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아우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녹취자: 허 혜숙
이 편지는 주후 54년에서 68년 사이에 있었던 네로의 박해 시대에 기록된 편지로 보입니다. 아마도 베드로사도는 이 편지를 로마에서 쓴 것 같습니다. 5장 13절에 “바벨론에 있는 교회도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바벨론을 주석가들은 로마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이미 교회를 향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이미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씀으로 소망 중에 더욱 굳건히 인내하도록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고 3장에서부터 구체적인 성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두 장을 연결해 주는 2장이 바로 산돌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시대는 건축으로 유명한 시대였습니다. 두 개의 벽이 나오고 그 두 개의 벽을 하나의 건물이 되도록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모퉁이 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크게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오늘날 영남과 호남사람들의 차이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이었습니다.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과 종교관 생활의 방식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로 한 건물인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모퉁이 돌은 그냥 건물을 연결해주는 모퉁이 돌이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당신에게 접붙여진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모퉁이 돌이셨기 때문에 ‘living stone’ ‘살아있는 돌’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핍박과 시련이 가득 찬 시대를 지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이 모든 삶의 상황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말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근원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지는 끊임없는 생명과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이 생명과 사랑의 힘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공급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 전서 2장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라는 것입니다. 이 긴 구절을 이 짧은 시간에 설교할 수 없기 때문에 ‘택하신 족속이요’라는 한 표현만을 오늘 설교하고자 합니다. 택하신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 ‘게누스 에클레크톤’이라고 되어있는데 에클레크톤은 선택받은 이라는 의미이고 게누스라는 것은 한 조상의 후손 혹은 한 문화와 왕권에 의해서 동아리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게누스라는 말은 어느 한 교회의 신자가 아니라 당시 있었던 모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한 모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우라’라는 말을 사용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단어가 일본어인 줄 압니다. 사실은 이 단어가 일본어가 아니라 라틴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미 고전 그리스어에서도 ‘아우라’라는 말로 나오고 일찍이 피타고라스도 이 아우라라는 단어를 자신의 학문을 전개할 때 사용했습니다. 원래 이 ‘아우라’ 라는 말은 공기, 바람, 분위기, 미풍, 풍취, 어떤 존재의 영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영풍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구약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는 욥기에서 딱 한 번 ‘아우라’ 라는 단어가 나오고 거기에서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어집니다. 원래 이 ‘아우라’라는 단어가 은유적으로 사용이 되어서 어떤 존재가 그 존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독특한 분위기, 그리고 누군가에게 쉽게 꺾이지 않는 자신만의 존재의 기운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역사의 시계바늘을 약 30년이나 40년 전으로 돌리면 사람들은 무조건 큰 것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 안에도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회가 굉장히 크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 그러면 일단 존중을 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하고 학식이 높다고 하면 일단 존중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무슨 대회를 하는데 어느 광장에서 수십만, 수백만이 모였다 그러면 사람들이 ‘오우, 대단 하네’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런 것들을 깔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크다고 해서 그 큰 교회의 목회자가 절대로 존경을 받지 않습니다. 단지 그런 큰 교회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 큰 회사를 거느린 사람들이 존중을 받지 못 하는 것처럼 그런 규모와 크기를 가지고 이제는 굴복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무슨 사건이 생기면 ‘너희 내가 누군지 알아?’하면 경찰도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누가 잡혀 와서 ‘너 내가 누군지 알아?’ 하면 젊은 경찰들이 ‘너 잘 걸렸다’ 그렇게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제 이 시대는 이미 우리 30년 40년 전에 그렇게 효율을 추구하고 규모를 자랑하고 어떤 업적이나 크기를 가지고 위신을 부리던 그 시대가 지나고 이제 이 시대는 다른 의식을 가지고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기독교인이 이 세계를 향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에 권력을 결속 해가지고 기독교도 이런 힘이 있다는 것,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이런 정치가가 있고 이런 높은 관직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선교에 있어서 역행하는 것입니다. 모인 직장마다 신우회를 만들 어가지고 그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자기끼리 주도권을 가지고 뭔가를 하고 뭔가 정치를 주무르고 하는 것들은 다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까 교수님이 우리 학교를 위하여 기도를 하셨는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학이 만 명 2만 명 되어야지만 훌륭한 대학이라는 것은 옛날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학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어떤 존재감을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대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서 수십 만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궐기대회를 하는 것 같은 것은 기독교의 선교에 이제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베드로의 이 지적은 우리에게 아주 뼈아프게 각성으로 다가옵니다.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게누스 에클라크톤. 너희는 선택된 백성들이다 그래서 선택되지 않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예수께 접붙여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고 그 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그 생명과 피를 공급받아 사는 생명을 가진 형제들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70이 넘은 어느 노스님이 글을 썼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저 시골로 여행을 갔습니다. 거기에 친척집이 있어서 여름방학을 잠깐 보내고 돌아가는 길에 친척이 하는 이야기가 ‘이 근처에 유명한 절이 있으니까 한 번 구경을 하고 가거라.’ 해서 가서 절을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다리가 아파서 툇마루에 앉았답니다. 그런데 저기에서 젊은 스님이 한 사람이 걸어오더랍니다. 옆에 앉더니 ‘너는 누구냐?’ ‘저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인데 이 절이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습니다.’ 젊은 스님이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왜 사니?’ 그러면서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학생이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자마자 부모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충격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학교를 모두 그만 두고 이 집안을 떠나 출가 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십시오.’ 이 집은 대대로 유교를 믿는 집안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슨 소리냐?’ 반대를 하면서 말렸습니다. 마침 거기에 사촌이 있었는데 그 사촌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면서 일본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하기를 ‘이 아이가 이제 인생에 대해서 자각이 생겼으니 이아이의 인생이니 이 아이의 길을 가게 두십시오.’ 결국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출가를 해서 승려가 되어서 70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와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얘야 너는 인생을 왜 사니?’라고 물었던 스님이 바로 성철 스님이었답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다섯 살 때 제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일 날 교회를 향하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논두렁에 엎드려 통곡을 하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집이 가난하긴 했지만 그러나 가난이나 어떤 고통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매일매일 살아야 하는가? 제일 무서운 것은 아침마다 내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곡하면서 논둑에 엎드려서 한참을 울고 일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나의 이런 질문에 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나만큼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열다섯 살 먹은 아이가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논둑에서 일어났을 때 결심했습니다. 일생을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기로... 나는 그 승려의 글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한 시간 동안에 짧은 문답이 그 인생에 놀라운 결단을 하게 만들었던 힘이 무엇일까? 승려 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무슨 학벌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수만 명이 모인 주지 스님도 아니었을 텐데 어쩌면 끝까지 이름도 확인하지 못하고 헤어졌을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무엇일까? 그 때 쿵 하고 제 마음속에 들리는 깨달음이 바로 ‘존재의 울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서 있을 때 쿵 하고 울리는 존재의 울림입니다. 이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글과 입으로 떠들면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전파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2천년 정도를 회기 해 간다면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시대에 어떤 인상을 그 시대에 주었는가 하는 것을 볼 수가 잇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라고 하는 책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제 3의 족속이 나타났다. 폴리캅의 ‘순교’라고 하는 책에서는 우리시대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족속들이 있다. 영웅전을 기록했던 플루타르코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이 도덕론이라는 모랄리아라는 책입니다. 그 도덕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신성한 법정의 판결에서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이것은 불신자의 눈으로 본 그리스도인들의 인상입니다. 유세비우스의 멜리토라는 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그렇다고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지성인들이나 고관대작들만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닌데 그 기독교인들을 향한 불신자들의 인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 삶의 방식에 있어서 유대인의 삶의 방식도 아니고 또 이방인의 삶의 방식도 아닌 그들과는 구별되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 이것은 단지 도덕적인 착한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뭔가 세계관과 인생관, 역사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인상입니다.
그러면 아시다시피 절대적으로 교회에서 받는 교육의 양이 중세교회 시대 때에 많았겠습니까? 아니면 오늘날 더 많겠습니까? 절대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기독교의 지식의 총량으로 말하자면 지금이 훨씬 더 많습니다. 왜? 기독교의 역사가 2천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리고 찬란한 기독교 신학의 역사가 2천년 동안이나 전개가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철학자들이 보기에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사상의 체계처럼 보였을 텐데 어떻게 그 사람들에게 또렷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결국 무엇인가 우리시대에는 그런 것들을 결핍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오늘날 도덕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고, 실제로 도덕적인 수준이 현저하게 하락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착한 일을 좀 더 많이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자 이렇게 하는 것은 마치 기업이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 때 회사 로고를 바꾸고 홍보팀들을 돌리고 사회사업도 하고 이렇게 해서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정말 이것이 교회의 쇄신일까요? 주님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원하시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독특한 자기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제가 정확하게 8년 전에 총신 채플시간에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총신 채플에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하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완전히 시장이었습니다. 뒤에서는 일간스포츠 보고 그 다음에 숙제하고, 여기에선 설교하고, 여기에선 떠들고, 여기에선 엎드려 자고. 그날 저는 뒤집어 졌습니다. 저는 그 날 학생들한테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엔 하나님이 없다. 내가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확신하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이 없다. 만약에 하나님이 여기에 오신다면 내가 오시지 말라고 해야겠다. 이런 쓰레기 같은 모임에 어떻게 하나님이 오실 수 있느냐? 티끌만큼도 경외심이 없는 자리인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가서 기독교 지도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무슨 뜻이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의 울림이라고 하는 것은 그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 자신이 의식하는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누가 있습니까? 어두운 방에 나 혼자 있으면 나 혼자 일 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다릅니다. 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너하고 나밖에 없다. 요셉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너와 나밖에 없지만 나에게는 나의 하나님이 계신다. 그것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욕을 먹으면 우리가 왜 이렇게 욕을 먹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여쭤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도덕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이 세상의 기준과 합치하는 도덕의 기준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결과일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기독교의 힘은 결코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거나 높은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이 기독교의 힘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해 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한국 역사를 다 비틀어서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이후에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평판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더럽혀졌습니다. 이런 것은 교회의 영광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이 윤리의 힘은 거룩의 결과로서의 윤리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뚜렷하게 어떤 사상이 있고 그 사상을 따라서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뚜렷한 주관이 있어야 됩니다. 죽을지라도,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누가 와서 물어도, 네가 시기에 왜 이렇게 살아가느냐? 바보같이, 왜 이렇게 어리석게 살아가느냐? 물을 때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가 아니면 말하지 마십시오. 입으로 하지 말고... 그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뚜벅 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불이라도, 칼이 기다리고 있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될 순간이면 장엄하게 피를 토하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모두 나를 따라 오너라 나와 같이 죽자’이것이 복음서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윤리의 힘, 도덕의 힘입니다.
그러면 총신, 여러분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도록 요구받고 있는가? 비교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표적을 따라서 살아가고 살지 못했을 때는 진실하게 참회하고 다시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으면서 어거스틴이 말했던 바와 같이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일어서서 재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끊임없는 용서의 경험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아도 아는 것처럼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앎과 삶이 찢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없는 것입니다. 고백하고 글을 쓰고 설교하고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청산유수입니다. 그것도 일부의 사람들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삶이 그것을 따라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 윤리와 사상을 이어주는 비가시적인 세계에 속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매일 매일 필요한 것입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그래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큰 규모, 많이 모이는 교회, 돈이 넘치는 재정, 이런 것으로 세계를 정복한다고 하는 것은 바벨론의 가치, 예루살렘의 가치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가치는 하나님께로부터 지극히 독특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엇인가 중재하는 것 자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인 확신을 가지고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지사의 충성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삶 자체가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그것은 존재의 위대한 울림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날 너무 타락하고 세상이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진리가 보편화 되던 시대가 있었습니까? 복음이 대중적이던 시대가 있었습니까? 온 세상이 더 이상 빛을 비출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진리의 빛 아래 살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런 시대는 없었습니다.
캄캄한 바다에 풍랑이 일어도 등대 하나만 반짝이면 그 어둠 속에서 수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대피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공부하고 나서 모두 흩어진 뒤에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저 아우라는 어디에서도 못 본 아우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뭔가 자기의 입지적인 세계를 이루고 독특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에게는 아우라가 있습니다. 그 아우라는 항상 남들에 대한 무시와 까칠함을 동반합니다. 때로는 폭력적인 아우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아우라는 그런 야만적인 아우라가 아닙니다. 자기와 다름을 포용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부요한 자로부터 창녀에 이르기까지 그 분의 품에서 쉼을 누렸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고 결국은 그들을 진리의 품으로 데려가는 그런 종류의 아우라입니다. 그래서 저 독특한 아우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 사람이 관계하고 있는 그 하나님과 나도 관계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존재의 울림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