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가장 귀한 섬김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 15:22-23)
녹취자: 오희정
우리들이 이렇게 평소에 생활 할 때는 우리가 얼마나 완고하고 그리고 얼마나 우리가 고집이 세고 강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어느 결정적인 시점에 가면은 하나님이 우리에 갈길을 돌이키실 때에는 반드시 우리가 얼마나 완악하고 완고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인생은 말입니다.
마치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하이킹을 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대형 트럭을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과 같이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하이킹을 하면서 가는 길은 그저 갑자기 왼쪽으로 돌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돌 수도 있고 제자리에 급히 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속도로 한번 가 보십시요.
고속도로 타고 갈 적마다 바닥을 보면은 섬짓섬짓 합니다.
왜냐하면 똑바로 가던 길에 갑자기 누군가가 시커먼 줄을 한 2-30미터 삐뚤삐뚤하게 그려 논 거예요. 그게 뭐냐면은 스키드마크죠.
졸면서 가거나 혹은 어떻게 잘못 가다가, 작은 차에서는 그렇게 심하게 안 생깁니다. 몇 십톤씩 탱크로리가 달려가다가 확 브레이크를 밟은 거예요.
그래 확 차가 돌면서 쫙 미끄러지면서 한 줄이 아니라 두 줄 혹은 네 줄씩 생기잖아요.
그러다가 바로 그 스키드마크가 끝난 지점에 검게 그슬린 커다란 화재에 흔적이 보여요.
그건 분명히 누가 죽은 거예요. 탱크로리 같은데 뭘 싣고 가다가 부딪치면서 불이 나서 이제 활활 타오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이 얘깁니다.
그냥 달려갈 때에는 속도감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뭐 다 이렇게 가는 거지.
그런데 방향을 한번 바꿔본다던지 제자리에 급히 서 볼려고 하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미친 듯이 자기 좋은 길로 질주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이 입증이 된다 이 얘깁니다.
이게 말이죠. 하나님을 위해서는 시속 5키로도 안되고 결국 자기를 위해서는 막 시속 150,160키로 밟을 정도로 미친 듯이 막 달려가는 거예요.
(예화) 천안에서 한번 올라오는데 저두 서울에 강의가 있어 가지고 서울에 갔다가 막 급하게 천안 학교에서 인제 서울 학교로 급하게 오는 거거든요. 저두 꽤 밟았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뒤에서 막 난리가 나서 막 승용차, 깜박깜박 그리고 빵빵하고 손가락질 하고 난리예요.
이렇게 들여다 보니까 165키로 내가 가고 있는데, 뒤에서 도데체 얼마로 갈려고 그렇게 빵빵거리는지 몰라요. 그래 비켜줬더니 총알처럼 지나가는데 180은 넘을 것
같애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친 듯이 질주를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에 영적인 모습이예요.
멈추질 않고 또 멈춰야 되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도 그게 멈춰지느냐 이 얘기예요.
오늘 말씀 들으면서 아 거참 알고 보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그러대 이제 그렇게 살지 말까 그런다고 해서 이게 브레이크가 잡히냐 이 얘기예요.
브레이크가 안 잡히죠.
그 미친 듯이 질주를 하는 예요. 끝까지 안서면 결국은 어딘가 가서 일낸단 말이죠.
차가 혼자 뒤집힙니까? 꼭 누구 박고 멈추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목숨 빼앗고 자기도 죽고 남도 죽잖아요.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완고 한거, 고집을 쓰고 완고 한거 그게 그것이 결국 여기서 이야기하는 순종에 반댑니다.
두 가지 이야기 하잖아요?
거역 하는것와 완고 한거.
거역하는 것은 말하자면 사술과 같고 여기서 사술이란 것이 뭐냐 하면 점치고 이러는 거예요. 구약에서 이걸 얼마나 미워합니까?
점치고 굿하고 이러는 거 얼마나 미워하냔 말이예요.
그리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이거 다 돌로 쳐 죽여야할 율법에 말하자면은 율법을 어긴 그런 죄로써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끊어져야 될 죄들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날은 우리들이 이런 의미에 우상숭배 존재하지 않잖아요?
정신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허긴 뭐 인생 살다 답답하면 미아리고개 가끔 간다 그러던데, 왜 가는지 알아 미아리고개? 응? 알아요 몰라?
거기 점쟁이들이 다 모여 있다고 처녀도사 무학 도사 뭐 다 모여 있어요 거기.
거기 간단 말이죠.
그러나 제 정신 박힌 그리스도인은 그게 얼마나 하나님이 더러워하시는 건지 안단 말이죠. 그러니까 안갑니다. 그러나 안 가봐야 간 거나 마찬가지라 이 성경이 얘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너희들이 거역하면 분명히 하나님에 뜻인 줄 알면서 그것을 거스르고 거역하면 너희들은 굿하고 점치는 것과 꼭 같고,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써 우리가 얼룩덜룩한 옷 입고 커다란 붉은 모자 쓰고 거기다가 꿩털 몇 개 꽂고 양쪽에 칼 들고 줄 타면서 한번 춤추고 무당 굿한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란 말이예요.
섬찟하지 않아요?
여기서 그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 자녀로써 하나님 앞에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그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뭐 충성하고 뭐 정말 주를 위해 불꽃처럼 살고 그거는 이 거스르지 않는 삶속에 포함되는 거예요. 물 흐르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설득하실 때 거기에 설복되는 사람이 되야 된다 이 얘기예요.
거기에 설득되는 사람들이 되야 된다 이거죠.
그래야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참 하나님에 자녀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건고하게 살면서도 그 건고함에 원인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 건고함에 원인은 미친 듯이 질주하는 그 거역하는 삶에 있다고요.
물론 이따금 기도하지요. 하나님 날 좀 도와 달라고. 나를 좀 안전한 휴게소에서 쉴 수 있게 해달라고. 아니 그럼 속도를 줄여야지. 표지판을 보고 시키는 대로 가야지 그냥 눈감고 이판사판 그냥 막 엔진에서 탄내가 날 때까지 밟으면서, 미친 듯이 질주를 하면서, 어떻게 안식을 달라고 기도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얘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 자기도 괴로우니까 어떤 때는 교회 나와서 막 울구 불고 매달려요. 울고불고 매달리지 말고 중요한 것은 그 엑셀에서 발 띠어. 떼야 된다고.
이거 왜 아멘을 안 해. 금요일 날은 아멘을 안 하는 날이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게 떼야지. 막 미친 듯이 질주를 하는 거예요.
왜? 여태까지 그렇게 달려왔기 때문에 여태까지 그렇게 달려왔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멈추려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사람에 눈에는 그게 안 보인다구요. 근데 하나님에 눈에는 그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인생 살다가 시험을 만나서 커다란 낭패를 당하는 경우 있잖아요?
사람들이 낭패당하고 어려움 당할 때 하나님이 살살 유혹하셔가지고 '야 너 욜로 와라 욜로 와라' 이래가지고 달려라 달려라 달려 이래가지고 시궁창에 꽉 빠뜨려
가지구 하나님이 '아이구 잘됐다' 하나님이 그러십니까?
그게 아니라 막 달려가는 거예요.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래 하나님이 막 뛰어가는 놈한테 한번 '탁' 하시는 거예요.
그 지발에 걸려가지고 말야 자기 속도에 걸려가지고 뒹굴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아 천천히 갔으면 손 이렇게 딱 대면 서잖아요. 천천히 갔으면 발을 탁 대면 서잖아요.
미친 듯이 달려오니까 하나님이 막으려고 탁 건들기만 해도 나뒹굴고 인생 막 뒤집어지는 거예요. 그게 결국은 하나님이 막 주먹으로 막 박살내신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지풀에 넘어진 거란 말이예요.
그런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에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거예요. 오늘 이 사람 제사 지냈잖아요?
좋은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지냈잖아요,.
그게 뭔 소용이 있느냐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멈춰라 멈춰라 멈춰라 그래도 그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멈추라는게 하나님에 뜻인데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찬송가 부르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거예요.
중요한건 서는 건데.
거역하는 거예요 거스르는 거예요. 반역하는 거란 말이죠.
하나님에 백성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이 하나님에 백성과 이 세상 백성에 차이는 뭐냐 하면 이 세상 백성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에 자녀는 하나님에 통치를 기뻐하는 사람 이예요. 하나님에 통치를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 이예요.
(예화) 옛날에 제가 직장 다닐 때 그 최고 책임자가 아주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어요.
그때 지미 카터가 뭐 그 분이 신앙이 어느 정도인진 모르지만 신앙이 아주 독실하다고 한국에 그렇게 소문이 났었어요. 오죽했으면 와서 박정희 대통령한테 전도하고 갔잖아요?
그 사람 너무 그런 전도..국민이 세금 줘서 비행기 태워서 보내면 맨날 가서 전도만 한다고 미국 사람들이 굉장히 싫어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분이 기도를 많이 한 모양이라. 지미 카터 되게 해달라고.
탁 붙었어요. 붙었더니 막 출근하는 첫날서부터 입이 싱글벙글 싱글벙글 하는 거예요.
아 카터가 됐다고 옆에 타임진지 뉴욕타임지 하나 끼고 들어오면서 말이죠 아 카터가 됐다고.
같은 피도 살도 안 섞인 먼 나라에 그리스도인이 남에 나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됐어도 다른 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박수 치면서 좋아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 할 때 하나님에 자녀들이 얼마나 좋아해야 되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질 않고 저쪽 편에 붙어서, 가서 훼방 놓고 하나님에 통치를 싫어하는 거예요.
고의로 하나님이 멈추라는 명령도 무시하면서 막 미친 듯이 질주하는 거예요.
그게 다 이해 싸움이예요, 이해싸움.
사실은 그것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거든요.
거역하는 그 삶 때문에 진노에 대상이 된 우리를 위해서 용서해 주실려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 근데 한편으로는 주님에 십자가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주님을 못 박았던 그 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에 자녀들에 모습이다 할때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거역하는 것 이거는 거역하는 것 완고한 것 다 비슷비슷한 이야기지만 거역하는
것, 적극적으로 거스르고 완고한 것은 어떠한 설득에도 움직이지 않는 주체성 강한 자세를 얘기하는 것 이예요.
그 결국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무슨 뜻이냐면 그런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은 심히 모독을 느끼시는 거예요. 모독을.
그러니까 뭐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러고 얼버무리면 안돼요.
하나님이 사랑 이시다는 사실은 불순종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깊이 참회하고 주님에 뜻대로 살기로 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조건이 없이 값없이 주시는 그 큰 호의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 하는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그런 사랑 자비 이런 것이지, 계속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삶을 멈추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자비와 은혜를 말하다는 것은 결국은 계속해서 하나님 거스르는 삶의 길을 걸어 갈테니까 하나님 이해해 주십사 하고 하는 이야기나 똑같다 이 얘깁니다.
그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정말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요, 진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거스르고 불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이 참아는 주시지만 그러나 영원히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인내가 어느 시점에서 딱 끝난 다구요.
그때는 하나님이 정리 단계에 들어가시는 거예요.
생명을 거둬 가실 수도 있고, 커다란 위기와 환란을 만날 수도 있고 그리고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고통 가운데 있을 수도 있어요.
왜? 그렇게 몸은 멸해도 영혼만은 구원하시길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에 그 속도계로 자신에 그 거역하고 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되요.
가끔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달려가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즉시 깨달아야 되요.
'아 이 일이 아니야' 그리고 필요하면 유턴하고 필요하면 좌회전하고 필요하면 비상등을 킨 채 누군가에 도움과 구조를 기다릴 수 있는 그런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지만 인생이 막 가지를 않는다 이런 얘기예요.
무엇인가 우리가 깊이 곤고하고 고통 하는 불안한 삶을 살고 있으면 거기엔 반드시 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거역하고 거스르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삶이 만약에 그러하다면 우리가 드리는 제물, 우리가 드리는 제사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한낯 가증스런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이런 말씀입니다.
근데 오늘 성경은 마지막으로 결국은 왜 그렇게 인간이 거역하고 왜 그렇게 완고해서 사술을 행하고 또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그런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드려서 진노를 사느냐에 대해서 성경이 간단하게 말합니다.
'왕이 하나님에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왕을 버려 당신을 버려 왕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무슨 뜻이냐면 인생에 질주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 질주라고 하는 것은 질주 할려고 노력을 하기 때문에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질주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 달려가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미친 듯이 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제어장치가 없으면 모두 그렇게 되고 마는 거예요.
여러분 참 놀라워요. 시내에서 100키로 정도로 달리면은 엄청난 속도잖아요, 그쵸?
(예화) 남태령에서 말야 실험을 한번 해봤어요. 차가 별루 없는 한가한 때였어요.
야 이거 중립에다 내버려두면 차가 어떻게 될까? 중립에다 놓고 차 굴러가게 가만히 내비뒀어요. 와 밑으로 내려가니까 쏜살같이 내려 꽂는데 95,100 키로를 넘어
가더라구요.
아무것도 안했어요.
엑셀도 안 밟고 뭐 빨리 가라고 자동차 두드려 주지도 않았어요.
채찍으로 이랴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미친 듯이 내려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제가 또 하나 깨달았어요.
야 그렇구나 엑셀 한번 안 밟아도 차가 이렇게 미친 듯이 달릴 수 있구나.
그러니까 막 불순종과 거역함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는 사람을 보고 물어 본다구 '야 너 왜 인생 그렇게 사냐? 당신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 가는거 보면서 하나님 얼마나 마음 아프겠어' 이렇게 말하면 뭐라는 줄 알어? '내가 뭘 내가 뭐 어땠는데, 내가 뭘 내가 뭘 했나?'
맞어 한 거 없어요. 그냥 내리 꽂으면서 달려가는 거예요.
왜? 그러나 한 거는 없을진 모르지만 안 한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안 한거예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면 달리긴 달려가도 수시로 멈춘다구요 아 이게 아니구나 이게 아니야 이러면서 멈춘다구요.
근데 이게 없는 거예요.
그럼 뭐 성경을 보나, 본들 또 뭐 소설책을 보나 성경을 보나 마찬가지고, 설교를 듣나 들어봐야 이게 뭐 들리는 건지 듣는 건지 그저 설교 견디기 하다가 집에 돌아가고 말이죠 이런 식에 삶을 사니까 말이죠.
그나마 수요일 날은 오나? 또 수요일 날은 비 온다고 빼먹고, 금요일 날은 늦게 끝난다고 빠지고 주일날 오후는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빠지고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무슨 제어 장치가 있느냔 말이죠. 그러니까 못 말리게끔 그냥 달려가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겠느냐 이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삶을 살며는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말 거역하며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오늘 주님 뭐라 그러십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얼마나 창피한 말이예요.
정성껏 제사를 드렸는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그러니 제사는 소용없는 거예요
듣는 것,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서 내적으로 순종할 결심을 가지고 듣는 거예요.
'듣는 것이 수양에 기름보다 나으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래서 여러분 우리 이제 기도할 때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이걸 깊이 돌아보며 사는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은말 할때 좋은말 하실때 듣는 사람들이 되야 됩니다.
뭐가 징표가 있어야지.
그거는요, 하나님 앞에 열심히 주님에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 때 징표를 구하는 거야 시편에 나온 대로 은총에 징표지만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 징표가 있어야지 멈추겠다고 하는 것은 그거는 한번 반쯤 죽고 싶다는 이야기랑 다른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뭐 할일 없어서 그런데서 징표를 구해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잠시만 마음을 비우고 주님에 뜻을 받아들이고 싶은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면 의심할 수 없는 듯한 또렷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그 길이 아니고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 가는게 인생이 아니라고 하나님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왜 우리가 죽기 위한 징표를 구하고 징벌받기위한 징표를 구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짐승입니까?
우리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솝니까? 나귑니까?
주님에 형상을 받은, 말하면 알아듣는 하나님에 자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면 아멘을 한번 해 보십시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