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하나님의 목소리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눅 20:14-15)
I.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한 방법 - 설교자의 권위를 의심함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진리를 가르치는데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주신이가 누구인지 말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독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그대들에게 한 질문을 할 텐데 대답을 해보아라. 만약에 대답을 하면 나도 대답을 주리라.”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성전에서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놀라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마지막 선지자인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냐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냐”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냐 보통 사람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라고 대답을 한다면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전하신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니 만약에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라라고 하면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내가 전하려고 왔는데 너희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대답할 것이고, 만약에 “세례 요한은 선지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알고 있기에 세례 요한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면 백성들이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을 돌로 칠 것 같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대화가 오고간 후에 예수님이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Ⅱ.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본 설교자
한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딸 때가 되어서 주위에 울타리를 둘러 안전하게 해주고, 일꾼들이 살 집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시설과 망대까지 만들어 놓고 오갈 데 없는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이 농부들은 놀라운 감격 속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큰 혜택을 입은 농부들이 거기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포도원을 빌려 쓰고 있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약속한 시점이 왔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종을 보내어 포도원의 소출 중 얼마를 소작으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농부들이 주인의 전갈을 가지고 왔던 종을 심하게 때려서 거저 보냈습니다. 다시 두 번째 다른 종을 보냈더니 심히 때리고 능욕해서 빈손으로 돌려보냈고 세 번째 종을 보내니 피투성이가 되도록 상하게 하고 결국은 빈손으로 내어 쫓아버렸습니다. 주인은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면 아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소작료를 바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아들이 오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이 바로 우리의 포도원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아들이니 죽여버리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하여 살인을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이고 백성들을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어떻게 당신의 말씀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선명한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도 없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리 잡고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유리방황하던 포로와 같던 백성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서 이민족을 타파하고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신 것을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준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이유는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백성의 독특한 삶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셨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진리의 빛을 열방 가운데 드러내어 그들도 하나님께 돌아오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신약시대로 넘어오면 신자가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삶의 방식과 의무에 대한 성찰로 이끌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거저 주어 누리게 하셨던 것처럼 또한 이 세상에서 악마의 노예가 되어 죄와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가던 우리들을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능력과 힘으로 건져내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모든 복락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 자신에게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진리의 빛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 진리의 빛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행복을 우리에게 주셨고, 진리를 함께 알고 사랑하는 교회의 한 지체가 되도록 우리를 접붙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공로가 없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해지는 삼위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살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일평생 불의를 행하다가 멸망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눈 뜨게 하셔서 진리가 무엇인지, 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영혼도 참 사랑도 몰라서 시간 가운데 태어나 살다가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죽어갈 비참한 인생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향해 살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진리의 빛 안에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혜택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모든 영적인 혜택들은 결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포도원 농부들이 포도원을 거저 선물로 받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도록 허락해준 주인의 호의를 입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농부들은 커다란 호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은혜를 모르고 심지어 주인이 보낸 당신의 아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보내었던 착한 종들을 핍박해서 피 흘리게 만들었고 죽도록 때렸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처음 주인이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때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알았지만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사라지고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욕망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하게 되자, 거기에서 소작을 붙여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땅에 주인 행세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비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기독교는 진리와 관련된 종교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후, 특히 죄를 짓고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떠나간 후에 인간의 불행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때에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과 모든 고통이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만, 먹고 입고 마실 것이 충분한 때도 인간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행이 지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학문의 발전과 많은 교육을 통해 인간들에게 지식을 넣어주고, 발달한 지식을 가지고 문명은 구가하며 살지라도 그 지식 때문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쉬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맴돌았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인간은 누구이고, 나는 어떤 사람이며, 우리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잠시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그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참으로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일까?”에 대한 깊은 고민들이 인류 역사에서 사람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떠나고 영혼의 어둠이 찾아와서 진리를 향한 지성의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은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없었고, 스스로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설령, 어떤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죄로 말미암아 그들의 지성과 영혼이 너무나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그 세찬 진리의 빗줄기를 인간의 타락한 지성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이래저래 자신의 갈 바를 모르고 먹고 마시고 방황하며 살게 되었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원수 맺은 가운데 이 세상에서 진노와 불신앙의 자식들로 살다가 멸망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뛰어난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알 수 있는 길을 남겨두셨습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이후에 한 가족을 선택하시고 또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급기야는 나라를 선택하셔서 이루게 하셨으니 이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지식을 성경을 통해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지식을 친히 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몸소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들을 위해 진리를 쉽게 해석하시고 자신의 온 삶으로 진리대로 사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참 진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진리를 알 수 없고, 알아도 돌아올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 그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참 진리의 빛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비추는 빛, 곧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진리의 길로 돌아올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신적인 기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교회에서 진리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진리와는 상관이 없이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몇 해 전에 강남에 다니는 많은 교인들을 대상으로 앙케이드를 하였다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교인 가운데 90%가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교회에 출석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교회에 와서 무슨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저의 경험에 의하면 차라리 교회 와서 얻는 마음의 위로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즐거운 낙을 누리는 것이 아마 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 위로 있다면 그것은 참 진리에 의한 위로일 것이요 진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말미암는 위안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위안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질병 상태에서 죽어가는 환자에게 놓아준 진통제 하나 정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비극은 진리와 상관없는 교회생활에 있습니다. 진리를 등진 교회생활은 결국은 하나님과 맞서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죽어간 허무한 철학자들은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진리를 찾아보려다가 모두 시궁창에 빠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주셔서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들을 믿음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능력으로는 추론해 갈 수 없는 것들을 성령의 찬란한 빛으로 우리에게 개명하여 그 진리의 빛을 보도록 우리의 지성을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진리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알게 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들을 이성으로 조직화하며 한편으로는 믿고 한편으로는 깨달으며 성경을 붙들고 이 모든 질문에 답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모든 종교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 한없이 긍지를 느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특별히 이단과 이성주의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고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앙인이 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고 그 진리를 알고자하는 자들이 지금 저의 말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자기 몸에 배인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습관에 의해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교회 생활 속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여러분 교회가 몸담고 있는 교단의 신학교는 들어가기 위해서 삼수, 사수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합니다. 고시 공부도 아닌데 왜 그럴까요? 교회 역사를 보면 참 놀랍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강력한 설교자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설교되고 진리의 높은 표준이 제시될 때는 신학교에 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타락하고 강단에서 진리가 선포되지 않고 교회 생활이 동호회 모임쯤 되면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진리를 전하는 표준이 너무 높고 뛰어나기 때문에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저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으랴?’ 하고 감히 소명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단에서 하는 설교가 진리를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 오가는 이야기들이나 주고받는 수준이 될 경우에는 직업의 한 방편으로서 신학교에 가서 제도를 따라 목사가 되고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엊그제도 신학교에 가서 “그대들 중의 절반은 소명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는 중생했는지 의심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신학교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제대로 된 종들이 나와야지만 여러분 후손들이 진리의 맛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A.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
하나님이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누구든지 강단에 올라와서 한 시간 떠든다고 해서 설교자가 아닌 것입니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종들이 그러했던 것들처럼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진리의 세계를 안 사람이어야 합니다. 전문적으로 진리를 알기 위해서 탐구하고 하나님과의 심오한 교통 속에 끊임없이 살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자기의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주님의 심정과 그 음성을 듣고 그것을 충실한 하나님의 종의 심정으로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성도의 편일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의 편일 수도 없고 오직 진리의 편이니 굳이 편을 따진다면 하나님편이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진리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대해 눈 뜨고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그 시대를 향한 말씀을 주신 이들이 있었습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라고 외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눈물로, 혹은 분노로 호소하였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목사는 그 선지자들의 후예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도 마음 깊은 고통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대의 많은 교회들 속에 진리를 전하는 것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지 않는 설교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과 세상이 가져다준 지식과 시대사상으로 진리의 말씀을 대신합니다. 일리는 있지만 진리는 없는 강설(講說)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깨닫도록 지식의 빛을 주지 못하는 설교자들이 많고, 그런 교회에서 성도들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이 기독교 신앙의 미로에서 방황을 하는 모습이 오늘도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삼으셔서 여러분처럼 교회에 모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에 의하여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아버지 앞에 변화되어서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는 마치 포도원을 거저 공급받은 농부들처럼 감격했습니다. 주님을 몰라서 이 세상에서 무지와 죄 가운데 방황하다가 진리의 밝은 빛을 보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정말로 감격하고 말할 수 없이 기쁜 마음으로 신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가르고 비쳐오는 찬란한 진리의 빛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 큰 사랑을 상실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감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나가 맛이 없다며 불평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죄 때문이었습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불신자 안에 역사하고 있는 끔찍한 죄와 동질의 것이고, 죄의 목적은 신자 안에 있든 불신자 안에 있든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 죄가 사람들 마음 안에서 자라게 되자 마음을 심히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신자의 영혼 안에 들어온 죄의 특징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혼과 마음의 질서들을 뒤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지성을 현혹시키고 마음에 더러운 타락을 부추겨서 하나님이 자기 안에 세운 질서도 못 보게 만들고 자기 밖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도 어기고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기능이 바로 죄가 하는 혼란스러운 역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로부터 멀어진 가운데 자신의 육신만을 사랑하며 이기적인 욕망에 빠져 이렇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가 자신에게 너무 당연한 것처럼 뻐기고 감사할 줄 모르고 은혜에 담긴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이 살아갑니다. 내버려두면 분명히 그들이 받은 구원은 부끄럽게 될 것이고, 그들이 한때는 거듭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았어도 이후에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삶이 될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방책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설교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수시로 떠나는 진리를 생각나게 만들고 자신의 지성의 빛으로는 언제나 자기 사랑에 감염되어서 객관적으로 자기를 올바로 볼 수 없는 인간들에게 참다운 진리의 빛을 비춰 그들로 하여금 진실이 무엇이고 진리를 떠난 그들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더러움에 오염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이 세상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광은 유명한 지위나 학위, 그의 저명한 학술과 지식 이 모든 것들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왔다고 하는 숨길 수 없는 영혼과 지성의 특징, 그의 모든 인격과 그들의 영혼 속에 아로새겨진 진리에 대한 깊은 인상과 진리대로 자신이 살뿐 아니라 모든 회중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야 되겠다고 하는 비장의 결단과 하나님의 기운이 스쳐지나간 비상한 하늘의 힘, 이것이 바로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특징지어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진리의 성경을 놓고 밥그릇이나 들고 이 세상에 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와 함께 살고 진리와 함께 고뇌하고 진리에 부합하기 위해서 자신이 고민하고 그 진리에 합치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성도들에게 세워질 기회를 얻으면 자신이 고뇌하고 만났던 진리의 찬란한 빛을 쏟아놓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설교자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시대의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교회당이나 많은 헌금이나 선교나 열정,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이런 설교자들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많이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악한 죄인들이 그 설교를 들으며 가슴을 찢고 회개하고, 죽어도 회개하지 않을 죄인들은 마음에 악한 칼을 드러내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교회에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하나님의 얼굴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며, 교회의 십자가는 꺾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사상과 이상의 승리의 깃발만이 교회에 나부껴서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참다운 영광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이 장난인 줄 알고 있는 이 세대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기독교인들에게 저는 감히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경고합니다. 진리에 상관없이 사는 그대들의 삶이 이후에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보라고 말입니다. 진리에 대한 싫증난 감정들이 예배 속에서 아주 분명하고 현격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설교를 하찮게 여기는 풍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설교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나는 설교자이지만 정직하게 말합니다. 모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설교가 사람의 사상을 설교하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은 순종할 필요도 없고 순종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자가 자기 자랑이나 하고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세상적인 처세술이나 가르쳐주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이 거기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진리와 연속성을 가지고 진리를 사람의 언어로, 그 시대의 말로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한 그것은 진리입니다. 다만 성경은 원천적인 진리이고 설교자의 설교는 파생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똑같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기에 복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신 나가고 얼빠진 교인들이 자기가 듣기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하여 이 교회 저 교회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자기가 적응할 곳을 찾습니다.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깨뜨려져서 피를 흘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죽은 심령을 가지고 어디에 가서 적응하면 거기가 죄악의 구렁텅이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불행하게도 외치는 설교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신앙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과 함께 교회를 기웃거리며 거기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기웃거리며 살아갑니다. 그런 여러분의 마음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선 마음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의 발을 씻겨주시며 여러분의 인생, 가는 길을 훼방 놓지 않고 도와주는 것 아닙니까? ‘꿈은 내가 꿀 테니 주님은 도와주기나 하십시오.’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의 몫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훨훨 날아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 지옥에서 만나시기 바랍니다.
B. 설교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
1. 설교자의 고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나니”라고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농부들을 자기 포도원에 들인 이 주인이 소작료를 받기 위해서 자기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종은 오랫동안 주인 곁에서 충성을 다하고 주인을 위해서 온갖 헌신을 다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전갈을 들려서 보냈더니 실컷 두들겨 맞고 피멍이 들어 왔습니다. 주인이 진짜 이 종을 사랑했다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때려서 피멍이 들 뿐 아니라 온갖 욕설을 퍼부어 모욕을 하고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무사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 종을 보냈더니 이번에는 실컷 두들겨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보냈습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종은 선지자요 선지자인데 도대체 이 종들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의 집에서 일평생 주인을 사랑하고 봉사했는데 마지막에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주인은 다른 종을 보내고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오니까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종을 보냅니다. 도무지 답이 안 나옵니다. 어느 순간에 그 종들을 보아서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포도원은 구원의 은혜요 교회의 축복이고, 농부는 예수 믿은 여러분이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죽은 아들은 예수님이시라는 사실도 말입니다. 죽어간 종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어떻게 되었습니까?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구약에만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있는 사도들과 많은 주의 종들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기쁜 소식으로 증거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혀 오게 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주신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수많은 말씀의 종들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급기야는 피 흘리며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당신의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능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능과 탄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목회자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그렇게 애매한 말이 없습니다. 무엇이 목회입니까? 목회라고 하는 기능은 많은 일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하고 성도들은 그 진리를 깨닫고 함께 고민하며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목회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의 기능이 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진리는 그 모든 것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 원천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는 바로 그것을 예배 시간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해줌으로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생명이 흐르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고 설교자가 보냄을 받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바쁘게 돌아치고 움직이면서 예배는 죽은 자와 같이 드리고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감화가 없이 태만한 예배생활이 이어집니다. 그런 사람이 전도를 한다고 하는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도(道)를 전하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도를 전하고 싶을까요? 자기도 싫어하는 그 도를, 도가 울려 퍼질 때 졸고 자고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드리는 인간이 과연 도를 전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선교를 한다고 하는데 ‘선(宣)’하는 ‘교(敎)’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을 ‘교(敎)’하는 것이 선교이고 그 진리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 내가 기뻐하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하고 이 세상에 있는 만방에 전파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자기가 예배 중에 기뻐할 줄 모르는 그 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한다면 도대체 그 선교의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천사도 자다가 웃을 일 아닙니까? 자기는 그 진리를 기뻐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를 전하고 싶어 한다. 진리를 받아서 그들이 참 진리를 알고 기뻐하게 될 때 과연 그가 그들과 함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진리를 즐거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피부색이 다른 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는 여기서는 못하는 그 일을 거기에서는 할 수 있다는 간증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앙적인 기만이고 종교적인 사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설교자를 교회에 보내신 이유는 성경을 여러분에게 주신 이유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도록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을 가르치고 돌보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사명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본질적이지 않은 사명으로부터 그는 멀리 떨어져야 합니다. 본질적인 사명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거기에 깊이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진리를 깨닫는 일에 마음에 얽매임 없이 헌신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해야 하고, 설교자는 그렇게 깨달은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죄지을 가능성도 없이 무흠하게 이 일을 수행했지만 설교자는 유흠한 인간이고 한때는 여러분의 형제였습니다. 똑같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시름에 잠기고 때로는 정욕에 시달리는 똑같이 연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불림 받은 매우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그 일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설교의 도구이고 말씀을 전해주시는 방편임에는 틀림없지만 설교자는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만 하였지만 설교자는 의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설교자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사상이 농축된 것이 바로 설교자를 위한 성도의 애끓는 기도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 중의 상당수는 목회자를 위해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오늘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설교자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그런 중 어떤 사람은 오늘도 설교에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보기에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잔재주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진리를 진리답게 선포하고 자신의 변화와 성도들의 참된 변화를 통해 교회가 참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도록 헌신한 사람이 설교자요 목회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성도들이 사소한 일로 자기 교회 목회자와 부딪히고 심지어는 마음속에 깊은 원망을 품고 미워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도전하는 것은 마치 물을 길어먹을 수 있는 샘에 오줌을 누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 여러분의 이 교회에서의 생활과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각각 생각은 틀리고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조금씩 달라도 우리에게는 일치를 이룰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빛이 선명하게 목회자를 통해 예배 속에, 설교 속에 비추게 될 때에 그 설교 앞에, 말씀 앞에 목회자도 깨뜨려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성도들도 깨뜨려져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가끔 불순종의 길을 걷는 죄인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의 빛 안으로 들어오게 될 때 교회는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진리로 말미암는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목회자에게 도전하고 목회자와 마음이 상하고 서로 깨뜨려진 목양의 관계를 가지고 살 정도로 그렇게 중요하고 엄청난 일이 교회 안에 있는지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듣지 않는 자신의 방종하고 배교에 가까운 예배의 태도를 합리화시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그런 사람이 있어서 제가 여러분을 책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인격에서 나오는 설교를 내가 어떻게 듣겠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매이지 않습니다. 진리 앞에 무릎을 꿇어본 사람들은 진리의 힘을 알고 진리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 사랑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Ⅲ.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요즘 들어 여러분의 예배생활은 매우 잘못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중요한 의무는 진리가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진리에 대한 궁금증,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고자 하는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에 몸을 담고 사는 동안 목회자가 이 두 가지 일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며 살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진정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여러분은 나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설교자가 매주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단에 오를 때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돈을 달라고 합니까? 예쁜 옷을 사 달라고 합니까? 경치 좋은 곳에 관광을 시켜달라고 합니까? 설교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은 여러분이 진리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에게 박수치지 않아도 하나님께 열광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은혜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잠시 전에 들은 설교가 누가 한 설교인지 잊어버려도 설교자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자신을 돌아보고 이후 남은 생애에 여러분의 교회생활이 진리가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하고 권사 하는 재미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참 맛을 느끼는 것이 교회 생활의 중심이 되어서 날마다 진리의 빛 앞에서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난을 받을 때는 위로를 받고 진리를 거스를 때는 그 빛에 책망을 받으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가운데 여러분은 많이 미끄러지지 않고 하늘가는 밝은 길을 따라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