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이 의무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그리스도의 탁월성(卓越性) (골1:16) 2008.1.14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그리스도의 인격(人格)의 탁월성 (골1:16) 2008.1.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5
3. 성육신, 구원의 지혜와 능력 (고전1:24) 2008.1.16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9
4. 그리스도, 믿음의 대상 (히 12:2) 2008.1.17 새해말씀사경회(저녁) 44
5. 십자가 은혜의 회복 (벧전 2:24) 2008.1.18 새해말씀사경회(저녁) 62
6.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 (요일 4:10) 2008.1.20 주일오전 77
7.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 (히 7:25) 2008.1.27 주일오전 89
8. 교회의 모든 필요와 유일한 보고(寶庫)이신 그리스도 (엡 1:23) 2008.2.3 주일오전 99
9.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 (행 5:31) 2008.2.10 주일오전 110
10. 진리의 보고(寶庫)이신 그리스도 (요 14:6) 2008.2.17 주일오전 128
11.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창조와 구속에서 (엡 1:10) 2008.2.24 주일오전 140
12.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완성과 영원에서 (계 21:11) 2008.3.2 주일오전 149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 그리스도의 탁월성(卓越性) (골1:16)
I. 세계와 그리스도
II.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
A. 부활이전 1. 자원하신 낮아지심
2.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심
3. 죽으시기 위함
B. 부활이후 1. 부활체의 영광
2. 인성의 은혜 제거
III. 율법과 죄 아래 오심
1. 창조 목적을 보여주심
2. 율법(律法)의 요구를 감당하심
3. 죄악(罪惡)세상을 사는 자녀를 위함
2. 그리스도의 인격(人格)의 탁월성 (골1:16)
I.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결합
II. 영혼(靈魂)의 탁월성
A. 지성
B. 능력 - 인간:성령, 그리스도:신적본질+성령
C. 사랑
III. 성육신하신 목적 : 창조 목적의 회복
1. 돌아가게 함
2. 정향의 삶을 위한 능력
IV. 성육신하신 이유(理由)
A. 죽으시기 위함 1. 배상
2. 생명(生命)
B. 모본(模本)을 보이심
1. 하나님 : 사랑, 지혜, 능력
2. 인간 : 사랑, 순종
3. 성육신, 구원의 지혜와 능력 (고전1:24)
I. 하나님의 지혜(知慧)와 능력(能力)
A. 창조에서
B. 구원에서
II. 성육신, 인성(人性)과 신성(神性)dml 만남
A. 영광과 겸비
B. 위엄과 온유
C. 통치와 섬김
D. 자족과 의존
III. 구원의 근거가 되심
A. 용서를 위한 속전
B. 생명과 사랑의 전달
IV. 그리스도께 돌아오라
4. 그리스도, 믿음의 대상 (히 12:2)
I.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A. 믿음의 본질(本質)
1. 구원의 타(他)길 포기
2. 의지의 동의
3. 마음의 인정(認定)
4. 절대의존(絶對依存)
B. 믿음의 대상(對象)
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2. 성경
a. 율법
b. 복음
II. 그리스도 믿음의 유익(有益)
A. 율법으로부터 구속
B. 죄로부터 구속
1. 신분의 자유
2. 상태의 자유
C. 하나님과의 교통(交通)
D. 그리스도를 닮음
E. 창조목적을 따라 살아감
5. 십자가 은혜의 회복 (벧전 2:24)
I. 회심치 않은 자에 대한 경고
A.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라
B.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생각하라
C. 끊임없는 부르심을 생각하라
II. 회심한 자에 대한 부르심
A. 은혜로부터의 부패
1.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의 상실
2. 은혜의 지배로부터 멀어짐
a.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림
b. 은혜의 방편의 미각을 상실함
c. 자기사항으로 고립굄
B. 부패로부터의 회복
1. 영혼의 상태를 성찰함
2. 믿음을 가짐
a. 치루신 죄값을 기억함
b. 베푸실 사랑을 기대함
3. 그리스도께 마음을 고정함
a. 마음의 나뉨을 겨계함
b. 은혜의 불씨를 유지함
c. 환경과 자신에 경성함
III. 그리스도께 순종함
6.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 (요일 4:10)
I.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
A. 성부의 사랑에서 비롯됨
B. 성부의 사아의 목적을 실현함
II.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길
A. 그리스도를 생각함
B. 성품과 사역을 묵상함
C. 그리스도께 순종함
III.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살아가자
7.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 (히 7:25)
I.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A. 하나님 사랑이 동기임
B.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킴
II. 구원의 근거이신 그리스도
III. 그리스도의 사역
A. 영원하신 중보자직
B. 간구하심
8. 교회의 모든 필요와
유일한 보고(寶庫)이신 그리스도 (엡 1:23)
I. 창조와 신적 상호교통
II. 구속과 신적 상호교통
A. 구속의 목적
B. 교회의 모든 필요의 유일한 보고
C. 성령을 통해 생명을 주심
1. 택한 자들을 살리심
2. 끊임없는 생명의 역사
III. 그리스도로 충만케 됨
9.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 (행 5:31)
I. 하나님과 세계
A.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
B. 하나님이 아닌 세계
II.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A.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적 생명
1. 창조시 : 영적 생명 안에서
2. 타락후 : 영적 생명 밖에서
B. 구원하시는 삼위하나님
1. 성부의 사랑
2. 성자의 희생
3. 성령의 은혜
III. 인간의 회심과 그리스도
A. 회심하게 하심
B. 접붙이시는 그리스도
IV.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음
10. 진리의 보고(寶庫)이신 그리스도 (요 14:6)
I.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A. 하나님 자신
B. 하나님의 뜻
II. 진리의 영광
A. 진리의 빛 : 참 빛이신 그리스도
B. 진리의 영향력 : 주를 닮아감
1. 생명과 사랑으로 교통하게 함
2. 지식과 의무로 돌아가게 함
III. 복음진리와 그리스도
11.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창조와 구속에서 (엡 1:10)
I. 창조, 처음 머리되심
A. 창조의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B. 한 몸으로 창조된 세계
II. 구속, 교회의 머리되심
A. 인간의 타락과 상호교통의 단절
1. 두 가족 : 천상천사와 지상인간
2. 두 세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B. 타락한 세계를 보호하심
1. 죄로 타락한 두 세계
2. 천사는 거절당하고 인간은 선택됨
C.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
12.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완성과 영원에서 (계 21:11)
I. 완성, 다시 머리되심
A. 두 세계를 통일하심
1. 인간구속의 완성을 통해
2.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
B, 창조의 영광을 회복함
1. 만물의 상호교통과 영광
2. 타락과 파멸로부터 보호하심
II. 영원, 영광의 무한한 증진
A. 점증하는 영광
B.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C. 자신을 교통하시는 하나님
III. 성도의 영원한 보락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1.그리스도의 탁월성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6)
I. 세계와 그리스도
우리가 믿는 이 종교를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좀 이상하다. 라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으십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낳으시고 또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에게서는 성령께서 나오셨는데 그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교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교라고 했을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면 참 당연한 것입니다.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사경회에서 그런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그리고 생전처음 들어보는 내용 보좌, 주관, 정사, 권세.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 이건 뭐에요? 이건 천사들의 별명입니다. 천사들의 등급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제일 먼저 왜 우리들이 믿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말하는가? 라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지금 이 이야기가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을 인생 안에서 풀어 보려고 하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를 중심으로 해결책을 찾고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세상에서도 도움을 얻지마는 혹시 신앙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신앙의 세계를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의 세계는 좀처럼 열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지만 야 정말 이 사람은 종교인이구나! 야 이 사람은 뭔가 이 세계와 인간과 모든 것에 대해서 아주 뚜렷하게 알고 있고 그래서 인간이 가야할 바를 확실하게 알고 있구나! 그래서 이 사람은 과연 정말 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구나! 하는 사람을 만나본적이 있는지 한번 묻고 싶어요. 오늘도 제가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현실이 그것 이죠 교회를 5년이나 10년씩 다녀서 교회의 상당한 직분이 되었는데도 이 기독교가 왜 그리스도교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리고 이 신앙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해 그리고 교회를 기웃거리며 인생의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도움을 받아보려고 해요.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나가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셔서 부자가 되었더라는 간증을 듣고 그걸 받은 사람은 뻐기고 그걸 못 받은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받은 가망성이 없는 사람은 시기심을 내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엉터리처럼 엉켜있어서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고 그 사람은 또 그렇게 믿고 그러니까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기독교의 그리스도교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혼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대답이 오늘날처럼 이렇게 아주 혼돈한 시대에 살아가면서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이것은 우리가 머릿속에서만 생각하는 공상적인 일이 아니라 사실은 이 기독교 그리스도교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데서 우리의 모든 삶의 지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지난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처음부터 하나님 믿고 싶어서 교회 문을 두드린 사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살다가 살다가 살수가 없고 괴로우니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도를 받았을 때 그럼 한번 하나님이라도 믿어볼까 하고 나갔지요? 그럴 때 여러분이 하나님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까? 자기 좀 어떻게 살아 보려고 교회 나왔지요? 그랬더니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세상에서 부자 되는 비결, 권세 잡는 비결, 그리고 줄서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행복했습니까? 아니죠! 오니까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계셨는데 4대성인중 한분인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게 도대체 오늘 내가 빚더미에서 허덕거리고 직장이 없어서 구직의 대열에 서있고 가족적으로 관계가 깨뜨려져서 고통을 받고 나의 성품의 못됨으로 인해서 내가 괴로움을 당하는 나의 각박한 이 현실과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그리스도 4대성인중 한사람의 죽임이 뭔 상관이 있냐 말입니다. 처음에는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여겨지죠. 그런데 신기하게 거기에 인생의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깨닫고 나니까 신기하게 이제까지 내가 교회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교.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왜 이것이 그리스도교인가에 대한 이해가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삼위하나님이 계신데 성령교도 아니고 아버지교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그리스도교냐 그것입니다! 이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셔요.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할 계획을 당신의 지혜 속에서 가지고 계셔요. 그래서 이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그 다음에 아들이신 성자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령 안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것을 아버지 혼자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아들을 통해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얘기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 사랑과 능력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 내려옴으로써 이 세계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셔서 창조된 이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된 이 모든 세계는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붙들고 계시면서 모든 만물들이 각기 자기의 고유한 존재를 유지하고 또 풀은 풀대로 꽃은 꽃대로 그리고 새는 새 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각자 자기의 존재에 알맞도록 작용을 하면서 그러면서 이 세계를 엮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은 이 모든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리고는 그리스도만이 이 창조 세계 속에 드러나게 하셨기 때문에 이 성부와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내려오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아름다운 섬김, 예배, 헌신, 봉사, 기도 이 모든 것들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려오고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도 사실은 그것이 이미 우리가 죄인이고 더럽혀진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받으실 정도로 정결한 것은 되지 못해요. 심지어 우리의 아주 따뜻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서 하나님아버지께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 위로, 위로부터 아래로, 더듬어 올라가고 더듬어 내려오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안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흔적이 묻어있겠죠?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들이 아름다운 문화유산이나 유적 커다란 건물을 보면 그 건물을 지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어도 오랜 역사가 흘렀어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예술작품이나 건물들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게 되듯이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는 하나님이 그것을 지으셨다고 하는 표가 다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는 아주 희미한 표야! 더욱이 우리의 이 눈이 어두워서 그것을 명확하게 보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 모든 창조 세계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아놓은 정수입니다. 성경은 그 아름다움이 모여 있는 것이고 이 모든 창조세계는 그 아름다움의 가루들이 흩뿌려 있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하면 아주 기가 막힌 비유가 생각나네요.
(비유: 꿀벌들이 수천마리 수만 마리가 날아가서 꿀을 따오잖아요. 따다가 그것을 밀랍으로 벌집을 만들고 거기다가 계속 저장을 하잖아요. 양봉업자를 위해서 저장을 하잖아요. 그 꿀통에 가득 담겨있는 그 꿀을 성경이라고 한다면 그 꽃에 흩어져있는 벌들이 따오려고 하는 그 꿀은 이 자연의 세계 속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그러니까 흩어져있는 이 자연의 모든 세계를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수집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신 것이 너무 아름답다 이렇게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제일먼저 그런 것은 눈에 안 띄고 몰라도 이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왜 이 상에 오셨고 우리를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될 때에 눈이 띄어지면서 꿀통에 있는 꿀을 맛보고 나게 되니까 그 다음에 눈이 띠어져서 꽃송이 송이송이 수많은 꽃송이 속에 들어있는 그 꿀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는 벌처럼 그렇게 창조의 모든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깨달으면서 이 창조세계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이 한분을 통해서 이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시란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행하신 구원, 이 세상을 향해서 베푸신 그 자비와 사랑을 우리들이 발견하게 될 때에 그때 바로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게 하시고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에 대해서는 알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렇게 많은 것을 몰라도 창조세계 이런 것들을 몰라도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볼 때 틀린 느낌이 들죠. 예전에는 ‘야 이 산 아름답다 야 이 바다는 아름답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이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계는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더해야 되지만 아쉬운 대로 이 정도 설명만 해도 ‘아 왜 하나님도 계시고 성령님도 계신데 왜 우리가 믿는 이 종교를 그리스도교라 부르는지 이해가 가시죠?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잘 아는 것이 그게 바로 세계를 아는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기 혼자만을 살펴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살피게 되면 그것을 통해서 비로써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해요. 인간이 참으로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될 때 자기와 세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자기의 육체와 영혼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너무나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북한에서 그런 것들을 많이 만드는데 중국에서도 나와요 우황청심환 말고 안궁환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그 안궁환은 아주 귀한 약이고 비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이가 자꾸 경기를 하고 놀랜다고 하니까 그 약국주인이 안궁환을 주면서 한 육 개월 먹여 보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안궁환을 사다가 그 약사가 시키는 대로 육 개월을 물에 개어서 먹였는데 그 아이가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나중에 도대체 이게 왜 그렇습니까? 하고 항의했더니 내가 언제 육 개월이나 먹으라고 했느냐고 하더래요. 나중에 전문가에게 의뢰를 했더니 이 안궁환이라고 하는 이 약 안에는 주사라고 하는 재료가 들어가는데 글자 그대로 붉은 흙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독약입니다. 독약! 그래서 이거는 사람이 절명할 위기에 있을 때 깜박 깨어나라고 그냥 일생에 몇 번 먹는 약인데 이 약사가 착각을 하고 육 개월을 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왜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고, 교회는 무엇이고, 나는 나는 도대체 영혼과 육체가 어떤 관계에 있는 존재인가? 이런 것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사네 그리고 그런 것을 참고하고 나도 나도 그러면서 따라가요. 그렇게 살아요. 그리고 한참 살다보면 저 사람은 이렇게 믿네! 나도 그렇게 믿으면 좋겠다. 왜 저 사람은 나보다 돈도 많고 부자고 왠지 저 사람은 행복한 것 같으니까 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면 병에 걸렸는데 그 약이 무엇인지 이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저 약은 포장지가 예뻐서 먹고, 이 약은 맛이 달아서 먹고, 저 약은 딴 사람이 많이 먹어서 먹고, 그 약은 값이 싸서 먹고, 이러고 돌아다니는 환자 같은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을 믿는 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인생의 유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심각한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인간으로 태어난 중요한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에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고용한 사람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겠어요? 군인으로 뽑혔는데 이 군인이 전투는 안하고 맨날 화투만 쳐요. 그런데 이 군인이 와가지고 빵 좀 더 주시고 배식 좀 늘려 주시고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그러면 부대장이 그걸 가만 내버려두겠어요? 영창을 집어넣던지 반쯤 두드려 패든지 하겠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하나님 앞에 복을 달라고 매달리고 떼를 쓰고 그래도 그런 기도 많이 안 해도 잘살아 봐요. 그럼 하나님이 그냥 복을 주시지! 자신 없으니까 아멘 안하죠? 불리하면 노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것을 가슴에 칼로 새기세요) 일생에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의무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4장에서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신약성경으로 내려오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을 버렸으므로 나도 내 백성을 버려서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려 하니라.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기도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그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라고 우리에게 영혼도 주시고 지성도 주시고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알지 않으면 다른 것은 의미가 없습니까? 물론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가장 큰 복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 했을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병 고쳐 주셔서 벌떡 일어난 사람보고 너는 복 되도다 말씀안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물고기와 보리떡을 나눠주면서 사람들이 배불러서 배를 두드릴 때에도 너희들은 복 되도다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가난한 베드로가 어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랬을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 되도다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II.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
A. 부활 이전
그런데 이 그리스도는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하늘에 계셨을 때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 그런 뜻입니다. 피동명사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기름을 부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기름을 부어서 그를 특별한 임무를 주어서 그래서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히브리말로 했을 때 메사야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그리스도의 말하자면 도전인신 성육신이라고 불러요. 육신을 입으셨다고 해서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그리스도가 이렇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셨으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삼위하나님을 대표해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세상 모든 만물들이 그분으로부터 나왔으니까 그분은 존재에 있어서 탁월하지지 않겠어요? 탁월하시죠.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사람의 몸을 입고 창조 하신 게 아니죠. 왜? 창세에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계셨고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몸으로서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자! 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이것이 이번 사경회의 가장 큰 주제입니다. 자! 이 문제를 차차 내일부터 풀어가기로 하고 우선 예수님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인간을 창조 하시고 이 모든 세계를 창조 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망가져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는 따라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의 이름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그분의 이름입니다. 그분이 바로 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입고 오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니까 모든 사람이나 똑같잖아요. 말구유에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나서 아이들처럼 성장하시고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면서 그러면서 어른이 되어 갔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똑같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잖아요. 그런데도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 오셨는데도 예수그리스도는 탁월 하신 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 분께 경배를 드렸던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마음의 눈으로 그 분이 얼마나 탁월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 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우리와 똑같이 입고 오셨는데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을 높이고 경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는 두 시기로 나누어지는데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이 예수님의 몸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제일 처음 아담을 창조 하셨을 때에 이 아담의 영혼은 원래 불멸하도록 창조 되었고 이 아담의 영혼도 육체도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늙고 부패해서 허리가 망가지고 눈이 침침해서 안보이고 머리가 빠져서 다 벗어지고 그러니까 점점 흉한 몰골이 되어가는 이런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 변함이 없는 아름다운 육체 늙지 않고 사멸하지 않는 육체 그러한 불멸하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는 어때요? 이 모든 육체가 그렇게 불멸해요? 불멸하려고 애써서 화장품도 바르는데 불멸 안 해요. 불멸 안 해요. TV에서 보면 예쁜 여자들이 나오잖아요. 한참 텔레비전 안보다 보면 없어졌어요. 벌써 아줌마가 되어 있지요.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나와 계속해서 밀어가면서 새로운 얼굴들이 떠오르고 그저 5~6년 돈 벌다가는 다시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사라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자! 그러면 무엇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계속 사람이 변해가고 그래서 육체가 망가지고 마지막의 결국에는 죽음에 삼킨바 되어서 결국 육체 자체가 더 이상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혼을 풀어 놔주죠. 그리고 자기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 이런 육체는 왜 그런 것이죠? 인간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면 원래 아담이 입고 있던 그 육체를 입고 오셔야 되겠어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이 입은 이런 육체를 입고 오셔야 되겠어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전자여야 맞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 예수님이 아담의 불멸할 육체를 입고오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이 입고 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부패해가고 마지막에는 죽음에 삼킨바 되는 그런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증거가 무엇이냐?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하실 때 삼십 세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삼십삼 세정도 였다는 것이 기본적인 학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 보고 뭐라 했어요? 너 보아하니 오십도 안 되었는데. 그게 말이 되요? 그건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오십도 안 되었는데. 그 얘기는 무엇이냐 하면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일수도 있다는 뜻 아니에요? 그렇죠? 제가 40대 초반 때였는데 어디를 갔는데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 계속 저를 형님처럼 모셔요. 깍듯이. 그래서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나 했더니 밥을 먹다 말고(그때 40대 초반이었는데) 뜬금없이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 한 50은 훨씬 넘으셨죠?‘ 그러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형님대접 받았으니 그거 뭐 십년을 더 보셨네요. 그러면 내가 또 형님으로 나머지 기간을 모셔야 될 것 아닙니다. 그래서 ’뭐 좀 되었죠‘ 그러고 말았어요. 그게 예수님이 30대면 팽팽하고 요즘 애들로 치면 아직 장가도 안 갔을 나이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나이밖에 안됐는데 50이 된 것 같으니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고뇌에 가득 찬 인생을 살으셨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그걸 보면 예수님의 모든 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부패에 종속되고 결국은 연세가 드시면 죽어갈 수 있는 죄인의 몸과 똑같은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결론이 되잖아요.
그래서 빌립보서가 말하기를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죄 없으신 그분이 당신에게 어울리는 불멸하는 아담의 몸을 입고 오지 않으시고 이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패해져가는 이 비참한 죄인들의 몸을 죄가 없으심에도 그런 비천한 몸을 입고 오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1. 자원하는 낮아지심
이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자원하는 낮아지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본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과 동등한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스스로.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과 천사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 힘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 비참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인들을 편들어 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되신 것을 사람의 몸속에 감추시고 그리고 한없이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할 인간들 중 누구도 갖고 있지 아니한 불멸의 아름다운 육체 대신에 시간이 흐르면 부패하고 결국은 죽음에 삼키우게 될 이 비참한 죄인들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어요.
2.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심
두 번째는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라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그랬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신데 그 분이 배운다고 하면 모르는 것이 있으시다는 결론 아니에요? 모르는 것이 있으시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 있나요? 이 질문에 적절히 대답할 사람? 어떻게 하겠어요? 더군다나 인간은 죄가 있기 때문에 죄의 영향으로 모를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으니까 그러고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셨는데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운다? 예수님이 순종도 잘 모르셨다는 것 아니에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참으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것을 설명하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잘 들으면 여러분이 명쾌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들어 보세요 상세하게 설명할 테니.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본질이 있을 것 아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육체 안에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을 수가 없죠.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신데 자고 일어나면 계속 늙어 가시니까 그래서 33세밖에 안되었는데 남이 볼 때 50은 되어 보이는 사람으로 여기셨으니까 육체는 사실은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죠! 그러면 이 하나님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데 그러면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게 바로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에. 그러니까 우리의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본질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도 인간의 본질, 영혼도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닮도록 만드셨지만 닮도록 만드신 것이지 자기를 떼어서 주신 것은 아닌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의 육체와 인간의 영혼이 만나서 인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틀려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야! 그래서 예수님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야 틀림없이! 그런데 예수님의 영혼은 두 개의 본질이 그 영혼 속에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본질이 그 분의 영혼 속에 들어가 있는 거고 또 하나는 인간의 본질이 그 영혼 속에 또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시장하면 배고프시고 많이 걸어 다니면 지치고 피곤하고 그리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보고 싶어 하시고 만나면 반가워하시고 기쁜 소식을 들으면 즐거워하시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은 영혼 안에 있는 예수님 안에 있는 영혼에 인간적인 본질의 작용이잖아요! 그렇죠! 만약에 이것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생활 하실 수가 없었겠죠!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영혼을 필요로 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영혼 안에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개를 완전하게 가지고 계시면서 다 활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으로 모든 일을 다 하면서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행하고 여기도 계시면서 동시에 저기도 계시고 얼마든지 요술과 마술처럼 당신 자신을 행사하실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입니다. 포기하셨다는 것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을 퍼내서 버려 버리고 스스로 인간의 본질만을 가득 가지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이단이에요! 그게 아니라 예수님 안에는 인간으로서의 본질과 함께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죄인을 위해 봉사하고 종처럼 섬기는 동안에는 이 하나님의 본질을 다 사용하지 않기로 스스로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신데도 예수님은 다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본질을 다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는 인간의 본질로 이것을 가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모르시는 것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아니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기저귀 찬 나이에 이 세계에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알았단 말이에요? 어려서부터 성경도 읽으시고 글자도 배우시고 밥 먹는 것도 배우고 예절도 배우시고 그러면서 자라가셨겠지? 상식적이지 않아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죠. 그렇게 해서 자라가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뭐라 하냐 하면 ‘예수님의 키와 지혜가 자랐다‘ 지혜가 없었을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먹으면서 점점점점 지혜가 자라가셨다‘ 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조금 모르는데서 점점 아는 데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르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 예를 들자면 아니 그분이 오신 곳이 하늘나라고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는데 그분에게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요? 그런데 뭐라 하셨어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데 그 날과 그 때는 천사도 모르고 인자인 나도 모른다.” 그런데 그분이 모르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아실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셨죠?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에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시며.’ 뭐 기도해요 직접 하시면 되잖아요. ‘나라에 임하옵시며.’ 뭐 당신이 그냥 와라 한마디만 하시면 올 거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그래도 그것은 나아요.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 그냥 있어라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모르는 것이 있으셨다는 것이죠! 왜?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실 때는 모든 것을 다 아실 수 있었는데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을 때 이것은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모두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멸시와 핍박을 받는 것, 진리와 말씀을 가르칠 때 영혼들이 변화되는 것, 병든 자를 바라보는 그 연민의 마음, 이 모든 것들은 육신을 입고는 모두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순종하고 복종하며 사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배워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3. 죽으시기 위함
세 번째 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이유는 만약에 아담의 몸을 입고 내려 왔다면 죽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겠죠. 불멸의 몸을 누가 죽일 수가 있겠어요. 만약 죽일 수 있다면 불멸의 몸일 수 없죠!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짓고 대신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위해 오셨는데 만약에 불멸의 몸을 입으셨다면 죽으실 수 없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님 그 영혼 안에 있는 인간의 본질로써 고통을 당하시고 인간의 몸으로써 죽임을 당하여 피를 흘리고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B. 부활 이후
1. 부활체의 영광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이제 그야말로 불멸할 몸으로 찬란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이 몸은 부활체의 영광을 보여줘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부활체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이 그 영광을 감추셨을 때에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았지만 그 영광을 드러내실 때에는 사울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엎드러져서 눈이 멀어버렸어요. 이게 찬란한 영광입니다. 부활하시기 전 육신을 입으시고 이 지상에서 종처럼 우리를 섬기시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감추시고 부활 후에는 그 감추인 것을 걷어 버리시고 찬란하게 하나님으로서의 그 본질이 드러나도록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도 지상에 계신 것 같은 그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만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찬란한 빛으로 그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를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그 찬란한 영광 가운데 우리들이 그 분이 거기 계시다는 효과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인성의 은혜 제거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는 비록 육신으로는 이 죄 많은 인간들의 몸과 똑같은 것을 입으셨지만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예수그리스도는 낮아지셨지만 탁월하신 분이었고 그래서 이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순간순간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시지 않았는데도 아시고 폭풍이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을 내어쫒고 하는 이런 일들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이 그 분의 섬김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분의 초라한 인간의 썩을 육체 뒤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을 발견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예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부자 될 것을 믿고, 높은 지위에 올라갈 것을 믿고, 천국 갈 것을 믿는다는 것만이 믿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 그 초라한 인간의 뒤에 있는 믿음의 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을 발견하고 그분을 믿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이 이 세상에 사셨던 그 삼십삼 년 동안의 생애의 발자취를 사모하게 되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그런 사모함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III. 율법과 죄 아래 오심
그게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때가 율법아래에 있는 때였어요. 그러면 율법아래에 있는 때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이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방법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율법에 의해서 다스리시고 또, 한 가지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얘기하면 굉장히 길어요. 그런데 이제 율법에 의해서 다스리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은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 축복과 저주가 함께 들어있는 삶과 죽음의 계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네가 이 계명을 지키면 살고 이 계명을 어기면 너는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함께 들어오는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나? 이렇게 율법을 주시면 사람들은 그 율법을 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저주받을 만한 짓인가 복 받을 만한 짓인가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자기가 지금은 하고 싶어도 저주 받을만한 일은 버릴 것이고 자기가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 복을 받을 만한 일이면 행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목적을 따라서 이 세상의 질서를 잡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율법은 어기게 되면 반드시 그것에 대한 형벌이 따릅니다. 그래서 잘못하는 거다 라고 하고 벌을 내리는데 그 도구가 바로 법에 의해서 처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법을 발견하게 될 때에 양심이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전에는 길이 없었잖아요? 조그만 골목길 밖에 없었잖아요. 그때는 그냥 맘대로 돌아다니는데 지금은 도로가 뻥 뚫리고 이게 건널목까지 있으니까 이제 가운데 노란 줄까지 있으니까 건너기가 좀 찜찜하죠? 이제 건널목으로 건너야 해요. 왜냐하면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을 때에는 그냥 건너다녀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데 줄을 그어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건너지 말라고 하는 국가의 의사표시거든요, 그래서 건널 땐 항상 주위에 누가 있나 보고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딱지라도 끊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건너죠. 이게 바로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그 예수님이 오신 때가 율법아래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십자가 이전은 율법아래 있는 때이고 십자가 이후는 은혜아래 있는 때입니다. 그 분기점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자 그러면 율법아래에 왜 그러면 은혜의 시대에 오시지 않고 그렇게 시퍼렇게 율법이 있는 시대에 오셨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의 요구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율법아래에 오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들어보십시오. 자 이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아주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 대리자로 창조하셔서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알아보고 그리고 그 모든 사물들을 만드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리고 자기도 알아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깊이 이해하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더 잘 이 세상을 가꿀 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임무를 부여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죄를 지은 목적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아래 첫 번째 대리자로 삼으시고 그 아래에 수많은 이 창조세계를 모두 그가 사용 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셨는데 이 인간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 창조 모든 세계를 통해 영광을 받는 자신의 지위를 감사하는 대신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짓게 되니까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면서 이 창조의 모든 세계가 다 깨뜨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하나 아무렇게나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시작해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이 자연의 모든 피조물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그 하늘의 떠있는 커다란 우주 천체로부터 시작해서 땅에 있는 작은 날파리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인간까지 모두 묶어서 성령으로 이 모든 것들을 연결한 것이 마치 수많은 전구를 전선으로 수없이 연결해 놓은 것과 같았어요. 그리고 그 선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이 충만한 것이 가득 흘러가서 날파리 하나 그리고 발아래 흐르는 돌 하나, 푸른 바다와 하늘에 있는 아름다운 별들도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바로 하나님과 첫 번째로 관계를 맺고 있는 피조물이었습니다. 특별히 영혼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이 모든 창조의 세계를 대표하는 대리자 같다고 생각해도 되요.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하나님이 이 창조세계의 모두 연결된 그 선을 통해서 흘러들어가 있던 창조주로서의 당신의 영광을 모두 거두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스위치를 끄시니까 이 모든 연결들이 다 깨뜨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 보면 하와를 하나님이 이끌어 오실 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 이라고 최고의 사랑을 고백을 하던 사람이 3장에 가서는 아내가 있어서 괴로운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둘이 싸웠냐하면 둘이 아무런 다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각자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뜨려지고 이제는 자연만물로부터 위협을 받는 그런 자연 속에서 아주 소외된 비참한 존재가 된 것이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인간으로부터 소외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고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서 자기가 자신을 생각해도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게 고립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믿고 은혜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면 외롭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많이 받고 눈을 떠보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주변에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고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은혜가 떨어지면 하나님도 낯설어지고 하나님이 낯설어지기 시작하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고립시킨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으로부터 고립되니까 사람으로부터도 고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등지고 살면 하나님이 그래도 버릇을 못 고치면 하나님이 물질적으로나 건강이나 이런 모든 것들도 하나님이 막으셔요. 그런 고립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은혜생활 할 때는 은혜생활을 잘 할 때는 내가 누군지 너무 분명하고 내 안에 있는 둘이 정확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편의 나의 새 본성, 세상편의 나의 옛 본성 매일매일 경계하면서 뭐라고 뭐라고 떠들어도 ’그것 쓸데없는 소리야‘ 하며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이런 명료한 구분이 사라져서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는 것입니다. 혼동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이런 연결들이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 아름다운 세상이 다 관계가 끊어지고 깨뜨려져서 아주 흉한 세상으로 번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살아가는데 사람들이 있어서 정말 좋다 무슨 맥주선전처럼 ’사람이 좋다‘ 그럴 때가 몇 번이나 있어요? 발에 치이는 게 사람. 누가 그러더래요. 저기 가난한 나라의 사람 별로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 남산에 올라가서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불이 휘황찬란하고 사람들이 천 몇 백만 명이 돌아다니잖아요. 그러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무엇을 먹고 삽니까? 하니까 ‘서로 속여 먹고 살지요’ 그랬대요. 그러니까 사기 치는 것도 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기발하더라고요. 정말 그 세계는 완전히 별세계에요 사기꾼들의 세계 (텔레비젼에 가끔 나오잖아요). 기가 막힌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관계가 다 끊어져요.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의 세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다고 그러는데 재미있기는 뭐가 재미있어요? 서로 뜯어먹고 나는 원숭이는 바나나만 먹는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짐승을 잡아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그걸 맛있다고 뜯어먹으면서 비계까지 다 먹어요. 그때부터 원숭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조상님이라고 모시는 사람도 있으니까 참 걱정이죠. 동물의 세계도 보면 안식이 없어요. 서로 잡아먹히는 그런 세상이잖아요 그런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잖아요? 이게 모두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더 하나님이 보실 때 가슴 아픈 것은 하나님 닮은 모양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모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게 궁금하지도 않은가 봐요. 내가 어렸을 때에 매일 밤하늘 쳐다보면서 궁금해 했는데 ‘저 하늘이 어디까지 계속될까? 그걸 몇 번 어른들한테 물어보았다가 뒤통수만 얻어맞았어요. 쓸데없는 것 물어보지 말라하면서. 공부나 하라고. 그런데 지금생각해 보니까 그게 근본적인 질문이에요 저 하늘이 어디에서 끝날까? 너무 신비 했어요. 더 신비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걸 궁금한 걸 모르는 저 사람들은 어떻게 잘 살까? 초등하교 4~5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까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이 그러고 살잖아요.
이 세상이 그렇게 그렇게 아름답던 세상이 다 파괴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은 무한했을 거 아니에요? 그 무한한 아름다움을 이렇게 다 파괴해버린 인간의 죄는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무한한 분량일거 아니에요? 그래서 지옥의 형벌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은 이성적으로도 너무나 분명한 거예요 그 죄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지만 영원히 형벌을 계속 받아도 끝나지 않는 정도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지옥의 형벌이 공평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간의 모든 무한히 큰 죄를 인간으로서는 대신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짐승들을 통해서 제사를 지내고 그 짐승들을 통해서 잠시 죄를 용서해주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일시적인 죄의 용서였고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모든 제사를 통해서 이루고 싶으셨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를 짓기 전의 인간과 똑같은 그런 죄 없는 인간의 상태로 내려 오셔서 그래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셔야 했는데 그 죄를 짊어지신 분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 한사람이 죽으셨지만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 수치와 고통은 무한한 크기였기 때문에 이 무한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분이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셨는데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그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였어요. 그래서 인간의 죄를 위해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감당하시고 죽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 세상에 인간이 고안해낸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총살도 아니고 참수형도 아니고 몇 분 만에 눈 깜작할 사이에 고통이 끝나는 형벌이 아니라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서 하나님의 저주를 모든 죄 지은 인간들의 죄를 위해서 한 몸으로 당하면서 그 십자가에서 철저히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생명이신 그분이 죽음아래 복종된 더러운 인간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거기에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비천한 강도들과 함께 매달려서 그 악한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으며 인간에게 저주를 받고 하나님 앞에 형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 형벌과 고통 그리고 그 심판의 크기는 무한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그분이 너무나 고귀한 분이고 그분이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한 몸에 지니신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에 그 모든 인간의 죄악을 홀몸으로 다 짊어지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그런 존귀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고 율법아래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정죄 받을 만한 아무것도 없지만 그 율법 아래서 모든 정죄 받은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서 율법의 요구대로 이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참사람과 참 하나님이신 그분의 죽음이 필요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이 율법의 요구를 감당하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죄 때문에 창조주도 잊어버리고 창조의 목적도 상실하고 자기가 누군지도 깨닫지 못하고 짐승처럼 먹고 마시고 쾌락에 빠지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다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이 비천한 인간들의 무질서한 방황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창조하신 그분을 사람의 몸을 입혀 ’너로 말미암아 창조된 세상이니 이제는 네가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가 이들을 구원 하거라.‘ 하여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처음에는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이 이번에는 창조의 목적을 떠난 인간들을 다시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그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라고 부른 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완전히 타락하고 이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어서 비참하게 찢어진 영혼과 육체로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이 형벌가운데 있는 이 비참한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인간들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래서 그들을 다시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셨다고 하는 이 구원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이 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IV. 결론
마지막으로 그럼 도대체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이 무얼 얘기하는 것이냐? 이거는 두 가지입니다. 지식과 은혜야 그래서 뭐냐 하면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나의 지성으로 명확하게 알고 믿음으로 명확하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그다음에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와서 뜨거운 감동을 받는 거예요 이 두 개가 만나는 것입니다. 이 뜨거운 사랑의 감동이 없고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지식을 갖는 것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게 아닙니다. 또 그 분을 아는 지식은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에서 진동과 같은 뜨거운 감정이 일어나는 것도 그 분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명료하게 알고 한 가지 사실이라도 명료하게 알고 그것이 내 마음속에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켜서 그래서 그 지식과 은혜가 불타는 것 그래서 그것이 마음속에서 불붙어서 그래서 그 예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이 교회가 눈에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세상에 비천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여러분을 지금처럼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아주 명백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된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금도 누구든지 나를 구원해 달라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라고 나에게 이 어두운 세상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랑과 생명을 달라고 그 은혜와 지식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방황하고 창조주도 몰라본 채 제멋대로 인생을 살면서 찢기고 할퀸 그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치료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부르셔요. 오늘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2.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성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I. 인성과 신성의 결합
어제는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데 왜 하필이면 우리가 믿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가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제 설교를 듣고 보니 정말 우리가 믿는 종교는 ‘그리스도교’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상승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만물을 알게 되고, 사람들을 알게 되고 또 자기를 알게 됨으로써 그 하나님이 내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사는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자, 오늘 여기 연세 드신 분들도 많이 오셨는데 부모가 되서 자식을 낳았으면, 부모의 마음에는 비록 많이 공부하고 세상에서 높은 지위는 없어도 이 부모의 마음에는 자식을 위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내 자식이 ‘이렇게 이렇게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서 이렇게 이렇게 이 세상에 이바지하고 또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 라는 계획이 있잖아요.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의 그 마음을 헤아리고 그 자식이 부모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것은 뭐 인생을 살면서 별난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리고 분명히 부모를 가지고 있어서 부모의 몸에서 생겨났어요. 그러면 그 부모가 짧은 눈으로 보면 나를 이 세상에 나게 해준 원인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부모가 나를 만든 건 아니거든요. 그러면 육신적으로는 그 부모에서 태어났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죠. 그러면 영혼이 주인입니까? 육체가 주인입니까? 당연하죠. 그래서 영혼이 기능을 안 하면 식물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은 사람으로 취급이 되요. 그러면 육신도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사람의 몸인 부모의 몸을 빌어서 태어난 그 자식이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한다면, 육신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주인이 되는 영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사는 가장 기본적인 인생의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이것은, 부모도 몰라보고 꼭지도 없이 살던 무지막지한 인간이 자기 영혼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부모에게도 자식을 낳았으면 그 새끼를 향한 계획이 있듯이, 하나님이 내 부모를 통해서 육신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영혼을 내게 주어서 나를 내셨다면 우리 부모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고 진정으로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를 낳게 해 준 진정한 부모인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사는데 그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낳아준 자식이 부모도 몰라보고 부모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제 좋은 대로 살고 돈 떨어지면 와서 돈이나 내놓으라고 협박을 한다면, 그걸 새끼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또 돈을 많이 모았다고 해도 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부모를 몰라보는 인간이 그게 어디 인간일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부모님이신. 하나님은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또 어머니이기도 해요. 하나님은 결혼 안하셨으니까. 하나님은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그런 부모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이 유별난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것이 매우 유별난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네 부모가 뭐냐 ?’ ‘아, 난 없습니다, 모릅니다. 난 태생이 누구에게서 낳았는지도 난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정상입니다. 아니면 ‘부모님이 살아계십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정상이냐 이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들이 알아야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부모이신 하나님도 몰라보고 또 그 마음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 부모의 마음을 보여주시고 그 부모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세상이 창조되고 또 인간도 그 모든 세상과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해도 돌아갈 힘이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으니까 이것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죠. 이 세상에 있는 기적 가운데 이건 최대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동시에 사람의 본질도 그대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육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육체는 사람의 몸입니다. 예수님도 늙으면 점점 피부가 검어지고 검버섯도 생기고 주름살도 생기시는 그런 인간의 보통의 육체를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육체만을 가지고 따지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분 안에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깃든 곳은 예수님의 영혼이었단 말입니다. 그 영혼 안에서 사람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함께 만나요. 그런데 이 본질이 서로 섞이는 것이 아니라 나뉘어지면서도 한 영혼 안에 있어서 그래서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참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실 수 있었고, 동시에 참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만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과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맺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진노하시는. 죄 가운데 있으니까 그 인간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셔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셔야 되지 않겠어요? 어느 한편만을 위하면 화해자가 될 수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이셔야 했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사람이셔야 하지만 양쪽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과 다시 화목시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인격 안에서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함께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예수님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무한하신 분이었습니다. 끝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끝이 있잖아요. 여기까지는 컵이고, 접시고 이 바깥은 접시가 없어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한계를 가지고 있죠. (목사님을 가리키며) 여기까지는 나라는 사람인데, 여기는 내가 없어요. 강대는 이렇게 있는데, 이 모양 바깥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다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었습니다. 끝이 없으신 분이었는데,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유한하신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는 유대에 안 계셨습니다. 몸을 입고 오셨으니까 당연하지 않아요? 어떻게 한 몸이 두 군데 양쪽에 계실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동안에는 복음 전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지 않고 하나님으로서 생각을 하면 그 분은 어디든지 다 계실 수 있는 분이세요. 무한하시니까. 그런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유한 세계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분은 영원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처음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영원하신 분이었고 그리고 영원히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하나님은 늙거나 쇠퇴하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분이 아니 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영원하신 분이 시간 세계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나실 때는 어린 아이였는데 자라시고, 열여덟 열아홉 됐을 때는 한창 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열심히 노동하시고 그리고 섬기면서 사셨더니 33년밖에 안사셨는데 50세는 되어 보일 정도로 푹석 늙으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영원하신 분이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그렇게 변하시는 분이 됐다 이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생명입니다. 무한한 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와서 생명이신 그 분이 육체로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탁월성 입니다.
그러면 그 분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니까 그러면 이 땅에 계실 때에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도 둘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둘로 이루어지죠.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져요. 돈과 명예로 이루어져요? (웃음)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지냐니까 어떤 사람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대. (웃음) 그래요. 육체와 영혼으로. 물건이 어떻게 된 물건인지 알려면 공장에 가보면 알잖아요. 공장에 가보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의 몸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영혼을 주입하셔서 그게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은 죽지 않아요. 영혼은 태어난 시점은 있지만 죽는 시점은 없어요. 영원히 불멸해요. 그러면 하나님 안 믿고 하나님께 거역하면서 산 사람들, 그 사람들도 죽지 않아요. 영혼은 죽지 않아요. 영원해요.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사람이 된 것처럼, 예수님도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육체와 영혼이 함께 만나서 성육신 하신 즉,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되셨던 것입니다.
II. 영혼의 탁월성
그러면 그 분의 육체는 죄인들의 그 육체와 다를 것이 없는 육체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런 육체였어요. 그러니까 육체로서는 예수님 자신이 어떤 탁월성을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신데도 사람이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인간과 틀리다고 하면 그 틀린 탁월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영혼에 있겠죠. 당연히 그렇죠. 그 영혼이 있는데 이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영혼이 하는 일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인간의 영혼과는 틀린 신적인 (영혼의) 인간의 영혼과는 틀린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인간의 영혼은 죄에 물들어 있는 영혼인데 예수님의 영혼은 죄가 하나도 없는 순결한 영혼이셔요. 두 번째 또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본질로만 이루어진 영혼입니다. 그렇죠? 인간의 영혼은 인간에게 필요한 영혼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영혼이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함께 들어있는 영혼이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영혼은 인간의 영혼과 탁월하게 틀렸다 이 얘기입니다.
A. 지성
이러한 증거들이 여러 면으로 나타나요. 첫째는 뭐냐면, 그 분이 아는 것이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아실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지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영혼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고, 그리고 생전 만나본 사람이(적이) 없는데도 그 사람이 사악한 사람인지, 참된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영혼이 인간의 영혼과 틀리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다 아시질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엄마 젖을 먹을 때 모든 언어를 다 깨치셨을까요? 아니고, 자라면서 똑같이 우리 아이들이 ‘엄마, 아빠’ 이렇게 말을 배우는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 배우시면서 성장해 가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시면 모든 것을 아실 수 있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지성이 뛰어났다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지성을 가졌을 것이 아니냐. 그게 아니라, 영혼 안에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들어있었는데, 인간의 본질을 퍼버렸다면 예수님은 아무것도 배울 필요도 없이 전지하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있는데, 이 인간의 본질로 하나님의 본질을 감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것처럼 그 신의 본질을 다 사용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연약한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어린아이 적에 하나씩 둘씩 배우고,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의 이 지성과 생각이 점점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언뜻언뜻 인간이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으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이 문득문득 작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깁니다.
B. 능력-인간: 성령, 그리스도: 신적 본질+성령
또 하나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맨 처음 공생애에 들어서시면서 제일 처음 설교한 곳이 고향 갈릴리에서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장소를 잘못 택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태어난 것을 다 아는 거기에서는 사실 대접을 잘 못 받는 것입니다.
(예화) 아버지가 목회하던 교회를 물려받아 목회하던 목사님 이야기
그래서 가능하면 고향이 아닌 먼 곳에서 설교를 시작하셨어야 하는데 고향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웠어요. 듣는 그 순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가르쳤지만 예수님이 그 진리를 가르치는 순간 사람들은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는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놀라운 권세와 힘이 느껴진 것입니다. 거역하기 어려운 어떤 힘이 느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그리고 또 예수님이 무슨 박사학위를 받으셨어요? 아니면 지체 높은 사람이어서 비단 옷을 입고 그들에게 금마차를 타고 나타나셨어요? 목수로 얼마 전까지 일하시다가 지금 그냥 나타나셔서 그 허름한 차림에 그리고 연세가 삼십 좀 넘으셨는데도 오십이 되어 보일 정도로 푹석 삭은 얼굴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에게서 놀라운 광채와 그리고 권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예수님에게는 있었습니다. 이것을 말이죠, 잘 들어보세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냐 하면,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셨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요단강에 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요.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그런 음성이 들렸어요. 그렇게 세례를 받으신 것이 이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서 취임식을 한것이 거든요. 그러면 곧바로 직무를 시작해야 하잖아요? 시작을 안 하시고 유대광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거기서 40일 동안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거기에서 기도하시면서, 금식하고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께 매달리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큰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을 시키셔서 이제는 세상으로 내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이 그렇게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할 때에는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유명한 박사들, 유명한 율법사들이 와서 설교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그 사람들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병든 자들도 다른 사람들은 병원에 데려가고 의사를 불러오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 기도하시니까 이 사람들이 낫게 되었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까지도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회의적인 생각을 품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그 일을 못하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낙심하고 절망하여 무너진 것과 같은 마음, 심지어는 마귀 귀신들려서 모두 미친 사람이 되어버린 인간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그를 온전케 하여 고치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셨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어떨지 모르지만, 사도행전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 사람들도 그땐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설교를 들으면서 거의 압도당하는 그런 은혜의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그런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얼마 안됐을 때, 하나님이 놀랍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한번 맛을 봐라’ 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를 했어요. 그때 설교 지금보다 젊었으니까 좀더 소리를 질렀죠. 그런데 소리 지른다고 무슨 감동이 더 합니까?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막 쓰러지는 것입니다. 회개하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울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나도 멀뚱멀뚱 하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야~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예수님이 행한 것과 비슷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할 때 뭘 생각해야 하면, ‘예수님도 성령 받아서 그 일을 하셨고 우리도 성령 받아서 그 일을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우리가 그런 일을 한다면 오직 성령의 능력 때문이지만,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시는 것은 단지 성령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 분 안의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때에는 성령을 힘입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능력에 있어서 우리 인간과는 비교되지 않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그분이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는 늙수그레한 분이었지만 그분이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고 또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C. 사랑
그 두 가지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영혼은, 인간의 영혼 안에는 물론이거니와 영혼 안에 있는 인간의 본질도 포함되고 심지어 그 분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서의 본질 안에도 모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람이 참 선한 사람이다, 악한 사람이다 하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죠?
(예화) 중국에서의 교통사고 현장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
어쨌든지 간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죠. 책임을 누가 지든지 간에 일단 사람이 쓰러져서 피를 흘렸으면 그러면 달려가서 정말 어떻게 하느냐고 염려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사람이 된 사람 아닙니까?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워낙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서 그 사랑이 흘러나오는 그러한 사랑이 있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잘 안되는데. 노력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아주 훌륭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속에 있는 성향 자체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성향으로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율법사와 이제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은 그 사람 가까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진리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더럽게 생각했어요. 그것은 그들이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죄인들의 친구였고 허물이 많은 사람의 형이었고 그리고 어머니였고 아버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영혼은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사랑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원수를 향해서 그들을 저주하고 욕하는 대신 그들이 자기를 그렇게 죽였기 때문에 받게 될 하나님 앞에서의 형벌을 가슴 아파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힌 채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저희는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면서 하나님 앞에 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러한 과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예수님이 그러실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을 이 속에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러한 사랑의 행동이었단 말입니다.
(예화)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이 보여주는 진실하지 못한 사랑의 행동
예수님에게는 정말 인간을 향한 사랑이,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자기를 통해 창조된 이 세계가 처음에는 그렇게 아름답게 창조되었던 이 세계가 다 망가지고 자기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들이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며 물고 뜯고 살아가는 그런 현실들을 바라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잃어버린 사랑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너희들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또 너희들은 서로를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가를 내가 보여주겠노라 하고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보여주려고 사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 이끄시는 대로 살았는데, 그것이 마음에 가득하고 자비와 눈물 속에서 사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언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만큼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너희에게 땅도 주셨지, 너희에게 제사 제도도 주셨지, 그리고 적군들도 물리쳐 주셨지, 먹을 것도 주셨지, 포도원도 주셨지, 외적으로부터 너희를 보호해 주셨지. 그래도 그것은 그렇게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33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 죄인들을 오늘도 부르시고 그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화) 어느 주일학교 학생의 고백.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린 주일학교 교사를 보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알게 된 고백.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돈을 주고, 밥을 주고, 집을 주고, 땅을 주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것보다 우리와 꼭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연약한 자와 함께 약해지시고, 병든 자와 함께 아파하시며 그들을 치료해 주시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서 방황하는 목자 잃은 양 같은 그 인간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 속에서 말로만 들어 알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깊이 깨닫게 되는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하나님이 부르셔도 돌아갈 줄 모르던 막된 인간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서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막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든 생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한 생애였어요.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랑의 마지막 절정이 어디였냐 하면,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못 박혀야 할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고난의 십자가가 이 사랑의 절정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영혼의 탁월성이었습니다.
III. 성육신 하신 목적: 창조 목적의 회복
그러면 그런 탁월한 영혼을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궁극적인 목적이 뭐냐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업을 해도 목적이 있는데, 하나님이 이 아름답고 넓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수많은 사물들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 인간을 당신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셔서 이렇게 살아가게 하실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없다면 말이 되겠어요? 우리가 자식을 낳아도, 어리석은 인간인데도 자식을 향한 목적이 있어서 자식이 나의 의도하고 있는 목적대로 살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자식이 그 목적대로 안 살면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데 우리보다도 더 완전하신 하나님이 그냥 할 일 없이 인간과 이 세계를 창조하실 리가 있겠어요?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맡기고 싶어 하셨습니다. 맡겨서 인간이 위로는 하나님을 잘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알고, 또 옆으로는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잘 알아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계속 가꾸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주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그 아름다움은 드러난 아름다움과 감추어진 아름다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아름답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봉사하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애쓰고 노력해도 원래 그런 가능성을 하나님이 안 남겨두셨다면 인간이 애를 써도 안 되겠죠? 그런데, 그런 가능성을 남겨두셨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잘 살면 이 세상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화) 옛날 민둥산에 대한 비유와 요즘 너무 나무가 빽빽하게 많아 쓸모없는 산에 대한 비유
똑같은 숲인데 그냥 나무가 자라고 빽빽해서 발도 들여놓을 수 없는 그 숲과 계획된 조림에 의해서 하늘 높이 뻗은 나무들로 쫙 도열하고 줄지어서 서있는 그 숲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똑같은 숲인데 사람들이 가꾸니까 아름다운 가능성, 묻혀져 있는 아름다운 가능성들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아름다운 숲이 되잖아요. 하나님이 세계를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훌륭한 행복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마치 제대로 된 인간이 제 부모를 알아보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효도하고 그러면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유산이잖아요. 그러면 누구 거예요? 아들 거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자기의 소유처럼 누리면서 위로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고 자기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이 창조 세계를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잘 가꾸고 돌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 갈 때 자기도 행복하고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사랑하며 행복하고 또 이 사람에 의해서 잘 돌봄을 받는 짐승들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대공원 연못의 행복한 물고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인간에게 그렇게 맡겨 주셔서 잘 돌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는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고 부모를 더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고 창조 세계를 잘 가꾸어 놓으면 그 모든 유산이 자기 것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인간 이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인간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안하고 하나님 자리를 넘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 섬기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가서 아무도 섬기는 이가 없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혼자 섬김을 받으려고 했더니 이하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비록해서 모든 식물, 혹은 땅까지 반란을 일으켜서 인간을 향해 대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것입니다? 곡물을 심어도 소출이 잘 안 나고, 그리고 얼마든지 아담이 부르니까 차례대로 나왔어요. 이름을 지어달라고. ‘넌 기린, 넌 돼지, 넌 코끼리, 넌 다람쥐’ 이렇게 이름을 지어줬는데, 불러서 오기는커녕 이제 그 짐승들을 피해서 도망을 다녀야 하는 그런 신세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깊이 순종하고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지으신 하나님, 부모님을 알아보면 그리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면 다른 것들이 우리를 섬겨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한테 섬김을 받아보려고 하는데 하여튼 약만 올리고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돈 따라 다니다 도는 거야. 돌아버리는 거야. (웃음) 아름다워 보겠다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기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거든.아름다워 보겠다고, 미를 찾아 돌아다니는데 그러다가 미쳐. (웃음) 그렇게 되는 거야.
IV. 성육신 하신 이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이유는 뭐냐 하면, 그렇게 부모님이신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채로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아주 정교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육체는 땅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하게끔 창조하시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내려오는 생명과 사랑을 먹으면서, 진리의 말씀을 먹으면서 영혼이 건강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땅도 내지를 않고, 위에서 내려오는 자원도 끊어진 것입니다. 육체로는 괴롭고 곤고하고 이제는 죽음이 들어와서 죽음의 기운에 삼키면서 멸망으로 가고,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더 이상 영혼의 양식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가리켜서 길 잃은 양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양은 집을 떠나는 것은 제 맘대로 할 수 있는데 돌아오는 것은 제 능력으로 못해요. 왜? 눈도 나쁘고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안돼요. 머리가 나빠요, 양이.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볼 수도 없거니와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고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되는데. 달을 섬기고, 별을 섬기고, 물고기를 섬기고 심지어는 원숭이를 섬기고, 소를 섬기고.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그 인간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예수님이 온 몸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그의 인격을 통해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는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를 바로 그렇게 죄에서 구원하여 원래의 그 사람을 지었던, 세계를 창조하였던 그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 입니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는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반드시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셔야 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됐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보고 불효막심하게 살던 인생을 청산하고 이제는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잘 알아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을 떠난 인간을 부르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혀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그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인간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제가 몇 해 전에 한번 설교 시간에 그런 얘기한 적 있었죠?
(예화) 미국 슈퍼볼 복권에 당첨된 공장 노동자들이 불행하게 된 내용
절대로 그런 물질로 인해서 인간이 행복해지지 않아요. 건강을 잃어버리면 건강만 되찾으면 행복해질 것 같은데, 멀쩡한 사람들도 인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살해요.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거기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나 이것입니다?
A. 죽으시기 위함
첫째가 뭐냐 하면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자~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면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죠. 그러면 그 사람 앞에 책임을 져야죠. 배상도 하고 보상도 하고 이렇게 되죠? 그런데 그거는 자기들끼리의 일이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죄를 짓고 나쁜 일을 했을 때 궁극적으로 손해를 보는 분은 하나님 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인이 이유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뭐냐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이 모든 세계를 맡기셨는데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는데, 조건이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손종한 것입니다. 부모가 빚쟁이가 되면 그 자식들도 모두 그 빚을 유산으로 받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인간들이 함께 그 죄에 참여한 것이 되어서 결국 인간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죠. 그렇게 해서 태어날 때부터 이 속에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계속 죄를 짓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을 안 해요.
(예화) 교도소 수감자들이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죄의 성질을 가지고 태어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은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이 결국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다 망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망가진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망가뜨렸으니 인간이 지은 죄는 한없이 큰 것이거든요. 이것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신 배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배상이란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에게는 공정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자녀들을 도덕적으로 지도를 할 때, 형이든지 동생이든지 아들이든지 딸이든지 잘했으면 잘 한 것만큼 상을 주고 못했으면 못 한 것만큼 야단을 쳐야지 자기가 좋아하는 큰 애라고 잘못을 했을 때 ‘아이고, 나쁜 짓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다, 애썼다’ 그러면서 엉덩이를 두드려주고, 둘째 애는 착한 일 하려고 애를 쓰다가 잘 안됐는데 ‘그것도 못하는 게 그게 아들이냐’고 쥐어 패면 이 아이들이 부모를 신뢰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공정하신 분이시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지었으면 죄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받아야 되요. 그런데 어떻게 대가를 지불 받는냐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하면 비유도 안 되지만 예를 들어 말하자면, 서너 살밖에 안 되는 애가 몇 조 짜리 원자력 발전소를 망가뜨린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하면. 어떻게 배상을 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약에 인간이 죄는 죄대로 갚으면 인간이 모두 파멸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죄가 갚아지지 않아요. 그까짓 파리 목숨이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뜨린 죄를 갚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구원하실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에 이런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던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그리고 예수님이 대신 율법을 따라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만약에 인간이었다면 받은 형벌의 크기가 유한했을 텐데 참 죄 없는 사람이었고, 또 하나님이신 그 분이셨기 때문에 그 분이 당하신 형벌의 크기는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지은 인간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배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믿을 수 없는 완악한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이천년 전에 나무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위한 예수님이 대신 당한 형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발견하면서 그 앞에서 이제껏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아래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출발 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출발은 무릎을 꿇는 것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무슨 고백? ‘하나님,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정말 더러운 인간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고백과 함께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죽으셔야 됐고,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던 것 입니다.
B. 모본을 보이심
1. 하나님: 사랑, 지혜, 능력
마지막으로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어요. 즉, 모두 추상적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너희를 향해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죄인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다’ 라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추상적입니다.
(예화) 엄마 아빠가 곁에 없는 아이가 간접적인 부모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눈으로 똑바로 볼 수 있게끔 유달리 광채가 나는 눈부신 얼굴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치료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시면서 평범하게 그들과 함께 섞여서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보이는 예수님의 육신의 모습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를 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믿음을 기뻐하시는지를 보게 되죠. 그리고 문둥병이 걸려서 가족들조차도 다 버린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그 헌데를 어루만지시고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보면서 사람들이 버린 자들도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굶주린 이들을 위해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물고기와 보리떡을 나누어 주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영혼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면서 사는 우리를 위해서 백합화를 옷 입히듯이,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듯이 그렇게 우리들을 먹이고 입히고 마시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서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도록 주님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심판을 앞둔 예루살렘성에서 목 놓아 우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그 후에 하나님이 얼마나 당신과 우리 인간이 평화롭기를 원하시는지, 예수님의 그 슬픈 모습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이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아주 연약한 사람이 되었는데도 위대한 하나님을 보고는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비밀들을 아주 연약한 인간의 모습 속에서 인간들은 그 위대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되었습니다.
2. 인간: 사랑, 순종
뿐만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인간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어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인간들에게 참으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시는 동안에 그렇게 연약한 몸을 가지고 인간과 똑같이 노동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가난과 결핍, 그리고 굶주림과 많은 핍박 속에서 일생을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으므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살아가신 그 삶의 모본이 자신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성경이 끊임없이 말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는데, 그렇게 하늘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영혼들을 사랑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시는 철저히 낮아진 종으로서 섬기면서 사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보면서 자신의 삶이 부끄러운지도 알게 되었고, 지금은 그렇게 못 살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아는 기준을 갖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고 예수님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고, 하나님을 섬기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고자 하는 그 본보기를 예수님이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눈부신 찬란한 태양빛으로 오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꼭 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멸시와 욕을 당하시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대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Ⅴ. 결론
우리의 인생이 복잡해 보여도, 문제는 아주 많아도, 문제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생겨나도 대답은 우리 인생 속에 없어요. 그 대답은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님, 그분을 보면서 우리의 인간의 가장 큰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분을 통해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나도 그분을 통하여 그 분을 닮아 이 세상에 지은바 되었으며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나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이 비천한 인간, 나 스스로도 삶의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혼란과 어두움에 있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인생살이, 따분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살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인간이 걸어가야 할 참된 길이며 참으로 인간이 걸어가야 할 진정한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모든 대답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오직 그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전에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해요. 예수님을 만나면 예전에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극복할 힘을 주세요.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 안에서 예전에는 내가 인생을 보는 눈이 없고 어리석어서 그렇게 애쓰면서 살았지만 불행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되어서 우리의 인생이 밝은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등불이시며 우리의 길의 빛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캄캄한 인생길을 걸어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들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향해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당신이 직접 사신 것처럼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를 힘써 아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많이 있어도 그것은 결국은 여러분에게 예수님 만나게 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문제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껏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신 원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고, 나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효막심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돌아가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한없이 받으며 여러분이 이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육신, 구원의 지혜와 능력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1:24)
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성육신 사건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많이 찾았고,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지혜를 찾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능력, 지정한 지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발견된다고 오늘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어떻게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이며 또한 지혜가 되는 지를 그의 성육신 사건을 중심으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창조된 세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A. 창조에서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는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볼 사람이 없구요.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지존하시고 지엄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쨌든 그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와 능력을 창조세계를 통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기 전에는 삼위일체의 한 하나님으로 오직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이 당신의 아들이신 이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창조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었고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비롯한 이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누구도 그 창조의 세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으시는 신이셨기 때문입니다.
B. 구원에서
그러나 이제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던 이 세계는 인간의 그 죄에 의해서 관계가 끊어지고 그래서 창조된 세계가 본래 가지고 있었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영광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된 이 세상이 인간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죄로 말미암아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진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창조하실 때는 오직 신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직 신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지만 구원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반드시 하나님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왜 반드시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시면 안 되었고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 되셨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죄 값을 치르고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과 용서시키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셔야만 했고, 한편으로는 용서하고자 하는 대상이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참 인간이 되시지 않으면 양편을 화해시키는 화목 제물이 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고 그리고 여기 이 창조의 과정에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지만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는 그리스도를 아주 잘 볼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을 통해서 만나지 않는다면 창조 세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졌지만 그렇게 이 창조 세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르게 될 수 없다 라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Ⅱ. 성육신, 인성과 신성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을 가리켜서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즉 육신의 몸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성육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것이 바로 참 인간의 성품과 참 하나님의 성품이 함께 만난 장소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그리고 무한한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창조된 이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잡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능력으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혜로 그 모든 사물들을 배치하시고 그 무한한 지혜 속에서 그 각각의 사물들은 자기에게 고유한 작용을 하게 했고 그러한 존재와 작용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이 창조 세계가 아름다운 질서를 갖게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소산입니다. 그래서 창조 세계를 보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지혜 그리고 지금도 이 모든 창조 세계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우리들이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창조를 통해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구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비하면 이것은 아주 약소한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모든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진정으로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하면 구원을 통해서 들어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잘 이해하게 될 때, 그보다 더 흐리게 흩어져 있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은 그냥 편안하게 듣는 사람이지 음악을 뭐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이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뭐가 좋은 음악이냐 그러면 글 잘 써지고, 기도 잘되는 음악 그래서 하나 딱 틀어 노면 맘에 들면 그냥 반복해서 돌아가라 그러고 하루 종일 돌아가게 하고 그리고 글도 쓰고 기도로 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 음악이 뭐 어디서 나왔는지 뭐 4조에서 뭔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다가 우연히 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자연의 놀랍고 아름다운 질서와 이 음악이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번 조금 시간을 뭐 많이는 아니고 조금 이렇게 들여다봤어요. 설교시간에도 조금 했잖아요. 그죠? 그랬는데 그러고 가만히 보니까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마음을 열고 들으려고 하더라고 들리지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들리느냐 하면 아는 것만큼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이 뭔지를 잘 알고 나면 들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젤 음악을 좋아하면서 젤 싫어하는 게 꽝꽝꽝꽝 그러고 울려 퍼지는 교향곡, 아 뭐 이렇게 조용히 나가다가 버럭버럭 소리가 나잖아요. 너무 짜증나 그저 조용하게 실내악 정도 뭐 바이올린이나 첼로나 뭐 이런 거면 좋고 또 찬송가도 좋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거를 조금 지식을 갖고 나니까 이 교향곡을 들을 때 이 우주의 질서가 훨씬 더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묻어 있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그리고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계 안에 가득하거든요. 근데 그 가득하고 충만한 그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이 지혜와 능력의 엑기스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 그 가운데에 엑기스가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깨닫고 그다음에 자연의 세계를 펼쳐서 보면은 이게 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너무 꽃잎파리 하나도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발아래 구루는 돌멩이에 있는 무늬 하나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막 쏟아지는 하얀 눈을 까만 벙어리장갑에 올려놓고 보는 그 육각형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감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만 하면 안 되고 또 자연에 대한 공부도 조금은 해야 되겠죠. 알아야지 보인다 그랬으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한 삶이예요 그게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렸을 때 아이를 데리고 와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면 얘네들이 그렇게 자연과학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흔적을 막 발견하면서 그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아름답다고 노래를 합니다.
(예화)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그럭하면서 아리들을 그렇게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래서 백년 뒤에도 여기에서는 저보다 훨씬 훌륭한 목사 백년이면 너무 길다 30년 성도들 중에서 누가 아들이 여기 있을지 모르지 나보다 훨씬 훌륭한 목사 여러분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한 성도들, 왜 존심이 상해요. 아니 그럼 갈수록 좋아져야지 그렇게 해가지고 막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만백성 알게 하소서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며 옛 성전 돌같이 요긴하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이 교회가 말이죠 흔들릴 수 없는 권위 가운데 서서 우렁찬 소리로 말이죠 높이 찬양하고 이 걔네들이 여기서 신앙생활 할 때쯤 되면 새해 사경회 때 이렇게 나오라고 나오라고 광고할 필요도 없는 그런 성도들이 교회를 꽉 채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때에 그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지 않겠어요?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뛰어난 탁월성이 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역사 속에 특별히 그 구원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찬란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드세요? 아니 우리가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가슴 아파 하셨다면 아 죄가 들어오지 말게 하시지 그것도 못하시면 뭐 하나님이 그런가 그런 생각 뭐 내놓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 투덜거리듯이 한번 해 볼 수 있잖아요. 오늘 여러분에게 아주 감격적인 사실을 알려드리겠어요. 결론부터 먼저하고 증명을 하겠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나타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영광이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온 이것이 과정적으로 어떨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어도 하나님이 이 창조세계 안에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그 계획은 오히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더 찬란히 빛나게 되었던 것 이예요
그 불꽃놀이를 하잖아요. 그죠? 불꽃놀이 불꽃놀이를 밤에 해요 낮에 해요 낮에 하면 바보죠. 그죠? 낮에 한번 불꽃을 공중에다가 한번 쏴봤어요 어렸을 때 우리 불꽃놀이 많이할 때. 폭공탄을 사다가 불꽃을 사다가 불을 붙이면 쏵 하고 올라가요 근데 낮에 올리니까 정말 시시해 연기 조금 뿜은 다음에 그다음에 뭐가 하나가 연필 같은 게 공중으로 휙 하고 올라가다가 툭 떨어져. 근데 캄캄한 밤에 골목에서 인제 성냥불을 붙이면 말입니다. 쏵 하면서 그러면서 불꽃을 그리면서 골목위로 쫙 올라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어른들이 혼내죠. 그렇지만 어쨌든 찬란한 불꽃은 어두웠기 때문에 찬란한 불꽃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찬란하게 들어날 수 없었던 몇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이 사랑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언제 아주 뼈져리게 깨달았어요. 알아맞히면 제가 끝나고 나서 새로 나온 책 한권 드릴게요. 자 누가 자신 있는 사람 한번 손 들어봐요. 아니 책 한권 준다는데 왜 자신이 없어요. 자 어떨 때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도록 부인할 수 없게 내 가슴속에 밀려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는 상품 없어요.
자 1번 아파트 40평 샀을 때, 아니에요? 아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이 사랑해서 주신 건데 두 번째 쌍둥이 났을 때, 그거 아닙니다. 그건 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죠? 세 번째 딸에가 서울대 들어갔을 때, 네 번째 죄를 용서 받았을 때, 네 번째 아아 근데 왜 그렇게 회개를 안 하시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죄를 용서 받은 거 죄를 용서 받은 거. 그러니까 죄는 나쁜 거지만 만약에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를 한다면 지금 큰 죄 가운데 있는 것은 저쪽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기회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그 기회를 갖기 위해 죄를 짓자 그럴 순 없다고 성경이 얘기하잖아요. 그죠? 예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큰 죄로부터 용서받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했던 사람입니다. 다윗도 그랬고 신약성경에서는 바울도 그러했어요.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하면서 믿을 만 하도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이 가슴이 저리도록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가슴이 저미는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녹는 마음 이런 건 없었고요 아담에게도 이거는 없었다고 봐야 되요. 아담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뿐 만 아니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그래서 은혜 생활할 때는 마음에 기쁘면서도 마음에 눈물이 꽉 차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지푸라기 같은 인간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깊이 그 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 어 주님이 없이 제가 살 바에야 제가 없이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성도는 담대하게 이렇게 고백을 했어요. 가능성도 없는 얘기지만 내가 주님 없이 천국의 꽃길을 걷기 보다는 예수와 함께 지옥의 불길을 지나고 싶습니다. 교리적으로 말은 안 되지만 어쨌든 감동은 되잖아요. 그죠? 감동은 되요. 예수님이 왜 자기와 함께 지옥 불길을 지나겠어요. 그래도 어쨌든지 간에 마음은 그 마음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 그분의 십자가 사랑 앞에 녹아내리는 마음,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없고 내가 한 방울의 촛 물이 되어서 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녹아서 스며들어가 버리고 나는 사라져 버리고 싶은 그러한 마음이 녹는 것 같은 절대 의존의 마음이 아담에게 없었습니다. 이런 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의존의 마음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녹는 것과 같은 의존의 마음을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 구원의 전개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이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은혜의 감격, 곤고하기 짝이 없는 인생길을 살아가는데 오늘도 무심코 왔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요. 나는 이제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고 내 인생에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속히 이 세상을 끝내는 것 뿐 이라고 하는 처절한 절망 속에 있었는데 마음에는 미움과 원망이 가득하고 삶의 아무런 희망이 없는데 어느 한순간에 주님이 내 마음 속에 오신 것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그리고 누구에게도 기댈 곳이 없고 처절히 외롭고 단절된 존재가 자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주님이 오래 전부터 그 피 묻은 십자가의 손으로 나를 부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본질이 뭐냐면 은혜의 본질이 뭐냐면 하나님 사랑으로 말미암는 감화입니다. 사랑의 감화. 이 사랑의 감화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바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은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감격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런 거 누리지 못 했어요 누렸더라면 죄를 지었겠어요? 누리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잘 들으세요. 인간이 죄를 짓자 환하게 밝은 세상이 세상에서 인간이 죄를 짓게 되자 영적으로 캄캄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근데 그 캄캄한 어두움을 뚫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자비, 용서, 사랑, 은혜 이런 아주 뚜렷한 빛줄기가 어둠을 가르면서 휙 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음의 눈을 가지 면은 볼 수밖에 없는 눈부신 빛이 인간이 죄를 지은 그 어두움을 배경으로 해서 찬란하게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아름다움은 아담도 보지 못한 아름다움 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해치며 죄를 지었는데 오히려 그 죄를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자비와 이 은혜와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찬란하게 이 어두움을 가르며 이 세상 속에 비취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이 그렇게 죄를 짓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망가트렸는데도 하나님이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계획은 인간의 죄가 좌절 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온몸에 비늘이 돋는 것 같은 여러해 전에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온몸에 비늘이 돋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어요. 아 그렇구나 주님의 그 탁월한 지혜, 인간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당신의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이 세상에 어두움의 빛줄기로 드러내 보여 주셔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죄가 없던 시대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더 큰 사랑과 자비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죄 짓기 전 무죄 시대에 그리스도를 몰랐던 것은 문제가 덜 되는데 이 찬란한 빛이 있는 이 은혜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탁원함을 몰랐다는 건 인간에게 변명할 수 없는 커다란 죄가 되는 것 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전 하여튼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며칠 동안에 전율하는 마음으로 지냈어요. 그러고 막 전에는 찬송을 부를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아 이 죄가 가득찬 이 어두운 세상, 이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았는데 하나님은 그 캄캄한 어두움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지혜와 탁원한 능력, 그 무한한 사랑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감격적인 자비 그리고 그 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존들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들을 그 죄를 이용해서 찬란하게 빛을 비추는 ( ) 그러니까 그렇게 용서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가지고 있는 그 아주 애틋한 가슴이 저미는 것 같은 그 놀라운 사랑 그래서 찰스 스펄전 존경하는 찰스 스펄전 목사가 자신의 기도 속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하나님이여 내 몸의 피 중 당신을 위해 흘리기를 거절하는 피가 있다면 쏟아 주시고 내 몸에서 당신을 위해 찢어지기를 싫어하는 살이 있다면 도려내 주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아담은 죽어도 뭐 죽지 않았겠지만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이것입니다. 오직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놀라워요
이 세상이 그렇게 무질서한 세상이 아닙니다. 거 바보들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질서정연해요. 인간의 책임은 책임대로 물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그 죄 때문에 책임을 물으시면서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 신앙은 진지한 것입니다. 교회 와서 낄낄거리고 웃다가 나가면 큰일 나요 그렇게 믿는 게 아닙니다. 이런 놀라운 어두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 어두워진 이 세계 안에 이렇게 선명한 해성의 빛줄기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이런 빛줄기들을 눈부시게 찬란하도록 부어 주셨는데 그 모든 빛줄기가 한분을 통해서 뻗어나왔던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이 한 분 이 한분은 당연히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두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 다중 인격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의 인격 안에 하나님으로서의 본질과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같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잘 설명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근데 만약에 예수님이 그냥 완전하신 사람이기만 했더라면 그 분이 보여주신 빛은 아마 성인처럼 잘 살다가 모범적인 인간으로 살다가 죽은 빛줄기를 능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만약에 하나님으로만 오셨다면 빛줄기를 그렇게 남겨도 인간이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인격 안에 가지심으로 찬란한 빛을 그으실 수 있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게끔 그릴 수 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이제 네 가지만 예를 들어 볼게요.
A. 영광과 겸비
우선 첫째는 뭐냐면 예수님이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도 예수님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분 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구유의 가난한 집의 아이로 태어났을 때 천사들의 합창소리가 들렸는데 하늘에는 영광이요. 그랬어요. 예수님은 바로 그런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 보고 아이를 예수님이라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고 지어라 했는데 맨 뒤에 나오는 엘 그거는 하나님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찬란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지만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종 같은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럼 이거는 겸비함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경배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였는데 동시에 그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종처럼 노예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고 그리고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주시고 진리를 가르쳐 주신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분이었지만 겸비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오히려 찬란한 하나님의 이 지혜와 능력의 빛줄기를 이 어두운 세상에 그리실 수가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게 바로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만나는 이 신비라고 하는 것 입니다.
B. 위엄과 온유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볼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위엄이 있으시고 엄위로 우신 분이시죠 그렇죠? 그러니까 아주 엄격하고 그 위엄을 가지신 분이시잖아요. 그러니까 귀신 들린 자들도 와 가지고 엎드려서 예수님께 발아래 빌 정도로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빌 정도로 그렇게 탁월한 권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풍랑이는 바다에서 고생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바다여 잔잔하라고 명령했을 때에 잔잔해진 바다를 보면서 제자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누구 시길래 명령하시니까 이 거친 풍랑도 잔잔해진다는 말인가 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런 놀라운 위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위엄을 드러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그 위엄을 가지고 죄인들은 감히 그 분 앞에 설수 없는 엄격함과 거룩한 위엄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분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놀라운 위험을 가지고 계신데도 이상하게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 모여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분과 교제하며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위엄을 나타내셨고 사람의 본질을 가지고 지극히 온유하고 낮아지셨기 때문에 오히려 이 두개 모두가 다 이 어두움 밤하늘 같은 죄악 속에서 찬란한 빛을 그으며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C. 통치와 섬김
또 하나 예를 들어 보죠. 예수님은 통치하시는 분이시죠.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면 열두 영이 넘는 군대를 하나님이 보내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있는 사람 예수님이 죽어있는 자도 살려서 누구도 죽음을 정복해 본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고 통치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은 왕처럼 좌정하셔서 수많은 사람을 통치하시는 대신에 오히려 종처럼 낮아지셔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서 노예처럼 봉사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오히려 어두운 인간의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이 은총과 자비, 사랑, 의존 이런 은혜의 빛줄기 들이 찬란하게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D. 자족과 의존
뿐만 아니죠 예수님이 뭐가 부족 하셨겠습니까? 그건 우리의 생각이지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부족하신 것이 없었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부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 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분이 부유하신 분이었다고 말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실제로 사실 때는 기도로 사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나님이신데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눈물로 기도하셨고 통곡하며 기도하셨고, 죄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과 탄식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존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나 약 하구나 그래서 예수님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족하는 예수님의 본질과 신적본질과 의존하는 인간의 본질이 함께 만나는 예수님의 이 성육신의 삶을 보면서 어두운 세상에 찬란하게 우리들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빛이 찬란한 해성처럼 긋고 지나가는 장면을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기만 했다면 이런걸 보여 주어도 인간의 눈이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사람이시기만 했다면 이것을 보여주실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셨기 때문에 만드실 수 있었고 또한 보게 하실 수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세상에서 예수님과 비교될 수 있는 어떤 탁월한 것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높이고 찬송하는 이유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성에 대해서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그렇게 감격했던 이유라고 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 셈에서 물을 많이 마셔야 해요. 이 쓸모없는 세상의 지식과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신앙을 이용하는 이러한 어리석은 이 세상에 물든 이 신앙을 버리고 이 지푸라기와 같은 신앙은 환란과 시련의 때에 우리를 위로하지 못해요. 이렇게 마르지 않는 임마누엘의 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 육신으로는 가난한 목수의 집안의 아들이고, 그리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강도들과 함께 목 박히신 그분이지만은 그분이 왜 이렇게 우리의 영원한 찬송 제목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종교가 그리스도교로 불리워져야 하는 이유를 이제는 여러분이 마음에 알 수가 있잖아요.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의 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 것뒤에 붙은 그리스인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떼어 놀 수 없게 거기에 함께 엮어진 존재들이라는 뜻 이예요 그거라 이 얘기 입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라고 조롱 했잖아요 대장 쟁이 대장간하고 그 사람하고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죠. 예수쟁이 예수와 떨어질 수 없도록 함께 엮어져서 그 사람 없는 예수는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 없는 그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예수쟁이.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말 이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신앙의 모든 비밀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알아가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며 감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분이 나 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자비와 분이 깊이 감격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돌아가게 하시고 싶으셨던 인생 입니다. 인생. 인생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그 참사람으로서 참 인생의 길을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Ⅲ. 구원의 근거가 되심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서 이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셨던 것 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만약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없었고, 우리를 위해 죽지 않았더라면 부활하실 수 없었고 그랬더라면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 모습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천년 전에 나사렛 땅에 사셨다가 잠시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를 그렇게 사랑하고 높이고 그분의 생애를 기억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목말라하는 이유라 이런 얘기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렇죠. 그래서 혹시 꿈에서라고 하나님이 네 소원이 뭐냐 그러고 물으면 그 바보 같은 대답하지 말고 오직 모두 똑같이 대답해야 돼요. 모두 똑같이, 내 생애에 유일한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 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참 신기한 것은 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냥 알기만 하고 그걸로 끝나는 게 많은데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요. 알면 사랑하게 되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의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을 이루러함이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그것이 사도바울의 비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모르고 살 때와 여러분이 예수를 알고 그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그리고 내가 살아온 이 피곤하기 그지없는 절망적인 인생의 길 나 자신의 힘으로는 개선할 수 없는 인생의 비참한 상황이 결국은 어디에서 유래 되었는가 하는 모든 것들을 철학책을 보고 깨닫고 남의 인생관을 배워서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보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더럽고 막대 먹은 인간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존경하고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됐잖아요. 여러분이 안 예수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되겠어요. 무시 하는 건 아니지만은 정말 적은 분량이거든요. 누구도 그분을 알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 무한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싶어 하세요. 왜냐면 그거를 살짝 보기만 했는데도 이 캄캄한 어두움을 이용해서 찬란한 빗줄기가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꽉 붙든 것입니다. 아멘하고 그 감격이 살아졌는데도 그 빛줄기가 진리였다 라는 사실을 신앙이 떨어졌는데도 부인을 못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매일 그 빛줄기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A. 용서를 위한 속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은 이것이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속전이었습니다. 무슨 듯이냐 하면 옛날에 로마시대 때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가 많은데 이 노예들은 그저 그 돈 주고 시장에 가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물건입니다. 그리고 노예가 새끼를 자식을 낳아도 그거는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게 바로 노예입니다. 그런데 이제 노예가 되는 이유는 뭐 부모가 노예니까 노예로 태어나서 세습돼서 노예일 수도 있지만 빛을 많이 졌다든지 이럴 경우에 결국은 자기 몸을 스스로 노예로 파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왜냐면 빚을 못 갚아서 형벌을 받을 바에야 내가 나를 팔아서 우리 집안의 빚을 갚는다 이런 제도가 있었습니다. 또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올 경우에는 진나라의 사람들이 이긴 나라에 끌려와서 그 신분은 노예입니다. 그러면은 이제 시장에 가보면 노예가 이제 같이 가족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이 가족들의 어차피 신세가 노예니까 어디론가 팔려 가는데 그러면 이 노예가족의 유일한 소원은 어차피 이 신분에는 벗어날 수 없으니까 같이 같은 집에 팔려가서 얼굴이라도 같이 보면서 주인을 섬기면서 사는 게 꿈이겠죠. 그죠. 근데 이제 예를 드는 것입니다. 어떤 돈 많은 사람이 좋은 마차를 타고 종과 함께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이 시장을 가는데 거기서 노예가 파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노예를 말이죠 노예를 세워 놓고 파는데 노예가 힘이 세다는 걸 보여줘야 하잖아요 주인이 막 채찍질을 막 하는 거야 그러면은 이 노예가 막 펄쩍펄쩍 뛰어야 되는 거야 이정도 맞아도 끄떡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안하면 장사 끝난 다음에 반 죽는 거야. 니가 그렇게 힘이 없어 보여서 내가 널 못 팔았다 개패듯 패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찍에 맞으면서도 이정도 맞아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노예를 사가지고 가시면 일에 보탬이 됩니다. 이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이제 아 우리 아내는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한다고 이렇게 하면서 상품 가치를 높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인이 날이 어둑어둑 뉘엇뉘엇 해져도 노예가 안 팔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제 이거 한 번에 안 팔아도 좋으니까 하나씩이라도 찢어서 사가라 그러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은 자지러지듯이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돈 많은 주인이 딱 지나가면서 자기도 노예가 필요가 없는데 집에도 많은데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을 보내서 야 저 얼마라 그러냐 물어봐라 아 오백만원입니다. 그래 야 오백만원 주고 사와라 그리고 오백만원 주고 사와요. 그리고 집에 가지고와 가족들은 막 안도의 한숨을 쉴 거 아닙니다. 아 이제 우리 가족이 다 찢어지는 줄 알았는데 아이 돈 많은 주인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를 한 가족을 한꺼번에 사서 데리고 왔으니 이것만해도 감사하다. 그러더니 목욕을 깨끗히 씻기더니 그 다음에 옷을 새로 입히는 거야. 밥을 주고 그러더니 그러는 거야. 나는 노예가 많아서 너희들이 필요가 없다 그러더니 내가 길거리에서 너희 서있는 것을 보니까 너무 불쌍해서 내가 너희를 샀는데 이제 우리 집에 있을 필요 없고 가서 자유롭게 살거라. 그러고 종이 한 장을 펴놓고 노예해방 문서를 써 주는 것입니다. 도장을 딱 찍고 누가 너희들을 보고 노예 티가 난다고 하고 혹은 노예들은 옛날 여기에다가 등에 다가 문신을 찍었거든요. 뭐 모든 노예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래서 너희들을 노예라고 그러면 이걸 보여줘라 내가 주인인데 내가 너희를 풀어줬다고 그래라 그리고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문서거든요. 이게 바로 속량입니다. 그런데 속전은 뭐냐 하면 이렇게 팔린 노예를 사기 위해서 이 사람이 지불했던 돈, 그래 이 사람은 돈을 날린 거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노예는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희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성경이 속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에 의해서 팔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죄 값을 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근데 그 죄 값이 뭐냐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 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고 나면 신자되기 전보다 훨씬 더 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분이시라고 하는 강한 끌림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창조하신 그리스도도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지만 그것이 가슴에 다가오기 위해서는 그분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가가 다가와야 돼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죄에 팔린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속전으로 당신 자신을 바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속전의 지불이 완불 된 것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죄 값을 다 치르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값이 치러지고 그를 믿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바쳐 죄에 팔린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사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셔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람의 몸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속전으로 지불하고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을 사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만약에 이 세상에 죄인이 한 사람 밖에 없었더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모두 전가 받으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가 믿을 때에 당신의 의를 전가 시켜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눈에는 이 사실이 잊혀지면 안 됩니다. 이건 인간이 아닙니다. 그 은혜를 잃어버리면 그게 사람이 아니라 이거야.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시는 사건이 늘 있는 거 누구에게나 베풀어주는 수돗물 같이 여겨지는 거야. 그런데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집주시고 떡 주시고 쌍둥이 낳게 해주시고 딸내미 서울대 들어가게 해 주시고 이것 때문에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을 죄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당신을 속전으로 지불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거를 늘 회상하면서 그 감격 속에서 사는 것이 이게 인간의 의무입니다. 인간의 의무.
B. 생명과 사랑의 전달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죄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것 입니다. 자 무슨 뜻이냐 하면은 맨 처음 인간이 잘 들어보세요. 맨 처음에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잖아요. 그죠 죄를 짓지 않았는데 그 인간이 참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었던 살수 살았던 그 시간 동안에는 그 비결이 뭐냐 하면 죄는 없었으니까 용서 받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그거 그러면은 그 이후에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그러면은 하나님과의 관계없이도 그 사람이 그 인간들이 충분히 잘 살 수 있었을 거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 인간이 참으로 살게 하시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계속 부어 주셨어야 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과 생명을 힘입어서 그래서 육체적으로도 생명을 가질 뿐 만 아니라 영혼이 생기 있어서 생명을 가지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째든 뭐 밥을 많이 먹는 건 별로 안 좋잖아요. 그렇죠? 자구 배가 나오고 그러니까 그런데 이게요 막 몸을 움직이면서 운동을 하는 것보다 머리를 쓸 때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요. 근데 이제 이렇게 머리를 쓰면서 이렇게 공부를 한다든지 아니면 연구를 한다든지 뭘 하잖아요. 그러면 이게 너무 몰두해서 밥을 제때 안 먹을 때가 있잖아요. 근데 이제 그러면은 어떻게 되냐면 생각이 전개가 안돼 생각이 그게 뭐냐 면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맨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놀라운 지적인 능력과 감정의 능력, 의지 이런 것들을 능력을 주셨어도 그걸 움직이고 작용하게 하는 어떤 정신적이고 영적인 힘들이 그것이 계속 부어지지 않으면 능력은 있으나 움직이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라 얘기 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러니까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뭐냐면 생명 입니다. 그 생명 입니다.
뿐만 아니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돌보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게 자기의 마음만 가지면 안 되고 그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돼. 근데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게 뭐냐면 사랑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셔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도 인간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기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기도 세계를 사랑하고 이렇게 할 때에 비로써 하나님을 대신한 대리자가 될 수 있을 것 아닙니다. 그렇죠. 그러기 위해서는 뭐냐면 단지 영혼만 가지고 있으면 저절로 사랑이 생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계속해서 사랑을 부어주셔야 했단 말입니다. 이런 연결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게 죄가 들어오면서 끊어져 버린 거야.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고 그래 결국은 힘이 다해서 생명의 기운이 떨어지면 육체는 죽어버리고 영혼 속엔 아예 생명이 없어서 그냥 먹고 입고 마시고 인간으로 생존을 위한 동물적인 기능정도는 하지만은 이 영혼 속에는 뭔가 생명이 있어서 생명이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운동이 그의 영혼 속에서 완전히 박탈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 이거는 이런 것은 역사 속에서 계속 되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께서 이게 그런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멸망되지 않고 유지 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잘 들으세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요.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지 삼일 만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요. 그래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다가 하늘로 가시고 주님이 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내가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보혜사는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의 뒤를 잇는 성령님의 별명 입니다. 그게 뭐냐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사이의 역할을 하셨던 것처럼 성령님이 오셔서 그런 역할을 하시고 또 예수님이 가난하고 고통 받고 병들고 혼자 일어설 수 없는 이들을 돕고 위로하신 것처럼 성령님께서 그렇게 오시고 무지한 자들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르치셨던 것처럼 성령님이 오셔서 이번에는 사람의 몸을 입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 속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는 일을 하신다 이거예요 그래서 보혜사야. 그 일을 할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내가 보내 주겠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것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온 사람 속에 임하고 그 다음에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믿는 그 순간에 성령께서 그 마음속에 들어가 계신 것입니다. 구약에선 왔다가 일만 끝나면 가 버리셨습니다. 근데 이젠 신자의 마음속에 오셔서 영원히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셔서 그 안에 계시는 거예요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기쁨, 샘솟듯 솟아나는 환희와 이 성령의 희락 이런 것들을 아담은 몰랐다 이것입니다. 아담은 경험하지 못했어요.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써 넘치는 은혜와 함께 이 성령님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 성령님이 이번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인간에게 계속 부어주시는 그입니다. 그러니까 뭐나 하면 성령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성령이 인간에게 오실 때에 그때 생명과 사랑으로서 신자의 마음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 면은 예전에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인생만을 생각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그리고 멋있게 죽을 궁리를 했는데 이번에는 성령님이 이 안에 오시면 생명을 찾아가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이신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갈려고 하고 거기에 붙어 있으려고 하고 죽어 있는 사람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그들에게 생명을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이 들어와요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게 오시면 사랑이 이 안에 가득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형제지간에 맨 쌈질 하고 말이지 부부싸움하고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불화하고 그랬는데 성령이 충만하게 오시면 원수 같은 인간이 그렇게 불상해 보이는 거야. 그래서 그를 긍휼히 여기게 되는 거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참 하나님과 사람으로 이 어두운 캄캄한 인간의 죄악 세상을 배경으로 하여 찬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와 빛줄기를 빛의 찬란한 빛의 줄기를 그으셨던 것처럼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이번에는 내가 그거를 그으면서 가는 거야. 물론 예수님처럼은 아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요. 원래 아버지도 성자야 엄마도 성인에 가까워 형제들도 뭐 완전히 진짜 성인들이야 현자들이야 그런데 자기가 태어나서 좀 잘 살아 그런데 빛이 나겠어요? 근데 집안이 개판이야 아버지는 뭐 주정뱅이고 엄마는 바람나서 도망하고 형제는 맨 날 쌈질거리하고 사고나치고 감옥소에 가고 집안이 캄캄해 그런데 한인간이 예수님을 만나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서 찬란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 인간도 맨 날 쌈질이나 하고 사고나 치던 인간인데 성령님이 오셔서 생명과 사랑이 흘러 들어오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 집안이 와서 보니까 족보에 이런 인간은 본적이 없는 거야. 그러면서 아! 그렇구나 어 사람을 사는 인생의 도리가 여기에 있구나 그래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 설교 했죠. 문둥병을 고친 그 사람들 아니 소경이었던 그 사람을 고친 이야기 나면서부터 소경 이었어요 내가 얘기하잖아요. 저는 지금도 부러워요 잘 믿는 아버지 잘 믿는 어머니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가정 그리고 정말 훌륭한 선생님 그리고 정말 인간의 도리를 아는 친구들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 부러워요 근데 몇이나 있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그러면 거꾸로 놓고 생각해보면 그런 속에서 못 태어난 걸 가지고 분통해 하고 후회하고. 어떤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자기 다시 태어나면 대한민국에 안 태어나겠다고 47%가 그랬데. 바보야 바보 아니 뭐 될 수도 없는 일에 거기다 대답을 하고 앉았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하고 있어. 나는 그런 거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그리고 난 오히려 이 나라 좋아요. 다시 태어나도 여기 태어나고 싶어요. 정말 입니다. 그 다시 태어나면은 여기에 태어나겠다는 사람이 47%밖에 안 되니까 우리라도 다시 태어나서 우리 후손이 모두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야 될 소명이 있잖아요. 아 20년 뒤로 올라가면 있지 30%도 안됐을 것입니다. 그 맨 날 잡아가고 감옥에 가고 개 패 듯 패고 그러는데 누가 태어나겠어요. 똑똑한 사람들 다 도망가지.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환경 속에 지금 놓여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고 불만하고 뭐 아유 내가 좋은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아유 내가 인격적인 남편한테 시집갔더라면 아유 내가 무슨 뭐 하나님 잘 믿는 경건한 장모님 만났더라면 그런 생각을 해보면 뭐하냐 이거예요 자기 인생이 아닌데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지.
그렇게 그대들이 인생이 캄캄하고 어두우니까 여러분이 잘 믿으면 그것이 배경이 되서 한줄기 선명한 빛이 되는 거야. 그 빛을 그으면서 인생길을 지나가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뭘 원망해야겠어요.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기를 원망해야 되겠어요. 어두움에 가득 찬 배경을 원망해야겠어요.
그래서 어떠한 속에서도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희망은 사라지지 않아요.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 내가 설교를 할 때에 여러분이 남이 알지 못하는 큰 죄를 지어서 이제는 너무 괴롭고 희망이 없다 괜찮아요. 죄를 지은 게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대답이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그 성육신은 얼마나 웃기는 거겠어요. 그런데 더 흉악한 죄인들도 용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예화] 나는 지금도 너무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여러해 전인데 제가 감옥, 감옥소에 그 설교하러갔어요. 근데 거기에 누가 있었냐 하면 김현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다 잊어버렸죠.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좋은 차타고 다니는 사장들을 납치 해다가 죽인 다음에 포를 떠서 그래서 아주 자디잘게 토막을 내어서 아주 잘디잘게 포를 뜨고 토막을 내어서 큰 아궁이를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석쇠에다가 다 태워서 흔적을 없애 버린 사람입니다. 15명인가를 죽였습니다. 잡혔습니다.사형언도 받았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사람이 결국은 그렇게 눈물로 전도하는 전도자의 전도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그러면서 그가 쓴 편지를 그 편지의 복사본을 제가 직접 봤어요. 그런데 정말 눈물납니다. 뭐라 그랬냐 하면은 자기는 이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이렇게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약 알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사형 당하기 며칠 전에 이런 고백을 했어요. 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찬양을 썼어요.
[나 같은 지는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리고 자기 장기를 남기고 형장에서 사라 졌어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남이 알지 못하는 큰 죄가 있어도 하나님이 죄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탁월성을 보여 주셨잖아요. 그러면 그 분께 돌아가기만 하면 여러분이 지금 죄 가운데 있는 이 큰 좌절과 고통은 캄캄한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용서를 받고 은혜를 경험하면 한 줄기의 찬란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보고는 예수 안 믿어도 원래 잘 사는 사람보고는 예수 안 믿어도 여러분 보고 하나님 살아계시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Ⅳ. 그리스도께 돌아오라
인생을 살다가 섭리 속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인생의 한계, 빚에 몰리고 더 인생이 눈을 감으면 다시 뜨고 싶은 않은 것 같은 인생의 고달픈 시련의 길, 천해 만해한 낭떠러지 에서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발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더 이상 갈 데 까지 간 그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사랑의 주인을 만나기만 하면 평탄하게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여러분의 그 막장 간 인생에 그 어두움을 배경으로 하여 찬란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빛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입니다. 우리들이 놓여 있는 어려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 내 인생의 모든 답이 그렇게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그리스도 거기에 답이 있었구나. 깨닫게 되는 거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믿은 여러분에게 도 내가 오늘 말하고 싶어요. 왜 사는 것이 곤고하고 기쁨이 없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은 믿는 그 순간에 이 속에 이미 커다란 목마름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그 빈 잔을 하나님이 우리의 이 마음속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입고 취하고 하는 이 모든 것으로서 죽어도 채워지지 않아요. 술 마시고 노래해보고 미친 듯이 질펀하게 타락해도 채워지지 않아요. 오직 주님만이 오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그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은 예수님 믿고 참 예수께 접붙여 신자가 되기를 바라고, 신자로써 주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그 생명을 누리며 여러분의 불행한 지금의 영적이고, 환경적인 처지를 어두움으로 삼아서 선명한 죄 때문에 빛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찬란한 은총의 영광을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4.그리스도, 믿음의 대상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장 2절)
Ⅰ.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혜와 능력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보이셨죠? 창조 시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하셨으나, 창조물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지만, 그러나 구속을 통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증거는 이 모든 세상 자연 만물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처음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다음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그렇게 독특하게 창조세계를 통해서 그리스도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히브리서 12장 앞에는 유명한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우는 11장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구약을 살았던 수많은 인물들이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은 흔적들이 나옵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행적을 열거한 후에 사도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그러니까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계속 달리자 그러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바라보자” 라고 하는 것은 “믿자”라고 하는 말과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바라보는 것 그 자체가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처럼,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러한 바라봄을 의미하는 것이죠,
A. 믿음의 본질(本質)
그래서 성경은 그 그리스도가 바로 믿음의 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창조를 통해, 구속을 통해, 특별히 하나님의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이 세상에 보여주셨고, 또 특별히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과 사랑 이런 것들을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 어둠 속에서 한줄기의 빛처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우리는 어떤 의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인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탁월하신 분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면, 거기에는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인간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신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의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참된 자리로 돌아갈 수 있고, 거기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탁월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인간의 가장 큰 의무,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의무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믿음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믿음이라는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이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도무지 살수가 없습니다. 비행기가 자주 하늘을 날다가 땅에 떨어져 모두 죽지만, 내가 타는 비행기는 안 떨어지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행기에 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즈음이야 뭐 그런 거 거의 없습니다마는 옛날에는 이발소에 가며는 동네 이발소에서 면도를 해주었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뒤로 누우면, 이발소 아저씨가 그 가죽에다가 칼을 착 갈아서, 그래서 남자를 면도를 하는데, 어디부터 하냐하면 여기 목에다가 먼저 시작을 합니다. 목에다가 닥 되고 그리고, 다음에 작 댕기면서 이렇게 면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면도해주는 이발소집 아저씨한테 생전 처음 보면서, 그 눈을 지그시 감고 목을 맡길 수 있는 것도 믿음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확률입니다. 확률, 왜냐하면 비행기도 떨어질 때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공중에서 비행기가 떨어져서 죽을 확률은 인도를 걸어가다가 차가 뛰어 올라와서 치어죽을 확률보다 더 작아요. 그러면, 차가 미친 듯이 인도에 뛰어 올라와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집안에만 갇혀있겠습니까? 아니, 신문에 난적이 없지만, 이발소집 아저씨가 정신이 약간 이상해서 그거 자기한테 목을 맡긴 사람 그 목이 닭목인줄 알고 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일이 잘 안 일어난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맡기는 거지, 그게 믿음하고 그런 거 하고는 상관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건 확률문제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이 믿음 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잘 들으세요.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는데 믿는 건 성경이 믿음이라고 말 안 해요. 내 주머니에 2만원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럼 필요 없다 이것입니다. 아니, 열어보면 알지 그걸 뭘 믿느냐 이야기죠.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가세요. 제가 왜 이렇게 상세히 말씀드리나 하면, 오늘날 믿음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 믿음이 확률의 문제와 막 섞여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 이라는 것과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이라는 것 사이에 구별을 못하고 혼선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세상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아요. 설명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아요.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세상에서 믿음이라 그럴 때 사용되는 그 말과 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사용되는 이 믿음이라는 말은 틀린 거라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 나는 자네를 믿네, 우리회사 처음 왔지만, 나는 자네가 잘해 줄 거라고 일단 믿네.” 그런 종류의 믿음이 예수를 믿는데 사용되는 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데, 이제 혼선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머릿속에 뒤섞여가지고 좀처럼 분리가 안 돼요. 그래서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혼란스럽게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성경으로 보면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추론되어서 이해 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실을 거기에 동의하고 그것을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믿음이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 믿음은 대상이 예수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어야지 예수와는 상관이 없이 끊어진 그 믿음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본질은 어떤 것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이 믿음이 말씀드린바와 같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논리대로 따져서 이해되고 납득 될 수 없는 것을, 없는 것을 하나님이 밝히 보여주신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동의하고 붙잡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1. 구원의 타(他) 길 포기
그 믿음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 있느냐 하면,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그리스도께 대한 그 믿음의 본질은 제일먼저 그리스도이외의 구원의 길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니, 그리스도 말고 다른 구원 얻을 길이 또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인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구원이 뭐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 구원이 뭘까 그랬더니,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 받고 그리고 내가 회개하니까, 주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이것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이제 분명히 하게 되었어요 그렇죠, 그럼 그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 이냐하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 정리가 되고 이제 알게 된 것은 사실 이지만, 그러나, 세상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이 구원에 대해서 이처럼 명료하고 분명한 생각을 가 진 것은 아니었죠? 그렇죠, 그러면 잘 들어보세요. 그러면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기독교신앙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욕망이 있었겠어요. 우리에게 자기가 지금 비참한 죄인이고 그리고, 지옥에 갈 운명이라고 하는 사실조차도 모르는데 무슨 구원을 갈망했겠어요. 그죠 그러니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기를 위해서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고 사느냐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다른 개념의 구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보다는 나은 또 다른 삶을 원하죠, 지금 보다 나은 자기가 되고 싶어 하죠 또 지금 만약에 행복하다면, 그 행복한 상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고민하고 애쓰죠. 그렇게 해서, 자 끊임없이 우리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늙 어가, 근데, 늙어가지 않으려고 막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구원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게 아주 큰집에서 그리고 좋은 차를 타고, 그리고 돈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대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그 돈으로 그렇게 사람들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불행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구원을 위한 여망입니다. 권력에 대한 탐심도 마찬가지죠. 권력을 많이 가져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많은 사람에게 지배를 받고 그들의 하인처럼 사는 것 보다는 그들을 지배하고 그리고, 자기의 뜻대로 그 사람들을 부리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어떤 일들을 행하면서 자기를 실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것이 바로 구원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이런 모든 빗나간 방향으로 구원 하고자하는 노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냐하면 인간 그자체가 완전히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구원의 길을 포기하는 거예요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행복해 질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 예수이외의 다른 길에는 없다고 하고, 전적으로 그러한 가능성과 그러한 기대들을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참된 행복의 길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 그 분 안에 있다. 부활하고 주님의 보좌에 앉으신 그분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의지의 동의와 마음의 인정
이렇게 믿게 되면, 그다음으로는 그렇게 주님을 믿게 될 때, 자기의 의지가 이 믿음에 동의를 하고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마음 깊이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아멘”입니다. 아멘, 그래서, 그 주님이 내 인생에 나의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이고 그리고, 나의 참 소망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의 깊은 인정함이 생기는 거예요 “아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이 모든 정신 전체에 예수그리스도가 들어와서 그분이 나의 인생의 행복을 위한 유일하고 참된 길이며, 그 밖의 어디에서도 나는 행복을 찾을 수없다고 하는 그것이 분명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분명하게 믿어지는 거예요
3. 절대의존
그리고는 마지막에 생겨나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에 그렇게 하면 생겨나는 게 뭐냐 하면 이제는 예수께 대한 절대의존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절대의존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절대의존 하는 것이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믿었습니다. 나의 건강을 믿고, 혹은 권력을 믿고, 그리고, 내 가문을 믿고, 돈 많고 힘 있는 우리의 아버지를 믿고, 그리고 친구들을 믿고 이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만이 자신의 인생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만약에 그 예수그리스도를 잃어버리면 나의 인생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심한 고통이요 형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 전적인 의존의 마음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종종 경험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순간 말씀을 듣거나, 기도하거나 혹은 묵상을 하거나, 혹은 찬양을 할 때에, 여태까지 내 인생에 희망을 주었던 모든 것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그것에 희망을 걸던 마음이 모두 깨어지고, 그리고, 오직 그 예수그리스도만을 깊이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녹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예수께 대한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의존의 마음은 언제 강력하게 생기느냐하면, 자기를 향한 의존의 마음이 깨어질 때, 그때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의 마음이 절실하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자기 깨어짐”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의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상이 딱 둘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그다음 누구를 의지해? 자기를 의지하느냐, 돈을 의지한다, 권력을 의지한다. 뭐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죠. 그것을 갖고 있는 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한국은행에 있는 돈 여러분이 의지할 수 있어요, 아 줘야 의지를 하지. 쓸 수가 없는데, 의지가 되냔 말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의지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깐. 결국은 돈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돈을 가지고 있는 나를 의지하는 거지요. 권력을 의지한다는 것은 권력을 쥐고 있는 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어떻게요.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갖고, 돈에 대한 욕망을 갖고, 뭐 이런 것들에 대한 욕망을 갖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더 잘 의지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집사님이 오래전에 저한테 간증을 하는데, 주님을 믿고 아주 강력하게 회심을 했어요. 그런데, 그 감격적인 은혜를 받았는데 좀 비딱선을 탔거든요. 그랬더니 나중에 덜커덕하고 걸렸어요. 그래가지고 뭐 감옥소도 가고 그랬는데, 이 양반이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예수 안 믿을 때는 요령을 피워도 잘 넘어갔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깐, 딱 걸린 데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정답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을 때에는 어차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섞여서 사니까 구원의 때가 이르지 않았더라면, 요령을 피우면서 살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딱 믿고 나면 그러면 하나님이 잘 들어 보세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믿고 그분에게 절대 의존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의존을 안 해요. 제일 좋은 건 뭐냐 하면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수시로 깨뜨려지는 거야, 집 애가 사고치지 않아도, 남편이 부도 안나도, 아내가 병원에서 사망선거 안받아도, 그냥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어두운 세상에 어떤 죄인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한 줄기의 섬광과 같이 찬란한 빛으로 당신의 사랑과 은총, 자비, 긍휼 이런 모든 것들을 내게 가리켜 주고 지나가셨는데, 예수님은 나를 위해 그 큰사랑을 베푸셨는데, 난 왜 이것 밖에 못살까?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지금 내가 나인 것에 대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베푸신 그 크신 사랑과 비할 데 없는 넓으신 은혜에 비하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주님 앞에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굳이 사건을 일으키실 이유가 없어요, 아니 말을 잘 듣는데, 거 잘 하려고 그러는데, 하나님이 왜 풍비박산을 만드시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이런 생각 안 들어요, 나는 조금 잘못하고 저 인간은 되게 잘못 했는데,이상하게 저 인간은 풍파가 안 일어나고, 난 요만큼 잘못했는데, 하여튼 된통 걸려서 찍사들하게 맞는 다 이것입니다. 왜 그럴까 그러면서 기껏 하는 말이, 하나님이 차별대우 하시나봐, 그거 정답입니다. 당연히 차별대우하시지, 차별하는 게 공평한 것입니다. 차별하는 게 공평한 거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그렇게 주어패지 않아도, 잘못할 땐, 하나님이 지켜보시지 않아요. 이렇게 허덕거리며 죄가 운데 살면 하나님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참 고생한다. 이렇게 지켜보시잖아요. 그러는데, 어 금방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드니 하나님 내 마음이 틀렸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며는 자기가 의존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기대가 깨어지고,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구속한 주 만 또렷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안 된다고 그랬지만, 어떤 성도가 고백했던 것처럼 주님 없이 천국의 꽃길을 걷는 것 보다는 주님과 함께 지옥의 불길을 걷고 싶습니다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근데 거기에는 뭐가 있냐하면, 주님께 대한 절대 의존마음에는 뭐가 있나하면, 자기에 대한 불신과 미움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그래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보다는 자기의 말을 더 잘 듣게 되었거든요. 야, 새벽기도 가자, 이 주님의 말씀이죠. 아이 좀더 자자, 누구 말 들어요. 그래,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야 좀 자자, 그럴 때 네 이놈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으면 깨어있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안하거든요. 그리고 자기편이 딱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 하나님이 돌아올 수 있도록 수없이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아주 작은 사건으로 그를 어루만지시면서 타이르시고 하시는데, 이게 자기를 워낙 꽉 믿으면, 그게 꼭 예수 믿는 것 같애 웬만한 환난과 핍박에 흔들리지를 않아, 그리고 자기를 꽉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떡해, 그러면서도 꿈이 뭐냐 하면, 예수 전적으로 의지하겠다. 것이 꿈이 아니라 돈을 꽉 잡아서, 한번 돈 가진 나 의지해야지, 하나님이 돈 통을 한번 날려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천에 그 사고 난 것 봐요, 졸지에 한사람한테 4억인가 물어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40명이니깐 160억 한 번에 날아간 것입니다. 왜 아주 여러해 전에 그 삼풍백화점 무너지었지 않아요. 근데, 전 세계에서 그렇게 순식간에 망한 사람은 거의 기록일 것입니다. 5초 사이에 전부다 망했어요. 나도 확인한 것은 아니고 어디서 들은 이야기지만 그 사장이 무슨 안수 집사였데요. 뭐라고 하냐하면, 한 달 전에 그 교회 목사님이 불러서, 당신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큰일 난다고 그랬데요. 그리고 한 달 있다가 와르르 무너져 버렸어요. 모든 돈 다 날아가고 자기는 감옥 속으로 들어가 고 막 온 백성이 일어나서 그 인간 살인죄로 집어넣어 된다고 막 소리소리 질렀잖아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번에 날려버리시는 것입니다. 왜? 이게 정상적으로 돌아오지 않으니까, 돈을 사랑하면, 돈을 명예를 사랑하면 부끄러움을 주시고, 인간을 사랑하면, 사랑하던 사람을 아예 죽여 버리시든지 데려가 버리시든지 대판 싸움하고 찢어지던지, 둘 중에 하나거든요. 아버지의 유산을 너무 그리워하면, 아버지가 둘째아들한테 다 물려줘 주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이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세상사를 막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눈에는 혼돈 서럽고 어지러워 보이는데, 질서 정연해요. 질서 정연해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착한 사람이 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론에서 이런 고백을 했어요. 거의 외웠는데 똑같지는 않지만, 들어보세요. “하나님 나도 이제는 내가 싫사옵니다. 이제 나도 내가 싫어버린 지금 나는 이제 당신만을 인하여 나도 즐거워하고 당신도 즐겁게 하고 싶나이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무엇을 빼앗아 가시겠어요. 난 내가 싫다는데, 난 내가 싫다는데, 빼앗아 가실게 있어야지, 난 내가 싫데, 내가 싫으니까 돈을 쥐고 있는 나도 싫고, 명예를 쥐고 있는 나도 싫으니까 이걸 쥐고 있는 내가 싫은데 이것은 좋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빼앗아 가시겠어요. 다 싫다는데, 다 싫다는데 무엇을 빼앗아 가시겠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건 이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뭐 그렇게 약한 데가 있으신가? 왜 그렇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시나?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 순종합니다. 절대 순종합니다. 다시 한 번 들어보세요. “나도 내가 싫어진 지금 나는 이제 오직 당신만을 인하여 나를 즐겁게 하고 당신을 즐겁게 하고 싶사옵나이다”, 그렇게 고백을 할 때, 그때에 그 사람이 어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바로 그것입니다.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힘들고 어려워서 순종하지 않는다고 그러는데, 그거 아니거든요. 순종안하는 이유는 그 순간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고 하나님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자기 자신의 방법을 더 많이 의지하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아무리 화려하고 예뻐도 하나님이 가장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바로 이렇게 상하고 깨뜨려진 마음, 그래서 주님만을 온전히 의존하는 절대의존의 마음, 그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다음에 제사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던 다윗이 51편에서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이 기뻐하였더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따로 있다, 이게 뭐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다” 그것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B. 믿음의 대상
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녹는 그 절절한 사랑을 한줄기 빛처럼 찬란하게 보여주시고,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이 녹아내리게 그렇게 해서 결국은 죄를 떠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구원하신 그 목적대로 하나님만을 의존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보면, 아우 열린 교회에서는 너무 신앙을 매우 힘들게 가리킨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힘들게 이유가 여러 개가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계명대로 살려면 이건 너무 너무, 힘든 게 아니라, 사실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계명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더라면, 아무 희망이 없는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치르신 그 희생과 고난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기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렇게 어두움 가운데 찬란하게 나타난 부인할 수 없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사랑과 은총을 굳게 붙드는 것 많이 자기가 참으로 하나님을 얻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포기하고 나면 그 주님의 계명은 어려운 계명이 아니라, 가벼운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게는 계명의 무게가 아니라 자기사랑 이라는 욕망의 무게 때문에 안 되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신앙은 바다를 헤엄쳐 가는 것과 똑같아요.
(예화) 여러분 수영장에서 그 올림픽가운데서 수영장에서 선수들이 수영하는 것 본적이 있지요. 본적 있죠. 그런데, 선수들이 수영하기 전까지 이렇게 수영하기 전에 수영복 바람으로 이렇게 벤치에 앉아서 이렇게 폼 잡고 있는 것을 본적이 없을 것입니다. 이상하게 두꺼운 담요같이 생긴 온 몸에 감싸고 있다가 호루라기를 불면 그때서야 이걸 벗고 나와서 삑 하면 수영장 속으로 휙 다이빙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모르죠, 그게 뭐냐 하면, 옷을 벗고 수영장에 있으면, 소름이 돋아, 추워서 그러면 물속에 다이빙을 탁 할 때에 이 소름에 물이 저항을 받아가지고 이게 속도가 느려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땀을 흠뻑 내서 여기가 촉촉하게 젖어서 맨질맨질 하게 됐을 때 물속으로 착 들어가며 는 미끄러지듯이 쏴 악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거 실험해보고 싶으면 말이죠, 어떻게 하면 되냐하면 실험해 보고 싶으면, 간단해요. 그런데 목욕탕집 주인이 좀 싫어하지, 사우나에 가서 땀을 착 낸 다음에 보면 땀을 씻고 탕에 들어가시오, 그것을 무시하고 탕에 착 들어 가 봐요. 그러면 몸이 미끄러지듯이 착 지나가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그리고, 아주 얇은 수영복 하나 입고 수영을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수영선수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보고 밍크코트 입고 나하고 한번 수영 내기하자 그러면은, 그 사람이 따라 올수가 있겠어요. 아마, 물에 뜨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이라고 하면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대적인, 계명의 무게가 아니라, 결코 계명의 무게가 아니라, 무게는 결국은 자기사랑의 욕망의 무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그래서, 예수님이 내 마음에 충만하게 오시고 나면, 의무가, 의무가 너무나 가벼운 것입니다. 십자가를 벗겨주셨기 때문에 가벼운 게 아니라,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과 자기를 의존하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사는 것입니다.
2. 성경
그러면,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이 누구냐, 그게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러잖아요. 믿으면 구원받는다, 무엇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예수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다. 아주 핵심적으로 요약을 하자면, 성경에 있는 것 다 믿어야지, 성경에 있는 것 다 알아야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성경 한 번도 안 읽었어도, 오직 한 가지를 확실하게 믿으며 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 사실을 내 마음으로 굳게 믿고, 다른 구원의 길을 모두 포기하게 될 때에 그것 하나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 하늘에 계실 때에는 죽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는 구원을 얻는 신앙으로는 불가능하죠. 그게 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을 굳게 믿고, 그 예수그리스도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셨고, 내가 어떻게 살든지 그분이 이 세상에 다시 내려오셔서, 나를 심판 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을 때에,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a. 율법
그런데, 잘 들으세요. 문제는 뭐냐 하면, 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반드시 무엇하나를 믿는 그 신앙과 나뉘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에 대한 신앙입니다. 성경에 대한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믿어지는데, 성경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둘 중에 하나가 착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던지, 성경이 안 믿어진다고 하는 것이 착각이던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가 보지도 못한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온 목수의 아들인 그 나사렛 예수가 죽은 그것이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디서 알게 되느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거든요. 그러면 순환논리에 의해서 그렇게, 그 2000년 전에 날 위해 죽은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게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건데, 성경 이 자체를 믿지 못하겠다는 그러면은 아까 믿었다고 하는 것과 순환논법에 의해서 이게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으로 본 것은 아니지마는, 누가 전해주었던지 간에 그것은 성경에서 나온 진리입니다. 근데, 성경에서 나온 진리를 믿지만, 성경은 믿지 못하겠다. 그러면, 이게 논리의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그 분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은 성경 진리에 대한 믿음을 함께 가지고 따라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직 이 66권 성경에 대한 믿음을 따라 들어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것입니다, 오늘 11장에서 그것을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 때에는 예수그리스도 오시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믿음을 따라서 죽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뭐냐 하면 “이러므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러니까 너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는 예수를 바라봐야 된다. 그럼 무슨 뜻입니다. 그 분들은 그렇게 믿음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대상이 결국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이제 너희를 위해서 예수가 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받았는데, 오진 않았지만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도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b 복음
그렇다면, 이미 온 예수그리스도의 시대에는 더 더욱 그분을 믿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잖아요. 그것을 성경이 증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제사와 생활에 대해서 증거 했는데 그 제사가 예수 오실 걸 알리는 제사였고, 그 생활이 오실 예수를 바라보며 준비하는 삶이였어요.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그리스도와 그분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기록입니다. 경배해야 될 기록입니다. 결국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라고 했는데, 이 예수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수많은 역사를 통해서 달려온 증거를 받으면서 오신분이고, 오신 그분은 달려가는 신약성경의 의해서 증거를 받으면서 오셨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시고 증거를 남기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성경을 믿는 이것은 나누어 질 수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게 되며 는 제일먼저 사랑하게 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전까지는 읽으면 이게 한 장을 읽으며 는, 졸릴 때 읽으면 닦입니다. 딱 읽으며 는 곧바로 잠이 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증거입니다. 놀라운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을 읽으면, 확실히 잠이 온다고 그래요, 낳고, 낳고, 낳고, 그런데 제가 아는 사람은 그 낳고, 낳고, 낳고를 읽다가 회심했어요. 거짓말 같죠. 어떻게 했냐고 그랬더니, 죽음의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성경을 딱 펼치니깐, 마태복음부터 읽어야 하잖아요. 낳고, 낳고, 낳고,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구나, 하고서 회의하고 확 회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졸리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지가 은혜가 떨어진 것입니다.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믿음은 나누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이야기입니다.
II. 그리스도 믿음의 유익
A. 율법으로부터 구속
자 그러면, 그렇게 그리스도예수를 굳게 믿을 때에 우리에게는 그러면, 어떤 유익이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그 믿음을 보시고,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내세요. 율법은 무엇이냐하면,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죄를 매기고 벌할 수 있는 근거가 율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율법을 우리 몸 바깥에다가 새기고 우리 마음 안에다 새기셨는데, 우리 몸 밖에 새기신 것은 바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돌에다 새기셨죠,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 새기신 율법은 우리의 양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지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심판하실 때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시냐 하면 율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 같은 사람들 그리고 율법을 어떤 식으로든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율법을 따라서 심판을 하시고, 그런 율법을 성경을 통해서 본적이 없어요.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양심을 율법 삼아서 그들의 죄를 정하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그렇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그 크기가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히 형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율법의 법칙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주 흉악하게 아주 처참하게 죽으셔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지요. 왜냐하면, 짊어지신 우리의 죄악이 너무나 악질적이고 큰 분량이었기 때문에 무한한 희생을 지불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됐단 말입니다. 그렇게 죽으시니깐 죄인들에 대해서는 그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모든 형벌을 감당하고, 예수님이 그 죄 값을 다 치루신 것입니다. 그렇게 치루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를 획득하신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고, 예수께서 소유하고 계신 그 의가 예수님의 의야, 우리가 믿는 그 순간에 예수님의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예수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나,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B. 죄로부터 구속
두 번째는 죄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구속은 자유로 나타나요.
1, 신분의 자유
우선,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신분 그자체가 죄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가지고 당신의 자녀로 이 세상에 만드셨는데, 죄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과는 원수 된 사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과 원수의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악하고 본뜨면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의존하면서, 자기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온 우주의 중심이 자기이고, 자신의 행복이 이 세상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자기를 위해서 스스로 봉사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던 인간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죄의 종이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장 좋아해요.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하면, 결국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죄에게 순종 할 것이기 때문에, 죄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끊임없이 사랑하게 되면, 이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감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슨 감동이냐 하면 자기 사랑의 감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사랑의 감동이 되면서, 자기를 위해 계속 살고자 하는 자원들이, 정신적인 자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힘을 내어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신분의 상태였어요.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믿는 순간에 하나님이 죄의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신분을 이동시켜 주는 것입니다. 신분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상태의 자유
두 번째는 무엇 이냐하면, 이제 이것은 신분이고, 또 하나는 상태의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죄를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이 영혼이 죄에게 점령되어 있고, 그리고 악한 마귀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병이 들 정도의 지배를 받지 않았지만, 이 악한 마귀의 지배를 받아서, 이 영혼에는 어두움이 가득하고, 지성에는 눈이 멀고, 의지는 하나님 앞에 좀처럼 복종을 안 하고, 감정은 고르지 못하고, 불균등해져서 욕망에 따라 출렁거리는 아주 불안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게 마음의 평안이 없고 참된 안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해도 나를 사랑하는 한계 안에서 할 경우에는 자유로운 것 같은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하면 이 속에서 억제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가끔 보면 우리 옛날에 개를 많이 길렀잖아요. 개를 기르면, 항상 말뚝에 묶어 놓고 기르잖아요. 다음 복날까지는 어쨌든 잘 자라야 되니까 묶어놓잖아요. 그러면, 인제 이 개가 묶어나요. 그러면 이 개가 줄이 이만큼 있는데 ,말뚝 가까이에 이러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이 개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인제 봄에 햇볕이 따듯하면 한숨 꺼벅거리고 졸다가 쭉 벋고 자지요. 그게 개 팔자 아니에요 그렇게 자는 것입니다. 근데 뭔가 부스럭하는 소리가 나요. 그때 벌떡 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딱 보니까 웬 사람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확 뛰어 나가요. 그때 자기가 여기에 묶였다는 것을 깜박 까먹은 것입니다. 잠자는 동안에 팍 뛰어나가는데 목을 탁 잡아채는 것입니다. 깨갱 그러잖아요, 그게 바로 그 말뚝에 개 줄에 묶인 개 같은 상태가 바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아니, 웃을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웃음이 나와요. 나오겠죠. 그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면서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때에는 아주 자연스러워요. 뭐 이렇게 억압을 못 느껴요. 그런데, 이건 아니야 하고 떨치고 하나님께로 갈려고 할 때에는 모가지를 탁 잡아채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라요. 주님을 부르지도 못해, 누군가가 와서 그 개 줄을 끌러주기 까지는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러한 상태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그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절대의존으로 마음으로 믿게 되며 는 하나님이 한순간에 그 개 줄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막 기뻐하면서, 이 영혼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는데, 주님이 내안에 오시니까 말이 지죠, 그 얽매였던 죄의 줄을 끊으니까, 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이 놀랍게 찾아 오셔서 죄의 힘보다 더 강한 은혜의 힘을 주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갈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뭐입니다. 마음에 얽매임, 얽매임 할 때에 제일 지독한 얽매임이 무엇이냐 하면, 미움입니다. 미움. 미움보다 더한 영혼의 얽매임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이요 누군가를 미워하면요. 그 사람 자신이 육체와 영혼이다 망가져요. 파괴된다고요. 오히려, 미움을 당하는 사람은 피둥피둥 잘사는데 미워하는 그 인간은 확 마르면서 비참한 몰골이 되어 가면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시집가 가지고 애를 낳으면 그 아이도 망가진 애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자기를 위해서라도 이것을 미워하지 말아야 되요. 그런데 이게요.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은 죽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탁 만나고 나며는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 하면, 용서하는 것, 그게 왜냐하면 자기가 용서가 무엇인지를 아주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그것을 아주 뼈저리게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그용서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을 보고, 용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용서하신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뭐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이 얽매이었던 이 죄의 사슬이 미움의 줄이 속박 상태에 있게 만들었던 이 줄이 끊어졌다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이속에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잖아요. 희한해요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 무엇이 생겨나나 하면, 무엇을 하던지 예수님이라면 하는 질문이 계속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윤리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하던지 모든 인간을 예수께 묶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능력과 구속의 지혜가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예수께 묶어서, 그래서, 예수께서 사셨던 삶의 질을 이어가게 하시는 것이지요.
C. 하나님과의 교통
이럴 때에 궁극적으로 무엇이 주어지냐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말이죠, 먹어야 살죠. 그죠? 그래서 세상 끝 날까지 번창하는 사업은 먹는 것입니다. 근데 너무 많이 가게를 하니깐, 사 먹는 사람 숫자 보다 가게 집주인이 더 많으니까 장사가 안 되는 것이지, 사실은 세상 끝날 때까지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비싼 음식점은 돈 있는 사람들 와서 먹으니까 잘되고, 싼 음식점은 돈 없는 사람들이 와서 먹으니까 잘되고, 다 잘 되게 되어 있거든요. 근데, 이제 잘 만들어야죠. 음식을 그런데, 육체는 계속 먹어야 살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셔서 우리의 육체는 계속 이렇게 음식을 공급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인간의 육체는 더 많이 음식에 대해서 의존적이 된 것입니다. 고기도 하나님이 먹게 해주시고 ,그러시잖아요. 그러지 이제 먹어야지 되는 거지요. 적절하게 먹어야 돼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나와요. 그리고 너무 덜 먹으며 는 여러 가지 질병이 오고, 그래 이걸 적절하게 잘 조절하면서 먹어야 되는데 이게 조금 먹다가 보면 이게 건강을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몇 초 동안의 이 맛을 즐기기 위해서 먹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먹는 것을 가만히 보면 2 만 원짜리 먹는 거나 2 천 원짜리 먹는 거나 배속에 들어가면 어차피 맛을 못 보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을 가끔 해요. 이게 입으로 안 들어가고 여기 옆구리에 구멍이 있어서 이렇게 집어넣는다고 그렇다면 비싼 음식점이 하나도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쪽으로 들어가며 는 여기에 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돼지고기를 넣던지, 비계를 집어넣던지 어떻게 하든 들어가면 그만 일 것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인제 입으로 들어가니까 몇 초 그래봐야 한10 초도 안 되잖아요. 그동안에 싼 것과 비싼 것의 맛의 차이가 현저하게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양념도 그렇게 많이 팔리고, 그 슈퍼에 가며는 정신이 산란할 정도로 음식의 종류가 그 전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가지 수가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런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 조그만 인간이 먹으면 이 속에서 건강을 위해 먹는 이것이 도락으로 딱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식도락으로 싹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또한 올무가 되어 가지고, 이것을 더 10 초 동안 즐기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되는 것입니다. 10 초 동안 별루인 것 보다 10초를 더 즐기기 위해서 돈을 좀 더 벌어 야해요. 그리고 비싼 것을 먹어야 되고. 이러면서 인간이 계속해서 배가 나오고, 이게 원리입니다. 어쨋든지 간에 인간의 몸은 계속해서 음식을 집어넣어서 건강을 유지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통해서 생명과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 받음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에 기대하셨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데, 그렇게 처음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이렇게 확 열려진 통로를 주셔서 그래서 접하는 이모든 자연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 처음 사람들 속으로 계속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음식을 잘 먹으면서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영혼도 건강함을 유지하면서 건강한 영혼과 건강한 육체가 만나 건강한 정신을 형성하면서, 인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이지요. 죄로 말미암아 이런 것들이 끊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셔서 결국은 회복시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처음 가졌던 그 통로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회복시키셔서,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예수께 접붙여져서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진리를 흘려보내시고 생명과 사랑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시어서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참 살아있게 하시는 것에요,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우리들이 생명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교통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에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이 가득하고, 눈을 떠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가득해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나 자신이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가야 할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때인데도, 그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련이 많이 오고 절망스러운 상황이 되면 사실 기도도 안 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어떤 때는 별 기대도 없이 교회에 나와서 푸념하듯이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기도를 해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찾아요. 어느 한순간 주님이 마음을 확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 며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나와요. 그러면은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때에 성령님이 오셔서 내 마음을 어루만지지 않을 때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나의 다른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면서 거기에서 나와 하나 되었던 내가 싫어지고 나를 불신하게 되면서, 그러면서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요. 그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놀라운 평강, 그리고, 놀라운 은혜 그리고 아주 놀라운 기쁨이 확하고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평강과 은혜가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냐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그랬어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확 밀려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되면 은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이 그 사람에게 계속 흘러들어오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와 함께 성령을 통해서, 생명과 사랑이 계속 그 사람 속에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이 본질 자체가 계속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본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본질이 계속 변화되는 것입니다. 왜 자기 성질대로, 자기 욕망대로 자기 사랑을 꽉 붙들고 산 그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하늘의 생명과 진리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똑 같을 수 있겠어요.
(예화) 여러분 참 놀라운 게 말입니다. 지금은 시골사람하고 서울사람하고는 구별이 별로 틀렸습니다마는 한 70 년 대 쯤만 되어도, 시골사람하고 서울 사람하고는 종류가 틀렸습니다. 종자가 틀려요. 그러니까 서울에 살면서 그냥 수많은 사기꾼들이 모인 그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속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또 자기도 속이려고 몸부림치면서 이렇게 부딪히면서 사는 사람하고, 그냥 저 시골에서 그냥 농사나 짓고, 돈도 별로 쓸 일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마주대하고 보면 종류가 틀립니다. 종류가, 우리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요 우리 부모님이 살던 시골에서 좀 더 깊이 읍내에서 더 멀리 면에서 더 들어가 며는 돈을 줘도 시골 사람들이 돈을 잘 안 받아요, 왜냐하면 돈을 쓸려며는 장 보는 날 가야 되는데, 장서는 날 그걸 가는 게 한 달에 한번이나 갈까 두 달에 한번이나 가니까 하니까, 돈 보다 더 오히려, 성냥, 치약가루, 나일론 양말 초 이런 것을 훨씬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사냥을 좋아하셨는데, 사냥하러 걸때에는 항상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배낭에다가 성냥, 초, 양말 이런 것을 잔뜩 넣어가지고 가요. 하나만 배낭에 넣어갖고 가며는요, 둘이 가서 한 보름은 끄떡없이 묵고와요. 사랑방에서 자고, 성냥한통하고 양말하나 주고가면, 아침까지 채려준다고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요 속고 속이는 게 무엇인지 몰라요. 그렇게 순박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똑같은 자기사랑인데도 그렇게 악한 걸 생각하고 살질 않아도 인간성이 이렇게 차별이 나는데, 하물며 한사람은 하나님 모르고, 날마다 변덕을 부리고, 자기를 욕망으로 휘몰아가는 이 사악한 자기를 꼭 붙들고 살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서 그렇게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면서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와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는 이렇게 쓰레기같이 삽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늘도 회개하고 내일도 참회하고 또 그다음날도 하나님 앞에 뉘우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성령과 진리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의 본성이 안 바뀐다면 그건 너무 이상하잖아요. 천천히 바뀌느냐 빨리 바뀌느냐 하는 문제가 있지마는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계속해서 바뀌어 나아가는 거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래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 꼴배기 싫어서 교회에 안나간다고 그래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그러니깐, 어떻게 예수 믿는 인간이 그따위로 사느냐고 그래요. 믿었으니깐 그 정도로 살지 안 믿었으면, 큰일 나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요. 그 인간이 믿었으니깐 그 만큼이라도 사는 것이지 그렇게 망가진 인간이 안 믿었으며 는 그 진짜 못 볼 텐데 그 교회 덕분인 줄 알아라. 그 정도만 하는 것만 해도 할아버지 인줄 알아라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고개를 끄덕거리면 안 돼요. 여러분이 그러면 안 되죠. 바로 그거 거든요. 그렇게 해서 자기가 계속해서 변해가는 것입니다.
D. 그리스도를 닮음
그러면, 변해가는 방향이 있을 것 아닙니다. 그럼 점점 변해가서 누구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흘러들어온 진리가 예수의 진리이고 그렇게 흘러들어온 성령이 예수의 성령이고, 성령을 통하여 흘러들어온 사랑이 예수를 통해 주어진 사랑이고 그 생명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어쩠든 그런 은혜를 계속 받게 되며 는 자기는 모르는데,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변해가서 그래서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쭉 변해가는 것입니다.
(예화) 한 10 년 전에 일인가요. 지금은 뭐 푹 삭아서, 요새는 거울보기가 싫어요. 너무나 눈이 밝아져서, 이상한 사람하나가 거울에 계속 나타나요. 그래서 내가 “넌 누구냐?” 한 10 년이었는데 기도원을 갔는데 밤에 차를 타고 가다가, 갈림길에 이렇게 닥 서서, 일리 가야 되나 일리 가야 되나 고민을 하고 차가 섰는데, 웬 차가 졸 졸 졸이 따라오더니 내 뒤에 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람 왜 내가 일리 가나 일리 가나 고민하는데, 이사람 왜 서나 그래, 그러더니, 차를 내려, 그래서 나는 내가 뭐를 잘못 한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도 얼른 내렸거든요. 그때 이제는 이렇게 스웨터를 입고 있었습니다. 뭐 티셔츠에다 스웨터를 기도하러 기도원 가니깐 따뜻한 스웨터를 이렇게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렸더니, 문을 열고 내려요, 그러더니, 아니 왜 그러세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그랬더니, 아니에요 그러더니, 무엇쯤 여쭤 불려고요. 뭘요. 어디 갈려면 이쪽으로 가야 되요 이쪽으로 가야 되요 그래서, 나 그것을 몰라서 지금 내가 여기에 서있다고 그러니까 나를 이렇게 쳐다보더니 그래요. 나를 쳐다봐요. 그래서 나를 쳐다봐요 그래서 “나를 알아요?” 알 수도 있잖아요. 책에서도 날 아아요 그러니까 아니래요, 그러더니 다시 날 이렇게 쳐다보더니 “저, 목사님이시죠?” 그래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아니, 어떻게 내가 목사인 것을 아냐고 하니깐. 그랬더니 얼굴에 써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오면서 계속 거울을 봤어요. 여기에 왜 이게 써있나, 이제는 진짜 좀 조심해야 되겠구나. 이거 그랬어요. 그러며 는 우리가 이렇게 직업 활동을 하면서 살아도 자기의 표가 나는데, 하물며, 예수님을 계속 생각하고 그분 앞에서 자기가 예수님처럼 못사는 것 때문에, 예수님의 사는 것에 비해서 자기가 너무 잘못 되었기 때문에 깨트려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사랑 없는 것 때문에 깨트려지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가 변화되어 갈 때 그 모습이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E. 창조목적을 따라 살아감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정신 차려 들으세요.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비밀 있냐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누구도 하나님은 직접 볼 수가 없거든요, 봤다고 그러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이용하신 자기를 보여주시는 매체를 본거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볼 수가 없어요. 그 하나님이 보이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계신데, 누구도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안계신데 가없이 이 모든 만드신 우주에 가득계신 분이죠. 그러니까 어디에서 하나님을 피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안 계신 곳 없이 이 모든 세계와 우주 안에 꽉 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시긴 하지만, 그 하나님이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과 섞여서 함께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기도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러나 이게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소나무 풀숲에도 계시지만, 소나무와 섞여서 계신 것이 아니라, 소나무는 소나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이 소나무가 있어도 소나무 때문에 당신자신이 있는 게 방해 받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기 때문에 소나무도 방해를 받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 안가요. 예수님 믿는 그 순간 성령님이 오셨죠, 그래서 뭐 창자가 한 3미터 잘려 나갔어요.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요. 주님이 오셨으니까 장소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다. 그럼 간이 자리를 비워주던지, 쓸개가 자리를 비워주던지, 뭐 위가 등으로 비켜서 공간을 좀 만들어 두어야 주님이 오실 것 아닙니다. 여러분은 웃잖아요. 뭐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체는 아무 변화가 없는데도 주님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오신 거예요, 창자하나 이동 안하고 쓸개 하나 안 떨어져서, 공간 안 남겼는데도 충만하게 오신 것처럼, 이제 이해 할 수 있겠죠? 더 설명 안 해도, 그렇게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에 안에 가득 계신 것 거거든요.
그러면 우주는 끝이 있을 거 아닙니다. 어떤 과학자들도 무한하다고 말하는 과학자는 없어요. 끝이 있다고 봐요. 근데 문제는 끝 바깥에 뭐가 있냐고 그러면 인제 대답을 못하지마는 끝이 있다고 본다 이것입니다.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끝이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은 끝이 없어요, 무한하신 분이시죠. 하나님은 결코 끝이 있으실 수가 없고, 하나님은 끝이 있으실 수가 없고, 동시에 하나님 아닌 모든 것들은 끝이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컵은 요기가 컵으로써 끝나는 것입니다. 여기는 컵이 아닙니다. 두 지점에서 컵이 끝나는 지점에서 손이 시작을 한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몸이 끝난 것입니다 내 몸은 이 곡선으로 끝난 것입니다. 여기는 내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존재하려면, 이 소나무를 밀쳐야지 만 존재해요. 내가 있는 것이 소나무에만 방해가 되고, 소나무가 있는 것이 나와 중첩해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해가 되시죠. 이것이 존재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시겠어요? 우주만 하시겠어요. 우주보다 훨씬 크시죠. 자 그런데,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은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실분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이 살아 계신 효과를 끊임없이 이 세상 속에 나타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계신 효과를 이 창조 세계 속에 나타내 보여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 하셨는데, 창조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야, 그렇지만, 하나님 속을 떠날 수가 있어요? 없어요,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끊임없이 창조하시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한번 창조 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세상이 계속해서 번성해 나아가게끔 하나님이 또 다른 의미에서 이 법칙들을 움직이면서 하나님이 또 다른 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금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나무나 풀 동물들의 번식, 그 다음에 풀포기나 아니면 하늘의 별, 달과 별, 바다의 물고기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번식시키고, 자라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에 일하고 계시는 놀라운 증거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이 살아계시고, 살아계시는 영향과 효과를 이 세계에 미치시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뭐냐 하면, 당신이 영이신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과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당신 닮게 만들어 가심으로써 끊임없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반복하시고 생성하고, 그다음에 전사하고 그다음에 발현시켜서 그래서 당신 자신을 이 세상에 계신 효과를 계속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사는 모든 세상에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이 당신을 가장 닮을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인간들도 그 안에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을 가장 닮는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예수그리스도를 사람에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심으로 그러한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하나님이 인간이 의심 없이 생생하게 볼 수 있게끔 하나님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연약한 몸을 입고 태어나서 인간의 삶을 살게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타락한 인간과는 다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품으면서 그렇게 창조의 목적을 따라 섬기면서 사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분이 그렇게 우리와는 다른 영혼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그 진리와 은혜의 감동을 받고, 그 앞에 자기를 끊임없이 자기를 깨트리는 그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의 모습을 점점 닮아 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잘 들어요. 그렇게 예수의 모습을 잘 닮아 가며는 예수님처럼 큰 키 예수님처럼 젊은 육체는 아리라고 할지라고 정신과 영혼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면 그러면,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영향을 끼치시고, 자기에 정신과 영혼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서 죄인들을 구원하고, 그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당신 닮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의 그 형상을 닮으면, 사람들에게 똑같이 그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해주고 우리는 잊어 버렸지만,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삼위 일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발견하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예전에 발견하고 그렇게 감동했던, 자기가 지은 모든 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과 부패 이모든 것들이 절망스럽게 느껴졌는데 그것을 캄캄한 어두움으로 삼아서 영광스러우시나 겸비하게 오시고, 그리고, 높으시나 낮은 분으로 오시고, 통치하시는 주시나 겸손히 섬기기 위해서 오시고 자족하시는 분이나, 의존하면서 주님을 향하여 사셨던 예수님의 그 생애가 한 줄기 빛처럼 찬란하게 아름답게 그 사람 앞을 그리고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꽉 붙들게 되는 거야, 그 사람도 예수님을 닮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점점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예수 닮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계속 변화해 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 생명과 사랑이 이 안에 넘쳐서 주님이 이 모든 세계를 아름답게 완성하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하며, 주님을 의존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어떠한 놀라운 일이 일어 나냐 하면 사람들이 예전에는 항상 자기 밖에 몰랐어요. 그래서 인간이 한번 부딪히면, 이 갈등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도 원을 그리면서 원을 그리면서 팽창하려고 하고, 저 인간도 팽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죽어버리면, 동그라미가 끝나니까 내가 뻗어가서 갈등이 없어지는데 근데 이게 살아있습니다. 둘만이 아니라 셋씩 넷씩 겹칠 때가 있습니다. 치열하게 다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안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 평화가 없지, 그런데 인제 사람들이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알게 되면 은혜가 떨어지며 는 자기 원을 그리면서 이렇게 자기 깃발을 꽂고 내가 그래 교만하게 살아, 이 인간도 이렇게 원을 그리면서 다가와 그러다가 쿵하고 부딪히는 거야, 이 인간이 한번 해볼 기여, 돈이면 돈, 칼이면 칼, 한번 해볼 기여,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경험하면서 다시 자기가 그렇게 더러운 인간인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던 그 사랑을 십자가 앞에서 내려놓고, 그리고 깊이 회개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 이 인간도 그러고 돌아가, 그러니까 잠시는 그렇게 원을 그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깨트려지며 는 그 십자가 사랑 안으로 다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그 속에서 사람은 다양해도 한분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원이 그려지면서, 그렇게 사랑의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인간들을 이 세상에 확 흩어져서 제 각각 살게 하지를 않고, 한곳으로 이렇게 모으신 곳입니다. 그게 어디냐 하면 교회에요 교회. 그래서 교회에서 그런 하나님의 진리, 성령 그 생명과 사랑 이것을 충분히 받아가지고, 그래가지고 일주일 동안 세상에 나아가서 그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살면서 예수 닮은 이 영향을 사람들에게 미치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좀 떨어질 만 하면, 와서 말씀을 듣고 다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성령 안에서 다시 회개 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또다시 힘을 얻고 그리고 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살아 있는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그 효과를 이 세상에 끊임없이 생명과 사랑을 펼치면서 살게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보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아들을 예수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 너희의 모든 죄를 위해 죽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의 할 일은 그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이다” 그러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요. 이제는 잘 믿어야 해요. 개떡같이 믿으면, 예수 믿어도 사는 게 고달프기 짝이 없어요. 잘 믿어서 이렇게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한없이 흘려보내는 그런 아름다운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5.십자가 은혜의 회복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24,25)
I. 회심치 않은 자에 대한 경고
A.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라
이렇게 참 하나님이신 그 분이 우리의 이 비천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시고자 하시기 이전에는 주님의 그 탁월한 아름다움, 우리를 향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총 같은 것들이 생생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리의 지은 모든 죄와 이 세상의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생애를 통하여 어두움을 긋고 지나가는 선명한 빛줄기처럼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의심할 수 없게끔 우리 모두에게 비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 몸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망가뜨린 당신께 반역한 모든 죄 값을 예수 주고 사셔서 용서해주시고 다시 그에게 하늘을 여시고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셔서 ‘참 사람’으로 살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그리고 그 분을 믿는 것이며 그리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이후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없으면 그는 사람이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오, 생명을 이어가되 그는 실상은 죽은 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분의 그 극한 고난의 형상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우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져온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치 않은 자에 대한 경고를 성경은 여러 차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우리 모두가 볼 수 있게끔 그렇게 멸시와 욕을 당하며 어두운 이 세상에 선명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그으며 사셨고 아무리 죄가 많은 인간이라도 그 분께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는 구원의 약속을 베푸시면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죄 값을 치르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하나님의 초청,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거역하고 인생을 종말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두 번 그들의 죄를 값으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더럽히고,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불효막심하게 살아 온 그 삶에 대해서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비참한 그 인간을 위해 친히 자기 외아들을 사람 옷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믿으라고 그렇게 뜨거운 사랑으로 그를 권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그 죄에 대해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B.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생각하라
그러므로 아직까지도 교회에 나왔지만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을 향하여 인생의 태도를 바꾸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 깊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듣지 못하였을 때에는 아마도 여러분은 “내가 교회 나갔지만 눈이 어두워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참된 사랑을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고 다른 것만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느 정도 변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의 모든 피에 대해서 나는 깨끗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나는 5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지금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들었던 어떠한 진리보다 중요한 진리이고 그리고 단지 듣고는 지나갈 수 없는 여러분의 인생에 본질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4일 동안 들었던 말씀과 오늘 들려오는 이 선포 앞에 “그것은 다 개소리다”라고 일어서서 진리를 버리고 떠나든지, 만약에 계속 듣겠으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식으로 결혼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믿는 가족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바로 이 모든 이 세상천지 만물 앞에서 사람 몸을 입고 오신 그 한 분이, 그 한 분만을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창조된 이 세상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그 분을 믿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 어떠한 행복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 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피 묻은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물결이 여러분을 유혹하고 여러분에게 좋은 것들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수많은 고통, 몸부림치며 행복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면서까지 인생을 살아왔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평안이 없는 삶과 그리고 찢어진 마음과 상처 난 가슴밖에는 여러분에게 남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이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는 비참합니다. 회심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영혼입니다.
C. 끊임없는 부르심을 생각하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을 처음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수 없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양심 안에서, 마음 안에서, 환경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많은 사람의 전도를 통해서,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평안한 삶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여러 차례 주셨습니다. 그러나 완고한 여러분은 이제까지도 회심치 아니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버린 삶을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안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여러분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여러분은 그 세상에 나그네처럼 세 들고 사는 사람인데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눈물을 흘려 본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향해서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얻고 어떤 지위를 누리든지 여러분은 결코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회개하든지 멸망하든지 두 길 밖에 없고 다른 길은 전혀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알고 그 분 앞에 이제껏 지은 모든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의 문을 열고 여러분의 영혼에 끊어졌던 양심, 그 생명의 진리와 사랑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전달하는 도구로 여러분을 이 세상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그리스도 예수를 꼭 붙드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생각지도 못한 행복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방황, 기독교 신앙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좋은 것일수록 비슷한 게 많기 때문에 올바르게 배우고 올바르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회심한 자에 대한 부르심
A. 은혜로부터의 부패
1.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의 상실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앙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깊은 회개의 흔적이 있고, 그렇게 회개할 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살아 온 지난 모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에 대해서 통절히 회개해야 하거든요? 회개하지 않고 구원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깊이 회개를 해야 해요. 그래서 저도 스물한 살 때에 회심을 했어요. 그 전까지 정말 교만했죠. 누구 이야길 쉽게 듣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러 교회 나가는 사람은 골 빠진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골을 빼놓고 산다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생각해야지 골 빼고 인생을 예수에게 맡긴다고 예수가 인생을 다시 살아주나?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자기들을 위해 뭘 할까? 그리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책도 많이 읽고 고민도 했어요. 창피한 이야기지만, 제가 스물한 살 때,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두꺼운 노트에 인생론을 쓴 청년입니다. 그게 아마 지금 남아 있다면 아무 쓸 데 없을 것입니다. 개소리지. 그런데 책을 읽고 고민하면 할수록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사람이 쓴 책 속에는 그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은 없어요. 문제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답은 없어요.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이 내 마음을 한 6개월에 걸쳐서 녹이기 시작하셨습니다. 공부할 때인데, 밤새도록 공부하는 새벽에 저 멀리서 ‘댕그렁~ 댕그렁~’새벽의 종소리가 들려요.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새벽에 조용히 공부하는 4시쯤 되면 그 종소리가 확 올라와요. 형언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거기 가면 평화가 있을 것 같아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저를 교회로 이끄셨습니다. 저 교회 데려간 사람 없습니다. 제 발로 걸어갔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이 마음에 울려 퍼졌어요.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가장 시시하고 유치하다고 믿었던 교회에 인생의 대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2천년 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분, 방황하는 나의 삶을 멀리 지켜보시며 그 긴 세월동안 웃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이라고 고백을 하고 나니 순간에 일생동안 경험해본 적이 없는 놀라운 평화가 영혼 깊이 밀려 들어왔어요. 이게 십자가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 십자가에 대한 경험과 함께 사람이 지난 죄는 회개하고 예수는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될 때에, 이제 그게 바로 은혜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십자가의 경험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될 때 한 번만 일어나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계속 내 안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는 2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성령께서 오셔서 그 분의 죽음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그 사건은 지금 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사건이 되어서 나의 정신 속에서 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으시는 그 고난의 아픔 때문에 흘리는 그 눈물은 2천년 전에 돌아가신 십자가에 대한 애도라기보다는, 지금 현재적으로 내 정신 안에 반복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 반응입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서 살고 참된 복음 안에서 예수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이 오늘도 내일도 계속 반복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을 잘 믿고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매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했어요. 그리고 깊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아파했어요. 그게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입니다.
2. 은혜의 지배로부터 멀어짐
a.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림
그런데 문제는 은혜로부터 부패하게 되면 여기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 십자가가 수시로 내 마음 속에 느껴져서, 그래서 나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면서 나를 부인하고, 나를 못 박고, 주님이 내 안에 충만히 사셔서,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연합하는 그 영생의 행복을 실제의 삶 속에서 누릴 수가 있었는데, 이제 이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부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패하게 되는 것은 선한 것만 부패하지, 더러운 것, 악한 것은 부패하는 것이 없어요. 그러면 선한 것 중에서 이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생명과 사랑입니다. 이것보다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또 이것보다 쉽게 부패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한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 펑펑 울고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다고 감격했던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멀어지자 그 은혜는 부패하고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로부터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신자의 아름다운 삶은 바로 이 은혜에 의해 지배를 받는 생활입니다. 이 은혜가 그의 영혼과 정신 안에 가득해서 이 은혜가 흘러가는 그 물에 자기를 맡기고 그 은혜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자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으로 데려가려고 하고, 죄는 우리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그 목적으로부터 우리를 이탈시키려고 하는 것이 죄와 은혜의 성격의 차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수록 인생의 목표가 아주 분명해져요. 그래서 은혜가 충만해지면 그 사람의 사는 것이 돈 많이 버는 것일 수 없고, 그리고 큰 집에서 사는 것일 수 없고, 애들 좋은 대학 보내고 돈 많은 집에 시집보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영혼 그 자체가 하나님을 좋아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행복하실 수 있는 그 삶을 내가 살아드리는 데서 내 영혼도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지배로 들어가게 되면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지속적으로 통치를 받으며 살게 되면 자기가 사는 인생의 목적이 아주 분명해요.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내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사명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감당하여야 하고 그리고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나에게도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나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죄 자체가 목표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방황하게 만들어요.
b. 은혜의 방편의 미각을 상실함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수단들로부터 멀어져요. 굳은 땅은 곡괭이로 파고, 파서 모은 흙은 삽으로 퍼 담고, 퍼 담은 흙은 삼태기로 옮기잖아요. 이게 도구잖아요. 밥을 먹을 때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먼저 찾잖아요.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머리통에다 구멍을 뚫어서 깔대기로 부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이 놀라운 은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우리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이 은혜도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시는 수단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가슴 속에 옮겨주는 가장 훌륭한 방편입니다. 그래서 세속 이야기에 빠지고, 세상 사랑에 빠지고, 세속에 물들고 생활하면, 거기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같은 것들 발견할 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우리에게 증거 될 때, 우리가 그 진리를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그 때에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영혼 속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를 듣고 있어도 자기의 마음의 상태나 이 모든 것에 의해서 그 진리가 공허하게 들리기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지 못하는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마음에 떨어졌는데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서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되어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그 모든 마음에는 어쨌든 그 씨가 떨어졌듯이, 진리가 전해지는 진리를 방편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질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쓰고, 진리를 깨달으려고 애를 쓰는 이 노력이 세상 지식 배우려고 하는, 세상에 대해서 알고 자기의 육체에 대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 때,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여러분의 영혼 속에 전달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훌륭한 은혜의 방편이지요. 그래서 깨달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며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마음의 틀들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존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시기 때문에 이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또 피를 흘려주신 그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사,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그 구속을 위한 고난, 그것이 바로 집약되어서 우리의 눈으로 생생하게 보도록, 그리고 우리의 입으로 그것을 맛보도록, 그리고 우리의 온갖 오관을 사용하여서 생생하게 전달되도록 만들어주시는 은혜의 수단이 성찬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기도를 많이 하고 정결하게 한 다음에 참여하면, 그 성찬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주 생생하게 사람 몸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이 심령이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식을 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회개하여 다시 그 은혜의 생명이 내 마음에 부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만하면 간절한 기도 속에서 다시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충만해지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하나님, 내가 잠시 눈이 멀었습니다. 내가 사랑할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입니다.” 라고 고백해요. 방황하면서 제 멋대로 살다가 그렇게.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바 나의 몸이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니 곧 언약의 피니라.” 할 때 그 떡을 떼고 그 잔을 마시면서 “그래, 예수님은 나를 위해 살을 다 찢으시고 나를 위해 피를 흘려 이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하시고 방황하면서 미친 듯이 살던 내 인생을 사랑으로 길들여주셔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고 주님을 알아보게 하신 은혜.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며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c. 자기사항으로 고립됨
그런데 은혜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되면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져서 예수의 사랑을 전해도 마음이 녹지를 않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날에도 심령이 떨지를 않아요. 그래서 결국은 돌덩이 같은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마음에는 결국은 자기 밖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어요.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결국은 자기 사랑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는데, 자기 혼자 동떨어져 있다는 깊은 고립감입니다. 여러 해 되었습니다. 5~6년 됐는데, 혼자 이 사랑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다가 정말 생애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해도 한 인간이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하여 한 사람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게 될 때, 그 안에 수많은 사랑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 외로움에 빠지는 것은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외로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외로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은혜로부터 부패하여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면, 이러한 영혼의 부패, 십자가 은혜로부터 멀어진 이 부패에서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 부패로부터의 회복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B. 부패로부터의 회복
1. 영혼의 상태를 성찰함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쉽지 않아요. 담배에 인이 배긴 사람은 담배가 가지고 있는 독성에 대해서 객관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요? 술에 빠져서 중독된 상태가 된 사람이 오늘 이 독한 술을 마시면 이것이 나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생각하기 어렵겠죠. 먹기를 매우 탐하는 사람이 이 음식이 들어가면 나의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 객관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일단 사랑에 빠지게 되면 객관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래도 자기반성이 잘 되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니까, 말씀이 빛을 비추어주면 늘 깨닫는 마음이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깨닫게 되요. 기도가 살아 있으니까 처음엔 나 잘난 줄 알고 막 기도했는데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닫게 해주세요. ‘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이 모습이 아니구나.’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모로 깨닫게 해주세요. 또 이 세상에 코 박고 이 세상 밖에 없는 것처럼 미친 듯이 살다가 성찬에 한번 참여하게 되면 깊이 깨달아요.
2. 믿음을 가짐
a. 치르신 죄 값을 기억함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깊이 성찰하게 되요.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 있어서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옷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아주 치욕스러운 죽음 속에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지불하실 수 있는 최고의 값을 지불하시고 여러분을 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주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계세요. 그렇게 값비싸게 사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매우 귀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매우 귀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여러분을 구원하셨으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은혜를 많이 받고 부패하지 않고 하나님을 참 의지하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원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도 ‘내가 막 구원받고 싶어 했더니 하나님께서 겨우 나에게 밧줄을 던져주셨다’라고 말할 수 없고, 어느 한 순간에 ‘내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그렇게 울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이 불현듯 나를 인생의 벼랑 끝에서 건져주셨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듯이,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타락하거나 부패한 영혼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께서 아주 놀랍게 은혜로 다가오셨습니다.
b. 베푸실 사랑을 기대함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부패한 영혼의 상태를 회복시키셔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윽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신 것이지요. 제가 셋째 날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은 일반 섭리의 축복이 있고 영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일반 섭리의 복은 건강을 주시고 사업이 잘 되게 해주시고 애들 말 잘 듣게 해주시고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주시고 아파트 샀는데 값이 오르게 해주시고 뭐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복이지만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서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는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해요. 이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느끼고 내가 선교를 하겠습니다, 목사가 되겠습니다 그러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끼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된 사람 중에서 그 사람, 땅 투기하다가 뜨겁게 느꼈기 때문에 영혼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람 본 적 있어요? 집을 사놨는데 막 엄청나게 올랐어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교회가 빚을 내서 교회를 지었는데 IMF가 나서 100억인가 빌렸는데 한 달에 이자가 2억5천이 나왔데요. 장로님들이 일 년 동안 돌아가면서 집을 팔았데요. 참 그 분들도 대단해요. 교회가 하도 어려우니까 어떤 권사님이 “이 땅이라도 보태쓰시오.”하고 문서를 하나 가져왔는데, 웬 길도 없는 밭뙈기 하나더래요. 그래서 ‘에이그, 제길’하며 교회 금고에 턱 놓아두었는데 신도시 개발이 되었는데, 거기가 정 가운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50억에 팔았데요.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일반섭리의 복이지요. 그것은 사람 마음속에 오래 남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하나님이 그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평생 잊혀지지 않고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요. 그리고 실제로 그 영혼에 성향들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상태를 깊이 성찰해가는 가장 훌륭한 비결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자기를 세우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은혜가 떨어져서 기도할 때에는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거든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도대체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제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 나를 보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취어주세요. 그래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또렷이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고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럼 어떠한 믿음이냐면, 제일 먼저 해야 할 믿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면 그런 생각이 들게 되거든요? 자기가 잘못한 것 없이 은혜를 다 까먹고 죄의 지배의 상태에 들어가지 않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만 그러나 잘 안 될 때 그 때 많은 생각들이 이 속에서 혼란스럽게 오고가요.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내가 지은 죄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무 화나셔서 나 같은 인간에게 상대해 주시지도 않는다.’ 라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아가다가 마음이 낙심하면 이 마음에,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기고 자포자기 하는 마음이 생기고 무엇이 더 나빠지랴 하면서 오히려 더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먼저 보지 말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그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또한 기도도 허공을 치면서 하나님께 올리는 그런 기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시선을 예수께 고정한 가운데 그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은 예수를 통해서 오고, 모든 나쁜 것들은 예수를 통해서 온전케 되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이 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른다고 제가 둘째 시간에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치르신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 값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 아주 중요한 복음적 사실이 있습니다. 아주 쉽게 설명할 테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보세요. 일평생에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제 살았고 오늘 살고 있고 내일도 하나님이 허락하면 살겠죠. 어제는 살았지만 그래서 오늘 왔으나 어제는 이미 흘러가 버려서 내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오늘 하루 동안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간도 쉼 없이 미래로부터 달려와서 현재를 거쳐서 지나가고 있는 것이 오늘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렇게 말하는 이 시간 중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오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기억이 나는 과거의 시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예상이 되는 어느 시점까지 끊어서 24시간을 우리들이 오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실은 오늘이라는 것이 동시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과거는 흘러가 버렸고 현재는 그냥 부단히 지나가고 있는 거고 무엇하나도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있는 시간이 계속 흘러 들어와도 미래가 과거 속으로 들어가면서 미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계속 흘러가도 미래는 계속 뒤로 밀려가면서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현재대로 그대로 남아 있고, 그리고 그 현재는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과거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흘러갔는데도 미래는 미래 그 앞에 그대로 있고 과거는 지나간 채 그대로 있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현재는 끊임없이 현재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속에서 사는 것이 인간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 창조한 모든 것들은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지나갔고 오지 않은 시간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해요. 인간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도 있고 지금 현재 짓고 있는 죄도 있고 미래에 지을 죄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많이 섬기겠지만, 또 여러분이 많은 죄도 짓고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며 그렇게 인생을 살겠죠. 그런데 그 아들을 사람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이 치르신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하나님은 시간에 매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일어난 모든 일을 한꺼번에 확 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와서 구원받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을 때에는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나 현재의 죄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짓겠지만 아직은 시간이 흘러오지 않아서 발생하지 않은 그것까지 모두 짊어지고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이미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도 하나님은 한 눈에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에서 강릉 가는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보면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려서 대관령이고 뭐고 다 뚫어서 지나가잖아요. 정말 빨라요. 옛날에는 대관령을 넘어가는데, 강원도 사람들은 말하기를 대관령 아흔아홉구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관령을 넘어가면서 재봤어요. 아흔아홉개는 거짓말이고 일흔일곱개더라구요. 옛날사람은 아흔아홉개가 맞았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걸어서 지나갔을 테니 그 때는 아흔아홉개 되었겠죠. 그런데 이제 길을 닦아놓으니 이제 일흔일곱개더라고. 하여튼 정신없이 뱅글뱅글 돌죠. 지나갈 때는 앞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 위에서 비행기 위해서 내려다보면 개미같이 작은 자동차가 발발거리면서 올라오죠. 와, 여기 낭떠러지네, 하는데 비행기 탄 사람은 내려다보며 다 알지요. 그렇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길을 한 번에 보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죄 가운데 있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많이 미끄러지고 은혜로부터 부패했지만 예수님은 바로 이것까지도 죄 값을 다 치르고 나를 위해서 이 십자가에 못박히셨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당하신 그 큰 고난과 아픔이 바로 이렇게 내가 지은 이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구나, 하면서 예수님이 치르신 죄 값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아주 진지한 생각을 갖게 되요. 뿐만 아니라, 이렇게 악한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 까지 예수님이 희생하셨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신 분인가,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값 비싸게 산 나를 하나님이 버리실 리가 없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신 그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나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그 베푸신 사랑을 깊이 기억하며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그 사랑을 기대하게 될 때에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번 구원한 자기의 백성을 결코 버리시는 적도 없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 느끼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뭐냐 하면, 아직 마음이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 버리시면 사람들이 죄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하고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은혜로부터 멀어진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사는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가,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주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그 진실한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로부터 멀어져 사는 영혼의 고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실제로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마음을 곧게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악한 부모라도 자식이 나쁜 짓을 하면 가끔 후려칠 적은 있어도 그 자식을 버리거나 죽여버릴 생각은 안하는 게 부모의 마음인데, 가끔 부모들 “저 자식 안 태어났으면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게 상처가 되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저 뱃속에서 안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어떻겠어, 답변을 할 게 없잖아, 그러니까 봉변당하지 말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부모는 자식을 깊이 사랑해요. 부패로부터 회복되기 위해서 또 믿음을 가지고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께 마음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 마음을 고정함
a. 마음의 나뉨을 경계함
무엇보다도 마음의 나뉨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밖의 세계와 접촉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밖의 세계는 두 가지인데 하나님께 속한 정신의 세계와, 그리고 하나님께 속해있지만 또 물질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물질의 세계는 눈과 코, 입과 귀, 그리고 살갗의 접촉,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 세계와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접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목사님께서 눈을 수술하시고 나서 설교가 굉장히 밝아졌다고 그러는데, 그런가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아요. 전에는 여러분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뿌옇기 때문에 어디 쳐다볼 데가 별로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경을 벗으면 조금 덜 보이지만 그래도 또렷하게 보이고 안경을 쓰면 저 뒤에 있는 사람이 인상을 찡그린 것 까지도 느껴질 정도로 시력이 좋아졌어요. 그러니까 기분이 굉장히 밝아요. 아직은 적응이 안됐는데 어쨌든 밝아요. 그래서 제가 어젯밤에 한참 눈이 안보여서 마음이 너무 우울할 때 쓴 글을 하나 올렸어요. 담임목사 에세이에. 그게 내 마음이었어요, 그 때. 이렇게 놀랍게 달라지죠.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기분이 좋잖아요. 그게 뭐에요? 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머리를 만져주거나 등을 두드려주거나 얼굴을 만져주면 행복하죠. 그게 뭐에요? 촉감입니다. 골이 띵하고 어지러운데 이렇게 머리를 맑게 하는 향을 피워놓고 들이마시면 정신이 맑아져요. 뭐죠? 코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혼란하고 괴로운데 마음의 질서를 잡아주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다시 자기에 집중하게 만들어주잖아요. 이렇게 오관(육체의 다섯까지 감각)에 의해서 이 세상과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촉을 할 때에 이것들을 나에게 실어다주는 것은 몸이 하는 것이지만, 실어다 준 것을 해석해서 내 정신과 여기에 영향을 미치게 만들어주는 것은 영혼이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영혼이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실어다주는 것은 육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려 온 그것을 해석해서 우리의 정신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은 영혼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는 것이 많고 냄새가 수없이 들어오고 귀에 별의 별게 다 들리고 입으로 맛있는 거 별거 이상한 거 다 들어가고 만져지는 게 수없이 많고 이러면 영혼이 얼마나 정신없겠어요. 그것을 해석해 줘야 하니까. 영혼이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은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이거든요.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을 통해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이 정신에 이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많은 다섯 가지 감각들을 영혼이 해석을 해서 우리의 정신에 전달해 줄 때 이게 막 전달이 되면 영혼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그게 바로 우리의 감정이 되는 것입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막 용솟음치면서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고, 막 우울한 마음이 심란해지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막 기쁘기도 하고 맛없는 것을 먹으면 퉤퉤- 이 인간이 나를 뭘로 생각하나 내가 아무리 돈을 못 벌어다주기로서니 밥이 이게 뭔가, 내 아내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나보다, 이런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이렇게 영혼이 해석을 하는데 그 중에는 굉장히 가치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데 가치 있는 것들도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괜찮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무차별로 눈으로 귀로 코로 막 들어올 때 영혼이 이것을 들입다 해석해주는데 초점이 없어. 이렇게 막 들어오는데 영혼이 실려 들어오는 것을 해석을 해줘야 되요. 그런데 이게 들어오는데 초점은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영혼은 생각이 나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하여튼 사람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데 에 있어서, 마음을 고정 시키는 데 있어서, 이 나뉘어짐은 최대의 적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눈, 코, 귀, 입 막 감정을 자극하는 수많은 것들이 많이 일어나게 될 때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원 같은 데에, 꼭 기도원 아니더라도 시골 같은 데 가서 조용하게 사람 없는 곳에, 한 적한 곳에 고요히 있어서 아침에 홀로 눈을 떠서 고요히 혼자 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잘 모아지고 성경도 잘 들어오고 기도도 잘 되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 멀리 안가더라도 아침 시간에 방해받지 않고 나와서 조용한 교회당에서 기도 잘 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그렇게 해석해달라는 정보를 잘 전달을 안 해주니까 활동이 쉬워지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냥 볼 수 있는 것은 다 봐야 되는 줄 알고,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지 들어도 되는 줄 알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지 먹어도 되는 줄 알고, 만질 수 있는 것은 모든 지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맡아도 되는 것은 모든 지 맡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관성 없이 초점이 없이 수많은 정보를 전달하면서 해석해달라고 영혼에게 막 요구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막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다 가끔 잠시 멈추면서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에 집중해봐야지, 그런데 영혼이 너무 피곤하게 움직인 것입니다. 아직까지 잔상이 남아 있어서 영혼이 계속 해석을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도 생각이 나는데 그 많은 정보 가운데 하나로 취급이 되는 것입니다. 끝나고 나면 또 사라져버리고 지속적인 집중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되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그 예수를 생각하게 되기 위해서는, 들어오는 이 많은 감각적인 것들을 죽여야 되요. 죽일 때 예수가 내 마음 속에 집중적으로 생각하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산 속에 들어가서 고요히 예수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실까요? 그러면 이 세상은 누가 돌보아?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옛날에 살았던 수도사나 이런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함은 높이 사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본은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우리에게 뭐라셨어요? ‘너희는 모든 족속에게로 가서’ 그 모든 족속이 어쩌고 살아? 정말 타락한 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속으로 깊이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것들을 지키게 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이 세상을 올바로 질서를 잡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려면 눈에 끊임없이 정보가 들어와요, 안 들어와요? 죄인을 만나고 허튼 짓하는 인간을 찾아가야 할 일이 있지, 예수 잘 믿는 사람 찾아가 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앙쇼? 그러니까 수없이 이 속에 막 들어오게 되는 거요. 그런 게 아무리 많이 들어와도 주님을 생각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경우가 있단 말입니다. 그게 뭐냐면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이런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한가할 때는 은혜 생활을 잘 했는데, 바빠지니까 은혜 생활을 팽개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무슨 공식이 생기냐면, 아, 내가 바빠지고 일이 많아지면 신앙이 떨어진다, 그래서 결국 마음이 미끄러진다, 그래서 스스로 바빠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뭐 괜찮아요. 사업에 욕심 덜 내고 살고 괜찮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어떤 때는 육신적으로 매우 고달프고 일이 엄청나게 많았는데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예수의 은혜에 붙어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바쁘다’라고 하는 얘기는 뭐에요? 삶의 상황이 수없이 들어오는 것, 그러면 마음이 다 나뉘어지는데 그러면 어떻게 예수께 잘 붙어있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하나의 경건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짧게 볼 때는 오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 자체의 양에 문제가 되지만, 그러나 짧게 보면 그게 문제지만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정보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의 통일성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은혜 가운데 있으면 눈에 수 없이 들어요. 이것을 내버려 둬서 상상의 날개를 펴면, 결국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고 냄새 맡고 먹고 육체에 접촉을 하고 그러면서 결국 신앙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많은 것들이 들어와도 이것을 해석할 때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을 해서 하나님과 연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어오는 정보 자체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나 임무, 내가 해야 될 일, 이 모든 것들에 집중이 되면서 다가오는 모든 정보의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 예를 들죠. 은혜가 떨어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는 무엇을 보든지 간에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돈 벌면 자기 먹고 자기 사 입고 자기 바르고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 중에 있으면 사업을 하고 돈을 벌어도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요. 아, 여기 가니까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구나, 누가 돕는 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고 보니 하나님이 여기에서 나에게 이런 사명을 주셨구나, 이렇게 많은 수입을 주셨으니 내가 이 일을 쓰면 좋겠구나, 하고 무엇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쁘면 바쁠수록 더욱 더 하나님게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고도의 영적 생활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나뉘어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밀려들어오는 이 오관의 수많은 감각들을 정리를 해야되요. 덜 들어오게끔, 덜 보고, 덜 듣고, 덜 먹고, 덜 쾌락에 빠지고 이렇게 절제를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생각하게 해달라고 깊이 매달릴 때 그 예수가 또렷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b. 은혜의 불씨를 유지함
두 번째는 은혜의 불씨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부패하고 나면 어느 한 순간에 성령의 강한 불과 강한 은혜와 사랑이 막 획기적으로 주어지길 원하지만 사실 소수의 경우에만 그러지 대부분의 경우에는 서서히 그 마음이 변화되면서 다시 은혜를 회복해요. 그 때에 은혜의 불씨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때 그것을 잘 간직해야 해요. 제일 먼저 커다란 통나무 가져다 놓고 성냥불 붙이는 사람 없어요. 마른 나뭇가지 조그만 것들을 성냥개피 같은 거 덩굴 같은 거 모아서 채우고 그 다음에 불을 붙인 다음에 손으로 바람을 막으면서 후~ 불고 그럼 살아나요. 그 다음에 조금 더 큰 나무 얹고 다시 살아, 조금 더 큰 나무 얹고 다시 살아, 아주 큰 나무 얹으면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졌을 때 조금이라도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가슴에 잘 간직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 은혜를 받았으면 좀 더 경건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하나님 말씀 듣고 예배 참석하고 어려워도 기도하려고 애를 쓰고 할 때 이 은혜의 불씨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c. 환경과 자신에 경성함
그리고 결국은 마음을 잘 지켜서 그래서 그 은혜의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경과 자신에 대해서 잘 깨어있으면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이렇게 하면서 그리스도께 마음을 고정하게 될 때에 그 때에 이 마음속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한 감격, 이전에 내가 그 십자가로부터 받았던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 나 같은 인간을 건져주신 그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큰 은혜가 우리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되요. 그래서 결국은 다시 하나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 은혜입니다. 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이 다시 가슴 쏙에 따뜻하게 밀려오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에 전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러면서 주님을 떠나서 살던 자신의 삶의 어리석은 삶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주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영적인 교통 속에서 그 생명과 사랑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세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서 십자가 은혜를 회복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6.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I.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초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형벌을 내리시기에 골몰하신 분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을 말려서 인간을 겨우 구원받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사랑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A. 성부의 사랑에서 비롯됨
그리스도 예수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시기에 골몰하신 분이지만 예수님이 유독 우리를 사랑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사랑에 있어서 무엇인가 갈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이 사랑에 있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누구도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치 없는 인간들을 사랑하심으로서 기쁨을 느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에는 삼위일체의 한 하나님이셨습니다. 한 하나님이시지만 세 인격으로 계신 분이시고 세 인격이면서도 한 하나님이셨으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아름다우시고 완전하시고 그 성향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서로 간에 사랑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이고 그 사랑에 있어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하였습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직접 보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내려오시기 전에도 지극히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지만 그것만을 보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는 인간의 지성이 너무나 어려워졌고 타락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독생자와 언약을 맺으시고 이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의 뜻을 따라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위하여 인성을 입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났지만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 그리스도의 사랑은 구별이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으로서의 사랑이었으니 신적인 인격의 사랑이며 아들의 사랑은 하나님으로서의 사랑일 뿐만 아니라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이었습니다. 인성을 취함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 인성을 취하여 사람의 몸 입고 오셔서 목숨을 버리신 것은 사람으로서 하신 일이니 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 동시에 또한 사람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 어두운 죄인들이 직접 볼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온 사랑이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인격 안에서 생생히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오직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었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서른 세 해 동안 사신 예수님의 그 몸은 우리들이 직접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눈이 어두운 죄인들의 마음속에도 생생히 비칠 수 있는 모습이었고 그 모습에 대한 진지한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게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돌보시는 그 모든 사랑의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죄보다는 명백하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온 예수가 계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것이 더 커다란 죄가 되는 것이니 이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은 형체로 이 세상에 오신 그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의 나타남은 아주 놀라운 사건이요, 최고의 기적이었습니다.
성자 예수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고난의 길을 걸으시며 우리를 위해 종처럼 낮아지도록 봉사하시고 마지막에는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모든 희생의 과정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 인간을 향한 목매인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고 사랑을 찬미하지만 그 사랑은 모두 모조품에 불과하고 진정한 사랑, 이 창조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나타난 하나님의 명백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자기의 외아들을 주셨다”하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생생하도록 우리의 눈에 보이게 해 주시고 우리의 손으로 만지게 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오관으로 그분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비천하도록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사람마다 삼위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본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B. 성부의 사랑의 목적을 실현함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부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사랑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 지혜와 능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지만 당신의 성품을 시간과 공간세계 안에 나타내시고 자기를 닮은 이 모든 창조세계를 만드시고 자신의 영혼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빚으시므로 말미암아 당신 닮은 인간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모든 창조세계보다도 더욱 소중한 인간의 존재야말로 하나님의 얼마나 크고 많은 사랑을 받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누리고 가족관계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이 세상에 펼쳐보여서 하나님이 이 창조하신 세계를 잘 돌보고 가꾸어서 영원한 영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계획이 시간 안에서 아름답게 실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이었고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가득차야 할 이 세상에 죄와 불공평이 넘치게 하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는 상관없이 인간들이 악을 행하며 날뛰는 아주 불결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 되도록 파괴하였습니다. 마치 좋은 집을 지어놓고 불쌍한 사람에게 이 집을 돌보며 의지할 곳 없으니 내 집에서 살라고 맡겼는데 그 예쁘게 지어 놓은 집을 다 때려 부수고 더럽게 만들어서 주인의 이 집을 지은 계획을 망가뜨린 악한 세입자들과 같은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즉시 파멸하시고 인간도 모두 멸망시킨 후에 다시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창조하실 수 있었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계획이 좌절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사실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속하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은 큰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영적인 어두움과 이 세상의 캄캄한 흑암과 같은 부도덕한 세상을 통하여 그 어두움 때문에 하나님의 찬란한 사랑과 자비, 은혜와 긍휼이 빗줄기처럼 지나가게 하시므로 인간이 망가뜨린 이 세상을 통해 당신의 사랑은 생생하게 보여주시므로 죄가 들어오기 전보다 더 큰 영광을 거두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계속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혼의 어둠이 들어오고 지상의 기능은 파괴되고 마음에는 죄 된 욕망이 가득차서 하나님에게 복종하며 살기 싫어하는 인간에게 어떻게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날을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으로 내려오게 하셨고 보이지 않는 당신 안에 있는 이 큰 사랑을 친히 보일 수 있도록 예수님으로 사람의 형상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를 보내시고 보이는 사람의 사랑은 예수의 희생을 통해 나타나게 하셨으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큰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 망가진 세상과 하나님 떠난 인간을 향해 멈추지 않은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의 목적을 실현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정상적으로는 볼 수 없는 인간에게 보여주실 수만 있다면 당신의 부끄러움은 개의치 않고 좀처럼 낮아지도록 섬기시고 마지막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짊어진 흉악한 죄인이 되어서 더러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치욕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가 낮아지면 낮아지실수록 아버지는 그분의 비천함을 통하여 높아지셨고 그분의 인격 안에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났던 것입니다.
변함없이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에는 아주 풍부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문제가 무엇인지 압니까? 설령 복음이 살아있다 할지라도 ‘자, 우리는 정말 쓸모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냐면 자기의 외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멘’ 문제는 거기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매우 분명한 계획이 있고 계획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몸 버리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깊이 감격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날 사랑하실까? 주님이 갈보리에서 이 쓸모없는 인간, 죄로 가득 찬 인간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그 분은 죽으셔야 했을까?’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죽지 않고 이 땅에 살아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살아있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살아있는 것이 사는 것의 이유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삶의 이유는 또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를 위해 제물로 자기를 드리시기까지 사랑한 것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목적을 실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성부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나를 불러내어 당신의 사랑을 받게 하시는 여기에는 무슨 계획이 있을까하는 것이 넓게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며 아주 좁고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왜 삽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계속 살려두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이것 때문에 나는 아직 살아있어야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러나 부탁하건대 예수님이 너를 왜 살려두어야 하냐고 물을 때 ‘교회 다니기 위해서’ 라고는 대답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삶을 위한 존재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보십시오. 수많은 별들이 제자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북두칠성 하나 때문도 아니고 오리온 별자리 하나 때문도 아닙니다. 크고 작은 수많은 별들, 지금도 폭발을 통해서 생겨나고 폭발과 함께 사라지는 수많은 별들이 있어서 하늘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 한사람이 죽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왕에 이 세상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을 때에는 나 한사람을 이 세상에 두므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안 태어나는 것보다는 태어나는 것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주님을 믿게 하셨고 주님이 우리 안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비록 여러분이 한 시대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인생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에는 분명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 것일 수도 있고 아주 작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기는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지 않고 그 크기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계획에 어떻게 부흥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계획입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 할 때 아이들 수련회를 가면 와서 밥을 해주는 연세 많으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 따라 오는 것이 안쓰러워서 거절을 해도 이분이 굳이 따라 오셨습니다. 다른 집사님이나 권사님을 데리고 가보면 돌아와 보면 항상 말이 많아서 시험거리가 생깁니다. 이분은 연세 많으시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시고도 항상 말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모두들 좋아했습니다. 연로하셔서 죄송한데 여러 해 따라 다니셨습니다. “힘드신데 가실 수 있겠어요? 권사님” “이것이 내 사명입니다. 전도사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입니다.”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 꽤 큰 신학교가 있습니다. 신학교는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운영이 잘 안 됩니다. 이사들을 영입해서 이사님들이 돈을 냅니다. 연초에 회의를 하는데 총장이 고민을 합니다. “학생들은 많고 힘들어서 기숙사를 지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중에 장로님 한분이 “총장님 그 기숙사가 얼마나 듭니까?” “15억 쯤 듭니다.” “총장님 그것은 제가 하나 지어드리죠. 아무래도 나를 이 학교에 보내신 것이 오갈 데 없는 학생들 기숙사 지어주라고 보내신 것 같습니다. 제가 지어드리겠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만을 위하던 짐승과 같은 삶을 포기하고 나를 아름답게 하고 나를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예쁜 세상,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죄의 어두움이 들어와서 깨뜨려진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감격하고 이 망가진 세상은 이 아름다운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이 땅의 자원, 주님이 주신 하늘의 자원으로 망가진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에서 그 뜯어진 곳을 꿰매고 있는 사람, 찢어진 그곳을 고치고 있는 사람, 망가진 그곳을 새로 쌓고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부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명을 또렷하게 발견하고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은 그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즐기라고 사는 것도 아니고 영광을 누리라고 사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에게 박수갈채 받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매일매일 사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며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으며 인내하고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나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받는 모욕과 멸시를 견디고 주님이 주신 이 땅의 자원으로 바치며 섬기고 매일매일 걸어가는 그것이 이 지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일주일을 마음에 초점을 모으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섬기며 견디게 되든지 뚜렷한 목적을 위해 살 때 주일이 그리워집니다. 목마르게 그리워집니다. 더 많은 은혜의 자원, 기왕에 더 많은 이 세상의 자원, 하나님이 주시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득 담아가지고 이 세상에 다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인간 취급을 안 할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그 눈에 눈물을 씻기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내게 주신 물질을 나눠주고 옛날 같으면 멸시하고 하찮게 여겼을 인간들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진리의 빛을 나눠주고 그를 깊이 끌어안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와 함께 기도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부하나님이 범죄 한 우리 인간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줄을 타고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길
그러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며 사는 길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문제를 살피기에 앞서서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에 칼로 새겨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 중에 남녀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여러분 누구도 나는 남녀의 사랑을 모른다고 말하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사람은 우리 모두 다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일반적으로 아는 그것은 사랑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존귀한 지위를 다 버리고 넝마에 헐벗은 굶주림, 깡통을 차고 아프리카에 빈민굴로 내려가도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가신 것만큼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향하여 사랑에 빠지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낮아지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열렬하고 뜨거운 것도 아니고 그저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생각해서 억지로 사는 것 같은 그런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잘못 기준을 세웁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만 든다면 우선, 첫째는 우리 주위에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소설을 읽는다든지 애틋한 애정 영화를 보고 깊은 사랑에 빠져 행복해하는 남녀를 본다면 여러분도 그런 사랑에 빠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적으로 무디어지고 어두워져서 그런 사랑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안에서 그런 사랑이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랑에 대해서 진작 포기하는 것입니다. 무슨 사랑이 그렇게 시시한 사랑이 있습니까? 정조도 없고 생각나지도 않고 감격도 없고 눈물도 없고 목마름도 없고 아무리 못 만나도 상사병이 생기지 않는 그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존오웬 청교도 목사님은 언젠가 자기 책속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너무 목마른 나머지 상사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보이면 얼마나 보일까?’ 왜냐하면 성경은 그렇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은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게 하는 사랑이고 그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사랑이고 그를 위하여 멸시를 받을 때 그를 더 가까이 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우리들이 경험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자주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부활 승천하셨고 갈릴리 사람들이 보던 그런 방식으로 우리 예수님을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생생하게 이 세상에 살던 모습을 성경에 남겨놓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 그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1800년대로 기억합니다. 연도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파리시에 커다란 쇠로 만든 탑을 세우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미국의 기술자를 불러다 설계를 해서 철탑을 크게 세우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에펠탑이었습니다. 계획을 발표했더니 파리시민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데모를 했습니다. 이 고색창연한 도시에 쇠 덩어리를 세워서 무엇 하냐고 경관 망가뜨리니까 당장 집어치우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자기의 파리시에 대한 자부심은 굉장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도시 전체의 건물은 6층입니다. 높은 에펠탑에서 내려다보면 거의 환타지 영화에 나오는 광경입니다. 전봇대 하나 없고, 매일 천명이 지하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색깔도 모두 통일 되어 있고 건축양식도 중세의 양식입니다. 그것을 꼭 세우고 싶어 하던 사람들과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20년 후에 다시 투표해서 결정하는데 20년 후에도 파리 시민이 싫다고 하면 허물어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1년, 2년 지나갔더니 괜찮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그것을 보겠다고 와서 사진을 찍어 가고 파리에 갔다가 온 증거가 되었습니다. 20년 후에 투표를 하자고 했더니 모든 시민이 반대를 했습니다. 왜? 계속 보는 사이에 정이 든 것입니다. 이제는 에펠탑이 없는 파리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허물어 버리자고 하면 이번에 모두 일어나서 데모를 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유치한 예화를 여러분에게 들고 있는지 아십니까? 수준에 맞추려고 들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사물들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 수 있도록 아는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지성이라고 합니다. 지성은 두 개가 합쳐져서 됩니다. 하나는 이치를 따지면서 파악해가는 이성이고, 또 하나는 가슴에 번쩍번쩍하고 들어오는 어떤 사실들을 통해서 판단에 도움을 받는 것인데 이것을 오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사람으로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도 계셨고 사람의 성품도 계셨다고 하는 것은 수학이나 과학 생물학으로 입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성으로 깨달아져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번쩍하고 들어와서 아멘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오성에 들어오는 참 빛입니다. 오성에는 진리, 하나님,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 성경만 들어오면 참 좋을 텐데 여러분의 눈, 코, 귀, 입, 촉각 이런 것을 통해서 접촉하는 사물들에 대한 인상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가 맺히는 오성에 빛으로 들어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믿음처럼 번쩍 들어와서 영상으로 맺히는 것입니다. 쳐다보느니 세상의 광경이요, 타락, 육체의 즐거움, 눈의 요기 이런 것들이 들어옵니다. 이런 것들이 들어오면 이런 것들은 영혼이 그런 것들에 대해 반응을 합니다. 영혼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한번 거기에 대해 욕망이 열리게 되면 눈은 보아도 차지 않고 귀는 들어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계속 목마릅니다. 영혼은 거기에 몰두해 버립니다. 예수가 안 보입니다. 세상이 커 보이면 주님은 안 보입니다. 주님이 커 보이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의식적으로 이 감각의 문을 닫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예수를 생각을 많이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이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각을 많이 해야 됩니다. 예수를 생각나게 해 주는 것들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물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의 진리 속에 있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복음서를 읽고 예수님의 이 지상의 생애와 십자가의 사랑, 그 은혜 이런 것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마음속에서 그리스도가 익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첫 번째 길입니다. 가능한 한 덜 보고 세상을 너무나 잘 알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을 더 많이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다. 그 하신 기록이 성경에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은 원숭이처럼 예수님 흉내 내라고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면 문제가 생깁니다. 죄인은 도저히 그것을 따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적은 원숭이처럼 의미도 모르고 흉내 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선한 행동 하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는 그 행하신 어떤 행위가 더듬어 올라가면 그분의 성품을 옹달샘으로 해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원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작은 어떤 행동을 흐르는 작은 개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더듬어가서 샘이 있는 그 원천을 발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원천이 바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성품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해, 우리 인간을 위해 어떤 착한 일을 하셨을 때 그 시냇물은 하나입니다.
시냇물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그것이 하나의 옹달샘인데 그 속에서 두 개의 샘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그것이 바로 신으로서의 성품과 사람으로서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성품을 통해서는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고 사람의 성품을 통해서는 아래에 있는 나를 비춰보게 만드셔서 위로는 하나님을 찾고 아래로는 나를 발견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삶의 모범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착한 행실을 발견한 사람은 즉시 원숭이처럼 그것을 흉내 내려고 하지 말고 그분의 그 행동을 통해서 그분 안에 있는 은혜의 깊은 원천을 발견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 성품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를 통해 나타난 인간의 성품을 발견하면서 그 인간 예수의 성품과 나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 묵상을 통해서 우리 속으로 깊이 내려오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에 그 예수님에 대한 성품과 생각이 가득차서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 변화되어 가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예수를 닮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III. 결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향이 필요합니다. 내 속으로 깊이 들어가므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 속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면 나를 초월해서 주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사람과 하나님사이에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한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대충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도 자부심을 느꼈던 사람이 이제는 온전히 순종하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여러 차례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히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주님이 충만하게 자기 안에 오시게 될 때 인간의 회개의 제목들은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예전에는 생각도 잘못하고 마음도 빼앗기고 죄를 짓고 그래도 모르다가 얻어맞으면 그때에 잘못했노라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뉘우쳤는데 이제는 생각에 미끄러진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감시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까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의 이유가 환경으로부터 오는 압박이나 환난, 시련 같은 것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깊이 살피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의 마음은 물대인 동산과 같아서 각종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샘의 근원이 생수로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예배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일까요? 창조세계를 망가뜨리고 방탕한 길로 떠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길래 주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멸시와 천대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서 죽으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 변함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대의 행복이 이 세상과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니 너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고통은 물질이나 먹을 것, 권력의 부족에서 오는 고통이 아닙니다. 오직 그 고통의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사랑을 받지 않고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는 버리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사랑함으로서 이 사랑의 질서를 뒤바꾼 것입니다.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십자가 사랑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탁월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앞에 여러분이 보여야 할 반응입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7.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Ⅰ.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님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셔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중보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중보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자기의 몸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영원히 제사장이 되셨고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가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창조목적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가고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는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게 되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율법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간을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정하신 우리의 삶의 규칙입니다. 이 규칙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셨고 실재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세를 통해서였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기록된 율법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미 이러한 법칙을 세워놓으시고 그것을 우리 인간의 마음에다가도 기록해 두셨습니다.
우리 몸밖에 새겨진 글씨가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 때 행복하고 평안하고 기쁨을 누리도록 주님이 우리 안에 율법을 새겨놓으시고 또 그 법칙을 어기면서 살 때에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고통을 경험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인간이 되었고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욕망은 인간을 점점 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며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어긴 인간들, 율법을 어긴 것은 죄요, 이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고 무시이며 하나님을 향한 공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을 어긴 죄는 그 크기가 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그 율법을 어긴 행위가 가진 의미 때문에 그 죄는 곧 죽음에 의해서 형벌이 내려져야 했습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제가 이런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면 설교하는 내용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나라를 집어삼키고 왕을 죽이기 위해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조직적으로 군대가 동원되고 자기 수하에 있었던 수많은 병사들을 꼬여서 군대를 구성해서 말을 타고 보병들을 이끌고 왕궁을 향해 쳐들어옵니다. 반란군의 괴수, 반란에 부역했던 모든 인간들은 왕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다 사형을 시켜야합니다. 그런데 왕 앞에서 왕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나라의 위협을 준 것은 군대를 이끌고 수많은 군사들과 함께 쳐 들어온 것이 나라에 위협을 더 많이 주었지만 그 사람이 왕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조롱한 그 죄는 죄의 크기에 있어서 작을지 모르지만 똑같이 죽음이라는 형벌로 다스려져야지만 왕의 위엄을 보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하나님 사랑이 동기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율법에 따르자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났기 때문에 멸망하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없는 이 모든 창조세계는 하나님에게 너무나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어기고 죽어야 할 이 땅에 있는 비참한 존재들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죄 때문에 맨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심으로서 보이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자비와 은총을 찬란하게 비추심으로서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을 잘 알 수 없었던 많은 죄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 아버지를 말리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당신의 온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당신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볼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시므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주님의 창조의 세계를 망가뜨렸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그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맨 처음 그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그 아름다운 목적,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과 상호교통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각과 능력을 주셔서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 마음에 맞게 다스리므로 자신들도 행복하고 모든 피조물들도 복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사랑을 초라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간들의 죄를 위해서 율법을 따라 범죄 한 인간들을 위해 율법의 요구대로 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랑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자기의 출신의 근본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이고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는 한 줌의 흙처럼 짐승처럼 이 세상에 살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을 관측해서만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무리 많이 학문을 통해 연구하고 철학을 통해서 삶의 방식을 탐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를 아는 것은 오리무중입니다. 오직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자기를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오시도록 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알게 될 때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전한 인간의 모든 죄를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대신 짊어지게 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습니다.
B.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키심
흔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 맞춘 곳이라고 말합니다. 공의는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당신께 공격하고 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그 죄의 크기에 따라 갚으시는 의로운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이 공의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심을 지키도록 만들어주므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인간의 도리를 깨닫게 해 주신다는 점에서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 결코 이기적인 목적으로 공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신앙을 보고 생겨납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인간 옆에서 교만한 인간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모든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이 땅에 누가 하나님을 공경하겠으며 이 땅의 인간이 어디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그 인간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영혼의 죽음이 들어왔고 영혼이 불멸하기로 되어 있는 인간의 육체는 짧은 시간 이 세상에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났습니다.
모세에 의해 율법이 들어오기 전에도 죄를 지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속에서 육체의 수를 누린 후에 모두 죽어갔고 불멸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채 죽어가는 인간의 삶을 향하여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공의는 단지 우리를 위협하기 위한 공의가 아니라 실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를 다 용서해주셨고 앞으로도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범죄하고 한순간 하나님께 불순종해 보십시오. 아직 하나님이 여러분을 죽이시거나 심판하시지는 않았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고통이 시작됩니다. 잘 되던 기도의 문이 막히기 시작합니다. 가슴에 깊이 꽂히기 시작하던 하나님 말씀의 빛이 차단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해야 될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공의가 여러분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어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죄 없으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온 몸과 살을 찢기며 처참하게 죽으신 그 고난의 피범벅이 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사랑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두려워서 떨어본 사람들만이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참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피로 물든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죄가 얼마나 무섭고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놓치지 않고 심판하시는지를 알고 치를 떨며 두려워한 사람만이 그 십자가가 어떻게 사랑의 십자가가 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공의로운 분이셨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랑이셨습니다. 어떻게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그 깊은 사랑, 사랑을 하나님께 누구도 강요할 수 있는 이는 없지만 하나님 자신이 우리 인간을 향해 그런 사랑을 가지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 인간의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져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내리시므로 인간들에게 인간이 지은 모든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 없는 자기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보고 예수께 피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흠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신 아들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고 죄를 짓고 악스럽게 행하였던 그 모든 형벌을 대신 지시기 위하여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죽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으며 존귀하신 그분이 멸시를 당해야 마땅한 인간의 모습을 띠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랑을 시간과 공간속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늙음과 배고픔, 추위와 굶주림에 복종하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의 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탁월한 사랑 앞에서 자신이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첫째가는 본분입니다. 태어난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의무입니다.
Ⅱ. 구원의 근거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원의 근거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종교를 왜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우리 인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지은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이 있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만물이 창조된 것이 만물과 인간 안에 명백히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창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신성을 보면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아야 할 인간은 하나님께 정면 도전하고 주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공격을 하는 아주 불역 배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잘 알지도 못하지만 혹시 그것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내신 하나님을 알아보기에는 너무나 눈멀었고 그 길을 따라 가기에는 의지는 굽었으며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는 사랑이 너무나 썩어서 가치 없는 것에 굴복하고 그것들에 욕망을 느끼는 숙명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시 이 모든 세계를 너를 통하여 창조하였으니 이번에는 내가 너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작정하시며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비천하게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앞에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와서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께 형벌을 받으시므로 피범벅이 된 십자가에 앞에서 자기의 진 죄를 자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 행한 모든 불순종과 죄악이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그 공의와 위엄 앞에 두려워 떠는 모든 사람,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여신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에 앞에서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깨닫는 모든 사람,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 구원의 근거로 삼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더러 누군가가 일주일 동안 쓰레기같이 산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우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Ⅲ. 구원의 사역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처럼 한번 하시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생각하게 됩니다.
A. 구원하신 중보자직
중보자이신 그분이 하신 이 섬김, 이것은 영원한 중보자직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이미 그리스도는 이 모든 세계를 향하여 중보자이셨으며 천하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해 지은바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욱 이런 영원한 중보자직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사에 오셔서 쓰레기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거기서도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은 계속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선하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맞닿을 수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게 하셨고 그 후에는 성령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 모든 세계의 만물들이 상호교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충성스럽게 주님을 위해 살아도 주님이 내려주시는 축복을 직접 받기에는 여러분이 너무나 불결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 이 땅에 있는 모든 여러분이 쓰고 사용하는 모든 물질들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게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들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드리는 많은 섬김, 남이 보기에는 지극히 아름답고 박수를 보내는 섬김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이르기에는 아직도 때 묻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 우편에서 여러분의 섬김을 중보하여 아버지께 돌려드립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그 모든 섬김은 여러분이 드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바치는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간절한 기도, 마음이 녹고 깊이 자신이 깨뜨려지는 자기 깨어짐의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여러분을 부러워하고 여러분을 진실한 신자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기에는 불결합니다. 보좌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중보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사랑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기에는 너무나 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을 당신의 중보자직 안에서 중보하여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덧입어 순결하고 깨끗한 지순의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낸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니 그분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그렇게 기도에 약한지 아십니까?
저는 업혀 다닐 때부터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회심은 하지 않았지만 철들기 시작하던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 때쯤에는 교회의 모습이 어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안 좋은 모습도 많이 있었지만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하자면 그때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어느 교회를 가든지 간절함이 있었고 기도했습니다. 대부분의 주일학교는 여름성경학교를 하면 누가 회심집회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땅을 사고 교회당을 짓고 이층건물을 세를 얻었지만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때는 동네에서 이층건물이 손으로 셀 정도였습니다.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층건물을 지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땅이 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교회 땅은 없었습니다. 무조건 시유지에 믿음으로 교회를 짓는 것입니다. 옛날세상이므로 가능했습니다. 시유지는 시의 땅이고 텐트는 미군부대에서 사정하여 얻어 오고 사과 궤짝은 청과물상에서 두 어 개 얻어오고 호롱불은 교인들이 가져다 내었으니까 교회 것은 하나도 없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에서 가만 둘리 없습니다. 헐어버립니다. 헐 것도 없습니다. 뜯어버리면 됩니다. 며칠 있다가 다시 주일되기 전에 또 칩니다. 가마니 깔고 기도합니다. 성도들도 부서지려니 합니다. 다시 와서 또 세웁니다. 하다가하다가 시청에서 포기합니다. 불하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도해서 가난한 성도들이 눈물로 돈을 모아서 겨우 불하를 받습니다. 교회를 지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밤에 성도들과 교역자와 청년들이 개울가에 갑니다. 밤중에 몰래 모래를 훔치는 것입니다. 갈 때는 꼭 기도합니다. 가서 모래를 퍼서 교회 마당에 쌓는 것입니다. 한 트럭 정도 쌓으면 시멘트를 사고 벽돌을 사면 비싸니까 찍습니다. 땅을 조금 파고 잡석을 채우고 발로 밟고 콘크리트를 뿌린 다음에 그 위에 벽돌을 얹어놓고 위에는 돈 없으니까 천막을 도로 씌웁니다. 아래는 각목을 사다가 널빤지를 놓고 꼭 주막집에 놓고 앉는 의자 같은 것을 놓고 사과 궤짝 두 개를 엎어놓으면 강대 높이가 됩니다. 거기에 성경을 놓고 호롱불 켜고 그나마 돈이 있으면 밑의 바닥을 콘크리트 바닥을 하고, 안 그러면 흙바닥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도 모든 성도들이 불평 하나 없이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했던 기도가 오늘은 왜 사라지는 것일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가 그 사람의 마음에 많이 있으면 기도가 되고 그리스도가 사라지면 다른 모든 것이 있어도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많이 있으면 왜 그렇게 기도하게 됩니까?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분께 대한 깊은 의존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오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가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악 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기도가 잘 때는 돈 많이 벌었을 때, 건강할 때가 아니라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젖어 있을 때, 그때에 우리는 가장 많이 기도하게 됩니다. 그립습니다. 겨울이면 두꺼운 옷을 껴입고 가마니 바닥 위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긴 예배 시간에 차가워오는 발가락을 만지면서도 그리스도를 찾으면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 자기 같이 비참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처지도 있고 자기들도 그렇게 비천한 삶을 살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굶주림도 배고픔, 추위와 멸시, 모독을 받으신 예수가 불쌍해서 울던 착한 성도들이 있던 교회,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요?
B. 중보자로서 간구하심
오늘 성경은 그런 그분이 항상 살아서 우리를 향해 하시는 또 하나의 일이 있는데 간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간구한다고 하는 것은 간구함을 받는 이보다는 낮은 자리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한 몸에 받으시고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이시지만 우리 인간의 구원받지 못한 처지를 생각하실 때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낮아지시는 분이 됩니다. 그 아버지 앞에 탄원하며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서도 그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아서 그 사랑을 등질 때 여러분 혼자 그 주님을 등지는 것 같아도 하늘 보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당신의 사랑을 등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여러분의 뒷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빌 수 없을 때 그분이 간절히 여러분을 위해 비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해 여러분 안에 오신 성령님은 그러한 여러분을 보시며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나 큰 죄가 있다고 믿을 때, 내가 너무나 많이 미끄러져서 내 힘으로는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될 그때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시고 계신 때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의 사랑은 모두 한 송이 꽃과 같습니다. 만나서 한번 맞닿으매 꽃 봉우리가 맺히는 때가 있는가 하면 활짝 피는 때가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 사랑은 시듭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사랑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여러분을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렇게 시드는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미끄러질 때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더 간절히 여러분을 위해 비십니다.
하늘에는 눈물과 고통은 없지만 그분이 하늘에서 어떻게 기도하실 지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앞두고도 그분의 긴 기도의 시간은 이 땅에 남겨두어야 하는 당신의 사람들, 사랑하는 당신의 제자들, 구원받을 이 땅의 많은 영혼들을 위한 간구로 채워졌습니다. 그분의 땀이 피가 되기까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버지께 올렸습니다.
IV. 결어
언제까지 그분이 하늘 보좌에서 여러분을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도록 그분 홀로 버려두시겠습니까? 왜 오늘은 안 됩니까? 왜 또 내일, 다음 주에 하려 합니까? 이제껏 우리를 강하게 얽매이던 모진 세상 사랑의 줄과 자기 본위의 삶의 줄, 그리스도를 하찮게 여기고 자신을 그 자리에 두려고 하는 이 교만의 줄, 왜 오늘은 이것을 끊을 수가 없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그분을 의지하려는 절실함,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과 은혜,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의 온 몸과 살을 찢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 앞에 그분의 십자가를 붙든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아들을 보내서 보여주신 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지 말고 이 사랑으로 돌아오고 이 사랑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8.교회의 모든 필요와 유일한 보고이신 그리스도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1:23)
I. 창조와 신적 상호교통
오늘 성경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교회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유일한 보고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합니다. 매우 어렵게 보이는 성경구절을 해설하고 설교를 진행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듯싶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이고 “만물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한 이 구절은 우리에게 생소한 구절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구절의 의미를 밝히 가르쳐 드릴 테니 가슴에 새기시고 그렇게 된다면 에베소서를 읽는데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 계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그리스도는 이 모든 세계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는 아무데도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은 여러분이 믿을 수 있습니까? 머리에 뚜껑을 열어봐도 갈비뼈를 갈라 허파를 뒤져도 배를 갈라 복부의 장기들을 모두 꺼내고 관절을 갈라서 뼈 속을 파헤친들 거기서 영혼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없는 것이네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과 물질의 차이입니다. 만물을 다 뒤져도 거기엔 어디를 파헤쳐도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 안에 계심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입니다. 충만케 한다는 것은 꽉 채운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꽉 채웁니까?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그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의 영광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온전한 사람이었고 동물들은 각기 하나님이 정하신 분량대로 온전한 동물이 되었고 식물은 식물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온전한 분량의 식물이 되었고 이하 모든 사물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그대로 된지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창조된 인간을 비롯한 이 모든 세계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 모든 창조한 것들 속에 당신 자신의 신성의 영광을 가득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 가득 채웠던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은 일시에 사라져버리고 만물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성령 안에서 아주 아름다운 연결과 연합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다 깨뜨려지고 무질서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죄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 하나님의 세계를 파괴하는 큰 능력을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모두 파괴하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놓아서 사랑해야할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는 그런 살인을 불러오고 자연과의 관계도 끊어져서 다스려야할 자연에게 정복당하며 피해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도록 망가졌지만 죄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을 아름답게 연결해 놓으셨던 그 연결 속에 두신 하나님 자신의 신성에 충만한 영광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거둬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 모든 피조물들의 상호교통이 깨어지고 파괴되는 무질서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망가진 이것은 죄의 힘과 능력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모든 만물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충만한 것들이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라진 것입니다.
II. 구속과 신적 상호교통
A. 구속의 목적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다시 인간을 구원하셔서 인간을 충만하게 하나님의 영광위에 영광으로 성령을 주셔서 채우시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이후에는 피조물들도 회복시키셔서 그 모든 것을 채우는데 그것이 바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행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분이십니다. 그분이 충만하게 하시는 역사를 제일 먼저 교회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될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만물의 창조를 위한 위대한 계획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무한한 지혜와 영원한 능력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그 설계도를 따라서 아주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그 창조한 모든 만물들을 성령 안에 있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그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에 충만한 것을 그 모든 사물들 속에 스며들게 하셔서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로부터 하늘에 떠 있는 태양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창조하신 그 분의 솜씨와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가족처럼 이 존재는 저 존재에 기대고 저 존재는 또 다른 존재에 의지하며 상호 연결된 가운데에 궁극적인 하나님의 한 목적을 위해서 이바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 목적에 이바지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과 위대함을 드러낼 때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가장 완전한 힘과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인간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던 모든 사물들 사이에 상호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사랑받고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려워서 숨는 관계가 되었고 서로 의지하고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는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창조된 이 모든 자연은 피해서 인간이 도망가야 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는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주신 자연인데 인간이 무릎을 꿇고 허무하게 복종하며 공경하기까지 하는 역전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제자리로 돌아가서 우리 위에 있는 한 분,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고 봉사한다면 우리 밑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질서로 돌아가서 우리를 섬기고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위로 섬겨야 할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관계를 깨뜨리고 나니까 우리의 다스림을 받기로 되어 있는 모든 자연의 세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를 또한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좌절되었으니 하나님의 능력보다 인간의 타락의 힘이 크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서도 침공을 당하시거나 비록 인간들이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손상을 입으시는 분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 가운데서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여 이 세계가 창조 당시에 아름다운 상호교통을 잃어버리고 어둠에 잠기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어둠을 통해서 그 어둠이 없었더라면 차마 이 세상에 보여 질 수 없었던 하나님의 그 넘치는 사랑과 비범한 긍휼, 확실한 은총, 인간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아버지의 그 긍휼을 그 어두운 세상을 통하여 한줄기 빛처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에 의해 창조목적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잠시 세계가 창조목적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이 세상에 보이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죄 때문에 망가뜨린 이 세상이었기 때문에 보다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시대가 너무 타락하고 어둡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도 얻고 세상도 얻으려는 사람들의 나약한 핑계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붙어있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빛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어두운 이것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주 조금이라도 주님의 참된 사랑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껏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많이 미끄러졌고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은 새롭게 시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어둡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을 알고 그 진리 가운데로 돌아가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전에 그리스도를 떠나서 경험했던 그 칙칙하고 어둡고 고통스런 날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행복과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뜨겁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한때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주님을 대적하던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회개하였다고 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쉽사리 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무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진리에 대한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끊임없이 낮아진 가운데 순교의 순간을 앞두고도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거꾸로 보면 사울이었을 때 타락한 그 모든 시기는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고 주님의 명예에 먹칠을 한 인생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자기가 우월해 보일만한 그 놀라운 일에 쓰임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감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만약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껏 실패하고 죄 가운데 미끄러져 살았다 할지라도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미끄러지고 넘어진 많은 날들은 자기에게 임한 구원의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자랑하게 만드는 배경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악함이나 우리의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지만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원래 있었던 충만함을 상실한 인간과 이 세계를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하도록 채우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셔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생명 없이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몸소 보여주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볼 수 없을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생하게 우리와 똑같은 뼈와 살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처럼 울고 우리처럼 아파하고 우리처럼 핍박을 받으며 우리같이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당하신 그분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큰 사랑과 긍휼, 자비를 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 되심을 사람 되심 아래 철저히 감추시고 율법 아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 율법을 수여하신 분이셨지만 그 율법 아래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율법을 따라 판결을 받으시고 멸망의 일을 위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한없이 피 흘려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그분의 생애는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시는 복종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들이 못 버리는 우리의 자아 때문에 지은 그 많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당신은 친히 자기를 버리셨으니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구원받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그 무한한 형벌에 복종하심으로 쏟아 부어지는 아버지의 진노를 한 몸에 받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아들의 이런 복종은 아버지께서 시키셨기 때문에 하신 복종이 아니라 아들이 기꺼이 드리신 복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보내신 사랑이었지만 십자가의 죽으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시므로 하나님 안에서 창조되었으나 그 모든 창조 당시의 충만함을 잃어버리고 고통하며 갈등하는 이 모든 인간과 피조 만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아들의 완전한 복종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고 창조된 이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고 함께 상호교통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모으셔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그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보물 창고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 사랑보다 더 큰 인간의 감정은 미움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자신의 자원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미움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에 그 사랑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휴지 보듯이 살았을 아무 관계도 없는 많은 사람들의 비참한 형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어주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만들어주시고 그들을 찌르기 위해서 평생을 가슴에 품고 다니던 피 묻은 칼을 내려놓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고난과 핍박, 시련과 괴로움, 온갖 시험들이 내 안팎에 있지만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그 모든 것들을 참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랑으로 위로로 격려하셨습니다.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베푸신 큰 사랑과 분에 넘치는 긍휼, 한없이 오래 참으시는 그분의 인내가 바로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을 보고는 용서할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었지만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면서는 참을 수 있었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고 진리의 빛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배도 무지하게 사랑하는 인간이 어떻게 한순간 영혼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 떨며 이제껏 살아왔던 자신의 삶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십자가 앞에 나오게 될까요? 자신의 욕망을 신처럼 떠받들며 자기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어느 한순간에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 삶의 사악함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을 하게 될까요? 죽음으로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굳센 비점을 깨뜨리고 찬란한 복음의 불길을 쏟아 부어 얼어붙은 땅을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게 하시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위로받을 길이 없어 단절과 외로움 속에 살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한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목적이 있어서 이 세상에 창조하게 된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 될까요? 이 모든 질문은 많지만 대답은 오직 한분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때, 그때입니다.
너무 가슴 아프게도 우리들은 이 시대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알려고 찾으려고 배우려고 그를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문제를 가져다주지만 그 대답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습니다. 회심하기 전에 우리들이 살았던 삶은 각자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었고 우리 중 누구도 복사판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다양한 문제들은 한분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 안에서 해결되었고 그분이 우리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B. 교회의 모든 필요의 유일한 보고
그런데도 교회는 왜 그런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구세주가 세상인 것처럼 세상을 배우고 세상을 익히고 세상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터득하고 세상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듣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창고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교인이 되고 나면 제일 먼저 배워야 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 중에는 그리스도 없이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후자는 전자보다 치명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 없어도 헌금하고 직원들을 고용하고 교회는 운영됩니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 사랑 앞에 하나님을 거슬려 살았던 자신의 많은 죄를 참회하게 하고 핏빛보다 더 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울게 만들고 죄 가운데 미끄러진 사람들의 양심을 찔러 자신이 예수 못 박은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가던 길을 돌아가게 하는 것,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 없지만 주님 한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의 자리에 서서 예수처럼 살기 위해 예수처럼 죽고 싶어 하는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돈이나 재주로 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엇에 목말라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 진리를 몰라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찬란한 진리의 빛을, 생명이 없어 파리해진 자들의 영혼 속에 부으시는 생명의 강물 같은 은혜, 자기 사랑으로 말미암아 고립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의 빗장을 풀러 은혜의 강가로 나아오게 하는 이 신령한 감화의 능력, 이 모든 것들은 돈이나 한사람의 말재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없어도 돈이 꼭 있어야 되는 것처럼, 예수는 없어도 우리가 행복할 수만 있으면 그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 인본주의적인 정신이 교회를 향한 하늘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서 기도해도 절대로 응답되는 기도의 제목 하나를 가르쳐드릴까요? 집을 사게 해 달라는 기도는 꺾일 수 있습니다. 우리 아들 서울대학교에 보내달라는 기도는 안 들어줄 수 있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해 달라는 기도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해주셔서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절하시는 않는 기도의 제목을 여러분에게 가르쳐드릴까요?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주신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하네]
예수를 간절히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 우리들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떠날 때마다 우리는 가슴속으로 가책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제법 많이 알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몰라, 비밀이 되는 예수의 이름, 내 가슴에 새겨지는 사랑 그리스도, 그분을 몰라 하고 지체들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를 간절히 알기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내가 알기를 원합니다. 아는 것만큼 찾는 것만큼 발견하기를 원하고 발견하는 것만큼 알기를 원하고 아는 것만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해 보셨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얘야, 곤고하게 사는 너에게 내가 무엇을 해주랴?”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합니다.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C. 성령을 통해 생명을 주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 교회당을 드나들고 있는 비회심자들, 우리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 그들에게 부어질 그리스도의 생명,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택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고 영혼을 중생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명의 나타남,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은혜의 물이 누구도 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생수의 강이 이 교회를 통해 가득차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희망이 없는 이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기이한 생명의 역사,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의 수많은 문제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비극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이 생명을 주기 위해서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교회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생명을 이 땅에 분여하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모든 일에 해답이시고 그 하나님의 모든 보화를 한 몸에 가지고 계신 그 유일한 보고이신 그리스도께서 문을 여실 때 우리에게는 꿈꾸는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래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생애적으로 만나고 변화되어서 이제는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인생의 대안도 없다고 모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질기디 질긴 육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하여 눈을 감고 빛의 자녀이면서도 어둠 속을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이미 한번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고 기갈하고 있는 그의 영혼을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돌아가면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이 끊임없는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기를 싫어합니다. 몸은 교회에 있으나 마음은 세상에 있고 영혼 안에는 참된 안식이 없이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는 충만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미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기를 모두 주시므로 하늘의 창고를 열어주셨지만 본인이 그 쏟아 부어지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기 싫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이런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갓 결혼한 신부가 마음에 다른 남자를 품고 남편과 함께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이것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만물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그분의 그 충만하게 하시는 역사를 교회가 온전히 받아들여서 그분의 생명으로 충만해져서 자기 밖으로 이 생명을 흘려 내 보내게 하는 일에 심각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그 무한한 사랑과 십자가 고난의 덕을 입고 그분의 몸에 접붙인바 되었지만 그분의 몸으로 이 창조된 세상을 섬기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지체들을 아프게 하고 끔찍한 고통으로 그리스도에게 쓰라림을 주는 그런 몸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III. 그리스도로 충만케 됨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충만히 오셔야 합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들의 영혼,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도 깨우칠 수 없고 마치 불에 한번 달았던 쇠가 굳어지면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도 쉽게 녹지 않는 그 굳어진 마음에 생명의 강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신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답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교회의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 진리의 말씀에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 어떤 의미로든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하찮게 여기고 그분이 주신 모든 권위를 휴지 쪽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그의 삶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려는 막무가내의 삶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의 발 앞에 복종하는 신자의 마음을 통하여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겸손한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들은 대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께 꽂힌 사람들이 되십시오. 눈을 뜰 때마다 그리스도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며 부딪치는 수많은 일상사속에서 그리스도 도움을 바라며 나의 언어와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께 어떤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 생각하고 그 일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가득히 나타나도록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해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하고 그리스도 없는 세상 때문에 아파하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때문에 즐거워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 모든 만물 가운데 탁월하신 분이시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예수 더 알기 원합니다. 다른 기도의 제목들은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나의 모든 고통의 근원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합니다. 예수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9.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5:31)
I.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의 존재적 관계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존재적 관계와 흡사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압니다. 우리 안에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두개골을 열고 아래로부터 더듬어 내려가서 흉곽을 열고 우리의 폐와 배를 열고 장기와 관절을 모두 찔러 찾아본들 거기서 우리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안에 없다면 더 혼란스러워지겠죠? 만약 우리 안에 우리의 영혼이 있는데 살이 쪄서 몸집이 두 배쯤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도 그 안에 우리의 영혼이 있을까요? 이후에 늘어난 살 속에는 영혼이 없는 것일까요? 살 쪄 보신 분이 답변 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휴가기간 중에 우주 공부를 조금 했습니다. 우주는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모든 별은 지구와 같이 혹은 화성과 같이 항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들은 없습니다. 태양계 안에 있는 것들만 눈에 띨 뿐이지 행성은 관측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을 우리들이 하늘에 떠 있는 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우리가 속한 은하계 안에만 2,000억 개 정도 있다고 합니다.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의 길이가 20만 광년 정도 됩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 태양계가 오백 원짜리 동전 안에 들어오는 거리라면 태양에서 가장 가깝게 있는 별이 대구쯤 있다고 하니까 우주 공간의 넓이를 생각할 수 있겠죠? 그렇게 멀리 떨어진 별이 망원경으로 통해 관측될 때 포도송이처럼 보이니 은하계의 크기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 은하계와 가장 가까운 은하계는 안드로메다은하입니다. 이 안드로메다은하가 시속 50만km로 우리 은하계를 향해 이미 오래전부터 돌진 중입니다. 부딪칩니다. 35억 년 후의 일이랍니다. 그 안에 주님이 오시겠죠? 오셔도 부딪치지 않을까요? 오시는 것은 오시는 것이고 부딪치는 것은 부딪치는 것일까요? 그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그 별들이 그렇게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은하가 많이 모여 있는 것을 은하단이라고 합니다. 이 우주 안에는 그러한 은하계가 약 1,000억 개정도 있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우주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는 약 150억 광년이라고 하지만 초당 2,000km씩 우주는 팽창을 거듭하고 있고 이것을 곱하면 하루에 일억 칠천 팔백 이십만km씩 우주가 커지는 중이고 빛으로 계산하자면 약 10분 정도 빛이 달려가야 하는 거리만큼 우주가 늘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맨 우주 끝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벗어 날 수 있을까요? 큰 우주도 하나님을 벗어났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온 우주 안에 하나님 밖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높고 높은 별부터 이 낮고 낮은 땅까지 모두 뒤진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찾기 위해서 육체를 해부하여 영혼을 추적하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초자연적인 신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 가운데 범신론이 있습니다. 불교, 동양의 종교들이 대부분 범신론입니다. 불교는 범신론의 극치 아니겠어요? 이 모든 세계가 곧 신과 맞닿아 있고 신과 같은 본질인데 형태만 계속 바뀌어 갈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도 잡아먹으면 안 되고 쥐도 죽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할아버지 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잠시 후에 그렇게 될 지도 모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이 범신론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점에서 모든 세계가 하나님 안에 포섭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서는 범신론과 상당히 유사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차이점은 온 우주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이 하나님 안에 포섭되어 있지만 그중 어느 것도 하나님 일 수 없다는 것이 범신론과 뚜렷한 구별점입니다.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 안에 있으나 하나님 자신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 일 수는 없지만 모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가리켜서 내재신론이라고 부릅니다. 범신론은 Pantheism이라고 쓰고 내재신론은 pan과 theism사이에 희랍어 ‘εν’(en)을 하나 더 집어넣습니다. 희랍어 ‘εν’은 ‘그 안에’라는 뜻입니다. Panentheism이라고 씁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주 독특한 신앙을 형성합니다. 안 계신 곳 없이 계시지만 아무데도 안 계신 하나님, 아무데도 안 계시지만 그러나 어디에든지 당신이 계신 증거를 남기시는 하나님, 이런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그 흔적이 작은 미생물의 움직임으로부터 시작해서 광활하고 끝이 없는 우주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크시도다고 노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혼란시킵니다. ‘하나님을 여기 계시다 저기 계시다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바로 너희 안에 계시느니라.’(눅17:21) 전작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너희 안에는 없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러한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나면 조금도 혼란스러울 것이 없고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친밀한 교통을 느끼고 동시에 어느 피조세계도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월성과 역사성을 형성하는 단초(端初)가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었지만 살아가는 것은 이 땅입니다. 이 땅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이 우리가 딛고 사는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언젠가 서울 시내의 큰 교회인데 새벽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기도회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글을 썼는데 듣기 거북한 욕을 한 것입니다. 수만 명의 사람이 모여 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은 기복이었다고 합니다. ‘과연 사람들이 모여 하는 열렬한 기도가 역사 속에 흘러 들어가는 기운이 되고 있느냐’라고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두 개의 신앙이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거소를 단초로 해서 기독교 속에 두 개가 하나의 큰 맥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과 초월성입니다. 이 시간과 공간 안에 주어진 이 삶을 아주 사랑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이 안에 구현되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절대로 하찮게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럴 수 있는 힘을 동시에 이 땅 자신에서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하나님, 그분에게로부터 부어지는 신비스런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공급받으며 살아갑니다. 기독교인은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신비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신비주의자가 진정으로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은혜가 필요하지 비디오나 보면서 노는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초월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게으름피고 제 욕심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과 놀라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이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여러분이 신자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직장 가서 교회 열심히 다니지만 축축 뒤로 쳐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승진에 관심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얼치기가 된 것입니다. 역사성도 없고 초월성도 없는 애매한 사람들입니다. 현실을 살기에 아주 부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서 살아가려면 역사 그 자체 안에서 전개될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자원 부족입니다. 오늘날에 비전에 대한 많은 붐이 일고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여전히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비전은 초월적인 신앙 안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II.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A.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적 생명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셔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과 인간과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 맺으신 관계는 매우 특별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모든 사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식물의 생명현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을 식물생물학이라고 하고 동물은 동물생물학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인체생리학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인간생물학이 훨씬 더 맞는 용어 같습니다.
강대에 있는 화분이 일주일 전엔 안 그랬을 텐데 파랗고 빨갛고 생명력이 있어 보입니다. 밑에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을 하라고 하면 생물학자들은 뿌리가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올라가서 꽃으로 갈 때는 꽃의 유전자와 결합하여 꽃잎이 되고 잎사귀로 간 것은 잎과 결합을 일으켜서 여러 가지 단백질 작용을 해서 식물로 변화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생명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한 것이지 무슨 힘으로 왜 그것을 빨아들이느냐 라고 물어 볼 때 빨아들이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조절 작용들은 결국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갑니다. 그것들이 각각 일어나는 개별적인 작용들은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씨앗이 맺어서 번식 하도록 하나의 목적을 향해 전체적인 것을 통솔하는 그 원천적인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것은 누구도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몸도 200여개 넘는 뼈와 590개가 넘는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구조 가운데 특별히 신비한 것은 신경구조입니다. 현대 의학에 있어 밝혀진 것은 정말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신경세포들이 있어서 사물과 접촉하는 것들을 전달하여 우리 몸의 조절작용과 연결이 되게 합니다. 화가 나면 분비액이 나옵니다. 기분이 좋을 때, 사랑을 느낄 때도 분비액이 나옵니다. 이런 분비작용과 조절작용을 잘 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것이 호르몬입니다. 호르몬이 용도에 따라 적절하게 분비될 때 이런 기능들이 원만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을 만졌더니 액이 분비되었다고 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설명이지 왜 이것을 만졌을 때 나오느냐 하는 것은 설명이 안 됩니다. 생물학에서는 생명을 안 다루고 생명의 현상만을 이야기 할 뿐이지 생명 자체는 이야기를 못합니다. ‘생명학’이란 학문은 없습니다. 이 학문이 존재 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각각의 피조물 속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힘이라고 나는 정의를 내립니다.
하나님의 힘이 두 가지의 큰 줄기로 그 사물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생물인데 그 두 가지의 큰 맥을 이루는 하나님의 힘의 작용이 조절작용과 대사 작용입니다. 환경에 대해서 반응하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정체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거의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신학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공부하는 것이지 하나님 자체가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이 무슨 존재인가에 대해선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의 작용들입니다. 하나님과 피조세계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런 것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신 다음에 내팽개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힘을 여기에 작용하여 작은 식물 하나로부터 시작해서 하늘에 떠 있는 우주 천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우주가 하나님의 힘으로 꽉 차있는 것입니다. 이 힘은 바로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입니다.
태양 주위에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렇게 있습니다. 명왕성은 최근에 잘렸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큰 별이 목성입니다. 목성은 태양의 1/4 정도의 크기입니다. 엄청난 크기입니다. 지구가 1년에 한 번씩 태양주위를 도는데 목성은 12년에 한 번씩 돕니다. 어느 과학자가 이것 사이에 무엇인가 묘한 균형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한 것입니다. 실제로 슈퍼컴퓨터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이 목성이 이만한 크기가 아니라 1/2, 1/4로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까? 데이터를 집어넣고 실험을 하는데 목성의 크기가 변하기 시작하면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던 모든 행성들의 궤도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가면 물때가 있습니다. 물이 많이 들어오는 시기가 한 달 중에 있고 물이 적게 들어오는 시기가 있습니다. 차이가 어마어마합니다. 달의 영향 때문입니다. 목성이 지나가면 지구가 흔들립니다. 줄어들면 이 궤도가 엉키기 시작하다가 목성이 아주 작아지니까 지구가 팡하고 돌멩이처럼 태양계에서 튕겨나갑니다. 우주를 향해서 발사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균형을 이루며 창조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 안에는 소낙비 쏟아지듯이 어마어마한 천체의 운석들, 우주 파편들이 날아옵니다. 지구에 직경 10km 정도의 바위 덩어리 하나가 떨어지면 지구는 확실하게 멸망합니다. 지구를 깨뜨려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쾅하고 부딪히는 순간에 어마어마한 먼지가 생겨납니다. 지구 전체를 뒤덮으면서 몇 년 동안 태양의 빛을 가리어서 혹한기가 찾아오게 만듭니다. 공룡의 갑작스런 죽음을 그렇게 설명하는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날아오는 수많은 우주로부터의 파편을 온 몸으로 막아주는 존재가 목성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덩치가 그 천문학적인 숫자의 돌멩이들을 중력으로 잡아당겨서 자기의 몸에 부딪히게 만듭니다. 궤도 안에 들어오는 90% 이상을 막아줍니다. 10년 전에 목성의 크기가 얼마큼 되는지 모르는데 우주 운석이 부딪혔습니다. 그 부딪힌 광경이 선명하게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쾅하고 부딪혔는데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목성의 표면이 단단한 지구 같은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가지 기체들로 되어 있습니다. 쾅하고 부딪혔을 때 불기둥이 솟았는데 그 높이가 1,800km 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높이의 불기둥이 치솟은 것입니다. 비행기가 가장 높이 떠 봐야 10km 밖에 안 됩니다. 어마어마한 불기둥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망원경에 잡혔습니다. 그런 엄청난 운석들을 자기 온 몸으로 막으면서 지구를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힘이 그 안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이런 것들도 작용을 합니다. 하나님의 힘이 작용하는데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힘의 작용이 어느 정도 계속 되다가 멈추면 이것이 사라지고 새끼들이 태어나서 그 다음 세대를 열어갑니다. 인간도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창조 시 : 영적 생명 안에서
창조 시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런 모든 사물들이 함께 거미줄처럼 연결을 이루면서 각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이라고 하는 생명을 받으면서 자연적인 교통을 이루고 영적인 교통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피조 세계는 물질이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조물과 하나님이 만나는 이 관계는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관계보다는 간접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로서는 자연과 똑같은 관계에서 하나님과 만나지만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으므로 영혼과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하나님과 가까운 본질로서의 만남이기 때문에 보다 직접적이고 이 관계가 직접적이라고 하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의 의미가 창조 목적에 대해서 직접적이라는 뜻을 갖는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 창조 목적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관계를 하지만 인간은 그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인간 중에서도 굳이 분리를 하자면 인간의 영혼은 창조목적과 더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2. 타락 후 : 영적 생명 밖에서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이 모든 창조세계의 대부분의 연결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 맺어졌던 이 관계는 대부분 끊어져 버립니다. 간접적인 관계들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이 모든 세계와 맺으신 당신의 영광스런 관계를 끊으시고 이 모든 인간과 피조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된 가운데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충만한 영혼을 거두어 가시고 영적으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이 관계들이 끊어졌는데 자연적인 관계 속에서 영혼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놀라운 이점들, 지성, 추리력, 논리,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 이런 것들 중에 상당 부분을 하나님이 그냥 보존해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아주 해괴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지성의 능력은 아주 뛰어나게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어느 목적으로 가게 해야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인 판단의 능력은 거의 사라진 것입니다. 이 많은 과학 기술과 학문의 발전을 가지고 인간 자신이 이 모든 우주, 이 세계와 창조물 위에 군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창조 목적 자체를 자기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런 일들을 구현해나가기 위해선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 자원을 손에 넣기 우해서 인간이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그 욕구들이 나라와 나라가 부딪히게 되면 치열한 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흔히 과학기술이 너무나 발달했기 때문에 옛날은 항상 후진 사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100년 전에 거슬러 올라가서 핸드폰하고 컴퓨터를 찾으면 후진국입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이 컴퓨터나 핸드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놀라운 증거가 건축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인데 목욕탕에 가면 지금도 기분 나쁜 것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입니다. 겨울에 특히 위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데 조롱조롱 맺혀있습니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못했습니다. 2,500년 전의 폼페이의 유적지를 가보고 나서 한참 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습니다. 거기도 사우나가 있는데 2,500년 후의 지금과 똑같습니다. 들어가면 카운터 있고 옷 벗는데 있고 옷 넣어두는 칸이 있습니다. 밑에서 불을 때고 찜질방처럼 거기서 땀을 내는 것입니다. 샤워기가 있습니다. 노예들이 물을 계속 붓습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나갈 때 양치질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맑은 물을 퍼서 양치질도 하고 끼얹습니다. 시계도 있습니다. 구멍 세 개를 뚫어 놓았습니다. 아침에는 첫 번째 구멍에서 햇빛이 비추고 점심때는 두 번째 구멍에서 비췹니다. 저녁때는 세 번째 구멍에서 비췹니다. 찜질방에서 한참 뒹굴다가 몇 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이 더운물이 쏟아져 나오니까 천장에 물방울이 생겨 떨어지는데 천장을 아치(arch)로 만들고 물결치게 설계를 만들었습니다. 물방울이 생기면 즉시 매달려 있지 못하고 물방울 자체의 힘에 의해서 각기 파여진 골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아래로 떨어지면 작은 물길을 경사지게 만들어 사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여 바깥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아주 쾌적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언제 시대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되는데 근대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쪽 산을 지켜보는데 아침마다 아주 짧은 순간 찬란한 빛이 비치는데 잠깐 동안 비치다가 사라집니다. 매일 거기서 찬란하게 빛이 비추어 너무 신기하여 며칠 동안을 고민을 하면서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작은 구멍이 있어 허물어 보니 엄청난 공간이 나옵니다. 들어 가보니 석굴암이었습니다. 이마에 박혀있는 보석에서 각도가 기가 막히게 맞아 빛이 비추어 작은 구멍, 흙더미가 무너진 그 사이로 보낸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관에 신고하였습니다. 일제 시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들어가서 조사했는데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습기, 이끼하나 없이 보송보송 하게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너무 신비하게 보였습니다. 천 년 전에 어느 임금들이 지었는데 완벽하게 시공을 했을까하고 몇 개를 뜯어봤는데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맞추어도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그때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건축들을 했던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내려와 건축하는 것을 보면 비웃을 것 같습니다. 다리를 세워 놓았는데 우르르 무너지고 아파트를 세웠는데 오징어처럼 쭈그려져 날아가고 후진국에서 그런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도 자기 힘으로 저절로 주저앉고 차도 내려앉고 그런 것들을 보며 그 사람들을 볼 때 바보들이 사는 나라인가 하지 않겠어요?
인간에게 지적인 능력을 그대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음악에 잘 나타납니다. 세월이 언제인데 쇼팽, 바하, 비발디, 그런 것만 합니까? 아무리 새로운 음악가가 나타나도 그들의 작품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드는 커다란 끌림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까? 300년 쯤 후에는 베토벤이나 헨델이나 바흐, 쇼팽, 스트라우스 같은 사람 다 잊어버리고 21세기에 태어나서 작곡한 사람들의 작품만 연주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 잘 알고 있잖아요.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학문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최근에 새롭게 연구해 놓았다고 기뻐하지만 많은 경우에 이미 몇 백 년 전에 치열하게 담론(談論)들이 이루어진 정보를 빗겨 갔기 때문에 자기가 최초의 발견자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그대로 인간에게 남겨두시니까 인간들은 이 좋은 머리와 능력을 가지고 자연적인 사물들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문명들을 일구어 가는 능력은 하나님을 굉장히 많이 본받았는데 이 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이 생명의 현상은 놀랍게 분석해낼 수 있는데 이것을 지은 분이 누구냐 하니까 대답을 안 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어느 인간이 돌입니까? 이 안에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아무것도 설명 못해도 이것을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생명의 원리는 몰라도 이 풀과 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된 인간이에요 아니면 연구를 해 낸다고 한들 이것을 주신 이가 모르는 그 인간이 돌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것을 알 수 없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인간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과학 기술과 문명이 엄청나게 발달을 해서 많은 것을 우리가 향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산층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가 17세기의 왕족과 아주 높은 귀족들이 누리던 소비생활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동의해요? 17세기에 여러분이 왕족, 귀족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합니까? 물질문명은 절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삶에 대한 만족도에서 수위를 차지한 국가는 구라파나 미국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있는 국민소득 500$미만의 나라들 속에서 인생에 대한 만족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습니다. 욕망이 계속 늘어나니까 엄청나게 자원을 낭비하면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망이 너무 지나쳐서 큰 문제입니다. 중국에서 샨샤댐을 만든다고 합니다. 물이 꽉 차면 지구 자전축이 흔들린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가봐야 압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이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렇게 삽니다. 하나님이 그런 물질문명 속에서도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행동입니다. 구원이 필요하게 됩니다.
B. 구원하시는 삼위하나님
1. 성부의 사랑
구원하시는 역사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모두 여기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동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장본인이셨습니다. 당신의 계획을 따라서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조하신 세계를 주님이 이루신 세계이기 때문에 창조하신 세계가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가장 많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된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무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빚으셔서 새롭게 하실 수 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고 굳이 망가진 세계를 고치시고 고장 난 인간들을 치료하셔서 당신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해석할 때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복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하나님이 무로 돌리셨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 없애 버리셨는데 누가 비난을 합니까? 새로 창조된 인간은 기억도 못하는데.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우리 인간 쪽으로 끌어내려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해석입니다. 적합한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불행하게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조금 모자란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갖다 버리라고 하는 것은 남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를 계속 내가 데리고 있을 때 앞으로 돌아올 것은 끊임없는 고통과 부담밖에는 없다 하더라도 부모인 내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이 이 아이를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 아이에게 집착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2. 성자의 희생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사랑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의해서 타락한 이 세계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랑 때문에 성자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이 모든 인간들 속에 사람의 모양으로 함께 사시고 마지막에는 그들이 지은 모든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성자의 희생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사랑이지만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희생하신 아들의 사랑은 보이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그 사랑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빨래가 흔들리는 폭에 의해서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듯이 그리스도 성육신을 통한 그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세계의 인간들을 향한 창조세계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은혜
그러나 인간을 위한 구원의 사역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성령의 참여하심으로 더욱 찬란한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을 실 때부터 중요한 사명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험하게 만들어주시는 그 일을 위해서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사랑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찬양)
멸시와 유혹 가시관 쓰셨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끔 육체를 입고 오셔서 그 사랑을 베푸셨을 때 목격한 사람의 수는 이후에 구원받을 모든 인류의 수에 비하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극복이 되느냐? 그것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역에 성령이 참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서 사람의 몸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그분은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이 되셨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이후에 구원받을 인간들 속에 역사하시는 은혜는 이 기록이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이 기록을 통해서 사람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믿게 되는데 그 경험은 갈릴리에서 직접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면 믿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 분이 우리와 같이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시고 그러다가 ‘미안하다 잠간 화장실에 갔다’ 올게 하고 나가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냐면 아버지 없이 태어나신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많은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분이 저렇게 모질게 채찍질을 맞으시며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망치소리 들리며 나무에 높이 매달려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어갈 때, 저분이 저렇게 죽으시므로 내 죄가 용서받는 생각했을까요? 더군다나 치욕스런 죽음 끝에는 찬란한 영광의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알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아무 방해 없이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신 그 말씀이 절대적으로 보지 않고 믿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감각적인 이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는 사람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보고 지성으로 믿는 그 사람이 훨씬 복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은 그것은 눈에 그 증거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나면 예전의 것은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유대에서 주님과 밥을 먹지 못했어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찬양)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봤도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성령님이 바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III. 인간의 회심과 그리스도
A. 회심하게 하심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렇게 탁월하신 그분이, 죄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형벌을 당하는 그것이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 그 죄는 무슨 죄를 회개하게 될까요? 하나하나의 죄들이 그 순간에 절대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그 이전이나 훨씬 후에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펑펑 울면서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원천적인 것 때문에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적이고 원천적인 죄는 자기 존재 그 자체가 죄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덩어리에서 빚어진 각종 물상들의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의 반죽덩어리를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자기가 죄악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 이외에는 자기에게 아무런 선한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치열한 고난이 이러한 죄악의 덩어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임하신 모습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회심하기 이전에는 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이 세상이 가르쳐준 죄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도둑질 하지 마라. 남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이런 저런 악을 하지 마라. 우리에게 사회가 가르쳐 주는 도덕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안 저질렀으면 자기는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들끼리 만든 것입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훔치면 어때? 이것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훔쳐 와도 장소 이동만 할 뿐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어떤 사람이 “당신 왜 감옥에 들어왔느냐?” “법도 그지 같아요. 줄 하나 붙잡았는데 날 여기에 처넣었습니다.” “그런 나쁜 사람들이 있나?” “줄 끝에 무엇이 달렸습니까?” “남의 소가 달렸지요.” 인간이 행복을 위해 각기 그렇게 rule을 정한 것입니다. 어겨도 됩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그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법들은 우리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죄라고 하는 것을 그런 개별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몰라보는 것이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보는 거기에서 그 무지로부터 모든 악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모인 줄 모르고 부모에게 반말도 하고 홀대를 했습니다. 사실 홀대한 것은 큰 죄가 아닙니다. 더 큰 것은 몸에서 태어났으면서 자기 엄마 아빠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효도의 첫 번째는 돈을 주고 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의 첫 번째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모를 인정하는 것이며 효도의 첫걸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자기가 그 하나님에 의해 지은 바 된 존재인데 하나님을 몰라보고 살았던 죄에 대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 하나님이 계실 자리에 자아를 두고 산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게 됩니다.
(예화) 황제가 산 궁 이야기
생애 최초의 회심이 구원의 결정적인 표가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었던 것에 대한 심오한 회개 없이는 누구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성인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깊이 회개하게 될 때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자기가 당해야 할 비참한 형벌을 당하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성경의 기록으로 말미암아 생생하게 현재적으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전에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모든 길들을 이제는 전적으로 포기하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혼란이 생길 수 있냐면 예전에 과연 우리가 구원을 필요로 했는가? 라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자기가 비참하고 멸망 받을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얼마든지 불행해지고 나빠질 수 있는 존재라고는 생각합니다.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불행해지고 나빠질 수도 있으니 거기에 대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인간이면 누구나 합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이 상태가 지속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지금 불행하지 않고 행복한 사람은 이 상태가 지속되기 위해서 노력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그 당시의 차원으로 보면 구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치열하게 구두쇠처럼 돈을 번 것입니다. 부모도 안 주고 자식도 안 주고 죽고 나면 누구한테 빌려주었는지 몰라서 빚쟁이만 땡 잡게 합니다. 그렇게 수전노처럼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에는 별로 취미가 없지만 지식을 많이 쌓아서 남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되겠다 생각하고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공부가 구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머리도 안 받쳐주고 돈도 없어요. 할 수 없이 돈 모아서 깎아내고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얼굴을 예쁘게 만들어서 구원 받을 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신은 머리도 안 받쳐주고 돈도 없지만 예쁘면 누군가가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 자원에 참여함으로서 미래에 다가 올지도 모를 불행을 면해보겠다는 것도 확실히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잠시 있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일 뿐 나를 영원히 행복해 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찾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그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이 나의 구원의 전부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존재를 다 팔아서라도 그분을 사고 싶은 것,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얻게 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절대 의존적인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바로 가질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반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여기에서 혼란을 느낍니다. 그렇게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뼈져리게 아파보고 싶은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스도 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절대적인 믿음을 행사해 봤으면 좋겠는데 안 생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도 혼란은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의 신비한 관계가 드러납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회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인간의 의지와 조화된 가운데 발생하는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비유를 들었는데 가슴에 와 닿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장작을 패는 방법은 똑같습니다. 나무를 사다 잘라서 운반을 한 다음에 쪼갤 때에는 결을 보고 옹이는 피해야 합니다. 힘껏 치면 쪼개집니다. 동양에서만 이렇게 하고 서양에서는 떡국 썰듯이 장작을 패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똑같이 그렇게 세워 자릅니다. 어리석은 행동이므로 떡국 썰듯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실 때 장작을 엎어 놓은 것처럼 패시거나 생선회를 깍두기처럼 썰거나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결을 따라서 역사하십니다. 그 마음은 상당부분 자기의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하게 결합이 되면서 인간의 책임도 면할 수 없고 인간은 스스로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심하고 주님 안에서 행복을 얻은 모든 사람은 자기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돌아보면 자기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데 무엇인가 근원을 알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힘에 떠 밀려서 자기를 회개하고 주님을 꼭 믿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바로 구원 받은 증거입니다.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그렇게 다루어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루기 위해서는 정직하게 인간의 죄를 보여주고 그 죄로 말미암는 자기 자신의 비참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단절된 가운데 살아가는, 영생으로부터 멀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을 향해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못 박혀 죽은 것이 유일한 길로 보여서 그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다루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선명한 죄,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의 불순종의 죄와 비참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인간의 죄를 어떤 식으로 바꾸는가 하면 회심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서 한없는 능력과 은혜를 예비하고 계신데 왜 이렇게 사느냐 당신들이 믿기만 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돈을 벌면 최고의 사람이 될 수 있고 공부를 하면 최고의 수재가 될 수 있고 당신도 인생의 꿈을 꾸면 성공할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이 있는데 왜 이렇게 분발을 해야지 패배 의식 속에서 사느냐고 야단을 치는데 이것은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영원히 형벌 받을 인간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해주었는데 지금이라도 네가 최고가 되어서 부럽지 않냐? 자동차를 판다면 평생 남의 집에서 월급쟁이 할 생각을 하냐? 온갖 간증을 통해서 예수 믿고 자동차 많이 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지난달에도 25만불 수입을 올렸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미래에 나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딜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모든 사람이 고객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적극적인 마음이 생기기 시작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미래의 고객으로 보이지 시작했습니다. 전심전력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투자했더니 연봉이 계속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일조를 하기 시작했더니 하나님이 더 많이 부어주셨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당신도 예수 안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입니다.
죄에 대해서 정직하게 지적을 해서 빗겨가지 말고 깊게 참회하고 예수의 생명에 접붙이도록 정면 도전을 해야 되는데 이 사람의 관심이 있는 것이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입니다. 그쪽으로 모는 것입니다. 신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생을 그렇게 사느냐고 욕을 하는데도 너무 신나는 것입니다. 다 설교를 듣고 난 후 나도 성공해야지 하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성공도 쓸데없구나.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태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B. 접붙이시는 그리스도
여기에서 그렇게 회심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접붙이시는데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몸에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십자가라고 하는 큰 나무가 있는데 각자가 헤딩하듯이 다 달라붙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로 회개하사 죄 사함을 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 그렇게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게 된 이유를 즉시 배워야 되는 것은 임금이신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구주이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사는 것, 그분의 생명의 원리에 접붙여 사는 것을 배워야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제일 먼저 배울 것은 사랑과 복종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서 교회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것, 세우신 질서에 복종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를 사랑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일체를 이루시는 삶, 이것이 배워야 될 삶입니다.
그런데 모두 자기가 주인입니다.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의 특징입니다. 모든 인간을 신으로 만듭니다. 각자 자기가 중심점입니다. 그런 사선들이 들어와서 자기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져도 그리스도와 일대일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셨다고만 생각되면 나머지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입니다. 가정도 교회도 질서도 목회자도 교회의 권위도 다 때려 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성령 충만하고 깨어서 살면 생각은 틀렸지만 한 성령이 움직이시니까 어느 정도 껴들어서 돌아가는데 은혜가 떨어지고 교만이 뻗치게 되면 엉망인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게 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삶이 됩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일들이 삶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고통을 받고 혹은 헛된 희망을 걸어보거나 혹은 그 속에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람을 원망하고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좌절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이루어진 영생의 관계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겹칠 때 정신이 산란하니까 기도도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가 흘러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인데 하나의 은혜는 태양빛과 같습니다. 삶의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고난을 만나게 되면 인내로 나타납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나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역경과 두려움이 휩싸이게 되면 소망으로 나타납니다. 슬픔이 밀려오면 기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의 햇빛이 프리즘을 통해서 일곱 가지 색으로 찬란하게 분광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 접붙여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주어진 이 은혜가 상황과 만날 때 찬란한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 빛 하나하나가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빛깔로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초시간적인 은혜가 시간과 공간에 있는 인간의 마음을 통해 상황과 맞부딪혀 발산이 될 때 그렇게 찬란한 빛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살아가게 됩니다.
회심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의 몸에 그리스도께 접붙이지 않았더라면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삶의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그것을 통해서 자기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지체가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힘들지 않냐?” “목사님 저는 어려움이 오면 기대가 되요.” “왜?” “이번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관한 새로운 사실을 보게 될까? 내가 만약 역경이 없었더라면 드러나지 않았을 하나님의 성품, 이제껏 평안한 길을 걸어오면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섬세한 역사 이것을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현실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은혜의 힘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은혜의 영향력은 의지나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정 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의지나 감정이 아니라 지성부터 시작해서 사고방식까지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바깥에 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삶입니까? 그리스도 바깥에 있을 때 기대나 할 수 있는 삶입니까?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면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11:33) 말문이 닫혔던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분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너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한없이 넘쳐나게 될 때 그것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가서 좌절하고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오류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진리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옆에 있어 자신을 위해 섬길 때에 그들을 통해서 생생하게 자기 안에는 없는 어떤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실제의 근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거기에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IV.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음 4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그 자체가 믿음입니다. Believing is seeing 그 믿음이라고 하는 자체는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탁월하심을 바라보고 탁월하심이,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그 은혜가 얼마나 우리의 충족한 믿음의 생활을 위한 자원이 되는지를 깨닫고 그분께로만 붙어있기로 결심하는 것, 그분을 의지하고 고난이 오고 슬픈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분의 십자가를 꼭 붙들고 나의 인생의 계획이 그분의 계획안에 있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할 때 오늘의 큰 고통도 결국은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선이 될 것임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큰 불행을 단번에 기쁨으로 절망을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에 대한 기대로 외로움을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과 교통하는 통로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변화의 힘이 이 세상 안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이 물질과 번영 속에 욕망으로 치닫는 삶의 잠시 눈을 감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많이 소유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의 평정을 찾으면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얼굴빛으로 비추는 그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들이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내 인생에 이렇게 놀라운 교통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날마다 고백 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주 안에 가득한 그리스도의 영광, 그 모든 피조물들 위에 가장 뛰어난 예수의 탁월하심, 그 안에 우리도 있고 우리 안에 그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10.진리의 보고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I.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예수님께서는 잠시 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후에는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실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곧 제자들을 떠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깊이 낙심하고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들을 잠시 떠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도 함께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있게 할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논리적인 도마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 만나러 가는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곧 길이며 진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진리,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오늘 이 성경보다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 진리는 인류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찾고자 하였던 바로 그 진리였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경험 세계 너머에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는 진리를 알고 싶어 했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지성뿐 아니라 때로는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런 욕망까지 모두 포기하는 극기의 삶을 살면서까지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료한 언어로 당신 자신이 진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진리란 무엇일까요? 우선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본래적인 진리와 나타난 진리입니다.
A. 하나님 자신
본래적인 의미에서 진리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진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진리라고 하는 것을 살아가면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이 사는 이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합니다. 과학적인 발견들은 사물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터득하면서 거기에 있는 법칙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이외의 물질로 세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진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법칙, 모든 진리가 오게 된 원천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존재, 선, 진리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존재가 많이 있지만 원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이시고 거기에서 많은 존재하는 물질과 사람이 창조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좋은 많은 것을 경험하지만 본래적인 좋음, 원천이 되는 선은 하나님 자신인 것처럼 인간이 살면서 많은 진리를 경험하지만 진리 자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는 눈을 뜨면 존재하는 것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풀을 마주하게 되고 이런 탁자도 마주하게 되고 사람인 존재들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정한 시간 안에서 공간을 차지하며 있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존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오늘은 존재라고 부르지만 몇 년 후에도 우리들이 이것을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몇 달 가지 않아서 이 푸르고 청청한 잎은 누렇게 변하기 시작할 것이고 습도가 맞으면 썩기 시작할 것이고 건조하면 말라서 부스러지기 시작할 것이고 더 많은 세월이 흘러가버리면 아무것도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책상은 식물에 비해서 오래가겠죠?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부패하고 썩거나 혹은 닳아서 서서히 형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존재하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존재하는 것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얼음이 있으면 큰 얼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날이 따뜻해서 모두 녹아버리면 우리는 얼음이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바닥에 고인 넉넉한 물을 보면서 좀 더 생각해보면 얼음이라는 덩어리가 시간이 흐르면서 물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 물이 시간이 지나서 열을 받아 증발하게 되면 김이 나오게 되고 김이 나오게 되면 우리는 물이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김으로 바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김도 공기 중에서 흩어져버리고 수증기의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김도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수증기로 변한 것이고 더 시간이 흐르면 이것은 원소들로 대기 중에 흩어지게 됩니다. 존재의 양상만이 바뀌게 되는 것이지 물질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물질의 본질이 원소라고 본다면 이렇게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이것이 원소가 되어 모두 흩어졌을 때 존재를 이 풀의 모양으로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사라진 것이 된 것입니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있지만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즉,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져서 존재하고 있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공간 속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있기는 있지만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있는 것이지만 존재 자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존재는 모두 자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졌고 또 있는 그것도 자기만이 아닌 다른 사물이나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서 자기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는 법이 없으신 누구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만이 참으로 존재하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은 만져지는 분도 아니고 그 하나님은 접촉되거나 우리의 육신의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렇게 사실은 존재하시지 않는 분이 진짜 참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도 육신을 가지고 시간 속에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육신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있을 수 있으니 그러므로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육체 때문에 내가 나인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그 영혼 때문에 내가 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많은 좋은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때는 참 좋다. 저 사람은 참 좋다. 하나님은 참 좋으시다. 이런 고백을 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선함, 그 선은 모두 홀로 진공상태에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혜택을 입거나 다른 물질과의 관계에서 원만한 공급을 경험하거나 혹은 자연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유익을 얻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좋음 혹은 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만약에 나 이외에 아무 대상도 없이 진공 속에 있다고 할 때에는 선이 무엇인지 우리가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찬란한 태양이 뜨겁게 불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태양에 접촉하도록 만지도록 허락되지 않고 심지어는 두 눈을 똑바로 떠서 이글거리는 그 태양을 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 태양에서 비친 그 열과 빛 때문에 식물이 움트고 동물들이 살고 우리 인간이 호흡하며 이렇게 기동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물들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이 선함은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비치는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많은 선을 발견하지만 하나님이 선 자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선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들은 햇살에 불과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참 선,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진리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이 살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진리를 터득합니다. 진리가 아닌데도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진리 매우 가까운 것들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면서 인간이 사는 도리와 이치를 깨닫게 되기도 하고 학문과 과학을 연구함으로서 사물과 사물사이에 존재하는 법칙들을 터득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상당히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물건이 있기 때문에 법칙이 작용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진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사람의 선한 것이 느껴지고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인간에게 악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물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투영되어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진리가 발생하게 된 원천이시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진리 자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하나님과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찾기 위해서 헤매었습니다. 자신의 온 지성, 혹은 자신의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욕망까지도 포기하면서 진리를 얻기 위해 극기의 삶을 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찾고자 했던 것은 차디찬 진리였고 그들이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움직이지 않고 생명도 없는 차가운 돌멩이와 같은 비인격적인 사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에게 그렇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아무리 더듬어도 알 수 없는 이 진리가 아니라면 누구도 하나님께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진리를 가르친 선생님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진리이셨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탁월성은 이 진리를 인격을 통해서 가르친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호메트교는 마호메트 없이도 존재하고 불교는 부처 없이도 건재할 수 있습니다. 어느 종교도 한 사람의 인격에 그처럼 철저하게 모든 것이 달린 종교는 없습니다. 각기 교주라고 하는 인물들을 가지고 있고 창시자들이 존재하지만 그 사람들은 종교를 일으켰을 뿐 그 사람의 인격 그 자체를 종교의 본질로 삼는 종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모든 종교의 본질을 사람의 몸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인격과 맞닿는 일이 없이는 누구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진리이신 하나님 자신의 화육이었습니다. 진리 그 자체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진리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분 안에 모든 진리의 비밀들이 있고 그 진리와 함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뜻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진리는 하나님 자신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도 진리라고 가르쳐줍니다. 즉, 하나님이 태양이시라면 하나님 뜻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있는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를 향해 관계를 맺고 있는 진리입니다. 세계가 없다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없습니다. 인간인 나 누구누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는다면, 개인인 나 누구누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에 있는 인류 전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와 하나님과 관계 이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이 뜻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는 처음부터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나와 사람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나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관계, 나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의 진리는 단지 지성적인 탐구의 대상일 수 없고 진리를 발견하면 그것은 곧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그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나면 우리가 그 모든 관계 속에서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실제적인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를 아는 지식과 그의 존재, 그의 삶은 떼어놓을 수 없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비롯한 교회 이 모든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향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의지, 뜻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풍부하게 보여 졌습니다. 보여 진 그런 하나님의 뜻들을 모두 모아놓은 책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무슨 뜻을 가지고 계신지 의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탐구하고 알면 알수록 진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인 성경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또한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으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진리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찬란한 진리의 정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무한히 펼쳐진 우주의 모든 세계 속에 흩어져 있는 그 조각조각 진리의 부스러기들을 모두 모은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 진 그 진리의 크기와 양, 질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증거 되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마다 예전처럼 그렇게 자기를 철저하게 인간의 욕망과 모든 자연적인 필요까지 거절하며 치열하게 자기를 학대하면서 진리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렇게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II. 진리의 영광
진리는 필연적으로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탁월한 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빛으로 보이던 것들은 어두움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우리에게 찬란한 빛으로 다가오고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 주어서 그 진리이외에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진리의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A. 진리의 빛 : 참 빛이신 그리스도
이 진리의 빛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그분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분이 없는 이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묘사하고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악을 행하면서 사는 것은 빛을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빛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박해와 멸시를 받으신 것도 이세상이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빛인 진리보다는 어두움의 일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비추기 위해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어둠 속에 있고 사단은 이러한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진리, 빛이 비치지 못하도록 인간을 속이고 가로막는 어둠의 일은 사단의 일이고 이 장막을 거둬버리고 인간의 영혼에 찬란한 진리의 빛을 쏘아 보내시는 것은 성령의 일이라고 성경은 누누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빛, 찬란한 빛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빛입니까? 이 세상에는 타락한 인간이라도 본성의 정신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많은 지식들이 있습니다. 거듭나고 변화 받지 않은 사람들도 물체에 대해서 연구하며 많은 지식과 진리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진리는 물체와 물체 사이에 존재하는 낮은 수준의 법칙에 관한 지식들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지식은 어떤 지식일까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 자신만을 탐구해서는 그가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생각함으로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도 알게 되고 그렇게 존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비하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인생에 행복이라는 사실들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지식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지식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지식들은 일반 학문이나 철학자들이 그토록 열을 올리며 탐구했던 그 모든 지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전 5세기 더 멀리 나가면 7세기경부터 2-3세기까지 살았던 희랍,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탐구가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인류의 정신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지적 유산 위에 진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 탁월한 지성인들이 그렇게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들이 살던 곳에 가보면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땅이 엄청나게 기름집니다. 씨를 뿌리면 곡물이 잘 자랍니다. 노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의 노예들은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동양에서처럼 학대하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허드렛일을 다 해줍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왜 태어났나?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만물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을 통해서는 사상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일단 사상이라는 것이 나오려면 배부르고 등이 따뜻해서 딴 생각을 많이 해야지만 사상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지 못했으면서도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밥을 많이 먹고 좋은 옷 입고 편안하게 살면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자기를 짐승처럼 쳐서 복종시키면서 고행의 삶을 살면서까지 진리를 내가 한번만 발견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마음을 가지고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중에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해 보이는 그 시대 가장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았던 그 사람들이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진리는 그렇게 찾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우리의 지성을 비치는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입니다. 인간 자신이 논리를 가지고 파악해가는 것은 이런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을 우리 자신에게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비쳐질 때 이 진리의 빛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이 우리에게 비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은 누구이고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고 내가 누구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되는 것만큼 내 주위에 있는 이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이 아닌 이 모든 자연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입니다. 바로 이 빛을 가져다주는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곳에 성경보다 더 많은 지식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하는데 거짓말입니다. 자기는 성경에 모든 경영이 다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에 모든 물리학이 다 있다고 생각하고 정치학에 관한 내용도 성경에 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들은 현대의 물리학이나 정치이론 현대의 모든 학문 속에 더 풍부하게 많습니다. 정치를 하려면 성경만이 아니라 일반 정치의 학문도 배워야 하고 무엇인가 과학적인 발견을 하려고 하면 현대의 물리학을 비롯해서 많은 학문들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자기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그런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은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예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엄청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그것을 읽고 쓰고 외우고 풀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데 탁월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자신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성경 속에 나타나있는 이 명백한 진리들 중 참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그들에게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을 전달해 주려고 하는 것들은 그들이 모두 거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21살 때 회심을 했습니다. 교회를 찾게 된 유일한 동기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심하지 못했던 때였지만 인간이 정말 혼란스러운 존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남의 행복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내가 나인 것, 내가 인간인 것 그 자체가 나에게는 무거운 부담이 되었고 풀 섶에 자라고 있는 한포기의 풀을 부러워했고 굴러다니는 생명이 없는 돌멩이를 부러워했습니다. 내가 저런 것들처럼 생각할 수 없고 아예 마음조차도 없는 그런 물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가장 무서운 것이 내가 나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복음을 듣게 되었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분께 다가갔습니다.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만약에 살아 계시다면 내게 대답해 주십시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내 힘으로 나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나도 내가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당신이 있다면 나를 도와주십시오.’하고 빌었습니다. 그때에 저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든지 이 창조세계가 하나님께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든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의지하며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순간에 복음은 제 마음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2천 년 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분이 진리에 대해서 가르쳐주기 위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었고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를 향한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모에게서도 친구에게서도 이웃에게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나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자기모순과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힘이 없는 가련한 존재, 그러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내가 아는 작은 사상과 지식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고집하고 믿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리며 대놓고 주님을 욕했던 나의 지난날의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그런 많은 오류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와서 스스로 죄를 지었지만 그 죄의 무게와 혼돈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나와 같은 인간을 이해서 멸시와 모욕을 당하셨고 차마 하나님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일들을 체험하시며 마지막에 이 쓰레기 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동안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고 나는 왜 존재하며 이 세계는 무엇을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며 읽었던 수많은 사상과 수많은 지식의 나부랭이들 그것들에 심취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고 예수를 비겁자라고 욕하던 쓰레기 같이 죄악 된 모든 날들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진리의 빛이 제 가슴속에 비쳤습니다. 그때에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들이 주던 빛들은 차라리 어둠이라고 말할 만치 물러갔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인격 안에서 비치는 그 빛의 매력이 젊은 가슴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시니
못자국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신 말
내 죄악을 인함이라 하실 때 곧 내 죄짐이 풀렸네]
캄캄한 어둠을 가르는 찬란한 진리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그 어둡던 저의 영혼에 창문이 열리고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오게 되자 단지 지식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그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지식과 사랑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었던 생명이 없는 나에게 강물 같은 생명이 그 창문을 향해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교회는 내게 더 이상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탐구하였더라면 더 많이 알 수 있었겠지만 주위의 사람들을 보니까 더 많이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이 사람은 이런 모양으로 저 사람은 저런 모양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뒤 그렇게 영혼의 창문을 열고 들어왔던 찬란한 진리의 빛과 생명의 기쁨, 사랑의 희열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이것이 이 세상을 사는 신자의 운명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후 저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주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저의 목양을 받으며 신앙 생활하는 여러분 가운데 나와 같이 그런 불행한 길로 다시 들어가는 신자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B. 진리의 영향력 : 주를 닮아감
1. 생명과 사랑으로 교통하게 함
이처럼 그리스도만이 진리의 참 빛이며 또한 그 진리의 빛은 곧 진리를 인정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영광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진리가 영향을 미치는 그곳에서 진리는 영광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동안에는 성경에 대한 존중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 나의 영혼에 놀라운 생명을 일으켜 영향을 미칠 때 이 성경을 사랑하게 되고 소중히 여기게 되고 그리워하게 되고 또 알고 싶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드는 실제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철학자들이 발견하려고 하는 진리들은 깨달았다면 ‘아하’하는 진리였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인격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리는 발견하는 그 순간 찬란한 지식의 빛과 함께 뜨거운 사랑, 운동력 있는 생명이 우리 속에 밀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죽은 행실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로 변할 수 있고 영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바뀌게 됩니다. 나밖에는 사랑할 줄 몰랐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인간들을 사랑함으로 교통할 수 있게 하는 실재적이고 놀라운 능력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지식과 의무로 돌아가게 함
그리하여 이 진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으로 돌아가고 인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되는지 그 의무로 돌아가게 하는 놀라운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난날 주님을 생애적으로 만나고 저처럼 찬란한 지식의 빛이 십자가의 광채가 여러분의 영혼의 어둠을 찢으면서 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고 그와 함께 강물처럼 넘쳐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불같이 뜨거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다고 할지라도 이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영향력이 성경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계속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부패한 것입니다. 그 놀라운 신앙의 경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두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은 신자들이 많이 늘어나서 교회를 가득 채우는 것 아닙니다. 더욱이 진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고 진리를 사랑하거나 진리 때문에 깨뜨려지는 일이 없이 꾸역꾸역 교회 나오는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이 교회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영향력이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어두움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서 영혼의 어둠을 물리치고 빛 가운데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어둠 가운데 살았던 많은 날들을 참회하고 그로부터 받은바 십자가의 그 사랑,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람의 몸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큰 사랑과 자비, 은혜와 긍휼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파도 내가 이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둘 중에 하나 태도를 명백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리를 들을 때 진리의 빛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여러분 때문에 화가 나든지 아니면 싫은 데도 그 진리를 가르쳐주는 목회자에 대해서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힘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내 지성과 온 마음과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내게 붙여주신 그대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랜 세월동안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했습니다. 진리이신 그분의 진리의 빛이 숙명과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것만이 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두 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온 지성을 설득하며 때로는 여러분의 마음에 불을 지르며 때로는 여러분에게 책망하여 여러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나에게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상당히 많은 수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지막에 여러분의 인생을 왜 이렇게 살았느냐고 하나님이 물으실 때에 어떻게 답변하시려고 합니까? ‘명백한 그리스도의 복음,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해서 내가 내 종을 보내어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한숨으로 때로는 너희들의 지성에 너희들의 가슴에 설득하고 수없이 외쳤으나 너희들은 그까짓 그리스도가 대수냐고 생각하는 것처럼 무관심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구나. 어찌하여 너희가 그랬느냐’ 물을 때 여러분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진실한 참회나 십자가 앞에서 반성도 없이 차갑고 냉담한 얼굴로 예배당 문을 빠져 나가는 여러분을 보면서 차라리 저 사람들이 이 설교가 싫어서 저 교회 마당에서 차라리 돌을 던지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반응이 없다고 하는 것은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무시는 모욕보다도 더 무서운 반응입니다. 내가 묻습니다. 예수 없이 살아가는 삶이 행복합니까?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까?
저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부목사님들이 한 분씩 한 분씩 교회 개척 나갑니다. 아마 내년에도 후년에도 한 분씩 나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200명씩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공간 가지고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사심이 없는 말인지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반대할지 모르지만 나는 기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안 따라가지 않습니까? 왜 그러냐하면 김목사 설교 듣기 위해서 남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냉담할 수 있습니까?
III. 복음진리와 그리스도
보십시오.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 없는 삶은 모두 껍데기의 삶입니다. 그것은 거짓과 허위의 연속이며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에게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는 진리가 분명하고 더 이상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어느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런 변명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밝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명백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땀과 기도와 눈물과 흘리는 붉은 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람의 몸 입혀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을 남김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신자의 참된 행복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자기 같이 비천한 인간을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모욕 속에 죽어 가시면서까지 성도로 살아야 할 모범, 인간으로 걸어가야 할 표본을 보여주신 그리스도께 깊이 감사하며 무엇을 하든지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를 바라면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애인이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그 아름다움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기를 원하고 숨쉬기를 원하고 나처럼 이런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지식이 없다고 멸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지식의 빛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오래 참음으로 살아가고 가슴을 풀어 젖을 물리시던 그리스도처럼 그들에게 내가 아는 참다운 빛을, 난 빛이 아니지만 빛에 대해 증거 하는 사람으로 가르쳐주며 인생을 사는 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아직도 우리 교회 안에는 참된 회심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들만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여러분 중에도 회심하지 못한 명백한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오늘 깊이 회개하고 거듭나길 바랍니다. 일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로부터 비치는 그 아름답고 예쁜 지식의 빛을 받으며 참으로 인간의 의무로 돌아가서 이름 없고 많은 재물이나 영화가 없어도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기쁨이 되는 그런 사람으로 이 땅에 존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11.그리스도의 머리되심 : 창조와 구속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I. 창조, 처음 머리되심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개인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개인적인 사건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신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자기의 삶에 유익을 주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분당 갈래? 천당 갈래? 물어보니 다 분당 가겠다고 했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 한사람의 구원은 개인적인 사건인 동시에 온 우주를 구속 하셔서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사건입니다. 성경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는 άνακεφαλαιώ 다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게 하려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라고 말합니다.
A. 창조의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주님께서 모든 피조세계에 다시 머리가 되신다고 함은 언젠가 머리이셨던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창조 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된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복음서에 말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생겨 난 것이 없다”(요1:1-3)고 단언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된 그 모든 세계의 중보자는 그리스도입니다. 중보라고 하는 것은 한쪽으로는 이편에 한쪽으로는 저편에 연결되어 있어서 이쪽과 저쪽을 중재해주는 자를 가리켜서 중보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창조 시에 하나님으로서 삼위 하나님과 이 모든 피조세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이 모든 인간과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통로가 되신 것입니다.
B. 한 몸으로 창조된 세계
이 모든 세계는 한 몸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다시 머리되게 한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누어집니다.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이 모든 우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세계, 지상의 세계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세계까지도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고 그리스도 없이 생겨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모든 하늘과 땅의 피조물의 머리이십니다. 창조된 세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모든 것이 우주적인 하나의 몸을 이루며 그분의 통치 아래서 서로 상호 교통하며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의 몸은 온 우주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오늘날 아마 가장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환경의 문제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 환경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는 잘 느끼고 못하지만 사실은 정말 위기입니다.
우리 초등학교 다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약 40여 년 전인데 그때에 너무 흔하게 잡혔던 물고기들을 우리가 거의 못 먹고 있습니다. 저희 초등학교 때만 해도 연평도에서 제철이 되면 어마어마한 조기가 잡혔습니다. 그 조기, 굴비는 가난한 자들의 주 식품이었습니다. 대개 커다란 배가 누런 조기를 타래미로 부엌에 걸어놓고 먹을 것 없으면 이거라도 구워 먹자하고 비늘을 긁어 연탄불 위에서 구워 먹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아이들이 이 굴비를 반찬으로 싸오면 친구들 앞에 창피해서 내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굴비를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런 굴비는 찾아볼 수도 없고 수십 짝 뒤져서 10마리 묶어놓고 450만원이라고 합니다. 450만원이면 승용차 한 대 값인데 그거 한 마리 먹자고 지출을 합니까? 놀라운 이야기는 울릉도 오징어가 서해에서도 잡힌다고 합니다. 동해에 가서 어부를 만났는데 그 어부가 투덜거리는 이야기가 동해에서 잡히는 고기가 서해에서도 잡힌다는 것입니다. 참치라고 불리는 가다랑어는 북한 인근 해역에서 무지하게 잡혔는데 이제는 배타고 태평양까지 가야 겨우 잡힙니다. 이렇게 생태계가 놀랍게 변하게 되었고 심각한 위기에 처해서 과학자들은 주후 3천년이 되면 지구는 용도 폐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속에서 1966년에 린 화이트라는 사람이 아주 중요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 모든 환경 파괴의 책임이 기독교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요지는 이 지구가 이렇게 파괴된 것은 서구 문명 때문이고 서구 문명에는 존재도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최고의 존재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좋은 인간의 지배를 받고 인간에 의해서 정복될 수 있는 피조세계라는 사상을 성경에서 배웠다는 것입니다. 인간중심의 무자비한 개발과 착취 자연 수탈 같은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명 발달과 함께 세계가 황폐하게 되었으니 교회가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이후에 생태 환경주의자들의 강조점은 인간이 창조된 세계에 있어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풀과 나무, 꽃, 동물 모두 다 한식구로 창조되어 동등하게 어울려 사는 자연의 일부분이 인간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설득력을 얻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설득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 주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빗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모두 이 세계를 하나님이 인간을 우두머리로 창조하셨지만 이 모든 세계는 원래 없는 것이었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똑같은 처지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피조세계를 학대하고 착취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고 생각하고 이웃과 같은 마음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는데 폭군이 왕을 다스리거나 침략자가 나라를 짓밟는 것처럼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주 어진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가 왕처럼 군림하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착취의 대상이라고 보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나라 내 백성 내 자식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던 어진 임금들처럼 어버이의 심정을 가지고 피조세계를 돌보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태도는 반성해야 된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가 인간과 동물, 식물, 다른 모든 물질들의 가치 규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환경파괴라고 하지만 큰개울이 흐르고 거기에 꽃들이 피고 풀들이 자라면 새들이 날아오고 벌레들이 깃들고 먹을 것이 풍부하니까 수중생물과 동물들이 있게 됩니다.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물이 줄어들고 하수를 배출하고 공장의 노폐물들이 흘러나오고 개울을 더러운 물로 채우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맑은 물이 흐르던 좋은 환경에서 자라던 것들은 죽고 없어지지만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는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열매 맺고, 향기를 내는 아름다운 꽃들과 동물들은 사라지고 몸에 해로운 미생물과 박테리아와 가시와 엉겅퀴 독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아주 억센 식물들이 자라서 가까이 접근하기 싫은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피조물들이 다 똑같은 것들이라고 한다면 열매 맺고 꽃피는 예쁜 식물들이 사라진 대신 가시와 엉겅퀴가 생겨난 것이 생태계에 손해가 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사과나무나 딸기나무와 가시와 엉겅퀴 사이에 구별이 없어진다면 그런 것들이 나쁜 일이 될 수 없지요. 더 확장해서 원래 생태계의 파괴라고 하는 것은 생명체의 파괴입니다. 나아가서 살아있는 식물이나 동물 인간과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나 흙이 같은 가치를 가진 존재라면 생명이 모두 사라지고 자기를 괴롭힐 것이 없는 흙과 돌멩이만 남은 들 환경이 파괴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하나님은 질서를 세워서 인간에 의해서 이 모든 세계가 통치되고 다스려지게 하였는데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창조세계가 망가진 것입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아래 있는 동물과 식물 모든 물질들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 모든 세계가 창조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도록 가꾸고 돌보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셨고 이 창조된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들이 자라나는 세대에 교육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기쁨이 피조세계 속에서도 느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살아계신 놀라운 증거들을 아이들이 은혜를 받았을 때에 창조세계의 피조물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가르쳐 주어서 이 모든 자연의 세계와 넓은 의미에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을 가르쳐 줄 때에 아이들 마음속에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연의 세계를 보호하고 하나님 형상을 닮은 모든 인간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심성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II. 구속, 교회의 머리되심
A. 인간의 타락과 상호교통의 단절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창조된 세계는 하늘에는 천상의 세계가 있었고 지상에는 지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천사와 천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지상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 두 세계의 머리가 되시고 천상의 세계에도 죄가 들어와 타락하고 되었고 지상의 세계에도 죄가 들어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B. 타락한 세계를 보호하심
타락에 있어서 천상의 세계는 의지를 가진 악한 천사들에 의해서 타락했고 지상의 세계는 악한 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서 타락했습니다. 천상의 세계에서 타락한 천사는 타락하지 않은 천사와 구별되어 격리되었고 그 천사들은 구원 얻을 수 있는 어떠한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 채 악마들이 되었지만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다시 선택되어 구원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만 천상에서는 타락한 천사들이 완전히 격리되어 천국으로부터 축출되었지만 이 땅에서는 인간이 타락하고 타락한 인간이 격리되지 않고 이 세상에 함께 섞여있게 하셨습니다. 섞여있기 때문에 이 온 세상은 죄가 지배하고 죄로 물든 세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C.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물들고 죄로 모든 인간들이 타락한 세상을 밑그림으로 삼아 그 위에 찬란한 구원의 역사를 적어 내려가시므로 결국은 창조세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과 은총을 충만하게 드러내시므로 당신이 영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을 때에는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으로서 이 모든 세계의 창조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신 채로 그 위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대신 예수님이 형벌을 당하고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 세계에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은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인간들에게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생생하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를 모본으로 보여주시려고 사람의 몸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시에 이 모든 피조세계의 머리가 되시고 이 모든 구원이 완성되고 세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재창조될 때에 온 우주를 몸으로 하는 피조세계의 머리가 되십니다. 전자는 처음 머리되심이시고 후자는 다시 머리되심이십니다. 교회는 바로 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머리되신 그리스도는 이 세계의 완성과 함께 다시 머리되실 때까지 이 세계를 구원해 가시는데 이 모든 생명 없는, 영혼이 없는 피조세계를 모두 완성하시기 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인간들 하나하나를 구원하셔서 당신의 몸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통하여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금도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어 있는 모든 성도들은 그분께 접붙여 있을 때에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부어집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분여 받게 됩니다. 그 은혜는 생명과 사랑으로 우리 속에 가득 들어와서 우리 안에 그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게 될 때에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전파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을 때에 교회의 연약한 지체들이 도움을 얻게 됩니다.
이번에도 회심집회를 하는데 900여 명의 지체들이 왔다고 합니다. 저녁 때 기도를 열심히 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아이들이 장난치고 떠들고 하니 선생님이 그 아이를 꼭 끌어안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사랑은 자기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셨더니 그것이 그 아이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 가족들이 혜택을 입게 됩니다. 내가 은혜를 받아서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게 되면 그 예수의 사랑과 생명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그 생명과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당신의 교회에 하시는 일입니다.
전도란 이 생명에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에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을 버리신 주님의 그 사랑을 전하여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길 수 없었던 나를 이기게 하고 견딜 수 없었던 모든 환경들을 극복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힘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계를 완성하시기 전에 교회의 머리가 먼저 되신 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끊임없이 은혜로 공급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여 아직까지도 죽어가고 있는 많은 영혼들을 본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여 가졌던 그 생명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인류의 계획이 가득 차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구속을 완성하시고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의 가족으로 묶으시는 것입니다. 세계의 찬란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화) 20년 전에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 집회 간 이야기
은혜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입니다. 고난을 이기게 만들어주고 미워하던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들어주고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이 살아가던 무목적한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펴서 목적이 있는 삶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입니다.
주님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전달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고난이 있는 곳에 위로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그분께 오는 은혜를 계속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답은 많지 않고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그 은혜를 위해서 우리들이 겸비하게 오늘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끊임없이 생명의 물, 사랑의 진액을 계속 받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한사람이 예전에 생애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수없이 자기가 깨뜨려졌습니다. 깨뜨려지면 본성이 변합니다. 참회하고 새로워지니까 계속해서 새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옛날에 오래 은혜 받고 변화되어 왔지만 하나님이 은혜와 성령을 거두어 가버리시면 그 인간은 예전에 주님 몰랐을 때 망가지고 더러운 인간 그대로 돌아옵니다. 탐욕스럽던 인간은 은혜 떨어지고 나면 모든 절제를 잃어버리고 다시 더럽고 탐욕스런 인간이 되고 상처 많이 받아 인간들 칼로 찌르던 그 사람은 은혜 떨어지면 또 다시 그런 인간으로 변합니다. 인격이 너절하고 야비하던 사람은 은혜 떨어지면 그 은혜가 가져다 준 점잔 함을 잃어버리고 또 야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생활은 바로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는 끊임없는 생명과 사랑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내가 끊임없이 주님의 교회를 온전케 하는 한 지체가 되고 떨어져 나간 수많은 영혼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이 수많은 인간들을 끊임없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면서 밖으로는 온 땅과 하늘 위에 구속의 완성과 함께 충만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꿈꾸며 하나님 사랑하며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모든 세계의 한복판에 모든 우주의 주재자로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 온 땅과 하늘에 빛나며 오늘 우리들이 사랑하고 섬겨야 할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에게 생명주시고 은혜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면 온 우주의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될 때에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실 우리의 임금, 우리의 탁월하신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그분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바로 교회 생활입니다. 날마다 은혜 안에 사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
12.그리스도의 머리되심 : 완성과 영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 21:11)
I. 완성, 다시 머리되심
그리스도께서는 미래에 되어 질 위대한 일의 계시를 요한에게 보여주시는 가운데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후 영원 무궁히 빛날 하늘나라의 영광에 대해서 증거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데 그 영광의 빛으로 말미암아 이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그 영광이 찬란하게 비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 완성된 이후에 전개될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입니다.
A. 두 세계를 통일하심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세계의 모든 인간과 사물들은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모자라는 것이 없이 완전한 창조로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목적도 모두 성취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된 모든 만물이 서로서로 질서 있게 어울리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하고 아름답고 선하였지만 이 세계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돌보고 가꾸고 정복함으로써 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여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서 사물에 부여하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여지를 이미 처음 창조할 당신에 그 모든 피조물 속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인간구속의 완성을 통해
그러나 죄가 들어왔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는 그 질서가 깨어졌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이 모든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깨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사물들 사이에도 질서와 모든 관계들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세계와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이루어진 이 세계의 파괴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망가진 세계 안에서 우리는 죄의 큰 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세계 속에 두셨던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거두시자 그 모든 피조세계들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을 보여줍니다. 죄의 위대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죄 때문에 그 모든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깨뜨려진 사람들과의 관계, 부서진 모든 자연 만물들과의 관계 이 어두운 배경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란한 빛처럼 그려내셨던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고 이 모든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셨지만 망가진 캄캄한 세상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큰 영광의 광채, 구원의 은혜가 이 모든 세계에 찬란하게 비치도록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서 죄를 지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창조의 질서를 깨뜨린 모든 고통 하는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는 길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미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볼 수도 없고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이 세상에 내신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으며 욕망을 따라 살려고 용솟음치는 자기 의지를 꺾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으니 이분이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
맨 처음 이 모든 세계가 창조 될 때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이 모든 세상이 망가지자 이번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이 모든 인간과 만물을 구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죄 때문에 캄캄하게 된 이 세상, 여기에 그리스도를 빛으로 보내시고 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서른 세 해 동안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인간과 똑같이 사셨습니다.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몸을 통해 직접 보여주셨고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그 모든 비참한 처지에서 자기를 철저히 버리고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당신이 온전히 자기를 버리므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33년 동안 이 세상에 사실 때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섬김은 이 땅에 고통 받는 불쌍한 인간들을 향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건이었고 진리를 알지 못해 무지한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시고 당신 자신이 친히 그 진리대로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것은 무지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인간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눈가에 맺힌 이슬은 죄인들을 향한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친히 볼 수 있도록 직접 드러내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그분이 멸시와 욕을 당하고 처참한 형벌로 죽어 가시는 광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죄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신 지를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곧 보이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의 큰 희생과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이라도 기꺼이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용서와 성령의 은혜로서 회복하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 속에 생명과 사랑이 부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혼을 위한 모든 자원이 끊어진 가운데 이 세상에서 죽은 자처럼 살던 사람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이 세계를 구원해 가시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구원이 마치는 그날에 그분은 최종적으로 이 모든 세계를 심판하시고 끝까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친히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모든 불신자들을 멸하시고 구원 얻은 사람들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삶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요한 사도가 본 이 전망은 바로 이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런 광경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십니다.
B. 창조의 영광을 회복함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당신과 직접적으로 영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고 자연 모든 만물들은 그분의 통치에 굴복함으로서 간접적으로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지체가 하십니다. 온 몸을 머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그날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자연 만물들까지 머리이신 그분께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서 모든 피조 세계는 질서를 회복할 것입니다.
1. 만물의 상호교통과 영광
그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미움과 갈등은 물론이거니와 자연 모든 만물들의 악들이 사라져서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고 어린아이들이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그 뱀으로부터 해 받음이 없는 완전한 평화와 조화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연 만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죽여야 하고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멸해야 하는 치열한 약육강식과 생존 경쟁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이 빛나는 그곳에서 인간과 모든 자연 만물들이 일체 한 가족처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장 탁월한 존재가 거기 있게 하셨으니 그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직도 구원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만이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보았지만 완성되는 그 나라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영혼을 어루만져 그 눈을 뜨게 해주셨던 사람들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이고 하늘의 영광이 무엇이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지심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감격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그때에는 모든 만민들이 눈의 비늘이 벗어져 명백히 볼 것이며 예전에는 희미했으나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치 찬란한 영광 가운데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얼마나 초라한 모습이었으며 사실은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전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위대한 존재인지를 그때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 너머에 계신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잘 몰랐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 하나님이 닫힌 그 눈을 열어준 사람들만이 일부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을 보았지만 그것도 그들의 지성의 한계로 말미암아 보여주신 만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두 구원의 완성되는 그날에는 온 땅과 하늘 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 이제는 썩을 사람의 몸에 가리지 않는 찬란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이신 그분의 광채를 모든 천사와 인간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눈의 비늘이 벗겨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볼 수 있게 변화된 모든 성도들의 영혼은 그리스도 그분의 탁월하심을 보여주신 것만큼 볼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은 온 땅과 하늘 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고 믿음은 모두 현실로 나타나고 소망은 성취되어도 사랑은 계속 될 것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목도하는 자마다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2. 타락과 파멸로부터 보호하심
성도가 누구입니까? 이렇게 이루어진 완전한 하늘나라에서 일평생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세상을 보고 자기의 장점을 볼 때는 교만하여지지만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고난의 십자가를 볼 적마다 사실은 자기가 아무런 선한 것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더러운 인간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비로소 자기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넘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미천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는 수시로 죄의 어두움과 정욕의 눈 멈, 모질기 짝이 없는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한때는 십자가의 사랑 앞에 깊이 감격하고 자기가 희망이 없는 죄인임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자기의 본분을 잊어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진리는 드러났고 자기가 살아왔던 죄악 된 삶,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불행했던 지난날의 모든 과거도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탁월한 은혜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성도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구별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을 전부로 알고 일생을 살지만 그러나 성도는 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정신은 영원한 세계 속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잠시 있다 사라질 이 세상을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그분과 함께 안식을 누리게 될 그때를 그리워하면서 이 세상에서 진정한 안식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II. 영원, 영광의 무한한 증진
A. 점증하는 영광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의 구원이 모두 완성될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처음에 그 아름다운 영광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영광을 회복한 후에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찬란한 영광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무한한 영광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의 만물들은 그분의 영광을 받아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고 거기에서 모든 인간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아름다움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죄 가운데 소경이 되어 살던 우리에게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의 작은 조각이라도 발견되었을 때에 그렇게 이 세상의 시름을 잊고 감격하던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과 시련이 많고 핍박과 환난이 가득해도 주님의 그 아름다우심을 사랑하며 그분께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주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들이 안팎으로 모두 제거되고 찬란한 주님의 영광이 바다는 유리와 같으나 성도의 마음의 사랑은 천국에 있는 아름다운 보배나 수많은 아름다운 보석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 때문에 성도들은 지상에서 느낀 적이 없었던 완전한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의 그 큰 행복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바라보며 영혼이 만족을 얻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자신의 영혼 속에 부어지는 것을 통하여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의 나타남은 어느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게 끊임없이 비췰 것이며 그 찬란한 그리스도 예수의 빛 앞에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경험한 적이 없던 새로운 기쁨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고난과 결핍, 시련과 고난이 많은 이 땅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성도들은 이 하늘나라의 기쁨을 당겨서 맛봅니다. 시련과 핍박이 가득하고 사람의 정으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우리같이 비천한 인간을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십자가의 은혜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칠 때에 오랫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세상의 근심과 모든 고통들을 잊게 되는데 하물며 하늘나라에서의 완전한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누구도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은 없습니다. 변함없이 사랑한 사람은 없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하늘의 별은 찬란하기는 하지만 끊임없는 공기의 흐름, 바람결 속에서 그 빛이 반짝이듯이 똑같이 그렇게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움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르는 그리스도를 향한 찬양은 시련과 고난 속에 끊임없이 잘리고 그분께 올리는 사랑은 끊임없이 바람결에 떠밀리듯이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바 그 십자가의 사랑의 큰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주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한 우리의 헌신의 각오는 얼마나 거미줄처럼 약합니까?
고난과 어려움이 오고 고독과 고통이 찾아오게 되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도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참회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만약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회개할 일이 없는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이 회복될 때마다 미끄러졌던 날들이 떠오르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날들이 생각나게 됩니다. 우리는 미끄러졌다가는 다시 회개하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고 예전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며 주님을 거슬렀지만 다시 십자가의 사랑을 안후에는 예전의 일을 버리고 주님을 붙듭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 뿐 우리는 또 다시 미끄러지고 참회하며 주님께 돌아오고 하는 시간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모든 신자의 일생은 참회의 일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C. 자신을 교통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들이 미래에 도달하게 될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가슴을 쥐어짜는 깊은 회개의 고통과 환경에 의해서 떠밀려 주님을 알기에 부적합하게 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 곡하는 것이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등지는 일도 없을 것이며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헤어지기 싫어하는 사람을 죽음의 저 강 건너편으로 떠나보내고 생애 나루터에 홀로 앉아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별의 아픔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뿐 아니라 다시는 죄와 파멸이 없도록 보호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며 들풀처럼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그 순례자의 길과 같은 신앙의 날들을 우리는 비로소 한 눈에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이 계속되는 날 동안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흔들리면서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셨고 쓰러지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게 하셨던 하나님의 큰 은혜를 인하여 감격하게 하실 것입니다.
III. 성도의 영원한 복락
그 날과 그 완전한 행복을 기다리는 성도의 일생은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우리를 보내셨으니 주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이며 많은 사람들을 죽음 저편으로 불러 가시는데 우리를 아직도 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 있는 날 동안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있도록 해드려야 할 것이며 내가 사람의 몸을 입고 여기에 있는 날 동안에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주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유익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이바지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는 더 마음의 눈을 들어야 할 것이며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궁극적인 고향이 이 세상이 아니라 탁월하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나라임을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입니다.
매순간 감사하며 주님을 섬기고 마음과 영혼의 무지를 깨고 날마다 주님을 알기 원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매순간 발꿈치를 들고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그것을 소원하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은 하루하루 죽는 것이며 매일매일 죽는 것은 다시 만날 그리스도를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 동안에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큰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고 하늘나라의 전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과 고통, 주를 위해 당해야 하는 모욕과 시간과 공간 속에 부패하며 살아야 할 육신을 지고 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매순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때에 주께서 부르시는 그날은 여러분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그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그날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