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의 마음대로 행하는 자(삼상2:35上) 2000.8.23 수요예배 1
2. 아멘이신 예수님(계3:14) 2000.8.30 수요예배 14
3.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계3:14中) 2000.9.6 수요예배 22
4. 충성된 자들을 기대하심(고전4:2) 2000.9.20 수요예배 36
5. 치는 은혜(딤전3:13) 2000.9.27 수요예배 47
6. 충성되이 여기시는 하나님 Ⅰ(딤전1:12) 2000.10.4 수요예배 55
7. 충성 되이 여기시는 하나님 Ⅱ(딤전1:12하) 2000.10.11 수요예배 65
8. 충성 되이 여기시는 하나님 Ⅱ(딤전1:12하) 2000.10.18 수요예배 78
9. 충성된 자는 열심이 있다(딛2:14하) 2000.11.8 수요예배 91
10. 충성된 자는 흔들리지 않는다(고전15:58) 2000.11.15 수요예배 106
11. 충성된 자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고전15:58下) 2000.11.22 수요예배 122
12. 충성된 자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고전15:58下) 2000.11.26 주일오후 137
13. 의무를 능가하는 헌신 2000.11.29 수요예배 145
14. 충성된 자가 누리는 영적 친밀함(민12:6) 2000.12.3 주일오후 161
15. 충성하는 사람의 위험(민12:13) 2000.12.6 수요예배 186
16. 충성의 열매 착한 인격(민12:13) 2000.12.10 주일오후 198
17. 착하고 충성된 종 Ⅰ(마25:23) 2000.12.13 수요예배 208
18. 착하고 충성된 종Ⅱ(마25:23) 2000.12.17 주일오후 224
19. 착하고 충성된 종Ⅲ:“충성된 종”(마25:23) 2000.12.20 수요예배 233
20. 착하고 충성된 종Ⅳ: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종(마25:23) 2000.12.24 주일오후 249
21. 적은 능력, 큰 충성(계3:8上) 2000.12.27 수요예배 259
22. 충성을 입증하는 삶(계3:8下) 2000.12.31 주일오후 271
1.하나님의 마음대로 행하는 자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2:35上)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구약의 역사에서 한 중요한 전환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람이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변곡점마다 항상 거기에는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짚어 보고자 하는 이 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여러해가 흘렀습니다. 이미 가나안 정복 말기 때부터 여호와의 유일신 신앙이 약화되면서 그들은 점점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말씀하시고 본 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가나안 땅의 악한 원주민들의 신앙과 행실을 본받고 그들에게 동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야를 유리한 끝에 요단강을 건너며 병천지동하는 역사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위대한 일들을 행하던 때에 볼 수 있었던 단호하고 순결한 신앙은 거의 사라지고 그들은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이미 여호수아는 죽음을 눈앞에 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거침없이 불신앙을 향해 치달아 내리는 이스라엘 의 역사의 비탈길에 마주서서 유언과 같은 그 유명한 24장의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4달까지 유일신 신앙이 우리의 대안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여호수아가 죽고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본 모든 세대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대는 사사들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사들의 시대에서 넘어오면서 엘리라는 제사장이 등장하게 됩니다. 사무엘의 스승이었습니다. 사무엘 상서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서 슬픈 마음을 토하며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듣고 있던 그 늙은 제사장 엘리였습니다.
오늘 역사의 전환점은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고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할 때에 “엘리”를 실패한 제사장, “사무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엘리에 대한 편견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오늘의 성경으로 볼 때에도 엘리의 잘못의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그의 커다란 잘못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능멸한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써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도고하며 그들이 그 죄를 씻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용서받도록 그렇게 백성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 직무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회막안에서는 자식들이 회막을 수종드는 여자들과 간음했고, 그 자식들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가져온 제물들을 제사도 드리기 전에 가로채는 파렴치한 짓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 없는 짐승 같은 인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신의 고유한 직무를 하찮게 생각하고 그 고유한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던 이 제사장은 일찍이 없었던 멸문지화를 예고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문에는 대대로 노인이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잘못 섬긴 하나님의 저주가 대대로 이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모두 젊은 날에 요절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섬기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의 또 다른 중대한 잘못은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식을 훨씬 더 사랑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많은 사람들이 고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자기 자식들을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는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작정된 사람이었으니 필요하면 그 자식을 죽여 버리거나 아니면 그 자식과 절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마땅히 그렇게 행해야 했습니다. 왕도 없는 시대의 사사이면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백성들의 일을 결단력 있게 재판할 수 있었겠으며, 그리고 그들에게 도덕적인 삶을 규율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 지도자의 최고의 자질은 리더십이나, 조직력이 아니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력에 있어서 최고의 요소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교회도 버릴 수 있고 아내도 버릴 수 있고 자식과도 절연할 수 있는 사람, 필요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시고 나면 이 교회가 얼마나 폭발적으로 부흥을 보고 얼마나 엄청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셨을 것입니다. 그 큰 교회의 지도자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3번이나 부인한 그 베드로에게 물으신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과거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조직력이 얼마나 있느냐? 물으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Do you love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것을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인간의 차원에서 물으신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베드로를 대면해서 물으셨을 때,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수님도 아시고 베드로도 알았습니다.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내가 네게 있어서 전부이냐?” 이 질문입니다. 이것이 지도자로써, 하나님의 일꾼으로, 특별히 지도자로써 최고의 자질입니다. 이것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 없으면 나머지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것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는 자식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성질상 나누어지거나 덜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특이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면 사람의 속성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이 사람도 사랑하고, 이 사람도 사랑하시는데, 저 사람도 사랑하시는데,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사랑하시고, 성도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는 우리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아무리 다른 사람을 사랑하셔도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적은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도 모두들 다른 사람을 많이 사랑하시는 것을 보면서 시기하거나 혹은 저렇게 하나님이 신경을 많이 써 주시니 내 사랑을 저리고 퍼 가셨나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죠.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지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가정도 있고, 교회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있고, 이 세 개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리 여기에다 사랑을 부어도 여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저기를 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똑 같은 논리로 우리가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전능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 동기 자체가 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은 그렇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예를 들면 어떤 여성이 살았는데, 버려진 것처럼 살았습니다. 굴러다니듯이 걸레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전에는 술 먹고 담배 피고 몸이 다 망가지고 아무하고나 육체적인 관계를 가져서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삶도 사랑하지 않았고, 자신의 일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가정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열렬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몸이 너무 상했구나!” 그리고 건강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헬스클럽에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 몸에 않좋다는 것은 안 먹고, 젊어진다는 것은 뭐든지 먹고, 화장도 하고 그랬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순결한 삶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사랑하는 그 남성의 뜨거운 사랑에 몇 %을 띄어 내서 순결을 사랑하고 몇%를 띄어내서 건강을 사랑하고, 몇%를 띄어내서 미래를 사랑하고, 몇%을 띄어 내서 가정을 사랑하고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 여자가 뜨겁게 사랑하는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은 그 여자가 순결을 사랑하고, 건강을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보면서 질투해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때문에 예뻐지고 자기 때문에 건강해지고 싶어하고, 자기 때문에 오래 살고 싶어하고, 자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데, 그것을 왜 미워하겠습니까? 그것을 열심히 사랑하며 살면 살수록 그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더 강력한 소속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안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5월달에 가정 시리즈에서 “자식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일은 회초리 들고 쥐어 패고 발길로 둘러 채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처럼, 그 사랑의 환경 속에서, 교훈도, 책망도, 바르게 함도 모든 것들이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오늘도 어느 목사님과 통화를 하면서 정말 목회가 어려운 것을 느낍니다. 제가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정말 어렵다라고 느낍니다. 일이 많은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힘든 것입니다. 정말 어렵다, 너무 너무 무지한 것을 절감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의 그 사랑이 하나님의 대한 사랑을 깎아 먹은 사랑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엘리를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를 버리시기 전에 엘 리가 이미 하나님을 철저히 버린 것입니다. 저는 엘리를 보면서 슬픈 생각이 드는 것은 “어느 날 밤잠을 자는데 사무엘이 옵니다. 저를 부르셨어요? 저를 부르셨어요, 아니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갔습니다. 또 옵니다. 저 부르셨어요? 아니 안 불렀다니까? 또 옵니다. 그때에 엘 리가 가만히 생각합니다. ‘야! 하나님이 부르시는가 보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사무엘은 작은 소년이었습니다. 자기가 현재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제쳐놓으시고 그 소년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소년은 듣는데 자시는 못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주목해서 볼 제목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럴 경우에는 “제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소서!’ 이렇게 일러준 것을 보니까 옛날에도 엘리는 그런 경험을 가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풍부한 경험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끝까지 가 봐야 합니다. 마지막에 죽을 때 가 봐야 압니다. 지금 펄펄 뛰어도, 죽을 때 봅시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엘리가 그런 상황에 들어가기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 뿐만 아니라 엘리의 가문의 파멸로 들어가기 전에 영적으로 철저하게 엘리를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재산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유가 무엇입니까? 왜 믿음의 위대한 사람이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오. 나의 분깃입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까? 그 의미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요, 나의 분깃입니다.”
저도 저의 아버지께 받은 유산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희망은 별로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기업”, “할레크”라고 하는 단어는 “땅”입니다. 농경사회에서 땅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의 소작인들의 비참한 삶, 여러분들은 소설 같은데서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당해 보시지는 않았겠지만 읽어 보시지 않았습니까? 옛날에는 땅을 갖는 것과 함께 주종관계가 형성됩니다. 땅이 있으면 지배계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는 것은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오. 나의 분깃이십니다”이 고백의 의미는 농경사회로 들어가서는 전부라는 것입니다. 실감이 나십니까? 전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까? 우리가 무엇이 가진 것이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 엘리는 기업 되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 두 사람은 예언대로 같은 날, 전쟁에서 죽고 그 소식을 듣고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으로 섬기는 그 자리가 이제 이 사무엘에게로 넘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들이 잘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 때에는 그 사랑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사랑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그저 늘 숨쉬며 사는 동안에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지만, 몇 분만 질식하면 죽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안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완벽할 정도로 엘리 가문의 몰락을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성경으로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진리 하나를 터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이 여기고 그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엘리는 철저하게 이 점에 있어서 실패했고,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입니다. 하나님이 엘 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들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고유한 직무를 소홀히 하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엘리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는데,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사람입니까? 이것은 사무엘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러나 사무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엘리도 만약에 사무엘을 향해 기대하는 것과 같은 그런 사람, 그런 인물로써 하나님 앞에 살았더라면 역사의 전환점에서 이렇게 버림을 받는 사람이 안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지금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살피기 전에 “내가 나를 위하여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하나님이 “내 나를 위하여”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열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이것을 먼저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을 향한 사랑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 열심, 이것이 성경 전체를 덮고 있는 커다란 물줄기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쩌실 줄 모른다. 꼼짝 못하신다. 그렇다면 마음놓고 불순종도 하고, 대충 개기면서 살 탠데, “하나님의 영광”이것은 감당하기 너무 무거운 주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말씀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사랑밖에 다른 성품을 안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균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데 다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된다든지, 하나님의 사랑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렇게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제사장을 일으키리라”이것은 하나님의 엘리가문을 향한 뼈저린 감정을 인간적인 화법으로 하나님이 속 내면을 사무엘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읽을 수 있습니까? “네가 나를 위하여 , 이제는 나를 위하여”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이 살고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도록 가르치고 다스리고 지도해야 할 이 엘 리가 하나님을 전혀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당신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챙기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때에는 항상 이 땅에는 강력한 심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영광을 손수 챙기실 때, 그때에 강력한 심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교적인 놀라운 성과들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엘 리가 처음 부름받은 데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 섬기는 데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죄가운데 있어서 곤고하고 사하심을 받지 못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죄인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이끄는 이 일에 자신을 바치고 드리면서 살았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챙기시면서 엘리의 가문을 버리셨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제사장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셔서 거룩한 나라로 들어가게 하신 기한 빛에 대한 선전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제사장들입니다. 목사가 제사장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사장이 인생을 살 때에 인생의 가장 커다란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모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 지도자로써의 최고의 자질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깊은 고통과 분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분노입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본능적인 사랑, 하나님을 향한, 엘리가 잊어버리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되찾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되찾게 해 주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보면,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하시는 사람은 똑똑하고, 잘 나고, 잰 체하고, 돈 많고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초라해도 자신의 이름을 향한 그 뜨거운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 노아, 야곱, 요셉”이나 그런 사람들을 움직이는 그러한 중요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유능한 사람들, 능력 있는 사람들이 공통점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아주 강력하고도 생애적인 집착을 가진 사람들, 내가 살아 있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동안에는 내 앞에서 하나님이 모욕을 당한 것을 볼 수 없다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공통점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만 것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찬송가에서 작시자가 통곡하면서 우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깊은 탄식의 궁극적인 원인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슬퍼할 이유가 없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한 구석에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저마다 주의 일을 하겠다고 일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생명수는 말랐다고 통탄해 하면서 슬피는 우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그 열심을 분주한 사람들 속에서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영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안은 너무도 다릅니다. 그러면서 작시자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야, 그런 시각을 엘 리가 잊어버린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갈망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명감이라고 하는 것은 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사명은 자기를 보낸 사람에서 메여서 그 강제력 때문에 무언가를 하는 것, 그것이 사명입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그 일이 아니라 기원이 다릅니다. 물론 우리가 사명 받은 일을 할 때에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은 사명을 감당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래의 동기 그 자체는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누군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까? 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 할 정도로 자신의 사명에 메이게 하는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에 그 체험에 붙들려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는 그 신적인 강제력입니다. 이것이 가슴속에서 타고 오르기 때문에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데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 성화 되지 못한 모습을 인해서 존재 그 자체로써 누를 끼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애통하는 눈물이 없고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아가는 죄악된 세상에 이 타락한 풍조를 인해서 모욕 받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눈물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명이 없는 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못하게 해도 그 사람은 얼마든지 삽니다. 이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사명은 그 일을 못하게 하면 죽어버리는 것 그것이 사명입니다. 살아서 무엇하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데, 영혼들을 섬길 수 없는데,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데... 살아서 무엇하랴?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의 대한 열심히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는 이 점에 있어서 철저히 파산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입니다.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기다리십니다. 언젠가는 그런 열망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염두에 두다 주신 사람 사무엘을 기억하심이라 하신 말이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하는 자” “나의 마음 내 뜻대로 행하는 자”.
몇 주전에 기도하러 가서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미 어린 사무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공유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심오하고 신령한 교재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표증들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신앙생활에 껍질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럴듯한 교회생활을 한 꺼풀 벗겨 놓고 나면, 예배를 드리러 가는 모습을 보고 나면, 동기가 무엇인가? 그리고 또 하나 벗기고 나면 주님을 만나서 무엇을 느꼈는가?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나 하나 양파 껍질처럼 계속 벗기고 나가면 더 이상 벗길 수 없는 핵이 나옵니다.
“heart", "마음”입니다. 더 이상 벗길 수 없습니다.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 내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내 마음 내 뜻대로”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이고 “뜻” 무엇이냐?를 나누기보다는 그 뜻이 마음을 통해서 실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개는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의 전체를 움직이는 심장부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의지대로 움직이려는 것, 그것을 한꺼번에 결합시켜서 오늘 표현한 것이 “내 마음, 내 뜻대로”라는 표현입니다.
“내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엘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자식들을 안좋아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러 놓고 야단을 칩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갖지 않게 생각했는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인 엘 리의 입장에서는 자식을 죽일, 사형에 처 할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철저하게, 우습게 여김을 받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로써 자식한데 해 준다고 해 주었지만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것이 자기 자식의 인격에 맺힌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재산을 다 퍼주고 얼굴까지 성형 수술시켜서 매주를 클레오파트라처럼 만들어 주고 대학도 못 들어가는 놈을 외국에 갔다가 돈 쌓드러 가지고 좋은 학교는 아니지만 이상한 학교 나오게 만들고 이렇게 사회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끔 자리를 다 마련해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부모가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자식을 향한 농사는 마지막에 자식의 존재 자체 속에 맺히는 것입니다. 인격과 신앙에 맺히는 것입니다. 많이 물려주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아래 지방에서 유산 물려주지 않기 운동하는 것 아십니까? 한 교회에서 700명이 자기 죽으면 교회와 사회를 위해 물려준다고 각서를 썼습니다. 공증하면 그대로 지켜집니다. 자식들은 썰렁하겠지요. 그 썰렁함을 느끼기 전에 빨리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자녀의 사람됨을 위해서는 많이 투자를 해서 그 자녀의 신앙과 인격으로써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엘리는 그 점에서 철저히 실패하였습니다. 자식들을 그렇게 사랑했지만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견딜 수 없는 모욕과 자신의 사역,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삶, 모든 것까지 파괴하고, 마지막에는 가문까지 모두 초토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의 대한 형벌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마음을 심지어 몰락해 가는 엘리도 느꼈습니다. 누구든지 다 조금씩 느낍니다. 여기서는 단지 일상적으로 느끼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 내 뜻대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부은 바 되어서 하나님이 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하나님과 동일한 생각을 품고 행하는 사람, 하나님 대리인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이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노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는 그 시점에서 자기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그 시점에서 자기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그 시점에서 자기도 아파하는 그 하나님과 동일체의 마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일이 하는 사람, 그 사람입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내려가면서 마당이 왜 이렇게 지저분하냐 그리고 내려왔는데 세수하고 내려 왔는데 누가 마당을 깨끗이 쓸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유리창이 왜 저렇게 지저분할까? 생각하는데,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누가 와서 세정제를 뿌리면서 깨끗이 반짝 반짝하게 닦아 놓는 것, 그것이 내 마음입니다. 내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 ‘이렇게 살아라’ 나는 당신의 명령을 듣지도 않거니와 순종하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순종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겠습니다만 은 순종에 대해서는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듣기는 하고 순종하려고 는 했지만 온전한 순종을 못하는 사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키는 대로하는 사람, “옮겨, 예, 도로 갔다 놓아, 예, 더 빨리” 하나님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 슬퍼 하실까? 왜 슬퍼 하실까 ? 나의 이런 모습을 슬퍼하실 꺼야? 아! 이것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나의 이러한 모습들 때문에 우리 주님을 아프게 하다니?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한 마음입니다. 온전하다고 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구약성경에서는 “완전한 자라”, 노아를 보고 “당세에 완전한 자라”라고 하는데, 사실은 인간에게 쓸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이가 글짓기를 써 왔다고 합시다. 10살짜리가 기행문을 썼는데 기가 막힙니다. 선생이 보면서 “이것은 완벽해” 이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전세계의 노벨상 받은 작가들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10수준으로 봐서 완벽한 것입니다. 교회의 일을 시키면 무엇을 하잖아요. “잘 했다, 완벽하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포스터 한 장을 만드는데 인류 기업체에서 용역을 주어서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로써 근근덕신으로 만든 수준으로는 완전하다 그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쓰여진 말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것,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잘 알지 않습니다. 오늘 처음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예수 믿기 며칠 안된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아 참 순전한 믿음을 가진 자로구나”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 모두가 그 사람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 수준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수준에서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오래 할수록 신앙의 수준이 굉장히 높아집니다. 한없이 높아집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런 하나님의 마음, 그런 온전한 하나님의 마음을 상대적으로 전수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신앙의 경력이 얼마나 되었는지? 엘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그 제사장으로 부르셔서 그를 경험하게 하신 소명의 체험과 이 모든 것들을 비교할 때에 거의 모든 것들이 온전한 마음이 없는 것들처럼 마지막에 다 망가져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십시오. ‘노아’, ‘아사’이런 사람들은 완전한 사람들입니다. “다윗” 이런 사람들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순전히 하나님을 쫓아 다녔다라는 수식어들이 따라 다니지만은 “노아”가 나중에 하는 짓을 보면 술 먹고 정신 못 차리는 주정뱅이고 바뀌었습니다. 아사도 일평생 하나님을 온전히 추구했다고 말하지만 병나서 죽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보다 의원을 더 의지하였더라하고 죽지 않습니까? 다윗은 간음죄 짓고 나쁜지 하잖아요? 이것이 결국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은혜, 그 사람의 진리의 수준에서 기대하시는 그 온전함을, 그리고 그 시대도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어디서든지 찬란한 진리의 말씀을 듣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수준이 높으실 수밖에 없고, 귀를 씻고 들어도 참된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시대에는 어떻습니까? 그러다가 돌연변이 하나가 “예수 십자가에 사랑에 놀라워서 우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도 참 감격스러우실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그 시대는 어떠했습니까? 엘 리가 그러했으니까 그 이하의 엘리의 다스림을 받던 모든 백성들도 함께 그렇게 썩어갔을 것입니다. 그때의 한사람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하는 사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애틋하고 간절한 소원을 읽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 시대에 우리 중의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 시대의 어떤 사람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그리고 자기를 비롯한 온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고, 바램이고, 기대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으냐 하면 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왕들이, 두 왕국에서 떠올랐다 사라지고 떠올랐다 사라지고 그 수많은 제사장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지만은 하나님이 그런 평가를 내려준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에 불가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커다란 돌멩이를 움직일 때,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고 흔들 수도 없는 바위인데, 지렛대를 가져다가 꼽고 무엇을 괸 다음에 쇠파이프 같은 것을 가져다가 지렛대를 기다랗게 삼아서 움직이면 대 여섯 명이 움직일 수도 없는 커다란 바위나 물체를 한 사람이 것든히 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끔 온전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자신의 보람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역사라고 하는 큰 바위를 움직이는데 있어서 지렛대 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상황을 너무 절망적으로 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결단나고 초토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지렛점 하나가 확실하게 있으면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느 물리학자인가, 천문학자가 그랬습니다. 나에게 하나의 지렛점과 긴 지렛대를 달라 지구를 흔들어 보여 주겠다. 물리학적으로 가능한 모양입니다. 흔들지 않기를 다행이지, 우리를 흔들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몸이 아파서 닝겔을 맞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위에서 액이 흘러 들어오는데 기운이 없었는데, 몸이 안 좋은 사람은 주사약을 넣지 않습니까? 빨간 주사약이 말입니다. 물을 타고 혈관으로 들어옵니다. 들어오는 구멍은 한 구멍입니다. 그런데 온 몸에 퍼지면서 그 사람을 소생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교회, 여러분들의 가정, 직장, 가문의 문제, 이것이 절망적으로 커 보이는 문제여도, 치명적일 정도로 모두 와해 되어버린 상태, 소생의 가망성이 없을 것과 같아도 하나님이 한 사람 자신의 마음,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절망적인 상황을 뒤엎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지렛점으로 사용하셔서 이제 이 사사기가,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의문 투성이의 책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사사기를 보면서 어떤 이론을 제론 하느냐 하면, 창세기 다음에 이것이 오는 것이다. 이 앞에 나오는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여호수아,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이성계가 위하도 회군을 하고 나라를 만들었는데 아무도 자기의 가문을 알아주지 않으니까, 해동육명이 나라왔고, 일마다 복을 주시고 해서 자기 조상쩍부터 하나님이 무슨 왕가로 점지했던 것처럼 했듯이 그렇게 조작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을 조작해서 성경 앞으로 보내 놓은 것이 모세오경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논거는 이것입니다. 아무리 사사기를 읽어봐도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동질성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한때 유일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라고 하는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교가 거꾸로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다신론사상인데, 다신론에서 일신론, 일신론에서 유일신, 진화론적으로 가는 것이지 거꾸로 내려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야훼종교의 영적인 특성의 무지함의 결론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예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다. 어쩠다. 하는 수없이 많은 신앙고백을 했어도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관계의 은혜 속에 멀어지고 나면 우리는 사실상의 유일신을 고백하지만 사실상 삶에 있어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유물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타락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는 인간이 있었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도 지도자라고 하고 믿었던 한때, 하나님 자신을 깊이 경험하게 하셨던 엘리까지도 그 가문까지도 모두 속속들이 썩어서 하나님의 심판아래 들어가게 되었을 때, 누가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사무엘” 그 사람을 통해서 다 죽은 이스라엘의 혈관을 타고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무엘에게 있어서 다 죽은 이스라엘은, 거의 죽은 이스라엘의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날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축복 받은 것입니다. 거들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복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철호의 찬스입니다. 만약의 여러분들의 부모가 걸출한 신앙생활을 하고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었다면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들은 아버지만 못하였더라 그것밖에는 보여 줄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전에 모시고 있었던 목사님께서는 미국유학을 하였는데 게르하를드 보스라고 하는 유명한 복음주의 성경신학자가 있었습니다. 50년에 한명정도 나올까 말까한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그분의 하시는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학문이 깊으신지, 그 분이 쓰신 책이 50넘어 60년이 넘었어도 교과서로 쓰일 정도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그 분의 책을 읽으면서 그 분을 한없이 존경했는데, 유명한 대신학자였습니다. 아들은 찰스 보스입니다. 저 시골에 있는 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신학교의 선생이었습니다. 그 분의 아들 보스의 손자, 요한네스 보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얘는 나하고 공부를 했는데 영 아니야, 그렇게 될 경우 어떻습니까? 그래도 가문이 후 졌으면, 그 집안에 목사 하나가 났다 그러는데 가문이 워낙 쟁쟁하니까 웬만큼 해 가지고는, 그래도 신학교 선생이라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전 세계를 뒤흔드는 아버지의 명예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요즘 가문의 저주를 끊어라, 어쩌라 그러는데 뒷다리 긁는 것 아닙니까? 소용없는 것입니다. 뭐가 어찌되었다는 것입니까? 왜 조상들 탓하냐하는 것입니다. 잘 살면되지, 백번 양보해서 그런 일들이 있다고 합시다. 3-4대까지 저주를 받았다고 칩시다. 이젠 내가 잘 살아서 천대 만대 복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똑 바른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 멍청하게 조상 탓하고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무엘을 보면서 한없이 사무엘을 측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처지 아닙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분들처럼 진실한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 얼마나 복된 사람이었겠습니까? 말하는 대로들을 것이요, 말하는 대로 순종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외쳐도 듣지 않는 그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유일신 신앙을 새까맣게 잊혀졌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이 싫어서 왕을 요구할 불신앙이 백성들이 자라고 있는 다 죽은 이스라엘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얼마나 슬픈 사실입니까? 그런데 슬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바로 다 죽은 역사를 자신을 통해서 살리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사람”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늘 사는 것, 이것이 순종하는 삶의 관권입니다. 신앙지키기는 다른 말로 “마음 지키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단이 신자의 삶을 와해시킬 때 제일 먼저 마음을 공격합니다. 인간은 마음에 없는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절대 못합니다. 마음에 없는 짓은 못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잘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배우들입니다. 그 사람들도 마음을 수시로 바꿉니다. 사랑하는 애인하고 헤어지는데 왜 그렇게 울 수 있냐고 하니까? 4학년 때 돌아가신 아빠 생각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꾸며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의무감만으로는 안됩니다. 의무감만으로는 안됩니다. 의무감도 필요한데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되지도 않거니와 그것만으로 순종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노예적인 신앙생활이지 하나님의 자녀된 양자의 신앙생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경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피흘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 하나님의 눈빛 앞에 살아가는 행복, 그리고 주님이 나를 위해 어떻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사모함, 늘 이런 것들을 회상하고, 전망하고, 새롭게 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을 세우십니다. 참 놀라운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똑 같습니다. 사도들을 세울 때, 베드로가 “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마음의 관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절망적이어도 절망하지 마세요. 소망을 가지세요. 여러분이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면 그 상황을 여러분들을 통해서 바꾸는 것입니다. 죽음이 가득한 그곳에 다시 여러분들을 통로로 하나님의 생명의 물이 흘러 들어가서, 황폐하던 정원에 꽃피고, 새 울고, 벌래가 다니고, 새들이 노래하는, 향기로운 정원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죽음이 깃들었던 그곳에 다시 생명을 주고, 부패한 그곳에 다시 소생함의 역사를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상황에 절망하면 소망이 없고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에 부패함과 그런 것들을 절망하십시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늘 하나님의 만져주심,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2.아멘이신 예수님
“라오디에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3:14)
앞부분에는 먼저 예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시기 전에 아시아에 있는 7개의 각 교회를 판단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교회는 칭찬, 어떤 책망, 어떤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불행하게도 칭찬보다는 책망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관심을 끄는 것은 7개의 모든 교회를 평가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도요한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7개 교회마다 당신 자신을 소개한 내용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는 예수님 자신을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는 이것이 각 교회의 처한 영적인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의 영적인 상태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이런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아멘“이셨다는 사실과 ”참되고 충성된 증인“이셨다는 사실과 창조의 근본이셨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멀리 올라가면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상세하게 소개한 커다란 자료에서 예베소 교회에서 비롯해서 일곱 개에 하나하나를 뜯어서 나누어주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와 신앙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시기 전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멘“이었다고 상기시키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어떤 점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그들이 아멘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멘이었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라오디게아교회를 통해서 상기시키신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아멘이셨던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 앞에 “아멘”으로 살아가 하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아멘”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히브리의 말입니다. “아멘”은 부사인데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아만”은 “굳게하다”는 뜻입니다. “굳게 하다”가 부사로 쓰입니다. 이것은 ‘굳게, 분명하게’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면은 “아멘”하는 것은 “그렇게 확실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나 선포된 진리에 대해서 혹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전적인 동의를 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모든 신앙고백이 그런 것처럼, 삶이 동반된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집회에 갔더니 “여러분, 아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멘” 도대체 설교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아멘’ 설교가 심각하게 가는데 계속 “아멘,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발 하지 마세요” 산란해서 설교를 할 수 없어요. 다 모았다가 한꺼번에 하라고, 한꺼번에 하는데 예배 시간에 하지 말고 “Say 아멘 by your life." "당신의 삶으로 아멘하라고” 이것이 무엇을 하는지 졸다가도 “아멘 ”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멘”이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삶에 대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이 아무리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화목재물로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대속재물로 삼으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하셔도 아들이 아멘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계적인 강요나 기계적인 파송에 의해서 그렇게 강제적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는 목숨을 스스로 버리노라” 이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에 대해서 동감을 표하는 것입니다. 이 아멘이라고 하는 것도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너무도 싫어요. 정말 싫어요. 이제까지의 모든 신앙의 지식을 동원해 볼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런데 나는 너무 싫어요. 그래도 행동으로 순종하는 것 이것은 아멘입니다. 이것은 낮은 수준입니다. 이것도 아멘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이 두 개는 비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종의 첫걸음은 자기의 뜻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딱 꺾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득이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살고, 풍부한 인격 속에서 살 때에는 설득이 됩니다. 이미 마음 밑바닥에는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살고자 하는 총체적인 지각능력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설득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말씀도 정확하게 가르치고 마음속에 그리고 머리 속에서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판단이 되면은 머리와 가슴사이에 커다란 장애물이 없습니다. 바로 가슴으로 내려와서 “아멘”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다스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에 의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런 은혜 속에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실 때에는 나는 좋은 것입니다. 그때 설득을 하려고 해도 이미 이 속에서 내적인 순복의 자세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설득이 안됩니다. 머리 속에서는 그것이 옳다고 하는데 내 마음속에서는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려와서 가슴속에서 폭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래도 미래에 쉽게 순종하는, 그래서 머리 속에 있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라고 하는 생각이 가슴으로 내려와서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꺾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픕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내주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이것은 은혜 안에 있는 성도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이 즐겁고 복됩니까?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복된다면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설득을 통해 아멘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있지 않을 때에는 분질러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선행이 후 마음이 따라옵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년들이 좋은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고 해서 부지런히 갔습니다. 갔더니 몇 사람이 와서 “목사님! 오늘 몇 시에 끝나요?” 물어 보는 것입니다. 강사한데 그런 것을 물어 보는 것이 실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얘들이 몇 시에 끝나는지 물어보나’ 자세히 보니까 자기들끼리 무엇인가를 꺼내어 가지고 열심히 ‘이거 몇 시에 가는 거냐?’ 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까 극장표 몇 장 들고 이 시간 끝나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 따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가고 싶은 것이지요. 그때에는 가장 손쉽게 아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찢어 버리는 것입니다.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면은 극장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저녁 집회에 은혜를 받습니다. 전혀 동의를 안 하시네요. 낮은 차원의 아멘이지만 이것은 굉장히 유용한 아멘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이 아멘이셨다고 하는 이것은 그런 차원의 아멘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시거나 나에게 보이신 뜻이거나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알리셨을 때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아멘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아멘입니다. 예수님이 그런분이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주님께로부터 이 세상을 위해서 보냄을 받도록 평화의 언약을 맺도록 하실 때에도 그러했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실 때에도 그러하셨고 그리고 오신 후에 33년이라는 긴 생애 동안에 고난과 박해를 받으시면서 머리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알았고,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참된 가치는 자신이 화목 제물로 들려져서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 대속하시는 것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최고의 가치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들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서는 견딜 수 없는 커다란 희생과 고난을 당신 자신이 지불하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자신의 희생, 두 가지를 놓고 저울질하면서 아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겸비함, 아니 비참한, 하나님이신 그분이 촌 여자의 태를 빌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그 비극에 가까운 출생, 가난과 궁핍속에서 고난과 질고를 겪으면서 일생을 사시고 마지막에 죄인들처럼 비참하게 죽으시는 그 고난,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내려오신 예수님에게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큰 일이었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고난을 초월하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고 비참한 것은 비참하게 되는 것이었고, 머리를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는 것은 그분에게는 외로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적은 것은 아니었고 그것이 작은 희생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에 대해서 아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당신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대신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라고 물어 볼 때에 형제여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아멘”이셨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완벽한 생애에 대해서 어떤 생애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신은 죽고 주님은 사신 생애, 자신의 뜻은 버리시고, 아버지의 뜻을 취하신 생애, 자신은 잊혀지시고 하나님의 이름은 알려지게 하신 생애, 그런 생애였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살아야할 아멘의 생애를 누가 대신 살아 주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면 아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서게 해 달라는 세베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마는 자를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 예 우리도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들은 척도 안 하셨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예수님이 해야 할 그 아멘을 그 사람들이 대신 ‘아멘’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누구든지 심정적으로 볼 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내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네 십자가를 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더군다나 주님의 사람으로 인처 주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여러분이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고 그것을 쉬운 말로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 대신 아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내 자리에서 내 짐을 지고, 나 홀로 아멘할 수 있습니다. 대신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 아멘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주님을 닮고 변화되는 것이야말로 구원받은 이후에 여러분들을 향해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소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십자가 였습니까? 성질을 날마다 죽여야지요. 주님이 안 계셨더라면, 아니었더라면 용서를 빌만한 잘 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가서 무릎을 꿇고 화해를 청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죽입니다. 누가 대신 질 수 있는 아멘이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대신 질 수 있는 아멘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아멘 함부로 하면 싸움 납니다.
학교에 있을 때, 어느 교수님이 아주 좋은 차 새 것을 내었습니다. 학생들이 차를 몰고 들어오다가 내가 차주라도 화를 내겠더라구요. 아주 반짝 반짝합니다. 다 떨어진 봉고가 와 가지고 우지지직 긁어 버렸습니다. 아주 충분히 긁었습니다. 부--욱, 그러니 새차 몰고 와서 거기에 대 놓았는데 얼마나 열이 바치겠어요. 그래도 목사인데 화가 나도, 누가 그랬지, 누가 그랬지 그래야 되는데,, “누구예요. 누구예요” 방송을 하고 난리를 치고, 봉고는 걸레였지만 운전사는 신자였습니다. 자기가 그랬노라고 왔습니다. 그 현장에는 없었지만, 그 목사가 가난한 신학생에게는 어떻게 고쳐 달라고 하겠어요. 몇십 만원인데, 야단이나 치고 주위를 주고 사고 났으면 즉시 주인을 찾고 사고를 하고 그러면서 야단을 좀 치고 신경질을 부리고 난 다음에 면제부를 주려고 했나봅니다. 옆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지, 가만히 있으면 그러다가 끝날 탠데, 그 뭘 그러시오? 그리스도 사랑으로 용서하지? 하나님의 신학교에 와서? 둘이 멱살을 잡고 싸웠습니다. 자기차 긁었을 때 그렇게 하라고, 자기가 당했을 때 그렇게 하라고, 남이 그랬는데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오. 그것이 뭐요. 그렇게 될 정도로 성화가 덜 된 분이 멱살을 안 잡겠어요. 그 학생은 그러다가 살며시 없어지고 둘이서... 나중에 이 양반이 나를 붙들고 ‘김교수님 뭘 잘못됐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라고 했는데...’
자기의 십자가에 자기가 아멘을 해야지 남의 십자가에 대해서 아멘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 내 동생 훈이 순교하도록 도와주세요!’ ‘누가 그 기도하지만 죽기 싫어’,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아멘을 해야지요.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멘해야 할 그 자리는 여러분만이 아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멘의 생애를 살 때에 여러분을 통하지 않고는 여러분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아멘 하면 이루어지고, 여러분들이 아멘하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특히 가정의 문제는 놀랍습니다. 가정이 망가지고 있을 때에, 항상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 엄마 아빠, 남편, 아내 상관없이, 하나님이 영적으로 그 가정을 고치는데 통로로 딱 한사람을 삼으십니다. 그 가정의 진정한 행복은 그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자기는 죽고 아멘의 생애를 잘 살면 치유가 됩니다. 이 사람이 안하고 딴 사람이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예 물 건너가는 가정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나 아멘을 해야할 부담감을 주는 것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해야 할 자리는 나밖에 누가 아무도 대신 해 줄 사람이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삼일동안 신통치 않게 살고 여러분들이 여러분에게 대답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 않고는 자신에게 아멘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성질로 인해 말아먹은 우리 가정, 그것을 내가 치유해야 해야 합니까? 우리 엄마 바람나서 쪼개진 가족들 눈물을 닦으면서 싸메야 합니까? 나도 피해자 인데, 남편이 노름하고 나쁜 짓 해서 다 쪼개진 가정을 위해서 피해자인, 당사자인 내가 그 남편을 쓰다듬고, 위로하고, 용서하고 해야하느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은혜를 주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런 생각을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크고 기쁜 사랑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풍부하게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공히 자신이 아니면은 도저히 대신 아멘해 줄 수 없는 그런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다고 하고 생각할 수도 없고 대신해 줄 수 없다고,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역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심성에 대해서 죽다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목회 사역을 하다가 사명을 감당 못해서 떠나갔다던 지, 죽어버리든지 합니까? 그 사역지에 후임자가 옵니다. 그리고 교회는 다시 흘러갑니다. 이것이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 아니면은 누가 대신 아멘할 수 없는 모든 자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중압감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인터넷에도 목회자의 소명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머니가 소명을 받았는데, 할머니보고 목회자 되라고 하세요. 할머니 보고 하라고 하세요. 어머니가 얘기가 없어서 아들을 주기만 하면 목사 만든다고, 어머니보고 하라고 하세요. 오죽 못났으면 그런 것에 메여서 목사가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깨닫고 나서는 내가 아멘하지 않으면 안돼는 자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자리가 주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저 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해 주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 같다라고 하는 아주 현실적인 강박관념과 고통, 이것이 소명의 표증입니다. 꿈꾸다 신학교 정문 보는 것이 소명이 아니고, 개 꿈 꾸다가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 사랑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자유합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자유합니까?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내게 증거하기를 환난과 결박이 내게 기다린다 하신다 그러면 가지 말아야지, 그런데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메여 있는 것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에 메여 있는 것입니다. 죄에 메여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아니면은 누가 그 자리를 지킵니까? 세월이 약이겠죠? 신앙의 세계에서는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 하나님 앞에 진실한 성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영혼의 비추임이 없이 세월이 흘러가는 것는 약이 아니라 신앙의 생활에서는 독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진 가운데 세월이 흘러가면 아주 몹쓸 그리스도 인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한 말입니다. 아주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내가 아멘 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대신 아멘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세월도 아멘하지 않습니다. 항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정말 이 장면을 볼 적마다 가슴에 깊은 감동이 옵니다. 우리 주님의 별명은 아멘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자기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생애 전체,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당신이 보시기에 당신이 사랑하는 그 외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셨겠습니까? 죄와 반역과 하나님을 향한 도전, 하나님을 향한 무지가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생애는 아멘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 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삶은 울고 웃으면 사는 삶입니다. 죄악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한없이 기뻐하고 아직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가슴아파하면서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통곡하면서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사는 삶입니다. 구원받은 자녀에게 있어서 눈물 흘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피흘리는 삶은 사는 것도 바로 바로 눈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성도 아무게 아무게는 하나님 앞에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화려한 신앙의 경력, 많은 지식,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커다란 명분, 그런 명예 그것은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멘의 생애는 영원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아주 의미 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런 아멘의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소원이 아니라 당신이 마음속에 간절히 가지고 계시던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 뜻을 보이실 때에 아멘하기를 즐겨하시던 그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멘의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은 눈만 뜨면 우리를 얽어 메거나 우리를 송사하는 이 고쳐져야 할 상황이 변화되지 않고 있는 이 무기력, 이것은 그 환경 자체가 우리를 굉장히 정죄하고 우리로 하여금 빗줄기에 바위가 폐이듯이 우리의 믿음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기도해도 변화된 것이 없고, 가족을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했지만 여러해 동안 기도를 했지만 아무 것도 변화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영적인 어려움을 위해 하나님 앞에 늘 있지만 여전히 진전이 거의 없을 때, 그때에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묻습니다. 이렇게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진전도 없는 그런 비참한 삶, 그런 것들이 깊이 파들어 가면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데도 하나님이 특별히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러시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의 삶이 자리에서 아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진전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리멸렬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지식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깨닫는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은 삶의 아멘의 자리로 건너갈 다리일 뿐입니다. 금박으로 그린 약도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은박으로 찍은 약도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칼라의 약도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세하고 정확한 약도입니다. 정확한 지도, 그것의 목적은 그것을 걸어 놓고 즐기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지리멸렬한 삶, 이따금 은혜를 받을 적마다 저것이 원수구나, 저것이 나의 신앙에 있어서 여리고 성이구나 무엇이 적이고, 무엇이 무찔러야 할 대상인지는 명쾌하게 발견하지만은 그러나 더 이상 실제적인 상황의 진전이 없는 이유는, 삶의 자리에서 아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깨닫기는 해도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두루마리 속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처럼 사셨습니다. 그분의 생애가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나만 아멘하면 많은 사람이 살고 나만 아멘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는데, 내가 아멘 하지 않기 때문에 지리멸렬한 신앙생활,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앙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거의 망가진 생활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전한 순종보다, 즉각적인 순종이 더 중요합니다. 즉각적인 순종은 결국은 완전한 순종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순종이 아니면은 즉각적인 순종도 없는 신앙생활보다는 불완전한 순종보다도 즉각적인 순종이 있는 신앙생활이 낳지만 그러나 가장 완벽한 아멘의 삶은 즉각적인 순종과 함께 완전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생애 그런 생애, 그러면 우리의 삶속에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비인간적으로 살고 이성이 없는 짐승처럼 살고, 비정상적인 상태 속에서 이 세상에서 정말 천사와 결혼해서 살아도 안되겠다 저 인간 안되겠다. 천사가 저 사람한데 시집을 오냐만은 그럴 정도의 사람도 참 놀라운 것이 완전한 아멘의 자리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고치십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고치십니다. 말씀이 위대하다라고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그분의 존재는 그것으로 집약되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이 로마서 1장에 보면 “믿어서 순종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우리의 별명도 아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인간들이 얼마나 속속들이 부패한 존재인데, 그렇게 쉽게 아멘이 되겠습니까? 이것을 틀렸습니다. 이것은 아멘한 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말씀에 대한 지식도 늘고 , 신앙에 대한 틀이 잡혀서 경건해 지고해서 그러는데, 옛날 보다 삶의 자세라든지 이것이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경건해지고 성도다워졌는데도 무엇인가 굉장한 무기력 속에 들어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자신이 그 삶을 버팅이면서 그 삶 자체를 고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너무 없다라고 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멘이 부족할 때입니다. 아멘은 삶속의 아멘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영적인 충전을 하는 한 방법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소개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멘’이요.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아멘’이라는 말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때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아멘하지 않으니까 눈 먼자들이 되었고 그리고 육신의 것으로 영적인 부요함을 자랑하는 그런 불쌍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눈앞에 둔 그런 교회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입에서 토해 내고 싶을 정도로 역겨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 주님이 아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속에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영역을 힘차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의 능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놀라운 역사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우리의 심령이 살지만 그 더 이상 진전이 없을 때에는 정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굳어지고 잠들고, 생명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멘의 생애가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울리고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화를 끼쳐 줄 것 같으면, 삶에 동반되는 깨달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영적인 삶에 있어서 어떤 진전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이 아멘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아멘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계3:14中)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아멘이셨습니다. 그분의 별명이 아멘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멘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가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즉시 그분이 메시야이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예수님을 만류하면서 내가 세례를 당신에게 받아야 할 터인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면서 세례 주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세례를 내게 베풀어라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하나의 공생애에 들어서면서 단초가 될 뿐이지 예수님의 생애의 전체는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자신을 소개하는 가운데 아멘이시오 라고 먼저 소개하였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라고 두 번째로 소개하였습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나 예수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거꾸로 되어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나 예수로 말하자면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니라. 그리고 두 번째로 나 예수로 말하면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다. 나 예수로 말하자면 아멘의 생애로 산 하나님이며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순서가 뒤집어져 있습니다. 아멘의 생애 그것이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세계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주시고 싶으셨던 핵심적인 메시지의 본질과 관련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얘들아 나는 하나님 앞에 아멘이었단다” 라고 소개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들에게 그 메시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든 영적인 상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든 부패한 신앙의 상태를 볼 때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아멘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깨닫는 사실은 부패한 신앙 속에는 아멘이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멘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우리의 하나님과의 친교를 제는 정확한 측정수단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뛰어난 영적인 인물들의 외적인 삶의 특징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 전 방위적인 삶에 있어서 총체적인 순종을 지향하면서 살았던 삶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면서 사랑의 교리나 들먹거리면서 이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순종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지금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수 있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헛된 욕망과 그리고 나의 인간적인 결점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아갔던 것을 회상하면서 그런 교리를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하나님 은혜로우신 분이신라는 교리를 오늘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일에 하나의 자원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이것은 배역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거기에서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마음,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하시려고 하는 일들에 대한 그 사역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소원함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이것을 이중의 인침, “더블 실링” 앞에 부분은 관계, 두 번째 부분은 실제적인 생활의 부분입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는 내가 기뻐하는 사람, 저는 이를 기뻐하는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순종이기도 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며 사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 삶,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순종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멘입니다. 아멘의 삶입니다. 그것을 라오디게아 교회가 먼저 들어야 했습니다.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호소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곤핍함을 호소하면서 괴로움을 호소합니다. 마치 통증을 느끼는 환자가 병원에 와서 하소연을 하듯이 말입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영혼의 질병과 고통을 종식시키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더 이상 불순종하지 않는 아멘의 생애를 사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침체를 벗어나는 길에서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은 결코 정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쓰고 그리고 사악한 육체의 욕망을 쳐서 복종시키며 순종의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 죄인이 평강을 누린다는 약속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라오디게아 교회가 먼저 들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특히 신학교에 들어가서 교수들 사회에서 더더욱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도 성경공부 많이 한 사람들, 교회 생활에 열심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문제를 발견합니다. 문제는 철모를 보면 옆에 쇠로 되어 있고, 그 쇠 속에 양철이라고 하면 너무 심하지만 철판으로 되어 있고, 그 속에 화이바가 있습니다. 저는 전쟁을 못해보았기 때문에 경험은 없지만 그런데 전쟁에 참여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땅”하고 총알을 맞으면 철모를 뚫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들어와서는 속에서 “팽”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뚫고 들어와서 이것이 화이바는 뚫지 못하고 철판은 뚫었는데 속에서 팽그르르 돈다는 것입니다. 모자를 뒤집어서 열어보면 조그마한 총알이 나온다고 합니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펑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닌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야 전쟁에 왔다 갔다 한 사람이고 나야 육군 사관학교에서 마당이나 쓸던 방위였으니까. 남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야죠.
똑 같습니다. 얘기는 많습니다. 논란도 많고, 논쟁도 많습니다. 말도 많습니다. 그리고 복잡합니다. 꼭 총알이 관통하지 못하고 모자속에서 도는 것처럼 매일 도는 것입니다. 진전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듣기는 듣는데 계속 듣는데, 더 이상의 진전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무엇을 한다고 돌아다니기는 하는데 영혼의 핍절함은 여전합니다. 자신은 마치 하나님의 위해서 혼자 사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아무도 그를 혼자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우리 속에 없는 그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문제들은 모두 삶에서 비롯됩니다. 삶에 있어서 총체적인 순종을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의지가 결박한 것입니다. 그런 의지가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정사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살피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되는대로 그저 상황에 떠밀리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아멘의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예수님이 무수한 성경구절을 인용하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성경에 기록된 바를 수없이 되네 이시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은 단지 우리들에게 감화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내면에서부터 외면의 삶에 이르기까지 그 완전한 복종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사시려고 하는 아멘으로 충만한 생애였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전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해 지려고 몸부림치는 그 욕구 없이는 결코 성화에 있어서 진전이 없습니다. 그의 성화에서 진전이 볼 수 없다는 얘기는 하나님께 속한 그 친교, 그런 것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까 물으면, 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것과 같았는데 지금은 내 안에 계셔요라는 친교가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과의 신령한 친교가 사라지고 나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물질은 사랑하고 영적인 어두움에 빠져서 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아멘이니라” 이것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든 이 문제를 다 설교하지는 못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깊은 성찰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충성되고 참된 증인시며 “말튜스”라고 하는 증인은 법정적인 의미의 증언입니다. 히브리말로 “에드”라고 하는데 여러분 성경에 보면 “몇 사람의 증인으로 증언할지니라” “증인이 있어야 할지니”, “증인의 얘기를 듣고 판결한 지니라” 증인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 바로 이 “에드”가 “말튜스”라고 하는 증인입니다. 법정적인 구속력을 갖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증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증인”이라고 말하기에 앞서서 그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증인”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의 죄를 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를 잘 살펴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듯이 예수님의 생애는 지식으로 새롭게 하신 생애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무조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시기 전에 먼저 당신이 만나는 수많은 인간들에게 참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증언하셨고, 당신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증언하셨으며 그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자신이 이 세상에 보내셔서 자기를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지에 대해서도 증언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당신 자신 자신과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과 구원의 방법과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의 삶과 생애, 그리고 죽음 저 너머의 진실에 대해서 증언하셨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법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이 우리를 통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증거를 하고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참되게 증거를 하고 그 증거를 사람들이 믿으면 구원을 얻거니와 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면 우리의 전하는 이 복음을 농담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을 장난처럼 생각하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심판 받은 채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토요일날 열린신문 하나들고 아파트 갈 때에 세상에 외판원을 해도 그렇게 서러울 수는 없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만나는 것이 전도하는 사람들이고 물건 팔러 다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면 야단하고 내 쫓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아파트 경비를 몰래 피해서 아파트 한층 한층을 올라가면서 신문을 하나 꼽으면서 신문을 두드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거기에 서 있는 증인입니다. 대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신부름꾼입니다. 권위를 가진 심부름꾼입니다. 이것 하나에 인생전체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신문하나에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십자가의 못 박하시기 전에 철저히 증인으로써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마다하시고 마지막에 죄인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난 그 자체가 당신 자체가 하나님이심을 들어내는 보여주는 증거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온 하늘이 어두워지고 캄캄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도 동일한 기사가 나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는 더 상세히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 무덤들이 터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이변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백부장이 말하기를 “그는 정녕 의인이었도다”하리라.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자체가, 증인으로써 증언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시라는 것과 부활하심으로써,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증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 보면은 사도들이 고백하기를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대한 증인이요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니라” 성령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인이시다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상기하여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깨닫는 사실 하나가 이것입니다. 부패한 교회에서는 복음의 성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복음의 승리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속속들이 썩어 있고, 물질주의에 빠져 있고 깊이 병들어서 영적인 어두움에 빠져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얼마 안돼는 품돈으로 하나님 앞에 교만하며 사명을 잃어버리는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복음의 승리를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모두 교회 속에서 하나의 회원 됨을 enjoy하는 것이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에 복음에 의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동일체성을 가지고 이것을 역동화 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강력한 영향력을 이런 것들을 펼쳐나가는 복음의 승리에 관한 것들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시대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합니다. 이제는 누구도 교회에 모이는 신자의 수가 곧 복음적인 영향력을 결정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누구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껏 해봐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화하고 무엇인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단지 사람이 일하는 것이냐 복음이 역사하는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은 매우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인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그런 성도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불신자도 좋아하는 그런 교회도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허망한 노력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불신자가 싫어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도 좋아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노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을 하고 그 복음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진정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증인으로써의 결단이 있는 삶의 정성을 기울인다면 세상은 훨씬 빨리 변화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탈복음적인 사고방식들 때문에 심령이 괴로워 질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생각만 바꾸면은 세상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생각만 바꾸면 가정도 바뀌고, 사회도 바뀌고, 생각만 바꾸면 나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이 그렇게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인간의 모든 궁극적인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아무리 행복해 지려고 노력을 하고 애써서 노력을 하고 그리고 머리를 맞대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할 궁리를 수많은 사람과 의논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 속에 드리워진 그 어두움의 그림자들을 성경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죄인의 가슴을 찢고 들어오는 선명한 복음의 증언, 그리고 그 증언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깨닫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요구받고 있는지를 깨닫고 거기에 깨닫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 없이 그것은 결코 새 사람이 될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영혼의 변화 없이는 그의 불행과 고통은 숙명적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시대에 교회가 아무리 미친 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고 몸부림을 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참된 증인이 없으면, 복음에 대한 참된 증인이 없으면 그런 모든 수고는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일 따름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상기시키신 것은 나 예수그리스도는 증인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똑같이 타락한 헬라의 문명아래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주를 부르겠습니까? 어떻게 이방의 문화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그런 희망의 변화를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참된 증언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참되고, 진실 된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가 무엇을 팔아서라도 사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복음의 증인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그 사람들입니다. 증거하지 아니하고 베길 수 없는 삶에 대한 진실, 죽음에 대한 진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증언을 가진 사람들, 그것을 소유한 사람 그리고 이 증언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결정 짓을 것이라는 복음에 대한 위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증언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 냄으로써만 그 교회는 교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치밀어 오르는 증언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경험이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반드시 상막한 교인들이 악랄한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분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분과 친교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경험이 우리 속에서 갱신될 때에 그때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주 정결한 삶을 살 수 있고, 정죄된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의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증언을 가긴 증인으로써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 거리로 내 모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전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전도전략은 여기에 이렇게 모인 사람들의 가슴에 묻어두고는 견딜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불같은 증언을 가진 사람들이 되게끔 가진 사람들의 어떤 교회의 힘입니다. 거기에 오면 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고, 거기에 오면 왠지, 저 하늘 너머에 계실 것 같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그 무엇,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 모든 총체적인 것을 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인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입증이 됩니까?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영적으로 볼 때 그 교회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밖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밖에 두고 문 걸어 놓고 자기들이 무슨 일을 안했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제직회를 안 했겠어요. 예배를 안 드렸겠어요. 성가대가 없었겠어요. 선교사 파송이 없었겠어요. 헌금을, 바자회를 안 했겠어요. 뭘 안 했겠습니까? 다 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도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최악의 상황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는 그 증인을 들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그 증언이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여전히 불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미처 다 증거하지 못하고 죽으신 그 복음에 대한 증거를 계승하여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과 우리가 함께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러한 복음에 대한 증언이 있느냐입니다. 이것이 단지 전도를 하느냐 안하느냐의 평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교회와 그 신자의 영적인 삶을 재는 시금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아도 주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계실 때에는 이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견디질 못했습니다. 증인으로써의 삶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을 마음에 소유해서 그리스도를 계승하는 또 다른 증인으로써의 삶에 대한 자격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화 되어 가는 영적이 쇠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던 교회의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병들어 가던 시대에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까? 거의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죽어있는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낄을 끄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충성되고 참된”의 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피스토스와 알레디노스”라는 단어입니다. 충성되다라는 것과 참되다라는 것은 “알레디노스”는 “알레데이아” 진리라는 말과 같은 어근입니다. 형용사화 된 것입니다. “충성되다”라는 것은 외면으로 드러난 삶의 모습이라면 충성이라는 것이, “참되다”라고 하는 것은 내면적인 질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도 항상 이 두 단어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즐겨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은 그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가가 주어지는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평가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평가였는데 이 두 가지는 내면적인 그 질과 외면적인 삶의 모습을 함께 아우르는 평가입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말을 할 때에 충성된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앞에 질적으로 변화된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충성된 삶으로써 자신이 질적으로 착한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달란트 받은 한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평가를 받았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내면의 질이고 “게으르다”는 것은 외면적인 삶입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맞는 보십시오. “악하고 게으른 종” 그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근본적으로 그 주인이 보기에 악한 질을, 악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질적으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질이라는 문제는 상당히 숙명적인 말입니다. 질이 나의 마음대로 이제 악질로 사는 것도 지겹다 이제부터 진실로 돌아가야지, 이제 9시를 기해서 진실로 시작, 그런다고 해서 질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열매로써 그 행위를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뿌리를 깨 볼 필요도 없습니다. 사과 잎이 다 떨어졌어도 사과가 매달려 있으면 꼭 배나무하고 똑같이 생겼어도 사과나무가 아닐 수 있다는 개연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면 그의 엄마 아빠도 사람입니다. 엄마 아빠가 죽어서 고아가 되었어도 그것을 입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존재가 인간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질과 내면의 질과 삶의 문제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복음적인 신앙관들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리고는 악한 열매를 맺어도 이것은 연약함 때문이고 상처 때문이고 사실 이 속에 질이 괜찮은데, 어찌할 수 없이 이런 것들이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명백한 삶을 보면서도 자신의 내면적인 질의 악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됩니다. 자신을 향해서 절망할 줄 모릅니다. 자신의 존재를 향해서 절망할 줄 모릅니다. 이것은 굉장한 비극입니다. 자신을 향해서 절망할 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의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충만한 생애였습니다. 충성된 생애였습니다. 충성되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를 보내신 자가 누구인줄 알고 그분이 자신에게 부여한 목표를 인해서 사는 일에 자신을 매진한 삶을 가지고 충성된 삶을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는 일이 다릅니다. 이엠바운즈의 말입니다. 천사가 셋이 있는데, 천사가 지상에 보내질 때, 한 천사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라고 명령을 받았고, 또 하는 장사를 하라고 했고, 마지막은 똥푸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명의 천사가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 천사의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엇을 하며, 지상에 내려가서 무엇을 하느냐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줄반장이라고 시켜 나야지만 학교에 열심히 나오고, 하다못해 반장이라도 시켜야지만 반상회에 나오는, 무엇이라도 시켜야지만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껍질을 깨트리고 들어가 보면 진짜 100% 하나님이 이유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느냐에 대해서는 점검해야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의 일간의 자료가운데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성공적인 결과에 의해서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던 자세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야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성공하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고 실패하면 하나님이 다 미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보내신 그분이 가지고 계신 목표가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매진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충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학교의 교수 한 사람이 직원들이 늘 늦게 퇴근하니까 한국은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근무시간에는 다 어디를 가고, 회사 다니는 사람은 사우나 가서 벌거벗고 목욕하고 노닥거리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다 들어 와서는 9시 10시가 되도 퇴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행처럼 번져간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어떻습니까? 거기는 칼 같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번은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소매치기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을 막 부르는데 경찰이 그냥 휘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뒤에다가 “out of service" ”근무시간 끝났음“ 그냥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호주에 갔더니 어느 목사님 한분이 휴가를 시작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보따리를 싸 가지고 시동을 걸고 가는데 막 뛰어 오는데 “목사님 우리 교회 누가 돌아가셨대요” “out of service" 휴가 기간이기 때문이니까 나에게 얘기하지마, 알았어요.
아무리 근무시간 중에 열심히 일을 해도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충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충성은 자기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생애를 살았습니다. 자기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없는 생애를 사신 삶, 자기는 없고 하나님만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보고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당신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목표 사이의 갈등은 없습니까? 이런 의문이 예수님께 성립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사하고 사도 바울에게만 내려가도 이런 질문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주신 인생의 목표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목표 사이에 충돌은 없습니까?
이런 기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정리가 안 된 사람들은 충성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충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충성되지 않고도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교회에서 청년 회장이 되었는데 교회를 떠났던 떨거지들이 다 왔습니다. 그러더니 “잘 해 봅시다” 저는 무엇을 잘해 보자고 하는 얘기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교회를 일으켜 세워 보자. 매일 같이 도망다니고 술 먹고 담배 피고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는 무엇을 교회를 일으킨다고 합니까? 언제 교회가 쓰러졌습니까? '아 우리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짊어지고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무슨 남대문의 지게꾼 봇짐입니까? 젊은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한다. 문학의 밤 한다고 하니까 자전거 팔고, 카세트 팔아 가지고 돈 가져다 바치고 그것이 충성입니까? 그냥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충성이 아닙니다. 과로사로 교회에서 일하다가 죽어도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성은 하나님의 목표가 자기의 목표가 되어 버린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향한 그 목표가 자신의 전 삶을 움직이는 목표가 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충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외면적인 삶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충성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중에 “충성하라”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여러 해 전인데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을 깨우신 설교입니다. 충성되게 사는 삶에 대해서 한 설교입니다.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충성된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가만히 보면 어떻게 하나님이 저런 인간을 들어서 사용하실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자기 보다 훨씬 낳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못알아 보시는 것 같습니다. 엄한 사람 붙들어 가지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닌데, 인격적으로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아니고, 논리도 없고, 아닌데, 촌스럽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런 경우 상당히 많은 경우입니다. 충성된 사람을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충성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당신을 본받아서 충성된 사람들을 예수님은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모스서에 보면은 “나 여호와가 행하고자 하는 일을 나의 종에게 가르쳐 주지 않고 행하는 법이 없다” 그런 의미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종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먼저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알려 주시고 그와 함께 나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충성된 삶은 개인적인 영적인 삶의 계명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충성된 삶을 열정적으로 충성된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삶에 있어서 진전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성경의 본문의 하나가 민수기 12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구스여자를 취해서 장가를 듭니다. 구스는 지금의 에디오피아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흑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왠 흑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끄제 신문사에서 와서 인텨뷰를 하면서 하는 말이 신세대들을 대리고 왔습니다. 6명정도,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처음에 시작할 때부터 자신들과 나와는 굉장히 문화적인 차이가 많아서 폭을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그렇게 한자락을 깔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머리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시느냐? 나는 성경적으로 볼 때 문제가 없다. 뚫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그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 보면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안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뚫는 행위가, 오늘날의 청소년들의 문화가 기억해야 되는 것이, 문화현상 뒤에 순수한 문화현상이 있고, 종교성을 띈 문화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자일 경우에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거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종교성을 띈 것일 경우에는 이것은 굉장히 영적인 문제입니다.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이상한 옷차림, 다윗의 별같은 주술적인 장식구들, 이런 것들은 안됩니다. 뚫어서 무엇을 하고, 이런 것들은 안됩니다. 이런 것은 반대이다. 그런데 머리에 물을 드는 것은 괜찮다. 그래도 무슨 색깔도... 무슨 색깔을 드려도 자기 마음이지, 중고등부 두발 자유화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빨리 자유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 그러면 다 썩여서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에 스포츠도 허락을 한해서 박박 깎고 다녔습니다. 그래도 술 먹고, 담배 피고, 술집 다니고 할 짓들 다 했습니다. 머리 이만큼 기르고 사복을 입고 다니는데 그것을 못하게 하겠습니까? 교복을 다 입혀야 된다고, 뭐하러 그래요 죄수복을 입고 끌고 다니지.
사고 자체가 비인간적입니다. 그것을 옷을 티를 나게 만들고 머리를 박박깎고, 자기들은 다 보는 영화 못 들어 가게하고 그런 식으로 통제를 해서 사회가 진짜 건강한 사회가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을 보호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제의 방법이 그런 식으로 되어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중고등학생들 머리에 염색을 한다고 하니까 난리입니다. 조금 하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얘들이 까무러치는 것입니다. 쉰 세대가 아니라 신 신세대라고... 자기가 도저히 쫓아 갈 수 없다고, 그러더니 그 중에 한사람이 머리가 물을 드리면 안되지 않느냐? 왜 안 되느냐? 민족적인 동질성이 파괴된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열이 바쳐서 흥분을 좀 했습니다. 무슨 민족적인 동질성을 이냐? 민족적인 동질성이 있다는 그것은 무엇인가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면서 살아온 삶의 터전에 대한 집착과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하나는 이렇게 민족들이 모여서 사는 이 나라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 나라가 자랑스럽고 행복하고 긍지를 느끼는 그런데서 오는 민족적인 동질성이어야지 머리는 시커멋깨 물들여서 그것이 유일한 동질성인 것처럼 느끼는 것은 그런 동질성을 느껴서 무엇에 쓰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들이 뒤집어 져서 “그래도 저는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요?” 게임은 1:0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얘기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자유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아직 코 뚫고 다니는 사람없고 빨간 머리 드리고 다녀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 알록달록 물 드리고 돌아다니고 코 뚫고 돌아다니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아직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미성숙과 죄악된 옛 삶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준다면 우리들이 그것을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받아드리고 편견을 갖지 말고 그들의 영혼을 깊이 사랑하면서 초월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인터넷에다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교회에 야한 옷차림을 하고 가도 괜찮겠냐고”물었습니다. “오려면 와라”, 오고 얘기를 해야지, “와, 와” 얼마나 야하게 입어서 그러느냐. 와라. 그것을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 내가 누구라고는 얘기하지 않겠지만, 여름날에 반바지에다 쓰래 빠를 끌고 발톱에다 빨간 메니큐를 칠하고 왔다가 바가지로 혼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 교회 온 사람들은 야단을 치지 않습니다. 아니 무슨 반바지보다 더 짧은 것을 입고 와서 앉아서 말씀을 듣고 변화가 되어야지, 긴 바지 입고 예수 안 믿고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반바지 입고 새사람 되는 것이 낳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모세가 그 여자를 취해서 장가를 든 것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원래 우리는 흑발직모가 아니냐? 이것이 민족적인 동질성이라면 따고 다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손톱도 깍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왜 잘라야 합니까? 그리고 수염도 기르고 그러고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비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온유함이었습니다. 그 온유함이 어디로부터 나왔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오는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는 온유함입니다. 신학적 시야. 신앙적인 시야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와 상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수준이 맞지 않으면 웃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반기를 듭니다. 모세와만 말씀을 하시냐 우리와도 말씀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희가 어떻게 모세와 똑 같으냐 너희는 꿈으로 보고 이상으로 보았지만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대면하여 말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집에 충성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랬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생애를 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친밀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은 기독교의 영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인가 정신현상들이 영적인 하나님과의 교감 속에서 오는 진정한 친밀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8장에서 단칼로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아버지가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도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시다는 것은 구약적인 깊은 배경을 가진 신앙의 고백입니다. “히트할라크 에드 아도나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 동행하는 삶,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할 때, 그때 쓰인 동행,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인생을 살아갔다라고 하는 성경의 그 고백, “히트할라크”의 그 고백은 단지 하나님과 함께 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주 충만한 교감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빌리그래함이 언젠가 자신의 고백 속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한번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한 때가 없었다”이것이 “히크할라크”의 삶입니다. “내안에, 나와 함께” 온전한 친근한 삶, “히크할라크”의 신앙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는 삶을 살게된 그런 커다란 원인은 당신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하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친교를 느낄 수 있습니다.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데 있어서 어떤 삶의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과 어떤 친밀한 친교 속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굉장히 중요한 조건입니다.
주님을 똑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을 위해서 진실 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처럼 생각하면서 사는 이 충성스러운 삶, 이것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충만한 친교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나 사역자들을 만나서 볼 때 무엇인가 남보다도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산다. 그분의 대한 지식에 있어서 그 수준이 나와는 다른 것 같다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의 과거를 깨 보면 반드시 그 사람들에게 지금이든지 과거이든지 간에 나는 그렇게 해 본적이 없는 그런 정도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목표를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대치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살았던 헌신의 생활들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싶고 주님의 깊은 친교 속으로 들어가고 싶으면 첫째는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두 번째는 그분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헤아린 다음에 그 목표가 여러분들에게 전부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깊은 하나님과의 교감이 있는 세계 속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내가 교회의 일을 의논을 해야 하는데 내가 누구와 의논을 하겠습니까? 이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자신을 다 드리고 있다는 그 사람하고 의논을 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내일이면 떠나갈 것처럼 날개를 접고 있는 그 사람, 한데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저런 일을 상의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신복을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신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로를 신복처럼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에게 메여서 그 하나님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거기에 집중된 사람을 사는 이것이 충성된 삶입니다.
언제 한번 신문을 보니까 야구 선수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손가락을 1cm정도 찢었습니다. 멀쩡한 손가락을 왜 찢었습니까? 공을 잘 던지기 위해서 찢은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칼로 찢은 것이, 기영아 아닙니까? 왜 입니까? 공을 잘 던져서 이겨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니까 정상인으로써 이런 손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다라는, 생각해 보십시오. 1cm정도 들어가면 비정상이 아닙니까? 불구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공을 잘 돌려서 변화구를 만들어서 상대편 타자들을 쓰러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충성된 삶입니다.
그냥 열심히 일하면서 사는 삶이 충성된 삶이 아니라, 그렇게 내면의 질이 하나님의 목표에 진심으로 받아들인 그런 삶,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 전부라고 생각하는 삶, 그런 삶이 충성된 삶입니다. 그 충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과의 교감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이것은 내면의 질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참되다” 참된 것, 진실한 것, 그것은 원래 유래 자체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성품은 거칠고 진실하지 않는데, 삶은 저돌적이고 열심히 있습니다. 이것은 저돌적이지 충성된 삶은 아닙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내면 속에서 인격적인 주님과의 교감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열심 있는 삶은 그저 열심 있는 삶일 뿐이지 결코 그것은 충성된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충성스러운 삶은 일에 묻혀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주님을 위해 사는 것 이외에는 인생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삶,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서 사는 삶, 그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입니다. 내재하고 있는 동기 자체가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왜 하필이면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상기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진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영적으로 부패한 것과 진실하고 정직한 것은 아주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나 너저분하게 하고 숨기는 것이 많고 이런 삶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뚜껑을 열어 보아도 똑같은 삶, 속과 겉이 같은 삶, 그런 삶이 진실된 그런 삶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진실한 삶을 잃어버린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너무 유사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져야 할 가치들,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도, 성공, 헌신, 비젼, 목표, 진실 그럴 때, 제일 마지막이 진실입니다. 진실한 것을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헌신, 비젼, 꿈, 미래, 이런 것들은 찬란하게 구사해서 교회의 가치가 됩니다. 진실은 무엇입니까? 종교인들의 감각도, 종교인들을 만나면서 감각도를 얘기를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꼴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절에 다니는 사람보다도 부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진실, 참된 것에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되다라고 하는 것은 정직과 진실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열정적인 것도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을 섬기던 바알선지자들이 불을 불러 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것과 똑같은 인간적인 열심일 뿐입니다. 영적인 회복이든지 무슨 세계 선교의 꿈이든지, 교회를 위한 기도이든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성화의 삶의 진전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가장 중요한 출발은 하나님 앞에 자기 하나만이라도 우선 정직해지고 진실해 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가, 아버지, 그런 것 말고 어떤 사람은 한술 더 뜹니다. 기도하다가, 뭐라고 했더라, 그것이 아니고, 누구 대리고 노는 것입니까? 그것이 모두 경박하고 가볍습니다. 무릎을 꿇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손들고 주의 삼창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삼창만 합니까? 좋으면 백창이라도 하지, 기도할 때 북 안쳐도 괜찮습니다. 힘은 그런 대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릎을 꿇고 진실해 져야 합니다. 정직해 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살펴보고 말씀이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를 정직하게 그렇습니다 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 우리를 위해서 아멘의 생애를 사시고 충성되게 사시고 진실된 증인으로 사시다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존귀하신 그 희생 앞에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아주 철없고 연약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고 하는 그 고백,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깃드는 비결입니다. 이런 진실 없이 무엇으로써 우리가 신앙의 세계에 승부를 걸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알던 부흥사 한분이 통성기도를 시켜 놓고 꼭 눈을 뜨고 사람들이 기도하나 안하나 꼭 쳐다본다고 합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기 때문에 그것을 몰랐지요. 그 시간에 눈을 뜨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 얘기를 자꾸 합니다.
진실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능력이 깃드는 첫발자꾹입니다. 첫발입니다. 첫걸음입니다. 정말 진실된 것이 첫걸음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은 참되시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교감은 나누시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진실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교감없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단지 일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일을 섬기다가 죽는 것입니다. 진실이 필요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 사실을 상기했야 했던 이유는 너무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부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고약의 명산지 였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물질적인 부요함으로써 영혼의 허함을 달래면서 감추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모두 부정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곤고하면 하나님 앞에 곤고합니다. 죄를 범했으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내가 이러 이러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벌써 이런 자체가 거짓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된 상태로 돌아갈 때에는 하나님 이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잘못되었다 하시면 모든 사람이 나를 다 인정해 주고 박수를 쳐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잘했다. 괜찮다 그러시면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죽일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나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모세의 경우에도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들어야 메세기가 아닙니까? 사라진 복음의 능력, 사라진 하나님, 사라진 진실됨, 사라진 충성,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저 의무적으로 일을 일처럼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원히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이런 곤비한 세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영혼의 복된 일들을 생각한다면 전격적으로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이런 말씀의 지침을 받고 돌이키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충성된 자들을 기대하심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지난 두 주 동안 우리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도 역시 유사한 내용이 되겠습니다만 충성스러운 일꾼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무엇을 말하다가 성경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라고 말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여러 가지 있었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사도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고린도교회안에 있는 당파주의 였습니다. 그런 당파를 이루는 파쟁이 정신이 고린도 시의 정신이었습니다. 고린도시는 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였고 지적이 교만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제자들을 거느린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각각 자기들의 철학적인 주장들을 정확하게 피력하면서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각각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습니다. 그런 파당 정신이 교회 속에 자연히 파고 들어와서 영적으로 연약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사람을 추종하는 무리들로 구성된 당파를 만들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시작하자마자 거론을 하면서 어떻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게바파다. 바울파다. 아볼로파다 그러면서 파가 갈라지면서,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는데 언제 그리스도께서 한 파당의 우두머리일수 있느냐 그러면서 강력하게 이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볼로나 게바나 바울,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훌륭한 일꾼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런 파당을 만들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괄목할만한 신앙적인 지도자가 되니까 그 뒤에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군가로부터 깊이 감화를 받고 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존경하는 신앙적인 스승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조처가 불분명한 불량식품 비슷한 사람들이다. 그대로 만들어 집니다. 신학을 졸업했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어느 선생님에게 감화를 받으면서 무엇을 본 받았는가,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누구의 설교를 듣고 어느 분의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아볼로나, 게바나, 바울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고 그분들을 통해서 신앙적인 깊은 성장을 가져 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는 존경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 잘났다는 뜻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을 제일 존경한다고 하는데 정신 질환의 일종입니다. 그런 것이 마치 높은 신앙의 수준에 있는 것처럼 과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절대 아닙니다. 신령한 신앙적인 인물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면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이 없었더라면 디모데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디모데는 바울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서 알게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디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받았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데 미성숙해서 거기까지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문제를 계속 다룹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일꾼일 뿐이다. 일꾼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당시로 말하자면 하루 품삯을 받고 와서 품을 파는 노동자입니다. 의료보험도 없고, 노동조합도 없고, 근로 삼권도 없습니다. 그냥 아침에 와서 해질 때까지 일하고 몇 품 받고 돌아가는 품꾼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나절도 되지 않아서 그만 두고 가 그러면 가야되는 사람, 그 집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고, 주인이 시키는 데로 하루 품삯을 받아 가지고 가는 그런 품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꾼’이라고 생각하면 깃발을 날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영과 대접을 받으며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일꾼이라고 하는, ‘꾼’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천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꾼 이라고 합니다. 학자꾼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정치꾼’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술책을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영어에서도 “steit"는 ”정치가“라는 뜻이 있고 ”pelitation“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steit'는 정치가라는 뜻이고 ’pelitation'는 술수를 부리며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중국의 내륙에서 황해쪽으로 강이 흐릅니다. 왜 양자강은 강이라고 부르고, 황하는 하라고 합니까? 양자강을 크고 황하는 개천이라서 그렇게 부릅니까? 그것이 아니라 똑 바로 흐르는 것은 중국사람이 강이라고 부르고 굳으면서 흐르는 강은 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정치꾼은 정치를 빌미 삼아서 딴 짓을 하는 사람입니다. 천한 표현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일꾼’이라는 것은 어떤 존귀한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아주 천한 일에 종사하고 품삯을 받는, 권리 없는 하찮은 사람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와서 그저 일하다가 하나님이 이제 잘렸다. 그래서 떠나가는 그런 품꾼인데, 품꾼이 무슨 하나님의 교회에 커다란 기둥과 들보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들을 중심으로 모인 그 사람들이 서로를 대적하고 해서 교회의 이치를 깨는 이것이 얼마나 조잡한 일이냐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너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길찌라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 말처럼 오해가 되고 있는 성경 구절도 없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심지어 신학교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도 희랍어 성경을 보기 전까지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으니까 여러분도 저처럼 이해를 할 것입니다. 맡은 자들에게는, 일을 맡은 자들이 아닙니까? 목사가 되었든, 집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든, 교사가 되었든, 어떻든 맡은 자들이 아닙니까?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라고 하는 것은 열심히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 좀 충성스럽게 해 주십시오. 충성스럽게 하고 싶습니다. 충성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은 틀린 것은 아닌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청지기들 가운데에서는 이러 이러한 것들이 추구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 중에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신실한 자로 입증되기를 추구되어야 한다. 신실한 자로 나타나기를 구해야 한다. 신실한 자임이 입증되기를 간절히 추구해야 한다.’ 충성되다라는 말이 피스토스라는 말인데 사실은 영어 성경은 ‘로얄’이라고 번역을 안하고 “peipul” “신실한”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번역들이, 신실한,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그럼으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은 자기자신의 신실한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구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르지요.
이것에 대한 정확하지 않는 번역이 조국 교회의 신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선 오늘 두 가지만 얘기를 하겠습니다. 첫째는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일 중심이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에 메이는 것과 충성스러운 것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희랍에서 ‘피스토스’. ‘peipul'이라고 하는 신실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신실한 말이 성립을 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하다‘라고 하는 말은 어느 규범이 있을 때에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고 규범이 없습니다. 규범이 없으면 그 사람이 신실한지, 신실하지 않는지 어떻게 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똑같은 새 소리도 오늘 내가 기분이 좋으면은 새가 노래를 하는 것처럼 들리고, 기분이 엉망이면는 똑같은 새가 노래를 하는데 우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떤 때에는 아이가 ’아빠‘하고 메달리면 너무 사랑스러워서 안아 주는데 어떤 때에는 확 달라 들면 귀찮게, 떨어져라 말합니다. 느끼는 것이 항상 가변적인데 기준이 없다면 한다면 무엇으로 신실함을 잰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신실하다고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신실하다. 더군다나 상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기쁜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에게는 신실함 같은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더군다다 ‘피스토스’, ‘신실하다’라고 하는 이 말이 성경속에서 쓰여 졌을 경우에는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라는 말이 나오든지 안 나오든지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한국의 교회에서 이 성경 구절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렇게 성경구절을 잘못 번역을 해서 이렇게 이해를 시키는 가운데 재대로 잘 가르친 곳에는 안 그렇겠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일에 매달려서 집착하고 노력을 많이 하는 것이 곧 충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충성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격적인 하나님, 하나님의 인격에서 비롯된 진실함은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양성해 놓았습니까? 휘몰리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영혼의 상태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그분과의 신실한 경험,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무조건 많이 하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고 많이 희생해서 성과를 거두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성공적인 충성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적인 사람, ‘피스토스’ ‘신실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진실함을 기초로 한 섬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를 알고, 그분의 인격을 느끼고 그분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젖는 가운데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삶, 이것이 성경적인 삶인 충성이지, 자신의 영혼은 완전히 핍절해 있고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고 또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일을 기독교적인 일을 많이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충성스러운 것이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목사님의 설교시간이 제일 괴로운 것이 일년이면 4번 5번씩 예화가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분량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경지로 들어가고 있다고 집사람한데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비난을 무릅쓰고 하겠습니다. 미국에 가면 불면증 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불면증 환자가 없습니다. 죽어라 하고 낮에 일을 하기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자서 걱정이지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 부자여서도 좋지 않습니다. 언젠가 어느 잡지에서 보니까 대략 이 천만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불면증 환자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심야에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텔리벤젤리스트’ 그 중에서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류설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설교를 잘 하는지, 설교를 들으면 사람들이 철철 울면서 양복장에 들어서가 수표를 꺼내서 그날 밤에 헌금을 수표에다 끌고 잠이 들 정도라는 것입니다. 불면증 환자들의 구세주였습니다. 엔젠가 이 여자가 시체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사유인즉 수면제 과다 복용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을 잠들게 하고 자기는 잠을 들 수 없어서 오랫동안 습관성으로 수면제를 복용하다가 너무 과다하게 복용을 하여서 약리적인 효과를 일으켜서 죽은 것입니다. 대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잠들게 하고 자기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자기는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약을 먹고 결국은 죽은 것입니다.
사실 겉으로 보면 그 사람의 삶은 정말 열정적이고 충성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볼 때에 지금 성경적인 충성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진실함 없이는 충성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일뿐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일뿐이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한국교회에서는 약합니다. 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진실한 경험 거기에서 비롯되는 감격과 은혜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충성된 헌신 이런 것들이 연결이 되기 위해서는 둘다 있어야 합니다.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경험하는 것과 함께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감화,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인격적인 경험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마르지 않고 계속되는 것, 이것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결핍되고 나면 일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서 약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나, 약방에서 약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나, 교회에서 목사가 되어서 구약 신약 그것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히브리어를 오래 가르쳤습니다. 가르치다가 신학교에서 이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학원에서 영어 가르치면서 먹고 사는 것이나 여기서 이 고불랑 글씨 가르치고 먹고 사는 것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한가지가 없으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 한가지가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실함, 거기에서 오는 인격적인 위탁과 헌신이 기초가 되어 있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 앞에 가보면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 같은 것 테이프로 복사를 해 오거나 아니면 심지어는 CD에다 집어 넣어서 이만원이요. 이만원, 이만원에 사백개, 이렇게 하는데 자기는 다 문서선교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진짜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 없으면 그것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나 비디오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신실함, 진실함 그것을 기초로 한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리적인 문제가 돌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기독교적인 일을 위한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자신에게 맡겨주신 원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에 대한 마르지 않고 지속되어야지만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이념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이념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 있으면 공산주의에서는 신이 없습니다. 유물론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우리는 마음이 막 건조해지고 목마르다가도 말씀을 깨닫거나 찬양하면서 주님을 깊이 묵상하면 주님이 우리를 만져 주시잖아요. 공산주의자들은 누가 만져 줍니까? 레닌이 와서 만져 주나요? 마르크스가 와서 가슴을 문질러 주나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서 피뿌리고 죽어간 수많은 전사들이 살아서 피 바르고 가나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위해, 자신의 확신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념에 대한 충성심입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한 사람이 기독교적인 일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일, 원래 그 일로 불러주신 원주인이신 하나님의 인격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영혼 없이는 인격적인 경험이 없으면 그는 충성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나 이념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 차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에디드 토저 같은 사람은 즐겨하는 말이 “기독교 신앙은 많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회를 정신없이 돌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면서 누릴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 되어야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흘러서 우리를 풍부하게 적시어서 ‘정말 주님의 사랑 놀랍구나! 나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우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울까?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좋으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데, 그러면서 솟구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그 어떤 일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으면 이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솟아오르는 갈증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것 그런 것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헌신해서 사는 것, 이것이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에 충성이 없습니다. 무슨 충성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 그분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에 대한 인격이 없는 그곳에 어떻게 진실이 있을 수 있겠으면 어떻게 신실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 가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날 때 자기를 많이 감추는 사람, 자기를 부풀리는 사람, 굉장히 부풀리는 사람, 신학교 다닐 때 한해 선배였습니다. 나이는 나와 동갑인데 어떻게 나를 애 급을 하는지, 나를 혼자 위해 주는 것처럼 하면서 막, 그래서 그러면 찾아오래, 선배님을 찾으려면 어디 가서 찾아야 합니까? 네가 나를 찾으려면 도서관에 와서 “교수용 학생 어디 있냐”고 다 안다. 무슨 말이냐면 교수로써 쓸 학생이 누구냐 그 사람을 찾아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정신 질환이었습니다. 결국은 저는 교수가 되었고 그 사람은 강사가 되어서 두 학기 하다가 학교를 떠났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자기를 과대하게 포장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과대하게 포장하는 사람 또 저를 만나서 그런 얘기하는 사람, “목사님 이 바닥에서 나처럼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일 수는 있습니다. 아주 중대한 결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풍부하게 느끼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거짓의 옷을 벗어 본적이 없는 사람들, 혹은 있었다고 할지라도 매우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나면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들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이 감격하고 충성하고 하는 것은 나중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지고 나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짓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충분히 벌거벗은 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교육할 때, 부모가 아이들이 잘못했으면 어때, 죽일 꺼야 살릴 꺼야. 이렇게 배포 큰 사람으로 만들어도 문제가 있지만, 이것 말하면 나는 반 죽을 꺼야. 이 강박관념 속에서 아이들을 살게 하면 옳은 일이 아닙니다. 충분히 거짓과 위선의 옷을 벗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어야 합니다. 진실하고 솔직하기만 하면 뭐든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진실해 지고 솔직해 질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후회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사회 자체가 진실차체에 대해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야바위적인 사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우리들이 첫 번째 보이는 반응은 안심하고 충분히 나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는 이런 사람이었지? 전에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때에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나면 너는 이런 사람이었지? 하면 맞습니다. 너 이런 사람이지, 맞습니다. 또 이런 것도 있었지,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리고 다 벗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충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경험은 거의 없고 하나의 일에 매달려서 미친 듯이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에이든 토저가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살아가지만 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아니하는 모든 섬김은 심판 받는 그날에 불에 타서 없어질 지푸라기와 같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다 불로 시험을 받아서 그래서 정말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점검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무 것도 안 남는다는 것입니다.
언제가 한번 다큐멘타리를 한 번 보는데 한 부부입니다. 두 사람인데 이 사람들은 누가 월급을 주는 사람도 없는데 미친 듯이 해안을 누리면서 고래를 찾아내어서 주민등록 해주는 것 그것을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고래를 어떻게 주민 등록해 주느냐 하면, 고래의 몸에 맨질 맨질한데 조개 껍데기가 달라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지문과 같아서 형체가 똑같은 놈이 없습니다. 그것을 찍어서 컴퓨터에 등록을 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수 천마리의 고래의 이름을 붙이면서 주민등록번호를 먹여 주는 사람입니다. 월급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래에 미쳐서 그냥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하던 형제하나가 있었습니다. 공부는 별루인 친구였습니다. 우리 모두 별루 였습니다. 항상 뒤에 앉아서 노닥거리기나 하고 시험 때에는 슬쩍 슬쩍 보고, 매일 보면 5원씩만 달라고 하고, 5원은 뭐하려고 하느냐? 5원을 머리에다 꼽고 공중전화 거는 돈이라고 하고 다니던 친구인데, 어느 날 조선 일보를 보았는데 한 면 전체에 나왔습니다. 이XX씨하고, 점 있는 것까지 그대로 있더라구요. 내가 알기로는 대학도 못 갔는데, 조선일보 한면 전체를 나왔어요. 나도 한번 못나왔는데... 그리고 신문을 쭉 읽어보니까 역시, 아리랑에 미쳐서 팔도를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직업도 없이, 가정은 모르겠는데, 아리랑에 미쳐서, 그 친구는 그러고도 남을 친구입니다. 그런 기질이 있었습니다. 아리랑에 미쳐서 강원도에서 시작해서 사방팔방에 돌아다니니까 아리랑에 일인자가 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조상 중에 아리랑을 못 부르다 죽은 귀신이 있어서 헌신한 것입니까? 자기 좋아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적인 영력에도 그런 심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격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 앞에서 진실해 지는 경험을, 신실해 지는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 그 신실함에 강제력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이야기 할 때에는 일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충성스럽게 살아가면 그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이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그 앞에 진실해 진 사람이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일 뿐이다. 그 일꾼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들로 입증되기를 사모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이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떨리거나, 실패했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거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에 고뇌하는 그런 초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산 사람이 아닙니다.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햐면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충성스러운 삶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이 매말라 있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사모함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그런 것도 없다. 하면 하나님의 관계에서 고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할 필요도 없고, 은혜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을 쏟아 부어서 성취해야할 어떤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은 너무 슬픈 인생입니다. 목적이 없이 방황하고 파도와 물결을 따라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쪽배에 불가합니다. 잇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실함 그것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루지 않으면 안될 눈뜨면 생각나는 일, 그리고 성취되면 너무도 기쁜 일, 그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일, 그 일을 함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서 쓰임 받고 있다라는 그 일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죄악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죄악입니다.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큰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없이 무위도식하면서 살아가면 결국은 그 사람은 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반대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나는 성품이고 하나는 삶입니다.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왜 가만히 있습니까? 놀면 무엇합니까? 여러분들의 심령만 악해지는 것입니다. 주께 은혜를 받았으면 하다못해 전도하고, 기도하고, 교회 마당에 쓰레기를 한번 치우고, 이웃에게 한번 선하게라도 하고, 무엇이라도 한가지를 해야지 그냥 떠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주일날 와서 은혜를 주이옵소서. 그 은혜를 주면 뭐 하겠습니까? 삶이 없는 그 은혜, 삶으로 부어지지 않는 그 은혜, 그것을 해서 뭐하겠습니까? 신비주의의 가장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체험을 삶과 분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베풀면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주님의 인내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를 괴롭힌 사람들 악한 사람들에게 오랜 인내를 실천해야 할 의무가 주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아가야 할 의무,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을 나누어줄 의무가 필요한 것입니다. 너무나 안일하게 살아갑니다. 주님을 위해서, 어떤 하는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은 주님에 대한 깊은 인격적인 경험, 거기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그 앞에서 진실해지는 것, 그것이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데 강권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해야 하고 그런 것들을 이미 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마르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수도원의 사람들이 다 속세가 다 더러워서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해서 세상이, 산 속을 넘어서 세상의 물결이 넘어 올 수가 있겠습니까? 속세를 떠났는데 그런데도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속주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들이 정말 경건한 영성을 준비하고 살아가는 것은 불경건한 사회 속에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경건한 삶을 침범받으면서 살아갈 때 거기에서 고통을 경험해야 합니다.
영국에 있는 우리로 말하자면 ‘화로회 ’ 청어를 잡았습니다. 굉장히 히스테리칼하지 않습니까? 물에다 집어넣었는데 쭉 가다가는 가다가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다가 청어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큰 물고기를 잡아넣었다고 합니다. 그 통에다가, 8시간차를 몰고 오는데 이놈이 신이 난 것입니다. 통 안에서 그 놈을 잡아먹겠다고 몸부림을 치니까 청어들이 안 잡혀 먹겠다고 막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다 와서 꺼내 놓고 나니까 펄펄 뛰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산 속에 있으면 죄는 적게 집니다. 기도원에가 보세요. 기도원에 가면 유혹 받을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매일 찬송하고, 기도하고, 텔레비전이 있어요. 신문이 있습니까? 가만히 죄는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대신 하는 것도 없습니다. 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결국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진짜 경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경건한 삶속에서 경건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이런 하나님과의 그 속에서 인격적으로 진실해지는 경험이 없이는 충성스러운 삶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이미 했다고 할 것 같은면 무엇이라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과 함께 죽음이 다가왔을 때, 영혼과 이어질 수 있는 그 무엇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그곳에 얼마나 많은 일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많은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에서도 일손이 부족해서 절절맵니다. 그렇게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 것도 안하고 살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전혀 부끄럽지 않게 빈정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사람이 악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심령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양자를 다 극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일에 대한 집착을 통해서 자신이 충성 되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을 주님과 인격적인 경험이 없이 충성스러운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하는 무위도식하는 삶, 둘 다 경계해야 합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주님의 진실한 사랑의 인격을 충분히 느끼고 그 은혜의 흠뻑 젖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넘쳐 나는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가지고 그 자리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름이 없어도 괜찮고, 빛이 없어도 괜찮고, 보수가 적어도 괜찮고, 그렇게 충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나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니까? 이것이 충성스러운 삶이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이라고 할 때에 2차대전 때에 무용담을 같은 것만을 생각하지 마세요. 어디를 갔는데 핍박을 받다가 칼 맞고 죽었다고 하더라. 지금 어디 가서 어떻게 험하게 복음을 전해도 목에다 칼을 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순교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일제의 핍박도 없고 창칼을 들이대는 사람도 없고 신사참배 안 하면 죽여 버린다고 핍박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렇게 살아도 내버려두는 이 디지털시대에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루하루의 삶이 쌓여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여러 왕을 거치면서 고위직을 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을 받은 것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초창기에만 빼 놓고, 그런데도 성경은 “사시는 종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원하노라” 제상의 자리에 있었어도 다니엘은,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았지만, 그 사람은 실체는 하나님을 섬기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생고생하고, 먹지도 못하고 흰죽도 못 먹고 이것만이 충성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그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오늘도 베풀어주신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서 주님을 섬기는 삶, 이것이 충성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그러면 현실적으로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누리고는 충성스러운 삶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곧” 하나님이시기를 예수님이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성품을 비천한 인간의 성품 밑에다 감추신 것입니다. 스스로 감추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셨던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살다 갔지만 성경이 충성하면 늘 치켜세우는 사람가운데 한 사람, 구약의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스럽게 산 사람,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셨고, 모세도 똑 같은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신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있으면서 그들의 동족들을 섬겼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광야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나 모세가 두분이 하나님이심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이기를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미국에 암스트롬이라는 작가가 하나 있는데, 리더쉽이라는 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교회를 갔더니 백여명 모이는 교회였는데 자기가 갔더니 목사님이 사다리를 놓고 벽에 매달려서 열심히 칠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왜 거기서 칠을 하고 계십니까? 목사가 먼저 섬기는 데 있어서 본을 보여야 되지 않습니까?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분이 그 애화를 통해서 지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벽에 올라가서 페인트칠을 하는 것으로써 본을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영역은 목사가 본을 보여줄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맡겨진 자리에서 본을 보여할 영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성가대 밥도 하고 쓰레기 봉지도 담아야 하지요. 할 수는 있는데 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써 자기를 버리고 성도들을 섬긴다고 하는 본은 실제로 허드렛일에 종사함으로써 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가지고 교회를 인도하고 이끄는 일에 적용할 때에 사람들은 그가 지휘봉을 가지고 휘둘려도 그가 굴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고 느낀다 이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하나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기도 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번도 그런 일들로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 메시야이신 당신 자신의 위엄을 포기하거나 그 자리를 내어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심해야 할 것은,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세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충분히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낮아 지셨는데도 그 구주로써의 위험, 민족의 지도자로써의 리더로써의 권위와 위엄을 잃지 않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위대한 사명 감당의 원동력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땅히 누리고 가질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의 한국교회의 고종황제의 형제였는데, 7달만 먼저 태어났다면 그분이 황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직계 손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놀랍게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왕손으로써 목사가 되었으니 굉장합니다. 왕손이 목사가 되었으니 교회에서도 거물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목회의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는 당회를 하면 당회를 하면 장로들이 모이는데 장로들 가운데는 자기는 황제하고 같은 계열에 있는데 마부하던 자가 자라서 그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당회를 하다가 자기 마음에 안들면 “ 네 이놈! 고얀지고 네 놈이 무얼안다고 나서느냐” 그러니 무엇이 되겠습니까? 장로님이야 진짜, 왕손인데, 마부하고 말똥이나 치우던 것들이 와서 장로라고 두르마기 입고 앉아서 나도 한마디 하니까 수 틀리니까 옛 기질이 나와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목사들하고도 노회에서 회의를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고얀지고 어느 한전이라고 나서느냐” 왕따 당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두 번 다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정신 질환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안된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릴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권리 이런 것들을 버림으로써 충성된 삶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충성된 삶은 소유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 시간도 하나님의 것, 건강도 하나님의 것, 기회도 하나님의 것, 모든 것이 다 그분의 것이라는 인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시간이 없어서, 누가 태어나게 해 주었습니까? 여유가 없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것이 누구의 덕분인데,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빗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분의 빗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그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부르신 것이고 그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충성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충성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덩어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주님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보람되고 기쁜 것이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모든 것들을 향해서 시간과 재능과 마음과 모든 것들을 쏟아 부으면서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넘치는 은혜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딤전3:13)
충성스러운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목회의 선배로서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을 집사로 세워야 하고, 집사의 삶과 섬김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상세하게 말한 후에 그렇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실 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데, 첫 째는 아름다운 지위를 주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담력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집사이기 때문에만 해당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집사가 아니라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자신의 직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축복을 주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충성스런 삶에 대해서는 많이 말씀 드렸기 때문에 이제 그 충성스런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째는 아름다운 지위입니다. 이 아름다운 지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감당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주십니다.
아름다운 지위와 큰 지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큰 지위라 할지라도 그 지위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그 지위에 앉아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칭찬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분을 맡고 충성스럽게 섬기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지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갖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랑자였고, 핍박자였고, 복음을 거스르고 악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몸을 버리신 그 큰 은혜에 감격하면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나를 주님의 일군으로 삼으신 것을 너무 감사하며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아름다운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 직분이 권찰일 수 있고, 혹은 그 직분이 교회의 직원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직분이 평신도 중에서도 장로나 권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덕망을 끼치는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신 교회의 직분은 그것이 누구의 직분이 되었든지 간에 정말 아름다운 지위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는 일없이 대접이나 받으려고 거들먹거리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는 교사로서, 혹은 권찰로서, 혹은 집사로서 흔하고 너무나 많은 직분이지만, 그러나 한 구역 구역장을 맡아서, 혹은 한 구역의 권찰의 역할을 맡아서 깊이 사랑하고 진실한 신앙의 인격으로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직분은 얼마나 아름다운 지위입니까?
비록 이 세상에서 알아주고 대접을 받는 높은 세상의 꽃으로 꾸며 쓴 아름다운 지위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며 살아갈 때 그 지위를 정말 아름다운 지위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비춰지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아가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마음을 다해서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일이 그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이 세상에서 물질이나 자기의 명예를 찾아서 신앙도 팽개치고 방탕하게 살 때에는 모두 실패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새로운 은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뒤에 이 세상에서도 존경받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된 예는 일일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고기를 잡는 한낱 어부에 불과했고 그가 만약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조금 많이 잡힌 날에는 흐믓하게 웃으며 집에 돌아오고, 고기도 없이 빈 그물로 돌아오는 날에는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짐승처럼 살다가 죽었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을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자 그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많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지위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떠올릴 때 우리는 더 이상, 어부, 생선 몇 마리를 갖고 씨름하는 어부로 여기지 않고 비록 전직은 그러하였으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내주신 수 많은 양떼를 먹여서 어둠 가운데 개처럼 살고 죽을 수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이끌었던 아름다운 사람 베드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만나고 성령을 경험한 후에 예전에 그리스도 예수를 배신했던 실패를 거울 삼아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으로 주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 산 그 삶은 곧 자기의 직분에 충성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삶에 놀랍게 아름다운 지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세우신 첫 주님의 교회에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그를 사용하시고 주 앞에 충성된 삶을 산 사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반석 위에 세우게 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법칙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서를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 자신은 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는데 이제 내가 사도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이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한 비결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겼기 때문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사용하셨고, 그에게 이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지위를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흉악하고 강포하고 성질 급하고 못되먹은 사악한 청년 사울로 인생이 끝났을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버리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우리 모든 사람들이 사모하는 아름다운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비단 이렇게 신앙적으로만 아름다운 지위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난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높이시는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멸시받던 사람들을 어떻게 높이시는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더하여 주셔도 그 재물에 마음을 쏟지 않고, 명예를 더하여 주셔도 그 명예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시종일관 자기에게 베푸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 그것을 기억하면서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기는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같이 쓸 모 없는 인간들을 구해 자녀들을 삼으셨다는 그 신앙의 감격을 가지고 어찌하든지 이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자기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그 분의 이름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높이시는지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심하고 물질을 맡기십니다.
물론 목회자와 같이,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충성되게 주를 위해 살아도 일평생을 끼니가 간 곳 없이 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경우를 보면 그렇게 충성스럽게 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안심하고 물질을 맡기실 수 있기 때문에 물질을 주시고, 안심하고 권력을 맡기실 수 있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앉히시고, 높여주셔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며 섬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을 높고 아름다운 지위에 앉히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어떤 사업을 하고 어떤 방법으로 해야지 돈을 버는지, 어떻게 해야지 금시발복을 해서 큰 부자가 되고 높은 명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서 낮아지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뼛속까지 배이고,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버린 자처럼 내팽겨쳐 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죄가 있으면 씻어서 깨끗케 하시고 당신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뼈아픈 과거가 있으면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전에 실패했어도 이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은혜를 그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자기와 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삼으신 것은 죄인을 향해서 일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필이면 자기와 같이 못된 인간을 사용하셔서 이 일들을 이루신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제가 교회가 이전할 때가 되어서 전략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교수로 있던 때에 제자가 와서 자기 아버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에 와서 꼭 3일만 설교를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곳에 가서 보니 교회를 크게 잘 지어 놓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그 교회는 교인이 300명이던 시절에 지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목회도 , 건축도 잘 모르면서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300명이 이렇게 큰 예배당을 지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 전도사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목사님, 그 때 저희들은 신들렸었습니다.”
성령에 신이 들렸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전부 다 그 교회 하나를 짓기 위해서 다 자신의 집을 팔고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지어진지 3,4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헌신한 사람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복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누리며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을 때에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채워주셔서 놀랍게 다시 가세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은혜를 받고 , 그러면서 이 교회를 자신의 피붙이처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을 정말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느낍니다. 이 교회는 제 교회도 아니고, 주님의 교회입니다만 그러나 항상 남이 대신 목회를 해 주는 것은 아니니까 나의 목회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고 섬기지만 때로는 정말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섬기고, 교회를 사랑하는 지체들의 뒷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저는 눈물을 흘립니다.
이 교회는 제것도 아닌데, 저도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여기에 와 있는데, 내일이라도 부르시면 제가 이 세상을 떠날텐데, 제가 저를 돕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기만 해도 이렇게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맙고, 무엇이라도 내게 있는 것으로 다 주고 싶은데 교회의 주인이시고 여기에 모여있는 모든 양떼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 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재산과, 체력과 재능과 기회를 쏟아 부으면서 섬기며 일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쓸데없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미친 사람처럼 여겨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높여 주십니다. 아름다운 지위를 이 세상에서 갖게 하십니다.
세 번 째로는 하나님이 천국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첫 번째 집사였던 스데반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주위의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돕고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집사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편의 훌륭한 증거를 강퍅한 유대인들에게 남겼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그는 그 한 번 밖에 없는 복음 전파의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한번의 설교를 한번의 생명과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충성했습니다. 돌멩이가 날아오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쓰러졌고, 피묻은 돌멩이들이 그를 뒤덮었지만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그렇게 충성스럽게 살았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충성스럽게 최후를 마감한 이 스데반을 받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좌에서 일어서셔서 그의 영혼을 받으셨습니다. 아마 틀림없이 팔을 벌리시고 올라오는 그의 영혼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자기를 위해서 죽은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 스데반, 그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무 하는 것도 없이 되는대로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황급히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은 사람과 똑같이 대우하신다면 주님의 공평한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면류관을 보면서 살아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디에서 들은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올라가니 커다란 식당이 있더랍니다. 이 세상에서 살던 대로 대접을 받는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천사가 와서 수종을 들면서 성도들을 대접하는데 어느 장로님께서 올라갔더니 짜장면을 한 그릇 내놓더랍니다. 열심히 먹고 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까 자기에게 꼼짝 못하던 집사 한 사람이 저쪽에서 아주 큰 그릇에다가 먹음직한 탕수육을 먹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물었답니다. “저는 장로였고 교회 일도 열심히 했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좋은 요리를 먹습니까?” 그랬더니 천사가 하는 말이 “아무 말 말고 드십시오. 댁의 담임 목사는 배달하러 나갔습니다.” 고 하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것을 모두 적어 놓으시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휘장을 걷고 난 다음에 주를 위해서 살았던 대로 많이 산 사람이든지, 적게 산 사람이든지 그것을 따라서 각자 아름다운 지위로 갚아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일평생 주님 밖에 모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하나님 섬기는 재미로 일생을 산 사람들은 그날이 얼마나 복된 날일까요? 무거운 사명의 짐,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부담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안식이 있는 그 곳에서 우리의 모든 땀과 눈에 흐르는 모든 눈물과 주를 위해 살기 위해서 흘렸던 핏자국을 씻기시고 영광스런 면류관을 씌우시고 우리를 당신 앞에 앉게 하시고 당신을 찬송하는 아름다운 성도로 삼으시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날일까요? 이 세상의 어느 왕의 대관식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으며 이 세상 어느 왕자가 세자로 책봉을 받는 그 순간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기쁜 순간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임금들의 면류관은 시드는 꽃으로 씌어진 것들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일평생 주님을 섬기다가 쓴 면류관은 쇠하지 않는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아서 교회에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 보니까 믿음의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담력, 이것은 담대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상 비굴합니다. 할 말을 제대로 못하고, 뒤에서만 말을 하는가 하면 , 혹은 두려움이 있어서 어떤 문제를 직면했을 때 새가슴이 되고는 합니다.
여러분들은 가나안의 첫 번째 정탐꾼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머지 10지파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나머지 10명이 그 땅이 악한 땅이고, 거친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 아니라고 거짓말로 보고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들이 그렇게 자기네 눈으로 두 사람이 꿸 채에 포도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들이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그렇게 거짓 보고를 했어야 했습니까?
그렇게 그들이 진실하게 보고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담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 보고만 한 것이 아니라 참된 보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를 꺾어 놓는 부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진실되게 보고를 했습니다. 성이 높고 그들은 굉장히 커서 우리 어깨 위는 더 올라가고 거인과 같고 그들은 무기를 가졌고,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와 같았다는 보고는 과장이 아니고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말로 보고하고 백성들을 수많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담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그들은 정직하게 보고했습니다. “그 땅은 정말 기름진 땅이고 우리가 본 땅 중에서 너무 아름다운 땅이고 정말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그런 복된 땅이고 우리가 거기에 가서 정착을 하기에 마땅한 땅이다. 그러나 그들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성은 높고 우리보다 발달한 병기를 가졌고 그들은 우리보다 덩치가 훨씬 커서 기교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창칼로 싸우고 백병전을 하는 옛날의 싸움에서는 우리가 불리한 것이 틀림없다.” 그 사실을 사실대로 다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하나님이 떠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담력입니다. “저희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처음부터 왜 그 땅으로 가라고 하셨겠습니까? “저 사람들에게 죄가 가득 찼기 때문에 내가 그를 징벌해야겠는데 그 징벌하는 도구로 내가 너희들을 택했다.”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님께서 쓸어버리려고 작정하신 족속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긍휼을 거두신 족속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기에 저들이 강하고 힘센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리고 그들이 그 곳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 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해 주실 것이다 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고 그 믿지 못하는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어떻게 이 싸움에서 우리와 같은 오합지졸이 저 강력한 군대를 격파하고 그 높은 성읍을 차지할 수 있는지 합리적인 보고서를 만들어서 우리를 설득해 보라고 한다면 전지전능하신 여호와와 함께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지만 그것은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과 계산으로 설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멘하고 받아들이고 확신할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위기 속에 담대함을 지녔던 이 여호수아와 갈렙 이 사람들이 그 이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충성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일찍이 출애굽기 33, 34장에서 이스라엘이 큰 위기를 만나고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우상 숭배를 책망하실 때에 회막을 만들어 놓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거기에 가서 기도할 때, 모세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간 후에도 그 긴 밤을 회막을 지키며 여호와 앞에 매달렸던 사람입니다. 깊이 헌신하며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애통하며 지도자로서의 영성을 길러가기 위해서 충성스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하는 그 과정에서도 얼마나 충성스러웠는지 보십시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 일을 하였고 마지막에는 가나안을 모두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평안한 삶 속에서 부패에 흐를 그 때에 유일신 신앙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외치면서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고고하게 외쳤던, 충성스러운 생활을 죽을 때까지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담대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갈렙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모두들 평지를 차지하고 싶어할 때에 그는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이렇게 나이 많아 늙었으나 내게는 아직까지도 힘이 있으니까 나에게 가장 험한 산지를 주십시오. 내가 저기에 나아가서 저들을 쳐서 몰아내고 그 산지에다 여호와의 깃발을 꽂겠습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죽을 때까지, 노령에 이르러서도 계속했던 사람입니다.
아무리 지금은 동의할 수 없는 일꾼들도 젊었을 때 처음 얘기를 하라고 하면 눈물나도록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주를 위해서 생명을 한 번쯤 드려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번 그렇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너는 이제 선한 싸움을 다 마치고 내게로 오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일관되게 충성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믿음의 담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눈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나, 혹은 이 세상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향한 욕망에 흘러지지 아니하고 하늘의 소망에 빛나는 신령하게 반짝이는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충성스럽게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담대한 확신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여기에 그가 나를 세우셨으니 그가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시고 내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나 하나님의 일이 모두 형통하게 될 때 희희낙낙하고 웃으면서 좋은 표정을 갖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난관에 부딪히는 것 같고, 어려움이 있는 것 같고 벼랑 끝에 선 것 같을 때에 비로소 같은 일꾼이라도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정말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충성하는 사람인가, 상황을 보고 필요할 때에만 충성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인가 이것을 모두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는 이러한 충성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담대함을 가져서 삼킬 듯이 밀려오는 이 모든 인생의 파도를 정복하고 점령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오히려 위기 속에서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6.충성되이 여기시는 하나님 Ⅰ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성경의 인물가운데 바울만큼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을 반복해서 말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가 사도행전에서만 하더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사가 세 번이나 반복이 되고 교회에 편지를 쓰는 가운데도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난 그 감격과 과거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회고하기를 즐겨하는 성경의 저자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은 옥 속에서의 일이었고 디모데는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를 시작하는 장면을 보면 믿음의 대 사도가 아들과 같은 훈계 조로 편지를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도는 목회서신으로 알려져 있는 디모데서에 먼저 “사랑하는 디모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고하고 자신의 소명을 반추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는 것입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예전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이후의 그의 삶이 무엇을 목표로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는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충성되이 여기셨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내가 실제로 하나님 앞에 충성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다. 희랍어 원문에서 보면 이 단어는 “하나님이 나를 충성된 사람으로 치셨다” 그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문맥상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뒤편에 보면 자기가 핍박자요 포행자였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나는 정말 죄인 중에 괴수이다.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문맥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여기서 “나는 충성되이 살았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재물도 모으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생을 살았노라” 말할 수 있는 문맥이 아닙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다. 나는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지 못한 것 같은데 주님이 보실 때에 나를 충성된 사람으로 보아 주셨다.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사도의 고백입니까?
여담이지만 들어보십시오. 언제나 하는 얘기가 아니니까? 물을 비닐로 코팅된 봉지에다 부어봐야 물은 물대로 가고 종이는 종이대로 가겠지요. 종이 중에서도 표면을 코팅을 해서 반짝 반짝하는 고운 종이가 있습니다. 물을 부어도 태반이 흐릅니다. 이런 것입니다. 이 성경이 25연된 성경책입니다. 가보입니다. 이제 보통 중요하게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낡아서 습기찬 날이 되면 이 습기가 이 책으로 들어옵니다. 이 책이 가변 성경입니다. 이렇게 두툼해 집니다. 햇볕이 바짝 나는 날 가져다가, 그늘에다 말립니다. 가죽포이니까? 그러면 성경의 부피가 줄어듭니다. 이것이 닳고닳아서 표면이 다 벗겨졌는데 이곳에다 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으로 베어 들어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어도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어떤 말씀의 메시지를 흡수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되면 아주 스쳐지나갈 것 같은 성경의 말씀을 캐치해서 들어가면 쭉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스며들어갑니다. 그래서 성경 사이에 있는 행간의 진리가 강력하게 녹일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어떤 경험을 하느냐? 면 무슨 성경 말씀이 나오는데 무슨 상황에서 이 성경이 나왔는가?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그 성경 글자 사이에 들어있는 대목입니다. 그 상황하나를 생각하면서 깊이 은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자기가 충성스럽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를 충성되이 여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얘기했던, 정신질환자, “목사님! 이 고장에서 나만큼 주의 일 많이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보다 이 사도바울의 고백은 얼마나 신앙의 고백에서 나오는 말입니까? 주님이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한 한가지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충성되게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느끼는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그 피흘리며 눈물흘리며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지 않으면 충성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제가 있던 교회에서 연세드신 목사님인데 옛날 역사를 잘 알고 계십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이 수백 명이 나온 사진이 있습니다. 매주일 한사람 한사람마다 그 인물에 대해서 훌륭한 점들을 골라서 설명해 주시는데 깊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 사람은 순교자의 명부에는 올랐지만 진짜 순교를 했는지 괜히 죽었는지, 미스터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왜요? 근거가 없이 어떻게 이 사진 속에 있습니까? ”,“그런데 죽은 것은 평소의 그 사람의 신앙으로 볼 때에 결정적인 순간에 진리 때문에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갑자기 그 명부가 썰렁해 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사람을 순교자이냐 순교자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생각해 주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 주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다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면서 삽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생각이 우리의 삶의 겉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의 척도와 기준을 하나님이 내리신 평가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천, 수만의 사람이 자기를 향해 박수를 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명성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내가 골방에서 무릎을 꿇을 때에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내가 너를 기뻐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의 하는 일을 인정해 준다. 이런 평가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교만한 사람 중에 충성된 사람이 없고 외식하는 사람 중에 충성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보다 과도히 신경을 쓰면서 인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 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가치의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면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옛날 찬송가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이 세상에 있는 즐거움이나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평판이나 이런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람은 충성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의 결심 문에 보면 그 가운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1번은 나와 나의 모든 이웃은 하나님 아버지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2번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안 해도 나는 한다.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 아니면 이 세상이 모두 옳다고 해도 나는 안 한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명예에 대한 욕망은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충성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기껏 살아봐야 껍데기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주님이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하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인터넷에 오래간만에 들어가서 답장을 한참 쓰다가 왔습니다. 가끔 보면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흉보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어떤 때에는 너무 바빠서 일주일 정도 뒤에 열어 보면 내 흉보는 것은 조회건 수가 왜 그리 많습니까! 웬 갓 사람들이 들어와서 다 보고 갔습니다. 할 수 없이 일주일 뒤에 답장을 씁니다. 인격적으로 씁니다. 천천히, 솔직히 말씀드리면 싫습니다. 칭찬을 들으면서 살아도 힘든 세상인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나한데 편지를 많이 보내는데 모두 힘내세요. 빌빌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교회 한번 옮기는데 무슨 사람이 죽어 가는 것처럼, 초상집 분위기로 몰고 가지 말아요. 괜찮아요. 얼굴이 초췌해 보인다는 둥, 그렇지 않아요. 얼굴이 원래 못생겨서 그렇지, 이런 일로 뭐 초췌합니까. 이 보다도 더 깊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왔는데, 뭐 그래요. 괜찮습니다. 그 얘기도 자꾸 여러 사람들이 하니까 듣기가 싫더라구요.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염려가 됩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건강 조심하세요. 언제는 제가 용기가 없었습니까? 좋은 얘기도 몇 번 들으면 싫은데, 좋지 않는 얘기는 사람들이 자꾸 와서 할 때에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있지도 않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명예를 훼손할 때 느끼는 감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때마다 내가 느끼는 다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위해서는 이렇게 예민하고, 속상한 얘기를 들으면 밤이 잠이 안 옵니다. 어떤 목사님은 화가 나면 사탕을 입에 물고 “요놈”하고 아지직 깨묻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돌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제가 언제가 교역자들 한데 얘기를 했는데, 저도 맨 처음에 혼돈을 가졌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깨끗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한가지 의미가 이 견고한 삶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많은 연단을 거치면서 강한척하는 지도자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유리그릇 같았습니다. 누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하면 밤잠을 못 잤습니다. 좋아해도 밤잠을 못 자는데, 그 기질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날 누가 나를 흉보는 말을 쓴다든지, 용기 있는 사람은 편지를 쓴다든지, 아니면 정면으로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한 날은 들으면 불쾌한 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평정을 잃고 흔들렸습니다. 교수생활을 할 때, 학교에서는 검찰청장을 했습니다. 엄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학생들은 열렬히 좋아했지만, 싫어하는 학생들은 아주 혐오했습니다.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얘기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평정이 흔들리더라구요. 용서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고, 그러던 어느 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태도인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한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잖아요. 인터넷이든지, 전화이든지, 편지이든지, 일단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테 그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들어와서 저를 많이 야단을 치고 갔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단순합니다. 그렇게 여쭤본 순간, 진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염려를 주께 맡긴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도구가 되었을 뿐, 제가 이런 비난을 받았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라고 말씀을 하시면 그 사람에 대해서 너무 감사해야 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낸 사자입니다. 내가 너무 못 깨달으니까 무례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용서하고 안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발람선지자가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를 보면서 앞을 향해 가지 않는 나귀에게 감사해야 되야 되지 않습니까? 나중에 입을 열어서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너를 태우고 다니면서 이런 적이 있었느냐? 눈을 떠서 봐라 이 정신병환자야? 눈이 열리고 보니까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이지 않았습니까? 감사해야지요.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기분 나빠하고 범죄하고 그럴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아주 논리적으로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말을 해요. 이렇게 말할 때에는 손찌검을 하고 이렇게 말할 때에는 이것을 집어던지면서 나를 구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유할 수 있지요. 하나님이 그렇지 안다고 하는데, 그 뭐 지나가는 개소리인가 보다 하지, 아니 그것 하나에, 성경을 보면서는 365일 우는 적도 없고, 웃은 적도 없으면서 누가 와서 얘기하고 가면 막 천국을 올라가는 것처럼 붕붕 뜨다가 또 한마디하면 땅바닥에 처 박혀서 길길 거리고, 무슨 하나님의 사람이 그런 사람이 있는가 말입니다. 놀랍습니다. 이 원리를 내가 발견했는지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예외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휫필드 같은 사람들은 일평생 사역을 했으니까 얼마나 대적들이 많이 있었을까요? 왜 그렇습니까?
산 속에 들어가서 묘목은 등산객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높은 나무가 사람들 눈에 뜨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어깨 넘어 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인식을 넘어서니까 모두가 다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공격이 있었겠습니까? 일평생 수많은 비난을 받아도 한마디도 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분은 대적들과 씨름을 하면서 변호하고 변증하여야 할 에너지를 축적하여야 했습니다. 어떤 신앙에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이 옳다하시면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고 그래도 고난을 받으면 의를 위한 박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강인함이 폭력 조직 배들의 강다귀와 다른 것입니다. 너무나 다른 얘기이지만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어떤 리더쉽차원에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평가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옳고 인정해 주시면 난 충분하다라고 하는 것이 견고함을 가져다줍니다.
저는 그 진리를 터득하고 난 다음에 제 자신이 영적인 삶에 굉장한 안식을 찾았습니다.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훨씬 강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강함과 다른 것은 이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가치 기준의 변동이 없는 강인함은 기질적인 깡다구기질에 개입이 됩니다. 그런 깡다구 같은 기질이 개입이 되면 항상 거기에는 비인격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그냥 터프한 사람이 되어 볼까요? 어느 교회 목사님이 집사가 되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으니까 그 사람을 따귀를 몇 대 갈겼다고 합니다. 집사가 되가지고, 교회도 안나오고 말이지, 따귀를 맞으니까 조인트를 발길로... 사랑하기 때문에 패는 것입니다. 얼마나 터프 합니까? 항상 그런 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기준이 어떤 것인가의 변화 없이는 그 충성됨을 이야기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런 원칙을 따르기를 충고합니다. 진심으로 충고합니다.
이것이 대적들에게 둘러 쌓일 때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 방법입니다. 아주 중요한 비결입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아주 자존심을 상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충고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하는 순간 그 아이의 말이 옳다고 말하시면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그 메시지가 중요해요. 그 메시지가 전해지는 방법이 중요합니까? 아니 내가 암에 걸렸는데 암의 말기입니다. 어떤 의사가 와서 암 말기입니다. 제가 의사로써 이런 진단을 내리게 된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암말기입니다. 옥체를 보존하소서 이렇게 말은 안하고 좀 무례한 의사가 있어서 몸을 어떻게 관리를 했기에 암이 말기가 되도록 그대로 놓아두었소. 정신 차려 내달이면 죽어, 수술하라고 그랬는데 가면서 씩씩대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례하기는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어떻게 나한데 반말을 지껄이고, 죽어 가 뭐야, 돌아가셔야지, 이러고 씩씩대고 갔다. 그것이 말이 됩니까? 메시지가 중요하지, 그것은 다 고치고 산 다음에 다 수술하고 고친 다음에 하는 말이지, 나 그때 유감이 있었다. 왜 반말로 찍찍하냐? 살았으니까 하는 말인데 다른 사람한데는 그렇게 말하지 마라.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지 그런 것을 따지게 되었느냐,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지 알겠지요? 메시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기분 나쁜 사건을 통해서 왔어도 무엇인가 비난받을 것이 있는가? 하나님 사실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무례하게 한 것, 그런 것 하나도 나지 않고, 선명하게 가슴에 찍히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에게 주었다. 가서 진심으로 그 사람에게 가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그 무례한 표현이기는 했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내가 너무나 많이 돌아보게 되었고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을 다시 재고하게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우는 가치기준은 비굴이지 겸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비난받을 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삶을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그것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칭찬 받을 때에도 적용됩니다. 칭찬 받을 때에도,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저것도 인간인가? 왜 태어났는가? 그렇게 한심하게 보이는 사람에게도 펜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저런 분은 훌륭할까 수십만명의 열렬한 펜이 있어도 그 중의 몇 사람은 그 사람을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칭찬을 받는다고 우쭐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 칭찬하면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그래도 계속 하면 들어요 듣고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어떤 사람이 저 한데 그러는데 나는 태어나서 너 같은 그리스도인 본적이 없다. 어쩌면 그렇게 신앙의 인격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 말이 맞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당근이지” 그러면 감사하지요. 이렇게 많이 변화시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누가 나보고 뭐라고 뭐라고 막 그러는데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하고 계시면 아닌 것입니다. 응답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니구나! 하나님 이 바람과 같은 인생에서 착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풍설에 마음을 써서 하나님 앞에 성숙의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이런 정신으로 사도가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충성 되이 여기셨다라는 것입니다. 쳐주셨다는 것과 사실이 그렇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너무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정신과 인식을 가지고 그런 인식 속에서 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된 삶을 헌신적으로 살고 나서도 마지막에 그렇게 충성된 삶을 살고 나서도 마지막에 자랑거리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충성되지 않았는데도 충성 되다고 인정해 주신 하나님 때문에, 저는 이 광경을 보면서 너무 부끄럽습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그런 마음이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눈을 들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일주일 동안을 어두움 속에서 지내고 육로에 위험과 해로의 위험을 수많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고난을 받으면서, 핍박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서 가정도 없이 자신의 재산도 없이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하나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채우면서 산 사람이 내가 충성스럽게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한데 충성 되다고 쳐주셨던 마음, 이 마음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가?
너 어디 가든지 충성하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주 너의 하나님 왕되신 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우리는 어떠한가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여겨 주실 까요? 그런데 이제 사도는 이렇게 충성된 삶을 살았고 또 그렇게 충성 되다고 여겨주시는 가운데 자기 인생의 일어난 놀라운 두 개의 일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자기를 능하게 하셨다. 두 번째는 직분을 맡기셨다. 첫 번째 능하게 하셨다 라는 번역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능하게 하셨다는 유능하게 해 주셨다는 말이 아니라 영어서 “엠 파워링” 능력을 부어주셔서 능하게 하심, 말하자면 기술을 익혀서 유능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약이 다 떨어진 건전지에 강력한 파워를 충전에서 그래서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으로 , “듀나미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in powerling, 강력한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능하게 하는 것은 일에 반복되는 일에 능해지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능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1940년대에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포드 시스탬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산업의 일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켄데어 벨트를 인용해서 자동차를 서서히 이동하게 하면서 나사만 조이는데는 나사만 조이고 유리 다는 사람은 유리만 달고 전깃줄 메는 사람은 전깃줄 메고, 이렇게 하면서 착착착 진행이 되니까 너무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일을 계속 반복하고 나니까 최고의 기능공이 되는 것입니다. 작업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지고 정확도도 뛰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저는 딱지치기도 잘 못하고, 다마치기도 잘 못하고 했습니다. 우리 같은 골목에 사는 얘 중에서 그 유별나게 잘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동네 딱지를 푯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싹 쓸었습니다. 집집마다 난리입니다. 여기 있던 장부책 어디 갔냐? 신문 어디 갔냐? 그 아이네 집에 다 있습니다. 구슬도 말입니다. 삼각형 속에다가 집어넣고 다니는데, 우리는 어쩌다가 하나 맞는데 이 아이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 구슬이 있는데 어쩌면 그냥 던지면 딱하고 맞는 것입니다. 빗겨서 맞는 것도 아니고 딱 맞으면서, 맞은 놈은 띵겨가고 때린 놈은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아마 대단했을 것입니다. 얘는 손부터 다릅니다. 전문가입니다. 땅에 매달려서 놀아서 손매가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워낙 능했기 때문입니다.
직장 다닐 때 어디를 갔는데, 나는 그런 것도 못합니다. 트럼프를 하는데 트럼프가 여기서 ... 여기서 무슨 아커디온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운동 가운데 멋있는 것은 선수들이 서브를 멋있게 먹이면서, 그 세련된 폼이 잡히기까지 삼만 번의 연습 끝에 그 폼이 나온다고 합니다. 한 가지 일에 계속해서 반복되면 유능해지는 것입니다. 늘 하던 것이니까? 유능해 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일에 반복된 일을 통해서 유능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워가 그 사람 속에 부어져서 그 사람이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능력, in powerlling이라고 할 때 빼 놓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성령의 강한 은혜, 그 영에 강력한 체험을 채워진 속에서 살 때에 생각은 신령은 창조적인 생각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 그 일들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신령한 능력이 뒤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간단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공식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in powerlling 해서 그 능력 있는 사람으로 powerful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같이 없을 경우에는 일을 많이 해서 유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의 강한 권능을 부어 주었을 때에는 양상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경험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교인들을 기가 막히게 분배를 하고 관리를 하는데 성령에 의해서 in powerlling된 사람은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면 그 인간들이 변하고 거꾸러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새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섬김의 질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일에 있어서 유능한 사람들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있는데, 분장을 하는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골같이 병든 사람도 그 사람 손에만 가면 건강한 사람처럼 화장을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의 의사가 있는데 암 말기의 사람을 석달만에 고쳐서 걸어다니게 만들었어요. 두 사람을 비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분야도 다르고 질도 다른 것입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일에 달고 달아서 내가 유경험자가 되었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사도바울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들한테 늘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래된 교사가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기도도 안하고 그리고 영혼을 애절하고 절절한 마음도 없고 공과 준비도 안해도 되고, 몇 년동안 울거 먹어서 “다윗”하면 뻔합니다. 몇 가지 “골리앗” ‘ 아 그거’ 물 맷돌로 쓸어버린 이야기, 더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는데, 일에 익숙해진 사람이 된 것이지, in powerlling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계속 해 나가다 보니까 충성된 것이 아니라 익숙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익숙해지면서 하나님은 절대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in powerlling을 통해서 강력한 능력으로 변화된 사람이 사도바울이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사도바울을 볼 때에 다메섹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평생 그것을 울거 먹으면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것이 참다운 고백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고백입니까? 저의 생애에 있어서 입증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버리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주시는 포기할 수 없는 목표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녹아 본 사람, 그리고 주님이 주신 자기의 사명이 진심으로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뼈 속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런 공식을 가지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일할 뿐이지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일은 하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의 충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의 충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섬기는 과정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그에게 in powerlling 해서 강력한 사람으로 만드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할 뿐입니다. 유능해질 뿐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을 전달할 뿐이지 그 복음이 자신의 영혼을 헤집고 들어와서 그 영혼의 실체가 되어서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충성되게 감당해 나가지 않으면 교회나 하나님이 손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이 고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되게 일을 하지 않는 사람 중에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일에 미친 사람 말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고 그 분에 대한 순수한 사랑 때문에 그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 그래서 그분이 너무나 소중하고 고귀하기 때문에 그분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오직 그분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 살아있는 영혼을 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말 충성된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 놀라운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수 잇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평가를 삶에 있어서 기준으로 생각해라. 주님이 생각하실 때에 네가 충성되다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고린도 전서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들로 나타나기를 그렇게 힘쓰면서 살아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성령으로 in powerlling된 사람으로 그래서 단지 일에 달고 단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한 능력을 받아서 된 사람, 그래서 무엇인가 사역의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이 아니라 사역에 밑바닥을 두들겨 부수어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 사역을 하면서 충성된 삶 없이 말씀에 지속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워낙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을 때에 번쩍하는 지식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시는데 그때에 우리들은 온 영혼은 전율하게 합니다. 오감이 깨어나고 이 일을 몰랐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어둠 속에서 살았구나! 그렇게 깨달았으면 즉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번에 열린 하늘을 보니까! 뭐라도 해야지 그러고 살면 뭐하냐. 그랬더니 자극을 받고 전도를 했다고 그랬는데, 그렇게 살지 않으면 말씀에 대한 감각이 누그러지기 시작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에 자신은 이제 내가 상당히 말씀에 대한 지식이 축척 되었기 때문에 이제 말씀이 신선하지 않게 느껴지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는데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겨우 자신의 머리를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 글을 기억하신 그 하나님의 믿어야 되냐 말입니다. 맛이 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파악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이처럼 노사도가 될 때까지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런 노사도가 될 때까지 생생한 복음의 대한 통찰력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면서 주를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하거나 성경을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을 가지고는 고민을 많이 하였는데 자신이 섬기고 있거나 자신이 변화되고 있지 않는 영혼을 가지고 몸부림친 흔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충성된 삶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영혼을 맡겼더니 교회에 나오는 것을 가지고 너무나 대견하게 생각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교인이 계속 늘어나고 헌금도 많이 나오고 열심히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이 겉만 번드러한 사람이 되었으니 오호라 나여 곤고하도다라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목표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전자의 사람은 후자의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고뇌 속에서 성경 속에서 답을 찾는 것과 그냥 거짓된 만족 속에서 성경에서 위로나 찾는 것이 어떻게 똑 같으냐 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업그레이드시켜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으면 충성된 삶에 있어서 업그레이드된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하고 싶은 면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맡은 일이야 어떻게 되든지 아랑곳없는 사람들은 사실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실상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일이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일이 식당에서 교인들을 먹으라고 밥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교회의 맨 바닥을 끌어내는 청소의 일일 수도 있고, 목사가 되어서 가르치는 일일수도 있고, 구역장 일수도 있고, 교사일수도 있고 무엇일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새벽에 올라가서 종을 치는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성실하게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말 생생하게 느끼면서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 해겠다고 하는 투철한 목표의식이 있게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과정을 통해서 불결한 자신이 정결케 되고 중심을 못 잡고 삶의 목표가 불분명하던 사람이 고정된 목표에 영혼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쏟아 붓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왜 필요한지를 터득하게 만듭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 사람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충성 되이 여기시는 하나님 Ⅱ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하)
사도바울이 자기 스스로의 입으로는 자신이 충성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그럴 충성된 자로 여기셨습니다. 그 자체가 은혜였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충성된 삶을 살 때 주님께서 두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를 능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그리고 오늘 다루는 것은 그에게 직분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능하게 하셨다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많은 일을 오래도록 반복해서 하기 때문에 일에 숙달되어서 능하게 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셔서 일을 행함에 있어서 기능상 유능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 면에서 뛰어나서 그래서 그 사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질이 업그레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보다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충성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에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존재하는 가치요. 그것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온 마음을 쏟아 붓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능력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 강한 군사와 같은 사람들이 된 사람, 믿음의 사람들,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믿음의 신령하고 거룩한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예전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직분들을 감당하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의 이유와 목표가 분명하고 깨끗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인생의 목표,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라도 이루어야할 사명이 없는 사람들은 굳이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고 분투할 필요도 없고 생명을 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무엇 때문이고 그렇게 보냄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게 하셔서 구원해 주신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귀한 은혜,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안는 사람들은 분투합니다. 그들에게는 좌절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실패라고 말할 수 있는 고비가 있습니다. 역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인내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자기를 십자가의 은혜로 사랑을 기억하며 자기에게 맡기신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 그 사람들을 신령한 능력을 부어 주셔서 그들을 유능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충성 되이 여기실 때에 그에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누군가 제게 준 명함을 보니까 얼마나 직분이 많은지 앞쪽도 모자라서 뒤쪽으로 넘어 갔는데 뒷면이 빽빽하도록 아주 깨알같은 글씨로 수개의 직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 직분과 사도바울은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직분을 하나님께서 사도에게 허락하셨을까요? 직분이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 원어로 보면 “직무”번역을 하는 것이 원어의 의미에 훨씬 가깝습니다. “직무”, “목회사역”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훨씬 가깝습니다. 이 직분은 상당히 지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의 초점은 직분의 의미보다는 일을 의미합니다. 지위보다는 일을 의미합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은 일은 나에게 맡기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그에게 무슨 회장, 이사장, 무슨 총제, 무슨 대회장, 이런 오늘날에 유행하는 세상의 명예와 견줄 수 있는 직분은 없었지만 사도바울은 일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일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다메섹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후 그의 인생은 일 속에서 산 생애였습니다. 그냥 일 속에서 살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일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매를 맞은 것도 일을 하다가 매를 맞은 것입니다. 왜 깊은 어두움 속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서 바다 속에서 배가 깨트려지고 죽을 뻔한 위기를 경험한 것도 일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굶주렸습니다. 만약에 시골에서 한가하게 천막이나 만들고 돈벌이나 하면서 자신의 육신을 공개했더라면 굶주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로마의 시민이요. 탁월한 엘리트 였던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노예 취급을 받으면서 감옥에 갖치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한 이유, 동족에게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는 대신 모욕과 죽임을 당할 위기를 넘겨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일이 아니라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맨 처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사울을 만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격적으로 사울을 찾아오셔서 거꾸러 트렸습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울의 입에서 “주여 뉘시니 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내가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주님의 발앞에 엎디어서 겸비하게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제 그는 생애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자신은 확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없다. 메시야는 없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그 젊은이, 이단의 괴수로 여겨져서 처형을 당하고 누군가가 시체까지 훔쳐가 버린 그 사악한 무리의 우두머리인 예수, 그가 결코 메시야일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이전의 자신의 신앙의 세계가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게 되시자 자신이 이제껏 까지 알게 되었던 구약의 신학이 찬란한 메시야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성경 구석구석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들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무너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져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혼란과 혁명적인 변화의 한 복판에서 예수님께서 천천히 그에게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가 나타난 것은 내가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난 일에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도록 하겠다라는 이 말의 의미를 사울이 알 수 있었겠습니까? 없었을 것입니다. “ 내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네가 나타날 일들에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한다” 그렇게 증거 하는 일에 수종드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널 사용하려고 한다. 그럴 때에 사울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할 것이며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26살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목사가 되라는 피할 수 없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내 일이 이런 일인지 몰랐습니다. 목사가 되라고 하니까 인생이 끝난 것 아닙니까? 술을 먹을 수 있습니까? 담배를 피울 수 있습니까?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가장 혐오했던 일입니다. 2층 교회에서 교인들의 코 묻은 돈이나 먹고사는 그 더티한 직업, 나중에 알고 보니까 2층 교회가 얼마나 좋은 지 몰라요.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에 2층교회 목사님들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저 사람들은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어떻게 2층에서 저렇게 살수가 있나? 그나마도 못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소원이 있다면 빨리빨리 주님의 일을 농축해서 하고 죽어 버리는 것이 그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목사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곰곰이 기대는 할 수 없고 상상만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상상하는 모습은 제가 시골을 워낙 좋아했으니까 시골 깡촌이나 아니면 저 바닷가 오막살이 같은 곳에 모여 있는 그런 교회에 가서 결혼은 하면 하고, 말면 말고, 어차피 구겨진 인생이니까 그리고 동네 사람들 끌어안고 열심히 복음을 가르치고, 힘 닫는 대로 복음을 전하다가 그러다가 어느 한적한 시골에서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죽는 꿈밖에는 꾼 것이 없습니다. 뭣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의미가 이렇게 복잡하고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세계 속에 들어와서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추진하고 결정하는,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목사인지 몰랐습니다. 앞에 다 산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이 소명하셨을 때에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몰랐는데 누가 사도가 되어 본 사람이 있어요. 물론 있었지만 그 사람들하고 사도바울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울이 무슨 목회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까? 그들 밑에서 목양을 받았습니까? 교회 생활을 해 보았습니까? 어디 교회에 가서 교육 전도사 생활을 해 보았습니까? 그냥 다메섹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쫓아 가다가 번쩍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거꾸러져서 진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구나.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구나. 이것을 깨닫는 순간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과 같이 벌벌 떨리고 정신이 혼미하여 하나도 기력이 없는 상황에서 주님이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증거하는 심부름꾼으로 내가 너를 삼았다. 그때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여유가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인생은 사라졌고 주님이 나를 사로 잡으셨으니까 주님이 무엇을 증거하라고 하셨으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증거하고 심부름꾼처럼 나를 삼으려고 하시니보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에 사도바울이 나보고 목사되라고 그러셨을 때에 그 생각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사도바울이 당장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당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돌아와서도 그는 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그를 예루살렘교회에 소개시켰습니다. 사울의 이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신용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그리스도인을 가장하고 들어온 첩자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에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바나바가 그 사울이 정말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에게 사로잡힌, 주님의 종이 된 것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을 소개하고 변명에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앞부분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나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저명 인사였고 사울은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위험한 젊은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회심의 진정성까지도 의심을 받은 그 상황에서 무슨 일이었겠습니까? 할 일이 뭐가 그렇게 남아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는 자신의 진액을 다 풀려서 모자를 정도로 그에게 많은 주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어디서든지 많은 곳에서 그의 전파하는 복음을 듣고 싶어했고 그리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갈한 영혼들이 그의 섬김을 원했고 그와 함께 수종하는 많은 동역자들의 헌신, 선교적인 수고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 속에 묻혀서 사는 생애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회심조차 의심을 받은 한 예루살렘 교회의 무명한 젊은이가 별로 한 것도 없는 젊은이를 하나님께서는 후일에 자신의 생명을 다 드려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직무들을 그 일들을 행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죽을 때까지 일 속에 묻혀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옥 속에서 편지하던 가운데 나누던 그의 말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가질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너희를 위해서는 내가 더 살아있는 것이 좋겠다” 일을 위해서 내가 살아 있으면 너희들이 나를 통해서 신령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제일 좋으나 너희 때문에, 일 때문에 내가 살아 있다.
많은 일들을 주님께서 맡겨 주셨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어느 신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신적인 강제력 속에 사로잡혀서 산 생애였습니다. 그러니까 “ 적인 강제력”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하나님 자신이 갖는 신적인 강제력 이런 신적인 강제력, 소명대로 살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하나님 자신이 감지하는 신, 신적인 강제력, 소명대로 살지 않으면 형벌을 받을 것 같은 신적인 강제력,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인생 그 전체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신적인 강제력, 주님을 위해서 사는 주님을 이 세상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세상이 되는 것을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러한 강력한 신적인 강제력,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위해서 피눈물 뿌리면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 같은 신적인 강제력,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로 잡힌 바 그 무엇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적인 강제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충성스럽게 행하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점점 더 점점 더 그에게 더 많은 일, 더 많은 활동의 영역, 더 많은 활동의 범위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사울 말고도 12명의 사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팔레스타인, 즉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국경을 넘지 않고 사역을 하다가 대부분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써 전파될 수 있는 세계선교의 기반을 모두 놓았습니다. 신약의 진리 가운데 13권이나 되는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그 자체를 복음 진리로 조직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도구로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일들을 맡기신 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일들을 그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남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다 감당하면서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숫자가 제한되어 있는 시대에는 더더욱 일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몰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라는 말도 잘 해야 하지만 아니요라는 말을 용기 있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지만 조국교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누가 무엇 좀 하다고 하더라하면 전부다 빨대 들고 덤벼들어서 꽂아서 짝 빨고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면 빈깡통을 차는 것입니다. 모두 일회용품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도 마찬가지이고, 글쓰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강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이십년 삼십년을 롱롱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히 사모함을 받는 그런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불가 5년 내지 10년 아주 짧으면 2-3년 반짝하고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삶의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아니요라고 할 때에 분명하게 선을 그어서 “아니요”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은 일 속에 묻혀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할 일이 없어서 한가하게 돌아다니면서 자기에게 일거리를 주기를 고대하면서 다니는 사람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절제하며 사는 사람, 두 사람의 영광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될까바 걱정입니다.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이 늙을 때 잘 늙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자기가 아는 친구가 있었는데 얼마나 성품이 고결하고 진실하고 자존감이 강한지 모든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런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교회를 은퇴하고 나서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공허감에 시달리면서 전화를 해서 막 우시더라는 것입니다. “아무개 목사, 나야 나 설교 좀 시켜 줘 사례는 안 달라고 할게” 하시면서 막 우시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공허하면 그러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셔서 일에 시달릴 때에는 정말 힘들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한데만 왜 일을 맡기시냐. 진짜 하나님께서 일을 하나씩 거둬가 보실 까요? 정신이 돕니다. 하나님이 하나씩 하나씩 일을 거둬 가시면 여러분들은 일에 시달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요즘이야 살벌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너 그만 뒤 하면 옷을 벗는 세상이지만 옛날에 쉽게 직원들을 내 보내지 못할 때, 어느 기업에서는 내 보내고 싶으면 출근은 계속하게 하는데 일을 다른 사람을 다 줍니다. 친구는 윗도리를 벗고 쪼기 바람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하는데 부장은 그 사람보고 그 사람의 도움을 못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밥도 못 먹고 일을 하는데 자기는 빈 책상에 서류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심장이어도 두달이상 못 있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아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균형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우리에게 맡기실 때에 하나님을 위해서 얼만큼 까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재어야 합니다. 만약에 쇠 구슬을 실에 묶어서 돌린다고 할 것 같으면 이 구슬의 무게와 실의 강도를 생각하면서 돌릴 것입니다. 무명실에 주먹만한 쇠 구슬을 묶어서 힘차게 돌려 봐야 뚝 끊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줄이 탄탄한 나일론 줄이면 좀 돌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일들이 우리를 필요로 해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지키면서 일을 위해서 활동할 수 있는 영향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재면서 이 일을 해야지, 미련하게 일 속에 뛰어 들면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도 함께 기억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일들인데 우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때에 그 일들을 거부하는 것은 불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었으면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종일 뿐입니다. 그 하나님께 수종을 드는 마음으로 낮아지는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부름 받은 노예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일을 해도 주님을 위해, 안 해도 주님을 위해 하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성되게 여기실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일들을 맡기십니다. 그 모든 것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신 것은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고 우리의 섬김이 요긴하다고 말할 때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섬기지 못하는 것을 당당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그리고 내가 그곳에 가서 당신들을 섬기는 것을 당신들에게 유익하지만 내 영향인 만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내 자신을 지키며 이렇게 절제합니다. 내 자신의 분수를 알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겸비하게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영향을 스스로 컨트롤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계속 일을 맡기십니다.
개인적으로 보아야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하나를 맡겼는데 너저분하게 일을 해 놓고 시킨 내가 가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더 힘일 들 때에는 할 수만 있으면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어차피 본전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굴 찾겠습니까? 그 사람 말고 그 일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완결해 낼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나만 갖고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거기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되도 그만 안돼도 그만 하는 일은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을 하시는데 해도 되고 안되고 되는 그런 일을 가져다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꼭 이루고 싶어서 갈망하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누구에게 그 일이 갈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충성스럽게 하려고 하는 사람, 자기를 버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십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그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 분이 우리 주 그리스도라는 평신도 수준의 “뉘앙겔리조마이” 복음에 수근 수근 소문내는 이런 개인전도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 후에 그를 사도로 삼으시고 그 설교의 선교의 전략들을 지휘하고 지도하는 기독교 신앙의 대의 초석을 놓는 사람으로써 하나님께서 삼으셔서 모든 초대 교회의 근원중 한 사람이 되게 끔, 그래서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알게 끔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예수님하고 직통으로 통한다고 바울 너두 필요 없다고 꺼지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바울을 통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그런 통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라고 외치면서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을 읽다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을 보다가 그의 성경적인 신학사상을 발견하고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것 보다 훨씬 정도가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던 복음서 만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두 조직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조직화해서 서신서를 통해서 교회적인 맥락에다가 초석을 쭉 깔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아 비키라, 성경을 비키라고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무식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일꾼으로 주님이 삼으신 것은 그가 처음 소명을 받을 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가 무엇인가 자기를 위해서 일하신다고 하는 것만 알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가 충성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무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사역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껏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세워 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이 너무 너무 필요한 사람으로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 가든지 목회자가 사역에 있어서 보배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맡낄 때마다 불안합니다. 무슨 일을 낼지, 맡기기 맡겼는데 마음이 도저히 놓이지 않으니까 쫓아다니라고, 이런 사람들 말고, 저 사람이 생명이 있은 한 자기에게 맡겨진 그 하나님의 일이 가장 소중한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다 드리는 그러한 섬김의 삶을 다 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특별히 신학생들이 많은데 그 사람이 미래에 어떤 교역자가 될 것인지 교사를 하는 것을 보면 다 압니다. 교사들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교사를 아주 열렬하고 신실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런 교역자가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런 목사가 됩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있을 때 중고등부 전도사를 했는데 신학생 하나가 왔습니다. 올 때에는 담임 목사의 책을 읽고 왔는데, 이 교회밖에 섬길 교회가 없다고 왔는데 무슨 일이든지, 변소 청소하는 일이든지 시켜만 주시면 충성스럽게 일한다고 그래서 중등부교사를 시켜 주었습니다. 뻥이었습니다. 개기기 시작하는데 지적이면 개기고 뭉개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이나 분위기를 어느 정도 고려하면서 태만하게 하는데 무대보입니다. 신학생인데 주일날 교회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눈물 펑펑 흘리면서 기도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는 거창합니다. 한국교회 비판을 하면서... 저 사람하고 일하게 해 주신 하나님 찬송하기가 참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격려도 해 보고 야단도 처보고 그랬는데 막무가내 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년도 못 채우고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 네가 무슨 목사가 되나 보자 했더니 원수는 외다리 나무에서 만났습니다. 대신 대학을 사표를 내고 천안대학으로 왔는데 거기의 대학원 과정에 와서 만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의 수종을 든데나 어떻게 한 대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갔는데 무슨 관심을 갖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목회 사역이 잘 되나요?” 그러니까 그 사람 하는 말이 가슴을 찌르더라구요. “그때 교수님을 그렇게 도와주던 꼭 그런 사람들하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목회 사역의 고달프면서 옛날의 내가 이렇게 섬겼을 때에 김남준 교수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실토를 하는데, 참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도 신학교 다니는 분들, 신학교 다니는 학생이 가르치는 반은 두 번 세 번 물어 봅니다. 얘들 상태가 어떠냐, 심방은 잘 하냐? 열정이 있느냐? 말씀은 잘 가르치느냐? 꼭 그런 사람 만납니다. 여러분들과 똑 같은 동역자들을 만납니다. 두고 보십시오. 또 그런 사람들은 나보고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러면 목사의 사역이 어땠는지 알겠네요. 저 같은 사람만났으니...? 그래요 아무렇게나 생각하세요. 어차피 지나간 일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똑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붙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너무 감사합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섬김, 그리스도를 위해서 섬기고 헌신하면서도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그런 겸비한 사람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의 사랑의 변함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크고 작은 직분을 진실하고 성실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런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불평을 합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일이 몇 사람에게 몰린다. 자기도 해 보라고 하세요. 이것이 쉰 떡 돌리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공평하게 아무에게나 나누어 줄 수 있는 문제냐? 이것입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되나 안되나, 신기하게 하나님의 일은 충성된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있는 자는 없는 자의 것까지 빼어서 있는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있는 자는 점점 더 일이 많아지고 없는 자는 점점 더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공식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공평하다가는 난리가 납니다.
오백여명 모이는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주일학교도 하고, 거기에다 여전도 회장도 하고 이것이 엉망징창이 되고 회의를 한번 하려고 하면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고 하니 어떻게 하겠어요. 시간이 중복이 되니까? 그래서 이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우리 골고루 일을 맡아서 한 가지씩만 일을 합시다. 한가지 일에 헌신을 하기로 하자” 했더니 성가대도 폐쇄 직전이 되고 주일학교도 문내리기 직전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야 잘 되었지요. 너는 세 가지 일을 하지 말고 한 가지 일만 맡어, 너 지금까지 하나도 맡지 않았지, 여기에 와서 교사 맡어,“ 그래서 처음에 출발할 때에는 일꾼들을 많이 세웠는데 그 일꾼들이 다 일꾼입니까? 죽어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출석 생활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그것을 했는데 무슨 수로 아침 8시에 교회에 나오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열한시반이 되어야지만 기껏 나오던 사람들이 무슨 수로 그렇게 나오겠습니까? 주일학교도 문을 닫고, 성가대도 문을 닫게 되는 그런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세반을 나누어주었더니 나중에는 합반이 되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결론을 내리기는 아 이것은 안돼는 것이구나. 그러면 천명이 되면 그렇게 되겠네요. 그렇게 안됩니다. 왜 일꾼이 많아지지 않습니까? 일꾼이 많아지는 대신 그렇게 교육받을 아이들이 많아지고 그 일을 섬겨야 할 일의 종류가 많이 늘어나니까 그러니까 마찬가지 비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더 많은 일들이 맡겨지는 것입니다. 더 많이. 그런 직무들을 주님이 자신들에게 맡겨 주셔서 마지막에 그 교회의, 오늘날의 교회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인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수종들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충성스럽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은 우선 “충성스럽다”라는 하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의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충성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세워 주신 그 자리를 죽어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의 근본, 기본입니다. 잘 보십시오. 적군이 쳐들어 왔을 때에 달려나가서 용기 있게 싸우다가 작렬하게 싸우다가 죽지는 못해도 자기가 맡겨진 자리에 있어서 끝까지 총을 쏘다가 죽는 것과 그 다음에 거꾸로 고무신 신고 도망가다가 뒤통수에 총 쓰고
쓰러지는 것과 아니면 총알도 아직 날아오지 않았는데 백기들고 가서 적장의 품에 앉아서 입맞추는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입니다. 성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자리에서 계속 서 있는 모든 사람이 충만하고 유능하고 권능 있고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에 불붙여 저서 불꽃처럼 타오릅니까? 그런 불꽃은 없습니다. 다 인간일 따름입니다. 서서 충만한 가운데 피 흘리며 눈물 흘리면서 자기의 일을 감당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떨썩 주저앉아서 살 용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고무신을 꺼꾸러 신고 도망가다가 뒤통수에 총 맞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감당하려고 애를 썼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 때문에 주저앉으면서도 차마 자기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거꾸러 돌아서서 도망가는 것과는 다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전도사때입니다. 전도사일 때 가슴이 갈기 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속이 편하게 목회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생전 빠져 본 적이 없는 선생이 주일날, 아무 통보도 없이 안 나왔으니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심방을 갔습니다. 어디가 아팠지? 그러면서 아니라고 하면서 변명을 하지 않습니까? 인천 앞 바다에 놀러 갔다고 했습니다. 상태가 너무 나빠서 아이들이 가르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해는 하지요. 누구는 상태가 좋아서 설교를 하고 있나요? 이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당에 열심히 왔는데 담임 목사가 설교는 안하고 부목사님이 올라왔습니다. 일정표에 보니까 어디에 가지도 않았는데, 보니까 저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단 말입니다. 부목사님이 광고를 하시기를 “목사님이 상태가 안 좋아서 제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워 주신 자리에, 때로는 눈물을 흘릴 때도 있고 때로는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무신 거꾸러 신으면 안됩니다. 그 사람은 회복이 쉽지 않습니다. 하다가 하다가 주저 앉는 것은 다시 두 다리에 힘을 받고 다시 일어나면 되는데 고무신 거꾸러 신은 사람은 다시 그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제가 기도의 교리를 말씀드리면서 기도가 강력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주여 삼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서 있으라는 자리에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 기도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충성은 우선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자기를 세워주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얼마 전에 봄페이의 최후의 날에 대해 전시도 하고 그랬습니다. 거기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대해서는 에스비유스 화산이 폭발하면서 봄페이라는 도시가 삽시간에 묻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화산이 폭발을 했는데 용암이 흘러나오고 화산 제가 나오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 아닙니까? 참 놀라운 것이 봄페이에서 성을 지키던 어떤 군사들은 창을 들고 서 있는 부동자세의 화석이 발견된 것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규율이 엄하기로 세계 역사에서 유명한 군대였습니다. 화산이 폭발을 해서 화산이 흘러내리는 데 부동 자세로 죽어서 그 화석이 그대로 발견된 것입니다. 죽으니까 용암이 확 덮쳐서 사람은 용암에 의해서 없어지고 구멍이 뚫리는 것입니다. 그 구멍 속에다 석회를 집어 넣고 본을 뜨면 이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그 자리를 떠나면 곳 죽음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거기를 지키는 그 마음, 그 자체 충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충성되다고 하는 것은 그저 거기에 눌어붙어 있는 것만을 가지고 충성되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자기 자리를 지킬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자신을 쏟아 붓는 섬김이 있는 삶, 그 자리에서 그것이 정말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해 보니까. 말씀을 전하는 일 뿐 아니라 교회의 일을 행하는 일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원리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직원들 한데도 하는 얘기가 무엇하나를 맡겨 주면 그 일을 꼭 필요한 일이다면, 그 일을 관찰하게 위해서 항상 아주 간단한 일이 아니면, 그 일을 못하게 하는 요인이 항상 있습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그 요인에 쉽게 굴복하고 마는 것은 그것이 불충성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무슨 일을 하는 가운데 항상 대부분의 모든 일들이 그 일을 성취되지 못하게 하는 그 방해 자체가 그 일 앞에 수 없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자매 가운데 꽃꽂이를 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벌써 몇 년 되었습니다. 주일날 보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는데 돈도 문제이지만 꽃을 사 가지고 와서 자기를 이것을 해서 이곳에 놓아야 하는데 아무 때나 기분 내킬 때하고, 서너게 해 놓았다가 몇 달 쓰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 맞혀 놓아야 합니다. 꽃이 없으면 조사를 해야 하고, 이것이 오랜 동안 계속 할 때에 이것을 그대로 행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지를 정해 놓고 어디를 가려고 하는데도 차를 놓쳤다, 가다가 빵구가 났다. 전철이 대모를 해서 출발을 안한다고 하더라, 가다가 넘어졌는데 병원에 갔더니 문을 닫았더대라, 별의 별 이유가 많아서 자기가 가는 길을 막는 요소들이 많은데 더군다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을 성취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가로막는 요인이 얼마나 많겠느냐? 이것입니다. 그 때에 한 두 번 시도를 해 보다가 그 일을 못하게 하는 요인에 굴복을 해서 그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불충성한 것입니다. 충성은 그것을 뚫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어떤 한 일을 하는데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다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발생하였을 때에 막혀서 그만 두고, 그만 두고 하는 이런 사람은 이런 식으로 한가지 일을 되풀이해도 항상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능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배우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돌아가는 길도 찾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문제를 뚫고 지나가는 방법을 찾고, 아니면 밑으로 지나가는 길을 찾고 찾으면서 극복을 해서 결국은 많은 난관을 거치면서 성취해 내고 나면 이 일을 하나를 하는 동안에 수많은 일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더 점점 더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입체적인 지식을 갖는 박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국은 그 목표를 성취해 내고 마는 자기 쏟아 부어지는 사람이 있는 삶, 그것이 충성된 삶인 것입니다. 그저 이것밖에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이 있으냐 하고 떨 퍼덕 주저앉아서 이제 고무신 바꿔 신어 봐야 내가 무엇을 하랴, 배운 것이 이것밖에 없으니 하고 떨 퍼덕 주저앉아서 있는 것은 견고함이 아닙니다. 전봇대보고 견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살아 있는 나무보고 견고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셨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처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복음을 증거하는 심부름꾼이 되라고 하는 그 자리에서 일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높이실 수도 있었고 큰 일을 맡기실 수도 있었고, 적은 일을 맡기실 수도 있었지만 항상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그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삶이 그의 생애 속에서 아주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에 철저한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충성된 것으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애달픈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파한 교회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을 때에 그는 눈물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복음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구원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이단의 교리에 빠져서 흔들린다는 소리를 들려올 때에 무엇이든지 그들을 위해서 해 주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모든 것을 자신을 모두 허비하고 싶을 정도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다 쏟아 부어서라도 이 영혼들이 잘 될 수 있다면 이 영혼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싶다면 아주 사모하는 마음,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열렬하게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이것이 충성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이고 자기가 무슨 일을 위해서 부름 받았고 섬기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그 일이 실패하는 곳에 성공하는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강한 목표의식을 가지면서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는 삶을 가진 사람, 그런 삶을 살았을 때에 주님이 충성되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달란트의 비유에서 다섯달란트를 맡겨 주신 그 종은 어떻게 했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달란트를 맡겨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 달란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사업을 하고, 장사를 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 마음의 욕구는 무엇이었습니까? 군대간 얘들 내무반에 들어가 보면 화장실에 가보면 새까막게 낙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 시간만 지나면 제대할 것이라 그것입니다. 충성된 이 종은 시간이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인이 올 때에 최선을 다해 장사를 해서 남겨 드려야 겠다라는 소원이었습니다. 그 일에 자신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일을 위해서 그렇게 자신을 쏟아 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 살고 난 다음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았는지 불충하게 살았는지 주님이 무엇을 보고 재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투표로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았는지를 결정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얼마나 부단히 자기를 처서 복종시켜 주님 닮은 사람으로 자기를 바꾸어 갔는지, 두 번째는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 때 그 사람은 하나님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지 그것을 보고 우리의 인생이 충성된 삶을 살았는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좋아하는 것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가질 수 있었는데 버려 본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얼마든지 평탄한 일이 있었는데 욕먹고 고난받는 길을 걸어 간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몰랐더라면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가책 받지 않고 인생을 살 수 있었는데 주님 때문에 내 인생의 아픔을 누르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준 적이 있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을 쏟아 부는 그 무엇 없이는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시간에 이곳에 오셔서 “얘야 왜 우니 네가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앞에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뭐냐? 한가지만 들어주고 싶은데?” 물을 때에 생각이 안 나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초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고급 양벌한벌 해 주십시오”라고는 말하지 않겠지요. “광대뼈도 낮추려고 하는데 수술비 좀 대 주세요?” 그러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의 안전에서는 그런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에 “하나님 나는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나오는 기도 제목이 없습니다. 한가지만 들어주신다고 말씀을 하신 데에 솔직히 내게는 자신 있게 이것입니다 라고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사실상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의 삶입니다. 그는 충성하지 않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매말라 있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말랐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가슴을 뛰게 하는 거룩한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목표를 성취하게 못하게 하는 자신 안에 있는 악한 요소와 환경 안에 있는 저항하는 요소와 분투하는 삶도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을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일 뿐입니다. 아침 구름과 같은 인생, 아침에 있는 이슬과 같은 인생,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이 글을 남긴 사도바울을 비롯한 모든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그렇게 물어 보실 때에 아주 간단하게 “주께서 내 생명을 가져가시더라도 만약에 생명을 바꾸자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기꺼이 바꾸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모세에게 물어 보셨더라면 모세는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오 주님 당신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땅을 안전하게 주님과 동행하며 그 땅에 이르게 하옵소서 나의 생명도 아깝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한지 얼마 안되어서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부패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던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야! 한 가지만 너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한이 될 것 같은 기도제목을 말해 보아라?””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말했을 것입니다.“ 오! 주여 제가 필요한 것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신 신앙의 부흥입니다.” 만약에 솔로몬에게 물어 보셨다면 그는 틀림없이 초창기에 성신으로 충만하였을 경우에는 “하나님 내 부친인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받아 주시옵소서”이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기드온, 입다, 삼손 모든 사람들이 이런 기도의 사람들이 이런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요즘 우리 교회의 이전의 문제를 놓기 기도를 하는 집사님들은 아주 실감이 나는 기도 제목일 것입니다. “소원이 뭐냐? 입당예배가 소원입니다” 동감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그 목표의 성취를 통해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것을 소망하며 이루어질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그 목표에 자신의 마음을 고정시키고 거기에 제물, 시간, 건강, 마음,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사는 그런 삶, 그것이 충성된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충성된 자를 살피심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101:6)
겉으로 매우 바쁘고 헌신되게 살면서 사실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속에도 생명이 있고 겉으로도 하나님을 위해서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 태만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외해 놓고라도 그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분깃인 것처럼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때로는 많은 일을 하지만 그 사람 안에 그 사람의 생명이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아시지를 못합니다. 그가 열심히 거룩한 일에 종사하지만 자신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자신에게는 진리가 다가온 적이 없습니다. 애써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공간과 시간 전체를 하나님의 일로 채우지만 그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로 가득 찬 적은 그의 없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허한 삶을 보면서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일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열심히 일을 해도 그 심령이 완전히 죽은 자와 같은 자가 될 수 있구나 그러니까 결국은 아마도 저 사람이 저렇게 영혼이 비참하게 된 것은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일 꺼야? 그리고는 일을 줄이면 봉사하는 것을 줄이면,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을 굉장히 많이 허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이 이런 논리에 굳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을 무엇인가 굉장히 두렵게 느끼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헌신하는 것이 곧 일에 대해 미치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그것은 곧 자신 속에 있는 생명을 포기하거나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오물 단지를 만지듯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에 내적인 충만한 생명과 거룩을 누리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십시오. 물론 잘 듣고 있지만, 정리를 하자면 이것입니다. 항상 양쪽에 치우치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잘 방향을 잡아야 됩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우리들이 내적인 충만함을 유지하면서 주님의 생명으로 가득 찬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경건의 세계가 견고해야 하고, 개인적인 경건의 세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기에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아니 성경을 폈으면 발에 쥐가 나도록 한참 읽어야지요. 일간스포츠는 사람 찾는 광고까지 눈을 뒤집고 보면서, 성경은 5분도 안 읽으려고 하면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한참을 해야지 유익이 되지, 새벽기도 와서 손바닥을 찍고 가는 것입니까? 6시 14분에 와서 설교 끝나고 나서 30분에 끝나고 나가면 왔소. 갔소이지 물론 그렇게 라도 오는 것이 낳습니다. 그런데 물론 빨리 가서 밥도 하고 그래야 되니까? 시간이 없이는 제 아무리 장사라고 할지라도 깊은 경건의 세계를 견고하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세계가 유지될 때, 공적인 모임에 대해서 강력한 감화와 신령한 영향력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됩니다. 주일날 받아서 일주일 동안 떨어먹고 두드리면서 깡통 들고 와서 그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하는 신앙생활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시간,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굉장히 중요합니다. 깊이가 시간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물론 교회사 속에 시간과 상관이 없이 탁월한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십만명 중의 한 사람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끼려고 생각을 합니까? 그래서 제가 그것이 어느 정도 보도되었는지 모르는 것이지만 스펄젼의 전기를 읽으면서 놀랍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보다 기도 시간이 훨씬 짧더라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저 같은 사람하고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았다는 것은 의심의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설교집을 이렇게 펴면 유치원 학생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그런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있고 그것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거기에서 한참 나가다 되지만 거기에서 그것은 끊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인정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경건의 세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참 엎드려 있어서 무엇이 되지, 공중전화 걸 듯이 따르릉하고 뭐라고 뭐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다 들으시고는 말씀을 하려고 너의 기도를 듣고 보니까 사실은 이렇더라 그리고 얘기를 하시는데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천국에 가 보십시오. 사람이 없어서 도로 돌아온 응답의 편지가 가득 쌓여 있을 것입니다. 어쩌든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섬길 때, 살을 깎고 뼈를 깎아서는 섬길 수 있는데 시간을 깎아서는 섬길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시간이 자기에게 남아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침범이 되지 않는 시간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나 부 목사님들은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전 교역자들이 8시 30분에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집에 9시에도 들어가고 11시에도 들어갑니다. 그것은 진짜 하늘로부터 보낸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야 그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오래 전부터 이 다음에 내가 교회를 하면 교역자 출근시간이 무조건 1시이다. 오전 시간에는 기도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고, 천국의 이슬에 흠뻑 젖고 또 여유가 나면 책도 한두 시간보고 그러다가 흠뻑 젖은 은혜의 사람으로 농축된 사람으로 섬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말하더군요. 출근 시간은 있는데 퇴근 시간은 없다고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절대적인 시간의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인정을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밀려오는 일들을 못한다. 안 한다.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서는 것입니다. 하기 싫다. 좋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또 많이 한다 적게 한다 그런 말이 아니라 자신의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 그 범위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큰 구슬을 매달아서 돌린다고 합시다. 이 줄이 쇠줄이면 아무리 힘차게 돌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면으로 만든 줄이면 적당히 돌려야 합니다. 이것을 진짜 세게 돌리면 딱 하고 끊어지면서 쇠 덩어리가 휘 날아가서 누구 머리에 맞으면 살인입니다. 줄이 튼튼하면 세게 돌리고 줄이 튼튼하지 안으면 조심해서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줄이 견딜 수 있는 상황까지만 돌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관리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100%인정을 하고 그렇지만 아무 것도 안하고 일을 안 하면 저절로 그 남은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내적인 생명을 누리는 대로 투입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어디로 흐르는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길을 따라서 흐르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목사님 댁에 갔습니다. 컴퓨터 앞에 다가 “나의 금년 결심, 오락은 절대 하지 말라” 무슨 복잡하게 합니까? 프로그램을 다 지워버리면 되지, 안 깔면 되지. 유혹을 많이 받는 모양입니다. 마음이 오락 쪽으로 가면 그쪽으로 그곳으로 흘러갑니다. 마음이 멋 부리고 싶은 대로 가면 옷가게 돌아다니는 것 때문에 시간을 다 씁니다. 마음이 뭐 먹는데 그러면, 회 먹으러 어디를 가고, 짜장면 먹으러 어디를 가고, 곰탕 먹으러 인천을 가고, 그러다가 한세월을 다 보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교회로, 은혜 받는 대로, 하면 늘 교회만 왔다 갔다 합니다.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은 결국은 일을 어떻게 줄이느냐에 의해서 저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서 절대적인 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개인의 경건의 시간이 위협을 받을 정도로 해서 소진하고 나면 고갈 상태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은 사람이 단지 일을 안하고 놀다가 그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일은 그 마음은 어디를 향해서 흘러가겠습니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흘러가지 않는데 남은 많은 시간이 그런 경건과 하나님을 위한 시간으로 흘러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절대적인 시간을 널널하게 흘러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의 수로를 따라서 시간을 흘러 보내는 삶을 사는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삶의 질을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양도 중요합니다.
언제가 전철을 탔는데 독서를 하라고 써 났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책을 못 보는 스타일입니다. 눈이 나빠서 이나마 이 눈도 잘못 관리를 하면 그 남아 앉아서 책도 못 보겠다라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외국 사람들과 우리 나라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외국 사람들을 보면 지하철을 타든지, 무엇을 타든지 보면, 사람들이 거의 모두 책을 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게 옆의 사람 신문 보거나, 아니면 멍하고 있거나, 끄덕거리고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루에 15분씩 사십년만 책을 읽으면 대학을 4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저것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에 있는 대학생들을 굉장히 높이 평가를 한 것입니다. 4개가 아니라 10개도 넘습니다. 전자 계산기를 꺼내서 계산을 해 보았더니 하루에 15분씩 읽는 것을 쳤을 때, 저 사람은 10년 동안에 250권의 책을 읽는다고 본 것입니다. 250권이 대학 1개를 나온 것의 독서 분량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 학생은 제대로 된 학생입니다. 250권 좋아하십니다. 몰라, 만화까지 다 합치면 그렇게 될지. 25권이 읽을까? 카바에서 카바까지 완전히 독파해서 읽는 것이, 25권이나 될까? 좀 심하지만 말입니다. 하루에 10분씩 책을 읽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쭉 쌓이고 나면 도저히 다른 사람이 따라 올 수 없는 량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나면 추월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질, 질, 말은 하지만 질도 량에서 옵니다. 어떻게 추월을 하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한된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데,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처다 보시다가 아무렇게나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왜 벌써 죽었느냐? 를 가지고 하나님이 비난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참 일을 할 나이에 왜 죽어서 여기에 왔니? 하나님이 그렇게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불렀기에 말입니다. 문제는 정해진 삶의 기한이 있는데 그 기한동안에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산다고 하는 의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질적인 우월한 삶을 사는 것이고, 또 하는 양적으로 많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질적으로 우월한 삶을 살고, 양적으로 많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구 말 맞다나 이 바닥에서 누구보다 나보다 주의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일 저 일을 쑤시고 다니면서 했는데 열매는 거의 없다. 양은 많고, 질적으로는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는 삶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무엇이든지 맡겨주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게 끔 밑바닥까지 잘 파고 들어가서 좋은 성과를 거두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많이 사는 것입니다. 일평생 사는 동안에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한 사람 가르치겠다고 왔습니다. 그것도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무엇인가를 조직화하고 효과적으로 하고 최선을 다해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놓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질에 있어서도, 양에 있어서도 성공한 사람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면 사는 내적인 생명력 있는 삶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충성스러운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나의 두 눈이 땅의 충성된 사람 속을 향하여 있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나의 눈”,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의 두눈”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지력을 동원하셔서 무엇인가 그들을 향해서 있는 장면입니다. “충성된 자”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어 “아만”동사에서 온 수동형 분사 복수입니다. “아만”은 “아멘”이 거기에서 왔습니다. “견고하다” 그 뜻입니다. 히브리어 사람들의 입장에서, “충성되다”라는 말과 “견고하다”라는 말은 동의어입니다. “아멘”이 거기에서 온 것입니다. 부사입니다. 충성되다라고 하는 것은 견고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충성”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다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그 충성은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보면 충성되다라고 하는 그림이 견고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워준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 그것과 그 곳에서 자신의 최선을 쏟아 붓는 것 이것이 충성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견고한 사람들을 충성 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이 충성된 자들 속으로 히브리어 ‘베’라는 전치사인데 “into"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충성된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의 눈이 그 충성된 내면을 관통하면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눈이 충성된 사람이 있는데 정지의 개념이 아니라 움직이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충성된 사람이 있는데 그 충성된 사람의 내면 속을 꽤 뚫고 감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견고하다”라는 것은 외면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앞에 세워 주신 자리에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고 서 있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내적인 동기를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그 내적인 동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헌신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리도록 간절한 갈망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감찰하시고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일을 맡겨 두면 정함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도 한번 옮기면 한참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식당에 가도 몇 달을 먹어 봐야 밥맛을 아는데, 방석에 가시 돋친 사람처럼, 여기에서 저기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여기에서 교회를 했다고 하더니 집어치었다 하더니 다시 한다, 다시 한다하더니 딴 것으로 바꾸었다, 이 교회에 있다고 하더니 다시 저 교회로 번쩍 가고 저 교회로 번쩍 갔다고 하더니 다시 이 교회로, 부흥사가 되었다고 하더니 다시 선교사가 되었다, 선교사로 갔다고 하더니 다시 돌아왔다고 늘 한 소식을 듣고 나면 그 사람은 벌써 두 걸음을 떴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견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내면 속에는 최선의 것을 쏟아 붓는 하나님을 향한 정신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심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품과 같은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너무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신경 안 쓰시는 것이 아니지만 지금 여기처럼 “랴 쉐베트 입마티” “나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내면의 세계를 애정을 가지고 쾌 뚫어 보시는 감찰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굉장히 중대한 부분입니다. 생명을 건기도 제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그 기도 제목 앞에 마음이 녹는 절대적인 기도 제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까? 하나만 얘기하라고 하면 “음, 예, 저, 무엇이드라, 뭐지, 그런데, 그래서, 있었는데, 저기 잠깐만” 하다가 주님이 “끝났네 이 사람아”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정말 그것이 결국은 무엇인가 목표가 있는 삶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맡겨 주었을 때, 그냥 온갖 열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동행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상회 나오지도 않다가 반장시켜 주면 반상회 안 나온다고 막 야단치고 다니잖습니까? 그런 심리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독재 시절에 부정하게 정권을 잡은 어떤 대통령이 우리 나라에 있었는데 그 부인이 회상을 하는데 자기 남편 너무 존경을 한다고, 왜냐하면 밤중에 세계 지도를 펴놓고 고민을 한다고, 누가 해도 다 합니다. 그 자리에 가면 말입니다. 나도 매일 교회 지도 펴놓고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 말고,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그런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감화, 그리고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해 깊은 사랑, 공경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그릇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아무 것을 맡겨 준다 할지라도 견고하게 서 있지를 못하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경외함이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조금만 사랑합니다. 아니면 거의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희미하거나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한해를 저물어 가면서 잘 보십시오. 잣대는 하나입니다. 내가 맡은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내가 서 있느냐? 그러나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소 잡아먹은 귀신 모양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나를 세워 주실 때에 내게 주신 목표에 대한 의식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가? 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내가 울고 웃고 있는가? 가슴 아파하고 기뻐하고 깊이 아파하고 그런 고뇌가 있는가? 그리고 그 일이 온전히 성취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그 일을 성공하여 자기에 맡겨 세워 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께 승리하는 삶을 살아 보여 드리고 있는 것이 불붙는 소원이 되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점검을 해 보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건강함이 아주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가 여러 번 써먹은 것 같은데, 제가 발명해 낸 비유이기 때문에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신선합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자연 속에서 숲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 스펄전은 그 호수를 너무나 좋아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에드워즈의 말을 타고 산책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나도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겠구나? 결국은 누가 자연 속으로 들어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진짜 자연의 세계에서 비치는 일반 계시의 빛이 거룩한 하나님을 응시하고 자연 속에서 자신과 하나님이 홀로 대면할 것 같은 그런 것을 느끼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런 아이들이 시꺼먼 밤중에 기도원 같은 곳에 갔다 놓으면, 부스럭 하는 소리만 들리면 놀라서 심장이 떨릴 지경이지, 대낮에 갔다 놓으면 삼겹살 구어 먹을 생각밖에 더 하겠습니까?
문제는 그 사람 자신의 내면의 질이 어떤 성질의 것이냐 따라서 그 환경이 이렇게도 기여하고 저렇게도 기여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길이 어디로 나와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충성된 사람들의 속을 하나님이 감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을 면밀하게 살피시는데 그것은 그들의 시험에서 드러낸다는 것보다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흔들리지 않고 있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을 기쁘게 찾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냉혹한 자본주와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자녀들을 근로자처럼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공했어, 못 했어?, 성공을 못 했는데, 성공을 못했으면 뭐 말이 많아” 하나님이 그런 대우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힘을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그런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갈 때에 그 내면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과 경외의 정신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아도니 저드슨이라는 사람이 미국에 보스턴 신학교에 수석으로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미얀마, 미얀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굉장히 좋은 교회에서 그를 부목사로 청빙을 했는데도 다 뿌리치고 죽음의 위협이 있다고 하는 그 미얀마 땅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느냐 하면 매일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토요일날은 하루 종일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천재였는데도 그렇게 깊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신자를 얻어서 세례를 주는데 6년이 걸렸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 선교지가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그렇게 헌신을 해서 토대를 놓아서 그 이후에 육만 여명의 미얀마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쳐진 한 나라의 선교의 문을 열면서 동토의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때에 그때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면 그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식이 뛰어나고 재능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자신을 세워 주신 그 자리를 떠나는 그 사람들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견고히 서서 마음 중심으로 자신의 최선의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섬기고 그 일의 성공에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그 신앙의 성패를 건 사람, 그런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이지만, 저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어깨를 두르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이 그런 것에 있어서 다듬어지고 정돈되려고 하는데 초창기에는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품꾼들이 포도원에 와서 일하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아침에 온 사람, 점심에 온 사람, 낮에 온 사람, 저녁때 온 사람, 나중에 품삯을 줄 때에 똑 같이 한 달란트씩 주니까 처음에 와서 일을 할 때에 내가 써 줄게 하니까 기뻐했거든요. 그런데 6시 끝나는데 어떤 녀석이 5시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두 들어왔나 하고 같이 일을 했는데 줄 때 똑같이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순식간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비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있다. 여기는 내가 있을 만한 곳이기 때문에 맡겨 주셨다. 이것 때문에 내가 우월할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라고 살아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일을 합니다. 그러면 저것은 정석대로 안하기 때문에 저렇게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자기를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성과가 초라할까? 이것은 내가 성경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 결과가 초라하다. 밑에 있는 사람과 비교를 하면서 자기 보다 못한 사람을 비교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효과 면에서 저 사람보다 훨씬 좋게 나왔고 저 사람은 아주 못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복을 안 주셨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저렇게 나보다 처진 위치에 서 있다라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다. 아래를 보면서 자신 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나는 저 인간보다 못한 인간인데,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구나 내가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 충성된 삶을 살아야 되겠구나하는 결론을 내리고 자기보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하기에 내가 모르는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순전한 동기로 살았기에 더 많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셨을까? 하는 자신을 드러나 보는 기회로 삼아야지 자기 발전이 있는데 이것이 위를 보면서는 자만해지고, 아래를 보면서는 교만해지는 것, 마찬가지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하니까 결국은 자신의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나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현실로 나타날 때, 그것을 보면서 무엇인가 메시지를 깨닫고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고치는 그런 것들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많은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얼마나 주님의 일이 많습니까? 정말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무엇인가 조국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처지가 되면 일에 치어서 숨질 정도로 일이 많은 이 나라입니다. 이 나라 이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무엇인가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누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기저귀 찬 아이가 견고함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 방금 예수님을 믿었는데 견고함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의해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시면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최선을 쏟아 부으면서 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내적으로 순수하고 그리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그 사람을 빚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맡겨 주든지 간에, 그냥 흔들흔들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구역을 맡겨 주어도 내 팽개치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무엇을 맡기면 시킨 사람이 더 불안합니다. 저러다가 안되지 뒤에다가 무엇을 하다 바쳐야 합니다. 안정장치를, 그것이 더 신경이 쓰여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영적인 수준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상태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새로워지지 않는 것은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죄악된 가운데에 살아가다가 흔들리는 어느 때에 번쩍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들어와 우리를 환하게 비치고 저주받을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걸어가는 어떤 급격한 회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생애적인 전기를 맞이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일어날 필요도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섰으면 그것을 옮겨 놓아서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섰으면 꾸준히 달려가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삶이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에는 계획이 있고 그 계획 때문에 그를 하나님 앞에 변화하게 하셔서 그에게 적절한 사명을 맡기셨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직무에 대한 태도가 진실하고 정직하고, 충실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생애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이 길이 하나님 믿으면서 가는 길이다. 발견하고 그 길로 들어섰을 경우에는 사실은 그 삶에 있어서 그 사람이 지속적으로 성화되고 변화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삶에 있어서 순종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의도하시는 길을 걸어가느냐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와중에서 하나님께서 수시로 맡기시는 사명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며 걸어가느냐 그것에 의해서 고갈된 영혼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살아감으로써 그 진리가 갖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고 그 진리가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성격들을 파악하게 되는 체험적인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구도가 작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런 식의 급격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한번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 그때에는 돌아서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지, 그리고 그 살아가는 길에서 하나님이 수시로 자기들을 세워 주신 자리가 어디지를 알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닌까 그 섬김을 통해서 영혼이 하나님을 주시한다든지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을 갈망한다든지 그 일이 실패하거나 좌절될 때에 자신의 부족을 깊이 깨닫고 절망한다든지 그러한 작용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 부패해 가는 것입니다.
벌써 자신이 맡겨준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열렬히 구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싶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기도도 다르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증거도 다릅니다. 자신의 삶을 향한 태도도 다르고 실패했을 때에 반응이라든지, 성공했을 때의 반응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느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교회에서는 무슨 직분을 맡았느냐? 세상에서는 내가 의사이냐? 아니면 무슨 직업을 가진 사람이냐? 년봉을 얼마 받는 사람이냐? 거느리는 부하 직원이 얼마냐? 이 험한 일이냐? 깨끗한 일이냐? 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겉으로 드러나는 종류의 일이냐 보다도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게 하고 있느냐? 하나님은 그것이 더 관심사입니다. 그것이 충성스러운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성공에 따라 울고 웃는 마음, 그것은 일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 사명을 맡겨주신 그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안타까움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세워주신 자리는 어디입니까? 교회적으로 볼 때에, 가정적으로 볼 때에, 사회적으로 볼 때에, 혹은 직장적으로 볼 때에 여러분을 세워주신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여러분들은 거기에 서 있습니까? 그 고유한 하나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거기에 세워 주셔서 여러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 일들을 여러분들이 이루어야 될 일들입니다. 물론 끝까지 감당하지 않으면 치워버리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있는 동안에서 여러분들이 아니면 서 있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제가 죽든지 사라지고 나면 여기는 저만 있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각자의 자리는 누구도 대치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각자 하나님이 심오한 은혜와 섭리 속에서 여러분들을 거기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세우실 때에 그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있어서는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고 계신 것입니다.
집안에 문제가 있어서 집안의 선교적인 사명이 있다면 나보다는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대를 걸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말씀을 듣고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과 이제 것까지 하나님이 인도해 오신 모든 은혜, 그 모두가 총체적으로 엮어서 농축한 연료로 삼아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세워주신 그 문제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명을 최선의 것을 드려서 감당하려 애를 쓰는 그런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라쉬베트 임마드’라는 구절인데 이것은 “나와 함께 거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말 성경에는 “거하게 하기 위함이라”, 다릅니다. 나와 함께 있게, 나와 함께 거하게 하기 위하여 나의 눈이 땅의 충성된 자들의 속을 향하여 있노라 여기에서 “쉐베트”라고 하는 단어는 “야샤브”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것인데, 구약의 동사에서 1090번 정도 나오는 단어입니다. 굉장히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동사로써는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야샤브”라는 단어는 “거주하는 것”입니다. 왕이 보좌 위에 오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여기에서 나온 단어가 “모샤브”라고 하는 단어인데 아주 쉽게 말을 하면 잠깐 들렀다 가고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짖고 아예 좌정하는 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뒤에 나오는 단어 “임마디”라는 단어는 “나와 함께 거하게 하기 위하여” “나와 함께”라는 단어도 굉장히 심오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굉장히 심오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외면적인 삶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삶의 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된 깊은 영적인 친교의 상태를 진 채 하나님이 그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동행하시는 사람을 남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심오한 의미를 가진 전치사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거하게 하기 위하여 나의 두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들 속을 향해 있다. 이 땅에 충성스런 자들을 향하여 내 눈이 그를 찾는다. 그들을 깊이 꽤 뚫어 본다. 그들을 나와 함께 하려 하기 위하여, 이것이 다윗의 시라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풍부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이 “임마디”의 신앙에 대해서 “나와 함께”의 신앙에 대해서 말입니다. 풍부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기름을 받은 이후로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라를 다스리고 마지막 운명할 때까지 하나님이 나타날 때마다 즐겨하신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입니다. 이것입니다. 내게 나와 함께 하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이 많이 사용하셨고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진수를 내면적인 세계에 있어서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 아주 분명하게 체험하면서 풍부한 삶의 간증을 남기면서 산 사람이 다윗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주목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풍부한 삶을 가지고 써내려 간 것입니다.
외면적인 삶으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을 때에 다윗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는 동료도 없고 혈혈단신이었습니다. 도망 다니고 지명수배 받은 상태였고 사울은 한 나라의 왕이었으며 수많은 자객들을 풀어서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계산을 깨고 그가 늘 죽음의 위기 속에서 구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나라들과 수없는 전쟁을 했는데 하나님은 항상 다윗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항상 이기니라, 이기니라, 이기니라, 계속된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군사의 숫자로써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전쟁도 치러 보았지만 거기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가 내 마음에 합하느라” 나의 뜻한 바를 이루러 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그의 외면적인 삶에 있어서 분명한 표적이 나타납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이겼습니다. 어떻게 안 잡힐 수 있는가? 안 잡혔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외면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간증이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진짜 사모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사모해야 합니다. 사람이 애쓰고 노력하면 사람이 애쓰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애쓰고 수고하면 하나님이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외면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는 약속이 성취될 때에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산다라고 할 때에 그것은 깡다구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외면적일 삶을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구출해 내시고 시련 속에서 그 놀라운 평안을 주시고, 곤고할 쯤에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고 도저히 상황이 닥쳐져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파격적으로 길을 내셔서 길을 보여 주시고 예기치 못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하시고 수많은 자기를 에워 싼 대적들 앞에서 벌벌 떨 때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 대적들을 초토화시켜 버리는 위대하고 놀라운 평화가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써내려 가다가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집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였고 대적을 멸하기도 하였고 죽음의 위기를 도달했지만 비굴해지지 않고, 하는 믿음의 행적들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다 외면적인 표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외면적인 표적이 따라다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모든 인생을 우리의 잣대로 살고 그것대로 산다면 “Where is God?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에게는 도전적인 모험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요세는 높고 그들은 우리들보다 크다. 하나도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똑 같이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들을 떠났고 그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임마디“ 나와 함께 하는 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표증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고 들어가면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을 계산하지 않고 사는 것, 그것은 교회도 만약에 그런 모험적인 정신이 없으면 그것은 경영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수지타산 다 맞추어서, 금년에는 얼마 해야 흑자가 납니까? 이것이 무슨 회사입니까? 무엇인가 하늘을 향해 치고 오르는 도전적인 정신이 필요하는데 그런 도전적인 정신이 우리 속에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는 표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그냥 쉰 소리만 펑펑치면 나중에는 거들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어느 날 저를 만났는데 자기네 교회 돈이 많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잖아요. 금년에서 몇억이 남았고 내년에는 건축헌금 하나도 안해도 몇 년 뒤에는 교회를 짓고 내가 보기에는 그 장로님이 생각을 잘 못 한 것 같습니다. 교회의 교인들이 돈을 쓸 기력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이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의욕이 있을 때에 돈을 쓰는 것이지 기력이 없는데, 문제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이는 돈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끊임없이 나를 하나님께서 여기에 세워 주셔서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셨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무엇인가 창조적인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아야 겠다. 그 시작이 끝나고 나면 그 자리에 있고 싶어도 빨리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동안만 하나님을 섬기며 살수 있도록 시간제로 우리를 거기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원없이 자신의 시간과 모든 것들을 쏟아 부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어떤 외면적인 삶의 표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 땅의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찾으셔서 그런 표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꿀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상대가 안돼도 꿀 수 없는 그런 꿈들을 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윌리암 케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선교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도 선교에 대한 사상이 약한 것이 놀라운 제목입니다. 그 시대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눈뜨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방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노예와 흑인들, 자기가 볼 때에 이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우상들을 섬기며 죽어 가는데 저들 모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매일 구두 드는 제화공이었는데 지구본을 만들어서 매일 끌어안고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기의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 사람들을 구원받게 해 달라고 그 당시에 사람들, 벌써 300년 전의 사람들인데 그 교통수단도 불비하고 하던 시대에 그런 꿈을 꾼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꿈을 꾸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도전은 그처럼 어떤 의미에서 황당할 정도로 굉장히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외면적인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놀라운 증거들을 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내가 도전하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의 진수는 내적인 교제입니다. 교통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도 다윗이 아주 풍부한 증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범죄해서 깊이 고뇌할 때에 그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내면적으로 성령이 그에게 기름 부음 받은 이래로 자기와 함께 하셔서 그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창세기에 보면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다. 36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에녹에 대한 얘기가 유다서에 나옵니다. 에녹이 선지자로써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다는 것은 하기 좋은 말로 복 받으면서 살았다. 은혜 받으면서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나누어주지 않는 특이한 영적인 교통을 에녹에게 주셔서 그 시대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그 인간들을 향한 마음을 에녹의 마음에 부어 주시니까 그 에녹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선지자가 아니었지만, 평범한 사람에 불가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둡고 타락한 시대를 향해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의 내면적인 삶의 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시간을 기도하는 것과 그런 것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서너 시간 기도하는 것, 엎드려 있는 것은 비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펄젼의 평균 기도시간이 1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요즘 목사들이 한시간 10분밖에 기도를 안하다면 그것을 저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뛰어난 영적인 수준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24시간 살아가는 그 삶 자체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야유회를 갔는데 어느 날 동역자들이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감사 기도합시다. 가는 곳마다 자연인데 그것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이 어떤 통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를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의 진수입니다. 신약적인 말로 하면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늘 경험하는 삶, 그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사람, 그 임재 아래에서 사는 사람, 그런 것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이면 우리의 인생은 다 산 것입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내가 열렬히 내가 언제나 느낄 수 있고 내가 먼 곳에 있든지, 가까운 곳에 있든지 언제든지 내가 그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내가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삶을 나와 함께 살아가는 표적들을 , 요셉이 그러했던 것처럼,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다니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세, 여호수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외면적인 삶이 그렇게 놀라운 증표들을 드러내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정복하면서 이 세상에서 막힌 담들을 허물고 고장난 사람들을 고치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런 삶 이외에 더 소망스러운 삶이 있습니까? 또 나머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 때문에, 소위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함께 거하게 하시는 놀라운 축복들이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가지고 그것을 일을 한다. 사람을 섬긴다라는 사고를 가지면 그 헌신의 정신이 1년을 못 갑니다. 구역을 맡겨 주었는데 어린아이들을 맡겨 주었는데 매일 나오지 않아서 출석률 떨어뜨리고 매일 결석하고 그러면 그 사람을 처지는 사람들을 주어서 출석률을 떨어뜨리냐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불러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달란트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그 속에서 자기에게 맡기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하나님을 향해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하는 진실한 헌신, 이것이 있을 때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충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내셔서 그와 함께 하시고 외면적인 삶에 있어서 내면적인 교제에 있어서 주님이 동행해 주시는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사는 이 삶, 이 마음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생명이 있는 삶, 주님이 특별히 동행해 주시는냐, 동행해 주시지 않느냐 하는 특별한 삶, 중대한 관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세워 주시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거기에 서 계십니까? 12월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최선의 것을 드려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고 합니까? 기도하겠습니다.
9.충성된 자는 열심이 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하)
수요일마다 이미 여러 주에 걸쳐서 충성스럽게 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각도에서 충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충성 그 안에 있는 핵심은 역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그 사람의 인격이 충성될 경우에는 그 사랑은 뜨거운 열심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충성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열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렬함, 불타는 것 같은 열렬함, 열정적인 것 없이는 충성을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충성은 언어나 관념 사상, 상상 속에 속하는 세계가 아니고 충성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삶 속에 열매로써 나타나는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이야기 할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충성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9가지 열매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열매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인격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격으로써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인격, 충성스러운 인격, 이 충성스러운 인격의 삶의 방식이 열렬하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열렬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것이 삼중의 목적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모두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고 여기서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에서는 “아노미아”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법이 없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하나님 앞에 옳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큰 법인 하나님 앞에서 부름 받은 우리의 삶이 창조의 본분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든 삶은 총체적인 불법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창조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불의 하게 불법하게 산 사람의 마지막 결과는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형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대신 값 주고 우리를 그 형벌을 피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구속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깨끗해 하심이라” 희랍어 원문에 보면 우리를 깨끗케 한다는 말은 “물로 씻어 낸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정화 작용이 일어나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영향이 가해져서 씻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자정에 작용에 의해서 씻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인격의 더러운 부분들과 우리 속에 구속받았지만 계속 남아 있는 내적인 부패성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씻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결케 씻기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협력합니다. 그러나 역시 주도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씻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인격적으로 깨끗해져 가는 대해서 소명이 없는 사람들은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화에 대한 고뇌가 없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마지막날에는 모두 위조된 확신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을 때까지 고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나는 왜 이렇게 더러울까? 내 인격과 내 존재가 왜 이렇게 부패하고 불결할까? 내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성품과 내가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특징이 왜 일치하지 않을까? 라는 그 고민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구원을 우리가 신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한 사람이 그 짧은 시간인데도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결을 본 것입니다. 반대로 “이 분은 옳지 않은 일을 행하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순결과 자신의 불결을 본 것입니다. 그 순간에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 그 한편에 달려 있던 강도가 가지고 있었던 강렬한 소원은 “낙원에 이를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절히 부탁했을 때에 그는 본성적으로 즉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써 자신의 부패한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했을 때에 그가 가지고 있는 강렬한 소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거룩해 지고 순결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설교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변화되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생긴 대로 살아가는 한도 내에서 신앙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건드리지마 내가 알아서 신앙생활 할 테야” 그런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절대 그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거룩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영혼으로나 마음으로나 무엇으로도 느낄 수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도 역시 성화하는 일이지만 선한 일에 열심하는 백성이 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마지막 말입니다.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충성이라는 맥락에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이라고 하는 의미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화의 한 부분입니다. 성화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자신의 존재가 거룩해 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선한 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충성이라는 것은 이렇게 선한 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 삶의 방식은 그 존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야비한 사람에게서 진실한 행동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물론 어쩌다가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흉내내는 것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모창을 잘 하는 모창 전문 가수가 아무리 파바로트의 흉내를 낸다고 하더라도 가장 잘 냈을 때에 파바로트 노래 비슷하다는 것이지 파바로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 자체가 인격적으로 야비한 사람은 결코 진실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면의 세계가 충성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태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의 마음이 그런 삶을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존재와 삶이 방식이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세계가 열정적인 사람은 열정적으로 삽니다. 경박한 사람은 경박한 삶을 삽니다. 그리고 야비한 사람은 야비하게 삽니다. 그 사람 야비한 사람은 야비하게 살 때에 진실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자기 작품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속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중한 사람이 신중한 삶을 삽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이 겁내지 않는 삶을 구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존재와 삶의 방식이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이야기하는 논점은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이 마지막 부분에 초점에 논리를 구성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불법을 저 지르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의 진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버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리 하나를 도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감격이 충성스러운 삶의 방식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제가 입증을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영성의 핵심부에는 이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것의 일관된 생각이고 그것은 곧 성경의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성경의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발견해 내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 상황입니다. 이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면서 살아가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말고 다른 것도 열심 있게 살아가는 동기로 작용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렇다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화가 아니고도 얼마든지 열심을 내게 하는 또 다른 제 삼의 동기들이 존재합니다.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짓밟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불법을 행하고 불의를 행하여 하나님 앞에 정죄 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고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있던 인간들 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가운데 우리를 불러서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는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와 연관시킨다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열심히 자기 딴에는 분주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품지 않는 사람들이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산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고난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박해를 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 마음에 불타도록 뜨겁게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옥의 형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자기 같은 절망적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천상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듯, 주체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에 강권하는데 그가 어떻게 게으르고 나태하고 초점이 없는 사람처럼 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그 사람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 일은 안 하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막지 않으십니다. 결국은 쏟아져 나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열망이 없다는 것, 열정이 없다는 것, 꾸며 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내면의 세계 속에서의 열망이 없다는 것, 열심히 없다는 것은 중대한 질병입니다. 심각한 질병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꼼꼼히 살피는 정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뜨거운 눈물을 동반한 열렬한 회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름 같이 헐떡거리며 주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그런 열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본 받고자 하는 경건과 거룩의 진보를 위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 하나도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숨을 쉬고 있을 뿐이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찬 그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에
탄식소리 들려온다
정말 우리들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 있었던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자신이 죽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잘 살고 있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 오래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녹슨 훈장처럼 간직하며 오늘의 허한 마음을 달래는 골동품 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좀더 깊이 본문으로 들어가자면 이런 것입니다. 그 선한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서 기억을 해야 할 것은 “선한 일”이라는 것과 앞에 나오는 “불의”이라는 것이 의미적으로 두 단어가 함께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불법이라고 되어 있는 “아노미아”는 “아”는 “없다”이고 “노미아”는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법이라고 번역을 할 수 있지만 불의라고도 번역을 할 수 있고 “무법”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착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선한 것이 있습니다. 신문지상에 늘 오르내리는 교회를 칭찬하는 많은 미담들 선합니다. 선한 것이 그냥 “착한 것” 모든 사람들이 공동생활에서 느끼는 “착한 것” 그렇게 하면 이 인류 공동체, 혹은 이웃에게 누구에게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 그것이 선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카알로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의 선한 것은 모든 죄인이나 의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그냥 공통분모로써 모든 합의 할 수 있는 그냥 좋은 것, 유익이 될 수 있는 것, 그런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한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에 선한 것으로써 교리적으로 영적 선을 동반한 그런 선입니다.
그럼 영적 선을 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아노미아”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불법을 저지른 것은 결국은 “노미아” 하나님의 율법에 한 ---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게 하는 진정한 힘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모든 이웃,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좋다 좋다‘라고 하는 그런 보편적인 인도주의적 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키면서 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일입니다. 이런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불의, 불순종이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부인하거나 버리는 것에서 비롯될 것 같으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영적 선을 갖춘 선은 도모하는 것은 바로 자신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을 토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토대로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삶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서 그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을 쫓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착한 행실을 희랍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한 행실을 이야기하기 전에 팔복의 인격적인 거듭난 사람의 인격적인 변화에 대해서 질적인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그 정체성에서 착한 삶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인도주의적인 선의 개념을 가지고 만약에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을 보면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 져서 이제 주님이 아니면 도움을 구할 곳이 없어서 이제 주님이 아니면 전폭적으로 매달리며 주님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그 경향을 가진 사람, 죄에 대해서 울고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애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거듭난 성품으로 온유함을 보여서 이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이 땅을 정복해 가는 사람, 전에는 먹고 입는 것만 있으면 만족하는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의에 대한 굶주림으로 배고픈 사람, 이 모두 변화된 성품입니다. 그 변화된 성품으로 정체성이 완전히 바뀐 그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빛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착한 행실을 하는데 그 착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이 똑같은 “카알로스”라는 단어입니다. 팔복에 나타난 놀라운 그 인격적인 변화를, 변화의 초점은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 보면서, 우리 자신이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하나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죄인이고 희망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느끼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기까지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인간을 향해 악한 마음을 품지 않으셨던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원수를 용서할 온유함의 대한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성품이 선한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그 삶이 선한 삶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의미상의 대조를 이룹니다. ‘노미아’ 법이 있었는데 ‘아’ 인간의 불순종에 의해서 그것을 허물어 버리고 부인한 것입니다. 그것을 선한 일을 행함으로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그 법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도 이와 같으니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사랑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다시 세우는 그 사랑이 다시 제건 된 삶의 방식이 선한 것을 쫓는 것입니다. 이제 아주 명백해 졌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면서 사는 그런 종류의 일반적인 도덕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토대가 되어서 그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주님이 자신에게 거시는 기대와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헤아려서 그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 드리는 삶, 그래서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아노미아’ 율법을 무너트린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무너트린 그 삶을 이 땅에 다시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있어서 삶의 요체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그리스도인의 목표입니다.
여러분들의 아직도 신앙생활의 목표가 천당 가는데 있다고 생각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고 더 궁극적인 목표는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를 변화시켜 주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시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계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어 보겠습니다. 세상이 열렬합니까? 냉랭합니까? 대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또 하나 여러분들의 육신이 열렬합니까? 냉담합니까? 세상은 가만있지 않습니다. 열렬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세상에서 살면서 유혹 받았지요? 세상이 냉담합니까? 세상의 유혹이 강렬합니까? 아니면 있으나 마나 합니까? 강렬합니다. 안목의 정욕이 냉담합니까? 열렬합니까? 열렬합니다. 하나 딱 꽂히면 정복을 해야지만 갈등이 멎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어떠합니까? 이것을 펄펄 끌고 있습니다. 다 태워버리기 전까지는 욕망이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벗도 태워버립니다. 선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했는데, 죽음이 선고되었는데도 그 선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열렬합니까? 냉담합니까? 열렬합니다. 이미 답이 다 나왔습니다. 그런 것들에 둘러 쌓여서 소명을 받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가 열렬함이 없으면 정체성이 다 사라지고 세상과 자기 육신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모두 흡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구원을 받으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들을 지배한다고 했는데 생명과 성령의 법은 어디로 갔습니까? 나는 요만한 죄도 거슬릴 수 없을 정도로 억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래 되면 신앙이 좋던 그리스도인들도 회의를 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내가 구원을 받았나?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 있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해방시킨 것 같지 않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현실적으로 너무나 그 결박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통적인 경험 아닙니까? 그것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을 못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자기편인 자기 자신도 묻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 마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인격 속에 열렬함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그가 무엇을 알고 있든지 그가 무엇을 이해하고 있든지 예전에 무엇을 경험하고 살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지금 열렬함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 깊은 질병에 들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렬함이 없는 것이 어느 한 방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들어보세요. 열렬함이 없는 것은 삶의 어느 한 방향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삶이 개입되는 전 영력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노래방 가서 노래를 부르면서 술 몇 병 먹고 하는 것은 영적인 삶이 개입을 합니까? 안 합니까? 영력이 있어야 합니까? 안 합니다. 어떤 성령의 능력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능력이 개입되지 않아도 노래방 가서 노래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력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열심히 없는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 그것에 또 다른 열심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영적이 삶이 개입되는 것, 영혼을 섬기는 것, 영력이 개입이 됩니까? 안 됩니까? 내가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면 영향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이 삶이 개입이 됩니다. 이런 영력에서는 열렬함이 그쪽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습니다. 핍박이 올 때에 고난을 받으면서 신앙을 지켜는 것은 영적인 삶이 개입이 됩니다. 거기에 열렬하게 자신의 신앙을 파수해야 되겠다라는 영적인 삶의 방식이 작동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야합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핵심부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자기의 기도제목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삶이 개입을 합니까? 안 합니까? 개입하는 정도가 아니라 핵심부에 있습니다.
노래방 가서 술 먹고 노래를 부를 때에 기고 만장하던 그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때에는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흘러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지키고 순종해야지만 깨달음이 가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이 지키면서 살아가는 이 실천하는 삶, 여기에는 영적인 삶이 개입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기도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고갈되면 손톱만큼 순종하는 데도 팔다리 짤라 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왜 주님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되. 미쳤나? 이것입니다. 내가 왜 주님을 위해서 순종해야 하느냐? 이렇게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 많은데? 한번만 눈 찔끔 감고 하나님이 명령을 어기면 이렇게 신나게 사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어기는 것은 잠깐이고 이익은 영원한데 왜 순간의 삶을 고통스러운 곳으로 몰라 그러느냐? 왜 내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박해를 받느냐? 작동을 안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열심히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일’ 영적인 선을 위한 열심히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영력이 개입하는 모든 삶의 전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중간 결론이 이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인격은 열렬한 열심히 없을 때에는 영적인 삶이 개입되는 전 영력에서 무기력이 나타납니다. 기도도 열렬히 할 수도 없고,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도 열렬하지도 않고 신앙을 지키고 파수하는 것도 열심도 안 내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에도 물론 열심을 안 내고 어느 한 부분에만 작동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작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죽어 있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마음의 특징, 정서의 특징은 강퍅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리차드 쉽스가 인간의 마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옥토와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죄와 유혹에 대해서 딱딱한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마귀들이 볼 때에 그 인간들이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고 합니다. 아무리 유혹을 해고 씨가 먹혀들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유혹을 해도, 몇 번 유혹을 하면 넘어가야지 유혹을 하지, 씨도 먹히지 않습니다. 절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강퍅해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유혹과 악에 대해서 아주 부드러운 밭입니다. 그래서 이미 마귀들이 볼 때에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받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준비가 된 사람에게 설교를 하는 것은 설교자로써 행복한 사람입니다. 던지면 싹 빨려 들어갑니다. 영혼에 가서 딱딱 꽂힙니다. 다음주에 가면 영혼에 싹이 납니다. 마귀가 그런 사람들을 볼 때에 사역에 얼마나 보람을 느끼겠습니까? 아주 훌륭하게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있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일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팝송을 무지 좋아했습니다.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가락자체가 싫습니다. 헤비메탈 같은 것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분만 들으면 골치가 아픕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변화된 내면적인 변화와 그 음악의 질서가 부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에 열심히 있을 때에는 육체적인 것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것의 어떤 열심이나 그런 것들이 잘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열렬한 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 영적인 것에 아주 냉담합니다. 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열심하는” 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똑같은 단어가 여러분이 잘 아는 고린도 13장에서 쓰여졌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투기하지 않으면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아주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투기한다 이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 입니다. 무슨 뜻으로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느냐 하면 여기에서 ‘열심하는’ 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열심히라고 하는 단어의 질과 방식이 그냥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는 힘들고 질투심과 비유를 해야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질투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결국은 사랑의 깊이와 관련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처녀 총각이라고 합시다.
전철안에서... 질투... 질투가 납니까? 질투가 나면 정신과에 찾아가십시오. 질투가 나면 정신질환입니다. 전철안에서 같은 칸에 탔잖아요. 진짜 뜨겁게 사랑합니다. 이 여자가 뜨겁게 사랑하는 다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여자를 뜨겁게 사랑하는데 그 사랑에 대해서 좋다는 반응도 보였습니다. 그 짓을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누가 왔는데 똑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너 영자아니냐? 눈물을 흘리면서 끌어안고 날 리가 아닙니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 때 확 쏟아 오르는 감정이 투기의 감정입니다. 그 질투의 감정은 어떻게 묘사를 하느냐 하면 성령 충만과 비교하면 됩니다. 그런 극적인 충만을 여러분들 모두 경험해 본적은 없지만 성령이 불을 받을 때와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언젠가 성령을 경험한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혼을 하고 나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강력한 임재하심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혀끝까지 뜨겁게 타오릅니다. 그리고 진짜 땀이 쏟아질 정도로 무엇인가 신적인 문제에 강력히 사로잡히는 것이 느껴지는데 어는 한 부분도 내 것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분이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질투의 감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질투의 감정은 저의 표현에 의하면 자아상실의 감정입니다. 자기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완전히 미움만 남습니다. 질투로 말미암아 미움만 남는데 그것이 혀끝에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투가 확 올라와서 자신을 지배할 때, 자신을 채우면서 지배할 때에 자신을 완전히 상실되고 오로지 모든 사고가 하나를 향해서 가는데 그것이 투기의 대상의 존재 자체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의 감정입니다.
성경을 보면 언어학적으로 혀를 내 두를 정도로 하나님이 단어 선택에 있어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그 삶을 위해서, 투기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가슴에 다가옵니까? 그래야지만 불붙는 세상을 이깁니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육체의 소욕을 이길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진리입니다.
인류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 하나가 산불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무리 발달한 선진국도 대책이 없습니다.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기다리는 정도이지 대책이 없습니다. 미국도 대책이 없습니다. 수없이 불이 타는데 그 중에서 조상 대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쓰는 원시적이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가진 산불진화대책이 있습니다. 맞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저 쪽에서 타오르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불을 질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과 불이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을 끄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서도 이런 지혜가 전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충성스러운 삶이 열심을 특징으로 한다면 그 특징은 정신나간 것처럼 온 마음과 삶 구석구석이 저항할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런 뜨거운 열정이라는 것을 다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성숙할 수도, 순간적인 열정에 충동을 받지 않는 그러한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점에 있어서는 약간은 맞는데 대부분은 틀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이야기합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감정에 의해서 감정에 충동을 받는데 신앙이 깊어질수록 지식이 구비해지니까 이런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감정이라는 것에 영향을 덜 받게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 틀립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거기서 이야기하는 표현 그대로 자극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징적인 대중 조작이라든지 인간의 감정 그 자체를 겨냥한 것 이런 것은 안됩니다. 음악 같은 것, 북 같은 것 막 치고 이러는 것 속에 주여 삼창하고 하는 것들에 대해 왜 조심을 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인격 전체가 아니라 아예 목표 자체가 감정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의지 자체를 겨냥하는 것도 옳지 않고 감정 자체를 겨냥하다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런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혹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울컥하고 감격하면서 자극을 받는 그 모든 것이 다 신앙적인 미성숙의 증거라고 보는 것은 아이를 씻기를 것이 더럽다고 아이까지 한꺼번에 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오늘밤에 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를 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도를 가지고 사람들이 감격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쪼개고 그 말씀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만들어야 되겠다고 설교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집중해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의 행복,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의 곤고함을 계속 설교를 했다고 합시다. 그때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쿵하면서 충동적인 감정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자극을 받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 받을 사람만 받는 것입니다. 오죽 굳어 있으면 겨냥을 해서 자극을 해도 그것이 안되냐 이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영혼이 죽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너무나 성숙하기 때문에 안정적 때문에 생각하는 것은 사대교회의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살았다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죄악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심의 불꽃이 투기처럼 불일 듯 일어나는 강도가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불씨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면서 사는 비결입니다. 끊임없이 육체의 정욕들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안목을 따라 살려고 하는 눈은 보아도 차지 않고 귀는 보아도 족하지 않는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불은 부저갱과 같습니다. 수없이 쓸어 넣어서 하나님의 율법까지 쓸어버려도 인간의 욕망은 만족이 안됩니다. 불기둥같이 타오릅니다. 그렇게 타오르면 그것을 가지고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 사랑,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주님이 기쁘신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일, 그것에 대한 사모의 눈빛이 투기처럼 마음속에 타올라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영성의 심장부에 있는 그 어떤 작용의 특징들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여러분들이 당장 우울해지는 분위기입니다. 그것은 이해가 갑니다. 내게 정말 그런 열정이 있는가? 투기와 같은 열정이 있는가? 시편 119편에 보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타오르는 분노와 하나님을 훼방하는 원수들에 대한 치열한 적개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투기처럼 그 사람의 마음과 인격 속에 타오르는 장면을 보는 것입니다. “저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기 아니함으로 내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 원수를 멸하시되 저들의 이를 꺾어 멸하소서 여호와여 주를 대적하는 자를 훼파하소서” 이것은 모두 원수에 대한 적개심인데 그 적개심의 발로 자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 그것이 열심히 있는 사랑 속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복음전파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고 그 사랑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살아서 창조의 목적에 반하는 그런 삶을 살아 주님의 진노아래 있는 백성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무엇인가 저들을 위해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겠다라고 하는 끌어 오르는 열망, 그것이 복음전파의 동기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속에 이런 투기의 정신의 지배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이 치열한 열심히 살아간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미운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불쌍하고 한편으로는 미운 것입니다. 왜 저렇게 사나?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리면서 살아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왜 저렇게 한량처럼 사나? 그것 때문에 온 세상에 이런 사랑의 불을 내리도록 호소하는 사람들입니다. 부흥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불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체포되어서 신문을 받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아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만들었구나? 너 돌았구나?’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각하 이렇게 결박된 것 이외에는 여러분도 모두 나처럼 미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입니다. 다른 동기를 가지고도 충성스러워 보이는 열심 있는 삶을 살 수 있느냐? 가능하냐? 이것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아는 지체가 하나있었는데 그의 형, 그 형은 제가 보기에는 거듭났나? 직접 많이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너의 형 신앙생활을 잘 하냐?’ 굉장히 열심히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이냐? 승용차 살 것을 봉고를 샀다고 합니다. 왜냐햐면 교회 사람들을 실어다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가용 안 사고 그것 사서 놀랍다 했습니다. 그 형제 말이 더 말입니다. 목사님 그것 다 우리 형 작전입니다. 작전이 무슨 작전, 안수 집사 되려고 합니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도 가능합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엔의 표현에 의하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죄의 종이 되는 것이고 세상에 나아가서 술 먹고 나쁜 짓하면서 살아가고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죄의 종의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인데 후자는 그라운드가 세상이 되는 것이고 전자는 그라운드가 교회라는 차이입니다. 형편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노예로써 살아가는 삶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자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온전히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며 그분 한 분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 거기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자유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죄가 들어오면서 무엇이든지 끊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그런 종류의 자유를 허락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이나 혹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명예 이런 것들을 통해서 안정을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 자체를 이 세상에 주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잠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잠시 느낄 수 있는 마취효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오직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감격해서 그 사랑 때문에 눈멀고 자기를 주신 그 사랑 때문에 투기처럼 불붙는 사랑의 정서를 가지고 그것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 쏟아 부을 때 이것이 교회의 영성입니다. 이것이 예배 용 영성이냐? 이것이 종교적인 만족을 위한 영성이냐? 그것이 아니라 이 삶속으로 녹아드는 영성이어야 합니다.
작년에 나온 책 가운데 “뒤집어엎는 영성” 번역을 하면 자족하고 교회의 예배의 영성이 아니라 치열한 열정, 불붙는 세상, 불붙는 정욕, 그 불붙는 박해가 기다리고 있는 그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그 삶의 상황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정복하는 영성, 그 핵심이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절망의 상태에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신을 자기를 도저히 도울 수 없는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 그 죄 값을 다 치루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놀라운 은혜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열렬하게 살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원리에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지속적인 삶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생각할 때 주님이 누구신지를 진심으로 알고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진실한 사랑 때문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의 그 열심을 품은 삶, 그 삶은 액체의 삶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펑펑 우는 삶이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사랑을 인해서 울고 그 사랑을 받았는데도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자신의 때문에 울고, 자기를 인생의 벼랑 가운데서 건져주신 그 하나님의 그 강건하신 사랑 때문에 울고,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이 살아가는,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큰사랑과 비교를 하면 그 사랑을 입은 사람이라고 명암을 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살아가는 이 삶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과 통곡을,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자신의 내면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이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가를 느끼면서, 여러분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와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우리들이 경험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고 하는 일이 술술 풀리고, 오늘 새벽에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지금 있는 최대의 현안은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본당을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서 입당예배를 드리면 내가 행복할까? 대답은 즉시 절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교인들이 꽉차면 행복할까? 정직하게 말해서 아닙니다. 이것은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일이지 내가 행복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사랑 함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사랑 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사랑 함
그리고 바보 같은 기도를 또 했습니다. “ 하나님 큰 교회도 싫고, 유명해 지는 것도 싫고,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되는 것도 싫고, 돈이 많은 것도 싫고, 어느 한 가지도 가져 본 적이 없지만 싫고,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사랑 함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십자가에 버리실 때, 어느 한 부분도 아끼심이 없으셨던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게 해서 그 사랑이 우리의 허물보다는 우리를 향한 긍휼을 보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 안에 부패한 성품과 하나님을 반역하는 낙인찍힌 죄인의 증표가 있지만 그 사랑이 그것을 보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다 버리시고 불법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친 백성 삼으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의 세상의 세계의 전 삶은 이런 하나님을 향한 투기처럼 불붙어 오르는 그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은 다른 마음이 아니라 이렇게 투기하듯이 가슴속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인격적인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의 상태, 그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 됨을 취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종으로 오실 수 있는 삶’, 그래서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실 수 있었던 삶,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실 수 있었던 삶,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을 그 발앞에 꿇게 하실 때까지 자기를 죽음에 복종시킬 수 있었던 삶,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그 마음을 품으라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다가 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처럼 거품처럼 살다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회를 방종의 기회로 삼으며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흠집을 내며 살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충성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챙기지 않았고 자기에게 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 알았고 생명과 지식, 재산과 건강, 기회와 목숨까지라도 모두 주님을 위해서 다 주었습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사자처럼 살았습니다. 주를 위해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 그들의 마음의 특징은 불붙는 열심히 있습니다. 마치 온 세상에 죽어 가는 영혼을 자신 혼자 구원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처럼 이름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수많은 영혼의 아픔을 끌어안고 피흘리는 울부짖음으로 기도하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안주하면서 살 때 그들은 거친 광야를 통곡하면 지나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온 세상의 영혼들이 구원받지 못하면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 것처럼 울부짖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자신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통곡하면서 주최할 수 없는 열망을, 열심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십자가에 대한 강력하고도 현재적인 체험이었습니다. 주님이 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다 버리셨을까? 아까운 것이 없이 다 버린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나를 이제 하나님 앞에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 십자가의 경험 속에서 열정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흘러 나왔습니다.
어제 어떤 첼리스트가 인터뷰를 하는데 감명을 받았습니다.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렇게 유명해 지셨는데 그 흔한 은반하나 못 내셨습니까? 물었습니다. 그 체얼리스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악은 내가 연주하는 것이 있고 내 안에서 음악이 흘러 나와서 그 음악이 나를 악기를 연주를 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전자의 음반을 내려면 벌써 내었습니다. 음악이 신들린 것처럼 기다리다가 늦었습니다’ 여러분 경박한 감정주의에 휘말려서 우리의 몸을 윤락가에 파는 것처럼 그런 신비적인 조작을 우리의 몸을 팔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도 뜨거운 사랑이 투기의 불꽃처럼 타올라서 주님을 위해서 모든 삶을 아버지 앞에 드리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서 구속하신 것은 살기 싫은 부부가 자식을 생각해서 마지못해서 사는 것 같은 그런 교회생활,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사랑하는 여러분! 값없는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에 빚진 우리의 유일한 의미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우리가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큽니다.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너무도 큽니다. 그런 말을 가지고는 설명이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결한 자신의 몸을 찢어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가 숨이 붙어 있는 날 동안, 우리의 피가 굳고 우리의 혈관을 씻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을 향해 투기의 불꽃처럼 열렬한 사랑을 간직하고 주님이 좋게 여기시는 선한 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다 드리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짐승이 아니라 고귀한 한 분밖에 없는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구속해 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충성된 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충성스러운 삶에 대해서 여러 주 째 걸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열심을 다하는 것이 충성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충성스럽게 되는데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그 사람의 특징을 말하고자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미 오래 전에 충성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충성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충성이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일에 대해서 자신의 전체를 쏟아 붓는 것이 충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라고 시작이 되는데 성경을 읽다가 항상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나오면 항상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앞에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그리고 뒷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러나”, “그러므로”를 중심으로 연결과 전환하기 때문입니다. 그 앞부분에서는 사도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을 비난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것, 그렇게 되면 썩을 육체를 벗고 우리들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고 소망을 강력하게 피력한 후에 그러므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음 교리를 아는 것과 실제의 삶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왜 사도가 부활의 소망에 대해서 아주 그것을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심각하게 정죄하면서 그러면서 부활의 교리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면서 열렬하게 부활의 교리를 말했느냐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당시에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유대교 입장에서 볼 때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대 종파에 많았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혹시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옛날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교리에 대해서 무엇인가 확고하게 과거의 그릇된 교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부활이 우리에게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하셨다고 할지라도 썩어서 죽는 우리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도 그런 예가 흔치 않는데 우리들이 그렇게 부활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영광스러운 몸으로 우리가 부활할 수 있겠느냐?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가 강력하게 규탄하면서 부활신앙에 대해서 강력하게 변증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렇게 부활의 약속을 가진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신앙적인 확신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도 영원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부활이 없다고 생각을 한다면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가졌겠는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을 하든지 아니면 죽음 후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재가 끊어지고 음침하고 습한, 결코 성경에서 기분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음부, 스홀이라는 곳으로 내려가서 아주 칙칙한 곳에서 보낼 것이라고 하는 것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혼에 대한 것들이 분명하게 해결이 되지 않으니까 죽음의 문턱까지는 통용될 수 있는 어떤 가치와 추구점들이 있는데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다음으로 현재의 삶이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상황은 도덕적인 회의들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회의들이 찾아오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것으로 인식해 버리는 경향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력하게 규탄을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부활신앙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신앙이 마지막 가는 곳은 현세 중심의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꾸 기복 신앙을 이야기하고, 기복 신앙이 다 나쁜 것이 아니지만, 어쩌든 그것이 중심이 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지극히 현세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복음주의 균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밥솥 같은 것을 야유회를 가서는 돌을 싸 놓아서 최소한 솥을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세 개는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솥이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쪽 돌이 무너지면 두 개를 세워 놓고는 도저히 솥을 올려놓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쏟아집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 가운데 어느 하나가 기울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붙들고 그것이 성경에 근거가 있다고 해서 그것만을 중심으로 신앙의 이론을 펴 가면 그것은 마치 끓는 가마솥을 한 개의 돌멩이에다 솥을 걸어 놓고 불을 태 보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성경은 내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부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죽음 이후의 상급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복 주시고 은혜 주시고 자식들의 번성함을 주시고 축복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다 말씀을 하십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균형 있게 받아드리면서 그 위에 신앙의 틀을 놓아야지 성경에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어떤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이것이 아닙니까? 말라기에서 보면 십일조를 해라, 하나님을 시험해 보아라 그러면 내 창고에 쌓을 것이 없도록 쏟아 부을 것이 없나 두고 봐라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이루어 졌습니까? 십일조 안하고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을 하겠습니까? 십일조를 했는데도 창고가 비어 있는 사람, 우리처럼 아예 창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 어느 하나를 가지고 극대화해서는 안되고 전체적인 것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로만 자신의 신앙의 토대를 만들었다면 그것이 성경에 나온 모든 것이어야 하지 성경에서 몇 가지만 추려 내어서는 안 된다 이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이 사라지고 나니까 내세에 대한 소망이 사라지고 나니까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까 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상한 비관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까지 치우친 신비주의자들입니다.
저는 그래서 어떤 때 이런 상상을 합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우리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배우면서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만약에 사도 바울 자신이 와서 신앙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면 오늘날로 볼 때에 백사람이 그 강론을 듣는데 구십 사람이 아마 저 사람은 이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매우 위험한 사람이라고 한 일에 치우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만큼 낯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덕적인 문제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더욱 주의 일에 열심 있는 자들이 되라” 결국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신자들의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현세에밖에 존재하지 않으면 사람들 사고 방식이 현세 중심의 사고 방식이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만을 최고로 생각하고 최종적인 가치로 생각하게 되어서 그런 미래의 영광스러운 상급을 위해서 자신을 준비하는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삶이 성립을 안 하게 됩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고난과 핍박 속에서 시련을 당하고 문초를 당하면서도 견고하게 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 것이라고 하는 소망,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 자들이 부활한 몸으로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는 그 소망, 그 소망을 위해서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서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자들이 되라 그럴 때 두 가지 측면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 보면 “자기 자신을 주의 일에 완전히 바치는 사람이 되라” 이런 말입니다. 충성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바깥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을 떼어놓고 충성스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충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섬김을 받으시는 본 주인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을 먼저 고려하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시키는 것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충성된 사람은 그 일을 자신에게 시키신 그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이 헌신적인 삶에 기초가 된 그 사람, 여기에서 자신을 주의 일에 모두 바치는 사람 그 사람이 충성된 사람인데 그 바치는 이유가 자신을 주의 일에 다 충분히 바치는 이유는 이 일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 일을 자신에게 시키신 그 하나님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이나 이때에는 아이들이 심부름하는 것이 그렇게 싫어합니다. 심부름하는 것이 싫습니다. 옛날에는 심부름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전화도 없지, 팩스도 없지요. 핸드폰도 없지요. 그러니까 발로 뛰어 다녀야 하니까 ‘얘 뭐 사와라, 뭐 사와라, 누구네 집에 가서 뭐라고 이야기해 주고 와라, 아이들도 참 바빴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때에는 착한 아이라고 할 때 교과서에서의 그림은 심부름을 잘하는 아이가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부모가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그때에는 선생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예화)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선생님을 맞을 때 - 출석부를 받으려고 아이들이 뛰어감 - 칭찬도 해 주고
아이들이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똑 같은 심부름인데 엄마가 시켰을 때에는 열을 받는데 선생님이 시켰을 때에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집에 늦게 들어가도 영광이고, 엄마도 그렇게 좋아하고, 요즘 같으면 전화를 해서 왜 우리 얘 그런 것을 시키느냐고 했을 탠데,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그 많은 아이들을 제쳐놓고 “너보고 변소를 치라고 했니” 이것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것은 일 자체의 헌신이 아니라 그 일을 시킨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거기에서 출발한 그 일을 시킨 장본인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충성스러움,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성스러움입니다. 그렇죠? 그런 것입니다.
가끔 가다 주의 일을 하다가 보면 참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구역장들도 그렇고, 찾아가 보시오. 전도를 하다가 보면 얼마나 낮아져야지 전도가 됩니까? 어떤 때에는 치사할 정도로 낮아져야지 전도가 됩니다. 빨래 빨라 주면서 사영리 전하고 이삿짐 날라주면서 하고 교회 좀 가라고 하면 바빠서 못 갔다고 하고, 청소까지 해 주면서 가자고 하잖아요. 자기가 먹고산다고 하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전도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섬기기 위해서 심부름까지 해 주어도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시킨 사람이 자기가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자기가 섬기는 영혼이 자기를 그렇게 부러 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의탁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보다 더 천한 일에 우리를 사용하신다고 해도 우리들은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이고 오늘 하고자 하는 것이 이제부터입니다.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며, 진정으로 충성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요소와 소극적인 요소가 있는데, 적극적인 요소는 주님께서 맡기신 그 일에 주님 자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충분히 쏟아 붙는 것을 말합니다. 충분히 쏟아 붙는 것, 이것도 참 신기합니다.
오늘도 교역자들하고 같이 회의를 하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대체로 헌신한 사람이 열 명이 모이는 공동체와 완전한 헌신한 사람, 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하나님이 더 강력하게 역사 하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구십 곱하기 사 하면 삼백육십이 아닙니까? 90% 헌신을 했다면 4명이면 360%를 헌신한 것이 아닙니까? 여기는 한명, 혼자 젖 먹는 힘까지 쏟아 부어도 100밖에 되지 않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계산은 그것이 아닙니다. 100%가 아닌 사람들이 99%라도 마찬가지고 모두 합쳐도 360, 397밖에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100%을 다 바친 사람은 100이 아니라 무한대입니다. 하나님이 무한대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100을 다 쏟아 부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쏟아 붓는 것은 이것을 짜 듯이 ‘그래 오늘 저녁에 다 쏟아 부어야 겠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나 자신을 다 쏟아 붓는다고 해서 그렇게 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쏟아 부어지느냐 이것입니다.
제가 어디 가서 강연을 하고 낳는데 누가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절망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알아듣겠습니다. 그래 맞다. 그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고 말씀을 전할 때에는 남의 말처럼 하지 말고 진액을 짜서 이 설교 한편에 내 생명과 승부를 건 것처럼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강조를 하는데 다 맞다 이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나도 비지땀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싶고 발꿈치가 닳도록 기도하고 싶고 설교를 할 때에는 이 설교를 하고는 순교를 하고 싶을 정도로 설교를 하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된다. 그 문제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는가? 충격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답은 순발력 있게 대답을 합니다. 당신 안에 있는 더러움의 찍기가 빠져나가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순결하지 않는 사람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겠습니까? 완전히 순결하지는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순결의 더러움을 인식하고 순결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비지땀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겠느냐? 이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생사를 걸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피를 쏟듯이 마지막 순간에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전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거룩한 삶을 위해서 고뇌를 불러일으키는 아픔을 뼈 속까지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 설교를 자신의 진액을 쏟아 부으면서 설교를 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말씀을 어떻게 마주 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100% 자신을 희랍어 성경에서 이야기하듯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충분히 너 자신을 드리라” 이것을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 살아온 살아 온 사람들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마스터”에 쓴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라”고 충고를 하였을 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충고도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총체적인 자신의 삶, 영적인 상황과 같이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100%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정말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주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이신 지를 알고 그리고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 알고 그 사랑을 거스리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의 비극을 보면서 왜 주님의 햇살처럼 퍼붓는 그 사랑 앞에서 아직까지도 어두움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까? 를 깊이 고뇌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어디다 무슨 일로 세워 두든지 간에 아픔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이 아직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돌아오지 않는 한 어디에 세워두든지 간에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어디를 세워두든지 간에 자기를 다 쏟아 붓지 않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something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닐 때에 교수님 한 분이 있는데 제자가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저 아무개 목사입니다. 목사님 제자입니다. 목사님이 잘 아시니까? 그래 그래 이번에 교회를 짓었데며 헌당 예배를 드리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아 예 고생은 많이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해 주셔서 잘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저 이제 이 교회 사임하려고 합니다. 왜 여태까지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 교인이 얼마나 모이는데.. 예 천 칠백명 모입니다. 교회도 다 짓고 헌당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임을 하려고 하느냐. 이제 제가 이 교회에서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가 할 일을 다 했다고 봅니다. 교인들이 이 정도 되니까 어느 목회자이든지 오려고 하고 그리고 교회에 땅도 사고해서 교회당도 멋있게 지고 빗도 다 갚고 이제는 다 했습니다. 이제 저는 이 교회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이 교회를 사임하고 그리고 작은 교회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왠 만한 사람은 진짜 영광 다 버리고 멸시천대 십자가 지는 사람이구나 라고 칭찬을 할 줄 알았지. 그런데 ‘내 이 사람아 자네는 전공이 건축학이야 신학이냐? 뭐 천 칠백명이 모이고 교회를 다 지어 나서 빗도 갚아 놓아서 이제 다 했어 할 일이 없어. 어디서 배운 신학이 그런 신학이 다 있냐? 그래 교회만 지어 놓고 사람만 모이면 그것이 교회이냐? 있는 보이는 교회는 그렇게 지어 졌는데 너희 교인들의 가슴에 보이지 않는 교회도 그렇게 멋있게 지어져 있냐? 회개하라 회개하라 지금부터 목회시작이다. 깊이 충격을 받고 겸손 속에 감추어져 있는 칼 같은 교만을 버리고 그리고 맞다 교회를 지어 놓은 것이 대수인가? 성도들 속에 성전이 없는데, 그리고 교인들을 보면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닌 껍질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다 드려서 하나님 앞에서 섬기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못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일을 맡겨 주든지 간에 100% 쏟아 부을 수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높은 자리에 놓아 두면 더 잘 섬길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가끔은 그런 모험을 합니다. 전혀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을 직분을 주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회에 열심을 내지 않겠느냐?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닌 것으로 입증이 됩니다.
항상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여기에서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의 일에 충분히 드리는 것이 충성이라고 말할 때,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의 선택이라고 말할 때에 잘 새겨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겨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꼭 교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일이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여러분들의 직장에서 주의 빛을 드러내며 사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더 가깝게는 복음 사역을 위해서 이 교회에서 여러분들을 부르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은 각자 맡은 것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중요하다라는 위치에 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겠지라는 사소한 위치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판단하는 생각이지 우리 주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하는 것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의 보편성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여러분 자신을 다 쏟아 붓고 있는 일이 있는가? 그것이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수준과 정도는 다르지만 서너번의 현격한 영혼의 때를 경험을 했는데 그때의 배경을 보면 신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포함해서 주의 일 밖에 없는 것처럼 살 때에 하나님이 만나 주셨습니다. 주의 일 밖에 없는 것처럼 그것은 일에 미친 것이 아닙니다. 일에 미친 사람들의 특징은 일에 미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은 굉장히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그리움, 기도 속에서 만나는 참된 인격적인 행복 이런 것들은 없습니다. 그것을 똑같이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주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고 영혼의 중대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자신을 다 쏟아 붙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순결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을 결코 쏟아 부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논리에 빠지면 안됩니다. 그러면 나는 불결부터 제거해야 되겠구나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함께 하면서 고뇌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일에만 능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어 가시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이 나 자신을 고치고 바꾸어 가시는 방법과 나를 다루어 가시는 그 연장선상에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통해서 자신의 성화를 보고 주의 일을 통해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일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이 안 되어 가고 있을 때에 그렇게 안 되어 가는 것에 대한 적절한 변명거리를 능숙하게 찾아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잘 되면 내 탓이고 안되면 주위의 환경 탓이다. 이만큼만 되면 나는 굉장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들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도 변하지 않고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도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에 첫 번째 되는 핵심은 자신을 완전히 쏟아 붙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쏟아 붙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8-90%까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죽어도 100%헌신이 안 나오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망가진 사람이고 대개 맡겨주면 8-90%까지는 헌신을 합니다. 그러니까 부탁하는 것이 상처받지 말고, 1년 내내 가도록 구역원들을 위해 기도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11월 달이니까 빨리 사표를 내십시오. 왜 합니까? 무슨 체면처럼 생각을 하고 우리 교회는 아주 좋으면서도 아주 이상야릇한 풍조가 있습니다. 구역장에 대해서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훈장이 아닙니다. 서당에서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 같이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어서 진심으로 영혼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리고 자신의 구역의 식구들의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위해서 땀을 흘리고 자신을 쏟아 붙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구역장을 해야지, 그리고 당장은 없어도 그런 구역장이 되기를 사모하는 그런 사람들이 구역장을 해야지, 가끔 그만 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지 만 좋은 사람이 나오면 물갈이도 하고 그러는데 한번 맡으면 등을 밀어도 나가지 않습니다. 털썩 주저앉아서, 그냥 앉은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있는 것이 견고함이 아닙니다.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그것은 집착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다 쏟아 부어야 합니다. 이것밖에 없는 것처럼,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쏟아 붙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있습니까? 요즘 뭐하고 지내니? 나 요즘 구역장이야! 나 교사야? 토요일마다 교회 청소해?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앞에 모든 것을 쏟아 붙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다 쏟아 부으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있다고니까 자칭 자기가 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발 그 얘기를 안하고 다녔으면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나는 자기 선생되기 싫은데, 자기가 다니면서 내 수제자 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고 말입니다. 자기 신앙은 김남준 교수님이 보증을 한다고, 저는 보증을 안 합니다. 인간적으로 그것이 느껴지는데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을 볼 때에 정말 합당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섬기고 애를 써 줄 때 고맙지 그 사람이 인격과 나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 잘 못된 열심히 나를 섬길 때 나는 그것이 너무 싫은 것입니다. 진짜 싫습니다.
하나님은 오죽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과 핀트가 빗나간 관계가 아니라 자신도 하나님을 위해서 다 쏟아 붓고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에도 자신을 다 쏟아 부어서 흡족하다고 여길 수 있는 이런 의미에서 완전히 헌신해서 충성하는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내 자신이 죽고 내 자신을 다 쏟아 붓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찌끼들이 다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앙의 인격이 순결하다라고 하는 것은 무공해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순결하다고 할 때에 그것은 완전히 도덕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신앙의 인격이 순결하다고 할 때에는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것이 너무나 열렬하게 불붙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사랑이 개입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 그것이 순결한 사랑입니다. 세금 한번 떼어먹은 적이 없고 교통법규한번 위반한 적이 없고 주일 한번 빠진 적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순결한 사람이 아니라 성경은 순결한 창녀도 말합니다. 몸은 걸레이지만 과거에는 그랬지만 그 후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순결한 사람입니다. 그런 순결한 사람이 자신을 다 쏟아 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완벽주의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항상 완벽주의자 처럼 보이고 성격 이상 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 비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하나님께 도움이 되고 싶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 그냥 하나님께 욕을 보이는 것도 많고 영광을 보이는 것도 있는데 합쳤을 때 조금 낳은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닌까 거기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자신을 향해서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는 이유가 충성된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충성된 사람들은 바로 당신 자신을 향해서 목마른 사람들이고 당신 자신을 위해서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품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찾으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무명할지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할지라도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은 어느 구석에 숨어 있든지 주님께서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무디를 보면 무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쓰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꼽는데 그런데 사실은 무디에게는 똑똑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이 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 하나님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돌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신 영혼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는 정신적인 부담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항상 그의 사역 속에는 완벽을 추구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회심을 해도 대체로 만족을 안 합니다. 완전히 회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을 향해 아주 진실하고 뜨거운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비관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이만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순결이 무엇인지를 아는 잣대로 보면, 정말 이 사람이 정말 살아있는 사람인가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만약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의 영혼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영혼들에게 진실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버지 앞에 우리들이 재물이 되기만 한다면 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온 지난날들이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들은 현재 자신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거의 병든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업적과 그리고 자기가 한 일을 회상하기에 다급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영혼들 속에 진실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진단할 여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쏟아 붓는 진정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지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좋은 방법과 전략들이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복 주시는 위대한 영의 부르심은 제도나 방법 위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충만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하나님이 영적이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서 영혼이 움직이는 영향력들이 흘러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만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과 관계가 되는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다 쏟아 붓지 못하는 것이 영혼의 중대한 결함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중대한 결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종종 질문을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통곡하며 기도할 제목이 있는가? 자신을 다 쏟아 부어서 기도할 제목이 있는가? 주님이 오셔서 왜 우냐? 계시록 5장에 나오는 것처럼 요한 사도가 우니까 울지 마라 두루마리가 인봉이 되어서 우니까 이 계시를 보여 줄 사람이 없다고 천사가 없다고 하니까 막 우니까 희랍어로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울지 마라 다윗의 자손 이새의 뿌리 가운데서 이것을 풀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다. 어린양이 나셨다.” 거기서 눈물을 그치는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마지막 날에 대한 계시에 대한 것을 터득을 해서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을 땅위에서는 땅 아래에서 풀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뜯어서 계시를 보여 줄 자가 없다. 자기가 막 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왜 살아 있습니까? 죽어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일이 아니면 영혼들입니다. 자기 동족들이 가서 머리 가죽을 벗겨 오고 말입니다. 촌지를 하고 그런 인디언들을 보면서 영혼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잠을 자면 꿈에 저들이 보입니다. 주님을 모르면서 짐승처럼 죽어 가는 저들을 보면서 눈물이 앞이 가립니다. 잠에서 깨어 오르면 첫 번째 생각이 그 잃어버린 영혼들, 오늘 하루도 그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살아 있느냐?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 있습니까? 왜 죽지 못합니까? 또 왜 죽어서는 안됩니까? 목표가 있습니까?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 보여 드릴 눈물이 있나요?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매달리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들어주랴? 그것을 손들어 이야기 할 수 있느냐?
이 충성스러운 사람은 이것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휴전선을 넘어서 이북에 가게 해 달라고 온 몸에 기름을 부어서 끼었고 투신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확신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런 것을 빼 놓고는 충성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충성을 빼 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청평인률적입니다. 미지근한 사람들입니다. 충성스럽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미지근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부패해져 있습니다. 순결하지 않습니다. 정직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에 대한 치열한 열망이 없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지부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와 긍휼이 열방중에 부어지는 주의 영광스러운 부흥은 항상 이렇게 자신을 전적으로 소진해서 자신이 그 하나님의 열방에 부으시는 은혜와 긍휼에 통로가 되어서 살아가고 싶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징검다리로 해서 일반적으로 그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목매이는 목표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사명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서 무엇을 이루어야 되겠는가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난 자신을 전적으로 쏟아 부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미션이 없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자신을 다 쏟아 부어야 될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주님 때문에 한번도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드리는 사람, 그것이 충성스러운 삶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참 신기한 것은 하나님은 어떤 자기에게 맡겨진 한가지 일에 그 주님에 대한 사랑을 깊이 알고 자신에게 주신 그 미션에 아주 심각한 것을 알고 거기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서 주님을 섬길 그 사람들을 사용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정말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지 못해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인정해 주시는 표증을 일 속에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복 주시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수십만의 교인을 거느린 목회자가 대체로 충성하면 산 것보다는 일곱 여덟명의 구역원들을 거느리고 멸시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하면 고난을 받으며 그 영혼을 쏟아 붓는 그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큰 자의 삶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런 섬김의 삶이 하나님의 서열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양과 염소가 갈리듯이 오른편과 왼편에 갈라놓으시고 그리고 주님이 알아주시는 던 사람과 주님이 모르시는 던 사람들을 갈라놓으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주님 앞에서 행한 것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언제 굶주린 자를 찾아가서 옥에 갇힌 자를 찾아 방문하고 아픈 자를 고치고 곤고한 자를 위로했습니까? 자기의 행위를 다 잃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그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자신의 마땅한 본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 잊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안 그랬습니까?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냥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우리들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열매를 통해서 그래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는 우리를 쳐다보시는 하나님을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헌신하는 삶, 그것이 헌신하는 삶의 또 다른 국면입니다.
두 번째로는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 보면 국권 하면 흔들리지 아니하며, 움직일 수 없으며, 누군가 와서 움직이려고 노력은 하는데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굳게 서 있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도 일이기 때문에 때때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격적인 헌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반짝하는 충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절하게 자극을 하면 그 사람의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헌신이 아니지만 어떤 비상한 헌신이 순간적으로 발동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헌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외국에 나가서 고달프게 이민 생활을 하다가 스타디움에 태극기가 올라가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오면 다 애국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들이 애국자라고 부를 수 없잖아요. 중요한 것은 이민 생활에서 곤고 할 때에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 태극기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 하는 그런 가슴이 아니라 평소에 이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그것이 애국자 여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보고 애국가 4절까지 외우느냐? 못 외운다. 옛날에는 나도 외웠는데 지금은 나도 부르지 않아도 지금은 못 외운다. 그것만 외우면 애국자이냐? 나라에게 보탬이 되면서 사는 사람,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인생을 사는 사람, 그 나라가 진정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에 기여하는 살아가는 거기에 보탬이 되게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외국자지 “남산 위에 저 산이 철갑을 두르고” 그것을 4절까지 부른다고 해서 그가 애국자이냐 그것이 무슨 애국자이냐? 그런 애국자가 있느냐?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평소의 삶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순간적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충동을 받아서 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충동을 받아서 행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교회당이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가난할 때이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술 먹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아저씨 교회 좀 다니세요. 하니까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내가 감사 헌금 바칠 깨 바닥에서 휫 던지고 가는데 오천원이었습니다. 그때 오천원은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쌀 네 말 정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정확하게 판단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 이것 아까 술 취한 사람이 감사헌금 내고 갔습니다. 그런 감사헌금 안내도 된다. 가서 빵이나 사 가지고 와서 너희들 먹어라. 그렇지요. 아주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술김에 기마이 한번 쓰고 갔는데 그것이 어떻게 헌금이 되겠습니까? 가서 빵이나 사 먹어라. 실컷 먹었습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순간의 무엇에 쏟아져 나오는 그것 말고 다시 얘기라 나오는 것은 ’인격적인 신앙이 없이는 견고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옛날의 어떤 교회들 보면 어느 교인들 보면 말씀에 깊이도 없고 대대로 교회에서 흔들리지 않고 요동도 안하고 3대가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런 것을 견고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 잡아먹은 귀신 모양처럼 털썩 주저앉아서, 눌러 붙어 앉아서 누가 그랬다며 어떻게 신앙에 변화를 받아보아서 ’이 나이에 무슨 변화를 받아, 변화를 받으면 얼마나 또 고달프겠어. 사명도 주신 대며. 그것이 견고함이냐. 그것은 집착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 사람들은 견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꾸 구역 예배에 가면 아이들이 까불고 날치잖아요. 그런데 그것 얘들이 그림처럼 앉아 있으면 그것은 연구대상입니다. 걱정입니다. 정신질환입니다. 아니 서너살 밖에 안 된 아이가 30분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책상다리하고 앉아서 그림 같이 앉아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정신 못 차리게 돌아다니고 칭얼칭얼 그려야지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체를 가지고 철썩 주저앉아 봐야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내가 교회를 삼주동안 비어도 요동하지 않는다. 선배 목사님이 목회를 오죽 아우라지게 하면 네가 있든지 없든지 교인들이 신경을 안 쓰겠느냐? 나중에 설명을 하는데 그것이 맞았습니다. 교인들이 영원한 아이들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엄마 아빠에 대해서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에는 엄마가 없으면 허전하고 아빠가 없으면 아빠가 보고 싶고,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것이 정상적인 아이입니다. 엄마가 오면 엄마 왔어. 아빠가 오면 아빠 왔어. 이번 주에 아빠 들어 왔었어. 다음 주에도 온데. 그러고도 아무 탈없이 살수 있다면 관계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견고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을 만났는데 저는 너무 곤고하고 힘들어서 죽겠어요. 누구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까? 너무 힘이 들면 하나님의 은혜가 넘처나는 그런 교회로 가서 좋은 목사님 밑에서 목양을 받으세요. 그래도 저는 우리 교회는 못 떠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다녔는데 제가 어떻게 떠나겠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다닌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집착입니다. 내가 뭐 몇대 째 이 교회 다닌다. 그것이 뭐 그렇게 자랑입니까? 몇 대 째 우리가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이것은 말이 됩니다. 그 쓸데없는 명분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견고함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견고하다고 하는 것은 타오르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헌신이 있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존재와 삶의 이유,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흔들릴 수 없게 된 삶, 그것이 견고한 삶입니다.
제가 언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 정말 견고하네 할 때에 전봇대보고 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어서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있는 나무 중에서 비바람을 견디고 서 있을 때에 그 나무를 보고 견고하다고 합니다. 전봇대 콩쿠리대를 보고 견고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이 있어야지 만 견고함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신앙의 토대 없이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룩한 견고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집착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견고한 사람이었습니까?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 배운 그 신앙의 도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그것을 가져다가 견고하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완고한 것입니다. 생명은 없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확신하는 삶, 그것이 완고한 삶이지 견고한 삶이 아닙니다. 견고한 삶은 생명 가운데 역사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삶입니다. 주님과 맺은 인격적인 관계,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쏟아 붓는 삶이 자신과 그분께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없게 된 사람,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붙잡힌 사람,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이 집고 넘어가야 될 것은 태생이 이런 태생인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할 때에 즉각적으로 암시 받는 것은 충성스러운 삶,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고 그 목표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이나 마귀가 우리를 가만히 내 버려 두지 않습니다. 뒤흔듭니다. 결코 가만히 내 버려 두지 않습니다. 강한 비바람의 도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신의 분투하는 삶이 있는 사람들만이 도전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흘러가는 나그네라고 할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도전, 어디로 가는데 도전이 필요합니까? 못 가게 한다. 바람이 부는 대로 가고 싶은데 누가 도전을 합니까? 가치 없는 삶을 살면서 이리 저리 흔들리는데 방황은 무슨 방황입니까? 방랑입니다. 모두 의미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안개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주 쓸모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인가 분투하십니까? 분투하는 어떤 세력을 느낍니까? 선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목표를 열심히 이루려고 할 때에 그 열심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다가와서 여러분들을 좌절시키려고 하는 그 무엇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목표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이런 것이 존재합니다. 목표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견고하게 되는 것은 성화의 교리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 그 사명을 받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아서 분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에 그가 견고해 지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흔드는 것입니다. 마음을 흔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흔들고 그 시련과 가난을 통해서 나를 흔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나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흔드는 많은 고난들 앞에서 그 목표를 향해 가려고 합니다. 그런 기회가 여러분들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눈보라가 치는데 어디를 가야 합니다.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우산까지 바쳐 들었는데 바람이 어마 어마하게 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이 얼마나 불었으면 프라이드가 뒤집어 졌습니다. 그런 정도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몸을 가눌 수 없게 말입니다. 그때에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려고 하면 더 맞바람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무엇인가 중대한 시련에 뒤 흔들리는 것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향해 집중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은 기뻐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산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시험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영적인 어떤 도전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수하에 있는데 어떤 도전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뚫고 나가려고 하는 몸부림을 칠 때, 몸부림 속에서 유혹을 받고, 시험을 받고 그럴 때, 견고한 사람들의 특징은 환경과 더불어 싸우기 전에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싸워 이긴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요동칩니다. 아이 씨 다 뒤집어 치워. 이런 마음이 수시로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분명하고 충성심이 있을 때에는 이 세상에 누가 자기에게 부여한 사명보다도 더 심각하게 느껴지지 왜 지존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라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어명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네게 주신 사명이고 어긴다고 해서 죽 떠먹은 자리에 표 안 나는데 뭐 내게 주신 자리 잠깐 떠났다고 해서 벼락을 맞아 죽습니까? 일년동안 구역장 내 팽개치고 엉망진창으로 했다고 해서 그 다음달 12월 31일까지 살려 두고 1월 1일날 하나님이 대려 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 살아 있는 사람이 몇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미션, 자기에게 주신 어명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임금이 합친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라지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라진 사람들이 어떻게 분투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상황 속에서 싸워서 승리한 사람들, 끊임없이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서 분유하게 만들고 요동치게 만듭니다. 극단으로 몰고 갑니다. 소망을 가지고 주를 위해 섬기려고 하면 엄청난 좌절을 안겨 줍니다. 봐라 무엇이 되냐? 너 같은 인간은 아무렇게 해도 안돼. 그렇지 않으면 조금 하나님을 위해 잘 하려고 하면 교만한 마음을 불어넣어 주어서 너 밖에 없다. 너 같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봐라 너 밑에 와서 한 줄씩 배워야 하는 똘마니들이다. 그리고는 교만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저앉게 만듭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한 시간도 하나님과의 평안을 누리면서 주님 앞에서 자신을 모습을 보면서 살아가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충동합니다.
유혹, 교만, 좌절, 절망, 낙심들을 끌어 드립니다. 그것을 지킵니다. 잠언서에서 지킬만한 모든 것 중에서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기 때문이다. 이것과의 부단한 싸움을 싸우면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변함없이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거기에 서 있기 위해서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서 자신 속에 일어나고 있는 끊임없는 유혹, 절망, 좌절, 교만,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어 부서 버리고자 하는 이런 강한 마음을 흔드는 것과 싸우며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리차드 쉽스라는 청교도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큰배의 키와 같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큰배도 몇 평 안 되는 키 하나를 가지고 어느 쪽으로 움직이냐에 따라서 집채만한, 운동장만한 배도 좌로 돌고 우로 돌고 둥글게 돌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기도 하고 이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냥 저절로 은사를 받아서 견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방법은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마음을 흔들리지 않기를 먼저 하나님 앞에 고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고 충분히 흔들리면 형식은 남아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거기에 마음이 있을 뿐이지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속에는 쏟아 붓는 마음이 없습니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마음에는 쏟아 붓는 마음이 없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는 마음에서 모든 쏟아 부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자리에서 자신의 그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사는 그 헌신된 삶을 위해서라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흔들리지 않는 비결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흔들림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감당하지 않고 엉망진창으로 감당을 하면 마귀도 그 사람이 교사를 하든지 구역장을 하든지, 목회자를 하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충성스럽게 감당을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는 사람들은 아주 집중적으로 달라붙어서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상황 자체를 마귀가 흔들 수 없으니까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트려지게 만들고 상처받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그 마음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무너트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무너지고 나면 견고함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을 쏟아 붓는 충성스러운 삶이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마귀가 흔들고 다닙니다. 두루두루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때에 자기의 마음을 흔드는 모든 영적인 시각에서 정확하게 판단을 하고 그 사단의 머리에 말씀의 칼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견고해 집니다. 그리고 내가 이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 주님을 위해서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나? 아주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것이 오늘 충성스럽게 살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한번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게 씁니까?
오늘 새벽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께로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큰데 한번 힘을 다해서 내 모든 것을 드려서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해 보고 죽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견고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수많은 시험과의 싸움입니다. 거기에서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인생의 자리에서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충성된 자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下)
지난 주 장시간에 걸쳐서 충성스러운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왜 싶게 흔들리게 될까? 그것입니다.
얼마 전에 폼페이의 유적을 전시하는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가 보지는 못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자료들을 쭉 보니까 폼페이의 유물가운데는 화성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덮치는데 너무 순식간에 덮쳤기 때문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을 덮쳐 버리면 사람의 몸이 용암보다는 차기 때문에 사람을 태우면서 용암이 굳어집니다. 사람이 들어갔던 자리는 용암 속에서 다 타 없어진 빈 공간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 공간에다가 다시 발굴된 것을 갈라서 거기에 석고를 넣어서 다시 뜨면 기가 막힌 용암 속에 맨 처음에 들어갔던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유적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창을 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군인들입니다. 물론 그 재앙이 순식간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감상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심판을 받아서 도시 전체가 용암이 뒤덮인 가운데 자신의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자들은 각자 그 사람이 서서 감당해야할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서 이탈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물론 여러 가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그 일에 진전이 있고 성과가 있어서 자기가 훌륭하게 쓰임을 받고 있다라고 하는 그 확신을 섬김의 현장에서 받고 있는 동안은 거기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그 자리를 쉽게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무슨 보수가 문제가 아니고 대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주님과 우리와 성립되고 나면 우리에게 제일 희망을 주는 그 순간이 어떤 순간입니까?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희망을 주는 순간이 어떤 순간입니까? 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면 좌절하고 싶고, 이렇게 오래도록 믿고 주님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데도 내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좌절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시다. 그리고 아직도 나를 쓰고 계시다. 아직도 하나님이 나를 당신이 불러주신 그 자리에서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계시다. 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이 정말 거듭난 사람인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큰 소망을 얻는 것입니다. 저도 가만히 보면 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아주 순간적으로 강력한 침체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공통적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이 낙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 안에서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인간이야! 나는 정말 죄인 중에 괴수야!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나 같이 더러운 죄인이 없을 꺼야! 하는 자기 고백이 나오는 것은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겸손과 낙담이 다른 것은,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죄인이야! 주님이 나에게 이 사명의 자리에 세우셨지만 나는 어림도 없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어. 나는 도저히 불가능 해!” 이런 것이 파고들어 올 때에는 낙담이나 겸손이나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겸손의 차이점은 그런 생각이 다 들어온 다음에 충분히 낙담하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그렇기 때문에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라는 생각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겸손과 낙담의 차이는 믿음이 있는 낙담이냐. 믿음이 없는 낙담이냐? 그 믿음이 한쪽에서는 소망을 주고 한 쪽에서는 그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낙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미묘한 차이입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죄인이야. 죄인 중에 괴수이고 하나님 앞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어.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지만 내게는 그런 자격이 없었고 귀한 사명을 주셔서 여기에 세워 주셨지만 그러나 내가 이것을 감당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돼. 도저히 불가능해. 그런데 여기에 세워 주신 분이 주님이야.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저를 세워 주신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 서 있는 자리가 분명합니다. 보십시오. 내게는 선한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감당할 만한 훌륭한 도구들이 내게는 없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런 것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의 자리를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낙담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는데 진전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과가 없습니다. 자책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는 정말 못났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겠느냐? 내가 여기에서 이 일을 감당해 나갈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점점 더 낙담해 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거기에 이렇게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서 있는 것이 견딜 수 없게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깊은 침체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좌절합니다.
예전에 같이 있었던 교역자 한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교역자 생활을 그만 두어야 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교회도 조금한데 자기 사례금, 성도들의 귀한 헌금으로 사례비를 받으면서 사명도 감당해 가지도 못하고 자기는 아무래도 너무 무능하고 쓸모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서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자리를 비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위선을 집어치어라. 구역질이 난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받는 사례비는 성도들의 귀한 헌금이라고 말하고 그런 귀한 헌금을 받으면서 요만큼 밖에 일을 못한다고 당신이 말을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당신 같은 태도가 나 같은 사람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쉽게 말하면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에 이만큼 밖에 못한다고 해서 생활비를 성도들의 헌금을 받는 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양심이 있고 우리는 덥썩덥썩 이것밖에는 못하면서도 받아서 먹고 사니까? 우리를 정죄하는 것 아니냐 아무 소리하지 말고 들어 봐라.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쳐 낼 것이니까 듣고 정신 차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된 것이고 두 번째, 당신이 성도들에 대해서 그만큼 미안해했다고 하는데 언제 성도들이 당신한데 그 사명을 주었느냐? 당신의 목회관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성경을 보아라 하나님의 일꾼으로써의 사명감은 그 직위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한 달에 몇십 만원 생활비가 피 눈물나는 헌금으로 그래 당신 생활비를 주었다고 치자. 그것을 받아서 성과가 없는 것 때문에 성도들 앞에 양심이 괴로웠다면 당신이 그 사람들이 아니라 직접 사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괴로워해 보았느냐? 내가 보기에는 별로 괴로워한 것 같지 않다. 그리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다 쏟아 놓았습니다. 제가 아무 한데나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만한 사람한데 그랬습니다.
세 번째는 당신은 당신 자신이 무능하다라고 했는데 그래서 이것을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하는데 당신의 출발 자체가 잘못되었다. 당신이 이 귀한 사명을 맡을 때에 당신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한번 해 보려고 생각을 했느냐? 출발이 된 것이냐? 선지자들을 봐라 주님이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시기 직전에 그들은 철저하게 엎드리면서 예레미야의 경우 “나는 아이입니다. 내가 너를 선지자로 불렀다. 나는 아이입니다. 말할 줄을 모릅니다. 나는 어립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족을 철저히 깨닫고 그것을 받을 때에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사오나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옵소서 라고 하는 절대적인 복종의 그 자세가 하나님 앞에 받는 그 순간이었다. 당신도 그런 사람 아니었느냐? 당신도 그런 사람이었다. 잘 못 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이것을 더 하면 좋겠다고 하는데 당신이 정말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보다 저 분이 훨씬 유능하기 때문에 그분이 가시는 그 앞길을 정말 내가 비켜 주어야지 그런 사람들을 당신이 만난 적이 있느냐, 그런 마음을 가진 당신의 눈에 저 분이면 내가 죽쓰고 있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겠다라는 이런 사람이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당신 눈에 그런 사람이 있느냐 말해 보라 이것입니다. 말도 못합니다.
다섯 번째, 당신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잘못된 관계를 당신은 전부다 일에 대한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을 그만 집어치운다고 하자 집어치우면 당신과 하나님 사이가 새로워집니까? 아니 한국에서 세는 바가지가 미국 간다고 안 세냐? 한국에서 하나님 볼 때에 착하고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소련으로 간다고 해서 불한당이 되냐 이것입니다. 당신이 바다 끝에 가서 거한다고 해도 끝까지 쫓아다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것을 왜 그런 식으로 얽어매느냐?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당신이 이 길로 들어 설 때에는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들어섰는데 이 길을 떠날 때에도 그렇게 많이 기도했느냐? 그것이 잘 못 되었다. 다 생각이 안 나는데 열 가지는 더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식의 반응과 태도를 아주 역겹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다. 라고 말을 한다면 솔직하고 깨끗합니다. 체면이 있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리 저리 핑계를 대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러느냐? 너무나 부족해서, 아니 그럼 처음에 맡을 때에는 넘쳤기 때문에 맡았습니까? 주체 파악을 해야지요. 그런데 그것을 깊이 깨 들어가면 다 쓸데없는 가식적인 변명에 불가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밑에 깔려 있는 생각은 이렇게 힘들게 애를 쓰는 것이 정말 그 헛된 것이 아닐까 라는 자기 섬김에 대한 회의가 처음에는 아주 가느다랗게 비집고 들어와서 나중에는 점점더 크게 벌려 놓는 것입니다. 박살을 내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이 오늘 말하는 것은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을 앎이니라. 여기서 재미있는 구절이 이것입니다. “주안에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버무릴 때 자주 쓰는 말이 주안에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시야와 판단으로 볼 때에는 많이 애를 쓰고 수고를 하는데 그것이 헛된 것인 것처럼 느껴 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애를 쓰고 성과가 없을 때, 많이 눈물을 뿌리고 수고를 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꼭 가시적인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사역이 자판기와 같다면 충성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자판기는 정확합니다. 300원 넣고 누르면 물이 나옵니다. 고급커피 먹고 싶으면 100원 더 넣으면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집어넣고 누르면 정확하게 나오는 것처럼 일정한 우리의 헌신과 어떤 것들을 투입하면 일정한 결과가 나오는 것 같으면 그러면 너도나도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별로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는데 이상하게 놀랍게 눈에 보이는 성공을 거두는 가 하면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눈물나게 피가 맺히도록 고생을 하는데 적은 성과밖에는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의 눈의 시야로 재려고 하면 안됩니다. 원래 충성스러운 삶이라고 하는 자체가 이 세상의 시야로 보는 자체가 매우 불합리한 삶입니다. 불합리한 삶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대부분 충성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미쳤다고 말을 합니다. 제 정신을 가지고는 제대로 살수 없는 사람들이 그것이 충성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차피 세상사람들의 시야와 눈길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의 안목을 가지고 따라서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처음서부터, 우리는 무엇인가 다른 시야 속에서 사는 삶입니다. 다른 삶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다른 눈빛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야요. 하나님의 안목이요.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애를 쓰고 수고하는 것을 우리의 눈빛으로 보면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빛, 하나님의 시야로 보면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수고한 사람들의 수고는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성과를 보고 그 사람을 재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물론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영적으로 뛰어나다라고 할 때에 그것은 세상의 시야와 하나님의 시야야 교차 할 때에 세상의 시야에 영향을 적게 받고 오히려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진짜 깊이 있는 사람들은 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세상의 자랑이나 세상의 칭찬에 마음을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 주 앞에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애를 쓰고 수고를 할 때에 너희들이 헛된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시야는 너희들이 성공이냐 실패이냐 성과가 있냐 없냐 하나를 가지고 보았기 때문에 헛된 것처럼 느낄 수 있겠지만 그러나 헛된 것이 없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며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결코 헛된 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해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짤막한 것이었는데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설교자는 그 설교의 결과로써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위해서 헌신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을 하고 그 말씀을 잘 준비를 해서 기도를 흠뻑 하고 그리고 여기에 올라와서 다 잤습니다. 아니면 정 반대로 마음을 강퍅하게 세우고 어떻게 저런 설교를 할 수 있나 반감을 품고 한사람의 마음에도 부딪치지 않고 설교가 다 떨어 졌다고 합시다. 세상 적으로 성과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재면 그 설교는 다시는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아무도 안 들었는데, 다 싫다고 하는데, 다 성과가 없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바꾸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성경주의 입장입니다.
로버트 슐러 같은 목사님이 와서 성장 세미나를 하면서 죄에 대해서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들이 많은데 그런 것에 대해서 설교를 하느냐 그러면 교회가 크지 않는다. 그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 시야에서 보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아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안 듣고 하는 것은 각자 하나님 앞에서 해야 될 문제이고 하나님께서 이 자라에서 외치라고 하시는 그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온 지성을 동원해서 노력하고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그리고 자신은 한없이 부족하지만 위로부터 내리시는 성령의 은혜 속에서 이 말씀을 전해서 저들의 마음에 다다르게 하려고 듣는 회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외쳤으면 아무 결과가 없어도 그 사람이 받을 상급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성공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한은 우리들이 신앙의 본질적인 실체에 접근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을 앎이니라” 이런 시야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주를 위하여 살아갈 때에 우리의 최종적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최종적인 가치를 성공에다 두면 안됩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우상이 됩니다. 그 성공에 대해서 집착을 하니까 성경의 원리를 어기더라도 성과가 나타나면은 기꺼이 그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열매들이 정말 주님 안에서 맺은 열매들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성화의 영력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에 미쳐서 충성스러운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그 일을 자신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헌신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일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아닙니다. 전자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면 일을 할수록 아주 망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단물이 다 빠져나가서 쇠약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런 식으로 섬기면 섬길수록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속에서 만난 하나님이 자기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충성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를 모두 일로 내 몰라서 우리를 충성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교역자 수련회를 갔습니다. 1층에서 어느 회사에서 온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어로 막 써 놓았는데, 그런데 옆에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회사 사원 수련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수련회를 하는데는 다단계 판매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완전히 사이비 종교집단입니다. 한 사람이 나가서 자기네 깃발을 세워 놓고 “하면 된다” 하니까 사람들이 “된다 된다” 와 그 분위기가 종교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흥분을 해서 신발을 신고 책상 위에 올라가서 된다는 것입니다. “와 와”하는데 무슨 특공대 궐기 대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 정신들이 일부가 교회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 충성된 사람들을 만들어 낼뿐입니다.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내주 예수 주신 은혜 한 없 것 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성경적인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충성스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일에 대한 비전을 보여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비전타령 너무 하지 마십시오. 비전은 무슨 비전입니까? 주님을 많이 알아가야 합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을 보면서 은혜를 받았는데 사도바울이 “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또 배설물과 같이 여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니라” 거기에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으로 대치해도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고상한 일 아닙니까?” 주님을 깊이 알고 나니까 이전에 자랑하는 것들,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을 만났을 때 “야 너 베냐민의 지파라고 너무 뻐기지 마라, 난지 팔일 만에 할례, 할례를 받으나 안 받으나, 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그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다. 내가 제일 소중해 알겠니 사울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어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가치관이 변한 것입니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분을 진심으로 알게 되니까 이제 무엇이 쓸모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육로의 위험과 해로의 위험과 피어린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세계 선교의 꿈 때문에 그랬다는 것은 바보 같은 것입니다. 세계선교의 꿈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는 꿈에 들뜬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 예수님께 잡힌 사람, 주를 위해서 죽은 사람이지 일의 성공을 위해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얼마나 다릅니까? 목회를 하면서도 느끼는 것인데 어떤 때에는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옵니다. 오늘도 일이 전화통에 불이 납니다. 계속 옵니다. 어떤 때에는 뭐 좀 해 주십시오. 어디도 가야 합니다. 뭐도 목사님이 가야 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 속에서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어떤 외침이 나오느냐? 내가 목회하는 기계이냐? 그렇게 살수는 없다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방을 안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반감이 생깁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일 속에 내게 여러분들과 교회를 위한 도구로써만 살수는 없습니다. 바보 같은 이야기이지만 여러분에게 내가 중요합니까? 교회가 중요합니까? 말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교회전체, 목회자로써의 명성, 저자로써의 명성, 그런 것들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섬기도록 세워주신 하나님께 비하면 여러분께 미안하지만 여러분들 모두가 지푸라기에 같은 존재에 불가합니다. 아무도 아멘을 안하십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배가 아프면 가스명수 먹고, 머리 아프면 사리돈 먹고, 어떻게 잘 살아보려고 기력을 찾으려고 잠도 자고 밥도 먹지만 그 생명도 나를 살게 하신 주님 자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하물며 어떻겠습니까? 일에 노예가 되는 것과 인격적인 하나님께 대한 깊이 울어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비슷한 것 같아도 조금만 눈을 뜨고 드려다 보면 절대로 똑같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을 하는데 요한복음 15장 강해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길‘을 꼭 들어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그것을 꼭 들어야 합니다. 거기서 제가 일에 노예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것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주안에서라는 짧은 구절이 의미하고 있는 바입니다. 너희들이 수고하고 애를 쓰면 헛된 벗이 없다. 그것은 꼭 성공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꼭 성공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시야가 주안에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맺어진 열매를 보면서 절대적으로 좌우 되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잘 못된 나머지 일만 맡겨지면 죽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 태평입니다. 주안에서 보면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는 다 영혼을 맡겨 주면 다 털어먹습니다. 그리고 하나 밖에 안 남았는데 워낙 진리를 가르치다 보니까 나의 이 섬김을 감당할 수 없어서 다들 떠나가고 한 사람 밖에 남은 사람이 없는데, 그 남은 사람은 참된 진리를 받아서, 떠나간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받아서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에 연연해하지 않고 다 털어먹도록 초지 일관 그렇게 섬겼으니 이제 나는 주안에서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애를 썼는데 ‘하나님 내가 부족해서 영혼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주님 앞에 면목이 없어서 어떻게 주님 앞에 서겠습니까?’그럴 때 주님께서 와서 ‘네 수구고 주안에서 헛되지 않다. 네가 그렇게 진리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도 알고 그 영혼들을 네가 사랑하는 것도 안다. 그들에게 나를 경외하는 믿음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떠나갔단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 너의 수고는 하나도 땅에 떨어진 것이 없단다.’그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셔야지 무엇인가 감동적인 스토리가 되지, 자기가 ‘얘야! 괜찮단다. 다 털어먹었어도 내 수고가 헛되지 않단다.’ 주님이 위에서 하시는 말씀이 ‘혼자서 쇼하는구나?’
오늘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헛되지 않다라고 했는데 어떻게 헛되지 않다라고 했는가?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사역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이 지상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어집니다. 실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인을 못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선교를 나갔다고 합니다. 죽어라하고 애를 썼는데 그야말로 성과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들 하나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러더니 또 하나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도 야속하지 비슷한 병으로 아내까지 죽었습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주저앉아서 탄식을 하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모든 동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싸서 그 선교지를 철수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항구인데 배를 탔다고 합니다. 한국에 도착을 했는데 마치 그 배에 휴가 갔다오는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몇 대 대통령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대통령이 탔는데 항구에 도착을 하니까 빨간 주단이 깔리고 군악대들이 사열을 하면서 그 대통령을 환영을 하였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그 광경을 보면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주단이 다 거치고 팡파르를 울리던 군인들도 다 사라진 그 항구에서 바닷가의 처 놓은 줄을 붙들고 바다를 향해 한없이 울면서 하나님 앞에 고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휴가를 받아서 사냥이나 하고 온 이 세상의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서 주단을 깔고 저렇게 군인들이 나와서 팡파르를 울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는데 저는 주님을 위해서 애쓰고 살았지만 아무 성과도 없고, 두 아들과 아내를 선교지에 묻고 돌아 왔는데 나는 제 자신을 지탱할 힘이 없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울러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선교지에서 애쓰고 수고한 것을 내가 다 아노라. 네가 내게로 오는 그날 네가 여기서 본 환영행사와는 비교될 수도 없는 영광스러운 환영식이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 선교사가 다시 선교국에 신청을 해서 다시 선교지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가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실패한 사람으로 이렇게 기록된 사람이 주님의 나라에서 커다란 상급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잣대와는 다릅니다. 내세의 상급이라는 사이에서 볼 때에 분명합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이야기할 때에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의 위인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믿음의 공통적인 초점이, 삶은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았던 모양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그 믿음의 내용은 공통됩니다.
두 가지 사실을 믿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 하나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내가 성공할 꺼야, 성공할 꺼야 거울을 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것과 살아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전 삶을 보고 그를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전 삶을 걸고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의 내용이었고 그 믿음의 내용들이 그렇게 다양한 삶의 모양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을 보십시오. 성경이 모세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그것을 택했다고 합니다. 상주시는 이 이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상이 어떤 종류의 상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충성스럽게 주를 위해 살다가 주님 앞에 간 사람들은 더 빛나는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참 좋은 것이라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주님을 위해서 신앙의 절개들을 지키며 순교하는 순간에 용기를 불어넣게 주었던 그 믿음이었고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그리고 객이라고 일컬음을 받으면서도 세상에 정을 두지 않고 본향을 향해 찾아가는 사람들로 살 수 있게 했던 그 원동력이 내세에 대한 소망,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그리움, 그런 점에서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공을 보고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토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헛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헤아리실 하나님이 당신의 책에 기록을 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오는 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교회의 한 구석에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하는지도 모르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뿌리며 헌신했던 그 영혼들,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의 그 중보기도를 받았던 사람들도 여러분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책에는 그렇게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여러분들의 수고가 기록되는 것입니다.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을 하고 그리고 전도지 한 장 돌린 여러분들의 이름 없는 모든 수고가 그분의 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모든 성도의 아름다운 섬김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생활가운데서도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 드린 순간순간의 헌금들, 모두 그분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모여서, 일평생 누구를 위해서 산 사람인가? 그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이것, 이것이 헛되지 않습니다. 내세의 상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 헛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측면은 섭리의 결과라는 상태에서 볼 때에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우신 분입니다. 한 예가 있습니다. 우리 지난 십자가 사경회때입니다. 이 십자가 사경회는 두고두고 우리의 숙제입니다. 네 번 저희들이 부흥회를 하는데, 여름수련회를 합쳐서 말입니다. 해마다 제일 힘드는 것이 십자가 사경회입니다. 첫째는 시기적으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때이고 사람들 마음이 신앙으로 잘 모아지지 않습니다. 비교적 쉬울 때가 연초의 사경회입니다. 연초의 사경회 때에는 다 일년동안 잘 못 산 후회가 있기 때문에 그래도 금년에는 무엇을 해 볼까? 작심 한달이라도 해 보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참여도 자발적이고 기대하는 바도 있습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참 어렵습니다. 그런 대다가 학생들이 중간고사 기간하고 항상 겹칩니다. 고난주간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문교부에서 양보 좀 하지 꼭 그 주간에만 꼭 시험이어서 학생들을 다른 방면에서 고난을 받게 합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고 잘 참여를 안 합니다. 여러 가지 원인에서 힘들어서 몇 번씩이나 십자가 사경회를 그만 둘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지난봄에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사람이 안 모인다. 힘들다. 그러지 말고 한번 우리의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맡겨 보자. 그래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사경회 홍보하고 그랬는데 열린교회 개척 이래로 최고로 헌신을 했습니다. 눈물겹도록 헌신을 했습니다. 육만오천장을 인쇄를 해서 한집 한집 다니면서 대문에다가 스카치 테잎으로 붙였습니다. 저쪽부터 시작을 해서 저 쪽 봉천동까지 새 빨갛게 십자가 사경회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그랬지, 방송에도 내 보냈고, 신문에도 내 보냈지, 저는 그때 우리 세미나 할 때에 천삼백명 모이겠지, 이 정도 홍보를 했으니까? 꽉 차겠지. 주일날 이부예배때의 모이는 만큼 모였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 마음에 좀 낙심이 되었습니다. 지체들이 얼마나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는데, 심방을 가다 보니까 빨간색이 안 붙어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열린 교회 천지였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하나님 그것밖에 안 보내 주시나. 그랬습니다. 좀 낙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몇 주 후에 등록을 했는데 개기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대문을 열고 가보니까 이것을 들고 어머니가 자기네 집에 오셨다가 놓고 가셨는데 며느리가 그것을 보고 은혜를 받고 교회에 나와서 등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케이스가 십자가 사경회 이후로 나왔습니다. 요즘도 그 십자가 사경회 포스터 이야기하는 사람이 가끔 나옵니다. 교회에 등록을 하러 왔다가 말입니다.
섭리의 측면에서 보면 지금 당장 열매가 맺혀지지 않아도 세월이 지나면서 열매가 맺혀집니다. 누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모르지만 신촌의 기독교 대학에서 껌 씹고 채플 드리던 학생이 강남에 와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름대로 간증의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쓰래빠 끌고 채플 실에 가서 껌을 씹으면서 쪽지를 내어야지 만 졸업을 하니까 들어 왔던 학생들이 그때에는 신앙을 받아드리지 않던 학생들이 인생의 곤고한 시간을 만나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마음이 생기더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희랍어 성경에 보면 ‘유카이로스 아카이로스’ “유”는 좋은 때에든지 “아카이로스” 없는 때에든지 때가 좋든지 때가 안 좋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밖에 없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면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간증을 많이 봅니다. 수없이 많은 간증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헛되다고 누구도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어떻게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가 보고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이 충분히 섭리를 하셔서 그 결과가 나타나는데 어떤 때에는 우리 생애에서 못 보고 죽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유명한 저술가 중의 한 사람이 ‘아더 핑크’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책이 오늘날 삼천만권이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그분은 성공적인 저술가가 아니었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복음의 메시지를 써서 쪽지를 만들어서 전단지 비슷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던 사역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그것들이 묶여져서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당대에는 별로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후대에 그것들이 묶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것을 보십시오. 당대에서 볼 때에는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일을 하고 죽었겠거니 했습니다. 그 이후에 그 글을 통해서 파격적인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죽었는데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이 하는 말이 “스펄젼은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도 스펄젼은 영국을 움직이는 이미 백년이 지난 사람인데도 움직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설교를 읽으면서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이 순간에도 이 지구상 어디에선가 그 설교를 들으면서 누군가 회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소포를 싸면서도 우체국에 붙였는데 배달부가 그 소포를 배달하다가 그 소포를 보고 읽다가 회심을 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예화)인터넷사역-정말 모르는 것입니다. 인터넷 사역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 언제였냐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애를 쓰고 수고하는 것이 짤막한 구간의 시간을 가지고 재면 안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언제 사용하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수고는 절대 헛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코 헛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헛되지 않다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변화와 관련을 해서 헛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한 자리에 세워 주실 때에 여기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많은 희생과 자신과의 싸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까? 신앙적인 의미에서 견고하다고 할 때에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밥이나 먹자하고 털썩 주저앉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봇대보고 견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견고하다고 합니다. 살아있어야지 견고합니다. 그렇게 살아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남이 보기에 그 자리가 한없이 영광스럽게 보이고 훌륭해 보여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없는 사명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어는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신학생의 장학금-- 나중에는 횡설수설하더니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분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상황을 변화시키면 성과가 있는 것이고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제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일을 통해서 얼마나 훈련을 시키는지 아십니까? 한 사람이 그래도 믿음이 부족해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온 힘을 걸었을 때에 그 일에 인생을 걸었을 때에 그 사람의 마음을 밀고 땅기고 하실 수 있는 좋은 재료는 그에게 맡겨주신 일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를 격려하기도 하시고 그를 좌절시키기도 하시고, 그를 겸손하게 하시기도 하시고, 그에게 용기와 꿈을 주시기도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그런 충성심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가 겸손케 해야지 너는 성공하니까 교만하구나. 일을 꽉 찌부르 드려 습니다.”실패가 많은 사람들은 안 되는구나 그것뿐이지 충성스럽지 않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다릅니다. “어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 왜 그렇게 되셨을까? 무엇 때문에 이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이 이 일이 안되고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여기에서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절대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전혀 걱정 안 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스스로 착각하기를 자기는 믿음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평안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일을 맡기신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부재입니다. 그 일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입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다 일에 미친 사람들이고 자기는 그런 일에 초월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들일수록 사고가 단순합니다. 야바위치는 사람들일수록 사고가 아주 복잡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이 잘 되면 감사가 넘치고 기쁘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고 그 일이 안 되면 죽고 싶은 것이 정상이지 믿음이 워낙 뛰어난 나머지 영원한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되던지 말든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아니 구멍가게를 차려 놓고 손님 몇 사람이 와도 신이 나고 매상이 좀 떨어져도 밤에 잠 못 이루는 것이 사업을 하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이 자기 자신의 존재와 가치라고 하는 것은 그 사명의 자리에서 일을 하는데 있는데 그것이 실패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아무런 자극이 없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평강할 수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무감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부재이지 다른 것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제는 내게 눌리는 것이 있으니 너희를 향한 염려라” 염려는 무슨 염려를 그렇게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마음이 눌리도록 그렇게 염려를 합니까? 그렇게 바울에게 충고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부재이지 믿음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매진을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풍성함 때문에 염려를 극복하는 그 모습은 염려 자체가 사명을 맞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염려가 있는데 그 염려를 통해서 신기하게 하나님을 더 의지하면서 평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평강이 한 인격 속에 같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염려와 평강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대표적입니다. 근심하고 고통하고 괴롭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성공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영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죽은 자의 돼지와 같은 평강을 그것을 마치 믿음에서 오는 평안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우리들이 이점에 있어서도 모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통곡과 눈물 속에서 사셨습니다. 완전한 만족을 하나님과의 속에서 느끼신 분이셨지만 그러나 그것이 근심이 없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변화되지 못한 영혼들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성취되지 못하는 아버지의 뜻, 그리고 일용할 양식이 없어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 대한 생각이 예수님으로 하여 늘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는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 수많은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이를 악물고 자기를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두를 드려서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일의 성공도 주시지만은 일의 성공보다도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신학교 다닐 때 어디든지 가면 다열지리적인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에도 선생으로 있을 때 완전히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운동권 학생의 개척교회 후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교만한 인간인지 모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만약에 무슨 주님의 일을 맡았든지 간에 실패 없이 그 자리에서 고난도 없고 실패도 없이 줄기차게 성공을 거둔다고 생각을 하면 아마 틀림없이 “예수님 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저한데 와서 한 술 배우시죠?” 이럴 사람들입니다. 그런 교만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쓴맛을 보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꽤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는 도저히 자기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타계할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안 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한계를 드려냅니다. 거기에서 피 눈물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축복이 필요로 하는데 그 축복을 받을 수 없도록 훼방을 놓고 있는 자신 안에 있는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인격을 알고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룩해 집니다. 자기도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일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일에 자신을 쏟아 붓는 삶을 살고 나면 우리 자신이 변화된다는 면에서 결코 그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일은 최선을 다해서 거기에 생명을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그런 자세로 나아갈 때만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하지 설렁 설렁하는 동안에는 늘어나는 것이 요령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일을 맡겨 놓으시고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함께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그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큰일 작은 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일의 규모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태도로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애써서 사는 사람들, 그 일이 실패할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성공할 때에 주님의 축복에 감사하면서 그분을 더 사랑하기로 결심하며 살아 온 사람들, 그런 식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헌신한 삶을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거기에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고쳐주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맨 처음에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독선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 속에 끌어 오르는 열정을 가지고 남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단선적인 생각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환경과 씨름을 하고 자신의 부패성과 씨름을 하면서 주님이 그 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릴 때에 우리 자신이 주님의 향기 나는 사람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함께 섬기며 분투하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게 됩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갔더니 자기네 교회에서는 영혼을 섬기지 않는 사람을 결코 장로로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렸느냐고 했더니 영혼을 섬겨서 피눈물을 쏟아 보아야지 만 목회자의 심정을 안다는 것입니다. 장부나 들고 계획서나 들고 왔다갔다하는 행정 장로들은 목양의 마인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진리입니다.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눈물을 쏟아 본 사람들은 목양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영혼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영혼들을 위해서 생명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이어야지 만 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영혼을 섬기는 일만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각자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서 세우주신 그 일, 그 일의 성패에 생명을 건 사람들, 그러나 그 일 자체 때문에 생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 일 뒤에 여러분들에게 사명을 주신 그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충성 그것 때문에 생명을 거는 사람들이 될 때에, 여러분들의 헌신은 일에 대한 헌신과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충성과 헌신 이것을 깊이 기억을 하면 주님을 위해서 산 모든 우리의 삶의 방식은 결코 헛된 것이 없고 주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가졌던 확신이 이것입니다. 내가 사역을 꽃피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교 동기들 가운데 많이 죽었습니다. 먼저 갔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하나님이 너 사명이 있으니까 신학교에 가라고 하셔서 신학교에 갔는데 목사도 안되고 하나님이 대리고 가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데리고 가셨는데 말입니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는 동안에 이 다음에 목회라도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 보려고 가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목사가 되고 목회 지를 가져야지 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사람은 신학교를 다니다가 죽었으면 결국은 신학교 어떻게 다니는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채점을 매기시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커닝이나 하고 대리 출석이나 하면서 다녔다면, 그런 것이나 하고 다닌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나 되어서 개판이나 하다가 죽은 사람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 매순간순간 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연습은 없고 예비가 없습니다. 얼마나 살다가 죽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이 써 주셔서 여기에 새워 주셔서 이렇게 더러운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게 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눈을 뜨고 일어나면 이것이 정말 꿈인가?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용서함을 받아서 이렇게 주님의 섬기는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있게 되었나? 나 같은 인간은 백번이라도 버렸을 탠데! 그래서 나를 사용하시려고 오늘도 여기에 세워주시는구나 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생명이 있는 날 동안 그 크신 십자가의 사랑을 품에 안고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주님을 섬기는 것이 내 인생에 보람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면서 섬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삶이 그가 무슨 일을 하면서 섬기면서 살아가든지 결코 작은 자의 인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안에서 그들의 섬김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2.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수고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네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우리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될 수가 있는가 혹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한 경우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질문을 생각하면서 말씀에 대해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 10절과 9절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구절입니다. 무엇을 말하다가 사도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15장 전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변증입니다. 사도는 부활된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목격자로서 다른 많은 목격자들을 거론하면서 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도 사실이고 다시 사신 것도 사실이고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주를 믿는 것도 주를 위해 사는 것도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것이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권위의 기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게바를 비롯해서 500여 형제에게 동시에 나타나시고 그리면서 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한 자와 같은 자기 같은 자에게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신 것을 확증하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모두 사도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바울에게 단지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부르신 것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 배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쯤 사도가 전해준 복음의 진리를 끝까지 붙잡지 않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의심하게 하는 말을 퍼트렸습니다.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사도에 대한 개인적인 유감이라기 보다는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빚어낸 작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존심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통해서 그들에게 전파한 기독교의 진리가 참된 것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이 참된 사도라는 것을 변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여기서 비록 모든 사도들보다 나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을 틀림없다라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나된 것은 은혜에 의해서 지금의 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이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화에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사도가 되어 있는 현재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직분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사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가 자신이 사도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하면서 뜻하신 한가지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효력 없이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내게 어떤 효과를 나타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더듬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견고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중요한 원천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특별히 그 은혜에 대한 강한 의식은 소명의식을 가르킵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도 바울이 지금 사도가 되었고 주께서 그를 불러주신 이후로 계속 사도입니다. 그 이전에 그가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를 보면 절대로 지금의 모습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폭행하고 박해하고 그리스도를 매우 미워하고 대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로서 살아가던 옛 삶을 생각하면 지금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그 시대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미워하던 광포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거스리고 살아가고 있을 때 사도보다 훌륭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려던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아니라 핍박자요 포행자이던 적대자를 주님께서 사도로 삼으셔서 지금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죄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행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시면서 이 일을 행하신 것은 죄인 중에 괴수인 자기를 일꾼 삼으신 것은 그 하나님의 긍휼을 보이시기 위해서 자기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가 지금 자기가 사도로 서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아무것도 안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표적입니다. 죄인들을 감화시켜서 옛 삶에서 떠나게 하고 예전의 진노의 자녀 마귀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의 명분을 주시고 사랑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표입니다. 악한 죄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리고 사는 것이 자신의 행복인 것처럼 여기던 여러분과 저를 불려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 각 사람에게 적합한 일을 주서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충성할 자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리게 베풀어주신 크고 아름다운 은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항상 이것을 회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한 불만족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오늘의 우리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고가 없기 때문에 악한 원망과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경험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것을 주셔도 하나님도 우리를 만족하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은 끝이 없고 우리들이 행복의 기준과 가치를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으로 삼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채워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충분히 만족한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처럼 그런 고백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충분히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벌써 수십년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생의 변화를 받은 어느 집사님이 저를 만나서 하는 말이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주어도 안 바꾼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충만해서 그 사랑을 알게 될 때에는 우리에게 가장 만족을 주는 감사의 조 기도가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을 받아서 예전의 육체의 자녀이고 진노의 자녀인 나를 그리스도의 피로 주의 자녀로 삼아주시니 무엇인가 주님이 너는 나를 위해 이 일을 하라고 말할 때의 그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이런 직분을 감당해도 되는 것인가라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사도가 지금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 할 수 있는 이유는 소명의식입니다 그 소명 의식이 사도의 삶에 있어서의 핵심입니다.
소명 의식이라는 것은 자신을 많은 죄에서 건져서 구원해 주시고 일꾼 삼으신 그리tm도 예수의 부르심에 대해 그 순간에 예수님과 가졌던 강렬한 만남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살아간 삶입니다. 그가 자기의 일을 사랑하였지만 그 일 자체를 사랑해서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한 것이 자기를 불러주신 그리스도 예수께 신의를 지키고 충성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을 얻고 가장 쓸모없는 죄인을 일꾼을 삼았다는 은혜의 감격은 그렇게 은혜로 구원한 그 분이 소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직분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고 있는 이일이 고상해서도 아니고 의미의 엄청난 것때문에도 아니고 자기의 존중심을 높여서도 아니고 그 일로 불러주신 그분이 감당하신 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같은 일이라도 그 일의 중요성은 누구를 위한 일이냐에 의해서 달라집니다. 제가 군인으로 있던 시절 3월초 경이었는데 대통령이 오신다고 하는 태릉로의 아스팔트를 하이타이를 풀어서 닦은 뒤에는 다른 차가 다니지 못하게 줄을 쳐서 다른 차는 다니지 못하게 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검은 아스팔트를 수많은 군인들이 소용도 없이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런 수고를 하는 것은 무었때문입니까? 왜냐하면 그 일은 대통령이 시킨 일이기 때문에 그런 수고도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소명이란 누가 시켰느냐 즉 누구한테 받았느냐로 집약됩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었다라는 이유는 끊임없이 자기를 소명 주신 분, 그리고 자기가 맡고 있는 일이 자기를 은혜로 대해 주신 그리스도께서 시킨 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회고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구역장을 맡겨 주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진노아래 있던 나를 주님의 자녀 삼으신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을 누가 집사로 맡겨 주셨습니까? 진노아래 있어서 소망 없이 살고 있던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런 직분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모든 직분에 대해서 그것을 회고하는 것이 소명의식입니다.
오늘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뒤에는 강한 부정이 나옵니다. 아니라는 말은 그 은혜가 헛되기는커녕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그렇게 수고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기는커녕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라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의 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열심히 주를 섬기면서 살아갔다 라고 할 때 그는 아주 분명하게 나의 나된 것도 사도로 불러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며 살 수 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고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아간 사도의 태도는 주의 일을 자기가 힘써서 행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 혼자서는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태도로 산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직분의 맡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실 것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데 내가 최선을 다해서 주를 위해서 충성 되게 살아야만 그 분이 충분히 자기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이 정상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도의 고난에 넘치는 삶을 회고합니다. 그의 고난에 대한 자전적인 고백은 깊은 감동으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자기의 삶을 게으르게 살았던 삶이 없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 모든 일을 하였다 라는 이면에는 이런 철저한 자기 분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반쯤 충성해도 주님이 여기에 은혜를 보태서 이룰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인생 말년에 순교의 때에 했던 고백이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의 싸움을 다 싸웠느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가 의의 면류관을 받기에 합당하다든지 경주의 삶에 1등으로 산 사람에게 상을 받기가 합당하다는 사상을 전파하 것이 아닙니다. 죄인중의 괴수인 자기를 써 주신 것도 감사한데 마지막에 그런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은 그의 사상에 비추어 보면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백을 믿음의 길을 다 달려가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운 뒤에 그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자기의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도 은혜로 맺혀지는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회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회고는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 뒤에 하는 것입니다. 1년 동인 혹은 일생동안 자기가 양육해야 할 영혼을 맡아서 애써서 수고하고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때 생각하길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여도 하나님이 이런 많은 은혜를 주셨으니 그러면 내가 이전보다 더 많이 헌신하고 더 최선을 다 하였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큰 은혜를 주셨을까 이런 반성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드리는 삶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도보다 만삭되지 못해 난 자와 같아서 그들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전에 교회에 아픔을 준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는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더 많이 충성해야 한다고 채찍질하였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어린 시절에 주님을 알아서 젊은 시절을 방종과 타락 대신 경건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그 어린 시절에 주님을 알았던 것에 대해 주님께 부채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의 나이에 인생에서 방황하고 주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들을 어린 시절에 불러서 단정하게 신앙 속에서 살게 하였으니 여러분들은 더 많이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아닙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노년에 주님을 믿어서 남은 날이 얼마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과거를 돌아보고 주님을 믿을 기회가 수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주님을 거절하고 살았던 수많은 날들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범죄였습니다. 그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제는 사도 바울의 심정이 되어서 너무나 긴 세월동안 주님을 대항하고 산 반역의 삶이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날을 주님을 위해서 살수밖에 없다라는 고백이 따라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든지 저렇게 보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쳤으니 우리는 그 은혜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사슬이 되어서 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에 이 구절을 보면서 자기가 어떻게 다른 사보도 보다 더 많이 수도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싫어하고 불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깨달은 것은 이 구절은 12사도가 더 게으르고 자기가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산 삶의 자유한 고백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 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나 많은 사람 앞에서나 항상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는 없어도 주님이 너가 어떻게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하였느냐고 물을 때 그것을 깊은 감격 속에서 받아들이고 주님의 은혜에 비하면 주님을 위해 산 나의 삶이 최선을 다해 산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라는 자기 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바로 사도의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사역 기간 동안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일을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현재적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삶에 있어서는 그 은혜에 의해서 자신의 헌신을 대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크기 때문에 내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서 다른 사람이 최선을 다해도 하기 어려운 일을 나는 반만 노력하여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성과만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성취를 위해 어떻게 분투하며 사는지 그 과정을 보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남다른 달란트를 주셨고 남들에게는 없는 귀한 재능을 갖게 하였으나 그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것을 드리고 살아야 할 충성의 의무를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해한 역사는 언제나 위대한 사람들이 일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찮은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소중한지 알고 적은 것이지만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재능과 반짝이는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는 일인지 배우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크고 놀라워서 아름답기 때문에 그 은혜 때문에 그것에 매여서 다른 사람처럼 편안하게 살 수 없고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려서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때에 은혜가 은혜 되게 합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사도가 자신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다시 은혜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난 후에도 찬송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빚진 자의 삶입니다. 자기를 성도로 삼고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무엇인가를 섬길 일을 주신 것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은혜 때문에 태만하게 살지 않고 그 은혜에 빚졌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사는 삶,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더 많은 은혜의 빚을 졌기 때문에 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모든 살과 피 한 방울까지 다 짜서 산 후에는 마지막에는 그렇게 헌신적으로 살았던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은혜 주셔서 살게 하신 주님의 큰 사랑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삶이 진정으로 충성된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충성하며 살아온 삶은 그 심령이 결코 건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곤고하고 힘들 때에는 내가 만약에 주님의 그 은혜로 구원받지 않았다면 내가 만약에 주님께 특별한 부름 받아서 이 일을 위해 헌신하며 살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붙들고 살 사람이라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항상 마음 속에서는 주님의 거룩한 인격, 좋으신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헌신의 감격이 넘칩니다. 그래서 은혜의 감격과 충성스러운 삶이 항상 함께 역사하고 넘치도록 수고 할 수 있도록 하여줍니다. 사도 바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것은 내 안에서 역사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력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는 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짜서 바치면서도 고갈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의 인격과 만나는 감격을 누리고 자기가 용서받은 죄인이지만 자기를 일꾼으로 택하셔서 세우셨다는 감격이 주를 위해 살아가는 헌신이 계속해서 역사 하는 사람의 삶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름지고 더 넘칩니다. 에전에 주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고 예배 시간에는 마음이 풍요로웠는데 지금은 건조한 사람들, 예전에는 기도제목이 너무나 많아서 기도할 적이면 늘 감격이 쓰고 눈물이 있었고 기도 후에는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은 기도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지금은 메마름 속에서 허덕이는 지체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말이 이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삶을 살지 마십시오. 주님은 주시지 않는 은혜를 따라서 일하게 하신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있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통해서 세우고 싶은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만 할 뿐 헌신적인 삶에 실천적인 영역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은혜는 6개월도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기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주시며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눈뜨고 자신의 삶의 현장을 보게 하였는데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교회나 나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자리로 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라도 주님을 위해 해야 합니다. 주를 열심히 추구하고 섬기며 살면 저 일은 내가 해야 하는데 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외면해서 문제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성도는 은혜 받기 전에는 몰랐는데 은혜 받은 후에는 화장실이 너무나 지저분하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매일 교회 와서 지저분하던 화장실을 치우는 것이 그 사람의 일의 되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저 일은 나에게 시키시는구나 라고 생각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외면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은혜 되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긴장을 사도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큰 은혜, 죄인 중에 괴수 같은 나를 불러서 사도로 삼아주셨는데 이 은혜가 헛되면 어떻하나라는 그 긴장이 소명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주를 위해 섬기면서 도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그렇게 자기의 최선을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최선을 다한 다음에 애쓰고 수고한 자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넘치도록 열매를 주신 주님이 눈에 가득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세 무궁토록 그분만이 영광을 받을지어다라는 고백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 나 신앙의 원리는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애쓰고 수고한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즐기는 것이 아니라 왜 자기처럼 쓸모 없는 인간에게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셨을까를 생각하고 은혜의 계획 속에 있는 사명을 생각한 사람,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삶이고 소중한 사람의 삶입니다. 그 일이 세상을 움직이고 교회를 들었다 놓는 일이 아니라도 주님이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한번 깊이 생각하길 바랍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 이 시점에서 지난해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주셨고 깨닫게 하시고 삶 속에서 어떻게 당신이 살아 계시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것을 입증하였는지 회고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디다가 세우고 싶어하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깊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수많은 순간동안 주님이 여러분들을 섬김의 자리로 세우시길 바라는 마음을 외면하였던 것이 보일 것입니다. 혹은 외면하지 않았더라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 않는 여러분의 모습을 인정하고 깨닫게 하실 때 인정하지 않으려던 여러분의 모습도 떠오를 것입니다. 깊이 뉘우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부르신 일에 응답하지 않은 것과 이미 맡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형식적으로 단지 부담감을 가지고 인색함으로 하려던 섬김의 태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회생이라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런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남지 않는 시간이지만 주님이 은혜를 주시고 세우려던 자리, 세우고 싶은 자리에서 받고 싶었던 헌신을 드렸는지 깊이 돌아보고 여러분 자신의 생애의 가장 큰 보람을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다가 그 승리 또한 주님의 은혜라고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여러분들의 가장 큰 꿈이고 보람이 되길 바랍니다.
13. 의무를 능가하는 헌신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 4:2上)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로마의 조직적인 박해가 임박할 때에 비장한 각오로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특별히 장로들에게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장로라고 하면 우리들이 요즘의 장로들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장로는 그 당시에는 장로라고도 불리우고 감독이라고도 불리우고 목사라고도 불리우고 했는데 이 장로는 감독이나 장로나 마찬가지로 어느 측면에서 그 사람을 봤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조직적인 교회를 두루 보살피는 입장에서 보면 감독이고 교회를 다스리고 질서를 바로잡고 교인들을 훈련시키고 하는 면에서 보면 장로입니다. 그 장로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가르치면서 다스리는 장로가 있었고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가 있었어요. 가르치면서 다스리던 장로는 오늘날 목사와 같은 사람이었고 다스리기만 하던 사람은 오늘날의 장로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로교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했더니 장로에게 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앞에 대한 예수고 장로회라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근데 그 장로회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와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가 모두 모인 모임이 말하자면 장로회에요. 그래서 그 회에 교인들은 권한을 위임하여 교회를 다스려나가는 체제다 그런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 들을 기회가 쉽지 않기 때문에 오늘 설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장로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말이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라 이 이야기입니다. 오늘 충성과 관련시켜서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다 하는 것은 의무를 감당하여 나가는 그 이상 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아주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의 목자가 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뒤에 나오는 내용 중에 고쳤으면 하는 내용은 뭐냐 하면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뭐 거의 비슷한데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희랍어 본문에 안나오고 하나님을 따라서 혹은 하나님께 맞추어서 이렇게 나옵니다. 그다음에 부득이한 마음으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고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하냐면 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 말고 원하기 때문에 하라 이렇게. 좀더 실감나게 번역하면 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 말고 기꺼이 하고 싶기 때문에 하라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저급한 단계는 의무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저급한 단계의 신앙생활이에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무에 대해서 깊이 가슴에 세길 필요가 있어요.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자기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거룩한 의무를 지고 있는지 그것을 늘 생각하면서 사는 정신자세가 꼭 필요하다 이거에요.
청교도들이 늘 잘 쓰던 단어가 운데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의무라는 거예요. 그리고 또 잘 쓰던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순종 혹은 복종이라는 단어였어요. 의무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사용했어요. 그들은 그 인간을 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자체가 하나의 언약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언약 따라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거저 주어진 구원이지만 그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받은 즉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삶의 표준을 갖지 않으면 사실상 무신론자의 삶이 된다는 것이 청교도인 들의 생각이었어요. 그거 사실이에요.
그것은 십계명이 있자나요 마틴 루터와 칼빈이 그것을 각각 다르게 사용했어요. 마틴 루터는 처음 온 사람은 십계명부터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뭘 깨닫게 만드느냐 하면 도저히 지킬 수 없다. 그걸 깨닫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가르침으로서 거기서 정죄를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데 칼빈의 경우는 조금 달랐어요. 칼빈의 경우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물론 그 계명을 율법을 아까 말씀드린 용도로 사용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는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도덕적인 표준으로서 십계명을 1년씩 가르쳤어요.
그 십계명을 가르치는데 칼빈의 생각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도 그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무엇이냐면 구원받은 자로서 거저 구원을 얻었지만 거저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이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어떤 표준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이냐 할 때에 그것이 무엇이냐면 다름이 아닌 율법이었다 이거죠. 그게 십계명이었다 이거죠.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을 받았는데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삶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아무리 감격하고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시다니 하며 펑펑 운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그가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의무가 무엇인지 그에게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면 실제로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칼빈이 200회 이상이나 걸쳐서 자기 설교사역의 굉장히 많은 부분을 신명기를 설교하는데 바쳤던 거예요. 사실 여러분 생각에 잘 안 어울리잖아요.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계획을 일으킨 칼빈 같았으려면 당연히 로마서를 붙들고 수십 년을 설교했어야 맞잖아요. 근데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데 특별히 신명기를 설교하는데 공을 들였어요. 그게 무엇이냐면 거기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화)하나 더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들이 아하~ 하실 거예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제는 전쟁 위협이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자다가 대표소리만 들 어도 놀란때가 있었어요. 고등때 전쟁 생각만 나도 너무 무서운거에요. 고2때쯤 인가 딱 생각 정리했어요. 전쟁나면 누가 말려도 입대하리! 군인으로서 참전하고 살면 살고 살면 좋고 죽어도 할 수 없다. 치사하게 무서워 도망다니다 잡혀 죽지 않겠다. 전쟁나면 나는 입대한다. 지금도 그럴 각오를 갖고 있어요. 안받아줘서 그렇지. 진주만에 일본군대가 와서 치사하게 야비하게 폭격 다해놓고 돌아가면서 선전포고 하자나요. 그러구 나서 우행했던 구호가 진주만을 상기하자. 20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어요. 수많은 젊은이들이 습격받은 소식을 듣고 군대에 입대하겠다. 마음속에 불붙는 애국심 적을 향한 적개심이 타오르잖아요. 폭탄을 들고 적의 탱크속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기꺼이 그럴 각오가 되어있어요. 그 사람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내 조국위해 이 생애 바치겠습니다! 그럴 때 폭탄하나 내주고 보내도 쓸모 있겠느냐고요. 아무 쓸모없어요. 그리고 펄펄 끓는 마음이 계속해서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누가 그러드라구요. 우리 아버님이 그러셨나? 전쟁하면은 총알 비 오듯이 쏟아져서 전우가 총을 맞아 죽는 것을 보면 사람이 돌아버린다구. 그러면 총을 들고 막 서서~진짜 그 영화에서 보는것처럼 돌격을 한단말이에요. 이렇게 피를 흘린 전우들이 되었잖아요. 그런데 평화가 찾아오면 건빵은 안 나눠 먹는다고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런거에요. 마음속에 나라를 위해 바치겠다는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얼마나 지속되는가가 문제고, 마음이 얼마나 지속되는지가 문제고 그런 마음가지고 있다 해도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의무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 애국심 쓸데없는 애국심이에요. (예화 끝)
그래서 중국선교의 아버지인 허드슨 테일러라는 사람은 훈련되지 않은 헌신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라고 했어요. 가슴에 새겨들어야 해요. 우리 흔히 펄펄 넘쳐나는 열정 그리고 펑펑 쏟는 눈물 이것만 있으면 다른 것은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에요. 허드슨 테일러의 이야기가 진실이에요. 훈련되지 않은 헌신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오랜 선교사역속에서 깨달은 예지 압니다. 그러니까 감격은 감격이고 그것은 있을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고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날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구원받고 자기 같은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은혜로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나의 의무인가 그것을 배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거에요.
오늘날에는 의무가 없는 복음이 유행하는 것이 문제에요. 여기서 의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함으로서 내가 구원을 얻는다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향하신 은총을 대치한다는 뜻에서의 의무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구원해주신 놀라운 사람은 가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거저주신 하나님의 놀랍고 강력한 은혜인데 그 은혜라는 것은 틀림없이 사랑의 표현이죠. 그 뜨거운 사랑을 받은 내가 더 이상 그분이 행하신 일에 보탤 것은 없지만 그 사랑을 받고 어떻게 그냥 있느냐 이거죠.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겠습니까? 내가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고 백성이 된 나 같은 사람에게 우리 하나님이 거시는 기대와 계획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깨달고 나면 거기에 우리들이 어떻게 살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기준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무감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는 거죠. 근데 저급한 신앙생활은 이 의무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살아가는 거죠. 스스로는 형식에 메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막가는 인생이에요.
(예화)제가 전도사로 있던 때인데 말이죠. 자매인데 선교단체도 나가고 뭐.. 거의 직업이 예수 믿는거예요. 월요일은 어느단체에서 제자 훈련, 수요일은 무슨 훈련, 목요일은 찬양집회, 금요일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약자로 된 그런 훈련... 일주일 내내 직장도 안다니고. 근데 예배드리면 설교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아요. 앞자리에 앉아가지고 펑펑울구. 근데 주일날 잘 안나와. 그래서 하루는 왜 주일날 교회 안나오냐니까 이상하게 나와야겠다는 사명감이 안 생겨서 자고 점심 먹고 기도원에 갔데. 근데 그런 행동을 계속 해요. 자신은 어떤 착각에 빠져 있느냐면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하다는 거예요. 교회를 나가고 안나가고에 대해 인생을 어차피 하나님께 드렸는데 주일날 나가고 안나가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라는 거에요. 그것은 율법주의가 아니고 마음 내키는 대로 교회 나가고 안나가는게 막가파 아니냐. 그건 막가파 신앙이에요. 자기가 지존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아래. 내가 섬길 마음이 있을 때 섬길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라. 그래서 그 자매에를 불러놓고 말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긴 자녀지만 후레자식이고 하나님을 네가 생각하기는 하지만 막보고 있다. 동원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를 동원해서 ***할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매 왈 그래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 다시 목사님왈 하나님이 널 사랑 안한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랬더니 그러면 그렇게 의무적으로 교회나오는게 복음적이라고 말할 수 있냐 그거에요. 내 동생만 같았으면..^^
복음적이죠. 그렇게 억지로 교회 나아오는 것으로서 자기가 뭔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건 복음적이 아니지만 복음이라는 게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게 복음인가? 그러면 세상 사람들 자기가 믿는 데로 육체가 원하는 데로 사는 사람이 가장 복음적이란 말인가? 그럼 여러분 오늘 직장 나오면서 피곤한데 집에 가서 일찍 씻고 텔레비전하고 친구하면서 잘까 혹은 수요예배 갈까. 이렇게 생각하고 온 사람 한둘은 있을 꺼예요. 그 사람들의 생각이, 비 복음적이에요? 육체가 원하는 데로 계속해서 살면 마지막에 영적인 죽음밖에 없다. (아까 예를 든 자매 같은 사람은) 생각이 뭐가 정리된 것이 아니라 짙은 안개 속에 쓰레기 같은 사상들이 가득 차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는 높은 신앙 수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그런 사람들이 가장 바닥을 헤매는 저급한 그리스도인이에요.
의무감으로조차도 자유로운 사람들 이런 사람이 가장 저급한 그리스도인. 그런 사람공통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갖고 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님께서 깨달게 하시지 않기 때문이에요. 막가파는 자기 자신을 지존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무상하다고 하는 지존무상을 깨달을 때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눈이 열리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 말씀을 열어서 보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진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요. 우리의 지적인 능력 하나만을 가지고 성경을 헤쳐서 깊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성경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지적으로 뛰어나도 죄악과 편견이 그의 마음을 가리고 있으면 성경이 문을 닫아요. 이게 바로 개혁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조명의 교리에요.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마음에 오셔서 환한 빛을 비춰주실 때 성령이 원래 기록하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이것이 신비라구요. 그리고 그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역사를 베푸느냐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쁜 사람이에요. 주님의 종처럼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서 일방적으로 깨달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면서 살고 그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분투하는 사람은 점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의 폭이 넓어져서 진리를 아는 지식이 자신의 전 사람 속에 체험적으로 쌓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없어요.
(예화)그리고 그 자매가 말이에요 그 자매가 울기 시작하면 설교가 안 돼. 기분이 나빠서. 무얼 깨달아서 우는 게 아니라 분위기에 심취하는 거예요. 훌쩍거리고 두주 울면 세주 자. 이것은 정상적인 말씀의 은혜의 체험이 아니다. 오늘은 그렇게 역사하는 그게 어떻게 그 다음주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그 다음날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그런 거 소용 없어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한번 그랬다는데 어떤 형제가 목사님 면담을 하고 싶습니다. 제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이 무엇인지 검증을 받고 싶습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냥 가라고 했더니 내일이 되면 이게 사라져서 말씀을 못 드릴 것 같다고 했더니 목사님이 아주 간단하게 말했데요. 내일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냥 집에 가라고 했다죠.
그 자매가 울면 기분 나빠요. 저 자매가 왜 우는지 알기 때문에.
그런 식의 의무감이 전혀 없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 자매는 교회와 신앙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으로 안가는 거예요. 그 자매는 의무감이라고 하는 것들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와 종교적인 분위기가 자신의 삶의 그라운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종교적인 영향권 안에서 노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의무감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노는 거예요. 극악한 죄악에 빠져서 타락한 사람보다는 훨씬 낮지만 극악한 죄악에 빠져서 타락한 사람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짓이고 그 사람도 월요일이면 어디 화요일이면 어디 이렇게 다니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장엄한 의무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좋아서 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요한복음 15장에 빛 아래서 보면 결코 예수님의 친구가 된 삶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가장 저급한 삶이에요. 그래도 그 자매는 비교적 양질에 속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보다 훨씬 질이 나쁜 사람이 있어.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말고, 구역장이나 교회 직분 밭더니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집어 던지는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예요 전혀 의무감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 이예요. 이런 사람들은 아주 저급한 그리스도인 이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정말 회심의 표증이 있는지 물어봐야 해요. 그런 사람들이 성화를 위해서 애쓸 리가 없어요. 주님이 진실 되게 사랑하는 사람일 수 없다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좌절하고 가끔씩 쓰러지는 사람이 아니에요. 경향성 자체가 자기 좋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아버리는 거예요. 아주 가장 저급한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다음에 그래도 나은 그리스도인이 뭐냐면 의무감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에요. 이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좀 배워야 된다 이거죠. 의무감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물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피로 구속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나라와 특별 권력관계를 맺으면서 군인의 신분이 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게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상당히 유기관계가 있죠. 성경도 그리스도인을 묘사라고 하니까. 군인이 애국심이 충만할 때만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탈영하고 싶을 때에도 보초서로 나가야 되요.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을 때에라도 제 자리에 서서 복무기간을 마쳐야 된다구요. 그게 군인이라 이거에요.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에요. 항상 가슴에 새겨야 되는 단어가 의무에요. 여러분들이 의무 있느냐 이거에요. 가정에 있어서 그리고 크리스천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교회의 회원으로서 지체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목양하는 일꾼으로서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눈떠야 되요.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일 먼저 이 의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암시를 우리에게 계속 주는 거예요. 사단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 아세요? 근데 그 가르치는 방법 자체가 뭐냐하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의무을 짓밟으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거예요. 속삭이는 거예요. 네가 그런 의무쯤 짓밟으며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널 버리시겠느냐? 이렇게 속삭이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 의무감을 해체 시키는 거예요. 의무감을 해체되고 나면 그 자리에 서있는 그 사람이 그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예요.
(예화) 70년댄가 간첩들이 한참 넘어와서 예비군들이 동원되었거든요. 예비군을 쫘악 동원해서 사람이 많으니까 물샐 틈 없이 찾는데 40m인가 50m 앞에 한 사람씩 세워놔요. 근데 다 도망가. 50m씩 딱딱 서있었으면 도망 갈 수가 없지. 야 너 담배 있어? 이렇게 부르는 거죠. 그렇게 두 사람이 모이면 100m가 뚫리잖아요. 벌써 5명만 모여서 담배 피우면은 250m-300m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 도망가요. 이것은 의무감이 없는거죠.
의무감이 해체되고 나면 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는 거의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교회에서 훈련시켜야 되고 교회에서만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처음 주님을 믿을 때부터 이 의무라는 단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돼요. 구원받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거저 주신 것 이지만 그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무는 무엇일까. 주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사는 것을 원하실까. 의무에 대해서 눈뜨는 사람들이 돼야 해요.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야 돼요. 사느냐 못사느냐는 나중 문제고 가르쳐야 된다는 거예요. 어느 애비가 자기 자식을 보고 이놈은 싹수가 노라니까 어떻게 돼야지만 옳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 사람이 있겠느냐고요.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애비 될 자격도 없는 사람이죠. 만약 자기가 도둑질을 하고 뇌물을 받아다가 아이들을 먹여 살려도 자식들에게 그 짓 못하게 하는 거 아니에요.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라고 가르치는 것이 부모 아니냐구요. 아이들에게 의무를 가르쳐야 된다구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가 의무를 가르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누리면서 살고 방종하게 살줄만 알지 의무를 몰라. 그리고 의무를 알되 그 의무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이행하고 나면 반드시 보람과 기쁨이 있고 네가 그 의무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되요. 그렇지 않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화) 토요일 날 우리 남전도회 집사님들이 직장이 얼마나 바빠요? 토요일 날 그래도 일찍 끝나서 집에 일찍 들어가는데 말이죠, 교회로 온다구요, 사회적으로 지휘도 있고 그런데 변기도 북북 닦고 지하실에 내려가서 청소하고 다 해요. 근데 그거 나온 사람만 나오더라고요. 사람이 별로 바뀌지는 않는 거 같애. 어찌하였든지 간에 그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토요일 날 성실하게 청소를 하고 나니까 주일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이름과 얼굴은 기억을 못해도 행복한거에요. 그리고 편안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살아가는 안락한 삶도 수많은 사람들의 의무를 이행하는 유 무명의 수많은 사람들의 연결이 맺어지면서 이런 삶의 여건들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리니까 이 의무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중대한 직무 유기예요. 철저하게 가르쳐야 된다 이거예요. 그리고 항상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철저한 사랑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의무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기준에 자신의 삶을 맞추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하나님 없이 방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되는 이유에요. 그러니까 신명기에서 모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분부하신 말씀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이렇게 애굽에서 거저 구속함을 얻고 아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을 백성들의 의무라는 것을 강조한 거예요. 그리고 그 의무를 그 땅에 들어가서 형통한 때가 되어서도 잊지 말라는 것이죠.
이것도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의 그림 같은 하나의 모**이 되는 거예요. 애굽은 결국은 죄악 된 세상에서 노예 되어서 살아가는 구원받기 이전의 신자의 모습의 모형인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건져 주시잖아요. 광야에서 생활하는 것은 신자의 여정이나 인생 여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죠. 이것을 마텐스 같은 신학자는 가나안땅에 들어간다는 것, 그 땅 안에서 표현을 쓰는데 이것이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죠. 근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그렇게 간절히 유언적인 설교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상태는 굉장히 좋은 상태였어요. 그것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지도권을 넘겨주기 직전에 설교를 한 것이거든요.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격을 앞두고 광야의 생활 가운데 그래도 몇 번 안 되는 신앙적으로 상당히 고양되어있는 상태였다고요. 그런데 모세가 철저하게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어떤 형벌을 내리실 것과 순종하는 자에게 어떤 축복을 주실 것을 아주 간곡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야한다는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삶의 문제를 광야에 논 것이 아니라 대부분 가나안땅에 놓고 설교를 한거에요. 너희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번성하고 부유 할 텐데, 그때 하나님을 잊어버릴 텐데, 그러다가 곤고해져서 다시 하나님을 찾을 텐데 이런 식으로 계속 추론해 나가면서 하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이나 이끌어온 모세는 그 사람들의 속을 너무 잘 알았어요. 그러니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 하나님께 대해 배우는 기간이었다면 이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보낸 40년은 목회자로서 인간에 대해 많이 배운 기간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패역한 인간인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은 이렇게 고양되어 있어서 충만한 상태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고난이 사라지면 어떻게 타락할 것인지 미리 알았다고요. 그 사람이 그것을 미리 바라보고 이야기 한거에요. 그런데 만약 마텐스라고 하는 신학자의 말대로 가나안땅 안에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될 성도의 안식에 대한 모형이었다고 한다면 거기에까지 율법을 가지고 들어간 것은 의미심장하도 이거죠.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 가시죠?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이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무 율법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의무도 뭐도 필요 없고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삶의 표준, 기준 자체가 이제는 필요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성령님께서 나에게 오셨기 때문에 그분이 직접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준다는 거죠. 그런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이냐면 자기 안에 성령이 있다는 생각만 하지 부패한 본성이 있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성령이 있다는 것만 생각을 하지 죄의 부패한 성품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삶에 기준이 필요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그 자매 같은 경우 만약에 상담을 하자면 결론이 뭐냐면 교회 나오기 싫어도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나와서 조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여기 나와서 졸 바에야 안 나오는 게 낮다고 말하는 것은 안 된다는 거예요. 졸고 예배시간에 자는 것은 잘못된 거지만 교회에 안 나와 버리는 것은 더 잘못된 거예요. 나와서 조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 보려는 것이지만 안나와 버리는 것은 막가는 거라는 거죠.
(예화)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아버지가 애야 그만 놀고 공부해라 그러니까 아빠는 맨날 공부하래 그러면서 만화책 감춰놓고 몰래 보다가 끄떡 끄떡 조는 것이 교회 나와서 조는 것 이라고 한다면 애야 들어와라. 그만 공부해야지하는 말에 싫어요 아빠 니가 뭔데. 학비 좀 준다고 나를 구속할 권리가 있어? 그리고 아버지 보는 앞에서 보따리 싸고 내일은 내가 알아서해 그러고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가정이 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이거 막가는 거예요. 후레자식이지. 사실상으로는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거지. 그 차이라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의무라는 것은 아주 고상한 거예요. 신앙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이 의무를 느낄 수가 없다 이거에요. 신앙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이 의무감에 의해서 자극을 받을 수가 없다 이 이야기에요. 거듭나지 않고 변화 받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압니까, 사명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거기에 세운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 뜻은 당신에게 무슨 의미를 부과하였습니까, 이렇게 물어도 그 사람들은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아요. 의무를 말할 때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을 만나게 될 사람들이에요. 의무를 말할 때 그 의무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사실상 자기는 하나님을 버렸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전에 하나님 만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 이거에요.
하나님 앞에 아주 충성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에요?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에 개인적인 성화를 통해서 주님을 섬기든지 사명을 맡아서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든지 어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아간다고 할 때에 그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고 싶을 때가 있는가하면 낙담에서 할 수 없을 때도 있고 때로는 하기 싫을 때도 있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제 솔직한 고백이에요. 교사생활 할 때 어떤 주일은 1월 첫 주에 내가 왜 임명장 받았나, 6월에 왜 용감하게 사퇴를 내지 않았을까. 가르치기는커녕 나 자신을 추스르기도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내가 안가면 일곱 여덟 명이 눈을 멀뚱멀뚱 튼 채 이 방 저 방 기웃거릴 생각을 하니까 할 수 없이 공과 공부도 안한 채 간다 이이야기죠. 그럴 때도 있었어요. 내가 만약에 하나님을 못 만났다면 그런 의무감을 느낄 수 있어요. 지들이 눈을 멀뚱멀뚱 뜨던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겠어요? 나 싫으면 그만이지. 뭔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주님의 일을 못해서 안달이 나는 사람 자신의 죄 된 욕심을 난도질을 하지 못해서 안달인 상태에서만 일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오라고 해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한사람이 충성스럽다 그럴 때에는 먼저 자기 자신과 철저히 싸워서 자기 자신을 이기는데 헌신된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의무감으로 버티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하기 싫으면 그만이지 하고 가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여기 보내셨는데. 지금은 비록 내가 주님이 안 느껴지지만 그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는데, 아직 하나님이 가라고 안 그러셨는데. 그것이 의무감이지만 동시에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강력한 의무감을 느끼는 것. 그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충성된다고 할 때에는 그런 과정, 넘쳐 오르는 감격에서 자기를 바치지 못해서 어쩔 줄 모르는 끓어오르는 헌신, 그것이 식고 침체에 빠질 때면 주님이 자기를 불러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여기를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이 자리에 내가 비록 훌륭하게 섬기지는 못하지만 이것을 벗어 버릴 수 없다, 이런 의무감으로 버티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보면 넘치게 흘러내리는 헌신의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나서 그런 모든 것들을 거치면서도 외관적으로 볼 때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달려갈 때도 있고 기어갈 때도 있고 잠시 주저앉을 때도 있고 펑펑 울 때도 있지만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그냥 꾸준히 모진 비바람을 맞으면서 걸어가는 그 삶의 모습을 보며 충성스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무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고 그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상기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의무감은 말하자면 하나님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면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두 번째 단계의 삶입니다.
그렇게 의무감을 이따금씩 느끼면서라도 그것으로 버티면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 있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반적으로 충성된 삶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의무감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하여야 하기 때문에 하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하고 싶기 때문에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이 높은 담을 넘어 가려고 할 때 제일먼저 찾는 것은 어디를 잡을까 어디를 밟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밟을 데가 있고 붙잡을 데가 있으면 자기 키 보다 높은 담도 넘어 갑니다. 손으로 잡아당기고 발로 밀면 상체를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의무감을 느끼는 것은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손잡이와 발판이 됩니다.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앞에 어떤 의무감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기분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다 집어 치우고 자기 갈 길로 가서 하나님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가다가 그렇게 살아보니까 그렇게 재미있지 않고 행복하지도 않아서 다시 주의 일을 해 볼까 하고 자신의 사명의 자리를 기웃거립니다. 이것은 충성이 아니라 변덕의 일종입니다. 그 감정을 신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무감을 못 느끼는 사람의 신앙 형태는 그것에 대해서 강한 욕구를 가질 때 그것이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기초로 해서 솟아나는 욕구가 아닌 불쑥불쑥 솟아나는 욕구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충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어느 날 하나님의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충동입니다. 들어서 기분 나쁜 충동은 아니지만 무게 있게 생각할만한 것이 아닐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까처럼 의무감을 못 느끼고 막가파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울컥하고 느껴지는 감정은 충동일 경우가 대부분이지 그것을 가리켜 충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충성은 일시적으로 솟아오르는 충동이 아닙니다. 충성은 자기를 특정한 의무에로 부르신,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인격을 깊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동반된 헌신에서 출발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맡은 종이 그 한 달란트를 묻어버린 후 주인이 와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렇게 책망을 받았는데 네가 왜 이렇게 했느냐고 했더니 그 종이 당신이 굳은 사람이라 이렇게 감춰두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인의 성품을 올바로 반영한 고백이었냐 하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충성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대한 참된 이해 없이는 그는 결코 주님의(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 충성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충성된 사람이라고 할 때 의무감에만 계속 매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충성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한발 딛고 뛰어 넘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맡겨진 사명을 따라서 사는 것이 기쁨인 사람! 이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전파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그 고백 가운데 괄목할만한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지로다 내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의 빛 진자가 되었다는 고백 있지 않습니까? 누가 빛을 졌나요? 이방인이 그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주었나요? 유대인이 그에게 복음을 전해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빛 진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지로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바울의 구원이 취소가 될까요? 누구도 그에게 그렇게 사생결단을 요구하는 공포를 동반한 의무를 심어준 사람은 없습니다. 아주 신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에게 의무감을 심어주신 방식이 무엇이었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삶의 비참함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알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크게 차이가 나는지를 자신이 직접 경험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다 알아도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눈먼 상태로 살아가는 그 삶이 얼마나 형벌 받을 삶인가, 거기에 얼마나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참 구원하시는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그분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저주받은 삶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거기서 의무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무감이 단순히 이렇게 안 살면 내가 형벌 받을 것 이라고 귀결되는 의무감이 아니라 그 의무감을 따라서 살아야지만 자신도 행복한 의무감으로 바뀐 겁니다. 그것을 가르쳐 사도 바울의 소명의 핵심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신적인 강제력인 것입니다. 그것이 그런 삶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던 빛 졌다고 하는 것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 모두가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의미로 표현했잖아요. 소극적인 의미로 표현했지만 이것이 사도바울의 간절한 소원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면서 내가 이것을 알았고 내가 전하면 저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원 받을 수 있다라는 것 자체를 부채의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가 그렇게 빛 진자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를 행복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 편하게 살라고 하는 것은 고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 불타는데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것은 호강이 아니라 고문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무감을 느끼고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면서 자기를 추스르며 살아가는 것도 훌륭한 신앙이지만 그것밖에 없다면 그 삶은 충성된 삶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막가파 신앙보다 훨씬 낫지만 충성된 삶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충성된 삶은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신앙과 삶의 목표를 자기의 것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과 자신에게 맡겨준 의무를 감당하면서 살 때에 하나님이 기쁨을 받으시는데 그 기쁨이 자기 기쁨이 된 사람.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것이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된 사람. 이런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예화)전도사 생활할 때에 학생들을 심방하고 교사들에게 부탁하면 몇 가지 유형이 나와요. 교환수형 심방을 하는 사람. 심방을 하라고 하면 항상 전화를 해요. 물론 더 밑 단계는 막가파가 있어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듣는 사람이 있어요. 몇 명이 나오든지 안나오든지 안나오면 나 혼자 공과시간에 섬기고 집에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다음단계가 교환수 형이에요. 요새 안나오는 애 심방 좀 해봐라 그러면 전화해요. 요새 그 애가 아주 늦게 들어와요. 그래서 만날 수가 없어요. 난 몇 번 심방을 간줄 알았지. 심방을 했냐니까 했데요.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 하니까 뭐 그런 줄 알았는데 전화를 했데요. 너 아까 심방 했다면서 그랬더니 에이..전도사님~ 전화 심방 말씀하시는 건지알았죠 그것도 심방인가 모르겠어요. 그다음에 우편배달부가 있어요. 꼭 가봐 하면 갔다 왔어요. 가니까 없데요. 간단하게..없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말이죠..
가는 것이 자기의 의무인 것을 받아들였는데 꼭 이 심방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이 심방이 다시 그 영혼을 교회로 이끌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것들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충성스러운 형이 있어요. 목양형이죠. 딩동 딩동 하면 누구세요 하는 소리가 나잖아요. 교회에서 왔는데요 그러면 소리가 안나는거예요. 그러면 담을 넘든지 그 엄마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문 열면 따라 들어가서 붙들고 기도를 해주고 오든지 해요. 그 목표에 대한 의무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심방이 목표가 아니잖아요. 목표는 그 영혼이 유익을 받고 주님을 멀리 떠났던 거기서 돌이켜 오는 것이잖아요. 참 신기한게 말이죠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은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들이 질투 날 정도로 충성스러운 사람들 편에 서서 편들어주세요. 정말루요.
(예화)교사 리바이벌에도 잠깐 썼는데, 전도사땐데 어느 날은 목사님이 오셔서 한달에 한번씩 설교를 하는데 그거 정말 스트레스 받아요. 올라오셔서 제일 먼저 애들 숫자 헤아리시는 거예요. 설교하시기 전에 애들아 니 친구들 다 어디갔니? 나는 뒤에 앉아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한 가지 생각밖에 안나요. 빨리 사표 내야지. 능력도 없는 사람 여기 앉아가지고 애들 다 내보내고 이렇게 사는구나. 74명인가를 받았는데 34명인가까지 떨어졌으니까요. 나도 물려날려고 기도를 많이 했죠.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렇게 응답을 하셨어요. 하도 답답하니까 선생님들 불러놓고 이애는 왜 안나왔냐 그런데 뭔가 잘 안되는 때일수록 이유는 명쾌해요. 40명이 결석을 했는데도 빼도 박을 수 없는 정확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뭐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선생들 야단쳐도 소용없어요.
도저히 막판에 몰리니까 이제는 목사님과 인간적인 관계가 끊어지느냐 계속되느냐, 그 막판까지 간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목사님한테 말씀 드렸어요. 그런 때가 몇 번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심방을 나서요. 저 혼자가기도 하고 선생들 데리고 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이제 주일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지옥이죠. 설교를 하긴 했는데 애들이 은혜를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수요일만 지나고 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나. 그리고 주일밖에 시간이 없어요. 다른 날은 가도 애들 만날 수도 없어요. 모든 교역자들이 집에 갈려고 봇다리 쌀 때 그때 나는 심방 봇다리를 싸며 사역이 시작되는 거예요. 떠나기 전에 교회당에 앉아서 기도를 하면 정말 내가 처량한 거예요. 그때 즐겨 불렀던 찬송이 이거였어요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화장실에 앉으면 피가 한 컵씩 쏟아지고. 그리고 이제 가요. 벌써 심방 가는 길이 눈물로 얼룩진 길이예요. 다른 교수들은 편하게 잘 사는데 나는 주일날 교회 와서 떡이 되는구나. 그 떡 가방을 들고- 성경 들었으니까 떡 가방이죠. 그때 돈은 좀 있었으니까 택시를 타고 때로는 선생님 데리고 때로는 없이, 주소를 보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인간들이 집에 없어. 그렇지 여섯시쯤에 집에 있을 정도면 교회를 나왔지. 그리고 어디를 나갔어도 그 시간에는 안 들어오지. 그러면 우체통 앞에 혹은 공중전화 박스, 공터나 화단에 빨간 벽돌에 앉아서 기다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집에다 물어보면 한결같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데요.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죽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이 하나님 앞에 등 돌리는 영혼들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화단 같은데 쭈그리고 앉아있으면 솔직히 말해서 그 아이가 불쌍해서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쌍해서 눈물이나. 이러면서 내가 살아야 되나. 내가 이렇게 영혼을 향해서 영향력이 없는데 무슨 목사를 기르는 선생이 되겠다고 쭈그리고 앉아서 월급을 받고 앉아 있으니, 하나님 내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눈물이 펑펑 쏟아져요. 죽을 것 같아요. 한참 있으면 어디선가 누구세요하는 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옆에 앉혀놓으면 이제 설교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오늘 왜 안나왔니하면 할말이 없으니까 오늘 뭐 중요한 일 있었나 보지? 속으로는 개 코나 뭐가 중요해, 니가 무슨 중요한 일이 그런데 물어볼 때는 니가 무슨 중요한 일이 있었니? 그러면 이제 대답을 하죠. 그때 이제 설움이 복바쳐서 쏟아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사실은 그 말이 다 나를 위한 말이에요. 너에게 그 은혜를 주셔서 너를 예수님 믿게끔 만드셨는데 네 마음이 어렵다고 그렇게 하나님 떠나면 되겠니. 네가 예배당에 없을 때 하나님이 너 앉았던 자리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아파 하시겠니. 전도사가 한참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가지고 자기한테 이야기 하니까-나는 내 설움에 겨워서 눈물이 나오는 거죠- 이 애가 미안해서라도 울어주는 거예요. 어떤 때는 코를 뚝뚝 흘리면서 울어. 그래, 내가 기도해줄게. 어두움이 내릴 때 붙들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보세요. 거듭난 하나님 자녀의 영혼이라면 다 마찬가지거든요. 하나님 사랑 안에 살면 행복하고 주님 떠나 살면 곤고한 거예요. 자기 딴에는 행복한 일이 있어서 까불고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곤고한 거예요. 붙들고 막 기도하면 그냥 엉엉 울어요. 그러면 그 다음 주일날은 토요일 날 전화 안 해도 꼭 소금에 절인 배추마냥 교회 뒷자리에 와가지고 앉아 있다고요. 예배드리고 그 아이 반에 가서 잘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이아이가 몇 주 동안 못나왔는데 이제 잘 나온다고 했으니까 데리고 있으라고. 그렇게 해가지고 쭉 심방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럴 때에 마음에 우러나오는 생각이 다음주에 교역자 회의 할 때 왜 이렇게 아이들이 조금 나왔냐고 물어보면 내가 그래도 몇 군데는 심방을 했다고 변명을 해야지 그게 아니예요. 그런 것은 소용없어요. 뭐냐하면 이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되는데, 지금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내리는 이 시간에 은혜안에 있는 병아리 같은 지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고 가정으로 돌아가서 그 은혜를 간직하고 일주일 동안 세상을 이겨내며 살 텐데, 영혼을 위해 기도해도 그들을 위해 부르짖어도 그래도 돌아오지 않은 영혼들이 어디에 있을까. 교역자의 의무는 생방을 해야 한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데 하나님이 시켜서 양떼를 돌봐라 그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 이제는 내 기쁨 이예요. 살점을 한점 떼서 한 양이 돌아온다면 열점이라도 떼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거죠. 그 마음이 바로 의무감에 묶인 마음이 아니라 하여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기 때문에 하는, 그게 자원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하자나요? 자원보다 훨씬 강한 뜻이에요. 하여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기쁘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라 이거죠. 그런 시간들을
아까 말씀드린 하나님이 항상 자기의 충성된 자 편에 선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충성된 삶은 신기하게 환경까지도 바꿉니다.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여기를 헤치고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비켜 안 비키면 죽어 그러면서 미친 듯이 뛰면 아무리 밀어도 길을 안 비켜 주는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는 거 상상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충성된 마음으로 그 목표에 불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항상 그런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것도 있지만 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사명에 대해서 불타는 소원을 갖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벽들을 벽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니까 아무도 물을 안 열어 줘서 그냥 돌아 왔어요라고 말하는데 대해서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인간을 만나서 다시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고 기도를 해서 감화시키고 와야겠다는 목적에 불타는 사람은 문이 잠겼기 때문에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11시 아버지 들어올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는 방법도 있고, 담장을 넘는 방법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충성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끝이지만 그것에 대해 불타는 충성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한계가 한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변명이나 구실이 별로 없습니다. 충성되지 않고 상황과 타협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변명에 강하고 구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충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그 사람 속에 있는 사역과 섬김의 대부분의 동기가 의무감일 뿐이지 그것을 뛰어넘는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은 소원 때문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목표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을 갖고 그 목표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깊은 사랑의 헌신을 갖고 있다면 그런 마음과 목표 의식이 없을 때 우리가 거론하는 수많은 한계들이 사실은 한계가 아닙니다.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소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소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테니
풍랑이 일면 무섭고 새벽닭이 울면 괴로웠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서 죽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에 주님이 젊어서는 네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이제는 사람들이 너를 원하지 않은 곳으로 끌고 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순결의 예언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한계가 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그런 삶이 구체적으로 생활 속에 적용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예수님 자신의 피 묻은 분투하는 삶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면 자신은 없어져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그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존재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따로 있고 자신이 삶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집착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예수님의 마음에도 불붙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단순한 의무감의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직분, 사명은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불붙는 소명이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맡겨주신 사명에 대한 불붙는 마음이 하나님 마음속에 불붙고 있는 소원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동일하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면서 모두 자신을 모두 소진 할 수 있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왜 사람들은 부득이함으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해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마지못해서 하느냐, 왜 의무감 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죠. 두 가지 이유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한 가지 일에 자신을 다 불태우면서 헌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잃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잃어버리는 것을 자기가 추구해야할 충성스러운 삶보다 더 가치 있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무엇을 잃어버려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락한 삶을 잃어 버렸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기 위해서 애굽의 왕으로서의 화려함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을 가치 있게 생각했기 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자기에게 좋은 것들은 다 잃어버리고 외톨박이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변절했더라면 다시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충성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아무것도 안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같이 충성스러운 삶에 대해 감히 이야기 할 수 없는 너저분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잃어버린 것이 많이 있는데 진짜 하나님 앞에 주님 사랑 하나에 미쳐서 주님이 맡겨주신 그 사명밖에 없는 줄 알고 주님의 마음을 안고 하나님 한분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이 없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지 못하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럼 말씀이 있습니다. 쟁기를 잡고 어떻게 가야합니다. 똑바로 가야 합니다. 똑바로 가서 한 고랑에 씨를 뿌려야지 비틀게 가면 다음 이랑까지 망가지고 농사까지 망치게 됩니다. 쟁기를 붙잡았으면 길을 따라 똑바로 가서 일직선으로 고랑을 파야지 이곳저것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잃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충성스럽게 살아오시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휴가 한 번 가본 적 없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런 이야기는 하나 마나입니다. 휴가 가서 뭐하겠습니까. 예수 믿고 휴가는 종쳤습니다. 공휴일은 교회의 밥입니다. 맞습니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시기에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들은 그런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가게 됩니다. 부득이함으로, 의무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잃어 버렸던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은 영광스러운 보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후 물질로 교회를 섬기느라고 변변한 옷 한번 못 사 입고 휴가한번 못가고 집안 식구들 모였을 때 팍팍 쓰면서 체면한번 못 살려 봤다고요?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님 섬긴 것을 사람은 잊어버렸어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에서 찌들리 듯이 살다가 쉬는 날 이라고는 주일 아침인데 오히려 주일학교를 맡았기 때문에 직장 갈 때 보다 30분을 먼저 나와야 하는 그런 삶. 그래서 잃어버린 육체의 휴식, 누리지 못했던 것들. 주님은 다 기억하십니다. 신앙을 지키는 삶을 살기 위해 세상에서 그렇게 좋고 사랑스러웠던 친구들도 다 버리고 어느 날 외톨박이가 된 것처럼 느낄 때. 그 주님을 위해 잃어버린 것을 주님은 다 기억하십니다. 잃어버릴 줄 알면서도 그것과 결별하고 주님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아왔던 날들을 주님이 기억하지 않으신다면 공의로우신 그분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 보니까 직장에서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해서 너무 괴로운 적이 있습니다. 승진에 불이익을 받기도 했습니다. 가질 수 있었는데 충성스러운 삶을 살기위해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십니다. 갚아 주십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갚진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들이 집착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려고 할 때에 자신이 많은 고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일을 위해서 애를 쓸 때에 과연 성과가 있을 것 인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 두려움들 때문에 항상 한발은 그 일로부터 도망칠 준비를 해놓은 상태에서 나머지 한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상기해야할 또 하나의 조언이 있습니다. 물론 충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다 소진하고 바치다 보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잃어버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았는데 성과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충성스럽게 했다고 해서 그 일이 꼭 내가 보기에 인간으로 만족할만한 업적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큰 실망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일만 생각했지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면 하나님의 사명을 대하는 태도가 충성스럽고, 그래서 그 일을 맡겨주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인격적인 태도가 착하고 진실 되면 비록 일에 실패한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아주 친밀하게 보여주십니다.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돌아다녀서 많아야 하루에 세 명 심방하고 마치고 나면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찾아가면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셨고 엽서를 보내고 전화를 해도 안나오던 아이가 펑펑 울면서 나오니 감사한거죠. 그날은 설교도 죽을 쓰고 애들도 많이 안나오고 목사님이 니 친구들 어디 갔니하며 제가 완전히 떡이 되었는데도 저녁때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감사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아직 안 버리셨구나. 내 사역에는 아직까지 희망이 있다. 여건을 보면서 충분히 절망할 수 있는데 그 속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져주시는 하나님 자신이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신비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선지자들이 강한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영적침체를 모아서 조사를 해보면 재미있는 설교가 될 것입니다. 엘리야도 에레미야도 에스겔, 다니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침체하고 좌절하는 장면들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비교적 꿋꿋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눈에 보이는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에레미야가 무슨 업적을 보았습니까. 그가 본 업적이라고는 망할 것이다 하니까 진짜 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하니까 진짜 포로로 끌려간 것 밖에 없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 수많은 사람이 펑펑 울며 민족적인 회개와 각성이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무 성과가 없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꿋꿋하게 사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시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충성스럽게 사는 사자를 위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도 그렇게 어두운 포로 시절에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어느 날 에스겔 전체를 찾아보며 세보니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라는 구절이 50번이 넘게 나옵니다. 아무 성과가 없는 것처럼 사역하던 포로 된 시대의 선지자가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고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찬란한 왕국을 예언할 수 있는 놀라운 비결은 하나님의 개인적인 터치입니다. 성과는 없는 것 같지만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을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한번 어루만지신 것, 이것은 보통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번 업적을 이루고 나서 야, 오늘 사람들 많이 모이고, 오늘 내 설교가 대박을 터뜨리고 영혼들이 다 목사님도와주고 전도사님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신난다. 이것은 이틀만 지나면 가슴에서 사라집니다. 반면 하나님의 터치, 하나님의 만져주심. 모든 것이 낙망한 것 같고 실패한 것 같고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 같고 면목이 없고 죽을 것 같지만 주님이 찾아오셔서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내가 세워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충성하며 살아가는구나. 너의 피눈물 나는 헌신적인 삶을 내가 봤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니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이런 하나님의 터치가 있을 때 눈에 보이는 성과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나에게 있으신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모두 무너진 것 같고 하나님의 일이 안되는 것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보냐하면 여기서 하나님이 일하시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구나. 이 절호의 기회에 날 세우셨구나. 시편 119편에 보면 시인은 사람들이 모두 율법을 버렸습니다 하면서 주저앉아 펑펑 울어댑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라고 말하며 소망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그런 두려움 때문에 부득이함으로 일하며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충성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충동적인 감정으로 주를 위해 살려는 간헐적인 자극된 감정이 아닙니다. 의무감에 매여서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는 삶도 아닙니다. 충성된 삶은 그것을 뛰어 넘어서서 주님의 마음속에 우리를 통해 이루고 싶으신 사명이 우리의 마음속에도 불타오르는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로 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진정으로 충성된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오늘도 이런 충성스러운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와 감동과 역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14.충성된 자가 누리는 영적 친밀함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12:6)
사실 성경의 역사도 알고 보면 인물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인물을 공부하는데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연속해서 한 인물을 강론하기도 했습니다만 성경의 큰 인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배워 가면 성경 전체의 흐름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성경 속에서 그런 산과 같이 높은 인물들이 몇 명 나오는데 그 중에 한 산이 ‘모세’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성경이 모세를 거론할 때에 그의 생애 특징을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카리스마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어떤 기적을 행하는 탁월한 신령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모세를 커다란 산처럼 느끼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인격적인 온유함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려서도 능력을 행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신앙이 어렸을 때도 늘 느끼는 의문은 왜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주시는데 인격적으로 좀 내가 존경할만한 그런 사람에게는 잘 안 주시고, 무슨 말인지 하여튼 아실 것입니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게 없습니다. 이게 있으면 이게 없고, 왜 그럴까? 그리고 생각을 했는데 아직도 시원한 답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사역을 해나가면서 가만히 돌아보니까 몇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겸손하고 이러면 그런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가 잘 안 오는 것 같이 그렇게 생각을 해서 괜히 허세도 부리고 말도 좀 반말도 하고 뭔가 권위 있어 보이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그 당사자는 대게 이런 위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런 어떤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 다니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인격적으로 온유해지기가 힘들겠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모세도 가만히 보면 이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카리스마의 능력을 받기 전에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처절히 목부 생활을 하면서 침장의(?) 시기를 지내는 동안에 자기가 한없이 낮아지고 겸비해지는 것들을 배웠기 때문이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목회를 하면서 모세가 많이 성화가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결국은 이렇게 온유함이 승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데도, 그래서 이것이 그런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도 모세 같은 사람은 이게 가능했는데 우리 같은 그런 좀팽이들은 뭐 하나만 있으면 자기가 최고인줄 압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잘 섬기게 하기 위해서 그런 능력도 주시고 또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주시는데 그런 것이 주어진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목소리가 이래서 미안합니다.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생일이라고 우리 집 사람이 하나 사주었습니다. 이것 입었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 양복이 잘 어울립니다. 그것은 폼이 난다는 것이지 이걸 입었기 때문에 내가 무슨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안경을 썼다든지 책을 들었다든지 아니면 좋은 집을 산다든지 뭐 학위를 받았다든지 그런다고 해서 내가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카리스마 틱한 그런 어떤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으면 그 입은 양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걷어 가시면 그만입니다. 이게 있다고 해서 내가 새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도 아예 없을 때는 자기 부족을 잘 깨닫던 사람이 하나님이 이런 것을 주시면 이상하게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의 기회들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굉장히 두렵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우리를 가식 속에서 살게 만듭니다. 그것을 언제든지 기억해야지 됩니다. 공상 속에서 삽니다. 그러기가 십상입니다.
그런데 모세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런 카리스마틱한 능력을 주셨어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데리고 목회를 했는데 얼마나 큰 교회입니까, 남 전도회만 60만 명이 넘었으니까, 그러니까 주일학교는 따질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지긋지긋하게 많은 그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대 교회 목회를 했는데 행복했는가 하고 물으면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나를 죽이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가 안 되도, 슬며시 그저 은혜가 안 되는가 보다 하고 최악의 경우에 교회를 떠났지 돌을 들고 쳐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런 것까지 당했습니다.
한때는 말씀을 전해주고 지도자로 살면 거기에 자기를 하나님 다음으로 생각하고 엎드려지는 인간들이 어느 순간에는 돌을 들고 죽여 버리려고 하는, 성경이니까 잠잠하지만 뭐 욕이 안 나왔겠습니까? 거기에서 많이 연단을 받으면서 모세는 순간, 순간 자기에게 주신 카리스마적인 큰 능력이 이게 걸친 옷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그런 목회 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자기 깨어짐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온유한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세의 훌륭한 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인간들은 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재능을 특별히 주시든지 아니면 그런 카리스마적인 능력을 주신다면 졸지에 아주 교만하거나 깡패 같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막 그냥 후리고 사람을 무시하고 지식도 마찬가지고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런 능력이나 지식, 그 다음에 재능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물이 잠기게 됩니다. 그 은혜의 물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그 은혜의 물에 잠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으니까 공존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도 또 성경에서 얼마든지 입증이 되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 위험을 자기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고 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 것입니다. 눈병이 있었던 걸로 여겨집니다. 그냥 막 죽은 자를 살리고 기적을 일으키는데 매일 눈에 눈물이 질질 나서 이렇게 하며 다니는 바울의 모습을 봤을 때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비판거리가 되었겠습니까? 너나 고쳐라. 자기도 못 고치면서 뭘 그렇게 하고 다니는가.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능력을 많이 받았으면 교만해질 위험이 있고 남다른 재능을 받았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살 가능성이 많으니까 더 많은 자기 깨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들이 안 그렇습니다. 좀 능력이 있으면 펄펄 나릅니다.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신앙이 있을 때는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아니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생각하다가 그 다음에 막 펄펄 날고 교만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도와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방해만 하지 말면 저 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이 방해를 하셨으면 그런 고백이 나왔겠습니까? 가는 길이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막으셨습니까? 그렇게 교만한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의 온유함은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특징을 우리에게 갖는 것입니다. 능력도 없고 사람도 변변치 못해서 그저 기죽어서 지냈더라, 그런 의미에서의 온유함이라면 사실 무슨 온유함입니까, 기가 죽은 것이지. 기를 못 피는 것이지,
또 하나 세 번째 이 모세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이것이 모세의 지도력의 세 가지 특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지도력, 리더십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많이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소용없습니다.
한 일년 되었습니다. ‘이집트 왕자’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나오고 나서 미국이 계속해서 모세 신드롬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게 이미 미국과 상관도 없고 3,500년 전에 죽은 그 모세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자꾸 끄집어내고 카바 스토리로 만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조국의 상황을 보면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사실 엄청난 외화의 획득이나 머리 좋은 두뇌들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이런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가 우리를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특히 이 기독교 리더십에 있어서는 나는 세 가지가 거의 집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강력한 신령함, 그러니까 육적인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거룩한 신령함을 지닌 그런 지도력,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만 있고 인격이 없으면 강포한 깡패 같은 그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떤 인격적인 지도력,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것이 권위의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하나님과 그런 탁월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온 것에 대해서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제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이 성경 구절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뭐 스토리는 다 아는 바와 같이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구스는 에티오피아 여자니까 흑인이었습니다. 흑인을 광야 교회 담임목사가 사모로 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얼마나 실족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그런 자기 혈육조차도 그것을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조차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것이 저 사람이 저런 일을 했을 때에 사람들이 그게 옳은가, 그른가 판단이 잘 안 선 상황에서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지고 있을 텐데 그때 미리암과 아론이 이야기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옳지 않다. 옳지 않은데 그런데 어떻게 그 대답을 권위 있게 할 수 있는가 그랬더니 무엇인가 하면 모세도 하나님이 말씀해주신 사람이고 우리도 하나님이 말씀해주신 사람이 아닌가. 모세와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광야 교회 회중 가운데서도 성령을 받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선지자들과 같이 증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신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판단할 수 있다. 그 판단을 해볼 때 모세의 한 일은 잘못된 일이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미리암과 아론 모세 셋을 불러서 나오라고 하시고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서 너희들이 잘못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제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이야기가 뒤에 나옵니다. 그런데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대게 드는 생각이 저도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지도자의 어떤 권위에 대해서 초점이 가는데 이게 대들다가는 반 죽는구나. 사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두려웠던 적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절대 나서지 말아야지. 괜히 이 사람들은 나서서 고생하는데, 사실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초점은 하나님이 당신께서 일을 맡겨주신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이 교통하시는데 그 교통하는 수준이 다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과 깊이 대면하는 교제의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인가를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미리암의 사명이 간단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미리암이 아니었으면 사실 모세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모세를 살게 해준 사람이 미리암이고 오늘날이 있기까지 사실 어떤 의미에서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역할을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해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감에 있어서 미리암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가 아브라함과 요셉 그리고 나서 미리암의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강물로 떠내려보낸 모세가 다시 생명을 얻고 바로의 궁에 입양되어서 교육을 받게 그렇게 해준 게 미리암이고 그 중간에 이야기가 거의 안 나오지만 무엇인가 이 미리암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뭔가 하여튼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모세를 돕는 그런 역할들을 나름대로 감당해왔을 것으로 봅니다.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나름대로 중요한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론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제사장입니다. 아론은 두고, 두고 제사를 담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대신한 하나의 제 이 인자처럼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해나가는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에게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중요한 사명이 있고 그 아론을 제외하고는 구원의 역사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이 모세의 소명을 입증하게 해주시고 또 바로 앞에서 말하게 하신 그런 일까지 감당하면서 이 아론이 모세가 구원 역사의 중심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데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 모세만 하나님께서 사명으로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니까 네 형 아론에게 너의 입에 말을 주어서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리라 하였으니까 아론에게도 뭔가 그 나름대로 독특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서 사명을 감당해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사람이 여호수와 갈렙은 훨씬 뒤의 이야기고 이 세 사람이 아주 중요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가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미리암의 경우에 보면 홍해를 건너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찬양하게 만드는 그런 지휘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결국은 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어떤 영적인 지도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렇게 그런 나름대로 독특한 사명을 가졌고 그들에게는 각기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깊은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미리암과 아론을 우리들이 이 성경을 보면서 비난하지만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는 신앙에서 모세의 이런 행동을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이 어떤 모세와 같은 이런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민족주의 적인 편견을 가지고 이제 구약의 율법을 대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은 맞다. 선지자가 또 너희들 중에 있지 않은가. 너희들도 선지자 중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이상으로 보여주고 또 꿈으로도 그에게 말하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분명히 그들에게 의사를 소통하고 그래서 전할 말들을 일러주고 그리고 그가 뭘 해야지 될지를 알려준 것은 사실이다. 너희도 그런 경험을 했지.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에게는 이렇게 했지만 그러나 내 종 모세와는 대면하여 말하였다. 모세와도 그런 의사 소통이 있었는데 모세와 하나님의 의사를 소통하는 방식과 미리암이나 아론이 하나님과 의사를 소통하는 방식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그 ‘오벳’이라고 하는 혹은 ‘에벳’ 이라고 하는 종, 이 말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지자를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종”이라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라는 그 말 자체는 노예이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이제 히브리어로 ‘아브디’라는 말인데 나의 종인데 하나님이 ‘아브디’ 라고 불러주시면 여기에 반드시 묻어 들어가고 있는 성경적인 개념이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종인데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인데 관계에 있어서는 아주 친밀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서에도 “나의 할 일을 내 종에게 말하지 않고 알려주지 않고 행하는 적이 있는가”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그때 그 ‘종’이라고 하는 그 말의 의미도 결국 무엇인가 하면 일로만 보면 안 되고 그들은 일을 함에 있어서는 나의 종이고 나 때문에 그 일을 하는 노예와 같은 존재들이지만 친밀함에 있어서는 가족과 같은 친밀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게 구약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종에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호와의 종이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구속 사역을 위해서 섬기며 사신 것은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그 율법대로 철저히 노예와 같이 복종하신 생애를 사셨지만 그러나 그 율법 아래 그렇게 사시고 철저하게 복종하셨어도 그분이 탁월하게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을 누리면서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세계 속에서 당신과 함께 교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내가 너희들에게도 말해주었고 모세에게도 말해주었지만 그러나 모세와는 말하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똑같은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너희와는 다른 대면하여 말하는 특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대면하여 말한다라고 하는 히브리말의 표현이 사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빛에 비추어서 설명을 한다면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여호와를 보면 사람이 살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영인데, 하나님을 보고도 살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보실 수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영광은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영광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불이 들어오는 플래시를 잃어버렸다고 칩시다. 낮에는 빛이 환해서 어디 떨어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깜깜한 교회당에 들어와서 보니까 저 밑에서 빛이 환하게 나더라. 플래시가 아직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의자 밑에 떨어져 있는데 거기서 빛이 나니까 그 빛이 확 비추는 것입니다. 실체는 아직 눈에 안 띠었는데 실체는 감지할 수 없는데 실체에서 나오는 빛이 우리로 하여금 그 실체에 대해서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 자신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지만 하나님이 임재해 계실 때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그 영광에 빛난 인간이 보더라도 살수가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대면하여 말하였다’ 라는 이것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페이스트 페이스’라고 하는 이 히브리말에 표현은 그러니까 얼굴을 이렇게 마주보며 말한다고 하는 것은 친밀하다라고 하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말하는 사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친밀하고 숨김이 없는 사이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 당시 거울은 석경이 아니면 동경이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동경을 썼고 그렇지 않으면 석경을 썼는데 돌맹이를 갈아서 거울로 보는 것이고 또 이제 동을 갈아서 구리 입판에다 자기 모습을 비쳐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마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그런 표현입니다. 그런 사상이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대면하여 말했고”라고 하는 것은 어떤 친밀함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니 친밀하든지 안 친밀하든지 하여튼 전하면 되면 되는 것이지 그게 무슨 그렇게 차이가 있나. 그것은 아닙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적용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왜 그 깨달음이 나로 하여금 생애적으로 하나님 앞에 거꾸러지도록 만들고 뭔가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있게 만들어주었는데 그런데 왜 어떤 때는 그 깨달음이 이렇게 하나의 단상으로 아! 참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구나. 그리고 불과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잊어버리는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 같습니까?
무슨 말씀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깨닫는 것이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그러니까 성경을 공부만 해서 안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깨달음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보면 인생을 살아오면서 제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성경을 펼칠 때마다 항상 똑같은 강도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온다면 진짜 엄청난 변화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또 감당할 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보면서 깨닫는 것은 똑같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깨닫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단지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다 깨달을 때 단순한 깨달음이 있고 때로는 이렇게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딱 깨닫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주 강력하게 은혜로 역사 하셔서 우리가 거기서 나를 대면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직면하게 하셔서 그 하나님의 임재의 영향을 받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깊이도 깊어지거니와 폭도 넓어지면서 의미 자체가 굉장히 장엄한 의미를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미리암을 향해서도 기본적인 교통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셨습니다. 또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듣기도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관계를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세가 하나님과 나누는 영적인 교통의 깊이는 아론과 미리암이 나누는 그런 정도의 깊이와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물론이었거니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모세에게 전달해주시는 그 방식에 있어서도 매우 친밀한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뭐 우리도 그렇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한다고 그럴 때 자네는 이 일을 할 일이니까 이것이것 해놓게. 왜 해야지 되는가. 시키면 하지 뭘 그렇게 말이 많아. 이렇게 하고 일하는 것도 직장 생활이고, 그래도 거기서 하여튼 의사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사장이 자기를 너무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보게 박 부장 끝나고 나서 저 직원들 다 보낸 다음에 내 방에 좀 와. 다 보내놓고 윗도리도 벗고 와이셔츠에 넥타이도 푸르면서 한숨을 푹 쉬면서 어떻게 해야지 되는 거야. 네 생각 좀 한번 들어보자. 회사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왔거든 이렇게 지금 좋은 길이 있는데 이게 내가 판단이 안 서는데 야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네가 만약에 사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냐? 이렇게 물어보는 것과 똑같습니까? 같은 의사소통인데, 그 순간만큼은 회사에 있어서 위계질서를 가진 사장 대 부장이 아니라 이 시간에는 이 사람을 친구처럼 생각하면서 자기의 사업에 대해서 이 사람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와 같은 애정을 가지고 이 회사의 일을 생각하고 판단해주리라 하는 것을 신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직무보다 먼저 인격적인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아! 진짜 나에가 네가 있어서 이 사업을 끌어간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직원들 다 보내고 10시 넘어서 나오면서도 회사를 문을 닫고 내려올 때 스쳐 가는 바람이 감미로울 것입니다. 아! 난 진짜 필요한 사람이구나. 사장이 나를 신뢰해주는구나. 거기에 하나 더 보태주면 좋을 것입니다. 야, 너 이렇게 늦게까지 고생하는데 내가 무엇으로 갚아야 되는가. 너만 몰래 보너스 100% 더 줄게. 그러면 더 신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들에게 종종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똑같이 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 몇 사람이 모여서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교환하는데 어떤 설교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니고 누군가가 설교를 했는데 내용이 참 깔끔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의 무게도 좀 있습니다. 깊이도 있고,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나서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한 사람의 이야기는 내용은 깔끔하고 나무랄 때가 없는데 어쩜 꼭 기름 넣지 않고 볶음밥 한 것 같이 뻑뻑하다고 하니까 한쪽에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열정이 없는 것이다. 이야기하니까 한쪽에서 또 이야기하는데 열정이 있어야 되나. 어떻게 하든지 정확하게 전달만 해주면 그러면 성도들이 깨닫고 은혜를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뭐 양쪽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그 말씀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설교자에게 없는 감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인정하는데 그런데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이상적인 형태가 되려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설교하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말씀을 깨달을 때 특별한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을 느끼면서 그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과, 오늘 무엇을 설교를 할까 그리고 헤매다가 이것 한번 해봐. 그리고 한 것하고 그게 똑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후자의 설교를 매끄럽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을 깨트리고 그 사람의 인격을 부스러트리고 거기서 액체가 쏟아져 나오고 피를 바른 그 설교하고 머리에 반짝하고 스쳐간 꽁트 같은 그 설교하고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용이 아무리 비슷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똑같이 느껴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 용서받은 이 은혜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나 같은 이 쓸모 없는 인간들도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니까 당신 같은 사람도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용서하고 새 사람을 만들어주십니다 라고 하는 것과, 그냥 깨달은 하나를 가지고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똑같을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후자도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깊은 깨달음 속에서 내면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서 우리의 깨달음의 깊이가 다 다릅니다. 어떤 때는 성경을 읽는데 아! 여기 이런 말씀이 있었네. 내가 이런 이야기 좀 하고 싶었는데 마침 여기 나왔네. 그래 맞아. 어떻게 이렇게 내 속을 성경이 잘 알고 여기다 써 났을까! 그리고 밑줄을 그어놓고 그 다음에는 만났을 때 이야기하는 것과 어느 때는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여기 나왔네 그게 아니라 성경을 보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막 살아서 역사 하면서 나를 거꾸러트립니다. 내 피를 받아냅니다. 그리고 막 거기서 대부분 자기 부서짐이 있고 거기서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치료하심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둘 다 깨달음이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캐치한 것이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밖에 깨달음이 없으면서도 한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말쟁이고 제대로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으면서 흘러나오는 증거일 때 그것이 진정으로 성경에 대한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것을 미리암이나 아론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지 하나님이 의사소통을 하시면 그것이 동일한 것이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사람들은 동일한 영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세를 질서 상에 최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둔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상을 여기서 읽어내야 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네가 아무리 모세하고 같은 형제지간이라고 하더라도 임마, 내가 대장으로 세운 애는 모세인데 어디 대들고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떤 위계 질서상의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권위라고 하는 것이 사실 이게 앙상한 뼈다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너무 슬픈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윗목에 앉으셔서 곰방대 물고 탁탁 두드리면서 가서 일도 안하고 네 이놈, 그런 것만 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애들이 소리만 지르면 무서워서 이렇게 굽실굽실하다가 어느 정도 철이 들고 나름대로 가치판단이 서게 되면 저거 다 아무 것도 아니구나. 권위에 대한 강력한 거부반응이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권위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인정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감화를 줌으로서 권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그렇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까? 뭐 신앙이 좋아지고 나서 하나님 앞에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 이제 매맞는 것이 이골이 나서 하나님 앞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순종하면서 순종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어짐, 자기 부서짐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감화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라고 하는 애들도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부모의 신앙의 인격이 강물이 되어서 흘러가는 것이고 그 물을 먹고 그 물가에서 놀기도 하고 물 속에 들어가 첨벙대기도 하는 게 이게 자녀 교육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 비로소 부모의 권위가 있는 것이지 아빠 앞에 앉았을 때는 무릎을 꿇고 앉아. 밥 먹을 때는 말하지마. 갈 때는 똑바로 인사해. 이렇게 해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물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갈기면 할 것입니다. 그게 개 훈련소지, 그게 사람이 사는 가정입니까?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암과 아론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그런 위계 질서상의 권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가 사역의 세계에 들어서고 나서 옛날에 이 설교를 청년 시절에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부흥회 때 이 설교를 잘합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을 때는 더 많이 하는 설교입니다. 부흥 강사가 와서 대신 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초점이 그게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초점은 교회의 위계질서 이런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기서 오히려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인정하심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궁극적인 권위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있다고 하는 그것을 여기서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미리암에게 모세에게도 아론에게도 또 다른 선지자들에게도 알려주셨지만 그러나 모세는 영원히 레벨을 달리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대면하여 말한 사람입니다. 이 대면하여 말한 선지자라는 표현이 성경에서 모세 이외에는 안 나옵니다. 거의 독점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라고 하는 커다란 산과 같은 인물은 세 방향에서 캐 들어가 보면 그 모세라는 인물의 탐구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모세에 대한 상은 전자에 의해서 거의 포장이 됩니다. 강력한 카리스마, 강력한 사람 손을 펼치면 재앙이 일어나는 이런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런 놀라운 파격적인 카리스마의 권위 그 뒤에는 하나님께 전매특허처럼 받은 그런 능력의 수효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교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면하여 하나님과 말했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럼 당신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대면하여 말하는 것과 같은 사이에서는 의사소통을 할 때 느끼는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언어만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말하는 화자의 마음이 함께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말씀의 깨달음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데올로기 하나, 인생관 하나, 가치관 하나 되어서 우리들이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권세 잡은 자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결심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옳다고 확신하는 그 확신만 어떤 종교적인 깡다구 하나만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성경을 다시 써야지 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주시는 그 하나님과의 교감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말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말을 듣는 청취자인 우리에게 함께 흘러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들을 뿐이지 사실은 곧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파헤치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도 기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말씀의 기근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표피적인 이해를 더 (?)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그 표피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그들의 마음에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마음을 찢고 그리고 그들의 관절과 골수에까지 스미고 배어서 그 말씀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된 그런 사람으로 바꾸어놓을 때 진정으로 말씀에 대한 기갈이 해결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에 대한 기갈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피적으로 스쳐지나가고 이해하고 잊어버리고 하는 그런 것들이 결국은 말씀이 없어서 갈급한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해갈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많이 듣고 그 어떤 것도 흠잡을 수 없고 또 어떤 것도 비난할 수 없고 또 내가 몰랐던 것도 아니고 하여튼 마음속에 이렇게 깨닫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영적인 기갈의 상태를 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그런 정보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수없이 책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많이 듣고 양육을 받고 그런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하나님께서 뭔가 우리에게 전해주실 때 그 말씀의 전달의 통로를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가슴 녹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흘러 들어올 때 그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터트리고 우리의 뼈 속과 관절과 골수에 박혀서 나오지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험이 거의 없는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계속해서 빨간 칠, 파란 칠 머리에 물들이고 그 시대 다 지나가니까 다시 또 검은 물들이고 볶았다가 이제 다시 펴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니까 또 돈 들여서 펴고 그래서 뭐가 변한 게 있습니까? 뭐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십시오. 해야지 미장원도 하고 또 양장점 하는 사람들도 다 돈벌어서 십일조도 내고 하니까 해야지, 그런데 그런 것이 우리 자신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허긴 뭐 양장점과 미장원이 본질적으로 사람을 바꾸라고 하는 게 무리한 요구입니다. 교회도 못 바꾸는 사람을 미장원이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너무 유사하지 않습니까? 무슨 책을 읽고 누구 설교를 듣고 방송에 코를 박고 살고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것입니까? 저도 방송설교를 하고 나서 깨달은 사실인데 방송설교에다가 일년 내내 고정시켜놓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반 방송은 거의 안 듣는 사람들이, 그런데 내가 말하는 게 그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것도 좋은데 결국은 뭔가 한가지가 결핍되어 있으면 그것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럼 뭔가 고민을 해야지 됩니다. 왜 이렇게 내가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 생활을 해서 말씀에 대한 이해도 있고 깨달음도 있는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친밀함이 느껴지는 그런 세계 속으로 내가 가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려올 때에 단순히 정보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막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파고 들어와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배이면, 잘 보십시오.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뼈 속 깊이 베이는 것은 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신앙을 떠나서 인생의 경험을 보더라도 정보에 그치는 것은 항상 잘해봐야 머리 속에 저장되는 것입니다. 뼈 속 깊이 저장되는 것은 뭔가 강력한 느낌을 동반해서 파고 들어올 때 그때 그 정보가 뼈 속에 저장되는 것입니다.
(예화: 슈바이처의 어린 시절 이야기- 친구와 싸움을 했는데 친구가 도망가며 그 친구 가 하는 이야기가 나도 너 같이 고기 국을 먹고살면 나도 너를 이길 수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평생 고기국을 안 먹었는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부를 누리며 산다는 것에 대한 어린 시절 최초의 강력한 충격으로 남을 위해 다 베풀며 사는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아니 그런 것, 내가 가진 재산을 공유해야된다든지 아니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든지 그런 것은 어느 시대이건 다 어렸을 때부터 가르칩니다. 그러나 가슴에 깊이 와서 뼈 속 깊이 사무쳐서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는 진리는 그 속에 무엇인가 정서와 함께 다가올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모세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 자기 깨어짐과 전에 아는 말씀 전달에 정보의 통로가 나누어지지 않은 삶을 산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게 사실 우리들이 느끼는 가장 심각한 괴리가 그것입니다. 가르쳐야 될 것과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이 다를 때 거기서 외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뭔가 모세에게 전달해주실 때 항상 하나님께서는 대면하여 그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 이것을 모세는 그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면 안 되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명기 같은 곳에 보면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미리 염두에 두시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모세에게 미리 예언해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타락,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것을 예언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도자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 같이 괴로웠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이제 가나안 들어간다고 꿈이 부풀어 있는데 이 지도자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니까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이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도 한꺼번에 다 보셨습니다. 그 본 모든 정보를 모세에게 전달해주시지 않으셨지만 그것을 볼 때에 그 느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예언하시는 가운데 묻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마지막 유언을 남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사실 비교적 좋은 상태였는데 그런데 거기에서 혼자 흐느껴 우는 것 같은 그런 정서를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오랜 후에 있게 될, 오래지도 않습니다. 얼마 안 가서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이 복된 부흥의 시기가 지나고 난 다음에 그들이 경험할 타락, 이런 것들을 미리 다 보면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 속에는 그런 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아론의 한계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하면 모세가 기도하러 올라갔을 때 송아지 만드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정도의 수준입니다. 물론 이 송아지는 사실 소의 형상을 가진 것이었는데 동기 그 자체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겨야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어디서 오는가 하면 애굽을 비롯한 중동 지방에 자기의 신들에 대한 형상을 가지고 있었던 민족들에 대한 열등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러니까 그래도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미리암이나 아론이나 모세나 무슨 신학적인 차이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밖에 수준이 안 되니까 그것도 그 당시에 있는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는 뛰어난 수준이었으니까 그런 정도의 차이를 모세가 가지고 있으니까 모세가 사라지고 나니까 당장 그것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지도자의 권위를 잃어버려서 백성들이 막 날뛰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평정하지 못합니다. 모세가 내려올 때까지는,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한계를 여기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청중을 깨우는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에서도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을 꿰뚫고 지나간 사람들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냄새가 납니다. 그가 비록 지금 그렇게 완전히 못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벌써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미리암과 아론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나도 뭘 봤고, 나도 뭘 알았고, 나도 뭘 배웠다. 이런 수준에서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었던 사람과 대면하여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을 우리 가운데 심으셔서 당신의 마음까지 흘려보내셔서 그 마음과 함께 관절과 골수까지 녹아서 뼈 속까지 사무쳤던 이런 말씀을 지닌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우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항상 자족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누가 설교를 성공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예배를 성공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오늘 우리의 예배는 내게 만족을 주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더 크고 완전한 축복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그들을 대면하실 수 있고 그리고 어떻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저들의 마음을 뚫고 뼈 속 깊이 사무치게 해서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몸과 하나님의 말씀이 나누어질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뼈 속 깊이, 골수 깊이 베이게 만들게 하시는 그 말씀의 영광과 부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감히 설교를 성공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 참 훌륭했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주님과 교통하면서도 우리들이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많은 정보가 사람들을 바꾸는지 보십시오. 이제는 뭔가 이렇게 많은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뭔가 그 속에 담겨진 파워를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전에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그 무엇을 경험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고 파헤치고 지나가는 이런 놀라운 변화를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눈떠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 싶은 것은 그럼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모세와만 그런 독점적인 관계를 가지셨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최고 지도자니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할 이야기는 많습니다. 왜 당시 최고 지도자였으며 사사였으며 제사장이었던 그 엘리를 제쳐놓고 하나님이 왜 사무엘과 친밀함을 나누셨을까요? 사울이 아직 직책상으로 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왜 젖혀놓으시고 사울이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양을 치는 목부인 다윗에게 오셔서 그런 친밀함을 보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대답이 나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너희들과는 달리 나와 아주 특별한 수준에서 대면하여 말하는 관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너희들의 삶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충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신 속에서 일어난 한 작용이 아닙니다. 충성은 한 정서의 작용이 아닙니다. 충성은 치열한 삶의 현장을 동반할 때에 그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스러운 심정을 가진 성도 한 사람이 놀고먹고 살다가 죽었다 이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향한 불변하는 헌신이 인격 속에서 용해되어서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그런 상태가 충성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표현을 오늘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 표현이 무엇입니까?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의 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그 보이지 않는 연합된 무리, 그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게 충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충성한 영역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전 영역에 있어서 충성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나의 온 집에, 어느 한 부분을 위해서 충성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큰일과 작은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을 자기에게 부여하고 수여하신 그 하나님이 그 일을 맡기신 장본인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 자신이 중요하시기 때문에 그가 맡기신 모든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그러니까 늘 우리들이 조심해야지 될 것은 자극에 의해서 이런 충성을 받아낼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이 모세를 이렇게 독점적인 교제를 누리게 되는 특별한 사람으로 삼아주신 아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자기의 집에 충성된 삶을 살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그 충성스러운 삶을 산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쭉 감동적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는 얼마든지 애굽의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얼마든지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살수 있었는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삶을 이 모세가 철저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을 낙을 누리는 것 보다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누가 시켰는가 하면 믿음이 시켰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충성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는데 사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하나 갖는 게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었는가? 저는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3장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이제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들을 구원해내라. 그러실 때 하나님이 화를 내실 정도로 그 명령에 불복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결코 그런 자세는 하나님 앞에 충성 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렇게 모세를 보면서 깊이 인정해주시기까지 결국은 어떤 원리를 쫓아간 것인가 하면 충성이라고 하는 이것도 하나의 성화의 영역이기 때문에 발전의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쯤 되면 충성스러워지겠습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주면 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요구하지 안 주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는데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최선을 다해서 그런 자기가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적인 변화들도 촉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이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하늘 문을 하나님께서 열어두신 교회인데 그 열려진 문을 통해서 계시와 하늘의 신령한 복들을 하나님이 내리신 것입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적은 능력으로 내 말을 지켰다” 사실 그게 말이 됩니까? 큰 능력을 가져도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까 말까 하는데 적은 능력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 말씀 지키면서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적은 능력을 받은 그 사람의 수준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뭔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이 있으시면 반드시 거기에는 그것을 여러분들을 자족하는 만족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남이 모르는 진리를 알게 하셨으면 거기에는 분명히 뭔가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이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게 했다면 반드시 여러분들을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났을 때에 사도 바울이 맨 처음에는 자기가 하나님 만났다는 것 이외에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즉시 들려오는 음성은 미션이었습니다. 선교였습니다. 너에게 일어난 이 사건은 너 개인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내가 이런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데 있어서 한 과정이다. 너를 부른 것이다. 우리는 좀 그렇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나 중심적으로만 보지 말고, 나라고하는 사람이 받은 은혜의 경험,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만들어 가시는 장엄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한 과정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정직하게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 없이 나도 없다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결국은 충성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니 이 모세가 미디안에서 목부 생활하고 있을 때 뭘 그렇게 충성됐습니까? 뭘 그렇게 충성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이방인 여자와 결혼해서 아주 평범한 목부 인생을 보냈습니다. 물론 그는 40년의 세월을 통해서 뭔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고 그리고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경건한 영적 연단의 시기를 가졌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뭐 백부장도 맡겨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기에 있고 자기는 미디안에서 목부로서 인생을 살고 이것은 무슨 제대 연한이 정해진 군대에 입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결국은 죽는구나. 그것 밖에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을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모세 자신도 하나님 앞에 부단한 싸움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 능력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신 그 능력을 가지고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충성하면서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세에게 더 주시는 것입니다. 또 더 주시고 또 더 주시고 깨달음도 더 주시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이도 더 해주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누었던 교제의 깊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대면하여 말하였다” 라고 하는 이것도 사실은 아주 영적으로 깊이 성숙한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숙성하는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처음에 만약에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장, 4장에서 너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해방 자로 불렀다. 너 빨리 가서 네 백성을 구하라 하실 때 그때에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는 못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이야기합니까? 그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그런 의사 소통자체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 들어가는 아까 이야기한 그런 식의 의사 소통이었다면 사실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획일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뭔가 자기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을 위해서 자기가 압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막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깨달아지면 뭐 합니까? 하나님이 한 말씀하시면 자기는 세 말, 네 말 하면서 그 말씀을 능가하는데, 논리도 더 뛰어나고 그래서 아 이것은 이게 아닙니까?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한 수 가르쳐주려고 말이지, 기도할 때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이것은 하나님이 똑바로 하셔야 합니다. 이런 것입니다. 속지 마세요. 그러니까 벌써 여기서 이야기하는 대면하는 그런 교통을 처음부터 누렸던 것이 아니라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만큼 모세의 특징은 충성된 삶을 산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능욕을 애굽에 모든 보화보다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렇게 산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렇게 죽을 때까지 그런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충성이라는 인격적인 특성이 형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사는 삶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직분을 맡겨주시고 주님을 위해서 살도록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은 이것은 단지 우리가 일하는 도구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섬기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시기 위한 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자기를 다 쏟아 붓지 않은 사람들은 한 달란트 맡은 종과 같습니다. 그는 많은 일을 해도 그 많은 일에 익숙해질지 모르지만 결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명을 주셔서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의 가슴속에 녹듯이 들어오는 그런 경험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 일을 맡겨주신 분에 주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위해서 헌신되게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곧 그 사람의 헌신은 일을 위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섬기면서 살아가는 피 흘리고 땀흘리는 삶의 현장 그것을 보면 이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가망이 없는지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희생,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사명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그런 핵심가치에 대한 분투하는 노력, 그리고 자기를 부수는 그 열심, 그런 것들이 인격에 깊이 베어 있을 때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일할 뿐이지, 하나의 기능인으로서 일하는 것이지 그 속에서 무슨 비범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다든지 주님의 축복을 본다든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기에게 돌아오는 어떤 보상에 대한 기대가 그런 일을 하게 하고 말게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왜 그런 친밀함을 보여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구약이든지 신약이든지 원리는 동일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피 흘리며 살면서도 자기는 죽어도 주님의 일은 이루어져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탁월한 희생과 헌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게 당신의 사람과 같이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나의 종, 내 종 그러면서 이렇게 친밀하게 불러주신 그 근거가 직위나 지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풍성 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영적인 하나된 교감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 애정의 표현을 주님이 그렇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종입니까? 주님의 노예입니까? 정말 충성되게 살고 싶다면 비록 안팎으로 수많은 죄악의 요인들이 있습니다. 내 안에 가시와 같이 돋아나는 내가 꺾어야 할 내 자아, 그리고 육체의 방종한 욕심을 따라 살 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들이 이제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니까 대적하며 덤벼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충성되게 살려고 애를 쓸수록 사람들은 깊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분투할 때에 그때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무엇인가 하면 주를 위한 목표의식이 너무나 희미합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그저 떠돌 듯이 살아가는 되면 하고 안 되면 그만두고 그런 식의 삶들이 모두 모아져서 결국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뭔가 애태우는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애를 타게 합니까?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이 우리를 애태웁니까? 뭐가 우리에게 애를 태웁니까? 뭔가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변화되지 않은 때도 그것이 우리의 애를 태웁니까? 성화 되지 못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우리의 애를 태웁니까?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은 돌처럼 차가워져서 좀처럼 하나님을 향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간절해지지 않습니다. 목숨과 바꾸고 싶은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정말 있습니까? 목숨과 바꾸고 싶은 그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나를 버려도 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있습니까? 충성된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것이 있습니다. 자기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압니다.
그래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을 보면 하나의 새로운 교훈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된 삶을 살았더니 이렇게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경지에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반대로 한번 거꾸로 대입을 시켜보십시오. 주님이 시시때때로 여러분들에게 임무을 주시고 또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데 불충하게 살아갑니다. 자기의 이 속만 차리고 그리고 자기의 눈앞에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고유한 본분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때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아간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을 해야지 됩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전 목회 하는 일 말고도 제가 좋아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자기에게 주신 그 본분에 충실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여기 목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역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제일 잘 해야지 됩니다. 그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영혼들을 섬기는데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그것 하나만 그의 임무는 아닙니다. 다른 것도 많습니다. 집에 가면 집에서도 잘 해야지 되고 또 글을 쓰는 것도 사명이고 하여튼 여러 가지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본분은 그것입니다. 학교 선생으로 부름을 받았으면 학교 선생으로서 잘 살아야 합니다. 그 영역에서는 실패했는데 다른 것에서, 조기 축구회에 가서는 성공했다. 거기서는 막 진짜 사람들을 장악한다 그런 것은 안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고유한 영역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역자면 교역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고유한 사명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자기의 최선을 드려서 목사면 목사로, 전도사면 전도사로, 장로면 장로로, 구역장이면 구역장으로서, 교사면 교사로서 거기에 세워주셨을 때 아! 너는 그 일에 목숨을 걸었구나. 주님께 그렇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거기에서 참다운 자신의 변화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놓고 뭘 충성을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들 가운데는 (?)있는 충성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순교의 역사를 살았던 것을 가지고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해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산 것이고 자기는 지금 바라보고 즐거워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말 그런 영역이 있는지, 삶의 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꾸고 이 세상에 그 모든 가치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이 일이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번에 신학생 세미나 가서도 내가 그 이야기한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 교회 신학생들은 아주 모범적입니다. 이야기한 게 꼭 전도사로 써주고 생활비를 몇 푼 주어야지 충성스럽게 일하는 그 심리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맡겨주지 않을 때는 강 건너 불 보듯이 하는 그런 것들이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일에 의해서 동기가 충동되고 자극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고유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내가 아니면 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교사일 수도 있고 구역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내가 가정에서 어떤 일일 수도 있고 남편의 역할이나 아내의 역할이나 모든지 하여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에 충성되게 살기를 원하는 그런 영역이 있습니다. 고유한 영역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 영역에서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생명을 걸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그런 목표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 앞에 충성 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적군 앞에 사로잡혀서 사형을 당하면서 눈을 가리운 채 묶여서 마지막 총살을 당할 때 마지막 남길 말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충성스러운 군인이면 무엇이라고 해야지 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만세’ 하고 죽지 않겠습니까? 영자야 그리고 죽겠습니까? 대한민국 만세 하고 죽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죽어도 조국은 영원하리라. 그것이 아닙니까? 한 사람이 가문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가 죽어야지 된다면 가문을 위해 죽는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가슴속에 충성된 삶을 살지 않은 사람들은 충성된 삶을 계속 살지 않는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면 부패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처음에 모세가 그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설득하셨습니다. 화도 내시고 깨닫게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장인인 이드로가 어디에 가느냐고 그러니까 아니 왜 똑바로 이야기를 못하는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려 갑니다. 그렇게 말을 못하는지, 잘 있는지 한번 가보려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저게 인간인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목회지를 받아서 부임하러 가는 목사에게 어디 가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게 글쎄 양떼를 맡겨주셔서 목회 하러 갑니다 그렇게 말해야지, 한번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지 보려고 내가 한번 가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입증하고 싶은 것은, 그런데 그게 오랜 광야 생활을 통해서 강적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렇게 성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 도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참 전 복이 없습니다. 너무 좋은 교인들을 만나서 이렇게 성화가 안 되니까, 아직 무슨 말인지 못 깨닫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이렇게 맷돌과 같이 갈고 갈아서 이런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그런데 반대로 만약에 그렇게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않는다 할 것 같으면 하나님과의 어떤 영적인 교통이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패해지는 것입니다. 교통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게 부지런하고 목표 의식이 불타는 사람들이 모두 신령한 사람이 아니지만 게으르게 분명한 목표 없이 여기도 찔러보고 저기도 찔러보면서 이러고 사는 사람들 중에 충성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항상 기억해야지 됩니다.
여러분들이 목숨을 건 영역이 어디입니까? 있습니까? 말씀드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가슴이 녹는 기도의 제목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눌린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를 향한 모든 영역과 마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역이 있는가 하고 물을 때 충성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게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보면 뭔가 가슴이 녹는 것 같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희생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자기 가슴이 녹고 그리고 내가 죽어서 가족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나를 우리의 가족들을 위한 제물로 삼으시겠다면 나는 죽고 우리 가족들이 주님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 제목이 있는가 하면 있다고 합니다. 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는 소원이 있는가 하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의 구원입니다. 그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그것은 크고 위대한 일을 맡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그 하나님의 마음이 부음 바 되고 하나님의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때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입니다.
제가 이십대 중반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은혜의 경험을 깊이 하고 난 다음에 그전에는 총각 집사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결국은 목양의 마인드를 갖는 하나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그 영혼이 한없이 불쌍해 보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진리를 가르쳐주어도 변화되지 않고 저 길을 저렇게 걸어가면 저 길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길인데 왜 저렇게 늠름하게 걸어갈까? 저렇게 곤고하게 살아가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낙도 없고 기쁨이 없는 많은 성도들이 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무능한 것일까? 그런 소원함이 생겨나는데 그런 목양의 마음을 가질 때 네 소원이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저의 소원은 제가 죽어도 내 앞에 핏기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수많은 핍절한 영혼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흥을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고 이 황무한 땅에 우리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수없이 바람이 불어 날아가고 새가 와서 쪼아먹고 싹이 나는가 하면 햇볕에 나서 터져서 말라버리는 그 복음의 초라한 열매를 보면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약속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부흥에 대한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어찌하든지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그런 도구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시면 하나님, 제 마음에는 그칠 수 없는 애환이 있습니다. 부흥입니다. 한번 부흥과 내 목숨과 바꾸고 싶습니다. 그런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목표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의 신자들의 방종하고 게으른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역겨운 삶입니다. 정말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던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삶이 예배와 종교의 영역에만 묶여 있었지 삶의 지평으로 이어진 것을 그들이 그렇게 말하자면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자기만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가로막고 자기는 털끝하나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어주는 그런 희생 정신이 없는 사람들, 주를 위해서 뭔가 희생하면서 살겠다 라고 하는 그런 정신이 결핍된 사람, 그것이 정말 마지막에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영혼의 깊은 피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초점이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고유한 사명을 향해서 타오르는 마음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아주 부패한 사람들입니다. 썩었습니다. 마음이 아주 부패합니다.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뭘 보면 그게 입증이 되는가 하면 우리들이 흔히 누가 이렇게 나쁜 짓을 했다더라 그러면 막 도덕적인 분노를 느낍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살수가 있는가 하고 분노를 느낍니다. 그런 것만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명 적인 분노를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분노된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허비하면서 초점 없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이 자신의 옆에 살아 있는 것이 분노로 느껴집니다.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식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하게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수가 있습니까? 무슨 인생의 의미가 있을까? 불붙는 목표도 없이 인생을 살아가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가끔 신문에 보면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 나옵니다. 요즘은 좀 낫습니다. 빌딩 하나가 있는데 월세가 한 달에 60억이 나오는데 그거 가지고 자식들이 먹고살면서 압구정에 가면서 한번 술 먹고 1,500만원을 냈느니 2,000만원을 냈느니 그런 자들은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사는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인생이 있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서 부모 도움 받아서 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그리고 저녁때면 오렌지나 하나 들고 골목에 나가서 어디서 하나 그럴듯한 사람 하나 꼬여서 그리고 재미보고 그 다음에 아침에 술이 진탕 취한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사우나에 들어가서 퍼 질러 자고 그리고 낮이 되면 다시 일어나서 해장국이나 먹고 다시 밤이 되면 이렇게 오렌지 들고 나타나고 그게 산 것입니까? 그게 인생의 삶입니까, 짐승의 삶이지. 결국은 개집 멋있게 지어놓고 거기에서 개대신 사람을 키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기에 무슨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보람이 있고 무슨 꿈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더 미친 듯이 그런 환난 속에 빠지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분명합니다. 맨 정신으로 자기를 살게 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그의 인생에는 없습니다. 그것을 부러워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루마를 끌어도 뭔가 (?)가치를 가지고 사는 그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고 근본적으로 인생관이 변한 성도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슴속에 새겨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않으니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간절한 기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눈물이 그친 설교자가 배우입니다. 연기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염려 없이 주일마다 성경을 펼쳐놓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위선이 아닙니까? 하나도 불쌍하지 않으면서 그 영혼을 위해서 뭔가 해주어야지 된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무엇을 위해서이고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인간이면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그런 일을 하는데는 익숙해질지 모르지만 자신의 영혼은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위해서 울고 하나님 자신이 맡겨주신 이 중요한 핵심의 가치, 사명을 위해서 피를 뿌리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이렇게 살아 있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의 건강함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교사로 부름을 받고 교역자로 부름을 받고 구역장으로 부름을 받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을 향해 눈물이 흐르지 않고 그 영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지 못하면 그는 이미 패역하고 있는 중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사명에 충실하기 싫어서 성령을 버리지만 나중에는 눈을 뜨고 나서 충성하고 싶어도 사실 사명이 자기를 버립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가슴속에 심겨진 가치와 주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충성된 목표도 없는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떠버리고 무슨 영적인 깊이에 대해서 말하고 그런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신앙이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전시장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말년이 다가올수록 쓴 서신서들이 원숙해져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들을 보여줍니다. 결국 어디서 오는가 하면 치열한 삶의 현장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모세가 바라보며 즐거워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주님에 대한 이해도 있고 그 십자가의 빛 앞에서 우리들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들인지 아는 자기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신학생 세미나에서도 이야기한 동일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신학생들이 많이 왔는데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결단을 하고 열린 교회에 왔기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다른 교회에 있으면 양복이나 입고 거들먹거릴 학생들이 와서 걸레질하고 전도하러 다닌다고 하고 누가 십 원 하나 토큰이나 주나. 그렇게 합니다. 타 교회에서 몇 십 만원이나 받던 학생들이 와서 전도사도 그만두고 교회에서 전도도 하고 전도사님 돕고 그러니 얼마나 생활이 곤고하겠습니까? 그래도 대부분 그렇게 충성스럽습니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을 겨냥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하고 있지 말고 빨리 가십시오. 이 교회에서 변화될 가능성이 없으면 빨리 가십시오. 가서 개척교회에 가서 봉고 차라도 운전하십시오. 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기대를 가지고 이렇게 모입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통해서 깨닫게 된 여러분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했다면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의해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이고 내 인생은 이것을 통해서 살아있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그 자리를 확인하고 그것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변화되기 싫으면 빨리 개척교회에 가서 밥이라도 해주십시오.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여기에 목을 매고 앉아 있습니까? 가서 밥이라도 해주고 봉고 차라도 운전해주십시오. 하다못해 교회 청소라도 하십시오. 지금 일손이 필요한 작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서 성가대 밥이라도 해주면 목회자가 얼마나 눈물나게 좋아하겠습니까? 매일매일 만나서 아마 손잡고 기도해주실 것입니다.
부패해져 갑니다.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우리의 섬김의 목표, 나는 죽어도 이 일은 이루어져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생명과 바꿀 수 있는 목표, 그리고 만약에 내가 이 사명이 나의 부족 나의 불 충성 때문에 성취되지 못한다면 죽을 때도 눈을 부릅뜨고 죽을 것이라고 하는 핵심가치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 그 사람이 산 사람입니까? 그런 게 없는데 무엇을 기준을 두고 그 사람의 충성을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까?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다 드려졌기 때문에 다른 데는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 드려졌기 때문에 다른 데는 드릴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직분 맡은 다음이 아니라 직분에는 상관없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일 학생이라도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았으면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세우시고 싶으신 그 자리가 있습니다. 분투하며 싸우지 않으면 안될 오직 내 안에 계신 우리 주님만이 아는 싸움이 있습니다. 내게도 있고 여러분들에게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더 큰 것을 맡겨주시기를 기대합니까? 주님을 위한 충성이 동일합니까? 작은 것에 충성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음, 다음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명감이 없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깊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병입니다. 무위도식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여러분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은 불만족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각자 각자에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 제게는 제게 세워주신 것, 여러분은 여러분이 세워주신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세워주시기까지 할 (?) 세워주신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다듬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거기 서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 거기 설 수가 없습니다. 내가 떠나면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는 비어 있습니다.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 있고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성을 다해서 기대하시면서 우리를 거기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장구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모세가 그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말하자면 모세는 불뚝불뚝 솟아오르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지만 절대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 대범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면서 충성스런 생애를 산 것입니다. 일 이년 후에 충성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로가 된 다음에 충성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가 된 다음에 충성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역자가 되면 그 다음에 충성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구역장을 맡겨주면 내가 충성하지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충성하게 하는 것이 만약에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충성은 너무 슬픈 것입니다. 우리의 충성하게 하는 동기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우리를 사랑하실 하나님의 그 성품, 그게 우리를 충성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정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뭔가 특별한 목표를 놓고 부단히 자기를 부수는 열심 속에서 피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예외적으로 생각한다 이게 우리의 병입니다. 이게 마음의 병입니다. 그게 인위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수 있습니까?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고 그 큰사랑 앞에 입을 다물 수도 없는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그냥 살수가 있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는 게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냥 살수가 있습니까? 뭐든지 해야지 어떻게 그냥 살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리가 그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활용해서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이 나의 태만과 충성으로 인해서 묻히는 일이 없도록 하자 그리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하나 가진 사람에게 다섯을, 다섯 가진 사람에게 열을 하나님께서 더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요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온 땅을 감찰하십니다. 주님을 믿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일합니다.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다 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그 모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사로잡혀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사명, 섬김의 그 자리가 자신의 존재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 그것을 위해서 산 사람, 그 사람들이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선배 목사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저는 그렇게 깊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다 맞습니다. 교사를 할 때 그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고 가슴아파하는 그 사람들이 전도사일도 잘합니다. 전도사 할 때 자기에게 맡겨주면 그렇게 생명을 걸고 하는 사람들이 담임 목사가 되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가 그것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도 계속 자신의 안락을 포기하기 싫고 눈앞에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 불충하게 살아가면 신앙의 인격이 야비해집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알고 주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가면 그 일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놀랍게 다듬으시는지 모릅니다.
그 본보기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모세입니다. 처음 이 사람이 그렇게 신령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리고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주신 그 은혜를 따라서 그렇게 충성스러운 삶을 살은 것입니다. ‘모세’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에 떠오르는 감동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겠습니까? 능력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그 분이신 데, 재능이 뛰어나면 그 재능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오! 네가 되게 잘한다. 나는 못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냐.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있습니까? 그런 달란트를 주신 분이 주님이신 데,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릴 수가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게 아니라 충성된 자세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가슴을 잃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울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 피를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자신의 땀을 흘리고 체력을 쏟아야 할 그 삶의 핵심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정결한 마음으로 생존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불결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매달리면서 주를 위해 살면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벌어집니다.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어찌할 수 없었던 이 더러운 찌끼들이 빠져나가면서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입니다. 사역을 많이 하고도 아주 강포한 사람이 되고 독선적인 사람이 되고 야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일에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도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앎과 이 모세가 보여주는 이런 교통 속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깊이 돌아가시면서 생각하십시오. 내가 몇 주전에 던졌던 질문을 또 던지고 싶습니다. 지난번에 질문을 던졌는데 여러분 그 고민이 계속 안 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압니다.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주님이 오늘 오셔서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슨 소원을 들어주랴. 할 때에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없으면 여러분은 하나님도 없는 삶입니다.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유일한 기도 제목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한 나라의 제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큰 지위를 갖는 것도 아니고 우리 구역의 부흥을 주십시오. 내가 맡은 교구에 변화를 주십시오. 누가 늘 만져도 변화되지 않던 저 영혼들에게 봄에 내리는 가랑비가 얼음장을 뚫고 땅속으로 스며들어서 해토시키는 것처럼 그렇게 영혼들에게 스며들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그것을 위해서 내 살을 깎아야 된다면 깎고 모난 부분을 잘라내야지 된다면 내가 잘라내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나를 당신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만드셔서 그렇게 써주십시오. 나는 왜 내게 주신 이 사명에 대해서 이렇게 무능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이 존귀해집니다. 그것이 없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존귀해질 수가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데 이렇게 분투해서 주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면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6개월도 필요 없습니다. 3개월이면 끝납니다. 그리고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게 결국은 뒤로 물러간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매일 해봐야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라고 합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분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빛입니다 언제나 어둠의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우리에게 갈 길을 알려주시고 우리의 삶에 등불이 되어 주셔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오묘한 진리에 숲 속에서 주님의 위대하심을 맛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정말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15.충성하는 사람의 위험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민12:13)
“ 어떻게 하나님이 모세에게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모세를 지도자로 생각하는 것은 가할지 모르지만 그의 잘못된 문제들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이 어찌 권한 밖의 일이겠느냐.” 이런 의미로 항거하는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 이렇게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 것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 네가 왜 신령한 사람에게 대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령함에 있어서 미리암이나 아론과는 비교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카리스마도 이와 같은 신령함에서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신령한 사람이 되기까지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신령함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흔히 숙명론적 사고를 하기 쉽습니다. 신령한 사람이 따로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따로 있어서 심지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신령한 사람한테 기도를 부탁하고 그가 대신 응답을 받아 그가 시키는 대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워낙 답답함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마치 그렇게 사는 것이 충분한 것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것들은 결코 옳은 것들이 아닙니다.
교회에 보면 소위 은혜 받은 사람들이란 부류가 있어서 교인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거기 가서 이러 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기도를 해 줍니다. 그리고 답변을 해 줍니다. 어김없이 봉투가 오고 갑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하든 간에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위해 충고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려오는 응답으로 자기가 충분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노예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중대한 문제에 부딪혔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대답을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되었을 때 나보다 기도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도 필요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해결책은 내가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나, 내가 어쩌다가 내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가서 응답을 받아서 확인을 할 정도의 사람이 되었나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담도 필요하고 자문을 받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의 지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오래도록 기도한 것 보다 깊은 은혜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신앙의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대답해 주는 것이 훨씬 정확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면의 도움을 받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으나 획일적으로 그렇게 마치 신령한 세계에 사는 사람이 따로 있고, 자신은 영원히 그 밑 단계에 살 사람인 것처럼 처신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그러나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신령함에 대해 처음부터 신령한 사람이 따로 있거나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번쩍하고 부어주셔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늘 이 시점,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이 때에 있어서 모세는 아주 상당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세는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제를 누리는 신령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그가 그랬습니까? 우리는 모세가 멀리로는 불타는 혈기로 동족을 위해 애굽의 병사를 때려눕히고 미디안으로 도망쳤던 모습을 봅니다. 그 일련의 행동 속에서 용기를 볼 수 있었을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신령함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강력한 용기를 가지고 민족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의지는 있었지만 그를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실패했고 도망쳤습니다. 가깝게는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보낸 후에 소명을 받을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거듭거듭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릅니다. 그러한 모세의 태도를 보면서 신령함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편견입니다. 그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는 그가 신령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대면하여 말하고 친구가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친밀하게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으며 또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신령함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적어도 그렇게 육적이던 사람, 그리고 신령함을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비범한 신령함으로 누구도 다다르지 못할 경지에서 그 신령함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까지 그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충성된 사람이었다고, 충성스럽게 살아왔다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영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런 신령함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듬는 그런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신령한 인격의 결정적 특징은 하나님이 그 가운데 강하게 임재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강력한 성령을 부어주셔서 신령한 사람으로 만드실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순간에 성령의 강한 권능을 어떤 한 사람에게 부어주셔서 그 사람에게 강한 어떤 능력이 깃들게 하고 무엇인가 남이 행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행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이 신령함은 그런 하나의 영적인 은사 그 이상입니다. 모세가 대면하여 하나님과 말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까지 볼 수 있는 정도의 신령함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인격과 나뉘어 질 수 없는 인격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랜 기간 동안 독특한 삶의 방식을 통해서 획득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항상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도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광야로 보내어졌는데 30세쯤 되었을 때에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에게 내리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내리시는 그 체험을 통해서 이 사람이 전체적으로 강한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면서 말씀에 불붙고 사로잡힌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결정적인 체험이 있기 전에 30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광야에서 다듬어졌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에게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강력하게 부으시는 그런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은 영성이나 신령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급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동안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통해서 형성되어 간다는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충성되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온 삶의 방식, 그 방식에 복종된 장구한 삶의 결과, 그는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경험하면서 이 성화 속에서 신령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그런 신령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영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삶의 현장을 빼고는 결코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와 정상적인 신앙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영적인 체험의 영역과 삶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신앙인은 신비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세계와 치열한 삶의 현장이 서로 붙어 있으며 주님을 만나는 경험이 그들을 삶 속으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길 수 없는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견딜 수 없는 박해를 견디게 하시고, 물리칠 수 없었던 유혹들을 물리치게 하시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핵심적인 가치를 따라, 신앙을 좇아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있을 때 고갈을 느낄 때 즉시 우리는 다시 영적인 은혜로 우리의 영혼의 창고를 채워주셔야 할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어져 갈 때에 갈급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아주 깊이 병들어 있는 사람이거나 거듭나기 않은 사람입니다. 이 때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적어도 모세가 이렇게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기도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금식 기도도 하였습니다.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하나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더 많이 기도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더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나의 온 집에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런 모든 남다른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삶이 동반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의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분을 위해서 자신을 다 쏟아 붓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살아서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참사랑을 알았는데도 그 분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행복이 있다고 성경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세상으로 가기에는 신앙이 아깝고 신앙을 떠나 주님만 위해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아까운 어정쩡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친구가 없고, 신앙의 세계에서도 주님을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소원한 거리를 가진 신앙 생활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무슨 진전이 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일 저녁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여러분들에게 마음을 모두 모으고 추구해야 할 삶의 핵심적인 가치, 마음을 불붙게 하는 목표가 없다면 여러분들의 충성을 입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신령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런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이런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충성스럽게 사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받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받은 것을 가지고 요구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사십시오. 여러분들이 작은 은혜를 받았는데 당장 어마어마한 일을 하라고 그렇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방금 믿기 시작해서 참새처럼 떨리는 가슴을 가지고 신앙에 발길을 들여놓은 사람에게 집 팔아서 건축헌금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은 만큼만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나 주님에 오셔서 칭찬하시는 말씀은 똑같았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두 달란트를 맡은 사람에게 두 달란트를 남기고 나니까 주님이 흡족해 하시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또 남겼더니 똑같이 칭찬하셨습니다. 문제는 받은 것 가지고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충성된 삶, 헌신된 삶을 절대치로 측정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측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의 삶을 우리들이 사모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전설적인 순교자들처럼 살지 않느냐고 주님께서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래도 너희들에게 주일을 지키고 새벽기도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은혜를 주었는데 왜 그것도 안 하고 있느냐 그것입니다. 먼 곳에 나가서 가족을 버려두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선교사로 나설 수 있을 정도로 안 주었지만 가까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곤고한 너희 가족을 위해서 기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은혜를 주었는데 왜 안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을 팔아서, 땅을 팔아서 하나님 앞에 바쳐도 아직까지도 어림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단 돈 10만원이라도 하나님 앞에 드려도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충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전설적인 크리스챤이 되어서 역사에 남을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 목사가 되겠으며 다 전도사가 되겠으며 다 설교자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다 선교사가 되고, 어떻게 다 순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각자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적은 것, 혹은 큰 것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큰 것을 받아서 조금 크게 사는 것보다는 작게 받은 사람들이 그 작은 한도 내에서 맘껏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을 때 칭찬을 하셨는데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이 아마도 네 달란트를 남겼다면 그렇게 칭찬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절대가치에 있어서는 두 달란트보다는 네 달란트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성되다고 하시는 것은 피를 토하고 사는 것만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주시지 않은 것, 그 이상은 내가 살 수 없지만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만큼 주님이 내게 주신 지식의 빚만큼, 그리고 더 많은 지식의 빚을 원하며 주님이 주신 기회들을 선용하며 힘 닿는대로 우리의 최선을 다해 주를 위해서 사는 삶, 이것이 충성된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비록 그 은혜가 작은 것이라도 끊임없는 영적인 성숙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더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말하자면 신령함의 깊이를 더해 가는 체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주님 앞에 충성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쏟아 부으며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향해서 선한 마음을 품고 어찌하든지 주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살지 않으면 살지 않는 그 동안 우리는 신속하게 부패해 가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인 진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을 때 우리에게 의무를 주셨으며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맡기신 독특한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더 큰 은혜들을 예비하시고 더 깊은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 신령함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셔서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맡기셨는데 아무 것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무를 태만히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고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 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웅적이고 전사적인 그런 위대한 삶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주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장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여 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더 큰 사명을 주시고 이전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자신만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앞에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러분들이 이미 받은 바 은혜, 주님이 알게 하신 것, 주님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보게 하신 것, 그것을 기초로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의 악함과 패역함과 문제를 보여주셨습니다. 일단 말씀의 빛으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패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으면 이제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있는 깊은 패역을 보여주실 때 아파하면서도 기뻐합니다. 왜일까요?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은혜로 보여주셨으면 즉시 여러분들에게는 사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여러분들의 잘못과 패역과 더불어서 얼마나 진지하게 싸우면서 그것을 결국 그 패역을 고치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협조하는가 이것이 아니면 어떻게 여러분들의 충성을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아, 정말 더럽구나 하고 본 후에 돌아서서 금방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 받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씀의 놀라운 깊은 세계를 보았다는 그것이 결국은 그에게 그대로 살아서 자신을 고치지 않으면 이후에 이미 그런 것들을 아는 사람으로서 받을 형벌이 크다는 것만을 입증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만약 도무지 기도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으로 어느 순간에 기도의 문을 열어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셨고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오는 행복을 경험했다고 합시다.
지하철에 앉았을 때나 흔들리는 버스 안에 앉았을 때나 혼자 운전을 하고 갈 때나,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 하나님하고 부르면 가슴 깊이 그 분의 숨결이 느껴지고 그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서신 분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충성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습니까? 안 될 때는 안 되서 못했을지라도 기도의 문을 열어주셨으니 그 다음에는 활용을 해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놓고는 어떻게 그 사람이 충성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불신자를 만나기만 하면 새가슴이 되어 가슴이 콩닥콩닥 었습니다. 교회 한 번 와보세요 소리를 와들와들 떨면서 하고, 그 교회가 어디 있느냐는 한 마디 말에도 화들짝 놀라서 꽁무니가 빠지게 돌아오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전도해야 할 지 알게 하셨습니다. 불신자를 향한 담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셨을 때 그 사람은 이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알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내게 주신 그 재주 안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그 일을 위해서 꾸준히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충성된 삶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구역장을 맡겨주셨습니다. 교사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에게 교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왜 저 시베리아에 있는 불쌍한 에스키모 사람들을 위해서 직접 가지 않느냐고 그렇게 다그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역이 선교의 소명을 받은 사람이 그 일을 안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들이 충성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구역장이면 자기가 맡은 그 구역의 식구들을 잘 돌보고, 그들이 신앙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희생해서 예수님을 본받은 섬김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됨을 입증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이 충성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 영웅적인 사고 방식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항상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있고 그리고 각자 하나님께서 그 은혜 속에서 주시는 사명이 있고 서야 할 자리들이 있습니다. 거기를 떠나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자신을 다 드리고, 다 드렸는데도 모자라고 일의 결과가 왠지 흡족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안타깝게 능력을 구하면 그 때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충성되게 살지 않는 사람에게 능력이 왜 필요합니까? 싸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총을 주면 뭐합니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에게 많은 지식이 있으면 뭐합니까?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과가 너무 비참할 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도 그렇게 밖에 못할 것 같은데 결과는 만족할 수가 없을 때 좋으신 하나님을 왜 이렇게 초라하게 섬길 수밖에 없을까 좌절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너무나 조잡하고 초라한 결과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럴 때 장작을 벌여놓는 것은 제가 할 일이나 불을 내리셔서 태우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간구하며 능력을 더해주시기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응답이 없다면 그 이유는 충성된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이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을 자기 할 일을 하기 싫으니 하나님이 대신 해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충성되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극적인 변화를 받아서 말씀 사역을 시작한 지 벌써 12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수 십 만 명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개중에는 진짜 뒤집어지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은혜 받은 그 결과를 지켜보게 되는 이 목회의 현장이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 많이 속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큰 말씀의 은혜를 받고 천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부단히 자기를 부수는 열심으로 자기에게 주신 그 은혜가 자신의 생에 의미하는 사명에 대해서 눈뜨고,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특별히 충성되게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미끄러지더라는 것입니다. 모두 부패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오랫동안 커다란 의문이었습니다. 아주 부인할 수 없게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던 사람,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연단 되었던 사람, 인생을 바라보는 사고의 방식이 완전히 돌아섰던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어쩜 저렇게 철저하게 미끄러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은혜가 강력해 보였지만 실상은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로 미끄러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몇 해 후에 그런 판단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가 찢어지는 장엄한 부흥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 오히려 견고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한 번에 자기의 세계가 찢어지는 것 같은 광대한 부흥의 세계는 못 만났지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서 깨뜨리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붙들고 잘 간직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더뎌도 하나님께서 그 깨달음 위에 더 큰 것, 더 큰 것을 주시면서 자기가 와르르 부서져 내리는 혁명적 체험이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으로 놀랍게 변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두 가지 문제와 관련이 되는데 성화를 위한 죄를 죽이는 철저한 자기 성화의 노력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죄를 죽이고, 주께서 은혜를 주실 때 자기에게 주신 삶과 섬김의 목표를 향해 집중된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이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코 골방에 앉아서 죄만 죽인다고 죄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해 사는 목표, 그것을 추구하고 추진해 나가는 삶, 그리고 죄를 죽이는 내적인 은밀한 생활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이지 하나만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던 수도원에서 도시보다도 더 심한 죄악상들이 발견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럽게 살지 않으면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님을 위해 한 번 잘 살아보려는 사람이 충성스럽게 살지 않는 것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지금 살아있는 것 같아도 얼마 있지 않으면 거의 죽은 자와 같이 발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고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교역자 수련회에서도 제가 강력하게 언급했습니다. 전도되어 와서 등록하고, 새신자 교육을 받고 잘 양육되어서 교회 출석도 잘 하게 된 사람들, 왜 출석만 합니까?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하다 못해 주일 학교 신발 정리라도 하십시오. 주일에 주차라도 도우십시오. 왜 아무 것도 안 합니까? 직장이든지 가정이든지 목표를 두고 간절히 주를 위한 충성이 없는 사람은 결코 신령한 사람이 될 꿈도 꾸지 마십시오. 계속 여러분들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신령함에 눈 뜰 수 없을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의 현장이 없는 사람들이 신령해 지려고 하는 것은 영적인 탐심이지, 신령한 갈망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두 번 째로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그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야단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떠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니까 영광의 구름도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자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미리암이 눈같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자를 보셨습니까? 피부가 곪아서 하얗게 변합니다. 문둥병균이 퍼져서 곪게 되면 진물이 흐릅니다. 왕궁을 오갈 수 있는 자매였으니 용모도 아름다웠던 자매였을 것입니다. 그가 문둥병자가 된 것입니다.
당시의 문둥병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 징벌 받은 저주의 표시였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이스라엘 진중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와 같이 광야에서 마치 여전도사와 같이 동역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치 광야 교회에 모세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이렇게 미리암을 벌주시는 것이 옳았을까요?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과 충돌을 일으키는 행동이 아니시냐는 것입니다.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지도자에게 대들면 혼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이 징벌은 미리암의 영적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징벌이었습니다.
죄 중에서 심각한 죄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신령하지 않으면서 신령한 척 하는 것, 그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항상 자기의 기도의 체험 같은 것을 말하면서 부풀려서 아주 자기가 신령한 세계를 들락거리는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경쟁이라도 하듯 말입니다. 항상 자신의 은혜 체험에 대한 간증을 할 때에 늘 조심해야 할 대목입니다. 부풀리지 말고, 그리고 그 간증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될 수 있는 대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말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영적 교만이 이렇게 무서울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모두 이 미리암과 같은 위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영적 교만의 위험은 초신자에게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 등록한 사람이 영적 교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위험은 없습니다. 이런 위험은 나름대로 신령한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기도해 줄 때나 아니면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자신 속에 번뜩이는 무언가가 있다고 사람들을 난도질하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굉장히 조심해야만 합니다.
이 징벌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왜 아론은 놔두시고 미리암에게만 벌을 내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12장 앞부분에 보면 모세를 향한 부분에 미리암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많은 주석가들이 추측하기를 성격상 아론은 2인자에 적합한 성격이었으나 미리암은 우두머리 기질이었음을 언급합니다. 선두에 선 그 미리암을 징벌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미리암에게만 징벌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커다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징벌을 하신 이유를 금방 이해했을 것입니다. 영적 교만의 악함을 확실하게 가르치신 교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궁금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모세가 이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무적인 기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살려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모세가 하나님과 통하는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는 그 자체보다도 이런 모세의 자세가 저는 참으로 부럽습니다. 반란을 일으키면서 모세를 비방할 때 성경은 모세의 인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 모세는 그의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 ” 그의 온유함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자가 모세인데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이렇게 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후대에 삽입이 된 것입니다. 모세의 죽음의 기사와 같이 삽입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자기의 충성스러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의 태만을 볼 뿐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가 온유하다고 말하지 않고 아직까지도 성품 구석 구석에 남아있는 그 포악을 봅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항상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칭찬해 줄 때 웃으면서 좋아하기는 쉽습니다. 공격을 받고 비난을 받을 때 온유해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서 근거 없는 비난으로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할 때 그 온유함의 원천은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의 존재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들었을 때 그래도 이 미리암은 여자로서 보스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백성들 모두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치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동조자가 있을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섣불리 나서지 않습니다. 그 동조자들은 모세의 리더쉽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그 비난에 동조한 수많은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때 모세는 온유하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온유함이란 맥없이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항상 이해 관계가 자신에게 얽혀있을 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보이는 너그러움과 자비의 특성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분노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온유한 사람이 분노하지 않음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 관계가 얽혔을 때 분노하지 않음으로 온유한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결단, 용기, 의로운 일들을 위한 분노, 하나님을 향한 치열한 열심, 때로는 거기에서 비롯된 과격한 발언 등이 온유라는 성품에 의해서 다 덮여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셨을 때,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모세는 비난받을 때 온유함이 지면에 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맥없는 사람이었습니까? 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온유함이 용기를 삼켜 버렸습니까? 온유했기 때문에 그의 단호함이 침범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온유하면서도 단호함, 용기, 결단, 지도자로서의 판단력, 탁월한 시행하는 결단력, 그 모든 것이 살아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온유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비난받을 때에 그 인격을 입증하듯이 가식된 것이 아닌 진실된 온유함을 보였습니다. 미리암이 얻어맞아 고름이 철철 흐르는 문둥병자가 되고 나니까 이번에는 모세편으로 갔습니다. 한번만 살려달라고, 이렇게 비참하게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느냐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때 모세의 태도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가 어찌 거두랴 하면서 너희들이 직접 하나님께 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미리암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 마음이 연민과 긍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병사를 때려죽이고 도망가던 때의 그 기질은 어디 가고 이제는 자기를 향해 가장 악랄하게 반역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미리암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착한 인격입니다. 이 착한 인격과 충성된 삶이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같이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우리 주변의 착한 사람들은 힘이 없고, 결단도 없고, 그저 사람만 좋고, 주기는 좋아하는데 실속도 별로 없고, 또 뭔가 결단해야 하는데 미적미적하는 그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충성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확신과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결심이 있습니다. 일을 맡겨주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하는 자기 주장이 있습니다. 그 충성된 사람은 주위에 충성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항상 상처를 잘 줍니다. 왜냐하면 포악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했습니다. 교회를 섬기고자 여러모로 애를 썼습니다. 오후예배 전에 청년들과 함께 찬양하는 순서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오랫동안 충성하며 섬기던 한 집사님이 울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시더랍니다. “ 주여, 우리 교회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기타를 치다니요, 캬바레에서 치는 북이 웬말입니까! 주여...” 뭔가 자기 확신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은 자기만 옳다는 독선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을 하찮게 보는 영웅주의적 심리입니다.
이런 부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은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에게 있는 위험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는 자기 확신이 강하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확신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쓰레기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만일 미리암을 이렇게 여겼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를 위해 이렇게 기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착한 인격과 충성을 같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의 칭찬은 “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였습니다. 주인이 “ 충성되고 착한 종아.” 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충성된 것이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면 착한 것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에게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른 삶의 방식과 악한 것이 하나가 된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정말 한 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간증을 들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머리 속의 깨우침은 있으나 가슴까지 내려오는 감화가 없는 것입니다. 충성된 삶의 방식은 있는데 착한 인격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럽게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의 몸에서 살기가 느껴지면 안됩니다.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충성되게 살아가면서 주를 위해 한눈 팔지 않으면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핵심적인 가치와 소명의 완수를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눈빛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향해서 고정된 채 번뜩이지만 그의 몸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착한 인격이 느껴져야 합니다. 내게 비록 저 사람 같은 불굴의 확신은 없지만 왠지 저 사람에게 다가가면 나를 용서하고 나를 일으켜서 자기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비결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영웅만 좇아올 수 있는 길이 충성의 길이 아닙니다. 교회는 특공대로 조직된 곳이 아닙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짐승처럼 살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주 앞에 새사람이 되어 전에 방종하게 살던 사람을 충성된 사람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삶의 목표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길을 확실하게 걸어가는 것은 좋은데 타협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서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그 사람들을 향한 눈물을 간직한 충성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책망을 할 때도 온유함으로 경책하라고 했습니다. 경책은 부드럽게 부탁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따끔하게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꾸짖는 것입니다. 싫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온유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 하지 마세요---.”하며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온유함이 아닙니다. 야단을 쳐도 마음으로 그를 버리지 않고 그를 생명을 다해 돌봐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온유함을 가지고 경책하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께 집중된 나머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아왔습니다. 충성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독선과 포악함,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마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아주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실로 오랜 세월동안 범죄하며 사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렇게 못사는 것은 사람도 아니라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랜 동안의 연단을 거치면서 거룩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어 미리암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포악한 신령한 사람. 그 신령함은 거짓입니다.
신령함의 열매는 온유함입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동반된 확신 있는 삶입니다. 왜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 속에는 온유함이 맺힐 수밖에 없는 지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충성스럽게 산 그 위에 그 삶의 방식이 독선과 포악함, 강포함들을 정당화시킨 다음 그것은 결코 올바른 충성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비난받을 때에 온유함이 승하고 반기를 들었던 미리암을 향하여 간절한 중보의 기도로 용서를 빌고 치료를 구하는 착한 인격을 보였습니다. 이런 충성된 삶과 착한 인격이 함께 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충성의 열매 착한 인격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민12:13)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생명을 걸고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세가 옳다고 인정받은 것은 단지 지도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구스인 이방 여자를 취한 것은 하나님이 납득할만한 사유였고 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미리암이나 아론이 받은 하나님과의 교통과는 동일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살 때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교제에 대한 진전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정말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분노뿐 아니라 사명적인 분노도 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즉 도덕적으로 분노할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명에 합당하게 살지 못할 때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리암과 아론이 하나님의 분노를 받은 후에 미리암만 문둥병이 중병이 발명된 사람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아마 미리암이 이 일에 주동을 하였던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모세가 미리암을 위해 마치 자신이 그런 병에 걸린 것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본문을 오늘 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부분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거칠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현상을 오늘날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성화의 진전이 거의 없는 기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 문제제기를 하면서 우리는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모세는 이렇게 충성스럽게 살면서 온유한 사람이었는데 라는 것이 지난 시간의 설교 내용입니다.
오늘은 그 뒤를 이어서 이 질문에 먼저 답을 하고 성경을 풀어가겠습니다. 그 충성이 정상적인 충성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분명히 착한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모든 시간이 기도한 시간으로 기록될 수는 없습니다. 기도하다가 잔 시간은 빼고 헛소리 한 것도 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도 빼고 하나님의 뜻은 알지도 못하면서 엉뚱한 기도한 것도 빼고 나면 나중에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습니다. 충성스러운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 성취에 빠져서 한 것도 빼고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싶은 어서 한 것도 빼고 한 후에 자기 자랑으로 보상 받은 것도 빼고 나면 얼마나 남겠습니까? 겉으로 그럴듯한 삶이 사실은 그런 삶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모세가 자기를 도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반역을 이르킬 때 상처를 받았는데 미리암이 문둥병을 받았을 때 얼마나 좋은 기회였겠습니까? 모든 사람들 앞에서 미리암을 보이면서 자기의 권위를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 다. 오히려 미리암은 구해달라고 빌었다는 말도 없는데 모세는 그를 위해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착한 인격입니다. 이것은 이런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비난받을 때 그 비난을 참는 것보다는 더 깊은 인격을 드러냅니다. 아론이 고쳐달라고 했을 때 주께서 하신 일을 내가 어쩔 수 없다 라든지 주께서 행하신 일 중에 그른 것이 있더냐하고 모른 체하지 않고 마치 자기의 일처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모세에게 특이점을 봅니다.
우리는 지금가지 충성 제일주의에 빠져서 아주 거친 사람이 많았습니다. 교회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 와서 내가 여기서는 성장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가져야 하였지만 신앙이 어리고 상처가 많은 사람이 와서는 내가 하나님께 여기서는 용납을 받는구나 라는 마음도 같이 주어야 하는데 인간의 어찌 할 수 없는 연약함을 감싸안고 끌어안는 착한 마음이 능력적인 교회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진 것입니다. 신앙적이고 영적인 사고가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사고가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식의 엘리트주의에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양의 참된 가치, 교회의 존재의 가치는 기능적인 능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용납하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납하심 느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돈 없는 사람이 소외감을 느끼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게 착한 인격을 모세가 가지고 미리암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과 도전을 받을 때 무저항으로 버티는 것은 그래도 쉽습니다. 그런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면서 그 사람이 상처를 가할 때 그 아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서로 도우며 용납하라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는 십자가의 감화 없이는 우리는 그런 식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렇게 기도한 것이 한순간에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모세가 본래 자기 안에 있던 그 내면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11장 3절에 ‘모세가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고 나옵니다. 그 온유한 인격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모세가 원래부터 그렇게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오래 전에 애굽사람을 처 죽이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는 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면을 보면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처음 애굽에서 도망할 때도 그렇고 80세가 다되어서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부르실 때에도 겸손하거나 온유하거나 착하거나 하는 증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온유함이라고 번역된 부분이 희브리어로는 아나우인데 이 말은 괴롭게 하다 고통을 주다 비참해지다 수동형으로 낮아지다 겸비해지다 등인데 우선적인 뜻은 고통을 주다 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모세는 사실 온유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은 수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직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한가지 중요한 일을 위해 매진하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가지 일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가지 일을 위해 산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 말고는 자신의 인생의 추구할 또 다른 것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가지 목표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고 오직 그것 하나였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오직 그것을 통해서 확인되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것이 있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런 것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니 힘을 못쓰고 하나님을 위해 생사간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의 기도는 언제나 처절합니다. 장난처럼 기도하고 농담처럼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살을 쏴 보셨습니까? 과녁을 향해 쏘면 화살이 가다가 이리저리 돌다가 놀다가 가서 과녁에 꽂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쏘면 슝 하고 날아가 바로 꽂히는 것입니다.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가서 과녁에 꽂힙니다. 모세가 그런 인생의 목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목표가 있어야 충성된 삶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목표가 전 생애를 뒤덥지 않더라도 그런 목표가 있어야 충성된 삶이 산출되는 것이지 마음에 불타는 목표가 없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충성스러운 삶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충성스러운 삶을 살다가 보니까 그렇게 거칠고 투박하였던 사람이 이렇게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애굽사람을 때려 죽이고 도망가는 사람이 자기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이 걸린 한 영혼을 향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교할 수 없는 현격한 차이를 느낍니다. 그렇게 착한 삶이 온유한 인격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온유한 인격이 되었습니까? 그렇게 거친 인격과 온유한 인격의 사이에 모세가 한 일은 수도사적인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산 속에서 차나 먹으면서 도나 닦으면서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 미친 듯이 살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인격으로 바뀔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아나우라는 온유함이 괴로움, 고통스러운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처절하게 연단 되어서 비참함을 깨닫는 속에서 맺히는 열매가 착한 인격이라는 것이라는 사상을 희브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단지 일에 미친 사람과 충성스러운 사람의 차이는 일에 미친 사람은 오로지 일 자체의 실패와 성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성취하건 못하건 간에 일의 성취되면 성취되는 포만감이 있겠지만 일이 실패되면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에 대한 기능에 대한 반성과 후회입니다. 예를 들면 뭔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이 일을 하려는데 이 일이 실패하면 그 실패의 의미 같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실패하였을까 전략이 잘못되었다 사람을 잘못 썼다 적기에 위기 대처 능력이 약했다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면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겠다라는 정도의 사고 방식만을 가집니다. 성공하였을 땐 왜 성공하였을까 작전이 훌륭하였고 내가 잘 지휘하였고 실행하는 팀이 잘했다 그래서 성공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에 대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실패를 하였을 때 그 원인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분석하지만 실패의 의미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공할 수밖에 없는 좋은 계획을 세웠는데 우리가 왜 실패하였을까 하나님은 왜 우리가 이 일에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셨을까 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 가지 대답을 얻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 준비되지 않았다 방법과 모든 것은 옳았지만 동기가 잘못되었다 혹은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었다 라는 영적인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성공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사고로 일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양자의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거친 사람이었던 후로 40년 세월동안 주님을 섬기고 살았던 마지막 말년에 그가 그렇게 온유한 사람으로 나타났는데 그 40년 동안 인격적인 놀라운 변화, 온유함에서 흘러나오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수도와 수양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는데 이 삶이 일에 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소명의식을 느끼며 어떤 영적인 원리를 찾아가며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12장 5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론과 미리암 앞에 인정한 것은 모세는 나와 대면하여 말하였던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혼신을 다해 살았는데 단지 일에만 자신을 바친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삶을 누렸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대한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목회로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평신도로서 사역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섬기며 산 사람인가는 그 사람이 만지고 지나간 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인격 속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 제 인생의 성패는 그 마지막 순간에 남겨 놓은 교회에 대한 규모와 교인들의 수와 활동에 대한 업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마지막에 남아있는 것이 거룩한 신앙의 인격입니다. 거기서 성공하였다고 말할 때 그 인생에 기록된 수많은 업적이 진짜 충성일 가능성이 있지 마지막에 남은 것이 조잡하고 거칠고 황폐하고 파괴된 인격밖에 남은 것이 없다면 그가 정말 충성된 삶을 살았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도 이것이 입증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걸음 더나가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충성스러운 삶이 거칠고 황폐한 인격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온유하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인격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입니다. 그 비결은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충성스러운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않는 충성스러운 삶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하지 않는 일도 충성스러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비추어졌기 때문이고 한 사람이 은혜 안에서 사는지 안 사는지 다른 사람들이 보아서는 잘 알 수 없고 그 자신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렇게 비춰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는 일에 미쳐서 충성스러운 듯이 살아가는 차이는 무엇입니까? 단지 일에 매몰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교회 부흥에 가면 가장 답답한 일이 강사가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면 곡 들어야 할 사람들은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1순위가 그 교회담임 목사님과 그 교회 부교역자들은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변화될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 장로님들도 돌아다니면서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있어도 교인들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들은 받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모님들과 교역자 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머지 교인들은 울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아무리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4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지 않는 한 교회가 변화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변화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결정적인 변수를 가진 사람들은 부흥회를 자기가 변화될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변화시킬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부흥회나 사경회 같은 것으로 변화를 받기에는 자신들은 워낙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강적이 1호가 목회자이고 그 다음이 장로님들입니다. 이유는 아까 말씀 드린 것 같이 자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리에 세워서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고 싶은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일을 처리하는 한 기능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와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지 않는다면 설교단에서 설교를 하는 것과 길거리에서 약을 파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일을 위한 단순한 기능으로 살아가는 것을 영적인 은혜를 대치하는데 길들어진다면 그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나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많이 사용하실수록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고 감동과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자신은 마치 물을 흘려보낸 파이프처럼 아무 것도 안 남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대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초보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은 이 두 가지가 분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가 너무 많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지만 절대적인 시간의 문제와 일을 줄이고 안 줄이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식으로 그가 사명감을 지니고 어떤 식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느냐의 방법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기도하고 말씀을 더 깊이 읽고 자기를 성찰하는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다고 해서 모든 그리tm도인이 깊고 심오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추수리는 기회로 삼느냐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간 많이 있고 한가해서 깊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묵상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추수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쁘게 하나님을 섬길 때에도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번쩍이는 지혜와 통찰들이 쌓여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하던 때에도 시간이 많고 한가 하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바빠서 기도할 때에도 내 24시간은 다른 사람의 72시간이 되도록 시간에 축복해 달라는 때였습니다. 일주일을 살아도 3-4시간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그런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일을 어느 정도 줄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오히려 견딜 수 없이 지치고 괴로운 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해 주기도 합니다. 고린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에는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하는 사선을 넘나드는 순간에 깨달은 놀라운 은혜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것이었습니다. 놀면서 좋은 침대에 누워서 과일이나 먹으면서 깨달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그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변화 받는 것은 방식과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교사를 맡았는데 어떻게 이 일년만 채우고 도망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성실한 생활도 여러분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사는 삶을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대강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깊이 녹아 본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신 사명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처절하게 깨닫고 자신의 내재하는 약점과 부족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설 수밖에 없다는 두 가지 사실 사이에서 긴장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주님의 거룩한 간섭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자신이 맡고 있는 사역에 간절히 원하는 태도가 자신의 중심이 물같이 녹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비참한 사람, 고통 하는 사람, 아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아픔과 깊은 고통을 느낀 사람들의 정상적인 반응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이 성취되면 일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의지하면서 고백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교만과 자존심이 뭉개지고 내면의 세계가 정돈되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포도주에 설탕을 뿌려서 초를 뿌려 땅에 집어놓으면 나중에는 포도도 없고 설탕도 없고 포도주만 남는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게 주고 거칠고 못된 인격 속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는 마음을 넣으면 나중에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 믿으면서 뼈 빠지게 고생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는데 그 사람들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무엇이 안 들어가서 그런 겁니까? 사실 뼈 빠지게 일한다는 것도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사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우리의 육체적인 면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모두 영적이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충성스러운 삶을 입증하는 것이 고단하게 일하는 물리적인 수고만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시켰기 때문에 내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고 맡겨진 일이 작은 일이라도 그일을 어렵게 하는 수많은 영적인 것을 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구역장이나 교사가 되어서 수십 명의 식구를 맡겨 주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하는 사람도 있고 한명을 양육하라고 맡겨 주었는데 저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보면서 내가 이렇게 변화되지 않는데 네가 어떻게 변화되겠냐 하면서 그의 변화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강팍한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변화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변화되어서 그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식의 접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들이 볼 때 수십 명을 거느리고 수고하는 것과 한 명을 두고 수고하는 것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 명을 맡은 사람의 일은 한가해 보일 수도 있으나 골방에서 그의 영혼을 기억하면서 그 영혼의 변화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는데 달렸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자신을 부수면서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길 바라는 확신을 가지고 비참한 사람의 세계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만나고 깊이 자신의 본질을 알고 마음이 개트려 질 때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면서 깊이 깨트려지는 것이 계속 유지될 수 있고 말씀에 의한 하나님의 감화가 계속될 수 있지만 자신을 감화시키고 자신을 깨트리면서 그래서 자신이 비참해져서 아나우의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착한 인격으로 변화해 가는 깨어짐의 세계는 하나님께로 충성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깨어지는 세계와 함께 유지되지 않으면 지속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한 사람이 받고 눈물을 쏟으면서 지낸 날이 몇 칠만 지나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말씀이 맞기 맞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어떤 성도님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순종하라는 설교에 대해서는 은혜를 많이 받아습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멘 할 수 있겠는데 지금 당장 순종하라는 것도 승복할 수 없고 완전히 모든 일에 순종하라는 것도 순복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말한 것입니다. 천천히 순종을 해야지 어떻게 모든 일에 순종할 수 잇겠는가 5-6가지 불순종하다가 이제 1-2가지만 순종해도 대단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은혜 받은 성도의 마음 속에도 드는 것입니다. 하물며 깨달음에는 관심이 없고 삶의 초점이 없는 사람의 감화가 며칠이나 가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인간 속의 내재하는 강력한 부패한 본성에 대해 무리 우리는 너무나 순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모세가 자기를 대적하는 미리암에 대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보면 모세는 미리암을 용서한 정도가 아니라 그는 처음부터 미리암이 자신을 도전할 때부터 미움이 있지도 않았던 것을 봅니다. 그 미리암에 대한 온유함은 자신의 일에 대한 정당성과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온유한 것이었음을 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일을 다 감당하면서 처절하게 자신이 깨어져 있었습니다.
모세의 사역의 특징은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또한 이런 모습을 모세에게 배운 흔적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아이성 침략에 실패 하였을 때 여호수아가 처음 한일은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모들은 아이성 실패의 책임자들과 대책을 분석해서 보고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실패한 이유를 하나님께 얻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일를 감당해 나가는 것이 충성스러운 삶인데 이런 식으로 충성스럽게 일을 감당하고 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불신앙의 세계에서도 성격이 고약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던 처녀가 층층시하에 시집살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그 상황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 성질 못 버리고 다 뒤집어엎고 이혼하고 도망 나오는 경우와 또하나는 잘 참아서 사는 것인데 잘 참아서 살았다고 하면 이제 진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도 배우고 질서도 배우고 동기간의 사랑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고난과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한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성찰의 시간을 가진 사람은 어느 정도 인간성이 변하는데 전능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면전 앞에서 자신의 부족으로 그 한계 상황에서 분투하다가 아나우의 사람, 주님 앞에서 비참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호소하면 그 은혜에 의해서 당신에게 이루신 일들이 성취되어 가는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놀랍게 변화되어 가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역장 3년이면 목회자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꺽어진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역식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라는 생각으로 감당해 나가는 사람은 이렇게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위해 울고 그 영혼의 변화 되어서 새사람이 되는 기쁨을 경험해보면 진정한 목양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 깨어짐의 세계가 동반되려면 삶의 초점이 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의 사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 있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방의 땅에서 불신자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더 넘나드는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스스로 나그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환란과 핍박과 적들에게 둘러싸여서 고난과 죽음의 골짜기를 넘나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청풍명월을 벗삼아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던 사람들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습니다. 치열한 전쟁터, 이교세력들과의 싸움 처절한 죄악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든지 거룩한 신앙의 정조를 지키려고 생명을 걸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독점적인 교제의 세계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 중에서 일을 하지 않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그 일만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일이있습니까? 나는 죽어도 그 사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는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지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은 하나의 신념을 지녔습니다. 죽어도 조국의 광복을 보면 여한이 없겠다는 애국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이라는 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 없이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알면 뭐하겠습니까? 치열한 삶의 현장도 없고 주를 위해 살고자하는 불꽃도 없는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주님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그 속에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느끼면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서 아나우의 마음이 되어서 비참한 사람, 자신이 하나님 일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님이 자신의 일에 진전을 주지 않을 때 미친 듯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괴로워하는 사람, 일에 진전을 주실 때 자신이 깨어지지도 않는데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을 때 내가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더 잘 살 수 있을까하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돌아보면서 관찰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최근 3년 동안 깊이 깨달은 것은 이전에는 일은 경건에 위협하는 요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 주위의 선배들이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일에는 정말 열심히 하였는데 자신이 파괴되는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파괴되는 것에 일이 주범이 아니라 자신이 주범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성경이 주목하는 영적인 방식에 의해 그 일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에 의해서 자기가 파괴되는 것이지 그 일 자체에 파괴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존칼빈, 웨슬레, 휫필드 이런 사람들이 50대 초반에 삶을 마친 것을 봅니다. 왜 그럽니까? 일평생을 너무나 자신의 힘에 넘치도록 주님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과로사한 경우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삶과 상황들에 충성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목회지에서 처절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죽은 경우들입니다. 모두 그들이 힘에 넘치도록 수고하였습니다. 벌써 한해가 넘어가고 인생의 시계가 오후로 접어들었는데 우리는 정말 무엇을 주님을 위해 한 것이 있습니까?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 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햇빛같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 쓸모 없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광대한 사랑, 쓰레기같이 처분함이 그분께 영광이 됨에도 불구하도 긍휼히 여기서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면서 좌절하였을 때는 희망을, 죄를 지었을 때는 용서를 베푸시면서 다시 회복시켜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는데 무엇을 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에 계속 빚지면서 살아가는데 내 꿈과 내 마음과 내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드려졌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일에 분량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적인 업적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가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물리적이고 물량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이 증거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 앞에 가서 다시 죽고 살지 못하니라고 선고를 하였을 때 그가 면벽을 하면서 한 기도가 제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선한 행실로 살아온 것을 주님이 내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그런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까? 한가하게 놀고 배교에 가까울 정도로 태만하게 산 것에 비하면 우리는 분투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배교에 가까운 방종한 사람과 불신에 가까운 사람에 비교하면서 위로를 얻어야 합니까? 우리가 히브리서에 11장에 나오는 자기를 다 드려서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과는 비교 될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시대에 자기의 것을 남김없이 다 바치고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다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살던 사람들,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주님의 사명을 부여잡고 살았던 사람들과 우리를 비교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의 삶의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머리와 손발 보오니
큰 나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주님이 자기의 것을 우리에게 허비하고 아버지를 위해 다 바치시고 소유도 없고 가족도 없고 거처도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분이 가난한 삶을 선호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자가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부자는 거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그분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고유한 일에 자기를 다 쏟는 충성심과 하나님 한 분을 위해 사신 결과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예수님의 별명이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그 충성되신 주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셔서 그 핏길을 걸어가게 하신 이유는 그 길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내 아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서 너희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들인데도 사자와 같이 산 사람들, 주님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십자가의 감격 속에서 산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자기를 다 버리는 헌신으로 살던 사람들은 고난을 받을 때 자기들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삶을 배교에 가까운 그 시대의 다수의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위안을 얻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충성스럽게 살아가지 않으면 미래의 상도 없고 거룩의 진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트려져서 주님을 닮아 가는 삶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기도의 제목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내가 너의 무슨 기도를 들어주랴고 할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울면서 하나님, 내가 너무나 많이 기도해서 뼈 속까지 묻혀 한이 되어버린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기도 제목이 세계를 움직이지 않는 기도 제목이어도 상관없습니다. 한 영혼의 위한 구원의 소망이어도, 내 구역의 식구들의 변화를 위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그 사람의 삶의 초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가 그 강포가 하고 거칠며 야만적인 사람이 이런 인격을 가지고 주님 앞에 징벌을 받으며 서 있는 미리암을 위해 가슴을 찢으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초점을 가진 처절한 삶을 통해서 그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아나우의 마음을 가지고 살 며 그의 인격이 착한 인격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살면서 이런 사람이 되시길 하나님 앞에 빕니다.
17.착하고 충성된 종 Ⅰ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25:23)
교회를 별로 다니지 않은 사람들도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는 알고 있을 정도로 자주 설교되는 비유입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들이 잘 듣고 익숙해진 성경의 본문일수록 사실은 우리들이 모르는 부분들이 훨씬 많은데도 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 익숙한 본문들에 대한 우리들의 위험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저는 엄청난 양의 비유를 모두 설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들이 다루고 있는 충성에 대한 시리즈를 진전해나가는 동안에 필요한 부분들을 다루는 것이 오히려 요즘의 영적인 분위기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잘 아는 부분이지만 가상의 한 주인에게 종들이 있었는데 그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겨주고 어디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달란트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인가. 이게 원래 당시 금전의 명칭입니다. ‘금화’ 요즘 이것을 어떻게 환산해야될지 감이 안 잡힙니다.
그런데 88년도에 제가 어느 책을 번역하면서 한번 거기에서 달러로 환산해놓은 것을 인플레이를 고려해서 그 당시에 환율을 적용해서 제가 한번 심심해서 계산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정확한 수치가 될지 모르지만 인플레이까지 모두 고려해서 달란트 하나가 96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현재 원화로 계산해서 얼마인가, 이렇게 판단하기는 힘들겠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때에 달러 환율이 한 7-800대 일이었으니까 지금으로 계산을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액수의 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 우리가 이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달란트’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그저 몇 천 원이나 몇 백원이 아니구나. 그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굉장히 커다랗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일생에 만져보기 쉽지 않은 돈이었고 더더군다나 노예들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 어마한 액수의 그런 가치가 있는 금화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인이 맡겨놓고 그리고 떠났습니다. 주인이 그 사이에 와서 지도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보고를 하도록 누구 심부름꾼을 보낸 적도 없고 어째든 놔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왔는데 몇 년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긴 세월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오랜 후’라고 그랬습니다. 돌아왔더니 이제 이 사람들이 한 사람은 한 달란트를 원래 있던 것을 그냥 가지고 왔고,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더 남겨서 네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겨서 열 달란트를 가지고 왔더니 주인이 한 달란트 맡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바깥 어두운데 슬피 울며 이를 갈아라” 그리고 책망을 하며 내어쫓았고 그리고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맡은 종들에게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네가 더 큰 것으로 네게 맡길지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글자까지도 거의 완벽한 칭찬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를 파고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비유가 놓여 있는 마태복음 25장에서의 문맥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문맥은 24장과 25장은 잘 읽어보시면 싹 빼버려도 23장에서 26장으로 연결이 될 것 같은 그런 문맥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24장과 25장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교훈 하신 교훈의 내용들이 집약되어서 23장과 26장 사이에 삽입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24장과 25장에서 다룬 것은 무엇인가 하면 24장에서 다룬 것은 말세에 관해서 다룬 교훈입니다. 그리고 25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그 유명한 열 처녀의 비유,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 등이 나오는데 이것은 결국 신앙생활, 깨어있는 신앙생활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실제적인 지침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말세 후와 함께 엮어져 나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어떤 신앙과 삶에 지혜를 보여주시려고 하는 의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거두절미하고 쭉 연결을 해서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늘 설교 시간에 말씀드리지만 어떤 성경의 가르침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하는 그 자체가 아주 굉장히 강력한 메시지를 지닐 때가 있습니다.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그만두고 우선 어떤 가르침이 성경의 어느 문맥에 놓였을 때, 그 위치 자체가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여기에서 말세 후를 말씀하시면서 말세 후에 되어질 배교의 상태라든지, 말세에 되어질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종말의 상태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쭉 말씀하시면서 충성하는 삶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미 있는 그 위치 자체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는가 하면 마지막 때가 될수록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자체가 깊이 동의되지 않습니까? 전혀 동의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를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왜 그냥 생각할 시간을 사회가 주지를 않습니다. 특히 요즘에 사업이나 직장 생활 같은 것은 그렇게 인생을 어떻게 사나, 내가 이 사업을 해서 마지막에 뭘 할 것인가, 이런 것 생각하다가는 경쟁사회에서 다 추월 당하고 자기는 뒤로 쳐집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면 막 뛰어가면서 왜 뛰어가는지도 서로 모르면서 달려가는 그런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왜 해야지 되는지, 내 인생에 이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것 묻지 말고 그냥 일 자체를 사랑하고 거의 미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퇴근하면서 그런다고 합니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퇴근합니다.
그런 사회이며 그리고 또 하나는 굉장히 기계 문명과 물질 문명이 발달되면서 인간이 굉장히 고달파집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동차가 없을 때에는 그렇게까지 멀리 가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아예 꿈도 못 꿉니다. 이틀 시간을 내지 않으면 못 가는 거리이니까, 있으니까 공간을 초월해서 막 달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편해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하면서 살게끔 된 것입니다. 집에 있다가 어디에 가면 연락이 안 됩니다. 연락이 안 되면 그 동안이라도 마음이 편한데 이제 여기 족쇄가 하나 있어서 띠리릭 하고 전화가 오든지 부르륵 떨든지 하면 여지없이 받아서 코가 꿰입니다. 어디 있어, 그럼 어디에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지 다 아는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두 코가 꿰어서 살아가니까 더더군다나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나 자신이 인생을 왜 사는지에 대한 가치에 관한 문제를 질문하는 시간적인 여유나 사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원인 중에 하나는 세상이 말세가 될수록 아주 감각적으로 됩니다. 그래서 뭔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고 그런 것을 싫어합니다. 나는 보면 우리 아들도 제일 좋은 것은 게임입니다. 그 다음에 TV, 비디오, 그래도 책을 보라고 하면 만화책이라도 되어야지 만 최소한 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뭔가를 이렇게 쓰여진 글들을 혹은 들려오는 소리를 기억하면서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사고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착착 눈에 들어오는 그런 어떤 감각적인 것들을 원합니다. 요즘 잡지를 보십시오. 잡지가 사분 의 삼은 전부다 그림입니다. 왜냐하면 읽는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보는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감각적인 생활을 해나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질문이 불가능하고 그것보다도 더 궁극적인 이유는 마지막 때에는 예수님이 탄식하신 바와 같이 믿음을 보기가 힘든 시대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가치나 질문, 이런 것들을 갖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이렇게 자신이 아니라 자신 밖에 있는 가치, 즉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치가 아니라 내 밖에 있는 가치입니다. 내 안에 있는 가치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육신을 만족시킨다든지, 내가 즐겁다든지, 내가 신난다든지 이런 것들이 자기 안에 있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은 물론 거룩한 자기가 아니니까 문제입니다.
거룩해진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짜증나고 괴로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늘 말씀드립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고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죄로 가득 찬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뭔가 밖에 있는 가치, 하나님의 나라, 그런 가치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산다는 것은 마지막 때가 되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런 말세의 교훈의 문맥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우리는 이런 시대일수록 이런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육신과 욕심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면 망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진정으로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야지 되는데 그런 삶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바로 충성된 삶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주인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겨주셨습니다. 주님이 그 비유 가운데 또 이런 모두 똑같이 나누어주는 비유가 나옵니다 이것은 양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 가운데는 모두에게 똑같이 맡기신 것이 있고 차별되게 맡기신 것이 있습니다. 똑같이 맡기신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면 시간 같은 것, 저 사람의 시간은 한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려서 서너 시간이 되고 내 시간은 줄여서 삼 십 분이 한 시간이고 그런 것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명은 같이 땡 하고 태어나서 같이 죽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는 날 동안에 시간은 모두 똑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예를 들자면 우리가 각자 생존하기 위해서 소비하는 물질이 똑같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비슷합니다. 저 사람은 뭐 한끼에 소 한 마리를 먹어야 생존이 가능하고, 저 사람은 소가 장화를 신고 지나간 국물만 먹어도 하루를 지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식사 량의 차이는 있습니다. 많이 먹는 사람은 한끼에 한 바케스 가까이 먹을 수도 있고, 저 같이 조금 먹는 사람도 있고 뭐 이렇게 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하여튼 비슷합니다. 비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님께서 똑같이 주신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각기 다르게 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두달란트를, 다섯 달란트를 줬는데 성경에 보니까 뭐라고 했는가 하면 주님이 각각 재능을 따라 주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재능이 좀 적었던 모양입니다. 하나를, 또 한 사람에게는 그보다 재능이 많으니까 둘을, 또 한 사람에게는 다섯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주인의 주권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탤런트’라고 하는 이 말이 여기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관심은 그렇게 왜 차등을 주었는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달란트가 무엇일까? 이 비유의 달란트는 기회입니다. 뭐가 기회일까요? 우선 태어나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회가 아닙니까? 또 내가 부자가 되었다. 항상 부자인 것은 아닙니다. 거기를 캐어 올라가면 삼대가 도달하기 전에 부자가 나오고 또 부자를 캐어 올라가면 삼대 안에 거지가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유한 것도 항상 부유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야기할 때 내가 옛날에 잘 살았는데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유한 것도 기회입니다. 건강도 기회입니다. 펄펄 나르는 것 같아도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습니다. 오는 백발 가는 홍안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안 됩니다. 그런 것도 기회입니다.
또 남다르게 어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해서, 공부를 너무 잘하는 것도 하나의 병의 일종입니다. 너무 잘하는 것도 하나의 특수 현상입니다. 적당히 평범한 게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가 뛰어나서 누구도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막 탁월하게 공부를 한다 그것도 하나의 기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뭐 쉽게 이야기하면 또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임무를 맡기시든지, 직분을 맡기시든지 이런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달란트입니다. 그런 달란트를 한 사람은 그냥 묻어두고 사용을 안 한 것이고,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열심히 활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은 둘을,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다섯을 남긴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그런 평면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그 주인이 돌아와서 두 사람에게 향한 칭찬의 연설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요즘 관심을 갖는 ‘충성’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한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게 네게 더 많은 것으로 맡기리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몇 주에 걸쳐서 생각해볼 것인데 오늘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잘하였도다” 이것입니다.
이게 사실 희랍어 성경에는 “잘했다” 그런 말은 안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는 NIV 같은 데는 well done 이렇게 표현했는데 미국 사람들이 아주 잘 쓰는 표현입니다. 다 됐다. 잘 됐다. 완벽하게 끝냈구나. 완벽하게 끝냈네 잘 끝냈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희랍어 성경에는 ‘유’ 이렇게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부사입니다. ‘well’ 그런 뜻입니다. 좋다. 그런데 직역을 하자면 주인이 와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두 달란트 맡은 자가 둘,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이 다섯 이렇게 내어놓으니까 주인이 딱 봤을 때 잘했다 그렇게 말했다고 번역이 되었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아! 좋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 좋다. 참 좋다. 그것을 우리말로 이제 “잘하였도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좋다. 와! 좋다.
제가 묻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아! 좋다. 주인님 두 달란트를 저에게 맡기셨지요? 둘을 더 남겼습니다. 주인님 제게 다섯 달란트를 맡겼지요? 다섯 달란트 남겼습니다. 딱 말했을 때 주인이 아! 좋다. ‘well you’ 이렇게 말했을 때묻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뭐가 좋다는 것입니까? 김학재 형제만 알면 다 아는 것이니까, 뭐가 좋다는 것입니까? 둘을 가르쳐주겠습니다. 첫째 남긴 그 돈이 너무 좋다. 그 다음에 나는 네가 좋다. 뭐가 좋다는 것입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네가 모르면 다 모르는 거야. 뭐야? 아! 박수한번 쳐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진짜 박수를 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나뉘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나뉘어집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충격적인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충성스럽게 살아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훌륭하게 해서 왔을 때, 주님이 그 일을 해온 현장을 보면서 “아! 정말 잘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 기뻐하시는 감정이 이루어놓은 성취가 일에 대한 기쁨인가, 그것을 충성스럽게 살아서 성취한 사람에 대한 기쁨인가 그것을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충격적으로 들어오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면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삶과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이것이 정상적인 충성에서는 분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메시지들을 성경 속에서 발견했을 때 굉장히 커다란 빛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동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일과 사람의 인격이 분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헌신적인데 인격은 아주 조잡하거나, 또 일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열심 있는 일군인데 가슴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이런 두 가지가 분리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각각 균형을 잃지 않고 동시에 추구되어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은 솔직히 말하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저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충성스러운 사람인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이게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이것이 아주 강력하게 메시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게 지난주 석주 동안 설교한 것과 그 석주 동안 설교한 게 여기서 통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충성스러운 삶과 착한 인격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와서 뜻밖에 많이 남긴 이 종들을 보면서 ‘you well’ 아! 좋다. 아! 좋다. 아! 좋을 수가, 그럴 때에 그 주인의 마음속에 좋다라고 하는 것은 남긴 돈이나 그 다음에 남긴 돈, 성취한 일,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뒤로 넘어가면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이 종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 어마한 액수의 재산의 금액입니다. 그런 엄청난 그 돈을 맡아서 그것을 가지고 일한다고 할 때 생각을 해보십시오. 잘 실감이 안 날 것입니다.
오랫동안 취직도 못하고 놀고 있는 젊은 백수에게 어떤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뭐 좀 해보라고 하면서 1억을 통장에 넣어주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실감이 잘 안 날 것입니다. 1억 정도면 실감이 좀 날까? 푼돈입니까? 한 10억 정도를 넣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일입니다.
여기에서 종이 노예입니다. 진짜 노예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이 종 같아서 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 당시 노예입니다. 노예가 그 돈을 남겼을 때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입니다. 자기 몸값에 비유하면 상상도 안 갑니다. 그런 돈을 맡았을 때,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했을 때, 많이 남겼을 때 이 종들에게는 이 일이 큰 일이었습니까, 적은 일이었습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일었습니다. 주인이 와서 하는 이야기가 뭐라고 합니까?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주인은 이것을 전혀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주인은 지금 두 달란트를 남긴 이 물건이나 이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그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이 주인이 지금 아! 좋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그 일을 통해서, 그 결과를 통해서 드러난 주인을 향한 종들의 인격과 마음, 그것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그 상황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청소하는 것을 좀 좋아했습니다. 아주 좋아했다면 거짓말이지만 참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심란하고 그러면 제 방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책들도 다 먼지를 털고 그러면 뭔가 이렇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화: 월곡동에 사실 때 동리 아줌마들이 놀러 가시면서 아이들을 맡기셔서 애들과 세 집을 다니면서 청소를 한 이야기)
그때 엄마들이 와서 야! 좋다 그럴 때 뭐가 좋다는 것입니까? 청소해서 좋다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뭔가 하면 엄마가 집을 비우고 동리 아줌마들과 어딘지 모르지만 놀러간 것도 미안한데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말썽을 안 피우고 집에 가만히 있어도 할아버지 할 텐데 이렇게 깨끗이 청소까지 하고 엄마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좋다. 그 상황도 너무 좋고,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도 좋고, 집안 청소해놓은 것도 좋고, 너희들도 너무 사랑스럽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생활의 실제적인 것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을 보며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깊이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충성스러운 삶과 인격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충성된 그 사람의 어떤 착한 인격과 이런 것들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게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삶은 충성스러운데 인격은 개떡이란 것은 이 사람의 충성스러운 것이 잘못된 것이든지, 아니면 워낙 인격이 형편없었는데 성화의 과정에서 초기에 일어나는 증상이든지, 장구한 세월을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여전히 일은 지독하게 열심히 하는 일 벌레인데 인격에서는 전혀 주님을 닮은 냄새가 나지 않고 야비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성화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잘하였도다” 사실은 잘하였다는 것이 아니고 좋다, ‘you well’ 아! 좋다. 그러고 주인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착하고 충성되다라고 하는 이 두 가지는 다 인간의 인격 속에 맺혀 있는, 삶 속에 맺혀 있는 인격적인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서 성화의 길을 걸으면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인격 속에 맺힌 인격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하면 인격에서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충동’ 충동은 그렇게 깊이 인격에 뿌리를 박은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오랜 된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격 속에 맺혀지는 열매이고, 충동은 어느 한순간에 어떤 일관성 있는 논리가 없이 어느 한순간에 불쌍하게도 보였다가 죽여버리고도 싶다가 막 이렇게 뒤집혀지는 감정들은 사랑이 아닙니다. 충동입니다. 그런 충동적인 감정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순간에 이렇게 충동적인 감정에 의해서 어떤 일을 행하는 그것을 가지고 충성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어떤 사람들이 굉장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일하고 그랬는데 어느 한순간에 교회를 떠나고 나면 아예 교회 출석도 안 하고 주일도 안 지키고 아예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해버리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뭘 반영해주는 것입니까?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삶이 신앙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동일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야비한 사람이 부산에 간다고 온유해지겠습니까? 부산에서 온유한 사람이 인천에 간다고 해서 야비해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장소와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일관성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인격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 보는 앞에서는 아주 선한데 돌아서서는 칼을 꽂는다. 이것은 야비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 보이는 데서는 칭찬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선한 말이나 선, 이런 것들은 결코 인격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진리를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두 가지는 함께 가는 것이지 결코 따로 따로 추구되어야 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와서 아! 좋구나. 이렇게 말했을 때 그 마음은 그 상황을 비롯해서 거기에 있는 종 모두가 좋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아! 좋다. 이렇게 말했을 때 모든 상황과 모든 달란트 남긴 것, 모든 것들을 반영하고 또 그 일을 통해서 드러난 주인을 향한 인격적으로 신실하고 충성됨, 이런 것들이 모두 표출되었기에 주인이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정신적인 연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더 해석을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잘 보십시오. 지금 주인이 돌아왔는데 두 달란트 맡은 종은 두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내어놓았습니다. 주인이 그것을 보면서 너무 좋은 것입니다. 마치 방안이 깨끗이 청소된 그 광경을 보면서 좋은 그 옛날의 엄마들처럼 ‘아! 좋다. 너무 좋다.’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충성이 입증된 그 상황을 통해서 주인은 이 종들을 예전보다 훨씬 더 신뢰하게 됩니다. 훨씬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이 종들이 자기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입증되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신뢰함으로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자기 같은 노예를 수백 명을 사고 팔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게, 은 삼십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 당시에, 그런데 이것도 작다고 하면서 더 큰 것을 맡기겠다고, 그런 것까지도 이해가 안 가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그럴 수 있습니까? 종이 어떻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인과 같은 레벨에 서 있는 가족들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잔치 상을 벌여놓으면 노예들이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노예는 노예로서의 신분에 있지만 이 일을 통해서 주인이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이 잘하였다고 하는 칭찬을 하면서 주인과 종들 사이에 예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정신적이고 심정적인 연합을 이룬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의 연합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하라고 암시함으로서 마치 가족관계를 방불한 친교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마태복음 6장을 설교하면서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드려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사람을 구제할 때에 은밀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묻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구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기억하십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구제’라고 하는 것은 행위입니다. 누군가를 물질로 돕는 행위이니까, 그런데 이 물질로 돕는 행위를 은밀히 하면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여러분 구제와 같은 선행이 우리를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구제의 행위, 주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섬기는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더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줍니까, 안 만들어줍니까? 가만히 있으면 상책입니까? 대답을 해야지, 무엇입니까? 만들어줍니다.
(예화: 처음 은혜를 받고 여름 성경학교를 맡아 하는데 돈이 모자라 월급 탄 것을 다 바치고자 하는 마음에 주일날 강대 상에 아무도 모르게 올려놓고 도망치듯 나오는데 자신에게 있는 소중한 것을 드리고 나니까 하나님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섬길수록 더욱 귀한 주님
그래서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합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주 보기는 힘들지만 가끔 있습니다. 이상하게 저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시는 것 같고 직감적으로 죄인의 마음에 느껴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 같고, 저 사람이 모든지 말하면 이상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고 저 사람이 뭔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이상하게 훌륭한 방법으로 자극을 해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실 때 그래, 또 뭐 더 할 말이 없니, 또 뭐 있니, 이야기해봐 또 가져와. 내가 기도할 때는 한참 기도해도 가만히 이러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주여, 하고 기도했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은 것 같고 그러면서 마지막에 기도하면서 속으로 주님은 나만 미워해. 나는 그런데 저 사람은 이상하게 항상 친밀함이 느껴집니다. 형제여 오늘 얼마나 아름다운 날입니까?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상하게 무슨 사춘기 소녀들이 길에 구르는 낙엽만 봐도 깔깔거리고 웃는다고 하는데 저 사람은 언제나 봐도,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느낍니다. 그런 어떤 영적인 연합을 봅니다. 그때 시기 나지 않습니까? 그런 게 뭐가 시기가 나는가. 그까짓 것 좋은 차, 좋은 옷 그런 것 시기 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진짜 소중한 것입니다. 성도의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나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계셔서 좋고 하나님은 내가 여기에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그런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그것 없이는 신앙의 행복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무슨 놈의 사랑이 그렇게 멋대가리가 없습니까? 몇 달씩 하나님 안 만나도 하나도 보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싶어하시는 것을 생각도 안 할 뿐 아니라 기대조차도 안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게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게 갈라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보고 싶어서 병이 납니다. 그것이 사랑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과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살아갔던 탁월한 교제의 사람들 중에서 악하고 게으른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악하다고 그렇게 하면 말이 안 되지, 당연하니까. 다시 말하겠습니다. 그런 탁월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살던 사람들 중에서 헐렁하고 알량하게 분투하는 것 없이 여가생활을 하듯이 인생을 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삶은 부패한 인간의 삶의 방식이지, 주님 앞에 진실하고 신령한 사람의 삶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빛나가 있는 것들을 이 시간에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의 느낌이 없이 살아가면서 그 원인을 자신의 삶에서 찾아야 되는데 그렇게 찾지를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서 한번 그 사람이 자기의 머리만 눌러주면 해결될 것 같은 이런 미신적인 방식의 삶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영적인 곤고함이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살아가고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게으르며 아무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없이 헐렁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게으름이라고 하는 악을 좋아해서 거기에 집착하면서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 거기서 ‘일락’ 번역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일락’이라고 하는 그 표현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술 먹고 노래방에나 드나들고 술집이나 드나들면서 나쁜 짓이나 하고 그래서 마약이나 하고 아주 방탕하고 죄악 된 삶을 사는 것을 일락이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일락’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열망 없이 살아가는 게으른 모든 삶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락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면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돈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끝도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것도 인격의 특징이고. 그리고 악하고 게으른 것도 인격의 특징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 하루아침에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 되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 하루아침에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과 인격적인 성화의 문제가 하나의 틀에 만약에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염두에 두면서 이것을 가지고 같이 고민을 하고 이것이 순환관계에 있다라고 하는 논리를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루어 가야지만 적절한 방향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번쩍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하시고 애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게 하셔서 그래서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 섬기면서 살아가게 하나님이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만 반대 방면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다.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강한 자극을 받게 하셔서 그래서 그로 하여금 비록 내가 영혼의 상태가 활발하고 내 심령에 아직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에게 맡겨진 명백한 임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의무의 자리에 돌아가서 주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모자라서 그것을 섬기는 것이 너무나 힘겹고 어려워서 그래서 아버지 앞에 매달리면서 이 섬김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런 가운데 그 사람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의 정서가 새롭게 불러일으켜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방면에서 시작하든지 간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정말 이제껏 계속 되어온 게으른 삶이 점차, 점차 내 인격을, 나의 신앙의 인격을 아주 악하고 더러운 자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위험성을 간파하고 거기에서 탈출하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계속해서 하나의 커다란 웅덩이가 계속해서 맑은 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쪽으로 흘러 들어오고 한쪽으로는 흘러나가야지 됩니다. 요단강을 타고 내려오는 가운데 두개의 커다란 호수가 발견됩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 호수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는 물이 맑기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런데 폭이 한 4킬로가 되고 길이가 한 74킬로쯤 되는 그런 아주 거의 바다와 맞먹는 그런 호수인데 항상 맑습니다. 물고기도 많이 삽니다. 위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고 아래로 물이 흘러서 내려갑니다. 사해는 어떻습니까? 물이 계속 흘러 들어가는데 증발하는 분량이 어마 어마합니다. 희석되지 않고 계속 소금의 농도가 올라갑니다. 투신자살해도 물 속에 빠지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 생명체도 거기에 살지 못합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여러분들의 적당 주의 적인 삶, 그리고 주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게으름 속에서 방치하면서 살아가는 삶, 뭔가 주님을 섬겨도 거기에 전혀 마음을 싣지 않고 월급 때문에 마지못해서 직장에 나가는 그런 근로자처럼 일하는 그런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남는 아주 야비하고 더럽고 불결한 신앙의 인격만 남는 것입니다. 여기 주인이 그렇게 주인을 향해서 성실하고 착하고 충성된 인격으로 주인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서 주인의 일을 위해 성과를 남겨놓은 사람을 보고 좋구나. 아! 좋다. 이렇게 말했다면 정 반대의 경우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아! 싫다. 주인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아! 더럽다. 아! 보기도 싫어. 그럴 것이 아닙니까?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왜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충성스럽게 살아가야지 된다는 설교를 들어야 됩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구속하신 백성들이 그 크신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출생을 능가하는 뛰어난 사건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벌레 한 마리가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속하신 우리들을 보실 때에 정말 소중하고 주님이 보실 때 너무 좋고 아름다운 존재들이 되어야지 아! 싫다. 너무 싫다. 그래서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첫날 한 달란트 맡은 종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을 만나고 다음날 같은 자리에서 만날 것입니다. 이 두 종을 만났을 때 주인의 마음이 너무 흡족한 것입니다. 아! 좋다. 너무 좋다. 진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구나. 작은 일에 너희가 충성을 다했으니 이 큰 것을 네게 맡기마. 너희는 나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이렇게 주인이 잘하였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예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단숨에 그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러면서 아주 강력한 책망을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 강력한 탄핵 속에는 아까 우리들이 생각해본 칭찬하는 그 상황 속에서 연합과 정신적인 연대, 사랑의 관계 이런 것과는 정반대의 개념이 들어온 것입니다. 분리, 관계의 끊어짐, 그 다음에 불쾌, 심지어는 마지막에 정죄의 분위기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밖에서 이를 갈며” 이를 간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고통을 못 이겨서 막 참기 위해서 이를 가는 형벌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가지고 깊이 고민을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도대체 그럼 구원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걱정도 팔자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럼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건 사실 여기서 지금 그런 주제가 아닙니다. 굳이 그것을 표현한다면 여기에서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들이 있으리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면서 하나님 자신과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은혜의 세계에서 분리된 고통스러운 영혼의 형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태양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채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것처럼 먹고 마시고 길길이 뛰면서 기를 쓸 때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짜릿하게 행복한 것 같습니다. 즐거움의 시간이 끝나고 나서 혼자 조용히 벽을 바라보는 시간에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왜 하나님과의 연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그들이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분리만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느낌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을 거절하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좋아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싫어하시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깊은 은혜와 축복의 기회보다는 두려움들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자녀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 자체가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각자 주님께로 맡겨진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도 성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시면서 어떻습니까? 아! 좋다. 주님이 이렇게 많이 주시고 있구나.
저는 예전에 전도사 때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차별대우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정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 때문에 그럴지는 모르지만 안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심지어 상가 집 하나 가는 것도 원칙을 세워놓고 그 원칙과 룰 안에서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혜택을 본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마음 아파하니까, 제가 주례 안 서는 결혼에는 안 갑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다 이해를 합니다. 교인 20명 모일 때도 그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러면 지금이야 교인이 많아졌으니까 목사님이 바쁘시는데 주례도 못하시는데 어찌 오실까 그렇게 하지만 교인 20명 모이던 시절에 내가 안 가는 것은 어떤 교인들에게는 마음에 걸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관성이 있게 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누구도 소외 받았다고 상처를 느낀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노력해야 될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 하는 것처럼 치우쳤다고 하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인격에(?)문제이지 하여튼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러분 모두를 편애하지 않고 여러분 모두를 소외시키지 않고 공평하게 이렇게 대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에 대해서 내가 동일한 연합을 느끼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여기서 깊이 만나고 그리고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목양을 받으면서 순종하고 주님을 위해 더 뜨거운 가슴으로 주를 위해서 살려고 애를 쓰고 특별히 이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 남모르게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자신의 소유를 허비하며 영혼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섬기고 그런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고통 가운데서라도 견고하게 서서 섬길 때, 그때 나는 그 사람과 더 많은 연합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이것을 노골적으로 표현을 하고 그렇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인격의 문제이지만 심정적으로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 다른 교회 흔히 안 쓰는 말들을 합니다. “내가 너희를 말할 때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무슨 빌립보 교회에 아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이 교인들과 어떤 정신적이고 영적인 강한 연합을 실제로 자신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왜 빌립보 교인들 자체가 사랑스러우니까, 왜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와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그 일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하기 때문에 그 일과 섬기는 그 인격과 존재, 이런 것들이 분리가 되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사도의 마음속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에 제가 섬기던 교회 목사님이 나는 그래서 안 하는데 나는 마음에 안 드는 게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목사님이 나가셔서 인사를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뭐가 감사한지, 자기가 예배 드리려고 자기가 왔는데 오히려 목사님 아직 안 가시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되는데 감사합니다. 목사님이 고개를 7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면 교인들은 거만하게 이러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내가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전도사들을 향해서도 똑같습니다. 저는 좀 사람이 거칠고 강포해서 전도사님들이 심방하고 뭐 합니다 그러면 잘하라고 그러고 마는데, 제가 교수 생활하고 바쁜데 주일이고 월요일이고 방학 때고 시간을 내서 중 고등부 애들을 심방 하면 목사님이 꼭 그러십니다. 손을 꼭 잡고 전도사님 감사합니다. 우리 애들을 그렇게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목사님 애들인가 내 애들이지, 그런데 목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그런 마음이 무엇인가 하면 동역자와 동역자에게 느끼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의 느낌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거들먹거리고 일하지 않고 자신의 목회에 방해와 누를 끼치면 그런 영적인 연대감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물론 사랑하면서 더 잘하도록 보살펴주고 감싸주고 기도를 해야지 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무의 문제이지 그런 영적인 연대와 연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과 섬김, 그것들이 분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특이한 분이십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굉장히 오래 전 15-20년 전에 헌신적으로 교회에 와서 일하다가 다른 데로 간 전도사,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그 은혜를 늘 생각합니다. ‘은혜’라고 합니다. 내가 그 전도사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충성스럽게 자신을 섬기면서 도와준 것에 대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대의 친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이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이 없이 하나님과의 아주 깊고 친밀한 친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친교 속에서 장시간 동안 인생을 살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신비주의에서 아주 악한 신비주의입니다. 어떤 실제 하는 것이 있고 그 실제 속에서 뭔가를 느낄 때 이것이 정상적인 감정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떡을 보고 침을 삼키는 것은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나 여기 연탄 하나가 올라와 있는데 그것을 보고 침을 줄줄 흘리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그것은 뭔가 망가진 것입니다. 감각이, 그렇지 않습니까?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그 관계가 있을 때에, 그 연합이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느끼면서 하나님과의 풍성한 친교와 사랑을 느끼는 것은 정상적인 은혜로운 정서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자신은 혼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자신 혼자 하나님과 친밀한 세계 속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건 이성과 거짓이든지 아니면 아주 중대한 병적인 신비주의의 착각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마리화나 피우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나는 봤습니다. 옛날에, 마당에 앉아서 담배 피우고 이렇게 하는데 눈동자가 몽롱하게 돌았습니다. 그런데 혼자 히죽 히죽 웃습니다. 뭘 상상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말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들어갑니다. 그게 정상입니까? 병입니다. 미친 것입니다. 실제가 없는데, 그런 것은 정신병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회복,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 회복이라고 하는 이 성화의 교리들은 우리의 전체적인 신앙생활과 우리들의 전체적인 영적인 삶, 그리고 우리들의 실제적인 모든 삶을 거미줄과 같이 유기적으로 연결시킵니다. 결코 어느 하나를 가지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 오시면 어떻습니까? ‘유’ 아! 좋다. 정말 좋다. 이렇게 말씀하실 까요? 여러분들에게는 주님과 누리는 탁월한 친교의 교제, 실제가 있습니까? 주님이 내가 여기에 사는 것과 살아있는 것, 그리고 내가 지금 일을 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는 표징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그래서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며 성화의 진전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커다란 소원은 큰일을 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가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게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입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네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그래서 뭘 하면서 살아가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그릇이 있습니다. 하얀 쌀에다가 노란 조를 둔 기름이 잘잘 흐르는 햅쌀밥은 아마 노르스름한 반짝이는 놋쇠 그릇에 담으면 정말 더 맛있어 보일 것입니다. 뚜껑을 여는 순간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것입니다. 임금이 내려주는 귀한 포도주는 아마 금으로 된 잔에 담기면 어울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설렁탕은 뚝배기가 어울릴 것입니다. 된장은 투박한 질그릇이 어울릴 것입니다. 아주 정성껏 끓인 갈비탕은 아마 반짝이는 스텐 그릇에 담아 먹으면 맛있을 것입니다. 정성스럽게 끓인 아름답고 향기로운 차는 아마 은으로 만든 주전자에 담아서 컵에 따라 먹으면 식탁이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주인이 쓰는 것, 거기에 요긴합니다.
제가 어느 출판사에서 대표가 불러서 아침이나 같이 하면서 좀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 갔습니다. 평소에 잘 들어가지 못하는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우거지 갈비탕을 시켰습니다. 카펫이 깔리고 으리으리한 데 우거지 갈비탕을 가지고 왔는데 저는 뭐 멋있는 그릇에 가져오나 했더니 시커먼 오지 그릇에 담아 왔습니다. 크기는 매우 컸습니다. 다 못 먹었습니다. 그 호텔에는 그런 투박한 질그릇이 안 어울립니다. 반짝이는 금 그릇이 어울립니다. 그런데 호텔은 그게 어울리지만 우거지 갈비탕에는 그게 어울립니다.
무엇으로 쓰시면 어떻습니까? 달란트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정해주십니다. 그게 하나면 어떻습니까, 둘이면 어떻습니까, 셋이면 어떻습니까, 다섯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우리들에게 있게 하신 그 자리, 주님이 우리를 쓰시고 싶어하셔서 우리에게 뭔가 기대하시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제왕의 자리보다 훌륭한 자리입니까?
그래서 스펄젼이 그의 설교 속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누가 나더러 면류관을 쓰고 제왕이 되라고 하면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상관없이 면류관을 쓰고 제왕의 노릇을 하며 죽기보다는 자기를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몸으로 하나님과 영혼들을 섬기면서 사는 그것이 자신에게는 훨씬 소중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쓰시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직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기대하신 바가 있고 우리를 쓰시고 싶어하시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아직 하나님이 우리를 용도 폐기처분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망가지고 부패한 사람들인데도 주님이 뭔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고 우리 같이 속속 깊이 썩은 냄새나는 더러운 인간들을 그래도 고쳐서 변화시키셔서 그래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나라 한구석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살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계시고 그 섬김을 받아서 충성스럽게 섬김을 받으실 것이라고 기대하시는 그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가슴 떨린 복음이며 그렇지 않습니까? 가슴이 뛰지 않으십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위해서 자기의 물질도 아끼고 건강도 아끼고 재능도 아끼면서 저 좋은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시니까 우리가 교만한 것이지 어느 순간에 와서 애야, 이제 너는 끝났다. 목숨이 불쌍해서 너를 더 살아있게 내버려두는데 그러나 너는 이제 끝났다. 나는 이제 네가 필요 없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절망적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이 아! 좋다. 이거 말고 지금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순간에든지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아! 참 좋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애야, 사실은 나도 네가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좋다. 너는 내 기쁨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매일 매일 이런 관계를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행복한 성도들입니까?
그래서 주께서 살게 하시는 날 동안에 나를 위해 자기의 아들까지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 위해서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다고 믿으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 속에 채우며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며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의 천분인 것처럼 생각하며 그래서 일생을 주님께 기쁨을 드리면서 발꿈치를 높이 들고 하늘나라를 앙망 하면서 살다가 주께서 이 세상의 수고를 그치고 당신 곁으로 오라고 부르실 그때에도 주님 앞에 간 우리를 보고 잘하였도다 정말 좋구나. 이렇게 칭찬 받을 수 있는 그런 성도들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18.착하고 충성된 종Ⅱ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3)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에게 주인이 같이 칭찬하였는데 잘하였도다 라는 말인데 이것이 희랍어 성경에는 잘하였다 못하였다는 말은 안 나오고 ‘유’라는 말이 안 나오는데 이것은 좋다라는 뜻입니다. 직역을 하면 좋구나 라는 뜻으로 시작되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종들이 남긴 것을 내어 놓았을 때 좋구나라는 주인의 말은 뭐가 좋다는 것인가라는 말을 하면서 여기서 좋다라는 말은 돈 두 개가 더 생겨서 좋다라는 것으로만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주인은 대단한 부자였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구나 라는 말을 보면서 이 다섯 달란트는 주인에게 작은 것일 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좋다라는 것은 돈이 많아서 뿐만 아니라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나갈 때 좋다 라는 말은 무엇을 남겼느냐보다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서 주님을 섬기면 주님이 그 존재 자체와 깊은 친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드리면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은 깊은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와 정상적인 복음의 차이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는 영성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인이 착하고 충성되다라고 말합니다. 착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좀 바보같이 어눌하고 누가 뭐라도 해도 그저 묵묵히 참는 사람을 착하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고전에서도 착한 사람의 전형이 흥부입니다. 형수가 주걱으로 빰을 때려도 한번만 더 때려달라고 하고 박을 타서도 보화가 쏟아져도 형을 다 주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도 그런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일치의 면이 있기는 하지만 아가도스라는 단어에 희브리어 배경이 토브인데 이 단어가 제일 먼저 쓰여진 곳은 창세기 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단어가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창조의 세계를 보시고 좋다라고 하나님이 느낀 마음이 주인이 달란트를 남긴 종들을 보고 갖는 것입니다. 아가도스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한 단어인데 요점을 간추리면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착하다 선하다 라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친절을 가진 선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입니다. 단순히 선량하다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착하다라는 말은 이 사람의 인격과 성품 속에 반영된 내면적인 것을 가르키고 충성은 이 사람의 외면의 삶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좋다라는 이유가 너무나 착한 것을 보았고 충성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진리는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내면적인 인격과 외면적인 헌신된 사람의 삶의 방식이 유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착하다 라는 단어가 충성에 앞서 나온 것을 주의하십시오. 이 주인이 오랜 시간 후에 종을 본 후에 이 종이 착하다라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착하다라는 말을 하였을 때 그것을 한마디로 잘라서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행동 한두 가지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은 그 사람의 인격의 집이고 내면세계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그것이 착하다 다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신통치 않을 때는 하나님도 내가 마음에 안 들겠지만 나도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은혜를 받고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을 향한 하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후 그 시각을 가지고 이전의 삶을 바라보면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은 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은 신 나의 주
제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영접한 다음에도 하나님께 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짓눌러지고 팽개쳐지고 억압되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으면서도 시원하지가 않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내 인생이 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라는 필연을 읽을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에 승복할 만큼 깊이 충분히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통째로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제일 불길한 예감이 내가 주님을 열심히 믿으면 주님이 나를 목사로 만들 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주님을 깊이 만난 후에는 이전에는 내 인생에 불만이 많아서 자기 학대도 하고 열등감도 가졌는데 오늘 내가 주님을 만나고 살 이 최상의 삶을 연출하기 위해서 는 과거의 인생이 막간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있었다라는 생각이 들고 과거에 그렇게 아픔을 준 사람들을 용서할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대우할 수 있는 최상의 것과 자로 잰 듯한 정확한 섭리를 보니까 내가 살아온 인생의 모든 것이 주님과 함께 하지 않은 부분이 없고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인생 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 저는 참 좋습니다. 주님 너무 좋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여기서 좋다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다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다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해 주신든지 그것이 다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그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충만해질 때 누가 와서 당신 집에 불났다고 하더라고도 그 마음이 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주님을 믿고 신학교를 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니까 앞길이 막막합니다. 누가 도와줄지도 모르겠고 의논을 할 사람도 없고 학비를 어떻게 낼지 집에서 뭐라고 할지 막막합니다. 그때 한가지는 분명 합니다.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주께서 내 길을 예비하시니 오늘 하루하루를 주님을 위해서 살리라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 혹은 그 길이 가혹하더라도 선물의 알갱이 너무 맛있고 좋기 때문에 껍데기가 두꺼운 것일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좋다라는 말은 다 받아 들이겠다라는 마음입니다. 완전한 화해와 친교와 영적인 연합을 암시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너는 참 착하구나 선하구나 라는 말은 내가 너를 다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과의 완전한 친교 속에서 한없는 연합을 이루면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요한 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내 안에 있을 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너는 참 좋구나 무엇이든지 말하라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 고 말할 때 그때 종이 그럼 나와 신분을 바꾸자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가 무엇을 구할지 주님은 벌써 다 알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하고 싶어하던 일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여기에서 착하다라고 말할 때 이 내면적인 인격을 통해서 그 존재가 어떤 사람인지가 인격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주님이 내가 거느린 종은 이랬으면 하는 그 바람의 종과 실존하는 종이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우리 현실 세계에서도 그것이 동업자이든지 부부지간이든지 자식이든지 동기간이든지 이렇게 일치하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은혜를 주셨으면 하나님의이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계획이 있습니다. 로마서에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게계획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주님 생각과 맞을 때 주님에게 한없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많이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이 어떤 인물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람을 사랑을 표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렇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인치셨습니다. 모든 자식이 귀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마음에 두고 사랑하는 자식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여기서도 종을 향해서 가진 마음입니다. 너무나 자기의 마음에 맞는 그 사람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장기간 후 주인이 돌아와서 참 좋다라고 기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주님 앞에 기쁨을 주는 늘 예기하던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을 아들이 보고 왔는데 부모가 야 참 잘 했다라고 말할 때는 평소와의 기대를 뛰어 넘었을 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전의 종들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인의 기대를 넘어선 종들이 된 상황이 된 것을 보여줍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서 주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과 주님과의 연합을 엮어나가는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도 하나님과 교통하였지만 모세가 나누었던 교통과 친밀함을 너희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지였는데 그것은 강력한 연합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단절이냐 연합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그 둘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선하다 너의 존재 그 자체를 다 받아들이고 너의 모든 생각이 다 마음에 들 때 그 주인의 마음을 반영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자기의 분신처럼 일할 수 있도록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을 맡깁니다. 그 후에 더 시킨 사람의 마음을 잘 반영하면 더 크게 큰일을 시키고 그리고도 더 그 사람의 마음을 반영하면 모든 것을 다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섰던 요셉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가 보고 그 사람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령함과 착함과 자신의 분신이 되어서 일할 만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위임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앙케이트가 나왔는데 직장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진짜 자네 만한 사람이 없어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종이 달란트를 남기면서 그런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한 달란트 맡은 종이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갖다 주었을 때 그 상황도 주인이 평소에 그럴 것이다라는 예기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기대이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온 이야기가 악하고 게으르다는 인격적인 성품에 대한 평이 먼저 나옵니다. 그 세 종이 주인이 똑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후 자신이 남긴 것을 가진 것을 가지고 셈을 하는 상황에는 모두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종은 예기치 못한 기쁨의 상황이었고 한 종은 예기치 못한 가슴아픈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착한 성품이 된 것과 악한 성품이 된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주인을 섬기며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 그들의 인격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일 자체 속에는 우리를 순결하게 하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대신 그 일을 통해서 우리들이 정결해지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주님이 내게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어야 하는데 한 사람은 되면 되고 말면 말지라는 방식으로 살고 한 사람은 이것이 꼭 되어야 할텐데 무엇을 바꾸면 이 일이 이루어질까 생각하고 간절히 부르짖으면 주님이 멸시하지 않겠지 내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이 일을 이루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기도와 삶과 사고의 모든 초점이 그 일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렇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더러운 것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가운데 정화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순결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차는 것입니다. 한 목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가슴이 녹는 것처럼 몸부림치면서 살 때 우리는 방종하면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군인이 전쟁을 하는데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는 않는데 그러나 일이 동기가 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은 주인이 자기에게 것을 남기기 위해서 처절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몸부림의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주인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동행하면서 충성하면 놀랍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생명을 걸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야겠다는 가치를 걸지 않으면 자기도 안 변하고 일도 안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이루어진 업적의 크기가 충성의 크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일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저 하나님의 일이 안되고 자기는 신앙의 변화도 없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강팍해지고 악해지고 포악해지는 것입니다. 변해 가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제자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경건 생활에서 진정이 없으면 뒤로 밀리는 것이고 성화에 삶에 있어서 진전이 없으면 뒤로 밀리는 것이지 제자리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이 없으면 1년 전의 감격이 냉동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마음이 돌같이 굳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진 아니면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기를 그쳤다면 속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앙의 인격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일생을 주님 앞에서 살아온 후에 마지막 그의 삶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있지 않으면 그 사람이 일생을 충성하며 살아왔다고 상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헌신적으로 충성하며 살아온 날들이 우리가 살아온 충성스러운 삶의 제품이라면 우리의 내면은 그 제품에 대한 상표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경박하면 무엇을 하여도 경박합니다. 기도도 그렇고 설교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지하면 무엇을 하여도 진지합니다.
여기에서 나온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처음에는 이럴 정도로 주인을 감격시키는 사람들은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주인의 뜻을 받들어서 주인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성실하게 살다 보니까 주인의 성품을 반영하는 그래서 주인이 꿈에도 그리는 종의 모습과 일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주인이 좋다 착하구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달란트 맡은 종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주인이 이 사람이 이 정도의 사람이라고 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돈을 묻어두고 주인이 올 때가지 기다리고 노는 생활을 살다가 보니까 이 사람이 내면의 질이 아주 악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착하다라는 것이 주인의 마음을 그대로 교통하는 성품의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 악하다라는 것은 불쾌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품상 너는 나와 교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해보다 보면 어떤 사람은 그 생각의 방향과 질이 나라 워낙 달라서 같이 앉아있는 것이 불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같이 앉으면 어떤 정신적인 연합도 느낄 수 없고 그 사람 내면의 거의 모든 것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의지적으로 애를 써서 내 사랑을 부은다면 모를까 동등한 연합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는 느낌을 악한 느낌입니다. 도덕적으로 사기하고 살인하는 의미의 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이야기 마음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마음을 화합해서 느낄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이 종이 주인을 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기에게 사명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님을 대적한다고 해도 얼마나 대적하겠습니까? 무엇을 대적하겠습니까? 그래도 신앙 고백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기껏 해봐야 마음을 닫고 꿍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이 이런 마음 종 정도의 종을 악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으로 말할 수 있는 최악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고통이 있는 밖에 이 종을 내몰고 거기서 이를 갈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명백하게는 말씀하지는 않지만 이 상황은 지옥과도 관련된 것입니다.
지옥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적인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불쾌감을 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인격의 질과 삶을 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을 공로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원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뜻을 따라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서 그 긴 기간을 통해서 자신이 주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그 마지막에 주님께 너는 내 마음에 합하구나 라는 말을 듣는 것이 천국 가는 사람들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도 시시때때로 주님 말씀 들으면서 눈물도 흘리고 논적도 없이 무엇이라고 하는 생애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악하다 너와의 삶에 어떤 정신적인 연합을 느낄 수가 없고 너의 삶의 모습이 내게 고통스럽고 불쾌하고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 우리의 인생이 있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주님께 그런 평가를 받는데 주식이 값이 오르고 집이 늘어나고 땅을 사고 직책이 높아지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구속하고 십자가의 피로 건지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누가 억지로 사명의 자리에 세워준 사람이 없어도 우리 발로 걸어가서 섰고 은혜 받고 섬기는 자리로 스스로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네게 베푸신 많은 은혜와 사랑이 세워진 사명의 자리에서 충성스러운 자리에서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생활이 곤고할 때 주님이 살게 해주시고 말씀의 은혜가 없을 때도 시시때때로 은혜를 주시고 기도의 응답도 들어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자리에서 살 모든 여건을 주시고 끊임없이 도와 주셨습니다.
정착을 못하고 교회에서 떠도는 사람들은 마지막이 아주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자기만 모르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인격은 자신에서 소라와 소라 껍질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인격 속에서 자기가 숨고 나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도저히 이 교회에서는 내 영혼이 살길이 없다 라고 생각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씀의 은혜를 받고 기본적으로 교회생활이 가능한 삶을 해 나가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전혀 섬기지 않고 작은 일에도 기분이 상해서 다른 교회로 도망가는 돌아가는 다니는 삶을 몇 년만 살면 아주 악질적인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수없이 은혜는 받았는지는 몰라고 문제는 하나님 앞에 집중해서 타는 가슴으로 살아본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연합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고백이 없는 것입니다. 몇 주에 한번씩 크게 회개해도 자기가 자꾸 물러나가는 것 같고 자기는 너무나 악랄하고 단단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도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절망하는데 그런 것이 거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악해지지 않는다면 성경의 인간관을 다시 써야 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악해져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순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생각해 내는 것은 바탕이 악한 사람들은 상상해 낼 수 없는 일을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들이 생각해 내는 것은 그것이 도저히 착한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의 깊이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결국은 예수님이 말씀이 자기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자기가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잘섬 기지 않고 불충한 하면 우리가 악해지는데 그럴수록 우리는 불 충성하고 악하게 살아가는 거기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삶에 대해서 점점 발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 편 1편에서도 그것을 말합니다. 복이 잇는 사람은 첫째는 이 악의 꾀를 쫓지 않고 둘째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마지막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는 것은 상담한다는 뜻입니다. 가금 악한 사람을 만나서 상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전이 되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인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격의 특징이 된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런 사람의 길에 선다는 것은 그 길 안에서 밀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집을 짓고 정착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여기서 오만한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게으르게 섬기는 동안에 악한 성품이 게으른 삶을 촉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삶이 한 인격을 형성하고 이런 형성된 악한 인격이 훨씬 더 게으른 삶을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악에서 즉시로 영적인 선한 일에 대한 발동이 쉽게 걸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평성 소에 늘 기도하는 사람이 한번 더 나와서 부르짖는 것은 쉽지만 거의 기도하지 않던 사람들이 기도하러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삶이 품성을 악하게 만들고 그 악한 사람의 품성이 더 방종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가게 만들면서 뒤로 물러가고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주인이 와서 볼 때 진짜 불쾌한 사람이구나 정말 싫다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두 종은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주를 위해 부지런해 살려고 애를 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주님의 성품을 닮은 착하고 선한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이 주인을 위해 계획을 자꾸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들에 대해서 스스로 도전을 받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삶이 착한 인격을 착한 인격이 선한 삶을 살아가도록 촉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과 인격 자체가 순환 관계에 놓여서 우리자신이 변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잘 처리해 나가야 하지만 우리가 또 하나 해야하는 것이 우리들이 교회를 크게 만들어 보려고 한다든지 내가 맡은 구역을 불릴 생각을 가진다면 고달프기는 한데 열매는 없습니다. 우리의 사역의 열매는 하나님 앞에서 점점 변해 가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축복하시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가 축복 받은 일이 일어났다면 즉시 그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좋은 신자가 되려고 몸부림치면서 살더니 결국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구나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벌어지는 삶의 상황과 그 사람의 인격적인 변화의 노력이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문에 항상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할 때 처음 그 일을 하여야 했던 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바닷가에서 배가 난파 당해서 죽다가 두사람이 겨우 구출되어서 살아난 후 그들이 결심하기에 여기에 우리가 죽을 목숨을 살았으니 여기에 등대에 세우고 죽어 가는 또 다른 사람을 돕자고 생각하고 그 바닷가에서 불쌍한 사람을 구조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드리기도 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서 그 일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그들은 너무 많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여 일하는 시간을 줄였고 또 너무 위험한 일은 회피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늘 밤마다 파티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우리가 밤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라는 생각의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일 자체는 일단 굴러가지만 처음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섰던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단지 일에 익숙해져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라 일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인생의 삶을 산다면 얼마나 불행한 삶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거기로 내 몰았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발로 걸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은혜가 감사해서 그냥 섬기지 않고 사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고통스러워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처음 거기로 갔던 정신을 가져서 주님을 열심히 섬겨서 이루어지는 이 일로 인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그 일을 해나가는 태도와 방식의 삶에 진지하고 헌신적인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 주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을 통해서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장이 쌍스러운 소리를 하고 발길질하는 사람이면 그 모습을 전무가 배우고 그 것을 또 밑의 사람이 배워서 결국은 모든 밑의 사람이 다 배우는 것입니다. 회사마다 직원들을 보면 그 사장의 성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인격이 그렇게 조잡합니까? 그렇게 이율배반적이고 신실성이 없습니까? 주님이 시키신 명령이 재대로 하달되어서 그분이 일을 시켰고 내가 한 일을 그분 앞에 검사를 받는다고 하는 의식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임재 의식이 있다면 일을 시킨 사람의 성품을 안 닮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재로 안 닮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시시때때로 그 분과 일을 상의하고 일이 잘 되어가고 안 되어 가는 것에 그분께 도움을 호소하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속에서는 살아가지만 그 일을 성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속에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인격적으로 조잡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 종들은 여기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어서 착하다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주님을 위해 하였습니까 너무나 한 것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무엇을 하였다고 하여도 주님의 희생에 비하면 우리의 것은 비교할 바나 됩니까? 우리가 주님의 일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을 받고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였습니까? 주님의 맡겨주신 명령을 우리가 지엄한 분부라고 느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 일을 시키신 주님을 기뻐하며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살같이 빠른 세월은 흘러가는데 우리의 인격은 여전히 조잡하고 도저히 우리의 명함을 내밀고 우리의 일을 설명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할 수있다면 결국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일을 통해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존재로 통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천국의 표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향취가 납니다. 일평생 주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괴로울 때나 슬픈 때나 그 사랑의 주님께 고정된 생애를 살아왔기 때문에 내면의 세계가 주님의 성품에 의해 빚어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복음 세게는 그저 하나님 앞에 헐렁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수고가 아니라 주님 앞에 눈물뿌리고 피 뿌리며 살아온 헌신된 사람들의 희생을 징검다리로 하여금 이 복음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사발로 피를 받지 않고 선교의 문을 여신 적은 별로 없고 죽어가는 교회들이 소생할 때 피를 뿌리서 기도하던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하거나 높여주기를 위해 바라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고 이 길에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누가 잘 도와주면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 각서를 쓰고 사명의 자리로 걸어가지 않았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동시켜서 주님이 섬기기 원하는 자리로 우리가 걸어갈 때 우리가 환경을 기대하고 걸어갔습니까? 누가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하였습니까? 주님만 내게 있으면 족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속에 모두 내재 하고 있는 주님 만났을 때의 착한 마음을 오늘 일깨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이 VIP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 속에는 VIP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찮은 사람입니다. 구름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도 고난을 받았습니다. 왜 그러하였습니까? 그들에게는 모두 자기의 사명의 자리가 있어서 그 일에 최고의 가지를 부여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남들이 걸어가지 않아도 될 고난과 핍박의 길을 걸어 가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가 또 갑니다. 이제 내년에는 충성스럽게 살면서 무엇을 맡겨 주시든지 감사함으로 살아서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주님을 섬기도록 주신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이 섬김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어서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는 인생이 되어서 주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친교 속에서 사는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19.착하고 충성된 종Ⅲ:“충성된 종”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25:23)
두 주에 걸쳐서 “잘하였도다” 그리고 “착하고”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잘하였도다’도 마찬가지고 ‘착하고’도 마찬가지고 ‘충성된 종아’도 마찬가지이지만 모두 마찬가지지만 충성된 것이 무엇인가는 이미 여러 차례 설교를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여기에서 하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충성되었다고 선언을 하는 사람 즉 두달란트와 다섯달란트 맡은 종이 살아온 과거의 삶에 대해서 ‘그것은 충성스러운 것이었다’라고 선언을 해준 사람은 바로 그 달란트를 맡긴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종이 자신을 위해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종들이 살았던 삶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종들 자신이 아무리 ‘자신이 살아온 삶이 충성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혹은 그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 할지라도 만약에 이 종들의 본 주인이 그들을 충성 되다고 선언해주지 아니하였으면 아무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충성된 종아’라고 하였는데 희랍어 성경에서 보면 ‘충성스러워왔던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제상으로보면 이 사람들은 주인이 올 그 당시에만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아닌 이미 그 달란트를 맡긴 그 때부터 계속해서 충성스러워왔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주인이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앞에서 살아간 삶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욕구이어야지 우리들이 흔히 갖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기 자신의 자랑 혹은 자기 자신의 대우를 위해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잘못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충성스러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충성은 잘해야 외식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에서 달란트를 맡은 종들을 보며 그들이 충성된지 충성되지 않은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사람은 바로 그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그 주인이었습니다. 이들이 긴 세월동안 달란트를 가지고 어떤 사람은 뭍어두고 혹 어떤 사람은 장사하면서 이윤을 냉기며 살아가고 있을 때에 사람들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심각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달란트를 뭍어두고 돌아다니면서 그 달란트와는 상관없이 자기 좋은 삶을 살아가던 이 한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 지금 진노하는 태도로 ‘저 인간은 악하고 게으른 인간이야! 저런 인간은 밖에 쫓겨나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아야돼! 주인이 오면 당장 요절을 내고 말거야!’라고 사람들이 그 한달란트 맡은 사람을 향해서 이런 식으로 악담을 퍼붓지는 않았을 거란 것이죠. 또 두달란트나 다섯달란트를 맡아 가지고 이익을 남긴 충성스러운 두 종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보면서 ‘참 열실히 일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은 했을지 모릅니다. 또 ‘요즘 종들 중에서 참 특이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도 없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나! 그래봐야 어차피 남는 것이 자기의 것도 아닐텐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그들의 충성스러운 삶에 대해서 ‘야 정말 잘됐다. 진짜 저 사람들은 착하구나! 어쩜 저렇게 충성스러울까! 정말 주인에게 칭찬 받겠다. 저 삶은 정말 보람으로 가득한 삶이야! 야 정말 복된 종들의 생애야!’라고 이렇게 말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그런 칭찬을 받을 주목을 끌지 못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한달란트 맡은종은 아마 자신의 한달란트를 묻어두고 불충성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것도 그것입니다.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모두 떵떵거리고 사는 부자들입니까? 그리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들을 봅니까? 태만하고 나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시로 하나님의 정죄와 징벌을 보나요? 그래서 이 두종류 사람들의 삶이 확연하게 이 현실세계에서 복받은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으로 구별되나요?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두시간쯤 더 눈물을 흐리고 더 영혼을 섬김 사람과 대충 쉬고 논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납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현격하게 ‘넌 진자로 충성된 종! 넌 진짜 악하고 게으른 종’ 이렇게 사람들을 구별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그것을 구별해 낸다할지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그렇게 알아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냥 섞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 아닌 보통의 눈으로 볼때에는 뼈빠지게 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도 무엇이 된 것도 없고 안되는것도 없는 것같이 보이고 또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 게으르게 살아가는 사람도 뭐 안되는것도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아주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기는커녕 선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거슬리면서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앞에 불충성하게 살아가면서도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세계를 보면서 ‘이렇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나!’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는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악하고 게으른 종들의 전형적인 사고 방식인 것입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은 ‘주님이 어제오지 않았으니까 그저께 오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오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어제도 주인이 오지 않았고 그제도 주인이 오지 않았으니까 오늘도 안오실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들은 ‘지금까지 많은 날 동안 주인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주인이 오시지 않으면 그 다음날 주인이 오실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과거에 주인이 오시지 않았으니 오늘도 내일도 주인이 안 올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하면 그렇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당장 보상이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그렇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것에 대해서 금방 내게 무엇인가를 해주느냐? 마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우리들의 삶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판단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에 대해서도 물론 있거니와 한 구간 한 구간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물론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전 삶이 하나님앞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에 대해서 여러분이 마음을 쏟아 붓고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중심을 쏟아 부어서 충성스럽게 일했는지 않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모두 남김없이 한결같이 기록하고 계십니다. 모두 알고계십니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든지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면서 살든지 반드시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주 눈물을 흘리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데 당장 하나님이 그것을 알아주시지 않는것같은 고통스럽고 열매 없는 상황이 계속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불평할 수 없는 이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반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적인 생애를 살아가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이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전반대로 우리들이 악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갈 때도 하나님이 초장에 요절을 내시지는 않으셨던 것을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악하고 게으르게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리고 우리자신의 부족함과 부덕함을 깊이 깨닫고 주님을 위한 헌신의 마음이 없음을 깊이 자각하며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주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하기에 불충성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유보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고도 인격적인 권면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보다는 나를 사랑하고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보다는 나 자신의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훨씬더 자기를 더 허비하는 삶을 살았지만 한번에 요절나지 않고 다시 돌이켜 쓸모 없는 죄인들이 주를 위해서 옛날의 안일하고 게으르던 삶을 청산하고 주를 위해서 진실하고 헌신된 삶을 살 수 있는 충성스러운 삶의 새로운 기회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주님앞에 순수한 마음으로 애쓰고 잠시 수고해서 그래도 무엇인가 열매가 없는 그런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또 그럴 수 없는 이유 한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충성스럽게 마음을 드려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에 있어서 이 즉각적인 성공과 열매는 안주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입니다.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간증을 하나할까요? 제가 실제로 사역을 해오면서 정말 사역이 그제 세상말로 하자면 죽을 쑤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영혼들이 그렇게 강팍하고 모질던지 개척초기에 그런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교회 별명을 ‘공포의 외인구단’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사역에 있어서는 정말 열매가 없고 진전이 없는데도 기도만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친밀하게 다가오시고 그 교제의 놀라운 감격! 지금도 그런 시기가 부러울 정도로 교제의 친밀함을 보여주시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과 막 친근한 교제를 누리면서도 분투하면서 애썼는데도 이상하게 열매가 없어서 한없이 아파하던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비록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는데도 열매가 없고 우리들이 고생하는데도 하나님이 당장 보상을 안해주시고 그 고난이 오래 지속되는 것 같은 어려움을 주시는 때도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비록 열매는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적으로나 환경을 확열어서 전혀 다른 세계속에 들어가게 하는 격변하는 축복은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바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친밀하고 진실한 교제의 기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교제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은 도시에서 목회하시는 분보다 훨씬더 어렵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여러모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와 같이 도시에서 목회하는 사람들보다 훨씬더 위험합니다. 시골에 있는 목회자들은 그만큼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제가 경상도 어딘가로 세미나를 내려갔는데 젊은 목회자들이 여럿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세미나가 끝나고 났더니 점심을 먹으로 봉고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맨 처음에 이 시골로 목회지를 찾아서 내려올 때 의욕에 불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의욕에 불탔었냐고 물어보니 ‘도시처럼 경쟁에 시달리지도 않고 시간도 많고 그리고 교인도 많지 않으니까 성실하게 열렬히 기도해서 영력을 쌓고 부지런히 공부해서 지력을 쌓고 그리고 몇 명 안되는 교인이지만 사랑으로 목회를 해서 진짜 한 5년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에서도 좀 영향력있는 목회를 했으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년지나 이년지나 삼년지나고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분도 설교자는 불꽃처럼 살아가야 한다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각성을 경험했던 분인데 삼년전에 시골로 내려올 때 그리던 자신의 모습은 간곳없고 설교준비도 제대로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안했냐고 물어보니 ‘목사님 여기는요. 설교준비를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입니다. 말길도 잘 못 알아듣는 노인네들이 앉아서 졸고 있거나 발가락을 후비면서 설교를 듣고 있는데 정말 준비를 하건 안하건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점점점점 의욕이 꺾이는데 매일 뒤에 채소밭이나 일구고 뒤뜰에서 닭이나 길러서 수시로 잡아먹고 그리고 여름이면 망태하고 족들이하고 들고 나가서 개울을 뒤져서 추어탕이나 끓여먹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이 시골생활 자체를 한없이 즐기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시에 있을 때는 가만히 보니까 물론 이것이 올바른 목회의 동기는 아닙니다. ‘저 친구는 나하고 똑같이 졸업을 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목회를 잘하나! 나는 도대체 뭔가 정말 심통난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어디가서 무엇인가 한수 배워야 할텐데...’, 밤에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개척교회 3년에 열다섯명 도대체 이것이 교회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고민이라도 있었는데 시골에서는 ‘어차피 교인이 안 와! 다 기르면 서울로 가는걸!’ 이렇게 하면서 여기저기 편지를 써서 보조나 받아서 먹고살고 하니까 점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이제는 서울로 올라가서 큰 교회 혹은 경쟁하는 교회를 맡겨준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고 탄식하는 목회자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친구들 혹 제자들, 그리고 아는 인연이 없지만 우연히 알게된 사람들 중에 보면 지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시골에서 목회하는 현장을 보고 제가 돌아서서 눈물을 훔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 난 너무 편하게 삽니다. 하나님 십자가가 제게 있습니까? 제게 무슨 고난이 있습니까? 고난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오니까 십자가도 있고 고난도 있군요! 피흘리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핍박이 뭔지 서울에서는 받아본적이 없는데 진자 여기에는 핍박이 있군요! 전도사가 동네사람들에게 복음전하다 막대기로 맞아서 뒤통수가 찢어져서 흉터가 나고 동네사람들이 교회를 다 부순다고 난리를 치고 하는 것을 보면 너무 부끄럽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저보다 못하는 것도 많은것같습니다. 나처럼 원어성경도 줄줄 읽을 줄도 모르고 나처럼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비록 우리교회 교인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교회처럼 많은 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답답한데 그런데도 그 중심에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오래된 그 강단에서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 고장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 아파하면서 ‘이 우상의 단지들이 모두 치워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패가 서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목회자들을 봅니다. 그럴 때 정말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누가 크게 상을 받을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겠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충성스럽게 산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그 충성을 알아주시고 눈에 보이는 성공을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밀함을 주시쟎아요!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일의 성과보다도 더 시급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앞에서 서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대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크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고통스럽게 충성을 하는데도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성공의 열매가 없다할찌라도 우리들이 불평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을 위한 충성스러운 섬김의 보상이 눈에 보이는 그 한가지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교회에 안나오는데 유년부의 한 아이가 다른 동네에 있는 할머니댁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댁에서 그 아이가 ‘주일날 오전에 일어나자마자 열린교회에 가야한다’며 교회에 데려다 달라고 난리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께서 ‘이 동네에도 교회가 있고 주일날 아무교회나 가면 된다’고 말했는데 아이는 꼭 열린교회에 가야한다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왜 꼭 열린교회에 가야하냐?’고 물어보니 아이가 ‘열린교회에 가서 김남준 목사님을 만나야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가 유년부 내려가서 설교를 하는것도 아닌데 할머니께서 ‘왜 김남준 목사님을 만나야 되냐?’고 묻자 그 아이가 하는 이야기가 재밌습니다. 그 목사님 얼굴에는 ‘나는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라는 것이 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예배는 거기에서 드려야한다는것입니다. 참 제가 얼마나 수세미처럼 일그러져보였으면 겨우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제 얼굴에서 읽은 것이 ‘예수님의 광채’라든지 ‘천국의 기쁨’이 아닌 ‘나는 억수로 고생한 수세미요!’라는 것을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것이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위해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가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삶과 인격과 말 모든 것이 다릅니다.
참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특별히 설교자가 아니고 은혜받은 성도들 중에서라도 고난속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해서 모두 거룩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이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도 고생한 사람보다는 고생을 별로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 훨씬 여유가 있고 사람이 유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고난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는 한가지 조건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 한가지 조건이 붙는다면 그러면 고난을 받는 것이 크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을 당할 때 그냥 참기만 하면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거나 혹 그것을 억누르면 한이 맺힌 사람이 되는데 고난을 당할 때 거기에 대해서 경건하게 반응을 하면 그 고난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저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거나 혹은 누군가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간증을 하거나 혹은 증거하거나 할때에 나는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치열한 고난의 풀무불을 경건한 반응으로 통과한 사람인지 통과하지 않는 사람인지 거의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단지 고생만 했을 뿐 그 고생속에서 경건한 반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화될 기회를 놓치고 지나온 사람은 아주 딱딱합니다. 아주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사람을 쉽게 믿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피해를 줄것같은 그런 두려움속에서 자유가 없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이 뚜렷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을때에 하나님앞에 경건하게 반응함으로 신앙으로 이겨온 사람들은 그 흔적이 나타납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서도 그 흔적이 나타나고 물질이나 부유함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그 흔적이 나타나고 그리고 성공과 실패 인생전체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그런 흔적이 묻어 나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시련의 파도를 헤치면서 폭풍이는 광야의 벌판을 지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부르는 ‘괴로운 인생길 가는동안’이라는 찬송은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런데 이제 중학교 다니는 학생이 ‘여러분 인생은 괴로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학교에서 숙제안해서 얻어맞을 때, 그럴 때 괴로움을 많이 겪었겠지 어디에서 인생의 괴로움을 많이 겪었겠습니까? 그만큼 고난을 소화하는 사람은 그 고난을 통해서 삶의 주제와 신앙의 진리들이 인격적으로 용해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주님의 일을 위해서 충성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성공하지 하지 않음에도 우리들이 원망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과 성품 그것들을 담금질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성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우유부단하면 일처리도 화끈하지 않고 우유부단합니다. 사람이 경솔하면 일처리하는 것도 아주 경솔합니다. 사람이 야비하면 일처리 하는것도 아주 야비합니다. 말도 야비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품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그 성품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품을 다루는 가장 좋은 기회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을 다쏟아부으면서 일할 때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성공을 주시면 얼마나 교만해 지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벌써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될 처지이지만 만약에 우리 제자들이나 누군가가 개척한다고 할 때 먼저 그 교회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고생문이 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없어서 ‘고생문이 훤하다’ 그런 듯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살점을 떼어내셔서 벽돌로 사용하시고 그의 뼈를 떼어내셔서 기둥 세우시고 그의 눈물로 시멘트를 비벼서 벽을 바르실 것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직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경험을 해보아야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자기 부서짐의 아픔이 없는 사람들의 사역이라는 것은 자신도 죽도록 고생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죽도록 고생하는 것입니다.
제 목회사역에 있어서 최고의 숙제는 미안하지만 교회도 아니고 여러분도 아닙니다. 여러분 교만해지지 마세요. 여러분 얼마나 착합니까? 설교하면 가만히 듣고 있쟎아요! 그것만해도 진짜 착한것입니다. 최대의 강권은 저 자신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하면 안되죠!! 그래서 요즘은 누가 개척한다고 해서 가보면 눈물이 납니다. 내가 고생을 해서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무엇을 먹고사나 하는 것도 현실적인 고생이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살점을 때어서 벽돌쌓고 뼈를 부셔서 기둥을 삼고 눈물을 흘려야만 시멘트 반죽해서 벽돌 한줄한줄 쌓아 가실텐데 그는 자신 충만한 것입니다. 누가 그랬죠. 미치지 않고서는 개척을 못한다고....
계산상으로 자신이 있으면 자기는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컷 사역을 하는데 정말 열심히 하고 자신을 다쏟아 붓는데도 즉각적인 사역의 열매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사역자가 자기의 맡은 일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하느냐! 하는 것을 그 사역의 열매를 가지고 그대로 측정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보며 측정을 해야 하냐면 그 사람의 인격을 보며 측정을 하는 것이 훨씬 바릅니다. 만약에 그 삶의 인격이 계속 착해져가고 거룩해져 가지 않는 가운데 일의 성과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하고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일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진실하고 아주 열정적으로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서 충성하는데도 즉각적인 보상이나 성공의 열매를 안주시는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깎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사람들은 성도들이 모이면 교회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서가면서 그 교회의 크기만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셔서 거기서 변화 받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하고 자기부인하고 둘이 살려면 살자름도 조금 찢으면 되고 벼도 조금만 부수면 되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받는 진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자기가 부셔져야 되겠는가를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성공을 안주실때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칼이 있쟎아요. 요즘엔 우리나라에서도 칼을 잘만듭니다. 저는 어느 집을 가도 이제는 칼가는 집을 보지 못했어요. 옛날에는 그것이 일이었습니다. 남자라도 있는 집은 칼을 갈 수 있는데 갈만한 사람이 없는 집을 위해서 분통같은 것을 매도 ‘칼갈아요 가위갈아요’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칼이나 가위를 갈아주는 것이죠. 왜그랬느냐 하면 요즘엔 쇠가 워낙 좋아서 다시 날을 갈 필요가 없는데 그때 당시에는 쇠의 담금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무쇠같은 것은 뻘겋게 날을 불에 담궜다가 찬물에 담그는 것을 몇 차례씩 거듭하는 동안에 쇠가 강하게 되는 것이죠. 한 번 우리가 쇠라고 생각해봅시다. 주님의 손에 있는 집게에 달려서 불속에 한번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뻘겋게 달궈진 것을 그냥 사정없이 두들겨서 물속에다 집어넣을 때 어떻겠습니까? 갑작스럽게 차가워져서 뼈마디가 시릴텐데 다시 또 불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것을 많이 되풀이한 날이 쉽게 무디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명가에서 가지고 있던 보검은 장수들이 높이 들어서 바위를 박살내도 이가 나가지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누가 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장인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칼을 만드는 것입니다. 담금질이 되지 않은 것은 과장을 좀 하자면 파뿌리 몇 개만 썰어도 칼날이 뭉툭해집니다. 그러나 담금질이 잘된 칼날은 수많은 재료를 썰어도 늘 반짝이는 칼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는 것은 돈 넣으면 나오는 자판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지로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국에서는 우리를 자판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선교비를 집어넣으면 척커덕 하고 나오는 자판기요! 선교비를 넣으면 몇십명의 영혼을 찍어내는 그런 자판기로요!! 그런데 우리는 곤고할때가 많습니다. 김목사님 우리를 좀 선교해주십시오.’라고요. 우리가 자신을 자판기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충성이라는 코인을 집어넣으면 열매가 쫙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더 많이 복을 주시면 카지노에서 이야기하는 재팟이라는 것이 터져서 이만큼 충성했는데 억수로 쏟아져나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실한 의미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앞에서 하는 충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충성된 종아’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것은 주인이 단순히 열매 하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자체 자기가 없을 때에도 자기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기를 향해 보여준 그 모든 태도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충성스런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에 대해서 저는 포악한 인격, 착한 인격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또 충성스러운 사람이 쉽게 잊기 쉬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충성에 대해 즉각적인 열매가 없는것에 대해서 낙심하는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깊은 침체에 들어가는 것!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충성스러운데도 사람들이 자기를 잘 알아주지 않거나 충성스러운데도 성공하지 못해서 울먹이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자기고백을 보면 참 안됐죠. 그러나 안됐어도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태도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끊임없이 ‘열매가 적습니다. 열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열매가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죠 그런데 이렇게 열매가 없는 것이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되어야지 잠깐동안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 열매가 없거나 보상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다든지 낙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향해서 마귀가 기대하는 첫 번째의 현상입니다. 일단 하나님께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 낙담하는 마음이 파고들기 시작하면 충성스러운 마음은 아주 단번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믿음도 단번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러한 이유에 근거해볼 때 즉각적으로 열매가 없거나 성공에 대한 보상이 없을 때, 고난이나 충성스러운것에 대한 보상이 없다할찌라도 낙망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한다라고 하는 이 사실은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된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는 뭐냐하면 소극적으로는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를 인내하면서 지키는 것. 굉장한 고통입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가보면 그것을 못 느낍니까? 바닷가에 수십미터되는 방파제가 전부 돌맹이로 쌓은것아닙니까? 그런데 어김없이 그 방파제 앞에는 그 방파제를 콘크리트로 다 쌓아서 만들었는데도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고 방파제 앞에 불가사리 모양으로된 커다란 콘크리트를 수백개 수천개를 만들어서 방파제 앞에다 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둡니까? 그것을 안하면 방파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한 번 파도칠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한번 두번 계속해서 파도가 치고 폭풍우가 몰려와서 큰 파도가 치면 부서지는 것입니다. 작년인가 제작년에 있었던 폭풍 현장중계때 프라이드 차가 큰 파도가 치니까 파도에 맞아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파도가 쉼없이 그 방파제를 때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방파제는 어마어마한 파도의 힘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그 방파제를 볼 때 그 방파제가 무엇인가 노력을 하고 있는것같습니까? 사람들이 거기에다 콘크리트를 발라서 세워놓으니 그냥 있는것같죠. 그런데 내면적으로는 엄청난 저항을 받으며 거기에 서있는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알수있냐면 방조제를 쌓을 때 이렇게 양쪽에서 뚝을쌓다가 물이 들어오는 입구가 좁아지면 봉고만한 바위덩어리가 조류에 쓸려서 날아갑니다. 계곡에 물흘러가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택시만한 바위들이 우르릉 쾅쾅하며 쓸려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계곡물하나에도 그런데 그 엄청난 파도앞에서 어떻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만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탁월한 열매를 못거두어도 타는 가슴을 안고 ‘주께서 나를 여기에 세우셨는데 내가 여기를 버리고 어디를 가겠는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견고히 서있는것만 해도 그는 상받을만 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마음에 어떠한 고통이나 아픔없이 그저 소잡아먹은 귀신처럼 펄퍼덕 앉아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면 그런사람있죠. 아무것도 하지않으면서 장자리 자기혼자 맡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쟎아요. 그리고 일 이월에 얼굴을 보이는가 했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누가 그 일을 한다고 하면 회장이 난데 나에게 허락도 안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쟎습니까? 그런 사람은 자기 이름을 직분과 사명에 걸어놨지만 이미 그 사역의 자리를 떠난 사람입니다. 거기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이름을 걸어났다고 하는 것, 대리운전이나 대리 면허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사명의 자리에 서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엇인가 끊임없는 마음의 작용이 있을 때 그 사명의 자리에 있는 것, 자신의 사명의 자리에서 사명자답게 서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그 자리에서 흔들려고 하는 수많은 그 흔드는 도전들 앞에서 자기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을 태우고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견고함을 구하고 하나님앞에 자신의 사역의 현장을 보면서 성과가 있을 때 기뻐하고 성과가 없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자기가 맡겨진 자리에 주님이 서 계셨더라면 느낄 수 있는 미션! 즉 사명에 대한 주님의 그런 마음을 품은 체 거기에 있는 것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벌써 그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적극적인 요소인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런 충성스러운 삶을 이 종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종이 인생 끝날에 주인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종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길게는 일생전체가 하나님께 헤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짧게는 일년 집사를 맡겨줬는데, 예배위원에 임명이 되었는데 제정위원회에 임명이 됐는데 혹은 주일학교선생에 임명이 됐는데 그것을 안합니다. (--- ? ---)
한 해 동안 살았던 삶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더 짧게는 한 달, 한 주, 한가지 일의, 한 가지 일에 부딪혔을 때 그것들을 처리해 가는 사람의 태도를 통해서 그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 하나가 엮어지면서 그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된 자에 대한 주님의 판단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인생 전체를 생각하면 아직은 기회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젊고 어린 사람들은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생을 하루로 친다면 아직 오전 10시나 11시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후 두 시, 세 시, 네 시…. 여섯 시가 마감인데 벌써 다섯 시 30분까지 다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젊은 사람들은 젊었기 때문에 아직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핑계를 댑니다.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았을 때에는 너무 바빠서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지 않는 상황들에 대한 풍부한 변명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살다보니 한 번도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 부으며 충성스럽게 살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껏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해서는 결심이야 있겠지만 아직 살지 않았으니까 그 앞으로의 삶에 대한 판단은 없겠지요. 주님이 모든 것을 아셔도 미리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산 삶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평가를 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삶이 하나님께 충성하며 사는 것인지에 대해 정확한 잣대만 갖고 있다면 우리의 인생에 그것을 대입시킬 때 우리의 신앙적 양심이 즉각적으로 우리의 삶이 충성된 삶이었는지, 나태와 안일 속에 살아왔던 삶인지를 정확히 판결해 줍니다.
금년 한 해는 어땠습니까? 충성스럽게 살았습니까? 비록 열매는 많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느끼면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쏟아 부은 삶이었나요? 혹은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열매는 많지 않았지만 여러분 자신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동안에 많이 거룩해져 간 그런 기간이었습니까? 어떤 삶이었습니까?
여기에서 인생이 딱 마치면 여러분들은 마음의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물어야 할 질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 나는 매 순간 잠시 후 인생이 끝난다고 할 지라도 그래도 해야 할 그 일을 하면서 살자.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다고 했을 때 의미없는 그 일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의미 없는 일이다. 오늘 죽음이 나를 찾아온다고 할 지라도 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그 일을 하면서 살자. ”
여러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과 천박하고 경박한 부류의 신앙 인격을 가진 미성숙한 사람과의 중요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차이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깊이 있는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도 인격화된 사랑,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삶은 살아가는 사람이 복이 있을 뿐 아니라 지금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가슴에 타오르는 이유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알든 모르든 그렇게 웃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분명한 충성스러운 삶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생각뿐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키에르 케고오르라는 사람이 인류라고 하는 추상 명사는 사랑할 수 있는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도덕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사랑할 수는 있는데 삶은 도덕적 실천을 멀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충성스러운 삶,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영웅적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가질 수 있어도 지금 주님을 위해서 꿈쩍도 하기 싫어하는 그런 게으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충성을 꿈꾼 사람들의 복이 아니라 진짜로 그런 삶을 산 사람들에 대한 보상입니다. 상상 속에서의 충성이나 상상 속에서의 위대한 헌신이나 장엄한 순교가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진실되게 매일 매일 주를 위해서 자신의 육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맡겨주신 자신의 사명을 자신의 존재의 이유로 알고 삶의 한 구간, 한 구간에서 자신의 최선을 쏟아 부으면서 살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 여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가 하나 나옵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큰 것을 네게 맡기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의 희랍어 의미를 보면 ‘적은 일, 양적으로 얼마 안 되는 일’ 거기에 충성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과 인간의 시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인이 볼 때는 그것이 그리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적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그렇게 분투하면서 충성스럽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을 적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적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충성스러운 삶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지위나 직분에 대해 초월한다고 생각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신우회 연합에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부회장 투표를 하는 데 추천된 사람들이 앞 줄에 앉아있는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얼굴들이 전부 벌겋게 달아올라서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흥분되면 그랬겠습니까? 그 자리는 돈을 주는 자리도 아니고 무슨 명예가 있는 자리도 아닌데. 일반적으로 우리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직분이라는 것은 항상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설레게 만듭니다. 초월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만약 이 종들이 주인에게 돈을 받았을 때 그것은 자기에게는 큰 것이었겠지만 주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종들은 그것을 적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의 절대적인 액수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그것을 위탁한 주인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 존재를 , 그 인격을 생각한 것입니다. 돈의 크기를 보고 충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에게 맡긴 그 원 주인의 인격, 존재,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주인이 없는 데도 그 주인 앞에서와 같이 충성스럽게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도 그것입니다. 수 만 명의 교인들을 이끌고 목회하는 목회자도 주님께서 부르셨지만, 그 사람의 차를 운전하는 기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입니다. 그 기사가 하루 종일 운전을 하고 돌아와서 먹어야 될 밥을 해 주는 식당 아주머니도 주님께서 부르셔서 거기에 온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가 버린 음식을 치워 가는 교회의 청소하는 사람도 주님이 거기에 세우신 사람입니다.
신앙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맡고 있는 그 일을 가지고 그 사람을 간단하게 평가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연관지어 그 사람을 소명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줄 수 있는 것, 여기에서 성숙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역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서 일하는 직원들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걷어서 생활비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직원들을 대한다면 그 사람의 인격은 아직까지 바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교회가 세상에 있는 기관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대한 주식회사 같다고 비꼬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장로들은 대주주, 원로 목사님은 왕회장, 새로 온 목사님은 고용 사장.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얘기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각자 각자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소명의 빛 아래서 그들의 사역을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중요성의 여부, 그것도 사실 신앙적인 시각에서 잰 것이 아닌, 다분히 세속적인 시각에서 잰 것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만 중요합니까? 식당에서 밥 하는 일도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 중요합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주님이 부르셔서 거기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다 라는 시각으로 그들을 보십시오. 부르심의 빛 아래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사역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주인이 이것을 적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들은 그것을 적은 일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큰 일을 대하면 자기가 다르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착각일 뿐입니다.
제가 선교를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화와 언어가 같고, 그래서 항상 이웃이라고 하는 친근감을 느끼는, 같은 동족들의 영혼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자기가 얼굴 검은 사람들이 있는 아프리카에 가면 기라성 같은 전설적인 선교사들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감상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주인이 적은 일을 의도적으로 맡겼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적은 것을 맡기면서 이 사람들이 이 일을 통해서 자기를 향한 충성스러운 삶의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증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시험해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그것을 통해서 더 큰 일, 그보다 더 큰 일들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해도 이제는 자꾸 경력 있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회사에서도 자꾸 경력 있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 이유는 경력을 추적해 가면서 그의 삶을 수소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전의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과거를 통해서 판단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절대 하나님께서 어느 날 자고 있던 사람을 벌떡 깨워서 위대한 전도자, 커다란 일을 맡을 사람으로 세우시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사도행전의 뒷부분에는 ‘바울과 바나바’라는 호칭이 나오지만, 앞부분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임금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도록 큰 그릇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도 상당한 세월동안 자기보다 훨씬 더 유명한 사람들의 그늘에 가려서 지내게 하셨습니다. 바나바를 도우러 다니는 사람 정도로만 기록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한번에 가이사 앞에 그를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가 회심하자마자 단번에 ‘교회가 설지어다’하시며 믿는 자들을 구름처럼 모으시지 않고 그를 전도하게 하셨습니까? 왜 그를 바나바나 따라다니고 바나바가 그의 회심이나 입증해주어야 겨우 사람들이 믿어주는 그런 무명한 시절을 겪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적은 것을 통해서 그의 충성을 입증하셔서 더 큰 것을,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것을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으신 분도 있겠지요. 꼭 주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해야만 하느냐고, 적은 일이라도 충성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진짜 충성스럽게 살아서 주께 인정을 받으면 적은 일만 하면서 가만히 있도록 주님께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요양 중에 계신데 그 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으로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 분이 6,7세 때쯤의 일입니다. 그 동네에 한 고목 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 산신령이 나타난다고 동네 사람들이 제를 지내고 절을 하곤 했습니다. 그것을 본 이 꼬마가 교회에 와서 막 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저렇게 우상을 섬기는 것을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왜 이런 우상을 가만히 두시는가, 어떻게 저 나무를 좀 없애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벼락이 내려서 바로 그 나무를 내리쳤고, 그 나무는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목사님은 그 사건이 당신의 기도의 응답임을 강하게 확신하고 계십니다. 그런 정도로 믿음으로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서 월사금도 제대로 못 내고 소학교를 다닐 때, 일본인 교장 선생님이 그의 착실함과 준수함을 보고 학교의 소사일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학교의 일에 정말 너무나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니까 교장 선생님께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분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장선생님은 그 분을 일본에 유학시켜 공부를 하도록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그 분은 후에 목사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일도 이렇게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며 더 큰 일을 베풀어주는데 하물며 이 실패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맡기실 때 주님께서 입증 없이 아무렇게나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지금 살아서 뭔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혼의 유익을 끼치는 사람들, 그 분들은 지금처럼 알려지기 전, 평신도 시절부터 영혼을 위해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을 통해서 영혼들을 무엇인가 복되게 하려고 몸부림쳤던 사람들입니다.
무디의 전기를 보아도 이러한 사실이 너무도 잘 나타납니다. 그는 위대한 전도자를 꿈꾼 적이 없었습니다. 은혜 받은 자기의 눈앞에 보이는 불량배 아이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일을 끝내고 나니까 더 큰 일을, 그 일을 끝내고 나니 더 더욱 큰 일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셔서 영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그렇게 활발한 설교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엘리트주의에 빠져서도 안되고 허풍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큰 일을 맡겨 달라고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누가 나를 위해 갈꼬 하실 때 “저 빼고 누가 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왜 이제서야 이 일을 주시는 겁니까?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이 이렇게 부르실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미천합니다. 큰 길로 불러주실 때에 오히려 주님께 누가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절 보내지 마시고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보내셔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진심 어린 고백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겠다고 하실 때에는 주님께 쓰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우리가 그토록 섬기고 사랑하고 싶었던 하나님을 더 깊이 ,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왕이면 더 많이, 주님을 위해서 영광스러운 일들을 보게 하고 싶었는데 작은 영광이 아니라 큰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다면 우리에게 마다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지 그럴 마음을 가질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 잘 가르쳐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넓게 보면 이것 하나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생명과 풍성한 삶을 모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추수꾼과 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기를 우리는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한 자루의 낫이 되는 것도 너무나 감사하고 감당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세상을 보며 낫 가지고 언제 주님이 일 하실까 , 차라리 우리가 주님의 손에 들려진 낫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타고 앉으시는 6m, 12m짜리 컴바인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됩니다. 이런 생각이 절대로 영적인 허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운 사람의 자연스러운 소망이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나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 모두 주를 위해 일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때 얼마나 복될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충성된 사람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두 달란트 맡은 종이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칭찬 받는 것에 대해 시기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자기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서 이 일을 감당해서 주인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어떤 일을 맡겨주실 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크고 위대한 일로 한 시대에 주님의 이름에 영예를 돌려드렸던 사람이 전부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세월들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하찮고 작은 일에 헌신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귀한 일들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20.착하고 충성된 종Ⅳ: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종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3)
23절에 대한 설교를 오늘 이 시간으로 막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 번에 걸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까지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런 착하고 충성된 종의 인격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그리고 그렇게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무엇인지를 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여기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에 대해 여러분들께 설명 드리기를 착한 것은 선한 인격이고, 충성된 것은 그 사람의 충성된 삶의 방식이 가져 온 또 하나의 인격적 특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착한 것이나 충성된 것이나 모두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인격적인 특성인데 특별히 착한 인격이 선량하고 온유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리킨다면, 충성된 것은 그 사람이 충성된 인격을 통해서 보여줄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모두 인격적인 특성입니다. 두 달란트 맡은 종에 대한 평가가 착하고 충성되다는 것이었는데 이 두 가지가 모두 한 인격 속에 있는 것입니다. 착한 것은 선량한 성품과 관계된다면 충성된 인격은 그가 무엇을 시키면 어떤 방식으로 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인격적 특징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랑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의 9가지 성령의 열매는 모두 인격에 맺히는 열매들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의 인격적 특성과 삶의 방식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이 성실하면 무엇을 하든지 성실하게 합니다. 잠을 자든, 음식을 먹든, 무엇을 하든 성실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불성실하면 하다 못해 오락을 해도 그렇습니다. 화가 나면 평소의 가식과 절제가 사라지고 그 본성이 다 드러납니다. 감추어져 있을 때는 절제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풀어지게 하는 상황에 드러나게 나면 내면에 있는 것들이 드러나고 맙니다.
내면의 세계가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밖의 행실이 안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즉 내면의 세계에서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하셨는데 악인은 악한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면이 밖으로 흘러나가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선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면 살아가는 선한 삶의 방식이 그를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반대의 측면도 있습니다. 악한 삶을 살면 그 악에 익숙해지면서 사람이 그렇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야기 가운데 중 오늘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충성하였으매’라는 것은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어느 시점에서의 솟구치는 어떤 충성된 열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달란트를 맡기고 간 날부터 시작해서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해서 섬겼던 종들의 섬김의 전과정을 염두에 두고 내린 평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한결같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좋아한다는 말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얘기하고도 통하지 것이겠지요.
옛날에는 옷감을 모두 손으로 짰습니다. 그런데 그 옷감을 한결같이 짜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을 그저 어렴풋한 설명 정도로만 들었는데 한산에 집회를 갔을 때 직접 눈으로 보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바쁜 일정 가운데 집회를 부탁하시기에 거절을 해야할 상황이었으나 교인이 아홉명이라는 말에 차마 거절을 못하고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모시의 본고장입니다. 집회가 끝나고 모시 짜는 곳을 들렀습니다. 삼을 자서 짜는 과정을 보았는데 30년 동안 모시를 짜오셨다는 집사님의 솜씨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잠자리 날개같이 가는 세모시를 아주 곱게 옷을 짰습니다. 이렇게 가는 옷이 찢어지거나 닳지 않느냐고 했더니 아주 질겨서 잘 닳지 않는다고 합니다.
곱게 짜놓은 모시를 보고 감탄을 하니까 이 귀한 모시는 마치 한 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한 재료로 쉬지 않고 똑같은 결로 만든 것처럼 짜기가 매우 힘이 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을 들여 꼼꼼하게 제대로 짠 제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루 종일 공을 들여 짤 때 만약 1.5m를 짤 수 있다면 대충 막 짜서 하루 3m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답니다. 그렇게 해서 막 만들어진 천은 결코 한결 같은 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옷감뿐만이 아니라 한결 같은 사람 또한 아주 적습니다. 참 소수입니다. 두 달란트 맡은 종의 삶을 우리들이 다 들여다보지는 못합니다. 성경이 비유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의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가 장사를 했다고 했는데 오랜 세월이라고 했으니 상당한 세월이 흐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장사를 하면서 많이 남아서 기쁜 날도 있었고, 많이 남지 않아 마음이 상한 날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날은 나 혼자 죽도록 일하는 것을 주인이 알아줄까 생각 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할 때에는 누구보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봉사합니다. 섬기는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를 올립니다. 그런 때가 있는가 하면 왜 나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혼자 가는가 불평을 할 때도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어느 한 토막 한 토막을 끊어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표본 조사 하듯이 어느 하루를 뽑아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그 분에게 기억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시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주인이 그 사람을 탁 보았을 때 사진에 한 번에 찍히듯이 주인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있는 그 인격적 마음, 그리고 지금도 그에게 뭘 맡기면 어떻게 행할지 보여주는 그 심성, 그 모든 것들이 착하고 충성된 것으로서 주인에게 감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아주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적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런 결과가 맺혀진 것으로 드러났는데 그러한 인격적 열매가 있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살아온 충성된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충성하면서 실제로 살아온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든 간에 살아오는 그 삶이 방식이 여러분의 신앙의 인격을 결정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사명, 이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감당해 나가는 전 과정은 결국은 우리의 신앙의 인격이 어떻게 빚어질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실제로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관념 속에서 동경하고 생각함으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일의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아주 헌신적으로 그 일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꼭 성공적으로 성취되어서 열매를 맺어서 그 결과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오락을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삶일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 안에 고통을 감내하는 희생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연약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항상 그 뒤에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어떤 경건한 몸부림이 , 경건한 희생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청년 한 사람의 취미가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위험합니다. 비 오는 날이나 급커브에서는 아주 위험하지요. 뼈가 부러지고 많이 다치면서도 위험하게 오토바이를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위험하게 타고 다녔습니다. 그를 보고 그 누구도 오토바이를 타는데 충성을 다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미쳤다고 하지요. 자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뭐든지 취미 하나에 빠지면 그렇게들 푹 빠지게 됩니다. 그런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의 소원을 거스르는 적이 많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새벽 시간에 누워서 푹 자는 것이 더 쉽습니까, 아니면 새벽기도를 하러 오는 것이 쉽습니까? 새벽에 옷을 챙겨 입고 추운 공기를 가르면서 오는 것이 쉽습니까? 은혜 받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러 오는 일은 게으른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영혼들을 그저 설렁설렁 가르치는 것이 쉽습니까, 그 영혼들을 붙들고 고뇌하고 아파하고 그 영혼들이 뭔가 바르게 되지 않으면 그것이 모두 자기의 책임인 것처럼 아파하고 그렇게 충성하는 것이 쉽습니까?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거룩해진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종이 ‘충성하였으매’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도 그런 모든 자기와의 싸움의 전 과정을 지나면서 맺혀진 인격적 열매요, 받게 된 주인으로부터의 인정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간다고 애를 쓰며 살아가지만 그러나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애들 때문에, 먹고살자니 하고 핑계를 대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즉시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최대의 적은 환경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심지어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도 아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최대의 적수는 우리 자신이다.”
가끔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큰 일을 순간의 사소한 감정 때문에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본성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한결같이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시종일관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때로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혹은 인내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그런 모든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한결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어느 방향의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며 그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려고 몸부림을 쳤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저는 점점 나이가 들고 사역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얼마나 하나님이 부족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혹은 우리 주위에서 하나님께 일을 통해서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 같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얼마나 완전할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사람들의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 한없이 연약한 갈대와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부득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 나의 약한 데서 주님이 온전해 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들이 한결같이 충성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가 보면 한결같지 않은 그 사람만의 독특한 몸부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불꽃처럼 주님을 섬기며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 그렇게 충성하고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속에 꿈꾸고 그리워하고 어찌하든지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의 삶이 방향이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하나님의 사람과 사람의 사람이 나뉘어집니다. 사람의 사람, 세상의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구하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보다는 주님을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의의를 발견하는 사람,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은 것도 바로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애굽의 군사를 때려죽이고 도망쳤을 때 그 일의 원인은 혈기였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솟아오른 혈기이기는 했지만 히브리서를 보면 그 사람의 밑바닥에 그런 혈기가 솟아나도록 만든 그의 마음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궁중에서의 생활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모세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성숙한 인격으로 변하여 갔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그 믿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기초가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하지만 우리가 변함없이 그런 정신의 감화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약할 때가 있습니다. 강할 때도 있습니다. 용맹스러운 사자처럼 돌진할 때도 있지만 블레셋의 군사 일 천명을 당나귀 턱뼈로 때로 눕히고도 주저앉아서 나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저 인간들의 손에 이제 내가 맞아 죽게 되었다고 하는 삼손과 같은 그런 낙심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순간에 스쳐 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새롭게 주님을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전 삶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거룩하고 착하고 충성된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생을 게으르게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지 않는 삶을 살면 나중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과 똑같고, 성경 찬송을 끼고 교회에 주일날 가는 것, 그것만 빼고는 세상 사람들과 아주 똑같은, 그런 조잡한 인격을 가진 비천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주님과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연합, 친밀한 친교의 연합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것이 정수인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무슨 신앙을 가진 행복한 삶이 되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적은 일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적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큰 돈이었지요. 두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 하면 거의 1900만원이 넘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적은 일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주인이 얼마나 부자인지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이 종을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는 앞으로 맡겨질 큰 일들이 얼마나 엄청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작은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는 죽고 주님은 사셔서 그 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삶을 철저하게 살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얼마나 크고 엄청난 일을 맡기실 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위대한 설교자들의 생애를 이렇게 보면 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한 것도 특징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 문제가 관련하여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들 중에는 누구도 성공을 꿈꾼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꿈꾼 사람들이 없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 주실 때 세워주신 각 자리에서 무명할 때나 유명할 때나, 능력이 있을 때나 능력이 없을 때나 자기를 다 드려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 그들이 후에 어마 어마한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고,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큰 사역들을 했지만 그 사역들에 비해서 옛날에 하던 작은 사역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통된 특징입니다.
제가 어느 책을 쓰면서 조사를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13세에 예일대에 입학을 해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다 떼었다고 합니다. 지금 아이들 같으면 컴퓨터 오락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말입니다. 19세에는 그 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사상계에서는 커다란 거목입니다.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의 초대 총장이 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되기 전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시골에 들어가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회를 하다가 결국은 교회를 큰 교회로 만들지도 못하고 교인들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에스벨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도 오랫동안 무명의 복음 전도자로서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렇게 훌륭하고 걸출한 사람들도 모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 자체의 크기나 그 일을 행하는 지위를 어떤 것으로 주느냐에 따라서 충성하는가 말고 하는 것을 재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 때문에 충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변함없이 자기를 그 일로 불러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 충성된 헌신, 그런 것 때문에 자기 일에 헌신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적은 일이 적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아주 커다란 일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시는 훌륭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그 일은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실 크고 위대한 일의 한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에게 이루어주실 위대한 일들에 대한 전망을 갖기보다는 옛날에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분위기 속에서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후에 맡겨주실 크고 놀라운 일들은 이제 우리에게 아직까지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이 종이 두 달란트라고 하는 큰 돈을 가지고 노심초사하면서 주인에게 남겨주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한 순간도 그것을 작은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와서 진실을 보여줄 때에는 그 종에게 맡긴 두 달란트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그에게 맡겨 주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허황된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왕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저도 한 때는 이름 없이 그저 한 명을 맡겨주셔도 감사하며 소시민처럼 작게 살다가 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서 바뀐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진실하게 다른 사람이 어떻든지 주님 앞에 바르게 그렇게 산다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나만 진실하게, 깨끗하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모두가 주님의 땅이고 주님의 나라인데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한 두 사람이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것 가지고는 이 세상이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적인 욕망이 아니라 온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전파되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려드리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섬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을 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일을 꿈꾼다고 될 일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작은 일을 맡겨주셨는데도 그 일에 대해 충성된 사람이며, 하나님을 향해 정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 받아서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이 입증 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고 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지금 맡겨진 일들을 작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작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선언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이 있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그룹의 높은 직책을 맡은 분이었습니다. 회장의 아들이 기업을 이끌고 있는데 그와 아주 친한 친구사이이면서 회사의 중역을 맡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사장이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 회사가 뻗어나가고 있는 발전상에 대해서 죽 얘기를 하고 있던 차에 이 사람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공석에서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너의 발전의 아무리 커도 나는 같은 월급을 받는 고용인일 뿐이다 라고 하며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월급을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해 나가지만 주인의 즐거움을 같이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참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주식을 옵션으로 받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것은 완전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입장이 됩니다. 회사가 잘 안되면 자기 역시 아무 이익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 회사가 잘 되면 역시 자기가 잘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적합할 지 모르겠지만 영화 타이타닉을 만든 감독 역시 영화가 흥행이 안 되어 수입이 없이 적자가 나면 돈을 받지 않겠으나 수입이 많아지면 일정비율의 돈을 받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그리고서 흥행한 그 한 작품으로 1500억불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확실하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한 셈이 된 것이지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는 주인이 진정 이 종을 인정해 주면서, 종에게 무엇을 맡겼을 때에 잘 할 수 있을까, 못 남기면 혼날텐데, 욕을 먹을텐데 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인과 그와의 관계가 종의 진심과 충성을 확증하고 그의 마음이 종과 주인의 계산에서 비롯된 마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서 자식과 같이, 동지와 같이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주인의 일이 잘 되어서 맛보게 되는 모든 기쁨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 앞에서 잘 하였도다에 대해서 설명할 때 말씀드렸던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 속에서 그를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오는 친교의 장면을 아주 그림같이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경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아니지만 그 본문의 분위기는 그 종을 아들처럼 자식과 다름없이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성경에서 종이지만 그 집의 자식과 다름 없이, 후사와 다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종, 엘리에셀의 관계에서 그런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후사는 엘리에셀뿐이옵니다.”라는 아브라함의 말에서 종에게 다 주려고 마음먹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처럼 말입니다. 그 엘리에셀이 주인의 아들의 혼사를 이루기 위해서 주인의 뜻대로 면밀하고 충성스럽게 움직였던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주인과 종의 완전한 연합을 봅니다. 이와 같은 관계의 분위기를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케 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죄를 정케 하사 주의 일꾼 삼으신
구세주의 넓은 사랑 항상 찬송합니다.
나를 일꾼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어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진짜 하나님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온전한 연합 속에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살아가는 삶을 그림으로 묘사한 다면 어떤 그림이 될 것 같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리에서 자기도 기뻐하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자리에서 자기도 울고, 주님이 분노하시는 자리에서 자기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고 그 분이 침묵하시는 자리에서 자기도 침묵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 삶을 일치하게 살아가는 삶, 그 삶의 모습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친교와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 속에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진실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의 끝이 무엇입니까? 진실을 능가하는 신앙의 덕목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실이 없으면 사랑도 거짓입니다. 계산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실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 진실한 인격이 마지막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무슨 칭찬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 그래서 항상 충성스러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 하나만을 떼어서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이게 그 사람의 신앙의 인격, 그리고 그 사람과 주님과의 영적인 연합, 그 완전한 친교, 이 모든 것과 함께 완전히 어우러진 가운데 고려되어져야 할 성격의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민수기 12장에서 그렇게 훌륭하고 착한 인격을 보여주고 친교에 있어서 미리암과 아론을 능가하는 차원 높은 친교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을 때에 모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정신세계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면서 범죄하는 것을 보는 순간에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죽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인해서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지도자의 영도 아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생애도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할 궁극적인 삶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삶을 사는 것,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삶을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주님이 너무나 아파하시는데도 우리는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는데도 우리의 기쁨과 관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이런 삶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고 할 때 그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수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사람은 주인의 고통에 참예하는 사람, 주님의 아픔에 참예하는 사람은 주님의 기쁨에 참예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비록 신분은 종이지만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과의 완전한 교제 속에서 주인의 자녀처럼 그런 관계 속에서 섬기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인 세계인 것입니다.
21.적은 능력, 큰 충성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3:8上)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 구절은 ‘열린 교회’ 이름의 유래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사랑하는 구절이며 뜻 깊은 구절입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충고를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한 번 들은 설교를 충분히 소화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저희 교회의 초창기 때 말씀에 깊이 들어갔던 교인들의 말씀 생활의 특징은 말씀의 재독이었습니다.
충성시리즈를 거의 6개월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들은 것들이 모두 이해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듣는 목표는 제일 먼저 말씀이 귀에 들려서 우리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그것이 깊은 묵상 속에서 깨달음과 함께 깔대기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오고, 가슴에서 그것이 역사해서 우리의 혈관과 심장과 모든 사지 백체 속에 스며들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성품이 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일구어 낼 때 그 사람이 정말 그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태도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인들 가운데 설교 테이프를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지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했어도 테이프를 다시 재독하고, 또 재독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하면서 영혼의 유익을 얻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 교회의 녹취 헌신자들의 공통된 고백은 예전에 다 들었던 말씀을 녹취할 때 예배 중에는 흘려보냈었던 말씀인데 그 테이프를 들으며 녹취를 하다가 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고 삶이 바뀐 지체들이 여럿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재독하는 삶을 여러분들이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시리즈를 듣고 나서는 은혜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 때는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비슷한 심리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6개월 동안 충성에 관한 설교를 듣고 났을 때, 성경 적인 충성에 대해서 전체적인 골격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신앙의 집들이 지어져 가야 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었던 일곱 교회 가운데 주님께 칭찬만 받은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특별히 이 교회와 서머나 교회, 두 교회는 책망이 없이 칭찬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책망과 칭찬을 아울러 받거나 책망만 받은 교회였는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받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이름의 뜻은 ‘형제 사랑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주님이 ‘열린 문’을 두셨다고 했습니다. 희랍어 원어를 보면 ‘계속해서 열려져 있는 문’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 닫혔다 열렸다 하는 문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지신 그 분이 여셨기 때문에 그 분이 다시 닫지 않으면 누구도 닫을 수 없도록 그런 식으로 오래 전부터 열려져 있는 그런 문을 두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열려진 문의 의미는 에스겔 1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을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고, 하나님의 권능의 이상을 보게 되었던 것과 같은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당신이 세우신 종이나 혹은 교회를 향해 부어주실 때에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교회는 결코 이 세상의 단체를 이끌어 가는 경영의 방식에 의해서 교회다워질 수는 결코 없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조직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조직의 경영 방식들이 교회에 활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는 결코 그것 만으로서는 교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신령한 것들이 그 교회에 쏟아 부어질 때 그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였고, 그 교회가 적자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흑자가 나지 않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서 교회가 부채가 좀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을 가지고는 교회가 건강치 못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살아있다고 말 할 때 그것은 경영을 잘 해서 조직체로서 손해보지 않고 경영의 측면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그 일, 그것을 할 때에 그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닌 곳에서도 다 할 수 있는 일, 그것 이상의 것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교회라고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말씀의 위대한 능력이 어떻게 옵니까? 돌같이 굳고 강퍅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비상하게 그들의 마음을 다루면서 다가오는 죄에 대한 탁월한 인식과 하나님의 거룩 앞에 떨며 뉘우치는 우리의 각성은 어떻게 옵니까? 오랜 동안 죄에 익숙해지고 패역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고쳐져서 새 삶을 살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캄캄한 어둠의 밤처럼 주님이 누구이신 지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무지하던, 그래서 짐승처럼 막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에 번쩍하고 비치는 찬란한 진리의 빛, 그 각성의 빛을 받고 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 앞에 떨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갈망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게 됩니까?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교회 앞의 상황이나, 개인과 마주하고 있는 삶의 정황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게 만드시는 장본인은 누구이십니까? 그들이 부르짖어 기도할 때 환경을 변화시키고 여건을 바꿔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 앞에 하나님께서 앞서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되는 상황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모든 좋은 것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로부터 내려옵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매일이면 좋고 매일이 아니어도 종종 하늘이 확 열리고 주님의 사랑이 물 붓듯 쏟아 부어지고 도저히 지쳐서 일어날 수 없는 우리의 영혼, 우리의 육신에 신령한 힘이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이러한 공급하심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라는 이름, 얼마나 좋습니까? 가끔 외국에서 편지가 오는데 이름을 “ The Open Church " 라고 써서 보냅니다. 그 이름은 틀린 이름입니다. ” The Opened Presbyterian Church" 가 맞습니다. 스스로 연 교회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열려진 교회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희랍어 성경과 조금 다릅니다. 8절을 희랍어 원문으로 보겠습니다.
“ 내가 네 행위들을(일들을) 안다(본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오래 전부터 열려져 있는 문을 두었는데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켰으며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가끔 이렇게 원본과 대조를 해 보면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놓칠 수밖에 없었던 메시지들이 확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이 열린 문을 두셨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네 행위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 행위들은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살아온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복수로 행위들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 이런 최상의 인정하심이 있기까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충성스럽다’고 하시는 인정하심은 순간 순간 우리를 인정해 주시기도 하는 것이지만 주님의 궁극적인 인정은 우리가 한참을 살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복수형의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이 이들을 깊이 인정하셔서 그들에게 열린 문을 두시고 하늘로부터 교회를 교회답게 하시는 신령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탁월한 복을 주시기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섬기며 살아온 그 삶이 얼마나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삶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회상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처럼 자기 인생에 대해서 회상할 것도, 회상을 한다 해도 별 가치가 없는, 그냥 저 좋은 대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살아온 것은 최상의 깨달음을 주어 봤자 ‘그렇게 살지는 말자’ 정도밖에 배울 것이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 목표를 가지고 분투하며 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지혜를 던져줍니다.
사실 그렇게 목표를 가지고 분투하며 사는 삶은 사연이 많은 삶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 이런 인정을 받기까지 그들은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다’라는 말에 쓰인 단어의 뜻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그 단어는 직관적인 통찰을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내가 네 속을 다 안다, 네 속이 보인다’ 하고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람의 평가는 참으로 틀릴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 마음속에 진정한 충성심이 동기가 되지 못한 채 섬기던 사람들도 있고, 진정한 동기가 있어서 섬겼다 하더라도 섬기는 방식 자체가 신앙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는 사람인데도 사람들의 눈에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을 꿰뚫어 보시는 시선은 아주 정확합니다. 이것이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주님이 아십니다.
그리고 나서 중간에 삽입구처럼 본문을 깨고 들어오는 구절이 ‘볼지어다, 내가 너희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자가 없느니라.’ 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것 없이는 정말 교회가 교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놓으신 그것이 정말 교회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늘 문이 막힌 것 같은 상황을 지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 어떻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그것을 확대해서 교회를 향한 하늘의 문이 닫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지만 몇 해 전 일본에 가뭄이 극심했을 때, 우리 나라에서 공업 용수를 수입해 간 적이 있습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어도 그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이 없었던 것이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비용이 너무 막대하니까 경제성이 없어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6개월만 하늘이 닫히고 비가 오지 않아도 인간들은 거의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을 치는데 교회에 몇 년씩 하늘의 문이 닫혀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닫혀진 문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진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땅을 샀느니 기도원을 지었느니 어쨌느니 저쨌느니, 누가 예수를 새로 믿고 전도를 많이 했느니---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셨을 때 나타나는 작은 현상들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에게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열어놓으시고 누구도 닫을 수 없도록 주님이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는가? 이에 비하면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교회에는 하늘 문이 닫힌 교회가 아니었습니까? “네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너희의 가난한 것을 알지 못하고 너희의 눈 먼 것을 알지 못하고---” 하늘의 문이 닫히니까 사람들이 벌거벗었어도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이 멀었으면서도 자신의 눈이 정말 먼 것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그 열린 문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하고 기이한 일을 끊임없이 내리시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위해 하늘의 문을 여시고 그 문을 닫지 마시옵소서. 그 문을 통해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시고, 성도를 성도 되게 하시는 신령한 그 무엇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교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큰 건물, 허우대가 멀쩡한 사람, 좋은 학교를 나오고 학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특징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열려진 하늘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들을 수 없는 음성을 저 사람은 듣고, 내가 기도할 때는 닫혀진 그 문이 저 사람이 부르짖을 때는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축복이 따라다니는 사람, 그러한 교회 ,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렇게 신령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애매모호한데 희랍어 성경에 의하면 “왜냐하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나의 말씀을 지키고, 또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란다.”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충성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이 흔히 충성이라고 하면 불도저처럼 막 눈에 보이리만큼 혁혁한 일들을 해치우는 것, 그런 것들을 가리켜 충성이라고 할 때에 떠올리는 그림일 수 있습니다. 큰 일 하는 사람, 큰 일 해치우는 사람, 그런 그림들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충성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큰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서도 충성을 이야기 할 수 있고 작은 일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도 충성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충성은 일의 규모나 그 일을 해치우는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대면하며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의 내면의 인격적인 특성과 더 많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하나님이 열린 문을 두시고 거기를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끊임없이 부어주시리만치 탁월한 교회였으니까 그런 교회였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 커다란 능력을 가지고 혁혁한 일들을 해 나간 큰 교회였을 것이라고 우리들이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으며 산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뒷부분은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고 적은 능력을 가지고 산 교회였다고 하는 점만을 오늘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교회가 예수님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킨 것은 이 교회가 해치운 일의 규모나 그 사역의 효율성을 가지고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는 적은 능력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보면 예수님께서 예전의 좋은 일들에 대한 많은 칭찬, 그 교회가 받은 그 탁월한 영적인 은혜에 대한 많은 칭찬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칭찬 뒤에 아주 심한 책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큰 능력을 받았지만 그 능력대로 살지 못해서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가 되었다면 이 교회는 적은 능력을 받았지만 그 능력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신 삶을 산 교회입니다.
그런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 교회는 충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 가운데 하나가 달리기입니다. 특히 100m 달리기를 보는 것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9초7에 100m를 뛸까요? 질풍과 같이 달리는 것,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보시고 너도 똑같은 인간인데 왜 너는 저렇게 못 뛰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보다도 우리에게 그것을 주신 주님이 훨씬 더 잘 아십니다.
어떨 때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시는데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을 맡기십니다. 기도해 보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부르심인데 재능이 없는 경우, 그것은 땅을 파보면 나오게 되어 있는 묻어둔 한 달란트의 경우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라고 하는 신학자가 소명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명언을 남겼습니다.
“소명은 재능에 의해서 확인된다.”
얼마 전에 제게 개인적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두 세 사람 앞에만 서면 얼굴이 벌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얘기를 못 하겠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야될 상황인데 떠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떠나게 되었다고 인사하게 될 상황이 가슴이 떨려서 떠나지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과연 소명이냐고 물어왔습니다. 제가 몇 가지 가능성을 얘기해주었는데 정신적인 장애나, 정서적 쇼크로 인해 원래의 바탕이 왜곡되었을 가능성, 그리고 또 하나는 진짜 소명이 아닐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능이 전혀 우리에게 없는 것 같은데도 사실은 우리에게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주시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항상 충성과 관련될 때에 주님께서 문제로 삼으시는 것은 왜 못 받았는가가 아니라 이미 내가 너희에게 준 신앙, 물질, 이런 것들을 가지고 너희들이 왜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되고 헌신되게 살지 않았느냐 이것이 항상 하나님의 질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성실해도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전투기를 조종해 보는 것이 저의 꿈이라고 할 지라도, 조종간을 붙잡고 통성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몰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고도의 훈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신 것, 주님이 알게 해 주신 것,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급해 주신 그 은혜와 능력, 이미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원, 이런 것들을 왜 활용해서 충성스럽게 살지 않고 내버려두는가를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보고 두 달란트를 남겼을 때,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두 달란트 밖에 없는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를 보고 어디 가서 세 달란트를 더 꾸어다가 다른 종처럼 다섯 달란트로 시작을 했어야지 왜 두 개만 가지고 시작을 해서 두 개 밖에 못 남겼느냐고 하신다면 선한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분에게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지식, 남이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으면 남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남보다 더 하나님 말씀을 많이 깨닫게 해 주셨으면 그러면 남들보다 더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고 남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재능을 주셨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받지 못한 사람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서 내 삶은 고달프다, 나만 시킨다고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아무리 부담스럽고, 왜 나만 이렇게 애쓰고 수고하며 살아야 할까 하지만 막상 주께서 그래, 그만 두거라 하시면 살맛이 나겠습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이 교회를 보십시오.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제일 크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이 그것밖에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 더 큰 능력이 필요합니다, 제게 더 많은 능력을 주십시오 간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내 지식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된다, 그러니 더 이상 알 필요 없다, 이런 태도가 아니라 내게 더 많은 진리의 빛을 주십시오. 내가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내게 은혜를 주십시오.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장은 가지고 있는 것, 그 범위 안에서 최대한 그 말씀을 붙들고 사느냐 안 사느냐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충성스러운 사람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만 충성스러운 삶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으면서도 불충하다고 책망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제 삼으시는 것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있는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것으로 안주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만져주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더 많은 물질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미래에 속한 일입니다. 지금 문제를 삼으시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가 그것이 주님에게는 중대한 관심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기가 어린아이와 같고 그리고 능력이 심히 적습니다. 정말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화려한 영적 생활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은혜라고 하는 것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한 세대를 뒤흔드는 설교자보다 한 교회에서 걸레질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 충성 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충성과 불충성의 문제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 얼마나 큰 일을 위해서 역사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에게 자기에게 주신 부르심, 자기에게 주신 재능, 자기에게 주신 기회, 이것을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선용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좋으신 주님을 위해서 사는가 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지나갑니다. 우리에게는 좀 진실한 신앙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실한 신앙의 인격은 영계를 움직이는 탁월한 능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를 움직이고 휘어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진실한 인격이 아니면 하나님은 상대도 안 하십니다. 죄 가운데 있고,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도 진실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 진실로 하나님의 진실을 붙잡습니다.
성전에 올라갔던 악한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진짜로 그 사람은 바리새인보다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악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시선을 끌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악한 것을 숨기지 않는 진실함입니다.
우리 한 번 영적인 열등감에서 벗어나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나에게 하늘의 영계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위대한 영적 권세가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부패와 패역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존재합니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주님 떠나서는 살 수 없지만, 순간 순간 아직까지도 부패한 욕심의 자극을 받으며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고 후회의 눈물을 흘릴 적이 많습니다. 위대한 순교자의 삶을 사모하기는 하고 그런 삶으로 커다란 감동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늘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도 실제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은 그런 삶을 반영하지 못할 때가 훨씬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다 버려서 가난하고 병들고 지치고 고단한 영혼들을 위해서 자기를 다 주면서 살고 싶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삶이 주어지면 70%는 견디지만 30%는 못 견디는 것이 자신의 모습일 수 도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의 부족을 철저히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지 열등감 속에 빠져서 없는 30때문에 이미 있는 70도 활용하지 못하고 좌절해 버리는 그런 패배적인 삶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이 본문을 보면서 아주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앙적인 영웅주의적 사고 방식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가 하는 것을 보고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게 해 준 성경구절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그렇습니다. 부족합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규모도 작고 위대한 사람이 보기에는 시시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덩치를 보고 감동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의 일에 임하는 마음, 적은 능력을 가졌는데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마음, 그것은 우리 것이기에 주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더 크게 감화시키고 움직여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화도 차갑게 식어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리차드 십스가 표현했듯이 방향타입니다. 큰 배 뒤에 붙어 있는 작은 판자인 방향타가 어디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큰 배가 좌로 돌기도 하고 우로 돌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웅주의에 빠지지 맙시다. 우리가 위대한 부흥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혁혁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사모하고 정말 위대한 말씀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 영적으로 혼탁한 난세를 평정해주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우리는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위대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것, 내게 주신 그 자리, 내 마음을 다해서 주님이 내게 주신 능력이 적지만, 적은 능력 때문에 불평하지 않고 내게 주신 그것을 가지고 그 안에서 최선의 것을 드려서 주님 섬기면서 살 때, 주님께서 열린 문을 두시는 것입니다. 문이 열리면 다 된 것 아닙니까? 능력이 필요하면 주께서 능력을 물 붓듯 부어주실 것이 아닙니까? 의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주님이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권능이 필요하면 하나님의 권능을 부어주실 것이고 은사가 필요하면 주실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기계적인 일의 규모나 사역의 엄청난 크기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주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 내게 맡기신 사명, 내게 주신 능력이 적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를 다 해서 주님 앞에서 사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 다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을 크게 하는 사람 앞에서 기죽을 필요도 없고 자기보다 일을 조금 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 모두 바보 같은 짓입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것만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했지만 에베소 교회와 같이 책망 받는 교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저 사람이 나보다 작은 일을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께서 열린 문을 두시기만 하면 나보다 훨씬 더 큰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 하시고 쓰실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 뿐.
이 생명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물뿐인 세상에서
밀 알로 썩게 하소서.
그런 사람, 그렇게 살다가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이 우리를 기억해 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문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잘했다, 네가 이 세상에서는 누구의 주목도 끌 수 없는 작은 일을 섬기다가 왔지만 그러나 네가 나에게 충성하며 산 그 삶의 질에 있어서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세상 역사 속의 위대한 사람보다도 네가 더 훌륭하다,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다가 가면 얼마나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성입니다.
22. 충성을 입증하는 삶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3:8下)
오늘로서 계시록 3장 8절의 시리즈를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본문은 희랍어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는 너희 행위들을 본다(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려진 문을 두었는데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다.”
골자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님께 칭찬만 받은 교회였는데 그 교회를 위해서 열려진 문, 친히 예수님께서 여셔서 누구도 닫을 수 없는 문을 그들에게 두셨고, 하늘로부터 신령한 복들을 빌라델비아 교회에 부으셨는데 그러한 충만한 복이 있기까지 이 교회의 충성스러운 삶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들을 안다고 했을 때 복수로 표현이 된 것은 그것은 결국 주님 앞에서 산 그 삶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려진 문을 그들 앞에 두었는데 ‘왜냐하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충성스러운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능력의 다과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적은 능력을 받은 교회인데도 충성됨에 있어서 크게 인정을 받았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충성이라고 하면 항상 영웅적이고 전사적인 삶만을 생각하는데- 물론 이제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고 혁혁한 삶을 살아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선교사겠습니까? 모두 목사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받은 신령한 축복은 사실 어떻게 말하면 교회로서의 축복의 끝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려진 문을 통해서 뭐가 안 내려오겠습니까?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셨으니 교회로서의 참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을 텐데 , 그렇게 해 주셨던 이유는 이 교회가 큰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은 비록 적었지만 그들의 충성은 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처럼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다른 절대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도 백수로 놀 때의 10시간보다는 직장생활을 바쁘게 하면서 다른 일을 하면서 주님을 안타깝게 섬기는 가운데 시간을 내는 것이 더 힘들 수 있습니다. 가정적으로 넉넉할 때 100만원을 헌금하는 것은 수입이 없고 쪼들릴 때 10만원을 헌금하는 것 보다 부담이 적을 수 있습니다. 넉넉할 때의 10만원의 구제는 쪼들릴 때의 1,2만원의 구제보다 쉬울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바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없는 데서 있는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주신 데서 마땅히 남겨야 될 것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절대적인 것으로 달란트 맡은 종들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두 달란트 맡은 종에게 두 달란트를 남겼을 때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셨고, 다섯 달란트 맡은 종에게도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달란트를 맡기실 때에 거는 기대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야기가 빠져 있지만 한 달란트 맡은 종이 한 달란트를 묻어두지 않고 가서 열심히 장사해서 한 달란트를 남겼다고 한다면 그 사람 역시 똑같이 ‘잘 하였다, 진짜 착하고 충성 되구나’ 라는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 우리의 상상이기는 하지만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아마도 두 달란트 밖에 남기지 못했다면 아마 그 사람도 ‘악하고 게으르다’는 책망을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들이 자기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시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입증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충성스러운 삶의 발로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늘 학생들에게 설교할 기회가 오면 늘 말했던 것은 이 신학교에 다니는 기간을 절대 ‘준비기간’이라고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신학교 동창 가운데에도 죽은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또 제가 가르치던 제자들 가운데도 죽은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준비하는 기간에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미완성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완성하고 죽은 것입니다. 미완성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로 데려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서 그들에게 충분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큰 교회 목사나, 누구같이 능력 있는 종, 누구같이 목회 크게 하는 사람, 부흥사가 되어 그 꿈이 이루어지면 그 때부터 주님을 크게, 멋지게 섬겨봐야겠다고 항상 꿈을 꾸고 살지만 그러나 그렇게 꿈꾸는 사람 가운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충성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동기 자체가 날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하고도 인격적인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인격적 특성, 그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삶, 삶이 다시 인격으로 돌아가는 이런 순환 관계 속에 있는 작용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운 입기 전에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그 옷을 입게 되는 순간부터 열렬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겠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 방에도 가운이 있습니다. (저는 가운을 안 입자는 주장을 하지만) 안수 받을 때 입어야 하니까 하나 마련해서 가지고 있는데 아무리 입어 봐도 그걸 입는다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냥 막 생겨나지는 않더군요. 그런 코트가 있다면 불티나게 팔릴텐데 그런 것은 없지 않습니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에게 하나씩 다 사드릴텐데 말입니다.
졸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면 신학생들을 주님이 무엇으로 평가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아주 하찮게 여기던, 아주 시시하게 여기던 바로 그 것을 가지고 평가하실 겁니다. 보고서를 제대로 썼나, 대리 출석을 하지 않았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 잘 반납했나 하는 그런 사소한 것들로 점수를 매기실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학생들이 막 웃더군요. 하지만 그것 빼면 무엇을 가지고 점수를 매기시겠습니까? 그게 삶의 다인데 다른 무엇으로 평가를 받겠습니까?
저는 주위에서 아주 위대한 선교사들을 흠모하는 청년들을 아주 많이 만납니다. 흠모할 뿐이지 자기는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전도하지 않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피부색 다른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 가면 영혼을 향한 사람이 펑펑 솟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까 목사 가운을 입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과 똑같은 생각입니다. 어떻게 반바지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피부색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고 해서 갑자기 그런 사랑이 솟아나겠습니까? 아닙니다.
항상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신학 사상이 없고, 어떻게 보면 비전이 없는 찬송이 없다고 볼 지 모르지만 저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주님 가신 고난의 길을 매일 매일 , 그것이 자신에게 당한 삶인 줄 알고, 하루하루를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그런 삶이 충성된 사람들이 특징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충성하는 삶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그런 삶이 미래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다 바보 같은 생각들입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해서 담임하고 있지만, 제 주위의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부목사까지 하다가 죽은 사람도 많고, 전도사 하다가 죽은 사람도 많고, 신학교 간다고 소명 받았는데 신학교 들어갈 공부를 하다가 그냥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미국을 갔는데 박사 학위를 받고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우리들이 꿈꾸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면 우리가 이런 삶도 살고, 저런 삶도 살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미래에 속한 것이고, 미래에 속한 그 날들은 내 날이 아닙니다.
충성스럽다, 그리고 잘 한다, 그리고 착하다 라고 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가졌느냐에 좌우되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태도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느끼고 사랑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 것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감옥에도 갔다 오고한 사람이지만 옛날에 대통령을 했던 사람의 얘기입니다. 그 부인이 자기 남편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자기 남편이 애국자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매일 밤이면 그 분은 몇 시간씩 세계 지도를 펴놓고 고민을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 자리에 가면 다 그렇게 고민합니다. 여러분을 동네 통장을 시켜 보십시오. 동네 지도를 갖다 놓고 고민하겠지요. 묻고 싶습니다. 요즘도 그 사람이 그렇게 지도를 펴놓고 고민하는 지 말입니다. 골프나 치면서 보내겠지요.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충성 되다고 하는 것은 어떤 분위기에 휩쓸리는 정신적인 충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인격에서 주님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 줄 알고 그래서 그 분이 나에게 맡기신 이 사명과 주님이 내게 주신 이 섬김의 기회들이 얼마나 더 거룩하고 중요한 지를 알아서 그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쁨을 받으셔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제 일생에 감명 깊은 깨달음을 주신 분 가운데 한 분인 E. M.바운즈 목사님의 책 가운데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 한 그리스도인의 사람됨은 그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앉아 있을 때의 그 이상을 넘어 설 수 없다.”
그가 아무도 없이 하나님 한 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 그가 그 분에 대한 뜨겁고 간절한 사랑, 그 속에서 주님과 교통하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해도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서 섬기게 되고 일하게 하고, 봉사하게 하고, 전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그 사람이 거절 받고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은 사람의 충성은 의미가 없고, 진실된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 모르지만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서 충성된 마음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고 있든지 그 일이 큰 일인가, 작은 일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 분의 면전에서 섬기는 것처럼 주께 하듯이 충성스럽게 살아가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일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임하는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십시오. 큰 능력을 가진 교회가 아니었고,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빌라델비아 교회라고 하면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로 여기셨습니다. 이 교회에 반대되는 교회는 에베소교회였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알고, 수고를 알고, 인내를 알고, 그리고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고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드러낸 것과…” 그 교회는 진짜 많은 능력을 받아 가지고 있던, 빌라델비아 교회와 정말 대조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그런 많은 것들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였다면 이 교회는 적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최선의 삶을 살았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청교도 가운데 한 분인 뉴턴 목사님은 자기 책 가운데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천당에 가면 두 번 놀랄 것입니다. 첫 째는 와야 할 사람이 없고, 올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 거기서 당신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거기에서 사람들이 상 받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생각했던 상 받을 기준들이 그 곳의 기준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
그러기 때문에 큰 일을 하는 사람의 삶이 위대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新)성공주의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위대함은 작은 것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사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무슨 재능을 주셨든지, 무슨 기회를 주셨든지, 또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아주 작은 일이라 할 지라도 그 일의 크기는 하나님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 데 큰 일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 스스로 큰일 났다고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문제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을 정말 버려야만 합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에도 이것을 너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듣고 있는데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어려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일 자체가 주는 열심과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데서 오는 충성을 잘 구분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태도이고, 하나님은 그 점에 있어서 아주 칼같이 구분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진실하게 변화되고 그래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져가고 그래서 자기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지금 살아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서 주를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진실한 고뇌에서 출발하는 아름답고 헌신적인 충성스러운 삶, 그런 것이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의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디서든지 감투를 씌어 주면 다 자기 일에 열심을 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가 이용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정직하고 진실해야합니다.
자, 어떻든 간에 결론은 충성은 능력의 문제나 무엇을 얼마나 받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충성은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사느냐 하는 문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을 많이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통해서 이들은 주님께 이런 충성심을 입증했는가, 그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았기에 주님이 충성 되다고 인정해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 안에 있는 충성스러운 신앙의 인격으로 어떤 방면의 삶을 살 때에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받았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 째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무엇을 지켰다고 했습니까? “내 말을 지키며” 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난 다음에는 뭐라고 핑계를 댑니까?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놓고 마지막으로는 늘 핑계를 능력 없음에 둡니다. 결국 누가 능력을 안 주셨다는 겁니까? 그럴 때일수록 절대주권에 대한 생각이 투철하지 않습니까? 결국 누구에 대한 비난인가 하면 주께서 내게 주시지 않아서 없는 그 능력 때문에 내가 이렇게 밖에 살지 못했다고 하는 식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와를 두고 하나님 앞에 빙빙 돌려서 핑계를 댔던 것과 같지 않습니까?
제 책을 내는 출판사의 간부 한 분이 계시는데 저의 죄죽임의 교리에 대한 설명을 쭉 듣고 나서 자신의 놀라운 경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갔는데 동해안에서 경비를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참들이 부하 군인들 몇을 지목하고 일주일 동안 먹을 김치, 고추장을 조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군인들이 어디에서 음식을 조달할 수 있겠습니까? 군인 봉급 몇 천원으로 어떻게 조달을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 동네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너희 것이다라고 하더랍니다. 밤에 경비를 서다가 시골 동네에서 도둑질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의 차례가 되었을 때 고참에게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음식을 마련할 테니 훔쳐오라는 소리만 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하도 애원을 하니까 고참이 방법은 상관하지 않을 테니 고추장과 김치만 가져오라고 하더랍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무 대안이 없던 그 막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번뜩하고 주시더랍니다. 밤에 간 것이 아니라 대낮에 동네에 간 것입니다. 동네 아주머니를 붙잡고 김치 한 포기만 주시기를 부탁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동네에서 얻어온 것이 훔쳐온 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그 분이 ‘아 ,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순 거짓말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진짜 막다른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넉넉히 길을 열어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큰 능력이 있어서 예수님처럼 배추 두 개와 무 다섯 개를 놓고 하늘을 향해 축사를 해서 40명이 넘는 내무반을 다 먹이고도 김치가 12광주리나 남았다, 아니면 조지 뮬러 목사님같이 기도가 워낙 세서 밥 퍼놓고 숟가락 들고 김치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해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가 핑계를 댔다면 그 상황에서 범죄를 했을 텐데 그 상황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을 가지고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넉넉히 주님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보시면서도 감동을 하시겠지만, 능력은 없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쓸 때 주님의 마음에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은 없어도 마음은 굴뚝 같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서 그렇게 몸부림 칠 때에 그 자체가 주님께는 감동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전도사를 하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는데 지도자가 멍청이가 아닌 다음에는 사람을 세울 때 그 사람의 능력을 다 알고서 세웁니다. 물론 공개적으로 너는 다섯 달란트야, 너는 두 달란트도 많아 하고 직접 얘기하지는 않지만 각 사람의 능력을 보고서 일을 맡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몸부림치고 애를 쓰는데도 열매가 적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보고 우리가 열매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분투하며 애쓴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목발 짚고 100m달린 것하고 그냥 멀쩡한 몸으로 달리는 것하고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인간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여기서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즉, 말씀을 지켰다고 하는 것은 그런 영웅적이고 전사적인 삶을 살면서 기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이등병의 예화와 같이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서 분투하고 애쓴 것 자체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말씀 못 지키고 살 때에 핑계를 대는 것이 ‘능력이 모자라서’입니다.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렇게만 기도하지만 그 이면에는 ‘주님, 지난 한 해도 말씀대로 못 살았습니다. 이유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능력 없는 것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말속에 자신의 삶을 은근히 주님께 미루는 그런 내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없는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그런 잔인한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있는 것을 가지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많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을 위해 조금 살면 안 되고 많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하여야 합니다. 자기가 말씀을 깨닫고 알고 있는 것이 무슨 자기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서 얻은 노획물인 것처럼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세우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껍데기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산을 못 움직였냐고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께서 깨닫게 하신 말씀,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 우리에게 주신 기회들, 그 안에서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살지 못한 것,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며 산 것은 우리가 핑계할 수 없는 불충함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선명한 정리가 없으면 내년의 삶이 어떤 삶인가는 너무나도 뻔합니다. 무슨 내년이 된다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재야의 종소리가 100번이 들려온 들 그 사람이 새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0시 예배 때 결심 안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분투하고 애를 쓰면서 그것이 진리인 것이 입증되면 그 진리에 승복하고 그 진리를 명하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항복하는 그런 진실한 인격적인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순종하는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충성을 입증한 것입니다.
두 번 째로는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것은 당시의 문화적인 맥락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 희랍에 성경에서는 ‘부인하지 아니하였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핍박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핍박이 올 때에 그 핍박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살고 있고 살아온 기독교적인 삶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안 믿는다고 말만하면…’이라고 조건을 다는 것을 많이 들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름을 배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인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당시에는 정치적인 박해 뿐 아니라 사상적인 박해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힘이 들었던 때입니다.
지금도 씨족의 연결이 아주 강력한 고장에서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씨족들로부터의 따돌림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항상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가장 큰 위협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런 맥락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이나 동화나 유화, 우호, 선린 관계 그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이들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능력은 적은 것이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최대한 주를 위해 살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핍박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잡혀가서 심문을 당할 때에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놀라운 입의 재주를 주셔서 너희에게 무엇을 변명하고 말해야 될 지 공급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스데반의 설교나 바울이 재판 받는 자리에서 행했던 설교나 여러 개의 연설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산유수와 같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구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사천리로 감동적인 연설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충성심을 입증했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한 해 동안에 사실 여러분들이 요즘 세상에 박해는 무슨 박해, 내가 좋아서 믿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텐데 아직도 안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심지어 자녀에게 핍박받는 부모들, 그런 눈물나는 사연들을 안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박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박해받을 때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 박해에 굴복하게 되는지 , 유혹 못지 않게 이 박해가 , 이 핍박이 우리를 곤고하게 하고 우리를 주저앉게 하는지 핍박받지 않는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들은 가슴속에 응어리를 안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는 분 가운데도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똑같이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조차 박해를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똑바로 해 보려고 하니까 그런데서 일어나는 부조화 때문에 박해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분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 영역이 바로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 영역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남모르는 박해를 받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고통을 받을 때에 그것을 훌륭하게 견디면서도 그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는 일관성 있는 심지 깊은 자세, 이것이 결국은 주님을 향한 충성심을 입증하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사람들의 교회 생활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참 힘들거든요. 김목사 설교가 길어져서 늦게 끝나면 시아버지 밥도 안 차려주고 교회 가서 자빠져 있느냐고 핍박을 받을 수가 있거든요. 욕을 하고 말입니다. 자유가 없지요. 그런 사람들은 늘 교회에 와서도 기를 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견디며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사람을 입증하는 훌륭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바로 그랬다는 것이지요. “내가 네 행위를 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는데 누구도 닫을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너희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집 안 모든 사람의 후원을 받으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더 많이 봉사해야 합니다. 투덜댈 이유가 없습니다. 남편이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춤추면서 다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집안에서 박해를 한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충성을 입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인들을 보면서 그런 박해받는 사람들을 알지 않습니까? (요즘 여자들에게 매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이 정식으로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박해받는 남편들이 아주 많습니다. 원래 여자들이 교묘하게 박해를 잘 할 수 있는 기초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참 고달플 것입니다. 직장 다닐 때부터 제가 전도할 때 보면 부인 때문에 신앙 생활이 곤고해져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봤습니다. 교회만 다녀오면 성경을 집어던지면서 주일에 교회에만 가면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하냐고 포악을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핍박받는 영역이 없으니까 다른 방면에서 더 훌륭하게 살아야 하고 또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핍박받을 때에 예수 안 믿겠다고 하는 것만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성도답게 살지 못해도 그 삶으로서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면에 기울이면서 더 충성스럽게 살아야지만 그 사람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한 방향에서 더 적용을 하자면 실제로 그런 박해 속에서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에서 저희의 상이 클 것임이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런 박해를 받는 분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가정의 복음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교회에 가족이 다 나오는 것, 더군다나 그 남편이, 그 아내가 함께 예수를 믿고, 변화하고, 주를 위해서 섬기고 살아간다고 하는 이 공통점만으로도 하나님께 뭘 더 달라고 기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런 아픔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핍박이 올 때마다, 그 핍박하는 남편에게 복수하는 길은 그를 사랑으로 반쯤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핍박을 이기는 길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 앞에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께서 매순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충성을 입증하시려고 그러한 사람들의 순전한 삶, 비록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려고 하는 삶, 이것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위에 열린 문을 두신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가 막 쏟아졌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배 시간마다 하늘의 찬란한 빛이 쏟아지고 ,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고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하나님 특별히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무엇이든 말해라. 그러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입증하는 놀라운 선교적인 행진을 보여주신다는 약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핍박받는 사람들은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핍박 속에서 지거나 , 혹은 핍박받을 만한 환경을 갖지도 못한 채 신앙을 잃어버리고 야합하고 그러는데 여러분에게는 항상 하나님 앞에 긴장하면서 살 그런 영역을 주셨습니다. 거기에서 잘 이겨내십시오. 핍박하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핍박하는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고, 핍박하는 여러분의 이웃을 위해 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스러움을 입증하셔서 그들에게 하늘의 열린 문을 두신 것처럼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아직까지 그런 놀라운 축복의 연단을 주님이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고 충성되다 인정함을 받을 때 비록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그렇게 살려고 애썼던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빌라델비아 교회에 내리셨던 그 신령한 은혜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지난 한 해 동안 우리가 얼마나 쉽게 세상과 야합하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말씀을 지키면서 살지 않는 우리의 방종한 삶을 능력 없음에다 핑계를 대며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런 어리석었던 삶을 모두 2000년과 함께 영원한 시간의 세계 속으로 떠밀어 보내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충성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