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가르치는 사람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5:2)
녹취자: 최영순
교사가 되면 어쨌든 교사에게 맡겨진 일을 잘 행해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역을 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면 잘 한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도대체 교사가 뭐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이 왜 나를 교사로 세우셨는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5장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팔복으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의 도입부입니다. 그 앞에 4장에서는 예수님이 각색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놀라운 이적의 기사들이 나타납니다.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 있는 치유사역으로 고침을 받는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5장에서는 특별히 우리가 읽은 팔복의 내용 속에서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은 산 위에 올라가 왕처럼 앉으시고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 산에 모여서 장시간의 설교이니까 앉아서 들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내려다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고 천국 시민은 어떤 사람이고 천국시민은 또 어떤 생활을 해야 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5장, 6장, 7장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산 위에서 주신 말씀이라 하여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예수님이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댐에 물이 가득 고여 있다가 수문을 여니까 그 물이 확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입에서 진리의 말씀이 거침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가볍고 말이 많으신 분이었습니까? 과묵하신 분이었습니까? 과묵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입을 열자마자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진리의 말씀이 쏟아졌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손에 성경책도 없었습니다. 그 때 성경은 두루마리였습니다. 성경 전체를 모으면 한 리어카쯤 될 정도의 양입니다. 무슨 설교나 원고 없이 예수님이 “얘들아 심령이 가난한 자는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이란다.” 그러면서 설교하십니다. 예수님이 입을 여시자 진리의 말씀이 쏟아 나오면서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7장까지 흘러갑니다.
4장에서 예수님이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칠 때에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고치는 기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울려 퍼질 때 많은 사람들은 어떤 기적도 보지 못한 채 조용히 앉아서 예수님의 인격과 지성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자신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천국 시민의 자격과 생활과 천국에 대한 놀라운 진리의 말씀이 울려 펴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들의 영혼 안에서는 불치의 병이 고쳐지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자체의 본질적으로 사람이 바뀌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교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회심하고 나서부터 곧바로 영혼을 돌보는 사역을 하고 이제까지 약 35년 정도 되기까지 몇 달을 제외하고는 영혼을 돌보는 일을 멈추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과정에서 보면 얼마나 우리가 하는 일이 다양한지 모릅니다. 우선 아이들이 교회에 오지 않으면 심방해야합니다. 아이들이 고민거리가 있으면 상담해야 합니다. 내가 전도사 할 때 보니 아이들이 워낙 공부를 못하니 선생님들이 불러다 과외공부까지 시켜줍니다. 시험 때면 붙들어 수학, 영어를 가르쳐주고 휴일이면 데리고 놀러가기도 하고 교사로서 하는 일이 가족에게 하는 것만큼 많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일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지만 교사로서의 본질적인 사명은 아닙니다. 그러면 교사로서의 본질적인 사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 그것이 교사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사를 안수 받지 않은 목회자다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런 정체성에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사의 사명이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잘하는 데 또 다른 것도 잘할 때에는 빛납니다. 본질적인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 말고 잘하는 모든 것들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 됩니다.
(예화) 다윗은 군인이자 시인이었습니다. “멋있습니까? 멋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시집을 가지마라 고생길이 훤하다” 그 얼마나 멋있습니까? 또 다윗은 군인인 동시에 왕이었습니다. “멋있습니까? 멋없습니까?” 다윗은 군인인 동시에 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군인이던 시절에 수많은 전쟁을 치르었습니다. 시를 읊고 그래서 멋있고 철학을 하고 우아하고 그렇다고 할지라도 전쟁은 못하는 군인 의미가 있습니까?
학교 선생님인데 선생님이 사람도 좋고 뭘 사다주어도 잘 먹고 학생들 때리지도 않고 친절한데 공부를 못 가르칩니다. 수업시간이면 늘 오락회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좋은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영혼들에 대해서 그들이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많이 있지만 특별히 교사는 그들의 영혼이 어둠 가운데 있어서 무지하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는 그 부르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교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실정을 생각해 봅시다. 저는 매우 걱정이 됩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1년 전, 1999년도에 ‘교사 리바이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 다시 흐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서 영혼들을 변화 받게 하라고 교사로 불러주셨는데 교회학교의 관심은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아이들을 참여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교회 나오는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줄까? 이런 것들을 고민하며 마치 교회학교 그 자체를 거대한 이벤트 행사장으로 만듭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어 가면서 교회학교 교육의 초점은 복음과 진리라고 하는 좌표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시절들을 보내게 하는 것입니다. 불에 들어갔다가 나온 쇠가 불에 안 들어 갔다 나온 쇠보다 더 단단한 것처럼 예수 믿는 게 뭔지 좀 알았던 사람들이 마음이 식으면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강퍅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더군다나 여기 모인 분들은 교사 중에서도 장년이 아니라 주일학교와 청소년부교사들입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 때 일수록 진리는 가르치기가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성으로 생각해야만 깨닫게 되는 것도 있지만 진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단순한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의심하는 지성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어렸을 때일수록 진리를 체계적으로 탄탄하게 가르쳐서 그것들을 한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기회들을 진리를 공급하는 기회로 삼지 않고 행사 같은 것들로 때우면서 긴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은 점점 진리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되고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가르침이라는 인상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게 너무 심각합니다.
제가 20년 가까이 교사 세미나를 다니면서 똑같은 실험을 하는데 항상 놀라운 것은 10명의 교사가 있으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지난주에 성경을 아이들에게 안 가르쳤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50퍼센트 이상입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 20년 동안 해보았는데 항상 똑같습니다. 이번주일에 아이들에게 성경을 이것을 가르쳤습니다라고 명료하게 대답하는 교사가 아주 성적이 좋은 세미나에서는 20%, 평균10%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무엇을 가르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가르친 사람 마음속에도 남지 않는 진리가 배운 사람 마음속에 간직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적은 기대일지 생각해보십시오.
(예화) 저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중학교 2학년까지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여러 가지 회의를 느끼며 신앙을 버렸습니다. 6년 후에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중학교 2학년될 때 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생님들이 저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들 중 단 한 사람도 어린 마음에 ‘저 선생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정말 애쓰시는구나.’ 한 명도 그런 인상을 못 받았습니다. 더욱이 나를 앉혀놓고 “남준아, 너는 교회에 나오지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게 믿어지니?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게 믿어지니?” 물어본 선생님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15살 될 때까지 회심하지 못했고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여러분처럼 사역했기 때문에 저같이 불행한 사람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고 다시 돌아왔을 때 까지 견딜 수 없는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사춘기때 하나님 없이 보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고분고분 말을 들어준다고 해서 아이가 굉장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구나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교회에 와서 선생님들에게 행동해야지만 선생님이 기분 나빠 하지 않는지 압니다.
(예화) 남자 성도 한 분이 저희 교회에 와서 변화를 받고 10년째 교회에 다닙니다. 어느 날 교사에 관한 강연을 들으면서 자기가 20년 전의 교사생활을 회개했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그렇게 돌봐서는 안 되는데 하고 뼈저리게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명감을 가지고 20년 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수소문을 했습니다. 20명 정도가 기억이 나서 추적했더니 그 아이들이 벌써 30대 중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잘 나오고 자기가 가르쳤던 20명의 아이중 2명만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2명이 이혼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하는 것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 사역의 중심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궁금하셨습니다. ‘요즘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있나?’ 그래서 목사님이 주일학교에 내려가셨습니다. 지나다니는 아이들에게 “이리 오너라.” “목사님 안녕하셨어요?” “너는 몇 학년이니?” “저 4학년입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 교회는 몇 년 다녔지?” “6년 동안 유치부부터 다녔어요. 목사님이 “하나 물어보자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니?” 아이가 갑자기 비질비질 울려고 하더니 “내가 안 그랬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불렀습니다. “이 아이를 선생님이 가르칩니까?” “네 목사님 저희반 아입니다.” “ 내가 이 아이보고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니 물었더니 지가 안 무너뜨렸다고 하는데 선생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목사님 얘가 안했다면 안한 거입니다. 얘는 정직한 아이입니다.” 목사님이 기가 막혀서 부장 장로님을 불렀습니다. “장로님 얘가 여리고성 누가 무너뜨렸냐고 했더니 얘는 자기가 안했다고 울고 선생님은 얘 말이 맞을 거라고 하는데 장로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목사님 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기왕 무너진 거 지금 누가 무너뜨렸냐고 물어보면 뭐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물어줍시다. 제가 절반 대겠습니다.” 누가 만들어냈는지 모르지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중심이 되지 않는 교회교육의 껍질만 남아있는 상태를 잘 지적한 것입니다.
여러분 맨 처음에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참된 기쁨,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복음적인 행복을 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데리고 놀았습니까? 어설프게 만든 그런 동영상프로그램보고 행복했습니까? 교회에서 맛있는 것을 주어서 복음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에 왔는데 선생님이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다는 것과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복음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깨달아질 때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이제껏 나를 찾으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마치 아버지가 싫어 멀리 떠났던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웠던 나의 눈이 밝아져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교회에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기뻤습니까? 화려하고 웅장하고 예쁜 교회였기 때문에 그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꿀과 같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시간이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운 잔치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지금 죽는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감각적인 아름다움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아름다움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한 이름
마음속에 우리 그리스도와 함께 연애하는 놀라운 기쁨, 아침마다 눈을 뜨면 그분과 나누는 교제 때문에 마음이 설레는 행복, 그것이 무엇을 통해서 전달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정말 고통스러운 인생의 방황을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초부터 사춘기가 왔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수없이 죽을 결심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무서웠습니다. 죽을까봐, 아니 살아있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으로 살아있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그러고 나서 그 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를 가르친 선생님도 못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다시 주님께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거듭나게 되었을 때 그 교회는 새로남교회 교회 100분의1정도 사이즈의 교회였습니다. 손바닥만 한 예배당에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비닐장판 하나 깔고 모여서 톱밥난로를 때면서 삐거덕 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서 찬송을 부르던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이 30명도 안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나니 교회까지 갈려면 추운 벌판을 지나서 30분을 걸어야 하는데 너무 행복했습니다. 한 번도 그 교회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누덕누덕 기운 방석에서 곱은 손발을 호호 불며 예배를 드려도 그 교회가 아름다운 성전을 가진 교회보다 못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화) 18세기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가운데 전설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조지 위킬드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귀한 종이었습니다. 복음 사역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마르는 것 같을 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거듭나던 회심하던 교회에 찾아가서 자기가 울면서 주님을 영접했던 그 의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저 같이 불행한 주일학교 학생들이 다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아이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될 복음의 말씀을 가진 교사들입니까 ?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마지막에 올려 보낼 때 그때까지 여러분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교회 잘 나오도록 관리하는 거 아닙니다. 교회에 순종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아이로 돌보는 거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주님이 아이를 다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다 돌보지 않아도 주님이 아이 마음속에 살아계셔서 돌봐주십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중심이 되어야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돌아가셔서 아이들의 명단을 놓고 빨간 펜을 들고 정말 그 아이의 심령 속에 예수가 살아계신 아이들에게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나는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교사로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명예를 걸고 이 아이는 분명하게 구원받았다 주님이 아이의 마음에 살아계시다 이 아이에게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증이 있고 기도가 있다 아마 이 아이는 일평생 신앙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몇 명이나 되겠는지 동그라미를 쳐 보십시오. 그러고도 기도가 안 나오면 교사의 소명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삯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이게 주가 되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 고등부 아이들이 70명 정도 모였습니다. 새로 부임을 했습니다. 예배시간은 40분인데 공과공부시간이 2시간입니다. 엄청나게 성경을 가르치는구나 생각하고 무얼 하나 돌아보니 어떤 반은 열심히 가르칩니다. 어떤 반은 형편없습니다. 선생님이 지각을 합니다. 예배 끝나고 공과공부를 합니다. 6명이 모였습니다. “얘들아 지난 한주간 잘 지냈니?” “네, 선생님.” “내가 오늘 왜 늦었는지 아니? 너희들 아침 못 먹었지? 너희들을 위해서 선생님이 샌드위치를 만들었단다.” 당연히 그걸 먹고 성경공부를 할 모양이다 했습니다. 어떤 아이가 “선생님 우유가 없네요. 내가 우유 사올게요.” 한 명이 뛰어나가니 둘이 “나도 갈래요 ”하며 전 교인의 50%가 우유를 사러갔습니다. 슈퍼도 없습니다. 15분 만에 우유를 한 통 사가지고 왔습니다. “컵이 없네. 내가 가지고 갈게” ”나하고 같이가 ”전 교인의 30%가 컵을 가지러 갔습니다. 컵을 가져와서 쏟다가 쏟았습니다. 걸레 가지러 뛰어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샌드위치를 다 먹고 보니 40분 이상이 흘렀습니다. 공과공부를 시작하려나 했더니 “얘들아 우리 공부하기 전에 일주일 동안의 삶을 나누어 볼까?” 돌아가면서 얘기를 하는데 10분씩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일주일 동안 산걸 얘기할 게” 한참을 얘기했는데 수요일까지 밖에 못 왔습니다. 다른 반은 끝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화까지 모두 끝났을 때는 이미 아이들은 공과공부를 끝내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얘들아 오늘은 정말 은혜로운 공과였지? 우리 손잡고 기도하고 마치자” 그랬더니 옆에 있는 아이가 “선생님 우리 공과공부 안 해요?” 그러자 “가만있어 이 자식아, 가야돼” 저쪽에서는 공과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와 가자” “공과공부시간에 어디를 가니?” “우리는 웬디스에서 공과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웬디스가 뭔가 하니 치킨 집이었습니다. 순진하게 어떤 곳인지 가 보았습니다. 아침부터 음악을 세게 틀어놓아서 주문하는 것도 안 들릴 정도입니다. 무슨 공부를 하겠습니까? 닭다리 하나 뜯고 집에 갑니다. 그게 죄를 짓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선생님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들이 자기양떼입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게 아닙니다.
(예화) 그러고 나서 제가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용감하고 과격했습니다. 설교를 했습니다. 너희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너희는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다 목사님께 허락을 받고 8주 동안 공과공부를 멈추었습니다. “너희들은 내 설교를 듣고 변화되어야 해” 지금 생각하면 우직스러웠습니다. 매주 180분 설교를 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아이들이 변화를 받고 나니 변화 받은 아이들은 180분 설교를 하는데 움직이지 않습니다. 석고상을 깎아놓은 것처럼 빨려듭니다. 6시면 캄캄한 밤중입니다. 그 때 새벽기도를 드리겠다고 아이들이 추운 겨울에 머리를 감고 뛰어옵니다. 9시에 시작되는 예배에 앞자리에 앉으려고 새벽부터 옵니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날이 어느 날이냐면 설교 짧고 담임선생님 안 나온 날입니다. 왜냐하면 공과공부 안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왜 못나오셨을까? 무슨 일일까?’ 생각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와” 하고 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변화 받고 나니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선생님이 안 나오신 건 아파서 못 나온 건 아니고 어젯밤 과음을 하셨든 그랬을 겁니다. 아이들이 안 가고 둘러앉아서 기도합니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돌아가며 기도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는지 들어보니 “하나님 우리 선생님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을 만나고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실화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진리에 의해서 변화 받은 아이들만이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 전에는 선생님들이 심방을 했는데 아이들이 자기 친구들을 심방하러 다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영혼과 맞부딪히고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 사람 자신을 바꾸어 주실 때만이 참다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예수는 확실히 자기 마음 안에 계셔서 사람들에 의해서 설득되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이 자기를 움직이고 역사하셔서 교회나오고 신앙생활을 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형편을 보십시오. 90%의 선생님들은 그만두고 50%이상이 성경을 가르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번 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음 주에도 그럴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이 사람들이 내일은 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성경을 안 가르칠 것입니다. 이미 성경을 진지하게 가르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아이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중요성 자체를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조차도 엄중하게 인식하지를 않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이들이 모여 “아 재미있었다.” 교회 다닌 추억이 그들을 많이 붙들어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현대 사회의 문화를 잘 수용하고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칭찬할 만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도구가 훌륭하다 해도 도구를 통해 흘려보낼 내용이 없으면 도구들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모든 하나님의 진리는 교사들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와서 아이들에게 들어갑니다. 왜 선생님들이 “너 오늘 성경 읽었니? 너 이번 주에 성경 읽었어? 성경 읽어야 돼” 간절히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권면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유명한 격언 가운데 라틴어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두스비벤디 꼬삐야 디켄디’ 직역을 하면 ‘가르침의 풍부함은 삶의 양식에 달려있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전도자의 삶을 살면 전도학을 공부 안했어도 전도에 대해 할 이야기가 가르침이 많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왜 기도 안합니까? 아이들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깨뜨려지고 기도를 통해 자신 속에 있는 진심을 하나님께 토하고 간절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 죄악의 찌꺼기가 빠져나가는 정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 아이들도 영혼인데 그 아이가 정말 기도하는지 궁금해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기도하게 할 수 있을까? 이번 주에 기도했니? 이렇게 물어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 때문 입니까? 바빠서, 행사가 많아서가 아니라 교사 자신이 그것을 안 하니까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교사를 어린아이들에게 세워놓은 것은 선생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가르쳐질 때 그 말씀대로 살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선생님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서 선생님을 세운 것입니다. 선생님은 시청각교재입니다. 전도해야 되겠다는 강한 마음이 아이들 속에 일어나기 위해서는 전도하는 아이에게 축구공 , 농구공, 축구화를 사준다고 상품 거는 교회가 있는데 전부 잘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벤트회사입니까?
(예화)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있던 일인데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갔는데 교회 문 앞에 떡볶이, 오뎅, 맛탕, 사탕, 연필, 공책까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뭔가를 사는 겁니다. “이게 뭐냐 ?” “달란트 잔치하는 거입니다” “달란트가 뭐냐?” 그랬더니 6개월 동안 아이들이 출석하면 달란트주고, 전도하면 달란트 더 많이 주고, 요절외우면 주고 6개월 동안 돈을 모았다가 가지고 와서 교회에서 떡볶이 바꾸어 먹고 오뎅도 먹고 맛탕도 먹고 공책도 타가고 연필도 타가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달란트는 남기라고 주님이 주신다고 했지 뭘 사먹으라고 주신 것이냐? 친구를 전도하고 요절을 외우고 기도를 해서 칭찬할 만한 일을 했다고 치자. 그것도 주님이 상 주실 만하다고 치자. 그러면 천국에서 받아야지 여기에서 떡볶이하고 바꾸어 먹으면 천국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그럽니까?” 그렇게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위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무어라 말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랬습니다. 비극은 내게 있는 것이 없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아이들을 뜨겁게 사랑해도 사랑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진리가 없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애완견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참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그 핍절한 영혼, 하나님을 모르는 무직가운데 살아가는 영혼,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영혼, 이 영혼의 비참함에 대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리바이벌에서 저도 영혼을 돌보는 목사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사가 하루에 두 번씩 펑펑 울 수 있다면 한번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하나는 이 사랑을 모르는 영혼들이 불쌍해서 펑펑 울 수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연약해도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를 붙드신 주님이 우리보다 영혼을 더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는 거짓된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터넷 중독이 세 살부터 시작됩니다. 아이들 열 명 중에 두 명 정도는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중독에 걸렸습니다. 그렇게 지치고 병든 영혼들이 가득한 곳이 이 세상입니다. 선택받은 아이들만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이 세상에서 줄 수 있는 것들로 만족 시켜서는 안 되고 아이들이 진실로 변화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만족을 드릴 수 있는 아이들로 바뀔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서 수많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것들로 아이들이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찬양)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그 울부짖는 소리들이 수없이 들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얻은 구원인지 생각해 보십시오.주님이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는 큰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건지시고 생명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가득했을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주님이 내 안에 사신 것입니다 고백했고 우리의 일생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요 주님께 바쳐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안 사람이라면 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영혼의 구원과 변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교사의 삶입니다.
주님을 조금 만난 사람들, 주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은 교사 안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 ,주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쓰러져가는 영혼들을 볼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강건한 그래서 영혼을 섬기면서 끝없이 고통을 받아도 그 길고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을 받다가도 한 영혼이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기를 마치 어미가 자식을 해산하고 난 다음에 해산의 수고를 잊는 것처럼 잊어버립니다. 여러분들의 출석부는 눈물에 젖었습니까? 아침마다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다가 그 출석부를 얼굴에 묻고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어떤 것인지를 손짓 발짓하며 수없이 묘사하는 것보다 자기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흐르는 선생님 볼에 한줄기의 눈물을 보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더 커다란 감화를 줍니다. 어떻게 할까요? 확실히 예고할 수 있는 것은 다음 세대에는 이 기독교는 더 매력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떠날 것입니다. 유일한 대안은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아이들을 전심으로 가르치고 피붙이처럼 사랑하고 우리의 가슴을 풀어 젖을 물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진리를 아이들이 빨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쳐서 확실한 예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이외에는 미래에 대한 아무 대안도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아이가 자기의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모르고 있다면 아는 우리들이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이 모든 간격을 뛰어넘는 위대한 힘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입을 열자마자 진리의 말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영혼들을 녹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의 교회에서 영혼을 섬겼다면 그 아이들을 천국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미련해 보이지만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인간의 지혜를 버리는 대신 마치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 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을 물리는 어미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의 마음속에 진리가 심겨지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몸부림쳐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죽음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양떼들 안에 역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화) 인간의 영혼이 가장 순수해질 때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아무 욕심도 없고 바람도 없고 영혼이 주님을 만나 변화되어 그가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면 제가 지금도 그렇지만 신학교 다닐 때 정말 존경하던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18세기에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21살에 회심에서 24살에 목사가 되었고 5년 동안 건강을 돌보지 않은 헌신적인 사역 속에서 일하다가 29살에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위대한 역사에 남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큰 사역을 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빵이나 몇 개 싸가지고 배낭에 짊어지고 말을 타고 저 숲 속에 가서 그 밀림 속에 있거나 혹은 외딴 동네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다가가 손짓 발짓하며 예수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기에 보면 이른 새벽에 별을 보고 기도하러 들판으로 나아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생각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에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영혼을 사랑하며 자기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모두 허비했습니다. 눈 내리는 언덕 위에 올라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면 폐결핵 3기였습니다. 눈밭에 각혈을 해서 붉은 피가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일기 속에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에다가 내가 노래를 붙였습니다. 한 번 새겨듣거나 기록을 해 놓았다가 가슴에 새겨 보기를 바랍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많이 헌신하십시오. 그리고 영혼들을 위해 많이 우십시오. 엄마처럼 아빠처럼 이 영혼들이 주님의 양떼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내게 주신 이 영혼들이 너무 소중하기를 마치 내 몸과 같다고 생각하고 목숨까지라도 내어 놓을 수 있을 것처럼 영혼을 위해 우십시오. 그리고 깊이 탄식하십시오. 그의 곤고함이 나의 곤고함인 것처럼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인 것처럼 그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목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