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순장 특강
녹취자 : 장주은
이 문제를 우리들이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 해 봅시다.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이 너무 고통을 겪습니다. 옛날에는 그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그러면서 교회가 고통을 겪었는데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교회에 굉장히 핍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보다도 교회 안에서 자꾸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중에서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툼과 분쟁의 문제들, 그래서 교회가 갈등이 아주 심해지고, 예전에는 교회에서 갈등이 좀 생겨도 누가 중재를 하고 하면 해결이 되었는데 요즘은 1970, 80년대 민주화 이후로 사람들의 의식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바뀌면서 좋은 것도 많이 얻었지만 사실은 거기서 권위나 질서나 이런 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이 그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풍조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그런 사상들이 교회까지도 들어와서 교회가 싸우면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의논을 하고 노회의 지도를 받으면서 문제를 해결했는데 지금은 싸우면 곧바로 법원으로 갑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결국 가장 커다란 것을 사람들이 나쁘기 때문이지만 사실 더 커다란 문제는 교회 안에서 지식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같이 칼로 고기를 썰어도 푸줏간에 있는 사람이 칼로 고기를 써는 기술을 가지고는 외과에 가서 수술을 하지는 못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혼란들이 교회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은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2004년도에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썼는데 그때에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챕터 중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챕터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이미 그 이전서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거기서부터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들이 엿보였는데 그 후에 좀 더 많은 탐구를 하게 되면서 저 나름대로 정리를 하게 되었고 아직까지 이 세계가 워낙 지적인 유산들이 방대하기 때문에 사실 정리를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것 하나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필요한 만큼만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학을 함에 있어서 반성을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을 너무 몰랐다, 그리고 학문이 파편화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드렸지만 신학 안에서도 똑같은 그런 파편화 현상이 일어나고 신학 안에서 파편화 현상이 일어나니까 각 전공한 교수들이 만나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커뮤니케이션이 좀 낫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 과목을 평생 한 사람은 아니니까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했으니까 나하고는 그래도 소통이 되는데 오늘날의 방식대로 신학공부를 한 사람들은 조직신학교수하고 신약교수하고 갖다놓으면 서로 공통된 화제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조직신학을 하고 그래도 기본적으로 교수들이 원어를 공부를 하고 그리고 조직신학을 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합니다. 그러니까 점점 깊이가 없어집니다. 이런 신학의 파편화 현상이 신학 전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신학 안에서도 파편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론 전공하는 사람은 교회론만 가고 구원론 하는 사람은 구원론만 가고 기독론 하는 사람은 기독론만 하고 현대사상 하는 사람은 현대사상만 하고 그렇게 합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면 조금 나은데,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가 계속 폭넓게 독서를 하는 사람들은 좀 나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런 현상이 심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냐하면 이제는 좀 우리들이 여태까지 배웠던 교리나 이런 것들을 한번 좀 더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우리들의 약점들을 보강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개신교의 위대한 힘이 사실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이것은 정말 획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이 발견이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고안해 낸 것이라기보다는 교부들 속에 그 모태들이 있는 것들을 찾아낸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신학에 가려서 보지 못하던 로마서를 비롯해서 성경에 나오는 이신칭이의 교리들을 볼 수 있도록 교부들이 눈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사실은 완성된 형태의 칭의교리가 교부들에게 종교개혁자들 같진 않았지만 그러나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신교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균형입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발견하고 이신칭이의 교리와 축을 이루면서 기독교 신앙이 건전하게 가려면 이신칭의 교리와 꼭 같은 정도로 'santification', 성화의 교리를 강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두 개의 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구원파나 순복음교회나 옛날에 있었던 CCC나 대부분 교파들의 구원론이 그냥 구원받고 그저 은혜 받고 성령충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라는 식이니까 사실은 성화론 자체를 독특하게 달리 만들었다기보다는 성화론 자체가 사실은 존재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실제로 살아보면 결국은 그런 간단한 성화론 가지고는 사실은 우리의 삶의 많은 문제를 포괄해 나갈 수 있느냐 라고 하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론을 우리들이 올바로 토대를 세우지 않으면 사실 설교 그 자체가 신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공정하게 보면 서신서부터 교회 시대가 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서신서부터 보면 서신서의 내용들이 사도들이 설교했을 내용입니다. 쭉 보면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라, 구원 받았으면 똑바로 살아라, 이 두 가지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또 구원받으라고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복음을 이야기해도 처음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 전할 때 그 복음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선포였는데 그 후에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 복음이 구체적인 성화로 나타나기 위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1950년대쯤에 ‘C. H. 다드’라고 하는 신약학계의 거두, 복음주의 신학교에서는 거두인 사람이 등장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둘로 나눕니다. ‘케리그마’ 라고 부르는 ‘케리소’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인데, ‘케리그마’는 선포입니다. ‘케리그마’와 ‘디다케’. ‘디다케’는 희랍어로 ‘가르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Didactic'이라고 하면 교수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개로 나뉜다고 합니다. 케리그마는 불신자에 대한 기독교의 'public proclamation'이다, 디다케는 이미 믿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교화되도록 가르치는 교화적 교훈이 디다케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들이 나중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표합니다. 나도 그런 구분에 대해서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연 디다케와 케리그마가 그렇게 또렷하게 구분이 되는가. 이 두 개가 항상 상하부 구조를 가지고 불신자들에게는 케리그마가 선포되지만 그러나 신자인 교회에도 케리그마가 없었느냐 하면 절대 그게 아니고 서신서 자체가 불신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가능성이 있다면 누가복음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서신서로 돌아오면 교회나 교회에 속한 지체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불신자를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서 엄청나게 많은 케리그마들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관심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복음적인 선포의 제목과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도바울 시대에 복음을 전파했던 것과 오늘날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사도바울 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특히 지도층에 대한 교육의 수준은 어마어마하게 높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벌써 철학적인 사고력, 그리스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학문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나는데 어마어마하게 장중한 사상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게 시간이 흐르면서 골로새서나 에베소서 쓸 때 쯤 되면 인생의 말년이니까 성숙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로마서의 깊이와 골로새서의 깊이는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런 신학적인 깊이를 가지게 된 것은 점진적인 성장이라는 것도 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 한번 딱 예수 그리스도와 부딪히면서 확 하고 세계를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는 지평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열리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왜 가능했냐 하면 이 사람이 세계의 사상과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 유대주의 이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 로마주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으로 학문적인 훈련이 잘 되어있기 때문에 그때 딱 하고 떨어지자 확 하고 휘발유 불붙는 것처럼 일어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과 생각에 대 변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클래식 음악도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클래식이 들리지 않습니까? 연극이나 이런 것들도 잘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하나가 아주 놀랍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느 유적지 같은 곳에 가면 사람들이 보면서 저 구석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쭈그리고 앉아서 삼겹살 구워먹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접했을 때 이것은 뉴 필라소피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철학이구나. 그래서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은 지금 우리들이 접근하는 이런 식으로 예수 믿고 하나님을 믿어, 교회 다녀 봐, 그런데 이게 이 세계와 무슨 상관이 있고 내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 관점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벽이 딱 쌓이면서 이것은 교회, 이것은 세상입니다. 자기 얼굴도 다른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교회 와서 행하는 방식과 끝나고 나가서 세상에서 직장 다닐 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완전히 두 개를 가지고 스위치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 어떻게 보면 고도의 위선자인 것입니다.
내가 대학에 있을 때 이 녀석들이 과학개론인가의 시간에 답안지를 쓰는데 시험 감독을 들어갔는데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등등 나오지 않습니까. 진화론 답안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 너희들은 미친놈들이다, 차라리 순교를 하고 말지 그 학점이 무서워서 그걸 갖다가, 너 진화론 믿냐 했더니 아니래, 왜 이렇게 쓰냐 했더니 학점 얻어야 하니까 답안을 쓰는 거래,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똑같은 그림을 오늘날 성도들에게 옮겨보라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여러분이 주위에서 신앙이 좋다 이러는 사람들 대개 보면 그 두 개의 벽을 높이 쌓고 세상 쪽으로 많이 안 들어간 사람들을 신앙이 좋다 평가를 하는 것이지 사실 그런 게 신앙이 아니지 않습니까? 관점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서 그 속에서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다가 조금만 힘들면 교회에 취업하고 싶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학교 가고 싶어 하고,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술 먹으라고 너무 괴롭히고,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인데 뭘 그럽니까. 가서 그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뭔가 그 사람들을 변혁시킬 것인가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관점인 것입니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독론을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독론을 배우면서 이게 도대체 조직신학 안의 다른 것과 어떻게 연관되는 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생각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 영원하신 성자에 대한 기독론을 배웁니다. 그리고 말씀이 창조되었고 말씀이 없으면 된 것이 없다 라고 배웁니다. 그런데 그게 이 세계와 이 우주 전체 속에 있어서 그 속에서 어떤 학문의 연관관계를 발견하고 진리의 요소들을 그 안에서 발견하니까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사회 지식의 체계가 서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학문이. 그럼 그것은 무엇이냐? 원래 있는 것이냐, 그게 결국은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계가 지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것은 신론하고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신론과 기독론의 관계는 단지 삼위일체에 있어서 그 위격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무슨 문제가 되냐 하면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기독론이 어떻게 교회와 연관되는가, 사실 우리들이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지 않습니까. 사실은 교회론을 다루면서 기독론을 빼놓을 수가 없고 어떤 의미에서 기독론과 교회론은 한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으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론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관관계를 생각할 때에 그럼 어떤 방식으로 그런 연합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구원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론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론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어떻게 감동이 되어서 예수 믿기를 결정하니까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다, 나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고 그래서 여기에 100명이 모였으면 100개의 실처럼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 되었는데 그리스도는 100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어쨌든 다 합쳐질 것이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들이 생각을 하면서 자꾸 서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독론을 이해하면서 이미 벌써 개인주의적인 전제가 신학 이해에 깊이 깔려있습니다. 그 속에서 신학을 설명하니까 이상하게 휜 형태의 신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깊이 공부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 말이 별로 없지만 요새 동양사상을 보면서 미래에 서구 사상에 대한 대안으로서 동양 사상들이 상당히 많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결국은 구원론도 결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도 구원론적인 설명인 것입니다. 교회론 적인 기독론, 교회론 적인 신론, 교회론 적인 종말론, 교회론 적인 성경론, 교회론 적인 계시론, 교회론 적인 종교론, 교회론 적인 인간론, 이러한 검토를 할 때에 이것들이 모두 다 산산이 찢어졌을 때에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새로운 계시의 쉐이드 들이 측면들이 나타나게 되고 거기서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자원들이 나오게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원론에 있어서는 어떤 것들이 문제냐, 하면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 믿고 구원을 얻었는데 그럼 구원을 얻은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라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성화가 강력한 힘을 못 얻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이 성화를 안 가르치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성화의 의미 자체를 그냥 개인이 하나님 앞에 상급을 얻는 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까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들 때에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관점을 도입하면 추진력이 있었지만 지금 먹고살만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은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문제를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되는가, 이거 아닙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성화를 구원과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봐야합니다. 성화가 교회론 적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에서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집니다. 그러면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와 연결이 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서 그로부터 우리의 연합이 주어지고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두 가지는 같은 단어인데, 그것들이 흘러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들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늘의 자원들을 가용하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 연합의 교리의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정말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떨어져서 하나님의 관심도 없던 그런 사람들이 들어와서 교회에 달라붙게 되었느냐, 라고 볼 때에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리반에서 배운 것을 보면 칭의를 이야기 할 때 다중적 의미로 칭의를 이야기합니다. 영혼의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 칭의, 실제적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돼서 얻게 되는 칭의, 이런 식으로 층차를 구분합니다. 그럼 똑같이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니까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언제 지금 이 세상에 종말이 오게 될지,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도입될지에 대한 시간표가 하나님에게는 있을 것 아닙니까. 아직 전개되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럼 그것들이 펼쳐지면서 결국은 세계의 역사가 전개되고 마지막에 구속사가 완성이 될 텐데, 그러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작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바울도 증명하는 것이고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다메섹에서 예수 믿게 된 줄 알았는데 더 깊어지니까 엄마 뱃속에서부터, 더 깊어지니까 영원 전에 만세 전에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똑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두고 이렇게 하나님이 영원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정하시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실은 그 구원사의 전개, 교회가 세워지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이 구원론에서 제일 큰 개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게 아니다 라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반대하냐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칭의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 졌다고 하는 것이 강조점이 너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 칼빈이나 마틴 루터나 이런 사람들 1세대 종교개혁자들에서는 그런 것들이 너무나 뚜렷하느냐 하면 사실은 둘 다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까 이야기 한 영원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연합의 계획이 있고 그 연합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 사실은 이 세상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든 과정하고 연결이 되는 것인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두부를 자르듯이 잘라놓고 보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사람들이 여기 있는 사람들뿐이겠지만 영원한 관점에서 보면 이중에서도 가짜들은 나갈 것이고 저기 바깥에서 지금은 불신자로서 조폭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될 것입니다. 그러면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사실은 그리스도와 연합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그런 가능성을 가졌는지는 전도해봐야 아는 것이지 해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진정한 선교적 마인드는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possible', 가능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이야기했던 'whole christ'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불신자와 신자가 딱 구분이 되지만 초대교회 시대 때에 테르툴리아누스가 있었던 시대에는 물론 구분이 되지만 그럼 그 사람이 이야기했던 교회 안에서 신자라고 이야기 할 때 그 신자 안에는 진짜 신자도 있고 신자 아닌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똑같이 그 테르툴리아누스의 'whole christ'의 개념을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것을 종교개혁 시대나 중세시대에는 교회와 세상이 일치였기 때문에 하나만 이야기하면 됐지만 지금은 교회를 넘어가는 'whole christ'의 개념을 이야기 한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whole christ' 개념 아시죠? ‘토투스 크리스투스’,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보면 결국은 이것이 무엇과 연결되냐 하면 ‘레카피탈라치오’의 교리와 연결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를 다시 한 번 듣고 이것들을 보면 굉장히 쉽게 느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세계를 완성해 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예수와 상관없는 이방인이요 외인이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순간에 구원을 얻어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다고 하면 이신칭의는 확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다분히 유용론적인 접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획 없이 그런 일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 두 가지가 사실은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볼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해서 보는 관점에서 보면 전자의 설명이 훨씬 설득력이 있고 시간의 과정 속에서 전개되는 것을 보면 후자의 설명이 훨씬 설득력이 있으니까 사실은 현견지와 단순지의 문제처럼 이 두 가지를 같이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이해를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현실적으로 우리가 오늘날 다루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연합의 교리는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새롭게 발견한 교리는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그런 교리에 대한 흔적들이 나오고 특히 이런 것들은 중세의 영성가들 중세의 신비주의나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유산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아주 깊이 있는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칼빈에게서도 아주 풍부하게 도입이 되고 칼빈 이후에 17세기 종교개혁자들, 17세기 개혁파 정통자들에 의해서도 발전을 하고 특히 청교도들, 영국에서 박해를 받았던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런 것들이 아주 고도로 발달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번에 공부하게 될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이 공과는 그런 하나의 커다란 그림,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구원이다, 그런데 우리가 접붙여질 때에는 이미 하나인 교회가 있었고 거기에 우리가 접붙여지는 것이지, 우리가 단독으로 구원을 얻어서 마치 천장에 고기 하나 달랑달랑 매달아 놓은 것처럼 그런 식의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화를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성화를 위해서 노력을 하면 그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온전하고 바르게 사는 것인데 다 합해서 두 가지로 딱 정리를 하면 지식과 사랑의 성숙입니다. 지식과 사랑의 성숙입니다. 지식과 사랑에 있어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데 그래서 결국은 사람 자체가 팔복의 사람이 되고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이 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앞에 잘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 이것이 사실은 성화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화의 목표가 기독교의 아주 독특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다 자신들의 숙제를 두 가지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늘을 향해 자신을 정화하고 이 세계를 향해 뭔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바지 하면서 사는 것, 그것을 종교와 철학마다 다르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직은 불결한 존재인 인간이 계속 지적으로 정화되고 도덕적으로 정화되는데 그 두 가지의 핵심을 요약하면 그것이 지식과 사랑에 있어서의 성숙을 통해서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지식과 사랑에 있어서 정화되는 것이 성화의 핵심인데 무엇이 문제이냐 하면 교회 전체가 그 요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화가 모두 합쳐져서 교회의 성화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간절하게 그 교회의 성화의 상태를 절실하게 요구했을까 하는 질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냐 하면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놓으신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에 하셨던 일, 세상에 대한 관계를 계승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우주적인 교회는 단 하나입니다. 단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전체가 총 합을 이루어 그 교회가 지식과 사랑에 있어서 성숙해서 온전한 교회가 되면 될수록 그렇게 되는 것만큼 예수님의 분신처럼 그런 존재가 되고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집니다. 그 계획이 무엇이냐 하면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교제 속에서 인간을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인간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생태계와의 관계도 다 파괴됩니다. 모두 파괴된 가운데 인간은 완전히 고립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 계획을 펼치시면서 오히려 인간의 죄 때문에 사실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비췰 수 없었던 그런 찬란한 영광의 빛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말입니다. 그 불꽃놀이의 중심에 교회가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절하게 교회의 온전함에 대해서 요구하시는데 교회가 어떻게 온전해지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는 있겠죠. 교회가 우리교회처럼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등등 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야기하는 온전함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어떤 옷을 입은 것 같은 그런 것이지 사람 그 자체가 바뀌어서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공동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혼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지식과 사랑의 성숙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성화, 성숙, 온전케 됨 없이는 교회가 그렇게 나타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 개인을 성화시키는 것도 힘든데 교회 전체를 성화되게 하고 우리교회는 상관이 없고 내 말 듣지도 않는 카톨릭을 성화시키는 것이 쉽겠느냐는 것입니다. 카톨릭 중에서도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일 것이 아닙니까.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성화되고 진실한 삶을 살면 이것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 봉헌이 되고 그것은 다시 하나님께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화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네가 성화되지 않는 것이 내게 손해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속해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들이 보면 성화의 문제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우리가 순간순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작은 관계의 삶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우주적인 성취와 관련이 있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하는 이 사상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특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르게 배우면 사실은 세계관에 대한 다른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난번 설교 시간에 우유 이야기도 하고 피자 배달부 이야기도 하고 치킨 이야기도 하고 등등 이야기 했지만 그런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관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창조한 세계가 이렇게 비참해 질까. 숲을 돌아다니는 독사도 어린 양도 사자도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함께 같이 살아야 할 식구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동물들을 학대하고 비인간적으로 인간들을 고용해서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게 하고 하는 것이 정말로 올바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나온 어린이집 아이 폭행사건도, 얼굴까지 다 떴지 않습니까. 정말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당장 우리 한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정치를 하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어딜 가든지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분신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동물들을 그런 식으로 학대하고, KFC에서 치킨으로 떴지 않습니까? 거기 보니까 할아버지가 켄터키 주의 대령입니다. 집에서 퇴역하고 나서 만들어 먹다가 대박 터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무 뚱뚱해서 저걸 홀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닭을 거의 죽지도 않은 상태에서 기계에 넣고 털을 뽑는답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냐 하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인권문제 같은 것도 이것은 침묵하는 것이 죄입니다. 남북관계의 미묘한 것이 있지만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정치범들을 수용소에 가두어서 한 끼에 옥수수 25알 씩 준답니다. 의사들이 연구해서 어느 만큼 주면 죽지 않는가 해서 주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중국과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가서 무슨 전투기를 타고 가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최소한 괴로워해야 기도가 나올 것 아닙니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하고 살면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 의도하셨던 바가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히 수족냉증 내지는 불감증이 걸려서 중풍병부터 시작해서 온갖 질병이 걸려서 이게 예수님의 분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될 때에 교회가 구원 역사 속을 지나가면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금 잘 내는구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좋은 대학 다니는구나, 대기업에 잘 들어갔구나, 회장이 몇 명이 교회에 나오는구나, 이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은 존재의 울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얼굴이 예뻐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사진 찍자고 하고, 이런 것은 존재의 울림이 아닙니다. 존재의 울림은 얼굴이 예쁘기 때문에,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돈이 많기 때문에, 키가 크기 때문에, 스펙이 좋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뭔가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사람으로서 따라갈 수가 없다. 다 계급장 떼고 내려놓아도 내가 저 여자처럼 예쁘게 만들어지고 저 남자처럼 스펙을 쌓고 그래도 나는 인간으로서 저 사람에게 족탈불급이다. 도저히 인간이 저 사람만큼은 안됐다, 그러면서 뭔가 존재의 울림이 울리는 것, 그것이 진짜 존재의 울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자꾸 교회가 무슨 도덕수준이 낮아졌다, 형편없다, 개혁을 해야 한다 하는데 백번을 해봐야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하긴 해야 되겠지만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너무 안타까우면 성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신 소명을 이해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여기 골로새서에 보면 내가 직분을 따라 라는 말은 오이코노미아입니다. 경륜입니다.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경륜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살림살이 하듯이 이 우주와 지구를 이 세상을 살림살이 하듯이, 살림살이지 않습니까, 오이코노미아가. 거기서 이코노미라는 경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듯이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계획 속에서 교회도 세우시고 우리의 구원도 주어지고 교회의 직분도 주어지고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경륜을 이해하면서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 삶이 그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레카피탈라치오의 교리를 교역자들하고 공부하고 교회 안의 교역자들과 공부하고 외부에 있는 교역자들하고도 공부했는데 외부에 있는 교역자들 와서 공부하면서 레카피탈라치오의 교리를 듣게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 자발성이 있으니까 열심히 듣고 옵니다. 마지막에 다 듣고 와서 결론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오늘 이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고통에 빠진 사람을 착하게 대해주고 불의가 창궐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고 하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가지면 우리들이 막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 그렇게 살다가는 마지막 날에 가서 심판 받는다, 이것은 오늘날 약발이 잘 안 먹힙니다. 개명한 시대가 되어서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반신론자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지옥 있으면 가겠다 이겁니다. 담대한 사람들입니다. 내 장렬하게 영원히 고통을 당하겠다 이겁니다. 그래도 나는 신은 싫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에베소서, 로마서도 마찬가지로 다 보면 장엄한 우주적인 교회론, 우주적인 기독론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너무 시시합니다. 남편에게 잘해라, 자식들 성질나게 하지 말고, 네가 고용되었으면 고용주에게 잘 섬기고, 네가 부하직원들 구하면 후하게 잘 해라, 싸우지 말고 정직하게 살고, 이런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시시해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런 한걸음 한걸음이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내가 오늘날 한 사람을 만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장엄한 우주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다고 생각하니까 너무나 놀라운 것 아닙니까.
자 그러면 우리의 넓혀졌던 시야를 마지막으로 교회로 좁혀 봅시다. 교회 안으로 우리가 눈을 돌리게 되면 사도가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서 내가 힘에 다하도록 수고한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옵니다. 그럼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깊은 관심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조금만 제가 이해를 시켜드리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수많은 지체들과 함께 얼굴은 다 모르지만 지체들과 함께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나도 그 몸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몸속에서 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바라보는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교회에 있는데 교회만을 위해서 일할게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일해야 겠다 하고 뛰쳐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특공대 파견되듯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우리의 소속을 너무 물리적인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물리적인 입장에서 보지 말고 우리가 영적인 입장에서 보면 내가 몸을 이동하고 한 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곳에 내가 갔다고 칩시다. 그것이 무슨 문제냐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물리적, 공간적 연합이 아니라 영적인 연합입니다. 내가 간 그곳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모든 교회가 거기에 같이 있는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자기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해 살아가는 모든 삶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관점에서 사도가 자신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한다고 할 때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교회에 남겨진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통들 뒤에 있는 남겨진 것들,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배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이기 때문에 우리의 참여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는. 그런데 자격도 없고. 무지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신 분만 매달릴 수 있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가장 큰 소명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교회에서 특공대를 파송해서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교회를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이쪽 분단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생 불신자들입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여기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전도되어야 합니다. 결국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가서 전도를 할 것 아닙니까. 교회의 한 몸이 쭈욱 연결되면서 가서 전도를 해서 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모든 이 세상을 위한 모든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섬김은 교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이 사람들에게 완전 불신자들 한복판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와 함께 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온전케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일 년 내내 가도 전도 절대 안하려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까, 전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 자기가 온전해지든지 남을 온전케 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 가서 전도를 합니다. 결국은 직접적으로 불신자들에게 하는 모든 일들도 결국은 교회가 온전케 되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보면 결국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결국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다. 선교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일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은 전도나 선교도 그런 관점에서 우리들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럼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한 시간 딱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치르신 고난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고난이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동참시키고자 하는 고난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 참여할 때 예수님이 다시 고통 받는 것 같은 것들이 현견지 안에서 느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을 교화시키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숙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면서 성화되어 가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일을 하면서 성화되어 갑니다. 내가 예를 들어서 도벽이 있습니다. 어느 날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반성해보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되겠습니다. 어느 날 집에 가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내가 이제 이러지 않겠습니다, 편의점에 가서 안 훔치겠습니다, 그리고 깊이 결단을 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회개하고 편의점에 가서 훔쳐온 것 다 돌려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게 교회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너무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할 때 선교사나 목사를 생각하면서 그 구절을 읽으면 안 되고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거기서 피할 수 없고 떨어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속에서 교회의 수많은 다툼이라고 하는 처음에 내가 제시했던 문제들을 제기해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보면 자기 이기심, 자만심, 영혼에 대한 무관심, 이런 것들이 교회의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화되지 못했을 때에 그 결과는 세상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신에게로 다시 고통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사람이 점점 더 온전히 성화되어 갑니다. 그럼 그 유익을 내가 제일 많이 받습니다. 사람들을 만났는데 너 어찌 그렇게 변했니, 옛날의 너가 아니다, 가서 막 소문을 냅니다. 걔 진짜 놀랍다, 어떻게 그렇게 변했냐, 싸가지 하나도 없는 애였는데, 어쩜 그렇게 변했냐, 합니다. 자기가 유익을 받듯이 교회 자체도 자기가 잘못 살았을 때 교회 자체로 그것들이 회기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순장 쯤 됐으니까 내 설교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암의 발생의 의학적인 원리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 예화를 들었는데 의사선생님이 너무 정확했다고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교회 와서 목사님 가끔 의학 관련해서 예화를 드는 것을 보고 걱정이 많이 됐었는데 아직까지는 한 번도 주류 학설에서 어긋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에서 암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죽을 때에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사경회 네 번째 날 설교한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다시 'repeat' 하기엔 어렵습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못들어도 좋으니까 네 번째 것은 꼭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 고통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과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그때 자기가 죽는데 사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죽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 안에 좋은 새 본성과 옛 본성이 있는데 옛 본성이 살아있습니다. 죽이면 싫다고 합니다. 살려줄 때 계속 좋다고 합니다. 그런 죽음을 경험해서 누구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디타치오 크리스티’,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를 묵상하는 것이 경건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히브리서에도 예수를 묵상하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묵상하는 것이 초대교회서부터 수천 년 내려오는 전통이었습니다. 오늘 그 전통의 유산이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를 묵상하라고 하면 예수님 자체가 너무 낯선 분인데 어떻게 묵상하래, 서로 잘 아는 친구들이 생각나는 것이지 뒷집 아저씨 어쩌다 마당 쓸다가 만났는데 묵상이 되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묵상을 하면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죽는 것을 경험할 때 2000년의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서 예수의 죽음 그 자체가 'actualize'되어서 자기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죽음과 맞닿으면서 살아야 할 것들은 확실하게 살고 죽어야 할 것들은 그 죽음에 의해서 삼킨바 되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 독기를 품었던 마음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김지아 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이 맺힌 사람 아닙니까? 이번에 보상 많이 탈 것처럼 신문에 나왔습니다. 자기가 굉장히 들떠서 좋아하더라고, 보상금이 나온다고 10몇 억 쯤 나온다고 하는데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서 이빨을 갈았는데 어느 날 교도소에 갇혀있는데 소식이 들어온 것입니다. 10월 26일 날 죽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화르륵 무너져 내리면서 이게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일시에 모두 용서가 되더랍니다. 그것은 특별은총의 빛이 아니라 일반은총의 빛입니다. 일반은총의 빛 가운데에 무엇이 있냐하면 허무의 논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다가 내가 이렇게 까지 해서 뭐하나, 허무한 생각이 확 들어올 때 그것을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허무의 논증이라고 합니다. 그런 허무감이 확 들어오면서 탁 하고 놓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반은총의 빛 아래에서도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논어에 보면 논어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군자부재, 군자는 다투지 않는다. 다투는 것은 소인배들이 하는 것이지 군자는 다투지 않는다. 공자가 얘기하는 군자는 무엇이냐 하면 철인입니다. 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선을 찾아가는 구도자입니다. 그러면서 도덕과 지성의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투지 않습니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다툼이 더군다나 공자나 맹자나 이런 사람들의 사상에서 보면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정의 관념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정의 관념을 서양 일변도로 우리들이 흡수를 하고 기독교 안에 있는 어떤 동형적 요소가 있는 전통들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살벌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정의롭게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한데 그 정의가 칼만 가진 정의여서는 안 되고 실패하고 혹은 잘못했던 사람들이 함께 연합을 이루면서 재기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인의가 있는 정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정치 철학의 한계를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깊이 죽는다면 그 때에 성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죽는 것입니다. 다 죽으면서 그렇게 죽음과 함께 살아남을 경험하는데 이것은 누구나 다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회개 많이 하고 돌아갈 때 이상하게 너무 가벼워, 그 가벼운 것이 그게 살아난 것입니다. 사랑한 그 생명이 공동체적으로 봉헌이 되면서 교회 전체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끝 날까지 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보면 이쪽에서 막 은혜를 받고 온전해지고 이쪽에서 또 사고를 칩니다. 여기서 번거 저기다 갚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세상 끝 날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건한 성도들은 정말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 내 힘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레카피탈라치오 교리도 마찬가지이고 지금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 이런 것들을 배우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르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다 똑똑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몇 달만 바짝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면 나만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라, 다투지 마라, 자기를 죽여라, 뭐든 나옵니다. 그것이 전부다 기독교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는 그것을 레시피라고 보고 커다란 볼에 맛있는 재료를 다 넣었습니다. 마지막에 소스를 넣어서 무쳐야 합니다. 그런데 소스가 피 입니다. 심장을 뽑아서 짜서 거기에 피를 발라서 마지막으로 버무려야 합니다. 그것이 마지막 레시피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해, 용서해, 이건 너무 쉽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너무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남보고 하라고 하는 것은 입에 침만 바르면 됩니다. 말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할 때는 피로 발라야 합니다. 교사로서의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기독교적인 그 가르침을 잘 지식으로 정돈한 다음에 그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칠 때에 권위가 나옵니다. 그 최종적인 권위의 완성형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레시피가 지식이고 레시피를 가지고 요리를 만들어서 주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그 레시피가 마지막에 케찹을 쫙 짜듯이 여러분들의 심장을 쫙 뽑아서 구멍을 뚫어서 쫙 눌러서 빨간 피가 쫙 내려가서 충분히 흠뻑 젖게 적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버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세계는 냉혹합니다. 제가 21,2년 동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구원 이외에 공짜로 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정말 예쁘다, 아름답다, 신앙은 참 아름답구나, 언제 공부해서 저런 것을 찾아냈을까, 이야기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그런 하나의 아직 닫혀져 있는 어떤 진리의 요소들을 보여주실 때에 그 설교자의 심장의 껍질을 찢으시면서 하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찢으시면서 하나를, 그 다음에 하나, 하나, 하나.. 그러니까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서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교리도 사실 우리에게 어떤 고민이나 고통이 없었더라면 발견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향해 걸어오는 "I’m the way" “내가 곧 길이요” 할 때의 그 길을 걸어오는 구도의 과정이 그냥 단순한 말장난으로 걸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끊임없이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그 피가 묻어있는 신학 함, 신앙생활 함,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여태까지 공과 책이 조금 부실했었습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이번에는 안 되겠다 생각되어서 바짝 챙겼습니다. 거의 다시 다 썼습니다. 열 줄도 건진 것이 없을 정도로 다시 했습니다. 분량도 좀 늘어나서 제 생각엔 아마 뒤에 다 붙이면 250페이지 정도 나올까 생각됩니다. 이번부터는 신나는 공과입니다, 공짜로 준다니까. 공짜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닌데. 구원 말고는 난 공짜 다 싫습니다. 어쨌든 내가 갖는 건 아니니까.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렇게 구도의 길을 가라, 그리고 작은 것 하나 하나가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라, 그러면서 죽도록 힘든 길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쓰디쓴 인생에서도 달달한 맛을 주시듯이 매 순간 그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때에 즐거울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마음껏 즐기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면서 그렇게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