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2007-2008년 설교모음)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설교기간|2007-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1. 바른 섬김과 복 주심(삼하6:10-11) 2007.12.16 주일오후 1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2. 오랜 섬김과 복 주심(눅2:36-38) 2008.1.6 주일오후 5
3. 기쁜 섬김과 복 주심(시100:1-2) 2008.1.13 주일오후 9
4. 참는 섬김과 복 주심1(단6:19-20) 2008.1.20 주일오후 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5. 참는 섬김과 복 주심2(고후12:12) 2008.1.27 주일오후 21
6. 견딘 섬김과 복 주심1(계1:9-10) 2008.2.3 주일오후 29
7. 견딘 섬김과 복 주심2(계1:9-10) 2008.2.10 주일오후 3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8. 이긴 섬김과 복 주심(막2:5) 2008.2.17 주일오후 47
9. 죽은 섬김과 복 주심(요12:24) 2008.2.24 주일오후 57
10. 꺾인 섬김과 복 주심(고후1:8-9) 2008.3.2 주일오후 62
11. 선한 섬김과 복 주심(말2:17) 2008.3.23 주일오후 68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1.바른 섬김과 복 주심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6:10-11)
이스라엘은 성전이 지어질때까지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를 행진할 때에는 그 행진을 따라서 이동을 하다가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정해진 한곳에 장막을 치고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겼지만 몇 번 장소를 옮기게 됩니다. 그 장소를 옮기는 이야기중에 하나를 여기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궤가 있었는데 다윗은 이 궤를 모셔가려고 했습니다. 이 궤는 법궤인데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세가지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돌비와 아론의 쌍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담겨진 항아리가 여기에 있고 이것은 지성소에 모셔져 있고 금으로 만든 천사 그룹이 두르고 하나님이 임하실 때 바로 이 법궤에 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임하시는 보좌처럼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이 법궤를 모셔가려고 했던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법궤를 모셔가기 위해서 새롭게 수레를 만들고 거기에 그 법궤를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낙원의 타장만한쯤 이르렀을 때 소가 뛰면서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웃사가 떨어지지 않게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법궤를 이동하는 그 일은 중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는데 그러면 떨어지는 법궤를 붙들려고 한것이 뭐가 잘못이길래 거기에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서 죽임을 받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법궤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 그 중에서도 레위지파 사람들이 메고 이동하게 되었지 아무리 새로 만든 수레라도 그것을 수레에 싣고 짐짝처럼 운반하게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되 방법도 바르게 섬겨야지만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이 법궤가 복의 근원이고 상징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복을 주기는 커녕 한사람이 죽고 법궤를 운반하는 이 일은 중단이 되게 되었으니 이제 다윗은 법궤를 자신의 궁으로 옮기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때에 이 궤가 오벧에돔의 집으로 비로서 메어서 오벧에돔의 집에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벧에돔이 석달동안 그 법궤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뭐라고 말을 하냐면 오벧에돔과 그 온집에 복을 주셨다 라고 했습니다. 이 오벧에돔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복을 많이 받고 오벧에돔 뿐만이 아니라 오벧에돔과 관련이 있는 그 집 사람들까지도 복을 받았고 '온' 이라는 말이 추가 되었으니 이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물질과 모든 것에 있어서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복을 이 오벧에돔이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궁금히 여기는 것이 이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크고 많은 복을 받을 만한 그 무엇이 오벧에돔에게 있었길래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큰 복을 내리셨을까 하는 것이 우리가 궁금한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지금 여기에서 법궤를 받았더니 복을 받았더라 하는 단편적인것 말고 한번 여기가 아니라 낙원의 타작 마당에서 웃사가 죽임을 당하고 다윗조차도 더 이상 법궤를 옮길 계획을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던 그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면 오벧에돔이 법궤를 자기 집에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법궤가 있었는데 법궤만 가져다 놓으면 복이 쏟아 지는줄 알았는데 웃사가 그 법궤 때문에 즉사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웃사는 또 누구입니까? 법궤를 맡아 가지고 있었던 아비나답의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법궤를 맡아 가지고 있던 아비나답의 아들이 죽었으니까 사실 그 법궤는 복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집의 소중한 아들의 앗아간 애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같았으면 그 법궤를 그렇게 지금 그 자리에서 사람이 죽어 넘어간 사건이 발생해서 다윗조차도 싫어 하면서 버리고 간 그 법궤를, 무슨 일이 일어 날지 모르는 법궤를 집으로 옮길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고, 평판에 보탬이 되고, 이름을 내는때는 그것을 사용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평판에 보탬이 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행할 때에는 섬기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요. 법궤가 있었는데 그 법궤 때문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법궤를 가져 가면 큰 복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다윗은 잔나무로 수금과 비파와 재금과 양금과 이런 악기까지 만들어서 특별 성가대에 의해서 연주까지 하면서 그 법궤를 가져 가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때에는 모든 사람이 법궤를 가져가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히고 아비나답의 집에 초상이 났을때에 과연 그것을 내집으로 가져 가겠다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냥 멀리 하는 것이 났지 무슨 일이 일어 날지 모르는 그 법궤를 왜 가져 가겠습니까? 그런데 오벧에돔은 바로 그때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하나님의 그 법궤를 모셨습니다. 그 법궤는 색칠을 하고 다시 만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오벧에돔은 어떤 마음을 가졌길래 웃사가 죽어 넘어가게 만들고 다윗도 버리고 간 그 법궤를 자신에게 가져다가 두려고 했을까요? 그 마음이 어떤것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석달동안 하나님이 궤가 있는 동안에 오벧에돔의 집에 큰 복을 온집에 내리신 것을 보면 그의 마음과 행동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에 도달하게 되는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신앙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정리하는 것이 섬기는 것부터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하는 소리가 둘중에 하나입니다. 첫째는 겸손해 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겸손이 아니라 아주 나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신앙도 없고 엉터리로 이렇게 자격도 없이 살아가는데 이렇게 은혜도 없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이 귀한 하나님의 섬김의 자리에 가담하는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위선을 떠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버리기 보다는 그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더 원하시지 않을까요? 이렇게 귀한 직분인데 제가 은혜생활도 못하고 하면 직분을 버려야겠습니까? 은혜생활로 돌아와야겠습니까? 아이를 목욕시키다가 때가 하도 많이 나와서 물이 더러워지면 물을 버려야겠습니까? 애를 버려야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은혜가 회복될것 같아도 끝없는 미끄럼을 타고 저 깊은 수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일하다가 은혜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 주저 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신발을 싣고 지팡이를 들고 반대편으로 떠나는 것 하고는 틀립니다. 하나님이 있도록 지정하신 자리에서 드리는 한마디의 외치는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자리에서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수 많은 한마디의 말보다 훨씬 힘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가 아닌데 회복을 위한 기도가 응답이 될까요? 우리는 너무 우리 중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 내자리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필요하면 집어 팽개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맛보는 생활입니다. 또 하나의 변명은 제가 이렇게 섬길바에야 더 좋은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얼마나 겸손 합니까?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이 주신 그 섬김에 어울리지 않는 못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회개는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역겨운 고집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자리를 떠나고 버립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목사는 이러이러해야 합니다 라는 강연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목회자들이 많이 낙심을 한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래도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면 그런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목회를 그만 두는것이 옳겠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칼 같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 이었으니까 "그럼요 당신은 시작이 잘못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실것 같은데 "하면서 고민 하십시요" 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를 읽고 학교를 그만둔 학생들이 많습니다. 이삼백명 될 것입니다. 97년도에 그 책을 썻는데 그 책이 대구 경북지방에서 많이 팔렸습니다. 계기가 있었는데 대구에 있는 어느 신학교에서 그때가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학생들이 도서관에 모여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갑자기 도서관에서 대성통곡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았더니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그 책을 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전파되면서 학생들이 성경하고 그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한동안 유행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질문하는 것이 "목사님 저는 아무래도 여기에서 말하는 그런 신학생이 아닌것 같은데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그렇게 물으셨는데 제가 대답을 할까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가면서 기도하라고... 절대로 이 길을 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면서 나는 아닌거야 하나님 제가 아닌것이 맞죠? 만약에 그래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다면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요. 능력을 주십시요.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요.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법궤 그 자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궤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은 법궤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궤를 돌보고 있는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 하는 영적인 사실을 꿰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두려워하는 법궤를 자기의 집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웃사는 법궤 때문에 죽었는데 오벧에돔은 그 법궤 때문에 복을 받아서 결국은 다윗이 그 오벧에돔이 복 받았다는 소식에 배가 아파서 다시 그 법궤를 찿아 오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섬김 그 자체는 우리의 신앙이 없는 것을 있게도 못하고 있는 것을 없게도 못합니다. 그것은 일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해서 다른 사람은 섬기다가 주저 앉아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 그 다음 사람은 섬기면서 한 없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섬기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마술적인 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장실 청소만 하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하니까 어느 부흥사가 와서 화장실을 치우면 건강을 주신다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지 합니까? 어떤 사람은 회계집사만 하겠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어느 부흥사가 와서 말하는데 회계집사 10년하면 복 못 받는 사람이 전세계에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회계 집사하면서도 회사 파산하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일 자체에 그런 신비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거기에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게 이 구역장들이 시험에 들면 제일 먼저 정리하는 것이 구역장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래도 꽤 끈질기게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그만 둡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사는데 화장실 청소하고 다른 노동을 하는 것은 어떻게 견디겠는데 그 영혼 앞에 서서 자기도 안 살면서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믿어라 하는 것이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면 계속 그 괴로움을 당해야 합니다. 그럼 뭐와 똑같은가 하면 얼굴에 검댕이를 묻히고 다니는 자기가 잘못 한 것입니까? 거울이 잘못 한 것입니까? 거울을 보여 주면 검댕이를 닦으면 됩니다. 그런데 안 닦으면서 거울을 볼 때마다 거울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거울을 집어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맨날 나만 보여 준다고 하면서...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이것이 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고백을 하노라면 그 영혼을 섬기면서 자기가 정말 미천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섬김 자체에 마음이 실려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우리 각자에게 세워주신 가장 아름다운 자리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름다웠고 우리 각자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거기에 두셔서 아름다운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이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항상 섬김의 수고가 따르고 그 자리에 서서 인내하며 사는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도 거기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폭풍속에서 휘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나무가 휘청거립니다. 그래도 견디고 거기에 있는 것이 났지 뿌리채 뽑혀서 쓰러진 것은 보기 싫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으면서 아무것도 섬기는 것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뿌리가 뽑힌채 누워있는 나무입니다. 잠시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땔감으로밖에 쓸 수 없는 나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아무런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 일생동안 근무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근무중이어야 합니다. "넌 뭐하냐?" "네 목사로서 근무중입니다." "그럼 넌 뭐냐?" "저는 식당에서 밥하는 것으로 근무중입니다." "너는 뭐냐?" "화장실 청소로 근무중입니다." "그래 그럼 넌 뭐냐?" "저는 구역장으로 근무중입니다." 쉴때는 비상대기, 일할때는 근무중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모두 싫어 버리고 가는 그 법궤를 자기의 집으로 모셔서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을 샘나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사면을 돌아 보십시요. 버리고 간 법궤같은 섬김의 자리가 많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오벧에돔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앞에 간 사람은 그 직분을 감당하다가 침체에 빠져 미끄러져서 타락했는데 나는 그가 버린 직분을 감사함으로 대신 맡으면서 오히려 오벧에돔과 같이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 입니까? 여러분 한 사람이 잘 섬기면 슬하의 자녀들이 복을 받고 여러분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쓰레질 하는 히브리 노예에 불과 했는데 그 한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섬기니까 보디발의 온 집에 들판에 곡식에 모든 가축들의 때에 까지 하나님이 복을 내리 셨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주님의 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2.오랜 섬김과 복 주심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 (눅2:36-38)
섬기는 자에게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시리즈를 시작을 하고 제가 2주 동안에 병원에 있느라 설교를 못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법궤를 가지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겼던 이들이 복 받은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신약으로 넘어 오면 여기에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사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 다른 곳에 여러 번 나오는 사람 못지않게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판단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올라 왔을 때 그 분을 처음 뵙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시므온이라는 사람과 함께 누리게 됩니다.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임재하신 것을 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뵙는 큰 특권을 누렸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오래 작정하시고 하나님이 꼭 마음에 품으셨던 사람들에게 이 아기 예수의 결례의 현장에 동참하게 하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에서 처음 뵙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과 또 여기에 나오는 안나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에 대해서 말하기를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며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던 사람이었고 또 이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 하는 성령의 특별한 지시까지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와 함께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에서 처음 대면했던 안나의 그 복이 얼마나 큰 복이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마음속에서 영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지만 이 사람에게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 그것도 처음 성전에서 하나님께 결례를 드리시는 그 예수님을 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니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영광이요 명예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에게나 허락하시지 않은 이 특별한 특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직접 뵙는 놀라운 특권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은 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었지만 이 분들은 성전에 오신 아기 예수를 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놀라운 특권을 안나에게 허락해 주셨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처음 대면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흔히 허락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이 이들에게 주셨을까요? 오늘 성경은 이 사람이 선지자였다고 말합니다. 아직 구약시대의 선지자의 제도가 남아 있는 그런 때 였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도 받고 또 그 계시를 해석하기도 하고 해서 교회에 유익을 주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이가 매우 늙었다고 말합니다. 출가한 후에 일곱해를 남편과 살다가 과부가 된지 84년이 되었으니까 시집간지 91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 서너살에 시집을 갔다고 할지라도 104세나 105세 되는 할머니 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곱해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지 84년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곧바로 성전에 있었는지 아니면 그 후에 있었는지는 성경을 통해 명백하지 않지만 그러나 과부가 된지 84년인데 예수님을 만나는 이 시점에서는 어쨎든 이 여자가 오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시므온과 짝을 이루며 안나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전에서의 첫 대면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올바로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신앙을 다 까먹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기 전에는 정말 착한 신자였는데 이상하게 교회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일을 하고 났더니 사람이 아주 허접해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던 간절함도 없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고 은혜를 그리워하던 어린 아이 같은 마음도 없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아주 진실한 신앙의 인격도 없고 하는 이런 잘못된 모습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섬기면 섬길수록 점점 거룩해지고 진실해져서 아기 예수가 성전에 올라 왔을 때 대면할 두 사람중에 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선택해 주실 정도로 그렇게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과부된지 84년 이후 성전에 머물면서 성전을 떠나지 아니 하였다고 했으니 이 사람은 속세의 즐거움을 버리고 주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에만 자기의 신명을 다 드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얼마나 시시하고 재미없는 인생입니까? 여러분 가끔 보면 돈도 많고 권세도 있는데 일찍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그래서 사명을 받아서 교회를 성실하게 섬기는 신자들을 보십시요? 가진 것이 많아도 그들은 그것을 별로 쓸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남처럼 호랑방탕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돈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데 그것을 활용해서 누려보기도 하고 사람들을 한번 부려보기도 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해 보기도 하고 해야 할텐데 그럴 수 없는 위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꿈과 희망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렇게 살텐데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향기 없는 생활입니다. 그저 왠만한것 하나 걸치고 와서 기도한다, 예배드린다, 구역을 인도한다, 교회에 봉사한다, 식당에서 일한다 등등으로 이렇게 오락가락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보면 그의 삶과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향기가 없는 무미건조한 인생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이 보는 인생이고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사람들이 보는 시선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된지 84년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갈 곳이 수없이 많은데 안 간 것이 아니라 갈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와서 있었지 않습니까?
요즘은 생활이 많이 나아져서 권사님들도 세련되었고 예전에는 권사하면 머리가 희어야 하고 그리고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지팡이를 들어야지만 권사님 티가 나는데 요즘은 권사님들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권사가 전에는 50이 넘고 60, 70된 분들이 권사인데 요즘은 그렇지 않고 마흔 몇 살된 사람들이 권사이고 늙으면 권사도 사표를 냅니다. 퇴직입니다. 그래서 권사들도 옛날같은 개념의 권사님들이 아니라 아주 세련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힘 있고 기력이 있을 때 열심히 주님을 위해 봉사하라고 변해가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권사님들은 정말 갈 곳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경로당 가봐야 예수 믿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대접 못 받습니다. 담배도 안 피우죠 화투도 안 하지 하니까... 교회에만 꾸역꾸역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것 아니어도 갈곳이 많고, 할 일도 많고, 연세 드신 분들이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안나라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갈 곳이 없어서 성전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세상에 있는 많은 낙을 원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주님의 교회를 떠나지 않고 주님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수종을 들며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섬기면 섬길수록 점점 거룩해져 가서 아기 예수를 뵈올수 있는 그러한 마음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도대체 무엇으로 섬겼습니까? 성경은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섬기는 것 따로 있고 기도는 별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섬김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은 분명히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섬겼다 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기도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노년에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성경이 말하지 않고 노년에 부자를 만나서 재혼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자식이 잘 되서 돈 방석에 앉게 되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성전에서 섬기며 늙어 갔는데 누구도 받지 못하던 복을 받았으니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처음으로 대면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 백세가 넘었는데도 그의 영혼은 어린아이같이 맑은 영혼이었고 세월이 흘러 갈수록 노역에 붙잡혀 초로해진 영혼이 아니라 아기 예수를 기다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여망에 눈이 진무르도록 기다리던 선지자인 여자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큰 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언제나 만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우러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일이 잘 될 때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이 섬길때에 그 섬김에 그렇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그 일이 잘 안될 때, 어려움이 올때에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늘 그 마음은 아닙니다. 맨 처음에 제가 전도사일 때 설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떨리는지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거의 날마다 설교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처럼 떨리지 않습니다. 아마 그때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애절하게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변합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교회에 와서 대표기도 시키면 청심환 먹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떨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만 보는 것 같고 하는 마음과 정신을 항상 유지하여야 하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한결 같음을 잃어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당신을 섬길 때 어려움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속에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때 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섬기는 사람들은 그 일이 잘 될 때에도 주님을 만나고 잘못 될 때에도 주님을 만나면서 잘 될 때에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발견하고 잘못될 때에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누추한 인간인지를 발견하면서 하나님앞에서도 변화를 받고 새로워지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그것이 아주 작은 주님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도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교만해지겠습니까? 그러면서 안나는 그렇게 기도속에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자신도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 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그 순간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 시므온과 그리고 평생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과 기도로 주님을 섬겼던 이 연로한 안나를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주님을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해 동안에도 주님을 풍성하게 만나는 그 은혜와 사랑의 때를 우리들이 살아가려면 우리가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함부로 섬기지 말고 잘 섬기고 마음을 다해서 잘 섬겨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3.기쁜 섬김과 복 주심
“온 땅이여 어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100:1-2)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구속받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약에서 많이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속의 사랑은 그들에게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 구속이 뭐냐면 애굽의 노예로 팔려 있다가 거기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가나안은 텅비어 있는 개척지가 아니라 아주 발달한 문명을 가진 원주민들이 이미 찬란한 문명을 구가하며 살고 있던 번영한 땅 이었습니다. 그곳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그들을 모두 물리치게 하시고 나라를 세우셨으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나 이웃나라 입장에서 보면 역사속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그 두가지를 비교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 땅을 주시지 아니 하셨다면 살았을 애굽에서의 비참한 종살이와 지금 여기에 와서 이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모든 열방들에게 하나님을 생각나게 해주는 민족으로서 살 수 있게 된 이 나라, 이 두가지를 항상 비교하면서 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찬송에 보면 우리를 애굽땅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항상 첫머리에 나옵니다. 예를들면 십계명이 두 번 나오는데 출애굽기에 한번 나오고 신명기에 나옵니다. 신명기에 나올때는 그 십계명을 지키는 동기가 거기든지 출애굽기든지간에 모두 그 계명을 지키는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무슨 은혜에 대한 감격이었을까요?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기들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해주신 그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언약백성의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본은 회상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비젼을 가지고 많이 이야기 하는데 비젼도 물론 좋은데 그 참된 비젼은 회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회상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계속될 애굽에서의 희망이 없는 그 비참한 종살이 그것을 생각했듯이 우리가 회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구원이 없이 살았더라면 계속되었을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앞에 더 필요한 것이 별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지금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복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가지를 회상하게 하셨을까요? 이런 회상으로 돌아가면 돌아 갈수록 결국은 섬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었는데 어떻게 그냥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섬기는 삶은 언밀한 의미에서는 축복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섬기는 것은 언약백성의 섬김의 동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식으로 도전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기 보다는 결과입니다. 언약 백성의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는 구원에 대한 감격, 자기들을 비참한 억압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에 대한 감사 이것이 섬기면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축복에 대한 기대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명백하지 않습니까? 저도 잘 몰랐는데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유산이 있으면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말라고... 왜 그런가 했더니 재산이 있을때는 자식들이 잘 하는데, 하다 못해 강남에 아파트라도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자식들이 얼마나 잘하려고 하겠습니까? 연로한 노인들이 죽으면 결국은 자기들에게 올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미리 다 나누어주고 나면 자녀들이 효도를 안 하니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 아파트 하나 가지고 담보로 해서 받는 효도가 정말 효도일까? 효라고 하는 그것은 한자를 보면 자식이 늙은이를 업고 다니는 그림입니다. 그것이 효입니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부모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예의바른 섬김이 효도이지 유산을 남겨 주실지 모른다 하는 생각을 하고 부모에게 경쟁적으로 잘 하는 것은 돈 내도 돈 먹기이지 효도 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적용시켜 볼 때도 하나님이 보실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속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바라 보실때에 정말 섬기려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주님이 이렇게 내려다 보실 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그 구원의 은혜, 베풀어 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 많은 사랑의 빚을 졌는데 내가 어떻게 그 좋으신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이 섬김이지 이렇게 이렇게 섬기면 부자가 되게 해 주신데 아니면 건강을 주신데 아니면 우리 자손에게 복을 주신데 하는 이런 동기에 의해서 섬기는 것을 참된 섬김이라고 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계속 십자가의 복음이 울려 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정말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 주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할 때입니다. 그래서 찬송가가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긴다고 할 때 기쁨으로 섬기고 그 앞에 나아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섬김이 외형상으로 볼때에는 어쨎든 봉사하고 있으면 그것이 섬김 아닐까요? 그렇죠 섬김입니다. 그런데 그 섬김이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그 사람의 마음안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기뻐서 하는 일은 항상 그 일을 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이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길때에 기쁨으로 섬기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을 하면 일 자체 안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뿌리가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좋을 때 까지는 기뻐서 하는데 내가 좋지 않을때는 더 이상 그 일을 하는 것은 내 마음에 더 이상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동기 그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전한 덕에서 오는 동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섬기기는 하는데 못합니다.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오래참고인데 안 됩니다. 섬기기는 하는데 그 섬기는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일에 대한 애착이기 때문에 언제나 오래참지 못합니다. 그러면 언제 입니까? 언제나 오래참고 이것이 사랑의 특성인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온유하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무례히 행치 않으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언젠가는 거기에서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일 이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좋은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에게 좋은 사람을 주셨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말고 그 사람을 내게 주신 하나님을 그 사람 때문에 기뻐하자. 내게 만약에 물질을 주셨으면 물질을 좋아하지 말고 물질을 내게 주신 하나님을 좋아하자.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가 좋아하는 그것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싫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주신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너희가 좋아하는것 때문에 하나님께 너희는 싫은바 된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부딪히는 모든 한계가 그런 것입니다. 하고 싶을 때 까지만 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싶을 때 까지만 참는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내는 자기는 너무 싫은데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견디고 하기 싫은데도 그 일을 하고 있기 힘든데도 그 자리에 있는것, 누구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것이 인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한다고 하면 마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장로님께 기도를 좀 짧게 하라고 목사님이 사정을 했는데 그날도 올라가서 25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제가 다니던 어느 교회 목사님은 장로님이 하도 길게 기도를 하니까 10분이 지난 다음에 우리 교회는 이렇게 생겼지만 다른 교회는 뒤에 의자가 쭉 있는데 목사님이 뒤에 앉아 있고 장로님이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10분을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가서 바지를 잡아 당겼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손을 탁 치면서 10분을 더 기도하더랍니다. 이 양반은 25분을 기도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장로님이 기도한 다음에 올라가서 기도가 끝났는데 설교 할줄 알았는데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또 기도를 하는데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히 함께 할 지어다 아멘" 하고 성경책을 들고 가버렸습니다. 교회가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어떤 쪽에서는 반쪽이 쪼개져서 장로가 푼수도 없이 자기 혼자 있을때는 기도도 안하면서 주일 예배에 나와서 한을 풀을 일이 있냐고... 그렇게 오래 기도하니까 목사님이 화를 내고 나가는 것이 당연하지 하고 또 한쪽에서는 아무리 장로가 25분을 기도해도 목사가 설교를 하고 가야지 그냥 축도만 하고 가는 그런 목사가 어디 있냐고... 결국은 교회가 싸움박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참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이 섬기는 것은 항상 불안 합니다. 솔직히 말을 하자면 은혜가 조금 없는데도 교회에서 일을 시킬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섬기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게 됩니다. 저도 맨 처음에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하도 사람이 없으니까 청년 하나가 와서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니까 얼른 공과책을 들려 준 것입니다. 세례 받자마자... 9월에 믿어서 11월에 세례를 받고 선생이 되었으니까 자기도 모르면서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얼마나 떨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님을 더 알게 되었다고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요. 어떤 사람은 일을 시켰더니 일 때문에 신앙을 털어 먹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부족한것 같은데 그 일을 하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었어도 일만 붙들고 있었던 사람들은 결국은 기쁨이 없이 화분에서 뽑힌 꽃처럼 마르고 신앙이 좀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찿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계속 보게 되니까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못 만났을텐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랑을 배우고 인내를 배우고 절제를 배우고 자기를 버리는 헌신을 배우고 이렇게 하면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이 될 때에 그때의 섬김이 기쁨 속에서 섬기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 억지로 섬기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복을 못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라진 기쁨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알았는데...
(찬송)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은혜 받으셨나
깊은 감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고 초점이 떨어지면 섬기는 자리에서 반드시 이탈합니다. 아니면 형식적으로 섬기든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있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큰 은혜가 내 마음에 깊이 넘칩니다. 너무나 구원 받은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 기쁨이 이상하게 날마다 너무나 오래 되었으나 너무나 새로운 기쁨입니다. 그것이 은혜생활의 비밀입니다. 너무나 오래전의 일인데 너무나 새로운 기쁨입니다. 너무나 오래된 일인데 지금의 나에게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죽을때가 다 되었는데 여전히 어린아이같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죄인중에 괴수와 같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도다.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착한 성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주님을 만나서 오늘도 영상에서 봤는데 새신자라고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따끈따끈 합니까? 그런데 더 어려운것은 오래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그 예수님이 너무나 오래 되었는데도 그 예수님 때문에 느끼는 기쁨이 새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록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진리이시여! 영원한 진리이시여! 영원한 사랑이시여!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새로된 아름다움이시여!"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계셨으니까 무한히 오래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은 오늘 진리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깨닫고 나면 그 아름다움은 일평생 처음 발견한 아름다움입니다. 그 고백을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날마다 새로운 너무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섬기면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 얄팍한 심성 같은 것도 아니고 내가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미 내게 주신 많은 축복들을 거둬가셔서 내가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라고 하는 두려움도 아니고 그 하나님 나의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 자신이 나의 마음속에 한없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예화) 제가 34살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일에 첫사랑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 처음 갔을 때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습니다. 그때 만났던 학생이 아까 인사했던 박헌준 목사입니다. 내가 교수로 가서 2년뒤에 학교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만난 것입니다. 벌써 언제 입니까? 17년 이상 되었습니다. 그때 만났습니다. 너무 사랑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때 민주화 투쟁하고 하니 얼굴이 거칩니까? 그래도 뜨겁게 사랑하고 하니까 아이들이 뭘 시키면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와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느낌이 있고 저는 특히 자존심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심해서 아직까지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지장을 받고 있지만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억지로 나를 도와주고 하는 것은 내가 차라리 안하면 안하고 불편하면 불편했지 저는 그렇게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밤늦게 심지어는 밤을 새면서 나를 돕고 해도 기쁨으로 그렇게 돕는 것입니다. 그런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맨 처음에 무엇이든지 섬겼을때에 보면 그것이 축복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섬기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시작은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그 큰 사랑입니다. 제가 제일 하기 싫은 것이 목사 였습니다. 그래서 오죽 할일이 없으면 교인들 코묻은 돈을 먹고 사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심을 하고 나서 방황을 하다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나니까 할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뭘 해도 만족이 안될 것 같습니다. 옛날에 내가 꿈꾸던게 영문학을 해서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나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의 나라 글 열심히 배워서 시나 읊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그것이 무슨 생명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무원 생활을 했으니까 예전에는 계속 시험을 봐서 승진해서 높은 자리에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 했는데 주님을 깊이 만난 다음에는 그것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뭐하나 고달프기 짝이 없고 책임질 일만 많은데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아무것도 할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당신 어떻게 목사가 되었습니까? 할일이 없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내 할일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데에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을때에는 마음 한 구석에서 내가 은혜를 받았어도 늘 하는 소리가 돈 많고 지위 높은 장로가 되어서 목사님을 열심히 돕고 성도들 섬기고 이렇게 살아봐야겠다 했는데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질 때 드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평안함, 하나님이 나같은 인간에게 그런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살려 주시고 몇 번을 죽고 싶었던 인생의 길에서 나를 건져서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길을 가게 하셨는데 내가 할일이 무엇인가? 희망이 무엇인가? 그래서 내가 목사를 잘하면 하나님이 돈도 주시고 지위도 주시고 글재주도 주시고 교수도 만들어 주시고 유명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 자손들도 복을 주시고... 꿈도 꾸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유명해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훌륭한 목사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때의 꿈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도시는 처음부터 싫어 했으니까 시골에 가서 농촌이나 어촌에 가서 20-30명 교인이 모이더라도 초가집에 호롱불 하나 밝혀 놓고 내가 전도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죽고 싶다 결혼은 하면 하고 말면 말고 그것도 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마음이 하얗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무엇이 될것인가? 하나님 깊이 만나면 그런것이 별로 없습니다.
(찬송)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 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 하시네
그래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십니다. 제가 가끔 이야기를 합니다. 십년전에, 십년후가 너무 궁금했다고... 지금도 10년후가 너무 궁금합니다.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 10년후는 더 궁금하고 내가 여러분들하고 헤어지면 어디서 어떻게 하고 살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절대 안 보여 주십니다. 기도해도 안 보여 주십니다. 아무리 신령해도 안 보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미리 아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자꾸 뒤를 돌아보고 사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은헤를 생각하면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주 자연스러운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것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사냐고 말입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것이 없는 사람은 결국 내안에 주님이 없습니다 라는 삶입니다. 그 주님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오래 되었으면서도 새롭게 다가 오는데 자기를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그 큰 은혜가 옛날에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도 새롭게 다가 오는데 어떻게 그냥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의도식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방금 내려오면서 어느 지체가 쓴 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나서 자기의 신앙적인 간증을 써서 보냈습니다. "목사님! 인생은 정말 한줌의 재와 같고 꿈결처럼 사라지는 덧없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조금만 직시하면 금방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박 목사가 세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고 유학을 간다 하는데 이민 수준입니다. 대가족이 이동하는데 출애굽, 출한국입니다. 내가 만났을 때 19살 먹은 청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히 지나가지 않습니까? 10년만 지나면 이제 같이 늙어 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사전에는 내가 제일 이해 못하는 사람이 아픈 사람입니다. 왜 아플까? 나는 나의 사전에 허리가 아프고 눈이 안 보이고 목이 아프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옵니다. 이렇게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40년 50년 가까운 세월이 바람에 지나가는 주마등처럼 한숨에 확 지나 갑니다. 그러면 덧없는 세월속에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도 떠나가고 내가 하던일도 버려야 하고 예전에 있던 건강도 사라지고 젊음도 나를 버리고 홍화는 사라지고 백발은 다가 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해가 안간다고 하지만 어떤때는 혼자서 이 세월을 생각하면서 펑펑 웁니다. 나는 너무 쓸모없이 인생을 낭비했다. 한 것이 무엇이 있나? 정말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더 집중할 수 있었는데... 더 지혜가 있고 더 많이 알았더라면 했을텐데... 그것이 섬김의 삶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섬기지 않는것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속에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고 그 분께로부터 와서 그 분으로 말미암아 살다가 지금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고 결국은 그분께로 돌아 갈텐데 어떻게 섬기지 않는 인생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그 분앞에 설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항상 기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섬기다 보면 맑은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며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기쁨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라고 말씀 안 드리겠는데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전세계적인 목회자입니다. 한국사람 아닙니다. 그가 개인적인 석상에서 간증을 털어 놓았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에 목사가 무슨 자기의 영혼도 구원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나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남이 보기에는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정말 근심 걱정 없는 삶 같아도 목표 하나를 향해서 달려가는 모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고통이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악하고 또 자신도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악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내안에 내밖에 환경속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한때는 스펄전 목사님을 정말 존경했습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정말 그런분은 19세기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선물입니다. 이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었냐면 설교를 해서 설교집을 냈는데 수십년 뒤에 그 설교집을 다 뜯어가지고 소포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우편배달부가 배달을 하는데 집을 찿다가 못 찿으니까 그 뒤에 있는 글씨를 읽게 되었습니다. 소포를 들고 펑펑 울면서 하나님 만나고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럴 정도로 설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성경적으로 살고 목회했던 아주 부지런한 분이었습니다. 그분도 우울증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지독한 통풍, 그리고 어쩜 그렇게 악랑한 반대자들이 많아 가지고 그 사람이 당시 교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악랄하게 정말 악랄하게 교회 안이고 교회 밖이고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 시기하는 사람 때문에 이층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불이야!" 라고 소리를 쳐서 2층이 무너졌습니다. 나무로 만든것이 무너지면서 열몇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그 신학적인 논쟁들 속에 뛰어 들어서 집요하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유난히 연예인들이 많이 죽었는데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인기를 누리던 사람들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캐들어가 보니까 악랄한 비난입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려서... 그것을 정신의 크기가 있으면 감당을 하는데 병들어 있거나 연약해질 때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살해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전부 그 사람들 하나님 앞에 가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살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나와서 좋은 대학교 나오고 똑똑한 사람이 왜 그랬습니까 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 한강에 투신 자살해 죽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인격살인입니다. 그것이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가을철이 되면 연어가 돌아 오는데 그래서 남대천에 가면 연어 축제를 하는데 여기서 알을 낳아 북태평양까지 갔던 것들이 긴 항해를 해서 남대천으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정신이 한군데에만 꽂혀서 가다가 절벽을 만나게 되면 거기에 몸을 부딪혀서 튕기더라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낚시꾼들의 수많은 밑밥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자기를 낳아준 모천을 향해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그런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게 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예수 내 친구 나를 버리지 않네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고 견디기 힘든 상황을 참을 수 있고 고통스러운 환경을 이길 수 있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입니다. 안에서 계속 샘솟는 기쁨, 하나님 때문에 생겨나는 기쁨, 그 은혜, 십자가의 사랑 이런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참 신기한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동안에는 은혜의 필요를 그렇게 뼈져리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은혜의 필요를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기왕에 섬기려면 잘 섬겨야 되지 않습니까? 잘 섬기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 합니다. 그 힘과 자원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래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힘을 하나님께로 공급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메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신앙도 없고 새로운 섬김도 없습니다.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새로운 그런 섬김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답은 말은 많아도 답은 하나입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그 원천이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차게 되면 거기에서 흘러나와 영혼을 위한 기도가 나오고 거기에서 흘러나와 진리를 따라 살게하고 거기에서 흘러나와 박해를 이기게 하고 거기에서 흘러나와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려도 주님을 의지하게 하고 거기에서 흘러나와 나의 원수를 용서하게 하고 거기에서 흘러나와 견딜수 없는 괴로움을 참고 이길수 있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주님 앞에 갔을때에 "그래 뭘 섬기다 왔니?" 하면 여러분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래 네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마음을 다해서 섬기던 교회는 어디였니? 교회 소속이 어디냐?"했을 때 여러분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항상 살아 있는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눈을, 어제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잤습니다. 새벽에 눈을 떳는데 제일 처음 드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이 이상의 삶은 없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는데 그래서 그 하나님 우리에게 전부 이신데 이 이상의 삶이 없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이 많이 흘러도 신앙의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새로운 원리 똑같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새롭다고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마른뼈와 같은 영혼을 살리는 은혜, 아무 생명이 없는 죽은 땅에 생명이 부어지는 은혜의 소낙비 그리고 비온끝에 돋아나는 새싹들 이렇게 변화되는 광야, 벌판도 광야도 그렇게 누리는 단비에 의해서 변화되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루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갑갑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목말라 하십시요. 그래서 깊이 그 은혜에 젖어서 그래서 변화되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꼭 붙들고 살아 가십시요. 아무것도 안 변해도 나만 변하면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 속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4.참는 섬김과 복 주심1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 (단16:19-20)
여기에는 섬기면서 살다가 간 믿음의 사람 다니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어렸을때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갔고 후에 바벨론은 망했지만 메데바사를 거치면서 역시 이어지는 메데 나라에서도 이제 벼슬을 하며 나라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리오라는 왕이었습니다. 전국을 120개 도로 나누어 전국을 통치하고 그들 중에 3명의 총리를 두었는데 그들 중 한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방백들은 이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해서 나라를 잘 돌보게 하였던것입니다. 그런데 3명의 총리중에서도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났기 때문에 왕이 그를 세워서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말하자면 수석총리에 임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민첩하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참 좋은데 마음이 민첩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사람은 참 좋지만 귀하게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직장생활을 해 보면 그만 두려고 하면 붙잡는 사람이 있고 그만 두겠다고 하면 정말 결정을 잘 하셨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만둘 때 저 사람이 뭐가 어려워서 일을 못한다고 할까? 그 어려움까지 내가 해결해 주고 내가 저 사람을 계속 붙들고 내가 일해야지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만 두겠다고 했을 때 정말 결정을 잘 하셨군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는데 그 중요한 차이가 무엇이냐면 마음의 민첩함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이 마음이 순수하고 동기가 좋아도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사람과 자기 직장에 도움을 줄 수 없으면 높은 자리에 오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사람들이 나가기도 하는데 그때 사장의 고민이 그것입니다. 누구를 내 보낼까? 어떤 사람은 일을 잘해서 붙잡아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은 못하지만 빽이 있으니까 내보낼 수 없고 또 어떤 사람은 일은 좀 못하고 빽도 없는데 성실하고 마음이 착해서 붙잡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느 회사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회사가 넘어가서 구조조정을 하는데 "사장님 사람은 놔 두시죠?" "왜!" "정말 이 사람은 성실합니다." "성실해서 회사에 뭐 보태준것이 있냐?" 사장 하는 말이 재미 있습니다. "나는 우리회사 출근 안해도 되, 돈만 많이 벌어다 주면 괜챦아!" 그만큼 세상이 바뀐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건 간에 귀하게 쓰임을 받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사람은 남다르게 틀린데가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마음이 민첩했기 때문에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위에 뛰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사람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얼마나 주위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했겠습니까? 그래서 요즘 말로 말하면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 본것입니다. 뇌물을 먹은 것은 없나 말썽을 부리는 것은 없나 하고 다 조사해 봤는데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허물도 없었음이니라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비밀 통신을 해서 도청을 해 봐도 이 사람을 얽어 맬 아무 구실도 발견이 안 되었는데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잘 됐다 하고 왕에게 찿아가서 당신이 최고입니다. 나라를 이렇게 차지하셨는데 당신이 최고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나라를 세운 기념으로 30일동안 어느 신이든지 사람에게든지 기도를 하면 사자 우리에 던져 놓기로 하십시다. 그래서 당신만이 우리 모든 나라위에 최고 뛰어난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랬더니 생각이 짧은 다리오왕이 그 왕의 조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다니엘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10절에 보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서도 자기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난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더라 했습니다. 그러니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고 이 민족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에 행하던 대로... 우리가 보면 하나님의 일 열심히 하다가 여건이 바뀌었기 때문에 집어 치우는 사람 많습니다. 이것도 두 종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집어 치우는 사람이 있고 권한 때문에 집어 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다 중대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충성하고 봉사해서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셔서 복을 주셨는데 그래서 사업이 잘 되니까, 그래서 높은 지위에 오르니까, 그래서 가정이 살만하니까 하나님 섬기기를 그만 둔다면 하나님이 예뻐 하실 리가 없습니다.
(예화) 필리핀에 가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날이 더워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열심히 일을 하지 않습니다. 선교지에 한번 갔더니 화장실 하나를 짖는데 세사람인가 네사람을 썼는데 3일째 짖고 있다고 하면서 선교사가 복장이 터진다고 했습니다. 한국 같으면 두사람이서 하루면 지을 것을 3일 시간을 주는데도 못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 하는것 보니까 4일에 화장실을 지으면 기적이겠습니다. 한사람이 콩크리트를 하면 세사람은 쳐다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물을 퍼 오면 세사람은 그 물을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그렇게 하면서 저보고 하는 말이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콩크리트 비비는 시범을 보였습니다. "야! 이것봐라 여기에 서 봐라 그리고 시멘트에 물을 넣고 이것을 뭉게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물이 흘러가지 않게 너하고 나하고 이 삽이 보이지 않게 비비는 것이다. 시작..." 그러니 그것이 될 리가 있습니까? 콩크리트를 비빌때 어떻게 하냐면 물조리로 뿌리면서 콩크리트를 비비는 것입니다. 그러니 콩크리트 비비는데 하루종일 가는 것입니다. 물 양동이 두개 가져다 놓고...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한국에 와서 그렇게 일해서 밥 못 벌어 먹는다. 한국에는 손이 안보인다 했더니 정말 그렇냐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업하는 사람이 한명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진짜 필리핀 사람 같이 않게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기특해서 두달 일을 시킨 다음에 한달치 월급을 더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황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제대로 된 녀석이 들어 왔구나 하고 가게에 나갔더니 안나왔습니다. 왜 안나왔나 했더니 일주일을 안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인간이 어떻게 이럴수 있나 했더니 8일만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 왜 안나왔냐? 네가 그렇게 일을 잘해서 한달치 월급을 더 줬으니 와서 열심히 일을 해야지 왜 안나왔냐"고 했더니 "과외돈이 생겨서 쓰느라고 못 나왔어요"
여러분! 전에 행하던 대로 하십시요. 주님이 일을 맡겨 주시면 받을때에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으십시요. 아무렇게나 생각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받은 후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잘 감당하여야 합니다. 남이 몰라주고 욕을 먹어도 주님 생각하면서 잘 감당해서 휙 집어 치워 버리면 하나님도 발로 차 버립니다. 여러분들 인간의 존귀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기간동안 존귀한 것입니다. 나라에서 사람을 써 줄때에는 과장님, 국장님, 장관님, 차관님 해도 나라에서 필요 없다고 던져 버리면 관악산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위나 장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쓰임 받고 있는 그때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에 높은 직분이나 장,차관은 나라가 써 준 것이지만 주님이 주신 이 직분은 모든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이 주신 직분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그 사연을 안고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이 사람이 결국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왕이 아차 싶었지만 왕이 자기 체면이 있지 조서에 도장을 찍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무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자를 굴 아래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사자를 두어서 사람을 잡아 먹게 할 사자를 삼일씩 굶긴다고 합니다. 인간이나 과식을 하지 사자는 절대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게 하려면 몇일 굶겨서 배가 고프게 만든 다음에 사람을 휙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떨어지기 전에 입으로 물어 뜯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굴 속에 집어 넣고 그리고 아구를 막았습니다. 가만히 다리오 왕이 생각하니까 다니엘이 죽고 나면 다니엘처럼 민첩하게 자기를 위해 봉사해 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먹고 마시던 기락을 그치고 잠을 들지도 못하고 있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사자굴로 달려가서 다니엘이 들어 있는 굴에 이르러서 슬프게 울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다리오왕이 한 이야기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다니엘이 자기 곁에서 함께 한 일생을 보니까 하나님이 늘 살아계신 것이 이 다니엘을 통해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모독스러운 이야기 입니까? 월급은 내가 주는데 종 노릇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월급은 내가 주었지만 나라의 일은 거들었지만 네가 진정 섬기려고 했던 분은 하나님이었지?" 그렇게 놓고 묻기를 "사자에게서 그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그리고 외쳤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그 속에서 소리를 지르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나의 무지함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왕 앞에 잘못한 것이 없나이다. 그리고 왕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보십시요. 다니엘이 한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많은 사람을 통치했지만 그리고 왕의 일을 잘 거들면서 일을 위해서 애를 썼고 온전하게 그 일을 처리해 허물이 없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봐야 그것은 남의 나라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진정으로 섬기고 싶었던 대상은 다리오왕이 아니라 다리오왕 보다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 사람은 남의 나라의 국사를 처리 하면서도 어쨎든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너희 착한 행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비추게 하라는 말씀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약백성으로서 훌륭하게 이 일을 감당해서 왕과 나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들은 나라를 섬겨도 틀리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왕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더니 결국 돌아 온 것은 승진과 명예가 아니라 비참한 사자굴속에 죽음으로 내동이쳐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정도 되면 여기에서 사람들이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 기껏 섬기면서 산 마지막이 이것입니까? 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 큰 난관에서 건져주셔서 오히려 큰 세력을 형성하여 다니엘을 헤치려고 하는 사람들을 모두 정리하시고 다니엘이 마음껏 그 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길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은 길이 막힌것 같아도 하나님이 맡긴 그 길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내심으로 막히지 않았더라면 도달하지 못했을 더 아름다운 지경으로 이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섬기든지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을때까지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을때까지 잘 섬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위기와 어려움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섭리 속에서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5.참는 섬김과 복 주심 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12:12)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항상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목표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잘 봉사한다고 할 때 그것도 영혼의 질서를 올바르게 잡아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교회 생활을 올바르게 한다 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아간다는 뜻입니다. 가정을 복음화 한다는 것도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질서를 잡아 가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항상 가정이 복음화를 기다리고 영혼이 자기 변화시켜 주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은 각자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생겨난 질서들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것이 버릇입니다. 여러분 끊기 어려운 버릇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지저분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왜 그렇게 생겼는지 항상 이렇게 양치질을 하면 그 물로 손을 씻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할머니가 하는 것을 보면서, 그때는 왜 그랬나하면 물이 굉장히 귀한 시절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떨쳐 버렸습니다. 버릇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도 않지만 하루 아침에 끊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내가 내 안의 영혼과 정신의 질서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지만 그래서 내가 고쳐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내 온 몸이 중립적으로 고쳐만 주십시요 즉각적으로 따르겠습니다 하고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예가 있을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만 고쳐주고 내가 내버려 두라는 것은 내버려 두면 좋겠지요? 그런데 그렇게는 안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도록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도 항거하는 것이 일어 납니다. 가정을 복음화하려면 모든 가정이 복음에 목마르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찿기에 갈급함 같이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하는 것 같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가정에 행복이 찿아 오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그것을 제대로 못하는데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가정복음화가 되지 않았쟎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섞여 있을 경우에는 무엇 때문에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로 해서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어디든지 간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대로 가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가려면 거기에는 항상 부딪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고난으로 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으면 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의 경우도 똑같은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한때는 사도바울을 하나님 다음으로 떠받들고 창자라도 빼어서, 간이 라도 빼어서 주고 싶을 만큼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슬슬 이 교회가 병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를 터키에 집회 갔을 때 잠깐 가까운곳에 있어 고린도를 갔는데 그곳은 그럴만 하겠습니다. 항구인데 그 고린도 앞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제 무역 시장이 있습니다. 지금도 몇천년이 지났는데 그 장터가 그대로 살아있고 항구가 있는데 그때보다 훨씬 물이 저 밖으로 빠졌다고 하는데 배를 대면 배에서 각국의 짐들이 내려 집니다. 심지어는 거기서 아주 먼 중국이나 일본 짐까지 거기에서 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물건들이 내려와서 물론 그것은 먼 후대의 이야기입니다. 성경 때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해서 각국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그 시장에서 상인들이 그것을 가지고 내려와서 팝니다. 팔면 몇일을 머물면서 물건을 파는데 얼마씩 돈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거기는 장사꾼들이 새까맣게 모여서 거기에서 희귀한 물건을 받아서 자기 고장으로 가져가서 팔려니까 교통도 발달해야 하고 옛날부터 뱃사람들이 와서 몇 달씩 항해하고 묵으면 거기에서 술도 마시고 그 다음에 유흥도 즐기고 하는 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곳 사람들은 굉장히 풍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시대뿐만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시대에도 그곳은 굉장히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유적을 파 내려가면 그리스시대 유적이 나옵니다. 헬라시대때 유적이... 그런데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보면 양쪽에 시장이 서 있고 대로가 쭉 나 있는데 벌써 그것을 돌맹이로 깔았습니다. 저 끝에 가면 광장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상인이나 애들이 그곳에 앉아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낙서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닥의 돌맹이 좋은것을 다 긁어서 낙서하고 장기판 같은것을 만들어 놓고 장기를 두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돈도 많은 도시 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복음을 전했을때에는 이 사람들이 기쁘게 받아 들이면서 그렇게 사도 바울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이제 처음에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한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면서 큰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이 슬슬 타락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한때는 그렇게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신앙의 아버지처럼 받아 들였던 바울이 가르쳐 주는 가르침이 자기에게 너무 버겁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 없습니까? 그래서 그런것 같습니다. 목회자를 향한 성도의 사랑도 꽃과 같은것 같습니다. 활짝 피었다가 시들고 지고나면 또 새로운 꽃이 피고 또 활짝피고 그래서 그런것을 잘 몰랐을때에는 굉장히 힘듭니다. 사도바울도 굉장히 힘들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뭐라고 했냐면 너무 황당한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어쩌면 사도가 아니라는 소문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12명중에 하나도 아니고 예수님 만나지도 못했는데 사도라고 말할 수 있겠나? 한때는 자신에게 복음을 받아서 그렇게 감격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사도 였겠나 하는 것입니다. 말이야 그렇게 간단하게 하지만 사도바울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다 하다가 안되겠으니까 12장에서 자기가 사도라고 하는 것을 한번 어쩔수 없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체험을 쭉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비난도 받았던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 사도이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이라면 그 수 많은 사람들 병을 고치는데 자기 병은 왜 못 고친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이야기까지 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병이 있어서, 학자들은 눈병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좀 물러가게 해 달라고, 그래서 사도바울이 쓴 편지들은 대부분 남이 써준 것입니다. 자기가 부르고 대필해 준 것입니다. 어째든 그것인지는 모르지만 육체의 가시가 있어 물러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오히려 내 은혜가 족하다 세 번이나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도 내 은혜가 족하다 그 질병 계속 달고 다녀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에 간곡히 내가 사도라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건 볼 때 그 물건이 좋은 물건인지 믿을 수 있는 물건인지 무엇을 보고 확인 합니까? 표 보고 확인을 하지 않습니까? 사도도 나도 표가 있다 하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인데도 표가 무엇이 붙어 있나에 따라 값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그 표가 무엇이냐면 사도라는 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할때에 지금 계속해서 이 사람들이 사도 이겠느냐 하고 이 사람을 사도가 아닌것 처럼 부인 한다면 사도는 무엇을 표로 내 세워야지만 그 사람들을 꺽을수 있겠습니까? 나도 예수님 보았다. 나도 가까서는 아니지만 멀리서 보았다. 아니면 그 다음에 또 나도 병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안 고쳐줄 때 내가 스스로 거기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했더니 났더라. 그런데 그 정도가지고 안됩니다. 내가 죽은 사람도 기도해서 살린 사람이다. 그리고 나한테 대들다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만 사실은 저 인간들을 밟아 버릴것 아닙니까? 돈 없다고 나를 괄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돈을 보여주면 됩니다. 육체의 힘이 없다고 깔보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집어 던지면 기를 꺽는것 아닙니까? 사도바울도 그런식으로 대응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사도가 아니다. 그래. 까불지 마라. 너 한번 볼래? 이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원래 성격으로 보면 그렇게하고도 남을 사람이었습니다. 혈기방자한 젊은이였지 않습니까? 오죽 독종이었으면 스테반이 돌을 맞아 죽는데 자기들은 그 증인들의 옷을 지키면서 가편투표를 하고 그 의인이 죽어가는 광경을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사도의 표가 있다. 사람들이 생각할때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뭐라고 하냐면 내가 너희같은 인간들을 오래 참은것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라고 하는 표다. 그리고 뒤에 표적과 기사 능력 이런것들은 영적인 파워입니다. 이것은 뒤로 가는 것입니다. 뒤로 가고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내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사도의 표 된것이 있는데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 그것이 첫번째로 올라 오는 것입니다. 참는것... 그것이 사도의 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참는것이 무엇일까? 여러분들은 모두 아는 것 같아도 참는것이 무엇일까? 참는것이 무엇 같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참는다고 합니까? 쉬울수록 어렵습니다. 이런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데 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수고를 해야 하는 것 그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술을 좋아 하는 사람이 술을 사러 헐레벌떡 슈퍼에 뛰어 가는 것 그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게임을 워낙 좋아하는데 팔이 저리도록 게임을 하는 것 그때 그 팔저림의 통증 이것을 견디는 것 이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노름을 좋아 하는 사람이 화투를 많이 쳐서 팔목이 시큰거리는 것 그래도 치는 것 이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 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 어떤 의무 때문에 그것을 견디는 것을 가르켜서 참는다고 말합니다. 또 의무 때문에 견뎌도 참고 싶을때까지만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통계가 나왔는데 사람이 이혼을 결심할 때 30분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대부분 30분안에 결정을 한다고 합니다. 생각은 많이 하지만 결단을 내리는 것은 30분안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화났을 때 그 사람을 만나면, 화나면 그 사람을 열렬히 찿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찿는것처럼...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쏟아 놓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30분만 지나면 안하게 됩니다. 그것을 안 참는 것입니다. 진짜 참는 것은 참고 싶을때까지만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 것은 참아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참음으로서 그 목적이 성취될때까지 참는 것 그것이 참는 것입니다. 복잡한 이야기인데 한마디로 줄이면 영원히 참는것 그것이 참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했으면 가슴에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데 사도바울이었기 때문에 가슴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세가지 이유에서 가슴에 다가옵니다. 우선 첫째는 이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이다. 두 번째는 참음하고 회심하기 전에는 이 사람 성격이 별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이 참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 이 참음에 대해 연구하면 사울이었던 시절의 그 인간과 예수님 만나고 바울이 된 다음의 인간 그 둘 사이에 아주 확연한 대조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우리 눈길을 끌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 참지 않아도 될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참았다라는데 대해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참기라도 잘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장도 못다니고 자기사업도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능력이 없으면 누구 덕을 보고 살아야 하는데 그냥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못합니다. 그러면 쪽박 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명하노니 물러가라 하면 귀신도 떠나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는 어느 정도 였습니까? 선언 하니까 사람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런 능력에 있어서 베드로만 못했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이러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사도의 표된 것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모든입니다. 사람마다 참는 정도는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것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주님이라도 한판 붙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배고픈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외모가 사람들에게 후져 보이는 외모는 못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한번 몇년전인데 잠깐 텔레비전을 보는데 거기에서 제자들이 성공해서 선생님 찿아가는 그런것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생님을 찿아 가는데 아주 유명한 영화배우가 된 사람인데 선생님을 찿아 가는데 선생님을 뜨겁게 포옹하면서 반가워 하면서 이제 아나운서가 물었습니다. 지금은 탑스타가 된 이 학생에 대해서 어렸을 때 생각나는 것이 없냐고 하니까 선생님이 애는 정말 못말리는 애 였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도시락도 못 싸와서 너무 불쌍해서 만원을 줬다고 합니다. 이것 가지고 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줬더니 그 돈을 가지고 퍼머를 하고 오더랍니다.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사람마다 틀립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모든 것을 다 못참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원래 잘 참는 것 그 자연적인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참을 수 있었던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못 참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점에서 내 성질을 건드리면 다 집어 치우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기보다 돈 없고, 빽없고, 힘 없는 사람들한테는 그것이 폼 잡는 말은 될 지 모르지만 똥 폼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를 절대 존경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돈만 조금 더 벌면 그런 사람들 제일 먼저 밟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반 은총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향해 잘 참고 덕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가 이야기 하는 이 모든 참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가 자연적으로 잘 참는 특기가 있는 어느 한 분야를 참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고리도후서 1장에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참으면서 살아 왔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을 합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이 끊어지고 우리의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줄로 알았으니... 그럴정도로 깊은 고통을, 가지가지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고린도 교회에 한때는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만들어 주고 자기 품에서 말씀을 먹여서 인간으로 만들어 놨는데 그 인간들이 고개를 쳐들고 사도 바울이 진짜 사도냐 요즘으로 말하자면 가짜 목사 아니야 그리고 진짜 제대로 된 목사이면 어떻게 자기 병도 못 고친데? 그러면서 온갖 험담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해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 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한쪽에서는 이 사람을 목회자로도 안치고 무시하는데 사도바울 마음속에는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자기를 허비하는 것 같이 그렇게 다 주고 허비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도대체 참는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참음은 사도안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참음을 계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만이 참음을 계속하게 한다면 사도바울이 사실 여기에 내가 사도의 표가 있는데 그것은 능력이나 권세 이런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딘 것이다. 결론은 너희들이 뭐라고 해도 내가 정말 사도이고 내가 사도된것이 무엇에 의해 증명 될 수 있냐면 내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참음이라는 것을 사도는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에서 배운것이 아니라 예수님 전체의 생애를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른것이 없는 것은 없는 이유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래 참음이 없는 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비록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의 생애를 다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의 교분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하고 그분께 치료의 은혜, 말씀의 떡 이런 모든 것들을 받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너무나 생생하게 우리 보다 더 훨씬 생생하게 예수님이 이땅에 33년동안 계실 때 어떻게 태어나셔서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눈으로 보듯이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슴에 끊임없이 예수님의 생애가 그림처럼 그려져 밀려왔던 것은 예수님의 생애는 모든 것을 참으시는 생애였습니다. 누가 예수님 보고 열정이 모자라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열정에 넘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오래 참으셨습니다. 참지 못하는 제자들이 인간의 혈기를 부리려고 할때마다 예수님이 후렴처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거라. 너희가 만약 그렇게 하면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참음은 이유 없는 견딤, 까닭없는 인내가 아니라 아주 분명한 목적을 바라보고 그 목적이 성취되기를 바라면서 그것 때문에 참는 참음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혈기,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 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분노하는 순간 그 욕망의 실체는 하나님처럼 주권을 행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못참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너무 모릅니다. 사랑은 인내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중요한 사명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절실한 사랑이 없어도 시간은 낼 수 있고 절실한 사랑이 없어도 돈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어도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우리는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불사르게 내어주나 하는데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앞에 사랑이 없어도 시간도 돈도 희생도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없으면 절대 못하는 것이 참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면 어떻게 되냐면 울화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가난하고 힘든 어느 부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찰을 했더니 한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그것을 성격적으로 밖으로 표현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끌어 안고 있으면 이 속에서 울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몸을 썩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암에 잘 걸립니다. 심장 계통의 병에 잘 걸리고...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참으라고 하시는 것은 이 속에서 주저리 주저리 한이 맺힌 가운데 폭발하지 말고 견디라는 그런 의미에서의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하면 쓰레기 같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 때문에 참은것이 아니라 자기를 거기에 세워주신 주님 때문에 참은것입니다. 만약에 고린도 교회를 돌보아야할 사도의 사명이 고린도 교회 교인에게로부터 온 것이라면 이 사람이 벌써 버렸을 것입니다. 안 살면 되지 않습니까? 안 보면 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어디를 가든지 사도바울같은 목회자를 환영하는 교회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하나님앞에 부름을 받아서 돌보도록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교인들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참았던 것입니다. 모욕과 모든 것을 참아서...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마지막으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오후마다 하는 시리즈가 섬겨서 복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렇게 가슴이 저리도록 참아서 무슨 복을 그렇게 받았는가? 여전히 질병을 가시처럼 달고 다녀서 사람들에게 흉 잡히고 했는데 그 참음이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사도바울이 육신의 가시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애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충분하다." 말이 됩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제자들에게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라고 했습니까? 그냥 가서 "여기 좀 고쳐 주세요?" 하면 "내 은혜가 족하다 살아 있는 것만해도 감사하라" 앉은뱅이가 기어 다니면 "애야! 그래도 팔다리 없는 것보다 백번 낮지 않냐?" 문둥병이 걸려 죽어 가는 나 좀 고쳐 주세요 하면 "애야! 네가 문둥병이 걸렸어도 아직 죽지않고 살아 있으니 네 은혜가 족한줄 알아라" 그러면 될텐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병자를 고쳐주고 가난한 자를 돌보면서 복음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때는 거기에 깊은 또다른 뜻이 계실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뜻이 뭐냐면 하나님이 바로 그에게 주시려고 하는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우리 흔히 네 은혜가 족하다 하는데 네 은혜가 아니라 내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 충분하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이 네가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도바울 기분 나빠하실까봐 빙빙 돌려서 말씀하신것을 사도바울이 체면이 있으니까 한번 더 돌려서 어려운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 해 볼까요? "나 이것 좀 고쳐 주십시요?" 하니까 예수님이 "주제에 그만하면 됐다." "왜요?" "왜냐하면 네가 그나마라도 병에 걸려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니까 나를 의지하지 그것까지 내가 너를 고쳐주면 네가 사람이 되겠니?" 그 뜻입니다. 돌려서 이야기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나중에 고백하는 것이 "내가 정말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래서 나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 마음에 녹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가 참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혈기방자한 이 젊은이를 이렇게 내가 정말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 난지 8일만에 할레를 받고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요 흠이 없는 자여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다.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자랑하던 사람인데 내가 정말 자랑할 것이 있다면... 이 사람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학문, 영력 그리고 지도력,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능력, 병자를 고치는 힘, 선교전략등 너무너무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안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백하면서 "내가 정말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내가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내가 약한것을 자랑하고 나면 결국은 나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그 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은 참고 견디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에게 그를 이렇게까지 변화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참는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참으면 때로는 자기 안에 더 많은 상처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해야 하냐면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나에게 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돕는자가 없이 혼자 이렇게 고생하게 고난과 시련속에서 기적의 도움을 바라건만 주님은 멀리 계신것처럼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구나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앞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면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참으십시요. 오랫동안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행복하고 모든 것이 잘 될 때에 교만하지 말고 반드시 쓰디 쓴 날이 오고 사명의 길이 외롭게 느껴지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안 그럴때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참아야 합니다. 꼭 참고 참는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되어질 때 마다 죄 없이 나무에 누워 십자가에 박히시던 주님의 그 손과 발을 생각하고 내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할 때 주님이 지고 가시던 그 십자가를 생각하고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외롭게 있다 생각 할 때 열두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던 그 예수님의 고독을 생각하면서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하나님 그리스도 속으로 더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의미에서 홀로 있을 때 찿아 오시는 주님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오래 참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여기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힘이 들 수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오라는 곳도 있는데 기도해 보면 하나님이 더 있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힘들고 마음에 밀려오는 유혹은 여기서 이렇게 참는 것이 내 인생의 무슨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 그때마다 부르던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 눈물 흘림을 몇일 더 닮고 행할 길을 다가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실 때 영광중에 나아가리 아! 그렇구나 주님은 우리를 당신이 세워주신 거기에서 견디고 참고 이제 그만 됐다 이제 내가 옮겨주마 하실때까지 거기에서 그냥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견딜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이 사랑의 힘입니다. 은혜를 통한 사랑의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다스리고 또 참고 참고 참고... 이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안 있더라면 혈기방자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거꾸러지고 넘어졌을 인간을 거기에서 자기를 비우고 아무것도 자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신자의 최고의 행복이지 않습니까? 섬기면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주일에도 몇사람이 와서 이렇게 섬기는데 어렵고 성도들이 협조를 안해 주고 교회에서 안 도와주고... 그 사람들도 많이 깨달야지만 그러나 당신이 더 많이 참으십시요. 그리고 참을 수 없다라고 생각될 때 아! 이것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분량이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오래 참고 견디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섬김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6.견딘 섬김과 복 주심1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1:9-10)
아시다시피 이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되어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을 적은 기록입니다. 참 신기하게 12명의 모든 제자들이 순교를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유독 이 사람만 자연적인 생명을 끝까지 누려서 이 책을 쓸때에는 95세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러니까 참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한을 이렇게 오래도록 살려 두셔서 저물어 가는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중요한 통로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신 것을 대게 30년경으로 보고 더 빨리 보는 사람들은 27년경으로 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한 3년정도 사역하시고 돌아 가셨으니까 기껏해야 AD 35년경에는 이미 예수님은 없으셨고 그리고 이 사람은 이 긴 세월동안 살아남아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통로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요한이 먼저 죽은 다른 선배 사도들보다 덜 고난을 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사람을 사형시켰는데도 죽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우리는 다 믿지는 않지만 어쨎든 그렇게 일평생 아주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사람이 살아 남았던 것입니다.
섬김과 관련해서 이 사람의 자기 증언을 우리들이 들어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소개하는데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즉 그리스도 예수안의 형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자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환란에 동참한다, 예수의 환란과 나라 그리고 참음에 동참한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의 나라, 예수의 환란, 예수의 참음 모두 예수와 관련된 것인데 예수의 환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환란이라고 하는 것은 생애 전체가 고난이었으니까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환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환란의 극치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그렇게 설명하고 보면 왠지 틀린것 같지는 않은데 시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뭐냐면 교회의 환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교회와 당신 사이의 일치를 강조 하십니다. 그 한 예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을 만나지 않습니까? 주여 뉘시이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예수님이 뜻밖의 대답을 하시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수님을 진짜로 핍박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문제를 삼고 있던 것은 예전에 네가 핍박했던것이 아니라 지금 네가 핍박하고 있는 예수다 라는 뜻입니다. 핍박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를 핍박한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그것이 곧 나를 향한 핍박이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가 핍박하는 그 교회 그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의 환란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교회가 그 치열한 핍박속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미 이때에는 치열한 로마의 조직적인 박해가 이미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 였습니다. 배교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하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던 그 때 였습니다. 그것을 사도가 오늘 예수의 환란이라고 묘사하는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환란, 그리스도의 교회, 핍박받고 환란을 받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그 환란에 내가 동참하는 자다 그리고 동시에 또 예수의 나라에 동참하는 자다 이것은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예수의 나라는 이땅의 어느 지역이 있고 깃발이 서 있어서 정부가 조직된 그 나라가 아님니다. 그렇죠? 이 나라는 누구든지 주를 고백하고 성령이 그 마음에 온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복종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는 그 나라가 예수의 나라이지 않습니까? 그 나라에는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그 아름다운 교제 안에는 행복이 있지만 그 아름다운 교제 밖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거부하는 옛날의 질서와 더불어서 싸우는 거기에는 치열한 세상과의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바로 동참하는 자라 이것은 전사적인 생애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의 환란, 예수의 나라 모두 이것은 공동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이 참음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 요한이 아주 개인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요한은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참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렇게 견디면서 환란과 시련을 견디고 박해를 견디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든 교우들과 작별을 하고 이 외로운 섬 밧모에서 이렇게 홀로 외롭게 견뎌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자기도 함께 시련을 당하면서 그 고통을 견디는 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밧모라는 섬에 갇히게 된 이유를 말하는데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갇혔다, 도둑질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치거나 부도덕한 일을 했기 때문에 체포되어서 이렇게 모진 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여기에 갇혔다. 즉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그 죄 때문에 지금 이렇게 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귀향살이 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요즘같이 바쁘고 힘든때에는 귀향 한번 가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파도가 철썩철썩 치고 전화도 안되고 휴대폰도 안되는 곳에 몇일 귀향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몇일 가는 것은 우리들이 귀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휴가라고 하지... 대게 귀향을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고 특별히 나라에서 지정한 사람 이외에는 귀향 간 그 사람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처벌을 당합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사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어렸을 적을 생각하면 복잡한 도시를 떠나고 싶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서울 변두리에 사는 사람도 "나 시내 나갔다 왔다"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너 어디 가니?" "나 문안 간다" 4대 문안... 그렇게 복잡한 도시속을 돌아 다니다 오는 것을 굉장히 자랑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늘 보는 것이 풀이요, 나무요, 벌판이요, 밭이요 하니까 그런것들이 귀한 줄 모르고 오히려 사람들 속에 부디끼고 어울리고 사는 사람들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창경원 같은데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한것이 그렇게 신기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아픕니다. 진짜 사람들 보고 머리가 안 아플때는 교회 이외에는 어디서 봐도 머리가 아픕니다. 사람들이 정말... 그런데 그런것을 한번 많이 확장해서 한번 생각해 보면 이 당시의 귀향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은 나이가 많아도 목회자였습니다. 사랑하는 교회도 있고 사랑하는 교우들도 있지 않습니까? 전승에 의하면 이분이 너무 나이가 많아서 설교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축을 해서 간신히 설교단에 올려 놓으면 인자한 모습으로 손을 높이 들고 "자녀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거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니라"하고 내려오면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든 성도들도 있고 그렇게 섬기는 교회도 있는 그 사람이 아무 교제할 일이 없이 이 외딴 밧모라는 섬에 갇히게 된 것이 무엇때문이었습니까? 예수의 증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증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로마 조정에서 핍박하는 사람들이 그만두어라 하였을때 그만 두었으면 여기까지 끌려 왔을리가 없습니다. 순순히 말을 들었으면 사랑하는 교회에서 떠나서 정든 가족들과 작별하고 이 외로운 섬에서 혼자 고독속에서 지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끝까지 자기의 예수 증거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애썼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오랜 섬김속에 돌아 온 것은 이렇게 외롭고 고통스러운 귀향살이였습니다. 세상의 맥락에서 보면 섬기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성립합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잘 섬기면 복 받는다고 할 때 항상 이속에 돈이 떠오르면 안됩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그러는데 주님을 위해서 헌신합시다 하면 성도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멘!", 주님을 위하여 충성합시다 하면 "주여!", 우리 모두 기도 많이 합시다 하면 "주여! 아멘!", 헌금도 합시다 하면 "어! 왠돈!" 우리는 그것이 아주 예민한 영감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렇게 보면 그렇게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으며 동참하면서 그 핍박을 견딘 그 섬김의 결과로 복을 받았다고 말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복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만약에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람은 정말 실패한 사람입니다. 복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복을 가르칠 때에는 복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복에 대한 총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복이라는 개념에 접근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배시간마다 부르는 그 찬송은 참 감동적입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성부 성자 성령"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악한 인간이건 모든 선한 인간이건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공통됩니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있는 상태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그 복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쨎든 그렇게 보면 이 사람이 그렇게 오래도록 견디고 참은 끝에 돌아 온 것은 쓸쓸한 귀향살이뿐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 뒤에 우리가 본 구절을 보니까 과연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그렇게 오래도록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며 견딘 끝에 받았던 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복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복 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시대에 될 위대한 일 그것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시지 않고 요한 이 한사람을 복잡한 도시 사람들이 많이 있는 육지에서 불러내어 아무도 없는 이 외딴 섬에서 독대하시며 당신의 마지막날의 위대한 계시를 이 사람에게 홀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럽니다. "나 대통령 만났다!" "어휴 대단하시네요? 언제 가셨어요?" 지난달에 만났다고 합니다. "어떻게 만나셨어요?" 삼백명이 청와대를 방문해서 까치발을 뜨고 봤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난것이 아닙니다. 대통령하고 둘이 앉아서 밥을 먹었으면 진짜 만난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만났어도 만남의 수준이 틀린 것입니다. 그렇죠? 이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마지막날에 될 위대한 일에 대한 계시를 요한에게만 알려 주셔서 그래서 모든 교회가 귀를 기울이고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뜻을 전달 받도록 만들어 주셨으니 이것을 신령한 차원에서 보면 누구도 누리지 못했던 탁월한 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복을 언제 받게 되었느냐 하면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면서 오래도록 견디고 심지어는 그렇게 섬긴 마지막이 비참한 귀향살이가 되었는데도 그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는 섬에 있기를 거절하지 않았을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위대한 마지막날의 계시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쳇 그것 보면 뭐해?"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복을 주셔서 하다못해 아파트라도 하나 생겼다든지 아니면 입신양명을 했든지 해야 그것이 복이지 그것이 뭘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설명을 할테니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들어 보십시요.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통해서 마지막시대에 교회에 보내신 이 계시는 그냥 사도에게 보여주셔서 그냥 전달해주는 우편배달부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전달된 계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계시를 받는 가운데 요한은 기뻐하기도 하고 통곡하기도 하면서 그 계시를 전달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막다른 골목에서 이제 도저히 어디로 날아 갈수도 없고 도망 갈 수도 없고 인생을 고달프게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열린신문 간증에도 은혜로운 간증이 실렸는데 친구의 전도를 받아서 그냥 교회에 왔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잘 깨달아지면서 기쁨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냥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것이다 하고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질 때 예수의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도 그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도 그 인격적인 따뜻함과 함께 우리속에 함께 스며들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나면 우리의 삶이 갑자기 금시발복을 합니까? 안그렇습니다. 집에서 여전히 말썽부리던 남편 은혜 받고 집에 가면 여전히 그렇습니다. 공부 안하고 뺀질되던 자식들 여전히 똑 같습니다. 그런데도 내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생명의 기쁨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날에 위대한 계시가 전달될 이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항상 맛있게 음식을 차려서 내려 보냈더라면 30분동안 행복했을 것입니다. 가족들을 만나게 하고 교회로 돌아 갔으면 요한이 한달쯤 행복했을 것입니다. 한달쯤 지나고 나면 목회자 속 썩이는 교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까요? 이 사람이라고 별것입니까? 자기도 인간인데...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면서 오래도록 견디는 이 요한에게 위대한 날들의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큰 은혜를 입고 비록 환란을 당하고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아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외로운 섬에 있었지만 이 노사도의 마음속에는 두고 가야할 이땅의 나라 보다는 자신이 도달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찬란한 영광으로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끝까지 다 보았을때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승리하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 찬란하고 무궁한 영광의 나라, 빛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다시는 눈물과 슬픔과 이별과 고통이 없는 그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분명히 한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알고 십자가의 사랑앞에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감격하고 주님의 말씀의 맛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들인데도 시간이 흐르면서 입맛이 변해서 말씀이 안 들어 온다는 이야기를 가끔하고 본인들도 경험을 합니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아도 경험합니다. 말씀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입맛이 변한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꾸 어렸을때에 젊었을때의 음식 생각하고 그것을 굉장히 먹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거의 공통된 것입니다. 그래서 20대때에는 맛있는 것이 있다고 멀리 가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도 없고 차도 없고 하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한끼씩 때우는데 나이가 들게 되면 고향에서 먹던 국수맛이나 아니면 어렸을 때 먹던 짜장면이니, 부대찌개니 하면서 그렇게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학자들에 의하면 가서 그것을 먹어도 그 맛이 안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각세포 자체가 변했기 때문에 기억은 또렷이 남아 있는데 그 음식을 그 사람이 살아서 똑같이 해 주어도 그 맛이 절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입맛이 변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그런데 왜 그렇게 입맛이 변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육체의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안에서 소화합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우리의 지성은 그것을 받아서 입에 집어 넣는 손이고 그리고 그것을 이빨처럼 잘근잘근 씹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확 베어 들어 올때에 우리는 그 맛 안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은혜의 감미로움 같은 것들을 이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사람들이 소고기를, 우리가 소고기를 사러가면 비싼데 지금도 7,000원짜리 뷔페 집이 있는데 소고기를 마음대로 먹고 밥도 먹고 7,000원 혹은 만원하는데 내가 하도 궁금해서 한번은 잘아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퍼주고 그때는 7,000원 이었는데 지금은 올랐겠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여러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한마디 이야기를 합니다. 소고기가 같은 수입산이라도 1 Kg에 40,000원부터 1,500원짜리가 있다고 합니다. 1 Kg에 1,500원이면 그러고 보니 계산이 맞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니까 거의 다 죽어가는 소, 젖을 짜다가 이제 더 이상 젓을 낼 기운이 없어서 쓰러진 소, 조금 안된 이야기지만 실험하다가 버리는 소 이런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 붙이는 말이 그런 고기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에 별로 안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고기는 한근에 그 당시의 가격으로 100g에 150원인데 어떤 고기는 그 당시에 100g에 가격이 3,000원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입에 넣어서 배가 고플때는 입안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 집니다. 한번, 두번 씹고 삼키니까... 기껏해봐야 5초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20초 이상 씹으라고 하는데 이빠진 할머니 빼놓고 누가 그렇게 씹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섯 번 정도 씹고 꿀꺽 삼키니까 기껏해야 5초, 8초 머물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뱃속에 들어가고 나면 수입육이든지 한우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그것이 욱하고 토해서 다시 올라 온다고 하더라도 그때 맛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모두 위산에 섞여서 시금털털한 것이 올라 오니까 우리가 되새김질 하는 소도 아니고 한번 먹고 들어가면 끝인데 그 다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가서 마지막에 나올 때 한우라고 예쁜소리 하고 나옵니까? 그냥 똥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비싼 돈을 주고 좋은 고기를 우리가 먹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씹을 때 그렇게 비실비실하다가 죽어서 1Kg에 1,500원 밖에 안하는 소고기는 씹을 때 꼭 대나무 입사귀 씹는 것 같고 수수깡 단물 빼 먹은 수수깡 씹는 것 같습니다. 아무 맛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우는 씹으면 육집이 흐르면서 약간 느끼하면서도 아주 감미로운 그 맛이 온 혀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싼 돈을 주고 먹는 것입니다. 요즘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한우 같습니까 아니면 수입소 1Kg에 1,500원짜리 같습니까? 어렸을때에는 고기를 먹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저희 어렸을때에는 고기를 물론 정육점에서 팔았지만 그런 정육점이 시장에 하나 있을까 했고 그것을 찿아가서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 본 기억은 없습니다. 대게 구르마에다 혹은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다라니에 이고 오는 아줌마나 아저씨들이 선지하고 같이 팔았습니다.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저희 할머니는 꼭 아팟을때에만 사 주셨습니다. 온통 독감에 걸려 정신을 못 차릴 때 사주셔서 그것도 늘려 먹는다고 당면을 잔뜩 집어 넣어서 고기는 가끔 오고 가게 해서 가지고 오십니다. 그러면 얼마나 그것이 맛있을텐데 입에 넣고 씹으면 정말 수수깡 씹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몇일 지나서 몸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맛을 느낄때쯤 되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왜 그렇게 맛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단물 빨아먹은 수수깡처럼 맛이 없고 그런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두가지 대답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대답은 어디에서 찿을 수 있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에서 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셨는데 그 이백오십만명쯤 되는 사람이 쏟아져 나와서 놀 때 가축까지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 먹는것이 그 광야에서 장난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곡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와 보았자 얼마나 버텼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곡식이 떨어질때쯤 되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만나를 내리시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때 그 이스라엘의 감격은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우리 초등학교때 아이들이 눈이 펑펑 쏟아지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것이 쌀가루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이들이 얼마나 배고프고 가난했으면...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 났습니다. 하얗게 널려 있는 것입니다. 바가지로 담아다가 가지고 와서 떠 먹으니까 기가막힌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떡을 먹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불평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기를 다오 언제까지 이 맛없는 만나만 먹고 살아야 하나? 고기를 다오 그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진리가 빠진 그런 내용들이 교회에서 말씀이라고 전달되는것은 일차적으로는 설교자 자신의 소명이 충실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차적으로는 거기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먹이면 처음에는 그렇게 감격을 하고 받아 들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또 만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기 좀 다오 세상 이야기도 좀 해 다오... 어떤 미국의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잡지에서 읽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예배가 무슨 제사라는 것입니다. 맨날 모이면 우울하고 눈물 흘리고 심각하고 자기는 이 예배가 코메디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정신 나간 것입니다. 그런 설교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영혼은 급속히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확실한 것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식습관을 부모가 정해서 들여주는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지만 아이들이 먹고 싶은데로 먹으라고 방치하면 균형잡힌 먹거리를 찿아서 건강식을 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가끔 살을 빼려고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온 사람이 있는데 이런 이런 음식 먹으라고... 그것이 맛이 있습니까? 고기를 먹어도 닭고기만 먹고, 그것도 가슴살만 먹고, 굽지도 말고 기름 바르지도 않고 양념하지도 않고 맑은 물에 삶아서 소금만 찍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맛이 있습니까? 그리고 닭을 먹어도 껍질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니 그것이 무슨 맛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좋아하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패밀리 레스토랑 하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건강이 뭐라고 의사들이 이야기하던지간에 하여튼 패밀리 레스토랑은 튀기고 설탕을 많이 부어야지만 팔린다는 것입니다. 튀기고 설탕을 많이 부어서 싫다 하고 안팔리는 요리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설탕 덩어리를 만들고, 기름 덩어리를 만들어서 제공을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먹어야할 식사량이 2400kcal 정도 되는데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데 가서 허리띠 풀르고 퍼 먹으면 6,000kcal를 한끼에 먹어 치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전부다 살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습관에 길들여 지면 사람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런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너무 슬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능력이 없어서, 안주셔서 슬퍼하신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신 이유는 그것만 먹고 수도사처럼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의미를 생각하면서 만나를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인간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것이니라고 한 이 교훈을 자기가 심지도 않고 뿌리지도 않은 그 땅에 떨어진 하나님이 내리신 만나를 보면서 그것을 먹으면서 영혼의 양식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진리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매일 그 만나를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만나를 거부한 것은 이 만나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이 놀라운 영적인 의미까지도 거절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이 사람이 그렇게 마지막에 위대한 계시를 보면서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면서 오래도록 견디었기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감격이 계속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이 정말 여러분속에서 미각을 잃어버려서 예전의 그렇게 한우 고기처럼 육즙이 나오고 맛있고 달고 그래서 늘 여러분들의 영혼에 용기를 주던 하나님의 말씀이 맛없는 말씀이 되었다면 그대들의 섬김의 삶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것도 안 섬기고 교회 뒷자리에 앉았을 때에는 그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교회 일 한다고 부리나케 오고 가고 하니까 말씀에 은혜 받는 그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섬겼기 때문에 은혜가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입니다. 일을 한다고 해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계속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섬기는 것과 일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다. 일하는 것은 일이니까 일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께 마음을 드리고 그 반영이 그러한 마음이 섬김속에 일 속에 투영되었을 때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섬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주전에 다니엘을 볼 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방의 왕조차도 뭐라고 그랬습니까? 자기 밑에서 그렇게 일생을 온 몸과 마음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 충성한 다니엘 보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를 섬기는 다니엘아!" 안 그랬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내 쫄병 다니엘아" 안 그랬습니다. "내 꼬붕 다니엘아" 안그랬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지키시기에 능하셨느냐? 몸은 이방의 나라에 그리고 일로써는 이방의 임금을 섬기고 있어도 그 모든 섬기는 일을 그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진정으로 이 다니엘이 공경하고 싶었던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들 눈에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일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미각으로부터 멀어 집니다. 그런데 섬기면 하나님의 말씀이 미각에 계속 살아 납니다. 그러면 왜 어떻게 해서 섬기면 섬길수록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내안에서 계속 살아날까? 다음주에 계속 하겠습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7.견딘 섬김과 복 주심 2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1:9-10)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잘 들리는 것과 섬김의 자리에서 잘 견디는 것이 어떻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그 말씀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지속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읍니다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더 많이 말씀을 듣는 지혜가 열리는 사람이 있고, 일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뭐라도 맡고 나서 부터는 말씀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 자체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빠지는 시험입니다. 그것이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것을 섬기라고 세워주신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그렇게 섬기고 있기에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어떤 사람은 섬기기 전에는 안 그랬는데 섬기고 나서는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차이가 있는데 일 자체에 우리를 말씀으로부터 떼어 놓고 붙여 놓고 하는 힘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섬기느냐에 따라서 그것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노라면 기쁘고 보람있는때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괴롭고 힘들고 희생하여야 하는 때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이런식으로 하나님의 일과 관계를 맺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일을 하게되면 혼자서 하는 일은 거의 없고 다른 사람과 대부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서 하는 일들도 있을 수 있지만 혼자서 하는데 이 일이 다른 사람과 연관을 갖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일을 할때에 만약에 일을 하는 그 사람이 일 그 자체가 자기가 섬기고 봉사하는 것에 끝이 되면 일이 잘 될 때에는 일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것을 보고 기쁨을 느끼니까 그 일을 사랑하게 되고 그러니까 열심히 하게 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꽃처럼 활짝 필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할때에는 좋은 결과를 내려고 지혜를 짜서 한다고 했는데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할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일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일뿐 아니라 세상의 일도 잘 안되게 하는 일은 어디서나 숨어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을 할때에는 만약에 백의 힘이 들어야 하는 일이라면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백이십 정도의 힘, 여유, 마음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어려움이 오면 그 댓가를 지불하면서도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일이 끝일 경우 꽃처럼 활짝 피어날때는 그 일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일이 어렵게 되면 그 일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견디지 못하게 될 때는 반드시 불평하게 하는 요소가 들어오고 사람이나 환경을 향한 불편은 항상 그 속에 그런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인간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대게 교회에서 큰 불평이나 불만을 품고 교회에 상처를 주거나 아니면 자신도 괴로워하면서 교회를 이탈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주일날 와서 축도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져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일을 하는데 좋을때까지 할 수 있고 견딜수 있을때까지만 견디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이야기하는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참음에 동참하는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의 경우는 어떤 일이 자신에게 주어졌을 때 그 일을 통해서 일 하고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오히려 일은 수단일뿐이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일의 상황 모든것이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면서 신앙적인 안목에서 그 일을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는 마음과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마음과 힘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관계인가? 그 일을 통해서 그 일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 일을 꽃처럼 활짝 피어나게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일의 잘되고 안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고 그러니까 일하는 것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 일을 하지 않을때도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가 하나님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그 사람도 알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신령한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많은 통로들은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입니다. 사업, 직장생활, 가정생활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계획 이런것들에 참여하면서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다양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람들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만약에 그 일이 자기가 스스로 맡은 일이라면 자기가 싫으면 그만두게 되고 사람에게서 맡은 일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지면 혹은 그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면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인간적인 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계속 헌신을 많이 합니다. 그 대신에 옆에서 계속 박수를 많이 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그 힘은 그런식으로 공급을 받게 되는것이 아닙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격려가 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으니 나도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신앙의 힘을 공급 받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게 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십시요.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이것이 흔들리고 내가 붙잡기 어려울 때 버리지만 내가 너무나 가지고 싶은 것일 경우에는 흔들리고 이동하면 마음도 함께 흔들리고 이동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의 이치 아닙니까? 똑같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는데 하나님은 안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변함없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일들이 자꾸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잘 될 때도 있고 안될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될 때도 있고 안될때도 있는데 그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는가 하면 자기가 지금 하나님 앞에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떤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보게 될 때에 당연히 그는 하나님과 더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기가 섬기는 그 일에 있어 복을 받으려고 하는 그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말씀을 펴면 사고가 그런식으로 되면 말씀을 펴고 설교들 듣거나 하면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앞에 고치고 교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경우에는 일을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을 만나면 만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더 많이 은혜를 받고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도 변해가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도 변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우리가 보기에 좋은것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나쁘고 괴로운 것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괴로움을 당하라고 주시고 그냥 기뻐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좋은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면서 그것을 그렇게 아름답고 보기 좋게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고 그런것들을 내가 누릴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나게 하고 어려움과 고통이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느끼게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라고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흔들리기는 해도 항상 그 하나님께 자신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요즘 꽂감이 많이 나오는데 꽂감 한실에 꿰어서 매달아 말리는데 이쪽에서 실을 붙들고 꽂감을 꿰는데 이것이 아무리 흔들려도 이 실과 이 실 끝이 고정되어 있으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노라면 기쁠때도 있고 보람있는 때도 있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때도 있고 어느정도 영광 받을때도 있지만 모욕을 받을때도 있고 오해를 받을때도 있고 때로는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일이 전부라 하면 그 시련과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제법 말씀의 은혜가 넘쳐서 하나님의 일을 맡겨 주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차라리 그냥 은혜나 받게 내버려 둘껄 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직 영적으로 미숙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리 교회에서 오래 일하고 교회 경험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일꾼으로서 많은 것이지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는 혈기 이것은 무엇을 보여 주냐면 결국 일의 목표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임하게 될 때 하나님이 늘 말씀으로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고난도 이기게 하시고 시련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주에 거의 한 이야기이고 그러면서 잘 견디고 있노라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도 생겨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다음주에 하겠습니다 하고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보면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는데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어려움이 워낙 크면 그 어려움을 딛고 자기가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활짝 꽃 피우는 것은 나중 문제고 거기에 붙어 있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간적인 욕심은 빨리 집어 치우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그렇게 고통을 오래도록 견디게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게 되면 그렇게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계속 생깁니다. 그리고 고난이 계속 옵니다. 그때에는 항상 섬김의 자리에 내가 거기에 서 있는데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일이 많고 힘들고 어려워도 주위의 사람이 뜨겁게 박수를 쳐주고 그리고 정말 고생한다고 주위에서 그렇게 칭찬을 해주면 사실 힘든것이 힘든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때는 항상 환경적으로 힘든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힘들게 하는 시험이 같이 찿아 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것들이 밀려오게 될 때에는 피할 수 있는 길을 자꾸 찿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생각까지 하게 되나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보내 주셨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때 응답을 아무래도 내가 착각 한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기도도 별로 못해보고 여기에 왔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여기에 왔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냐면 떠나가는 가책감을 줄이기 위해서 마음안에서 조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서... 어쨎든 인간은 양심을 덜어 낼수 있는 합리화를 찿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한참 살아서 아기까지 낳았는데 어느날 뜬금없이 그 부인이 그러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를 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이미 다 일이 벌어졌고 아기까지 낳았는데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헤어지면 되겠지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할 때 미리 알리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과정이 있으면 나중에 그런 고민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당시에 열심히 기도를 안해서 분간을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바퀴는 계속 굴러 왔는데 그때 열심히 기도하고 당신이 똑같이 확신을 못가졌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해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 그렇죠? 그런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에 대한 오해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우리의 뜻을 알려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시간속에서 당신의 뜻을 도도히 펼쳐 보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섭리의 시련입니다. 섭리가 감추어진 뜻인데 감추어진 뜻은 시간이 흐르면서 꽃피우듯이 활짝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뜻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회개하고, 남편 사랑하고, 아이들 사랑하고 살 생각을 해야지 지금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괜히 결혼 했나봐 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되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번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 그 일을 잘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거기에서 떠나지 않고 붙어 있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것 아닙니까? 강이 이렇게 흐르는데, 개울물이 흐르는데 허리쯤 차면 강물을 등에 지고 걸어 내려가는 것은 힘이 안드는데 한번 뒤를 돌아서서 서 보면 그때 비로서 물의 힘이 얼마나 세다고 하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헤엄쳐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나중 문제고 우선 이렇게 똑바로 서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힘이 든다고 하는 사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어려움이 많이 올때에는 아주 잘하지 못해도 거기에 가만히 있는것 만으로도 하나님은 칭찬해 주십니다. 거기에 있는것 만으로도 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거기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충성스럽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어떤식으로든지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충성하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앞에 굴복된 사람이어야지만 충성이 가능하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열심은 열심이기는 하지만 충성은 아닙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충성은 충성하는 그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께 복종되어 있을 때 그것이 충성이지 하나님께 자신의 인격이 복종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에 따라서 솟아 나오는 열정은 충성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 속에서 제거 되어야 할 육정입니다. 그래서 충성 그 한 복판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내면으로부터의 진정한 복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이것이 성화의 길과 아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진실해지고 거룩해지고 경건해지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갖는 품격, 아름다움 이런것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을 하면서 도드라 집니다. 사람들에게 눈에 띄기는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아름답게 안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열정은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 복종됨이 없이 열정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그런가 하면 들어 보십시요. 인간의 열정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자기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자기를 바꾸어 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서 나온것은 자기와 동류입니다. 무슨뜻인지 아십니까? 자기에게서 나온것은 자기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이 짝짝꿍이 되었기 때문에 둘이 함께 힘을 합쳐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지 자기를 깍고 다듬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된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복종에서 나오는 열정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혜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두 본성이 내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본성이 강하면 나 인간의 본성중에서 은혜의 본성에 화합하지 않는 것들을 자꾸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변화시키기위해 깍아 내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 일인데 공부는 안하면서 대모만 했다하면 혼자 학교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 덕을 좀 봤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용기가 없을 때 혈기 충만하니까 쫒아가서 따질 사람에게 따지고 혼내줄 사람에게 혼내주고 저쪽에서 뭐라고 떠들면 손가락질하고 저쪽에서 손가락질하면 주먹을 날릴 정도의 혈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나름대로 자기가 하는 역할이 있었습니다. 진짜 혈기 충천했는데 졸업을 하고 전혀 뜻밖에 개척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개척 좋아하네 개가 척하는구나" 그래서 했는데 될 리가 있습니까? 학교에서 데모할 때 모이는 것하고 교회에서 모이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까? 될 리가 있습니까? 안되지... 그래서 안되서 집어 치웠으면 개꼴이 삼년 묵어서 황무가 안 되었을텐데 그것도 하나님의 신기한 은혜인지 안되니까 하나님앞에 울며 매달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한 삼년만에 찿아 왔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고 공손하고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으려고 하는 자체가 엄청난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그런 환경에 세우지 않으시면 볼 수 없는 우리의 결점, 우리의 약점 이런것들을 보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충고, 따뜻한 말 이런것들이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이 우리에게 막 쏘아대는 우리의 말 속에 사실은 우리의 참된 모습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것을 접고 약한것을 감싸줍니다. 그런데 우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에 눈에 비친대로 쏘아대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악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들을 수 없는 진실이 그 안에 묻어있을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지혜로운 사람은 저 인간은 나를 사랑하는 인간이 아니니까 입 열때부터 닫을때까지 나오는 모든 소리가 개소리 일거야 이렇게 치부해 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그 속에서 나에 대한 미움 때문에 쏟아낸 독설과 함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또 사랑하기 때문에 콩꺼풀이 씌어서 절대 볼수 없는 그것을 저 인간은 나를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볼수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나에게 내 모습을 보여 주시는 계기일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이것은 살점을 파내는 것처럼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요. 잘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해도 어마어마한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뭘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잘 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여기에 서 있는 것 조차도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예화) 목회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꽤 열심히 목회를 했는데 남의 교회 사정을 세세히 알수가 있겠습니까? 교회 사정은 부부생활과 비슷합니다. 잘 모릅니다 밖에서... 그런데 약 삼백명 정도 되는 교회에 가서 열심히 10년 이상해서 육칠백명 모였습니다. 그 척박한 동네에서 그 정도 모으고 토요일이면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새벽기도하고 도시락도 싸가지고 가고 거기는 그런것을 한다고 합니다. 토요일날 온 교인들을 다 나오라고 한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자마자 아이들은 가방 매고 엄마 아빠는 출근할 준비해서 그냥 나오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새벽예배 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나면 식당에서 밥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사람들은 하나씩 밥을 주고 학교 가는 아이들은 토요일날 거기에서 도시락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도시락 가지고 학원까지 간다고 하면 두개를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지고 가서 아침은 그날 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굉장히 열심히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교인들도 좋아하고 칠백명, 팔백명 가까이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늘 자기를 챙기고 섬겨주는 교회 중직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뭐냐면 매주 토요일날 목사님하고 밥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부임할때부터 그렇게했는데 그 시간에 교회 돌아가는 일, 목사님 이렇게 하십시요 하고 건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년반쯤 갔는데 더는 못하겠더랍니다. 왜냐하면 교인들도 늘어나고 상대할 사람들도 많은데 장로님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자기하고 매주 토요일날 밥을 먹자고 하니까 어느날 "이제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 제가 매주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우리 가끔 만납시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죠?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인간에게서 끝나는 사랑은 모두 투기하는 사랑입니다. 투기를 안하면 사랑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나서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면서 갈리지고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 같아서는 다 필요 없고 훌쩍 떠나고 싶더랍니다. 그런데 그러면 교회가 더 큰 위기를 만날것 같아서 육개월인가 일년을 사역을 계속 감당한 것입니다. 이쪽에서 찬송하고 예배하면 저쪽에서 소리지르고 하면서... 편을 갈라서... 참 견디기 힘든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고백한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정말 주일이 다가 오는것이 죽는것 만큼 싫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솔직히 아무 욕심도 없고 빈 몸으로 떠나도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 더 큰 혼란에 빠지겠다 라고 생각이 들어 그렇게 있는데 너무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잘 하는 것은 그만두고 그 자리에 있는 것 그 자체가 누가 잘했고 잘못 했고를 우리가 판단할 사항이 아니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새기십시요. 충성의 일보는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의 일보입니다. 그래서 잘하고 아주 훌륭하게 감당하지 못해도 일단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시련이 오고 사람들의 비난이 있고 많은 근심 걱정이 있어도 주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 주셨기 때문에 아직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것 그 자체가 충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충성된다고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는 시련과 괴로움을 많이 당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그 충성이 믿음에서 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하는 많은 괴로움과 시련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할 때 물위를 걸어 다니는 능력, 죽은자를 살리는 능력, 병든자를 고치는 능력,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만명을 먹이시던 그 능력, 예수님이 당신 고난 당하실 때 사용 하셨습니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쓰는 편지 속에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너 속병이 자주 나는데 그러지 말고, 물만 먹지 말고 포도주를 좀 먹어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포도주가 약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너무 시시하지 않습니까? "빨리와! 내가 안수 기도 해줄게" 하면 되는데 "물만 먹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 먹어라" 그리고 마치 자기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인것처럼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워낙 믿음이 좋은데 올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내일 밤에 네 배에 손을 얹어 기도는 내가 여기서 해줄게" 그런 부흥강사들도 많습니다. 몇년 몇월 몇시에 내가 기도할테니까 모두 전국에서, 세계에서 아픈 부위에 손을 얹으시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그런 사람들보다 모자라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중에 충성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안팍으로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흔듬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잘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한 교회에서 혹은 직분을 맡고 오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그런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같은 것을 할 때 아이들을 열명쯤 물려 받았는데 정신 없이 보면 어려운 일이 생기고 시험이 들어서 내버려 뒀더니 한 유월쯤 됐는데 세명 네명 나오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안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반은 다 공과하는데 옆에서 혼자 공과책 다 읽은것 펼쳐놓고 읽고 있을 때 무슨 마음이 듭니까?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게 드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났으면 아이들이 하나도 안 나올까? 이러면 안되지 내가 분발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열명 나오다가 갑자기 학교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해서 집단 조퇴 했을때나 그런일들이 일어나지 열명에서 일곱, 여섯, 셋, 둘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나, 마지막에 자기 아들까지도 아빠 다니는 교회 안나갈거야 하는데 아빠 선생하는 거기 싫어 하는데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그만두고 싶은 생각입니다. 구역장을 맡았는데 하나씩 둘씩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역장 모임 가서 교역자에게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우리 구역은 짜증나게 이렇게 많이 모이는 거야!" 자기 과시하는 것입니다. 알아 달라고... 짜증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감사하고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씩 둘씩 떨어지기 시작해서 10월쯤 되니까 "전도사님 아무래도 10구역하고 11구역 합쳐야 할것 같아요" 그것이 무슨 이야기 입니까? 결국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구역예배 모였어요?" 라고 이야기 할 때 "예 모였습니다. 둘이 모였습니다." "누구하고?" "나하고 우리 딸하고..." 그러면 벌써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엊그제 신방을 갔더니 구역장 한분이 금요일이 되면 떨린다고 합니다. 핸드폰에 문자 올거봐... 무슨 문자? 나 구역예배 못간다고 하는 문자... 전화가 오면 심장이 벌렁벌렁 한다고 합니다. 전화가 오는데 구역식구가 구역장에게 전화할 때 제가 두명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는 구역원이 어디 있습니까? 시아버지가 오셔서 못가는데 이럴까봐... 그래서 제발 전화 울리지 마라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 오래 있는 사람들은, 변함없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모자라는것 같아도 무엇인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하기 전에는 그저 목회자들이 한 교회에 오래 있는 것은 갈데가 없어 눌러 붙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정말 그분들에게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있으면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고 괴로움도 견디면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그 괴로움과 견디기 힘든 압박을 견딜수 있겠습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부산에서 있었던 일인데 목사님 한분이 결국은 무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과 맞물려서 결국 기본적인 동기는 무능하다 우리도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직 젊은 나이인데 쫒겨나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데 별 야릇한 느낌이 들어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목사님이 그 교회에 오셨을 때 이백명도 안모인 교회에 와서 칠백명으로 교인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한 십삼년동안에...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잘했다 못했다 이야기 할 수 없지만 목사님이 놀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열심히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같은 크기의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도 이백명밖에 안 모였던 교회인데 그 교회는 아까 그 교회는 이백명에서 칠백명까지 가다가 멈추었고 옆에 있는 교회은 이천명을 치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이 목사님이 무능해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제 불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되었을때에 목회자뿐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가 그런식으로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그 분이 와서 잘 희생하고 섬겨서 이백명밖에 모이지 않는 영혼들이 칠백명이나 모였다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전진하는 교회하고 비교를 하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을 사람들이 우리 평신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잘 되지 않을때에는 사람들은 자기는 그렇게 생각 안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대한 것입니다. 아도니람 저드슨이라고 하는 사람은 버마의 선교사로 파송이 되었는데 보스톤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입니다. 오라는 자리가 많았는데도 마다하고 선교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1명을 세례 주는데 6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놀았습니까?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토요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기도만 했습니다. 매주 토요일... 그런데도 6년동안 한 영혼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누가 그 사람보고 불충성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선교비를 계속 받으면서 아무리 애쓰고 심지어는 토요일 하루종일 기도를 해도 단 한명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했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사람들을 평가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구역이 숫자가 조금 줄어든다고 해서 저 인간이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나? 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많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서있는 것 그 자체가 엄청난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떠밀리지 않고 거기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잘하는 것은 관심 밖입니다. 우선 여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기라도 해야 겠다는 아주 열심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월의 흐름속에서 불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매달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열정이 아닌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견디면서 하나님앞에 자기의 자리를 지키려고 할때 엄청난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련도 이겨야 하고, 고난도 극복해야 하고, 자기를 판단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의 눈빛도 이겨야 하고, 시험과 고난 어려움 모든 것들이 밀려 올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앞에 정말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마음을 추수르고 그런 사명의 자리에서 더 온전하게, 더 아름답게 이 사명을 감당하고 나가야겠다 라고 생각할 때 거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진짜로 중요한 일 가운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엘리아가 바알 선지자와 대항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나무를 벌려 놓고 물을 붓고 장작을 쌓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장작을 쌓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작을 높이 쌓은것을 바알 선지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표는 거기에 불을 내려서 확 타올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까? 사소한 일은 우리가 하는데 정말 중요한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쓰면 우리가 사람을 데려올 수 있지만 그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되고 데려왔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회심하는 것은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일을 잘하려고 고난과 시련을 이기면서 감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안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모든 것에 마음을 쏟아 놓지 않아도 물 흐르듯이 굴러 갈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못 느낍니다.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내 자리를 지킬수 없을 것처럼 시련이 오고 고난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잘 하려고 할 때 그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이 가슴에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 보십시요.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섬김을 순풍에 돛단것처럼 만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될 수 밖에 없는 일인데도 안되게 해 주시고 정말 자기가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인데 때로는 갈라지게 하시고 그래서 결국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주님 한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에게 집중하고 매달릴 때 그의 영혼의 은혜를 많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앞에 그렇게 시련과 어려움속에 굳건히 서서 거기에서도 그 어려움을 딛고 잘 감당하려고 할 때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옵니다. 그런데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더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충성입니다. 기도하면 그때의 기도는 가슴을 찢으면서 흘러 나오는 기도라기 보다는 가슴을 찢으면서 나오는 피와 눈물이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는 영혼의 시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꼭 붙들면서... 그래서 모든 것이 폭풍이 지나고 나면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셨던 것은 생각이 잘 안나고 고난과 시련의 길을 겪게 해 주셨던 것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그렇게 자기는 시련과 어려움속에서 떠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고 내가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주님의 일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잘 감당하려고 애썻을 뿐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자신이 아주 놀랍게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주는 또 ???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헌신하기 전에는 아주 막되먹은 모난 성품이었는데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아주 은혜로운 사람, 주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맡았을때에 견디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잘 견디십시요. 어렵고 힘들때마다 주님의 생애도 인내의 생애였던 것을 기억하십시요. 그리고 견디면서 일생을 사신 주님을 묵상하십시요. 그러면 그 모든 견디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아픔에 동참하게 될 것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섬기십이요. 그 섬김속에 눈물이 있게 하십시요. 그것이 여러분들이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8.이긴 섬김과 복 주심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2:5)
물은 높은곳에서 낮은곳으로 흐릅니다. 물은 그 자체가 흐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높은곳에서 낮은곳으로 흘러 내려 갑니다. 그렇지만 물이 항상 거침없이 흘러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물이 흘러가려고 해도 그 물을 가로막는 많은 것들과 부딪히면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울물이 흐를때 사람들은 조잘조잘하면서 흐른다고 하지만 물 입장에서 보면 흐르면서 부딪혀서 아픈 소리입니다. 그렇게해서 물이 흘러 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우리들이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섬기는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앞에 뜻을 세우고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부딪히는것 없이 흘러 가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실망하는 일은 너무 많은 기대를 갖기 때문입니다. 기대하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실망시켰을리가 없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시킬때가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가 않고 대부분 모두 같이 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책상 하나를 들어도 당장 손짓해서 사람을 불러야 되는 것이 일의 성격입니다. 이렇다보니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특히 교회에서는 혼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여럿이서 해야 하는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일을 맡았고 흘러가려고 하는 의욕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잘 협조를 하지 않거나 예기치 않은 어려운 상황이 되면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때 낙심하고 실망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기 때문입니다.
(예화) 어느 청교도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거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적는 습관를 길들여라 하는 충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늘 자기는 생각나는 것들을 잘 적어 두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평생 내 기억력은 나를 실망시킨적이 한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기억력을 처음부터 믿은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기는 생각나는 것이 잊어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기억에 많은 기대를 걸지 않고 늘 수첩에 메모를 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보면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40년동안 목회를 하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쓴 회고록 한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회고록 앞에 보니 40년을 목회를 하고 나니까 잊혀지지 않은 사람도 참 많은데 어떤 사람은 아주 사랑스럽고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고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생각만 하면 억울하고 화가나서 이렇게라도 여기에 써 놓지 않으면 분통이 터질것 같아서 여기에 쓴다 그리고 자기를 섭섭하게 한 사람들을 다 썼습니다. 이름 가운데 글자만 동그라미로 해 놓고... 그것이 법의 최소한이라고 합니다. 가운데 한자만 동그라미로 하면 법으로 안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떻든 자기가 전도사로 있었는데 어느날 장로님이 주일날 오후예배 시간에 광고한다고 나가더니 갑자기 아무아무개 전도사는 오늘부로 그만 두었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자기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예배에 갔더니 애는 셋이나 되는데 통보도 안해주고 나가라는 소리도 안해주고 불쑥 예배 시간에 아무아무개 전도사는 오늘부로 그만 두었습니다 라고 광고를 하니까 이것이 몇십년이 지났는데도 그것이 너무 원통해서 그때 당회원 명단을 전부 적었습니다. 자기에게 육개월치 월급을 안준 이야기도 다 적고... 인간의 섭섭한 감정이 그렇게 오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고 기대를 걸려면 하나님안에서 걸어야 됩니다. 인간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적이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걸 때 그 기대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기대를 걸면 설령 사람이 나에게 섭섭하게해도 하나님안에 있는 그 기대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니 상처 받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들이 살면서 경험하는 많은 어려움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열심히 나를 도우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안되는 경우도 있고 능력이 모자라서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전에도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갔는데 그 교회가 꽤 괜챦은데 급히 지은 흔적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니까 전에 있는 교회에서 이 교회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어디 다른데로 갔나요? 했더니 그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예배당을 열심히 지었는데 결국은 경매에 넘어갈 상황이 되어서 시급히 이것을 팔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어서 결국 그 교회는 거의 문닫을 상황이 되어서 나가고 그리고 대신 다른 교회가 들어 온 것입니다. 다른것이 안 들어오고 교회가 들어 온 것은 다행이지만 그 교회야 그것을 싸게 들어와서 좋을지 모르지만 앞에 쫒겨 나간 교회를 생각하면서 한동안 마음이 아렸습니다. 그 교회 목회자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믿음으로 해보려고 했지만 또 자기를 돕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때로는 물질이 모자라서 안되는 경우도 있고 또 물질도 있고 사람도 있는데 자기 자신의 건강이 악화가 되어서 도저히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이런일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들이 늘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청산유수처럼 물이 흘러가듯 줄줄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될 것 같아도 만약에 그렇게 되게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덜 의지합니다.
(예화) 저는 다 이제 지난 이야기지만 벌써 4-5년 되었나 교육관을 구입할 때 아이들은 여기에서 오백여명이 우글우글 하는데 보시다시피 지금도 여기에 만원인데 아이들이 오백명 더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주일이면 생난리고 이부제 수업을 하듯이 예배를 드리는데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저녁을 먹고 나와서 동네를 돌아 다녔습니다. 하나님 이것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하는데 어떻하면 좋습니까? 하고 나가 보니까 대단합니다. 이 앞에 있는 빌딩은 다섯층을 얻는데 전세 12억 5천만원을 달라고 하고 매달 관리비로 해서 400만원인가를 달라고 합니다. 그런것도 걱정인데 수백명이 이 길을 건너가면 언젠가 한번은 사고가 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곳을 지키면서 깃발을 흔든다고해도 언젠가 한번은 사고가 날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한번이지만 그 아이를 가진 가정에서는 치명적인 슬픔인데 그래서 안되겠다 하는데 마침 여기에 있는 이 빌딩 3층을 세 놓는다고 합니다. 가 보니까 너무 좋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를 쉽게 놓을 수 없는데 하도 안 나가니까 교회라도 들어오라고 하고 세를 주겠다 하는데 계산을 해 보니까 들어갈 때 1억 5천만원 시설을 해야 할 것 같고 한달에 천만원이 월세하고 관리비로 나갑니다. 그리고 2년후에는 그 사람들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데 그때는 더 많이 불어 날텐데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나?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지금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였지만 그런 생각 없이 빨리 머리를 회전해 보니까 그리고 계산기를 가져다 두드려 보니까 사면 기가막히겠습니다. 그래서 재정위원장을 불러서 같이 의논을 해서 둘이 몇일동안 웃으며 돌아 다녔습니다. 땅집고 헤엄치기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저 집을 담보로 해서 돈을 얻으면 오히려 돈을 더 얻어가지고 우리가 빌린 부채를 갚을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환상적인 것입니까? 그러니 천만원이면 그 당시에 거의 이십억을 빌릴수 있는 이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엎치고 메치고 하니까 교인들이 헌금을 조금만 해 주면 누워서 식은죽 먹기이고 길 건너에 얻어서 가슴을 졸이고 하는 것이 정말 바보짓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기도도 별로 안했습니다. 너무나 뻔하게 될 일이니까... 그리고 계약을 할 때 급히 돈을 마련해서 그날 밤에 3억인가를 마련해서 그 건물 주인하고 계약금을 주고 계약을 하고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그때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눈물 골짜기로 들어가는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렇게하고 발동을 걸었는데 노무현 대통령께서 은행보고 돈 빌려주지 말라고 시달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나니까 그 다음에 거기에 있는 부채를 인수하고 끝전을 치루어야 하는데 나는 한 오억이 남을 줄 알았는데 남는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15억내지 20억 가까이 돈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20억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금리는 올라가고 20억이 남았는데 이것은 죽어도 빌릴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려 준다고 약속한 곳에서 15억을 펑크를 낸 것입니다. 무슨 교회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려 가냐고... 새로 들어온 행장이 결재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고난의 길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정말 매일밤 창문을 열고 교육관을 보면서 기도를 하는데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목사가 아닐때에도 그렇게 돈 때문에 고통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 건축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냥 눈을 감습니다. 생각하기가 싫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 가도록 절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축복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안 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하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럴때도 있지만 안 그럴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렇게해서 한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일을 하다가 보면 일을 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같이 일하는 사람의 영혼도 하챦게 여기고 자신의 영혼도 우습게 알고 일에 매달리지만 하나님은 그런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다루시고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상처를 받거나 마음이 닫히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커다란 주의 일을 맡을 때 가슴이 뛰고 목숨까지 버릴수 있겠다하는 헌신의 각오와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것을 역경과 어려움을 통해서 자기안에 있는 부족한 부분과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동기가 얼마나 순수한지를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고 너 자신을 한번 보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중풍걸린 사람이 나옵니다. 네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쨎든 중풍걸린 이 사람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지 않겠습니까? 품삯을 주고 한 사람이 이렇게 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니까 많은 사람들 특히 병자들이 가서 너도나도 예수님께 치료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중풍병자이니까 자기 스스로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가벼운 중풍병이 아니라 아주 심하게 걸려서 그래서 결국은 누워있을 수 밖에 없는 대소변을 받아 내어야 하는 처지였던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이 사람이 누워있는 침대를 가지고 이 사람을 그 침상에 얹어서 데리고 예수님 계신곳까지 갔는데 똑바로 서있는 사람도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모였으니 이 상을 들고 그 대열을 뚫고 예수님께 간다고 하는 것은 참 쉬운것이 아닙니다. 저는 옛날에 평신도때 한번 그런 현장에 가 보았습니다. 어느 은사를 많이 받은 권사님이 병자를 위해 기도를 해 준다고 하는데 정말 어마어마하게 모였습니다. 그런데 줄을 서서 차례대로 받는데 그 줄 세치기한다고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불신자들도 섞여 있겠지만 좀 그랬습니다. 그리고 가서 거기에서 안수기도를 받는 것을 보면서 이 장면이 이해가 됩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이 중풍병자를 메어 가지고 간 이 네사람은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갔는데 사람이 많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몸도 가누기 힘들었다고 나옵니다. 그런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침상에 한사람을 메어서 좀 들어 갑시다 했을 것입니다. 좀 비켜주세요 들어 갑시다. 우리도 기도 한번 받읍시다. 이렇게 사람들을 헤집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적도 하지 않는 두터운 대열을 뚫고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치료를 받으러 갔지만 못 받고 돌아왔다고 할 때 누가 이 네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을 해도 인력으로 안되는 것도 많습니다. 자기는 하려고 했는데 문 앞에 용신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수 많은 사람에게 외치고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해도 사람도 들어 갈 수 없는데 침상을 가지고 들어갈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중풍병으로 앓다가 그 다음달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들 누가 이 네사람 보고 나쁜 사람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성경에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냐면 무리로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무엇인가 일을 함에 있어서 방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 온 것입니다. 또 이럴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봐 내가 새벽에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했쟎아! 아침 먹고 가자고 그렇게 늦장을 부리더니..." 그러면 이제 사람을 내려 놓고 "아니 뭐 나만 늦었어! 저 사람도 늦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그리고 아마 대판 싸우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줄은 서서 기다리는데 이 사람들은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랬는데 하고자하는 열망이 있으니까 창조적인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이 지붕을 뜯고 그 사람을 위에서 달아 메어서 예수님이 여기서 기도해 주시는 머리 위로 상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세치기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해석할 때에는 세치기로 해석을 하시지 않고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기를 이 네사람 뿐이 아니라 병자까지도 다섯이서 당신을 전폭적으로 의지함으로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어떤 주석가들은 "보아라 남의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경우가 있지 않느냐" 하는데 사실은 남의 믿음을 통한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저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환자 자신을 포함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쨎든 그래서 침상에 달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모여있는 이 중풍병자보다 더 급한 많은 사람들이 보호자에 의해서 이끌려 왔을것 아닙니까? 그래도 누구도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고자하는 간절한 의욕이 가져다 주는 창조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도 모든 창의성은 어려움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해보려고 하는 노력속에서 창의력이 발휘되는 것이지 가다가 안되면 그만두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어떤 창의적인 방법도 나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모든 창의적인 방법은 안되는 여건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 꼭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창의적인 방법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런 창의성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예화) 엊그제 목사님 한분을 만났는데 이분이 아이들 초등학교 4학년때 쌍둥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전도사 생활하다가 목사되고 갔으니 집안도 넉넉하지 않으니까 가난한 유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갔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 둘 다 쌍둥이가 똑같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입학시험에 붙었습니다. 그런데 등록금이 살인적이랍니다. 얼핏 들으니 등록금이 삼천만원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돈입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교회에서도 보내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진짜 코끼리 비스켓이었습니다. 어쨎든 그렇게 큰 돈인데 도저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빌릴데도 없고, 얻을데도 없고, 빌려도 갚을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그 아이들이 입학시험 보기 몇 달 전에 영주권이 나오기로 되었습니다. 기간이 딱 맞아서... 영주권이 나오면 장기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취직해서 갚는 것으로... 영국은 그런것이 잘 되어 있으니까... 걱정이 없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한국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잠깐 나왔다 갔는데 당신 영주권 줄때가 되었는데 어디를 갔다 왔냐고 하면서 떨어뜨려 버린 것입니다. 영주권을 안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은행에 가니까 당신 영주권이 없는데 어떻게 대출을 해주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난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방법이 없는데 한국에서 어느 집사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입학을 하는데 내가 많이는 몰라도 한학기에 삼백만원씩인가를 보내 주겠노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학교를 계속 다녀야 등록금이 필요하지 입학을 할까 말까인데 그래도 그것만해도 고마운데 뭐라고 이야기할 수 없어서 기도만 하고 있는데 입학하기 전날 갑자기 전화가 오더니 자기가 이상하게 기도를 하는데 삼백만원씩 몇 번에 줄 돈을 한꺼번에 줄 마음이 생겼다고 하면서 천오백만원을 한꺼번에 입금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해서 어떻게 하나는 해결이 되었는데 하나는 해결이 안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경제학부에 붙고 하나는 물리학부에 붙었습니다. 둘다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양쪽에서 상담을 하는데 한명은 등록을 하고 한명을 받아 달라고 하면서 그 돈 가지고도 등록금이 모자랐는데 나중에 더 주기로 하고 받아 주었는데 저쪽에 가서 조금만 받고 등록을 해주면 등록금을 내겠다고 했더니 펄펄 뛰면서 하는 말이 무슨 소리냐 나도 옛날에 제3세계 학생 이렇게 받았는데 끝까지 등록금을 안내서 얼마나 골탕을 먹었는지 아냐 하면서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도 안들어 가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도저히 안되서 이제 이 양반이 등록을 받아준, 상담을 해준 그 사람에게 가서 통사정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류 하나를 보여준 것입니다. 서류가 뭐냐면 삼성재단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한 약속이 아니라 삼성재단에 장학금 신청한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여기서 이 아이 장학금을 줄 것이다. 이것이 신청서이지 장학금이냐? 그래도 이 아이는 해당이 된다. 그러니 들여 보내 달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는데 쌍둥이인데 한 아이는 당신이 고맙게 해주어서 등록이 되었는데 저쪽에서는 안된다고 한다. 제발 도와달라고 하고 기도를 간절히 했는데 눈물이 나더랍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눈물이 안 나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전화를 하더니 받아 주라고 하니까 싫다고 하면서 둘이 막 싸우더랍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똑똑하고 훌륭한 학생들을 왜 안 받냐? 삼성에서 돈 준다고 하쟎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러면 하고 도장을 찍어서 받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 났습니다. 그렇게해서 입학을 했는데 돈을 내야 하는데, 외상으로 들어갔는데 대출이고 뭐고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같으면 그 정도 선에서 끝나지 않겠습니까? 알아 볼데는 다 알아 보았고 이제는 누가 유학생에게 몇천만원을 빌려 주겠습니까? 이제 가능성이 없고 우리 같으면 휴학이라도 해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을 한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제일 첫 번째 이야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장학금을 준다는 이야기를 보고 접수한 영수증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이 아이들 가입학이라도 받아 주었는데 그러면서 구구절절히 해서... 그런데 이 아이들은 안 준다는 것입니다. 왜 안주냐했더니 이공계만 준다는 것입니다. 한명은 주는데 한명은 안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쭉 쓰면서 눈물로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건희 회장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없죠. 그런데 어쨎든 그 편지를 쓰고 한달인가 있다가 한국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 편지가 회장실에 넘어와서 우리들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결국 안 주게 되어 있는데 주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한꺼번에 돈이 들어 온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애정을 가지고 나는 체면이 상하고 다 사라져도 이 일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면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 간증이 더 재미있습니다. 영주권 안 나온것이 천만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영주권이 나왔으면 빚더미에 앉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갚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나왔기 때문에 울면서 메달렸고 결국은 하나님이 빚 없이 깨끗이 정리해서 아이들 다 졸업해서 한명은 장교로 근무하고 한명은 예일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은 당신 안에 뜻을 세우고 길을 찿는 사람에게 열어 주시는 구나 생각했습니다.
(예화) 제가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을 때 지금이야 그런 신경을 안 쓰는데 목사님들이 다 열심히 하니까... 내가 이제 안그러는데 옛날에 전도사로 있을 때 전도사인 내가 심방을 다 못하니까 선생님들에게 심방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편배달부 선생이 있었습니다. 심방 보고하라고 하면 "가니까 없데요?" 그것은 좀 났습니다. 가니까 없데요 하니까 갔다는 것입니다. "가려고 전화해 보니 안 받데요?" 그것도 좀 났습니다. "가려고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누가 이야기하는데 집에 없을 거래요"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그 심방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갔습니다. 갔는데 이 아이를 만나게 해 달라고 벨을 계속 눌렀는데 사람이 아무도 안 나옵니다. 그렇게해서 결국은 심방을 못하고 돌아 왔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누가 정신 자세가 글러 먹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전도사로 섬길 때 주일날이면 늘 심방을 했습니다. 교수 생활을 했으니까 평일에는 심방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4시쯤 끝내고 안 나온 아이들 심방을 했습니다. 그러면 빠르면 2시30분쯤 나가면 하나, 둘, 셋 잘하면 넷 아주 잘하면 다섯정도 만납니다. 그리고 잘 안 맞으면 세명정도 심방을 하는데 그리고 선생님들하고 같이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 사람들이 다릅니다. 같이 심방을 가보면 새가슴이 되어서 띵동 띵동하다가 개가 한번 짖으면 "전도사님 가요 없데요" 이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심방을 하러가서 벨을 누르니까 "누구세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왔는데요"하니까 그 다음부터 아무소리도 안 들리는 것입니다. 계속 벨을 누르고 전화를 해도 아무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나 보다 가자" 했더니 이 선생이 "아니에요 전도사님 제가 분명히 그 아이 목소리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하냐? 문은 닫히고 날은 어두워오고 벨은 울려도 문은 안 열어주고 하는데 어떻하니?" "안되요 저 아이 오늘 꼭 끌고 가야해요" 그러더니 담을 넘었습니다. 여선생이... 그리고 그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방문을 잡았더니 안에서 잡아 당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 잡아 당기는 것입니다. 마루로 달려 나왔습니다.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타이르고 골목길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니까 자기도 교회 안 나오고 곤고한 것입니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꼭 해야 되겠다고 하는 목표의식이 필요 합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들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 일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잘 하기를 원하는 좀더 강력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르켜서 열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간곡한 마음을 가지고 하게 될 때 하나님은 놀랍게 길을 열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에게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마지못해 하거나 심드렁해서 그냥 일을 해나가는 사람은 이십년을 섬겨도 간증거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사람이 하는 일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열정을 가지고 눈물이 있는 섬김으로 자기를 태우면서 그 일을 완수해 내려고 하는 간절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 한달을 섬겨도 거기에는 간증꺼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놀라운, 말하자면 간증꺼리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큰 일에 간증꺼리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 가지고 사람가지고 하는데 큰일에 무슨 간증꺼리가 많겠습니까? 큰일 이라고 간증꺼리가 많은 것이 아니라 마음을 쏟아서 자기를 잊고 주님의 일을 이루어야겠다고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될 때 거기에 바로 수 많은 간증꺼리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앞마당을 쓰느 아주 작은 일이라도 간증꺼리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일의 크기나 사람의 포부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순전함을 보고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이긴 섬김과 복주심인데 중풍병자 이 인간은 그렇게 해서 병이 나아서 침상을 가지고 돌아 갔으니까 큰 복을 받았는데 지붕을 뜯고 세치기까지 해서 인간을 내려 보낸 창의적이었던 네 사람은 도대체 무슨 복을 받았는가? 성경에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든지, 무슨 하늘나라에서 별이 하나 올라 갔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하면서 받는 복을 그냥 물질과 명예 이런 것들로만 생각을 한다면 성경은 하나님 많이 섬기고도 아무 복을 받지 못한 사람, 심지어는 저주를 받은 사람 천지입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복음을 위해서 거의 모든 사도들이 순교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이세상에서 어떤것을 복으로 받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그렇죠? 주님을 위해서 핍박받고 고난을 받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지킨 댓가로 돌아오는 것이 가난이요, 불명예요, 핍박이요, 슬픔이요, 이별이요 이런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각도를 가지고 복을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중풍병자는 이 네사람의 섬김으로 볼 때 이 사람들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 아프면 늘 가서 돌보아 주고 병을 고칠길이 있다면 침상에 이 사람을 떼어 메어서 남의집 지붕을 뜯어서라도 예수님 앞에 데려다 줄 수 있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이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 났다는 소식만큼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이기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주님의 사랑으로 넓은 마음을 가지고 보면 사실 주님이 그렇게 어려움을 이기며 섬긴 우리에게 안 주신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 안주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마음이 따뜻해 졌을 때 주께로부터 받은 복들을 세어 보십시요. 정말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에 넘치도록 갚아 주신 것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런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랫동안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을 때 그 어머니 모니카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이제 아무 남은 여한이 없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네가 참으로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제 이렇게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으니 나는 이제 하나님께 가도 여한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디 모니카 같이 탁월한 사람들만의 마음이겠습니까? 아마 회심하지 못한 자녀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그 자녀를 위해 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에게 당신이 이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 아이의 회심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것입니다. 물질적인 안목을 가지고 보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큰 믿음을 가지고 중풍병자를 섬겨서 받은 바 복이 없지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보면 이 사람들은 물질 보다 훨씬 소중한 자기가 사랑하는 이 중풍병자의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들이 어찌 주님께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이 공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에 정신에 육체에 환경에 그가 필요한데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지혜 안에서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그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해 나갈 때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당연히 일어날 일들이 일어 났구나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돕지 않을 때 혹은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시기해서 방해할 때 새로운 일이 일어 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원래 주님의 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섬기는 우리는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자기가 섬기는 그 모든 섬김의 동기가 정말 하나님인지 다시한번 또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주님을 섬기지 못한 사람은 섬길수록 인간이 거칠고 마음이 황폐해져가지만 올바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은 많이 섬길수록 겸손해 지고 결국은 큰일을 이룬 후에도 이 일은 내가 이룬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룬것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주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험한것은 주님의 일을 크게 하면서도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사람들 이것이 근심거리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넘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능력이 없다고 고백을 하고 주님을 가난하게 의지하는 사람들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언제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가 하면 "아 나는 이제 상당해 기술도 갖추었고 경험도 많고 지식도 많아 정말 충분해!" 이럴때에는 뿌듯함은 있지만 하나님 품으로 파고드는 듯한 영혼의 애뜻함은 없습니다. 자기가 자랑스럽고 사람들이 나처럼 못할까 하는 마음이 들지만 아주 따사롭게 말하자면 아주 애뜻하게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고 그 품을 파고드는 것은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런것 같습니다. 조금 알때에는 "야! 나는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구나! 나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너무 수준이 안 맞는 환경에서 일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정말 나는 아는 것이 없다 라고 생각될 때 그 마음이 아주 여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라는 생각이 들 때 마음이 연두부처럼 아주 부드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도 우연히 2,500년 만에 태어난 최고의 천재 철학자라는 사람의 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읽으면서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데... 어쩌면 이렇게 엄청난 공부를 했을까? 그것이 확 밀려 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딪고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내가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도록 이 세상에 널려 놓은 많은 진리와 지식,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진리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하챦은 것인가? 그리고 교육관에서 보따리를 메고 걸어오는데 계속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대해서도 내가 가르치고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정말 아는 것이 없구나 그리고 그렇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찬송)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어디 그것이 지식 뿐이겠습니까? 주님의 일이 잘 되어가고 승승장구 할때는 "나는 이 일을 위해 태어났어, 나는 정말 적합한 사람이야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것도 참 많지" 이렇게 앞에 여러말을 붙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매우 대견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시면 그 인간이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어려움을 만나게 하십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실망을 시키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 하시고 도움을 약속한 사람들이 마음이 변해서 자기를 곤경에 빠뜨릴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구나! 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줄 알아라! 너에게 아무리 많은 물질이 있고 네가 터득한 기술이 있고 또 네가 일생동안 발견하게 된 사물에 대한 지식이 있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고 너를 돕는 동지들이 겹겹이 에워 싸여도 그 모든 것들은 내가 보내서 있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런것을 하나님이 한번쯤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고통속에서 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실때에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주님이 붙들고 계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험, 보장된 환경, 도울수 있도록 약속된 사람, 자기를 좋아하는 동지들 많이 있는데도 마음이 연두부처럼 물러져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며 나의 피난처 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기면서 어려움이 일어나는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면서 거기서 그것을 극복하고 결국은 할 수 없어서 그것을 넘어서고 넘어서는 가운데 그 사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더 순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고 그 후에는 더 어려운 일들이 있어도 사랑으로 인내로 극복하고 그래서 주님이 보실 때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본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좋은 환경이 있었습니까? 가난한 집안에서 돈도 없이 태어나셨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회개가 도대체 왜 필요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슨 돈이 있으셨길래 그리고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지가 있었습니까? 제자라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은 배반하기 전에 이미 그들을 용서 하시고 당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될 수 없음으로 없음으로 없음으로 수 많은 되지 못할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넘고 건너고 뛰어넘고 극복하고 이겨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자신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이 모본을 보고 그리고 깨달으면서 잘 극복하고 이기십시요. 극복하십시요. 그래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9.죽은 섬김과 복 주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오늘 예수님이 하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교훈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당신 자신에 관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즉 인자가 영광을 얻을때가 왔다 라는 뜻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이 죽으실때가 가까이 왔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죽으실 때가 가까워 온 것을 가르켜서 영광을 받을때가 가까이 왔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쫒아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 큰 고통이었지만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도록 그 길을 걸어갈 때 예수님의 시선을 잡아 끌었던 것은 당신이 고난 당하고 죽는 그 아픔이 아니라 그 고난을 능가해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앞에 두신 예수님의 관심이 당신의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당신의 고난이 곧 영광이요 죽으실때가 곧 영광을 얻으실 때 인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화) 밀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곡식은 두개를 쪼개 보면 반드시 그 사이에 모든 식물은 씨앗이 대부분 있고, 씨앗의 가운데를 쪼개 보면 반드시 거기에는 씨눈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쪼개지지 않는 곡식일 경우에는 뒷 부분에 깊이 파인곳에 씨눈이 숨어 있습니다. 모든 곡식이 예외가 아니고 혹시 그렇게 씨를 갖지 않은 식물일 경우에는 뿌리에 그 눈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표적인 식물이 감자입니다. 그래서 감자를 심을때에는 씨눈이 하나씩이나 두개씩 붙어 있도록 감자를 잘라서 재에 잘 비벼서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씨눈이 잘 나오면 거기에서 감자가 뿌리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감자의 씨눈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작은 씨눈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거기에 매달려 있는 감자가 그 씨눈을 살릴때까지 자기는 썩어서 그 씨눈을 살리는 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씨앗을 갈라 보아도 땅콩 같은것을 쪼개 보면 그 씨눈의 크기는 땅콩 한알 전체의 1/30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아주 작은 분량입니다. 아마 쌀의 눈은 그보다 더 작아서 바늘로 꽁무니에 꼭 찌르면 빠져 나오는 씨눈의 크기는 쌀알 하나 크기의 1/30도 안될 정도로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감자나 혹은 땅콩의 큰 살이나 또 하얗고 큰 쌀알의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가능성은 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땅에 심겨지면 온도와 습도 이 모든 것이 맞으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이 그 씨눈을 싸고 있는 살들이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썩으면서 거기에서 분해되어 양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양분을 빨아 먹으면서 죽은것과 다름이 없었던 씨눈의 눈에 잠재 되었던 생명이 이제 움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쭉쭉 자라면서 싹이 나오고 잎과 가지와 줄기가 나오고 뿌리가 뻗어 나가는데 사람들은 생각하기에 그 씨눈이 결국은 뻗어서 감자가 되고 혹은 벼 이삭이 되고 심은 콩대가 되었으니 결국은 한알의 밀알중 작은 일부분이 살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씨눈이 싹이 트고 잎이 나오는 그 순간 더 이상 그것은 씨눈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면 사실은 그 씨알 하나 전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죽어서 그 안에 있는 잠재된 생명을 싹틔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 생명체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자연적인 사실들을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비춰보아도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백성들을 품고, 그 모든 사람들을 품고 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한 것을 가르켜서 그것을 품고 죄를 대신하였다해서 내포적인 대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을 품고 그래서 그 인간들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자신이 죄인으로 여겨짐바 되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함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쌀알이 되어서 죽으시고 씨눈 같은 우리를 다시 예수 안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시고 그들로 교회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피부색과 인종, 문화와 지역을 불문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그리스도 교회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내포적이고 대신적인 죽음 때문에 생겨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죽으시니까 그 생명의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나서 많은 영혼과 교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에서 나타난 현상이, 원리가 예수님 안에서 그대로 반복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그런 원리속에서 내포적이고 대신적인 죽음으로 죽으심으로 교회를 생겨나게 하셨기 때문에 또한 동시에 이번에는 정반대로 교회가 당신을 끌어 안고 고난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교회속에서 사시는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생명과 사랑의 확장입니다. 새생명의 사랑과 확장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교회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각기 예수를 끌어 안고 예수를 씨눈으로 삼고 자신은 그 씨눈이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하여 죽어야할 낱알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죽을 때 그 교회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그들을 넘어서 교회 안에서 흐르고 교회 밖에 흐르고 세상을 향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반대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반대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끌어 안고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 씨눈이신 그리스도를 계속 죽이는 삶을 살 때 교회는 결국 자기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씨눈이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들도 또 다른 의미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4대 교회를 가르켜서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송장들이 모여있는 교회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자들이 모인 것과 같은 교회라는 것 아닙니까? 신령한 것을 말해도 이해할수 없도록 죽어 있고 기쁜일을 보아도 기뻐할 수 없도록 죽어있고 또 슬픈일을 만나도 슬퍼할 수 없을 정도로 죽어 있는 그런 목석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교회를 가르켜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원리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이 죽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이 죽음으로 살것을 바라보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래서 당신 자신은 죽으셨으나 오늘 우리 안에 사시고 그 성령의 은혜안에서 또한 우리 밖에 사셔서 그래서 우리와 우리 이웃과 가족과 모든 불쌍한 영혼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어쨎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운 죽음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믿어지는 곳마다 놀랍게 자기를 이제까지 사랑 하던 사람들이 자기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십자가를 따라서 예수가 내안에 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은 기꺼이 죽는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아주 어린 신자들의 가슴안에서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예수의 생명은 사랑의 마음을 넘어 교회의 담을 넘어 국경을 넘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한알의 밀알로 썩어 죽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아는 것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죽으셔서 자기가 살아난 기쁨이 어떤것인지를 아는 것 그때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 분을 위해서 죽는 것이 사실은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비결들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있는 행복을 찿아 보려면 하면 할수록 신앙생활은 굉장히 힘겨운 노동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서 헤엄치려는 것처럼 아주 피곤하고 힘이 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에화) 고등학교 다닐 때 였는데 수영을 아주 뛰어나게 잘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울가에 여름에 놀러 갔는데 물이 그래도 꽤 흐릅니다. 아주 급한 물은 아닌데 물이 꽤 흐르는 속도가 있는 물인데 자기가 한번 실험해 보겠노라고 하면서 자기가 한번 세게 헤엄을 쳐서 물을 거슬러 올라 갈 테니까 백을 셀 동안에 자기가 얼마나 올라갈지를 자리를 잡고 제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울가에 앉아서 "시작" 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헤엄을 잘 칩니다. 손발을 정신없이 움직이는데 우리가 막 웃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뒤로 떠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그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것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일단 행복을 얻고자 하고 하나님 밖에서 어떤 만족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찿기 시작하면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이 생활이 너무나 힘겹고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고생입니까? 주일날... 남들 다 쉬고 파자마 바람으로 텔레비전 보고 있는 시간에... 우리 교사들 한번 봅시다. 8시 예배 나와야 합니다. 8시 예배 나와서 10시까지 예배 드리고 그 다음에 가서 어린이 돌보고 점심 먹고 청년부 예배 드리고 구역예배 드리고 그리고 나서 오후예배는 안드리지만 그리고 나서 청년부 모임하고 그리고 집에 갑니다. 친구들 만나서 밥 먹고 집에 들어가면 9시면 빨리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조금 나을 것입니다. 10시 혹은 12시 예배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점심 국수라도 하나 먹고 그리고 나서 구역예배, 구역예배 끝나고 오후예배, 오후예배 끝나고 나면 청결 위원회에서 청소하고 가야 합니다. 청소 좀 많이 남아서 하십시요. 사람이 소수라서 고생들을 많이 하는데... 열심히 좀 하십시요. 그리고 청소하고 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짜장면이라도 먹고 흩어져 집에 가면 8시, 9시입니다. 이것이 무슨 고생입니까? 이런것 말고 정말 유쾌하고 즐거운 휴일을 보낼수 있는 길이 있다 라고 생각을 하면 이것은 너무 큰 희생입니다. 너무 힘든 희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들 신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라고 생각을 하면 이것은 그렇게 힘든 노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써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나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하게 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마음껏 예배 드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면 우리의 살아가는 길이 너무나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정물에 계속 생수를 붓는 것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이 아니면 내것이 아니다 하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과 함께 누리도록 나에게 주신 복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찿기 때문에 그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요즘도 여전 합니다. 공직자들의 비리 말입니다. 그래도 많이 나아 졌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니까 또 어떤 사람은 나아 진 것이 아래에서만 나아졌고 위에서는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가 그런가했더니 십만원씩 다섯사람만 주면 됐는데 한사람이 오백만원을 먹으려 한다고 합니다. 어느정도까지 사실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 빨리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외국사람이 한국에서 기업할 때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 단어가 촌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나라에서 자기를 일꾼으로 써 주어서 자기에게 생활을 하게하고 명예를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찿으려는 사람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밖에 무엇이 있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언젠가는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열심의 부족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주인삼아서 살아가는 욕망의 태도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우리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제일 먼저 욕망을 버려라 그리고 일단 욕망을 버리고 포기하고 주님께 순종하려고 해라 그러면 예전에 안 깨달아 지던 진리가 깨달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을 얻으려는 욕망은 우리에게 두가지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욕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현재의 삶이 너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욕망을 갖게 된다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음성을 옳게 들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옳지 않은 욕망을 가득 품은 기도는 절대로 하나님께 올라 갈 수 없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아니라 천둥과 벼락으로 말씀하셔도 그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밖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한알의 밀알로 죽으려는 것이 훨씬 쉬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 밖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버리게 될 때 그 사람은 자기의 모든 행복에 대한 소망을 예수 안에서 발견되고 예수를 위해서 자기를 꺽고 자기가 죽는다고 하는 의미는 예수 안에서 자기가 다시 산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말 행복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누구든지 자기의 분야에서 아름다운 성취를 이루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는 그 사람의 섬김의 핵심에는 항상 철저하게 자기가 죽고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사신 희생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든지 아니면 기독교인이 벌이는 사업이라든지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몇사람은 거기에서 자기를 다 버리고 죽은적이 있거나 죽으려는 사람이 있는 그곳에서 아직은 죽기까지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만약에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섬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복을 받는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왜 이 구절에는 죽는다는 이야기만 나오지 복 받는 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때 자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사시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신자의 행복입니다. 신자의 행복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으니 만약에 그 사람이 진정한 신자이고 예수 안에서 기꺼이 죽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자기가 살기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안에 충만하게 살아 있었던 날들안에 자신이 행복한 날들이라고는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런날들이 지속되었으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었을 리가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충만히 살도록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신앙을 갖게되면 우리가 항상 하나님앞에 아파하며 기도하는 것이 뭐냐면 내가 아직 많이 살아 있다는 이유, 내가 아직 안 죽었다는 이유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지 자기가 충분히 죽었기 때문에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위해서 사는 우리를 향해서 충분한 보상을 주신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온전히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것이 자기의 간절한 소원이고 그리고 자기의 희망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떠나 있을때나 그 다음에 육체를 떠났을때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 안에서 존귀해 지는 그것이 자기가 바라는 최고의 상급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은 몸과 육체로, 시간으로, 돈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과 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돈이 있고, 돕는 사람이 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반드시 하나님이 그것만을 통해서는 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고난과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많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의지하게하고 당신을 믿게 만드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10.꺾인 섬김과 복 주심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하심이라” (고후1:8-9)
오늘은 8절과 9절의 내용을 가지고 꺾인 섬김과 복주심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더전서를 쓸때에는 고린도 교회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불신앙적인 소식에 마음 아파하면서 상당히 많이 감정이 격앙된 가운데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고린도 교회에서 그 편지를 받고 많이 마음에 찔려하고 겸비해 졌다는 이야기가 들리니까 이제 고린도후서에서는 좀더 인격적으로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당한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될지에 대해서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에 보면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 교리적인 내용도 있지만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가 라는 내용과 경험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지만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안에는 사람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효과가 일 자체 안에는 없습니다. 일은 일일 뿐이지 그 일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부뚜막에 칼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움직이는 사람없이 칼이 벌떡 일어나서 옆에 있는 무나 홍당무나 감자를 써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로 그 자체안에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어떠한 마음으로 그 일을 위해서 봉사하느냐 그것에 따라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도 하고 오히려 일을 하면서 마음이 더 강팍해지는 인간으로 우리를 더 못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할때에는 사실 일을 하는 그것도 힘이 들지만 더 힘든것은 일을 하면서 자기를 다스려 일도 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변화도 되어가고 하는 그것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 바울이 편지 첫머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 이야기는 니들이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그 고난을 꼭 기억하여 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간절한 사도의 바램을 표시하는 표현이 아닙니까?
그러면 도대체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무슨 일을 당했길래 이렇게도 간곡하게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자기의 고난과 위로를 말하면서 아시아에 있었던 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요? 사도행전에 보면 그 대답이 나오는데 19장, 20장에 보면 아시아에서 이 사람이 무슨일을 겪었는지가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즉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귀신들린자가 그 난리를 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것 때문에 사실은 에베소 사람들이 영적인 사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음에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굉장히 큰 소동이 일어났었습니다. 더 큰 일이 그 후에 일어 났는데 아데미에 우상을 만들어서 팔고 있는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서 자신들이 이 우상 장사가 잘 안되는 이유는 바울 일행이 사람이 손으로 만든 이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상한 예수 믿는 도를 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업이 천하게 되고 장사도 안되니 저 자식 죽이자 하고 백성들을 충동질해서 난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맹수들과 더불어 싸웠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즉 그 사람들에게 체포되어서 그렇게 맹수들과 싸울 정도로 그렇게 핍박의 위기를 느낀 사람 이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이제 에베소에서의 3년이 조금 넘는 사역을 마치고 성령의 부르심을 따라서 어쩌면 순교할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게 되었을때에 그가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에 오라고 불러 놓고 유언처럼 남기는 설교속에서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내가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것과 유익하던것은 공증앞에서나 회중앞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전한 것이요 하면서 자기 일행의 피나는 고생을 상세하게 술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시아에서 당했던 그 환란이 어땠느냐 하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줄로 알았다 그러니까 이 큰 하나님의 사람 사도바울이 거의 절망할 지경에까지 가게 되었다라고 하는 이렇게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며 육체의 안식이 없이 그렇게 지독하게 헌신을 한 것도 참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마지막에는 더 이상 살아날 아무 희망이 없는것처럼 어떠한 소망의 빛도 보이지 않고 결국 나아가서는 마음까지도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아서 "아! 이제 하나님이 여기서 우리를 데려가시는구나" 하는 낙담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아시아에 들어와서 섬기는 날 동안 당했던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 살 소망이 끊어지는 고통,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는것 같은 좌절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동족들과 함께 묻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면 이 세가지 고생중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보장된 장래와 넉넉한 재물 그리고 명예와 앞길이 보장된 전도유망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가 바로 죄 없으시면서도 우리 모든 인간을 위해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결국 그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심한 고생을 당하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살 소망이 끊어지고 동료들이 잡혀가고 핍박을 받는 그 뼈아픈 상황속에서 마지막에는 마음에까지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 정도로 그렇게 깊은 고통속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디 이렇게 복음을 전한 이천년전의 사도바울에게만 있는 일 입니까? 어디든지 이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또 감당하기 힘겨워하는 육체가 있는 한은 이러한 고난은 정도의 크기는 있지만 어디서든지 늘 재연되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의 사랑에 목이 메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 자기를 구원하신 은혜가 감사해서 이 지구의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류의 고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나는 그런 고난을 한번도 당해 본적이 없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로 계속 내 인생은 룰루랄라 노래하면서 살아 온 행복한 인생이었지 라고 말한다면 그러면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쯤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예수 믿고 이렇게 행복했는데 나 구원해 주신 주님도 그렇게 행복하셨을까 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은 회심한 어느 젊은이가 저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싫고 이렇게 예배당에서 늘 예배만 드리고 기도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이 세상에 내려 가려니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사랑을 잃어버릴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 그 속에는 이미 흐르는 성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돌 같지 않고 물 같아서 높은자리에서 낮은 사람으로 흘러 내려가는 법입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면 예전처럼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은 물 같아서 어디론가 끊임없이 그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일즈라고 하는 작가가 이런 찬송을 남겼습니다.
(찬송) 밤 깊도록 동산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면 괴로운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며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아름다운 주님의 목소리, 마음에 내려와 앉는 금싸라기 같은 진리의 빛깔들,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사실 거기가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알게 하실 때 그 사랑을 흘러가는 사랑 되게 하십니다. 계속 끊임없이 새로운 곳으로 그 사랑 받은 사람을 흘러 가게 하시기 때문에 죄인들만 모여 사는 이 세상에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렇게...
(찬송) 자기를 온전히 죽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한 7년전에 설교속에서 이 찬송을 불렀더니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항의를 했습니다. 영생은 믿음으로만 얻는데 자기를 아무리 준들 영생이 생기겠습니까? 여러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는다는것이 우리들이 세상살이에서 이웃을 믿고 신문에 나오는 내용을 믿는 그런것 아닙니까? 이웃의 이야기를 믿고 백화점의 바겐세일 포스터를 믿는 것은 영혼의 변화가 없이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전부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그것은 그렇게 영혼의 변화 없이 백화점에 써 붙여 놓은 바겐세일 포스터를 보고 그 내용을 믿는것 같은 그런 믿음으로는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기의 쓴 책 은혜론이라고 하는 책에서 말하기를 아주 담대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곧 사랑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은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믿음이고 그 영혼의 변화는 사랑으로의 변화입니다. 얼마나 명쾌합니까? 그러니 자기가 진실로 그리스도를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심을 깊이 믿는다면, 그렇게 영혼이 움직여진 사람이라면 어찌 자기를 온전히 주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런 사랑 없이 어찌 주님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백화점의 바겐세일 포스터는 믿고도 안 갈수 있지만 주님이 자기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고 베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주시고 섬기고 살아가야 할 자리를 지정해 주십니다. 이후로 부터는 그의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과 떼어 놓을 수 없게끔 밀접히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하는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것과 형제들아 우리가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그 사명의 자리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이 끊어지고 우리의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줄로 알았으니 라고 말할 수 있는 고백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 열린신문에 나온 간증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똑 같구나! 크기는 다르고 모양은 달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안 사람들을 가만 내버려 두시지 않는구나! 시키는 사람 없고 부르는 사람 없어도 주님이 부르시고 시키시기 때문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교회의 한 구석, 이 세상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가슴앓이를 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렇게 살을 에이는 것 같은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것,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힘에 지나도록 고생을 하여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는것처럼 큰 고통속에 떨어질 때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사도바울이 죄를 지어서 힘에 지나도록 고생을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남 모르는 범죄를 했기 때문에 살 소망이 끊어졌습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무슨 물질을 착복했기 때문에 마음의 가책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도 연약한 인간이었지만 그의 소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못 믿고 이세상에 오신 예수가 아니었더라면 유대교의 어느 그늘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전하며 예수의 몸인 교회를 핍박하다가 죽었을 인간인데 수만명중의 하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둠속에 있는 동족들에게도 불구하고 유독 자신에게 찿아 오셔서 일체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를 보이시고 전에 폭행자요 핍박자요 회방자였던 자신을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주님 때문에 그냥 평안하게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도 그를 버렸고 동족도 그를 버렸지만 자신을 버린 그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숙명처럼 자기 안에 심겨진 것이었고 어떻게 움직일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 때문에 자신의 인생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섬기면서 살지 않고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줄에 메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었습니다. 그렇게 힘에 지나도록 극심한 고생을 하였고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는 것 같이 그렇게 고통을 받을 때 주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자기의 사랑하는 종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어려움을 만나고 시련 가운데 많은 고통을 받으면 쉽게 생각하기를 죄가 얼마나 많으면 하나님이 저렇게 내버려 두실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십자가 아래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하나님도 너를 버리셨다고 외치고 싶었던 그 악한 사람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이 깊이 고통을 받던 3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 아시아에서의 그 섬김을 통해서 무엇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었는지를 말미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드리는 섬김속에서 자기가 꺽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자신 만만하던 패기 그리고 확신 그 뛰어난 지혜와 언변, 추진력, 그 모든 학식, 조직력, 순교의 각오와 결단 이런것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자신안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꺽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종이었고 순수한 일꾼이었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아시아에서의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섬김의 기간동안 만물의 찝게와 같이 살 소망까지 끊어진 가운데 벼랑 끝까지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자기를 의지하는 마음까지도 꺽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거기서 만약에 자신의 섬김이 순풍에 돛을 단 배와 같았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아주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섬김에 있어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오직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그것만을 바라보며 섬기도록 큰 깨달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갔고 섬기면 섬길수록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앞에 꺽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루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다듬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를 꺽는 섬김의 현장이 없는 사람이 몇 달이나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서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성령의 은혜를 경험할지 생각해 보십시요. 인간은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게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14년동안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이 앉은 그 자리에서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오늘 저녁에 목숨이라도 내놓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사명의 현장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당에 앉아서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은 아무 희생도 없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불꽃튀는 사역의 현장에서 수 많은 모난 지체들과 부딪히면서까지...
(찬송)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사는 것은 쉬운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비로서 말씀을 들으면서 흘리는 그 눈물보다 주님을 섬기는 현장에서 흘리는 그 눈물이 값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눈물은 저 눈물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 눈물은 이 눈물 없이는 진실성이 입증될 수 없는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섬기면서 어려움이 오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섬기면서 비난을 받으면 예기치 못한 일이 있어 났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그런일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복음을 들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복음을 단지 듣고 은혜 받으면서 흘리는 눈물은 그져 깨달음의 눈물이지만 섬김의 현장에서 예수의 모습을 본받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은 피가 담긴 눈물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위해 허락해 주신 그 작은 섬김의 현장에서 어려움이 올때마다 시련이 올때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잘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남을 꺽는 비결을 배우지 말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꺽인 비결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세우지 않은 것들은 아프더라도 부러지고 주님이 박아 놓지 않은 것들은 괴롭더라도 뽑히고 주님이 심어 놓지 않은 것들은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잘리움을 당하는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이천년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신기하게도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서 그 예수 죽음의 기운이 날마다 우리를 죽이고 그래서 우리로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에 다시 살게하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 해 보십시요.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는 그 현장은 어디입니까? "목사님! 그 까짓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도 하나님앞에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 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과 자세로 섬기게 될 때 여러분들은 그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골몰했는데 사람들의 눈에는 여러분들이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꺽인만큼 주님은 예수를 닮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의지할것이 없고 오직 주님 한분 이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매일매일 살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섬기는 사람의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
주일오후예배(2007/12/1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1/06)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3(2008/01/1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4 (2008/01/2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5(2008/01/2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6 (2008/02/03)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0)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17)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2/24)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02)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2008/03/23)
11.선한 섬김과 복 주심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말2:17)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을 때 "아! 이제는 하나님을 섬겨야 되겠구나! 그동안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별로 없이 살았구나!" 라는 자각이 생기게 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주님을 믿었지만 아무것도 섬김없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와 함께 이제라도 주님을 섬겨야 되겠다 라고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일을 한번 맡는것은 일순간의 은혜의 경험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한번 맡은바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지속적인 사랑과 은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타락했던 시대의 일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또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삶의 명령들, 성경에 나오는 계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 늘 가책을 받고 우울하고 슬프게 다니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지금은 우리가 이런것 모두 쓸데없는 일이다 세상을 봐라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들이 아니라 저 잘났다고 고개를 드는 자들이 복된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 하면서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그리고 주님께 겸손히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오히려 불행에서부터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냐? 이렇게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경건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실한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은혜와 축복 이런것은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면 영혼이 싫증이 난 것입니다. 그러면 뭐에 대해서 싫증인 난 것입니까? 일에 대해서 싫증이 나기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든지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의 감정으로 하나님 앞에 내가 이 일을 하겠습니다, 저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 가지고 사람의 신앙을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 그리고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곳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인간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하면 뭐라도 하나씩 다 맡길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럴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번 하나님 앞에 무엇을 맡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한번 맡겨진 그 일을 흔들림 없이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기면서 남들이 볼때나 보지 않을때나 또 다른사람이 나와 함께 그 일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묵묵히 처음 자기를 불러주신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매순간 믿음으로 살아 가는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입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죽이고 고단하게 사는 것은 다 싫은 일입니다. 누구도 좋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고단하게 사는 그 일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면 모두 싫어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바로 삶의 의와 도리를 자기의 싫고 좋음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싫음과 좋은것에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대의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냐면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해야할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면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부어 주시고 사랑의 감동이 마음속에 지속되고 있을때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해야 하는 그 일이 정말 기쁘고 행복할 때 그 사람은 최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요.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해야 할 일은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인데 그러나 그들이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한때는 하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아멘하고 응답한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기 싫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자신이 꼭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이 이제는 싫어지는 이유가 무엇때문일까요? 맨 처음에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 불러주신 그 부르심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거기에 우리를 세웠으면 섬기다 헛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택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해 불러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그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수종을 드는 그것이 옳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일들을 처음에는 감정으로 맡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에게 싫증이 나고 그 일에 싫증이 나서 마음 흘러가는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지 아니하면 자기를 위해서 살고 싶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때에는 한없이 힘이 듭니다. 그 은혜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때에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엄청나게 많은 희생을 하는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그 일을 행복해 하기 때문에 마음과 자신의 삶의 일치가 이루어져서 한 없이 그 일로 섬기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고 기뻐지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섬기면서 사는 사람, 섬기지 않고 사는 사람, 섬겨도 겉으로는 섬겨도 마음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 이런 사람들이 모두 섞여서 함께 살아가는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들을 정확하게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묘하게 의인과 악인을 나누는데 의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악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의인과 악인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악인과 의인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도 얼마든지 악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은 일평생 흠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커다란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이라고 분류하신것은 그의 도덕생활만을 분류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악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악인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고집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의인은 하나님께 입은 은혜 때문에 때때로 악을 행할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서 꺽어지는 사람들이고 악인은 완고하여 결코 꺽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의인과 악인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의인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를 힘 입었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러 가지 많은 부족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굳게 붙들고 자기가 그 언약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섬기기 싫은 사람을 거짓으로 섬기기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진정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싶은데 외부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힐 때 그때 그 사람은 더 큰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경험이고 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입니다. 아가서를 보면 신랑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신부가 너무나 보고 싶은 나머지 병에 걸려 누워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이 내용들을 증명하고 있는 인간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두 섞여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정확히 그들을 구별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기념책에 기록해 놓으신다고 오늘 성경은 우리를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큰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큰 사명을 주셔서 그 사명을 따라 살게끔 사명의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것이 존귀함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사람입니다. 존귀해 처하며 그것이 존귀한 자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머지 않아서 아주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명예를 하나님도 사랑하셔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이 맨처음 자기를 불러 주셔서 그 은혜 때문에 서 있게된 이 섬김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있을 때 그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완전해지기를 바라고 또 하나는 그 완전을 위해서 주의 깊게 섬기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섬기고 하나님께 봉사하되 온전하게 잘 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면서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챦게 여기면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섬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두가지입니다. 밭을 갑니다. 밭농사를 지을 때 소도 일하고 그 땅의 주인의 아들도 씨를 뿌리고 일을 합니다. 소는 쟁기로 갈고 아들은 씨를 뿌리며 파종하면서 그렇게 다 일을 합니다. 아무도 소가 섬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는 일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주인의 아들은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주님앞에 자기가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아는 구원에 대한 감사, 이 감사의 정의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섬김속에는 주의 깊음, 온전히 이 일을 하여 정말 잘 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 그런 뜻이 없는 것입니다. 외국에 집회를 가거나 혹은 멀리 갔다가 돌아오면 제일 정겨운 것이 교회 마당입니다. 교회 마당을 휘이 돌아서 열린공간으로 올라가면 열린공간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마루를 밟으면서 걸어가면 거기에서 지체들을 만나 인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열린 공간을 참 좋아했습니다. 한 4년전인가 마루가 다 망가져서 어느 업체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꽤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무 비싸다고 했더니 쭉 설명을 합니다. 한번 맡겼더니 깨끗이 갈아내고 정돈을 했는데 마루가 정말 이렇게 이쁜 줄 몰랐습니다. "야! 정말 잘했다!" 그리고 4년이 시간이 지났습니다. 주일이면 몇천명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니까 엉망이 됐습니다. 그래서 하도 때도 끼고 더러워서 그 사람 생각이 나서 서류를 찿아서 그 사람 연락처를 찿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와서 "그때 정말 잘했다" 그리고 믿고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열린공간 가 보십시요. 꼴이 아니게 일을 해 놓았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오죽했으면 설교 시간에 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믿었는데 말입니다. 그 사람이 워낙 성실하게 잘해서 그 회사는 틀림없이 만족을 준다고 해서 뒤도 안돌아 보고 시켰는데도 이렇게 이렇게 하자 해서 그럼 그렇게 하자 했는데 저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볼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정말 찻잔 한잔을 나르고 빗자루 한번을 들어도 옆에 있는 불완전한 사람도 저 사람이 마음에 있어 이 일을 하는지, 할 수 없이 이 일을 하는지가 느껴지는데 우리를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그 자리에 세워주신 그 하나님은 얼마나 잘 느끼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훤히 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한동안 두고 보시면서 다시 은혜 받을 기회를 주시고 섬길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섬길 기회를 빼앗아 버리십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아주 많은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두십니다. 그리고 다시 그렇게 섬길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중 누구에게도 섬김을 구걸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시기 위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자녀로 당신을 불러 당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로 섬김을 받으시면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와서 원래대로 해 놓으라고 지시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이름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당신을 섬긴 사람들을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사람은 다 잊어도 하나님은 또렷이 기억하셔서 각자에게 당신에게 행하신대로 갚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기념책에 기념하셨느니라 하는 이것은 하나의 우리를 이해하기 쉽게 하는 은유일 것입니다. 기록을 하라는 이유는 자꾸 까먹기 때문에 기록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내 기억력이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적이 없다고 해서 나는 기억력이 엄청 좋구나 했더니 그 뒷말이 재미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번도 내 기억력을 믿은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분은 아니 십니다. 그러니까 기록한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게끔 아로새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나는 그들을 위하여 내 가슴에 아로새기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족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옛날에는 사실에 근거해서 족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족보있는 집이라고 하면 진짜 족보있는 집이고 한 글자 가지고 조상들이 목숨을 걸었습니다. 지금은 전주쪽으로 가면 족보 만들어 주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가문이 조금 허접한데 족보를 하나 만들어 주시오 하면 8대조 할아버지 벼슬을 무엇으로 해 드릴까요 합니다. 옛날의 관리들 가운데 당상관과 당하관이 있습니다. 일품부터 시작해서 품계가 내려 오는데 당상관은 텔레비전 사극 같은데 보면 왕이 있고 쭉 서 있는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이고 하관은 왕을 먼 발치에서도 못보는 벼슬입니다. 그 하나가 굉장히 큰 차이입니다. 한계단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교적 양심에 털이 덜 난 사람입니다. 자기 8대조 할아버지가 소잡고 돼지 잡는 백정이었는데 그것을 올려서 큰 벼슬을 한것처럼 덜컥 올려놓는 이런것이 말하자면 족보입니다. 그것을 또 비석에 까지 새깁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그런것에 새겨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남는것을 굉장히 영화롭게 생각을 합니다. 어렸을 때 맨날 선산에 가면 우리를 끌고 다니면서 이 할아버지는 무엇이고 무엇이고 하면서 거기에 새겨진 비석의 벼슬자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훌륭한 조상들이라고 항상 자랑을 하셨습니다. 항상 마음속에 "아버지는요?" 하는것이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것들은 모두 이 세상의 풍파속에서 돌들에 기록이 지워지면 함께 잊혀지는 이름이야 우리 주님의 마음에 새겨진 그 이름은 잊혀지는 법이 없고 사라지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길 때 한번 하나님의 일을 맡았으면 그것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요즘은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교회도 등록했다가 심방을 가면 때려 친다고 하고 직분도 주면 어느날 에이씨 열받는다고 사표 던지고 어느 교회 목사님은 저한테 물어 봅니다. 이런것은 어떻합니까? 일년짜리 서리집사가 사표를 써 들고 6월달에 찿아 왔습니다. 자기는 이런 사표가 있다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고 일년짜리 서리 집사가 6개월 있으면 떨어질텐데 그것을 사표를 써가지고 들고 담임목사님께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당신 믿겠다고 교회 모이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 대부분의 인파가 벳세다 광야에서 떡하나 얻어 먹겠다고 모인 사람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진짜 그 가운데 이름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분앞에 자기가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방황하던 인생의 길에서 구원받은 상처받은 어린 양이라고 생각하고 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 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이름을 가슴에 아로새기십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사랑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님도 소중히 여기셔서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그 분의 복잡한 그 어려운 명령을 지키면서 말씀대로 사는것이 다 쓸데없는 것이다 이러는 사람들이 처처에 횡횡하던 그때에 그래도 어느 한 구석에서는 주님이 자기같은 인간을 사랑으로 불러 주신 그 은혜, 그리고 비천한 인간을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신 그 크신 자비하심 때문에...
(찬송) 몸 밖에 드릴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그 사람들 하나님이 반드시 가려내서 그들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시고 그리고 그들을 아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오... 이 특별한 소유가 무엇이냐면 보배입니다. 그래서 보배라고 하는 말이 감추다 라고 하는 말에서 왔는데 감추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않고 소중하게 그런 소유로 삼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아끼신다고 오늘 그들이 받을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고 그리고 그들을 아끼시는데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끼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아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충심으로 섬겼는데 이용만 해 먹고 자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변함없이 충성했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고 아끼시기를 가슴에 아로새기시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그렇게 산 사람들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나의 정한날에 그들을 나의 소유로 삼을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두고 보십니다. 한순간에 하나님을 위해 많이 희생할때도 있고 어떤때는 하나님앞에 아무렇게나 행하며 사명을 무시하는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시면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섬긴 많은 날들은 기억에도 없고 하나님 앞에 잘 섬겼던 어느 순간만이 우리의 가슴에 남아서 일생동안 우리의 과오는 망각속에 흘러가고 자기가 희생한 것은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때까지 우리들이 이름없이 빛도없이 섬겨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헤가 우리의 심령속에 깊이 들어오게 되면 주님을 위해 섬기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섬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큰 은혜이고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은혜가 없이는 거룩한 삶도 섬기는 삶도 감사의 생활도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감사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끝까지 감당하며 살아가는 그런 충성스러운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들의 복이신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