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꾼을 세우자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장로의 자격①(딛1:6) 2003.11.23 주일오후 1
2. 장로의 자격②(딛1:7) 2003.11.26 수요예배 13
3. 장로의 자격③(딛1:8上) 2003.11.30 주일오후 22
4. 장로의 자격④(딛1:8下) 2003.12.7 주일오후 25
5. 장로의 자격⑤(딛1:9) 2003.12.10 수요예배 32
6. 안수집사의 자격(행6:3) 2003.12.14 주일오후 40
7. 권사의 자격(롬12:8上) 2003.12.17 수요예배 45
1. 장로의 자격①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딛1:6)”
모든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고 그 진리 안에서 모든 답을 찾으려고 할 때 비로소 가장 좋은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교회는 장로를 세워서 그들로 당회를 구성하고 그 당회를 통해서 교인들의 권한을 행사하는 간접민주주의입니다.
역사를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체적으로 다루시기도 했지만 항상 하나님의 일꾼들을 세우셔서 이미 구약에서부터 장로들이 있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백성들을 판단하고 재판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투명하게 살 것이 요구되었고, 또 백성들을 율법으로 판단해야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사람들은 장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워주신 질서들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 장로제가 이루어져 오게 되었고 신약에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구약의 장로와는 또 다른 의미의 신약적인 장로를 세워서 교회를 치리해오게 된 것입니다.
저는 장로교회 목사니까 당연히 장로교회의 이러한 정치 체제가 성경에 부합한다고 믿고 있고 또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러한 장로 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를 품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대표로 뽑힌 장로들에게 많은 권한을 맡겼는데 그 권한이 자의적으로 행사되어서 교인들이 원래 그 사람을 뽑을 때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행사되거나 또한 그러한 권한을 제대로 행사를 못하거나 혹은 교인들이 맡겨준 권한 이상으로 잘못된 방식으로 행사되어서 교회의 경건한 영성과 교인들의 단정한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폐해를 주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요즘에 와서 6년을 하고 다시 투표로 신임을 물어서 잘못하는 사람들은 미역국을 먹이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니까 장로들의 입장에서는 ‘성경적으로 보면 목사도 장로의 일종인데 우리가 6년에 한번씩 투표를 하고 미역국을 먹는다면 목사도 투표를 당해라’하며 함께 투표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나오는데 정답은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제도에 부합하지 못하니까 그 제도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도 내각제냐 대통령제냐 하면서 설왕설래합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봅니다. 우리 나라 역사에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았습니다. 하다가 잘되면 결국 한가지를 할텐데 안되니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강력한 대통령제는 도덕적이고 유능한 사람이 나오면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류역사상 나타났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체제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왕정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 하나 조건이 붙는다. 그 왕이 유능하고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고 욕심이 없고 도덕적이고 깨끗하고 심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그러나 역사상 그런 왕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머리가 돌처럼 나쁜데도 아버지가 왕이니까 할 수 없이 그 사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백성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돌이 또 돌을 낳으면 2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참다 안되면 뒤집어엎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그리스의 역사를 보면 대통령은 반드시 철학자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만큼 인간을 지혜롭게 하는 학문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역사를 보면 철학자가 대통령이 된 예도 있습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장로제도 자체가 아무리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제도 하에서 고통받는 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 하기 전 신학 대학의 선생이었을 시절에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이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장로교의 정치체제는 탁월하고 성경적인 정치체제인데 교회가 초대교회의 영성을 갖춘 교인들이면 그것보다 더 좋고 탁월한 정치 체제가 없고 거기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장로 체제가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바와 같이 많이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장로님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세울 참입니다. 그래서 저도 개봉박두가 기대됩니다. 저는 처음 이 일을 할 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어떤 관여도 하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운 사람입니다. 물론 제가 담임목사이니까 무책임하게 할 수는 없겠지요. 기본적인 가이드 라인이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여러분 앞에 맹세하지만 누구누구가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사진첩을 놓고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되어도 놀랍지 않고 누가 돼도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모두 비웠습니다. 안수집사 투표할 때도 그랬고 권사 투표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면 김 목사가 첫 번째 열린 교회 장로 선거를 얼마나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사심이 없이 치렀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 많이 하고 뽑아준 사람이면 저는 누구와도 함께 일할 것입니다. 그중 어떤 사람이 저를 많이 힘들게 하면 주님이 성화되라고 특별히 마련해주신 도구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모두 기쁨으로 받아들이면서 할 용의가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정치적인 술수나 은밀한 계획이나 뒤에서 오고가는 어떤 부끄러운 인간의 잔꾀 같은 것들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명징하고 유리 그릇에 들어있는 것처럼 투명하고 깨끗하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지금 운영제직회에서 스스로 내규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장로를 뽑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지금부터 이름을 불러줄 테니 받아 적어라 하시며 김 아무개 최 아무개 박 아무개... 이상 10명을 장로로 내려보내노라’ 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또한 우리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개입되다보면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한 결정이 역사가 흐르고 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결정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뽑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년 전쯤 미리 말해서 오래도록 기도하게 하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하시겠지만, 저야 마음에 새기면서 기도했어도 여러분들에게는 조금 늦게 알려드렸습니다. 미리 알려 드렸다면 여러분들이 고민할 것 아닙니까? 누구를 뽑을까 누구를 말까 하는 생각이나 하고 서로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면 기도해서 받는 유익보다 그렇게 해서 얻는 불이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뚜껑을 여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도해야 합니다. 가롯유다가 제 갈 길로 가고 사도 한 사람이 부족했을 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모두 모여서 교인들과 함께 제비를 뽑을 때 제비를 먼저 뽑은 것이 아니라 먼저 기도했습니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누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겠습니까’ 하고 기도한 후에 추천된 사람들 속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맛디아라는 사람이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으로 가입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고 사람을 세우는 것과 기도하지 않고 사람을 세우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든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여러분들은 특별히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우리가 누구를 선택해서 하나님 앞에 이 교회를 돌보는 장로로 세워서 목사를 돕게 해야겠습니까?’ 기도하고 묻는 가운데 택하는 것과 사진첩을 보고 잘생긴 사람을 골라서 선택하거나, 개인적인 친분관계나 생각하면서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투표 용지 받아보면 제일 위에 ‘기도 하셨습니까?’ 묻는 물음이 들어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를 충분히 하고 와서 선택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당일에 와서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두세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누구는 어떻다. 누구를 찍어주자’ 하는 것은 교회에서 세상을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누구를 밀어주자’ 하면 한 주간 내내 전화통에 불이 납니다. 그런 것은 안됩니다. 혹시 그런 당부가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찍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선거운동은 이 세상에서도 별로 좋은 선거 운동이 아닙니다. 신앙과 인품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니까 여러분들이 절대로 그런 어리석은 일에 가담하지 말고 깊이 기도하면서 당일에 투표하는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두 가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그래서 자신의 뜻은 꺾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고, 그 결국이 어떻게 결론이 나든지 간에 아주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류의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우리들이 기도해야합니다. 깊이 기도하면서 주님의 일꾼들을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장로뿐만 아니라 안수집사도 마찬가지이고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벼슬이 아닙니다.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가 돼보면 안겠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열린 교회에서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를 하려면 성경적인 삶을 살고 그대로 행하기를 요구하니까 정말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담 없이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과 함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장로의 자격이 무엇인지 알면 안수집사도 거기에 준하고 권사도 거기에 준하겠다는 해석들이 생겨납니다. 자격이 무엇인지 얘기해보라고 하면 청산유수로 밤새도록 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얘기해봐야 다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이 원래 의도했던 장로의 자격이 무엇인가를 몇 번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듣고 투표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말은 ‘아낸케토스’라고 하는 희랍어인데 이 단어의 의미를 칼빈 선생은 아주 적절하게 해석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책망할 것이 전혀 없을 수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까 누구에게든지 다 책망 받을 것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책망할 것이 없는’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 속에 발견되는 그런 사소한 잘못이 아니라 그 잘못이 장로라고 하는 자신의 지위를 더럽힐 만큼 부도덕하거나 문제가 되는 윤리적인 책망 받을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아예 이것은 아주 커다란 도덕적 결함과 사회법에 대한 위반 사실을 가리킨다고 주석했습니다.
저는 전자의 해석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누구에게나 조금씩 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놀드댈리모아 라는 전기 작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죠지 윗필드에 대한 전기를 많이 썼습니다. 이분이 제가 죤 오웬을 흠모하듯이 그렇게 18세기 때 죠지 윗필드를 깊이 깊이 흠모했습니다. 그래서 죠지 윗필드에 대해서 책을 쓰면 모두 그 죠지 윗필드를 거룩하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으로만 그립니다. 그 댈리모아가 자기의 글 속에서 말하기를 ‘내가 정말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 거룩한 설교자의 생애를 연구하다가 뭔가 이 사람의 결점이 드러나면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정확하게 보도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맹목적인 추종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끔 오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청교도 죤 오웬은 정말 거룩한 분입니다. 그리고 제 생애에 끼친 감화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목회의 발자취는 그분을 흉내내다가 죽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열 한 명의 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이 모두 자기 앞에서 죽었습니다. 그 생애가 얼마나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살아간 생애였겠습니까? 그러나 지성의 치밀함이나 영적 깊이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나 고난의 깊이에 있어서나 친절함에 있어서나 진리에 대한 담대함에 있어서나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부귀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과 아주 친밀하게 지냈는데 결정적으로 사이가 벌어지게 된 원인은 올리버 크롬웰이 당시 거의 왕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켰을 때 오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완전히 반해서 무릎을 꿇고 그를 거의 나라의 목사 정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급격하게 틈이 벌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너무나 높이는 올리버 크롬웰의 요구에 ‘나는 그렇게 높아지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계기로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럴 정도로 뛰어나면서도 정말 사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분도 그분은 귀족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도 흠이 있었습니다. 옷 입는 것이 그렇게 까다로웠습니다. 치수하나 바느질 하나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진리에 대해서 헌신했던 사람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하면 얼마나 더 고상하고 빛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사소한 잘못과 책망할 것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목사요 저술가요 청교도로서 진리의 말씀을 외쳤던 설교자라고 하는 사실에 누를 끼칠 정도로 그렇게 결정적인 책망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조금씩 다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허물은 그런 일반적인 허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사람이 장로라고 하는 직위와 함께 대놓고 볼 때 이 책망할 것이 도저히 이 장로라고 하는 지위와 명예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회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주례를 아무에게나 부탁하면 안됩니다.
(예화: 상당히 높은 사람에게 주례를 부탁해서 다들 부러워했는데 나중에 집에 있는 결혼 사진을 치워야했다-그 주례자가 사회적으로 몹쓸 사람으로 낙인 찍혔기 때 문이다 )
그래서 유명하고 굉장한 사람에게 주례 받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장로라고 하는 자기의 이름에 누가 될 정도로 중요한 책망 받을 것이 있는 사람들-교회적으로 개인의 양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법률적으로-은 안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자격입니다.
두 번째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두 아내의 남편이면 안됩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듯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당시에는 교회에도 중혼이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서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살아온 것이 바로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하는 본보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때는 이스라엘이 유아기였기 때문에 옳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묵인해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성숙했으니까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말라기서에 의하면 ‘영이 유여하실지라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내와 남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이미 에베소서에도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아내를 교회로 보고 남편을 자신으로 봐서 마치 교회와 혼인한 관계처럼 그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한 교회만 충성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너무 우화적인 알레고리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문자 그대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혼은 겹치기 결혼을 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으면서 다른 쪽에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첩을 두고 산 사람이 그런 경우인데 장로의 자격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었던 적이 있는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었는데 아내가 죽었거나 성경에서 허락한 이혼의 사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비록 다시 다른 아내와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혼을 했는데 사유가 성경에 합당하지 않을 경우입니다. 성경에서 합당하게 여기는 사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죽어버린 경우, 두 번째는 함께 예수를 안 믿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아내가 신앙적인 이유로 박해하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나는 그리스도인과 함께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며 이탈되어나간 경우, 세 번째는 상대방이 간음을 해서 이혼할 수 있게 되는 성경의 사유에 들어간 경우입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에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정신병 증세가 있는 경우, 결혼을 하고 보니 상대방이 성 불구자일 때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이런 합당한 사유를 제외하고는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사람도 장로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인 제가 동의할 수 없는 이유로 제가 목회 하는 동안에 이혼을 했거나 또 성경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이혼을 한 사람이 다시 결혼을 하고자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주례를 안 해줬습니다. 물론 그에게 충분한 회개의 표증과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그런 올무에서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교회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 쌍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하는 세상에서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나’ 교회로 오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용서받고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용서해 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 돌봐줘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고 그런 정도의 죄 가운데 살 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니 용서해야 합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줘야합니다. 그리고 한 형제로 조금도 구김이 없이 공동체 안에서 살게 합니다. 그러나 장로는 안됩니다. 목사도 안됩니다. 정답은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아내의 남편인 자’라고 하는 사실은 그런 배경을 깔고 동시에 성적 순결이 장로의 조건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바람 피운 사람들은 절대 안됩니다. 아내의 남편이라고 하는 소유격이 의미하는 바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결합 속에 있는 부부를 이야기합니다. 거기까지 이 해석이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둘이 살며 부부 중 누구도 간음한 적이 없고 두 아내의 남편이었던 과거도 없습니다.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현재 한 아내의 남편입니다. 그런데 부부 사이에 전혀 결합이 없고 아내가 그 남편과 살아가는 것을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생각합니다. 폭력을 휘두르고 폭언을 행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합니다. 그 사람은 한 아내의 남편이 아닙니다. 하숙생도 그렇게는 안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때리면 무조건 두 군데 전화하십시오. 119에 전화해서 일단 넣고 담임 목사에게 전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가서 철창문을 열고 위로하겠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그냥 살면 안됩니다. 사람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성 문제뿐만 아니라 현재 단란한 가정을 가진 순결한 남자여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자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장로의 조건을 말한다면 이렇게 부정적인 것부터 이야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것부터 말할 것 같습니다. 우선 교회 지을 때 집을 팔 용의가 있는가, 공산 치하에서처럼 핍박의 위기가 올 때 담임목사와 함께 손잡고 형장으로 갈 수 있는가, 교회 경영 능력이 있는가, 사회적인 지위는 어느 정도 있느냐, 그런데 그런 것을 다 치우고 소극적인 것부터 먼저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깥으로 넓혀져 가는 것입니다. 물론 장로가 끼니가 간데 없어서 한 달에 한번씩 교회에서 구제비를 보태줘야 하는 처지에 있는 장로보다는 재산이 있어서 언제든지 헌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장로가 있으면 교회에 나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예화: 어느 목사님이 새해 예산을 세워보니 쓸 돈이 들어올 돈보다 훨씬 많은데 그 차이를 도저히 메울 수 없었는데 한 장로님이 그 자리에서 약속 헌금을 하고 은 혜롭게 마쳤다는 내용)
그렇다면 좋지만 성경은 그런 조건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또 장로가 되었는데 사회적으로 교육을 못 받아서 아주 무식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과 대화할 때 쌍스러운 소리나 한다면 요즘처럼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처지에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 모든 조건들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들은 다 밀쳐버리고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장로의 지위를 더럽힐만한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일반론을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서 자녀들을 이야기합니다.
왜 자녀들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이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녀들이 그 사람의 경건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녀들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한 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사이는 그 사람이 진짜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예화: 교인들이 목사님의 설교에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고 나가는 길에 목사님의 손을 잡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사모님이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강대로 올라갔 다-강대에서만 목사님이 신령하니 거기서 살자는 것이다)
멀리에서 볼 때 아름다운 사람은 가까이 볼 때 아름답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어떠함을 멀리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밤마다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아내, 잠옷바람으로 늘 자신들과 먹고 마시고 기대어서 텔레비전도 보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 자녀들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만일 방탕하다거나 불순종 하다고 하면 이것은 그 장로 될 사람이 가정에서 신앙적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의 사람됨의 안팎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순전한 신앙의 상태의 신령한 영향력을 자녀들에 대한 감화력을 보고 측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안전장치라고 본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가정에서 행하는 가장의 일과 이 장로의 일이 아주 유사하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장로의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장로가 된 다음에 교회 돈 통을 다 끌어안고 있고, 당회실이나 하나 만들어서 목 기대는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장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장로가 되어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장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담임목사 따라다니면서 밥이나 사주고 담임목사 듣기 좋은 말이나 하고 하는 것이 장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장로의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목사를 도와서 첫째는 교회의 신령적 사무를 총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령함과 관련된 일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신령함이라고 하는 것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한 부분은 도리적인 부분인데 우리 가운데 누가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가 거짓된 교훈을 믿고 가르치는 사람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해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냥 털털하고 좋은 사람이나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는 교회가 계속 은혜의 상태에 있을 수 있도록 교회의 영적 상태를 위해서 헌신하는 헌신된 보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도의 비밀을 알고 믿음의 비밀을 알고 은혜의 비밀을 따라서 자신이 거룩해지는 삶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믿는 집안의 아이들이 신앙을 등지는 이유가 그들의 패역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패역하고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있는 현상입니다. 이 아이들에게 신앙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신령한 사무를 총찰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교훈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누가 극악한 일을 행했다고 하면 그를 경계하고 책망하고 그를 교회법으로 다스리고 하는 이런 일들을 해나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집안에서 자녀들을 다스리는 일과 아주 유사합니다. 어버이의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인을 사랑함으로서 일체의 훈도를 가르치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목사를 거들어서 섬겨야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집안에서 입증이 안됩니다. 아내도 수시로 대들고 아이들은 아버지 알기를 똥같이 알고 그 아버지는 겨우 교회에 나와서 명맥이나 유지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장로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가지고 벌벌 떠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에는 그 아이를 부모가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폭력과 폭언, 용돈을 현상금으로 건 구차한 세상적 방법에서가 아니라, 신앙적인 감화력으로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가정의 자녀 몇 명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돌볼 수 있겠느냐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또 어떠해야 합니까? 믿음이 좋을 수도 있고 믿음이 덜할 수도 있고 확신 충만할 수도 있고 확신이 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방탕하다는 비방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방탕하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라틴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룩스라이’라고 번역했는데 사치스럽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단순한 경제적 사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틀이 없이 제멋대로 행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자동차가 얼음에서 미끄러지면 제 마음대로 가듯이 자녀들이 그렇게 욕심이 끌리는 대로 함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그것을 제재할 수 없는 정도의 아버지라면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불순종하지 않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늘 불순종합니다. 일찍 들어오라고 해도 늦게 들어오고 일찍 자라고 해도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안 잡니다. 그런 사소한 것을 이야기한 것을 아닙니다. 여기에서도 이 불순종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직함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중대한 불순종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자면 부모의 거듭된 충고를 어기고 아예 교회에 안 나와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수단들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불순종입니다. 이런 자녀들을 둔 아버지는 장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정이 나아지면 그 때 뽑으면 됩니다. 앞으로 사정이 나아져서 이런 요건들이 충족되면 그때 뽑아주면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렇게 몇 가지를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결국 장로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라는 것이 장로 것 따로 있고 목사 것 따로 있고 평신도 것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데 다만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도 용납해주고 받아주지만 지도자가 될수록 엄격한 기준이 요구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바로 그렇게 검증되어진 사람들을 진지하게 투표해야합니다.
(예화: 불과 1년 전에 투표해서 99.7%로 목사로 세워놓고 1년도 안되어서 그 목사 나 가게 하는 투표를 해도 또 99.7%나왔다고 한다)
그 목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도 어느 누구도 그 목사가 목사 되는 것에 자신이 가편 투표한 것을 회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중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 앞에 좀더 온전한 사람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인간이기 때문에 모자란 것이 없을 수 없지만 또 그런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목자와 양에서 배운 것처럼 미완성인 그들 지도자들보다는 그들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면서 또 은혜를 받는 대목이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끝.
2. 장로의 자격②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딛1:6)”
여기서 나오는 감독, 장로 하는 것은 직분을 어떤 입장에서 보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감독은 목사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사는 성경적으로 장로이나 장로에는 두 종류의 장로가 있는데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와 다스릴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목회 하는 장로가 있는데 전자의 장로가 오늘날 의 장로가 되었으며 후자의 장로가 오늘날 목사가 된 것 입니다. 장로는 비록 평신도 이지만 성경에서 목사와 함께 엄격한 자격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뒤에 나오는 감독의 자격은 장로들 에게 적용 되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기준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물론, 목사와 장로는 교회에서 맡고 있는 일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자격이 목사 에게 필요한 것도 사실 이지만 오늘 여기서 얘기 하는 것들은 거의 공통된 자격 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 입니다.
장로의 자격을 얘기 하면서 말했듯이 감독을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 에도 “책망할 것이 없고” 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 사람이 청지기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청지기란 옛날로 말하면 주인과 하인 사이에 있는 그 집안의 집사 정도의 양반과 노예 허드렛일 을 하는 품꾼도 아닌 주인과 어깨를 겨눌 세도 있는 집안의 일원도 아닌 중간에서 주인의 명령을 받고 하인을 부리는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청지기 입니다. 그렇게 청지기는 주인처럼 주인을 대신 해서 일하지만 사실은 주인은 아닌 주인 에게 예속된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 모든 일꾼들 이 모두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주인의 일을 하지만 우리가 주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하나님일 수 없듯이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주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서 고용된 청지기일 뿐이라는 생각을 망각하기가 쉽습니다. 인간 에게는 언제나 그러한 속성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것도 자신은 다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연약하고 예속된 피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인간은 이렇게 될 위험이 많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교회의 감독, 장로를 거론 하면서 청지기 일을 상기 시키는 이유는 교회에서 주도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럴수록 점점 더 그 사람들 에게는 자신이 다만 하나님의 일꾼 이면서 주님이 세우신 청지기라는 사실을 망각 할 위험이 높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어두운 인생길 에서 방황 하면서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은혜 앞에 회개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을 때는 정말 겸손 하고 주님의 은혜 밖에는 모르던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처음 가졌던 순수한 신앙의 인격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에 깊이 개입해서 주님의 일을 돕는 동안에 여기저기 망가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자신이 자신의 본분을 그렇게 망각할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많이 쓰임 받고 중한 일을 하노라면 그렇게 하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되는 불행한 일이 종종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나고 어두운 인생길 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깨달았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이제 하나님이 나를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셨어도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고 그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는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노예일 뿐이고, 내가 가진 모든 소유도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을 섬기도록 내게 맡겨 주신 것일 뿐 이라는 사고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생각의 끈을 놓치게 되면 넘어집니다.
청지기는 청지기가 주인의 신임을 많이 받을수록 청지기가 주인의 영역을 넘보려 한다든지 주인의 재물을 훔친다든지, 주인만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이 감히 누린다면 이 청지기는 노예도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미움을 주인 에게 사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 주인이 청지기 에게 걸었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요하게 해 주실수록 내가 가진 부요함이 내 것이 아닌 것을 고백해야 주님이 나에게 많은 기별을 주실 때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하며 지위를 높여 주실 때도 내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주님 앞에 이름 없는 한 노예일 뿐 이라는 청지기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들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미끄러지게 하는 기회가 되고 급기야는 형통하고 좋은 하나님의 인도가 우리를 영혼의 깊은 나락으로 인도하는 미끄러지게 하는 길이 되기가 쉽습니다.
목사와 장로,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도 이런 청지기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교회와 장로 목사는 이런 정신에 있어서 으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많은 교인들 에게 깊이 존경을 받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교회를 크게 하고 이끌어 가다보면 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훌륭한 목회자 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대적 하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결 하게 목회사역을 해 가는데 그 목사님을 비방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돈을 쓴다든가 사리사욕 을 챙긴다든가 하는 비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돌아 가셨을 때 모든 교인들이, 특히 살아서 그 분을 존경하지 않던 교인들이 목사님이 돌아 가셨을 때 더 많이 존경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 해 보니까 180만원이 들어 있는 통장이 전부 다였습니다. 결국은 소문이 모두 풍문이었음이 입증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정신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이 여러분들의 지위를 높이시고 혹은 사업에 기회를 주시고 물질을 넉넉히 주시고 여러분의 자녀들을 지혜롭게 하시고 훌륭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교만해 하거나 그것을 하나님이 단순하게 여러분 에게 누리라고 주신 축복 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인 양 생각하면 큰 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영혼을 오염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도 소용없습니다. 맘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이나 이 세상의 성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이나 지위가 객관적으로 보여야지 물질이 나로 하여금 만족을 얻게 하는 커다란 자원으로 보이거나 지위가 하나님 앞에 높아지는 훌륭한 사닥다리로 보여 지기 시작하면 파멸이 문 앞에 엎드려 있기 때문에 큰일 납니다.
그리고 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이 많은 물질과 높은 지위와 기회를 주실 때에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시험하시기 위해 주실 때가 있고 또 믿기 때문에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망 시켜드리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 하는 길 테잎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테잎 에서 하나님이 같은 죄를 똑같이 취급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죄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쏟아 질 때 행한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너무나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현저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가슴 아픔과 진노를 보여 주십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과격하게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리고 청지기 정신이 몸에 깊이 배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하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하고 하나님이 주신 성공의 기회들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장로나 목사가 되어선 절대 안 됩니다.
(예화) 옛날에 구한말에 마지막으로 왕족 한분이 계셨는데 예수 믿고 변화를 받아서 그분이 목사님이 되셔서 어느 교회 담임을 하고 있었는데 세월이 좋아져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중 믿음이 좋은 한사람이 장로가 되었는데 왕족의 말을 끌던 마부가 장로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당회를 하는데 목사님 의견에 장로님이 토를 달자 목사님이 화를 내시며 “네 이놈 어느 안전 이라고 네가 감히 썩 나가지 못할 고” 하시니 교회가 잘 되어지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서 청지기의 정신이 필요하며 지도자 에게는 특히 그런 정신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사회의 높은 지위에 있거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앙이 돈독하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도 몇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은 나를 이런 자리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주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나를 이렇게 만드셨구나 하고 의도적으로 생각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청지기 정신으로 투철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이 감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소히 책망할 것은 누구 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주님이 쓰시는 훌륭한 사람을 볼 때에 작은 잘못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이 훌륭한 것 과 하나님이 쓰시는 것을 모두 덮어 버리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에게는 평범한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는가 하면 또한 뛰어나게 훌륭한 사람을 깔아뭉개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려는 본성 두개가 인간 속에 공존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갖 중상모략과 비방이 나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인생을 살면서 좋은 스승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책망 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면에 있어서 뛰어나신 분, 내가 유혹을 받거나 인생의 어두운 고비 속에 있을 때 늘 생각나는 스승, 그리고 내가 죄의 길에서 유혹을 받을 때에도 생각 나는 순결함을 지니신 분, 내가 일을 잘했을 때에도 그분이 내가 하는 일을 보시며 대견스러워 하실 그런 총체적인 스승을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저택을 소유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복된 것 입니다. 저는 제 인생을 살아오면서 저의 젊은 날을 이러한 스승을 찾아서 방황한 날들이었습니다. 이번에 쓰고 있는 책의 말미에도 내 인생의 젊은 날에 그렇게 총체적인 스승을 찾아 방황 했던 날들을 적었습니다. 여기 이 상상과 저 철학을 기웃 거렸지만 그런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총체적인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훌륭한 스승을 몇 분 만났습니다. 그분들 에게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꼭 결점이 있지만 그때마다 항상 작은 그분의 결점이 나로 하여금 나와는 비교 될 수 없는, 그 분들의 장점들이 나의 존경을 폐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스승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책 속에서, 성경 속에서, 찾으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소한 책망 받는 것도 없는 것을 얘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지면 감독이라는 장로라고 하는 직분을 갖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모욕 거리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중대한 하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론되는 구체 적인 것도 그중의 첫째가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하면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고집이며, 그 다음이 분내는 것, 술, 구타, 더러움의 순서대로 나옵니다. 그래서 첫째는 고집으로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여기에서 가리키는 제 고집이란 진리에 대한 진실하고 정직한 자세에서 오는 거룩한 고집,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명과 책임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때문에 오는 신령한 고집, 한 방향으로 흐르는 분명함에서 비롯되는 그런 신령한 완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죄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악하고 왜골수적인 경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분명히 거룩한 강인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자신의 경향,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기중심적인 아집, 이런데서 오는 유격적인 고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가보면 교회당을 지어놓기는 했는데 구조가 이상하게 불합리하게 잘못 만들어 놓은 건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고집 센 사람, 잘나서 제 멋대로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입니다.서너 사람만 모여서 회의를 한다면 이렇게 되지 않는데, 완고한 한사람이 제 멋대로 하니까 엉터리인 건물을 만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모두 잘못된 제 고집대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조직 같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회가 세워지게 되면 당회에서 교회의 기구들을 의논하고 협의 하면서 교회의 틀을 만들어 갑니다. 어느 유력한 장로 한 두 사람에게 모든 권한이 있어서 그들 마음대로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제 고집대로 라고 하는 것은 유격적인 고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유격적인 고집이 왜 남아 있겠습니까? 이 자체가 이미 성화 되지 않은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 만약에 그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많이 성화 되었다면 이런 유격적인 고집 대신 신령한 강인함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신령한 강인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사소한 것들에 있어서 대범하지만 오히려 신령한 강인함이 없는 사람들이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걸고 치명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하찮게 생각하며 양보를 하기가 일 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교회를 이끌어 오면서 혼자 외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교회에 따가서 어느 교회는 장로님 때문에 가슴 아파 하면서 마음 졸이는 목회자도 있고 목회자에게 상처를 받아서 신음하는 장로님도 계시지만 그러나 모든 교회가 불행한 채로 교회의 한 지붕 안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서로 사랑하고 어려움이 와도 의지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을 때 그 목회자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오늘 저녁에도 잠깐 기도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영혼들을 잘 돌봐야 하겠는데 눈을 뜨면 잘 돌보고 있는 영혼들 땜에 안심되는 것이 아니라 돌보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영혼 때문에 눈물이 납니다.
주님이 어떻게 구해서 우리에게 보내신 영혼들인데 주님이 어떻게 당신의 피로 구해 내셔서 우리 에게 맡겨 주신 영혼들인데 함부로 돌보고 우리에게 능력이 모자라고 사랑이 부족해서 미끄러진 영혼들을 본다는 것도 하나님 앞에 얼마나 커다란 죄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해야 할 일이 많은데 ..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에게 유언 적으로 눈물을 흘리던 바울과 그를 전송 했던 그 장로들과 같이 복음 안에서 동지가 된 사람들 이라면 정말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런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어쨌든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입니다. 이 부분은 극복하기 쉽지 않은 요구입니다. 지도자가 되고 나면 황당한 비난을 받을 때도 많고 말도 되지 않는 오해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 평정을 잃지 않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 에게는 그런 인내의 자질들이 꼭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도 비록 장로들 이라고 하지만 일을 맡기고 나면 나대신 일을 맡겨서 도움이 되기보다는 그 사람 지켜보느라 가슴 졸이며 지켜보다 소비되는 에너지가 더 많은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교회가 혼자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신앙은 부족 하지만 맡겨 보면 일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 신앙이 좋아질까 하여 맡겼는데 참질 못하여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겨우 달래서 진정을 시키지만, 이런 것이 모두 다 분 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구 일을 하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사람 일을 하는 것이면 사람이 당신을 옳지 못하다고 하면 분내고 떨겠지만 일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일을 맡겼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당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지금껏 살면서 항상 하나님이 나를 좋아 하셨는지 그렇지 못 할 때도 있었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괴로워했는지 밤잠을 못자고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시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그냥 싫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절을 내겠다고 호통을 치셔도 넉살 좋게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뭘 그러시나 하고 뻔뻔스럽게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람들이 좀 부당하게 요구를 했다고 해서 참지 못하고 혈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판단에 예민한 사람들도 사람의 판단에 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신전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말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을 내는 사람의 이전에는 분내기 전에 마음이 상처 나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상처를 받는 것도 그 사람이 아직까지도 죄를 벗어나서 신령한 사람이 안 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우리의 관용이 많은 사람이 알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모든 시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그렇게 살아 갈 때 분내지 않게 됩니다.
기질적으로 쉽게 분 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세워서는 걸대 안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도 당회를 여시는데 의견이 좀 갈리자 어떤 장로님 한분이 벌떡 일어나 문을 발로 차고 나가더니 다시 발로 다른 문을 차더랍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거룩한 교회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엄하게 혼을 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국회를 열면 상스러운 행동과 말들이 오고 가는데 그러지 않는 나라가 바로 영국입니다. 영국의회 에서는 이런 행동에 대해 법을 만들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서 의회의 품위를 지키게 했습니다. 세상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이렇게 품위를 지키는데 여러분은 당회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도 그런 일은 비일 비제 합니다.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시켜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다음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로 섬기고 있을 때 어느 날 한 청년이 제게 와서 분을 내며 장로님이 벌겋게 술에 취해서 있음을 보게 됐다고 하면서 그 청년이 말을 하는 동안에 그 청년 입에서도 술 냄새가 확 올라 왔습니다.
기독교가 전해질 때는 당시의 선교의 문맥을 가지고 금기 사항을 정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중국 같은 경우는 복음이 전해질 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아편 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 제일 먼저 타도해야 될 것이 아편 이었기에 아편을 못하게 했습니다. 미국 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금주법이 유효했습니다. 기독교는 술이 가져다주는 해악과 무절제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당시에 술이 나라를 망치던 때에 술이 조선을 황폐화 시키고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금하게 해서 들어오게 된 것 입니다. 사업상 어쩔 수 없다면서 술 먹는 장로들을 가끔 만나는데 그래서는 절대 안 됩니다. 술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인임을 선포하며 자신의 의사를 밝힐 때 몇 주 후엔 서로 존중해 주는 사회이기 때문에 권하지 않게 되며, 또한 술을 안 먹는 다고 사업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또 하나는 구타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어느 전도사님께 들은 얘기인데, 목사님이 개척 교회를 하고 교인이 열 댓 명이지만 본인이 회계 하는 것이 뭐해서 회계 집사 한 분을 세웠답니다. 그런데 이 회계 집사가 지출 내역에 대해 시시 때때로 목사님과 의견이 충돌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참지 못해 주먹을 한번 날렸는데 이빨이 8개나 부러졌답니다. 그런 일이 있고 경찰서를 왔다 갔다 하고 소송이 일어나게 되니 그곳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이렇게 교회 안에서도 폭력이 종종 일어나는 수도 있습니다. 회심을 경험하고 사명 받은 것도 좋지만 신사적 이면서도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고 어디에 가도 신사라는 소리를 들 수 있어야 교역이 가능해 지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흔치 않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구타라는 것은 장로나 목사가 교회에 와서 또 다른 집사나 장로를 구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염두 해 두고 얘기하는 것 입니다. 때문에 지도자들은 언제나 부화뇌동 하지 않는 냉정 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구타는 커다랗고 부끄러운 죄이며 그런 사람이 더더욱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수치입니다. 그러나 그런 전력이 있는 사람이 영원히 장로나 목사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옛날에 그렇게 행동 했어도 깊이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더러운 이를 취하지 아니함 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목사든지 장로든지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이런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얼마나 많은지를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때 만난 선생님 한 분은 교회의 돈이 얼마가 되던지 여러분들은 교회를 세우는 그날 교회의 재정을 맡는 사람에게 위임하고 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이 되라고, 그것이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길임을 저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이 더러운 이를 취할 가능성이 그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같은 일을 계속 반복 하다 보면 우리는 마음도 양심도 무디어 집니다.
(예화)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교회를 하시는데 교인들에게 매달 성경 공부 교재를 사게 해서 공부한다고 합니다. 교인이 몇 천 명이다 보니까 그 수요가 엄청난 분량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서점을 하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한번은 제가 집회를 내려갔는데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책 이 천권을 사는데 정가를 다 받더 라며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목사님이 출판사에 전화만 하면 70%에 가져오는데 그런데 교회의 일꾼이 일을 그렇게 처리한 것을 알면 그 사람을 지금껏 해 온 일이 나타나고 교회에 분란이 생길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교회의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이 너무나 걱정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탐욕 입니다. 오늘도 우리교회 집사님 한분이 얘기 하시는데, 사업상으로 영수증을 끊는데 기독교 교단에서 설립한 단체에서 물건을 구입 하면서 그러더랍니다. 예를 들면 가격이 50만원에 사갔지만 60만원으로 영수증을 끊어 주십시오. 하길래 여기가 기독교에서 세운 단체인데 그러면 되겠냐고 하니까 인생을 살다 보면 다 그렇죠 하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정직이 마지막 등불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으로부터 10년 전에 대학에서 입시생들이 연주할 때 심사위원이 얼굴을 못 보게 하려고 커텐을 치고 실기 시험을 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돈을 받기 때문입니다. 입시 남겨 놓고 한달 레슨 받으면서 그게 무슨 제자라고 교수 월급 백만 원 정도 될 때 한달 레슨비를 사백만원, 팔백만원 받았으니 그것이 다 실력 향상이 아닌 한 달 동안 얼굴 보이고 심사 위원 에게 뇌물 주는 의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곳에 교회의 집사, 장로들이 연루 되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그랬습니다. 수치스러운 겁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늘나라의 비밀과 그 은혜의 아름다움에 눈뜬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썩을 이 세상에서 그 헛된 재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꾼 된 명분을 더럽히고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아갈 것인지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절대 용납 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방치하면 안 되고 막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오늘은 비록 신자답게 살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처럼 살고, 오늘은 비록 주님 안에서 온전히 성화 되지 못한 채 산다 할지라도 내일은 하나님이 그 사람들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새 사람으로 만드시지만 그러나 지도자는 그런 결함을 가지고 현재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이를 탐하고 구타하고 술에 인 박이며 즐기고, 부끄럼 없이 행하고 심지어 장로가 되는 사람들이 십일조 생활도 안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부산에 집회를 내려갔는데 젊은 목사님이 은혜를 많이 받으셨는데도 표정이 굉장히 어두웠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해운대를 산책하자 하시 길래 산책을 하는데 목사님이 은혜 받은 이야기를 눈물이 그렁한 채 얘기하면서 자기는 마음에 너무나 쓰디 쓴 뿌리가 있다고 하시면서 옛날에 그 목사님 자녀들이 별명 붙이기를 얼마나 정서가 풍부한지 시인이라고 했는데 교회에 청빙 받아 간 곳에서 장로님들한테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왜 그런지 그렇게 모든 일에 목사님이 하자는 일에 방해를 받았답니다. 그날도 집회하기 직전에 마음이 많이 상했는데 방을 개조해서 성경 공부를 가르칠 수 있는 깨끗한 방을 하나 만들자 했더니 결사적으로 두 사람이 반대하더랍니다. 그 분들은 주일 헌금을 천원 추수감사헌금을 이천 원 하면서 빌딩도 두 채나 가지고 계신 장로님이랍니다.
모두 다 더러운 이에 대한 욕구,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정말 더러운 이 와는 거리가 멀고, 구타하지 않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분 내지 아니하는 그러면서 한 걸음 나아가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책망 할 것이 없는, 고집대로 행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뽑아서 지도자를 삼아도 교회가 저절로 아름다워지지 않는데 말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자격에 부합한 사람들을 주시도록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 행 할 바를 행할 뿐이지 역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우신 사람들 에게도 끊임없이 은혜를 주셔서 주의 뜻을 분별하며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기도하고 많이 하나님을 의지 하면서 주의 일꾼들을 세워 갈 때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른 교회로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장로의 자격③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딛1:8上)”
이어서 8절에서도 또 자격이 나옵니다. 장로다 감독이다 하는 사람들의 자격이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정말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고 양떼를 돌보는 이 일이 아무에게나 맡겨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 들고 있는 자격 요건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 선을 좋아하는 것, 근신하는 것, 의로운 것, 거룩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이것은 그야말로 순수한, 그 나그네로부터 어떠한 대접이나 호의, 평판, 미래에 받을 지도 모르는 보상, 이런 것을 생각지 않은 순수한 애정의 표현이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사람을 향하여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포학하고 폭력적이고 난폭한 사람들이 교회에 지도력을 행사하게 되면 교회는 많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 저 일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여들기를 좋아하는 오지랖넓은 사람이라는 말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전자는 쓸데없이 주제넘게 자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일에 부당하게 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 어린 관심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굳이 다른 사람들을 욕할 의도는 없습니다만 이 성경구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국가’ ‘민족’이라는 추상명사를 사랑하는 정치인은 참 많은데 사람을 사랑하는 정치인을 만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큰 화재가 났을 때 그 화재가 나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현장에서 정치인들이 줄서서 사진 찍다가 시위대원들에게 몰매를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람들의 모임 단체도 사랑하고 그 단체를 위해서 일하고 그 단체를 위해서 섬길 수 있는 방식이 되어야지만 올바른 지도력을 행사하는 방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그 영혼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지체들의 영혼이든지 혹은 구원받지 못하고 아직까지 이 세상의 바깥에 있는 영혼이든지- 그 영혼들에 대한 깊은 연민, 깊은 사랑과 친절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도 추상명사인 민족, 역사, 이런 거창한 단어들 앞에서만 옷깃을 여미지 않고 눈에 보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인간을 향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하는 일은 그 자기의 지도를 받는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도구로 삼는 그런 지도자가 아니라 그들의 눈물을 씻겨주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잠시 전에도 선교하시는 분과 함께 북한 동포들의 실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백성들이 정말 고통을 받고 있으며 올해도 수십만 명이 굶어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강대에 올라오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안이한 삶인가. 우리들이 고민이다 괴롭다 힘들다고 불평하고 투덜대는 많은 하소연 가운데 사치스러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지도자를 뽑을 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의를 갖춘 그런 사람들을 뽑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나그네를 대접하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것이 진정으로 그 사람 안에 있는 경건이 무엇인지를 밖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벌써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의 지도자는 어디서 받았는지도 모르는 소명에 불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자격 요건이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지혜로운 통찰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이번에도 여러분들이 교회의 일꾼을 뽑으실 때 반드시 사람을 향해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개인적으로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어도 그 사람의 인격과 인품 속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느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선을 좋아하고’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선은 악의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을 설교하면서 선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한 바와 같이 성경에 나오는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좋아하는 것은 개별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그 사람 안에 있는 경향성 내지는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의 경향과 맞는 것이 함께 있으면 그 시간이 즐겁고 행복하고 마음이 편해지지만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경향과는 다른 것이 주위에 있게되면 함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됩니다. 저는 소리에 무척 예민합니다.
(예화: 외국에 갔을 때 호텔 방에서 2분 간격으로 소리가 나서 결국 이유를 못 찾고 방을 옮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방 속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택시를 탔을 때 나오는 유행가는 제 경향성과 너무 안 맞아서 제일 먼저 ‘끕시다’하고 갑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경향성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선한 사람들이 모인 선한 환경에서는 좌불안석입니다. 그런 선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본성상 선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속속들이 절망적으로 부패한 존재들입니다. 아이들을 길러보면 인간의 전적 타락의 교리를 깊이 깨닫게 되고 칼빈주의자가 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아이들이 악합니까?
(예화: 교회 개척 후 3살쯤 된 전도사님의 아이에게 껌 하나 달라고 했더니 껌을 까더 니 알맹이는 자기 입에 넣고 껍데기를 주었다)
(예화: 사탕을 먹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사탕하나 달라고 했더니 까다가 떨어트린 사탕 을 주워먹으라고 하고 새로 깐 사탕을 자기 입에 넣었다)
그래서 선을 좋아하는 경향성은 우리 안에 본래적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성품입니다. 그리고 성화를 통해서 그 경향성들이 더 강력해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선을 좋아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라면, 한 부패한 인간 안에 있는 선한 경향성이 그 사람의 끊임없는 성화의 노력을 통해서 생겨난 경향성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씨 좋고 돈 팍팍 쓰고 남의 말을 잘 거들어주는 의미에서의 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선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많이 애를 쓰다보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서 선한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선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된 그런 사람들이 바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는 아무리 사람이 훌륭해 보여도 믿은 지가 얼마 안 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인격적인 면에서 불안한 요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의 일꾼을 뽑을 때 꼭 보아야 할 것은 그 사람 안에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어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는가,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서 점점 더 온전해져 가는 변화가 있는가, 처음 교회에 와서 은혜 받기 전에는 사람이 악해 보이고 예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 앞에 정말 새로워짐으로서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신자가 되어가고 선한 일을 좋아하는 선한 사람이 되는 증거가 있는 사람들을 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지위나 재산의 유무보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신자가 되려고 실제적으로 노력하고 또 자기 깨어짐 속에서 변화되어 가는 사람인지를 우리들이 먼저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지도자고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가지고 교회에서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은 성도들을 섬기고 자기보다 작은 자의 발을 씻기는 종의 도를 걸어가는 섬김 직분입니다. 돈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좋은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많은 축복을 받게 하시면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헌신되어있고 주님의 주되심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는 진실한 신자라면 그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을 주님의 뜻에 부합하게 사용할 것이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되어있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의 재산이나 지위가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보다는 선을 좋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선한 성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선한 성품, 이것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나타나는 것은 ‘근신하며’입니다. 근신한다는 말은 두려움 속에서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경건과 유사한 말인데 경건이 우리의 내면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근신은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않는데서 보이는 행동의 양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근신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과, 그래서 자신의 잘못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누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기 자신을 의뢰할 수 없다고 하는 경건한 불안에서 비롯된 마음의 경향과 행동의 양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마치 들판을 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달리는 것과 같은, 혹은 들판을 큰 트랙터 같은 것으로 한방에 밀어버리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물론 믿음에는 그런 위력이 뒤따르기도 하고 또 난관이 많아 보이는 삶의 상황을 담대하게 헤쳐 가는 것이 믿음이 가진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질그릇처럼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사자처럼 용감하게 살았고 상황과 타협하고 비굴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중요한 특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믿음은 두려워함을 모르는 인간적인 무모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속에 항상 근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로는 우리들이 종종 긴장을 풀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평상시 살아가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적절하게 긴장되어있어야 합니다.
바이올린을 보관할 때는 줄을 모두 풀어서 느슨하게 해서 보관해놓아야만 바이올린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주를 하려고 마음을 먹을 때는 줄을 전부 맞추고 팽팽하게 조절한 다음에 비로소 연주가 시작되는 것이지 보관하기 위해서 줄이 모두 풀려진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할지라도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긴장해야할 삶의 현장에서 긴장이 없는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에게는 항상 이런 의미의 거룩하고 경건한 긴장이 있어야 합니다. 주위의 모든 환경이 자기의 마음에 맞게 돌아가면 경건한 모습과 긴장을 보이고 마음에 안 맞거나 혹은 너무 마음에 잘 맞으면 풀어져 버려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그렇게 경솔한 사람들은 결코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종종 그 사람이 지도자가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그런 바람들이 지도자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어서 일생에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자기가 속해있는 그 공동체를 욕보이게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비들은 항상 손을 놀려서 쓰는 붓의 끝과 말을 해서 사람들의 귀에 들리는 혀끝을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어찌 선비뿐이겠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말에 있어서 절제가 없고 근신함이 없는 사람들은 반드시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너무 지나치게 가까이 하고 곁에 두면 그들로 인해서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또 변화되어야할 제목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항상 어느 곳에 있든지 거기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보고 계시다고 믿고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람 앞에서도 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사람 앞에서도 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러분들이 교회의 지도자를 뽑을 때에 무례하거나 아니면 행동이 우발적이어서 사람들에게 당황함을 주고 또 잠시 후에 사과하며 용서를 빌고 또 그런 행동을 되풀이하고 이렇게 무례하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챙길 줄 모르는 경건한 근신함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아직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예화: 지금은 연로하신 한 목사님이 장로를 뽑을 때 ‘당회에서 의논된 일을 당회의 허 락 없이 집에 가서 누설하거나 발설할 경우에는 면직이 되어도 하등의 이의를 제 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한 장씩 받으셨다고 한다)
대개 장로님들의 부인은 권사님들이고 그분들은 교회를 참 사랑하는 분들이고 또 특별한 활동이 있기보다는 교회를 중심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자연히 교회에서 만나는 교인들도 많고 이야기들도 많이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거나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알려지면 안 되는 것인데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가 부인들의 입을 통해서 여기저기로 돌고 일파 만파가 되어서 교회에 큰 시험이 되었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부끄러운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교회를 다스리면서 항상 조심하는 것이 말에 있어서 근신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남발하고 거기에 대해서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깊은 곳에 들어와서 섬기게 되면 섬김을 통해 주는 유익보다는 근신함이 없는 그의 부주의한 삶을 통해서 교회에 미치는 해가 정말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지도자를 뽑을 때 그런 인격적인 결함도 깊이 생각하면서 근신함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지 못하도록 여러분들이 특별하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인격, 선을 좋아하는 성화 된 성품, 근신할 줄 아는 경건한 사려 깊음 이런 것들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에 한 집사님이 노숙자를 데려와서 교회에서 재워달라고 했는데 목 사님이 단호하게 거절하시자 너무 마음이 상해서 시험에 들었다. 그 때 목사님이 그 사람이 불쌍하면 그 집사님 집에 재우라고 하셨다)
정말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 없는 것을 괴로워하지 누구는 사랑이 없다고 하면서 고통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의 인격은 모든 면에서 솔선하는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나그네를 대접하고 연약한 인간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는 면에 있어서나 하나님께 속하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한 행동을 즐겨하는 선한 성품에 있어서나 매사에 사려 깊고 주의 깊은 근신함에 있어서나 항상 모든 성도들의 모본이 되는 그런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을 비우고 여러분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해서 선택하게 하실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10명이 모두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한 명도 안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 하다가 이번에는 재투표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를 세우기 위해서 2차 3차 계속 투표를 하면서 3분의 2가 나올 때까지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투표해서 결국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딱 한번의 기회만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떤 사람들을 세우셔서 일하게 하실 지는 모르지만 투표를 하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교회의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은 정말 여러분들이 닮고 싶은,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참된 신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앞서 가면서 보여준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격을 엄격하게 해서 감히 지도자가 되는 사람이 없게 하자고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신앙생활을 참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내 평생에 힘써 하나님 앞에 행할 그 의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여러분들이 정말 말씀 안에서 변화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누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든지 그 사람의 인격 속에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하는 처절한 노력이 배어있고 그의 삶을 가까이 보는 사람일수록 그가 정말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비록 선택했지만 그는 우리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이 되고 그런 일꾼들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좋겠습니까?
그들이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눈물로 목회 사역을 돕고 그들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자신이 갈 수 없는 선교지에 선교사를 보내고 교회에 있는 지체들을 돌아보면서 아픈 지체의 눈물을 씻겨주고 흐르는 상처를 고쳐주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그런 지도자들이 교회에 많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몸은 하나이고 교회의 지체는 큰데 구석구석 아픔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직접 찾아가서 돌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가장 생각 나는 것이 ‘내 마음을 가지고 저 지체들에게 다가가서 우리의 마음에 그 마음을 주신 목자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일 사람이 누구일까. 예수님처럼 아파하는 그들과 함께 울고 예수님처럼 그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고 예수님처럼 무지하여 깨닫지 못하기가 이를 데 없는 그 죄인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진리를 하나씩 가르쳐서 그 어두운 영혼에 빛을 줄 사람이 누구일까’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뇨
사람마다 소리 질러 사랑 요구 하도다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위해 저희들 오래 참고 있었네
누군가가 저에게 교회 지도자의 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길이 액체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울이 고백했듯이 많은 눈물과 탄식, 많은 땀과 많은 피, 그것이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도자의 모본을 보여주셨는데 그 사상이 마가복음 10장에 잘 나와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로 주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기독교의 리더쉽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참 사랑을 알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알기 때문에 나그네를 깊이 사랑하고 대접하여 선에 속하고 그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미워하고 괴로워하며 정말 근신하는 가운데 거룩한 경건 속에서 만족해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진실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또 혹시 자신은 그런 지도자의 자격을 충분히 못 갖췄는데도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를 세우셨다면 배전의 성화의 노력을 가지고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는 지도자가 되기로 깊이 결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의 섬김과 눈물을 통해서 교회를 잘 섬겨 주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 주님의 교회의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장로의 자격(4)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딛1:8下)”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격 요건들을 계속 제시하는 성경 앞에서 그렇다면 정말 교회의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세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자격들이 성경에 의해서 상세하게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교회의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하나님이 교회의 지도자에 대해서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높고 고상한 지위입니다. 세상적으로 지위는 돈이 많고 권력이 얼마나 있는가에 있지만 하나님의 지도자가 되는 일은 간단하고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일입니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지위입니다. 그래서 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지위를 그 고상하고 아름다운 지위에 맞게끔 감당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상세하게 자격 요건을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에서 지도자로 쓰는 사람들이 올바른 방법과 절차를 거치고 성경이 규정하는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쓰시지 당신이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자리를 차고앉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황제 하에서 교황들이 첩을 얻고 자식을 낳고 다시 또 그렇게 태어난 사생아를 위해서 교회에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암투하는 장면들이 중세 교회사에 질펀하게 흘러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지위는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귀하고 소중한 자리에 세워서 쓰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격을 갖추고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들을 절대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그런 아름다운 거룩한 권위를 기초로 해서 당신의 교회를 질서롭게 어거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올바로 다스려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나라도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가장 가슴아픈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경제적인 문제도 아니고 남북통일이 안되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뢰하고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가 너무 없습니다. 다윗과 같이 억울하고 원한 맺히고 가난하고 빚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함께 눈물을 흘려줄 목자와 같은 지도자가 없는 것이 이 민족의 가장 커다란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국민 소득 5천불정도를 반납하고라도 그런 지도자 한두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지도자를 사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훨씬 훌륭한 나라가 되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내가 가슴 아파하면서 조국의 현실을 말하니까 어떤 사람이 ‘우리 목사님이 대통령을 하시면 좋겠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챨스 스펄젼 목사님이 ‘누가 나를 보고 면류관을 쓰고 제왕의 노릇을 하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노라.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이 양떼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할 뿐이지 할 수는 없습니다.
몇 해전 타임지에서 한국에 대해서 특집으로 나오면서 거기 실린 한마디 말이 한국 사람으로서 마음이 찔리는 말이었습니다. ‘한국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많이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한국인들의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그들을 인도해줄 적절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조만간 그런 지도자가 나타날 것 같지 않은 현실이다’ 그런 뛰어난 지도자가 없으니까 외국도 우리 나라를 그렇게 깔봅니다. 지도자가 대대로 되어있으면 감히 깔보지 못합니다. 그런 현실을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도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우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자격을 오늘 세 가지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혈기 충만해서 악을 토벌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의롭다는 것은 삶의 모든 표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획득하게 된 인격적 특성, 삶의 방식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다가 보니까 손해가 나도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사는 그런 생활에서 온 의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든지 장로든지 집사든지 간에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미제 호야를 비싼 값을 주고 사왔는데 닦으면서 잘 보니 Made in O.S.A 라고 써있는 가짜였다)
(예화: 어느 교회 집사님이 가짜 미제 공구를 팔았는데 목사님께서 그것이 잘못되었음 을 지적하셨다-정직하게 해서 망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라는 충고에 순종했다 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의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삶의 방식과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의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에게는 항상 구김이 없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함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비굴해지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불의한 사람의 겸손은 비굴입니다. 불의 하게 살아서 언제 들통날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비굴입니다. 의롭고 떳떳해서 누구에게 굽잡힐 것이 없고 범법하거나 위법한 사실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사람에게 용서를 빌 일이 없는데 예수의 사랑에 사무쳐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허리를 숙이고 발을 씻기는 것은 비굴이 아니라 그야말로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잘못하신 것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흠 잡히실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고통 가운데 사는 우리들을 섬기고 우리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겸손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교역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유리로 만든 집 속에 살아도 문제가 없으리 만치 우리 그렇게 살자’ 물론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그런 식으로 경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려봐도 유리 통에 들어있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의 중심이 된 사람, 언제든지 말씀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있고 말씀이 가라고 명령하면 태산을 넘고 험곡을 지나도 그 고난 속에서 자기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에 나서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지 못하게끔 온 몸을 던져서 막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아가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교회가 되기 힘든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로운 삶이 다져지지 않은 사람들, 인간적인 동기나 극히 세속적인 동기에서, 그리고 사교적인 동기에서 교회생활 하는 사람이 단순히 재산이 좀 있다는 이유, 열심이 뛰어나다는 이유, 그리고 말을 잘한다는 이유, 오래 교회에 나왔다는 이유, 이런 몇 가지의 이유만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 교회의 미래는 가시밭길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거룩도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작용입니다. 신자 안에, 혹은 밖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변화된 모습은 모두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변화된 것일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죤 오웬은 말하기를 모든 거룩함의 뿌리는 복음의 비밀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태어나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하신 이 구속의 도리, 그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이 복음의 비밀들, 이것들을 터득하면서 끊임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깨어짐과 부패한 본성으로부터의 거룩한 변화로 말미암는 그러한 인격적인 변화, 삶의 변화, 이것이 바로 거룩이고 그런 것들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복음의 비밀과는 관계가 먼, 인위적인 도덕, 인위적인 반듯한 사회 생활, 이런 것들은 모두 죽은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도덕의 뿌리는 오직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변화되는 사람, 그 변화된 과정에서 거룩한 인격으로 성화 된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교회의 일꾼이 되고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면접에서 어떤 학생을 붙여줄까를 생각하며 많이 떨어트렸습니다. 구약성경 제일 마지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엉터리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가 힘드니까 신학교라도 들어와서 졸업장을 따보려고 했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거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학교에 일반학과도 섞여 있기는 하지만 면접 보는 복도에 담배연기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학생을 풀어서 신학교 원서 가지고 있으면서 담배 피우는 학생들 이름을 다 적게 했습니다. 그래서 면접 볼 때 담배는 언제 끊겠느냐고 물으면서 내년에 담배끊고 다시 한번 오라면서 떨어뜨렸습니다. 그 모두 거룩함이 없는 삶입니다.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는 작용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거룩의 의미 자체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자면 모든 피조물들에 뛰어난 하나님의 무한한 초월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면에 있어서 온전하신 분이라고 하는 덕성적 완전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적용되면 그것에 대한 반응 내지는 영향이 바로 인간의 거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초월성 앞에서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풀잎의 이슬과 같은 존재로구나. 이렇게 한없이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홀로 살수 있을까?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우리는 우리 혼자 살 수 없는 연약한 피조물입니다’하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 자기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엎어지는 것이 바로 거룩에 대한 첫 번째 반응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를 때까지는 자기가 꽤 사랑이 있는 사람인줄 압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인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나면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 그 스랍 가운데 에워싸이신 하나님을 뵈오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게 될 때에 자기가 얼마나 더럽고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거기에서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덕성적 완전성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가운데 뭔가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왜곡된 생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 4대째 예수 믿는 사람, 헌금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 많이 받는 사람, 거룩한 사람, 당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당신 닮은 사람들을 예뻐하시고 그러는 것입니다.
(예화: 발가락이 닮았다는 소설)
발가락이 닮아도 그렇게 안심하는데 전부 닮으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내가 10년 동안 은혜를 주고 복음의 비밀을 가르쳤더니 발톱이 닮았구나’하신다면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썰렁하시겠습니까?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그래서 주님 앞에서 자기가 하찮은 피조물인 것을 알고 ‘어떻게 하면 창조의 목적대로 살까’하며,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발 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갈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사는데도 늘 하나님 앞에 ‘나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쓰레기와 같이 더러운 인간입니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야지 만 진정으로 섬깁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절제하며’ 했습니다. 절제한다는 뜻은 자기 속에서는 계속 흘러 넘쳐나고 그 넘쳐나는 정서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계속 그 사람을 몰고 가는데 그 결과가 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에 입각해서 판단하고 그러한 열망을 죽이고 그래서 행동을 금하는 것이 비로 절제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교역자가 되면 보고 오라고 권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미국과 독일이 싸우면서 잠수함으로 전투하는 내용인데 스토리가 단순해서 어떤 사람은 재미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너무 잘된 영화입니다. 유능한 부함장이 있었는데 공부도 잘해서 좋은 학교 나오고 목숨을 걸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대원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함장이 A학점을 줘야 승진해서 작은 배의 함장이라도 할텐데 결정적인 때마다 C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떨어졌습니다. 함장이 불러서 ‘너는 아직 안되니 맡겨진 일이나 열심히 해라’하며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희생적이고 모범적이고 공부도 잘하는데 지도자로서의 결단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동생처럼 사랑하는 부하들, 네가 친구처럼 사랑하는 아이들을 필요하면 죽으라고 보낼 수 있겠느냐? 못하지? 그러니 너는 아직 멀었다. 내 말을 믿어라. 너는 아직 안 된다’했습니다. 대장이 죽고 엉겁결에 지휘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우유부단한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대원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I don't know’ ‘나라고 뭐 아는 줄 아느냐.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야’하며 불평을 늘어놓는데, 고참 기관장이 ‘Don't say I don't know’라고 말하며 ‘당신의 그 세 마디가 우리 모든 대원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몰라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두려워도 자신 있는 것처럼 말해라’고 합니다.
제가 그 영화를 보고 배운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로서 교회를 이끌고 살아가면서 그것이 정말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저도 너무 두렵고 사람들도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를 때 ‘나도 무섭다’고 하면 사람들은 더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괜찮다’하며 항상 생각하는 것은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도와주세요’할 때 고물에서 잠을 주무시던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Be quiet” “잔잔하라” 말씀하시니 조용해집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지만 그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자신 속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내면서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말을 해놓고 나서 잘못했다면 ‘그 때 제가 말한 것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자세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루에 한번씩 그러면 안됩니다. ‘제가 이렇게 잘못한 것을 놓고 스스로 번복을 하면서 용서를 빌기는 제 생애에 처음입니다’할 때 무게가 있는 것이지 밥먹듯 한다면 지도자가 권위가 안 섭니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꼭 요구되는 것은 절제입니다. 좋은 일에 대해서, 그것이 선한 결과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절제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을 너무 많이 갖지 말고 절제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섬겨라 그러나 너무 많이 그러지 말아라 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겨라 그러나 너무 많이 그러지 말아라 하지 않습니다. 또 위험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절제는 지금은 좋은 것 같아도 나중에는 나쁜 결과가 나올 위험성이 있는 일에 대한 절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여러 가지 절제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말의 절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막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험이 들었을 때 캐 들어가 보면 항상 말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권사가 되었든 안수 집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든 간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말에 있어서 절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가 항상 동역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당신을 아무리 존경하고 열심히 따라도 말에 있어서 절제가 없는 사람들을 동지로 여기지 말아라. 언젠가는 쌓아올린 그 사람이 당신을 허물어 버릴 것이다’ 절대로 그런 사람들은 안됩니다.
다른 것은 다 갖춰져 있는데 말에 있어서 좀 절제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온 지체가 성화의 물에 잠길 때 끝까지 물 속에 안 들어가고 떠오르는 것은 입입니다.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그 입이 물 속에 쑥 들어가서 정욕적이고 육적인 기운이 그 입에서 빠져나가고 거룩한 언어를 가진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개척초기에 이것 때문에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화가 많이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리스도인의 말과 영적 삶’이라고 하는 시리즈를 제가 했겠습니까? 그때 많은 사람들이 깨트려졌습니다. 굉장한 파괴력으로 성도들을 뒤집어놨습니다. ‘참된 신앙과 외식’ 시리즈와 함께 한 때 선두를 달렸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남발하거나 혈기로 말을 배설하듯이 아무 데서나 토해놓거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장로가 되거나 운영 제직이 되어도 큰 소리 내면 안됩니다. 저는 큰 소리 내면 체포해서 일단 회의장 바깥으로 내보내고 문 걸고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비록 세미나 실에서 회의를 해도 거기는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회의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혈기를 부리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거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회중에서 쫓겨나기에 합당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내보내고 문 걸고 짐승은 퇴장시키고 사람들만 회의를 해야합니다. 영국에서는 세속 정부를 통치함에 있어서도 의원들이 그렇게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거룩한 교회에서 지도자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예화: 어느 교단의 총회장 이야기-자신에게 계속 불리한 발언을 하는 사람을 향하여 자신도 모르게 ‘에이씨’하며 총회장 명패를 들고 던지는 시늉을 했다는 내용)
또 물질에 있어서 절제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도하게 소비하고 낭비하면서 사는 사람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너무 유난을 떨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사회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고 복 주시면 잘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복 주셨는데도 아직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많이 축복해주시면 조금 더 넓은 집에 살 수 있고 좀더 편한 차 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 바닥에서 옷 한 벌에 3천 원 짜리 골라서 입다가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면 괜찮은 매장 가서 사 입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외식도 못하고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먹었지만 돈 좀 벌면 영양을 생각해서 냉장고에 먹을 것을 넉넉히 사도 놓고 먹고 문화생활을 위해서 1-2주에 한번씩 가족들과 웬만한 집에서 식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활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한 끼에 몇십 만원 짜리 식사를 하고 문고리까지 도금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것만 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마틴 루터가 주석하기를 ‘일용할 양식 속에는 먹을 빵과 포도주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 인간다운 교육을 받고 또 자식들에게 시킬 수 있는 비용, 모든 것이 들어간다. 그러나 사치품은 안 들어간다’ 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절제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큰 사업을 하고 대외관계도 많은 사람이 좀 괜찮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그렇게 문제가 안됩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한 사람은 너무 절제력이 뛰어나서 다 썩은 차를 타고 다니니까 곧 망할 회사인줄 알고 은행에서 쳐다도 안 봤답니다. 이런 것들은 지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지나치면 안됩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카드 빚에 몰려서 도망을 다니거나 낭비가 심해서 직장으로 차압이 들어오거나 빚더미 속에 사는 것들은 지도자로서 처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없을 때에는 절약해서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좀 넉넉할 때는 부한 데 처할 줄도 알고, 그러나 절대로 분수에 지나치는 것이 없는 절제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정신도 맑고 건강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절제함이 있어서 냉정하게 처신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장로는 목사와 함께 신령적 사무를 총찰하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니 영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장로는 매일 새벽기도 나와야 합니다. 안 나오겠다는 사람은 찍어주면 안됩니다. 장로가 되어서 새벽기도도 안나온다면 어떻게 교인들의 신령적 사무를 총찰하겠습니까? 안수집사 때까지는 못나왔다고 하더라도 각서 다 받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 1키로미터 앞으로 이사와야 한다고 아예 교회 정관에 박았다고 합니다. 저는 100키로 떨어져도 괜찮은데 새벽기도만 나오면 됩니다. 미국에 살아도 괜찮으니까 새벽 기도 나오고 매 주일 예배를 교회에서 지키면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 절제가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목사와 함께 신령적 의무를 다하려면 수시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구를 위해 기도하고 교역자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자기 일인 것처럼 기도하고 괴로워하고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방면으로 교회를 이끌고 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오늘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반응해야 한다’ ‘교회가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게 하기 위함이다’ 하는 신령한 사실을 깨닫는 시야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냉정하게 사태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적용할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냉정해야 합니다.
쓸데없고 육욕적인 정열에 사로잡혀서 무분별하게 자기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낭비하는 그런 방탕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감정에 휘말리는 지도자들은 결코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냉정하게 사태를 판단하고 주시하면서 하나하나 일을 해나가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장로는 절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든 지도자의 기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자로서 좀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평신도는 절제가 없어도 되고 일반 집사는 거룩하지 않고 방탕해도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 마찬가지지만 지도자에게는 특별히 이런 것들이 더 요구된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들을 뚫고 하나님 앞에 지도자가 되면 하나님이 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이 직분은 천사들도 흠모하는 직분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천사들과 함께 우리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찬송하는 24장로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지고 그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주님을 위해서 섬기며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높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실을 알아서 깊은 두려움 가운데 선택하고 또 선택을 받고 그래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고 교회가 여러분들의 세워짐을 통해서 큰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 장로의 자격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1:9)
9절 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지도자 에게만 필요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는 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도자 들이 되기까지 베푸신 은혜를 봐서도 그러하고, 또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믿음의 아름다운 지위를 봐서도 역시 그러한 자격이 요구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맡고 있는 임무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할 수 있는 한 온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기억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믿음의 지위에 따라서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항상 두려움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에는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명 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책임 덩어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 입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면 그 사명은 책임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말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을 때에는 항상 은혜가 주는 즐거움만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은혜의 보다 원대한 계획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계획을 따라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받는 그 은혜는 예고편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받은 축복도 하나님 앞에 받은 예고편일 뿐입니다. 그 보다 더 놀랍고 원대한 일을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아주 귀하게 사용하신 훌륭한 영적인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대부분은 믿음을 시작할 때 크고 위대한 일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크고 위대한 일을 하려고 꿈꾸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깨닫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수 없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님이 그들 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이 항상 우리에게 맞는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한번에 어마어마한 일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맡기시는 법은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원리는 시험 하시는 원리입니다. 작은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에 맞는 사명을 맡기시고 시험해 보시고 그렇게 은혜를 주셔서 달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격하면 좀더 좀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람들 중에 요셉 이라는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을 때 히브리에서 팔려 온 몸값 몇 푼 안 되는 하찮은 노예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가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될 때 까지 하나님은 노예로 팔려온 그날 갑자기 왕국에서 기별이 와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많은 기회를 주시면서 기회 때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를 사용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지도자로 삼으시기 까지 주님이 베풀어 주신 많은 은덕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돈이 많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거나 사람의 성격이 사교적이라 해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도 보면 지도자로써 흔치 않지만 매력이 없는 사람이 있고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 에서도 매력이 있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에서도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지게 되면 인간적인 매력과 신앙적인 지도자의 자격을 혼동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두운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그 결과는 자신들이 직접 감당 하면서 고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도자의 첫 번째 자격이 미쁘신 말씀을 그대로 지켜야 할지니... 미쁘시다 라는 말은 믿을 만한, 신실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미쁘다, 신실하다, 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미 이 말을 디도에게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 하다는 것을 경험한 것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도 그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사람을 판단하거나 생각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이치는 여러분들이 목자와 양에서 많이 터득했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이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양도 목자도 통과해야할 양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문이 있습니다.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가 통과함으로써 소명을 받게 되고 양들이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함으로써 바로 그 목자가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기의 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목자는 자기가 통과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양들을 사랑하게 되고 양들은 자기가 통과한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 잡혀서 그 예수께 사로잡힌 목자의 목양을 받음 으로써 한 무리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교회에서 목사님이 8년 동안 장로가 안 되신 분이 투표를 해서 어떻게 장로가 되었습니다. 장로님이 제일 먼저 목사님께 달려와 큰 절을 하면서 전에 있던 교회에서 8년 안 장로 후보 였는데 장로가 되지 않아 마음이 많이 상했던 차에 목사님이 새로 가셔서 1,2년 지켜 본 후에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물론 목사님이 시켜 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시켜 주신 것이지만, 목사님 제가 목숨 다하도록 목사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장로님 절 너무 도울 생각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섬기도록 하십시오. 그런 분별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미쁘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고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 까지 찔러 쪼개고 숨은 뜻 까지 드러내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 이구나 내가 진토에 떨어진 것 같이 내 영혼이 곤고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고 나를 이 세상에 지으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구나...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정리된 시야를 가지고 교회와 사회와 자신과 목회자와 성도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 이어야합니다.
(예화) 한참 부흥회 갈 때 가장 속 터지는 이유에는 강사가 설교할 때 안 듣는 세 부류가 있는데 교역자, 사모들, 장로들, 인데 사실 교회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만 뒤집어지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교인들 올 때 설교 안 듣고 교인 세고 있는 사람 보면 틀림없이 그 교회의 장로님입니다. 모든 것이 객관적입니다. 예배 시간에도 항상 교회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를 올바로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사상으로 한번 나라를 대통령 에게 맡기듯이 교회를 누구 에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나 장로나 모든 일꾼 들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 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미쁘시다 라는 경험이 없으니까 고백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 하지도 않고 말씀에 의해 자기가 어떻게 깨뜨려 지는지 모르고 어떻게 그 말씀이 죄로 가득한 영혼에 작용해서 그를 거룩하게 하고 회개 시키고 새 사람으로 만들고 변화 시키는지에 대한 체험적인 경험이 없거나 현저히 희미할 때, 그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화)제가 전도사 생활할 때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가 집사님 이였는데 엄마 속을 그렇게 썩일 수 가 없었습니다. 청소년 기 라서 반항심도 있고 하니 교회를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교회에 가도 예배시간에 고개 푹 숙이고 골난 사람처럼 있다가 끝나면 도망 가버렸습니다. 엄마가 그 아이 때문에 너무 속상해 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변화를 받더니 기도하고 또 예배시간에 말씀을 너무나 사모하면서 주님을 만나고 늘 살다가 어느 날 엄마에게 엄마는 예수님을 지금도 만나고 계시냐고 묻는데 이제는 이 아이가 영적 호주가 되어 엄마의 지도력은 사라지고 그 가정에서 목자의 심정으로 오히려 엄마를 불쌍히 여기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교회에서 지도자와 이제 막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 그렇게 바뀐 사이가 된다면 그게 지도가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말씀을 경험하고 은혜 생활을 하기를 원하지만 지도자들 에게는 더 커다란 믿음의 비밀이 있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엇을 통해 경험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 하다고 하는 이 신실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 에 서 경험으로 말미암아 말씀하신 하나님이 정말 신실하신 분이란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그런 말씀의 신실함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는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그런 말씀의 신실함을 고백 하지 않을수 없는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깊이 배어있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고난이 올 때도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위로를 받고 유혹이 올 때도 말씀을 붙들고 이기고 너무 감사하고 축복된 일이 있을 때에도 그 말씀을 붙들고 겸손해 질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신령한 일들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목양 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로는 주식회사의 무슨 이사 같은 역할 아닙니까? 교회에 가보면 장로님들 의자를 한 줄로 쭉 놓고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앉는데 그렇게 놓고 회의를 하는데 모양부터 고쳐져야 합니다. 교역자실 지날 때 권위적 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건축적으로도 꽤 신경을 쓴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적으로 사람들이 보는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생각이 암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털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는 당회의실 에다가 교회 예배당의 기다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답니다. 그것도 한 방법일수도 있겠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의 정책을 결정하고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장로의 기능이 아니라 원래 더 고유한 장로의 기능은 목회자를 도와서 목회자와 함께 교인들의 신령한 생활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일입니다. 그래서 목양 적 기능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장로님을 몇 분 세웠는데 매주일 마다 밥 먹고 나서 당회의실 에 모여 목사님께 어느 권사님, 어느 집사님, 안보이더라는 이야기를 물으며 매주 그러기에 목사님이 심사가 편치 않으시다가 하루는 왜 나보고 물어 보는지 되물었답니다. 분명히 교회 헌법에 장로는 교인을 돌아보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교인을 돌아보는 장로가 매일 시험 치듯이 사람들이 어디 갔는지를 물어보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교인을 살펴야지 무엇을 도구로 그 일을 하고 있는지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그대로 지켜야 할지니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하는 삶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 알면 뭐합니까? 자기가 순종하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완전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순종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 하시던지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연약함과 자기도 어찌할수 없는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완고함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뜻을 세우고 온전히 순종함으로 살아가려는 삶을 안 살아가는 사람인지 그 두 부류의 사람을 어떻게 가려 내는가 하는 겁니다. 그 방법은 참회하는 생활 즉,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서 애를 쓰는데 우리 모두 온전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제외해 놓고 누구도 온전한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불완전한 사람인데도 마음속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온전히 지키면서 순종적인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비록 불순종 하는 때가 있더라도 항상 자기 깨어짐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고 참회가 있습니다. 후자의 사건들에게는 그런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장로와 목사가 함께 모여 당회를 할 때 그 목사와 장로들이 눈물로 늘 기도 할 수 있다면 교회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자기 앞에 약한 지도자, 지도자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나아가는 그런 교회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흘린 눈물은 성도들이 흘린 눈물보다 훨씬 하나님에게 의미 있는 눈물입니다. 지도자에게 교회를 맡기고 양떼를 돌보도록 위탁하셨는데 그 지도자들의 마음이 완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 살면서도 가책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일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처음 예수 믿을 때에는 눈물도 많고 은혜도 많다가 시간이 흘러 지도자가 되어서는 그런 눈물도 마르더라는 겁니다. 무엇인가 일을 열심히 하고 헌신도 하는데 마음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 눈물이 있고 흘리는 땀이 있고, 피에 절은 고백이 있는 그래서 장로는 목사의 목회를 감시 하거나 제동 거는 것이 아닌 목사를 도와 영혼을 돌보는 것이 첫 번째 의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에서 순교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올라가서 누구를 불렀습니까? 에베소의 장로를 불러서 양떼들을 부탁했습니다.
오늘날 장로를 이세상의 명예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 마음 아픕니다. 그렇게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 아니고 도리어 양떼를 잘 돌보라고 주신 직분 입니다. 여러분이 구역장만 해봐도 알지만 눈물이 없이는 구역장 못합니다. 일년간 구역장 하면서 눈물 없이 구역장 하는 사람은 안과 적 질환이 있거나 심령 적 질환이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목양이라 하는 것은 가슴의 속살을 베이는 아픔 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도 수련회하면서 교역자들 에게 그냥 꾸역꾸역 일만 만들고 자꾸 일을 늘려서 복잡하게만 하지 말고 한가지나 두가지 를 하더라도 피가 배인 목회를 하자고 했습니다. 붕대를 꼭꼭 감았지만 억제할 수 없는 피가 흐르니까 붕대에 피가 배어나오는 그런 피 배인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런 목양을 해야 합니다. 무슨 새 시대 의 새 방법이 어떻다고 해도 모두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지정하신 방법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기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방법위에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온 영혼과 심령을 드려서 피가 배인 사역을 할 때 그 피 배인 섬김을 통해서 영혼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그 섬김을 사용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와 같은 망가진 인간들에게 우리의 작은 섬김을 통해서 고치시는 그런 새 생명을 주고, 그들과 연관된 많은 사람들에게 새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 일보다도 소중한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교회 에서 장로님이 되어 교구에 배치가 되면 목사님을 도와서 교인을 부지런히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배고프면 채워주고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가고 죽으면 관에 넣어주는 그럴 수 있는 목자 적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장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야기하는 장로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피가 배인 섬김을 드리기 위해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 하나가 그렇게 변화가 안 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은혜 받는가 싶더니 어떤 날은 주일도 안나오고 갑자기 하나님 안 계신 것 같다고 하고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삶을 살다 어느 날 주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드리고 싶다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은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의 목숨만 받으시지 아무나 당신을 위해서 죽는다고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자기를 바친 사람들의 헌신도 받으시고 자기를 바친 사람들의 희생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말씀 안에서 바쳐져서 그 말씀을 온전히 그대로 지키면서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불순종 하는 사람들이 불순종하는 다른 일을 보고 맘을 아퍼 하는 법이 없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들을 보고 기뻐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소생함을 경험하고 그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것을 경험한 시인이 저들이 죄의 율법을 지키지 않기에 내 눈의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킴으로서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친교와 사랑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이 영혼에 베풀어 주는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슴 아픔이 점점 더해가면서 바로 피가 배인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교사나 구역장출신이 아닌 사람은 절대 장로를 하지 못한다고 못 박아 놓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목자의 마음을 조금 이라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에 그런 기도를 합니다. 첫째는 정말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으로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두 번째는 이렇게 선거되고 선거 끝난 후에는 6개월 동안 전심으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세워지고 훈련받는 과정을 통해서 정말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이 깊이 변화되어서 만져 주셔야 합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경험하다 책에서 십자가아래서 라는 시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안수를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안수를 받지 않는 이유는 성직에 부합하는 삶을 살 자신도 없고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다 안수를 받았는데도 난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하나님이 몰고 가셨습니다. 1주일 동안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데 도저히 자신은 안 되고 부족하다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데 마음의 괴로움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수 며칠 앞둔 새벽 혼자 남았는데 하나님이 가슴을 찢게 하시면서 놀랍게 만져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많은 헛된 것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앞에서 얼마나 분토와 같은 것인지 깨닫게 하시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만드시는 일이 예수님 온전한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프게 만져주셨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맨 처음 은혜 받아서 성령체험 했을 때 새벽에 기도하면서 성령님이 깊이 만지고 지나가시니까 기도 제목도 다 잃어버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생명이 붙어있는 날 동안 정말 주님을 순전하게 사랑하고 싶고 그분의 기쁨을 위해서만 살고 싶다는 소원이 다시 한번 들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안수 받으라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좀 만지고 지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깊이 만지고 지나가셔서 정말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로워진 그런 것이 있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마지막으로 보니까 그 이유가 두 가지 인데 권면과 책망입니다. 이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면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어뗳게 살도록 그들에게 인격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극해서 그렇게 살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렇게 성도가 살아갔으면 하는 삶을 자기가 먼저 살고 있어야 합니다. 완전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온전한 삶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집 판돈 이 커서 십일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장로가 되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인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장로는 목사와 함께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 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힘들지만 참된 성도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목회자와 함께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팍한 사람들이 지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개구리가 학을 지도자로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지도자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연약한 교인들을 연약해서 뒤로 물러가니까 그들을 붙들고 격려 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자극하고 이렇게 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면하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가 보십시오.
(예화) 미국에서 목회하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성도들이 점심때면 새까맣게 모여서 밥을 먹는데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열심히 써빙 하는 분들이 계신데 눈에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머리가 하얗고 벗겨진 노인네들이 식판을 들고 왜 저렇게 하시느냐 했더니 저분들은 저희들을 기쁘게 하십니다. 우리교회 장로님들이십니다. 교인들이 그 장로를 교회 오면 밥이나 나르는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절대로 그렇게 생각 하는 것 이아니라 얼마나 존중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 들이 바로 섬김의 정신입니다 그런 삶을 성도들 에게 격려하고 자극하고 이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따라 오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도록 자신이 보여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무의식중에 배우는 것이 의식주에 배우는 것 보다 더 뛰어날 때가 있습니다. 잘 권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에 대해서 무한한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장로가 되면 항상 무한책임 사원이라 합니다. 그 대신 그 장로의 섬김으로 해서 그 교회가 정말 아름답게 세워질 때 그때에 이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가 받을 축복과 면류관은 얼마나 클지 아무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책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책망한다 라는 것 은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방법은 인격적 이어야 하지만 현명한 책망이 필요 합니다 이 책망의 교육에 자꾸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책망자체 때문이 아니라 책망하는 방법이 너무 비인격적이기 때문에 교육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입니다 이 책망은 분별력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성 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와 싫어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해서 바울이 이야기 할 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그러면서 성경에 책망의 기능을 아주 높이 평가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올바로 가르침을 받고 꾸짖음을 받지 않으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굽은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책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나 신앙의 인격으로나 특별히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나 믿음의 정서에 있어서나 자기를 드리는 물질의 헌신에 있어서나 모두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존경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될 때에 많은 양떼들을 올바로 돌보고 그 들을 주님 앞에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지도자 들이 세워지도록 또 그런 지도자들로 변화되어 가도록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6. 안수집사의 자격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행6:3)”
‘집사’라는 말은 영어로 ‘deacon’인데 희랍어 ‘디아코니아’에서 왔습니다. ‘디아코니아’는 바로 이 6장에서 온 것입니다. ‘공궤를 일삼다’에서 ‘공궤’는 섬기는 것인데 특별히 식탁을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공궤를 일삼는 것, 희랍어로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인데 ‘트라페자이스’가 식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디아코네인’은 식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원래 이것은 종의 일입니다. 그래서 상전이 식사를 하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식탁 옆에서 거들어주는 그런 일을 바로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영어의 ‘deacon’이라는 말이 왔고 ‘집사’가 된 것입니다. ‘디아코노이아’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야말로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집사(執事)’라고 번역했는데 일을 꼭 잡고 집행한다는 뜻이며, 원래 가지고 있는 희랍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렵습니다. 어떻든 거기에서 집사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집사는 1년에 한번씩 교회에서 임명하는 집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외국에는 없는 독특한 제도가 한국에서 생겼고 아마도 명분을 좋아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심성과 잘 맞아떨어져서 선교적인 배려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섬기는 집사인데 자기라도 잘 섬겼으면 좋겠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안나오는 집사, 봉사 하나도 안 하는 집사, 시험이 들어서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집사부터 시작해서 잘못해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집사까지, 안 믿는 사람들도 집사라고 하면 그냥 그 자체 때문에 ‘이 사람은 교회에서 중요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고 예수 믿는 우리 자신도 집사가 와서 등록했다고 해서 ‘그 교회에서 굉장히 인정 받으셨군요’ 하며 호들갑을 떨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사가 너무 남발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것이 너무 싫어서 처음 교회를 하면서 집사를 매우 어렵게 해서 힘겹게 되게끔 만들었더니 수평 이동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한 번 집사이면 교회를 안나와도 집사님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하면서 ‘집사님, 이제 교회 좀 나오세요’하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임명하지 않아도 등록하자마자 자기들끼리 ‘집사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교회에서는 굳이 ‘성도님’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일종의 타협일수도 있겠지만 목회적인 배려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고 왔으면 우리 교회에서도 인정해주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우리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게 되는 사람은 좀 엄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남녀 모두 권찰을 거쳐서 집사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없는 직분입니다. 권할 권, 살필 찰인데 자기도 못 권하고 못 살피는 사람에게 누구를 권하고 살피라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떻든 권찰을 만들었습니다. 그 제도도 어떤 의미에서는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도입했습니다. 성차별 없이 남녀 모두 권찰을 거치게 했습니다. 처음 제직이 되는 사람은 교육받고 교리 시험 봐서 90점 맞고 권찰이 됩니다. 2년 있다가 다시 교육받고 시험 봐서 집사가 됩니다. 수평 이동 한 분들에 대해서도 교회 잘 출석하시고 십일조 생활하시면서 불신앙 하려는 고집이 없다면 기본적인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해서 연말에 제직 임명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국 교회에서 집사가 점점 늘어나게 되어서 60년이 된 어느 교회는 교인 1600명이 모이는 중 1200명이 집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어렵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제대로 교육을 시켜서 집사가 뭐 하는 직분인지도 알고 집사로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살기 위해서 눈물도 흘려보고 영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도 알아보고 집사의 직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것인가도 알고 하면서 집사를 세우려고 결정했습니다. 외부강사도 모셔와서 교육하고 이미 집사 되신 분들도 차례차례 재교육해서 이름만 집사가 아니라 속도 집사 같은 사람이 되어서 성경에서 집사를 세웠을 때에 그 집사의 의도를 감당해 나가는 그런 복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후에 적용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고 원래 성경의 기원을 따르자면 집사는 안수집사입니다. 본문에 보면 안수 집사 세운 이유가 간단합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면서 초대교회를 이끌어 갔는데 너무 가난하고 고통받는 과부, 고아들이 문제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훨씬 단명했기에 고아들이 많았고 어느 시대이든지 고아를 모두 돌보는 그 일은 국가에 있어서 참 어려운 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이 제일 중요했는데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분류된 것일 겁니다. 교회에서 구제를 해주는데 히브리파 과부들이 덕을 보고 헬라파 과부들이 빠져서 마음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그렇게 충만하게 역사 하시던 시대에도 교회에서 마음 상하는 일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들에게 반성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두고 이렇게 과부를 구제하는 일에 마음을 다 빼앗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본 업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일을 집사들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운 것이 집사 제도인데, 이 집사들은 모두 안수해서 세웠습니다. 그래서 안수집사가 된 것입니다.
외국목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1000명 모이는 교회에서 집사가 400명이라고 하면 그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면서 ‘매일 3000명씩 회개하고 세례를 받던 그 큰 예루살렘 교회도 집사가 7명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 사람들이 다 뭐 하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래도 다른 나라 교회보다 열심히 봉사한다’고 얘기할 뿐입니다.
이 사람들을 세우는 자격의 기준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성령이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영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집사는 장로와는 달리 지도자라기 보다는 실무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법 상으로 봐도 당회는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그 결정된 일들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섬기는 사람들이 집사들의 모임인 제직회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법 상으로는 안수집사를 포함해서 집사들에게는 일반적인 권리만 있고 교회 자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권한을 장로들에게 위임한 간접 민주 방식이 장로교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 방식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사람들의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살림살이를 맡아서 운영해가고 -그 때는 지금보다 교회의 기능이 단순하기는 했지만-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수 있도록 교회를 상당부분 맡아서 경영하고 돌보는 일을 안수집사들이 했던 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돈이 들어오는 제정의 출납부터 시작해서 그 돈으로 음식물을 사서 조직을 짜서 과부들에게 나눠주는 일은 아마 작은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번 설교할 때 3천명 5천명씩 회개하고 들어왔으니까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방대한 조직이 필요했고 일곱 명뿐 아니라 많은 돕는 성도들의 손길이 필요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조직적인 방법으로 이 과부 섬기는 일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는 일은 이처럼 영적인 일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일이라면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자격으로 꼽은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교회의 장로, 안수집사라고 하면 교회가 큰 일 있을 때 뒷돈 대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이 결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몇 주간동안 계속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날 같이 교회의 큰 직분을 맡고도 헌신에 인색하고 교회보다 자기 자신의 안일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지도자로 행세하고 있는 때에는 그런 경고의 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큰 책임을 맡겨주시면 더 많이 헌신할 것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특질보다는 영적인 특질을 하나님께서 더 지도자에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안수집사가 비록 지도자는 아니지만 미래에 지도자가 될 사람들로서 성도들의 본이 되는 사람들이어야 할진대 제일 먼저 성경이 요구한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수집사는, 권사와 장로와 마찬가지로 교회 오래 다닌 사람,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 재산가이기 보다 더 중요한 자격이 은혜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그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옛날에 은혜 받았던 과거가 있는 사람을 따지면 왕년에 집에 금송아지 없었던 사람 없고 거지도 3대 올라가면 다 부자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년이 아니라 지금, 현재입니다. 옛날에 신앙의 많은 경험도 있고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하기도 했고 그러고도 현재도 그 은혜 가운데 살려고 애를 쓰고 실제로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화하거나 글을 읽거나 그 사람과 교제할 때에 거기에서 어떤 영적인 것들이 느껴지는, 신령함이 있는 그러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장로님의 고백-그 어머님이 하나님께 아이를 주시면 장로로 드린다고 서원 했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교회의 기둥처럼 장로 노릇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가난하게 되었다. 장로로 피택을 받았어도 돈도 없고 지 위도 없는 자기가 꿈에 그리던 장로가 될 수 없어서 계속 거절하여 목사님의 마음 이 상하시게 하는 것을 어머님이 알고 호통치시면서 ‘내가 너 를 하나님 앞에 바 쳤을 때는 사람이 장로가 되기를 바랬지 돈이 만들어주는 장로가 되기를 바래서 하나님 앞에 바친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돈을 바친 것이지 너를 바친 것이겠느냐’ 하시며 아들의 믿음 없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다. 후에 그분이 장로가 되어 열 심히 교회 봉사하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셨다는 내용)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의 사람이 안수집사가 되면 물론 모든 것이 여유로워서 물질로 많이 섬기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자격일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항상 성경이 이야기하는 순서에 따라서 자격들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늘 우리의 필요나 이 세상의 흐름을 좇아서 자기의 마음속으로 상식적으로 장로나 집사의 자격을 정하는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그 영성에 있어서 집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 날마다 그 성령의 은혜에 붙잡혀서 말씀의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자기 깨어짐이 있고 진리에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있고, 그래서 성령 안에서 매일매일 강건해져 가는 영적 세계가 있는 믿음의 비밀이 있는 사람들이 집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자격입니다.
두 번째는 ‘지혜가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지혜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은 섬기는 일과 관련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지식이 얼마나 많은 시대인지 모릅니다. 초등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자신이 무식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어쩌면 그렇게 아는 것이 많은 지 모릅니다.
(예화: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일본어를 능통하게 한다는 잡지 에 난 이야기-인터넷 일본 사이트의 게임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했다고 한다)
아이들과 우주, 과학, 인체, 자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아이들이 잘 압니다. 그렇게 많은 교육들을 받으면서 지식은 많아지는데 문제는 지혜도 지식만큼 많아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식의 몰지혜화 현상을 초래해서 지식은 많은데 지혜가 너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더 아름다운 것은 지식보다 사실 지혜입니다. 공부는 많이 해서 지식은 소위 인텔리겐차라고 하는데 예의 범절이 없고 인간사는 도리를 너무나 몰라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고 자기가 또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생을 사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무지막지한 지성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모두 다 지식의 몰지혜화 현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이 없어도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 많이 못해도 부모로부터 인간사는 도리가 무엇인지 배우고 터득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인간사는 도리를 압니다.
그래서 젊은 아이들을 보면 어떤 때는 ‘큰일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무례함을 보았을 때 ‘그 무례함 때문에 내가 기분 나쁜 것은 잠깐이지만 저런 태도를 다른 사람들이 용납해줄까?’ ‘저런 생활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시집을 갔을 때 시어머니 시아버지들이 그것을 용납해줄까?’ ‘저런 태도를 그 남편이 용납해줄까?’ ‘저런 태도를 아내가 용납해줄까?’ 그러니 가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깨지면서 온몸으로 과외비를 지불하면서 티끌만큼씩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우리 자녀들에게 지혜를 가르쳐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어서 ‘싫은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꼭 필요할 때는 이해를 구하고 그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얘기해주는 것이 좋겠다. 그것이 목사의 임무가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당하는 사람은 참 고달플 것입니다. 조금 실수했어도 불러다놓고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렇게 살면 망가진 것이다’ 얘기하니까 ‘과하다’ ‘목사님이 조로 현상이 오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좀 지혜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을 구슬이라고 말한다면 지혜는 그 구슬을 꿰는 실입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구슬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슬을 한 되 갖다가 방바닥에 쏟아놓으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거의 쓰레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하나 이으면 목걸이, 팔찌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가치를 드높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혜는 그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영적인 것에 관한 것이라면 지혜가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처리해 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고 인간성이 좋아도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들이 일을 하게되면 일을 시킨 사람에게 항상 고통을 주고 일을 기다리고 있는 혜택받을만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감사한 것은 그래도 사회에서 직장생활 하면서 층층시하 높은 사람 밑에서 섬기는 일도 해보고 부하 직원들을 거느리고 관리자가 되어서 일도 해보고 이런 저런 것을 거쳐온 것이 제 나름대로 목회에 있어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게으르고 무능한 부하직원을 데리고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게으르고 무능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되어서 일을 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교회 일꾼을 세워놓고 상전 모시듯이 모셔야 합니다. ‘시간 있으십니까?’ ‘ 이 때 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준비해 놓으면 오셔서 봉사하실 수 있겠습니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너무 바쁜 사람도 뽑으면 안됩니다. 바쁘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절대적인 의미에서도 바쁠 수 있지만 중요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교회를 섬겼던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교회가 자기 자신의 전부 다였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은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를 건축하는 때와 농번기가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농사는 씨를 제때 못 뿌리거나 거둬드릴 때 제대로 안 거둬들이면 반드시 손농이 오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하는데도 믿음으로 교회 일을 먼저 하면서 복 받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안수집사는 장로와 마찬가지로 명예직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기에 평소에 교회에서 보기 힘든 사람들을 안수집사나 장로로 뽑아놓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더 높아져서 더 보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일은 누가 하겠습니까? 직장 일을 하다가 교회에서 전화 왔다고 직장 일 팽개치고 오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은 벌써 가르쳐드렸습니다.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교회에 일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달려오고 새벽에라도 달려오고 해서 교인들의 섬김이 모자라는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일을 해야되니까 반드시 거기에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지식이라도 있어서 교회에 맡겨진 일과 전문가적 지식이 맞아떨어지고 그 위에 지혜까지 있으면 좋지만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이치가 돌아가고 일을 어떻게 시키고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제공받은 목표를 위해서 어떻게 기능하고 그 일을 해나가야 되는지를 끊임없이 지혜를 공급받으면서 지혜롭게 된 사람, 그런 지혜가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일을 감당할만한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 안수집사가 될 때에 교회가 활동성 있게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손잡으면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을 시키면 ‘틀림없이 해낼 거야’하는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맡겨놓고도 불안합니다. 그래서 딴 사람 불러서 ‘저 사람 못할지도 모르니까 네가 뒤에서 망 좀 봐라’고 이중 삼중 해놔도 안심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안수집사가 되어서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잘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군대를 지휘하는 사단장이 있다고 칩시다. 사단 안에는 대포 쏘는 부대도 있고 총 쏘는 부대도 있고 탱크 부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장이 그런 일들을 모두 해본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기계 하나 하나를 모두 만질 줄은 몰라도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고 어떻게 예하에 있는 많은 부대들을 조직화해서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안수집사를 세울 때는 반드시 지혜가 있는 사람들을 세워주어서 목회자와 교회의 지체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의 인격에 관한 것인데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종종 교만한 사람이 있고 자기 방식대로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다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만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사람 안에서만 칭찬 받는 사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칭찬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제일 먼저 그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볼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알게 됩니다. 겉으로 화려한 경력과 활동적인 일들을 감당해 나아가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신자가 되어 가면 갈수록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 변화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남편의 신앙은 아내가 인정해야하고, 회사를 경영하면 그 직원들이 그 사장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인격적으로 그분을 존경으로 깊이 인정해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도 그러면 안되겠지만 언뜻 듣기에 아내가 너무 괴로워하는 남편,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편에 대한 흉이 나오고 인격이 나오는데 그 아내가 도저히 그 남편을 동의해줄 수 없는 신앙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가 동의 안 해주고 회사에서 직원들이 동의 안 해주고 가까이 사는 이웃집에서 동의해주지 않는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영원히 안수집사도 못해본다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아니니까 좀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변하겠지요. 변해서 이웃에게도 칭찬 받고 이웃에게도 존경을 받고 아내나 남편에게도 깊이 존경을 받고 회사의 직원이나 동업하는 사람들, 어떻든 윤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깊이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안수집사가 되었는데 그 사람이 늘 불법적인 거래나 하고 바이어와 술이나 먹고 파티나 하던 사람이었다면 확실한 것 하나는 그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절대 예수를 안 믿을 것입니다.
(예화: 한 형제가 세례 시험에서 계속 떨어졌는데 우리 교회는 떨어트리는 교회라고 오히려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인격이 너절하면 우리가 가지고있는 교회의 수많은 직함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부끄러움을 교회에 안겨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옛날에 오히려 그랬으면 그랬을수록 그 하나님의 은혜가 빛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정말 술 고래였어’ ‘나 옛날에는 정말 나쁜 놈이었어’ ‘옛날에는 맨날 지명수배 당하고 쫓겨다녔는데 지금은 성도가 되었지’ ‘옛날에 나 성질 나면 무서웠지. 우리 집 식구들은 꼼짝도 못했지. 요즘은 꼼짝해’ 그러니 과거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정말 안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렇게 사람의 인격이 정리가 덜되고 너절한 데가 있고 금전관계가 깨끗하지 않고 욕설이나 퍼붓고 가정에서 폭력이나 행사하고 만나기만 하면 동업자와 대판거리 싸우고 법정투쟁이나 하고 회사의 직원들에게 욕이나 먹고 하는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안수집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칭찬을 듣는 사람, 우유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고 선행과 신실한 인격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 바로 안수집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성령 충만한 영성, 둘째는 지혜 있는 일 처리, 세 번째는 칭찬 듣는 인격, 이것을 갖춘 사람들이 안수집사가 될 때 성경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뽑히는 것입니다.
7. 권사의 자격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롬 12 :8上)
교회 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고 지체들 마다 다른 지체 로 부터 도움과 섬김을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은사를 따라 섬김 으로써 다른 지체들을 온전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하나님이 교회를 설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옴 으로 말미암아 모든 창조 세계의 피조물 사이에 아름다운 교통이 다 끊어졌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서 그 모든 연결들을 믿는 자 들 가운데 특별히 회복하시고 그래서 그 믿는 자 들의 연합으로 교회를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은혜, 은사는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한 것이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나 은사를 교회를 위하여 모든 지체들을 위해서 참으로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단순히 게으른 것이 아니라 주의 진노를 살 만한 일 이라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달란트를 맡은 종이 땅에 묻어 두었을 때 후에 주인이 와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하는 것 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 봉사 할 수 있을 때 에는 이렇게 주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를 섬기는 것이며 이 봉사를 통해서 나로 말미암아 많은 지체들이 온전하게 된다 라고 하는 교회의 총제적 지체의식 속에서 이러한 섬김을 다하여야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한 성도의 진실함과 충성됨은 그가 이루어 놓은 위업에 비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큰 사명을 주시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일로 섬기도록 부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크다 작다함은 사람의 판단 일 뿐이지 그 크고 작은 일 들이 모두 핏줄과 같이 연결된 교회 속을 흐름으로 그 섬김을 통해서 교회가 교회답게 아름답게 그렇게 서 가는 것 입니다.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길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 가운데 권위 하는 자가 나옵니다. 권위 하는 자가 무슨 뜻 이냐면 바나바가 원래 권위자라는 뜻인데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나바가 권하고, 위로 하다는 뜻입니다. 근데 여기서 나오는 권위 하는 자는 권위 하는 일로 파라클레론 이라고 하는 단어 입니다. 이는 성령, 보혜사를 가리키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들어가면 파라칼레라고 하는 곁에서 부른다, 옆에서 변호 하다,이런 뜻을 가진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파라클레온, 이 기능은 사실 성령님이 하시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파라클레이토스 라고 성령님을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 뜻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갖는데 가르치는 자, 위로하는 자, 돕는 자, 이런 뜻 입니다.
그러니까 권위 하는 자를 그런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은 권위 하는 자에게 성경이 기대하는 역할이 무엇 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파라클레론 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간구하다, 간청하다, 요청하다, 혹은 변호하다 위로하다, 권면하다 등 여러 말로 번역 되었습니다. 어째든 그 근원을 들어가 보면 권위한단 말이 가장 어울리는 원조는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라는 것 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권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권사는 사람들을 잘 권면하기 위해서 세우는 직책입니다. 언제부터 권사가 세워지기 시작 했는지는 정확히 찾을 길이 없지만 확실히 권사를 세울 때 한국교회의 생각은 권하는 사람들로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는 별로 나이 제한이 없지만 권사는 45세가 넘어야 한다는 것을 법에 제한했습니다.
받은바 실력과 은사를 따라 어린 나이 에도 권사를 할 수 는 있지만 한국교회의 선배들이 생각 할 때 에 권사는 그래도 방금 은혜 받아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보다는 두루 신앙을 거치고 인생의 굽이굽이를 넘겨서 다양한 형편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살도록 잘 권면하는 역할을 기대하면서 권사를 뽑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장로가 교인들을 대표해서 교회의 중요한 나아갈 길을 정하고 교인들의 신령 적 사물을 전체적으로 살피고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깨어 기도하고 그것을 위하여 돌보고 일하는 직분이 장로의 직분이라고 한다면, 권사의 직분은 그렇게 전체적이기 보다는 사람, 사람을 위로하고 목회자를 도와서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섬기고 수고 하는 그런 일이 권사에게 기대하는 일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권사는 주일날 하루 와서 예배드리고 얼굴도 볼 수 없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권사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내고 영혼을 위해서 수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권사가 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권하는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성경 전체의 맥락 속 에서 몇 가지 로 간추려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첫째는 권할 내용이 그 사람에게 있어야 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권한다는 것입니까?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시험 든 사람에게 찾아가서는 믿음을 권하는 사람이고 신앙을 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마음에 믿음이 사라져 갈 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 마음속에 신앙이 점점 식어져 갈 때 다시 그 신앙에 뜨거운 불을 붙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를 때 이 길이 신앙의 길이라고 가르쳐줄 수 있는 권할 내용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권사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미국에 집회를 갔는데 점심 먹으로 가기 전에 교회의 중직들에 대해 목사님이 아주 칭찬을 하시면서 소개를 하셨습니다. 그중의 한사람을 소개하면서 너무 헌신되고 믿음이 좋으시고 물질로도 많이 섬기신다고 칭찬을 하시면서 어느 성도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고 모두 흩어졌는데, 그 목사님이 칭찬 하시던 안수집사님 하고 둘이 앉게 되었습니다. 질문을 하나 하고 싶어 해서 하라고 했더니 아주 황당한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의 요지가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가 진리라고 해서 열심히 믿는데 어느 순간에 모두 꽝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겁니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무지가 아니라 거듭 났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양자의 영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 삼으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느낌도 있고 증거도 우리 안에 갖고 있습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권사면 권면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권할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고 김치나 담가 주라는 것이 권사의 일이 아닙니다. 권사의 하는 일은 권면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권면할 내용을 반듯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자녀인지 주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고 구원이 무엇이고 하나님은 무슨 계획으로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는지 이러한 기독교의 이치에 대해서 깨끗하게 정리가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투표는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법에 보면 6개월간 훈련을 받아서 합격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교육을 아주 힘들게 시킬 겁니다. 6개월 동안 모자라는 분들은 밤낮으로 공부하고 내용을 꽉 채워서 장로나 집사나 권사나 열심히 공부 해야지 받는 둥 마는 둥 해서는 안 됩니다. 투표에서 당선되면 선서부터 할 겁니다. 6개월 동안 교육을 성실하게 받을 것 이며 불성실하게 받을 때 에는 임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두 보는 앞에서 서약을 하게 해야 하며 그것이 교회법이고 또 그렇게 받아야 합니다. 먼저 권사가 되려면 가르칠 수 있는 권면 할 수 있는 내용을 확실하게 지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로는 권면할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감화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권사의 하는 일은 낙심한 사람들 에게 힘을 주고 곤궁한 자를 도와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해 주고 용기를 잃은 사람들 에게 힘을 북돋아 주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을 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적으로 권면할 인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 5개 가운데 한 가지를 든다면 바로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는 것 보다 훨씬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들이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꼭 빼 놓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일생에 좋은 스승을 만나도록 자녀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며 좋은 목회자를 만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무언가를 잘못해서 마음에 번민하고 혹은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할 때에는 예수님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회개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는데 그때 또렷이 생각 나는게 내가 존경하던 어느 은사님이 그렇게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이라면 나처럼 이런 상황에서 우유부단하게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으셨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에 깊이 배인 사람들은 무언가 평범한 이야기를 해도 항상 비범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남이 이야기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에 배인 사람이 이야기할 때 에는 소리를 지르며 피를 토하지 않아도 조용히 전하는 그 고백이 나 말이 가슴에 깊이 와서 오래도록 찌르는 겁니다. 그런 힘이 바로 인격의 힘입니다 그래서 권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격을 갖추어야 됩니다. 인격도 예절도 없고 특별히 말에 있어 절제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권사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사람들이 교회를 허물어 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말에 있어 절제가 없는 사람들, 말로 많은 사람들 에게 상처를 주고 말로 인해 자신을 수시로 더럽히는 부정한 말의 방탕함을 성화의 물 속에서 정돈하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권할 수 없습니다 가서 좋은 말로 한마디를 권하고는 쓸데없는 말로 수백마디를 전해서 교회를 시험에 빠뜨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권사, 그러면 요즘이야 45세면 젊지만 옛날에는 권사님들이 나이가 많이 드신 분 들 이었는데 다행히 오랫동안 성화의 삶을 살면서 진실해진 인격을 가진 할머니들은 안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철이 들지 않은 할머니들은 머리만 하얗지 쉴 사이 없이 말의 절제가 없는 방탕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맥 한맥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진정한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런 것 들이 교회에서 여러 가지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무는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들을 권할 인격이 아직 안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능해 보이고 열렬한 신앙이 있고 말씀이 정리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성화의 은혜에 있어서 많이 다듬어져서 영혼들을 권면할 처지에 있지 아니한 사람들은 후에 권사가 되어야합니다.
가르칠 인격을 이야기 하면서 또 하나의 인격은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인격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하나님 열심히 믿고 교회를 잘 섬기고 하니까 교회에서 권사로 세웠답니다. 그런데 부자이기도 하신 이분이 그 시절에 공부를 아주 많이 한 분이었는데 권사가 된 다음부터 는 교회에서도 사람을 골라서 상류층만 사귀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상류층에 국한된 사람들만 사귀려는 이런 사람들은 한사람의 영혼 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나 학벌을 보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인격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장로님들 인데 그분들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기업을 가지고 있는 분 들 이었습니다. 선교를 한다고 아침에 일찍 나와서 영어까지 들어있는 성경을 가지고 나와서 수백 명의 직원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 선교회의 총무 쯤 되는 분이 마당에서서 늦게 오신 어느 분 을 직원들 앞에서 호되게 호통을 치는데도 잘 섬기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사회적인 지위가 어쨌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주님이 세워주면 그 자리에서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겸손히 낮아져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인격입니다.
권사 에게는 이렇게 영혼을 영혼으로 보고 사랑하는 깊은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초상이 나도 가보지 않는 권사, 1년이 지나도 한 구역, 교구에서 찾아가서 권해보지 않고,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참된 신앙의 길로 돌아오도록 권해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심히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에서 역할을 줄 것을 기대하지 말고 항상 자신이 나는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의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가난한자를 구제하고 눈물 흘리는 자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무지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낙심한 자들에게 힘을 주고,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혼을 사랑하는 순수한 인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세울 때 출신 학교를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물으신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베드로나 사도 뿐 만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직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분에게로부터 난 그분의 자녀도 또한 깊이 사랑하는 것이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인격이 권사를 할 사람에게 깃들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늘 사람들과 논쟁하고 인격적으로 되지 않아 교회에서 큰 소리 내고 목양도 받지 않고 목회자에게 대들기나 하고 봉사하면 작게 일하고 크게 분쟁 일으키고 그런 사람들이 권사가 되어서는 교회가 유익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권사는 오늘날의 우리교단의 헌법으로는 여성도가 하나님 앞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의 직분입니다. 그에게는 가히 장로와 맞먹는 영성이 있어야하고 그러한 인격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마치 연세가 많이 든 분을 경로대우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집사로 일생을 마친다고 해서 그게 불명예가 되겠습니까? 이 세상 에서 지위를 누리라 것이 하나님 앞에 큰 것 입니까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론대소하고 하나님을 섬긴 자들 에게 상을 주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권면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하는 은사를 주셨겠습니까?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 그런 것입니다 장로나 권사 특별히 권사에게서 그런 경향이 강한데 무슨 경로우대증 같이 생각하고 권사를 주는데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세워져서 그들이 영혼들을 섬기고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지 경로우대를 생각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사람들의 헌데를 고쳐주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가장 잘 따라야할 직분이 바로 권사인데 영혼을 사랑하는 인격이 없이 어떻게 그가 이 막중한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권사로 세움 받는 그 일을 말년에 경로우대증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신앙이 잘못된 것이고 마치 나이든 사람 대접해준다는 의미에서 연로하신 분 순서로 도장을 찍는 것도 잘못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은 영적인 직분들이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뽐내고 스스로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 그런 직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권면할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학교에 다니는 심정으로 예배에 꾸준히 나온다고 해서 권사를 시켜주면 안 됩니다 그 이상의 열렬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역장도 구역이 건강하기위해서는 구역장이 거룩한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매일 한번 씩 울어서 강단을 흥건히 적시고 구역장이 매일 자기의 구역식구들을 위해서 가슴이 아프도록 애통해하면서 눈물을 흘리면 교회는 뒤집어 집니다. 부흥사가 온다고 개혁을 한다고 교회가 뒤집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예배출석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어서 구역식구 하나 안나오면 마치 학교 갔다 밤이 늦었는데도 자기자식하나 안 들어 온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교회 안나오던 구역식구 하나 나와 구역예배 드리면 정말 뭐든지 섬기고 싶고 구역예배 나온 것이 감사해서 눈물이 있고 영혼들을 생각 하면 너무 기뻐서 잠이 안 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볼 때 나는 너무 기쁘고 또 그런 것을 보지 못할 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구역예배 안 나오면 자기가 손해지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구역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구역장 1년이면 손수건 3개는 갈아야합니다. 구역 식구들이 미끄러지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울지 않을 수 가 있습니까? 말씀을 제대로 들어 보지도 않고 구역을 떠나가는데도 눈물로 막아서지 않는 구역장이 어디 구역장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영혼을 돌본 것이 주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하든지 영혼들을 가르치던지 식당에서 밥을 하든지 피가 배인 섬김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영혼들을 맡고 있는 구역장, 교사, 그리고 교역자들에게 정말 뼈 속 깊이 우러나오는 말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나는 것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나는 새벽이라도 구역 식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구역장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구역장을 보면 또 가슴이 미어집니다. 영혼을 저렇게 밖에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그 영혼의 상태는 어떨까 걱정입니다.
다 무엇 때문입니까 열렬한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하신말씀이 생각납니다. 누가 와서 불을 질러서 모두를 태워 버렸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을 던져서 모두를 태워버리듯 그렇게 거룩한 열정에 붙잡혀서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준 영혼들이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눈물로 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입니다. 그냥 마치 공부 못하는 얘들이 갈데 없으니까 학교 오듯이 수요일이면 수요예배, 주일이면 주일예배 와서 앉아서 감동도 없는 예배를 꾸준히 드리다가 가는 그 종교적 성실성을 보고 권사를 찍는 것은 안 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찍어줘서는 안 됩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이 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열정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이 권사가 되어서 뭘 권하겠습니까?
선지자를 히브리말로 나비라고 합니다. 어원이 어디에서 왔느냐에 여러 가지 학설이 많은데 그 중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설이 나바라는 동사에서 왔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그 나바라는 말은 부글부글 끓다 또 나비라는 것은 부글부글 끓임을 당한 자 라는 뜻으로 수동태가 되어 선지자는 히브리 사람의 문맥으로 볼 때 선지자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당겨져서 이글이글 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것을 입을 열어 토해내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이 불길에 삼킨 것 같아서 견딜 수 가 없는 사람, 예레미야가 고백했듯이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말씀이 내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서 내가 견딜 수 가 없습니다. 라는 그런 고백을 가진 사람을 선지자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중에 열정이 없는 선지자 보셨습니까? 혹시 있다면 미끄러진 선지자, 아니면 수준이 현저히 낮은 요나 같은 선지자입니다. 요나도 끓는 것이 있었죠, 골부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 모든 것에 비춰볼 때 영혼을 권면하는 열렬한 열정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있고 있는 겁니다. 구역장들이 영혼들을 권면하기 위해서 걸어 다니는 거리가 몇 km나 됩니까? 구역식구를 권하기 위해 낙담하고 미끄러진 자를 권하기 위해 걸어 다닌 길이 얼마나 되며 그들을 위해 흘린 눈물이 몇 컵이나 될까 그들을 위해 가슴 아파한 날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권사가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열정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고사해야 합니다. 가슴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정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우리가 그렇게 냉정하게 섬길 수 가 있겠습니까?
(예화) 미국을 한번 갔는데 저녁식사 끝나고 집회 끝나고 나니까 밤 11시가 다 되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데 자기네 집에 꼭 들러서 차 한 잔 하시고 기도해 주고 가달라고 해서 갔는데 책을 많이 읽는 열렬한 독자 였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니까 자기가 은혜 받은 목회자가 들어오니까 부인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에 찻잔을 떠는데, 하물며 자기가 은혜 받은 목회자한테도 그렇게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렇지만 그 목회자는 요한복음 1장에서 얘기하듯이 그는 빛이 아니요 오직 빛에 대하여서 증거 하러 온 자일 뿐이라
그러니 그 빛이신 주님은 얼마나 고결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우리들이 그 사람보다 훨씬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겨야지 어떻게 냉담하게 섬길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뜨거운 열정, 그 열정이 그로 하여금 영혼을 섬기는 일에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고 영혼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많은 희생들을 기꺼이 감당 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금방 낙심하고 말 것 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사람들치고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만 들었던 사람 있습니까? 죽은 뒤에는 그랬지만 살아서는 반대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마치 메마른 들판을 한줄기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듯이 사람이 무어라 해도 사명이 시키고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섬기는 그 길이 영혼을 섬기는 길이고 하나님의 사명을 맡아서 걸어가는 사명자의 길입니다. 그러니 열정이 없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일년 365일 지나도 그 뺨에서 눈물 한방 흘리는 것을 본적이 없는 그런 사람들은 권사 찍어주면 안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심 도 읽을 수 없는 냉랭한 사람 그런 사람을 찍어주면 안됩니다. 육적인 혈기는 살아 있어도 신령한 뜨거움이 마음속에서 엿보이지 않는 이런 사람들이 권사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구역장이 가르치고 교역자가 가르치고, 권사들이 돌보는 사람들은 미끄러진 사람 낙심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 물론 구역장도 그런 사람들을 돌봐야하지만 이런 사람을 돌볼 때는 그들의 완고함을 능가하는 거룩한 열심 그들의 낙담하고 무너진 마음을 능가하는 꿋꿋함 그리고 그들의 비열함을 능가하는 성숙한 신앙의 인격과 열렬한 사랑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열렬함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커다란 일을 맡아서 하나님 앞에 이 일을 감당 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네 번째 그것을 권면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많은 공부를 하고 학식이 뛰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난번에 안수집사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바와 같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 제가 있던 교회에서 보면 구역장을 시켜줬는데 자기 집 에서 과일 한조각 내는 것이 부담스러운 초신자 들이 있는데 지혜로운 구역장은 미리 과일 몇 개와 쥬스를 사서 먼저 그 집에 가서 마치 그 집에서 준비한 것처럼 깨끗이 깎아놓고 구역식구들을 맞이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분별력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영혼들을 권면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울 때 교회가 큰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까? 특별히 이런 권사의 기능도 교회가 커질수록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목회를 해보니까 개척교회를 할 때는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다가 교인이 많아지면 사랑이 식는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정말 그런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선한 목회자는 변함없이 영혼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많아질수록 성도들은 점점 더 목회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목회자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작은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옛날이 그리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채워주나 그럴 때 예수사랑 가지고 가서 전하는 사람 안수 받지 않은 또 다른 목회자의 마음이 되어서 그 목회자의 마음에 있는 주님을 위해 쓰러져 있는 영혼들에게 전해주고 그 음성을 듣게 하고 그리고 그를 위해서 대신 울어주는 이일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직분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저는 권사들의 나이가 젊어지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이든 사람만 엎드러지고 넘어집니까? 젊은 사람들도 엎드러지고 넘어지지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넘어지면 젊으신 권사님들이 권하고 이렇게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그렇게 해주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항상 우리에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권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움바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어느 교단 에서는 45세 우리교단 에서는 50세 전부 다 젊어지는 추세인데 젊어지느냐 안젊어지느냐 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 영혼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수요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권사가 되어서 예수사랑 가지고 구석구석 찾아가서 영혼들을 권면하고 구석구석 찾아가서 영혼들을 돌보는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한다면 그 구석구석 마다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들이 울려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울어줄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있다 라고 하는 것도 교회에 얼마나 아름다운 재산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오늘도 우리들 모두가 이런 열정을 가지고 이런 지혜를 가지고 영혼들을 섬기고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이번에 권사가 되시는 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더 많이 맡기셨습니다. 인생의 황혼의 때에 남은 생애를 영혼들을 위해 권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기를 하나님이 많이 원하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권사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꾼을 세우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