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있는 신학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녹취자: 박지성
히브리서는 신약의 레위기라고 불립니다. 그 정도로 구약의 제사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약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기서는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것에 있어서 충족하신 하나님이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구약의 역사는 이 한 지점을 향하여 줄달음쳐 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남기셨던 여섯 번째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외치신 말씀이었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이래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즉시 보이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것을 기초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를 왕처럼 다스리고 통치함으로써 더 높으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며 사는 것이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욕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 있는 아주 아름답고 탁월한 질서들은 현저히 훼손되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졌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무너졌습니다. 사람과 자연사이의 관계도 깨졌고,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자연과 자연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연결도 심각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어 영혼을 창조하심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이 아담의 고백은 남녀사이에만 존재하기를 원하셨던 고백이 아닙니다.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를 이 고백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죄는 인간과의 관계를 철저히 파괴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자원이 끊어진 인간은 마치 더듬이가 끊어진 귀뚜라미처럼 살아있지만 어디로 살아가야할지를 모르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타락하자마자 인간에게 즉시 두 가지 놀라운 은총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제사의 제도를 주심으로 타락한 인간이지만 일시적으로나마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약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음에 가인이라 하였으니 이는 ‘구속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쉼’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인류는 여자의 후손에게서 태어날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제사장의 도움으로 짐승이 죽임을 당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열릴 수 있었던 구약의 모든 제사의 성취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일시적인 죄의 용서가 아니라 영원히 단번에 우리를 죄와 죄의 비참으로부터 건져내셔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신성으로는 온 땅과 만물, 온 세계에 충만하신 분이었으나 인성으로는 인격 없이 인성을 취하셔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니 이것을 가리켜 신학에서는 “안 휘포스타시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안 휘포스타시아”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분은 크게 세 가지 일을 이루셨습니다.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사람의 인격에 관하여는 “안 휘포스타시아”로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한은 “앤 휘포스타시아”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인성을 가지시긴 했으나 그분의 인격은 사람의 인격과 신의 인격, 두 개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격만을 가지신 분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 되셔야 했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서는 참 하나님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귀로만 듣고 상상으로만 생각하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게끔 한정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병든 자의 헌데를 어루만지고 주린 자의 입에 음식을 떠먹이실 때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을 향해 가진 그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가하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전에는 희미한 선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으려다가 허탕에 빠져버리는 것이 종교의 역사였으나 예수님은 친히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심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놀라운 사랑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람들과의 관계와 온갖 섬김 속에서, 특별히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선포 속에서 계시되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에게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셨으나 동시에 참 사람이셨습니다. 비록 “안 휘포스타시아”로 인성을 입으셨으나 그는 참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참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모세와 다윗, 그 이외의 많은 선지자들은 탁월하고 훌륭한 신앙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그들은 결함을 가진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지를 완전히 보여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이 생각하는 것과 행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베풀고 싶어 하는 동일한 사랑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33년 동안 이 세상에 사시면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핍박했고, 그를 미워했고,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왜 그런 대우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분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갖고자 사람들과 다투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임금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진리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빛이었고 자신들은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에 어두움이 빛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그 어두움은 빛을 미워했고 미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과 똑같은 연약함을 가지신 분으로서 늙음에 종속되셨고, 추위에 종속되셨고, 더위에 피곤하셨고, 주리면 시장하셨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른 분으로 모든 결핍 속에서 이 세상에 계시며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모든 것들이 전혀 방해가 되지 않게끔 오로지 주님을 섬기는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 한 가지 이유로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죽으시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짊어지시고 내포적 대신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치루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유화시키고 속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의 임무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학의 임무는 다른 학문의 임무와 같지 않습니다. 다른 학문의 임무는 각기 그 학문이 관여하고 있는 영역에서 인간에게 지식을 더하게 함으로 올바른 앎에 도달하게 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물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것이 학문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학문은 아주 세분화되어 있고 세분화 된 학문은 각기 고유하게 자신의 영역에 헌신합니다. 통섭과 통합의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것도 역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학문의 분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써 그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와 이 안에 있는 물리적인 법칙에 대한 지식은 아무리 증대한다고 할지라도 창조한 세계 안에 있는 법칙과 사실의 정보만을 가르쳐 줄 뿐이지 그것이 왜 존재하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어떤 식으로 이바지하는 지를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 자체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넘치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과거보다 현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화) 최근에 어느 과학 잡지에서 나온 정보를 보니까 인간이 이 지상에 생산해낸 정보를 CD, DVD에 담으면 달에까지 쌓아야 될 정도의 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정보는 매 순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에 대한 정보가 늘어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자연 세계를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우리가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가르쳐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지만 이것이 지식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학문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의 독특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영적인 세계와 자연과 사회의 세계에 동시에 도성인신의 원리로 맞닿아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으로는 하나님과 연계를 이루시고 인성으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셨던 것처럼 신학자는 신앙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또 그 관계 속에서 신앙의 신비를 통해 신앙이 아니면 체득할 수 없는 진리들을 변증적인 방법으로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놀라운 지혜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에서 성경을 통해 발견한 진리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일반적인 학문은 도저히 가르쳐 줄 수 없는 사실, 즉 이미 우리들이 알고 있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야지만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임무가 바로 신학이고 그런 지식들을 구체적으로 사람들 속에 심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선교요 목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탁월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예리한 지성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평화를 누리는 것만큼 이 세상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희망하고 갈망하고 또 주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아주 탁월한 설명을 도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는 사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사물은 두 가지 종류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사용하여야 할 사물이고 또 하나는 향유하여야 할 사물입니다. 사용하여야 할 사물, 즉 “레스 우텐디”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사용해서 이것을 도구로 더 높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복을 주신 것은 추위를 피하고,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옷 자체에 탐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옷을 주신 목적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식은 우리의 건강과 활력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수단인데 식도락에 빠져버린다면 그것은 음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위반됩니다. 권력도 나라를 다스리고 이 세계를 통치하기 위해 주신 것인데 권력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면 그것은 권력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레스 우텐디” 사용하여야 할 사물들로 주신 것이고 이것들을 통해서 보다 더 높은 목적으로 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그것이 바로 “레스 푸루엔디”즉 우리가 누려야 할 사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단 한분 하나님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그것을 사용해서 높은 목적에 도달하고자하는 보다 더 높은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신학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또 이 땅에 있는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데 자신을 공여하고 이바지할 수 있도록 중보자적인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이 오늘 이 아침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빛을 성경의 계시와 자연의 계시를 통해서 주셨지만 이 모든 계시의 빛은 한분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탁월하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성육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곧 하나님과 모든 세계를 아는 지식의 등용문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세계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이 놀라운 증거는 성경을 통해서도 명백히 입증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로 믿어지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신학적인 최고의 화두가 무엇인지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그노시스 크리스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놀랍게도 구약에 나오는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기독론적인 변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놀라운 지식을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아는 길을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입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의 소원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주석가들의 견해는 이 5장 7절의 광경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던 그 광경을 염두에 둔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대부분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의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한 그 기도의 심한통곡과 눈물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고 저는 그런 주석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계셨을 것이고 이것은 단지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당신의 육체위에 얹어진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위에 쏟아 부어진 무한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한량없는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합리화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긴 밤에 이 십자가를 좀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 것으로 기도의 시간을 가득 채웠다고 보는 것은 왠지 선뜻 우리의 마음에 기쁨으로 받아들일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이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처럼 당신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셨지만 아버지의 소원대로 해달라고 맡기셨고 이것은 짧은 시간에 결단이 난 기도였으며 예수님의 관심사는 즉시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나면 이 땅에 홀로 남겨질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 땅에 당신이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많은 죄인들의 모습이 마음에 떠올랐던 것으로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기도가 있습니까? 나는 오늘날 신학생들과 교회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바로 30년 전과 비교를 해보더라도 지금은 현저히 기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고 심지어는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조차도 기도의 습관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예화) 돌아가신 박윤선목사님이 유럽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신 것을 모아 어느 제자가 책을 냈습니다. 그 책의 육필로 쓴 원고의 사본을 쭉 읽었습니다. 수십 통의 편지에 자기의 제자를 향해 그치지 않는 충고가 있었습니다. 편지 끝에 항상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개 목사, 기도 많이 하십시오. 열렬히 기도 하십시오. 당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정말 기도의 영을 느끼게 해주는 신학생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기도가 인격의 특징이 된 것 같은 신학교 선생님들은 얼마나 만나기 어렵습니까?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몇 달 전 이었습니까? 언제였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 혼자의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너무나도 필요하기 때문에 도와달라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울부짖으며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며 부르짖었던 그 마지막 순간이 언제였습니까? 오늘 새벽이셨습니까? 지난주의 채플시간이었습니까?
(예화)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쯤 되는 아이가 어느 날 교회에서 예수님을 깊이 만났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 후로 아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물어봤습니다. “너 무슨 일이 있었니?” 그러자 아이는 “엄마, 전도사님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많이 설교하셨을 때에는 믿어지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가르쳐 주시며 눈물을 흘리셨을 때 나는 그 모든 사실이 믿어졌어.”라고 말했답니다.
존경하는 저의 스승 존 오웬은 소위 “death of death of death”라는 개혁주의 속죄론에 관한 난해하고 어려운 저서를 7년 만에 탈고한 후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책을 심한 통곡과 눈물 속에서 기록하였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로마 령의 박해를 받으며 2000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졸지에 설교할 강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통 받으며 성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자신들이 믿는 방식대로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기에 이 위대한 신학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신자의 죽음의 종식에 관한 개혁주의적 속죄론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여러분의 인격의 특징이 되게끔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늘 들고 다니는 찬송가는 신학을 하는 도상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여러분 곁에 있는 친구여야 합니다. 전 지금도 오래된 찬송가를 가끔 넘겨봅니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혹은 학교에서 혹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괴로움 때문에 가슴이 아플 때 즐겨 부르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좋아하는 찬송가에는 어김없이 눈물이 배어있고 구겨진 흔적이 있습니다. 고난의 길에 찬송가는 저의 위로였습니다. 이게 어디 저 뿐의 경험이겠습니까?
30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한 시간 기도했다면 지금은 두 시간 기도해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없어서 제가 5장 7절 이 위대한 절의 설교를 모두 마치지는 못하겠습니다. 중간에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당부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있는 신학도가 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이 있는 그래서 어디서든지 무릎을 꿇으면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는 그런 신학을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