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울림 5장
녹취자 : 김세나
제 5장 우리에게 행하신 일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으려 한다면 그의 영혼은 병든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만납니다. 삶과 생활의 질서가 우리 원하는 대로 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기뻐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기쁨이 너무나 커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쁨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움직여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입니다. 신앙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섭리로써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사물들의 질서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대신 그것을 움직이신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보며 기뻐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들이 전해주는 작은 선물을 받고 선물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자녀들의 마음을 읽으며 기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놀라운 은혜가 현재적으로 경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신자가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감격 속에서 살도록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실재로 그 신자가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셨을 때 의도하는 바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일치를 방해하는 신학적인 요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것이 구원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의 영향이 구원에 관한 성도들의 이해를 삼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관심사는 너무나 개인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도 자신과 관련된 일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복음적인 신앙의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에 접붙여집니다. 이미 교회에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공동체로 진입한 사건입니다. 그 몸이 늘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의 구원은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리스도께 함께 접붙여져 그분의 생명을 공동체로서 누리는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셨고 그리스도가 되신 그곳에 삼위 하나님이 계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소명을 위해 분투하는 공동체의 삶에 신자는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한 지체가 된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는 순간 우리는 이 땅에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반드시 도래하게 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 속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그리스도인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계획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신 원리를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원리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단순한 신앙의 원리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구원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들은 신학적으로 바른 길을 이탈하게 됩니다. 어떠한 신비한 경험을 통해 예수를 만난 간증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그 사람이 어떠한 헌신과 그리고 수고로서 섬기며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모든 삶이 우리를 구원하고 교회의 한 지체로 삼으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지혜를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의미를 올바르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어떻게 하나님과 세계,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울림은 바로 이러한 질서 잡힌 삶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러한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결국 우리의 삶은 이 세상 사람들과의 삶과 다른 방식일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삶의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들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행하신 일
우리는 종종 교만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그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해가는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덕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덕을 선포하는 일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두움에서 불러냄
사도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눈길을 끈 단어가 있습니다. “어두움”이라고 번역된 단어 “skotouV”(스코투스)입니다. “skotouV”(스코투스)는 성경에서 ‘어두움’, ‘흑암’을 나타내는 단어들 중에서도 그 의미의 폭이 매우 넓은 단어입니다. 사도베드로가 이러한 단어를 일부러 선택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skotouV”(스코투스)는 빛이 없는 물리적인 어두움, 신령한 뜻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 지성이 부족해서 사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어두움을 뜻합니다. 때로는 어둡게 만드는 세력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바로 이러한 어두움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이고 지성적인 어두움 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을 어둡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로 이러한 어두움으로부터 불러낸바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우리를 그 어두움에서 불러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는 어두움의 자식들이었고 그 어두움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석과 같이 여기신다는 놀라운 증거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이 어두움은 크게 지성적인 어두움, 영적인 어두움, 도덕적인 어두움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지성적인 어두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성적인 어두움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린도전서 4장 5절) 이 말씀에서 “감추인 것” 그것이 어두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감추고 계시니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쓴 편지의 수신자들도 한 때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 세계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인간이 누구인지 올바르게 알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지성의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아는 것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무지위에 짜깁기한 이야기들로 엉성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위에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의 마음대로 사는 삶을 고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생관이 우리를 참 인간으로 살기에 충분하였습니까. 그러한 우리의 세계관으로 하여금 이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까. 그래서 우리 자신도 행복하고 우리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까. 만일 그랬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계와는 물론, 사람과는 물론, 나 자신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복음의 소식이 우리에게 들려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를 그러한 죄의 결과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고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에 어두움을 물러나게 해 주셨습니다. 예전에는 믿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을 믿게 해 주시고 알수 없었던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이 세계의 의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의미, 심지어는 나 자신의 의미까지 깨닫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성에 밝은 빛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게 되었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미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해 놓으셨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 우리의 삶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결코 배반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대해 일부만을 알았을 뿐이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라도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실물이 아닌 구리로 만든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예전에 비하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났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눈에 비늘을 벗겨주셨고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을 안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기에 충분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신학을 탐구함으로써 우리의 지성의 어두움은 물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그 지식 안에서 자라나고 그 사랑 안에서 자라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지성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석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 어두움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지성적인 어두움과 영적인 어두움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빛은 반드시 지성의 빛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어두움은 지성의 어두움보다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의 눈이 열려 예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안다는 것은 대부분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사물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을 실어 나릅니다. 보고 듣고 감촉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이 모든 감각들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정보들을 실어 나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체계적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각각 구분이 되어 축적되어 갑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새롭게 만나는 사물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세계는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성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성만으로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앞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보혈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성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먼저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내어 빛으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린도후서 4장 4절)고 말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세상의 마귀가 그 찬란한 복음의 광채를 우리 영혼에 비치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으로서 이러한 영적인 측면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영적인 어두움이 복음의 광채를 가로막고 있을 때 물리적인 빛을 아무리 내리쬔다고 할지라도 그 영적인 어두움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어두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연인은 영적인 세계에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껏해야 귀신들의 이야기나 공상 속에 나오는 영들의 세계에 대해 막연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자연인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때 조차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 하나님이 자기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는 막연히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양심의 가책을 유발할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구원의 길을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맹인 가운데서도 시신경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밝은 장소에서는 빛이 뿌옇게 비치는 것을 느끼고 어두운 집안으로 들어가면 어두움이 내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완전히 무감각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분별할 수 없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인의 처지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 리가 없습니다. 그 분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그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씻을 수 없는 죄에 대해서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신령한 빛이 비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이 찬란한 영광의 빛을 비춰 주셔서 영적으로 어두움이 물러가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성도 우리의 삶에 필요한 합당한 지식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빛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획득한 지식들을 끊임없는 기도와 탐구 속에서 성장하게 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영적인 빛의 비춤을 받는다는 것은 천지창조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질료를 만드셨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생각해 보면 빵을 위해 먼저 밀가루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 질료의 상태가 바로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첫 번째 창조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빛”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 1장 3절) 이 질료들로부터 빚어진 실제적인 피조물이 바로 빛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등지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영혼에게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영적인 빛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향한 재창조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인간들이 더 이상 어둠속에서 사단의 권세에 얽매여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게 될 때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바로 이 영적인 빛입니다. 이로 인해서 신령한 세계에 대해 절망적일 정도로 희미한 감각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아니지만 신령한 세계를 뚜렷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할 정도는 충분하게 그 빛을 주셨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전에 그 영적인 어두움 속에 살던 때의 사람과 이제 영적인 빛 안에 사는 사람의 처지가 비교할 수 없이 놀라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가장 우선적인 의미는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영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나 영적인 빛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보물들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어두움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덕적 어두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도덕적인 어두움은 영적인 어두움, 지성적인 어두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적인 어두움과 지성적인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생겨나는 삶의 어두움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어두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주인삼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모든 도덕적인 어두움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없는 사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정죄는 이것이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3:19)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분을 미워하였습니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진리가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그들에게 훨씬 만족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면 자신들의 행위가 정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대비하여 성도들의 바람직한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단정하다.”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로마서 13장 13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정하다.”는 것은 예쁘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름다운 값비싼 옷을 입거나 장신구를 해서 사람들의 눈을 끌어 아름답게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정함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흠잡을 데 없게끔 질서가 잡혀 있고 예의범절과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인상이 바로 단정함이라는 인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단정함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질서가 잡힌 삶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있고 이웃을 향하여 마땅히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자연의 세계를 향하여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 각각 그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본분을 다하며 살아가는 단정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과 영혼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질서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세계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따라서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사용할 것은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용해야 할 목표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적 사이를 구분할 줄 아는 질서 잡힌 삶이 바로 단정한 삶입니다. 이러한 단정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향한 존재의 울림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심각한 도덕적인 어두움을 보십시오. 이러한 도덕의 개선을 위해 애쓰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단정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윤리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향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 사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의 삶을 살면서 자신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 속에서 그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빛으로 들어가게 함
우리를 어두운 데서 건져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빛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빛은 영적인 빛이며 빛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어두움에 갇혀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귀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단지 먹고 입고 마시고 쓰며 자신의 육체를 생존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이 뜻하신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성의 가치가 있습니다. 단지 목숨이 붙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 번역은 헬라어 성경에서 “eiV to qaumaston autou fwV”(에이스 토 싸우마스톤 아우토 포스)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그 놀라운 그 빛 속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치사 “eiV”(에이스)는 ‘into’의 뜻입니다. 종말론적인 진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빛은 우리에게 생명과도 같습니다. 이 빛 때문에 우리들이 눈을 떠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을 비춘 사람이어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왜 창조하셨는지 알고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될지에 대해 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받은 사람들은 현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빛을 받은 현자들입니다. 물론 이 빛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는 더욱 찬란한 빛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얼굴을 마주 대하며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명백해 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빛은 오늘날 우리가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으며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정통신앙을 버리고 이단으로 가면 그가 이단자가 된 분명한 표가 있습니다. 이교도들에게는 이교도들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어떤 증거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지혜의 빛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소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렇게 그 자신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온 사람으로서 자기를 건지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선포하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외경 클레멘트 1서 36장 2절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전적 고백이 나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어리석고 어두운 총명이 빛을 향하여 피어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총명의 개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외경 바나바서 14장 5-7절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자는 이방의 빛이 되게 하며 눈먼 자를 보게 하며 족쇄에서 끌러주며 어두움에 앉았던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며.”라고 말합니다. 즉, 불신자를 향한 복음의 전도는 이 빛을 나누어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빛을 나누어 받아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또 다시 이방인들 중에서 빛이 되어 또 다른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모든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자녀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진 사람들이고 또 그 빛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단지 그 자신이 빛 안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되지 않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빛을 전파하여 그들도 그 빛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빛은 존재의 울림으로 나타납니다. 그와 마주하던 사람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 지식의 빛을 충만히 누리면서 사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 빛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마음이 뛰고 어린아이처럼 행복할 때 그는 그 빛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아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들고 빛으로 나아가게 된 사람들의 체험을 들으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는 미개한 시대였기 때문에 복음이 새롭게 들렸을 것이지만 지금은 사상과 철학, 지식이 넘쳐나는 개명한 시대인데 복음 같은 것들이 우리를 감동시킬 리가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많은 위대한 철학과 어깨를 겨루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었습니까. 수많은 질문들을 제시하고 뒤에 오는 철학은 앞의 철학을 파괴하며 끊임없는 자기 부정 속에서 발전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철학이 준 빛이 무엇이었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불안한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철학의 빛이 아니라 참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이처럼 이 모든 인류에게 빛이십니다. 그래서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약속하는 그러한 사탕발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웅장한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이 진리의 빛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존재의 울림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목회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삶을 살 수는 없고 그것이 꼭 행복하고 복된 삶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이 충만한 복음 진리의 빛이 우리 자신을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단정한 삶을 살게 하고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찬란한 빛을 나누어 주어 그 빛 아래서 살게 할 때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이 빛이 충만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을 벗어날 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공부는 우리에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습니까. 날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는 기쁨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충만한 기쁨 속에서 사는 것은 곧 빛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충만한 은혜와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 자율적인 존재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빛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해 한 없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더욱이 우리가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입니까. 진리를 알고 그 진리로 말미암아 기쁜 사람은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진리 때문에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충만한 빛 안에서 현실적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사단의 영적인 권세는 완전히 무력화되었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우리를 그 모든 얽매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속박을 느끼고 영혼의 억압을 느낄 적마다 어마어마한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운명처럼 매여 있던 모든 영혼의 쇠사슬과 속박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곤고한 영혼을 위해서는 근심하지 않습니다. 애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도움을 받음으로 물질과 건강의 복을 구합니다. 그것들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무엇인가 속박당하고 있다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면 자신들은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며 믿음을 지키고 살아갈 때 모든 것을 누리고 형통할 때 오히려 불행하게 느껴진 적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를 통한 자유는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살 수 있을지를 말해야 합니다. 더욱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편견이나 옳지 않은 속박, 이러한 것들로부터 어떻게 우리가 자유롭게 될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억압들을 우리들이 끌러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또 다른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지 그 자유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 놀라운 가치는 바로 자율입니다. 인간 바깥의 절대적인 진리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스스로가 주인 되는 것이 자율입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율은 자신이 모든 삶의 원천이나 목표,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자율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렇게 살아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자율은 이런 종류의 자율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율법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러한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바로 사랑의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의 통치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다음 고아처럼 내던지며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구원해 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친절히 우리의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의 신앙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에 붙들려 살아가는 자율을 강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신율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율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교육하여야 합니다. 예전에 우리는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으로 짓밟힘을 당해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랑의 강제력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속박 받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강제력은 언제나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줄이 우리를 굳게 잡아매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 빛 가운데 거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를 통치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로서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였습니다. 그가 쓴 「명상록」은 로마의 고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세비우스의 교사회사에는 당시 박해가 심하였던 교회 남부 비엔나의 상투스라는 집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상투스는 모든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그를 심문하는 자들은 “상투스로부터 어떤 민족인지 어느 나라인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오직 그 모진 심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말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