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스런 종의 삶
(2009년 설교모음)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12/13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충성스러운 종의 삶 2 (2009/12/13 주일오후예배)
목 차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12/20 주일오전예배)
1. 주님 섬기는 삶(눅19:17-22) 2009.12.13 주일오전 1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12/27 주일오전예배)
2. 아멘이신 충성자(계3:14) 2009.12.13 주일오후 10
3. 섬기는 자의 삶 (1)(행20:17) 2009.12.20 주일오후 15
4. 섬기는 자의 삶 (2)(행20:17-19) 2009.12.27 주일오전 24
5. 변함없이(단6:10, 19-20) 2009.12.27 주일오후 34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12/13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2 (2009/12/13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12/20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12/27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5 (2009/12/27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 12. 13 주일
주님 섬기는 삶
눅 19:17-22
I. 본문해설
II.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
III. 주님 섬기는 삶
A. 잘한 종
B. 착한 종
C. 충성된 종
IV. 결론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 12. 20 주일
섬기는 자의 삶 (1)
행 20:17-19 상
I. 본문의 배경
II. 신앙과 섬김
A. “첫날부터 지금까지”
B. “너희도 아는바니”
III. 섬기는 자의 삶
A. 겸손
B. 눈물
IV. 결론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 12. 27 주일
섬기는 자의 삶 (2)
행 20:17-19
I. 본문해설
II. 섬김과 시련
III. 섬기는 자의 삶
A. 시련을 참음
B. 주를 섬김
IV. 결론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12/13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2 (2009/12/13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12/20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12/27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5 (2009/12/27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12/13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2 (2009/12/13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12/20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12/27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5 (2009/12/27 주일오후예배)
1.주님 섬기는 삶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눅 19:17~22).
Ⅰ. 본문해설
오늘 본문에 보면 므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학자들은 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와 너무 흡사하기 때문에 한 작품의 변형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주님이 각각 따로 주신 비유라고 봅니다.
Ⅱ.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
마태복음에서는 다만 충성하라는 의미에서 달란트의 비유를 제시하셨지만, 오늘 여기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는 배경이 좀 다릅니다. 우리가 읽은 므나의 비유 바로 앞에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삭개오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삭개오는 새리 장이요,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을 마음을 갖게 되었고 자기의 지난 날의 삶을 삶으로써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삭개오의 믿음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하면서 오늘 이 므나의 비유가 나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할 수 없는 죄인이 구원받은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에 므나의 비유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은 거저, 우리의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렇게 구원을 받은 후에는 우리들이 주님을 어떻게 섬기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죠. 구원의 은혜는 참 놀라운 것이지만, 그 이후에 그 은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계속해서 심령 속에 유지되기 위해서는 받은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렇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이 많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금년에는 그렇게 못했다 할지라도 다가오는 새해에는 결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무엇으로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또 하나 이 달란트의 비유는 종들이 셋이 있는데, 각각 다른 달란트를 남겨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렇게 각각의 종에게 남겨 두었지만 므나의 비유에는 열 명의 종이 나오고 그들에게 모두 똑같이 한 므나 씩 남겨 두었습니다. 달란트는 당시의 화폐 단위인데, 한 사람의 장정 남자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6000 일을 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액수의 돈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거의 20년 치 연봉이 되는 거죠. 그래서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되 아주 힘들게 일하는 인부들이 요새 한 십만 원을 받는다고 해요. 그러면 그 십만 원에 6000일을 곱하면 약 6억 정도 되는 큰돈이에요. 이에 비해서 므나는 한 사람이 20일 정도 일하면 모을 수 있는 품삯이이에요.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200만 원 정도의 액수의 돈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거죠. 이런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달란트는 아예 주인이 갈 때부터 장사 잘 하게 생긴 녀석은 다섯을,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애는 둘을, 그것보다 좀 더 부족한 아이는 하나를 주고 갔지만, 여기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에서는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 다 하나씩 나눠주고 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분량을 따라서 일을 맡기시죠. 그렇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교 하도록 일을 맡기시고, 또 어떤 사람은 여린 영혼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어떤 사람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등등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사의 분량을 따라서 일을 맡기시죠. 다섯 개를 맡긴 사람이 다섯 개를 남겼을 때에 받은 칭찬과 똑같은 칭찬을 두 개를 받은 사람이 두 개를 남겼을 때 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를 맡은 사람이 하나를 남겼다면, 다섯 개를 남긴 사람과 똑같은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므나의 비유에서는 열 명의 종이 므나를 받았지만 대표적으로 세 사람만 나옵니다. 열 개를 남긴 사람, 다섯 개 남긴 사람, 하나를 그냥 내버려 둔 사람, 이렇게 나오는데 똑같이 악한 종이라고 강력하게 비판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들과 각각 다르게 주신 것도 있지만, 똑같이 주신 것도 많습니다. 얼굴 예쁘게 생긴 사람에게도, 못 생긴 사람에게도, 배 나온 사람에게도, 배 들어간 사람에게도, 결혼한 사람이나 결혼 안 한 사람이나, 공부 많이 한 사람이나 못 한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어린이나 모두 하나님이 하루 24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살아있게 하셨죠? 그리고 구원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은 두 번 구원해 주신 것 아니고, 못 생긴 사람은 세 번 구원해 주신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똑같이 구원해 주셨고, 똑같이 교회 안에서 믿음 생활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대대로 예수 믿는 집은 매주 예배 나오고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은 한 달에 한 번씩만 교회 나올 수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 주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이 므나의 비유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공히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활용하여 하나님을 섬겼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송구영신예배가 끝난 다음에 수천 명이 모였는데, 나가는 교인들에게 일일이 하얀 봉투 하나씩을 줬답니다. 나도 지금 그렇게 해 볼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교인들이 집에 가서 열어보니까 그 속에 만 원이 들었더랍니다. 그런데 그 만 원은 뭐냐면 “일 년 동안 만 원을 열심히 불려서 다음 송구영신예배 때 들고 오쇼.” 이렇게 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수천 만 원을 나눠줬는데, 40% 되는 사람은 다 털어먹고 빈손으로 그 다음 송구영신예배 때 나왔고, 좀 나은 사람은 털어먹은 것을 자기 돈으로 변상하기 위해서 만 원을 넣어가지고 왔고, 어떤 사람은 400만원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그 돈을 가지고 자기 장사하는데다가 예를 들면 자본이 천만 원이면 만 원을 투자해서 남는 것만큼 천분의 일 씩 모으고, 은행에 집어넣었다가, 주식에 집어넣었다가 이렇게 안전한 데에만 왔다 갔다 했는데 그게 400만원으로 불려서 가져 왔대요. 여러분도 그렇게 불려서 가져온다고 대답을 하면 제가 송구영신예배 때 모두 나눠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구원의 은혜는 놀라운 은혜잖아요?
그럼 그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매일 매일 가슴에 간직하고 산다면 나쁜 신자가 될 사람이 아무도 없고 불순종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세상에서 방황하고 고생하다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던 그 회심의 마음을 매일 매일 간직하고 산다면 그 누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겠으며, 그 누가 교회의 가시 노릇을 하겠으며, 그 누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아깝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해서 한 때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렇게 감격했는데, 지금은 구원의 감격도 없고, 교회는 억지로 끌려나오는 것처럼 교회 다니고, 일 년이 다 지나도록 하나님 앞에 열매 맺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이 불평과 원망이 가득 찬 그런 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 사람이 받은 구원이 오늘날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이 받은 구원만 못한 구원이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두 번 죽으시고, 자기를 위해서는 한 번 죽으셨습니까? 동일하게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지만, 마음과 삶이 하나님을 향하던 데서 이탈하여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섬기는 것이 없이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게 되니까 구원의 감격도 우리 속에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에요.
이 구원과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서 우리는 두 극단을 아주 조심해야 돼요. 한 쪽 극단은 카톨릭에서 나타났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심을 품고 착한 일을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사상이에요. 이러한 공적 사상에 대해서 쐐기를 박고 종교 개혁자들은 구원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어요. 이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이제 ‘구원은 그렇게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믿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데, 그렇게 구원해주신 후에는 우리는 자유다. 그래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절대 하나님은 취소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도 일수불퇴라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고 나면,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도 꼼짝없이 우리를 책임지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얼마나 즐거우랴.’ 하고 죄를 짓고 방종하게 사는 것이에요.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결코 구원 얻은 사람의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카톨릭에서는 우리에게 상급과 형벌을 약속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올바르게 살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거저 구원해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그 감사한 마음이 우리에게 살아 있기만 하면 상으로 주신 것보다 훨씬 더 감사하게 주님을 위해 살 수가 있는 것이죠.
제가 젊은 나이에 대학교 교수로 처음 발령을 받고 갔을 때의 일인데, 한 학기가 끝나고 나면 교수들이 퇴수 회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온천이나 관광지에 가서 목욕도 하고 좀 쉬면서 저녁때는 교수들이 모여서 한 학기를 반성하고 다음 학기를 계획을 하는데, 거기서는 저녁 시간에는 과별로 교수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식사들을 하면서 이제 학과의 일들을 의논해요. 그때 되면 학교에서 항상 점심을 먹으라고 봉투를 하나씩 줍니다. 그때 같이 있던 교수님 가운데 음식점에 가면 팁을 종업원들에게 잘 주시는 분이 있었어요. 항상 공금에서만 주시더라고요. 그날도 그러시더라고요. 물 컵을 가져온 아주머니한테 “아줌마, 여기서 이렇게 일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쇼.” 하더니 봉투에서 오천 원을 꺼내서 아줌마 손에 쥐어주었어요. 그런데 그 오천 원이 그 당시에 이십 년 전이니까 정말 큰돈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분 하는 소리가 “저 아줌마들이 이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우리라도 와서 가끔 팁을 줘야 합니다.” 그 아줌마들은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왜? 힘드니까. 월급은 정해져 있는데. 또 손님이 적은 것도 원하지 않아요. 잘리니까. 그럼 뭘 원하느냐면 문 닫지 않을 만큼만 사람이 오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천 원을 줬더니 그 다음에는 감당할 수 없이 반찬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게장이 있었어요. 저는 별로 게장을 좋아하지 않는데 교수님들이 열심히 드셨어요. 그래서 세 번인가 게장을 날라 왔어요. 그런데 더 달라고 그랬더니 아줌마가 가서 게장을 달라고 그러는데 조금 있더니 싸우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게장 좀 더 주쇼.” 그랬더니 주방에서 뭔 게장을 자꾸 달라고 그러느냐고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랬더니 이 아줌마가 “손님이 왔으면 반찬을 제대로 내 놓아야지, 장사가 돼야지.” 그러면서 싸우는 거예요. 미리 오천 원을 주니까 그 은혜에 감사해서 그냥 주방에 가서 투쟁을 해서 반찬을 뺏어 오잖아요. 그래가지고 반찬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저녁을 포식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여기서 서비스 받고 더 먹은 반찬이 오천 원은 넘을 걸?” 그랬어요.
우리의 구원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날 섬기면 구원해주지. 이렇게 말씀 안 하셔도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을 감사하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 때에 이미 받은바 구원이 우리의 마음속에 뜨거운 감사와 감격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에요.
Ⅲ. 주님 섬기는 삶
그러면 이제 우리 모두 그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할 터인데, 이 주님을 섬기는 삶이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은 이것을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A. 잘한 종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이르시되 잘 하였다.” 첫 째는 잘 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잘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심부름 시켰을 때 “야, 참 잘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잘 했다고 하는 것은 일을 시킨 사람의 마음이 일을 하는 사람 마음 안에도 있어서 마치 일을 시킨 사람이 직접 했더라면 했을, 그렇게 온전하게 일을 이루는 것을 가리켜서 잘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일을 시키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러나 잘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시키신 하나님, 그 일에 대한 마음을 주신 목회자와 그 마음을 그대로 물려받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여러분들이 한 해 동안 교회의 이 곳 저 곳에서 주님의 직분을 맡으셔서 일했지 않습니까? 한 해가 지나갑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한 것에 대해서 한 번 셈 하여 보십시오. 잘 하셨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한 해 동안 섬긴 그 일에 주님의 마음이 묻어 있습니까? 잘 하는 종은 돈 많고 능력 있는 종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이 있는 종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은 종들만이 잘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은 종들만이 진실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함으로 주님을 섬기듯이 그렇게 그 일을 잘 하는 사람, 그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찾으시고, 여러분들은 받은바 은혜가 너무 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받은바 그 은혜가 너무나 귀하고 놀랍기 때문에 주님이 맡겨주신 그 일은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온전히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잘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공로로 구원을 얻은 것처럼 여러분이 주님 앞에 잘 하는 사람들이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섬김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B. 착한 종
두 번째로는 착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라고 말입니다. 한 므나는 달란트에 비하면 대조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액수였습니다. 허투루 써버릴 수도 있는 돈이었지만, 이 착한 종은 그것으로써 많은 것을 남겼고 그때에 주인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목표에 대한 열정이 뜨겁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열정이 없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십상입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지각하고 축도하기 전에 집에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고 물질을 바치며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섬기려고 할 때에 다툼도 일어나고 많은 갈등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열심히 일을 하면 일을 하면서 거칠어지기 쉬운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신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6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줄 때에 그 직분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를 곧 떠날 것 같은 사람도 장로를 시켜준다고 하면 다시 교회에 주저앉는 사람도 있고, 전혀 교회를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도 교회에서 투표를 해서 당선이 되면 초등학교에서 마치 반장에 당선이 된 것처럼 아주 기뻐하고 그 약발을 받아서 몇 달 동안 교회 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사람의 눈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이 분명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엔 큰 것도 작은 것이니, 왜냐하면 커 보이는 그것은 앞으로 맡겨주실 일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맡겨진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중요성이 있고 그 일이 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으면, 당연히 그 일을 붙들고 있을 때에 그 사람도 존중히 여김을 받기 때문에 큰일은 좋아하고 작은 일은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두 착한 종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Charles H. Spurgeon 목사님이 죽을 때까지 우리가 잊혀 지지 않을 만한 훌륭한 비유를 남겼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천사 셋을 부르셨답니다. 그러면서 세 천사에게 각각 다른 물건 하나씩을 주면서 세상에 가서 내가 시키는 일을 하라고 파송을 하셨대요. 첫 째 천사에게는 황금으로 만든 지휘봉을 들려주면서 너는 저 세상으로 내려가서 임금노릇을 하라고 지시를 하셨답니다. 두 번째 천사에게는 주판을 들려주면서 너는 가서 큰 기업을 경영하는 회장이 되라고 그러셨대요. 셋 째 천사에게는 두 천사보다 더 큰 물건을 주셨는데, 군인 모자에다가 막대기를 달아서 못을 박아서 주시면서 너는 이걸 가지고 땅에 내려가 똥 푸라고 그러셨대요. 이 세 천사가 각각 구름을 타고 하나는 금 지휘봉을, 하나는 주판을, 또 하나는 똥 푸는 바가지를 매고 이 땅에 내려올 때에 그 세 천사의 마음이 달랐겠느냐, 같았겠느냐는 거예요. 달랐으면 그 녀석들은 천사도 아니죠. 중요한 건 나라를 다스리느냐, 장사를 하느냐, 똥을 푸느냐가 아니라 그 미션을 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에 감격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려가는 거예요. 그거죠. 그게 바로 착한 종들의 마음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맨 처음 이 벌레 같은 나를 왜 구원해 주셨냐고 눈물을 흘릴 때의 그 마음이면 작은 일이 없어요. 왜? 일은 일 때문에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키신 주님 때문에, 그 일이 주님의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없는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예요. ‘야, 다행이다. 작년에 아무것도 안 맡았었으니까 그렇지, 맡은 사람들은 다 찔릴 텐데 나는 한 해 동안 아무것도 안 맡았으니 찔릴 게 없이 자유롭구나!’ 그게 바로 악하고 게으른 종의 마음이었어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 되지 마십시오. 저는 지난 한 주 동안도 살면서 해야 될 일이 이 세상에 너무 많아요. 우리가 조금만 헌신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은혜를 받을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일손이 없어요. 그런데 교회 안에도 지금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 좋아하는 일간 스포츠 보는 시간만큼만 봉사했다면, 그 밑도 끝도 없이 허무하기만 한 바보 통 앞에서 넋 놓고 드라마 보는 시간만큼 교회에서 봉사했다면, 아무 남는 것 없이 떠들고 나면 가슴에 공허한 기운밖에 찾아오는 것 없는데 이웃 집 마실 가서 한 없이 잡담을 늘어놓은 그 시간만큼만 아꼈다면, 적당히 자면 충분히 건강을 유지하는데 그저 넘치도록 잠자는 그 시간만 할애해서 하루 한 시간만 빼 내어서 섬겼더라면 아마 우리의 교회는 영적으로, 외적으로 훨씬 더 아름다운 교회로 변해 있었을 거예요. 일하는 사람들만 허리가 부러지도록 땀을 흘리면서 일하고, 노는 사람들은 방관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에요.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난 한 해 동안에 넌 날 위해 무얼 했니?” 하고 물으시면 적어도 “이것만큼은 주님을 위해서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나는 마음을 드려서 애 썼습니다.” 할 것이 있는지 새겨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일에 깊이 헌신하면 일의 크기를 보지 않고 시키시는 주님의 크기에 주목하고 섬기는 착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충성된 종
마지막 세 번째는 충성된 종들이 되셔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그랬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는 항상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한 번에 큰일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작은 일을 맡기시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얼마나 충성하는지를 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일을 맡기셔서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나님이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충성된 자를 부르시고 이 땅에 많은 사람이 당신을 섬기지만 충성된 사람들이 매우 소수라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잠언 속에서 말하기를 “주인에게 충성된 자는 추수하는 날의 얼음냉수와 같다.” 그랬어요.
추수해 보셨어요? 추수해 보셨어요? 각자 하는 일이면 요령을 피울 수 있는데 추수하는 일은 남자들이 한 줄로 쭉 서서 낫으로 벼를 자르면서 앞으로 전진 하는 거예요. 저 뒤에서 보면 누가 요령을 피는 지 다 보여요. 그리고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나중에 앞에 간 사람들이 전부 다 나아가서 자기는 뒤떨어지고 포위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열심히 해요. 손이 부르틀 정도로 합니다. 이 추수하는 게 어려운 게 뭐냐면 허리를 펼 수가 없어요. 계속 숙이고 있어야 해요. 허리를 펼라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벌써 한 걸음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이것을 잘라서 옆으로 쌓아놓으면서 추수를 해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거기에서 감독하는 사람이 “자, 이제 잠깐 쉽시다.” 할 때에 가을날의 따가운 햇볕은 내리쬐고 땀은 뻘뻘 흘리면서 추수를 했는데 얼음을 둥둥 띄운 시원한 냉수가 옵니다.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냉수를 쫙 들이킬 때 그건 갈비보다 귀하고 이 세상의 어떤 진귀한 음식에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을 추수 꾼들에게 주어요. 그때 그 “야, 정말 시원하다.”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종들은 주님의 마음에 그 얼음냉수와 같아요. 그러니까 그 추수 꾼에게 그 얼음냉수가 얼마나 고맙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주님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섬기면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에게 그렇게 시원하고 사랑스런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까 화면에서 잠깐 스쳐간 것을 보면서 ‘야, 정말 세월이 빠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영사기 돌리는 것 같은 사진이 나왔는데, 애기 하나가 하얀 옷 입고 성도 품에 안겨 있잖아요? 그게 우리 딸이에요. 대학 들어갑니다. 올해. 그 옆에 초등학교도 안 다니는 조그만 애가 서 있는데 그 애가 군대를 갔다 와서 내일모레면 장가갈 나이에요. 한 번만 더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이 중에는 우리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도 많아요. 그때 주님 앞에 갔을 때에 “내가 너에게 준 구원의 은혜, 때를 따라 너에게 공급해 준 물질, 그리고 생명과 건강, 때를 따라서 예배당에서 너에게 들려준 은혜의 말씀과 성령의 은총으로 네가 무엇을 섬겼느냐?” 라고 물으실 때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방황과 고민,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번민한 날 밖에 없다면 그날에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저는 목회를 하면서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의 회심을 가끔 봅니다. 칠순 좀 넘고 그런 분들이 어떻게 하다가 은혜를 받으세요. 그래서 제일 안타까워하는 게 뭐냐면 이제는 주님이 누구신지도 알았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싶은데, 기운도 없고 돈도 없어요. 시간은 있는데. 머리도 흐릿해진 거예요. 그때에 그 노인들의 눈에는 젊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이거는 제가 어느 부대에 설교를 하러가서 직접 들은 간증이에요. 예배를 드리는데 거기에 별 둘인가 셋인가 하는 양반이 나와서 간증을 해요. 제가 보기엔 그렇게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어느 한 교회의 집사였어요. 당연히 그 부대 안에는 군목이 있을 것 아니에요? 젊은 군목이 왔는데 준위로 임관하거든요. 그 군목이 주일날 일곱 군데인가 여덟 군데를 예배를 드려야 한 대요. 그래서 이제 써금 써금한 오토바이를 타고 그 옛날 비포장 길을 아주 불나게 가야지만 여덟 번을 예배를 드릴 것 아니에요? 잠깐 설교하고 도망가고 이래야지만 예배를 드릴 수 있잖아요. 주일날 아침인데 그 별을 단 승용차가 뚜껑을 딱 씌우고 교회 앞에서 기다리더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운전병이 와서 “목사님, 다음 예배지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이게 뭐냐고 했더니 “우리 사단장님 차인데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니 새파란 중위한테 별이 타고 다니는 차가 와서 그거를 타고 예배를 드리러 가라니, 나부터도 떨려서 그걸 타겠어요? “싫다, 난 안 탄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이걸 안타고 가시면 제가 장군님한테 가서 반 죽습니다.” “그래도 난 못 탄다.” 끝까지 안탔대요. 그 얘기를 두고 별 둘 단 집사님이 간증을 하는 거예요. 자기는 젊은 나이에 이렇게 높은 데 까지 진급을 했고 승승장구하면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가만히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별 둘까지 달고 나니까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더군다나 전방에서 회의다, 훈련이다, 얼마나 일이 많겠어요? 그러니까 정신없이 일을 하는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주님 앞에 갔을 때 “야, 내가 널 구원해 줘서 그렇게 많은 은혜를 줬는데 너 날 위해 한 게 뭐 있니?” 이렇게 물어보시면 가만히 보니까 대한민국이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있더라는 거예요. “난 나라를 지켰다.” 후방에 있는 사람들이 물으면 “난 전선을 지켰다.” 할 말이 있는데 하나님이 물어보시면 그거는 아무래도 답이 아닌 것 같다 이거예요. 구원을 준 게 대한민국이 준 것도 아니고 은혜를 준 게 대한민국이 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 하나님이 너에게 이런 은혜를 줬는데 넌 날 위해 한 게 뭐 있니?” 그랬을 때 “주님, 저 별 달았습니다.” 주님이 관심도 없을 것 같더라는 거죠. 그리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자기가 시간이 없어 교회 가서 봉사할 수는 없고, 그래도 뭔가 주님이 물으실 때 “이거는 했습니다.” 하고 얘기는 하고 싶은데 그것밖에 빌려줄 것이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넌 뭘 했니?” “주일날 제가 다른 데도 다니고 해야 하는데 저는 짚 차 타고 다니고 승용차는 목사님 빌려드렸습니다.” 그 얘기라도 하고 싶어서 그 차를 보냈다는 거예요. 신앙이 어린 사람들도 이런 고민을 하는데 여러분은 이런 고민 좀 합니까? 주님 앞에 가서 “얘야, 너 나 위해 뭘 했니?” 그렇게 물으실 때 “주님, 아무 것도 한 게 없지만 그래도 주님이 제게 은혜를 주셔서 열린 교회에 있는 동안에 구역장으로 섬겼습니다, 주일 아침에 어린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성도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새벽에 화장실을 치웠습니다.” 뭔가 하나님 앞에 할 얘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찔리죠? 이렇게 살 같이 깊이 흐르는 세월은 열린 교회 역사도 그렇게 여덟 명이, 25평 밖에 안 되니까 여기의 15분의 1도 안 되는 손바닥만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을 하고, 산소가 없어 예배드리다가 기절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열악하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를 섬겼던 많은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그분들의 섬김의 덕을 입으면서 오늘 이렇게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도 하나님 앞에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영혼들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때 미래의 우리의 많은 후배들이 주님을 만나고 신앙생활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여러분.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너무 부끄러운 것이고 구원의 은혜도 간직하며 살 수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신령한 것 본 적이 있습니까? 게으른 사람이 주님 사랑하는 것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충성된 삶을 사십시오. 직분의 크기, 일의 크기 보지 마시고 그것을 내게 부여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서 주께서 여러분들을 만나실 때 주께서 여러분들의 눈의 눈물을 씻겨주시고 위로해 주실 수 있는, 그런 분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12/13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2 (2009/12/13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12/20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12/27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5 (2009/12/27 주일오후예배)
2.아멘이신 충성자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3:14).
결국 어두움 가운데서 방황하고 사는 동안에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낙이 없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거기가 우리의 모든 인생의 끝인것처럼 여겨 집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에는 찬란한 빛이 찿아 오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을 그렇게 사랑해 주신다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적인 방황의 끝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저 뒤편 무지하고 방황하고 소외되었던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날에서 바라 볼 때 그렇게 되는 것이고 저 멀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늘 나라에서 바라 본다면 그러한 복음진리에 대하여 깨달음과 은혜의 경험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실제로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그 진리에 부합하면서 살아 가는 우리의 삶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알고 깨달은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요.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는데... 우리들이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려고 하는데 도무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랬는데 가다 보니까 표지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 이길로 가면 내가 가려고 하는 부산으로 내려 가는 길이구나 하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길로 들어 서지 않았다면 그 표지판을 만난 사람이나 안 만난 사람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또 표지판을 보고 그 길을 가려고 마음을 먹는데 차가 기름이 떨어져 더 이상 가지를 못합니다. 기름을 가득 채웠으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 입니까? 그렇지만 가득 채운 기름을 가지고 내가 가야 할 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간다면 그것도 기름 채운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좋고 또 은혜가 기쁘고 하지만 그런 말씀을 깨닫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에게는 그것 자체를 위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신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대우 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토요일마다 결혼 주례를 하는데 많이 갔으면 좋겠는데 왜 그렇게 못 가는지 그것도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도 많이 하고 왠만하면 빨리빨리 가라고 하십시요. 시집 장가를 제때 가는 것도 목회 하면서 보니까 효도 입니다. 결혼 주례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까지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었지... 자기들이 서로 좋아 하니까 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있으면 해야만 하는 사랑이 된다. 왜냐하면 가끔 사랑에 빠져서 일주일에 한 두번씩 만났는데 좋지 않으면 정신 이상자 아닙니까? 그런데 같이 살아 보십시요. 그러면 단점과 결점도 많이 보이는데 그 때에는 단점이 보여도 접고 넘어 가고 결점이 보여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이렇게 접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될 때에는 되어서 하지만 그 다음의 사랑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데 그렇게 사랑을 하다 보면 또 사랑이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 가는 이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여러분들이 그렇게 회심할 때 진리를 깨달으며 내가 죽어도 좋습니다 하고 가슴에 칼을 품고 성경을 펼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차라리 타 종교에는 그런 사람들이 가끔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그런 사람은 거의 없이 그렇게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됩니다. 또 자기들이 방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의 사랑에 그렇게 목말라 했습니까? 해석이 그런 것이지...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들이 찿은 사람도 아니고 자기들이 뺏어 온 사랑도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찿아 오셔서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부어 주신것이 하나님 진리에 대한 경험이고 사랑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으면서 불평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교인이 자기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감격을 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설교 때문에 그 교회에 왔는데 나중에 교회를 떠났는데 원인이 설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인생 살아 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진리를 많이 안 것도 우리의 자랑거리일 수 없고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도 자랑거리일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진리를 깨달아서 어떻게 우리의 삶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느냐, 주님께 그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목메이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자기도 그 사랑에 반응하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았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열매를 맺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열매 입니다. 그 열매는 제일 먼저는 우리의 마음과 인격 안에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잘 섬기려고 하고 주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게 되고 주님께 기도 하는 사람이 성화되어 가지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천방지축처럼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물에서 한번 뛰어 보셨습니까? 물이 발목까지만 차면 아이들이 비 오는날 뛰어 다니고 하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첨벙첨벙 물탕을 뛰어다녀도... 그 물이 무릎까지만 오면 그렇게 뛰어 다닐 수 없습니다. 그 물이 더군다나 허리 까지 오면 이제는 손을 흔들면서 뛰어도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기면 잠길수록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고 그 분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에 있어서 우리에게 아주 모범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아서 주님께 책망만 들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교회를 향해 너는 말하기를 너는 부자다 부유하여 부족한것이 없다 하지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하고 가난한 것 눈 벗고 벌거 벗은 것을 모르는 구나 내 너를 권하노니 불에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가 로마 시대때 아주 부유한 도시 였습니다. 이 도시는 특별히 로마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안약이 생산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개성인삼처럼 라오디게아산 안약하면 로마 전체에서 유명하게 통하던 그곳이었고 이런것 때문에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잘 살았고 지방이 잘 살면 교인들이 잘 살고 왜냐하면 그 지방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니까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자라고 생각해서 예수 잘 안 믿고 또 자기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영적으로는 아주 가난하다 그러니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쉽게 이야기 하면 이것은 순금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 불로 연단한 금은 결국은 너희에게는 돈이 많아도 순수한 믿음이 없다 그런데 너희들이 그런 순수한 믿음이 없는 것은 시련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 쓰는 가운데 그 신앙이 정결하게 되는데 너희에게는 그 믿음이 없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면서 이 교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력하게 주님께 책망을 받고 있는데 그 중에 제일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아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는 가장 준엄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이 책망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사도요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렇게 너희 교회를 판단하시는 예수님은 아멘 이시었단다. 아멘은 그 뜻이 아멘 입니다. 우리가 쓰는 아멘, 히브리말 입니다. 그래서 확실히 혹은 어떤 말씀에 진실하게 동의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아멘 이었는데 예수님이 누구의 말에 대해서 아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 하셨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이 요한 이었고 요한은 이것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전체에 회람 형식으로 읽혔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결국은 주님은 가장 아멘하지 않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부패한 교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아멘 이시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충성스러운 것이 능사가 아니라 올바르게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의 고통은 오전중에도 말씀 드렸듯이 예배시간 지각하고 왔다가 끝나기 전에 도망가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 받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어차피 진정한 의미에서 교인이 아닙니다. 교회가 정말 고통을 받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교회에 크게 헌신하는 사람에 의해서 고통받는 것입니다. 서울 근교에 있는 교회에서 벌써 오래된 일 입니다. 교회를 지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교인이 수없이 몇만명이 몰려 오니까 교회를 다시 건축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님이 우리가 아무래도 교회를 지은지 얼마 안 되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교인들이 밀려 오니까 우리가 교회를 다시 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회에 있는 어느 장로님이 그러셨습니다. 목사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그 교회를 짓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 갑니까? 벌써 20년전 이야기 입니다. 430억 정도 듭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그냥 제가 하지요... 그러더랍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돈이 많은 사람인지 모르지만 이건희 회장일리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돈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만 15년-20년 가까이 되는 그 때에 430억을 제가 하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면 그것은 보통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나는 백만원 가졌는데 만원을 내면 백억을 가진 사람이 일억을 내는것과 똑 같겠다 그래서 나의 만원에 대한 감각은 백억을 가진 사람이 일억에 대한 감각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난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자의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정주영씨가 한번 특강을 하는데 명색이 그룹의 회장인데 자기는 라디오도 가지고 있고 신문도 보는 사람을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들쳐 업은 아줌마가 핸드폰 가지고 다니는 것을 그분은 죽을 때 까지도 이해 못하고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분들이 어떻게 나의 돈 만원은 당신 10억하고 똑같습니다 라고 동의를 하겠습니까? 오히려 이러지 않을까요? 네 돈 만원은 내 돈 천원하고 같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타일렀습니다. 장로님 그 뜻은 정말 고마운데 그러면 성전을 짓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절반만 내십시요. 절반은 교인이 헌금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재를 당해서 절반을 헌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간에 물론 사연이 있었을 것 입니다. 그 장로님하고 목사님하고 세상 법정에서 고발 했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헌신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방향이 올바라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핸들 조작이 안 되는 차는 엔진이 꺼져 버리는 것이 낫지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 대형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보여 주셨는데 그것이 뭐냐면 아멘 입니다.
(찬송)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안에 즐겁고
그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뭐냐면 교회에서 큰 일 하는 사람이 가장 안 꺽어 지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님이 저의 방에 와서 교제를 하고 가다가 마지막에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우리 신학교 교수들에게 해 주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십시요? 어떤 것이 있을 까요? 시골에서 목회하는 사람이 서울에 있는 신학교 교수님들에게 할 말이 있겠습니까? 평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시골 목회라고 하는데 촌 목회를 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한 말씀 해 주시죠? 굳이 한 마디만 하라면 신학교 선생님들에게 한가지만 바라고 싶습니다. 그럼 신학교 선생님들에게 뭘 말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면 제일 좋겠습니까? 신앙생활을 잘 하십시다. 거기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신학도 거기에서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받으면 거기에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멘의 삶 입니다. 그래서 정말 한 교회의 최고의 복은 그 교회 지도자들이 아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멘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교인들이 뭘 해 달라고 해서 아멘 그 다음에 실력이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해서 아멘 무슨 정치인들이 교회에 무엇을 요구 한다고 해서 아멘 담임목사가 무엇을 하라고 한다고 해서 아멘 그 아멘이 아멘이 아니라 참된 아멘은 우리 주님의 말씀에 아멘 하는 삶입니다. 그 아멘의 삶을 예수님이 먼저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 주님께 순종하게 되었는데 자기의 몸을 주님 앞에 재물로 드릴 때 그 분의 육신은 그 분의 마음까지도 이 세상에서 33년을 사셨지만 더렵혀지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재물로 바쳐졌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아멘의 생애 였습니다. 주님이 천상에서 내가 구원할 백성들을 위해서 네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가야 되겠구나 아멘, 네가 사람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거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숙해 가거라 아멘, 이 백성들을 위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를 따라 사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거라 아멘, 마지막에는 너는 나를 위하여 이 백성들을 대속하는 재물로 십자가에서 나의 저주를 받거라 아멘, 토를 달지 않는 완전한 아멘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아멘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주 훌륭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재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 힘을 발휘해서 교회를 섬기기에 앞서서 방향이 올바로 잡힌 아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해석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나에게 아주 아픈 일을 주셔도 그것을 좋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섭리 속에서 이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시지만 이것은 아마 내가 타락하지 말라고 주님이 예방 주사를 놔 주시는 것일 거야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교회를 아주 사랑하게 되면 교회에서 아프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해석을 선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데 내가 이렇게 괴로움과 고통을 끌어 안고 참고 인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아프게 하시지만 다른 성도들은 나의 아픔 때문에 살아나게 하실 거야 나는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억울하지만 그러나 나 때문에 다른 성도들은 살아 날 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나와 앉았는데 어느 교인이 뿔이 잔뜩 나 가지고 찿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 씩씩 거리면서 따지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오해 투성입니다. 그래서 하도 자기가 화가 나서 듣고 있다가 이것은 이런것이고 이런것이다 라고 다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오해가 많이 풀려서 꺽어져서 훨씬 얼굴이 밝아져서 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얼굴이 밝아지고 얼굴에 그림자가 없이 돌아 갔는데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니까 너무 후회가 되더랍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결국은 성공은 했는데 이제는 가면서 저 사람이 목사인 나를 미워하던 사람이 집사인 아무개를 원망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교회 전체로 보면 고통과 상처가 이동하는 것이지 치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 그래서 옛날에 선배 목사님이 목회가 무엇입니까? 교회생활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을 때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이것 어디서 많이 듣던 것입니다. 며느리가 시집가서 늘 듣는 이야기 입니다. 아!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 주님의 생애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많이 당하시면서도 하나님 앞에 올곧은 아멘의 생애를 사셨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시간에 이 뒷부분을 계속하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 앞에 몸 불태워 재산 받쳐 헌신하는 일도 훌륭한 일이지만 제일 먼저 아멘의 삶이 되십시요.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올바릅니까? 잘못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 아멘 하면 우리를 꺽을 수 있고 잘못 가던 우리의 방향을 돌이 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성도의 최고의 섬김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는 것 그래서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진정한 아멘의 사람이고 그렇게 아멘의 삶을 살아 갈 때 우리가 때로는 빗나가도 결국은 바로 잡히고 바로 잡히고 바로 잡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되고 은혜로 교정 되어서 결국은 주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착한 일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해에는 여러분들이 아멘의 삶을 못 살았지만 이번에는 아멘의 삶을 삽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천사가 내려와 나팔을 불어도 아멘 하지 말고 어린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면 아멘 할 수 있는 예수 닮은 겸손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12/13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2 (2009/12/13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12/20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12/27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5 (2009/12/27 주일오후예배)
3.섬기는 자의 삶 (1)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 20:17~19上).
Ⅰ.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마지막 순교의 길이 될 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으로의 전도여행을 앞두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남긴 유언적인 설교입니다. 그는 아시아에 들어와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며 또한 에베소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하여 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을 마지막 대면하는 것이 될 지도 모르는 만남을 하면서 자기의 유언적인 권면을 여기에 남겨 주었던 것입니다.
Ⅱ. 신앙과 섬김
우리는 여기에서 비록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신앙과 섬김의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섬기는 자로서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의 실제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될지를 배우기 전에 우리는 제일 먼저 신앙과 섬김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바울은 젊은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유대인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이 길을 걸어가던 젊은이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믿은 이후 사도바울은 죽는 순간까지 섬기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참 믿고 은혜 받은 후에야 비로소 섬기는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그 자체는 섬김과 떨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죄를 용서받은 이후 그는 즉시 아라비아 광야로 갔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거기서 수도생활을 한 게 아니라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즉시 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섬김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더 많이 섬길 것이고, 큰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은 큰일을 위해서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름의 크기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섬김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고, 신앙은 섬김에 의존하고 또 섬김은 신앙을 따르는 것이니 잘 믿을수록 섬기게 되고 섬길수록 신앙은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온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이제까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말합니다.
A. “첫날부터 지금까지”
제일 먼저 그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섬김이 처음 부르심을 받아 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순교의 종소리가 들리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까지 그 섬김이 얼마나 일관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완전한 사람이 있겠으며, 우리 중 누가 온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시고 사명을 주실 때에 흠 없이 그것을 감당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한 시대의 탁월한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도 역시 안팎의 수많은 시험과 유혹 속에 우겨 쌈을 당하던 사람이었고 그런 고난 속에서 그는 때로는 갈대와 같이 연약한 인간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동안에 그의 삶은 시종일관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자 애썼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모자라는 것이 많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섬김을 받았던 양떼들에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한 번 주님께로부터 받은 직분과 섬김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귀한 사명을 맡아 주님을 섬길 때에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주님을 아름답게 충성하며 섬겼던 것도 주님의 은혜요, 잘 섬기지 않았던 사람이 섬기기로 뜻을 세우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로 한 것도 주님의 은혜요, 예전에는 잘 못 섬겼으나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하든지 저러하든지 우리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한결같은 삶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섬겼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의 약한 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온전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들을 주님의 그 큰 사랑으로 부르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며 살게 하십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 스스로 당신을 섬기기에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굳이 우리를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려 함은 당신의 모자란 것을 채우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섬기는 일에 부르시고 우리의 그 희생과 수고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구별하여 인간으로 지으시고,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동역 자가 되어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함으로 죄 많은 세상에서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일평생 사랑하며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섬김에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의 섬김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섬김이 올곧고 진실했다면 그 모두 주님의 은혜이니 , 여러분들은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이 직분을 맡은 때로부터 지금까지”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했다면 주님의 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주님이 주신 은혜를 올바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면서도 그 섬김이 일관되지 않은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연초에 주님께 약속한 많은 섬김의 자리들에 거기에서 많은 성도들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는 비어있고, 또 내가 거기 남아있다 하더라도 나의 섬김은 올곧지를 않았습니다. 우리의 섬기는 삶은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짜는 옷감과 같은 것입니다. 한 올 한 올 매일 매일의 삶은 한 땀 한 땀 우리의 섬김의 옷감을 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일생을 주님 앞에 온전히 섬긴다면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이 온 몸에 휘감으시기에 적합한 아름다운 옷감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옷감은 매우 질이 나쁜 옷감이 될 것입니다. 한결같다는 말이 바로 이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한 해 동안, 일평생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섬겨온 삶을 돌아보면서 한 결 같지 않았던 날들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올바른 섬김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봉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B. "너희도 아는 바니“
두 번째는 사도바울이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섬김을 사람들에게 과시할 욕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섬김을 받는 것은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사람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기를 십자가에서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이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므로 그의 관심은 자기를 부르신 예수님께 있었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아시아에서 섬겼던 사도바울의 이 아름다운 섬김의 삶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드러났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섬김이 순전하고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나 구김이 없이 순전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는 양심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좇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우리의 삶은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목소리의 가르침도 사람을 일깨우지만,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삶이요,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단순한 감정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인격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열렬한 마음의 열정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이기면서 그 은혜 때문에 주님이 세워주신 섬김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센 사람이 되어 주님을 봉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주를 만나고 증거 하는 복음의 증언이 본문이라면 그의 아름다운 섬김의 삶은 그 본문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이 좀 어려워도 해설이 상세하고 친절하면 본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처럼 우리들이 비록 바울같이 말 잘 못하고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말을 능란하게 잘 전하지 못해도 우리가 꾸준히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섬기는 삶을 산다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신부와 같은 우리의 삶을 보면서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을 두고 모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너희도 아는 바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피 흘리기까지 섬기면서도 자신이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주님이 자신을 충성 되이 여기셔서 사도라 불러주신 사실에 감읍하며 주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불신하는 이 세상을 섬김에 있어서 매우 작은 섬김의 헌신하면서도 그 섬김을 위해 수종 들면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이 영광스런 섬김에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한다면 우리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일 중 하찮고 작은 일이라고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처음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피 흘리는 죽음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던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벌레 같은 죄인을 위해 살을 찢으시고,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포악한 인간을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무엇이 아까운 것이 있었습니까? 살아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요, 생명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라고 믿었고,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들은 여러분들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것이지, 아무것도 여러분들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어린아이같이 우리는 우리의 주먹으로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며 주님 없이 살았던 날을 회개하고,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았던 수많은 세월들을 탄식하며 애통해하였습니다. 얼마를 살든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한 모퉁이나마 섬기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과 동행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은 충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주신 은혜는 크고, 받은바 은혜는 가없건만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주님은 우리에게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셨지만 우리는 변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녹아내리던 우리의 마음은 굳어지고, 우리 뺨에는 잃어버린 영혼들과 아직까지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야할 교회에 대한 눈물이 사라졌습니다. 탐욕과 교만에 가득 찬 얼굴로 우리는 주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외식하는 삶은 많은 어린 신자들을 실족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섬김이 없는 신앙은 영혼이 없는 인간과 같고, 신앙이 없는 섬김은 아들이 아닌 그야말로 종살이하는 노예와 같은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는 이 신앙 안에서 무엇이든지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매일 매일 주님을 바라며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을 기뻐하고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부족해서 섬기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섬기려고 마음을 먹을 때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올 한 해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았어도 다가오는 한 해에서는 무엇이든지 주님을 섬기며 살아 신앙의 감격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Ⅲ. 섬기는 자의 삶
또 하나는 사도바울이 이런 회고적인 선언을 한 후에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섬기는 자로서 살았는지, 그 내면의 세계와 외면의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라고 하였습니다.
A.겸손
제일 먼저 그는 섬기는 자의 삶이 겸손이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겸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는 가마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다소 출신의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열심 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가정과 모든 친척들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오직 예수와 결혼한 사람처럼 독신으로 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신념을 바쳤습니다. 누가 그 헌신을 따라 올 수 있었으며, 더욱이 그에게는 큰 은사가 있어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었고 산 자도 죽일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 큰 능력과 은사를 한 몸에 받은 최고의 지성인이요, 철학자요, 목회자요, 헌신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는 선교사인 그가 도대체 누구 앞에서 자신의 모자람을 느끼며 겸손해져야 했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의 겸손은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는 비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겸손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능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겸손해졌고, 하늘의 비밀을 더 많이 알고 산 자를 죽이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큰 능력과 은사를 주시면 어렵게 할 수 있는 일을 쉽게 희생없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큰 능력과 은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주는 편지 속에서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즉 네가 하나님 앞에 받은 능력의 크기를 따라서 복음을 전할 것인데 고난이 주어질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알았던 사람들, 그 사랑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자기를 다 버리고 오직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십자가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신명을 바쳤던 사람들 중에 받은바 은혜와 능력 때문에 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의 사람은 한 결 같이 고난의 사람이었고, 그 고난은 바로 섬김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당했던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자기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거지만, 그 은혜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려고 할 때 그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이기며 살게 하는 큰 비결이 겸손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 앞에서는 겸손해질 이유가 없었지만,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계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면 그는 목숨을 버리기까지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면 그는 큰 능력을 받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면 그는 하늘의 신비한 은사를 체득한 은사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면 그는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용서받은 한 흉악한 죄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막 돼 먹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악한 무리들에게 간악한 시험과 도전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했지만 그 사람들을 인해서 겸손해진 것이 아니라 고난이 오고 섬기는 길에 어려움이 올 때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생각했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 큰 능력을 자기를 위해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그 큰 은사도 불쌍한 영혼을 섬기는데 썼으니 이는 예수님이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한 번도 자기를 위해 사용하신 적이 없음을 본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길에 우리는 어려움이 올 때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그 어려운 섬김의 현장에서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중용한 사람이 아니고, 이 일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추켜세우는 것처럼 이 일에 적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이, 용서받은 죄인이 그 받은바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서 어린아이와 같이 적합하지 않은데도 여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어려움을 느낄 적마다,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멸시를 받는다고 느낄 적마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이 천대받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를 별다른 위대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말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이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자의 사랑 앞에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이제는 내 마음도, 영혼도 내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였던 그 회심의 때를 되새기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낮아졌더라면 아마 우리에게 맡겨준 주님의 섬김은 아마 크게 번성하였을 것이고, 많은 영혼들은 더 많이 세움을 입었을 것입니다. 섬김의 원리는 죽음의 원리입니다. 나는 죽고 너희는 사는 것, 나는 포기하고 교회는 섬김을 받는 것, 주님은 내 안에 사시고 나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섬김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 동안 섬기면서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겼던 것을 회개합시다. 한 해 동안 섬기면서 겸손히 낮아지고 좀처럼 사람들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이 맡겨주신 섬김을 그르친 것을 깊이 회개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와서 종처럼 섬기셨던 우리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겸비해지고 또 겸비해지고 겸손해지고 더 겸손해져서 우리는 엎드러지고 주님의 십자가는 세워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눈물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3년 동안 섬긴 자신의 삶을 눈물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비록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의 모든 은사를 한 몸에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그의 고난을 감하여주지 못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먼저 당신의 은혜를 보여주신 후에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력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만난 사람들, 당신의 핏빛 은혜를 한 몸에 받은 사람들을 결코 편안하게 살게 내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일락에 붙이고 자기 즐거움에 빠져서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타락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것은, 자기로 하여금 그 사랑을 알게 하신 것은 이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가신 그 길이 어떤 길이었습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의 백성들은 자기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분을 높이고 사랑하는 대신 자기위해 생명을 주신 분을 죽이고자 하였으니, 그분의 생명은 곧 자신들의 생명이었지만, 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대신 자기를 향하여 살기를 택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죽어도 자신을 향해서는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신 이 예수가 미웠기 때문입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을 섬기되,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섬겼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한 번 죽는다면 그 후에는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전에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을 차례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는 방종하고 더러운 죄인이 차고 넘쳤어도 그렇게 주님의 사랑에 목이 매여 끊임없이 예수처럼 죽은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겼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 설 수가 있었던 겁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사람은 모르지만 주님은 여러분들이 한 해 동안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 한 구석에서 어떻게 주님을 위해 봉사했는지 알고 계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늘에서 받을 상급 중 그 아무것도 사람 때문에 가불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받은 큰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핍박하면 핍박을 당하고 모욕을 주면 모욕을 당하는, 그래서 그의 고백에 따라 그는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고 살 소망까지 끊어진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항상 보이도록 축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전하는데도 거짓인 것처럼 오해를 당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순전하게 주님을 섬기는데도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이 여김을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과 위로 대신 멸시와 모욕을 받게 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로 하여금 작은 성취에 도취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섬김의 길을 가는 동안 예수와 연합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시집을 가서 자녀들에 시달려 고통을 받아본 후에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복과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의 마음을 모르지만 미력이나마 주님을 섬기고자 할 때 고난과 시련이 오고, 감당하고자 할 때 온갖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직분과 섬김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사랑 때문에 그 섬김을 다하려고 애를 많이 쓸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어떻게 섬기셨는지 주님의 그 핏빛 사랑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전수받게 됩니다. 주님의 그 고난의 죽음이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 때 그 죽음은 우리 안의 죄를 죽입니다. 야망과 욕망을 죽게 만듭니다. 주님의 사랑의 은혜 받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을 때에 하나님은 고통의 눈물만 흘리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장 처절한 고통의 순간에 평안한 때에는 맛볼 수 없었던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위로를 우리의 마음 소게 물 붓듯 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고통의 때에 비할 데 없는 희열과 사랑을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몸을 아주 조화롭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활기차게 하는 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엔돌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많이 웃고 행복한 일이 일어나면 몸에서 이런 엔돌핀이 많이 나와서 우리의 몸이 건강을 유지하고 몸과 마음에 즐거운 환희를 얻게 하는 것이죠. 온 몸이 쑤시고 괴로운데 아주 반가운 친구를 만나서 서너 시간 웃고 떠들고 먹고 이야기 하면 씻은 듯 두통이 낫고 온 몸에 활기가 생겨납니다. 성도들의 교제가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요? 혼자 있을 때에는 토요일 밤에도 죽을 것처럼 힘들고 괴로웠는데 주일에 와서 이렇게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나와 똑같이 연약한 지체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승리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간증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영혼의 피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의지가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면 여러분들이 몸도 마음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지요. 이 엔돌핀이 굉장히 중요하고 희귀하여, 동물에서 이것을 얻는데 그것을 얻어내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지금부터 한 15년 전 가격으로 엔돌핀 주사가 한 방에 1200만원씩이나 했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의 일생에서 엔돌핀이 가장 펑펑 쏟아지는 때가 있답니다. 그때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때, 아들이 좋은 대학 들어갔을 때가 아니라 죽는 그 순간에 엔돌핀을 확 쏟아 온 몸에 부어주셔서 고통스런 죽음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그런 섭리로서 온 몸에 엔돌핀이 솟아나게 하셔서 죽음의 고통 보다는 희열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며 고난의 길을 가, 우리 안에 있는 이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의 분부를 따라 우리의 타락한 자아가 죽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기쁨과 영생의 희락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십니다. 만약에 고난과 시련과 아픔만 있었다면 사도도 아마 그 큰 고난의 섬김을 다 봉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 때문에 흘리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 섬기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어도 알 수 없는 그 은밀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쁨으로 고난과 슬픔의 가시밭길을 헤치고 신앙의 길로 나아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신명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IV. 결론
공평하신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여러분들은 우연히 주님을 믿게 되었고, 우연히 이 교회에 왔고, 우연히 은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주님은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한 당신의 영원한 계획과 사랑 안에서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믿게 하시고 은혜 받게 하시고 그리하여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님의 교회에 한 모퉁이라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 여러분을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계획은 만세전부터 있었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을 따라서 사랑하며 순종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섬김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봉사 안에서 여러분들의 믿음은 가장 잘 지켜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세워주신 섬김의 자리 힘들다고 집어치운 사람이, 주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를 걷어치우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훨훨 날아 가버린 사람들이 거기에서 주님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그 자리에서 바람이 불 때나, 비가 올 때나, 눈보라가 몰아칠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나 사람 때문에 섬긴 섬김이 아니라 우리 주님 때문에 시작한 섬김이니 주님의 사랑이 변함없으니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의 모든 인생을 통해 주 홀로 영광 받으시도록 그렇게 섬기는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12/13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2 (2009/12/13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12/20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12/27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5 (2009/12/27 주일오후예배)
4.섬기는 자의 삶 (2)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롬 20:17~19중).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남긴 유언적인 설교 속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는 지난주에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그들 가운데 섬긴 그 섬김을 모든 겸손과 눈물이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그가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 아시아에서 그의 삶이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Ⅱ. 섬김과 시련
여기에서 우리는 섬김과 시련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 시험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시험은 사람을 유혹하여 죄에 빠뜨리게 하는 그런 종류의 시험이라기보다는 고난을 당하는 시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것입니까?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오히려 평안한데, 뜻을 세우고 주님께 봉사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의 삶은 시련이 그칠 날이 없으니 이 어인 일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가 누구이든지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지만, 누구든지 복되기를 사모하고 있고 아무도 시련과 고통을 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믿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지만, 뜻을 세우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시련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시련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할 때에 시련이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 뜻에 어긋난 세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강물이 흐를 때에 그 강물을 따라 흘러가려고 하면 아무 힘들 것이 없지만 그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면 커다란 물의 힘이 느껴지듯이, 우리가 뜻을 세운바 없이 세상의 물결을 따라 살아갈 때에는 그것이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악한 세상에서 선한 뜻을 세우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목표를 가질 때에는 이 세상의 거센 물결과 맞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하는 우리 속에 있는 의도는 선한 것이고 이 세상은 악한 것이니, 선한 뜻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려고 할 때에 그것이 이 세상에는 거침이 되는 것이죠. 그리하여 고난과 시련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애하고 사랑하던 좋은 가족이었는데, 내가 회심하고 참된 기독교인이 되고 난 다음에는 가정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그늘이 없고 행복했는데 아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남편보다 더 사랑하게 되니까 집안에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함께 악을 행하고 죄를 지었을 때에는 친구였던 사람들이, 뜻을 세우고 내가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니까 갈등이 생기고 핍박이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있는 법입니다. 어찌 이런 일들이 세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려고 하면 언제나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진리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진리 때문에 성도가 되었지만, 여러분들이 항상 진리를 좋아합니까? 은혜가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는 진리가 더없이 기쁘고, 그래서 그 진리를 전해주는 목자의 소리가 감미롭지만, 여러분들이 미끄러지고 마음이 부패해지게 되면 마치 동일하게 아름다운 햇빛인데도 눈에 안질이 걸렸을 때 그 햇빛이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주듯이 그 진리가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을 줍니까? 그래서 설교자도 여러분들이 미워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리가 여러분들을 칭찬하고 다독여줄 때에는 좋아하다가 진리가 여러분들을 꾸짖을 때에는 진리를 싫어하죠?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이런 고난과 시련이 넘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한 결 같이 주님을 섬깁니까? 내가 은혜를 받고 주님을 섬겨보려고 하면, 옆의 사람은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내 하는 일에 방해를 놓고 시비를 걸고, 선하고 올바른 뜻을 곡해하여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고통을 끊임없이 주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도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분투할 때에 그렇게 되기 싫은 수많은 힘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무한한 지혜 속에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성취를 인하여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래서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고 그 시련 속에서 괴로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 칼빈 선생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말하기를 “평생 고귀한 맛만을 보는 사람들이 어찌 그리스도를 섬기기에 알맞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청교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세요. 미워서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통을 주셔서 우리가 힘에 넘치는 섬김 속에서도 부패하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참으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거죠. 그 고통을 주실 때 주님이 원하시는 뜻은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저도 직접 가 보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어디서 읽은 이야기인데, 영국은 사면이 다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요. 저 북해도 쪽에서는 아주 싱싱한 생선이 많이 잡힙니다. 그래서 옛날에 거기에 유학 가 있던 어느 목사님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목사님, 우리 동네로 꼭 집회 한 번 오십시오. 북해도에서 나는 싱싱한 연어를 매 끼 한 마리씩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난 별로 좋아하지를 않아요. 그런데 그쪽에서 청어가 많이 잡힌답니다. 그런데 이 청어가 값은 쌉니다.(꼭 비싼 생선이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 청어 좋아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청어가 가시가 굉장히 많은 생선입니다. 가시가 많은 생선이 잔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신경질적인 물고기예요. 그래서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죽어버려요. 자살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싱싱한 청어를 잡아서 수족관에 가득 넣어서 북쪽에서 내려오는데 내려오면 3분의 1은 죽어있는 거예요. 죽으면 사실 반값도 안 되잖아요. 3분의 1도 안 되죠. 살아있는 것 한 마리 천 원이면 죽어있는 것은 댓 마리 해도 천원 될까 말까 해요.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고민을 하다가 바다 메기라는 생선이 있는데, 이게 청어를 그렇게 잘 잡아먹는답니다. 그놈 한 놈을 그 통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한 여덟 시간 걸려서 내려오는데 먹어봐야 지가 몇 마리나 먹겠어요. 그래서 거기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랬더니 이놈이 지 세상을 만난 거지요. 큰 통속에 도시락이 가득 하니까 돌아다니면서 한 마리씩 잡아먹는 거예요. 그러니 그놈의 메기가 돌아다니니, 청어 떼들은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잡아먹으려는 바다 메기와 도망치는 그 속에서 막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스트레스 받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런던에 와 가지고 뚜껑을 딱 여니까 거의 한 마리도 안 죽고 쌩쌩하게 살아있더라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뭘 맡기셨는데 순풍에 돛 단 것처럼 잘 굴러간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망가져 버립니다. 다윗이 얼마나 순결한 사람이었어요? 진짜 오웬 목사님의 가르침대로 구약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잖아요. 평안해지니까 타락하잖아요? 성령으로 시작했던 수많은 인물들, 히스기야, 아삽, 요시야, 이런 훌륭한 임금들이 모두 다 나중에 부패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평안할 때 부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변장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섬기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끊임없이 고난을 주세요. 그 고난을 주실 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괴로워하는 것이에요. 그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또 섬기려고 하나님 앞에 좋은 뜻은 세웠지만 그러나 사실은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기 안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에요. 문제는 우리가 순풍에 돛 단 배 같은 인생을 사느냐, 혹은 파도를 헤치는 고단한 항해를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배가 어디를 향하여 가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시련을 안겨 주세요. 자기의 인격의 부족과 허물 때문에 당할 때도 있지만, 이런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우리를 끝없이 깨어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련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는 것이에요.
사도바울은 온갖 은사를 다 받은 사람이었고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아마 산 자도 죽일 수 있는 능력도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이 능력이 그의 시련을 덜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이 시련을 받게 하시는데, 이런 시련을 받게 하실 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 괴로움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당하신 그 섬김의 고난과 시련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하셔서, 반대로 그 시련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우리 인생의 길을 인도하시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많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평탄하고 좋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고난을, 또 어떤 사람은 저런 고난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들에게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어서 그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더 붙들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원리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겁니다
Ⅲ. 섬기는 자의 삶
사도바울은 이제 섬기는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A. 시련을 참음
첫째는 시련을 참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이 간계는 희랍어 성경에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두 번 간악한 유대인의 꾐에 걸린 것이 아니라 수없이 유대인들의 간악한 꾀가 발동하여 이 바울을 시련과 고난 속에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파하고 있었는데, 부득불 그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라는 곳으로 그 장소를 옮겨야 했던 것도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련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하고 성령의 큰 역사가 있었을 때에 은장색들이 큰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은으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인데, 사람들이 이 은으로 만든 우상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데메드리우스라고 하는 자가 난동을 부려서 큰 핍박을 받았는데, 이것도 역시 뒤에서 유대인들이 조정한 것이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에베소에서의 그 유대인들과의 싸움을 맹수들과의 다툼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지독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는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고백하기를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큰 고난 속에서 이 바울은 끊임없이 이 시련을 참으면서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련은 주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에게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줄 같은 시련입니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하나가,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하나가 끊임없이 끊임없이 다가오게 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저는 어제, 오늘, 어제 밤늦게까지 교회에 있었는데 살아온 인생길을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했을 때에는 뭣도 몰랐지만 그렇게 교회 나가는 게 좋았고 주님 믿는 게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더 깊이 받고 보니까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를 신학교를 가라고 하셨어요. 돈이 없고 집이 가난하고 장가까지 갔으니까 벌어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에 신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니까 먹고 사는 건 어떻게 간신히 먹고 사는데, 문제는 공부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열시 십 분에 학교가 끝나면 마지막 전철이 있을 때까지 도서관에서 매달려 공부를 하다가 내려오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기도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서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그 언덕에 있는 학교를 오르내렸어요. 그래서 일평생 기도제목이 나 좀 시간 좀 많이 주셔서 공부 좀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랬더니 직장을 그만두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시간은 많아졌어요. 그래서 결심을 하고 공부하려고 했더니 교회에서 덤터기를 옴폭 씌우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일이, 교회도 큰 교회라서 분업도 안 되는데, 뭘 하면 그래도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담임목사님은 사랑의 표시로 수없이 일을 맡기시는데, 구역 네 구역, 고등부, 유년주일학교, 청년부, 토요일 날 성도들을 위한 성경공부 두 타임, 그리고 주일날 새벽에는 불 펴야 되고, 매일 새벽기도 불 피워야 되고 교회 청소해야 되고, 하여튼 교회 안에 집이 있었는데 5미터 거리였어요. 그런데 주일날은 새벽에 나와 가지고 밤중에 되기까지 집 문턱에도 올라갈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그 다음에는 이 짐을 짊어주시는 거예요. 그때 받은 훈련이 오늘날 목회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런데 또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 나는 진짜 공부 좀 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신학교 가서 학생들 가르치라고 소명을 주셨는데, 소명을 주셨으면 공부할 시간을 주셔야죠.” 그렇게 눈물로 기도했더니 8년 만에 그 교회를 그만두게 하셨어요. 그리고 이제는 교회 일도 없고 시간도 많은 거예요. 그런데 이번엔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도 공부는 원 없이 했어요. 많이 할 때는 하루에 15시간씩 공부했어요. 그때 공부한 게 오늘날 이렇게 써 먹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는데 집에 돌아오면, 오죽했으면 돌아가신 우리 장모님이 쌀 너 말을 이고 사위 굶어 죽을까봐 올라오셨어요.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 고통을 당하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정말 가난합니다. 이거 어떻게 살 수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영양실조가 걸려가지고 학교에서 몇 번을 넘어졌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졸업을 하자마자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대학교 교수가 되게 해 주셨어요. 첫날 타온 봉급이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은 월급의 열 배였어요. 그러니 이제는 먹고 살 만해졌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다시 또 시간이 없어졌어요. 박사과정 공부하랴, 교수하랴, 그렇게 했는데, 그것도 좀 참을 수 있는데, 가보니까 이거는 신학교 학생들이라고 들어왔는데 태반은 거듭난 인간들이 아니야.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밤중이면 술집에서 싸우다가 걸렸다고 전화가 오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놈들 보면서 또 매일 괴로움을 당하고 울었어요. 내가 개척교회 하고도 그렇게 많이 안 울었어요. 맨 날 교수실에서 혼자 앉아서 훌쩍 거리고 울고, 맨 날 강의 끝나면 저 벽 쪽에 가서 안양 하늘 쳐다보면서 이 인간들이 어떻게 변할까? 나는 이 인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정말 없구나! 그때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어요.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그래서 이제 수업이 끝나면 지하실에 데리고 가서 기도회도 인도하고, 내가 담임교수였으니까 “남아” 그러면 남거든요. 더군다나 나는 4학년 때까지 필수과목으로 만나야 되니까 학생들 사이에 저 김 교수한테 걸리면 졸업 못한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찬송 몇 장 부르고 설교하고 “기도하자” 그러면 막 울음바다가 되는 거예요. 그 의자에서 내려와서. 그러면 뭐해요? 그 다음날 또 사고 치는데.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학교도 정리하게 되고,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어요. 시간도 있고, 학교는 계속 다니니까 먹고 사는 것도 염려가 없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 교회를 하고 나니까 이젠 교회에 일생동안에 만난 사람들보다 훨씬 강적들을 하나님이 보내 주세요. 학교야 퇴근이 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걸린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또 성도들이 모이질 않고, 지하실교회에서 영혼들을 보내달라고 마음고생을 하니까 보내주시기는 보내주시는데, 다 예수 안 믿으면 절대 안 될 사람들만 보내 주세요. 예수 안 믿으면 절대 안 될 사람들이니 오죽한 사람들이겠어요? 여러분들이나, 나나? 그러고 보니까 은혜를 받으면 좋은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그 옛날 본성들이 다 나와요. 그래서 힘들어요. 고생했어요. 좀 더 할까요? 성도들이 안 모여서 기도하니까 성도들이 모였어요. 성도들이 모이니까 이번에는 교회를 옮겨야 되는 문제가 생겨요. 또 교회를 짓느라고 고생하면서 눈물을 흘려요. 성도들도 고생을 많이 하고. 가만 돌아보니까 지금까지도 계속 되요. 형태는 달랐지만, 이것 주신 다음에 훈련되면 돈은 주시고 시간은 없게 하시고, 또 훈련되면 시간은 주시고 돈은 주시되 사람들로 인해 고통 받게 하시고, 또 훈련되면 사람도 괜찮게 하시되 또 다른 고난이 있게 하시고, 그러다가 모든 것들이 평안할 때는 내 속에서 반란이 일어나가지고 내가 나를 견디기 힘들어 하는 거예요. 이런 시련이 끊임없이 계속 되는데 이게 어떻게 나만의 일이겠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시련과 고통이 계속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살았던 그 3년의 생활을 시련을 참은 생활이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자꾸 자기를 사도라고 불렀다는데 증인이 있으면 대 봐. 이렇게 사도직을 의심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거예요. 그때 사도가 “나 사도가 맞거든. 내가 사도라는 표가 있다, 내가 사도라는 증거가 있다.”라고 하면서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이 "참음과” 이것이 첫 번째 언급한 거예요. 그리고 이적이 두 번째 나와요. “내가 주님이 세운 사돈인데 의심이 드냐? 그럼 내가 증거를 보여줄게.” 그러면서 보여준 게 이적을 일으킨 게 아니라 참잖아요. 내가 진짜 사도가 아니라면 참을 수가 있었겠어? 그런데 주님이 불러주신 사도이기 때문에 내가 견디잖아. 오래 참잖아. 그러니까 내가 사도가 맞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이 참음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고통이요, 화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1695년 어느 청교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 지혜가 무한하시고 선하심이 비길 데가 없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습니다. 많은 어려움들이 사방으로 우리를 우겨 쌓습니다. 우리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처럼 우리의 십자가도 그렇게 하나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내려오는 십자가는 보통 하나의 십자가는 다른 것의 발뒤꿈치를 밟고 연이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장마철의 비처럼, 한 차례의 비가 그치자마자 또 다른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십자가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모든 고통이 처형이 아니고, 모든 징계가 저주가 아닌 것은 참으로 자비입니다. 그러나 우린 고통이 심할수록 우리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타오르게 됩니다.”
뉘 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십자가가 다 있잖아요. 이 십자가는 두 종류로 나뉩니다. 원래 이 십자가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성숙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괴로움과 고난들을 통칭하여 십자가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 십자가는 둘로 나뉘어요. 하나는 절대적인 십자가예요. 자기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만 당하는 고난이에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살려고 했는데 사람들에게 모함을 당하는 것, 이런 것들이죠. 진리를 가르쳤는데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 이것도 절대적인 십자가예요. 그만 못한 십자가가 또 하나 있어요. 상대적인 십자가예요. 왜? 제 성질에 못 이겨서 괴로워하는 것, 이게 상대적 십자가의 대표적인 것이에요. 그 다음에 나쁜 짓을 했는데, 그게 휙 던졌는데 그게 부메랑처럼 빙 돌아와서 결국 쓰디쓴 열매가 자기에게 맺혀지게 돼서 당하는 고난이에요. 그런 것들이 바로 상대적인 십자가에요. 그런데 이런 십자가를 우리들이 짊어질 때 하나님 앞에 올바른 태도로 이 십자가를 지기만 하면, 그것이 절대적인 십자가이든지 상대적인 십자가이든지간에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는 동안에 주님을 많이 닮게 만들어주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십자가를 질 때에 임마누엘의 위로를 주시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다 십자가가 있잖아요. 제게도 있고, 여러분들에게도 있고.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혼자만 이 십자가를 지독히 지고 간다는 느낌이 들더래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더랍니다. “하나님, 제가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왜 나만 이렇게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까? 정말 불공평하십니다.” 그랬더니 그날 밤에 천사가 꿈에 나타났더래요. 그래서 자기를 데리고 천국으로 올라갔더래요. 그러더니 월드컵 경기장보다도 더 큰 방을 보여주더래요. 창고죠, 창고. 그런데 수십억 개의 십자가가 매달려 있는 창고로 자기를 데려가더래요. “네 십자가가 힘들다고 그러니까 그거 여기다 벗어놓고 네 맘에 맞는 십자가 한 번 골라봐라.” 그러더래요. 이 사람은 정말 원하던 바였으니까 그걸 팽개치고 골라본 거예요. 자기가 매던 십자가가 너무 커서 이번에는 작은 걸 한 번 골라본 거예요. 찾으니까 딱 맞는 게 있는 거예요. “이거 진짜 좋다. 나 이걸로 바꿔 주세요.” 그러니까 “그래라. 그런데 금방 가져가지 말고 좀 걸어본 다음에 진짜 맞는지 실험을 해 보아라.” 그래서 지었더니 전엔 땅에 질질 끌려서 괴로웠는데 가뿐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만하면 됐지. 이런 거라면 내가 두 개라도 지겠다.” 하고 막 걸어본 거예요. 그런데 이게 나무가 박달이라나? 엄청 무거운 거예요. 조그만 게. 어깨가 부셔지겠는 거예요. 그래서 와서 “아, 이거는 작아서 간편하긴 한데 무게가 돌덩어리처럼 무거운데, 이거 말고 가벼운 것 좀 달라.” 그래가지고 무거운 것을 팽개치고 돌아다니면서 골랐는데, 이거는 무슨 나무인지 가뿐한 거예요. 그래서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이 아니라 십자가 지고 뛰어보자 팔짝 할 정도로 진짜 가벼운 거예요. 이걸 지겠다고 했더니 천사가 좀 더 걸어보라고 해서 신발가게에서 신발신고 걸어보는 사람처럼 걸어본 거예요. 그랬더니 길이가 너무 길어요. 방향전환을 할 때는 벽에 꼭 부딪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아닌가 싶어 집어치우고 깨달은 게 있어요. 십자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렇다. 작고 가벼우면 되겠구나! 그러고 나서 온 방을 헤매며 작고 가벼운 것을 찾은 거예요. 드디어 짤막하면서도 가뿐한 걸 찾은 거예요. “이겁니다. 지고 내려가겠습니다.” 그랬더니 검사를 한 번 해 보라고 하는데 검사는 무슨 검사냐고 그냥 내려가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 번 검사해 보라고. 그런데 가볍고 자그마해서 정말 간편하게 십자가를 질 수 있어서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데 한참 지고 났더니 이상하게 등이 아픈 거예요. 알고 봤더니 그 나무 십자가에 중간에 등뼈에 부딪히게끔 옹이가 하나 튀어나온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또 아니에요. 그래서 어디를 걷다 보니까 진짜 안성맞춤의 십자가를 탁 만난 거예요. “야, 이건 무게도 딱 맞다. 이걸 지고 가겠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일평생 네가 지고 온 거다.”
뉘 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래서 남 쳐다보면서 ‘저 사람 좋겠지.’ 하는 사람은 제 십자가 벗어놓고 그렇게 헤매면서 남의 십자가 찾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마지막에 제 십자가 짊어지는 겁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사명은 절대적인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셨고, 나에게 이 짐을 지워주셔서 걷는 것이지, 가볍기 때문에, 좋기 때문에, 폼 나기 때문에, 내 맘에 들기 때문에, 그래서 지는 것 아니에요. 시련을 참읍시다. 오래 참으면서 섬기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주님도 그렇게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도 때로는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면서 견디셨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의 핍박과 저주들을 받으셨고, 자기가 지극히 아끼는 제자들로부터 배신도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모두 참으시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더 많이 사랑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참으세요.
B. 주를 섬김
두 번째는 “주를 섬긴 것과” 그랬습니다. 참는 것으로 모두 끝났다면 자랑할 것이 없겠죠? 참는 것은 섬기기 위한 조건이었을 뿐입니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폭약을 나르고, 주먹밥을 만들어대고, 참호를 파고, 추위를 견디며 보초를 서는 것은 그냥 견디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말만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한 해 동안 주님을 온 맘을 다해 섬겼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섬김이 사람 때문에 시작한 섬김이었다면, 그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 섬기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 때문에 섬김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섬김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사람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일 리가 없죠.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 때문에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시련과 고난을 참으면서도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가야 합니다. 섬기고 싶을 때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싫을 때도 섬겨야 하고, 섬길 수 있을 때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할 수 없을 때도 그리고 봉사하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때에도 끊임없이 주님을 섬기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VI. 결론
하늘나라에 가면 생명책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거기에 기록되어 있겠죠. 그러나 어찌 생명책만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살아 온 발자취도 기록이 되어 있을 거예요. 성경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영적인 군사로 묘사를 해요.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하늘의 주관자들과 어둠의 영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사도바울은 남자답게 굳세어 강건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디모데서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라고 불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양으로만 아니라,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이 세상과 끊임없이 마주하며 전투하는 거룩한 군인, 용사들로 우리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병적부가 있어요. 그 병적부에는 여러분들이 교회생활을 어떻게 하고 살아왔는지 샅샅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님이 교회에 보내주셔서 사명을 맡겨 주셨으면, 마음을 다해서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고, 여기는 전진기지에요. 여기서 주일에 탄약과 총탄을 배급받고 애국심을 충만하게 채워서 밖에 나가서 가정이라는 전쟁터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믿음의 싸움을 신실하게 싸워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러다가는 돌아와서 떨어진 탄약도 충전 받고, 식은 애국심도 다시 보충하고, 하늘나라에서 주어진 새로운 병기들과 최신 무기들을 공급받아서(다다음주에도 최신 무기가 공급되잖아요. 사경회 때. 왜 웃어요? 그래서 담임 목사의 서재는 무기 제조창이에요.) 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병적 기록부를 한 번 보란 말이에요. 1982년 3월 1일 회심함으로 하늘나라 군대에 입대하였음. 그리하여 서울에 있는 아무아무 동네에 있는 무슨 교회에 배속됨. 두 달 후 탈영했음. 그러다 붙잡혀서 다시 두 번째 교회인 강남의 아무아무 교회에 배치되었음. 육 개월 동안 훈련 잘 받다가 또다시 탈영하였음. 그래가지고 병적 기록부를 보니까 입대, 그 다음에는 탈영, 체포, 탈영, 체포, 탈영, 체포, 그러다 죽었음. 그게 뭡니까? 나는 열린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탈영기록이나 남겨놓는 그 한 장소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싸워야죠. 예수 믿고 나서 한 게 뭐 있어요? 한 번이라도 제대로 살아본 적 있어요? 그리고 무위도식하면서 인생을 살아서 뭐 하겠어요? 그런데 저기 어떤 사람들은 말이지, 회심함으로 어느 어느 교회에 입대하였음. 이 얼마나 멋있어요? 1998년 1월 둘째 주 신년사경회, 열린 교회에서 회심함으로 입대하였음. 그곳에서 죽기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음. 하늘나라에 갔음. 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렇게 싸우는 동안에 배속된 부대는 수없이 나오죠. 초등부에서 중등부로, 중등부에서 구역장으로, 구역장에서 선교회로 왔다 갔다 했지만, 온 마음을 다해서 싸우고 주님을 섬기는 거예요. 이 벌레 같은 날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그리며, 살아있는 날 동안에 조국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섬기기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아무도 모르는 시련을 참으면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서 사는 거예요. 세상에서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으나 그것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고난과 시련이 넘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위로는 이것보다 더 크다고 믿으면서 씩씩하게, 기왕에 전투지에 서 있는 거, 온 마음을 다해서 대장 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다가 주님의 나라에 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충성스러운 종의 삶 1 (2009/12/13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2 (2009/12/13 주일오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3 (2009/12/20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4 (2009/12/27 주일오전예배)
충성스러운 종의 삶 5 (2009/12/27 주일오후예배)
5.변함없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다”(단6:10).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6:19-20).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주 유명한 본문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다리오왕 시대때 큰 핍박을 받는 위기에 놓였습니다. 어느 세계이든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다리오왕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도 아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를 신격화 하며 우리가 뭐든지 임금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덕으로 사는데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하고 간구를 하면 이것은 왕에 대한 모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해 주십시요? 왕은 생각 없이 쉽게 고칠 수 없는 그 규칙을 따라서 거기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니엘을 제거 하고자 하는 정치적 대적자들이 다니엘에게 어떤 흠을 찿기 위해서 뒷조사를 모두 해 보았지만 그는 마음이 민첩하고 뛰어난 사람이고 정직했기 때문에 아무 허물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국회에서 인사 청문회 하는 것을 보니까 이사람 저사람이 나오는데 그렇게까지 망신을 당하면서 감투를 쓰려는지 온갖 과거사가 다 나오고 누구는 또 그 사람의 옛날 애인이라고 하고 애를 낳았다고 튀어 나오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청문회에 나왔는데 위원들이 샅샅이 조사를 했는데 물어 볼 것이 없었습니다. 과태료 2번 이외에는 아무리 수색을 해도 잘못한 것이 나오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물어 볼 것이 없으니까 앞으로 맡겨 주면 어떻게 하겠소? 라고 하니까 잘 하겠습니다. 그래서 끝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싱거운 청문회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 다니엘이 그런 사람이었던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랬는데 이 다니엘이 이 사람의 음모를 모를리가 없습니다. 정치적 명운이 달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다니엘이 이 무서운 조서에 왕의 어인이 찍힌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 가서는 전에 행하던 그대로 하루에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전에 행하던 대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두가지 변화를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는 환경의 변화, 또 하나는 마음의 변화 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가난하고 주님이 은혜를 사모하였을 때에는 그 말씀이 그렇게 달고 주님을 위해 자기가 지는 십자가가 무겁지 않았고 주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사용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격하고 아주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부패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 났기 때문에 가볍던 짐도 무거워지고 그리고 힘들었던 순간들은 더 많이 힘들게 되는것 아니겠습니까? 이것뿐이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교회 청년들이 한때는 장년보다 많았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상 청년들을 공격을 많이 했는데 나는 너희들 신앙을 묻지 않는다. 엊그제 어느 자매가 와서 목사님 제가 옛날에 청년일 때 아이 둘을 낳아 보기 전에는 너희들 신앙을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제가 이제 아이가 둘 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렵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딸린것이 없고 젊은 나이에 자유로울 때는 그저 작은 힘으로도 주님 섬길 수 있고 봉사할 수 있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숨좀 돌린만해서 아이 하나를 더 낳아서 엎친데 덮친데 되었을 때 그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생활이 그것이 그 사람의 원래 신앙입니다. 이따금 새벽에 그 아이를 엎고 와서 기도하는 자매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얼마나 사모함이 있으면 그 아이를 엎고 와서 이렇게 아이를 어르면서 기도 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향해 변함이 없으신데 우리는 너무 잘 변합니다. 그런데 오늘 다니엘은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번씩 무릎을 꿇고 열린 창에서...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 같으면 그렇게 비바람 부는 핍박이 생기면 문이라도 좀... 문을 열어 놓아야지만 주님이 들으십니까? 주님이 하늘에서 귀가 멀으셨습니까? 전에 행하던 그대로 문을 열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다니엘은 비록 한 나라의 총리로 살아 가지만 이것은 껍질일 뿐이고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고 자기가 섬기는 진정한 주인은 다리오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니엘은 붙잡혀서 사자굴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리오 왕이 아차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분들은 왕이 금을 탐내고 그 다음에 말을 탐내고 그럴것 같죠? 영토를 탐내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임금은 그것 보다 더 탐내는 것이 있습니다. 충성스런 인재를 탐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복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교역자로서 좋은 자질을 갗춘 청년들과 신학생들이 교회에 층이 두텁습니다. 그래서 늘 다른곳에 사역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기도해 주면서 늘 미안합니다. 교회가 규모가 크면 다 데리고 소신껏 일해 보게 할텐데... 옛날에 그런 일꾼들이 별로 없고 교회가 갑자기 컷을 때 그때는 교회 주일학교 부서 하나만 생겨 나면 몇일 동안 밤잠을 못자고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혼이 달린 문제 입니다. 그거야 와서 일하겠냐고 하면 열린교회에 굳이 싫다고 안 올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와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좋아 하지만 나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 했으면 제가 우리 교역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정말 우리교회 정신과 부합하도록 이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볼 사람이 있다면 그가 비록 주일학교를 가르치는 교역전도사라도 내가 미국에 가서 면접을 할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사비용 다 대주고 데려올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에 비할 수 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 한 사람을 미국에 청한적이 있습니다. 이사비용 다 대줄테니 우리 교회 전도사로 올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여러가지 계획이 있으니까 무산이 됐지만 어쨎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왕의 입장에서는 그 어마어마하게 넓은 나라를 다스리는 더군다나 마음이 민첩하고 뛰어나서 그렇게 나라를 잘 다스렸던 자기 입의 혀 같이 움직이면서 다스려 주었던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 넣게 되고 그것을 알았을 때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도 그것을 고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이튿날 왕이 새벽에 일어 났다고 했습니다. 왕이 새벽에 청소 할 일이 있겠습니까? 새벽에 일어난 것은 아마 다니엘이 너무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자굴로 달려 가서 가까이 이르러서는 다니엘을 불렀는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슬프게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왕이 얼마나 사랑하고 인정했으면 다니엘아! 라고 했습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사실 마음이 뭉클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도 중요 하지만 사람에게 인정 받는 것도 얼마나 중요 할까? 과연 나는 목사이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 당신은 하나님의 종 입니다 더욱이 당신은 항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성도들이 볼 때 목사님은 우리들을 섬깁니다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봉사하지만 사실은 하나님만 섬기셨던 분입니다. 이렇게 인정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이 짧은 호칭이 여러가지 진리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선 다니엘의 정체성이 다리오 임금에게는 하나님의 종 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샘 나는 일 입니까? 자기의 종이 되어야 하는데 오랜 세월 이 다니엘을 거느려 보니까 틀림없이 일 하고 왕국을 위해서 훌륭한 엘리트로서 봉사하고 있지만 그가 마음속으로 진정으로 섬기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때문이었을까요? 여기서 종이라는 단어 에베드는 히브리어로 노예 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아바드라는 동사에서 에베드가 나왔는데 아바드가 섬기다입니다. 그러니까 다리오 왕의 눈에 다니엘은 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체의 부정없이 올바르게 국사를 처리하면서 왕국에 큰 유익을 펼쳤지만 왕국을 위해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애처롭게도 이 왕은 나의 종 다니엘아 라고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 감격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는 다리오 왕이 그 하나님을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묘사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니엘의 생애를 지켜 보니까 자기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없는데 다니엘의 삶을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서서 그와 함께 동행하며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몰랐지만 다니엘을 알았기 때문에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다리오 왕 앞에 살아 있는 하나님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묘미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갈 때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의 편에 서십니다. 말 많고 섬기지 않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말 없이 희생하며 섬기는 사람의 편에 서십니다. 그래서 기적과 같은 일을 하나님이 행해 주셔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저 사람은 하나님이 동행 하시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나중에 오셨기 때문에 여기의 역사에 대해 이해가 없으시지만 교회의 이 땅을 살 때에도 저는 그런 사시는 하나님을 경험 했습니다. 땅을 보러 돌아 다니니까 부동산 업자들은 우리가 어마어마한 부자인줄 알고 비상이 걸렸는데 사실은 통장에 1,500만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를 붙들어서 계약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이 70년대에 가발공장 하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은 썩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3층에 사람이 많이 올라가는 것을 싫어 합니다. 이 가발공장을 운영하던 장로님이 80이 넘어 사업을 접고 이것을 우리에게 파신 것입니다. 내버려 두면 계속 오르는 땅인데 우리가 교회를 하겠다고 하니까 마음이 바뀌어서 그러면 팔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 분께 감사합니다. 그 분이 나중에서야 회고를 하는데 그분이 26살에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단합니다. 그것이 사이비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으면 우리들이 그럴수도 있겠다고 하는데 한경직 목사님이 안수를 해서 장로가 되셨고 한경직 목사님이 여기에 와서 1년6개월동안 매주일 직원들을 위해서 성경 공부를 하셨다고 합니다.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그러면 돈을 주어야지 땅을 인수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가격은 그렇게 되었는데 계약금을 3억을 달라고 하는데 죽어도 3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기도하면서 괴로워 했더니 성도중 누가 3억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쨎든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중도금이 문제입니다. 돈이 있어야지요... 부랴부랴 헌금을 했는데 그 헌금이야 나와야 나오는것 아닙니까? 천천히 천천히 들어 오는데 돈은 빨리 빨리 달라고 하니까 그래서 이제 우리 일꾼들을 보내서 교회 사정이 이렇다고 솔직히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 났는데 사업 하는 분들은 그런 점에서 일체 없습니다. 그런데 돈을 5억밖에 안 주었는데 인감도장하고 집 문서를 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나쁘게 먹으면 우리가 도장 찍어서 우리가 돈 다 주었다고 하고 가져가도 할말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우리는 이 까다로운 거래를 해서 사기를 당하지 말아야지 하고 변호사까지 동원해서 깨알같이 써서 계약서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랬더니 교회가 원하는 대로 교회가 좋은대로 하십시요. 교회를 짖는다는데... 이것 회장님 읽어 보시고 했더니... 뭘 읽어 봅니까? 교회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요. 자 찍으십시요. 그래서 우리가 찍었습니다. 그리고 돈 없으시죠? 예. 제가 집문서하고 땅문서 그리고 도장 넘겨 줄 테니까 이것 가지고 가서 명의이전부터 하십시요. 그래서 여기 39억짜리 땅을 돈 5억을 주었는데 명의이전 해 주었습니다. 명의이전을 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대출을 받아서 그 돈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해 줍니까? 어림 없습니다. 저는 제가 교회를 팔아도 절대 그렇게 안 해 줍니다. 내가 왜 그것을 해 줍니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리고 저녁에 교회에 들어 왔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더 사랑하시는 구나? 그래서 사실은 여기 부서진 터에 모여서 성도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보면 그때 기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목수가 여기에 와서 일 했는데... 한창 많을때 15명씩 와서 일 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하는데 이 사람들이 살 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애정이 있읍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처음에 젊쟎게 대해 주었더니 이 사람들이 멋대로 입니다. 그래서 양복 벗어 던지고 철모 쓰고 군화 신고 지휘봉 들고 나타났습니다. 노가다 십장처럼 막대기를 들고... 그러다가 그 사람이 한번 지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마당에서 생애 최로로 혼났습니다. 15분 지각해서... 그리고나서 친해 졌습니다. 그리고 일 못하면 나에게 야단을 맞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에수 안 믿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녁에 야근을 할때 이쪽에서는 공사를 하는데 성도들이 와서 거기에 서서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아주 애절하게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제가 하나님을 안 믿지만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잘 해 주고 떠나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충심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도와 주십니다. 다니엘의 생애에서 다리오가 이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다리오는 하나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이번에는 다니엘에 대한 평가를 덧 붙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항상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총리는 껍데기 였습니다. 그 껍데기를 쓰고 그는 충심으로 하나님을 항상 섬겼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때나 낮은 지위에 있을 때나 국사에 바쁠때나 여유가 있을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아니면 핍박을 받지 않을 때나 변함없이 전에 행하던 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사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도록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충성스러운 종의 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