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의 도전과 교회의 사명
녹취자: 김경애
Ⅰ. 들어가는 말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아직까지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리고 인터넷은 더더욱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1년을 통틀어서 10시간 정도 사용을 할까 말까하는 사람인데 하도 궁금해서 며칠 전에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내 이야기가 인터넷에 그렇게 많이 실린 줄은 예전에는 정말 미처 몰랐습니다. 넘겨도, 넘겨도 끝이 없이 내 이야기가 실려 있고 그중에 어떤 것은 내가 참고할 만한 것도 있고, 전혀 참고할 가치가 없는 것도 있고, 동의가 조금 되는 것도 있고, 전혀 동의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수준이 어느 정도 있는 글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은 글도 있는 것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고 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시간을 보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인터넷을 닫으면서 당분간 들어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하나를 읽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새로 나온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이라는 책을 읽고 소감을 올렸습니다. 올렸는데 저는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그럴 의도는 없고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 책을 자기는 읽었는데 ‘평소에 김남준 목사님 책을 좋아하는 마니아인데 이 책은 왠지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 같다.’ 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뜻으로 이런 글을 썼을까? 그때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어쩌면 이 책을 쓴 나의 동기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를 내가 과학이나 역사, 그리고 예술이나 문화, 수학, 자연과학, 인문학,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 이 성경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전혀 저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사경회 때 들은 사람들은 제가 어떻게 설교했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 책을 쓴 저의 의도는 성경을 이런 모든 주변의 학문으로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려고한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학문의 도움이 없어도 성경이 말하는 이 진리의 내용을 내가 받아들이고 믿고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리는 데에는 아무 불편이 없고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남이 하지 않는 시도를 하려고 했던 것은 그렇게 우리끼리는 충분히 공감하고 아멘하고 믿고 있는 이 진리를 실제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할 때 그것들을 도구로 삼아서 우리가 듣던 그 진리를 어디까지 적용하고 살아야하겠는가? 하는 것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 통용되는 진리가 있고 세상에 나아가서 사는 진리가 있고 혹은 성경 속에서 통용되는 법칙이 있고 성경밖에 있는 모든 세계를 바라볼 때 통용되는 법칙이나 세계관이 따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하나님의 의도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가운데 단 일인치의 땅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지 않아도 되는 영역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인간이 미치는 이 모든 영역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는 왕이신 것을 드러내면서 살고 또 믿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니신 분들 제가 생각하기에는 최소한 8년 정도 다니신 분들은 두 개의 시리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는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라는 시리즈였고 또 한시리즈는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경회 시리즈였습니다. 참고로 그 시리즈는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접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는 몇 개의 시리즈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열린 교회를 오래 다니신 여러분들은 강단에서 얼마나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죄에 대한 미세한 분석과 그 다음에 우주적인 의미의 규명 같은 종류의 설교에 아주 익숙해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쯤에 시리즈 중에서 정말 지루하게 계속된 시리즈가 있었는데 ‘죄의 속임을 이기는 길’이라는 시리즈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그 설교를 교인들이 힘들어했는지 여러 명의 교인이 한동안 교회를 안 나왔고 구역장이 전화를 해서 ‘이제는 나와 그것 끝났어!’ 그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설교를 들어도 전혀 요동도 하지 않고 회심하지 않던 사람들이 그 두 시리즈를 들으면서 여러 사람이 회심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어떤 방향으로 펼치는가에 따라서 정말 영혼을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책이 사실 신앙이 돈독하고 무엇이라도 설교하면 아멘이라고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고자하지만 의심과 회의의 방해를 받으면서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굳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계몽주의 정신 때문에 방해를 받으며 신앙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까지 함께 끌어안으면서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참된 빛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여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이나 길은 달라도 모두 함께 그 빛을 드러내며 사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행복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버나드 램이라는 유명한 개혁신학자는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신학은 계시에 입각한 신학이고 이것은 믿음에 입각하여 받아들이는 성경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학문의 형식으로 표현할 때에는 반드시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하여야한다.’ 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계몽주의의 언어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소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가깝게 교제하고 제가 많은 가르침도 받고 도움도 받는 철학교수 강영안 박사님이 이번에 수련회에 오십니다. 그분과 함께 대화를 하는데 그분에 저에게 굉장히 의미심장한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당신이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데 대학원의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둘로 갈라서 신이 있다고 믿는 학생들의 부류와 신이 없다고 믿는 학생들의 부류를 갈라서 토론을 하게하고 자기는 많이 개입하지 않고 도와주기만 하면서 계속 힘이 다할 때까지 논쟁하도록 한 학기를 지켜보았답니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났을 때 어떤 학생이 긴 편지를 써서 자신에게 보냈답니다. 그 학생은 대학원을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 속에서 이렇게 썼답니다. ‘교수님 저는 크리스천 청년이고 그리고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있고 누구 보다고 신앙이 돈독하다고 교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학기동안 그 열띤 토론에 한 번도 발언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토론이 만약에 교회 안에서 벌어졌다면 제가 좌중을 휘어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안 믿는 사람들이 섞여있는 그 속에서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로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이 신앙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신학적인 지식, 그리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은 대부분 은혜 받은 사람들끼리 통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게 어두움이 있어야지만 빛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있어야지만 빛의 진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은 어두움이 아니고 빛은 어두움에 섞일 수 없고 어둠은 그 빛을 이길 수 없지만 언제나 그 빛은 어두움을 향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진리의 진리 됨이 드러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선교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용어와 언어를 익힐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 체계를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믿고 있는 이 신앙의 이유와 근거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저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들이 전하고 가르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앙에 관한 이유와 근거를 이성적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저 사람들이 성령의 도우심 없이 믿음을 갖게 된다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든지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두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모든 논리와 사상을 파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써의 믿음의 작용, 이것은 인간의 논리와 그리고 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는 이런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하나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 정말 참된 진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이 신뢰하는 가치의 체계와 사상보다 우리가 믿는 이 진리의 체계가 훨씬 합리적이고 아름답다는 것을 굳게 믿는 그런 확신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믿는 신앙의 근거를 분명히 하면서 살아가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거의 이십년 가까이 열린 교회를 하면서 배운 것이 참 많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잘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 정말 잘 믿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잘 못 믿었던 사람들은 방해물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의심이 되는 회의, 의심, 이런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설득에 의해서 어느 정도 치워질 때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은 성령을 초자연적인 역사를 받아들이기에 잘 준비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언제나 필요한데 논리적으로 잘 준비된 기독교신앙에 대한 설복은 성령이 역사하도록 자유를 많이 줄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잘 준비되었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낸시 피어스 라는 기독교 세계관을 전공으로 하는 유능한 학자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성인데 그분이 쓴 책 중의 한권이 우리나라에서 Total Trues 라는 책인데 ‘완전한 진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사상적으로 이 사람은 프란시스 쉐퍼 계열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는 부모님을 따라서 교회를 다녔는데 학교의 교육을 받으면서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을 거부하고 그 다음에 이제 교회를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방황을 하다가 스위스에 있는 라브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라브리에서 생활을 하면서 거기에서 전 세계에서 온 좋은 학자들, 신실하고 사상적으로 잘 갖춰져 있는 학자들을 만나서 그리고 동료들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이 기독교는 정말 원래의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기독교야말로 정말 모든 인간이 동의할 수 있는 최고의 합리성을 가진 그런 정말 아름다운 사상의 체계를 갖춘 최고의 종교이고 사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여기에서 이 사람은 깊은 지적인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이것을 연구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면서 그 기독교 사상의 웅장함과 우주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분이 읽은 책들을 보면 독서량이 장난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뿐만 아니라 정치, 역사, 경제, 과학, 예술, 사회부터 시작해서 다방면의 책을 어마어마하게 읽으면서 그러면서 스승인 프란시스 쉐퍼의 계열을 따라서 이 모든 창조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설득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그 간증을 책에 실었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두 가지에 대한 경험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다음에는 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들어주신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라고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목표는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다가 가는 마지막 결과입니다. 그리고 상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에 맞도록 살아서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보다는 우리가 태어난 것 때문에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티끌만큼이라도 아름다워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창조하셨고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어느 망 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 망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질서,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라고 하는 커다란 그물이 바둑판처럼 펼쳐져있는 연관관계 속에 인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고 한시대의 인류라는 것이 존재하고 거기에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실제로 구현하고 싶어 하셨던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 죄 때문에 거기에서 틀어져버린 현실적인 이 가치의 붕괴,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서 자기의 위치를 설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아무리 십자의 구원과 부활의 감격에 차고 넘쳤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해주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위로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또한 옆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신 이 세계와 인간들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하고 또 지금은 여기에 살아있지 않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아왔던 수많은 인류들과 교회의 역사, 지금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완성하지 못하고 가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언젠가는 일하게 될 미래에 태어날 우리 세대와의 관계, 이 모든 속에서 우리를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인류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처럼 이렇게 창조의 목적과 인간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려고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의 커다란 세계 안에 이렇게 하나의 커다란 포물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보이는 이 세계의 역사입니다. 밑으로 다시 하나의 포물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물고기 모양으로 되어있는 두 개의 포물선이 만나는 이 타원형의 그림 속에 두 가지 원형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과 세상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왕 삼은 나라의 사람들이고 은혜가 통치하는 나라의 사람들이고 세상의 나라는 자기를 왕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 자기 사랑을 움직이는 궁극적 세력이 사단의 세력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속에서 두 나라가 함께 투쟁하면서 이 현실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나라는 이 세상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또 하나님은 이 세상의 역사를 사용하셔서 믿음의 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이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 아래에 있는 구원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상의 역사도 보여야하고 세상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눈을 떠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 역사를 사용하여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에 대해서도 눈을 뜰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책임성입니다. 거룩한 의무와 책임을 지는 것이고 이 책임을 져야할 주체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책임 있는 존재로서 이 세상과 인류와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와 심지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까지 우리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여기에 책임을 부여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 세계와 사회, 역사, 문화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과 이 세상나라의 백성들이 엄연히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지만 함께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 이 자연, 이 학문, 그리고 공통된 이 모든 삶의 자리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은 저들과 싸우는 것도 가능하고 혹은 저들을 사랑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리고 우리의 어떤 행동들이 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체적으로 이루어가는 이 일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일회용 내지는 가볍게 쓰고 버리는 싸구려 물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 곁에도 플라스틱이 많이 있을 것이고 오늘도 아마 몇 십 킬로그램의 플라스틱을 버리고 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속에서는 별로 문제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느냐하면 태평양 한가운데 가면 거의 아메리카 대륙의 절반 정도 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플라스틱이 물 아래에 가라앉아서 보이지는 않는데 거기에서 대륙의 반 정도 넓이가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전 세계에 쏟아져서 해류의 영향으로 거기에 모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것이 수십 년에 걸쳐서 분해되면서 그것들이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작은 물고기들이 먹고 그것을 큰 물고기들이 먹고 그 큰 물고기들을 사람들이 잡아먹고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이 오염된 것이 모두 눈으로 보기에는 파랗고 아름다운 바다인데 이미 그 속에서 그런 것들이 분해되면서 수없이 오염을 시키면서 현실적인 위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참치를 잡았는데 거기에 세슘이 상당량 함유되어있는 먹지 못할 생선을 잡은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 때문에 생성된 쓰레기가 1500만 톤인데 그것이 어마어마한 양이 되어서 지금 미국으로 쓸어져 내려온답니다. 어떻게 처치할지에 대해서 대책조차 세울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지금 눈을 돌려서 우리들이 자연, 다른 나라, 오염 이런 문제에 대해서 눈을 돌리면 우리가 오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아주 작은 예를 들었을 뿐인데 이것이 우리의 이렇게 자연적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윤리와 도덕, 어떤 진리에 대한 견해와 사상, 이런 것들에 관한 삶이라면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아닌 이 세상과 지구, 인류, 공동체, 가치, 존재, 이런 것들에 대해서 통합적인 앎을 가질 때와 갖지 않을 때 우리는 아주 현저히 다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정말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이후에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냥 구원을 받고 그냥 살면 됩니다. 그런데 그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미 실험을 많이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무엇인가 개선이 되지 않을 적도 많았습니다. 은혜는 많이 받았는데 이 은혜를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앞에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것들에 대해서는 희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올바로 정립되어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자원 그리고 물질적인 자원,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합당하도록 이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 흘러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Ⅱ. 현대 정신과 상대주의
이렇게 서론을 해놓고 보면 지금 현대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정신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허치슨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결코 우연하지 않다. 인간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의 정동과 그리고 겪음, 이 두 가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고 했습니다. 어떤 행동을 우리들이 하게 되고 그 행동이 계속되는 연속적인 것일 때에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성향으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데 움직이고 있는 것들을 개별적인 것들만 보면 제각각 제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어지러운 세상 같지만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이 세상의 움직임들을 보이지 않는 위로 추적해 올라가면 마치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인간인 것처럼 그 속에는 그렇게 현실적으로 현대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어떤 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을 이해하면 그러면 그 사람을 대하고 다루기에 아주 편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모른다면 항상 이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나를 당황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 모든 세상살이 돌아가는 현대의 현상들을 더듬어서 이 정신이 무엇인가를 통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렇게 사상이나 철학이나 사회를 연구해서 이런 정신들을 규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모두 일치한 의견을 내놓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각각 오늘의 이 현대의 현상들을 분석하고 정신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A. 상대주의란 무엇인가
그런데 오늘 그 모든 시대의 정신을 다 여러분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지만 지금 오늘날의 시대에 가장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현대의 정신중의 하나가 상대주의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상대주의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프로타고라스라는 그리스의 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척도다.’ 이 주장이 사실은 이 모든 가치의 척도에 대한 중심점이 이제 이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 안에 있다고 하는 사상을 가장 확실하게 최초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상대주의라는 것은 지식이나 가치 이런 것들이 개인과의 관계에서만 상대적으로 타당한 것이지 영원하고 불변하고 인간 밖에서 실제적으로 주어지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바로 현대의 정신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언제는 그런 생각을 안했나요?’ 그렇습니다. 항상 했습니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와 비교해볼 때 현대는 그런 정신이 훨씬 더 강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현대는 상대주의가 가장 더 강하게 표출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이야기를 하려면 이제 역사이야기를 조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우선 기독교와 관련해서 생각해야하니까 우리가 조금 너무 멀리가면 복잡하니까 구라파를 중심으로 보면서 기독교입장에서 생각할 테니까 그 구라파로 가서 우리들이 한번 기독교 성립된 거기부터 이야기합시다. 자, 이제 기독교가 받아들여지고 로마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이 되고 그리고 잠시 후에는 국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서양사상 전체는 이제 기독교 속으로 편입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에 의해서 기독교가 되는 것이 유럽 전체에 강요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성경에 의해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세계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창조의 원인이고 또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한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 목적에 따라서 인간이 창조되고 이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을 포함한 천사들까지도 하나님 나름대로 그들을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사용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덕스러운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위로는 하나님 아래에 있는 존재이고 옆으로는 인간과 함께 있는 존재이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위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가리키는 세계관이었습니다. 죄와 타락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서 창조하신 목적을 이해하며 살게 하셨다는 이것이 기독교가 가르쳐온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인간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 주체이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서있는 수많은 객관적인 존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자기를 깨뜨려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면서 사는 것, 거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노예적으로 혹은 소모품처럼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당신 안에 있는 그 위대한 신비와 사랑을 인간에게 흘려보내어 인간이 하나님의 그 위대한 목적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주셨다는 것이 인간관인 것입니다. 이것도 이야기하면 길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결국은 이제 중세가 끝나면서 기독교가 엄청나게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믿는 사람들의 삶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엄청나게 타락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어느 정도로 타락하느냐하면 로마 가톨릭에서 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면죄부를 팝니다. 이 면죄부는 바로 돈을 그 사람 이름으로 그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 있는 영혼이 그 불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연옥은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장소인데 여기에서 정화기간이 길다는 것은 고통의 시간이 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금이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예쁘게 칼라로 만듭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팔리니까 흑백으로 막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우매한 사람들이 새카맣게 줄을 서서 그 면죄부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하면 로마 가톨릭이 교회와 수도원이 소유한 모든 것은 어느 나라에 있든지 왕의 소유가 아니라 교황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면세입니다. 그러면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죽으면서 땅을 나라에 기증하고 죽는 것이 아니라 자꾸 수도원에 기증하고 죽는 것입니다. 거기서 가끔 올라가서 은혜도 받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경건한 수도사를 보니까 훨씬 더 하나님과 가까운 것 같으니까 거기에 그렇게 바치고 죽는 것입니다. 면세의 땅이 점점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자기 아들 중에서 괜찮은 녀석은 왕위를 잇게 하고 조금 덜한 애를 뇌물을 많이 써서 대주교로 만들어서 그 모든 영토를 관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팥이 풀어져서 솥 안에 있다고 자기 집안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주고 교회의 중요 직책을 사왔으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본전을 뽑아야합니다. 여기에서 이런 비극들이 일어납니다. 땅덩어리를 잘라서 이만큼에서는 ‘네가 면죄부를 팔아도 좋다.’ 하고 ‘그 대가로 얼마큼을 교회에 바쳐라.’ 이렇게 흥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주교가 되는 사람들이 신앙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 신앙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사 교수에 의하면 교회에서 아예 나체쇼를 벌인 성직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부패하니까 상식으로 모든 사람들이 교회가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모든 세계관에 대한 재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르네상스 운동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이 무엇이냐 하면 은총아래 인간이 있어야지만 신 아래 복종해야지만 인간은 진정으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 수 있다는 슬로건 하나를 가지고 인간을 너무나 무참하게 짓밟으면서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하고 부도덕한 교계의 부패를 보면서 사람들이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르네상스 운동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이라는 것은 ‘레나스키멘치오’ 라는 라틴어입니다. 거기에서 ‘나스키오’ 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르네상스라는 ‘네상스’ 가 ‘나스코’ 라는 ‘낳다’ 는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탄생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재탄생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새로운 발견입니다. 이제까지 중세까지 계속되어 온 기독교가 가르쳐준 코드 말고 새로운 코드로 신과 세계, 인간을 읽어야한다는 새로운 코드가 제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 코드가 뭐냐 하면 인간이 중심이라는 코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제 성서만 읽도록 강요를 당하다가 그러다가 도대체 이 역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접근한 한 원천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 로마의 문학입니다. 특별히 그리스의 고전들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 길지만 그리스는 여러분이 지도를 보면 에게 해를 중심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가 여러분들이 학교에 다닐 때 배운 에게 문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게 문명은 크레타 문명의 모태가 됩니다. 크레타는 섬입니다. 그 에게 문명이 모태가 되어서 크레타 문명, 그리스 문명, 미케네 문명을 활짝 꽃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명의 씨앗을 가져다준 사람들이 누구였느냐 하면 이집트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아주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작년엔가 성지순례를 갔을 때 제가 충격적인 문화적 발견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천년 전에 만든 팬티입니다. 오천년 전에 만든 왕궁에서 사용하던 여자팬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화점에 놓고 팔아도 사갈 사람이 아주 많을 고급상품입니다. 잠자리 날개처럼 실로 팬티를 만들었습니다. 너무너무 정교합니다. 그렇게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필요한 물건을 사가고 그쪽에 있는 그들의 문물들을 여기에 퍼뜨렸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미 농경사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자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 크레타사람들 특별히 에게 해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세계 각국에서 와서 거기서 무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관심사는 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왜? 신에게 아무리 잘 보여 봐야 상업을 해서 거래를 할 때 흥정을 잘해서 이기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인간중심의 사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서구의 문명의 모태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도 사람의 모습으로 똑같이 만들어버립니다. 그게 신이다. 그래서 신들의 세계가 그렇게 우아하고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쌓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욕칠정들을 신들의 세계에 투사시켜서 신들이 이혼하고 고발하고 바람피우고 죽이고 도망 다니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 지구상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중에서 그리스 시대만큼 인간이 정말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살던 시대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소아시아에 가면 로마 문명, 그리스 문명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밀레토에 가보면 아직도 이런 경기장이 있고 에베소가 딱 이천석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여기가 딱 이천석입니다. 아마 생각해서 똑같이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밭일하고 일하고 그리고 저녁때 모두 이렇게 극장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녘에 해가 저쪽으로 걸립니다. 방향도 딱 이쪽입니다. 그때는 전기불이 없으니까 해가 서녘에 걸리면 여기서 거대한 무대에서 배우들이 와서 비극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비극이 아주 유행했습니다. 로마시대 때는 그것을 금지시킵니다. 소포클레스 같은 사람들의 비극이 연기되는 것입니다. 인간사회의 비극을 연기하면서 이 사람들이 수천 명이 모여서 그것을 들으면서 펑펑 울고 어둠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예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노예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존중되는 시대에 비춰보니까 이렇게 흘러오던 역사를 기독교가 다 엎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르네상스를 해석하면서 이 르네상스는 틀림없이 반기독교적이고 반종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르네상스가 일어난 첫 번째 도시가 플로렌스입니다. 지금의 피렌체라는 가죽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천재들이 태어납니다. 마사토라는 사람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조각, 회화 그 다음에 미켈란젤로도 그때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이제 그런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들을 선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면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보았자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면 예수님이나 성모마리아 같은 인물들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르네상스로 넘어오게 되면 항상 화폭의 중심에 인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벗고 나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러는지 여러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면 다윗을 왜 목동 옷이라도 입혀서 만들지 홀딱 벗겨서 고추를 내놓고 그러고 나오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을 그렇게 활짝 벗겨놓고 나체로 만들면서 인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 그리고 그렇게 아름다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모든 질서의 중심에 있을 수 있다는 가치관들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반종교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에는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디치의 아들 같은 사람들이 제2대 메디치인데 이 사람에 의해서 피렌체에 진정한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짧은 80년 사이에 스물 몇 명의 세계적인 천재들이 등장합니다. 그때에 그런 사람들을 키워냈던 실력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별장을 짓고 거기에 기도실을 만들고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중심의 사상을 르네상스에서 인간을 다시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재발견된 그것이 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기독교와 관계가 적은 세속적 르네상스로 가고 하나는 기독교적인 르네상스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세속적 인문주의와 기독교 인문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그러면서 기독교 안에서 엄청난 각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각성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각성이 무엇이냐 하면 르네상스 운동의 도움을 받으면서 거기에는 옳은 요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교회가 그동안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인간을 억압했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권리를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형상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비성서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리스 고전에 눈을 돌렸던 많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이번에는 기독교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문을 이해하면서 그 원문에 담겨진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더 이상 로마 가톨릭의 해석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원천을 대하면서 ‘아드폰테스’라는 ‘원천으로 가자.’ 라는 기치를 들고 그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발견해보니까 자기들이 중세를 통해서 실제로 보아왔고 짓밟혀왔던 이 기독교의 현실적인 모습과 성서에서 그려내는 인간의 상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종교개혁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톨릭 성직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00% 르네상스의 물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독교 인문주의로 받아들여서 그 르네상스의 정신을 사용해서 참된 기독교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쳤던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이 폭발하듯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종교개혁이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또 하나의 개신교를 만들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의도는 처음에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그렇게 전개된 것입니다. 전개될 때 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은 물론 정치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이러한 사상적인 진공상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실은 놀랍게 이 사상이 수용되면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동안 종교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철저하게 사람들을 교육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속에서도 마르틴 루터가 요리문답을 쓸 때에 자기의 그 비참한 유럽의 목회적인 상황을 돌아보는 여행을 하고 와서 통탄하는 내용들을 여기에다 실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알다시피 칼빈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마무리되고 17세기에 말하자면 수많은 신학자들이 나타나서 이 개혁주의의 유산들을 아주 아름다운 신학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서 영적인 부흥의 불길들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725년쯤에 와서는 제네바까지도 완전히 이성주의에 의해서 잠식되어 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개혁신학의 본래의 정신을 유지하는 기류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성주의, 합리주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7세기에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위대한 발견의 시대입니다. 과학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제 신을 중심으로 하고 인간도 모두 패러다임으로 보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면서 인간이 모든 만물의 척도이고 이성으로 판단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이성을 초월한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자유일 뿐이라고 하면서 완전히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모든 것들은 이제 과거와 같이 이성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들을 조율하는 수준과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각시켜 버려서 그것은 종교의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학과 학문, 이 모든 것들 속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보고 신학을 그런 종교에 속한 것으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 데카르트가 나왔을 때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성주의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미 데카르트가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라는 것은 이미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인간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위 유명한 명석판명 법칙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의심할 때까지 끝까지 의심하라. 그리고도 의심할 수 없는 그것은 진리이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거기에서 인간을 최종적인 판단자로 삼는 사상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느냐 안하느냐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면서 계몽주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는 것입니다. 유럽 전체를 휩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운동의 불을 붙이는 위대한 인물 한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이 아이작 뉴턴입니다. 이 사람은 이전까지는 형상학과 자연과학이 분리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몇 사람들이 그것을 분리했지만 그렇지만 이 사람에게 와서 형이상학과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 유명한 꼬린띠삐아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뭐냐 하면 ‘자연 과학의 수학적 원리’ 무슨 뜻이냐 하면 자연의 모든 현상은 법칙으로 설명되고 수학으로 정리해 보일 수 있는 것이라는 사상을 펼쳐 보이면서 우리 앞에 펼쳐있는 신들이 지배하고 통치한다고 믿었던 이 모든 세계의 자연현상들이 사실은 엄밀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아주 질서정연한 세계라는 개념들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인간은 거침없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거침없어지느냐하면 예전에는 어떤 것을 발견하고도 항상 ‘이것이 정말일까? 맞는 것일까?’ 하고 신에게 물어보아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법칙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법칙은 어디서나 통용되는 아주 규칙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모든 세계를 보았고 그러니까 과거에 대한 법칙을 정확히 조사하면 현재가 설명이 되고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모든 것들도 다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으면서 사람들은 이제 어떤 환상에 사로잡히느냐하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은 망상이고 미신이라는 사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 속에 수많이 기록되어있는 초자연적이고 초이성적인 사실들에 대한 제시는 모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이 이것을 쓴 것이기 때문에 기각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몽주의 방식에 의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종교의 형태는 이신론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법칙을 만드셨고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에 쪼잔하게 이런 삶은 간섭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것은 법칙을 따라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우리가 찾으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주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인정하는데 이것은 마치 일본의 국왕이나 영국의 여왕처럼 입헌군주국의 왕이 뒷방에 있는 하나의 노인네일 뿐이지 폼만 잡지 실제로 무슨 권력을 행하는 분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신론이 막 엄청난 인기를 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유신론과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몽주의 정신입니다. 이 계몽주의 정신은 무엇을 가지고 있었느냐하면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자들이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또 신이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조차도 무엇인가 인간이 본성적으로 함께 찾아갈 수 있는 공통된 가치와 세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공통된 도덕, 공통된 가치, 공통된 그런 것들을 찾아가면 이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어있기는 하지만 각자가 자유를 행사하면 이 자유는 모두 한 지점에서 만나서 공통된 가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영국의 경험주의를 물려받은 사람들, 데이비드 흄이나 이런 사람들의 말하자면 불가지론을 물려받은 사람들조차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아담스미스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레제스페르’ ‘내버려두어라’ 그리고 자유방임주의 그리고 인간은 법에 의해 규제받지 않아도 가장 합리적인 소비와 공급을 선택하기 때문에 시장에 의해서 모든 것들은 조정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야경국가의 개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국가는 이제 더 이상 옛날처럼 더 이상 우리에게 개입하지 말라.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야경을 도는 것이다. 밤중에 어떤 나쁜 놈들이 나타나지 않는가 하면서 야경을 도는 정도만 국가에서 간섭을 하지 나머지는 인간이 자유롭게 행하게 두어라 그러면 인간의 이성은 이 모든 것들을 찾아가면서 그러면서 질서 있는 이 세계를 구현해 갈 수 있다고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편가치, 공통도덕, 그 공통된 가치관과 도덕을 찾아가는 감각을 가리켜서 그들이 양심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양심이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선과 악에 대한 상과 벌에 대한 현실적 인식인데 신 테레시스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덕적인 공통감각입니다. 공통 보편적인 가치를 인식하는 도덕적 감각입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에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양심에 대한 또 다른 설명입니다.
그래서 이 18세기에는 계몽주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면서 어떤 학문이 엄청나게 뜨냐 하느냐하면 도덕철학이라는 학문이 뜨는 것입니다. 그 도덕철학은 특별히 18세기에 있었던 영국의 로크, 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펼쳐지는 소위 이야기하는 경험주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펼쳐지면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기독교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것을 이신론적인 기독교적인 해석을 하면서 인간의 어떤 내면의 작용들이 도덕적인 선택을 행하게 하고 도덕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 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이런 연구들이 활발해집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에게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저 천국으로 밀쳐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공통적인 가치관이 있다고 보고 인간은 이것을 찾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보니까 도대체 이 마음에서 무슨 작용이 일어나는지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19세기에 와서는 심리학에 대한 폭발적인 분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근거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공통된 가치라는 것이 있었고 인간은 그것을 찾아가야 행복해질 수 있었고 인간은 그것을 찾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념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 깨지게 된 가장 커다란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하면 두 번의 세계대전입니다. 1917년에 일어났던 1차 세계대전에서는 비교적 충격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은 그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러한 과학정신의 아주 탁월한 발전으로 말미암아서 어마어마한 과학의 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1차 대전 때에 상상도 못했던 비행기나 잠수함 이런 수단들이 발달되고 이미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이런 미사일이 독일에서 개발되어서 실제로 영국의 런던을 타격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과학의 발전을 이루면서 결국은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 전쟁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사람이 죽어가는 완전히 광기에 사로잡힌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전쟁의 비참한 결과를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마어마한 기술력의 발전과 이 물질을 사용한 것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져다줍니다. 이렇게 엄청난 파괴력을 경험하면서 인간에게 공통적인 무엇을 찾아갈 수 있다는 이 계몽주의의 전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라고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국제연합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제 이런 절대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기독교가 아니라 계몽주의적인 전제에 대해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사람이 장폴 사르트르 같은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철학교사였는데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인간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예전에는 기본적으로 이상한 철학에서든지 그 다음에 기독교철학에서든지 인간은 왜 우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된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무엇인가? 그냥 잉여의 존재로 휙 던져져서 창조된 존재일 뿐이지 그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그런 의미를 묻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세계 전체가 어떤 규칙이나 필연, 인간과 세계 밖에 있는 어떤 원리나 원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이것은 매주 엉망인 법칙에 의해서 전개되는 그런 무작위의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진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앙리 베그르송 같은 사람은 그러면서 뉴턴주의적인 세계관의 해석이 이제 스펜서 같은 사람들에 와서 이것이 사회적으로 접목이 됩니다. 그래서 진화론과 함께 어울리면서 이 세계가 기계론적으로 진화한다는 개념을 펼치는 것입니다. 앙리 베그르송 같은 사람이 나와서 그것은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이 세계는 두 종류가 있는데 동물의 세계와 식물의 세계가 있다. 식물의 세계는 법칙에 비교적 엄격하게 따르지만 동물의 세계는 식물의 세계와는 다르다. 동물은 동물의 세계 맨 꼭대기에 인간의 세계가 있는데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 이 사회이고 역사다.’ 그런데 그것은 이렇게 기계론적인 합리주의 혹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에서 이야기하는 법칙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모른다. 그것은 이 속에 있는 무엇인가 어떤 것들이 생명 속에 있고 이것은 개별적인 생명 안에도 있고 이 생명 전체를 어우르는 세계 안에도 있는 어떤 생명이 작용을 하면서 그 생명의 충동에 의해서 이끌어져가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형성이라고 보고 그 생명을 ‘엘란비딸’ 즉 약동하는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이성과 논리에 수학적인 어떤 파악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관할 수 있는 어떤 아주 분명한 종교적인 직관, 혹은 지성적인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구별되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두 하나의 통합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파악되는 것이라는 발전된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B. 현대 문화와 상대주의
사실은 이러한 모든 것들의 더 크게 상대주의에 쐐기를 박은 사람이 마틴 하이데거입니다. 다음의 도식을 보십시오. 기존의 철학적인 사유는 존재와 존재자를 이렇게 하나로 보는 사유였습니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그림을 잘못 그렸는데 밑의 두 개 화살표로 분화되어 있는 것 거기가 하이데거의 사유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 옛날 기독교 철학에서는 존재 중의 최고는 하나님이고 그 다음에 천사과 인간 같은 것들은 하나님보다 약간 덜한 존재이고 동물은 그보다 더 모자라고 식물은 더 모자라고 그리고 무생물은 그 존재를 조금 가지고 있는 것이 존재로 보아서 존재 하나를 하나의 피라미드로 그렸는데 이것은 틀렸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미 플라톤이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모든 사상적인 혼란의 주범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맹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여태까지 왔던 철학이 결국은 인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존재와 존재자를 나누는 것입니다.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데 이 존재자는 현실 존재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실존주의의 용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이 이런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이것이 허상이고 사실은 진짜의 존재는 이 너머의 영원한 것이라고 믿었던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시간과 공간에 실존하는 이 존재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하는 결론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니까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모든 것이 이제는 절대적인 것의 모든 움직이는 가치의 기준은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도 치워버렸고 하나님 대용으로 나왔던 소위 공통 도덕이라든지 아니면 공통가치라든지 공통적인 도덕의 근거 같은 것들도 모두 다 부정해버렸습니다. 부정해버리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인간의 이성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미학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래의 미학은 규범 미학입니다. 그 규범을 가지고 그 규범 속에서 어떤 사물이 아름답고 어떤 풍경이 아름다울 땐 그 안에는 아주 질서정연한 규칙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을 보면 수학으로써 아름다움을 설명합니다. 그런 식의 미학적인 개념을 떨쳐버리고 중요한 것은 미학 그 자체를 기술미학으로 바꿉니다. 서술적 미학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어떤 기준 때문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름답게 느껴지는 개별적인 사실을 중시하고 그것을 기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건축학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사람이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 라는 유명한 건축가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 ‘르꼬르 비제’라는 프랑스 건축가입니다. 이 사람이 다음 화면에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시카고에 있는 한 아파트인데 강철과 유리만으로 만듭니다. 새로워 보일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의지가 굉장히 새롭습니다. 그 다음을 넘겨보면 시카고 일리노이 공대에 건축학부 건물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항상 완벽한 직사각형 형태를 무시하고 그 다음에 강철과 유리가 특징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크라운 홀이라는 일리노이 공대의 건축학부 건물 내부를 보십시오. 뭐 그리 복잡한 설계가 아니라 그냥 간단하게 딱 떨어지는 사각형으로 되어있는 구내식당과 같은 스타일입니다. 그 다음에 크라운 홀에 보면 거기에서 앤디워홀의 실버 크라우드라는 알루미늄을 구겨서 던져놓은 작품이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전에는 건물을 지을 때 높이, 넓이, 곡선과 직선 이런 것들을 아주 조화롭게 활용하면서 무엇인가 이 건축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르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생각하는 요소들을 많이 도입해서 그래서 건물을 예쁘게 그리고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최고의 건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스 반데어로에에 와서 어떤 생각을 하게되느냐하면 이 미스 반데어로에는 Almost Nothing 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여러 가지 복잡한 사물을 사용하지 않고 유리를 한군데 다 모아서 전부 유리로 감싸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냐하면 그냥 유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리를 느끼면서 그냥 유리라는 것만 느끼고 다른 것은 느끼지 않았으면 좋은 것입니다. 돌멩이를 잔뜩 붙입니다. 왜? 그냥 돌만 느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돌, 유리, 강철, 이런 것들을 한군데 몰아서 하나로 만들면서 무엇인가 사상이 들어가서 무엇인가 기준을 가지고 예쁘게 만들려고 한 노력이 없다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은 엄격히 말하면 이 미스 반데어로에만 해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를 걸쳐있는 사람입니다.
C. 현대 정신의 도전과 기독교
그런데 베르나르 츔이라는 사람에 와서는 훨씬 달라집니다. 이 사람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도시미학을 제창한 사람인데 창시자라기보다 그것을 전개해 나간 선구자들 7,8명중의 한사람인데 전통적으로 정원이라는 것은 파라다이스와 채원의 개념을 중심으로 발달하는 것입니다. 파라다이스는 뭐냐 하면 정원은 원래 돈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 정원이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왜 그것도 없으십니까? 기본적으로 권력자가 가지는 것이 정원입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은 정원이 없습니다. 그 권력자의 정원은 천상의 세계를 본떠서 천상의 세계가 땅에 내려온 것처럼 아름답게 만들고 자기 혼자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혼자 가금 친구들을 불러서 천국에 들어오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부릅니다. 우리는 만날 매주 천국에 들어갑니다. 칼빈 파크 말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을 거기서 채소를 가꾸어서 식생활을 해결하는데 이것이 근대화와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이게 공원에 Public 개념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Public 공원은 나무를 많이 가꾸고 아주 예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가면 다른데서는 전혀 접하지 못하는 ‘정말 예쁘다. 정말 아름답다. 여기에 살았으면…….’ 이런 또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Public Garden의 목표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베르나르 츔이라는 사람이 허물어 버립니다. 뒤에 보면 빠끄딜라 딜레뜨라는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빵생 지역의 한 넓은 지역을 꽤 넓은데 이 지역을 이 사람에게 맡깁니다. 이 사람이 여기에다가 공원을 만드는데 공원이 정말 신세대의 말로 깨는 공원입니다. 왜 공원이냐 하면 공원을 만들면 나무를 아름답게 심고 그 다음에 그 사이사이에 예쁜 통나무 같은 것으로 환경 친화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서로 서로 상관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길을 따라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 인줄 알고 길을 따라 가는데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냥 가다가 구불구불 가다보니 길이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이 꼭 어딘가로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것이 고정관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지만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길이 꼭 그렇게 어디로 우리를 데려가야 하는 수단인 것인가? 그러면서 폴리라는 구조물을 만드는데 아주 굉장히 우습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변의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생뚱맞은 큰 깡통 같은 것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돈도 많이 드는데 말입니다. 그것을 38개나 만듭니다. 목표는 뭐냐 하면 ‘저 예쁜 풀밭에 저 이상한 것은 무엇이지?’ 그것이 바로 목표입니다. 그렇게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L. E. J. 브로우웨르라는 사람이 나와서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원래 수학에 대한 개념은 2+2=4라는 법칙이 밖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밖에 법칙이 있다고 보고 지성이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에 두 개와 두 개를 더했을 때 4가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객관적 실제론에 입각한 수학의 개념입니다. 그것이 전통적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완전히 엎어버립니다.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 속에 직관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결국은 인간의 밖에 어떤 수학적인 법칙조차도 인간 밖에 있어서 인간이 그것을 겨우 인식한다는 개념 자체를 전부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중률이나 귀류법 즉 ‘A거나 A가 아니다.’ 그러면 A가 낫거나 A가 아닌 것이 낫다고 할 때에는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에 무엇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배중률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다 부정합니다. 배중률, 귀류법을 다 부정하고 모든 수에 대한 의식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방가르드 운동이 일어납니다. 20세기 초반의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경영을 보여준 현대의 예술을 지칭하는 운동입니다. 원래 이 아방가르드라는 것은 전쟁이 나면 선봉대를 가리켜서 아방가르드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19세기에 확립된 이런 규범미학적인 질서와 전통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는 데에 집중했지만 대중과의 교감에는 실패합니다. 실패한 중요한 원인이 뭐냐 하면 대중문화입니다. 뭐냐 하면 그 시대마다 유행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나팔바지를 입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이상한 것을 입고 나타나면 사람들이 다 왕따를 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입고 저런 사람은 저렇게 입을 텐데 그럴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중문화에 의해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확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소녀시대 아무개가 머리띠를 무엇을 했다고 하면 아이들이 전부 다 그 머리띠를 사러갑니다. 어떤 가방을 누가 들고 다니더라. 그러면 그것을 쭉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대중문화의 획일성 때문에 아방가르드가 설득을 못 얻고 있는데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 그래서 아방가르드의 최고의 적은 이제 계몽주의가 아니라 시장경제라는 이상한 논리를 이야기합니다.
아놀드 쇤베르크라는 사람은 기존의 많은 음악의 역사에서 계속되어 왔던 기존의 작곡법들을 무시해 버립니다. 이것을 무조성 음악이라고 그러는데 대개 음악은 단조, 장조, C코드, F코드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음 기법이라는 새로운 방식에 의해서 반음까지도 모두 그 체계에 넣어서 소위 이야기하는 ‘도미솔, 도파라, 시레솔’ 하는 이런 으뜸음의 개념들을 다 뭉개 버립니다. 처음에 이 음악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림에 무엇이 나오느냐하면 봄의 제전이라는 발레가 나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함께 나진스키라는 안무가가 만든 작품입니다. 그 당시에 굉장히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이 스트라빈스키는 19세기 말에 태어난 러시아 사람입니다. 이것이 발레와 함께 연기되는데 거기서 뭔가 희생 제사에 소녀를 바치고 거기에서 그 소녀가 피를 흘리고 죽고 하는 아주 유혈이 낭자한 그 시대로써는 상상하지 못했던 아주 기괴한 장면들을 연출해내고 음악도 완전히 불협화음을 사용해서 이상하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깨는 것입니다. 여기서 맨 처음에 안무가 시작될 때 사람들이 막 휘파람을 불며 조롱하는데 한쪽에서는 열광하는 것입니다. 양쪽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경찰이 동원됩니다. 그때에 이 스트라빈스키가 ‘이게 바로 내가 의도하던 바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기존에 없었던 무질서와 파괴가 도입되었을 때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격식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보면 백남준씨 작품이 나오는데 제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입니다. 이게 1960년대 초기 대표작품입니다. 이게 행위예술인데 이 사람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방가르드 예술가입니다. 그래서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라는 작품을 1960년에 만들면서 이제 두 대의 멀쩡한 피아노를 도끼로 때려 부수고 자기의 정신적인 스승을 앉혀놓고 샴푸를 들이부어서 머리를 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의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서구의 부르주아적 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인 이 피아노를 때려 부숨으로써 기존 서구 질서에 대한 반항, 그리고 이것에 대한 파괴적 극복을 시연해 보이는 그런 시도를 한 것입니다. ‘다다익선’이라는 1980년도의 작품은 1003개의 모니터로 이루어진 작품인데 개천절을 의미하는 이런 식의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간딘스키라는 추상화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수학과 음악, 과학 이런 것을 미술에 결합시키면서 그러면서 무엇인가 추상적인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콘서트 같은 것을 보면 인간의 어떤 정신이 커다란 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방해를 하는 이런 상징적인 작품을 그리는데 자기 이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이런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소통하고자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내면의 어떤 것들을 표현하고 발출해내는 그것으로써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들이 특별히 무슨 구분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뉴턴주의가 일어나고 계몽주의가 물 건너가면서 낭만주의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게 사실은 계몽주의적인 세계관이 그리 오래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계몽주의의 영향이 계속되고 있지만 계몽주의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결국은 이 객관성을 중시하던 고전주의 철학에 반발해서 이 모든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이성, 이것을 지배하고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인간의 주관성에 오히려 더 강조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의 정신작용 중에 이성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에 더 귀를 기울여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8세기 말에 계몽주의와 기계론적 세계관에 반대하면서 일어난 사조가 바로 그 유명한 낭만주의 운동입니다. 그래서 낭만주의에서는 이성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이 세계와 맞부딪히고 자연의 세계인 아름다움의 요소와 맞부딪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희열과 쾌락을 중시하게 되면서 사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위한 중요한 정신적인 모태적인 작업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다원주의가 전체적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종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다원주의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이비드 웰스 박사가 말하는 것처럼 도시화가 되면서 인간이 완전히 비인간화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동네에 살면서 위 어른, 옆의 친구, 이웃집 아저씨 다 친척관계입니다. 동생 누구누구, 자기의 서열이 분명합니다. 거기는 온갖 책임과 의무 이런 관계들로 얽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업이 발달하면서 도시로 몰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익명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옆에 있는 아파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그냥 가서 일해서 노동의 대가를 받으면 그것을 가지고 나 혼자 소비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물질주의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인간의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공통된 무엇을 찾아간다는 개념이 없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즐거워하느냐에 의해서 인간의 행복이나 모든 기준들이 다 주관화 되어 버리고 내재화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모든 가치들이 다 주관화 되어 버리고 이제는 어느 하나도 절대적으로 따라야할 신도 없고 공통된 가치도 없고 도덕도 왜 그렇게 꼭 지켜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제는 별로 원하지도 않고 그런 것을 늘어놓으면 짜증내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의 도움 없이 도덕교육이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오늘날의 도덕문제를 가지고 개탄을 하는데 이것은 호전될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호전될 가능성도 전혀 없습니다. 무엇인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세상사는 것이 굉장히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병, 우울증, 그런 것뿐만 아니라 도시화에서 오는 인간소외감, 그런데서 오는 외로움,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분출하듯이 향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외국에 성매매 수출하는 것 때문에 전 세계에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성매매를 단속한다고 창녀촌을 없애고 철퇴를 내려치니까 그 지역에서는 없어졌는데 이런 것들이 국내에서 견디다 견디다 돈벌이가 안 되니까 해외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전부 다 그런 방면으로 한국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로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심각합니다. 특히 개도국에 있어서 이런 사상들은 너무너무 심각합니다.
Ⅲ. 삶의 지혜로서의 기독교
A. 초기 기독교 신앙의 이해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교회에 일주일에 한번 나옵니다. 물론 부지런한 사람들은 매일 나오지만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간들은 이 세상에서 그런 정신을 머금은 사람들과 함께 보냅니다. 이젠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가치관에 상당부분 전염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염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겠느냐는 것입니다. 원래 이 기독교라는 것은 참된 철학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리겐이라는 교부는 우리 기독교신앙을 ‘우리의 철학’이라고 말했고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우리의 완전한 철학’이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에 의한 철학’이라고 말했고 ‘예수 철학’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런 용어를 기독교신앙에 대치어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 기독교신앙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천국을 가고 복을 받는 이 단선적인 것들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리고 하나님,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이 모든 세계와 관계를 맺는 우리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것이라는 것을 이 교부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그때는 기독교가 나오기 전이니까 유대교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디아스포라들이 아주 현란한 그리스문명을 보면서 유대교에 대해서 아주 미개한 종교라는 자책감을 가지면서 자꾸 헬레니즘으로 동화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아니라 우리 유대교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이야말로 최고의 철학이고 플라톤도 사실은 그 위대한 사상을 모세오경을 통해서 배웠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이 작품을 쓰면서 그 헬라화 되어가는 이 유대교 교인들을 향해서 활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빠뜨리오스필로소피아’ 라고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유대교를 ‘우리 조상들의 철학, 우리 조상들의 예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장끌레르 라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의 철학적인 전통은 중세시대와 수도원운동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원래 참된 철학으로 이해되었고 종교 개혁자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계몽주의시대까지 계속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래서 피터마터 버미글리 라는 16세기의 개혁신학자가 있습니다. 칼빈과 동시대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책을 쓰는데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을 씁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윤리학 교과서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해설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거기에서 거론하고 있는 윤리적인 담론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담론들을 해설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잘못 이해한 것을 기독교적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16세기 17세기의 신학자들에게 흔히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 복음에 대한 것들이 약했느냐하면 약한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모든 철학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제가 ‘복음지혜와 성령’이라는 시리즈에서 여러 번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설교했던 것입니다.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면서 이 모든 철학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이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구절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이 장성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내가 철학을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 철학은 세상의 철학이 아니라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철학도 아니다. 그러면 누구의 철학입니까? 하나님의 철학입니다. 그 하나님의 철학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뭐냐? 죄를 범해서 도저히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아들을 사람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 피 묻은 복음으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시는지 하나님의 지혜였고 이것이 하나님의 철학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어떻습니까? 이런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고민하기에는 눈을 뜨면서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과다한 업무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두 사람이 가면을 쓰고 만나고 있습니다. 뒤에는 무엇을 들었습니까? 칼을 들었습니다. 인간관계 자체가 서로 이용해먹는 관계입니다.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시달리는데 정말 인간은 외로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냥 많은 것을 향락하고 누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여자는 돈으로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입니다. 돈으로 목욕을 하면서 지금 비싼 포도주를 마시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진짜 인터넷은 대단합니다. 벌써 2년 전 이야기인데 전 세계에서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CD에 담으면 CD를 쌓아놓았을 때 달나라까지 간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해마다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에 제가 1990년대에 교수님댁을 놀러갔는데 교수님이 새로산 노트북을 꺼내면서 자랑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거 내가 새로 산 것인데 너희들 한번 볼래?’ ‘그게 뭐에요?’ ‘노트북인데 이게 미국에서 내가 새로 사왔다.’ ‘그런데요?’ ‘이게 저장용량이 어마어마해! 80메가야!’ 그런데 여러분들이 웃습니다. 그때 보통 20메가였습니다. 내 노트북이 20메가 짜리였습니다. 배터리 대기시간 20분이었습니다. 상상이 안 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KT에서 개인에게 50기가씩 주어버리는데 그 당시로써는 상상도 못할 숫자입니다. 그런 속에서 조금만 뭔가를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지 않으면 정보에 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매달려서 막 미친 듯이 인터넷과 씨름을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이동을 하면서 계속 합니다. 동창회에 모여도 사회자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밥을 먹고 밑에서 이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모아만 놓으면 각자 놉니다. 혼자서도 잘 놉니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기만하고 뭔가 가치 있는 깊은 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서른네 번 아이 폰을 확인을 한답니다. 또 거기에 소녀시대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외모중심의 대중문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자기와 거울에 비춰보면서 ‘역시 나는 안 돼.’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는 저렇게 쭉쭉 뻗은 각선미와 예쁜 얼굴을 자랑하지만 나는 마음으로 승부 할 테야.’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때만해도 이런 식으로 어떤 것을 보고 ‘누구는 너무 예뻐 나 걔한테 반했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수치스러웠습니다. 친구들끼리 마음에 품은 것을 그렇게 말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그때는 좀 나았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애들이 머리에 든 것이 없는 애들도 문학전집을 늘 가지고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는 그래도 뭔가 든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모여서 토마스 하디의 테스가 어쩌고저쩌고 이야기하면 돌아올 때 애들이 너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날 도서관에 가서 토마스 하디의 테스가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입니다. 왜? 너무 쪽팔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때 인기 있었던 책이 뭐냐 하면 세계문학전집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이 두꺼운 것 한권을 세 페이지 정도로 요약해서 요만한 것 한권을 읽으면 수십 권을 읽은 것처럼 폼 잡을 수 있는 책이 나오는데 불티나게 팔리는 것입니다. ‘가야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에 누가 나오더라!’ 그러면서 줄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름만 따와서 중얼대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도 안합니다.
여러분 레이디가가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스물여섯 살을 먹은 여자인데 이 사람을 놓고 세미나를 할 정도로 올해 4월에 이 사람이 와서 전 세계를 돌면서 세계투어를 하는데 한국에 들렀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벌어들이는 수입이 가히 세계 기록을 세울 정도로 돈을 쓸어서 가지고 갑니다. 이 사람이 사탄숭배자니 아니니 그러면서 생난리인데 뭐 사탄숭배자까지는 아니고 양성애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나는 남자친구가 있을 때에도 여자에 대한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고하는 양성애자입니다. 그리고 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반대를 합니다. 그러면서 양성애자인 동시에 상대주의자이고 이런 사상들을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모피처럼 보이는데 모피가 아니라 생고기입니다. 생고기를 얇게 저며서 옷을 만든 것입니다. 소고기 빛깔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걸치고 비키니 차람으로 피아노를 치고 그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현대 사회의 모순입니다. 결국은 이런 속에서 우리도 흔들리고 살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자녀들이 다음 세대에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들이 만약에 정확하게 도대체 상대주의가 무엇이고 왜 이 세상의 정신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도 이러한 세상의 조류 속에 함께 섞이면서 흘러들어가면서 우리도 그런 사람의 일부가 되어서 살다가 그냥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막 갈 데로 가지만 우리는 멈칫멈칫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왜? 매주일 교회에 오면 그러지 말라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왜 멈칫멈칫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Ⅳ. 현대사회와 교회의 사명
A. 사상적 체계를 갖게 함
그러니까 정말 언제든지 그랬지만 오늘날이야 말로 진짜 여호수아24장에서 여호수아가 외쳤던 그말 ‘강 건너편에서 조상들이 섬기던 그 우상을 너희들이 섬기든지 너희들은 오늘날 섬길 자를 분명하게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노라.’ 했던 그 신앙고백이 절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세상이 좋으면 믿지 말아야하고 그리고 나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내 인생의 또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절대적인 도덕적인 기준과 가치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정신이 마지막에 이렇게 자기의 자유를 주장하고 하나님 없는 자유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절망입니다. 그런 마지막이 결국은 욥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는 그것이 마지막 비참한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이런 때야말로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해서 그리고 불신앙하는 이 세계를 향해서도 우리가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신앙의 열심이라는 것이 손바닥이 피가 나도록 박수치고 그 다음에 그저 아무생각도 없이 자기의 종교적인 열심에 들떠서 이 세상일들은 아무렇게나 되든지 상관없고 이 속에서 그냥 자기 스스로의 종교적인 즐거움에 심취해서 사는 이런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했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에서 목구멍에 피를 머금고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은 장난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장엄한 자기선언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죽기까지 예수를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겠습니다. 선교를 나가겠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를 따라서 사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그렇게 따라 살아야 할 주의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습니다. ‘성경이 있으면 되지!’ 누구는 성경이 없습니까? 이단들은 그럼 성경이 아닌 국어책을 들고 예배를 드립니까? 사회책을 놓고 기도회를 합니까? 그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진리를 최종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그리고 마음먹는 것과 그리고 사랑하는 것, 미워하는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가치의 체계를 그 도덕적인 근거위에 세우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하나님 앞에 해명할 수 있어야하고 왜 이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지를 우리의 삶으로 고백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상대주의가 유행하고 기독교의 절대적인 가치가 뭉개지는 시대에는 어쩌면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을 걸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는 이것은 순간순간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 결단이 없이 무엇인가 자기만 행복하게 하고 자기의 행복에 도움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 기독교를 접근하면 그 사람에게는 이 기독교신앙의 본질이 절대로 발견되지 않고 자신도 행복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인간이 연약할 뿐이고 그리고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누구는 깨끗한 사람이 있느냐는 식으로 그렇게 뭉개버리는 마음을 가지고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1. 중생과 참된 회심을 경험하게 함
그렇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중생과 참된 회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이 중생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회심을 회심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회심은 회심 하나만이 아니라 이 회심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우리에게 매일매일 새로워져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나 같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위해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지 않고는, 그래서 예수의 새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고는 여러분들이 이런 강의를 골백번을 들어도 여러분들이 이성적으로 설득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절대로 이 기독교가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죽어있는 시체가 오늘 이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을 보고 이 골짜기를 흐르고 있는 숲속의 아름다운 냄새를 맡고 즐거워하는 것만큼이나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2. 경건의 비밀을 알게 함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한번 하나님을 믿고 회심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그 회심이 우리 속에 반복되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른눈을 가진 성도의 눈에는 천국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가 당장 눈앞에 있는 이 현실을 희생해서라도 저 세계 너머에 있는 무한하고 영원한 하늘의 가치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이것은 우리가 영원의 세계를 매순간 지각하는 현실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하는 이 감화 없이는 우리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인 이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생각보다도 우리는 거기에 마음이 굉장히 많이 매어있고 이것이 현실적인 그냥 이익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경우에 따라서는 파멸하고 목숨을 잃고 핍박을 받고 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이것은 정말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없이는 우리들이 하늘에 있는 가치를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소욕을 죽인다든지 그 영원한 하나님의 판단을 의식해서 이 현재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이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남이 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 손가락질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그렇게 못합니다. 결국 우리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제일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성경의 특별계시여야 합니다. 그 성경을 우리의 믿음과 삶에 유일한 원칙으로 생각하고 나의 모든 삶을 이 성경 위에 세우고 나의 모든 사상을 이 성경 위에 세워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예배에 은혜를 받으며, 성경을 사랑하고 읽고,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고 회개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지금도 새파랗게 살아있어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고, 우리의 아는 바와 믿는바 우리의 살아가는 바와 생각하는 바를 진리의 칼날로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세상과 단절된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내게 아무리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타협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에 의해서 매순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결정된다고 하는 장중한 신념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했을 때 다시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이것이 인위적으로 노력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무리 많이 가르쳐주어도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견고한 삶을 사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성경에 대한 집착과 함께 그 다음에 일반계시, 이것을 관계를 이해하면서 그러면서 이 지식의 폭을 넓히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이 모든 세계 속에 어떻게 퍼졌는지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것 속에서 하나님은 가장 탁월하시다는 신념을 우리들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이 중심에 놓이고 그 다음에 역사와 신학, 사회와 인간, 자연과 예술에 대한 지식이 함께 확장되면서 그러면서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그 아름다운 원인이 우리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판단하지 않는 것을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거기에 기울어지는 것 그 자체가 죄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그러면서 성경과 교리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이 어떻게 이 자연세계에서도 그 아름다움이 나타나는지 그것 때문에 성경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아름다움이 그것에 의해서 증명을 받아서 겨우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것들을 어떻게 이 모든 세계 속에서 심으셨는지 오히려 그것들의 아름다움으로 성경이 증거되고 진리가 증거되는지 그런 지식의 체계를 우리들이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무리 모든 지식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이 지식이 경건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에 소용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 앞에서 떨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그 대치할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탁월한 경륜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모든 거룩한 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교육을 받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고, 그리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마음이 감화되고 하는 이 경건의 작용들이 이게 사경회 때 한두 번 있어가지고는 안되고 매일 매일 다반사로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유지될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의 빛들을 내가 받아들이면서 그 빛을 따라서 살고자하는 의지가 솟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럽니다. ‘현실적으로…….’ ‘요즘의 세상이…….’ 언제는 현실적이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까? 언제는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도움을 준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향해서 그렇게 담대하게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했던 크리소스톰과 같은 고백을 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B. 윤리적 생활을 실천하게 함
1. 거룩함의 추구와 윤리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윤리적인 생활을 실천해야하는데 이것이 결국은 거룩한 생활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아주 탁월하게 높으신 위대한 분이시라는 엄중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정말 티끌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엎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덕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에 계신 분이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모든 도덕적인 성품의 빛은 완전 그 자체이고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무한한 완전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겸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교인처럼 은사를 좀 받았다고 하나님 앞에 교만해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런 거룩함에 대한 충만한 경험이 우리의 공적인 예배, 그리고 개인적인 하나님을 향한 경건생활, 기도,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제,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 속에 계속해서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속에서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계속 불어넣어지고 그리고 이 속에서 계속해서 거룩함에 대한 열망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게 될 때에 그것이 없이는 그 위에 쌓아올려진 개혁신학이니 뭐니 뭐니 철학이니 모든 것들은 다 줄 떨어진 연입니다. 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철학을 모르고 깊은 신학을 몰라도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다가 큰 은혜를 받고 자기가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하고 나면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상을 모르고 은혜를 많이 받고 매일 매일 회개하며 사는 사람이 복되겠습니까? 아니면 회개는 없어도 매일 매일 철학이나 이야기하고 심오한 사상이나 유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 개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둘 다 붙들고 살아야할 성질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탁월하심 앞에서 그 도덕적인 완전하심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닫는 그 거룩함에 정동이 거기에서 하나님과 인간, 자연, 이 모든 세계들의 배열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는 질서대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정말 기독교 사상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벌써 여러 해 전인데 어느 잡지사에서 저를 취재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런 것도 이름을 내고 그러는 것은 원하지 않는데 그래도 인터뷰를 해주는 것이 불신자들도 보는 잡지니까 선교적으로 도움이 되겠다고 해서 그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 한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는데 그러면서 질문을 하는데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합니까?’ 라든지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까 이야기한대로 계몽주의의 언어로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쭉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는데 그 기자는 불신자였습니다. ‘목사님 제가 종교인도 많이 인터뷰했습니다.’ ‘그런데요?’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아요.’ 하도 황당해서 ‘그럼 내가 누구 같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은 스님 같으세요.’ 남들이 나보고 교만하다고 그럴까봐 그냥 스님이라고 그러는데 그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목사님은 고승같으세요.’ 그때 내가 직감적으로 들어왔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불신자의 눈에 스님들은 철학가로 보이고 목사들은 사업가로 보이는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무엇이 그런 인상의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목사님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면 대부분 사업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업이 나쁜 의미의 사업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선교를 하고, 이렇게 해서 교회를 지었고, 이렇게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사람들이 보기에 무엇인가 이렇게 인생의 깊은 문제들을 탐구해서 무엇인가 자신들에게 답을 전해주는 현자로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체취는 스님들 중에서도 조금 높은 레벨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야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기독교의 목사님들은 그런 쪽으로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똑같은 이야기를 강영안 교수님께 들었습니다. 그분이 벨기에에 있을 때 똑같은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들으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은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회자도 물론 그런 인상을 주었겠지만 사실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무엇인가 자기들이 전도한다고 할 때 영혼에 대한 사랑이 안 느끼면 자기 종교의 뻥튀기로 느껴질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인상들이 과연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일에 정말 도움을 줄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도의 중요성을 굳게 믿고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입을 열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현실적으로 헌신해야하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써 우리들이 모든 것을 충분히 했고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에 ‘The Presents is Best Proclamation.’ 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실존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줄 때 그것이 사실은 진리에 대한 최고의 선포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할 때 그것이 느낌이나 직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배운 이 하나님의 지혜 때문에 나는 이 세상을 이렇게 판단하고 저렇게 생각 할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분명한 태도 이런 것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하게 살고 지금도 사람들은 기독교가 다 무너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조국교회의 구석구석에 정말 내가 무릎을 꿇고 그분에게 배우고 싶은 존경스러운 사람들, 신실한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런 삶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상적인 분명한 근거들을 우리 속에 가지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을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은 이 세상의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이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 그리고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인데 주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에 붙들려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나 같은 인간을 통해서 영원한 세계에 속한 이 진리가 나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증거되는 그런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영광스럽습니다. 그런 영광을 즐거워하면서 소망가운데 우리들이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C. 신령한 은혜를 유지하게 함
1. 지식과 실천, 그리고 은혜
그래서 결국은 지식이 있고 실천이 있는데 이 지식은 사상이고 실천은 윤리입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개혁주의, 혹은 참된 복음주의, 아니면 순교신앙, 이런 등등의 구호들이 무엇인가 자기만의 아주 좁은, 그 자기만이 옳고 나머지는 옳지 않다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인가 옳고 무엇인가 도덕을 추구하고 무엇인가 의식이 있어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싶어 하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데 왜 그렇게 그 속에서 어떤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까? 나는 그 사람만큼 뛰어나지 못해도 그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어떤 이끌림, 그리고 나를 용납해주는 그 무엇,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그 어떤 따뜻한 손, 이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쓰러진 나를 짓밟는다는 느낌만을 받게 될 때 그것이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가치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윤리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고하게 하나님이 세우신 하늘의 가치를 향해 살면서 또 우리는 옆에서 지금은 수없이 쓰러져 가치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대신 쓰러진 그들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아량과 사랑,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쓰러진 자였고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오류에 빠진 자였다. 그 사람의 오류를 내가 받아들여 준다는 뜻이 아니라 오류에 빠진 그 사람을 진리로 건지기 위해서 내가 그와 관계를 갖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고 언젠가 그를 꾸짖기 위해서는 그를 긍휼히 여기고 자비롭게 대하며 선교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오래 참는 사랑으로부터 나오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교회가 어느 한순간 아주 투철한 사상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이데올로기의 집단이 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에도 양보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가치를 최선을 다해 파수하고 그것을 신뢰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눈물로 끌어안으면서 선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것은 매일매일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십자가의 사랑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무한한 사랑의 감화가 우리에게 매일매일 일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 중에 단 하나도 버려야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Ⅴ. 결론
그래서 나는 수많은 철학자의 글을 읽었지만 어느 철학자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개혁신학자들이 훌륭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들의 사상을 오늘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으로 나 자신이 위로와 그리고 자긍심을 느끼는 그런 종류의 신학을 추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훌륭한 개혁신학의 가치를 굳게 붙들고 그들은 17세기에 헌신했고 우리에게는 21세기가 있습니다. 이때에 이런 식으로 상처받고 쓰러진 사람들을 17세기의 신학자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절대적인 가치를 양보하지 않지만 그러나 신앙이 약해서 그 가치를 붙들고 살지 못하고 신앙이 없어서 그 가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끌어안고 선교의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을 끌어안는 동안에 우리도 그 사상에 오염되지 않을지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또 하나는 그 일이 힘들다고 생각될 적마다 항상 그 길은 우리 주님도 걸어가셨던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더럽다고 버리시는 대신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용서하고 재생의 기회를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 아주 흉악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세리와 창기들도 그의 품안에서 쉴 곳을 찾았는데 그들이 한 비윤리적인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이 용납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치열하게 미워했으나 주님은 그렇게 살지 못했던 모든 사람들까지 끌어안고 선교의 삶을 사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아주 탁월하고 놀라운 사랑이 그분의 영혼 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깊이 헌신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배우고 많이 배워서 사상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에 미국에 가서 데이비드 웰스박사와 네 시간 동안을 정말 달콤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도 너무 행복해하셨습니다. 엊그제 편지가 왔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우리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많은 개혁주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귀를 기울여 들어야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랬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까운 시일에 데이비드 웰스 클래스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것은 당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무한한 은혜의 자원과 놀라운 사랑을 어떻게 이 세상에 흘려보내야 할지에 대한 지혜를 당신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언젠가 실행에 옮길 것이고 그래서 그의 4부작부터 공부해 가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이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인가 다른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이라는 것을 매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입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의 기록들을 피로 써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례자의 삶입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그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리처드 먼로 개혁신학자 그분은 우리 교회의 집회를 끝내고 가시면서 그러셨습니다. 뭐냐 하면 ‘이러한 개혁신학이 이렇게 많은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데 이것은 우리들이 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성령의 역사가 이 회중들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아직도 이 완고한 세상에 비춰보면 충분하지 않고 사회의 곳곳에서 우리들이 성공도 하지만 실패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더 많이 고난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성령의 역사가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열고 주님이 부어주시는 충만한 은혜의 역사, 탁월한 지식을 갖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는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충만한 신적인 사랑이 필요하다고 어린아이처럼 울며 매달리는 성도들의 애달픈 몸부림치는 이 기도가 있는 이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당신을 사모하는 백성들에게 충만한 기름을 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이 교회에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속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힘들고 외롭고 때로는 하나님의 기대에, 조국교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아주 미력이나마 역사가 많이 흘러가고 난 다음 평촌에 있는 어느 작은 교회에서 이렇게 어두운 세상을 한줄기 빛으로 살고 싶어 몸부림치던 목회자와 그리고 그와 함께 예수를 따르던 성도들이 있었다는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교회에 보내신 목적들을 실현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하나님 앞에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나는 이 아름다운 6월의 산상세미나의 마지막 장을 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