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다니십니까?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도망 다니십니까?(욘1:1-3) 2000.1.11 새해말씀사경회(오전) 1
2. 풍랑을 만나셨습니까?(욘1:4-10) 2000.1.12 새해말씀사경회(오전) 17
3. 회개하는 요나(욘2:1-10) 2000.1.14 새해말씀사경회(오전) 29
1. 도망 다니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외모나 우리의 공로를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같이 사랑하셨을까? 이렇게 쓸모없는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이 많은 축복을 주셨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고도 당연히 은혜 줄 사람에게 주셨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은혜 속에 깊이 들어 가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깊이 체험하면 한 사람일수록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요나서는 우선 4장으로 되어 있는데 길이는 긴 성경이 아니지만 다른 성경에 비해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우리가 하는 짓이 요나하고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공감이 많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요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이야기이고 또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요나서는 4장으로 되어 있는데 아주 외우기 쉽게 1장은 도망가는 요나, 2장은 회개하는 요나, 3장은 전도하는 요나, 4장은 배우는 요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장은 도망가는 요나입니다. 여기에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다. 라고 했는데 이 때는 언제인가 하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 시대입니다. 역사로 따지면 주전 760년 쯤 됩니다. 그 때에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남 왕국은 세력이 아주 약화 되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은 오랜만에 아주 세상 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왕을 한사람 만납니다. 여로보암2세라고 하는 왕인데 이 사람이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산업면에서 아주 탁월한 수한을 발휘 하면서 40년이나 북 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러면서 전쟁에도 능해서 여러 나라들을 복속시켜서 최고의 판도를 만들고 강성한 나라를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신앙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적으로 볼 때는 영명한 군주이었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는 그렇게 경건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한나라는 그 지도자를 따라갑니다. 지도자가 신앙이 없으니까 나라는 융성하였지만 백성들 전체가 신앙에 가치에 대해서 신앙에 가치에 대해서 우습게 생각하는 풍조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데다가 나라가 잘 살고 부강하니까 사람들의 가치관은 점점 세속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잘사는 것만 너무 좋아하면 안 됩니다. 잘 사는 것은 좋은데 잘 사는 것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신아이라든지 국민정서들이 함께 성숙해 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보면 갑자기 돈 벌어서 벼락부자가 되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치고 행복한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같이 성숙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런 사항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나라가 하나 있었습니다. 앗수로라는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이 역사 시간에 배우는 앗시리아라는 나라입니다.
그 앗시리아라는 나라가 결국 이스라엘을 이 때로부터 40년 정도 후인 722년에 사마리아를 쳐들어 와서 완전히 함락을 합니다.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영 영 사라지게 됩니다.
앗시리라는 여러분들이 지도를 보면 지중해가 있고, 지중해 연안에 붙어 있는 여러 도시들이 있고, 그 밑에 이스라엘이 있고, 요단강이 있고, 건너편으로 해서 저쪽 중국 쪽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서남아시아 쪽에 큰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곳이 앗시리아입니다. 니느웨는 바로 그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앗시리아는 이스라엘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굉장히 강한 나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강한 나라 앗시리아의 침공을 수시로 받아서 이스라엘은 괴롭힘을 받았었습니다.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치고 들어오면 남쪽으로 유다를 거쳐서 애굽 쪽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고 지중해를 건너가면 지중해를 제패할 수 있는 입지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이스라엘이 있다. 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그곳을 공격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은 위로는 성경에 나오는 다메섹으로부터 공경을 받고, 밑으로는 남 왕국 유다하고 안 좋은 관계이고 그리고 옆으로는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남 왕국은 이제 눌렀고, 북쪽에 있는 다메섹은 그 나라 안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항 때문에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못 되었는데, 이 옆에 있는 강대국인 앗수로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수시로 침공을 해서 고통을 주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데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여호와의 말씀을 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하셨다. 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선지서 시작의 공통 적으로 나오는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는 은혜 체험의 사건입니다. 이는 단순히 “너는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해라 그 말씀만 임했다. 라는 것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할 때 그 처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이 선지자는 커다란 성령과 진리를 동반한 큰 은혜 체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놀랍게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그러한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 그런 것 없이 어떻게 선지자 상역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당시 선지자 사역이라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놓고 하는 사역 이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전하여야 하고 그 말씀을 전파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거나 고난을 받아도 그대로 감당해야하는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헌신 되지 아니하고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을 바꿔 놓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셔서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다. 라고 하는 이것은 평범한 한 가정의 아밋대의 아들이었던 이름 없는 요나를, 원래 요나라는 말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그 요나를 이제 선지자 요나 바꿔 놓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 특별하고 큰 은혜를 하나님께서 이제 요나 선지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은혜는 그저 주시는 것이지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사명이 함께 따라 옵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계속 유지하고 증진시키면서 사느냐? 그 은혜를 소진 시키면서 사느냐? 라고 하는 가장 결정적인 강권이 뭐냐 하면 주님이 주신 은혜와 함께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을 따라서 사느냐? 안 사느냐? 그것이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 하느냐? 못 간직 하느냐의 커다란 강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은혜를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그런 것 뭐 하게 줘요. 난 싫어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왜 여기 나오셨어요. 오늘 교회에서 점심도 안 해 주는데 왜 나오셨어요. 금이나 은 혹은 밥 떡을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온 여러분들이 무엇으로 가장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잘 생긴 설교자를 만나고 가면 만족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간절한 바램, 그리고 유일한 만족은 무엇인가 하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아닙니까?
주 예수여 충만한 은혜 내 영혼에 부어 소서
주 예주만 나의 힘 되고 내 만족함 됩니다.
그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 받기를 갈망하는데 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은혜를 잘 간직하지 못 하고 얼마 못 가서 다시 또 빈털터리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은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 은혜를 유지 하면서 사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도 아닌데 늘 더 많은 은혜를 원하고 더 큰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데 주님이 주신 그 큰 은혜를 그렇게 쉽게 잃어버리는가? 그리고 “은혜” 라고 하기만 하면 항상 추억 속에 잠기는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은혜가 아니라 “ 옛날에 참 많이 받았는데, 왕년에는 나도 펄 펄 뛰었는데” 그런 생각함 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사명을 따라서 살지 않으니까 은혜가 유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가 꼭 필요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은혜를 더 하시고 그 은혜가 유지 되게끔 하십니다. 그러니 은혜를 다 잃어버렸을 때에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이 사명의 자표도 은혜와 함께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도 잃어버리고 고갈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평범한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선지자 요나로 바꾸어 놓는 큰 은혜를 하나님께서 물 붓듯 부어 주셔서 놀라운 은혜의 사람으로 만드시자마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쳐서 내가 너에게 전하는 그 말을 외쳐라. 사명이었습니다.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흔해 주시지 않은 특별한 의무를 특별한 은혜를 하나님이 물 붓듯 부어 주셔서 완전한 새 사람 새 사명을 가진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크신 은혜를 한번 기억 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 주님을 크게 만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경험해서 이제는 지울 수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기억이 가슴에 아로 새겨진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은혜 생활을 한다고 하고 교회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 때 주님과 나눈 어떤 그 특별한 사랑 물 붓듯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가 이제는 추억 속에 아련하고 지금은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왠지 건조하고 메말라 버린, 은혜가 사라진 신앙생활, 그런 생활을 하면서 옛날을 그리어 하는 분들 여러분 주에는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특별한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왜 주셨을까요? 처음에 여러분들을 만나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어두운 여러분들의 영혼에 진리의 찬란한 빚이 깃들여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하시고 전에 차마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하시고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셔서 주님의 크신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어 주셨을 때 즉각적으로 그 은혜를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큰 은혜를 체험 할 때마다 우리에게는 항상 우리가 은혜 받은 것보다 더 분명하게 사명이 떠오릅니다. 이제껏 까지는 내가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는데 주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까 “아 나에게 이런 사명이 있었구나! 그리고 이런 일들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 놀 납고 특별한 은혜를 내게 베풀어 주셔서 어두움 속에서 나를 건져 내셨구나!” 그것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 커다란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대로 제대로 살지 못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계속 은혜를 주셔서 이제껏 여러분들이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간헐적으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그래도 거미줄 같은 신앙이나마 붙들고 이제껏이나마 살아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뒤에 숨겨져 있었던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큰 은혜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한번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셨던 사명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명대로 살았습니까? 그리고 그 사명이 처음이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처럼 여러분들에게 여전히 소중하게 생각되어 왔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졌을 때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주님이었을 때는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생명보다도 더 소중 했습니다. 내가 살아서 내게 맡겨진 사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죽어서라도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이 성취 된다면 기쁘게 죽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때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아직 없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주님의 은혜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됩니다. 이 세상에 하다못해 길 가에 구르는 조약돌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목적 없이 만드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또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죽어 있는 우리를 주님 알게 하셔서 사랑하게 하시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셔서 남들에게 알려 주시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이 무엇이고 인간이 사는 도리 주님을 믿는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깊이 가르치시면서 이제껏 우리를 인도하셨는데 그기에 뜻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인간이 개를 키우고, 소를 키우고, 닭을 키어도 최소한 잡아 먹고자하는 목적이 있으니까 사육을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를 그 피로 구속하셔서 애지중지 기르시는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사명 없고 뜻이 없다. 라고 한다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세 번 태어납니다. 육신 적으로 한 번 태어나고, 그리고 또 한번은 영혼이 거듭나서 한번 태어납니다. 그러고 나서 또 한번 주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 하면서 자신의 생명 보다 소중한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세 번째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한번 죽지만 태어나는 것은 세 번 태어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의 시작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살아 있는가? 주님이 나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왜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는가? 그것을 깨닫고 그 사명을 확인 하면서 사는 것이 그 때부터가 진정한 의미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직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시고 이제껏 까지 여러분들을 대려 오셨는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오늘은 이런 사명 내일은 저런 사명 하면서 매일 조속변이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많이 주셨을 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났다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셔서 여러분들의 가족들은 경험하지 못했던 치료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을 그 상하고 상처 받은 가정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큰 사랑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하셨다면 그리고 여러분들의 주위에 믿지 않는 수많은 가족을 늘 대면 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여러분들에게 그런 구원의 복음을 가족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하게 하셨는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을 믿지만 신통치 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 둘려 싸여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들에게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전파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사명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신비한 음성이 아니라도 여러분들이 놓여 있는 사명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놓여 있는 상항이 여러분들에게 사명이 무엇인가를 큰 소리로 외쳐서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외부적으로만 들어나는 것만 있는 것만 아니라 내면적인 것도 있습니다. 주님 모르고 살아 갈 때에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다 자기 같은 사람만 있으면 행복한 세상이 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진리의 말씀을 매일 매일 깨닫고 나니까 자기가 정말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너절하고 모순 덩어리고 그리고 아집 덩어리 교만 뭉치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아래에서 자기를 비쳐 보니까 도저히 자기 같은 인간이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살아 왔고 또 그렇게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망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면 자기를 고치는 겻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물단지였으나 이제는 자신이 많이 변화 되어서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자기를 만나는 수많은 이웃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그가 하나님 앞에 이루어야 할 사명입니다. 그것을 발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더 깊은 은혜 속을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를 쓸 때 우리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신앙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거룩한 긴장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니까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증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삶은 일락에 빠진 삶입니다. 일락에 빠진 자는 죽은 자라고 했지 않습니까? “일락에 빠진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 일락에 빠졌다는 것은 술이나 먹고 매일 화투나 치고 바람이나 피운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일락 빠지면 사명으로 말미암은 긴장이 없는 삶, 모두 일락에 빠진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 죽은 자의 삶을 계속 살아가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셨어도 그 은혜가 우리에게 유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면 무엇 하시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은혜 그 자체를 엔죠이 하고자 은혜를 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게 잃어버린 사명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그래서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는데 그 일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합니다. 아이들 보고 “야 너희들 돈 줄 테니까 가서 롯데 월드 가서 놀이 기구나 타고, 피시방에 가서 게임이나 하고, 롯데리아에 가서 햄버그나 사 먹다가 와라” 그랬을 때에 아이들이 그 돈을 받아 가지고 나가면서 “야 우리 사명 감당하러 가자”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휴가를 주면서 몇 칠 어디 가서 푹 쉬고 즐기다가 오게.” 그럴 때 사명 아닙니다. 사명은 항상 희생이 따르고 수고가 따릅니다. 다만 사명감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수고라고 생가하지 않으니까
(찬양) 즐겨 고난길 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전에 어떤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되 돌이켜 생각해도 고생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다른 사람이 개척을 하는 것 하고는 다르게 개척을 했겠습니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다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괴로울 때가 왜 없겠습니까? 세상에서 사는 것이 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한번도 그것이 괴롭다거나 지겹다거나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이 수고요, 희생이요, 뼈를 깎는 고통이다.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만약에 그런 것을 하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마찬가지 입니다.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본인이 은혜가 충만하면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희생과 수고와 고통이 동반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입니까? 수고하고 고통 받는 것 그것을 왜 좋아하겠습니까? 교회에서도, 교회뿐만 아니라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잘 안 모입니다. 조금 일하고 나서 밥 먹고 합시다. 하면 사람이 와르르 모입니다. 어디서 왔는지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무엇인가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자기의 이름이 높아지고 좋은 일이 있고 그런 것은 누구든지 다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리고 피를 흘리는 것은 너나 나나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해 나갑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사명을 따라 살면 은혜가 유지되고 은혜가 유지되면 사명을 따라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 있는데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다 때려 치워”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다 때려 치어” 그랬을 때는 벌써 은혜가 다 떨어 질 때에 아무러면 어때 그냥 다 집어치워. 그러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 있을 때에는 은혜만 소중한 것이 아니나 사명이 정말 소중하게 보입니다. 사명이 너무나.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집니다. 크기가 크던지 작던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이라는 데에 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젠가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예화) 하늘에서 천사 세 사람이 보냄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는 가서 저 나라에 가서 왕이 되어서 일하고, 둘째 너는 저 동네에 가서 큰 회사의 회장이 되고, 셋째 너는 똥 퍼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사 셋이 내려 와서 진짜 하나님만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천사인데 똥 퍼는 천사는 “이게 뭐 사명이라고 뭐 이리 거지같나.” 그리고 이거는 대충해도 될 거야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 천사도 성심성의껏 주께 하듯이 똥을 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천사에게 이 일이 지휘봉을 가지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냐 똥을 퍼는 일이냐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사들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그 분의 위대함에 대해서 눈 뜨고 나면 우리들은 큰일을 맡겨 주셨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것을 크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작은 일을 맡겨 주셨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것을 작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각자각자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목자가 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사명은 작은 것 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사명을 명하신 분을 커나 작으나 그 사명을 명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저는 여기에다 두셨고 여러분들이 그 곳에다가 두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지에 두셨고 어떤 사람은 일터에 두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터에 두셨고 어떤 사람은 가정에 두셨고 어떤 사람은 학교에 두셨고 가자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거기에다 자기의 사람들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쭉 유지 되고 있는 동안에는 이 사명에 대한 생각이 늘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의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서 성취해 드리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긴장이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져 버리지를 못합니다. 먹고 놀고 마시고 편안하게 지내는 대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수고하고 분투하고 인내하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는 사명의 자리에서는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도저히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족 중에 아직까지 예수를 안 믿어서 여러분 마음에 늘 눈물이 흐르는 사람들 있지요. 다른 사람 한사람 예수 믿게 되었다. 라는 이야기 들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는데 자기 식구들은 전도 못하지 않습니까?
(예화) 어떤 사람은 한 교회에서 전도 왕이 되었는데 자기 남편은 여전히 교회에 안 나와요. 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웃을 일이 아니라 눈물나는 사연이라는 것입니다. 왜 저 인간이 왜 저렇게 변화가 안 될까?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복음을 전해서 잘 믿는데 저는 왜 저럴까?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아들 좀 변화 시켜 주면 무엇이든지 다 주겠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손 얻고 한 번 기도하면 벌렁벌렁 나자빠지면서 새 사람으로 변화 는데 자기 아들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명은 항상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쏟아 부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그 사명이 충만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늘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알아보게 되고 그 하나님 따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 사명을 간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리니까 은혜의 필요성도 못 느끼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도 다 잃어버리고 빈 털털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크나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기까지 하나님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선지자 요나로 만들어 주시는 큰 생애적인 은혜를 부어주셨을 때 아마 선지자 요나는 그랬을 것입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뜻밖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그러니 오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러나”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3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라” “그러나” 사명이 있는데 “그러나”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것은 없습니다. 요나가 왜 하나님께서 큰 은혜와 함께 주신 그 생명적인 삶은 마다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탓을까? 그럼 우리는 이렇게 보면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거야 뭐 사명감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거야 맞는데 왜 하나님께서 크나큰 은혜를 주신 사람이 이 사명을 완전히 져 버리고 전면적으로 져 버리고 사명과는 상관이 없는 그런 불순종의 길로 가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셔서 사명을 받으셨지만 그 사명대로 안 사는 것은 어쩌다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내어 보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타당한가? 살펴보고 그래야지만 하나님 앞에 잃어 버렸던 사명으로 돌아 갈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왜” 그랬을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에 이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남 왕국 유다에 가서 외쳐라. 그랬다든지 아니면 신앙이 별로 없는 여로보암에게 가서 똑바로 하나님 안 믿으면 싹 쓸어버린다고 가서 외쳐라 그랬다면 아마 이 사람이 아멘. 아멘. 하면서 갔을 사람입니다. 생명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풍랑이 막 일어나니까 무엇이라고 합니까? 날 던져. 죽여. 죽여. 라고 합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예화) 어떤 사람이 인생사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약국에 쥐약을 사러 가는 것입니다. 아저씨 쥐약 주세요. 라고 아주 비장한 각오로 말 했더니 약사가 끈끈이 밖에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기로 했답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쥐약 주세요. 그랬을 때 주면 어디 숲 속에라도 가서 먹어 버리려고 생각을 했는데. 끈끈이 밖에 없어요. 라고 하니
하여튼 이 생명에 대하여는 애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명감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선지자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아등바등 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든지 목숨을 부지 하면서 살아야 되겠다. 그런 것은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니까 생명이 두려워서 니느웨로 안 갔다.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 왜 그랬나?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이 싫었던 이유는 그런 식으로 명령을 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여튼 앗수르 그러면 철 천지 원수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게 한 맺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공 오랑케, 북한 괴뢰토당, 지금은 많이 희미해 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해 남아있는 것은 일본 놈, 그런데 저는 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똑 같이 그러면 그렇게 속 좁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하겠어요. 그러니 일본 놈 그러지 말고 일본 애들 그렇게 말하십시오. 북한하고 일본하고 축구를 하면 누구를 응원을 하겠습니까. 북한을 응원하게 됩니다. 하여튼 우리는 져도 좋은데 일본이 우승하는 것은 못 봅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데 우리는 이게 악해 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일제 시대 때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제 시대 때 창에 찔려서 죽고 총에 맞아서 죽고 징용에 끌려 나가고 정신대 끌려 나가고 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는 아주 피멍이 맺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최대한으로 확장 시켜서 이 선지자 요나의 마음속으로 가져가 보면 이 선지자가 형평 없는 인간이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선지자니까 선지자들의 역사를 다 읽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망하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요나야 앗수르 인들 안 되겠다. 그러니까 너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오늘 여호와 내가 너희를 위해 행하는 이 놀라운 일을 보아라. 그것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공식이었습니다. 그 애굽에서 나올 때도 그러셨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이 쫒아 올 때도 그렇게 홍해를 가르시면서 내동댕이치셨고 그런 광경을 다 보여 주셨지 않습니까? 그랬더라면 이 요나가 얼마나 좋아 했겠습니까? 그런데 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망할 것을 네가 외쳐라. 두루 다니면서 내가 외쳐야 된다. 이 요나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곱씹어 보면서 이것을 쭉 생각해 보니까 이게 뭐냐 하면 심상치 않은 일을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때 대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회개 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영적인 사람이었는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니느웨에 가서 너는 쳐서 외쳐라. 이렇게 말씀 하실 때 그 하나님의 음성 속에 느니웨에 있는 백성들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는지 아니면 서슬이 시퍼래서 다 정리 해 버리려는 마음에서 말씀하셨는지 그 정도 분별력 없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확연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거여요. 저 나쁜 놈들 우리를 수시로 괴롭히고 우리 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던 저 인간들을 하나님이 용서하십니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을까? 저들이 회개한다. 그리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히 물 붓듯 저들에게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이 월드컵에서 우성하는 것만큼 속이 쓰릴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나. 그런 마음이 이 선지자 속에 뼈아프게 박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지의 내리 속에는 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앗수르로부터 받았던 수많은 상처가 함께 클로우즙 되면서 도저히 이 사명을 감당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때요. 이 삶이 인간적으로 요나를 바라보면 이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이 큰 은혜를 주셨는데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않고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둘이 만나서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를 다 이야기 하면 다 함께 눈물나는 사연입니다. 사실입니다. 누구는 하나님 앞에 사랑 받고 살고 싶지. 누구는 고무신 거꾸로 신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추격당하는 그런 도망자 신세 되고 싶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고 주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사명하나를 감당해 나가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다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데에는 모두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연은 인간적으로 보면 깊이 눈물나는 사연입니다. 눈물나는 사연 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들을 깊이 파헤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었지만 주님의 큰 은혜와 함께 여러분들에게 주어 주신 사명을 따라 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이 집회에 나왔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당당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그런 가책이 있는 사람들. 모두 동정합니다. 그러고 나는 확언 하건데 그러한 처지에 있는 여러분들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저는 그렇다고 생각을 하는데 우선 첫 째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 괴로움은 사명 앞에 설 때마다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명을 모르는 체 그냥 살아가던 때에는 괜찮았는데 이제는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 사명 앞에 수시로 서게 됩니다. 내가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 부름을 받았는데 내가 복음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데, 아니면 내가 어떠어떠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게 하시려고 나를 불러 주셨는데 그런데 잘 경작 되어서 열매가 맺혀야 할 그 사명의 밭에 가시와 엉겅퀴가 넝쿨져서 뒤 덥혀 있고 그런 광경을 보면서 자신도 그것을 어찌 할 수 없을 때, 그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 같은 거절 감, 그리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지만 나는 그 은혜를 버리고 그 사명으로부터 멀리 도망갔다라고 하는 그 자책감, 그런 것들 때문에 괴로울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사명대로 살지 않으니까 자꾸 은혜가 식어져 가게 됩니다. 그러니 그것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총체적으로 삶 전체가 사명을 향해서 턴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회복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불이나 받아 가지고 모면해 보려고 하는 그런 심보 나쁜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은혜를 안 주십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명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은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삶 전체가 턴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중심을 다시 삶이 세워져야 합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가를 헤아리면서 사명을 중심으로 다시 삶이 세워지고 구축되어 가야 합니다. 그런 돌이킴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 받는 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 가지 않아서 여러분은 다시 빈털터리가 될 것입니다. 공식입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것은 선입견 이라는 것입니다. 앗수로 그 인간들은 싹 쓸어 버려야 되는 인간들이라는 선입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 주셔야 한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만 움직이셨으면 이 요나 선지자는 불꽃같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 하시지를 않은 것입니다. 만약에 요나 선지자가 바로 앞에 있었던 나중에 나타나는 느헤미아나 에스라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진짜 헌신적으로 살 사람입니다.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사명감도 문제가 되지만 사명을 이루어 가는 방식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깊이 의뢰하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은혜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요나에게는 비뚤어진 애국심이었고, 애족의 정신이었고, 그리고 애국사람들에 대한 편견이었지만 여러분들에게는 또 다른 것일 수가 있습니다.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앞에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못하게 하든지 간에 결국 여기서 우리들이 터득하게 되는 중요한 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버리려고 하는 복종의 마음이 없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항상 사명은 버려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 자기를 모두 버리고 부인하는 철저하고 총체적인 복종 없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사명은 자꾸 밀쳐지는 것입니다. 개개인에게 따지고 들어가 보면 그 이유는 모두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설득력이 있어 바야 그것은 사람들끼리 통하는 이야기이고 하나님이 주신 명령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해결 방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은혜로 다시 돌아가고 다시 사명으로 돌아가지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무엇인가 하면 철저한 복종,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있어서 자기를 온전히 버리겠다. 라고 하는 총체적인 순종,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전 방위 적으로 자기가 온전히 순종해야겠다. 라고 하는 이 의지와 결단! 이것 없이는 사명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이제는 아시겠지요. 내가 은혜를 못 받는 것이 단순히 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열열이 부러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위치가 있고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이고 그 사명을 이루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지 아니하고는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받은 은혜라고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은혜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고 사명을 받았는데 그 사명이 버려진 채 놓여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여러분들의 불순종이 있습니다. 불순종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이지 간에 그것을 여러분들이 버리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는 자기 죽임의 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사명은 꽃피울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죽이고 내가 업 더려진 그 위를 하나님의 뜻이 밟고 지나가기를 원하는 복종의 마음이 있는 곳에서만 사명은 꽃을 피우고 하나님의 은혜는 융성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결국은 그것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 배를 타려고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탓 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 이 다시스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다시스로 가는 배로 가는 것을 탓다라고 했으니까 아마 지중에 연안 쪽으로 갔을 것임이 틀림이 없고 욥바가 그곳에 있으니까 아무튼 이 앗수르 쪽은 아닙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가려면 배를 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육로로 걸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육지를 걸어서 니느웨로 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배를 탓으니까 완전히 도망가 버리려고 하는, 적당히 걸어 가다가 힘이 없어서 딴 길로 간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완전히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딴 길로 가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무슨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기 싫다. 이것입니다. 사명을 버린 사람의 심리는 무인인가 하면 하나님이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 주님의 공급해 주시는 물질,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형통하도록 길을 열어 주시는 도움 이런 것들이 싫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응 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주님을 대면하면서 살고자하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사명 감당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만큼만 사명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것만큼만 사명을 아주 기뻐합니다.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왜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욥바로 갈 때 하나님께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리시든지,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십리를 못 갔는데 발병이 난다든지, 그래서 도저히 갈 수 없게 됐다든지, 욥바까지는 갈 수 있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욥바까지 갔는데 배타는 그 매표소 앞에 “다시스행 배 매진” 그러면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니구나!, 아니면 어디로 멀리 도망가려고 했으니까 돈이라도 좀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려고 가서 강도를 만나 납치를 당해 실컷 어디를 실고 가서 돈도 다 털리고, 발길 차여서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길 숲에 팽개치고 도망을 갔는데 눈을 떠서 이렇게 받는데 니느웨 이렇게 써 있습니다. 그러면 참 우리가 주님을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주님 홀로 하시는구나! 정말 사명은 피할 길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하십니다. 사명은 피할 수 있습니다. 만약 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할 것 같으면 모든 사람들이 사명을 감당하다가 장렬하게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회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기 선지자가 욥바로 가서 표를 사러 갔는데 표가 있었습니다. 돈도 있고, 배를 타려고 했는데 돈을 잃어버렸다든지 강도를 당했다면 배를 못 탓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삭을 주고 배를 탔습니다. 만약 타자마자 해적을 만났다면 못 갔을 것입니다. 타자마자 풍랑을 만났다든지, 타자마자 벼락이 쳐서 배가 다 부스 졌다든지 그러면 못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순풍에 돛단 듯이 쑥~하고 가는 것입니다. 아마 요즘 같았으면 요나는 그저 선선한 시원한 남방에다가 밀짚모자를 쓰고 길거리에서 선글라스를 한 오천 원 주고 사서 끼고 갔을 겁니다. “ 아! 저 푸른 바다는 언제 봐도 멋있어.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가는 이 즐거움이여. 그랬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사명을 등지면 즉각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을 등지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힘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 보아야 안다는 것입니다. 순조롭게 욥바로 내려습니다. 순조롭게 배를 탔습니다. 순조롭게 배가 항해를 하는 것입니다. “아 이제 이렇게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있구나!” 여러분 그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화) 6.25때 있었던 일들을 영화로 엮은 것들을 가끔 보면 끔직한 장면들이 나옵니다. 괴뢰군들이 도망가면서 어린병사들을 기관총 아래에서 말뚝을 박아놓고 발을 묶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저 밑에선 국군들이 올라오는데 거기에 딱 묶어 놓고 총 하나만 주고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도망 갈 수도 없으니까 거기에 매달려서 그냥 총을 쏩니다. 항복도 할 수가 없습니다. 총을 들고 서 있는데 누가 그 항복을 받아 주겠습니다. 일어 설 수도 없는데. 그런 영화들을 가끔 보게 되는데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 입니다.
그런 이들을 우리들이 가끔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명도 자기가 감당하기 싫으면 그만 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책임은 져야 합니다. 자기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지 않거나 신앙을 바로 지키면서 살지 않고 은혜를 다 틀어 먹으면서 살 때,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한 대 내리 치셔서 풍랑이 일어나게 만들고 풍지박살을 만들어서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드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득의 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뜻을 얻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욥바까지 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시고 바다를 향해 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등지고 걸어가는 길에 잠시 동안에 형통함을 보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명을 떠나서도 이렇게 잘 살 수 있구나!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 오해라는 것입니다. 절대 오해입니다.
평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영적인 성리를 통해서 맛보는 평안이 있고, 항복과 포기를 통해서 얻는 평안이 있습니다. 뭔가 여러분들이 신앙의 싸움을 싸워 보려고 노력을 하고 육체의 욕망을 이기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 보려고 투쟁할 때에는 항상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댈 대로 대라 하고 모든 것을 포기 해 버리고 나면 갑자기 평안이 쭉~ 밀려옵니다. 그 평화는 거짓된 평화입니다. 그 평화 속에서 은혜는 완전히 시들고 하나님의 사명은 철저히 도외시 되고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몰고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교만해 지는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바다 끝에 가서 거해도 거기서도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드시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이 계시는데 한국에서 살 때 하나님과 관계가 망가진 사람들이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가면 갑자기 그 망가진 관계가 좋아지겠습니까? 죽을 때 까지 좆아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명을 버리고 은혜를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과 맺힌 것을 정리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잘못된 것들을 다 정리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으면 계속해서 어두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이 바다를 지나가면서 요나가 진짜 평안 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풍랑이 일어나고 나 다음에 잠에서 깨어나고 난 다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고뇌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보람,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 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있는 돈 이런 거 가지고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명예 이런 것 가지고 행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잠시 기쁨이 되겠지만 영원한 행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환경에 달려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 구원해 주신 그 큰 은혜의 이면에 숨겨 있는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대로 매일 매일 살아가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때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즐거워 할 때 우리도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는 그렇게 바꿔진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명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물론 오늘 여기 오신 분들 중에는 불순종의 길을 너무나 많이 걸어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고 다 뒤집어 져서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주님의지 할 수 밖에 없어서 나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폭풍을 만난 사람이고 지금 여러분들 중에는 폭풍은커녕 아직 욥바로 내려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돈을 꺼내서 표를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밀짚모자 쓰고 그 배를 타고 슬슬 부는 바다 바람을 맞으면서 심호흡을 하면서 득의만만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평안이 아닌 것은 절대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신 행복이 아닌 것들 때문에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은 잠시 맛보았던 그 행복의 달콤함을 능가하는 쓰디쓴 고통의 열매를 언젠가 머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이 평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그 큰 사명을 감당하고 나가는데 자신의 존재의 의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뼈저리게 느끼면서 한걸음, 한걸음 그 사람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볼 때에는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고 그리고 지리멸렬한 사람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느껴지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오는 진실한 기쁨은 받아 본 사람들만이 안다는 것입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포도 비유 같은 이
참 좋은 나의 친구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아도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주님이 나의 만족이 되시고 내가 주님의 마음의 기쁨이 되면 우리끼리 나누는 그 만족과 깊은 사랑과 신령한 기쁨은 거기에서 얻는 참된 행복 때문에 우리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지가 않은 것입니다. 신아생활을 해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별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알 수 없는 즐거움, 세상이 알 수 없는 충만함 속에서 주님을 의지 하면서 그 생명을 공급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신앙의 기쁨이 붙어 있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제 여러분들이 결단을 하셔야 됩니다. 이제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로 걸어가서 주님이 주신 큰 은혜는 잃어버리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은 내 동댕이쳐 지고 결국은 여러분들이 큰 풍랑을 만나서 죽음과 삶이 넘나드는 위기 가운데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손들고 하나님 앞에 돌아 올 것인가? 아니면 아직 본격적으로 불순종하는 항해의 길을 떠나기 전 여러분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인격적으로 설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무릎을 꿇고 다시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은 누가 대신 할 결단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해야 할 결단입니다.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의 강퍅 함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하찮게 여기게 만들고 우리의 아집과 독선 그리고 제멋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이 쾌쾌 묵은 우리의 옛 성품이 우리를 도저히 하나님의 사명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우리의 패역의 요소들을 부정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에 그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를 생각하고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음밀한 기쁨과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사명의 길을 버리고 걸어가는 동안에 잠시 편하고 또 우리의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즐거움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은 것을 얻는 동안에 더 큰 것은 잊어 버렸습니다. 주님의 주신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잃어버렸고 주님이 주신 큰 사랑의 세계를 잃어버렸고 주님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불순종하고 있다. 라고 하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우리들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나서도 살 수 없고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이중적이 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본래 주신 사명의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분투하여 나가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여지고 부드러워 지지만 사명의 자리를 떠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갈수록 죄에 깊이 물들고 그 죄가 뼈 속까지 스며들어 와서 강퍅하고 패역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래도 지금이 돌이키기에 가장 쉬운 때입니다. 더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더 하나님의 사명을 등지고 더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우리의 죄악은 더 깊이 패역에 뿌리를 내릴 것이며 불순종은 더 굳어져서 하나님 앞에 돌이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고 어디까지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고 어디부터는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잘 아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려고 불순종 가운데 뼈 속 깊이 패역이 몸에 베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 이였지만 그러나 겸비하게 자신의 그 어찌할 수 없는 이 죄악 된 모습과 그리고 뼈 속까지 베인 이 강퍅함을 주 앞에 토설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사명을 등지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 순간도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 했나니
우리 긍휼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나보다도 더 큰 은혜를 입고 요나보다도 더 불순종해서 요나보다도 더 먼 곳으로 간 사명을 버린 사람들도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구석구석에서 아 내셔서 자기가 서 있는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겸비하게 인정하면서 주의 자비와 긍휼을 효소 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일으켜 세우셔서 돌아갈 수 없었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셔서 이전에 하나님 앞에 고통이었던 사람들을 다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차피 우리의 일생은 불순종과 순종의 연속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하나님께로 사명을 받은 이래로 한번도 멈추어진 적도 없고 뒤돌아 본 적도 없이 쓰려진 적도 없이 한 길로 걸어 가다가 장렬한 생애를 마친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선배인 바울에게서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면서도 수시로 나약해 지는 그 사람을 봅니다. 심지어 무릎을 꿇는 그 사람도 봅니다. 죽기까지 낮아지고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미말의 집게와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명의 벼랑 끝에 서서 삶과 죽음의 모든 기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때에 도달하게 된 모습들을 봅니다. 그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동의 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때로는 순종하고 때로는 불순종 했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은 방향하고 흔들렸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사명으로 돌아와서 그리고 끝까지 과거의 실패와 불순종을 거울을 거울삼아서 지난날의 하나님의 사명을 져 버렸던 우리의 죄를 그것을 통해서 받으셔야 했던 하나님의 불명예를 보상하려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그 사명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세워주신 그 자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나 아니면 누가 이 사명을 완수 할 수 있으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그 사명의 자리에서 주님 은혜를 한 없이 힘입으며 매일 공급 해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덧입고 사명을 감당해 나가다가 우리의 인생을 마쳐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요나처럼 주님을 멀리 떠나서 사명을 져 버린 사람들 있습니까? 이제는 돌아와야 할 때 입니다. 여러분 금년 한해도 또 지난 한해에 경험했던 불순종과 사명을 버린 어두움 속에서 주님과의 관계의 가지고 신음 하면서 사시겠습니까? 이제는 불순종과 하나님의 사명을 버린 부끄러움을 99년과 함께 모두 묻어 버리고 새해에는 순종하는 자리에서 주님의 사명을 따라 살기로 다짐하는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원합니까? 이제는 여러분들이 선택을 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2. 풍랑을 만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대풍을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욘1:4-10)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 없이 은혜를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큰 사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은혜를 주십니다. 또 적은 사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갈만한 은혜를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면 즉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특별한 은혜를 나에게 주셨을까? 이 은혜를 주셔서 주님이 이루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일까? 그리고 이렇게 특별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을 때에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살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먼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들 중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사명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처럼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 우리에게 주셨던 계획을 버리고 그리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도 하나님께서 즉시 개입하셔서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한참 평안한 항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순종하고 사명을 버리고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법은 굉장히 인격적이십니다. 한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큰 칼을 빼어들고 “이놈 한번에, 한 칼에 베어 버리리라” 그렇게 하시면서 만약에 다가오신다고 할 것 같으면 교회 안에는 목 잘라진 시체들만 가득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보십시오.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져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는데, 눈을 이렇게 감으면 이런 모습이 떠오릅니다. 파란 하늘에 구름 한점 없고 바다는 잔잔하고 순풍에 돛단배가 미끄러지듯이 가고 시원한 가판 위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파라솔 밑에서 유리잔에다가 노란 오랜지 쥬스를 쭉 빨아 먹으면서 역시 좋다 고무신 거꾸로 신는 것도 해 볼만하구나.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겠지. 그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잘 살고 순종할 때도 내려다보시고 불순종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눈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게 되면 그런 시각이 없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던 하나님의 사람 요셉, 그 보디발의 아내가 와서 너하고 나밖에 없으니 우리 동침하자라고 합니다. 그 여자는 눈이 뒤집혀서 그 방에 요셉하고 자기하고 밖에 없는 것으로 여겼는데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 방에 누가계신다고 생각 했습니까? 그렇죠. “내가 그 큰 죄를 지어서 어찌 하나님 앞에 죄를 얻겠느냐?” 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서 고개를 돌리고 불순종하는 길로 걸어가게 되면 즉시 영혼의 어두음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기도의 은혜가 있고 순종하는 삶이 있고 그 순종하는 삶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살아가게 하고 싶어 하어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좇아서 살아갈 때 그때 우리의 눈이 항상 밝아지고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것이지 일단 불순종을 하게 되면 즉시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서 모든 사태를 바르게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순종하지 않는 사람 마음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욕망이 있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없이는 불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 평안한 가운데서 요나라는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망각하면서 평안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실 리가 없겠지요. 오늘 성경에 보니 하나님이 바다에 대풍을 일어 켜셨다. 라고 했으니 큰 바람을 일으키셨다. 요즘으로 말하면 큰 풍랑을 만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면 정말 무섭습니다. 육지가 얼마나 안전한가 하는 것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보면 알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목사님은 풍랑을 만나보셨습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예화) 한 번 만나서 죽을 뻔 했습니다. 덕적도에서 어떤 여객선을 탔는데 배는 폭풍주의보가 안 내리면 풍랑이 좀 일어도 출발을 합니다. 그래서 출발을 하여 인천하고 정 가운데까지 왔는데 폭풍주의보가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파도가 치는지 방송이 나오기를 승객께서는 모두 아래층에 내려 가셔서 구명조끼를 입으시고 탈출에 대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겨울이고 컴컴해지는데 이제는 죽었구나. 장가도 못가보고 물귀신이 되나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는 예수님도 잘 안 믿을 때였습니다. 여기 누워 있으니 저쪽으로 굴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나갈 엄두는 못 내고 참문으로 이렇게 내려다보니 배 이쪽 머리를 때린 파도가 저쪽 머리로 넘어 가는 것입니다. 쉬 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여기저기에서는 토하고 난리였습니다. 그래도 안 죽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러고 있겠지요.
제가 신학대학에 있을 때 어느 학생이 대학원에 면접을 하러 왔는데 마도로스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선장을 했는데 17만 톤까지 몰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대단한 베트랑 입니다. 파도가 어느 정도나 치냐고 물어보니 자기가 본 파도가 17미터가 넘는 파도를 만난 적이 있답니다. 자기의 동료들은 30미터 넘는 파도를 만났다는 사람도 있는데 자기는 보지 못했답니다. 요즘은 기상예보가 워낙 발달했기 때문에 컴퓨터가 제어 하면서 다 피해 간답니다. 그런데 17미터를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파도가 재어 보다고 하더라도 거의 10미터는 될 것입니다. 이건 어마어마한 집 채 만한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 보면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풍을 일으키셨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발사 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뜻대로 한다면 이 폭풍이 지중해 전역에 일어난 광범위한 폭풍이 아니라 국지적이라는 폭풍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려다보시니 이 요나가 분명히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는데 그 쪽으로 가지 않고 엉뚱한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 하고 내려다보시니 계속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람일발 장진을 하셔서 요나가 탄 배에 쏘았듯이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배가 이동을 하면 바람도 따라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에게 재난은 미사일과 같은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큰 풍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요나는 나쁜 의미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풍랑이 일어나면 즉시 배 밑창에서 올라와 쳐다보면서 하나님이 노하셨구나. 이 풍랑은 모두 내가 사명을 버리고 불순종하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통해 자복하고 주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 될 텐데 그것이 아니라 배 밑창에 내려가서 자는 것입니다. 배 밑창에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덜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위로 올라올수록 흔들립니다. 그래서 배 밑창에 쑥~들어가서 쭉~ 뻗고 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했겠습니까? 위에서는 사람들이 난리를 치면서 바람이 부니까 물건을 집어 던지고 무게를 줄이면서 파도와 풍랑과 더불어서 싸우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고 고생을 하는데 이 선지자는 배 밑창에 들어가서 푹 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평화 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무슨 평화입니까? 불순종과 죄악에 잠을 자는 평화입니다.
여러분 평화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주님 안에 거하면서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대서 오는 평안이 있고 즉 하나님과의 화목 된 관계에서 비롯되는 참된 신령한 평안이 있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포기한다든지 신령한 생활을 포기하면 맛보게 되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것이 죄와의 타협을 통해서 오는 평화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신앙의 길을 가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미끄러지는 가장 중대한 유혹 가운데 하나는 죄가 가져다 주는 평화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모두 불안하고 두려울 것 같지요. 그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초보적인 공식이고 깊이 들어 가 보면 하나님을 떠나도 이렇게 평화가 밀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가 확 밀려 왔습니다. 요나가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배 밑창에 들어가서 푹 자는 것입니다. 코가 비뚤어지도록. 배 삯은 내었으니 자고 보면 다시스가 나오겠지. 종착역까지 가는 것이니까 중간에 내릴 일도 없으니 푹 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다시스가 아니면 어때요. 니느웨만 안가면 아무데든지 다 갈 수 있는 사람 아닌가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만 감당하가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깊은 잠을 자는 것입니다. 푹 자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러분 중에 아 평안하다고 느끼시는 분 없으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없고 생명은 느껴지지 않는데 평안하게 아무 염려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상태의 잠을 자시는 분들은 없으십니까? 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푹 잠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전부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파도와 더불어서 싸우려고 하는데, 이 당시에는 기껏해야 배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렇게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니까 노를 저어서 가는 작은 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건도 많이 실었고, 돛단배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알다시피 그 당시에는 기관이 엔진을 가지고 작동하는 배가 아니니까 바람이 불게 되면 이 돛을 올리고 내리는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배의 방향과 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배를 운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필요 했습니다. 그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산했겠습니까?
그런데 밑창에 들어가 보니 어떤 사람 한명이 실컷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들은 모종의 배신감 같은 것들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배가 어려움에 처했으면 같이 일어나서 도와야지 실컷 자고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장이 자는 자여 어쩜 이뇨. 라고 묻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자고 있느냐. 너는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고 하는 말이 일어나라. 깨어라. 그리고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요나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렇게 주님을 모르고 죄악에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우시려고 주님이 불려 주셨는데 이 선지자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깨라고 재촉을 받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영광은 주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 서 있을 때가 가장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선장이 일어나라 깨어라 그러면서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사람이 부스스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점점 하나님께서 이 배를 겨냥한 풍랑이 가속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시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그렇게 하고 깨어났는데도 의식이 없습니다. 일어나서 이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진짜 나 때문이로구나! 그러고 하나님 내가 어떻게 주님의 낯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회개해야 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거짓된 희망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나아가서 이런 시련도 오고하는데, 우리 생각에는 저렇게까지 불순종하고 살면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을까? 라는 답답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불순종한 대가로 부자가 댔다든지 미인이 댔다든지 명예가 높아 졌다든지 자기신앙의 지조를 버린 다음에 커다란 것을 얻었다면 워낙 그게 좋으니까 그렇게 살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우리들이 볼 때 사명을 버리고 살아갈 때 잠시는 평안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평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져 버리고 사명을 떠났는데 평안할 수 있겠습니다. 탈영병이 부대에서 탈영을 해서 그날 밤에는 어디 민가에라도 숨어들어 가서 밥 먹고 한 숨 자면 고달픈 훈령 안 받으니 편할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탈영병으로 도망 다니는 그 신세가 평안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징벌을 행하시기 시작하니까 고난을 많이 당하는데도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거짓된 희망을 못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는 것이 전부다 기적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다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풍랑이 일어나는 예는 아주 희귀한 일입니다. 풍랑이 왜 일어납니까? 바람불면 풍랑이 일어나지. 바다에서 뱃사람들이 풍랑을 보는 것이 한 두 번 보는 것입니까? 여행을 많이 했을 이 요나가 바다에서 풍랑 이는 것을 보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풍랑이 일어도 이것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지나가겠지.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명을 버리고 떠난 여러분들을 인격적으로 승복 시켜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르시지 위해서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시고 고난의 정도를 점점 더 강하게 만드셔서 주님께 메 달리도록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신데 헛된 희망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꼭 주님께서 하셨다. 라기 보다도 다들 어려운 때니까 이런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지. 누가 협조를 안 해주어서 우리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 누가 도와주면 이 어려운 문제가 해결 될 것이다. 하나님 없이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 이 모든 것들이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절대 그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환난을 통해서 사명을 버리고 도망간 우리들을 다시 불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헛된 희망을 품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계속하니 점점 더 하나님께로부터 돌아 올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 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선장은 하나님께 기도해라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이 풍랑을 일으켰다라고 까지는 생각을 못했겠지만 하나님이 이 풍랑을 잠잠케 하실 것이라고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그런 마음조차도 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포위망을 점점 더 좁혀서 이 사람을 깨닫게 하시려고 포위망을 좁히는데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니 계속해서 포위망을 점점 더 좁히는 것입니다. 포위망을 한번 좁힐 때마다 회복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이 우리들에게는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깨닫고 순종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가? 그것은 마치 일기예보 보고 미리 피하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예화) 1945년 8월 6일로 기억이 되는데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히로시마 하늘에 미군기 하나가 붕하고 날라 가더니, 8월 6일이 아니고 6일 되기 한 일주일 전쯤에 그 때 삐라라 하는 것이 하얗게 눈처럼 쏟아져서 사람들이 주어 보니 “우리는 미군이다. 경고 한다. 8월 6일 몇 시까지 이 히로시마 방경 50킬로 밖으로 대피하라. 다시 한번 당부한다. 이 삐라를 받는 여러분들은 누구든지 히로시마의 50킬로 떨어진 그 밖으로 대피를 하라. 진심으로 충고 한다. 이것을 받아 본 사람들이 50킬로 밖 갓으로 대피를 해라. 현재로서는 별 이상이 없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냥 불안하니까 피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 웃기고 있어“라고 하면서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정확하게 8월 6일 예고한 그 시간에 아놀라게이 라고 하는 비행기가 날라 와서 그곳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고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고를 말씀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고 할 때 그것이 자기가 불순종하고 사명을 버리면 어떻게 되고 어떻게 불행해 질 것이 한번에 자기에게 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 길을 왜 가랴. 그러면서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잠시 잘못 생각하고 잠시 혼돈이 왔다라고 하더라도 즉시 희생을 치르지 않고 즉시 자신을 고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재 속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합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승복시키기 위해서 인격적으로 많이 설복하십니다. 인격적으로 많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실 때가 되면 예수님을 잘 믿는 이웃을 만나게 하기도 하시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기도 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반복해서 우리에게 듣게 하기도 하시고 그렇게 해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몇 년 되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부부가 둘 다 교수데 그 양반이 저희 설교 테잎 정기 구독자 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갔는데 재미있는 간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열린 신문을 받아 보는데 그때는 교회가 참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신문을 보니 문서선교부에서 테잎을 복사할 기계가 필요한데 돈이 없어서 못 사고 있습니다.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신 분계시면 기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약 130만원 정도 됩니다. 라고 광고가 났었답니다. 그러면서 부부가 둘이 차를 타고 가는데 부인이 먼저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여보. 열린 교회에서 우리가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는데 그 테잎 복사하는 기계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테잎 보급을 못 한다고 하니 우리가 하나 사 드리면 안 될까?”라고 했더니 남편이 얼마냐고 물어보기에 130만원이라고 했더니 대답을 안 하더랍니다. 그리고 라디오를 켰습니다. 그 차에 제 설교 테잎이 들어있었는데 탁하고 켜니 “우리가지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아낌없이 드려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설교가 넘어 가야 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무슨 오작동을 일으켰는지 “우리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라고 계속해서 세 번을 반복을 하더랍니다.
이 때 남편이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대개 원하시나 보다. 여보. 입금해.”라고 하더랍니다. 그 카세트 망가진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제껏 까지도 불순종하면서 살살 피하면서 살면서도 뭔가 낌새가 이상하고 하나님이 포위망을 좁히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아니야 뭐 바다에서 풍랑쯤이야 일어날 수도 있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셔서 주님이 그 포위망을 좁혀 가시면서 결국은 우리를 승복시키시려고 하는 그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데 제대로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지 되는데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중에 여러분 전도지 보고 오신 분 있지요. 가만히 들려다 보다가 바른 길을 가고자 하지만 길을 알지 못하고 알아도 갈 사람이 없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전도지 보고 열린 교회에서 뭘 한다고 난리데 한번 가 볼까? 올 때 이번에 말씀 듣고 절대 순종하고 엄청나게 회개하고 생애 적으로 주님께 돌아가야지. 라고 결심하고 온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또 좋은 이야기 있나. 한번 가 볼까. 그러고 왔을 것입니다. 하다가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전도지 쪼가리를 통해서도 여기에 앉혀 놓으시는 것입니다.
경고입니다. 마지막 히로시마 하늘에 흩날리던 삐라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포위망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좁혀 가실 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들이 일어납니다. 돈 때문에 유혹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번 흔들어 놓으면 도장 잘 못 찍어 빛 보증서서 거들이 나고 사업하다가 위기를 만나고 직장 다니면서 위기를 만나고 하면서 포위망을 확 좁히시는 것입니다. 한 번 좁히실 때 마다 피해가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헤어지게 만들고 심하면 데려 가시고 그러면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나님께서는 포위망을 좁혀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포위망을 좁히실 때마다 우리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의 아픔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 그 고통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복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로 하실 때에 알아듣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 하지만 간증이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지 한번 보십시오. 간증을 하는 것을 보면 예수 믿고 은혜 잘 받아서 잘 먹고 지금껏 잘 살았습니다. 그런 것은 간증하지 않습니다. 대개 간증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멀리 떠났다가 억수로 고생을 하고 풍랑을 만나서 다 쪽박을 차고 이런 사람들이 간증을 합니다. 그렇게 인생에서 시련을 많이 겪고 환난 풍파를 만난 다음에 깨달음과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이 깨달았다라고 하는 사람 중에서 뭐 특별한 것 깨달은 사람 있습니까? 그래도 크게 깨달았답니다. 뭘 깨달았나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건 매일 하는 이야기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설교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는 끄덕거리고 졸고 앉아 있다가 다 털어 먹고 껍데기 까지 다 벗겨지고 나가지고 그때서야 겨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실 때는 자고 비싼 돈 싸들고 과외에 가서 배어가지고 옵니다.
왜 그러십니까? 말로 할 때 알아들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렇습니까? 아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아 사랑이군요. 나. 주를 멀리 떠났다 그러고 돌아온다고 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사명을 버리고 가면 평탄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나요? 그것은 다 나온 공식인데 그것을 꼭 그렇게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꼭 찍어 먹어 보아야만 아는가요. 빛깔만 보면 알지. 온 몸으로 부딪쳐서 씨름을 해 보고 피투성이가 된 다음에야 “아! 내가 들어 박은 저것이 돌이었구나!”그러면서 머리가 이렇게 터지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왜 머리는 박살이 났어도 그것이 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안 된다고 거기 표지판에 위험! 받으면 머리가 깨짐! 이라고 쓰여 있는데 꼭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달려가서 쾅하고 박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웃고 나는데 왜 눈물이 날까요.
이 선지자가 그런 상항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발사를 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코를 골고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장을 보냈는데 선장이 손님 일어나세요. 라고 했겠습니까? 옆구리를 발로 차면서 일어나 이 자식아!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보니 풍랑이 일어나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 주셨는데도 깨닫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 가지고는 안 되겠기에 포위망을 한 번 더 좁히시는 것입니다. 저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 요나가 아니라 그 돈 몇 푼 받고 요나를 태운 이 사람들이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요나만 안 탔으면 하나님께서 왜 바람을 거기로 발사를 하셨겠습니까? 배 삯을 몇 푼이나 받았겠습니까? 그 표 하나 팔아서 몇 푼이나 남겠어요. 그리고 그 사람 태웠는데 자기네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그 인간이 타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발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짐 다 바다에 던지고 사람들이 죽을 것처럼 데굴데굴 구르고 배는 막 깨질 것 같은 위협을 느끼고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가진 재산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상항이 발견된 것입니다.
여러분! 거래를 하거나 동업을 하거나 뭔가 같이 도장을 찍을 때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무신 거꾸로 신은 사람들하고 손잡으면 같이 물귀신 되는 것입니다. 잘 기억 하십시오. 그런데 웃기는 일입니다. 이것이 유유상종입니다. 충만하고 은혜 있는 사람은 은혜 있는 사람들하고 교재 할 때 뭐가 통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떨어지면 꼭 이렇게 고무신 거꾸로 신은 사람들하고 만나면 궁 짝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우리 가족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똑바로 믿지 않는 나 정신 차리게 하시려고 가정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 없었다면 예수님 모르는 우리 가족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편하게 살았을 텐데 하나님이 나 불려 놓으시려고 수 없이 말씀하시고 경고 하시고 보여 주시고 그랬는데도 내가 이 요나처럼 배 밑창에 들어가서 실컷 퍼질러 자는 것입니다. 도저히 안 되겠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것입니다. 요나야! 내가 그 직장에만 안 다녔다면 부도 안 맞았을 텐데 나 거기서 한번 뒤흔들어 가지고 정신 바짝 차리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밥통을 한 번 뒤흔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 믿는 사장은 괜히 이상한 사람하고 거래하다가 부도 맞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막 흔드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 털어 놓으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것 안 하지만 옛날에 저희 할머니 보면 꼭 쌀이 남으면 갔다가 키루 웁니다. 몇 번하다가 쌀을 쏟아서 야단도 많이 맞았는데 참 신기했습니다. 몇 번 하다가 쌀을 쏟아서 야단도 많이 맞았는데 이것을 휙 하고 던지면 쌀이 높이 올라갔다가 쓸데없는 검불 같은 것만 다 날아가고 떨어지게 됩니다. 사실 쌀만 모여 있으면 그렇게 흔들 이유가 없습니다. 검불 날려 보내려고 공중으로 휙 던지면서 흔드는 것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선풍기 털어 놓고 한답니다. 이렇게 하면 싹 날라 가고 아주 깨끗하게 털어질 것입니다.
그럼 우리 거기서 털어 내시려고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것입니다. 집안을 흔들어서 우리를 털어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회사를 흔들어서 털어 내십니다. 이 사람이 이 직장 다니다 저쪽으로 가고 저 사람 만나서 사업하고 이쪽으로 가고 하는 중에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이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애물단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진짜 조심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명 버리고 고무신 거꾸로 신은 사람들 이 사람들이 시한폭탄이라는 것입니다. 지례입니다. 가까이 하면 안 됩니다. 교회 와서도 늘 조심해야 됩니다. 저 사람 요새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는데 같이 무엇을 하자고 하는데 난 안돼. 같이 하면 안돼. 하나님이 우리에겐 유감이 없으셔도 그 사람 털어 내기 위해서 터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똑같은 바다에서 일어났는데 정 반대의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제냐 하면 바울이 로마로 죄수로서 끌려 갈 때에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풍랑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털어 내려고 발사 하시는 풍랑이 아닙니다. 그 풍랑이 일어날 것을 바울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지마라. 위험 하다. 라고 하면 기라성 같은 군인들이 있는데 거기서 죄수가 묶여 가지고 가지마라고 해도 말을 듣겠습니까?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갔더니 자연적으로 폭풍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짐을 버리고 일주일 동안이나 어두움에 있었다고 하니까 그 풍랑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다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 풍랑은 자연적으로 일어난 풍랑이긴 하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다 앗아 갈만한 풍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풍랑 속에서 바울 한 사람을 건져 내기 위해서 그 모든 사람들을 살려 두신 것입니다. 바울이 토성 줄에 묶여있고 결박을 당한 상항에서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생명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평안이 하고 뭘 좀 드십시오.”
묶여있는 그 죄수가 정신적인 지주가 된 것입니다. 그 풍랑 속에서. 그랬더니 진짜 한 사람도 상하지 아니하고 배는 쪼개졌지만 모두 구출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나서 손이 스쳐 가면 하나님의 복이 나 때문에 그 사람에게 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면 보디발이 복을 받고 옥에 들어가면 그 전옥들이 복을 받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뜻이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하고 몇 번 하다가 다 덜어 먹고 이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하고는 상종하지 마라. 재수 없다. 그런 소리 들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시련이 일어났는데도 정신을 못 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한 번도 안 가지는 것입니다. 사과하는 대목이 한번도 안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것 가지고 안 되겠기에 하나님께서 포위를 좁히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것은 확실히 이변이다. 이것은 분명히 바다의 신이 노했든지, 하늘의 하나님이 노했든지 하여튼 뭔가 신기한 현상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 한번 제비를 뽑아보자. 그 당시에는 흔히 통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인간 때문인가 한번 보자하고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당첨되는 것도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가져야 할 제비는 다른 사람들이 못 건드리게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요나가 집어서 보니 당첨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이 요나를 보는 눈빛이 어땠겠습니까? 재수 없는 사람이 우리 배를 타서 우리가 이 고생을 한다는 원망의 눈물이 확 쏠렸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존귀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 인간 때문에 뭐가 되는 것이 없다. 밥맛이 없다. 그런 소리 들어서 되겠습니까?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신신당부 합니다. 신앙을 지키면서 직장생활 하려면 그 사람들하고 같이 술 먹고 니나노 집에 다니고 그런 것 못할 것 아닙니까? 뇌물 같다 싸 줘서 승진하고 그런 것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런 요인 이외의 다른 요인에 있어서 뛰어나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유능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 성실한 사람, 그 다른 분야에서 깊이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 없으면 안 돼. 라는 생각을 가지게끔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 없이도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사명을 버리고 살아가면 이렇게 제비를 딱 뽑으니까 나오는 것입니다. 너 때문이구나. 도대체 무엇이야. 왜 네가 탔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실 것처럼 파도를 이렇게 길길이 뛰게 하시고 우리가 지금 죽을 것 같은 위기를 당했는데 도대체 너는 어떤 인간이냐. 어디서 왔고, 뭘 하는 사람이냐. 그러고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요나가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며 하늘과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다.” 라고 했습니다. 말이 됩니까? 고무신 거꾸로 신고 사명을 등진 사람이 어떻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진리는 무엇인가 하면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끈임 없이 우리에게 네 자신의 본분과 정체를 알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져 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 갈 때 큰 풍랑이 일어나고 시련이 일어나는 것은 그 시련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고 나면 그 다음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올바른 자리인가 그걸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고도 사명에 불순종 하면서 우리 가고 싶은 길로 가 버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우리를 세워 주시는 그 자리는 우리가 서 있으면 서있고 우리가 거기 안 서 있으면 비워 있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하시려고 하신다. 그래서 여러분을 먼저 하나님 믿는 사람 되게 하셨다. 여러분 아니면 누가 감당 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거기 서 있으면 서있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안 서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사명의 자리는 비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워두고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뭐냐 하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받고 나면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해 집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해 집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주님의 자녀, 이제 주님이 나에게 이처럼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은 이제 나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살게 하심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시기 위함이구나! 라고 하는 분명한 인식을 갖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본분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기의 고백을 어떻게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뱃사람들에게 이렇게 제비에 뽑혀 가지고 죽을죄를 지은 죄인의 모습으로서 비로소 이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그런 비참한 자리에서 해야 되는 것입니까?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는 복된 자리,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면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그 아름다운 자리에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 주님이 물으실 때 “주님은 천지를 지으셨고 저는 그 위대하신 주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럼 이 신앙의 고백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잃어버린 신앙의 고백을 풍랑 속에서 되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주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 각자의 자리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세워 두신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기억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본분을 기억하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본분을 기억하면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져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본분은 기억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세워 주셨을 때 이제 우리는 그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갈 때에만 우리의 인생은 가장 빛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귀하고 아름다워서 하나님에게도 물론 귀하고 사람들에게도 매우 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주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면서 사는 것 그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알고 거기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면서 살도록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럼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깊이 즐거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때에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아무리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자리에 서 있으면서 그가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자녀는 없습니다.
요나가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다. 이건 틀린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하나님을 경외했던 자로다. 이렇게 말하든지, 아니면 경외하고 싶은 사람이다. 라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왜 그 배 밑창에 가서 누워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풍랑이 일어나니까 당첨된 쪽지 하나 들고 푸른 바다를 쳐다보면서 눈물을 지어야 하는 그런 서글픈 신세가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찾아내고야 맙니다. 사명을 버리고 자기 갈 길로 걸어가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추적해서 찾아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명 참 지긋 지긋 하구나. 결국은 죽을 때까지 따라오는 구나. 맞습니다. 죽을 때까지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유한 사명은 있지만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제넘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보면 정말 하나님을 위대하게 섬겼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딱 때가 되면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능력을 가지고 봉사 했던 사람들은 한 120세 까지 살고 사명을 맡아 가지고 설렁설렁하는 사람들은 30세 넘기 전에 다 데려 가실 것 같으시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명을 버리고 고무신 거꾸로 신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90세 100세 때까지 살게 하시는가 하면 순결한 영혼으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을 20~30세 때에 데려 가시기도 하십니다. 오히려 정말 신령하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장수한 사람들은 오히려 적습니다.
그건 무엇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사람에게 메이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여러분들이 그 사명의 자리로 안 돌아 가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완전히 옮기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끈임 없이 우리가 아니면 그 자리에 설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설복 시키시고, 은혜 주시고, 우리를 감동 시키시고,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알리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하는 커다란 벼려 중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거기에서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행복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본분을 그렇게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잘 생각 해 보십시오. 거기 서 있는 그 자리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입니까? 거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처음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기대하시던 그 모습이었습니까? 남이 못 본 것을 보게 하시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게 하셔서 주님이 세워 주신 그 자리에 서 있습니까? 풍랑과 시련이 일어나고 주님이 그 풍랑 속에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고 너를 은혜 주었던 나를 기억하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애써 거절하면서도 뭔가 사명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문제 해결의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 풍랑으로 끌어 들이는 그런 고통스러운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죄 끊음 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나 본향 찾아 가리
큰 풍랑 일어나는 것은 거기에서 머리를 굴리며 피할 길을 한번 찾아보라고 IQ경진 대회 하는 것이 아니라 퍼즐하는 것이 아니라 큰 풍파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명의 자리를 떠나게 만들었던 세상과의 질기고 모진 인연을 끊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오라고 하실 때에 주께 갈 수 있는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큰 풍랑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명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했던 우리들을 사명으로 돌아오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 대신 그렇게 사랑했던 세상에 버림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의탁했던 이 배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탁했던 이 사람들로부터 이제는 배반을 당하고 자기를 그 사람들이 바다에 던져야 할 운명에 놓이게 만드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에게 잃어버린 사명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보십시오. 포위망이 얼마나 좁혀 왔습니까. 여러분 한사람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애 굿은 여러분들의 가족과 그리고 함께 동업하던 사람들 그리고 여러분들의 주의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었습니다.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도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만났기 때문에 주님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나를 만났기 때문에 불행했던 자리에서 행복을 발견하게 되어도 시원치 않은데 그런 사건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영문 모를 피해를 당하고 시련을 당하게 하시는 이 일들이 정말 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할 일입니까?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 때문에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새롭게 알게 되는 그러한 축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결국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 내셨습니다. 사명을 버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찾아내시고야 맙니다. 이렇게 찾아냄을 당하는 것 보다는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작은 풍랑 속에서 우리들이 인격적으로 깊이 승복하고 “하나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보니까 주님이 제게 주시는 은혜는 크고 사명은 막중 했으나 우리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사명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사명을 떠나 사는 동안 제게는 행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제게 주께서 은혜를 주시고 사명을 주신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사오니 오늘 저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회복 시켜 주셔서 하나님께서 원래 두셨던 그 사명의 자리로 저를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이전에는 저를 세워 주신 그 사명의 자리를 볼 때마다 그 자리에 내가 없어서 주님의 마음에 고통이 되셨지만 이전에 제가 주님의 사명을 버리고 아프게 해 드린 것 보다 이제 이 남은 생애에는 주님께서 세워 주신 그 자리에 서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사람으로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저를 그 자리에 세워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즉시 회복시키시고 잃었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서 주님 때문에 정말 보람 있고 행복한 생애를 살도록 만들어 주시고 여러분들은 주님 안에 주님은 여러분들안에 거하는 그런 관계로 되돌려 놓아 주실 것입니다.
3. 회개하는 요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이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1-10)
이 물고기 속으로 들어갔을 때 요나의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바다에 휙 던져 질 때에는 이를 악물고 이젠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요나의 일장에서의 태도를 쭉 보면 여러분 느낌에 죽음을 굉장히 두려워 한 사람 같습니까? 아니면 죽는 것 자체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강퍅해져 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주님이 싫어하시면 어떡하나? 주님이 야단치시면 어떡하나?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살아 있습니다. 또 반대로 주님의 사랑을 더 받아야 될 텐데 그런 마음도 살아있고 그런데 강퍅해 지게 되면, 죽으면 죽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살아지는 방법이 둘인데 하나는 신앙이 충만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는 방법이 있고 인간이 대개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징벌을 하셔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런 마음이 된 것입니다. 날 잡아 잡수십시오. 물 속에 풍덩 빠지면서 이것으로서 모든 것은 끝나는 구나! 라고 생각 한 것입니다. 착각도 유만 부득이지 사람이 죽을 때 빚은 때어 먹을 수 있어도 사명은 때어 먹고 못 죽습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입을 짝 벌리고 있다가 휘 던지니까 바로 들어갔겠습니까? 바닷물 속에서 물을 한참 먹고 그러다 실신 상태에서 고기가 삼킨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지 라고 하면서 먹었겠습니까? 물고기 중에서 별스럽게 생긴 것이 옷까지 있고 물 속을 돌아다니니까 맛이 어떨까 하고 별식인줄 알고 넙죽 받아먹었겠지요. 그런데 그게 입으로 넘어 가지도 않고 코로 나오지도 않고 간질간질하게 후실에 딱 걸려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거기서 요나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처음에야 길길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묘한 그 섭리를 보십시오. 물 속에 집어 던지시면 인생이 끝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예비 하셨어요. 물고기를 예비 하시고 요나를 받아먹게 하셨습니다. 위 속으로 들어갔으면 다 녹아서 없어져 버렸을 텐데 후실에 덜어 가 있게 하셨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고 보니까 한번도 와 본적이 없던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식으로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장소가 아주 상쾌했겠습니까? 코 구멍 비슷한 곳에 들어 가 있는 것인데, 체액 같은 것 들이 흘러 다니고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한번 물 속으로 들어가면 바닷물이 들어오고 그리고 물풀 같은 것들도 딸려 들어와서 목에까지 휘 감키고 진짜 상항이 어떤 상항입니까? 살래야 살수가 없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을 수가 없는 상항이 되었습니다. 물고기 후실에 들어가서 평안하게 바람 잘 부는 어디 강변에 있는 여관방 같은 데서 창문을 열어 놓고 긴 의자에 누워 그런 시간을 보냈을 리가 없습니다. 이장에서도 고난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배에서 당한 고난하고는 종류가 다른 고난입니다. 그래도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는 인생들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고독한 가운데 홀로 씨름하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시려고 그 시련은 이상하게 외롭게 당하는 시련입니다.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와주려고 하여도 이 사람들처럼 열심히 배의 노를 저어서 육지 쪽으로 갈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다 덮게 만들어 주시고 그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게 만들어 주고 힘을 얻게 만들어 주고 그러면 하나님께 돌아오겠습니까? 안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려고 의도적으로 일으키시는 그 풍랑 한 가운데서는 결코 도움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고 요나처럼 홀로 외로이 당하게 하십니다. 왜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과 대면하게 하시고 하나님 만나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요나가 결코 배에 있을 때보다 상항이 좋아 졌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것입니다. 죽지도 못하게 하시고 살지도 못하게 하시고 그 속에서 고난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공포, 그 고통, 그 외로움, 그 물고기 배 속에서 나오는 미끄러운 체액, 냄새 이런 것들이 삼일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3일 이었을까? 이렇게 물으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계신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물론 그것도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억지로 그것을 맞추기 위해서 3일 동안 하나님께서 끌어가신 것은 아닙니다. 3일이나 그 상태를 견뎠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그 속에서도 요나가 즉각적으로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견딜 만큼 견디다 이제는 도저히 못 견디겠으니 차라리 죽어 버리면 견디겠는데 쉽게 죽어버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일 동안이나 끌다가 이 회개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문을 보면 고난을 받으면서 기도한다. 라는 것이 처음 시작입니다. 상항이 바꿨습니다. 바다에서 집어던져 졌고, 물고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이렇게 상항은 바꿨지만 진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좀 전에 넓은 바다에서 시커먼 하늘을 보면서 모질게 부는 바람 속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파도 속에서 고통을 받았다면 이번에는 한번도 들어 가 본 적이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처절한 외로움을 당하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풍랑을 일어나게 하셔도 우리들이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헛된 기대를 자꾸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괜찮아지겠지. 어떻게 되겠지. 라고 하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절대 진전이 없습니다. 그리고 돌을 더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큰 환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이 고난이 오면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눈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고난이 오면 누구 때문에, 어떤 일 때문에 왔다 이런 것들을 분석을 하고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재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사람들 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큰 풍랑이 일어나면 이것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풍랑을 피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쓰는데도 안 되는 이유가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고난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이제라도 깨달으면 요나보다 났습니다. 요나는 아직까지도 고난을 받으면서 고통스러운 물고기 속에서 결코 고난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왜 풍랑을 만났지요. 왜 고난이 계속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피할 수 없이 받는 고난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뭔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고난이 아닐까요.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는 고난입니다. 신앙을 버리면 피해 갈 수 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찾아내시기 위해서 당하게 하시는 고난은 신앙이 아니라 뭘 버려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고난입니다. 전방위적인 고난입니다. 그런 고난을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당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유대관계는 고갈 되어 버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깊은 체험은 모두 사라질 때 그 때 여러분들은 고난의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에 대해서 묻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어떡하면 이 고난을 피할까 하고 생각하고 그 고난이 너무나 괴로워서 잠 못 이루면서 뒤척이는 그 깊은 고민 중에 십분의 일 만이라도 이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 왜 하나님께서 사랑받는 자녀인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실까? 왜 이 캄캄하게 막힌 것 같은 질식할 것 같은 상항이 아무리 기도하고 교회를 다니고 하여도 도저히 변화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십분의 일이라도 드린다면 훨씬 우리의 인생의 미래는 밝아 질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그래서 두 방면으로 그 문제를 해결을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직접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갑니까? 제 친구도 제게 왜 그러고 사니? 라고 하는데 하나님 저도 그렇게 묻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삽니다. 이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 저에게 한번 직접 경쾌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하고 말씀 앞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어는 기회인가 반드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도저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풍랑의 의미를 깊이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참 재미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요나가 드디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이 인용된 기도 시는 진심입니다. 그런데 1장에 보면 이미 큰 풍랑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벌써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말합니다. 이건 큰 풍랑이 일어나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이것이 바로 요나 때문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나 자신도 이것이 나 때문인지를 아노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인정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은 별개 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데 인정하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욕할 때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다 내가 잘못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반항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식의 인정은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합니다.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깊이 동의가 되어야한다. 정말 나 때문이고, 내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왜 그랬나. 내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그 분명한 사명을 받은 복 서러운 사람인데 내가 하나님 앞에 왜 그랬을까 절대 그럴 수 없는데 그런 마음이 생겨야지만 자기 고백이 회개로 이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2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드디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큰 풍랑이 일어나서 요나가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 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해서 바다에 큰 뒤 엎치는 파도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고통을 많이 당해도 그 자체 만으로만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계시다는 것이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받으실 때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그 은혜가 깊이 몰려 와야지만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변화대어야만 할 필요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쳐 주시고
너의 작은 시름에도 응답 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는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 볼 찌라.
만약에 그 노래 가사처럼 작은 시름에도 응답한다고 하셨을 것 같았으면 요나는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놓으시려고 일으키신 이 풍랑 속에서는 단지 고통 받는 그 모습 가지고는 안 됩니다. 거기서 그 고통의 의미를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회개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나가 이제는 진심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2장에 나오는 기도문을 읽어 보면 꼭 시편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만큼 그 기도의 영성과 진실이 깊이 베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제 많이 고난을 받으셨지요. 그리고 그 풍랑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이번 기회에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뭔가 이 상항 속에서 깊은 고통을 느껴도 그 고통 이상 느끼는 것이 없다면 그 고통을 계속 진전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찾아내시기 위해서 이제 여러분들을 지금은 부스질 것 같은 파도위에서 돛대를 붙들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망신창이가 됐지만 하나님이 거기서도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지심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바다에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이제는 바다에서 뒤 덮치는 파도에 떠밀리는 이리저리 굴려 다니던 때가 훨씬 더 행복했다고 느끼게끔 그 물고기 속에서 고통 받던 그 요나의 상항을 여러분들의 상항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여러분들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다.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수록 우리에게는 정직과 진실이 필요합니다. 허세, 허위, 거짓, 위선, 교만, 잘난 체 하는 것, 이런 것들 가지고는 풍랑이 아무리 높아도 거기서 하나님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 버리고 진짜 진실한 여러분들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보여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회개하고 이 큰 풍랑과 이 견딜 수 없는 많은 시련 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연류 된 이 큰 풍파가 나의 죄 때문이며 따라서 나는 나의 하나님의 멀리 떠난 삶을 깊이 회개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여기서 기도를 하는데 요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몇 절이냐 하면 4절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이것은 요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기도입니다. 이 마음이 된 것 입니다. 기도 속에서 우선 이 말의 뜻을 해석을 하고 그리고 적용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비록 주의 목적에서 쫓겨났을지라도”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고나 받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나는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그것은 내가 잘못해서 주님은 나를 싫어 하셔도 나는 주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을 나를 싫어 하셔도 나는 주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을 나를 버리셔도 나는 주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환란의 풍파 속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잘 들어 보세요.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생활 다 해체 됩니다. 영적으로 고갈되고 삶에 있어서 순종도 없으며 늘 불순종과 죄의 열매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 다녀도 하나님이 마음에 없고 그냥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풍랑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왜 재수 없게 나한테만 이런 오는 거야. 내가 인생의 바다에서 선장 노릇하며 산지가 40년 50년이 지났는데 큰 수많은 풍파를 만났지. 이 까짓것은 문제없다고 하면서 덤벼듭니다. 그런데 오늘 만난 파도는 옛날에 만난 파도하고 다릅니다. 옛날에 만난 파도는 그냥 만난 파도였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고쳐 놓으시려고 일으키신 파도입니다. 그런데 접근 하시는 방법은 똑같습니다. 육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파도를 접근하는 것입니다. 해결이 되지 않겠지요. 그리고 헤쳐 나가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더 풍랑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노력도 더 배나 합니다. 더욱 더 그러다 결국은 점점 포위망이 좁혀 지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안 되겠으니 포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뭘 바라게 되나 하면 이 풍랑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이구나. 그러면 하나님이 아니면 해결을 못하시겠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는데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풍랑이 해결 되는 데만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이 풍랑을 좀 잔잔케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서입니다. 그러다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럼 그 다음은 풍랑을 다 간 곳 없고,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심정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조금 전 그 풍랑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하나님!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그 심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요나가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정말 주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 구원이라는 것은 죽음일 수도 있고, 물고기 배 속에서 꺼내시는 것일 수도 있고 무엇일 수도 있는데 하여튼 지금 이 견디기 힘든 상항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어떠한 탈출구도 안 생긴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왜 풍랑을 만났습니까? 하나님이 상대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서 주님을 붙들며 산다는 이유 때문에 축복을 받아도 주님을 놓을 수 없고, 주님을 의지하고 산다는 이유 때문에 풍랑을 만나도 주님을 놓을 수가 없고,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살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 삶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내가 놓칠 수가 없다. 그러면 이런 식의 요나적인 풍랑은 만나지 않습니다.
(예화) 여러분들에게 자녀가 있어요. 공부해라. 그러니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친구들하고 싸우면 안 된다. 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있어요. 자기 일을 다 그렇게 알아서 잘 합니다. 그러니 왜 때리겠습니까? 이런 생각 하면서 때리는 사람 있습니까? 저 놈을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가끔 때려야만 부모가 살아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텐데. 너 말만 잘 들으면 다야. 너 부모가 살아 있다는 것 의식해. 소속감 가지래. 엎드려. 이런 부모는 정신병자 아니고는 없습니다. 잘하는데 왜 때립니까. 신앙생활 잘 못 하는 서도들 데려다가 놓고 “그 따위로 하려면 다 집어치워”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매일 눈물 콧물 흘리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성화의 삶을 살고 교회 봉사하는 사람 불러 놓고 “그렇게 잘 살기만 하면 다야. 목사가 있다는 것 알기나 해. 다 집어치워” 라고 하면 뭘 집어치울 것이 있습니까? 다 잘하는데.
여러분들이 부모라도 안 때립니다. 왜 때립니까? 더군다나 자비롭고 인자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왜 풍랑을 일으키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상대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것을 위해서 신앙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이 더 귀하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기 보다는 적당하게 타협을 해서 형통한 길을 찾아 가려고 하는 신앙 자체를 상대화 시키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란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절대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절대라는 것은 서로 상관관계를 끊는 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들이 비쌀까? 이 물건이 비쌀까? 이것은 비교가 안 됩니다. 무슨 아들을 근으로 달아서 팔아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걸 가리켜서 절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비교되시고 저울질 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그런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의 행정을 하는 원칙이 뭐냐. 그랬을 때 첫 번째 원칙이 뭐냐 하면 성경진리인가? 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이런데 현실이 도저히 안 맞으면 그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애를 쓰고 모든 궁리를 해 보다가 신앙을 기본적인 원칙을 파괴하지 않고는 이 상항을 끌어 않을 수 없다고 생각 되면 성경을 버리지 않고 상항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하고 살려면 이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도저히 이 길을 못 걸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서 고민을 하면서 씨름을 하면서 이 신앙을 지키면서 이 길과 조화를 찾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신앙을 포기 하지 않고는 여기에 고난이 가난이 심지어는 죽음이 기다려도 이걸 포기하고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 절대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걸어갔다면 이런 풍랑을 만날 리가 없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나쁘고 앗수르 사람들이 죽일 놈 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거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가서 “내가 너에게 쳐서 외치라” 이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주신 사명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지금 강력한 그 소원은 있지만 사명이 절대적입니다. 이 사람이 절대 신앙의 원칙에서 사는 사람이었으면 사명을 버릴 것이 아니라 자기소원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니느웨 사람들이 절대 구원 받아서는 안 되고 꼴도 보기 싫지만 주께서 가라하시니 견딜 수 없이 내키지 않지만 나는 간다. 이것이 절대 신앙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았으면 이 풍랑이 일어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 속에서 하나님께서 회개 시키실 때에는 이 절대 신앙을 회복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로 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앞에 쫓겨났을지라도 내가 주의 성전을 바라게 되었나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토라지고 나면 하나님께 잘 토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섭섭한 마음을 많이 품습니다. 그래서 대 놓고 “진짜 하나님 해도 너무 하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내가 진짜 많이 봐 줬는데 너희들이 해도 너무하다고 하실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 큰 원망 같은 것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강한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 같은 것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좀 더 맞아야지 정신을 차리겠죠. 여러분 아이들을 때릴 때 가끔 “때려요. 맞으면 되잖아요.” 그런 아이들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거기서 지면 교육이 안 됩니다. 그것을 못 꺾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점잖게 나가야 됩니다. 만약에 그런 상항이 벌어지면 그 때는 아주 강하게 체벌을 하여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꺾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부모의 권위가 안 서는 것입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처음서부터 때리지 말고 인격으로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인격은 더 자신이 없는데. 그럼 낳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태권도 배워 가지고 아이들하고 싸울 수는 없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빨리 사람이 되는 비결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요나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사랑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님이 나를 쫒아 내시면 주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서 살겠습니까? 제가 처음 교회에 나와서 부를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지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 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 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주님이 나를 박대하신다 생각을 하면 말 서러운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세상의 친구들이 다 나를 버려도 예수님은 나를 안 버리실 것이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그것은 주님께 박대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마지막 희망입니다. 주님이 내가 은혜를 안 베푸셔도 나는 갈 때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꽉 메 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애처로우시겠어요.
(예화) 예전에 어떤 지체 하나가 그냥 자기 스스로 기복이 심하고 그러다가 또 어디를 가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 보라는 하였습니다. 어디 간들 하나님이 안 계시냐. 그래도 인간이라는 것은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장에 찍어 먹어 봐야 되잖아요. 찍어 먹어 보고 된장이 아니면 빨리 와라. 라고 하고 보냈습니다. 막 돌아 다니다가 어느 날 눈물을 뚝 뚝 흘리면서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열린 교회를 떠나고 나니까 떠나기 전에는 갈 때가 많은 줄 알았는데 떠나고 나니까 갈 때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쓰린지 모릅니다. 그가 잘못한 일들은 생각이 안 납니다. 단지 내 앞에 있는 이 영혼은 하나님 아니면 살 수 없는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영혼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쫓겨났을지라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면전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다. 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더 이상 은혜를 안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고백입니까? 주님이 은혜를 안 베푸신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고생한 보람이 있습니다. 요나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윗이나 이사야나 에스겔이나 에레미아나 이런 사람들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너절한 선지자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까? 참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도 진짜 이 풍랑이 멈추고 거기서 진정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진짜 새로운 생명을 회복하는 그런 일들을 위해서는 여러분들 속에서 이렇게 완전한 고백을 받아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큰 시련 갑절로 더 고통스러워져도 주님 그것은 제가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는 주님의 은혜를 제게서 거두시면 저는 더 이상 살수 없습니다. 그런 고백을 받아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끌었던 모든 상항과 환경에 대한 희망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하나님 홀로 그 문제 가운데 장엄한, 찬란한 빛 가운데, 영광 가운데 하나님 홀로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대표적으로 경험 하시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까닭 모를 고난을 많이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원망하기도 하고 막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지존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 이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고백을 갖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보인이 계시도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왔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시간이 흐르자 욥은 잃어버린 자식들 무너진 집 그리고 죽어버린 양떼들 이런 것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서 찬란하게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합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힘으로 극복하면 이 상항이 나아지리라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 없이는 이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 풍랑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정말 주님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나를 쫓아내시고 주님이 내게서 그 은혜를 거두신다고 하더라도 나는 주님께 돌아오는 것 밖에는 따로 갈 때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풍랑 속에서 고통 하는 여러분들의 영혼에 새로운 기쁨과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이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자기라고 고백을 했는데 그 뒤편에 가서 아주 중요한 고백이 나옵니다. 7절을 보십시오. 6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그것 보십시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여호와를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순풍에 돛달 듯이 그렇게 항해하고 있을 때에 요나의 영혼이 고통스럽고 피곤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풍랑이 일어날 때도 영혼이 피곤하고 곤했으면 어떻게 잠을 잤겠습니까? 아무 고통을 못 느꼈습니다. 환란과 시련을 당해서 속이 상한다고 하는 말과 심령이 깊이 고통스럽다는 말은 상관은 있지만 같은 말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영혼이 피곤하다는 말은 단지 시달려서 괴롭다는 것이 아니라 이 풍랑과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고생하는 전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렸다는 영적인 자각에서 오는 곤비함입니다. 그런 곤고함입니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면 영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빨리 돈을 빌리려 다니고 지명수배 당했으면 도망 다니고 누가 자기를 망하게 했으면 복수하려고 다닌다고 바쁘지 영혼의 곤비함 같은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런데 그 풍랑과 환란이 지속 대면서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여망이 별로 없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에 자기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 속에 이 영적으로 고갈되었기 때문에 뭔가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이런 고난들을 극복해 나가게 하는 영혼의 힘이 없다는 것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곤고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환란의 고통을 통해서 육적인 고통과 영혼의 깊은 고통은 일치하지 않는 적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곤고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곤고할 때 깊이 곤고함을 느꼈습니다. 사명을 버리고 불순종하고 가면서는 전혀 그런 곤고함을 못 느꼈습니다. 배 타고 다시스로 가고 있는 순풍이 부는 곳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밀짚모자 쓰고 쥬스나 한잔 마시면서 갈 때에는 그런 것을 전혀 못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씨름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주님이 결코 사명을 버리고 가는 나를 용서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 사명을 져 버리고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곤고한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영혼이 곤고하게 되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메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란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면 모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자복하고 주님도와 달라고 할 것 같지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볼 때 저 인간이 아무 희망이 없는데 저렇게 환란을 당하고 폭풍은 커지고 아무 희망이 없고 밤에 잠도 못자고 수면제를 먹고 그렇게 고통을 받는데 이상하게 심령이 기름 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 앞에 비참 하리 만큼 낮아지는 이 마음은 하나님의 또 다른 선물입니다. 고통이 저절로 그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봄에 비가 옵니다. 비가 올 때 살아 있는 나무에는 싹이 나고 잎이 납니다. 그런데 죽은 나무에는 그 비 때문에 썩습니다. 심령에 그렇게 은혜가 남아 있고 뭔가 하나님께서 만져 주셔서 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생겨날 때에는 고난을 당하면 세상에 점점 희망이 없고 염증이 생기고 지겹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자꾸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영혼의 곤고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간절히 메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상담을 합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을 똑바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해결이 됩니다. 우선 말씀을 잘 깨닫고 신앙을 회복하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목사님 고난도 웬 만해야지 그런 여유가 있지요. 라고 합니다. 이것은 뭔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깊이 포기할 때 까지 갈 때까지 가 봐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고난이 닥친다고 해서 즉시 회개할 마음이 생긴다든지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 고난이 닥쳤는데 그런 마음이 생겨났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런 특별한 은혜를 이 요나가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곤고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합니다. 그때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였고 주의 성전에까지 비쳤나이다. 이건 똑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깊이 들으시고 그 들으신 증거를 자기에게 보여 주셨다.
솔직히 저도 환란을 많이 당해 보았습니다. 간단하게 살아오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다 마찬가지겠지만. 환란을 당하면서 살아 온 그 인생의 가정을 보면 진짜 환란이 심한데 영혼도 곤고할 때에는 어떤 마음이 드나 하면 환란은 물러가지는 않아도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살 텐데. 그런 마음이 듭니다. 정말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살 텐데 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명을 등졌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는 회개하는 일 없이는 이런 기도의 영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단순히 기도를 안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기 때문에 지금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물고기 배 속에서 요나가 ........
2장에서는 자기 자아를 다 버린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회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기억하십시오. 큰 풍랑을 만나서 견딜 수 없이 몸부림 치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을 수도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는 상항에서 신기한 것은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만 되면 살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물 속에 들어가도 대롱이 있어서 이 위에 올라가서 숨만 쉴 수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처럼 비록 미약한 기도이지만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며
내가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니
앞길 환하게 보이도다.
큰 풍랑이 일어나도 기도만 된다면 기도를 해서 이 기도가 하나님께 빨리 올라가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진다면 물 속에 빠져서 숨구멍을 찾은 사람들과 똑같은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물 속에 있지만 그러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언제 가는 떨치고 일어 날 수 있습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그런 기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제 요나가 굉장히 중요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9절 마지막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다 맡긴 겁니다. 결국 불순종 가운데서 사명을 버리고 걸어가다가 당한 이 큰 시련 이 풍랑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하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아 내시고 싶어 하는 고백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마음대로 이십니다. 그런 고백이 진실 된 고백일 경우 그 고백이 곧 나는 하나님만 소망으로 삼으며 살아 가겠습니다는 고백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고백이 있었으면 이 요나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또 어떤 사람은 그때 고무신이 정말 있었나? 원래 쓸데없는데 이렇게 예민합니다. 그때는 고무신 없었습니다. 신발을 거꾸로 신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백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이것은 주님이 마음먹은 사람은 구원하실 수 있고 주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구원 받을 것입니다. 그 고백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적용시켰더라면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 마음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주님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부족합니까? 잘 안되지 않습니까? 뭘 자꾸 바치시라 그러는데 주님 저도 먹고 살기 어렵습니다. 제가 얼마나 아껴서 돈을 모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내 시간이 얼마나 금쪽같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 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좀 옮겨 주십시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결론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내 뜻 앞에서 주님의 뜻을 꺾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느냐 아니면 하나님 나는 이러고 싶어요. 이랬으면 좋겠고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겠다면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가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결론이 나는 것이 바로 구원은 주께로 말미암나이다. 이 고백입니다. 진작 했더라면 거꾸로 신도 일도 없고 이 고생도 안 하고 정말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귀한 사명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성경 속에 누워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라고 하는 부정적인 예증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뒤 늦게야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제 큰 풍랑과 환란을 만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누구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그 인간 저 인간 하면서 이를 갈고 복수에 칼을 가슴에 뿜고 있어요. 그것 하나님께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풍랑인데 다 버리십시오. 그리고 용서하십시오.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무릎을 꿇고 이제 나는 내가 만난 이 큰 풍랑과 어려움을 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주님 모든 구원이 주님께 말미암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해야 됩니다.
덧 붓 쳐서 마지막의 장면이 우리에게 주님의 자비에 대해서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로 토 하니라” 참 하나님 얼마나 멋있으십니까? 삼일 동안을 물고기 속에 넣어서 온갖 고생을 다 시키시다가 물고기를 명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그랬습니까? “구원은 주께로 말미암나이다.” 이 고백을 받아내신 후에 그리고 몇 칠 지나서가 아니가 그렇게 받아내시고 나서 바로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즉, 이 영혼의 곤고함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생각과 태도 관계를 바꾸고 나면 즉시 영혼의 회복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 할 때도 잘 생각을 해 보십시오. 회개를 할 때 어떤 때는 장기간에 거쳐서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다가 어느 순간에 예상되는 대로 회개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뜻 박에 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화) 제가 언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께서 말씀 하시는데 주택가에서 지하에 방 하나를 얻어서 낮에 어느 요일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동네사람들이 진정을 넣은 것입니다. 저기 웬 지하실에다가 교회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울고불고 기도를 하는데 도대체 견딜 수가 없다고. 그렇게 진정서가 수없이 들어가니까 경찰서에서 형사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온 그 시간이 바로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자기들은 배운 사람들이니 예배를 망치면서 이 따위 집어치워.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큰 소리가 나고 문제가 일어나는지 자기들도 보아야 되니 뒷자리에 둘이 사복을 입고 와서 쭈그리고 앉아서 있는데 그 말씀 듣다가 둘이 똑같이 회개 하고 성령을 받았어요. 그래서 방언을 하고 주여! 하며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러니 가서 무엇이라 보고서를 썼겠습니까? 아주 좋은 사람들이니 아무 문제없더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단속하러 나왔다가 뒤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하나님 만나고 회개하고 변화된 사람들처럼 전혀 계획에 없었는데 졸지에 회개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그런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서서히 회개 할 마음이 생기면서 갈 때는 조금씩,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회개하는 순간에 빛이 확 들어오는데 이제 그런 경우에 캄캄한 어두움이었다가 쾅 하면서 어두움이 무너지면서 빛이 확 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명은 부지했지만 견딜 수 없이 영혼의 곤고한 상태를 직면하게 하셨는데 그가 깊이 회개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물고기 배 속에서 토해 내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영혼의 깊은 곤고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진실 되게 회개하고 토설하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밝은 빛을 주십니다. 때로는 놀랍니다. 수십 년 동안 싸인 어두움인데 한번에 하나님께서 그 어두움을 거두시고 빛을 짝 비추시는 것입니다. 빛은 일단 들어오기 시작하면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비추기만 하면 어두움이 다 물러가게 됩니다. 전기 불을 켰는데도 여기 컴컴한 적 있었나요. 그런 것 없습니다.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은 즉시 물러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비추면 우리의 영혼의 곤고함과 어두움은 즉각적으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 바랍니다.
덧붙이면 바로 그렇게 조건이 충족 되었을 때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 놓은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호와께서 명하시매. 이 때문입니다. 그때 물고기가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이 속에 달라붙어 가지고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고 견딜 수가 없는데, 저는 이것이 토해 냈다기보다도 제체기 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 됩니다. 그런데 이게 또 얼마나 재미있어요. 요나를 육지에 토해 났다라고 할 때 여러분들은 떠오르는 그림이 어떤 그림입니까? 요나가 토해진 곳이 어떤 곳일까요. 문제를 낼 테니까 셋 중에 하나를 맞추어 보십시오. 일번 시커먼 바위가 잔뜩 있는 해변, 이번 암벽으로 된 절벽 바로 아래, 삼번 부드러운 모래가 가득 있는 해변.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토해 냈는데 다시 깊은 바다라면 도대체 설교가 안 맞아 들어가잖아요. 회개 하면 뭐가 어떻게 된다고 하였는데 깊이 회개 하고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하고 토해 냈더니 다시 그 바다입니다. 그리고 죽었더라. 또 깊이 회개 하니 이 큰 물고기가 토했는데 너무 세게 튀어 나가다가 절벽에 부딪혀서 죽었다면 사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서 죽는 것이 훨씬 낳겠지요. 그냥 토해서 날라 간 것이 아니라 시름시름 앓고 고통 하던 물고기가 울컥울컥하며 토해 놓으니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엎드러진 것입니다. 발가락만 물이 찰랑찰랑하고 위로는 숨을 쉴 수가 있었습니다. 한참 있다 눈을 지그시 떠 보니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느낄 수 있나 하면 우리가 사명을 져 버리고 주님의 은혜를 져 버리고 주님의 사명을 져 버리고 불순종을 길을 걸어 갈 때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다시는 안 볼 분 같이 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순종하고 막 가는 인생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언제나 자애로운 손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에게 회복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한 체질과 모든 것을 아셔서 그 곳에다가 던지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요나 스토리는 다 안 끝났지만 이제 결단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풍랑 속에 계속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물고기 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영혼의 고뇌가 그치지 않는 그 어두움에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름다운 햇살이 찬란하게 비추는 해변에서 눈을 떠시겠습니다. 계속 자기 고집대로 설마 그래서 내 힘으로 해결 할 수 있을 거야. 이러면서 계속 풍랑을 만나고 여러분 주의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고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 같은 그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렇게 영혼의 어두움을 벗 삼아서 지내시겠습니까? 아니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이 가득한 해변에서 회복의 눈을 떠시겠어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결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도망 다니십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