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199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나를 보내소서(사6:6-8) 1995.6.18 주일오후 1
2. 전에 행하던 대로(단6:10) 1995.6.25 주일오후 21
3. 오해가 빚은 불충성 1 (마25:14-20) 1995.7.2 주일오후 35
4. 오해가 빚은 불충성 2 (마25:21-22) 1995.7.9 주일오후 44
5.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1:1) 1995.7.16 주일오후 53
6. 복음을 위한 사명(롬1:1) 1995.7.23 주일오후 59
7.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마24:45) 1995.8.6 주일오후 64
8. 복이 있는 종(마24:45下-47) 1995. 8.13 주일오후 74
9. 스스로 종 된 자유인(신15:12-17) 1995.8.20 주일오후 82
10.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삼상16:10-11) 1995.8.27 주일오후 96
11. 실패한 사명자를 찾아오신 하나님(욘3:1-2) 1995.9.1 금요기도회 107
1. 나를 보내소서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네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말이 제하여졌고 제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6:6-8)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말할 때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그 행복한 사람이 아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상상하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우리들에게 있어서 우리들의 행복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실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한없는 힘이 되요. 할 일이 없고 아무도 필요로 하니 않는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하다가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목회를 그만 두셨어요. 그러니까 이제 임무가 없는 목사님이 되신거지요. 그건데 처음 몇 달동안은 괜챦은데 그 다음에는 너무너무 괴로운거예요. 왜? 주일이면 목사가 어디에선가 설교를 해야되는데, 예배를 인도해야 되는데 아무데서도 오라는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답답하니까 그 목사님이 무슨 얘기까지 하느냐 하면 나중 누가 설교하러 오라는데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고, 그리고 그 교회에 꼭 말하기를 “나는 사례금을 안받는다고” 꼭 이야기해 달라고, 사례금도 안받고 그리고 내가 가서 연보를 하면서 설교를 할테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교회를 좀 알려달라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그때 우리는 소외감을 느끼고 그리고 비참한 느낌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관계와 우리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세삼 깨닫게 되는겁니다. 그리고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고 하는 그런 분명한 느낌이 없이 우리들이 살아갈대 우리는 무기력해지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들이 되는거예요.
가끔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을 봐요. 한 때는 혹은 공직에서, 한 때는 자기사업을 하고 한 때는 자기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고 애쓰고 수고하면서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지만은 그러나 은퇴해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바쁘고 힘들던 시절을 그리워해요. 만약에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어가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예요.
오늘 이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그 체험을 말하고 있어요. 그 체험이 뭐냐하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나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자기를 써달라고 하나님앞에 주님이 일꾼을 부르실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있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써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리움을 받는 장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차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그 이후에서부터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인생의 참된 보람을 찾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어요.
늘 내가 말씀드립니다마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세상에서 열락을 즐기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느낄수 있다면은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예요. 쉽게 얘기햐면 옛날에 우리가 세상 물을 막 먹쟎아요. 세상의 쾌락, 방탕함, 그 다음에 세상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모든 것을 막 먹는데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그 순간에 우리 입맛이 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의 물은 마셔도 예전에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 마실 때의 그 시원함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을 때 얼마든지 내 배를 배부르게 하고 그리고 내 마음을 넉넉하게 하던 그런 모든 세상에 있는 것들이 이제는 나에게 참다운 만족을 못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이예요.
그럼 무엇으로 만족할수 있나?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내게는 너희가 모르는 그 양식이 있으니 그것은 내가 주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갈 때는 우리가 배부르고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그러한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있었어요. 또 이 세상에서 보람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게 했던 많은 것들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예수를 믿고 진정으로 변화를 받게 되면 이전에 나를 만족하게 하던 그 옛날에 있던 것들은 오늘 나에게 만족이 안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전에 나를 배부르게 했던것들이 오늘 나를 배부르지 못하게 하는거예요. 늘 허기짐을 느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양식이 내게 있는데 내가 온 것은 주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는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되는 것이지만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자신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우리는 주께서 자를 귀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나를 속량하시고 구속하셔서 나를 여기 이렇게 살아있게 하신 그 절대 절명의 이유가 무엇인가 그 사명을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면 그는 정말 온전한 신앙의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기쁨도 그 안에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참된 신앙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그 사명을 가지고 울고 웃어본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가치 있고 또 귀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느날 골목을 쭈욱 걸어가는데 할아버지도 아직 안되신 한 50세쯤 되었을까, 머리도 짧게 자르신분이 담요를 펴놓고 혼자 화투를 치고 있었어요. 혼자 화투는 못 치는데 그 몇 장을 깔면서 재수 보는 것 있쟎아요. 그것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멍하니 쳐다봤어요. 다 해본 다음에 다시 좌악 모아서 다시 피는 거예요. 그런데 한 한 시간 뒤에 다 돌고 와서 그 곳을 보니까 또 그걸 그대로 하고 있어요. 그 다음날도 그 시간에 그것을 하고 있어요. 거기서, 그래서 옆에서 누가 물었어요. “그 혼자서 그걸 매일 뭘하슈?” “이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보내야지”.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은혜를 받은 것 같으나 그렇게 은혜를 받고도 삶이 계속해서 그 영적인 삶이 진전이 없는 이유는 푯대가 없기 때문이예요. 푯대가 무슨 푯대가 있어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았어요. 그래요. 그리고 언젠가는 천당에 가겠지요. 천당에 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일수는 없어요. 결과지요. 목표가 없으니까 사람들 속에는 긴장이 없어요.
오늘은 은혜를 받았는가 해도 내일은 사라지는 거죠. 어느 집회에 갔는데 사람들이 막 은혜를 받으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그래, 은혜 받으면 뭘 하겠느냐?” 그래 하나님이 충만하게 해주시면 뭘 하겠느냐? 충만하게 해주시고 또 6개월 후에 충만하게 해주시면 또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냐. 하나님이 나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오늘 여기에 두신 그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붙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단순해요.
눈을 감아도 생각나는 사명, 눈을 떠도 잊혀질 수 없는 사명, 밥을 먹어도 뇌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뚜렷하게 빛나는 사명, 내가 왜 수많은 자리에 있을 수 있음에도 물구하고 오늘 구원받은 자녀로서 여기 있어야 하는가?
이 문제가 많은 환경, 이 고통스러운 상황, 때로는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는 이 상황에 내가 왜 있어야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용맹스럽게 일했던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거기에 서있어야 되는지 분명히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인가 묻거든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해야 될 말을 가지고 살아라.”
사람들이 이렇게 환난이 많고 고통이 많은 이때에 너희가 어찌 그렇게 그리스도예수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느냐? 그렇게 물을 때 내가 왜 여기 있고 왜 내가 모두들 슬퍼하고 불안해하는 가운데 기뻐하며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 깨닫는 사람들은 언제니 절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표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성취가 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흔들거리며 오늘 예배를 드리며 스쳐가는 은혜가 있으면 그저 감사하고 없으면 그만이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제껏 나를 구원하시고 그리고 이제껏 하나님이 우리들을 놀라운 사랑으로 인도하셔서 이곳에 데려오시고 여기에 서게 하셨으며 또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결코 실수나 실패가 없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여기에 데리고 오셨습니까? 그리고 여기에 두셨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면 계획이 있는 그 자리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그 최고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며 때로는 주저앉아서 더 이상 걸어갈 아무 힘이 없으리 만치 그렇게 낙담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사명의 자리에 서있다는 이유 때문에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서 침몰되는 위기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십시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그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누리거나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일평생을 가난과 결핍과 고통 가운데 사셨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고통하고 신음하는 그곳에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거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끔찍한 고난과 그리고 핍박과 투쟁 속에서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하게 만들었던 그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왜 이 땅에 보내셨으며 왜 이 땅에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자신의 의식이었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미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긴장하는 믿음 생활에서 이탈해서 일락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그 안에서 보람을 느끼다가 그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의 일들과 육신을 위한 일들을 크게 여기는 것입니까?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저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주께서 취하시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은 생명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 하는 것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게획이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지금 왜 내가 수많은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있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지난주에도 했어요. 이 세상에는 보람되게 살다가 죽을 수 있는 인생의 방법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정말 지난주에 느낀바 대로 추수할 일꾼을 부르는 곳이 너무 많아요. 그곳에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알기 원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목말라하고 그러면서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수많은 곳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고 그리고 그곳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다가 그렇게 훌륭하게 인생을 마칠 수 있는 방안들이 수없이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위에서 신학생이나 동역자들 가운데 할 일이 없어 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찾고 깨닫는 자에게 일을 맡기셔요. 어떤 사람들은 24시간이 부족하고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일을 해도 다함이 없고 그리고 그를 필요로 하고 그를 원해요. 어떤 사람들은 나를 써달라고 수없이 이력서를 써들고 다녀도 오라는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고 있는 그런 간절한 음성을 들었어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명의 결국은 하나님을 위함인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들을 위해서 살았던 인생이 70이고 강건하면 80이라고 칩시다. 어떤 사람은 반쯤 살고, 어떤 사람들은 다 살았을 거예요. 그중에서 정말 나 자신들을 위해서 살았던 시간들 빼버리고 나면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던 시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이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음성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하명자를 찾고 영광을 위해서 사람을 보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사명의 자리에 보내었지만 사람들은 그 사명을 저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사명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는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런 사명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연단된 꿋꿋함과 거룩한 강인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댓가를 원하며 거기에 서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계산이 우선합니다. 그리고 그 계산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에 그때까지만 거기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여기에 우리가 이렇게 서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고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내가 하나님이 왜 믿지 않는 가족 가운데서 나를 불러내시고 그리고 믿는 많은 사람 가운데 특별히 나를 부르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어두운 마음에 나에게 진리로 말미암아 깨닫는 심령을 주셨고 그리고 나에게 남들이 알지 못하는 꿈을 꾸게 하셨는지 그것들을 우리들이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허공을 치느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할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예요. 이 세상의 누구도 자기를 누구인지 가르쳐줄 수 없지만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하시는 말씀 앞에 “나를 보내서.”라고 그것을 고백할 때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소명을 받고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우리가 어떤 목표를 놓고 사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우리의 영혼은 거듭났어도 우리의 소명이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거듭난 삶의 가치를 가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거듭났다고 말해도 우리의 삶은 전혀 거듭날 수가 없어요. 삶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목표가 거듭나야 돼요. 사명이 거듭나야 돼요. 그래서 내가 예수를 바로 믿고 변화를 받고나서는 전에는 월급타기 위해서 직장 다녔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전에는 단지 마음의 위로를 위해서 교회 다녔지만 아니예요.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나를 왜 부르셨는지를 깨닫고 난 다음에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요. 이것이 사명이예요.
그리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사명이 있어요. 그리고 이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명을 따라 살 때에만 하나님이 기뻐하세요. 그가 사명을 버리면 그를 버리십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따라서 사는 길은 결코 쉽지를 않아요.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어떻게 구해집니까?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의 인생의 유익과 인생의 좋은 것들을 먼저 구하지 아니하고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끼? 그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 힘이 무엇입니까? 사명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면 선교, 목회면 목회, 아니면 무엇을 하던지 사명이 분명한 사람든 눈에 빛이나요. 그리고 언제나 거기에는 긴장이 깃들여 있어요. 확신이 넘쳐요. 그리고 더군다나 그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용기가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담대한 신앙이 있어요. 3학년, 4학년이 되어도 뭘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 졸업반이 되어도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람들은 전망이 불투명해요.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확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확신이예요.
그러면 그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가며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여져 있는 확신은 언제나 아집이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거예요. 삶이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의탁되어질 때 사명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꿈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계시적인 비젼이예요. 우리가 그리고 또 하나의 비젼은 자기가 갖는 비젼이예요. 그런데 계시적인 비젼과 자기암시적인 비젼의 차이는 뭐냐하면 계시적인 비젼의 기초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자기 암시적인 비젼의 기초는 무엇이라고 자기가 아름답게 포장해서 말할지라도 그 속에는 언제나 자기의 성취를 위한 용구, 욕심이 도시리고 있는겁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이 자리에 들어섰어요.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과 그 다음에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들을 교묘하게 결합시키는 작업들을 하는 거예요.
이번에 선교지를 돌아보면서 그 목사님이 아주 뼈아픈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는 한국을 떠나서 선교지에 왔을 때 개척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불탔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얼른 사람들을 모으고 그리고 그 중에 현지인들을 세워서 얼른 교회를 물려주고 그다음 자기는 가른 교회를 개척하고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면서 1년 내지 2년에 하나씩 개척해서 세워나가는 이런 꿈을 가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고백한 것이 뭐냐하면 교회를 하나 세워가지고 사람들을 모아 한 70명쯤 모아서 현지인에게 넘겨주었대요. 그리고 자기는 또 다를 교회를 개척했어요. 그런데 1년 뒤에 100명 정도 모이던 교인이 다 줄어들어서 30명 이하로 내려갔어요. 자기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하면 헌신된 마음속에 깃들여져 있는, 얼마나 훌륭해요? 교회를 세우고 자기는 그 교회에서 어떤 유익이나 보상도 받지 않고 그리고 현지 사람에게 넘겨주고 또 교회를 세우고 또 넘겨주고 또 교회를 세우고 자신은 그렇게 세우고 늘 개척자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 때문에 말하자면 그 좋은 생각 그 자체가 자기에게는 우상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현지 교역자가 있는 그 자리에서 저의 이 개척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제가 없이는 혼자 설수 없는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재정 자립도 안되고, 교인 모이는 것도 실패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엄청난 충격으로 깨우셨다는 거예요. 그런 뭐냐하면 과연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고상한 목표라 할지라도 정말 그렇게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는 데에 하나님 영광 하나를 위한 것이 아닌 그러한 그릇된 인간들의 목표의식들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철저히 통회하고 이제 어떻게 이 문제를 수습할까 다시 자기는 목회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두 번 실패하고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어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이렇게 자기 암시적인 비젼들을 계시적인 비젼에 섞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가 원하는 목표도 성취하는 이러한 마음들이 깃들여져 있다는 것이예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순수한 꿈,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이 받으심직 하지 않다는 것이예요.
구약의 제사를 기억해보십시오. 소가 멀쩡하쟎아요. 흠집이 있는 소는 딱 한군데 흠집이 있을 뿐인데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명에 있어서만큼은 우리가 순수해야 돼요. 그것만이 그 사명을 성취하는 방법이예요. 사명 따라서 살아가고 그 사명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사명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난과 위기와 역경이 있어도 그 사명의 자리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수시로 느껴요.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보람이 돼요.
그러나 아무리 자기가 좋은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사명의 자리에 자신이 서 있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모든 사람이 다 인정을 해도 자기 속에 있는 깊은 양심이 자기가 사명을 등지고 서있다고 하는 불안한 그림자가 자기 인생 속에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자신의 그 유익을 버리는 자기의 부인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낼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이 이 음성을 처음 발하신 거예요? 아니예요. 주님의 음성은 언제나 이 음성이었어요. ‘누구’, “누굴 내가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왜? 이 하나님의 탄식이 그 시대 이스라엘 상황 속에서의 탄식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몇 년에 한번씩 들려오는 음성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속에는 늘 들려올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어요. 그러나 마무도 그 음성을 듣지 못했어요. 무엇 때문이예요? 이사야도 그동안 듣지 못했어요. 지금에야 듣게 되었어요. 어떻게? 그 성전에 들어가서 스랍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예요. 그리고 거기서 자기가 철저히 무너지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이 ‘무너진다’ 그럴 때 무너지면서 그냥 아프게 무너지는 부분들이 뭐예요? 일평생 이제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 아픔이 됩니까? 아, 그것이 뭐가 아픔이 돼요? 하나님이 도와주시는데? “아이고 이렇게 내가 무너지면 교회에서 내게 막일을 맡기겠지?” 그런 것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 봤어요? 없어요. “아이고 이렇게 무너지면 내가 십일조 생활 안할 수가 없을텐데 , 어떻게 하니?” 그러면서 아파요? 아니예요. 무너지면서 최고의 아픔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꿈을 반납해야 되는 것이예요. 여러분!
인생의 계획표를 여러분들이 짜두었지요? 무너질 때는 어떻게 돼요? 그것을 찢어서 하나님 앞에서 휴지통에 집어넣어야 되는 것이예요. 그래야 사명이 보여요. 그렇지 않으면 안들려요.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낼꼬?“ 아무리 하나님이 외쳐도 자기 계획표를 찢어서 휴지통에 넣지 않으면 안 들리는 거예요. 들리지 않는 거예요.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 나라 확장의 최선봉에 서서 위대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사명감당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 왕국의 확장을 가로 막는 악한 세력들을 진멸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증거를 자기 사명을 통하여 보여 주었던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꿈이 없는, 내 뜻은 모두 버린 사람들이예요. 그리고 ‘주께서 나를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써 주시옵소서.’ 그렇게 자기의 인생의 계획을 모두 포기한 사람이예요.
전에 왔던 그 제주도에서 목회한다는 그 친구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왔었쟎아요. 아주 자아가 강하고 아주 강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푹 들어가고 나니까 “앞으로 뭘 할거야?” “몰라.”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 “나도 몰라.” 왜?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시간표를 짜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는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오면서 상당히 헌신된 사람들 속에 깃들여있는 그런 아집들을 굉징히 많이 봤어요. 뭐냐하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 깊이 들어가서 자기의 시간표를 백지로 만들고 하나님의 그 찬란한 계획을 보여주시는 그것을 받을 때, 그것이 사명을 위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이게 물질도 드리고 시간도 드리고 모든 걸 다 드려도 그거 하나는 드릴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해 내는 것은 뭐냐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인생의 계획을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을 해서 참 승화 시킬 수 있겠는가?’그러고 온통 연구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참 훌륭하게 느껴져요. 요즈음 같이 자기만 살려고 하는 시대에 누가 하나님을 위하여 그런 치밀한 계획을 세우겠어요? 하나님의 집에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그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거예요. 신앙이 깊어질수록 그 속에는 사단의 역사는 훨씬 더 교묘하고 사단만 교묘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일수록 그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기권하고 꿰뚫어볼 수 없는 그런 아주 세밀한 인간의 트릭, 간사함, 그런 것들이 도시리고 있는 거예요.
나다나엘을 보셨습니까? 깊은 고민에 빠졌쟎아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야곱과 같은 사람을 축복해 주실 수 있겠는가? 생각했어요. 인간의 잣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 점점 굳어져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기의 생가인지 하나님이 주신 확신인지조차 구별은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들이 거짓말하면 안되지만 그러나 우리가 뭐 간증이나 뭘 하다가 계속 이렇게 뻥튀기를 해버릇하면 세월이 흐르면 혼돈이 생기는 거예요. 착각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암시적인 비전들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을 하고 아주 신앙적으로 승화시키다보면 그러면 자신도 이제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내 마음에서 솟아난 것인지 본인도 분간을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해서 흐르는 거예요.
참된 사명과 불순물이 섞여있는 사명의 차이는 바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순수해지기를 원하시쟎아요. 그때, 비로소 그런 목표를 따라서 살아갈 때 순수한 헌신이 나오는 거예요. 순수한 헌신, 마태목음 7장을 보셨지요? 사람들은 “주여! 주여!” 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쫒고 선지자 노릇을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모른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기가 막혀요. 그것이 부정 과거예요. 처음에는 알았었는데 자주 귀신을 내어 쫒고 그런 일을 하다가 엉뚱한 길로 갔기 때문에 난 너를 몰랐다 모르는 걸로 친다 그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몰랐다는 그런 의미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 주신 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하는 것이예요. 다시 말합니다. 사명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것을 또렷이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깊이 돌이키고 깨달아야 돼요. 군인들이 밤중에 잠을 자잖아요. 자다가 발로 뻥 차서 깨워서 군인의 길이 무엇이냐? 그러면 그 군인의 길이 무엇인지 새벽 두시에 일어나서 다 외워요. 대한민국 군인으로 부름받아 나선 길이 무엇인지.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고백이 뭐예요? 우리는 본디 유리하던 아람 족속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여 가나안땅에 들이기 전에 애굽에 살았고 거기다 귀한 능력과 힘으로 건져내어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시고 그리고 쭉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이 뭐예요? 그런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서 우리를 이방인의 빛으로 삼으셨다 그겁니다.
하나님이 왜 여러분들을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내셨어요? 그리고 빛으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예요? 그리고 왜 하필이면 수많은 자리 가운데 오늘 여기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있게 하신 이유가 뭐예요? 그냥 왔어요?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여기 왔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앞이 안보이는 거예요.
버림 받지 않고 구원 받았는데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 하셨나? 여기로 올 수 없게 하는 수많은 요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나를 여기에 두셨는가?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갈 수 있는 수많은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 자리에 이곳에 있게 하셨는가? 문제가 많은 가정에 문제가 많은 삶 가운데 그런 깨달음을 얻고 여기 서게 하셨는가? 그것을 밤중에 자다가 일어나서도 또렷이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은 내가 여기 이르기 전에 내가 이러 이러 하였고 이러 이러 하였더니 지금은 나를 이곳에 인도하셔서 이곳에 있게 하셨으니 주께서 나를 이속에 두신 것은 이러 이러하기 위함이라. 이것이 나의 사명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것이 푯대가 있는 삶이예요. 그런 푯대를 가지고 있을 때 오늘 예배 드리다가 은혜 받은 것이 생각이 나고 오늘 은혜 받은 것이 내가 사명을 감당하는데 어떤 유익을 주고 그 무엇을 깨닫고, 잘 깨달은 것을 고치고 다시 새 힘을 받아서 주님이 능력을 주시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들을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어떻게 하다 보니까 떠밀려 왔고 하나님이 떠미시면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는 그런 흔들리는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뭐라 그랬어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니 아무것도 얻을 줄 생각하지 말라.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는 것 중요해요. 그리고 남이 알지 못하는 일들을 알게되고 남이 못 본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 소중합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관람용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시식용이 아니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결코 목적이 없이 주시는 은혜가 없고 계획이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여기에 붙잡혀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노라는 그런 고백이 있는 곳에 사명이 있고 소명이 있고 깨어있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차리고 깨어나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딘가 한번 전에 있던 교회를 심방간 일이 생각나요. 사업을 하다가 큰 위기를 만난 집이었어요. 예배를 다 드리고 돌아오려고 그러는데 “우리 아기 아빠가 사업을 하다가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잘 해결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 사업이 위기 가운데 있는데 그것이 해결이 되면 하나님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관점을 바라보는 우리를 버려야해요. 그래야지만 사명이 보이기 시작해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하고 우리 사이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협정을 맺어놓고 살아가는 그렇게 뭔가 인생의 결실들을 나누어가는 그런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고 우리는 주님이 한 10,000원어치 복주면 한 1,000원어치 갖다 바치고 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침에 말했죠? “나는 너희에게 수소나 수염소를 취하는 여화와가 아니다.”
마치 신앙 생활하면서 낚시 밥으로 고기를 유혹하듯이 얼마 안 되는 헌금이나 봉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유혹하려고 하는 이런 안일한 태도를 버리기 전에는 사명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나는 그래서 환난이 있거나 위기가 있는 집에 늘 물어요. 그 어려움이 해결되면 하나님이 어떤 영광을 받으시겠느냐? 그걸 먼저 생각하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그 고통 가운데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고는 모든 인간이 벗어나려고 하는 보편적인 생각이예요.
그러나 사명을 가지고 사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틀려요. 끊임없는 교묘한 논리와 생각들이 파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사명을 말하자면은 망각시키는 겁니다. 잃어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역사하시기를 꿈꾸는 그 꿈으로 가득차있어요.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그런 사고를 가져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반주에 맞춰 춤추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세요.
오히려 하나님 가락에 맞춰서 우리가 춤추는 것이예요. 주께서 빠르게 두드리면 우리는 빠르게 정신없이 춤춰야돼요. 주께서 굿거리 장단으로 장단을 맞추시면 우리는 고전 무용을 춰야해요. 하나님이 그것을 그치시면 우리는 쉬어야돼요. 자다가도 주께서 두드리시면 우리는 일어나야 돼요.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 견해인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찬송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의 제단에 모든 것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온전히 정결케 되어지기 전에는 신령한 빛이 우리에게 비치지 못하리라 자신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찬란한 소명이 비치는 거예요. 바울이 뭐라 그랬어요? 다메섹이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포기했었어요. 뭐라 그랬어요? “주여! 뉘시니이까?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자기가 가졌던 인생의 모든 꿈들은 완전히 초토화 되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지만 자신도 그 믿음에 부합해서 자신의 꿈을 내려놓았어요. 그랬더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너를 이스라엘과 이방인 가운데 구원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기업을 얻은 자 가운데 너를 불렀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 들려오는 거예요.
사명은 우리를 만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예요.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한 것이예요.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귀에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낼꼬.” 이 외침은 이사야 선지자의 때에만 들린 것이 아니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보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 쉽게 확장되지 않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고, 목회의 꿈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꿈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 꿈만 보아도 무슨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런데 안 일어나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지만 하나님을 완전히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티끌과 같이 사라지고 거룩한 하나님 밖에는 없는 그런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소명을 붙들기를 원하는 이런 포기된 사람들을 찾으시는거예요. 수많은 사람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닌 하고 불러도 “내가 누구를 위하여 갈꼬?”하는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대해서 부풀고 선교를 한다, 배우러 다닌다, 어느 신학교를 가고, 어느 교회를 가든지 즐겨쓰는 단어는 맨 션교예요. 그런데도 선교지에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헌신하고, 자신을 써달라고 부르는데 주님은 그런 갸륵한 헌신의 각오를 가진 사람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비전 하나에 매일 사람을 찾는 거예요. 그것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 신학을 하면서, 신학을 하기로 결심할 때 비참하고 무거웠던 것은 뭐냐하면 치사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신학을 하겠다고 딱 결심하고 기도를 할 때, 내 인생의 그림을 최악으로 꿈꿨어요. 뭐냐?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생하고 그리고 가장 비참하게 살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생각하니까 내가 가진 모든 생각과 인생의 게획표를 매년마다 매시간 계속 그으시더니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한번 한번 짝대기 긋고 지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그것을 쓰레기통에 넣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더 이상 버텨봐야 뭐해요? 어차피 이것은 다 틀리는 답이예요. 그걸 붙들고 앉아서 조바심을 하다가 화투장 한 장씩 까는 기분으로 까가지고 내밀면 하나님이 찍 긋고 까가지고 내밀면 긋고.. 이제 이렇게 사는 것도 지겨워요. 어느 한 순간에 나를 다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최악을 꿈꿨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최선의 것을 주셔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계획들을 포기해야지만 하나님의 참다운 소명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계신 거예요. 왜“내가 누구를 보낵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하나님의 외침이 6장에서만 시작이 되었어요? 1, 2, 3, 4, 5장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예요. 그러나 그 음성이 6장에서만 들렸어요. 그리고 그 6장에서 들린 음성도 바로 9절에서야 들렸어요. 그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선지자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꿈을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또 하나님 앞에서 명함을 내미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어요?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위대하게 기여했던 사람들은 꿈에 들뜬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앞에 직면하고 오히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고 비참한 인생의 죄인인지에 대해서 마음 들떴던 사람들이예요. 나를 다 버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나의 편견과 나의 꿈을 모두 버리니까 그 먹구름이 그치고 나서 찬란한 비젼이 보이기 시작하는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도 들려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자기 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이기 보다 나를 못 버리고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선교 역사를 보십시오. 선교를 위해서 놀랍게 헌신했던 사람들은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이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깨달았던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케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예요. 구두 수선공이었어요. 그를 위대한 선교사로 만든 것은 선교의 위대한 꿈이 아니었어요. 그는 은혜를 받고나서 수없이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연민했어요. 그리고는 그 가죽으로 구두를 지은 나머지 가죽으로 지구본을 만들어서 거기다 나라들을 그려넣고 매일 품에 안고 잠들었어요. 선교가 그의 비젼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참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깨닫는 것이 놀라운 비젼이 되었어요.
만약에 진정으로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이런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선교도 비즈니스 같이 할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아주 뼈아픈 말을 해요. 선교 후보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신문에 광고를 내 가지고 누구든지 와라 우리교회에서 돈 대 줄께 그리고 선교 후보생을 뽑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아주 절대적으로 동감했습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김 중권목사님 말을 인용하면서 본국에서 100명을 열심히 전도해서 그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본 사람이라야지만 선교지에 나가서 전도자로서 선교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선교도 영혼구원을 하는 사역 자체가 아니라 비즈니스처럼 한다 이거예요. 통장도 관리하고, 또 거기도 목회인데 1년에 두 달씩 석 달씩 선교회비 모으러 가버리면 목회가 되겠느냐 이야기예요.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사람의 변화에 달려있는 거예요.
나는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 젊은이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선교의 소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교회 앞에 입증해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면 우리는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재산을 팔고 우리의 귀한 것들을 다 드려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도와야 해요. 어디 가든지 예수의 정신으로 살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명 때문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수 있는 사람,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고 사명 하나로 살고 죽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없다가 얼굴 까만 나라 사람들 나라에 갈 때에 갑자기 생겨난다는 것 그건 희한한 일이라는 거예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왜 사는가의 분명한 이유 그리고 오늘도 우리가 죽지 않고 여기에 살아있게 만드는 고통이 있고, 역경이 있고, 시련이 있고, 위기가 닥쳐도 우리로 하여금 그래도 우리의 생명을 거두지 말고 사명을 완수하는 날까지 이 문제가 많고 고통이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달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들을 분명히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신앙에 있어서 회색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고 사람들은 대충 넘어질 수 있어도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서있습니까? 매순간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워지지 않는 그 꿈 밤새 잠자리에 들어도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 형통할 때에도 그 형통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이 형통한 것을 통해서 내가 반드시 찾아가야 할 그 꿈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예요. 이게 주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자신을 모두 포기하고 철저히 자신에 가지고 있는 포장된 위선을 버리는 사람들에게 이 소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찬란해요. 나는 가끔 정말 귀한 사람들이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형제들도 그렇고 자매들도 그렇고 장하게 느껴질 때 언제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있어요. ‘하나님! 이 사람 아직은 모릅니다마는 그러나 주님 이 사람을 보석과 같이 사용해주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보석과 같이 고귀하게 사용해 주십시오.’
어떤사람이 그렇게 사용될 수 있을까요? 사명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쓰심도 없어요. 사명!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날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어떻게 조금 아까는 머라고 말했어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랬던 사람이 주님이 “날 위하여 누가 갈꼬, 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할 때,
주님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어요.? 스랍이 날아와서 숯불을 가지고 와서 그의 입술을 지졌어요. 이건 제유법이예요. 입을 지졌지만 입만 정결케 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온 영혼이 정결케 되어진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인생의 더러운 꿈, 그리고 자기의 꿈을 하나님의 사명으로 포장하려고 하는 그런 교묘한 위선 이런 것들을 모두 포기한 것이예요.
그러니까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그때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우리가 누구를 보낼꼬”할 때 “주님! 거기가 어떤 곳입니까? 거기가면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도 높아지고 또 나도 높아집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됩니까?” 그렇게 물어보면서 말하지 않았어요.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할 때 거기가 어딘지 이사야는 그것을 몰랐어요. 그러나 "Here am I!"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거기가 대접을 받는 곳이든지 위기와 역경이 있는 곳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의 세력들이 도시리고 있는 열방의 사람이든지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곳에 내가 거기에 있고 또 내가 거기 있는 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나와 동행하실 것이며 내가 거기 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하다못해 동장까지 하다가 죽은 것까지 묘비 뒤에 다 새겨 놓습니다. 보니까 참 웃기데요. 요번에 우리 족보 나온 것 들여다보니까 아무개 무슨 신문사 기자, 누구는 뭐 몇 급 공무원, 누구는 어느 대학 교수, 누구는 전임강사 심지어 하꼬방 만한 회사의 이사 이런 것까지 다 적어 놓았습디다. 세상 나라에서는 그런 것 모두 기억해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것 기억 안해요. “네가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 그럴 때 “주님, 제가 이래 뵈도 자가용만 타고 다니던 사람입니다.”하나님이 그러시면 “잘났다.” 그러신데요?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인생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유일한 척도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이예요? 우리는 먹고 입고 그리고 누워 자다가, 살다가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이예요. 그것은 그러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어요. 주께서 그 거룩한 보혈의 피로 우리를 구속해 내셨어요. 이방의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 개개인을 향하신 우리의 소명이 있어요. 우리가 그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을 그 소명을 바로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예요.
나는 생각해요.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많은 세월들을 불순종했어요. 또 어디선가 뭐 우체국장하고 있겠지요. 또 내 인생에 무슨 힘이 있고 보람이 있겠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비교적 우리가 도덕적이고 신앙을 따라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 정결케 되어지는 소명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끊임없이 생각하세요. 주님이 왜 부르셨는가. 은혜를 사모하지요? 그 사모하는 은혜를 한없이 받고나면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유익을 받는가? 하나님이 여러분이 그렇게 꿈꾸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냐? 주님께 무슨 영광이 되겠는가? 그 답이 있습니까? 그러면 지금 그렇게 살아야 돼요. 삶이 그 방향으로 가야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것도 힘을 얻을 수 있어요.
오늘 이 선지자는 말합니다. “날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주소서.” 하나님이 이사야가 거기 있는 것 모르셨겠어요? 하나님이 뭐 바보예요? “하나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걸 왜 몰라요? 이사야는 그런 대답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답이었어요. 뭐요? 하나님이 여기 있는 것 알아도 실천적인 대답이예요.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응답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 응답이예요.
그것은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갈 걸 모두 아셨어요. 하나님이 무엇하러 물어보실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물으세요. “누가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낼고” 하니깐 이사야가 대답해요. “주님 내가 여기 있어요.”그 고백은 완전한 자기 포기의 고백이에요. 자신의 것을 다 포기하면서 그러면서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다 버리고 내 인생의 계획표는 모두 찢어서 휴지통에 들어갔고 이제는 어떻게 사용하시든지 주님 나를 쓰시옵소서. 내가 여기 아무런 저항 없이 오직 주의 손에 의하여 빚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다 부서져서 반죽되어진 그런 진흙과 같이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님 나를 빚어서 나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예요.
주님이 이사야를 쓰셨어요. 빚으셨어요. 이사야 선지자는요 선지자들 가운데 Top Class의 선지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선지자였어요. 나는 이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선지자라고 불러요. 그렇습니다. 선지자들 가운데 이 사람처럼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들이 많지를 않았어요. 뛰어난 인식으로 인생이 무엇이고 변하는 인생 위에 초월하는 하나님은 영광, 쇠하는 인간의 영화 뒤에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는 그런 영광스런 선지자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치욕의 때 불신앙이 가장 팽배하던 그런 시기에 하나님을 오히려 이 사람을 드셔서 주의 거룩한 영광을 온 세상의 무지한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위대한 선지자의 비전을 갖게 하셨어요.
그가 만약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비교적 그 시대에 태어난 양심적인 사람으로 갸륵하고 기특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살다가 결국은 원통하게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고 말았을 것이예요. 그러나 자신을 모두 버리고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깊이 절망할 때 주님이 그를 정결케 하셔서 소명으로 거듭나게 하셨어요. 그러자 인생은 비명에 죽었고 순교했지만은 살아있는 동안에 그는 짧은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계시를 대대에 보여주는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명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단 한 번 지나갑니다.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되돌려 받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줄다리기 대신에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내 생각과 삶을 모두 포기하고 그리고 주께서 나를 왜 여기에 두시고 그 많은 인생의 고비고비 가운데 죽은 자와 방불한 나를 살리시고 병든 나를 고치셔서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목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가져야 되요. 그리고 그것을 온 삶으로 고백해야 돼요. 그것이 나의 삶을 이끌고 살아가게 만드는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서있는 그 자리를 크고 훌륭하게 보시는 거예요.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의 자리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담대함이 있어요. 죽음의 위협이 그를 굴복시킬 수 없어요. 환난의 시련과 그리고 죽음의 위협이 그를 좌절하게 만들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여기 서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리고 이것이 아니면 삶의 참된 진실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예요.
담대함이 있어요. 그 사람들의 기도가 하늘나라를 움직이는 거예요. 사명을 따라서 살고 그 순수한 사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기도는 하는ㄹ을 가르고 땅을 합쳐 놓을 수 있는 그런 권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예요. 수많은 사람이 기도했으나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사명에 따라 살고, 사명에 따라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모세를 기억하십니까? 개구리가 몰려오고 메뚜기가 오고 우박이 쏟아지고 그리고 불이 붙고 어두움이 내리고 할 때마다 하나님은 오직 누구를 기다리셨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세 한사람이 “주님! 그만이옵나이다.”그 말을 할 때를 기다리셨어요. 왜? 왜 그랬어요? 왜 하나님이 보내신 그 놀라운 재앙의 이적을 모세 한사람이 손을 올리고 “주님! 됐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주님이 모세의 쫄병입니까? 주님이 모세의 하수인입니까? 어떻게 주님이 모세가 이야기 할 때만 기다리십니까? “주님! 안되겠습니다. 손 좀 보십시오. 보시고 그만하십시오. 다시 하십시오.” 모세의 손이 오르고 내리는 바에 따라서 하나님이 움직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하수인입니가? 그렇지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움직이셨어요. 무엇 때문에? 모세가 사명에 따라 살아가는 한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에게 역사 하시고 움직이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사명 따라 살아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한손에 넣고 움직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장단에 맞춰서 춤추시는 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한 결코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서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잠시후면은 이삭이 떨어지고 그리고 나락이 될 때가 옵니다. 추수하려고 낫을 들고 나가도 이미 곡식들이 다 떨어져서 추수해봐야 쭉정이들만 추수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때가 옵니다. 지금이야말로 사명을 받은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래서 이번에 깊이 결심했습니다. 우리 이 시대에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 또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도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사명을 들고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살고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할 일꾼들을 부르고 있는 이 절려진,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들을 보여주고 그러지 않으면 안 될 도전을 깊이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순수해져야 합니다. 그것만이.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대로 우리 힘을 최고로 발휘애서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원만하지 못한 환경들과 우리의 대적들이 우리의 꿈과 우리의 소망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계획들이 아름답게 결실되지 못하도록 도전하고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갸륵한 꿈을 갖고 비전을 갖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그것들이 온전히 이 땅에서 이루어졌으면 벌써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것입니다.
꿈은 언제나 크게 주었지만 이루어진 결과는 언제나 초라했습니다. 출발은 장엄했지만 나중은 심히 미약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모든 대안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져서 우리는 오직 삼손의 손에 들렸던 나귀의 턱뼈 같은 존재가 되어서 한없이 그가 휘두르실 때에 마음껏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그렇게 그 손에 붙잡힌바 되는 것이 짧은 기간 동안에 유일하게 일을 크게 이루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바라보고 추수한 일꾼들을 부르고 계시지만 그러나 보두 조건을 들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겠다고 나온 사람들뿐입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써 주시옵소서. 그러나 주님 조건이 있는데 나를 꼭 이렇게 써 주셔야 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장단에 춤추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흥정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자신을 모두 버리고 그리고 희어져서 추수하게 되어서 낟알이 떨어져가고 있는 잠시 후면 서리가 내릴 그 희어져 추수하게 될 밭을 바라보며 끝없는 연민으로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원대한 비젼 앞에서 그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앞에서 내 자신의 인생의 계획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닫고 그것을 기쁘게 내려놓은 그 사람, 그것을 기쁘게 버리고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그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꿈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을 나 스스로 계획하고 그리고 내 인생을 꿈꾼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을 설계하고 그 인생을 계획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기본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기본권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힘들지만 한 분을 바라볼 때 그 일들이 가능해집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
추수할 일꾼을 찾아 부르네
거친바다 험한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전에 자기의 좋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자기의 꿈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기록된 대로 자기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남김없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외로이 골고다 언덕에 높이 달려 못박혀 죽으시는 그 최악의 고통 가운데서 영혼으로 절망하시지 않으셨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못 박혀 죽음을 당하므로 하나님의 사명이 이루어지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기대하시는 (?)
우리를 보고 세상을 볼 때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과 우리의 계획을 포기하거나 버릴 수 없으면 그러나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주님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 앞에 간절하게 부르짖었던 예수 그리스도, 결국은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찾으셨습니다. 자신을 모두 비우고 자기의 모든 유익을 버렸을 때에 그는 이틀 후 자기 앞에 놓인 그 십자가에 기꺼운 마음으로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명은 이루어졌고 그분이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오늘 그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그 분의 이름을 예배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고통하는 이 세상은 수많은 일꾼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통하는 이세상의 유일한 답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선지자 앞에 놓여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패역하고 그리고 누군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그분을 거역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온 장엄한 선지자의 증언을 담고 있는 선지자의 사명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시대는 이렇게 추수할 일꾼들을 부르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소명 앞에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옵나이다 나를 보내주시옵소서” 실존적으로 응답하는 그러한 응답을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꿈에 들떠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 같은 인간이 이런 고상한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자기들을 대견해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가 움직여진 것이 아니라 나를 항상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식과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말 앞에 한 덩이의 진흙이 되어서 나를 빚어서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토기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자기를 모두 비우고 그 사명의 찬란한 빛 아래 실기를 소원하였던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구원의 역사는 전개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비통한 주님의 음성을 하늘로부터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너희들 가정들로 가서 영혼들을 구할꼬? 누가 나를 위하여 무너진 교회에서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며 애통하던 예례미야의 심정으로 마음의 불을 쓸어안고 기도할 것인가?’ 모두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살기에 정신이 없는 이때에 오직 자신의 삶을 통해 홀로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이름 하나에 생명을 걸고 온 땅이 여호와를 경배하는 그 세상을 꿈꾸며 가슴 벅차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은 오늘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 한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지난 세대의 수 십 만 명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나님은 그 손에 붙잡힌 한사람의 손에 의해서 이룩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당나귀의 턱뼈 같고 낡은 막대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붙잡았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손에 붙잡혔던 당나귀의 턱뼈나 모세에게 붙잡혔던 지팡이의 꿈은 사람들이 지팡이인 자기를 경배하고 턱뼈인 자기 앞에서 절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 아닙니다. 그들의 소망은 자기를 붙잡아 주었던 주인되신, 삼손이나 모세 그리고 그들을 붙잡으셨던 그들의 손을 능하게 하셨던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 오고가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지위와 명예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는 그렇게 예민하게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이 방치된 사명 앞에서 무감각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비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유의 부족하고 자족하여 도무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못함으로 인하여 내 영혼 속에 밀려오는 가난함에 눈뜨고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려고 다시 한번 우리의 사명에 허리띠를 동여매지 않고도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나태한 모든 삶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오늘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박수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장단에 맞춰도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사명 하나에 마치 장사의 시위를 떠난 활이 과녁을 꿰뚫고 누가 잡아당겨도 뽑혀질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사명에 굳게 박혀있는 사람이 아니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그만 일 때문에 낙심합니다. 그리고 역경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고 내 뜻대로 어려움이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혹시 내가 여기에 잘못 이끌려서 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황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모르는 무감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순수하게 빈그릇이 되기까지 우리의 인격의 잔에 우리의 심령의 잔에 주의 거룩하신 일들에 부으시는 일들을 연기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자기 암시적인 꿈들을 깨끗이 비울 때 그것은 살을 에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버리고 그때 비로소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는 응답이 실존적인 신앙으로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말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교회가 잠들어있던 시대에는 말의 잔치가 무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부끄럽고 내가 비록 연약하고 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이 있지만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기를 소원하고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우리의 꿈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는지 사람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당장 아십니다.
주님은 이사야 시대 때에 수없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외쳤지만 이사야 한사람이 여기 응답했을 뿐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귀에 외쳤지만 그들이 자신은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자 주님의 그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이 나의 꿈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꿈을 기뻐하신다고 하시는 사실을 인쳐 주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비교적 좋은 생각이라는 응답을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 가지고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일을 네 앞서 능히 성취하고 이루리라.”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응답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세상에 이런 일꾼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모두 오직 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에 일꾼으로 등장하셔서 추수하는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이 일념 하나로 부름 받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열린 교회에서 이렇게 생명보다 더 귀한 소명을 발견하고 구원의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즐기다가 그것마저 까먹고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꿈도 없고 목표도 없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획과 목표를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위장하는 그런 공교한 삶 속에서 자신에게 속고 그리고 세상에게 속다가 그렇게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손 하나에 붙들려서 잠을 자면 그 사명을 꿈꾸고 눈을 뜨면 첫 번째 생각이 오직 그 사명이 되어서 앉으나 서나 일어서나 그 사명하나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다가 그렇게 살면서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세상을 호령하고 어두운 악의 세력들을 호령하고 그렇게 우리는 비록 질그릇 같으나 사자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흩어져도 어디에선가 이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부족해도 하나님의 손이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 위대하고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바람처럼 스쳐가는 인생, 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닙니다마는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잡힐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태어난 그 보람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에 우리 자신이 쓰인바 되어서 살아있는 날 동안에 우리는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한없는 기쁨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자신을 비우고 지금도 끊임없이 이 시대를 향하여외치고 있는 주님의 음성,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보낼꼬 하는 이 외침앞에서 “저 여기 있사오니 주님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응답할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전에 행하던 대로
“다니엘이 처소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예루살렘으로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4)
우리들이 알다시피 우리들이 흔히 잘 아는 그런 성경의 내용들이 사실 우리에게 도전을 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학교 때든지 장년 때든지 뭐 신학교 다닐 때든지 그냥 성경을 맨 처음 대할 때 첫 번째 받았던 그 인상이 오래도록 남아서 우리 이해를 좌우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좋은 선생님 밑에서 훌륭한 방식으로 배우지 않으면 그 말씀을 많이 배운 것 때문에 오히려 은혜를 덜 받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흔히 지나쳐 버리기 쉬운 그런 본문 가운데 하나를 우리가 오늘 함께 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리오왕 때에 다니엘이라고 하는 믿음의 사람이 경험한 사건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익히 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오늘 14절을 깊이 생각해 볼 많은 여지들을 우리들은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시대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제 왕족이 아니었겠는가 귀족이 아니었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끌려간 게 주전 605년의 일이었습니다. 586년에 나라가 망했지만 그러나 이제 처음으로 포로를 대량으로 끌고 간 것은 그 전 약 9년 전부터 이미 포로를 끌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포로로 끌려오면서 다니엘은 바벨론의 많은 변화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지켜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때 끌려가서 동화와 같은 간증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상에게 절한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서 왕이 주는 산해진미를 거절하고 채소와 물만 먹은 사건이라던지 여러 사건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제 나라는 바벨론이 다시 망하고 예언대로 메델 사람 다리오가 와 서 나라를 얻게되었습니다. 바벨론이 지나고 나서 메데와 바사, 그리고 나서 헬라, 로마 이렇게 해서 신약성경으로 넘어가게 되죠. 그 때 다리오가 자기 원하는 대로 120명의 방백(도지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 그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다니엘이 그 총리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특별히 다니엘의 인생을 붙드셨던 것이 느껴져요. 다니엘은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라의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서 이 다니엘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이 전의 정권에 일했던 사람들은 다 축출해 버리는 것이 상례인데 이 사람은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총리가 되는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관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어떻게 메데의 총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린 여기서 관심이 있는 것은 정권이 바뀌는 상황에서 어떻게 처세를 하고 그 시대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아서 다음 나라가 바뀐 메데 때에 와서도 여전히 나라를 움직이는 총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그런 그 처세술을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다니엘로 하여금 다니엘 되게 만들었던 신앙의 요소들을 우리들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성령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무엇보다도 신앙적으로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어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대개 신앙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직장에서 승진도 잘 못하고 그렇더라고요. 옛날에 제가 직장 다닐 때도 보면 승진하는 사람들은 신앙이 별로 없고 세속적인 사람들, 술 잘 마시고 뇌물 잘 받치고 그런 사람들이 승진들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착실하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은 늘 말단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너무 신앙이 좋아서 세상에서 직분이 올라가는 것에 대해 신경을 안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니엘은 출세하려고 몸부림을 쳤습니까?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이스라엘이 모두 망해버린 역사 가운데서도 쓰고 싶어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 사명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높이 드신 것입니다.
대개 신앙이 뛰어난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를 얘기하라 그러면은 그 사람들은 대게 직장이 너무 세속적이기 때문에 나같이 경건한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 모든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산 속에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디를 가든지 다 그렇습니다. 오죽하였으면 바울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으려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변화를 외치면서 살아가는 적극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꼭 필요하고 유능한 사람이 된다는 것과 적당히 타협을 해갔고 합리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제가 직장 생활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 꼭 그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세상 사람들하고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방탕하게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되지 못할 때 우리는 소외되기 쉽지요. 그들이 우리를 소외해 놓으면서도 소외시키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삶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굳게 지키며 영향을 미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유능하고 필요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제 경험에 비추어서 이것을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직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성실해야 되요.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지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해요. 꼭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직장을 몇 일 빠지면 직장이 큰일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 때에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그 속에 세우고 그리고 말하자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워낙 유능하고 그리고 직장에 기여하는 바가 크면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신앙 하나로 외곬수로 살아간다고 해도 말하자면 직장 속에서 버틸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되니까. 그래서 꼭 유능한 사람들이 되어야해요. 그런데 예수도 믿고 무능하고 거기에다 성실치도 못하면 그것은 완전히 세상 속에 빛이 아니라 어둠이 되는 것입니다. 유능해 지십시오. 그리고 성실해 지십시오. 주께 하듯이 그렇게 살아가면 그러면 우리가 그 속에서 영향을 미치는 기본적인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직장생활 세미나 때 할만한 이야기들이고 여기서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다니엘은 이방의 땅에 와 차기 대권 후보가 되겠다든지 아니면 열심히 해서 총리에 오르겠다든지 그런 정치적인 야망을 갖고 있던 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민첩하였다고 하였어요. 그러니까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놀랍게 국사를 잘 돌보았습니다. 유능한 사람들이 대개 정직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근데 이 사람은 유능하면서도 정직했어요. 그리고 정직한 사람들은 의외로 무능한 경우가 많아요. 꽉 막혀서 융통성이 없으나 융통성이 있는 사람들은 민첩한 대신에 또 약삭빨라 갖고 정직하지 못한데 이 사람은 정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뛰어나게 국사를 처리하는 능력과 민첩함과 지혜와 용기가 있었고 그러면서도 무엇보다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이 사람을 축출해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시도를 했어요. 정말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가 메데로 넘어가게 되어서 그래서 이 나라를 앞에 있던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나라의 끌려온 포로 중 하나가 그 나라의 수석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국사를 살피는 과정들을 보면서 뭐가 잘못됐는가 하는 것들을 한 번 보면서 그들로 그것들을 갖다가 고쳐서 그래서 그것들을 이 핑계를 잡아서 이 사람을 음해하려고 했지만은 그래서 모든 걸 조사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요즘 말하는 운동권 전력도 없고 총리를 하면서 판공비를 유용한 경력도 없고, 공사간에 깨끗한 삶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사람을 제거할 것인가 생각했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볼 수 없는 특별한 일을 하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박해를 할만한 그런 이유들은 얼마든지 찾아내고 만들 수가 있어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다니엘이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교묘하게 지혜를 동원해서 다리오 왕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리오왕을 위하는 모든 정성의 표시로서 날짜를 정해서 30일 동안 왕을 신처럼 떠받들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절하거나 다른 신에게 빌면 그것은 곧 왕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말하자면 불충성의 고백이 되오니 그들을 주님이 친히 징벌하는 이 포고문에 서명을 하옵소서라고 하니 이 사람은 좀 단순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서 도장을 쿵 찍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을 오늘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다니엘이 이 처소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문을 향해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라고 그랬습니다. 분명히 왕이 서명을 했으나 이 사람은 총리였기 때문에 국사에 돌아가는 모든 일들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국무총리인데 수석 총리인데 이런 문서가 품위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이 다니엘이 왜 제지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어인이 찍히도록 내버려두었을까? 그런 생각 한 번 해 보신적 있습니까?
이 사람은 수석총리였습니다. 그리고 실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은 충분히 알았을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못하게끔 얼마든지 막거나 혹은 회유하거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도장이 찍히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이 국사에 관한 문제였다면 아마 그가 이런 식으로 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사의 이름을 빌렸지만은 국사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이 일이 철저하게 신앙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결국은 이렇게 자기에 신앙을 목조이게 하기 위해서 도전하는 것들이 자기의 신앙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신앙에 대한 도전에 있어서는 어떤 타협에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신앙을 따라서 살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으면 타협할 것인가? 타협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버려두었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에게 있어서 이미 문제가 되거나 협박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면 그는 타협과 회유와 여러 가지 정치적인 방법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는 어인이, 임금의 도장이 그 조서에 찍혀도 그것은 찍히지 않은 것과 다른 것과 아무런 다름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열린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 앞에서 하나님 앞에 무릅을 꿇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삶을 그 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서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결국은 이런 시험을 믿음으로 이기리라 그런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메시지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다니엘은 그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조서에 어인이 찍혔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 왕에 칙명대로 순종을 하지 아니하면 자기 앞에 무슨 환란과 그리고 형벌이 기다릴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모든 내용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어인이 찍힌 것을 알 그 때에 그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의 집은 자기가 이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어느 곳을 봐도 이방의 신들, 그리고 이방 신상들이 온 나라에 가득하였습니다.
오직 자기의 집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적합한 구별된 장소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이 불신앙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을 잃어버리고 세상 속의 물결로 가득 찹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러하였습니다. 세상 자체가 하나님이 만져주시는 그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있기 전에는 결코 이 세상이 구별된 장소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그 집은 이 세상의 파도와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만남이 있는 집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교회도 없었습니다. 제사도 지낼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 훼파되었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그를 만나시지 않으셨지만 그의 기도를 통해서 만나주셨습니다. 이방의 땅 한 가운데 하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교제할 수 있는 자리를 이 다니엘은 간직하고 살아갔다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구별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들일 때는 세상사람과 구별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워서 자거나 영화관에 가거나 놀러가거나 텔레비젼 앞에 나와서 파자마 바람으로 편안하게 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여러분들은 분명 구별됩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 출근하고 나면 그 사람들하고 뒤섞여서 살아갑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별해 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과 썩여 사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그 자리에서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다른 삶을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구별된 삶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맛을 내게 만들어 주고 참된 삶을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처럼 한 주간 동안 똑같이 근심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갖고 고민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술 취하고 방탕한 일들에 자신을 내어 던지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그 모든 악한 것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렇게 행하고 살아간다면 나타나는 모습이 어떻게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존재들입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 하나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근본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들이 아니라 타락한 이 백성들 가운데서 건져내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한 번 구속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사명을 말해줍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감격이 오늘 내게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 하나를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충성된 마음이 오늘은 내게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너를 위해서 어떻게 피 흘려 죽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살아야된다는 걸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말해주는 그것이 사명이예요. 왜 지금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서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여전히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예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명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내가 느끼던 못 느끼던 그건 상관이 없어요. 누구는 충만할 수 있고 누구는 안 충만할 수 있어요. 누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졸아요. 그것과는 상관없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었다. 느끼던 안 느끼던 상관이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느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어요. 그런데 죄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이유에 대한 뚜렷한 사명이 없이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세상일이 흔들면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저리 흔들면 저리 가는 거예요. 신맛이 있는 사람 속에서는 신맛을 내고 단맛을 내는 사람들은 단맛을 내고 쓴맛을 내는 사람들 속에서는 쓴맛을 내고요. 독특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조서에 어인이 찍혔어요. 세상의 환경이 그를 기도하지 못하도록 밀었어요. 그러나 그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기도했습니다.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 예루살렘이 모두 훼파되고 모두 망하는 가운데서 주께서 자기를 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오게끔 만드셔서 정권이 바뀌는 위기 속에서도 정치적인 생명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오늘 이 메데 나라에 총리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만들어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셔서 나에게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과 부귀를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 오늘 이 메데에 이 정권의 이 자리에서 총리가 되게끔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거예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의 거친 파도와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세상의 죄와 더불어 싸워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피 흘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겠어요? 사명이 없다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고 피 흘려죽으신 것은 우리가 불쌍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구원하게 하신 다음에 이제는 옛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셔서 새롭게 부르신 거예요. 사명이 무엇인가요? 복음 들고 물 넘고 산 넘어서 해외로 선교사 나가는 것만이 사명이 아닙니다. 여기서서 이렇게 목회를 하는 것만이 사명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희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하신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은 너희들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게 하신 그리스도의 기이한 덕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너희를 불러내신 것이다.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구원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주는 것처럼 사명도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하고 신앙의 관점 자체가 너무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언제까지 자기가 두드리는 장단에 하나님께서 춤을 추시기를 바라는 이런 신앙들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너 좀 바뀌어라 이렇게 말을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 제발 좀 나를 향해서 태도를 바꾸십시오 라며 하나님을 고치려는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 이 다니엘이 이렇게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어주는 참된 힘은 바로 하나님과 거룩한 교통을 할 수 있는 구별된 자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속히 똑같아집니다. 무엇으로 여러분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보다 저보다 훨씬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습니까?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독특한 맛은 그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히고 그리고 믿음을 향한 핍박이 물 밀 듯 밀려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돌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자기 집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 처소가 있었고 간구하는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변화를 얘기하면 변화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변화가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태도가 그렇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당에 오늘도 성경, 찬송을 갖고 나오는 사람을 꽉 붙잡고 한 번 물어보십시오. 오늘 기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무슨 기대가 있습니까? 무엇을 기대하면 교회를 나오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오히려 자기의 인생을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이런 신앙의 태도들을 근원적으로 고치고 바꾸기 전에는 우리들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갈 때에 삶의 긴장도 있고 도전도 있고 성취도 있는 것입니다. 무슨 성취입니까? 이 세상에서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아무 기대도 없이 성경, 찬송 들고 교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대학 붙고 승진하고 돈 벌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다니엘에게는 그렇게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정치판은 인간의 모든 악함이 집결된 곳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얌전한 사람들이 입 열고 험악한 말하는 것을 텔레비젼에서도 많이 보셨죠. 그게 바로 인간의 죄된 성품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정치판입니다. 그 속에서 수없이 험난한 세월을 지내온 이 말하자면은 다니엘이 오늘도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주님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자기의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한 번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어두운 시대에 유독 다니엘을 붙잡으셔서 사용하셨던 이유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니엘에게 미래에 될 위대한 일들의 계시를 알려주신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으로 들어가서 그가 한 일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릅을 꿇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좀 복잡하게 되어 있지요. 우선 말입니다. 그는 들어서서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항상 창문을 열어 두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해주나요? 다니엘의 인생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무엇을 꿈꾸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다니엘의 모습을 보고 읽은 사람이 우리 믿는 사람이 아니라 만약에 다니엘과 함께 정치를 하면서 살아왔던 그 바벨론과 메데의 사람들 그 메데의 친구들이었다면 가슴이 섬찟한 사건 아니였습니까?
그 사람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리오왕 이후에는 자기보다 높은 자가 없는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부귀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벨론 시대로부터 혁혁한 공신으로 살아왔던 이 유능한 행정가요 정치가인 이 다니엘에 대해서 이제 그를 많은 백성들과 그리고 많은 역사가 다니엘 하면은 모두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국가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 십년 전에 망해버린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이게 메데 사람들이나 아니면 이 바벨론 사람들이 생각하면 가슴이 섬짓한 이야기 아닌가요? 세월이 그렇게 수십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다니엘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모두 갖고 있었는데도 그는 그런 것들로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예루살렘을 향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 갖지 않은 빈 잔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갖지 않은 배를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채워지고도 만족할 수 없는 그 빈 공간을 마음속에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 다니엘이 지금 수 십년 전에 망해버린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그토록 열어두고 그리고 국사를 보면서 하루에 세 번씩 그 집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무릎을 꿇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던 그 사람들이 들으면 가슴 섬찟했을 잊지 못할 예루살렘을, 잊지 못한 예루살렘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에 가면은 대통령이 될 것입니까? 왕이 될 것입니까? 여기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누리고 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지금 그가 그리워하고 있는 예루살렘은 어떻게 되었어요? 이방인들에게 다 짓밟히고 제사도 그치고 그럼 말하자면 비참한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동족들은 포로로 끌려갔고, 그런 황폐한 예루살렘이 안식년에 마치 풀이 길같이 자란 것 같은 그런 황무한 상태가 되었는데도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것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이 땅에 성 자체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관계를 맺으셨던 언약의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거죠. 다른 곳에서는 만나고 느낄 수 없는 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에 대해 증거를 풍성하게 갖고 있던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살아계심을 확연하게 들어보여 주시는 그 어떤 곳보다 위대한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그리워 한 것은 곧 예루살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을 그리워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그는 틀림없이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다시 한 번 영광을 되찾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이 아름다운 음식과 훌륭한 지혜와 많은 재물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혁혁한 권세가 그를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제 삼의 그리움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열려진 그 창에 무릎을 꿇을 적마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위해 목놓아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참된 부흥과 예루살렘의 참된 재건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부서진 예루살렘 성이 다시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문으로 치장되고 무너져 벽돌이 흘러내리는 무너져 내리는 예루살렘 성벽들이 다시 장엄하고 탄탄하게 쌓여지고 성문에는 마치 잔치집에 사람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말하자면 훌륭한 성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한 번 예루살렘 성 한가운데서 번제에 불꽃이 피워 올려지는 그 날들을 그리워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루살렘이 그렇게 되지 않고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버리셨는데 예루살렘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지를 못하면 그 교회는 지옥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지옥입니다. 그것보다 괴로운 곳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에 나왔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도 없고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연보를 드리고 헌금을 해도 기쁨이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섬기고 봉사를 해도 마음에 참된 즐거움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가 없을 때 그 교회는 지옥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외치는 이유도 이 곳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예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이 모인 백성들의 그 모임과 그 교회를 기뻐하실 때 그 교회는 천국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그걸 만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나요? 인간들이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열심을 품지 않으면 교회가 그렇게 말하자면 지옥과 같은 곳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을 품으십시오. 신앙에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러면 어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마음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것입니다. 마음이 예루살렘에서 떠나는 순간 그 사람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싸웠던 그 이유는 그런 마음을 갖고 관심도 없이 성전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늘도 아니였고 땅도 아니였고 오직 예루살렘을 향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창문은 항상 열려있었습니다.
열려진 그 문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을 때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무너진 예루살렘이 눈앞에 들어오는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겠습니가? 주님 내일은 한 등급 더 승진이옵나이다를 기도했겠습니가? 무너진 예루살렘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욕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러지요? 예루살렘을 향하여 소망을 품고 그곳을 향하여 열린 문을 갖고 그 교회 소망을 갖고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합니까? 교회는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여러분들이 이 곳에 올 때 여러분들이 누구인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그 분의 자녀였구나. 극장 구경가서는 그런 것을 잘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바쁘게 살 때는 그런 것을 잊어버립니다. 말로는 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 와서 그 흘린 보배의 피로서 날 속량했으니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됩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게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 예배를 통해서 그가 누구인지를 확인시켜 줄 수 있다면 세상은 변하고 교회도 변해요. 근데 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막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살고 주일날 교회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만약에 저를 포함해서 아니면 여기서 느낄지 모르지만 한없이 교회 생활이 답답하고 교회 나오는 것이 지옥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면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생각해야 되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버렸는데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버리지 않았어요.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을 열고 주 앞에 막 눈물로 간구했던 것입니다. 계속 기도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이산가족 때문에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동포들의 생각 때문에 안타까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근본적으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던 그 하나님의 은혜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교회의 관계는 여러분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냐고 하는 것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가까우니까 가까운 슈퍼에서 장 받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거나 하나 택해서 그래서 그냥 운명처럼 왔다리 갔다리 하는 그런 것들이 교회 생활일 수 없어요.
(예화) 동기 목사님을 만났는데 수원, 인천 등 저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예배에도 늦지 않고 마음 에 교회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그리고 모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자부심을 갖지고 있다. 그 런데 교회 바로 앞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고민도 없고 목마른 것도 없고 그냥 시계바늘 처 럼 왔다 갔다 하며 살아서 답답하다는 이야기. (그들은 자기네 교회가 크고 유명하니까 나 왔지 이 교회에 나올 필연성이 없는 사람들이며 언제든지 다른 교회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었다.)
그런 것들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그냥 이렇게 헤하고 살다가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힘차고 생기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공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이 사람은 자기의 수석총리의 지휘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 메데나라에서 매장이 되어서 수 십년 동안 자기가 정치가로 쌓아왔던 그 모든 명예와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그 뜨거운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귀한 것들을 신앙 생활을 위해서 말하자면 희생하면서 정성을 기울이는 마음을 기울이는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수없이 기다려보십시오. 하나님의 변화는 감처럼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와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사람을 찾으신다. 누구를?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나요. 그렇지 않으면은 굳어가는 거예요. 딱딱하게. 세월이 흐르면 돌같이 단단해져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그 창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우리도 유능하게 삽시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모이라고 하면 맨 말단 직원만 모이는 그런 회사가 되지 말고 사장부터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능하게 삽시다. 그리고 승진도 합시다.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무슨 자랑일 수 있겠습니까? 못사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처럼 가난한 것도 자랑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하고 알뜰살뜰 모아서 잘 삽시다. 모두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야말로 이 다니엘은 형통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야말로 이런 정치적인 운세를 사람들은 부러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이 하나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는 오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에 하나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그냥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이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다니엘을 택하셔서 계시가 끊어진 그 어두운 시대에 이 다니엘에게 마지막 날에 되어질 그 위대한 일들에 대한 계시를 장엄하게 보여주셨어요.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을 메데 땅에서 만나신 거예요. 그리고 그에게 역사와 교회의 미래를 조국의 미래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기울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점점 우리의 마음은 강팍해져 가고 굳어져 가서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무릅을 꿇고 기도했다고 하였으니까 이것은 의식 속에 지배하고 있는. 여러분 하루에 세 번씩 동일한 제목으로 기도만 한다면은 그것이 그의 의식을 완전히 지배해 버립니다. 그 의식을 지배해 버려요. 정말 지배해 버립니다.
(예화) 옛날에 독특한 제자훈련을 했는데 자기 기가 끝나기 전에 다음 기에 신앙이 약하거나 실의 에 빠져있는 사람을 전도해서 데리고 와서 그를 훈련시키는 동안 그들의 자녀를 자기가 보 살펴주고 훈련받는 그를 위해 하루에 다섯 번 씩 기도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놀라운 간증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
우리가 한가지 제목을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그리로 돌아가서 거기서 기도를 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이미 다니엘의 인생에 있어서 예루살렘에 대한 의식이 그의 인생을 철저하게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을 자나, 눈을 뜨나, 앉으나 서나, 먹으나, 누우나, 깨나, 자나, 늘 그 속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그 의식이 살아 역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식이 오랫동안 그 의식을 갖고 그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진정한 회복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루살렘의 회복이기도 하고 자신의 회복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제는 전에 행하던 대로... 여건이 바뀌었습니까, 안 바뀌었습니까? 아직도 왜 몇 주 동안 이렇게 대답을 안 하십니까? 여건이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다니엘이 하나님을 믿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여건이 오늘 이 아침에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의 여건이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환경이 상황이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바뀌었습니다. 어제까지는 아무리 기도해도 잡아가는 이가 없었지만 오늘 다리오왕이 서인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누구든지 입을 벌려서 기도를 하면 사자굴에 집어 넣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고신측에서 나온 신문에 전도사의 순교 일기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공산군이 처들어와서 공산군이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투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신앙의 여건이 바뀌었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는데도 전에 행하던 그대로 그 걸음으로 그대로 걸어갔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인생에는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그런 변화가 어떤 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도 옵니다. 그것에 따라서 사명을 버렸다, 갖었다, 했다, 말았다, 믿었다, 말았다, 다녔다, 말았다 한다면 결국은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까?
여러분 이 2년 동안에도 여러분의 신상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일어났습니다. 한 예로 두 부부가 교회를 다니다 쌍둥이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직장에서 매일 말단으로 기계적인 일만하다 승진을 하고 수많은 부하들을 돌아보는 쪽으로 상황이 변한 이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에 행하던 대로... 왜 그렇습니까?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이 사건, 그리고 포고문이 전국에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로써 말하자면 비상조치, 특별조치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뭐가 바뀐 것이 있느냐? 임금이 절하는 자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사자굴에 집어넣겠다는데 그것이 무엇이 바뀐 것이냐? 그것들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 하나 하나가 다니엘로 하여금 자기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여야 할 예전에 받은 사명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면 다니엘은 그 수 십년의 세월동안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얼마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을 예로 들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에 행하던 그대로의 신앙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이 사건이 국가적으로 큰 사건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명이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는 집에 뚜껑을 열고 한 번 봅시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려진 그 창에서 무릎 꿇고 잠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계속하겠다는 의지 하나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쌓아왔던 정치적인 명성을 하루 아침에 물거품처럼 날려버리고 역적이 되어서 사자굴 속에 집어 던지어져 비참하게 뜯김을 당하고 죽어야 되겠다. 그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 과연 합당한 사고였습니까? 바보같은 사고입니다. 어리석은 사고입니다. 세상 사람의 눈이면 다니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무릅을 꿇고 그 오랜 세월동안을 기도해서 예루살렘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나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명을 갖고 있었지만 사명이 완수되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것 같았으나 다니엘에겐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알았어요. 내가 이 사명을 작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나도 작다고 하실 것이다. 만약에 이 메데 땅에서 다니엘이 누구를 의지하겠어요. 하나님밖에 의지할 사람 없잖아요. 의지할 분 없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다니엘을 작게 만들어 버리시면 어떤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여호와의 신이 동행했으나 그러나 그 여호와의 신이 버렸던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삼손과 같은 사람, 사울과 같은 사람, 엘리와 같은 사람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위대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버리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집이 큰데 사람이 안 살면 그리고 거미줄이 끼면 흉가가 됩니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 흉가하면 그 흉가가 조그마한 흉가가 없습니다. 흉가는 대부분 큽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시던 사람을 하나님이 버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악신이 임한 사울과 같은 이는 정신병자, 귀신 들린 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삼손과 같은 경우, 이방의 계집의 무릎 아래서 놀아나는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고 이스라엘의 시시비비를 판단해야할 사사로서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그 사람이 짐승이 돌리는 연자 맷돌을 돌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이 문제이냐 하면 언제나 그런 하나님의 시각에서 인생 문제를 바라보며 자기에게 맞겨진 사명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분히 세상의 시각에서 신앙의 사명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작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정말 외로움 속에서 이 2억만리 먼 곳에 끌려와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긴 세월동안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셔서, 이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음해와 모함이 있었어도 그 난관을 헤치고 하나님은 다니엘을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사람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위한 작은 사명을 큰 것으로 알고 전에 행하던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만 전에 행하던 대로 했던 것이 아니라 정권이 바뀔 때 그 때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였습니다. 느부갓넷살 왕이 죽고 또 다른 왕이 자리에 올랐을 때도 전에 행하던 그대로... 벨사살왕 때에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다리오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명을 그에게 주셨고 그에게 주신 사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큰 인물이 되었던 것은 이 작은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려있고 이 세상의 권력과 압박과 압제와 협박도 가로막을 수 없는 예루살렘을 향한 창, 이것을 늘 열어두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도 변화가 아직 없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예루살렘의 진정한 회복을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죽어간 그 동족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이 다니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 이 사명이 그로 하여금 이 다니엘이 다니엘 되게끔 만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다니엘이 다리오 시대 때에도 또 다시 총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습니다. 또 그 자리에 올라서 세 총리 가운데서도 뛰어난 수석 총리가 되었다는건 더 큰 사건이었습니다. 나라에 큰 뉴스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고 동시에 이 다니엘이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이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세상적으로 볼 땐 큰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다니엘의 눈에는 그것이 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사명을 향해, 두고 온 예루살렘 , 무너진 예루살렘 , 물론 자신은 이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으나 짓밟히고 고난받는 동포와 교회를 바라보며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그 사명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를 감동시키기보다 짐이 되기 쉽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에게 언제나 놀라운 사건, 뚜렷하고 특징적인 사건이 되어서 우리를 흥분시키거나 우리의 모든 관심을 그 하나에 쏟아 붓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쉽게 그 사명을 저버리고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의 신앙 생활을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슨 직분으로 하나님을 섬기든지 그 속에서 사명이 넘쳐야 합니다. 저 같은 것이 무엇을 하겠습니까하며 교회에서 겸손한 이들이 정말 답답합니다.
오늘 다니엘을 보십시오. 죽음을 무릅쓰고 전에 행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예루살렘이 광복을 맞이했던 축전이나 예루살렘에 찬양이 들려온다는 영적인 회복도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결국 예루살렘의 회복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었어도 그가 하나님 앞에 자신에게 맡겨진 분깃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 환경이 변해도 그 환경과는 상관없이 전에 행하던 그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던 그 신앙은 오늘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에 행하던 그대로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3. 오해가 빚은 불충성 1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마25:14-20)
성경 중에서 유명한 장은 장마다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고린도 전서 13장 같은 것은 사랑에 대해서 많이 나오니까 사랑장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또 그 히브리서 11장 같은 경우는 믿음에 대해서 워낙 훌륭한 교훈들을 담기 때문에 믿음장이라 말합니다.
오늘 이 25장은 특별히 마지막 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말세의 교훈을 담고 있는 장입니다. 우리는 몇 주전부터 주일 오후 예배마다 사명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비유를 통하여 이제 우리가 이 사명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선 말씀하신 것은 천국은 마치 이와 같다. 그러면서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 얘기를 하신 다음에 여기서는 천국이라는 것은 마치 주인이 타국에 갈 때에 자기의 소유인 재산을 종들에게 맡기고 가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세 종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종들에게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한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달란트는 금화의 명칭입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돈의 가치도 변합니다. 그 가치를 따지는데 무리가 있겠지만 한 십여 년 전에 나온 책에 보면 한 960만원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 돈을 달러로 환산하고, (달러를 우리나라 돈으로 이중으로 환산해 보면 한 달란트라 하는 것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라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일백 데나리온이라 하는데 그것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하루 품삯이니까 일백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받는다면 500만원 정도를 받은 것이니까 적은 돈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적은 돈이 아니니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렇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달란트를 나눠 준 것은 누구의 마음이었냐 하면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의논을 해서 너 어느 정도면 되겠느냐? 나는 다섯 달란트만 주십시오, 그래 그럼 너 두 달란트 가져라 이렇게 해서 나눠 준 것이 아니라 종들과 타협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인 마음대로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이렇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달란트라는 헬라이 말이 나중에 영어로 들어가서 탤렌트로 변합니다. 이게 재능입니다. 오늘도 여기에 보면 재능을 따라서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이렇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은 선교를 나가서 순교의 길을 걸어가고 교회에서 목회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정신을 번쩍 차려야 됩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그 종들에게 각각 맡겼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일을 맡깁니다. 어떤 사람은 훌륭한 재능을 타고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적은 재능 밖에는 타고나지 못합니다. 확실히 어떤 사람은 유능해서 다른 사람이 열흘 동안 해야하는 일을 삼일만에 마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또 무능해서 다른 사람이 하루에 끝낼 수 있는 일을 삼일 동안 해도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달란트도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잘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노래만 하라고 하면 차라리 자기를 때려 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 다닐 때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여직원 하나가 저는 도저히 부를 수 없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종류와 양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뛰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아주 뛰어나게 잘 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 못하는 대신 다른 것을 잘 합니다. 이런 많은 재능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또 재능만이 달란트가 아니라 기회도 달란트입니다. 기회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사람에게는 선교사로 나갈 기회로 주시고 어떤 사람은 목회할 기회를 주시고 또 어떤 사람은 교사로서, 구역장으로서, 꽃꽂이를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달란트입니다. 종이 주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을 볼 때는 그것이 달란트지만 그 의미는 그 돈이 있었기 때문에 주인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장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달란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태어나면 사람들에게 재능을 주십니다. 또 기회를 주십니다. 언제든지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주십니다. 때로는 큰 기회를, 때로는 작은 기회를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 기회를, 재능을 활용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만들고 열매를 맺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훌륭한 재능을 받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받지만 주신 재능과 기회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잘 살아가며 내 생활에 있어서 주님이 주신 것을 통해 많은 열매와 결실을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그 은혜와 은총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며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지혜를 주시옵소서 라고 했더니 하나님이 감탄했습니다. 네가 그 많은 왕들의 영화를 구하지 않고 재물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으니 내가 그 지혜 위에 그 모든 것을 얹어 주리라 하셨습니다. 지혜도 받고 놀라운 부귀와 영화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온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누리던 그 화려한 영광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용되는 것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냐 아니면 세속적으로 살 것이냐는 자기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주위에 강성한 나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들과 적대 관계에 있어서는 나라가 발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그 이전에는 없던 놀라운 지혜를 짜내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이방 나라들 전부와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의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궁중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믿음으로 활용하지 않고 세속적인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회를 주님이 주셨다고 해서 그 기회 속에서 성공하는 것까지 주님이 보장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를 주님이 주실 때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기회를 주님이 주셨고 그 기회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갈 때 그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만한 놀라운 결실을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일단 어떤 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선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고 선택하고 들어서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밀어주십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 속에도 하나님이 원하는 뜻대로 바로 살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선택을 자기가 해 놓고 그 다음에 사건은 자기가 저지르고 뒷감당은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하라고 한다면 용이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선택 자체가 잘못 되어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길을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찾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늘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문제 옆에 해결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재산, 잃어버린 건강, 우리가 잃어버린 손해 이런 것들을 찾는다고 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아야만 거기서 해결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도 주고 재물도 주셨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고 또 그것을 받을 때에 그것을 마음으로 사용하고 활용하여 결국은 하나님께, 솔로몬에게 주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돌려야만 주님이 그 주신 모든 것들의 목적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도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을 때 그 주신 것들을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훌륭하게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그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입니다. 신앙.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오늘 이 세 명이 주인으로부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렇게 달란트를 각기 받았습니다. 모두 받았지만 세 사람 모두 똑같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받자마자 즉시 나아가서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돌아왔을 때 열 개의 달란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주인에게 내 놓았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나가서 열심히 장사하여 네 달란트를 만들어서 주님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꼬깃꼬깃 쌓던 돈을 풀러 놓는데 주인이 보았을 때 한 달란트 준 것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인이 한 달란트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 준 것을 가지고 장사한 사람들은 열매를 맺었고 그것을 그대로 깊이 묻어둔 사람은 그 하나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주인의 것을 그대로 다시 돌려 드렸습니다. 요즘처럼 남의 돈을 떼어먹고 사기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는 이것만해도 참 감명 깊은 이야기입니다. 내 것이라고 우기지만 않아도 대단히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이것을 통해서 주인이 크게 진노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천국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것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주신 그 은혜 이상의 것을 남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명을 낳습니다. 사명은 충성된 일꾼을 부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구원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하시고 어느 지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귀한 은혜를 주셨는가를 깨달을 수 있는 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그 은혜가 크든 작든 그 은혜의 종류가 무엇이든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를 따라 살아 나갈 때 그 은혜는 배가되고 그 은혜를 따라 살아 나갈 때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살게 되고 이렇게 노력하며 주를 위해서 살 때 작은 것이 큰 것을 낳고 큰 것이 더 큰 것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일을 위하여 수고할 때 충성할 때 많은 것을 맡기시는 겁니다.
저를 가르쳐 주신 신학교 스승이 한 분 계셨는데 옛날에 남대문 교회를 목회 하셨던 분입니다. 아주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일제 시대 때부터 예수를 믿었던 참 귀한 분이었습니다. 아니, 그 시절에 중절모 쓰고 지팡이 들고 가방도 없이 신약 성경 작은 것 하나 들고 신학교에 강의를 하러 나오셨습니다. 걸음도 부자유스러운 가운데 목회서신을 가르치겠다고 들어오셨습니다. 학생들이 여기가 경로당인가 젊은 교수가 들어와야지 할아버지만 들어온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첫 시간 저는 그만 완전히 사로 잡혔습니다. 기운이 없으니 의자 하나 달라고 하시고 앉으시더니 다리를 탁 꼬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고 신약 성경 낡은 것 그 얇은 걸 펴놓고 디모데 전서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발음도 좋지 않아서 우리는 모두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받아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심금을 울리는 설교는 처음이었습니다.
강의 시간이 설교 시간이었습니다. 디모데 전서 1장 1절부터 풀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학기 끝났는데 10절인가 하고 끝났습니다. 여섯 살 때는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어떻게 동네 사람들이 고목 앞에서 매일 제사를 지내느냐고 말입니다. 어린 아이가 심령이 너무 상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저 고목 나무를 박살을 내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런 어느 날 저녁에 벼락에 맞아 고목 나무가 완전히 박살이 났습니다.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린 겁니다.? )여섯 살짜리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 겁니다.
이 분이 옛날에 너무나 가난하여 초등학교 소사를 했습니다. 학교를 못 들어가서 청소도 해주고 화장실도 푸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 하나는 확실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소사로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했는지 교장의 눈에 띄었습니다. 소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 아이는 목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그 교장은 일본인이었는데 그 아이를 일본으로 보내어 자신의 돈으로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곳에서 신학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작은 달란트, 작은 기회 그리고 가장 작은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변함 없이 하려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이고 그 달란트지만 그것을 활용하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달린 겁니다. 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돈 많고 신앙 없으면 타락합니다. 신앙이 훌륭하고 돈 있으면 정말 훌륭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있고 믿음이 없으면 교만하고 결국은 지식으로 밥 벌어먹고 살다가 죽거나 더 신앙이 없고 악해지면 감옥에 들어가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법 모르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갑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그 아이가 믿음을 가지고 함께 자라가지 않으면 앞으로 그 좋은 머리 가지고 나쁜 짓 밖에는 하는 겅 없습니다. 사람이 성실한데 신앙이 없다면 미련해집니다. 요령도 모르고 꾸준히 하다 꾸준히 빗나간 길로 계속 소 같이 걸어가는 겁니다. 신앙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달란트를 바로 감당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수련회?)가 가까워 옵니다만 사람들이 은혜 받기 위해서 애를 쓰며 밤늦도록 기도하고 금식을 합니다. 그 은혜를 받아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그 은혜를 받아서 발복을 합니까. 하늘에서 돈이 쏟아집니까. 명예가 올라갑니까. 그게 아닙니다. 왜? 바른 정신을 가지고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느낍니다. 순간 순간마다 주님이 나에게 훌륭한 은혜와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신앙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시고 나에게 놀라운 재능을 주시고 기회도 주시고 젊음도 주셨지만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아진다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나 하나님을 높이는 줄 압니까? 예수님 잘 믿은 것 같으나 어림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건져 주는 것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자녀도 마찬가지며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신앙이 들어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달란트를 주신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에게 충성하도록 말씀하시는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모두 자기 인생인 줄 알고 함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여호와를 기억하라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든지 행한 그대로 하나님이 그대로 심판하시리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리고 남에게 없는 재능과 기회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신 건 주님이 주셨어도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 순간마다 그것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매일 매일 느껴야 합니다. 그걸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업을 한다, 그거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직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으며 사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 사실을 늘 의식하며 사는데 신앙이 없어는 의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셨는데 주님이 주신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에 가서 제물로 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민했겠지요. 고민의 깊이만큼 불신앙의 깊이가 커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생각했습니다. 내가 죽은 자와 방불?하고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태를 가졌을 때 주님이 기적으로 이 아들을 주셨으니 이 아들을 나에게 주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들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자 그는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도 신문을 보니 어떤 사람이 강원도에 있는 어떤 여의사가 42억을 강릉대학에 기증했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여의사가 하는 말이 재미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빌려쓰다가 죽을 때 세상에 다시 돌려주는 것이 돈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90%이상은 거의 크리스찬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기회와 모든 재능과 모든 소유가 바로 그러합니다. 신앙이 없으니까 안 느껴지는 겁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안 느껴지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깊이 인식한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몸으로 섬기고, 물질로 섬기는 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여러분 누가 자기 지갑에 있는 돈을 쓰면서 아이구, 이거 주님 것인데 이렇게 마구 써도 되나. 시간을, 이거 주님 것인데 이렇게 마구 써도 되나. 청교도인들은 화투나 카드놀이를 안했습니다. 그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시간 낭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불충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멍하니 앉아서 시간 보내는 것 이것 모두 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하게 하는 그 힘이 신앙입니다. 신앙에 깊이 들어가면 자기의 것을 부인합니다. 마지막에는 나의 생명도 내 것이 아니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선한 청지기. 말로는 주님,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합니다. 그 주님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다스리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이라는 호칭을 불렀던 사람들은 모두 노예들입니다. 노예들이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인을 부를 때에 주님! 자기의 소요와 자기의 생명을 모두 주관할 수 있는 그 주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부를 때마다 상기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께 의탁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별로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어느 신앙이 아주 신실하신 분이 기업체를 꽤 큰 것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때 불황으로 모든 기업이 어려움을 겪을 때, “집사님! 요즘음 모두 부도나고 난리인데 어려움 없으십니까? 걱정은 안 되십니까?” 그랬더니, “망하면 주님이 망하지 내가 망합니까?” 자기는 이거 해봐야 회사를 굴려서 일찍 수입을 번 다음에 그 중에서 자기들 생활에 필요한 돈을 종업원 다 나눠주고 나머지 돈은 모두 사장 것인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종업원 다 나눠주고 자기도 살아야 되니까 자기 생활에 필요한 돈을 하나님께로부터 월급 받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재투자하거나 저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렴 하나님 사업인데 망하면 하나님 망하는 것이지 자기는 어디간들 이 월급 못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완전히 배짱입니다.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자유가 있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사실 살리든지 죽이든지 주 뜻대로 하소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생명으로부터도 자유로와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말기 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도 아프니까 간호사 출신이 사모님이 그랬답니다. “목사님 너무 아프지요? 아파서 어떻게 해요?” 목사님이 침대를 붙들고 고통을 참으면서 “원래 이것이 성경이야. 인생이 원래 이렇게 아픈 거야. 내 생명 주신 이가 주님인데 또 취하시는 이도 주님이지.”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모든 인생에 대한 모든 불안은 하나님의 것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 적이라고 생각하면 이제 불안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모든 불안의 원인은 바로 자신의 기회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이양해드리지 못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새 힘을 얻기를 원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머리로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내 인생이 주님의 것이라고 아는데 아무리 살아봐도 이상하게 삶은 나를 위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생인데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 나를 위해 살려고 하니 이것이 신통한 열매가 맺어질 리가 없습니다. 늘 실패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하나님 앞에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좀더 심하게 얘기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과 자기의 모든 기회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까지라도 하나님 앞에 다 드리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 그 기도 속에 나타나는 그 수많은 요구들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 승진하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주님이 분명히 물으십니다. 그럼 덕보는 것이 누구냐? 내가 덕보는 것이 모두 주님 덕보는 것이지요. 그럼 너는 내가 고난받을 때 너는 고난받았느냐?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남는 것이 있을 대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고 주님의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주님 것이고 고난받는 것이 있을 때는 언제나 주님은 주님 것이고 나는 나이고. 목회자들 이야기가 교회를 건축하고는, 이번에 간 교회도 교회는 잘 건축했습니다만, 교인들 잃어버린 교회가 많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교회 건축한다니까 슬슬 빠지기 시작한답니다. 여러분! 자기에게 주신 기회와 인생과 소유의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은 자유해집니다. 그들의 기도는 사심이 없습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무엇을 꿈꾸십니까. 오늘 이 종들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종들은 나가서 열심히 장사했습니다. 요즘 말하자면 좌판 벌리고 장사할 때 단속하는 경찰에 쫓겨다닐 때도 있었고 경찰서에 끌려가서 구류를 살았던 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왜 여기서 좌판을 펴놓고 떠들고 있느냐고 모욕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수고와 고통없이 그렇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 다섯 달란트를 주인 것이라고 내 놓고 이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이라고 내 놓았을 때 이것은 그 사람들의 피눈물나는 오랜 세월에 고난이 깃들여 있는 결정체였습니다. 그것은 그냥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돈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일주일 동안에 가서 부동산 투기를 해서 받치고 사기를 쳐서 받친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돈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직하게 일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서 번 돈은 그건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돈입니다. 성스러운 돈입니다. 그 속에 돈을 벌기 위한 모든 눈물과 모든 자존심 상하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받치는 것입니다. 헌금은 예배 순서 속에 넣어 올리는 것이 맞습니다. 이제 헌금 많이 넣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 바깥에 통 안 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올 때 툭 집어넣고 오기에는 이게 너무 귀한 시간들을 축적한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았던 종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을 남기기 위해서 그들은 그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기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때로는 눈물 흘리고 때로는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시험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면서 오직 주인을 기쁘게 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앞에 지금 내 놓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바로 헌금 시간이란 말입니다. 다섯 달란트,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인님을 위해서 내가 번 것입니다. 얼마나 성스럽고 거룩한 시간입니까. 그러므로 헌금은 예배의 순서 시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 달란트 맡았든지 다섯 달란트 맡았든지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헌신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큰 실패를 경험한 종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이었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뭘 이야기했습니까? “나는 당신이 귿은 사람이어서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내가 모으는 줄을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내가 땅에다 묻어두었나이다.” 이것은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오해가 주인에 대한 불충성한 삶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큰 설교를 듣고, 성경을 통해 배우고, 공부를 통해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수없이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오늘 이렇게 수많은 문제에 얽혀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지식만이 그로 하여금 그 주인의 뜻대로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잘못 안 것입니다.
지금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잊어버린다든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이것을 가지고 주인이 올 그 날을 대비하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가 맺히면 그 열매로 인하여 주인은 한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믿음이었고 주인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산 모든 사람들에게 달란트를 맡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충성스럽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당신을 향하여 그 온전히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이 없으면 그 마음에는 범사에 정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이리 저리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라고 하는데 자기 인생을 모아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삶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변함 없는 것, 정결한 것. 거룩한 것,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모두 충성입니다. 왜 하나님 앞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경박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주님을 위해서 싸우고, 진지하게 씨름하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매달리고, 마음 속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없는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한 충성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소비하고,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의 어떤 모든 것들을 쏟으며, 피를 쏟으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세속적인데 그 세속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충성스런 기도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충성과는 거리가 멀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의 그 마음 속에 하나님과의 깊고 오묘한 교통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특이한 교통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더 깊이 알고 하나님의 광대무변한 성품을 알았던 모든 사람과 이 시인과 성경을 기록한 모든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연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선교지를 누비면서 악한 마귀가 들끓는 목회지에서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피흘려 싸우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배웠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갔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맡고 최선을 다해서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도 하나님 앞에 착하다고 칭찬을 못 받고 또 하나는 자기의 신앙도 올바르게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주일학교를 한다든지 고등부를? 한다든지 청년부 리더를 한다든지 구역장을 한다든지 모든 것을 한다고 칩시다. 일도 제대로 못하고 영혼들에 대한 관심도 없으면서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충만함이 솟아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충성에 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일 뿐 진짜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충성스러운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감지가 되지 않습니까. 대충 먹고사는데 나를 위해 사는데 그것이 심각하겠습니까. 그러나 한 순간 한 순간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할 때마다 우리들은 수많은 대적들을 만납니다. 그 속에 강한 고통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전도사들이나 부교역자들이나 선생님들이나 집사님들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직분을 맡아서 신앙이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 속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면서 자신이 변화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습니까?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됩시다.
4. 오해가 빚은 불충성 2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마25:21-22)
지난 시간에는 그 한 달란트 맡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있었는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을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 그것이 정말 적은 돈이 아니 엇었는데 그 주인으로부터 그 달란트를 맡고 충성을 다하여 마지막 주인 올 때에 귀한 칭찬을 받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집중적으로 살펴봤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 깨닫게 된 것은 그 한 달란트 맡은 종의 그 실패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고 주인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주인의 성품에 대한 무지가 그로 하여금 불충성한 삶을 낳게 되었다 그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듯이 열심히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신학교에 있으면 전도사님을 소개 시켜달라는 전화가 많이 옵니다. 그래서 근데 사실은 잘 소개를 안 시켜 줍니다. 신빙성 있게 소개를 안 시켜주면 두고두고 원망을 할 테니까 근데 전화가 왔습니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전도사 한 사람만 소개 시켜 주십시오. 어떤 사람을 원합니까? 총각이면 좋겠다고 합니다. 총각이면 아무 총각이나 됩니까? 그랬더니 총각이고 그냥 열심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근데 여러분 사실 말입니다. 열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열심을 받으셔야지 만 그것이 충성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무조건 열심히 산다고 해서 열심히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 앞에 열납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또 다시 이야기하면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참된 신앙이 동기가 되어서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열심히 살아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충성이 되는 것이지 사람으로 하여금 어느 한 가지 일에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은 반드시 신앙만은 아닙니다.
다른 여러 가지 동기도 우리에게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오늘 이 달란트의 비유 속에서 우리는 칭찬을 받았던 종들에게로 시선을 돌릴 때가 됐었습니다. 두 달란트 맡았던 종과 다섯 달란트 맡았던 종은 열심히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주인이 그렇게 나가서 열심히 섬기고 그리고 열심히 장사해서 많은 것을 남길 때에 주인이 기뻐할 것이다. 주인은 자기가 전인 우리들에게 맡겨준 그것 하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그대로 돌려 주 는 것 가지고는 만족해하지 않는 주인이라는 것을 깊이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가서 장사 했습니다. 주인이 어느 순간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회계하게 됐습니다. 계산을 하게 됐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받은 많은 은혜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결국은 마지막 때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계산하시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려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종말에 대한 긴장을 잃어버리면 그는 하나님을 향해 충성 할 수도 없고 주님 앞에 충성 하면서도 소망을 갖으며 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는 것이 소망입니다. 살아가는 인생이 자기를 위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주님이 마지막 오시리라 하는 것들이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종들은 그 주인이 왔을 때 세 가지 말로 이들을 칭찬하셨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잘하였도다. 영어 성경에는 well done 잘 이루어 졌구나. 네가 잘 하였도다. 착하도다. 충성되도다. 이렇게 얘기 했던 것입니다.
우선 잘하였도다. 그랬습니다. 잘 하였도다. 여러분 이 한마디 말을 주인으로부터 듣기위해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었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한마디는 잠깐 동안에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잘하였도다. 이 한마디 말을 했지만 그러나 이 한마디 말은 그동안 살아왔던 그 종들의 삶이 어떤 삶이였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이 칭찬은 한마디였는데 이 한마디의 칭찬을 듣기까지 그들이 어떤 한 삶을 살았는가 한번 보십시오. 한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 주인은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랬습니다. 게으르다는 것. 그는 잘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잘 하였도다. 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한순간 산 삶을 가지고 주인이 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그 돈을 맡기고 얼마 만에 돌아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런 다음 주인은 그 사람 전체의 인생을 잘 하였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실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어느 날은 그 달란트를 가지고 물건을 사서 들고 시장바닥에 나갔는데 어느 날은 밑지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날은 남은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날은 본전도 다 날려 먹은 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의 경험이 그거 아닙니까? 장사하는 사람들 어떤 날은 돈을 많이 법니다. 택시를 한번 탔는데 택시 운전수가 계속 싱글벙글합니다. 그래서 택시 운전수 만날 신경질 내는데 그래서 하도 궁금해서 내가 뭐 좋은 일 있습니까? 내가 아 선생님 오늘 좋은 날입니다. 그래서 뭐 좋은날이입니까? 네 시에 택시를 몰고 왔는데 그때가 11시밖에 안됐는데 벌써 10만원을 벌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버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오전도사님은 알 텐데 난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십만 원을 벌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금을 빼고도 자기는 4만원인가 5만원 벌었는데 아직도 시간이 5시간이나 남았으니까 오늘 같은 날은 돈 십만 원 이상 벌어가지고 가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면서 하루에 십만 원씩 벌면 한 달이면 삼백만원인데 나보다 백배 낫구나. 아 축하한다고 오후에도 잘 하라고 그런 날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차가 막혀가지고 입금액도 그런 못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게 장사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 주인이 잘하였다고 말한 거는 어느 하루의 삶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루의 삶. 삶 전체를 통틀어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습니다. 때로는 잘할 때 있습니다. 자신도 대견해질 정도로 잘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생각해도 한심하던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날은 미친 날이죠. 그런 삶이 결국은 다 합쳐져서 인생 마지막 우리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앞에 종합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이 와서 종에게 잘 하였도다 말했을 때 그는 매일매일 장사할 적마다 많은 돈을 남긴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두 달란트 맡아가지고 두 달란트를 남긴 게 아니라 두 달란트 맡아가지고 수십 달란트 남겼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밑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그리고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어떤 때는 주인의 종으로서 그 달란트를 맡은 것 그 자체가 한없이 부담스러워 지는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장사가 안 되고 본전도 까먹는 그런 때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때론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셨다는 사실이 때로는 감격적으로 다가오지만 그러나 때로는 한없는 이 신앙생활의 무거움으로 다가오는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교사의 직분을 맡기고, 구역장의 직분을 맡기고, 집사의 직분을 맡긴 것이 어떤 때는 나에게 감사하고 찬송 할 수 있는 제목이 되지만 또 어떤 때는 무거운 짐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말하자면 그 직분 때문에 내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때가 우리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한토막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시고 그리고 평가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인생을 다 산 다음에 주님이 잘 못했구나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학원 다닐 때 그 마지막 학기 전 학기입니다. 그러니까 장학금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썼었습니다. 그 리포트를 아주 굉장히 정성스럽게 심려를 기우려 써가지고 갔는데 점수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한테 가서 따졌습니다. 내가 이렇게 리포트를 정성껏 썼는데 나는 이 점수가 이 리포트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볼 수가 없는데 교수님이 해명을 좀 해주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쭉 얘기가 잘 쓰긴 잘 썼는데 사상이 자기하고 맞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하고 사상하고 맞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정성을 다 기울여서 열심히 썼는데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훨씬 밑도는 평가를 받았을 때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는데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나 일주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인생 전체를 살고 난 것에 대한 평가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신념이 있고 자신감이 있고 그리고 스스로 하루를 살고 나서는 아 오늘은 참 즐거운 날이었다. 일주일을 살고 나서 아 참 내가 사는 맛이 난다. 한 달을 살고 나서 야 참 보람 있다. 일 년을 살고 나서 역시 태어나길 잘했어. 십년을 살고 나서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 거야. 자기가 아무리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주님 앞에 딱 섰을 때 잘 못했다 그 말씀하시면 그러면 자기 인생 헛산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안 믿고 사느라고 이 세상에서 쾌락이라도 맛보고 죄라도 지으면서 잠시 즐거움이라도 얻었기 때문에 나중에 사수 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즐겁게 인생을 살아봤으니까 여한이 없다고도 칩시다. 그렇게 생각할 사람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자 하나님을 믿습니다. 주일이면 교회 곁을 떠나지를 못해 구질구질 비 오는데 물까지 지금 습기들이 쏟아 납니다. 지하실에 눅눅한데 여기 앉아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밖에 나가면 얼마나 좋은 일들이 많은데 그 여기 교회를 못 떠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면서 늘 부담을 느낍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세상에 나아가 살아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갖습니다. 받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무거운 마음을 늘 갖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예수를 똑바로 믿지 않으면 예수를 믿으면서 오히려 우울한 인생을 살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았는데 결국 하나님이 평가하시기를 잘 못했구나 왜 그렇게 살았느냐? 참 네 인생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혹은 없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평가를 받는다면 그럼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종들이 주인에게 잘 하였다라고 칭찬을 받기까지는 매 순간순간 마다 말하자면 자기의 즐거움을 버리고 그리고 안락하게 살고자하는 자신의 유혹을 버리고 주인 올 날을 항상 손꼽아 기다립니다. 매일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그 주인에게 충성하는 마음으로 그 주인이 자기와 함께 자기 앞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충성하며 매일을 삶, 전체적인 인생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대나무 마디 하나하나가 대나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디하나하나가 모여서 전체적인 큰 대나무를 이루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잘 하였도다. 그렇게 평가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종들이 주인에게 잘 하였다고 하는 칭찬을 받기까지는 우선 몇 가지 삶의 규칙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뭐냐 하면 주인인 온다는 사실. 반드시 주인은 온다. 주인은 반드시 온다. 나에게 이 귀한 달란트를 맡겨준 그 주인은 실수로 우리에게 이 맡긴 것을 잊어버리거나 혹은 우리에게 맡기고도 다시 돌아와서 우리에게 그것을 찾지 않거나 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다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맡긴 것을 찾고야 마시는 분이시다 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풀어 내리게 하신 하나님은 또한 반드시 우리를 반드시 당신 앞에 세우십니다. 둘 중에 하나 일겁니다. 주가 먼저 오시거나 아니면 우리가 주님 앞에 먼저 가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들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대학에서 입학시험 볼 때 보면 어떤 애들은 시험시간에 바스락 바스락 거리면서 뭘 꺼내는데 우황청심환을 꺼냅니다. 왜입니까? 대학시험이 너무 어려운데 떨리니까 그렇습니다. 대신에 한번 그랬는데 어떤 과가 35 : 1인데 한 클래스에 33명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반에서는 하나도 안 붙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그 답안 하나를 쓰기위해서 우황청심환까지 먹으면서 답안을 쓰는 겁니다. 뭘 하는 겁니까? 12년 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학생으로서 공부해 왔는가 하는 것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고등학교 3년입니다. 고등학교 3년 과정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해 왔는가 하는 것을 평가 받는 것입니다. 근데 너무 떨리니까 여학생들이 우황청심환을 꺼내서 먹는 것입니다. 하긴 운전면허 보러 갈 때도 우황청심환 까먹는다니까 대학시험 볼 때 먹는 거야 서너 개 먹어도 흉이 안되겠습니다. 한 학기나 일 년이나 삼년을 공부하고 그것을 시험 치러서 평가를 받을 때 그렇게 떨리는데 사람들은 인생 전체의 답안지를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내놓고 평가를 받아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 그런지 자신 만만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비유가운데 말씀하실 때 보면 양식을 나눠 주는 그 비유를 말씀 하십니다. 그때에 악하고 게을렀던 종은 무엇 때문에 게을렀나 하면 주인이 더디올 줄 알고 살았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긴장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살아갈 때 그 긴장이 이완 되어 버리고 나면 그다음엔 삶의 회의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생활의 염려와 그리고 근심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한 사람들은 주인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굳게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소망입니다. 성도의 소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한국 초대 교회사에 보면 종말신앙에 대해서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어떤 신비적인 생각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하나 배워야 될 것 하나는 뭐냐 하면 과연 우리들이 그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 이라고 하는 그래서 복음성가에도 있습니다. 먼 하늘 구름만 이상하게 떠도 주 오시려는가. 기다려지네. 그런 찬송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어떤 신비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종말을 대망하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앙망하던 그런 신앙에 대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냉소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은 상당히 대부분 주님이 오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우리를 다 들려 올리실 것이다. 그런 주님의 재림의 기대에 대해서 가슴 벅차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 있냐하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오늘날 우리 서울에 특히 이 강남에서 예수 믿는 우리들은 대부분이 필요한 것은 미래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공중으로 올리시고 아니면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런 것들이 소망이 아니라 그런 거 없어도 좋으니까 이 세상에서만 제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시면 그것으로 오케이입니다 라는 그런 현세적인 신앙으로 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꿈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쌓아두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모아 두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이런 것들에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주님이 다시 오실 날들에 대한 어떤 바람이라든지 사모함 같은 것들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종들은 주인이 다시 오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들의 꿈은 비록 돈을 가지고 장성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꿈은 이 돈으로 많은 것을 남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 자체를 모으고 달란트 자체를 축척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꿈은 돈을 모으고 많은 돈을 남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들의 꿈은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해서 많이 남기는 것보다도 다시 만나 주인을 기쁘게 해주고 그 주인의 마음을 시험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반드시 다시 오리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히 주인의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주인이 오시는 것이 자신들의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사람들은 철저하게 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그것이 주인의 것임을 인정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나 한 달란트 맡은 사람으로 인해서 자긍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가 뛰어나기 때문에 주인이 내게 준 것이 아니라 주인이 주권적으로 자기에게 나눠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차피 둘이 됐든 다섯이 됐든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는 이 소유의 개념에 있어 철저하게 주인의 종 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시험은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험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내가 그것을 주장하고 싶어 하고 그것을 누리고 싶어 하고 그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로 말하자면 작정을 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파괴 시키면서까지 그 물질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그것이 주인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그 좋은 직장과 그리고 그 좋은 환경과 그리고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신앙에 대한 모든 열심, 그리고 신앙에 대한 체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주님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 그리고 여러분들의 생명까지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원래 주인이신 주님을 위해 쓰여 질 때 빛을 발하게 되고 볕을 바라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하여 쓰여 질 때 그것은 가장 훌륭한 곳에 쓰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사용되어 질 때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더 훌륭하게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주인은 두 번째로 이 종을 착하도다. 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종아 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 말하고 또 하나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과정에 대해서 말하고 또 하나는 신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착하다 말했습니다. 착하다. 그러니까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잘 했느냐 잘했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느냐 자신이 행한 것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 가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행하는 바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주는 말씀 하셨습니다. 악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을 내고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으로부터 선한 것을 낸다. 매일 장사하며 장사하러 나갈 때 이것을 남기기를 바라고 남기기를 바랄 때마다 주인이 자기의 이 장사를 통해서 기뻐해야 한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종말론적인 말하자면 기대를 갖으며 살아가는 이 사람을 주님께서 그 살아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영적생활을 영위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위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단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우리가 꿈지럭 거리고 애쓰고 노력을 하고 거기에 정열을 바친다면 우리는 그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통해서 성품 자체가 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은 충성스럽게 살아가니까 그 행한 것을 통해서 주님께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 속에 있는 악함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놀랍게 크게 만났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성품은 주님이 부르신 그때까지 점진적으로 거룩해져 갔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그 의와 그리고 복음을 전파해야겠다는 일편단심의 이 사명을 하나를 가지고 투쟁을 하듯이 자기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이 과정이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를 만듭니다. 우리가 악한 일을 계속하면 성품 자체가 악하고 모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면 우리들이 선해집니다. 정말 선해집니다. 이런 종들이 주인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한꺼번에 칭찬을 받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일에는 성공하고 인격에는 실패한다. 인격에는 성공했지만 일에는 실패한다. 또 쉽게 말해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는 성공했지만 주님을 닮는 일에 있어서는 실패했다. 또 주님을 닮는 일에 있어서는 성공했지만 일에 있어서는 실패했다. 우리는 그렇게 이분법 적으로 나누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나 보십시오. 그들이 주인을 위해서 매일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썼을 때 그들의 삶은 충성스러운 삶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그들을 착한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또 그 착한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계속 충성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 때 말하자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면서도 무엇 때문에 자기가 불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불만의 원인을 다른 사람들과 환경으로 돌리고 게으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견고하게 서서 그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쁨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20년 혹은 10년 혹은 30년, 혹은 40년 혹은 50의 인생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인생을 계산 하십니다. 그때에 칭찬받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정말 우리의 인생을 충성스러운 생애를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때가되면 시집 장가가고 애들 낳고 애들도 별로 잘 키우지도 못하고 그리고 먹고 살다가 죽었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무얼 먹고 무얼 입고 어떻게 몸을 누리다가 죽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록 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그 미국인들의 시체를 2차 대전 때 죽은 시체를 다 묻어놓은 무덤을 지나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누구를 새겼겠습니까? 돈 많은 부잣집 아들? 거기에 보면 미국 사람들 중에는 이름 뒤에다가 주니어라고 쓴 사람들이 명문가에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대게 그런데 그렇게 명문가에 있는 사람들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저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 오른 게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오른 것도 아닙니다. 자격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안 올랐습니다. 오직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자유를 위해서 싸우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든지 간에 그 나라가 그 고귀한 대리석에다가 수만 명의 이름을 글자하나 틀리지 않고 정성껏 새겨서 그렇게 비치해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억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기억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는 사람은 당신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 누가 뭐라고 하든지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한 걸음으로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드려도 섬기면 섬길수록 더욱더 주님이 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렇게 외길을 걸어가는 충성된 사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기억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반드시 종착역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대합실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대합실에서 어떻게 기차를 기다리는가 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이 당신을 위해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 그 보상을 이 세상에서는 맛만 보고 저 세상에 가서는 완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부르신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세상에서는 우리의 이름 석 자를 크게 기억 해줄 만한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의 이름 석 자가 굵고 뚜렷하게 기록되고 그 밑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써주시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1:1)
지난 시간에는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사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월급을 줘서 먹고사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에 각자 자기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리고 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아무리 공들여 살아도 가치 있는 인생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거울을 보았습니다. 인생이 70이라고 하면 이제 반을 훨씬 더 살았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서는 저보다 훨씬 더 오랜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거울을 보면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나, 그리고 내 인생은 그렇게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이었나... 좀 귀찮고 무겁기는 하지만 언제나 물어 보아야하는 질문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사명은 큰 것만이 사명이 아닙니다. 크고 작은 것은 하나님이 판단을 하실 일입니다. 때로는 인간에게는 매우 작은 일도 하나님께는 꽤 큰 일일 수 있고, 인간에게는 꽤 크고 엄청난 일인데 하나님께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이고, 우리는 매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그 가치를 찾아서 살아가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은 곧 가치입니다. 사명감은 그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각오와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명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목표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달란트의 비유와는 또 다른 면을 사도의 유명한 서신서 로마서 앞부분의 고백이 보여주며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먼저 로마서를 쓰기 전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편지를 읽기 전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주기를 원했던 바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로서 직분을 맡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라고 하는 자부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사람을 향하여 뽐내고 뻐기고 싶은 마음에서 자기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뽐내기 위한 것이라면 오늘 이 소개는 너무 초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러분,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당시 그렇게 가치 있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보다는 자기에게 공부를 가르쳤던 가말리엘의 이름이 훨씬 더 이 세상에서는 가치 있는 이름이었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름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가말리엘의 종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종도 아니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 버린 바 된 이름, 세상에서는 미련하고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심부름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헬라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여기고, 히브리 사람들이 능력이 없다고 여기는 이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읽을 때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정확히 그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다.”바울은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이 어떻게 여김을 받든지, 로마의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는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자신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의 첫머리에서 자기의 인생 중심에 누가 서 있고 자기의 인생중심에 서신 그 분을 중심으로 자기가 누구이고, 누구여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인생의 중심에 서 있는 그 분을 먼저 주목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공부 많이 한 바울, 학문이 너무나 많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할 바울,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인, 그리고 그 뛰어난 능력의 사도, 이런 것들로 알려지기를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순간,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는 그 순간에 자기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한 가운데 중심으로 서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또 보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여, 내가 당신들에게 편지를 쓰기 원하는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한 마디가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훌륭하게 보여 주고 있고, 우리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사명의 문제에 관해서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세상에서 얻은 그 많은 후천적인 특징들, 외모와 문벌과 학식과 지식과 혈통과 가문과 명예, 이런 모든 것들을 사람들이 그를 보는 순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각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너희는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를 알아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위대한 사도만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이 위대한 사도만의 이야기라면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신분입니까? 바울에게 있어서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인생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살다가 갔지만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훌륭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다가 간 수 많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구속하시고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어서, 이전에는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살고 생명이 없는 것들을 위해서 모든 것들을 다 투자하면서 그렇게 살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만나주심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의 빛 아래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깨달은 그 순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놀라운 구원은 참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이 죄인에게 이 같은 큰 그리스도의 구속의 놀라운 은혜가 주어지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주홍과 같이 붉은 죄로 죄인 줄도 모르고 그 세상 속에서 그렇게 먹고 마시고 살다가 심판에 이를 죄인을 살리셔서 하나님의 종이라,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을까 하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아는 순간 한마디로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일이 바울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또 우리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생의 중심 되신 것을 삶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헛되이 하지 않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였을 때 그는 노예 제도 하에서 비참하게 인권이 유린당하며 오직 주인 하나만을 위해 봉사하며 그렇게 죽어 가는 수많은 노예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흑인들의 인권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목에 엄마, 아빠, 아이들의 가격 표찰을 각각 걸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주인이 그 노예를 사고자 하는 자가 나타나면 채찍으로 후려칩니다. 채찍에 맞을 수록 노예는 더 힘차게 뛰어야 합니다.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서 이 정도 매로는 끄떡하지 않는 힘있는 노예임을 보여주어서 매매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팔려가고, 아내와 자녀들이 울부짖다가 잠시 후에는 아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팔려가고 그리고 울부짖는 자녀들이 각각 다른 사람들에 손에 끌려가는 그 것이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바로 그런 노예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 이것은 낭만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로마의 시민인 바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종 되는 것을 꿈꾸게 했겠습니까? 오늘 이 서신 첫머리에서 담대하게 모든 사람을 향하여 자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인 나 바울이라고 고백하게 만들었던 그 힘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겠습니까?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그 끔찍한 그림, 채찍에 맞으며, 그리고 정해진 잠자리도 없이 헛간에서 짐승처럼 뒹굴며 자고, 없으면 굶고, 주인을 위해서 마지막에 그렇게 비참하게 소유물 중의 하나로 대접을 받다가 죽어 가는 그것이 노예였는데 바울은 자신을 노예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바울을 ,자기를 경외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바울을 그렇게 노예처럼 대우할 이유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을 노예처럼 대우한 것이 아니라, 또 바울이 노예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접을 받을 것을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는 그를 형제로 불러주고 하나님은 그를 자녀로 불러주었으나 그 사랑을 받은 그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노예처럼 살아가겠노라는 신앙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선대했으나 세상은 그를 박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존귀히 여겼으나 세상은 그를 천하게 여겼습니다. 고난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모두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 바울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종처럼 대접을 받고 그리고 노예처럼 대접받으며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이 같은 삶을 통해 존귀히 여김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과는 상관없이 주인의 이익과 주인의 행복을 위해 만족하며 그렇게 학대받으며 죽어갔던 노예로서의 삶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바울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위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한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하고 구원을 받는 위대한 선교의 꿈을 이루었던 바울을 위해서만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니라 또한 동일하게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입니다.
그 보혈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치 있는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거나 대신 죽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착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선하지도 않고 가치 없는 죄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나 같이 더러운 죄인,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였지만 내 안에 각양 탐심과 더러운 욕심이 죄를 이루며 내 이름을 내기 위하여 히브리인의 행세를 하고 율법의 엄격한 도를 지키며 살아왔던 그 모든 자신의 죄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의 노예는 돈에 팔리거나 혹은 아버지가 노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아래서 세습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밖에 길이 없지만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자기가 노예가 되기를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이 노예 됨은 자기가 원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묶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이 세상에서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예수 안에 있는 놀라운 구속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인생을 그리스도의 종처럼 살았던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미 미친 그 구속의 은혜와 놀라운 사랑이 얼마나 깊고 위대한지 깨달았을 때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 수록 자기가 얼마나 가치 없는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그것을 알 때 정말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체험한 많은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핍박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오, 하나님, 예수를 위하여 핍박을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니 하나님이 우리를 참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명의 기초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위험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깊이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큰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은 개인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불행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구하신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 늘 울어도 감당할 수 없었던 그 구속의 은혜, 그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못 받으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사명을 안다 하더라도 그 사명을 위해 살아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습니까? 마음으로는 원하고, 정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몸이 그렇게 안 움직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가치 없는 인간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인생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를 받을 때 머리 속으로만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던 것을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은혜를 못 받으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살수도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만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사명을 감당해 나간다고 하면서도 그 동기가 순수해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시작했지만 점차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동기가 희석됩니다. 그런 태도들을 , 그런 삶들을 새롭게 하고 정결케 해 주는 힘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냥 한 마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은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를 꽉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손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그 강제력에 붙잡혀서 예수의 이름만을 위하여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전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것이나,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의 히브리인이라든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든가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끝날 까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자기 중심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분의 종인 것을 한없이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과 동행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바로 자기의 인생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배를 타고 육지를 걸어서 핍박을 받으며 이 성에서 저 성으로 이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러 다녔습니다. 그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노예라 일컬음을 받기 원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거나 육로를 걸어서 수많은 성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을 지금 당장은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의 종인 것을 참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먹고, 무엇을 마셔도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노예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겁고 부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누구냐 물을 때,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친구같이 부르셨고, 아버지는 나를 자녀로 부르셨지만, 나는 그 사랑이 너무 놀라워서 이 짧은 인생을 예수를 위해 노예처럼 살아가고 싶어하고 그래야만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을 사명감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6. 복음을 위한 사명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몇 주 째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사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월급을 주어서 먹고사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에 각자 자신이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 지금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아무리 공들여 살아도 가치있는 인생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과연 자신이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선 한 번 더 회의적으로 물어봐야할 무서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큰 것만이 사명이 아닙니다. 크고 작은 것은 하느님이 판단을 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인간에게 매우 작은 일도 하나님에게는 꽤 큰 일일 수 있고 인간에게는 크고 엄청난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하나님의 판단이며 우리는 우리의 삶이 절대적인 가치를 찾아가는 삶인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은 곧 가치입니다. 사명감은 그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각오와 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명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목표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달란트의 비유와는 또 다른 면을 오늘 이 사도의 유명한 서신서인 로마서 앞부분에서의 고백이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먼저 이 로마서를 쓰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편지를 읽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받아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바울이 자기가 사도로서의 직분을 맡고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라고 하는 이 자부심 때문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사람을 향하여 뽐내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뽐내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면 오늘 이 소개는 너무도 초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셨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그다지 가치있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보다는 자신에게 공부를 가르쳤던 가마리엘의 이름이 훨씬 더 이 세상에서는 가치있는 이름이었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름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가마리엘의 종도 아니고 쉴렐의 종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종도 아니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 버린 바된 이름, 세상에서는 미련하고 천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주인이 아닌 심부름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모든 헬라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여기고 히브리 사람들, 유대 사람들이 능력이 없다고 여기는 이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을 뽐내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읽을 때는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정확하게 그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이 어떻게 여김을 받던지 로마에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신앙을 갖고 어떤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 사도는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의 첫 머리는 자신의 인생 중심에 누가 서있고, 자신의 인생 중심에 서신 그분을 중심으로 자기가 누구이고 누구여야하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인생의 중심에 서있는 그분을 먼저 주목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한 바울, 학문이 너무도 많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할 바울,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고 뛰어난 능력의 사도로서 알려지기를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는 그 순간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처다보는 그 순간에 자신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 한가운데에 서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고 또 보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쓰는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가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도 살아갈 것인지를 훌륭하게 이미 보여주고 있고, 우리들이 오늘 궁금하게 여기는 사명에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그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얻은 그 많은 후천적인 특징들-그는 그다지 잘난 인물도 아니었다고 하지만 어쨋든 외모와 학식들, 문봉과 지식과 혈통과 가문과 명예 등-을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순간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순간 그리스도가 생각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아야지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사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신분입니까? 바울에게 있어서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살다가 가지만, 그러나 때로는 우리는 훌륭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구속하신, 죄 가운데서 구원해내어 이전에는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살고 생명이 없는 것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투자하면서 그렇게 살던 그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만나주심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해아래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의 빛 아래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는 그 순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을 참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나같은 이 죄인에게 이같은 큰 그리스도의 구 속의 놀라운 은혜가 주어지게 되었는가? 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지금과 같이 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지금과 같이 붉은 죄도 죄인지도 모르고 그 세상 속에서 그렇게 먹고 마시다가 심판에 이르러 죄인을 살리셔서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게 하셨구나. 이 놀라운 사실을 아는 순간 한마디로 예수보다 귀한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일이 바울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또 우리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생에 중심되신 것을 삶으로 고백하며 그렇게 해쳐가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헛되이 하지 않고, 살아가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을 하였을 때, 그는 노예 제도하에서 비참하게 그 인권이 유린당하며, 오직 주인 하나만을 위해 봉사하며 그렇게 죽어가는 수많은 노예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흑인들의 인권 문제를 다룬 그 다큐멘터리 영화같은 것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목에다 엄마, 아빠, 아이들 각각 표찰을 걸었습니다. 가격입니다. 한 사람은 800달러, 600달러, 300달러, 200달러를 걸어놓고, 그리고 뒤에서 주인이 그 노예를 사고자하는 자가 나타나면 채찍으로 후려 칩니다. 채찍에 맞을수록 노예는 더 힘차게 뛰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 정도 매로는 끄떡하지 않는 힘이 있고 팔팔한 노예라는 것을 보여주어서 말하자면 매매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달려가고 아내와 자녀가 울부짖다가 잠시 후에는 아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팔려가고, 그리고 자녀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그 자녀들마다 각각 다른 사람들 손에 의해서 팔려가는 그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런 노예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 이것은 낭만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누가 로마의 시민인 이 바울이 스스로 종되는 것을 꿈이나 꾸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 서신 첫머리에서 담대하게 모든 이를 향하여 자랑스럽게 예수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들었던 그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겠습니까? 필서로 다할 수 없는 그 끔찍한 그림, 채찍에 맞으며 그리고 정해진 잠자리도 없이 헛간에서 짐승처럼 뒹굴고 자고, 없으면 굶고, 주인을 위해서 마지막에 그렇게 비참하게 소유물 중에 하나로써 대접을 받다가 죽어가는 그것이 노예였는데 바울은 자신을 노예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많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바울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이고 온 맘을 바쳐서 사랑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경애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이 바울을 노예처럼 대우할 이유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을 노예처럼 대우한 것이 아니라 또 바울이 노예처럼 예수로부터 대접을 받을 것을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는 나를 형제로 불러주고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불러주었으나 그 사랑을 받은 내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노예처럼 살아가겠노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그를 선대했으나 세상은 그를 박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존귀히 여겼으나 세상은 그를 천하게 여겼습니다. 고난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 바울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종처럼 대접을 받고 그리고 노예처럼 대접을 받으며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이같은 삶을 통해 존귀히 여김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의 행복과는 상관없이 주인의 이익과 그리고 주인의 행복을 인해서 만족하며 그렇게 학대받으며 죽어갔던 노예로서의 삶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바울만이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위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한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을 알고 복음을 받는 위대한 선교의 꿈을 이루었던 바울을 위해서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이 아니라, 또한 동일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던 것입니다. 그 보혈의 위대함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같이 있는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거나 대신 죽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착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선하지도 않고 가치없는 죄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아서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였지만, 내 안의 많은 탐심과 더러운 욕심이 죄를 이루며 내 이름을 내기 위하여, 히브리인의 행세를 하고, 율법의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살아왔던 그 모든 자신의 죄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다메색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죠. 세상에서는 노예는 돈에 팔리거나 혹은 아버지가 노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아래서 세속적으로 노예가 되는 운명 밖에는 아니지만 그러나 어느 경우에는 그것은 자신이 노예이기를 원해서 노예가 된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의 이 노예됨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의해서 보아야할 것입니다. 묶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세상에서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무엇때문입니까? 그 예수 안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인생을 그리스도의 종처럼 살았던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그로하여금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미 미치는 주님의 구속의 은혜와 놀라운 사랑을 얼마나 깊고 위대한 것인지를 깨달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가 얼마나 가치없는 죄인인지를 인식합니다. 그것을 알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체험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았을 때 그들은 말하기를 오늘 우리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핍박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를 위한 이 핍박을 딴 사람에게 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참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이게 사명의 기초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위험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깊이 모르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그 사람들은 개인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불행합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하신 이 놀라운 구 속의 은혜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뛰어난 바울이 울어도 감당할 수 없었던 그 구속의 놀라운 은혜, 그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노예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못 받으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사명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사명을 위해서 살아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원해야합니다. 정말 그러고 싶어야 합니다. 그러나 몸이 안 움직여 줍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면,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가치없는 인간이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때 비로소 인생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를 받을 때 머리 속에서만 살아야지 하던 삶을 정말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무엇입니까? 은혜를 못받으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살 수도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지만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사명을 감당해 나간다고 하면서도 그 동기가 참 순수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동기가 희석되어 버립니다. 그런 태도를, 사람들을 새롭게 하고 정결케 해주는 힘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한마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은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를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 손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그 강제력에 붙잡혀서 예수의 이름만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전에 가마리알의 문하에서 공부한 것이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의 히브리인이라던가 율법에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이런 모든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끝날까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자기 중심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분의 종인 것을 한없이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과 동행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격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을 받은 이들이 걸어가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배타고 육지를 걸으며,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이 성에서 저 성으로 이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러 다녔습니다. 그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노예라 일컬음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바울 처럼 배타고 지중해를 건너가나 육로를 걸어서, 수많은 성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을 지금 당장은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의 종인 것을 참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셔도 언제나 우리는 예수의 노예다, 이것이 무겁고 부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당신의 존재를 물을 때 나는 회사의 사장이라든지 하는 허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보는 순간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보낸 바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는 것을 느끼게 해야합니다.
그 분은 나를 친구로 부르셨고, 아버지는 나를 자녀로 부르셨지만 나는 그 사랑이 너무 놀라워서 이 짧은 인생을 예수를 위해 노예처럼 살아가고 싶어하고 그래야지만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을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7.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충성되고 착한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24:45)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에도 ‘종’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커다란 주제 가운데 하나는 청지기직입니다. 아마 청지기라는 말처럼 성경 가운데 제대로 잘 번역이 된 말이 없을 것입니다. 청지기는 신분은 종이지만 워낙 주인의 신뢰가 두터워서 그에게 가사를 위탁해서 그로 하여금 그것을 돌아보게 한 직분을 맡은 사람을 ‘청지기’라고 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녀로 살아가야 할 삶의 정신, 그것이 바로 청지기 정신이라고 여러 가지 비유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지만 살아가는 삶이 정말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고 신앙을 체험하게 되면 많은 것들을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을 계수해 보면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느끼는 때가 많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때에 이렇게 따로 떨어진 공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고 체험하는 일 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시간들을 삶의 현장에 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좋은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할 때 이 청지기적인 삶의 정신이 성경에 의해서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서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이겠는가” 이 말씀을 하심은 교회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 앞부분에서 <<<?>>> 라고 하는 교훈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갑자기 그러하다, 홍수 전에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있으면서도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도 그 노아를 통해서 주신 경고들을 참된 미래의 심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아마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종말과 직결된 깨달음에서 그것에 부합한 삶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청지기에 대한 말씀이 나올 때는 언제든지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청지기직을 함께 말씀하신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미래를 예비하는 종말론적인 삶과 오늘을 청지기 정신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인 기대, 주님이 오시리라고 하는 사실에 기대가 없는 사람들,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고 동무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악한 삶의 이유는 주님이 더디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이 바로 그들의 삶을 악하게 만든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똑같이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을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재림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오실 것이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너희도 예비하고 깨어 있으라” 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면서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먹고 마시고 취하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그렇게 살아가는 믿음 없는 일들은 이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 자녀들의 세계 속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신앙이 식어지고 영적으로 잠들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도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과 집과 전토와 아비와 아내와 혹은 부모와 자식을 버려 두고 나를 좇은 너희라고 할 지라도 스스로 너희들도 예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생각지도 못할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곧 오시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고 하는 그 기대를 가지고 살다가도 잠시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시 오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낙담하게 되는 경우가 있으리라고 예측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 올 때까지 예비하고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왔으니까 우리가 모든 삶을 다 버려 두고 오직 기도하고 예배만을 드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기다리라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삶이 아닙니다.
지난 번에 달란트 비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를 상기해 보십시오. 그 주인이 곧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던 그 두 사람, 달란트를 맡은 종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주인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들의 삶의 자세는 그 돈으로 열심히 나가서 장사하고 그 돈을 불리고, 그리고 이익을 남겨서 주인이 올 때에 주인에게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들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이 오실 날까지 기다리는 삶의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리라고 하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청지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미래를 향한 최선의 준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종이 누구인가를 오늘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서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서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이겠는가. 우선 주님은 마지막 때에 바라시는 종들의 모습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충성스러운 삶, 지혜로운 인격, 집 주인에게 사람들을 맡아서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성실함, 이런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충성된 종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주님은 충성된 종들의 필요를 느끼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지막 때가 될수록 사람들의 삶은 점점 복잡해지고, 감각적이 되어지고, 육신의 것들을 탐하고 그리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서 점점 영원한 것과 신앙의 가치에 대한 생각들이 희박해지고, 오직 감각적이고 눈에 있는 것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들이 말하자면 마지막 시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문명의 이기 속에서 살지만, 그러나 그것들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의 삶들이 평화롭고 부요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잘 살게 되고, 그리고 마지막 때가 다가와서 이 세상에 물질 문명이 충만하게 될 때 사람들은 오히려 그 물질 문명 속에서 더욱 더 영원한 것의 가치에 대하여 아주 우습게 생각하고, 그리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생각보다는 어떻게 즐기고 살 것인가 하는 감각적인 삶에 자신을 던지는 이러한 일들이 유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사람들은 가치 있는 어떤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충성스럽게 산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수련회를 가서 손양원 목사님의 따님이 나오셔서 어떻게 손 목사님이 일제 시대에 신사 참배를 반대하시고, 투옥 당하시고 또 마지막에는 자기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자기의 양아들을 삼고, 마지막에는 공산군에게 순교 당하신 그런 이야기를 죽 들었습니다. 들으면서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또 그 때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이면 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힘들긴 하지만 그 설교를 듣고 밖으로 나가보면 정말 일본 순사들이 칼을 들이밀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덤벼들 때에는 그 말씀을 더 이상 해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르쳐준 말씀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밖에 나가도 누구도 우리를 잡아가는 사람이 없고 공산당이 와서 우리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예수를 믿을 것인지, 버릴 것인지 우리를 위협하는 그런 상황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간증을 다 들으면서 느낀 것이 우리는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이냐, 아니냐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생명이냐, 죽음이냐 하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흐려진 채 그냥 흐리멍텅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세상 사람들의 풍조가 그렇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풍조가 그렇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것들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하며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그 시대의 물결을 거스리며 순교자적인 정신으로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을 각오를 하고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이처럼 충성스러운 종들의 모습들이 식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지막 때가 될수록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이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속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행하여지게 되며, 사람들 간에만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사랑이 식어지고, 도처에 불법이 횡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사랑, 영혼을 향한 사랑, 그것이 사람들을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 수록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없는 상황과 그런 환경들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충성된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충성되다는 말이 신실하다, 믿을만하다는 원래 의미가 있지만 한자처럼 이 말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운데 중(中)이 있고, 그 밑에 마음 심(心)자가 있는 것, 그대로 읽으면 중심입니다. 그것이 한자의 충(忠)입니다. 충성되다고 하는 말은 모든 행하는 삶이 마음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만약 그 섬기는 일이 마음 중심에서 동기가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들이 마음의 중심 없이 하는 일도 사용을 하십니다. 은혜 못 받은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쳐도 아이들은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 없는 사람이 설교를 해도 하나님께서 하도 급하시면 그 은혜 없는 사람의 설교를 통해서도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만드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들이 받은 감화는 말씀을 전하는 자의 인격과 말씀이 합치가 되어서 영향을 미친다 하면 최상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필요니까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섬김과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섬김은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으면 교회를 향한 신실한 사랑이 있으면 섬기는 그 자세가 틀리다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들이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고 같은 집에서 살 때, 아이가 병이 나서 문제가 생기면 아이의 변의 맛을 보고, 병을 판별해 낼 때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겠습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있으니까 그것이 더러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폐질환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운명하는 순간에 그 균들이 다 밖으로 빠져 나옵니다. 가족들도 다 지켜보지 못하는 그 자리를 목회자들이 지키며 염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충성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들을, 내게 맡기신 임무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바로 충성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불행히도 어느 시대건, 이런 정신과 이런 삶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충성된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러리들이었습니다. 충성된 사람은 항상 우리 모든 교회에 만족을 줍니다.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고 나면 마음이 푹 놓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교회의 일을 맡겼을 때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은 심방을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들을 심방하는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계속해 나갈 때 목사님은 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고 하시면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심방의 일을 맡겼을 때, 어떤 사람은 닫힌 문이 열리지 않으면 담이라도 넘어서 들어갈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문 닫힌 집을 보며 오히려 속으로 잘됐다고 생각하며 그냥 돌아 올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다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는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사 나를 사도와 복음 전파자로 삼으셨느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에도 열심을 내지 않지만, 구원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충성되이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러운 사람이 빛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목사님들이 충성된 사람 하나가 교회를 떠나게 될 때 그렇게 떠나지 못하도록 그냥 부탁을 하며 간절하게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떠나지 못하게 할까 싶어서 애를 태웁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세에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모두들 자기의 육신적인 일에 매이고, 자기를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아니면 그들이 하는 많은 말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말들이 무슨 가치 있는 말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을 충성스럽게 살게 하기 위해서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충성스럽게 살지 않는데 그 사람의 말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며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가까이 하시기를 참 기뻐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천국을 넘나드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은 모두다 한결 같이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는 가만히 말씀을 들으면서 예배를 나와서 드리면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우리의 믿음이 정돈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과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폭탄이 퍼부어지고 총알이 비오듯 쏟아지는 영적인 전쟁의 한복판을 지나갔습니다. 그의 한 통 한 통의 편지는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쏟아 놓은 한 사발의 피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서신이었고, 설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삶이 하나님을 목표로 하고 있어야 하며 오늘 먹고 마시고 숨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충성된 사람을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이고 타성에 젖어서 신앙 생활을 하니까 조금만 충성스러운 삶을 살면 그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러한 시대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도록 마지막 때에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포기한 것, 버린 것,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준 것, 이런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들은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왜 아론이나 다른 모든 선지자들보다 다른 사람으로 취급받았는지에 대해서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꿈이나 이상으로 말하였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그는 내가 친히 대면하여 친구와 같이 말하였도다. 이는 그가 나의 온 집에 충성되었기 때문이다.”
충성된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친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중히 여기시는데, 마음이 없이는 충성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은 충성된 삶은 마음이 없이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는 충성된 삶을 사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고 드려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 변하기 시작합니다. 쉰 내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붙들고 있지만 그것을 계속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이고, 중심에 애타하는 안타까움들이 이미 다 사라진 상태, 이런 것들은 충성된 마음이 아닙니다.
충성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주십니다. 그 친밀함 속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뭔가 궁금히 여기고, 정말 신앙 속에서 뭔가 혼란스러울 때 누군가에게 상담을 하거나 자문을 받습니다. 그렇게 상담을 받고 자문을 받으며서 ‘아, 맞다. 내가 잘 못 생각했구나’하고 깨닫게 하고 감화를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여러분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살지 못하는 충성스러운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그러면서 하나 하나를 그렇게 배워간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고는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사람을 살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높여드리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과 더불어서 항거하며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마치 자신의 생명과 관계된 것처럼 그렇게 살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해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보상을 해 주십니다. 그 일차적이고 중요한 보상은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그 일에 충성된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된 삶을 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뛰어난 사람, 프로가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풀어서 쓰고 해설한 저의 책들을 읽고, 듣곤 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기회를 주셨을 때 그 일 하나에 최선을 다해서 매달리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열어 주셨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은 어린아이에 대한 놀라운 전문가이십니다. 유치부 전도사가 설교를 하면 아이들이 떠들어도, 칠순이 다 되어 가는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시면 완전히 쥐죽은 것 같이 고요합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부모가 지난 주에 목사님께서 무엇을 가르쳐주셨느냐고 물으면 기가 막히게 기억을 합니다. 2분 내지 3분 동안 설교를 하시고 퇴장을 하시는데 아이들에게 지워질 수 없는 신앙의 교훈을 심어주십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목사님께서 언제나 “충성된 삶을 사십시오. 언젠가는 그것이 나에게 자산이 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젊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일학교를 맡겨 주셔서 그 주일학교를 붙들고 새파랗던 신학교 시절에 사례금도 못 받으면서 매달려 주일 학교의 부흥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방법이 무엇일까 고심하며, 어떻게 바르게 가르칠지를 놓고 애쓰는 가운데 아이들이 700명 가량이나 늘어났습니다. 그 많은 아이들이 모여도 이 전도사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나는 그 때 그 상황에서 충성을 다했을 뿐인데 충성을 다하니까 그렇게 충성한 것이 나 를 전문가로 만들어서 수많은 교사들 앞에서 어떻게 영혼들을 가르쳐야할지를 증거하는 기 회를 하나님께서 주시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문가가 되게 해 주십니다. 어느 한 방면에 전문가가 된다고 하는 것은 깊은 고민과 자기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충성은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서는 점점 그 사람을 유능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충성된 것뿐만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를 간절히 찾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충성만 강조하지 지혜는 별로 강조를 하지 않는데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십니다.
워찌만니가 복음 전도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그의 복음 전도대가 중국 대륙을 행진을 하며 고을마다 전도를 하는데 그들이 한 번 스쳐 가면 몇 십 만 명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1년 동안에 1600명을 전도했던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놀라운 전도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 비결이 없습니다. 오직 나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사모했고, 그 일들을 성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면 나가면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흔히들 말하는 경력, 그러나 그 경력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았다고 할 때에 그 경력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충성되이 살지 않은 사람들의 경력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또 한 가지는 담대함입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용기가 있고, 담대함이 있고,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확신이 없이는 충성된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해서 땀 흘리고 수고하고, 심지어는 수고의 대가를 받기는커녕 사람들에게 오해와 미움을 받아도 여기에 내가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충성되게 여기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동기가 되어있는 사람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런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놀라운 감화를 사람들에게 끼치고 놀라운 신앙의 덕을 남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또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마지막 때에 누가 지혜 있는 종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하면서도 지혜가 모자라지 않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충성하면서도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충성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충성을 다하면서도 언제나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 충성을 다하면서도 다른 지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독선적인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충성을 다하면서도 언제나 사람들을 자기와 함께 충성된 대열로 불러모으고 그들에게 헌신할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자기처럼 경성하면서 살아가야 할 그러한 마음의 각오들을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충성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함정이 무엇인가 하면 충성 하나가 너무 가치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삶을 자기가 이미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최상의 신앙 수준에 이미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충성스럽기는 한데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충성에 대한 동기를 빼앗기게 됩니다. 혼자서는 대단히 위대한데 많은 사람들과 연합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입니다.
진짜 훌륭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왜 충성하지 않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이 어찌하든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있도록 그렇게 여건을 만들어주고 격려하고 힘을 주고 도와주고 일깨워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그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닫고 알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럽지만 독선에 흐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지만 그러나 나태하지 않으며 언제나 헌신되고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사람들, 지혜로운 사람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다혈질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충성이 아예 없는 사람들은 뭐가 결정되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되는 자기에게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충성된 사람들은 대부분 다혈질입니다. 뭔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때 , 이 일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받는 모든 고난은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을 즐겨하는 일종의 영웅 심리를 자주 보입니다. 불의와 의의 싸움이 아닌 것 같은 일에도 한쪽을 불의한 편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을 의로운 쪽으로 만들어 죽을 각오가 된 것처럼 덤벼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심기 위해 보냄을 받았을 때, 샬롬을 가지고 샬롬을 전할 때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바로 샬롬이 없는 자리입니다. 자기의 샬롬이 그 곳에서는 깨뜨려지고 도전 받는다는 생각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산다고 해도 타락한 곳에 참된 순결의 복음을 가지고 가도, 전하고 싸우는 가운데 자기도 그 악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로 더불어 그들을 교화시키려고 싸울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악한 자들과의 싸움 속에서 같이 악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종으로서 섬기는 그 섬김과 우리 인격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두 가지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라.”
무조건 비둘기 같이 순결해서만은 안됩니다. 우악스럽게 충성심을 발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또 다른 독선에 흘러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이렇게 충성된 마음과 함께 지혜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충성스러운 삶 가운데도 사람들을 넘어뜨리거나 좌절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충성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혜롭게 그 어둠 속을 헤쳐 나가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 길을 걸어나갈 수 있는 뱀과 같이 지혜로운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교회는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8. 복이 있는 종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희에게 맡기리라”(마24:45下-47)
우리는 충성에 대해서만 가치를 높게 부여하지만 또한 동시에 지혜로워야 됩니다. 그래서 어디에 그 사람이 있든지 그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면서, 그렇게 충성을 다하는 그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삶을 부러워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지난 시간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면서 말씀을 드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렇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서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서 주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누어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은 사실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을 직접적으로 깨우치시기 원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마음에 맞게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맡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실하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그 때가 얼마나 있겠느냐, 몇 명이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의문문은 진짜 모르셔서 물으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촉구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이 세상에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를 따라서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참 보기 힘든 그런 때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서 청지기는 자기 집안을 지키며 식구들과 종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주는 일을 맡은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 청지기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교역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의미를 축소해서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 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풍성한 말씀을 받아서 곤고한 영혼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주께서 오실 그 기약의 날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그 말씀으로 성도들을 섬기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들을 안온하게 다스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교회로 가꾸며 예수 그리스도 오실 날을 소망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줄 신실한 종들이 얼마나 되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이 비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그런 교역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언젠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거룩한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셨다는 점에서 볼 때 그 구속의 은혜는 우리 모두가 다 입었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일은 틀리고 종류는 달라도 그 사명의 본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렇게 말씀으로 성도들을 섬기고 교회를 돌아보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가르쳐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따라서 삽니다. 여러분, 여러분 각자는 하나님께서 무슨 사명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인생을 가치 있고 보람있게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꼭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 모든 사람에게 이름을 내는 사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서가고, 영혼들이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는 복스러운 구령의 역사가 있는 이런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교회인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저는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참 감화를 많이 받고 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 교회같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왔습니다.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열심히 뜨겁게 기도를 합니까? 그 교회는 겉에서 보니까 아주 낡았습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니까 교회가 정말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정성을 다해 만든 다과들을 나누고, 뜨겁게 기도하고 , 말씀을 사모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교회의 수리비가 많이 들었을 텐데 하고 여쭤 보았더니 일손을 많이 사지 않고, 교인들이 나와서 직접 벽지를 바르고, 못을 박고,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교회에 모두 나와 일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이제 보이는 교회는 모두 고생을 해서 잘 마련하셨으니 보이지 않는 교회만 잘 세워 가시면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보이는 교회는 고생만 하면 다 지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고생을 많이 해도 잘 세워지지 않으니 걱정입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어디 하나님의 교회가 하는 일이 숫자로 되겠습니까? ”
맞습니다. 모인 수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의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헌신되어서 하나님의 종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서 교회가 그런 커다란 일들을 해낼 수도 있고, 해내지 못할 수도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거기서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쩜 저렇게 적은 교인이 얼마나 헌신적이며, 시험에 들지 않고 은혜 가운데서 저렇게 교회를 구입하고 성도들의 노력으로 저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꾸몄는가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때가 마지막이 될수록 사람들의 신앙 생활이 형식적이 되니까 사람들은 헌신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기보다는 손님처럼 교회 다니는 일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그저 신앙 생활 하는 것을 무슨 친목 단체 가입하는 것 같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이 교회, 저 교회 마음에 드는 대로 옮겨 다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바로 예수님이 이미 옛날에 다 예고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횡행하고 사람들의 신앙 생활이 형식적으로 될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경고를 누구의 경고로 받아들입니까? 뒷집의 김 집사나 앞집의 최 장로 이야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도처에 이런 신앙이 유행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의 풍조와 그 시대의 물결을 따라가며 우리도 똑같이 믿음에서 파산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름에 장마가 질 때 제일 신나는 사람들이 옛날에 있었습니다. 애들입니다. 물이 도랑에서 마구 내려오는데 삼태기를 거꾸로 돌려놓고 한참 있으면 물을 거슬러서 올라오는 고기들이 많이 모입니다. 건강한 고기들은 물을 거스르면서 삽니다. 건강한 고기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이 이렇게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시대의 물결들을 거슬러 살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알고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 그것 하나를 가지고 주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의 군병 되리
다른 사람이 어찌 하든지 나는 주님의 군사가 되어 주께 충성을 맹세하고 그렇게 헌신된,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를 보실 때 ‘아무개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겠느냐’ 하시며 그런 종이 별로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이는 앞에서는 잘 하는 것 같지만,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 여기에 서 계셔서 얼굴을 내밀면서 웃고 계시다면 누가 예배 시간에 졸겠으며 누가 예배 시간에 늦게 들어오겠습니까? 주님이 여기에 서셔서 못 박힌 손으로 오는 사람마다 매주 인사를 하신다면 누가 늦게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주님이 아닙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며, 눈으로 보이는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들을 보이지 않는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이 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들이 누가 있겠느냐 하신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물결을 따라가고 인간의 풍조를 따라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들 때에 자신도 잠듭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에 늘 자신을 비춰보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좇아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 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이기에 세상의 풍조를 거절하는 사람으로서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서 생명 있는 물고기가 강을 차고 올라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을 차고 올라가다 보면 시련도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는 물을 따라서 흘러내려 가면 얼마나 헤엄치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물결을 거스르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수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며 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연어에게는 태평양까지 갔다가 자기가 부화한 그 장소까지 다시 돌아오는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인간이 저런 집념만 갖고 산다면 못 할 일이 없고 하나님의 일이 집념의 대상이 되어서 저렇게만 산다면 주님 앞에 영광 돌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의 일념으로 올라가다가 폭포가 나타나도 그 몸을 튕겨서 그것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으니 내가 그 사명을 완수하면 나는 사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것 하나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희생과 분투를 하면서 그 정신 하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오실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종들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길이며 잠시 지나는 길입니다. 여기서 살고 숨쉬고 애쓰는 것들이 영원한 주님 앞에 서는 날로 이어지는 충성이 아니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면 전부 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열린 교회에 나와서 한 자리를 차지해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가든지 내가 왜 여기에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생에게 무엇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예수와 상관없이 사는데 이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에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하시고, 남에게 없는 그런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주셔서 예수를 믿게 하였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살아가야만 마지막 날에 우리가 슬피 울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무엇을 우리에게 기억하시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의 무엇을 주목했습니까? 돌아와서 제일 먼저 무슨 일을 했을 것 같습니까? 주인이 먼 나라에 갔다 돌아와서 종들을 불러놓고 무엇을 물었겠습니까?
그가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은 자기의 식구들과 가솔들을 어떻게 이 청지기가 신실하게 돌보았는가를 자기의 가솔들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가사를 위임하고 떠난 그 청지기가 그들을 잘 돌보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가솔들을 힘을 다해 섬기면서 주인이 계실 때와 다름없이 가솔들을 돌보았음을 확인 받았을 것입니다.
이 시간도 주님의 마음이 바로 그 마음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교회, 이것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떼들, 그들로 인해 노심초사하며 주 앞에 기쁨으로 만나 그 영혼들과 함께 만세 부르며 찬양할 때까지 힘을 다해서 주께 하듯이 영혼들을 돌보고, 그 영혼들을 사랑하고 양식들을 나누어주는 이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주인이 올 때에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구속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귀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람들은 영원한 세계에서 주님께 복 있다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오실 때에 축복된 종으로 인정받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야만 우리의 인생이 비로소 성공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청교도적인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훌륭하게 해석해서, 여러 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목회자요, 설교자요, 작가 가운데 아더 핑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책들은 깊이가 있고 훌륭합니다.
영국에 가면 한 공동묘지가 있는데 하루는 어떤 목사님이 관리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내가 영국에 와서 그 유명한 아더 핑크 목사님의 무덤을 보고 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 분의 무덤이 여기에 있습니까? 그 곳으로 좀 안내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관리인이 뱃살을 쥐고 막 웃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가 보았더니 묘지가 있는데 땅바닥에 다른 무덤들과 똑같이 묻어놓고 팻말이 꽂혀 있는데 단지 AP 라고만 적혀 있고 그것이 그 분의 무덤이라고 전해오기는 하지만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맨 바닥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그 맨바닥의 잔디를 수 없이 사진으로 찍어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자신의 비석 하나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매 주 설교를 잘 준비해서 원고를 쓰고 팜플렛을 인쇄해서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인쇄를 할 경비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1페니씩, 2페니씩 헌금을 해서 그것을 제작했습니다. 그 경비를 낸 사람들은 그 팜플렛을 읽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적은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서 찍어내고, 또 찍어내면서 그 일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아무런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에 그 팜플렛이 모아진 그의 책들이 수 천만부가 팔려서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핑크 목사 한 사람이 그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려 할 때 그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들 가난하였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그 가난한 중에도 1페니, 2페니의 땀에 절은 푼돈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나라의 사업에 동참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아더 핑크 목사님의 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일으키는 위대한 역사들을 창출하기까지 수고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지금은 알 수조차 없는 상황이지만 그들이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되어서 자신들이 이전에 했던 자그마한 일들이 얼마나 위대한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를 나중에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두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종처럼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실 때 주님이 그들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가 마지막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만 주님이 인정을 해 주십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 살아갈 때에도 인정해 주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한 사람 치고 자기를 위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없습니다. 모두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는 일념을 가진 사람들, 이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 사람과 동행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라는 어두로 강조를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희에게 맡기리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몇몇 사람에게 집중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작아서가 아닙니다. 큰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여러분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작은 것이라고 생각지 말고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노력을 다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비록 작은 것이지만 후에는 큰 것을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명을 받았든지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무엇으로 영광 받으시려고 계획하셨나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맡고 있는 가장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때에 양식을 맡아서 집 가솔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며 주께 사명을 위탁받은 사람처럼 그렇게 주인의 오실 날을 기다리며 신실하게 감당해 나갈 때 주께서 크게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오면서 한 목회자 분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분은 ‘설교자는 불꽃처럼 살아야한다’를 읽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힘이 다 빠져서 자신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인가 싶고, 살아갈 마음이 안 나고 교회를 당장 그만 두고 싶은 마음밖에 없으며, 매일 설교단에 서는 것이 괴롭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위해서 그 책을 썼다고 말했더니 ‘당신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제가 교회를 그만 두고 설교를 쉬면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잘 갖춰진 후에 설교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괴롭더라도 사역을 계속 할 것을 충고했습니다. 그런 괴로움과 고뇌가 없이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당신을 계속 더 위선적으로 만들지만, 그런 고뇌함으로 아픔으로 내가 그 일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늘 깨달으며 그 일을 감당해 나가노라면 그 과정을 통해서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며 에스겔처럼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실 그 때 우리는 투덜댈 것 없습니다. 그것이 정말 귀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목사님이 뭔가 맡아주기를 부탁할 때 ‘기도 좀 해 보겠다.’며 버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일을 부탁하지 않을 때의 외로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새벽기도도 “나오십시오, 나오십시오.” 하면 몇 번 부탁해야 한 번 씩 나오는데 “우리 교회는 아무에게나 새벽기도를 개방하지 않으니 누구누구만 나오십시오.” 라고 한다면 아마 소외감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무엇을 맡길 때에 먹기도 싫고 버리기도 싫은 떡을 쥔 어린아이처럼 그런 심정으로 주님의 일을 대하는 것을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 분명히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해서 정말 훌륭하게 헌신을 다하고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인정하시기만 하면 주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리라. 큰 것을 너희에게 맡겨주시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여러분에게 일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아서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고 우리에게 주신 작은 것,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여기, 이 교회에, 내 가정에, 나의 일터에 나를 세우신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 소명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거기에 자신의 삶의 가치를 두고 그렇게 안 보이시는 주님 앞에서 그 분이 보이는 주님인 것처럼 충성을 다하며 살 때 여러분의 인격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왕이 다니엘을 보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다니엘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다, 사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 다니엘로 , 그의 인격의 특징으로 기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자기의 귀한 것들을 희생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가장 작은 일, 그 일을 자신이 완수할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고 믿는 그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며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것을 맡겨 주십니다.
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 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면 지금은 비록 코흘리개 아이들 하나 두 명을 만족하게 하고, 그 영혼들 속에 믿음을 심는 일들을 하지만 그러나 내가 그 사명을 작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때를 따라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주의 귀한 은혜를 따라서 영혼들을 위해 수고하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 우리의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을 통해서 수 백 명, 수 천 명, 수 만 명의 영혼에게 만족을 주는 하나님의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 분을 못 만났더라면 내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인정하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되고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아가고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살려고 가장 작은 것, 그 일 하나를 위해서 수고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높이십니다.
주를 위해서 사명을 감당할 때 , 때로는 그 사명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높은 곳에서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내려와라.’ 높은 의식으로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 우리는 정말 괴롭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낮아지는 사람들은 주님이 반드시 다시 높이십니다.
저는 이것에 대한 체험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주님이 반드시 높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높은 자리에서는 그 일을 못하기에 무릎을 꿇고 그 일을 귀하게 여기며 감당하는 것은 목표가 있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우리는 정말 귀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려오는 것이 자기의 죄 때문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낮아짐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고 그 의를 위해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져 보십시오. 주님이 다 때가 되면 능하신 손으로 여러분을 높이십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모든 사람 위에 존귀하게 만드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높아진 것들은 빛 바랜 영광이나, 주님이 그들을 높이셔서 하나님이 그 인내 속에서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주께서 주님의 손으로 높이실 때 그것은 영광스러우면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영광입니다. 안팎으로 충만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많이 맡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주십니다. 많이 남긴 사람들에게 없는 사람의 것까지 빼앗아 더 많이 주십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그 일이 무엇입니까? 가장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이 스스로 주를 위해서 낮아진 여러분을 이번에는 주님이 내가 나를 위하여 너희를 높이리라 하시면서 존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 나오는 모든 분들이 이 곳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렇게 만나게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사명이라도 충성을 다해서 섬겨, 주께 인정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9. 스스로 종 된 자유인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제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찌니라”(신15:12-17)
여러 주에 걸쳐서 종에 대해서 시리즈로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계속 신약에서만 보았습니다만은 오늘 이 구약에서 한번 종에 대해서 살펴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제는 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권층을 상징하는 것 같이 ‘주의 종’ ‘종님..’ 뭐 복잡하게 종이라고 하는 자체가 가까이 하기엔 어려운 권위, 그런것까지 깃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이라는 말을 그렇게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예라는 말이 훨씬더 적합하겠다고 하겠습니다. 이 히브리 민족의 사회가 매우 특수한 사회였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노예라고 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회속에서도 없는 것이 아니라 있었습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라고 하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있었지만은 그러나 노예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노예라고 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은 있는데 왜 노예제도가 없느냐! 이 노예가 한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가지고 노예제도라고 하는 이 제도가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이 신분이 계속해서 세습이 되고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야지만 그것이 하나의 제도가 됩니다. 제도가 되고 그 제도 속에서 노예라고 하는 말하자면 층들이 생겨나고 그 층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사회가 전체적으로 계급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가 노예라고 하는 제도를 가지고 그렇게 계급사회가 되어가지고 이방이 나라들이 그 계급사회를 토대로 해서 그 노동력들을 가지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소수의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이런 나라의 체제가 되는 것을 하나님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역사적으로 있었던 노예제도에 있어서 물론 어떤 교회들은 강력하게 대처를 하고 거기에 대해서 분명히 반대의사를 표명해서 심지어는 노예제도를 폐기하기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 역사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지나고 나면 바로 올바른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러면 노예라고 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무자비한 노예제도가 될 수 없었냐면 6년을 일하고 7년은 안식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년이 되면 그 안식년에는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노예로 팔려가는 어떤 경우냐 예를 들면 빚을 너무 많이 졌을 경우, 그럴 경우 말하자면 사람의 몸이 팔리는 경우가 있죠. 그러나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도 7년 동안 일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해방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자유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공정하게 시행되고 있는 그런 때에는 팔려가도 6년만 고생하면 7년에는 율법에 의해서 놓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식어지고 믿음이 떨어지게 되니까 나중에는 이제 6년이 되고 7년째에 노예들을 놔주어야 하는데 놔주질 않는 겁니다.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서 안식년이 되어서 너희가 노예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됐는데, 너희들이 노예를 놓아주지 않고 그렇게 계속 부려먹는 이유가 뭐냐! 율법이 뭐고 여호와가 누구관데 우리가 노예를 놓아 주겠느냐. 그런 때가 이제 오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율법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들려줄 때에 이 바로 반복해서 들려준 율법 중에 하나가 이 바로 노예제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동족이 팔려서 그래서 6년을 섬겼으면 7년에는 그를 놓아주면서 자유하게 하고 자유하게 할 때는 그가 비록 옛날에는 팔려 왔지만은 빈손으로 가게하지 말고 이제는 놓아주고 그리고 이제는 ‘네가 갈 때는 양무리 중에서 타작마당에서 포도주 틀에서 진귀한 그런 귀한 물건들, 풍성한 물건들을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셨으니 너도 후히 아끼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넘치는 마음으로 줘서 돌아가게 하라. 그러니까 사실은 해방은 그냥 단순히 신분만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그건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까 마치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먹고살 대책이 없어서 다시 범죄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처럼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율법에 아예 정한 겁니다. 갈 때는 그러니까 충분히 스스로 자활해서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말하자면은 보상들을 받아 가지고 보상이기보다는 은혜입니다. 그것들을 받아 가지고 떠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상기시켰잖습니까? 가만히 보면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종살이하다 나오던 기사를 보면 그들이 거기서 종살이하다 나올 때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너희들은 애굽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라 그러면 그들이 후히 주리라 그래서 애굽 사람들한테 ‘인제 너흰 가도 된다’ 애굽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냥 가기가 좀 섭한데, 뭘 좀 달라’ 그러니까 애굽 사람들이 금, 은, 폐물 모든 걸 막 준겁니다.
줬을 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제 너무 끔찍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애굽이 완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초토화되는 과정을 보았기 때문에 이 애물단지들이 빨리 떠나야지만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폐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많은걸 가지고 나왔습니다. 만약에 빈 몸만 나왔다고 한다면 삼백만 가까운 사람들이 광야에 나와서 아마 하루만 굶으면 난리 날텐데, 여러분들 만약에 하루만 굶어도 눈에 헛것이 보일 겁니다. 그런데 삼 백 만 명이 되는 사람이 광야에 아무것도 없이 나와서 뭘 먹고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신 겁니다. 종살이 했으니까 거기서 모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 두고 오는 겁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올 때 많은 제물들을 애굽 사람으로부터 얻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그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들이 종살이하던 사람이 나갈 때 그때 충분하게 그가 충분히 독립해서 말하자면 생계에 어려움이 없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너희가 그런 것들을 마련해서 보내라, 그런 것들이 여기에 나온 겁니다. 아낌없이 다 줘서 보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율법이 만약에 그대로 시행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늘날 일어나는 노사분규니 뭐니 하는 이런 모든 문제들이 결국은 무엇 때문입니까? 관계가 끊어지고 단지 그 곳이 일을 하고 돈을 벌어먹는 곳이고, 또 사람들을 모아다 일을 시켜서 돈을 벌어서 그 돈을 빼내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삭막한 곳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미국사회는 노동조합이 엄청나게 강한 곳입니다. 미국이 대통령이 되도 대통령이 맘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되는데, 중앙은행 즉 발권 은행에 돈을 찍는 그 총재와 노동조합에 이 최고 우두머리를 손을 못 댄다는 것입니다. “돈을 더 찍어야 되겠습니다.”라고 얘기해도 총재가 우리나라 같지 않고, “아무래도 경제사정으로 볼 때 돈 찍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라고 비토(?) 놓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임기하고 이 총재 임기하고 어긋나요. 어긋나가지고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는 한 대통령이 재임 중에 자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말하자면은 국가에 권력을 분리하는 겁니다. 그 중에 한사람이 노동조합을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여러해 전에 이화여대 교수가 특강하는 것을 참석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그 교수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 얼마나 막강한지 미국에 있는 전 근로자를 두 달 치 월급을 줄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그 노동기구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회사에서 월급을 안 줘도 파업시켜놓고 노청에서 월급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일을 안 하고도 버텨날 수 있는 회사가 없으니까 아주 강력하게 노동자들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근데 한국사람 한 사람이 미국에 건너가서 공장을 하나 차렸습니다. 공장을 차리고 종업원이 80명 내지 100명이 되니까 미국에서도 작은 공장은 아니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조합에서 내려와 가지고 그 근로자들을 돌아다니면서 노조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개인의 권익에 대해서 우리보다 훨씬 눈이 밝은 사람들이니까 “노조를 만들라.”그러면은 모두 잘 만드는데 미국 사람들은 노조를 만들라고 하면 노조가 싫다고 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사장이 미국으로 예전에 어렸을 때 가서 거기서 자수성가해서 회사를 세웠는데 그 사장은 말하자면 미국에서 돈을 벌어서 한국에 가서 돈을 모으고, 그 돈을 가지고 한국에서 재산을 붉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예 미국으로 귀화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살면서 그 돈을 공장을 세울 때 아주 독실한 그리스도인데 거기에서 공장을 세워서 아예 말하자면 청교도적인 정신으로 검소하게 자기가 생활하면서 그러면서 회사를 아예 공개를 하는 겁니다. 돈에 입출금 외에 모든 내용을 다 공개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냐면 미국 사람이 일을 매일 나오다가 몸이 아파서 못 나왔답니다. 그랬더니 사장이 심방을 왔습니다. 미국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높은 사장이 심방을 와가지고 위로를 해주고 격려를 해주면서 몸이 아파도 당신 안 나오는 날수만큼 월급을 깎지 않을테니까 몸조리 잘하고 나오라고 순 한국식으로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옛날처럼 큰 대가족들이 모여서 사는 그 정신을 기업에다가 이렇게 적용을 한겁니다. 그러면서 한국에 그 대가족제도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우리는 ‘원 패밀리’ 즉 ‘한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고취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해를 떠난 관계를 갖는 겁니다. 그러니까 희생적으로 일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해서 돈 남으면 그 돈을 은행에 넣지 않고, 자기 회사의 주식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일을 하면 자기 월급 받고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공장이 잘 돌아가서 돈을 많이 벌면 또 연말에 주식을 배당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 가정처럼 생각을 하면서 그 사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오늘날 그렇게 노사관계를 하면서 그렇게 강퍅해지고, 심지어 사람들이 불에 타 죽고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관계는 없고 이익만 남으니까 바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 우리에게 그대로 시행이 된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이 육 년 동안 이 사람은 이 육 년 후에는 말하자면 속함을 받고 이 집을 떠나게 될 것이고, 그리고 육년 후에 떠날 것을 보면서 그전에 그렇게 종살이를 하다가 떠나는 많은 사람들을 살아오면서 봤습니다. 그런데 모두 육 년 동안 열심히 주인을 위해서 한마음을 가지고 봉사하고 섬긴 후에는 놀라운 말하자면 복을 받아가지고 그 집을 나가는 것을 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고 헌신을 다하는 종들, 그래서 누리지 못하고 종의 신분으로서 자신을 위하지 않고,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특별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육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수고한 종들을 공수로 돌려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치 않다. 그러니까 포도주 즙 틀에서 제일 좋은 포도주를 부대에 담아서 메어 주고, 그리고 곡식단 중에서 제일 낱알이 풍성하게 달린 곡신단들을 털어서 그들에게 지어주고 그리고 타작마당에서 양무리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취해서 그들에게 줄지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따라서 종으로 살아가고 그들을 충실하게 섬길 때에도 하나님께서 풍성한 보상을 약속해 주셨거든, 하물며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놀라운 그 구속의 은혜를 힘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종처럼 살아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후히 갚아주시겠느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속에서는 때로는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평생 주님을 위해서 신실하게 종노릇하며 살았지만 이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자기의 목숨까지도 하나님 앞에 드리며 순교하는 구별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사심 없이 하나님을 섬겼고, 그리고 아무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일평생을 섬기는 종으로서 일평생을 사셨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해주셨습니까? 이 세상에 많은 재물과 전토와 그리고 이 세상에 많은 부귀영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갚아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까지 받으셨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오도록 외치고 마지막에는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갔던 선지자들의 생애도 마땅히 그러한 생애였다고 우리는 생각해야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전토가 늘어나는 것이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나 재물의 복이나 부귀영화의 복들을 자기들의 희생과 종된 섬김에 대한 보상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은 우리는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 내 이름을 위하여 부모를 버리고, 전토를 버리고 그리고 친척들에게 소외당하고 ,네가 만약 네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잃어버리고 가난한자가 되면 그러면 이 세상에서 너희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갚들의 복을 주고 그리고 전토의 복을 주고 자녀들에게 축복학리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약속만 기억하지 말고 일반적인 약속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율법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 년 동안을 전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또 그것이 주인에 도립니다. 왜 예수그리스도가 말씀하셨습니다. 주께 하듯이 하라, 전심으로 주인을 섬겨라 그것도 또 율법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서 성실하게 주인을 섬겨라, 그렇게 섬길라 치면 하나님께서 육년 후에 그 주인의 마음을 움직여서 율법을 지키게 하시고 그래서 풍성한 보상을 받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율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변함없이 충성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아버지께서 그런 보상을 해주신다면 보이는 이 세상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땅의 것이 아니라 천국의 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것들을 상급으로 예비하셨겠느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자기의 것을 희생하며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겁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선지자나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에 일생을 주님을 위해 나실인으로 다 드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혹은 이 세상에서 형벌을 받아 다 죽어갈 때에 그들은 전토나 부귀나 영화를 손에 쥐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 이상의 축복들을 손에 쥐었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주님을 일평생 섬기다가 마지막 순교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여러분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이 마지막 죽어가는 그 사람을 돌에 맞으면서도 그 얼굴을 천사와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켜주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그렇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지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전심으로 종으로 섬기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 결코 주님을 위해 흘리는 땀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흘린 눈물을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신다고 얘기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그리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노라면 더디 성공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축복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모든 것들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을 통해서 축복을 받으려고 해야지 하나님 제외해놓고 축복을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종이 이 세상에 축복의 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도 잃고 축복도 잃는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그 종이 말입니다. 마지막 칠년에 그 성공적인 종살이는 마치고 그리고 그 주인의 집에서 해방되어 나갈 때에 많은 노예들이 그를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군대에서 제일 부러운 사라들이 누굽니까? 제대한 사람들이 제일 부럽습니다. 이제 막 제대한 사람이 초라한 모습으로 어릿어릿하게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누가 그를 부러워하겠습니까. 그런데 군대라는 사회에서는 너무너무 부러운 겁니다.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군대생활이 종생활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종으로서 살아가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기서 해방되어 나와 가지고 그 말하자면 기름진 곡식과 포도주와 몇 마리나 줄지 모르지만 우양을 몰고 자립할 집을 찾아서 떠나가는 자유인이 될 때에 그때 노예를 사는 사람이 얼마나 그것이 부럽겠는가 생각을 해보십시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 기약도 없는 박봉정도가 아니라 노예나 다름없는 그런 생활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말입니다. 그 자유하게 되어가지고 훌륭한 아파트에 준비된 차에 이렇게 해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나는 그 귀순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제는 귀순해 봐야 좋은 시절 다 지나갔지만, 지금은 귀순해도 아파트 평수도 자꾸 줄어들어서 19평정도 밖에 안 되고, 돈도 얼마 안 준다지만, 옛날에 김신조나, 이웅평 이런 사람들 비행기 타고 넘어온 사람들, 그리고 김만철씨가 막차타고 내려온 사람이지 이제는 뭐 그 사람들은 몇 억을 받았잖습니까? 그렇게 사선을 넘어가지고 완전히 거지처럼 그렇게 거름덩이에 빠져서 거지처럼 넘어 왔는데, 하루아침에 여의도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환영대회를 하고, 목욕하고 나서 새 옷 갈아입고 나니 몇 십 평 아파트에, 자가용에, 여기저기에서 출연해 달라는 것에, 인터뷰에 그 수많은 특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6년 동안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종살이를 했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뭐가 기쁨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풍년이 들어도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입니다. 장가들어서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는 자기소유가 아니라 주인의 소윱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그런 속에서 6년 동안 그렇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인의 영광, 주인의 집을 위해서 그렇게 봉사했던 것입니다. 그런 눈물의 세월이 6년이 있고 나니까 해방의 제 7년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저는 이런 종살이를 안 해봤기 때문에 해방의 기쁨을 모르지만은 그러나 제가 한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전에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제가 8년 동안 있었는데, 제 성품의 큰 단점 중에 하나가 지금은 어떻게 보이실지 모르지만 너무 여리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그러면 마음이 아파가지고 잠을 못자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아셨는지 저를 8년 동안 그 속에 집어넣고 연단시키는데 그것은 영적인 연단이 아니라 인격적인 연단이었는데,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여튼 얼마나 마음에 단련을 받았는지 지금 그 교회 떠난지 10년이 다 되었는데, 그 교회가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그 교회 꿈을 꾸면 등골에서 땀이 쭉 납니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리고 인격적으로 얼마나 단련을 받았는지, 말도 못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얼마나 단련을 주시는지, 이 가슴이 누르면 아파서 한의원에 갔더니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심장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한 8년 동안을 질그릇처럼 연약하니까 하나님께서 연단시키시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람 만드시려고 얼마나 열심을 품으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그럴 때 최선의 방법은 “날 잡아드세요.” 하고 여러분을 맡기십시오. 계속 뻣뻣해봐야 하나님께서 부러트리십니다. 그러니까 그 손에 그저 “주님 만드시옵소서.” 하고 맡기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이 되려면 훈련을 잘 받아야합니다. 그 분 앞에서 견뎌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훈련의 기간을 지나면 위로가 넘쳐납니다.
그러니까 이 종이 해방만 되도 좋은데 그 재물을 얻어가지고 독립된 삶으로 나갈 때에 그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요즘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부모님이 시집 장가 간 자식들을 데리고 살잖습니까? 그러다가 분가만 해도 친구들이 와가지고 그저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꽃다발을 안기는 세상인데 그렇게 부모하고 사는 게 아니라 상전 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종살이로부터 해방되어서 이제는 독립되어서 토지를 가지고 짐승을 가지고 돌아가는 겁니다. 토지도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7년 후에, 그렇게 거기 가서 그렇게 경작을 하면서 이제 자기 살림을 살아갈 때에 그 축복이 얼마나 크겠는가 생각을 해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모두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과 종에 대한 하나님의 해방과 놀라운 은혜가 있기 전에 눈물로 사는 6년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름 없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6년 동안의 피나는 종살이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 쓰라린 시련의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멈추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이 있어서 시련과 고난을 주시는 겁니다. 그 목적이 다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애들이 자꾸 말 안 듣고 공부 안하니까 때립니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데, 계속 맞던 거니까 오늘도 너 맞아야 겠다 그런 부모들 있습니까? 그건 정신 나간 부모입니다. 징계를 하거나 시련 가운데 둘 때는 목적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6년의 때가 끝나고 나니까 이 종을 이렇게 놀랍게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겁니다. 그동안에 6년 동안 종살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련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셔야 자유한거지, 우리가 아무리 해봐야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자, 예를 들어서 죄를 들어서 자유를 얘기해 봅시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부자유합니다. 그래서 죄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마음속으로 ‘끝났어, 다 정리됐어, 모든 일은 잘 될거야. 좋은 생각을 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고 주간지에서도 얘기하던데’하면서 아무리 얘기해도 그런다고 자유가 됩니까? 그런데 언제 자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내가 네 죄를 사하였으니 이제는 자유하라.’ 주께서 그렇게 우리는 놓아주실 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어서 문제 가운데 우리가 얽매인 삶을 살 때도 언제 자유로워집니까? ‘아 이젠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신경 안 쓸거야.’ 안 쓸 수 있습니까? 집에 들어가면 그 문제에 또 부딪히는데, ‘나 이제 우리 자식들 없는 셈 치고 살아 갈거야’ 없는 걸로 쳐 집니까? 이미 낳아 놨는데, ‘우리 부모, 이제 난 상관없이 살아 갈거야. 아버진 아버지고 난 나야.’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 뱃속에서 나와 가지고 매일 코 대고 같이 밥 먹고 잠자리에 잤는데, 근데 언제 자유케 되고 해방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당신과의 관계로 회복시키시고 그 문제를 풀어주시고 우리를 거기서 놓아 주실 때 그때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그런 자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고 이렇게 완전한 해방의 자유를 누르기 전에 종은 6년이라고 하는 세월동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인내하며 인내하며 해방의 그날을 바라보며 사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불평하고 불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그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맨날 깨닫습니다. 이게 내 사명입니다. 이게 내 할 일입니다. 그리고 깨달으면서도 또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은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는커녕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리고 그 사명의 자리 떠나지도 못하고, 감당하지도 못하고 어중간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인생낭비하고 시간 낭비하는 시간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건 전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니까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우리를 보상해 주시고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산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만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이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몰라줘도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주님이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을 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충직한 종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에 그 수고를 보상해 줄 그날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앞에 한마음으로 섬겨야합니다. 나눠지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하는 것입니다. 기쁘게 즐겁게 하나님을 섬겨야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는 자는 잃고,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즉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하는 죽는다.’라는 이게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완전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노예들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을 갖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노예가 되고 당신을 섬기기 위해서 나에 좋은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버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렸던 사람들을 보상해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들이 축복에 있어서도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없이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는 또 다른 하나의 종이 나옵니다. 6년을 다 살고 7년이 된 다음에 이제 해방이 되어야 할텐데 주인이 말했습니다 .“얘야 이제 복역의 때가 끝났고 네가 노예하던 때가 끝났으니 이제는 자, 이 통장을 가지고 이 물질을 가지고 그리고 이 우양을 가지고 이제 내 집을 떠나서 네가 독립된 생활을 하여라.”라고 그리고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종이 눈물을 막 흘리는 겁니다. 그리곤 종이 “주인님 내가 주인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이 사랑하는 주인님의 집을 떠나서 내가 어디로 도대체 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이 주인에게 울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제발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그 전혀 다른 또 하나에 종이 나타납니다. 그 또 하나에 종이 뭐냐면 이제는 자유하라고 놓아 주었지만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고 있습니다.
자, 이 종이 이제 율법에 의해서 6년 만에 다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 네 의무도 끝났고 이제는 가라, 그러니까 그 6년 동안 그것을 기다린 것 아닙니까? 모든 종들이 그걸 기다리며 살잖습니까. 그래서 딱 그 때가 마쳐서 물질도 주고, 자유도 주고 해방도 주어서 가서 살아라, 그랬더니 이 종이 해방에 날이 가까워 오면 다른 사람들은 기뻐하고 웃어야 될텐데, 갈수록 이 사람은 우울해 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자유와 물질과 이제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설계하고 나니 정말 기뻤어요. 여기서 백년 살아봐야 내 집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이제 독립된 집을 갖게 되잖습니까?
그러니까 야곱이 라반의 집에 있을 때에 라반을 향하여 “나는 이제 떠나겠습니다.” 했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언제나 내가 내 집을 세우리이까?’ 그거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짐승을 많이 쳐도 그건 다 외삼촌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고생은 되지만 나도 나가서 내 집 산림을 차리겠습니다. 그거였습니다. 그게 바로 라반한테 이제 당신 곁에서 떠나겠다고 말한 그 이유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니 라반이 그러면 우리 둘이 품삯을 정하자 그리고 이제 네 집을 세워라 라고 약속했잖습니까?
모든 종들이 그것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종은 틀렸습니다. 그 이유는 해방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우울해 지고 슬퍼지는 겁니다. 마지막에 주인이 요즘으로 말하자면 ‘야 우리 아무개 노예가 이제 자유인이 되는 날이니까 우리 송별파티하자’ 다 모였는데 앉아가지고 송별파티를 하는데 눈물을 흘리느라고 음식을 못 먹는 겁니다. 그날 저녁에 누워서 생각하는데 ‘내일 아침에 떠나야 하는데, 내가 인제 이 종되었던 것에서 해방이 되니까 내가 낳는 자식도 그 아이도 이젠 노예도 아니겠지. 아, 참 좋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이 주인의 집을 떠나가면 어디에서 내가 이렇게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주인의 그늘에서 살수 있겠는가?’ 그리고 밤새도록 뒤척이며 고민을 하다가 결심하는 것입니다. ‘아, 그래 나는 자유케 되도록 율법이 나에게 명하였으나 나는 그 자유를 버리고 종이 되리라’
그리고 그 이튿날 주인이 이제 떠나라 모든 식구들이 나와서 떠나가는 사람에게 박수를 쳐 주기 위해서 나와 있는데 울면서 무릎을 끓고 주인에게 사정합니다. “주인님, 제가 떠나서 어디서 이렇게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볼 수 있겠으며 어디서 내가 주인과 같이 은혜로운 상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른 곳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 보다는 이곳에서 차라리 구속을 받으며 주인님 밑에 있는 것이 나에겐 행복입니다. 내가 신분은 종이었지만 주인님 언제 당신이 나를 종처럼 대우해 주신 것이 있으십니까? 나는 비록 종이었으나 그러나 내가 노예로 이 집안에 들어온 적부터 주인은 나를 노예로 취급하지 아니하시고, 자식으로 취급하시고 내가 종이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내가 이 집안에서 무슨 주인에게로부터 고통과 박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나 주인은 기쁜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기쁨을 나누게 해 주시고 비록 종이었지만 주인님은 나를 한번도 종으로 대해주시지 아니하고 자녀와 같이 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인님, 주인님이 나를 자녀와 같이 대해 주셨는데 호적에야 종이라도 되어있거나 노예라고 되어 있으면 어떻습니까? 그 까짓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를 받아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면서 그 집에서만 떠나가지만 말게 해 주면 자기가 마당도 예전보다 잘 쓸고, 그리고 장작도 옛날보다 더 힘있게 될테니까 그리고 짐승도 이전보다 훨씬 더 성실하게 먹일테니까 내가 이 집에서 그렇게 계속 종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이제껏 내 집에서 종살이로 일생을 보냈건만 내가 어떻게 너를 또 종의 자리에 두겠느냐? 가라 자유케 하라, 이 돈이면 네가 가서 얼마든지 독립을 하고 자립하여 살수 있지 않느냐, 이제는 가거라 가서 너도 언젠가는 종을 거느린 상전이 되거라.” “주인님 전 그런 것 싫습니다. 나는 이 집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주인님 자꾸 가라 그러시면 죽어버릴 겁니다.”
그러니까 이 주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종에게 내려가서 그 종을 끌어안습니다. 그때 호적에 뭐라고 되어 있던지 간에 이젠 종과 상전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자녀와 아버지 이상의 관계입니다. 그러면서 그 종의 귀를 기둥에 대고 송곳을 가지고 와서 뚫는 것입니다. 귀걸이 매라고 뚫는 게 아니라 종 되는 율법의 규례인 것입니다. 귀를 기둥에 대고 송곳으로 귀 귀퉁이에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뚫으면 자국이 남을 것 아닙니까? 이것을 볼 적마다 그 사람은 자유인이 되었으나 스스로 종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라는 표시인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일생을 그 집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신분은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셉이 노예였습니까? 신분은 노예였지만 그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저금통장, 등기부등본까지 갖고 관리를 했는데 그게 무슨 노예였습니까? 이 노예는 그 집에서 살면 그럼 뭐합니까. 일생 살아도 자기돈 하나도 없는데, 노예는 그런 것 상관없습니다. 이 귀 뜷은 노예는 이미 그런 것에 대한 미련이 있었으면 나가라고 할 때 얼씨구나 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이미 이 주인의 집에 살면서 이 노예가 크게 감화를 받았고, 이 노예가 최고의 자산으로 생각했던 것은 해방될 때 받는 몇푼의 퇴직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이 노예는 그 속에 살면서 그 은혜로운 상전과 그 집안에서 함께 누렸던 그 말할 수 없는 관계, 그것을 이 노예는 돈을 주고도 살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세상에 있는 물질로서 그가 하나님을 섬긴 것이 보상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 노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신으로 살다간 사람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평생을 가난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모두 누리면서 산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예수를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셔서 우리를 구속받게 하셔서 이젠 진노의 자녀이었다가 어느 한순간에 우리를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어서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때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뭘 요구하셨습니까. 구원받고 나니까 “얘야 너는 오늘부터 십일조는 꼭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까?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명령은 바로 그겁니다. “가라. 이제 네 죄가 사하여졌으니 평안히 돌아가거라.” 근데 어떻습니까? 나의 죄를 속하시고 나를 위해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십자가에 흘린 구속의 놀라운 사랑으로 나를 사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젠 가라고 하는데 “주여 우리가 어디로 가겠사옵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자유하라 하셨으나 주님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없사옵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하라고 말씀하셨으나 우리는 주님,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네가 우리 집안에 종이 되면 네 소유는 없는데 그래도 괜찮니?” “그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주님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귀 뚫은 겁니다. 이게 진정한 의미의 복음적인 나실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은 그를 놓아주라고 해서 율법에 따라서 주인이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율법을 따르면 해방을 받을 수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데 그 주인과의 관계가 너무 좋아서 이제는 물질에 대하 대가는 상관없이 매일 아침 주인님의 얼굴만 뵈올 수 있고, 내가 봉사하고 노동하는 그것이 주인의 집을 위한 것이라면 저는 더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살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 차가운 율법이 통용되고 있는 구약시대에서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베푼 호의와 은총에 의해서도 이렇게 감화를 받고 그 주인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귀 뚫고 마지막에 일평생을 주인을 위해 살고 얻는 것이 뭡니까 수의 한 벌 얻어 입고, 주인의 땅에 묻히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 인생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러한 허물이 많은 인간의 유한한 호의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무한한 호의와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되 자기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기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늘 말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기뻐하며 사는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종으로 살아가야 되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6년 동안 호의를 입은 종들이 주인을 위해 일생을 드리고 귀를 뚫고 자유케 하라 하였으나 그러나 스스로 자유인으로서 종이 된 인생을 일평생 살고 마지막으로 수의하나 얻어 입고 주인의 집에 묻히는 그것을 한없는 영광으로 살면서 죽었던 율법시대에 종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어제도 살아봤고 오늘도 살고, 내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완전히 주인의 놀라운 사랑에 감화를 입어서 그래서 주인 앞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인의 집에 산 이 종의 즐거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주인을 위해서 섬기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보람인 것입니다.
쥐꼬리만큼 봉사하고 개 꼬리만한 하나님의 축복을 주시는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투기하듯이 이런 것들은 전부다 종교적인 사의식입니다. 십일조 내는 동기도 그래서 올발라야합니다. 나눠주는 봉투마다 십일조를 내면은 창고에 부을 것이 있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고 축복하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멀어질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창고를 비우실수 있습니다. 관계가 올발라야지, 그 다음에 축복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관계는 저리 가고 복이나 받겠다고 덤벼드니까 문제가 더 복잡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종이 그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내가 쓸어놓은 이 마당을 주인님이 걸어가겠지, 이것이 즐거움입니다. 일평생 그렇게 그 주인을 섬기는 즐거움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같이 가치 없고 공로 없는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이제 구속을 받고 우리의 육체대로 살아서 우리의 정과 욕심대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 마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세계를 위해 살아가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뭔가를 얻어 보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뒷전으로 제껴놓고 그렇게 바쁘고 발바닥에 불나도록 돌아다니는 인생에 그 비참하고 가련함을 우리는 이 시간에 즉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어서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자유케 되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의 집에서 귀 뚫고 섬기는 종들은 뭡니까. 이제 귀 뚫은 종을 들여다보면 귀 안 뚫은 종을 보면서 생각할 겁니다. ‘6년 후에 저놈 뭘 좀 해서 보내야 하는데.’ 생가할겁니다. 귀 뚫은 종을 보면 볼 때마다 주인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우리 집에 노예로 끌려와서 혹은 팔려 와서 그렇게 혹독한 고생을 하면서도 결국은 6년이 지나서 가라고 하였더니, 니가 그 모든 보따리를 내려놓고 앞마당에서 울며 니가 내 집에서만 거하기만 하면은 정말 아무것 없이 살다 죽어도 좋다 그랬지;’ 그 주인이 양심의 화인을 맞은 주인이 아니라면 그 귀 뚫은 종은 종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위대한 친구처럼 보일 것입니다. 정말 그럴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역자들이 교회에서 존경을 받는지 아십니까. 설교를 잘한다고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인류 대학을 나와서만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가끔 보면 내가 기른 제자들 가운데 목회하는 현장에 가볼 기회가 있습니다. 이건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하고 인물이나 훤칠하게 잘생기면 좋건만 꽤재재 해가지고 그런다고 해서 설교를 잘하냐 하면은 잘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게 어디 몸 따로 마음 따로지 제대로 됩니까? 그래서 참 속으로 답답하다 생각했지만 사람하나는 참 진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가서 목회하는 현장을 보면 말입니다.
거의 그 아이보다 훨씬 더 공부 많이 하고 그리고 훌륭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머리를 깎듯이 숙이면서 전도사님, 혹은 목사님 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자면 그 사람을 목자로 모시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그렇게 즐거워합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철저하게 하나님 한분만 이유가 되어서 종된 삶을 살아가는 삶, 그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공부 많이 못해서 학위가 없는 것도 자유, 하나님이 날 알고, 내가 하나님을 알고, 주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는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만이 가진 독특한 권위와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그렇게 귀 뚫은 삶을 살아간 자유케 되었으나 스스로 하나님 한분만을 위해서 종되어 살아가는 사람 모두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존경하지 않으면 사람보지 모르는 교인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귀를 뚫은 종이 마당을 쓸고 지나갈 때 이 주인의 마음은 언제나 뭉클하고 뚫어진 귀를 볼 적마다 생각나는 게 있을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 사람을 볼때마다 이 사람이 종이라고 하는 종의 신분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그렇습니다. 관계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 종은 정말 인생 자체가 나를 위해 헌신한 종이다. 그 사람을 어떻게 종으로 대우해 주겠습니까. 오늘 우리 일생을 한번 이렇게 멋있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갑니다.
이렇게 멋있게 살면서 세상이 뭐라 그러던지, 나는 주님이 좋고 나는 주의 종이 되어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을 섬기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의 집에 수종을 들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인해 우리도 기뻐하고, 그렇게 일평생을 살다보면 인생이 잠깐 지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이 주인의집에서 매일 평생을 주인을 위해서 수고하고 그렇게 인생을 마치게 될 때 내가 주인이라면 그 종을 품에 앉고 임종을 지켜볼 거 같습니다.
저는 그 흑인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가끔 보면 그 말하자면 남부에서도 그 훌륭한 인격을 가진 주인들이 노예제도가 있었지만 노예 해방하라고 그러는데 안가는 겁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님 주인님이 우리를 어떻게 해 주셨는데, 우리가 해방이라니 우리가 언제 속박 받고 산 적이 있습니까.’ 그러던 노예들이 죽을 때가 되면 주인이 그 존귀한 품에 노예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임종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케 되었습니다. 주님은 구속을 덜미로 우리의 발목을 잡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값없이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시진 않지만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주님의 사랑으로 종삼아 주셨으나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일평생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간직하고 종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 유한한 인생을 이렇게 원 없이 후회 없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여러분들 되시도록 축원합니다.
10.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15:10-11)
아마 7-8째주 되는 것 같은데요. 이 시간에는 우리가 신명기에 나와 있는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에 대해서 아마 꽤 설교가 길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명을 깨닫고 주님의 종처럼 살아갈 때에 인생들은 ‘야! 행여나 내가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헌납했다가 하나님이 내 인생을 휴지통 같이 스타일 구겨지게끔 사용하시면 어떡하나.’이런 불안감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할 사실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그렇게 사용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놀랍게 대우해주시는가.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율법에 종들에 대해서 어떻게 후대하라고 가르쳐주셨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게 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집안에 충성하는 종을 그렇게 후대하여야했다면 그렇게 후대하도록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에게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종들을 얼마나 선하게 대우해 주시겠는가 하는 것을 믿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것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복잡한 것 같지만은 간단하게 놓고 보면 일평생동안을 결국은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드리고 그리고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주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야 되는데 하나님은 계속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시고, 그리고 자기는 계속해서 그렇게 못살겠다고 아둥바둥하며 줄다리기 하다가 결국은 일평생을 그렇게 신앙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안 가진 사람도 아니고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허송하는 것입니다. 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여러분 한번생각을 해보십시오. 인생의 목표가 올바르지 않는 사람이 재주가 많고 기술이 많으면 그 사람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자기가 왜 사는지, 그리고 내가 내게 주어진 사명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매일 와서 하나님 앞에 은혜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은혜를 받아야지만 사명을 깨닫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고 내가 그것을 따라 살아야겠다고 하는 그런 각오와 마음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우리의 인생을 더 값있게 하시는 것이지 주님이 은혜를 주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모두 은혜를 주셔도 내 인생 내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그리고 내가 어떡하면 이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이 내가 인생길을 걸어가고자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좀 뒤를 밀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해결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무엘서에 나오는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쨌든 좋은 의미에서든지 나쁜 의미에서든지 이스라엘 역사가 기억하지 않을래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사무엘까지 와가지고 사사시대가 끝납니다. 사사라고 하는 것은 재판도하고 나라도 다스리고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보니까 대단한 힘이 있고 자기네 나라를 늘 쳐서 괴롭히는 나라들이 다 왕을 가진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네가 왕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연약하게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왕이 없어서 연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왕이시거든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면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임금들은 백성이 갖다 주는 세금이나 빨아먹고 그리고 이 세상의 임금들은 백성들이 말 타고 창 칼 들고 싸우겠다고 그래야지만 비로소 임금이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때요? 홀로 힘을 가지고계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려고 하면 앗수르 군데가 쳐들어왔을 때도 그 수십만의 군데들을 말이에요. 하루아침에 창 하나 칼 하나 들지 않고 이슬에 맞아서 말하자면 그대로 다 죽어버리게끔 만들어 놓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왕을 구한 것입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충실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네 가운데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보이는 왕처럼 자신을 다스려주시고 인도하시기 위해서는 그런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체험하면서 살기위해서는 하나님이 능력으로 자기들과 함께해 주시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승리하고 이기게 하는 것은 바라는 바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많은 명령과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너무나 버겁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입니다. 그러니까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달라고 하는 것들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사무엘이 여러 번 근심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뭔가를 허락하실 때에도 두 종류입니다. 기쁘게 우리를 위해 허락하실 때가 있고 또 하나는 기쁘지 않게 허락하실 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 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첫 번째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울이 하나님께 이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잘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겸비하고 겸손한지 왕이 될 때에 그 태도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너에게 기름 부어 왕을 삼겠다.” 그러니까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될 수 있겠느냐고 자신을 감추면서 겸손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세월이 흘러가니까 이 사람이 점점 교만해지고 타락해서 마지막에는 이 선지자, 제사장 이외에는 드릴 수 없는 그러한 말하자면은 제사를 자기가 대신하면서 하나님의 그런 율례를 배반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깨뜨리는 불순종과 교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한 하나의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실 일을 왜 하시나? 후회하실 일을 하신다는 그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실 수가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 말씀에 보니까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후회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울을 왕 세워도 앞으로 결국은 그 사울이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의 길로 가리라고 하는 것을 아셨다고 하더라도 오늘 사울이 막상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픈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듣는 말로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야기할 때에 질문을 할 때에 그 질문을 어른들 속에서 통용되는 이야기로 대답을 해주면 그 아이가 알아듣겠습니까? 한번 텔레비전을 보는데 아이가 물어보는 거에요. “아빠, 저 텔레비전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춤춰?” 그러니까 뭐라고 답해요. “백과사전을 갖다놓고 전파를 이용해서 그게 전기를 만들어서 전기가 통해서 브라운관을 통해서 나오는데 요즘 새로운 브라운관이 가진 텔레비전이 많이 나왔는데...” 수없이 설명해도 애는 더 못 알아듣습니다. “저기 조그만 사람들이 있어.” 그러면은 “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렇게 알아듣게 이야기해주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갓난 애기처럼 이해하기 쉽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회가 없지만은 후회하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뼈저리고 아픈가하는 것을 하나님이 잘 아셔요. 그러니까 “얘야 너희들이 누군가를 굳게 믿었는데 그 사람이 배반을 하고 너희 가슴에 말하자면 비수와 같이 그런 아픈상처를 남기고 다시 너희를 떠나갔을 때 너희마음이 너무 아프고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그와 관계를 맺은 것을 너희가 후회한적이 있지. 너무 마음이 아프고 그렇지. 내가 지금 그렇단다. 그러니까 과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이야기 하고자하는 것입니다. 이해가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는지 인간이 흔히 하는 후회라는 표현을 써서 인간들에게 사울을 세운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셔서 하나님이 그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을 부으실 때 실제로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하나님을 섬기고자하는 그런 사모하는 열심히 충만하게 일어났습니다. 어쨌든 말이에요.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믿습니까. 밥 기껏 먹고 오늘은 맛있는 것 많이 줬던데.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믿습니까? 유아실 해보세요. 믿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을 때에 성령이 임하니까 여호와의 권능으로 충만해져서 한 백성을 능히 다스리고 나갈 수 있는 지혜의 신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지혜의 신이 오셔서 그를 인도하였습니다. 이전에 어둡던 지성을 밝히시고 이전에 혼돈하고 바르지 못했던 생각들을 바르게 정리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부하들 중에서도 충성된 자와 거짓된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볼 줄 아는 지혜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통찰과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 백성을 다스려야 되겠다는 순수한 마음의 열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 세울 때마다 혹은 선지자로 세울 때 마다, 제사장으로 세울 때마다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름은 붓는 것은 그냥 붓는 것이 아니라. 진짜 부을 때에 여호와의 신이 함께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을에 또 성찬하지 않습니까?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덜렁덜렁 그러고 그냥 막 살다가 와가지고 성찬이다. 그러니까 뭐 몇 일전에 술 먹던 입인데 같은 술인데 어떠랴. 그리고 먹으니까. 그게 은혜가 안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잘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나와서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성찬에 참석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아침마다 금식했다. 그러는데 그렇게 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와서 성찬을 받을 때 말입니다. 그 은혜라고 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이 오늘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오늘 우리에게 충만하게 됩니다. 이 성찬 때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심령이 깊이 새로워지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아! 내가 예수의 사랑으로 이렇게 선택받은 인생이구나 참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빛처럼 소금처럼 사는 것 말고 나는 희망이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기름 부을 때 충만한 성령이 사무엘에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무엇보다도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지파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은 그러나 이 사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연약하다 라고 하는 그런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왕으로 세움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던 이 사울을 하나님께서 오늘 “후회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넘어진 신앙의 상태에서 세우신 것도 하나님이고 또 우리의 사업이 쓰러졌을 때 세우신분도 하나님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멸시받을 때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능하게 하시고 여호와만이 우리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후회를 하신 것입니다. 그 후회하신 이유는 뭐냐하면 나를 좇지 않고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붓고 성령을 부어주셔서 여호와의 신에 감동시키실 때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위한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저 구속된 그 인생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야 될 의무,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사명’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이 하나님의 사명을 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름 부어서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셨던 것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리면 그 인생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사명을 모르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것입니다. 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왜 이렇게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하는 것만이 사명이 아닙니다. 어떻게 내가 오늘 아침도 일어나서 밥하고 빨래하고 그리고 직장 다니는데 만약에 사명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식모입니다. 식모. 식모 아닙니까? 식모인데 다른 식모는 왔다가 출퇴근하지만은 우리들의 식모는 한집에 계속 있으면서 식모 노릇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월급 받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가 돈을 가지고 식모살이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수많은 날 동안 이 주부가 일평생동안 얼마나 밥을 할까. 옛날에 우리 할머니 말씀하셨어요. “얘야,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지 아니?” “난 몰라요.” “제일 어려운 것은 밥하는 것이란다. 왜 그러느냐? 하룻 저녘에는 드러누워서 얘가 내가 쌀을 몇 가마나 밥을 했을까? 70살이 되도록 내가 8-7살서부터 밥을 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도대체 내가 쌀을 몇 가마나 밥을 했겠냐?” 옛날은 한 가족이 20명이 넘어가지고 밥을 하고 소죽까지 끓였으니 소 먹는 것은 빼고 사람 먹는 밥만 얼마나 밥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60년, 70년 가까이 밥을 했는데도 지금도 질 때있다.” 그러니까 결론은 오늘 아침 밥 진 것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시골에서 겨울이면 후 부는 그 겨울, 그 무서운 바람을 싸리나무로 만든 수수깡 같은 것으로 부엌 차려놓은 그런데서 제가 그 때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보지 않았지만 시골에서 살았으니까 환하게 알죠. 거기에서 그렇게 쌀을 씻어서 밥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먹였는데 그 먹은 사람들도 대부분 다 죽었습니다. 그 해주시던 분도 돌아가셨고.
한번은 그거 남겨두었으면 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몇 살 때인가 18살 때쯤인가 광을 들춰내더니 할머니가 그러시는 거에요. “얘야 이게 무엇인지 아니?” 그래요. 그래서 도저히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수동식 세탁기에요. 빨래판이란 이야기입니다. 빨래판인데 3분의 1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거 누가 잘라먹었느냐 그러니까 자른 것이 아니라. 하도 빨래를 해서 그게 3분의 1만 남았는데 그게 바로 너 귀저기 빨던 빨래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빨래를 거기에다 대고 했습니다. 그것을 깨끗이 입고 나가서 밭 일도하고 시장거리에도 나가고 출근도하고 그랬습니다. 그 옷 입던 사람들도 대부분 다 죽었습니다. 빨아주시던 분들도 돌아가시고. 인생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또 여자들 얘기만 해서 안됐지만은 남성들은 뭐가 틀립니까? 죽어라고 가서 일해서 무슨 사건하나 뻥 터져서 누가 몇 십억 해먹었더라. 눈만 껌벅껌벅 하는 것입니다. 11억을 20억을 해먹었데나 뭐 얼마를 해먹었데나. 그것 월급쟁이들은 갑자기 손에 힘이 쭉 빠지는 것입니다. 야! 아무것도 안 먹고 갖다 모아도 100만원을 못 모으는데 100만원 저축하려면 200만원 월급타도 힘들거에요. 그렇죠. 250만 원은 타야지 100만원 모을 거에요. 그 100만원씩 모아가지고 1년을 모으면 1000만원이고 10년을 모으면 1억이고 100년을 모아야지 10억밖에 안되는데 100년 모으려면 3대가 일을 해도 모을까 말까인데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사명이 없으면 여자들은 파출부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뭐에요. 머슴이에요. 머슴인데 옛날에는 작대기로 맞으면서 머슴 했지만 요즘은 시말서 쓰면서 머슴 하는 거지 뭐에요. 가가지고 그렇게 논 갈고 짐승처럼 일해가지고 마지막에 몇푼 안되는 세경을 받는 것이나. 그거 한달 일해가지고 돈100만원 200만원 300만원 500만원이라도 마찬가지지 그거 받아가지고 거기에다 목숨 걸고 일하는 것이면 인생 가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좀 독특한 시야를 가져야 됩니다. 내가 직장 다니면서 내가 월급을 받기위해서 다닌다고 생각하는 동안이 3년이었는데 그 때는 내 인생이 완전히 구긴 인생입니다. 내가 꿈도 많고 낭만도 많은데 내가 이것 돈 몇 만에 묶여서 이러고 사는가 야 인생이 참 사는 게 아니다. 이러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영적인 변화를 받고 은혜를 받고나니까 그러니까 너무 좋아 보여요. 나는 여기 와서 일할 때 나라에서 10만원 20만원을 주지만은 나는 그 10만원 20만원 때문에 여기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 다녀야 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두셨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사명이 있다. 주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런 모든 일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앙이 없어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나. 요리학원 다니거나 아니면 무슨 자동차학원 다녀서 운전 좀 해가지고 돈벌기 위해서 직업학교 다니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을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비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내 인생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그리고 내 인생이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별거 아닌 것 같은 인생이지만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인생의 이런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그 사명이 있기에 내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끔 가다가 보면 신문이나 소설 같은데서 읽어 보면 그런 것 나오지 않습니까? 이제 젊었을 때는 멋도 모르고 막살아요. 그러다가 나이한 40대쯤 되고 나면 그러면은 뭐 한25에 시집 장가 가서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은 아마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되거나 그럴 거에요. 45 되면 그죠? 고등학교 다니거나 아이들도 이제 다 컸어요. 그러고 나서 시간이 좀 남아요. 바쁘면 그런 생각 안하는데 시간이 남아요. 45살 되었으니까 남편은 48쯤 되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은 이제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다면 꽤 지위가 저절로 세월이 떠밀어서 올라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봉급봉투도 두툼해지죠. 그리고 보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여자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인생이 허망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도대체 뭐하나?’ 그거 왜 그래요? 인생의 사는 의미가 그 돈 모으고, 집 늘리고, 세간 바꾸고, 아이들 기르고 남편 뒷바라지 하는 것 밖에 없었으니까. 그거 다해서 나중에 애들도 자기 도움이 필요하지 않고 집도 이제 더 늘릴 것도 별로 없고 하면 인생이 허무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래요? 예수를 잘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뭔가 이렇게 사는 인생의 목표자체가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신바가 있고 내가 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성취해드려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 인생은 그런 낙심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절망에 빠질 시간이 없습니다.
왜? 아직도 우리들은 젊음이 있고 건강이 있고 그리고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주목을 안 해주는 인생일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기억하셔서 나를 특별히 불러주셔서 나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혹은 가족을 구원하게 하고 혹은 가족을 위해서 중보하는 사람으로, 혹은 교회를 섬기는 사람으로, 혹은 교회 속에서 남이 할 수 없는 일들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빛나게 하시느냐 그것은 우리가 그 사명대로 우리의 인생을 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말 훌륭하게 높이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높이셔요. 어떻게 국민학교도 못나온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대학교 나온 사람처럼 실력이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이 노예로 들어왔어요.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하루아침에 보디발이 죽고 어느 날 보디발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때요. 그런 것이 조금도 부럽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보디발은 허세고 그리고 이 요셉은 실세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통해서 보디발의 모든 일들을 이루고 애굽의 온 땅을 향한 이스라엘 민족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이 계획을 이룰 수 있도록 요셉의 인생을 착실하게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거보세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진 다음에는 이미 피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목표가 무엇이고 그리고 내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가. 그 사명을 목표로 가지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살면서 그래서 내 인생이 하나님의 사명대로 살아가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축복하셔서 변화시켜주셔서 은혜를 배풀어 주셔요. 이런 꿈을 인생들이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에요? 사명은 싫고 인생만 잘나갔으면 좋겠다. 그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수없이 이야기를 해도 꼭 실험을 해봐야 안다. 이것입니다.
사울이 주님이 이렇게 슬퍼할 때도 왕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여전히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사울 앞에 경배하고 사울을 왕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의 자리에 있었으나. 그를 왕되게 하셨던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부리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사명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는 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사명을 버리면 하나님을 버린 자와 다름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불행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고자하는 뜻이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내 뜻을 쫓아가고 사명보다는 내 할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버림 받은 자처럼 그렇게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이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 앞길을 예비하시고 여셔서 그 사람을 형통한 길로 걸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누가 그 길을 막아서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히 불행한일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길을 가게하기 위해서 그를 파멸시키면서라도 악한 사람의 계획을 파괴시키면서라도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잠시 범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모욕을 하고 다윗을 욕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셨어요?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으니까. 그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사람들을 불행해지게 만드시면서라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맡겨진 그 사명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한 사람이 그 앞길을 나아갈 때에 누구도 그 앞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겨 싸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다시 여시고, 무너뜨림을 당하는 것 같아도 다시 뚫고 일어나게끔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특권입니다.
여러분, 사명이라고 계속 몇 달 동안 하는데 ‘무슨 사명이 있나?’ 껌벅껌벅 ‘나는 교회에서 월급 받는 것도 없는데, 웬 사명?’ 껌벅껌벅. 그런데 또 축복이라. 그러면은 ‘웬 축복?’ 여러분 눈을 떠보세요. 옛날에 고신대 학장하던 한상동 목사님이 국민학교 밖에 안나왔습니다. 그런데 다 연로해지셨는데 덕망이 워낙 높으시니까 그러니까 이제 학장을 시켜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학식이 있습니까?” 학장은 원래 학장하는 것 아닙니다. 국민학교 밖에 못 나오신 분이 무슨 학장을 하겠습니까. “내가 학식이 있습니까? 덕망이 있습니까?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사명은 받았습니다. 내가 이 학장실에서 죽기까지 이 학교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게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사명이 눈에 안 보이는 것이지 주를 위해서 살고자하고 주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내 인생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면 사명이 지천으로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들락날락 하는 사람, 그런가 보다 어쩐가 보다 하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어서면 ‘야! 오늘도 어느 집사님은 비가 많이 오는데 교회에 이거 물차면 어떡하나?’ 교회를 사랑하면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네 집에 습기가차면 드라이기로 말린다, 보일러를 뗀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 습기 차면 어떡하나? 성도들이 예배드릴 때 불편하면 어떡하나?’ 생각이나요. 그래서 사명은 누구에게 보이느냐면 그 사명을 무슨 사명을 하나님이 주시든지 내가 그것이 가장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감당해 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명을 보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 조애는 깊지 않지만 옛날에 우리 같은 교회 있는 집사님이 늘 세종문화회관 티켓을 주어서 한 두 번 간적이 있습니다. 난 거기에서 제일 맥 빠진 사람의 상황은 바이얼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줄줄이 늘어서서 신명이 나는데 그 사람은 꼭 정 가운데 있어요. 뭐 연주하는데 한 시간 내내 가만히 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쨍하고 이거 한번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음악 전공하는 학생에게 “야, 저것도 레슨 받아야 되냐?”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니 내가 그랬어요. 저 사람도 음대 나왔냐. 그랬어요. 아니 그거 누가 못해요. 가만히 있다가 내가 가만히 보니까 딱 세 번 치더라고요. ‘땅’치고 그 다음에 10분 쉬었다가 다시 ‘땅땅’치니까 끝나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저 사람도 음대나왔냐. 저사람도 월급 똑같이주냐. 그거 물어보았거든요.
저거 렛슨 받을려면 보통 힘들지 않데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가르치는 사람이 별로 없어가지고 그거 한번 치는 게 보통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그거 딱 45분 동안 딴 사람은 땀 흘리고 연주할 때 그 사람은 가만히 앉아가지고 그거 기다리는데 온갖 정신이 어디에 집중되어있어요? 그 세 번 칠 시간이 언젠가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웃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심각한 것입니다. 그게 그런데 어때요. 우리 생각은 어때요. 아이구 이거 세 번 치는 거니까 신나게 놀다가 주저앉아서 포카나 하고 놀다가 시간되면 일어나면 한번 아무데나 두들기면 되겠지 아닙니다. 그거 하는 말이 그래요. 큰 뭐지 교향악이나 그런 거 한번 연주하려면 콩나물대가리 8만개를 외워야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이거 치는 사람도 외우냐 그랬더니 외운데요. 이거 세 번 치기 위해서 8만개의 콩나물 대가리를 외우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릴 때를.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거 때리는 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을 통해서 전체의 사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명입니다. 45분 동안 이러고 서있어요. 그 사람은 꽃다발도 별로 안줄 것 같아요. 누가 그런데 그거하기 위해서 거기 서있는 것 입니다. 사명입니다.
사명은 내가 무슨 사명이 있나. 주일날 예배를 드려주는 것만 해도 참 감사해야지. 난 누가 감사해야 되는지 모르는데 하여튼 감사해야지. 저는 감사할일 없으니까 누가 딴 사람이 감사해야 되는 모양입니다. 감사해야지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가 사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간절히 가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사명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니까 잘못되어가고 있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입니다. 내가 사명을 감당을 안 하니까 잘못되어가고 있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어떻게 생각을 해요. 그렇게 안되가면 남편 탓이지 뭐, 아니면 애들이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었지. 생겨먹었으면 누구 배속에서 나왔어요. 생겨먹었어요. 그렇게 생겨먹었지. 뭐 회사가 그러니까 그렇지. 세상이 그러니까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죠.
그러나 은혜를 받고나서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가정과, 교회와, 자기의 모든 삶의 터전들을 돌아보면 내가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와 안 감당해 나갈 때에 얼마나 놀라운 차이가 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그렇게 기뻐하셔서 하나님이 세우셨지만 사울이 사명을 버리니까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셨어요. 옛날에 그렇게 사울이 하나님과 함께 했는데 그래도 버리셨습니다. 그 이유를 가르쳐서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돌이켜서. 이전에는 잘 나갔는데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않고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사울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가운데 얘기치 못하게 그를 택하여 뽑으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기름을 부을 때에 여호와의 신령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해주신 것, 그래서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은 목표자체가 사울로 하여금 왕으로서 한번 모든 사람들에게 깃발 날리는 인생을 한번 살아보게 하기위해서 이 사람을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만드셔야만 그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계획을 이 사울은 이루어 드리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버리게 되었을 때 그는 사명을 떠난 자가 되었고 그가 사명을 떠나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도 그에게서 떠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결같이 말하기를 은혜는 받았지만은 이 은혜가 고갈되지 않고 늘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그런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 은혜 받으면 조금 있다가 다시 은혜가 다 빠져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더 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은혜 받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거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집회 같은 것에 대해서 극도의 회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충만히 받은 다음에 그 은혜가 고갈되지 않고 계속 우리 안에 역사해서 그 은혜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거기에는 계획이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주시면 그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 사명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될 때에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더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가 고갈되지 않도록 우리 안에 계속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울이 한때는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때는 주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민족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소원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사명을 버리고 여호와의 명하신 것을 어기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버리자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명령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로서 이 사명에 대한 설교를 마칩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 ? ) 오늘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그 사명을 되찾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모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할 때 교회는 정말 능력 있는 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수에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통해서 일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가 의미 있는 숫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사명을 깨달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가 이번 우리 기도집회에 18일부터 22일까지 있는데 이 기간동안에 충만하게 은혜를 받고 내 사명이 무엇인지를 한번 깨달아 알아서. 그래서 정말 하나님,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나같이 초라한 인생을 여기에 이렇게 만들어놓으시고 가시밭길을 걸어오게 하셨습니까.
이제 하나님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밝히 보여주셔서 그리고 내가 그것을 따라 살게 해 주시옵소서. 결단하고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사명으로 다시 한번 태어나서 여러분이 새로워지고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또 함께 교회가 새로워지는 기도의 영으로 거듭나는 그런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11. 실패한 사명자를 찾아오신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으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3:1-2)
이미 이 요나서는 테입이 나와있고 그리고 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요나서를 마지막장까지 듬성듬성이긴 합니다만은 전했습니다. 제가 설교한 본문을 다시 설교할 때는 별로 신나지 않는데 그러나 또 다시 설교할때는 그 본문에 대한 어떤 전에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부분들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가 또 지난 본문을 다시한번 살펴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안그럴때도 있지만은 그러나 어떤 때에는 두 번볼때 더 진한 국물이 나오듯이 그렇거든요. 뼈를사다가 첫 번째 삶을때에는 피국물밖에 안나와요. 그런데 다시 두 번째 삶으면은 국물다 따라먹고 그다음에 다시 삶으면은 진짜 노란 국물이 나옵니다. 그죠.
아 얼마전에 그 거기가 어느 동네가 그러는지 잘 모르겠는데 보은인가 어딘가 하여튼 그 쪽으로 내려갔는데 저는 사진차트에서만 많이보던 그 정이품 소나무가 거기 나타났습니다. 집회를 오라. 그러고는 약도를 그려서 팩스를 보내줬는데 반은 보이고 반은 안보이는데 다시 연락도없고 연락도 안되요. 뭐 올래면 오고 이것도 못찾아 올라면은 강의 들을 필요도없다 그랬는지. 그래가지고 새벽의 시간에 그날이 바로 그 전날이 여름수련회 우리 갔다온날입니다. 차를 몰고 그냥 헤매면서 갔는데 도저히 그 약도가지고는 못찾는것입니다. 결정적인 부분이 팩스에서 안나온 부분이 어떻게 된모양인데 뭐 아무리 들여다봐야 알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뭐 웬만하면 찾겠지 그러면서 갔는데 두시간 가까이를 그 근처에서 뱅글뱅글 그것도 시내도 아니고 시골에서 말입니다. 뱅글뱅글 돌다가 어디쯤 어디쯤 갔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데가 나와요. 이렇게 보니까. 그 정이품 소나무가 나오는 것입니다. 야 여기 좋구나. 나는 그 어느 임금인지 지금 제가 역사를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그 소나무가 얼마나 멋있는지 임금이 오죽했으면 정이품이라. 그렇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 그 앞에 가면 쫄병입니다. 정이품이면 정승벼슬아닙니까. 정이품을 줬단말입니다. 그러데 그게 작년인가 제작년에 후 하고 폭풍우가 불지않았겠습니까. 그 때에 폭풍우가 불면은 그렇게 귀한 것이면은 미리 뚜껑을 덮어놓든지 밧줄로 붙들어매든지 하지 내버려뒀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말입니다. 그 왼쪽 가지가 두두둑 부러진 것입니다. 두 개가. 그런데 그게 기가막힌게 가서 가만히 관찰해보니까. 나무를 정중앙을 딱 짜개놓으면은 완전대칭입니다. 딱 이렇게 접으면은 대칭이되게끔. 그러니까 그 기풍이 정말 한 그루의 소나무치고는 정말 대단합니다. 세계적인 소나무 갔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부러졌을때에 모든 그 나무를 사랑하는 저 같은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요. 저 나무가 과연 회복될수 있을것인가. 그래서 그 완전한 대칭의 그 아름다운 자태를 그냥 유지할수 있을것인가. 부러졌다. 그래서 나도 나도 모르게 신문을 보면서 아유. 쯔쯔쯔 그거 그렇게 비바람이 치는데 밧줄이라도 미리 매주지 어쩜 그것을 그냥 내러려두었나. 그래 부러졌습니다. 전봇대가 그냥 막 넘어가는 상황인데 그까짓거 소나무 가지 두게 못부러지겠습니까. 팔부분에 해당되는 아주 멋있는 그 부분이 나무가 큰게 두 가지가 부러졌단 말입니다. 그게 회복될것인가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앞만보면서 달려가면서 승리의 지점을 향해서 끝까지 달음박질하다가 끝나면은 할렐루야죠. 그런데 그래서는 안되는데 실패할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은 안되는데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는데 범죄한 경우도있습니다. 하여튼 애석한 일이긴 하지만은 그래서는 안되는데 완전히 넘어지고 실패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다시 일어설수 있을것인가. 하는 이 문제가 우리에게는 정말 커다랗고 절실한 문제가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요나서의 주인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실패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그 회복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 요나는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로서 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의 땅. 니느웨로가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서 그 백성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는 가기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왜 그 사람이 가기 싫어했는지 여러 각도로 설명할수 있겠습니다만은 그러나 왜 가기 싫어했는지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정말 중차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순종했습니다. 느니웨로 가야되는 사람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아마 그럴수 없습니다. 똑같은 죄라도 성도들에게는 흉허물이 안되는 것이 교역자에게는 허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죠. 똑같은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정말 문제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커다란 사명은 맡은 사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자의 생명은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 그 선지자로 부르실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교가 안되는 큰 은혜를 받았고. 우리에게 뭔가 하나님이 사명을 맡겨주실 때는 사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도 주신 것입니다. 감당할수 없다고 투덜거리지 마세요. 왜 그거 감당할수 없다고 투덜댎필요가 없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은 하나님이 그 사명을 맡기실 때는 이미 하나님이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왜 아멘 안해요. 아멘 그렇죠.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인간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좋다고 받고. 사명을 주실 때에는 마치 남에게는 안주신 무거운 십자가를 나에게만 짊어지게 해주신 것같은 그런 착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실때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이미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을만한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를한번 들어볼까요.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말고. (제가 인간입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생각이 모자라는 일천한 말하자면은 일개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군을 세웁니다. 사람보고 어이고 당신은 아무래도 우리 교회 장로를 해야되겠습니다. 아니면은 주일도 제대로 못지키는 사람보고 당신은 부목사를 좀 해야되겠습니다. 그렇게 시킬 리가 있겠습니까. 시킬리가 없지않습니까. 그러니까 뭔가 일을 맡길 때에는 그 사람이 우리교회에 와서 은혜받은 표징이 있을 때에 그 때에 그일을 맡기는 것아닙니까. 하나님이 오죽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못받은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면 그 사명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기시겠느냐고요.
그러니까 사명을 주실때에는 이미 하나님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할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은혜만 있으면 사명을 감당해 나가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은혜를 내가 사용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데 섬김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내 마음 속에서 계속 불일듯하게 하여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 내 자신을 드릴것인가. 아니면은 은혜를 받았지만은 그러나 사명하고는 상관없이 불순종하고 살아서 그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게끔 소멸시켜버리고 말것인가. 그것은 여러분 자신 각자에게 달린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성경에서보면은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은 도중에 타락해버린 사람들 많이 있지않습니까. 사울같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또 솔로몬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렇죠.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친사람들, 누가 그 사람들이 그렇게 육체로 마친것에 대해서 은혜를 주신 하나님에게 문제가있다고 말할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 아침에도 지난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될것인가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사명이 있으면 그 은혜가 사명을 이루면되는 것이지 뭘 우리가 그렇게 골몰하게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되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되는가. 우리 옛사람과 더불어 싸우고 왜 이런 일들을 해야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고 은혜를 주셔서 감당할수 있도록 능히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러나 실재로 그 일을 감당하며 살게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 능력이 우리안에 역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받은바 은혜대로 살아가는 삶의 결단이 있어야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에게는 하나님이 그 사명 자체가 참 무거운 사명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은 냉전시대에 중공이나 아니면은 소련 한복판에 가서 모스크바 광장이나, 천안문 광장에가서 하나님의 복음, 혹은 민주주의를 외치라고 하는 그러한 명령에 해당될 정도였으니까. 그런 사명자체가 엄청나게 무겁고 큰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앗수르 사람을 철저하게 미워하는 그런 민족적인 감정의 골이깊은 이 사람을 들어서 그 원수 나라에 가서 심판을 외쳐서 회개할 기회를 주라고하니까. 이것은 업친데 덥친격으로 여러방면으로 어려운점이 많은것입니다. 그런 많은 어려운점과 그 수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그 사명이 얼마나 큰 사명이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될 것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와 사명이 엄청나게 크고 그리고 살을 에이는 것 같이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에게 살도 에일수 있도록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것입니다. 주님이 주신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는 회피할수 없는 사명이 우리앞에 기다리고 있는적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생각하세요. 무엇을 아! 나는 하나님 앞에 은혜받은자구나. 주님이 적어도 나를 이정도의 사명을 감당할자로 여겨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바꾸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랬으면 잘 감당해 나갔어야될텐데 그는 감당해 나가기는커녕 그러면은 안되는데 하여튼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받고도 니느웨로 가는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나가 어떻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나. 오늘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오늘 주제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주목하고자하는 말은 두 번째라는 말입니다.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대 일어나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가 명한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두 번째였습니다.
여러분 더큰 사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명완수 못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소한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을때는 두 번째 기회를줍니다. 그러나 큰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을때는 다시 기회를 주지않습니다. 지금부터 한 5년인가 전에 어떤 미망인이 소송을 냈습니다. 그 소송이 뭐죠. 6.25때 한강 다리말입니다. 한강 대교를 폭파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대위인가 대령인가 하는 사람이 하여튼 받았습니다. 그랬는데 문제는 뭐냐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폭파를 안했다는 것입니다. 미리 했는지 나중에 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증언에 의하면은 다리가 끊어진 시각이 안맞았기 때문에 많은 차들이 다리가 있는줄 알고 그냥 한강다리를 달려오다가 그 강 아래도 수없이 많이 추락했다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내리면서 뭐냐하면은 몇시까지 이 다리를 끊어라. 못끊으면 한번 더 기회를 주마가 아니라. 총살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임무를 명령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총살당했습니다. 그래서 미망인이 소송을 내서 결국은 소송에서 이겼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명이 사소할 경우에는 잘못하면 두 번 세 번 기회를 주지만은 사명이 워낙 막중하고 크면은 한번의 기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번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은 세상에서는 다시 기회를 주지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사람을 과연 하나님께서 두 번째 다시 찾아오실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지않는 특별한 사명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이방의 백성을 구원해 내기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의 계획이 그 사람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좌절되었습니다. 다시 기회를 줄수없을 정도의 커다란 손실을 하나님의 계획에 입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다시 요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우리들을 대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요나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변명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갈려고 했는데 가다가 어려움이 왔기 때문에 믿음이 없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가고 싶은 의도는 있었는데 뭔가 착각을 일으키고 지식이 모자랗기 때문에 다시스로 갔던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고 은혜를 받았지만 즉시 불순종하는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따라서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버렸습니다. 불순종은 그 순간에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당신을 버린 이 요나를 오늘 두 번째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밀하게 요나에게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삶의 어느지점에 서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맡겨주신 사명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감당해 나가고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서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우리에게 서 있기를 원하시는 그 자리인지 한번 물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감당해나가고.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짊어져야할 그 십자가를 우리에게 지게하실때가 있습니다. 구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누구에게든지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특별한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남이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 알게하셨고. 남들은 받을수 없는 그 은혜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적이 없는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은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은 하나님의 은혜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의 계획에서 혹시 떨어져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불순종해서 너무나 멀리 떠나와 계시지않습니까? 여러분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요나의 곁에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다가오셔서 새로운 회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부러진 정이품 소나무는 식물학자들 판단에 회복할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 은혜에서 떠나고 사명으로부터 떠나간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집요하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하는 계획을 모두 성취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당신의 뜻을 이룰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인격도 참 훌륭하고 신앙도 좋아서 이제 우리 나라에 돌아와서 뭔가 큰일을 하겠구나. 그리고 돌아왔는데 뭐 어떻게 하다가 다쳤는지 모르겠는데 뭐 기차를 타고 들어오다가 몸을 이렇게 내밀었는데 뭐 마중을 나왔나. 하고 이렇게 하고 그 머리가 어떻게 전주에 부딪쳤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분을 기다리던 그 사람이 말입니다. 깊은 고민에 쌓이게되었습니다. 야 이거 그렇게 신실하게 공부하고, 기도하고 신앙좋고, 뭔가 이제 한국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위해서 크게 일할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금방 와서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죽었을까? 오랬동안 연구하다가 마지막 결론을 얻은 것이 하나있데요. 그게 뭐냐하냐면은 하나님이 뭔가 보여주시고 싶으셨데요. 뭐냐 난 너희들 없이도 얼마든지 일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사람에게 매이지 아니하고 일하실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명 싫어하시면 끝가지 싫어하고 그 사명의 자리에서 서기 싫어하시면 그만 둬도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통해서 일하실수 있습니다. 일하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약에 요나를 그런식으로 첫 번째 불순종 때문에 요나 대신에 다른 사람을 보내고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면은 요나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존재가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뿐만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실패한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깨뜨려진 사람들에게 여전히 찾아오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도덕적인 문제에 아주 깊이 휘말려서 결국은 그 성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까지 이르르게 되었습니다. 이단으로 알려진 그런 교파에서 말하자면은 뒷돈을 받아가지고 외국여행을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래 처음에는 모르고 갔는데 나중에는 알았는데 알았을때는 이미 발 뺄수가 없는 상황에 간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협박에 못이겨서 말하자면은 이단을 위한 하수인처럼 잠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너무 양심에 괴로워서 견딜수 없어서 어느날 정식으로 노회에 찾아가서 자기의 잘못을 다 고백하고 그리고 말하자면은 성직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2년이 넘는동안을 산속에 들어가서 깊이 기도하면서 참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자신을 깍으면서 하나님 앞에 세상을 너무 사랑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직을 더럽혔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2년여 지나서 다시 말하자면은 교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큰 교회는 아니지만은 작은 교회를 맡아서 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이전에 하나님 앞에 잘못했지만은 그러나 그 잘못을 안고 죽는 것 보다는 이 지점에서 자기의 과오를 하나님 앞에 깊이 뼈를 깍는 반성을 통해서 회개하고 이전에 하나님의 이름에 입혀드렸던 그 불명예와 말하자면은 모욕을 이제 헌신적인 삶, 다시한번 주어진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씻겨드려야되겠다.라고 하는 각오로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서약을 하는분들을 알고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셨을 때 우리는 미끄러지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은혜가 너무나 놀랍게 우리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배풀어 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큰 나머지 자신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간수하고 순종하며 사는 일에 마음을 다 기울이는 그런 집중된 생활을 하지못하고 경솔하게 그 은혜를 잃어버릴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두 번째 요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고 있지 않다면은 우리는 우리의 길로부터 돌이켜야됩니다. 우리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새롭게 만나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불순종한 길을가고 잘못된 길을 걸어갈때에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의 사명을 되찾게해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한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잘못된 것들을 새롭게 일깨워주시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받고있는 양심의 가책과 그 모든 고통들을 풀어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실패가 없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저는 화장실에서 꼭 신문을 읽는 습관이 있는데 신문을 그냥 아까워요. 시간이 그래서 신문을 이렇게 읽는데 아니 얘기하더군요. 파카 크르스탈을 제가 결혼이후부터 한 몇세트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좋은것도 있지만은 별로 안좋은 것도있는데 그거 아주 귀하지않습니까. 유리를 갖다가 기계로 갈아서 만든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잘 모르겠는데 비싼 것은 컵하나에 2만원 꽃병하나에 30만원씩 가는것도 있다고합니다. 그런데 제일 아까운 것은 뭐냐하면은 이컵도 그렇게 좋은컵은 아닙니다만은 이런데 이빨이 빠지면은 갖다가 버리면은 되는데 그런데 그거 컵하나에 만약에 2만원 3만원짜리 이빨이 빠지면은 그냥 쓸수도 없고 어떻게 할수도 없지않습니까. 그런데 신문에 보니까 보증서를 잘 나뒀다가 크리스탈로 가지고 가면은 이빨 부러진것만큼 키를 낮춰가지고 다 갈아가지고 새로 A/S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그거참 괜찮다.
여러분 안깨졌으면 좋았을뻔 했습니다. 어떡합니까. 깨졌습니다. 불순종하지 말았어야되는데 불순종했습니다. 어떡해요. 이미 그런 일들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다 갈아가지고 새로 만들어놓으면은 새것하고 6개를 쫙 놔두면은 어때요. 5개는 키가크고 나머지 하나는 키가 작아요. 볼때마다 이게 깨졌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요긴하게 사용할수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받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명으로부터 멀어지고 불순종해서는 안되죠. 신앙을 떠나서라도 그럴수는 없지않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는데 사람이 은혜를 배신을해도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수 없는데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는데 그래서 똑같은 마음으로 언젠가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사명의 자리에 있게해주신 것 감사하옵나이다. 찬송하던 사람이, 언젠가 신앙이 약해지고 마음이 변해서 하나님이 그를향한 모든 감사와 하나님이 은혜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일어났습니다. 어떡합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옳지않습니다. 그러나 어떡게 옳은일만 행하면서 살겠습니까. 그러지 않을려고 애를쓰고 그러지않다는 것을 아는데도 어쨋던지 간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해서 잘못한 그 옛날에 없던 것으로 돌아갈수있겠습니까.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망가진 사람들을 망가진소명, 망가진 사명, 망가진 은혜를 고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바랍니다. 오늘 요나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뒤집어서 말하면은 요나와 같이 이 큰 은혜와 이 큰 사명을 받은 사람도 하나님이 불순종했을 때 다시 두 번째 찾아오셨다면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소망이된다.하는 말씀인것입니다. 주님을 믿을 때, 변화받을 때, 새롭게 살기로 결심할 때, 여러분 하나님 앞에 피할수 없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의 짐이 무엇입니까?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 어느자리에 서 있으라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일러주습니까? 거기 서 있습니까? 언제나 그 자리에 주님처럼 서계십니까? 그래야됩니다. 그러나 실패했다면 정직하게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주님 저에게는 두 번째 찾아오시는 주님이 저에게는 필요합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저에게 기회를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실패했을 때 두 번째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를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되는 그 자리에 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떠나온 분들이 많군요.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렇게 두 번째 요나에게 찾아오시는 방법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요나, 여호와와 요나, 사이에 있는 단어가 바로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지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다시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십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사명과, 그리고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고 불순종의 길로 들어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시리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다가오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건, 실패했건, 고난을 받았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깨어진 우리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깨뜨려진 아픔,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일을 통해서 이루고자하는 나의 일이 회복될고 나의 영광이 어떻게 이 사람을 통해서 회복될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주님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인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주님이 실패하고 그리고 두 번째 다시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님은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오늘 성경을 말씀으로 다가오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때가 되면은 들을귀가 열립니다. 예전에는 자기의 머리속을 인간의 잔꾀와, 사람의 잔재주와, 상식과, 그리고 여러 가지 사람들의 이야기와, 방법과 술수와, 이런 것들이 무질서하게 자기의 머리속을 오갔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복의 때가 가까워지면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 음성을 통해서 내게 전해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느낄수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이 그 음성을 통해서 나에게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도저히 관심도 없었고 전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내가 이렇게 불순종의 길에서 하나님을 떠나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 고통하는 내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이런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슴깊이 다가오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기한 것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복될때가 되면은 회복되기 전까지는 내고통, 하나님 나를 어떻게 해서 이런 자리에 몰아넣으셨습니까. 도데체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됩니까. 이렇게 내가 고통을 짊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내 분깃이 아닙니다. 이렇게 원망하고 시기할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안들리는 것입니다. 다들리는 것은 가기의 울부짖음, 내가 여기에 왜 이러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바보같은가, 왜 남들은 안그러는데 나만 이렇게 유벌나게 예수를 믿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고통가운데 인도하시는가, 이런 생각만 나에게 마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우리의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의 회복은 우리의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통하는 자가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서 부드러워진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회복되기 직전에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명을 받은이후 불순종하기로 결정한 이후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가득차 있는 음성은 야 집어치워. 사명이 도데체 뭐 말라죽은것이냐. 왜 내가 무엇 때문에 그 철천지 원수인 앗수르 놈들의 한복판에 가서 죽음을 무릎쓰고 더군다나 회개하라고 외쳐서 그 백성들을 심판이 가까웠다고 외쳐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서 적군을 살리는 매국노가 될길을 내가 왜 택해야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되기까지 신앙생활에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하나님의 그 은혜의 자리로부터 떨어져서 실패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다시한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에 불순종하는 자리에 있고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의 권고하심이 필요한 자리에있다면 여러분 그 하나님은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실패한 나를 향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가 귀를 기울일 때 회복이 가까울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잃어버린 사명을 들고 요나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성경은 2절에서 말합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했습니다. 1장에 보니까. 똑같은 성경구절이 또나옵니다. 1장 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데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절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음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똑같은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조각난 여러분들의 사명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전과 똑같을수는 없죠. 그러나 예전과 똑같을수 없지만은 그러나 똑같은 자리로 돌아갈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수리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사용하실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처음받았던 은혜와 사명의 자리로부터 멀어졌을 때 말씀으로 다가오시고 또 하나는 사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옛, 두고 갔던 그 사명으로 다시한번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한 교훈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는 길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길입니다. 가장 짧은 인생을 효율적으로 사는 길은 실험해보고 이것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바였다. 깨닫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앞에 효율적으로 사는 길은 순종하면서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진정으 기쁘시게 해드릴수 있는 그러한 길인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가오셨습니다. 그런데 2절에 한단어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일어나”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셨느니라.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팔을보내서 쓰러진 요나를 번쩍 일으켜 세우시고 등을 떠밀어 니느웨로 가게하시니라. 하나님 그러실수 있는 분입니까? 아닙니까? 그러실수 있죠.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셔요. 히브리어로( ? )명령형입니다. 너는 일어나거라. 일어나거라. 우리는 이 3장에서 이 3장의 1절이 하나님의 다시 임한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다시 말하자면은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도있고 또 어떤 사람은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가 육지에 토해진 그 자리에서 시간이 흘렀을 때에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쨋든지간에 여러분 물고기 뱃속에서 3일 3야동안을 시달리다가 캭하고 물고기가 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아마 부드러운 모래밭, 그리고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새롭게 눈을 뜨게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혼돈과 어지러움 속에서 3일 3야를 물고기 배속에서 배만타고 다녀도 배 멀미를 하는데 물고기를 타고 다녔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는 2장에서 말하기를 말하자면 물풀들이 내게로 달려와서 내위에 넘쳤다.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물까지 먹으면서 거기에 말하자면은 수많은 수초까지 자기에게 막 뒤엉키는 말하자면 이런 전무후무한 체험을 하고 완전히 기력이 쇠진해 있을 때에 주님이 좀 버쩍 일으켜 세워주시면 안되요. 그런데 뭐라그래요. 너는 일어나라.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잃었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단이 필요해요. 대답을 왜안해요. 결단이 필요합니다. 길만 잘못들어가도 결단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사명의 자리를 떠나고 주님께 순종해야할 자리로부터 이탈되었는데 결단이 안필요하겠습니까. 가야할텐데. 가야할텐데. (옛날에 참 그 택시타기가 쉽지않던 시절입니다. 신학교 1학년때인가 밤이 너무 깊어서 학교에서 무슨 행사를 마치고 야밤에 택시를 탔습니다. 그래 이제 택시를 타고 나하고 우리 친구 하나는 이쪽방면으로 가는데 또 한친구가 거기에 탔습니다. 지금 그 친구는 미국에 가 있는데 그래서 붕타고 가는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우리둘은 방향이 맞는데 이 친구는 이쪽으로가면 안되요. 완전히 반대에요. 그런데 옆에서 아니 당신이 왜 이거타고 계속가 당신집 반대편 아니야. 그랬더니 반대편 맞대요. 그래서 왜 이거타고 계속가. 그러니까 택시잖아. 택시가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타면 다시 돌아와야되는데)
이렇게 우리가 가던 길을 돌아서는것도 결단이 필요한데 불순종에서 그렇게 먼길을 떠나왔는데 결단이 안필요하다면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제대로 서서 그것을 이탈을 하지않고 사명감당한 것은 그만두고라도 일단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것만해도 얼마나 정열을 요구하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디에서 그것을 보면 아냐면은 홍수가 막내려와서 물이 떠내려갈 때 우리는 그 집까지 갈 때 ( ? ) 봐요. 그러면 할수없이 지금 생각하면 참 위험한것입니다. 그 학교에서 하교할 때 책가방을 이렇게 들고 그리고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여기까지 찹니다. 그러니까 까치발을 들고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조금만 깊으면은 그까짓거 물조금만 불면은 사람 밑에서는 3분의 2밖에 중력이 안되니까 그냥 이렇게 물살이 샌 물살이 몰아치던지 바위뿌리하나에 툭걸리면은 그냥 빠지는 것입니다. 수영도 못하는주제에 말입니다. 중량천에 가서 발견될텐데 그런데도 그렇게하고 건넜단말입니다. 그런데 몸을 가누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막 물이 흔드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특이하게 예수믿게 만들고 또 은혜주셔서 있게 하신자리 있지않습니까. 거기에 서 있는 것만해도 참 훌륭한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또 우리 입장에서 아멘이라 그러면은 안되죠.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멘.그래야지 어쨋든지간에 자리에 서 있는것만해도 참 귀한 것입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진공가운데 사명을 붙들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모진 바람이 불겠는지 한번생각해보세요. 어떻게 거기에서 한번 밀어가지고 쓰러뜨리기만 하면은 악한 세력이 쾌제를 부를텐데 그것을 버티고 서있는 것입니다. 큰 사명을 불꽃같이 감당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우선 거기에 그것을 다른데서 오라 그래도 못갑니다. 그러고 거기 버티고 주여 죽여도 할수 없습니다 그러고 거기에 서 있는 것만해도 대단한것입니다. 그렇게 힘이드는데 거기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불순종의 물결을 헤치고 그 원위치로 찾아와야되는데 결단이 없이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용단이 없이 되겠느냐고요. 그냥 가만히 있다보면은 세월이 약이겠지. 영적인 은혜의 세계에서는 세월이 약아닙니다. 세월이 독이될수도 있습니다. 날이가면 이잊혀지겠지. 안잊여집니다. 요나가 날이간 것이 아니라. 물속에 들어가서 그 난리를 치고 왔는데도 하나님이 요나가 물고기에서 막 고생하니까 불쌍하다. 야 바다에 던져지니까 물고기가 받아먹게하고 물고기가 받아먹고 막 요동치다가 뱃속에서 다 그냥 통회자복하고 이것도 했겠죠. 그러니까 고통스러워서 배멀미가 아니라. 고기멀미도 하고 다 하고, 막판에 이제 낮아지니까 하나님이 요나를 이렇게 그래 물고기야 토해라. 만약에 암초에다가 토해놓았으면 뇌진탕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모래가 있는 곳에다가. 물속에다 토해놓으면 그거 수영을 어떻게 해서 살았겠습니까. 육지에다가 에취. 재체기를 하던지 뭘하든지 토해놓았습니다. 부드러운 흙에 엎드려있다가 눈을 뜨게되었죠. 하나님이 얼마나 세심해요. 그리고는 요나야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예. 주님 제가 참 잘못했습니다. 이거 이게뭡니까. 너 그때 내게 도장찍은 그 사명, 여기 이거 해놔라. 깍아졌습니까. 좀 깍였습니까. 그대로입니다. 원위치로 다시. 두고온 것 그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하십니다. 결단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없이는 우리가 순종의 자리로 돌아갈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자리를 떠나는 것은 쉽지만은 버티지않으면은 떠밀려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은 돌아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단이 필요한것입니다. 일어날수도 없을 정도로 기운이 소진해있는 요나를 향해서. 너는 일어나라.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가 명한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내가 명한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결단을 촉구하시는 음성으로 다가오셨을뿐만 아니라. 사명을 다시 한번 부여하시면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실 때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이 우리에게 정말, 사명이 우리에게 살아있으면 우리도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명이 없으면은 그 사명을 감당하지못하면은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그래도 은혜를 유지하고 살아온때는 언제였는가. 싸우고 분투하던때였습니다. 목표하던바가 있고 이 일을 꼭 이루어야하는 말하자면은 추구하는 바가 있고, 그래서 그 길을 목표로하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하던때에 그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신앙을 유지하게되었습니다.
여러분 목표가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온몸은 피패하나 그의 눈은 거룩한 목표에 불탑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야할 어떤 내적인 필요에의해서 타오르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강한 군사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나태와 안일을 부인하면서 살아가야하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분부심에도 불구하고 그 부인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사명이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사명이 분명하지않으니까 목놓아 기도해야할 이유도없습니다.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할 제목도 없습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무엇을 위해 몸바쳐야 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또 그럴 필요도없고 그런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인생은 안락하고 태만하고 평안삶 이외에 무엇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요나는 오랫동안 잊어버렸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잃어버렸던 그 사명, 그대로 가지고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가지고 다가오셨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그 불순종의 지점이 어디입니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대면하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는 그 불순종의 지점이 어디입니까?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두 번째로 얼마든지 찾아오셔서 아니 세 번째라도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이루시기를 원하고, 말씀하시기를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셨던 사명을 다시 한번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입니다. 주님이 두 번째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심령들이 되어야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값비싼 결단을 요구하실 때에 우리는 그 결단의 대가를 생각해야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스럽고 그 말하자면은 나에게는 당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은 그러나 그 결단의 희생을 통해서 내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진정한 사명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다시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이 될까. 우리는 생각해보야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