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5월 9일
목 차
1. 목회자의 아내가 되는 것에 대하여 1997.12.15 목회자인턴십 세미나 1
2. 기도생활 1997.12.15 목회자인턴십 세미나 22
3. 부부애와 인격적 결합 1997.12.16 목회자인턴십 세미나 36
1. 목회자의 아내가 되는 것에 대하여
가장 말씀과 가까워야 하는 사람들이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인데 사실 말씀의 빛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삶이 목회자와 아내의 삶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목회자이고 두 번째는 목회자의 아내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그처럼 위험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성경적이 사고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봐야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을 하겠죠? 아니 무슨 성경에 목회자 사모가 어떻게 하라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까? 물론 나옵니다. 또 풍부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성경적 사고의 빛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오늘날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목회자의 아내가 교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목회자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의해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취향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목회자가 허물허물 하고 줏대가 없으면 아내가 대가 세서 휘어잡고 그래서 어느 교회는 이름만대도 여러분들이 다 아는 교회인데 거기는 집사를 줄 때 사모님의 심사에서 합격을 받아야 됩니다. 목회자하고 둘이 나란히 앉아 심사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사모님의 권한에 있죠. 굉장히 커지요. 또 어떤 교회는 목사님이 아주 고리타분한 유교적인 사상을 가져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러는데 이건 교회니까 울면 교회는 더 잘 망한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주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죽은 것처럼 살아야 되는 그런 것이 있단 말이죠.
모두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다 성경에 입각한 생각들이라기보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란 말이죠. 그런 것에 따라서 춤추는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나 불행하고 불쌍하잖아요? 그럼 성경적인 사고란 무엇인가? 성경전체 복음전체의 빛을 받은 사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 안에 우리들에게 풍부한 빛을 던져주는, 다양한 상황에 빛을 던져주는 진리의 체계들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걸 가지고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보이고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의 삶이 보인단 말이죠. 그런 걸 가지고 우리가 한번 더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가 될 사람들은 결혼을 잘해야 됩니다. 이미 결혼한 사람은 얘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무를 수 없으니까 오늘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서 “여보, 아무래도 당신하고 내가 만난 건 하나님 뜻이 아니었나봐.” 그렇게 얘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만났으면 할 수 없이 하나님 뜻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처음에는 잘못 했어도 이제는 같이 살게 되었으니까 이제 덜 잘못 하는 비결은 둘이서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살아야 되는 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자, 그렇습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될 사람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고를 때 어떻게 해야 되나? 그것은 자매 얼굴에 난 사모감입니다. 하고 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노인네들처럼 어떤 모양의 며느리를 얻어야지만 아이도 잘 낳고 복이 있다. 그런 게 사모의 세계에는 없단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해서 그 사람과 결혼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그것이 중요하고 다음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정말 주님을 위해서 영혼을 위해서 헌신하는 목회자의 아내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부르심이 있는가를 확인해야 됩니다. 그것 두개면 되느냐? 물론 그것 두개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부수적으로 중요한 게 또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결함이 너무나 현저하게 크면 그가 아무리 부르심을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좀 곤란하다 이 얘기입니다.
그 결함이라는 것이 어떤 결함이냐? 과거에 잘못하고 죄를 지은 결함이라기보다는 현재적인 결함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품상의 결함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나 불완전 하다고 하는 것과 어느 한 가지 면에서 강력하고 완고한 그런 잘못된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가끔 보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죠?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또 얼굴이 잘생겼건 못생겼건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대개 인성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소명이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고, 또 하나님 앞에 그런 부르심을 따라서 충성하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이해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건 참 쉽구나! 그러는데 그렇지가 않단 말이죠. 왜 그러냐하면 굽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정적으로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상처로 말미암아 비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다든지 아니면 어떤 성품상의 문제가 생겨 하여튼 일그러진 그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소명이 있어도 치유 받는 기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상처가 크고 성격이 굽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면 새사람이 됩니다. 그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품이 평범하지가 않고 심각한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과 조화된 삶을, 완벽하진 않더라도 평균적으로 조화된 삶을 살수 없는 인성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들은 그 인성적인 결함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패역에 가깝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은 한번의 눈물 흘리는 회개나 아니면 고백 이런 것들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화, 믿음의 생활, 연단 이런 것들을 통해서 치유되고 고쳐지는 과정이 필요하단 말이죠. 그런 것 자체를 그 사람의 소명이 무효다. 이렇게 말할 순 없지만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저는 권하기를 사역에 들어서기 전에 충분히 치료를 받고 영적으로 깊이 회복되어서 성품이 정돈된 다음에 사역의 세계에 들어가도 늦지 않다고 권고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목회자의 아내를 고를 때 눈에 보기 좋은 대로 골라서는 안 된다 이거죠. 결혼은 아무리 결혼에 대한 예찬이 우리 가운데 유행해도 결혼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결혼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에게 좀 충격이 될지 모르지만 교회는 무얼 위해 존재하느냐? 물을 때 교회가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하면 큰일 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썩어서 없어지는 한 알의 밀알입니다. 교회가 모두 썩고 그 교회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여하는 교회만이 의미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정도 역시 교회와 같은 맥락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제도 가운데 기뻐하시면서 직접 세우신 두 가지 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둘 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신앙공동체라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가 그러하다면 가정도 더더욱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렇죠? 두 분이 부부이십니까? 두 분은 잠시 같이 사시는 거예요. 천국에 가면 두 분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렇죠? 섭섭하신 모양이네요. 거기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없어요. 물론 알지요. 아 저 자매가 옛날에 내 아내였고 저 형제가 내 남편이었지. 그렇게 확인은 되겠지만 거기서 둘이 따로 어울려 살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혼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에 관계를 맺게 하신 한 공동체라는 말이죠. 그럼 왜 그런 공동체를 주셨겠어요? 한사람 한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이나 둘이 같이 만난 목적이나 동일한 것이란 말이죠. 한사람이 홀로 서 있는 목적이 뭐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우리의 제일가는 본분이 뭐예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해 놓으시고 또 우리를 그 어둠 속에서 빛의 자녀로 불러 주신 것이란 말이죠. 우리 한사람이 살아도 그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은 거예요. 둘이 만난다고 갑자기 이 목표가 바뀐 게 아니란 말이죠. 요즘은 아주 잘못된 사조들이 번지고 있는데 사랑지상주의가 번지고 있잖아요? 이런 것들은 성경적인 사랑이 아니에요.
희랍신화에 보면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이방신화 이야기지만 참고가 된단 말이죠. 원래 희랍사람들의 생각에 인간이 창조될 때 워낙 고매한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높은 도덕성과 정신세계 지닌 피조물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신들이 이렇게 보니까, 희랍의 신들은 잡신들이 많아요. 지저분하고 싸우고 간통하고 근친상간하고 편 가르고 질투하고 도망가고 그러는 신들이거든요. 그런데 신들이 가만히 보니까 인간이 점점, 점점 고상해지는데 그 고상의 정도가 이제 신의 경지까지 올라오려고 하는 거예요. “야, 저놈들이 우리 경지까지 올라오면 우리는 찬밥이 되겠다. 어떡하면 좋겠냐?” 그랬더니 신들이 “쪼개.” 그랬습니다. 그래가지고 인간을 원래는 남녀의 구분이 없었는데 반쪽으로 쪼개버렸어요. 그리고는 넌 저쪽으로 가고, 이놈은 저쪽으로 보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어렸을 때는 그것도 모르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면서 도덕적으로 고상해지고 성숙해지고 이러다가 이게 한창 그런 일에 전력을 하여야 사춘기 때 그때부터 뭔가 성숙에 있어 가속도가 붙는 때인데 그때가 딱 되면 이상하게 생각이 나는 거예요.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자기 반쪽이 생각나는 거예요. 반쪽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이 영원히 신들의 경지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뭐 지저분한 신화가 있어요.
말 같지도 않은 신화가 있는데 결국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결혼을 해도 분명한 결혼의 목표가 없다면 참 아름다운 것이 아니란 말이죠. 여러분, 결혼은 신성합니까? 신성하지 않습니까? 신성하죠. 그런데 성경이 결혼에 대해서 정말 그렇게 말하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럼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성경이 마지막 때가 다가왔을 때 인간들이 정신없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서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그렇죠? 노아의 홍수 때에도 심판이 다가왔는데 사람들은 뭐하느라고 노아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어요? 시집가고 장가가느라고 정신 팔렸단 말이죠. 그럼 무슨 이야기냐? 결혼은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그 결혼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무엇을 위한 결혼이냐에 따라서 신성할 수도 있고 혹은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를 사랑하는 일에 가장 중심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골몰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여성들이 나이가 차면서 온통 지배하는 게 무엇입니까? 뭐가 지배합니까? 언제 어떤 사람한테 시집갈까? 그 고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혼해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지만 넓은 평수로 갈까? 그것에 정신없습니다. 아이 낳고 나면 어떻게 하면 내 자식을 잘 기를까? 그 얘기는 고상하고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아이로 기른다는 생각이 아니라 더 많이 퍼 먹이고 더 많이 껴입히고 더 많이 퍼질러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그것 궁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좋은 무덤에 묻혀서 죽는 것 그것이 사람의 꿈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혼과 직접적으로 관계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결혼할 계획이 없는 사람은 사랑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언제 이 바쁜 세상에 그런 사랑에 빠져서 살 시간이 있겠어요?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결혼은 성경적으로 볼 때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죠.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하나되기 전에 먼저 뭐가 있었습니까? 아담이 하와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히브리 문학에서 “~중에” 라고 하는 것은 Best혹은 Choose를 이야기 합니다. ‘Choose’ 최고라는 것입니다. ‘Best’ 가장 좋은 거라는 것입니다. 내 많은 살 중에 가장 귀한 살 내 많은 뼈 중에 가장 중요한 뼈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고백이 있은 후 성경은 즉시 두 사람이 결혼 관계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성경적으로 볼 때 결혼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실질적으로 권면하기는 하다가 사람 만나서 사랑하게 되면 결혼을 하지 그것보다도 더 좋은 방법은 결혼할 계획을 기도하고 세운 다음에 구체적으로 세워지면 그때부터 연애를 하는 것이 인생을 덜 낭비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사귀어 보고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가서 생각을 해보자. 갈 때까지 가고 그러면서 마음 뺏기고 정신 뺏기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약해지고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 수가 없다 이거죠. 자 그러면 결론은 뭐냐? 이 얘기입니다. 결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신도 훌륭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한 방식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거예요. 먼저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내가 결혼에 소명이 있는가? 독신에 소명이 있는가? 그것을 먼저 기도해야 해요. 이런 생각 없이 그저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결혼하는 것은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못 만나서 늙어가는 것과 똑같다 이거죠. 그리고 독신에 소명도 없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보니까 세월 다 보내고 노처녀 노총각이 되어서 이제는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 없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이죠. 분명하게 소명이 무엇인가? 그리고 독신이 소명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떳떳해지고 당당해란 말이죠. 아름답고 향기로운 독신으로 살아야 된단 말이죠. 나는 그런 소명을 못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소명 받은 사람들이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독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나는 봤어요. 그래서 이번에 책이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훌륭한 삶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죠.
창세기에 보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니 하는 그 성경 구절은 제가 보기에는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이죠. 아담이라는 히브리어 글자와 사람이라는 히브리어 글자가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 번역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니 이렇게 번역을 해야 된단 말이죠. 아담의 경우에 그랬단 말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독신도 있고 보기 싫은 결혼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독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결혼을 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것인가 둘 중의 하나가 소명이지 둘이 시집가고 장가가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소명이 아니란 말이죠. 그건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이 되고나면 그 다음에는 누구를 찾아야 되냐 하면 누구하고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게 제일 중요해요.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볼 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결합시키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흔히 같이 성격도 맞고 모든 게 맞는 사람이 연애할 땐 아주 좋아요. 그렇죠? 이렇게 탁 하면 저쪽에서 척하고 알아들으니까 “놀러가자.” 그러면 저쪽에선 “멀리” 그렇게 나오니까 “자, 쓰는 거야.” 그러면 한쪽에선 “아껴.” 그러면 이게 장단이 안 맞잖아요. “쓰는 거야.” 그러면 “팍팍” 이렇게 나가야지만 아주 로맨스가 이루어진단 말이죠. 그런 사람들이 결혼하면 고달파요. 그런 사람들이 결혼하면 거들 납니다. 잘 맞는 것 같아도 연애는 이상이지만 결혼은 한 배를 타고 파도를 헤쳐가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상호견제와 균형과 조화가 필요해요. 그러나 연애를 할 때는 그런 게 있으면 정이 안 들어요. 막 나가야지 막 가고 싶은 대로 가속도가 붙어서 함께 달려가야지 사랑의 스파크가 튀지, “우리 여행갈까?” “지금 얼마나 추운데 이 불경기에.” 이러면 그게 분위기가 잡히겠어요? “우리 오늘 근사한데서 외식 한번 할까?” 그러는데 “IMF시대에 국가가 부도났는데 지금 무슨 소리야?” 이러면 불꽃이 튀지 않는단 말이죠.
그러나 결혼생활에서는 그런 게 필요하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로 가장 안 맞아 보이는 사람들을 결합시켜요. 그게 뭐냐 하면 보완관계예요. 보완관계.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그러잖아요? 히브리어에 에제르입니다. 이 에제르는 전쟁하다가 패배의 궁지에 몰렸을 때에 아군이 보내주는 응원군이에요. 응원군. 그래서 그 똑같은 단어가 시편에 많이 나오는데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의 도움이신 여호와여,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할 때 그 도움, 도움, 도움 이게 다 에제르입니다. 배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 위해서라도 결혼은 단순한 결합의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결합의 관계다 이 얘기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남편이 커피 같으면 아내는 프림 같아야 이게 어울리지 커피에다 더 센 커피 집어넣으면 써서 못 먹는다 말이죠. 이런 보완의 관계로 하나님께서 이제 배필을 만나게 하시고 허락하신다 말이죠.
그런데 일단 그렇게 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라고 딱 생각하면 그리고 응답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되었으면 그 다음엔 다시 뒤를 돌아보면 안 돼요. “아, 그때 내가 잘못 생각했나봐. 그때 독신이었는데 내가 응답을 잘못 받았나봐. 그렇게 생각하고 무르자 그러면 안 돼요. 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있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그건 안 돼요. 그런데 기억해야 될 것은 독신으로 살아도 비용이 많이 들고 결혼을 해도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러니까 잘 판단을 하고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르심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을 하고 그리고 독신이냐 결혼이냐를 결정을 해야 돼요. 경우에 따라서 어떤 주의 일은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예를 들면 독신으로 살면 아내가 없으니까 애들도 없을 것 아닙니까? 최소한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지는 않겠죠? 여러분, 제가 오래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요즘 신부들이 월급을 얼마쯤 받는 것 같아요? 10여 년 전 얘기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금액이에요. 교통비하고 커피 값 정도 밖에 안 됩니다. 한 30만원 정도. 그럼 그걸 가지고 무얼 하느냐? 그건 가족이 없으니까 그런 삶이 가능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신부가 아르바이트 하는 것 봤어요? 그런 것 안 해도 살아요. 왜? 가정에서 이미 신부가 되었다 그러면 그 신부에게 기대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유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독신에는 그런 유익이 있잖아요. 그 대신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봐요. 제가 어렸을 때 알았던 어떤 신부님들은 몇 사람을 만났는데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과격한 운동을 좋아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밤에 늘 술을 잘 드는 거예요. 그게 허락되어 있잖아요? 그렇죠? 무엇 때문이냐 하면 육체적으로 낮에 에너지를 많이 발산하는 거죠. 정욕을 이기는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술로 달래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것에 인박힌 사람들도 많다 그래요. 술이나 담배. 그런 것들을 보면 그것도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어요. 제가 정확하게 확인은 안 했는데 제가 직장 다닐 때 신부가 되고 싶어 하는 형제가 한명 있었어요. 기독교 모임에도 몇 번 나왔는데 그 친구 이야기에 의하면 카톨릭 신학교에 입학생이 450명이면 마지막에 신부로 서품을 받는 사람은 150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그래요. 늘 교역자 부족 현상이 일어납니다. 품귀 현상이. 그러니까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고 그리고 들어서고 나서도 꼭 신부만이 아니라 탈선의 유혹도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이 받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양쪽 다 비용이 들어요. 어차피 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비용을 우리에게 요구한단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해서 결혼은 무를 수가 없어요. 한번이 끝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한번 결혼하고 그리고 이것이 내 인생에서는 끝이다. 마지막 한번의 기회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그러면서 결혼을 하고 너무 결혼에 대해서 장밋빛 꿈같은 것을 갖는 것은 금물이다. 이 얘깁니다. 결혼은 냉엄한 현실이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한 방법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중심의 결혼이 이루어지고 진행도 그렇게 되고 마지막에 결말도 두 부부는 하나님을 함께 섬기다 죽은 사람이다. 그렇게 인정을 받지 않으면 다 세상 사랑하다가 죽은 거품과 같은 인생들이란 말이죠.
이제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니까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서 할 수 없이 목회자의 아내가 되는 것은 재앙이에요. 이런 경우 있을 수 있잖아요. 목회자의 아내가 될 마음이 죽어도 없었는데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저 하늘 끝까지 쫓아가겠다고 그래가지고 쫓아온 곳이 개척교회였단 말이죠. 하늘로는 안 데려가고 지하실로 데리고 왔어요. 그러면 그런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그 경우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둘 중의 하나인데 변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면서 목회를 훼방하다가 죽는 거고 또 하나는 비록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목회자의 아내로 서명을 못 받았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과 만나서 생사 담판을 하고 내가 이전에는 소명이 없었지만 이제라도 목회자의 아내로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개인적으로 신앙의 문제에서 탈출구를 찾는 길 밖에는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일평생 살다가 결국은 남편의 목회에 계속 시험거리가 되다가 시험거리를 만들다가 죽는 그런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제 말이죠, 이제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면 이제 그런 특별한 경우는 말고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함께 이제 결혼을 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이제 남녀가 한 쌍을 이루어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고 칩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목회자의 아내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그런 전적인 사역자의 그런 상황을 보는 겁니다. 이제 그렇게 되면 말이죠, 이런 문제가 나오잖아요. 2+2는 4잖아요. 그렇죠? 확신이 안가요? 계산기가 없어서? 2+2는 4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목회자의 장점이 둘이고 목회자의 아내가 될 사람의 장점이 둘이 라면 합해지면 목회 현장에서 4로 나와야 되잖아요. 근데 이 4로 나오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0아니면 -4, 곱하기 2해서 -8로 내려가 버려요. 그러니까 장점과 장점이 결합해서 빛을 보는 게 아니라 단점과 단점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단지 주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열심히 무언가를 해 봐서 목회에서 성공해 봐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의지만 가지고 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잘 생각해 봐야 됩니다. 자,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산 위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너희는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이 진지를 죽기까지 사수하라. 그런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저쪽에서 적군이 쭉 올라옵니다. 새까맣게 대열을 지어서 올라오는데 그런데 한군데 보니까 다른 병사와는 다른 아주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지휘관이 뚜껑이 없는 차를 타고 올라온단 말이죠. 그때 여러분들은 총알이 몇 발 밖에 남지 않았다면 누구를 겨냥하겠습니까?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저격수들을 동원해서 지휘관을 향하여 총을 겨누지 않겠습니까?
한 교회는 목회자가 쓰러지면 어느 정도 쓰러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켜주시지만 그러나 주님이 지켜주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목회자 한 사람을 들어서 역사하시고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기도 하고 교회 문을 닫기도 하시고 교회를 크게 일으켜 세우시기도 하고 많은 사람을 시험에 들게도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우리교회의 교인이라면 여러분 중에 한사람이 교회 등록도 안 하고 왔다 갔다 하다 시험에 들어봐야 여러분의 시험을 보면서 교회 전체가 쓰러져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 영혼들을 돌보고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목회자 한사람이 어떤 범죄에 연루되었다든지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면 교회도 함께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집요하게 목회자가 되려는 순간, 목회자의 아내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 사단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표적꺼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단이 어떤 사람은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왜? 그 사람이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 할수록 자기에게 이로운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보호를 해 주겠지요. 교인들이 쫓아내려고 해도 절대 못 가게 보호하고 너야말로 나를 대신해서 교회를 지켜라.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특별한 그런 사람들을 제외해 놓고는 모두 그러한 표적이 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먼저 명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표적이 된다는 말이죠.
그럼 표적이 되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것은 힘이나 열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목회자의 길에 처음부터 들어서서는 안 될 사람도 들어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은 옛날에 뭔가 하나님을 만났고 예수의 넓은 사랑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서 영혼을 위해서 뭔가 수고하며 살고 싶다, 라고 하는 일념 때문에 들어섰습니다. 넓은 사택에서 좋은 자가용 타고 다니고 싶어서 목회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교회가 커서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수십 평 아파트에서 살고 떵떵거리고 사는 부도덕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처음에 들어설 때는 그것을 목표로 하고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의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회자의 아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런 영광을 바라고 들어선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안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옛날에 이화여대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30년 전에는 목사가 이발사 다음이었답니다. 그런데 요새는 몇 년 전에 이야길 들으니까 변호사 다음이라나? 참 좋은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이 없는 여대생들이 그리고 있는 목사는 누구냐 하면 개척교회 지하실 천막에서 비가 새고 그러는 목사가 아니라 아마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금테 안경 쓴 아주 유명한 그런 목사님들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만큼 이제 사람들이 목회자하면 고생하고 먹지도 못하고, 영어속담에 뭐가 있나 하면 가난하다는 말을 표현하는 숙어가 있어요. ~as poor as mouse in the church 교회 안에 쥐만큼이나 가난하구나. 교회안의 쥐 그것은 가난의 대명사야. 왜?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쥐 먹을 것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신학생 그러면 가난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끼니가 간데없는 신학생들 많습니다. 그러나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제는 신학교 교정에 자가용 둘 곳이 없어서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겠느냐? 그건 이겁니다. 뭐냐 하면 규칙을 우선 잘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올바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저는 농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새 덩크슛, 덩크슛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나중에 한번 보니까 점프를 하는데 농구골대에 우리는 키가 작으니까 그냥 넣느라고 발발거리는 것만 봤는데 서서 이렇게 드니까 농구골대가 밑으로 나와요. 이렇게 해서 푹 쑤셔 넣는 거죠. 이런 것을 덩크슛이라고 하는데 가정을 해봅시다. 2미터 35센티미터 북한 선수 하나가 NBA를 가느니 마느니 이런 얘기가 있었잖아요? 이 녀석이 이렇게 발꿈치를 드니까 농구 골대가 여기 손목에 거리더군요. 공을 드니까 점프할 필요도 그렇게, 점프를 하면 보드 위로 올라갈 것 같아. 밑을 내려다보고 던져. 예를 들어서 235를 넘어서서 255쯤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애들이 밑에서 놀겠죠. 공만 이렇게 들고 있으면 꼼짝 못할 것 아냐? 그리고 키만 큰 게 아니라 드리블이 현란합니다. 몇몇이 달라붙어도 다 따돌리고 아주 현란한 드리블 솜씨를 가정한다고 칩시다. 그뿐만 아니라 하프라인만 넘으면 집어던지면 3점 슛이 팍팍 터지는 그런 선수라고 칩시다. 그런데 다 좋고 순발력도 좋고 다 좋은데 규칙을 몰라 농구를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 그러면 그 선수가 들어와서 뭘 하겠습니까? 자기 골대를 향해서 미친 듯이 몰고 가서 골을 집어넣고 막 환호성을 지르고 관중석에서 막 소리를 지르니까 그 사람한테 가라는 줄 알고 가서 머리에다 집어던지고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이 있고 열심이 탁월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는 순수한 신앙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규칙이 필요하단 말이죠. 그래서 성경이 목회자의 아내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목회자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정리된 사고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의 길을 후회 없이 걸어갈 수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중에 하나가 뭐냐 목회자 아내의 자리입니다. 자리. 자리를 잘 매겨야 되잖아요?
(예화)여러분 세숫비누가 고급입니까? 빨랫비누가 고급입니까? 그렇지요. 걸레 빨 때 세숫비누로 빨면 안 됩니다. 빨랫비누로 빨지요. 그러나 얼굴 씻을 때는 세숫비누로 씻지요. 그런데 군대에서 식기를 닦는데 세숫비누가 비싼 비누 아니에요? 졸병이 가가지고 그 추운 겨울에 발발 떨면서 손이 다 터지는데 고참들이 시키니까 손이 시뻘겋게 얼 정도로 간신히 깨끗이 닦아서 왔어요. 쭉 가지고 들어오니까 고참들은 벌써 틀리잖아요? 다했어? 그릇을 딱 보더니 밥풀이 있나 그런 것을 보는 줄 알았더니 이 녀석이 냄새를 맡는 거예요. 그러더니 탁 집어던지면서 누가 세숫비누로 했어? 그러는 거예요.
세숫비누가 분명히 더 좋지만 용도가 따로 있어요. 그러니깐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 열심만큼이나 중요하단 말이죠.
(예화)요 아래 건너편에 보면 제 2교육관이라고 있습니다. 제 방이 그 지하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하실에 있는데 어느 날 하루는 창문을 이렇게 열어 놓았어요. 여름쯤 되었나? 가을쯤 되었나? 환기통을 타고 새 한마리가 날아 들어왔어요. 그런데 공중을 날아다닐 때는 그 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공중을 나는 새에 대해서 불쾌한 느낌을 가져본 사람 있으면 한번 얘기해 보세요. 그런 사람 없어요. 더군다나 이 새는 지저분한 비둘기도 아니고 참새였어요. 예쁜 참새가 날아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그때 깜짝 놀란 게 있어요. 하늘을 날아다닐 때는 그렇게 예쁘던 참새, 한번도 나는 그 참새에 대해서 더럽다거나 혹은 불쾌하다거나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방에 들어왔는데 도저히 소름이 돋아서 같이 못 있겠어요. 나가라고 문을 열어줬는데도 못나가는 거지. 막 그 좁은 공간에서 돌아다니면서 부딪히고 그러더니 저쪽 뒤로 뚝 떨어졌어요. 그런데 이제 안 보이는 데 책꽂이 뒤로 떨어졌거든요. 그러면 뭐 휴지도 떨어뜨리고 하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고 할 수 있을 것 같잖아요? 보이지도 않고 하니까. 그런데 못 있겠어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거야. 책꽂이가 있는데 그 책꽂이를 다 피스를 박아서 연결을 해놨어요. 나사를 다 풀었어요. 전도사님 시켜서. 책을 수백 권을 다 쏟으면서 결국 찾아가니까 새가슴을 할딱할딱 거리면서 거기 있는 거예요. 그것을 잡아가지고 공중으로 날려 보냈어요. 날아가는 새는 또 왜 이렇게 아름다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목회자의 아내의 직무는 엄청나게 많아요. 여러분 제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지만 목회자는 특별한 사람들만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아내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 가는 데 입니다. 별로 놀라지도 않네요.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주부들이 늘 가사를 돌보면서 하는 말이 피곤하다는 이야기죠. 빈혈, 피곤, 피로, 스트레스 그러잖아요? 그런데 목회자의 아내는 가정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진하면서 살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랍니다. 그런 매우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면 설 수 없는 그 자리만 골라 서서 살아야지만 경제적인 삶을 산단 말이죠. 소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경제적인 삶을 산단 말이죠. 그렇지 않고 여기저기 아무데나 말 갈 데 소 갈 데 다 가면서 살면 그는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 이 얘기인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의 길에 들어서면 어마어마한 직무가 짓누릅니다. 큰 교회 목사님만 그렇겠죠. 조그만 교회는 괜찮겠지요. 아니에요. 여러분, 가게 큰 슈퍼마켓이나 조그만 구멍가게나 물건개수가 틀려서 그렇지 종류는 다 있어요. 거래처는 비슷하다고. 바늘 갖다 놓는 사람 따로 있고 콜라 갖다 놓는 사람 따로 있어요. 백화점엔 수십 박스 수백 박스씩 들어가지만 거기는 몇 개씩 들어가서 그렇지 거래처가 수십 개에요. 똑 같아요. 백화점에 있는 것 중에 구멍가게에 없는 것 봤어요? 좀 먼지가 묻고 구석에서 꺼내서 그렇지 있긴 다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내가 보기엔 큰 교회 목사님들은 오히려 안식년도 훌쩍 떠나고 그리고 책도 좀 보는 시간 많고 그래요. 지금 우리 교회에서 내가 안식년 1년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되겠지요.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그러니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죠. 그렇게 격무에 시달리는데 목회자가 안 서고 다른 사람이 서도 될 자리는 최대한 양도를 해요. 그래야지만 경제적인 삶을 삽니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설 수 없고 또 서면 큰일 나는 그 자리, 그 자리만 골라서 서야지만 경제적인 삶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말이죠, 목회자가 쓸데없이 말 갈 데 소 갈 데 잘 나서고 이일 저일 나서기 좋아하는 목회자치고 자기 고유한 사명에 충실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어떻게 서야 되는가, 어떤 자리인가, 다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원칙을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목회를 위해서 부르신 사람이고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를 위하여 부름 받은 한사람의 남자와 더불어 가정과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목회자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고 목회자의 아내도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인데 목회자는 직접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고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를 하는 그 남편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죠. 너무 말이 복잡해요? 목회자는 목회하는 사람이고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하는 남자를 도와주는 아내란 말이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자리매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 들 거란 말이죠. 아니 그러면 뭐 자기만 매일 앞장서고 나는 뒤에만 가나? 이것은 앞에 가고 뒤에 가고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우리의 가정에 대해서 그러한 질서를 자리매김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데 있어서 남편이 그 아내 때문에 목회에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지 목회에 방해를 느끼게 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방해가 될 바에야 너는 완전히 떼어놓고 나는 너 없는 걸로 치고 밥 먹을 때만 있는 걸로 치고 나는 나대로 간다. 이것도 비성경적인 목회방식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남편을 목회를 하고 아내는 목회하는 남편을 돕는 그래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그런 파트너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말은 되게 쉽죠? 그런데 이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매우 드뭅니다.
제가 작년도에 어느 교단에서 총회에서 개최한 목회자아내 세미나에 갔습니다. 가서 부흥 설교나 한 편 하고 오려고 그랬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곤고해요. 그래서 목회자의 아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두 시간에 걸쳐서 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좀 노골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점심시간에 식당에 들어가서 같이 밥을 먹는데 그 교단에 총무가 되는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해요. “목사님 오늘 너무 시원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노회 시찰회 안에 세 교회 중에 한 교회목회자는 아내 때문에 목회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래요? 그 아내도 뭐 하려고 거기로 들어선 사람이에요? 예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 사랑에 은혜를 받아서 이제는 목회를 위해서 한번 주님 앞에 일평생 살아보겠노라고 영혼을 건지고 구원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생애를 한번 살아보겠노라고 거길 들어선 거예요. 그런데 목회를 하고 나니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다 병든 자기의 영혼, 그런 것들만이 재고품처럼 남은 거예요. 남편하고의 깨어진 관계 그런 것들만 남은 거란 말이죠. 그래서 이거는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은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부부의 가장 중요한 원리에요. 세상이 뭐라고 이야기 하든지 여러분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사상은 변천하고 그리고 복음은 불변합니다. 우리나라 사회에도 남성이 지배하던 사회가 있었고 결혼하고나면 어머니의 성을 따라야 되는 모계사회가 있었습니다. 고려시대까지 우린 그랬습니다. 얼마 안 돼요.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남편 호적을 따라가는 게. 이러한 모든 여러 가지 세상의 풍조가 바뀌어도 중요한 줄거리가 하나 있단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종과 상전, 상전과 종 사이에는 각각 우선적으로 견지되어야 할 덕목이 있단 말이죠. 그 우선적인 덕목은 필수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이에요. 그 덕목이 뭐냐 하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돼. 그러니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에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질서란 말이죠. 이것이 시종일관 유지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들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거든요. 어떤 때는 말도 되지 않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거나 사리에 맞지 않은 건 이미 벗어나고 성경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사고방식을 가지고 목회할 적이 있단 말이죠. 그땐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때는 내가 주장하는 것은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야 돼요. 그게 유일한 대안이에요. 바로 그 시간을 위해서 거기에 세워준 거예요. 그때 순종하면 안 돼요. 여러분 오종모여사라는 사람을 압니까? 기억해요? 주 기철 목사님 사모님이에요. 주 기철 목사님은 알아도 오 종모여사는 아는 사람은 드물죠. 주 기철 목사님이 투옥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제가 직접 역사책에서 들은 것도 아니고 직접 본인을 만나서 확인한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신학교에서 제가 만난 연세 드신 어느 목사님이 들려주신 일화에요. 그런데 이게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가 있는지 야화인지 정사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투옥되어있는 상황에서 마지막에 어떤 상황이 되었냐 하면 그 목사님이 하루는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했는지 완전히 인간이 아니더라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면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그러시더라는 거죠. “여보, 나 아무래도 교회로 돌아가야 되려나봐.” 무슨 이야기예요? 그렇죠. 내 이 고집을 꺾고 일단은 내가 살아서 교회로 돌아가야 될 건가보다. 그때에 이 오 종모 여사가 마지막 남긴 말이 “목사님, 거기서 죽으십시오.” 그것이 마지막 대면이었다는 거죠. 면회 갈 때마다 제일 먼저 그 고문의 상처투성이의 남편을 만날 때 그 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갈가리 찢어졌겠어요? 그런데도 면회실 문을 딱 들어갈 때마다 항상 하던 말이 있대요. “승리하고 계십네까?” 그러니까 그 아내가 남편을 사랑했지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목표가 너무나 분명하고 투철한 거죠. 그런 아내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떻게 목회를 하는지 그저 사례금이나 타다주면 법이나 먹으면 된다. 이건 식모의 소명이지 사모의 소명이 아냐. 식모의 소명이지 사모의 소명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는 교회 일에 낱낱이 참견하진 않지만 그러나 남편의 목회가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교회의 영적인 상황은 어디에 와 있는가? 우리 남편의 목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슬퍼하시는가? 왜 하나님이 교회를 축복하시지 않는가? 왜 영혼들이 하나님께 변화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깊은 관심과 애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사모가 아니란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수보다는 목회자의 아내로서 진실한 소명을 받은 사람의 수가 훨씬 적어요. 그걸 기억을 해야 된다고. 그러니까 좋은 목회자 아내 감을 딱 만나면 그때는 생명 걸고 놓치지 말고 꽉 잡으라고. 감별이 잘 안 되면 나한테 데리고 와요. 내가 감별해 줄 테니. 병아리 감별사도 아니고, 그런데 여러 가지 이야기가 아직도 남았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이제 목회자의 아내가 목회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경제입니다. 경제. 그런데 이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그게 돈이 많아서 안 두려운 건지 돈이 없어도 안 두려운 건지 그건 살아봐야 안단 말이죠. 그런데 목회자의 생활의 경우 가정경제를 다 아내가 담당하잖아요? 목회자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가계부를 들고 쩔쩔 매는 사람은 교회에서 사례금이나 받다 죽을 사람이지 큰일 못해요. 제가 신학대학원 3학년 땐가 다닐 때 일인데 친구 전도사 집엘 갔습니다. 친구들이 모여서 왔으니까 콜라도 사주고 대접을 할 것 아닙니까? “어, 콜라가 없네.” 그러더니 쪼르르 내려가더니 구멍가게에서 뭘 사가지고 와요. 두병을 사가지고 동전을 가져오더니 책상으로 올라가, 그러더니 서랍을 열더니 치부책을 하나 꺼내요. 그러더니 펼쳐놓고 뭘 긁적거리고 써. 그래서 “김전도사, 그건 뭐야?” 그러니까 “응” 아주 자랑스럽게 “가계부야.”그래서 “오 가계부야?” 제 입에서 좋은 말이 나갔겠습니까? 저보다 나이가 많이 어렸어요. “그걸 왜 당신이 써?” 그러니까 자매와 결혼을 했는데 두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 영 틀려요. 이 형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수십 년 동안을 자기가 살림을 해 온 거야. 그러니까 이 지취나 이런 것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거야. 자매는 많은 언니들 틈에서 월급 타면 휙 던져주고 밥 얻어먹고 용돈 팔요 하면 타 쓰고 이런 생활을 너무나 오래 한 거야. 그러니까 10만원만 만지면 덜덜 떠는 거야. 이게 너무 많아서 이걸 어떻게 세어야 될지를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당연하잖아요. 당신이 훨씬 살림 잘 하니까 하라고 그러니까 해온 거죠. 그래 내가 그랬죠. “야, 세계평화 염려할 시간도 없는데 언제 그걸 하고 앉았냐? 넘겨줘라.”그러니까 “되겠냐?” 그래서 내가 차근차근 일러줬어요. 그랬더니 그 형제가 한 30분 얘길 했는데 감화를 받았어요. ‘아, 그렇구나.’ 그러고 넘겨줬더니 부인에 막 불안해서 잠을 못자는 거예요. 10만원도 이랬는데 몇 백 만원이 이러니까 근데 두 달이에요 두 달. 두 달이 가니까 너무 잘하더라는 거지. “그것 봐라. 하나님이 여잘 만드실 때 그런 것 잘할 수 있게끔 이미 달란트를 주셔서 만드셨다. 그러니깐 그렇게 하고.” 그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자유롭게 세계평화 염려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언제 그것을 하고 앉았겠어요? 그것도 한달 쓰고 나서 다 써봐야 200만원도 안되는 것을 또 무릎에 갖다 펼쳐놓고 요거는 하나님의 뜻대로 썼나? 이건 어쨌나? 그렇게 따지고 회개기도 하고 통성기도 한다고 그러고 있어요. 아이고, 뭘 그렇게 복잡하게 사냐? 그냥 좀 절제하면서 신앙대로 살면 되는 거지 그것보다 더 큰 죄는 꿀꺽꿀꺽 잘 넘어가면서 무슨 가계부를 갖다놓고 회개할 게 뭐예요. 그런 것 하지 마요. 여러분, 위해 아직까지도 그런 것 검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좀 세계평화나 염려하라고 그래줘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경제는 부인들이 책임을 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많은 문제가 파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문제가. 무슨 문제가 파생되나 하면 여성들은 살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남자는 쌀이 떨어져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가책을 받지 않지만 그러나 여성들의 경우에는 틀립니다. 자식들이 밥이 없어서 밥을 못 먹을 정도가 되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풍부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던 두려움이 또 있어요. 왜? 가난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서움이 있고 가난함 속에서 살았던 사람은 체험이 있기 때문에 가난해지는 게 너무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히 알뜰살뜰 돈을 모으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돈을 모으게 되는데 결론은 이거예요. 그러면 안 된다 이거지 그러면. 그 돈이 정당한 방법으로 교회에서 얼마를 사례금을 줬는데 풍덩풍덩 다 써 버릴 수도 있는데 쌀밥 먹을 것 보리밥 먹고 보리밥 먹을 것 피죽 먹으면서 돈을 모았다 치자 이거죠.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이거지요. 내 얘기는. 그러면 잘 먹고 다 써버리자 그 얘기냐? 그것도 아니다 이거죠. 그럼 뭐냐? 살만큼 살아 유별 떨지 말고. 유별 떨지 말고 절제하면서 최소한의 생활 해나가고 남는 건 어떻게 하나 조금은 저축을 해야 돼. 조금. 어느 정도냐 하면 가족이 갑자기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든지 어려움이 닥쳤다든지 아니면 자녀들로서 부모에게 기본적인 도리를 한다든지 하는 기본적인 예비비 정도야 있어야 되겠죠.
또 어떤 사람은 성경에 나온 대로 산대. 어떻게 하냐고 그랬더니 일용할 양식을 구한대요. 주면 먹고 안 주면 안 먹고. 왜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에게 돈 통 맡은 가룟 유다는 뭐하려 두셨어요? 일용할 양식 필요하면 예수님이 뭐하려 돈 통을 만들고 또 돈 통을 맡기셨겠어요? 일용하면 그냥 다 써버리면 되지 돈 통이 무슨 필요해요? 왜 그렇게 유별을 떨어요? 왜? 좀 생긴 대로 살아요, 생긴 대로. 유별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오히려 평범하게 삽니다. 쥐뿔도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유별을 떤단 말이죠. 못 생긴 사람이 화장 진하게 하는 거와 비슷하다 이 얘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정도 선에서 요렇게 남겨두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나 그 다음에는 다 흩어요. 흩어. 쥐고 있으면 뭐해. 그것 쥐고 어떻게 되나 하면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주님이 말씀 하셨잖아요? 생전 손가락 쳐다볼 일 없다가 반지 하나 예쁜 것 사거 끼면 왜 그렇게 손가락만 쳐다봐요? 구두도 낡은 구두 신고 다닐 때는 쳐다보는 일도 없고 외출할 때 한번씩 걸레로 훔치고 나오다가 좋은 구두 신으면 뭔 볼일이 그렇게 있어요? 보물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법이란 말이죠. 지금은 없어도 앞으로 마음이 갑니다. 그러니까 흩어요. 흩어.
여러분, 요한 웨슬리를 알죠? 그 사람이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1년에 천 편의 설교를 하는 집회를 감행했다고 하니까 그는 엄청난 여행을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당시에도 그 사람을 거저 돌려보냈을 리가 있습니까? 그랬을 리 없죠. 그런데도 그 사람은 처음 복음사역에 들어 설 때와 똑같은 액수의 돈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았습니다. 그 나머지는 어떻게 했나? 모두 흩었어요.
목회자의 아내가 돈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을 저는 참 많이 못 만났어요. 마지막에 남편의 목회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두 가지 악에만 빠지지 않으면 최악의 위기는 모면합니다. 여자의 문제와 돈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두 문제 다 목회자의 아내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거죠. 내일 다룰 텐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목회자의 성적인 타락, 여자문제 여기에 정확하게 50%는 목회자 아내의 책임이에요. 피할 수가 없어요. 돈 문제 이것은 50%를 훨씬 뛰어 넘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는 지금 살아계셔요. 정말 인격이 고매하신 분이예요. 정말 청결하고 고매하신 분인데 그분이 그럴 수 없는 분인데 마지막 교회를 떠날 때 퇴직금 가지고 교회하고 대판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 다른 사람이 다 그래도 그분은 그럴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결국 살피고 보면 누가 개입되어 있느냐 하면 거기에 사모님이 개입된 거예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점에 있어서 가난해지는 것이 두렵고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는 불안한 사람들은 그게 아까 얘기한 심각한 인성적인 결함이에요. 치유받기 전에 목회현장 들어가면 남편의 목양지를 망친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가난해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알 수 있는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 이것이 목양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품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는 목회자가 18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받는 퇴직금이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그 퇴직금 때문에 어떻게 싸웠는지 그 내막은 모르는데 다 계산을 해 보니까 8억입니다. 8억. 여러분들은 지금 ‘와’하고 놀라겠죠. 물론 여러분들 입장에서 ‘억’ 이라고 하는 것은 생선 먹다가 가시나 걸려야지만 나오는 소리지만 그런데 따지고 보면 흔히 통용되고 있는 거예요. 아파트 한 채, 자가용 하나, 퇴직금 3억 이예요. 그렇게 합계 내니까 8억이에요. 여러분, 중.고등학교 선생으로 18년을 봉직하면 퇴직금을 얼마나 줄까요? 우리는 이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없을 수 있느냐 그런 걸 따지기에 앞서서 그렇게 교회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욕한단 말이죠. “맨 날 거룩하게 살자고 큰 소리 뻥뻥 치고 말이지. 뭐 세계평화 혼자 염려하는 것 같더니 너도 돈 좋아하는구나. 나도 돈 좋아한다. 그럼 네 놈이나 내 놈이나 틀린 게 뭐 있냐?” 세상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이렇게 나간다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교회에서 아무리 좋은 소리가 오고가고 좋은 이야기가 오고가도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감화도 쉽게 받고 상처도 쉽게 받습니다.
얼마 전에 성철 스님이라는 분, 그분이 죽었지 않습니까? 태우고 사리도 나오고 그 사람이 얼마나 전도 많이 했는지 몰라요. 물론 불교로. 살아온 삶이 너무 청결해. 내가 종교를 떠나서 봐도 참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목사도 저만하면 진짜 좋겠다.’ 그럴 정도의 삶을 살았어요. 그 많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마지막에 남기고 간 것은 무명으로 다닥다닥 기워서 입다가 벗어놓고 죽은 가사, 그 한 벌 밖에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 ‘야, 불교엔 뭐가 있나보다.’ 있긴 뭐가 있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면 사람들이 기독교를 보고 ‘야, 뭐가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에요? 뭐가 있어요? 있지. 그럴 것 아니에요?
제가 알던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은퇴를 하셨습니다. 은퇴를 하기 전에 교회에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다툼이냐 하면 아주 아름다운 다툼이에요. 목사님이 그 교회 와서 유아세례를 준 아이가 당신 손으로 장로 장립을 받았다니까 그 많은 세월을 42년을 목회를 하셨답니다. 그러니 젊은 시절에 20대에 와서 마지막 70대까지 목회를 했으니 그리고 교인이 거의 5000명 넘어 1만 명 가까이 모이는 이름대면 여러분이 다 아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그 교회가 그 목사님을 그냥 보내드릴 리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은퇴위원회를 만들어서 목사님 노후를 준비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뭘 결정했습니까?” “목사님 45평 아파트 하나를 드리고 그리고 매달 얼마씩 사례비를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이 펄펄 뛰는 거예요. “그 무슨 소리냐? 나 이제 자식들 다 커서 교회에서 돈 줘서 공부 가르쳐서 시집 장가가서 다 잘 사는데 우리 두 늙은이 남았는데 애들 집에 가서 곁방에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45평에 그걸 해서 뭘 하느냐? 청소를 누가 하겠느냐? 난 싫다. 내 마지막 가는 길을 욕되게 하지 마라.” 장로님들이 고민을 했어요. 궁리궁리 하다가 그 다음에 모였을 때 목사님께 얘기를 했어요. “목사님, 목사님 우리교회에서 42년을 봉사하셨는데 이제 떠나가실 때 퇴직금도 없고 거처도 없이 떠나가시면 한국 교회는 아무개 목사 진짜 목사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교회 장로들은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자기네들은 시커먼 차 큰 차타고 다니고 사장이고 박사고 교수고 떵떵거리고 살면서 두 노인네 20대에 와가지고 단물 다 빨아먹고 나중에 늙으니까 뱉어 버렸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목사님 욕먹는 것은 우리교회입니다.” 이 목사님이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한 거예요. ‘아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그러고 나서 몇 주를 고민하고 오더니 “장로님들 제가 결정을 했습니다. 사택을 주십시오. 제가 받겠습니다.” “아유, 그러셔야죠.” “단 13평 미만이면 받겠다.” 그러니 장로님들은 “32평만이라도 하게해달라.” 목사님은 “13평 이상은 안 된다.” “30평” “13평” “15평”막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은 19평에 낙찰이 되었어요. 이사 가던 날 교회의 젊은 집사들이 이삿짐을 날라 드리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대요. 왜? 그렇게 교인이 지금 교인이 아마 5000명~10000명 모인다고 하면 아마 굉장할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한번 개인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어느 큰 교회에서 청빙이 왔더래요. 와서 하는 이야기가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목사님, 저희 교회 오시면 사례금을 이렇게 드리겠습니다.”하는데 옆에 사모님이 눈빛이 변하더래요. 자기가 현재 그 교회에서 받고 있는 사례금의 아홉 배더래요. 엄청나더래요. 그런데 이제 이사를 가시는데 올라가보니까 아파트는 그렇게 나쁜 아파트가 아닌데 그 속에 있는 집기 중에서 제일 값나가는 물건이 401여 년 전에 부임할 때 싣고 오신 일제 철재 캐비넷이더래요.
그러니까 그 후에 그 교회가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겪겠어요? 젊은 목회자가 왔는데 모두 교인들의 기대 이하에요. 그럴 것 아니에요? 그런 분 설교를 듣고 그런 분 하다가. 나는 이해가 안가요. 5000명의 교인이 모이는데 어떻게 목회자가 그 사람들의 이름을 외울 수가 있나? 별로 안 놀래는 것 보니까. 하여튼 그런 삶을 사셨던 분이에요. 그런데 그 목사님도 훌륭하시지만 목사님의 아내인 사모님이 비슷하게라도 훌륭하지 않고는 그런 삶은 불가능한 거예요. “여보, 당신 미쳤어요? 아니 세상사람 다 퇴직금 몇 억씩 받아가지고 나가는데 그게 범죄도 아니고 당신 왜 그래? 난 당신 정말 싫어. 당신이 이거 해야지만 애들 병원도 차려주고 가게도 내주고 슈퍼마켓도 사주고 할 것 아니야. 당신 할 거야? 안 할 거야?” 그러고 짓누르면 웬만한 목회자는 하나님은 못 움직이셔도 아내는 움직인다고. 물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이 부족할 때면 그런 문제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곤란하다 이거죠.
8억인가 얼마를 받아가지고 나갔는데 그런 돈을 교회에서 내 놓을 때 그냥 기쁜 마음으로 모든 성도들이 그것을 내놓을 수가 있겠느냐 생각을 해봐요. 왜? 18년 다녀도 1억 퇴직금 안 되는 교인이 즐비해요. 그런데 그렇게 나가는 것을 공동위회 같은데서 볼 때에 심령이 안 상하겠느냔 말이죠. 안 상하겠지? 상해요. 그런데 아이러니한건 뭐냐 하면 그 목사님의 사모님이 얼마나 절약을 하는 사람인지 몰라요. 교회 돈이라면 발발 떤단 말이죠. 그래가지고 물건을 잘못사면 자기 돈으로 물어내고 그리고 차타고 가는 거리도 걸어가고 콜라 먹을 거 맹물 먹고 그렇게 하면서 돈을 아낀 거예요. 그 장면만 보면 그 사모님이 정말 교회 돈을 아낀 사람이지만 인생 전체를 통틀어 보면 그건 교회 돈을 아낀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충성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 사람 원래 자기 돈도 그렇게 쓰는 사람이야. 짠순이에요. 거룩한 성품이 빚어 낸 내핍 생활이 아니라 그 인간이 원래 그렇게 쫀쫀하게 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근데 어때요? 마지막 목회가 다 끝나기 전 까지는 그렇게 모른단 말이에요. 원래 사람이 씀씀이가 그렇게 통이 좁아서 그런 사람인지 주님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 돈을 아끼는 사람인지 다 살아봐야 안단 말이죠. 그 얼마나 웃겨요? 토큰 하나를 아끼고 백 원짜리 물건 하나를 발발 떨던 사람이 어떻게 그 돈으로 8억을 쥐고 나가냐 말이에요. 될 수 있는 일이예요? 그렇게 다 상급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뭘 상급으로 받으려고 그래요? 뭘 받겠어요? 물론 목회자의 길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투쟁의 길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그만큼 받았으면 받을 것 다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런 분들이 목회의 길에 들어설 때 퇴직금 계산하면서 날을 보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마지막에 뭘 사랑하는 사람이었는지 다 드러내는 거예요. 웃기는 내핍생활 아니에요? 차라리 조금 널널한 삶을 살고도 마지막에 청결하게 목회지에서, 쉽게 얘기해서 제 얘긴 그 얘기예요. 뭐냐 하면 그렇게 일평생 목회를 하다보면 마지막 노후를 교회에서 책임져야죠. 그렇지 않아요? 책임져야죠. 그러면 교회에서 두 노인네가 살만한 웬만한 사택 얻어주면 은퇴목사 얻어줄 수도 있잖아요? 원로목사고 그러면 얻어주면 거기서 살다가 또 아주 떠나가도 집은 교회가 사주고 거처만 하고 마지막에 돌아가시면 집 교회에서 회수할 수 있잖아요? 캐나다 같은 데서는 노인네들이 둘이 살다가 자기 집도 교회에 바치고 죽는다는데 그렇게 하고 생활보조비 받으면 그것 받고 노후에 경건하고 편안하게 하나님 믿고 기도하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몇 억의 퇴직금은 해서 뭐하고 45평 아파트는 해서 뭐합니까? 결국은 마지막에 다 처분해서 자식들 입에 털어 넣는 것 아니에요? 제 얘기는 빗나간 자식 사랑이 영력을 말린다는 거예요.
이름만 대면 여러분도 다 아는 교회입니다. 침례교회에요. 교회에서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냐 하면 어느 날 신문에 목사님하고 사모님 이름이 나온 거예요. 외환관리법위반으로 목회자의 아내가 구속되었어요. 그것은 또 그럴 수도 있잖아요? 모르고 들고 나가다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돈이 너무 컸어요. 몇 억이에요. 그런데 그걸 불법으로 빼돌리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 교회 교인을 한번 만나서 제가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교인이 느끼는 깊은 절망감은 무엇이냐 하면 그 돈을 미국에 있는 자식에게 가게를 차리는데 장사 밑천으로 도와줬다는 거죠. 사실 목회자나 목회자가 아니든지 자식은 영원한 애물단지입니다. 그렇죠? 본인 생각해 보면 알잖아? 영원한 애물단지에요. 형제나 자매나 다 그래요. 그런데 거기 가서 궁리궁리하고 이것만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뭐 좀 보태주는 것 당연하지 않겠어요? 여러분도 장단 못합니다. 그러니까 보태줄 수도 있다는 거죠. 돈이 좀 커도 집을 처분하고 해서 보태줄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근데 그 교인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뭐냐면 평소에 목사님과 사모님의 말하고 너무 틀리다. 라는 거예요. 말이나 안했으면 모르는데 평소에 늘 두 분이 하시는 말씀이 “우린 아무것도 없어. 우린 다 바쳤어. 우린 빈손이야. 우린 교회에서 쫓아내면 거지야.” 맨 날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엄청난 몇 억이 되는 돈이 어디서 났느냐 이거에요. 어디서? 그러니까 그전에 교인들이 목사님이나 사모님이 나타나서 “아, 우린 아무것도 없어. 우린 다 바쳤어. 우린 그저 교회에서 쫓아내면 거지야. 죽든 살든 우리는 그저 교회에서 먹고 교회에 살아야 돼.” 그때 교인들의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는 거죠. ‘아, 저 두 분은 우리교회에 와서 젊음도 바치고 돈도 바치고 모든 걸 주님 위해 희생하고 목양을 했구나.’ 어느 날 몇 억이라는 돈을 들고 김포공항을 나가다 덜컥 걸린 거예요. 어디서 났냐? 이거죠. 그 많은 돈을. 그것 때문에 교인들이 배신감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그 사람들이 오해인지 이해인지 난 알 수가 없지만 그 교인들이 상상하는 그림이 이거예요. 계속 돈을 꿍쳐서 쌓아두면서 이쪽에다 계속 쑤셔두면서 “없어” “없어 우린 거지여.” 이랬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모였다는 거지요. 그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말이죠. 부모로서의 그 마음은 있을 수 있고 외환관리법위반도 이해한다 이거야. 그런데 평소에 그런 말만 안했으면 차라리 “아들 도와줘야 돼. 아들 도와줘야 돼.”그러고 살았더라면 그렇게 배신감 안 느꼈을 것이라는 거죠. 교회가 찢어질 것 같은 위기를 만나는 거예요. 무슨 얘기를 하느냐면 자식 사랑에 영력이 마른다는 거죠. 제가 말씀드리는 이 대목에서 여러 목회자들이 넘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어느 교회는 목사님이 6.25 끝나고 나서 양키물건 장사를 했어요. 전도사 부인이 왜 양키물건 장사를 했는지 그때도 불법이었단 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하여튼 야금야금 돈을 벌었어요. 재밌게, 쏠쏠하게 돈을 벌어서 그 돈 가지고 등록금도 대주고 하면서 돈을 모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남편 목사님이 개척을 했어요. 이분도 참 유별난 분이죠. 하여튼 여장부입니다. 교회에 한번은 도둑이 들어왔답니다. 복면을 쓰고 칼을 들고 들어왔는데 무슨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래. 교회가 이렇게 있고 저쪽에서 들어오고 여기는 문을 탁 열면 사택인데 사택에서 교회당 문을 탁 여니까 복면을 쓰고 칼을 들고 이놈이 걸어 들어오는 거예요. 다른 여자 같았으면 기겁을 했을 텐데 걸어 나오더래요. 고무신짝을 이쪽 손에 들고 “이놈이 정신이 있나? 요즘 어느 시대인데 너 복면 쓰고 칼 들고 다니냐? 한번 맞아 볼래?” 그러니까 강도가 놀래가지고 도망가더래요. 여장부였는데 그러니까 그랬겠죠. 땅을 그 돈으로 샀습니다. 그러니까 그 위에다 교회를 세우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 교인 몇 안 되는데 목사님 사모님이 아주 딱 부러지게 얘기하더라는 거죠. “여보, 집사님, 이 땅은 내 땅입니다. 빌려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십시오. 좋으면 이 위에 교회를 짓고 싫으면 그만 두십시오.” 그렇게 얘기하니까 이 목사님 얼굴이 뭐가 되었겠어요? 똥칠한 것 아니에요? 그래도 남편이 똥칠을 해도 똥칠하는 게 낫지 이 땅은 안 된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거기다가 지었죠. 그래가지고 교인이 야금야금 모여서 400명 정도 모였습니다. 느닷없이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나더니 그 땅 달라는 거예요. 아니 교회가 서 있는데 이 땅을 어떻게 주냔 말이에요. 그러니까 땅값을 내 놓으라 이 얘기죠. 왜 그러냐? 급하다는 거예요. 왜냐? 사위가 치과의사인데 병원을 차려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동안에 땅값이 얼마나 올랐어요? 현 시세를 쳐서 달라는 거죠. 남편이 말려도 그 영력이 통하질 않아요. “그 필요 없다. 당신은 모른다. 당신이 아냐? 나는 이것 얻어야 되겠다.” 교인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요? “그래, 그 땅이 지 땅이란 말이지.” 아니 진짜 교인들이 한 말이에요. “그 땅이 지 땅이란 말이지? 그럼 우리도 막말로 나가볼까? 20년 동안 이 땅 위에서 벌어먹었잖아?” 그러면서 나가는 거예요. 그 목사님이 얼마나 중간에서 고통을 받았겠어요? 그래서 결국은 3년인가 4년에 걸쳐서 다 받아냈습니다. 대단한 여장부죠. 여러분도 그런 사람 되고 싶으십니까? 하여튼 이 경제적인 문제에는 목회자의 아내가 필연적으로 깊이 개입된다는 거죠.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요.
최소한의 삶을 살고 그 다음에는 흩어줘야 돼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목회자의 아내가 있는 곳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남편의 동지들이 없어요. 동지들을 돈으로 규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실 요즘에 책도 나왔어요. ‘사실은요, 하나님 다음엔 돈이 제일 좋아요.’그게 책이름이에요. 그게 사실 정직한 고백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인간에게 숭배를 받기 위해서 다투는 대상이 있는데 물신이에요. 물질이란 말이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랬는데 가장 커다란 방해물이 걱정이고, 걱정과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들은 재물을 모은단 말이죠. 목회자의 아내가 그런 식으로 길을 들어서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위탁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서는 안돼요. 흩어요, 흩어. 자기 돈 못 쓰고 발발 떨고 그래도 도와줄 기회가 딱 나타나면 ‘아, 이건 달란트구나.’ 그러고 던져주라 이거죠. 그리고 가난하고 연약한 동역자들에게 마음껏 뿌리고 그렇게 물질로 섬기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됩니다.
대한 신학교를 나오고 총신을 나온 목사님 가운데 순교하셨습니다. 김 예진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결국 6.25 때 공산당에 끌려가서 순교 당하셨습니다. 그분 마지막 순교 장면이 참 눈물겨워요. 뭐냐면 공산당이 와서 “너 이렇게 말하면 살려 주겠다. 내 딸을 미국 놈들에게 팔았으며 나는 매국노입니다.” 그렇게 말하라 그러면 너 살려 주겠다. 그게 그 당시 신앙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씨가 먹히는 소리입니까? “나는 내 딸을 미국 사람에게 판적도 없고 그리고 나는 매국노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같은 동포입니다. 주여, 이 완악한 사람들 예수 믿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그냥 총구로 얼굴을 막 짓이긴 거예요.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결국은 순교했죠. 뚝섬에서 사형 당했습니다. 국립묘지에 묻혀 계시죠. 그런데 그분이 부흥사로서 집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거기 후암동에서 목회를 하셨으니까 남산에 달동네가 많았던 시절이거든요. 그때 사례금이 뭐 얼마나 주겠습니까? 받아가지고 오다가는 집에 안 들어오고 달동네에 다 돌아다니면서 자기네 집에는 끼니가 간곳이 없는데 교인들 집에 다 돌아다니면서 학꼬방 집에 문 두드리고 들어가서 심방하면서 쌀 팔아 먹으라고 다 나눠주고 당신은 빈손으로 들어오고,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주를 위해 죽어야 할 그 순간에 그렇게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랑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소유든지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야 할 때 너무 거치는 것이 많단 말이죠. 그런 삶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면 목회자의 아내라. 목회자가 물질에 눈이 어두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 “여보, 안돼.” 그렇게 성경말씀으로 그 사람의 심령을 찌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그게 목회자의 아내란 말이죠. 그런데 목회자의 아내가 먼저 돈을 밝히고 안일한 삶을 살려고 물질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런다면 그 목회자가 얼마나 탐욕으로 가득 찬 목회자가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에 훨씬 우선하는 거예요. 그럼 자식들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우린 흔히 이런 얘기하잖아요. 목회자보고 하는 이야기가 목회자의 아이들이 삐뚤게 나가잖아요? 그래서 우리 옛날에 아이들 가르쳐보면 그 속 썩이는 꼴통들이 누구냐 하면 장로님 집안, 목회자 집안, 전도사님 아들딸들 이런 애들이 아주 주일 학교에서도 속 썩인단 말이죠. 요즘 우리 아들이 속 썩이고 있는지 모르지만 말이죠. 그런단 말이죠. 그래서 흔히 어떤 권면들을 주느냐면 아이들과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십시오. 그렇게 권면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목회자나 목회자의 아내는 좀 낫지만 목회자의 경우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목회자라면 그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목회를 하고 격무에 시달리고 또 여기저기 가서 말씀을 전해야 되고 틈틈이 글을 쓰고 심방을 하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되고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대부분의 많은 일들이 가정을 떠나야만 이루어지는 일들이에요. 그런데 마냥 아침 점심 저녁 마주앉아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직장 다니면서 가정 목회만 해야지 교회 목회는 못할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자녀들이 신앙의 사람이 되어서 목회자인 아버지와 목회자의 아내인 어머니의 삶을 신앙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받는 부모로부터의 소홀함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상당부분을 충족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줘야 된단 말이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주의 일에 힘쓰고 틈틈이 가족들을 돌보고 애를 썼는데 하나님 앞에 살려고 몸부림을 쳤는데도 아이들이 그 목회자의 아내나 목회자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않았다. 어떻게 합니까? 제 얘기는 할 수 없다 이거죠.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느니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는 게 낫다 이거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의 관심의 초점이 어디로 옮아가야 되느냐면 자녀들의 신앙의문제로 옮아가야 돼요.
토론토에 가면 peoples church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구령의 열정을 쓰신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교회입니다. 그분은 선교에 거의 미친 사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교회가 그 당시에 단일교회로써 선교에 지출한 돈이 세계에서 가장 많고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고 하니까 힘에 힘을 쏟은 교회였습니다. 제가 그 교회를 가 보았습니다. 토론토에 갔을 때, 그런데 지금도 그 교회당에 들어가면 한 2000여명 동시에 앉을 수 있는 교회당인데 그 교회로비에 가면 아직도 그 교회에서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이 작고하신지는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그 교회와 교인들이 그 목사님을 흠모하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정신이 지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도 돌아가셨고 그분의 아들인 폴 스미스 목사님도 거기서 훌륭하게 목회하시다가 작고하셨습니다. 몇 년 전에. 그런데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유명한 부흥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교계인물도 아닙니다만 정신없이 바쁜데 그분은 우리 같은 사람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선교지를 많이 누빈 사람이었는데 그 아들 폴 스미스와 그렇게 정겨운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들이 아주 훌륭한 목회자로 토론토 시민의 존경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목회를 하다가 죽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부모가 관심을 많이 가져주는 자식은 타락을 안 하고 부모가 소홀한 자식은 타락을 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각이죠.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그 아이가 정말 부모의 사랑도 필요하지만 동일하게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그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고는 무엇으로도 그 아이를 붙잡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회 팽개치고 그놈 붙들고 씨름하면 올바른 사람 될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그래서 때로는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그 목사님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내 아들 그놈 그놈만 고쳐주는 목회자가 있다면 내가 뭐든지 해줄 텐데.” 그래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목회자에게 존경을 받던 신학자인 박 윤선 목사님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결국은 그 나이 다 먹은 거의 늙은 그 아들, 끝까지 예수 안 믿고 방탕하게 사는 그 아들 때문에 고통 하셨습니다. 제가 모시고 있던 박 기철 목사님만 보면 “박 목사, 우리 아들놈 좀 어떻게 좀 해봐.”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힘든 생애를 산 사람들이 많단 말이죠. 결국은 아이들과 오래 함께 있어주지 못한 원인이 물론 있지요. 그런데 그것은 주된 원인이 아니라 그 아이들 속에 아름다운 신앙이 안 들어간 거예요. 이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는 자녀들의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폴 스미스는 9살 되던 어느 해에 침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주님을 영접하고 회심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따라 배우면서 신앙이 자라갔습니다. 아버지가 늘 바빴지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즐거움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스스로 배워갔습니다. 신앙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훌륭한 목회자로서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자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 환경이나 여건 이런 것을 조성해주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으로써 이 아이에게 부모의 할 일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목회자들이 수입이 적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 이르게 된 거예요. 홍 목사님이 아주 훌륭한 말씀을 하셨어요. 홍 정기 목사님이. 애들이 미국에 갔대요. 공부를 잘 하는 모양이지요. 학교를 여길 가고 싶습니다. 저길 가고 싶습니다. 그러더래요. 딱 불러서 얘길 했대요. “얘야, 네가 어느 학교엘 가도 좋은데 네가 만약에 이 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데 -거긴 등록금이 2만 불이래요- 그러면 아버지가 그 돈을 대기 위해서 돈에 신경을 써야 된다. 목회자가 그러면 되겠느냐? 너 등록금 3천 불 밖에 안하는 조금 학교가 나쁘더라도 그 학교 가라.” 그렇게 권면했다는 거죠. 이건 목회자로서 얼마나 솔직한 권면입니까? 그리고 자녀들이 신앙이 있으면 그런 것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문제는 신앙교육이 성공을 해야지만 나머지 교육도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목회자의 아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여러분 유대인들이 혈통을 중시하게 여기는 것 같아도 지금도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이방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혈통을 따라서 유대인이라고 치지 않고 이방인으로 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방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의 피를 받고 태어나는데도 그 아이를 유대인으로 계산합니다. 그렇게 혈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할 때 부계를 따라가지 아니하고 어머니가 누구였는지를 가지고 자꾸 따지냐 하면 참된 유대인이 되는 것은 피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해서 된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회자의 아내가 남편이 밖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가정에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교부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교는 어머니의 무릎신학교라고 그랬어요. 그 무릎에 앉아서 그러면 청교도는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여러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성경 가르쳐 줍니까?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때문에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경건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맨 교회 일로 속 썩이고 부부싸움 하고 그리고 만나면 교회사람 흉보는 것 그런 것 보고 하니까 아이들이 목회라면 아예 질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교육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목회자의 아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도 잘해야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아내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많은 삶을 아버지와 접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접합니다. 어머니의 삶이 이율배반적이면 그들은 이율배반적인 신앙을 배웁니다. 말을 쫓아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을 보면서 배우게 된단 말이죠.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삶 이런 게 얼마나 하나님 앞에 목회자의 아내로서 결정적인 삶인지 보십시오.
축구로 말하자면 목회자는 센터포드고 목회자의 아내는 골키퍼에요. 골키퍼. 그런데 적군이 볼을 몰고 돌진을 해도 슛을 쏴도 선방을 하면 안심하고 볼을 몰고 적군의 진지까지 한번 뛰어가서 차보겠는데 하프라인만 넘으면 무조건 골인이니 그러면 어떻게 돼? 이거 적군만 넘어오면 공격한 틈은 없고 골대로 들어가서 골대 붙들고 씨름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잘해봐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슛을 먹는 거죠. 그런 삶이 목회자의 아내의 삶입니다. 공격적인 삶도 필요하지만 이런 수비적인 삶이 얼마나 많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결국 이러한 자신의 사명을 잘 찾아가야 할 그런 책임이 목회자의 아내에게 있단 말이죠. 오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뭐냐 하면 말입니다. 말. 문제는 뭐냐 하면 목회자의 경우에는 말을 실수를 해도 교인들이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아내의 말실수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말을 많이 하면 성경에 의하면 허물을 면할 수 없다. 그것이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 안하고 있는 사람이 최고냐? 그건 아니죠. 적당한 때에 적절한 말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꿈을 줍니다. 그러나 늘 기억해야 될 것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서 해야 된다는 거죠. 인간의 백체가 있는데 은혜의 물에 잠길 때 끝까지 안 들어가려고 물위로 떠오르는 인간의 신체부위가 있는데 그것이 요 입입니다. 그러니까 말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은 이미 그의 인품이 온전한 성화의 단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말로 인해서 교회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는 다른 곳 하고 틀려서 한번 상처를 받으면 사람들이 마음에 칼을 품습니다. 교회가 왜 그렇게 사랑이 없냐고 자꾸 그러는데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예요. 교회는 사랑이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교회는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에요. 오히려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상처 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이 많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말에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의 아내는 말보다는 제가 내리는 결론은 많은 말보다는 미소에 능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자기를 지키고 목양지를 지키는 비결이 됩니다. 누가 와서 뭘 할 때 쉽게 찬동하거나 쉽게 거부하지는 말고 그리고 늘 사람들에게 많은 말보다는 미소를 통해서 자신 속에 있는 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아내가 궁극적으로는 목회지를 살찌게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의 길은 이처럼 주의해야 될 것도 많고 힘써야 될 일도 너무나 많은 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고통스러운 길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이 이 자리에 세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많다고 해서 주님이 하찮게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이 가리고 뽑고 골라서 특별히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원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가기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거기 세워 주셨습니다. 거기에서 서 있는 동안에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규칙을 따라서 우리가 살아야 될 것인지 배워야 됩니다. 그리고 어떡하면 우리 속에 우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뜨거워지고 온전해지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성취될 수 있을까? 이런 그리움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2. 기도 생활
1교시에 제가 목회자 아내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2교시에 이제 부부간의 결합과 성적인 타락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목회자 아내의 기도 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기도 생활은 목회자 아내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해야 되는 생활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굳이 이렇게 제목을 붙이는 이유는 목회자의 아내의 삶에 있어서 기도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큰 부분인가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목회자 아내 강해를 전체적으로 들어보시면 여러분들이 알 수 있겠지만 목회자 아내의 삶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이 있고 부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목회자이기 이전에 먼저 한 사람의 남성이고 그리고 또 아내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영역에 사는 사람들이 공통된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중심적인 것이 있고 부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중심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 의무가 있는데 하나는 기도하는 것과 또 하나는 남편과의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결합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생활 이것은 두 가지 결합을 굳게 함으로써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합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같이 살도록 만들어주신 한 남성과의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이 두 기초가 함께 강조되어야 하고 그리고 이 두 기초는 목회에 있었어도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원론적인 것에 성공할 때만 어제 강의한 것들을 지키는 것이 빛이 나지 오늘 말씀드리는 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제 말씀드린 것을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사람 얼굴에 분 바르는 것 밖에는 효과가 없다 이 얘기입니다. 그럼 이제 기도 이야기입니다.
작년인가 언제 올해도 그랬죠. 아주 가물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거의 없는 때이고 물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비가 와서 우리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산에 도랑이고 뭐고 모두 물이 말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가던 산이 치악산이 있는데 그 산에 들어가고 나서 가끔 거기 가서 글을 쓰곤 했습니다. 많이 쓰지는 못하죠. 노트북 컴퓨터 가지고 가니까 밧데리가 신통치 않아서 한 시간 쓰면 떨어집니다만 그래도 거기 가면 머리가 맑아지니까 생각이 잘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구상을 할 때나 혹은 마무리를 할 때나 이럴 때 종종 갑니다. 요새는 바빠서 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들어가 보고 산위로 쭉 혼자서 시름없이 올라가는데 한 3월 달쯤 됐나 날이 좀 추웠어요. 그래서 두툼한 옷을 입고 올라가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물이 없는데 도랑이고 뭐고 다 말라버렸을 때인데 그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두 길은 족히 되어 보이는 시퍼런 물이 그 메마른 산 아래 계곡에서 휘돌아 내려가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내가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아하, 산이 높으면 물도 깊구나.’ 그걸 깨달았어요.
목회자는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이렇게 방법을 배우고 요령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부리고 있는데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보다는 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우선 필수적인 것은 깊은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깊은 사람. 인격적으로도 깊은 사람이 되어서 1년, 2년 가까이서 그의 삶이나 그의 언행이나 그의 마음을 읽게 되잖아요. 그죠? 자꾸 사귀다보면 마음이 읽혀지잖아요. 처음 볼 때는 얼굴의 윤곽이 들어오는데 두 번째 생각하는 것, 세 번째는 마음 그의 영혼의 순결함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결혼할 때도 인물 너무 따질 것 없어요. 웬만하면 괜찮아요. 살다보면 다 정이 들게 되어있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살아도 안 보고 어떻게 아노? 처녀 총각들이.
그래서 인격적으로 깊은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한번 만나면 호감이 가고, 두 번 세 번 만나면 깊이가 느껴지고 자꾸 만나면 만날수록 마치 깊은 숲 속을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신비감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어떻게 어디서 무슨 공부를 많이 하고 학위를 받고 집안에다 무슨 졸업장을 걸어 놓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사귀는 거룩한 인격의 함양을 통해서 그런 사람이 되는 거죠.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지식적으로 깊어야죠. 맨 날 목회를 한다고 그러고 똑같은 것만 이야기 하는 사람이 되면 뭘 하겠습니까? 제가 어느 목회자 세미나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가 진정으로 목회를 잘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사상을 아내가 잘 이해해야 된다. 그러니까 남편에 대해서 많이 배우라 그랬더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여전도사 한분이 저한테 나중에 개인적으로 와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그래도 남편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는 남편을 가진 아내는 행복합니다. 이게 목회도, 철학도 없고 신학도 없고 어디 가서 요령으로 배워가지고 마구잡이로 목회를 하고 성경은 연구도 안 하고 기도생활은 물 건너갔고 그렇게 살아가는 목회자한테 아내가 아니 무릎을 꿇으려면 배울 것이 있어야 무릎을 꿇을 것 아닙니까? 오히려 목회자 아내들이 남편을 보고 답답해하며 나한테 한수만 배워도 저렇게는 목회를 안 할 텐데 그러는 목회자들이 많다는 사실도 목사님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슴에 깊이 새기죠.” 그러고 왔습니다. 그래요. 그럴 땐 어떡할까요?
목회를 하려고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깡통이에요. 비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얼굴 멀끔하고 외모가 흰죽사발 개 핥아 놓은 것 같아서 결혼을 했는데 가고 보니까 완전히 깡통이라 그땐 어떻게 해야 돼요? 그때 제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뭐냐면 부분적인 수리를 가지고는 안 돼요. 부분적으로 수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통째로 바꿔야 합니다. 이렇게 얘길 하니까 또 어떤 사람은 ‘아, 목사님 재혼을 하라는 말씀이군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께 “하나님, 우리 신랑 목사님은 부분적으로 수리해서는 쓸 가망성이 없답니다. 하나님, 어디를 고쳐줄까? 말씀하지 마옵시고 물리적인 존재는 내버려두시고 안에 것은 살, 피 빼고 모두 바꾸어 주시옵소서. 새사람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마치 그렇게 새로워지지 아니하면 자신의 인생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시집을 잘 가야지만 고생을 안 합니다. 그래서 갈 때 이것저것 보지 말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약간 곁가지로 나갔습니다만 자, 목회자의 아내의 기도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 목회자의 아내가 남편을 돕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편이 결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도울 게 별로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알아요? 남편을 돕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남편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는 도울 게 별로 없어요. 여러분, 위기가 뭡니까? 남편이 매주 올라가서 설교를 하는데 이상하게 영력이 마릅니다. 그리고 설교가 겉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말씀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병들기 시작합니다. 그때 목회자의 아내가 어떻게 남편을 도울 수 있겠어요? 쫓아다니면서 당신 왜 그러냐고 우리 남편 좋은 사람이라고 그것 얘기해봐야 뭐하겠어요? 아무리 그렇게 얘기해봐야 그게 남편 목회에 도움이 되겠냐고? 은혜를 못 받고 교회가 점점 병들어 가서 교회가 시험에 들 때 부인이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이 사람 붙들고 우리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보증한다고 아이고 그거 뭐 가재가 게 편이지 그거 뭐 보증을 서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 합니다. 도울 영역이 없죠. 남편은 성실하게 하려고 하는데 무슨 하나님의 뜻이 계신지 이상하게 거기서 못된 사람이 나타나고 쓴 뿌리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근거 없는 비난을 날조하고 목회자의 욕을 하고 돌아다녀서 목회자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그리고 세력을 규합해서 목회자에게 조직적으로 대항 합니다. 그때 어떻게 남편을 도울 수 있겠어요? 도울 방법이 있겠느냐고요. 세상 같으면 금반지라도 빼서 팔아서 해결사들을 동원해서 뒷골목에서 테러라도 하겠지만 그렇게 도울 수는 없잖아요? 뭘 어떻게 도울 수 있겠어요? 세상 법정에 고발을 하겠어요? 아니면 목회자 부인 중에 유단자들도 가끔 있지만 유단자라고 해서 그걸 돌려차기를 하겠어요? 앞차기를 하겠어요? 이빨을 뽑겠어요? 뭘 도울 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교회가 큰 위기에 처하는 때 있잖아요? 있어요? 없어요?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교회가 건축을 하려고 그랬는데 무리하게 빚을 얻어다가 해가지고 남편이 목회자가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고 빚쟁이들이 와서 지어놓은 교회를 어느 교회는 큰 해머를 가지고와서 때려 부수면서 돈 안 내놓으면 다 때려 부순다고 이러고 행패를 부릴 때 목회자의 아내가 어떻게 돕겠어요? 그렇게 폭력을 부리고 휘두르고 교회에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사람한테 어떻게 무엇으로 도울 수 있겠느냐고요? 돈이 많으면 돈으로 돕겠죠. 무엇으로 돕겠어요? 결국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목회가 진정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회자의 아내는 정말 도울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지 않았을 때는 도울 게 많아요.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가족과 같은 교인들이 모여앉아서 친교도 나누고 대화를 나눌 때 옆에서 배라도 깎으면서 맞장구를 치면 그것도 도와주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평안할 때는 도울 일들이 많아요. 위기가 없을 때는 이상하게 도울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갈라지고 위기가 오고 큰 시련이 와서 남편의 피가 말라가기 시작할 때 아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느냐 이겁니다. 아무것도 도울 일이 없어요.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제목이에요. 왜? 그러니까 위기 속에서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때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어요. 그게 뭐예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말이죠, 고기도 먹어본 사람들이 잘 먹는다고 기도도 평소에는 기도도 안 하고 날라리처럼 신앙생활 하다가 위기가 닥치면 기도한다. 그것은 이론으론 가능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기도하던 사람들이 어려움 닥쳤을 때 기도를 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기도를 전혀 안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려움 닥쳤을 때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훨씬 더 확률이 적은 것이다. 이거죠.
저는 목회자의 아내들을 많이 만나고 또 목회를 하고 싶다고 그러는 아주 어린 자매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기도의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요. 기도, 그 자체가 인격의 특징이 되어 있고 기도 그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의 깊이를 아는 사람,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거룩해지고 기도 속에서 자신의 모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의 고통의 문제를 기도 속에서 풀고 해결할 줄 아는 간증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너무 소수라 이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많은 목회자의 아내들이 세상 사람들이 수다 떨고 TV보는 시간만큼도 기도를 안 합니다. 동네사람들 모아놓고 점심 때 보리밥 먹고 수다 떨고, 수다가 얼마나 긴지 아십니까? 굉장합니다. 아주 깊습니다. 깁니다. 기도는 얕습니다. 그리고 짤막합니다. 수다는 복잡합니다. 기도는 간단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잡지에 얼마나 잘 빠지는지 여러분 아시죠? 그런 시간만큼도 기도를 하지 않는데서야 어떻게 그의 소명이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말이죠.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기도합니다. 주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은 조금 기도합니다. 주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씩씩하게 잘 살아갑니다.
우리나라 한국 교회사에 최 필건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때가 1930년대나 40년대 초쯤 되었을까요? 그때에 유학을 한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내신 분들입니다. 그만큼 유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때였단 말이죠. 그런 때에 동경에 가서 유학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아온 분이 있었으니 그분이 귀국하자마자 얼마나 많은 교회가 눈독을 들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평양에 있는 어느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가셨습니다. 가고 나서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교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는가하니 점점 교인이 줄고 그리고 새벽기도 오는 교인의 숫자도 적어지고 쉽게 얘기해서 교회에 커다란 정치적인 문제는 없는데 교회가 점점, 점점 쇠약해져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회에서 그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회에서 그 교회가 왜 그렇게 교세가 약해져 가는지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만들었고 그래서 이제 그 조사 위원을 보냈습니다. 가보니 평일-주일날은 각기 자기네 교회에서 설교할 것이고ㅡ 날 가보니 그 교회 건물하고 목사, 사찰 두 사람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들여다보니까 아니 건물을 보고 왜 교회가 작아지는지 거기 무슨 자막이 나옵니까? 뭐가 나옵니까? 뭐 알 수가 없는 노릇이죠. 열심히 하려고 그러는데 안 된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고 목사님 둘이서 조사를 하고 나오다가 그 교회 사찰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집사님, 교회가 옛날 목사님 계실 때는 그렇게 강성하고 은혜가 충만했는데 요새 교인수가 줄고 은혜가 사라진다는데 그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집사한테 쉬운 걸 물어봐야지 그렇게 어려운 걸 어떻게 제가 답변을 하겠습니까? 전 모릅니다. 전 모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허긴 목사인 우리도 모르는 걸 집사님이 알겠나? 가세.”그러고 나오다가 뒤에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 있긴 있습니다.” “그게 뭐냐?” “글쎄, 그게 꼭 그 원인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목사님은 새벽기도를 오래도록 했는데 요번에 오신 목사님은 교인들 기도시켜 놓고 자기는 슬리퍼 끌고 나갑니다.” 그때에 그 목사님들이 깨달았답니다. ‘아, 그렇구나. 결국 교회는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들이 얼마나 깊이 기도하고 교회 그 자체를 자기의 가슴에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는가, 그것에 의해서 비록 지식적으로 뛰어나고 세상의 학문에 유능했지만 기도가 모자라니까 교회가 식어지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아내가 어떤 사람이냐?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보이는 교회에서는 그냥 한 사람의 평신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통 평신도가 아니라 특수한 평신도입니다. 그는 목회자를 돕고 목회자의 가정을 돌봄으로써 목회자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목회하도록 돕는 매우 특별한 평신도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미안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그 사람의 위치는 영적인 지도자인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에서는 특별한 평신도에 불과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는 목사와 함께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자, 보이는 교회에서 목회는 목회자가 해나가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영적인 지도자는 어떻게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할까요? 그의 직분은 목회자가 자리를 비우는 대신 올라가서 설교를 하거나 이러는 것이 그의 임무는 아닙니다. 저도 최근에 주워들었습니다만 웨슬리의 어머니가 수산나 웨슬리죠. 19명이나 아이를 낳은 대단한 여인입니다. 그랬는데 그 아버지도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 웨슬리의 아버지 목사님이 집회 가기만 기다렸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집회가면 부인인 수산나 웨슬리가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가 훨씬 감동적이었다는 거죠. 그러나 이것은 매우 특별한 예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보이는 교회에서 그의 직무는 보이지 않게 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그의 직분은 눈에 띄도록 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그가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일은 목회자의 주 업무이지만 그러나 사람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고하는 일은 목회자의 직무인 동시에 목회자 아내의 가장 중요한 직무입니다. 그에게는 설교할 시간은 쉽게 주어지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할 시간은 언제나 주어져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될 사람이 도무지 기도에 흥미가 없고 노력을 해도 기도가 안 된다면 나는 소명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게 만약에 소명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명이 있다면 그 사람은 뭔가 기도의 세계에 있어서 깊이 질병에 걸려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 치료받지 않으면 목회에 축복 없습니다. 하늘 아래 미국으로 가든, 소련을 가든, 도시에 가든, 시골에 가든, 산동네에 가든, 달동네에 가든, 높은 동네에 가든, 낮은 동네에 가든 어디가든지 간에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영을 간직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가면 뭐가 쏟아집니까? 거짓말입니다. 동일한 피부색깔을 가진 내 동포, 내형제, 내 지체들이 불쌍해서 기도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비행기 타고 외국에 가서 피부색깔이 틀린 사람들 만나면 영혼에 대한 연민이 가슴에서 복받쳐 오른다고 생각하면 그건 바보같이 황당한 생각입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마음속에 ‘기도하지 않으면 내 소명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된단 말이죠.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많은 목회자의 아내들이 기도 안 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이 땅의 조국교회 목회자의 아내들 가운데 하루에 2시간 이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의심스러워요. 몇 해 전에 어느 잡지에서 통계를 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목회자들 250명을 대상으로 무기명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쭉 했는데 3시간 이상 기도하는 사람이 8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보통 1시간에서 달랑달랑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하고 어떻게 우리들이 이 영적인 싸움이 창궐한 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양떼들을 지키고 강단을 든든히 세워갈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의 말은 사람의 마음까지만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축복하셔서 우리의 말을 영적인 언어로 바꾸시고 그 위에 성령으로 기름 부으실 때 우리의 말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장 완악한 자의 심장이라도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기름 부어진 한 마디의 말은 가장 완악한 죄인들의 심장도 꿰뚫을 수 있고 그들을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목회의 축복은 얼마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축복하시지 않고 되는 일은 그것은 재앙입니다 주님이 축복하시지 않는 형통함은 결국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형통함보다는 오히려 주님이 보내주시는 시련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고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서 집어내어서 전폭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하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정말 자신을 전심으로 찾고 구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을 온전히 갈망하게 될 때 그는 자연스럽게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싶어지고 더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싶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될 것은 그러면 기도를 깊이 해야지만 된다. 기도를 깊이 해야만 된다. 그런데 그런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우선 제일 먼저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탁월한 깨달음이 있어야지만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깊은 기도라고 하는 것은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이 깊습니까? ‘주여~’하고 한숨을 깊이 쉰다고 해서 깊은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깊은 기도가 되겠습니까? 깊은 기도라고 할 때 그 ‘깊다.’ 라고 하는 말은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끔 기도 속에서 그런 것 발견하지 않습니까? 저는 종종 발견합니다. 기도하려고 뜻을 세웠을 때는 A 라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열심히 가려고 뜻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가 보니까 내가 하려고 했던 기도는 점점, 점점 사라지고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도로 하나님이 나를 이끄십니다. 계획에 없던 기도를 시작 했는데 그 기도가 나를 점점 더 끝이 간데없이 더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 나를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수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수되는 것 없이 악을 쓰고 울부짖는 것은 그것은 깡다구로 하는 기도이지 영으로 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고 우리 안에 영혼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 기도할 때 영이신 하나님과 또 영혼을 가진 우리는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흘러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 된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깊은 기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물려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이 세상에서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본받고 이 세상에서 목회를 빌미 삼아서 부와 영예를 누리고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그런 바보와 같은 욕심은 갖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하고 있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것을 읽고는 그 읽은 것을 할 수 있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복음사역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당신의 종들에게 어찌하든지 끊임없이 전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애를 쓰시고 끊임없이 그것을 전해주고 싶어 하시고 또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물려주게 하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깊은 기도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육적인 마음에 부딪혀서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깊은 기도로 들어가야지만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가 어디로 갑니까? 한 치 앞이 보입니까? 보이긴 뭐가 보입니까? 여러분, 캄캄한 밤하늘에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떠 본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돌아보아도 별빛 하나 보이지 않고 지상에 불빛 하나 없는 새까만 바다 위를 비행기가 바다 위로 날아갑니다. 북으로 가는지 남으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팔자도 좋습니다. 늘어지게 잠자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이야기하고 라디오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은 잘 몰라도 돼요. 왜? 싣고 가니까. 누구만 잘 알면 돼요? 조종사만 잘 알면 됩니다. 그런데 조종사가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북으로 가는지 남으로 가는지 알프스 산맥에 부딪히러 가는지 태평양에 곤두박질치러 가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 다 알아도 그 한사람 모르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평신도들이 뭘 압니까? 그저 신앙 좋은 사람들은 교회 와서 “기도 많이 해요.” 그러면 “아멘” 하지요. 뭘 얼마나 압니까? 그런데 목회자 부부는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된단 말이죠. 교회가 지금 어느 상태에 놓여 있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모르고 설교하는 것은 마치 지도 없이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거리가 가까우면 ‘아이, 가보자. 가다가 안 되면 돌아오지.’ 아니 망망한 바다에서 어디를 가보다가 돌아옵니까? 가봐야 사면 새파란 수평선 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디 만큼 가다가 돌아오겠느냐 말이죠. 그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침반이 없고 무전기가 없이는 항해도 불가능하고 그리고 통신 시설 없이는 비행기의 왕래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움직이는 물건들도 이렇게 나름대로 방향의 감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운송하거늘 하물며 영혼을 책임 맡고 있고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고 있는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 부부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삯군입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삯군입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매우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약사도 병날 때 있죠. 아플 때 있어요? 없어요? 아프죠. 마찬가지에요. 우리교회 옛날에 다니던 교회 약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감기에 지독히 걸려왔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아이고, 못나기도 했다. 아니 그래 약에 둘러싸여 있는데 감기한테 져? 약사도 감기 드나?” 그랬더니 되받아치는데 할 말을 잃었어요. “목회자는 영적 침체에 안 빠지나요?” 그래요. 빠지죠. 빠지죠. 없을 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기도생활이 어떤 때는 깊고 어떤 때는 부족하고 그러죠. 그래도 주님은 다 알아요. 기도를 안 하며 사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 기도가 어떤 때는 깊어지고 어떤 때는 방향에 어려움을 받아서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기도로 살려고 한 사람들이었는지 요령으로 살려고 한 사람들이었는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르신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래, 너 기도 많이 하는구나. 너도 많이 하는구나. 넌 하지 않는구나.’ 하나님이 보시면 다 알지 않겠습니까? 그런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단 말이죠. 제 주위에는 탁월하게 기도를 많이 하던 목회자의 아내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첫 번째로 말씀드린 건 기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깨닫는 것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깊은 기도의 영성은 성경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집회에 나가면 부흥사를 불러다가 설교를 시켰으면 그럼 와서 열심히 들어야 되잖아요? 열심히 설교를 교인들이 듣는데 안 듣는 사람이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 그분은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교인들 누가 왔나? 어느 집사 빠졌나? 보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가 그 교회 교역자들, 왜 그렇게 바쁜지 몰라요. 막 돌아다녀. 그 다음에 안 듣는 사람이 두 부류가 또 있는데 장로님들 하고 또 하나는 교역자의 부인들, 멍~ 하고 딴청하고 있는 사람 나중에 누군가 물어보면 틀림없이 전도사님 사모님 아니면 목사님 부인이에요. 그 사람들은 교회생활에 만성이 되어서 교회에서 뭘 해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에요. 멍~해요. 눈에 안개가 낀 것 같이 그런 사람들이 열렬히 기도한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또 기도해봐야 해봤자 입니다. 천국에서 그들이 올리는 기도는 다 쓸데없는 우편물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진리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정곡을 찌르는 기도를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다 깊은 기도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깨닫는 일들을 위해서 열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머리가 멍 하고 하나님 앞에 말씀이 깨닫는 것이 없다면 기도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차가 좋아도 외날로 된 선로를 달릴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과 기도는 같이 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하면 그리고 기도 속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순결하게 하면 진리의 말씀이 더 깊이 깨달아질 것이고 진리의 말씀이 더 깊이 깨달아지면 여러분들은 기도의 놀라운 변화를 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때 이런 때 있죠. 심령이 무거워지고 그리고 도무지 뭘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도 모르고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크게 은혜를 받습니다. 깨닫게 됩니다. 회개가 됩니다. 눈물이 나옵니다. 이상하게 은혜받기 전까지 희미하게 보이던 것들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이젠 자기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깨닫게 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될지도 알게 되고 이젠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붙들고 몸부림쳐야 될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가 있어서 갈 길을 찾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때 변화가 온다.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아내가 설교할 기회는 없지만 혹시 그런 기회가 주어져도 정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말씀을 아주 능숙하게 깊이 풀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정도로까지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 깊은 말씀에 대한 은혜의 체험 이런 것들을 소유해야 된단 말이죠.
자, 그래야 할 필요성은 또 있습니다. 남편이 바르게 목회하는지 잘못 목회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점쟁이니까 점을 쳐서 알겠습니까? 뭘 보고 알겠습니까? 매번 하나님 앞에 물어보는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자신이 성경을 아는 지식위에 서 있는 신앙이 아니면 그는 결코 목회자의 아내가 남편이 그릇된 길을 갈 때 그릇 됐다고 판단하거나 옳은 길을 갈 때 옳기 때문에 밀어줘야 할 때에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첫 번째가 그런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래 기도해야 됩니다. 이 이야기는 오래라는 말을 가지고 우리를 율법에 옭아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기도가 되려면 오래 기도를 해야 된단 말이죠, 오래. 여러분 기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자신의 더러운 심성을 하나님 앞에 녹이고 정결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신령해지는 과정을 동반할 때 그것이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성찰이 필요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받으면서 깨뜨려지는 과정들이 필요하단 말이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화)여러분, 이런 겨울이면 아, 오늘 저녁때도 생각이 나더라. 곰탕을 참 좋아합니다. 여러분, 곰탕을 어떻게 끓이는지 아십니까? 제일 먼저 곰탕은 말이죠, 설렁탕은 뼈다귀로 끓인 것이고 곰탕은 살로 끓인 것입니다. 고기에 다양한 맛을 내는 여러 가지 살을 섞어서 끓이는 거죠. 끓이기 전에 먼저 고기를 끊어다가 차가운 물에 담가 놓습니다. 왜 그러죠? 한 하루쯤 담가두면 고기에서 피가 모두 빠집니다. 그러면 그 핏물을 모두 버리고 그 다음에는 그 고기를 집어넣고 뜨거운 온도에서 그것을 마냥 끓이는 것입니다. 안양에 가면 곰탕집이 있는데 그 집은 가마솥을 걸어놓고 요즘과 개명한 시대에 장작으로 계속 땝니다. 그래서 물어 봤습니다. 아니 가스도 많고 전기도 많은데 웬 장작이냐고? 장작 구하기는 쉬우냐고? 굉장히 어렵답니다. 장작 구하기가. 그래 왜 이렇게 장작으로 하냐? 그랬더니 그분 말이 간단해요. 왜냐하면 아무리 과학이 발달됐어도 가정에 공급되는 가스 가지고는 장작을 때는 그 불의 온도가 안 된다는 거죠.(요부분에서 잘렸네요.) 나중에 48시간 정도 끓이면 하나 가득 물을 부으면 쭉 내려가서 1/3정도 밖에 안 남습니다. 그리고 국자로 퍼가지고 이렇게 하면 쭉 떨어집니다. 끈적끈적한 국물이 됩니다. 거기에다가 소금 좀 치고 이렇게 해서 먹어보십시오, 얼마나 맛있나 입에 착 달라붙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는 뭐 기도라고 했는데 뼈다귀도 물에다 불리지도 않고 갖다가 설렁설렁 끓여가지고 핏 국물이 벌겋게 뜨는 그런 설렁탕 같은 기도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느냔 말이죠. 그렇게 기도하니까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하면 성경에 의하면 사람이 거룩해져야 맞는데 디모데전서에 나오잖아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 그랬는데 아니 아무리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한다는데 사람이 거룩해지기는커녕 목회를 하면 할수록 더 이기적이 되고 야비해지고 수단과 방법에 능한 사람이 되고 예수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직업적인 ‘꾼’의 냄새가 나는 사람들로 자꾸 변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자기를 죽이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안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깊은 기도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장시간의 기도가 필요하다고요.
그러면 얼마나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꼭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물어보기를 좋아해요. 줄을 그어 주기를 바라는 거죠. 그러나 저는 그 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아버지”하면서 바로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세 시간 네 시간 동안을 엎드렸다 무릎을 꿇었다 비비어대도 도무지 깊은 기도로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면 앞에 한 사람의 30분 기도한 것은 뒤에 한 사람이 4시간 기도 한 것보다 더 위대하고 더 깊은 변화를 가져오죠. 그건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까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죠. 그러나 저는 어떻게 획일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사역자들을 놓고 계산을 하면서 말할 때 그런 연약한 그리스도인을 놓고 말할 때 저는 언제나 그렇게 얘길 합니다. 우리 교회 교역자들 보고 “하루에 3시간 기도하기 싫으면 나가서 다른 것을 해라. 장사를 하든지 햄버거를 구워서 팔든지.” 왜? 그것도 하기가 싫어서 못할 정도가 된다면 그건 소명 아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기도 안 하고 걸어가는 사람이면 인간은 결국은 일을 하려면 무언가를 의지해야 됩니다. 더군다나 이 목회라고 하는 것은 내 방법대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세상에서 수단 좋고 ‘꾼’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회사도 잘 경영하던 사람은 목회선상에 들어서서 죽어라 하고 죽을 쑵니다. 왜 그래요? ‘꾼’ 기질 쫙 빼시려고 하나님이 아주 불 속에다 집어넣어서 달달 볶으시는 거예요. 마지막에 야곱처럼 손들고 항복을 하고 나면 그때 생기는 신념이 뭐냐면 ‘아하,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야 되는구나.’ 그것을 그렇게 오랫동안 깨닫는 동안에 수많은 교인이 자기 인생수업의 교재가 된 거예요. 뭔가를 의지해야 되잖아요? 제 결론은 이거예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눈초리가 빨리빨리 돌아가요. 왜? 눈치 보기가 바빠요. 교인, 담임목사님, 또 누구? 우리 마누라, 누구? 왜요? 이게 빨리빨리 움직여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이게 목이 붙어나질 않아요. 그게 뭡니까? 그렇게 해서 무슨 목양을 하겠습니까?
목회자가 되고 목양의 길에 들어서려면 경박한 사람들이 가까이 범접하기 어려운 뭔가 영적인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되잖아요? 어떡하면 위엄을 내겠어요? 여기다 학위를 걸고 다니겠어요? 훈장을 달고 다니겠어요? 뭘 달고 다녀서 교인들이 인정을 해주겠습니까? 옛날에는 대학 나온 교인도 없던 시대에는 대학원 나온 게 대단한 꺼리가 되지만 이제는 웃습니다. 우수수 떨어지고 발에 차이는 게 석사에요. 실업자로 다니는 사람들이 박사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무얼 가지고 그 앞에서 명함을 내밀겠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촌스러운 사람이 그 주보 앞에다가 liver and 아무 아무개 영어로 써 놓고 옆에다가 Ph.D. Th.D. 그게 뭡니까? 진짜 박사들이 보면 얼마나 웃겠어요? 목사면 족하지 말이죠.
그런 상황에서 위엄을 갖추게 만들어 주는 건 뭡니까? 깊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이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면 누구도 그를 쉽게 범접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이런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도 하기 싫으면 그것 목회자의 소명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래도 만약 소명이라면 당신은 매우 불순종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명령에? 기도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있는 거예요. 기도 안하는 목회자의 아내의 마음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없어요. 만약에 있다면 아주 조금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강할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강할 것입니다. 기도 안하는 목회자나 목회자의 아내가 교인들을 사랑한다면 마귀가 박장대소할 일입니다. 기도 안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을 사랑합니까?
여러분, 인간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끔찍이 자기를 사랑하면서 살도록 죄 가운데 태어난 존재예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는 히죽거리고 웃어도 자기의 요만한 상처에는 견디지 못해하고 칼을 품는 게 인간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아를 무너뜨리고 결국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는 아파도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인해서 고통하고 슬퍼하며 그 영혼들을 끌어안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입니다. 자기의 사랑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요. 여러분, 목회를 해보십시오. 얼마나 속상하는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담임목회 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해보면 아니 사람들이 대드는 거예요. 대들거나 혹은 뒤에 가서 욕하고 다니거나 그래요. 그런데 말이죠, 인격적으로도 나보다 고상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지위도 높고 이런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내 욕하고 보는 앞에서 대들고 사람 앞에 비방하고 그러면 덜 억울하잖아요? 그런데 교회 그런 식으로 목회자를 대적하고 목회자의 아내를 헐뜯으면서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참 지푸라기와 같은 사람들이 그러고 다닌다고요.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아무 별 볼일 없는 지푸라기와 같고 지렁이와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뜻으로 세운 교회에서 사랑으로 지배한다는 것 하나 때문에 세상 사람들 앞에는 그렇게 비굴해지는 사람들이 교회 와서는 목회자에게 그렇게 담대해지는 거죠.
그런데 사랑이 생긴다고요? 아이고, 존경스럽네요. 사랑이 먼저 생기는 게 아니라 ‘아휴, 속상해.’ 이겁니다. 아휴, 속상해. 너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마음에 고통을 주는 지체들이 있으면 기도하는 겁니다. 축복하면서 기도 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기도하면서 날짜가 지나가면서 그가 나를 아프게 한 것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영혼이 겪고 있는 곤고함과 괴로움이 마음에 밀려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밀려오는 거죠. 그래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죠. 그렇게 끌어안고 가는 것이 목회입니다. 이게 누구의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인격이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얼 통해 옵니까? 기도를 통해 온단 말이죠. 그런데 그 기도하는 것 속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거기에 사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목양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못한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러니까 긴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씨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환경을 이기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아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여러분, 옛날에 계시던 저의 할머님이 시집살이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딸 넷인가 다섯인가를 기르고 시동생까지 엎어서 길렀다니까 하여튼 고생을 많이 하셨죠.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전설 따라 삼천리를 듣는 것 같아요. 무슨 저녁을 오후 두 시면 저녁을 시작해야 된다고 그래서 아니 얼마나 밥을 거창하게 하기에 오후 두 시에? 밭에 나가서 아직 다 익지 않은 보리를 베다가 그놈을 떨어서 젖은 보리를 빻아서 거기서 씨앗을 내서....... 그것을 얘길 하는데 공정도 다 모르겠어요. 그러고 밥을 해서 먹으면 저녁 어스름 때가 된다는 거죠. 그렇게 고생을 하시면서 아이를 낳고는 3일 만에 가서 찬물에 손 담구고 일하신 것이 철천지한이 되신 거예요. 그런데 늘 하시는 말씀이 “요즘 아낙네들이 너무 약하다.” 이 얘기입니다.
여러분 애 둘만 가지고 있어도 눈코 뜰 새 없는 거 여러분 아실 겁니다. 그것 잘 모르겠으면 아내 없을 때 세 살배기하고 한 살배기 둘 하루만 봐 바요. 진이 쪽 빠지죠. 차라리 부흥회 다니는 게 훨씬 낫다. 그렇게 결론 내릴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워요? 그것 해야죠. 그런데 또 심방도 꼭 필요한데는 따라가야죠. 교회가 커지면 목회자의 아내가 그런 것 안 해도 되지만 교회가 주먹만한 교회일 때는 가서 청소도 해야죠, 밥도 해야죠, 설거지도 해야죠. 안하면 누가 합니까? 그리고 큰 교회에서는 목회자 사모가 나서지 않는 것이 고상해 보이지만 작은 교회에서는 안 거들어주면 거만하다 그럽니다. 그러니 가서 본당도 쓸고, 마당도 쓸고, 설거지도 하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해야 됩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될 사람들 말이죠, 좋은 꿈 많이 꾸세요. 그러나 고난의 세월에 눈물 밥을 좀 먹어야 됩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 다 하면서 언제 기도를 합니까? 그러니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알잖아요?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신앙생활 신실히 하는 것 같고 그러더니 애 둘만 낳으면 나가떨어집니다. 그냥 ‘날 잡아 잡숴.’에요. ‘하나님 날 마음대로 하라고. 나 이것 밖에 살 수 없다.’ 요런 배짱이에요. 그런 배짱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일날 은혜를 받을 수 있겠어요? 왜? 어차피 안 살건대 어차피 ‘그래, 너는 해라, 나는 이 이상 못 산다. 날 잡아 잡숴.’ “이것 고쳐야 된다.” ‘하나님, 냅둬요. 난 어쩔 수 없어. 어쩔 수가 없네.’ 이러고 사는 거죠.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거죠. 제가 얘기 하는 게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는 환경 순응형의 사람이 되면 안 돼요. 그러니깐 아예 ‘환경이 나를 도와줘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도와줄 것이다.’ 꿈 깨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각오를 해요. 환경은 끊임없이 우리로 기도하지 못하게 방해할 것이다. 환경은 끊임없이 우리가 진리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다. 그렇게 아예 계산에 넣고 매달려야 돼요.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거죠. 목회자의 아내가 될 사람들이 기도해야지, 기도 안하면 목회하고 나서 기도한다고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더 못합니다.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 신학교 다닐 때 기도하던 사람이 목사 된 다음에도 기도해요. 그리고 전도사 때 기도하던 사람이 목사 되었어도 기도하지 검은 가운 뒤집어쓴다고 무슨 신비적인 마력이 나오는 게 아냐. 그래서 나 안 입고 다니잖아요. 거기 뭐가 있을까? 생각할까봐 빌려 줄 테니까 써 봐요. 뭐가 나오나 그거 둘러쓴다고 해서 베트맨 되는 것 아니야.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에.
그런데 아주 환경에 길들여지는 거예요. 환경에 길들여지면 그 다음 단계가 환경에 대항을 하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면 뛰쳐나가는 거예요. 얼마나 고난이 심하면. 그걸 알아야 돼요. 도대체 목회를 하기 위해 길을 들어선 사람들이 사모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사람들이 하루에 단 두 시간 세 시간도 기도를 안 하고 앞으로 무슨 목회를 하려고 그래요? 소명 아니에요. 왜 결혼을 했어요? 남편 혼자 걸어가게 내버려두지. 애들, 애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몸이 약해서, 몸 안 약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새벽 시간에 드러누웠을 때 새벽에 눈 딱 떴을 때 아이고 왜 눈 이제 떴을까?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적 없어요. 한 시간만 더 잤으면....... 늘 그랬어요. 싸워야 되는 거예요. 애기가 울면 들쳐 업고 나와요. 낮에 도저히 기도할 시간 없으면 코피를 씻으면서 밤새워서 기도해야 돼요. 죽기까지 주를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 추상적인 용어가 아니에요. 실제 삶에서 주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죽기까지, 죽기까지, 죽기까지, 뭘 죽기까지, 언제? 그렇지요. 늙으면 죽지요. 그렇게 살아서 되겠냐고요.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19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쌍둥이를 얼마나 낳았는지 난 모르지만 하나씩 낳았다 그러면 19년을 낳자마자 임신하고 낳자마자 임신하고, 오죽했으면 웨슬리가 자기 전기에서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나는 철들면서부터 우리 엄마가 배 안 부른 것을 본적이 없다.” 그랬어요. 그러고 19명을 낳았어요. 매년 들어섰어도 20년이 걸린 것이고 1년에 한번씩 걸러서 들어섰으면 40년 동안 임신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19명을 기른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거 고아원도 아니고 말이에요. 어떻게 19명을 쭉 눕혀놓고 재운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거 세려고 해도 한참 걸려요. 여러분도 그런 자녀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환경은 타협을 하면 앉으라고 그러고, 그 다음에 앉으면 드러누워라 그러고, 드러누우면 아예 죽어버리라고 말한단 말이죠, 신앙적으로. 무얼 하겠어요?
여러분, 남편이 이 다음에 목회할 때 환난이 언제 와요? 알 수가 있나? 이런 때만 오겠죠. 애들 다 키워 놓고 건강할 때 그 때만 오겠죠. 기도할 시간 충분할 때 그때 시련이 오나요? 기도할 각오가 서 있을 때 그때 기다렸다가 시련이 오나요? 자기의 마음의 상태와는 상관이 없어요. 아무 때나 시험이 와요. 아무 때나 기도해야 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온다고요. 그런데 환경 하나에 매달려서 그것 어떻게 좀 열릴 길이 없나? 뭘 봅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제가 사실은 참 늘 마음에 품고 있던 게 결심이 약한 것이 하나님 앞에 늘 죄송스러웠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도사 시절에 그 교회에서 한 8년 있었는데 정말 호되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교회당까지(교회 안에 몇 년 있었지만)거리가 막 뛰어오면 한 5분정도, 걸어오면 한 10분정도 걸릴 정도의 거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습니다. 하여튼 한가하고 설렁설렁 걸어 다니는 그런 인생을 살 기회가 허락이 안 되었어요, 이상하게. 그래서 직장 다닐 때는 직장 다니느라 그랬죠. 또 신학교 다닐 때는 신학교 다니느라 그랬죠. 얼마나 고달픈지 몰라요.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야간 신학교를 다니고 끝나고 집에 오면 12시고 씻고 들어 누우면 1시입니다. 그런데도 4시 20분에 일어나야 돼요. 왜? 일어나서 교회당에 불을 피워야 된단 말이죠. 불도 이렇게 스위치 누르면 켜는 불 만들어 놓으면 얼마나 좋아요? 교회 돈도 있는데, 아 이 목사님은 완전히 복고풍이에요. 연탄도 안 된다고 그러고 조개탄도 안 된다고 그러고, 전기도 안 된다고 그러고, 석유도 안 된다고 그러고, 장작을 때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장작 난로 6개의 난로가 있는데 거기다가 장작을 때고, 이제 장작에 불이 붙으면 석탄하고 나무의 중간에 갈탄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걸 집어넣고 불을 때는 건데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살다가 보면 피곤하니까 다 알잖아요 야간 신학교 다니고 들어오면 12시, 1시 되니까 4시쯤 되면 ‘아이고, 우리 김 전도사가 너무 고단한가 보구나.’ 그러고 한 번쯤 넘어가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뭐 알짤 없습니다. 10분전까지 안 오면 따르릉 전화가 오는 겁니다. 하여튼 그게 악마의 소리같이 들렸어요. 알짤 없어요. 그 전화도 혹시 못 듣거나 혹은 무슨 문제가 생겨서 연락이 불통되어서 못 나가면 그 수요일 날은 죽는 날입니다. 불러놓고 “야 임마, 너 똑바로 해.” 이렇게 말하면 좋을 텐데 아 이 노인네가 말이죠, 수요예배 광고 시간에 얘길 하는 거예요. “오늘 새벽에 김 전도사 새벽기도 안 나오고 뭐하고 있었어? 늙은 할아버지 목사는 추운데 호호 불면서 왔는데 젊은 놈은 가서 퍼질러 자고.” 이러니 이건 완전 미사일 공격이에요. 이게 언제 쏟아질지 몰라요. 차라리 가는 게 낫지. 완전히 떡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교인들이 가면서 전부다 인사를 하는 거예요. “아이고, 전도사님 어떻게 그래 새벽기도를 못 나오셨어요?” 완전히 이거는 망신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떡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 사랑해서도 새벽기도 다녔지만 내가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새벽기도 다닌 적도 많아요. 요즘 내가 그러잖아요. 난 못 봐요. 박 성원 형제도 여기 있지만 새벽기도 시간에 누군가가 교회당 안에서 자고 있다는 걸 못 봐요. 그때 배운 거예요. 새벽기도 시간에 누군가가 교회당 안에서 자고 있다는 걸 못 봐요. 얼마나 나쁜 버릇이 잘 전염이 됩니까?
그런데 환경을 이기려고 하는 강인함 없이는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죽어도 기도하다가 죽는다.’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지 않으면 기도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의 일이라고 하는 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기도의 세계 속에서 주님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기도의 세계 속에서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셔야만 됩니다. 이렇게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남편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압니다. 그리고 어느 때가 말을 해야 될 때인지 침묵해야 될 때인지를 압니다. 어느 때가 방법을 찾아 나서서 행동을 취해야 될 때인지를 알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될 때인지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것 없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서는 교회가 교회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미숙한 목회자, 그 사람은 비유를 하자면 운전을 못하는 운전수와 같고, 영적으로 미숙한 목회자의 아내는 갈 길도 모르면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하고 똑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게 참 문제죠. 교회에서 새벽기도 같은 때 가장 간절하게 기도가 터져 나와서 아버지 앞에 쏟아놓는 사람이 목회자나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요즘 은혜 받은 평신도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뭐가 잘 안되는 거예요. 기억해요, 여러분 요즘 기도 안하고 자꾸 꾀부리고 그러면 편합니다. 뱃살도 좀 늘어나고 그리고 땀도 안 흘립니다. 눈물 흘릴 일도 별로 없지요. 그런데 나중에 목회 현장에 들어서서 진짜 치열하게 살 빠지고 피눈물 나올 날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우리에게 원하는 만큼의 기도의 분량을 요구하신단 말이죠. 기억해야 돼요.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 성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는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는 기도의 땀과 눈물을 받으신 후에야 비로소 그 아들의 보혈도 받으셨습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목회자의 아내 아닌 사람들도 많이 왔으니 ‘아 우리는 예외구나.’ 뭘 예외에요? 뭐하려고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남편은 이른 아침 눈코 뜰 새 없이 돈 벌러 나갔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직장생활 합니다. 물론 그래도 기도해야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보냅니까? 물론 정신없이 보내겠죠. 제가 다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일에 시간을 쓰고 있습니까? 바쁘고 분주한 일에 시간을 다 써버립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어째 테이프가 잘린 것 같습니다. 여기서 끝나네요.)
3. 부부애와 인격적 결합
목회자인데 시골에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했답니다. 그래서 거기를 갔는데 국회의원들도 오고, 사업가도 오고, 군인 중에서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들도 오고 다양한 사람들이 왔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오래간만에 만나서 좀 어색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사회자가 제안을 했답니다. “오늘 동창회를 하는데 우리 사회적인 지위 그런 것 인정해주지 말자. 사장님, 회장님, 장군님, 의원님 그런 것 하지 말고 우리 옛날 초등학교 때로 돌아갑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 좋다.” 그랬대요. 그래 어떻게 돌아갈 것이냐? 멍하니 사람들이 지켜보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자기 친구한테 그랬대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야, 이 호식이 너 개새끼 아냐? 야, 이 새끼 너 오래간만이다. 야, 이 개새끼 얼마만이냐?” 그 다음서부터 다 개새끼가 된 거예요. “저 새끼 저거” “이 새끼, 너 옛날에 1학년 때 생각나 새끼야? 너 개새끼.” 그런데 자기가 목사인줄도 아는데 목산데 목사한테 “너 이 개새끼 너 목사라며?” 그런데 처음에는 이상하더니 그날 밤 동창회가 최고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양반이 하는 얘기가 “아, 그 개새끼들의 동창회 끝내줬습니다.” 자기는 너무너무 행복하더라는 거예요.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그렇게 마음을 터놓고 흔쾌하게 웃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 목사가 어딜 가서 개새끼 소리를 듣겠어요? 교회가 큰 시험 들기 전에 어딜 가서 듣겠어요? 그런데 결국 그 얘기를 들으면서 여러분 무얼 느끼십니까?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소위 얘기하는 고독을 생각하게 됩니다. 고독에 대해서.
목회자는 말이죠, 개인의 사적인 생활과 공적인 생활의 모습, 여러분은 목회자의 영성이 훌륭하다, 라고 하는 척도를 어디에다 두십니까? 기도 많이 하는 것, 그것 굉장히 중요해요 그것 보면 알 수 있겠죠. 말씀을 깊이 쪼갠다, 거기서도 드러나겠죠. 그리고 뭔가 끓어오르는 열정이 있다, 물론 그렇겠죠. 텅 빈 사람한테서 그 열정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럴 때 그런 기준도 없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 사적인 생활과 공적인 생활의 갭이 작으면 작을수록 그 사람의 영성은 순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적인 생활과 공적인 생활이 하나도 갭이 없을 수는 없어요. 그런 사람은 예수님 제외하고는 아마 거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되는데 그런데 갭이 조금씩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갭이 높을 수 있죠. 그래서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깁니다만 설교가 은혜롭게 끝나고 교인들은 눈물 흠뻑 흘리고 축도 받고 돌아가는데 사모님이 사택에서 이불하고 베게를 끌고 나오더래요. 그래서 당신 어디 가냐고 그러니까 아, 강대에서 자야 되겠다고 당신 여기만 올라가면 너무 좋은 사람이 되니까 우리 여기서 살자 그러더래요. 그런 갭이 없을 수는 없지요. 있는데 그러다가 보니까 무슨 문제가 일어 나냐 하면 그것도 또 어느 정도는 필요해요. 예를 들어봅시다.
제가 한 교회를 이렇게 목회를 하는데 아 내가 이렇게 영적인 관리를 잘못해서 그런지 마음에 어려운 일들이 많아서 낙심이 됩니다. 그럴 때 성도가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 집 큰일 났습니다. 이것도 안 될 것 같고 이것도 안 될 것 같고 너무 힘들어요.” 그럴 때 목회자가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이제 죽는 것 밖에 길이 없겠네요.” 그러면 목회가 되겠느냐 말이죠. 자기는 마음속에 인생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곤고해도 성도가 그렇게 얘기하면 “아, 그러면 안 된다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힘을 내라고 성경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피곤치 않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어서십시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지 될 것 아니에요? 그게 위선이에요? 그건 위선이 아니라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거죠. 그죠? 그러다가 보니까 정말 자기를 온전히 다 인간적으로 자기를 다 노출하는 것이 허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되겠습니까? 안되거든요. 그러다가 보니까 어떤 독특한 지도자로서의 외로움이 있는 거예요. 지금은 다 이름도 잊어버렸어요.
(예화)옛날 프랑스에 아주 날리던 유명한 배우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얼마나 콧대가 높은지 사교계의 거물들도 춤 한번 추지 못했던 그런 여자였는데 어느 날 그 여자의 스캔들이 지상에 폭로되었어요. 연인이 누군가 하면 우리나라로 하자면 중학교정도 밖에 못나온 아주 못생기고 돈 없는 트럭 운전수였습니다. 왜 그렇게 미모의 배우가 그 사람하고 사랑에 빠졌냐? 간단해요. 이 사람이 전화를 걸었어요, 감히. 전화를 걸었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자기의 미모에 열광하는 팬들은 많았지만 그렇게 따뜻한 목소리로 자기에게 이야기를 걸어온 사람은 그 남자가 최초였다는 거예요.
그러한 외로움들이 목회자들의 세계에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드러누워 침 뱉는 것 같아 좀 죄송한데 저도 직접 목격은 못했습니다만 제가 옛날에 신학교에 있을 때 그 학교에 고스톱을 잘 치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물론 목사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 치냐 하면 연수를 가면 일반학과 교수들하고 고스톱을 치는데 싹 땁니다. 그래가지고 아침에 일어나서 깨평 다 나눠줍니다. 의리는 있어요. 갈 때 차비 하라고 다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재미있는 거예요. 자기는 총동창회에 꼭 간대요. 왜 그러냐니까 거기 가면 기수별로 모이는데 그때 회포를 좀 푼대요. 좋은 예죠. 그런데 회포 푸는 방법이 뭐냐면 그림을 보면서 회포를 푸는 거야. 둘러 앉아가지고 그러면서 거기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야 이제. 그 목사들이 돈 따가지고 갖고 가서 교회 건축을 하겠어요? 뭘 하겠어요? 거기서 그냥 밤새도록 밤을 새워 그러는 거예요.
그게 결국은 뭐냐면 목회자들은 그런 약간은 어떤 면에서 이중적이랄까? 이중적이라면 표현이 너무 뭐하지만 자기를 있는 그대로 확 드러낼 수 있는 대상들이 없단 말이죠, 교회 안에서. 그런데 또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말이죠, 그런 아주 독특한 정서의 세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이죠. 그것을 그 아내가 잘 이해를 해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저는 목회자의 아내가 되려면 인간 마음의 책을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되는 거예요. 반은 심리학자 비슷하게 돼야 돼요. 그래야지만 지혜로운 아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돼요. 목회자의 아내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의 정서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결혼 생활에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인간의 마음을 읽도록 하십시오. 남자들의 정서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란 말이죠. 그런데 결국 말이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서도 그런 것이란 말이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 부부는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사랑만으로는. 미갈을 보십시오. 다윗과 결혼한 여자 미갈 말이죠. 왜 결혼 했어요? 좋아했어요.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고요, 그런데 그 결혼이 얼마나 불행했습니까?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가, 우리 유행가에는 사랑하면 저 세상 끝까지 험한 파도를 넘어~ 다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더욱이 이 세상에서 단지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인 일에 들어선 사람들은 단지 그런 평범한 공식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여러분들이 교회 역사를 읽어보면 때때로 아주 뛰어난 영적인 인물, 그리고 교회에 영향을 아주 많이 끼쳤던 설교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자들, 그 뛰어난 영적인 인물 가운데 목회도 성공하고 부부와의 결혼생활에도 성공한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너무나 소수에요. 대부분의 사람은 둘 다 실패했고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결혼에 실패했지만 그러나 목회에 성공을 했고 극소수의 사람들은 둘 다 성공 했습니다.
여러분, 요한 웨슬리 하면 18세기 영국을 타락의 늪에서 건져낸 교회 역사에 위대한 부흥사입니다. 그리고 설교자입니다. 영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결혼 생활은 너무나 불우했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이 바아제일 이라고 하는 여자였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회심했는지가 의심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이 힘들게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머리가 허연 노인네를 집에 들어오자마자 머리채를 붙들고 방안을 한바퀴씩 돌아가지고 한 줌씩 머리카락을 뽑아 놓았대요. 요즘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그 설교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녹아졌잖아요? 그런데 아내는 별게에요. 별개라고요. 그걸 기억을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특별한 무엇이 필요하단 말이죠. 에이든 토저 라고 하는 하나님을 추구함이라는 책을 쓰신 분도 역시 결혼생활이 불우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회자는 38년 동안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불과 30~40명 모이던 교회에 부임을 해서 피눈물 나게 목회를 해서 결국 3000여명이 모이는 대교회로 만들어 놓고 은퇴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불우했는데도 목회에 있어서는 성공했어요. 10년을 넘게 집에서 안 주무시고 교회에서 주무셨다니까 결혼생활이 성공이라고는 말할 수 없죠.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부부만 알죠. 그러나 이건 워낙 희귀한 예에 속한단 말이죠. 결혼생활이 부부관계에 실패하고도 시험에 들지 않고 훌륭하게 목회를 하는 경우는 아주 희귀한 경우에 해당된단 말이죠. 대부분 결혼관계가 깨어지면 걷잡을 수 없는 시험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악에 빠진단 말이죠. 그래서 결국은 파멸로 떨어진단 말이죠. 그걸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공했던 부부들 가운데는 어떤 사람들이 있냐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르틴 루터와 수녀원에서 도망쳤던 여자 폰보라, 그리고 존 캘빈과 이델레뜨라고 하는 그 여인, 그리고 그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라피에르폰트 부인, 스펄전과 수산나, 마틴 로이드 존스와 베다니 존스 여사 이런 사람이 교회 상에서 아니 물론 남편이 별로 하는 것 없이 부부사이만 열렬했던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은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별로 없고 자기네끼리 잘 살다 죽었는데 그게 무슨 자랑꺼리에요? 그런데 남편이 무언가 좀 교회역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영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 중에서 부부관계에도 성공한 사람들의 예가 이런 경우란 말이죠. 그런데 마르틴 루터 폰보라, 이델레뜨 요한 캘빈, 그 다음에 베다니 존스와 로이드 존스, 사라피에르폰트와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과 수잔나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남편이 만난 하나님을 아내도 만났어요. 이게 핵심이에요. 남편이 경험한 영적변화와 동일한 변화를 자신도 경험한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살 수 있었어요.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먼저 경험하고 후에 사라피에르폰트가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사라피에르폰트는 아예 어렸을 때부터 자랄 때 워낙 청교도적이고 신앙이 훌륭한 집안에서 자랐어요. 그러다가 이제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변화 받으면서 그 후에 자기도 놀라운 변화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의 그 심오한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 거예요. 캘빈과 이델레뜨도 마찬가지에요. 이델레뜨는 미망이었거든요. 과부하고 결혼을 했는데 아주 끔찍이 사랑했어요. 8년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훌륭한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에요. 그래서 그 여인이 죽을 때 남겨놓은 기도는 참 대단합니다. 신학적이에요. 죽을 때 말이죠, “여보 애들 잘 부탁해.” 그러니까 그렇게 밖에 못 살죠. 그게 아니야. “오, 영광스런 부활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여, 거룩한 신앙의 선조들의 아버지시여.” 이렇게 부르면서 마지막에 죽는단 말이죠. 칼빈의 세계가 얼마나 깊습니까? 그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감동을 받던 지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칼빈을 쫓아갈 수 없었겠지만 하여튼 그것을 이해 다시 풀어서 말할 수 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건 틀리잖아요. 그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잖아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죠.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편이 만난 하나님을 아내도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결합이 이루어진 거죠.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가 부흥이라는 책에서 무얼 이야기 했냐 하면 부흥을 함께 경험 해아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끔 와가지고 “목사님, 믿지 않는 형제와 결혼하면 안 될까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믿지 않으면 아직 형제가 아니에요. 말 같은 소릴 해야지. 그렇게 얘기 해봐야 소용없어요. 여러분, 신앙의 격차가 나도 정말 견디기 힘든데 신앙의 격차가 나도 견디기 힘든데, 영적인 수준에 격차가 있어도 견디기 힘든데 하물며 신앙이 있고 없는 사람인데 거기서 무슨 조화 점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요. 그것은 부부로서의 연합이나 어떤 것들이 가능하지 않아요. 쉽게 얘기하면 그냥 정신적이고 세속적인 사랑으로써는 결합이 가능한데 신앙적이고 영적인 결합은 불가능하잖아요. 그걸 뭘 자꾸 물어봐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얘기가 그거에요. 여기 목회자 되려는 사람도 있고 아내 되려는 사람도 있죠? 결혼을 잘 해요. 결혼 못 하면 일생이 주의 일 하다 죽는 게 아니라 가정 일 하다 죽어요. 주의 종이 되든지 뭐가 되든지 간에 그래서 결혼을 할 때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는가?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요. 더군다나 목회의 길에 들어서려는 사람에겐 의미가 없고 그럼 뭘 봐야 되냐? Real Christian 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그래서 목회를 할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진정한 소명을 받은 헌신자인가? 이걸 봐야 돼요. 그리고 결혼을 해야 된다, 이 얘기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입맛에 맞는 대로 우선 좋아하고 보자. 그렇게 하면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그런 식으로 결혼 하면 그런 결합을 이끌어 내는데 굉장한 어려움이 들어간다, 이 얘기죠. 혹시 그런 상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면 그런 것들을 같이 공유해야 된단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부부의 인격적인 결합이 가능하지 않단 말이죠.
목회자의 아내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그랬는데 그중에 하나는 기도였고 하나는 뭐냐면 남편과의 인격적인 결합을 굳게 하는 거예요. 쉽게 얘기해서 남편을 고독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돼요. 그 얘기는 그 앞에서 기쁨조 노릇하라는 게 아니에요. 다 늙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쁨조를 잘 하겠어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깊이 가장 잘 그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리고 함께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 동료처럼 함께 동역자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깊은 심성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이 얘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돼요. 무슨 얘긴 줄 알죠? 남편이 읽는 책은 될 수 있으면 빼놓지 말고 읽어 버릇을 해요. 그러면서 뒤를 쫓아와야 된다는 말이죠. 물론 자매가 훨씬 뛰어난 경우도 많지만, 그땐 또 함께 뒤처지면 안 되겠죠.
자, 우리 강의안 오래간만에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2페이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1페이지 맨 밑에 줄부터 보겠습니다. 못생긴 아내는 용서해도 목회자 부부가 인격적인 연합을 견고히 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을 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목회자의 아내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영악한 목회자의 아내는 많은데 지혜로운 사람은 너무 소수이고, 세속적인 사모는 많은데 정말 타락한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사모는 너무나 드물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세간에 나도는 우스개 소리로 못생긴 아내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미련한 아내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만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경고하는 목회자인 남편과 인격적인 결합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목회자에게 이 문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적어도 세 가지 책을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말씀의 책, 자연의 책, 인간 마음의 책입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자기를 매몰시키고 (거기 줄 치십시오) 허덕이는 대신에 이러한 책들을 더 잘 읽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더 잘 힘쓴다면 목회사역의 열매는 더 풍성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목회자인 남편과 인격적인 결합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중요한 비결 가운데 하나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필요를 나누는 것입니다. 늘 함께 사는 부부가 시간을 정해 놓고 순서를 갖는 것은 부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 시대를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남편이 읽는 책을 함께 읽으며 목회적이고 영적인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영적 생활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신앙에 있어서 남편의 제자가 되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알게 하십시오. 찰스 스펄전 목사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아내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내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인격적인 결합을 굳게 하고 영적인 유대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오후 설교할 본문이 결정되면 부인 수잔나가 주석들 중에서 본문에 관한 부분을 읽어줍니다. 평생 12000권이나 되는 장서를 소장하였던 스펄전이 그 많은 책들을 설교에 인용하고 응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수시로 서재에 머물며 인격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일을 수잔나는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는 남편에게 주석을 읽어주면서 스스로 많은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서재에 남편이 앉은 의자 곁에는 언제나 나를 위한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도움이 필요할 때 남편은 나를 거들어 줄 수 있겠소? 하고 정중히 요청하였습니다. 서재의 많은 책들에 둘러싸인 그는 꽃밭의 꿀벌과 같았습니다. 그 많은 책 중에서 어느 책 어느 부분이 필요한지 남편은 환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린 함께 성경을 연구하며 때로는 슬픔에 가득 찼으며 때론 기쁨에 넘쳐서 함께 눈물을 흘리곤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토요일 저녁 깊은 기도 속에서 설교할 내용을 마음에 불붙이는 일을 끝내고 마음속에서 설교가 형성되면 서재로 아내를 불러서 이튿날 전할 설교의 요약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시간이 수잔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튿날 그 교회의 수많은 회중들에게 줄 귀한 말씀의 성찬을 미리 맛보는 특권을 홀로 누리곤 하였습니다. 남편은 가끔 리차드 벡스터의 리폼더 패스트를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목사의 맡은 책임이 크거늘 어찌 불충분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가족을 섬기는 직분을 소홀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로서 우리의 행위를 올바르게 영위하고 있는가?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울었습니다. 남편도 나와 함께 울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어 울고 웃으며 살았습니다. 어느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남편은 주일 날 예배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아오는도다. 시편 110편 3절 말씀을 본문으로 정해놓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밤늦도록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곁을 지켜보던 나는 너무나 안타까워 그냥 주무시도록 권했습니다. 새벽에 일찍 깨워 드릴 터이니 주무시라고 권하자 새벽에 꼭 깨워달라고 부탁하시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새벽이 올 무렵이었습니다. 나는 깨어있었습니다. 남편은 꿈속에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110편 3절 바로 그 본문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중얼거리는 남편의 꿈속 설교를 하나하나 기억하기에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나는 그 설교를 두 번이나 듣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설교를 꿈에서 한 거예요. 참 하나님의 사람은 꿈 꿔봐야 알 수 있죠. 그렇죠? 잠꼬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렇게 하면서 했어요. 제가 보기에는 말이죠, 정말 이상적인 부부중의 한 사람이 이 스펄전과 아내였어요. 그런데 슬픔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두 사람 다 너무 병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수산나는 늘 몸이 약해서 늘 남편보다 먼저 죽을 것을 스스로 예감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골골하면서 80까지 산다고, 남편이 먼저 죽고 부인이 남편을 이별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죽을 때 남긴 유언이 참 놀랍죠. 스펄전이 마지막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 뭔지 아세요? “여보, 나는 그분과 함께 일생을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다오.” 그 말을 남기고 죽었어요.
얼마나 이상적인 결합인지 보세요. 우리들이 오늘날 이야기하는 부부간의 결합이나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할 때 너무 초점들이 세속적이란 말이죠. 함께 시간을 많이 가져라. 아니 어떻게 시간을 함께 많이 가져요? 그렇지 않아요? 뭐 여행을 다니십시오. 말은 누가 못해. 세계여행 좀 다녀오십시오. 누가 말은 못해. 한번 해봐요. 정신이 없는데 언제 여행 돌아다니고 그럴 시간이 있는가. 취미생활을 즐기십시오. 취미생활 같은 소리하네. 해보라고 그래요, 그게 쉬운가.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중심이 된 가운데 하나 된 영적인 결합의 끈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뭔가 하나님을 섬기는 그 방법 안에서 함께 즐거움을 찾고 유대를 찾는 그런 것들을 발견해야 되는데 결국은 두 사람 속에 공통된 마음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뭐?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며 살고 싶어 하는 소원이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결합은 결합이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여기서 얘기하는 아주 중요한 부부간의 신앙적인 결합의 조건이란 말이죠.
그러면서 이제 마귀가 교회를 쓰러뜨리기 위해 도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 인격적인 결합을 해체시켜 놓는 거예요. 어떡하든지 간에. 모든 부부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부부가 이런 공격과 위협을 받는 거예요. 팀라이 목사님이라고 가정사역을 전문으로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샌프란시스코를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기내식이 나오더래요. 그래서 기내식이 나와서 식사시간이 되어 먹으려고 했는데 옆에 사람은 ‘No, thank you" 그러면서 안 먹더래요. 왜 안 드시냐고 어디 불편하시냐고 목사니까 친절하게 물어봤죠. “금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너무 기뻐서 “아. 크리스천이시군요.” 그러니까 “아닙니다.” “누구십니까?” “사탄교 신자입니다.” “그런데 무슨 금식입니까?” 그러니까 “우리 온 교우들이 매주 화요일 금식을 하면서 목회자의 가정이 파괴되기를 우리 사탄에게 빈다.” 그 얘길 하더래요. 얼마나, 밥이 소화가 되었겠어요?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만큼 목회자의 가정을 파괴해버리는 것이 가장중요한 공격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하는 거죠. 성적인 타락은 다음에 나옵니다만 여기서 내리고자 하는 결론은 성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시발이 아니라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결과이냐? 인격적인 결합이 풀어진 마지막 종착역이 성적인 타락이에요. 그리고 더 마지막은 교회가 깨뜨려지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가 파괴되는 거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성적으로 타락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부부가 영적인 결합이 해체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평신도의 부부도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그런 결합이 해체되고 나면 그 다음에 타락으로 가는 것은 아주 쉬운 거예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 영적인 결합이 해체되는 것이 있죠.
제가 영화 중에서 안 보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의 절대로 안 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게 뭐냐면 멜로드라마입니다. 남녀가 나오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 이런 것들 있잖아요? 러브스토리, 초원의 빛 다 옛날에 본 영화입니다만 그런 종류 드라마 같은 것도 그런 것 나오잖아요? 그런 것 거의 안 봅니다. 거의 안 보는 게 아니라 눈에 띄면 돌려버립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트룰라이스, 다이하드, 람보 그런 영화입니다. 스케일 이 크고 완전히 폭탄의 불빛이 거의 그치지 않는 영화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왜 사람이 그러냐? 그런 애정영화를 안 보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의 집 사람이 없고 저 혼자 있을 때였습니다. 밤에 하도 잠이 안와서 거실에 나와서 TV를 틀었는데 외국영화 한 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목은 뭔지 기억이 안 나는데 한참 보는데 보면 알잖아요. 이게 날라리로 만든 영화인지 원작이 문학성이 있는지 그건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탄탄해요, 스토리가. 그런데 아주 쉽게 요약을 하자면 가정을 가진 아내와 젊은 청년의 어떤 로맨스에요. 그런데 쭉 끌어가는데 천박하게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을 막 설득하면서 끌어가요. 한참 영화를 보다가 거기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우린 또 한번 빠져들면 정신없거든요. 깊이 빠졌는데 막 그걸 보는 순간에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내가 결혼 했다는 사실이 잠깐 잊어지고 ‘나도 저런 사랑에 좀 빠져봤으면 하는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게 아니구나. 끄고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로는 한 편의 애정 영화나 한 편의 멜로드라마도 본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싸우는 것 같다가도 그 속에서 이상하게 이야기가 그런 쪽으로 가면 TV를 끄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슬며시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우리의 생각을 공격하면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먼저 우리의 지성 속에서 열어준다는 거죠.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에 이제 이상 속에 그리고 있는 여인과 자기 아내나 남편하고의 차이가 나타날 것 아니에요?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걷잡을 수 없이 이런 인격적인 관계가 파괴되어 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비교되기 시작하면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숙명처럼 알고 살아야 돼요. 뭐 어떡해? 바꿔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꼭 뒤에 덧붙여요. 안 바꿔줘도 버리지는 않겠습니다. 그 기도를 덧붙여야 될 필요가 있단 말이죠. 그렇게 숙명처럼 사는 거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결합이 일단 풀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다른 관계가 개입되는 것이 너무나 쉽단 말이죠.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회자는 대학부 사역을 했었는데 부인이 워낙 미모였어요. 미모였는데 그래도 결혼을 해서 5년인가 되었는데 남편하고 사이가 인격적인 결합이 해체된 상태에요. 교회 안에서 외톨박이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그때 그 목회자의 아내를 매우 불쌍히 여기는 -부목사인가, 교육 목사인가 그랬어요. - 대학부 한 형제가 다가와서 “사모님, 얼마나 힘드세요?” 그러고 정답게 손을 잡아 준 게 인연이 되어서 불행한 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인격적인 결합이 해체되고 나면 그 다음엔 얼마든지 다른 관계들이 들어온다는 것이죠. 더욱이 목회가 목회자의 아내에 대해서 자꾸 불만이 쌓이고 그 다음에 신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잘못된 방법으로 그것을 고치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고 심화되어 버리면 인격적인 결합이 풀어진 것이거든요. 둘이서는 못할 이야기가 없어야 돼요. 뭔가 접어둔 이야기가 있으면 그것으로 인격적인 결합은 처음엔 요만한 틈새가 벌어졌는데 거기를 째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이해 못한다고 그러죠. 결국은 이해 못하는 갭이 점점, 점점 커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을 한다고요. 거기 그 속에 타락한 감정들이 깃드는 것은 순간이에요.
자, 보십시오. 신앙이 자기를 붙들어 주지도 못해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겠어요? 베드로서를 보십시오. 결혼의 문제는 막 바로 하나님과의 기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어요. 부부간의 문제는. 그렇게 기도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결혼 생활에서 부부간의 관계가 그렇게 심각하게 손상을 입고 인격적인 결합자체가 깨져서 이제 서로 돌아앉으면 고독해지는 사이가 되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해지겠느냐고요?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야지 겨우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는데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붙들려 사는 것도 힘들어지고 그러면서 부부간에 그런 것도 깨어지고 더군다나 지도자로서 외로운 삶을 살고 이럴 때 자기 부인은 자기를 싫어해도 좋아하는 팬들이 많아요, 사역지에는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도 너무나 많고 그의 사생활을 한번 엿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가진 여성들이 너무나 많단 말이죠. 그래서 윌로우 크릿교회 빌하이벌스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는 설교를 마치고 나와서 자기에게 의식적으로 다가오는 미모의 여성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런 고백을 했어요. 그만큼 사람들이 많단 말이죠.
그런데 깨어지고 인격적인 결합들이 모두 해체된 상태에서 그런 질병과 같은 타락에 접어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거죠. 순간적으로 허물어 질수 있는 거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모으고 가정경제를 꾸려갈까 생각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어떡하면 우리들이 이 영적인 결합,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결합을, 인격적인 결합을 공고히 하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훨씬 가정은 덜 깨어질 것이라는 거죠.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부부의 가정도 결국 이 문제에 있어서 예외는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교계의 지도자가 두 분이 있는데 두 분 다 큰 교회를 목회하시던 분들입니다. 이름 대면 여러분들 거의 알 수 있는 분들이에요. 이 두 분의 취미가 뭐냐 하면 스피드 광입니다. 스피드도 우리는 아무리 한껏 내봐야 180km 이 정도에서 발발 떠는데 이 사람들은 200km 이상씩 밟아댑니다. 연세도 많은 분이에요. 그중에 한 분은 은퇴하셨어요. 12시 반에 “야, 나 여기 인천인데 금방 내려갈게.” 그러고 붕하고 밟아가지고 대구까지 내려갔는데 2시간 반인가 밖에 안 걸린다고 하니까 완전히 목숨 건 거죠. 그런데 그분들이 그렇게 고속도로를 뒤밟고 막 200km씩 다니면서 사고도 억수로 냈답니다. 교인들이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그래도 소용없답니다. 차가 크고 튼튼하니까 좀 안전할지는 몰라도 그래도 장사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들이 언제 그렇게 미친 듯이 질주하느냐? 밤, 언제 밤? 주일 밤이나 당회가 끝난 밤중에. 그게 뭐예요? 얼마나 싸우고 얼마나 스트레스가 밀려오면 그러겠느냐 말이죠. 그중에 한 분은 그래도 비교적 좀 안전해요. 뭐냐면 야밤에 고속도로 나갈 때 부인이 하도 목회를 오래하니까 알아, “여보, 갑시다.” “어디 가게요?” “드라이브나 좀 합시다.” 그러면 이게 완전히 죽음의 드라이브에요. 부인까지 옆에 싣고 200km로 말도 안하고 일자로 딱 그리고 그냥 밟는 거예요. 옆에서 목회자 아내는 기도만 하는 거예요. “주여, 살려만 주옵소서. 애들이 아직 어리옵나이다.” 기도하는 거예요. 그분이 한 분은 이제 은퇴를 하셨고, 그분이 부인하고 같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게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위험해요? 엄마, 아빠 둘 중에 한 사람만 죽어야지, 둘 다 죽으면 천해고아가 되잖아요? 그런데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가 없다. 쌓인다. 아내하고 뭔가 얘기가 안 통한다. 난 외롭다. 밤중에 아무도 몰라, 차번호도 안보이고 캄캄한 밤중에 새벽 1~2시 되어가지고 200km를 달렸습니다. 낯선 도시에 들어갔어요.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거기서. ‘오, 서울에 없는 주님 대전에 오시옵소서.’ 뭘 하겠어요?
우리나라에 여러분 아주 너무나 유명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외국에도 집회 많이 나가십니다.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니까 외국에서 집회를 마쳐도 한국에 들어오기가 싫더래요. 그래서 목요일 끝나고 입국을 해야 되는데 목사님이 안 오는 거예요, 토요일까지. 돈은 있고 그러니까 비행기 타고 이 도시 저 도시 다니면서 기웃거리면서 그렇게 방황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면 그 비슷한 그림이 그분하고 어울리질 않습니다. 그 교계의 거물이 부다페스트의 거리를 마치 집시처럼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바바리 하나 걸치고 땅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방황한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란 말이죠. 강단에 올라서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그분이 말 한마디 하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교계의 거물이 그렇게 시름에 잠겨서 이름도 알지 못하는 거리를 외로이 방황할 때 50%는 아내의 책임이라 이거죠. 그 여자 분은 그런 커다란 목회자의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었어요. 잘못 들어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으면 잘 들어섰으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든지. 남편이 그렇게 엄청난 일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고 거기에 자신을 매몰시키고 그런 어려운 세월을 보내는데 자기는 무슨 일인지 모르는데 목회 다 집어치우고 지방에 있는 대학교의 교수로 가 버렸어요. 그게 뭡니까? 그럴 것이면 왜 목회자 될 사람하고 결혼을 했어요? 물론 그 사람 얘길 들으면 그러겠죠. “당신이 우리 가정의 피나는 사정을 아냐?” 아, 피나는 사정이 아니라 물 나는 사정이라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면 하나님이 칭찬하시겠어요? 인간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해 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인간적으로 이해 받으려고 이 길 들어선 것입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거든요.
인격적인 결합이 풀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기느냐하면 굉장히 많이 성적인 타락으로 가게 됩니다. 성적인 타락. 성적인 타락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이 이제 잊지 말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목회자의 성적인 타락은 굉장히 생각보다 쉽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환경적으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개인주의화 된 세상에서 옛날처럼 대문만 열면 안방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정생활 하는 사람 없습니다. 이제는 저도 연립주택에 살지만 같은 동에 여섯 집이 사는데 내가 확실하게 아는 집은 -거기 이사간지 2년이 넘었어도- 세 집 밖에 없습니다. 그 세 집중에 한 집은 우리 집입니다. 그러니까 두 집 밖에 몰라요. 같이 걸어 나오면 ‘거기 사람들인가 보다.’ 하고 인사를 하지 1층에 있는 사람하고 3층인가 있는 사람하고 두 가정, 가본 적은 없고 그냥 알 뿐입니다. 나머지는 거의 모릅니다. 그런 오늘날에도 부인 혼자 누워 있는 방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하나는 의사고 하나는 목사입니다. 둘 다 '사‘자 돌림입니다. 한 사람은 육체의 질병을 고치러 들어가고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영혼의 질병을 고치러 갑니다. 의사는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요조숙녀라도 “다 벗으시오.” 그러면 병원에서 다 벗어야 됩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자존심이 강해서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않다가도 “다 털어놓으시오.” 그러면 그 앞에서 다 털어놓아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은 또 그런 목양의 관계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 속에서 의사야 신체적인 접촉으로 끝나지만 목회자와 목회자에게 돌봄을 받는 양떼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면 정상적인 목양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약장수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목회자와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은 누구에게 털어놓습니까? 절대적인 도움의 기도가 필요할 때 여러분들이 기도의 도움을 누구에게 요청합니까? 곤고하고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뭔가 중요한 선택을 해야 될 때 여러분들은 누구와 의논을 합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의문이 떠올랐을 때 의지하고 찾아갈 목회자가 없다면 여러분은 목자 잃은 양과 같습니다. 있어야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란 말이죠. 그만큼 목회자의 삶은 가정의 삶에 깊이 파고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피부를 맞대어야 되는 그런 사역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런단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기억해야 될 것은 나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나병에 걸릴 확률이 많듯이 이러한 많은 상처와 죄악들을 가지고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치료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오염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답시고 그 사람보다도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된단 말이죠. 그중에 하나가 이 성적인 타락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죠. 이 성적인 타락의 문제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에게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그러나 굉장히 심각하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어떤 의사들은 그런 권고를 합니다. 목회자부부가 성적인 타락에서 보호받기 위해서는 성생활이 원만해야 된다. 그것은 사실은 맞는 이야기에요. 성적으로 밸런스가 맞지 않고 트러블이 많은 부부는 그만큼 더 채워지지 않는 성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타락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죠.
그리고 통계에 의하면 이 지적인 활동을 많이 하고 육체적인 활동을 덜 하는 사람들이 성적인 욕구가 강하다는 거예요. 성적인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강하다는 거예요. 능력은 나중 문제고 욕구가 그렇게 강하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욕구가 강한데 그런 사람에 딱 해당되는 게 누구냐? 목회자에요. 걸음걸이도 살살 걷고 가만히 있어야 돼. 조용히 책을 본다든지 아니면 조용히 엎드려 기도를 한다든지 한곳에서 가만히 설교를 한다든지 그래야지 좋지, 사업가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 여러분 싫어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제가 금년에 집회 잘 안나가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죠, 그렇죠? 눈빛이 사랑스러워졌어요. ‘아, 오늘도 안 나가시는구나.’ 그런데 말이죠, 그러니까 목회자가 바로 그 부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스트레스 많이 받고 성적인 욕구도 있고 그런데 고것이 부부생활 속에서 밸런스가 잘 채워지면 되는데 그것이 잘 채워지기가 굉장히 어려운 게 뭐냐면 목회자의 아내들이 너무 바빠. 목회자의 아내들 중에서 저녁 때 조용히 눈썹 그리고 다리 딱 꼬고 “어서오세요.” 이럴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나 생각을 해보란 말이죠. 그러기엔 너무 곤고하고 바빠요. 금요일 날은 금요철야 가야지, 수요일 날은 수요예배 드려야지, 새벽엔 새벽예배 나와야지, 그러니까 늘 얼굴 보면 눈곱 떼기 바쁜 얼굴 밖에는 뭐 그렇게 매력에 푹 빠질 얼굴이 없어요. 그러니까 일에 매몰되다가 보면 굉장히 그러기가 힘들어지는 거예요. 저녁 때 목회자도 하루 종일 사역을 하고 피곤합니다. 목회자의 아내도 피곤하죠. 피곤하다는 말이 입에 붙어 있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목회자들입니다. “아, 피곤해.” “아, 피곤해.” 목회자의 아내도 “아유, 쉬고 싶어. 어디 새벽기도 없는 나라로 한번 갔으면” 매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언제 눈썹 그리고 이러고 앉아 있어요? 불가능하죠. 더군다나 또 목회자의 아내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매우 특수한 사람들 빼고는 그런 것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말하자면 혐오감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건한 삶을 살고 그래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한 집요하게 성적으로 매력을 발산해야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파생을 한단 말이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면 물론 부부간에 성생활이 원만하면, 원만해야 돼요 그리고 원만하면 분명히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그것 자체가 목회자의 성적인 타락에 안전한 방패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기가 늘 저녁마다 남편을 유혹했기 때문에 남편이 만족을 했고, 만족했기 때문에 남편은 어디 가서도 성적인 문제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무저갱과 같은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너무나 모르는 거예요.
실제로 그 사람은 크리스천은 아니에요. 넌크리스천인데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여러 여자와 아주 훌륭한 성생활을 만족하게 즐기면서 여러 해 동안 사는 걸 많이 봤어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게 인간이라면 목회자가 뭐 말라비틀어진 건데 그 사람도 똑같이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 한 분은 한 교단의 노회장까지 지내신 분이십니다. 20년 동안 이중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혼외로 낳은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 되는데도 아무도 이중생활의 비밀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타락할 수 없는 그런 것은 없어요. 세상 사람이 타락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그리스도인도 갈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 갈 수 있는 그 모든 타락의 경지에 모든 목회자도 동시에 이를 수 있단 말이죠. 어떻게 되면? 경건생활이 해체되어지고 부부의 인격적인 결합이 깨뜨려지고 나면 갈 데까지 가는 거란 말이죠. 이판사판 공사판 그러고 가는 거예요. 어디까지든지 갈 수 있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이제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들이 한번 교정해야 될 시각이 있어요. 이런 이야기들 아마 여러분 교회에서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성적인 트러블이 왜 생깁니까? 물론 신체적인 결함이나 정신적인 결함 때문에 생겨나는 성도착증 환자나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특수한 부부이고 평범한 부부들의 경우에는 아주 명백하고 쉬운 한 가지 원리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성적인 트러블이 생기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면 성생활은 잘 들으세요. 성생활은 봉사의 원리에 입각해야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죠, 그렇죠? 그러나 성경은 그걸 지지한단 말이죠. 고린도전서가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이 뭐냐면 남편 된 자와 아내 된 자들의 성적인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분방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명령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합의상 얼마간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는 남편은 윗방 쓰고 부인은 아랫방 쓰고, 남편은 교회에서 1000일 철야기도를 한다, 그러고 잡아도 어떻게 그렇게 무식하게 잡아요? 3일, 30일 하면 몰라. 1000일 철야기도래. 1000일 동안 자기 부인하고 잠자리 같이 안하는 것 아니에요? 그것은 신앙적인 열심이 아니라 패역이에요. 그게 뭡니까?1000일, 계산해 보니까 3년이야. 아이고, 왜 그렇게 유별을 떨어요? 그렇게 안 하고도 윗필드나 웨슬리나 이런 사람들은 훌륭하게 사역 잘 했어요. 어디서 이상한 걸, 그런 부부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부부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어요. ‘너 같은 것 하고는 3년간 같이 잠자리를 안 해도 난 넉넉히 살 수 있다.’ 이런 게 깔려있단 말이죠. 타락을 하고 안하고는 별개의 문제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그런데 그런 문제 때문에 봉사의 원리라는 거예요. 논리전개를 지금 시간이 없어 못하겠어요. 결론만 내릴게요. 이거예요. 그러니까 부부 중 한 쪽이 성생활을 하고자 하는 의사 표시를 했을 때 아주 굉장히 중대한 이유가 있기 전에는 단지 싫다는 이유만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게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거죠. 그래야만 안전하다는 거죠. 왜? 성적인 타락의 문제는 성생활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억지로 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보다는 성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아내나 남편에 의해서 채워지지 않을 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의사 표시를 하면 아주 명백하게 무슨 커다란 문제가 있는 이외에는 최대한 거기에 응해 주려고 하는 의지와 마음을 가져야 된단 말이에요.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고,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의사 표시를 싫다는 말 한마디로 딱 잘라버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이거죠. 이유가 “왜? 왜 싫어?” “싫으니까 싫지.” 그러면서 딱 잘라버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이거죠, 결론적으로.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뭐 그런 문제까지 성경을 따라야 합니까? 어느 나라 사람이 질문하는 겁니까? 그럼 뭘 따라야 됩니까?
열심 있는 목회자의 아내들이 인격적인 결합을 해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는 남편은 아주 내성적이고 부인은 외향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늘 나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돌아 다니면서 아이들도 있고 하니까 윗집에 사는 집사님한테 늘 아이들을 맡기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사택에 자주 들어오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 목회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다음에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물론 목회자의 책임이지요. 그러나 그런 원인 제공을 해준 당사자가 목회자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는 거죠.
여태까지는 목회자의 타락을 이야기 했는데 목회자의 아내의 타락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들어본 적이 별로 없죠. 왜? 그거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타락은 당장 소문이 나고 교회를 떠나느냐 남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가 되지만 목회자의 아내의 타락은 목회자 자신을 교회가 내보내려고 마음먹지 않는 한 묻어두려고 한단 말이죠. 그러나 이 문제도 상당히 위험한 수준에 와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이제는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인 문제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수많은 정보들이 저에게 들어옵니다. 책을 써내고 나서는 특별히 상담이나 이런 전화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정말 이 자리에서 입에 내놓을 수 없는 험한 생활을 겪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전 그러면서 목회자들의 생활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가지면서 정말 이 땅에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은 평신도들이 아니라 목자들이다 하는 느낌을 너무나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건강하고 훌륭하게 교회를 이끌어가고 가정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의 이 문제는 소수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두 사람 안에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기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즉각적으로 교회에 영향을 주고 또 양떼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단 말이죠.
결국 제가 알고 있는 자매 한 사람은 중년 부인이었습니다. 물론 목회자의 부인은 아닙니다. 그런데 신학을 하겠다고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남편하고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자기가 교회에서 가르치던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너무나 불쌍하고 측은하니까 늘 돌봐주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자기 집에까지 와서 거처하도록 피난처를 제공했죠. 그 형제도 역시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형제였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해서 아이들까지 중 고등학교 다니는데 결국 자기 아들같이 생각하던 고등학생과 같이 동침을 하고 선을 넘었습니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없는데 상상외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인간자신이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만약에 그 부인이 남편과 견고한 신앙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유지하고 원만한 가정에서 좋게 남편과 함께 유대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정말 훌륭하게 아들과 같이 대해주고 좋은 신앙으로 양육해줘서 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폭력을 받고 이리저리 헤매는 그 청년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해 줄 때는 그런 삶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봉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은 부부의 결합이 깨뜨려지니까 거기에 누군가의 결합이 들어오게 되고 들어오게 되니까 그 결합은 즉시 정신적인 결합으로 이어지게 되고, 정신적인 결합은 결국 성적인 결합을 가져온단 말이죠. 그래서 결국 두 사람 다 불행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 떨어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불행한 일들이 결국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부부간의 영적인 결합을, 성적인 결합을 견고히 하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한 사람들이 많은지 압니까? 저는 이 문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앙케이트나 통계조사를 잘 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니까 그렇지 않겠지만 결혼한 부인 가운데 10명중 2명이 결혼해서도 계속해서 자위행위를 합니다. 남편들도 상당히 많은 숫자가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조금만 지혜롭고 조금만 성경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찾아가서 자기를 양보하면 서로 상대방을 그렇게 범죄 하지 않게 하고 살아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바보같이 미련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파괴하고 결국은 그런 가정의 파괴의 영향이 목회에까지 영향이 오도록 만들어주는 무책임한 삶을 사느냔 말이죠. 모두 리차드 벡스터가 말한 바와 같이 무지는 거의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해야 됩니다. 그리고 삶을 바꾸어야 됩니다. 그러면 상당히 많은 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텐데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사단이 판치면서 우리들을 점점 어두움 속으로 끌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냔 말이죠.
그래서 이런 타락의 문제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러니까 미국을 특별히 중심으로 요새 새로운 유행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 유행이 뭐냐면 털어놓기라는 유행이에요. 요즘 그런 책들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책 서문에 밝힙니다. “나는 성적으로 타락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쓴다. 나는 도와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나오죠. 참 그 사람들은 정직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거의 한 사람도 그런 사람 못 봤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나라 사람들은 남녀가 그런 타락에 빠져도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는 그래도 목회자가 그러면 ‘있을 수 없다. 두 번 다시 볼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한국에서도 점점, 점점 분위기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언젠가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미국에서 일어났던 젊은이들의 집회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서 한국에서 여러분 이름만 대면 다 잘 아는 유명한 복음송가 작곡가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집회 시간에 나와서 자기가 성적으로 오랫동안 범죄 한 것을 모두 털어놓고 눈물로 참회했다는 거죠. 그래서 그 목사님 하신 말씀이 “아, 그 형제 거기서 고침 받았다.” 는 거죠. 난 순간적으로 ‘아니다.’
성적인 타락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타락도 어떤 종류의 타락인가 구별해야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럴 수 있습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과 우연히 한번 솟아오르는 정욕 때문에 딱 한번 관계를 맺고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런 경우, 교회 안의 사람들과 똑같은 경우, 그리고 한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 경우, 그리고 여러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 경우 다 다른 것이란 거죠.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거예요. 일단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한 번 그런 범죄에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지속적으로 될 가능성이 많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지속적으로 되게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죄가 쌓이면서 이 속에 경향성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경향성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예화)실제로 제가 어느 신학교에 다니는 형제 하나를 상담했는데 자매가 아주 똑똑한 자매였습니다. 그러니까 수능시험인가 학력고사인가 300점을 맞았다고 하니까 하여튼 똑똑한 급에 속합니다. 뜻이 있어서 신학교에 들어온 거죠. 이 형제는 300개까지는 못 맞았겠지만 멍해 보이긴 하더니만 그래서 하여튼 만났죠. 만났는데 결국은 그것도 이상하죠. 그 멀쩡한 사람이 왜 그래요? 바다를 보여 달라고 하더래요. 바다를 보려면 자기 혼자 가서 보지 왜 남학생한테 보여 달라고 해? 여러분, 우리가 바다를 보려면 서해바다 안 가고 동해바다나 남해바다 가려면 하루 지나야 가잖아요? 가가지고 차가 끊어지고 밤을 지내고 넘지 못할 선을 넘었습니다. 관계가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관계가 깊어지게 되면서 말하자면 돌이켜서야 되는데 돌이켜서야 되는데 하는데 막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무너지니까 엄청난 외로움과 두려움 같은 것들이 엄습하는 거죠. 둘의 결합이 죄 속에서도 견고하게 되는 거죠. 결국은 이 자매가 정신 이상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형제가 얘기하는 게 그거예요. 자기는 어떻게 하든지 이 어려움 속에서 헤어 나와서 아름다운 종지부를 찍고 싶었는데 자매가 너무 보고 싶다고 그래 가지고 만나자고 그러면 그 순진하고 착하던 자매가 자기 손을 이끌고 자기는 가기 싫은데 여관으로 끌고 들어가더라는 거죠.
그것이 바로 간단히 해결이 안 되는 문제라는 거죠. 이 속에서 죄가 누적되면 어떤 강한 경향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이 범죄든지 범죄가 아니든지 성적인 탐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젊은이들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법이 지배하는 것 아닙니까? 그 속에서 생겨난 그 법은 한번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진실하게 몸부림치며 기도한다고 해서 뿌리 뽑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어요. 과거, 현재, 미래 엄밀한 의미에선 우리의 죄는 우리가 고백하지 않아도 다 용서하신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교리가 진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해나가는데 있어서 막혀진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참회하고 뉘우쳐야 돼요. 그런데 문제는 참회하고 뉘우치는 진실한 회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즉시 그렇게 회개하는 그 순간 그 눈물이 즉시 우리 속에 뿌리 박혔던 오랜 동안 형성된 이 죄악의 법들을 모두 드러내어서 우리를 거기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해주느냐? 그건 아니에요. 그것은 그렇게 쉽게 끝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물론 그런 참회와 결정적인 회개가 필요해요. 그러나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오랫동안 쌓였던 이 죄악 된 경향성들이 씨를 말리는 일들이 동반되어야 된다는 거죠. 이걸 위해서는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자기를 거룩하게 채워서 완전히 그 죄가 자기 속에서 완전히 거의 소멸되어 버리게 되는 거룩함의 과정들이 필요하단 말이죠. 그런 거룩함의 과정들이 눈물 한 번 흘리고, 울고불고 데굴데굴 구르고 기도하는 것으로 모두 성취가 된단 말이에요?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그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주위에서 한 번 보십시오. 저는 타락한 목회자들은 많이 만났지만 회복된 목회자들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만났어요. 10년 후에 만나도 10년 전에 우울했던 그 얼굴을 그냥 가지고 있어요. 그만큼 무서운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무언가 이 속에서 우리들이 지혜로워지는 것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이 범죄는 많이 행해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면 세상은 자꾸 우리에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계속 가르치고 세뇌시키는 동안에 율법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죄의 엄중성에 대한 진지함을 자꾸 잊어버리고 희석되어 버려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그 범죄에 빠져서 고통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단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커다란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작은데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회자의 아내가 된다면 여러분들이 중요하게 해야 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자녀를 기르고, 그리고 가정일 하는 건 누구나 하는 거잖아요? 목회자의 아내라고 하는 길을 선택했을 때 여러분들은 밥하고 빨래하는 것 생각하면서 이 길 들어서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죠? 그것을 들어서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 저는 사모는 싫어요. 사택에서 밥하는 건 싫어요. 식당에서 하는 건 좋아도.” 그런 식으로 기도하진 않았을 거란 말이죠. 뭔가 다른 삶을 생각하면서 결단했을 것 아니에요? 다른 삶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고유한 직무에 충실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남편인 목회자와의 인격적인 결합을 굳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사명 중에 한 가지입니다. 그것을 왜 안합니까? 안 한다, 라기 보다도 그 일을 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찮게 생각합니까?
제 말씀은 이겁니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분의 고유한 직무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목회자든 목회자의 아내든 나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고유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설 수 없는 자리,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 고유한 사명입니다. 목회자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람, 자기를 대신 해서 누가 거기 설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목회자의 아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정신적인 공황의 상태가 될 때 그것을 메워주고 중화시켜 주어서 정상적인 정서의 세계로 바꾸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격적인 결합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목회자의 아내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이 거기에 설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죠. 다른 사람이 거기에 서면 가정은 무너지고 교회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해도 되는 그 일에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면서 자기가 서야 될 그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어요. 그리고 남편은 늘 누군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다 외로운 목회자의 내면의 세계와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성도의 마음이 만나면 언제든지 최악의 상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에요. 교회가 깨끗한 곳이 아니라 가장 추접스럽고 더러운 곳이 교회입니다. 죄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은혜에 잠길 때는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껍질 벗기고 나면 그 상처, 그 더러움, 그 옛날에 타락한 경향 다 쏟아져 나와서 교회가 전체적으로 개펄 밭과 같이 되어버리는 그렇게 부패할 수 있는 곳이 교회란 말입니다. 세상에 볼 수 있는 죄악 가운데 교회에서 못 보는 죄악이 뭐가 있습니까? 교회 안에 얼마나 귀신이 많은가 생각해 보란 말이죠. 신앙생활 올바르게 하지 않을 때 교회에 얼마나 귀신이 많은가 여자 좋아하는 귀신, 돈 좋아 하는 귀신, 놀기 좋아하는 귀신, 온갖 잡것들이 다 있지 않아요? 그런 속에서 목회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올바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고유한 일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자기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과감하게 자기를 통해서 지체들이 자기의 등을 밟고 올라가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길을 열어주고 내어주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야지만 교회는 교회되고 목회자의 가정은 목회자의 가정대로 더 견실해지지 않겠냔 말이죠.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목회자의 직무는 점점 과중해지죠. 그러면서 반대의 삼각형을 그려야 된다는 말이죠. 목회자의 경우에는 점점, 점점, 점점 시간이 흘러갈수록 교회 일에 대해서 신경을 더 많이 써야 되고,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가 커갈수록 점점, 점점, 점점 더 사역의 범위의 폭이 좁아져야 된단 말이죠. 남편은 더 넓어져야 되고. 그럴 것 아니에요? 교회가 커지면 이제 사역이 세계적이 될 것 아니에요?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목회자의 아내도 함께 세계적이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이죠. 남편이 세계적이 되면 자기는 동네적이 되고 동네적이란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가정적이 되고 그래서 말하자면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목회사역이 되어야 된단 말이죠. 그런 고유한 목회사역을 내팽겨 치고 자기 성취감에 들떠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결국 마지막에 목회 20년 하고 나면 재고밖에 남는 게 없습니다. 무슨 재고? 상한 교회, 병든 마음, 깨뜨려진 관계 그런 재고품 가지려고 그렇게 꿈에 부풀어서 복음 들고 가오리다. 하고 이 사역에 길에 들어선 것 아니잖아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된단 말이죠.
결국은 이상한 털어놓기 같은 것들이 유행하는데 인간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어거스틴을 알고 있죠.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알고 있죠? 17살에 이미 마니교에 빠져서 사생아를 낳은 시대의 타락한 남성이었습니다. 똑똑했지만 그러나 이교도의 철학에 빠져서 깊이 타락했습니다. 어머니가 모니카 여사였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얘긴 기억하지만 다시 타락한 얘기는 여러분 모를 겁니다. 돌아왔습니다. 참회하는 눈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옛 생활을 씻어버리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와 약혼 했습니다. 그런데 귀족 집안의 딸이었는데 그 여자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법정결혼 연령이 아직 안 되었기 때문에 2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눈물 흘리고 주께로 돌아왔는데 결국은 그 2년 동안을 못 견디고 다시 타락합니다. 그 얘긴 우리가 모르지요. 그러다가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는 완전하게 돌아왔죠.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길거리에서 한때 자기와 함께 정을 통하던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아직까지도 어거스틴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 어거스틴, 저예요.” 어거스틴이 돌아서면서 말했습니다. “여인아, 그대는 여전히 그대이지만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란다.” 그게 바로 자기 속에 흐르고 있는 타락 된 경향성이 완전히 뿌리 뽑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디모데전서에서 말했죠? 그러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거룩한 경건한 생활 속에서 자기를 깎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고자하는 그런 진지한 신앙의 열심으로 자기를 거룩케 하는 그런 과정 없이는, 한번의 눈물 흘리는 회개로써 상처 나고 깨뜨려진 것들이 모두 회복된다,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만약 타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돌아다니고 술 먹고 해서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쁜 짓 많이 해서 성병까지 옮았습니다. 그래서 탕자처럼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에게 와서 이젠 아버지 집에 영원히 살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용서해 주시옵소서, 지나간 날은 정말 내가 나쁜 놈이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나면 여러분들은 위장병도 낫고, 알콜 중독도 치료되고 성병도 낫고 매독도 깨끗해져서 완전히 건장한 남자가 되기를 원하죠. 그러나 실제론 그런 일들이 그렇게 일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용서 받은 건 용서 받은 거고, 그것은 이제 병원에 다니면서 부지런히 치료해야 됩니다. 위장병도 고치고, 알콜 중독 해독제도 먹고, 정신과 치료받으면서 하면서 알콜로부터 해방되고, 성적인 탐닉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런 타락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 몸에 만들어냈던 수많은 상처와 수많은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죠. 회개하고 눈물 흘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정결케 해서 마지막에는 그 타락, 자기가 그 타락에 다시 안 빠지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타락한 경향들을 모두 내몰고 거룩함의 은혜로 자기를 채워서 새사람이 되는 일 없이는 결코 그는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어떻게 쓰실지 모르지만 제가 그렇게 거창하게 하고 싶은 게 있는 게 아니라 저는 교회가 어느 정도 커지면 이런 일들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타락하고 가정적으로 무너진 목회자들을,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 회복되고자 하는데 회복될 길이 없습니다. 왜 그래요? 목회를 그만 둬야지 회복이 되든지 뭐가 되든지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뭐 어떻게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부와의 관계는 깨뜨려졌습니다. 올라가서 설교하는 것 꼴도 보기 싫습니다. ‘저것도 목사냐? 저것도 목회자냐?’ 자기가 이런데 말씀에 은혜를 받겠습니까? 심하면 아이들에게까지 알려집니다. 우리 아버진 인간도 아니야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진 게 아니라 목양의 관계에서만 묻혀있을 뿐이지 가정의 관계는 가족들끼리 산산이 박살난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들어서 산속에라도 올라가고 싶은데 교회 그만두고 올라가면 아이들 학비는 누가 대고 가정의 생활비는 누가 댑니까? 실질적인 문제가 그들로 하여금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가로막는 거예요. 이때에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해주고 2년이든 1년이든 수도원 같은 시설을 지어놓고 가족이 들어와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거예요. 가족간에 서로를 용서하고 말씀으로 서로를 세우고 낮이면 노동하고 밤이면 모여서 이상적인 가정을 세상과 교회현장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한번 꾸려가는 거예요. 그동안에 모든 생활비를 전적으로 지원해주고 나가서 다시 정착할 수 있는 목회지도 구해주고 정착할 수 있는 집도 마련해 주고 그렇게 해서 완전히 치유 받아서 나가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사역하겠는가 말이죠. 그런 일들을 위해서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가 그런 일들을 위해서 쓰임 받고 싶다하는 소박한 소망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다가 마지막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데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목회를 할 때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하는 것이 주 앞에 귀하게 생각될 때는 마지막에 승리를 할 때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일생동안 우리가 목회자로서 입었던 피 묻은 전투복을 하나님 앞에서 벗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 주님이 입혀주신 전투복에 치열한 전쟁과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진리의 깃발을 들고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한 채로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수많은 영적인 전쟁을 치루면서 교회를 지키고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수고했던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들이 피 묻은 전투복을 벗을 때 기도도 안 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지도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타는 마음도 없고 목회를 위해서 무얼 해야 될 것인지 남편을 돕기 위해서 무얼 해야 될 것인지 흐리멍덩한 생각을 가지고 그날그날 히히덕 거리면서 그저 세월 보내는 것을 직업으로 알고 그렇게 보낼 때 전투복에 뭐가 묻었겠어요? 묻은 것이라곤 밥 먹다 밥풀이나 간장밖에 묻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남들은 피 묻은 전투복을 벗으면서 승리의 면류관을 쓸 때 그렇게 안일하게 마치 자기 같은 사람을 목회자의 아내로 밀어 넣으신 것은 하나님의 최대의 실수였다는 듯이 그런 식으로 자아를 죽이지 못하고 버티면서 태만과 나태로 살아온 사람들이 마지막에 그 앞에서 하나님 앞에 어떤 꾸지람을 받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겠습니까?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이 목회자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망가진 교회의 현장을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려다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부부가 중요하다 그러지만 잠시 만나서 사는 이웃사람 같은 것입니다. 천당 올라가면 다시 거기는 장가가는 것도 없고 다시 결혼하는 것도 없어요. 저 사람이 내 아내, 내 남편이었구나. 그건 깨닫지만 거기에선 더 이상 그 관계가 중요한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찬양하는 성도들과 모두 한 백성, 한 가정, 한 민족이 되어서 주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잠시 있다가 흩어지는 관계에요. 동반자예요. 다른 사람들과는 훨씬 더 긴 동반자가 되어버린 거죠.
그때 여러분들이 만약에 남편 때문에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당신을 만나게 했고 이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불꽃처럼 살고 우리 자신을 모두 하나님 앞에 드려서 주님께 우리가 둘이서 일평생 이 세상에 산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우리 모두 그렇게 기도하면 삽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