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2018년 구역장공과교육 강의모음)
설교기간|2017년 12월10일-2018년4월2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9년 1월 10일
목 차
책을 열며 2017.12.10 1
1-1장 삼위 안에 있는 사랑 2017.12.17 7
1-2장 참된 인간의 삶 2018.1.14 14
1-3장 신자의 특별한 삶 2018.1.21 19
2-1장 삼위 하나님과 교회 2018.1.28 25
2-2장 교회생활: 사랑 안에서 행함 2018.2.4 30
2-3장 사랑의 아픔: 불완전하기에 아름다움 2018.2.11 36
Q&A 2018.2.11 42
3-1장 교회, 재창조의 씨앗 2018.2.25 47
3-2장 사랑 안에서 교제함 2018.3.4 53
4-1장 사랑으로 이루는 일치 2018.3.11 58
4-2장 신자와 교회의 일치 2018.3.18 63
5-1장 그리스도와 교회: 머리와 몸 2018.3.25 69
5-2장 불완전한 혼합인 교회 2018.4.1 71
6-1장 교회의 아름다움 2018.4.8 78
6-2장 사랑 안에서 자라감 2018.4.22 84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7.12.10. 구역장교육1)
책을 열며
녹취자: 장미연
이미 우리 교회 안에서만 6천부가 찍힐 정도로 인기를 누렸던 책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2006년도 말씀 사경회에서 책이 두 번 정도 설교 되었습니다. 있었던 일을 말씀 드리면 그때 제가 말씀 준비하러 광림 수목원에를 자주 가는 편인데요. 별로 사실은 좋지 않고 불편하고 오래 되서 냄새도 나고 겨울에는 대개 춥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말씀 준비가 잘 될 거 같은 그런 예감도 들어서 올 겨울에도 거기다 예약을 해놨습니다. 그때 거기에 예약을 해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가지고 계시던 그 책이 제가 거기서 3일 만에 썼습니다. 하루에 원고지 한 350페이지씩 한 번에 1,000페이지를 썼습니다. 전 타이프를 못 하기 때문에 그 때 우리 목사님 한 분이 같이 가셔서 목차는 만들어서 갔고 제가 부르면 입력을 해서 나온 책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여러분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는데 ‘그 책 집에 있을 테니까 이번에 그 책으로 쓰면 안 될까?’ 그러는데 집에 가서 대조해 보시면 3문장도 똑같은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3천원 주고 그걸 또 살까?’ 그러지 마시고 사시는 게 좋습니다. 전면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큰 흐름은 변하지 않았고 이미 제가 발표한 내용을 추호도 바꿀 의향이 없지만 좀 더 물 흘러가듯이 다듬고 보충을 해서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한 번 더 손을 보아서 이번에 책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비교해 놓고 보시면 다른 책이라는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페이지가 다른 건 물론이고 첫 번째 책은 6과로 되어 있어서 호흡이 길게 되어 있습니다. 호흡이 긴 책들은 잘 못 읽습니다. 한 과가 50쪽 읽어야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 쪼개서 작게 만들어서 전체 내용을 포괄하게 했습니다. 그럼 한 번 보겠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오늘은 워밍업입니다. 책을 열며 우리가 공부하게 되는데 서론격인 내용입니다.
1.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부족은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우리가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하고 살아가니까 이런데서 어떤 어려움이 오게 되느냐 보자는 것입니다. 뭐하는 거지요?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인데 여기 나오는 사람은 싸우는 거 같지요? 여자가 남자를 때리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열 받았다는 뜻이고요. 이 사람은 보따리를 쌉니다. 열을 받아서 씩씩 거리면서 보따리를 싸고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새 교회를 찾을 거고 잠시 후에 또 보따리를 쌀 것입니다. 밑에 있는 사람은 굉장히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혼자 열 받아서 조용히 혼자 떠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은 모여서 갑론을박하고 이러는데 이 사람은 혼란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뭔가?’ 그러면서 얘기를 하는데 작대기가 쭉 그어져 있는 것은 이러면서 이 사람이 생각하기를 ‘아, 교회는 필요가 없구나.’ 그러면서 한때 1980년대 90년대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모 교회 주의가 굉장히 지성인들 사이에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그 역사가 오래됩니다. 성경도 믿고 그리스도도 믿지만 교회는 필요하지 않다 생각하고 자기 개인이 주님을 믿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열, 개인주의 이런 것에 있어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앎이 없으니까 상식을 가지고 판단을 하고 이런 많은 것들로 미루어볼 때 교회에는 별로 그렇게 필요한 곳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교회의 설립의 목적 그리고 나의 인생의 목적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이 책에서는 이 세 가지의 목적이 어떻게 연결된다고 말합니까?
여기 잘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이게 나방이나 이런 게 아니고 갈비뼈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이 굉장히 생각할 거리가 많은 부분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수준이 성경을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냥 사람을 둘을 만드시지 왜 둘을 만드시면서 또 한사람의 뼈를 취하셨을까?’ 한 몸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몸인데도 둘이 한 덩어리가 아니고 이렇게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사실은 두 사람이 연합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결국 사랑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래전에 말씀을 읽고 깨달으면서 깊은 은혜를 받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제가 쓴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책도 역시 이걸 펼친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아들이 태어났잖습니까? 가인이. 그러면 두 사람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이야기 하고 “너는 그렇지 않다.”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고 결국은 그 자녀까지 똑같은 고백을 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동생이 태어납니다. 똑같은 고백입니다. 그 자손에 또 자손이 태어납니다. 똑같은 고백입니다. 우리가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예화) 저는 사실 그런 정도는 아닌데 친구 목사 한 사람은 그러더군요. 딸이 시집을 가서 아기를 낳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품에 안으니까 너무 기쁘더랍니다. 아들이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아서 품에 안았더니 눈물이 나더랍니다. “개혁주의 목사가 그러면 안 되지. 아니, 똑같은 손자인데 딸이 낳은 건 그냥 그렇고 아들이 낳은 건 왜 눈물이 나냐?” 그게 인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라는 고백이 아직까지 흔적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족을 보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성이 원래 좋은 인간성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동양 철학에서 맹자 같은 사람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는데 나쁜 본보기를 보고 올바른 스승이 없어서 망가진 인간이 되는 거라 보지만 순자나 혹은 홉스 같은 사람은 반대로 봅니다. 결국은 이런 죄와 인간의 악함이 이런 관계들을 다 깨뜨리면서 사랑해야할 관계들이 서로 미워하고 치열하게 이렇게 되는 증오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언급을 해서 원래 금기 사항이었습니다. 온통 뒤집어 놨는데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려고 그랬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끊임없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지도자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인류에 이상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서로가 다 나누어서 극단적으로 말해서 죄와 타락이 전혀 없이 60억의 인구로 증가되었다면 우리 모두가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사랑하면서 사는 그런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결국은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그런 사회를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중간에 만드시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이상을 먼저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1번, 그 다음에 두 번째 교회를 세우신 목적 2번, 하나님이 세계를 완성하시는 목적 3번 이게 전부 다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사람들이 예수를 믿다 보니까 필요에 의해서 만든 그런 단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에 경륜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여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가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회가 되기를 원하셨는데 죄로 말미암아 깨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사람들을 창조의 목적으로 다시 돌아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크게 보면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인류를 왜 창조하셨나? 결국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는 마지막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그 세상이 되도록 교회는 이바지하기 위해 선택받은 공동체인데 그러면 그렇게 미래의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그 사랑의 나라를 어떻게 죄와 갈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 속에서 그것을 실현할 것인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그 전부입니다.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조의 목적을 선취적으로 구현하는 곳입니다.
이 사람은 넘어진 사람입니다. 지난 공과에서도 자주 나왔잖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넘어졌는데 자기의 죄 때문에 넘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했는데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기엔 무능합니다. 불가능합니다. 무능하니까 결국 불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접붙이십니다. 접붙이셔서 교회에 일원이 되게 하신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생명과 사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그것이 곧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 자원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면서 교회 속에서 살아가서 거꾸로는 인류의 원래의 죄가 들어오기 전에 모습을 앞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완성하실 때 어떤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인가를 먼저 이 안에서 누리면서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는 곧, 하늘 생명과 사랑을 누림으로 우리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람다운 삶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어떠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최근에 미성년자들에 의해서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 성인들도 저지르기 힘든 흉악한 범죄가 일어납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 청소년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된다. 필요하면 청소년도 사형을 언도 받게 한다든지 사형이 어려우면 무기징역이라도 살게 해서 사회로부터 영영 격리시켜야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러한 일들을 공자에게 물어보면 우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건 안 된다. 그 아이가 그렇게 된 것은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니고 부모답지 않은 부모를 만났기 때문이고 좋게 말하면 좋은 부모를 못 만났기 때문이고 옆에 좋은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이고 보면서 자신에게 감화를 줄 인생의 스승을 못 만났기 때문에 어둠속에서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다.” 그런 의미에서 그 아이가 망가진 것은 사실은 가정과 사회의 책임이 매우 크다. 그런데 그가 범죄를 했을 때 마치 자기 사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온전히 이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모두 이 사람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왜 그 아이가 그렇게 예도 모르고 의도 모르고 측은지심도 없는 무도한 아이가 되어 버렸느냐? 그것은 주변에 책임도 크다고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무기징역까지라고 하셨는데 상당히 우리 장로님들은 너그러우신 분들입니다. 사형은 안 된다고 하셨는데. 우리나라는 사형 안 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가 그 책임을 공유해야 된다고 봅니다. 사회에서 그런 문제아들이나 장애를 가진 분들 이런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여기 달라붙었구나.’ 생각하면 안 되고 내 몸에 있는 어떤 약한 부분이나 장애의 경우, 혹은 범죄의 경우도 내 몸에 난 부스럼이나 상처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같이 다루어야하는 것입니다. 청소년에게 아무리 흉악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어른과 똑같이 중형을 내려서 그 한 사건 때문에 그 아이의 인생이 제기할 기회를 완전히 일어버리도록 만드는 것은 개인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근거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들이 본보기가 없다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생명과 사랑입니다. 청소년들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다가 극적으로 회심하고 예수 믿어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보면 놀랍습니다. 결국은 생명과 사랑입니다. 불후하고 정말 어려운 가정에 태어났는데도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렇게 새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생명과 사랑.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자신도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유익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4. 우리가 이 교리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떠한 교리를 깊이 알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 교리가 주는 유익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시다.
이게 파일인 모양입니다. 파일에 서류들이 들어가잖습니까? 지금은 거의 다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이런 게 별로 없지만 저도 연구실에 파일 통이 쭉 있어서 파일 통에 넣습니다. 그럼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도 그것을 서류 통에 탁 탁 넣어 놓으면 너무 일하기가 편합니다. 컴퓨터도 활용을 잘하는 사람들은 컴퓨터 안에 잘 분류가 되어있습니다. 저는 대체로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쏟아놓고 그 다음에 ‘내거 어디 있나? 자료실에 부탁해서 찾는 양인데 또 그런 것까지 시간을 모두 보내면 시간이 모자라겠지요? 어쨌든 이렇게 잘 정리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어떤 진리들을 잘 정돈합니다. 정돈해주는 게 바로 교리입니다. 교리가 이렇게 정리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를 하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올바른 세계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때는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 이런 건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지 않습니까? 물론 살인이 성경에서는 “살인하지 말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 그런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분노에 의해서 그렇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은 정당화 되고 혹은 이웃과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거의 정당방위를 하는 것들은 법에서도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여지가 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약간의 폭이 있게끔 우리에게 제시를 하는 적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올바르게 세계를 볼 수 있는 일관된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모든 사물과 상황에 대해서 확고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방해하는 가장 커다란 것이 이념입니다. 성경에서 온 게 아니라 자기가 어디서 좌파 혹은 우파 공산주의 이론, 자유주의 이론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에 깊이 그것에 의해서 잠식 되어서 거기다가 성경의 진리들을 덧입혀서 그것을 신앙의 확신으로 붙들 때 매우 위험한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지식을 가지고 성경의 원리를 따라 정리된 교리, 여기에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만 이겠습니까? 인간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또 앞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심지어 역사에 대해서 문화에 대해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교리를 배우는 목적은 일곱 개로 보는데 우선 첫째 위에 그림이 나타나 있잖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의 모상을 교회에 구현하십니다. 이 교회가 서로 사랑하며 살게끔 해주셨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그림으로 요약을 한 것입니다. 첫 째는 삼위하나님의 교통의 본질은 사랑이다. 어떻게 삼위 교통의 본질이 사랑인가? 이것은 책에 들어가면 설명을 할 것입니다. 두 번째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 본보기입니다. 아파트를 큰 걸 지어서 분양하기 전에 모델하우스를 만듭니다. 모델하우스를 만들면 사람들이 와서 보면서 ‘아파트 32평 한 채가 이렇게 생겼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걸 보게 되니까 아직 아파트가 여기 지어진 게 아니고 저기 농어촌 공사 그 옆에 짓고 있는데도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서 견본 주택에 들어가 보면서 ‘아, 이렇게 집이 나오겠구나. 괜찮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게 바로 모상입니다. 본보기로 한 번 만들어 본 것입니다. 본보기와 나중에 시공되는 것 중에서 어떤 게 더 좋습니까? 일반적으로 모델하우스가 훨씬 더 좋습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좀 더 예쁘게 만들겠지요. 견본으로 내놨는데 찐빵을 내 놔도 예쁘게 잘 빚은걸 내놔야 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을 구현해도 항상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뛰어난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사랑입니다. 세 번째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는 곳. 사회가 둘이 있는데 하나님 안에서의 사회, 하나님 밖에서의 사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모두 다 궁극적으로 똑같습니다. 서로 처음에는 약간씩 갈리는데 다양하게 갈리지만 마지막에는 하나처럼 엮어져서 마지막에 하나로 달려갑니다. 끝이 결국 창조의 목적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모든 성도들이 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면 교회는 질서 정연하게 하나님 당신의 인생의 목적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에 연장선상에 있으니까. 그렇게 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들이 그 사회를 보면서 ‘매우 특별한 사회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의 본질은 사랑의 교통이다. 교회는 일치를 이루어야한다. 이 일치는 그냥 뭉치는 것이 일치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저희를 하나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일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눈에 보이는 교회에 모든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겨야함. 이것이 ‘토투스 크리스투스(totus Christus)’의 개념입니다. 몸 전체가 예수의 한 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가짜 신자도 섞여있고 또 상태가 매우 나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배교자도 있습니다. 교회 믿다가 이단으로 가는 사람들, 무신론으로 돌아간 사람들, 불교에 가서 승려가 된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 속하지 않은 자임을 드러낼 때까지는 한 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드러났을 때 어떻게 할까요? “이 사람은 교회 속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하고 딱 끊어내는 것이 excommunication. 출교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출교를 너무 남발합니다. 출교는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지체가 아니다.” 라는 선언입니다. 그것은 세상 법적으로 말하자면 사형 선고입니다. 그것을 마구 남발하니까 사람들이 판결에 대한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는 사랑으로 확장되는 교회의 영광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선교,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전도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일곱 번째 교회론 적으로 이해하는 성화론.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서 이미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했고 지난번에 공부한 『부활, 세 번째 지평』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만 이런 내용들을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 안에서 다루게 됩니다.
5. 저자는 진리에 대한 탐구 위에 성령의 은혜가 부어질 때 쪽배와 같던 우리의 삶은 항공모함과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느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큰 풍랑을 만납니다. 요즘은 워낙 GPS가 발달하고 기상이 발달해서 시간 단위로 만들어 찾아내기 때문에 배가 큰 풍랑을 만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런 큰 풍랑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자 한 사람이 1만 5천 톤 짜리 배를 몰았는데 17미터 파도를 태평양에서 만나봤다고 합니다. 만약에 30미터의 풍랑이면 무시무시하겠지요? 그런 큰 풍랑을 만날 때 작은 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옛날에 “퍼펙트 스톰” 이라는 영화 보셨지요? 참치 잡이를 나갔던 사람이 풍랑을 만났는데 파도 하나가 쳤는데 그 배가 작지 않은 배인데 막 통통하고 올라갔는데 하나의 파도에 걸쳐 있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파도가 일어나는데 쪽배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 3미터 파도만 쳐도 충분히 실종 되는 것입니다. 13미터 파도가 치더라도 군함 같은 것은 끄떡없고 더군다나 15,000천 톤짜리 항공모함일 경우에는 그까짓 파도 쯤은 상관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똑바로 바다를 가르며 항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쪽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답변하시면 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7.12.17. 구역장공과교육2)
1-1 삼위 안에 있는 사랑
녹취자: 이경순
새로운 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감사의 박수를 칩시다. 이미 2006년 새해 말씀 사경회 자료인데 한 3줄도 중복되지 않게 전부다 다시 썼습니다. 큰 흐름이야 같겠지만 표현을 완벽하게 다 고치고 출전도 찾았고 성경구절까지도 다 찾아서 완벽하게 보충을 했습니다. 우선 1장 제 1과부터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랑의 원인은 사랑 받는 대상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렇지만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교통과 인간의 사랑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피조물들의 사랑은 남녀가 있고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사랑을 할 때에는 무엇인가 에이라는 사람이 비라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뭔가 사랑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외모든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점이 있으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도 있는데 이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이 발견이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워낙 사람 자체가 사랑의 사람일 경우에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 보면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것들이 사랑을 하면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사랑은 본성적으로 볼 때에는 아름다운 것을 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신이 즐겁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담에 두 번째 하나님 안에서의 내재적인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부 성자성령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할 때에는 사랑할 대상이 이세상에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사랑이 되셨느니라 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는 영원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가? 그것은 바로 위격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삼위일체에서 배웠지만 세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위격인데 서로 관계를 가지시는 위격입니다. 그 위격이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결국 또 무엇과 나뉘어지지 않느냐면 각 위격은 모든 나머지 위격들과의 질서 속에서 가장 무한히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 성부 성자 성령님이 서로 사랑하시므로 각 위격의 사랑이 결국은 하나님 한 분 안에서의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사랑의 원인이 되시고 목적이 되시고 대상이 되시고 사랑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고 이 사랑을 이제 하나님이 인간사회 속에서 이것을 펼쳐서 당신이 성부 성자 성령 이 위격 안에서 서로 사랑하시는 것 같은 관계를 가지고 인간들이 그렇게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사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그것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르네상스시대 때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문인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단테를 쳐보고 단테의 이야기를 한번 읽어보세요. 그럼 아마 아실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 영원한 빛이시여 당신은 당신 안에만 계시고 당신만이 당신을 아시고 당신은 당신에게만 알려지고 당신을 스스로 알면서 사랑하시며 웃으시는 도다’ 집에 가셔서 이것을 다섯 번은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그림을 한번 보세요. 의미심장한 위격들 간의 교통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2. 본문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2-1. 개별적 위격의 완전성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둘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 두 번째는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사람을 모델로 쓸 때에 부분 모델을 씁니다. 손이 아주 예쁜 사람은 손 모델로 씁니다. 보험사가 와서 계약을 하는데 아줌마인데 손가락이 너무 예쁩니다. “아 정말 손가락이 예쁘시군요.” 그런 사람들은 방송을 할 때 모델로 씁니다.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아무리 예뻐도 얼굴은 안 보여줍니다. 왜 그럽니까? 미인이 되어서 카메라에 후레쉬를 받을 정도가 되려면 코나 눈, 입 이런 것 하나만 예쁘면 안 되고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한 사람의 얼굴이 예쁘다고 할 때는 코가 사람의 코로써 완전성에 가까워야 됩니다. 눈도 마찬가지고 입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첫 번째 조건이고 두 번째는 그것이 제자리에서 높이와 낮이 이런 모든 것이 어울려야 됩니다. 그 두 개가 성립이 되면 예쁜 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것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랑새 예뻐요 미워요? 숲 속을 나는 파랑새가 예뻐요 안 예뻐요? 그 열 마리가 지금 여길 날아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예뻐요? 안 예쁜가요? 그런데 왜 똑같은 새인데 아깐 예뻤는데 지금은 안 예쁜가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지요.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 나무가 여기에 세 그루쯤 아름드리나무가 서있다면 예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하나는 완전하고 멋있는 나무인데 주변에 있는 것들과 함께 어울리는 아름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름답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나님을 놓고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설명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굳이 설명한다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각 위격이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무한한 선이고 진이고 성이고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각 위격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위격과 함께 있음으로써 그 성부 성자 하나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위격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또 성자 성령에 어울리는 최고의 위격은 성부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개별적 미의 완전성 때문에 그리고 위격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너무 많이 들으셨으니까 보람을 느꼈습니다. 연세 드신 권사님들은 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 대해서 스위니(Douglas A. Sweeney) 교수가 와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상당히 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도 수없이 들어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원리를 가지고 사물을 보세요. “이 공간이 다 아름답다.” 그것은 딱 두 가지 조건입니다. 하나, 하나가 완전하면 이것이 어울릴 때 또 하나는 보는 사람이 그것을 올바르게 관찰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다음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나오는데 ‘하나님의 단순성’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것도 설명을 하고 설교도 여러 번 했는데 아마 쉽게 기억하시는 분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쪽은 나중에 설명하고 여기부터 설명합니다. 삼위일체에서 다 배운 내용이지만 그러나 한 번 더 설명하자면 성부는 하나님이시다. 성자 역시 하나님이시다.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다. 그러면 이 복잡한 이야기를 딱 둘로 설명하면 위격은 각각 서로 구별되어 있으며 서로 다르다. 그리고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시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동일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시다. 이 뜻입니다. 그래서 각 위격은 하나님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다우실 수 없는 무한히 완전하신 하나님 그 세 위격이 관계를 이루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단순성이라는 좀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는 위격은 위격간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각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질이다. 그 담에 스스로의 완전성으로 각 위격은 무한히 아름다우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구성 요소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사서 보면 뒤 포장지를 보면 성분 그러면서 그 제품에 들어간 모든 것이 나옵니다. 과자라면, 밀가루, 우유, 코코아가루, 설탕, 전분, 베이킹파우더, 소금 어쩌고저쩌고 쭉 나옵니다. 그 성분이 합쳐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성분을 과학적으로 다시 분해하면 그 성분으로 다 추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구성요소를 가지신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할 때 파이조각처럼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서 성부 성자 성령 이런 식으로 설명하려면 안 됩니다. 더욱이 이렇게 놓고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할 때 이렇게 파인애플 조각처럼 그리면서 하나님의 사랑, 공의 그 다음에 공평, 의, 정의 이런 식으로 설명해도 안됩니다. 그럼 그것은 하나님은 단순한 분이시기 때문에 구성요소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고 당연히 성부 성자 성령도 하나님의 구성요소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이 삼위일체가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물건을 설명할 때 유비에 의해서 설명을 합니다. “이 제품이 말하자면 이미 예전에 우리들이 보았던 이런 것과 비슷한 거야.”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데 존재의 양상이 양식이 하나님과 유사한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인간에게 매우 난해한 영원히 불가해한 존재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설명한 모든 것은 성경에 근거를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단순성으로 돌아가서 단순성이 무엇이냐면 이렇게만 이해하면 됩니다. 제가 즐겨 드는 비유인데 햇빛이 수많은 역할을 합니다. 식물을 자라게 하고 얼음을 녹게 하고 그래서 물이 흐르게 하고 개구리가 깨어나게 하고 빨래를 말리고 많은 역할들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햇빛이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햇빛이 가지고 있는 작용에 의해서 균이 있는 빨래는 살균이 되고 씨가 뿌려진 땅에서는 싹이 나고 얼음이 언 땅에서는 물이 녹는 것이지 그 햇빛 안에는 얼음이나 풀이나 이런 것들이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프리즘에 빛을 통과시키면 빨주노초파남보 이렇게 일곱 개로 분광이 됩니다. 놀랍게 이 분광을 합친다고 해서 다시 그 빛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은 단순하셔서 구성요소를 가지고 계신 분은 아니지만 그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이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성품을 무지개 빛깔처럼 비추시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인과 만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비참한 사람과 만날 때에는 자비하신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선한 사람과 만날 때에는 은혜로운 하나님으로. 이런 식으로 당신이 설명할 수 없는 단순하신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다양하게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를 하고 이 세상과 맺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이런 것들을 보면 아주 예전에 흑백사진으로 보던 세상이 칼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주 생생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역사하시는 방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단순성은 ‘하나님은 어떤 구성요소를 가지시고 나뉘어지는 분이 아니다.’ 위격 안에 있는 사랑의 교통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이신데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부는 성자를 성령을 사랑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그리고 성자는 성령과 성부를 사랑하시므로 이렇게 삼위는 사랑의 교통을 이루심으로 각 위격은 개별적으로 다른 위격과 사랑의 교통을 나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5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그의 손에 주셨으니 나오는 것입니다.
2-2. 삼위의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계십니다. 그런데 성자는 성부께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 이렇게 서로 질서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세 위격 사이에 완전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이 종속은 본질적인 종속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냐면 잘못된 신학자들이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100%하나님이고, 성자는 90%하나님이고, 성령은 80%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질서가 종속적인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 덜 하나님 같은 성자를 낳으시고 그 담에 그 성자가 더 덜 성자 같은 성령을 낳으신다.” 그래서 “이렇게 종속적인 질서를 갖는다.”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관계의 질서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 되시고 성자를 통해 성령을 통해 그 창조가 이루어지고 구속이 전개되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경륜’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경륜은 희랍어로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이코노미 경제라고 하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원래 가계입니다. 이것은 ‘집을 세우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할 때 둘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내재적 삼위일체 그 담에 경륜적 삼위일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시느냐 이것이 내재적 삼위일체라면 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시느냐 이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입니다. 다시 내재적 삼위일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데 어떤 관계로 계시는지 이것에 대한 이론이 내재적 삼위일체론입니다. 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영원한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세계 속에서 모든 인간과 피조물과 더불어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이 경륜적 삼위일체입니다. 성경은 내재적 삼위일체에는 오히려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경륜적 삼위일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위격이 이제 인간의 창조부터 시작해서 완성에까지 관여하시면서 인류의 역사의 대파노라마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 담에 세 위격이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위격이 상호간에 사랑으로 교통하시고 세 위격은 질서로운 관계를 유지하십니다.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에 대해 무한히 아름다운 방식으로 존재하시며 그 위격들에게 사랑을 받으십니다. 각 위격은 존재와 서열에 있어서 다른 위격을 배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가 막힌 설명이 이 삼각형입니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설명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의 설명을 내가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렇게 삼각형을 그리고 여기 성령이시고 성자이십니다. 그리고 성부이십니다. 그런데 아랫부분이 이 세 개와 관련되는 부분이라고 이해를 합시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두 위격을 배재하고 혼자서 일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실 때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창조하시지만 성부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 일을 하시고 성령과 성자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담에 타락 후에 구속사건이 있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다시 이런 삼각형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는 성자가 되고 성령이 되고 여기는 성부가 되십니다. 그래서 삼위가 모두 이 일을 하시지만 그러나 성자하나님이 이 구속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담에 이 구속을 적용시키는 사역에 있어서는 어떻게 될까요? 여기는 성부 성자 성령 이 성령이 구속의 적용입니다. 이것은 구원입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경륜이 전개가 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예전에 했던 삼위일체 한 다섯 시간 할애해서 다시 한번 쭉 들으면서 정리를 하고 하시면 공과시간에 자신 있을 것입니다.
3. 사랑은 자기 충족적 사랑입니다. 자기 충족적 사랑이란 무엇이며 이러한 사랑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의 행복과 배치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충족적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충분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무엇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에게 무슨 이득이 된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거스틴이 개념을 이야기 한 것은 몇 번들은 이야기지만 ‘향유’는 그것 자체를 궁극적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고 ‘사용’은 그 보다 더 상위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펜을 이거 말고 새로 나온 좋은 것을 가져와라 그래서 이것을 버리고 100만 원짜리를 사왔다고 칩시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이것을 가지고 누구한테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이것을 그려서 설명을 잘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산 이유는 이것 스스로를 즐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을 잘하기 위해서 산 것입니다. 계속 할 때 인간의 사랑은 항상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이 아니라 항상 사유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좋아할 때는 그것을 건너뛰어서 끝까지 올라가서 무엇인가를 더 사랑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딱 두 개밖에 안 나옵니다. 자기냐 하나님이냐 둘 밖에 안 남습니다. 세상도 사랑하는 것도 세상 좋으라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할 때 자기가 좋아하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무엇인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떤 피조물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사용하기 위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종속적 목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는데 결국은 올바르게 향유하는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에는 결국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피조물 은 결국은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냐 자기 자신이나 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충족적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부터 읽어 봅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성부, 성자, 성령은 자신에게 목적이 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위격들 안에서 살아나실 때 그 자체가 목적이지 그것을 뛰어넘는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원인이자 주체와 목적이 됩니다. 그 안에 피조물에 대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이웃을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 때문에 또 이웃을 사랑하고 마지막에 이 모든 것이 휘돌아서 결국은 사랑이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를 들어서 금 장로님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잘 가르쳐서 금 장로님이 “하나님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면 내가 이 분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이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을 받고 그 담에 각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하면서 온 인류가 사랑으로 연결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비전이었습니다. 많이 설명했으므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깨닫습니다. 아가페사랑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리따스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에 감화를 받은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자연에는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말로 표현 할 때 아 우리 코코 참 사랑스러워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의입니다. 선의를 갖는 것입니다. 그 담에 하나님께서 계신데 인간이 결국은 사람과 피조물의 사랑에 매여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득을 목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꾸피디타스(cŭpídĭtas)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결국은 우리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육욕적 사랑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당신의 지혜를 이루는 것입니다.
4-1.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도덕적 목적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있고 창조의 목적이 있으셨으니까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창조하십니다. 그러면 종말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만물을 어떤 상태로 창조해야 되겠다.’ 이것만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목적대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자연적인 목적과 도덕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목적은 모든 피조물이 생성 생존 변화 소멸하는 자연적인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 속에서 자연이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연적인 목적이었고 인간도 이 자연적인 목적을 따라서 건강과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너무나 과도한 물질문명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면 돌아 갈수록 우리 몸은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목적은 인간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입니다. 통치입니다.
4-2.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혜가 있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선의로 인간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만물을 통치하시는데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 선하심이 결국은 이 모든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에 이렇게 악이 많고 자연의 재해도 많은가 그렇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없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반문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러면 이 세상은 완전하고 질서 있고 조화롭고 모든 피조물들이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번도 그래 본적이 없는데 인간은 끊임없이 그것을 가장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 자체가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신이 있어서 모든 만물들을 그렇게 통치한다는 기억 때문에 인간이 그런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안에 있는 모든 무질서와 악들 이런 것들은 결국은 인간의 죄에 의해서 악에 의해서 도덕 악과 자연 악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4-3. 하나님의 지혜를 이루는 방법인 세 위격의 경륜의 일치는 무엇이며 구속사속에 나타나는 지혜는 인간의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구속의 계획자 성부, 구속의 실행자 성자, 구속의 적용자 성령. 창조, 구속, 완성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세 위격은 각각 고유한 역할을 하시는데 다른 두 위격을 배재한 채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함께 일하신다. 그러면서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당신의 역사를 펼쳐 가신다. 그래서 이렇게 인간의 사랑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결국은 이 창조하신 세계를 구속의 역사로 드러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들에 의해서 망가지고 병들고 악이 들어온 이 세상을 치료하고 고치고 투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계를 선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만들어가는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1.14. 구역장교육3)
1-2장. 참된 인간의 삶
녹취자: 이미란
1.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1-1.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 영혼 안에 있는 창조주에 대한 기억의 씨, 유익과 한계점은 무엇입니까?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 데서 완전히 제외시키지 않기 위해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semen religionis’라고 하는 것인데 ‘종교의 씨앗’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신앙의 씨앗’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란 일반 종교가 아니라 참된 종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종교의 씨앗은 ‘Sensus Divinitatis’라고 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혹은 신성에 대한 의식을 의미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흔적을 쫒아 그분을 찾게 되는 것을 말하며 그런 가능성을 인간에게 주십니다. 그 씨앗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인간이 종교에 대해 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인간은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희미하게는 알지만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의 씨앗,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식의 씨앗은 어느 정도일까?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즉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그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근거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음의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기에는 아주 불충분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만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볼 수 있는 많은 종교는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이 종교의 씨앗이 생겨나고 그 씨앗을 오해하고 곡해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나 사상들을 이 안에 집어넣어서 체계화한 것이 바로 세상의 종교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결국은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종교의 씨앗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1-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죄를 짓기 전까지는 특별 계시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인간에게 종교의 씨를 주님께서 주셨지만, 그러나 죄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지식으로 충만했습니다. 종교의 씨라고 하는 것인 인간에게 심어 주신 것인데, 타락 이후에 인간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으로 충만했고 이런 자연의 세계가 하나님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어서 특별 계시라는 것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구원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위해 특별 계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꿈이나 하나님의 현현, 혹은 환상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들을 인간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특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구속에 완성이 되고, 이 특별 계시가 특별한 형태로 남게 된 것입니다. 원래 특별 계시는 이만큼 많았었는데, 이중에서 요만큼만 기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특별 계시는 성경보다 사실 더 큰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 계시의 특별 형태가 주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믿는 것은 그 계시를 수납하는 손과 같습니다. 받아들인 계시를 믿고 그것을 잘 추론함으로써 견고한 사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하는 지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혹은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속성들의 시행 방식,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독특한 성품이 이 세상 사람들과 맺으면서 그 성품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서 시행이 되는가에 대한 지식,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속성에 대한 지식과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특별 계시는 인간의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죄와 구원의 필요성,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배우고 은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서 이런 요구를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1-3. 인간이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길은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하신 것이라' 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복음인데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때부터 바라보고 달려온 사건이었다는 것이고, 이것들이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부분적으로 점점 명백하게 가르쳐져 오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고 이것을 믿음으로써 구원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4.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참된 종교』 는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 책은 도서관에 가면 있습니다. 굉장히 인상 깊은 말을 남깁니다. 35장 65절에서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린다.”라고 말합니다. 즉, 공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시합니다. ‘공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에 의해 점유된 상태, 사물에 의해 연장된 상태라는 것을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생각을 펼쳐보면,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로 꽉 차 있는 것이고 그 사물이 연장되어 있는 것이고 그 사물이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공간 자체는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공간인 것이고, 다만 이런 물건으로 채워져 있는지, 다른 물건으로 채워져 있냐에 따라 다른 공간인 것입니다. 여기는 그런 게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대상을 제시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심지어는 인간의 존재도, 심지어 그렇게 사랑하고 분투했던 주체 자체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시간은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립니다.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것들이 모두 있는 것처럼 거기에 궁극적인 사랑을 둘 때, 마지막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생을 주심으로써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하십니다.
2-1. 인간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이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사랑 가운데,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으면, 거기엔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알아야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내가 세상과 무슨 관계인지를 알 수 있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지식은 이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인데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것만큼만 나를 알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것만큼만 세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그 공간이 세상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며 거기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끊임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자신이 죽고 나면 이런 얘기할 사람도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살아 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공부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시간 보내지 말고, 부지런히 배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는 지식이 생깁니다. 이 지식은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전에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내가 누구 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라는 질문밖에 없었는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향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성품과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지식의 빛으로 이렇게 내려와서 세상과 자기를 보게 되면 그 지식 속에서 비로소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는 만났는데 답을 못 얻었다면 확실한 신앙이 아닐 수 있습니다.
2-2. 영생의 고유한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영생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생의 사전적인 의미는 시간 안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 있습니까? 시간은 영원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서 죄와 죄의 영향으로 완전함을 상실하기 때문에 이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교적 오래 존재하는 것은 있습니다.
(예화) 최근에 상어가 한 마리 잡혔는데, 학자들의 판단으로 540살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쯤 태어난 상어가 계속 살고 있다가 이제야 잡힌 것입니다. 바닷가재는 귀족들이나 먹는 음식이었는데,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면 랍스터가 굉장히 많고 엄청 쌉니다. 서민들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싸고 부둣가에서 팔뚝만 한 거 하나씩 사면 12000원씩 밖에 안 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 큰 건 20kg까지 나갑니다. 그것은 보통 사이즈로 안쳐줘서 커다란 망치로 쳐서 잡는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거의 100년 산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100살을 살면 천수를 누렸다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예전 동해안에서 잡힌 거북이는 학자들이 판단하니 1300년 정도 되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 속에서 오래 사는 것은 금방 사라져 가는 인간이 보면, 참 어마어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두 지나가는 하나의 점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하루 살다가 죽는 하루살이나 파리나 비슷비슷해 보입니다. 생기를 잃은 영혼과 늙고 병들어 버린 육체로 사는 것은 영원히 살수도 없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생이 아닙니다. 120세까지 수명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50년을 요양원에서 보낸다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젊음의 활기를 갖고 몇 살까지 더 살수 있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과학은 그것까지 뛰어넘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 하지만 두고 봐야 할 것입니다.
2-3. 영생의 적용한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을 이해할 때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은 무엇입니까?
영생의 적용한 의미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영생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때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든지 못 만나든지 어쨌든 인간의 영혼은 영원불멸합니다. 그러하더라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영혼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인간의 영혼이 이렇게 하나님과 만나서 생명적인 연합을 이룰 때 여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전달되어 그런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들을 가지고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모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진정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살아갈 때에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삶을 살아내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자원이 주어질 때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며 사는 삶, 만물의 닮긴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그 지혜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고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의 선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말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살게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인간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2-4.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도구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지식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그 영생은 바로 지식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생의 정체입니다. 그 속에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통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또, 그 지식과 사랑 안에서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기자는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것을 음식의 맛을 보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한번 맛을 보는 것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이 음식은 우리가 음식을 보고, 음식의 맛을 느끼고 그것들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건강을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몸에 좋은 음식에 대해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대로 그것을 먹지는 않습니다. 마늘이 그렇게 좋다고 싫어하는 사람은 안 먹습니다. 요즘 브로콜리가 좋다고 해도 기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안 먹습니다. 슈퍼 푸드가 10개 있어도, 그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먹지 싫어하는 것은 먹지 않습니다. 저는 토마토를 정말 싫어합니다. 그것이 슈퍼 푸드인데도 말입니다. 요즘은 그것을 먹어보려고 시도는 해보는데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문뜩문뜩 토마토가 생각이나 먹게 됩니다. 그것은 굉장히 좋은 노력입니다. 그 대신 조심해야 할 것은 그렇게 음식의 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탐닉하기 쉽습니다. 그것을 항상 경계 하면서도 그렇게 음식의 맛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것을 방탕하면 안 되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무슨 음식을 가져도 다 그것이 그것 같다고 하고 신선처럼 먹는 것을 초월한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 즐거움 대신, 영혼을 구원하고 기도하고 교회 와서 봉사하고 이러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말하면, 우리는 조용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워낙 훌륭한 사람이니,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에게는 맛있는 음식이지만,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또 다른 양식이 있으니 죄인들이 회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rivaux), 저명한 신학자이자 칼빈에게도 영향을 많이 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사랑 그 자체는 앎이다.”라는 말입니다. “지식 그 자체는 사랑이다, 둘이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그것은 확실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 여러분들은 그런 적 없습니까? 저는 사춘기를 좀 일찍 겪었습니다. 중학교 14년 2개월 전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런 사춘기가 한창일 때라 영화 한편을 보고 나서 거기에 나오는 여주인공 때문에 3일씩, 4일씩 앓았습니다. 정신과 모든 세계를 다 사로잡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그 영화 상황이 생각이 나고 그 때 그 사람하고 저와 나이차이가 최소한 많으면 20살, 아니면 15살 이상 차이가 났을 텐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몸살이 나서 병이 날 정도로 영화에 몰입 했습니다. 브로마이드 10대의 가수사진을 잘라서 가지고 다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순간의 열망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 그게 아닙니다.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영화 한편에 나왔다는 것 외에, tv에 나와 현란하게 춤을 추는 금발의 소년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충동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앎이 있어야 하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엔 반드시 앎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과 지식은 하나이기 때문에,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올바른 지식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일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누구냐 하면 본당에서 눈물 나게 기도하고 열린 공간으로 직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을 빌리고 책을 읽은 다음에 너무 감격해서 교회 와서 기도하고, 기도하고 나서는 반납을 하고 다음 책을 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열린 공간 가도 괜찮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1.21. 구역장교육4)
1-3장 : 신자의 특별한 삶
녹취자: 김순미
1.신자 안의 죄성은 영생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1-1. 회개란 무엇이며,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자는 하나님을 모르고 미끄러진 채 살던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본성이 있습니다. 심겨진 이것은 곧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 본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과 관계없이 인간에게 본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항상 함께하셔서 이 본성이 생겨집니다.
언젠가 열린 교회로고를 설명하면서 그려 드렸는데 사람모양에 회색 테두리는 여전히 옛사람의 성품이 신자에게 남아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결국 신자 안에 있는 죄, 혹은 부패성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새 성품이 하얀 색이라면 아직 남아있는 옛사람의 본성이 있어서 신자에게는 긴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긴장을 하면서 하나님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은혜 주시기를 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1)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사도 바울이 불신자였던 시절의 경험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명백하게 사도바울이 신자가 된 후에 경험한 내적인 경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중생의 은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부패한 옛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성과 끊임없이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새 사람이 옛사람을 짊어지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롬 7:22-23) 여기에서 ‘법’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은 크게 ‘공표된 법’과 ‘실효적 법’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공표된 법은 요새 김영란 법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법이 바뀌었으니 지켜야하는 법입니다. 실효적 법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는 법이 없지.’ 그러면 그것은 공표된 법이 아니라 참새 안에 있는 낱알을 좋아하는 성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또 다른 법이 있다. 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운다. 내 마음에 있는 거듭난 신자의 본성과 싸워서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본다. 결국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법이 유지 되는 것이고 이 은혜로부터 소외 돼 버리고 나면 죄의 법속으로 우리들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 하면 이렇게 됩니다. 불신자의 상태라면 이게 신자의 상태입니다. 둘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살다가 넘어집니다. 넘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랑이 있긴 있었는데 깨진 사랑이 됩니다. 그러다가 회개를 합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사랑의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진정한 회개의 표는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그러다 그것이 완성이 됩니다. 언제 완성이 되냐면 신자의 죽음과 함께 완성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각기 죽는 지점에 가면 어떤 사람은 많이 성화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성화가 많이 안 된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의 그 순간에 모두의 성화를 주님이 완성 시키십니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럼 ‘뭐 하러 힘들게 성화를 하냐? 그냥 살지’ 그냥 살면 매우 고달픈 삶이 되므로 성화의 삶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영화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부활 하실 때 우리 모두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회개는 죄성을 물리치는 일격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일격’은 한방 때리는 것입니다. ‘회개’는 ‘메타노에오’라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메타’는 ‘뒤에, 후에, 다시’ 이런 뜻이고, ‘노에오’는 ‘생각하다’입니다. ‘생각하는데 뭔가 사물을 통찰하면서 깊이 생각함. 다시 생각한다.’ 원래 고전 그리스어에는 ‘회개하다’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생각이 전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독교권에서 ‘메타노에요’라는 단어를 ‘회개하다라’는 의미를 부여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통찰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회개한 사람의 결정적인 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사랑과 함께 아주 결정적인 놀라운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회개한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생각이 파편적인 생각이 아니라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우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바뀝니다. 신이 존재할까? 없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확실히 ‘하나님은 존재 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그 하나님의 존재를 놓고 이제 그 존재의 빛 아래서 모든 것들이 규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리고 ‘이세상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의 의미는 뭔가?’ 이런 것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히 바뀐 생각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처음에서부터 사상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깨닫는 순간 모든 가치관이 바뀝니다. 이 회개는 결국 죄를 슬퍼하는 것과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자기 깨어짐을 당연히 동반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 깨어짐에서 배웠지만 결국은 그것은 무엇에 대한 깨어짐입니까? 첫째는 죄에 대한 사랑이 깨지는 것이고 그다음에 자기 의가 깨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은 자기 사랑입니다. 그릇 된 자기 사랑 혹은 여기서 말한 대로 부패한 자기사랑이 깨지는 것이고 그릇 된 자기 사랑이 재편 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질서를 세우다가 하나님을 깨닫고 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는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당연히 이렇게 회개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때에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발견하고 그 죄에 대해서 자신이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무력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하나님이 무엇하나도 그냥 넘어가시는 법이 없는 엄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피조물과 창조주의 무한한 격차를 느끼는데 모든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결국은 우리 자신의 죄를 버리고 자신의 나악함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1-2. 쇄신이란 무엇이며, 신자가 날마다 쇄신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쇄신한다.’ ‘전적으로 새로워진다.’ 는 뜻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레노바티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지혜 속에 있는 것인데, 불신앙의 상태에서 불으심이 있었지만 이 부르심은 유효하지 않았고,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이 부름심이 유효하게 이 사람 마음속에 역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회개와 신앙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사람이 결국은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지게 되면 하나님은 이 사람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어떤 식으로든지 이 사람을 쇄신 시키십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영적인 회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인도하시지만 말씀으로 그 사람이 영향 받지 않을 때 때로는 삶의 질서를 움직여 그 사람의 마음이 가난하게 하나님을 붙들도록 만드셔서 하나님이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가지고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다시 이 회개와 신앙이 다시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회개와 신앙이 즉 회심이 반복되면서 그 사람이 죄로 물들고 어두웠던 이 마음이 완전히 새로워 져서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게 해 주시는 데 놀라운 것은 인간에게는 항상 누군가가 잘못하면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입견이 맞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진실하게 회개하면 언제나 그를 다시 살아 갈 수 있도록 쇄신 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영혼과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쇄신의 은혜입니다. 그 쇄신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때 미끄러진 사람들이 주님이 항상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① 영혼의 쇄신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쇄신이 가져오는 제일 큰 효과는 감각의 회복입니다. 무슨 감각이냐 하면 이것은 육체적 감각이 있고, 신령적 감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거듭날 때 신령한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은혜에서 미끄러지면 둔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막 맛있게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다 가도 몸이 병이 들면 음식도 맛이 없고 어디 가고 싶은 욕망도 없고 모든 욕망들이 퇴화 되듯이 마찬가지로 영혼이 건강을 잃어버리면 이런 신령적 감각들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것을 회복 시켜 주는 것은 사죄, 하나님의 forgiveness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각 그다음에 사랑, 그 다음에 글로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켜 주실 때에 인간은 사죄 감각을 느끼면서 자신이 지은 죄의 크기와 용서의 크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각이 생기면서 속되고 세속적인 것에서 찾던 만족을 하나님께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에 대한 감각이 들어오면서 이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잠시 지나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며 참된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쇄신을 회복하게 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렇게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쇄신되면 두 가지를 회복하는데 순결을 회복하게 하시고, 사랑의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순결과 그다음에 사랑입니다. 이 순결이 정결해 지는 것이 예전에 있는 그릇된 것을 내 보내는 것이라면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다시 사랑해서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시는 것이 쇄신이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하나님이 쇄신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이 다시 삼위하나님과의 풍성한 교통 속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셔서 결국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쇄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될 바는 이렇게 하나님이 쇄신해 주시면 다시 순결해 지고 그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들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쇄신을 주시는 목적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잘 보관하는 상자와 같은 것 입니다. 집어넣어서 보관을 하는 것 입니다.
② 영혼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쇄신과 영혼의 아름다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쇄신을 통해서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이 원래 주신 그 기능으로 돌아가는 것 입니다. 그게 아름다움입니다. 그럼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똑같은 기능의 차이가 전혀 없는데도 모양이 새롭다는 이유 때문에 바꾸는 물건들이 많습니다.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냉장고도 새로운 디자인이라 바꾸고 혹은 핸드폰도 한 2년 지나면 일부러 잃어버리기를 바라거나 고장 나길 희망하면서 만지작거립니다. 바꿀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역할을 잘하고 주위에 있는 사물하고 어울릴 때 그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소비자의 사랑을 받는 것 입니다. 자동차나 TV 자전제품의 기술은 거의 끝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서 디자인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오면서 잠깐 보니 핸드폰 두께가 7미리 밖에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벽돌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제는 7미리 밖에 안 되니까 좀 더 지나면 접어서 수첩사이에 명함처럼 집어넣을 수 있는 핸드폰도 나올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 하셨을 때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원래 영혼에 기대하셨던 바대로 기능을 하면서 그 영혼이 인간을 제대로 지도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상태가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늙지도 않고, 섞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망가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다릅니다. 예뻤던 얼굴이 나이 들면 죽음의 기운이 들어와서 석음석음 해 집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음을 쇄신과 함께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을 닮아 갔지만. 쇄신 할 때 인간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이렇게 순항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은 쇄신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아름다움에 대한 또 다른 정의를 애기 한다면 아름다움의 두 요소입니다. 개별적인 사물의 완전성과 질서의 완전성입니다. 사물하나하나가 원래의 그것의 가장 가까운 것이 완전성이라면 보편적인 질서에서 완전성은 다른 것들과의 어울림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의 또 다른 정의를 이 책에서는 지순의 사랑이라고 봅니다. 영혼이 아름다웠을 때 그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라 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이 아닌 피조물들을 선의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만하게 차오르는 지순의 사랑으로서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시면 그 사랑이 충만하게 차오름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은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의 완전한 모본이기 때문입니다.
1-3.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발견함으로써 얻게 되는 변화는 무엇이며, 그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해 싸워야 할 두 가지 어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쇄신을 인간에게 주실 때 그 때에 하나님은 이런 쇄신을 통해서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십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은 사랑은 사실은 사랑 때문에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반대 되는 것 때문에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인간에게 용서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굉장히 신비스럽잖습니까? 왜? 어두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빛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악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이 비로써 선을 경험하고,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만이 악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질서를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 것인지를 알고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이 질서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이시는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고 아주 경쟁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참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그 반대되는 당신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밑그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지어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도 당신이 받으실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은 결국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더 상세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그 통치의 질서 속에서 자신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이 쇄신을 통해서 주시는 지식입니다.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두 어둠이 있는데, 하나는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마음 안에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결국은 어둠 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 판단 착오를 일으킵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든지, 잠시 있을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행동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바로 이런 주관적 어두움 때문입니다. 객관적 어두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ㄴ다.. 이런 어두움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고 주관적인 어둠속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기사랑에 대해서 깨뜨려 짐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영생을 누리는 신자는 교회의 지체로서 두 가지 실천적인 삶을 요구받습니다.
2-1.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일을 위해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사랑 안에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지식이 필요하고 이 지식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모두 연결을 이루면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2-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가는 것과 하나님의 지헤를 깨닫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 5:20) 결국은 하나님의 지혜를 방해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잘 못 된 사랑이 이 지혜를 가로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마음 안에서 가장 잘 발휘 되는데 이런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 기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 적으로 알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 지혜는 더 풍성해 지는 것이니 결국은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교회가 신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신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신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오늘 우리가 배운 것들을 잘 소화해서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먹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018.01.28 구역장공과교육 5
2-1장. 삼위 하나님과 교회
녹취자: 허혜숙
1. 교회가 삼위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p.75)
‘모상’이라는 말을 ‘模相’ 이렇게 쓰기도 하는데 사전의 뜻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떠서 나타냄 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삼위 안에 있는 사랑을 똑같이 베껴서 나타낼 수 있는 피조물 안의 사랑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완벽한 원이 있는데 인간이 그리는 원은 완벽하지 않지만 그 원을 저 원의 모상이라고 부르듯이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을 쓰는 것입니다. 교회는 삼위 일체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을 본떠서 나타내야 하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삼위 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안의 사랑의 교통이 있는데 그것이 성도들 속에 나타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하나님 사랑의 모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을 확대하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겠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류전체를 사랑의 사회로 만들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교회 바깥에 까지 이것들이 확장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삼위 하나님은 교회의 설립에 함께 하십니다.
1) 인간을 구원함에 있어서 성부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 동기는 무엇입니까?(p.76-77)
하나님 안에서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이 피조세계에 투영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떨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전에도 한 번 설명을 드렸는데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자 성부 없이 성령 홀로 계시거나 성부를 빼놓고 성자와 성령이 모이시거나 성령 없이 성부와 성자가 모이시거나 그런 예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느 위를 떼어놓고 나머지 위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봐야 될 것이냐 하면 저는 가장 좋은 설명이 삼각형 설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꼭지 점이 성부 성자 성령 다 똑같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각 위는 떨어질 수 없지만 어떤 일, 피조물 특히 인간의 일을 행하실 때 어느 위격이 주로 관여하시는가? 이것은 차별이 있다 이 뜻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성부로서 사랑입니다. 축도할 때 이상한 것 못 느끼십니까? 왜 성부 하나님부터 시작을 해서 성자 성령으로 내려가지를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이 말이 먼저 나오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렇게 나옵니까? 이유는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보다 크시다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인식되는 순서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그러니까 우리들이 교회의 한 몸이 되어서 사랑으로 교통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경험의 순서를 따라서 사도가 그렇게 배열을 한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성부는 구원하시는 분인데 사랑이 바로 이 성부의 피조물을 향한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성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사랑하심으로 사랑이시지만 성부 하나님은 이 모든 신성의 원천으로서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구원 계획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종말에까지 많은 사람들을 중생하여 구원받게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수여적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우리가 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여적 원인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우리가 받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랑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그 사랑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의 마음속에 그 사랑이 주어지고 이 성도들이 서로 연합함으로써 사랑의 일치를 이루게 되는데 이렇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고 이 사랑을 세상을 향해 확장해 나가는 것이 결국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이고 성부 하나님은 사랑, 그리고 그것은 수여적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성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p.78-79)
자, 성자는 ‘희생하시는 성자,’ 그래서 ‘은혜’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은혜와”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구원계획을 세우십니다. 이 구원계획을 세우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랬잖습니까? 그것이 수여적 원인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하면서 십자가로 구속을 실행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희생하시는 성자의 은혜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공로적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공로를 지불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수여적 원인, 외우기 어려우면 하나님 아버지가 주셨으니까 받는다, 그래서 수여적 원인, 두 번째 성자 하나님의 공로적 원인, 그가 우리를 대신해 희생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공로적 원인입니다. 이것이 용어가 한 번 이해하고 외우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해 놓으면 말하고 생각하는데 너무 빠릅니다. 여러분, 버스를 우리말로 한 번 풀어보십시오. 크고 쇠로 만들고 여러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 있는 다자를 위한 교통수단으로써 하면서 두 줄 세 줄로 써야 버스가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버스’라고 생각하고 외워두면 ‘버스’라는 말로 모두 통하게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공로적 원인이다.
3)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어떻게 나타납니까?(p.79-80)
어떻게 나타날까요? 믿게 하시는 성령, 그러니까 뭡니까? ‘교통’입니다. 그렇게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 적용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시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속을 실행하십니다. 그 실행한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리스도께서 실행한 것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용하셔서 즉 믿어지게 하셔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사랑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과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과 성령의 적용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상하네요? 구약에서는 아직 그리스도도 없고 성령도 강림하셨을 때에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오실 그리스도를 제사나 율법을 통해 믿으면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처럼 이렇게 충만한 성령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은 나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그렇게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구약시대에는 그림이었고 신약시대에는 그 그림 밑에 달린 해설이고 성령이 오심으로서 그것이 동영상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세 가지 원인을 다 발견하게 됩니다. 축도를 생각하면서 한 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를 앞으로 내 보내보면 ‘하나님의 사랑’ 수여적 원인, ‘그리스도의 은혜’ 공로적 원인, ‘성령의 교통’ 유효적 원인, 무엇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있어서, 이것을 통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성령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하늘의 자원 즉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 은 사경회 때 무엇이라고 설명을 했습니까? 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의미를 찾아서 살아가기 위한 힘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로서 하나님이 주신 주체성을 가지고 의미를 찾아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벌면서 버는 대로 그것으로 쾌락을 즐기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은 생명이 없어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러나 불의를 거절하고 대의를 위해서 기꺼이 고통을 받고 옳은 일을 하며 불의한 사람과 싸우고 진리를 명백히 밝히기 위해 거짓과 투쟁하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으면서 그것을 따라 사는 데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육체의 생명과는 다른 영혼과 정신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뭐냐 하면 타자와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명과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움직여서 생명은 있으나 사랑이 없다든지 사랑은 있으나 생명이 없다든지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만큼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3. 삼위 하나님은 교회의 설립 후에도 함께 하십니다.
1) 이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파괴하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교회가 영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p.81-82)
자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고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하실 때 당신의 의도대로 정확히 세상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매우 좋았더라”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인류를 그렇게 해서 만드셨는데 인간이 타락합니다.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내버려두면 창조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구속을 실행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 망가진 인간을 다시 세워서 창조의 목적을 알고 그 다음에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성과 의지를 주셔서 가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창조 목적을 떠난 인류를 다시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곳이고 사실 교회가 없으면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교회 자체의 건물이나 모임 때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하나님이 이렇게 교회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신적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꺾을 사람이 없고 교회는 안전하고 영원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머리되심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p.83-84)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때가 언제인가 하면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신 후입니다. 원래 ‘주’ 라는 호칭은 여호와 하나님께만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이 여호와에 대한 명칭이 그리스도에게도 적용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온 교회를 다스릴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우주의 통치주가 되셔서 교회뿐만 아니라 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이것은 우주적인 주가 되는 것이고 이것은 교회의 주가 되시는 것인데 교회의 주되심은 우주적인 주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 유기체적 생명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그 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모두에게 참여하게 해 주시는 원천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핏줄처럼 얽혀서 그것이 우리가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이 사람이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이들이 느끼는 생명의 정도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영혼의 침체와 회복, 성령의 충만함과 영혼의 쇠약함 같은 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유기체적 통치의 머리되심’ 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통치입니다. 그래서 아까 얘기했듯이 교회의 통치자가 되시고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잘 보십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엡 1:23)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충만’은 완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만물을 완성하시는 이의 완성이시니라”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는 그의 몸인데 그의 몸인 교회 안에서 그의 몸이 교회인데 그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완성,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시고 유기체적으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주셔서 교회를 통치하시고 또 말씀으로 이들을 통치하셔서 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나의 그리스도 아래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통일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데 그 통치는 나중에 온 우주를 향해 확장되어 갑니다.
3) 교회의 설립 이후 교회 안에서 성령의 사역은 어떻게 나타납니까?(p.84-85)
그 교회가 설립 된 다음에는 성령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의 교회 안에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위로를 주십니다. 이 위로의 힘으로 성도들은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을 따라서 교회의 한 지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천지창조 목적은 무엇이며, 그것과 교회는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p.85-87)
아까 설명하고 반복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창조의 목적을 떠납니다. 흐려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의도 속에는 여전히 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구속을 실행하시고 교회를 설립하시고 인류를 하나의 십자가 사랑으로 묶으십니다. 그것은 사랑의 사회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모든 세계를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이 피조세계를 보면서 인간 사회를 보면서 ‘아,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구나,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것을 발견하게 해 주는 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2.4. 구역장공과교육6)
2-2장 교회생활, 사랑 안에서 행함
녹취자 : 허혜숙
1.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은 어떻게 다릅니까?(92)
육체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의학자들도 정확하게 정의(definition)를 잘 못 내리지만 육체에서 생명의 기운이 완전하게 소멸된 상태,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 기운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면 인간은 소생을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폐소생술 같은 것을 하는 것은 아직 생명의 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에 충격을 주어서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성경적인 설명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늙고 병들고 마지막에는 종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어떤 상태에서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결국 죽음의 의미가 육체가 죽었다는 의미와 영혼이 죽었다는 의미는 다른 것입니다.
(예화) 어떤 새댁이 시집을 갔는데 배추로 김치를 담갔습니다. 그런데 깜박 잊고 절이지를 않고 김치를 담갔습니다. 남편이 밥을 먹다가 “배추가 살아있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살아있다’라는 말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동사나 개사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영생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렇게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들이 흔히 일상생활에서 쓰는 ‘응, 내가 알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기노스코’라는 단어인데 여러 번 말씀 드렸듯이 이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나누어지지 않는 인간의 총체적인 경험으로서의 앎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이 ‘앎’이라는 단어가 기가 막힌 단어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우리말이 너무 신기합니다. ‘지식’ 하면 이 ‘앎’하고 일치하지 않습니다. ‘앎’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안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가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니라” 할 때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향해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그런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여자가 남자에게 눈을 뜨고 남자가 아내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기 때문에 지식과 사랑 이런 것들이 구별되지 않은 총체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2.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1) 신자가 지순의 사랑을 갖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 봅시다(93)
지순이라는 말은 끝 至자 순결할 純, 더 이상 순결할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를 옮긴 것이 이것입니다. 인간이 무능함을 경험합니다. 무능하다는 것은 지적인 무능, 의지적인 무능입니다. 알 수가 없고 두 번째는 알아도 그렇게 살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혼자 살 수 없는 비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의문투성이 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가 살고 싶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도 자기사랑의 발로입니다. 살자고 믿는 것이지 예수를 위해서 죽으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금방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도를 많은 것들이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뚫고 나갑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처럼 이상한 종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논란이 있지만 저는 이 사람이 맨 처음에 도저히 자기가 살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것은 결국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자기사랑입니다. 에로스는 꼭 남녀 간의 사랑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희랍어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 신의 사랑은 ‘아가페’,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스톨게’, 형제간의 사랑은 ‘필리아’, 이성간의 사랑은 ‘에로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이 에로스의 사랑이 신 안에서 통합을 이룹니다.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제외한 모든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자기를 중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랑으로 나아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가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람이 사랑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지순의 사랑을 소유한 신자에게 나타난 사랑의 변화는 무엇입니까?(93)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까리따스의 정의는 아가페 사랑에 감화를 받아서 주어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 까리따스의 효과는 그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는데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무관심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갖습니다. 관심을 갖는데 그것이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어서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을 위해서 언제든지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 자체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 가난 자체가 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물질에 치우쳐서 그 물질을 사랑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수히 경계를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집착을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재물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효과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끝없이 즐거워하고 그 분께 자신을 합치시키려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을 가져다줍니다. 어떻게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신자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온 인간을, 인류를.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계를 선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동물에 대한 무자비한 학대, 자연에 대한 파괴, 일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오는 것들, 미식을 위해서 동물들에게 한없는 고통을 가하는 것,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들입니다.
결국 까리따스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교회 안에만 묶이는 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확장되어 나아가야 할 사랑입니다.
전국시대에 묵자(墨子)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겸해설’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으로 살자’ 이 사람은 원래 공자를 공부하던 사람이었는데 공자를 공부하다가 깊은 회의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철학이 수많은 나라와 인간들을 분리시킨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철학에 깊은 회의를 품고 새로운 이론을 창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철학입니다. 제가 중국의 철학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동북아에서 나타난 사상가들 중에서 어거스틴의 사상이론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묵자입니다. 공자의 이론은 부모에게 잘 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친구들 간에 신의를 지키고 이런 것들입니다. 묵자는 그것들 때문에 사회가 망가진다고 본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계의 불행은 사랑이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기 때문에 세상이 불행해 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가족 밖의 사람이 자기 가족을 조금만 해롭게 해도 적대관계에 서게 됩니다. 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절대주의로 가니까 조금만 왕과 거스르는 사람이 나오면 역적으로 몰아서 능지처참을 하고 없애버려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인’의 사회가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묵자의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내 새끼 남의 새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는 ‘인’이 실현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의견이 너무 이상주의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완벽하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정치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수레를 고치고 기름칠을 하는 우리로 말하자면 카센터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홀로 앉아서 철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유아교육에서 커다란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엄마아빠가 사랑을 많이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도 하나 둘밖에 안 낳아서 ‘내 새끼 내 새끼’ 하고 감싸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더 행복한 것이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게 됩니다. 그렇다보니 자기에게 잘 해준 사람 이외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대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교육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험으로 나오는 것이 여러 집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묶어놓고 모든 부모들이 같은 자식으로 생각을 하고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상당히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단순히 아파트 평수의 크기대로 아이들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커뮤니티라고 하는 것은 삶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이상적입니다. 저는 교인들이 모여 사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뀝니다. 타운하우스 같은 것을 만들어서 연립주택이나 아파트 같은 것을 만들어서 백 가정 정도의 교인들이 모여서 살면서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한층 정도를 넓게 비어서 공동공간으로 만들고 온 새끼들을 자기 새끼처럼 생각하면서 돌보면서 양육하는 방식이 상당히 기독교식 교육에도 성공적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주일 날 달랑 와서 배우는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범주의 새로운 이론입니다.
3) 신자가 교회 밖의 이웃을 사랑하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94-96)
대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신앙이 약하면 자매를 만나도 얼굴이 너무 예쁘면 불신자라도 고려를 하는 것이 남자의 심정입니다.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가 상당히 성공을 한 사람이면 데리고 살다보면 회심하고 새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유사한 케이스를 찾으면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목적애입니다.
목적애는 결국 나에게 좋은 것이 돌아오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애애는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 그 사랑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동기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돌아 갈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사람에게로, 사람에게로, 사람에게로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지 사람에게로 와서 다시 그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그런 사랑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이 모든 교회와 인류에 대한 질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을 발견한 것이 생애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날 기독교의 가장 큰 비극이 사랑에 대한 오해라고 본 것입니다. 4년 전에 도올 김용옥씨가 책을 한 권 썼는데 기독교에 일갈을 날린 책입니다. 제목이 도전적인데 『사랑하지 말자』였습니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어떻게 잘못 전파를 했는지 창가에 서서 한 권을 다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제가 내린 결론은 ‘아, 이 사람이 정말 모르는구나.’ 기독교가 이야기한 사랑을 이 사람은 기독교인을 통해서 듣고 본 본인 이야기로만 사랑을 규정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뭔가 이론을 연구할 때에는 기독교의 고전 원판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오해되고 miss reading 된 그 개념 말고 원천에 있는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비판할 때 자기 말과 글로 비판을 해야지 ‘어떤 사람이 당신한테 뭐라고 하더라.’ 그렇게 비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부끄러웠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는 방식으로 사랑을 했기 때문에 그런 사랑의 개념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잘못 된 개념을 심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랑의 개념은 욱하고 몰리고 미국 떠받들고 통일 반대하고 독재를 찬성하고 불의를 감싸고 이런 것들로 신앙화 하는 사랑으로 알려 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실제로 우리 속에 있어 왔던 부끄러운 역사의 한 토막입니다. 이런 것들을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이론을 다시 정립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류의 본성적인 연합, 피터마트 포마글리의 연합 세 가지가 지난번에 나왔습니다. 표현은 각각 다르지만 본성적인 연합이 있고 칭의의 연합이 있고 성화의 연합이 있습니다. 본성적인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가지고 계셔서 그 인성과 인류가 가지고 있는 죄에 물들지 않은 본래의 인성이 하나 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머리이십니다.
어거스틴은 교회를 매우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으로 확산되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믿음과 공존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지상에 있는 교회만이 아니라 보편교회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세계가 우리처럼 쪼그라든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동시에 인류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저 멀리 이교도들이 있었지만 그 이교도들에 대한 사랑도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그 사랑이 마지막에는 모든 인류를 포괄하는 사랑으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선교를 사랑의 확장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를 8권 8장 12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으리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으리요”라고 똑같은 이야기를 뒤집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과 정의를 연합시키는 이론이 되는 것입니다.
4) 신자는 다른 신자들을 특별히 더욱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97-100)
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98)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모든 믿는 사람들을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서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마치 삼위일체로서 당신이 성령 성부와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신자의 연합에는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데 이 원리는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그 연합은 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취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실제적인 연합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트의 색깔들이 다 다릅니다. 색깔이 있는데 왼쪽 색은 맛이 많이 간 사람이고 이 사람은 맛이 갈려고 하는 사람이고 빨간색 하트는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한 상태인 사람입니다. 1, 2, 3, 4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지 마음속에 도장을 찍어보십시오. 연합된 지체를 사랑함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다음에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가시적인 교회나 보이는 성도들에게만 집중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 사랑이 미끄러지고 실족한 비참한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은 마음의 병이 있어서 그런지 TV를 볼 때 어떤 것을 보면서 분노하지 말아야 됩니다. 세상의 보이는 불행의 현상만 보고 ‘저 자식 죽여 버려야지, 깔아 뭉개버려야지, 폭파시켜 버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뿌리가 어디에 있고 그들이 그 뿌리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② 신자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임이 이유는 무엇입니까?(100)
좁은 의미의 형상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불신자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타락해서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그러나 일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분도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타락하면 존엄성을 상실한다.’, ‘짐승과 구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런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언제가 좁은 의미의 형상을 못 가졌던 사람이었는데 구속받고 가졌습니다. 아무리 불신자라도 이교도라도 희대의 살인마라도 그는 여전히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대로 갚아줘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칭의,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사랑과 동질의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사랑과 일치를 이룹니다. 밸런스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과 형제사랑은 나뉘지를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신자는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을 교회의 존재 목적과 합치시킵니다.
1) 신자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교회의 존재 목적에 합치시키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101)
첫째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인생의 목적을 하나로 합치시키는 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가 예수쟁이가 되려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려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인간이 되는 과정입니다. 참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는 참 인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신자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보이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사랑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게 되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보시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하시던 그 사랑이 바로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크면 희미한 형상을 또렷이 보는데 사람이 사랑이 없으면 뚜렷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형제인데도 형상이 없는 사람처럼 짐승처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황폐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신자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지순의 사랑 안에서 교회의 그것이 합치시키는 과정을 설명해 봅시다. (102-103)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경험하면 지순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뜻에 인생의 목적을 합치시키는데 그것이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이 사람들에게 사랑이 확장되어 나가서 세상 사람들조차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선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온전한 회복을 위해 기여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2.11. 구역장교육7)
2-3장 사랑의 아픔: 불완전하기에 아름다운
녹취자 : 강정아
1. 지상의 교회가 원리적인 측면에서 완전한 이유와 실제적인 측면에서 불완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10)
원리적인 측면에서 완전하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연합인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으로 속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속죄의 성질 자체가 됐다 안됐다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정된 것이고 원리적인 측면에서 완전한 연합을 이룹니다. 요즘에 와서 이런 것들을 흔들려고 하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완전한 신적기관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당신 자신의 기관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원리적인 측면에서 그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그래서 원리적인 측면에서 완전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점에서 흔들리지 않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불완전한데 먼저 선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을 종료하실 때에는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까 미리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의 숫자를 가지고 144,000을 가르치는데 사실은 12*12라고 하는 것은 144,000의 144인데 12의 완전수 10을 곱하고 또 12의 완전수 10을 곱해서 144,000이 되는데 이것은 상징적인 충만한 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구원 얻고 교회가 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까지는 그 충만한 수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선교적인 측면에서 불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목양적인 측면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하더라도 모두 믿음의 정도가 다르고 성숙의 정도가 다르며 또 사람들이 미끄러지기도 하는 등 목양적인 측면에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합니다. 그 불완전함 때문에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으니. 그것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그 문제들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은 불완전한 교회를 완전하게 하십니다.
1) 교회의 온전함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112)
이런 불완전함의 세 가지 원인은 첫째,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당장 내일 회사로 출근해서 세상 속에서 삽니다. 그곳은 우리가 생각하고 통하는 윤리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기준이 다릅니다. 그런 속에서 갈등하고 살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 불완전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어느 정도는 불완전함을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있고 성화를 온전히 이루지 못한 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지상 교회는 역시 불완전합니다. 신자 자신이 구원은 받았지만 온전히 주인이 되려하는 신자의 불완전함 때문에 결국 교회는 불완전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너무 큰 관용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만 교회가 이런 문제들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것들을 고쳐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저도 면역력이 떨어져서 바이러스성으로 문제가 생겨서 얼굴에 이상이 생겼는데 상처로 인해 몸에 이상이 오면 그것은 매우 나쁜 것이지만 정성껏 고쳐서 몸을 온전하게 하듯이 교회도 그런 불완전함을 고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화란 무엇일까요? 죄와 불결로부터 신자의 전 본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결국 성화란 신자 안에 있는 죄와 불결을 제거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전 본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것이 제거되면 결국은 거룩하게 하시는 것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도적 주체는 성령이시고, 믿음과 순종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이 교회의 온전함입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총합이 결국은 개개인의 성화의 총합이고 이는 교회를 완전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2) 교회가 자신을 완전케 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습니까?(113-114)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입니다. 개인의 성화라는 것이 공동체적인 측면하고 나뉠 수 없지만 구분하자면 개인의 성화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정결하게 되는 것이고 교회적 지평으로 깔아놓고 보면 그것은 수많은 관계와 동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함께 연결이 되면서 일치된 섬김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하면 잘 할수록 교회는 보다 더 온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전하다’라고 할 때 그것은 두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우선 정신과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그 올바른 생각과 마음을 자신의 행동으로 원하는 것을 몸으로 움직여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교회의 온전함은 신자 개개인의 성화의 정도와 교회가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섬길 수 있을 때 더욱 높아집니다. 인간과 영혼과 육체, 교회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정신이 깃드는 것이 성화라면, 그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듯이 교회가 모든 성도들의 성화를 통해 온전한 교회가 되고, 그 성화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수립된 공동체입니다. 이상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에 가득해져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 마지막의 비전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온 인류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이 땅의 교회에서 선취적으로 구현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중요한 의무 중에 하나는 이 예배의 기쁨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냥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생생한 기쁨이 있어야 압니다. 그런데 은혜가 없어 쓰러지는 사람이 나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사람들을 목양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전도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섬김을 통해 교회는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해본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영혼을 돌보고 목양해본 사람들만이 영혼의 가치를 알 수 있고,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해본 사람들만이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기적처럼 놀라운 일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은 교인들이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섬김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섬김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교회가 온전한 교회로 바뀌어가고 변화되어 갑니다. 영혼들을 목양하는 일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라 눈물과 고통, 아픔, 벗어버리고 싶은 말할 수 없는 속박감 등이 있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를 붙들어주는 역할들을 합니다.
3)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안에 두신 지향성은 교회를 온전하게 합니다.
➀ 목적인으로서 영혼의 지향성은 무엇이며 이것이 교회와 완전함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115-116)
➁ 완성인으로서 영혼의 지향성은 무엇이며, 이것이 교회와 완전함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116-117)
지향성이라는 것은 뭘까요? 가리킬 ‘지’, 향할 ‘향’ 성품 ‘성’, 영어로 propensity 혹은 inclination 으로도 불립니다. 어느 쪽으로 향하는 성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이런 지향성을 주십니다. 그 지향성은 본래적인 지향성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사랑의 나라이고 그곳은 하나님이 있는 나라입니다. 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플라톤은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고 철학자들의 견해인데 기독교들과 비교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승 저편에 영혼들이 있고 영혼이 육체를 만나기 위해서 레테(Lethe)의 강을 건넙니다. 영혼들이 헤엄을 쳐서 건너는 레테의 강은 망각의 강입니다. 그 강을 건너서 육체와 결합을 해서 사람이 된다는 그런 전설적인 철학 이론이 있습니다. 영혼들이 헤엄을 치는데 이 흐르는 물이 망각의 물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물을 많이 먹고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입에 물을 한 방울도 넣지 않고 헤엄을 칩니다. 물을 많이 먹은 사람은 고향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 거룩함 등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극단적으로 그런 기억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조폭 같은 사람들입니다. 막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미친 듯이 사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엊그제 tv에서 역대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중국에 나오는 한 스타가 동시에 20명과 연애를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나중에 컴퓨터를 수리하러 갔다가 탄로가 났고 온통 난리가 나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런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마치 나방처럼 감각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덜 마신 사람은 그 때 기억이 생생하게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돈을 줘도 만족이 안 되고 잘 살아도 만족이 안 되고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되도 만족이 안 됩니다. 끊임없는 공허감을 느낍니다. 제가 아는 돈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 있는데 자기는 35세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싸게 나온 그랜저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키를 누르고 시동을 걸면서 ‘나보다 행복한 30대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랬지만 어느 한 순간 모든 것을 누리는 데에도 불구하고 공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사업이 망한 것도 아닌데 부부관계도 서로 사랑하고 모든 게 좋은데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레테의 물을 덜 마셔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그런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주셨고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거의 잃어버렸고 어떤 사람은 안 잃어버렸거나 덜 잃어버렸는데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미친 듯이 감각적인 것에 몰입하고 감각적인 것에 몰입하면서도 하나님을 못 잊는 그래서 불가해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을 찾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평생 사람들이 자기를 못 찾고 남으로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자신의 인생에 주체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이 삽니다. 얼마나 공허합니까?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완전함과 온전함의 차이는 영혼의 완전함은 정지된 상태이고 온전함은, completeness, wholeness 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행적 개념으로서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상태이고 개개인의 성화를 통해서 완전함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케 된 사람은 온전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목적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론입니다. 형상인, 질료인, 유효인, 목적인으로 나뉘는데 ‘인’이라는 것은 원인입니다. ‘형상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물질이 있기 전에 그렇게 되려고 하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빵가게에서 제빵사가 수많은 빵을 만드는데 토스트 빵을 만들 때 머릿속에 하나의 밀가루 반죽을 가지고 그런 걸 만들겠다는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밀가루 반죽이 팥빵이나 곰보빵이 안 되고 토스트용 식빵인 된 것입니다. ‘질료인’은 빵 반죽을 얘기하고 ‘유효인’은 실제로 그 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고 ‘목적인’은 무엇인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목적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성질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아는 지식을 주셨는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영혼의 지향성’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지만 죄 때문에 깨져서 기억이 희미해졌습니다. 기억이 희미해지니까 세계는 그대로 있는데 이 세계를 올바로 볼 수 있는 능력도 같이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유교, 불교 등에서 올바르게 행하려고 하는 요소들이 그 흔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교에서는 다 때려치우고 막 사는 사람보다는 유교사상대로 살면 세상에 덜 해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의명분을 위해서 살고 그런 것을 비판한 묵자의 예를 보면 그런 사상은 그런 사상대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창조 목적에 대한 인간의 영혼에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말처럼 모든 도덕적 논제는 종교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해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효도받기위해서? 그것은 정말 허접한 일을 하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효도를 할까요? 요즘 세상은 시집 장가가면 다 잊어버리고 해외로 이민가면 해외동포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안고 살아야합니까? 종교적이란 말입니다. 쪼가리, 쪼가리 흔적들이 창조목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가 이만큼이라도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은 당장 때려 내쫓으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종교적입니다. 왜 부패하면 안 될까요? 우리에게 해롭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에는 이익을 줍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결국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연 사물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선의로 대해야합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영혼의 지향성이 올바로 발휘되면서 인간과 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도 신학적으로 올바로 정리되면 그렇게 훼손하면서 살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매우 중요한 책임입니다. 자녀들에게도 환경에 대한 교육을 잘 시켜야합니다. 인간이 이 환경 때문에 엄청난 질병을 얻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약을 발견합니다. 죽음은 연장하는데 삶의 질은 계속 떨어지는 것입니다. 환경을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전일성은 전부가 하나인 성질입니다. 이것은 영혼이 영원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상태입니다. 영혼은 그런 상태를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움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성공하고 이래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쾌락, 탐욕 등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더욱 곤고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진리와 은혜를 주시면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고 성화되어 감으로써 영혼은 전일성을 갖게 되고 인간이 가장 행복한 것은 이 영혼이 영원 아닌 것들로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가 될 때 인간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3 . 하나님이 지상의 교회에 불완전함을 남겨놓으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 신자들은 교회의 불완전함을 봄으로써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118-119)
2) 신자가 교회의 완성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19-120)
3) 교회의 불완전함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20-121)
불완전한 사람들이 있고 완전한 사람이 있으면서 완전한 사람이 불완전한 사람을 보고 경험합니다. 불완전한 영혼은 우리에게 고통으로 경험이 됩니다. 그때에 이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런 불완전함이 신자를 온전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보편교회의 회원이 아닌 교인들을 보면서 예수 믿는 다고 교회 들어와 있지만 사실은 진정으로 거듭나서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속해있고 그들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하기 어려운 신자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보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 안에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했지만 미끄러진 신자들, 교회 안에 그런 모습이 똑같이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간이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런 아간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들을 정말 아골 골짜기에서 처단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다시 정결하게 하십니다. 마지막에 자신 안에 있는 불완전함을 깨닫게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4. 이중적인 면에서의 미완성으로 인해 지상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는 아픔이 동반됩니다. 이중적인 면에서의 미완성이란무엇이며 이때 신자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입니까?(121-122)
개인과 교회의 온전함에 대한 갈망은 그렇게 자기가 온전해지는 것이 행복하니까 교회도 그렇게 온전해질 때 행복하고 그 때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개인의 온전함에 대한 경험은 교회의 온전함에 대한 갈망으로, 하나님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불완전함을 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이유는 시험이 일어나고, 환란이 일어나고, 싸우고, 대들고,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결국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교회를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중적인 면에서 미완성으로 지상의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는 아픔이 동반되는데 이중적인 미완성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주체가 물론 주님이 주인이시지만 우리가 결단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불완전해서 사랑을 줘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은 이중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을 권면하고 목양하고 돌보고 전도함으로써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필용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 2. 11 구역장교육7)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Q&A
녹취자 : 장미연
학생이 공부를 할 때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은 그 학생의 자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학생들 질문의 수준은 선생님의 설명의 욕구의 수준을 결정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구역장 공부를 하며 내준 질문을 보면서 선생님으로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들이 질문한 내용들을 하나씩 알기 쉽게 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1번입니다. 삼위의 아름다움의 모상이 교회인데 현재 교회에서 그렇게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을까요?
우리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는 이 세상 어디엔가는 완벽한 교회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였던 초대 교회 조차도 완벽한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더 아름다운 교회는 분명히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어떤 교회들을 주님이 칭찬해주십니다. 그림을 보면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교회가 상처 난 부분이 있고 해도 그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면 사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보면서 다른 아름다운 부분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 추한 부분이 온전해지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까리따스의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질문 2번입니다. 평소에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께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잘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 속에 오신 구세주 이십니다. 그러면 사람의 몸을 입기 전에는 물론 하나님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신인 동시에 인간이신 그런 신인 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는 사람의 인격을 입고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분인데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시공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고 인간과 교통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충분히 사랑한다고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부이신 하나님은 크게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할 때 항상 둘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내용인데 잘 이해해 보십시오.
첫 째는 성경에 나온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신적인 본질로서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나눠진 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의 신적 본질이신 하나님 자신이 아버지로 표명이 됩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은바 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성령님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해석할 때 아들이신 성자가 성부이신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나 예배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은 성부, 성자, 성령 이런 식으로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나눠지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와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그 대상은 결코 위격으로 나뉘어져서는 안 되는 대상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표현이 나타내는 의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 우리 무리와 똑같이 일부가 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를 해라.” 그런데 그 속에는 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신 예수님 자신이 거기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또 이 기도를 가르치는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모두 포함된 그 삼위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경우는 아주 명백하게 성자가 아니고 성령이 아니신 하나님 아버지 즉, 삼위일체 안에서 3위인 성령이나 2위인 성자가 아닌 성부를 가리키는 적이 있습니다. 이때는 신성의 근원이신 성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4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할 때 그 아버지는 분명히 성자, 성령과 구별되는 제 1 위격으로서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기억할 포인트는 예배와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그것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할 때 예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성령님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성부여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때는 성부, 성자, 성령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부 하나님은 분명히 성자 하나님에게 또 사람들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사랑 자신입니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위격이라는 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가장 널리 채용했던 것이 소위 얘기하는 심리학적인 모델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사회학적 모델이라고도 하는데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그 자체 이것은 셋이 다른 것 같지만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그 자체가 한 사랑 안에 있는 것처럼 성부는 사랑하는 자, 성자는 사랑받는 자, 성령은 사랑 그 자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사랑 자체니까 성령을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을 사랑하라는 언어적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령 하나님을 우리들이 위격으로 보면서도 성부와 성자는 사랑의 대상이 되시고 삼위일체 전체는 사랑의 대상이 되셔도 성령 위격 하나가 사랑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서점에서 보면 “안녕하세요. 성령님”이라든지 이렇게 성령님과 대화하는 이런 것,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다만 성령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성령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 성령을 근심시켜드리는 것이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시켜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종종 그런 은유적 표현을 우리에게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질문 3번입니다. 약간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존재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두 가지 질서로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는 이미 드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할 때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시고 육체는 자연에 속한 것이고 영혼은 정신에 속한 것입니다. 똑같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자연의 질서를 따라서 자연 세계를 만드시고 그것은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한자에서 자연(nature)울 설명할 때의 자연입니다. 스스로 자 그러할 연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인간 몸 바깥에서 그런 것을 자연이라고 부르고 인간 몸 안에서 자연적으로 그러한 것을 본성이라고 부르는 게 동북아 철학에서 기본적인 사물관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또 하나의 질서는 도덕질서입니다. 그것은 자연세계는 스스로 의지가 없습니다. 자연세계를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덕적인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도덕 행위자들 특히 인간, 넓게 보면 마귀, 천사,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들어가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들을 도덕행위자로 만드셔서 도덕적인 결정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타락하고 난 다음에 그걸 제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올바른 도덕 질서로 돌아가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서들이 가장 아름답게 어울리는 상태가 하나님이 꿈꾸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상태입니다. 지금 있는 이 두 가지 기둥을 항상 머리에 넣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땅이 신음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땅이 저주를 받고 그러면서 자연의 질서도 깨지고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환경계의 이런 커다란 변화가 오면서 인간의 삶이 고통을 받아서 결국은 자연적 질서가 깨진 것만큼 인간의 육체의 생명과 눈에 보이는 세계가 위협을 받고 정신의 질서가 깨진 것만큼 인간이 마음으로 불행하게 되고 불행이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시면 도덕적 행위자들 인간을 비롯한 도덕적인 지성적 피조물들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있는데 존재의 질서입니다. 옆에 삼각형이 되어있는데 파란 것은 원래 우리가 볼 때 하나로 보이는 거라면 밑에 짙은 고동색부터 상처가 난 것처럼 보이잖습니까? 하나님이 볼 때 좀 더 가치 있는 사물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불평등할 수 있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죽어 가는데 나무를 몇 개 꺾으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할 때 그 나무도 생명이니까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게 한다든지 사람이 동물의 습격을 받을 때 몇 십 마리의 동물을 죽이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그것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물체니까 인간과 다를 게 없다고 만약에 동물을 죽이지 않을 그런 비이성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잖습니까? 이처럼 모든 사물들이 존재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중요도입니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하신 분이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겠지요. 그 다음에 인간 이하의 중요한 것들 질서가 지어져 있을 거 아닙니까? 기본적으로 볼 때 우리들이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들어오니까 여러 가지 많은 질서의 구분이 생겨나는 것이지만 예를 들어서 정상적으로 여러분들이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의 강아지가 화분에 끼어서 죽게 되었다면 여러분들은 화분의 식물을 버리겠습니까? 아니면 강아지를 살리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런 존재질서들이 쭉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점은 영원불변가치 이런 관점에서 이것들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자연세계들을 선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얘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독사가 물지 않고 양과 사자가 함께 풀밭에서 뛰노는 그런 화해의 광경이 펼쳐지지 양육강식의 광경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존재의 질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존재 질서를 뚜렷하게 나누면 하나님 그 다음에 인간, 사회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고 그 밑에 자연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로 사랑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 때문에 옆으로 사랑하고 자연의 모든 세계는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사랑을 가지고 선량한 관리자로서 의무를 다하며 선한 마음으로 돌보고 가꾸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분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묵자를 잠깐 말씀 드리면서 동북아 철학에서 『겸애설』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렇게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할 때 인간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관계가 가족, 부부, 내가 속한 작은 교회 심지어는 작은 구역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만남 속에서 우리들이 거기가 가장 먼저 우리가 사랑을 보일 수 있는 영역입니다. “가족들에게 마땅히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들보다 악하니.”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이 배타적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을 하면 내가 가족을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고 내 교회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다른 교회를 싫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합리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 사랑이 온 우주를 모두 휘 돌고 당신 자신 안으로 돌아와 당신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존재의 질서는 가치의 질서고 가치의 질서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덕이고 사랑의 질서를 어긋나는 것이 악이요 불의가 되고 그것 때문에 인간이 불행지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4번입니다. 영화된 이후 우리가 부활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우리의 몸이 새로운 몸을 입어서 영원히 멸하지 않는 몸이 되었을 때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성장하는가? 그 다음에 지상 생활에서의 신앙생활이 그것과 어떻게 관계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하자면 “천국에서도 성도의 사랑은 성장한다.”라고 봐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 동경 아니면 석경이었습니다.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희미한데 마지막에는 그의 형상으로 변화해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했고 다른 곳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얼굴을 마주대하고 보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더 놀랍게 드러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지식과 총명과 함께 자라나는 것이지 사랑 혼자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한 번에 우리에게 다 보여주시지도 않거니와 보여주셔도 인간이 그 지식의 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를 발견해서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무한히 계속 되어도 우리는 매일 아침 마다 새로운 지식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지금은 지식이 들어와도 죄와 정욕 이런 것들 때문에 그게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하지만 거기서는 새로운 지식과 총명의 개안이 바로 바로 사랑으로 이어지면서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모든 사람의 지식과 이해력이 똑같습니까?” 정확하게 우리가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려울 거 같지만 성경을 통해서 유추해 볼 때 하나님이 각 각 천국에서도 다른 영광을 이야기 하시는 것을 보고 달의 영광, 별의 영광, 해의 영광 이런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천국에서도 이런 지식의 크기는 다를 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서도 죄는 물론 없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크기는 각 각 다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군인이 전쟁을 하는데 말단 소총수부터 전투기를 몰고 공격을 하는 군인에까지 모든 사람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그런데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병과와 혹은 병과 안에서도 각 각 자기 맡은 일을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느냐는 능력의 차이가 나는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그렇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크고 작은 별들이 하늘에서 어울리며 반짝이고 빛나는 것처럼 그런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마지막 하나는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과 하늘나라의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데 이것도 사실 성경이 무엇인가를 똑 떨어지게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 없고 또 하나는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하늘나라에 가서 단 번에 얻는 그 지식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유치원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땅에서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주님을 더 많이 알았던 성도들은 하늘나라에서 훨씬 더 익숙하게 주님을 뵈옵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또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만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알아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더 격려가 되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물론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 땅에서 충분히 믿음으로 살면서 보상을 받지만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질문에 매우 즐거웠고 답을 하는 순간도 매우 즐거웠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2.25 구역장 교육 8)
3-1장 교회, 재창조의 씨앗
1. 삼위 하나님의 교통하는 아름다움은 창조세계 안 에 새겨졌습니다.
1) 하나님이 창조세계 안에 두신 현실적인 아름다움과 실현 가능한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131)
우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가 나오고 6일 째에 “매우 좋았더라”라고 나옵니다. 히브리말로 ‘매어드’라는 부사가 첨가가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도 보실 수 있는 분이고 시간을 초월해서도 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 되었을 때 그것밖에는 모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서 있으면 그 사람의 모습만 들어오는 것이지 30년 후에 어떻게 늙을 지도 우리가 한 번에 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요즘은 무슨 앱이 나왔다고 하는데 거기에 사진을 놓고 찍어서 30년 후 이렇게 하면 30년 후에 어떻게 얼굴이 변하는지 나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통계를 가지고 유추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 모습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세계가 참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름다움이 거기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증진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증진되는 아름다움까지 한 번에 보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부사 ‘매워드’, ‘매우’라는 부사가 붙은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 그림을 보면 알기 쉽게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현실적인 아름다움, 여기에서 현실적인 아름다움이란 창조당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창조당시의 아름다움을 보면 현실적인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현재적인 아름다움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투영된 아름다움인데 이것이 인간이 노동을 하고 섬기면 더 아름다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가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창조하셨을 때 모두가 참 아름다웠다고 했을 때 마지막으로 하와가 창조됩니다. 하와가 혼인을 통해서 둘이 함께 사회를 만들게 됩니다. 그 때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실현가능한 아름다움이 있는데 인간의 섬김과 노동을 통해서 아름다워지는 부분도 있고 자연적으로 아름다워지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새 종류도 더 많이 퍼졌을 것이고 끊임없이 그 종자들이 퍼져서 하나님이 종류별로 창조하셨는데 그 종류 안에서 분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종자는 하나님이 종류별로 창조하셨는데 종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개의 종류도 마티스도 있고 큰 개도 있듯이 다양한 종류가 많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그렇게 더 아름다워져 갔다고 봅니다.
2) 상호연관이란 무엇이며, 모든 만물이 상호연관을 누리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132-133)
상호연관이란 서로 연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연관이 있다는 것은 동물들이 낮 시간에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생성해 냅니다. 그런데 식물들은 그 이산화탄소가 없으면 광합성 작용이 안 됩니다. 그것을 먹고 산소를 뱉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물들에게는 그 산소가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만물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어느 작용이나 이런 것들이 다른 것들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는데 하나님이 맨 처음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는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인간이 일으키는 공해에 의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되고 나서 그 긴 세월동안 소비하고 뭔가 자연에 손해를 끼쳤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합쳐도 지난 100년 동안 자연에 끼친 손해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그런 환경문제가 엄청나게 심각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진단장비가 발달하지는 않아서 암이 발견되지는 않았겠지만 요즘처럼 이렇게 일반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암이 보편화되고 일반화 되었습니다. 다행히 암을 치료하는 것도 발달이 되어서 암에 걸려도 ‘이제 건강에 신경을 써야겠구나.’ 이런 수준까지 왔지만 여전히 이것은 환경문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결혼을 해도 아이가 안 생기는 문제도 생기는데 이런 것들이 환경호르몬 같은 것들이 인체를 결함시키면서 많은 문제들이 오고갑니다. 탐욕으로 자연을 낭비하고 엄청난 대가를 돌려받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상호연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창세기 1장1절에 나오는데 2절에서 그 창조된 상태를 혼동과 공허로 묘사하는데 그것을 질료라고 보는 것입니다. 질료라고 하는 것, 원재료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들로 제2의 창조를 하심으로서 이런 모든 자연만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육체까지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질료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혼은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는 동일하게 질료로 창조 된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운명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한 쪽이 무너지게 되면 다른 한쪽이 반드시 해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환경에 대한 생각을 강조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연적인 연관인데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사랑의 교통을 하면서 삼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합니다. 인간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랑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인정을 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지는데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창조됩니다. 하나님의 일부는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은 직접 창조하신 것입니다. 어느 시점이냐는 것은 우리들이 쉽게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과는 달리 질료에 의해 창조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는데 육체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자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TV프로에 보면 암에 걸려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의사가 두세 달 밖에 안 남았으니까 집에 가서 편히 쉬라고 진통제나 줍니다. 그러면 아무 희망이 없으니까 포기하고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산 속에 들어간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죽었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TV에 나올 수가 없고 살아있는 사람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연적인 치유로 고침을 받습니다. 그런 것들이 인간의 몸이 얼마나 자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몸이 공해에 찌든 음식을 먹고 공해 속에서 살고 날이 어두워도 잠을 안자고 불을 밝히고 일을 하는 모습이 마치 양계장에서 닭이 알을 많이 낳으라고 밤새도록 불을 켜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의 많은 범죄의 50%가 밤 9시 이후에 벌어집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자연들만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도 파괴시킵니다. 당연히 인간의 육체가 자연 속에서 살면 살수록 인간의 몸이 안녕을 누리는 것입니다. TV에 보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는데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는 참 좋겠다는 생각과 거기에서 자연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TV도 없고 신문도 안 오고 심지어 핸드폰도 안 가지고 사니까 얼마나 평화롭겠습니까? 물론 부지런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홀로 거기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저것이 인생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혼자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사는 것이 인생일 텐데 말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사람이 서로 기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몇 달은 저렇게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살아가지만 의식적으로 자연친화적이 되려고 애를 쓰고 우리는 휴지 하나라도 덜 버리고 쓰레기 하나라도 덜 버리면서 자연에 이익을 끼치며 선대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3) 인간이 마땅히 사랑하고 선대해야 할 대상을 나누어 설명해 봅시다.(133-136)
사랑해야 할 대상과 선대 혹은 선의로 대해야 할 대상으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예쁜 강아지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까? 아닙니까? 그냥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방식이 보신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영국에서인가 법제화 된 문제인데 살아있는 랍스터를 철판위에 올려놓거나 그릴 위에 올려놓으면 처벌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랍스터만 그렇겠습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해당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해물탕을 보면 기겁을 합니다. 전복도 꿈틀거리고 게도 팔딱거리고 낙지도 움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끓여야지만 제대로 된 매운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처벌을 받습니다. 저는 문화적으로 익숙해져서 매운탕을 보면서 혐오를 느끼거나 하지 않고 괜찮은데 먹는 것들 중 소도 행복하게 키워서 순식간에 고통을 받지 않고 죽게 해서 고기를 섭취하고 랍스타 뿐만 아니라 낙지도 어느 정도 동물 복지 권을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살아있는데 꼭 펄펄 끓는 물에 데쳐서 먹어야 할 당위성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를 선대하는 것입니다. 우주 개발을 한답시고 사람들이 막 쏘아서 수만 개의 우주 쓰레기들이 돌아다닙니다. 5mm정도만 되는 쓰레기에 맞아도 우주선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인간은 작은 먼지 하나에 부딪쳐도 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를 두 시간 반 만에 한 바퀴를 도는 속도니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사실은 그것도 우주를 선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인간이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생산해내고 공해를 일으키는 생활의 방식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수소차입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산소를 내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효율성 있게 이용할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바람직합니까? 어쨌든 그런 것들은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칭찬할만한 것입니다. 산업의 발전을 하면서 사회가 굴러갈 때에 기독교인들이 자본의 효율성을 생각하면서 경쟁에서 이겨야 되겠지만 동시에 환경의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배려하면서 살아가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할 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가서 아마존의 밀림이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훼손이 되어서 거기에서 생산되는 산소량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전 세계가 돈을 걷어서 그곳을 개발하지 못하도록 보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가 땅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지구 전체의 산소 공급을 위해서 당신이 집을 짓지 말라고 하면 우리가 동의를 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보상을 하면서 사용료를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구에 있는 자원을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주님이 오시지 않겠느냐고 한다면 주님이 내일 오셔도 그 일은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계가 아름다워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다 설명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면서‘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온 인류가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4) 죄가 창조세계에 미친 결과를 교통하는 사랑의 깨어짐에 따라 설명해 봅시다.(135-136)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대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결국은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생명이 단절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저를 포함한 현대인들이 왜 이렇게 작은 일에 쉽게 화가 날까? 우리들도 현대의 풍조에 물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단순히 은혜가 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서 발끈하고 분노하고 참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차를 세우다가 주차에서 시비가 벌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현대인들이 결국은 인간에게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데는 엄청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입니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직까지도 자식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신학대학원 다닐 때 항상 청량리에서 스쿨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을 휠체어에 싣고 그 아줌마 오는 시간과 제 시간이 딱 맞았습니다. 그 아이가 5학년쯤 되었는데 정확하게 그 엄마와 아이를 2년 동안 매일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한테서 어떻게 하든지 내 아이와 함께 이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는 다부진 힘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엄마가 어려운 시련을 당해도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이 있는 한 잘못되지 않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식을 두고도 자살을 하거나 도망을 가거나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무한한 사랑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반은총 가운데 그 사랑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조금 힘들다고 자기 자식을 내팽개치고 가버린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랑을 안 하니까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도 우스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종말사상 같은 것들이 환경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큽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인데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자연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망가진 세계를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1) 하나님이 재창조를 위해 첫 번째로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137)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일이 재창조를 위한 첫 번째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삼위일체와 관계가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펼치면서 살아가도록 그리고 이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고 또 들어오면서 온 인류가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입니다.
2) 재창조될 세상의 모습이 어떠할지 설명해 봅시다.(137-138)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나님이 제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자 씨입니다. 종자 씨를 심으면 거기에서 무엇인가가 자랍니다. 그 종자는 더 많은 수확을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아무리 빈궁할 때에도 그 종자는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자는 식구들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종자 씨가 온 인류에게로 퍼져나가서 열매를 거두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까지 재창조가 확산이 되어서 모든 만물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저주가 풀리고 자연세계에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고래가 숨어 있다가 물개를 잡아먹는다든지, 그래서 발기발기 찢어서 자기는 포식하고 만족해하는 그런 세상이 모두 끝난다는 것입니다.
3) 재창조될 세상을 위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137-138)
솔직히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자연의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데에 교회가 특별히 기여할 바는 없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의 세계를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꼭 해야 될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재창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 주어져 있는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삶으로서 모든 만물들을 그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시켜주고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을 끔찍하게 학대하거나 방치해서 유기 견을 만들거나 하는 일들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적절하게 번식을 통제하고 관리해서 어쨌든 살아있는 동물들은 기본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인간들이 돌보아 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선을 사랑하면서 뻗어나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서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것을 넓혀서 자연을 선대해야 하는 것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도 교회의 한 모습입니다.
3. 첫 창조와 재창조는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1) 목적에 있어서 첫 창조와 재창조는 어떻게 연관됩니까?(138-139)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이 재창조는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재창조 하신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재창조입니다. 재창조된 사람을 통해서 사회를 재창조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속으로 말미암아 재창조가 이루어지고 마지막에 이 사회가 완전하게 변하지 않고 늘 갈등이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전하게 새롭게 하실 날이 옵니다. 이렇게 재창조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시작이 되고 이 세계의 종말로서 완성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창조의 목적은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풍성히 나타나게 하는 것이 재창조라는 것입니다.
2) 교회가 재창조의 환성을 위한 씨앗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140)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갖고 자신들이 먼저 이것을 누리고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도록 만들어서 결국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인류가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가 먼저누리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이 분리되었다가 그 모든 구원받을 사람들이 완성된 숫자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종말에 대한 완성이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교회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이 희망하시는 사회의 한 과정입니다. 그것이 완성되면서 교회가 곧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3) 교회는 완성될 세계에서 누릴 사랑의 질서를 미리 누리는데, 그날에 누릴 사랑의 질서는 어떠한 것입니까?(141-142)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질서가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 존재의 질서가 가치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위에 계시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고 밑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뒤집는 것이 악입니다. 이 질서를 뒤집는 것이 악입니다. 여기에서 누리고 있는 질서가 확장이 되어서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질서대로 돌아가고 인류는 그 질서를 가치의 질서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삶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선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자연도 그리스도인과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방식에는 여기에 부록처럼 나왔는데 성육신 이전에는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을 아는 것이고 성육신 후에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삼위일체 중 한 위격,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그리고 마지막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래서 그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봤고 지금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3.4. 구역장교육9)
3-2장 사랑 안에서 교제함
녹취자: 허혜숙
1. 신자와 교회는 모두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1) 영혼을 창조하심과 인간의 중생함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어떻게 나타납니까?(148~149)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창세기 2장 7절에 나타납니다.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말이 참 어려운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내피쉬 하야’라는 단어입니다. ‘내피쉬’라는 말은 영혼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영어표현으로 'There is not a soul in the street' 하면 ‘길거리에 사람이 한 사람도 안 보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된지라” 이것을 생령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이면 땅의 흙을 재료로 해서 사람이라는 것이 지어지고 이것은 사람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산 사람이 된지라 라고 한 것은 영혼입니다. 번역이 잘 못 되어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되니라” 이것이 결론이면 땅의 흙을 재료로 해서 사람이라는 것이 지어지고 이것은 사람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산 사람이 되니라” 그러면 이것은 영혼입니다. 영혼을 하나님의 일부를 불어 넣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훅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으신 행동이 창조의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 각 사람의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후에는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들지 않고 생육을 통해 태어나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하나하나 창조하셔서 그 육체와 만나게 해 주시는데 그 시점이 수정 난 때냐 아니면 어느 때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정확하게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그런 원리에 의해서 태어나게 되는데 이때에 당연히 모든 만물이 성령 안에서 창조가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과 매우 닮은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이것은 성령 안에서 인간의 첫 번째 창조이고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영혼과 육체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광도 상실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할 때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라는 것이 인간의 영광이 쭉 뻗어서 하나님과 맞닿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그 영광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fall short of’라고 나옵니다. 그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원래 인간의 지위는 아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데 그 지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타락의 결과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다시 부여하고 이런 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물 같은 성령, 혹은 바람 같은 성령이라는 의미도 되고 우리를 정결케 쇄신 시킨다고 하는 의미도 됩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이 재창조가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영혼의 창조와 재창조 이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교회를 창조하심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을 설명해 봅시다.(150~152)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중생을 통해서 교회에 접붙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무리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맨 처음에 어떤 식으로 이 교회가 이루어졌는지 보십시오. 교회를 멀리 보면 구약까지 내려갈 수가 있고 좀 더 가깝게 보면 예수님 오신 때로 내려갈 수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약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이 오심으로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아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도 모르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서 그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면서 교회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생을 통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짐으로서 이 사람들도 생명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접붙이면 원가지의 생명의 힘으로 그 가지가 접붙여져 자라듯이 마찬가지로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교회가 맨 처음 성령이 오심으로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인 교회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것도 당연히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이 창조 될 때 인간의 창조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두 번째 중생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립되는 것도 성령 안에서 성립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불완전한 교회는 두 가지를 누림으로써 점점 더 온전해져 갑니다.
1) 첫째는 용서입니다.
① 교회 안에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53)
용서에 의해서 불완전한 교회가 완전해져 가는데 우리 몸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복원력이 뛰어납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안 보시겠지만 제가 야구랑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야구 같은 경우에 공휴일 같은 때 해가 뜨면 나가서 저녁때까지 야구를 하고 놉니다. 어두워서 공이 안 보일 때까지 놉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끙끙 앓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이면 거뜬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리고 젊으니까 신체적인 복원력이 뛰어난 것입니다. 상처가 나도 금방 낫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불완전해지기 때문에 조금만 일을 많이 하면 힘들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완전해서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교회도 인간이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보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한 교회를 찾는데 스펄젼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에 없는데 혹시 그런 교회를 찾거든 당신은 절대로 거기에 가지 마라” “왜요?” “당신이 가는 순간 불완전해 지니까 당신은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본을 보이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을 못 보인 사람들이 원래 못 된 사람일수도 있지만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요즘 상태가 안 좋습니다. 그러면 옛날 성질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또 돌아서면 후회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받고 교회를 가다가 차선 때문에 사고가 날 뻔해서 길거리에서 대판 싸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들어갔더니 조금 전에 길거리에서 대판 싸우던 사람이 나와서 설교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기독교를 완전히 끊고 다른 종교로 갔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있겠지만 교회의 믿음의 본을 보여야 된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기도 어떤 때는 못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하고 어떤 때는 못 하고 아니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교회 안에서 덧나지 않게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무조건 죄를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준 사람을 마음속에서 풀어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럴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에 대해서 당신이 직접 심판하시지만 손해 본 사람이 어느 정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을 자기가 나타나서 저 사람을 용서해주고 그럴 권한은 없습니다. 자기가 손해의 당사자일 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가 뭡니까? 봅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상태가 변합니다. 그래서 깨집니다. 미끄러져 버립니다. 그러면 무슨 일은 못 하겠습니까? 신자가 미끄러지면 뭐든지 합니다. 여러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두 달 동안 불신 남편한테 잘 하다가 한 번에 바겐세일로 엎어버리잖습니까? 그러다가 또 한 3개월 속죄하고 회개하고 그런 일들이 우리들의 일입니다. 상태가 안 좋으면 이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② 신자가 다른 지체들을 용서하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154~156)
첫째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도 언젠가는 변질되었다가 벼락 치는 것처럼 열을 받아서 벌렁 나가 자빠져서 은혜에서 미끄러졌는데 하나님이 용서해주셔서 십자가의 피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죄인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도 도달할 수 있는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아픔을 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이렇게 상태가 나쁜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교회를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그들이 명백하게 성경에 어긋나는 죄를 지었을 때에는 치리라는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징계하지만 그것은 죄를 미워하라는 것이지 그 사람을 미워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 사람이 교회가 계속 아플 것이기 때문에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사랑은 자신이 시발역이 되게 하고 미움은 자신이 종착역이 되게 하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랑을 자신이 시동을 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사랑을 주십니다. 지체들을 통해서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시발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은 여기에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퍼붓고 또 다른 사람에게 퍼부으면 처음에는 아주 작은 상처가 덧나서 결국은 팔을 잘라내든지 하는 일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상이 대단한 것입니까? 우리들이 클 때 모두 걸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 정도가 심하면 발가락을 잘라내야 합니다. 썩어 들어가서 발가락 다섯 개도 자르고 심하면 발목까지 자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또 교회의 아픔을 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③ 진정한 용서란 무엇입니까?(156)
‘용서’란 말은 ‘容恕(용서)’ 이렇게 씁니다. ‘容(용)’은 한자에서 ‘용납한다’는 뜻이고 ‘恕(서)’는 ‘죄를 묻지 않는다’, ‘사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풀어준다.’ 하해와 같은 은혜로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할 때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적인 의미는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의 교제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단까지를 포함합니다. 교회에서 그런 교제가 금지된 경우에는 예외이지만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가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게 하신 것입니다. 자,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체들을 사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이 옛날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는 핍박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긍휼을 입은 것은 네기 믿지 아니할 때에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 은혜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고 개인적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를 합니다. 진심으로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회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우리를 대하십니까? 3주 전에 제가 설교 했듯이 토끼와 어떤 신사와의 예화를 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와 함께 하는 죄 때문에 우리에게 당신의 친근함을 보여주시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근함을 보이신다면 우리에 대한 교육이 잘 안 되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예를 들면 자녀에게 때리거나 하지는 않지만 자녀가 뭔가를 잘못했을 때는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는 야단치지 않아도 자신과 엄마아빠와의 관계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반성하게 되는 그런 이치입니다.
④ 용서가 복된 이유를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해 봅시다.(159~161)
신자에게는 두 가지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첫 째는 신분의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죄의 종 된 신분이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변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것은 영혼의 자유라고도 하지만 상태의 자유라고 합니다. 영혼에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영혼이 사슬에 묶여있었습니다. 개가 사슬에 묶여있으면 사슬의 범위 안에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멀리 뛰쳐나가려고 하면 줄이 자기를 잡아채는 것처럼 인간은 여전히 이런 줄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줄 범위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자유롭지만 그런 제약을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날아간다든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추구하려고 할 때에는 우리의 영혼을 얽어매고 있는 죄의 사슬이 우리를 잡아채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훨씬 더 강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끌러주셔서 하나님이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외워야 되는 것입니다. 신분의 자유와 상태의 자유. 신분의 자유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승격된 것이고 상태의 자유는 얽매였던 영혼이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는데 서로 미워합니다. 요즘 가장 힘든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다른 사람 욕을 아주 험악하게 할 때 굉장히 힘듭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당신 그 따위로 하면 안 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미움의 문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이런 계명 저런 계명도 지키면서 삽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를 주셔서 살게 하시는 것이 결국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회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모델케이스를 교회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삶은 그것이 교회 안에서든지 교회 바깥에서든지 불신자든지 신자든지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건설하시는 사회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뭔가 불의와의 갈등이 있고 빛이 진짜로 비취기 위해서는 어둠과의 싸움이 있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런 이유가 없이 개인적인 원한이나 이익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옛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먼저 시작하신 용서이고 용서를 통해서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면 우리는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도 없습니다. 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를 해 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고도 잘 모릅니다. 어거스틴은 용서를 이야기할 때 ‘누군가를 용서하면 최고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게판을 칩니다. 그리고 고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해 줍니다. 그러면 용서를 해 준 사람이 자유를 누립니다. 물론 서로가 용서를 하면 책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 사랑의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교회가 구현하면서 사랑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2) 둘째는 사랑입니다.
① 교회의 참된 기초가 사랑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162~163)
② 신자가 누리는 사랑은 마지막 그 날에 완성될 세계가 어떠한 것임을 보여줍니까?(162)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자신도 계속 변합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교회에 계속 둘러 싸여있습니다. 우리 교회나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잘못 된 것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자신의 몸에 그런 상처가 있다고 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찌게 집에서 밥을 먹다가 순식간에 아주 조금 데었습니다. 그런데 3일 동안 엄청 불편했습니다. 약도 바르고 했는데 신경이 많이 쓰이고 쓰라리고 따가웠습니다. 우리는 치료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런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했더니 어느 신학자가 아주 훌륭한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 자신에 대하여 그렇게 행하고 산다.” 는 명답을 했습니다.
결국은 영화의 마지막 날에 교회가 완성이 됩니다. 그러면 인간도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이 불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끌어안고 아파하고 자신이 헌신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 중심을 모두 헤아려서 그가 한 모든 섬김과 희생이 당신을 향해 바쳐진 것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그에게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결국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거기에서 모든 염증과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나는 그런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그런 완전에 도달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말한다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그렇게 애쓸 뿐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3.11. 구역장교육10)
4-1 사랑으로 이루는 일치
녹취자: 허혜숙
* 내용 이해를 위한 토의
1. 신자들이 교제를 통해서 누려야 하는 교회의 일치란 무엇입니까?(171)
결국 기본적으로 교회의 일치는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모두 다 지순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자기가 되고 싶은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올바른 지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랑, 그것은 올바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와 결혼할 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모든 남자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동일한 감정이 아닙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남자의 경우를 말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한 여성을 향한 사랑과 모든 여성을 향한 껄떡거림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욕망에 의해서 울컥울컥 솟아나는 정념에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들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한 앎이 사랑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 방향이 따로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인생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갔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방향이 바뀔 것 아닙니까? 이런 변화된 존재의 목적이 지순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누리면서 얻게 되는 지순의 사랑의 일치, 까리따스의 사랑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은 두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사도들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를 볼 수 있었습니까? 그 때 드러난 교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172~173)
처음에 제자들이 있습니다. 제자들 속에는 사도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제자라는 의미가 크게 세 가지로 쓰입니다. 제자는 성경에는 가룟 유다를 포함한 열 두 제자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조금 더 넒은 의미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아니라 배와 그물을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들이 Full time 추종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누가가 쓴 사도행전에서 확 넓어지는데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나를 봐야 됩니다. 제자들은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일체의 긍휼의 삶을 사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이것은 결국 희생의 삶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눈에 직접 들어 온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위해 긍휼을 베푸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교회는 어떨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들의 시대에 그리스도는 무엇을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납니까?(173~174)
예수 그리스도는 가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그 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신자가 있고 기도하지 않는 불신자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 가시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눈에 띱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못 보지만 이 교회는 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추측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아마 이런 분이실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가 어떨 지를 예측했고 지금은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이 추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에는 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이야기는 교회가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해야 된다거나 혹은 교회가 세상에 아첨을 해야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 교회가 그런 것에 너무 많이 신경을 쓰면 안 됩니다. 솔직히 오늘날 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아주 표독스럽게 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데에는 교회가 반성해야 될 점이 물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여러 가지 부패라든지 부정이라든지 오늘날 여러 가지로 돈에 얽힌 추문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교회는 깊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종교계의 모두가 그런 점에서 가장 많은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점을 100% 인정을 하면서 그 다음에 애기하는 것은 어느 시대이건 교회가 문제가 없었던 적은 없는데 오늘날은 더 강력한 표적이 되는 이유, 그 중에서도 불교나 천주교나 이런 종교들에 대해서는 덜하고 개신교에 집중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이 ‘이것만이 진리다,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입장자체가 현대사상에 커다란 거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배타적으로 사람들 눈에 비치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반감을 가지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처지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런 처지에서 교회는 ‘아, 세상의 눈이 무섭구나, 세상에 잘 보여야 되겠구나.’ 라며 이런 것에 하나님께 신경을 쓰는 것보다 더 많이 신경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들의 경우 굴을 파고 묘지에 넣었습니다. 그것은 석회질 같이 잘 부스러지는 토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늘 봤습니다. 그것을 깨끗하게 회칠하는 것입니다. 회칠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시체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에 그들이 율법을 반듯하게 행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들의 행위는 본받으라’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왜? 저들이 갖고 있는 교훈은 본받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부합하는 행위를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탐욕, 사람들에게라도 잘 보여서 자신의 평판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탐욕,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개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날 도덕적인 많은 추문이 일어나서 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위축되거나 그것을 무시하거나 하는 태도를 가지면 안 됩니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하나님이 오늘날 교회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읽어내는 기회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잘 보여야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그런 세상의 비판들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이 가리키는 교회의 상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비난을 향해서 옷깃을 여미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모두 들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는가를 반성하며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해야 하고 혹시 그런 것을 보면서 세상이 막 박수를 치고 우리를 높여준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마음을 많이 쓰거나 우쭐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더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미담을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따라서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고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시는 새로운 인류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어떠한 비난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거기에 움츠러들거나 굴복하거나 혹은 세상에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사랑했을 때 우리가 걸어가기로 헌신했던 그 길을 꾸준히 흔들림이 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의 울림입니다.
3. 교회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1)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 일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175~176)
여러 번 나온 그림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교회에 보여 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여기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사랑이 생겨나면 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뿐 아니라 또한 지체들을,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하고, 그 표준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또 하나는 이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해야 합니다.
어제 저녁에도 코코가 가족은 다 자는데 나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제가 자기 전에 준비하는 것이 있는데 우선 침구를 깨끗이 정리를 하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입니다. 물을 끓여서 물주머니에 넣어서 꼭 잠그고 그것을 발아래 놓고 수면제 두 알을 놓고 물을 한 컵 떠서 가지고 가고, 그 다음에 세수를 깨끗이 하고 로션을 바르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과입니다. 그 때까지 코코가 계속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간식을 하나 주면서 “코코야 이제 자거라”하고 세수를 하러 갔다 오니까 내 방 앞에서 쭈그리고 엎드려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가엾어서 안아주며 “코코야 이제 네 집에 가서 자야지”하며 집에 놓아주고 불을 모두 끄니까 코코가 ‘자는 시간이구나.’ 하고 압니다. “코코야 잘 자” 낮에는 손가락을 막 물고 장난을 치는데 잘 때에는 손가락을 막 핥습니다. 개가 핥는 것은 최고의 애정표현입니다. ‘주인님 저도 알아요, 이제 잘 시간이란 이야기죠? 네 알았어요. 오늘 주인님과 함께 너무 즐거웠어요. 갈 곳 없는 저를 돌봐주셔서 이렇게 아껴주셔서 감사해요,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핥는 것입니다. 물론 개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저는 손등과 바닥에 닿는 개의 혓바닥의 촉감을 통해서 그 언어를 읽는 것입니다. 가슴이 뭉클한 것입니다. 엄마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낳은 지 며칠 만에 휙 버려지다시피 애견센터에 온 이 강아지가 내가 이 아이에게 마음을 열고 짧은 인생이 아니라 견생이니 우리 서로 사랑하며 살자 하면서 이 아이를 가슴에 받아들이고 선의로 대해주니까 이 미물이 그렇게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싹 씻기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개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시간에도 도륙당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개와 우리 개 사이의 운명은 세상말로 한 끝 발 차이입니다. 이렇게 갈라지지 않습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의 만물을 선의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풀 한포기 꽃 한 송이 생물하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진정한 창조의 목적과 질서를 아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이런 것이 너무 약했습니다. 린 화이트 같은 사람에 의해서 오늘날 자연의 광범위한 파괴가 기독교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의 지평을 사람에게서 자연만물에 대한 선의로까지 가기고 가야 된다 이것을 가슴에 새겨보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가페를 깨닫고 까리따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창조목적으로 돌아가고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만물을 선의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2) 교회가 일치를 이룸으로써 이 세상에 보여주는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176~177)
첫째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탁월한 지혜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인간의 도리를 다해서 삽니다. 그러면 많은 무지한 사람들이 깨달으면서 ‘아, 저렇게 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이심을 인정함.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고 자연만물에 대해서 선의로 대하면서 삽니다. 왜 그럴까? 마지막에 아 그리스도가 이들을 다스리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교회는 독특한 목적을 가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세상의 돈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명예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인류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교회가 독특한 존재의 목적을 가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교회의 공동체적인 이상이 개인의 인생의 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4. 교회의 일치를 ‘사랑의 하모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78~180)
하모니는 뭡니까?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데 화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도, 미, 솔 이것이 하모니입니다. 예술에서 하모니는 음의 어울림입니다. 비유를 해서 부부가 가족이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원래 하모니라는 말은 음악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연극에 적용을 해서 각 역할, 역할이 멋있게 어울려서 일치를 이루는 것을 앙상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모니는 음악에 관한 것이고 앙상블은 연극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사회를 볼 때 하나님은 놀라운 하모니와 앙상블을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아내를 향해 저 인간은 나하고는 성격적으로 어울리지가 않아 라고 말합니다. 이혼사유 중에 제일 많은 이유가 성격차이라는 것입니다. 성격이 동일한 사람은 더 빨리 이혼합니다. 지금 아내와 이혼하고 자기와 성격이 똑같은 여자를 만나면 전처와 살았던 것의 1/3도 못 살고 이혼합니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벌써 결별설이 돕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용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1년밖에 안 됐는데 말입니다. 짜증이 납니다. 우리같이 객관적인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상처는 무엇으로 보상을 받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모니를 이루면 각기 성격이 다른 아들, 남편, 딸, 심지어 강아지까지 기가 막힌 앙상블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묘미가 바로 인생을 사는 멋이고 자유입니다. 사랑의 하모니라는 이야기가 어디에서 나왔나 찾아봤더니 아우구스티누스 설교 집 184번부터 229권 Z의 제 3권 270 여기에 하모니가 나옵니다. 하모니는 첫 째는 개별적으로 고유한 본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함께 도를 큰 소리로 내면 하모니가 아니라 함성이 됩니다. 물론 함성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궐기대회 하는 것 같아 무섭습니다. 도, 미, 솔 음악에 재주가 없는 여러분들이 하는데도 최소한의 하모니가 들립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함, 선을 드러내는 영광의 일치 이것이 사랑의 하모니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7장 7절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너무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과 달 별자리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5. 교회가 섬기는 세 가지 대상은 무엇이며, 그 섬김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181)
하나님을 섬깁니다. 세상을 섬깁니다. 교회를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목양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을 섬기는 것은 전도와 봉사로 나타나고 교회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나타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3.18 구역장교육 11)
4-2 신자와 교회의 일치
녹취자: 허혜숙
1. 교회의 일치
1) 단순히 분쟁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교회의 일치가 완성된 것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188)
외견상의 평화는 일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합의에 도달하게 되고, 이해관계가 맞고 힘의 논리에 의해서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굴복하고 하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진정한 일치가 아닙니다. 분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렇게 금이 가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바른 관계의 일치란 무엇입니까? 교회가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두 대상은 누구입니까?(189-190)
바른 관계의 일치라는 것은 질서를 따르는 일치이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바른 관계의 일치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것만큼 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식과 사랑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수평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져서 결국은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런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의 일치를 이룰 때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일치라고 보는 것입니다.
3) 교회와 신자가 온전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기는 무엇입니까?(191)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당신의 성품을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온전하시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시고 공동체가 온전해 집니다. 공동체의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영적 성장입니다. 영적 성장이 없는 외적인 성장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과 은혜입니다. 이런 것들을 부어주시면서 사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해지면 교회 전체도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군대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2. 교회의 불일치의 원인
1) 소극적인 차원에서 신자들의 다툼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192-194)
소극적인 차원과 적극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차원은 영원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영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니까 현세밖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하나의 불일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무관심이 인간의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도 깊이 공감을 하는 바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원래의 진리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인데 그것들을 기독교인들에게만 모두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일반은총, 일반계시라고 하는데 그것들을 하나님이 인류에게 나누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아마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어서 거의 미치광이처럼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지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의 지식들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들 가운데에 어떤 반짝 반짝 빛나는 것들은 종교, 예술, 학문 이런 것들 속에 주십니다. 발견을 했는데 문제는 그것들을 제 자리에 못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얼핏 얼핏 우리에게 ‘아하!’ 하는 공감을 주는 것들이 나타나지만 전체적인 체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1980년도에 영원에 대한 관심을 조계사 종종으로 취임을 하면서 취임사를 남깁니다. 그 때 남긴 유명한 말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입니다.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가 식당에 갔더니 ‘산은 산이요 물은 셀프로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의 법문이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는가’ 탄식한 다음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원각이라는 것은 완전한 지혜의 빛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거든다는 뜻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두‘루 비친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이 인간의 마음에 두루 비출 때에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여기에서 관음은 ‘소리 음’자를 씁니다. 이것이 소리가 아니라 ‘관음보살’ 할 때 ‘관음’입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가공의 존재입니다. 부처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흔들리지 않는 인간상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성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관음이요 들리는 모든 것이 묘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기묘한 소리인데 소리가 아니라 우리식으로 설명을 하자면 진리의 말씀입니다. 들리는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것은 산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이 붙이기 전에 이미 산은 산이었고 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물이었다. 그런데 산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그 산이 원래의 산이라는 인식을 인간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이야기 하냐 하면 ‘그 때 모든 만물이 그 위대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발아래 기어 다니는 벌레 한 마리까지도 모두 부처요, 들리는 모든 소리가 진리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원각이 보조해야 합니다. 원각은 완전한 깨달음이 와서 그것이 두루 비칠 때 인간이 비로소 아주 하찮은 것을 통해서도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아무도 그렇게 산을 산으로 못 보고 물을 물로 못 본 것입니다. 왜? 인간은 인간인데 인간을 보면서 돈을 생각합니다. 권력은 권력인데 권력을 보면서 부귀영화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 결정합니까? 권력이 그런 것을 가져다주거나 사람의 얼굴이 그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욕심에 이끌리는 마음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이 불교에서 나온 사상이라기보다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도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시험과 시련이 발생론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한 사건을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시험에 안 들 수도 있고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많은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영원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에서 당회를 하면 안 싸울 것이고 장례식에서 재직 회를 하면 아마 다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그 장례식에서 삶의 허무를 느낀다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삶의 허무를 느낀다는 것은 영원에 대해 눈을 뜬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툼 중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울만한 것이 아닌 다툼들이 대부분입니다. 진리를 지키고 올바름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 영혼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의 말씀에 ‘지혜로운 사람은 상갓집에서 배운다’ 고 했습니다. 잔칫집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상갓집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경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슬픔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느끼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천상적인 것과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균형 있게 가르쳐서 항상 천상적인 은혜의 자원에 기대면서 자신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계시라는 것이 말입니다. 자,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전에는 사랑했는데 지금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합니다. 음악 듣고, 연애편지 쓰고, 메일 열어보고, TV 채널 돌리고, 주식이 올랐는지 안 올랐는지 보고 이런 생각들이 꽉 차있는 것입니다. 복음 송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자리가 없네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에 해 뜨면서 바로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고 안락하고 그런 것들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것입니다. 열 받아서 교회를 쳐들어가는 것인지 떠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열 받아서 씩씩거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면서 교회는 결국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차원에서 신자들의 다툼의 원인은 무엇입니까?(194-195)
교만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모두들 다리 꼬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슬처럼 이어지는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을 고집하는 태도,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판단을 잘 합니다. 이런 것들을 자기의 판단을 절대화할 때 둘 중의 하나입니다. 부딪혀서 그를 지배해 버리거나 아니면 지배를 당하거나 축출 당하거나 이탈하거나 합니다. 그 다음에 신자의 이기심입니다. 사람들이 가슴에 뭔가가 가득 차있습니다. 사실 가슴에 차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경외심입니다. 재물 애, 명예 애, 탐심, 지위,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것 이런 욕구들이 계속 꽉 차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기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중심축으로 삼아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행복과 안녕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 혹은 삶의 자세를 이기심이라고 합니다. 이기심이라고 해서 남을 해치는 것만이 아니라 딱 자기중심에 서 있어서 예수도 자기 아래 질서 속에 들어와야지만 예수 취급을 해 주는 자세가 바로 이기심입니다.
3)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무엇일까요? 신자들 간의 실제적인 연합으로 교회는 일치를 이룹니다. 교회를 이루는 두 일치는 무엇입니까?
원리적인 일치와 실제적인 일치입니다. 원리적인 일치는 이미 한 번 이룬 상태입니다. 그래서 손상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태가 좋든 좋지 않던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들이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있습니다. 이것은 운명적인 것이어서 상태에 따라서 다시 떨어져나가고 다시 들어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 결합이고 이것은 원리적인 일치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중생과 일회적인 구원 이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실제적인 일치란 그리스도를 향한 신자들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이 미끄러지고 사랑이 식었습니다. 사랑이 불붙었고 이 사람은 상당히 많이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분열이 오는 것입니다. 분열이 오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들을 모두 관통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회복이 되면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가장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때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그리고 진리의 맛과 깊이를 안 사람이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거기에서 비로소 진정한 친구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붕이 자원 방래 하니 불역 낙호아라’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들은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친구가 스스로 찾아왔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유붕’이라는 이 단어가 해석이 몇 가지가 있는데 ‘원래 있던 친구’라고 해석을 하고 또 아무 뜻이 없다고도 해석을 해서 그냥 ‘벗’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이 ‘벗’은 친구가 아닙니다. 벗을 상징하는 말이 한자에 하나 있는데 이것이 友(우)입니다. 朋(붕)은 友하고 다릅니다. 友는 허물이 없이 함께 자란 친구입니다. 朋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알고 지내던 친한 친구가 온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뜻을 품고 진리의 길을 인간사는 도리를 찾아가는 그 동지가 온 것입니다.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옛날에 같이 자란 불알친구가 찾아와서 신나는 것이 아니라, 友가 온 것이 아니라 朋이 왔습니다. 붕이 오면 왜 그렇게 좋을까요? 밤새도록 이 친구와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가 되어야겠습니까? 붕이 되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붕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잘못 된 붕도 있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붕당이라고 합니다. 붕당정치라는 것은 자기들끼리 해 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소인배들의 짓입니다. 소인배와 군자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도리’입니다. 소인배는 작은 이익에 집착하고 군자는 대의에 집착합니다. 대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붕이 된다고 할 때에 진정한 붕은 그러한 소인배들이 뜻을 같이 해서 모인 인위적인 당이 아닙니다. 그것을 붕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편을 가르는 사람들은 붕당입니다. 성경이 우상숭배와 간음에 비길 정도로 성경이 정죄하고 있는 죄가 바로 붕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하나 되게 하소서’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들은 형제인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유붕이 먼 곳에서 오지 않고 스스로 먼 길을 왔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서 와도 이렇게 붕이 될 때에 진정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3.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
1) 교회가 품어야 하는 올바른 사랑의 질서는 무엇입니까?(197-198)
하나님의 질서로 재편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고 모든 삶의 질서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엮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미줄을 보면 질서가 탁월합니다. 시작점이 있고 줄을 그어갑니다. 회심, 회개와 믿음, 생명의 질서, 사역의 질서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질서로 재편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소욕이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질서로 올바르게 잡히는 것입니다.
① 회개와 믿음은 어떻게 작용을 함으로써 사랑의 질서를 올바로 재편합니까?(198-201)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개인이 반복적인 회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도 이런 회심의 경험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성과 자기 사랑을 버리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색깔이 변질 된 것을 다시 돌아가게 만들어줍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서 진정한 일치로 돌아갈 수 있는 요건을 갖추게 됩니다.
② 교회가 사모하여야 하는 생명과 사역의 질서란 무엇입니까?(202-203)
생명의 질서란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에 신자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안에 있는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예수께 접붙여져 생명을 받게 되는데 그런 생명들을 하나님이 무질서하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부어주시는데 그 몸속에서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그리스도예수께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 성령께서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생명을 주신 것은 그 생명을 가지고 자신 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예수가 이 땅에 계셨으면 되었을 사람이 되어가고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역의 질서란 그리스도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주십니다. 그 사람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가르치기도 하고 긍휼사역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가족들과 평안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머리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아직도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생명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당신의 분신처럼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생명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무위도식하면 안 됩니다. 구역 원들에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십자가가 은혜다’그렇습니다. 그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남이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교제가 지체들 간의 교제의 증진도 가져와 실제적인 일치를 이루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205-206)
까리따스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그 사랑이 교회를 휘도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으로 이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한 朋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매우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4. 진리에 합치됨으로 이루는 일치
1) “교회의 일치의 중심에는 진리가 있다.”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207-208)
어느 남전도회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목사님, 저희가 야유회를 가는데 따라오셔서 설교도 해 주시고 한 나절 우리와 함께 있어주십시오.” 하니까 목사님이 남성들이 신앙에 무관심한데 모이니까 좋아하셨습니다. 더욱이 그 날은 총 전도의 날로 정해서 불신 남편들을 억지로 끌고 와가지고 남자들끼리 단합대회를 한다고 남이섬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봉고차를 타는데 얼핏 봉고차 뒤에 실린 이상한 물건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진로소주 두 박스였습니다. 그래서 “저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목사님, 신경 쓰시지 마시고 그냥 가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불신자들은 다 이렇게 해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가시죠. 우리가 불신자의 눈높이로 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침에 교회 앞에서 봉고차를 타고 가면서 싸울 수도 없어서 그냥 가랬는데 문제는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가신 다음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 소주들을 마시고 불신자와 신자가 주먹다짐을 하면서 대판 싸운 것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일치는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자, 계시된 진리 성경이 있습니다. 그 진리가 각 사람에게 제시됩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 진리를 깨닫고 어떻게 하든지 그 진리에 합치하려고 합니다. 객관적인 진리에 주관적인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진리에 부합된 상태를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전제되지 않은 진실은 배 째라’고도 했습니다. 식당에 강도가 들어와서 “죽을 준비를 해라” 하니까 주인이 “밥밖에 없는데요.” 라고 했습니다. 결국 진실은 진리에 부합된 상태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3.25. 구역장교육12)
5-1장 그리스도와 교회
녹취자: 박미주
1. 신자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됩니다.
1)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두 가지 특징은 무엇입니까?(218-220)
영적인 연합은 성령을 통해 신자의 영혼이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영적인 자원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 미끄러져 살던 사람이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져서 하늘로부터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원으로 삼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셨던 양들이 구원을 받고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은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 성령의 내주하심의 신비를 말합니다. 실제적인 교통의 관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연합은 중생과 함께 그리스도와의 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신비적인 연합은 성화를 통해서 이 연합이 증진되어 가는 것입니다.
번성적인 연합은 온 인류가 인간성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있고 하나님의 형상이 이 안에서 이야기 되는 것입니다.
2) 신자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의는 무엇입니까?(220-221)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회와의 연합 속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모판입니다. 이것은 결국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샘플로써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에 이것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결국은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공통체적인 사건입니다. 즉,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2.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머리와 몸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1) 교회의 유기체성이란 무엇입니까? 교회의 유기체성을 그리스도-신자, 신자-신자의 관계에서 설명해 봅시다.
유기체의 사전적인 의미는 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아래 통일 조직되어 각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는 조직체를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 몸들이 하나로 연결 되어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건축물과 같이 서로서로 연결이 되어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길 경우 다른 곳까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 교회 역시 유기체로 이루어졌습니다. 유기체로 된 교회는 이것을 지휘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명령하는 머리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기관들이 머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 뜻을 이행하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많이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신자 안에 영원한 생명으로 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그 안에 내주하시는데 성령님은 곧 사랑이십니다. 그 성령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연결이 되어 유기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고 문제가 생겼음에도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부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각 사람의 관계가 있는데, 이 사람들은 서로 유기체적으로 연관이 있어서 서로 통합니다. 주위에 있는 지체들이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과 접촉하고 교제하는 사람들이 또 은혜를 받습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쓰러지면 도미노 현상에 의해 사람들이 쓰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지체들과 더 넓게 나아가서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까지 보는 것입니다.
2) 교회의 통일체성은 진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➀ 교회의 통일성이 유지되는 두 가지 원리는 무엇입니까?
성부 하나님이 충만한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주시고, 주신 생명을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많고 사람이 많지만 한 생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화의 차이는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면 남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그 모습이 인종과 상관없이 한 사랑 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가 있으면 예수님의 통치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세상이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교회가 불완전하고 틈이 있음에도 온전한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➁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치하는 것에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대체로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시고 스스로 악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은혜는 신자답게 살 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교회에 부어주셔서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자답게 산다는 것은 참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계와 상벌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징계는 상벌을 의미합니다.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것인데 사람들에게 그런 기대와 경계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와 복음일 뿐만 아니라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와 넘치는 은혜를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통치에 굴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일반 은혜가 있고, 믿는 자에게는 일반 은혜뿐만 아니라 특별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지만, 은혜가 떨어져도 완전히 내 마음대로 살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은혜와 징계, 상벌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3. 교회의 머리는 완전하나 몸은 불완전합니다.
1) 교회의 불완전함은 그리스도를 의존함으로써 극복됩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의존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고 그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2) 교회의 불완전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림으로 극복됩니다.
➀ 그리스도가 교회를 영원히 떠나지 아닐 것이라는 근거 2가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생명의 근거이시기 때문에 떠나가시면 교회 자체를 하나님이 포기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둘째는 신자 각 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떠나지 아닐 것이라는 하나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첫째는, 교회와 그리스도와 연합은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데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기 때문에 연합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면 이 연합이 증진이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 하시는 감격을 많은 성도들과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마음이 다 떠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예배와 찬양 기도가 냉랭해지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어있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면서 사람들이 공동체적으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원리적인 연합의 두 가지 근거는 생명의 근거이시고 성령이 보증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➁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순종은 어떻게 증진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함으로서 실제적인 연합이 증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성화를 뜻합니다. 교회가 점점 더 거룩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에서 자라가게 될 때 실제적인 연합은 증진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4.1.구역장공과교육13)
5-2장 불완전한 혼합인 교회
녹취자: 이경순
여기에서 제5장의 그리스도와 지체 그리고 불완전한 혼합인 교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배운 내용을 한번 쭉 회상을 해보면 1장에서는 사랑 삼위하나님의 교통에 대해서 다뤄봤고 2장에서는 교회가 삼위교통의 모상이라는 것 3장에서는 사랑과 교제 4장에서는 사랑과 일치를 공부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제5장인데 그리스도와 지체 중에서 지난시간에 머리와 몸을 공부했고 이 시간에는 불완전한 혼합인 교회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1.교회 안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1-1. 교회 안에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있음을 보여주는 성경구절을 찾아 읽어봅시다.
고백자 참 신자와 거짓신자 1번을 큰소리로 읽읍시다. 제가 읽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여러분들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13:31-42)) 아멘.
이러면 이제 고백자 참 신자와 아까 우리가 성경에서본 내용은 바로 이렇게 밭에 씨를 뿌리는데 거기에 가라지도 섞여 있어서 진짜 곡식과 가라지가 자란다는 것입니다. 농사지을 때 우리가 피라고 그럽니다. 그것들을 일부러 일삼아서 논 사이를 다니며 뽑아냅니다. 또 천국은 바다에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은데 그물을 치는 그 물에 먹을 수 있는 좋은 물고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온갖 고기들이 한꺼번에 잡힙니다. 거기서 어부들에게 소용이 될 수 있는 고기는 거두고 그렇지 않은 것은 내어버린다. 이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이 교회에 참된 신앙의 고백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에 하나님이 정리하신다. 그 뜻입니다.
1-2. 하나님이 노아 방주에 불결한 짐승까지 태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면 고백자 참 신자와 거짓신자 2분단이 한번 읽어 봅시다. 노아의 방주에 불결한 짐승까지 태우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 이렇게 노아의 방주를 만들고 그리고 땅에 있는 많은 동물들을 실었습니다. 그 종 자체를 보존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있는데 부정한 것들은 다 물에 빠져 죽게 내버려 두시고 정한 동물만 실으시면 될 텐데 그렇지 않고 부정한 것들도 쌍으로 싣고 정한 것들도 쌍으로 싣습니다. 그래서 서로 교배를 해서 종자들이 계속 번식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 나면 부정한 것을 두심으로서 정결의 개념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돼지가 부정 하다고 할 때 뭐가 부정한 것입니까? 절대적으로 그 물건을 보면서 정결한 짐승에 비해서 열등하다거나 그런 식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돼지는 돼지니까 그리고 소는 소니까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지금 현재 돼지를 사억 마리를 기르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인구 3.5인당 한 마리씩 돼지를 기르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중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고기는 돼지고기입니다. 돼지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가공하고 하는데 종사하는 사람이 일 억 명이랍니다. 중국인구 15명 가운데 한명은 돼지고기를 생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돼지고기가 일반화 되어있습니다. 그게 절대적인 의미에서 돼지고기가 소고기 보다 나쁘다 부정하다 몸에 해롭다 건강학은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것은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일부로 우리를 귀찮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나하는 것을 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섭생학적인 문제들도 물고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사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금하신 모든 짐승들을 하나도 안 먹으면 완벽하게 건강할 수 있느냐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섭생학적인 고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것을 정결한 것 속에 섞어두시므로 정결의 가치를 알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정결함과 부정한 것 사이에 구분을 지으면서 자신의 도덕생활과 종교생활을 성찰하게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의식의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두움이 없으면 빛의 고마움을 알 수가 없고, 가난하고 고통받아보지 않으면 풍족하고 편안한 것의 의미를 모릅니다. 인생이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사가 자기 원하는 대로만 되어 가면 정말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일이 꼬이고 잘 안됩니다. 그런데서 인생은 묘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단 그렇기 위해서는 그 인생을 쫄지 않고 살아가는 어떤 힘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있어야지만 그게 가능해집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것들을 두심으로서 정결한 것들을 선택하기 위해서 이렇게 노아 방주의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넣어 두십니다. 이것도 하나의 교회론의 훌륭한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하게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신자들을 보면서 도전을 받고 감동도 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잘못살고 하나님 앞에 패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 우리들이 경고를 삼으면서 아 나는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자각을 갖게 하니까 선을 하나님이 선하게 쓰시고 때로는 선하게 쓰셔서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유익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눈을 뜨면 세상을 포용하는 힘이 훨씬 더 커지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간다. 라고 하는 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평소 하던 말로 하면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가야합니다. 그런데 이 두 현실 사이 즉,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현실입니다.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살아가야한다는 것은 당위입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의 격차가 적을수록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격차가 너무 심하면 이 갈등이 너무 커집니다. 그런데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 인간은 근거도 없이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됩니다. 특정한 대상도 없는데 앙심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실은 우리에게 살아가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데 모든 것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어떻게 포용하면서 인생을 사느냐 하는 것이 지혜고 그것을 기독교신앙에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것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오늘 청년들 특강이라서 이 정도에서 예고편을 하겠습니다.
1-3. 보편교회가 불신자에 의해 거룩함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교회에 불신자가 있음으로써 겪게 되는 불이익은 무엇입니까?
그담에 3번입니다. 고백자 겉으로 신앙을 고백하는데 그 고백자 속에는 참 신자와 거짓신자가 있습니다. 3분단 읽어보겠습니다. 불신자는 보편교회의 거룩함을 해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불신자는 제외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가 해롭게 해도 그는 이미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거룩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정확하게 진짜 교회와 가짜 교회를 나누지를 못합니다. 가짜를 보면서도 진짜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단에서 저렇게 문제를 막 일으키면 사람들은 싸잡아서 기독교라고 합니다. 그리고 ‘개독교’라고 놀립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야 될 것은 참된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이 교회가 아니다 교회 속에는 신천지에서 몰래 들어온 사람도 있고 아는 사람하고 연을 맺어서 돈이나 빌려볼까 하고 오는 사람도 있고 대통령이 어느 교회 다닌다고 그러면 눈도장 찍으려고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말로는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도 그들은 참된 고백자가 아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교회에 속한 지체는 아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지만 그 교회는 참된 교회와 이렇게 이게 참된 교회라면 거짓된 교회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삼켜버리면 안되겠지 뭐가 그래도 남아야 됩니다. 이게 눈에 보이는 교회가 빨간 교회라면 속에 있는 이 하얀 교회가 눈에 보이는 교회가 이렇게 있는데 이 눈에 보이는 교회 중에서 더 적은 것이 이게 참된 교회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거짓된 신자는 이렇게 참된 교회가 아닌 데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된 교회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지냐면 중생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의 연합이 참된 교회고 참된 예수의 몸입니다. 지상교회의 불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가견적 혹은 가시적 교회에는 속해 있지만 참된 교회 혹은 불가시적 교회의 진정한 회원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그 사람들이 섞여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때로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거나 악이 행해질 때 그것을 공정하게 보면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위치나 장소가 그 사람의 본질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에 독을 품은 악인을 옷을 다른 것을 입히고 선한 사람들의 모임 안에 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나무는 그 나무일뿐입니다. 아무리 버드나무가 밤나무사이에 심겨져 있어도 그것은 버드나무고 밤나무는 밤나무입니다. 사람의 본질을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담배피고 술 마시고 까불다가 단정하게하고 교회에 나와서 말끔하게 앉아 있으면 이게 완전히 골수 예수쟁이가 된 것처럼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거기다가 교회에 헌금이라도 좀 하고 사람들에게 뭐라도 잘 사주면 그 사람이 아주 매우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엄청난 기대를 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놓고 보면 교회 안에는 사실상 배교자도 있고 사실상 불신자도 있고 사실상은 그냥 유사하게 그리스도인 닮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온갖 악들이 터져 나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의사가 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들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환자가 어디 아파서 갔는데 눈물을 뚝뚝 흘려드릴 정도라면 목사가 되어야지 그 사람은 의사가 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냉정하게 해야 합니다.
2014년도에 한림대병원에서 편도선 수술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보더니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에 염증이 계속 생겨서 잘라내야 된답니다. 무지무지하게 크답니다. 의사가 나보고 20년 동안 처음 보았다고 할 정도 이었습니다. 잘라냈는데 아주 가벼운 수술처럼 얘기합니다. 아주 간단하답니다. 그래서 수술을 했는데 죽을 뻔 했습니다. 엄청나게 크게 도려냈는데 오죽했으면 제가 말씀 준비하러 갈 때 가방에다가 진통제 주사기를 넣어가지고 가서 혼자 뒹굴면서 진통제를 맞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지난다음에 선생님 찾아가서 “선생님. 내 수술 쉽다고 하더니 나 8키로 빠졌어요!” 했더니 선생님이 하는 말이 여의사인데 “아니 그거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누구나 다 8키로 에서 10키로 빠집니다.” 왜 그럽니까? 완전히 얄미울 정도로 나의 병이 그에게는 객관적입니다. 그런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회의 아픔을 볼 때에도 목사의 마음과 의사의 마음이 같이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게 아니라 둘 중에 하나로 갑니다. 목사의 마음에 대해서 선악의 분별은 없이 함께 울고 한풀이를 하거나 두 번째는 완전히 냉정해서 자기하고는 아무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칼을 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둘 다 다 나쁜 것이고 두 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들이 자기 가족들을 잘 수술을 안 한답니다. 왜냐하면 그게 객관적으로 모르겠습니다. 의사선생들이 알겠지만 조그만 것을 이야기하겠지만 머리를 갈라버린다던지 배를 뒤집는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은 대게 다른 사람을 시킨다고 의사선생님 몇 분이 나에게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만큼 객관적으로 보는 태도가 필요 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목사의 마음과 의사의 마음을 겸하여서 교회문제를 보는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가지고 뒤집힌 것처럼 펄펄 떨거나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냉정하게 대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진정한 기독교적인 영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순결과 지혜를 함께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교회가 받는 불이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싸움질들을 합니다. 뿔이 나서 싸움질을 합니다. 결국은 이 사람들은 이 중심에 하나님 사랑이 완전히 사라져서 완전히 영혼이 바닥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쌈질을 하면서 이 난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침체기에 빠져서 교회를 자꾸 분열을 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사랑하면서 이 짓하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연약한 자들을 돌보면서 굳건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다양한 그림들을 교회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가 이런 게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여기까지는 참교회가 아니다 라고 이렇게 갈라내면서 볼 수 있는 안목이 이 사람들에게는 없고 원래 예수를 믿었다고 고백을 한다고 해서 한 번에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자기 인식이 이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는 그렇게 못살면서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 앙심을 품는데 이것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쪼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봅니다. 그러면 이게 진정한 교회에 속했든지 안 속했든지 그것은 상관없이 모둔 것을 다 싸잡아서 교회는 그들에게 평가를 받으면서 이 세상에서 교회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교회에서 모든 사람이 오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세례를 줄때에는 그 사람이 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최대한 분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1-4. 교회의 불완전함을 남겨두신 하나님의 경륜으로 인해 신자가 누리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고백자 참 신자와 거짓신자 4번째 문제입니다. 1분단 읽어보십시오. 자 여기서 이렇게 은혜가 떨어져서 싸움질을 합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함께 돌팔매질 하고 욕하고 두 사람 중 자기이익이 되는 사람 편에 서서 분쟁을 부채질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될 때 이것이 비록 참 신자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단 이것이 교회 안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아픔으로 보고 이것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완전함 때문에 고통 받는 지상교회를 바라보게 되고 교회에 남아있는 연약함이 자신의 연약함임을 알게 되고 교회와 스스로의 온전함을 위해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2. 토투스 그리스투스의 교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토투스 크리스투스(Totus Christus)’ 교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라틴어로 ‘토투스’는 ‘올(all), 호울(whole)’ 그런 뜻입니다. ‘크리스투스’는 당연히 ‘크라이스트(christ)’입니다. 그러면 모든 그리스도 전체적인 그리스도 모두 그리스도 이런 뜻이 됩니다. 그래서 ‘토투스 크리스투스’를 영어로 옮길 때에는 ‘호울 크라이스트(whole christ)’라고 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단어로 ‘모두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신자는 완벽하게 참 신자와 거짓신자들을 인간의 눈으로 분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일단 가시적 교회에 들어온 모두를 그들이 신앙이 없다, 혹은 잘못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판명되지 않는 한 그 모두를 그리스도 몸으로 사랑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 ‘토투스 크리스투스 교리’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토투스 크리스투스’는 라틴어로 ‘더 호울 크라이스트(the whole christ)’ ‘전부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모두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은 ‘인간이 교회 안에 있는 회원을 완벽하게 참 신자와 불신자로 구별해낼 수 없다. 그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자신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졌거나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한 일단은 그들을 모두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을 ‘토투스 크리스투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3. 토투스 크리스투스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믿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 보이는 교회를 사랑함 토투스 크리스투스의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양들이 있고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또 다른 양들이 있는데 우리밖에 있는 양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는 이 둘 다를 같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울타리를 참 교회 울타리라고 보면 아직 이 울타리에 들어오지 못한 이 양도 예수님에게는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들을 사랑하고 돌봐야한다고 하는 것이 토투스 크리스투스교리의 근거입니다. 외형적 교회에 속한 교인을 그래도 사랑해야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아직 회심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양 일수 있기 때문에 두 번째는 선택 받지 않은 자라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먼저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들이 선택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우리가 끝까지 섬겨봐야지 아는 것이지 미리 앞에 놓고 이 사람은 불택자라고 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토투스 크리스투스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2018.4.8. 구역장공과교육14)
6-1장 교회의 아름다움
녹취자: 김경애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6장 ‘Chapter 1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오늘은 늘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공부할 내용이 그렇게 양이 많지 않아서 일찍 끝날 것 같습니다. 보겠습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공부한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봅시다. 1장에서는 사랑, 삼위 하나님의 교통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2장에서는 교회가 삼위 교통의 모상이라는 것, 3장에서는 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교제 4장에서는 사랑과 일치 그리고 5장에서는 그리스도와 지체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6장에서는 교회와 사랑의 확장으로 막판에 접어들었습니다.
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회론에서 선교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전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랑의 측면에서 보면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신자가 되는 것이 마지막 목표가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한 하나의 중간 목표라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믿음과 사랑이 찢어지게 되면 그것은 참사랑도 될 수 없고 참 믿음도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의 이야기도 결국은 본성이 변화되어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본성에서 새로운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에 맛보기로 보여주신 샘플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인간이 그런 사랑으로 한번 돌아가면 영원히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면서 은혜를 받는 일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요약을 하겠습니다.
1.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6장에서는 교회의 아름다움을 다루게 되겠습니다. 1분단부터 읽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자의 최고의 섬김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참 신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참 신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교회가 본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그 자체가 최고의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위에 있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사랑으로 교통합니다. 그 교통을 그대로 본떠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 사람이 원래의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다른 이웃을 또 다른 인간을 사랑하며 사랑의 사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철저히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이 관계적인 존재라는 것을 끊어버리고 그리고 인간 하나를 고립시켜 놓고 보면 여기에 이렇게 맺어진 관계들이 단절되니까 이 사람은 의무도 사라지고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간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기에 가서 제가 누구인지 설명해보십시오. 나의 존재는 관계 속에서 설명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인간의 자기 이해라는 것은 관계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찾고 자기 속에서 이 관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고 그 다음에 자기를 성찰하면서 관계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둘의 균형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 찼을 때 사람들은 그 사회를 보면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행복한 사회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 사회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막 북 치고 예수 믿으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만이 전도가 아닙니다. 존재로써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의무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것 때문에 행복해진 사람이 되면 그것은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여러 가지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행복해 하는 사람은 세상에도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때 그 이유에 사람들이 눈길을 주게 됩니다.
2. 교회의 아름다움은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2-1. 우리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 2분단이 보겠습니다. 2-1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행하고자 하는 어떤 아름다운 것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격과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과 관련이 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저하게 구원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하는 계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런 구원계획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합치하는 모습이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가장 잘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역사를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전달해주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다.” 당신의 성품에 아주 찬란한 아름다움을 인간을 창조하고 구속하시고 완성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긍휼히 여기시는지, 그리고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방법은 교회가 참된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사람들이 왔을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이상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사람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자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교회의 아름다움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신데 그분이 아름다우시니까 교회도 그분 안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는 비록 잘 못살고 미끄러졌어도 교회가 그리운 이유는 교회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거기에 나는 미치지 못해도 내가 꿈꾸고 그리워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고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했고 또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다른 위격의 아름다움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교회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2-2. 신자의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길이 무엇입니까? 아까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통해,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는데 이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말씀 속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 구원계획은 가치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하나님백성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찬란한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오히려 그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들의 죄가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찬란하게 빛나고 죄인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악독하면 악독할수록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또 그들을 심판하셔서 올바르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죄가 없었더라면 심심했을 세계에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눈부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발산을 구원역사를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만약에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둡고 칙칙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배반하지 않았더라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3. 신자들의 연합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신자에게 요구되는 삶은 무엇입니까?
신자는 그 아름다움의 일부입니다. 1분단 읽으십시오. 교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신자에게 요구되는 삶은 무엇입니까? 보편적인 질서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부어짐으로써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변한 사람들이 사랑의 질서 속에서 이렇게 이런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돕고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은혜에서 미끄러져 변질되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이런 사랑을 간직하면서 한 사랑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이루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미끄러지지 않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사랑이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상황이 어렵고 많은 고난이 있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신자 안에 가득 있을 때 그때에 우리는 그 시련을 이기면서 하나님 앞에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높은 지위나 세상에서의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고 한 인간으로서 어떠한 처지에 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된 사람의 행복 그리고 그 기쁨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아름다운 모습을 교회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신자는 교회의 아름다움의 일부입니다.
그 다음 3분단 읽으십시오. 신자는 그 아름다움의 일부입니다. 첫째는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나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본바탕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부패함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원래 의도하셨던 작품으로써의 그 영혼이 이 죄와 자기사랑이 들어오면서 뭉그러지는 것입니다. 참된 영혼이 아닌 것들이 섞이는 것입니다. 섞인 만큼 이렇게, 이렇게 섞여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활동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몸에 어느 부분에 염증이 있어서 썩어 들어가게 되면 그러면 당연히 우리의 몸의 활동이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영혼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영혼이라고 본다면 이 영혼에서 마음이 나오고 마음이 사람을 어떤 행동으로 데려가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이런 결점들이 마음은 물론이고 삶 속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꽉차있는 상태 이것이 나쁜 나무입니다. 여기에서 꽉 차있는 나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항상 일치를 이루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르게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하나님이 깨끗이 지워서 영혼에 잘못되게 들어온 것들이 모두 변화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영혼으로 꽉 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진정한 변화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변화가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것이고 마음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신자의 영혼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완벽하게 아름다워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자의 영혼이 완벽하게 아름다워질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세상에서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라도 동일한 신자라도 그가 영혼이 아름다운 상태에 있을 때와 아주 추루한 상태에 있을 때의 그 차이는 너무 큰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는데도 거의 짐승과 같이 사는 사람이 있고 또 은혜를 많이 받아서 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이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본성적 연합, 영적 연합, 신비적 연합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본성적인 연합을 하나님의 형상의 맥락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도 설명 드렸지만 형상이라고 할 때 우리말로는 다 하나인데 한자로는 크게 이렇게 세 개의 낱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상(形象) 맨 위의 것은 조각 같은 것을 깎아놓은 신상을 이야기합니다. 형상(形相)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형상과 질료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써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물질들이 질료를 가지고 있는데 그 질료위에 형상이 작용함으로서 각각 다른 사물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드는 비유로 질료를 빵가게의 반죽으로 비유하는데 열린 공간에서 반죽을 잘해서 빵을 만듭니다. 반죽을 잘해서 숙성시킵니다. 그것을 잘라서 둥그런 빵도 만들고 네모난 빵도 만듭니다. 늦게 오면 다 팔리고 없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최고의 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빵을 반죽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이런 납작한 카스텔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형상입니다. 그것을 여기에 도입을 하면 카스텔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질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써의 형상입니다. 질료는 이렇게 씁니다. 형상(形狀) 그 다음에 마지막 형상인데 이것이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관련지어서 쓰는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형상을 만들지 말고’ 할 때는 1번이고 ‘주님의 형상을 닮기까지’ 이것은 3번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닮은 성품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 맡기신 일이 매우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이렇게 독특하게 당신의 형상을 주셔야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알고, 하나님처럼 선택하고, 하나님처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닮은 형상을 주신 것입니다. 이 형상을 따라서 인류가 창조됩니다. 타락할 때 이 형상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형상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 형상이 남아있고 그 형상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한 무지막지한 인간도 그가 행한 그대로 그에게 갚아주어야 한다는 식의 칼리오의 법칙이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법을 따라 재판을 받고 처벌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여전히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역시 그 존엄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잃어버린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유한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은 이러한 절차를 거칩니다. 삼위 하나님의 교통입니다. 이 교통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이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성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한 사랑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것들도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의 회복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서 살아감으로써 그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모두 같이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3-1. 이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의 아름다움은 누구를 통해서 드러납니까?
2번 교회의 아름다움의 일부로써의 신자의 아름다움 2분단이 읽어봅시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무엇을 통해 드러납니까? 신자 개개인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는 같이 있지만 흩어집니다. 흩어지면서 우리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교회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보면서 ‘어떤 사회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개별적 신자들을 쳐다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교회는 다른 곳이구나!’를 알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불신자가 한 번에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을 통해서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그리스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3-2. 아름다운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의 아름다움의 일부로써 교회의 아름다움 읽어봅시다. 아름다운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은 무엇입니까? 영혼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은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인간 존재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무리 비천해도 하나님을 향해 살고자하는 선한 의지가 큰 사람이면 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존엄하다는 이유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인간의 가치는 모두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악인의 가치와 선한 사람의 가치가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세상의 지위나 재물이 아닙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룹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이 그냥 걸어가는 길도 돈 많고 높은 사람들은 빨간 카펫을 깝니다. 세상은 그렇게 취급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 인간이 얼마나 영혼이 아름다운가? 그리고 얼마나 선한의지가 큰가? 하는 것입니다. 적으십시오.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인간 존재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다.’
3-3. 아름다운 영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신자는 교회의 아름다움의 일부다. 아름다운 영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지순의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영혼이 영혼다운 것으로 꽉 차있는 상태 그리고 그 영혼이 힘과 경향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이런 사랑이 지순의 사랑을 가진 사람인데 이 사람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의 계명들을 사랑하는데 주의 계명을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동일한 것입니다.
4. 사랑은 영혼에 실재하지만,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곳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랑이 마음 안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그 다음 영혼의 자리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인간의 영혼 안에 경향성으로 존재하고 기능적으로는 인간의 애성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결국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성향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향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마음을 통해서 육체의 행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거듭날 때 사랑의 경향성이 생기고 이것이 인간의 사랑하는 마음 안에 존재하고 이것이 작용할 때 인간의 마음 안에서 육체를 사용해서 실제로 행동하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행동과 현저히 다릅니다. 마음으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하는 행동과 싫어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하는 행동은 현저히 다릅니다. 왜? 마음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입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성향이 마음으로 나타나고 육체가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혼을 돌이키라고 말하지 않고 마음을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마음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마음에 반영되고 마음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은 다 고려하지 않고 이것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겉은 회칠하고 속에는 썩어가는 뼈들을 간직한 무덤과 같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우리의 삶의 모든 행동들은 마음이 우리의 육체를 사용한 결과이고 그 마음의 흘러가는 방향은 우리의 영혼의 성향에 달려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5. 신자의 영혼이 어떠한지는 공동체 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교회가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이며, 신자가 하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결국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마음도 사랑의 성향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순종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사랑을 이 세상에 확장시키는 것이고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2장 사랑 안에서
녹취자 : 강정아
1. 교회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확장은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재창조된 세상은 사랑의 사회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있는 동안에만 세상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 갈등이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결국 구속은 완성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회복되며 모든 인류가 모여서 사는 사랑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선교적으로 계속 확장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주신 이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확장 될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재창조의 목적은 똑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창조하셨습니까?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주 하나님” 육체는 흙으로 창조하시고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심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에 사랑의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고 모든 자연 세계의 피조물들을 선의로 대하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선한 세계가 인간의 노동으로 인해 더 아름다워지고 그 선한 상태가 증가할 수 도록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을, 아름다움을, 현실적으로 주시고 또 잠재적으로 주셔서 노동을 더 할 때 거기에서 아름다움과 선함이 증진되어 나타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셨더라면 되었을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도의 정신력을 가져야했습니다. 지성과 감성, 의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인간의 영혼 안에 주셨습니다. 영혼의 기능은 지성, 감성, 의지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은 아주 대단한 능력과 존엄한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간의 사람됨의 깊이는 사람을 어떻게 여기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인간하고 사람하고 다를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인간과 사람은 현저히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를 전제로 합니다. 사회를 통해서 사람을 보는 게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벌써 사회에 속해 있는 한 구성요소로서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사람에 대한 아주 객관적인 성찰입니다. 이에 비해서 사람이라는 단어는 사회와도 관련이 되어 있긴 하지만 사회와는 상관이 없이 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통해서 사회를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표현이 사회를 통해 본 사람이라면, 사람은 자신을 통해 본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수 있는 언어는 없습니다.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에도 없는 아주 독특한 언어입니다. 인간이라는 단어는 번역할 수 있지만 사람이라는 독특한 뉘앙스는 너무나 탁월해서 번역할 수 없습니다.
3. 신자는 사랑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사람의 한 인간성의 깊이는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이나 미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설령 나를 해친 사람이라 할지도 그를 여전히 사랑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 어떠한 악을 행한 사람이라도 그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과 복수, 그리고 그의 비존재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재창조도 똑같이 비록 인간이 타락을 했지만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다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때문에 새로운 인간이 되는데 그 인간이 바로 사랑을 가진 인간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재창조의 목적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관되게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창조를 통해, 구속을 통해 완성해 가십니다.
교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건물이 커지지만 사랑의 확장이 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괴질’이라고 얘기합니다. 몸이 부어서 커지는 것, 즉 질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숫자를 확장시키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불신자가 회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 사랑을 하게 된 사람이 그 사랑을 계속해서 보존하고 증진하는 것이 사랑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변질하는 여러분 자신을 보면 그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가 이사도 오기 전에 50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불신자 부동산에서 우리 교역자들에게 복비 벌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배를 박스로 들고 와서 말할 정도였습니다. 교회는 1년 후에 이사를 왔습니다. 믿음으로 1년 일찍 이사를 온 사람이 교회에서 사당동으로 출퇴근 하면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너무 드리고 싶어서 방 3개짜리를 정리해서 2개짜리를 얻어서 이사를 왔는데 이사 오고 나서 너무 행복해하더니 언젠가부터 새벽기도를 안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인간 심리입니다. 의정부 등 먼 곳에서 새벽기도 너무 나오고 싶어서 이사를 온 사람들이 이사를 오고나면 새벽기도를 안 나옵니다.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사랑을 확장하는 것도 어렵지만 자기 안에서 사랑을 보존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결국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해서 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3-1. 신자의 사랑이 정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며, 정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이 정화 된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빗나간 사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단입니다. 이단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추종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추종합니다. 선교지에 나가보면 정통교회의 선교의 열심은 이단의 열심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예 전세기를 띄워서 그 전세기를 타고 선교지에 와서 자기돈 다 들여서 온몸을 불사르며 선교합니다. 그걸 보면 사랑의 방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 정화된다는 것은 사랑의 방향이 올바르게 향한 것입니다. 사랑의 품질을 순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관계를 가지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 이것이 고품질의 사랑입니다.
반면 타락은 사랑의 방향이 망가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사랑으로 가거나 자기 사랑 둘 중 하나로 가게 되는데 그 중간에 있는 것이 싫증입니다. 영혼의 싫증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육체 속에서 게으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창조된 영혼의 기능이 부패해버리는데 그것이 타락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할 수 없는 노예적인 의지와 병행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운데 자유롭지 않는 것, 중독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은 마리화나에 속박 당합니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사랑의 방향이 망가진 것입니다.
중생하고 은혜의 역사가 있고 회개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자기 사랑을 버리고 여기에 이끌리는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3-2. 신자의 사랑의 풍성함이란 무엇이며, 풍성함으로 누리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졌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세상 것들에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강력하게 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기도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지식과 사랑은 양립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이 계속 부어질 때 사랑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게 됩니다. 지순의 사랑이 회복되면 기쁨으로 삶을 드리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쾌락, 이생의 자랑, 안목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을 다 버리게 됩니다.
4. 신자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리를 깨닫기에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순종하는 생활과 죄를 죽이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마음 안에서 자라기에 최고의 환경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있고 거기에 자신의 행함뿐만 아니라 마음 까지도 여기에 합치시키는 게 그게 진실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만족시키지 않고 거기에 자신의 마음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① 진정한 의미의 용서란 무엇이며, 그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다시 사랑의 교제를 시작하겠다는 결단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했던 말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들이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하신 말씀이 닮아 있습니다. 즉, 사랑은 용서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로부터 죄 용서를 받고 사랑하게 된 사람이 끊임없는 용서를 통해서 망가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잃어버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② 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은 나보다 없거나 연약한 사람을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들로 그들을 부요케 해서 같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치로 나타나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상대방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과 동일시하게 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섬김은 번성의 빛 아래서 이루어집니다. 신자들의 섬김은 일치를 통해 나타나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자연스러운 열매이고 유한한 자원을 함께 나누며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세우게 하는 것이 신자들의 섬김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자원이 되어서 사람들을 용서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용서, 관계 회복, 나눔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넉넉히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5. 신자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대조됩니다.’ 옛 계명이 십계명 이었다면 새 계명은 십계명이라는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은 것입니다. 사랑의 원리 속에서 그것을 지켜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랑의 원리를 져버리고 율법을 지키니까 지키지 못한 사람은 무시하고 지킨 자신은 오만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주셔서 그 사랑으로 상처 난 교회들을 치료하고 마지막엔 이 세계를 완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