칭찬받을 종처럼 살자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14-2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놓여진 마태복음의 문맥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기술하는 문맥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는 그 유명한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오고, 그 앞에는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의 이야기가 나오고, 더 앞에는 마지막 때에 당하게 될 환란에 관한 경고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러한 문맥에서 오늘 이 달란트의 비유는 그렇게 천국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어떤 자세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꽤 돈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어떤 주인이 타국으로 멀리 떠나 장기간 출타할 때에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겨주었다고 했습니다. 종은 주인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을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주인은 종들의 재능이나 능력, 성품까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재능대로 맡겼습니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무엇인가 이 종들에게 기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II. 종들에게 소유를 맡김
A. 재능대로 맡기심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는 없는 재능이, 우리에게는 없는 그 어떤 물질, 혹은 우리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인해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런 태도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첫째는 있는지 없는지는 실제로 그것을 활용하려고 애를 써 봐야지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저 사람과 같은 재능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저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지식이 내게 그런 지적인 능력이 없는 것 같아도 실지로 탐구하고 공부하기 전에는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B. 달란트를 맡은 종들
또 두 번째는 설령 절대적으로 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 없다고 하더라도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미모는 뛰어나지만 머리는 내가 더 좋을 수 있고, 머리도 미모도 저 사람이 뛰어나지만 창의력은 내가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창의력도 없다면 그것 말고 무엇인가 잘하는 것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원래 우리말 성경에서 달란트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희랍어에 ‘탈란톤’이라는 단어를 음역한 것입니다. 고대 서부 아시아 지역과 마케도니아가 이끄는 헬레니즘 시대에 어떤 물건의 무게 혹은 화폐의 단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1달란트는 성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고 있는 고대 로마의 문맥에서 보면 1달란트는 약 100파운드의 무게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금 1달란트의 무게는 약 33kg이었습니다. 금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1g에 53000원을 기준으로 계산을 할 때에 1달란트는 현재 시가로 17억 5890만원이라는 돈입니다. 그러니 어마어마한 액수의 커다란 물질을 종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그러니까 한 87억 내지 88억 정도 되는 재산을 맡은 것이고,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은 36억 정도 되는 재산을 맡은 것이니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는 커다란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이것을 맡겼는데 이제 성경에는 그 달란트를 맡은 종들이 어떻게 그 맡은 재물을 활용하였는지 등장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은 똑같은 태도로 그 물질들을 관리하였고,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좀 다른 방식으로 그 물질을 보관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떠나자마자 즉시 그것으로 장사를 시작했고 그래서 이익을 남겼습니다. 다섯 달란트는 두 달란트의 2.5배인데 돌아와서 주인이 계산할 때 내린 칭찬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똑같은 칭찬의 말을 하였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칭찬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아마도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남겨놓은 액수와는 상관이 없이 이 달란트를 맡은 두 종을 칭찬했습니다. 이 두 종의 공통점은 주인의 성품과 달란트를 맡긴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 주인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식은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성품과 그 모든 의도에 관한 지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 비극과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 맞닿아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관한 무지입니다. 그 무지가 모든 불행과 비참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죄 이외에는 고유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악과 그로 말미암는 비참함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된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들입니다. 나쁜 것 제외하고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재능, 지식, 젊음, 심지어 우리의 좋은 성품, 생명까지로 모두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주신 것을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것들을 활용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우리를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모든 삶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이바지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생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부터 자기의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진정한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회심하고 주님을 믿기 전까지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바로 정욕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왔고 나 혼자서는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없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구원해 주심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자기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지만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게 하시고 나에게 주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그것을 사용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얼마나 달란트를 맡겨주셨을까요? 그것은 모릅니다. 아는 것도 있지만 아직 모르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직 몰라서 활용하지 않아서 혹은 게을러서 파보지 않고 뭍혀져 있는 많은 달란트들이 여러분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좀 소원해졌습니다마는 제가 중년 때에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가수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리스에서도 존경받는 나나무스꾸리라고 하는 가수였습니다. 그 사람의 음반을 제가 거의 구해서 들었습니다. 몇 년 동안 그 사람의 노래만 들으면서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가수로 대성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음악학교에 입학했고, 결국 그는 음악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유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쫓겨난 후에 그는 쫓겨났을 때에는 자신이 음악에 재능이 없는가 하고 고민을 많이 했지만 자기 방식을 받아들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음악학교를 졸업한 어떤 우수한 학생보다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는 없는 것 같아도 실제로 그 일을 하려고 애를 써보면 사실 자신에게 굉장히 많은 가능성과 하나님이 이미 주셨지만 활용하지 않고 살고 있는 그런 재능과 기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없는 재능, 오지 않는 기회를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열심히 파 보면 어디엔가 무엇이 있을 줄 누가 알겠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덜했는데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내가 심각한 학습장애가 있는 열등생이라는 의식을 굉장히 갖고 괴로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하면 학교 공부가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열심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해보려고 하면 잘 이해가 안 되고 그러다가 사춘기를 맞이하면서부터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인생 자체의 무게가 나로 하여금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에 흥미를 더더욱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생각하기를 나는 처음부터 이 공부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나보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가만히 생각하면 고등학교 때보다는 오히려 대학과정에서 공부할 때 훨씬 더 자신의 재능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 대학원에 다닐 때는 훨씬 더 공부를 잘했고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아예 그만둔 다음부터는 정말 잘했습니다. 그러니까 해 보면 압니다. 상상 속에 묶여있지 말고 자기의 삶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기에게 주신 이미 주신 달란트가 무엇이고 그것들이 묻혀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돌아보니까 교육 제도와 방법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나 하고는 하여튼 안 맞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한국의 교육 과정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가서 아주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교육은 자기네가 만들어 놓은 것을 아이들의 머리통에 쑤셔 넣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 속에 있는 어떤 달란트들을 이끌어 내는 것에서 ‘education’이라는 말이 라틴어 ‘에듀까레’에서 옵니다. ‘에듀까레’는 ‘끌어내다’라는 뜻입니다. 쑤셔 넣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끌어내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런 교육의 어떤 모순이나 이런 것들을 느낍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위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그것을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왔을 때 그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자는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인색하고 자기의 물질을 손해 보거나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을 하지 않는 확고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즉, 투자 안하고도 벌어들이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즉, 노력을 하지 않고도 수확을 거두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히려 이 달란트를 가지고 뭘 했다가는 이것도 잃어버릴 것이고 그러면 당신의 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고 이제 당신이 본전은 찾으셨습니다. 그러니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이 얘기입니다. 주인은 이 사람을 심하게 책망했고, 이 무익한 종을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까지 평가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단순히 주인을 잘 몰랐지만 진심으로 주인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 두려움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자신의 태만을 두려움으로 변명하며 주인에게 책망을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III. 칭찬받은 종들
이제 나는 이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여러분과 관계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은 종들에게 주었던 주인의 칭찬을 고려하면서 이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이 두 종은 주인이 돌아와 계산하는 그날에 칭찬을 받은 종들이었습니다. 주인의 이 칭찬은 세 가지 말로 요약이 되었습니다.
A. 잘한 종
첫째는 ‘잘 하였다’라고 하는 칭찬이었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였습니다. 잘하였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나 혹은 회사의 부하 직원 혹은 동생들에게 “잘했다. 정말 잘 했습니다.”라고 칭찬합니까? 이 ‘잘 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주인의 의도대로 하였다는 뜻이고 주인의 의도대로 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이 기대했던 것만큼 했다는 뜻이고 오히려 그것을 능가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주인의 의도, 주인의 기대한바 그대로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섬김의 분량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주인이 5달란트 맡은 종에게 20달란트를 기대하고 있었다면 5달란트를 남겨 놓은 것은 주인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섬김의 분량이 그 주인의 기대치에 충분히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섬김의 품질 또한 뛰어났기 때문에 잘 하였다고 주인이 칭찬을 해 준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20년 전 제가 책을 한권 썼는데 출판사에서 이 책은 잘 팔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초판을 1만부를 걸었습니다. 모두 인쇄가 되어 나온 후에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페이지에서 마지막 한 줄이 인쇄에 빠진 것입니다. 출판실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마지막 필름을 출력해서 인쇄소로 넘기는데 그 출력한 마지막 필름을 원본과 정확히 대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밑에 한 줄씩 잘린 채로 인쇄소로 넘어갔고, 인쇄소는 며칠 동안 기계를 돌려서 1만부를 찍었는데 그 분량이 8톤 트럭 하나 가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라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냐 그랬더니 그래서 고쳐서라도 쓰면 어떠냐 했더니 편집부장이 “목사님 죄송합니다. 폐기 처분하겠습니다.” 그게 당신 20년 전에 1700만원의 제작비가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직원 한 사람이 빨리 일하고 많이 찍은 것은 좋았지만 섬김의 품질이 매우 후졌기 때문에 엄청난 손해를 출판사에 안기고 본인은 아마 해고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섬김에 있어서 분량과 품질이 동시에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은 지금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맡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제일 고유하게는 교회에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맡은 일이 있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교사를 30년을 했다고 자랑하고, 구역장을 한 해도 쉰 적이 없다고 자신의 신앙의 경력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가대에 15년 동안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잘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되물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여기 있더라면 100배나 더 잘할 수 있고, 자신이 그 일을 가로막고 있다면 결코 잘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잘하는 사람, 이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러한 잘 하신 모본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재물로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일을 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병자를 돌보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하셨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의도에 빗나가는 법이 없이 주님의 기대를 충분히 채워드리는 만큼 그렇게 최고의 분량과 최선의 품질로 우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사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례를 받으시던 바로 그 순간에 하늘을 여시고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소위 이중의 인침이라고 불리는 이 인침의 두 번째 하나님의 기쁨은 그가 하고 계시는 일, 그가 하여야 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요 보증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만 자랑하지 말고 누구에게 맡겨도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착한 종
두 번째는 ‘착하다’라고 하는 인정이었습니다. ‘착하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선하다는 것이고, 거기에는 판단의 기준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한 선한 상태가 바로 착한 것입니다. 이 주님의 뜻에 부합한 선한 상태는 위로는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리고 옆으로는 그 사랑 안에서 모든 이웃을 품으며 그들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일체된 사랑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 열심이 있고, 헌신이 탁월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독선과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처럼 이렇게 열정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은 무시하고 자신이 가장 열정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도 언제나 ‘옳다’라고 하는 오만에 빠지기 쉽게 마련입니다. 잘 하였다가 일에 대한 칭찬이었다면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인격에 대한 칭찬이었습니다.
조지 베일런트 박사는 하버드에서 약 40년간 인간의 어떠한 행동의 양식이 행복을 가져오는가를 연구한 사람입니다. 하버드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행복하고, 하버드 출신이라고 해서 성공했다고 해서 모두 그가 평안하고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기술과 덕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술은 물질을 사용해서 사람의 육체를 이롭게 하는 것, 물질을 사용해서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기술이라고 합니다. 어느 텔레비전 광고 카피에 보니까 ‘기술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카피를 쓴 사람은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측면도 있지만 속박하는 측면도 많이 있습니다. 자, 좋은 냉장고, 세탁기, 설거지 하는 기계도 있더군요. 그런 것을 다 들여다 놓으면 가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해방될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그것을 살려면 죽어라 일해야 하니까 속박입니다. 그러니까 기술이 우리를 정신과 영혼까지 자유롭게까지 하지는 못합니다. 기술이 물질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덕은 자신을 사용해서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 덕입니다. 그래서 이 덕의 정의는 타자와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덕의 정의는 타자와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타자와 관계를 맺는데 선한 관계를 맺는 힘을 미덕, 아주 나쁘게 관계를 맺는 힘을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술이 물질을 사용하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덕은 자기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과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착하다 라고 하는 것은 덕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을 하나님 사랑 안에서 품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의 인격적인 특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열심이 있고 충성스러운 자들은 대부분 독선과 오만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정말 칭찬받는 종은 일을 잘할 뿐 아니라 또한 착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버드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타자와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뉴욕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어떤 아줌마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다른 승객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무원이 이제 그 기차 칸을 지나가다가 “아주머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타일렀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줌마가 소리소리 지르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내가 아줌마라고 무시하는데 나 학부는 예일을 나왔고, 대학원은 하버드에서 했어. 나 우습게 보지마. 나 예일에 하버드 출신이야” 그러고 나서 잠시 후에 전동차 내에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이 전동차는 많은 시민이 함께 이용하는 시설입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시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예일과 하버드 출신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조지 베일런트 박사는 40년의 연구 끝에 의미 있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하버드 출신 800명 중 행복한 노년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오르도록 출세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그 결과가 실린 책을 읽으면서 이것은 기독교에서 내놓은 대답의 모범답안의 일부를 훔쳐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덕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일을 잘 한다고 해서 모두 거칠기 짝이 없는 독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무위도식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가책을 느끼고 이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해 보시고, 그 일을 잘 하여야 되겠다고 결심을 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남이 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 같은데 내가 그것을 하고자 할 때에는 아무리 작은 섬김도 쉬운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그 모든 과정에서 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끊임없이 교만과 거짓에 대해 깨뜨려지고 자기 사랑에서 깨뜨려져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만을 갈망하는 착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잘 하면서도 주님께 인격까지 인정받는 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일에 있어서 모본이 되었던 분입니다. 그 분은 사도들이 회고하기를 착하신 분으로서 일생동안 착한 일을 행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진리이시면서도 오류에 빠진 사람들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분이었고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신 분이었지만 주님을 위해 그렇게 충성되지 못한 분들도 그분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착한 인격이 우리에게 끼친 감화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일은 잘 하지만 인격은 착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일도 못하고 성질도 못돼 먹은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일도 잘하면서 자기처럼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품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고 그 안에서 쉼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착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이런 착한 종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소명이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섬김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되고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일을 잘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착한 종들이 되어 가는 것이니 여러분이 이렇게 일을 잘할 뿐만 아니라 착한 종이 되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충성된 종
마지막 세 번째는 충성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입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충성은 자기가 사랑하는 존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정신의 성향입니다. 이게 충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충성은 성품과 경향, 내적인 본성에 관한 것이지 일시적으로 솟구치는 열정에 관계하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충성된 사랑이 내일 불충할 수가 없습니다.
충성스럽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무엇과 관련된 것일까요? 잘하는 것이 일에 관한 것이라면 착한 것은 인격에 관한 것이고 충성된 것은 신앙에 관한 것입니다. 충성의 동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지식이 좀 부족해도 때로는 오류가 있어도 충성된 사람들을 충성되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기뻐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스 여자를 취하여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흑인과 결혼을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혈통의 관념에 매여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의 그 행동은 충격을 더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끝까지 그를 따르고 그를 보호하던 형제자매인 미리암과 아론도 모세에 대해 반기를 들었고 지도력에 도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만 말씀하시더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시지 아니었더냐?” 하고 그의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여 문둥병을 들게 하시고 모세를 옹호하셨습니다. “너희는 꿈과 말로서 소통하였지만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친구가 얼굴을 마주 대함과 같이 그를 대면하여 내가 말하였노라” 다시 말해서 모세와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해 주심은 그들과 주신 방식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고 모세의 권위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니라”고 말입니다. 충성에 있어서 그들은 모세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로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고 충성되게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든지 예수님과 동행해 주셨고, 그래서 요한 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의 별명은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뒤를 좇아 충성된 길을 가고자 했고 그 사람들의 충성된 순교 정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제까지 이 땅에서 번성하여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충성되지 않은 일만 명보다는 마음이 자신에게 바쳐진 한 사람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셨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들을 성취해 가셨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한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천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사명을 주셔서 우리의 구원이 모두 이루어지는 영광의 그날까지 하나님을 위해 그 사명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데 있고 그 깨달은 바를 따라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교회 안에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그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행복하십니까? 그렇게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아서 기쁘십니까?” 아마 행복하지도 않을 거고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행복하고 기쁘다면 금방 끝날 것입니다. 왜? 잠시 착각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충성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처럼 안일한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싸우며 피 흘리고 때로는 전쟁을 치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소망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만 기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기쁨을 주셔서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여러분 주위에서 성령 충만하게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크던 작던 모두 사명을 발견한 사람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위해 일하고 그 일의 성취와 함께 웃고 그 일의 좌절과 함께 울며 자신의 존재를 걸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천국에서 맛볼 하나님의 기쁨을 지금 앞당겨서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불러주신 여러분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거기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주님이 보시기에 잘하고 있는 종들입니까? 착한 종들입니까? 충성된 종들입니까?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네가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앞으로 내가 너희에게 더 큰일을 너희에게 맡기리라. 내 기쁨에 너도 참여하리라.”고 칭찬을 받고 있는 중입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인생의 방향도 모를 때에 복음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하셨고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예수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무엇인가 시계추처럼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람들, 형식은 기독교인이지만 삶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과 교회 다니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구별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 땅에 생명이 있는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젊음이 있는 것도 건강이 있는 것도 물질이 있는 것도 재능이 있는 것도 주님의 달란트입니다. 언젠가는 주님이 오실 것이고 이 달란트도 거두어 가실 날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칭찬받을 종처럼 살아서 이 땅에서는 주님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저 하늘에서는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