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아우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녹취자: 원수연
반갑습니다. 이렇게 뜻 깊은 CHISTA(차이스타)에서 여러분을 만나 뵈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라는 제목입니다. ‘아우라’라고 하는 말을 흔히 일본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우라는 원래 라틴어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희랍어에서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어떤 존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운입니다. 이 말을 지금 화면에서 ‘广泛(광환)’이라고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한번 거대한 나무들로 가득 찬 숲을 생각해보십시오. 평균 500년 이상 된 나무들로 가득 차 있는 숲입니다. 그런 아름드리나무들이 숲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 밑으로는 그 수많은 나무들이 서로 뿌리를 함께 얽히고 있습니다. 온 산은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해집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거목과 같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분재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차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글을 쓸 때 역사적으로 네로의 박해 시대였습니다. 주후 58년에서 68년경 사이였습니다. 이미 로마의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살아있는 소망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실패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안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1장에서 영광스러운 소망에 대해서 말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3장서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 사이를 연결하는 지점이 바로 제 2장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2장에 들어있습니다.
2장의 주제는 산돌이신 그리스도입니다. ‘Living stone’입니다. 당시의 로마의 건축술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한쪽 벽과 또 다른 벽이 모퉁이에서 만납니다. 두 벽이 함께 한 건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이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두 벽을 함께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모퉁이돌입니다. 그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두 개의 벽이 만나서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것입니다. 당연히 네모난 건물에는 네 개의 모퉁이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퉁이돌이 생명의 돌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단순히 둘이 한 교회가 되었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 모퉁이돌은 그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돌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2장이 가르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베드로는 핍박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켰습니다.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들은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거룩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시간의 제약 때문에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택하신 족속’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이 부분은 ‘게노스 에클레크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게노스’는 한 핏줄을 가진 조상을 의미합니다. 그 후손을 가리킵니다. 혹은 한 왕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에클레크톤’은 선택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당시에 있었던 흩어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이 바로 하나의 족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독특한 족속으로서의 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아, 이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표지가 있을까요? 만일 그 표지라는 것이 이렇게 모여서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슬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그 이상의 표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능력 있게 선포되던 주후 1세기와 2세기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폴리캅의 순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록입니다. 그 책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방인의 평가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족속이다.”
주후 160년경에서 220년 사이에 살았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쓴 ‘이방인들에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쓴 ‘스트로마타(Stromata)’라고 하는 책에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을 ‘제3의 족속’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나 이방인들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가르침으로 율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족속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유대인과 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도 달랐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 말기의 작가인 플루타르코스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영웅전’이라고 하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가 78편의 수필로 이루어진 ‘도덕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책에서 기독교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로마의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고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유세비우스라고 하는 3세기 때 사람이 『교회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 ‘멜리토(Melito)’라는 글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인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의를 하든지 동의를 하지 않든지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였습니다.
저는 최근에 어떤 한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스님이 70세가 넘어서 쓴 글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불교를 믿게 되었는지를 기록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시골을 내려갔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유명한 절에 들르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절을 구경하다가 잠깐 마루에 앉아서 쉬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젊은 스님에게 이야기를 걸었습니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왜 이렇게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지요?” 젊은 스님은 이 아이를 방 안에 불러 말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왜 사니?”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한 시간 남짓한 대화였습니다. 그 아이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출가하려고 하니 허락을 해주십시오.” 유교를 대대로 신봉하던 부모님들은 이 아이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70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 그 때의 경험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때 자신에게 문답을 건넸던 스님이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명한 성철스님이었습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는 동안에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일까? 그냥 절을 구경하러 왔던 어린 학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무엇일까? 인생에 대한 결단을 내리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 때 저에게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 있었습니다. “존재의 울림”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다른 가족들의 도움으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 나이 열다섯 살 되던 해였습니다. 교회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져서 울었습니다. 한없이 울었습니다. 가난하거나 병들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안타까운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인생은 무엇인가? 나는 왜 오늘 하루도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은 정말 살아있는가?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열다섯 살 아이의 마음속에 파고들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수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볼 때 당시 교회의 사람들은 별로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무언가 인생에 대한 답을 기독교에서 찾았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질문이 없었으니까 그들은 답을 찾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존재의 울림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제가 보기에는 기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린 아이는 거기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뺨의 눈물을 씻으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일평생을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후 한 6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6년은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문학이나 철학을 통해서 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질문들은 사람들이 했지만 그들도 답을 찾은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을 이 세상에 아직까지 두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분을 잘 먹고 잘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삼으신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그 아우라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삶입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얻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울림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부도덕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물론 그런 고민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자본주의적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회사가 잘못해서 커다란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기업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소비자가 그 회사 물건을 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회사는 재빨리 TV에 나와서 사과를 합니다. 그리고 책임자를 처벌합니다. 심지어는 회사의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전시하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회사가 그렇게 나쁜 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선전합니다. 신용은 서서히 회복됩니다. 그리고 매출도 다시 오르기 시작하겠죠. 이것이 바로 비난을 받을 때 이 세상의 회사들의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상에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라고 윤리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박수쳐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 그린 궤적입니다. 그러므로 존재가 변하지 않으면 변화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렇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어로 선포한 복음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파하는 신자 자체가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존재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는 불교인의 방식으로 삶을 살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을 살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는 자유주의자로서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으로 구원 얻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만나는 것을 그 십자가에서 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감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야합니다. 거기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얼마나 심각하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전의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물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그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의 울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런 십자가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제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이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갖춰야 할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남다른 사상의 체계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남다른 사상의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그 만남의 신학적인 의미도 배워가야 합니다. 성경과 신학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통해 견고한 신앙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확고한 사상의 체계를 세워가야 합니다. 거기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견고한 삶은 확고한 사상에서 나옵니다. 말씀과 성례, 기도와 같은 은혜의 수단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기독교의 지식들을 함양해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남다른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공산주의자에게는 공산주의자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이 세상의 물결과 충돌을 합니다. 그 때에 많은 어려움이 옵니다. 지혜롭게 이 어려움들을 극복해가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불신자들과도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끊임없는 세속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 세상과 화목하게 살아가려고 애써야하지만 우리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뚜벅뚜벅 걸어서 성경이 가라고 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며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류가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거짓된 세상 속에서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다. 비겁한 세상에서 용감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남다른 은혜의 시여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합니다. 그 때 미움이 있는 곳에서 사랑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오류가 있는 곳에서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살기보다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죽도록 만들어줍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속적으로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신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의 사상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남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교회가 이 세상과 구별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들이 지식과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진리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이런 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은혜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이 여기 모인 이유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간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가 당신의 교회에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용사와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순전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매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우리는 독특한 방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명심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사는지를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아우라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