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재물 사랑의 특성(마6:19-23) 2000.10.29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1
2. 겸하여 섬길 수 없는 하나님(마6:21-25) 2000.10.3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14
3. 적과의 동침(마6:25-26) 2000.10.3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21
4. 들풀에 깃든 사랑(마6:27-31) 2000.11.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32
5.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6:32-34) 2000.11.2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40
6.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눅19:28-46) 2000.11.3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51
1. 재물 사랑의 특성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19-23)
(예화) 화분 두 개를 가져다 놓고 한 화분 앞에서는 한 숨을 쉬고 한 화분 앞에서는 즐겁게 노래를 부른 결과 한숨을 쉰 화분은 시들어갔고 노래를 들었던 화분은 활짝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
오늘의 이 본문 말씀은 우리가 늘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헌금을 거둘 때 많이 들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 내용의 주된 관점은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재물에 민감하기 때문이지 그 재물은 한 가지를 말하기 위해서 도입된 부분이고 마지막 결론은 우리의 인생, 즉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왜 현실적으로 그렇게 못사는가를 이야기 하다가 보물의 문제, 근심의 문제, 먹고 마시는 문제, 염려의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닥을 잡고 오늘 우리들이 이번 사경회 아침공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할 때 그렇게 거창하고 커다란 주제는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교역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지 말씀 듣고 예배드리러 나오는 평범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거창한 구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과 우리가 그렇게 안 살기 때문에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것은 구별되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사는 것은 특별한 교역자나 어떤 은혜 많은 사람들의 의무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면 다시 태어난 새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새나라가 태어났는데 다시 태어난 나라를 위해서 살 지 않고 옛 나라를 위해서 살면…
(예화)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나라가 조선으로 바뀌었는데도 고려를 위해서 사니까 역적이라고 불렀다
나라가 바뀌면 바뀐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백성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까? 이중국적은 안됩니다. 예수를 믿고 다시 태어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이 세상은 나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입니다. 세상이 ‘너 누구냐’고 물으면 ‘저는 외국인, 나그네입니다’ ‘여행하는 중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나그네로라’ 혹은 ‘이 땅에 우거하는 자로라’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자리 매김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왜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지 않고 세상의 나라를 위해 부역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반기를 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신앙적으로 바른 원리를 따라서 신앙생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은혜 받을 생각을 먼저 하지 말고, 말씀이 무엇을 아니라고 하는가, 말씀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믿음에 대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붙들고 살아온 것들 중 말씀이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지만 은혜가 주어지고 그 은혜가 의미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다 붙들고 살아가면, 주님은 우리에게 새집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들의 생각은 ‘주여 새집은 필요 없사옵나이다. 설계는 제가 할 테니 벽이나 붙여주십시오’하며 하나님을 미장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집을 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생각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3년 전 봄에 숲속에서 이 본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후 이 성경구절을 정리하면서 나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있는가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19절 말씀에서 ‘너희’가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에는 1차적인 청중이 있고 2차적인 청중이 있습니다. 2차적인 청중은 우리입니다. 1차적인 청중은 예수님에게 직접 그 말씀을 듣거나 사도들로부터 직접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2차적인 청중이지만 2차적인 청중으로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차적인 청중이 누구였는가를 잘 보고 1차적인 청중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었겠는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1차적인 청중은 마태복음 5장부터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5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이 제자들은 성경에서 세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12제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2제자들 이외에 예수님을 계속 쫓아다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고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말씀사역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제자라고 말했는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많이 나옵니다. 이 마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제자라고 하는 것은 두 번째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예를 들면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던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집안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예수의 뒤를 따라왔던 사람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자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면서 전적으로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이 바로 오늘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 5장, 6장의 말씀을 계속 듣고 있는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자기를 위하여 살려고 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은 이것을 알고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을 줍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비와 아내와 심지어는 자녀들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던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습니까? 밤새도록 고기잡이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고기를 잡도록 명령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도저히 자기의 계산과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고기를 거둬드렸습니다. 고기가 조금 많이 잡혔으면 기뻤을 텐데 잡힐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양이 잡히니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분이 도대체 누구시길레 이런 기적을 만들어내시는가?’ ‘저렇게 물 속까지 꿰뚫어보실 수 있는 분이라면 내 마음은 주님의 눈앞에 다 드러나지 않겠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한 말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옵나이다”라고 간절히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고백하게 되었고 그후 “너희는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말씀하실 때 그는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쫓았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특별히 산상에 오르셔서 가르치시는 말씀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하셨으니 한번 예수를 믿고 좋은 신앙적인 생각을 가지고 한번 결단을 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한 것과는 상관이 없이 언제나 이 재물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커다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재물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향한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믿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자체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교회를 다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기도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도 답답하시니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기도의 방식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이 사람들에게 새삼스럽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구원을 즐거워하며 혹은 그로부터 권능으로 자신을 낫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는 한 가지 성품이 모질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성품입니다. 이 재물은 곧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이 없으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재물은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믿음의 세계에서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하게 살라는 명령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을 다 앗아가시는 것, 가난이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우리의 재물을 가져가시거나, 하나님 앞에 신앙 생활을 잘 하면 물질을 더 주시거나 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도 가난할 수도 있고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될 것은,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물질이 없고 궁핍하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게될 때, 나는 하나님 앞에 주님만을 섬기며 살고 싶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물질이 없다면 자기가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가 자기를 버린 것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서 타락할 마음이 남아 있는데 건강이 허락을 안 한다면 자기가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가 자기를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만들어서 영광을 받지를 안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 잘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에게 빼앗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하는 것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로 나타납니다.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를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단순한 재물이라고 하지 않고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귀중한 물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귀중한 물건, 대체로 재화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잴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를 가장 잘 잴 수 있는 것이 바로 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사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세상 자체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여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조차도 이 땅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욕망입니다. 그 욕망이 들어와서 그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인하여 만족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지고 끊임없이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기 때문에 그 성향을 끊기 위해서는 변화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금을 캐서 모든 주머니에 잔뜩 집어넣고 도망치다가 강을 헤엄쳐 건널 때는 문제를 일 으키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하늘의 은혜와 능력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의 줄을 끊어버리고, 우리의 존재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마음속에 역사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가 사랑하는 바를 바꾸어 놓아서 변화시켜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너희는 보물을 사랑하라든지 사랑하지 말라든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이 이 대목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예수님에게는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먼저 왜 인간이 이것들을 쌓아두는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미래를 염려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앞날의 일에 대해서 늘 염려합니다.
(예화) 6.25 때 어린아이들이 미국으로 입양될 아이들을 미군부대에 재우는데 그 다음날 먹을 것을 걱정하 느라 잠을 못 자길래 햄버거를 쥐어주니 잠이 들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왜 재물을 쌓아 두느냐하면 미래를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고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환경의 변화와 인생의 변화를 그 물질을 통해서 대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점점 잘 살아서 많은 사회보장이 잘되면 인간은 저축할 필요를 점점 못 느끼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재물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이 이렇게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데 더 큰 문제는 영원을 위한 미래에는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계속 이 세상에서 재물을 사랑합니다. 자기가 쓰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그 재물을 준비하고 모으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도하게 물질을 쌓아두므로 말미암아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대신 이 물질을 신뢰하고 믿고 하나님의 보호가 없어도 물질이 우리를 보호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것을 족한 줄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과연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인간의 내면에는 불편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하니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여러분들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화) 아버지 것은 결국 아들 것인데도 서로 고소하는 경우가 있다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감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염려 대신에 자신의 육체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항상 앞서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홀로 있는 사람들이, 관계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더 물질에 대한 욕망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젊었을 때 강합니까, 아니면 나이 먹어서 강합니까? 나이가 먹을수록 물질에 대한 욕망은 점점 증대됩니다. 젊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 하나만 있으면 무인도에서 손가락만 빨고도 살 수 있을 것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 먹으면 계산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는 못살고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가지고 살면 2-30년후 협오스러운 탐욕의 5-60대가 되는 것입니다. 학처럼 고고하게 늙기 위해서는 젊어서 거룩한 생각을 품으면서 살아야지 만 삶의 모습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통해서도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쌓아두는 이유가 미래를 대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신학교 다닐 때 잘 모아두었다가 등록금을 준비해야 하는데 다 써버리고 등록금 낼 때가 되면 기도 원에 금식하러 가는 학생들 이야기.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대비하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통장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만 의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지고 있되 그것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헌금 안 해주면 교회가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이 내는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도들은 헌금을 해도 하나님의 교회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운영된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쌓아두려는 인간의 마음을 왜 미워하시느냐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쌓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미래를 위해서 대비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래에 예기치 못하게 일어날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물질을 모으는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 미래에 예기치 못하게 일어날 일들을 위해서 물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물질을 모으는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 있는 경향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누구도 물질 사랑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경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 일 계명이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인데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석가모니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첫 자리를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려고 합니까, 아니면 마호메트가 다투려고 합니까, 무당이 첫 자리를 다투려고 합니까? 우리는 그런 것을 이미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 더불어서 우리의 경배와 섬김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자리다툼을 하는 것이 딱 하나가 있습니다. 물신입니다. 물질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일 계명을 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리한 눈을 가지고 이 문제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이 쌓아두지 말라는 의미는 단순히 미래를 대비하는 의미가 아니라 쌓아두면서-그렇게 보존하므로써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계속되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너희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쌓아두는데 사실 너희가 그것을 쌓아둔다고 해서 너희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쌓아둔 것들은 자기를 위해서 쌓아두었지만 언제든지 그런 식으로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 다 쓰지 못하고 빼앗기고 도적을 맞고 혹은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에게는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20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면서 하늘을 말씀하십니다. 아까는 땅을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하늘을 말씀하시고 똑같이 ‘너희를 위하여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너희를 위하여서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너희를 위하는 것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으로는 너희를 위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너희를 위하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늘이 실감나지 않으면 우리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 자녀 만드신 것이 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그네길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던 성도들의 가졌던 신앙의 특징 가운데 결정적인 특징 하나가 내세신앙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얼마나 내세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중학교나 초등 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가 내세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나그네와 같이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젠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저 천국으로 우리를 불러주실 것이다. 그래서 천국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신앙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결국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물질 문제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물질이 점점 부요해감에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나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으로 대치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쁨과 은혜의 즐거움 없이도 세상의 물질이 주는 즐거움에 매료가 되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속에 대부분 유행하고 있는 신앙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습니다. 생명나무 과일이 있고 생명 강물이 흐르고 노동이 없고 편안히 쉬고 하는 그 천국은 다 먹을 것이 없이 시달리던 시대에 꿈꾸고 그리던 것들이지 지금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신나게 사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원하는 것은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다가 그렇게 땟깔곱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주제가 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은 정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들로 하여금 모두 죽음을 한번씩 경험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정신이 번쩍 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이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보다 더 간단하게 종말을 맞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종말이 오지 않아도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계획표에 천국이 계산되고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내가 주님께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계산에 넣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늘어나는 적금통장 말고 하나님의 나라의 적금통장을 또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주님을 위하여 섬기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며 복음과 함께 고난을 겪고 지체들과 함께 아파하고 섬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 때문에 세상에 있는 것들을 버리고 세상에서 손해를 본 적이 있는 일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적금 통장에 불입금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적금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탈 날을 그리워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에서 함께 만나서 주님을 찬송하고 노래하며 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은 숙명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기 싫고 지겨워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또 코를 대고 마주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차피 헤어지지 못할 바에야 좋게 살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보물이 하나님의 나라에 쌓여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적이고 영적인 나라입니다. 그리고 보물은 이 세상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의 물질이 하늘 나라에 쌓아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영원과 영원의 틈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있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염두에 둬야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인생을 이슬이라고 표현했고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 인생이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러주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상 나라가 너무 크고 세상 나라가 너무 큰 나머지 하나님의 나라가 지극히 적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면서 열심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분투하며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임해서 ‘하늘나라는 이렇게 의와 희락과 평강이 넘치는 곳이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살아야지 만 마땅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식으로 살지 못하는가하는 답이 바로 21절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재물과 마음이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보물 있는’은 현재형인데 ‘있느니라’는 미래형입니다. 지금 당장은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이 없을 지 몰라도 결국은 그쪽으로 마음이 가게되는 것입니다.
(예화) 시계하나만 새로 사도 눈이 시계로 간다. 운동화를 새로 샀을 때도, 차를 새로 샀을 때도
인간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얼마간 그러다가 시들해집니다.
(예화) 문을 열고 자니 경비가 놀라서 왔다는 이야기
보물이 있는 그곳에 정말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계명은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는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없는데 어떻게 마음과 뜻을 다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예화) 어느 회사에서 여직원을 뽑는데 못생긴 사람만 뽑았다-예쁜 여직원들은 전화기만 바라본다.
식구들이 몸은 있고 마음이 없으면 그곳은 가정이 아니라 집입니다. 교회에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주일날 하나님 앞에 벌 받을까봐 모이기만 하면 교회가 아니라 예배당입니다. 예배드리는 건물입니다. 반상회 소집한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마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는데 마음이 여기에 없으면서 설교를 하면 월급 받으려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일이 따로 있고 세속적인 일이 따로 있어서 거룩한 일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그 일을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저는 평생 사찰 일을 하였던 몇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목회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아니면 정말 해나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역을 30년씩 감당을 하면서 곱게 교회에서 늙은 사람들의 노후를 교회는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일 자체는 허접쓰레기의 일이고 그 일 자체는 그렇게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쓸고 닦고 칠하고 못을 박는 사소하고 속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교회에 두고 봉사하며 섬길 때 섬기면 섬길수록 그 사람의 모습이 달라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때를 거룩하게 늙어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속적이고 탐욕적으로 늙어가고 싶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거룩하게 늙어가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룩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이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은 다 드려도 마음은 하나님께 못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혜자는 잠언 속에서 그 시대의 모든 풍속에 순종하여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많은 아들과 자녀를 보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때마다 갈비를 사들고 가고 철마다 보약을 지어가고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물건으로 만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마음이 내게 있다’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만족인 것입니다.
(예화) 카네이션 한 박스를 사들고 가서 매년 오기 어려우니 알아서 한 개씩 달으라고 했다는 이야기.
아무 것도 없어도 그 마음이 부모에게 있는 것을 인하여서 우리 부모들이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바로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내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고 하나님이 나 없이 견디실 수 없어 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면 마음이 깊이 통합니다. 그런데 물질에 대한 사랑은 이런 모든 것들을 다 황폐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고소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아버지를 법정에 세워서 재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재물에 대한 사랑이 가슴을 지배하니까 아버지가 마음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재물에 대한 사랑은 인간과의 관계도 파괴하는 것입니다. 동기간에 일어나는 모든 불화의 대부분은 물질의 문제입니다.
(예화) 큰일에 누가 얼마를 내놓았느니 하며 싸운다
이 때 예수 믿는 여러분은 폭넓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소유보다 생명이 훨씬 귀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예화) 전기세 가지고 싸우는 사람 치고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사람 못 봤다)(예수 믿는 주인이 전기세를 안 받았었다.
자기를 위해서는 인색하고 남을 위해서는 후해야 합니다. 보물에 마음이 있으면 인간도 안 들어오고 하나님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영광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것 하나를 위해서 자기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6장 앞부분의, 은밀하게 구제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제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구제가 다른 사람을 물질로 섬기고 교회를 물질로 섬기는 것이 물질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에게 있는 매우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를 많이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의 하나가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인데, 매일 놀러 다니고 하나님을 전혀 섬기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압니까? 예수의 넓은 사랑을 아는 사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마음을 다 드려 본 사람들,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드렸던 사람들은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가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공로였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들은 자유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린 사람들은 언제나 배짱이 있습니다. ‘주님 아시지요? 제 인생에 사심이 없사옵나이다’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 자기를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감추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지 않은 사람들이 물같이 자신을 쏟아놓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각성과 재물에 대한 사랑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내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갑자기 보물 말씀을 하시다가 눈을 말씀하십니다. 눈이 어두워지는 이야기와 밝아지는 이야기를 말씀하시고 등불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왜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눈 얘기를 하십니까? 보물에 대한 이야기와 눈에 대한 이야기를 묶어주는 고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네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하시고 화제를 돌리셔서 눈과 우리의 몸의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일단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 내어서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는 말씀과 연결을 시키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는 무슨 뜻입니까? 어두운 길에서 등불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과 같이 눈은 우리의 몸을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릴 때 소경이 얼마나 불편할까를 생각하며 눈을 감고 걷다가 부딪혔던 이야기-눈이 있는 것을 감 사했었다
캄캄한 밤중에 등불 하나를 들면 빠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밝은 대낮에도 눈은 등불의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지 않겠느냐’ 눈이 성하면 온 몸이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워지지 않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은 얼마나 심하겠느냐’ 캄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빛과 어두움의 차이를 만들어내느냐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사랑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을 깊이 사랑하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이 물질 문제에 대해서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부유하게 산 사람들은 부유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가 쓰고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의식 없이 살아가고,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못 먹고 못 써본 것이 평생 한이 되어서 물질의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도하게 가난한 속에서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것도 저는 교육적으로 썩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질 문제에 있어서 항상 수많은 걸림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극도로 가난하게 성장을 해왔다고 생각된다면 지금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내 마음을 다스리고 변화시켜주시지 않으면 언제나 마음속에 이 물질문제에 대한 약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 욕구가 북받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강하게 붙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전 대통령들의 비자금 문제는 그들 어린 시절의 궁핍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부유했던 사람들은 부유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삶을 계속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모든 문제들이 가져오는 결과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볼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매일 매일 말씀을 따라 살면 되는데 벼랑 끝까지 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눈이 멀고 한참 잘못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바로 떠져 있으면 잘못된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거나 시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 마음대로, 우리 갈 길대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벼랑 한가운데 서게 되는 사태를 종종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결론을 도출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든지 밝아져야 할 필요가 있고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데, 밝아지고 새로워져서 나중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걸어가지 못할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소경이 되고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발람 선지자의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발락이 기도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기게 해주는 선지자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발락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청구를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 째 보낼 때는 첫 번 보다 훨씬 더 많은 재물을 실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요구만 들어준다면 이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 앞에 가서 여쭈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여쭈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것을 하나님 앞에 여쭈어보면 하나님은 불쾌하게 생각하십니다. ‘사기를 칠까요, 말까요? 도둑질을 할까요 말까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할까요, 좀 쉬어야 할까요?’를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최대의 불쾌함의 표시인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런 것을 분별하는 사람이었는데 물질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으니까 눈이 완전히 어두워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할 때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재물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을 사랑하면 그것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예수를 사랑하니까 집안에서 여러분들을 내놨다고 합니다. 하다하다 말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하다못해 오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도 못 말립니다. 자기 집은 전세에 살면서 집 한 채 값보다 더 비싼 오디오를 가지고 살며 퇴근 후 기름으로 그것을 닦는 것이 취미입니다.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인생을 안 살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인생은 결국은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인간이 스스로 자살 할 때 사랑이 있으면 자살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있는 동안에는 자살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끊어지면 삶의 소망도 끊어지는 것입니다. 소망과 사랑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 때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을 많이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깨어있는 사람이 되고 헌금 많이 한다고 해서 우리가 깨어있는 사람이 되고 팔 걷어붙인다고 해서 깨어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무엇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느냐에 의해서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 하나가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순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것들에 의해서 우리 인생을 허비하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화) 마대에 만원짜리를 차곡차곡 담으면 3억 들어간다. 마대를 양쪽에 다섯 개씩 쌓아놓고 써본 적이 있 다. 그 한 마대는 매일 100만원씩 써도 1년을 쓸 수 있는 돈이다. 그 돈을 옮기는 사람은 그 것이 한 번도 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월급으로 받는 몇 푼 안 되는 것만 돈으로 생각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알고 우리가 살아온 것이 물질로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물질을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했다는 의미가 무슨 뜻입니까? 눈물 흘렸다는 것과 회개는 동일한 의미가 아닙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고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린 것과 회개가 동의어가 아닙니다. 회개는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물질과 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재주와 재능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더니 수많은 근심의 쓴 뿌리들을, 염려의 쓴 뿌리들을 우리의 가슴속에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회개하고 나니까 깨닫는 것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붙들고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관계 속에서 기뻐하며 관계를 누리고, 이제는 물질이 문제가 아니고 관계가 문제가 되어서 그 관계를 붙들고 그 관계 속에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도 물질로 살고 우리도 물질로 사는데,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예수 믿고 나도 돈 가지고 가야 쌀 주고 돈 가지고 가야 옷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가 사는 것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롭게 해야할 대목들입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에 이 시간에도 ‘우리가 정말 주님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여태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기 보다 세상을 의뢰하고 신뢰했던 우리들을 용서해주시고 이런 것들이 많은 근심과 염려의 쓴 뿌리가 되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픔을 드렸습니다. 주님 이 시간에도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겠습니다.
2. 겸하여 섬길 수 없는 하나님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1-25)
지난 시간에는 서론 격으로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23절부터 잠깐 더듬은 다음에 24절부터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생명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며 물질 자체가 쌓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많은 사람들만 물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잃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사랑하고 없는 사람들은 없어서 한이 맺혔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합니다. 대개 물질을 많이 모은, 자수성가 한 사람들은 억세게 고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화: 정주영씨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문도 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몸에 배인 절약정신.
우리가 지금 절약을 규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물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이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돈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물질을 사랑하고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고생을 자신의 대에 되풀이하거나 자식들의 대에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돈을 사랑합니다. 시편에 보면 세상 사람의 본질에 대해서 '열심히 재물을 모으고 그 재물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과거에 물질이 부요한 가운데 살아온 사람들은 부요한 가운데 살아왔기 때문에 그 옛날 생활로부터 오늘의 생활을 바꾸지 않기 위해서 또 물질을 사랑합니다. 또 지금 현재 부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에 혹시 잘못해서 오늘의 부한 생활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돈을 사랑합니다. (예화: 부인이 과거에 부자였던 한 전도사님 이야기-함께 시장 가면 이것저것 사달라고 한다) 옛날에 부유하게 살았었기 때문에 오늘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물질을 사랑한다는 것은 환경이나 여건에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 모두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공통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똑같습니다. (예화; 한 여집사님이 새벽 예배 시간에 오천원짜리가 떨어진 것을 보고 방석을 밀고 가다가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 인을 치소서'를 부르며 대성통곡했다) 이렇게 연약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있든지 없든지 우리 인간 속에 공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재물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외제 승용차를 타고 싶다고 했습니까, 80평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했습니까, 호의호식을 하겠다고 했습니까, 몇 백만 원 짜리 코트를 사 입겠다고 했습니까? 기본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것도 염려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물질의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의 말씀을 하시면서 마시고 먹는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꿈꾸는 허영으로서의 물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펑펑 쓰기를 좋아하는 낭비벽이 있는 사람들은 이 낭비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을 모을 생각을 합니다. 또 그런 낭비벽이 없고 검소한 사람들은 그 검소한 성품 때문에 물질에 대해서 안달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물질의 문제에 관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맡기지 못하고 산다면 너희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삼 제사 부탁을 드리는데 이 6장을 자칫 잘못 읽으면 '나는 거기에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한 켤레에 몇 백만 원씩 하는 구두를 신고 몇 십억씩 하는 집에서 호화스럽게 살 꿈을 꾸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든 아니면 오늘내일 먹고 살 문제를 위해서 염려하고 그것이 마음에 차든 하나님에게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늘 깨어 있겠다고 하나님 앞에 다짐하면서도 깨어있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커다란 것은 은혜 받기에 너무나 바빠서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은혜를 웬만큼 주셔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온전히 간직하며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창을 깨끗이 씻어 주실 때 우리가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말갛게 닦여진 마음의 창이 끊임없이 오물로 더럽혀지고 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움직이기는 한데 눈이 나빠서 그것을 믿고는 분명하게 우리 인생을 맡길 수 없고 그것을 믿고는 우리가 걸어갈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닦이어진 마음의 창을 그대로 깨끗하게 간직하며 사는 길은, 하나님이 온전히 우리 마음의 자리를 차지할 때 그 때 우리가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교회를 목회 하다 보면 기도는 잘 하는데 삶이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창을, 깨끗이 닦이어진 은혜의 창을 하나님 앞에 언제나 깨끗하게 간직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물질이 많이 있다고 해서 눈이 어두워지고 없다고 해서 눈이 밝아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예화: 어릴 때 길을 잃어버렸던 이야기-닭을 삶아놓은 것을 보며 너무 배가 고파서 훔쳐서라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 결핍한 사람이 자신의 결핍을 보고 부요한 사람이 자신의 부요한 것을 보게 되면, 그 마음 자체가 물질에 가게 되면, 도덕적인 의식이 약화됩니다. 신앙적인 의식이 약화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은 도덕보다 훨씬 고차원입니다. 감각에 있어서 훨씬 뒤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죽이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신앙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감각이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신앙적인 감각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감각이 다 사라진 것이 눈이 어두워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화: 한 큰 교회의 장로님이 교회 건축을 위해 모아 둔 돈을 선거 운동 자금으로 썼다는 이야기.)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고, 맨 정신의 상태에서 그분에게 이 말을 하면 있을 수 도 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고, 결핍되든지 부요하든지 일단 하나님 아닌 다른 목표에 마음을 쏟게 되고 거기에 마음을 고정시키게 되면 신앙의 차원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이 어두우면 우리의 인생이 바른 길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늘 따르면서 실수가 없는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그 인도를 감지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감지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벼랑 끝에 가서 서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서도 못 깨닫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는 합니다.
늘 깨어있고 언제든지 자신의 삶이나 타인의 삶, 그리고 교회의 모든 문제들이나 자기가 놓여있는 삶의 정황에서 예리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각에서 자신의 처해있는 문제들을 예리하게 직시하고 직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져서는 안됩니다. 물질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것에 있어서도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실 때 그 인도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고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깊어지고 영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아집이 더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의 아집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그리고 은혜체험 많이 했다는 사람의 고집은 누구도 못 말립니다. 정말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잘못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이 도자기 만드는 진흙 같아집니다. 도자기 만들 때 보면 진흙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릅니다. 주인이 원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고 은혜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을 보면 눈빛이 틀립니다. 강단이 강합니다. 사람을 향해서 강단이 강한 것은 좋은데 하나님을 향해서도 강단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나를 주님 마음대로 못해'하는 강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뼈빠지게 일하는데 언제나 교회의 모든 고통이 그런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세상에서 불법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고 교회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를 하다하다 십자가를 내리는 교회가 있고 발칵 뒤집혀져서 반으로 갈라서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된 이면에는 한 달에 한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교회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집 팔고 땅 팔아서 교회에 다 바치고 통장 다 털어서 교회에 바친 사람들이 교회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속에 있는 아집과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에 일단 눈이 멀게 되면 하나님 앞에 헌신되었던 그 훌륭한 생각과 마음들이 악한 세력을 위해서 사용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깨어있는 것입니다. 무지몽매(無知蒙昧)한 헌신은 언제나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그 깨어있는 마음이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늘 침해를 당하고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물이라는 것은 단순히 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재물 사랑은 세상 사랑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아니라 명예나 다른 것들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4절에서 갑자기 예수님은 다른 이야기를 들고 나오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여기에서 한 사람은 한 인격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당연한 이야깁니다. 한 인격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한 인격으로 두 주인을 섬기면 정신 분열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TV 드라마에서 이중 스파이를 봅니다. 그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두 주인이라는 것이 하나는 재물로 표현되는 '물신'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로 대표되는, 인간의 숭배의 대상이 되는 재물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하나님이 물질을 창조하셨지만 물질이 일단 사람들로부터 섬김의 대상이 되게 되면 일 계명에 의해서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섬김을 받는 물질과 인간의 섬김을 받는 하나님이 화해의 관계에 있을 여지가 없는데 그 두 주인을 함께 섬길 때 그 때 인간에게는 분열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열현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으로서의 신앙과 행동으로서의 삶을 정확하게 나누어버리는 일을 해야합니다. 이것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마음은 신앙의 세계, 삶은 또 다른 세계로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인격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의 종이 되고 노예가 되기 마련입니다. 이미 한 인격이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를 더 사랑하거나 하나를 미워하고 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또 하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하시고 싶으신 이야기는 한 인격으로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만약에 너희가 한 인격으로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면 거기에는 이미 선후가 있고 경중이 있고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나뉘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염려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영적인 어두움을 낳고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서 섬김이 깊어져서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을 미워하는, 그리고 세상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을 경히 여기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핏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그것이 주님을 미워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어법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때때로 이런 어법을 사용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다"는 논리를 가끔 폅니다. 그것은 히브리 어법에서 사랑하는 대상 하나를 강조하기 위해서 반대편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어법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나머지 사랑하지 않는 것들은 상대적으로 미워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어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어법을 볼 때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은 당신을 향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것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사랑하고 저것도 사랑하면서 사랑이 분할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고 오늘날의 우리도 그렇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늘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한 인격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편이든 아내이든 자식이든 누군가 한 사람을 만나서 그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거의 미워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제공받는 사람들은 정말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대적인 사랑의 개념이 없이 그냥 만났으니까 살고 살다보니 만나고 낳았으니 예뻐하고 예뻐하니까 좋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념으로 하나님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볼 때는 사랑에 부모를 향한 사랑과 자식을 향한 사랑이 나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주님만을, 그리고 만일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수많은 상처들, 사연들을 안고 있는데 그 문제의 해결은 상처를 능가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깊이 깨닫고 체험할 때 그 상처가 이미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해결이 된 것 같아도 언제나 또 문제가 됩니다. 근원이 해결되지 않은 종기처럼 상황과 여건이 조성되면 언제나 문제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생각하는데, 상처가 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상처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고 그것이 자기 속에서 역사 하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생각의 차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고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죽어 가는 속에서 가끔은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만 그 사람도 소망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여기시고 숙명적인 죄의 굴레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마음을 먹으니까 하나님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처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대가로 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 마음의 전부를 차지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이해하고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있습니다. '주 예수여 완전한 주의 사랑 나 받기를 원합니다' 결국은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빛을 비춰서 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보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너희는 세상의 눈이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의미를 갖습니다. 먹고 마시고 취하고 노래하고 지지고 볶으며 사는 이 세상이 자신들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게 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는 사실을 세상이 압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것을 가르쳐 줄 때 비로소 세상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가르쳐줘도 세상은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잘 믿든 못 믿든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의 유일한 눈입니다. 더군다나 이 인생 자체가 영원의 세계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할 때 그 영원으로 가는 길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안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똑바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지 못하면 자신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한 인격으로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살든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와는 상관없이 무엇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섬겨야 할 목표를 잃어버릴 때 인간은 이 세상에서 공허해서 살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입니까? 오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다고 말하기는 캥기고, 그렇다고 세상을 섬기면서 산다고 말하기에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고, 결론은 내 인생을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사실은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 인생 자체의 특징이 하나님을 섬기며 산 사람이었다고 낙인찍힐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수니까 세상이 안 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소금을 생각할 때 부뚜막에 있는 소금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름날 우유와 계란을 넣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따뜻한 부뚜막에 12시간만 놔두면 새파랗게 변합니다. 곰팡이가 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찻숟가락 하나 정도의 소금을 집어넣고 반죽을 하면 안 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소금을 말씀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소수라는 사실 때문에 너무 눌려하고 다수라는 사실 때문에 뻐길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진실 되게 섬겨서 이 세상으로 하여금 썩지 않도록 소금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 하지만 소수라고 해서 영향력이 소수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위기를 만났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습니다만 크게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이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때, 교회 온지 2-3년이 되었는데도 그 때 그 사람 그대로인 것을 볼 때, 변했다면 겨우 이 얘기 저 얘기 주워들은 것밖에 변한 것이 없을 때, 목회 하는 저는 깊이 좌절하게 됩니다. '이렇게 안 변하는 것이 인간이구나'합니다. 터질 듯 터질 듯 하는데 안 터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돌같이 굳어집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되는 지 아십니까?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대견스럽게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내 마음에 있을 때 그 때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들이 얼마나 놀랍고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왜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마음에 가져야 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체험해보지 못해서 모르는 것이야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어떻다고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느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3. 적과의 동침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5-26)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관점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염려가 문제가 해결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만 그 염려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문제 하나가 해결된다고 해서 염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염려가 생겨납니다. 마치 여름날에 죽순을 잘라버리고 비가 다시 한 번 오고 나면 또 솟아나는 것처럼 이 세상이 원래 그런 곳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염려가 한번 만족되면 다시는 염려가 없고 고통이 없고 문제가 없는 곳이라면 왜 옛날의 경건한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으면서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어했겠습니까? 세상은 원래 그런 곳입니다.
(예화: 결혼 후 사글세방을 전전하다가 그럴듯한 전세방을 얻게 된 한 성도의 다음 기도 제목은 다음 심방 때까지 아파트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다음 기도 제목은 더 큰 아파트... 결국 45평 아파트로 가게 해달라는 기도 제목을 말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그 만족감은 잠시입니다. 잠시 동안은 그것이 기도제목이 아닐 수 있지만 다음에 또 다른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어서 그런 육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 말고 상당히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세상 염려는 다 접어두고 주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주일 학교를 맡았다면 이이들이 늘어나는 것이 기도제목인데 결국 주일학교가 부흥했다면 기도제목이 끝나겠습니까? 또 눈을 들어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족을 위해서, 교회 부흥을 위해서, 조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세계지도를 펴놓고 한 나라 한 나라 집어가면서 선교의 부흥이 일어나기까지 기도하게 됩니다.
마귀의 세력들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삶을 치가 떨리도록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차피 구원받았기 때문에 마귀가 그것을 취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힘을 빼놓는 것입니다. 발목에 줄을 매서 돌아다니며 활동할 수 없게끔 잡아놓는 것입니다. 아무런 힘을 쓸 수 없게끔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 하나 하나가 충족된다고 해서 인간이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고 하는 기대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끔 “저 아이만 속을 안 썩이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근심이 커 보이니까 나머지 작은 근심들이 근심같이 생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되고 나면 다른 문제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꾸라고 하시냐 하면, 처음에 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먹고 입는 것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처음에는 살아가기 위한 몸, 그리고 부지하기 위한 목숨을 위해서 먹고 입을 것을 가지고 염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렵하며 채취하며 살아가는 원시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원시시대에서 싸우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먹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전쟁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이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싸웁니까? 아닙니다. 더 많이 먹겠다는 것입니다. 더 호사스럽게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일년동안 산출해 내는 부의 80%를 전세계의 10% 인구가 흥청망청 먹고 쓰는 것입니다. 나머지 20%를 가지고 90% 전 인류가 먹고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모자라니까 일년에 2500만 명씩 굶어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염려하고 계시는 모든 문제들이 정말 생존선상의 문제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보다 더 많이 소비하고 잘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불안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병에 걸려서 앓다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는데 ‘건강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게 하나만 있으면 남대문에 가서라도 먹고살텐데’하였다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생존선상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생존선상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관점을 바꾸라고 말씀하시는데, 의복과 음식에 대한 염려의 기원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몸과 목숨을 위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을 보호하는 의복과 목숨을 보호하는 음식 가지고는 염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 출발은 몸을 보호하기 위한 의복, 생존하기 위한 음식이었는데 이제는 훨씬 그것을 능가해서 사람들이 강도 짓을 하고 살인을 해서 돈을 빼앗는 것이 배가 고파서 먹고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살인을 서슴치 않게 된 것입니다. 과도한 욕망이 과도한 염려를 빚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족한 것을 어느 정도 참을 줄 아는 지족하는 신앙생활을 해야지 만 우리가 열 번째 계명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는 “너희들이 의복이나 음식을 위해서 염려한다만 그것의 출발은 원래 몸과 목숨을 위한 것이 아니었겠느냐? 그렇다면 몸과 목숨을 염려하는 것이 인간적이고 일반적인 것이라면 그것도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몸이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혼의 생명, 너의 속 사람이 아니냐?”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우리의 육체를 간수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편한 것을 밝히는 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불편한 것은 조금도 참을 수 없습니다. 양말 목이 조금만 조여도 못 견딥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불편한 것을 조금도 참을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 “그러한 몸과 목숨에 대한 예민한 염려가 너의 영혼, 영적인 삶에도 적용되고 있느냐?”고 예수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몸의 건강과 몸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예화: 이상구박사 건강 신드롬 때문에 갈비 집 매상이 떨어졌고 고구마 가격이 폭등했다) 인간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세심한 배려와 주의를 기울이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가 “이런 죄를 지으면 여러분 영혼의 건강에 대단히 해롭습니다.”해도 귓전으로도 안 듣습니다. 마귀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죄를 세일할 때 목사가 “여러분, 이런 것 먹으면 큰일납니다”하면 파리가 날려야 하고 “여러분, 믿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하면 천국의 수퍼마켙에서 성경이 불티나게 팔려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많고 과도하게 염려하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속 사람에 대해서 염려합니까? 염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이런 관점에 변화가 생깁니다. 은혜를 안 받으면 관점에 변화가 안 생깁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마이동풍입니다. 들을 때는 뭔가 있는 것 같지만 끝나고 나면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은혜 받지 않고는 인생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안 생깁니다. 세상이 좋은데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너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관점이 변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각성과 함께 옵니다. 그렇게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던 사람들이 어느 날 말씀을 듣고 보니 세상 사랑으로 어두워졌던 눈이 벗겨지고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가난한가 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 하나를 감싸기 위해서 과도하게 고급으로 옷을 입어서 몸은 잘 보호가 되었는데 자기의 속 사람은 아프리카 난민과 같은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을 보면서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렇게 잘먹고 잘 살면서 내 염려로 스스로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것이 얼마나 불쌍하고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속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보는 관점이 변화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아둥바둥하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지만 더 이상 월급을 위해서 직장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 몇 푼에 울고 웃는 사람이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서 주가의 등락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몸져 눞는 이상한 일들은 안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생을 보는 관점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갑자기 “공중 나는 새를 봐라. 들에 핀 백합을 봐라”말씀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학교야말로 최고의 신학교였습니다. 칠판도 복잡한 교과서도 없이 주님 자신이 교과서입니다. 우리들이 영혼을 가르칠 때도 가장 훌륭한 교과서는 자신입니다. 양육 받는 영혼들은 성경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성경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예수님 신학교의 특징은 예수님과 함께 살고 함께 다니는 것입니다. 책 보따리 만 싸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전수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늘 만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들어야 신앙이 자랍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부터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겠습니까? 눈뜨고 일어나면 가르치시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가르치셨습니다. 3년을 그렇게 가르치셨는데도 마지막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전수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결혼식에나 가듯이 옷 깨끗이 차려입고 연보 몇 푼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주일 예배 한번 드리고 간다고 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와 매일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살아야 하니까 일주일에 네 번 정도 밖에 못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늘 생각하면서 교회에 매일 나와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새가 지나가고 있으니까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을 지나가시면서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하며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께 육화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체득하는 방법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자기에게 육신이 되는, 그래서 말씀과 자신의 사람 자체가 분리되거나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체험의 요소가 깃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생각하지 말라” 중간에 삽입구처럼 비유가 들어가지만 그 비유를 빼내고 나면 25절에서 30절로 바로 연결이 됩니다. 결국 염려의 원인은 믿음이 적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신 것은 재물로 대표되는 세상 사랑의 대표적인 제유법으로서 재물을 든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재물이 세상 사랑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물만 있으면 세상의 대부분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심지어 돈으로 사람도 사고 팝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재물은 세상 사랑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사랑하는 이 문제는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결국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최대의 암초가 염려와 근심인데 믿음이 없는 것이 염려와 근심의 원인이 아니라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거의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인해전술이 통하지 않습니다. 세상 전쟁에서는 인해전술이 통할 지 모르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인해전술이 통하지 않습니다.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데 거의 도움을 못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내실 때 우리 인생의 목표와 가치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면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토록 ‘믿음이 없는 세대여’ ‘믿음이 적은 세대여’ ‘불신하는 세대여’ 하시면서 슬퍼하고 애통하셨던 것입니다. 적은 믿음으로서는 하나님을 위해 적은 것을 섬기고 큰 믿음으로서는 큰 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적은 믿음으로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거의 해드리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이렇게 큰 믿음을 가져야 된다고 외치는 이유입니다.
재물 사랑, 세상 사랑의 문제는 일반적인 믿음의 차원에서는 극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모습이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진정 주를 위해서 산다는 그러한 명목, 주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 같은 자기의 겉모습 속에 교묘히 감추어져서 결정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인간을 의뢰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어디서든지 항상 주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경배하면서 살지만 이 적은 열매들을 한번 보십시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만 돌이켜보면 허우적거리면서 싸운 기억밖에는 나지 않습니다. 승리를 하고 땀을 닦으면서 곡식 단을 묵어서 하나님 앞에 드린 생각은 안 나고 개울 창에 빠져서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생존이라고 하는 허우적거렸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적은 삶이 바로 주님을 위해서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우리의 섬김의 열매, 그 모든 것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실패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모든 삶의 동기가 깨끗이 정화되고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에 고정되었던 사람들은 정말 핵폭발적인 위대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어마어마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예화: 큰 항공모함이 전 세계를 일주하는데 달걀보다 작은 우라늄 만 있으면 된다-작아도 폭발하는 힘이 강하니까 위대한 힘과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폭발적인 위대한 힘들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놀랍게 섬겼던 사람들의 이면에는 정화된 삶의 동기, 한발은 이 땅에 매여있고 한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려고 하는 묶여있는 상태가 아니라 이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위대한 일들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저나 여러분들이나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생각보다 사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가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주 복잡한 덩어리입니다. 복잡하고 야바위에 능하고 사기꾼 같은 기질이 있고 그러면서도 고집과 배짱이 셉니다. 그런데 그것도 선하게 대해주시는 하나님을 향해서만 배짱이 세지 세상을 향해서는 언제나 아부하기 잘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속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쓸만하다고 생각하고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은 살짝 데쳐지는 은혜는 받을 지 모르지만 푹 삶아지는 은혜에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칼빈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만큼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는 매순간 설교를 들을 때마다 기쁨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의 연속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십년을 살아왔으면서도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니까 충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가해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신앙의 겉모습 속에 깃들여 있는 이런 세상을 향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의지하며 살기보다는 내 방식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삶, 이런 것들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 지 모릅니다. ‘내 인생과 삶을 하나님께 맡기면 내 스스로 내 삶을 지키는 것보다 혹시 더 실패작이 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불안감들이 우리의 인생을 에워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며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악함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결국 말씀하신 것은 믿음이 없는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적은 믿음으로는 극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큰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가장 잘 돌보아 주실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해보면 아무에게나 마음을 잘 주는 사람도 있지만 유난히 사람에게 마음을 잘 안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올 때도 그것이 적용이 되어서 하나님과 자기 아이디어를 한없이 저울에 달아봅니다. 그래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기 가슴에 닿을 때는 하나님이 내려가는 것 같고 자기가 올라가는 것 같아서 ‘믿어볼까’합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면 자기가 쑥 내려가고 하나님이 위로 올라가서 ‘아직까지는 마음놓고 맡길 수가 없겠는데’하며 줄다리기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그렇게 마음의 문을 하나님을 향해서 열까 말까 합니다. 누구도 못 엽니다.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고 습관적으로 닫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늘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잘 열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가 알아서 문제들을 잘 처리하면서 잘 살아온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래 동안 가족 없이 혼자 알아서 살아온 사람들이 정말 단단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한번 깨트려지면 그 때부터는 자신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충격의 순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가 제대로 들어가면 하나님 한 분 붙들지 않고는 못삽니다. 필사적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영적인 변화보다 더 급선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육체와 세상의 목숨, 이런 것들을 향한 염려, 재물 사랑은 적은 믿음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만을 위해 산다고 큰소리 치지만 사실 속 사람을 들여다보면 각양 수많은 탐심과 욕망들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위해 살지 못하도록 얽어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이렇게 우리와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런 재물에 대한,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떨쳐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크게 만나고 변화되어야지 만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말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서 훌륭하게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면에는 훌륭하고 착한 인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악하고 간악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이름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광화문 앞에서 원서 성경을 싸게 샀는데, 그 앞장에 “형제여, 이 책의 저자만큼 너를 사랑하는 분이 세상에는 없단다”라고 쓰여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깨닫고 알게 될 때 그 때 우리가 이런 무거운 짐들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는 힘과 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로부터 극복되는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염려로부터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세상은 악하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악한 것도 아니고 혐오대상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신앙이 나옵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는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4-5세기경부터 수도원이 생겨나면서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이라는 말이 홀로 있다는 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게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800여년 지난 다음에 산 속에 들어간 수도원이 세상보다 더 많이 썩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부패시키는 원인이 우리의 몸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착각한 것입니다. 혼자 있어도 부패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부패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세상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 세상이라는 대명사 자체는 악함의 대명사도 아니고 선함의 대명사도 아닙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 살아있지만 영원히 세상 속에 섞일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이 “너희는 빛이다 소금이다” 말씀하시면서 ‘세상의’라는 소유격을 부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어느 인생의 시점에서 모든 일을 젖혀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만 매달려야 할 때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든지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에 서서 하나님 앞에 갈 길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눈치보며 직장생활 하는 것보다 교회에 나와서 찬송 부르고 박수치는 것이 훨씬 신나서 백수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구제하는 것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즐거움은 교회 집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백수가 되어서 교회에 나오면 신나고 그 이상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소금 창고이지 무슨 교회입니까? 조명 회사이지 무슨 교회입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나가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이 없으면 우리의 사명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사명’ ‘소명’과 같은 복잡한 말은 없습니다. 세상에 있으니까 우리에게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립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랑을 혐오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적입니다. 세상이 적이 아니라 세상 사랑이 우리의 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이나 세상의 있는 것들과 함께 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몇 평에 살고 있고 무슨 차를 타고 다니고 무슨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셔서 누리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누리게 하시지만 누리게 하신 것도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주님이 주셔서 누리며 산다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누린다는 것과 그것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화: 한 목사님이 집회를 가셨는데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도 사양하고 잠도 사무실 소파에서 주무셨다) 누리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사랑하며 사는 것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알 수 있습니다. 은혜로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요 가져가신 이도 여호와시니 오직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실지로다”라고 고백을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가져가실 때에 마음이 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져가실 때에 더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달라고 조른 적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주시고 하나님 마음대로 가져가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과도하게 이삭을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경고를 받으면서 끊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이 아브라함을 감싸면서 더 큰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을 받는 언약의 갱신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방법입니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런 재물에 대한 사랑, 즉 재물 사랑으로 대표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떨쳐버리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소수지만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화: 하용조 목사님이 사석에서 학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을 못 보았다고 하신 이야기)
우리가 세속적으로 살아갈 때는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이 있고 종교적으로 살아갈 때는 종교적인 것들로 포장이 된 세상 사랑이 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강하게 눌어붙은 것입니다.
재물과 세상은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경배를 받기 위해서 서로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그러한 세상 사랑이 빼앗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단순히 우리가 세상을 좋아하는 정도로는 만족을 안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나아가서는 열렬하게 숭배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 사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헌신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 마음이 하나님과 같습니다. 그리고 양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도 자기만을 사랑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가까워지지만 세상은 사랑하면 할수록 처음에는 가까워지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그렇게 사랑하던 세상이 우리 자신을 발길로 차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에 쓰겠느냐 세상에 버리워져서 사람들의 밟히어 버리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 사랑과 결탁되어있고 거기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세상 사랑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적당히 융합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적과의 동침입니다. 침상에서 세상 사랑을 끌어안고 동침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낳은 자식의 이름은 근심, 염려, 불안, 고통들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올망졸망 쫓아다니니까 이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결국은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으면서도 자식들을 기르느라고 애지중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염려와 근심의 대가족이 됩니다. 그래서 옮겨가고 싶어도 이제 옮겨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것을 영적인 용어로 ‘영혼이 눌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어떻게든지 머리를 굴려서 세상과 동침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그것을 큰 적으로 느끼지 않은 채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의 확장은 멎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내실 때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속상합니까?
(예화: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에 들어간 아들을 둔 아버지가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 학사경고를 두 번 받게 되자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하나님이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때 구원은 거저 주신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못났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 수 있다고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가슴 벅차지 않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이렇게 매일 비실비실 쓰러지고 죄밖에는 짓는 것이 없는데도 주님이 정말 그런 기대를 하셨을까요?’라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기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찾는 것이고 버리면 버리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는 것은 이미 주님을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이미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적당히 발을 걸치면서 살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단언적인 촉구들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밤마다 침상에서 세상 사랑과 동침하면서도 호적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혼인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과 더불어 간음한 자들’입니다.
순결해야합니다. 그래야만 그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와의 영적인 관계가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적과 끊임없이 동침하면서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라 그리하면 만나주리라 하셔놓고 구해도 안 만나 주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찾는 것이 다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적과의 동침으로부터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전쟁입니다. 정말 피비린내 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수괴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랑은 그러한 전쟁 행위 중에 적의 장교와 함께 동침하는 것입니다. 그 적과의 동침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들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생각들을 정말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이 세상에서 부해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 몸부림이 기가 막히게 적중해서 신나게 돈 모으고 떵떵거리고 살면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때를 두고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도 잘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면 그는 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돼지를 기를 때 인물 보려고 기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도살하려고 기르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호락호락하게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포기하십시오. 꿈꾸지 마십시오. 옛날 방식대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믿게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그 자녀들로 하여금 살게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대로 안 살고 적과 동침하고 겉모양만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세상에 대한 사랑을 분명히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부해지려고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버려 두실 리가 있습니까? 그것을 계속 구하게 하고 한참 잘나가게 만들어 주시면 하나님을 떠날 것이 뻔한데 왜 잘나가게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예화: 전에는 손만 대면 사업에 성공했는데 예수 믿고 나서는 마이다스가 되어버려서 손만 대면 망하고 동업하는 사람까지 망하게 되었다고 말한 한 신자의 이야기-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대 답해 주었다)
거듭났으면 거듭난 방식으로 사업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동의 할 수 없는 옛 방식으로 사업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잘나가게 하시면 하나님 믿고 하나님 의지하겠습니까? 그러한 적과의 동침의 문제를 해결해야지 만 복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중 나는 새를 봐라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하셨는데, 이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는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부른 것이 아니라 가장 하찮은 것을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새가 아니라 일상 날아다니는 우리의 참새 떼와 같은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던 가치가 별로 없는 하찮은 새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백합화도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흔한 꽃입니다. 순결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찮은 풀꽃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백합이나 공중의 날아다니는 새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생존과 생명과 향기와 운동하는 모든 힘들을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크고 장황한 것에만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다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 모든 것들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말씀하시면서 “그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알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귀하다’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집에서 대접 못 받아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부모는 “내가 너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해도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주일을 수시로 빼먹고 전도사님들 속만 썩이는데 그래도 주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실까요?”“제가 이렇게 사람답게 못살고 세상을 사랑하는데도 주님이 귀하게 여기실까요?” “제가 지금 세상에서 방탕하고 타락 가운데 있어서 거의 기도할 힘을 잃어버렸는데 그래도 주님이 귀하게 여기실까요?”라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그래도 주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의 어떤 적은 믿음을 책망하신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얼마나 귀하게 보는가를 믿지 못하는 마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풀이 아름답고 나무가 아름답고 공중에 나는 새가 아름답고, 인간으로 하여금 한없이 처연하게 만드는 유구한 자연의 세계를 보면, 하나님께서 “있으라”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마지막에 “없어져라”하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주님의 자녀가 되어라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잡한 행동과 아픔과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이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운명이고 자랑인 것처럼 살아갈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녀 만드시기 위해서 아기 예수를 낮고 천한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셔서 그 피로 구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래 걸렸습니까? 그래도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을 어떤 사람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복음 앞에서 망설이게 하시다가 환경을 움직이시고 마음을 움직이시고 여건을 움직이셔서 예수 믿을 마음이 생기게 하시고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 앞에 굴복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죄가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승복할 수 있도록 설득하시고 예수 믿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태어난 것이고 때를 따라 사경회를 통해서 말씀으로 씻기시고 먹이셔서 건강하게 만드시고 매 순간마다 말씀으로 가르치셔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지 일러주셔서 이만큼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별로 없지만 주님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투자하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폐기처분 안 하시고 어떻게 하든지 고쳐서 써보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공장에 들어가기 싫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 대해서 눈뜨고, 주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 지에 대해서 우리가 눈뜨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적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으로 이런 염려와 불안의 문제를 극복하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4. 들풀에 깃든 사랑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27-31)
예수님께서 29절에서 “그러나 그 들풀과 같은 백합화, 공중에 나는 새들이 얼마나 가치가 없고 하찮은 것인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려한 식장에 장식된 꽃이 아니라 한껏 자기의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피어났다가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들풀, 그것 하나에도 하나님의 세심한 사랑이 깃들여 있다는 것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렇게 공중의 나는 새나 들에 핀 백합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돌보시고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왜 가치가 없는 풀과 새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입히고 먹이시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자식이니까 입히고 먹여서 혹시 효도를 받으시려고 하시는 지 모르지만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들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인데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세심하게 배려하시며 입히시고 먹이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들풀의 의미 없는 것과 공중 나는 새의 무가치함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주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미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창조하신 것들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지시며 그것들을 돌보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산이 은혜 받기 전의 산이 아니고 물이 은혜 받기 전의 물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자연을 오염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점에서 볼 때, 공중에 나는 새나 들의 풀이나 그 모든 것들이 피조에 있어서 우리와 동기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선배입니다.
그런 아무런 가치가 없는 백합화 하나가 들에 피었다가 사라짐에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사랑으로 돌보시고,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사랑,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가 길쌈을 아니하고 수고도 아니하고 공중에 나는 새가 창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중을 날아다니고 화려하게 꽃이 피어서 향내를 발하는 것은 백합화나 공중에 나는 새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는 백합화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가 추수도 안하고 거둬들여 모아둘 창고도 없는데도 여전히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그 공중에 나는 새나 들에 핀 백합화가 무가치함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인간의 가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보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모든 염려와 고통, 모든 찌르는 것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따라서 살아간다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먹여 살리고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지탱해간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든 염려와 근심들이 가시가 되어 우리 속에서 수없이 돋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어도 가시나무 숲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조금 자라는가 하더니 위에서 가시-재리와 염려와 근심-가 짓누르니까 더 자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잔뜩 있어도 언제 그것들이 자라서 공중의 새가 깃들 만한 믿음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공중에 나는 새나 백합화 자체가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이런 것들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전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를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것으로 왕궁을 짓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더군다나 나중에 신앙까지 잃어버리고 나니까 호화로운 생활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물질을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비참한 말로를 걸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지혜롭던 사람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여기에 솔로몬이 나온 것은 아주 재미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다가 죽은 사람이 솔로몬만이 아닌데 하필 솔로몬을 거명하는 것은 이 문제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일천 번의 번제를 드리면서-번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다-“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재판할 수 있는 공의로운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의를 펼치게 하옵소서”하였습니다. 이 말에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셔서 “그래 내가 너에게 일찍이 없었던 지혜를 주고 그 위에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리라”해서 부귀와 권세와 영광까지 다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기만 해도 지혜로운데 경외하는 것 위에 전대미문의 놀라운 지혜의 은사를 받았으니까 이 사람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뛰어났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죽했으면 이 사람이 지혜롭다는 소문을 듣고 남방여왕이 와서 그의 지혜를 몸소 겪어보고 감탄을 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돌리는 일들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게 되었겠습니까? 그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바뀐 아이를 재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그렇게 백성들 마음속에 있는 사악한 생각들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의를 폈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일에 신앙을 잃어버리고 화려한 생활로 부패해지게 되니까 주님이 그 놀라운 지혜를 주셨는데 오히려 이 지혜가 악한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그에게 그렇게 뛰어난 지혜가 없었더라면 훨씬 더 훌륭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학벌, 재산, 미모 등 여러분들이 자랑하고 있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여러분들을 붙잡고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게 되는 것이지 신앙이 여러분들을 붙잡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도 그것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 실패한 인물의 대표로서 솔로몬을 예로 든 것입니다.
그렇게 화려한 모든 영광으로 입은 그 아름다운 옷이 이 백합화 하나만도 못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팔면 백합화가 더 비싸다는 것입니까? 백합화는 들에서 사람들의 주목도 못 받고 사라지지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솔로몬의 입은 영화스러운 화려한 옷이 이 꽃만 같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입은 화려한 옷은 그 옷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들에 핀 이 백합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와 하나님의 이 무가치 한 것들을 향해서 베푸시는 들풀에 깃든 사랑을 드러내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점에서 이사야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는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화려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별 의미도 없이 역사 속에 사라져 갔습니다. 잘 먹고 좋은 옷 입고 큰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은 세상에서는 잠시 의미가 있을 지 모르지만 영원한 세계에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마지막 남은 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얼마나 경외하고 그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만이 영원히 남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꽃이 가치가 있습니까?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땔감에 지나지 않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고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들에 활짝 피어있을 때도 사람의 주목을 못 받았는데 들에 활짝 피었다가 시들고 나니까 사람들이 더 주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말라버린 이 풀들이 갈퀴에 다 모아져서 마지막에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의 불을 돋구기 위해서 휙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다 타고 재가 남았습니다. 그렇게 재가 남고 모든 것이 다 타버리고 난 후에 하얗게 남은 재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이 꽃의 말로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것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입히고 먹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입히고 먹이시는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불안과 염려와 고통은, ‘우리의 양식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데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놓치고, 몇 푼의 세상 재물을 움켜쥐기 위해서 금보다 고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양 근심들이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양립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염려의 원인은 결국 적은 믿음 때문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결핍 때문이 아니라 적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적기 때문에 염려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없기 때문에 염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근심 걱정이 없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부한 사람들을 보고 ‘걱정이 없겠다’고 하지만 부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오늘 확실히 정리하십시오. 염려는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핍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믿음의 부족 때문에 불안과 공포와 염려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결핍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결핍의 기준은 한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 한없이 치솟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단칸 셋방에서 아이들과 복닥이며 살 때는 공부방 하나만 있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는데 공부방이 하나 생기면 거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영국 속담에 ‘일년을 행복하고 싶으면 집을 사고 한 달을 행복하고 싶으면 말을 사고 일주일을 행복하고 싶으면 장가를 들고 하루가 행복하고 싶으면 면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한없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결핍이라는 것도 결국은 욕망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욕망이 끝이 없으니까 결핍을 느끼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욕망이 없으면 결핍을 느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길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도움이 되나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직무유기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욕망은 하나님이 가진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못하실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다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계속 채워주시니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셔도 당신 자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까? 거기에 걸린 사람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그 아담의 피를 받아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인간의 욕망은 다 만족시켜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욕망이 있으면 즉시 결핍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려가 결핍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염려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믿음이 적은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게 해주시고 갖게 해주신 모든 과실나무와 생명수 물가와 모든 것들이 눈에 안 들어오고 오직 하나만 들어온 것입니다.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신 그 나무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타락한 욕망입니다. 뭔가 부족하다는 결핍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따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염려는 결핍에서 온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눈여겨보니까 염려는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데 세상이 거의 변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말씀하신 것처럼 적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적게 봉사할 수 있고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많이 이바지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상의 산술 계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계산에서는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적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이 땅에 오게 하는 데 거의 기여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심하게 이야기하면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거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적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결국 한쪽으로 염려하고 재물을 섬기고 세상을 사랑하고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큰 기쁨과 신령한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적은 염려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니까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끔 “네 믿음이 크도다” “이스라엘 가운데 내가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큰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지 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믿음을 가지면 그가 정말 세상에서 못난 사람인데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지 모릅니다. 교회의 역사도 가만히 보면 이름 없는 수많은 다수에 의해서 변화되어온 역사가 아니라 몇 사람의 역사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16살에 은혜를 받고 전도하기 시작해서 17살에 한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되었는데 20살 때는 12000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정치가, 박사 같은 사람들이 그 애숭이의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물같이 녹아졌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나중에 2층이 무너져서 9명이 죽는 비극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알고 큰 믿음을 가지니까 그 그늘 아래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생명과 가쁨을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교회가 있는데 노인들만 50명인가 모인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다시 모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이름이 없는 수많은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이 “네 믿음이 크도다” 인정해 주신 소수의 사람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창조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두 길을 택하십시오. 적은 믿음을 가지고 세상 사랑과 동침해서 불안, 염려, 근심의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아서 호적에 잔뜩 달고 다니면서 마음에 온통 가시나무와 가시와 엉겅퀴를 모두 돋아나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오히려 거침돌이 되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거절하며 사는 믿음이 적은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 -어차피 한번 살고 죽고 어차피 예수 믿은 것을 무를 수 없는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말씀하십니다.
(예화: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던 사람이 늘 돈을 꾸러 다니는 것을 보고 회의가 들었다)
나중에 해답을 찾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기록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조화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결론은 여러분들이 큰 문제, 즉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만을 의뢰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전적으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매일매일 베풀어주시는 양식으로 살아가는 우리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매끼마다 제공되는 그 식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에 의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임을 깨닫고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우리 자신이 육신을 위해 식사를 챙기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영혼의 양식을 챙겨주고 있는가를 하루에 세 번씩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 기도만 잘해도 우리의 신앙이 놀랍게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지 말라”하신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염려하며 이르기를” 하였습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도하지 아니하고 혼자 타이릅니다. ‘무엇을 먹지, 무엇을 입지’하며 염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시대의 맥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이 당시는 극한 가난의 시대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민소득 50달러도 될까 말까한 때입니다. 이 시대는 먹고사는 것이 정말 문제가 되었던 때입니다. (예화: 6.25가 끝난 1년 후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장정들이 힘이 없었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품삯은 세끼 밥이었다는 할머니 말씀) (1940년도 남자 평균 수명이 35세였다) 그래서 당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실 때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쉽게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의 명령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나’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명령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몇 천만 원씩 바치라는 명령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명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늘 그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먹고 입는 문제를 가지고 고통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이 사람들은 먹고 입고 마시는 이 말초적인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지만 오늘날 염려하는 것은 그런 생존상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태까지는 내 옷이 상당히 괜찮아 보였는데 계모임에 나가보니까 내가 제일 초라해 보였다’하며 염려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괜찮던 옷이 그 다음부터는 입고 나갈 때마다 꺼림직 한 것입니다. ‘너무 빈티 나는 것 같은데’하는 생각을 하며 염려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먹고살기만 했어도 괜찮은데 옆 사람이 좋은 차를 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프레스토를 타고 다니는 자기 남편이 무능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볼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입니다. 누가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면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하며 염려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생기니까 결핍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 결핍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까 그것이 근심이 되고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자신을 찔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염려라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의 기준은, 전에는 생존을 위한 말초적인 문제를 가지고 염려했지만 이제는 관능적인 쾌락을 위한 재물의 결핍을 가지고도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잘 사는 사람들의 구역을 맡게 되었는데 구역예배만 끝나면 스키, 골프 등 끼여들 수 없는 이야기들만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식 이야기를 하면서 딸이 5부 다이아 한 개를 끼고 초라하게 왔다고 말했다-당시 5부 다이어를 사려면 1년 사례비를 모아야 살 수 있었다) 인간의 욕망이 그렇게 관능적인 것에까지 펼쳐지니까 결핍의 심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결핍이 계속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인간의 이런 사악한 욕망의 끝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결핍을 느낄 때마다 후히 주사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채우리니 너희가 만족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딱 잘라서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도움이 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소금물에 한번 푹 절게 되면 입맛이 변합니다. 그런 것들이 같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입맛이 변했기 때문에 보석이나 세상에 있는 화려한 것들이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고 싶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고 보이지 않는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것이 마음에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나라를 위해서 보물을 쌓아 두는 삶인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우리 차가 다 망가졌는데, 무슨 차를 사지’ ‘어떤 옷을 살까’하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고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그런 것들은 전부 하나님의 말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증거를 수없이 보여주시고 사랑을 주셔서 이곳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너희를 그냥 버려 두실 리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가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 아버지를 불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32절에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하셨는데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단지 기도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추구점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그 자체가,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는 자체가 이방인의 삶의 목표요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라고 하는 것도 자신의 그런 먹고 입고 마시는 것들을 만족케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과 그 탐욕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메우려는 수단으로 신들을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화: 대만 사람들이 손바닥에 작은 신상을 올려놓고 복을 안 준다고 회초리로 때리는 이야기)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훨씬 도덕적이고 고차원적이고 영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수단으로 해서 자기의 인생의 결핍을 채워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무속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실수와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신을 섬기지 않아도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숭배의 대상이 없어도 자신의 욕심과 필요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신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저희의 신은 자기의 배요”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욕망이 자기의 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욕망에 의해서 신속하게 우리의 삶이 움직이고 변화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5.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2-34)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게 하지 말라”이고 열 번째 계명까지 내려갑니다. 우리는 일 계명이 제일 심각한 계명이고 점점 내려가서 마지막 십 계명이 서열상으로 열 번째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열 번째 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하면서 십 계명이 다시 일 계명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일직선상의 계명이 아니라 원형의 계명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서 펼쳐져 나갈 때 십계명이 온전히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 계명에서 구 계명을 지켰는데 십 계명을 어겼다고 하면 한 계명만 어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탐심 그 자체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하시며, 구약에서 정죄 당하던 끔찍한 죄를 탐심에 비유한 이유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욕망이 우리에게 힘으로 군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철저하게 거기에 복종시켜서 노예와 같이 열렬한 숭배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것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과도한 욕망을 가지면 안 됩니다. 어떤 취미에도 지나치고 위험할 정도로 깊이 빠져드는 것은 신앙생활에 결코 도움이 안됩니다. 사고가 항상 하나님 중심이 되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기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탐심을 갖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하나님과 그 탐심 하는 대상이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올라가서 우리의 섬김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주님을 섬기게 하려고 주셨는데 마음의 염려로 얻는 것은 결국은 육체와 함께 썩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는데 ‘이방인들이’라고 하시며 이방인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적은 믿음을 가지고 적은 믿음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이방인들의 삶과 거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성경 찬송 들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다릅니까? 여러분들은 자신의 하는 행동은 자기 눈에 안 띄고 다른 사람들은 눈에 잘 들어오니까 “예수 믿는 집사가...”하는데 집사가 아니라 목사라고 해도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방인과 거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변화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큰 믿음 가진 사람만 집사 세우면 될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큰 믿음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자신이 큰 믿음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결국 큰 믿음을 갖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렇게 변화되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안타깝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내실 때 가지고 계셨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들이 성취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든지 우리가 변화 받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적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큰 믿음으로 한번 변화되어 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초토화되었던 마음의 밭이 새롭게 말씀으로 부흥될 때에 그의 인생 자체가 한없이 즐겁고 기쁜 인생을 살게 되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화:직장 생활 할 때 3년 동안 사표를 써서 넣고 다녔다)
그러나 변화를 받고 나니까 너무나 행복해서 교회 다니고 직장 다니는 즐거움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요즘 직장 다니는 사람 보면 푸주간에 끌려 들어가는 소 같거나 신앙은 팽개치고 회사 일에 미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방인과 비교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우리 입술의 고백이 어떠하든지 이방인과 거의 다름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위해서 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기보다는 자기를 자랑하고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보다는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를 소원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열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산상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이 이 사람들처럼 그렇게 말씀을 사랑하십니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나와서 졸음과의 전쟁 아니면 잡념과의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팔복산에 올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실 때 그 청아하게 울리는 주님 자신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심령이 물같이 녹고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아로새겨졌던 사람들입니다. 자주 헤매는 제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러분들이 깊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닌데 이 사람들은 복음의 원판이신 주님 자신의 설교를 들으면서 감화를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서도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들이 이방인 같이 될 수가 있다”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얼마나 심각한 경고를 들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화: 자매가 갑자기 영국 왕실로 시집을 간다면 왕비노릇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전에 하나님 나라의 자녀 된 연습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졸지에 하나님 나라의 왕궁으로 불러들여서 주의 자녀 삼으셨는데 그렇게 호락호락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자식답게 살아야 자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낳은 후 다시 집어넣고 다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부모 마음에 들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도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들을 풀무 불 속에 집어넣으셔서 연단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난 성격과 위선, 아집들을 불 속에 넣어서 어떻든 하나님 닮게 살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셔도 그 집념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기쁘기 전에 먼저 아픕니다. 말씀에 들으면서 아파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위기를 만날 필요도 없습니다. 하다하다 안되시니까 하나님께서 한번 다듬어지라고 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큰 믿음을 갖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거의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느냐하면, 32절에 “너희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믿음이 적은 자들아”에서 그 ‘믿음’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과 그 아버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신다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당연한 것에서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큰 진리를 깨달았다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변화 받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순교자적인 삶을 살면서 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며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섬기게 되었습니까?” 물으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알았기 때문입니다”고 당연한 말을 합니다. 평범한 진리에 대한 생각을 비범하게 가질 때 우리가 비로소 비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간단하고 단순한 진리입니다. 믿음이 적은 ‘너희’에게도 하나님이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너무 후하십니다. 만일 믿음이 좋은 사람만 선착순으로 뽑으신다면 주님이 오셔서 “나는 너 같은 자식 둔 적이 없다”고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이 큰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 흘리며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싼 모피코트 하나 사 입기 위해서 껄떡거리며 생활의 염려로 고통 하는 사람들까지도 자녀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여러분들의 차이점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줄 때만 좋아하는데 하나님께는 여러분들이 거기에 있는 그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또 하나 알게 되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셨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옷을 입고 비가 오면 비옷을 입어야 하고 날이 너무 추우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다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은 단지 이해할 뿐만 아니라 필요를 따라서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방의 신들은 그것을 중언부언하면서 많은 말로 구해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는 분이시고 그 아시는 바를 따라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안다’는 말은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그 관계 속에서 활발하게 상호작용이 오고가는 것이 ‘안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내가 다 안다”고 하시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녹아집니다.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그 하나님은 필요 아래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해 한없는 애정을 가지신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안다”고 하실 때 단순히 아는 것만 아니라 전폭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아버지에게 어려움에 쳐해 있는 아들이 가서 하소연을 할 때 “다 알겠으니 돌아가라”고 한다면 도와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앞의 말씀들을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을 쌓으면서 살아가고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기 싫으셔서 하나님께서 그런 저런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실 때는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너무 갖고 싶은데도 안 된다고 하실 때는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가기 싫은데도 그 길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는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염려와 물질사랑, 세상사랑, 이방인들의 삶들에 대하여 다 말씀하신 이유는 이 한 구절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 헌장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교훈에 있어서 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 교훈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런 교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말은 많이 들어온 말인데 그것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입니다. ‘구하라’는 말은 단순히 기도한다거나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 자체가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그것을 따라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쉽게 표현하면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무게를 실어서 그것을 목표로 놓고 그것을 따라가고, 살아가는 삶 하나 하나가 그 커다란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 되도록 삶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구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계획이 있었는데 그 계획은 우리를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회복되고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들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 가지셨던 구원의 계획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눈을 뜨면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주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왜 예수를 믿는 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조금 은혜를 받으면 받았나보다 하고 떨어지면 또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왜 은혜 받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면 은혜가 떨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니까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별로 바꿔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 자체가 거듭나야 합니다. 오늘 분명히 결정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금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났다고 해도 금방 주님을 또 놓치고 맙니다. 그리고 또 벼랑에 갑니다. 좋은 길로 잘 나갈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본 신앙이 있기 때문에 벼랑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떨어지기 싫은 것은 인간의 공통 심사니까 벼랑에 있을 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하는 말씀이 생각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기억 못합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나를 받으소서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주여”하면 주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주여, 벼랑이옵나이다”만 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거듭나지 않으니까 벼랑으로 안 갈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잠깐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너무 비참합니다.
툭 터놓고 한 번 이야기 해 봅시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대로 신나게 세상으로 가서 한번 질탕하게 타락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님의 나라와 의만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도 왜 사는지 모르시겠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서도 여러분들이 왜 예수 믿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둘 중의 하나에는 분명히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대답은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그러니 대안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사는 것만이 우리의 인생이 비로소 가치 있게 사는 길입니다.
죽은 후 여러분의 묘비에 뭐라고 쓰여지겠습니까? ‘스물 여섯 살에 시집와서 두 아이를 낳고 사십 팔 년 동안 밥하다 죽다’ 그것 말고 묘비에 쓸 것이 있으면 내놔 보십시오. ‘스물 한 살에 회심하여 예수를 믿고 계속 월급 받아 식구들 먹여 살리다가 과로로 숨졌다’ 그것이 우리의 묘비에 들어갈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무목적한 삶입니다. 의미가 없는 삶입니다.
이런 삶들을 수없이 살다가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안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대로 안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답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무르면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를 아시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보람을 느끼시는 그 일이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보람을 느끼는 일이 되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손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들이 되어서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삶의 보람을 다른 데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참 걸어가며 열심히 살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공치사 할 일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생명 보험이 아닙니다. 생명보험은 죽어야만 돈이 나옵니다. 죽은 다음에 보험 타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오늘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 목표가 바로 그 나라와 그 의리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왕의 권력이 얼마나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대로 통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대로 통용되는 그런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시는 그런 나라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답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에 대한 답입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친구에게 강제로 끌려 나온 경우도 있고 사탕발림으로 나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와서 예수를 믿으려고 할 때 속에 불순종하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왠지 설교가 화나게 하고, 왠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자신을 갑갑하게 하고,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좇으라”고 하는데 나는 나를 버릴 수가 없고, 내 머리 가지고 내가 염려하는데 그것이 잘못됐다고 합니다. 그런 불순종한 세력들이 속에서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중심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교만과 이기심과 자아와 편견과 위선, 이런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마음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시는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셔서 야구방망이로 패시면서 우리를 고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어느 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니까 깨닫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억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교회당에는 데려다 놓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는 억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들어오게 되니까,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태껏 자신이 행한 것이 죄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 중 첫 번째 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세속적인 관심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모이는 것이 술 먹고 춤추러 다니는 것보다 더 신나고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 세속적인 기쁨을 맛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사람을 화목시켜 주고 주님을 알 지 못하는 사람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서 또 사람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배로 늘어나고 또 늘어나고 또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니까 언어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반기를 들었던 반군들이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토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나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마음속에 있는 모든 반란들이 토벌될 때 그 때 가정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될 때 교회가 온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아가서 살아가는 직장 속에서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향기를 나타내고 그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예수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있는 그 비밀스러운 평화를 알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 평화를 나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물질도 없고 먹고 입고 마실 것도 풍족하지 않은데도 그들은 안심하고 평안한데, 자신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불안하고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그 비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의 복음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가게 됩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거기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진정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주일 예배 후 마음이 심난해서 임진각까지 차를 몰고 갔었는데 고향 생각에 한없이 우는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통일이 되어 고향에 가보는 것이다)
(예화: 위조 여권을 가지고 중국을 통해 입국한 북한 동포를 외국인이라고 추방하려 했는데 헌법에 ‘대한 민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조항 때문에 소송에서 그 사람이 이겼다는 이야기)
우리는 북한 땅이 우리 땅인데 그 땅에 다른 사람들이 점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고향에 더 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원래 누구 땅입니까? 주님의 땅입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가라고 만드신 땅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을 만드셨을 때에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듬어 주고 슬픔에 싸인 자를 위로해서 다른 나라 땅에 살다가 이 하나님의 나라 땅에 들어오면 한없는 환희와 기쁨과 희락과 위로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세상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법으로 땅을 점거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이 세상의 신들을 군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아직도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라기 보다는 그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땅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땅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너희들이 그렇게 불행하고 고통 하는 이유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시고 이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다른 주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너희들이 모두 불행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맞아. 우리 이렇게 살면 안돼’하며 하나님의 나라로 항복하고 오는 것입니다. 찬송가에 ‘손들고 옵니다’하는 것이 항복입니다. ‘손들고 와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겠사옵나이다’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또 나아가서 이 땅이 하나님의 땅인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사람들에게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복음을 전파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전파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진격하기 전에 포격을 퍼붓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이 회심하고 그 땅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세워질 때 그 나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우리 서로 살아있는 날 동안에 주님을 열심히 섬기고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먼 동네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교사를 보내고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토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면서 사는 것이 그 나라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고도 자신의 가족의 구원에 대한 염려, 가족들의 신앙의 상태에 대한 염려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잘못 사는 것입니다.
또 ‘그의 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공정한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공정한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정한 의가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고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그 의를 보기 원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불공평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이 변화되어서 공법을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나오는 그런 세상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목표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잘먹고 잘 살고 지위가 높아져도 그것가지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자기 때문에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외로워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너희는 먼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있어서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도 인생과 결탁된 문제이지만 그 우선 순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선 순위는, 다른 모든 인생의 목표가 이 목표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꿈들이 이 꿈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헌신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안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이루며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먹고 입고 마시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거기에 우리 자신이 쓰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삶 자체가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할 때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퇴각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상황실에서는 근심하며 지원군을 보냅니다. 그런데 다시 돌진하고 있는데 승리의 진군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상황실에서는 환호성을 지릅니다. 바로 교회가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안 믿는데 ‘그런가보다’ 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어디서 복음이 승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 한없이 기뻐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지체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놀랍게 변화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릴 때 우리는 뛸 듯이 기뻐야 합니다. ‘그 돌덩이 같던 형제를 하나님이 결국은 변화시키셔서 주님의 사람 만드셨구나. 할렐루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거스르는 삶과 얼마나 투쟁하겠습니까? 그래서 삶 자체의 목표가 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을 때 김소월은 웃었지만 여러분은 웃으면 안됩니다. 왜 사느냐고 물을 때 비시시 웃으면 바보입니다. 왜 사느냐고 물을 때 여러분들은 “나는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산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 한길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그러다 우리의 인생이 다 끝났을 때 우리의 묘비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 하나만을 위해서 섬기며 살다가 간 ○○ 여기에 묻히다’라고 쓰여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는데 그것은 결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 계획하셨던 그 계획을 따라서 산다면, 그 하나님의 계획은 젖혀놓고 그렇게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모른 척하시지를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선후가 깨끗이 정리된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주님이 안 주시는 것은 다 나쁜 것입니다. 가지면 안 되니까 주님이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원망하면 되겠습니까? ‘주님, 나는 이제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하는 양심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위에서 보실 때 정말 주님의 나라와 의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뭐가 아까우시겠습니까?
(예화: 큰 교회에서 부교역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계신 한 목사님이 자기 일 같이 하지 않는 부교역자들을 보면서 “게으른 종은 입의 초요 눈의 연기니라”하신 잠언의 말씀을 늘 기억한다고 했다. 그러나 때 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을 보면 아까운 것이 없다)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고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변화 받아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은혜 받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사랑스럽고 무엇이라도 아낌없이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실 때, 하나님 나라에 전쟁이 한창인데 다들 춤추러 가고 술 마시고 드러누워 자는데 그 중에 누가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님의 군사 되리 다른 사람 어찌든지 충성을 맹세하고 전장을 향하여 돌진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버려 두실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의 욕심과 이익을 따라서 염려와 근심의 자녀들을 끌어안고 시름 속에 잠겨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을 때에 홀홀 단신으로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해서 내 인생을 드리리다. 내가 주님만을 위해서 싸우리니, 주여 비굴하게 후방에서 살기보다는 장렬하게 전선에서 전사하겠사오니, 주님, 평안한 데는 다른 사람 보내시고 최대한 격렬한 전투지로 나를 보내셔서 주님의 영광 드러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전선으로 뛰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배곯게 만드시겠습니까?
때가 되면 먹어야 될 것을 아시고 때가 되면 아이들 학교 보내야 될 것도 아시고 때가 되면 죽을 묘지가 필요한 것을 주님이 다 아십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는 보증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우리가 마음놓고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노조 위원장을 왜 하려고 하는지 동생에게 물어보았다-구속되면 몇 억, 해직되면 얼마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려고 할 때 밑천 떨어지지 않게 뒷돈 대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시리라”는 도장을 하나님께서 찍으셨습니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고,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서 버둥거리고 살지 않고, 욕망을 만족시키고 결핍의 노예가 되어서 불안의 자식들을 거느리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 영혼이 변화를 받고 심령이 변화를 받아서 이 땅에 너희를 구원해낸 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이고 내가 이 세상을 향하여 무엇을 원하고...(?)”
“내가 어려서부터 의인이 걸식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시인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따라서 살았던 의인의 후손이 걸식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화: 6.25 때 부상당한 사람들, 심지어는 구덩이에 빠져서 다리가 부러진 사람들도 지금 보상금을 타고 있다. 어떻든 이 나라를 위해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 대 주시겠습니까? 주님의 나라와 그 의만을 구하기 위해서 사무치는 열심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이 끊어져서 굶어죽었다는 사람 보았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뒤를 대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놓고 투쟁하십시오. 뒷돈이 든든합니다. 이런 배짱을 가지고 사십시오. 그러면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일 염려를 내일 하라고 했다 해서 매일 매일 염려하며 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너희들이 감당하는 것이 충분한데 왜 내일 일을 미리 당겨서 염려하여서 오늘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느냐”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타이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거듭난 인생의 목표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나라를 구하면서 살아가는데 인생의 위기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내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기입니다. 어차피 다 내놓았고 뒤돈 대시는 분은 주님이니까, 나는 재주만 부리고 장사는 주님이 하시니까, 어차피 나는 노동력만 제공했을 뿐이니까, “주님 어떻게 하시렵니까? 책임지십시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걱정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인생의 목표가 고정되어서 그 길을 추구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을 위한 불안,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염려가 있다해도 그것은 거룩하고 신령한 염려입니다. 그 거룩하고 신령한 염려는 우리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한 마음을 주어서 주님을 구하고 사모하고 위로부터 내리는 신령한 은혜를 더 갈망하도록 만들어 주니까 신령한 은혜가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통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다가 막히면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고 더 정결해져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니까 또 은혜가 되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열어주시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니까 또 신나는 것이고, 그러다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 앞에 더 매달리니까 우리의 신앙이 더욱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10년, 20년, 30년, 40년 살아갈 때, 그렇게 산 사람은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안고 살아간 사람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안고 살아간 사람은 늙으면서 얼굴이 피폐해 집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비참하고 늙는 것이 나무나 끔찍합니다. ‘내가 늙으면 저렇게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탐욕의 사십대 오십대를 거쳐서 무기력의 육십대 칠십대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자신을 고정시켰던 사람들은 형통한 속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루어지니까 감사합니다. 막힐 때는 자기의 신앙이 연단 되고 정결하게 되니까 거룩해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우리의 성품뿐 아니라 우리의 얼굴도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성자와 같이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그 우리의 연로함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에는 주님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그 살아온 지혜로 자녀를 가르치고 자손들을 가르치다가 흔들리지 않고 구름 한 점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6.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내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19;28-46)
예수께서 호산나 찬양 소리를 들으시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과 이튿날 일어났던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기사를 동시에 읽어서 오늘 제가 설교하려는 본문으로 택한 이유는 이 두 사건이 신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 맥락 안에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주일이었습니다. 많은 무리가 그들의 본 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그 능한 일을 인하여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이 환영과 축하가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 마태복음에서는 온 성이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서 소동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정말 이들의 찬양은 대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불렀고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오심이 하늘에는 평화이고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그들이 벗은 겉옷을 양탄자처럼 깔았고 밭에서 베어온 종려나무 가지를 길 위에 펴고 흔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살아오신 생애 가운데 이런 대대적이고 열광적인 환영이 받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기하는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열광적인 찬양은 인간에게 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나 돌려질 수 있는 찬송인데 이런 열광적인 찬송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고 계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했느냐 하면 이 때가 바로 유월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고 그렇게 자신의 죄를 위해 잠시 후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성경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의 찬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면서 만약에 저들이 찬송하지 아니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환영의 인파에 둘러 싸여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환영하는 기쁜 인파와 많은 찬송 소리가 성 앞에 가득한데 예수께서 성에 가까이 오시자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우셨다’고 되어있는 이 성경이 원래 희랍어 성경에는 ‘엉엉 우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어깨를 들먹이며 대성통곡하시는 장면입니다. 환영인파에 둘러싸여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던 예수님이 환영하는 찬송 소리를 들으시면서 갑자기 목놓아서 대성통곡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구절을 늘 보아왔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해 인파에 둘러싸여서 그렇게 환영을 받으시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왜 그렇게 대성통곡하며 우시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제가 성경을 보다 깊이 읽는 방법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을 깊이 읽고 싶으면 우선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를 주의하면 여태껏 성경을 읽었던 것과는 차원이 틀린 맛을 느끼면서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을 때 너무 깊이 성경에 빠져들어 가면 안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에 너무 도취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나는 그 인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출애굽기 3장 4장에 미디안 광야에서 짐승을 치고 있는 모세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지도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셔서 “모세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구원자로 세울 것이니 너는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어서 내가 네게 약속한 땅으로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세 번 네 번 못 가겠다고 하나님께 사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그 성경을 보면서 얼핏 모세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겸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서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었습니다. 그런 후 6-7년이 지나고 나서 성경을 다시 읽어보니까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깨달은 사실은 이 내용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는 고집과 독선으로 가득찬 모세를 하나님이 어떻게 꺽어서 결국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만드시고야 마는가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행동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 하면 훌륭한 사람, 우리가 발벗고 쫓아가도 못 쫓아가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은 거의 완전에 가까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는 선입견이 성경을 보는 저의 눈을 멀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인물들을 보시는 마음으로 봐야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셨는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하니라 내가 저를 통하여 내 일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죄를 저질렀을 때에 성경은 말하기를 “다윗의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하니라”하시는데, 다윗의 범죄행위가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람들의 범죄행위와 같다고는 전혀 생각을 안 하는 선입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려고 하는 바를 못 깨닫게 하기 때문에 성경 속으로 너무 빨려들어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으로 깊이 들어가야지 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분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을 강해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바쳐라”고 명령을 하셨을 때 성경의 어디에 아브라함이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삭을 내게 바쳐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등의 고민할 필요도 없이 “예 알았습니다. 즉시 바치겠습니다”하며 그 다음날 불과 칼을 들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들은 좀 곤란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밤새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며 베갯잇을 적셨다는 이야기는 안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을 들여다보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고 이제껏 까지 살아왔는지를 보면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고뇌 없이 이삭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도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삭을 부를 때 “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있었는데 주님이 바치라고 하시니까 “진작 말씀하시지 이제 죽이라고 말씀하십니까?”라고 했을 리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2장에서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명령 앞에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순종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어떻게 만났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주셔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주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을 창세기 전체를 걸쳐 보면서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본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리고 그 번제를 드리기 위해 어떻게 짐승들을 죽이고 어떻게 각을 떠서 어떻게 태워서 하나님 앞에 바쳤는가, 그것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리고 아들 이삭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으며 오직 그 아들에게 무슨 약속을 주셨고 그 아들을 자기의 유업자로 삼기 위해서 있었던 이스마엘과 하갈과의 갈등이라든지 그 가슴아픈 사라와의 사건 등등, 도움이 될만한 성경의 기록들을 모두 상기하면서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천년전 모래 바람이 이는 블레셋 족속의 땅에 텐트를 치고 살아가던 아브라함의 삶의 정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그 중대한 명령을 앞에 놓고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인하여 고민하며 그 경외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신앙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서 밤새도록 갈등하는 인간 아브라함의 고뇌를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한숨소리와 베갯잇을 적시기 위해 떨어지는 아브라함의 눈물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이튿날 아브라함이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이삭을 데리고 가더니”라고 되어있는 창세기 22장 2절과 3절의 사건이 얼마나 위대한 결단의 사건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러한 놀라운 결단, 이 엄청난 결단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과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 나도 이렇게 아브라함처럼 살아야겠구나.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그냥 주먹을 한 번 쥐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인간적인 사랑과 신앙 사이에서 결단하는 일들이 필요하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성경이 새롭게 우리의 마음에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저는 여러분이 이런 묵상을 하기를 권합니다. 2천년전으로 돌아가서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디서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와서 발에 펴면서 예수님 옆을 좇아가는데 여러분들에게 예수님께서 놀라운 특권을 주셨습니다. 나귀의 끈을 붙잡고 예수님을 가장 옆에서 모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해서 가는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까 예수님께 찬양을 돌리는데 옆에 서있는 여러분 자신도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온화하게 주위를 돌아보시면서 사랑으로 가득찬 눈빛으로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가시다가 예루살렘 가까이 오시자 안색이 변하시면서 통곡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처럼 가슴 벅찬 환영의 인파에 둘러싸이신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항상 긴장과 고난과 섬김의 연속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로부터의 핍박과 논쟁이 그치지 않았고 안으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으로 섬기고 치료로 봉사하기 위해 쉴 틈 없는 생애를 사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찬양 소리에 둘러싸여서 환영을 받으시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오시자 안색이 변하시면서 통곡을 터트리셨습니다. 동양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눈물을 보이는 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아니하고 통곡을 터트리셨고 눈물은 흘러내렸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으시고 그 격한 울음을 억제하지 못하시고 통곡하고 계셨습니다. 그분 주위에는 찬양소리가 그치고 제자들과 따르던 백성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모로 보든지 이 날은 기뻐해야 할 일이지 이렇게 외로이 흐느껴 우셔야 할 비극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아니하시고 계속 목놓아 우시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 가까이 다가가고 계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시면 다가가실 수록 예수 그리스도는 더 크게 통곡의 울음을 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결단코 연약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강철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때도 결코 나약해지지 아니하셨고 복음을 전하다가 동리에서 쫓겨나서 핍박하는 사람들에 의해 추격을 받으며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도망 다니실 때에도 낙심치 아니하셨습니다. 그토록 사랑한 제자에게 팔려서 체포당해 가시던 때에도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 때문에 가슴아파 하지 않으셨고 간악한 로마 병정에 의해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는 그 순간에도 눈물조차 보이지 않으시던 강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토록 강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비탄으로 눈물을 흘리시고 통곡을 터트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성 가까이 오사 목놓아 우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신 기록이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 한번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흐느끼셨고 또 한번은 지금 이 자리에서 통곡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렇게 목놓아 우신 것도 이해가 안가지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께서 왜 그렇게 대성통곡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우신 사건에 대해서 이처럼 강렬한 울음을 뜻하는 단어가 쓰여진 곳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을 보십시오. 본문은 왜 우셨는지 말할 때에 “예수께서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신 것은 성을 보셨기 때문에 우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쳐다보았기 때문에 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성을 보셨는데 여기서 ‘보시다’라고 한 단어는 원래 희랍어에 의하면 그냥 육신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눈으로 그 영적인 배후를 꿰뚫어 보는 직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체의 두 눈으로 쳐다보는 쳐다봄이 아니라 사물의 배후를 꿰뚫어보는 직관적인 통찰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외관상으로는 어제와 다름없는 편안한 수도였고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는 유서 깊은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예루살렘 도성을 영적인 눈으로 꿰뚫어보셨고 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통곡하며 목놓아 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목놓아 우신 것은 어제와 다름없는 견고한 이 성, 이 천여 년의 언약이 깃들여 있는 이 예루살렘의 성이 잠시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무너질 것을 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큰 소리로 통곡하며 우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젖은 눈을 들어 울음 섞인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는 숨기웠도다” 이것은 선포가 아니라 차라리 홀로 되뇌는 독백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나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회개하고 돌아서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린 종교적인 도시, 이제 예루살렘을 사랑하시던 예수 그리스도도 이 성을 향해 40년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비참한 심판의 멸망을 바라보시면서 이미 정해진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형편을 보시고 목놓아 우실 수밖에 없다가 독백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상실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사이 좋은 화목의 교통을 잃어버린 이 성은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고, 그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 하나님만을 높이며, 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자신들이 부름을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주님의 마음에 드는 나라의 백성으로 신앙 안에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모세 시대로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모여서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한 땅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고 이곳을 중심으로 성전이 있고 이 성전을 중심으로 온 땅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왕권이 행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왕권은 만천하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족속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모든 백성들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알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두운 그 시대에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불꽃으로 택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고 이처럼 우리가 모여있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많은 종교단체와 같이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교제하고 서로 위로 받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고 그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온 세상과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것을 알고 이 세상의 누구도 그 하나님을 위해 경배하며 사는 삶이 아니면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충 살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듭난 방법으로 거듭난 목표를 위해 살아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에 혁혁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 어두움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험악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만 어두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 성은 그 이름 자체는 평화의 성이었으나 이미 예수님은 이 성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이 유서 깊은 성 뒤편에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영적인 통찰로서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밑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심판의 예언이 40년 후에 얼마나 무섭게 예루살렘에 역사적으로 그대로 임했는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이 로마의 군대들에게 포위 당하기 전 이 때도 마침 유월절이었습니다. 이 성에는 백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모여있었습니다.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 포위 당한 예루살렘은 보급이 끊기자 극심한 기근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주후 70년의 일입니다.
유서 깊은 도시였지만 그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거듭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죽어간 선지자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외침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들을 돌로 치고 예루살렘 성에서 죽인 그 죄를 회개치 아니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심판하셨고 결국은 하나님이 세우신 도성을 하나님의 손으로 허물어 저주받은 묘지의 도성이 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별일 없이 서있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머지 않아 당하게 될 이 성의 비참한 심판의 종말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40년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당할 그 뼈져린 아픔을 온 마음으로 느끼시며 통곡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구원에 합당하지 않게 살아가는 교회와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전에는 희생 제사가 끊이지 않았고 제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입술에는 언제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경외하되 마음은 나에게서 멀도다”를 생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4백여년 동안 선지자의 음성이 그치던 캄캄한 때에 이와 같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려 주었던 하나님의 목소리가 이 세상에 왔습니다.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왔다. 열매 맺지 아니하면 도끼가 이미 그 뿌리에 놓였으니 하나님이 찍어서 불에 던지어 버리시리라” 요한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처럼 전하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해 주었을 때 백성들은 요한의 이 음성을 기뻐하였습니까, 싫어하였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하나님의 참다운 음성을 전해주는 사람들마다 미움을 받았고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인 이스라엘 사람과 이 세상은 잠시 후 예수 그리스도조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었습니다.
언제든지 이 세상 나라의 사람, 심지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자기에게 좋은 얘기만 듣고 싶어하고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고쳐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은 거절되었습니다. 어느 시대의 선지자가 백성들로부터 떠받듦을 당하고 환영을 받았습니까? 외쳤지만 그들에게는 친구도 없고 동역자도 없고 추종자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친구는 외로움이었고, 진리를 피 토하며 외친 결과는 던져지는 돌팔매들과 날아오는 채찍과 모함과 고문과 투옥밖에는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에 모든 사람을 잠들게 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를 향해 외치게 하고 그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증거 되는 하나님의 음성과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해주는 사람들의 외침이 우리의 마음에 들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동반한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면서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들은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우리들이 들었다면 우리는 이제 몰랐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향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예배시간의 설교는 민방위교육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비군 교육이나 부녀회에서 개최하는 새마을 교육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마음 깊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심령을 찢고 우리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으며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을 돌이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말할 수 있는 신앙적인 반응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말씀하신 이 부분을 희랍어 성경은 “이 날에 예루살렘 너라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이라고 읽습니다. 조국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잃어버리고 여호와를 등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때문에 40년 후에 다가오게 될 민족의 멸망도 몰랐습니다. 이 심판의 영적인 비밀을 사마리아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갈릴리가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갔습니다. 다가올 민족의 위기를 유다가 깨닫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가지만 모든 성읍들이 이렇게 불신앙과 죄악 가운데 민족의 멸망이 가까워 온 것을 몰라도 예루살렘 너만은 알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과 성읍은 몰라도 예루살렘만큼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슬퍼하고 계시고 우리가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재앙을 미리 알고 경고의 나팔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 땅이여 회개하라 여호와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그렇게 외치는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부흥되고 온 땅에 교회가 많이 설 때 그 역사적인 사명이 얼마나 큰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내가 너희 한국교회에 부어준 이 놀라운 축복들을 가지고 네가 이 어두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실 때 별로 한 것이 없다고 주님 앞에 나타나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소망이 있겠습니까? 눈을 크게 뜨고 역사를 바라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역사를 바꾸기 위해서 세우신 것입니다.
통일되게 해달라고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이 상황에서 통일이 되면 이북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 뭐가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부녀자를 납치하고 강간하고 인신매매 하는 풍조가 이북으로 들어가겠지요. 한라산 꼭대기까지 가서 버리는 쓰레기가 금강산과 백두산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곳곳에 보신탕 집이 생기고 술집이 생기고 공원이 지정되면 여관이 생기고 병원들이 생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꿈꾸던 통일입니까? 나라가 이런 일색이 되는 것이 우리가 꿈꾸던 통일입니까?
우리 교회도 강남에 있어서 책임이 큽니다만 강남에서 하루 저녁에 팔리는 술값이 30억에서 40억이랍니다. 강남구에서만 1년에 팔리는 술값이 1조 4천억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집이 늘어나니까 여관이 늘어나고 죄를 많이 지으니까 교회가 생긴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북 아오지로부터 제주도까지 깔리는 그런 통일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국민 소득이 좀 늘어났다고 흥청거리는 이런 나라가 그렇게 통일되게 해달라고 목메어 울부짖던 그 나라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높임을 받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나라, 우리가 그리는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예화: 몇 년 전 대통령 선거 때 그 이름 석자를 부르며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파도와 같았다)
그 때 제가 마음속으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로 우리가 그리는 나라가 이런 나라입니다. 허물과 죄밖에 없는 이 세상 인간의 이름 석자를 부르며 저렇게 태극기를 들고 환호성을 지르는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언젠가는 이 땅에 하나님이 진정한 부흥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아오지로부터 마라도 앞바다까지 삼천리 방방곡곡에 내 동포들이 손에 손에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왕이신 예수여 우리 고장에 오시옵소서’ 찬송 부르는 때가 이 땅에 와서 종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보고 죽게 하옵소서”
성경은 예루살렘이 이렇게 눈 뜬 소경이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수농태입니다. 누군가가 숨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그 관계가 무너진 백성들, 그분과의 평화를 등진 이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영적인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가리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참고삼아 들어보자고 한다면 영원히 여러분은 성경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여 종이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종이 그대로 행하며 살고 싶사옵나이다’ 이런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눈물을 알고 있습니까? 민족을 향해 목놓아 우신 예수님의 통곡하는 심정에 관심이 있습니까? 저마다 예수를 믿고 복 받기 혈안이 되어있고 이방 신상 앞에서나 구하던 탐심과 부패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기독교로 포장을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런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눈을 크게 뜨십시오. 그리고 이 민족의 역사를 바라보십시오. 왜 하나님이 이 어두운 시대에 문제가 가장 많은 이 나라에 우리를 태어나게 해서 예수를 믿게 하셨고 우리를 이 복된 교회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셨는지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뜻밖의 통곡을 그치신 예수께서 다음에 방문하신 곳이 어디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목놓아 우시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행동파로 돌변하셨습니다. 갑자기 무슨 이변을 맞으신 것처럼 분노와 흥분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변하셨고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내어쫓고 상과 의자를 뒤엎으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하시는 모습을 가리켜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그렇게 간단히 처리해버리고 지나갈 수 없는 교회의 생명에 관계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이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번에도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과 더불어 들어가 보십시오. 예수님이 성전으로 들어가실 때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환영 인파들도 밤낮없이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전에도 보아왔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징그러운 뱀을 보기나 한 것처럼 흥분하시고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인습에 따라 매매하던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커다란 죄악의 현장을 목격하기라도 하신 것처럼 상과 의자를 마구 뒤엎으시며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저는 이 속에서 여러분과 교회를 봅니다. 우리 조국 교회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받게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해오고 있는 신앙 생활에 대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마음에 많이 들지 않는 잘못된 방향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믿어온 습관적이고 타성적인 신앙 생활 속에서 이만큼 신앙생활 하는 자신을 대단히 대견스럽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항상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오늘 이 예루살렘 성전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자신의 신앙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타성에 빠지지 않는 놀라운 신앙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작년 이맘대도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바꾸고 그렇게 제물을 사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지난 번 절기에도 이 성전에서는 그렇게 바꾼 돈을 헌금으로 받았고 그렇게 사온 동물들로 제사를 드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당도하시기 전 오늘 아침에도 이같은 헌금과 제사의 방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사람이 인정해 주어도 정말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들을 새롭게 봐야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거룩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견해 하던 많은 모습을 인해 오히려 주님께서 아파하시는 마음을 느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 까 생각하기에 앞서 영적인 각성을 통해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열정을 갖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18세기의 대대적인 각성과 부흥을 불러일으킨,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졌던 ‘죠나단 에드워즈’라고 하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아홉 살 때에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문으로 밝혔고 열두 살 때에는 자연철학에 관한 글들을 써서 세간을 놀라게 했습니다. 1716년, 열세 살 때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마스터한 채 고전을 섭렵하며 예일대학에 입학하였고 4년 후에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후에 그 예일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 때의 나이가 열 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는 그같은 예리한 지성이 불타오르는 복음의 열정과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화려한 학벌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그 시대 속에 하나님의 잠들어 있는 교회를 보았고 힘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신앙생활해서는 안 된다는, 가슴 깊이 사무치는 탄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영적으로 부흥해야 한다는 처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1729년 메사츄세츠주의 너스템톤이라고 하는 교회에 부목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촉망되는 학자의 길을 버리고 시골 목회자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부임하면서 6년 동안 끊임없이 외쳤던 설교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지옥에 대해서 설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에서 6년동안 지옥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교인들이 질려버렸습니다. 아침예배에 나와도 ‘지옥’ 저녁예배에는 ‘지옥의 불’ 수요예배에 모이면 ‘지옥의 구더기’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같은 설교와 열정을 비난했고 자기의 교인들조차도 위로와 심방만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735년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던 한 젊은이가 회개는 하지 않고 교회 밖으로 뛰어나가 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별의별 위협들이 들어왔습니다. “사람을 살리라고 안수했지 사람을 죽이라고 강단에 세웠느냐. 사과하라 죽은 자를 살려내라”하는 별의별 협박과 회유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외치는 설교를 수정하기를 거부하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자의 예언적인 선포는 그 후 6년 뒤에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 왜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사용하셨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첫 번째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미국의 백성들의 심장을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가 바로 주님의 심판이 임박해 왔다는 지옥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하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그 설교는 지금도 보존되어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성경 찬송 들고 교회를 들락거리다가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하신 놀라운 축복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야 마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을 바로 뜨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가슴 떨리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자녀여, 너는 내가 너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했으니 이제는 나가서 세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상상을 뛰어넘는 진노 끝에 주신 말씀이 바로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한 이 말씀은 구약 성경 이사야 56장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왜냐하면 나의 집은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불려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무슨 말을 하다가 이 구절을 쓰게 되었는지를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39장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40장부터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백성에서 정다이 말하라 이제는 복역의 때가 끝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40장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53장에서는 메시야의 수난을 예언하고 54장부터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말하고 56장에서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을 계속 예언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다시 죄악을 돌이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영적으로 새롭게 깨어나 은총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때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깨어나는 영적인 상황과 밀접히 연관된 변화가 하나님의 성전에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썰렁하던 성전이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집,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아야 할 그 많은 민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열망이었고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이같은 하나님의 바램에서 떠나서 기도하지 않고 잠들어 있는 성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목격하셨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통곡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희랍어 원문은 똑같이 이 부분을 단순히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하지 않고 ‘기도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야 하는 그 집, 구원받아야 할 많은 백성들을 위해 중보 기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나의 집임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될 그 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 조국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중심적인 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이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섬김,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위하여 제사장처럼 애끓게 중보하며 통곡하며 그 백성들이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기를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기도의 집, 이러한 기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그 집, 주님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성전에서 이처럼 진노하신 사건도 이 하나님의 집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치시면서 상을 둘러엎고 비둘기를 내쫓으셨습니까? 여러분, 많이 기도하고 계십니까? 더 깊은 신앙으로 가기를 원하는데 더 깊은 신앙으로 가지 않습니까?
제가 우리 나라 교인들, 특별히 제직들을 바라볼 때 가장 답답한 현실은 얼마만큼까지는 열심히 달음박질해서 신앙이 성장하는데 앞으로 더 이상 전진은 안 합니다. 그래서 처음 믿었을 때는 그래도 눈물이 있고 땀이 있고 첫사랑의 감격이 있었는데 10년 20년 정도 되고 나면 알도 낳지 못하는 폐계처럼 하나님 앞에 생산적인 그 무엇이 심령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단단하게 묵은 땅이 되어서 늘 즐겨하는 말은 ‘왕년에 내가’입니다. 왕년이야기 잘하는 사람 치고 금년이 신통한 사람이 없습니다.
많이 기도하면서 왠지 그 기도가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먼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돈 바꾸는 상을 들어 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매하는 자들을 여러분의 심령에서 몰아내어야지 만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자리잡은 탐욕과 심령에 뿌리박은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능력을 결단코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모습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의 특징이 단지 기도하는 사람, 아니 기도의 사람이 되고 있지 않다면 오늘 이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왕년에 하나님을 잘 섬기던 금년의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함치고 진노를 당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라. 네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라”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잃어버린 놀라운 영광을 이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이 교회들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 돌아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나의 힘과 나의 능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능력 있게 하고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교회에 부어주시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기도를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마음을 다해 하는 더 높은 수준의 기도가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기도의 진수인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기도 속에서 영적인 세력들과의 싸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칼날이 부딪히는 굉음을 듣고 있습니까? 기도가 깊어지면서 우리의 언어가 영혼의 신음소리로 바뀌어져 가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인도 받는 대신 구태의연한 습관과 규칙에 따라서 살아가고 성령의 능력 주심을 의지하기보다는 잘 짜여진 규칙과 조직과 인간의 머리로 짜놓은 기구들을 더 의지하고 기도하는 대신 사람들과의 사귐이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우정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지는 것 사이에 구별이 희미해져가고 있는 시대에 정말 밤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이 이 어두운 역사 속에서 타락한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하고 놀라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거룩한 영광을 이 세상에 모두 나타나 보여주시도록 그렇게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와 백성들 가운데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도록 통곡하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교회당에 가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자신의 옥체를 나무에 매달아 깨트리셨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던 바는 ‘내 피로 구원받는 백성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내 뒤를 이어 그렇게 살아주기를 원했던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기도는 교회가 해야 하는 많은 목회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기도 없이는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가 외치는 소리가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고함을 지르면 그 고함 소리는 교회당을 휘돌아 올지 모르지만 심령에는 적막이 깃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봉사하는 봉사가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서 몸부림 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하면 좋고 안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과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서 이 역사에 알려 줘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여 역사의 밤이 어느 경점에 왔느뇨?”하고 우리에게 물을 때 우리는 “세상이여 이제 잠시 후 새벽이 오리니 주님을 맞을 준비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까?”고 세상이 우리를 향해 물을 때 “나처럼 살아라”고 말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에 교회가 충실하지 못한 이유는 기도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영적인 교회가 되지 않으면 교회는 기도의 영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인격적으로 승복할 수 없고 그분의 설교를 보아도 신학적으로 납득할 수 없고 내 마음으로 다짐해서 ‘나는 저렇게 교회를 하지 않으리라’다짐하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일단 그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기도하자고 할 때에 영혼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려지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에게는 무릎을 꿇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쉽습니다. 기도는 항상 어렵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손을 걷어붙이고 일하는 것은 항상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살과 뼈를 깎으며 남모르는 아픔을 안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닦으며 주님의 진정한 뜻이 교회 속에 이루어지기 위해,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영혼의 이름을 불러가며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해산하는 고통으로 기도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것입니다.
그 기도의 세계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드넓은 바다를 생각합니다. 푸르고 끝없는 기도의 바다, 나의 기도의 생활도 그 기도의 바다 가장자리에서 모래성이나 쌓고 있는 형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바다보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은 우리에게 그분을 깨닫게 하여주지만 말씀을 들은 후에 하는 그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깨달은 그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 그 드넓은 기도의 바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바닷가에서 모래성이나 쌓는 어린아이와 같이 머물고 잔디밭에서 꽃이나 따러 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의 바다 한 가운데 배를 몰고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남이 듣지 못했던 포효하는 격난의 회오리바람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향한 진노의 폭풍 소리를 듣고 넓은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 기도의 바다에서 이 시대와 조국의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애통하는 눈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우리는 갈매기의 노래 소리를 듣고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온통 깨어나서 우리를 묶어온 모든 얽매인 죄악의 사슬과 닻줄을 끊고 기도의 바다로 나아가야 될 때라는 것입니다. 교회 앞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돌멩이로 새겨 놓았으면 그 집이 정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매일 와야 되는데 할 수 없어서 편법으로 일주일에 네 번만 오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것은 매일 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 한번 나오는 것을 큰 선심 쓰는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내신 거룩한 목적을 실현해 갈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정하고 항상 나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작년에 심방을 하면서 여섯 가정을 교회 옆으로 이사시켰습니다. 방 세 개 쓰던 것을 두 개 쓰지만 새벽 기도 나와서 기도할 수 있고 남편 출근하고 나서 기도하고 어려운 일 생기면 교회에 와서 기도합니다. 기쁜 일 생기면 하나님 앞에 와서 감사하고 수시로 섬길 수 있습니다. 이사했기 때문에 교회를 옮겨야 된다구요? 이사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이사갔기 때문에 계속 나올 수 없으면 이사를 가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부득이한 사정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교회를 옮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면 헬스클럽 회원권하나 옮겨 갖는 것 보다 더 가짢케 교회를 옮겨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옮겨간 그 교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십자가 지고 주님 좇아서 골고다 언덕길로 통곡과 눈물로 슬퍼하며 올라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평생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다가 부끄럽게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말 것 아닙니까? 그 가정의 식구들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야말로 기적이고 연구대상입니다.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의 심령 한 가운데에 주님의 사랑이 있어야지 만 주님의 음성이 들리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이 시간에 기도에 관한 많은 진리를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보며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심령의 눈으로 예루살렘의 미래를 통찰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예루살렘 성을 향해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목격할 수 있게 되기까지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땀의 생애였고 그분의 생애는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신 붉은 피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 뜨거운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땀과 눈물의 기도를 먼저 받으셔야 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가 먼저 눈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잔을 채우기 전까지는 하나님도 그 아들의 보혈을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 이전에 기도의 눈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 피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의 기도, 백 마디의 권면, 그리고 한 영혼을 붙들고 권면하는 말이 뼈마디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히 그리스도의 사랑이 묻어있고 예수의 피 냄새가 나는 그런 신앙 고백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을 섬기셨던 그 탁월한 섬김의 방식을 오늘 우리는 본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번도 마음에 없는 섬김을 아버지 하나님께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액을 토해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아직도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곤하게 잠든 제자들이 깰 새라 발꿈치를 들고 방문을 살며시 열고 나서실 때 바깥은 아직 어두운 새벽 미명이었습니다. 빈들에서나 산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혹은 강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흐느끼고 슬피 울며 기도하심으로 새 아침을 맞이하셨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기도였지만 그 기도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뼈마디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피와 눈물을 동반한 기도였습니다. 그는 항상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면 주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겠사옵나이까. 불순종하는 이 백성들을 보십시오. 언제나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온 백성들이 여호와의 통치를 즐거워 하겠사옵나이까. 주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오니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우리에게 오늘도 거친 보리떡이라도 좋사오니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기도하며 새벽의 미명를 깨우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고요히 눈을 감으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외로운 벌판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눈물 어린 기도의 소리가 우리의 마음에 들려오지 않습니까?
게세마네 동산에서는 어떠했습니까? 제자들 곁에서 하나님께 이 잔을 옮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두고 가는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과 보호 안에 주님의 훌륭한 뜻을 이루는 하나된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에 그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잠들어 있는 제자들 옆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흐느끼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치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성경은 오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예수의 정신이 어디에 배어 있냐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영혼을 위해 이토록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십자가에서 기도로 보냈거늘 너희는 나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기도로 이 교회를 섬기고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가 성령이 역사 하신 역사라고 한다면 성령의 역사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기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고 선교의 역사만을 전해도 그 권능의 역사를 가져오게 했던 기도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책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교의 역사 속에서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우리가 천국에 서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 교회의 역사가 기록하기를 빼놓았던 그렇지만 하나님을 귀하게 섬겼던 기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무릎이 약대 다리처럼 굳어지고 아직까지도 이 땅에서 교회를 위해 흘렸던 눈물 자국이 그 뺨에서 지워지지 않은, 무릎으로 교회와 역사를 움직였던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름 없던 사람들이 저 하늘나라에서 구름과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어깨를 겨루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새로워지고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회복하게 될 때 이 때까지는 특별히 깨어 일어선 기도의 사람이 있었고 그들이 기도할 때 그 시대와 그리스도인들은 이어서 깨어났습니다. 교회가 큰 부흥을 맞이하게 될 때 교회가 어떻게 변하는지 아십니까? 교회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집에 가기 싫어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합니다. 거기서 좋으신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살아있는 성도들과 함께 구원받아야 할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의 중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만약 베개에 얼굴을 묻고 5분 혹은 10분 기도하는 것으로 기도하는 것을 때우고 있다면 오늘 이 설교가 여호와의 음성인 것을 알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그 얄팍한 기도생활이 이미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떠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기도를 사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떨쳐 일어나기를 원하고 심령의 묵은 땅을 기경하고 교회가 그 약속된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일에 있어서 헌신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교회가 영적으로 변화되는 영광스러운 변화 그 뒤에는 언제나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생명을 건 기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혼을 쏟아 부으며 그 시대를 짊어지고 교회를 짊어지고 중보자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뜻과 진노와 사랑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기도의 투쟁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미국의 두 번째 제 2차 대각성 운동에 사용되었던 ‘챨스피니’라고 하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의 생애를 상세히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그는 19세기의 미국을 움직인 위대한 복음전도자입니다. 그가 설교 사역을 시작할 때 미국 교회에는 주일마다 예배에 나오는 사람이 30만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다음 해의 통계에 의하면 매주 300만명의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미국 교회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확성기도 없던 시대에 50만명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그를 위해 기도하던 ‘아벨 클러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피니를 위해 기도로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14시간이상 계속되는 살인적인 기도로 피니의 각성운동과 전도 사역을 도와 헌신했습니다. 병약한 몸으로 자신을 기도의 싸움에 바쳤을 때 1830년 미국의 로체스터시에서 피니가 복음을 외쳤을 때 교회는 각성되었고 예수 믿지 않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세 교회에서 집회를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한 교회는 목사님을 내어쫓을려고 궁리를 하고 있었고 두 교회는 서로 소송을 해서 법정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서 복음을 외치자 잠들었던 교회는 깨어났고 10만명이 넘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회개와 각성의 물결에 떠밀려 예수의 품에 안겼습니다.
병들어 쇠약한 ‘글랜들링’이라는 사람은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고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에 역사적인 증언으로 남아있습니다. 평신도였지만 허약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그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설교했을 때 그 유명한 올드시톤의 집회에서는 그가 설교할 때 12명의 악한 자들이 졸도했고 들것에 실려나가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 사람은 모두 그 집회를 회방 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타났던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인 ‘죤 웰츠’가 그의 사위 ‘요한 낙스’를 위해 하루에 8시간씩 기도하며 3천명의 이름을 부르는 영혼의 중보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더럽고 타락한 카톨릭의 당 스코틀랜드 위에 역사적인 장로교회가 서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사 속에 한 시대를 깨우고 교회를 영광스럽게 했던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고 6시간내지 10시간씩 설교했던 ‘요한 웨슬레’와 같은 탁월한 건강한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브레이너드’ 선교사와 같이 한번 설교하고는 주저앉아서 피를 한 사발씩 쏟는 연약한 사람도 사용했습니다. ‘에드워즈’와 같은 예일대학의 수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무디’와 같은 초등학교 중퇴한 무학자를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유명한 목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무명의 평신도를 사용하시기도 하여서 한 시대를 깨우고 교회를 새롭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 질그릇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깨워서 사자처럼 사용하셨고 그들을 하나님은 위대하게 사용하셔서 하나님만이 이룰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교회 속에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방법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탁월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3시간씩 기도하던 루터, 바쁠 때는 더 무릎을 꿇기로 결심하던 기도의 사람 ‘마틴 루터’를 들어서 독일과 유럽의 교회를 일깨워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얼어붙은 땅 눈 덮인 숲 속에서 폐결핵 4기의 몸을 이끌고 버림받은 인디안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며 매일 피를 한 사발씩 하얀 눈밭에 토해 놓으며 기도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통해서 수 백년 동안 우상 숭배로 잠들었던 아메리카의 하늘 아래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깃발을 세우셨습니다.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기도하던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를 칠흑같이 어두웠던 중세 카톨릭 암흑의 교회사를 밝히는 종교개혁의 새벽 별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바치리라고 결심하던 보스톤 신학교의 수재 (...?)를 들어서 생명이 없는 죽음의 종교 불교로 말미암아 잠들었던 버어마를 깨워 6만 여명의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지 않고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게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사람들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교회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직함이 여러분들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도 직함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존귀와 영광을 받고 배를 내밀고 어깨를 으쓱거릴 수 있는 명예직을 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다른 직분을 주시고 우리를 이 모든 성도들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청지기로 세워주신 것은 우리로 이 세상에서 존귀와 모든 영광을 버리고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를 남다르게 짊어지고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아골 골짝 빈들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들고 가며 그렇게 복음 들고 나가는 주의 종들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고난을 받는 것이고 우리의 면류관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우리의 최대의 기쁨은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회를 마치는 이 시간에 저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보다도 깊은 기도로 여러분의 교회를 기도의 집이 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모든 탐욕과 더러운 죄악들을 샅샅이 몰아내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한 분 앞에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일평생 주님을 섬기며 주께로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