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을 찾는 교사의 심방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오늘은 여러분에게 심방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양 일백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양 아흔 아홉 마리가 돌아왔지만 한 마리는 목자가 찾아가지 않는 한 결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확률적으로 보았을 때 100명 중 하나만 스스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교사나 목회 모두 할 만한데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비율이 훨씬 높습니다. 저는 제대로 된 교사생활을 하기 위해서 심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심방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심방할 것인가는 잘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심방의 방법과 실천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회심을 하고 스물두 살부터 교사를 했습니다. 심방을 많이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 교회는 담당하는 교역자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부장집사님이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어떻게 교사생활을 하라고 지침을 준적도 없었고 교사들은 집사님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애들을 데리러가려고 가본 적은 몇 번 있습니다. 저 자신도 다섯 살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우리 집에 선생님이 심방 온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교역자가 된 다음에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생각하면서 선생님들에게 심방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목회 초년시절부터 선생님들이 구체적으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해가도록 철저하게 지도를 했습니다. 어떻게 심방하는지도 잘 모르다가 장년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교육전도사 시절이었지만 전천후 폭격기처럼 교회 청소부터 시작해서 유치부 빼고 유년 주일학교, 고등부, 청년부, 장년 교구, 구역, 목사님 심방 따라다니는 것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따라다녔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장년 심방을 왜 했냐면 구역예배를 인도하라고 해서 가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장년들을 어떻게 심방하고 말문을 여는지를 목사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내수동 교회에 가서 햇수로 7년, 만으로 6년이 안되게 있었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오늘날 설교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심방의 경험을 책에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성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매력을 느껴야 하고, 두 번째는 감정과 의지 면에서 예수님에게 끌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끌리고, 교회 생활에 끌리고 이렇게 두 가지가 되어야 자발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열린 교회 교인들 중에서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설교에 은혜 받고 계속 독서하고 공부하면서 스스로 주님을 만나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심방 갈 필요가 없습니다. 안 찾아 가는데도 교회를 사랑하고 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 중에 목회자 옆에서 알짱알짱하면서 자기를 계속 다독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성숙한 일꾼의 태도가 아닙니다. 엄마가 애기를 낳아서 젖을 먹이려고 하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여덟 살짜리 아이가 “엄마는 맨날 애기만 예뻐하고 나도 젖 줘.” 하며 무릎을 파고들면서 젖가슴에 얼굴을 비비면 정상적인 아이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지성적으로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깨닫고 감사하고 예배시간마다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기도하면 좋은데 여러분 자신도 그렇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교회를 떠난 적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르는 양떼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약한 사람입니다. 항상 사람들의 신앙에 따라 각각 다른 기준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열린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야단을 쳤지, 전도 집회에서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처음 예수 믿으러 온 사람에게 태도가 그게 뭐냐고 하고,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은 똥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믿음이 많이 들어가고 성숙한 아이들은 거기에 맞게, “기도를 그렇게 안하면 안돼. 너는 이렇게 해야 해. 네가 친구를 돌봐야지.” 이렇게 해줄 수 있지만, 혼자 교회 나오는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전도해 보면 그 사람이 신실한 신자가 되는 것 말고 매주 예배당에 나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가서 전도해보셨습니까? 그렇게 전도해서 일 년이면 몇 명이나 옵니까? 교역자들이 매주 한번 씩 사모님들과 온 평촌을 누비며 전도를 해도 작년에 4명이 전도가 되었고 삼십 명 가까운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해도 문도 열어주지 않는 집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우리가 직접 찾아가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결국 영원히 불신앙의 길로 떨어져 버리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아이들을 돌볼 때 에너지를 배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아이들이라고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이 아이들은 욕구가 왕성해서 기름지고 좋은 음식을 계속 먹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그런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좋은 품질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아이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와 은혜의 세계를 보여줄 때 계속해서 자극을 받는 신앙이 됩니다. 한쪽은 나와서 딴 짓을 하고, 아예 나오지도 않거나 전화를 걸어야 간신히 나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배분해야 할까요?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에너지 배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너지 배분을 잘 해야 합니다. 저는 4 : 6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4’ 정도는 잘 나오는 아이들을 위해 쏟고, ‘6’ 정도는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오거나 잘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로 잘 섬기고, 교회학교를 사랑하고, 은혜생활을 많이 하고, 전도사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자꾸 전도사님을 만나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고 밥도 먹고 싶고 함께 교제하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그것은 교역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리더십에 잘 따르고 은혜를 받고 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리고 더 잘해보려는 교사들을 보면 일체감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딴생각을 하고 교사회의 때 표정을 보면 ‘내가 여기 왜 와 있나? 내 평생소원 이것 뿐 빨리 가는 것.’ 그러면 교역자들도 힘이 들 것입니다.
여러분이 돌보고 있는 학생들도 똑같습니다. 교역자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교역자나 교사나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품격 높은 유머를 20개 정도는 가지고 다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비행기탈 때 가끔 유머집을 삽니다. 한 권 사서 두 개 정도 건지면 괜찮은 것입니다. 씨디와 비슷합니다. 하나 사서 첫 곡하나 들을 만하고 나머지는 괜히 샀다고 하는 것처럼 유머집도 그렇습니다. 웃기기는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고받을 만한 품격이 없거나 야비한 농담이거나 사람들을 깔아뭉개는 농담은 안 되지 않습니까? 가십이라는 것은 고상한 농담을 말하는 것입니다. 웃고 농담을 한 다음에 돌아서면 생각하게 하는 것을 가십이라고 합니다. 유머보다 훨씬 더 깊이가 있는 뼈 있는 농담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인격이 훼손당하지 않고 좋아 보이는 것을 채집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그것이 하나의 의무입니다. 미국에서는 유머가 없는 지도자는 결격 사유 1번입니다. 그래서 교사회의 할 때도 그런 것으로 뚜껑을 여는 것입니다. 두 번 정도 활짝 웃고 나면 피곤이 확 가시면서 정신이 집중됩니다. 누구한테 웃기는 이야기를 들어서 합격이면 핸드폰에 입력을 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는 것입니다. 써먹기 전에 가족들 앞에서 실험을 해보고 합격이 되면 써먹습니다.
심방을 할 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역자가 심방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습니다. 몇 집만 하면 그 다음에 알게 됩니다. 문제는 교역자가 가는 심방은 가정에서 준비를 합니다. 어제도 병원에 심방을 갔는데 집사님이 내 손을 붙잡고 펑펑 웁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여기에 오셨느냐고 오실 줄 몰랐다고 합니다. 자기는 항상 뒤에 앉아서 매주일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목사님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보고 이야기를 할까?’ 했는데 아파서 입원을 하니까 소원성취를 했다고 했습니다. 26년 동안 불교 신자여서 멸치도 안 먹었는데 제가 일대일로 독대를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교회는 성직에 대한 존경심이 있기 때문에 덕분에 가르치는 사람도 상당한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전화를 해보면 신앙이 없는 부모는 다르겠지만 신앙이 있는 부모는 따뜻하게 여러분을 웰컴 할 것입니다. 그렇게 가서 자리를 함께 하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앉자마자 “너 지난주에 왜 교회에 오지 않았냐?” 하면 심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초하러 가는 것입니다. 어떤 교사는 꼼꼼하게 수첩을 놓고 계속 기록을 합니다. 그것은 형사에게 취조를 당하는 것입니다. 기록을 하더라도 차타고 돌아가면서 해야 합니다. 수첩도 꼭 형사 같은 수첩을 펴놓고 깨알같이 기록을 합니다. 인격적인 대화를 하러 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상식이 풍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집에 갔는데 “아빠 집사님은 뭐하세요?” 했는데 파일럿이라고 하면 20~30분 정도는 파일럿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모든 직업을 가진 사람과 30분에서 1시간정도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 신문을 읽고 책을 읽고 누구와 만났을 때는 계속 물으면서 축적을 합니다. 낯선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해 주면 좋아합니다. “제가 들으니까 신앙이 없는 파일럿은 기저귀도 네 번 접지 않는다면서요?” 하면서 현역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비행기를 타세요?” “F16입니다.” “F15비행기 다음 기종이군요.” “F15를 타고 있다.”라고 하면 “정말 놀랍네요. 그것 타고 다니는 조종사들이 베스트라면서요?” 뒤에 K가 붙은 것은 한국에서 조립한 것입니다. 요리사라고 하면 요리사에 대해서, 가정에서 엄마가 관심 있어 하는 일이 베이커리이면 베이커리에 대해서, “요즘 원근법을 이용해서 만든 세공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필요하면 심방가기 전에 “엄마가 뭐하시니?” 하면 나오지 않습니까? 관심 있는 것을 미리 물어 봐서 인터넷에 들어가서 보고 머릿속에 넣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줄 때 마음이 열린다기보다는 저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끌어내서 들어주면 마음이 열리고 경계심이 풀립니다. 풍부한 상식을 준비해서 재미있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너무 모를 때는 계속 물어봐서 그분이 즐겁게 답변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잘 모르는 것을 물어봐서 곤란에 빠뜨리면 안 됩니다.
여자 친구에게 좋은 인상을 받고 환심을 얻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전화로 속사포처럼 떠들 때 그냥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몇 단어만 계속 반복하면 된다고 합니다. “정말? 와~ 대박” 이렇게만 계속하면 이 친구는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들어주는 것 자체가 자기를 푸근하게 받아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눈을 초롱초롱 하면서 “와~ 대박, 정말?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단어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학부모님들과 마음이 잘 통해야 목회가 잘 됩니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 잘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터놓고 나면 전화를 통해서도 잘 되됩니다. 요즘에는 아이가 하나둘밖에 없으니까 자기 아이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듣고 싶어 합니다. 심방 가서 잘난 척하면서 아이의 문제점을 교육학적인 관점에서 ADHD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고 이 집안의 핏줄이 이러냐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아이가 성격이 괄괄하면 활달하다고 하고, 아이가 대답도 하지 않고 있으면 아이가 겸손하게 교육을 받은 것 같다고 긍정적인 이야기로 마음을 열고 충분히 신뢰가 쌓이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자마자 20분 안에 마음을 사야합니다.
특히 나이가 든 사람들일수록 예의와 범절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옷차림새나 대하는 태도, 언어, 말을 툭툭 끊으면 안 됩니다. 잘 듣고 “저는 가르쳐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이 아이에 대해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잘 사는 것입니다. 마침 같은 학교를 나왔으면 “저도 그 학교 나왔는데, 그 학교 옆에 있는 학교 나왔는데, 나도 거기 쳤었는데, 나도 거기 들어갈 뻔 했는데” 등등. 연결에 연결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국어를 좋아하셨어요? 저도 국어를 좋아했는데…….” 이러면서 공감을 사는 것입니다. 선하고 성실하고 따뜻한 교사라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심방을 가서 아이는 제쳐두고 엄마와 사간을 너무 많이 보내면, 아이는 둘이 작당해서 자기에 관한 정보를 조합해서 교회 생활을 압박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항상 대화를 할 때 거기에 모인 사람 중 누구도 소외되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그게 어색하고 힘듭니다. 내성적인 경우는 더 어렵습니다. 그게 사회생활을 할 때 너무 필요합니다. 친구 중에도 보면 밥을 잘 사줘도 만나서 80~90% 자기 이야기를 하면 만나기 싫습니다. 권사님들 사이에 속담이 있습니다. 손주를 봤는데 너무너무 귀여워서 “내가 5000원 줄게. 내 얘기 좀 들어줘.” 하면 만원 줄 테니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정기적인 일반적인 심방이 있고, 아이가 교회에 안 나와서, 혹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슬프고 힘든 일이 있어서, 혹은 병석에 있어서 위로하러 갑니다. 그때그때마다 어떤 것을 물어봐야 할 지 경험에 의해서 정리를 해서 매뉴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마다 적합한 성경 구절이 어떤 것이고, 거기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다는 것을 책을 봐도 좋은데 자기 힘으로 정리를 해서 그대로 써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부족한지 느껴집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이 예화를 드니까 사람들이 감동을 받더라.” 그렇게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1년만 해서 정리하면 훌륭한 자기만의 심방 매뉴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잘한 한 번의 심방은 다섯 번의 공과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물어보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아이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이고 관심사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축구하다가 다쳤다는데 너 축구 좋아하니? 어떤 선수가 제일 좋아? 왜 그 사람이 좋아? 지금 그 사람은 어디에 있어?” 그러면 아이들은 쭉 꿰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몇 년, 등본까지 다 꿰는 것입니다. 그때 축구에 대한 상식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축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니? 나는 아무개 선수가 참 좋더라. 호날두 선수가 좋더라.” 서로 대화를 하면서 아이에게 그런 것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처음에 대화를 시작할 때는 일상적인 것, 세속적이어 보이는 일반적인 관심사로 시작해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반대로 영적인 것은 아주 작게 시작해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많아져서 마지막에는 영적으로 전환해서 심방이 끝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방을 하면서 눈치를 보면 ‘한 시간 쯤 심방해도 되겠구나.’ 전화가 오고 행사가 있고 어려운데도 심방을 잡았으면 ‘삼십분 정도 범위 안에서 십분은 들어주고 십분은 아이에게 이야기하게 하고 십분은 내 이야기를 해야지.’ 마음속에 정리를 하면서 시간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어색하지만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몸에 붙어서 능숙한 기술이 생겨납니다. 장관이나 고위직 공무원이나 목사님이나 이런 분들의 비서직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자매들은 남편에게 만족을 줍니다. 비서는 눈치가 빠르니까 잘 합니다. 그렇게 눈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심방을 시작합니다.
이 경우는 집안에서 받아주고 기다려주는 경우입니다. 집안에서 전혀 받아주지 않거나 불신자이거나 이교도이기 때문에 집에 찾아가서 초인종을 누르는 것조차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환영을 안 해주는 분위기입니다. 그럴 때는 제일 좋은 것은 먼저 전화를 해서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으면 동성 아이들을 시켜서 그 아이를 불러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일부러 전화를 해서 공손하게 자기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학부모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저는 몇 살이고요. 무슨 회사에 다니고 있고, 학교에서는 무엇을 전공했고, 교회는 언제부터 다녔고요.” 하나하나가 신뢰를 주는 것입니다. 형제들 가운데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껌뻑 죽는 것입니다. “저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요.” “너희 담임선생님이 의사선생님이야?” 자신 있는 사회적 배경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하고 있고,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고, 저는 이 아이를 언제부터 돌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신앙생활 잘 하면서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사람으로 잘 자라도록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때 몰상식한 부모가 아니면 좋아합니다. “지금은 나중에 기회 되면 찾아뵈어도 될까요?” 당장 온다는 것이 아니니까 “예” 그럽니다. 그 다음에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려워 보이면 “이번에는 힘들지만 다음에는 제가 꼭 가겠습니다.” 못 간 게 자기 잘못인 것처럼 멘트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예”라고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전화할 때는 “그때 약속드렸던 것처럼”이러면 시간이 잡히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여유가 있으면 갈 때 귀엽게 케잌 낱개로 되어있는 것을 포장해서 가져갑니다. “제가 출출할 때 즐겨 찾는 동네에 있는 베이커리인데요. 이 치즈 케잌이 이 집에서 정말 맛있어요. 나중에 제가 가거든 꼭 드셔보세요.” 하며 조그맣게 메모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좋은 점이 많고, 교회에 와서 친구들과 활달하게 어울리면서 즐겁게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이런 점이 좋고, 이런 점에서 격려가 필요합니다.”라고 쓰는 것입니다. 요즘 그런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오늘도 강사로 갔는데 얼마나 예쁘게 간식 세팅을 잘 했는지 비서실에 사진 좀 찍으라고 했습니다. 요즘에는 인쇄된 것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잘 안보입니다. 작은 일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면 편지지는 항상 있어야 합니다. 문자나 이것으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감동이 편지에 있습니다. 요즘은 바른손이나 수입품 업체에 가보면 너무나 예쁜 게 많습니다. 남자 선생님들은 그런 것들을 자기 수준에서 생각하면 안 되고 눈높이를 내려야 합니다. 앉아서 응대하는 것이 도입된 것이 싱가폴 에어라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이었습니다. 외국 스튜어디스들은 키가 크지 않습니까? 위에서 말하면 위협적인데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면서 “손님. 불편하지 않으세요? 무엇을 드릴까요?”, 저는 “그러지 마세요. 한 번 앉을 때마다 무릎이 얼마나 아프세요.”했는데 “아니에요. 손님.” 생글생글 웃으면서 합니다. 그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것이 기본입니다.
저는 전도사 때도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저는 절대로 편지지를 큰 것을 고르지 않습니다. 편지를 쓸 때는 한 장은 절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두 장 반이고 한 장반 정도입니다. 더 감동적인 것은 작은 엽서에 플러스펜으로 김대중 씨가 옥중서신을 적은 것처럼 깨알 같은 글씨를 적어서 엽서 한 장에 원고지 50매 까지 써 봤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예를 들면 수련회 답사 갔다가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한 시간 반 정도 남았습니다. 찬송 부르고 기도드리고 대합실에 앉아서 책 한 권 읽고 “사랑하는 아무개에게” 진심을 담아서 적어내려 갑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이거라도 받으면 오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아이들이 금방 알아챕니다. 심방가면 만나주지도 않던 아이들이 그 편지 한 장을 받고 나오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도 그런 편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지금도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읽어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까만 글씨가 한 페이지를 꽉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심이 느껴집니다. 그것을 받으면 마음이 확 열려서 옵니다. “교회 잘나와야지?” 그러면 “싫어요!” 하던 애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이들은 외롭습니다. 엄마아빠도 일하러 나가고, 친구들도 그렇고, 컴퓨터에 매달리지만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이 아니니까 외로움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끝나고 나면 더 커다란 공허 같은 것들이 엄습합니다. 그런 것들을 이해하면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워드로 쳐서 뽑아서 보내지 마십시오. 진심이 담기게 써서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감동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맡은 반 아이들이 50명, 100명이라면 못하지만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선생님들이 봤을 때 지원이 필요한 아이들은 그렇게 해서 이끌어줘야 합니다. 가방에 기본적으로 그런 것이 없으면 교사로서의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항상 편지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는 사람을 심방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눈빛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통합니다. 만나주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는 아이들에게 집요하게 연락을 하면 선생님들을 스토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있던 정도 떨어집니다. 문자를 몇 번 해서 안 되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한 번 해서 반응이 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두 번 씁니다. 경험에 의하면 다섯 번 안에 반응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반응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요. 저는 교회는 못갈 것 같습니다.” 이런 애들은 나옵니다. 그 말에는 “밖에서 만나자고 하면 제가 한 번은 만나줄 수 있습니다.” 이런 언어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들 수준에 맞게끔 해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그런 일은 그 애 엄마도 못하고 담임목사도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어떻게 하나? 나는 남자친구에게도 그런 편지를 써 본적이 없는데.’ 그렇게 쓰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 밑에 서는 것입니다. 위에 군림해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면 만남이 잘 됩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심방을 합니다.
저는 심방을 대개 주일날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교수였기 때문에 항상 주일에 심방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심방을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교회라서 교역자들이 고생을 하는데 지금 고생해야 나중에 웃습니다. 저는 일 년에 두 번 심방을 했습니다. 제가 돌보던 아이들이 80명 정도 되었는데 교수생활을 하면서 두 번 했습니다. 한 달이 걸립니다. 한 달 심방할 때 매 주마다 심방계획을 방학 때 짜는 것입니다. 수련회가기 전에 끝나도록 아침부터 밤까지 하는 것입니다. 심방할 테니까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는 아이도 있지만 자기 멋 대로인 아이도 있습니다. 이 아이는 학원에서 만나고, 그 다음에는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만나고, 여기에서 내리면 그 다음 선생님 타고, 이렇게 해서 하루에 많이 하면 15명까지 했습니다. 심방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방을 하면서 엄청난 감동이 밀려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안되면 말지.’ 하고 툭 내려놓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은 “심방 좀 해보셨습니까?” 하면 “가보니까 없대요.”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 목양적 갈망이 있으면 하나님은 꼭 만나게 해주십니다. 너무 놀랍게 만나게 해주시고 기적 같은 일이 심방할 때마다 일어납니다. 한 번은 심방을 하는데 우리가 보통 다니면 나와 남자 총무선생님, 담임선생님 셋이서 다녔습니다. “전도사님 없는데 이제 가지요.” “아니야, 우리 여기서 좀 기다려보자.”,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려요?”, “우리 셋이서 빨리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혼자서 3시간까지도 기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전도사님이 자기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8시에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가면 오려고 일부러 11시에 들어온 것입니다. 피하려고 했는데 11시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이 미안해집니다. “전도사님 많이 기다리셨죠?” “아니야. 한 세 시간.” 그런데 무료하지 않습니다. 찬송하고, 기도도 하고, 책도 좀 보고, 선생님들과 같이 가면 은혜로운 대화도 나누고 하면서 찬송하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꼭 만나게 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주일날인데 교회에 나오지 않고 땡땡이 치고, 도서관에 간다고 했지만 공부도 안하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햄버거 먹고 친구들과 노닥거리다가 교회도 빼먹고 집에 들어와 봐야 식구들이 다 자고 있는 어두운 밤에 기대할 곳도 없습니다. 말없이 한 참 동안 앉아 있습니다. “힘들지?” 고개가 툭 떨어집니다. “그래, 사는 게 다 그렇게 힘든 것이란다. 오늘 무슨 생각했니? 오늘 무슨 일이 있었구나?” 맞장구 쳐주면서 아까 했던 것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담임선생님이 바뀌었다고 하더니 잘해주니? 집에서는 엄마, 학교에서는 선생님, 두 여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니 어떻게 하니?” 일상적인 이야기는 점점 줄어들고 그 다음에 영적인 이야기가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답답하니까.
저는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를 영락교회 권사님에게 들었습니다. 여자 중 2가 남자 중 2보다 더 무서운 것 아시죠? 담임선생님이 믿는 선생님이어서 권사님들과 한 학급이 일대일 자매 결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들이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 입었다고 해도 애들이 봤을 때는 얼마나 웃깁니까? “얘들아 우리 친구하자.” “웬 친구” 그런데 편지의 힘입니다. 권사님들이 매주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집에서 잘 조리해서 깨끗한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이면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두 달이 안 되어서 그 아이들이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엄마에게도 그런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엄마가 한 달에 한 번씩 예쁜 도시락을 만들어 주겠습니까? 나는 그게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쉬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권사님들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권사님이 자기 어렸을 적 이야기도 해주고, 손주 이야기도 해주고, 아들딸들이 자랐는데 그런 것을 겪으면서 훌륭하게 된 이야기도 해주고, 끝 무렵에 “그래서 우리 아들이 의사가 되었단다. 그래서 우리 딸이 교수가 되었다.”라고 하면 아이들이 껌뻑 죽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세대의 교통보다는 세대차이가 나도 사랑이라는 언어는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언어이고 유통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접근할 때 굶주린 아이들은 받아들입니다.
정말 가슴 아프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40년 전에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이 기차선로 아래에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그 사실이 문제가 되어서 조사를 했을 때 “그 오빠들 혼내지 마세요. 저를 그렇게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 봐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그것보다 훨씬 더 외롭습니다. 중 2가 무서운 것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러운데 소통이 안 되면 화약입니다. 언제든 폭발합니다. 그래서 무섭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면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들이 기본적으로 휴대해야 하는 것은 손수건, 좋은 티슈입니다. 자기이야기를 하면서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 이야기도 할 것이 없습니다. 시선을 집중하고 잘 들어주면서 슬픈 이야기하면 미간을 찌푸리고, 기쁜 이야기 하면 같이 웃어주고, 집중해서 이야기하면 “그래서? 그런데? 그래서 그 날 그런 일이 일어 난거야?” 추임새를 주어서 이 아이가 계속 이야기해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무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돌아와도 스스로 답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에게는 자기에게 없는 평안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장황하게 정리해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그래, 오늘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는데 선생님이 3분만 얘기해도 되겠지?” 그러면 싫다고 할 아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 혹은 다른 사람이야기, 아까 정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낙심했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러했는데 극복을 했어. 성경 말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그리고 손잡고 기도하면 아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따뜻하게 기도해주고 보냈습니다. 그 날이 주일이었으니 편지가 금요일쯤 도착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주고받았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자기를 진심으로 염려해주고 기도해준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꼭 와야 해.”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게 걱정하지 마라.” 갈 때 선생님들이 애교스럽게 귤을 사가지고 간다든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꿈틀이라도 넣어가지고 가서 올 때 주고 오는 것입니다. 비싸지 않아도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이라든지 그런 것을 하나씩 주고 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심방을 받지 않으려고 할 때는 억지로 해도 좋은 효과를 내지 않습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 ‘라포’를 형성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라포’라는 것은 영어로 ‘임팩트’입니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저 선생님이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 그런 것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전화를 하기도 하고, 종종 아이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같이 놀아주고 올 때 한마디만 해라.” “선생님이 너 되게 보고 싶어 하더라.” 그렇게 이야기만 해주면 그게 마음을 열어주는 하나의 자극이 됩니다. 어떤 왕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심방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십니다. 심지어는 집에 있으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나와 같이 교사하던 자매는 항상 주일날 바지를 입고 와서 대문을 넘어갑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문고리를 확 잡아당기면 문고리를 붙들고 있던 아이가 딸려 나옵니다. “너 여기 있으면서 전도사님 오셨는데 문도 안 열어 주고. 빨리 나와.” 나와서 이야기하면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굉장히 가난한 달동네 골목 보안등 아래에서, 주일날도 안 나오는 아이가 그러고 있으니 공부를 잘해도 살맛이 안 나는데 학교가면 치이고 집에 가도 치이는 것입니다. 자기는 한 일이 있으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슬슬 끌어냅니다. “전도사님 저는 너무 괴로워요.” “왜?” “뭐도 그렇고, 뭐도 그렇고 정말 괴로워요.” “전도사님은 너만 할 때 맨날 죽는 생각을 했단다. 그 정도 괴로움은 모든 사람이 다 겪는 것이지. 그런데 다른 사람은 희망이 없지만 우리한테는 예수님이 계시잖아.” 그러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한참 이야기 하다가 그 덩치 큰 남자 아이가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옆에서 하얀 손수건을 주고 닦게 합니다. 깨끗한 수건을 갖고 있으면 닦으면 미안합니다. 콧물도 묻고 그러니까. 그런데 그런 부채의식도 교회로 그 아이를 이끄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 아이들은 “선생님, 제가 그냥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빨아서 드릴게요.” 그럼 너무 잘 된 것입니다. “다음 주에 꼭 가지고 와야 해.” 몇 개를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주 깨끗이 다림질해서 모시수건 같은 쓰기가 미안할 만한 것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 보안등 아래서 추운 겨울날인데도 짧은 시간에도 설움과 그런 것들을 다 쏟아내고 우는 것입니다. 다 신앙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고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누구 앞에 설움을 다 토해내고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못하지 않습니까? 사명감이 아주 투철한 사람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젊은이들에게 다른 것 하지 말고 선생님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도 많이 하고 가서 처음에 학교에 들어갈 때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직에 임명 받은 마음으로 “일평생 봉투를 받지 않을 것이고, 가난해도 좋고, 이 아이들과 함께 죽겠습니다.” 이런 각오로 가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여주니까 지금 보니까 촌스럽던데 그때는 너무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덩치 큰 남자아이들도 그 영화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그 아이들과 일체가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청년 수련회에서 교사하라고 했더니 어느 청년이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 교사되고 싶어요. 그런데 성적이 나오지 않아요.” 그럼 과외를 하든지, 어차피 학생을 만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것도 안 되면 속셈학원을 하든지, 소명이 있으면 점수도 주실 것입니다. 끝까지 없으면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심방을 하는 것입니다.
심방을 해본 사람들이 전도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교회를 다녀도 곤고한데 전혀 안 다니는 아이들은 자살하고 하지 않습니까? 허무감을 극복하지 못해서 성적인 타락에 자기를 던져버리기도 합니다. 그게 아이들이 질이 나빠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희망의 끈이 떨어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아무렇게나 굴러가도록 자기를 방임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미우라 아야꼬는 ‘빙점’이라고 보지 않았습니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탱할 수 있는 점이 떨어질 때 인간은 정신적인 끈을 놓으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성매매 업소에 팔려간다고 하는데 자원해서 가는 아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심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들 중에는 연초에 10명 쯤 올려 보냈는데 하나씩 곶감 빼먹듯이 떨어져나가고 새로운 애들은 오지 않아서 나중에는 합쳐지는 반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아이들은 많은데 교사가 모자랍니다. 그것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한반에 두세 명 밖에 없는 반이 여러 개 있어야 합니다. 교사가 애정을 가지고 전도해서 반을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과를 가르치러 왔을 때 애들이 하나도 오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혹은 딱 한명 왔을 때 가슴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은혜가 떨어지지 않았을 때는 ‘내가 열렬히 기도해야지.’ 하는데 자기 반이 그 정도가 될 때는 대부분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둬야지.’ 그런 마음이 먼저 듭니다. 그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심방을 하면 영혼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애들이 떨어져나가도 심방을 하지 않으면서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계속 안 나오는데 재적에서 지울까요?” 그것은 양심에서 지우고 싶은 것입니다. 심방을 하면 그런 것이 극복이 됩니다. 어렵다고 하지 마십시오. 생활이 막다른 곳에 가면 외판원이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무장갑이나 비누 몇 개를 들고 아파트에 돌아다니면서 “아주머니 좋은 비누 싸게 파는데 하나 사주겠어요?”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 있어서, 영혼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집에 갔는데 박대를 당하고, 애들도 만나주지 않을 때 여러분은 주님의 이름을 대신해서 그곳에 간 것입니다. 못 만난 아이를 위해서 돌아와 기도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교사 리바이벌』에도 썼는데 어느 목사님이 교인 심방을 갔는데 없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돌아옵니다. 어디 갔냐고 물어보니까 며칠 여행 간다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갈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가방을 내려놓고 기둥을 잡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2층에서 불신자가 내려다봅니다. 나중에 주인이 집에 돌아오니까 위층에 사는 불신자가 그에게 하는 말이 “당신, 빨리 교회에 가라. 그런 목사님이 없더라. 당신들이 여행을 갔다고 하는데도 기둥을 붙들고 20분 이상 간절히 기도하고 가더라. 노인네가 가방을 들고 허리가 구부정해서 가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나는 불신자이지만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주는 목사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불신자가 권면해서 다시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지금이 심방할 시절입니다. 연초에도 심방하지만 봄이 오면서 아이들은 감정의 기복이 생기고 다운이 됩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4월, 5월 목회입니다. 4월, 5월에 심방해서 아이들을 잘 이끌어 내고 5월에 안 나왔던 아이들에게 편지를 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일곱 번까지는 편지를 쓰리라.’ 하고 쓰면 반드시 마음이 움직입니다. 4월에 심방을 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잘 추스르고 6월에 은혜를 받으면 수련회에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면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제가 이야기 해준 것들을 실제적이고 머리에 남는 내용이니까 잘 적어서 그대로 한 번 해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금년이 가기 전에 심방이 얼마나 기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심방할 때 교사로서 얼마나 보람된지를 깨닫게 되고,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심방을 하기 전에는 답답하고 근심도 많았는데 심방을 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면 다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 사역이 할 만한 사역이구나.’ 하는 자부심과 사랑이 밀려옵니다. 여러분이 그런 교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