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 제사장직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십자가 고난으로 왕같은 제사장이 됨(벧전2:9, 마7:50-51上) 2008.3.17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성령 부음과 그리스도의 성결(눅3:21-22, 레8:12) 2008.3.18 십자가사경회(새벽) 7
3.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에 참여함(고후8:9) 2008.3.19 십자가사경회(새벽) 13
4. 피 뿌림과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심(히9:13-14) 2008.3.20 십자가사경회(새벽) 20
5. 신자의 자기 봉헌과 세상의 정결(창4:4, 슥14:20) 2008.3.21 십자가사경회(새벽) 26
6.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닮음(빌3:10-11) 2008.3.21 금요기도회 32
2008/03/17 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제사장직 1
1.십자가 고난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됨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 려 하심이라” (벧전 2:9)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7:50-51上)
개신교 교리 중에 만인 제사장직의 교리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는 예수를 믿은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왜 마틴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일치하게 이 교리를 주장하였는가 .. 예전에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교회가 사제들이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과 일반 평신도들 사이에 연결정이 돼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말고 많은 성인들과 많은 믿음 안에서 죽은 위대한 순교자들을 힘입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는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는 신앙이 없었다. 만인 제사장의 교리는 이제 모든 믿는 사람들이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을 직접 뵈오러 간다는 것이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것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분명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못박고 있다. 여기에서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은 제사장인데 사실 옛날 제사장은 왕같지는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왕같은 제사장은 왕직과 제사장직이 합쳐진 독특한 형태로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라를 움직이는 중요 세 기관이 있었는데 왕, 선지자, 제사장이었다. 여기에 특별히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이제는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중보 말고 누구의 또다른 중보없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뵈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도 필요없고 교회도 필요없고 주님 앞에 직접 나아가면 된다는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도움이 필요하지만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토대로 중보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맞아주신다,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신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은 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제사장인데 그 제사장직과 왕직이 함께 만나야 한다. 왕직과 제사장직이 함께 만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직이 만난다. 그래서 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사람이었고 제사장은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모든 인간들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게 해주는 것이 제사장이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의 중보가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면 교리를 알고 있는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3직 중에 선지자직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성경 뒤에 보면 하나님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신 이유가 너희를 어두움 가운데 불러주신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우리를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가게 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지자처럼 전파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구약의 성직이 예수 안에서 만나고 예수 안에 있던 그 세가지 직분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서 만나게 되는데 이번 사경회는 그 성직 중 특별히 제사장 직에 이야기를 드리고자 한다. 성경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바로 그 순간,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 놀라운 일이 성전에서 일어났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이기 이전에 성막이었다. 성막 시대에도 똑같이 이어져오는 크기의 성전이 있었다. 그 성전은 백성들이 모이는 뜰이 있고 마당이 있는데 그 광야시대 같으면 천막이 쳐져있었다. 그 천막 속에 아주 은밀하게 제사장들이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이 있었다.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6평짜리 방이고 또 하나는 12평짜리 방이었다. 12평짜리 방이 성소였고 그것을 지나야지 들어가게 되는 작은 6평짜리 방은 지성소였다. 지성소는 제사장 중 대제사장만 일년에 한 번씩 피를 뿌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기에 거기서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그 방이 있고 그 앞에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가 있었다. 제사장은 숫자가 많았다. 그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러 가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제사장이 들어가서 성소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과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을 대신해 들어가서 한 번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에서의 주님과의 만남은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다. 그 휘장은 황소를 양쪽에 잡아매고 달음박질하라고 해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의 탄탄한 청색 자색 베실로 짠 천이 있었다. 그 휘장 자체는 성소와 지성소가 나뉘어져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나누어진 것을 누구도 찢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그 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 무엇으로도 찢어지지 않을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아래로부터 위로 찢어지지 않고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그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 순간에 성소에서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은 의미 자체가 새로워지게 된 것이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이 없이 직접 하나님의 임재를 뵈올 수 있도록 더 이상 대제사장이 필요 없고 누구든지 그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뵈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두 가지 국면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입혀드린 그 모든 손해를 예수님이 대신 갚아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는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기 전에 언약을 맺으시기를, 만약에 아들이 우리 모든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면 하나님은 그에게 무한한 은혜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시고 마지막에는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왕권을 맡기시고,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인간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 지셨던 것입니다.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지 않으시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입혀드린 이 큰 불명예와 손해를 갚으실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의 형벌을 따라 우리의 죄의 대가로 죽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계실 그때 하나님의 큰 진노가 떨어져서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가 친밀하던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나이까?”라고 외치지 않을 정도로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우리 인간이 지은 모든 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께 반항하고 거역하고 살던 그 모든 더러운 죄를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 끔찍한 형벌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때, 우리 모든 죄를 대신해 당하신 형벌이셨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실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셨느냐?”하는 문제가 대두 되게 됩니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니님께서는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수많은 죄가 보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서 제물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짊어진 죄 때문에 가장 흉악한 죄인들이 당하여야하는 형벌을 하나님께 한 몸에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향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죄 때문에 형벌하시는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들을 사랑하셨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시는 것 같고, 우리를 견책하시는 것 같아 고통이 계속될 때에도 사실은 그 고통과 함께 여전히 구원받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속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죽음은 사실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손해를 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어루만져드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당신의 공의로우신 성품에서 오는 모든 진노를 우리들이 지은 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이 죄를 향해 하나님이 정당한 심판을 하시자 하나님의 마음은 풀어지게 되었고 우리들이 지은 죄 때문에 우리들을 향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주님이지만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마음이 깊이 감동을 받고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다시 새롭게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고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고 구원 얻기만 하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십니다.
그래서 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그런 놀라운 위엄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이런 왕 같은 위엄과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왕이 위엄과 능력을 가지고 통치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핏줄만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한 나라의 왕이 되어서 왕이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기 위해서는 영토가 있고, 백성이 있어야 되겠지만 그것과 함께 중요한 것은 왕을 따르는 많은 군인들, 즉 왕 자신 안에 권력과 필요한 재물이 있어야지만 나라를 정상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라를 다르시고 통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을 단지 구원만 해주시고, 용서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왕으로써 통치가고 다스릴 수 있는 놀라운 자원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나라에 건설하고자 하시는 나라가 세상 나라와 같다고 한다면, 총칼을 든 군사도 주셔야하고 물질도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건설하고 싶으셨던 나라는 이러한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 나라는 물질과 힘으로 오는 나라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오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의 왕을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비록 아주 하찮은 것 같고, 연약한 것 같지만 내게는 구원받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건설하고 다스릴 수 있는 그러한 왕 같은 직분과 그 통치를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이유가 이런한 의미에서 왕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직분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왕 같은 사람이 되어서, 결국은 그런 통치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추구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 나라를 가서 기웃거리며 신앙을 꺽고, 굴복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이 아주 추해지고 지저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름을 받아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그분을 따라가는 또 다른 작은 왕이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신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원이 있어야 합니다. 왕으로 불러 주었는데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왕으로 직무를 감당하고 실현할 수 있는 왕에게 필요한 자원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허접한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 같이 보좌에 앉아 사람들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저 밑에 남의 집 앞에 쓰레질이나 하며 먹고사는 초라한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셨는데, 그 자원을 끊임없이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왕처럼 그렇게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다스리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통치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제사장의 직무입니다. 선지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고, 이 제사장의 임무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을 대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드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 너무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설령 그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미끄러 졌더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시고 여겨주신 것은 그가 잘 사는 삶 때문에 그렇게 삼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우리들이 받은 직분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가 미끄러지고 넘어져서 죄 가운데 빠졌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장 연약한 성도 한 사람도 대하고,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스스로 나는 적어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불러주신 왕 같은 제사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죄 때문에 직접 나아갈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하나님께 제사드려주고 기도드려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에는 특별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의 의복이었고, 그 위에 에봇이라고 하는 조끼 비슷한 것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깨 양쪽에 돌이 2개가 붙어 있었는데, 이 돌 2개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2칸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있어서 12개의 보석이 붙어있었는데, 12개의 보석은 12지파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당신 앞에 제사드리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성소에 들어올때, 반드시 그옷을 입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 까요?
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러 성소에 들어가는 그것을 개인의 자격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품에 품고, 하나님의 만나기 위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는 그 안에서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그것을 위해서 성소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만인제사장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믿은 그리스도인을 추켜세우기 위한 교리가 아니라, 그의 거룩한 본분을 일깨워주기 위한 교리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소를 들어가는 일이 필요 없습니다. 예배당은 성도가 아닙니다. 예배당은 필요에 따라 옮길 수도 있고,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거룩함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는 것이고 여기에서 가르쳐주는 것은 거룩한 가르침, 여기서 함께 하는 성령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주님이 세우신 제도들, 이런게 거룩한 것이지 장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후에 살아가는 모든 삶 전체가 성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만나는 것은,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서 더 넓은 의미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잘 드리기 위함인데, 그것은 우리의 전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해야하냐면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가 이 에봇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이것은 이 구원 안에서 우리가 모든 이 세상의 사람을 향하여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제사장은 제사를 위해 성소에 들어갈 때에만 에봇을 입었지만 우리는 항상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어 안고 그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대제사장으로써 사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사장은 제물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제상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산 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당신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서 하나님께 바쳐 우링에게 구원을 주셨던 것처럼 구원을 얻고 제사장이 된 우리는 주님 앞에 산 제사를 이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제사를 드리되,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죽여 하나님 앞에 바침으로써 이 모든 인간들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주고 돈을 나누어주는게 아니라, 그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를 다시 맺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직무도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회심했지만, 여러분의 자녀가 회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들이 너무 강퍅해서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제사장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왜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택하여, 여러분 가족을 모두 끌어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 일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치시기를 원하는데,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예수께 돌아오는데 진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내 주위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수 많은 사람들.... 그래서 여전히 죄 가운데 죽어가고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드을 보십시오. 그 인간들이 우리에게 소리칩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똑바로 감당하라!” 그 사람들의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진실한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수많은 눈물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 뒤를 따라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제사장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2008/03/18 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제사장직 2
2.성령 부음과 그리스도의 성결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1-22)
“또 관유로 아론의 머리에 부어 발라 거룩하게 하고” (레 8:12)
어제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궁금한 것은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원래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제사장이 그 직무를 잘 감당하여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잇게 해주고 왕이 그 나라를 잘 통치해주면 그 나라는 지극히 평안한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왕직과 제사장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성결케 해야 했습니다. 그 성결케 되는 것이 피 뿌림으로 성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드리러 나아갈 때에는 먼저 제사장이 자신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릴 때 피를 뿌림으로 장소를 거룩하게 하고 또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성결케 하는 일이 피뿌림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던 게 아니라 또 하나의 방법이 있었는데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성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제사장인 아론을 성결케 하는 예식 중에 기름을 부어 바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관유라고 하는 것은 붓거나 뿌리기 위해 준비된 제사에 쓰이는 기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로 올리브유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기름을 취해서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바르고 단에 일곱 번을 뿌리고 물두멍과 바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제사를 드리러 나아가는 아론 자신에게 부어, 그 부은 기름이 흘러내리게 됨으로써 그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결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결하게 되는 것이 결국 피로만 성결케 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기름으로 성결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리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도 동일하게 두 가지로 성결케 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성결케 되는 것과 제사장이 성결케 되는 것이 좀 다릅니다. 제사장은 죄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결케 되는 것이 그 죄를 포함해서 모두 깨끗케 되어 성결케 되는 것이겠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으니 이렇게 피 뿌림과 기름부음으로 성결케 된 것은 자기의 죄를 깨끗케 한다는 면에서의 성결이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구별되고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바쳐진다는 의미에서 성결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성결케 되는 것이 피 뿌림과 기름부음으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성결케 되신 것도 피 뿌림과 기름 부으심으로 성결케 된신 것입니다.
그러면 피뿌림은 예수님의 생애에 마지막에 죽으실 때만 이루어진 일인데, 그러면 그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성결하지 않으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뿌리시기 전에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고난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시기 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그때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시작된 것이고, 그리고 이것을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바라보면서 진행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이고 이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성결해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그것부터 이미 성결해지신 것인데, 태어나실 때 이미 성령 안에서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성결케 되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삶을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성결을 이루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부터 이미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마리아의 태속에서 잉태되시어 태어나심으로 성결해지셨지만 특별히 예수님이 30년 동안에 사적인 생애를 보내신 후에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섬기고 마지막으로 죽으시기 위하여 시작되는 공생애, 그 첫머리에서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십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기름으로 부음을 받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이 상징하던 실체인 성령으로써 부음을 받으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성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기름부은 사건이 바로 예수님에게는 성령을 부으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기에 모두 계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자는 거기 계셨고, 성령은 하늘이 열리자 비둘기 같이 그분에게 한량없이 부어졌고, 성부는 바로 그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음성으로 말씀하심으로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여기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기름 부으심을 말미암아 이렇게 성결해지셨는데, 예수그리스도의 기름 부으심 안에서 그의 몸에 접붙여져 이루어질 모든 교회가 함께 그 성령의 부으심 안에서 성결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 부으심 곧, 성령의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성결해지실 때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후에 이루어지게 될 모든 교회가 함께 성결해지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성령의 부음을 받으실 때에 홀로 성령의 부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앞서 있었던 구약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모든 영혼들을 함께 끓어 안으시고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단 두 사람만이 나머지 인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아담이었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담과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것은 행위를 담보로 한 언약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고 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께 범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범죄의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담과 맺은 언약이 우리 모두를 함께 끓어 안고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아담이 죄를 짓고 언약을 파기했을 때 우리도 거기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말하기를 한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사망이 우리 모두에게 들어와 왕 노릇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아담이 그래도 선악과를 먹어나봤지, 우리는 건드려보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왜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우리도 죽어야하고, 죄의 형벌아래 있어야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늘 놓으시고 아담에게 ‘이것을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은 안하셨지만, 괄호를 치면 ‘먹지 말라고 한 내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히 너에게 생명을 주고, 창조한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게 해 주겠노라,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이 의미 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영원히 있는 계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일정한 시간동안 아담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애쓰지 않았으면서도 아담의 순종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영생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뒤집어 보면 결국은 아담이 그 선악과를 따먹을 때 사실은 우리도 그 형벌을 받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언약으로 함께 묶여지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를 짊어지고, 구원받을 모든 인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형벌을 받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이후에 믿게 될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언약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행위언약을 깨뜨리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담당해야하는 형벌을 담당하실 때에 홀로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을 끌어안고, 그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안에서 구원을 받을 모든 사람들도 자기의 죄를 위하여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못 박혀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동일하게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결해 지셨을 때 예수 홀로 성결해 지신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이전에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성결해 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당신이 성결케 하신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주님을 믿으며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이 작정하신 계획하신 계획을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령 부으심에 우리들이 동참하여 함께 성결케 되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당신을 성결케 하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공생애 첫머리에 성령을 부으심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성결해지므로 예수님 자신을 성결하게 하셨습니다. 아론에게 부은 그 기름이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흘러 그리고 옷깃을 적시며 그 모든 아래로 흘러내림 같이 그리스도께 부어진 이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함께 흘러내려 온 지체를 그 성령 안에 잠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왕 같은 제상이 되는 이 부르심에 있어서 두 가지 떨어뜨릴 수 없는 요소가 이 안에 들어오게 되는데, 하나는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이었습니다. 넓게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때부터 고난은 시작되고 그리고 마지막은 그 모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고난은 이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으신 것입니다. 영원하신 그분이 유한한 시간 안에 갇힐 수 있는 몸으로 오신 것 그 모든 것이 고난의 길이었고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성결하게 되고 그리스도는 죄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의미에서 성결해지셨지만 우리는 죄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깨끗하게 죄를 용서받고 그 죄로부터 정결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잊지 말고 가슴에 품어야할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섬기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 한없는 원수 됨이 변하여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가슴에 새기게 될 때, 내가 살아있는 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모든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불순종은 바로 내 인생이 나의 인생이고, 내가 나를 위하여 매우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원수 맺었던 우리를 변하여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게 하신 그 일이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정말 중요한 것을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모두 끌어안고 당신의 모든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전에 우리가 자랑스럽고, 좋았고,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반역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셨지만 그것으로 왕처럼 이 모든 세상을 은혜의 통치를 받게 이바지하지 않았고, 제사장처럼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마치 어깨에 두 돌과 에봇의 12개의 돌을 붙여 이스라엘 12지파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이스라엘 제사장들처럼 행하지 않고, 제사장으로 불려주셨지만 제사장처럼 행치않고 제사장으로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 욕심만 차리는 악한 제사장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생각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보혈의 공로로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뿐입니다. 그럴 때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이유가 바로 이렇게 자기만을 부당하게 사랑하는 이기적인 자신의 욕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십자가 앞에서 예전에 좋았던 자신이 싫어지고, 그래서 이전에는 마음의 소원이 있기를 그렇게 사랑하던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함으로써 그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또 자기를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참회의 삶입니다. 그 하나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참회의 반복이 없이는 뜻을 세우지 않아도 그는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신실한 사람이냐면, 부족해도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참회하는 사람, 그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삶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그리고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평생 잃어버리지 않아야할 것이 참회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마음이 녹는 것이 나를 향해 가던 인생의 길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한없는 충만한 기름부으심은 그 길을 온갖 난관을 헤치고 달려가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월남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미군이 5만명이 죽었고, 우리나라 군인들도 5천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추락한 미군 전투기가 7백대였다고 합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미군이 졌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저녁에 전쟁하라고 무기를 공급해주면, 내일 그 종에 맞아서 월남사람과 미군이 죽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받은 무기를 가지고 술집에 가서 술을 먹었고 이 무기가 다음날 새벽에 베트공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한 병기를 주어도 애국심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애국심을 갖는 것이라면, (꼭 그렇게 나뉘어 줄수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나눕니다.) 동시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그로 하여금 강한 군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전쟁을 하게 하는 병기요, 힘이요, 강력이요, 견고한 진을 파하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 두 가지 안에서 성결하게 되심으로써 교회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예수님은 피 흘리심과 기름 부으심이 나뉘어 졌지만, 교회에서는 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굳게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단지 그의 죄 만을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위에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를 깊이 회개하면 죄만 용서받고, 성령의 은혜는 다시 기도원 올라가야지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피 흘리심과 기름 부으심으로 성결하게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서 예수에게 베푸신 것을 통해 함께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은 수염을 타고 그리고 온 몸에 흐른 것처럼 예수께 부어진 이 성령의 은혜가 함께 접붙여진 우리 모두 위에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의 은혜 안에 살게 될 때 우리에게 부어진 그 기름이 흘러 우리의 가족에게, 불신자들에게, 구원 얻기로 되어있는 이 세상의 많은 지체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적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같은 그 큰 사랑 속으로 나아오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시켜서 십자가 사랑에 돌아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삶의 환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충만한 기름부음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부으시는 충만한 기름부음, 성령의 놀라운 은혜, 그 충만한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하면 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화와 변화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오늘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충만한 기름 부으심이 있어, 고통하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환경 속에 흘러들어 가도록, 주님이 이루신 그 일에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도록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08/03/19 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제사장직 3
3.그리스도의 부요하심에 참여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
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임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성결케 하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성결케 하심으로써 당신의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거기에 참여하게 하여 교회를 성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써 성령을 한없이 부음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부어진 성령 안에 교회가 또한 함께 참여하여 그 성령에 부요함에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신령한 것은 예수님에게 먼저 부어진 것이고, 그 예수님께 부은바 된 신령한 풍부함 그 안에서 교회가 참여함으로 함께 그리스도에게 부어진 그 풍부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께 부어진 성령 안에서 온갖 신령한 것들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우시려고 했던 나라는 세상에 나라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이나 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신령한 영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물질도 이 세상의 번영도 그 모든 것이 해결할 수 없는 그런 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보면, 돈이 없거나, 질병이 많이 깊어지면 인생의 큰 충격이 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 집니다. 그래서 다시 돈을 많이 벌어서 부해집니다. 그리고 육신의 질병도 고쳐집니다. 그러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아도, 그러나 인생의 문제가 거기서부터 또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보면 기름값이 올라 많이 문제가 되는데, 베럴당 100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도 산유국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산유국 중에 잘 사는 나라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1960년도부터 시작해서, 96’~98’까지 경제가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석유를 많이 벌어들이는 나라는 국민소득이 1.3%씩 감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공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니까 이것을 가지고 복지해택을 느리고, 살림이 넉넉하니까 사람들이 공무원이나 나라가 제대로 돈을 쓰고 있는지 감사하는 체제가 잘 안 되었습니다. 1950몇년도에 네델란드의 북해도에 엄청난 천연가스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돈이 엄청나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잘 살줄 알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온갖 서비스를 다 해주고, 그러다보니 네델란드 화폐가 치솟아서 수출이 막히고, 결국 오히려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것을 가리켜 네델란드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석유가 나지 않는 게 얼마나 감사하지 모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슈퍼볼에서 당첨된 사람들 80%이상이 잘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갑자기 땅값이 올라 부자가 된 사람들을 추적해 조사해보니까 대부분 잘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인생의 문제가 물질의 문제나 이 세상에서의 번영의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성에 한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성 안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 교회에 접붙여진 당신의 몸에 지체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축복들은 부어주셔서 예수님의 인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 복의 창고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 안에 있는 놀라운 신령하고 아름다운 복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지체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이것들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이 모든 것들을 그 지체들이 공급 받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부요한 분이 되신 것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써 너희를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하심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의 인성에 부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풍부하고도 신령한 자원은 아무리 주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셔도 예수님이 줄어드셔서 영적으로 가난해 지시는 일은 잇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님의 외적인 삶속에 어떻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정신을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부여받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도 그분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스스로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소유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서 그것들을 소유하고 누림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부해지고 번영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신 그 풍부한 인성 안에서 주어진 이 자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누어 주시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지상의 생애에서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소유하신 것처럼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님의 지상생애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오히려 당신은 그것들 때문에 가난하게 되신 것이 예수님의 생애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주린 자들을 먹이기도 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기도 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이러한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적을 통한 공급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는 한없이 부요하신 분이셨지만, 그러나 당신의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난함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부요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그런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가르쳐주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자기를 다 버리고 그리고 가난하고 궁핍한 이 세상에 인간들을 위하여 그들을 부요케 하기위해 가난해 지셨던 이유는 그분이 바로 왕이신 동시에 제사장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은 제사장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제사장이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과 온 나라 그리고 열방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제사장은 하나님을 위해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제사장은 이스라엘 위에 있고, 이스라엘은 온 열방을 위해 있어서,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섬기고, 이스라엘이 열방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부요하시지만 가난해지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당신의 인성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번에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사랑하시고 위하여 못 박혀 죽으시 세상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제사장이 에봇위에 두 돌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기고 흉배에 이스라엘 12지파의 보석을 달고, 성소에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도 우리는 이 세상, 주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들의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부어주신 각별한 성령의 은혜, 하나님과의 친밀함, 심지어 그에게 베풀어주신 수많은 영적인 축복들, 진리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께 죄사함을 얻게 하는 그러한 놀라운 특권까지도 사실은 그것이 제사장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어주신 제사장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사상들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받은 큰 은혜도 하나님이 다른 사람과 차별대우하면서 자기에게만 주시는, 자신의 훌륭한 신앙으로 그것을 얻어 낸 것처럼, 그래서 그들의 간증이 전쟁터에서 얻어낸 무용담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물질의 많은 복, 육체의 건강, 남다른 재능까지도 하나님이 그 사람 개인으로써 주신 것이 아니라, 좁게는 모든 교회의 지체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넓게는 이 세상에 섬겨야할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부요함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이 교회와 세상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유지되어야할 정신이 무엇이어야 하면, 부요하신 분이셨지만, 가난한 우리들을 가난한 우리들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은 기꺼이 가난해 지셨던 삶을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 정신가 마음을 깊이 본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채워주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부르신 그 구원의 뜻을 따라서 교회와 이 세상에 있는 이웃들을 섬길 수 있게끔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적인 은혜만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물질과 건강 이 모든 것까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들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또 물질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재능들이나 혹은 특별히 물질적인 것들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우리가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베풀고 나누어 주면, 일시적으로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당신은 부요하시지만 가난해지시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물질을 많이 소유해서 부요한 분이 되셨다가 하나씩 하나씩 나누어 주셔서 거지처럼 가난해지신 적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분에게는 자기에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제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으로 이 땅의 물질과 풍요로움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절대 나쁘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신 것들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능력이 없고, 재대로 경쟁하지 못해서 가난하고, 힘겹게 살면서 마음 안에 있는 물질이나 이 세상의 번영에 대한 탐욕은 청산하지 못했으면서 스스로 경쟁의 대열에서 져서 가난하게 사는 것 자체를 엄청난 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으로 볼때 너무나 황당한 인생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까지도 가난해진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있기 때문에 돈을 잃지 않기 위해 탐욕스러워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누리고 싶어서 탐욕스러워 집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로 삼으셨던 것은 바로 마음 안에 있는 탐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물질과 건강, 남다른 재능과 우리의 가진 많은 것들을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셔도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우리자신이 누릴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육적인 모든 자원들은 제사장으로써 나에게 부어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이스라에을 위해 있고 이스라엘은 열방을 위해 있고, 열방은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 있는 그런 열방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고, 이세상의 사람들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다 보면, 우리 자신이 일시적으로 가난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인성,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신령한 것들을 주셔서 교회에 부어주는 모든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자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긍휼, 은혜, 그리고 영적인 은사와 모든 것들의 보고가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 접붙여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이것들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죄를 진실로 참회하고 뉘우친 후 그리스도 예수께 영적으로 접붙여 졌을 때에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렇게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부어주신 풍부한 성령의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부터 흘러드러온 것입니다. 성령은 이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시 역할을 하십니다. 모든 좋은 각양 좋은 은혜와 재능들을 나누어 주셔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게 하고 육익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는 동안에도 많은 지체들 속에 끊임없이 물이 흐르듯 우리의 몸에 피가 끊임없이 흘러 우리의 몸이 살듯, 그리스도의 인성으로부터 성령을 통해 끊임없는 님의 은혜와 사랑 새명이 공급됨으로 교회라는 몸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지체들에게 그리스도의 인성안에서 많은 좋은 것들을 나누어 주셨다고 해서 끊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언젠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졌는데, 그 사람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가 끊임없이 유통해야 하겠는데, 요즘 너무 회심한 사람이 많아서 한꺼번에 접붙여진 사람이 많아서 이제 비었으니 몇 달 기다려야겠다 라는 것은 은혜의 세계에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물질을 우리가 많이 사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 일시적으로 가난해지는 때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은혜와 그 영적인 축복들은 가난하고 고통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은혜로 섬기고 그 은혜로 부요하게 하고자 할 때, 아무리 많은 영혼들을 섬기고 나누어 주어도, 내 안에 부어준 하나님의 그 은혜를 고갈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가 고갈되는 것은 그 은혜를 사람들을 너무 많이 섬기기 때문에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부주의함 때문에 영적인 원리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에 고갈되는 것이지, 너무 많이 섬기고 봉사했기 때문에 고갈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구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간구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셔서 교회에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모두 주신 것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기도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예수님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을 성령님께서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바치신 성결한 그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받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부요하게 된 것을 생각하고 우리고 그 은혜에 참여했지만, 그러나 더욱더 그 충만한 성령의 기름부으심 속에 교회가 있을 때에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주어진 그 모든 풍부한 것들은 성례전 적인 연합을 통해 교회에 끊임없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끊임없이 은혜의 물이 흘러가면서 교회의 각 지체 지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지 않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있는 것들을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통해 교회에 부어주시고 각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할때에 그것들은 그 성령을 통해 개인에게 부어져서 그래서 그사람 안에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마음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이렇게 되면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당신의 자원을 부어주시는 방식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제사장처럼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받을때마다 항상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나 혼자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교회의 지체들과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을 제사장으로 섬기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제사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제사장은 깨끗한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제사들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인들이 짐승을 가지고 와서 기도하면, 그 사람의 죄를 그 짐승에게로 옮기고, 그 짐승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리며 숨이 끊어지고 그 짐승의 제물을 흔들리고 하고 기도하기도 하며, 그 피가 낭자한 속에서 제사에 바쳐질 수 없는 것들은 가려내고 그러면서 죄인들의 흐느끼는 통곡과 연기, 피, 짐승들의 몸에서 쏟아지는 더러운 오물들, 그 사이를 깨끗한 옷을 입고 지나 갑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그 죄인을 위해서 죄의 용서를 위해서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없어서 흐느끼는 죄인을 긍휼이 여기는 그런 제사장이었다면, 죄인이 그렇게 울부짖을 때, 그 죄인의 마음이 되어서 함께 울어주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도우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부름 받은 왕 같은 제사장임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이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 지식의 은사, 모든 물질과 영적인 복의 모든 은사들이 제사장처럼 교회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렇게 섬기면서 살 때 여러분들은 그 안에 예수의 인성으로부터 부어지는 끊임없는 영적인 부요함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008/03/20 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제사장직 4
2008/03/19 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제사장직 3
4.피 뿌림과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심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고” (히 9:13-14)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피 뿌림으로 자기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모든 제사의 필요한 기구들을 피를 뿌려 정결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헌제자를 위해 제사를 드려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피를 뿌리면 그것으로 하나님은 정결해진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을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피를 뿌린다고 해서 제단에 있는 기구들이 무슨 본질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대도 왜 하나님께서는 이 염소와 황소, 송아지의 피를 통해서 정결케 하는 그 의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셨을까요?
이것은 이제 고대 근동에 있었던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특별히 모세가 살던 그 시대즈음에 그 근동지방에서 행해지던 언약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언약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왕이 큰 나라를 차지하고 나면, 그 나라를 혼자 다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작게 떼어서 봉신이라고 하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신하는 자기에게 지정된 영토 안에서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백성들의 입법, 사법, 행정을 관할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본래에 그 땅의 왕이 아니라 보다 높은 나라 전체의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고 전쟁이 일어나면 온 목숨을 다해서 군대를 동원해 그 왕을 도와서 라를 지킬 의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약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요즘으로 말하면, 장관으로 부른 것보다 더 감읍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을 불러서 약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만큼 땅을 주고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해줄 것이니, 너는 세금을 내고 내 명령을 따르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대를 동원하여 온 목숨을 다해 나를 지키고 이 나라를 이 나라를 보위하여야한다.’ 이렇게 약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들 앞에서 서약을 하고, 마지막으로 체결의식을 하는데, 그 체결의식은 소 같은 것을 죽인 후 그것을 머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반으로 각을 떠 두쪽으로 벌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피가 한 없이 흐르게 됩니다. 두 조각으로 갈라져 마주보고 있고 피가 울컥울컥 계속 쏟아져 나와 작은 시냇물처럼 되어 물처럼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곳을 둘이서 함께 언약을 한 문서를 들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하면, 둘 중 하나가 약속을 어기면 ‘신들이 마치 짐승을 쪼갠 것처럼 약속을 어긴 자에게 이렇게 형벌을 내리기를 원하노라’ 하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서류를 하나는 이 사람이, 하나는 저 사람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신당에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광야 생활을 할 때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쪽 지방의 모두 널리 퍼진 그러한 언약체계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30년 동안이나 그들에게 잊혀 졌습니다. 애굽에서 430년 사는 날 동안, 그들은 조상 대대로 믿던 신앙을 따라 제사를 드릴 수도 없고,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율법도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그런 처지 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해내신 다는 것을 그들이 쉽게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똑같은 사정은 아브라함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너는 네 친척 본토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명령을 내리셨는데, 그 전까지 그는 갈대아우르에서 우상을 만들며, 그렇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여 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갈대아우르에는 신들이 수없이 많고, 그 신들 중에는 잡귀같은 신들이 있어서 신실성이나 믿음은 생각할 수도 없는 잡스러운 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얼마나 변함없는 분이신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짐승들을 쪼개 놓으라고 명령하시고, 쪼갠 그 짐승사이로 불처럼 지나가셨습니다. 무슨 의미 입니까? 내가 너에게 약속을 하는데, 나 여호와 하나님이 만약 약속을 어기면, 저 짐승들이 쪼개어져 죽은 것처럼 나도 그렇게 저주를 받으리라 사실은 하나님을 저주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을 다루실 때 그 수준에 맞게 설명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나온 피는 결국 생명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쪼개어 놓고 그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은 생명, 곧 피인데, 피가 흐른다는 것은 생명이 쏟아진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생명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맺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맺는 것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그래서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너희가 죄를 지어서 나 여호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기에 절대로 합당하지 않은 인간이 되었고, 너희들 때문에 내게 바쳐져야할 모든 제사의 도구들도 불결하게 되었지만, 짐승이 죽어서 뿌리는 그 피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형벌하신 것으로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 영원히 죄를 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것은 인간인데 인간대신 피 흘리는 것은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당신과 교통할 수 잇도록 열어주신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임시방편이라도 주셔야했던 것은 그렇게 잠시라도 죄를 용서해주셔서 인간과 교통하고 그 인간에게 진리와 은혜를 내려주셔야지만 그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향을 받고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런 방편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렇게 짐승들을 죽여 피를 뿌림으로 더러운 자기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들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심으로써 이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피 뿌림으로 얻은 죄의 용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어 영원히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해주실 그 구원의 때가 올 것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염소와 황소, 이러한 짐승의 피가 너희를 깨끗케 할 수 있었다면, 일시적이긴 하지만 깨끗케 할 수 있었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너희를 깨끗케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고 반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지금도 떨어지고 있다, 영원히 흐르는 피다’고 말합니다. 무슨 의미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으신 그 보혈의 죄사합의 효과는 영원히 지금도 하나님 앞에 계속되고 있다 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먼저 제사장은 먼저 짐승을 잡아 한 생명을 죽임으로 그 피로 피 뿌리고 난 후에 비로소 자신도 정켤케 되고, 또 하나님 앞에 바쳐질 모든 도구들도 정결케 되고, 그리고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려고 하는 그 헌제자의 죄도 정결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는 짐승을 죽여 피를 뿌리는 이 규례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무한한 죄를 감당하기 위하여 무한히 거룩하고 흠 없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짐승을 죽여 피 뿌릴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번에 자기를 죽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을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러한 구속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써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게 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짐승들 중에서 제물을 택해서 짐승들을 죽여 피를 뿌려 정결케 했지만, 예수님 께서는 짐승들을 통해 피를 뿌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영원한 속죄를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죽여 제물로 삼아 하나님 앞에 바치심으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당신의 죽음으로 치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는 당신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제물이 되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바치고 그 인간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짐승을 죽여 피를 뿌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주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을 죽여 피 뿌리신 그 보혈의 길을 지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휘장을 지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깨뜨려 흘리신 그 모든 핏 길을 걸어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 사이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뿌리신 그 보혈의 핏 길을 걸으므로 우리는 그 피안에서 주님을 대적했던 우리의 모든 불순종과 죄는 그 필로 속죄함을 얻었고,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용납되며 그 핏 길을 걸어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더 이상 핏 길을 걸어, 짐승을 죽여 피 흘릴 필요가 없이 이제는 한 번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나 같이 많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이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될 때, 그때에는 반드시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보혈의 공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또 새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죽여 피를 뿌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마다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 하나는 우리가 한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흠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아 우리 대신 피 흘리게 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의 피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로 주님을 뵈옵는 것처럼, 우리 또한 제사장으로써 세상에 나아갈 때마다 우리의 피를 뿌려 예수님처럼 당신의 피를 뿌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해 나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피를 뿌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그 피는 사람들의 죄를 없이할 수 있는 피가 아니라 그 일은 오직 예수의 피만이 할 수 있지만, 아직도 이 피를 믿지 않는 사람, 아직도 이 피 앞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 아직도 이 피가 가져다 주는 구원과 속죄의 은혜를 알기 원치 않는 사람, 이미 그런 속죄의 은혜를 입었으나 한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피 흘리기까지 헌신하므로 이 피의 효력을 전하고, 이렇게 당신의 아들을 피 흘리시기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게 하기 위해 우리가 피를 흘리는 자세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이 하여야할 역할입니다.
많은 사람은 이 세상이 타락했고, 못쓰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시대의 정신 속에서 반항적으로 살아간다고 불평하고, 심지어는 이 세상을 욕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은 언제나 안그런 적이 없는 세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보내시고 지금도 살계하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총, 어두운 영혼에 비친 밝은 진리의 빛,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의 은혜, 성령의 특별한 보호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제사장의 노릇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그 모든 것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 안에 주신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눈 씻는 모든 신령하고, 아름다운 은혜와 자비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우리가 가지고 일체의 오래 참음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희생을 본받는 헌신으로, 희망이 없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 기름 부음을 받아 성령으로 정결케 되고 피 뿌리심을 통하여 거룩하게 된 제사장이 율법과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놀라운 지식을 소유해서 능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모든 자원을 부여받은 제사장이 백성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혼자, 자기 개인의 유익을 위해 누린다고 한다면, 그 제사장은 심히 불충한 제사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를 꾸짖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흔희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연적인 많은 은사들, 내게 주신 많은 물질과 시간, 건강,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믿음생활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으로 주셨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우리가 받은 좋은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히 잘했기 때문에 상으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상으로 받은 것이라면 혼자 써도 됩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와 의로움이 없지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을 보고, 아들을 보고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자원들입니다. 그러며 그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섬기면서 사는 것이 이러한 은혜를 받은 성도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큰 사랑과 은혜, 자비, 진리에 대한 깨달음,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가지고 섬겨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여야할 일인데, 우리들이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남다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주셨다면, 여러분들의 눈에는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해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시기 위한 제사장으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남다른 재능이 있다면, 재능이 없는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재물이 있다면, 그것은 없는 사람들을 제사장처럼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빛의 나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를 불러내신 주님의 뜻이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신 지식을 가지고 무지한 자들을 섬기다가 실망하고 낙심해서 섬기기를 포기합니다. 자기에게 주신 신령한 은혜를 가지고 아직까지 육적인 사람들을 섬기다가 낙심합니다. 자기에게 주신 물질을 가지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다가 어느 한 순간 포기 합니다. 무엇 때문이죠? 피 흘림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주셔서 각자 사명의 자리에 맡기시고, 교회를 허락하셔서 교회에서 마음을 바쳐 헌신하도록 부르시고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주셔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시는데 잠시는 그 일을 하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물러서고 뒤로 물러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피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떻게 구언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자신의 모든 피를 흘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당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는 지사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수 없어하는 감읍하는 죄인들을 또 다른 죄인들에게 보내어 제사장의 노릇을 하게 하셨다는 생각을 한다면,
(찬양)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눈물만 흘리네
그 피의 감화가 우리 속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피를 흘리시기까지 사랑하셨다’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피로 속죄함을 얻을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께 자기를 다 드리십시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때로는 울기도 하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 그분의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으로 내가 살았으니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하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되는 것이고,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인 우리를 통해서 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게 하려고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보살펴 주시는 것입니다.
2008/03/21 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제사장직 5
5.신자의 자기 봉헌과 세상의 정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창4:4)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슥14:20)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교회를 정결케 하셔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한 제사장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지요.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사장은 그렇게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희생에 피뿌림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것들은 그가 개인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 앞에 받게 된 유·무형의 모든 축복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사실은 개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이 우리가 제사장 노릇해주기를 원하시는 모든 사람들 앞에 함께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이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제사장의 직무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덕 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느냐. 혹은 얼마나 높은 지휘나 또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느냐 혹은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만족을 누리느냐에 우리의 미덕의 여부가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 피뿌려 성결케 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얻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가장 뛰어난 칭찬할 만한 덕이 되는 것이예요. 그러면 구원받았어도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서 여전히 이기심과 그리고 자기를 온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들을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런 모든 사악한 욕망과 어두운 욕심들을 파쇄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기를 다 드릴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깊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을 동반한 사랑 즉,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이러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지요. 신자가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그 하나님과 자신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인식하고, 그분의 엄위 앞에 엎드려지는 경배의 정신으로 가득찰 때 비로서 그 신자는 자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 되는것이지요. 실로 신자의 모든 일생은 바로 이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당신의 피를 뿌려 죽으신 것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봉헌하며 사는 그것이 바로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깊은 사랑과 두려움의 정신이 심령 안에 있을 때에 그는 결코 자기를 중심으로 놓고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신자가 자신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의 정신으로 가득차게 할 때에 그가 어떻게 어떤 자세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봉헌하여야 할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봉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마음으로 비롯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과 우리의 삶은 정신과 몸의 관계 영혼과 육체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마음은 마음이고 삶은 삶이지만 그러나 삶은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그러한 유출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몸 어디를 찾아보아도 영혼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러나 영혼은 결국 육체를 어떤 삶을 살게 하는 주인 일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아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형 가인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거절하셨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열납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이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알수 있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봉헌하는 헌신의 삶을 살기 전에 그 드리는 봉헌의 삶과, 드리는 사람자체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는거죠.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릴 흠 없는 제물의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모두 제사를 위해 제물을 모두 제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제사속 에서 하나님 앞에 봉헌하는 제물이 참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받쳐지는 봉헌의 제물 사이에 제사의 정신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그렇지 않고 사람은 제물과 제사의 정신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 앞에 제물만을 드린다면 그것은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뇌물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도 뇌물을 받는 것을 매우 미워하셨고, 특히 당신 자신에게 어떤 호의와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변화 없이 뇌물을 드리듯이 하나님 앞에 아첨하며 드리는 제물을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것이 그러한 이유였습니다. 가인의 제사와 제물 모두를 하나님이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벨이 하나님 앞에 드린 이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 하셨을때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이것을 열납하셨을까요? 물론 드린 그 제물자체도 아벨이 드린 제물은 양의 초태생 이였고, 그리고 이 가인이 드린 제물은 이삭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제사의 제도를 그 전에 계시해주신 기록이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미 그 제사에 대한 규례들이 계시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이 이삭은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제사법도에 어긋나는 예물이였고, 양은 하나님의 제사의 법도에 어울리는 예물이였으므로 아벨의 제사는 순종과 자기헌신이 있는 제사였다고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바로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것을 믿으며 경외의 정신으로 제물과 자신을 일치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바쳐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다고 보는것입니다. 결국은, 마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봉헌하는 제사장의 자세인 것입니다. 마음에 관한 하는 두 가지를 꼽을수 있는데, 첫째는 온전함이고, 둘째는 순수함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되 이 마음이 온전한 것 이것이 바로 자기를 봉헌하는 마음의 조건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온전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온전하지 못했었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전에는 온전하지 못했지만 주님을 만나고, 성화되어 가면서 온전해진 사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전해지기를 끊임없이 사모하는 사람. 이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앞에 봉헌된 제사장들의 마음이였습니다. 이 마음의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법도에 일치하고자 하는 정신과 마음의 경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되 아무렇게나 섬기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이 알고 있는 한. 하나님의 법도에 가장 합치되게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런 마음이 되고자 하는 내적인 자세. 이것이 바로 온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온전함은 정지되어 있는. 이만큼 도달하면 온전한것이고, 그 다음에는 온전하지 못한것이라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온전함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전심으로의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하나님의 법도에 알맞게 되고자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을 가르켜서 이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을 부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과 그 권한에 참여하는것 에 대해 알고자 한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그는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달려간다고 고백을 하면서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요.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하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제사장의 자기봉헌의 자세였고, 이것이 바로 온전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적당하게 어느 지점에서 자기를 풀어놓으려고 하는 그것은 결국 우리를 온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이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릴때 작은 실수도 하나님은 용납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하나님은 고도의 경배의 정신을 요구하셨고, 이 높은 수준의 경배의 정신은 주의깊음으로 나타났던 것이지요. 그 주의깊음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자세를 잘 보여주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행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일체의 주의깊음으로 작은 것 하나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수행하여 그분께 만족을 드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어떤 마음이 생기느냐 하면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온전해 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은혜 중에 세워지고 있는 성도일수록 하나님 앞에 회개를 많이 하게 되는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질수록 그 성도의 마음속에서는 회개라고 하는 것이 나오질 않아요. 왜냐하면 마음 그자체가 온전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에 삶에서 결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예요. 그러니깐 성도가 하나님께 회개하는 삼을 살지 않으면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보다 못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예요. 사람이 점점 악하고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땀을 흘리는 것이 그렇게 좋다그래요. 그래서 요즘은 어떤 사람이 눈물 치료법을 개발을 해서.. 전 뭐.. 그게 얼마나 사실인지 모르겠는데, 눈물 많이 흘린 사람의 그 눈물을 담아다가 과학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나쁜 것들이 그 속에서 한껏 쏟아져 나온데요.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라도 많이 울어라. 이게 의사의 권고입니다. 근데 사실은 건강을 위한다고 해서 눈물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 줄을 알고, 그 십자가에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이런 자기들을 경험하게 되는것이지요. 두 번째는 순수함이예요. 이 순수함이라고 하는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어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삶 그의 태도 이면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또 다른 감추어진 목적이 없는 것 그것이 순수한것이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세요? 신학교 선생을 하고 있을때인데 그 때 초년생이였어요. 그때가 추석때즘 되었나.. 지하실 방에 혼자 있었나.. 그러는데.. 그때 만해도 자가용이 참 드물었거든요. 80 몇 년도였으니깐.. 이 시커먼 승용차가 골목에 탁 서더니 두 사람이 큰 궤짝을 하나 둘 셋을 들었는데 얼굴이 안보일정도로 많았는데.. 그것을 들고 똑똑, 김남준 교수님 댁입니까? 교수는 무슨 강산데... 네 접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누구십니까? 그랬더니 교수님한테 공부를 배우는 학생입니다. 뭐.. 그래서 들어오라고 그랬더니 자뜩 선물을 들고왔는데 뭔지 뜯어보지도 않았어요. 먹을것 뭐.. 이런게 있는데..얼굴을 보니깐 나이가 한 50은 넘어보이는 이 그런 사람 둘이서 교수님.. 하면서 그 아주 어려워하면서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학생들이 명절에 이런저런 선물들을 사가지고 오니깐 뭐 짜증날일은 없죠. 선물인데. 근데 나는 뭐 그랬어요. 암튼, 뭐라 그러냐면 자기 얘기를 쭉 하면서 아직까지도 직장을 다니면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데 미래에 목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어서 점수가 잘 안나왔는데 이것을 받으시고, 자기에게 점수를 좀 주십시오. 그래서 아~ .. 나이가 너무 많이 든 분들이라 일단 돌려보냈어요.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어요. 야~ 처음 경험하는것이니깐 좀 그랬거든요. 편지를 섰어요. 편지에다가 따끔하게 혼을 냈어요. 이렇게 사는게 아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앞에 그렇게 순수하지 않아서 어떻게 하겠느냐. 하여튼 지금 기억은 안나는데 그.. 저.. 하고 싶은 얘긴 다썼어요. 그 사람들이 준거는 그 자리에서 뜯어보지도 않고 청년들 에게 시켜서 고아원에 바쳐서 줬어요. 그 사람들 명함 이랑 같이 고아들하고 나누어 잡수시라고 줘버렸어요. 그리고 낙제시켰어요. 아마 졸업못했을거예요. 이런것들은 모두 순수한게 아니죠. 그죠? 순순한게 아니죠. 꽃 한송이를 주더라도 순수한 뒤에 감춰진 마음이 없는것. 그런것이예요. 어떤 사람이 간증을 하는데 땅을 샀데요. 땅을 사고 계속 하나님앞에 빌기를 이땅이 두배로 값이 올르기를 하나님앞에 기도하면서 십일조를 미리 했데요. 이거 순수해요? 순수하지 않지요. 그러니깐. 바치고 싶으면 바치면 되지 그러니깐 하나님께 바치는 일종의 뇌물이죠. 아.. 이렇게 십일조까지 미리 받으셨으니 책임지시겠지.. 그런거죠 그죠? 근데 하나님은 그런거에 매이지 않으셔요. 그 받는 사람이 공무원이라면 뇌물을 먹었으니깐, 뒷탈이 날까봐 해결을 해주겠지만 하나님은 그런것 요구한 적도 없고, 그런 협박에 넘어갈 분이 아니다. 하는 말입니다. 모든 순수한 것이 아니죠. 이 마음에 순수함이라 함은 하나님께 자기를 봉험함에 있어서 감추어진 어떤것이나 어떤 혹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드리고 나서 나중에 후회하는 것 같은 숨겨둔 마음이 없는 상태를 가르켜서 순수함이라고 그러는거예요. 하루는 학교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굳이 나한테 책을 좋은 책이 있는 데 한개를 나한테 주겠다는거야. 그래서 안받겠다고 씨름을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깐 교수들한테 그 책을 한권 먼저 가지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는 이제 드디어용건이 나오는거예요. 수업시간에 들어와서 3분만 시간을 주면 이 책을 팔겠다는 거예요. 그 얘길 먼저 하면 받을 교수들이 없으니깐 책부터 한사코 먼저 주고, 몇일있다가 와서 얘기하는 거예요. 잘못된 것. 순수하지 않는거죠. 저는 뭘 뽑아서 당첨된 적이 없거든요. 참~ 하나님은 처음부터 제게는 그런걸로 살지말라고 지정하신것 같아요. 뭘 뽑아서 당첨이 된다거나, 뭐 이런게 하나도 없었어요. 언젠가 핸드폰에 문자가 왔는데 축하드립니다. 동남아 항공권이 당첨되셨습니다. 제가요.. 여러분 잘 알지만, 구원 빼놓고는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인데. 뭐가 씌였지.. 전화를 했어. 아. 문자를 받았는데 거기 여직원이 정말 축하드립니다. 동남아 항공권이 당첨이 되셨습니다. 동남아 어디요? 그랬더니 어디든지 가셔도 된데요. 아이.. 그러냐고 정말 고맙다고 그거 언제주냐고 했더니 그게 그렇게 주는게 아니라 무슨 사십만원짜리 홍삼을 사야지 주신데. 됐네 이사람아· 그 동남아 항공권에는 저기 뭐야.. 밥 값도 포함이 안되고 호텔비도 포함이 안되고 그건 따로 내야된다는거야. 가만히 보니깐 40만원 자리 홍삼사고, 호텔, 식사비 내니깐, 그 돈을 보내깐 동남아를 두 번도 갔다가 올 수 있는 가격이야. 내가 씌여도 뭐가 단단히 씌였지. 구원빼고는 공짜를 싫어해서 주유소에서 주는 사은품도 안 받는 사람인데.. 아휴 내가 정말 창피하다. 결국, 뭐냐하면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순수함을 잃어버린 고객과 만나서 그래서 그게 그러는거야 야~ 이 세상에 누가 널 동남아 거저 보내주겠니? 넌 누구 보내준적 있냐. 왜 공짜를 바라냐. 그 다음서 부터는 그 보다 더 한게 와도 전화를 안할수 있는 순수함이 생겼어요. 이게.. 그런게 없어야해 우리들이 하나님 섬기다 보면 사람들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내가 주님의 일 하면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 내가 교회를 그렇게 섬길때, 그렇게 고생할때, 당신들은 나 도와준적 있느냐. 하는 이거. 처음서부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치는 제사장으로서의 봉헌의 마음에서 시작한것이 아니라 뭐예요? 끊임없이 본전 생각하며 봉사한겁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밑진다고 생각했을때 그 마음에 섭섭함과 서운함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지요. 사실은 이러한 모든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온전한 자기 봉헌의 자세라고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이 섬김은 절대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절대라고 하는 말은 서로 비교하고, 연관하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의 정신으로 하나님앞에서 온전히 봉사하고 그리하여서 하나님앞에 순수한마음으 로 주님이 자기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것에 감사함을 드리는 것이예요.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올곧음이예요. 올곧다 라는 말은 정직할 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길을 걸어가는 꺽어지거나 쉽게 휘지 않는 마음이예요. 그리고 그것이 바라보고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이고, 그러한 순순함과 온전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올곧은 삶. 결국, 하나님 한분의 영광을 위해서 걸어가는 흔들리지 않는 그런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이러한 올곧음과 순전함 순수함 그 속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봉헌하며 사는 이것이 바로 제사장으로 서의 성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앞에 순전하고 온전하고 순수해지고 삶이 하나님 앞에 올곧게 될 때에 이 삶은 어느 한 부분적인 삶에 있어서만 하나님앞에 올곧게 되는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모두 올곧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만약에 마음의 온전함과 순수함이 없이 살아간다면 필요한 부분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만 온전하게 되려고 노력을 하겠지만, 그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찾아가는 온전함이 아니겠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을 어떤 평판과 그리고 물질적인 이익 때문에 그렇게 되겠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니였습니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손을 올리고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한것은 바로 내면의 온전함과 순수함 때문에 그렇게 올곧은 경건의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평판을 위해서였고, 그리고 또 그런 평판을 위해서 애쓰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적인 수행들은 그의 삶을 바르게 할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곧은 삶을 살고자 할때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렇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어리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이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예요. 엊그저께 심방을 하면서 들었는데 초등학교 일학년 아이가 우리 교회 다니는 아이인데 학교에서 전도를 했데요. 다른 애들은 따라가든지 아니면 싫든지 둘중 하난데 전도를 받은 아이 하나가 물어봤데요. 내가 왜 교회에 나가야 되냐구. 교회가자. 예수믿자 했더니 내가 왜 교회를 다녀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되냐... 했더니 이 아이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교회가야 된다고 했데요. 무슨 소리인지 여러분들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텐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한다 그래서 넌 교회에 가야된다. 고 했데요. 그거예요. 삶의 한 영역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그래서 오늘 스가랴에서는 뭐라고 했냐면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때 성소에 쓰는 기구들이 있잖아요. 그것들은 다른 것과 똑같지 않죠? 여러분 이 종이 있는데 이렇게 종소리 있는데, 식당에도 있잖아요. 딩동.. 소리나는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똑같지 않죠.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성전에 바쳐진건데 틀리죠. 그렇게 하나님앞에 제사에 바쳐진 물건은 성물이였어요. 그런데 뭐냐.. 그러냐면.. 이제 이런 구별이 없어질때가 온다. 그래서 말의 목에 달고 다니는 그 말방울하고 주의 제단에 바쳐진 그 기구들은 비교할수 없는거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그 기구들에 잘못해서 거룩을 범하게 되면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리고 참회해야됐단 말이예요. 그런데 말이 말 타고 다니다니는 사람들이 말방울도 거기에도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쓰여질 날이 올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모든 세상을 구속하시는 그 날에 하나님의 목적은 이제 성결한 것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쳐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는 바로 그. 그런 때가 올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예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을 불러 한 때는 거룩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거룩한 백성을 삼으신것처럼 우리가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가격하며 온전함과 순수한 마음으로 올곳음은 삶을 살아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고, 병들어 있는 세상을 건강하게 해서 모든 세상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앞에 구별된 세상이 되게 하는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이예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 충성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 이런것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정신으로 하나님앞에 우리자신을 봉헌할때에 세상이 성결해지는 것이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구원하시므로 교회를 정결케 하시는 것과 같이 또한 우리가 하나님앞에 드려짐으로써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가족들, 직장 동료들, 이웃들... 하나님없이 건설된 이 모든 문화들을 성결케 해서 하나님앞에 바쳐지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앞에 헌신하며 분투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앞에 살아가야 할 제사장으로서의 자기봉헌의 삶인것이예요 이런 삶을 위해서는 많은 헌신과 희생이 필요한데 그것은 마치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편하게 짝이없는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사셨던 것처럼 그러한 고통을 우리에게 주어요. 그렇지만, 항상 그러한 삶을 사는 동기는 나같은 쓸모없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그의 고난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건져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동기가 되어야 하는것이예요. 우리가 섬기고 살아가는 이 삶이 어려울때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가 얼마나 큰것이고,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것인가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그 사랑에서 배우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살려고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신 모든 계명과 하나님의 말슴들을 따라서 살아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법에 일치하도록 드리는 그런 삶을 살아갈대에 우리의 자기 봉헌을 통해서 이 세상은 성결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교회에서 섬길대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웃과 만나는 모든 삶속에서 심지어는 자연을 대하는 삶속에서도 이러한 자기 봉헌과 정결의 마음으로 대하게 될 때 그대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훌룡하게 섬기는 종들이 될 수가 있는 것이예요.
2008/03/21 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제사장직 5
6.대제사장 그리스도를 닮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히 9:13-14)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주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찢어진 휘장을 지나 보혈의 핏 길을 걸어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우리로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헌신하며 그들의 이름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도구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나아가서는 이 모든 세상이 그렇게 하나님께 복종하므로 성속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만물들이 성결케 되도록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함에 있어 우리 혼자 그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 보여주신 훌륭한 모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마음 안에 있었던 참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참 인간의 됨됨이와 삶,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면의 세계와 하나님께 충성하며 살아가는 그의 외적 생활이 무엇인지를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공경하며 살아야할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신자가 되고자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참사람의 길을 걷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창조의 목적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걸어갈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참된 모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허공을 치는 것처럼 성경을 읽지 않고, 우리 눈에 본바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모본을 따라 가기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본받음은 그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외적 생활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내적인 생활, 내면의 정신세계를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동안 금식하셨으니 나도 40일 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으니 나도 나의 제자의 발을 무릎을 꿇고 씻긴다.’ 이런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참된 본받음은 이러한 외적인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제자들을 당신이 훨씬 높으신 분이였지만 기꺼이 낮아져 제자들을 섬기신 그분의 정신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으며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바라보고 능력으로 덧입기를 원했던 예수님의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을 본받는다고 할 때, 무엇을 본받는 것이겠습니까?
그분의 세상 생활의 모든 삶이 우리의 본받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도 우리와 똑같이 마음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세계로부터 외적인 삶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성령을 통해 전수 받으면, 그분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그분의 삶의 근원을 추적해가면 또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 내면의 질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본받아야할 우리의 커다란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는 바로 이 두 개의 원, 고난의 원과 부활의 원, 이 두 개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입니다.
흔히 우리들을 그분의 고난을 본받는다고 할 때,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운 죽음을 죽어 가셨던 그 시간만을 기억하며 본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최종적인 형태일 수는 있지만 그것만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하늘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써 위엄과 영광 가운데 계셨던 그분이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자신의 신적인 본질을 인성 밑에 감추어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순간부터 그분의 고난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그 고난이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거듭나 영적으로 출생하는 순간부터 중생으로 시작된 성결케 됨이 시작된 것과 동일합니다. 그리스도는 탄생과 함께 고난에 길에 들어서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탄생과 함께 성결케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결핍과 고난 속에 사셨던 생애 전체가 고난이었고, 그리고 그 고난은 마지막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셔 우리 인생위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하시는 속에서 고난의 절정을 이루게 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직막 말씀은 ‘다 이루었도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였습니다. 율법에 태어나셔서 율법에 의해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하는 모든 형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형벌을 받는 대신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멸망을 얻게 되는 대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결국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순간부터 고난을 통하여 성결케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성결, 중생을 통해 우리 안에 심겨진 성령의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토대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옛사람의 본성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흠없고 완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예수를 닮아가도록 우리를 촉진하십니다. 그 모든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이 고난, 즉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그 의미에서의 이 고난은 십자가라고 불리워지고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결케 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우리의 모든 어려운 형편과 처지들을 그로 인한 마음의 고통까지를 포함하여 우리들이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많은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더욱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닮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순수해질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그때 모든 신자들의 마음 안에는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지금 내가 짖고자하는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에서 고난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부메랑이 되어서 많은 고통과 징벌의 괴로움들, 이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므로써 이것이 십자가로 작용하여 우리를 성결케 하십니다.
그리고 신자가 고난을 당했을 때 그것이 개인적인 고난, 특히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게된 괴로움이나 고난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구하며 용서를 비는 것 이외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지만, 우리가 지은 죄로인한 고통은 여전히 이세상을 사는 동안에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불결과 더러움들을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찾음으로 씻어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을 찾는 것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왕같은 대제사장으로써의 십자가의 고난은 자기의 죄와 징벌로 인한 고난에 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진실로 살아있는 정신을 가진 제사장이라면 그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도 죄가 없을수 없지만, 그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제사장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죄가 마치 자신의 죄인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범죄한 그들의 양심속에 계속되는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경건속에서 보여주는 참 제사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실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름을 받았다면, 언제까지 나의 불순종과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이상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미끄러져 있는 생활을 계속하겠습니다. 우리를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셨을때 기대하셨던 것은 그것 이상의 무엇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할뿐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그리스도의 연합속에서 아무도 눈물 흘려주지 않는 이세상의 죄인과,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부족한 지체들, 육신의 가족과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가슴이 함께 붙이고 나아가 그들의 죄가 자신의 죄인것처럼, 그들의 위험이 나의 위험인것 처럼 울어줄 수 잇는 것이 진정한 왕같은 제사장이요 수종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신자의 삶입니다. 자신이 늘 성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뉘우칠뿐 아니라 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 나머지 모든 기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때 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그들의 대리자로 그들을 위해 빌고, 간구하는 것이 왕 같은 제사장이 하여야할 일입니다. 공동체,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써 교회가 당하는 고난을 자신이 당하는 고난인 것처럼 느끼며, 전응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마다 가슴에 붙이고 나아가 공동체의 아픔을 자신의 것인것처럼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거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러한 깊은 고난에 공참하므로써 2처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신자의 삶속에 스며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깊은 기도의 세계속에 들어가 섬기게 되면, 마치 자신의 죄와 공동체의 죄가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다가오게 되고, 교회 안에 많은 지체들이 당하는 고통과 모든 아픔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연합을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큰 고통이야말로 2천년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기운에 내 몸에 퍼지는 것을 의미하고,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안에 살아있는 나의 옛사람의 성품과 습관을 죽이는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현재적인 경험 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2천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자신 속에 경험될 때, 우리는 공동체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이것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뉘우칠 이유도 없었고. 욕심이 없으셨기 때문이 우리처럼 욕망하는 것도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며, 그렇게 고통으로 가득 찬 시간 속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은 바로 다가올 당신의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이었으며, 그 모든 죽음의 고통은 당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생긴 것이었고, 다른 사람을 위해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마다 이 가슴에 열두지파의 보석을 달고 어깨위에 두 돌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겼던 제사장처럼 예수께서는 구원받을 모든 언약백성의 이름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들 대신 울어주고, 그들 대신 간구하고, 그들 대신 염려하며, 그들 대신 참회하셨던 것입니다. 신자의 아름다운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바로 이런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으로써,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 아래 끊임없이 죽고, 새사람은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될 때, 신자는 2중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매순간 경험하는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그 고난을 생각하면서 교회와 그리고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 자신의 가족들을 위한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예수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끝나는 순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우리의 새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얻은, 중생으로 얻은 새 본성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 합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아가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매순간 재현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참여하므로 이루어지고 나의 옛사람이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멸하여 지는 것은 매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순간 죽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매순간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고, 마음 깊은 곳에 해결되지 않은 죄와 어두움이 남아있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또, 부른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응답도 들리지 않는 그런 비참한 단절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에 어떻게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이 깊이 뉘우치게 되고, 깨달음 속에 자기깨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전에 없었던 나의 양심을 찌르는 가책 때문에 아파하게 되고, 시간이 점점 흐르는 그 속에서 나의 아픔은 간곳이 없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하며, 원망하며 사는 동안 우리 주님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셨던가를 생각할 때, 처음에는 하나님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원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살았던 나를 미워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주님의 마음의 아픔이 내 마음에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예전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나를 미워하게 되고, 그 앞에서 할 말을 잊고 정죄의 부끄러움 속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가책을 받고 주님 앞에 용서를 비는 참회의 기도가 끝나고 나면, 다시 하나님의 큰 은혜가 회개의 깊이 만큼 우리에게 새롭게 임합니다. 그래서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던 나의 인생에 희망이 솟고, 고난과 시련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 죄에 빠져가는 자신이 두렵고 무서워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뉘우칠 때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고 소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약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내가 강하여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매 순간 경험하는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을 매순간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으로써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제사장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았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제사장이 살아있는 경건 속에서 무장되어 있다면, 낙심한 죄인들을 불러 모든 죄는 미워하시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언약백성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와 사랑을 그에게 가르쳐 줄것이며,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은혜와 자비의 성품을 말하면서, 그 죄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가능해지게 됩니까?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현재적인 부활의 경험 없이는 이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힘들었을때는 교회에서 밀가루나, 우유가루를 나누어주면 사람들이 모였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로 복음이 전파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우리 자신의 삶과 얼굴입니다. 고난과 슬픔이 가득한 세상을 함께 살면서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부활의 생명과 기쁨 때문에 우리의 얼굴과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을 보며 교회에 가면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이 부활의 기쁨을 삶속에서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 성품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힘이 넘쳐서 사람들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부활은 또 한편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 위한 구원의 마지막 서정에서 경험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썩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몸들을 부활시켜 살아있는 몸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영원히 썩지 않을 불멸과 영사의 몸으로 만들어 영원히 있도록 예정된 우리의 영혼과 결합시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육체와 영혼속에 함께 살아있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 속에서 생명이시며 영광이신 하나님의 끊임없이 점증하시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영원한 복락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그것이 우리의 모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써의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고난에 대한 참여와 부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전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신의 정욕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끊임없이 예수를 닮게 만들고, 육신의 정욕은 끊임없이 이 세상을 닮게 만듭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본받는다는 말은, 마치 붕어빵을 찍어내듯이 정해진 틀에 부어서 찍어내듯이 찍어내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부어지면 우리의 성품을 녹여 예수라는 틀에 부어져, 예수를 닮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육신의 정욕은 우리의 마음을 녹여, 세상이라는 틀에 부어 세상표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시고, 제사장으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면, 우리가 어찌 이 세상에 본뜰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제사장 삼아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을 녹여, 세상의 모습으로 찍혀 나와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온 삶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인간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빛으로 인하여 바꾸어 다시 그들을 녹여 예수의 틀에 붇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 일을 위하여 부름 받은 우리가 만일 세상의 틀 속에 부은바 된다면, 우리는 두 번 죄를 짓는 게 아니겠습니까? 한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값진 구원을 허비한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구원하여 그들을 녹여 예수의 틀에 부어야할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자기를 본받으며 세상에 틀에 부어지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진정으로 닮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 안에 살아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의 삶을 봉헌하여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 또 이 세상을 성결하게 하고, 교회를 성결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들은 나의 결심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나 나의 감정적인 열정을 가지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성령의 은혜에 잠기게 될 때, 그 성령님이 좋아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하여 우리자신의 마음을 모두 녹여 그분의 틀에 부은바 될 때에 우리는 그 성령의 은혜 안에서 나도 모르게 주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미래의 위대한 꿈을 계획하며 그것을 비전이라고 떠드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몰라도 매순간 자기를 위해 죽은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며,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대로 살고 싶고, 되고 싶어 하며,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그 사람이 훨씬 더 주님의 형상을 많이 본받아 많은 사람들에게 참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구가 되고야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예수를 위한 모방이나, 하나님을 위한 인생의 계획을 꿈꾸고 허영에 들뜨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을 공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좌우하는 것이니, 사랑이 깊을수록 그 연합은 깊어지는 것이요, 이 깊은 사랑의 연합 속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는 끊임없이 성도에게 유통하며 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옛사람을 녹여 그리스도 예수의 틀에 부어 예수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성도가 만약에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면 처음 예수 믿을때보다는 5년 후에 훨씬 주님의 모습을 많이 느낄 수 있고, 10년 후에는 더 많이, 15년 후에는 더 많이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생활에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달렸으며, 이 실제적인 연합은 자신의 전면적인 모든 삶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 사랑 안에서 자기를 십자가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이렇게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 자신을 다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한없는 속죄의 죽음 앞에서 감사함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일평생의 의무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가진 재물이 없고, 남들이 자랑하는 높은 지위 없고, 남들이 젊음과 건강이 없어도, 날이 갈수록 내 마음이 깊어지는 주님을 향한 사랑, 날이 갈수록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하나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깊은 사랑, 날이 갈수록 그분께 받은 사랑이 깊고, 그분께 드리는 우리의 사랑도 깊어져서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어 우리 서로 구별되는 것이 느껴지지 않은 것 같은 성화의 경지에 이르는 것,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 있을 때 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불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세상 살면서 주님께 많은 은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그 모든 은혜는 하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 기초가 되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형벌을 어린양 예수가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니, 원래 거기에 못 박혀야할 죄인이 우리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고,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예화) 청교도 목사님 중에 한 분이 연세가 많이 드시면서 치매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이 노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져 기억력이 희미해진다고 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기억이 아무리 희미해져도, 제 기억이 점차 망각으로 흩어질 지라도 두 가지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는 제가 끔찍한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그분이 자신을 못 박아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커 보일 때,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지, 우리가 형통하고 돈 많이 벌 때 전혀 아닙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 연합은 심령의 연합인 것입니다. 모든 삶은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것이니, 마음이 세상을 닮으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이 중요하게 보이지만 마음이 그리스도를 닮으면 삶도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합에서 나아가게 되면 우리의 외적인 모든 삶도 동일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법도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법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외적 생활에서도 끊임없이 일체의 성실함과 올곧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나의 삶을 기뻐하실지 끊임없이 반성하며, 마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오는 사랑과 성령의 은혜를 외적인 삶을 온전히 하게 하는데 끊임없는 에너지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합치하면 합치할 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는 고난을 받아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때문에 우리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고, 그리스도 예수의 본보기를 우리의 것을 삼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이 복잡한 것 같고 사연이 많은 것 같아도, 요약을 하면 단 3가지밖에 없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라는 인간이 있게 된것, 그리고 그리스도예수를 믿고 회심하고 중생했기 때문에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구원 얻은것, 그리고 힘을 다해 주님을 위해 살다가 마지막에 우리가 산 모든 삶을 들고 주님 앞에 서서 왜 이렇게 살아야 했는지 주님 앞에 보고하는 것, 이 3가지 밖에 인생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후에 그 자유를 방종 삼아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기 위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 어두움 가운데 건져 내셔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어두움에서 빛의 나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말로, 우리의 온 삶으로 그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보혈로 구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우리들은 어린 아이처럼 매순간 내 인생에 일어난 가장 큰 일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 버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일, 그분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일 완악하여 돌같이 굳어진 내 마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믿어진 일,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마음을 녹여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삶을 딸라갈 맘을 주셔서 새사람 삼으신 것. 이것이 내가 백발이 되고, 내 얼굴에 골이 깊이 폐일 정도로 늙을 때에도 우리의 가슴이 항상 그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뜨거워야 하고 그 사랑에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인생의 고난과 시련, 모든 풍랑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가슴에 고난과 괴로움 보다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각에 죽으신 거룩한 사랑의 공로가 내 마음에 큰 감격으로 다가와서 그 순수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이 일생을 살며 자기를 찢고 보혈을 짜서 우리 위해 뿌려 우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처럼, 우리는 또한 그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재물로 봉헌하여 드리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살아야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명 있는 날 동안 이렇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분의 사랑을 꼭 붙들며 이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미끄러졌다면 주님이 다시 여러분을 붙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만인제사장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