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까지 헤아리는 순종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찌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신30:8)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은혜 받기를 원하고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특별히 곤고한 영혼을 안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세상이 너무 좋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일이 너무 자유로워서 불순종을 택하지만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서 불순종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죄의 즐거움이 끝나고 쑥보다도 더 쓴 죄의 비참함들이 그의 영혼에 엄습할 때에는 이제 그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은혜 받고 싶어 하고 그리고 다시 면목은 없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 분과 평화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들 안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이 유언적 설교를 남길 때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백성의 신앙이 비교적 고조되어있던 때였습니다. 광야에 생활을 통해서 애굽을 떠난 세대들이 거의 죽었습니다. 많이 훈련 받으면서, 연단 받으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배워갔고 어느 정도 진실해졌고 믿음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기적을 봐야지 겨우 믿지만 이제는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그런 지경까지 많이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모세는 이 유언적인 설교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좋은 상태, 비교적 좋은 상태였을 때에 찬물을 끼얹듯이 모세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고합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세월이 얼마간 흐른 후에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방의 나라를 들어서 너희 나라를 치시고 너희들은 포로로 끌러 갈 텐데 그때에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했던 설교를 기억하라. 물론 이것은 당대에 이루어질 일을 아니었습니다. 그 후손들에게 이루어질 일이었죠. 그러나 모세는 이 신명기에서 모든 후대에 태어날 백성들을 자기 앞에 있는 한 청중으로 보고 그렇게 설교했으니 이것은 그들 안에 있는 후손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에 이 모세는 그런 일을 너희가 만나게 되면 그때 내 설교를 기억하면서 늦은 감은 있지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라.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 내 하나님이 돌이키시고 너희들을 새로 만나주시리라 하는 이야기를 여기에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결론 부분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8절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했죠.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멀리 떠나갔던 사람들은 주님께 돌아오고 싶어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런 사람들이 마음을 낮추고 주님께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구할 때에 주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들에게 다시 한번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내 하나님이십니다. 근데 무엇 때문인가 하는 거죠. 구원의 은혜도 마찬가지고, 회복의 은혜도 마찬가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그 은혜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사경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아마 최근에 있었던 사경회 중에서는 여러분들이 가장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하는 사경회인 것 같아서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준비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여러분 무얼 할 겁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서 컬컬하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기도가 펑펑 쏟아져 나오고 그리고 예배의 감격이 회복되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고 살렵니까? 그렇게 주신 은혜로 여러분들은 무얼 하려고 합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은 자기만족적인 은혜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만나주시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나 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왜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나주시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게 오늘 성경에 나오는데 순종하는 것이에요. 순종.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생애적인 은혜를 받고 뒤집어져서 모든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붙들고 간증할 수 있을 만한 위대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마이크를 들고 떠들 정도, 간증집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을 울릴 정도는 안돼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경험하고 생애 한⋅두 번 나를 꺾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지만,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붙들고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붙들고 자기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의 계획을 버리고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고 싶어 하는 그러한 삶이 정말 복된 삶입니다. 그래서 생애에 몇 번 경험하는 뒤집어지는 은혜를 경험하고 나머지 시간을 짐승처럼 산 사람보다는 그렇게 커다란 은혜는 없어도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마음에 싸인 악을 버리고 돌이켜 부드러운 마음이 되고 예수 따라가면서 매일 매일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 너무나 오래 불순종한 나머지 생애적으로 부서지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도록 악을 쌓는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주셔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순종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는 마음으로 그렇게 순종하며 살아야 해요. 그래서 이번에 은혜를 받으면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든지 힘닿는 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주님의 이루어지는 것을 인해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오늘도 여기 내려오기 전에 어느 기독교 잡지를 이렇게 넘겼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그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이렇게 되는 어린 소녀들이 아이를 낳은 거야. 미혼모지. 그리고 그 미혼모보호소에서 돌봄을 받으면서 엄마, 아빠한테 쓴 편지들이 가득 실려 있어요. 그중에 한 아이가 엄마, 아빠한테 편지를 썼어요. 그 편지 중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 ‘엄마, 아빠,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해줬다고 하지만 나를 항상 사랑해준 게 아니라 필요하면 와서 열어보고 갖고 놀다고 뚜껑 닫아버리는 장난감처럼만 나를 사랑해주셨어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거 불가능한 거예요. 그건 없앨 수가 없어요. 마음속에서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가 없어요. 그러나 마치 자신이 인생을 살다가 어느 필요한 때에 울컥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치밀어 올라서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다가는 싫증이 나면 며칠 안에 주님 떠나서 다시 방종한 길로 가는 불순종의 삶은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에 자녀가 하나님을 향해 보여야할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하나의 충동적인 연애감정과 같은 사랑이에요.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상자 속에 장난감처럼 나두었다가 당신이 한참 지내시다가 심심하면 열어보고 물고 빨고 몇 번하다가 그 다음에 다시 집어넣고 털컥 닿아버리고 언제 다시 돌아올 줄 모르는 먼 길을 주님이 떠나시고 우리를 모르는 척하셨습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그 분이 우리를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은 날 이후로 그 분은 당신이 우리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할 때도 그분은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하지 않은 때도 그 분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도 그 분을 우리를 사랑하셨고 불순종해서 주님을 멀리 떠날 때도 주님은 한번 우리에게 맺은 사랑의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한 사람이 순종의 삶을 살았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우연한 경우에 한두 번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꺾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유혹을 만나고 아직 죽지 않은 우리의 자아가 강하게 역사하면서 주님께 순종하며 살기에는 그 순종의 대가가 너무 큰 것이라 생각하면 희생이 싫어서 불순종의 쉬운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이는 순종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이게 구약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영적이잖아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해요.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 분을 위해 드리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것이 순종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순종해야 되겠는가? 이거죠. 어떻게 그게 오늘 성경에 나와요. 뭐라고 나오냐면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랬잖아요. 근데 오늘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데 아타타 슈브 베샤마티 베콜 아도나이’ 그리고 너는 돌아와라. 너는 돌아 혹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샤마타, 들을 것이다. 베콜 아도나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근데 흥미 있는 것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랬는데 베콜 아도나이, 아도나이는 야훼죠. 여호와의 콜,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샤마타 그랬는데 앞부분의 전치사가 베에요. 히브리말로 베는 영어에 있어서 in 혹은 into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가 이렇게 있는데 듣기는 듣는데 그 목소리 속으로 전치사가 이동하는 개념이에요. 듣기는 듣는데 목소리,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는 듣는데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그 목소리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까지 헤아리면서 듣는 거예요. 그거를 여기에서 순종하다 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샤마, 사무엘도 거기에서 온건데 듣는다, 순종하다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니까 여기서 순종하다 라고 번역된 것이 잘 된 번역입니다. 그래 그렇게 듣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그 목소리 속으로까지 귀를 기울이면서 듣는 것, 그것이 순종이에요. 그러니까 자식들이 부모에게 순종한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그게 효도인데, 마음을 헤아리는 거예요. 부모가 갔다 와라. 갔다 왔더니 없데요, 그런거 말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러니까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전도사 때 심방을 오히려 목사 때보다 많이 했어요. 근데 그 교사들 심방을 보내면 몇 가지 유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편배달부형이 있어요. 그래 야, 심방 좀 갔다와라. 대답이 없어요. 야, 어떻게 됐냐? 갔더니 없대요. 간단합니다. 그거보다도 더 한 형은 현장 확인형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심방 갔다 왔냐 그러니까 안 갔대요. 왜 안 갔냐 하면 전화해보니까 사람이 없어서 안 갔대요. 그게 현장확인형이에요. 근데 목양형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심방을 보내면 교역자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그 영혼을 돌보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심방자에요. 어떻게 하냐 하면 가요. 가면서도 기도 간절히 하면서 가요. 그리고 어떻게 하던지 만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 참 신기합니다. 애들을, 뭐 애들이 다 그렇죠. 교회도 안 나오고 까불고 돌아다녀요. 그래 저녁 때 심방을 갑니다. 있을 리가 없죠. 어디로 갔지. 있을 리가 없지. 그 이른 시간에 한 5시밖에 안 됐는데 있을 리가 없지. 그러고 도서관이든 어디고 삘삘대고 다니죠. 그래서 이제 그 문 앞에까지 가서 못 만나. 집은 굳게 잠겨있고. 그래서 이제 내려와서 공원 벤치 같은데 집 근처에 앉아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만나야지만 야단을 치든지, 붙들고 기도를 해주던지 그럴 것 아닙니까? 도와주십시오. 그러고 기도를 하면은 신기하게 만나요. 거기서. 마 이제 다 털고 야, 안 되겠다 한 시간 기다렸다 가자. 그러고 오는데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만나요. 지나가다가 빵집에서 빵 먹고 있는 것 들키고, 만나요. 만나면 가자. 누가 중고등부 전도사를 자기네 집에까지 들여 보내줘요? 맘도 안 먹죠. 그러면 이제 골목에 가서 딱 붙들고 ‘야, 내가 여기서 한 시간 반 기다렸는데 왜 교회 안 나왔냐?’ 그래서 붙들고 쭉 얘기를 합니다. 가로등 밑에서 붙들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게 사실 애먹이는 걸 생각하면 정말 내 동생 같았으면 따귀를 한 대 때리고 말지. 그래서 내가 데리고 있던 선생님 한 사람은 애가 하도 데리러 가지 않으면 교회를 안 나오니까 6개월을 아침마다 데리러 갔어요. 그래 나중에는 어느 날 찾아갔어요. ‘야 너 나와 봐라.’ 그러니까 또 안 나오려고 해요. ‘야 마지막이니까 한번만 나와 봐.’ 딱 나오니까 ‘너 교회 가자.’ 그러니까 ‘저 못 가거든요.’ ‘그럴 줄 알았다. 야 봐라. 출석부인데 빨간 볼펜으로 넌 잘렸다. 나도 솔직히 얘기해서 6개월 동안 너 데리러 다녔으니까 나 하나님 앞에 가면 나 할 말은 있다. 24번 널 데리러 왔는데 니가 지금 한두 살 먹은 애냐? 너는 오늘부로 잘렸고 그리고 나는 죽을 때까지 너 안 찾아온다. 그리고 너 지옥가면 내 핑계대지마라. 나는 너 여태까지 주일학교 다니면서 24번 데리러 온 선생님 있냐? 나는 매일 아침마다 너 데리고 와서 빵 사주고 밥 사줘가면서 교회 데리고 왔는데 이제 끝이다. 나도 이제 지긋지긋해서 이거 못하겠다.’ 그어버렸어요. 그리고 오지 마라. 나 찾지도 마라. 너는 끝이다. 그 다음 주일날 살금살금 걸어서 들어왔어요. 참 하나님이 누굴 좋아하시냐면요, 당신 마음을 헤아려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 좋아하세요.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이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재물 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려요. 모세가 요구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할 때, 혹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 목소리 깊은 속까지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 말 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는 사람이 되어라. 그런데 모세는 이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이었어요. 왜냐 하면 마음까지 헤아려드리면서 순종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대표적인 때가 언제였죠? 처음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 앞에 막 대들었습니다. ‘내가 왜 갑니까? 내가 애굽에서 말이죠, 뭐좀 한번 해보려고 그럴 때는 쳐다도 안 보시고 이제 팍삭 늙어서 아무 희망이 없고 애굽에서 배운 모든 것도 거의 모두 다 잃어버리고 이제 깡통이 됐고 이 짐승의 똥이나 치우는 목부가 되었는데 뭘 이제 와 가지고 하자고 그러십니까? 그때 이 젊을 때 말이지, 뭔가 좀 해보자고 그럴 때는 쳐다도 안 보시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막 그랬어요. 그래가지고 결국은 하나님이 혼내셔서 보내시죠. 갈 때 하나님 마음 헤아려드리면서 갔어요? 헤아려 드리긴 뭘 헤아려 드려요. 죽지 못해서 그냥 간 거죠. 광야의 지도자의 생활을 하면서도 모세는 얼마나 불평했어요. ‘하나님, 내가 이 사람들을 낳습니까? 이 사람들이 내 자식입니까? 내가 저들의 젓 먹이는 양육자입니까?’ 하나님 앞에 대들었어요.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그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이 깎여져 나가고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그 거룩의 은혜가 그를 많이 녹였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의 긴 세월 40년 동안에 지도자 노릇을 하면서 수시로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상황을 이기면서 지도자로 살게 만들어주셨어요.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깊은 곳을 헤아리시는 그 하나님의 터치를 느끼면서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의 깊이들을 터득해 간 것이죠. 여러분들은 살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것을 경험하실 때 있죠. 그때 기적을 본 것보다도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아요? 정말 위로가 되죠.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면서 순종해야 돼요. 그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이에요. 그게 하나님 사랑하는 거예요. 맨 쓸데없이 목사님, 이렇게 하면 죄가 돼요? 안 돼요? 1부 예배, 2부 예배 다 못 나오겠는데 새벽예배만 드리고 도망가면 죄가 됩니까? 안 됩니까? 구역 예배가 성경에 꼭 나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질문을 해도 그렇게 쓸데없는 질문을 해요. 그럼 뭐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예요. 그 대답을 들어서 뭘 어쩌자는 거예요. 마음을 헤아려 드리는 중심이 없을 때 다 쓸모없는 변론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교회를 지으면서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 성경의 한 장면이 있어요. 뭔 줄 아세요? 옥합을 깨뜨리는 그 여인의 이야기. 그 옥합을 탁 깨뜨려서 확 부어버렸으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천오백만원에서 이천만원이 넘는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어버린 거예요. 그거는 정말 낭비였죠. 그러니까 합리적인 제자들이 그 왜 그러냐? 아마 너는 저 규모도 없는 저 여자는 말이지, 가난한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냐? 그걸 팔면은 삼백 데나리온, 지금으로 따지면 천오백만원에서 이천만원이나 될 텐데, 그걸 가난한 사람들한테 먹을 걸 사주고 입을 걸 나눠주면 수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고 그럴텐데, 그걸 방정맞게 한번에 예수님 식탁에다가, 식사하시는 자리에다 한번에 확 부어버리고 그거를 낭비하냐. 그 제자들의 주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들이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그렇게 구제를 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격적으로 그 여자의 편을 드셨어요. 무엇 때문이었죠? 이 여자는 그냥 이 여자가 불합리하고 규모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자의 마음속에는 그런 비난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그거를 변명해야 될지 몰랐어요. 그런데 아는 것은 오직 딱 하나,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을 만나고 자기의 죄를 용서받고 보니까 이 세상에 정말 귀한 것은 주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었어요. 그걸 예수님께 드린 거예요. 낭비를 하고 싶어서 그 여자가 방정맞게 그걸 깨뜨린 게 아니라 예수님이 너무 사랑스럽고 그분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 한마디 못 한 채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전부를 예수님께 부었어요. 그 행동은 객관적으로도 옳은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그랬으면 예수님이 나무라셨을 거예요. 근데 예수님이 그 여자를 인정해주시면서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행하여 기념하리라. 이런 일들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많이 일어날 거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거 무엇 때문이었어요? 예수님이 그 여인의 눈에 보이는 행동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마음속까지 깊이 귀를 기울이고 들여다보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여자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기 때문에 여자의 편을 들어주신 거예요. 보십시오. 오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멀리 떠난 길에서 돌아온 다음에 하여야 할 것을 이렇게 말하죠. ‘너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근데 그 순종은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을 헤아려 드리는 그런 종류의 순종이어야 한다.’ 그걸 가르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 은혜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은혜를 주시면 제가 예전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잘 순종하고 순종하되 베콜 아도나이, 하나님의 그 말씀에 담긴 주님의 그 속마음까지 헤아려 드리면서 그렇게 사랑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나의 패역과 짐승같이 완고한 고집 때문에 주님의 가슴에 못 질하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살겠습니다. 한번만 더 내게 은혜를 주셔서 다시 주님 앞에서 살도록 내게 말씀에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