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감당하기 원하는 이에게
(2004-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계14:4) 2004.12.24 교직원예배 1
2. 목회의 길 눈물의 길(행20:19上) 2004.12.30 교직원예배 4
3. 하나님의 심복이 되라(몬1:11-12) 2004.4.19 교직원예배 9
4. 사역과 인내(행20:19) 2004.5.3 교직원예배 12
5. 목표가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빌1:30) 2004.5.24 교직원예배 19
6. ‘나를 본받으라.’ 말할 수 있기까지(고후4:16) 2005.6.23 교직원예배 23
7. 교회 사역의 방향(딤후3:17) 2005.6.30 교직원예배 27
1.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
이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14:4)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지만, 성경의 여러 예언을 종합해 볼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끝까지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 매우 적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올 때 믿는 자들을 몇이나 보겠느냐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했던 것이죠.
그렇게 진실로 택함 받고 구원을 확정 받을 그런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한데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오늘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 안에서 두 가지 정도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정절이라는 것이죠. 여자로 인하여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여자는 음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배교의 큰 세력을 가리키는 것이죠. 거기 굴복하고 회유당한 성도들은 더럽혀진 성도들이죠. 그래서 이미 성도라고 하는 말이 합당하지 않은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정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배교의 세력 박해하는 배도의 세력과의 타헙을 거절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오늘날은 사실 그런 식으로 배교의 위험이 다가온다기보다는 사실 유혹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배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도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순결한 신앙을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굴복하지 않으면 만나게 될 큰 재앙이나 사태, 핍박의 칼날에 의해 벌벌 떨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해 전에 평생을 캠퍼스 사역에 헌신해 온 어느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70년대 80년대에는 캠퍼스에서 이단이 제일 무서웠는데, 90년대 들어서면서 과외 자율화가 되면서 학생들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연세대였는데, 기숙사에 가면 먹을 것이 지천으로 쌓인다는 겁니다. 통닭도 사가지고 오고 수박도 사가지고 오고 해서.....그렇게 넉넉하게 살았어요. 70-80년대에는 이단이 제일 무서웠는데 90년대 들어서는 향락이 젊은이들을 신앙 안에서 살게 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들에게 신앙의 정절이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순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다른 비결은 없고 매일 매일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세우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어요.
두 번째보면 그 사람들의 특징을 이야기 하는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를 따르는 자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죠. 우리들이 일생을 하나님 섬기면서 살다보면, 때로는 자기가 섬기고 있는 길에서 깊은 회의가 올 수 있어요.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이 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현재에 대한 회의, 과거에 대한 후회 이런 것에서 오는 많은 고민들이 뭉개구름처럼 피어나게 됩니다.
오늘 지적한 것과 같이 어느 한 순간에 세상을 선택하고 배교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랫동안 걸쳐 은혜가 식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 과거에 대한 후회 현재에 대한 회의가 생각나면서, 자기의 인생을 이제껏 이끌어오고 지탱해오던 하나님의 인도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좌우되기 쉬운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살고 하는데 모든 순종이 다 하나님 앞에 소중하고 좋은 것이지만 우리의 죄에도 큰 죄와 작은 죄, 질은 같지만 크기가 다르듯이 우리의 순종도 큰 순종과 작은 순종이 있습니다. 커다란 순종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닐 경우, 그 후에 이어지는 작은 순종들이 열매를 맺기가 참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잘 생각해보세요.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어려움이 생기면 주님을 생각하며 그 고난을 이길 수 있어요. 그런데 만약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어려움이 오고 고난이 오면 하나님 앞에 뭐라고 호소할 것입니까? 자신이 불순종해서 이길로 들어섰는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도움을 호소할 때 양심이 자유로울 수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항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로하시고 모든 기도를 들으시지만, 있어야 하는 그곳에서 하는 기도를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에요. 그것이 성경의 증언이에요. 저는 회심을 하고 30년 정도 지났는데, 하나님 앞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올바르게 선택하고 올바르게 걸어갈 때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의 길에 대해 자신있게 하나님꼐 호소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여기 보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여기 세워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제가 이 길을 걸을 떄 힘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선택이 하나님 앞에 분명하지 못했을 때는 항상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구원받은 무리의 특징은 어린양 예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잉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항상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길로 인도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이 길은 내가 가고 싶지 않은데 인도하시는 적이 있는가하면, 혹은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이 길인데 하나님이 그 길을 전적으로 막으시고 다른 길을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섭섭한 마음도 들고, 반항하는 마음도 들고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과 비교하는 마음이 들면서 마음 아프고 괴로운 생각도 드는 것이죠. 그러나 신앙은 다른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가장 선한 계획을 하나님 혼자 가지고 계시다고 믿는 것,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그 분의 인도를 내가 따르면, 오늘은 내가 가는 이 길을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오늘은 내가 가야되는 이 길이 너무나 끝이 없는 길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따라가면 마지막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그 기막힌 계획들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것이다 라는 것을 믿는 것, 그 하나님의 선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고 신앙입니다.
하나님꼐서는 항상 우리가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우리 인생길을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비록 지금은 가시밭길 같고 좋은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어두움이 길 끝에 짙게 놓여있어도 믿음으로 걸어가면 나중에는 반드시 그 길이 자기 인생에서 너무나 필요한 길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다니엘같은 사람이 그랬고 다윗같은 사람이 그랬고 요셉같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또 한 해가 오면서 이런 믿음으로 가졌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되어서, 그 분을 깊이 사랑하고 어디로 그 분이 이끌든지 삶의 가치 자체를 그 분과 따라가는, 그 분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일하게 하셨사오니 감사합니다. 신실하신 주님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붙들어 주셔서 이길을 매일 걸어갈 동안 하나님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제껏 우리 길을 인도하셨사오니 남은 길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어딜 가든지 주님의 인도를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2. 목회의 길 눈물의 길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20:19 상)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그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인턴쉽 과정을 훈련받게 하셨던 사랑하는 형제들을 오늘 이처럼 수요예배로 하나님과 만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셔서 좋은 사람들로 세워지도록 오늘 이 시간에 말씀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올라가는 대목입니다. 유언적인 설교로써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다가 남기게 되었습니다. 우선 오늘 살펴볼 성경구절 겸손과 눈물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목회의 본질이 뭔가 하는 것을 그 앞 18절에서 보여주고 있죠.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그러니까 이 목회는 사람들이 설교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또 목회는 돌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으뜸가는 목회의 본질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살아가야 하는 지를 자기 안에 가득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보여주는 것이 참 힘든 것이 왜 그러냐하면 겉으로 잘 섬겨도 그게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정말 보여줄 것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바리새인들은 잘 보여 주었고 또 보여주기 위해 노력을 그들처럼 많이한 사람들이 어디있습니까? 기도할 때도 사람들 보이는 곳에서 하고 말씀 가르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고 선을 행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본질에 충실한 목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본질에 충실한 목표가 되면 거기에는 항상 살아있는 나무에 열매가 달리듯, 거기에는 목회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건 다른 것이 아니라, 정말 그 목회자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영혼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보여주는 목회를 통해서는 이러한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도로 삼아 파송하시며 무리를 보며 느낀 마음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유리하고 고생하는 목자잃은 양같아 보이지 않았습니까?
가끔 약수터라고 써놓은 곳에 가보면은, 언제 쓰다가 폐기처분 했는지 바짝 마르고 쓰레기 같은 것들이 떨어져 있는 그런 약수터가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이 목회다, 라고 하면 그 본을 보여주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본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말에 근본적인 의미는 자기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영향력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계신 것이고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살아있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참으로 목회자가 어떻게 주님을 믿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인 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그때에 목회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에요.
그런데 참 신앙의 비밀이 여기에 있어요. 뭐냐하면 자기 안에 이런 하나님 은혜의 자원이 없이 본을 보이면, 항상 그 사람이 기억에 남는데, 자기 안에 있는 은혜의 자원을 가지고 참으로 하나님 믿는 것이 무엇이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면, 본을 보여주는 것은 사람인 목회자인데, 사람들 마음속에 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새겨진다 말이에요. 주님이 새겨져요. 시간이 없긴 하지만 궁금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 궁금하지 않아요? 나는 맨처음 이런 거 깨달을 때 되게 궁금했는데........왜 사람이 모본을 보였는데......사람들이 그 사람에 의해 모본을 봤어. 그러면 당연히 그 사람이 새겨져야 되잖아요. 요즘 가슴에 욘사마가 새겨져서 정신 못 차리는 일본 아줌마들처럼 말이에요. 봤어. 그리고 가슴에 딱 새겨져서 어쩔 줄을 몰라요. 그런데 목회도 같은 거 아니에요. 목회자가 본을 보였어요. 그런데 사람이야. 목회자가 어떻게 섬기는지, 어떻게 본을 보이는지 보여졌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딱 찍혀지는 것이 정상적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새겨지는 거야. 그게 왜 그럴까? 우선 왜 그럴까를 설명하기 전에 약간 옆으로 간 얘기를 한 두가지 하고 이 문제의 해답을 드릴께요. 이렇게 보는 거죠.
그렇게 자기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섬겨야 되는 지를 보여주지 않았어요. 바리새인처럼 보여졌어요. 그런데 그게 성도의 가슴에 콱 찍혀졌어요. 그건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참된 양이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이 뭐라하셨어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나니......그러니까 목자도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나니.....그러니까 참으로 하나님꼐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은 타뷸라로사가 아니에요. 타뷸라로사 그 백지상태의 내면이 아니라 이거에요. 우리들이 갓 태어난 아이들의 마음을 많은 심리학자들이 타뷸라로사 즉 백지상태로 봐요. 거기에 환경과 교육 이런 것들에 의해 막 그려간다고 보는거에요. 그런데 성도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마음에는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방해받는 곳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는 그 예수를 닮으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목사가 보여주는데, 그것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하는 본이 아니야. 그러면 주님께 속한 양떼들은 그것이 즉시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단 말이에요.
반대로, 주님의 양떼들은 그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신앙적으로 훈련이 덜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어도 안다 이겁니다.
오래도록 같이 신앙 생활하던 어느 교인 한 사람이 결국 우리교회 왔습니다만, 도저히 목회자와의 갈등 때문에 못 있겠대요. 그래서 내가 참아라, 참아 사람이 다 그렇지 뭘 그러냐 그런데 나중에 하는 얘기가, 형용할 수가 없는데, 아닙니다. 설명할 수가 없는데 하여튼 아닙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하여간 뭘 하든지 간에 이제껏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받아온 그것과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거에요. 그러한 감각을 양떼들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요구했던 질문, 왜 본을 보여주는 것은 사람인데 그 사람들 마음에 찍히는 것은 예수님의 본이 찍힐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간략히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한 사람의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신앙과 삶의 모본을 보여주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모본을 보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성도들이 본 것은 목회자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이에요. 형상을 본 것......그러니 당연히 그 목회자를 보면서 주님의 형상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요. 사람들이 각각 여러 사람이 모든 성향과 성격이 달라도 주님의 형상은 같아요. 그 형상은 마치 그 사람의 모든 재능과 성품을 담는 그릇과 같아요. 이 똑같은 그릇에 물이 담겼다고 해서 이 그릇 자체의 신비적 영향이 있어서 이 그릇에 담겨진 물이 모두 똑같아 지는 것은 아니에요. 성분은 다른데 같은 그릇에 담겨 있어요. 마치 하나님의 형상이 미친 영향이에요. 그건 바로 성경이 얘기하고 바울이 자기 교회의 성도들에게 끼친 그 본이라 그거죠.
그러한 본이 결국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인데, 그 영향력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19절로부터 설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다는 못하지만, 오늘 맨처음 보니까 겸손과 모든 눈물이며.......라고 했어요. 이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무제한으로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은 대개 비굴로 분류가 됩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거룩한 의미에서의 겸손은 반드시 앎, 지식이 전제가 된 낮아짐이라고 하는 것이죠. 사람들앞에서 몸에 밴 기질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 있죠. 대부분 비굴일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적 겸손은 그 겸손의 출발이 앎에서 출발합니다. 그 앎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앎이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하고 그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비참하고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며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서 오는 겸손함이에요. 그 겸손함이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적용이 되는 거에요. 그것에 대해 머리를 숙이는 것이죠. 이것이 진정한 겸손함이에요.
사도바울은 별명을 붙이자면, 십자가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서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렌즈 삼아서 하나님을 보고 그 십자가를 거울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 도리 안에서 본 자신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더러운 죄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이 겸손이 주님에 대한 온전한 앎으로부터 비롯되는 의미의 겸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본을 사람들에게 끼쳐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이 눈물은 우선은 그의 성화의 길에서 흘린 눈물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복음의 감화와 은혜를 끼친 놀라운 역사를 이룬 사람이었지만, 항상 자기 자신 안에서 이 죄가 자기를 넘어뜨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죄 때문에 자신이 곤고하다고 고백했고, 자기 안에서 이 죄의 법을 본다고 까지 고백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오는 처절한 자기 분투 가운데서 오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목회하는 일이에요. 남을 목회하는 것은 많이 어렵지 않고 조금 어려워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목회하는 일은 참 어려워요. 거기에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교인보다도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해 많이 우는 사람이 오히려 교인들을 더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많이 우는 사람, 그 눈물을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이 눈물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물론 이 속에는 영혼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눈물도 포함됩니다. 참으로 사명감이 없는 사람이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욕심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눈물 흘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나옵니다. 사실, 뒤집어 놓고 생각해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집을 다 바치겠다고 각서를 쓰고 공증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면 아마 건축헌금 안 낸 사람은 다 죽어야 되잖아요. 약속하고 안 낸 사람은 다 죽어야 되잖아요. 분명 그들은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모든 경건한 성도들이 그렇듯이 재산을 팔아 주님앞에 바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정리를 했어요. 그런데 그걸 그대로 이행을 안하고 반만 바쳤어요. 그런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요즘 교회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교인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반씩만 바친다면 뭐 오히려 칭찬해주겠네. 뭐 그렇게 잘못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두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 가버리셨어요. 그리고 교회의 부흥의 불이 딱 갇혀서 더 이상 번지질 않는 거예요. 왜 그렇게 문제를 삼으신거죠? 그 두사람의 개인적인 죄라는 면에서 그 둘을 심판하셨다기 보다는 공동체에게 이 사건을 모델 케이스로 해서 정말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적인 것, 그게 없으면 하나님이 교회를 곧 떠나실 것 같고 내 마음속에서 주님의 은혜가 모두 달아날 것 같은 그 결정적인 것을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이에요. 그게 뭐였어요? 처음에는 한마음이었어요. 그래서 그 한마음 안에서 성령님이 강림하셨고,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회심할 때에도 한마음이었어요. 그래서 주님 앞에 모두 드리고 싶었어요. 그 얘기는 무엇이었나 하면, 재산을 모두 팔아서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주님께 드리겠다는 의미이거든요. 왜? 이제는 누굴 의지하겠어요? 복음 전하는 이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것과 같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리라 하는 고백이었어요. 한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두마음으로 찢어진 거예요. 그걸 하나님이 아주 준엄하게 심판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후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 두사람을 모델 케이스로 해서, 그가 무엇을 하든지 두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한 사람이 두 마음을 품으면 그건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교회적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개인적인 사건이었는데, 교회 부흥의 불길이 멈춘 거예요. 더 이상 번지질 않는 거예요. 교회가 뭘 잘못했나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에 있어서 한 사역자가 쏟아놓는 그 뜨거운 눈물은 이 마음이 한 마음일때 흘러나오는 증상이지 두 마음인 사람이 그리 되는 법은 없어요. 물론 두마음을 품어도 이런 건 있을 수 있죠.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할 책임과 그것을 감당하기 싫어하는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피곤해서 흘리는 눈물은 있어요. 그건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는 눈물이에요. 순전하고 순수한 눈물이 아니에요. 한 사역자가 주님께로부터 맡겨진 사명 앞에서 자기 몸을 다 부수어서라도 그 사명을 완수해야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비통하게 통곡하는 눈물이 있는 목회를 할 때 그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이에요.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감화를 주고 있는 그 윈 형제의 고백을 보면 감옥 속에서 자기 형제에게 편지를 쓰죠. 나는 이 감옥에 들어온 것이 하나님이 특별히 나에게 사명을 주어서 보낸 파송지다. 여기서 무거운 쇠고랑을 차고, 몸이 부스러질 것 같은 중노동에 시달리지만, 나는 이것이 사명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파합니다. 내 육신은 비참하게 학대를 받지만 내 영혼은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 마음의 싱글니스(singless) 그 마음의 하나됨에서 오는 그 섬김이 커다란 감화를 불러 일으켜요. 그 속에 주님의 형상이 비춰요. 하나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진리의 불길을 던져요.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불꽃처럼 타올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이 되고 역경과 시련의 상황을 허물어뜨리는 해일과 같이 밀려오는 능력이 되요. 모든 것이 한마음으로 모아질 때, 이런 능력있는 섬김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사도바울이 오직 그랬어요. 빌립보서에 이 한마음 사상이 잘 나타나있어요. 지금도 나타나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라 내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라는 로마서의 고백,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려 하나니, 그 한마음으로 달려온 사역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의 사역의 길에는 늘 눈물이 있었어요. 그의 능력, 그 큰 권세를 주셨는데도 그것들이 그의 눈물을 감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며 그 길을 걷고 또 그 길을 걷고 그 길을 걸은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사람의 삶이에요.
저는 얼마 안 된 목회 사역입니다만, 해오면서 가장 어려운 건 뭐냐면, 이 올곧은 한마음을 품는 것, 너무 너무 어려워요. 우리 아들이 몇 달 전에 그래요. 아빠 참 이상해 ·.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마음 지킴의 교리를 읽어보면 다 나오고 그렇게 쉬운데, 왜 나는 그걸 지키려하면 그렇게 잘 안 되죠. 우리 교회에 나오는 김수미 자매 아들내미 세현이가 그러더래요. 너 왜 이렇게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걸 했니? 그러고 야단을 치니까 4살 밖에 안 된 녀석이 막 울면서 그러더래. 엄마 나도 사실은 안 그러려고 했거든.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죄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어. 그러면서 막 울면서 하나님 도와달라 그러더래. 그게 그렇게 어린 아이도 느끼는 죄의 힘이에요. 그걸 파하고 거룩에 속하는 비결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뉜 마음으로는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오직 하나, 하나된 마음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불붙고 우리의 마음은 깨뜨려져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삶을 사도바울이 살았던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여기 있는 모든 교직원들도 다 사명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올곧은 길을 가서 여러분들은 죽으십시오. 다 죽으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우리를 붙들어주십시오.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고 그래서 겸손과 눈물이 있는 섬김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섬김과 우리의 기도, 우리의 말씀의 증거와 모든 것들이 마음이 나뉨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영광스럽게 타오르지 못합니다. 주여. 은혜를 내려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주님이 붙잡아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한마음으로 주를 섬기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모든 지체들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하나님의 심복이 되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몬1:11~12)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성실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붙들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는 생소한 이야기겠습니다만, 기억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그 사람들이 돈 버는 데만 눈이 먼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해서 돈을 벌고 고용을 늘려서 사회를 번영케하는 것이 간접적 목표입니다. 그리고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보면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처럼 그렇게 무섭게 경영을 합니다.
미국에서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한국에서 아이엠에프때 기업이 한국 기업이 막 팔리는 것을 보면서 한 사업가가 통탄을 하는 거예요. 저렇게 좋은 기업을 헐값에 외국사람한테 팔아서 외자를 끌겠다고 하는데, 몰라서 그렇지 저 사람들은 돈에 관한 한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기업이 그렇게 팔려나가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와 했어요. 그런데 그분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국 사회는 오늘 이렇게 번영한 나라를 이루고 있지만 합리적이고 경쟁적인 자본주의 정신이 사실 오늘날 미국을 만든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오늘날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들시 미국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경쟁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사실 잘 못한 점도 많죠. 왜냐하면 삶의 고요와 평화를 앗아가버렸어요. 그 치열한 경쟁속에서. 그런데 이제 그런 경쟁의 일환인데 말이죠. 우리가 이제 직장다니다 그만다니라고 정리해고 하고 하니까 길거리에서 데모하고 그럴 때 미국에서는 무한한 권한을 회사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일을 잘 하잖아요. 그러면 승진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에 출장을 다닐 때 1등석 비행기 티켓을 쿠폰으로 줘 버립니다. 그 쿠폰 한 장에 한 8천만원 가요. 그걸 그냥 줘요. 왜 그럴 거 같아요. 여러분 이걸 생각해야 해요. 그 사람이 3등석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미국서 살라가면 3일 동안 일을 못해요. 시차 때문에. 그런데 1등석을 타고 가면 누워서 11시간 자고 도착하는 거에요. 그러면 비행기서 내리자마자 업무가 시작되어요. 워낙 유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대우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다 그 사람이 회사에 유익을 못 끼치죠?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회사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거에요. 너는 해고됐다. 언제요? 어제 밤에. 넌 해고됐다 이거에요. 그럼 짐이라도 가져 가겠다. 필요없다 이거에요. 집으로 부칠 테니 집에 가있어라. 그런데도 뭐 깨고 들어오면, 이제 현존건조물 주거 침입죄가 성립되는 것이죠. 그런 걸 당연히 생각해요. 그러니 그들은 어딜 가나 자기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분투하는 거에요. 그러니 사회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세요. 회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경쟁상대가 도리 사람들과 싸우고 이겨서 그렇게 종업원들을 거느리고 일한다 이거죠. 그러면 참 살풍경이고 무섭구나 생각되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대우해 주는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그냥 일하는 근로자들이에요. 그럼 누가 있느냐? 회사마다 심복들이 있어요. 심복들은 달라요. 이번에 삼성에서 이사들에게 연봉을 89억씩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죠? 그렇게 큰 돈이 아니어서 관심이 없나봐요? 일반적인 고용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은 근로자들이에요. 심복은 달라요. 심복은 거의 그 기업의 오너와 혈육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일을 하셔요. 이 세상을 고치는 일을 하시잖아요. 예수 믿은 사람 중에 일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요. 하다못해 주보 만들고 교회 마당을 쓸고 구역장 독촉으로 교회 끌려나와 화장실을 청소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일해요. 조금씩 다 일한다 이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누구겠어요? 심복이에요. 심복. 모세같은 사람이 하나님 집의 근로자일 뿐 아니라 심복이었단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마치 미디안이나 아론이 보기에는 모세를 편애하시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특별히 사랑하신 것이에요. 내가 너희에게는 꿈과 이상으로 말하였거니와, 내 종 모세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와 함꼐 대면하여 말하였음이라, 심복이에요. 심복.
그 심복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편애를 받는다는 의미에서의 심복은 그런게 아니라 이거죠. 더구나 하나님은 불합리하게 사람들을 편애하고 그런 것 없으세요. 물론 우리 사람은 그렇잖아요. 저 사람 주는 것 없이 미워, 괜히 미워하는 거죠. 받는 거 없이 이뻐. 이게 실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후배 하나는 군대 생활을 하는데, 아주 이를 가는 거예요. 자기가 특정지역 출신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군대 생활 하는 동안 너무 박해를 받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거 없어요. 심복이라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다 나누어 가진 사람, 결국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에 가깝게 공유하고 있는 상태에요. 그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기도할 때, 여러분도 그런 기도 하시죠? 주님이 여기 게셨더라면 사셨을 그런 삶을 우리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입술의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죠? 사도 바울이 말했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걸 품은 사람은 예수 닮은 삶을 산다이거예요.. 그것이 심복 아니에요?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일을 행하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리더가 깊은 외로움에 빠져서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 지 모를 때, 일하는 수많은 근로자들 생각 안 나요. 심복이 생각 나는 거에요. 그래서 불러서 물어도 보고 의논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람에게 자기 속내를 보이며 기대기도 하고, 이게 바로 심복의 가치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실 때, 근로자처럼 보시겠어요? 아니면 심복처럼 보시겠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 일, 그걸 통해 톱니바퀴가 이루듯이, 합려하여 선을 이루면서 교회를 이루어 가시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아픈 마음이 있어요. 외관상으로는 내가 그 일에 책임을 지고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사람이 심복이 아니야. 그럼 인제 그 조직에, 신앙적 세계의 그 조직에 불행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성소에 맡겨졌을 때, 아직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지도자는 제사장 엘리야죠.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니까 사무엘이 선생님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니 부른 적 없다. 또 조금 있다 와서 또 부르셨죠. 아니 안 불렀는데......그때 이 엘리 제사장에 직감적으로 스쳐가는 것이 있었어요. 옛날에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불러 주셨을 때, 그때 그렇게 심복처럼 하나님을 받들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사무엘 또 들리면 이렇게 말해라, 예 하나님 제가 여기 있으니 하나님 말씀 하옵소서.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지도자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님이 오히려 이 지도자가 아닌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거에요. 엘 리가 영적 지도자로서 지위는 지키고 있었지만, 이미 하나님의 심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났어요. 그리고 옪지 않은 자식 사람에 깊이 빠져서 자기의 성스러운 임무를 더럽혔어요. 하나님 새로운 심복을 찾으신 겁니다.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쉬워요. 그런데 중간에 얼마든지 내가 하고 있는 일, 이것을 통해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의논하고 싶은 심복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마음을 먼저 보여 주시고,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아픈 마음을 알아주시고 싶은 그런 심복이 되는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일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끊임없이 본받아서 그분의 마음이 자신의 모형이 되어서 그것에 자신이 찍혀야 돼. 마치 로마시대에 동전에 가이사의 형상이 찍히므로 한 조각의 쇠붙이가 큰 재화를 팔고 살 수 있는 큰 가치가 있는 돈이 되었던 것처럼.
주님의 마음을 본 받지 않은 성도는 쇳조각이에요. 거기 자기 마음이 찍혀야되요. 그럼 이것이 화폐보다도 더 큰 가치가 되는 거에요. 그게 심복이에요.
우리 교구의 목사님들 많이 계시고 전도사님, 강도사님들 계시지만, 그럴 거에요. 사역을 하다보면 교구에서도 너무 어려운 일을 만나고 그럴 떄 있어요.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에요? 심복이에요. 심복. 여기 팀장도 있고 실장도 있지만, 제일 어려울 때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심복이에요. 심복.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주님의 심복이 되어야 해요. 주님의 심복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정말 주님이 내 자리에 계셨다면 하셨을 것같은 그런 일을 그런 마음으로 해 나가야 해요. 그게 미덕의 삶이에요. 이세상에서 높은 지위와 많은 보수, 박수 갈채를 받는 명예 이런 것들은 삶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 거에요.
그러면서 정말 주님의 심복이 되어야 해요. 또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나 또 여러분들이
그 자리를 떠나고 나도 우리가 계속 생각이 나는, 누가 와도 여러분이 만족을 주었던 것만큼 다른 사람이 만족을 줄 수 없다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축복이겠어요? 심복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도록 우리 한번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4. 사역과 인내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9)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이처럼 새봄의 날을 허락하시고 또 이처럼 복된 날 주님께 예배하며 한 주를 시작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주님의 따뜻한 인격과 사랑이 우리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우리로 주의 뜻대로 행하게 하시고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우리가 섬기는 것이 주님의 창조하신 창조목적에 조금이라도 이바지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복된 사람과 그 사람이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것은 결코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된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복이 있고 그것 때문에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사람들이 그 복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복이 부딪치는 그곳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앎을 소유하게 되고 그리고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세상이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중 대표적이 사람이 요셉 같은 사람, 아브라함 같은 사람, 믿음의 족장들이나, 또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사도바울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요? 제가 젊은 시절에 매우 좋아하던 인물 요셉은 그런 일에 있어 현저한 증인이 됩니다.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복이 그 보디발의 집과 그의 온 전토에 까지 내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요셉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복된 관계였고 하나님이 그에게 복된 사람이 되게 하셨고, 그에게 복을 내리셨기 떄문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보디발과 그의 온 집 사람들이 복을 경험케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며 일생 살아갈 떄, 이렇게 복 된 사람이 되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복음 사역에 있어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매우 엄중한 부르심이고 그리고 누구에게나 함부로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중요한 특권입니다. 여러 직원들은 신약 시대로 말하자면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애썼던 평신도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은 따로 직업이 없었고, 아마도 그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사례 제도가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생계를 교회에 위탁하면서 혹은 텐트 메이커로 스스로 자급자족하면서 자신의 삶의 양태가 어떠하든지 주님을 전적으로 섬기는 그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단순히 직업 이상의 것으로 생각해야 하고, 직장에 다닌다는 생각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맨 처음 세우고 직원인 여러분들을 부를 때부터 저는 교역자와 여러분들을 종류와 방식은 다르지만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평신도 사역자로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고 그러한 영적인 자존감 가운데 여러분들을 대하려고 애써왔습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언젠가 교회 지체를 만나 진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흘러간다고 방황하지 마라, 네가 이 교회에 남아 끝까지 봉사하고 이 교회에서 정년 퇴직하면 노후도 교회에서 책임진다고 말이지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이 소명을 아주 진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런 소명이 없이 세상을 살아갈 떄도 우리가 복 된 사람이 되고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복이 필요한데, 우리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최 일선에서 복음 사역에 헌신하고 있을 때 나의 사역에 하나님의 복이 없다, 한다면 그건 아주 중대한 문제이고, 교회 한쪽이 마구 부패해가거나 썩어내려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둥 수십 개가 떠받쳐서 한 건물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 두 개 정도의 기둥이 썩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건물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죠. 그러니 그건 기둥으로서 쓸모가 없어진 거죠. 그런데 그런 현상이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면 그 건물이 언젠가는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각 기둥은 모두 내가 건강하게 여기 서 있음으로 건물이 떠받쳐지고 있다라고 하는 중요한 존재이유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감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세워졌고, 교역자나 여러분들이 아무리 작은 부서를 맡고 있다 하더라도 작은 부서라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간이 췌장보다 직장보다 훨씬 크지만, 직장암에 걸리면 죽어도 간암에 생긴다고 금방 죽는 것은 아닙니다. 잘라내면 살 수 있죠. 일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고 기둥이 어디 서 있는가 하는 위치가 아닙니다. 문제는 각 기둥 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이 건물을 떠받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죠.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절대적인 기준을가지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죠.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맡은 부서가 어디든지, 특히 그 부서의 책임을 맡고 있는 여러분들의 경우에, 그 부서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지 그것을 한번 정직하게 물어보시고, 그런 축복들이 있다면, 그것을 계속 주실 만큼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들로서 순전하고 온전하고 하나님께 모아진 마음, 나뉘어 지거나 찢어진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아진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존재할 뿐, 현저히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또 어떻게 하나님의 시선을 붙잡아서 여러분의 사역에 하나님이 복 주시고 싶은 그런 섬김의 현장이 되도록 진지하게 생가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쓸모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때부터 거기서 3년 넘는 세월을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수고했습니다. 성령의 특별한 시키심을 따라서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데, 거기서 이제 어떤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죽을 지 모르는 때였습니다.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해서 마지막 유언과 같은 것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이 소아시아 들어온 첫 날부터 이제까지 내가 당한 고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도 다 알지 않느냐 모든 유대인의 간계와 모든 시험을 참고......
주님이 보내주신 그 사명지가 풀밭에 돗자리 깔아놓고 도시락을 먹는 것처럼, 주님이 보내 주시고 내가 순종하기만 하면 그런 일들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이 불순종하다가 죽었나요?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지에서 죽었습니다. 핍박 받는 사람이 엄한데 갔기 때문에 고난 당하고 핍박 당했나요? 아닙니다. 주님이 보내 주신 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고난 당하고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 참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전승에 의하면 이 바울은 원래 사울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사실 참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성격이 급하고 목이 짧고 키가 작고 그리고 아주 감정적인 사람이었다고 해요.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과격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성화되긴 했지만 이 잠재된 성품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대 사도 베드로를 이방인들 앞에서 면책하는가 하면 또 선교하는 일 때문에 바나바와 크게 다투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바로 바울의 사울 적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마지막 선교의 부르심을 받아 마지막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까지 모든 시험을 참았습니다. 참았습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그 사역을 이렇게 보면서 주님이 보내주셔서 응답을 받았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왔지, 나를 포함해서 자의로 여기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항상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맨 처음 보냄을 받을 때는 주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지만, 그러나 저절로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죠. 거기에 많은 괴로움과 고난이 있어요.
혹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님 고난도 고난 종류죠. 일을 많이 해서 힘드는 거 백번 참을 수 있구요 월급이 적어 굶는 것도 참을 수 있구요. 그러나 이러이러한 종류의 괴로움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거 없어요.
내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예수님이 구유에 오셔서 그 다음 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나요?> 아니죠? 그러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유대인들에 박해 받으시고 죄인들에게 멸시 당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곤고한 자를 위로하시던 그 다양하고 많은 섬김, 거기에 따르던 고통들은 사실 예수님이 원래 오신 목적하고는 좀 다르잖아요. 예수님이 원래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에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였어요. 다른 거 사실 안 하셔도 상관 없었다 이거에요. 그래도 예수님은 구유에서 오셔서 유모차를 타고 골고다로 가신 것이 아니에요. 쓸모 없어 보이는 하나님이 지어주신 것 같지 않은 고난을, 같지 않은 인간들과 더불어 살면서 다 당하셨어요. 그거에요. 그래서 많은 여기 유대인의 간교를 인해 시험을 참는 것들 다 복수로 나와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도 참아야 해요. 잘 참아야 해요. 그것이 무엇이든 잘 참아야 해요. 목회 길을 10년 이렇게 걸어오면서 정말 이렇게 생각해요. 모든 목회자들이 원초적인 고난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사례금을 못 받는다, 복음을 전하다가 불신자에게 박해를 받는다, 진리의 말씀을 전했더니 이것 때문에 투옥을 당한다,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목회의 시험과 고난이 그런 원초적인 것만 옵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일을 잘못하고 그래서 제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도 저에게 성화의 도구라고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여러분 천국에서 상이 많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그렇게 다양하게 다가오는 거에요.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는 것이 모험적으로(?)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요. 주님이 하늘 높이 오르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을 때, 단지 십자가에 달리셔서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그 이름을 만물위에 뛰어나게 하사 만물로 그 발 아래 무릎 꿇게 하시고......그러니까 한번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언덕을 오르듯이 계속 복종의 삶을 사시다가 그 복종의 삶의 마지막의 꼭지점의 삶이 바로 십자가 죽음이었으니, 복종의 삶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죽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보세요. 주님을 위해 훌륭하게 고난당한 사람들이 어제 놀다가 오늘 고난의 장으로 떠밀린 사람들 없어요. 사람들이 흔히 하나님, 내 생명을 받으시옵소서 그러는데 하나님이 그거 받으셔서 뭐하시겠어요.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받으시는 거예요. 보석과 같은 연단의 과정이 있고 마지막 화룡점정과 같은 그의 헌신을 받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잘 참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어서 사명지에 세워주셨는데 조금 어려움이 오면 아 집어치워 버리고 돈 많이 주는 자리 다른 자리나 가볼까? 까치발을 뛰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어디 좀 편한 데 없나? 이런 사람들이 어디 복 된 사람이 되겠어요? 그 사역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어요? 절대로 하나님이 복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참아야겠는데 이 참음의 원천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오늘 보니 이 참음의 원천이 어디로부터는 왔으니까 이 사도가 엄청난 그 괴로움과 고통을 참았는데,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오직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일까요? 자기를 희망없는 죄인의 길에서 부르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 거기에서부터 이 참음이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죽음의 과정이에요. 사랑은 그 자체가 고정적 개념이 아니라 이행적 개념을 지닌 동사의 성격을 가진 명사에요. 그래서 사랑은 이행적 개념이기 때문에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 중에 완전하고 순결한 사랑은 없어요.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그것은 항상 어느 정도는 자기에 대한 사랑을 내포해요. 그런데 그 자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참된 사랑과는 정반대의 개념이고, 참된 사랑 까리따스의 대응적 개념으로서의 꾸삐띠다스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 아래 있는 신자에 내재하는 죄와 같이 상극적인 것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들이 계속해서 죄를 죽임으로써 은혜가 순전한 은혜로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섞여 있는 그런 꾸삐띠다스, 자기 사랑을 계속 죽임으로서 온전한 사랑으로 이행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랑에 있어 자기 죽임은 필살의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에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부단한 자기 죽음의 과정이고 이 자기 죽음의 과정은 또한 항상 필살의 고통을 동반해요. 그런데 이 오래 참음은 바로 이 자기 죽음의 한 과정이란 말이죠. 이 자기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그 의지와 뜻, 그리고 그 경향성을 온전히 수납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에요. 왜 견뎠을까요? 바울도 한가닥 하던 사람이고 성질 있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죽어지냈을까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비록 예수님을 만나고 생애적인 소명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사람 속에는 여전히 사울이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일 뿐이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죄 가운데 구원하신 구속의 주인 되신 주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고난을 받아도 자기를 세우신 그 자리에서 이루고 싶어하는 그 하나님의 의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고 싶어하는 의지의 경향, 이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자기 의지를 꺽게 만들었고, 그 분의 의지가 실현될 때까지 참으면서 기다리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이런 고통을 동반한 자기 죽음인 동시에 또한 목적이에요. 쉽게 말하면 사랑하니까 참는 것이고, 잘 참으면 그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온전해지는 것이에요. 섬기면서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항상 그것을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밖으로부터 오는 부당한 고통이 내 인격에 가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실이 아니네요. 아니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지 전체적으로 사실이 아니에요. 항상 우리 안에 결함이 내포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그런 모습을 너무 잘 아시기 떄문에 우리를 그 사랑에서 연단하시는 거에요. 우리가 부름 받았을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그 고백이 늘 살아있는 지 이런 시험을 통해 시험하셔요.
또 이런 오래 참음의 자기 죽음의 과정을 통해 사랑이 성취되게 하심으로 까리따스 안에 섞여 있는 부당한 자기애를 섞어내어 예수님만 사랑하도록 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디에 세워주셨던지 간에 우리가 거기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도록, 나는 죽고 예수는 사시고.....가장 힘든 것은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경험하는 자기 죽음의 고통이에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 죽음과 고통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로 천국에 대한 소망의 발목을 붙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기를 다 버리며 사랑하는 사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에 분열이 있는 곳에 용서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면서 자기를 다 버리며 사랑할 때, 역설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헤어질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헤어질 준비를 하게 되는, 왜냐하면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과정을 통해 사랑을 완성해 가는 사람은 이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깨달아요. 그래서 온전히 까리따스의 사랑만 있는 그 나라를 그리워 하게 되는 거예요. 소망에 넘치게 되는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바울이 살았기 때문에 고난이 넘쳤지만 하나님의 사랑도 넘쳤어요. 그래서 자신의 이 유언적 설교를 받들 충성스런 장로들까지 와서 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을 받들게 되지 않았습니까?
뒤편으로 넘어가보면 사도바울이 아시아에 넘어온 후 3년 반 동안 있으면서 실천했던 그의 삶의 모토가 나옵니다. 주께서 친히 이르시기를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함이라. 아무 것도 없는 천막 깁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강물처럼 흘러가면서 끊임없이 베풀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헬라인들에게도, 자기의 동역자들에게도 모두 가시고기처럼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렇게 참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랑이 사도 바울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에요.
아침마다 제일 처음 사역하기 전 기도할 때, 그 자리가 여러분의 생명인 것처럼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제가 내수동 교회 전도사로 사역할 때 일입니다. 제가 중등부 사역자로 갔는데, 좋은 점은 제가 그 목사님을 존경하고 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존경하는 목사님 밑에서 사역한 다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중등부라고 하는 것은 저하고는 정말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서른 셋이었는데, 열 네 살 먹은 아이들에게 형제라고 부르면서 사실 그 사역이 잘 될 수가 없었습니다. 해 본 적도 없었구요. 그런데 거기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무 너무 힘들어요. 아이들이 예배시간에 비행기 접어 날리더라구요. 설교를 이것보다 두 배 정도 되는 공간에서 하는데 삼분의 이 지점에서 앉은 아이들도 제 설교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떠들어요. 제가 보기엔 한 놈도 거기 회심한 놈이 없었어요. 선생들은 왜 그랬는지, 예전에 있던 교회처럼 그렇게 교역자를 따뜻하게 대해주질 않았어요. 교사 회의를 오후에 모이자 했더니, 그렇게 해야 되는 지 말아야 되는 지 우리가 결정할 테니 전도사님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 했던 교회였습니다. 정말 있기가 싫었어요. 불과 2-3달 되었을 때 교회에서 왔어요. 청년부를 맡으라는 거예요. 너무 뛸 듯 좋았어요. 저는 처음부터 청년사역에 재미를 붙이고 교회를 섬겨온 사람이었습니다. 자신 있었어요. 근데 집에 와서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떠올랐던 단어가 하나 있었어요. 절대 주권. 목사님과 장로님 한 마디에 2개월 된 중등부에서 청년부로 가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다면 내가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이 교회 갈 때 하나님이 중등부 보내셨는데 그 하나님의 주권은 대체 뭔가? 그리고 내심은 너무 좋았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거절한 시점부터 한 2년 반 동안 피나는 고난의 길을 그 교회에서 걸었어요. 돌덩이처럼 절대로 회심 안하기로 태어난 결심한 것 같아 보이는 영혼들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2년 후에 제가 주님을 만나고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너무나 섬세하신 하나님......언젠가 한 2년 가까이 토요일마다 철야를 했습니다. 어느 날 밤 간절히 기도하는데, 제가 이런 표현 잘 쓰지 않는 거 여러분 잘 아시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날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게 제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내가너를 인하여 이 일을 준비하였노라. 그때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그날 주님을 만나고 오늘 날 이 미천한 설교 사역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저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꼭 필요하셔서 우리를 거기 세워주신 것입니다. 능력이 모자라면 피나게 연마해서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부족하면 더 많이 애를 써서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매달려, 내 사역에 주의 축복을 부으시도록 주님꼐 졸라야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우면, 자신이 많이 깨뜨려져서 누구에게나 적응하고 자기는 죽고 그 사람은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그 사람 완성되어가고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진 것 같은 그 사역의 현장에 주님의 복이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내리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할 때 오늘 말씀 생각하면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오늘 저희에게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비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역사하시고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이 계셔서 불러주시고 세워주셨사오니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귀한 사명을 통하여 저희들이 완성되어 가고 또 주님의 일이 완성되어 가도록 하나님이여 축복해 주시옵소소, 은혜 위에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오며 아버지 하나님꼐서 저희에게 힘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 목표가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1:30)
강릉에 가면 남대천이라는 개울이 있습니다. 이 개울은 강릉 한 복판을 흐르는 개천인데 밝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거기로 많은 연어떼 들이 올라와서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그 큰 연어가 다닐 절도로 깊고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은 아니지만, 연어가 가진 귀소본능에 의해 때가 되면 돌아오는 것입니다.
얼마만에 돌아오는 지는 제가 조사를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제 남대천에서 부화한 그 새끼들이 치어들이 개천을 따라 바다로 가고 동해바다로 간 치어들이 나중에는 북태평양까지 가서 성어가 되어서 다시 모천으로 회귀한다고 하니 참 굉장한 여행을 하는 것이죠. 그렇게 모천에 와서 알을 낳고 사람들에게 포획되고 하는 것이죠.
거기는 높은 절벽이나 폭포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들은 떄로는 그런 환경도 극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본능에 따라서 모천으로 회귀하려는 이 연어의 몸부림이 굉장합니다. 하천으로도 다시 돌아가려면 부쩍 커버린 자신의 몸집에 비해 작기만한 하천인데도 필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는 길에 낚시꾼들이 던진 미끼의 유혹도 있고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공해로 인해 물이 더러워졌지만, 아랑곳없이 끊임없이 모천으로 회귀합니다. 그렇게 올라갑니다. 그렇게 올라가면서 때로는 폭포도 만나죠. 내려올 때야 물에 떠밀려 내려왔지만, 올라갈 때는 간단한 일이 아니죠. 그래도 연어는 포기치 않고 돌맹이에 자기 온 몸을 부딪쳐 온 몸에 멍이 들어면서도, 떨어졌다가도 다시 도전하고 떨어졌다가 다시 도전하고 하면서도 결국은 그 폭포 물살을 거슬러 결국은 자기가 떠났던 그 곳으로 회귀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목표를 세워놓고 살지 않으면, 우리에게 고생은 있을지 모르지만 고난은 없습니다. 그냥 물을 따라 떠내려가듯이 떠내려가죠. 그러나 어떤 선한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며 사는 이에게는 모두 고난이 있습니다. 마치 떠내려가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물장구를 치면 힘이 들지만 그 강을 거스르기 위해 헤엄을 치노라면 유독 강해지는 물살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신자의 푯대를 세우고 달려가는 몸부림도 그러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는 몸부림을 치면서 무엇인가 선한 목표를 향해서 갑니다. 이것이 목표를 세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신자의 삶이 향기로운 삶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는 그 목표가 우리의 개별적 삶 속에서 어떻게 수행될 수 있을 지를 숙고하면서 그 큰 목표로 가기 위한 작은 목표들을 그때 그때마다 정확히 설정해야 하고 내가 지금 정한 작은 목표들이 그 큰 목표에 효율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지를 날마다 생각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은 생각 없이는 살 수 없는 삶이고 끓어오르는 마음의 충동만으로도 그 사랑의 삶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려 깊고 숙고하는 그런 삶이 없이는 자신의 전 삶이 하나님을 향해 기여하고, 이런 목표를 위해 기여하는 삶을 살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무엇 때문에 옥에 갇혀서 형 집행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을 까요? 무엇 때문에 그는 매인 바 되었을까요? 아마 바람을 따라,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물결 치면 치는대로 목표 없이 사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자기 자신을 복음을 위해 매인바 된 바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그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사람들을 복음대로 살게 하고 그 복음이 주는 축복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옥에 갇히게 하였고, 죄수의 몸으로 매인 바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난을 받는 이유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일락에 빠진 삶이 하나님 앞에 매우 더러운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락에 빠진 것은 타락하고 육체의 향략에 빠진 상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 없이 하루 하루 이어가는, 세월의 흐름 속에 떠밀려 살아가는 그 모든 생각 없이 삶이 일락에 빠진 삶입니다. 가보지 않은 목표가 있어도, 그래서 그 목표에 가 보려고 애를 써도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하물며 살아야할 분명한 목표가 없이 하루 하루 목숨을 이어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이나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했던 사람을 보면,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을 보면 분명한 자기 삶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큰 목표가 있고 그것에 기여할 수 있는 작은 목표를 끊임없이 세우면서, 그 작은 목표 하나 하나에 자기 온 생을 걸었습니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걸어왔던 것이죠.
이루어 지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간절한 목표, 이거는 생애적으로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 올해에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심하면, 금주에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꼭 이루어져야할 소원이 있고, 만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목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오늘 우리의 삶이 향기로운 삶이 되는 것이에요.
(예화)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포도가 우리 몸에 얼마나 좋은 지를 알게 될 기회가 있었어요. 이제 포도철이 돌아오는 데 많이들 드십시오. 거기서 권하는 것은 포도를 씨도 뱉고 껍질도 뱉고 알맹이만 먹는 방법으로 먹지 말고 포도 송이 송이를 잘게 절단해서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거나 혹은 식초와 설탕을 넣은 물에 충분히 담가서 모든 농약이나 불순물을 제거한 후에는 씨째 먹는 것이 배나 효과가 좋답니다. 모르모트로 실험을 했는데, 그 몸에 상처를 내고 발암 성분을 가진 물질을 발랐답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는 포도를 계속 먹이고 하나는 안 먹였더니 나중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답니다. 이 항암 성분은 사실 포도보다는 외국에 많이 있는 블루베리에 가장 많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보라색 빛이 나는 포도같은 열매에요. 쥬스로도 먹고, 쨈으로도 먹는 아주 좋아하는 식품이에요. 그런데 그 보고서는 같은 보고를 또한번 하는데, 외국에서도 블루베리 수요가 아주 많으니까, 이것을 공장에서 재배를 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여러분 캐나다에서 인삼 같은 거 기르는 거 아세요?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캐나다에서 기르는 인삼을 중국같은데서 기른 것 보다 훨씬 싸답니다. 수십만평에다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기르니까요. 블루베리를 그렇게 기릅니다. 그런데 그 보고서는 뭐라고 하냐하면, 그렇게 기른 블루베리랑, 야생으로 자란 블루베리가 그 생긴 모양은 똑같은데 그 항암성분이 일대 오랍니다. 어마어마한 차이죠. 이유는, 재배하는 것은 고난이 없어요. 가만 있으면, 주인이 비행기타고 와서 물 주고 영양 모자라면 비료주고 하니까, 이 블루베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쳐야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야생은 그렇지 않죠.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요. 때로는 흠뻑 물을 머금없는데도 폭우가 쏟아져요. 때로는 견디기 힘든 태양 볕이 며칠 동안 작열해요. 싦으면서도 그 속에서 살아남는 거죠. 때로는 가지가 꺽어질 것같이 엄청난 바람이 불어요. 그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부림 치는 가운데 이제 훌륭한 물질들이 함유되는데, 그것이 다섯 배나 더 함유된다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인격의 깊이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고난의 깊이입니다. 그러나 고난 그 자체에 그 사람을 성숙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도구일 뿐이고 그 고난을 받아서 산 사람의 신앙의 태도에 의해서 그 사람이 정금과 같이 성숙해져 가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일부러 고난을 줄 수 있겠어요. 피할려면 고난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거스르지 않고 살면 고난은 거의 없습니다. 고생은 있을 지 몰라도 고난은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물결 치는 대로 하루하루 하루살이처럼 목표도 없이 살아간다면 우리들이 고생은 있을 지 몰라도 고난은 없습니다.
값지고 고귀한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 쉽게 얻어지는 것은 그것이 값지고 고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고귀한 것임을 모르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고난의 비밀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안 변하는 지 아십니까? 그대로입니다. 그래도입니다. 정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치유를 많이 이야기 하지만, 저는 이 세상에서 치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이 변화된 신앙의 인격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기만 하면, 그 옛날의 본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납니다. 결국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것들을 누르면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분투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 라고 했겠습니다. 원래 희랍어 단어 들라고고 라고 하는 단언데, 노예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을 심한 채찍질과 매질로써 노예의 상태에 데리고 가서 거기에 순응하게 만드는 노예 길들이기의 행동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길들인 다는 것이죠. 분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같이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이런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기도하고 간구하오니 주여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부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우셨사오니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맡겨주신 부르심 속에서 주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날마다 우리가 분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도록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도록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고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으로 저희들을 새롭게 하여 주시고, 이 부르심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여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시옵소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6. 나를 본 받으라 말할 수 있기까지
어두운 데서 빛이 미취리라 히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4:16)
기도하겠습니다.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이처럼 복된 날 말할 수 없는 찬란함 가운데 좋으신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고 오늘 이 시간에는 그동안 이곳에서 인턴쉽 과정을 마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주시고 이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주님 저희에게 음성을 들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하나님은 참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목회 사역이라는 방법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는데, 이것을 천사들을 통해서 하지 않고 당신이 직접 하시지도 않고 우리같이 연약한 사람들을 택해 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영혼을 세우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그 일에 보탬에 되게 하신다는 사실 만으로도 참 놀랍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목회의 길을 걸어가게 되면 해야 할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사람들에게 잘 풀어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래서 존 오웬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말씀의 저장고를 세 개 주셨는데 하나는 성경책이고 또 하나는 성도의 마음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목회사역이에요. 그래서 목회 사역을 통해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속에 많은 것을 풀어서 성도들에게 베풀어 줄때 그 성도들이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목회사역을 경륜하신 것이죠.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야 합니다. 오늘 조국 교회를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은 성경에는 별 관심이 없고, 모두 자기 사상과 생각을 기독교적인 듯 포장해서 상품처럼 내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능숙히 익히고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성도들에게 펼쳐 보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언제까지 교회를 목회할지 모르지만, 주님이 데려가지 않는다고 하면 아마 한 20년 더 섬기게 되겠죠. 그런데 제 마음에 늘 간절한 소원하나가 있습니다. 큰 교회를 이루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예배당을 짓는 것도 사실 제 인생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은퇴하는 바로 전 주일날 성경을 들고 강대에 올랐을 때, 본문을 읽었는데도 성도들이 무슨 설교가 나올 지 예측할 수 없는 마음으로 기대를 가지고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는 것, 그렇게까지 성경을 아는 지식, 은헤의 세계를 아는 지식, 죄의 세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은퇴하는 그 순간에 인격도 가장 주님을 닮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가장 최고도에 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펼침에 있어서도 놀라운 영적 기술과 말씀에 대한 충성심으로 최고도에 달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같은 뜻을 품고 하나님 앞에 매일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몸의 두 부위가 닳도록 살아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무릎이 닳고 또 성경을 열심히 탐구해서 팔꿈치가 닳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인가 깊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그렇게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죠.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아무리 성도를 사랑해도 퍼줄 수 있는 것이 자기 속에 없으면 선한 목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거짓과 위선 허위 가식 이런 것들이 어디서 나옵니까? 자기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권위와 허위 가식 이런 모든 것들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자신이 당당하게 그 일과 맞설 수 있는 실력이 없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해 말씀을 탐구하고 목회 사역을 시작할 때쯤이면, 가슴 속에 말씀이 꽉 차서 성경 어디를 설교하든지 자유자재로 말씀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주님을 아는 지식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죠. 이런 모든 일을 함에 있어 최고도의 성실함으로 말씀을 알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우리들이 실천하면서, 말씀을 전파하기에 합당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저는 우리나라에서 꿈꾸는 목회의 전통이 성학들의 전통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쨌든 남은 제 생애를 교회와 좁게는 제가 목회하는 교회를 위해 섬기고, 이런 성학들의 전통이 우리나라에 다시 수립되는 그 일을 위해 헌신할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학들의 전통을 박윤선 목사님에게서 잠깐 보고 ·, 그 후에는 종적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공부를 하실 때만 해도 그때에 아직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초창기였고 구 프린스턴의 성학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 수 남아있었습니다. 더욱이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는 뉴 프린스턴의 그 자유주의 경향을 뿌리치고 세워진 학교였기 때문에 구 프린스턴의 성학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명맥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님이 돌아오시고 나서 그런 전통이 사라졌습니다. 성학의 전통은 청교도들의 전통이었는데 높은 학문과 경관 그리고 헌신적인 목회사역이 결합된 성자와 같은 목회자들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최고의 신학자인 동시에 평범함 목회자였습니다. 그리고 헌신적인 기도생활과 영혼을 사랑하고 치열한 교리 논쟁 속에서도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자의 심장과 독수리의 눈과 목회 사역을 함에 있어서는 여자의 손길을 아울러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성학의 전통을 가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지식 자체를 자랑하기 위한 그런 지식을 쌓는 일을 버려야해요.
어거스틴은 신자가 주님을 닮아가지 못하게 되는 가장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적인 욕구만을 만족하려 하는 지식에 대한 공허한 자부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부지런히 탐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그러나 이제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만 해가지고는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치열하게 두 가지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는 먼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치열하게 닮아가는 일이에요. 그것 없이는 누구도 나를 닮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천사도 하나님 자신도 아닌 인간을 통해 이 목회 사역의 대업을 이어가게 하신 것은 바로 다름 아니라, 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화육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 목회자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치열한 몸부림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 목회가 소명일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굳이 목회할 이유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목회는
한편으로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서는 그들의 구원 받지 못한 상태 때문에 가슴이 아파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을 보면서는, 그들이 참 성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아파 하고 무엇인가 그들을 돕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름아닌 목회의 소명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먼저 치열하게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 있을 때 그때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나를 본받는 것은 예수를 닮은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지, 예수를 닮지 않은 나, 끊임없이 현재도 내 안에서 예수님의 형상과 충돌하는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바울이 이 말을 할 수 있기까지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했어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기에 이러한 본받음이 가능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설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것, 그게 설교에요. 성도를 위한 기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찢어진 성도의 그 깨어진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물이에요. 그게 기도에요. 그러니 교회의 최고의 복은 목회자가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설교가 흘러나오고 영력이 흘러 나오고 사랑이 흘러 나오고 계시의 빛이 흘러들어와요. 그것이에요. 그때 그 사람이 주님을 점점 닮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선교 사역의 가장 큰 난관은 선교 환경도 아니고 강퍅한 교인들도 아니고, 타락한 이 시대도 아니에요. 목회사역을 가로막는 가장 큰 난관은 강퍅한 가슴이에요. 그게 모든 걸 가로막아요. 완고해진 가슴, 굳어진 심장,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가로막는 거에요. 그렇게 깨뜨려 지면서 주님을 조금씩 조금씩 닮아가는 거에요.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옛사람의 형상은 지워지고 주님의 형상이 그 속에서 빚어져 가는 그것을 날마다 보며 자라가는, 그렇게 자라는 것이 바로 목회에요. 제일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 한사람을 목회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너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또 한 가지는, 성도들을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이러한 말을 가능케 하는 거에요. 사랑해야해요. 그래서 목회 사역은 제가 비유를 하자면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해야해요. 그 마음은 어머니 같은 아버지 마음이에요. 오래 기다리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해야되요. 그래서 그것이 목회자에게 있어 어려운 점이죠. 교인들은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해야 해요. 교인들은 나를 괴롭게 해도 나는 그 사람을 축복해야 해요. 교인들이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해야되요. 그러니 그 일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자원이 필요해요. 자원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의 자원들이 필요해요. 그래서 목회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거에요. 목회자는 메마른 교회라고 하는 작은 벌판을 강물처럼 흘러가고 교회는 척박하고 이 넓은 사막과 같은 세상 한복판을 흘러가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도록 최소한 내가 살아있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아파하지 않도록.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도록 사는 그것이 목회사역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을 버려야 돼요. 사랑하는 것들이 많으면 그렇게 흘러갈 수가 없어요. 사랑을 버려야해. 세상의 물욕을 버려야되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명예욕이나 심지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미래의 비전에 대한 욕망도 버려야해요. 그때에 비로소 그가 가시고기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깊이 끌어안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 그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시간 우리 기도할 떄 한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고 오늘 이시간도 기도하고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 같이 미천하고 연약한 인생들을 사랑해주시고, 우리에게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영혼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세상의 물욕을 버리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저희들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날마다 간구합니다. 오 주님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에게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도와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맡겨주신 이 영혼들.......오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는 저희들 되도록 역사하시고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주여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성학의 전통들이 우리 나라위에 세워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도와주시고 은혜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7. 교회 사역의 방향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것은 성경을 통해서, 성경을 수단으로 해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풍부하게 하실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 교회에서 복음사역을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모두의 중심인 것과 동시에 교회 사역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성경이에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인 교회에서의 사역은 성경을 펼쳐 보이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 성경을 펼쳐 보이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나 가르치는 교역자들에게 해당되는 얘기구나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성경이 펼쳐져 보이는 것이 교회 사역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우리의 사역, 다양한 종류의 사역이 펼쳐지는데, 그 모든 사역이 성경을 펼쳐 보이는 사역으로 들어가고, 성경이 펼쳐 보이는 효과가 밖으로 흘러나오고, 그런 두 가지 사역으로 집약된다는 말입니다.
들어갈 때도 다양한 섬김을 통해 들어가요. 예를 들까요. 설교자 한 사람이 성경을 펼쳐서 설교를 하고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역은 교회에 있어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것으로 모두 다 라고 말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이후 잠시 녹음상태 묵음)
사람들이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에 담고 그것대로 산다면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자주 기억하라 잊지말라 순종하라 행하라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죠. 원래 이 종교라고 하는 것 릴리전이라고 하는 것, 원래 라틴어로 릴리기오네 인데 그 자체가 릴리가레, 반복하다의 의미에요. 이 종교라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 비종교적 특성을 버리고 종교적 특성을 갖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보면 끊임없는 반복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시려고 할 때 모세를 보내어서 당신의 뜻을 전하려고 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쳤어요. 기적을 보이고 섭리가운데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궁핍가운데 처하게 할때 공급해 줌으로써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당신자신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으신 것을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보이는 것이, 이 교회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헐떡이듯 사모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들을 맘이 없는 불신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 말씀을 펼쳐서 그 흘러나온 빛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 우리는 많은 힘을 쓰는 것이지요. 그것을 위해 교회 사역의 첫 번째는 모든 기능이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내어서 더 많은 빛이 거기서 흘러나오게 하는 일에 거미줄처럼 얽힌 모든 사역이 거기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말씀사역부터 시작해서 그 말씀의 빛을 더 많이 깨닫게 하는 사역부터, 또 그 말씀을 더 많이 깨닫게 하고 그 말씀을 효과적으로 습득하도록 교육하는 것에서부터, 또 그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이 말씀을 지속적으로 마음에 두고 살 수 있게 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조각조각 깨달은 것들을 퍼즐을 맞추듯이 죽 체계를 세워 그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도록 그것을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서....모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그것들에 깊이 몰입시키는 겁니다.
며칠 동안 설악산에 있으면서 뭐 꼭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몇 편의 시를 썼어요. 써보니까 참 재밌어요. 하나 쓰는 데 뭐 짧으면 한 시간 길면 한 세 시간 걸리는데, 뭐 그거 쓰겠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건 아니구요. 산책하고 생각하고 뭐 그러면서 시를 쓰는 거죠. 긴 시도 말고 핸드폰에 딱 쓸 수 있는 정도의 시, 그래서 왼쪽에 8글자, 아래 내 세 줄이나 다섯 줄, 운까지 딱 맞춰서 그래서 한 세 편 정도 썼어요. 그래서 돌아오면서 생각했는데, 아 그렇다 이걸 가지고 전도용으로 써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단 사진을 계곡이나 뭐 아름다운 자연을 찍고 그리고 일반은총에 관계된 노래 속에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암시를 담은 그 시를 딱 써서 불신자들이 봤을 때도 뭐 하나님 우리가 죄인입니다 그런 건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딱 볼 때에 뮤즈가 딱 느껴질 수 있는 시를 써서 예쁘게 엽서를 만들고, 밑에는 작은 글씨로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친절하고, 우리의 언어가 아닌 불신자들의 언어로 써서 하나의 교리를 200자 정도로 정리해서, 또 그 엽서도 한 종류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한 20-30종 찍으면 돈이 많이 드니까 그것들을 한 60가지 종도 한판에 쭉 찍어서 한꺼번에 털꺽털꺽 찍으면 싸게 들겠다. 그래서 찍기는 한 판에 찍었는데 엽서는 한 60종류쯤 나오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떡하면 저런 불신자들,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없고 마음도 닫혀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것인가 그걸 연구하는 거에요. 모두 빛을 끄집어 내어서 그 빛을 내가 받고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주어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수종 드는 사람의 첫 번째 중요한 자격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진리의 빛을 더 많이 받기를 원하는 현자의 정신이어야 해요. 이게 모든 복음 사역자의 기본 정신이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선교를 하던 목회를 하던 교회에서 행정을 보던, 심지어 교회 봉고 운전을 하건, 성가대 식사 봉사를 하기 위해 아궁이에서 불을 때건 뭐건,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자격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음성에 아멘으로 답하면서, 더 많은 진리의 빛을 받고자 하는 마음, 그런 현자의 정신, 내가 교회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교회 화장실 똥을 푸다 죽어도 내가 여기 이 가까이에 있으면서 진리의 빛을 소유한 현자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마음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벌써 그런 정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영혼이 부패해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더 많은 빛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 거하는 삶이 좋다, 적어도 더 이상의 빛이 들이 와서 나의 삶을 구석구석 비취는 것은 싫다, 그런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활짝 펼쳐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 얽혀서 우리가 모든 거미줄처럼 얽힌 기능을 가지고 성경을 더 많이 비추어 주려는 그런 노력을 할 때, 그 성경의 빛은 더 많이 빛나면서, 찬란하게 더 많이 비춰 나와서 지체들의 가슴에 심겨지는 겁니다.
이게 첫 번째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일을 위해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 이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고, 말씀의 빛이 쏟아져 나와서 그 빛을 우리에게 닮게 하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능들이에요. 그것들을 교회가 계속 계승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모든 기능을 집중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찬란한 빛, 그래서 우리가 무슨 사역을 하건 무슨 일을 하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간에 거기에 이 사역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물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예요. 그렇게 물으며 가는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면 거기서 빛이 확 쏟아져 나와서 성도들의 가슴에 심겨져.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빛의 사람이 되요, 그런데 이렇게 빛이 담겨지면서 그들이 빛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 것이죠.·?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두 가지 중 하나가 성취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하고.......그러니까 그 사람이 존재 자체가 온전히 빛을 통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성화되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된 다음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뭔가 하면, 그 빛이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사람들을 변화 시켰어요. 그래서 예전에 비루하던 죄인이 변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어. 그리고 세상의 얄팍한 지식보다 영혼의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어, 쭉 변화 되었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나 하면,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게 해야 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거나, 어떤 종교적인 열심히 우리를 자극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다 보면 나는 하나님을 섬기기 싫습니다, 하는 사람 없지 않아요? 궁극적으로 내 인생은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왔고.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목표는 섬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섬김에 있어 온전해 지는 거예요.
그러면, 섬김에 있어 온전해 진다고 하는 것은 뭐냐? 그건 종합적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지만 섬기는 동기에 있어서도 순수하지 않을 적이 있죠?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다 보면, 이게 내가 좋아서 신명을 바쳐서 하는 일인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건지, 내가 본성적으로 즐거워서 하는 건지, 내가 사명감이 있어 주님의 봉사를 기뻐하는 것인지......그런 것들이 분명해 지는 것이 온전해 지는 거예요. 또 어떤 일을 할 때, 우리가 열심히 그 일을 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일을 끝까지 잘 합니까? 아니죠? 에너지가 있을 때까지만 잘 하죠. 그리고 모든 여건이나 상황이 받쳐줄 때까지 자신이 그 일에 보람이 있을 때 잘 하죠. 심한 사람은 그 일에 박수갈채가 있고 보람이 있을 때는 열심히 하지만, 그러나 어려워 질때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신 목표 자체가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따라 그 일을 결정해요. 쉽게 말해 집어치워 버린다는 말이죠.
뿐만 아니죠. 중간에 마음이 변해 집어 치우거나 감정으로 사명을 두드려 엎지는 않지만 일을 해 나가기는 하는데, 그게 최선이 아니에요. 옳지 않죠? 하느라고 했는데도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일 시키고 그것을 통해 창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핀트가 안 맞는거죠. 여러분들, 어떤 일을 데리고 해보면 알지만, 어떤 일을 목적을 가지고 협동할 때, 이해도 못하는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면 함꼐 일하는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방해를 주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건 모두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섬김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온전한 사람들이 되어 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일을 위한 일이 아니라, 성도들이 지식의 빛을 받아서 변화 받고 새사람이 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진작께서 하기 원하셨던, 소명을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그 선한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거기 은혜 받은 성도의 모든 자원을 거기 쏟아붓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게 할 뿐 아니라 섬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자신의 내면 속에 얼마나 그릇된 동기가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인내하지 않는 사람인지 자신이 일을 하며 얼마나 지혜가 없는 사람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해 주시는지, 그걸 깨닫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그것이 바로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하면서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비결입니다. 그걸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리의 빛을 깨내어 찬란하게 하고, 그 빛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섬기는 그 일 모든 과정을 통해서 참 된 섬김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가르쳐 주어서, 그 다음에는 뭐가 필요해요? 더 많은 빛이 필요하게 되는 거죠. 놀 때는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니까 회개하고 돌아오라 하면 그 빛이 충분해요. 그러나 이제 주님을 섬기며 살려고 할 때는 그 섬김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자신의 불순한 동기와 올바르지 않은 삶의 모습 겉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는, 자신도 파악하기 힘든 자신의 영혼의 실체, 이런 것들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죠? 처음 보여준 것 보다고 훨씬 더 많은 빛이 교회 사역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흘러넘치려면 어떻게 되야 합니까? 말씀의 사역들이 더 깊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후자를 불러오고, 또 후자를 전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자가 후자에 부응하면, 전자는 더 많은 힘을 얻어서 더 많은 섬김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도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아래서 자라고 온전한 빛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도록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겁니다. 온 마음을 다해 우리가 그렇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셔서 우리가 이 교회에서 섬기게 해 주셨는데 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더 많은 진리의 빛을 하나님께서 쏟아부어주시고, 그래서 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변화되게 해 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는 이에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