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목회를 하라
지금 우리들이 교회를 해나가고 있고, 이런 속에서 (지금 최근에도 논쟁이 많이 벌어지고 있지만) 마케팅 교회, 신사도 운동, 방언 운동 해 가지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두어 시간인데 그 시간 동안 다 다룰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힘껏 접근을 해서 충분히 여러분들이 문제를 느끼고 고민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자 합니다. 먼저 왜 교회에 있어서 우리들이 지금 회심 목회를 생각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충격을 받을 이야기지만 교회가 매년 3천개가 문을 닫는다고 통계가 나왔어요. 물론 닫은 교회들 중 어느 교회는 영영 사라지기도 하고, 좀 더 목회가 잘 될 만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두 번째 개척을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어쨌든 3천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3천개 약간 안 되는 교회가 다시 세워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얼마나 목회가 어려운가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교회 하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지금은 안 모입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회자가 개척교회를 했는데 그런 얘기를 해요. ‘목회가 안 되는데 이유가 있는 줄 알았다. 저 양반 저렇게 설교를 하니 될 리가 있나? 행정을 저렇게 하니 될 리가 있나?’ 이렇게 생각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자기가 개척 교회를 해보고 느끼는 건 ‘목회가 안 되는 건 아무 이유가 없고, 되는 것만 이유가 있다. 원래 안 되는 거다.’ 믿음으로 개척을 하라고 그래서 ‘주여 믿습니다!’ 하고 문을 확 여니까 벼랑이더랍니다. 절벽이더랍니다. 이게 더 이상 우리들이 웃으면서 들을 얘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 되었던지, 이제는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고 종교개혁자들이 꿈꾸던 교회가 되고 하는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교회가 교회로서 모양이라도 갖추고 존립하는 문제가 심각한 어려움을 느끼게 되지요.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는 항구에 있는 겁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부목사를 (때가 되어) 어디 자리를 알아봐서 보내주려고 그랬더니 시골 교회 열 명만 모여도 이력서가 스무 통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랬더니 열 명 모여도 어차피 그 교회는 교인들이 헌금해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교회에서 보조 받기 때문에 생활비는 나온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제는 뭐 시골 교회는 안 간다 그런 게 아니라 시골 교회도 갈 데가 없어요. 뭐, 시골에 목회자도 못 모셔서 교역자가 없는 교회? 꿈 깨십시오! 그런 교회가 있나 찾아보십시오. 절대 없습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교회는 교인 30명이 모이는 교회인데 예배당도 없어요. 2층에서 하는 교회인데 모집원서를 냈더니 이력서가 삼사십 통이 들어오고 그 중에 다섯 명은 박사에요. (해외에서 박사 받은 사람.) 결국 박사 받은 사람이 갔어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여러분이 불과 3년 내지 길어야 4년 후면, 여러분 중에 빠른 사람은 2년 후에 만나게 될 현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늘 강의에서 무슨 길이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제 강의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어떤 경영적인 차원에서의 길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문제는 사람을 모으고 교회가 모양을 갖추고 운영이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무엇이죠? 사람만 있고 돈만 있으면 교회가 문 닫을 일이 없는 거죠. 왜 문을 닫겠습니까? 아무리 적게 모여도 단 열 명이라도 모이고 생활비가 나온다면 왜 문을 닫겠어요? 문을 닫는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에요. 그렇죠? 도저히 월세를 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 문을 닫아야 되는 거죠. 자, 이제 그렇게 되다보니까 존립을 해야 되겠으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모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이탈하지 않고 이 교회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이게 가장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떠난 사람이 헌금 보냅니까? 일단 거기 있어야지 (있어도 헌금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 있어야 헌금을 하든지 뭘 하든지 하잖아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거죠. 목회에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죠? 그러면 ‘교회를 모을 수 있는 방법이 뭔가?’ 그래서 미국에 있는 마케팅 교회들이 하는 것처럼 먼저 소비자 조사를 해. ‘교인들이 이 동네에서 원하는 게 뭔가? 어떤 교회를 원하나?’ 다 이렇게 해가지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그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뭐냐면 ‘어느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나?’ 그러면 그 목회자의 목회 방법과 리더십이나 모든 것들은 어떤지 경영의 노하우는 뭔지를 배워오는 거죠. 왜냐하면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죠? 오늘 설교를 해서 사람이 큰 은혜를 못 받아도 그것 때문에 교회 문을 닫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람이 안 모이면 문을 닫아야 되는 거죠. 이게 무슨 세속적인 신자냐 진실한 신자냐를 따질 겨를이 없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되다 보니 이제는 옆에 있는 교회들을 경쟁상대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실제로 제가 아는 어떤 교회는 온 교인들 보고 아무리 전도 하라고 해도 안하니까 전도하는 사람들을 20여명 정도 고용을 해요. 그리고 기본급을 60만원을 주는 거예요. 한 명을 교회에 데려다 등록시키는데 3만원이에요. 인센티브를 주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생계가 달렸으니까 온 힘을 다해서 이 일을 하는데 자기가 이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른다고요. 물론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겠죠.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그 다음에 철저하게 관리를 하는 거예요. 점 조직으로. 그래서 도저히 이탈하게 어렵게 그물처럼 꼼꼼하게 관리를 하는 거죠.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으면 ‘이 교회는 아닙니다. 내가 다른 교회로 가겠습니다.’ 이러겠지만, 그런 분명한 것이 없을 때에는 자기를 그렇게 꼼꼼하게 챙겨주고 떠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묶여져 있는데 굳이 그렇게 교회를 옮길 이유가 있느냐 이것이죠. 자, 이렇게 하면서 그나마 아이디어도 있고, 사업가적인 수완이라도 있고, 자기 대라도 좀 있고 해서 꾸려나가는 사람은 교회 유지가 되고 살아남고, 안 되는 교회는 이제 월세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아 그 다음에는 교회가 문을 닫는 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가장 좋은 경우를 가장을 해서 그렇게 해서 교회가 사람을 모으게 됐다고 칩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이 세미나실만한 교회를 (이 정도의 교회만 지니고 있어도 어디 가서라도 어깨를 펼 거예요.) 한다고 칩시다. 그래서 생활이나 교회 운영이나 아무 문제가 없다고 칩시다. 그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교회입니까? 그게 교회냐 이 얘기에요.
성경과 역사는 타락한 다음서부터는 철저하게 바벨론(Babylon)과 예루살렘(Jerusalem)의 대조야. 바벨론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사람이 중심이 된 인본(人本)이 된 나라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본(本)이 된 나라에요. 바벨론은 기본적으로 ‘크게, 많이, 높이’ 이것이 가치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편성을 많이 확보하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나라요, 그 상징이 바벨론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아까의 교회들은) 교회가 맨 처음에 시작될 때 그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그 시작부터가……. 그 시작이 뭐죠?
‘아, 내가 이제 신학교를 졸업했으니까 교회를 해야 되겠구나. 부목사로 오라고 그러는 뭐 괜찮은 교회도 없고. 그리고 목사가 되면 또 교회에서는 내보내잖아요. 작은 교회에서는 부담스러우니까. 그러니까 할 수 없다. 내가 뭘 하겠나? 이건 하나님이 나에게 소명을 주신 거다.’
그건 소명 아니거든요. 환경에 밀리는 거지. 그건 소명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처음에 ‘어쩔 수 없다. 나는 이걸 해야 된다.’ 해서 교회를 개척을 한다 이거에요. 그런데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모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뭘까, 어떻게 해줘야만 이 사람들이 교회에 남을까 이렇게 하고 (여기서부터) 질서의 파문을 그려가는 이 자체가, 벌써 이 시작점 자체가 인본주의에서 시작이 된 거라 이 말이에요.
처음에 이렇게 깃발을 꽂아서 중심을 내리게 되면 이 파문을 이렇게 (오른쪽으로) 그릴 수도 있고, 저렇게 (왼쪽으로) 그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시작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본주의에서부터 시작을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되겠어요? 한 사람의 목회자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소명(召命)의 핵심이 뭐에요? 소명의 핵심은 팔자(八字)가 아니야. 자꾸 하나님께서 환경으로 나를 인도하셨다고 그러는데 그건 소명이 아니에요. 소명은 자기의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보카치오(Vocatio) 즉, 콜링(calling, 부르심)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만난 것, 제일 먼저 일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거야.
죄인이요, 제멋대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복음(福音)을 발견하게 된 거야. 그것을 통해서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그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이 모든 인류는 구원의 희망이 있구나. 그리고 참된 구원이 없다면 이 사람들의 삶이 윤택하거나 발달된 과학 기술 속에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것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다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게 하면서도 직업도 가지고 사회활동도 하고 하면서 주일날 와서 주일학교도 하고 전도도 하고 직장동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그러고 사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살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이 복음적인 사실이 너무나 중차대하게 느껴져서 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도저히 다른 일들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만약에 이런 영혼들에게 대한 연민을 제쳐두고 그냥 일상적인 이 세상의 직업에 매몰되어 산다면 자기에게 저주가 있을 것 같은 그런 현실적이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력한 콜링(calling)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로잡히는 거예요. 사로잡힘.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래요?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가노라”
그러니까 앞에 있는 푯대가 있기 전에 뒤에 있는 푯대가 분명히 먼저 있었던 거라 이 얘기에요. 사로잡힌 거예요. 그 사로잡혔다는 거는 뭐에요? (뭐에 사로잡힌 거예요?) ‘복음의 의미’야. 그럼 도대체 ‘복음’이 뭐에요? ‘예수님이 율법과……. 주저리 주저리’ 그런 게 아니라 딱 네 단어에요.
"Jesus died for us"
이게 복음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게 복음이라 그 말이에요. 이것이 확장된 것이 신학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라는 이 사실에 깊이 사무치는 것, 그게 소명이에요.
그 소명의 가장 정확한 ‘이그잼플’(Example)을 누구에게서 발견 하냐면 바울(Paul)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이전에 그 사람은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Romanism), 그 다음에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Hellenism),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Judaism, 유대교) 속에서 자란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당세에 주다이즘(Judaism)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복음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어요.
분명히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천벌을 받아서 죽은 인간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살려 내신 거예요. 그럼 도대체 왜 하나님께 천벌을 받아서 죽은 죄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왜 살리셨을까? 죽으셨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고 살아나셨다는 것은 자기가 직접 봤어요. 그는 이 둘 사이에 도저히 좁힐 수 없는 논리의 간격을 설명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 때에 그가 깨달은 신학적인 사실이 뭐냐 하면 ‘예수께서 죽은 것도 사실이고 살아난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살리실 분이었다면 죽을 죄를 짓지 않으신 것이 분명한 것이고, 그렇다면 죽은 그것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구나.’하고 깨달은 거예요. 그것이 바로 ‘for us’에요. ‘died for us.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구나.’ 가슴 속에서 사무치는 거예요. 그게 골수에 사무친 불이 된 거예요. 그게 바로 ‘그노시스 크리스투’(Gnosis Christu)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에센스(Essence) ‘정수’라는 말이에요. 그게 소명의 핵심이란 말이에요.
‘이 불쌍한 인간들, 하나님을 모르고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이 불쌍한 죄인들을 어떻게 하면 내가 이러한 인간들을 도울 수 있을까? 한 영혼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난 괜찮다.’ 이런 전도자의 스피릿(spirit, 정신)이 이게 목회를 하게 되는 동기여야 됩니다. 목회(牧會)는 이 전도자의 스피릿의 결과물이어야 되요. 아, 나가서 죽어라고 전도했는데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다? 아니, 목(牧)을 하려면 회(會)가 있어야 목(牧)을 할 거 아니에요? 모이질 않는데,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목회를 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이렇게 묻겠죠?
‘아, 그러니까 저는 개척은 이미 은사가 아니고 달란트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럴듯한 교회가 청빙해오기를 제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꿈 깨십시오. 꿈 깨. 그럴듯한 교회가 왜 데려가겠어요? 우리 동창들이 어린 나이에 400명, 500명 심지어는 1000명이 넘는 교회에 갔는데 죽도록 고생을 했어요. 죽도록. 차라리 개척하고 말지. 당회 한 번하고 나면 얼굴이 하얘져가지고. 그래서 강원도 가서 생선 횟집에 들어가서 ‘무슨 회를 드시겠어요?’ 그러니까 당회 빼놓고 아무거나 다 주라고 그랬다 하잖아요. 그러니 그게 무슨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고용 사장처럼 가가지고 장로들의 시다바리나 다하고 말이지. 그게 무슨 목회의 보람이 있겠어요?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어요? 참아야지.
자, 뭐 그렇게 갈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가도 이 (전도자의) 정신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청빙 받아서 어느 교회에 가는 후배들에게 얘기해요.
“야, 너 갈 때 그 교회에 뼈 묻을 생각하고 가지 마라. 에이 씨, 나 싫다고 그러면 그만 두고 말지. 이런 마음으로 대담하게 가라. 그리고 교회를 천천히, 천천히 개혁한다고 그러지 마라. 가가지고 한 번 죽든지 살든지 담대하게 외쳐서 이 인간들이 거꾸러지도록 그렇게 설교를 하라. 그래서 네가 옳게 하는데 교인들이 저 못된 목사가 우리 평안한 마음을 깨뜨렸다 쫓아내자 그래 가지고 쫓겨나도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왜 웃어요? 웃을 대목이 아니지. 그런데 아직 시간이 다가오지 않아서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청빙을 받아서 갔는데 (인본주의적 기초를 가진) 이런 교회라 이거야. 그러면 제일 먼저 어떻게 해야 되겠어? 이 깃발부터 부러뜨려야 되잖아. ‘너 틀렸다. 이게 아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외쳐야 되잖아.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든지 이렇게 교회의 변혁이 일어나야 될 것 아니에요? 진리가 아닌 문제에 있어서는 너그럽게 최대한 참지만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칼 같이 깃발을 들고.
왜? 아니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간대며?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간대며? 소돔 같은 거리에도 복음 들고 찾아 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린다며? 그 찬송 최근 3년 안에 부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완벽하게 사라졌죠? 거대한 교회의 변화의 틀 속에서 코드에 맞지 않는 찬송가가 사라져가고 있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 다음 채플 시간에라도 한 번 불러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뜨악’해 할 거에요. ‘왜? 생뚱맞게 그런 걸 부르냐?’ 그렇게 된 거예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장 많이 눈물 많이 흘리며 부르던 찬송이었어요.
그러면 가서 맨 처음 교회를 한다고 그러면 뭐해야 되요? ‘사람이 얼마나 모일까, 그러면 교회 유지는 될까?’ 그게 아니죠. 왜? 어차피 소명 받을 때 그래서 내가 이제 복음을 들고 갑니다 라고 할 때는 나는 이미 무제한의 헌신을 하기로 작정을 한 사람이에요. 굶으면 굶고 그리고 이제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나는 순교한다 그러고 시작을 하는 게 목회야. 달란트의 문제가 아니야. 진짜 하나님과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의 문제지. 그러니까 교회를 개척할 수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와서 강의를 하면 ‘드라이 스칼라’(dry scholar)들이 되지 않겠어요? ‘드라이 스튜던트’(dry student)들이 생겨나지 않겠어요? 절대로 개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복음을 향한 열정이 없는 사람들이 큰 교회를 차지한다 그러면 부패하지요. (가서) 뭘 하겠어요?
교회를 세울 때는 내 속에서 복음이 불타서 ‘나는 이것을 외치지 않을 수 없노라’ 그러고 세우는 거예요. 그게 누구에요?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야. 그래서 열심히 눈물로 기도하고 전도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듣지도 않고 도망가는데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계셔요? 나 같은 인간도 사랑해주실까요?’ 그리고 복음을 더 들려주세요 하는 거예요. 탁 전하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면서 주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그러면 세례를 줘. 그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목회가 되는 거죠. 그리고 안 모여도 그런 자세로 계속 살아가는 거죠. 그것이 목회의 시작이에요. 그러면 어느 정도는 이것이 신본(神本)이 되는 거예요.
“나는 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오직 이 복음이 나에게 사무쳐서 외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리고 전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고 치면 가슴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행복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가 가장 간절한 소원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이 되면, 과연 그렇게 시작하는 목회자가 ‘그래도 300명, 500명은 모여야지 소나타라도 탈텐데’ 그렇게 생각하겠냐 이거야. ‘아, 그래도 200명은 모여야 어디 가서 명함이라도 내놓지. 쪽 팔리게.’ 그렇게 생각하겠냐 이거야. ‘잘 먹고 살려면 그래도 한 600명은 모여야지! 아파트도 한 40평 쓰고. 차도 좀 그럴 듯한 것 타고. 나도 좀 남처럼 교역자도 여럿 거느리고 총회도 좀 기웃거려보고 그러지 않겠어?’ 그게 예수가 있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 이거야. (신본주의의) 이 정신으로 교회가 서야 되는 거예요. 이게 예루살렘의 정신이에요. 그러니까 처음 출발부터 잘못된 거죠.
(그렇게 해서는 교회가) 안 됩니다. 이게 되는지 안 되는지를 저는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한 번 실험해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지 말고. 어떻게 하냐면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피나는 전도자의 삶부터 시작을 해야 돼. 우리 학교 교훈이 학교 다닐 때는 되게 복잡하고 웃겨 보여요. 나 아직도 못 외웠어 그거. 너무 복잡해서. 그러나 살아보면 그게 정확한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어. 신자가 된 다음에는, 목회자가 되기 전에 먼저 전도자가 돼야 돼. 그래서 타는 듯한 마음으로 ‘저 친구는 거의 영혼 전도에 미쳤구나.’ 그래야 돼. 동기 자체가 폭발적인 전도 방법 이런 게 아니라 영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 마태복음 9장에 나왔던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그랬잖아요. 그게 ‘에스플랑크니스데’ εσπλαγχνισθη 창자에 이르기까지 떨리다 그런 뜻이에요. 이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영혼의 좌소를 창자에 있다고 보거든요. 이게 우리말로 등가 번역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으니’ 그런 뜻이에요. 그 번역이 정확한 번역이에요. 그걸 느껴야 되요. 왜냐하면 그것이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는 예수님 기도의 배경이거든요.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이 적게 모일 수도 있고 교회가 커져서 많이 모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커지는 것 자체가 ‘가치’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죠. 어떡하든지 목회와 복음의 진리를 대중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다 타락으로 가는 거예요.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가르친다고 하는 것과 대중화하는 것은 다른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회개시켜서 교회의 영역을 넓혀간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거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말씀 앞에 깨뜨려지고 변화되면서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면서 결국은 이 사람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그런 나라가 되는 거죠. 그게 ‘교회의 원리’라 이 말이에요.
문제는 뭐냐면 자기에게 이런 깃발을 꽂을 곳이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거죠. 정말 여러분들에게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복음이 있는가 생각을 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복음에서 시작을 복음에서 끝나면 안 되죠. 그러면 그것은 그냥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한 번씩만 설교를 해야지. 왜? 하나 밖에 모르니까. 목회를 하려면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간단한 복음을 제시함으로써도 회심하고 구원받을 수 있지만, 구원받은 영혼들에게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 복음 주변에 많은 지식들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강의했던 바와 같이) 존 오웬이 그렇게 엄청난 학문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그 시대의 복음을 파수했던 것이죠.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이번에도 오면서 내가 최근에 보니까 존 파이퍼 목사님하고 N.T. 라이트하고 한 판 붙었더라고. 그걸 보고 N.T. 라이트는 하나도 자랑스럽게 보이질 않아. 그 사람은 원래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존 파이퍼는 베들레헴교회 담임목사잖아. 담임 목사로서 세계적인 ( 그 사람의 인기가 지금 유럽에서 하늘을 찔러요. 50년 안으로는 누구도 N.T. 라이트의 테제를 못 넘을 꺼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한 판 붙었어요. 그런 목회자들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이 공부를 해야 되는 거지.
그러나 시작점이 여기가 아니면 그게 공부를 한 들 그게 무슨 방향이 있겠느냐 이거야. 그렇게 해가지고 가서 어디 가서 공부해가지고 (학위) 하나 받아가지고 와가지고 어느 학교 들어가서 그래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들 학생들에게 진짜 가르쳐야 될 이것을 전해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기껏 3년 가르쳐 놓으니까 다 쓸데없는 거라는데 절대 쓸데없는 것 아니거든요. 열심히 공부하세요. 열심히. 절대 쓸데없는 것 아니에요.
이런 것들이 목회의 본질이거든요. 이게 목회의 본질이에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깊이 회개해서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기 부정과 자기 깨어짐 속에 참된 “투 크리스챤”이 되고, 그 토대 위에서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어 감으로써,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며, 결국은 그가 천지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해갈 수 있고, 그것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런 것이 목회의 본질인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 말이죠.
내가 여러분들에게 정직하게 얘기하겠는데, 여러분 중에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설교를 하는 위치에 있을 거예요. 뭐, 그걸 듣는 사람이 주일학교 학생일 수도 있고 어른일 수도 있지만은. 그렇죠? 그럼 최근에.... 두 가지 질문을 해볼게요. 여러분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쳐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기록이 있냐 이거에요.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설교현장을 보면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괴로워서 눈물 흘려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둘 다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이거예요.
마르틴 루터가 자기의 제자 멜랑흐톤에게 편지를 했어요. ‘당신은 설교할 때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화를 내든지 아니면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도록 설교하라.’ 그랬어요. 무슨 얘긴지 이해가 가세요? 복음을 명료하게 설교함으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화가 나든지 아니면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 성과가 없었을 때 그 쇠약한 설교를 보면서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분노를 느끼든지. 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렇게 초라하게 외칠 수밖에 없을까 이렇게 고민하라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에는 무슨 문제가 있냐 하면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때 ‘나의 이 설교를 통해서 저 죄인들이 (죄인들을 보고 설교를 해야 되지요.) 깊이 깨뜨려져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게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든지 이미 중생한 사람이든지 간에, 전자의 사람은 그렇게 처음 만나야 되고, 후자의 사람은 이전에 만난 회심의 경험이 새로워져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결심을 가지고 외쳐야 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도 감동이 되지 않는 내용을 들고 와서 판다 이 얘기야.
한국이 낳은 프리마돈나 조수미 씨가 인터뷰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까?’ 하니까, ‘나는 그 카네기 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청중들이 내 노래를 듣고 뒤로 넘어져서 졸도하는 것을 꿈꾸면서 나는 노래합니다.’
일본 바둑의 역사에 ‘토혈국’이라는 게 있어요. 둘이 바둑을 두다가 한 사람이 졌어요. 너무 억울해서 ‘욱’하는데 이게 피를 토해서 그게 바둑판에 쏟아지고 그렇게 엎드려서 죽었어요. 이게 실화에요. 그 기보가 지금도 전해 내려와요.
아니, 오락을 하다가도 지니까 원통해서 피가 토해서 거기서 엎드려서 죽었는데 소명 받은 사람이라는 사람이 지금 저 영혼의 운명이 달린 현장에서 이 복음을 외치며 설교하는데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듯 (마치 물을 흘려보내버린 수도관이 보내버리고 난 다음에는 바짝 말라서 아무 물도 묻지 않는 것처럼 그런 PVC 수도관 같은 존재가 되어서) 복음을 전한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 여기에서 만약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면 이건 진짜 100%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고, 또 이런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이 지점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절대 이 사람을 목양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삯군 목자는 참된 양을 목양할 수 없어요. 왜?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기 때문에 그 베어다 주는 꼴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이 말이에요.
그럼에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잖아요? 내가 한때는 강해설교 강사로 6-7년 동안은 열심히 불려 다닌 사람이에요. 지금은 오라 그래도 안 가지만 오라고 그러는 데도 없어요. 요새는 설교에 관심도 없어요. 마케팅하고 무슨 엔터테인먼트하고 심리학 도입하러 다니지 다 물 건너간 이야기에요. 강해설교 얘기도. 80년 90년 얘기에요. 끝났어요. 다 유행이에요. 유행. 그것조차도 유행이라는 얘기지. 그러니까 진리를 진리대로 전하는 그것이 관심이 되어서 무엇인가를 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많은 교회의 교인들을 넓히고 교회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써 마케팅도 택했다가 심리학도 택했다가 엔터테인먼트도 택했다가 강해설교도 한 번 택해보는 거야. 기도도 한 번 택해보고. 그리고 은사운동도 한 번 택해보고.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그냥 성과를 가져오니까 선택하는 거지 무슨 그 속에 심오한 사상이나 이런 소명의 움직임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설교자로서 질문을 받았으니까 회중으로서 여러분들로 돌아가 봅시다. 교회에서도 설교를 듣고 하잖아요. 그러면 심각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의 영혼이 위험하다 그러니까 지금 곧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하는 진지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을 회중으로서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교회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이 진실한 회심 목회가 왜 이렇게 우리들에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 밖의 요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안의 요인이에요.
교회 밖의 요인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시대적 조류에요. 시대적 조류. 시대적 조류라고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확 밀려오는 것은 조류가 아니고, 바닷물의 흐름은 느려요. 천천히, 천천히 해류가 흘러서 그래서 물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시대의 조류라고 부르는 거죠. 그럼 이런 시대의 조류는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느냐? 여러분들의 시대는 더 심각해요.
제가 Th. M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같이 공부하던 어느 전도사가 와서 학교 마당에서 (굉장히 진실한 사람이었어요.) 깜짝 놀라면서 나에게 ‘전도사님, 전도사님!’ 그래서 내가 ‘왜요?’ 그랬더니, ‘어휴, 내가 이번에 어느 목회자 세미나를 갔었거든.’ ‘그런데요?’ ‘어휴, 나 너무 충격 받았어!’ ‘왜요?’ ‘우리교회에 한국교회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오셔서 세미나를 인도하는데, 십자가를 설교해야지만 된데요. 십자가를 설교해야지만 그게 참된 목회래요.’ 충격을 받은 것이 아주 현저히 느껴져요. 그리고 그 강사에 대해서 감탄을 한 거예요. 그렇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는 통탄했어요. 도대체 그 많은 시간의 공부 - 예수 믿은 다음에 대학 다닐 때 배운 공부, 신대원에 와서 3년, 대학원에 와서 2년 동안을 공부하고 이제 낼 모래면 논문을 쓸 텐데, 이제 와서 십자가를 교회에서 설교를 해야지만 그게 좋은 거래요 라고 이야기를 하는 그 감당할 수 없는 순수함(?)....
그럼 왜 그렇게 되느냐? 시대적인 조류에요. 그 조류는 그럼 어떻게 흘러온 조류냐? 길게 따져가면 뭐 타락할 때부터 시작이 됐겠지만 가깝게 시대사적으로 따져보면 이게 결국은 18세기 (사상사적으로는 훨씬 더 전에 12세기 이후 13세기부터 준비가 되지마는 본격적으로 봇물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에요. 계몽주의.
계몽주의의 사조를 우리가 18세기부터 보잖아요? 개혁주의 신학이 전성기를 누리다가 이 계몽주의를 살짝 거치면서 개혁신학이 빠져나가는 거예요. 이 계몽주의 이전에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어서 칸트라는 인물이 나오고 등등 수재 혹은 천재 급의 철학자들이 나오는 거죠.
데카르트의 구도는 간단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성과 계시의 문제를 가지고 나온 거죠.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데카르트 이전까지는 (서구에서는 기독교 철학이 곧 철학이었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목회자들이 다 철학을 했으니까. 물론 중세 기독교 철학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논란이 나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얘기들에 대해서는 콧방귀도 안 뀌었지만 지금은 전부 다 중세에 철학이 분명히 존재했다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모든 철학이 존재론(ONTOLOGIE) 중심이에요.
그래서 여기 나라는 인간이 있고, 내 옆에 친구도 있고, 친구의 친구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동네 아줌마도 있고, 이렇게 수많은 인간이 이렇게 많이 있는 거죠. 이렇게 있고 그 다음에 우리는 이렇게 계속 이동하는 존재이며, 여기(내 주위)에 이렇게 사물들이 있는 거죠.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 속에서는 진리도 있고 하나님도 계신거란 거죠. 그래서 이렇게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객관적인 것이고, 보는 것은 내가 360도 모든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 자신은 하나의 상대(相對)로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계몽주의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이 세계의 체계에 대한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다 안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물들을 볼 때에는 오관을 통해서 보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오관은 항상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진정한 실체가 아니고 실체(substance)는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철학이나 이런 철학의 구조들이 아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 너머에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그것은 진리다. 우리가 다 모르기는 하지만 진리는 아름다운 것이고 불변의 것이고 최선의 것이며 가장 최고의 존재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런데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뭐라고 하냐 그러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있다고 치자. 너희들은 그 사물들 너머에 실체가 있으며, 그 실체라고 하는 것을 Ding An Sich, 즉 물자체(物自體)라고 그러는데, 그 물자체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당장 눈만 찡그리고 봐도 동그란 그릇이 넓적하게 보이고 넓적한 그릇이 길다랗게 보이는데, 원래 그게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은 네가 보는 환경 속에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다시 말해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를 거꾸로 뒤집어엎습니다. 중앙에 내가 있고, 여기에서부터 수많은 것들이 패러다임으로 돌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사물도 있고, 객관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도 있고, 수많은 것들이 있고, 신(神)도 거기에 있으니, 내가 판단자가 되어서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믿을 수 있는 것은 ‘보는 나’ 밖에 없다 이거죠. 다른 것들은 다 돌아가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거죠. 그럼 나는 믿을 수 있나? 믿을 수 있다고 말 안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면 ‘끝까지 의심하라! 그러면 마지막에 끝까지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만 남는다.’ 그게 뭐요?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는 거요. 그래서 “Cogito Ergo Sum” 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이게 사실은 데카르트가 만들어낸 얘기가 아니라, 이미 벌써 11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Si foolior ergo sum 만약에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의 패러디에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다.’ 라고 하는데 이게 그냥 생각하는 게 아니라 회의하는 거예요. 나는 끝까지 의심하므로 존재한다는 얘기죠. 다시 말해, 끝까지 의심을 해서 마지막까지 도달했을 때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그 지점, 즉 ‘명석판명한 사실’에 도달하는데 그것이 참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얘깁니까?
연도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데카르트는 메르센(Mersen)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씁니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에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제대로 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편지 속에서 뭘 얘기했느냐 하면 영혼진리 창조설을 말합니다.
그 영혼 창조설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그 당시에는 기독교 사회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얘기하면 논의가 안 되는 거죠. 데카르트는 본래 캐톨릭의 사제였습니다. 당시는 과학이 발달로 초자연적인 것을 다 안 믿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데카르트가 나와서 영혼진리 창조설을 주장하는데, 당시에는 획기적인 논리였습니다.) 여기 계신데, 하나님이 세우신 그 모든 질서가 정신세계, 영적 세계를 거쳐서(이것을 가지계라고 하는데) 가지계에서 가시계까지 내려와서, 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의 이러한 질서가 가시계의 세계에서의 질서로 쫙 펼쳐져 있기 때문에, 이런 펼쳐져 있는 이 세계가 아주 놀라운 질서를 자연속에서도 보여준다고 하는 거죠.
(지금 최근에 창조론, 진화론 가지고 피 터지게 싸우다가 대안이 하나 딱 나왔잖아요. 그게 뭐죠? 지적 설계이론! 그런데 이게 정말로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이 있나에 대해서는 두고 봐야겠지만, 어쨌든 그런 지적 설계 이론을 이 당시의 사람들이 이미 벌써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자연의 아름다움과 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질서인데, 그 하나의 질서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物)차원으로 들어온 것이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거죠.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하는 메디아(Media)적인 존재라는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 세계에서 어떤 것들을 발견해 낸다고 할 때, 그것들을 추적하고 추적하여 올라가서 자연 세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학문과 모든 지식에 있어서의 원리나 원칙 혹은 법칙 같은 것들이 거슬러 올라가면 규칙이 되고 또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이 진리(Veritas)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분께 속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그 분께로부터 오고, 자연세계에서 나타나는 규칙적인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로 귀결이 된다는 쪽으로 연결을 지어서 가지계와 가시계를 통합하는 원리로서의 신적 존재를 항정(恒定)했습니다. 이게 계몽주의 전까지의 세계관이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몽주의가 오면서 바뀌게 됩니다. 그 놀라운 단초를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제공하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봅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법칙도 창조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법칙은 진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는 거예요. 그리고 이 진리는 하나님과 사이에서 피조 세계와 불연속성을 이루게 만드는 걸로 봅니다.
① 이전까지는 하나님을 진리 자체로 봤고, 예수님이 오셔서도 자기 자신이 진리라고 하셨는데, 그는 그렇게 보지 않고 ‘진리 자체’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선악이나 가치를 가지고 추적해서 진리가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성품의 발현이라고 보면 안 된다는 거죠.
그래놓고 뭐라 그랬냐면 너희들이 피조 세계에서 최근에 과학적인 발견과 계몽된 정신으로 ‘야, 봐라! 여기에 과학적인 증거를 볼 때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건 너희들이 틀린 거다. 왜냐하면 이 법칙과 진리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아무리 뒤지고 찾아내도 네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여기(진리)이지, 거긴 하나님이 없다 이거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영원한 그 곳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로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박수를 치는 거예요. 드디어 우리를 곤경에서 건져줄 뛰어난 철학자요, 인재가 나타났다 그러고 찬사를 보내는 거죠. 그러나 이제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② 두 번째 논리는 이 분(하나님)이 진리를 능가하는 분은 분명한데 어차피 이성으로 찾아갈 수 없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진리를 보고 이 분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투사해서 ‘아, 이것은 A입니다. A'입니다. A''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그런데 처음엔 그렇게 얘기를 안 합니다. 그래서 요렇게 믿음을 통해서 터득하는 진리를 알파(α)라고 할 때, 그 알파가 이성을 사용해서 올라가는 베타(β)라는 지식을 능가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α≯β)
부드럽게 시작을 하는 것이죠.
③ 신적 존재로부터 내려온 어떤 믿음의 추론을 통해서 무언가를 진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해도,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지점을 뿌리로 해서 연역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신뢰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알파(α)보다 베타(β)가 더 신뢰할만한 것이다.
(α<β)
그제야 가톨릭에서는 ‘저 놈 나쁜 놈이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고, 파문을 내리지만 이미 때는 늦은 거죠. 이 사상이 누룩처럼 번져간 거예요. 이렇게 데카르트가 만들어 놓으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던 인간 중심적인 사상이 르네상스서부터 싹 트잖아요.
(르네상스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세큘라 르네상스Secular Renaissance와 크리스천 르네상스Christian Renaissance를 다르게 생각해야 되요. 크리스찬 르네상스는 그 르네상스의 방식과 정신을 받아들여서 인간이 교권에 억눌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도록 지배받는 거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신앙과 교회를 개혁해야 되겠다는 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크리스찬 르네상스 운동이에요. 그런데 세큘라 르네상스는 달라요. 세큘라 르네상스는 가치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예전에 하나님이 계셨던 그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는 거예요.)
인간의 자율(autonomy)이라고 하는 이것을 이전까지는 은총 아래서 봤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르쳐야 될 복음 교리가 그런 거잖아요. 지난 시간에 "mortification of sin"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했잖아요? 결국은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살아가야 된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아래서 그 은혜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갈 때 인간은 가장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테제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그렇게 안보고 은총 없이 인간의 자율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은총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논리와 이성에 의해서 판단을 받아야 될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일 뿐이다. 이때에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오토노미(autonomy, 자율)를 이루게 된다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데카르트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이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철학계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데카르트를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 보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데카르트로 하여금 이런 식의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단초를 준 사람이 누구냐 하며는 중세 말기의 철학자들이었어요.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유명론자들(nominalist)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똑같이 개혁주의자들이 아주 좋아하던 철학자가 유명론자들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중세 후기에 나오는 유명론과 실재론 - 윌리엄 오캄의 면도날부터 시작해서 나오는 그 유명한 논쟁들 있잖아요? 결국은 그게 뭐냐 하면 인식론과 존재론의 싸움이에요. 거슬러 올라가면 그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서 닿는 거예요. 그런 논쟁 속에서 이 사람이 힌트를 얻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데카르트가 중세 철학에게서 받은 것을 발달시키고, 이게 칸트에게로 넘어가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도덕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탁월하고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 뿌리 자체는 매우 취약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쓰냐면 ‘하나님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을 하라.’
“Demytheologigation, Remytheologigation.”
그래서 신(神)을 이렇게 맨 위에 놓고 생각하던 사고를 버려라. 그리고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의 사유체계를 받아들인 다음에 하나님의 존재를 사상시켜버리고 나면 굳이 내가 여기에서 선하게 살 필요가 없잖아요? 왜냐하면 신이 내가 선하게 살기를 원하고, 내가 선하게 사는 것이 신의 성품에 부합한다고 해야지만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도 선하게 살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걸 모른다고 얘기를 하면 그럼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되냐?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 하면 신이 있다고 투사를 해라. 그게 리미똘로기제이션(Remytheologigation)이에요. 그래서 ‘네가 똑바로 안 살면 심판을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라!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한테 묻지 마라. 그건 신앙에 달린 문제야.’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 거죠.
이 이해는 바로 우리 시대의 상황을 설명하는 아주 기가 막힌 툴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을 동떨어지게 놓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렇게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이제는 이런 식의 상대주의적인 세계관이 일반화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진리인 것이 저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는 거죠. 진리는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면 그냥 그것이 진리인거죠.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에서는 최종적인 판단자요 가치의 최고봉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그런 가치가 다른 사람들끼리 충돌을 일으킬 때에는 접점을 찾아서 사회의 공통적인 선을 수립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말하자면 가장 인간다운 삶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럼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에 부합하느냐 하며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유의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근본적으로 볼 때, 여기에 이렇게 진리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여기 이렇게 이런 질서를 만들고 계신데, 이렇게 돌아서서 도망가던 이 인간에게 담대하게 외쳐서 너 틀렸다. 그리로 가면 굉장히 불행해진다. 그리고 이 온 우주와 세상의 중심은 네가 아니고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이것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빨리 돌아오라. 그러면 그 때에 하나님이 복음과 그 다음에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중생/회심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우리들이 경험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거든요. 그렇게 해서 돌아와서 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단정한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구원이고 교회가 서가는 모습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한 두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너는 틀렸고, 너는 아무 것도 아니고, 사실은 너는 진리의 가장자리를 돌고 있는 수많은 객체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별 볼일 없는 인간이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너는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 후의 삶도 끊임없이 너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생각/사랑하고 자기 사랑을 못 박으면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만 거기에 너의 행복이 있다.’고 말하면 이게 이 시대를 향한 전면적인 도전장이라 이거에요.
이 세상의 시류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거예요. 강에서 물이 도도히 흘러갈 때, 철벅 거리면서 강을 따라가면 강물의 힘을 느끼지 못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에 거슬러 올라가려고 몸부림치면 팔이 아프도록 헤엄을 치는데 몸은 항상 제자리에 서있거나 뒤로 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 물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느끼게 되는 거예요.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남자들이 다 머리를 이만큼씩 기르고 다녔어요.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넥타이가 요기 이렇게 올라와서 (짧게 매고) 주먹만 하게 하고 다녔어요. 여기 깃이 이만하게 하고 나팔바지 입고.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안한단 말이에요. 누가 하지 말라고 그런 사람 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 안하니까 못하는 거예요.
어느 날 어느 전도사가 와서 ‘목사님, 제가요 목사님 책에 은혜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래 잘 했네 그랬더니, ‘그래서 받은 대로 교회에서 외쳤거든요.’ 그래서? ‘나가래요’ 자,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거죠.
그럼 만약에 이런 핵심을 양보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럼 어떤 제3의 해결방법이 있겠느냐? 아주 내가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해결 방법은 없다고.
제가 지방에 집회를 하나 내려갔어요. 어느 교회에 갔는데 담임 목사님은 어디 가시고, 부목사와 같이 대화를 했어요. ‘목사님 이 교회가 이 도시에서 한참 뜨고 있는 교회입니다. 목사님이 TV에도 계속 나오시고 성도들이 계속 옵니다.’ 그래서 난 뭐든지 하나 배우려고 하는 게 있어서 뭐 좋은 거 있으면 좀 가르쳐 주슈 얘기했더니 뭐라고 뭐라고 얘기해요. 그래서 제가 궁금했어요. 하도 입에 침이 마르게 자기 교회를 칭찬을 해서. 그래서 물었어요. ‘목사님은 총신 나오셨죠?’ 그럼요 그래요. ‘그러면 신학적으로 회심이 뭔지 아시죠?’ 예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럼 회심 없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래요. ‘그렇죠?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지요?’ 예 맞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정직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보십시오.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장년 교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늘어난다는데 몇 명이나 돌봅니까?’ 한 500명 정도 돌본다고 그래요. ‘그래요? 그럼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보십시오. 당신이 돌보는 구역 식구들 가운데 구원 받은 사람이 몇 명쯤입니까?’ 갑자기 우울해지는 거예요. 20%에서 30%?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런데 당신이 지금 나한테 뭘 자랑하는 거요? 당신이 돌보는 양떼들 가운데 100명 중 70명은 주민등록이 지옥이 되겠는데 뭐가 그렇게 자랑할게 있습니까? 어느 교회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없을 수 없겠지마는 그러나 당신의 고백에 의하면 지금 대다수의 사람이 지금 구원이 없는데 그런데 지금 뭐가 뜨고 있다는 겁니까?’ 옆에 있는 청년부 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우리는 조금 낫습니다. 제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40에서 50% 정도 됩니다.
그것 보십시오. 잘 되고 있다는 것이 관점을 어디에다 두는 것이냐 이 말이에요. 교회에서 제일 애매모호한 말이 ‘은혜 중에 있습니다.’ 그 말이에요. 사고치는 사람 없습니다 그 얘기에요. 이게 시대적인 상황이에요. 이거는 갈수록 더 굉장해집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죄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는 거예요. 내가 죄인으로서 죄를 짓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죄인이 되었잖아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모두 죄인이잖아요. 그런데 이 자체(구원받지 못한 죄인의 상태)를 피해자라고 부각을 시키는 거예요. 이러한 사상이 가스펠 송 안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요.
예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래서 이 사람의 이것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판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줌으로써, ‘결국에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구나.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한 짓이라고는 이렇게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 밖에 없구나!’ 이렇게 만들어줄 때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길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생겨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죄를 지은 것 자체가 피해자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지치고 상한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 주소서. 뭐 그런 식으로. (그 찬송이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서 너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너도 그런 피해자이고, 하나님은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관심 있는 게 아니라, 네가 지금 불행한 처지에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는 문제다. 그러면서 사랑을 부정직하게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고대 교부 시대부터 인간을 ‘아베르지오(AVERSIO), 콘베르지오(CONVERSIO)’라는 말로 설명을 했습니다. ‘아베르지오’는 뭐냐 하면 배향(背向) 즉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가는 거예요. 그러던 인간이 깊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것이 ‘콘베르지오’ 전향(轉向)인데, 이게 신학적으로 ‘회심’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관건은 ‘배향’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콘베르지오’하고 ‘콘베르지오’해서 ‘전향(轉向)’한 인간이 그 마음을 지키면서 정향(定向)의 삶을 사는 거예요. 이 세 가지가 결국은 인간과 신자의 기본적인 도리라 그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인간을 ‘콘베르지오’하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끊임없이 고통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부각시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오히려 정신 차려야 할 쪽은 하나님이라 보는 거죠. 시대가 달라진 걸 빨리 이해를 하시고 우리를 향한 태도를 고치셔야 된다 이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쌘 기도가 하나님을 고치게 만들어준다는 거예요. 우리의 쌘 기도는 하나님을 정신 차리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콘베르지오 하게 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런 많은 기도 운동들이 인위적으로 일으켜져도 그 시작점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 인본주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하나님을 돌이켜 인간이 계속 아베르지오 하는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것을 도와주심으로써 인간을 더욱 더 행복하게 하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1900년대 후반 즈음에 들어서면서 다시 새로운 종류의 번영주의가 각광을 받고 있어요. 이 번영주의가 각광을 받은 것은 벌써 60년대이거든요. 실용주의가 나오면서. 우리나라에도 순복음교회를 비롯해서 이 번영주의로 들어온 기복신앙의 문제를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50년 60년대에 시작되었던 그런 번영주의와 오늘날의 이 성공주의는 개념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두어야 되요. 무슨 얘기냐 하며는,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볼 때, 60년대 일어난 이런 번영주의는 복음으로부터 이탈된 것이기는 했지마는 그 자체가 생존을 위한 것이었어요. 지금 이런 번영주의가 옛날의 50년 60년대 한국 같은 개발 도상 제3국가에서 이런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 우리들이 수긍을 하잖아요. 아, 워낙 살기가 어려우니까. 예수 믿고 새마을 운동도 하고, 철야기도 가서 한 풀이도 하기도 하고 하면서 새 힘을 얻어서 사는 거니까. 그런데 문제는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미국 땅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조엘 오스틴 아닙니까! 나보고 자꾸 와서 조엘 오스틴 사상이 어떠냐고 묻는데, 그냥 말 길게 하지 않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아주 간단하죠.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데 그 번영주의는 단순히 물질이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이게.
매슬로우(A. H. Maslow, 1908∼1970)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인간의 욕구 단계를 구별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사회적 욕구, 국가적 욕구를 구별해서 가장 마지막 최상위에 있는 욕구가 뭐냐 하면 자아실현의 욕구예요. 이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없는 개념이었어요. 그냥 하나의 질서 속에서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학생으로서 어른으로서 부하로서 상사로서 살아가는 질서 속에서 자기를 온전히 구현하는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자아실현이에요. 그래서 매슬로우도 이 도표를 그리면서 이 사람도 자아실현을 하는 인간은 극히 드문 'few' 아주 드문 사람이라 이거에요. 이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쉽게 얘기하면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확 펼쳐서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물질 문제가 아니라 이겁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작품을 확 만들어 놓고 그걸 보면서 ‘아, 내가 드디어 이것을 만들었구나!’ 그걸 보면서 한없이 즐거워하는 - 창조 세계를 지으시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같은 그런 생각이라 이거에요. 이런 것들을 실현해가려고 하는 것이 후기 근대주의에는 인간의 모습이라 이거죠. 그러니까 이제는 단순히 조직에서 이탈하고 싶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최고의 위치에 올리고 그리고 그것을 마음껏 펼치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에서 너는 죄인이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된다는 복음이 이 시대의 코드하고는 너무 너무 안 맞는 거예요. 이런 이유 때문에 사실은 안 되는 거라 이거죠.
그러면 한편, 내적으로는 어떠냐? 어느 시대든지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다 자기를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 왔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급격히 힘을 잃어버린 거죠. 계몽주의가 밀려들어오면서 결국은 개혁파 정통주의가 꺾어지기 시작하면서 ‘로우 오도독시(Low-Orthodoxy)’로 넘어가요. ‘하이 오도독시(High-Orthodoxy)’는 계시를 믿는 정통주의이고, ‘로우 오도독시(Low-Orthodoxy)’는 계시를 떠나서 이성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로우 오도독시(Low-Orthodoxy)로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이게 급격하게 신학에서 엄청난 변화가 밀려 들어와요. 그게 뭐냐 하면 자유주의 신학이야. 그게 바로 자유주의 신학이에요. 그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며는 이러한 모든 현대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떡하든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들을 끌어안고 가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까? (그건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런 것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용없어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복음의 진수를 영혼 깊이 경험하고 이 세상의 어떤 이성의 추론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줘도 그것은 ‘아니다!’ 라고 단호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 그게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없는 거야. 그러면 결국 믿음이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복음적인 경건의 경험이 사라지고 나며는 그 다음에 우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이성과 감각 밖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되죠? 이런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도 여기에 맞설 힘이 없고, 또 근본적으로 자기도 이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이탈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목회를 하면 안 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에게 그렇게 하게 하는 강제적 요소도 없는데 내가 그렇게 어리석게 시대를 맞설 수가 있겠느냐 이거에요. 불가능합니다. 이런 커다란 구도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사상들이 흘러가면서 교회들이 이렇게 되어 가는 거죠.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를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그때가 뭐 아주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30년 전쯤으로 올라가면 열정이 있고, 열렬한 기도가 있고, 그리고 항상 부흥회를 하면 500년 모이던 교회가 700명씩 모였어요. 옆의 교회가 오는 것은 그것은 너무 당연한 거였어요. 인사차라도 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모여요. 절반도 모이지 않아. 그렇게 하면서 사회는 점점 바쁘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질서 안에서 살 때에 모든 것들이 단정해지는데, 이런 식으로 뛰쳐나가서 껍데기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점점 이 안에서 자기 균열 현상이 일어나는 거야. 자기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파악을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심리학이 엄청난 각광을 받게 되는 거예요.
칼 융과 프로이드 이후에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산업화 사회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규명하기 위한 ‘니드(need)’들이 수없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며는 산업화 사회에서의 소외에요. 가정이 다 깨뜨려지는 거예요.
예전에는 한 지역에서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아버지, 외삼촌 다 같이 살면서 자기가 이러면 안 되고 저러면 안 되고 하는 것들을 달 알아. 그러고 살아. 그러나 이제는 교통수단이 활발해지고 발달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이 저마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거리가 문제가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전에는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사회가 편성이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일 중심으로 사람이 바뀌는데, 일이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함께 의논을 하고 살아가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이 사람은 뚜껑 만들고, 이 사람은 몸통 만들고, 이 사람은 나사 만들고, 이 사람은 끼우고, 이 사람은 포장하고 하면서 일과 일 속에서도 단절되는 거죠. 왠만한 회사는 저 옆 방에서 무슨 일 하고 있는지 몰라요. 어떤 회사는 아예 의도적으로 아주 알지 말도록 요구를 해요.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인간 소외 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어 받아서 물질생활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이 일에 이런 논리를 사용하면서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거예요. 도저히 인간이 꿈 꿀 수 없었던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너무나 피곤하고 골치 아픈 존재가 되는 거예요. 휴대폰 없었으면 연락 절대로 안할 사람이 이게 막 수없이 (뭐, 태평양 건너에서도 전화가 오고) 별 군데가 다 전화가 와서 사람을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편리하기 위해서 자기가 기술 발전을 이루고 산업화 사회에 들어가지만 인간은 결국 물질세계를 제외한 영혼 자체는 점점 곤궁해지고 갈 길을 모르는 이런 처지가 되는 거죠.
그래서 심리학이 들어오죠. 위로해 줘야 되니까 오락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되어야 되요. 그러니까 마케팅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이러면서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막 걷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회심 목회가 사라지고 있는 이 문제가 이게 결국은 무엇과 관련이 있냐하면 세속화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결국 이 교회가 자체 안에서 이렇게 사람들을 데려다가 굴복을 시키고 회개하게 해서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고 여기에서 경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이런 참된 경험들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되니까 결국은 교회가 상황에 떠밀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다행히 어떤 사람이 ‘그건 아니다!’ 하고 힘껏 복음을 외친다고 하더라도 힘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예 안 되는 거죠.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가 목사들을 불러 놓고 같이 공부를 해요. 그래서 개혁 신학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청교도 신앙도 가르쳐 주고. 그런데 전화가 따르릉 오더래요. ‘목사님, 제가 가서 공부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 누구요 그러니까 ‘제가 성결교회에 있는 목사인데요.’ 그거 알미니우스주의인데 여기 와서 배울 수 있겠냐고 그러니까, 아이고, 알미니우스주의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목회가 너무 안 되는데 가서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배우는데 은혜를 받았어. 이 사람이. 그래서 기도도 많이 하고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이 아니라 정말 칼빈주의가 진짜 이거 보석이구나 그래요. 그 뒤에 교회는 어떻게 됐냐고 그러니까 교회가 하도 안 돼서 이거라도 배워서 해보려고 그러는데 열 명 더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그러니까 아니 저 목사가 어디 가서 뭐 배워온다고 그러더니 오히려 더 이상해져 가지고 딴 소리한다고 그러고 자꾸 간다는 거야. 그렇게 무엇인가를 붙들고 얘기를 해도 이미 벌써 대세가 기울어져서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게 빨려 들어가지 않는 상황이에요. 그러면 이게 지금 남의 얘기 하고 있는거냐 이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아무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난 여러분들을 보면서 삼가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아니, 내가 조의를 표한다는 말이 상당히 신학적인 말이야. 자기가 가서 끊임없이 죽어야 되는 거야. 그런데 그걸 왜 거기 가서 하냐 이 말이야 여기(신학교)서 하고 가지.
이제 이 문제가 무엇과 그렇게 깊이 관련이 있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그리스도인의 개념의 문제와 관련이 있어요. 그리스도인이 도대체 누구냐 하는 개념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럼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자, 전도사님은 그리스도인이 누구라고 생각을 하세요? (학생 대답.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럼 이제 도대체 뭐가 믿는 거냐 하는 문제가 나오죠? 그렇죠? 그것도 아주 딱 떨어지는 정의가 아니죠? 그리스도인이 누구에요? (학생 대답. 주님을 나의 구주로 인정하며 삶 가운데 주님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정의가 너무 주관적이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겠는가 라고 하는 문제가 나오죠.
이 문제가 왜 그렇게 문제가 되냐 하면요,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결국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것에 대해서 중세에 통용되고 있는 개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거예요. 여기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마지막에는 핵심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개념에 대해서 중세의 가톨릭 사람들과 종교 개혁을 일으킨 개혁가들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면 중세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어요? 중세에서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현시라고 본 거죠. 이 현시가 교회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본 거죠. 그러면 이게 제도인데, 이 제도 안에 사람들이 들어오게 된 거예요. 이렇게 있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교회는 이 제도야. 제도. 이 제도가 가톨릭 안에서는 구체적으로 교회의 사제적인 제도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형식상으로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나누고, 그 다음에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교회와 성사를 받는 교회로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건 형식적인 구분이고,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교회의 개념이 이러한 제도적인 질서를 교회라고 본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당연히 이 하부에 따라오는 개념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러한 질서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뭐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말보다도 ‘가톨릭 교인이’ 이런 말들을 많이 사용하잖아요. 왜? 그리스도는 가톨릭교회에서 그렇게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가톨릭 신자가 되는 거예요. 그 가톨릭이라는 의미가 무슨 뜻이에요? 보편교회를 믿는다는 거예요. 보편교회. 그러니까 벌써 그 사람들 머릿속에 교회라고 하는 이 개념(제도)이 박혀 있는 거예요.
이것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이게 아니다!’ 라고 반기를 든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하는 거예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얼마 안돼서 그 당시에 맞서야 했던 교황이 바로 레오 10세였어요. 레오 10세에게 쓴 편지 속에서 그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선행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밖으로 행하는 이 선행이 우리 자신의 영혼에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압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렇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이게 화두에요. 이 발언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핵심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는 거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꽤 불필요하게 보이듯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오늘날 교회를 개척하면서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무엇인가 라고 생각을 했을 때에, 그것이 어떤 것이었어요?
“이렇게 내가 교회를 해서 만들면 그러면 사람들이 거기 담기고, 그렇게 해서 머물면서 관계를 가지고 살 때 이것이 교회가 아닌가?”
이게 사실 종교개혁적인 생각이 아니라 형태만 바뀌었지 훨씬 중세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 이거지. 그러면 이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러니까 올바르게 하려면 하여튼 내가 여러분에게 간절히 말하는데 공부해야 돼! 공부. 자기 자랑을 위해서 공부하지 말고, 좋은 신자가 되고 바르게 가르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돼! 여러분들 중에는 한 두 사람만 교수 되면 돼. 너무 많아도 복잡해. 서로 또 싸우잖아. 그러니까 한 두 사람만. 그리고 교수도 그런 걸 깨우치고 교수가 돼야지 학생들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잖아.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된다 이 얘기야. 교수들이 이런 얘기를 하면 식상하잖아. 그러나 난 목회자잖아. 내가 간절히 얘기하는데 공부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공부해야 돼.)
그럼 이런 역사를 읽어보게 되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가를 보게 된다 이 얘기에요. 막 차를 몰고 달려도 어디로 가는지 길을 못 찾겠는데, 내비게이션을 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잖아요? 그 내비게이션을 봐야 된다 이 얘기야.
그러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이것이 이런 중세 시대 때의 교회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늘날의 개신교 목회자가 중세 시대 때의 사제들하고 비슷하다 이 얘기야. 교인들이나 타고 다니려고 하고 말이지, 교권이나 쥐려고 하고 그러고 말이지,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은 저리 가라하고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을 붙들고 살아가면서 그것이 목회인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아직도 부목사 밖에 안 된 사람이 자기네 교회 뜨고 있다고 그러고 말이지. 70%는 회심도 없고 구원도 없는 죽으면 다 지옥 갈 영혼들인데, 자기네 교회 배우려고 사람들이 수없이 온다고 이런 소리나 하고. 도대체 그런 정신이 무슨 정신이냐 말입니다. 자본주의 + 중세 시대 때의 정신이 아니냐 이거예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하는 이 개념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보고, 그 다음에 보겠어요.
18세기 후반으로 넘어가요. 우리의 신학적인 유산이 말이지, 종교개혁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종교개혁이 중세시대를 백지로 돌리고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런 건 역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거에요. 중세에 뿌리를 두고 (중세의 커다란 흐름이 잘못 갔지마는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절충적으로 사용을 해서) 종교 개혁이 이 중세를 뛰어넘어서 고대의 교부들을 통해서 마지막에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종교개혁이 일어나요. 종교개혁이 맨 처음에 일어나는데 러프하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개혁 시기에는 아직 조직신학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기독교 강요라고 하는 것도 1536년에 맨 처음에 나왔을 때 뚜껑 열어 보면 교리문답집이었단 말이에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 좀 더 덧붙이자면 로마 가톨릭의 부당한 성례주의를 공격하고 거기에서 성도들을 바로잡기 위한 카테키스무스(Katechismus)였어요. 그러나 기독교 전체적인 교리 체계 속에 사도신경하고 주기도문만 존재해요? 그렇지 않잖아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다 세울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후에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루터파에서는 멜랑흐톤으로 이어지고, 베자로 이어지는 개혁파 정통주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온 누리에 퍼지는 거예요.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가지고. 학교 들어올 때부터 그 사람들은 굉장한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고도의 교육 시켰지, 예수 그리스도 깊이 만났지, 복음에 대해서 불타고, 순교까지 하겠다는 사람들이지, 그러니까 뭐 기가 막힌 신학교가 되는 거죠.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찬란하게 이뤄지게 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몇 년째 심취해 있는 거예요. 요새 제가 책 잘 안 쓰는 거 아시죠? 책 쓰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더 재미있어서 책을 못 쓰고 있는 거예요. 그거 뭐 쓰면 쓰지 못 쓰겠어요?)
이 개혁파 정통주의에서 엄청난 기독교 유산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죠. 그게 약 150년 정도 가는 거요. 그 후에는 이제 로우 오도독시로 넘어가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말하자면 계시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는 그런 걸로 넘어가게 되는 거예요. 왜? 시대가 변하니까. 그러면서 이성으로 넘어가게 되는 거예요.
관계없는 얘기 같지만 그 당시의 사회학을 보면 아담 스미스(A. Smith)라는 사람이 국부론(國富論)을 제시합니다. 그죠? 그게 뭡니까? 레 제스떼르(Le gester)라고 그래서, 시장 안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경제는 돌아간다는 거죠. 그게 사실로 입증이 됐습니까? 그게 사실로 입증이 안되죠.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거든요. 그런 점에서 장 자크 루소(J. J. Rousseau)가 자연주의를 부르짖었지마는 결국은 사회 계약설을 내세우지요? 그렇죠?
그래서 토마스 홉스(T. Hobbes) 같은 사람들은 결국 그런 계약을 왕이 깨뜨리면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왕을 처단할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얘기합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죠.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인본주의의 승리였거든요.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 중심선에 뭐가 들어와 있어요? 신(神)은 축출 당하고 인간이 와요. 그래서 인간이 기고만장해진 거죠.
그렇게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면서 구 자유주의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막 봇물처럼 밀려드는 거지요. 제가 직접 확인은 못했습니다마는 어떤 자료에 의하면 유럽에서 하루에 교회가 600개씩 문을 닫았대요. 그러니까 교회가 초토화 되어 가는 거죠. 이러면서 결국은 종교라고 하는 것을 인간을 향한 거대한 수탈의 도구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후반으로 내려가면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어떻게 돼요?
그러면서 그 때에 기독교 안에서는 구 자유주의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번져가는 거예요. 그때에 여기에서 설교는 막 급격하게 퇴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대로 교회를 개척해도 그걸 외칠 그 something이 가슴에 없는 거야. 이미 벌써 선생들 자신이 다 변절되어 가지고 이성주의자로 변했기 때문에 - 그래도 신약성서가 불트만이 1942년에 디미똘로기제이션(demythologization, 非신화화)의 이론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표하잖아요. 이미 그 이전에서부터 그런 비신화화 운동은 일어나고 있었던 거예요.그러는 속에서 외칠 것이 없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에.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걸 못하는 거지. 그러니까 결국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를 못하니까, ‘금도 은도 여기 있거니와’ 이렇게 말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는 거기로부터 접촉점을 가지고 시작하자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독일을 기준으로 보면 이게 19세기인데, 19세기 말에 자유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설교가 완전히 퇴조해서 결국은 여기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냐면 주일날 설교 제목이 “감자를 먹는 행복”,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행복”, “천연두 예방 주사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축은 우리에 가둬 기르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좋다”, “부활절 날에는 생매장 당하는 위험, 예수님은 총각이었을까” 이런 것이 버젓이 주일 설교 제목으로 올라오는 거예요.
접촉점은 훌륭하게 마련이 됐지요? 그런데 와서 그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가치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거예요. 슈팔딩, 졸리 코퍼 이런 사람들의 설교 속에서도 역사적으로 이런 흔적들이 나타납니다. 물론 게르하르트 옹켈, 카알 델리취 이런 사람들이 피나게 항거했지만 이미 벌써 물 건너 간 거였다 이거죠.
이렇게 구라파에서 (자유주의가) 번지고 있을 때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유럽에 대해서 느끼는 사대사상은 굉장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건너가서 공부를 하러 갔을 때에는, 여기서는 복음적인 교회/개혁주의 교회에서 더 많이 보고 배우고 오라고 보냈는데, 여기 가면 이미 벌써 다 좌경화되어 있었던 거예요. 배워가지고 온 사람들이 구 프린스톤을 뒤집어엎고 뉴 프린스톤을 세우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서 자유주의가 가속화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유주의 천지 시대를 이루게 되는 거죠. 그러면 자유주의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되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뭐에요? 사랑과 평화만 남게 되는 거예요. 왜? 인간의 사상이 뭘 가지고 있어도 사랑과 평화를 원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것이니까. 그래서 종교다원주의가 부르짖는 것이 뭐죠? 헌신적인 사랑과 세계의 평화.
그런 관점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면 인간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역사는 다 뭘 가지고 시작이 된 거죠? 종교를 가지고 시작이 되는 거예요.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1/3인구가 모두 죽임을 당해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있었던 그 유명한 100년 전쟁이 무엇 때문이죠? 종교 문제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세속 역사가의 시각에서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면, 지금 독일에서 루터를 필두해서 미친 짓을 한 거예요. 내버려두면 그냥 결국은 살다 살다 시민 혁명에 의해서 민주화가 되고 자유화가 되었을 역사를, 갑자기 나타나서 아니 무슨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그것 하나에 목숨을 걸고 그리고 막 온 난리를 쳐가지고 30년 동안에 독일인구의 1/3이 다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100년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니까 독일 하나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합스부르크를 비롯해서 스페인 등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전부 다 전쟁에 참여해 가지고 결국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죽어라고 싸우는데, 그 속에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싸운는 것이 아니라 영주들이 딱 보면서 ‘누구 편에 가면 내가 영토를 더 많이 가질까?’ 이쪽 붙었다 저쪽 붙었다 하면서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인본주의적인 역사가의 눈에서 보면 미친 짓을 한 거라 이거죠. 아무 가치도 없는.
아까 얘기한 데카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초월하시고 인간은 알 수도 없는 그것을 어느 놈이 나는 안다 그렇게 하고 나타나 가지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죠. 광기에요. 광기!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루터나 이런 종교개혁자들이 히틀러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 거예요. 히틀러는 뭐 600만 밖에 안 죽였잖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니까 자유주의에서는 똑같이 저렇게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기존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보수적인 교회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근본주의가 나오는 거예요. 근본적인 교리를 제시하면서 우리는 이것만을 믿는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비판을 받게 돼요. 왜냐하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폭보다 훨씬 더 좁게 제시했다 그렇게 비판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에 대한 반발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신(新) 복음주의’라는 게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신복음주의는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 신복음주의가 결국은 종교 다원주의화를 열어버리는 거죠. 오켄카를 비롯해서 빌리 그레이엄 그리고 풀러 신학교 등등으로 해가지고 신복음주의를 열게 되는 거죠.
이미 벌써 그 당시에 빌리 그레이엄이 눈을 뜨면서 이제 이렇게 편협하게 부르짖어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방해가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 교리적인 개혁주의의 입장을 과감하게 포기를 하고 그리고 전도자로서 폭넓게 나가죠. 심지어는 여호와의 증인까지도 복음 전도 주최 측에 집어넣어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만 있으면 나는 누구와도 손잡는다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신복음주의 운동이 나중에는 종교다원주의화의 길을 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고, 교회성장운동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혼란스럽게 신사도운동, 마케팅 교회 그 다음에 이머징 처치 등등으로 막 혼란스러운 양상을 빚어내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당연히 물줄기가 전부 다 한국으로 튀어서 그래서 이쪽에서는 좋은지 나쁜지 모르고 다 받아들여서 어쨌든 성공하면 좋은 거라고 보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게 다 혼란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뒤섞임 속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렇기 때문에 결국은 오늘날 우리들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이런 변화를 논하기 전에,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로 귀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을 무어라고 보았느냐?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의를 무엇으로 내렸느냐 이거에요.
중세에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하는 질문은 필요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관심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어디에? 교회에. 그런데 가톨릭에서 얘기하는 그 교회는 어떤 종류의 교회였어요? 가시적이고 그리고 보편적이고 그리고 하나의 제도적인/사제적인 중심의 교회였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종교개혁가들이 영적 교회관을 내세운 거예요. 교회는 제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접붙여 지는 생명체적 연합이라고 본 거예요.
생명체적 연합의 이 교리는 독특하게 "unio cum christo"라고 하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는 개별적 연합을 기초로, 이러한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거예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굉장히 우주적인 개념이에요. 내가 시간이 없다 다 설명 못하겠는데 이게 사실 칼빈이 발견하거나 루터가 발견해낸 개념이 아니에요. 이건 전부 다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 속에서 찾아내서 중세의 오류 속에서 이것을 씻어서 건져 낸 거예요. 그리고 자신들이 이것을 구체화시켜 나간 거요. 이것은 시간을 조금 할애해서 제가 이야기를 하겠어요.
에베소서 1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죠.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 그런 말씀이 나와요. 그죠? 아나 카펠레오(ανακαπερεω). 여기에서 아나는 다시, 카페르는 라틴어로 캅투스(captus) 즉 ‘머리’라는 뜻이에요. 이것을 가리켜서 'recaputalatio'라고 불러요. 여러분이 총괄갱신론이라고 들었을 거예요. 나는 이것을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 이렇게 번역을 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은 창조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인데, 종교개혁자들이 한 사람의 구원 여부가 그리스도인 여부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구원의 개념이 창조론, 기독론, 교회론으로 이어지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 즉 성자를 머리 삼아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는 거예요. 이 때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머리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비롯한 전 창조세계의 머리가 되시는 거죠. 물론 이 모든 물질적인 창조세계에서 ‘예수가 머리이시다.’ 는 의미와 영혼을 가진 인간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디사라는 것은 좀 다른 의미를 갖고 있겠죠. 다른 의미를 갖고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해서 직접적인 머리가 되시고, 다른 모든 것들에게는 창조주로서 머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죠?
자, 구속에서 있어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성자입니다. 그러면 창조에 있어서 중보자는 누구죠? 창조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중보자가 되시는 겁니다. 그러나 창조의 중보자와 구속의 중보는 달라요. 구속의 중보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함으로써 중보가 되시지만, 창조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참여하시는 종류의 중보라 이거예요.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창조주이시면서 머리가 되시는 거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연결을 이루고 있어요.
이것을 가리켜서 존 오웬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 불렀던 거예요. 만물의 연관이에요. 연결이 되어 있는 거죠. 이 연결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발하게 하는 하나의 연결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나서 이 연결들이 깨뜨려져 버린 겁니다. 이제 희미한 영광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과의 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이 끊어져 버린 거죠. 이게 바로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속하시는데, 구속하시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라고 하는 제도 틀 속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충만한 수에 이르도록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작정을 개별적 인간 안에서 현실화시키시는 과정을 세계 선교의 과정이라 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커다란 섭리와 계획의 실현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고 하는 제도 틀 속에 들어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관심을 적게 갖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말씀하시잖아요. 그런 점에서 보이는 교회에 있는 구성원과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의 구성원이 불일치 할 수 있는 거죠. 불일치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던 이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될 때, 이것은 단순히 그냥 한 사람이 이 전에 예수를 안 믿다가 믿고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교회론적인/공동체적인 봉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론도 교회론적 구원론이 되어야 하고, 기독론도 신론적 기독론이면서 동시에 교회론적 기독론이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이것을 역 투사 하면, 창조론도 교회론적 창조론이에요. 종말론도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들의 수를 꽉 채운 것을 확 드러내시는 그것이 결국은 종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을 공동체적으로 인식하는 거라 그거죠. 그래서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연합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본거예요. 다시 말해, 바로 성례의 시행 아니면 보이는 성사의 교통, 보이는 제도로서의 가시적 교회로서의 현현, 여기에 교회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맺은 언약관계 안에서의 생명적인 교통, 공동체적인 자기 봉헌이 교회의 본질이라 본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 그 자체가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 구원 자체가 하나님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이 지평 속에서 나는 그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시려는 장엄한 계획을 따라서 내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구원을 이렇게 놓고 보면,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충만하게 이루어졌을 때, 결국은 하나님의 재창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이 세계의 구원이 함께 따라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의 머리로서 창조되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깨뜨려졌다가 구속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아직도 이 교회가 지어져가고 있는 중이죠. 언젠가 이 교회의 건축이 완성이 되겠죠? 그러면 만물들도 탄식하고 신음하다가 구속의 그날을 기뻐하며 함께 하나님과의 무한한 영광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상호연관(communication, communicatio)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틀을 사용하여 당신의 창조주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이 세상 속에 충만하게 들어내시는데, 그때까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으로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 되는 것이죠.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란 이 말입니다. 이 교회가 온전히 지어져가고 건축이 끝날 때, 이 모든 세계들이 함께 본래의 communicatio를 회복하고, 그리스도 예수가 단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다시 이 모든 창조세계의 머리가 되심이 찬란하게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ἁνακαπερεώ고 recaputalatio라 이거에요.
그렇다면, 지금 종교개혁자들이 이렇게 교회를 영적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면, 즉 그리스도인으로써 교회가 이루어진다/그리스도인이 교회의 구성요소다 라고 생각한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면,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결국 뭐라고 봤겠어요? 무엇인가 영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영적인 실재를 소유한, 예전과는 다른 그 사람이 되어야만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한 것이에요.
그러면 목회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는 이것이 목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imago Dei(하나님의 형상)’,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뭉그러지고 상실해 버린 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이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될 때에 이 형상이 그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며 그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제 종교개혁자들과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하면, 중생(regeneration)과 회심(conversion)을 이야기해요. 우리는 존 머레이(John Murray) 이후의 전통을 따라서 9가지로 된 구원 서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개혁파 정통파 주의의 후기에 와서 생겨나는 거예요.
이번에 제가 논문을 썼다. 개혁파의 커다란 라인이 초기 스위스 개혁파 정통주의, 독일-화란계통의 개혁파 정통주의, 영국의 청교도주의가 있어요. 그리고 도르트 총회를 기준으로 이 구원논쟁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아르미니우스 주의자, 레몬스트란트라고 불리우는 항논파들, 부르티우스, 이런 사람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예전에 있었던 구원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생겨나게 돼요.
그러면서 전에 생각하였던 폭넓은 개념의 구원 교리를 다듬어서 아주 구체적이고 좁은 의미의 구원 교리들을 논리적으로 세워나가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이제 도르트 총회 이후로 후기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들, 튜레틴이나 마스트리히트(마스트리히트는 화란 사람이지만), 이런 사람들을 통해 세워지고, 그리고 화란과 독일의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영국의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정교한 구원교리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이러한 것들이 생겨나면서 결국은 중생(regeneration)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맨 처음에 중세에서는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 할 때에 칭의와 성화의 개념이 모호했어요.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쳐준 것만을 꽉 붙들고 왔어도 교회가 저 지경은 안 되었을 텐데, 그것조차도 지키지 않았어요. 그래서 칭의와 성화가 구분이 모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개념이 가톨릭 안에도 약간 있기는 있었어요.)
아우구티누스 같은 경우엔, 한 사람이 많이 회개하는데 끊임없는 회개를 통하여 신자가 되어간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신자가 되는 맨 처음에서의 회개가 바로 칭의의 회개고, 이후는 성화의 회개라 생각을 한 거죠. 그러나 이 개념은 개혁주의자(reformer)들이 가지고 있던 개념과는 사실 차이는 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치하는 것이었어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한 사람이 회심을 해서 의롭다 함을 받고, 이후로는 끊임없이 참회와 자기 깨어짐 속에서 참된 신자가 되어 가는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Garatia가 필요하다. 그래서 Sola garatia를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것들을 명확하게 해놓지 않고 죽어요.
그래서 이후로 넘어가게 되면서, ‘그래, 너희들이 맨 처음 회개하고 의롭게 되지만, 그러나 이후에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점점 더 의인화되어야 가는 거야. 그 Garatia를 누가 주는지 알아? 교회가 주는 거야’ 이렇게 하여 garatia-infuser의 교리가 생겨나는 거예요. infuser는 ‘주워 넣다’는 의미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의미를 몰라도 들어와서 사제가 베푸는 미사/성사에 참여하기만 하면 그 성사를 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는 주입되어서 그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하여 그는 자기의 구원을 결국 이루어간다 이렇게 보는 거죠. 칭의에 의해서 완전히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보는 게 아니라 이게 시작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garatia-infuser할 수 있는 권한을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쥐고 있는 거예요. 이것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그게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sola fide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키자마자 제일 먼저 문제제기를 했던 것은 칭의와 성화의 엄격한 구분이에요. 칭의에 의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칭의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딱 못을 박아요. 그리고 그 다음에 성화는 점진적으로 쭉 이루어지는 거라 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중생이 아니라, ‘New birth'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전체를 다 신생이라고 본 거죠. 물론 regeneratio라는 말을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사용해요. 그러나 (그것은) 지금 여러분들이 20세기 이후의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좁은 의미의 regeneratio는 아니에요.
최근에 R. C. 스프라울(그 분은 존 거스너의 제자인데 존 거스너는 20세기 최대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가예요.)라는 학자가 책을 썼어요. 거기 보면 알미니우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나와 있어요.
‘조명과 중생이라는 사역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날마다 증가되고 때때로 발전되고 촉진한다.’
스프라울이 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이 점을 논할 때 알미니우스는 중생을 통해 시작된 것이 평생 성화 과정 속에 지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혼선을 보이는 내용은 중생이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알미니우스의 언급이다. 아마 이것은 중생의 열매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한 실수일 것이다. 만일 그의 말이 중생 사역 그 자체가 순간적이 아니라 점진적인 것을 뜻한다면 그는 개혁주의 사상을 반박하고 있는 셈일 것이다.’
스프라울은 훌륭한 분이시지만, 전혀 본질을 잘못 짚은 거예요. 왜냐하면, 알미니우스는 존 칼빈 이후에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사람이거든요. 알미니우스주의 때까지는 전부 다 스프라울이 생각하는 것처럼 중생을 하나님이 영혼을 확 살리시는 이런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 개념이 있다고 하더라도 희미하고, 알미니우스는 이점에 대해서는 맞게 이야기 한 거예요.
칼빈도 이러한 조명과 중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본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이라 보았어요. 그래서 구원받기 위한 성화가 아니라, 칭의 받은 사람이면, 성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동안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이러한 칭의와 성화가 나눠지기는 하지만 구분될 수 없고, 성화의 작용을 불러오지 않는 것은 칭의가 없는 것이고,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성화는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개의 구원은 일치를 이룬다 이렇게 본거란 말이에요. 그러면서도 철저히 가톨릭의 선행에 의한 것을 부정하고, 여기에 오직 성령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인간들을 끊임없이 쇄신시키심으로 성화되어가고/성화되어지는 과정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되어 가는 과정이고, 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이러한 모든 변화들은 궁극적으로 영혼이 변화되어서 예전에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던 사람이 그리스도와 공동체적인 봉헌 속에서 하나로 붙어서 영적인 유기체/생명체적 연합을 이룬다고 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로 다시 돌아가서 만약 우리가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한다고 할 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교회에서 충분히 해주고 배려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렇게 하여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는데 그 이상은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좋아하고 그 모임 속에 나와 헌금도 하고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는 교회도 아닙니다. 정말 이상한 것이 하나 생겨난 거죠.
그리고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모인 사실은 conversion하지 않은 사람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ἁνακαπερεώ에 다시 접붙여지지도 않은 사람들이 모인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모일 것이냐 라고 하는 캐파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본질자체가 시작이 잘못 된 거란 말입니다. 일평생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나가서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뛰어서 벌어먹고 살아도, 내가 참된 신자로 이 사람을 가르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야단을 치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단 한 사람의 신자라도 세우기 위해 그에게 종노릇하면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섬기다가 내가 죽으면 죽는 것이다 라고 하는 관점을 버리지 말아야지 그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온단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부터 그러한 기준이 없이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핵심으로 들어가서, 교회와 상관없이 떨어져있는 인간에 대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견해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 하나님께 자기 스스로 돌아갈 어떤 내적인 힘,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거나 행동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전적으로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 이게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인간이 결국 타락함으로 원죄를 짓게 되잖아요? 인간은 선천적으로 부패한 존재로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책과 오염으로 이루어진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거죠. 이는 전적무능, 전적타락으로 나타나요. 결국 인간은 ad extra,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이 아니면 도저히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죠.
결국 기독교는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고민하는 종교에요. 한 사람이 성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것은 삶의 양상이죠. 그대가 전도사로 살아가든지, 붕어빵을 구우면서 살아가든지, 운이 좋아서 한 나라의 큰 장관이 돼고 국회의원이 됐든지, 노가다해서 삽질을 하며 살든지 이것은 삶의 양상이라고 보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양상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창조의 목적에 더 많이 이바지하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한 인간이 있는데,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에요. 그 놈은 토끼 가죽을 뒤집어쓰고 창을 가지고 다니면 딱 어울리겠죠? 그런데 그 놈이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문화인이 되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양상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2천 년 전에 써진 바울서신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와 닿는 것 아니에요? 바울서신이 쓰여질 때 우리 나라는 한사군 시대에요.
최근에 1980년대에 한창 날리던 미국의 TV설교가 짐 베커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불면증 환자들이 그 설교를 듣고 평화를 누리며 잠을 자고, 양복장에 가서 수표를 꺼내서 헌금을 긁고야 잠을 자고 그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외치던 것은 성공주의 복음이었거든요. ‘당신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예수를 똑바로 못 믿기 때문이다! 똑바로 믿어봐라. 사이클을 딱 맞추어서 방송이 선명하게 들리는 것처럼 복이 쏟아진다.’고 가르쳤던 거죠. 자기가 진짜 복 받는 것의 화신인 것처럼 보여줬습니다.
최근에 조엘 오스틴도 그러했어요. 한국에서만 긍정의 힘이 150만부 나갔습니다. 어느 출판부에서 그거 팔아서 전 직원이 보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돈을 많이 벌겠어요? 그래서 당신 그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별한 복이기 때문에 나는 충분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복에서 상당히 멀어진 사람들이에요?
(책 한권 받고 좋아하는 여러분들은 조엘 오스틴이 보았을 때 너무 가엾은 사람이 되는 거죠. 신앙생활이 굉장히 안 좋은 사람. 가져다 주는 나는 조금 나은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다가 최근에 짐 베커가 책을 썼습니다. 『I was wrong』이란 책. 결국 그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어요. 그 다음에 스캔들까지 일어났어요. 어마어마한 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25년 선고를 받고 감옥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러나 그가 잃어버린 존경과 명예는 작은 것에 불과했어요. 이후로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고 소송이 일어나면서 알거지가 되어 소송비용을 대기 위해 감옥 속에서 4년 9개월 동안을 옥살이를 했어요. 나중에 횡령혐의는 무혐의로 풀려 났어요.. 4년 9개월 동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고백했어요. ‘나는 감옥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 예수님은 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속고 있었습니다. I was wrong.' 너무 늦었죠.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 혼자 혼돈을 살다가 죽으면 그건 개인적인 문제에요. 그런데 그것을 여러분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뭘 가르치는지 몰라서 사람들을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돌보면서 살아간다면 이것은 재앙이라는 얘기에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내가 9년 동안 신학교에서 교수로 지냈었는데, 200-300명을 내보냈어요. 나는 굉장히 잘한 일이라 생각해요. 사회인으로서 잘 살고 있어요. 가야할 필연이 없는 사람들은 가지 말자 이거에요. 그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이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옳게 인도하는 길이라 이거에요.
그러면 이러한 인간이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인간이 여기 있어요. 그런데 이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인간이에요. 소위 말하는 analogia entis와 analogia fide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서 나온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중세에 존재의 유비와 신앙의 유비. 존재의 유비가 뭐에요?
이성으로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은 없지만, 하나님 닮은 것이 많다. 그것이 아버지일수도 어머니일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는데,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을 닮긴 했지만 하나님과 같지 않은 것은 빼내고 하나님과 닮은 것이 있다면 최대로 확장시켜 쌓아 가면, 결국 이성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analogia entis입니다. 그런데 사실 타락한 인간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하죠. 만약에 그럴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수많은 이방의 종교들과 이교도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러면 analogia를 잘못했다고 그랬겠지. 그러면 도대체 누가 어느 analogia가 제대로 된 analogia고, 어느 analogia가 잘못된 analogia인지 정답을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알아갈 수 있느냐 이거죠. 그러니까 그런 식의 구도를 가지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오직 자연과 이성, 철학이 있으면 된다고 본 거죠.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한 칼에 쳐버렸습니다. 이미 그렇게 한 칼에 날려 버리는 시도들이 종교개혁자들이 첫 번째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중세 철학자들 사이에서 말년에 와서 자중지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중세철학이 형편없이 춘추전국시대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을 스스로 거부하는 몸부림들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이 못자리가 바로 데카르트를 비롯해서 근현대사상이 싹트게 된 모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중세철학이 피나게 진리를 찾는다고 싸워 가는데, 마지막에는 그 인간들이 태어난 못자리를 만들게 되었던 것으로 역사에는 막이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차매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analogia entis 좋아하네! 인간의 썩은 이성으로 찾아갈 수 있는 줄 아냐? 그것은 안 된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만나고 온 사람들만이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cognotio Duplex" 즉 이중인식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인식은 두 가지인식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창조주에 대한 인식과 구속주에 대한 인식이에요. 그런데 인간을 선천적으로 보면 창조주에 대한 인식이 논리적으로 보면 앞에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창조주를 아는 참된 지식은 타락함으로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analogia entis를 추구한 것이 중세철학이란 말이에요.
칼빈, 루터와 같은 사람이 보기에 허무하기에 짝이 없는 일을 한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틀렸다고 보는 거죠. 논리적으로는 창조주가 먼저이지만, 창조주를 통해서는 창조주를 볼 수 없고, 구속주를 통해서만 창조주를 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이 analogia entis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은 (창조주를 아는 지식) 이게 먼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주를 보고 창조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되면서 여기에서 다시 내려오면서 이 모든 창조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질서를 귀납해가는 것이 아니라 연역해 내려오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이 자연과 학문의 세계에 찬란한 아름다움과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의 답을 갖게 되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개혁신학이 학문을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무식한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결국 인간의 영혼을 살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이 장엄한 우주의 완성을 이루고자하는 하나님의 지적 계획에 의해 주도된 거라 이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지막 유언을 한다고 한다면 “총신 학생들이여 공부하거라.” 그리고 죽을 거야. 진짜야. 정말 갖추어진 학생,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이 학문을 통하여 진리를 알아가고자 열렬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학도 보내주고 싶어요. 그렇지만 없어요. 이게 있으면 저게 없고 저게 있으면 이게 없어요. 가서 그냥 줄 서가지고 학위나 받아가지고 와서 어느 대학교라도 들어가 볼까 목회도 하기 힘든데.. 할 줄 아는 건 공부밖에 없는데 이런 사람이거나 아니면 기도원에 가서 맨날 불이나 때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그러면 결국은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 영혼이 거듭나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거예요. 그것을 regenaratio, 중생이라 부르는 거죠. 이것은 이제 칼빈 시대의 사람들이 불렀던 포괄적인 의미의 중생이 아니라, 후기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들 이후에 정돈된 가운데 등장한 좁은 개념으로서의 구원서정 9가지(혹은 8가지 7가지) 중의 하나인 바로 그 중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monergistic regeneration입니다. 하나님의 동력적인 중생이라 이거에요. 구원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한 신학자가 구원교리를 A라고 믿고 있을 때, 이것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신론이나 인간의 의지를 어떻게 믿을지를 다 보여주는 집약판입니다. 이렇게 펼쳐나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러분들은 신학시간에 effective calling을 들어봤죠? 그게 뭐에요? ‘유효소명’이잖아요. 유효소명은 실패해요, 안 해요? 실패 안 하잖아요. 그런데 아르미니우스는 “유효소명은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도 임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구원에 관한 단순한 진술처럼 보이지만, 이 뒤에는 단순히 유효소명이 무엇이고 유효소명이 예수 믿을 사람에게 임하느냐 안 임하느냐 라고 하는 구원서정 가운데 이 소명의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뒤에는 철학적인 어마어마한 담론을 가지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아르미니우스는 이런 식의 칼빈주의적인 인간관에 동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구원하려고 해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싫어’하면 안 되는 것이고, ‘나는 구원받을래’ 하면 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뻗어 나가서 결국 신론에 가서 ‘potestia' 즉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의 자율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철학적 담론까지 물고 들어오는 거죠.
칼빈 시대에 칼빈이 맞서야 했던 범신론적인 대적자 가운데 오시안더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루터파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칭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의 본질이 인간에게 침투한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단순히 구원에 있어서 칭의의 정의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신적 본질이 인간에게 침투해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 문제가 나와요? 하나님의 편재성과 장소성의 문제가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과연 하나님이 자신의 실재의 본질/신적 본질을 인간에게 존속시킬 수 있느냐?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담지할 수 있느냐? 그러한 문제가 나오게 되는 거예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세계에든지 당신 자신의 본질을 나누어서 침투시킬 수 있는 범신론적인 존재가 된다 이거예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목회에서 완전히 깡그리 무시되고 있습니다. 구원은 무슨, 교회에 나와서 출석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신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에게 이 사람 중에 상당수는 아직까지도 거듭나지 못했을 텐데, “당신은 교회 나오지만, 그것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이 정말 예수께 접붙여졌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내 얘기를 다시 들어야 합니다. Jesus died for us. Because...." 하면서 쭉 복음을 설교해서 ’회개하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도전을 해야 되거든.
그런데 여러분부터도 장년설교를 하러 올라가라 하면 ‘성도는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버리지 않습니다.’ 성도가 없어! 없는데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 뭐하겠는가? 버리시지 않는다는데 택하신 적이 없어요. 택하심이 드러난 적이 없다 이거야. 구속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거야. 그런데 무엇을 버리냐 이거에요. 원래 버려진 사람인데.
주일학교 아이들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집에 가서 가슴에 손을 얹고 종이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2주일 시간 내어 저녁때마다 심방하여 부모님께 ‘이 아이가 정말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까? 구원의 증거가 있습니까?’ 객관적으로 조사를 해보라 이겁니다. 궁금하지도 않아요? 궁금하지 않다면 목자도 아니죠. 조사를 해본 결과를 실제로 놓고 본다면, 꼭 맞을 수는 없겠지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통곡이 날 수밖에 없을거예요. 통곡이 나지 않는다면 소명이 아닌 거예요. 아니 대부분이 다 구원을 못 받았는데, 눈물이 안 나오면 그게 어떻게 소명이냐 이거에요. 그러면 소명을 무엇으로 확인하냐 이거예요.
시간 되서 올라가서 사회보고, 교회 청소하고, 심방 다니고 그것은 아무나 다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이 없으면 때려죽여도 못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과장이고 허풍이에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일이라 이 얘기에요.
그러나 소명 받지 않은 사람이 못할 수 있는 대목이 있어요. 그게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우는 거예요. 그의 영혼에 일어난 나쁜 일을 내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아파하는 것, 그것은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면 그러한 중요한 차이점에서 여러분들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러면 어디에서 여러분들의 소명의 증거를 찾아야 돼요? 항상 소명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증거가 필요해요. 증거.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임을 입증해야 된다 이거에요. 모든 삶의 방면에서.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논의가 되지 않아요. 깡그리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 거예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 사람들에게 목회자인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에게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 뭐에요? 태반이 중생/회심이 없는 영혼들인데 그 영혼을 열심히 섬겨서, 그 일이 최대한의 성공을 거두었을 때, 그 공동체가 어떠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 목표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300명이 모였으니 500명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아까 이야기 하였죠. 자꾸 그렇게 커지기만 원하는 것은 바벨론의 특징이라고.
그렇게 하여 성도들이 행복할까요? 교회가 커지면 성도들이 행복하냐고? 아니라고 해야죠. 조금이었을 때 목회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만나야 합니다. 교회가 커지면, 성도들의 얼굴도 못 봐요. 항상 심방하면 이게 마지막 심방이야. 심방가면 맨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제가 언제 목사님을 이렇게 대접을 하겠습니까?” 자기도 스스로 최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제가 교인이 1100명 될 때까지 직접 등록한 사람들을 다 심방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1100명이 넘으니까 아무리 부지런히 몸부림쳐도 안 되요. 그래서 결국 포기했어요. 지금은 더 못하죠. 그래서 항상 미안해요. 항상 심방하는 것이 마지막이야. 누구네 집에 심방하려면 “아, 그거 2년 전에 심방했는데...” 그래요.
자, 그럼 보세요. 교인들도 행복하지 않죠? 그러면 하나님은 그렇게 국적 불명의 인간들이 교회라는 것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님은 행복하시겠어요? 그럼 누가 행복할까요? 목사만 행복하겠지.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에요. 그러니까 참된 목회의 정신으로 목회를 안 하면 행복한 거예요. 교인 많으면 생활비도 많이 주고 하물며 차, 집도 괜찮은 거 사줄 것 아니에요? 돈 많고 교인 많으면 여기저기서 오라 그러지, 아무리 설교를 못하여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명함도 내놓고,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이 세상에서 취해야할 영광을 이번에 그라운드로 교회로 택한 것 이외에 뭐가 달라진 게 있냐 그거에요.
그가 진짜 복음에 눈 뜨고 나면 그렇게 많은 교인들이 곤고하게 살아가면서 나를 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을 찢게 될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자기도 불행하게 될 거예요. 그럼 누구를 위해 그렇게 사냐 이 얘기예요. 절대로 교회를 크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갖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안 갖는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비전을 버리고 핵심가치에 몰두하세요. 그러면 최소한 성공 못하고 죽어도 하나님께 ‘잘하였구나.’ 소리는 못 들어도 ‘충성하였구나!’ 소리는 들을 것 아니에요? ‘크게 되었구나.’는 못해도 ‘충성스럽게 했구나,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래도 네 깐에는 최선을 다하였구나.’ 그렇게 하시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누리지 않을 각오를 해야 돼요. 그게 결국은 현실이라는 거죠.
그러면 이러한 것들을 거부한다면,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에 덧붙여진다고 하는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저밖에 모르던 이 인간이 살다가 결국엔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직접 못 봐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징조는 나타나잖아요. 그게 뭐죠? 죄로 말미암는 증상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고통과 악이에요. 죄가 병원체라면 자기가 느끼고 있는 발열과 기침, 오한, 뼈가 쑤시는 것 이것은 악이야! 이것을 경험하며 살면서 결국 나 혼자 살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거죠.
결국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할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거예요.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떨리는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요. 이것을 십자가를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짓이겨져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순결하신 그분이 저렇게 죽으신 것이 결국 나의 죄에 대하여 말해주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떨리는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도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의 또 다른 면을 동시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AMOR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떨리는 두려움이면서도 도망치고 싶지 않은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와 자기 같은 인간을 버리지 않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증거를 이 십자가의 사건에 보게 되는 것이죠.
지난번에 제가 학교 와서 나눠 준 “그리스도의 속죄론” 그게 바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죄와 율법으로부터 속량하셨는가에 대한 교리에요. 아주 일부분이죠. 그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시면서도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놀라운 사랑에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국은 회심의 경험이에요.
이 회심은 중생과 관련됩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동력적인 역사이지만 회심은 인간의 협력적인 역사입니다. 회심은 피터 판 마스트리히트라고 하는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에 의하면 중생한 영혼의 첫 번째 활동이 회심이에요.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데, 이게 결국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회개운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굳게 믿게 되는 거죠. 이러한 일들이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무의식 세계 속에서는 자기 영혼이 그리스도예수께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려오는 충만한 생명의 연합 속에서 그 생명을 부여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현주소이고, 그런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삶을 보이는 하나님의 제도 속에서 구체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으로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이 모든 활동이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기체적 섬김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공동체와 함께,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함께 공동체로서 섬기면서 그 모든 것들을 나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체로 봉헌이 되고, 공동체의 봉헌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열납되어 가는 삶을 함께 살아가는 거예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여러분들이 오늘 종교개혁자들이 물려준 유산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이러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에서 찢어져 뛰쳐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부인할 수 없잖아요.) 개신교 안에는 분열의 유전자가 생겨난 겁니다. 진리를 올바로 알면 부패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분열의 유전자인지 아니면 성경적인 분열의 유전자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데,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분열의 유전자는 성경적인 유전자인데, 이후의 후손들은 그 분열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는 필연적인 종자들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육욕에 시달려서 교단을 찢고, 교회를 가르고, 편 가르고 싸우고, 복음의 전선에 나가서 그렇게 싸워도 시원치 않을 텐데, 교회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학자의 글들을 가져다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분석하여 투서를 하고 학자들을 매장시키는 못된 일들을 하고 있다 이 얘기입니다. 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예요.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사람들이 그런 식의 삶을 회개도 하지 않고 일관되게 산다면, 그가 어떻게 중생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일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이렇게 신학교 생활할 때서부터 여러분들은 뜨겁게 사랑해야 됩니다. 뜨겁게 물질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고, 모든 것을 나누면서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제가 아는 교수님 한분이 유학을 갔는데, 돈이 없어서 죽겠는데 기숙사에 와서 성경책을 펴니 봉투가 하나 턱 나오더래요. 졸업할 때까지 누가 해줬는지 몰랐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학우들이 해준 거잖아요. 그래서 자신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뜨거운 형제애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PIETAS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경건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죄에 대하여 심오하게 회개하고, 오직 나를 모든 율법과 죄의 저주에서 건져낼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그리스도 예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conversio할 수 없거든요. aversio하는 존재에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의 목적에 살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인간 자신이 그러한 질서를 이탈하고자 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세운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질서를 세우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세운 그 질서 속에 사람들을 넣고 싶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변형을 시켜서 그 안에 쑤셔 넣어서 내 구도대로 모습을 가지고 움직이시는/작용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요, 세속주의라는 거예요. 세속주의는 뭐 나쁜 짓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이 딱 올라가서 중심성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세속주의입니다.
웃기는 얘기 같지만, 제 주위에 보면 굉장히 신실한 목회자가 세속주의적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슨 그런 말이 어딨습니까 그러겠지만 아니에요. 욕심도 없고, 돈에 대하여 욕심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깨끗하고, 교회 사랑해요. 그런데 세속적이에요. 그게 뭐에요? 가치 기준이 하나님 사랑이 아니에요. 금식기도하면서 전도대원을 불러 월급주면서 전도시켜요. 금식하니까 얼마나 신실해요? 그렇지만 돈을 주면서 전도를 시키니 얼마나 세속적이냐 이거에요. 신실한 세속주의이지. 굉장히 이러한 예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문제냐 하면, pietas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pietas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언약백성과 非 언약백성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Signal, 싸인이라 이 얘기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이 경건이 히브리어에서 ‘야레’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원래 두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희랍어로 넘어와서 ευσεβέια(유세베이아)가 됩니다. ευ(유)는 ‘좋은’ 이고 σεβέια(세베이아)는 ‘공포’라는 것이니까 좋은 두려움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사랑하지 않는 것만큼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중심성이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이 되고, 이런 속에서 (지난 시간에 강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온 거 읽어보면 알잖아요.) 끊임없는 mortification속에서 결국은 영혼이 vivicatio되고 그러는 속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이루어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똑같은 중생인데도 후기 개혁파 스위스 쪽으로 가면 중생의 필요성을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찾아요. 그러나 칼빈은 그것보다 훨씬 더 우주론적이에요. 왜냐하면 중생시키지 않고 내버려두어도 세계창조의 역사는 흘러가니까.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뭉개져 버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놓고 버리시지 않는 한, 인간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그 영혼을 회복시키셔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회복의 첫 번째 가능성의 부여가 바로 중생에 의해서 그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접붙이고, 접붙인 그 사람을 계속하여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양육해서 점점 더 점점 더 온전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칼빈이 기독교강요 3권에서 교회론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바로 그렇게 신자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련과 수많은 역경을 십자가 삼아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거라고 본 거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람을 구원하셔서 신자로 만드셔요.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여기에 잔존하는 죄가 남겨져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거룩하게 성화시키고, 우리는 거기에 믿음과 순종으로 참여해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해 가는 건데, 그것을 가리켜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여 완전히 참된 신자가 되어간다고 가정을 합시다. 그러나 결국 (완전한 신자는) 못되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성화를 완성시키고 마지막날에 영화롭게 하시잖아요. glorification하시잖아요. 그럼 그렇게 하는 마지막 목표가 뭐냐? 이게 바로 원래 인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예수께 접붙여지게 하고, 접붙여진 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과 모든 진리의 지식으로 가르치고 성령으로 그를 통치하도록/하나님께서 통치해주시도록 성화의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만드는 그것의 목표가 뭐냐 하면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바로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이 되어서 본래의 창조의 목적 가운데 돌아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하지 않은 업그레이드된 무엇을 추가적으로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개만도 못한 개는 없어요. 소만도 못한 소는 없어요. 그러나 인간만은 유일하게 인간이하의 존재로 될 수 있는데, 여기에 인간의 위대성의 paradox가 있는 것입니다. 개가 아무리 나빠도 개만 못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나쁘면 개보다도 훨씬 나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개는 보신탕이라도 제공하는데, 인간은 그 나쁜 것을 어디다가 끓여먹어요? 그러나 그런 막장에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참 인간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니까, 자기가 그런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기의 신앙적이고,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고뇌의 핵심이어야 되잖아요? 우리가 외치면서 설교하는 대부분의 것은 우리가 살면서 고민했던 것들이지, 내가 고민하지 않았었던 것들을 어느 순간 고민하였던 것처럼 설교하는 것은 고도의 위선이에요. 목회에서의 핵심적인 진리들은 신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에 안 되니까 그 사람들을 데리고 (끊임없이 씨름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때는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교회의 영광도 알고,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지체라는 사실을 알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과 복종을 하지만, 은혜와 진리가 떨어지면 보십시오. 교회에 감옥/형틀이 있어요? 고문도구가 있느냐는 이 말이에요. 옛날 중세 교회 때에는 했잖아요. 막 목도 잘랐잖아요. 그렇지만 지금은 없잖아요. 그래서 말 뛰듯, 개 뛰듯 하는 거예요. 징계해봐야 출교인데 그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예요. 막되 먹은 인간에게는 아무 소용없어요.
제가 이번에 종교개혁 발자취를 따라 여행을 했어요. 몇 년 전부터 벼르던 건데 9일 동안에 6천킬로를 달렸습니다. 휴가 받아서 떠난 건데 그거 갔다 오고 나니까 휴가 가고 싶더라고요. 하여튼 루터가 고난 받던 뷔텐베르그 성당, 탑에 갇혀 있었던 막데부르그 성 그리고 쯔빙글리가 장엄하게 아들과 사위와 더불어 전사한 카펠 전투의 현장을 들렀는데 눈물은 안 나왔어요.
그런데 칼빈이 목회하였던 삐에르 성당에 딱 들어가는 순간, 나올 때까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칼빈은 사실 신학적 독창성에 대해서는 루터에게 밀리는 사람이었고, 전사적인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쯔빙글리하고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었고, 목회적인 경험과 능력에 있어서/가슴에 크기에 있어서는 부쩌와 상대가 안 되는 사람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공부 잘 하는 거 빼놓고는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지독한 내성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예배당에서 그 못된 인간들과 싸우면서 거기에서 그렇게 설교했어요. 31가지의 질병이 있다고 그랬죠.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고 그러잖아요. 그 강단을 보니 한없이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카펠에서 작렬하게 찔려 죽임을 당한 쯔빙글리가 훨씬 덜 고생하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셨던 당신이 진정한 순교자입니다.”
제가 속으로 그렇게 고백을 했다고요.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목회를 안했다면 아마 눈물이 안 나왔을 거예요. 돌아오면서 그분을 생각하는데 그분이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겨지더라고요.
역사 속에서 볼섹 논쟁이라는 거 아세요? 볼섹이라는 인간이 칼빈을 씹고 다녔는데, 하다하다 안되니까 나중에 뭐라 하는가 하면 ‘여자만 보면 껄떡거리는 인간이고, 붙어먹다 모자라 가지고 동성애까지 한 놈이다. 증거가 나한테 수없이 있다.’ 이러고 글을 써가지고 유럽 온 지역에 글을 뿌렸어요. 그래서 칼빈이 그런 찬송을 불렀을 리는 없지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런 심정으로 목회를 하다가 죽은 거에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당시에 샤돌레뜨라는 카톨릭 사제가 있었어요. 샤돌레뜨 때문에 스트라스부르크에 갔던 칼빈이 제네바2차 귀환을 하게 되죠. 샤돌레뜨는 굉장한 학자였습니다. 중세철학에 대하여 훤히 꿰고 있는, 그 당시로 보면 중세 말기에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신학자였어요. 그가 정식으로 제네바 교회에 개혁신학에 대해 질문을 던졌어요. (그래서 제네바가) 편지를 받았는데, 물론 그 사람은 답변을 원하고 준 것은 아니라 꼼짝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죠.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해 대답할 사람이 없어요. 누가 이걸 대답하겠어요? 결국 칼빈 밖에 없어서 가서 삼고초려를 하지요. 그래서 칼빈이 돌아와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계속하여 교인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3천명이었던 교회가 1만5천명까지 늘어가게 됩니다. 전도를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각 나라에서 핍박받던 난민들이 칼빈의 그늘아래 모여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외치고, 그 진리의 정신대로 살려고 하니까.
그래서 샤돌레뜨가 ‘아니 도대체 곧 무너질 것 같았던 교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야, 가서 그 사람 한번 만나고 오거라.’ 그래서 이 부하들이 와서 칼빈의 집을 두드렸어요. 종이 내려오니까 ‘칼빈 선생에게 안내하거라. 샤돌레뜨 주교가 보내서 왔다고 하거라.’ 그런데 종같이 허름한 차림으로 내려온 사람이 ‘제가 칼빈입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돌아가면서 하는 얘기가 “아 그렇구나, 저 진솔한 삶.. 권위가 없는 진솔한 삶, 경건한 모습 거기에 사람들이 매료당하는구나.” pietas!
끊임없는 구원/이미 얻은 구원의 현재화를 통해서 pietas는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게 결국 회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을 목표를 사역을 해야 되는 겁니다.
찰스 스펄전이 쓴 『목회자 후보생에게 고함』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은 성경을 덜 읽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부터 보세요.『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의 두 배 정도 크기 되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회심을 목표로 사역하라!” 거기서 스펄전은 라헬이 아기를 못 낳으니까 야곱에게 매달리면서 나에게 아이를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하였던 예화를 들면서, “보아라, 하나의 비유이기는 하지만, 아이를 못 낳으니까 야곱이 아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야곱에게 매달리면서 ‘아이를 낳게 하라 내가 만일 아이를 못 낳으면 나는 죽어버리겠다! 그러잖아. 당신이 진짜 목회자라면 그런 심령이 되어라. 영혼을 끌어안고 영혼이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중생하고 회심하지 않으면 아무 희망 없는 이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라! 당신이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사역하는 사람인가?” 확 찌르잖아요.
그러면 마지막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문제는 이렇게 여러 시간 풀었는데, 답은 간단해요.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 자신이 경건의 진수를 경험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이 얼마나 불행한지 여러분들이 깨달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 아니에요? 여러분들 중에는 이 길이 좋아서 소명 없이 덜렁덜렁 온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만두라고 말은 안하겠어요. 그러니까 학기 중에는 공부하고 끝나자마자 기도원 가요. (아니 왜 웃어요? 나는 심각하게 말하는데. 웃을 대목이 아닌데... 기도원 가라 이거에요. 기도원 아니면 학교도 좋아.)
‘나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하나님 나는 어디에 쓰려고 만드셨습니까? 내게 소명을 주셨으면 내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이 소명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나를 자유롭게 한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교회에 소속되어서 신실한 목회자를 충성스럽게 옆에서 섬기며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
고 기도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훌륭한 삶이냐 이거에요. 누가 바나바가 바울보다 못한 삶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가서 한 사람의 평범한 회사원으로, 한 사람의 평범한 장사꾼으로, 한 사람의 사업가로, 그렇게 어린 영혼들을 돌보고 교회에서 그렇게 평신도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면 얼마나 아름답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겠어요? 왜 이 길이 필연적으로 가야하는 길이냐 이거에요. 그러면 필연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 갈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여러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내 보어야 되잖아요. 소명의 진실함을 보여야 되잖아요.
그러면서 행복함 자체가 하나님이 이렇게 떨리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날마다 더 알아 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없는 이끌리는 사랑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pietas가 증진되고,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런 삶의 행복을 느낄 때 그렇지 못한 영혼을 보면서 눈물이 날 것 아니에요? 그런 영혼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거예요.
돕는 도구가 뭐냐 하면 두 개에요. 나머지는 전부다 보조 도구에요. 그게 뭐냐 하면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 진리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여러분을 도구 삼아 이루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학문이 복음 진리를 깨닫는데 이바지하는 학문이 되게 해야 한다 이거에요. 철저히 공부해서 그래서 결국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존오웬 목사님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두 개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1) 복음과 2) 복음 교리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거예요.
복음은 뭐에요? 복음은 'Jesus died for us.' 더 짧게 줄이면 예수가 복음이다. 그러니까 뭘 공부할게 있느냐 이 말이에요. 복음을. 그런데 그것은 복음을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펑펑 울고 회심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사람 안에서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 죄가 무엇인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야 하잖아요. 이 복음 교리가 바로 복음을 토대로 그런 지식을 사용하여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화 시켜 주는 거예요.
여러분도 경험하였을 거예요. 예수 믿고 회심해서 6개월 동안 설교가 너무나 놀라웠는데, 1년 정도 지나가고 교사하다 보면 예배시간에 공과 준비하는 거예요. 왜? 목사님 설교가 거기서 맨날 거기서 빙빙빙빙 도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되면 그것은 예배가 아닌잖아요. 그러니까 치열하게 공부하여 성도들이 여러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발자국을 따라올 때 두 발자국을 도망가야 하는 거예요. 네 발자국 따라오면, 더 멀리. 마지막에는 당신을 따라오는 것을 포기하고 가르쳐주는 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까지 지적인 격차를 느끼도록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의무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소원은 2가지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할 수 있으면 빨리 그만두기를 바래요. 연구를 조금 더 하고 싶어요. 그것도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지만) 두 가지 간절한 소원이 있어요. 교회가 수만 명이 되는 것도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다 털어버리고 100명으로 되는 것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를 크게 짓는 것도 아니에요. 다음에 오는 사람이 채우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러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러한 것은 다 목회의 양상의 문제입니다. 원하는 것은 두 가지에요. 어쨌든 15년 후 은퇴를 하는데, 그 때가 살아온 날들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날이 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비교하면 그 날이 가장 덜 닮은 날이 되는 거예요. 두 번째는 70까지 설교하면,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31년을 설교를 한 것입니다. 지금 16년을 설교했는데, 3,800편을 설교 했다고 해요. 3,800편이 전부다 텍스트로 풀려 있습니다. 원고지 30만 분량으로.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마지막 날, 은퇴하는 그날 고별설교를 할 때에 성경을 폈는데 제 설교를 31년 동안 들었던 성도들조차도 본문을 읽었지만 무슨 설교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설교자가 되는 것. 그것이 소망입니다.
이것은 결국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무단한 mortification과 vivicatio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하는 참된 신자가 되어져가는 분투하는 개인적인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그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서고에서 새것과 옛것을 끊임없이 꺼내오는 서기관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능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사상이나 상황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 그 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해요. 그것을 중심으로 삼아서 힘이 있는 대로 하나님의 학문을 펼치면서 죽을 때까지 계속 공부해야 하는 것이 의무인 거예요. 의과대학 나와서 책 하나 들쳐보지 않고 골프채 들고 다니면, 10년 후에 돌팔이가 됩니다. 도대체 머리에 든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끊임없이 책을 놓고 공부하는 학생이기를 자처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그 모든 것을 잘 조직하고 가르친다 할지라도 성령의 강한 능력이 그들을 움직이고, 그들의 양심을 때리고, 그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역사 없이는 죽어도 사람의 잔재주로 회심할 수 없다고 확신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많이 공부하지만 그것은 갈멜산 위에 쌓아올린 장작에 불과하고 그 자체가 불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야 돼요. 그럴 때에 그가 열렬히 기도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 안하고 신대원 다니다가 목회해보면, 목회하면서도 기도를 잘 못하게 됩니다. 바쁘고, 늙으면 힘이 없어서 강의하고 집회하면 그 다음날 새벽에 못 일어나는 한계가 오는 거예요. 기도해야 됩니다. 방학 때 학기 끝나면 신대원생들은 기도 제목 없어도 기도원 가야 돼요.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묻었던 더러운 떼들을 닦아야 합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살아, 난 갈 길을 모르지만, 주님 손에 붙들려야 해요.
그래서 처음에 이 길에 들어섰을 때 품었던 소원 그대로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갈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영원히 살수 있다면, 내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그들이 회심할 수 있다면, 나는 더 많이 죽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교회가 어려운 일들이 생겨날 때마다 제가 반복하는 말이 있어요. “I'm nothing, I'm nothing. 저는 원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요. 두 신체의 두 부분이 닳아야 돼요. 책상에서 공부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고. 그래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해요. pietas의 사람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 로버트 머리 맥체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끝내겠습니다. 29살에 죽었습니다. 선교사였으며 목회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에 항상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러 올라와요. 올라가서 29살도 안된 사람이 설교하려고 단상위에 올라서 있으면, 설교는 시작도 안 되었는데 교인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얼굴에서 찬란한 빛이 나는 거예요.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을 만나고만 왔는데도, 저렇게 찬란한 빛이 나는데, 그가 직접 대면했던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일까? 그 거룩하심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더러운 죄인들인가?”
그것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기도의 현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역하면서 ‘전도사님, 기도 왜 안 나오세요?’ 이런 소리나 들으면 미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장로님이 ‘전도사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도하세요?’ 물어볼 수 있어야 돼요. 담임목사가 ‘너 그렇게 기도해도 괜찮겠니? 건강을 좀 보살펴야 하지 않겠니?’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이 이 신학의 과정이고 목회를 준비하는 자들의 과정이란 말이죠.
이런 마음을 가지고 꼭 살아서 그런 목회자 한 사람이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로 희망이 없는 이 조국의 폐허가 되어가는 이 교회 -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와 이 모든 비성경적인 시대의 사조에 타협하는 목회의 환경을 쓸어버리고 신본주의를 세우고, 내가 만난 신학중에서 신학을 꽤 여행을 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얘기하겠지만, 제가 신학을 꽤 많이 여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최고로 아름다운 신학이 개혁신학입니다. 그것도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약간 맛을 존 오웬의 신학에서 봤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신학을. 요즘도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을 매일 공부합니다. 이번에 한권에 520만원 책을 화란에서 사왔습니다. 인터넷에도 없고 구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샀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신학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습니까!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진리와 함께 살고 웃고 울고 그 진리대로 살도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나는 죽어가고 그들은 살아가고. 그러면서 나는 죽어갈수록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저들은 살아갈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혀가 굳어지고, 피의 흐름이 멈추고, 그렇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잠깐 살아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저 건물에서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이야기하던 소리가 엊그제 같은데, 그것이 벌써 25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벌써 많은 지체들이 사역을 접은 지체들이 있어요. 같은 형제들이. 그렇게 수북이 사라지는 거예요. 한번밖에 없는 이 길에 온 몸의 힘을 다하기를 바래요. 그래서 그대들 살아있음에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그대들 살아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더욱 아름다워지는 이유가 되도록 그렇게 산다면 비록 아골 골짝 빈들에서 복음 때문에 쓰러져 죽어가도 그 삶은 값지고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에요. 왜? 진리와 함께 삶이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러한 삶을 살다가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새 예루살렘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