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적 준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1:80)
녹취자: 김경애
성경의 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인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아주 짧은 생애를 살다가 죽었고 그의 관한 기록도 사실 그렇게 많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정도로 혁혁한 어떤 목회의 업적을 이루어놓은 것도 없습니다. 설교 몇 편을 남기고 어린 아이에 의하여 청구되어서 헤롯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 목이 그 어린 아이를 위한 선물이 되었던 그런 비운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례 요한은 저의 생애에 그 어떤 인물보다도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았고 그리고 일평생 이 사람을 본받으며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드릴 수 없지만 이 세례요한은 계시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신약 사이를 걸쳐있는 그런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에 속한 마지막 선지자이고 또 어떻게 보면 신약시대를 연 첫 번째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예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도록 하나님께 지정되었고, 이 사람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소개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까지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요한을 다른 요한과 구별하여 세례 요한이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매우 독특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중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세례 요한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세례 요한이 이 세상에 탄생하는 것과 같은 연결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는 세례요한을 타고 흘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알리고 그리고 구원 역사의 봇물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무엇인가? 예츠카라는 역사가는 말하기를 ‘역사는 역사적인 인물들의 우연적인 특징의 소산이다.’ 라고 그랬습니다. 좀 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알기 쉬운 말로 표현하면 역사라는 것은 어떤 한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은 역사다. 그래서 이 역사의 흐름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꼭짓점 삼아서 그렇게 줄로 이으면 그것이 곧 역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역사에 있어서도 통치하시는 주인이시고 이 모든 세계의 왕과 임금들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군인이 되고 전쟁이 일어나고 승리하고 패배하고 하는 이런 역사들 속에서의 인물들만을 기억하지만 이것은 모두 껍질일 뿐이고 하나님은 가시적인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속의 역사 이면에 그 역사의 전개를 통해 정말로 이루어 가시려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구원사’ 라고 부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이어지고 전개되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에서도 사람들이 사용되어 역사를 전개해나가듯이 구원의 역사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전개해나갑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우리 잠시 한번 살펴봅시다. 제일 먼저 이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고 그리고 구약의 진정한 의미의 선택 백성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어마어마한 인물이 하난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여호수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산맥이 내리달아 내리는 듯하다가 아주 중요한 인물이 또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 전개되고 그리고 아주 높은 산맥과 같은 거봉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구약의 최대 인물로서 모세와 쌍벽을 이루는 다윗입니다. 다윗 이후에는 이제 그렇게 커다란 선지자들의 일어남이 흔치않다가 여기저기에서 중요한 선지자들이 등장하고 다시 그 산맥이 떨어지는 듯하면서 기울어서 예수님 오시기 약 400년 동안 정경 선지자들의 역사가 그치고 이제는 그런 험산준령과 같은 거대한 산맥의 흐름이 끊어지는가? 했을 때에 불쑥 나타난 큰 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차치하고라도 그러면서 잔잔하게 역사가 달려오다가 이제 다시 산봉우리가 시작되고 그 위에 커다란 산봉우리 하나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일어서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역사가 잠시 주춤하고 다시 낮아지는가 하더니 이제 중요한 인물들인 속사도 교부들이 나타나고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리고 다시 그 봉우리는 낮아져서 이제 작은 언덕처럼 흘러가다가 또 다시 기독교 역사에 아주 위대한 한 봉우리가 솟아오르는데 그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확언하건데 기독교 역사 이천년에 아직까지도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봉우리를 넘어선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내려가다가 이제 중세에 접어들게 되고 그저 그만그만한 봉우리와 그만 그만한 산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특별히 걸출한 영적인 인물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 시대였고 알다시피 영적인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중세의 교회의 시대를 지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산봉우리가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높은 봉우리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 칼빈, 존 낙스, 브링거 이러한 거장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깎아 지르는 듯한 높은 험산준령들이 생겨나고 이 산맥들이 영국으로 이어지면서 청교도라는 알프스산맥에 비교될 수 있는 수많은 인물들을 낳게 됩니다. 그중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거봉중의 몇을 꼽자면 윌리엄 에임스, 그 다음에 윌리엄 퍼킨서, 존 오웬, 토마스 구딘 이러한 거봉들이 돋아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 역사는 점점 기울게 되고 이 봉우리가 미국으로 건너가 최대의 한 봉우리가 태어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리고는 그 봉우리가 다시 급격하게 합리주의에 의해서 이제 멎고 다시 언덕이 하강국면에 접어들면서 평탄한 지형으로 내려오다가 영국에서 위대한 인물 한 사람이 태어나는데 그 한사람이 바로 찰스 스펄전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탄생하고 그리고 다시 20세기의 암흑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자유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신비주의 등이 판치는 혼란스러운 양상이 계속되어가고 있습니다. 잠깐 동안 설명했지만 저는 벌써 거의 약 4,000년이 가까이 되는 기독교 4,000년이 넘는 기독교의 역사를 인물 몇 사람들이 이어오면서 기독교의 역사, 멀리 나아가 여호와의 종교의 역사까지 설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다를 좋아합니다. 바다에 가보면 큰 파도치고 바람 부는 날이 제일 멋있습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바람이 불고 삼킬 듯이 집채 만한 파도가 바위를 때립니다. 그러면 어마어마한 물거품들이 하얗게 토하듯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겨난 물거품 가운데 10분 이상 파도위에 머물러 있는 물거품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사는 방법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상품과 같은 인생이고 또 하나는 작품과 같은 인생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홍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아침에 숙소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가 배달되었습니다. 펼쳐서 읽어보니까 머리기사가 한국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흥미가 있어서 잠깐 들여다보았더니 제목이 그것이었습니다. ‘한국이 쓰다 버린 인터넷을 세계가 쓴다.’ 그러면서 한국은 2012년까지 전국을 1㎇/Sec 1초에 1GB를 전송할 수 있는 그런 Cable을 설치하고 광속보다도 빠른 그런 인터넷을 즐기려고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격세지감이 있지요? 어느 날 제가 신대원을 다닐 때 교수님댁에 갔습니다. 교수님이 새로 산 당신의 노트북을 자랑하셨습니다. ‘김전도사님 이 노트북은 미국에서 내가 새로 사왔는데 용량이 어마어마해?’ ‘얼마인데요?’ ‘이 총용량이 80㎆야!’ 지금은 아마 웃을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입을 쩍 벌렸습니다. 그때는 노트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간신히 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20㎆짜리였습니다. 입을 쩍 벌렸습니다. 지금은 요만한 스티커 하나에 8㎇까지 담기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우스운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노트북이나 이런 것들은 상품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으면 계속 값이 떨어집니다. 더 좋은 것이 나오면 옛날 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어서 밖에 내어놓아도 그냥 안가지고 가고 돈을 동회에 내고 거기다가 딱지를 붙여야지만 겨우 들고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모조품이 많이 나올수록 인기를 끄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 그런 작품들은 작품이기 때문에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세월이 흘러가고 비슷한 것이 아무리 많이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값어치가 떨어지는 법이 없고 오히려 모조품이 많이 나올수록 진본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끝없이 가격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회를 지망하는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복음사역을 꿈꾸고 이 기독교 신학대학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자, 여러분들은 앞으로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상품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작품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작품과 상품의 차이는 뭐냐 하면 상품은 기술자들이 하나의 기계에다가 수없이 찍어낸 것입니다. 작품은 그렇게 찍어낸 것들 중에는 작품이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영국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자매가 있는데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연주를 할 때 스트라디바리를 가지고 연주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보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가느냐고 하니까 45억이라고 합니다. 바이올린 하나에 말입니다. 뭐 그렇게 놀랍니까? 이런 바이올린은 값이 떨어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 정해진 숫자가 있고 해가 지나갈수록 못쓰는 것들이 계속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벌써 2, 300년 전에 기술자가 만든 것인데 한정된 수량만을 만들고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명품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기계로 막 찍어낸 그런 제품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하면 여러분 누가 이렇게 물어볼 때 ‘나는 상품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 한 십년 교회와 세상이 나를 쓰고 더 좋은 사람이 나오면 버림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이 여러분들을 상품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대량생산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량생산 말입니다. 대량생산이 되면 그것은 상품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본받지 말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로 ‘수스께마띠조’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조형물처럼 되어있는 속에다가 다이캐스팅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다가 뜨거운 쇳물이나 혹은 밀랍을 부어서 똑같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더 쉬운 말로 하면 붕어빵 기계에다가 계속해서 밀가루를 붓고 가운데다가 팥을 집어넣고 돌리면 아줌마가 밀가루를 부어도 그 모습이고 애들이 와서 부어도 그 모습이고 누구든지 거기다가 밀가루를 부어서 굽기만 하면 똑같은 천편일륜적인 붕어빵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본받는다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수스께마띠조 할 수 있는 길이 오직 둘밖에 없는데 하나는 세상에 의해서 수스께마띠조 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에 의해서 수스게마띠조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들이 대량생산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빚어지지 않고 우리의 의식과 생활과 인격과 모든 것들이 빚어져 나아간다면 당장은 써먹을만한 사람이 될지 모르지만 좀 더 다른 시대가 되면 그 사람은 구식이 되어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베토벤이나 멘델스존의 음악을 혹은 부르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헨델의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시대가 너무나 변했기 때문에 이제는 이런 것들이 다 쓰레기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명곡의 의미입니다. 온 지구를 뒤흔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감동시킬 때 팔려 나가는 음반들의 유행가의 음반의 수는 명곡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명곡은 그렇게 한 해에 어마어마하게 몇 십 억 원어치씩 팔려나가지 않습니다. 그냥 꾸준히 조금씩 계속 팔릴 뿐입니다. 그런데 그 조금씩 팔려 나가는 것이 100년이고 200년이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운명이나 브루흐의 콘체르토 같은 것들은 아마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애청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셀렌 디온이 주제가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가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음반도 어마어마하게 팔렸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선전을 틀어도, TV를 틀어도 라디오를 틀어도 온통 그 타이타닉 주제가였습니다. 일 년도 되기 전에 모두 사라져서 지금 그것을 틀어놓으면 분위기가 그렇게 촌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품과 같은 사람이 되면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살아가면 남들보다 좀 더 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노래를 좀 더 잘 부르느냐 못 부르느냐 목소리로 부르느냐 악기로 연주하느냐 남자가 부르느냐 여자가 부르느냐 아니면 혼성으로 부르느냐 솔로로 부르느냐 하는 문제이지 기본적인 그 곡조는 똑같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역사에 의해서 모두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사실은 역사가 기억해주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그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은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고유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역사를 붙들고 그것과 씨름해서 뱃머리를 돌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에서 보면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는 위대한 구원사역의 전개도 정경 선지자가 말라기로 그친 이후에 이 사람 바로 세례 요한의 출생을 기다려온 역사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요? 역사는 숨죽이면서 세례 요한 한 아이의 태어남을 기다렸고 그리고 이 아이의 태어남과 함께 잠시 멈추는듯했던 역사의 뱃고동이 울리고 힘찬 구원의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세례 요한은 사갸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이 아이는 당시의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 아주 어린 시절에 광야로 보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이가 자라며’ 라고 되어있는 이 아이가 파이디언인데 원래는 이 파이디언이 5살 이상의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이 파이디언이라는 말이 베이비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니 이 세례 요한은 아주 갓난아이였을 때에 광야로 보내어졌고 광야에서 누가 돌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광야에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면서 그 속에서 미래의 주님의 일을 할 사람으로 성장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도시에서 이렇게 저렇게 공부하고 학위를 따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교육과정을 밟으면서 제도권에서 인정받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 보내어졌고 그 광야에서 이 아이는 자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강하여지고 하나님이 그를 불러 이스라엘의 역사에 세우시는 그날까지 광야에서 그는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으로 살았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이 사람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것은 누가복음 3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하던 시기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그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불타오르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수 있는 그런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광야의 목소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도래를 통하여 그리스도 오시면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깊은 회개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께서 오시자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낳다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이며 자기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라고 그렇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위대한 인물들은 위대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과 똑같이 태어났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과 똑같은 성장의 과정을 밟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준비된 사람들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날 우리 교회 청년들이 저를 초청해서 설교시간에 다 듣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그래서 갔었습니다. 그랬더니 직업, 취업, 공부, 결혼, 연애, 직장생활, 심지어는 애기를 낳고도 계속 직장을 갖는 비결 등등 별의별 질문들이 다 나왔습니다. 그중의 질문 하나가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님,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직업을 가져야되는데 어떤 직업을 가져야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소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 몸부림치며 자신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후에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어떤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직업이 선택할 기회를 그대들에게 안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준비하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직업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업이 그 사람을 버려요. 아주 쉬운 말로 이야기하면 먹고살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강력하게 도전했습니다. 내가 오늘 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되어야겠다. 하나님과 역사와 나 자신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보다는 내일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노력하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예의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허투루 쓰고 흘려보내는 오늘 이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더욱이 구원을 받아서 복음 사역을 위해서 쓰임을 받아야겠다고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준비되어서 언제든지 주님이 쓰시고자 할 때에 거침없이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자신을 분투하며 끊임없이 노력하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론을 이정도로 마치고 그렇다면 어떤 준비가 갖추어져야지만 정말 이 역사 속에서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것을 가지고 삼일동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첫 번째로 나는 쓰임 받는 첫 번째의 준비가 신앙적인 준비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신앙적인 준비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핵심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는 강력한 은혜가 있어야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좋은 운동화를 신으면 다른 사람보다 빨리 달려갈 수 있고 덜 피곤할 수 있습니다. 좋은 운동복을 입고 그리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달리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평소에 훈련을 많이 하고 근육을 키웠으면 다른 사람보다 오래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는 방향을 바꾸어놓는 것은 운동화나 트레이닝복이나 맛있는 음식이나 달리는 사람을 위해 특별히 제조한 건강음료가 그 사람의 가는 방향을 바꾸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한때 사울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때도 지성인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수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그리스 문학과 희랍 철학에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지성을 갖춘 것이 예수를 믿고 나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도 그는 지성인이었고 역사와 신학과 그리고 유대의 종교를 꿰뚫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었다고요? 누가 말합니까?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불타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었습니까?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박해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죽이고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이 공부한들 방향이 바뀌었겠습니까? 더 잘 먹는 들 방향이 바뀌었겠습니까? 더 높은 사회인사의 후원을 받았던들 이 사람의 방향이 바뀌었겠습니까? 그 방향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이것은 아무래도 좀 신학적으로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예수는 없었습니다. 이 사람의 눈에는 모든 유대교의 신학적인 전제들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의 눈에는 사이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요한 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구약을 올바로 알고 있었으면 예수를 만났을 텐데 구약을 비뚤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라고 하는 것은 나타나 보일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들었으면 부인할 것이고 꿈이었다면 부정하면 될 터인데 살아있는 자신을 똑바로 자기 앞에 눈부신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들릴 수 있도록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부인하려고 해야 부인할 수 없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엄청난 신학적인 혼란이 이 천재의 머릿속에서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그것은 신명기서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인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 그러면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고 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인데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확인된 사실이었고 살아난 것은 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자신이 직접 그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커다란 두 개의 모순된 신학적 사실이 천재인 이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뒤엉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의 상식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도 사실이었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것도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죽음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사람이라면 부활시키실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해주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 바울은 그때에 깨닫게 된 것이 바로 대속의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지은 그 죄를 대속하게 하기 위하여 구원받을 자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짊어지게 하시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아 죽게 하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어린 양 희생의 제사를 통해 예표하게 된 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는 찬란한 복음의 빛이 밀려들어오게 되었고 눈이 열리며 그는 저 우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영혼 안에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놀라운 안목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의 출생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신학을 하고 미래의 지도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그 만남,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핵심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공부와 여러분들의 이 세상에서의 많은 발전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기독교신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고 회개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으로써는 알 수 없는 것이 구원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성령이 그의 마음을 조명해주실 때에 그는 비로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온 하나님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거기에서 한사람이 두 가지 엄청난 사실을 동시에 깨닫게 됩니다. 그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엄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이라는 이 존재가 너무나 부패하고 하잘 것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에 의하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아주 더럽고 그리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서 떨리는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그런 깊은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며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요,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바로 그런 희망이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영영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에 하심으로 당신의 품으로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경험하게 하시는 가운데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있는 사물밖에는 볼 줄 모르던 영혼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것들과 신령한 세계,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어주고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서 이 모든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체험의 깊이는 다르지만 그런 경험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신학교에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풍부한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고 나는 정말 티끌 같다는 사실과 그 티끌 같은 인간이 모질도록 주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그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찬양)
나 같으신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예수의 한분께 매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분의 사랑에 매여 이전에 내가 좋아하던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포기하고 날마다 그분께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는 청교도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미래의 역사를 위해 주님께 쓰임 받을 위대한 준비를 꿈꾸기 전에 제일 먼저 여러분들의 마음에 말씀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키에르 케고르 라는 철학자가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으로 유명해졌을 때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최고의 인생의 고민이 무엇이고 목표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 위대한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나의 가장 큰 목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비전을 크게 갖지 말고 그 비전 중에 제일 중요한 비전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목회라는 것은 신앙이라는 컴퍼스로 그려낸 원입니다. 신앙이라는 컴퍼스로 그려낸 원이 목회사역이고 그 컴퍼스의 중심점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과 모든 활동의 가장 중심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평생 사도 바울의 가장 큰 비전은 그리스도와 그리고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일생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미래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철저하게 제일 먼저 신앙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숙제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도대체 왜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쓰임을 받고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설교를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세상은 변화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바뀌고 있고 시대도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전의 목회방식은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버렸고 새로운 것들을 연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애써야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미래를 위한 준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3학년이시니까 얼마 안 있으면 교회를 하시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흔들리면서 밥을 먹고 사는 것은 조금 고달픈 일이지만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이 불신앙의 역사 속에서 교회를 이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는 것,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피 뿌릴 각오가 되어있는 그런 교인들이 아닙니다. 교인들만 그렇습니까? 내 마음속에도 끊임없는 유혹과 도전들이 있습니다.
제가 회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20평쯤 되는 교인 2, 30명 모이는 교회에서 제가 회심을 하고 그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때 새벽기도가 있었습니다. 그 새벽기도는 거의 살인적이었습니다. 4시 반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4시 5분에 첫 번째 종이 울려 퍼지면 사람들이 그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서 이제 새벽기도를 준비하고 4시 30분에 땡하고 종을 치고 그리고 새벽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때 아주 가난한 동네였는데 뚝방의 무허가 건물에 사는 아줌마가 하나 있었어요. 아줌마라고 그래도 지금 생각하니까 30대 후반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춥고 가난하던 때니까 못 먹어서 그랬는지 늙어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줌마의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국화빵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새벽기도를 나오는데 그 추운 겨울에 따뜻한 코트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허연 스웨터에다가 목도리 하나를 두르고 몸뻬 바지를 입고 털신도 없이 그냥 그렇게 고무신을 신고 그 추운 겨울에 그 먼 길을 걸어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교회로 오니 밤 11시가 다 되어서 노변에서 장사를 하다가 오니까 그게 보통 신앙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찬송을 부르는데 그 신앙 좋은 집사님이 방석을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자꾸 좌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도대체 가만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지 왜 자꾸 좌로 이동을 하나?’ 그런데 이제 설교가 끝나고 찬송을 하나 더 불렀는데 그 찬송가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맘은 연약하여 죄를 범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 인을 치소서.’ 갑자기 이 여 집사가 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방석 밑에서 오천 원짜리가 나왔습니다. 새벽기도를 나왔는데 오천 원짜리가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그 오천 원이면 당시에 정부미 10㎏짜리를 세 부대 내지는 네 부대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니까 일주일을 벌어도 벌 수 없는 돈입니다. 그래서 옆으로 계속 이동을 해서 덮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찬송가를 그 찬송가를 부른 것입니다.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그리고 통곡을 하고 울면서 목사님께 용서를 빌고 그리고 기도를 해주어서 보냈습니다. 가끔 교계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도덕하게 문제가 되어서 어쨌든 추문을 일으키고 아주 굉장히 큰 문제를 일으키고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알고 보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너무나 헌신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설교로, 강연으로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철저하게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 이랬을 리가 없다.’ 아니면 반대로 아니 이렇게 너절하게 문제가 터져서 온통 추문에 휘말리니까 ‘옛날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헌신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 거짓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둘 다 사실입니다. 둘 다 다 사실입니다. 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 그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잊어버렸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에 희대의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목사가 권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2,500만원을 빼앗았습니다. 권총을 그 시대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어떻게 사기를 쳤다든지 거짓말을 했다면 말이 되는데 목사가 어떻게 사람을 쏴서 죽이고 2,500만원을 빼앗는가 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체포당했습니다. 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교단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체포당했습니다. 심문을 하는데 ‘왜 돈을 훔쳤느냐?’ 그 동기에 있어서는 더 황당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훔쳤다는 것입니다. 형사가 그게 말이 되느냐고 했더니 그 다음에 털어놓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자기보다 훨씬 못한 친구들이 엄청나게 큰 교회를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이렇게 찌그러진 인생을 사는 것은 교회당 건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이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자기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을 다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노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왕년에 신학교에 와서 이렇게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고 그 고생스러운 전도사생활을 하면서 이 신학의 길을 걸어갈 때에 그때에 왕년에 주님을 그렇게 안 만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도 많이 고생을 했고 지금 다른 일은 다 자신이 없어도 고생하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13년 동안 교육전도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닐 때에는 한 달에 교회에서 월급으로 70,000원을 주었는데 학교 등록금은 한 학기에 450,000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로부터 다만 200,000원이라도 봉투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소고기하고 돼지고기를 구별할 수 있는 미각을 잃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어느 집사님이 어느 날 만났는데 교회에서 살았는데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습니다. 얼마나 추웠는지 잊히지 않는 것이 밤에 조갈이 나서 물 한 대접을 머리 위에 놓고 잤는데 신혼 때였는데 밤에 자다가 너무 추운데 목이 말라서 물을 먹으려고 그랬는데 물이 쏟아지지 않아요. 그래서 눈을 비비고 보니까 땅땅하게 얼었습니다. 옆에서 새색시가 잠을 자는데 콧김이 계속 하얗게 나옵니다. 코는 새빨개졌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몸부림치면서 삽니다. 그것이 주님을 만난 은혜가 없으면 어떻게 그런 길을 걸어가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평생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럽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속에 옳지 않은 것이 수없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언젠가 그 성경을 희랍어로 읽으면서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에스타오로마이’ 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현재완료입니다. 옛날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지금까지 계속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러분들은 아직은 나이가 있으니까 실감을 못하겠지만 세월이 좀 더 많이 흘러보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얼마나 변하는지 깨닫게 되고 아마 여러분들끼리도 20년 후에는 죽어라하고 전화를 해도 못 만나는 사람들이 이중에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맨 처음에 겸손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그러지 못하도록 자기를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붙들며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왕이든지 위대한 학자든지 그리고 위대한 선교사든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냥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라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고 죄인들만 있습니다. 한 종류의 죄인은 아직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이고 또 한 종류의 죄인은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올바른 일을 하면서 길을 걸어가다가는 수많은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역경을 만나고 때로는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핍박을 받기도 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안다면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마다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래서 나의 고난을 그분의 고난에 투사하여 그래서 그분의 죽음이 내 속에 스며들어 그분과 함께 나는 죽고 그분과 함께 나는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저는 일곱 명의 성도들과 함께 지하실에서 개척을 해서 17년을 지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짧은 세월이지만 어떻게 보면 또 굉장히 긴 세월 같습니다. 왜냐하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례없는 복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7년 동안 있으면서 가슴 아픈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교회에서 성도들이 막 조직적으로 목회자인 나를 괴롭히고 박해하고 심지어는 내쫒으려고 하고 그런 적은 없습니다. 하긴 언제든지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아마 누가 내쫒으려고 했으면 내쫒기 전에 내가 먼저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러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이 쉬운 길이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나는 전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배고픈 적도 없었고 또 예수를 믿는다고 동네사람들에게 모질게 박해를 받은 적도 없었지만 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칠 때마다 그것을 이기면서 17년 동안 살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오직 하나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는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주님도 언젠가 나를 위해 고난을 다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맨 처음 이 길에 들어설 때에 영광을 바라고 들어선 것이 아니고 칭찬을 받으려고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려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난 받을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정말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가 사신 것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지킬 수 없습니다. 많이 공부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강하게 붙들린 사람이 아는 것은 좀 모자라고 학식은 좀 부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면들이 있어도 오직 예수,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그 큰 사랑 앞에 붙들려 나를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죽으셨으니 이제 살아있는 나의 목숨은 주님의 목숨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난번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었을 때에 거기에 UDT대원들이 특수작전을 펼쳐서 사람들을 모두 구해내고 그리고 해적들을 제압한 감동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지휘했던 사람이 UDT의 소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 작전은 성공하고 자신은 총상을 입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아프지 않았습니까? 피격을 당하는 순간 두렵지 않았습니까? 작전명령이 떨어졌을 때 가족들 생각은 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군인의 대답이 한 주간 내내 내 마음을 울렸습니다. ‘군인이 된 그날부터 저의 목숨은 조국과 민족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다음 주일날 교인들에게 눈물로 물었습니다. 과연 우리보고 고난을 당하고 위험한 일이 있을 때에 거기에 우리들이 헌신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에 누가 두렵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날부터 이제까지 저의 목숨은 우리 예수님과 교회의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군인으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으면 그것이 신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세상은 변해갑니다. 저의 시대도 새로운 시대였고 여러분들의 시대에는 더 바뀐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목회방법도 필요하고 새로운 지식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의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붙들려 살아서 주님께 준비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