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위하여Ⅳ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교사와 기도 1(마14:23-25) 1999.3.7 1
2. 교사와 기도 2(눅11:1) 1999.3.14 7
1.교사와 기도 1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마 14:23-25)
고마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쫓아 살고자 하지만, 저희가 얼마나 주님의 뜻을 쫓아 살기에 무능한 존재들인지 주님도 알고 또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손에 의해 영혼들이 돌보아지고, 그렇게 돌보아진 영혼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진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순간, 영혼 앞에 설 때마다 우리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을 느끼고, 주님이 아니면 우리의 이런 초라한 모습을 고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도구로 새롭게 하실 리가 없음을 저희가 압니다. 오늘도 우리 모인 이 교사학교 위에 복을 주셔서 저희들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아가며 섬기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 영혼을 가르치는 일들도 하나의 교육 현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참 우리의 현실이 매우,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할 수 있는 바입니다. 비근한 예로, 일반적으로 이 시대가 옛날 보다 많이 타락했고, 인간ㄴ들이 악한 삶을 살아가는 시대라고 하는 고전적인 얘기를 하지 않아도 확실히 옛날과는 많이 다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이렇게 바쁘질 않았어요. 학교 갔다 오면 가방 집어 던지고, 손이 까매지도록 딱지치기, 다마치기 하며 그렇게 놀고 그랬어요. 지금 애들은 골목에서 볼 수 없죠. 그만큼 삶의 현실이 많이 달라졌어요. 전도의 현실도 달라지고, 교회 교육의 현실도 달라졌어요. 북치면서 골목을 다니면 할 일 없는 아이들이 졸졸졸졸 따라왔었어요. 지금은 달라졌죠.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냐 하면, 상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든지 일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강물이 남쪽에 북으로 흐르는 강도 있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도 있고, 넒은 강폭을 따라 흐르다가 좁아지는 강도 있고, 또 넓어지는 강도 있지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서 물이 흐르는 원리는 동일하고 산에서 출발한 물이 할 수만 있다면 바다까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한 시대에 특수한 전도 환경, 특수한 교육 환경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시대를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복음 진리의 보편성, 그리고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보편적 하나님의 원리 등을 간과하기 싶다는 것이죠. 이 말은 좀 더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무엇인가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이 일들을 하다가 잘 안 될 때에는 정직하게 말해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야 하거든요. 혹시 우리들의 방법이 너무 미련하지 않았는가? 또 하나는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섬김에 축복해 주셨는가? 두 가지를 같이 생각해야 하는데, 안 되면 모두 방법 탓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방법에만 목숨 거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방법을 개선해 보고 나도 뭔가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들은 당황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놓치기 쉬운 보편적인 원리들을 이번 우리 교사학교 시간을 통해 깨우치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교사와 기도의 문제에요. 이 기도는 보편적으로 우리들이 항상 인식하고 있지만, 그러나 실천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교육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고 계획을 세우는 일, 교육의 틀을 놓고 하는 이 일은 목표 하나 있으면 되지만, 그러나 기도는 영혼을 가르치는 그 사람이 먼저 영혼들에게 맛보게 하고 싶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스스로 누리고 살아가지 않으면 이런 기도를 실천하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이신 후에 요한 복음에 보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삼으려는 그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런 사람들을 버려두고 혼자 기도하러 가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그것과 거의 같은 문맥이 아닌가 그렇게 봐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배 태워서 보내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시는 거에요. 그곳에서 홀로 따로이 떨어져서 기도의 시간을 보내시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님이 얼마나 기도하셨을 것 같아요. 오늘 성경을 보니까 그러다가 예수님이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그 때가 제 사경이었다고 그랬어요. 로마 시간법에 따르면 해 질때가 1경 한 밤중이 2경 **때가 삼경(*잘 안들립니다) 그리고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이 4경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해가 저물기 전에 저녁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시고,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고 혼자 한적한 곳에 가셔서 1경 2경 3경 지내시고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그 때가 4경 이었다는 말이에요. 결국 요약하면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열렬한 팬을 만드신 다음-물론 팬을 만드실 의도는 없었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팬이 되었죠- 그런 열렬한 추종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심지어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하는 그런 놀라운 일이 있고 난 그 후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설적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기를 거절하시고 외롭고 고독한 곳으로 물러 가셔서 사랑하는 제자들조차 떠나보내시고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신 거예요. 성경을 이해하려면, 성경의 분위기에 젖어야 되어요. 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저자가 묘사하고 싶었던 예수님의 그 마음 자체를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자, 볼까요. 놀라운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떡을 먹고, 자기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자신을 추앙할 때, 저분과 같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분이 없고, 저분과 같이 능력이 있는 분이 없고, 또 떡까지 먹었으니 얼마나 예수님 말씀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겠어요. 역시 눈빛이 달라.....별 얘기들이 다 나왔을 거에요. 그때 주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사람 참 잘 봤구나. 나 아니고 누가.....그러셨나요?
저는 주님 처럼 겸손하지도 않고 교만해요. 분수도 모르면서 까불다 하나님께 얻어맞을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어떤 때는 사람들이 나를 추켜세우거나 좋은 얘기를 할 때 갑자기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공허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어요. 이 패역한 죄인도 그런 걸 느끼는데, 순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떡을 먹고 환호성을 지르는 백성들을 보며 무엇을 느끼셨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임금 삼으려 했던 의도는 무엇일까요? 아주 간단해요. 주여, 계속 먹여 주시옵소서. 그거거든요. 그때 예수님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예수님 그걸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잖아요. 저는 확신해요. 예수님은 아마 한밤을 새워 지내시면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실 때에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목적을 모르는 인간들, 그리고 영혼의 변화, 하나님과의 고치고 진리를 알고, 어두움을 버리고 빛 가운데 나아오는 이 감격과 변화에 대한 갈망은 없고, 어떻게 신앙을 이용해서 기적적으로 배부른 떡을 먹고 난 후에 이참에 예수님을 이용해서 계속 이런 식으로 먹고 살자는 그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보면서 변화되지 않은 영혼들에 대한 깊은 아픔으로 한 밤을 새우셨을 것 같아요. 감히 저는 예수님과 같은 동정의 섬김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느낄 수 있는 그런 감각이 우리에게는 느껴지는 거예요. 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제가 부패한 인간으로서 한 교회의 목회자가 되어서도 기껏 은혜 받고 나서 엉뚱한 소리하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이 한없이 불쌍하셔서 기적의 떡을 먹이신 것은, 생명의 떡인 예수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얼마나 절대적이고 필요한 존재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만나를 먹고 살았던 것처럼,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생명적 연합을 이루는 데 까지 나가야 한다는 깨달음까지 나아갔다면,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영혼들을 확인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산으로, 한적한 곳으로 올라가신 거예요. 그러면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보면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예수를 임금 삼으려 했던가? 그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어요. 그 당시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아였어요.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왜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렇게 열렬하게 환영하던 사람들이 왜 일주일 만에 돌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막 소리 지르는, 그런 강포한 사람들로 바뀌었을까요.
우리는 흔히 제사장들의 장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들이 기대했던 바에 예수그리스도가 부응하는 인물이 못된다, 라고 하는 것이 일주일 만에 입증이 된 거예요. 그러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겠다고, 말하자면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서 길에다 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던 그 입과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그를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 박은 거에요. 영혼이 참으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가 없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결국 가르치는 분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고민도 바로 그것이었어요. 영혼들의 참다운 변화, 그것이예요. 수를 불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었나요? 그런 게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물론 예수님도 많은 사람이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아오는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 자체에 만족하셨을 리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누가 이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올 때 그 나라에서 그 복락을 누릴 수 있으리만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할 것이냐,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하면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올 것이냐 그것이에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로 온 밤을 새운 것이에요. 그것이 오늘 성경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지 않아요. 왜 예수님이신데......요술쟁이들도 지팡이 하나 가지고 뿅~하면 피노키오로 변하고 뭐로 변하고 하는데, 아주 못생긴 자매에게도 지팡이 하나 가지고 아주 예쁘게 변하게 할 수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자처럼 또 당신 자신이 영혼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한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간구하시고 눈물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잡히시던 날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요한복음17장의 그 장엄한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로 영혼들을 위해 탄원하신 그 이유가 뭐냐,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사실, 명쾌한 답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왜 라고 하는 질문에는 시원한 답을 찾아내기 쉽지 않지만, 그러나 아주 명쾌한 결론은 하나 나와요. 그건 뭐냐면 주님이 그렇게 기도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 영혼을 진정으로 복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생애를 사셨고, 그 기도가 자원이 되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영혼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게 했다는 사실 하나는 부인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건 확실해요. 예수님 같이 완전한 능력을 가지신 분, 예수님 같이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신 분, 주님처럼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 예수님처럼 순결하신 분에게도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런 깊은 기도가 필요했다고 할 것 같으면,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우리도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분명한 것이거든요.
그러면 무슨 얘기가 나오냐하면, 우리도 영혼을 인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영혼을 인도하는 좋은 방법들을 배워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우리들은 힘을 다해서 복음을 제시하고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지만, 그 진리를 통해서 영혼을 만나서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지 우리가 아니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다가 실망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주제넘은 짓이에요. 어떻게 보면....영혼들을 열심히 하나님께로 인도하다가 그게 안 될 때 저부터도 실망할 적이 많습니다. 아.....정말 강적이야. 저 철판, 저 강적, 저 돌.....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그러는데, 사실 영혼을 보고 절망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상태가 내게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교사들은 영혼을 보면서 용기를 얻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할 때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는 거에요. 그래서 잘 한 일년의 교사 생활은, 잘못 살아온 수십 년 평신도의 삶보다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우리 어른들이 말하기를 에구, 이 녀석아, 너도 시집가서 애 낳아봐라 부모 마음을 알게 될 거다. 우린 이걸 이렇게 말해요. 어이구 너도 한번 교사생활 해봐라 목사님 맘 알거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교사 출신이 아닌 사람은 아예 교회 직분자로 안 세우는 교회도 있어요. 목사님 말씀이 교사를 안 해 본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장로님도 가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영혼을 거룩한 성도답게 살아가게 하는 그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모본을 보면서 기도를 배우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깊은 기도 속에서 생애를 사신 것처럼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해요. 만일 여러분들이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와서 가르치는 모든 현란한 공과 학습은 뭐에 불과하다구요? 그건 장기자랑에 불과한 거에요. 정말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솟아나는 지 한번 보세요.
사랑할 사람이 따로 있어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될 때에, 우리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게 되고 우리 눈에 콩꺼풀이 벗겨지면서, 소망이 없는 그 깡통같은 인간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끔 만들어 준 거에요. 영적인 건강한 생활 없이 영혼을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연애 감정에 가까운 사랑이지 정말 하나님께로 말미암아서 부름받은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가 묻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수 백명을 목회한 사람이라든지, 수 천명을 거느린 선교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사람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쉽지는 않을 거에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맡고 있는 서너명, 혹은 한 둘 혹은 열 명 이런 영혼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서, 여러분들이 주일 날 성실과 인내 하나로 아이들 앞에 선다고 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기만하는 일일 것이에요.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사역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혹시 하나님이 은혜로 열매를 주신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자신을 자랑하고야 말것 이에요. 그래서 그는 반드시 기도하는 교사가 되지 않으면, 그가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들은 한낱 향기나지 않는 종이로 만든 장미꽃에 지나지 않을 것이에요. 잠시는 사람을 속일 수 있고, 잠시는 사람을 끌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은 생명이 없는 생명이 없는 가화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그는 이미 걸출한 사람도 없고, 또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을 교사로 세우지도 않았어요. 여러분들은 이미 기본은 되어 있어요. 그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어떤 종류의 가르침을 어떤 가슴으로 넣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이 가르치고 있는 어린 영혼들의 이름 석 자가 그리움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가르치고 있는 그 이름 석자가 일주일 동안의 삶속에서 그리움이 되어야 해요. 그 이름들이 그들을 위한 기도속에서 눈물 젖은 기도가 되어야 해요. 그러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영혼들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치르면서 일주일 동안 기도하면서 나와서 영혼을 가르치려고 할 때에 가르치는 순간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빙산이 물에 떠올라 사람들 눈에 띄이려면, 십 분지 구에 해당하는 얼음이 받쳐주고 있는 것처럼, 그 십 분의 구가 바로 영혼들을 위한 기도에요. 그래서 그 영혼들의 이름이 여러분들의 눈물에 젖고, 그 이름이 여러분들에게 그리움이 될 때,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오고, 그런 눈물의 기도는 신기하게 영혼의 마음 밭에 떨어져서 주일 날 그 말씀이 뿌려지는 그 밭이 촉촉이 젖은 밭이 된다는 말이에요.
반에 가서 아이들이 마음이 강퍅해져서 딴 짓하고,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 아이들 그거 누구 탓이에요. 그거 그 아이들 마음에 눈물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에요. 저는 교회 딱 들어가면, 죄송한 얘기입니다마는, 이 교회 목회자가 얼마나 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지를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그 반에 들어가 봐도 거의 여러분들의 기도의 생활을 볼 수 있어요. 목회자가 기도를 많이 하고, 교사가 늘 그들을 위해 흐느끼며 기도하는 교회의 영 속에서 살아가는 삶, 그리고 그들의 이름 석 자가 늘 그리운 이름이 되어서 그 영혼들이 잘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무엇을 누리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이런 사랑이 있는 그 곳에는, 그 영혼들이 그곳에 오면서 마음 밭이 자기도 모르게 그 교사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눈물이 가랑비가 되어서 녹아요. 딱딱하던 그 마음 밭이 보슬비와 같이 내리는 눈물에 그렇게 서서히 녹아내리는 거에요. 당장은 열매를 맺지 못 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수 있는 마음의 밭이 생겨나는 거에요.
일년 딱 지나고 나면, 교사들 모여서 반 가를 때 보면,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지만 닫힌 교회 가보면(웃음) 이렇게 모여 앉아서( *****아무리 들어도 잘 안들립니다) 이건 완전히 떨이잖아요. 나 얘 싫어, 얘 안가져. 왜 내 반은 맨날 쭉정이만 주는 거야. 여러분! 쭉쟁이가 어때서요. 쭉쟁이로 따지면, 자기가 왕 쭉쟁이지. 올챙이적 생각을 해야지. 자기가 목회자 눈물 얼마나 많이 짜냈는지 그건 몰라요. 정말 기도해야 해요. 그리고 영혼들을 가르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정말 죄에요. 정말 기도할 마음이 없다면 교사직 놓고 퇴직해야 되요. 왜 거기 있어요? 누구를 위해서? 그래선 안 된다 이거에요.
우리는 은혜 카드, 목자 은혜를 다 받잖아요. 정말 기도들 열심히 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심할 정도에요. 바빠서 잘 못 했음. 이번 주도. 다음 주도.....그건 아예 막가는 교사에요. 막가파 교사라구. 아니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렇게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이 가능해지겠냐 이거에요. 그렇게 되면 안 되요. 그래서 진실한 마음으로 그 영혼들을 위한 이름 석 자가 여러분들에게 그리움이 되어야 해요. 눈물이 되어야 해요. 그리움이 되어야 해.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가 하면, 설교하고 원리가 비슷해요. 영혼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그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교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뼈 사이에서 솟아나는 그 체액을 묻히고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되어서 눈물 젖은 가운데 밖으로 흘러나와서 영혼들에게 전달되는 주님의 음성이에요.
영혼 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서, 그것이 그의 간절한 기도와 간구가 되어서, 그것이 뼛 사이에서 우러나와서, 그것이 체액을 묻히고 눈물에 젖어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주님의 음성이라구요. 그러니까 그런 간절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벌써 달라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여러분 길거리 가는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이 기도해! 그러면 에이 웃긴다, 자기가 목사면 목사지. 그러잖아요. 그러나 여러분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사랑하는 목사님이 와서 그래 어렵지, 기도해....그러면 사람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해, 하는 것하고 생전 기도도 안 해주는 사람이 기도해 하는 것 하고는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다 그걸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거에요.
새롭게 하나님 앞에 결심해야 되요. 그래서 세상의 다른 시간은 몰라도 영혼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그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해요. 그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바른 길을 가지 않고, 위험한 길로 가고 있는 영혼들은 특별한 기도 대상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어 놓고 더 기도하고, 심지어 필요하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심지어는 특별 기도 기간을 정해 놓고, 그것도 안 되면 영혼들을 위해서 금식기도라도 해야 하는 것이 영혼을 돌보는 자의 사명 아니에요? 그런 일들을 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들을 불러 주신 것 아니에요? 그런 마음으로 영혼들을 눈물로 섬기고, 그 영혼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받을 때에 주일날 와서 영혼들을 가르치는 그 가르침이 그 영혼이 그 기도에 의해서 어루만져지고, 그리고 거기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깃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에요. 영혼의 변화는 그렇게 장난처럼 해서 일어날 일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간절히 그런 열매를 거두어야 하겠다는 그런 서원을 가지고 영혼 하나 하나 변화되지 않는 것이 정말 슬픔이 되고 아픔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곡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저 교사 생활에 익숙해진 매우 쓸모없는 사람 밖에 되지 못하고, 영혼들을 섬기면 섬길 수록 교만해 질 것이며, 많이 선생 노릇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의 섬김 자체가 그 사람을 자기 의에 빠지게 만들고, 생생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잊어버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교사들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잠깐 동안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가 영혼들을 향한 기도가 없었던 것을 용서해 주소서. 그렇게 기도하겠습니다.
2.교사와 기도 2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여야 할 사람들인데 우리 자신이 어둡고 우리 자신이 참 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영혼들을 실족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도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새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품고 영혼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제가 안양에 있는, 지금은 안양대학이 되었습니다만, 대신 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가 봄이었던 걸로 기억이 되는데, 성경을 이렇게 펴서 누가복음 11장을 읽기 시작하는데, 첫 절을 읽다가 아주 깊은 은혜를 받았어요.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린 이 성경 구절들을 읽다가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 시간동안을 이 일절을 반복해서 계속 읽으면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기도 생활은 영혼을 돌보는 예수님의 사역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영혼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 영혼들을 가르치고 치료하고 하는 일에 신경을 쓰셨지만, 홀로 계실 때에도 영혼들을 향한 섬김은 기도를 통해 계속 되셨습니다. 오늘 그 예수님의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를 엿보게 만드는 장면이 오늘 나오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와 여짜오되“ 하면서 이제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장면이 나오죠. 우리는 제일 먼저, ”예수께서“라는 성경 구절을 보게 됩니다. 누가 기도하셨다는 거죠?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했다면 우리는 워낙 그가 능력이 없고, 비참한 인간이니까 하나님 도움없이 뭘 하겠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해서 새삼스럽게 그 기도가 깊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하셨다” 능력의 근원이시고, 권세로 따지자면 인간과 비교될 수 없는 그 분이 기도하셨다.......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언제나 오염되는 것을 느껴요. 그래서 기도를 통해 우리를 정결케 하지 않으면, 영혼을 섬기는 그 사역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영혼을 섬기기는커녕, 더러운 인간의 욕심으로 얼룩지게 만들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인성은 있으셨지만, 죄는 없으셨기 때문에 그런 위험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처럼 기도하신 것을 볼 때,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커다란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다...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는가 배우게 되지 않습니까?
또 하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며 배우게 되는 것은, 자기 기도의 중요성이에요. 중보기도는 정말 위대한 힘이 있어요. 그래서 중보기도는 수많은 기도의 간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기도할 때 생각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중보기도의 강요성을 많이 강조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이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충성된 삶의 모습이 뭐냐하면, 그 세상이 나 같은 사람 하나의 무릎 꿇는 일을 통해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오늘 여러분들 중에는 <에드워즈>의 저서를 구입한 분들이 있을 터인데, 뒤편에 보면 무슨 얘기가 나오냐하면, 기도하다가 주의하여야 할 점에 대해서 나옵니다. 나 한사람이 기도한다고 해서 커다란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그런 마음은 없애야 할 마음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나 혼자 기도한다고 해서 그런 큰 일이 이루어질까? 그런 큰 일이 이루어지려면, 수많은 사람들의 협동작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한번 보세요. 비가 오지 않은 채 3년 6개월이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겠어요? 그런데 성경은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하늘이 열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예요. 문제는, 중보기도가 그처럼 위대한 힘이 있어요. 성경은 그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바울과 같이 뛰어난 영적인 사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차 부탁하기를 잊지 않았던 바가 무엇이었어요? 나를 위해 대신 설교해 달라고는 부탁 안 했지만, 나를 위해 대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어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그처럼 성경에서 중보기도를 강조해요.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은 항상, 많이 자기를 사랑하고 중보기도 해주는 사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말 복 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성경에서 강조하지만, 그런 것들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중보기도가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중보기도를 받는 자기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 만큼 자기 기도도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사는 두 가지 기도를 다 가져야 하죠. 자기의 이 영혼을 섬기는 사역이 성공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도의 후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어떤 사람은 아예 자기의 기도 제목을 인쇄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기도 구걸을 해요. 그럴 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꼭 기도해 준다고 약속해요. 대신 평생을 기도해 주겠다던지, 그런 허황된 약속은 못 하죠. 그러나 받은 즉시 꼭 기도해줘야 해요.
미국에 갔을 때였어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다니는 학생인데, 하여튼 수업을 빼먹고 집회에 와서 큰 은혜를 받았어요. 그러더니, 밤에 상담할 게 있대. 너도 나도 해서 한 일곱 여덟 명이 모였는데, 형제 하나가 그러는 거예요. 눈물이 글썽해서 목사님, 저를 위해 평생 기도하겠다고 약속해 달래(웃음) 난 자기 이름도 모르는데,......그래서 끝까지 대답을 안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그건 못 지킬 것 같애. 평생 매일 기도하겠다고 약속을 해 달라는데, 못 지킬 것 같은 거 약속하면 그건 범죄잖아요. 우리 집사람 위해서도 매일 기도를 못하는데......하여간 힘닿는 대로 기도해 주겠다고 했어요. 얼마나 간절하면 그런 부탁을 했겠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나면 기도해 주고 편지도 써주고 합니다. 그만큼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중보기도의 능력을 사모하고, 그렇게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영혼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 줄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장 작은 어린 아이에게도 부탁을 해야 해요.
저한테도 기도 받은 사람 가끔 있을 걸요. 만나면, 너 목사님 위해서 기도 좀 많이 해라. 요즘 많이 안 하는 거 같다. 그건 인제 속으로 하는 거구......너 기도 해 줘라. 기도할 때는 항상 그 사람한테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부탁해야해. 인쇄해 가지고 다니지 말구.....야 부탁한다.....날 위해 기도해 다오.
그리고 또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영혼들에게 스스로 기도하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자신 스스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중보기도가 위대한 힘이 있지만, 자기가 스스로 기도해야 되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본이에요. 기도해야 될 문제를 이미 가진 능력으로 대신하려 하지 않았으니 기도로 해결해야 할 분량을 재능이란 말솜씨 가지고 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직업적인 행위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해요. 정말 해산하는 수고, 아이가 정말 귀한 것은 왜 그래요? 그 아이가 정말 내 안에서 잉태되어서 내 진액을 먹고, 내 안에서 성장되어서 내 살을 찢고, 내 안에서 태어났고, 정말 그 애가 태어났을 때 나의 체액이 묻고 나의 피가 묻고 나의 애정이 묻어져 있기 때문에 그 아이의 탄생이 그렇게 귀하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해산의 수고를 이기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만일 기도하지 않으면 주일 날 와서 가르치는 공과는 장기자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영혼을 깊이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한 곳에서” 라는 부분입니다. 이게 희랍어 성경에는 “토포티니” 라고 나와요. 그건 어떤 장소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이 누가 자신도 그 누가 자신도 석연치 않고 분명치 않거나, 혹은 거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곳이에요. 그런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어요. 성경을 다 뒤져보니까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매우 다양해요. 시간은 대충 정해져 있어요. 깊은 밤이거나, 새벽 미명이었는데, 장소는 아주 다양해요. 빈들에서, 산에서 심지어는 강가에서 혹은 한적한 곳에서......이건 예수님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한 생애를 사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서 그저 모일 장소를 만들어 놓고 자기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와서 당신 근무시간에 치료도 받고 말씀도 듣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동리에서 저 동리,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복음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순례하는 삶을 사셨고, 그 생애가 바로 머리 둘 곳 없는 생애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에요. 그런 생애를 사셨는데도 환경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 기도의 생애를 지으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틀림없이 기도할 장소를 먼저 찾으셨을 거예요. 기도 처소를 찾으시고 기도하는 습관을 좇아서 그 기도 장소로 가셔서 기도하시면서, 그렇게 영혼을 섬기기 위한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준비하시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준비하시고,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공급받으시면서 영혼을 돌보실 수 있는 충전을 받으셨다고 우리는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환경의 핑계를 많이 하거든요. 솔직히 저도 여러분의 편에 서 있을 적이 많아요. 저도 솔직히 직장 생활을 해 보고 사회생활을 해 보니 얼마나 어려운 줄 압니다. 여러분 직원회에서 찍혔죠. 그죠? 찍혔을 거예요. 왜 찍혔나요? 너는 교회하고 결혼했냐? 주일날 이 중에서 새벽 기도 나오는 사람은, 기도 끝나고 나면 6시 15분인데, 기도 끝나고 나면 중고등부 하고, 중고등부 하고 나면 2부 예배 들어오고, 예배 끝나면 구역예배 들어오고, 구역예배 끝나면 또 여기 오후 예배하고, 끝나면 구역장 모임하고, 그거 끝나면 밥 먹고....그리고 교사학교까지......요즘은 아마 가족들이 그럴 거예. 자알 한다. 찍혔죠. 그런데다가 또 내일 새벽기도 나와야 되잖아요. 내일 새벽기도 나오겠다고 두 손 들었으면 어떡할거야? 정말 우리의 환경은 어려워요.
그런데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가까이 가기 원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두 가지를 낭비할 수 없는데, 돈과 시간이에요. 돈 낭비하면 헌금 못 하잖아요. 그리고 시간 낭비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시간 있어야 기도도 하고 뭣도 하잖아요. 환경은 우리를 기도하게끔 도와주지 않아요. 환경이 우리를 기도하게 도와준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인생 살면서 정말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세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어서 시간 많아 빈둥빈둥 놀 때 열렬히 기도한 게 아니에요. 바쁜 직장생활 쫓기면서 심방하고, 그러면서 성경 공부하고, 또 그러면서 전도하고 그러는 삶 속에서 정말 아까운 시간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그렇게 매달릴 때 그럴 때 기도가 살아있어요.
너무 안타까우니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막 매달리는 기도가 살아있는 거죠. 예수님 보세요. 그렇게 순회하는 삶을 살고, 정처없는 나그네로서의 삶을 사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또 한 곳에 나가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보여 주시는 거예요.
여기에 정확히 시간은 안 나오는데, 대충 이 스토리가 맞을 거예요. 새벽에 제자들이 일어나 보니 예수님이 없어요. 어디 가셨을까? 기도하러 가셨겠지. 그러니까 찾으러 가보자, 하고 막 찾아보니, 예수님이 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뭘 좀 여쭤보고 싶은데,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거룩하니까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에요. 물론 옆에서 기도하면서 기다렸는지 그냥 기다렸는지 그런 모르겠지만, 그런 스토리일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 사이로, 아직 새벽 미명에 예수님께서 조용히 일어나셔서 제자들 깰 새라 뒷꿈치를 들고 아직 새벽 미명이 가득히 깔린 벌판을 지나외딴 곳으로 조용히 걸어가신 예수님은 어제도 늦게까지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가르치시며 지치신 몸이었어요. 육신을 가진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에요. 그런데 그 새벽 시간에 잠자는 제자들을 뒤로 두고 조용히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위해, 그리고 당신이 돌보는 수많은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벌판으로 나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생각해보라구요. 눈물 나지 않나요? 우리들의 삶이 그래도 예수님 보다는 편하잖아요. 이런 모습을 보여 주시는 거예요.
한곳에서, 라는 이 말은 환경에 매이지 않고 단호하게 살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생애를 보여 주시는 거예요. 기도하기 위해서는 처절한 싸움이 필요해요. 우선 환경과의싸움, 육체와의 싸움이 필요해요. 육체는 편안하게 해 줄 때 가장 좋아하고, 좀 고달프게 굴면 육체가 화를 내요. 그래서 말하자면 파업을 한다구요. 나는 기도하러 가고 싶은데, 육체는 드러누워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막 열을 내고 막 통증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떡해야해요? 어떤 땐 잘 달래지만, 어떤 땐 막 야단을 쳐야 해요. 니가 어찌하여 이러느냐? 내 말을 들어라. 이 나쁜 놈. 그러고 끌고 나와요. 새벽 기도 가야 될 시간인데 좀 더 잤으면 그러면, 이놈. 어딜 또 잘려구 해! 그러는 겁니다. 한번 만 봐주세요. 그런 얘기는 듣지 말아야 해. 대화가 이루어지면 안 돼.
세 번째로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여기에서 아주 커다란 감화를 받았어요. 마치시매 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에파우사토”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마치다’ 라기 보다는 ‘안식하다’ 예요. 그래서 이 에파우사토 에 맞먹는 히브리 단어가 ‘샤밧트(?)“ 에요. 이걸 정확히 번역하면, 예수께서 기도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매 제자들이 나아오니라......뭐가 필요했어요? 예수님이 기도하신 다음에는 쉼이 필요할 정도의 기도였어요. 공중전화 걸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은 쉼이 필요 없어요. 왜? 어차피 힘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에. 휴식이라고 하는 것은 고달픈 노동 끝에 오는 것이에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들은 쉴 필요가 없고 또 쉬어야 할 욕구를 느끼는 것은, 정말 육체의 자연적인 질서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태만하고자 하는 죄의 소원과 육체의 정욕이 그를 부르는 거예요. 예수님의 기도가 쉼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은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 예수님의 기도는 힘을 쏟으시는 기도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이 힘을 쏟으시는 기도가 장시간 계속 되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거는 소리를 지른다고만 해서 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신의 온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그 기도 속에서 들어가요.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는 영적인 일임과 동시에 체력에 뒷받침이 없으면 기도하기가 정말 힘든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런 특성을 가진 기도임을 짧은 성경구절이 보여주는 것이에요. 에파우사토라는 낱말이 보여주는 기도는 어떤 기도? 자신의 힘을 모두 쏟는 장시간의 기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힘을 쏟아서 하고 있습니까? 혹시 노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습니까? 짧은 시간을 기도해도 자신의 힘을 모두 모아서 애절하게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르는 가장 첫 번째로 중요한 조건이예요. 능력있는 기도, 위대한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성령의 도우심은 자기를 쏟아붓는 간절한 힘을 들이는 기도 끝에 주어지는 것이예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그 때에 힘을 다 쏟으니까 이어서 사지가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돕더라......그랬어요. 사자가 와서 돕고 싶어도 힘이 펄펄 남아있어요. 하나도 힘을 안 써요. 그런데 뭘 도와 주냐 이거에요? 자동차나 물건 같은 거 들 때 자기는 하나도 안 들면서, 남한테 자자 이거 들어 저거 들어 하나 둘 셋.....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도와줄 것이 없어요. 예수님의 이 기도는 자기를 모두 쏟으신 기도예요. 그래서 기도가 끝나고 나면 예수님의 육신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곤한 피곤을 느끼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정말 기도하고 나면, 쉼을 필요로 할 만큼 그렇게 자기를 쏟아 붓는 기도인가 그걸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예요. 기도하러 나왔으면, 정말 자기를 하나님 앞에 쏟아붓는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하잖아요? 전에 있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새벽기도 운동을 한대요. 운동으로 새벽기도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켜 보았어요. 그랬더니 정말 그 교회 성도들은 우리 교회 성도들만큼이나 착해요. 뭐냐하면, 교인이 600명 가량 모이는 교횐데, 새벽기도 해야 합니다 하니까 그것도 5시에 460명이 모였어요. 천안에서부터 차를 타고 왔는데, 두시에 출발했대요. 저녁 예배 끝나고 가서 조금 있다 다시 온 거예요. 저는 눈을 의심했어요. 나는 한 150명, 아니 그것도 안 될 것이다 그랬어요. 야! 460명. 구역별로 출석부 만들어 철저히 체크하고, 다 아는 길인데 그냥 오면 되지 추운 겨울에 뭐 이리 가시라고 안내를 하고, 몇 년 된 교횐데 길 모르겠어요? 화장까지 하나 나와서 말이지. 하여간 460명이 모였어요. 정말 기이하더라구. 여기 이 단상에 설교 하러 올라 왔는데, 이 본당에 사람이 꽉 찼다고 생각해 봐요. 정말 뭐가 일어날 것 같은 뭐 그런 불길한 예감이(웃음) 꽉 들었어요.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 거에요. 아 세상에......정말 놀랐어요. 그 새벽에 기도 그냥 하면되지, 뭐 또 성가대까지 하구...그렇게 예배가 끝났어요. 그 시각이 5시 30분이잖아요. 다섯 시 한 20분 쯤 예배가 끝나구 기도합시다, 그러기에 기도 했죠. 성도들이 그렇게나 많이 와서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나도 열심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뭔가 썰렁해요. 그래서 뒤를 탁 돌아보니까 한명도 없어. 시간을 보니까 15분 지났어.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어요. 모으는 것은 가능한데 열렬하게 기도하는 일은 각 사람의 의무감만으로는 안 되는 구나. 마음을 바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운동으로 안 되요.
새벽기도 와서 탁 눈도장 찍고 가는 거죠. 그렇게 하면 뭐하냐 이거에요. 기름만 없애지.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는 거 뭐하냐? 물었더니 교회 집사님이 그래요.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대요. (웃음) 기도는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의의가 있는 거에요. 자기를 다 떼어서 드리는 그 기도가 되어서 자기가 가르치는 영혼들의 이름이 자기 기도의 눈물이 묻은 이름들이 되어야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하면 장시간 기도하신 거에요. 아무리 자기를 다 쏟아 기도하셨다고 하더라도 10분 이나 20분 기도하셨다면 예수님이 쉬셔야 할 필요까지 없었을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도해야 될 것은 장시간 기도해야 한다는 거예요. 새벽기도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총계의 시간을 얼마나 들여 기도했냐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이 정말 하나님 앞에 바쳐진 시간이었냐 하는 것이에요. 영교(영적교제)가 있는 시간이었냐 이거에요. 우리는 가끔 성경에서 짧은 기도로 큰 능력을 불러온 기도의 사람들을 보잖아요. 그렇죠?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의 경우 그렇잖아요? 가나안 족속을 막 멸하러 가는 데 해가 떨어져요. 어두워지면 추격을 못하잖아요. 지리도 어둡고. 그래서 전대미문의 기도를 하잖아요. 태양아 멈추어라. 달아 멈춰라. 달아 멈춰라 할 것도 없이, 태양이 멈추면, 달도 멈추는 거잖아요. 기도였거든요. 명령형의 기도였어요. 그런데 그대로 되는 거예요. 밖에 나가서 한번 해 보세요. 달아 멈춰라(웃음) 달이 그래요. 너 돌았니?
무슨 얘기냐 하면, 짧은 기도로 기도할 때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대부분 항상 일어나지 않고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데, 그 특별한 사람들은 평소에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던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하나님과의 강력한 연합을 느끼면서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팽팽 놀다가, 한번도 기도 안 하다가, 갑자가 무슨 권세나 있는 듯이 태양아 멈추어라? 그런 건 모두 믿음이 아니라 폼이예요.
그런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을 누리면서 기도에 장시간을 바친 사람들이 그런 놀라운 특징을 갖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기도할 때 시간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되요. 몇시간이나 기도해야 하나? 몇 시간이나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무리죠. 왜냐하면, 많이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영이 흐릿할 수도 있고, 짧게 기도하면서도 농축된 가운데 자기를 드리는 기도를 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그들이 평균적이고 건강한 기도의 영과 맑은 마음을 소유했다고 했을 때 한시간도 기도하지 않고 영혼을 돌보겠다고 한다는 것은, 잘못된 마음이다 라는 것이죠. 그건 너무 욕심이 지나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오전에 30분 밤에 30분 하든지, 아니면 새벽에 와서 30분 기도하든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 이겁니다. 여기서도 보면 새벽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오랜 신앙의 경험은 무엇을 얘기해 주냐하면, 새벽에 기도 못하면, 거의 기도할 확률이 60% 이상 사라져요. 물론 뜻을 정해서 난 퇴근 시간에 꼭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은 달라요. 그러나 뜻을 정하지 않으면, 새벽 시간에 기도 못하고 나면 거의 기도 못해요. 그래서 전 새벽기도를 무지하게 강조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새벽기도는 무조건 등록할 때부터 나올 거냐고 물어보기로 했어요. 전 성도들을 막 불쌍하게 여겼어요. 직장 다니는 데 얼마나 힘들까? 아이들 데리고 가정 돌보는 데 얼마나 힘들까?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모두 이해하고 그냥 넘기다 보면,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피폐한 영혼 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안된다 이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이 기도를 대신할 수 없어요.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어나는 것으로 대신될 수 없어요. 그래서 두 개는 각자 영향력이 있는 거예요. 연관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계속 여러분이 말씀을 깨달아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건 삶의 산출이 결국 그 깨닫는 마음도 사라지게 되요. 그러면 안 되요. 그러니 싸워야 되요., 그러니 새벽에 전화를 해요. 친구들에게. 야 너 뭐하냐? 에드워즈 좀 봐라. 그리고 탁 끊는 거야. 기분이 팍 상하는 거지. (웃음)너 뭐하냐? 자고 있어. 짐승! 그리고 끊는 거야. 아예 ARS를 만들어서,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척 해서 전화 받으면, 그건 (새벽기도) 안 오고 있는 거니까 그렇게 하라구. 그렇게 서로를 격려하면서 기도하는데, 어느 정도? 한 시간 정도는 정말 간절히 기도 하는 거예요. 요즘 아주 예쁜 청년들이 많아요. 한 시간 씩, 두 시간씩, 세 시간씩 그렇게 기도하는 청년들......6시부터 나와서 한 아홉시까지 기도하고 그렇게 학교 가고 그런단 말이예요. 뭐 어때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와서......우리 교회 얼마나 조용하고 좋은 지 몰라요. 물론 고래 고래 기도하는 것은 내가 못하게 합니다. 당장 쫓겨나요. 그러나 소리를 조금씩 내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막 혼자서 난리치는 건 못하게 해요. 하고 싶으면, 저기 혼자 골방에 가서 하라 이거예요. 누구든지 와서 조용히 엎드려 장시간 기도해요. 기도 마치고 9시 쯤 열시 쯤 그렇게 나갈 때 보면 이렇게 휴지가 가득한 거예요. 얼마나 코를 많이 흘렸으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돌같이 굳어 졌던 마음이 장시간 엎드리면 녹아져요. 그건 마치 꽝꽝 언 얼음을 순식간에 일 이초 만에 녹일 수가 있겠어요? 그건 불가능 해요. 얼음덩어리를 큰 양푼에 넣고 약한 불에서 천천히 뎁혀봐요. 천천히 녹고 나서 그 다음에는 이제 끓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 떠나서 자기 가슴을 돌멩이 처럼 딱딱하게 만들어 놓고, 와 가지고 하나님 3분 안에 뜨겁게 안 해 주시면 나 기도 안 합니다. 이게 무슨 배짱입니까? 그거 잖아요. 시간을 들여요. 기도가 안 될 때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주님 떠나 있어서 마음이 얼음짱처럼 차가워 졌구나. 하나님 시간이 필요한 것 제가 압니다. 하나님. 내일 또 뵙겠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어떤 날은 아예 월차를 내고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내 마음을 열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기도가 탁 터지면서, 쏟아지는 기도가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그거(기도가 잘 되는 상태)를 잘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왜? 너무나 귀하니까. 근데, 돌멩이 같고 얼음 같은 사람들이 와서 10분, 15분 기도하고 가고, 심지어는 설교 끝나고 나면, 나하고 같이 일어나구 말이야. 그거 뭐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깊이.......장시간의 시간을 바치는 그런 기도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혼들이 강퍅하고, 어쩐지 자신이 건네주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안 받으려고 할 때 어떤 날 어떤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한번 나와서, 그 실족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 봐요.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시겠어요. 하나님, 제가 매주 수요일 7시에서 8시는 실족한 영혼들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하나님 이 영혼들을 도와 주세요. 기도하고, 간구하고 매달리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잖아요.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뭘 물었어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물어 보았죠. 그렇죠? 이거를 누구에게 얘기 하겠어요? 여러분 누구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저도 목사지만, 목사나 장로님이나 전도사님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볼 때 깊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거예요. 이건 무슨 말인가 하면,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깊은 감화를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린 영혼들에게 기도하라고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 지 한번 생각해 봐요. 그런데 이 강조 안 하고 있으면, 여러분 자신이 기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정말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고 영혼들에게 기도하게 하는 거예요. 전에 있는 교회의 유치부 전도사님은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 지 영혼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요. 심방 가면은 아이가 대표기도를 하게 해요. 6살 7살 이런 아이들.......자기가 기도 하면은 영혼들이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자기가 기도 안 하는 사람은 영혼들이 기도하는 것이 아주 웃겨 보인다구. 에이 뭐 저렇게 조그만게 기도한다구 말이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 말씀 막 순종하고 살면, 누가 순종한다는 말 들어도 그렇게 기쁘고 그런데, 자기가 불순종하고 사는데, 누군가 아주 잘 순종하고 사는 것 보면, 아이구 유별 떠네 그렇게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서 학생들에게 그렇게 깊은 감화를 줄 수 있는 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좋은 교재는 교사의 삶 그 자체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고, 특별히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로 세워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
교사를 위하여Ⅳ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