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위하여 Ⅵ
(설교모음)
설교기간|날짜미상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교사의 기능: 교훈, 책망 (딤후3:16-17, 제6회 교사학교, 2000.02.13) 1
2. 교사의 기능: 바르게 함, 교육 (딤후3:16-17, 제6회 교사학교, 2000.02.20) 14
3. 심방에 관하여 (딤후3:16-17, 제6회 교사학교, 2000.02.27) 1
1. 교사의 기능: 교훈과 책망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목사님의 교사리바이벌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낸다고 말입니다. 오늘 이번 교사학교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는 기회와 도전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에 먼저 우리 저희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김남준 목사님 나오셔서 첫 번째 특강으로 교사학교의 문을 열겠습니다. 우리 김남준 목사님 나올 실 때 힘찬 박수로 맞이하겠습니다.
성경 한절을 보고 잠깐 기도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입니다. 17절 두절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씩 제가 세 번인데 세 번에 걸쳐서 한 번씩 교사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구절은 아주 유명한 성경 구절인데 특별히 성경에 가치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아주 널리 알려진 성경구절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 성경은 바로 그 성경을 접하는 우리로 하여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매우 유익한 책이고 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성경이 이러한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 이 성경이 이렇게 네 가지 아주 훌륭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그리고 이제 오늘 이야기는 구원 받은 사람들을 이제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게 하는데 유익하다 이 말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체를 그 자체를 교훈으로 본다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 네 가지 사역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렇든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거를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네 가지 기능을 교사의 기능이라고 본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말씀으로 영혼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의 기능이 바로 이 네 가지로 집약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기능이 무엇인가 하면 교훈의 기능입니다. 오늘날은 자칫하면 교사가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참 많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오늘날은 사회가 산업화 되고 많이 변화 되면서 이제 누가 누구로부터 이렇게 그냥 가르침을 받고 누구는 수동적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관계 자체가 매우 전 근대적이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는 그런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삶으로서 사람들을 가르친다. 또는 함께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인도한다. 그러고 또 함께 삶을 같이 하고 자리를 나눔으로써 그들을 바른 길로 걸어가도록 이끈다. 그런 견해 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견해들이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다 타당성이 있는데 그런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인증을 하면서도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을 인증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후손들에게 전성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가르침입니다. 가르침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삶의 모본이라든지 뭐 함께 참여하는 학습니라든지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티칭입니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훈하는 것입니다. 교훈 하는 것.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시며, 그분의 성품은 어떠하며, 우리의 인간은 어떠하며, 우리가 어떻게 믿는 것이 도리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도리이며 하나님의 백승으로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며 이렇게 가르치는 구체적인 교훈, 그래서 모르고 있는 것들을 지식을 열어서 참된 깨달음을 갖게끔 할 목적으로 그에게 새롭고 분명한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 그게 교훈입니다. 그게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쓰인 것입니다.
물론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모본이 없는 가르침 또 말만 앞세운 가르침 듣는 사람의 상항은 고려도 하지 않는 일방적인 퍼 붙는 식의 그런 교훈, 내지는 훈계, 이런 것들이 때에 따라서는 거의 교육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제 깊이 인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인증을 하는데 그런 모든 것들을 인증을 하면서도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성경 속에서 이 야훼의 신앙, 그리고 신약에 와서 기독교 신앙, 이것을 후손들에게 전해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교육입니다. 가르침입니다. 그것도 무엇을 중심으로 성서를 중심으로.
제가 티에칭 과정에서 공부를 할 때 방글라데시에서 온 청년이 있었습니다. 얼굴도 잘 생겼는데 피터라는 청년이었는데 모슬렘에서 개종을 해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에 와서 교육을 받고 한국 여자하고 결혼을 하고 이제 다시 방글라데시로 이제 설교사로 들어간 친구인데 그 친구는 대단 합니다. 모슬렘들이 기독교로 돌아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역사가 없으면 안 되겠더라 구요. 진짜 어느 정도로 철저하냐 하면 정통 모슬렘들은 모두 “바이 링 규레어”코란이 아랍어로 쓰여 있습니다. 아랍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리지날 텍스트로 코라를 읽는 것입니다. 모슬렘들이. 하나도 안 놀라래요. 그런데 진짜 대단합니다. 저는 그런 열성은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사랑이 별로 없는데 무슨 언어에 대한 사랑이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한 백여 년 전에 찰스 스펄젼이 통탄하면서 뭐라고 했냐 하면 그 깊고 오묘한 성경의 계시가 담겨져 있는 신약 성경을 히랍어 본문으로 읽으려고 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그 때 강연을 들었던 대상이 신학생이나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였습니다.
코란을 외우는데 자기가 자라난 동네가 조그마한 동네인데 코란에 나오는 부호까지 포함에서 완백하게 악센트까지 외우는 사람이 많이 있고 자기도 이미 우리로 말하자면 중학교쯤 나닐 때 코란 전체의 3분의 1을 외었답니다. 그러고 외우더군요. 다다다다다 하고 외우는데 대단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의 교육이 신학생들이 읽지도 못하고 껍데기만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는 그 “비벨리아 헤브라이카” 히브리어 성경을 그들은 초등학교 5학년 정도 수준입니다. 그게. 그 때 외우면서 그 성경을 모음 부호도 안 찍힌 그 자음 텍스트를 거의 읽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경외심과 그 사랑이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자녀들을 향해서 가르치던 교육 방법 중에서 대표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세마”에 의한 교육입니다. 세마가 “사마”듣다 의 명령문입니다. 그 어디서 배운 것이냐 하면 하나님께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들을 지니라” 그러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그 다음에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고, 나는 누구고,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살고,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내게 순종해야 되냐를 쭉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교훈.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커다란 현실적인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너희는 들을 지니라. 그러고 탁 가르칠 때에 그 가르침들이 권위 있게 쭉 받아 들여 지는데 안 받아 들여 지는 것입니다. 안 받아들여 진다구요. 거기에서 모든 기독교 교육이 꼬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런데 그런 이상 현상은 우리 시대에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모스 선지자 같은 사람이 통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입니다. 이사야 같은데도 나옵니까? 그게 뭔가 하면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안식년도 지키고 희년도 지키고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땅도 돌려주고, 사람도 해방 시켜 주고, 그래야 되는데 그 율법에 따라서 그렇게 해야 되는데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안면몰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분노하면서 막 탄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신앙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들을 지니라”그러면 “웃기 네”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척 해도 마음속으로는 전혀 순종하려고 생각하지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얼마 안 되는 일차 간 경험이지만 이 기독교 교육이 제대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진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 교육하는 사람도 진짜 하나님이 스치고 지나간 사람이어야 하고 교육을 받는 영혼들에게도 하나님이 특별히 작용을 하셔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 질 수 있는 땅으로 마음이 기경되지 않으면 현실 적으로 교육은 성립을 하지만 그러나 그 성과는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놓고 그러면서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좀 전에 이야기한 그렇게 말씀을 안 받아 들이려는 그런 상황, 마음 밭이 기경 되지 않은 그런 상황, 이런 모든 것들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인데 어쨌든 칼빈에 따르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교훈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훈계 같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명한 가르침이 기본적으로 그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에 그 가르침이라는 사역 자체, 교훈이라는 사역자체가 존재를 해야지만 그 다음에 다른 나머지 사역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냐? 그 자기 아이덴티티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교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되게.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진리의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요새 교사 리바이벌 나오고 나서 불나게 교사 세미나 불려 다니는 것 아시죠. 저도 밖에 나가면 강사입니다. 내일도 갑니다. 통합 측의 대전 노회에서 불러서 갑니다. 이제 2월 달 까지만 다니고 그 다음에는 안 다니려고 그럽니다. 어쨌든 가는데 답답합니다. 중일학교가 변화되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지난번에 어디를 갔습니까? 부산을 갔었습니다. 거기서는 세원 놓고, 다 교사들입니다. 교사들. 지난주에 성경 어디를 가르쳤느냐고 물어 보니까 열 명 물어 봤는데 두 명이 대답하고 여덟 명은 어디를 가르쳤는지 생각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가 마음에서 울어 나와서 가르친 것입니까? 가르치지를 않았는데 그 가르침을 이해하게 해 달라고 그 영혼을 위해 그 가르침대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니 이게 전부 다 말하자면 겉도는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뭔가 이런 심정 속에서 울어 나오는 그런 기도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뭘 목회자로 여기서 설교 하는데 토요일 날 가서 컴퓨터 드드륵 드드륵 프린터 뽑아 가지고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데 CD에, CD 한 장에 요새는 설교가 몇 백편씩 들어 있는 것이 이맘 오천 원씩 팝니다. 그것 들고 와 가지고 읽으면 여러분들이 그걸 꼴이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 속에서 자기의 내면의 세계에서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자극을 받아서 그것이 자기의 진흙을 묻히고 나올 때에 눈물을 머금고 그게 성령의 은혜 속에서 구워져서 그래서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자신이 말씀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교훈을 하려고 하는데 속에 교훈이 없습니다. 막 뭐 무슨 비디오 본 것 텔레비전 시간표, 무슨 CM송 가사 외운 것, 무슨 컴퓨터 오락 게임에서 스타그래프트 재원 같은 것, 그 다음에 포겟몬스터에 150구가지 동물이름 그런 거나 들어 있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제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지만 여러분이 진짜 교훈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랑거리를 가지고 가르칠 때 신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막 자랑을 하는데 그것을 말하게 해보십시오. 너무 신 나는 것입니다. 새 차 사가지고 지금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게 차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면 라 황홀해 합니다. 강사료 주고도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진짜 하나님의 교훈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느냐?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성경 어디까지 읽었습니까? 생각납니까? 요즈음 하나님이 계속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새롭게 깨닫고 여러분들이 감격하면서 삶속에 그 지식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편지가 왔었습니다. 독일로 간 우리 한태준 집사님한테 편지가 왔는데 교환교수로 갔거든요. 뭐라 그러냐 하면 “목사님! 저 요즈음 학생 된 것 같습니다. 세 시간 밖에 못 잡니다.”에를안견에서 지금 교수로 가서 3월 10일 까지랍니다. 3시간 밖에 못 자는 사람이 큐티는 90분을 하는 것입니다. 90분 하는지 제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죄 죽임의 교리 원 투를 다 들었답니다. 매일 하나씩. 그런데 그게 평균 90분입니다. 그걸 죄 죽임의 교리를 들으면서 큐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저는 요새 눈물로 살아요. 하나님이 매일 만지고 지나가십니다.”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의 은혜가 막 쏟아진답니다. 그런 사람보고 뭐 해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전공이 해양 생물학이지만. 여기 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에 대해서 말해 보라 그러면 더 신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책망. 지금 책망이 존재 합니까? 책망이 존재 하야구요. 물론 저에게 야단맞은 사람들은 존재한다고 말하겠죠. 책망이 존재하야구요.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칼빈의 생애를 쭉 읽으면서 깊이 감동을 받았는데 아! 대단합니다. 우리들은 여러분은 생각하기에 칼빈 그러면 종교 개혁자니까 일생도록 강단에서 개혁 사상을 외쳤을 것 같지요. 그러나 절대 아닙니다. 그분이 설교 한 게 있는데 우리 생가에는 로마서 같은 것만 설교 했을 것 같은데 절대 아닙니다. 설교 시간에 굉장히 많은 부분을 오히려 구약에 활해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설교 하던 방식은 중세의 방식입니다. 개혁자의 방식이 아니라 성경 한절 읽고 술술술술 푸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깊이 면에 있어서는 청교도들 하고 비교 할 수도 없지만 그것은 칼빈의 무능 때문 이라기보다는 칼빈의 시대적인 상황과 청교도의 시대적인 상황은 다릅니다. 칼빈 같은 사람은 빨리 빨리 진리를 가르쳐서 정리를 해 주어야 되는 입장에 있었고, 청교도 시대에는 이미 그 터 위에서 한 가지 한 가지 거룩한 삶의 주제를 파고들어 갈 수 있었죠. 종교개혁자들 없이 그들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합니다. 무 원고 설교 주의자였습니다. 항상 요만한 쪽지 하나 가지고 올라가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교사로서 목사의 사역에 이 책망의 기능을 믿었는지를 예증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정말 대단 합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저 사람이 칼빈 맞아. 그럴 것입니다. 그 야단치는 게 부흥사들 야단치는 것처럼 그렇게 야단칩니다. 어떨 때는 길길이 뛰면서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막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야단을 치면 빙빙 돌려서 얘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부모에 대해서 불효하는 문제가 딱 나왔다. 그 도시에서 그것이 마치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성경에 마침 그것이 걸렸다. 그러면 그 날은 장날입니다. 그리고 막 아주 직설 적으로 파고들어 가면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책망합니까? 두 가지로 묻고 싶습니다. 책망할 때 아멘 하고 받습니까? 두 번째 가르칠 때 책망 합니까? 요즈음 꾸짖지 않는 교육이 유행을 하죠. 그렇지요. 그러한 배경들을 다 이해를 합니다. 다 일리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또 야단만 친다고 일이 될 것 같습니까? 야단만 친다고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산 증인 이지 않습니까? 이 중에는 저에게 바가지로 혼나는 사람들 많습니다. 아주 심한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제가 젊잖게 이야기 합니다. 교회를 떠나라고. 그러니까 설교도 안 듣고 목양도 안 받으려면 네 영혼을 위해서 그럴 수 있는 교회로 가라. 이렇게 말은 천천히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하기 전에 얼마나 야단을 많이 맞았겠습니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도록 야단을 맞은 사람들도 있지요. 때린 사람은 없습니다.
책망이 왜 존재 안 합니까? 책망이 존재 안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책망 할 수 있으리만치 충분히 사랑한다고 하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책망 할 수 있으리만치 충분히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라고 하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야단 칠 때도 사랑하는 사람은 야단을 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권위가 뭐냐 하면 진리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야단을 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래서 죠나단 에드워즈가 자기 반성문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이성이 없는 사람들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하자. 예를 들자면 교회에 오긴 왔는데 전혀 신앙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살 수 있어.” 그랬을 때 저쪽에서 “네가 뭔데.” 그러면 망신만 당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정말 진리로 인해서 얼마만큼 변화 되었는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짜 그 진리를 깨닫고 목양의 관계 속에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데 야단 칠 수 있겠습니까? 그 한도 내에서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진짜 신앙이 들어갔습니다. 신앙이 들어갔는데도 잘못할 수 있지 않습니까? 뭐 항상 옳습니까? 인간이라는 게. 그때는 갖다놓고 바르게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뭐 빙빙 돌려가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안 되고, 안 된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이점에 이점에 있어서는 잘못됐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그렇게 가르쳐 주었는데 네가 그렇게 밖에 못사느냐? 하면서 길길이 뛸 필요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목양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진짜 한심하다 네 같은 인간. 사람 만들려고 여태까지 애를 썼는데 깃것 가르쳐 주니까 그것 밖에 안사니? 신앙생활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집어칠 것이냐? 할 것이냐? 둘 중에 하나 해라? 항상 책망해서 거기서 뭘 발견하게 만들어야 되나 하면 자기가 잘못 사는 그 광경을 통해서 그 사람이 뭘 보게 만들어 주어야 되냐 하면 자기가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통증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교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이 강의를 들으면서 내일 보자. 너희들 반 죽었다. 그러고 언제가 어디 가 보았는데 주일 학교를 왔는데 손들고 벌세우고 앉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무식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벌서고 있기에 왜 그러냐고 했더니 늦게 와서 그렇답니다. 그 아이의 엄마가 봐 보세요. 당장 교회 끊어. 라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지금 어느 시대인데 그렇게 교육을 시키 냐는 것입니까? 여기서 얘기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충만한 목양의 관계가 되게끔, 그리고 말하자면 사랑하면 그런 책망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진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책망하는 게.
그 때 그런 것들이 그 책망을 통해서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그 책망도 결국은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는 그런 식의 호소가 아니라 책망을 해서 무엇을 생각나게. 성경의 가르침의 진리를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망해서.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여기까지만 오늘 하겠습니다. 또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책망 하고자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 대학에 있을 때 컨닝을 했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 컨닝 이거든요. 지긋지긋한 컨닝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구요. 시험만 볼 때만 되면 보고 써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것도 또 히브리어 시험은 공부해도 모르니까 그냥 보고 베끼는데 베낀 사람은 표가 납니다. 왜? 요번에 만화에 나온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요러고 있는데 정답은 로뎅인데 옆에서 본 사람은 오뎅이라고 쓴 것입니다. 본 사람 또 보면 생선묵이고 씁니다. 그러니까 무감독 시험으로 시험지 다 나누어 주고 교수실에 가서 앉았으면 시험지 딱 걷어 오면 누가 컨닝 했는지 번호까지 다 나옵니다.
제가 하여튼 그 컨닝과의 싸움을 많이 했는데 이놈을 잡아 놓고 컨님을 했습니다. 사실 컨닝을 했으면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목사님! 순간에 유혹을 못 이겼습니다. 라든지 아니면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못했다. 라든지. 한번 봐 달라든지 그래야지. 그런데 아주 개선의 점이 없습니다. 그래 저 인간도 아니구나! 이제 그래놓고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뭐라고 야단을 쳤냐 하면 사실 저는 그때는 학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정도였는데 그렇게 컨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컨닝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컨닝을 하면 되냐? 이 정직과 도덕성이 목회자의 생명인데 그 따위로 해 가지고 너희들이 어디 가서 뭘 할 것이냐? 나는 너희들이 이렇게 자라서 목사가 되고 우리 아들딸들이 이담이 커서 너 같은 놈들한테 목양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까 눈물을 앞을 가린다. 막 책망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참 대단 합니다. 뭐라는지 압니까? 목사님은 컨닝한 적 없습니까? 이 말이라고 합니까? 이게.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겠습니까?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묻습니다. 한 번도 없냐고. 이게 누가 교수고 누가 학생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한 번도 없다. 내가 변화 받고 신학교를 들어 온 이후로는 이제껏 까지 한 번도 컨닝한 적 없다. 그렇게 하고 살아서 뭐하게니?
책망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삶이 책망하고자 하는 문제에서 확연하게 정돈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 안 해서 되겠습니까? 여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도 안 해서 무슨 교사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기 싫습니까? 그렇게 기도 안합니까? 밥 먹을 때하고 잠 잘 때 베게 에다 얼굴을 묻고 한 오 분 동안 중얼 중얼 거리는 게 그게 기도 입니까? 주문이지. 그러고는 야단치는 사람은 누구 입니까? 아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하는 사람. 그러니까 그게 가능합니다. 기도도 안 하면서 나 그렇게 기도해도 되겠어. 그러면 양심이 너나 잘해. 라고 하겠죠.
그래서 어떻게 이 책망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에게 교사에게 어떤 도전을 주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망은 어떤 사람에게는 성결의 문제, 기도의 문제, 말씀의 문제, 순종의 문제 모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투 하면서 온전해져 간다고 하는 것과 그냥 내버려 둬 버렸다는, 그냥 자빠져 있다는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도전을 주느냐 하면 그렇게 우리의 사역이 책망으로 빛나는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을 뜨겁게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영혼들이 어떤 마음을 갖나 하면 아 나는 잘 모르지만 우리 선생님에게 있어서 내가 기쁨입니다. 나 존재 자체가 우리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삶의 이유다. 그럴 정도로 사랑으로 결탁 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모든 방면에서의 삶에서 온전하고자 하는 분투하는 노력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에 성경의 책망을 받으면서 자기가 온전해지는 경험이 있고 그렇게 온전하게 되어 간다고 하는 이 자의식 있을 때, 그렇게 전도 해 나가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고 하면서 털썩 주저앉아서 울어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는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매우 약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세인들이었습니다. 실천에 있어서 매우 약하고 그리고 모든 것들이 관념화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책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 속에서 우리가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교만을 읽을 수 있어요. 그런 불가능 합니다. 교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처절하도록 자기는 죽고 자기 몸에 그리스도가 살아 주님만 온전케 되려고 하는 그 모든 방면에서 성화 되도록 하는 사도 바울의 그 처절한 몸부림을 우리는 거기서 읽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읽을 때 전혀 우리에게는 그 사도 바울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도 바울이 미친 듯이 본받으려고 했던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영적인 감화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이와는 상관없이 누구를 가르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가르치는 영혼들을 깊이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 정말 저 사람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줄 사람이다. 누구 때문에 나를 교사를 불러 주신 양의 문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두 번째는 저 분은 완전한 사람이라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진짜 온전해 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를 책망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돼야 되잖아요. 그렇지요. 기도 하겠습니다.
2. 교사의 기능: 바르게 함과 교육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지난 시간에는 칼빈이 이 성경의 기능을 가지고 성경의 기능이라기 보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기여 하는 바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가지고 교사의 사명에다 연결 시켜서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씀 드리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교육에 있어서 두 가지가 사라져 가고 있는데 교훈과 하나는 책망이라는 거, 그리고 교훈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그랬습니까? 성경 자체에 대한 교훈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 이유는 가르치는 교사들이 먼저 진리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하고 명징한 가르침이 사라져 가고 있는 대신에 잡다한 인간의 사상들이 그런 가르침의 공간들을 메우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고, 책망이 안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그랬습니까?
우선 첫째는 영혼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감히 책망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사랑 받는 대상이 점점점점 더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물론 중요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점점 더 작아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대상이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무엇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바르게 살려는 몸부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책망해야 될 문제가 있거나 범죄가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아픈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말씀 드렸죠.
그 다음에 또 안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하는 것은 결국은 뭘 의미하냐 하면 뭔가 굽어 있는 것입니다. 사상 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생활습관에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 이 잘못 나가서 굽어져 있는 것을 올바른 길로 돌아가도록 이렇게 옮겨 놓는 것, 돌이켜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르게 하는 교사의 사역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사로서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과 이렇게 쭉 이야기 할 때 사실은 이 3장 전체의 문맥을 쭉 보고 이 4장하고 연결 되는 것을 쭉 보면 결국 여기에서 그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성경의 효능에 대해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같은 삶의 컨테스트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입증하듯이 거기서 두 가지가 나오는데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 그래서 두 가지 목적인데 하나는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가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서 선한일이라고 하는 것은 선행을 의미하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여기에서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라는 이야기는 결국은 아주 우리들의 신앙적인 이야기로 해설을 해서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기 위함이라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도덕적인 선을 가리키는 그런 것이라기보다 물론 그것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 보다는 보다 더 영적인 선이 결핍된 도덕이 아니라 영적인 선이 포함되어 있는 도덕적인 삶입니다.
그 영적 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도덕적인 삶을 사는 동기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때, 영적 선이 선에 기초한 도덕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 말하자면 그렇게 성경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을 닮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려 함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아주 신령하고 종교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의 컨택스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 속에서 살출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인격 속에서 우리가 사람은 그 존재를 능가하는 삶을 살 수도 없고 삶을 능가하는 존재도 없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런 원리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보다 기독교 교육이 세상 교육보다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기독교 교육은 인간의 뿌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뿌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세상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목표가 아니라 총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이 영혼 속에는 진짜 거의 아무것도 없으면서 삶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상당히 그럴듯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바리세인들이 그런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들은 근본적인 고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육은 그런 것들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밀한 인간 본성 속에 있는 깊은 뿌리들을 진짜 하나님께서 진리로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완전히 고치시고 그래서 새롭게 된 피조물이 새로운 삶을 살출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명의 원리가 심겨 지기만 하면 저절로 훌륭하게 살아 갈 것이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놔 놓으면 그 아이가 불완전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입니다. 먹을 수 있고, 배설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이 어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거의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놔 놓으면 저절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이 그런 전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결국은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삶의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컨텍스트에서 바르게 함과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한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이 얼마든지 잘못되고 굽을 수 있는데 그것을 바르게 해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아는 성경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 뿐만 아니라 또 그 성경을 자기가 가르쳐야 될 인간에 대해 해박하고 깊은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을 떠나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그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인간을 탐구 하면서 성경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하면서 지금은 성경의 세 번째 효능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걸 바르게 하는 효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우리 교사들이 회복 돼야 할 효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면 추상적이니까 구체적으로 우리 현장에서 예를 들어 봅시다. 이런 것입니다.
예화) 한 청소년을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데 어떤 교인을 여러분들 같은 교인을 목회자가 가르치고 있거나 아니면 학생들을 교사가 가르치고 있는데 생활이 너무 난잡합니다. 생활이 난잡하고 그리고 우리들이 잘 쓰는 표현으로 패역 화 되어 가지고 뼈 속 깊이 행동이 습관을 형성하고 습관이 인격을 형성하고 해 가지고 그게 아주 뼈 속 깊이 박혀서 그런 아주 잘못된 삶을 계속해서 숙명적으로 산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 어떤 부패한 삶에 되해서 인이 배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거룩하게 살아라.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손 좀 보신다. 그런 식으로 심판을 선포하고 거룩하게 살아라가 촉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하나? 이것입니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이러한 속에서 죄 속에서 살고 이렇게 패역한 습관 속에서 살고 이것이 나도 행복하지 않다. 라는 것도 알고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도 아는데 내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 그럴 때는 단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성결하고 경건하게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탁월한 열심 그거 하나만, 그런 한 두 가지 강렬한 인상이나 이 생각만으로는 그 사람을 바르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청교도 종교 개혁자 중에 한 사람이 리차드 십스인데 그분은 히븐리 닥트라고 별명이 붙었습니다. 하늘의 의사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 뿐만 아니라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을 때 그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고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탁월한 이해를 보여 줍니다. 특히 이번에 번역되어 나온“꺼져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의 회복” 그 원제목에 “상한 갈대”이거든요. “브리스드 리드”라는 책인데 그걸 쭉 읽어 보면 그 성경 구절 하나를 가지고 책 한권을 썼는데 인간에 대해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 것만큼 이 겉도는 불경건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겉도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만큼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신령하면서도 죄 가운데 빠져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화가 될 수 있는 지식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청교도 설교자들의 아주 굉장히 강한 강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내용이 가르침의 내용이 어마어마하게 풍부한 것입니다. 즉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저장 창고에 얼마나 풍부한 지식이 쌓여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물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생겨 날 수도 있습니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생겨 날 수도 있는데 사실은 모든 삶을 직접 다 경험 해 보지 않아도 그 성경을 탐구하고 그리고 죄인들을 다루고 이해하면서 이 복음의 빛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만 정확하게 보는 것인 아니라 자기 자신도 볼 수 있는 그 빛, 그러니까 그 빛 아래서 우리의 좋은 모습도 보지만 나쁜 모습도 같이 보는 것 아닙니까? 뭐가 옳은지도 보여 주지만 그 빛이 분명하면 무엇이 잘못 됐는지도 아주 선명하게 보게 되잖아요. 그런 비춤 들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그런 것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도해라고 이야기할 때 “맞아”그러고 기도 펑펑펑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문제가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라는 그 확정된 명령과 그것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하는 동의하는 자신과 그리고 실제 무릎을 꿇으면 기도가 잘 안 되는 그 현실 사이에서 굉장히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전혀 고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두 시간 이상씩 기도하지 않는 인간들은 사람도 아니라는 식으로 그렇게 하고 무조건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막 그렇게 휘둘려는 것은 사실은 그런 것은 바르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기도를 해야 된다. 기도를 안 하면 습관이 몸에 벴다. 그러니까 기도가 없는 생활을 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것을 찬찬히 가르치고 그리고 삶을 교정해 주고, 일어설 때 혼자 일어나 일어나 그러지 말고 자기가 좀 붙잡아서 일으켜 세워주고 그래서 결국을 그 다리를 펴고 자기 자리로 돌아 갈 수 있게 하는 그런 긴 치료의 과정이, 고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잖아요. 우리 어떤 날 하잖아요. 주일날 오후 눈물 펑펑 흘리면서 내일 새벽기도 나와야지 하면서 못나잖아요. 수요일 날 그리고 손 막 들어 놓고 자기도 나오고 싶다고 말하면서 목요일 날 또 못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의 삶이 결국은 뭐냐 하면 이 굽어진 것들이 바로 안돌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삶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아주 현격하게 부족합니다. 그런 것들이 현격하게 부족하니까 교사들이 그것을 다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영혼들을 돌보고 인도하는데 있어서 아주 간단한 도구 한 두 가지로 다루려고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발소 가서 머리를 깎아도 말이죠. 집에서 깎으면 엄마가 옛날에 바리깡으로 한 것, 요즈음에는 기계로 빙 밀죠. 그것 하나 가지고 깎지만 요즈음에 이발소 가면 가위가 열 개도 넘습니다. 별러 별개 다 있습니다. 저런 게 다 필요할까? 그런데 머리 한번 깎으면서 가위를 다섯 번도 더 바꿉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문가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냥 아주 단순한 것,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순종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그 간단한 공식 몇 가지만 가지고 이 복잡한 이 인간을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 쉽게 생각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런 지식은 어떻게 쌓아 가야 되느냐? 어떻게 쌓아 지느냐? 그런 지식이 그럼 우리에게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여러 가지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두 가지 요인으로 집약 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성경에 대한 무지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자신이 삶 속에서 말하자면 진리를 가지고 씨름 하면서 자신의 망가진 삶들을 고치려는 어떤 순례자적인 어떤 경건의 몸부림이 없기 때문에 뭔가 어려움 속에서 바른 길로 돌아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 적으로 정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습관에 빠져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막 살았습니다. 그러다 돌아 왔습니다.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나 하면 하나입니다. 부흥회 하다가 돌아 왔답니다. 그것 밖에는 입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 말고 그것은 하나의 외적인 요인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고 그런 것들이 어떤 면에서 성경에 이미 의인에 길이든지 악인의 길이든지 성경은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된다는 것은 성경은 이미 다 예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자신의 삶과 신앙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씨름 할 때 처절하게 그 씨름의 한 복판에 성경의 진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로 한심하냐 하면 제가 요즈음 교사 강습회 많이 불려 다니는데 저 끝에서부터 이 끝에까지 월요일 날 교사 강습회 가서 어저께 성경 뭘 가르쳤냐고, 성경 어디를 가르쳤냐고 물어 보면 열 명 물어보면 두 명이 겨우 대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들은 것도 생각이 안 나고 가르친 것도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 속에서 진짜 이 바르게 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안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성경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뭔가 자신이 굽어진 삶을 고치려고 하는 처절한 노력, 그리고 거기에서 맛보려는 성리의 경험 그런 것들이 있을 때 굽어진 사람이 굽어진 채로 사는 것이 운명이 아니다 라고 하는 도전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곧 고쳐 질 수 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것을 고쳐지도록 그렇게 만드는 기능이 성경의 기능이고 또 교사가 해야 될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게 의로 교육한다. 그랬는데 그 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에 하나님을 들어내면서 사는 그러한 의로운 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법정적인 의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법도에 맞게끔 살아가는 삶이 그 의로운 삶입니다. 그것으로 교육을 한다는 말입니다. 의롭게 살도록.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이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뭐냐 하면 교사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삶을 점검 받고 반성을 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기가 살아갈 인생의 가치와 목표가 성경에 의해서 완전히 바뀌는 것,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고 성경을 알기 전에는 돈 많이 벌고 세상에서 성공 하는 것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보니 가치관 자체가 바꿔서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고 결국은 자신의 삶과 존재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는 길인데 그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도록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의식에 붙들린 사람들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교사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 이 불의한 세상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들어내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통증을 느끼는 그러한 의로운 심장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롭게 살려는 몸부림이 없는 사람이 의에 대해서 말하거나 경건에 대해서 처절한 몸부림이 없는 사람이 경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모두 다 장난이지 그것이 진실 된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건한 사람만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 할 수 있나? 그것은 아닙니다. 얘기 했잖아요. 뭔가 몸부림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충분히 살지 못해도 정말 그 불의한 삶을 괴로워하고 의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고 지금은 비록 충분히 경건하지는 않지만 그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자 하는 그런 경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이 변화 되어 나가는 그런 움직임의 선상에 있는 사람이냐?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진실하고 피 묻은 가르침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뭘 보여 주냐 하면 교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아닌 교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가르침들은 단지 장기 자랑일 뿐입니다. 교훈이 무슨 말이고 그런 자신의 존재를 능가 하려는 어떤 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것은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교사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수많은 스승들이 나옵니다. 그 스승들은 모두 거룩한 스승들인데 그 거룩한 스승들은 모두 누구냐 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극히 작은 가르침을 엄청나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면서 그렇게 분투 하면서 자기가 그런 삶을 살아 왔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3. 심방에 관하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심방에 대해서 한다고 제가 미리 광고를 했지요.
이 세상에는 말로 할 것은 별로 없는데 혹은 말로 하기에서 너무 쉬운데 실제로 실천을 하려고 하면 정말 어려운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말로 하기는 굉장히 쉬운데 그렇다고 뭐 말로 할 것도 별로 없는데 말로 할 것도 별로 없을 정도로 말할 수 없이 쉬운데 실제 실천은 정말 어려운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기도도 사실 말로 하면 참 쉬운데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렇게 썼더라구요. 기도를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솔직히 말해서 요즈음 아이들 중에서 아버지와 대화 하면서 사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또 여러분의 경우에도 진짜 아버지 하고 대화하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아버지하고 대화를 하려고 “자. 대화의 시간을 갖자.” 그러고 앉으면 아주 빨리 어디론가 가 버리고 쉽죠.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해 보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전도도 그런 것 아닙니까? 말은 그냥 자연스럽게 당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하십시오. 그런데 사실은 내가 본 텔레비전 프로를 이야기 할 때 그렇게 쉬운데 내가 만난 하나님은 참 많은데 그런데 참 쉽지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라고. 자연스럽게 하라고. 그러는데 참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런 것 중에 또 하나가 뭐가 있습니까? 그렇지요. 심방입니다. 그런데 이 심방은 왜 어려운가 하면 심방 그러면 항상 여러분들 기억 속에 탁 남는 기억은 뭔가 하면 까만 양복입고 안경 쓰고 무거운 가방 든 목사님 하고 권사님 하고 사모님하고 줄줄이 사탕으로 쫙 일개 분대가 가서 안방에 근엄하게 포진을 하고 지난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감? 그렇게 하고 물어 보던 그 심방을 하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심방을 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심방은 사실은,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요구되는 심방은 그런 것 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가 하면 성도들을 심방하는 것, 또 제가 여러분들을 심방하고 그러는 것은 대부분 목사님이 이번에 우리 집에 심방을 오셔서 무슨 말씀을 주실까? 어떤 사람은 목욕 재개하고 무릎 꿇고 기다린다고 하는데 뭐 그 정도 스텐바이가 되어 있으니까 가서 그냥 앉아서 “그래.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해야 한다.” 그 말 한마디만 해 주고 와도 엄청나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심방을 하려고 하는 지체들은 어떤 지체들입니까? 대개 교회 학교에서는 어떤 사람을 심방합니까? 교회 착실하게 잘 나오는 아이는 굳이 집에 까지 갈 것 없습니다. 교회에서 만나서 이야기하면 다 되지 않습니까? 제가 심방을 안 가는 사람들은 정말 목사님이 나를 착실한 신자로 생각을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 하면 됩니다. 믿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아니라 잘 안 나오고 신앙이 견고하지 못해서 늘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심방을 한다는 말입니다. 심방을 하는 의의는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뭔가 하면 심방의 첫째 의의는 교사가 심방을 함으로써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영혼들의 속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교회 나가면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떠나면 하나님의 사전 권에서 멀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심방을 감으로써 선생님이 나를 찾아 오는구나! 그것이 곧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겠구나! 그런 것을 실감 나게 보여 주는 교육적인 효과가 그 심방 쪽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방 가서 별로 해 주는 것이 없어도 그냥 이렇게 찾아 가서 “네가 교회에 다시 나와야 되겠다.”라고 말해 주는 것 자체만으로서 아주 훌륭한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린 영혼들이 내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다. 라고 하는 것을 그 선생님을 통해서. 그 심방하는 구역장이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생생하게 생각하게 하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소이 교육학에서 이야기하는 '리얼 플레이에‘ 무슨 뜻이냐 하면 실제로 행동함으로써 말은 안하지만 그 실연, 실제로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찬 같은 것도 그런 것이잖아요. 그런 것을 통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심방의 의의를 찾을 수 있고.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큰 교회이든지 작은 교회이든지 그것이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모인 예배의 모임이든지 반의 모임이든지 간에 항상 그 모임이 개인적인 모임은 아닙니다. 학생이 둘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모임이 아니고 하나라고 할지라도 공과 공부 시간은 개인적인 모임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심방을 가면 완전히 그 교사가 그 아이 개인의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고 그래서 피할 수 없게끔 어떤 가르침과 맞딱 드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러한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방에.
그리고 세 번째는 부수적인 효과이기는 하지만 심방을 통해서 글 심방을 받는 영혼들은 교사와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지체들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을 열게끔 만들어 주는 아주 훌륭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심방은 누가 뭐래도 아주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은 그런 심방 같은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심방을 받고 심방을 하고 그러는 것은 유치한 신앙의 단계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전도사가 되고 나서 제일 안타까웠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목사님이 신년 심방 할 때 교역자를 항상 제외 해 놓으십니다. 교역자는 어차피 잘 나오는 사람이니까 신년 심방에서도 늘 제외 됩니다. 그래서 오죽 했으면 좀 제외 해 놓지 말고 심방을 해 주십사 하고 부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 심방을 받으니까 그저 목사님이 오셔서 간단하게 말씀을 해 주시고 기도를 해 주시고 가시는 데도 그렇게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 필요가 성숙한 신자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그저 늘 심방 다니고 그럴 수 있는 그 사이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건 또 인간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쨌든 그런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심방을 굉장히 중요하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를 촉진 시키는 그 면에서 교사 자신에게 큰 유익이 있는데 그게 뭔가 하면 그 사람의 삶의 현장을 보면 구체적으로 그 영혼에 대한 기도의 제목들을 찾을 수 있고 따라서 아주 구체적으로 그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늘 연약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그 영혼을 긍휼이 여겨도 그 사람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면 그런 사랑이 더 구체화 되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도 잘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신방은 굉장히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신방을 하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쨌든 첫째 이 심방은 심방하기 전에 먼저 심방의 열매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방의 행위가 있기 전에 먼저 영혼에 대한 깊은 기도가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쁘게 여기 저기 쫓아다니면서 지체들을 만나는 데도 별로 실속이 없는 심방이 있을 수도 있고 별로 많이 신방하지 않았는데 그 심방에서 아주 장쾌한 홈론이 터져 나와서 그 영혼이 가던 길을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는 결정적인 동기를 그 심방이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이제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심방을 어느 때에 할 것인가? 하는 그 때가 참 필요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교사는 반드시 심방합니다. 그리고 심방을 안 하는 교사들은 대개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안 하기 때문에 심방할 욕구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가르치는 지체들이 일곱 여덟 명이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이 계속 결석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일주일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도 또 안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가 일주일 동안에 한 간절한 기도가 그를 밀어서 심방을 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러니까 실천을 하면 기도가 그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다 하지 않으면 결국은 기도의 끈조차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는 사람이 전도를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는 사람이 영혼들이 잘 되기를 기도하지. 기도 안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하는 경우도 없고 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전도대원들을 위한 기도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삶과 기도가 늘 가르쳐 드리는 것이지만 이렇게 서로 유통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삶은 기도를 묶고 기도는 삶을 묶어서 기도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기도가 있지 그것이 따로 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 하는데 안 나온다.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만 맡긴다. 아니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하고 하나님께 맡겨야죠. 그죠. 그래서 심방을 안 하는 교사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안 한다고 그래서 가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그 영혼들이 안 나오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제가 유치부에서부터 중고등부까지 거의 여러분 클라스의 현황을 알고 있습니다. 매주 보고를 받습니다. 어느 반이 한명으로 계속 몇 달째 계속 되는지 어느 반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지 그 보고를 하나하난 계속 제가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반은 정말 염려스러워요. 석 달째 한명입니다. 혹은 두 명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아니 어떻게 계속 한명밖에 출석을 안 하는데 그게 변동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심방 안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뭔가 영혼들이 그렇게 시들시들해져 가고 아이들이 거의 교회 출석하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출석률이 하락하고 성경을 가르칠 준비를 하고 갔는데 아이들을 거의 안 나오는데 이것이 뭔가 그 사람에게 이 모습이 바로 내 신앙의 모습이다. 라는 자극을 주어서 뭔가 몸부림치게 하지 않으면 그 교사의 그 심령의 상태는 거의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은 다른 분들이라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네 명으로 몇 개월째 계속 나가는 반도 알고 있습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많이 받았기 때문에 네 명이고 아까 그 사람은 조금 받았으니까 한명입니다. 저는 그 영혼들도 불쌍하지만 그런 반을 그대로 끌고 가고 있는 선생님들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곧 무엇인가 하면 사역에 게으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한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벽에 부딪친 그 한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싶어 하는 그 메시지에 대해서 둔감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굉장히 허무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교육자 회의 때 말씀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도저히 한계상황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반 교사들을 내가 직접 불러서 만나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타일러고 야단치고 권면해야 되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그렇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것을 적절하게 극복하지 못하면 자기의 신앙이 늪으로 푹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역을 하다가 탈진한 사람들 많이 보셨죠. 우리 교회도 전도사님이나 이런 사역 많이 하다가 탈진한 상태에서 오시는 분들 많이 봤지요. 그죠. 쉬었다가 다시 용기를 얻고 가기도 하고 다시 또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드려내기 마련입니다. 그 어떻게 영혼들이 지금 흩어져서 유리방황을 하는데 한 두주 손을 못 쓴 것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석 달 넉 달 다섯 달 계속 나가는 것은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배드리지만 그의 심령에는 어두움이 가득 할 것이고 늘 기도 하지만 영혼들을 바르게 돌보지 못하는 가책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뭔가 구체적으로 그들을 위해서 도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무엇인가 그것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최대의 현 한으로 떠오르지 않는 한 이것은 단순히 부담일 뿐이지 영혼들을 향한 부담을 느끼는 것과 영혼들을 향한 연민을 느끼는 것은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후자이지 전자가 아닙니다.
전 참 걱정스럽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말이죠. 그렇게 사랑이 없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찬수 목사님 강의하는 것 봤지요. 그런 것입니다. 그게 고통이 되어야지 됩니다.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심방은 그 심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교회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심방을 아무리 해도 실속이 없는 사람들이 있고 심방을 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영혼을 향한 깊은 관심에서 울어 나오는 그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리차드 백스터가 말한 바와 같이 그 병든 영혼들을 향해서 구원 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들을 향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인데 그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결석한 영혼들의 출석 표를 보면서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과 그리고 실제로 그를 찾아가서 권면 하는 것, 그것은 특별한 사역이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하기 싫으면 그건 기본적으로 교사의 직에 들어서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학교와 교사의 수를 3분의1정도로 줄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뭔가 하면 그렇게 영혼에 대한 깊은 애증과 연민이 없는 교사의 손에서 자라난 영혼들이 뭘 배우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랑이 없는데. 그래서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뭔가 하면 꼭 만나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방 중에는 우편배달부 심방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갔는데 없데요. 전화해도 없데. 그 심방 말이죠. 그런 심방은 그 사람 자신에게 꼭 만나야 되겠다는 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뭐 심방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변명거리들이 참 많습니다. “집에 전화해도 통화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집에 전화해서 통화하는 게 쉬어요. 어떻게 쉽겠습니까? 아침엔 새벽기고 가죠. 새벽기도 끝나면 직장 가죠. 직장가면 저녁때나 와 가지고 세미나 참석하죠. 그 다음에는 화요일에는 청년교구 모임 있죠. 수요일에는 수용예배 있죠. 금요일 날은 금요 기도회 있죠. 목요일 날은 밖에서 친구 만나죠. 토요일은 또 교리 반 숙제 해야죠. 일요일 날은 또 세미나 있으니까 늦게 오죠. 여러분 친구도 전화하면 여러분 통화 할 수 없다 구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그거는 자기가 찾아 가야 됩니다. 당연히 찾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 밤중에. 그러니까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건 당연 하잖아요. 매일 찾아다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결정 적으로 필요하고 영혼들이 너무 안 나올 때 찾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꼭 만나려는 의지를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 사전 권은 못 벗어난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면 도서관 가고 학원에 가면 학원에 전화 걸어서 몇 반인지 확인하고 내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리다. 그렇게 맘먹으면 못 만나겠습니까? 아니 수업시간에 학교에 가면 있을 것 아닙니까? 최소한. 분명히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제가 사역할 때 선생님인데 아무리 연락을 해도 연락이 안 되고 집에서도 어느 도서관 다니는지 물어보니, 무심하지. 무슨 도서실인지 모른다고 그러더래요. 몇 시에 오냐고 물어보니 11시 20분에 온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11시서부터 집 앞에서 진 치는 것입니다. 잠 자로 오겠지. 여기서 딱 만나는 것입니다. 심방 못하게 하는 요인은 많습니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바쁜 세상에.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교회 심방이 대개 밤에 이루어집니다. 잘 아시지요. 청년들은 잘 모른 것입니다. 장년들에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교역자들의 출근 시간은 오후 1시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참 편하겠다. 그런데 그것도 아닙니다. 오전 시간에는 기도 충분히 하고 성경 읽고 자기 경건에 힘쓰다가 오후 1시부터 심방하자. 그러는데 그러면 우리교회 전도사님들 목사님 출근시간이 1시고 퇴근이 6시인데 야 그것 할 만하다. 아닙니다. 심방은 6시부터 이제 시작입니다. 왜 교회 잘나오는 부인 있는데 낮에 가서 둘이 만나면 뭐 하겠습니까? 그 남편을 만나야 될 것 아닙니까? 교회 안 나오고 흔들흔들하는 그 사람을 만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맞추는 것입니다. 9시에 온다고 그러면 9시에 12시 밖에 안 온다고 그러면 12시에 제가 기록이 1시에 신방 간적 있습니다. 새벽 한시에 그래서 한시 반에 마치고 마지막 신방 2시에 마친 적 있습니다. 왜 아니 그 때 온다고 하니까 그때라도 가겠다. 왜 그 사람을 만나야 이야기가 될 것 아닙니까? 아니 교회 잘 나오는 부인이야 내버려 둬도 잘 나오는데 왜 낮에 시간이 바쁜데 거기 가서 앉아서 차 마시고 앉았느냐는 것입니다. 그 교회 안 나오는 그 사람 만나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 그래서 등록 하면 다른 교회에서는 즉시 심방이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한참 기다려야 됩니다. 한 달이면 빨리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맞추다 보니까 수요일 안 되죠. 금요일 날 안 되잖아요. 토요일 날 힘들죠. 주일날도 힘들잖아요.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집회 가는 날은 저는 또 못 가잖아요. 그러니까 이거 맞추다 보니까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래도 가서 그 사람을 만나야죠. 그래서 그 사람에게 한마디라도 예수 믿어야 된다는 말을 해야지. 그거 아닙니다. 꼭 만나야 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식하나가 있습니다. 가서 못 만난 심방 가나 마나. 예. 가나마나입니다. “제가 굉장히 심방 많이 했거든요. 그러나 못 만났어요.” 그런 이야기는 할 것 없습니다. 못 만났는데 뭘. 제가 숫을 많이 쌌거든요. 한 골도 안 들어갔습니다. 그런 이야기 하면 뭐 합니까?
세 번째 만나면 제일 먼저 만나자 마자 조금 밤늦게까지 찾아 가서 저쪽에서는 감동했습니다. “어머! 선생님이 여기까지 오셨어요.” “ 너 지난 주일날 왜 교회 안 나왔니?” 누가 그렇게 물어 보니까 게가 그러더랍니다. 그 아이도 대단 한 아이입니다. “그 말 하려고 여태까지 기다리셨어요.” 그러더랍니다. 그러니 이야기야 안 되는 것입니다. 저 인간이 날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숫자 찾으러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심야에 숫자 찾으러 왔구나! 전도사가 엄청 스트레스 주었나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기왕에 심방 갔으니까. 그러면 대화가 끊어지지 않습니까? 뭔가 이유가 있어서 안 나왔겠습니까? 이유가 없어서 안 나온 아이들은 전화로 확인이 되었겠지요. 친구를 통해서 확인이 되었든지. 이유 없이 빠진 것이거든요. 그 때에는 마치 지난 주일날 네가 빠질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명을 할 수 있게 변명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하여튼 도망 갈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지만 그 다음에 계속 이야기가 될 것 아닙니까? 전도 할 때도 내가 전하는 복음 받아들일래. 안 받아 들일래. 싫어. 그러면 끝이니 않습니까? 그런데 뭘 쓸데없는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심, 관심이 이런 것입니다. “오. 세상에 너 요새 학원이 이렇게 늦게 끝나니?” 그러니까 단답형으로 묻지 말고 뭔가 이렇게 이야기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야! 요즈음 이렇게 학원이 늦게 끝나니?” 그러면 이야기 할 것 아닙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니” 뭔가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까? “야! 너 요새 이렇게 늦게 끝나니?” 그러면 학원을 두 개 다녀요. 라든지 학원 끝나고 도서관 갖다 왔어요. 라든지 도서관 끝나고 학원 또 갔다 왔어요. 라든지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죠.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하게끔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요즈음 제가 운동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좋은 것이지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로 먼저 들어가야 됩니다. “무슨 운동을 하는데” “아 제가 테니스를 배웁니다.” “야! 그것 나도 옛날에 했었는데. 너 요새 어디서 배우느냐? 수강료는 얼마냐. 나도 좀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거기 잘 가르치니?” 그러면 이제 자꾸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 때 소이 이야기하는 심리학적인 “라포”가 생기는 것입니다. 공감의 분위기. 그러고 가도 늦지 않잖아요. 그런데 “너, 왜 교회 안 나왔어.” 그렇지 않으면 “너, 교회 계속 그렇게 안 나오면 되겠냐?” 그러면 뭐라 그럽니까? “안 됩니다.” 그럼 끝이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사를 갔으면 너는 언제 여기로 이사를 왔냐? 집 찾느라고 혼났다. 그럼 뭐 “어떻게 어떻게 이사를 왔어요.” “야! 집을 줄여서 왔다고 그러는데 내가 보기에는 더 살기가 좋다. 여기 산 동래 좀 올라오기는 했지만 전망도 좋고 공기도 좋고 나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 봤으면 진짜 좋겠다.” 그럼 “여기는 뭐 산책 코스도 있고 뭐 있고” 라고 하겠죠. “야! 진짜 옛날보다 훨씬 더 머리도 맑아지고 좋겠다.” 뭔가 자꾸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하다못해 무슨 안경하나를 바꿔 끼었어도 “야! 요새 그런 안경 쓰고 다니는 사람들 많더라. 그 뭐냐 새알같이 생긴 안경 그것. 나도 어울리겠느냐?” 한다든지 그렇게 해서 마음을 좀 풀어 주어야지. 그 아이는 벌써 기대하고 있습니다. 딱 만나는 순간에 아휴 저 인간이 나 찾아 왔구나! 분명히 입 열자마자 ‘너 교회 왜 안 나왔어.’ 이거 물을 거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되나? 변명할 말이 없네.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경계심을 풀어 주어야지.
그 다음에 이제 네 번째 해야 될 것은 뭔가 하면 다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풍부히 대답할 수 있게 말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심방 갔을 때 좀 질문 하는 게 이런 것입니다. “그래 어떻게 주님을 믿고 살다가 열린교회까지 왔습니까? 한번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그럼 이거는 예. 아니오. 가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날 밤에 태어나서 떨어진 꽃잎처럼 태어났는데 가엾은 어머니 날 버리시고... 그러다 주님을 만나고... 그러면서 이제 주절히 주절히 일대기가 나오잖아요. 그러다 보면 이제 십년 이십년 지나면서 여기까지 옵니다.
그런 다음에 ‘그래 열린교회는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항상 단답형으로 묻는 게 아닙니다. 그럼 이제 물어보면 “아 사실은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열린** 하나를 주었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어디서 주었는데.” “예. 방배 사거리에서 주었습니다.” “아! 그래구나!” 또 꼬치꼬치 캐물으면 안 됩니다. 거기 가래침은 안 묻었습니까? 그런 것은 물어 볼 필요 없지요. 그냥 주었다니까 아! 거기까지 가서 전도 했구나! 그렇게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전철 안에서 읽다가 내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간증을 듣는데 어쩜 나하고 생긴 것도 똑같은 사람이 간증을 하는데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뭐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아! 그랬었니? 라고.
그러면서 이제 쭉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벌써 그러는 동안에 자기 마음이 이렇게 쫙 열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 집어내는 것입니다. 다 나와야지만 비어집니다. 빌 때 내 것을 집어넣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꺼 집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꺼 집어내는 동안에 자기가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나오거든요. 왜. 질문이 그런 질문이니까. 그러니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가서 어떻게 합니까? “그래. 요즈음 시장에서는 경기를 어떻게 봅니까?” 그런데 제가 그런데 관심이 있습니까? 교회나 잘 나오면 되지. 그래도 그런 것 물어 봐야지. 나는 장사하는 사람 아니지만 그 사람이 하는 사람이니까? “아휴. 힘들어 죽겠습니다.” “그래. 장사하는 사람들이 다 어려워. 그래. 그런 종류의 사업은 어떻게 IMF를 극복을 합니까?” 그럼 이제 자기가 전문가 아닙니까? 그래 이제 막 강의를 합니다. 그럼 감명을 받은 척 해야죠. 아! 그렇군. 아! 그렇군. 그래서 뭔가 그 사람이 이야기해 주는 것을 통해서 유익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됩니다. 그게 하나의 지혜입니다. 그러면서 쭉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오픈하게 해 주어야 됩니다. 아무 이야기나 괜찮습니다. 그 아이가 최진실 한테 관심이 있으면 최진실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최진실 전하려고 간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뭔가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에 있는 것을 아무 거라도 괜찮습니다. 뭐든지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야 합니다. 끌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이제 말하자면 친밀감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것을 끌어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기술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격적으로 아주 이상한 자폐증 적인 성격이 있는 사람 제외 해 놓고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풀 뜯고 있는 사람한테 가서 요즘 동해 바다에 고기가 많이 잡힌답니까? 이렇게 물어 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풀이 뭐냐고 물어 보든지, 아니면 이 꽃씨 뿌립니까? 뿌리면 언제쯤 싹이 납니까? 뭐 그런 것 물어 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동해 바다에서 고기 잡는 사람한테 그 뭐.... 하여튼 다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 그런 거잖아요.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러고 이제 네 번째가 뭐냐 하면 다 꺼 잡아냈잖아요. 다 꺼 잡아내서 갑자기 막 그냥 IMF가 어쩌고 탁 이야기 했는데,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 그러면 썰렁해집니다. 듣는 신방 받는 사람이 이럴 것입니다. 팽귄! 뭔가 분위기가 물어 익어야지.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그러고 짝 이야기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러면서 이제 관점을 신앙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이 이제 그런 쪽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사업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던가요?” 그러면 이제 한숨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휴! 참 신앙생활을 잘 해야 되는데.” 그럼 이제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면 됩니다. 이야기를 이제 풀어 갑니다. 신앙적인 쪽으로 하면서 마지막에는 말씀을 딱 가지고 가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알면 저는 성경을 그렇게 많이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 번도 심방 갈 때 설교 준비를 해 간 적 없습니다. 그러면 머릿속 에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을 합니다. 찬송 부를 때 또 생각을 합니다. 자 이제 이렇게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는데 이 사람에게 적합한 이야기가 뭘까?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쭉 생각을 합니다. 찬송하나 부르는 동안에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안 납니다. 한절 더 부릅시다. 그러면서 또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장까지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끝날 때는 딱 정리가 됩니다. 시편 몇장 몇절 그러면서 딱 폅니다. 그러면 거기에 상황에 정확한 말씀이 딱 나옵니다. 쭉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길거리에서 밤에 가로등불 밑에서 심방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분위기를 봐서 해야 됩니다. 얘가 지금 한참 딴 생각 하고 있는데, 야! 우리 성경 펴자. 바람 쌩쌩 부른 추운 겨울에 가로등 밑에서 마태복음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한테 그렇지만 분위기가 물어 익어서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면 자기가 성경을 펴 주면서 여기 한번 읽어 봐라.
양떼를 떠나서 길 잃어 버린 나
목자의 음성 싫어서 먼길로 떠났네
성경구절 하나 이렇게 읽게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너 정말로 사랑하셔.” 그렇게 교회 안 나오는 사람한테 가서 “너 그 따위로 살면 하나님이 단 칼에 목을 벨 거야.” 그렇게 해서 겁먹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떠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기본적인 감화가 없는 사람에게 책망은 마치 짐승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교인들 중에서도 가끔 저에게 들었다가 놓임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년들도 그렇고 들었다 놓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말씀에 사모함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깊이만큼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했었습니다. 죠나단 에드워즈 ‘이상이 없는 동물과 같은 인간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하라.’ 그랬죠. 그래서 제가 늘 예의 바르게 대하는 사람은 자신을 좀 깊이 성찰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성경 한 구절을 읽고, 그러고 항상 떠나가고 난 다음에는 선생님은 갔어도 말씀은 남게 해야 됩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다.’ 마찬가지로 ‘심방은 사라졌어도 하나님 말씀은 남는다.’ 그래도 선생님은 갔는데도 그 가로등 등불 아래서 추운 밤에 잠깐 얘기해준 그 말씀이 살아남아서 그걸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계속 살아 있도록 계속 기도 해 주면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상황에 맞는 거 몇 개를 알아 두면 좋겠지요. 병들었을 때, 친구에게 버림 받았을 때, 고통당할 때, 교회 나오기 싫을 때, 주일을 못 지킬 때, 그리고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갈급할 때, 멀리 떠나고자 할 때, 뭐 그런 거 불과 한 이십 가지 밖에 안 됩니다. 요만하게 표를 만들어 가지고 성경에다 꼽고 다니셔도 됩니다.
처음에 제가 교사생활 할 때 펜글씨로 다 써 가지고 다녔습니다. 왜? 성경을 잘 몰랐으니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방 가서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밥뚜껑을 요렇게 놓으면 병들었을 때, 어. 시편. 외로울 때, 시편 몇 편, 말씀에 집중 안 할 때, 시편 1편, 요런 식으로 적어 갑니다. 그래서 펴 놓고 아주 짤막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성경 펼 시간이 안 되면 외었다가 이야기를 해 주는 것입니다. 똑같이 못 외우면 어떻습니까? “탕자가 있었는데 돌아 왔을 때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 하셨지. 그지. 넌 갔어도 하나님이 항상 기다리고 계신단다.” 이렇게 이야기 해 주면 되잖아요.
그래서 항상 말씀을 심어 주고 오라는 거, 그래서 심방 그 자체를 개인적인 사경회처럼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제가 교회가 커지면서 제일 마음이 아픈 게 뭐냐 하면 청년들에 대한 개인 사경회식의 심방이 사라진 것에 대해 제가 안타깝습니다. 전도사님들이 훌륭하게 대신 해 주시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너 다음 주에 교회 나올 거야. 안 나올 거야.” 그러지 말고, 그냥 교회 나오라는 이야기 안 해도 왜 왔다 갔는지 압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쯤 전화해서 그날 밤에 헤어져서 “잘 들어갔니?” 라고 이야기 하고 “야! 내일 모래가 주일인데 잘 챙겨서 교회 나와라. 나올 수 있겠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꼭 나와야 돼. 안 나오면 너는 인간으로 생각도 안할 거야.” 그거보다 훨씬 강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려면 가라고 말하는 것이 떠나지 말라고 말하는 것 보다 더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꼭 심어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심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데 뭐냐 하면 기도를 마무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가 진짜 철심장이 아닌 이상 그 추운 밤에 가로등 밑에서 열한시 이십분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그 인간을 만났습니다. 만나고 또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순 저건 불성하고 땡땡이고 완전히 개판이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까 또 가슴 아픈 가슴앓이가 있습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그 최대한 이해하려고 보니까 그 영혼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게 철심장이 아닌 이상은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간절하게 권면 이거 벌써 기가 팍 꺾입니다. 그리고 손을 딱 붙들고 같이 기도 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제 경험에 의하면 청소년들을 심방해 보니까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거기서 울었습니다. 그 밤에 만나면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웁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다들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안 그런데 아무도 자기를 이해 해 주지 않는 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아 가 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열두시 이십분에 친구들이 오는 것은 저도 놀라고 오는 것이지. 저도 놀라고 게임방에 같이 가든지 뭐 어디 갈려고 저도 놀려고 오는 것이지 자기만을 위해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거기에 오는 것은 자기만을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의 경험이 아이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의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의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감동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혼을 대개 그렇게 까지 해 주고 그 다음에 붙들고 기도할 때는 제가 경험을 해 보니까 열중에 팔은 울어요.
그리고 교사들의 경우에는 열이면 열 거의 그 정도 추위에 떨다가 영혼을 만나면 서러워서라도 눈물이 나옵니다. 내가 이 밤에. 그리고 막 울어요. 그러면 그 나쁜 놈 말이죠. 선생님이 가르치면 매일 도망이나 다니고 땡땡이나 치려고 그러고 그러던 그 인간이 둘이서 손을 꽉 잡으면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아이들이 그런 적이 있습니까? 뭘 보고 아이들이 울겠습니까? 그러니 더 많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눈물 한 방울 떨어지면 꼭 닭똥 떨어진 것처럼 바로 닦느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안 닦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아줍니다. 아참. 너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그리고 축복하는 말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한 없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서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뭘 하나 꺼내는데 아주 포장을 거창하게 하고 그러면 오히려 아이들이 소름 돋습니다. 가공은 실레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정도가 지나친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표현인지 알잖아요. “야! 오다가 있지. 오렌지가 너무 큰 게 있어서 네 생각이 나서 하나 사 왔다.” 이찬수 목사님 잉크물 같은 것 사가지고 가라고 그러는데. 오다가 하나 샀다. 오늘 공부 하면서 이거 먹어라. 이거 전도사님이 지난주일 설교한 테잎인데 제가 고등부 목회 할 때는 테잎을 다 만들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때 벌써. 그래서 이거 지난주 네가 못 온 날 전도사님 설교한 것인데 한번 들어봐라. 그러고 줍니다. 그러면 거의 90%듣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듣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눈물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쓰다듬어 준 것만 해도 한없이 감격인데 그것만 해도 빚진 것 같은 마음인데 또 부스럭 거리고 뭘 또 하나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부채 의식이 꽉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음 주에 안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오게 됩니다. 그 다음날 쯤 전화를 하면 벌써 목소리가 나근나근 해 졌습니다. 그때는 전화를 해도 내일 또 나오라고 전화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왜? 그 전에 그게 있었으니까? 그런데 심방은 한 번도 안 나오고 꽁꽁 무심스럽게 잊어 먹었다가 꼭 토요일 날 야밤에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너 잘 있었니?” 그러면 아이들은 속으로 또 내일 나오라고.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인간적인 것들이 결핍된 채로 다루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서 타이릅니다. 그러고 나서 뭐 조금만 편지라도 써 갈수 있다면 그건 더 폭발적인 효과입니다. 간절히 편지를 쓴 것을. 뭐 어느 교사는 대단합니다. 그 아이를 기억을 하면서 매일 한 장씩 일주일 쓴 것을 일곱 개 묶어 가지고 딱 포장을 해 가지고. “나는 직장도 안 다니고 돈도 없어서 너에게 줄 선물도 없구나! 내가 취직하면 맛있는 것 사줄게. 야! 이거 내가 너에게 주는 마음의 선물이다.” 가서 아이가 뭔가 티켓인가 하면서 펴 보니. 첫날은 파란 볼펜, 그 다음날은 연필, 그 다음날은 샤프, 이렇게 썼는데, 딱 보면 알잖아요. 한 번에 내려 썼는지 진짜 썼는지, 그런데 “오늘도 너를 생각한다.” 친절하게 짧은글인데 하나 너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 너를 생각하는 마음 둘, 세상에 머리털 나고 그런 편지를 엄마한테도 못 받아보고 학교 선생님한테 가면 찬밥이거든요. 교회도 제대로 출석 안 하는 불성실한 아이가 학교가면 더운밥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를 받아 주는 것입니다. 그냥 뭐 한없이 녹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 목회를 하는 선생님들은 엽서하고 편지는 기본입니다. 하다가 친구하고 만났는데 찻집에서 시간이 남는다. 놀면 뭐합니다. 하나라도 써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아무데서나 집어넣으면 가는 것 아닌가요? 딱 보니 “어머. 부산에 집회 갔는데 거기 도장 찍혔네.” 그렇게 위선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동기에서 울어 나는 것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심방하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주님이 여러분들이 심방 안 하는 것 너무 슬퍼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마지막으로 하나 이야기 했는데 영혼을 위해서, 그 영혼 가운데는 강력하게 기도하면 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상당히 많은 양떼들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교회에서 오래도록 사랑하고 기다리면서 눈물로 기도해도 안돌아 오는 양떼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산 넘고 물 건너 그들을 찾아 가지 전에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사를 위하여 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