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구역장 특강
녹취자: 김명진
공과가 지금 제작 중이고 거의 마무리가 되어 책으로 나올 텐데 여태까지 우리가 다루었던 공과 중에서 그렇게 심하게 어려운 공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모일 필요가 있냐고 했는데 목사님들이 모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제가 꼼꼼히 봤고 8시간에 걸쳐서 제가 직접 간섭을 해서 교정을 하고 책의 완성도를 높였는데 이 번 주에 한 번 더 손을 봐서 하면 보다 완성된 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10과의 내용을 모두 강의를 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는 것 같고 하고 여러분의 성경 지식이나 신학 지식으로 읽으면 이해 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간략하게 요약해서 매우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자체가 보다 더 크게 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 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 생각에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는 구원론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먼저 꼼꼼히 읽으시면 공과에 대한 전체적인 구조들이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좀 부족하겠지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구원 받고 성화되어 가고, 마지막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모든 것들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내용이지만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질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교회론적인 기독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쉽게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고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없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이 영원한 작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영원한 당신의 지혜 속에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이 있을 것인데 그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다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림을 우리의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그 사람들은 결국은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세상의 최종적인 심판을 행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도입될 때까지를 종말이라고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이것들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전개해 가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한 사람들을 가득 채울 것 아닙니까? 제일 바깥에 그림을 그리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수가 될 것입니다. 그 중에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기로 하나님이 작정한 사람의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맨 안쪽에는 현실적으로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안쪽의 그림에서 두 번째 안쪽의 그림으로 계속 이행해 가면서 마지막에 안쪽의 그림이 꽉 차면 종말이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놓고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가 볼 때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관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믿으며 하나님의 의도하셨던 그리스도의 교회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을 비롯해서 이후에 있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와 떨어져 살던 사람들인데 믿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으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와 접붙여져 그의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시려고 하는 당신의 몸에 대한 계획이 있어서 우리가 예수 믿은 것 자체도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계획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이미 영원 전에 작정된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것들이 그 작정들이 전개되는 것이라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외인들이었는데,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교회에 접붙여졌다는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는 신학자들 속에서도 이것을 가지고 논쟁들을 합니다. 한쪽에서는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영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인류의 구원과 세계의 완성자체를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또 하나는 그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수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로서 그분께 접붙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조화를 가지고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 전에 하나님의 예정이나 작정에 대해 미리 생각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있다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다보니까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회고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왜 구원의 놀라운 은혜가 주어졌을까? 내가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다고 하면 믿은 내 행위가 대단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더 큰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나의 삶 속에서 실현 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믿었다고 하더라도 믿은 나의 공로보다는 나 같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어서 믿게 하신 하나님의 선택이 훨씬 더 큰 은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를 함께 묶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있는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칭의, 영원한 이 세계의 회복, 인류의 구원, 더 작게 보면 교회의 성립, 교회의 완성, 이런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실현해 가시는 과정이고, 믿음이라고 하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교회의 일부가 아니었고 하나님과 상관없고 그리스도와 무관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생명 없는 우리를 당신의 몸에 접붙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가셨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 두 가지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좀 더 깊은 공부를 원한다면 이 공과를 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심’이라는 공과를 수련회 때도 했지만 너무 간단한 것으로 했으니까 그러지 말고 원래 설교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이라는 교리를 차분히 들으면서 정리하면 이 공과를 이해하는 데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그림입니다.
두 번째로 들어와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주제로 좁혀보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을 염두에 두고 두 번째로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그 고난 뒤에 남겨진 것이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인류의 구속을 위한 고난,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을 수 있는 구속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고난, 이것은 인간의 동참을 필요로 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배타적으로 그리스도만이 지불할 수 있는 희생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만이 겪을 수 있는 고난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무죄의 상태에서 인간이 범죄를 했습니다. 두 번째, 그 인간들의 범죄가 무한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사는 무한한 크기를 가진 완전한 사람의 제사여야 했습니다.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분이 예수그리스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죄인인 우리, 그 죄를 지은 우리 당사자들이 구속의 근거가 되는 희생에 동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 말고 무슨 고난이 있느냐,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데 부활해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주가 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라는 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여호와’라고 쓰여 진 히브리어 단어를 ‘주’라고 읽었습니다. ‘주’라고 하는 것은 온 땅과 모든 만물을 우주의 통치자로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류 구속의 대업을 이루고 승리하셨을 때 그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부활하게 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해서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를 지배하고 통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통치하시면서 동시에 그 지배와 통치가 이 세계 안에서 도덕적으로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류의 구원이 완성되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당신에게 접붙여진 영적인 몸을 이루셨는데 이것을 우리가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를 이야기 하자면 종말에 이르러서 심판을 통해 더 이상 구원할 사람이 없을 때까지 하나님이 만들고자하는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현실은 항상 그것 보다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가 완전히 찰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몸은 계속해서 지어져 가는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접붙인바 된 사람이 떨어진 경우는 없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은 영적으로 하나님이 의도 하신 완전한 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적인 완성이라고 한다고 그렇게 접붙여서져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아직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성화에 대해서 많이 배웠지만 성화 자체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소명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하고, 진실하고, 참되고, 정결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정결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지금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각 사람을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신 후에는 더 이상 죄도 없고 모든 거치는 것이 없을 테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지금 현재는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몸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은 보편 교회로 보면 지금 현재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연합일 뿐만 아니라 이미 믿고 죽은 사람들까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낙원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온전해질 수 없고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심판할 날에 다 이루어지지 못한 구원의 미 완결된 요소들을 일을 완성할 때에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완성할 때 그들은 온전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지만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죽으면 오히려 온전해 집니다. 죽음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성화를 완성하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몸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성화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화되는데 그 성화의 목표가 무엇이냐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도 했고 온전한 사람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온전하신 하나님의 보이는 모본이기도 하고, 온전한 사람의 보이는 모본이시기도 합니다. 그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에서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그 그리스도가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크게 성경이 판단력, 지식, 사랑, 윤리 등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핵심적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 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그 안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는 것은 온전하게 알고 온전하게 사랑하면 온전한 삶은 거기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자체가 지성과 의지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온전해지면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는 진리의 빛도 있지만 무지의 어두움도 있습니다. 진리의 광채도 있지만 오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변심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오늘은 주님을 뜨겁게 섬기지만 그 사람이 내일은 미끄러져서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이 일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수없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영혼을 섬기다 보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어서 거의 목양을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몇 년 뒤에 만나보니까 여러 가지 다른 경로를 거치면서 아주 믿음이 견고한 사람이 되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열심히 사랑으로 돌보았는데 사실은 별로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교회를 떠나거나 심지어는 이교도가 되거나 혹은 불신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시험에 든 사람이 내일 은혜를 받기도 하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미끄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꺼번에 이 일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전교인이 예외 없이 시험에 들어서 전부다 세상으로 떠나서 교회가 텅 비었다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신앙이 출렁입니다. 이 사람의 신앙이 떨어질 때는 이 사람들의 기도와 섬김을 통해서 도움을 받게 하시고 반대가 되었을 때는 또 도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보면서 세상에 저렇게 밖에 신앙생활을 못하냐고 불평하고 타박하는 사람도 사실은 그 사람도 몇 년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교회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날 때 그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난 뒤에 남겨 놓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남겨 놓은 것이 무엇이냐면,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근거가 되는 고난은 당신 홀로 당하는 고난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은 이것이 당신만의 일이 아니라 머리인 당신과 몸 전체의 일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를 위해 구속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으셨고, 그 사랑을 알고 그에게 접붙여진 모든 성도들은 그렇게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랑으로 지식으로 온전함에 이르는 것을 위해서 일치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 누군가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함께 지체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목적이 각기 교회에서 섬기는 일은 달라도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사랑이 토대가 되어서 모든 것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로 섬기는데 교회의 이상은 이 세상의 기업체의 이상과는 다릅니다. 기업체의 이상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익을 수고한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기업주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빼앗기면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 오늘날 노동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자본을 투자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여러 가지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능이 한 가지 목적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만 온전케 되고 이 세상은 내버려 둬도 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 세상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선교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하기 전에는 누가 하나님 앞에 그의 몸을 이루기로 예정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는 그림을 그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선교하는 이 모든 일도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교회에서 섬기는 수많은 일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초점이 향해져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남북이 갈라져 있어서 군대, 국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많이 하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중요한 것은 통합입니다.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군대의 전력들을 어떻게 하나로 유기적으로 묶어져서 전쟁을 수행하느냐가 전쟁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그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여러 사람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래도 지금 전쟁을 제일 잘 하는 나라는 미국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많이 하니까 전 세계에 군대를 많이 파견해서 늘 연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군으로서 별 하나를 달기 위해서는 육군 준장이든지 해군 준장이든지 공군 준장이든지 필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육해공군을 망라한 합동군 지휘의 경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군을 합동적으로 지휘해본 경험을 축적하지 않고는 스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일에 종사하는데 마지막의 목표는 단일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하는데 그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많은 일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가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해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이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의 많은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생깁니다. 특히 영혼을 섬기고 돌보는 일은 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교회의 건물은 돈이 있으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돈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셔야만 하는 자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을 섬겨 본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영혼들에게 유익이 되는가하는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을 섬기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지고 일이 비즈니스가 되기 쉽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 여러분을 영혼으로 취급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숫자로 취급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매주 교회의 숫자를 헤아리고 교회의 중직자들에게 문자로 보내고, 어떻게 보면 별로 잘한 일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몇 명이 왔고 오늘은 얼마가 왔다고 오늘도 왔습니다. 조사를 안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숫자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교회가 사람이 숫자가 아니라 영혼으로 보여야 합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든지 눈앞에 보이는 영혼이라는 대면 의식을 가지고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숫자가 필요하겠지요? 교회의 공간을 하려고 해도 몇 명이 모이는지를 알아야 하고 예산을 세우려고 해도 몇 명인지 알아야 하니까 필요하지만 그렇지만 이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대면하여서 섬기면 정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는 이것보다 보람 있는 일이 없는데 그 사랑이 식고나면 이것보다 부담스러운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떨어지면 자꾸 그만두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당하면서 그 일을 할 때 그렇게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치르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 뒤에 남겨진 것들입니다. 이것에 대한 고통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한 지체들이 함께 현실적으로 경험되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온전해져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담겨진 깊은 신비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한 것을 이 공과 책으로는 5 과가 되고 원래의 시리즈에서는 다섯 번째, 사경회를 기준으로는 네 번째 날 설교한 것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핵심적으로 요약을 하면,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하면 누가 시켜서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에 대한 깊은 감사와 그 사랑에 대한 깊은 감화가 나로 하여금 영혼을 섬기게 하는데 그 뒤에 끊임없는 어려움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어려울 때에 결국은 그 어려움을 승화시켜서 이겨나가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연합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해 지불한 고난에는 우리가 동참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현실적으로 온전한 몸이 되기 위해서 받는 모든 고난에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고난을 받을 때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투사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가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을 받을 때 아픕니다. 그런데 그 아픔 속에서 통증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죄성, 교만, 하나님을 거슬러 살고자하는 욕구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는 신앙생활은 아주 추한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을 누가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너는 자기 깨어짐이 없으니까 벌금을 내라든지, 너는 자기 깨어짐이 없으니까 교회를 떠나라고 한다든지,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깨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나 오만함이나 불친절함 등을 많이 깨어진 사람들이 감내하면서 교회는 끌어안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이런 것들이 사회전체를 바라보는 틀이 됩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념이 백성들에게 정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현실의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정의를 가르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이상이라는 것은 이의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 없이는 정말 나라다운 나라가 설 수 없습니다. 국가 안에 정의를 가르치는 곳이 국가 힘 하나밖에 없다면 그 나라는 온전한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펼쳐진 좌파 우파의 피나는 대립들을 보십시오. 그것은 모두 정의라는 관념 하나에 매달리면서 이루어지는 폭력들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애, 자애로운 것이 정의와 어떻게 균형을 이루면서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 공자의 국가이상으로서 대동사상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입니다. 국가가 정의와 인애를 두 축으로 삼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충서’라고 합니다. ‘충’은 올곧게 정의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하면 ‘서’는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화해와 일치, 사랑은 정의에 배치가 된다고 생각하고, 정의는 화해와 일치, 용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둘을 어떻게 그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화합을 이루어 가느냐에 국가의 존립이 달린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서양의 정치사상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이렇게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면서 당하게 되는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죽으신 고난을 투사시키고 그 속에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이고, 정욕적인 것이 끊임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화목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목이 사람들 사이에 타협을 통해서 이루어진 화목이 그리스도와의 화목을 통해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와의 몸에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속에서 영적으로 2천 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칼빈이 은혜살림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전자가 죄죽임이라고 하면 이것은 은혜살림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알고 싶어 했던 부활의 능력이 바로 교회를 위한 고난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기 깨어짐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아주 거칠고 추해 집니다. 그래서 이런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의 고백, 자기 낮아짐의 고백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히 세워지고 자신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성결한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을 개인적인 일상사와 관련을 시킵니다. 사업에 어려움이 와서 금식기도를 하고, 회개도 하고, 생각이 나서 주님 앞에 뉘우쳐서 하나님이 복을 주셨더라. 이런 것들은 훨씬 지엽적인 이야기이고 근본적으로는 그런 모든 회개와 깨어짐의 과정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케 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의 추구와 함께 사랑의 완성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고 그 교회가 바로 이 세상의 나라들이 이루어가야 할 진정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귀가 아프도록 듣는 이야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교회의 수준이 떨어졌다. 몇 번을 만나서 토론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시대에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어느 시대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티끌만한 죄도 없어서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러러보던 시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논리나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똑같이 여기에서 떠들어봐야 계속 자기들에게 침 뱉고 돌 던지고 휴지 던지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부터 하십시오. 탈세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고, 연말정산을 하면서 속일 생각하지 말고, 불편하더라도 힘들더라도 법대로 살면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대가를 치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교회 전체에 대고 욕을 하고 침을 뱉습니다. 자기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유익이 있다면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위선이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여러분의 삶을 털어본다면 여러 분중 한 사람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모두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력을 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야비할 정도로 엄격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정면적으로 위반이 되는 그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의 거룩한 성도로서의 심오한 도덕적인 가치는 한 시민으로서의 평범한 도덕적 가치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 토대위에 서는 것이지 그 두개가 거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100년이나 200년에 한 번 나올 수 있는 성인과 같은 기준으로 재지 말고, 자기도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잴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성인만을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먼저 교회에 와서 심오하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감화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 교회사에서 몇 백 년에 한 번씩 나오는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욕먹지 않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그것이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한 길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하면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모여서 투덜거리고 한국 교회가 다 썩었다고 하면, 자기가 썩었으니까 다 같이 썩은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자신이 그 몸의 일부인데 말입니다.
나쁘고 아픈 이런 모든 교회의 것들이 자신의 문제이고 자신의 아픔이라는 생각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공과 전체에서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느끼고 아픔을 겪는 것은 너무 괴로운 것이지만 믿음으로 그 고통들을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이길 때 결국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어 가는데 그것이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온전한 몸으로 만들기 위해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데 모두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들, 이상적으로 그것을 계속 감당해 나가면서도 자기의 마음이 거칠어지고 폭력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힘주셔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혀 힘을 주시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계속 주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주어져야만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 뒤에 남겨진 고난에 참여하면서도 망가지거나 원한이 맺히거나 상처를 받지 않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고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서 깊이 섬기다가 상처를 받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신앙적인 원리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여러분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헤어지면 죽을 것처럼 좋아하던 남편과 아내도 등 돌아 누우면 찬바람이 서늘하게 가슴에 부는데 누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꿈을 꾸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하다고 해도 사람이 그 모든 사랑을 규합하는 구심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잊고 그리스도께로 연합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신앙의 원리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기 신앙에 비해서 교회에서 너무 큰일을 맡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에도 유익이 되지 않고 본인 신앙에도 유익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제발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교회를 섬기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선교적인 활동자체가 예수의 몸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고통을 배우고, 자신이 꺾어지는 경험도 하고, 포기하는 것도 배우고, 자기는 죽고 남을 세우는 것도 배우고, 그래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벽돌로 비유하자면 눈물은 벽돌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몰타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탁월해, 훌륭해, 모든 것이 좋아.” 라고 할지라도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것이 없다면 최고급 벽돌을 20미터 쌓아 놓았다고 합시다. 툭치 면 쓰러질 텐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 흐르는 눈물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눈물이 있다는 것은 은혜가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수술하고 여러 가지 과정을 겪으면서 극심한 고통 속에 시달릴 때 이 교리를 다시 정리하면서 아직까지 제가 발견한 것은 커다란 산의 일부분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서 훨씬 더 완성적인 형태로 교리를 구성하고 싶습니다. 어마어마한 주제라는 것은 틀림없고, 요즘 학계에서도 이쪽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면서 학자들도 책을 계속 던집니다.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토드 빌링스라는 사람이 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금 어렵지만 좋은 책입니다. 인내심을 가지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로버트 리담이라는 학자가 쓴 『예수님과의 연합』이라는 책도 있고, 헬리스커더가 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매일의 삶』, 예전에 나온 책들이라 요즘에도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책들도 눈여겨 볼만한 책들입니다. 어마어마한 교리들입니다. 그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체를 위해서 예수를 위해 산다고 하는데 깃발은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었는데 사실은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에서 하나씩 하나씩 다 제거가 됩니다. 오랫동안 제 설교를 듣고 강의를 들었던 분들은 제가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자기사랑의 중심성과 하나님 사랑의 일체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원그림에서 설명했던 이야기를 여러분은 기억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은 우주적인 전망에서 펼쳤고 오늘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교회의 지평 속에서 이것을 펼쳤기 때문에 소박해 보이지만 두 개가 맞닿으면 소박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이루어질 그 위대하고 보편적인 성취의 시작을 교회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섬김과 봉사의 깊은 토대가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서 해야 할 일은 자기 사랑의 깃발을 꺾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것을 끊임없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꺾고 그리스도만이 자기 안에 온전히 사시는 그런 통치를 구현해나가는 것이 온전한 신자의 행복이고 교회의 이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가르쳤지만 목사님들과 함께 공부하실 것이니까 목사님들이 많이 알고 있고, 목회자들이 원하면 제가 더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훌륭하게 많이 알고 있고, 제가 아프기 전까지 목회자들과 2년 넘게 매주 한 번씩 만나면서 시리즈들을 계속 공부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했습니다. 저는 싫었습니다. 제가 공부할 것을 해야지 제가 설교한 것을 왜 공부합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목회자들이 정리된 것이 있어야 잘 가르칠 것 아닙니까? 다 정리했습니다. 머리되심의 교리부터 시작해서 성도의 공동생활까지 다 했습니다. 이미 있는 설교의 테이프들을 차분하게 앉아서 들으면 상당한 분량의 신학적인 지식이 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르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면서 양심에 구김이 없어야 합니다. 쭉 가르치는데 양심이 이렇게 소리치는 것입니다. “자기는 죽지 않으면서” 그러면 안 됩니다. 한참 가르치는데 네가 먼저 죽여라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가르치기 전에 자기가 소화하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포기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감당해야할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원한이나 상처가 남은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섬기고 섬기면서 마지막에 그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성도들에게 인사를 받으면서 죽어가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집에 가셔서, 지방의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자기가 아는 목사님이 항상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는 책을 강대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설교하기 30분 전에 올라가서 서너 장을 읽고 마음을 뜨겁게 하면 설교가 잘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뜨겁게 하면 잘 나옵니다. 불쏘시개를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편 23편 6번째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여러분이 얼마나 티끌 같은 인간인지를 알고 한참 울고 나면 잘 달구어진 후라이팬 처럼 잘 볶아질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냐 하면, 기독교의 가르침은 성경에서도 배우고 신학에서도 배우면서 볶습니다. 마지막에 소스를 올려야 하는데, 요리의 원리에 의해서 잘 요리해서 마지막 접시에 담아서 소스를 뿌려야 하는데 소스는 여러분의 피 입니다. 마지막 소스입니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이러한 매일 매일 이렇게 살려고 몸부림 쳤고 그래서 나는 피를 흘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최후에 심장을 짜서 새빨갛게 볶아서 접시에 담아서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하셨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