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돌보는 섬김
(설교모음)
설교기간|날짜 미확인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개회예배: 마25:22-23, 1999.04.04.) 1
2. 교사로 섬긴다는 것 (새벽예배: 빌1:9, 1999.04.05) 8
2. 개인양육에 관하여 (세미나: 1999.04.05.) 12
3.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폐회예배: 갈4:19, 1999.04.05) 46
1. 개회예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 25:22-23)
달란트 비유에 보면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 두 달란트 맡은 사람, 한 달란트 맡은 사람, 이러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저는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눈에 들어 와요. 왜냐하면 내가 달란트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 에요. 이 달란트에서 영어의 탤런트가 온 거는 아시지요? 이 달란트는 탤런트라는 말을 낳았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주님이 맡겼어요. 왜 그렇게 맡겼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설명이 안 나와요. 그런데 이 비유의 의도 자체가 하나님이 충성스러운 것 같은 사람에게는 다섯, 그다음 충성스러운 것 같을 사람에게는 둘, 그다음에 전혀 아니올시다같은 사람한테는 하나, 이렇게 줬다는 것을 말씀 하시려는 데 초점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왜 그런지는 설명이 안 나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줬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둘, 어떤 사람은 하나에요. 이것이 이유가 안 나오고 그냥 준 거 에요. 이건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에 속한 거 란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가끔은 참 내 자신이 한심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 가 있어요.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잘 하는 게 뭔가? 다른 사람들은 찬양도 그렇게 잘하는 데 나는 그것도 좀 하다가 말았고, 다른 사람들은 기타도 잘 치는데 우리 형제 기타도 잘 치잖아요? 난 볼 적마다 좌절스러워요. 나는 뭔가? 저것도 못하나? 나도 왕년에는 손가락이 까지도록 기타 연습을 했거든요? 그것도 하다가 말고, 또 어떨 때는 부러운 게 그 붓글씨 쓰는 거 말이지요. 나도 그것도 좀 해 보고 싶어서 만졌었거든요? 근데 그것도 또 아냐.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는데 형제 하나가 서울 대 법대를 나왔는데 읽는 걸 얼마나 잘하는지 삼일 만에 원서 하나씩 읽어요. 그런데 그게 독일어 원서야! 그러니까 보고와가지곤 보여주면서 전도사님! 난 이 책 읽으면서 정말 감탄했다고 해서 나도 영어는 조금 하니까 나도 하나 사 볼까? 그런데 이게 뭐야 독일어래! 독일어도 자꾸 헷갈리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또 그래! 외국에 나가서 이렇게 들여다보면 나는 왜 이럴까? 나한테 공부배운 제자들이 나 데리고 다니면서 통역을 하는데 유창해요. 난 뭔가? 저것도 못하고 눈 껌벅 껌벅하고 앉아서 그러다가 또 유명한 사람들의 주석 같은 걸 보면 나는 세상모르고 쓸데없는데 돌아다니면서 그저 젊은 객기나 부릴 때 이 사람은 말씀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 에요. 조나단 에드워드가 거룩한 삶을 살고자 자기를 채찍질 할 때 난 세상에서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는 희망이 없는 젊은이였단 말이에요. 조나단 에드워드는 내 나이 됐을 때 더 이상 더 거룩해 질수 없을 정도로 한계에 까지 와서 그 삶을 지속했다고 하는데 난 이게 뭔가? 이엔 바인져 책을 읽다가 보면 이렇게 기도에 깊이 들어갔어요. 나는 대체 뭔가? 지나다니다 어느 형제 보면 제는 저렇게 잘 생겼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달란트가 없어요! 어떤 땐 불평을 하는 거지요. 주님! 제가 지능이 있습니까? 인물이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난 도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그때 마다 하나님이 제게 들려주시는 것 같은 음성이 뭐냐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왜 나를 하나님이 그렇게 뭐든지 하다만 사람처럼 만드셨는지 몰라요. 분명한 사실 하나는 달란트가 그거 밖에 없는 겁니다.. 한때는 공부를 해서 학자의 길을 걸어갈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릇이 어림도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어요. 요즈음은 목회자로서 한번 뭔가 한 시대에~ 그런데 그것도 참 그릇이 안 된다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보세요.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가하냐면 다른 사람도 다 그런 생각을 부분적으로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결론은 뭐냐면 그런 생각은 다 쓸데없는 생각이라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나하고 공감대가 없어요. 다섯 달란트면 이게 얼마쯤 되는 건가? 여러분 한 달란트하면 우습게 생각하지요? 1980년도에 웨인하우스 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그 책에서 1980년대를 기준으로 환산한 것을 계산해 보니까 한 달란트는 860만원정도 하는 거금이에요. 그러니까 다섯 달란트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지요. 두 달란트도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어차피 나하고 공감대가 없어요.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내 친구 같이 느껴지는 겁니다. 왜? 한달란트는 되기가 싫으니까.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게 이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뭐라 그래요? “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작은일 에 충성하였으니 큰 것을 맡길 텐데 주인의 즐거움에 네가 참여해라!” 그렇게 말씀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가만히 보면 추측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겼으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말씀하셨지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겼으면 아마 이런 식으로 말씀을 안 하셨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능력 많고 달란트 많은 사람 되기를 너무 사모 하지 마세요. 왜? 고달파요. 진짜 고달프다구요. 맡겨 진거는 할 수 없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의 주권으로 다 받아들이면서 쓸데없는 것을 꿈꾸지 말고 지금 내게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주어진 이 삶에 대해서 아주 충실한 삶을 사는 겁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겁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지요. 이렇게 이 시대에 설교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하게 된 것이 사실 교역전도사 하면서 중등 부 아이들이나 데리고 성경공부 가르치고 그러는데 조국의 교회, 세계의 교회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조국과 세계가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 염려하기엔 내가 너무나 바쁘고 고달픈 삶을 살았어요. 난 관점이 그런 게 아니에요. 왜 이 인간들이 안 변하느냐? 성경에 보면 분명히 복음을 들으면 변한다고 했는데 이 인간들이 안 변하는 겁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안 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가? 성경은 당연하지 안다고 말하는 거 에요. 그걸 고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건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 에요. 그런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많이 주십니다. 그래서 이걸 기억해야 되요. 최선을 다하지 않는 섬김은 영혼과 교회를 위해서도 무익하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아요. 소위 얘기하는 경륜, 경력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경력 , 경륜이라기보다는 요령과 방법을 터득하는 겁니다. 도를 깨우치고 걸어가는 도사가 되기보다는 술사가 되어버리는 거 에요. 그렇게 되면 안 되거든요.자기를 다 쏟아 붓는 충성스런 삶을 살아가야 돼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충성스런 삶을 살아야 되겠느냐? 우선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웰던~ 잘하였도다. 웰던~ 잘 이뤄진 거 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이뤄지게 됐어요? 거기에는 그 일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그 섬긴 자 가 있었던 겁니다. 내가 맡겨진 이 일들이 잘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가치를 그 잘하는데 희생 시키는 겁니다. 잘한다. 라고 하는 것은 성과만을 부풀리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바른 방법이란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거기에다가 자기를 다 맞추는 겁니다. 우리들이 흔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업적을 남기기위해서 매진하다가 보면 자기가 탈진하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건 관계자체가 잘못된 방식으로 그 일을 해석을 한 겁니다. 진짜 하나님의 일을 잘하려는 사람은 그 결과만을 잘 남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진짜 잘하는 것은 결과만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 나가는 과정까지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그런 과정이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잘하는 사람은 성과만 잘 되면 다 잘되는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동기가 올 바른가? 내가 저 지체들을 이렇게 가르치고 이 모임을 이렇게 이끌어 가는 데 그 동기가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인가? 분명히 많은 결과는 맺었어요. 그런데 그 동기가 선한 것인가? 그 동기가 선하지 않다고 하면 그 결과가 좋아도 그 결과가 야합을 안 하는 거 에요. 그러니까 좋은 결과가 나와도 내가 이런 맘으로 이런 식 으로 하는 걸 하나님이 안 기뻐하신다 생각되면 안하는 거 에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잘 한거지 잔득 열매만 맺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열매와 우리들이 생각하는 열매가 다른 거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 한거 에요. 그런 의미에서 잘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 존재의 관심의 초점이 그 하나님의 사역에 모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모아진 것을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모아진 것과 동일 한겁니다. 그런 과정에 대한 점검이 없이 일에만 쏠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만 야합을 하게 되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다르고 일과의 관계 다르고, 이런 식으로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에 매몰되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는 멀어지게 되는 거지요. 그런 문제를 낳는 거 에요. 그런데 여기서 주인이 ‘잘 하였도다.’ 라는 것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두 달란트이상 남겨라. 그걸 우리에게 가르고 싶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걸 가르치실 때에는 전혀 그런 식으로 가르치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우리들이 한번 잘 생각해 보라 이거지요. 정말 여러분들은 영혼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그 영혼의 잘되고 못되는 것에 따라서 울고 웃는 사람들입니까? 한번 스스로 우리들이 자문 해보자 이겁니다. 정말 영혼이 잘되고 못 되는 것 에 따라서 울고 웃는 사람들이냐 이거지요. 그럼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할거 에요. 목사님! 그게 신앙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봐야지 무슨 사람을 섬기다 그 사람을 보고 울고 웃습니까? 그거는 하나님 뜻을 모르는 겁니다. 그 사람이 지금 울고 웃는 것은 한 영혼이 이렇게 됐다 저렇게 됐다 그걸 보고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서 하나님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해 주시는 메시지를 보면서 울고 웃는 거 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역에 전심으로 매달리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잘하는 종으로서 주님이 주신 이 자리에서 정말 아름답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되겠다 라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사역의 코를 탁 뀐 사람이라 구.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이실 수 있는 방법이 뭐냐면 사역을 따라서 울고, 웃게 만드시는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참 정결하고 바르게 살고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주님을 섬겼던 그때는 하나님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열매를 막 주시는 겁니다. 거기에서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사용하시는구나! 확실히 내가 내 자신을 쏟아 붓고, 많이 기도하면서 몸부림치니까 나는 능력이 없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몸부림 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질 않는 구나! 그걸 내가 거기서 터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거 에요. 일이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은 처음서부터 관계자체가 잘못 설정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하는 사람이 되면 그 잘하는 그 과정 자체가 사람을 바꿔 놓는 거 에요. 두 번째 나온 요소가 뭡니까? 첫째는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 뭐 에요. 착하게! 사람 자체를 착한 사람으로 바꿔줘요. 여기서 착하다. 라고 하는 뜻은 멍청하고 맹하다. 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주인을 섬김에 있어서 사악한 다른 동기가 없이 섬기는 그 마음을 가르치는 거 에요. 주님이 보실 때 바나바는 착한사람 이라 그러잖아요? 성령이 충만하고 착한사람이다. 바나바가 얼마나 단호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 가끔 나오지요? 심지어 바울 하고도 갈라서는 장면이 나오지요? 단호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단호함 없이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의 반열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착한사람이었는데 그런게 있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착한사람이란 멍청하고 물에 물 탄 것 같고 그냥 아무에게나 굽신거리는 무걸 호인과 같은 그런 착함이 아니에요. 착함은 뭐냐면 주인이 맡겨진 달란트를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데 아무런 사심이나 트릭이 없이 단 마음으로 그 목표하나를 위해서 부어진 마음, 그걸 가르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 했잖아요.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나 더러운 이익을 위해서 하지 말고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그 영혼들을 돌봐야 된다. 그게 착한 마음이에요. 여러분들은 무슨 동기로 영혼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영혼들을 깊이 섬기는 그런 동기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혼들에 대해서 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면서 느끼게 되는 우월감이 여러분들을 계속 섬기게 만들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자랑이 여러분들로 계속 섬기게 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 들은 착한 마음의 섬김이 아니라 이겁니다. 착한 마음의 섬김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사심이 없이 자기의 이익과는 상관이 없이 영혼들을 섬기는 겁니다. 그래서 난 영혼들을 섬김에 있어서 그 사람이 영혼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하느냐가 얼마나 많이 착하게 섬기느냐하고 아주 중요하게 집결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내가 교역자 회의 할 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역을 맡겨주실 때에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역을 맡겨주실 때 우리를 보고 축복해 주실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되요.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건 몰라! 교임들에게 있는 건 내가 맘대로 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내게 있는 것은 돈도, 시간도, 건강도, 지식도 다 주님의 것이니까 다 열어 놓을 테니까 주님이 맘대로 가져다가 쓰십시오. 하는 마음이 돼야 된다. 이거지요. 그게 착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의 식구들을 돌보고 어린영혼들을 가르치면서 여러분 아끼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 시간도 아끼지요. 영혼들을 위해서 섬겨야하고 뭔가를 꼭 해야 할 그 시점에 그것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할 적이 훨씬 많잖아요? 그렇지요? 영혼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물질로 섬기고 있습니까? 혹시 예산 타령만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우리교회에선 그렇지 않지만 연말이면 한 교육기관의 부장은 능력이 어디서 평가 되냐면 당회에 올라가서 얼마나 싸워서 예산을 타내느냐. 그게 유능과 무능을 좌우해요. 그게 뭐냐 이겁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아끼고 있는가 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착한 섬김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착하지 못한 것은 바르게 잘 섬기는 과정이 계속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자체가 변화되지 않아서 착한사람이 되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잘하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 우리를 포학하게 만들어요. 포학하게 만들고 아주 거친 사람으로 만들어가요. 우리의 사역이 잘 열매를 못 맺을 때는 스트레스를 받아 거칠고 잘 될 때는 교만해서 거칠어져요. 안하무인 이 된 다구.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자기를 쏟아 붓는 겁니다. 그래서 영혼을 대할 때 그 영혼들의 이름들이 그리움이 되고 그들이 누군가 물질로 인하여 고통 받는다 생각이 될 때 진짜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라도 나눠주고 싶고, 몸이 아프면 그것을 대신해서 아파주고 싶은 마음, 심지어는 장기라도 하나 떼어주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들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게 착한 마음이에요. 영혼들이 잘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가치다. 나 하나가 사람들에게 우습게 된다든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한다든지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에요. 영혼들이 잘되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런 식 으로 마음이 돌아서야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착한 사람이 되는 거지요. 그러다가보면 그다음에 세 번째 요소가 나오는데 뭐냐면 어떤 종? 충성된 종이에요. 이 충성이라고 하는 것, 착하다고 하는 것은 사심이 없이 섬기는 것을 의미하고요.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자신을 다 쏟아 넣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드릴 같은 걸로 벽을 막 뚫잖아요? 그랬더니 이 드릴 끝이 한 일이 분 동안에 새빨갛게 달아요. 그러면서 이게 뚫어지는 거 에요.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훤히 태양이 비췰 때 는 모든 사람이 따뜻하다. 바람이 불면 서늘하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돋보기에다 빛을 모아가지고 종이에다 내리쬐면 퍽하고 불이 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항상 심플 라이프로 살아야 됩니다. 즐기고 싶은 것을 다 즐기고서는 군사의 길을 걸어 갈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 모든 걸 다 하면서도 잘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잘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어느 의대생의 이야기인데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를 시키는지 머리끝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라틴어로 온 몸을 외워야 되는데 미치겠더래요. 그래서 고등학교 다닐 때 까지 공부 꽤 잘한다고 그랬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맨 날 빵점만 맞는 애들도 여럿 봤어요.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6년 다니는 동안에 강의실 ,도서관, 채플 실, 이 세군 대 밖에는 몰랐대요. 그러니까 그렇게 집중해서 뭔가 자신을 쏟아 붓는 겁니다. 그게 충성이에요. 충성! 그러니까 힘을 분산하면 안돼요. 힘을 한데 모아가지고 자기를 다 쏟아 부을 때 거기에서 작렬하는 것 같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제게는 이 어린 영혼들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올 때 그게 초점이 맞 쳐 지는 거 에요. 거기에 불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가치를 위해서 내 즐거움, 내 취미 모든 것들을 희생 할 수도 있을 때, 그래서 전 요새 마음에 자꾸 다가오는 게 우리 선배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목양일념이거든요. 목양일념! 다른 거 안 하고 목회만 한다. 그 뜻이거든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오직 목회밖에 할 게 없으면 그것만 할까? 나는 교수도하고, 뭐도 하고, 다해야지 그랬는데 그게 갈수록 참 진리다. 제가 우리나라에 내놓으라 하는 부흥사들의 교회에 많이 다녔었거든요. 건강하다는 느낌을 받은 교회가 몇 안돼요. 우리 교회도 이렇게 더듬어보면 언제부터 하나님이 교회에 영혼들을 많이 보내 주시기 시작했냐하면 제가 오랫동안 다니던 집회를 딱 정리하고 원칙을 세우던 다음부터였습니다. 뭐냐면 수요 강단을 내가 안 비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영혼들을 많이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온 영혼들이 잘 정착했어요. 지금도 아주 먼 외국을 나가지 않는 한 세상없는 교회에서 오라고 해도 전 안 갑니다. 얼마 전에도 교회에서 왔는데 우리 교단에서 가장 정상급에 있는 교회에요. 웬만한 설교자들에게는 그 교회 강단에 가서 한번 서 보는 게 꿈 일수도 있어요. 일언제하에 거절 했습니다. 월화수목요일까지 해 달라고 해서 월화 까지는 할 수 있겠는데 수요일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어른이 소식 듣고 나중에 노여워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내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초점이 하나로 모아져서 거기에 하나로 쏟아 부어진 것 같은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야 돼요. 그게 충성된 삶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주인이 두 달란트를 맡겨줬을 때 주인은 그 일을 작은일 이라고 생각했어요? 큰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맡겨 줄 때는 그게 작을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을 그렇게 혼냈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맡겨 줄때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겨 줬는데 다 이룬 다음에는 작은일 이다. 라고 했습니다. 왜? 네가 앞으로 해야 할일을 생각하면 그건 작은 일이다. 충성스럽게 산 사람한테만 작을 일이라고 그런 겁니다. 왜? 그들에겐 미래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그러니까 큰일 놓고 그냥 끝나는 겁니다. 큰일인데 왜 이것도 못했니? 그러고 그냥 끝나는 겁니다. 그것이 큰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주인은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일을 그 종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쏟아 부었기 때문에 주인이 그걸 작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이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미래에 맡겨질 일에 비하면 이 까짓 거 두 달란트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겁니다. 제가 전도사들을 많이 보는데 교회 때 충성하는 사람들은 전도사 때 도 충성해요. 그리고 목사도 보면 전도사 때 어느 교회든지 가가지고 거기에다 아예 유서 쓰는 마음으로 생명 건 사람들이 목사가 되서도 충성스럽게 살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떠 있습니다. 그래 한번 자리가 바뀌면 뭔가 떠서 뭔가를 해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건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거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성취욕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일을 향해서 깊이 쏟아 붓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가 안 일어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영혼이 잘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쏟아 부으면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연말에 고등학교 3학년들의 출석부를 선생 하나가 넘겨받았는데 12명 이드래요. 그런데 하나도 안 나오는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넘겨준 선생들이 이야기하는 거 보면 다 이유가 있어요. 뭐 주일마다 특기 반 학원을 가고, 얘는 집에서 가게를 보고, 얘는 진학을 포기 했고, 얘는 가출을 했고, 다 이유가 있어요. 두 달 을 무릎 끓고 기도하면서 심방을 하니까 석 달 만에 열두 명이 모두 모인 겁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간절히,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그 영혼들을 축복해 주시길 원하세요. 그런데 그 영혼들 축복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가 깨뜨려져서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땀과, 눈물과, 피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지금 내 사역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죽고 싶어서 괴로워해야 되거든요. 내가 하나님 사랑하는데 왜 축복이 없습니까? 뭘 잘못됐는지 한번 말씀을 해 달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는데 그렇게 안 해요. 그렇게 안하니까 그냥 견디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는 잘하는 것으로도 안보고 착한 것으로도 안보고 충성된 것으로도 안보는 겁니다. 그냥 현상유지를 해 나가는 거지요. 생각을 해야 되거든요. 숫자만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의 축복은 두 가지로 나타 날 수밖에 없어요. 뭐냐면 양적인 변화와 그다음에 질적인 변화,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때로는 전혀 같이 안 갈수 도 있어요. 양적으로 많이 변화가 일어나도 질적으로 하나도 변화가 안 일어나는 때도 있어요. 그런데 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면 반드시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요. 중고등부 같은데 서도 보세요. 은혜 받고 변화 받은 아이들이 전도를 해요. 그리고 놀라운 게 교회에서도 그냥 설렁 설렁 꼭 덜 삼아진 수육처럼 그렇게 밖에 은혜 못 받은 사람은 전도해서 믿게 만들어도 꼭 자기 같은 사람 만들어놔요. 그리고 진짜 푹 삶아 진 것처럼 완전히 뒤집어진 사람은 전도를 해도 꼭 자기처럼 만들어 놔! 왜 그러냐하면 저 사람이 반만 삶아지면 자기가 알아! 저게 뭔지!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야 !자긴 이사람 잘됐다하지만, 저건 아니다 경험해 봤는데 저거는 소용이 없다. 다시 살아 나간다. 다시 육신이 산다. 그런 생각을 하고 기도하면서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 에요. 놀라운 일치점들을 보여요. 그게 뭐냐면 충성스런 삶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산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있다 이거지요. 미래가!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게 늘 그거거든요. 위대한 선교사가 된 사람들도 보면 위대한 선교사가 되려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고민한 게 아니라 영혼을 가지고 씨름한 사람들이에요. 윌리엄 케리, 와이튼 무디, 이런 사람들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씨름하고 매달린 사람들이에요. 둘 다 구두 수선공 이였잖아요. 윌리엄 케리 도 마찬가지고 그래가지고 구두 꿰매고 가죽 남은 게 있으면 동그랗게 지구 위 만들어가지고 거기다 자기가 엉성하게 펜으로 지도 그려서 그걸 끌어 앉고 자는 거 에요. 그게 뭐냐 하면 위대한 일을 꿈꾸는 게 아니라 영혼 하나하나에 대한 꿈을 꾸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충성스럽게 살면 미래를 주시고, 미래를 주시고 또 미래를 주시는 거 에요.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거 에요. 그랬더니 뭐라 그러시냐하면 큰 것을 네게 맡기리니~ 그러니까 이건 굉장히 큰 것이지요. 큰 것이 아직 뭔지 모르지만은 엄청난 거지요. 큰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이게 무슨 뜻이 에요?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있고 그 미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기 전에 어떤 맘으로 참여하게 되지요? 주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스럽게 살았단 말이지요. 그런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좀 충성스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나에게는 영혼들 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찬양! 이하생략!)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영혼들을 위해서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 혼자서 다 집어치우고 매일 명상에 잠겨서 십 년이 가도 이루지 못하는 신앙의 도리를 짧은 시간 안에도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정말 그것을 기억해야 되요. 옛날에 손동희 권사님 와가지고 손양원 목사님의 피눈물 나는 고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신앙을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때 중간쯤 앉아서 이렇게 쳐다봤어요. 어떤 태도로 저 귀한 이야기를 듣나. 여러 사람들이 잔잔한 간증을 들으면서 복 바치는 울음을 억제하지 못해요.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의 충성스런 삶이 마음에 다가올까? 자기가 자기를 다 쏟아 붓는 삶을 살아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그 충성스런 사람들의 생애를 들을 때 가슴이 저며 오는 것 같은 공감을 느끼는 거 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쏟아 부어서 충성스럽게 영혼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을 섬기는 기쁨이 없습니다. 충성하는 사람들! 너무나 충성스러웠기 때문에 영혼이 실족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던 사람들은 한 영혼이 구원받고 변화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뛸 듯이 기쁜 겁니다. 하나님의 기쁨이거든요. 그런데 아예 그런 생사를 건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나오면 나오고 안나오면 말고 기쁘긴 기쁘지만은 그러나 그건 자기의 어떤 성취감에서 기쁜 거지 영혼이 잘됐다는 소식 자체가 자기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는 그런 기쁨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것이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하고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병든 영혼의 상태의 반영이라는 것에 대해서 눈이 뜨지 못한 거 같아요. 여러분들은 내일 6시간 내지 7시간에 걸쳐서 개인 양육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 한 이 자세가 기본이 되지 않으면 다 쓸데없는 이야기들의 시간 낭비에요. 절대로 영혼은 제도나 기술, 틀 속에 집어넣으면 저절로 멋있게 크는 그런 건 없어요. 그런 방법은 있지도 않고 있어도 하나님이 무력화 시킬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과 충성된 농도 짙은 삶을 살 때, 거기에 자신을 쏟아 부을 때, 거기에서 자신이 변화 되는 겁니다. 그걸 깊이 생각하면서 사역할 때 한없는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영혼들에 대한 기쁨, 주님이 전도 대 들의 보고를 들으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마음과 영적인 특성들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상 A TAPE 마25:22-23)
2. 새벽예배: 교사로 섬긴다는 것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9)
교회교육의 관권은 두 가지다 그렇게 봅니다. 하나는 사랑과, 또 하나는 지식이다.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두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기도 하는데 그 기도 제목이 뭐냐면 그들이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그 사랑이 점점 자랐으면 좋겠다. 그런데 앞에서 뭐라고 그랬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그러니까 자기 속에 있는 그런 사랑이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겁니다. 제가 제일 큰 계명을 말씀드리면서 사랑을 이웃을 향한 사랑이냐? 주님을 위한 사랑이냐? 이렇게 나누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 말씀 드렸지요? 사랑은 하나에요. 그런 사랑이 점점 풍성하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거지요. 또 하나는 지식과 총명이에요. 그런데 이지식과 총명을 굳이 나눠서 설명을 한다면 지식은 복음 진리를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총명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광명이에요. 그래서 영적인 놀라운 분별력이에요. 지식이 많으면서도 영혼의 상태가 맑지 않으면 총명이 떨어 질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굳이 가른다면 지식은 복음 진리를 아는 깊이 있고 체계적인 지식이고, 이 총명이라 하는 것은 좋은 영혼의 상태를 유자함으로 말미암아생기는 영적인 지각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 들이 두 종류이지만 세 가지가 하나가 되어서 점점 자라게 하는 것 그것이 제일 관권이라 이겁니다. 셋 중에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나가면 안돼요. 우선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건 어떤 일입니까? 이건 강력한 회심의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주님을 향한 사람이 심겨지지가 않아요. 강력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면은 뚜렷한 표지가 일어나는데 그 표지가 무엇이냐면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는 겁니다. 이게 회심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느껴지지 않고 보지 못했던 하나님이시지만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하고 영혼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마음속에서 커다란 변화를 받아서 회심을 하게 되고 그렇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도 바뀌고 냉랭했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뜨거운 사랑도 생겨나지만 여전히 문제가 뭐가 남느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은 그 뜨겁게 회복된 사랑과 은혜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이 복음 진리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우리교회에 오기 전에 주위에서 많이 봤을 겁니다. 뭔가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도 체험하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 뜨거운 은혜도 받고 하나님을 향해서 순수한 동기도 가졌는데, 살아가는 삶 자체는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뭔가 일관성이 없고 동의 할 수 없는, 빗나간 열심, 그리고 바뀌지 않는 삶의 목표, 그리고 일관성이 없는, 논리가 없는 성경이해, 이런 것 들을 볼 수 있지요. 그것이 뭐냐면 사랑의 정서는 회복이 됐는데 불행하게도 복음 진리에 대한 이해가 매우 척박한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거룩한 삶이 나올 수 가없습니다. 생명은 있는 것 같지요. 일은 열심히 하고 주님 사랑하니까 세상적인 탐욕, 이런 것 들은 또 버리지요. 그 대신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해박한 복음 진리의 빚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이상의 상태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겁니다. 자기가 정말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런 은혜 속에서 있지 못하면서 어떻게 변화되지 못한 영혼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면서 마음 아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하지요. 그렇게 냉랭하고 회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께 기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선 자신이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있어야 된 다 이겁니다. 이거는 기본입니다. 그 기본조차도 안 되니까 그게 문제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우리자신이 풍성한 복은 진리 안에 있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하나님의 복음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이 끊임없이 진리의 빛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사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 다 는 겁니다. 그래서 깨닫는 복음 진리의 빛으로 말미암아 자기 어두운 영혼에 빛을 경험한 사람, 깨닫는 복음 진리를 통해서 자신의 영혼에 어두움이 물러가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삶을 경험한 사람, 그리고 그런 발전이 계속 있는 사람, 그 시람 이 교사로서의 중요한 자격입니다. 그런 사람은 또 어떤 일이 생겨나느냐하면 복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열심은있고 순수함은 있어도 여전히 동물적인 삶을 면하지 못하는 사람들 향해서 아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 진리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 복음 진리 안에서 자라간다 라고 하는 건 말이지요. 우리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들이 죠나단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거기서 보셨을 겁니다. 왜 내 회심은 옛날의 걸출한 사람들의 회심과 다를까?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해서 만족스런 해답을 얻을때 까지 연구를 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계속 탐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이러한 문제를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만족할만한 결과에 도달했다. 이제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겠다. 그의 뛰어난 천재성도 있었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민하던 모든 문제점을 가지고 신학적인 탐구의 화두로 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연구해 가는 과정 자체가 자신의 영혼을 놀랍게 비옥하게 하는 거 에요. 여기 신학생들도 많이 있지만 가만히 보면 신학공부 하다가 자기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거든요. 왜 그러냐하면 자신 속에 고민 되어지지 않는 것을 화두로 삼고 고민을 하다가 보니까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학문의 상태가 완전히 결별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세상일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식 의 신학항해 전통이 끊어진 겁니다. 그런데 그분은 위대한 신학자니까 그런 삶 을 살았지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여러분들은 그런 차원의 것은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으면 뿌리까지 깊이 캐들어 가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태도가 둘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자신 안에서 어떤 문제가 발견되면 끝없는 자기연민이나 자기학대로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이거는 감정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그런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정확하게 자신이 반복하고 있는 어떤 실패나, 자신의 삶에 있어서 깊이 영향을 주고 있는 자기의 영혼의 잘못된 상태에 대해서 냉정한 맘으로 그것을 관찰하고 거기에 대한 적절한 답과 해결책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신앙의 선배들의 신앙의 지식을 의존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가지고 다니는 장비자체가 우리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것과 달라요. 정말 달라요. 언젠가 알프스를 정복한 사람들의 야기를 다큐 로 본적이 있는데 30년전 의 이야깁니다만 놀랬어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니까 30년 전 이야기 아니에요? 프랑스에다가 구두를 맞추는데 지형의 지도를 사진을 찍어서 제화회사에다 보내면 제화회사에서 그 코스에 맞게 구두를 만들어 주는데 한 켤레에 250만원이에요. 그때 250만원이면 어마어마한 돈 이였어요. 그 중학교 때 우리가 살고 있던 그 집이 16만 원짜리였습니다. 16만 원주고 샀어요. 8평짜리 집을! 그런데 250만원이면 한번 생각을 해봐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에요. 지금도 아마 그렇게 할거 에요. 그걸 제작을 하는데 6개월 이상 걸린답니다. 그러니까 달라요. 유형이 달라요. 늘 고민은 해요. 그런데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하고 똑 같으냐 하면 높은 산이 있으면 먼저 산에 오를 생각하지 말고 좋은 등산화 어디서 파나? 쟈일 은 어디서 파나? 아니면 사다리는 어디서 파나? 그거 몇 개만 사가지고 가면 쉽게 올라갈 수 있겠는데 그냥 맨 손으로 암벽등반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큰 체구에 암벽등반이 되겠어요? 배는 나와 가지고 말이지요. 올라가다 떨어지고 올라가단 떨어지고 나중엔 낙심하게 되는 거 에요. 그거는 바보 같은 겁니다. 제가 미국에 갔다가 아주 좋은 책을 구했는데 에이 가이드 투 퓨리찬 이라는 책을 구했어요. 거기에 보면 어떤 사람이 청교도들의 모든 저작을 테마 별로 분류를 해놨어요. 위로, 그러면 위로에 대한 이야기가 존오웬 은 몇권 몇 페이지에 나온다. 웨드워드 는 몇 권 몇 페이지에 나온다. 리챠드 쉽슨 무슨 책 몇 페이지 에 나온다. 이걸 다 분류를 해서 이만큼 만들었어요. 완벽하다고 까진 말할 수 없지만 굉장히 의미 깊은 작업이에요. 그래서 도움을 받는 거 에요. 그러면서 부지런히 그 고민을 탐구 화해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민하고 있는 그 주제에 대해서 제일 먼저 사고의 폭을 넓히려고 해도 복음의 지식에 대한 빛이 들어와야지만 사고의 폭이 넓어지지 그게 안 들어오면 사고는 항상 묶여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재들은 사고하는 자체가 우리하고 다릅니다. 왜 다르냐하면 지식이 많으니까 사고하는 폭 자체가 달라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복음 진리를 많이 알면 알수록 성경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에드워드의 자서전 읽어보니까 그런 이야기해요. 어떤 때 는 성경 한절을 읽다가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거기에 하루 종일 멈춰있는 것 같은 모습을 발견하는 거 에요. 그 말씀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뜻이 너무나 많고 크기 때문에 도저히 더 이상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없어하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복음 증거의 빛을 받는 겁니다. 빛이 많으면 아무리 이상한 신자라도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탁 드러나요. 그런데 그 빛이 없으면 사람 하나 갖다 놓으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거 에요. 그러니까 그들을 적절하게 도와 줄 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직장 다니면서 밥벌어먹기도 바쁜데 뭘 탐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지만 쉽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 제약조건이 많아요. 우선 여러분들이 기존에 나와 있는 tape이라도 주제 별로 계속 듣기를 바랍니다. 시리즈 별로 듣고 나가서 하나하나 정리를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할수 있으면tape전체를 소장 할 수 있도록 힘쓰면 좋겠다고요. 나는 동의해요. 그래서 집에다 잔뜩 쌓아두고 빌려줘요. 자기가 말로 다 설명 못해도 빌려주면 되잖아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tape를 꾸준히 대하면서 현실적으로 영혼을 돌보는 대서 브로크 가 걸려서 궁금하면 자기들이 듣고 지식의 빛으로 삼으면 참 좋을 텐데 제가보기엔 열린 교회 에 왔을 때 의무적으로 내주는 서너 세트 까지는 하는데 그다음에는 항복이에요. 매주 듣는 것만으로도 버겁게 생각이 되는 모양이에요. 그렇게 되면 진전이 없어요. 계속해서 들어 나가는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반드시 빛이 풍성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복음진리라고 하는 것은 고도의 지식수준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접근 할 수 없는 그런 체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이 복음 진리의 해박한 이해를 갖는 걸 한번 보세요.그런 거 란 말입니다. 탐구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잘 안 해요. 그것이 제일 안타깝고, 그런 것 들을 위해서 깊이 노력하고 애쓰지 않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들의 태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탐구의 정신을 가지고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힘 써야됩니다. 여기서 자라간다 그러잖아요? 사도 바울 자싱도 자라가는 거고 빌립보 교회 교인들도 자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자라가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노력에 많이 의존 합니다 이게 성화의 영역과 같이 협력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적인 광명입니다.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영적인 광명입니다. 복음 진리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다 가지고 있어도 영혼이 잠들어있으면, 영혼이 잠들어 있어도 그 진리에 대한 이해는 어디 가지 않거든요. 보인다구요. 이야기 많이 하는데 저건 신앙이 아니다. 그건 영혼의 상태가 잠들어있어도 일단 복음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다 드러납니다. 저건 빗나간 열심이다. 이건 구원받지 못한 상태다! 이런 지식이 있습니다. 영적인 총명 없이도 그것은 가능해요. 그런데 총명이 영혼의 상태, 사물의 상태를 꿰뚫어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알고 복음 지식도 없고 영혼의 상태가 깨어있지 않으니까 넘겨짚다가 헛 다리 짚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 사람들 일수록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하지요? 그건 다 폼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건 그런 복음 지식이 있고 영적인 광명이 함께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영적인 광명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영어를 전공한 형젠데 아주 잘해요. 외국한번도 안 갔다 와도 선교지로 갔는데 영어로 능숙하게 설교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가지고 갔어요. 참 대단 한거지요. 머리도 샤프하고 사람이 참 진실해요. 사기 그런 게 없어요. 조금 게으르긴 했지만, 그런데 외국에 유학을 갔다 왔는데 사람이 좀 이상해 졌어요. “지금 성령께서 제게 말씀 하시는 데” 이렇게 직통파로 변한 거 에요. 그게 사실 대부분 안 맞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그런 복음 진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없이 번득하고 어떤 진리가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번득하고 들어오는 그 빛이 그 사람의 신앙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기는 다분히 힘들어요. 그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건 깨어 있는 영혼의 상태에서 영적인 분별력을 갖는 겁니다. 이건 복음지식 가지곤 안 됩니다. 영들을 분별하는 것들은 복음지식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직감적으로 저 사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성령인지, 더러운 영인지, 이런 것 들을 분별하는 것 들은 진짜 영적인 직관이 필요하거든요. 그런영적인 총명함을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다 자꾸 자란다는 겁니다. 자신의 영혼을 잘 관리하고, 순결한 삶을 살고, 기도로 영성이 깊어지면 그런 분별력도 자라게 됩니다. 복음지식도 자라게 되고 사랑도 자라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를 빌립보 교회 교인에게 간절히 원한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분별력이 있고, 진실한 삶이 되고, 허물이 없는 삶이 되고,열매가 가득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흘러나온다 이거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사역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게 그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영혼들이 회심하고 변화되어서 주님의 사랑으로 뜨거워지는 것, 그다음에 하나님의 복은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나가는 것, 세 번째로는 영적인 분별력을 갖는 것, 이걸 이루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의 노력도 세 가지 뭐 에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회복, 그리고 복음 진리에 대한 철저한 탐구, 그리고 세 번째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잘 유지하는 일, 이런 것들이 삶의 문제와 연결 되 있단 말입니다. 그런 교사가 될 때, 그때 많은 영혼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빌1:9)
3. 세미나: 개인 양육에 관하여
지금서부터 14년 전 에 , 14년전 이면 제가 신 대원 1학년 때 인데 그때 제자훈련에 매력을 느끼면서 깊이 빠진 적 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신없이 살다가 하나님 만나고 나서는 이게 다 지푸라기와 같구나 하고 다 밀쳐두었지요. 사실 그쪽에서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에 대해서 공허한 것들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버려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게 14년전 에 쓴 겁니다. 이게 레포트도 아니고 너무 많아서 양을 줄인 겁니다.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청년부 양육시키기 위한 책인데 출판도 안 된 겁니다. 대학원 1학년 때 누가 책을 출판해 주겠어요? 그렇게 해서 만들었습니다. 오래간만에 꺼내보면서 목회를 하면서 제생각이 바뀐 건 아니고 똑같은데 이런 것 들이 지푸라기와 같은 정도밖에 가치는 없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필요하다 라는 걸 느꼈습니다. 제자훈련, 개인양육, 이런 것 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뭐냐면 절대로 제자 훈련을 통해서는 영적인 거인이 탄생 안하게끔 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훈련이나 개인양육이 어떤 유익이 있느냐? 그건 묘목에 부목대기입니다. 무슨 소린 줄 알지요? 묘목을 심는데 그 묘목이 바람이 불고 잘 쓰러지니까 부목을 대는 거 에요. 그 부목 자체가 묘목에 생명을 주는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나무가 워낙 어리고 바람에 잘 넘어지니까 그 부목이 뿌리를 내리는데 도움을 주는 겁니다. 그 정도의 유익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이나 양육을 토대로 하는 교회 들은 새 가족 반은 왕성해요. 재미있고 은혜가 넘쳐요. 그런데 그 이상은 안가는 겁니다. 그걸 기억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체제가 상당히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정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생명을 일으키는 것 이라기보다는 그 묘목에 부목을 대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는 겁니다. 부목자체가 생명을 주진 않지만 결정적으로 굉장히 도움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겁니다. 제자훈련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목회의 방향을 삼은 그 교회에서는 영적인 거물들이 생겨나지 않게 돼있는 겁니다. 그 대신 상당히 평준화를 이루는 면은 있습니다. 일정한 수준의 훈련들을 다 받게 되니까 일정한 개념에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깡통은 아니라고요. 여태까지 가만히 보면 이나마도 안한 교회에서는 하나도 안 가르친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느 날 전도를 받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은혜를 주셨어요. 교회 나와서 펑펑 울고 은혜 받고 새벽기도 나오라고 해서 새벽기도 나오고 성가대 밥하라고 그래서 밥도 하고 열심히 봉사 하면서 산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이 강한 은혜를 주실 때 는 말씀에 대한지식이 별로 없어도 조금이라도 진리의 요소가 있을 거 아니에요? 교회니까 그런 것 가지고 성령이 역사 하셔서 먹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언제나 은혜 속에서 마음이 촉촉이 적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의 마음이 변하잖아요? 그렇게 마음이 점점 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진리의 요소도 없습니다. 자기가 왜 멀어지는지도 잘 모르고 또 멀어지면 마지막으로 어느 길로 가는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무엇을 대적하며 싸워야 되는지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전체적인 구도가 무엇이고 왜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셨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겁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우상을 숭배하는 것 같이 그런 식으로 교회생활을 해 나가는 겁니다. 모든 것들이 다 자기감정에 부딪히는 것들에 의해서만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게 제자훈련이 들어오기 전의 한국교회의 상황 이였거든요. 그런데 제자훈련이 들어오고 나니까 제자훈련자체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훈련자체가 성경공부를 도입을 해야지만 되게끔 되어있어요. 그러면 성경공부가 제자훈련의 목표냐? 그건 아니에요. 제자훈련을 하는 분들 자신이 무얼 이야기 하느냐하면 성경공부는 제자훈련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성경공부를 매개체로 해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관계를 기초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을 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나마라도 배우는 겁니다. 거기는 단계가 있잖아요? 매일 똑같은 것 만 가지고 할 순 없을 것 아니에요? 그렇지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기독교 교리의 틀을 한번 보는 겁니다. 물론 그 구조자체가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성경전체를 흐르고 있는 진리들을 균형 있게 골고루 배운다고는 할 수 없지만 , 왜냐하면 그자체가 이미 하나의 그룹이나 개인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가기 위한하나의 자료로서 제시 된 거 기 때문에 그런 한계는 물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기독교의 진리 체계를 배우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한국교회에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무조건 비판만 할 것 이아니라 대안을 이야기하면서 비판을 해야 합니다. 그걸 그나마 라도 도입한 교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성경공부의 커리큘럼이 짜여있어요. 배워나가게 된다 구요. 물론 그런 틀이나 커리큘럼들이 기존 교회에서는 없었느냐하면 그건 아니에요. 그게 뭐냐 하면 교단에서 나온 공과 같은 것들은 영아 부 때부터 시작해서 성경전체를 돌게 돼 있거든요. 그것도 모순이 뭐냐면 계속해서 다니나 하면 그렇지 않잖아요? 영아 부 때 다닌 애들이 초등 부, 중등 부, 고등 부, 장년 부 까지 계속해서 다니는 사람들을 염두 해 둔건데 그게 비율로 볼 때 얼마나 되나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구난방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심오한 깊이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기본적으로 성경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과 교리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이 싸이클을 그리면서 순환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이야깁니다. 예를 들면 유치 부 때 한번 쭉 돈다든지 초등 부 때 쭉 돈다든 지 중등 부 때 돈다든지 그래서 중간에 들어와도 대학부만 다니면 전체를 한번 쭉 돌 수 있도록 그런 식으로 커리큘럼이 되 야 되거든요? 물론 그렇게 되면 깊이의 문제가 나올 수 있겠지만 어쨌든지 그런 개념을 갖게 된다 말이지요. 있었는데 그자체가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일학교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중고등부까지는 교육이 되지만 대학 부는 교육이 안 된 겁니다. 대학 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생겨난 게 제자훈련 같은 것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선교단체들이 교회에 영향을 미쳐서 그 선교단체를 모방한 청년대학부 운영시스템을 가지고 들어온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교회가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서 깨어나게 됐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주일학교까지는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배우는데 중고등부까지만 해도 이미 아이들이 고정적으로 교회에 잘 출석하지를 않고 중구난방인 비율이 높아져요. 대학 부 때 가면 완전히 대학생이 되 버리는 거지요. 그리고 장년이 되면 교육 이라고 하는 것은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구역예배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친교거든요. 퍼질러 앉아서 밥해먹고 수다 떨고 세상사는 이야기 하고 그러는 거거든요. 그거보다 약간 나은 구역이 전도사나 구역인도자를 파송해서 성경본문 읽고 짧게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한국교회의 장년 부 신자들, 그런 성경공부 과정을 거치면서 장년이 된 사람들에게는 공부에 대한 저항감이 있어요. 그러니까 구역예배를 해도 앉아서 한 십분 간단하게 설교하고 앉아서 먹으면서 돌아가는 이야기하고 아니면 기도를 한다든지 이런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지 책상 펴놓고 공부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구요. 그걸 고치느라고 우리 교회에서도 제가 많이 씨름을 했어요. 어느 정도 정착이 됐다고 보는 거지요.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면 30대 40대 초반에 있는 사람은 안 그래요. 대학부과정이나 청년부 과정을 그런 식으로 거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이면 성경공부로 시작을 하는 거 에요. 그자체가 하나의 모임을 위한 구색이 되는 거란 말이지요. 그런 것들을 제자훈련 같은 것들이 가져다 준겁니다. 나름대로의 한국교회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그걸 우리들이 인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체에 대해서 너무 과신을 하는 게 문제란 겁니다. 클라이드 라이드라고 하는 사회 심리학자가 무얼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현대사회는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지고 또 사람들의 접촉도 많아졌지만 그와 반대로 인간은 점점 더 소외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고독한 군중! 군중 속에 고독! 그런 이야기들이거든요. 그만큼 사회가 각박해지고 기본적으로 산업사회가 되고 나니까 전부가 익명의 시대가되는 겁니다. 인간관계가 많이 단절되는 겁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가는 겁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대해서 점점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이 그런 강한 매력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공부를 미끼로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적인관계를 맺게 해 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사람이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끔 그렇게 관계를 맺혀 주는 겁니다. 거기서 사람으로 말미암는 강한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건 사람이 아무리 관심 없어 보여도 열 대번 정성껏 쓴 편지를 받으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러냐하면 그렇게 해주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따뜻하게 해주고 자기를 인간이하, 혹은 눈에 보이는 대로 대접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를 귀하게 해주고 접근해 올 때 사람들에게는 다 감동이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왜 그렇게 간절한 갈망으로 생겨나게 됐냐하면 60년대 후반으로 시작해서 70년대 넘어오기까지 한국사회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던 생각이 뭐였느냐 하면 업적주의 내지 성장 일변도의 드라이브였어요. 미국인 교수를 만나가지고 ‘안되면 되게 하라 ’는 것을 영작문으로 해가지고 보여 줬거든요.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게 무슨 말이냐 ’이게 한국에서 70년대 유행하던 구호 라 구! 군대에선 아직도 이런 말 잘 쓴다구 했더니 ‘아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어떻게 안 되는 걸 되게 하냐구! 되게 해서 될 수 있는 거면 그건 안 되는 게 아니지 않느냐’ 이거지. 훨씬 논리적이지요. 말도 안 된다 이거지요. 그런 식 이였거든요. 그런 걸 교회 가 그 시대정신과 결별할 수 있느냐, 교회하고 세상하고는 그렇게 무 자르듯이 그렇게 나눌어 지는 게 아닙니다. 결별할 수 없으니까 교회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성장주의적이고 업적주의적과제를 쫓아가는 겁니다. 교회가 성장주의, 업적주의로 나간다 하면 뭔가요? 할 수 없이 물량 공세로 나가는 겁니다. 많이 모이는 것, 그리고 큰 교회를 짓는 것, 그런데 그때 상황이 참 잘 맞아 떨어진 게 뭐냐면 60대 후반에는 우리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고달픈 인생을 살던 때 입니다. 별을 보고 나갔다가 별을 보고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분위기가 지금도 그대로 생각이 나요. 거리거리에 재건대가 있어 가지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새마을 취로사업장 같은 거거든요. 그런데 특징이 요새 새마을 취로 사업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데 그땐 새파란 젊은이들이 도로도 깔고 이러면서 다니는 겁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얼마 안 되는 돈 들을 받은 겁니다. 전부다 한국국민이 부지런하니까 진짜 부지런히 일한 겁니다. 한번 잘살아보자~ 뭐 그런 것 들이 교회의 목회철학에도 들어온 겁니다. 왜 그런 것 들이 들어오게 됐을까요? 간단해요. 복음에 대한 깊은 변화가 교회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것 들이 들어오니까 강하게 밀려오는 겁니다. 그런 와중에서 크게 성공한 교회가 번영주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각광을 받게 된 겁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먹고 부자 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교육의 질은 한없이 떨어지고 거의 교육은 시키지 않고 세를 불리는 작업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때 한참 각광을 받던 게 뭐냐면 능력부흥이에요. 능력부흥회, 그때 각광을 받던 사람들이 몇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다 사라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몰리는 겁니다. 거기에서 강한 성령의 역사, 이런 것 들을 이야기하는데 근본적으로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있어도 아주 깨끗하고 분명한 복음이 없고 거룩한 삶에 대한 진실한 가르침들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들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신자들에게 이어지지를 안았던 겁니다. 그러는 와중에 70년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데 그게 뭐냐면 70대 초반이 바로 6.25가 끝나고 나서 허리띠 졸라매고 무조건 공부해야 산다. 공부 안하면 너희 죽는다. 그렇게 학교를 집어넣었던 아이들이 막 쏟아져 나오던 시점이 70년 대였습니다. 70년대를 들어서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이 그때 란 말이지요. 71년~2년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때 6.25직후에 태어난 아이들이 국민 학교 학번으로 59학번 내지 60학번, 내가 62학번이에요. 그 학번 이 아이들이 한꺼번에 막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 아이들은 고등학교 이상을 나왔으니까 깼거든요. 또 하나는 부흥의 불들이 꺼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이제 새로운 위식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유신이니 이런 것 들을 물고 늘어서면서 민주화의 영기가 일어나기 시작한겁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기름 돌 듯 하는 겁니다. 나이 들고 텅 빈 사람들은 계속 박수부대하면서 하는데 젊은이들은 아니에요. 가슴에 안 다가와요. 그러던 상황에서 교회가 진공상태에 있을 때 성경공부 방식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제자훈련이 온 겁니다. 그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겁니다. 그것도 선교단체에서부터 시작이 된 거거든요. 그게 진짜 재미있는 거 에요. 우리는 깡통인거에요. 70년대엔 성경공부 교재 같은 것도 없었어요. 독보적인 교재가 텐스텝 그런 거였습니다. 선교단체 에 가서 공부하고 온 아이들은 눈빛이 막 변하는 겁니다. 한국교회는 주의 종 대접 잘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간단한 구도 이상을 못 넘어서요. 그러다가 제자훈련이 들어오니까 엄청난 각광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여를 하긴 했는데 어떤 문제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가치관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나라에서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목회의 방식이 있잖아요? 공적인 예배가 중심에 서 있고, 전도하고, 심방하고 가르치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전면적인 회의의 바람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의 비민주적인 체제에 대한 저항감도 있었고, 그리고 그런 것 들을 유지해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지식이나 이런 것들에 의해서 존경 받을 수 없고,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인 삶에 회의도 많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한 권위나 이런 것 자체가 다 붕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교재를 끼고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 인걸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 들이 공적인 예배 속에 깃드는 감화력 있는 설교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강하게 맞물리면서 반작용으로 나가기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공부하면서 보면 알지만은 근본적으로 제자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단계까지만 가면 그 다음에는 동일 한 것들만 계속되는 반복 일뿐입니다. 학습내용은 계속 올릴 수 있어요. 그런데 업그레이드 하다보면 결국은 신학교 비슷하게 가 버립니다. 기본적인 성경의 교리들을 이해하고 성경의 기본적인 틀이 어떤 건지를 배우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깊이 적용시키면서 나가는 거거든요. 이거는 사실 교재를 가지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이 제자훈련의 프로그램들이 강한 흡입력이 있어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거듭난 사람들을 기쁨 충만하게 하고 성장의 기쁨들이 있게 만들어주는데 어느 정도 가게 되면 ,쉽게 이야기 하면 제자훈련을 처음 받는 사람은 제자가 되는 기쁨이 있게 하는데 제자훈련의 단계가 높아진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제자가 되는 기쁨이 없는 겁니다. 그런 모순이 나오는 겁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초기 단계에는 고민하고 갈등하는 내용들이 심각할지는 모르지만 수준이 다 정해져있어요. 그러나 은혜를 받고 진리의 지식이 자라서 신앙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자기가 고민하는 내용도 상당히 수준이 높아가고 다양화 되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이라고 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틀 자체가 그 공부자체가 대답을 준 다기보다는 사람을 통해서 도움을 얻는 것이 성경공부에서는 더 크다고 말할 수 있거든요. 왜? 성경에 대한 가르침 그 자체도 사람을 통해서 오는 거니까 그런데 문제는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런 관계가 됐는데 어느 단계를 마치고나면 저 사람이 나보다 훈련은 많이 받았지만 나보다 영적인 수준이 높아 내 어깨위에 높이서서 내가 가보지 못한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더 많은 통찰을 가지고 있다. 아까 이야기한 사랑, 복음지식이라든지 아니면 영적인 총명함이라든지 이런 것 들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내가 볼 수 없는 그런 시야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계를 보고 있다. 라는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단순하게 그런 식의 그룹으로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하는 교제중심의 모임을 통해서 개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 들이 도움을 줄 순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영혼의 감화! 그런 거 없이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통해서는 영적인 거인들이 만들어 질수 있어도 훈련의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묘목심기지 그런 것 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이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것이냐? 전 이렇게 생각을 해요. 이러한 양력의 프로그램들은 교회에서 보조적인 방법으로 한시적으로 활용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봐요. 처음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는 사람, 그다음에 교회에서 이렇게 틀을 만들어 놓잖아요? 우리교회도 틀이 있잖아요. 들어오면 복음반이 있고, 새 가족반이 있고, 들어오고 나면 은혜반이 있고, 거기서 예배에 대해서 배우고, 십자가에 대해서 배우고, 그러면서 싸이드 로 계속해서 설교를 시리즈로 듣고, 지도 받고, 그러면서 정착되어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틀 속에 아예 안 들어 와버리는 겁니다. 싫다 이겁니다. 그리고 예배나 간단간단하게 참석하면서 익명의 신자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틀을 만들어 놓아도 그 틀 속에 안 들어오니까 할 수 없이 찾아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싶은 의욕을 끌어내고 격려해가지고 만들어 줘야 된 다 그런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합 적인 수단 가지고는 안 된단 말입니다. 찾아가서 권면하고 그러면서 하는 거거든요. 그런 곳에 부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기독교의 진리의 기본 체계에 대해서 거의 인식이 없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맨 처음에 묘목과 같이 믿음이 심겨졌을 때 부목을 대 주는 그런 맘으로 하나님을 믿는 진리의 내용들을 가르쳐 주면서 기도해 주고 하는 거지요. 그러면 활발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결국은 강력한 예배가 있는 공동체의 백업을 받지 않으면 하나의 개념으로 흐르고 마는 겁니다. 그런 문제들이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문제들이다. 하는 겁니다. 교회사 적으로도 언젠가는 두 가지 운동, 하나는 오순절주의적인 그 운동이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과 제자훈련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나름대로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두개의 아주 중요한 운동 이였다고 보는 겁니다. 지금 은 어떤 상태인가? 지금은 또 다시 진공 상태라고 봅니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이 초창기처럼 그렇게 강력한 영향을 신자들에게 미치고 있느냐 그건 또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순절주의적인 그런 운동들은 상당히 많이 한물 간 그런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 제3의 돌파구가 뭐냐?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오늘 강의하고자 하는 것은 포커스를 어디나 맞췄느냐 하면 개인적인 양육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매우 약한 새 신자를 신앙 안에서 세워주는 그 일을 일대일로 한다. 라고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겁니다. 왜 이것이 상당히 유용하냐하면 청년구역을 하든지 주일학교를 하든지 무얼 하든지 가장 효과적인 사역, 새로 믿기 시작한 사람들, 미끄러져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가장 효과적인 사역이 뭐냐면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돌보는 겁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이 그 사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있고 못 미칠 수가 있어요. 그건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인단 예배나 이런 것 들은 본인이 나올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 사람들을 이끌어 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개인 양육은 달라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활용 한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이런 일들이 가능해요. 그러니까 이일 자체는 하나의 그물을 많이 놓아서 고기를 낚는 식의 방식이 아니라 낚시를 드리워서 하나씩 건져내는 그런 방법입니다. 특별히 게리쿠네 라는 사람이 쓴 그 책을 저는 굉장히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침례교에서 나온 책 이였는데 영어도 아주 쉬워요. 중3학년 정도의 영어로 쓰여 진 아주 쉬운 책인데 나중에 그 책이 번역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새 신자 양육의 원동력이가? 하여튼 원동력이라는 말이 뒤에 붙었어요. 그런데 참 재미있어요. 신선했어요. 예배의 감화도 없고 성경공부도 없고 그런 교회에 있다가 그걸 보게 되니까 아주 신선한 감화를 받았거든요. 그 책에서 도움을 받고 많은 여러 가지 책들을 읽으면서 이걸 독창적으로 만든 겁니다. 여러분들이 소화시키면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재를 봅시다. 2페이지입니다. “양육이란 원래 소아과 의학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이것을 영적인 의미에서 생각해서 한 어린 신자가 성숙하고 유능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튼튼히 자라기 위해 계속적으로 도움을 주는 활동이라는 말로 사용이 되고 있다. 게리쿠네는 양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했다. 양육이란 새 신자를 믿은 안에서 굳게 세워주는 영적인 사역이다. 여기 몇 개의 요소가 나오지요? 새신자라는 요소가 나오고 두 번째는 믿음을 세워주는 사역이다. 믿음이나오고 영적인 사역이다. 이것이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겠지요? 어린 신자를 믿음 안에서 세워주는 이 같은 사역은 실제로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의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여기 보면 전파, 첫 번째 사역이지요? 두 번째는 권하고, 또 사역이지요? 그다음에 가르침, 이렇게 나오지요. 전파는 선포사역이고 그다음에 가르침은 교육에 관한 사역이지요. 상담학자들은 이걸 볼 때 상담 사역으로 눈에 보이는 겁니다. 전파는 집단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이고 가르침은 그룹적인 것이고 가르침은 개인적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거지요. 목표자체는 그라스도 안에서 완전한자, 여기서 완전한자는 퍼팩트 라기 보다는 히랍어 로 텔로스인 데다 자란 !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모가 완전하다든지 그런 뜻은 아니잖아요? 다 자랐다. 더 이상 안자란다. 이겁니다. 그런 뜻 입니다. 그걸 가르쳐서 히랍어 의 완전한자! 이렇게 부른 겁니다. ‘완전한자로 세우려함이다.’ 그러니까 성인다운, 어른스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려고 함이니. 그 반대는 자연히 어리다는 개념으로 나올 거 아닙니까? 어리면 교회 가서도 천방지축일거 아닙니까? 그러면 어른이 됐다고 모두 도덕적으로 완전한가요? 그런 건 아니지요. 얼마든지 다 자랐어도 여전히 사탕 좋아하고 그럴 수 있잖아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다 자랐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 그리스도 으로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자체가 도덕적으로 완전한자로 만들어가는 것이 이런 훈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겁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선 깊이 생각을 못해 봤는데 20세기에서 복음주의를 움직이는 는 다섯 명의 거장을 이야기 할 때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 쟈스터트, 프란시스 쉐프 ,빌리 그래함 다섯 명 이지요. 그런데 확실한 것은 빌리 그래함 이나 로이드 존스나, 패커 같은 사람들은 설교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들이란 말이지요. 특별히 패커가 패커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로이드 존슨이 이나 이런 사람들의 걸출한 설교를 들으면서 자란 겁니다. 라일이나 이런 사람들의 영적인 거목들로부터 감화를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사람과 그러한 은혜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패커 와 로이드 존슨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견해가 많이 다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 에 로이드 존스목사님의 교회에 가서 받은 충격을 여러 번 회상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다른 겁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아직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신자들에게는 보다 경건하고 성숙한 성도들에게로부터 신앙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초기에 특별히 영적인 돌봄이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지체들을 일정기간 동안 특별한 사람과 관심을 가지고 돌봐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개인양육이라고 하는 데 이 개인은 가르침과 교제를 통해서 이뤄진다. 제가 볼 때 가장 이상적 인건 개인 양육을 이런 식 으로 하는데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을 하면서 양육을 하는 사람자신이 복음지식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새로 믿기 시작한 자기가 돌보는 신자를 손바닥에 논 것처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면 그 설교에 대한 이해를 시켜주고, 갈등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갈등이 어디서부터 왔고 결국은 어디로 가는지를 지도 전체를 놓고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그런 양육을 통해서도 예배의 도움을 받으면서 훌륭한 거목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가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런 틀을 갖추면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에 문제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 전체적으로 이런 것 들 로 구색이 갖춰져서 이 틀에 따라 가르치는 교회에서는 절대로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보다 걸출하게 뛰어난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질 안 는다 이겁니다. 훈련 자체를 받아서 가이드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생겨날지도 모르지요. 여러분들이 보면 알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자체는 성경을 아는 지식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실천적인 거룩 을 추구하는 삶 가운데서 희미하게 그 삶에 대한 통찰들이 얻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런 통찰들이 얻어질 때 비로소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이해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그런 요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이 양육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양육을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겁니다. 다음은 효과적인 양육을 위해 돌봄을 받는 신자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기본적인 영역에 관한 영적 진리들이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과 주님을 영접하도록 도와준다. 지속적인 경건의생활을 발전해가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교회생활을 함께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른 사람 과 믿음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와준다. 이런 것 도 다 좋은 이야기 인데 근본적으로 계산해 넣지 않은 것들이 뭐냐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만남,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만져주시는 거룩한 터치, 이런 것들이 지속되지 않으면 이런 요건을 성취하도록 그 사람을 만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큐티를 거의 안 하고 예배만 참석해도 말씀에 깊이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매일 큐티를 하는 대도 그 깊이라고 하는 것이 하잘 것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거지요. 그런데 이런 자체에 깊이 빠져들어 가다 보면 어떤 함정을 갖게 되냐면 그런 것 들이 너무 약화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강하게 내 영혼을 어루만져주시고 진리에 대해서 깊이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배우려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훌륭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쳐도 그것이 안 된다. 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적인 그런 맘들이 약화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 들을 다 염두 해 두면서 이 문제를 들여다봐야 된다. 이겁니다. 영력을 위해 어린신자와 맺게 되는 영적인 관계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처럼 흡사합니다. 성경은 어린 신자를 영적 갓난아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확합니다. 갓난아이의 육체를 위해서는 사랑, 보호, 음식, 운동, 그런 것 들이 필요하듯이 어린 신자에게도 이와 상응 하는 영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누가 양육 할 것인가? 정의가 나오지요. 모든 육체적인 영역에서 그렇듯이 어린신자들은 그의 믿음이 성장하는 초기에 돌보아주고 공급할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개인 양육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린신자의 영적 성숙과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성숙한 신자와 일대 일의 관계를 취하고 이에 필요한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골로새서 1장28~29절은 선교의 삼 중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복음 전파, 권면, 가르침이 바로 그겁니다. 복음전파가 불신자들을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권면과 가르침이라는 사역은 이미복음전파를 통해 교회 안에 들어온 신자를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복음 전파란 설교가 아닌 복음 전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전파를 전해주는 중요한 수단 이였으니까 다 포함되지요. 이 세 가지 사역이 동시적인 사역입니다. 히랍어 본문에 보면 분사로 되 있습니다. 전파하면서 또 한쪽에서는 권하고 그러면서 또 가르치고, 그래서 일단 교회 안 에 들어온 신자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화 되기 위해서는 권면, 이건 권한다는 말 쪽에서도 책망 쪽에 많이 가까워요. 바르게 해주는 거지요. 그리고 가르침이라는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거지요. 이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흔히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을 하냐면 몇 명이모여서 교재를 놓고 공부하는 것만 가르침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목사님이 그런 이야길 하지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독교교리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교리를 교인들이 어떻게 습득할 수 있냐? 그건 가르침을 받으면서 습득할 수 있는데 그 기독교교리를 가르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무엇이냐? 그것이 예배 중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잘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설교가 갖는 교육학적인 기능자체가 완전히 도외시 되어버렸고, 거기에는 물론 설교단의 책임도 있지만,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설교 자체는 예배를 위한 하나의 예식중의 한 순서가 되고 교육은 그 방법을 통해서는 이뤄질 수 없는 설교자체의 예전화가 촉진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공부들을 통해서 습득하는 그런 방식으로 나가게 된 겁니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 보면 첫 부분에 이 수고스런 사역의 주체에 대해서우리가 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양육의 사명이 바울 개인의 독점적인 사역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한 모든 동 역자들의 사역임을 말하고 있다 이겁니다. ‘우리가’ 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을 비롯한 동 역자지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르 키 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게 돌보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 이여야 하는가? 첫째 조건이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근본적으로 헌신된 자.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따뜻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자.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자기의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자. 네 번째는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 다섯 번째는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자. 여섯 번째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자. 일곱 번째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룰 수 있는 성격을 가진 자. 여덟 번째는 개인 양육의 중요성과 사역의 결과를 믿는 자. 아홉 번째는 일관성 있는 믿음의 삶을 사는 자. 개인 양육의 사역은 크게 세 활동으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양육, 두 번째는 그룹양육, 개인적인 경건의 실천,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양육이란 말을 여기서 활로웁 이라고 하는 데 쫒아가서 붙잡는다. 그런 의미거든요. 어디로 가든지 쫒아가서 길러주는 그런 의미란 말이지요. 기존의 성숙한 신자들이 예배중심으로 모이는 것과는 달리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역을 통해서 상당히 혜택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역이 꼭 필요합니다. 이런 사역이 없으면 교회 온 많은 사람들이 적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역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거둘 수 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부흥을 갈망하면서도 부흥이 없는 때 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아울러 배워야 합니다. 메뚜기와 황충 이 와서 모두 먹어버린 그 시대에도 우린 죽을 순 없잖아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존 방법들을 터득을 해야지요. 그러면서도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그런 삶에 대한 부요함에 빠지지 않고 그런 사역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강한 만져주심을 필요로 하는 부흥에 대한 갈망들이 살아남아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개인양육은 일대일의 만남, 그룹양육은 소속된 교회 기관의 그룹 성경공부, 개인적 경건의 연습은 개인의 경건생활을 통해 이뤄지게 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개인의 성공적인 양육에 결정적인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본 구도는 가지고 있는 겁니다. 예배 참석하고 그런 것도 양육의 입장에서 보면 그룹양육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삼박자가 맞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양육에 있어서 개인적인사역이 아무리 훌륭하고 은혜롭다고 하더라도 돌봄 받는 신자의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는 교회나 소속된 부서의 영적인 분위기, 사람을 변화 시키는 힘, 이런 것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개인양육이 효과를 많이 보기가 어렵다 이겁니다. 더더욱 이런 프로그램들의 유용성이 감화력 없는 예배의 공동체 없이는 소귀의 성과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양육은 교회에서영적인 갓난아이를 돕거나 특별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지체를 돕기 위한 목양의 보조적인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는 체계들이지 영적거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역사상 누가 훈련을 통해서 영적거물이 됐는지 보십시오. 없습니다. 그다음에 누구를 양육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개인을 영적으로 양육한다. 고하는 것은 전도함으로 양육의 필요가 생겨나는 겁니다. 전도하고 복음을 전해서 주님을 영접하게 한 다음 생겨나는 필요란 말입니다. 따라서 전도의 결과로 맺은 열매가 이 같은 돌봄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두 체계 강력한 전도, 전도된 영혼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 이 두 가지는 똑 필요 합니다. 그리고 일정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자력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굳게 뿌리를 내리고 공적인 예배와 신앙생활을 통해서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통해서 신앙의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어 줘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개인양육을 위해서 사역을 할 때 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어떤 사람을 가르쳐야지 효과가 확보 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보면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개인양육에 있어서 좋은 성과가 기대되리라고 믿어지는 돌봄 받는 신자의 요건입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진 사람이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는 돌보는 자를 담당할 자! 양육하는 사람이지요. 돌봄 받는 자를 담당할 사람이 상담원과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사랑과 신뢰의 공감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 와서 어떤 사람에게 양육을 받으라고 하는데 자기 빛 떼먹고 도망간 사람이야! 그러면 기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가 부서졌기 때문에 양육이 안 됩니다. 그런 겁니다. 신앙이 있으면 문제가 안 되는 데 신앙이 없으면 이런 것 들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비슷한 사람을 묶어주는 겁니다. 영혼을 돌볼 사람들은 자기성격도 개조를 해야 합니다. 사람 보면 닭 개 보듯 하는 사람 있지요? 그러면 안 됩니다. 영혼들을 돌볼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질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의식개혁에 대한 교육을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여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닫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인위적으로라도 노력을 많이 해서 성격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우선 사람을 좋아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할 영혼을 섬기는 자로서의 자질이라 이겁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거룩한 삶으로 성숙되고 싶어 하는 사람, 양육의 중요성과 그것이 주는 영적 축복을 믿는 사람, 안정적이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자로 쉽게 다른 사람들과 친숙해 질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자, 교회생활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 다음엔 언제까지 양육 할 것인가? 획일적으로 판단하긴 어렵습니다. 우선 첫째는 교회출석이 생활화 되어있는 것, 기본적으로 예배 출석이 안정적이 돼야 된다, 이겁니다. 두 번째는 기본적인 그리스도의 교리,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방법, 영적생활 원리,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있을 것,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명의 성장이 주는 기쁨을 경험할 것, 기도, 성경읽기, 전도, 말씀 묵상 등 이 생활의 일부분으로 지속적으로 심겨질 것, 이런 훈련의 프로그램들은 틀을 세워주는 것은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은혜가 넘치게 만들어주는 것 그 자체는 누가 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에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고 쓰임 받으려는 믿음의 마음을 가질 것, 끝난 이후에도 문제가 발생 했을 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또 양육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질 것, 이런 요건들입니다. 이게 네 단계정도로 나뉘어 지게 됩니다. 양육이전의 단계는 전도의 단계입니다. 한사람을 전도할 때 먼저 기도하고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신앙생활이 뭐라고 하는 건가를 안내하는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나에게 인격적인 문을 열고 내가 저사람 에게 인생 상담자의 자격을 가지고 함께 교재를 나눌 수 있을까를 모색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전도가 되면 개인양육으로 들어가는 데 관계는 양육의 관계이고, 상담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는 관계이고, 교리적인 가르침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에 관한 이해를 갖게 하고, 그다음에는 교제를 갖는데 양육을 위한 교제를 갖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집어주면서 신앙이 자라게끔 해주는 겁니다. 세 번째 단계는 개인적인 성장의 단계입니다. 거기서는 한걸음 물러나서 이제는 자문 역할을 하는 관계 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상담을 하는 관계입니다. 여기서는 성경공부와, 성경강해 이런 것들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네 번째는 돌보는 자, 그러니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게 되도록 세워주는 훈련의 관계입니다. 그게 자문과 동반의 관계, 상호관계, 훈련과 사역을 위한 교제 이렇게 말하게 되는 데 좁은 의미의 개인양육의 관계입니다. 이제 이다음이 핵심인데, 개인양육이 이뤄지는 순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그다음에 양육대상을 선정하는 겁니다. 그담에 세 번째는 돌봄을 받는, 양육 받는 신자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몇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일대일 성경공부가 나오지요. 그담에 개인의 경건생활을 지도하는 요령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말씀이 적용되도록 돕는 방법, 이렇게 보조적인 것까지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타파 되 야 될 것들이 뭐냐면 이기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참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면 즉각적으로 부채의식을 느낍니다. 무슨 부채의식 이냐하면 구원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이 영적인 변화에도 적용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영혼의 진실한 변화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드리워졌던 먹구름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의 여러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지요? 참 불쌍하다. 나도 전에는 저랬는데 그런 생각을 갖게 되잖아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고나면 전도의 부채 의식을 느끼게 되는 데 그게 성령의 음성입니다. 그걸 순종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또 영적인 깊은 은혜를 받고나면 그 위에 하나 더 부담이 생기는 데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에 대한 연민의 정입니다. 제가 영혼의 변화를 받은 다음에 한동안 즐겨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이 왜 그렇게 가슴에 다가 왔냐하면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내가 있었던 그 어둠 가운데 있다는 사실 ,나는 그 어둠을 버리고 빛으로 나왔는데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는 사실 때문 입니다. 그런 부담이 여전히 우리에게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다른 모든 은혜와 마찬가지로 생겼다간 사라지고 생겼다간 사라지고 그러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영혼의 부담이라는 선물이 얼마나 축복된 선물인지를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그래서 그것들을 간직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돈 통만 꽉 붙들고 사명감 가지고 지키는 데 그 사명감을 십분의 일만 발휘해도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영혼의 변화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와는 달리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겁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애타는 기도로 도울 수 있고, 그에게 진리를 가르쳐줌으로서 도울 수 있고, 그렇지만 거기에 기여하고 그런 의식들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개인으로 먼저 누구를 양육할까 하기 전에 선행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기서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무슨 기도냐 하면 하나님 내게 주신 변화들을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나는 목사님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정말 주님께로 받았던 따뜻하고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특별히 형제로서 마음을 다해서 섬기면서 가르칠 수 있는 영혼을 제게 붙여주십시오. 한사람이도 좋고 두 사람이라도 좋은데 그런 특별한 관계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그를 돕고 싶습니다. 이게 꼭 교회에서 제도를 만들어서 틀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형제가 새로 왔는데 마음속으로 그 형제를 돕고 싶으면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 해주고 교재 같은 거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설교를 듣고 함께 나눈다든지, 자기가 듣고 은혜 받은 테입을 소개 한다든지 책을 소개 한다든지, 필요한 자료를 갖다 준다든지, 하는 섬김도 아주 훌륭한 섬김입니다. 가장 훌륭한 양육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와 만나면 만날수록 자기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는 양육자가 정말 좋은 양육자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을 돕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룹으로 양육을 하게 되면 ,어린이반도 맡아서 하게 되면 항상 이 사역은 개인적인 양육의 사역과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에 대한 돌봄 없이 전체적인 프로그램으로만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은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거기서 뒤로 물러가고 처지는 그런 영혼들은 너무 불쌍한 겁니다. 반 아이들을 돌보거나 구역을 인도 할 때 항상 관심이 어디로 모여져야 하는가 하면 전체적으로 모였을 때는 중간에다 기준을 마쳐서 해야 하지만 일단 끝나고 나면 개인적으로 돌보지 않으면 도저히 발육이 안 되는 젖꼭지를 물고 빈 젖꼭지 물고 돌아가는 강아지와 같은 지체가 누구인가를 찾아서 그에게는 개인적인 수유를 해야 합니다. 그런 돌봄이 필요 한겁니다. 특별히 개인 적인 섬김이 반드시 필요여한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섬김이 기도의 섬김입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기도 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내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내가 도우면 영혼이 놀랍게 변화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내게 붙여주시도록 적극적인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자기가 가르쳐야 하고 영혼을 위해서 부담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굉장히 힘겨워 해요. 때로는 겸손을 가장 할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을 헌신하기 싫은 마음이 많이 개입 되 있는 겁니다. 그런 것 들이 우리들이 고쳐야 할 문제입니다. 이 기도의 문제는 단순 이 양육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선정하기만을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또한 양육을 하는 관계가 유지되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기도가 선행되어야 됩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따라 올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세계를 지닌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그램 따라 움직이는 장기꾼 정도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추구하고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삶에 있어서 틀이 안 잡힌 사람들은 결국은 자기의 재주를 과시하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알게 된 신앙의 새로운 특징들을 고개하고 설명하는 정도이상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겁니다. 그 삶이 남다르게 성경을 많이 알수 도 있고 남다르게 지혜로운 사람일수도 있지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닌 거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뤄야 하겠다고 하는 개인적인 헌신의 결단이 서게 되면 그렇게 돌보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자를 만날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를 양육해야 할 것 인가를 선정할 때는 여러 가지를 많이 고려하면 효과적 일수 있습니다. 신앙의 경력, 과거 및 현재의 신앙의 상태, 영적성장의 의욕, 교회 출석 여부, 교회 안팎의 교우 관계, 그의 성격, 또 지적인 수준, 생활환경, 성장배경, 양육의 경험, 능력, 이런 것 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최선의 짝을 찾아줄 필요가 있다 이겁니다. 똑같은 가르침인데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기분 좋게 다가오기도 하고 기분 나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흔히 사람들을 만날 때 어디서 많이 뵌 분 같다고 하지요? 그게 심리적으로는 좋은 인상이라고 하는 이야기랍니다.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 지적인 수준등도 어느 정도는 고려 돼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들어오는 사람 자신에게 최대한 맞춰주는 겁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도움이 굉장히 필요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자매가 실연의 뼈아픈 상처를 않고 왔는데 신나게 연애에 폭 빠진 자매를 소개시켜줘서 예화를 들 적마다 자기 아가서 쓰는 이야기 그거만 하자고 하면 커뮤니케이션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선정이 중요한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러면 어떠냐? 그건 이제 성숙한 사람들이 이야깁니다. 처음 온 사람들은 그런 것도 다 고려를 해서 배치를 해줘야하는 겁니다. 돌봄을 받는 신자와의 인격적인 교제다. 이렇게 문제가 나옵니다. 양육에 들어가기 앞서 교제를 통해서 돌봄을 받는 사람이 공감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양육을 시작하기 이전에 충분히 개인적인 교제를 갖는 것을 전 양육이라 이렇게 불러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변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영혼의 변화를 먼저 경험하고 이러한 지식들을 깨닫고 성장하기를 원하는데 나를 영적으로 바르게 지도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누구의 가르침이라도 받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을 때 가 있는데 그럴 땐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해서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 동아리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가르침을 받을까 말까 하는 망설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아까 같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지 누구에게라도 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실제로 자기가 영적인 유익을 받을 수만 있다면 모두 따라 간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와서 그가 예배를 통해서 영혼의 깊이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이런 양육의 체제 같은 것도 복잡한 수순이 필요한 게 아니라 굉장히 단순해지는 겁니다. 도움을 누구에게나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가르쳤을 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려고 하는 수용성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양육에 앞서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눔으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친밀한 공감의 분위기를 형성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못한 채 개인양육을 시작한다는 것은 마치 ‘라포’ 없이 상담을 시작한다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 ‘라포’가 뭐냐면 불어로 공감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내담자가 상담의 관계로 왔을 때 제일먼저 필요한 것은 뭐지요? 왜 왔어요? 그런 식으로 물으면 안 된다 이겁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갔는데 뭘 도와드릴까요? 아니면 뭘 좀 드릴까요? 이렇게 물어야지 가게에 들어온 사람보고 왜 오셨어요? 그러면 말이 안 된다 이겁니다. 자기를 뭔가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아 왔을 때 목표는 아주 분명한겁니다. 무엇인가 도움을 받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뭘 도와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너를 도와 줄 수 있겠니? 이런 생각에서 이야기를 해야지 왜 왔어 그렇게 이야기 하면 대화 자체가 단절이 되는 겁니다. 맨 처음 왔을 때 이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털어 놨을 때 이 사람이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공감의 분위기자체를 ‘라포’라고 심리학에서 부르는데 그 분위기가 형성이 돼야지 좋은 상담의 분위기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강대 위에서 ‘하나님 앞에 모두 토설하시오.’ 그러고 침을 튀면서 설교를 해도 하나님 앞에서 안 털어놨던 이야기를 지체들을 만나서 털어 놓는 겁니다. 바로 ‘라포”가 형성됐기 때문에 그런 것 들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양육은 지식만의 양육이 아니다. 그렇지요. 삶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영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의 기초에 이뤄지는 라이프 트랜스퍼런스 삶의 전이, 혹은 삶의 전수이기 때문에 서로가 삶의 교통을 이룰 수 있는 공감의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상호 신뢰의 입각점을 둔 인격적인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 들이 깨지지 말고 지속적으로 계속 확장되어야지 영혼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돌보는 자가 유념해야할 분위기가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사랑과 영적인 관심이 깃든 분위가 돼야 됩니다. 자기가 인도하는 구역에서도 마찬가지고 둘이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두 가지로 이야기가 되는데 첫째는 사람이 깃 든 분위기가 돼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인데 신앙이 없는 사람이 사랑이다, 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뭔가를 퍼주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굉장히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성경도 사주고, 가방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그러면 불안해하기시작하는 겁니다. 이러다 뭐 내 놓으라 그러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처음에 교회에 왔을 때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에 왔을 때 바라는 것은 자기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그 느낌을 바라는 겁니다. 유별나게 대하지 말고 너희들과 나를 똑같이 봐 달라는 겁니다. 심리적으로 그거거든요. 그런 심리를 우리들이 깊이 이해를 해야 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배려해야하는데 그 배려가 항상 눈에 보이는 배려보다는 의식 속에서 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런 것들 이 필요하다 이런 거지요. 그게 바로 사랑이 있는 분위기입니다. 사랑이 있는 분위기가 되려면 여러분들이 구역에 있는 지체들이나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새로 온 영혼들을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해 보니까 어린아이들도 잘 가르치면 이해를 하고 그걸 상당히 잘 실천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그런대서 사랑을 배우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 주는 겁니다. 사람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느끼게 되면 굉장합니다. 일단 자기가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방어를 풀면서 다른 사람들과 인격적인 접촉을 가질 수 있도록 자기를 개방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불신앙의 세계에서도 적용이 되고 신앙의 세계에서도 그런 일들이 우린 필요하다 이겁니다. 그렇게 마음의 문을 여는 자체가 무슨 영혼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처음 여러 가지 많은 방어기제로 가슴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이것들을 풀고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안 들어갑니다. 알잖아요? 맨 처음에 와서 한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하면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들어가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과 자기사이에 막혔던 담을 치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자기가 교회에 왔을 때 자기가 용납되고 수용되는 따듯한 분위기를 사람들은 선물공세를 퍼 붓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어떤 것들이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하는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면 처음에는 자기도 그러다가 조금만 지나면 그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회상이 안 되는 겁니다. 잘 생각을 해 보세요. 처음 교회를 가면 굉장히 쓸쓸한 게 많잖아요? 처음 예수를 믿고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이 있지만 상처 받아서 교회를 유리하다가 다시 교회를 나온 사람들에게는 같은 일이 되풀이 될까하는 두려움이 더 큽니다. 그때 우리들이 무얼 도와줘야 할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따듯한 사랑의 분위기가 정말 필요 한겁니다. 그런 것들은 가식적으로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으면 소용이 없겠지요? 또 무엇이 있어야하냐면 영적인 관심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가면 그 분위기 자체의 포커스가 영적인 겁니다. 그래서 영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위기를 엿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둘이 만났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는 겁니다. 그때에 상대방이 오픈하면서 자기가 돌봄을 받고 싶다고 하는 의욕들을 갖게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제가 되도록 하는 겁니다. 여기서 세 가지 정도의 요소로 다시 나뉘게 되는데 첫째는 영적인 목표를 가진 만남입니다. 영적인 것들을 위한 만남이란 말입니다. 교회 안 에 보면 특히 어렸을 때 에는 공부 못해서 자살하는 아이들 비율보다는 친구로부터 소외당해서 비관하는 청소년들이 훨씬 많습니다. 청소년들의 통계를 내보면 교우관계가 공부보다 더 중요해요. 얼마 전 에도 자실한 아이 나왔잖아요? 공부도 잘하는 아이인데 친구들이 왕 따 시켜가지고 자살했어요. 어렸을 때는 그런 것들이 굉장히 강한 겁니다. 그런 욕구가 나이든 사람들에게 더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든 사람들은 자기를 은폐하는데 상당히 익숙해져 있고 아이들일수록 자기를 은폐하는 것들이 덜 훈련 되 있기 때문에 자기를 잘 노출하는 겁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들을 위한 만남이여야 한다 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하면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다보면 교제 자체를 위한 교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가 좋아서 교회를 못 떠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참 중요한 영향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리적인 교제가 다행히 함께 좋은 신앙으로 들어가는데 쓰여 지면 좋은데 그 이상의 것을 교회가 못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영적인 것들을 위한교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제자체를 위한교제로 전락되어 버리는 겁니다. 거기서 결국은 먹고 마시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세속적인 모임의 원산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서 사람 버린다는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기에 오면 세상에 나갈 때는 영적인 관심사들을 버리고 살다가 교회에 들어오게 된다든지, 자기를 신앙적으로 돌보는 사람과 만나게 됐을 때 는 관심이 다시 원 위치가 되게 하는 힘이 그 교제 속에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걸 있게 하는 게 뭡니까? 그게 결국은 그 모임을 이끌어가는 사람의 사고와. 그 사람의 가치관과 그 사람 속에 있는 열망,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향, 이런 것들에 의해서 좌우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이 아니고 세속적인 사람이면 아무리 신령하게 만들어놔도 결국은 그것을 세속적으로 끌고 가서 세속적으로 놀고 말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속적인 모임을 만들어줘도 영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있고 그 삶의 중심이 영적인 것들에 집중되어있는 사람은 세속적인모임을 하면서도 결국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려고 하는 그런 중심이 있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교회에 왔을 때, 구역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나서 양육하려고 할 때,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걸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으면 결국은 인간적인 사교모임으로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면 세속적으로 되는 겁니다. 구역예배도 마찬가집니다. 진짜 잘하는 구역에서는 늘 구역 예배 시간이 눈물로 얼룩집니다. 그러면서 말씀 함께 배우면서 구역 예배 끝나고 나면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구역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사람이 감격에 차서 눈물로 가르쳐 듣는 사람이 눈물로 듣고, 또 간증하고, 그러니까 새로 온 사람이 거기 와서 압도당하는 겁니다. 정말 신앙의 세계는 다르구나? 깨닫는 겁니다. 그린 분위기들이 형성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들어 왔을 때 자기 자신이 뭔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게 파악이 안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변화에 대한 열망이 안 생긴다. 이겁니다. 그다음에는 교제의 선도권입니다. 이건 뭐냐면 양육에 있어서의 이야기인데 개인을 양육을 하게 되면 양육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인격적인 교제를 갖게 되는 데 그때 그 교제를 그 사람에게 뭔가 영적도움을 주는 사람이 주도를 해야지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교제의 선도권 을 줘야 된다. 그래서 어떻게 동기부여를 해서라도 신앙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만날 때 마다 성경말씀에 대해서 공부하고자하는 동기를 자연스럽게 부여해 줘야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돌봄 받는 신자들이 교제하고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하겠다는 갈망이 생기도록 만들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자연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런 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의 모본이 주는 도전에는 언제든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게 만들어주시는 주체도 결국은 성령님입니다. 그런 신령한 감화와 은혜가 깊이 있어서 그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자신이 예배에 참석 했을 때 정말 나는 왜 이럴까? 라는 깊은 좌절이나 이런 것 들을 느끼게 됐을 때 생겨나는 공통된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다. 라고 하는 그런 욕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다. 라고 하는 갈망들이 생겨나고 말씀을 섭취하고 싶은 맘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 자체가 그 모임이나 그 사람을 가르치고자하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깊이와 상당히 비례하는 겁니다. 어쨌든 인간은 신령한 모임에 들어 왔을 때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신기한 일입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어떤 영향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두 가지 영향을 주는데 마음이 더 딱딱하게 굳어지든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든지 사람들이 변화 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배우고 싶다는 갈증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람마다 민감성에 따라서 빨리 나타나기도 하고 늦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영적인 분위기가 깃드는 모임이 아닌 곳에서는 그런 갈증이 안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과 함께 실제적으로 성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읽게 하는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거지요. 성경을 읽지도 않는 구역장 밑에서 무슨 도전을 받겠느냐 이겁니다. 실질적으로 그런 모임이주는 감화 이외의 실제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런 도전을 줄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이겁니다. 때로는 성경이 너무 딱딱하고 안 읽힐 때는 구역이나 청년부에서 산속에 깊이 들어가서 한 일박이일동안 성경만 읽는 겁니다. 로마서 읽고, 요한 계시록 다 읽고 막 돌아가면서 읽는 거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에 대한 도전들을 주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편으로는 두루 읽고 한편으로는 깊이 배워나가고, 이 두 가지가 함께 병행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그때 삶의 변화도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세 번째는 오래 참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게 결국은 사랑 없이는 안 되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따르려고 하는 사람과 그럴 의지가 별로 없는 사람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 둔다면 결국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잘 듣고 아멘, 아멘, 하는 사람들만 모아놓고 계속해서 아멘, 아멘 하면 그 사람들이야 좋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쫓아가기 어려운 높은 벽을 느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내를 가지고 무엇인가 강한 말씀을 가지고 교회가 전체적으로 나가면서도 이삭처럼 뒤에 떨어지는 지체들을 눈물 흘리는 그리스도의 애정을 가지고 주워 담는 이삭줍기의 사역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반영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단 말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을 할 때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즐겨 순종하고 따라 갈 때만 하나님이 오냐 하시고 그런 맘이 없을 때는 발길로 차 버리셨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영혼들을 향해 오래참고 인내 하면서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도 포기 하지 않는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영혼들의 변화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영혼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정말 몰라요. 저희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심방을 받으면서 교회를 옮기는 게 어떠냐고 저한테 제의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진심 이였습니다. 이년 삼년 다니는데 전혀 아니에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들어가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고, 저런 식의 사고방식 과 태도를 가지고는 앞으로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 이렇게 생각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만나서 교회를 옮겨 보는 게 어떠냐? 그렇게 권합니다. 좀 특이 할 겁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좀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내 생각이지 어떤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기도하기 조차 안하고 거의 포기 했는데 하나님 만나고 변하게 되는 경우가 나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이 영혼의 변화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집념과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래 참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면 언젠가는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 하고 기회 있는 대로 뿌리면 반드시 낙심치 아니하고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그런 희망을 가지고 우리들이 목양을 하는 사람들이 돼야 된다 하는 겁니다. 네 번째는 유익한 시간을 함께 갖도록 하는 겁니다. 유익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에 유익하다는 겁니까? 긍극적 으로 그 영혼을 변화 받도록 도와주는 일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관계를 갖도록 거기에 유익한 시간을 함께 갖는 겁니다. 사람과의 연합이 흐르는 관계자체가 인간을 바꿔 놓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절대 그런 것 자체에 인간이 만족하도록 길들여져도 안 됩니다. 그건 하나의 영혼의 변화를 위한 신령한 영향력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어린 신앙일 때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시간을 함께 하면서 교제를 나누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함께 먹고 마시는 교제만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 교제를 끼쳐야 되겠다는 마음들을 함께 갖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런 소그룹의 모임들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겁니다. 지난번에 왔던 박 목사님 같은 분이 그래요. 목사님 그러지 말고 새 가족 들 왔을 때 새 가족 수련회를 가세요. 그래요. 난 아직 엄두를 목 냈거든요. 직장 다니고 그러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다 간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니까. 이미 등록까지 하고 교육까지 받으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어떻게 하든지 여기 소속 돼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를 해도 간다는 겁니다. 가서 두시까지 시간 보낸 다음에 잠간 자고 거기서 세수하고 바로 가방 챙겨 가지고 출근을 한다 이거지요. 80%이상 쫓아간다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런 것 도 일리가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런 관계자체가 우리에게 뭘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데 초보적인 신앙일 때는 묘목에 댄 부목같이 확실하게 도움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효과적으로 양육하는 관계가 성립되려면 삶의 전 영역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된다 이야깁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전인목회지요. 전인목양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속고 있는 부분이 참 많은데 그게 뭐냐면 교회에 나와서 주일날 보는 그 모습이 사실그 사람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보고 판단을 합니다. 교회에서 섬기고 뭐하고 하는 것들이 물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전혀 말해주지 않는 건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만난 감격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견고하고 지속적으로 오래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그런다하는 것은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을 보는 시야자체가 정확 한가거든요. 그리고 또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당하는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속지 않느냐 그런 거지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 때문에 우리들은 교회에서 보여 지는 그 사람의 모습 때문에 굉장히 많이 속기 쉬운 겁니다. 그걸 우리들이 깊이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항상 피상적인 관계가 되는 겁니다. 제가 제일 처음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때 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전인데 가만히 보면 답답한 것이 뭐였냐 하면 교회를 안나오고 나니까 그때서야 교회에서 심방을 가고, 불러다가 상담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구역을 돌보면서 교회를 안나오기 때문에 목사님의 지시를 받아서 찾아가든지 심방을 하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버려 있는 겁니다. 그런 게 참 답답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미리 더듬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들을 알 수 있는 방법자체가 없는 건 아닌데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누군가 그의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어제도 박전도사님하고 오면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우리 동창하나가 교회를 하고 있는데 큰 교회에서 교구를 맡고 있더군요. 한 교구를 맡고 있는데 몇 명이냐? 했더니 700명이라고 하더군요. 엄청 난거지요. 그런데 나는 그런 식으로 교회들이 교구별로 나뉘어가지고 남자 전도사님이나 목사님 한분, 여 전도사님 한분, 이렇게 둘이 짝이 되서 교구를 해나가는 건데 그렇게 많은 양의 구역 식구들을 돌볼 수 있을까? 쉽게 이야기 하면 목표자체가 문제입니다. 목표 자체가 관리를 하는 거냐. 교회를 하는데 현상을 유지하는 거냐. 뭔가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고 그리로 가려는 거냐. 그게 차이가 있고 교회에 온 사람들을 관리 하는 거냐. 아니면 온 사람들을 겨우 시작이라고 보고 그걸 최고 산상으로 해서 뭔가 변화를 경험하게 하려고 하느냐. 그건 출발 자체가 엄청난 차이거든요. 전자의 경우에는 교회에 사람들이 들어온 게 최종적인 골라인에 들어 온 겁니다. 그다음에는 자체가 관리 위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돌보면 굉장히 광범위한 인원을 돌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교회 잘 나오고 헌금제때하고 그리고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돌봄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교회지도자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면 눈빛만 보고도 상당히 많이 알 수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특히 예배시간에 말씀을 전하면서, 성경공부 하면서, 이렇게 눈빛만 보고도 상당히 많이 알 수 있다 이렇게 생각돼요. 진짜 용한 의사들은 사람 얼굴만 보고도, 혹은 같이 식사한번 해보고도 당신 무슨 병에 걸릴 가능성이 많다 그런걸 알아낸다고 그래요. 그런데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정도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최종적으로 골라인 에 놓고 관리를 한다고 하면 참 슬퍼지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나마도 무엇인가 강력한 예배가 있고 그 사람이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스스로 독립적으로 신앙생활 해 나가는 어떤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체제도 가능할지 몰라요.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갖는 건 새로 온 신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그런 식으로 관리해 나가는 것은 결국은 인간관계로 교회를 묶어두는 것 밖에 안돼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은 교회를 한번 옮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고 그래서 왜 그러냐니까 교역자들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과 정이 들고 그런 식으로 구역예배 드리면서 사람들과 인간관계 맺혀 놓고 얼마나 잘 살아보려고 그 좋은 것을 버리고 물설고 낮 설은 그곳으로 가겠느냐. 그리고 거기서는 엄청난 뭐가 주어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말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주 자연스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청년들이기 때문에 아직 그런 거 심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결혼하면 달라집니다. 그리고 결혼해서 나이가 먹을수록 달라집니다. 교회에서 장년층들은 유동이 적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장년들의 경우에 유동이 적은 이유가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유동이 적은 것이 아니라 신앙외적인 요인 때문에 유동이 적은 겁니다. 사람들이 항상 제적이 얼만데? 그러면 교역자들이 그 까짓 제적이 무슨 소용이 있어 출석이 얼만데 이렇게 나가는 거지요. 항상 내려가니까. 이런 상황이거든요. 이런 상황들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우려하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은 몇 가지 방안이 있는데 우선은 말씀을 통해서 강력한 도전이 전해져서 그들이 정말 교회에 정착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정확하게 자기 갈 길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되겠고,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내가 여기에 오면 소속감을 느끼면서 내가 용납 될 것 같다. 라고 하는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이 처음에 그들이 그런 마음을 정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온 사람들을 무조건 강제적으로 팔 붙들고 등록을 하라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등록 할 것을 알거든요. 그런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 일들을 잘 안하는데 첫째는, 그 방식자체가 너무 비인격적 이고 두 번째는, 이제는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성숙한 삶을 살도록 훈련을 해야 돼요. 그래서 자기가 결정하게하고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져야하는 인격적인존재라는 사실을 자꾸 깨우쳐 줘야 해요. 그러면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신중하게 됩니다. 그런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교역자들이 늘어나도 그 교구의 수가 작아져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작아져서 개중에는 교역자들의 돌봄이 특별히 필요 없이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얼마든지 자신이 독립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도 가끔 그들이 브로커에 걸릴 때가 있거든요. 그때는 그런 것들을 풀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교역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자체는 복음진리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져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단순한 충성심이라든지 교회에 대한 사랑보다 중요하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새로운 믿기 시작한 사람들 일거거든요. 이런 사람들은 많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안나오면 찾아가서라도 가르쳐주고 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에서 지금 하고 있어요. 시스템 속에는 안 들어 있지만 암암리에 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저 사람이 교회 시스템에 안 들어온다. 아무리 만들어 놓고 제시를 해도 안 들어오는 겁니다. 놔두면 그 교회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보내요. 그 사람이 밤이 좋다고 하면 밤에 가고, 낮이 좋다고 하면 낮에 가고, 직장으로 오라고 하면 직장에 가고, 가서 이해 안 되는 것부터 가르치는 겁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래서 결국은 그런 식의 사역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 도움을 받아가면서 사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인원이 작을수록 좋은 겁니다. 그래서 깊이 있게 그 사람의 문제를 다뤄 줘야 하는데 그게 뭐냐면 전인적인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관리하는 차원을 벗어 날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땐 구역장 들이 구역 식구들을 가지고 있는데 나보다 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비정상적이고 잘못된 관계라는 겁니다. 얼마나 관계가 목양적인 관계가 안됐으면 이야길 안 털어놓고 다른 사람에게 그걸 털어 놓겠느냐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거는 목양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치명적입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교사나 구역장으로 영혼들을 섬기면서 교역자 위치하곤 좀 달라요. 교역자들에게는 경우에 따라서 자신이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해서 깊이 이해해야 해요. 처음에 만나고 나면 한참동안은 자신을 서로 개방하면서 자기들의 가지고 있는 삶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하는 것을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가 서로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겁니다. 그래서 구역장이 된다든가 교사가 된다든지 하면 빠른 시일 내 에 한사람씩 만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겁니다. 그게 내가 보기엔 한달 안에 다 끝나야 됩니다. 6개월 텀 인데 언제 그걸 하고 있겠어요. 빠르면 2~3주 안에 다 끝나야 됩니다. 마치 담임목사가 심방을 가는 것처럼 일 삼아가지고 빨리 만나서 그런 관계를 만드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난 생각을 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삶의 자리 전체를 이야기 하면서 저 사람이 자기가 어느 삶의 자리에 놓여있는 것을 깊이 알고 있다. 그리고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라는 것을 상대방이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돼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을 다루면 그게 불가능 한겁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사람들을 다룰 때는 그것이 가능하고 반드시 그 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일반적인 교회의 교구 제도는~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거든요. 교구를 담당하면서 기관을 담당하고 이런 식으로 되 있거든요. 특히 IMF 터지고 나서 교회가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우니까 교역자들의 수를 자꾸 줄이는 겁니다. 700명전도의 교구,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어느 교회 같은 경우에는 천 명씩 준다고 합니다. 천명이면 어마어마 한겁니다. 1000명주고 700명씩 주고 기관을 또 맡는 겁니다. 그건 너무너무 살인적인 부화 량 입니다. 그러니까 관리지요. 누가 안 나왔는가? 해서 안나온 사람들을 관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오게 되면 교회의 한 지체로서 취급받고 싶어지지 숫자로서 취급받고 싶어지진 않는 거거든요. 그래서 내가 중고등부 할 때 항상 선생님들에게 토요일 날은 될 수 있으면 전화하지 말라 그랬거든요. 왜냐하면 토요일 날 자꾸 전화하면 월요일 날 금요일까지는 생각도 안하다가 토요일이 되면 얘가 나와야지만 머리 숫자가 맞는데 그렇게 전화 하는 게 아이들에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엔 영혼에 대한 관심 그자체가 의심을 받게 되는 겁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월요일 날 하는 것이 훨씬 목양 적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과거의 일을 가지고 묻는 거지요. 너 내일 꼭 나와야 돼! 그런 게 아니라 어제 못 나왔는데 무슨 일이냐? 무슨 문제가 있니? 이게 자신의 삶의 자리에 대한 관심과 염려로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야! 너 지난주에 못 나왔지? 왜 못 나왔는지 관심이 없어요. 다음주에는 그러면 안돼! 이게 더 관심이 있는 겁니다. 그런대서 양떼들은 굉장히 예민 한겁니다. 그런 게 싫은 겁니다. 왜 그러는지를 다 아는 겁니다. 그래서 교구는 작아져야 된다는 겁니다. 중고등부나 유년부도 마찬 가집니다. 자꾸 쪼개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 아이들에게 맞는 전문화된 교육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시설만 있고 교회 영향만 있으면 다 잘라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 학년에 50명씩 모인다면 6학년이면 300명이지요? 그래도 공간이 있고 여유가 있으면 다섯 명의 교역자를 써서 50명씩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이겁니다. 중고등부도 마찬가집니다. 1학년하고 고 3학년하고 같이 합쳐 놓는 다는 것은 좀 그래요. 왜냐하면 중고등부 그 자체가 예배 공동체라기보다는 교육공동체기 때문에 세분화 시키는 것이 아이들을 잘 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학교 일 이학년 사역하는 것과 고 이 삼의 사역이 어떻게 다른지 자기의사역의 경험을 이야기 하면 두 사람이 확연하게 사역이 다른 것이 느껴 질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바로 특화된 사역을 하는 모습입니다. 교사를 한 오 육년이나 십년하면 전문화가 이뤄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잘 안돼요. 그 이유는 전도사님들도 마찬가집니다. 중고등부를 오 육년 육칠 팔년 하면전문가가가 돼야 하거든요? 그런데 안돼요. 그 이유는 특화된 사역을 개발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특화된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들의 이해를 새롭게 하는 겁니다. 보편적인 이해가 있을 수 있겠지요? 인간이란 다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복음이 보편적인 것처럼 보편적인 게 있을 수 있잖아요. 그것만 자꾸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 없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교회 하던 것처럼 유년 부부터 전부 한 예배에다 놓고 하면 되지요.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 책을 읽어보니까 청소년들이 많이 안 모였대요. 물론 거기에 들어온 아이들은 깊이 빠져 들어갔겠지요. 못 들어온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러니까 나도 기본적인 생각은 그런 겁니다. 한 예배면 좋겠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대 예배에 올라오기 시작한 게 재작년 여름 이후의 일이지요? 우리 교회 학생들이 여름 수련회에 8명이 갔어요. 재작년 여름 연합수련회에 제가 갔거든요? 그때 우리교회 학생들이 8명 갔는데 나는 바빠서 갈수 없지만 우리 아이들8면 데리고 할 순 없잖아요. 못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교회 8명 때문에 우리가 총대 메고 연합 집회에서 150명 정도 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서 은혜를 주셨어요. 내가 죄와 구원에 대해서 차례대로 설교 했거든요. 거기서 현재 우리교회 고등부 아이들 몇 명 이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됐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대 예배에 나오고 싶어 하는 겁니다. 지금 상당히 여러 명이 대 예배에 올라옵니다. 누가 강요해서 올라오는 게 아니에요. 금방 예배를 마쳤는데 어떻게 또 올라오라고 하겠어요. 9시 반에 예배를 드렸는데, 그런데 11시 15분 예배에 나오는 겁니다. 그 아들이 집중하는 것 보면 놀랍습니다. 어른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정도입니다. 그게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아이들이 더 많다 이겁니다. 다 그렇게 적용이 되면 좋지요.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도 단촐 하고 공간도 예배가 많이 필요하니까 많이 필요하고 복잡해지잖아요. 교역자를 자꾸 써야 되고 ,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인위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과도기적으로 그런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지요.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에 제가강사로 갑니다. 이제는 우리교회 중고등부끼리 할 수 있는 상황이 됐거든요. 100명 정도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 데 두고 봐야지요. 그 아이들이 엄청난 차이입니다. 같은 고등학생 인데 완전 깡통과 성도 냄새나기 시작하는 아이가 있는 겁니다. 대예배 시간에 와서 2시간이 넘는 예배를 울면서 감격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아들은 여러분하고 별로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더 많이 배워야겠지만 기본적인 틀에 있어서는 이제 자세가 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잘 돌 봐 주면 훌륭하게 뻗어나서 잘 성장해 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 못 만난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무리 대학, 대학원을 나와도 교회에 나와서 대할 때 철부지구나. 아이가 너무 어리구나! 그런 생각이드는 겁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중고등부에만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 확률은 좀 떨어지지만 청년부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장년부에는 더 많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장년부의 차이는 중고등부 아이들처럼 매너 없고 천방지축이 아니라는 것뿐이지 다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 건 다 내버려두고 우리는 거룩한 삶으로 간다. 오려면 붙고 안 오려면 관둬라!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교회가 소금 창고가 되지요.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가되 뒤에서는 떨어지는 영혼들을 붙들고 흐느끼는 마음으로 이삭을 줍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이게 그 사역입니다. 그 사역을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하면 교역자들도 감당을 해야 하지만 먼저 믿은 신자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하는 이야기지만 깡통이 변화될 때 그 깡통이 깡통에 대해서 갖고 있는 권세가 엄청납니다. 그의 증언이 어마어마하게 권위 있는 겁니다. 나도 그랬었어. 난 다 알아. 그렇게 나가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누가 그러더래요. 목사님이 바르게 살아라! 그랬더니 그 목사님보고 목사님이 우리 삶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아느냐고 그러더래요. 목사님이 상사의 핍박에 못 이겨서 할 수 없이 이중장부를 써야 하는 샐러리맨의 이 갈림길을 아느냐. 해 본적이 없거든요. 곱게 커서 고등학교, 좋은 대학 나와서 나이 먹어 바로 안수 받고 유학 갔다 왔다 이거지요. 뭘 아느냐 이겁니다. 그런 문제들이 남아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교역자들도 해야 하지만 교역자들의 역할들은 오히려 여기서 이야기하는 활로우의 역할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교역자의 역할이고 실재로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어필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평신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전 영역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가지곤 안됩니다. 지금은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처음에 교인 100명모이기 전까지는 빼 놓지 않고 전부 심방했거든요. 청년들 하나하나 다 했는데 최고는 한 사람 놓고 3시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호두껍질 굴리는 것 같아요. 딱딱하고 뭔가가 있는 건 분명한데 말을 안 해요. 빙빙 돌려요. 계속 물고 넘어지는 거지요. 결국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껍질이 깨뜨려지기 시작하면서 펑펑 우는 겁니다. 개인 사경회지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숙제를 내 주는 겁니다. 뭐듣고 뭐 읽고 한 달 후에 만나자. 그리고 다시 심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변하지요. 이제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해야 한다 이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전체 영역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 사람들의 말 자체를 액면 그대로 안 받아들이고 모습 자체로 전체를 평가하지 않으려는 자신 나름대로의 분별력이 필요하다이겁니다. 그런데 그 삶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갖는다는 게 애정이 있으면 아주 쉬운 일이고 애정이 없으면 너무 힘든 일입니다. 삶의 전 영역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하는 이야기와 같은 겁니다. 이렇게 깊이 그의 삶에 자리에 대해서 깊이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장이면서 이사람 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어디 사는가? 할 수 만 있으면 여러 번은 놀라도 한번정도는 그 자리에 가서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심방해서 그들의 삶의 자리를 볼 때 그들의 삶 전체의 애정이 생기는 겁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배우는 목회학에서는 토요일은 대부분 이런데 와서 목회자가 조용히 명상을 한다든지 기도 한다든지 리챠드 백스터는 토요일 날은 심방하는 날 이였어요. 이유는 토요일 날 오후에 심방을 하다보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해 진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유지하면서 주일날 설교단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것들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겁니다.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요? 그때 여기서 영혼에 대한 깊은사랑의 정서가 묻어나서 가르치는 것과 그것과는 상관없이 강의하듯 가르치는 것과 막 현란하게 말이 쏟아 나가는 대도 맆스탄스가 없습니다. 여러분 강의 듣다가 막 회개하고 그런 것 있습니까? 강의하는 사람도, 그걸 듣는 사람도 기대 안하는 겁니다. 교회는 그게 아니지요. 그런 것들이 선행 돼야 되는 겁니다. 삶의 자리를 깊이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것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겁니다. 자기 시간을 지나치게 주장하고 자기 물질이나 자기의 것 이라고 하는 소유의식이 너무 강한 사람들은 항상 영혼들을 향해 열어둔 문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열어둔 만큼만 영혼들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진정한 목양의 관계가 성립을 안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성경공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대일 성경공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대일의 성경공부는 우리들 나름대로 교재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미 나와 있는 교재들도 많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일대일 성경공부라고 하는 것은 돌봄을 받는 사람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면 처음 믿은 사람, 그래서 복음을 제시를 받고 주님을 영접했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 진리의 전체체계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사람, 말하자면 세례 이전의 사람을 염두 해 둔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일 시급한 것은 무엇이냐면 기독교 교리의 틀을 빨리 가르쳐주는 겁니다. 어떤 것들을 기독교에선 믿는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런 방향으로 교재를 만들어서 그것을 매주 만날 때 그 사람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것이 일대일 성경공부인데 이것을 가르치면서 유의해야 될 것들이 뭐냐면 이게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 신앙이 기능적으로 사람들에게 전수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가르쳐 주면서 항상 기독교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들을 가르쳐 줄때에 그가 그런 진리들을 자신의 영적인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브릿지 나 이런 것들이 탁월하게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 대신에 복음자체를 아주 간략하게 축소하다보니까 개념자체를 너무 최소화 시키면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다보니까 마치 어떤 것들이 될 수 있느냐하면 사람을 그리는 데 그 사람자체를 그리기 전에 뼈대를 구도를 잡은 다음에 그려야 하는데 구도만을 전해주는 게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 이야기하면, 당신은 죄인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사실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교리 하나만 가지고도 엄청난 체험을 해야 되거든요. 내가 정말 만물 중에 부패한자요.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느껴져야 되는 거거든요. 너무 간단하게 넘어가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6개월을 매주 나하고 만나자 그러면 당신이 비로소 무얼 믿어야 구원을 얻는지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그건 너무 깁니다. 그런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데 대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간략하게 가르쳐주되 성령이 그 가르침을 받는 순간이나 받고난 이후에라도 복음을 경험하고 십자가를 경험할 수 있도록 그 영혼에게 축복해 주시길 우린 기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다 염두 해 주면서 일대일을 하는 겁니다. 그 교재를 가지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런데 항상 어떤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가하면 한번 만나서 너무 어마어마한 양을 가르쳐 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요즈음 설교가 좀 짧아지고 있지요? 어떤 반성이 일어났냐하면 한 설교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여기서 많은 것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여러 개의 초점을 이야기 했다. 라는 느낌을 최근에 받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한번에 하던 것들을 요즈음은 세 번에 나누어서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을 자꾸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한 설교에 두세 초점이 오던 것들을 한 초점으로 줄이다 보니까 한 본문을 가지고 세주, 네 주, 다섯 주, 이렇게 설교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 입장에서는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은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후에 제가 결심했던 내용들이 훨씬 어필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시간적인 길이 문제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이아니라 사람들이 한 주제에 대해서만 설교를 들으니까 그 주제가 또 다른 주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자꾸 사고를 하지 않아도 그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 하면 되니까. 예를 들면 말씀을 듣는다. 그 듣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하는 겁니다. 듣는데 듣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 초점으로 나가면 연결은 되는데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너무 힘든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고구조가 아직 단순하기 때문에 한번 만났을 때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재를 만든다고 하지만 그 교재가 모든 케이스를 맞춰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재를 활용해서 그 틀 안에서 자기가 양육하는 사람에게 맞춰서 그것들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재로 이런 양육을 하게 되면 좋은 점은 교재위주로 흐르지 않는 겁니다. 교재위주로 흐르지 않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진 만남이 된다는 점에서 좋지요. 또 하나는 그렇게 만나서 성경공부를 하는 장소의 문제입니다. 장소가 좀 좋아야 합니다. 편안하고 그럴 수 는 없지만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돼야 된다는 겁니다. 그건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가끔 나는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 올 때 두 가지 욕망을 느낍니다. 하나는 이곳에서 자연의 공기를 흠뻑 마시면서 책 한권 쓰고 갔으면 좋겠다. 하는 소망이 강렬하고 두 번째는 평상에다 돗자리 펴놓고 대 여섯 명이 둘러앉은 상태에서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에 대해서 쭉 설명해 가는 겁니다. 그때는 막 한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왜? 함께 신앙 생활하는 동지들에 대한 애정, 방해받지 않는 특별한 환경, 누가 전화나 부르러 올일 도 없고, 그리고 이 자연 속에서 공기 때문에 사고가 굉장히 활발해지고 해서 공해 속에서 생각이 나지 않던 내용들이 많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런 것을 녹음해서 채집해서 나중에 글로 쓴다면 굉장히 좋아요. 그런 욕망 두 가지를 느낍니다. 얼마나 좋아요. 정말 사랑하는 동역 자들과 이렇게 와서 편하게 앉아서 하나님나라에 관한 진리, 거룩한 성도의 삶, 이런 것들을 방해 받지 않는 환경 속에서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이 조국교회의 변화와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할 수 있다 그게 얼마나 커다란 성도로서의 행복이고 축복이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돗물을 흘려보내는 수도호수가 물하고 가장 상관이 없고 그리고 칼날을 만드는 대장장이의 집에 식칼이 없다 듯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니 책을 내는 사람들의 마음이 건조해 지기 쉽거든요. 제 책을 많이 내 주는 출판사라서 내가 당신들을 섬기고 싶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밥이나 한번 먹으면 뭐하겠냐. 당시들에게 MT를 한번 시켜주겠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바쁘지만 내가 주강사로 가서 당신들을 이박 삼일하고 나는 일박만 하겠다. 그래서 내가 다 돈을 내서 좋은 콘도로 갔어요. 월급 받는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제가 봉사를 했습니다. 가서 저녁땐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특강을 했는데 죄 죽임의 교리에 대해서 해 달라고 해요. 그래서 로마서 8장을 읽고 죄 죽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교회에서 한 것 중에서 총론단계만 한겁니다. 마이크도 없고 8명 정도니까 많은 인원도 아닙니다. 의자도 없이 동그랗게 앉아서 편안하게 죄 죽임의 교리에 대해서 쭉 이야기 한겁니다. 책임자는 한없이 울고 거기서 4시간 반 인가했어요. 시간이 흘러4시간 반을, 그 사람들은 졸도할 뻔 했을 겁니다. 자기네 교회에서도 그렇게 한 적이 없는 데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앉은 그 자리에서 잠깐 쉬었다 합시다. 그것도 없이 아침에 그 딱딱한 바닥에 앉아서 쭉 나온 겁니다. 왜냐하면 방해받지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쳐야 될 때는 방해받지 않는 환경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양육을 하는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어디가 좋겠는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교회도 사람들 모이는 날 오면 방해를 많이 받지요. 그러나 사람들 모이지 않는 날 열린 공간 같은데 오면 방해 안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치 할 필요는 없지만 쉼이 있는 공간이 될 필요는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제일 조용하고 편하다. 진리를 가르치고 나누기에 제일 좋은 그런 교회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들 털어놓고 싶어서 만나 데리고 갔는데 니나노 나오는 다방으로 들어가서 뭘 이야기 하라는 겁니까? 그런 배려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다음이 성경공부에 들어가야 할 필요사항 이런 것들입니다. 복음의 핵심과 영적 성장의 필요성을 테마로 해야 한다 이겁니다. 새 신자니까! 두 번째는 귀납법적인 성경공부 방식으로 하되 성경 을보고 간단하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들로 내야합니다. 이제 처음 국민 학교 들어온 아이한테 턱걸이를 할 땐 무엇에 힘을 써야 하냐? 이렇게 물어봐야지 한국체육계의 문제점에 대해서 논하시오. 그렇게 하면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신앙이 성숙해지고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그런 단답형 의 문제들 보다는 전체적인 전망의 시야를 열어주는 강의나 공부가 필요 합니다. 말하자만 전망점을 마련해 주는 겁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좀 깊이 있는 스터디 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라일이면 라일 한사람을 깊이 읽으면서 그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갖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접근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초보에서는 그런 게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가르쳐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외국의 교재나 그걸 기초로 해서 만든 시중교재를 참고 할 때는 번역서적 이 갖는 어색한 표현의 잔재를 말끔히 각색해서 재구성할 것. 이런 게 문제지요? 그러니까 삶의 고민하는 바와 각도 같은 것들이 너무 달라요. 무슨 농담이라고 예를 들어도 하나도 우습지도 않은 것, 아마 외국사람도 우리가 이야기 하면 그럴 겁니다. 그런 것들을 넘어 설수 있어야 합니다. 총신 대 김이자 교수가 특강하는 것을 들으면서 많이 감동을 받았는데 어느 정도 교회의 사이즈가 돼야 가능하겠지만 거기는 공과 책 을 만드는데 그 공과에 들어가는 삽화, 사진, 그림, 이런 것들을 외국에서 찍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교회의 팀이 찍는답니다. 예를 들면 복음 안에서 자라가는 기도생활 그러면 선교사들이 기도하는 장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방금 믿은 주일학생이 기도하는 모습, 성도의 교통 그러면 자기네교회에서 구역예배를 드린다든지 연합 활동하는 사진, 전도의 기쁨 하면 자기네 교회에서 전도 하는 것, 이런 것을 찍어서 넘기면 아주 친근감이 든다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고 이게 우리 이야기 구나 하면서. 그런 기교도 심리적으로 상당히 좋은 도움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제작의 문제가 나오니까 많은 투자가 필요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작업들이 교회 안에서 이뤄져야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교재 하나를 만들어도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냥 미에 대한 감각이 없이 아무거나 뒤집어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설교하러 올라갔는데 넥타이가 너무 야하다든지 이상한 안경을 썼다든지 뭔가 바란스 가 안 맞게 되면 사람들이 다 노이즈가 되고 심하면 짜증이 납니다. 파랗게 벽을 발라놓고 시뻘건 칠을 밑에다 해서 촌스러운 겁니다. 현수막 하나를 걸어도 신경 많이 쓰지요? 몇 주 전부터 생각하고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보면서 받아들여 질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교재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렇게 되는대로 만들고 그러면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들이 교재를 만들어내는데도 상당히 많이 적용 돼야 될 겁니다. 최근에 세미나 하면 교재 만든 것 보셨을 겁니다. 그거 정말 신경 굉장히 많이 쓴 겁니다. 교회가 유급으로는 못해도 자원봉사로 교회의 공식 디자이너들이 있습니다. 특히 온 누리교회 같은 곳에는 디자인실이 있어서 내가 이 책을 써도 내 마음대로 출판을 못하고 썼으면 디스켓만 디자인실에 넘기면 이건 디자인실에서 도장을 찍어서 넘기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지 촌스럽지 않다. 그러면 찍어내는 겁니다. 주일학교도 해보고 청년들도 해보고 하면 아이들의 취향하고 나이든 사람들의 취향하고 다르거든요.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림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고, 예를 들면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면서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친근한 인물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그럴 경우에 아이들이 굉장히 친근감을 느낍니다. 물론 그 자체가 변화를 가져다주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을 열어 주는 게 되는 겁니다. 똑같은 사회 교과서 인데 아이들이 글씨가 새까맣게 써 있는 건 안 읽으려고 하는데 만화로 그려 진건 열심히 읽습니다. 그런데 새신자자들에게는 그런 심리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한테 들어오자마자 에드워즈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보여주면서 이거 이해 못하면 구원도 못 받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면 질리는 겁니다. 우선 가벼운 음식부터 먹이면서 성장하게끔 부목을 대 주는 마음으로 해 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마음을 열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새 가족 실이나 구역에서 모여서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공부 할 수 있는 작을 방들이 참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철저한 공부들, 그래서 깊이 있는 나눔 들을 할 수 있는 상호작용이 있고, 그리고 강력한 예배가 뒷받침 될 때 심화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것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이런 것을 한번시도해보세요. 어떤 책을 읽지요? 내가 그 책을 이해하지요. 그런데 그것을 이해한 것과 같이 읽은 사람들이 서너 명이 모여 앉아서 대여섯 시간 그 책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책을 세권 읽은 것보다 훨씬 났습니다. 엄청난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시리즈 하나를 들은 다음 혼자하지 말고 네 다섯 명이 날 잡아 모여서 그런 건 영적인 모임이잖아요. 회비 만원씩 걷어서 이런데 와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신앙과 외식에 관해서 토론해보자. 그다음에 누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쭉 이야기가 되지요. 무슨 형식이 필요해요. 누구 한사람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굉장히 많은 인 사이트를 얻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야기 할 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으면서 조직화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탄탄한 결정체로 구조를 갖습니다. 결국은 그런 토론을 거치고 나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잘 담금질한 쇠 같이 탄탄한 틀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게 필요합니다. 그게 제일 좋아요. 차선은 뭐냐면 자기가 이해한 것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면 두 배 정도 늘어나고 반박을 받으면서 자기가 변호를 하면 세배, 네 배 의 씨너즈 효과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성도의 모임 그 자체는 지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깨달은 바들을 풍성히 누리기를 사모하는 그런 모임이 돼야 하는 겁니다. 한번 제가 아는 여러 목사님들 온 가족들하고 큰 콘도에다 방을 잡아놓고 저녁 먹고 난 후 에 토론이 벌어 졌는데 제자훈련과 부흥의 관계에 대해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이상하게 의견이 두 편으로 갈라졌어요. 그래서 나는 상당히 반대편에 서 있고 한편에서는 긍정적인 편에 서 있고 물론 커다란 신앙의 둥지 에선 거의 다 동의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저녁11시부터 시작해서 새벽 5시 반까지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후회되는 건 그걸 녹음을 했어야하는데 옆에 있는 목사님도 그래요. 그걸 녹음 했어야 하는데 지금은 다시 그걸 해 보라고 하면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한 그 토론을 통해서 그 제자훈련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집착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전혀 몰랐던 통찰을 얻게 됐고 그리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부흥에 대해서 어떤 각도에서 그런 것들을 보고 있는가에 대한 그런 토론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인 싸이트 를 얻게 됐습니다. 그렇게 유용한겁니다. 그런 모임을 굉장히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수 백 명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것은 물론 훌륭해요. 그리고 이제 앞으로 그런 강의들을, 교회가 점점 더 커지면서 훌륭한 신앙의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우리 교회에 많이 세우려고 합니다. 한곡에서 찾아서 없으면 외국에 가서 비행기를 태워서라도 실어오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돈 모아서 뭐해요. 하루나 이틀 강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불러 세울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듣는 강의는 그 나름대로 유익이 있지만 항상 일방적입니다. 질문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일방적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소그룹 단위에서 나누는 토론식의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무한이 확장되 나가는 겁니다. 옛날에 철학자들이 어떻게 탄탄한 자기논리를 갖게 되었느냐하면 무수한 토론과 논증을 통해서 자기의 세계를 갖추게 된 거 아닙니까? 성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런 정신이 정말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나 그런 논증의 정신자체가 공리공단 적 이여서는 안 되고 아주 현실적인 삶의 요청과 직결된 것 이여야 합니다. 그런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좌우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삶과 연결을 가지고 고민 되어지고 토론 되어질 때 그런 것에 도달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것도 좋은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방해받지 않고 편한하게 진리 속으로 들어가서 나누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은혜로운 토론이 깊어지고 나면 마지막에는 그 깨달음이 신령한 깨달음이면은 열렬한 기도를 가져옵니다. 제가 경험한겁니다. 그래서 차가운 토론회가 아니라 지성이 묻어있는 영적인 분위기, 영성이 깊이 배어있는 지성적인 토론들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 대신 그것이 공리공단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주는 그런 것들을 갖게 해주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원투원에서 이뤄져야 할일들이라 이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초 신자들의 경우에는 그런 정도까진 힘들지만 그들에게는 분명히 성경의 진리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환경들이 준비되어한다 이겁니다. 그런 일들을 주어진 상황과 환경 안에서 형제자매 들이 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결혼해서 집을 얻게 되면 그런 방을 하나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에 온 사람들을 붙들고 모임을 갖는 겁니다. 그다음에 편집에 있어서는 공간을 살리고 시각적인 효과를 줄 것, 크기는 성경책정도로 해서 휴대 간편하도록, 그리고 오래 사용해도 정결한 느낌을 줄 것. 그다음에 일,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경은 어떤 책인가? 구원, 교회, 성령 충만, 기도, 순종, 시험, 하나님의 뜻 전도, 그다음에 얼마동안 만나는 것이 좋겠는가? 설교나 그룹공부는 대게 교회 안에서 이뤄지지만 성경공부는 장소가 교회 이여야 만할 이유는 없다. 여건에 따라서 교회가 가장 좋은 장소가 될 수 있지만 양육의 초기에는 돌봄 받는 신자의 형편에 따라서 직장, 학교, 가정 등을 참작해서 그에게 편리한 시간에 맞춰 주도록 하는 것이 좋다. 평일이나 예배 전 후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교회 내에 설치된 상담실이나 소집회실, 예배 실, 혹을 개인 성경공부 실 ,이런 곳을 이용하면 바람직하겠지만 형편에 따라서는 돌봄을 받는 신자와 돌보는 자의 가정, 학생의 경우에는 학교교실이나 캠퍼스 등을 선택적으로 이용하도록 한다. 상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성경공부를 위해서는 조용하고 편한한 분위기가 필수적이다. 교회가 사치해지는 것과 교육적으로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것 사이의 구별을 잘 해야 된다. 이겁니다. 다음은 일대일공부를 위해 얼마큼 시간차를 두고 일회 소요시간을 잡느냐를 두고 생각해 보고자한다. 양육을 위해서는 자주만나서 많은 공부의 시간과 교제를 했으면 좋지만 처음부터 지키지 못할 양속을 무리하게 세워서 부담을 주기 보다는 일주일에 한번, 많으면 두 번 정도, 또 특별한 상황이면 매일 할 수도 있겠지요. 교제의시간은 형편에 따라서 신축성이 있지만 양육초기에는 모든 시간을 합쳐서 60분을 초과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러면서 상황이 좋아지면 90분까지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그다음에 공부방법이 나옵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그다음에 개인의 경건 생활을 지도하는 것을 해줘야 됩니다. 크게 네 가지로 나뉘는데 기도와 묵상과 전도와 암송이거든요. 기도를 지도해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이야기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기도하는 사람이여야 합니다. 요새 구역장 섬김 카드 올라오는 것 보면 이 사람들이 구역장을 하려고 그러나 말려고 그러나 기도시간인데 동그라미 계속 동그라미 만 쳐 있습니다. 기도 하나도 안했다는 거거든요. 그런 사람이 드물기는 한데 나와요. 또 해 놓기는 해 놨는데 오 오 오 다섯 시간인지 알았어요. 5분입니다. 마른 뼈 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걸 획일적으로 정할 수는 없지만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 하루에 기본적으로 보통영적인 상태라고 볼 때 한 시간은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뭘 어떻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기도 할 시간이 없다. 기도는 급하고 중요한 일중의 일순위입니다. 밥은 못 먹어도 기도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약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열매가 너무 희박한겁니다. 우리가 영혼에게 가르친다면 최소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영혼들에게 말로 떠드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그 사람에 관해서 하나님께 말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기본적으로기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너무 약합니다. 그러니까 진전이 없는 겁니다. 밤무대에서 기타 치는 사람들의 몸값이 무엇으로 결정되느냐하면 얼마나 기타를 잘 치나 이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몇 곡을 안보고 치느냐 그겁니다. 바이올린도 마찬가집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굳어지는지 아세요? 은혜의 세계는 그 은혜의 방편이 깊이 스며들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방편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아주 깊이 굳어집니다. 결국은 기도를 가르쳐야 하는데 기도해야 한다고 말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만났을 때 기도의 향기가 그 사람에게서 풍겨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의 특징이 된다고 하는 것은 습관이 쌓여서 되는 것이거든요. 성경에도 보면 습관에 따라 기도하러나가시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생각이 반복되면 겨우 행동이 나오고 행동이 계속 반복되면 습관이 탄생하고 습관이 계속 누적돼야 비로소 인격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특질이 되고나면 어떤 특성이 생기냐하면 쉽게 분리가 안 되는 겁니다. 습관과 결별하기가 굉장히 힘들잖아요. 그걸 못하게 하면 막 고통을 느끼는 겁니다. 어떤 경우엔 그 습관을 못하게 하면 돌아버리는 겁니다. 인격의 특질인 경우엔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만날 때 마다 저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거 그것이 깊이 자신에게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건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거든요. 참다운 양육의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를 배우고 싶은 그런 관계가 돼야 하는 겁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영적인 권위도 서고 양육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걸 가르쳐줘야합니다. 자기가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 자기가 돌보는 사람에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아요. 전도 안하는 사람이 절대 전도하라고 가르칠 리가 없고, 성경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강조할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잘하는 것을 강조하게 돼있는 거거든요. 그것이 신앙의 영역에서 통용 돼야 하는 거지 술 잘 먹는다고 자기를 본받으라고 그런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그런 겁니다. 자기가 못하는 것에 대해 항상 평가 절하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하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도의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자세를 가지고 기도를 대해야 합니다. 이게 결국은 나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느냐 못서느냐 하는 문제도 있지만 영혼을 돌보는 자로서 내가 설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도 직결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말씀의 묵상입니다. 말씀 묵상은 명암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역사적으로 보면 언제 이런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가 하면 경건주의 이후로 성도들이 말씀을 대하면서 거기서 직접적으로 은혜 받는 것에 대해서 강조를 하게 됩니다. 이런 큐티 의 양식이 생긴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겠지만 그런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특별히 적용에 대한 강조점이 있지요? 오늘 나에게 뭘 의미하는가? 이런 질문자체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그런 것들에 대한 많은 강조점이 생겨난 겁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가르쳐주는 성경공부는 통합 구조적인 것 이였거든요. 뭐냐면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이렇게 설교하는 겁니다. 그게 예수그리스도의 도성인신 론 아닙니까? 그걸 설명한다. 이겁니다. 그런 교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강하게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오늘 당신에게 뭘 의미하는가? 이렇게 질문 안 해도 사람들은 통합적으로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교리 자체를 깊이 설교를 듣거나 묵상을 하면서 받는 복음자체에 대한 감화력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항상 사람들은 오늘과 그때를 따로 물어봐야 되는 것 같은 그런 이중 구조적인 생각들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자체가 잘못 됐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일이 성경에 있었는데 오늘 이게 당신에게 무얼 의미하는 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잘못하면 어떤 약점을 잡느냐하면 항상 질문을 받다보면 강조점은 옛날에 일어난 이 일에 대한 충분한 생각과 깨달음 보다는 오늘 무얼 의미하는가? 그러니까 성경의 뜻을 깊이 이해하기도 전에 적용부터 먼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말씀에 의한 순수한 감화라기보다는 말씀에 대해서 뭔가를 자신이 충분히 깨닫지 못하면서도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의무를 이 큐티 를 통해서 자꾸 만들어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하루에 열장씩 읽기로 결정했고, 그다음에 한 시간 이상 기도하기로 결정했고, 한주일 에 한명이상 전도하기로 결심했고, 그 다음날은 학교에서 뭘 봉사하기로 했고, 나중에 이것이 쌓이다보면 부담이 되서 자기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율법주의 적이 되고, 그 다음에 이런 것 못 지켰다고 회개해요. 회개를 매일 한번씩 하기로 했다. 그것까지 겹쳐서 어마어마해 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묘목심기입니다. 그리고 황당한 웃지 못 할 경우도 많아요. 적용을 이상하게 해서 많이 나옵니다. 그런 걸 적용을 해서 무얼 이야기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권위 있게 나가니까 큐티 자체가 직통파의 수단이 되니까 굉장히 어려운겁니다. 그래서 참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문제, 성경자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모르면서 큐티 를 하는 경우가 있지요. 특수한 경우가 아닌 대부분의경우에는 그런 염려가 적을 겁니다. 문제는 그나마 그런 식으로도 성경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성경전체의 맥과 뭐도 모르면서 성경을 펼치고 무조건 자기가 해석을 해서 자기가 뭔가를 깨달아낸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면이 많은 겁니다. 약국에 가서 어디가 아파? 배 아픈데요. 그래? 가서 몇 개먹고 가라. 그런 거 하고 비슷한 상황이 나올 수도 있는 거란 말입니다. 목회자들이 보는 말씀묵상이 있습니다. 그건 저도 2년 반 정도를 연재를 했는데 그건 그래도 상당히 비중을 가지고 칭찬해줄만합니다 .뭐냐면 묵상하고자하는 본문을 주해를 먼저 한겁니다. 주해를 했기 때문에 그걸 먼저 읽어보고 되거든요. 그런 장치들이 좀 필요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습니다. 작년에 생명의 말씀에서 찍어낸 책인데 아침과 저녁묵상이라는 책입니다. 챨스 스펄젼 이 성경 한 구절을 작은 한 페이지에다 설교 한겁니다. 그런 것 하나를 읽고 묵상하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훨씬 더 정확하게 성경에 대한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교회가 여력이 있으면 그렇게 매일 묵상할 수 있는 자료를 정기적으로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보급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좀 있으면 한편의 설교를 읽고 묵상을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매일아침 스펄젼 설교 한편씩을 읽는다고 하는 데 그것이 오히려 훨씬 잘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겁니다. 매튜엘리 나 그런 사람들의 주석을 처음부터 매일 성경 다섯 절 씩 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읽어 나가면서 자기의 결심을 큐티 에 쓰는 것이 훨씬 더 성경을 전체적으로 배워가는 데 좋습니다.
그 다음이 전도 생활입니다.
이것도 자기 자신이 솔선을 해야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자기는 걸어가지 않는 길을 자기가 양육하는 사람에게 걸어가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사도행전을 정직하게 읽어볼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정한 전도를 위한 훈련과 코스를 걸어야지 비로소 전도 할 수 있다고 사도행전이 말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경우도 보면 믿고 나서 즉시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여인도 마찬가집니다. 즉시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예배시간에도 말씀드린 대로 심각한 반성이 일어나는데 내가 새 신자들을 너무 우습게보면서 목회를 한 것 같습니다. 신앙의 표준자체를 현실화 시켜서 낮춰 잡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정말 성도들을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믿기 시작 하면서 이번 달부터 십일조 하시오. 내일부터 새벽기도 나오고 매일 성경 몇 장씩 읽고 전도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타성에 젖을 대로 젖어서 여러 교회 돌아다니다가 말라빠진 상태로 돌아온 사람을 두들겨서 원하는 상태로 바꿔 놓으려니까 정말 안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나중에 굳어진 것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정도로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어떤 땐 기도하는 게 목사인 나도 부러워요. 어떻게 녹아지듯이 저렇게 매일 기도를 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힘들지 않느냐 물어보면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는데 뭐가 힘드냐고 오히려 그들이 나를 설득하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그래서 새 신자들을 우습게 다루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새 신자들을 다루고 나면 제일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좀 부족해도 지체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는 구역장과 교사는 영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할 때 그 영혼 앞에 설 때 담대함이 있습니다. 기도 속에서 힘이 나오는 겁니다. 전도도 마찬가집니다.
그다음이 말씀이 적용되도록 도와주는 방법입니다.
이와 같이 양육의 과정에서 돌보는 자의 신앙적인 삶이 돌봄을 받는 신자에게 부어지는 것, 이것을 가르쳐서 게리쿠네는 그의 저서에서 라이프 프랜스 퍼랜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신앙적인 지식들을 생활로 전달해 주는 것, 종교적인 지식들이 자료화된 겁니다.
그것을 살아있는 산지식으로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는, 돌보는 자가 삶의 모범을 보여주고 두 번째는, 돌봄 받는 신자에게 우리의 실제생활에 대한 말씀의 적용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 할 것이 요구된다.
(1)돌보는 자가 신앙적으로 모본을 보여준다. 유대교 적이고 이단적인 기독교 사상과 행실이 혼합적으로 집적 돼있던 목회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목회자가 디모데였습니다.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가운데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 에게 본이 되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돌봄을 받는 신자는 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고, 돌보는 자는 누군가 사람을 통해서 신앙과 행동양식에 관한 통찰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혼자 알아서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서 배우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의존하고 매달리는 신앙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매이고 하나님을 배워가는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앙의 스승이 없습니다하는 이야기는 나는 막삽니다하는 이야기하고 비슷한 겁니다. 존경 할만한 사람이 없으면 너무 비참합니다. 산 사람 가운데 없으면 죽은 사람의 글을 통해서 그들과 대화하는 겁니다. 그러면 닮아갑니다. 로봇 콜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따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리스도만 따르기를 원합니다.’ 라고 진술하는 그리스도인 들을 본다. 이 말은 듣기에 겸손한 것 같지만 나는 이 같은 진술이 적합하지 않다고 믿는다. 다음성경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를 본 받도록 요구함에 있어서 추호의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스스로 본을 주어 우러러 본받게 함이니라.’ 되지도 못한 사람들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강요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본받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본받는 겁니다. 권위는 자연스럽게 그 앞에 설 때 무릎을 끌고 싶은 것이고, 권위주의는 기계적으로 강요를 하는 겁니다. 제자 훈련이라는 프로그램에 들어갔다고 해서 어떻게 가르치는 대로 다 본받겠어요. 모든 양육의 관계자체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설정해 버리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 대신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정말 여러분들을 존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인 관계겠습니까. 도저히 존경하고 승복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을 자기 제자라고하고 다니면 그 사람에게 큰 고통이 되는 겁니다. 강요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해 주는 것 과 진리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두 가지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존경심을 가지고 본받도록 만들어주는 겁니다. 이 두 가집니다. 하나가 없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사랑해주는데 삶의 일관성이 없고 진리 위에 서 있지 않는 것은 뒷골목의 패거리들이 보스를 중심으로 뭉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신앙적인 패거리입니다. 사람을 추종하는데 의리 하나는 끝내준다는 것이 이유라면 안 되는 겁니다. 반대로 너무나 분명하고 칼 같아서 존경스러운데,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과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본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겁니다.
(2)그다음에는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이거는 삶의 모본을 보여주는 문제와 아주 일치합니다. 이런 이야깁니다. 이런 양육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 있게 되면 삶의 커미니케이션 이 많아지니까 특정한 한사람의 삶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게 되는데 어떨 때 신뢰를 갖게 되는가하면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이 성경일 때 그때 말씀의 적용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자기의 생활은 교회에 와서 은혜 받는 것에 국한 되 있는데 그 사람은 사업상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도 어떤 척도를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이 성경일 때, 그럴 때 배우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습관 등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척도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삶 전체에 대한 신뢰가 생기게 되는 겁니다. 우연히 이뤄진 삶의 구도 같은데 두드려 보면 신앙적인 고민이 있었고 결단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 것들을 발견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적용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요령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크게 적용된 덩어리가 성도의 삶인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이 가장 실망하는 게 말과 행동이 엄청나게 차이가 날 때 괴리감을 느끼고 실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완전히 막을 수 는 없지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게 말씀을 삶에 구석구석 적용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이 상담이야기가 나옵니다.
크라잇 네레모아 의 저서에서 상담에 실패하는 원인이 사단의 방해, 그리고 내담자가 상담자의 조력을 원하지 않을 때, 내담자의 습관교정이 지체되는 것에 대한 상담자의 인내 부족, 상담자와 내담자의 인격적인 갈등, 상담자의 상황 오판, 이중에서 첫 번째의 원인은 본질적이고 원리적인 요인이다. 뭔가를 상담해주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결국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을 가져야된다.
그다음에 상담을 위한 공감의 분위기이야기는 넘어가겠습니다.
그다음에 목표를 위한 상담에 있어서의 돌보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찾아온 고객에 대해서 무얼 찾는가? 묻는 상인은 있어도 왜 왔는가? 묻는 상인은 없을 겁니다. 그것은 고객이 그곳에 온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돌봄을 받는 신자가 상담의 문을 두드리는 목적도 분명하다.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겁니다. 우선 안도감속에서 자신을 개방 할 수 있는 세심한 배려와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귀를 기울 릴 것.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이 딴청을 하면 대화자체가 잘 성립이 안 됩니다. 전화로 이야기 하는 것과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이 다릅니다. 의사소통은 다 되는데 만나는 이유는,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전인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건 얼굴의 색깔 일수도 있고, 눈의 모양일수도 있고, 눈물이 반짝이는 것 일수도 있고 체취일수도 있고 그런 겁니다.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서로 오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게 안 되는 겁니다. 상담할 때는 깊이 들어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보통 인격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걸 배워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게 되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어야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핵심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면서 핵심의 방향으로 이야기가 계속 전개되도록 조정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왜 그이야기를 하는지 이유를 먼저 알아두고 들을 것.
제가 새로 등록하고 심방하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언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다가 열린 교회 까지 오게 됐는지 역사를 간략하게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쭉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을 알게 되는 커다란 윤곽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일단 그걸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 전체의 생애 가운데 어디하고 연결되는지 집어넣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거나 불필요한 행동을 하여 대화의 흐름을 단절시키지 말 것.
주의력을 집중시켜 돌봄 받는 신자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파악할 것 .
돌봄 받는 신자가 이야기 할 때는 얼굴에 시선을 줌으로서 내담자의 표정, 동작 등에서 언어적인 표현이 드러나지 않는 유익한 시선을 받도록 할 것.
쳐다봐야할 이유가 이런 겁니다. 이야기를 막 하는데 어느 대목을 이야기 하면서 눈물이 핑 도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굉장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런데 딴청하고 있으면 그걸 다 놓칩니다. 그래서 상담을 들을 때 성숙한 상담자는 고통스러워하는 대목에서 이야기하면 자신도 고통스럽게 느끼는 겁니다. 흉내를 낸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공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면 그런 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이 보여 지게 되는 겁니다.
돌봄 받는 신자에 대한 감정적 접근
첫째는 횡설수설 형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이야기 하고자하는 요점이 아주 분명합니다. 횡설수설 한다는 이야기는 진짜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하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인내를 가지고 참고 기다리다보면 왜 그렇게 횡설수설했는지 마지막에 가서는 결론이 나옵니다.
두 번째는 부정적 감정 입니다. 이게 대상 파괴적인감정입니다. 네가 뭔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해결책은 이런 겁니다. 또한 부정적인 감정이 더 깊은 내면으로 기울어져서 염쇄적 이고 자학적인 면으로 표출된다. 네가 뭔데? 하고 대드는 사람은 난 아무것도 아니야. 나 같은 놈은 쓸데없어 이런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존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자학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겁니다. 그런 경우에 무조건 감싸고 나가기 쉬운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상담에 있어서는 심팩티 가 아니고 임팩티입니다. 심팩티 란 동일한 감정으로 휘말리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임팩티, 공감의 감정을 갖는 겁니다. 그래야만 충고가 가능합니다. 상황 속에 같이 말려 들어가면 충고하는 게 아니라 동지가 돼 버리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돌보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치우치지 않는 초연한 상태에서 다만 돌봄 받는 신자의 감정을 전부 수용해주고 시인해주는 자세에 서주는 동시에 더욱 친밀하고 관심 있는 반응으로 공감을 표시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돌봄을 받는 신자가 주장하는 지적인 내용보다는 감정에 응답해주는 자세를 통해서 그 자신이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적극적인 충동으로 새롭고 건설적인 방향을 모색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세 번째는 반항적인 감정입니다. 앞에 하고 비슷한 감정인데 그럴 경우에는 모든 것을 한번에 끝내려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왜냐하면 한번 만나고 안 만날 사람이 아니니까요. 저 사람은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있는데 똑 떨어지게 이야기해서 정작 아무것도 선택 할 수 없게끔 몰아치는 것은 결국은 다시 안보겠다는 이야깁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럴수록 자기의 절대적인 의견을 상대화 시키는 겁니다.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좀더 생각해 봅시다. 한번다시 만납시다하고 기도 하면서 다음에 만남을 기약하는 겁니다.
네 번째는 변덕스런 감정입니다. 이건 좀 신경 발작적인 증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 힘듭니다. 전혀 화 낼 대목이 아닌데 막 폭발하고, 웃을 대목이 아닌데 막 끌끌거리고 웃고 해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섯 번째 불안한 죄책감입니다. 막 불안스러워하는 겁니다. 그럴 때 잘못하면 왜 그랬니? 넌 나빠! 아니면 뭐 다 그래! 이런 식으로 해주면 안 됩니다.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죄책감을 활용해서 사단이 누르고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복음적으로 조명을 해줘서 죄에 대한 양면성을 함께 제시해줘야 합니다.
여섯째는 감추어진 감정입니다. 말을 계속 감추고 안하는 겁니다. 감추고 어느 선 까지만 이야기 하고 그다음에는 자꾸 회피하는 겁니다. 대화로 들어가기를 회피하는 감정입니다. 그럴 때 넘겨 집는 것은 참 안 좋습니다. 난 지난여름에 네가 뭘 했는지 난 다 알아! 하는 식의 수사관적인 눈초리는 안 됩니다.
일곱째는 깊은 이해심입니다. 이해심은 상대방의 입장과 형편을 완전히 파악하고 상담에 들어온 돌봄 받는 신자의 생각을 분명히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심중의 깊은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이야기 안 하기 쉽습니다. 그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해한다는 표현으로 나는 네 편이다. 라는 식으로 돌보는 자가 가지기 쉬운 것이 동정심입니다. 그것이 심팩티 입니다. 그런데 상담에 있어서 동정심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비정상적으로 결합 할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결합 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태도란 말입니다. 그런 태도는 돌봄 받는 신자의 자율성과 인격을 약화 시키고 동정을 바라는 의존심을 유발하게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팩티 보다는 임팩티 라는 감정의 이입관계를 갖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동정은 볼돔 받는 신자의 문제 속에 상담자가 참여하는 상황을 넘어서서 동화, 비정상적인 동화의 상황으로 까지 진전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어느 교회 에서는 교역자에게 수칙을 정했는데 이성과 함께 동일한 문제로 두 번 상담하지 마라. 특별히 이성으로서 부부의 성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을 상담하지 마라. 그런 철칙이 있습니다. 그런 경고를 수칙으로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 인가하면 심팩티 의 감정으로 들어가기 쉽다는 이야깁니다. 이 같은 상담 환경이 처음에는 장점은 있습니다. 내담자로 하여금 부끄러운 것을 걷어버리고 다 털어놓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단 심팩티의 상황으로 들어가면 가이드가 불가능해집니다. 인도가 안 됩니다. 이 같은 동정이 그릇 된 동질성 의 감정으로 떨어 질수도 있다. 결국은 돌보는 자가 상담과정에서 상담이라는 원칙적 기능관계에 지나쳐서 인간적인 애정이 넘치는 동정으로 기울어져서 내담자가 요구하는 애정에 빠져버려서는 안 된다. 상담자는 꾸밈없이 초연한 애정으로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해 주어야하고 돌봄 받는 신자에게 자신의 이 같은 위치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여덟 번째 자율성의 존중입니다. 이건 결국 인격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자기 스스로 결단하도록 만들어 줘야하는 겁니다. 강제로 해버리면 나중엔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인격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아홉 번째 상담의 끝맺음입니다.
효과적인 상담을 위한 몇 가지 제안입니다.
첫째는 상담 그자체가 마지막결론은 표현 방식은 좀 달라야 됩니다. 여러 문제를 가지고 왔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그렇게 계속이야기 한다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좁히기 어려운 격차를 느끼게 만들어주게 되는 겁니다. 특별히 성경에 의해서 지도를 받으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불신자를 상담할 경우에는 문제가 됩니다. 그래도 표현을 어떤 식으로 하든지 그걸 잘 풀어서 이야기 하는 전체 과정이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과정이 돼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상담을 하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2)상담하는 장소입니다.
상담의문을 두드리는 돌봄 받는 신자는 상담할 내용에 관해 털어놓고나 은폐할 어느 쪽도 결단하지 않은 채 돌보는 자를 찾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런 이야기 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요하는, 경우처음에는 할 의사가 없었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마음이 열려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대게는 어느 쪽을 결단하지 못한 중립적인 상태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만나서 다 털어놔야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황을 봐서 결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마음이 닫히게 하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게 하면 힘들어지는 겁니다. 끌어내질 않는 겁니다. 이런 경우 상담의 장소나 분위기들은 통로를 열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취향, 환경을 대하는 느낌도 같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장소가 가장 좋다고 단정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넓게 공개 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장소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조용하고 막혀진 장소가 좋다. 장시간 대화를 해도 방해를 받거나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상담실을 활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형광등 보다는 백혈등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더해주며 의자도 간이의자보다는 등받이 있는 의자를 사용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긴장을 풀어준다. 소파 같은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상담도중 성경을 함께 찾거나 팔을 올려놓을 수 있는 탁자가 있다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따라서 돌보는 자가 일단 상담을 계획할 때는 어떤 장소에서 본론적인 상담을 진행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야 된다. 예배당이나, 상담실, 집회 실, 편안한 찻집, 가정, 야외 벤취, 산책로 등을 활용하며 상담 시 불필요한 행동으로 대화가 단절되지 않도록 필요할지도 모르는 성경책, 필기도구, 메모지 등을 미리 준비해두는 세심한 배려가 요구된다. 상담을 통해 답을 주고자 할 때는 인격적인 방법을 택하라. 그래서 스스로 인격적인 자율성을 인정해주고 그러면서 분명하게 제시된길을 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여러 길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알고 보면 나머지 길은 걸어 갈수 없는 길이고 신앙으로 돌아오라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3)부딪히는 문제들입니다.
부딪히는 문제들은 너무 많은데 실제로 양육을 하다보면 부딪히는 문제는 이런 환경적인 문제들 이라기보다는 내면의 문제입니다.
(4)처리과정과 방법입니다.
첫째는 문제가 뭔지를 찾아내는 겁니다. 내면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이긴 한데 거기에는 반드시 매개가 되는 단서가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마음이 갈라진다든지, 가정의 불화로인해 집중을 못한다든지, 건강의문제로 인해서 말씀을 깨닫고 싶지만 교회를 못 나온다든지, 이런 문제들이 있는데 그 문제가 무엇인지 포착을 하고, 그다음에 어떻게 처리 할 것 인지를 모색을 하고, 기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할 것 인가하는 겁니다. 물론 가장 최상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고 할 것 같으면 구체적인 방법들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사용 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마련하는 겁니다.
(5)양육소신(육성소신)입니다.
편지를 쓰는 겁니다. 칼빈 이 일생동안 남긴 편지가 3000페이지라고 합니다. 편지 쓰는 그 자체가 사역 이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으니까 커미니케이션 이 많았어야 했겠지요. 사도 바울에게도 서신을 쓴 것은 중요한 양육의 수단 이였다. 이렇게 나오지요. 편지는 만날 수 없는 깊은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강한 호소력과 개인적인 친근감을 주는 장점이 있다. 진실한 편지는 항상 받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더욱이 보내는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기록한 내용이라면 받는 이에게 신앙적인 감화를 끼칠 수 있다. 문제는 글제주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입니다. 첫째, 표현의 기교보다는 진실한 마음을 전할 것. 둘째, 처음부터 단도지입 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르기보다 형편없어도 일단 인정해줘야 할부분이 어떤 부분인가를 더듬고 품으면서 들어가야 합니다. 셋째, 끝맺음은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내용으로 하되 만남을 기대하는 바램을 표 할 것. 다른 사람이 모두 볼 수 있는 엽서를 사용하기보다는 봉압 엽서나 봉투를 사용할 것. 이것도 선택적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남자교역자의 이름으로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것이면 공개된 것이 훨씬 났습니다. 그렇게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편지지를 사용 할 경우 한 장으로 끝맺음은 사무적인 인상을 주기 쉬우므로 최소한 두장이상의 길이를 쓸 것, 그러나 내용을 늘이기 위해 말을 만들어야 할 경우에는 한 장도 무방할 것입니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 성명을 떳떳하게 밝힐 것.
(6)방문과 전화
이 역시 볼 돔을 받는 신자를 격려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제일 좋은 건 편지 보내고 받았을 때 쯤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을 때 전화를 하면 일단은 호의적이 됩니다.
(7)선물을 한다.
이건 돈이 들어가는 문제가 있기는 한데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들을 선물하는 게 좋은지를 생각했다가 줄 때 도움을 많이 주게 됩니다.
(8)합심기도의 요청입니다.
이런 격려의 활동을 통해서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의 분위기가 형성되면 돌보는 자는 돌봄 받는 자를 합심기도에 초청하는 것이 좋다. 합심기도 방법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교회나 일정한 장소에서 혹은 일정한 시간에 만나서 기도하거나, 기도를 위한 여행을 함께 떠나거나 혹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흩어진 처소에서 기도하거나, 이럴 때 굉장히 감동을 받는 겁니다. 그렇게 기도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는 사람들에게조차 신앙의 세계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양육 받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니까 굉장히 좋은 기회가 되는 겁니다.
(9)여유기간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계속 쫒아 다녀 봐도 안 될 때 잠깐 동안 사이를 끊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다시 관계를 갖고 싶어 하게 됩니다.
4. 폐회예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사랑에는 허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자신을 투자하고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문맥자체가 사도로서는 이런 이야기하기가 참 어려운 상황 이였습니다. 이유는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버리고 유대교적인 율법주의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상황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가르침도 거절해야 됐고 당연히 사도 바울에 대한 비난도 뒤따랐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인간적으로 배신한거고 신앙적으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도를 버리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 서신에는 인사말이 없습니다. 처음 쓸 때부터 이미 감정이 격앙돼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이 분노하고 있는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4장까지 달려오면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한숨쉬면서 말하는 게 뭐냐면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같이 동역자로 살아가다가 지체들끼리 부딪치고 상처받는 것은 그렇게 큰 상처가 안 됩니다. 그런데 목양의 관계에서 받는 상처는 굉장히 오래 갑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가는 겪어본 사람들이 잘 압니다. 사도 바울이 이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함께 맺었던 목양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눈이라도 아마 너희가 빼 주었을 거다. 라고 할 정도로 깊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결 되 있는 관계였습니다. 이성간의 관계는 서로 좋아하다 싫어지면 미워해버리면 끝납니다. 그런데 목양이 관계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것을 허락 안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런 뜨거운 교제가 있었던 사람들이 어느 날 식으면서 자신을 향해서 인간적으로 배신하고 그것도 참된 복음의 도가 아닌 거짓된 도를 밟고 떠나온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어 왔을 때 바울은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참기 어려운 분노를 느꼈을 겁니다.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즉시 바울에게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고 돌아왔어도 그랬다는 사실만으로도 바울에게는 커다란 아픔이요 상처였을 텐데 여전히 자기를 험담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말합니다. 그게 결국은 포기 될 수 없는 목양의 관계를 의미 합니다. 너희들이 내가 가르쳐준 참된 복음의 길을 버리고 거짓된 길을 걸어가는 데 사도 바울의 인식 속에서는 그들이 여전히 자기와의관계가 자식과의 관계이고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가하면 사도 바울 속에 있었던 사랑이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생겨나기는 했지만 그 사랑의 기원자체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로부터 온 사랑이 아니라 불변하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변했지만 바울을 붙들고 계신 그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자기가 그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랑의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니까 이들이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고 그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부름 받은 사랑이자기를 인간적으로 배신한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서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이끌고 가다보면 정말 상처가 많습니다. 양떼들이 산 넘고 물을 건너는 동안에 가시에 찔리고 다리가 삐고 하면 목동이 그 양떼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먼저 헤치고 돌바닥 길 을 지나가고 산을 넘고 고개를 넘는 동안에 받아야할 상처를 다리에 다 받으면서 지나가는 겁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자는 용사라고 했습니다. 용사가 아닌 사람은 목자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작은일 에 주저앉아서 흐느끼는 사람들은 그 심장 자체를 강화해서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그런 상처를 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저렇게 야단을 맞고 비난을 받으면서 어떻게 추호도 흔들림이 없을까 섭섭해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린 한 사람의 목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많은 양떼들을 돌보며 나가다 한두 번 그런 일 을 당해도 쉽게 흔들리거나 낙망하면 나머지 많은 양떼들이 우리를 보면서 불안해하고 걱정 근심하기 쉽다 이겁니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분은 10년 동안 죽만 먹으면서 지내는데 교인들은 아무도 그걸 몰랐습니다. 그 만큼 철저하게 자기를 감추는 겁니다. 양떼들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바로 목자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한겁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기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사랑의 감격에 넘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이런 것들은 불가능한겁니다.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 불과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는 담대하고 용기가 있는 것 같지만 혼자 돌아서서 우는 것이 우리들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런 삶을 살수 있게 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울과 같이 이런 말도 안돼는 양떼들을 만나서 살아갈 때 이런 영혼들도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부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격에 넘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 이외엔 아무 대안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의 만져주심이 있는 삶을 살지 않고 교회에서 많이 봉사하고 목회하고 목양하고 나면 병든 양떼들과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지친 자신의 마음, 한걸음 더 나가서 깨어진 인간관계 그런 것만 재고품처럼 남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사로 섬겨서 영혼의 유익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보십시오. 허덕거리면 일년을 채우고 나서 12월 달에 기다렸다는 듯이 공과 책 놓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마지막 가지고 가는 건 지친 영혼과, 사람에게 실망한 것, 섬겨도 역시 안 된다고 하는 좌절감, 그런 것 재고품처럼 끌고 가는 것 밖에 뭐가 남느냐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재능이나, 경험, 자신에게 있는 달란트를 가지고 이것을 감당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감격에 넘쳐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진정한 목자의 도가 나오는 겁니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인데 펑펑 우십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자기가 정말 믿고 살아가는 교회의 부교역자들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주질 않는 것을 발견한겁니다.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닌데 얼마나 상처가 되면 그러겠어요. 우리 모두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특수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약한 겁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양떼들 중에서 취함을 받은 겁니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남이 못 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남이 알지 못하는 복음의 지식을 갖게 되었고 남이 쉽게 느끼지 못하는 영혼을 향한 부담을 느껴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지극히 연약한 양떼들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양 무리였을 때 가지고 있던 그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 결별 한 게 아닙니다. 저는 최근 교회를 이전하는 6개월 동안에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느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고린도 서신 속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지극히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손을 얹어 기도하면 죽은 사람이 일어나고, 갈라디아교인들을 야단치는 그 권위를 보세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가 있어요? 그렇게 양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도 한때는 주님의 양떼였습니다. 양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그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대신 남이 알지 못하는 큰 하나님에 대한 감화, 다른 사람 들이 맛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현재적인 감동,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들에 대해서도 느끼지 못하는데 병든 영혼들을 대할 때 하나님이 저항할 수 없이 느끼게 하시는 불가항력적인 감동, 그런 것 때문에 조금 다르게 사는 겁니다. 그렇게 조금 다르게 살아서 다른 사람들이 못 느끼는 자아를 내가 이기고 다른 사람들이 무릎을 끄는 상황에 쓰러질 듯 비척거리면서 앞으로 가는 겁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붙들고 계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영혼을 돌보지 않고 학교에서 강의만 했으면 분수를 몰랐을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교만해질라 할 땐 병든 영혼을 보여주면서 그때 너 거기 있었느냐 라고 물으시면 무슨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양떼와 같은 연약함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덮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그런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부어지는 사랑의 감격과 감화가 없다면 바울과 같은 이런 태도로 우리의 양떼들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한겁니다. 우리에게 상처 주는 양떼들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미워하며 그렇게 범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이제 알게 된 겁니다.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능란한 화술, 그리고 놀라운 진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영혼들에게 어떻게 해야지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야하는지 안다고 하는 많은 지식과 이론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양떼시절에 양떼들에게 볼 수 있는 연약함을 동일하게 그대로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감화와 현재적인 주님의 사랑의 감격 없이는 우리들이 왜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왜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말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심령,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 이것이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영혼들을 위한 삶이고 영혼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양떼를 위해 바쳐졌고 양떼는 그리스도를 위해 바쳐졌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졌습니다. 우리들이 영혼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그 의무가 너무 힘겹게 느껴지는 이유가 뭐냐면 아직 우리에게 우리의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높으신 분이였지만 죄 때문에 낮아진 우리를 높이려고 그 분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신 겁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감격 없이 무엇으로 우리들이 영혼들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런 사랑이 있으니까 사도 바울이 허비할 수 있다, 다 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허비한다는 것은 쓸데없이 써 버린다는 겁니다. 사실 쓸데없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릴 때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 따라서 너무나 다른 겁니다. 그런데 평상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고 낭비를 해야 한 것이 훨씬 클 때 그것을 낭비라고 합니다. 강대에 지저분한 것이 묻어서 걸레로 닦아야하는 데 사면을 돌아보아도 걸레가 없고 물도 없어요. 그런데 꼭 닦고 싶어요. 마침 가방을 보니까 향수가 있는데 60 만 원짜리 향수에요. 그걸 수건에 다 쏟아 부어서 때 닦는데 사용한 것을 가르쳐서 허비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허비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를 가르쳐서 허비라고 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이해 할 수없는 목적을 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영혼 사랑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지요. 이제라도 너희를 위해서 나 자신을 허비하려고 한다. 무슨 뜻 입니까? 이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는데 이 사람은 등 돌리고 돌아가는 그 무리를 가슴에 끌어 앉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를 쏟아 붓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게 바울의 인격이나 사명감에서 의무감에서 우러러 나온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역사 한 것을 체험한겁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과 의 화해를 원하는 것도 아닌데 예수그리스도를 속전으로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기를 향해서 발꿈치를 들고 돌멩이를 처든 이 영혼들을 원수로 보지 않고 자녀로 생각하면서 다가가서 끌어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온 것 인가 하면 현재적인 그리스도예수의사랑의 감격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회상한겁니다. 우리들이 항상 영혼을 섬기지만 우리 속에 떠올라야 할 생각은 그들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런대서 오는 깊은 고통과 좌절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라는 겁니다. 우리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면 안 됩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제품들을 만들기 위해서 청구업자처럼 영혼들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라는 겁니다. 결국은 처음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었던 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입니다. 그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회복되는데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회복된 그 형상을 그들이 본 받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히 성화의 문제를 물고 들어오는 겁니다. 두 가지 입니다.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일 을 행하기에 능한 사람이 되는 것,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사람자체가 온전해지고 그를 통해서 선한일 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자신이 아무리 성경을 가르치고 영혼들을 가르치려고 하더라도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려고 하는 추구 점 자체가 없다고 하면 우리의 사역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닮고자하는 강력한 소원에 의해서 삶이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인데 그의 가르침과 그의 사역이 영혼들을 위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바른 자세 속에서 영혼을 돌보아가기만 하면 이 길이 우리를 깍고 다듬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닮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자기 변화와는 상관이 없는 사역을 해서 사람들이 질문하기를 내 자신이 변하기 위해서 사역을 그만둬야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내가 변하는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사역자체가 노가다사역이니까 그런 겁니다.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추구 하라고하는데 나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거룩한 삶을 가르치는데 나는 그러고 싶은 의지가 없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데 나는 그 사랑과 관계없는 사람인겁니다. 그것이 결국 노가다 사역입니다. 노가다 하는 사람들이 아파트 지어주고 무슨 보람을 느끼겠어요. 돈 받아가지고 오면 끝이지 그걸 받고 감격해 하는 사람은 설계하는 사람과 건축주 인겁니다. 자기 집을 자기가 짓는다면 매일느낌이 다를 겁니다. 우리들이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영혼들도 황폐하고 우리도 황폐한 삶을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보면서 살아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 그들 속에 이뤄질 뿐 만 아니라 내 안에 이뤄지는 겁니다. 내가 영혼을 섬기지 않았다면 얼마나 엉망인 인생이 되었을까? 내 소견에 옳은 대로 먹고 마시면서 짐승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들고 주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지 못 할 때 메마른 내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가치를 갖게 하고 내게 무엇인가 아끼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이 잘못된 것 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그 힘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때 우리들의 섬김과 사역은 날마다 거룩한 사람들을 만들어가고 자신의 삶이 더 온전해지고 진실해져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서 주님께 그런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 가운데 서서 생명을 누리게 하셨으니까 그런 사랑과 진리의 빛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주님의 마음으로 이 빛과 이 사랑을 알려주고 깨닫게 하는 도구로 살면서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해져서 영혼을 위해 일생을 살다가 죽는 것이 진실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가야 할길 입니다. 물론 사역의 종류와 섬기는 방법은 그때마다 다르겠지만 대의는 이것입니다. 이번 수련회 끝나고 가서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좋아하시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아끼고 있는지, 그리고 내안에 영혼들을 향한 깊은 실망이 사랑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며 새롭게 각오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영혼을 돌보는 섬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