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 준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 80)
녹취자 : 허혜숙
저는 첫째 날 신앙적 준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복음 사역을 위해서는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께 사로잡혀서 우리 인생의 가치가 재편되고 그 가치의 질서를 따라 살 때에 바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이 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날에는 지적인 준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지도자가 무지한 것은 그가 이끌고 있는 공동체의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갈 길도 잘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잘못 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기회가 있는 이 젊음의 때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고 탐구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기회가 옵니다. 오늘 잠을 자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공부하는 사람은 꿈을 이룹니다. 오늘 헛되게 보내는 오늘 이 하루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며칠 더 했으면 몇 개 더 하겠는데 오늘밖에 기회가 없어서 오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가 되라’는 큰 주제아래 인격적 준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자랐고 누구에 의해 양육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양육을 받았을 것임에는 틀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돌보지 아니하고 그 갓난아이 시절부터 광야에서 생존했을 리가 없고 무엇인가 공부하고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끼칠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신도시를 찾아서 아파트 옆으로 교회가 옮겨가지만 세례 요한은 모래바람이 부는 광야에서 외쳤는데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모두 모였습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인파가 이 세례요한이 외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헤롯과 이 요한은 정치적으로 서로 적수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이 헤롯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단칼에 이 사람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이 이끌고 있는 많은 군사들이 있거나 그의 무력이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면 당장 잡아서 옥에 쳐 넣을 수 있는 권력이 자신에게 있었지만 자신의 권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의 인격의 영향력 앞에서 그는 굴복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백성들은 이 세례 요한을 참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요한을 직접 대면해 보니 그는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인격의 영향력 때문에 헤롯은 큰 권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그를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인 적수에게까지 인정을 받았던 세례요한의 인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에서 그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세례요한이 꿀이나 따먹고 메뚜기나 잡아먹고 돼지처럼 살이 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들사람으로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곳에서 성경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하였고 그의 마음속에 임한 그 불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오랜 세월동안 준비된 그의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겨서 한 시대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위대한 사역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오래 사역을 한다고 그 사람이 커다란 영향을 역사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지극히 짧은 시간밖에 예언하지 못했지만 몇 편의 설교가 한 시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살았던 모든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그리고 모든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의 영향력을 합해도 이 사람이 남긴 몇 편의 설교가 끼친 영향에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빨리 선생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오면 아직 학적부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교역자 생활을 시작을 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히고 사명감이 충만해서 그러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많은 학생들의 경우에는 넥타이 메고 전도사님 소리 듣는 것이 나쁘지 않아서 쉽게 교역자의 생활을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학교 다닐 때 특히 학부에 있는 여러분들은 가능하면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생활을 하는데 익숙해지지 말기를 나는 부탁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은 좀 더 오랜 기간 동안 배우는 학생으로 남고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교회에서 평신도로써 생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성숙해 지기 때문입니다.
청년시절에 주님의 은혜를 받고 뜨거운 가슴으로 신학교에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들어오고 나서 그는 즉시 교역자가 됩니다. 예전에 마음속에 불타올랐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면서 예전에는 하나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재미로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다가 무엇이라도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면 그 성경 말씀이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된다고 생활을 했었는데 교역자가 되고 나서는 무엇을 어디에서 듣든지 그것을 설교에 써먹기 위해서 사역에 활용하기 위해서 체득하는 그러한 심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 들어와서 그것이 깊이 내려가 이 자신의 영혼을 움직이고 자신을 변화시켜서 피와 살이 된 다음 자신의 인격 속에서 이것들이 쏟아져 나와야 되는데 머리로 들어갔다가 저장이 되어서 입으로 튀어나오는 생활을 여러 해 동안 반복 하다보면 사역을 할 때쯤이면 이 사람이 직업적인 종교인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 교회에서 할 수 있으면 신학대학원 졸업할 때까지는 평신도로 있으면 좋겠다 했는데 그것이 너무 어렵다 해서 양보를 해서 그러면 신학대학원 2학년 때 까지는 사역을 하지 말고 공부에 올인을 하고 교회에서 교사나 구역장의 직분을 맡아서 영혼을 열심히 눈물로 돌보고, 전도하고, 성경말씀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는 일에 익숙한 가운데 교역자를 섬기는 위치에 있거라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이렇게 해서 그래도 어떻게 그 때까지 참느냐고 그러는 사람에게 한 번 더 양보를 하자면 신대원 2학년 2학기 때쯤 교역자 생활을 시작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온전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좋은 평신도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물 한 살에 회심을 하고 방황을 많이 하다가 그 후에 변화를 깊이 받고 평신도로써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저는 목회에 관한 거의 80%의 많은 방법이나 정신들을 집사로서 주일학교 선생을 하면서 이미 다 배웠습니다. 별로 다를 것이 없고 정신이나 그 모든 자세는 똑같고 다만 담임목사가 되니까 예전보다는 좀 더 많은 일을 다른 위치에서 해야 된다는 것 밖에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저의 교회는 지금 현재 28명 정도의 교역자가 있습니다. 교역자 중의 서너 명은 수습교역자이니까 교역자가 될 지 아니 될지 모르는 사람들이고 25명 정도가 정식 교역자인데 어떤 교역자가 제일 잘 하냐면 우리 교회에서 회심해서 청년시절을 보내고 그러다가 소명을 받아서 신학교에 가고 그러다가 좋은 자매 만나서 결혼을 해서 교육전도사가 되고 강도사가 되고 부목사가 된 사람들이 가장 목회를 잘 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기도 이 모든 것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되는데 그것을 자신이 체험해 보았을 때 가장 잘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평신도로서 신앙생활에서 교회에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이 교역자로서 잘 섬길 수 있고 구역장 잘 하던 여자 성도가 여자 전도사 잘 하고, 교사 잘 하던 남자 청년이 전도사 제일 잘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목회는 현실세계에서 체득되어가고 우리의 신앙인격이 성숙되어 가는데 성도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영국 청교도 역사에서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오웬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를 세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목회자를 교회에 세우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르치는 말씀대로 믿고 살아간다면 어떤 사람이 될 지를 그 목회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믿게 하시기 위하여 목회자를 세우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조금 전 시대의 사람인 요한 칼빈은 자기의 기독교 강요 속에서 하나님이 보다 완전한 천사와 같은 존재를 교회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 그들 중의 한 형제를 목회자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친히 주님이 모본을 보이고 또 주님을 의지하며 그를 통해 말씀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 그 일도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가끔 남의 설교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만 그 중에는 은혜를 많이 받는 설교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저렇게 설교해도 될까? 저 사람이 설교자가 아니라 정수기를 팔러 온 사람이라도 저렇게 연설을 하면 누가 샤겠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야 할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진리에 대해서 투철한 생각을 갖는 믿음뿐만 아니라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서 풍부히 알고 있는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독서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신학대학원 학생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칼빈주의에 대해서 격찬을 들으면서 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을 것입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보수주의 신학을 한다는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모인 클라스에 가서 게스트 교수로 제가 강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보수신학을 이야기 하길래 ‘너희들 중에 기독교 강요를 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라고 물었더니 60명 정도 보이는 학생들 가운데 그것도 졸업반 학생들 반인데 단 두 명만이 기독교 강요를 읽었다고 대답을 하였으니 기독교 강요 이외의 책들은 얼마나 안 읽었는지가 입증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남들이 하니까 보수주의 개혁주의 그러는 것이지 뭘 알아서 보수주의 개혁주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정말 하나의 세뇌 된 보수주의 세뇌 된 개혁주의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혁주의가 목회를 해서 장사가 될 만하니까 분위기에 함께 떠서 자기도 개혁주의를 이야기하고 칼빈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렇게 자기 자신이 정리된 지식이 없이 개혁신학을 붙들고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보수신학을 가르쳐놔도 밖에 나가서 목회 할 때에는 그저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저 좋은 대로 아무렇게나 목회를 하고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 아무 쓸 데가 없더라 합니다. 언제 배워 봤습니까? 또 배운 것을 가지고 언제 써 봤습니까? 언제 자신들이 배워 봤느냐구요? 언제 진지하게 공부를 해봤고 공부 한 것을 가지고 그대로 설교를 해보려고 그렇게 신학적인 설교를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화집이나 들춰서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긁어모으고 여기저기 우스개소리나 긁어 모아서 사람들에게 관심이나 끌려고 하고 교회나 크게 키워가지고 교인들 타고 다니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입니까? 본인 자기 자신이 진리에 관심이 없는데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진리가 배어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제가 부탁합니다. 공부를 안 하면 소명 아닙니다. 로이드 존슨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목사의 소명을 느끼시고 계십니까? 책을 싫어하면 아마 그 소명이 거짓일 것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신학대학원 다니면서 제일 혐오하는 학생들이 시간만 나면 과자 부스러기 들고 잔디밭에 모여 앉아 농담이나 하고 자기 담임목사 욕이나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같은 동급생인데 동생뻘인 사람이 ‘형님, 나는 요새 죽겠어, 우리 담임 목사 때문에 죽겠어,’ ‘왜?’ 어떻게 그것을 설교라고 하고 밥을 먹고 살어? 기적이야 기적’ ‘그런데?’ ‘형 나 교회 좀 소개시켜줘’ ‘왜?’ ‘나는 있지 내가 정말 존경할만한 목사님을 만나면 나 월급 안 받고 내가 오히려 월급 바치면서 교회 봉사 할 수 있어’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애야,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이라면 왜 너를 전도사로 쓰겠니?’ 그랬더니 ‘허긴 그래’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미친 듯이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할 이야기가 꽉 찼는데 제가 참겠습니다. 공부 안 하기로 뜻을 세운 신학생들이 정말 많습니다. 정말 부탁이니 공부하십시오. 쓸모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고 다행히 그 사람이 교회를 해서 잘 안 되면 다행인데, 교회를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키든지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든지 교회를 뒤집어 놓고 조국교회에 큰 누를 끼칩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지나는 소리로 듣지 말고 한 번 도서관에서 옛날에 나왔던 신문들을 죽 읽어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냥 뭐 하나에 꽂혀서 열렬하게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떠들다가 나중에 교회가 커지고 나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신학적으로 바르지 않다고 비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여태까지 한 것은 다 취소 할테니까 용서해 주고 새로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어떻게 취소가 됩니까? 신학적으로 잘 못된 것을 퍼뜨려서 많은 사람들을 오염시켜놓고 이제 와서 지난날의 설교는 모두 다 취소 할테니까, 그것이 취소가 됩니까?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면 성공을 감당할 수 있는 전라도 말로 ‘깜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 정 의나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깜냥이 안 될 때 그 때에 성공하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더 큰 불행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뜻을 세우고 한 학기에 한 키씩 신학지식을 읽으며 소화하겠다 라는 각오를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 안 하는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마십시오.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의 목회자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너무너무 큽니다. 그래서 그가 옳은 것을 가르치든 그릇된 것을 가르치든 성도들은 어린애와 같아서 목회자가 하는 그것을 보면서 따라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철저한 지식을 통해 사상적인 준비를 갖추고 갖춘 그것을 자기 속에 깊이 소화해서 이것들을 자기의 인격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훌륭한 설교를 할 때 여러분들이 잘 아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것 어디에서 또 베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설교자의 지적인 능력이 닿지 않는데 자신도 모르는 것을 설교하거나 혹은 그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인격이 용해되어서 전하는 말씀과 하나로 합쳐져 소위 친밀성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는 설교와 그 사람사이의 괴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이 친밀성을 가지고 진리와 함께 부착 되는 가운데 설교하기 위해서는 설교하는 그 시간에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온 그의 모든 삶의 발자취가 진리와 함께 걸어온 길일 때 그의 설교는 진리를 말할 때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친밀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말씀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용하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부패한 인격이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 성결하게 되어 가는 내적인 변화 속에서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목회자가 끊임없이 일생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을 받고 그 은혜로 다져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이끌만한 바람직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지도력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처럼 학문을 도야하고 경건을 연마하는 것은 이렇게 신학교나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회에서 설거지나 하고 쓰레질을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하찮고 값어치 없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사슴이 이끄는 천 마리의 사자보다는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천 마리의 사슴들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올바른 신앙의 정신을 불어넣어주고 때로는 그들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기뻐해주고, 슬퍼해주고, 분노하고, 그리고 즐거워해 줄 수 있는 아주 뚜렷한 감정의 구분선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교계에 있고 교역자들을 만나보면서 저는 두 종류의 리더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 종류의 리더들은 소인배와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속이 좁고 자기 이익에 밝고 공동체를 이끌어 갈 때에 먼 안목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이끌어 가기 보다는 자기 아집과 가까운 장래의 현실적인 이익에 사로잡혀서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바른 말로 간하는 사람들을 멀리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만들어 놓았더니 분당이나 짓고 이런 사람들이 자신과 이익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렇게 다투고 싸우며 온갖 분쟁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교수님들끼리 커다란 분쟁이 있고 바깥에까지 신학적인 논쟁들이 번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커다란 진리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는 줄 알고 학생들에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그 학교에서의 교수들의 분쟁이 무슨 원인이냐고 물었더니 어느 학생이 ‘목사님 그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테니스파하고 탁구파하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불행하게도 성공을 거둘 때 그는 마치 자신의 성공을 개인의 성공처럼 생각하고 교회를 마치 기업처럼 생각하고 자신이 그 교회의 사장이나 된 것처럼 행사를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은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위탁한 목회자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인배 같은 지도자들이 군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언제나 공동체를 위하여 포기할 줄 알고 그리스도의 심김의 정신이 몸에 베여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어떻게 자신이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온전하게 서고 나아가서는 이 모든 세계에 있는 보편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복음의 빛을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그런 심성 깊은 지도자들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교회와 교인들 놓고 싸움이나 하고 그런 것은 정말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전도도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를 경영적으로 키워보기 위한 야망에서 그렇게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들도 우리는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형 지도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온전한 생각과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여러분, 교역자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게를 지고 날품을 팔아서 하루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로부터 정치와 경제계의 거물까지도 그 사람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아주 지체 높은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서 하찮게 취급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에게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진리가,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이 소위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있어서 ‘noise’ 없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여러분들이 예절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교역자들 가운데에는 정말 세상 사람들, 교양 있는 사람들 속에 갔었더라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예의범절이 없는 사람들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환영을 받지 못하고 고통을 많이 받는데 그것을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그를 바라볼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저희 집은 원래 예수를 믿는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 살던 고모님들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셔서 저는 부모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그 분들 등에 업혀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그 때 두세 살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집을 어떻하든지 예수 믿는 식구들은 전도하고 싶어 했고 그러다가 우리 집안 식구들이 마음이 열려서 그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을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지 온 가족들이 마음이 합쳐져서 불신자인데도 그 목사님의 심방을 환영하게 되었고 그 전날부터 고기를 사온다, 김치를 담근다 하면서 반찬을 정성껏 잘 준비해서 목사님 일행을 심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은혜로운 설교가 끝나고 식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제 식사를 무리고 잠시 그 목사님이 ‘여러분 이제 교회에 출석하셔야 합니다’ 하고 권면만 하면 모두 교회에 나가도록 마음이 기울어졌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식사를 다 마치고 난 후에 목사님이 아랫목에서 다리를 쭉 뻗으시면서 벌리시더니 등을 벽에 기대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모금의 물을 입에 넣으시면서 양치질을 하기 시작하신 후에 젓가락을 들어서 이빨을 쑤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가정복음화가 20년 연기되었습니다.
교역자가 되기 전에 정말 좋은 가정에서 그 예절바른 어머니 아버지 밑에서 인간으로서 풍부한 교양을 쌓고 사람 사는 이치가 무엇인가를 배운 교역자들은 몸에 베여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교역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양 있는 부모님 곁에서 자랍니까? 어떻게 보면 험한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교역자가 되는 예가 적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교육을 받을 데가 없습니다. 더욱이 목사가 되고 나면 누가 와서 감히 ‘목사님, 식사하시고 난 다음에는 두 다리를 벌리고 기대어서 이빨 쑤시지 마십시오.’라고 누가 교인들이 그런 이야기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교역자에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특별 가치는 언제나 보편 가치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신령한 교역자가 되기 전에 먼저 교양 있는 신사가 되어라’ 신앙을 떠나서 타종교 사람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 이 신사로서 숙녀로서의 교양과 체취가 풍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양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 줄 정도로 루드 한 사람들은 교역자로서 적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안 되면 돈 주고라도 어느 학원에 가서 사람 되는 예절교육을 받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자기 교회 여전도사 때문에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여튼 버릇이 너무 없어서 괴롭다는 것입니다. 장로님과 목사님과 그 교회 어르신들하고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제일 먼저 밥상에 턱 앉아서 아 이렇게 많이 차리느라고 수고했다고 그래놓고 젓가락으로 예쁘게 담아 놓은 생선을 제일 먼저 공격해서 막 젓가락으로 헤집어 놓더랍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열렬하게 타는 가슴으로 뜨겁게 전도하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한다면 참겠지만 꼭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이 영역이 뛰어나다는 함수 관계가 성립하겠습니까? 목사님이 견디다 견디다 교회를 나가달라고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전도사가 될 사람들 예절을 잘 배우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먼저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추후에 흐트러짐이 없이 ‘정말 교양 있는 사람이다’ 라는 그런 평가를 받게끔 그렇게 행동을 해야 합니다. 어디 예절뿐이겠습니까? 교역자의 혈기는 교회를 분쟁에 몰아넣고 많은 어려움들을 가져옵니다. 제가 집사로 교회에 있을 때인데 별로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교육 전도사가 청년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다 왔는데 무슨 행사를 했는데 안 좋은 사진들이 나와서 교회 전체에 돌았습니다. 결혼한 젊은 전도사인데 어떻게 젊은 교역자가 수영복 차림으로 젊은 여자 청년들을 껴안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고 이것은 덕이 안 된다고 말이 나왔습니다. 그 때 제직회를 하면서 시끄러울 때 그 때 어떤 사람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서 ‘너희들이 감히 나를 비판해? 너희들 전부 다 한 번 고소당해 볼테야?’ 펄펄 뛰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전도사 당사자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 집어넣어 버리겠다고 펄펄 뛰니 자기가 이기긴 이겼지만 그러나 사람들 마음속에 교역자에 대한 인상이 어떻게 남겠습니까? 오히려 자신이 교회에서 비난을 받으면 무엇 때문에 이런 비난을 받게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유준표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장로 한 사람이 얼마나 괴롭히는지 죽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 장로 좀 바꿔 주십시오. 새 사람 되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더니 어느 날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시더랍니다. ‘준표야 걔는 나도 못 바꿨다. 니가 바뀌어라’ 농담 반 진담 반 하신 말씀이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교역자의 도리이지 그것이 만약에 마음에 안 들고 억울하다고 뛰쳐나와서 교인들, 양떼들인데 양떼들한테 ‘너희들 그 따위로 하면 전부 다 감옥에 집어넣어 버릴 거야’이렇게 외칠 때 사람들이 그를 정말 목자라고 생각 하겠습니까?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죠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 분도 참 고난 많이 받는 목회를 하신 분이었는데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보다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속에 우리에 대한 진실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접고 이해를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직선적으로 갈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 많은 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배우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반성해야지 그렇게 혈기를 부리면 되겠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날 재정부 장로님한테 주의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뭡니까?’ ‘뭐가요?’ ‘사택에서 돈을 쓰고 교회에 청구가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요?’ ‘개줄 300원이라고 명세서가 들어왔는데 교회에서 목사님 사택에서 개목걸이 사는 것까지 돈을 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기분이 확 나빴습니다. 그래서 ‘저 그럼 교회 사임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일 오후 교회에서 3시에 당회가 열렸는데 7시에 목사님 사표가 수리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통보를 했습니다. ‘목사님 사표를 낸다고 하셨는데 당회는 기쁘게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그 후에 얼마나 커다란 분란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혈기’ 대신 추구해야 될 것이 ‘인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계셨는데 목사님이 50이 넘으셔서 사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장가를 새로 들 마음은 없으시고 교회의 옆방에 살면서 크지 않은 작은 교회에 목회를 하고 계셨답니다. 그러니 교인들 입장에서 목사님이 밥을 끓여먹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까 식모를 하나 붙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특별히 직업이 없는 청년 하나를 붙여주어서 가서 목사님 아침에 밥을 해 드리고 점심은 스스로 챙겨 드시고 저녁도 좀 해 드리고 빨래가 있으면 빨래도 좀 해 드리고 이렇게 틈틈이 가사를 도와드리라고 교회에서 배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점점 배가 불러 온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교회로 가든지 도망을 갔을텐데 애는 무슨 배짱인지 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냥 부를 배를 가지고 계속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교인들은 도대체 저 애가 어디서 임신을 해서 배가 불러 저러고 다닐까 그 사람들 속에 목사님의 애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좋은 것은 잘 안 믿으려고 하고 나쁜 것은 빨리 믿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세계적인 설교자도 아니었으니 교회 안에는 그 목사님의 목회를 못 마땅해 하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참에 목사님을 내 쫓자고 목사님이 애기를 가졌다고 이 자매가 그러는데 이 목사님을 가만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당회에서인가 제직회에서 그 여자애를 불러서 누구 애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가 목사님의 아이라고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퇴직금도 못 받고 한 칼에 잘려서 노회에서는 면직을 당하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약 5년이 흘렀을 때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이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목사님만 그냥 쫓아낸 것이 아니라 이 아이까지 안겨서 교회에서 쫓아 냈고,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이 처녀는 그 때까지 교회에 계속 출석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5년 후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 부흥회에서 이 여자아이가 큰 은혜를 받고 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흥회 하던 마지막 날 온 교인이 충격을 받을 만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사실은 그 아이가 목사님 아이가 아니라 목사님과 반대 입장에 섰던 모 집사의 아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온 교회가 발칵 뒤집히고 당회는 그 목사님을 찾기 위해서 전국을 수소문을 했습니다. 마침 후임으로 오신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고 교회가 비어있었는데 찾다 찾다가 보니까 저 강원도 어디에서 광부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혼자서 그 아이를 키우면서 광부 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길러서 그 아이가 다섯 살이나 되었을 때 당 회원들과 많은 교회의 재직들이 가서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하고 그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성자 대접을 받으면서 목회를 하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살다가 보면 도대체 이 목회자라고 하는 것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외쳐서 그 진리의 말씀에 꺾어 진 성도들에게는 그 목사님의 말은 대통령의 말보다 권위가 있고 목사님의 강력한 견책은 자객들이 목에 겨누는 칼보다도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목사는 그저 한 인간 목사 일 뿐이고 잔소리하는 교회의 사람일 뿐이지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설교 시간에 벌떡 일어나서 ‘니가 뭔데 나를 비판 하냐?’고 이야기해도 교회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회 불러서 그러지 말라고 치리하는 것 밖에는 무엇을 할 수가 있습니까? 교회 지하실에 감옥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형대가 있습니까? 아니면 교인들을 후려 팰 수 있는 채찍이 교회 지하실에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세상에 보낼 때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는 마음의 고생과 고난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지 못할 때가 많고, 들었는데도 못 들은 것처럼 생각해야 될 때가 많고, 보았는데도 못 본 것처럼 눈을 감아야 할 때가 많고,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이 짊어지고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인내하고 참고 그래야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고목나무를 봤답니다. 커다란 구멍이 나무에 뚫려있어서 목사님이 가다가 심방가방을 내려놓고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나무야, 나무야 너는 목회도 안했는데 이렇게 속이 비었느냐?’라고 했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목회자는 힘들고 어렵다고 투정할 수도 없고 행패를 부릴 수도 없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죄인들을 향해 인내하신 것처럼 그렇게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고통과 번뇌, 괴로움과 실망, 배신감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 역사할 때 그것이 미움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자신을 깊이 다독거리며 오직 그 모든 설움과 안타까움을 주님께 쏟아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고난에서 오는 이 모든 부담감과 어마어마한 위로들을 자기의 목회사역 속에서 쏟아놓을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연들을 안고 입을 다뭅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고 밤에 홀로 자면서 잠꼬대를 할 경우가 있을지언정 입을 굳게 다물고 오직 마음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있으면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과 고통을 오직 그 분께 쏟아 놓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그러면서 머리 둘 곳 없었던 주님이 걸으셨던 그 배신의 길, 그 오해의 길, 그 고난의 길, 그 핍박의 길을 생각하면서 내가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은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에 비하면 티끌 같고 지금 내가 받는 이 부끄러움과 수치는 다가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교회를 위해서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어디 이러한 혈기와 그리고 그것을 부리지 않는 인내 뿐이겠습니까? 교역자의 말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저는 거칠게 그 말을 쏟아내는 상스러운 교역자들을 너무나 자주 봅니다. 농담 속에 올려지는 교양 없는 말은 차지하고라도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렇게 독한 말을 쏟아내고 상스러운 말을 하는 그 목회자는 도대체 어디 있다 나온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한국 교계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본인에게 직접 들었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증언입니다. 목사님이 아주 입이 거친 분이 있었습니다. 장로 하나가 하도 깐죽거리고 말을 안 들으니까 당회를 하다가 ‘나 장로 안하고 사표 내겠습니다’하고 사표를 던져버리고 휙 나갔는데 담임 목사님이 옳다 됐다 하고 우리 당회 다시 하자고 하고 당회를 열어서 두 시간 만에 사표를 수리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당사자에게 들어가 버렸습니다. 저녁 때 당회를 마치고 교회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 장로가 막 뛰어올라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야 이 개새끼야 내 사표 수리했다며?’ ‘그래 이 개새끼야 사표 수리했다 어쩔래?’ 하고 있는데 문이 턱 하니 열리면서 부목사가 들어오더랍니다. ‘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저 새끼가 나더러 개새끼라고 하잖아’ 그랬더니 부목사가 ‘목사님, 이 새끼는 나한테 맡기고 가십시오’ 이게 무슨 조폭 이야기도 아니고 무슨 교회에서 야행시를 씁니까? 들으면서 사람들은 웃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제 마음에는 아주 부끄러웠습니다. 지나간 이야기이니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한 사람은 목사이고, 한 사람은 장로이고, 한 사람은 부목사, 교회의 손발과 같은 지도자들인데 그 사람들이 교회 건물 안에 모여서 이 새끼, 저 새끼, 개 새끼, 이것이 어떻게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집에 가서 그런 폭력을 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목회자들이 폭력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이런 감정들을 절제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쏟아놓아서 피해를 주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정신과 영혼이 망가진 사람들로서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 마치 씻지 않은 손으로 수술을 하는 것과 같아서 수많은 죄악의 병균들이 목회사역에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성실도 문제가 됩니다. 언젠가 제가 교회에 있는데 개척교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합동 측에 있는 아무 아무개 신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등록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 참 안 됐구나’ ‘제 등록금 좀 대어 주십시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이 학생이 그것도 여학생이 대담하게 등록금을 달라고 해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어려운데 넌 어떻게 3학년이 되도록 학교를 다녔니?’ 했더니 ‘목사님, 저는 정말 기적처럼 학교를 다녔습니다’ ‘왜?’ ‘항상 등록금이 없어서 개학 1주일 앞두고 기도원에 올라가면 항상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이번 학기에는 저 권사님이, 또 다음 학기에는 그 집사님이 등록금을 보태주셔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래,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나겠구나 내가 이번에는 네 등록금을 대어 줄테니 한 마디만 내 이야기를 들어라’ ‘네’ ‘기적으로 사는 것은 이번 학기로 마감을 해라. 그리고 다음 학기부터는 기적으로 살지 말고 상식으로 살아라’ 그리고는 그 때 벌써 17년 전인데 통장으로 30만원을 넣어주었습니다. 아마 그 돈이면 그 학교에 조금만 보태면 등록금이 됐을 정도의 돈 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기적입니까? 구걸이지. 그 긴 겨울밤을 내내 무릎이 닳도록 기도한 것도 아니고 목이 터지도록 전도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팔꿈치가 닳도록 책상에 매달려서 공부에 몰두하느라고 돈 벌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면 우리는 백 번도 더 도와줘야 됩니다. 그런데 볼 TV 다 보고, 놀 것 다 놀고, 무엇 하나 마음을 기울여서 방학 동안에 혼신의 힘을 쏟은 것이 없으면서 1주일 남겨놓고 기도원 올라가서 이 길이 하나님의 길이면 등록금 보태줄 까마귀를 보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그것이 여러분들이 아직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의 쓸 것을 스스로 조달하여 텐트를 엮으며 살았습니다. 신학생이 뭡니까? 아직은 교역자도 아닙니다. 교역을 하느라고 온 방학 때 교회에 혼신의 힘을 쏟아서 봉사를 했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게으르게 삽니까?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죽을 때까지 이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 교역자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칩니다. 이제껏 목회하면서 우리 교인들에게 이유 없이 교인들에게 밥을 얻어먹은 적이 없고 이치에 닿지 않는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공짜라고 했습니다. 구원 이외에는 다 싫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주유소에 가서 사은품 주는 것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안 받았습니다. 생수도 주고 그러잖습니까? 그런데 항상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것을 주느냐 이 돈으로 차라리 기름 값을 덜 받지, ‘받아 가세요.’ ‘필요 없다. 기름이나 제대로 넣어주라.’ 요새는 좀 받습니다. 아쉽더라구요. 물휴지도 좀 받아서 쓰고...
왜 그렇게 하냐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공짜를 아주 불편하고 누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뼈아픈 이야기 하나 해 주겠습니다. 80년대 이야기입니다. 따르릉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아무 아무개 교회 아무 아무개 목사님 좀 바꿔 주세요. 목사님 맞으시죠?’ ‘네 제가 아무 아무개 목사인데요?’ 별로 크지 않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안녕 하세요 목사님, 전화를 거는 저는 아무 아무개 교회 다니는 아무 아무개 집사입니다.’ ‘네 그런데 저에게 왜 전화를 하셨나요?’ ‘목사님, 사실은 제가 여행사를 하거든요?’ ‘그런데요?’ ‘그런데 제가 10년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아주 큰 사업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목사님, 요즘 극동방송에 새벽에 설교 내 보내시죠?’ ‘네’ 그것이 노회에 돈을 주고 돌아가면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 그 설교를 듣고 제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목사님 설교가 나올 때만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짓말이거든요? 그럴 정도로 엄청난 설교가 아니었단 말이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이 목사님이 감동을 받은 거예요. 자기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데 교인들도 못 받는 은혜를 방송 청취자가 받았다는데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10년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던 중에 성령님이 존경하는 목사님들 50분을 모아서 공짜로 성지여행을 보내드려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을 이 명단에 넣으려고 그러는데 좀 허락을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뭐 허락이 뭐 감사한 허락이지 이 목사님, 저 목사님 아시는 분들이 꽤 많아서 여행을 시작했는데 최고급 호텔 제일 좋은 음식, 그러면서 거기까지 따라와 가지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모든 시중을 들더랍니다. 그래서 하여튼 모일 때마다 그 집사를 칭찬하고 그 사업체가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거기 모인 50명 목사님 가운데 그 여자가 어느 교회 집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행사가 어디 있는 여행사인지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인데 이제 비행기 타고 다음날 아침이면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저녁 때 우리 모두 잠깐 모여서 예배드리자고 해서 그거야 너무 좋으니까 목사들이 모두 모여서 예배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 동안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아무개 선생님이 지원해 주신 돈으로 이제껏 성지순례를 하셨습니다. 자, 이제 협조를 하실 것인지 계속 우리 교를 비판을 할 것인지 한 번 각자 갈 길을 서류에 써 보십시오.’ 그리고 난리가 났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상당수의 목사님들은 면직이 되고 어떤 분들은 교회도 쫓겨나고 어떤 분들은 아예 미리 달려와서 교회야 노회야 전부 고백을 하고 용서를 받기도 하고 등등 그랬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공짜의 말로입니다.
여러분, 교역을 하더라도 나중에 어떤 사람들이 될 지는 어렸을 때에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순 있잖습니까? 한 번 씹어보십시오. 무 모양도 아닌데 신기하게 무맛과 똑같은 맛이 납니다. 나이가 어리고 이제 막 전도사 생활을 시작을 해도 부당한 선물이나 그렇게까지 초청해 주지는 않겠지만 생각 없이 교인들이 동정심에서 건내주는 돈이나 이런 것들을 어느 한순간에 ‘제가 이것을 왜 받아야 합니까? 저는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제가 받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다.’ 할 때에 그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서 굽신거리고 그거나 받아서 열심히 챙기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교역자로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야성의 정신들이 좀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여러분들은 공짜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로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인가 혜택을 받으려는 그런 마음들을 온전히 버리고 교역자이기 때문에 특별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 자체를 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또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게 목회를 하면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목사가 되고 교회가 커지게 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집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야박하지 않으니까 생활 할 수 있게 마련해 줍니다. 그런 속에서 자신이 자신의 분수를 잃어버리고 지나치게 부를 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좋지 않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래서 항상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던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지 않고 여러분들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신학교를 1년에 약 열 개를 섬깁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해외에 있는 신학교까지 제가 가서 똑같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도대체 요즘 시대에 밥 못 먹는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목사님은 다니면서 밥을 사주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희 총신만 해도 점심때면 밥 사먹을 돈이 없어서 물을 마시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학생들이 하루에 150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거저 밥을 주겠다고 와서 먹으라고 해도 자존심 때문에 와서 먹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일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식권을 제가 개인적으로 사비로 구입을 해서 학교에 주고 그런 학생들에게 나눠 주라고 했더니 1년 동안 다 못 썼습니다. 왜? 그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은데 진짜 가난한 학생들은 와서 안 받아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가난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정말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신대원 다닐 때는 얼마나 가난했는지 한참동안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된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를 갔는데 돼지고기를 시뻘겋게 볶아놓고 돈은 500원 주고 밥을 샀는데 그 식당 아줌마가 상추와 고기를 이만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뭐냐고 하니까 밥은 너희가 사 먹지만 이 고기는 20년 전에 졸업한 너희 선배들이 돈을 모아서 오늘 home coming day 하면서 너희들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점심을 어떻게 맛있게 먹었는지 먹으면서 그 때 저는 제 자신과 약속을 했습니다. 나도 교회를 할지 못 할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다음에 내가 만약 목회를 해서 형편이 된다면 꼭 와서 내가 누렸던 것을 우리 후배들에게 누리게 해 줘야 되겠다 약속을 했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지금 7-8년 째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든지 모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돕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일들을 형편이 나아지고 나면 자꾸 잊어버립니다.
여러분들은 벧엘 성서 교재의 저자를 알고 계십니까? 그 분이 오래 전에 이름 없는 교회의 교육 목사였는데 이 벧엘 성서 교재를 쓰고 미국에서 일약 대 스타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내노라 하는 교회에서 이 목사님을 교육 전문가로 모셔가기 위해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고 드디어 그 중의 어느 한 교회에서 거의 보쌈을 해 가듯이 이 목사님을 납치해 가듯이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당대의 최고의 성경교사인 이 분에게 진짜 저 푸른 초원위에다가 그림 같은 돌로 만든 집을 지어주었답니다.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이 목사님이 건축업자를 불렀답니다. 그리고는 이 옆에다 양철 지붕으로 헛간을 하나 지어달라고 했더니 그 건축 한 사람이 ‘아니 이렇게 이 모든 것을 다 지어주었는데 이 지저분한 것을 왜 짓냐’고 하니까 ‘그래도 내가 원하니까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해서 양철 지붕에다가 지어주었는데 알고 보니까 이 목사님이 옛날에 목동 출신으로서 주님을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넉넉한 환경에 마음이 부요해 질 때가 되면 아내와 함께 그 지푸라기가 깔려있는 헛간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면서 옛날에 양들을 치고 밤중에 누워서 건초더미 위에서 구멍이 난 함석지붕 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노래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겸손의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런 점에 있어서 모본이 됩니다. 비록 알미니안 주의자였었지만 이 사람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검소한 삶을 살면서 자신의 많은 수입들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고아원을 위해 흩고 또 흩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정말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외국사람 이야기만 하니까 그런데 한국에 옛날에 남산 위의 해방촌에 목회를 하고 계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김 예진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결국 광주로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당하고 순교를 당하셨는데 그 이유는 모두 피난 갔을 때 이 목사님은 피난을 가는 대신 삼각산에 올라가셔서 금식기도를 하셨답니다. 그리고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산에서 행인을 한 명 만나서 전도를 했는데 이 사람이 공산당 프락치였답니다. 그래서 결국은 체포되어서 끌려가서 그렇게 비참하게 총살을 당했는데 그 목사님이 평소 목회할 때 일화입니다. 그렇게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는데 부흥회를 많이 다니셨는데 부흥회에 가서 돈을 받으면 사모님도 끼니가 없어 가난한데 집에 들어오지 않고 그 돈 봉투를 들고 쌀을 팔아서 가난한 학고방 집 하나 하나씩 드나들면서 쌀을 다 나눠주고 자신은 빈 털털이로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는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의 삶이고 그리고 절제하지 않고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력이 있고 아주 뛰어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러나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을 더 잘 사용하십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밥을 담아 준다고 하면 금으로 만들었지만 개밥그릇으로 사용하던 그릇에 물 말아 준 밥을 드시겠습니까? 질그릇이지만 깨끗이 닦아 놓은 그릇에 담아 준 물 말아 놓은 밥을 드시겠습니까? 금 그릇이라도 개가 핥아먹던 개밥그릇에 그릇이 금이라는 이유 때문에 밥 말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같이 아직 사역을 시작하지 않고 학창에 있을 때에 칼날 같이 새파란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교수 생활을 할 때 학생들이 낸 Report를 받았는데 교수에게는 Report를 읽어내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400장의 Report를 받았는데도 한 번 스치고 지나갔는데 읽은 것은 정확하게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Report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교와 같이 Report를 펼쳐놓고 찾았더니 세 개의 Report가 나왔는데 똑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는 명조체, 하나는 샘물체, 하나는 필기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미래의 목회자가 되겠습니까?
제가 작년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 중부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일어난 일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다 받고 학교에 교수로 임용이 되었었는데 박사 논문에서 정확하게 한 줄이 근거 없이 베낀 것이었습니다. 그 한 줄 때문에 그 학위를 준 학교에서 그 학위를 취소하고 교수 임용한 학교에서는 한칼에 날려서 교수 임용을 취소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웃깁니까? 어느 날 우리 교회에 잡지가 하나 배달이 되었는데 제 글이 실렸어요. 그래서 이름을 보았더니 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만의 착각인가 하고 한 쪽을 펼쳐서 교회 직원들을 불러 읽어보게 하였습니다. 읽은 후에 느낌이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이거 목사님이 옛날에 쓴 글이잖아요?’ ‘너도 한 번 와서 읽어봐라’ ‘어? 이거 목사님이 쓴 글인데?’ 그 앞에를 봤더니 아무아무개 교수라고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신자나 사건 같은 것을 비판 할 수 있는 윤리적인 힘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선생노릇을 하면서 가장 싫어한 것이 대리출석과 컨닝이었습니다. 특히 이 컨닝은 혐오하도록 싫어합니다. 그래서 대학시절에 제가 교수생활 할 때에는 소문이 있었는데 장학금을 어느 학과에서 많이 받느냐는 김 남준 교수의 시험 감독 동선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들어가면 절대로 컨닝을 못하게 합니다. 컨닝을 하면 저는 내 손으로 편지를 써서 가장 엄격한 벌에 처해달라고 해서 학생처로 보내버립니다. 저는 그 정도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이런 취침들이 아주 많았어요. 나는 너무 부끄럽습니다. 저는 군 생활을 육군 사관학교에서 했는데 육군사관학교는 전통적으로 무감독 고사입니다. 아나 시스템입니다. 홀로 자기들이 시험을 보는데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면 급우들이 즉시 고발해 버립니다. 고발하면 처벌 받고 더블 백 메고 육군 병장이 되어가지고 전방으로 투입됩니다. ‘너 같이 부끄러운 놈 하고는 이 명예로운 사관학교에서 같이 있을 수 없다.’ 그런 것입니다. 여기는 거기보다 얼마나 더 중요합니까? 미 해군에서는 아예 한 기 전체가 유급을 당해서 한 해 졸업생을 안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왜? 외국 학교에서는 기숙사에서 답안을 써와도 책 보고 쓰는 학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생이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어도 컨닝을 합니다. 웃음이 나옵니까? 왜 우스우세요? 이 대목이?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가서 교계를 이렇게 거짓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웃음이 나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피가 끓습니다. 제가 총신 신대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이 하도 커닝을 하니까 뜻있는 학생들이 뭉쳤습니다. 서명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서명을 했습니다. 주장이 뭐냐면 이것은 성직 학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근본적으로 뿌리를 뽑자, 어떻게? 만약 컨닝을 하면 당회에 통보를 하고 노회에 통보하고 4대 일간지에 내버려서 아예 그 사람 일생을 매장시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이 열렬하게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어떻게 됐는 줄 아십니까? 그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이 이름 모를 학생들에게 뒷산에 끌려가서 린치를 당하고 이 두 학생은 자퇴서 내고 학교를 그만 둬 버리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보수 신학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날 교계에서 보는 봉투 사건이니 온갖 밀실에서 일어나는 모함들이니 모든 사건들이 전부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 아닙니까? 신학교 다닐 때 칼날 같은 양심으로 학교를 다녀도 세월이 흐르면 때가 묻어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정직의 문제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직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복음이지만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복음이지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 거룩한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거짓말 하는 사람은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칼날 같은 양심에 서지 않는 한 20년 후에 얼굴에 개기름 흐르고 번들번들하고 아주 유들유들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그런 정치꾼들이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이 정직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돈 문제입니다. 왜 정직하지가 않습니까? 그렇게 정직하지가 않아서 결국은 정직한 사람들만이 정직의 가치를 알고 그 정직의 가치를 자신이 교회 속에서 복음과 함께 실현하려고 하지 흐릿한 사람들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고서를 싸게 판다고 광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불러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오페라 옴니아를 비롯해서 몇 권을 샀습니다. 그래 턱 보니까 룰리지 철학사전이라고 나와있어요. 그 룰리지 철학사전이 영국에서 나온 책인데 엄청 비싼 책인데 깎아주지도 않습니다. 열 한 권을 샀는데 제가 560만원을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점에도 없고 주문을 하면 주문을 받아서 자기들이 손수 제작을 해서 팩키지로 등기로 보내줍니다. 그런데 150만원이라고 해요. 그래 내가 ‘아니 이 책이 내가 560만원이나 내가 주고 샀는데 이 책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 책인데 누구 허락 받았냐?’고 했더니 ‘아유 그냥 찍는 거죠’ 그래서 제가 ‘당신이 교회 장로라고 하면서 그러면 되느냐? 당신이 하늘나라 갈 때 예수님 오실 때 이런 것이 다 문제가 된다. 그런게 어디 있냐? 법으로 못 하게 되어있고 당장 이것 걸리면 잡혀 들어가는데 거기에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에게 이렇게 해서 사기로 찍은 이 책을 팔고 돈을 번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양심이 깨끗하냐?’ ‘이것도 사시죠.’ ‘나는 안 산다. 저작권 끝난 것 이외에는 나한테 팔지도 말고 사지도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물론 옛날에 80년대 이전에 저작권이 시행되기 전에는 법에 걸리지 않으니까 샀지만 그것도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주고 새로 사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났는데 2천만 원이 없어졌답니다. 어디 갔냐고 하니까 목사님이 선교사를 갖다 줬답니다. 선교사 왜 갔다 줬냐고 영수증 어디 있냐고 하니까 현찰로 갔다 줬으니까 그것 영수증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일반 세상에서도 그렇게 하면 그것은 배임 행위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그런 식으로 운영을 하면서 교회를 도탄에 빠뜨리고 어려움에 빠뜨립니다. 그것이 지도자로서 그 교회의 교인들을 올곧게 살아가라고 가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이 아니라 누가 들어와 보더라도 볼 수 있게 투명하게 재정을 공개해야 되는 것은 기본적이 아닙니까? 공개해서 쓸 수 없는 돈은 공개 안 해서도 쓰지 말아야 되고, 공개 안 해서 쓸 수 있는 돈은 공개해서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렇게 신학교 때 정직이라는 것을 하찮게 생각해 온 사람들이 교회를 그 꼴로 이끌어가서 교회의 도덕성이 이 세상의 친목단체의 도덕성만큼도 못할 만큼 추락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감사 위원회가 있지만 돈 쓰는 부서, 예산 세우는 부서 다 따로따로 있지만 그것도 충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인 회개사 사무실과 그것도 예수 믿는 사람이면 안 되고 일부러 불신자 찾아서 계약을 맺습니다. 일주일 동안 직원들 데리고 와서 우리 교회를 샅샅이 뒤져서 조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책임 질 것 있으면 책임을 집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그 회개사 사무실에서 국가 도장 번호가 찍힌 직인으로 보고를 하고 마지막으로 교인들 앞에서 자기들이 직고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학창에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졸업시험에서 컨닝을 하길래 잡아내서 끝까지 졸업을 안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 두 학생이 매일 와서 아침부터 진을 치면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하는데 뉘우치는 눈빛은 전혀 없고 졸업 못할 염려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서할 수 없다. 너희에게 개정의 점이 보이지 않는다. 또 개점의 점이 보이더라도 너희가 행한 응당한 죄 값은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랬더니 이 틀째 되던 날 그 중의 한 학생이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나한테 말하는 겁니다. ‘교수님은 의로우십니까?’ ‘나 의롭지 않다. 나는 죄인이고 주님이 용서해 주셨어도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면 교수님은 학교 다닐 때 컨닝 한 적 없습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난 의롭지 않다. 그렇지만 니가 나한테 내 신학교 생활 7년 동안에 나에게 컨닝을 했냐고 물어봤는데 내 눈을 똑바로 봐라.’ ‘정말 없습니까?’ ‘한 번도 없다. 나는 그렇게 사는 사람을 학교 다닐 때부터 쓰레기같이 생각했다.’ 만약 제가 컨닝을 했으면 어떻게 두 눈을 똑바로 보고 그 학생에게 대답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나중에 어떤 일을 당할지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들을 잘 모르시겠지만 고신의 학장을 지내던 한상동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사실은 공부를 그렇게 많이 못 하신 분이고 본과도 못 들어오셔서 예과를 다니셨습니다. 그런데다가 1학년 때 아예 개척을 해버렸답니다. 그러니 그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든데 개척교회를 해서 전도를 하고 교인들 심방을 하고 설교를 하니 그 고생이 이루 말이 아니죠. 그런데 어느 날 시험을 보더랍니다. 다른 시험이면 어떻게 하다하다 안 되면 설교라도 쓰고 나가면 빵 점은 안 줄텐데 하필이면 영어시험이었답니다. 그러니 시험지를 갖다 놓고 이 한상동 전도사가 한 숨을 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I am a boy’가 입력이 안 되는데 나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하도 시험지를 보다가 모르겠으니까 썼답니다. ‘교수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두 아십니다.’ 성적표가 나왔는데 ‘예수님은 100점이고 너는 0점이다’라고 나왔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한 숨을 내리쉬고 내 쉬면서 ‘주여, 주여’ 하니까 옆에 있는 학생이 이상하게 비틀어 앉아서 시험지가 자꾸 자기 쪽으로 오더랍니다. 이상하게 이 사람이 오늘따라 비틀게 앉아서 시험을 보나? 생각해보니 보고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시험지를 덮어 백지를 내고 산에 올라가서 회개를 했답니다. ‘하나님 내가 평소에 어떻게 거짓되게 살았으면 나를 잘 아는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보여주면 한상동 목사가 배껴 T쓸 정도의 신앙인이라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제가 이러고도 목회자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날 뒷산에 올라가서 회개를 했답니다. 영어를 잘 해서 한상동 목사님에게 답안지를 보여준 그 사람은 누군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날 영어시험을 백지를 내고 나온 그 사람이 후에 그 학교의 학장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찬양) 끝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의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그 뜻이 이뤄진다 외치며 사나니
그래야지만 외칠 수 있을 때 올곧은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요한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연단되고 연단 된 가운데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졌고 그것이 헤롯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떨게 만들었던 일종의 영향력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특별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특별하게 이렇게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서 여러분들의 인격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게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