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를 위하여Ⅱ
(1995-199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199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목숨을 버리는 목양(요10:17-18) 1996.4.10 수요예배 1
2.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삼상1:28) 1995.10.11 수요예배 13
3. 증거하러 온 사람(요1:6-7) 1995.10.15 주일예배 17
4. 기도와 말씀에 바쳐진 사람(행6:4-5) 1995.10.18 수요예배 22
5.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1:16) 1995.4.26 수요예배 25
6. 회막으로 나아오라(출33:6-7) 1995.2.26 주일예배 32
7. 기도의 능력(수10:12-14) 1995.4.2 주일예배 38
1. 목숨을 버리는 목양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설교자를 위하여 II (1996.4.10 수요예배 1)
양과 목자의 관계에 대해서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진리들을 보여 주고 있는지를 구경하기 위해서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특별히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대가를 내 놓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면 우리의 삶으로서 하나님께 반응 하는 모습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방법 세 가지를 말하라면, 증거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멘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말씀하시는 것을 자신도 체험 하려고 해야 하고 세 번째는 전심으로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 하려고 하는 의지적인 행동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 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친히 말씀 하시고 역사 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당신이 만약 기도 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설교자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배 시간 가운데 함께 임해 주지 않는다면 설교자와 모든 듣는 자들이 한꺼번에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10장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자 하는 본문은 17절과 18절입니다. 17절에서 의미 있는 말을 한 말씀 하십니다. 그 앞 절에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말씀 한 다음에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은 여러 번 하셨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기 전에 벌써 그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목자가 되신다고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의 근원은 인간들이 불순종함으로 참 영혼의 목자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데 모든 인생의 불행과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불순종으로 인해 떠날 때에는 그것이 자유인지 알고 행복인지 알지만 양식이 떨어지고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쥐엄 열매를 찾고자 하지만 그것마저도 허락 되지 않아서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생각 하게 된 탕자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향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즐거움은 잠시이고 그 다음 에 찾아오는 깊은 곤고와 영혼의 곤고다. 하나님의 밖은 평화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목숨을 노리는 악한 세력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출 하려고 하는 자녀들에게 꼭 이런 이야기들을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해라,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 나가버리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가지만 집보다 더 어려운 위기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노리는 것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세상의 모든 불행은 목자 되신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밖에 있는 양떼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 시는 것입니다. 목자의 마음이 부어진 교회의 마음속에는 항상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간절한 갈망이 교회 속에 가득 한 것입니다. 목양을 한다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양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깊은 관심을 함께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므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세상에 버림 받고 고통 하는 양떼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이 직분은 영혼 하나가 돌아오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즐거워하고 영혼 하나가 실족하면 낙심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여러 곳에서 목숨을 버린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양떼들을 다스릴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면서 그 모든 능력으로 풍성한 삶을 주시면 될 것인데 왜 그렇게 목숨을 버린다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것은 양 무리의 목자가 되어서 목양을 한다는 것, 자신의 양을 치는 목자가 되는 것은 생명을 거는 사명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는다, 목숨을 버린다" 이런 말이 반복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취 된 것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성취 된 것을 1차적으로 의미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혼들에 모든 목자가 되어 주시고 길을 잃어버리고 유리하는 양떼에게 진정한 목자가 되어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나타 난 것입니다. "목자를 치리니 그리하면 양떼가 흩어지리라" 말씀 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또 다시 양떼들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 모으는 또 다른 방법이란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한 번의 죄 사함이나 한번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린 희생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용서하신 미래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그 피로 구속 받은 우리의 삶을 목자로서 다스리고 통치하고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목양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갖게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마다 보혈의 공로와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 감사의 표현은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찬송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양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우리에게 응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 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목양의 관계에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리의 소굴에서 양인 우리를 빼앗아 오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면서 죄 가운데서 죽어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은 죄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에 팔린바 되었고 진노의 자녀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악한 세력들의 수하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거칠게 반역하고 악한 자들에게 고분고분 하면서 살던 그런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먼저 십자가에서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인생을 누리기 전에 먼저 신분에 변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악한 세력의 나라에서 사로 잡혀 살던 우리를 구속 해 준 일이 먼저 일어났어야 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 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구속을 주신 대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신 사건은 양들을 치기 위해서 달려온 악한 세력들의 도전을 그리스도께서 온몸으로 막아서시고 우리들을 도망가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에게 계속 목숨을 버린다는 말로 계속 우리에게 성경은 도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셨을 때에도 목숨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며 생명을 건 충성으로 당신의 양떼들을 돌보아 오셨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오셔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치유하고 고통과 가난 속에 신음 하는 자들을 건져 내어서 하나님 안에서 자유 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의 사역의 정신에 있어서는 생명을 내 건 사역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는데도 그 모두를 버리고 스스로 생명을 내려놓는다고 말씀 하실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살아 오셨겠는가? 의로우신 그분이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자 했겠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던 그분이 하나님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소외 되면서까지 양떼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택한 것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무엇이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겠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생각 하는 가치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모습을 입고 왔지만 내 인생의 가치는 내 생명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양떼들을 치고 이 양떼들을 풍성한 삶과 생명으로 만들어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하는 그리스도께서 믿으셨던 그 가치 때문에 그런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목양에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인생에 살아가는 가치관에 있어서 대 변혁을 경험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삯꾼은 가치의 문제가 정리 되지 않을 때 거기서 삯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수업시간에 무협지만 읽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젓가락으로 드럼 치는 연습만 하던 그런 친구였는데 어느 날 조선일보에 대문짝 만 하게 그 친구가 소개 되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괴짜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한지 23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면서 아리랑을 찾아 헤맸습니다. 모든 아리랑 연구에 있어 권위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리랑은 수백 가지라는 것입니다. 20연년 동안 다니면서 찾은 것들을 녹취를 하면서 아리랑 학을 세웠다고 합니다. 강원도 정선 동안 20억을 들여서 아리랑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왜 그랬다고 생각 하나? 무엇 때문에 월급도 안주고 상도 안주는 그런 일에 삼천리 방방곡곡을 아리랑을 찾아 헤맸다고 생각 하는가? 그 에게 아리랑은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 했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의 모든 삶은 그 쪽 방향으로 재편 된 것입니다.
내가 우체국 다닐 때 우표 수집을 좋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방을 두개 쓰고 살았는데 아이들 방을 전세로 내어 주고 방 한 칸에 아이들과 4식구가 사용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냐고 했더니 방 한 칸에 "일제 금고를 하나 구입해서 우표를 보관 하려고" 아이들과 방을 합류 했다는 것입니다. 국산 금고에 보관 하니 10여년의 세월이 흐리니 습기가 스며들어 우표가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정말 할일 없고 웃기는 이야기 꺼리다. 아이들은 안보고 살아도 하루에 금고 한번을 열어 안부 인사를 해야 사는 사람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가치 때문입니다.
목양이라는 것은 가치관에 대 변혁을 경험 한 사람들이 목양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모든 삯꾼은 그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가치관에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것조차도 양떼의 생명을 주는 것 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가치관의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에서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마찬 가지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힘들이지 않고, 죽음의 정신이 없이 목양을 하는 사람들은 그 현장에서 승리가 없습니다. 교회 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아르바이트 하듯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영혼의 축복이 없습니다. 목양의 현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현장은 생명을 내어놓은 목자, 생명을 내어 놓고라도 지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있는 그런 목자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초월해서 당신의 구원의 능력을 보이시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 회복시키시고 교회를 맡기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내 양을 먹여라"이었습니다. 그런 분부가 있었기에 모든 사도들과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 교회 사이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으뜸가는 지도자가 된 것을 모든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한이 베드로 보다 낫습니다. 오십보백보지만. 그는 막판에 도망갔다 왔다. 그 사람은 제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물과 피를 다 쏟아 지는 것을 다 보고 십자가의 주님과 대화 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요한이 좀 더 나은 것 같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시고 베드로에게 "양떼를 먹이라" 이 말씀을 하심으로 그가 회복 되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의 위치를 공교히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어 본 것은 "교회와 함께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느냐? 교회를 위해서 충성 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물어 보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시고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목양이라는 것은 양떼를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서 목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붙잡혀서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양떼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교회 나와서 목회자들에게 붙잡힌 사람이 되어서 무엇에 쓰겠는가? 하나님께 붙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넣어서 어찌해보겠다는 소인배 적인 발상을 버려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나를 어떻게 생각 하든지. 나의 지도를 받으면서 참된 지식과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혜로 말미암아서 어디서든 하나님을 아름답게 섬기면서 살아가고 그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목자라는 것은 내일이라도 "그만 두고 천국으로 올라와라" 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 할 사람이고 다른 교회로 가라고 하시면 말없이 언제든 떠나서 그곳에서 또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면 살아야 하는 것이 목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이상이 애착이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이 돼야 합니다. "네가 양떼를 사랑하느냐?" 쉽게 이야기하자면 양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그곳에서 비롯된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목양의 기초가 되는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교사를 하건 전도사를 하건 목사를 하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목장에 대한 사랑이 식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의 대한 사랑과 목양에 대한 사랑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목양에 대한 직분을 감당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준 대답과 질문을 통해서 영혼을 돌보는 사역이야 말로 그리스도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동기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양의 현장 돌보는 양떼들은 수시로 자신을 비춰 보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 영혼들이나 구역이 어떤 모양이 되어 있는지 한번 돌아보라. 그곳에서 보여 진 모습들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마음이 떠나가고 불현듯 내가 왜 이렇게 대가도 없는 희생을 감수 하면서 남다른 교회 생활을 계속 해야 하는가? 하는 속삭임이 밀려오기 시작 할 때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금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때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주님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마음으로 양떼를 돌보고 고난을 받으며 살아 갈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실이 하나님의 무한한 특권아래 있음을 찬송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사를 맡겨놓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있어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혹은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영혼은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섬기든지, 일주일에 몇 번을 섬기는 것과는 상관없이 온 마음으로 영혼을 섬기지 않는 것은 진정한 섬기지 않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겨준 양떼들을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돌보려고 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칭찬이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나 형제 잠매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나를 붙잡고 계신 그 주님이 내게 목양을 하라고 원하시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분부를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거스르게 할 수 없는 불가 학력적인 하나님의 부르심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과 인격을 지배 하고 양떼들을 바르게 이끄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에 있어 충성되게 돌보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내가 깊이 영혼을 섬기면서 깨닫게 된 사실 하나는 자신의 개인의 문제와 영혼을 섬기는 일이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섬기기를 소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생명을 다 했냐고? 주일 학교 교사들에게도 구역장들에게도. 생명을 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으로 목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섬김을 통해서 자신을 놀랍게 변화 시킵니다. 말씀을 한없이 많이 듣고 신학을 했다 할지라도. 교회에서 어떤 봉사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신앙의 성장이 절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주시는 그 은혜 속에는 우리에게 섬김을 위한 계획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려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영혼들을 돌보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고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 때 그것은 정말 힘든 삶입니다. 대충 하는 것은 쉽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한곳에 두고 그 가치 실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외롭고 한없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변화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결정적인 변화를 체험 했습니다. 그때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들어 주신 것, 결단하면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 그 모든 것들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모두 영혼을 섬기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백 명이나 수천 명을 모아 놓고 목양을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한 명을 놓고 그 영혼을 위해기도 하는 사람도 마찬 가지입니다. 주님 사랑이 있을 때는 자신이 영적으로 영혼들이 느끼는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반응 할 수 있는 감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떨어지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넘치면 주일이 늘 기다려지고 주님의 사람이 식으면 토요일이 두려워집니다. 직분 맡은 자들에게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도 술 먹고 담배도 피웠습니다. 전도사가 없으므로 설교 하러 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미줄 같은 신앙이 "내가 비록 술집에서 술을 마셨을 지라도 성경 찬송 들고 설교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나를 깨트리신 것입니다. 그런 죄악과 속박이 무겁다고 집어던지고 도망 나왔으면 오래 도록 변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집이 강하고 참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양의 일은 생명을 내어 놓고자 할 때 그기에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 내어 놓고 하면 폭발적인 부흥은 못 볼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낙망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열매를 주시고 무엇보다 자신을 하나님이 변화 시켜 가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수업시간에 막 대드는 학생입니다. 똑똑한 아이들이 대드는 것은 예의는 없지만 논리가 있습니다. 무식하고 교양 없는 아이들은 그냥 대듭니다. 당시에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 묘해서 남북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세상을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부흥회를 했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부흥회를 한다고 막 대드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갈라디아서를 읽어 내려가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1장에서 화가 났는데 4장으로 넘어가니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거기서 내가 마음이 녹아 진 것입니다. 다음에 가서 다 용서 했었습니다. 몇 년 뒤에 만났는데 완전 딴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목회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많이 보내셔서 그곳에서 완전히 죽어지게 하면서 변화 시켰다고 합니다.
교사생활도 가치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부르셨고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는 마음을 가지고 부르신 은혜대로 심령에 귀한 것을 하나님께 짜 바치면서 충성을 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교회 나와서 "내 영혼이 주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추구 하지 않으면서 "내 영혼 주 뵙기 원합니다." 입으로만 한다면 “난 하나님 보기 원하지 않아.” 속사람이 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사람의 부르짖음과 겉 사람의 입 발린 말을 분별 하신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불꽃과 같은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면했던 위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세상에 불꽃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목숨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신 것은 목양의 일이 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파트타임으로 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에 다니는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어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손님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2-3년 후에 떠날 지라도 그때 떠날 것이란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 본적이 없다고 어느 교육 전도사가 말했습니다. 사표 내고 나가지 전까지는 영혼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 번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혼을 위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은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곳에 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영적인 한계를 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몸부림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역을 하다가 깊은 한계가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다 자기로 하여금 정상 적인 사역을 하기 어렵다는 고통과 죄악 보다 더 큰 강수를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 하는 비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번째 진리를 보여 준다. 목양을 하는 사람들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는데 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이것이 예수님으로 말하자면 부활이었고 다시금 영광을 받으시는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의 진정한 소망이 돼야 합니다.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때에 내 면류관이 무엇이냐? 황금으로 된 면류관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너는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내가 돌보던 양떼들이 여기에 이렇게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섬기는 일에 들어서려는 사람들은 영혼을 섬기는 대가를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으려는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기복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나는 이 영혼들을 돌보는 상을 하나님 앞에서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옥중에 있는 자를 돌아보고 가난한 자를 공개 하는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고 말씀 하셨다" 똑같은 논리로 하나님은 이 시간에고 이 땅에서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깊이 애쓰면서 사랑하는 이 마음을 결코 상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내세에서도 분명 주실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상으로 갚아 주시든지 간에 우리가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 하면서 영혼을 섬기는 이 일이 허무하거나 해도 좋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신 아름다움 은혜와 선을 베푸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찾아가고,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간절히 애쓰면서 사는 것이다"
중공에다 우리 교회 설교 테이프를 보냈습니다. 녹화 테이프를 보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600명이나 모이는 교회 설교할 목회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예배를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고 그것을 예배로 하나님 앞에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목자가 얼마나 그리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목양을 받을 수 있는 목자가 있고 교회가 있다는 사실 앞에 하나님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격으로 감사 해본 적이 있습니까? 감사가 넘친다면 그 감사를 하나님 앞에 어떤 식으로 고백을 하면서 살기를 원하는지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을 돌보는 자가 되어서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목자가 되셔서 자신을 소진 하시고 그 사랑을 받은 이 세상에 목자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이 이만큼 자라기까지 자신을 소진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랑을 들려주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자리와 믿음의 자리로 인도 해 주기까지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여러분 자신이 목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목양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하나님의 응답일 것입니다.
집에 있는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하지 못하고 순종하고 살지 않는 자식들은 한번 부모 없는데 보내서 죽도록 고생을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부모의 음성이 사랑이 얼마나 고마운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비바람 맞아보고 고난을 당해 봐야 알게 됩니다. 문간에 서서 다음 주 수요일에 나오십시오. 그때 봬요. 하는 그런 음성들이 귀찮게 귀 따갑게 들려주는 목자가 있는 것은 그 중공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그리워 할지. 하나님께서는 유리하는 양떼들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셔야 할 모본을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서 34장에서 목자의 직분을 망각하고 양들을 유리하고 방황 하게 내 버려두는 사악한 목자들이 받을 불같이 치열한 심판에 대해서 상세하게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혼들이 유리하고 고통 받을 때 자기의 배만 불리고 자기의 인생에 문제만 가지고 씨름하며 양떼들을 돌보지 않았던 목자들이 받을 치열한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간절하고 뜨거운 어조로 사악한 자들을 향해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양떼를 위해 목숨을 버린 데는 더 뜨겁고 큰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양떼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며 주님은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입혀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며 주와 함께 사는데 그때 누리게 될 생명은 우리가 누리는 생명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한번 죽어지면 죽어진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부어준 생명의 역사는 이전에 간신히 붙들고 살아가던 생명의 역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현세에 죄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느끼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양떼를 섬겨야 할 진정한 믿음에 대해서 말씀 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최고의 보람된 일은 영혼을 목양 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배우고 알아가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가서 영혼들을 세우고 눈물로 피로 지킬 수 있는 신실한 목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게 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그것보다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사로 구역장으로. 영혼을 돌보는 사람으로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속에서 주님의 마음과 참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특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목양의 현장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불안전하고 아집과 교만으로 뭉쳐진 존재인지 변하지 않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나는 배웁니다. "내가 깨트려지기 전에는 저 영혼이 안 깨트려 지겠죠? 주님! 날 먼저 부수시옵소서." 내가 교만 해 지려면 한없이 교만 해 질 사람인데 책도 많이 내고 교회 이야기만 나오면 난 한 없이 겸손해집니다. 열린 교회 앞에만 서면 나는 그렇게 작게 느껴집니다.
위대한 부흥에 역사를 읽을 때는 심취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현장에 서 볼 날이 올 것이란. 그러나 교회를 보면 변하지 않는 양떼들을 보면서 역시 변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녀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순종 하지 않고 살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현장이라 생각 하면 됩니다. 맡겨준 영혼들이 변화 되지 않는 것은 여러분들이 변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화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괴팍한지를 그 양떼를 통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 지고 변하는 일을 상급으로 주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또 다른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우리는 다 잊어 버렸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영혼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했던 주님의 도구들이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교사나 구역장이나 전도사를 쓸 때 아무것도 보지 말고 하나만 물어 보십시오.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 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목숨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변화 시키는 힘이 영혼들에게 나타나서 영혼들을 구하고 자기 속에 나타나서 죽었던 자기의 신앙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이런 소명을 가지고 영혼을 위한 일들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에서 이 일 말고는 할 일이 뭐가 있는가? 어떤 과정에서 "나는 매일 죽노라, 겉 사람은 후패 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어디서 이랬나? 사우나 목욕탕에 드러누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피 비린내 나는 목양의 현장에서,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세우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귀한 것들 다 드리는 현장에서 자기가 죽는 것을 경험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의 체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런 체험을 받은 그 사람의 삶에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으니 그런 놀라운 사람으로 변화 된 것입니다. 목양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 그 일에 온 생명을 걸고 모든 꿈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의 참 위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입니다. 예수님으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 보다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과 사랑을 이 세상에서 경험 한 것입니다.
미래의 상급과 미래에 받을 훌륭한 축복만을 가지고는 목양을 하면서 부딪치는 그 치열한 도전과 뼈를 깎는 갈등과 심한 고통과 압박을 다 감당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혼을 위해서 수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제 적으로 그런 사랑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는."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이 많았지만 한 교회에서 5년, 8년,7년. 그러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은 지혜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지고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 매달려 씨름을 하면 하나님이 매일 매일 우리에게 사명을 감당 해 나갈 수 있는 사랑과 위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신비로운 일들이 있습니다.
한번 4개월을 교회 사역을 실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공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도가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절박한 기도 제목이 사라지고 추상적인 기도 제목만 남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모나고 못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부딪치지 않고 골방에서 혼자 생각 하는 것과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끈임 없이 섬기다 보니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예로 “하나님! 이 시대의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는 것이 있어야지 교회를 위한 가슴 아픈 기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간절하게 살아야 간절한 제목이 나옵니다.
영혼들을 섬기는 가운데서 기도를 배우고 참는 방법을 배우고 인격적으로 영혼들을 돌보는 방법들을 배우게 되고 주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 돌 던질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이 시대의 교회에 상처를 씻겨 준수 있는 목양의 마음을 가진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계신 참다운 사랑을 깨닫게 하고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과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런 놀라운 축복들을 누리면서 변화된 삶을 살고 어두운 세상을 찬란한 불꽃처럼 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중심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그 양들에게 향하고 그 영혼들을 세우는 일이 우리 삶에 최고의 가치가 되지 못하기에 기도 따로, 삶 따로 행동 따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위로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눈물을 씻기시는 주님의 손은 주를 위해 눈물 흘리는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싸매시고 치료하셔서 우리를 변화 시키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주를 위해 마음이 찢어져 본 사람 영혼을 위해서 가슴이 아파본 사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 하는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 직접 버림을 받으시기를 자청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내어줌의 사랑을 인하여 상처를 받아보았던 사람들에게 오늘도 찾아오셔서 변화와 위로와 함께 하는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같은 동족들에게 버림 받으셨던 이유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는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거절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사셨더라면 동네에서 환영 받고 그 분의 인품이 온 유다와 갈릴리에까지 알려져서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한 시대의 선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독특한 꿈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준 양떼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목양하고 그 영혼들을 하나님 안에 있는 풍성함과 은혜의 세계로 데려가는 사명을 받으시고 온전히 감당해 나가는 일을 생명 보다 소중하게 생각 했기에 세상이 그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동생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동족이 그를 버렸고 그가 사랑한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목양의 길을 걸어 갈수 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쓰라린 고통과 아픔이 우리 속에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길이 대접을 받으면서 눈물과 고통이 없이 걸어가는 길이라면 이 목양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리스도로부터 더 멀어 지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실하게 이길 을 걸어가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그 대접을 받으면서 살 아가야기에 목양의 현장에서 더 더욱 그리스도만이 나의 진정한 보배요 나의 참 친구 시고 세상에서 내 부모와 가족과 친구가 사랑하는 교회가 양떼 들이 다 내 마음을 몰라줘도
(찬양)
오직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구원했네
주의 사랑을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목양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자에 가까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장을 더럽힌 사악한 평판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목자들이 있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주께서 나를 구원한 그 목자의 사랑이 나 같은 죄인을 감화 시켜서 이 길을 걸어가게 한다면 사람으로부터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면 전능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 목자의 마음으로 당신의 뒤를 이어 양떼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일을 소망하면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근거 없는 비난을 받게도 하고 오해에 휘말려 고통하게도 합니다. 양떼를 섬기려고 할 때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경험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목양을 하면서 살지 않는다면 울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을 섬기면서 주님의 마음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사단은 가장 미워합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결국에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도록 물러가게도 하고 유혹하고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고 우리를 유혹하고 많은 아픔들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는 것입니다. 개인 적으로도 목양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 길을 걷지 않으면 몰랐을 수많은 많은 마음의 가시들을 발견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견뎌 내면서 살아 갈수 있는 이유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원수야 너의 울부짖음이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시련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하나님 앞에 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경험 할 수 있기에 당신의 목양의 일을 대신 하면서 살아 갈수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너무 소수라는 것이 마음이 미어진다. 인생을 다 산 다음에도 "나의 나 된 것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면서 풍진 가시밭길과 같은 사역의 길 섬긴 모든 신앙의 길 내 결심과 내 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들을 섬기는 이 일을 감당 하게 하셨다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이 능하게 하신 은혜와 권세를 자랑 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에 대해서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지만 스스로 버린다. 이 계명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어 가신 모양은 이 세상에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죽어 가셨지만 그 죽음은 이 세상의 죄인들의 죽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사단의 세력에 그 생명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즐겁게 주님의 손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말하기를 "목숨을 버린다는 이 말을 나는 내 생명을 내려놓노라" 그것이 가장 존귀한 것인지 알고 붙잡고 있다가 그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하나님의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서 발견하자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영혼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낙헌제로 드리신 이것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얻고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쓰시든지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주 홀로 우리를 쓰시고 주 홀로 우리를 주님을 위해서 소비해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한 이유와 원동력을 우리가 여기서 발견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시리즈를 마치면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목자 잃은 양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같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에게 생명 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목자의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삼아서 어찌하든지 목양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외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세상이 손짓 하고 유혹하는 것에 있어 귀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시고 이 속에서 목자의 지도를 받으면 신앙생활 해 나갈 수 있도록 연약할 때 함께 볼을 맞대면 따뜻한 체온을 나누면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참 하나님의 양떼로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 배우면 살아 갈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과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 다시 교회 안에서 밖에서 목자로서 섬김을 필요로 하는 그런 연약하고 길 잃은 수많은 양떼들을 생각 하면서 그런 지역과 선 교지를 위해서 기도 하고 목자 잃은 양이 아니면서도 목자 잃은 양처럼 살아가는 불쌍한 심령들을 부여 앉고 참된 사랑과 올바른 길로 인도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 고통 많고 연약함으로 둘러싸인 신앙생활이 모두 끝날 때 이 세상에서 목자였던 사람들 양 이었던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붙잡고 자기와 자기의 양떼들과 손을 붙잡고 완전하신 목자이신 어린양 예수를 주님의 나라에서 한없이 찬송하며 모두 한 양떼가 되어서 하나님나라의 목장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사는 그날 까지 우리는 이 모순 많고 어려움 많고 고통과 슬픔이 많은 이 속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보전 하는 길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목양 아래 살아가는 길임을 배우고 한 교회 목회자의 목양 아래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목양의 정신들을 가지고 교회 영혼들을 섬기고 흩어진 영혼들을 모우는 이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리즈가 여러분들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입니다.
2.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8)
설교자를 위하여 II (1995.10.11 수요예배 2)
본문은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장면입니다. 한나가 아이가 없어 고통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고 얻은 자식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겠다고 약속 합니다. 젖을 떼는 날에 성전으로 올라와서 그 아이를 여호와께 바치는 것입니다. 큰 아들이 되어서 군에 가도 울고불고 하는데. 겨우 젖 뗀 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아이를 바친다는 것은 그저 신학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 그 아이에 대한 모든 조제권을 포기 하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 앞에 서원한 일은 해로울 지라도 갚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었습니다. 목사가 되는 사람이 모두 그렇게 믿음이 좋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나와 같은 그 기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 바쳐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무엘은 오늘날 목사와 유사합니다. 목사는 한 교회를 돌보면 목양 하는 사람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목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라는 커다란 교회를 목회 했습니다. 뛰어난 영적인 지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는데 사용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돌보고 재판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라가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치 않겠다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이 하던 일을 충실히 하면 목사의 일을 훌륭하게 감당 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구속하신 것은 성도 또한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을 삼으셨을 때 할례를 한 모든 자들은 바로 여호와께만 속한 자라는 표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그 이상으로 인생이 드려진 사람들이 돌아 다녔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은 긴 머리를 한 자들이었습니다. 교과서적으로 볼 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려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걸어 다니는 나실인, 머리가 길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자들을 볼 때 마다 백성들은 옷깃을 여미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지만 저 사람은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인생이 드려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일반 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입니다. 목사를 정확히 표현 하자면 하나님께만 드려진 사람입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이전에 할 수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이제는 못한다는 의미도 포함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면 영원히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 하나를 위해서 살도록 바쳐진 사람입니다.
전도사 시절 아르바이트도 하고 하는 것은 전혀 흠이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훌륭하게 본다. 전도사는 교회 와서는 부름 받은 일꾼 이지만 아직은 세상적인 직업에 종사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목사는 어떤 이유에서든 가능 하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과 같이 인생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려졌어도 자신과 동행해 쓸 것을 위하여 텐트를 기우면서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처지에 있는 선교사적인 사람을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는 시골 교회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인이 9명이었습니다. 어디 가서 손을 벌리기도 그렇고 교회에서 주지 못하는 사례금을 대신 해서 노가다판에 가서 일을 하고 그렇게 스스로 일을 하면서 사역한 것을 우리는 정죄 할 수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없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복음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목사의 모든 괴로움은 가정적으로나 교회에서도, 형제들과의 모든 관계에서도. 사람들이 목사가 된 자신을 향해 이런 성숙한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 부모는 여전히 내 아들이고 아내는 여전히 내 남편이고 자녀들은 여전히 내 아빠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많은 갈등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자신을 드리고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목사인데 부모도 아내도 자녀들도 주권을 노치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보면 부모를 공경 하는 것이 율법에 큰 계명 중에 하나입니다. 그 부모를 욕하거나 때리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난 하셨던 문제가 "너희들이 뭐만 하면 하나님께 바쳤으므로 우리에게는 부모를 공개 할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은 잘못 된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르반의 교훈입니다. 재밌는 것은 율법이 그렇게 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이 하나님께 바쳐지고 난 다음에 한 번도 사무엘과 한나가 만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나가 오래 살았더라면 사무엘이 엘리 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선지자로 자라는 장면과 국가적인 지도자가 되어서 즉 요즘으로 말하면 신문 지상과 텔레비전에 수시로 오르내리는 광경을 분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이는 사무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무엘을 드렸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라는 신앙 고백을 한 것입니다. 목사도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사가 가정에서 갈등하는 것은 부모가 그 자식을 목사가 되었는데도 목사가 먼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낳은 자식이라는 생각을 부모의 마음에서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목사에게는 항상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목사 가 안수 식을 받을 때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이 아는 자녀 누구누구는 오늘 날짜로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자로 여기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도록 기도 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정신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계획이 있다면 부모가 죽었다 할지라도 그 나실인은 눈물을 삼키면서 복음 전하는 것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 백성들과 나실인과의 구별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부모가 죽어도 형제가 죽어도 곁에 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목사의 아내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목사와 동일한 소명을 하나님 앞에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이 목회 사역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가르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됨에 있어서 그 남편이 때로는 결혼을 했지만 그 남편에 대한 주권이 자기에게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 할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사랑과 그런 논리는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아내가 곤고하고 아플 때 죽게 내버려 둔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느끼면 그것을 채워 줄려고 노력을 남편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에 대해서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결혼을 하면서도 한없이 사랑하면서 사랑 받는 관계임에도 이 사람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 할 수 없는 사람이 목회자의 사모가 된다면 그 목회자에게 한없는 괴로움을 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여자와 결혼 한바 에야 바울처럼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한 훌륭한 목회자가 결국은 사모 때문에 목회를 그만 둔 분이 있습니다. 800여명 모이는 교회를 인도 하시는 목회자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미국에 집회를 하고 밤중에도 수시로 성도들의 심방을 가야하고. 그 아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목회는 철학만 가지고는 절대 안 됩니다. 사모는 한 남자와 결혼 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와 결혼 하는 것입니다. 사모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좋은 신랑감 찾아다니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그 여자도 하나님 때문에 결혼 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난 강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 설교 집을 읽어 보면 불꽃이 튑니다. 마이크도 없는 곳에서 수만 명에게 외칠 때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집에 들어오면 마누라가 "흰머리가 나 있는 목사님의 머리채를 붙들고 방안을 돈다. 흰머리는 한움큼 씩 빠졌다."라고 어느 성도가 말했습니다. 모든 비극의 원인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비극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설교에 가장 은혜를 못 받는 사람은 사모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바쳐 졌다고 하는 것을 아내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세속에 있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누릴 수 있는 상황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 할 수 있고 기꺼이 목사가 살아도 이해 할 수 있고 하나님 안에서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하늘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상급을 받을 때 여자로서 평범한 모든 것을 포기한 여인에게도 그 이상으로 빛나는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가슴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그 상처가 치유되기 전에는 영혼을 돌보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왜냐면 자기도 모르게 그 상처로 인해 영혼을 바르게 돌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아내 때문에 목회의 길을 걸으면서 신념을 포기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되었으면 목회자의 사례금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목사는 집에서 고통 을 받게 되고 말씀 사역은 뒤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모는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 난 뒤로 물러나겠다는 생각이 상처가 아니라 즐거움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소명이 필요합니다. 목사가 하나님께만 바쳐졌다는 사실을 가정에서만 용납 되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에서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내가 아는 훌륭한 목사님 한 분은 개척 하다시피 한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이유는 집회 많이 다닌다고 교회에서 목회자를 자른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의 헌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례금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사직은 하나님께 받았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면 여러분 모두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목회자다.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도 교인들이 불쌍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가면 죽는다고 메 달리니 바울이 이러지 말라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죽는 것도 각오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만 바쳐졌기에 살고 죽고 목양 하는 일을 그만 두게 하는 것은 하나님 홀로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정과 교회 모든 사람들이 속히 인식 해 줘야 합니다. 그때 가능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모본으로 힘을 다해 하고 하나님도 힘을 다해 섬기고 모든 것에서 A학점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면 왜 바울이 수시로 아버지께 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지 않았을까 제자들이 부모와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떠났겠습니까?
동생이 결혼을 하는데 큰형이니 부조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시 사례금이 7만원이었습니다. 하지 못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마음 아파하면 안 되고 거룩한 배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것을.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 물질 때문에 마음에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 하지 못할 때 교회와 목회자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바라보면서 그가 하는 일과 사례금을 비교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목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면 살아 갈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고뇌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목사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서로 하는 일들을 투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면서 그의 사역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의 사역에 동참 할 수 있는 길을 모색 하면서 함께 기도 하고 고뇌 하면서 그 속에서 함께 주님을 섬겨 가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을 하면 짧은 성경 안에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는 것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린다고 했습니다. 강도사 까지는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만 두고 가서 햄버거 가계라도 차리고 살아 갈수 있습니다. 목사는 죽어도 묘비에 목사로 찍히는 것입니다. 호적에 있는 것은 지울 수 있지만 죽은 다음에도 항상 목회자로 그 이름은 지워 지지 않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한 사람이 안수 받고 목사가 될 때 이미 하나님께 자신을 다 드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은 없습니다. 교회도 가정에서도 모든 주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안수식이라는 것은 자신이 모두 하나님께만 드려 진다고 하는 인치는 것입니다. 목사 안 수식 때는 식구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게 기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과 모든 미련을 그날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와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권을 행사 하려고 해도 받아 들여 준수 없는 사람으로 가는 것입니다. 목사 안 수식 때 봉투 들고 꽃다발 들고 오는 것 아닙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날입니다. 한없는 기쁨도 있겠지만 한없는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서품식을 할 때 보면 안수 받을 사람들이 십자가 위에 누워있으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이 고난과 시련의 길을 이 외로운 사제의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까? 지금이라도 돌이킬 분은 돌이키십시오." 한때 성도들이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것입니다.
목양의 길을 걸어가면서 당하게 될 모든 고난과 시련의 길을 생각 하면서 성도들이 함께 우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런 일들을 보기 드물다. 교회가 얼마나 세속화 되어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고 무슨 잔칫날처럼 꽃다발을 들고 부조금을 들고. 법석을 떠는 분위기다. 여러분들이 내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저분은 일평생을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고 누구도 저분에 대해서 주권을 행사 할 수 없는 그런 구별된 인생으로 외길을 걸으소서." 하는 눈물의 기도가 목사가 되는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하나님 한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드리다가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 저럼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자신의 육체마저도 바칠 수 있게 자유를 주고 목사를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 생각 하고 당연히 행사 할 수 있는 모든 주권을 포기 하고 그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고통 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함께 주님을 섬기는 일에 동참 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면류관으로 입혀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애가 이렇게 복된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증거하러 온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7)
설교자를 위하여 II (1995.10.15 주일예배 3)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온 것은 증거 하러 온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고 많은 사람을 회개케 하여 예수님을 영접에게 하는 말씀 사역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자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통해서 되지만 이것만 통해서 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독특함의 영적인 특성들을 소유하고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 둘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겸비한 후에 목사가 되는 것이 옳습니다.
누가 손들고 목사 준비 될 준비가 끝났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목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 해 준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고 이끌어 나가실 때 질서를 세워 질서를 따라 이끌어 나가시는데 그 중에 한 교회를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목사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직분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꼭 같이 성도들에게 공경 되어야 하고 존중 되어야 함을 누차에 걸쳐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을 인간 적인 제도적인 권위를 통해서 (매주일 입고 올라간 검정색 가운) 사람들에게 강요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 줌으로서 권위를 인정받는 일이 설교자에게는 중요합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그 목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 해 주지 않는다면 대단히 잘못 된 것입니다. 이러면 좋은 어떤 것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왕을 삼겠다는 표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미 버린 사울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십시오. 자신을 아 엥겔이 굴속에 잠들어 있는 사울을 만났습니다. 군사들이 그 동굴 숨으러 들어갔다 잠들어 있는 사울을 보고는 "다윗이여!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이 자리에서 죽이십시오."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냐고 말했습니다. 후에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는 그 자체를 가지고 깊이 뉘우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종을 하나님께서 제거 하실 때 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그 사실을 끝까지 존중하고 기름 부어 세운 종을 존중했던 다윗의 신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후에 사울의 옷자락을 잘라낸 것 까지 후회 하게 만들었던 것은 사울을 향한 존경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었습니다. 주님이 세운 권위를 끝까지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유적인 교회든 보수적인 교회든, 성향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교회를 한번 휩쓸고 가면 모든 성도들의 눈에 자기네 교회 목사가 커 보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달라고 바로에게 갔을 때 바로가 대답한 말이 "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너희 백성을 놓아 주겠느냐"라고 합니다. 모세가 나중에 십대 재앙의 크고 놀라운 일에 애굽 땅에 도구로 쓰여 집니다. 성경에 "이에 모세는 애굽과 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심히 큰 자로 여겨졌더라." 건전한 목회자의 권위가 인정되는 교회와 은혜가 충만한 교회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깊이 들어 간 사람일수록 목회자를 존중히 알고 교회를 위한 목회의 권위에 잘 순종 합니다.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 사람일수록 언제나 마음속에 반발과 불순종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 뭔가를 쥐고 흔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율적이라고 하는 것과 권위에 순종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대치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회 성도들은 카톨릭 성도들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아무리 없는 사람일지라도 카톨릭 성도들은 신부의 말에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목회자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알고 형제들 가운데서 세움을 받았지만 그를 목사로 세운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존중히 여기면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 해 줄 때 자유로운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웬만하면 성도들에게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깊이 들어간 사람에게 "이걸 하십시오. 저걸 하십시오." 하면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데 천방지축 같은 성도에게 "이것 저렇게 하고 저것은 이렇게 하라" 고 하면 목회자로서 이후에 그 사람을 교회 속에서 이끌어 갈수 있는 영적인 지도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그 목회자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하게 되면 저절로 순종하고 권위를 인정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목사로부터 주어진 부탁과 당부의 명령들을 순종할 수 있는 교회에 전체적인 대중적인 합의가 있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순종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목사임을 알고 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목회자의 권위가 교회에서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면 서로 밀고 잡아당기는 정략적인 관계만 있게 됩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목양 할 때 권위를 깊이 인정하고 주께 하듯 하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그가 온 이유는 “증거 하러 왔다” 빛에 대하여 목사의 대치할 수 없는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 일이 대치 할 수 없는 목사의 직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 일 하나만을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만 할 수 없는 것이 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 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가야 한다는 말씀의 그림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 같은 정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직접 헌금을 챙기고 관리비를 챙길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직무가 있는데 바로 증거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기 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설교자의 큰 직무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원하는 목사는 말씀을 잘 전하고 기도도 많이 하기를 원하고 자기네들은 막살아도 일 년 내내 경건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평생가도 주간지 하나 보지 않는 목회자 이길 원합니다. 또 유능한 행정가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주머니에서 언제나 헌금도 잘 걷을 줄 알아 교회 재정이 언제나 풍족한 그런 목회자 이길 원합니다. 자가용 없이도 심방 잘 할 수 있어야 하고 언제나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천사 같이 다가오길 원하고 목회자에게 가서 뭔가를 털어 놓기 전에 쓸쓸할 때 외로울 때 와줄 수 있는 점쟁이 같은 목사이길 원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살아온 삶의 과정이 있고 겪어온 인생의 경험이 있는데 어떻게 모든 일에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 앞에서 장단을 맞추려고 하면 한이 없습니다. 수많은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무능해도 이것에 유능하면 교회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말씀을 전하고 성도를 섬기는 일에 전념 할 수 있도록 교회가 목회자를 도와야 합니다. 한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서 갈수 있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고 능력 있게 전파되는 곳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당신이 세운 종들을 통해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를 가장 존중이 여기는 최대의 방법은 시시때때로 좋은 선물을 갖다 주고 맛있는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를 간증하도록 세움을 입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해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늘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으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목회자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보내면서 간증하러 왔으니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의 직무는 증거 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설교를 이용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목회의 계획을 성취해 가는 그런 일들을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들려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태도들을 바꾸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목회자로 보냄을 받고 가장 보람된 일은 말씀에 증언을 듣고 사람들이 영적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영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삶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영혼 속에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증언의 불꽃이 식어지면 매주 걸치는 검은 가운과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축복이 모두 위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알리거나 복음을 증명하는 대가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성도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하고 예전에 깨달았던 바를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느끼게 하고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못 신앙 했던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목회자가 부름을 받은 목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가 아무런 후고의 염려 없이 진리를 증명하는 일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 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든지 성도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신념과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과 예수그리스도의 증언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생명이 있는 동안 더 이상 말 할 수 없는 그 순간까지 그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말하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교회가 그런 사람이 목회자 이라는 것을 인정 해줘야 합니다. 자기 교회 목사를 하나님께 보냄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외치는 일이라고 믿게 될 때 성도들은 전심으로 그것을 사모하고 믿으며 자신의 목회자가 죽을 때까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의 증언을 들어야 되는 필요성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보다 더 먼 곳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전하기를 원하고 여러분들이 한 교회의 성도들로서 이 같은 부르심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열린 교회 목회자의 동정 란에 제가 한달 동안 사역한 것과 또 한달 후에 사역할 모든 일들을 자세히 소개 하는 것은 내가 이런 곳에 이렇게 많이 불려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신문에 내는 것이 아니고 신문 란이 남아서 내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 신문을 보고 ‘제법 잘 팔리는 목회자의 밑에서 목양을 받고 있구나.’ 하는 것으로 여러분들을 채워 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 목회자의 동정 란을 깊이 읽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에 관해서 증언하는 그 일을 위해서 제가 서 있는 그 시간에 여러분들이 기도로 동참하고 마음으로 동참하게 되는 그런 마음으로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께 사역 하는 것입니다.
그는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아서 일평생을 괴로우나 즐거우나 핍박을 받을 때나 혹은 칭찬을 받을 때나 한 가지 일에 매여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 일 하나에 매여서 살았습니다. 후일에라도 제가 교회를 비워놓고 여기 저기 다니는 일에 단지 익숙해지는 교인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저를 후일에는 선교사도, 저보다 훨씬 훌륭한 설교자도 나와서 어두운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훌륭하게 전하는 일꾼들로 세워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기에 함께 해야 합니다. 돈만 보내는 일 말고 건물이나 하나 세워 주는 지 교회 개척 말고 그들이 증거하고 복음 전하는 그 일에 깊이 동참하고 그기에 함께 있어 준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때가 이르면 석 달에 한번이고 두 달에 한 번씩 교회 밖에서 사역을 개인적으로 보고 해야 할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이르나 전하는 그 일에 묶여져 있는 사람이 바로 목사라는 사람입니다. 목사가 그 일 하나를 절대적인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일하나 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고 살지 못할 때 교회와 개인의 신앙에 부패가 싹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알게 하시고 우리가 열린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성장했습니다. 여기는 늙은 양을 가두는 우리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고 우리를 변화 시켰던 말씀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 되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우리 모두 사모하고 우리 안에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이 세상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행해 주시기를 고대하고 기대하며 증거의 사역에 온 교회가 동참해야 합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문서 선교에 사역을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이 순간에 여기서만 설교 할 수 없지만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테이프와 책은 여전히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설교 하고 있습니다. 그 일들을 우리는 깊은 애착을 가지고 온 교회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서 전할 수 있는 곳은 우리가 가서 들려주지만 우리가 갈수 없고 우리가 전할 수 없는 구속 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깊이 증거 되는 이 일에 우리는 헌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맨 첨단에 서서 그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는 언제든지 설교할 준비가 되어 있고 늘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증언들을 가지고 있어서 토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도록 여러분들이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이루실 거룩한 뜻들을 이루어 나가기 때문에 그 일에 막힘이 없게 하기 위하여 생활 할 수 있는 여건을 마음 쓰지 않아도 될 일에 마음 쓰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든 일들을 필요로 하고 섬기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교회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매진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독특한 일들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셔서 복음을 전파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목표는 똑 같지만 방법에 있어서 다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 할 때 즐겨 쓰던 단어는 ‘케르스’ 이 단어는 공중을 모아놓고 그 공중 앞에서 설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이 복음 전파하는 일에 대해서 ‘유한겔리조마이’ 이 말은 복음을 소문내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수의 복음이 무엇인지 말하고, 소문을 내고, 교회로 데리고 나오는 개인적인 전도 사역은 평신도 들이 온 땅에 흩어져서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서서 영혼들의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게 했습니다. 교회는 부흥하고 영혼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오게 되었습니다. 목사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도록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는 이 복음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고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빛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그의 목표는 설교를 해서 듣는 모든 사람들이 믿어지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굳게 믿어지면 마음속에서 힘이 생기고 은혜가 됩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신앙이 성립되지 않고 신앙의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신앙의 힘을 회복할 기력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목사의 사역인 동시에 온 교회가 동참 하여야 할 사역입니다. 교회 영광은 교회를 늘리고 기도원을 짓는 것이 교회 영광이 아닙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예배는 훌륭한 연주와 아름다운 노래가 있어 훌륭한 것이 아니라 들어와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놀랍게 변화가 되는 믿음이 역사하는 교회가 될 때 참다운 교회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서 오로지 증거 하는 일 하나를 위해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교회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방해 되는 일이 없도록 교회가 마음을 쓰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목표는 그와 함께 온 교회가 사역하면서 믿음을 심어주는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의 영광은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과 말씀을 전파 할 때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수많은 회중들의 마음에 이전에 없었던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도록 바뀌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 하기 바랍니다.
4. 기도와 말씀에 바쳐진 사람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행 6:4-5)
설교자를 위하여 II (1995.10.18 수요예배 4)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는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도자여야 하고 오늘은 사도들이 다시 한 번 교회를 새롭게 하는 장면으로 시작 합니다. 5장에서 아나니 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들은 땅을 판돈을 감추고 성령을 속였습니다. 신앙이 없는 이들의 태도는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하나님 앞에 살지 못하는 것은 교회에 큰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교회는 큰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순교를 얼마나 중요시 하는지, 순결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몇 지체들이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게 되면 교회 순결이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결을 위해서 두 사람을 죽임으로 끝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시지만 당신 자신의 이름을 더 보존하기를 원하신다.
6장에 와서 큰 곤란에 부딪힙니다. 고아와 과부들을 돕는 일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 수도꼭지가 고장이 났다든지 쌀이 떨어진 것 물이 나오지 않는 것, 화장실 막힌 것 까지. 이런 모든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담임 목사님께 말하고 해결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닌데 말입니다.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을 구제 하면서 누구를 얼마를 주고 얼마를 줘야 하는 것에 대해서 시시콜콜 사도들을 찾아 간 것입니다. 그 일에 깊이 관여 하다 보니 히브리파 과부들이 헬라파 과부들을 원망 하는 일이 생겨나게 되고 이때 헬라파 과부들이 "우리는 헬라 말을 쓴다고 괄시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때 열두 사도들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큰 위기에 부딪히는 문제가 교회 밖에서 들어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중국에 만리장성은 달나라에서도 육안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4000천키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중국이 그 성을 만들어 놓고 다섯 번 망했다고 합니다. 한 번도 그 성을 넘어서 적군이 쳐 들어와서 망한 게 아니라 속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다섯 번을 망했다고 합니다. 섬기는 교회적도 밖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언제나 환경과 여건 보다는 우리 자신의 자아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두고 성도들을 구제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 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사도들이 말한 것입니다. 한 교회에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일로 성도들을 섬기고 독특한 방식으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을 잊어버릴 때 교회는 문제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과 꼭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소명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 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두 가지에만 마음을 다 쏟는 다는 것입니다. 기도 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일에 마음을 다 쏟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목회를 하면서 모험과 도전도 필요 하겠지만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방해 받을 정도로 커다란 도전과 모험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도들이 교회가 어려움에 노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섬기는 자신들이 성도들과는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이 반성을 한 것은 말씀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반성을 했는데 반성이 끝나고 실천에 옮길 때는 말씀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빠져 나가고 기도해야 함을 먼저 올린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가 된다는 의미는 성도들이 섬기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섬기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건축에 대한 경험과 경영에 대한 조회가 깊지 못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고 깊이 기도 하는 목회자라면 성도들이 감화를 받아 다양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온전히 서 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된다는 의미는 다양하게 살았던 삶을 다 포기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부인도 목사가 된 다음에는 모든 직을 그만 두고 교회를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뒤에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 하면서 그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전심으로 기도 하는 자가 돼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교회의 목사가 된다는 의미는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전념 할 수 있도록 성숙하게 교회가 반응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결론 내린 것은 급한 일부터가 아니라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하자는 것입니다. 기도 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자신을 다 드려야겠다는 그들은 적은 시간을 드렸지만 크고 놀라운 위대한 일을 이루었고 우리들은 많은 시간을 일을 하면서 큰일에 수고 하지만 초라한 결과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이 사도들은 기도 하는 일에 전무하기로 했고 말씀 전하는 일에 메 달리기로 한 것입니다. 한 교회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 섬기는 데 있어서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이 일에 자신을 묶어 두기로 결심 한 것이 목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의 목회자가 자신들과 어울려 주고, 이것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목사가 된다는 의미는 신령한 방법으로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특별한 일에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는 서약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들이 자기들이 한 일들을 직원들을 세워서 일들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목사와 다수의 교육자들이 신령하고 거룩한 일에 자신을 드리고 그 일을 돕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세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은혜만 받기만 하고 교회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등록 하고 소속 되는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깊이 기도 하면서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 한 모퉁이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교회를 섬기면서 발견하고 모난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깨달으면서 변화 받는 일들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기도 하는 일과 목회 하는 일에 목사가 전무 할 수 있습니다. 결단을 내린 것으로만 교회가 성숙 해 진 것이 아니라 5절에 보면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였다" 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판단도 출중했지만 반응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성숙했습니다. 좋은 열매는 바라면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벽돌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핏대를 세우면서도 사람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면 훌륭한 목회자를 세울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믿어주고 신뢰해줘야 합니다. 뭔가 예리한 목회자의 판단이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성숙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탁월한 영적인 목회자를 소유할 수 있을만한 자격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였고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을 알고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온 무리가 사도들이 기도 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니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즉 묻혀 있던 일곱 명의 집사들을 발굴 하여 세워 지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이 할 때는 문제가 되던 일이 집사들이 하니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와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큰 내적인 위기를 딛고 일어나면서 놀랍게 훌륭한 교회가 되가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정치나 하러 다니고 말씀 전하는 일에 무관심 하면서 세속적으로 성도들과 친분이나 맺고 사회 활동이나 하는데 돌아다닌다면 교회가 교회답게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씀 전하고 기도 하는 일에 전무 하니까 성도들을 구제하고 돌보는 일은 잠시 권위가 떨어졌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 해 져 가는 역사가 나타 난 것입니다.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자는 말씀을 전하는 일이 즐겁고 기도 하는 일이 고통이 아니라 언제나 즐거움이 돼야 합니다. 그 일에 헌신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한 교회에서 목사가 되는 일은 기도 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드린 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온 교회가 성숙 한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교회는 놀라운 복음의 교회로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5.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설교자를 위하여 II (1995.4.26 수요예배 5)
오늘 사도는 신약 성경 중에서 유명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해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의 개념을 제외하고라도 복음 속에는 부끄러워 할 만한 요소가 많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고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부끄러워 할 만한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이전에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 하였고 하나님을 섬기는 도가 아니라 훼방하는 도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도가 온 땅에 누룩처럼 번져 가는 것을 보면서 속히 저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의미 하는 말이 무엇인가? 문자대로는 복스러운 소리입니다. 영어에서는 좋은 소리, 헬라어 라로는 기쁜 소식입니다. 무엇이 기쁜 소식이고 기쁜 소식입니까? 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 이유를 뒤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 이것이 마르틴 루터가 읽다가 크게 절망한 그 유명한 성경 구절이고 하나님을 만난 구절이기도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의가 무엇인지 모르면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죄가 무엇인지 모르면 복음이 무엇인지 인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읽다가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 항거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복음에 칼을 두셨나이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칼이 맞습니다. 의는 죄인을 정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드러나자, 인간이 그 의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구약 속에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을 지배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 인데 율법에 부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몸부림치면서 경험 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율법을 지켜서 그 계명에 대해서 내가 의를 이루었다 함은 다른 계명에서 실패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아홉 개를 다 지키고 살았는데 내 마음에 하나 있는 탐심이 있다면 그 탐심으로 말미암아 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율법에서 멀어지고 율법의 의에 도달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도록 한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루터가 "하나님! 어찌하여 복음 속에 칼을 숨겨 두셨나이까" 하고 몸부림치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지키면 의로 여기고 지키지 못하면 죄가 되고 죄의 대가는 형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했습니다. 누구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기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종노릇 하면서. 마지막에는 심판에 이르는 죄의 죽음이 지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복음이 이르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제 이런 것들로 절망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이 온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도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정죄 받고 사망아래 놓이게 된 사람들로부터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준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을 기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응분의 대가는 반드시 받게 됩니다. 대가가 싫어 도망가게 된다면 평안이 없게 됩니다. 병역법이 개정 되었는데 이전에 병역 기피한 모든 사람들을 살려 준다는 포고령이 반포 되었습니다. 일체의 모든 죄를 묻지 않고 자수해서 광명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병역을 기피하고 도망 다니는 모든 젊은이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바로 그런 소식이 역사 속에 들어 온 것입니다. 죄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지배 한 것처럼 이번에는 기쁜 소식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입니다. 육신대로 만족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망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믿음으로 살고 싶었지만 율법 속에서 끈임 없이 정죄 받고 있는 것으로 고통 했지만 그때 기쁜 소식이 들어 온 것입니다. 모든 율법 속에서 정죄하던 것들을 무효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새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셔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무 공로 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약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갈구하면서 몸부림쳤던 그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죄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몸부림 쳤던 사람이야 말로 이 복음은 복된 소식인지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이 기쁘고 즐겁고 복된 소식이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못 박혀 죽으시고 아무런 율법을 지키지 않고 도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 날수 있다는 놀라운 기쁜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살아가면서 그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원하지만 그는 그 사람들이 죄인임을 먼저 상기 시켜 주고 싶어 했습니다. 죄인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 아래 있어 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죄에 뿌리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서 죄성이 촉진 될 수도 억제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죄 성이 밖으로 발산 되고 안 되고는 환경도 많이 좌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행한 죄들을 가지고 심판을 하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문제로 삼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죄의 뿌리입니다. 인간을 환경이 없는 자극 속에서 평안이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죄 성이 쏟아나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경찰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달리는 차들은 그들이 서 있을 만한 장소를 지날 때쯤이면 일제히 속도를 줄입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죄의 법이 인간을 그렇게 지배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항로를 몰고 사망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킬링필드 영화를 보면 수백 명이 족쇄를 채워서 진흙 길을 걸어가면서 벗어나고 싶지만 족쇄로 인해 벗어나지 못한 채 사망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족쇄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텔레비전 앞에서 낄낄 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너스 한 번 받았다고 해외여행 가게 됐다고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입니다. 그의 결국은 이미 정죄 되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치열하게 불타는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죽음이 있고 심판이 있고 그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있는 것처럼 두 번째 사망 지옥의 불 가운데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던 것처럼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놀랄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신앙이 없는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에 각성을 주시고 진정한 변화를 주실 때 사람들은 지옥의 실제를 체험하고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나이를 먹음으로 죽음에 대한 무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것들이 사라지고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나 지혜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는 극단 적인 무감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후의 세계를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죄인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안 믿는 결과는 죽은 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않는데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자신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복음 안에 있는 것을 체험 한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혈통과 지위를 사도는 자랑스럽게 생각 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보여주자” 사울이 바울로 변화 한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구원을 체험 하게 된 것입니다. 미래에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오는 그 순간에 지금까지 살았던 삶이 열심히 살았고 부지런히 살았지만 그것이 생명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히틀러는 죽음을 앞에 놓고 하루 전에 네바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다음날 함께 권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입니다. 6개월 후에 죽는 것만 시한부 인생이 아닙니다. 1년 후에 죽는 것도 시한부 인생입니다. 10년 후에 죽는 것을 시한부 인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영원에 차원에서 보면 날짜가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것 앞에는 타오르는 불길이 기다리고 있고 심판의 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야 합니다.
인간들은 닥쳐오는 심판의 운명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로 자랑하고 취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그런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즉시 이전에 보던 그 세상은 다르게 보였던 것입니다. 인생에 목표들이 배설물과 되었던 것입니다. 우주가 새롭게 보이고 하나님이 보였던 것입니다. 나는 아무 의로울 것도 없는 그때에 그리스도가 나타 나셔서 "내가 너를 구원하기를 원하노라"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을 때 하나님의 칭찬이 그에게 미쳤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것은 하나님의 칭찬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칭찬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몸부림 쳐도 주님이 칭찬 할 만한 삶을 살수 없었습니다. 구원은 주님이 칭찬 할 자에게만 베푸는 것입니다. 수많은 법아래 자기를 복종 시키려고 노력을 하고 금식과 구제와 여러 가지 몸부림 속에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주님께 칭찬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 공로가 없던 그때 그리스도가 오셔서 "내가 너를 구원 하노라" 했습니다. 그는 아무 공로가 없었던 것입니다. 믿은 것은 공로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믿었지만 믿은 것은 조금도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소망 없이 죄의 지배를 받으면 살다가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서 영원히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인생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종교 지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리스도가 자신의 맘에 오셔서 그것을 바라보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나를 위해 자신 몸을 버리신 선하신 그리스도를 분수없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사랑했던 것들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의 생명을 버려서 추구하고 싶었던 저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분수없었다는 것을 알고 바울은 가슴 아파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또 다른 율법이 너는 죄인이라고 송사 했던 것입니다. 그때 나보다 더 많이 범죄 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비교적 의로운 자라고 위로 받은 것입니다. 스스로 칭찬 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칭찬에 이르는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에 이르는 것이 구원에 조건이었습니다. 찬란한 복음의 광채 앞에 자신이 금식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 받고,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지푸라기와 같은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 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운전자들이 무서워하는 것들이 경찰이 아니라 범칙금입니다. 죄의 법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탈 하면 생명을 얻는데 그 죄의 법아래 살아가는 것이 사망의 스티커인 것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 법이 무효와 되는 역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 난 것입니다. 사망의 스티커 뗀다고 내미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어도 산다는. 사망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역사했는데 그 사망의 스티커를 무효로 만드는 덧셈 카드인 구원과 생명과 부활 이었던 것입니다. 사망이 지배 하지만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생명이 역사 한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겠고." 사망을 능가하는 부활의 스티커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가 미래에 누린 것이 아니라 현재에 누린 것입니다. 사도에게는 다이너마이트의 능력과 같았습니다. 도무지 풀려 날수 없고 놓일 수 없는 엄청난 사망과 죄의 법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속량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자신들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깨달아야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않는다"고 했고 같은 이야기를 갈라디아서 에서는 "내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워하다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랑 한 것입니다. 자기를 벗어 날수 없는 죄의 사망의 지배아래서 소망 없이 살아가던 심판 속에서 자기를 건져 주고 생명을 주시고 구원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사도는 체험 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않는다." 그 복음이 내게는 능력이었다고 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외에 주어진 삶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삶입니다. “오직 그것 하나다.” 나머지 인생에서 잘 되어져 가는 것들은 오직 그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구원의 참다운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 구원의 의미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20억의 빚에 몰려서 자살을 했습니다. 아들이 수소문해서 찾아보니 증조할아버지 땅이었는데 못 찾았던 수백억 원의 땅을 찾았던 것입니다. 아들이 찾아내었던 것입니다.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예 없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 대해서 감격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고 줄달음치는 우주의 침묵 속에서 나 같은 미물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 때문에 밤하늘을 향해 외치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지. 눈을 들어 주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불만족에 차있고 불행한 얼굴들을 하고 있습니다. 베푸신 은혜는 저리 가라이고 오늘 기도해서 얻지 못한 직장문제 몇 모금의 포도주 인생의 몇 가지 진로의 문제들 온통 기쁨은 사라지고 불만족 이 우리를 지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기독교 신앙이 전혀 아닙니다.
기초가 단단해야 합니다. 주일날 출석하고 수요일 나오고 헌금하고 이런 것들로 신앙의 탑이 쌓여 간다고 생각 한다면 오해입니다. 우리는 늘 울어도 눈물로는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선물을 이미 받았습니다. 사도는 남은 나의 인생이 어떻게 되도 좋다는 태도로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놀라운 부요함과 그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오늘 내가 느끼고 소유하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폭탄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금과 은 같은 썩어져 갈 것들로 이세상이 고통 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신 그리스도가 없기에 고통하고 신음하면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통 하는 세상을 향한 모든 궁극적인 해답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 묻은 구원의 복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도는 깨달은 것입니다. 고통 하는 세상을 향한 유일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들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한 가지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운전자, 주부, 사장, 이 한 가지 일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 충성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하나님의 놀라운 거룩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자녀 삼으시고 인치 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목표가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메인 사람들입니다. 그를 자랑할 만한 것 말고는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이어야 하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 하는 이 세상은 그 사람이 외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랑 하지 않는 것은 모두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하신 복음을 그 복음이 나를 살게 했다고.
사도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의 핵심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형벌을 로마 교회에 속한 로마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한 것은 가장 흉악한 형벌을 지은 자를 저주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사도는 그 로마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흉악한 죄수를 달아 죽인 도구라고 생각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기에 달리신 분이 예수시기에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와 함께 했습니다. 복음의 깊이를 알았고 신적인 강제력이 사도의 마음속에 움직이고 지배 했습니다. 자신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복음으로 빚진 자라" 그는 헬라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무엇을 꾼 적은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어떤 거룩한 사랑으로 자신을 구했는지를 깨닫는 순간에 이 좋은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유대인 동족들을 생각 하고 한 피 받아 형제 된 자들을 생각 했던 것입니다. 여전히 복음을 싫어하고 타오르는 지옥에 불길 가운데 자신들의 영혼들을 던지는 수많은 동족과 골육과 지친들을 보면서 그는 생각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은혜로 구한 것은 바로 나만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나로 구원 받게 함이 아니요 내가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을 수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도구로서 사도를 불렀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기꺼이 기뻐하겠노라고 고백하는 데 까지 사도는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이 길 밖에서 죽어 가고 있습니다. 구원하는 구원의 능력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속의 역사를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가 복음에 충성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내가 이 복음을 전하고 자랑할 이유가 없는 것은 부득불 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로마에 까지 전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가 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복음 안에 사는 것과 밖에 사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 차이 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유식과 무식 속에 사는 것, 명예가 있고 없는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생각 하던 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차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하고 문제시 하던 것들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사도는 알았던 것입니다. 헬라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제일 무서운 차인 인줄 알았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는 그 차이가 엄청 난 것이었지만 예수 믿고 보니 세상에는 아무 차이가 없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을 차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는 참다운 사랑이 없는 것을 알았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줄긋는 것들이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는 휴지 조각과 같은 것이라고 .
교회가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복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래도 모이는 자녀들끼리만 모이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자녀라고 생각 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정신이 흐려 질 때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아무런 장벽도 없이 허물어 버렸는데 용서 받은 자와 용서 받지 못해 하나님의 칭찬에 이르지 못해 진노아래 살아가는 두 종의 사람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 했던 것입니다. 구속에 놀라운 사랑을 주셨다는 의미를 깨닫고 "내가 아니면 누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이것 하나에 메여 살았다. 초대 교회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교사일 수는 없습니다. 목사 일수 없고 설교자일 수 없습니다. 직장 다니고 있다면 보너스 받고 정해진 월급 받으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장사를 하던 집에서 가사를 돌보던 심지어 빌어먹던.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않고 이 복음을 만 천하에 전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도구로 택하신 것입니다.
사도는 삶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도 고난을 받을 때도.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않았습니다. 늘 울어도 감격 할 수밖에 없는 복음을 안고 그는 죽었습니다. 예수의 넓은 그 사랑과 지금도 죄인들을 향해 계속 되고 있는 그 놀라운 사랑이 사도의 가슴속에 신적인 강제력으로 역사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세상을 사는 날 동안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않았기에 하나님도 사도를 부끄러워하다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자랑 했기에 하나님도 그를 자랑 했습니다. 바울의 그리스도 예수라고 불리는 것을 그리스도는 부끄러워하다 않았습니다. 능력을 구할 때 하나님은 주셨습니다. 한 사람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 그리스도에게 붙잡히고 그 복음을 가슴에 부여 앉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온 사바나와 로마와 안디옥과 갈라디아와 땅 끝까지 그는 누볐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삶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없지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은 이처럼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복음 전파로 교회가 세워 지기를 마다한다면 하나님이 이 교회 문을 닫으시기를 기도 할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교회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 하고 계실 것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6. 회막으로 나아오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 33:6-7)
설교자를 위하여 II (1995.2.26 주일예배 6)
모세가 이끄는 큰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는 장면이 33장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해서 가나안 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렀다. 광야로 들어 서기 전에 시나이 반도였습니다. 그곳에 시내산이 있었습니다. 11개월 동안 광야에 들어가기 전 시내산 밑에서 머물면서 애굽에서 있었던 묵었던 때들을 다 털어 버린다. 모세가 하나님께 계명을 받으려고 올라간 틈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우상을 만들어 죄를 범한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쓸어버리려고 하는데 모세가 안 된다고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 중보기도의 능력은 이처럼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재벌 회장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지 말고 이제는 천재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왜냐면 천재 한 사람이 수 십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한 사람이 하나님과 뛰어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으로 인해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살게 됩니다.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려면 나를 주 앞에서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영생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기도 한 것입니다. 일단은 하나님이 노를 주춤하십니다. 애굽 땅에서 하나님 당신이 인도해 낸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떠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가서 가나안 사람과 아무리 사람과 헷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이런 사람을 쫓아 내고 젖과 꿀이 있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나 나는 안 간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정신이 돌아오게 됩니다. 범죄하고 타락 할 때는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 해낸 모세는 어디 갔느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인도해 냈다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도 했다고 생각지 않고 모세가 인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이렇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도 두 종류입니다. 목회자 의 자체를 존경 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때문에 목회자를 존경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누차 자신들을 이끌어 냈다고 말씀 하셨지만 영안이 어두워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기도 하러 가니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사람이 어디 있느냐? 없으니 우리 신을 만들자.” 그래서 우상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는 광경을 보면서 모세로부터 이야기를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모세로부터 말씀을 전해 주신다. "올라가라. 가나안 땅으로.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한 땅을 다 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그러나 나는 가지 않는다." 육적인 시각에서 보면 끝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은 가나안 땅에 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서 젖도 먹고 꿀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각성하고 나니 깨닫고는 그 소리를 듣고는 백성들이 집집마다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올라가라.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하겠다" 이 말을 생각 하면 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을 생각 한 것이 아니라 "난 너희와 가지 않겠다" 이 말을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의 태도가 바뀌게 되니 영적인 분별력들이 생겨 난 것입니다. 이들이 금붙이를 다 빼어 내서 우상을 만든 이유는 자신들을 인도해낼 신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목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고 부유하게 사는 것이었기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금붙이를 다 빼어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이는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원주민도 다 쫓아 내어주고 그렇게 가고자 하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해 줄 테니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가지 않는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깨게 됩니다. 슬퍼하고 울면서 이런 재앙의 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느냐고. 이들은 애통해 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젖이 흐르던 꿀이 흐르던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진다 해도 하나님이 자신들과 동행 하지 않고 자신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미워하는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각성이 생겨 난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각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금, 은 패물들을 다 버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7절 본문 바로 앞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이도 번성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들이 온 지면에 번성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지 않고도 사람들은 번성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심판대 앞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가장 중요한 표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 하고 있는가 이것이 유일한 표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와 동행해 주지 않겠다고 했을 그때 백성들은 모세는 영적인 통찰이 뛰어 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두었지만 주님은 구체적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올라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하겠다는 것을 하겠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살아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같이 가지 않겠다." 이것은 이스라엘 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선택 자체를 하나님이 버리시는 것과 맞먹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백성이 무엇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 합니까. 다른 것보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그것으로 증명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도 홍해가 갈라 지지 않았고 수많은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고 살았겠지만.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아가면 자신들이 텐트 친 그 자리만 만나가 내려 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회막 앞으로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 상황 앞에서 기도 할 수 있도록 모세는 처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만 진 밖으로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기도 처소로 만들어 진 장막은 한꺼번에 몇 만 명이 들어가서 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앙망하는 자들만 회막에서 간절히 기도 했던 것입니다. 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영적인 위기, 이런 회복을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회막의 기도로 인해 다시 모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함께 하겠다는 증거로 하나님께서 모세 앞을 지나가신 것입니다. 다시 축복 하셔서 가나안으로 데려간다는 것을 보게 해주신 것입니다. 항상 모세가 장막을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개인적으로 매달려서 설득 하는 것 보다 그 백성들과 함께 직접 기도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유하고 온전케 해 주어야 갰다는 영적인 통찰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쓸어버리겠다고 말씀 하셨을 때 모세를 보고 진노를 멈추셨습니다. 모세 한 사람을 기억하셔서 이스라엘 역사를 여러 번 바꾸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기도를 모세 한 사람에게 미룰 수가 없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는 것은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도자 개인적인 중보의 기도만으로는 해결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기도의 영이 얼마나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백성이 기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열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기도 할 수 있도록 백성들을 앞세워 주었던 것입니다. 중보 기도라는 것은 받는 사람이 하나님과 받아서 역사를 일으킬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 더 큰 추진력을 발휘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런 일을 생각한 것은 자신의 혼자 기도만으로는 하나님이 안 들어 줄 것이란 생각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 하고 백성들이 기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들 의죄로 말미암아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치유하는데 헌신하고 기여 하여야지만 모세의 중보기도가 위대한 능력을 발휘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회막에 나아가서 같이 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모세에게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했습니다. "은총을 베푸신다고 했는데 말만이 아닌 사인을 주십시오." 당돌한 것 같은 기도였지만 들어주시고 증표까지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수많은 백성과 깨어진 관계를 새롭게 하여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헌신의 기도를 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영적인 이스라엘 회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혼자 기도 해서 하나님 앞에서 끝장 내지 않고 큰 장막 을치고 회막을 치고 하나님의 백성이 가서 기도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준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서는 목사인 내가 열과 성을 다 해야겠지만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에 함께 기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기도의 짐들을 짊어지고 나아간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보 기도가 헛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기도를 지도자에게 미루고 헛되게 사는 사람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성숙하면 성숙한대로 거기에 맞는 헌신과 희생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환경과 여건이 어떠하든지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될지라도 기도 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교회의 힘들이 서서히 무너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간절히 기도 하는 것은 선택 과목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십일조 헌금 하는 것 보다 주일을 지키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의무입니다.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기도 하면 안 나타나도 모세가 기도 하면 "네가 나를 불렀느냐, 내 종아 내가 여기 있으니 말하라" 이렇게 영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혼자기도 해서 모든 것을 끝내지 복잡하게 회막을 치고 기도 할 마음도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기도 할 곳으로 나아 갈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신비합니다. 하나님과 모세는 친구가 얼굴을 대면해 마주하는 것 같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이야기한 것 같이 온 지면 위에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 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런 신령한 사람임에도 혼자 기도 하고 만 것이 아니라 회막을 치고 기도 하도록 백성들을 유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도자가 해야 할 기도의 몫이 성도들이 해야 할 기도의 몫을 대신 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기도의 헌신을 성도들이 대신 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마음과 뜻을 다하며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의 의무도 다할 때 교회도 변화되고 삶 속에 은혜로운 역사도 일어나고 죄악에 빠지고 침체에 빠졌던 영혼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축복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깊은 영성의 사람일지라도 기도의 의무를 목회자의 기도로 상쇄시킬 수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잘 모이지 않는데 흩어진 사람들이 엄청나게 기도한다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열심히 모이고 모였을 때 기도의 불꽃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흩어져서도 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요즘 여러분들이 얼마나 기도 하지 않는지 알고 있습니다. 오래 되면 큰일 납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장막을 치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도 지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장막을 치고 지금 초청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기도해야 한다고 하나님 앞에 정규적인 예배 시간에 나와서 마음을 드리고 기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비정규적인 자기의 삶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도의 영을 지킨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뭔가 이상하고 부조화스럽게 보일수도 있지만 모세는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기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일도 자기 스스로 기도 하고 있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일학교도 구역예배도 본인이 기도한 만큼 똑 같이 중요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기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지도자들이 피도 눈물도 없어야 가능합니다. 때로는 결단을 요하는 시간에 있어서 지도자가 매달리는 하룻밤에 기도는 수많은 성도의 한 달의 기도를 능가할 경우도 있습니다. 열두 사도를 세우실 때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도 기도를 부탁 하지 않고 올라 가셨습니다. 홀로 올라가셔서 밤이 맞도록 간절히 기도 하고 세운 것입니다. 그런 때도 있지만 지도자의 기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도록 그들을 내보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 역사를 붙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목회자는 교인들이 살아있는 기도의 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교회를 어거해가는 목회입니다. 설교는 동의 할 수 없지만 그런 목회자에게는 언제든 무릎 꿇고 엎드려 배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그런 교회가 아주 드물다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열린 교회도 그 점에 있어 다른 교회 못지않게 탁월한 교회가 되지 않으면 교회가 여기 이렇게 서 있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 아프고 목회의 수치입니다. 기도의 영이 가라 앉아 잠자고 있던 사람들이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은 금방 안 됩니다. 희생의 잔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축가라 앉아 쳐지는 것은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위기를 직면 했을 때 고독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직면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결단을 뒤로 미루고 백성들을 등을 밀고 너희는 기도하라 간구하라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 밖에 회막을 쳤고 진과 멀리 떠나게 했습니다. 회막을 쳐서 진 밖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모두 진 안에서 하나님이 내가 너희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해서 모든 가족들이 모여서 통곡 하면 기도했던 것이 아닙니다. 진 안은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경고는 했지만 여전히 텔레비전 켜놓고 히히낙락 하는 사람, 고스톱 치는 사람, 자는 사람...인간 세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이 진속 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건도 사고 팔 테고 말입니다. 이런 곳은 하나님과 만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닙니다. 아무데다 다 계시는 하나님이지만 새벽 시간에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집에서는 마음을 다 잡고 기도 한다는 것이 어렵고 새벽 기도 하는 시간에 거리가 먼 사람이 그 시간을 생각 하고 일어나 기도에 동참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적한 장소에 나와서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육신은 그런 일을 어렵게 만듭니다. 새벽 기도 나오는 것도 매 시간 마다투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자.” “아냐 일어나라.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습관을 쫓아 기도하러 나가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솟아날 때는 기도해야 하지만 그런 생각이 없어도 습관을 쫓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숙명이라 생각하고 기정사실이라 생각 하고 항상 기도 하는 시간을 정하고 교회로 나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는 회막을 진 밖으로 치고 진과 멀리 떨어지게 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조용한 시간 조용한 장소 텔레비전 소리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속적인 일로 방해 받지 않는 그런 곳이 필요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진과 멀리 떨어지게 회막을 만들어 줬던 것입니다. 방해로부터 떠나는 비결은 가깝게는 교회로 아님 기도원으로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분주한 생활 속에서 분리된 하나님과의 만날 만한 회막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곳만 가있으면 세상의 방해가 없는 언제든 그곳에 가면 하나님만 찾기에 적합한 회막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회막이 없다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아닙니다. "회막이라 이르니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밖에 있는 회막으로 나아갔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올라가도록 허락은 받았지만 하나님 이같이 가지 않겠다는 팽팽한 영적인 긴장이 감돌고 있는 위기 상황 가운데서 진에 가만히 앉아서 정상적인 삶을 살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텔레비전보고 놀이를 하고 음식을 만들고 이런 일을 할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진을 떠났던 것입니다. 웅성거리고 떠드는 소리가 멀리 느껴질수록 또렷하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갈릴리 바다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어디에든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혼자 조용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그곳이 갈릴리 바닷가인 것입니다. 방해 받지 않는 진 밖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가 너희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한 선언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가운데서도 그냥 먹고 마실 수 없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홀로 매달려 간구하고 기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금 만드는 그 무엇이 가슴속에서 역사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회막이 필요한 것입니다. 회막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인 것입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일시 정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짧고 간단하게 기도를 때우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그만 두고 마음과 뜻을 다해 섬겨야 할 의무를 형식적인 의무에 준수에 때우려고 하는 것에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기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모세는 진밖에 회막을 쳤습니다. 깊은 긴장이 감돌고 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 속에서는 특별한 기도의 사람들이 필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회막을 쳤던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못 하게끔 방해하는 것들을 분리시키고 나누는 일을 먼저 해야 했던 것입니다. 언제, 어느 시간에 어느 때에, 얼마큼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사고와 생각과 염려가 접근 할 수 없는 그런 공간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은 오늘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진 밖으로 멀리 떨어져 나오지 않으므로 늘 기도 해도 힘이 나오지 않고 능력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잘 쓰는 말이 피곤하다는 말입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하는 삶을 숙명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과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이 먼저 필요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일날 나와서 눈물 한번 흘리고 가는 걸로 신앙인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하면 안 됩니다. 감동만 우리 인생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충만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우리생활을 지배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인생을 꽉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능력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사는 삶이라야 감정도 의미가 있습니다. 뭔가를 잘 해내가다 어려움을 만나서 울 때는 다름 사람이 볼 때도 가엽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날 울고 있으면 못난 게 또 운다고 말합니다. 감정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 하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실제적인 능력이 우리 삶을 강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약한 모습이 우리 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므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나무 막대기 불에 던지면 다 타버리지만 모세가 잡고 그 지팡이로 떼리니 물이 터져 나오고 바다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진속에 일어나는 일들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애곡 하지 않는 세대가 지금 이 세대들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은 진 밖으로 나왔다. 진에 있는 생각에 그들을 얽어 메지 않았다. 그러고는 매달리고 간구했습니다.
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 비굴해지든가 쓸데없이 담대해지든지 합니다. 기도는 나의 선택 상항이 아닙니다. 기도의 중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일시 정지입니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은 영적인 침륜에 먼저 빠지게 됩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육신을 믿지 마라. 내 영혼아 깨어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주님 앞에 나아가라.” 여러분의 육신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감기 때문에 몸살 때문에, 연약함 때문에 이러지 말고 맞불을 지르십시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집이 만민이 기도 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의 삶도 회복되어진 교회에 영적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이 영적인 문제도 풀어 가실 것입니다.
7. 기도의 능력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2-14)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과 듣는 사람의 마음을 매우 중시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삶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삶을 붙들고 그리스도께 붙들려 살아가는 영적인 삶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피상적입니다. 이런 일들은 말씀을 깊이 깨닫지 못하기에 그렇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심으로 경배하기 위한 아는 것이 아니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라 할지라도 진리를 아는 방식이 잘못되면 지식의 내용이 옳은 것일지라도 습득하는 방식이 잘못되면 영혼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듣는 것입니다. 구약을 다 누벼보며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하고 너희는 듣고, 이런 관계가 계속 잘되면 그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안 듣기만 하면 괜찮은데 안 듣는 마음 가운데 다른 것이 들려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설교자는 설교하는 것에 면역이 되는 것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설교를 듣는 것에 면역이 되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은혜와 지식에 따라서 살아야 갰다는 절박한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신앙의 모든 요소는 분리 될 수 없습니다. 기도와 삶이 분리 되지 않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면 자신의 한주간의 삶을 바로 살다 와야지만 그 말씀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 땅을 점령해 가고 있는 과정이었습니다. 모세가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나안 땅만 바라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인도는 가나안 거기 까지였습니다. 율법의 인도는 구약 시대까지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족속과 싸우게 된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곳에 들어가면 모두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을 완벽히 순종을 못했으므로 두고두고 문제가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듣고 아모리 사람을 치기 위해서 줄달음칩니다. 그들은 도망가고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므로 그들을 더 이상 쫓아 갈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수아가 그 유명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라.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 있어라. 달아! 너는 거기 가만히 있어라" 명령을 하므로 즉시 해가 멎고 달도 정지한 사건입니다. 태양이 멎고 달이 멈춘 것. 이것이 기도였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기도라도 말 할 수 없습니다. 기도라면 "하나님! 저 태양을 멈추게 하시고 달도 멈추게 해주시옵소서." 이것이 기도입니다. "태양아! 거기 서라. 달아 너는 가만있어라" 이 명령이 오늘 성경은 여호와께 고한 기도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뒤로 가면 예수님도. "하나님! 귀신 들린 이 자매를 고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 한 것이 아니라 "귀신아! 그 아이에게서 나와라" 하므로 귀신이 떠나간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하옵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기도라도 하는데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렇게 했고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칠 때 명령해서 고치고 귀신 들린 자도 그랬습니다. 제가 생각 할 때 이것은 높은 수준의 기도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명령 한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생애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 악령의 세력들과 싸웠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삶이 너무 당당했습니다. 죽음을 향해서, 환경을 향해서, 귀신을 향해서 명령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풍랑을 향해서 명령하고 "바다야! 잔잔하라" 이것도 기도였습니다.
어떻게 여호수아가 짧은 기도로 하늘을 운행하고 있는 해를, 떠오르는 달을 정지시키리만큼 위대한 기도의 세계를 갖게 되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는 언제나 겉으로 들어난 하나의 아름다운 결과에 의해서만 주목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좋게 보이는 하나를 주목하면서 그 연로를 보고 부러워합니다. 가을날 국화가 이슬을 머금고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고. 봄부터 소쩍새가 울면서 피를 토하기까지 그 국화 꽃핀 것을 도왔다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저 소담한 국화꽃에 아름다움에 취할 뿐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들이 아무리 군대들을 쳐부수기 위해 공격 할 때 시간이 모자라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저들을 다 진멸 할 텐데. 이런 생각은 누구나 다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한사람은 여호수아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허구를 우리 신앙생활에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기도했습니다. 천사가 베드로를 옥에서 꺼내줬을 때도 베드로가 옥에서 나온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았습니다. 어린 여종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잘못 봤겠지. 계속 기도하자.” 이런 것은 신앙의 허구입니다. 이런 것 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우리 신앙생활은 허할 뿐입니다.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것 아닙니다.출애굽기 33장 7절부터 읽어보십시오. “가나안은 너희들에게 주겠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라.” 하나님의 이때 심정은 이스라엘과 맺은 인연을 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혼 하려는 것 같은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모두 회개 하게 됩니다. 그런 회개가 자기들의 삶에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랜 동안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회개를 해도 회복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진밖에 회막을 만들어 기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기도하게 했습니다.
모두 가고 없어도 혼자 남아기도 한사람은 여호수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도자를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신학을 하기 전에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뼈를 깎는 것 같은 깊은 고뇌와 영적인 단련의 기간이 없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가볍고 기도도 가볍습니다. 가볍고 피상적이니깐 본질적인 이야기는 가슴에 와 닫지 않고 자기처럼 가볍고 피상적인 이야기나 입맛에 맞는 것입니다. 본성이 피상적인 삶을 부채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한 번의 기도로 위대한 역사를 불러일으키고 태양을 달을 멈추고 했습니다. 우리가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싶다는 것도 탐심입니다. 문제는 모세가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오랜 기도 속에서 다져진 것입니다.
오늘 기도 하지 않으면 오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기 역부족이지만 또한 미래에 살아가는 삶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도는 보약과 같은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능력과 그 사태를 분별 할 수 있는 영적인 저력이 쌓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가 살아있을 때 곁에서 바보 비슷하게 생활했었습니다. 아무도 여호수아를 주목해주지 않았다. 모세가 마지막 바통을 넘겨주고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들보가 무너지는 것 같은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이고 마지막을 보면 모세가 죽기 전에 기력 없는 모습으로 여호수아에게 안수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지혜의 신이 여호수아에게 충만하게 임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만한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모습이 오늘 여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해 주었던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시대에 동일하게 함께 해준다는 증거들을 속속들이 보여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벌을 하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라는 지도자를 잃었지만 모든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자신의 사역을 감당해 나갔던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이기에. 사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겉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 또는 남이 갖지 않은 놀라운 사역의 비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밑에는 한없이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사람이었습니다. 낮에는 다들 열심히 진에서 기도 했을 지라도 밤에는 자고 가족들과 함께 텔레비전도 보고 신문도 보고. 그렇게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사람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외로움과 싸우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 한 것입니다. ‘앞으로 내가 지도자가 될 텐데 지금부터 기도해야지.’ 하나님이 예쁘게 볼 것이란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한 순간 한 순간을 하나님 앞에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없는 마음을 앉고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는 일들을 위해서 자신을 다 바쳐서 헌신 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준비되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천히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호수아는 그때 간절히 기도 했기에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도 하면서 기도의 능력을 천천히 쌓여 간 것입니다. 한번 철야 하고 온 것이 다음날 뚜렷한 결과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여호수아는 매달리고 기도해 갔던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태양아 ! 멈추어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에 기도 하지 않은 사람이 위기를 만나면 손을 들고 통성 기도하고 기도원으로 달려가고 하는데 그것은 평소에 기도 하지 못한 것을 보상하기 위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보상이 통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끈임 없이 자신을 쳐서 기도와 투쟁하면서 전쟁을 배우면서 기도 속에서 백전노장이 된 사람과 어느 날 하루 갑자기 기도 한다고 해서 수많은 세월을 기도의 전쟁에서 악한 세력에 총탄을 맞으며 위기와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면 백전 용사가 된 사람과는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수준이 틀린 것입니다. 눈물의 농도가 틀린 것입니다.
간절히 살아야 간절히 기도가 됩니다. 어느 날 기도 한답시고 매달리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답답해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출발이 그렇게 될지라도 응답이 되면 거기서 끊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 들어가야 합니다. 새벽 기도를 나와야 합니다. 새벽 기도 나가는 것을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너스로 해드린다는 생각을 한다면 평생 가도새벽 기도 하지 못 할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숙명이라 생각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새벽 기도를 한번 빠진다고 해서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 고감처럼 빼어 먹는다면 우리의 기도의 저력은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영원을 가지고 상황을 움직일 수 있는 영력 있는 기도를 드릴수가 없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육자들의 세계도 신학생들의 세계도 마찬 가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저력을 탄탄하게 쌓아 갔던 것입니다.
연로하신 모세는 주무셔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 회막을 지키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회막을 기도 하면서 지켰던 것입니다. ‘당 회장인 모세는 기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아무리 족속을 쳐부수는 총사령관이 되었을 때 태양을 멈출 수 있는 저력을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매 순간을 하나님의 교회와 조국을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충성 하고 기도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기도가 아닌 여호수아 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을까?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표징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게 아닙니다.
옛날에 교부들은 "에어삐어리" 라고 해서 공중설을 믿었습니다. 공중설이란 하늘에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이 있고 유대인들의 공중관입니다. 두 번째 하늘은 악한 영들이 지배하는 하늘이고 세 번째 하늘은 신령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바울이 삼층 천을 갔다 왔다는 것이 그 신령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기도의 화살을 쏘자." 이것이 성서적으로 타당한지 아니한지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의 기도에 대한 예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지는 말한다고 해서 다 기도가 아니고 강한 영력의 후원을 입으면서 악한 영들과 씨름해서 그들의 권세를 찢으면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 이 개념은 성서적인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계속 기도를 수련을 쌓았던 것입니다. 광야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에 도가니에서 삶아지고 진리의 도가니에서 구워진 사람은 눈이 안보여도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인수 것입니다. 영력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것을 모릅니다.
이런게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깊이 훈련된 가운데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깎이고 깎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몇 십 년이 걸려서라도 한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그 사람이 백년이 걸려도 할 수 없는 일을 몇 달 동안 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늘 방법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 크고 놀라운 일을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를 통해서 기도했다는 것 자체가 의가 되거나 기도 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서 보상할 의무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오늘 내 주를 사랑하고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뜻들이 있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계획과 뜻들이 나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성취되지 못하는 오류가 없도록. 끊임 없이 나를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들을 저항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묶고 속박하고 그들을 꺾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불철주야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그렇게 살아가는 진지한 기도 생활이 내일의 기도생활의 놀라운 변혁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본문을 보면서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아무리 사람을 이스라엘의 밥으로 만드시는 날에” 이미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이 붙이신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밥이 되게 한 것입니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 하셨어도 그 승리가 현재적으로 성취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스스로 성취 하시지만 성취하시는 방법은 기도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얘가 한다면 기차는 어디든 다 갈수 있습니다. 레일이 깔린 곳이라야 합니다. 레일만 깔아 놓는다면 공중으로도 물속으로도 산을 넘어서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홀로 일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기도 할 때 마다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 하고 있다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완전히 아무리 사람들을 부치셨지만 여호수아가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태양을 멎게 하시고 달을 더 떠오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과 동행 할 때 얼마나 위대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필요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 그들과 특별히 친근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되고 뛰어난 교통을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소유하고 살아감으로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아치 그들의 기도만을 들어 주시는 것처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싶은 시도와 노력들은 올바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를 개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삶이 절박하고 간절할 때기도 도 절박하고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니깐 삶을 간절히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느 한 요소만을 개발 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목소리를 완전히 들어 주시는 일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비롯한 여호수아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누렸던 영적인 교통이 얼마나 탁월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은혜와 능력을 한 손에 쥐고 어두운 가나안 땅을 혁혁히 지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똑바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사람들의 입장이 되서 생각해보십시오. 해만 떨어지면 자신들은 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해는 떨어지지 않고. 아마도 이 상황이 아무리 사람들에게는 죽기 전에 죽음을 경험한 무서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보통 민족이 아니구나. 태양을 스톱하게 하고." 어마어마한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소식이 가나안 족속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 속에는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므로 아무리 족속들이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영적인 능력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고 매 순간 죽어지면서 그 상황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의 안일함과 육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영적인 고난을 택하고 오늘의 달콤함 보다는 오늘의 쓰디쓴 고통을 통해서라도 완전히 성취되는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고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놀라운 이런 일들을 경험 하게 된 것입니다.
짧은 기도로 태양을 움직이고 달을 움직이는 여호수아를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기도의 놀라운 능력과 여호수아가 살아왔던 진지한 영적인 삶의 방식을 기억하십시오. 매 순간 쓰디쓴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육신적인 요소와 더불어 싸우면서 거룩한 소망 앞에 굴복시키면서 살아가기를.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 속에서 믿음의 증인들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자를 위한 시리즈 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