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행하시는 하나님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새벽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창19:23) 2000. 8. 20(주일오후) 1
2. 새벽에 원수를 멸하시는 하나님(출14:27-28) 2000. 8. 27(주일오후) 7
3. 새벽에 만나를 내리시는 하나님(출16:13-14) 2000. 9. 3(주일오후) 15
4. 새벽에 무너진 성(수6:15) 2000. 9. 17(주일오후) 23
5. 새벽에 이기게 하신 하나님(시46:5,왕하19:35) 2000. 9. 24(주일오후) 32
6. 새벽을 깨우는 정한 마음(시108:1-2) 2000. 10. 1(주일오후) 38
7. 새벽에 만나는 하나님 (시119:147) 2000. 10. 8(주일오후) 46
1.새벽에 구원하시는 하나님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창19:23)
이 짧은 본문에서 무슨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죠. 소알로 들어갈 때에 동이텃다. 그런 얘기죠. 당분간 저는 새벽에 일어난 위대한 일들을 성경에서 몇가지 골라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여기에 나오는 스토리는 다름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게된 경위에요. 경위인데 바로 이 소돔과 고모라의 지역에 누가 있었느냐하면은 롯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조카였죠. 아브라함과 함께 아브라함이 조카를 아들처럼 생각하면서 그렇게 같이 잘 길렀고 잘 지냈는데 가축의 떼들이 점점 많아져서 도저히 한 집에서 살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한다리 건너 두다리라고 조카 롯과 아브라함은 그럴수 없는 사이였지만 그 아래에서 수종을들던 목자들은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은 서로 다투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참 좋지않다. 그렇게 생각고 아브라함이 롯을 분가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실 이장면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은 굉장히 마음 아프고 울타리 하나가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허전함이었을거에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보낼 사람 다 보내고 정리하신 후에 아브라함과 홀로 대면을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작정들을 하시는거죠.
그런데 그 롯은 처음서부터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 이거죠. 왜 선택이 잘못되었는고하니 우선 두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는데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너 먼저 가고 싶은데를 먼저 택해라. 그렇게 아브라함이 말했을 때 그때 자기가 나 이쪽으로 갈래요. 그렇게 할수 있는 처지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안되지 인간이 그죠. 인간이 그러면 안되지 그렇잖아요. 그럼 되겠어요? 자기가 아브라함 그늘 밑에서 여태까지 살았는데 그러면은 먼저 가장 좋은데를 고르십시오. 찌끄래기 제가 갖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런 점에서 인제 롯의 선택은 잘못되었고 두 번째는 그가 소안 들녁을 바라보면서 그 쪽을 택했어요. 그런데 결국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는데 무슨 택한 동기가 무슨 다른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물이 넉넉해 보였어요. 그러니까 택할 때 아무런 무슨 약속이라든지 신앙이라든지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야말로 안목에 좋은데로 자기 갈 곳을 정했다는 점에서 선택이 잘못되었죠. 그 땅이 알짜배기 땅인지 알고 갔었는데 결국은 쫄딱 망하고 다 털어먹고 도망하는 장면이 지금 나오는 장면이잖아요. 그런데 오늘의 메시지는 그것이 아니라 롯이 거기에서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그 롯이 롯에대한 평가는 인제 갈린다고 봐야되거든요. 롯에대한 평가는 롯에대한 평가는 갈려요. 그게 뭐냐하면은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불법한 사람의 행실은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하나님이 건지셨다.” 그래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가 되었는데
우리가 읽은 이 19장을 찬찬히 살펴보면은 이 사람이 정말 신앙적인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의심이 갈 정도에요. 몇가지 점에서 그런데 우선은 말이죠. 이 롯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그러니까 사위라는 사람들이 농담으로 여겼다. 이거죠. 그 얘기는 뭐냐하면은 그 입에서 그렇게 신앙적인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별로 본적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거죠.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상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거죠. 그리고 롯 자체는 그후에 롯의 그런 행실이나 모든 것을 보더라도 결코 이 사람이 경건한 사람은 아니었다. 라는 심증을 갖게해요. 그런데 상대적인거죠. 뭐냐하면은 롯이 굉장히 의로운 사람이었다라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이 워낙 막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인 타락성들을 이야기할 때에 소돔과 고모라 뭐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죠. 그래서 그런데 달란 주점이 생기는데 별거다있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다쓰더라고요. 열린 단란주점, 불꽃 술집, 다 있는거에요. 그런데 고모라 술집은 못봤어요. 소돔 노래방은 아직 못봤어요. 솔로몬 노래방은 봤어요. 실로암 단란주점도 봤구요. 실로암 단란주점 앞에는 주일은 쉽니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목격자의 증언이에요. 그런데 이유가 무엇때문이냐면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워낙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는거죠. 그래서 아침에 잠깐 얘기했듯이 이제 심판하기 위해서 천사가 온 거에요. 두 천사가 와서 심판하기 위해서 말하자면은 현지를 시찰하러 내려왔는데 사람들이 사방에서 무론 노소하고 남자들이 떼거지로 달려와서 그 남자를 달라. 그러는거에요. 롯에게 롯은 이제 타관사람으로 거기 와서 사는거니까. 그 이유가 뭐냐하면은 아침에도 얘기했듯이 우리가 상관하리라. 라는 동성애예요. 이것은 굉장히 뿌리가 깊은거에요.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 때가 될수록 이런 문제는 굉장히 심각하게 들어오게되요.
그래서 벌써 세계적으로 보면은 영국도 그렇게 미국도 그렇고 교계에서 중요한 이슈로 등장을 하는거에요. 동성애자가 목회자가 될수 있느냐? 선교적인 차원에서 안수를 줘야된다. 그런 문제를 놓고 심지어는 교파가 갈라지는 그런 일까지도 벌써 벌어지는거죠. 그런데 굉장히 인류 역사에서 뿌리가 굉장히 깊은거에요. 그런거죠. 그런 뿌리가 깊은거에요. 그래 이 율법을 보면 말이죠. 그런 동성애에 대한 동성애 성적인 접촉에대한 경고, 그리고 인제 짐승들과의 어떤 성적인 접촉에대한 경고, 이런 것들 나오잖아요. 경고가 심각하게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그런 현상이 있었거나 충분히 영향을 줄 우려가 있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나타난거에요. 그것도 인류역사에 아주 깊이 뿌리 박힌거에요. 에이즈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 나는 벌써 오래 전에 추축했어요. 에이즈가 원래 의사들에 의하면 원숭이들에 의해서 발견되는 질병이라. 이거에요. 짐승과의 성적인 접촉을 통해서 인간속으로 들어온거에요. 이제서야 그런 것들을 새삼스럽게 입증할 필요도 없는거라고요. 자연스러운거에요. 인간에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런 질병들이 들어오게 되는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경고들이 이미 많이 주어지는거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것들은 어느시대에든지 있었거든요. 어느시대에든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소돔과 고로라 시대에는 아주 보편화 된거에요. 무슨 간음이라든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동성애가 보편화되어 있는 그런 사회에요. 그러니까 이 천사들에대한 얼굴의 묘사는 안 나왔지만 그러나 뭐 그 사람들이 눈에 확 뛸정도로 아주 미모의 사람들이었겠죠. 그런 외모를 하고 왔겠죠. 천사가 설마 저같은 얼굴을 하고 내려오지는 않았을거 아녜요. 그러면 사람들이 얼마나 썰렁하겠어요. 나 천사야. 너 천사 맞아 그러지. 그런데 이 사람들은 탁월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눈에 확 띈거죠. 그러니까 막 문을 깨치듯이 들어와가지고 달라는거에요. 상관하리라. 하는 그 단어가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니라. 그 단어하고 똑 같은 단어에요. 내 놓으라는거죠. 그런 상황까지 몰고 갔는데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천사들은 더 확실하게 입장을 굳혔어요. 무슨 입장이냐면 아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하셔야 되겠다. 조속히 몸소 체험을 한거죠.
그래서 결국은 이제 심판이 이루어지게 된거죠. 그 때에 이제 이 롯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요.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기도의 영향력을 무시할수 없어요. 아브라함이 이제 롯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죠. 그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엎으시는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거죠. 그러니까 이 의인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거에요. 의인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거에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의 한번의 기도는 하나님이 전혀 안기뻐하는 사람의 수십만의 열광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고요. 그렇게 보면 기도의 문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가느냐하는 성화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 성화에 대한 추구없이는 결코 그 기도는 깊어 질수 없어요. 어느 한계까니는 가겠죠.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대로 그 상태에서 굳어져버리는 거에요. 그것을 기억을해야된다고요. 그래서 지속적인 기도의 영향력, 의인으로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그 깊어져 가야되요. 성화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된다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비유할수 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많이 스쳐간 사람하고 한번 들어가도 이렇게 관통하며 지나가는 사람하고는 다르잖아요. 무슨 소리인지 알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수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하고 그러니까 막 풍부하게 스쳐지나 간거에요. 그래서 깍이고 딱이고 막 그랬어요. 그거하고 한번 이렇게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 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런 거룩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그래서 심오한 기도의 세계를 소유하게 되는것 이것은 수없이 스쳐가는 말씀이 아니라.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거에요.
제가 이런 얘기하면은 또 여러분 오해하면 어떡하나 그런데 염려는되는데 그런데 잘 새겨서 들어보세요. 저는 주위에 말이죠. 성경에 대해서 아주 굉장히 조직적으로 공부하고 그리고 구석구석 그 내용들을 참 많이 알고 성경을 배워야되겠다는 열심히 참 많아요. 그리고 뭐 정말 학원처럼된 그런데 가서 열심히 수강료 내고 배우고 그런 사람들 많이 봤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이렇게 꾀뚫고 지나가느냐는 그러한 말씀을 사랑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섭취하는 것을 사랑하는거하고는 별개의 문제에요. 무슨 얘기인지 알죠. 예레미야가 고백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중심을 상하게 하니 내가 포도주에 취한 사람 같이 되었습니다.” 라고하는 그런 말씀이 골수를 가르고 지나가는 경험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부지런히 가방싸들고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말씀이 관통하면서 그를 지나가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을 별로 못 만났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말씀을 배우러 다니는 그 사람의 태도나 욕구가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거죠.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다른거죠. 어쨌든 그 얘기는 접어두고요. 그러니까는 그런 풍성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누리면서 살아갈 때, 그 때에 그 아브라함의 그 기도가 시공을 초월해서 그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거에요. 천사들이 가서 롯과 이렇게 만나게된것도 사실 아브라함의 기도의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단말이죠.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거에요. 심판을 하시는데 그 천사들의 요구는 뭐냐하면은 여기서 도망하가 이 얘기에요. 이것은 심판하니까 도망가라.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면 롯이 여기 있고 소돔과 고모라가 다 이렇게 불비가 내리고 그 다음에 지진이 나가지고 싹 사라져도 롯이 있는 요만큼만 남겨놓으면 되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수 있어요. 없어요. 하실수 있잖아요. 미국인가 어디에서 한번 지진이 일어났는데 동네가 전부다 폭삭했어요. 교회만 그대로 있는거에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겠어요. 그죠. 아니 뭘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기왕에 쓰실려면 팍팍쓰시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셔요. 야 너는 살려준다. 너는 은혜를 준다. 집에 가만히 있어. 나중에 쾅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난리가 나는데 눈을 딱 떠보니까 자기네 집만 기둥처럼 이렇게 서있고 나머지는 폭삭 다 가고 말이지. 그렇게 하실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하시지를 않고 어떻게 하셔요. 피하라. 이 성에서 나가라. 그렇게 말씀하시는거에요. 하여튼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죠. 그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치시잖아요. 신학적으로 볼때에 인간과 땅은 같이 가는거에요. 같이 그 땅이 더러웠더라. 그 땅이 패괴하였더라. 땅이 뭐 패괴할게 뭐 있어요. 땅이 언제 누가 뭐라 그랬나요. 가만히 있는데 땅이 무슨 인격체에요. 그런데 성경의 사상은 그래요. 히브리 말로 에렛쯔 라는건데 이게 땅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거민이라는 말로 번역이되요.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의 전통적인 사고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땅과 인간은 하나라고 본거에요. 이게 창조때부터 땅과 인간은 하나에요. 땅이 무슨 불순종을 했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한거 아니에요. 그런데 온 땅에 저주가 함께 임하는거에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이거죠. 그러니까 어떻게되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사람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함께 심판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땅과 소돔 사람이 떨어져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롯과 그 가족들에게 나오라. 그런데 두 딸이 있고 두 사위가 있었을거 아니에요. 아내가 있고 자기가 있고 구출받아야 할사람이 여섯명이었는데 사위들에게 얘기를 했더니 농담으로 여겼다. 이거죠. 그거는 그들의 불신앙도 보여주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롯의 신령한 영향력이 얼마나 미미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그 성에서 나오라 그러는데 그게 쉽겠어요. 여러가지로 이렇게 미적미적 대다가 도저히 갈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심판은 정해졌는데 그런데 도더히 갈수가 없습니다. 저 산은 너무나 멈니다. 그러면서 거기보다 가까운데 있는 소알 이라고 하는 작은 산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동산이었겠죠. 가게 해주십시오. 그것도 허락을 한거에요. 그래서 쫙 빠져나와서 소알로 딱 들어가니까 그때 동이 쫙 터오르더라 이거죠. 그런데 동트기전에 그 상황이 얼마나 대단했겠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대낮에 소돔과 고모라 성이 무너졌다면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희망이 좀 있었을거에요. 그죠. 도망을 한다든지 뭐 훤한 대낮이니까 그죠. 그런데 이제 캄캄한 밤에 막 불붙으면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꺼져가는 그 광경을 한번 먼발치에서 그 성의 무너짐을 한번 본다고 한번 생각을해보세요. 굉장하죠. 그것을 롯이 다 지켜본거에요. 그 심판을 피해서 아직까지도 그 심판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데 딱 소알로 들어가니까 동이 터오면서 새벽빛이 쫙 떠오르는거에요. 그 새벽빛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늘 보아왔던 그 새벽이 아니었을거에요. 그렀죠. 하나님이 이 위대한 일을 하나님이 행한 거에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서 그날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살았던 자신의 말하자면 방탕한 삶들이 폭젹받는 날이었지만은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배푼 이 롯에게 있어서는 그 새벽은 무슨 시간이었을까요. 구원의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롯에게 있어서 생애에 잊혀질수 없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었어요. 새벽에 이일을 행하신거죠. 새벽에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행하신거죠.
새벽이라고 하는 이 시간에 무슨 그 자체를 가지고 신령한 의미를 부여란다는 것은 좀 어려울지 몰라요. 그렇지만 하여튼 지울수 없는 인상하나는 하여튼 성경은 이 새벽, 혹은 이른 아침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아요. 창세기를 보니까 창세기에도 마지막 육일 창조가 모두 끝난후에 그 끝난 그 날을 묘사하는 가운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라."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기전에 어쨋든지간에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지고 그 창조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할 때에 그 위대한 일들이 아침부터 일어났다는 것이죠. 여기에 이 일도 새벽, 혹은 아침에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요. 성경은 확실히 이새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새벽이었죠. 그렇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그랬고 홍해가 갈라진 것도 그랬고 새벽에 하여튼 이런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롯 자신은 새벽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기 때문에 구출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본문에 나오지는 않아요.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오랜 아브라함의 기도가 있었고 하나님이 그 아침에, 심판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그러니까 우리의 관심은 고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롯이 함께 멸망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이 그 크신 구원을 그 아침시간에 새벽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었다는거죠.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적용하고 싶어요.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 우리가 놓여있는 삶의 자리는 캄캄하고 무엇으로도 어떻게 나 자신을 구원할수 없는 처절한 그런 상황,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막다른 지경, 그 막막한 상황, 그 절대적인 위기와 어려움의 상황,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시기를 기대하는 새벽이라면은 그러면은 그 새벽의 시간에 롯은 이 놀라운 일들을 보았지만은 우리는 그런 놀라운 일들을 볼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는 있지않겠느냐 이거죠.
그래서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하는데 그리고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명쾌하게 앞으로 어떻게 이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삶을 이어가야될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서 위기에 놓여있는 우리의 삶의 상황이 모두 정돈되어 버린 것은 아니거든요. 그죠. 사업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고 해서 돌아가 보고나면 누가 돈보따리 들고 와가지고 돈대주겠다는 사람이 줄서있는것도 아니고. 가족들과의 깨뜨려진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내가 은혜받고 갔다고 해서 가족들이 펑펑울면서 변화받고 나올때만 기다리고 있는것도 아니라 이거죠. 모든 것은 그대로다. 이거죠. 그죠.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인제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은 제시해주시는 것은 우리로 그 길로 걸어가면서 살게하시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요번에 우리들이 여기에서 이 성경에서 볼수 있는 사실은 뭐냐하면은 하여튼 이 새벽의 시간에 아주 명쾌하게 대조가 된다는거죠.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에게는 긍휼이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불붙듯 쏟아졌고 그리고 롯에게는 예외적이고 특별히 대우해주는 특별한 은혜, 특별한 자비가 계속 배풀어진거에요. 그렇죠. 롯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고 천사가 가르쳐준 것만해도 굉장한 은혜였는데 자신의 힘으로 거기를 빠져나올 기운이 없었어요. 그 때 천사들이 이끌어서 그 성중에서 그를 이끌어 냈어요. 그게 첫 번째였죠. 그래서 하나님이 자비를 많이 입었다. 그랬잖아요. 그래 산으로 빨리 도망가라. 그러면은 지금 새벽에 불바다가 되고 있는 상황인데 빨리 가라. 환란을 면하고 지금 거기로 도망가게되는 것만해되 정말 감사한 일인데 못가겠다 그런데 못하겠다는거에요. 도저히 거기 너무 멀어서 힘들어서 못가겠다. 그런데도 마치 하나님이 양보하시는 것처럼 그럼 나 여기 가까운데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그것도 너 뜻대로 해라. 좋다. 두 번째 은혜를 입었죠. 그죠. 그리고 그 한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이 전체가 이 하나님의 심판의 폭격이 지연되고 있는거에요. 하나님 앞에 은총입은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놀라워요. 의인의 영향력은 고사하고 하나님께 은총을 입기로 작정한 한 사람의 그 영향력이 얼마나 놀라우냐 이거죠.
천사가 하는말이 뭐에요. 너가 피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아무일도 할수 없다.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풀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거죠. 그것을 전하는거에요. 그 새벽에 하나님의 그 긍휼이 없는 심판과 한없는 자비를 입는 자비한 돌보심을 입은 이 롯이 아주 명쾌하게 대도가 되고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적용을 해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신앙적으로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들을 여러분들은 대게 어떻게해요. 너무 정신이 없습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닙니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환란이 너무 큼니다. 너무나 커다란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릴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이 롯의 경우를 보면은 그러한 커다란 환란과 시련,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이 심판의 재앙이 오히려 롯의 입장에서 보면은 하나님의 독점적인 은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배푸시는 크고 놀라운 자비를 경험할수 있는 배경이 되잖아요. 그게 이게 뭐에요. 환경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해요. 환경이 그러니까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건져주시고 여러분들에게 매우 특별한 은혜를 주셔야될 필요가있다 이거죠. 누구를 돌아보고 어느 상황을 돌아보아도 절망의 연속이고 도데체 거기에서 해어나올수가 없는 그런 상황, 그런 위기와 그런 어려움이 그런 속에서 어떻게 해야되겠어요. 그런 커다란 위기와 그런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거기에서 어떻게 해야되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도더히 해결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죠.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수 없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롯이 경험한 것과 같은 특별한 은혜를 입는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잖아요. 새벽에 큰 환란 속에서 구출받는 롯을 한번 보기바래요.
성경 본문은 어느 곳에서도 롯이 새벽에 기도했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롯은 그 새벽에 하나님과 교통했어요. 그죠. 여기서 이 천사들은 특별한 천사들이에요. 그리고 그들과 교통한 것은 곧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심판을 앞둔 도성에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교제를 갖고나서 그는 그 교제를 통해서 모두 심판을 받는 불의 재앙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게되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는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아요. 그것을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이 여러분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되면 여러분들은 아직 인생이라는 군대에 이등병에 지나지 않는거에요. 우리의 힘으로 안되는 일들이 이세상에는 너무나 많아요. 또 돼서는 안될 일도 많이되는 곳이 이 세상이에요. 일어나서는 안될 일들도 많이 일어나는 곳이 세상이에요. 그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되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인생의 당한 한계와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극복할수 없는 소용들이치는 것과 같은 이 시련과 환란, 절망들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새벽의 시간에 기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교제 때문에 이 롯이 그 불의 심판의 한복판 속에서 해어나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입었다고 할 것 같으면 새벽의 시간에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교통하면서 그러면서 주님과 사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얼마나 더 큰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이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2.새벽에 원수를 멸하시는 하나님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데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출14:27-28)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두고두고 암송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 그런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다시 상기시킬 때에 예외 없이 떠올랐었던 몇 개 안되는 중요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택의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이런 것들에 대한 기억들을 상기시킬 때 떠오르는 것들이 몇 있었죠. 그죠. 애굽에서 그들을 탈출시키신 사건, 그리고 홍해를 건넌 사건, 광야에서의 만나의 사건, 그리고 시온과 바산의 왕들을 꺽으시면서 하나님이 그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그 위대한 사건,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그 놀라운 사건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암송되는 위대한 역사였어요. 그 중에 한 역사를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거죠. 많은 사람들은 인제 어떻게하면 과학적인 상식과 홍해가 갈라졌다고 하는 이 일들을 조화를시킬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들을 많이해요. 그러나 이제 뭐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진실이고 그리고 과학이 더 많이 발달하면은 아마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을것이다. 그냥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면되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것이 홍해 라고 했지만은 히브리 성경에 얌숲이라고 나와요. '얌숲' 얌은 바다이고 숲은 갈대에요. 그래서 그 얌숲이 진짜 이 홍해인가 홍해를 보면은 지도에서 보면은 굉장히 폭이 넓은 바다에요. 이것을 건너서 시나위 반도로 갔다는 것이 이것이 사실이겠는가 그래서 인제 거기가 아니라. 그 쪽 위쪽에 어떤 큰 호수가 있었는데 뭐 거기를 통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갈라졌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월이 많이 지나면서 뻥이 뻥을 부르고 그 뻥이 또 뻥을 불러서 그래서 이것이 부풀려진거고 사실은 신속하게 발목정도 빠지는 그 물을 건너온 그런 것을 거기에서 뭔가 이렇게 하나님이 크게 구원하신 것을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뭐 등등의 얘기에요. 그런데 하나는 내가 인정할 수 있어요. 홍해가 아닐수도 있겠다. 그것은 인정해요. 홍해가 아니고 그 위에 있는 어떤 다른 호수 일수도있고 다 있을수도 있어요. 뭐 바닷물이 들어간 그런 만같은 그런 호수있잖아요. 얼마든지 인정이 되는데 그러나 이렇게 하건 저렇게 하건 마찬가지에요. 확실한 것 하나는 뭐냐하면은 양쪽에 이렇게 물이 벽이되었다는거에요. 그 얘기를 했더니 그럼 고기가 그 쪽으로 튀어나오면 어떻게 되냐 그러는데 아니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 어떻게 살아요. 그대의 영혼이나 걱정을 하지 웬 벌써 이미 수천년전의 3500년 전에 물고기 걱정은 왜 해요. 그렇게 갈라졌다고요. 그러니까 아주 간단한 거에요. 이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을 빼버리려는 모든 시도는 우리는 부인한다 이거죠. 그것을 일정을 할 경우에는 고고학적으로 다양한 증거들을 대면서 이야기를 할수 있죠. 그러나 일단은 성경 그 자체가 정확한 사실의 기록이라고 보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거죠.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갈라져서 물이 벽처럼 선곳이 홍해든지 홍해 아래쪽이든지 윗쪽이든지 그 위에 호수든지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별로 중요한게 아니라이거죠.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 전에도 한번도 갈라져 본적이 없고 앞으로도 갈라질 리가 거의 없는 그 바다를 하나님께서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를 지나가게 하셨고 거기에 그들을 쫓아갔건 애굽의 병사들을 수장시키셔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그들의 마음 속에 각인 시켰고 그리고 그 역사를 이스라엘들이 계속 전승해 오면서 국가의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위기를 지날때마다 그런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를 사모하면서 살았고 실제로 똑 같이 바다를 가르신 것은 아니지만은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지극히 큰 팔을 내미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증거들을 보이셨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셨다. 우리는 그렇게 아멘하고 받아들이면 그걸고 끝나는 문제다 이거죠. 단순한 문제다 이거죠.
그런데 이제 이 사건을 이제 우리들이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냐? 우선 기적의 측면에서 볼때에 이 사건을 굉장한 사건이었다 이거죠. 기적의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처음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애굽으로 가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할 때 모세는 이중적인 난관에 부딪치고 있었어요. 무슨 난관이었느냐 하면은 바로가 그 백성을 놓아주겠느냐 두 번째 백번 양보해서 바로가 놓아준다고해도 그 인간들이 따라 나서겠느냐 그렇죠. 그거 아니에요. 두가지를 직면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바로를 비롯한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이신지를 알려서 그 백성을 놓아주게 해야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놓여질 백성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를 깨달아서 그 분을 따르게 만들어 주어야지만됐다. 이거죠. 그런데 거기에서 본 열 개의 위대한 재앙들이 아주 굉장한 것들 이었거든요. 그런데 인제 그것이 굉장한 재앙이었지만은 사실 그 뒤에 갈수록 점점 하나님 이외에는 이런 능력을 행하실수 있는 분이 없다. 라고 하는 것들을 보여주었지만 출발 그 자체에는 애굽의 모든 물들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가 나오고 이가 나오고 파리가 나오고 악질이 독종이 이렇게 순서대로 가잖아요. 그런데 처음에 피가 나오는 사건서부터 몇가지는 애굽에 있는 모든 술사와 박사들도 행할 수가 있었거든요. 흉내낼수가 있었거든요. 무슨 얘기냐하면은 갈수록 하나님 혼자만이 그런 일을 하실수 있다는 이 기적의 여호와 종교적인 특성을 들어냈지만은 처음 시작은 다른 사람들도 할수 있는 평범한 기적서부터 시작이 되었단말이죠. 그것에 비하면 이 바다가 갈라지면서 양쪽에 물이 벽이되어서 서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를 지나가는 이것은 다른 이방 세계에서 그런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무슨 비슷한 증거를 찾아볼수 있다거나 아니면은 그런 유사한 사건들을 볼수 있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이제껏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역사부터 시작을해가지고 쭉 자신들의 역사를 어느정도 노아의 홍수 역사든지 이런 것들을 어느정도 구전으로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홍해가 갈라지는 이 사건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는 아주 가장 최고의 기적이었다 이거죠. 최고의 그런것들을 생생하게 보았다는 점에서 인제 이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을 볼수있다이거죠.
뿐만아니라. 이제 신기한 것은 바다가 갈라진거에요. 그런데 이제 바다가 갈라졌는데 아까 말씀드린대로 쭉 벽이 되어서 선거에요. 섯는데 진짜 그 고기는 어떡하겠어요. 이렇게 집어 넣으면은 고기가 왔다 갔다 하는데 이렇게 수족관을 옆에서 들여다 보는 것처럼 말이죠. 고기가 지나가는 것들이 쭉 보였을거 아니에요. 그런데 굉장히 기적적인 사건이었죠. 그 기이함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 벽이 되어서 섯다고 그러니까 그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한번 똑 같이 묵사을 한번 해보세요.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였겠는가 그거 빨리 도망가야되는데 아마 쪼그마한 애들을 구경하느라고 가느라고 아마 도망도 못갔을거에요. 아 그거 63빌딩 가가지고도 눈이 휘둥그래 지는데 그거 생전 어디서 그런 구경을 하겠어요. 애굽에서 종살이나 하던 사람들이 야 빨리가자 뒤에 쫓아온다. 엄마 저기봐 고기, 하여튼 그 기적적인 일이죠.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마른 땅이, 땅이 들어났다. 그랬는데 이것이 히브리 성경에는 얍빠쌰에요. 얍빠쌰는 땅은 땅인데 마른 땅이에요. 드라이랜드 바다가 쫙 갈라졌는데 길이 쫙 났는데 밟으면은 가슴까지 빠지는 뻘이었더라. 그러면 홍해 갈라지나마나죠. 왜냐하면은 그냥 가만 있는게났지, 그런데 그 생각을해봐요. 적어도 300만명 가까이 땅을 밟는데 그 하중이 어느정도 되었겠느냐고요. 고속도로 타고 가 보면 알잖아요. 저 트럭 이런 것들은 서울 부산 가는데 돈10만원정도 받아야되요. 자동차, 승용차가 1만대 통과할 때에 도로에 입히는 손해를 한40톤짜리 트럭이 한 대가 가면서 입히는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은 꼭 떡 밟고 지나간 것처럼 이렇게 이렇게 파였잖아요. 그죠. 하도 무거운 차가 지나다니니까 하위 차선에는 깊이 아예 눌렸어요. 그런데 300만명이 지나간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게 그냥 평범한 바다 바닥 같으면은 그게 주저 앉는다고요. 그런데 마른땅으로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셨어요. 기왕에 하나님께서 기적 배푸시는데 풀 서비스로 하셔야지 그거 뻘을 만들어서 그 위에다가 다시 흙 갖다 붓고 이렇게 기적을 하시겠어요. 그러니까 마른땅이에요. 그래서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갔겠지요. 바다 한가운데를 얍빠샤. 또하나 더 놀라운게 있죠.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영리해요. 바다로 들어가니까 아 쫏아가면된다. 이쪽은 병거를 타고 달려가는 사람들이고 저쪽은 보따리 이고 구르마 끌고 애들 손잡고 가는 피난민 대열이에요. 더군다나 300만 명이 움직이니까 초당 1미터도 못움직일거에요. 초당 그러니까 뭐 문제가 아니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못오게 하시는거에요. 불구름 기둥으로 못오게 하시는거에요. 그래도 오니까 그 다음에는 바퀴를 벗겨버리시는거죠. 도저히 다닐수 없게 하시는거죠. 그래서 커다란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거죠. 그리고 인제 그들이 쭉 건너갔죠. 그리고 인제 그 다음에 그들이 아직 길위에 있을 때에 물이 덮치면서 그들을 모두 수장시키는거죠. 그 때는 인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편으로 다 올라가고 미리암의 소고에 맛춰서 출애굽기 15장이 그 위대한 전 이스라엘의 성가대화 되는거에요. 그래서 거기서 여호와와 같은 신이 뉘시뇨. 그러면서 장엄한 찬양을 올리는데 그게 뭐냐하면은 유일신 신앙에 대한 찬양이에요. 유일신 신앙에 대한 찬양. 그 때에 그것을 보면서 유일신 신앙에 대해서 아주 강한 이미지를 갖게 된거에요. 유일신 신앙이 뭐에요. 일신 신앙은 신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하나님이 제일 뛰어나시다. 이런 주장이고 유일신 신앙은 하나님 이외에는 모든 것들이 신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거죠. 헛된 것들이다. 하나님 한분, 그분만이 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거죠. 그런 유일신 신앙으로 아주 강한 인상을 받는거죠. 유일신 신앙에대한 여기가 아마 국가적인 이스라엘로서는 첫 번째 강렬한 인상이었어요. 이것이 그리고 인제 시내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임제를 경험하면서 두 번째 그런 장면들을 맞이하게되죠. 그런데 이것은 진짜 애굽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과는 또 차원이 다른 그런 종류의 유일신 신앙을 강하게 받는거죠. 그러니까 기적의 목적이 뭐냐하면은 신앙이에요. 신앙 기적의 목적 그 자체는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
그런데 이제 크게 두 번째로 이 사건이 일어나게된 경로에요. 그런데 그 경로를 보면은 이 사건이 일어난게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쫓기다 쫓기다 홍해 앞 바다까지 오게되었죠. 그죠. 그래 이제 바다고 뒤에서는 쫓아오니까 인제 도더히 어떻게 갈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그 때에 성경에 보면은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밀었어요. 그런데 모세의 손을 내미는 것은 항상 뭔가 기적적인 사건을 일으킬 때에 지팡이를 잡은 손을 내밀면서 하여튼 뭔가가 일어나거든요. 뭔가가 일어나는데 그런데 사실은 애굽에서는 내밀면 바로 직방이었거든요. 내밀면 바로 피가되고 그 다음에 개구리가 올라오고 이가 올라오고 막 이랬는데 여기에서는 내어 밀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거에요. 그런데 밤새도록 동풍이 부는거에요. 성경에서 이 바람이 부는 것은 심상치 않아요. 바람이 부는 것은 뭔가가 일어나는 거에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계속 후후부는데 그러면서 계속해서 바람이 부는데 밤새도록 하나님께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다. 그런데 물이 갈라져서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그랬으니까. 이게 가만히 보면은 우리가 십계라는 영화에서 보는것처럼 모세가 얍 하니까 지지직하면서 그냥 갈라지는데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거죠. 그러니까 바다위로 손을 내밀면서 밤새도록 하나님께서 광풍을 일으키셨는데 그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사실 지금처럼 이렇게 무슨 환한 불이있는게 아니고 그런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불기둥이 있었지만 그런 어두움 속에서 뭔가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진행되어 가는 과정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든 그런 상황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하여튼 뭐가 바람 속에서 뭔가 바다에서 심상치않은 일이 있었는데 드디어 새벽이 되면서 바닷물이 물러갔는데 그냥 이렇게 어디 무슨 진도에요. 완도에요. 길 생긴다는데 무슨 섬하나 있잖아요. 남쪽에 안가 봤어요. 이렇게 바닷물 빠지면서 어떻게 된다는데 진도에요. 진도죠. 진도인지 완도인지 하여튼 도인데 그런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고 이런 것들은 밤새도록 일어났지만 그러나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은 양쪽이 물기둥이 되어서 딱 선사건이에요. 엄밀하면 말하면은 이 시각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는데 이 시각은 환한 아침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뒤에 보면은 300만명이 건넜어야되니까 굉장한 시간이 걸렸을거라고 그 폭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지만은 그 사람들이 다 건너고 물이 합쳐져서 애굽 군대들을 수장시켰을 때 그 때가 새벽이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여기에서 이 사건이 자기고 있는 구원사적인 중대한 의미, 구원사 적인 중대한 의미가 뭐냐하면은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세례와 연관을시켜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물 가운데로 통과하면서 그러면서 지나서 더 이상 애굽의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할 수 없는 그러한 안전한 곳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 이것이 결국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에요. 물 세례를 통해서 받는 죄로부터의 말하자면은 구원이에요. 그런데 인제 마찬가지로 그걸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거듭나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들이 원리적으로 죄에 그런 집요한 추격, 그리고 그 죄가 다스리는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는거에요. 그래서 이제 인간이 처음에 태어날 때 죄인으로 태어나고 그래서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잖아요. 바로의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주님을 믿고 거듭나고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 사람이 인제 그의 마귀의 어떤 영향력 마귀의 통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거에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하면은 그렇게 해서 벗어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광야로 들어서게 된 다음에는 더 이상 바로의 추격이 없었어요. 추격이 없었는데도 역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들이 일어난거에요. 그게 뭐냐하면은 이스라엘 백성 자체속에 내재하는 부패한 본성들이에요. 더 이상 바로의 지배는 없는데 바로의 지배 아래 살아갈 때에 그 성품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반역과 불순종들을 광야생활동안에 하게된거에요. 그러면서 이제 거기를 건넜던 모든 세대들이 거의 다 광야에서 죽는거에요.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아주 귀한 빛을 보는거에요. 그것이 뭐냐하면은 우리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되면 더 이상 죄의 통치는 없어요. 죄가 이제 우리를 더 이상 통치하지는 못해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하면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사악하고 죄된 본성들이 남아 있다는거죠. 은혜 안에서 살면 적절히 통제가 되지만 다스려지지만 은혜 안에 살지않으면은 더 격렬하게 하나님을 거스리고 반항하는 그런 광야의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같이 되는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세 번째에 이 사건의 양면성이에요. 양면성 그 양면성이 뭐냐하면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것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애굽 백성들을 수장시킨 사건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이 사건을 볼때에 대게 한 쪽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수 없는 위기상활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건져주셨다. 는 것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쫓기다시피 깊은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오게 된것도 결국은 추격하는 애굽의 병사들 때문이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항상 우리를 어떤 어려움 속에서 구출해주신다. 라고 할 때에 그러한 구출. 혹은 어려움속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이 진짜 참된 의미가 있는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될것이 그런 어려움 속에서의 구출이 진짜 참된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그런 어려움 속에 들어가게 했던 우리의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멸해주시는 공격적인 심판이 동반되어야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이라고요. 그 두 개가 같이 이루어질 때에 그러니까 이게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짝이에요. 그래서 시편을 봐도 경건한 시인들이 하나님에게 구원을 간절히 호소할 때에 두가지 기도가 함께 나오는데 하나는 곤궁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자극하는 기도를 드리는거에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하는거에요.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렇게 비참하게되었고 이렇게 누구도 의지할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나는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자극하는거에요. 그기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뭔가 이렇게 한 맺힌 것 같은 강한 복수의 기도
그런데 이제 여기서도 이짝을 보는거에요. 두 개를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당신의 백성은 안전하게 그 바다에서 구원해 내시는거에요. 하나님이 피할길을 내 주시면서 빨리 달릴수 있는 사람만 살아라. 걸음에 처지거나 넘어져서 밟히는 애들은 나도 어쩔수 없다. 그런 것은 아니었거든요. 어린아이 하나까지라도 모두 나올 때 까지 지난주에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중에 하나라도 나오지 않고는 내가 아무일도 행할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거에요. 그래서 물을 합치고 나니까. 애굽의 병사들 속에 어린애들이 둥둥 떠다녀요. 하나님 그렇게 하시지 않으셔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에요. 자기의 백성들을 하나도 다치지 않겠금 거기에서 건져내시는거에요. 그 다음에 거기에 들어간 추격한 애굽의 병사들은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간 사람이 없겠금 그 바다에서 멸하신거에요. 그 두 개가 짝을 이루는거에요. 하나는 하나님이 건져수시고 하나는 하나님이 대적을 멸하신거에요. 그런데 여기 이 성경의 문맥으로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력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 마지막 사건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구출해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구출되어서 밖으로 나오고 그 다음에 모두다 건넌 다음에 약간 언덕진 곳이었죠. 거기에 이렇게 모여있고. 거기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마지막으로 나타난 광경이 뭐냐하면은 애굽의 병사들이 그 물위에서 수장되는 광경이었어요. 막 물결치는 파도에 그러니까 갈라졌던 것이 합쳐졌으니까 이게 엄청난 물의 충돌이 있었을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격렬한 파도가 일었겠죠. 그러면서 거기에서 수많은 병거들이 부서지면서 수 많은 애굽의 병사들이 말하자면은 물위를 떠다니는 광경을 보게하신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강렬하게 찍혔던 것이 뭐냐하면은 자신들이 거기를 통과하게 된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은 찬양을 부르면서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병거를 탄 애굽의 병사는 일제시대의 순사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들이었다고요.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의 생각에는 왜 평생 그 사람들 아래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혹독한 생활을 한거에요 우리 어렸을 때 그랬잖아요. 순사온다. 울던 아이도 뚝 그치잖아요. 요즈음은 그래도 애들이 무슨 소리인지 모를거에요. 그런데 이 애굽의 군인들이 병거들을 타고 나타난 이 사람들이 그랬단 말이죠. 거기에서 완전히 수장되면서 이제 끝나는 거에요. 이제 더 이상 동일한 병사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를 안는거에요. 영원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한 어려움이 거기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서 영원히 종식되는거에요.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요. 사실 우리의 문제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시련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난다. 그리고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셨다. 또 뭐 상처가 있다. 그런데 그 상처에서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다. 또 뭐 어떤 곤란이 있었는데 그 곤란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셨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하면은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때만되면 부활을해서 다시 나타나는거에요. 가정의 문제도 뭐좀 치유가되고 고쳐졌는가 했더니 어느날 은혜생활좀 게을리하고 그러다보니까 다시 고개를 들고 다 나타나는거에요. 다 나타나요. 그리고 시험도 마찬가지에요. 경제적이건 물질적인 그런 시험도 그냥 그때 그때 임시방편이지 때만되면 다시 고개를 들고 나타나요. 뭔가 동일한 시련이 동일하게 제현된다고 하는 것은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그 일들이 충분히 성취되지 않았을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거에요. 우리에게는 뭔가 좀 탁월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해요. 그래서 우리를 오랬동안 괴롭히고 또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우리를 지금 심각하게 위기속에 몰아넣고 있는 어려운 시련과 이 환란속에서 하나님께서 거기서 우리들을 강력하게 건져주시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우리들이 보아야한다 이거죠. 애굽의 병사들의 생각은 아주 간단했겠죠. 길이 낮고 그런데 그것을 생각을 좀 했으면 그렇게 경솔하게 뛰어들어갈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야 왜 이런 길이 어떻게 생길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데 하여튼 뛰어들어 갔어요. 그들도 건넜으니까 우리도 건널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그 길은 그들을 위해서 난길이 아니었죠. 하나님께서 합치시면서 파멸로 몰고간거에요. 결국 이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소유된 백성이며 당신이 친히 보호하시는 백성임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어요. 원수들에게는 하나님에대한 생각없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할수 없는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면 누구도 우리를 해칠수가 없다라고 하는 신앙을 불어넣어주는 사건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것은 하나님에게 그러한 능력이 과거에 있으셨다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도 그러한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실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 위한 사건이었다이거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3500년 전에 나타난 일어난 이 사건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믿게하시고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시면서 홍해의 난관과 같은 어려움을 만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소망을 얻게하시기 위함이었다이거죠.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려움을 만날 때에는 몸부림을 치면서 뭔가를 해야지만 하나님의 뜻이 들어나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가 있어요.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때는 밤이고 애굽의 병거들은 추격해오고 앞에는 캄캄한 홍해바다가 놓여있어요. 그리고 인구는 250만 내지 300만 가까운 사람들이 무슨 노력을 할수 있겠느냐고요. 돌맹이를 실어다가 돌 다리를 놓을수 있겠아요. 아니면은 애굽의 병거와 싸워서 그들을 깨뜨리고 다시 배수진을 친 그 상황에서 다시 유턴을해서 다른 곳으로 돌아갈 능력이 있겠어요. 무슨 길이 있겠어요. 그들 자신이 무엇을 할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을해보세요. 산으로 올라가서 커다란 나무를 골라서 뗏목을 만들어 볼까요. 300만 명이 탈수 있도록 한 30년 만들면 될까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걸 아셨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후일 우리들이 얻게될 구원이 정말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거에요. 잠잠히 있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을 보아야해요. 우리의 인생을 살다가 보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결단하게 하시려고 그러한 바다 끝으로 우리를 대려가실 때가 있어요. 정말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오지 않고 그래도 꾀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고 처세술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까지 살았던 신앙의 인생의 모든 경험을 동원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앞을 보아도 길이 없도 뒤를
그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거에요. 좋아요.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백성들처럼 두려워 떨면서 소리를 지르는 가족들고 있고 지체들고 있고 그래요.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도있어요. 하나님도 계셔요. 손을 내어밀자가 누구냐 이거죠. 주님처럼 바다야 잔잔하라 손을 내밀자가 누구냐고요. 우리가 예수님과 같지 못하고 그리고 모세와 같지 못해서 그렇게 바다야 잔잔하라. 한마디의 말로 명령할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지만 최소한 손을 내밀고 하나님 이 풍랑속에서 내게 속한 많은 사람들이 많은 가족들이 많은 지체들이 내 구역의 식구들이 내가 돌보고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이 위기를 만나고 고통하고 있습니다. 문제도 있고 울부짖는 백성들도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도 계십니다. 손을 내어밀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냐이거죠. 참 이상하잖아요. 그죠. 그냥 하나님이 어느날 하늘에서 말이죠. 야 받아라. 종이 한장이 날아왔어요. 딱 떨어졌는데 받아보니까 애굽의 십대재앙 일정표 쭉 1번서부터 10까지 써있고 맨 끝에 시간이되면 자동적으로 발생함 그러면 좋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안해요. 모세가 지팡이를 들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거에요. 모세가 손을 들 때 까지 기다리시는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거에요. 참 너무 놀랍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문제가 얽힌 절망적인 상황도 있고 그 문제속에서 고통하는 인간도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셔도 손들자가 없으면은 그 절망적인 위기의 상황의 종식은 이루어지지 않는거에요. 누가 있냐 이거죠. 누가 손을 들것이냐. 절망적인 위기의 상황속에 놓인 여러분의 가정속에서 모세의 역할을 할 사람이 누구냐 이거에요. 그런 교회적인 상황 속에서 모세가 될 사람이 누구냐 이거죠. 여러분이 섬기는 지체들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위기의 상황속에서 모세처럼 손들자가 누구냐 이거죠. 손은 밤에 들었는데 위대한 역사는 새벽에 완성되었어요. 평소에는 하나도 기도도 안하고 탱탱놀다가 어려운일 생기면 물러갈찌어다. 그게 왜 물러가겠어요. 그건 기도가 아니라 만용이에요.
(누가 귀신들린 집에 갔는데 신학교 다니는 애들이 갔는데, 물러가라 그러니까 귀신들린 사람이 와가지고 너나 가라 그랬데요. 내가 왜가냐고 내가 먼저왔다. 너나 가라 한번 생각을해보세요. 뭔가 깊은 하나님과의 교통속에서 신령하게 살던 사람이 물러갈찌어다. 그러면은 그 어떤 영적인 강한 영향력을 받아서 그러는데 아니 쥐뿔도 아무것도 없는데 기도도 않하고 탱탱히 놀다가 그것도 왜 물러가라 그러느냐면은 하나님 아버지 부르고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이런 것이 익숙치않기 때문에 그 주님의 이름으로도 할필요도 없고 얼마나 간단해요. 물러가라. 그러니까 너나 가라.) 성경에 보면은 그것도 하나의 기도거든요. 넓은 의미로 기도로쳐요. 명령형의 상황을 향한 선언을 그런데 이게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오는 그런 고유한 의미에서의 기도는 아니지만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하나의 기도로 보는데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불러일으켰던 사람은 모두 평소에 깊고 긴 기도속에서 산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는것이었지 아무때나 물러가라. 그게 영적인 세계에서는 얼마나 커다란 허풍인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모세를 한번 보라 이거에요. 밤에 손을 들었는데 그런데 새벽에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거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냐하면은 누가 너희들이 놓여있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손들자이냐. 이거에요. 그런데 이게 참 재미있는게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수록 우리들이 자신의 삶의 상황에 있어서 주인공 의식을 갖게 된다고요. 주인공 의식 이게 하나의 신비에요. 영적신비 그런데 (예를 들자면 뭐냐하면은 왜 사람들이 은혜를 깊이 받고나면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진게 자기 때문이라는거에요. 자기 때문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보기에 아니 무슨 무슨 자기가 장관쯤 되었으면 내가 정치를 잘못해서 이런 어려움이 온다그러면은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지만 사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잘못한게 없다 그런다고요 그런데 왜 구멍가게도 못하고 있는 백수처지에 나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고 가슴을 치니까 참 우리 보기에는 가소로와 보일지는 모르지만은 그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경험하는 기도의 세계에 있어서의 주인공의식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과 짝을 이루는거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듯이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은 자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라고 하는 것들을 강력하게 의식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되요. 이러한 문제들이 늘 우리 속에서 늘 경험되는 문제들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려고 할 때에 항상 모세와 같이 손들 사람들을 찾아서 일을 행하시는거에요. 사실 이 사람들이 말이죠. 믿음으로 이 홍해를 건넜다고 말하지만은 사실 엄밀하게 보면은 갈라진 것을 보고 건너간거에요. 사실 그것도 믿음이라면 믿음이지. 그런데 기적을 보고 그 다음에 아멘. 하고 믿고 그 기적을 보고 따라 간거죠. 그런데 크고 놀라운 일들이 결국은 누구를 통해서 일어났느냐하면은 하나님 앞에서 문제의 상황 속에서 손을든 이 모세를 통해서 일어나게 된것이에요.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문제의 상황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절망적인 문제의 상황속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배푸시기를 원하고 우리를 그 상황으로 몰아논 대적들을 멸하시기를 원하셔요. 그런데 문제는 누가 손을 들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에요. 새벽에 훤히 밝아오는 그 새벽녘에 바다의 위용이 들어나고 거기에 물결이 치고 그리고 애굽의 병거와 병사들이 떠돌아 다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성경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된거에요. 모세와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되는 그런 놀라운 계기가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시련을 극복하면은 그러한 부수적인 놀라운 효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게 되는데 문제는 누가 손들자인가 하는 것이 문제에요. 어쩌면은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지리할 정도로 계속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이 어쩌면은 여러분들이 손들기를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지도 몰라요. 보십시오. 이런 문제 속에서 이런 위대한 일들을 일으키신거에요.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쉽고 깨닫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상황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기까지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이 기도의 삶, 분투하면서 싸우는 이 매달리는 간구의 삶은 더 어려워요. 그리고 솔직히 주님의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라고 하는 그 일은 마침표에요. 그게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생활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어려운 위기와 난관을 만나고 시련을 만나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것만큼 기도했는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새벽에 이런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이것을 가지고 새벽기도의 교리로 삼을수는 없을거에요. 그것을 확실해요. 그렇지만 적용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상황속에 직면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손들자를 부르시면 새벽에 이르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던 애굽의 병사들을 끝장내신 하나님이 내가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주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으면 추격하지 못하도록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며고 사랑하며 신앙생활 할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온 사람,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는 믿음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보세요. 뭔가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강한 찔림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기 까지 그 지적상황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처음에 하나님께로부터 지적을 받을 때, 또 약속을 다시 받을 때 놀라운 자극 신령한 자극들을 계속 유지할수 없다고요.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되요. 그러니까 반드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그것을 극복해야할 문제라이거에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그래서 기도해야한다 이거에요. 그 시일이 지나가면은 여러분 다시 희미해지고 흐릿해지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모두 알려주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하는 커다란 죄에요. 그것을 기억을해야되요. 상황을 종식시키고 위기의 상황을 기회로 바꾸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그 일은 하나님 자신이 해야할일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해야할일이죠.
새벽에 좀 나와요. 기도해요. 이제는 더위도 많이 물러갔잖아요. 그리고 더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말 마음을 새롭게하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죄에 지고 실패하는 삶을 반복할수 없습니다. 나에게 한번 끝장을 주십시오. 마지막을 내게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한번 마음을 다해서 매달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셔요. 그리고 새벽에 와가지고는 말이죠. 기도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결의를 가져야되요. 기도하지 못하게하는 요소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죠. 우선 앉았으면 수많은 생각들이 따라들어 오잖아요. 골방에 들어간 상태가 안되거든요. 수많은 생각들이 따라들어와요. 그러니까 결단하면서 환경과 싸우고 일단 새벽기도 나오는 것은 환경과 싸워서 이긴 사람 아니에요. 그다음에 자신의 내면의 분요하게하는 내면의 여러 가지 방해들을 물리칠수 있어야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되겠다. 라는 결의가 필요한 거에요. 새벽기도도 제 경험에 의하면은 시계추 처럼 왔다. 갔다. 해도 기도 거의못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냥 왔다 갔다 할뿐이죠. 그렇게 해서 다닌 날수 세어봐야 하나님은 한번도 도착된 편지를 받은일이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결단을 하고 일주일이면 일주일 열흘이면 열흘, 한달이면 한달, 상황이 안되면 정해놓고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진실하게 간절히 주님의 도움에 호소하면서 매달리는거에요. 그래서 남이 승리하고 위대하게 이긴 이야기나 듣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 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그런 위대한 승리를 경험하고 일인칭의 간증을 할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래요. 기도하겠습니다.
3.새벽에 만나를 내리시는 하나님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출16:13-14)
새벽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하도 많지만 오늘은 또 하나 새벽, 혹은 이른 아침에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아닌 만나의 사건이었어요. 만나의 사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적게 잡으면은 200만명 그리고 넉넉히 잡으면은 300만명 되었을 것이라고 추산을 하는데 그 사람들이 먹는 문제는 진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유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경작을 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먹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라는거죠. 300만명의 사람이 300원짜리 라면 하나씩만 끓여먹어도 한끼에 10억입니다. 여러분 수련회가서 식사 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공포를 느꼇어요. 어떻게 그렇게 성실하게 드시는지 아!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먹는데 말이죠. 한 끼를 먹고 가면은 우리가 몇 백만원 어치를 우리가 한꺼번에 먹어치운거죠. 그 엄청난 밥, 그 반찬, 수를 해아릴수 없는 빵,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300만명이에요. 그러니 그것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이거죠. 애굽에서 올 때 양식도 가지고 나왔고 그리고 짐승도 끌고 왔으니까 당분간은 해결을했죠. 그거 불과 한두달 사이에 다 떨어졌죠. 그랬는데 야 이거 양식이 없어서 어떡하나 하는 근심도 하기전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들을 어떻게 인도하고 그리고 어떻게 이들을 먹이면서 살수 있을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거에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때에 3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나왔을 때에 누가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 있었으면은 300만명을 데리고 한시간에 몇킬로나 이동할수 있겠어요. 그죠. 불과 제 생각에는 한1-2킬로밖에는 이동을 못할정도로 장정이 부지런히 걸으면은 4킬로미터라고 보거든요. 그런데 그 애들까지 다 데리고 이동하는 그런 상황이 한2킬로미터만 이동을해도 아마 굉장한거라고 생각할거에요. 한시간에 그렇게 계산을 할 때에 그 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 가는 거리가 있고 그럴 때 누군가 똑똑한 사람 하나가 그러면은 우리들이 가지고 간 양식을 다 먹기전에 가나안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할것같으면 또 가나안에서 누가 밥해 놓고 도시락 싸서 기다린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 상황인데 그러면은 그 광야에서 어떻게 할것이냐고 누가 문제를 제기했더라면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답을 할사람이 없었을거에요. 그런데 그것도 답할 사람이 없었지만은 하나님이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시킬 것이라고 하는 이 신기하고 이 첨적인 방법들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느냐 이거죠. 그렇죠. 하나님이 만나 라는 이 방법으로 이 일을 해결하시는거에요.
우리 성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참 궁금하지 않아요. 어떻게 전도를 받고 엉겁결에 주님을 믿어서 그래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본 모든 사람들은 알지만은 우리는 너무 약해요. 그리고 예수 믿기전에는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세상이 이상하게예수닌 믿고나니까 세상이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거에요. 진실 아니에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아 이제 나는 모든게 끝났다. 이 세상 문제없어, 나는 이길수 있어, 아직 어려서 그래요. 아직 어려서 아직 뭘 몰라서 그래요.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큰 사랑,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함과 그리고 죄성,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성도로 살아야할 우리의 부르심의 지극히 크고 높은 그러한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면 알수록 우리들이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거에요. 그때 생각을 하는거에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괴로운 인생길 가는동안
평안히 쉬일곳 전혀없네
걱정과 슬픔이 어딘들 없으리
돌아갈 내고향 하늘나라.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안식과 평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성도일수록 이 세상이 괴롬과 슬픔이 많다고 고백했어요.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영적인 신념, 신령한 용기는 생겨나지만 육적인 방력은 다 사라지는거에요. 육적인 방력은 육과함께 사라지는거에요. 그래서 그렇게되요. 그래서 예전에는 주님 몰랐을 때에는 참 씩씩한 연구대상이었죠. 뭐근지 내가 결단하면하고 내가 한다면 하고 그리고 모든게 자기 중심이에요.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그얘기는 무슨 얘기냐하면은 하나님도 나는 못말려 그렇게 자기 멋대로 살아가던 방력에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주님 만나고 그런 방력이 다 없어져요. 뭐좀 해봅시다. 그러면 예날에는 응 좋았어 해봐 그러더니 기도해봅시다. 이거 어떻습니까? 하나님도 기뻐하실까요. 사람이 인간적인 방력은 다 빠져나간거에요. 그만큼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된거에요. 그런 세상이 쉽지 않는데 그래도 그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오냐하면은 그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못하는 양식이 있어요. 그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못하는 양식이 있다고요. 그것이 뭐냐하면은 하늘의 만나에요. 참 이게 진짜 하나님이 참 교육학의 원조에요. 교육학의 교육자로서 원조라. 이얘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살것이 없게된 상황에서 하나님이 새벽에 나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딱 눈뜨자 마자 무엇을 생각했겠어요. 눈뜨자마자 무슨 생각했겠어요. 바가지 가지고 들로 나가자.그렇잖아요. 왜 오늘 못거두면은 없어요. 어제 거두어서 남은 것은 벌레가 먹어서 도저히 활용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오늘 먹을 것은 오늘 거두러 가야되는데 오늘 게을러서 만약에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거에요. 뭐 어디에는 없었겠어요. 퍼질러서 자다가 눈 떠보니까 중천에 떳어 그래서 허겁지겁 내 만나. 그러고 마당으로 나가보니까 다 사라졌어요. 그날은 뭐하는날 굶는날 왜 없겠어요. 그죠. 그리고 또 놀아다니면서 나좀 꿔줘 그러는 인생이 틀림없이 있었을거에요. 다들 만나로 식사를 하면서 원기를 얻으면서 살아갈 때에 눈이 꿩해서 들어가서 거리를 비실비실 해매면서, 너 왜그래 그러면 엿새째 아무것도 못먹었어 왜? 퍼질러 자느라고 그러는 인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또 너도 퍼질러 잤어 아니 나 일부러 안나갔어 왜? 그 맛대가리 없는 만나 맨날 먹는 것 그랬을 거라고요. 그런데 그 처음을 생각해보세요. 처음을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제가 전도사 때 너무 가난해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데 사택에서 말이 사택이지 루삥친 집에서 이렇게 사는데 거기서 교회까지 교회 마당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한 10미터 정도되요. 눈이 펑펑 내려요. 그 때는 내가 눈을 안 좋아했어요. 다 쓸어야되니까. 지금은 눈을 좋아해요. 김 간사가 다 쓸어주니까 눈이 펑펑 내려요. 새벽에 나가서 기도하고 그리고 인제 들어오죠. 그리고 인제 자요. 피곤하니까 좀자요. 그 때 이제 야간 학교 다닐때니까. 한시쯤 잤으니까 네시쯤 일어났다가 좀 자죠. 그래서 이제 눈을 딱 뜨면 아침이잖아요. 이렇게 밖에 나가보면 발자국은 하나도 없는데 누가 거기에다가 생선도 갖다놓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부담갖지 마세요. 요즈음 갖다놓으란 얘기 아니니까. 생선도 갖다놓고 계란도 한판 있고 쌀도 어떤 때는 있고 그런데 왜 발자국도 없는데 그게 어떻게 있느냐. 새벽기도 왔다가 살금살금 와서 전도사 댓돌 위에다 놓고 갔는데 그 후에 눈이 내린거에요. 그래서 아무 발자국도 없이 하얗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발자국이 있을 때도 있어요. 이쪽으로 왔다가 저쪽으로 갔는데 털신 신은 사람이에요. 누군지 벌써 몇 명 이렇게 후보가 있죠. 그 때 참 굉장히 신비해요. 신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산다. 라고 하는 것 성도들의 섬김을 받으며 산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줘요. 그중의 대부분은 지금도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아침 식단은 까마귀가 결정을 하는거죠. 우리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제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인데 가야할 길은 아직도 먼데 하나님이 만나를 말씀하셨어요. 그게 먼지 뭐 알았나 경험해보지 누가 말마 따나 맛을봐야 알지. 뭐 말만 들어서 알아요. 그게 새벽에 나가본거에요. 그랬더니 온 지면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내렸는데 쪼그마한 알갱이들이 그것을 이제 모아가지고 반죽도 하고 과자도 만들어 먹고 그런데 꿀을 썩은 과자처럼 아주 맛있는거에요. 그때에 오랜 지난 다음에 말고 처음에 그 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 있을 때에는 여기 주위에 만나가 내리고 이쪽으로 이동을 하면 만나도 따라와요. 멈추면 계속 거기 내리고 떠나면 떠난 자리에는 다시 안내리고. 이렇게하면서 만나가 내릴때에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신비함과 그것은 이루 말할수 없었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것을 만나를 거두어서 먹으면서 어떤 강력한 교육을 받느냐하면은 너희를 먹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너희를 먹이신다. 그것을 아주 강력하게 만나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주 강력하게 주입시키시는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이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에요.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그 사건이 이게 언제까지 계속되냐하면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계속이되고 수확을 거두어서 이제 곡식이 있을때까지 계속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그 확실하신 하나님이신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느 선교사가 그런 얘기를 허더라고요. 선교비가 이제 다 떨어져서 아 이제는 내가 여기서 굶는구나 그러는데 누가 선교비를 턱 하고 보내주더래요. 거금을 계속 보내주더래요. 그래서 이제 살았구나 했는데 조금 있더니 누가 다른 사람이 또 보내주겠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야 이제는 평소에 선교비가 배나들어오니까 이제는 좀 제대로 좀 해보고 또 제대로 살겠구나 이상하게 그 사람이 딱 들어오니까 전 사람이 사정이 있어서 이제 그만 보냅니다. 그러더래요.) 하나님이 틀림 없으신 하나님이에요. 그렇게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는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다 마친 다음에 모세와 함께 술회했던 그 신앙의 고백중의 하나가 뭐에요.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서 여행하였지만 양식이 떨어진 적이 없었고 의복이 헤진 적이 없었고 신발을 벗은적이 없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으로 살았다 이거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 세상을 사는 것이 만만치않고 세상을 사는 것이 정말 쉽지않은데 이런 세상을 살아갈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냐하면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이 기본적이 통로를 상실한 것은 살기를 포기한것이에요. 생존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거죠. 그러면은 만나를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않고는 죽습니까 죽지는 않죠. 살기는 살죠. 그런데 사는데 사는것이 다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육신적으로 다 살아있지만은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는 산자가 아니라 죽은자에요. 육신적으로는 산 자지만은 영적으로는 죽은자에요. 그렇게 영적으로 죽은자가된 그런 사람의 삶을 성경은 산 사람의 삶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른 새벽에 광야에서 그러니까 언제 내리는지는 누구도 확인한 사람이 없죠 그죠. 그러니까 누가 서리 내리는 것 본 사람이 있어요. 그냥 서리 내리는 것을 볼수는 없어요. 서리가 아침에 내려 있는 것은 확인할수 있지만 그 내리는 광경은 그건 보이는게 아니거든요. 그런 방법으로 내렸을 것이다. 그냥 눈이 떨어지듯이 이렇게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거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내리는 과정은 안보여주셨지만 하여튼 아침에 가면은 그 만나가 발견되는 그런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셨을 것이란말이죠. 그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서 커다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양식을 공급받았던 백성들이 어디에 있어요. 그랬으면 했던 사람들은 많아요. 그죠. (우리 초등학교 다닐때만해도 지금도 기억에 남는데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지면은 누더기 기어입은 애들이 창가에 쭉 앉아서 야 저게 쌀가루 였으면 데게 좋겠다 저거 쪄서 바로 집으넣으면 떡이될텐데, 다 쓸데없는 얘기죠. 그런 희망을 가져본 사람들은 있을지 모르지만은 실제 그런 식으로 양식을 먹으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 의해서 보살핌을 받았던 민족은 없다. 이얘기에요.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은 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그것을 만나의 사건을 통해서 볼수 있었던거에요.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풀어 주신 것은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람이 다만 떡으로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것이니라." 하는 이 진리를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양식을 공급해주시는거에요. 그런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양식을 공급해 죽신 것을 통해서 알게하신 그 진리가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면은 바가지를 들고 들판으로 나아가서 그것도 내일이나 모래먹을 양식이 아니라. 오늘 먹을 양식을 구해야했듯이 우리들도 영적으로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 이거죠.
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얘기해보라. 그러면은 모두 새카만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 왕년 얘기 거슬러 올라간, 쥐어짜도 별로 감동적이 아닌데 그래도 어떤 감동을 하는것처럼 그렇게 한번 해볼려고 애를 막쓰는거에요. 무슨 10년전 얘기 20년전얘기 30년년전얘기 무슨 왕년의 얘기 다 나와요. 얼마나 많이 써먹었는지 다 달았어요. 그건 어디에서 비롯되는거에요. 그게 결국은 뭐냐하면은 오늘 하나님이 내게 공급해주시는 그 양식이 너무나 결핍된 상태속에서 살아가는거에요. 오늘의 양식,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는 진리가 바로 이런 것이에요. 새벽에 하나님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이 만나의 사건이 하나님의 커다란 이적이었다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기대해야할 가장 이적적인 사건은 뭐냐하면은 차에 치었는데도 안 다쳤다는둥 다 망해가는 회사 주식을 샀는데 값이 올랐다는둥 뭐 그런게 기적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가지며 말씀을 펼때에 어쩌면 꼭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이 내리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기대하면서 살아가야할 가장 커다란 하루중의 기적이라고요. 결국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사람들 중에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만 들어갔지만 광야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결국 알고보면은 그들이 만나를 먹으면서 살아있었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간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루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기적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징검다리처럼 엮어져서 그래서 마지막에 그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간거에요.
물론 우리들이 한번 말씀을 듣고 쾅하고 다가와서 일생이 뒤바뀌는 놀라운 일들도 우리는 기대해야되요. 그리고 기대할수 있어요. 기대해야 된다 이거죠. 그렇죠.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하다 이거죠. 그러나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내가 성도다운 삶을 지탱해 나가고 주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경건을 지탱해 나가고 세상의 유혹과 육체의 유혹을 받을 때에 그것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해주는 신령한 힘을 말씀을 통해서 공급받을수 있어야되요. 공적인 예배 속에서의 말씀의 은혜는 개인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생생한 말씀의 세계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강력하게 나타나고 그리고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으로 공예배에 나왔을 때 하나님이 배푸시는 은혜가 크다. 이얘기에요.
저는 가끔 일정한 기간동안 하나님이 새벽기도의 은혜를 깊이 내리신 적이 있어요. 저는 예전에 새벽기도에 나오면은 사람들이 뜨겁게 부르짖어야지만 그 새벽기도에 승부가 나는 것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새벽 시간에 새벽기도의 성패는 뭐냐하면은 하나님이 새벽시간에 말씀을 내리시는거에요. 그래서 죄악으로 무디어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가지고 교회에 나왔지만은 기도할수 있도록 영혼이 충분히 원기를 얻지 못한 그 사람들, 굳어진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잔잔하게 은혜를 내리시면서 그러시면서 새벽에 하나님의 만나가 풍성히 내리면서 내 영혼이 이제 흐물흐물하게 이렇게 녹아지기 시작할 때 그 때에 이제 10분만하고 집으로 돌아갈려고 했던 기도가 30분 1시간 퍼져나가는거에요. 그래서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새벽기도가 계기가 되어서 인생이 바뀐사람이 여럿있어요. 여러분 매일 아침에 첫 번째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광야의 생활에서 원기를 회복하게 해준 이 만나의 놀라운 사건이 언제 일어났어요. 부담스럽게 새벽에 그리고 혹은 이른 아침에 일어났어요. 그런데 사실 왜 하나님이 그러셨을까 그런 생각도할수 있잖아요. 그래서 새벽에 무슨 신비한 것이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내일 12시 빵주는 시간 그렇게 정해놓으시고 12시에 와르르 부어주시면은 되잖아요. 점심시간에 가서 거두어 오면 되잖아요. 일과가 모두 끝난 다음에 들판에 나가서 거두어 오면 되잖아요. 그죠. 그런데 아침에 새벽에 내리시고 아침에 그들이 발견할수 있었어요.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우리들이 눈을 뜨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매일 다시 태어나는 거거든요. 그죠. 죽음과 같은 잠속에 빠져들다가 의식없이 있다가 눈을 탁 뜨면서 우리는 매일 마침마다 새롭게 태어나는거에요 .그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 새벽에 그 사건을 배푸신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 역사에서 볼때에 아주 신령한 삶을 이어갔던 많은 사람들이 새벽의 사람이었어요. 사실 이것은 굉장히 힘들죠, 그죠. 새벽기도 자체도 농촌문화에서나 5시 혹은 옛날에는 4시30분이라고 하는것은 살인적인 거거든요. 4시 30분에 새벽기도를 할 때에 미국 사람이 와서 보고 새벽기도때 사람들이 가득 모인 것을 보고 제일처음 하는말이 은혜롭다든지 그 얘기가 아니라. 아니 잠도 안자요. 그러더래요. 이해가 안가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여튼 걸출한 신앙의 사람들이 새벽의 사람들이었어요. 여러분들이 볼때도 정말 신령해보이고 깊은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 사람이 있는데 아침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아침의 사람들, 아침에 눈 딱 뜨면서 하나님 생각하는 사람들, 주님이 주신 하루입니다. 그러면서 기도하고 기도한 후에 말씀 앞으로 다가간 사람, 그래서 그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이 오늘도 나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시는 그 명령에 귀를 기울이는거에요. 그러니까 삶의 자원이 엄청나게 다른거에요. 그러니까 짐승처럼 되는데로 살다가 하나님이 방망이로 한 대 갈기시면 그 때 펑펑울면서 사는 그러한 형태의 영적 생활밖에 없는 사람과 날마다 성경을 열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기대하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살고 싶다. 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과는 그 사람을 삶의 자원자체가 다르다. 이거죠. 감당할수 없는거에요.
그래도 말이죠. 캐톨릭보다 개신교가 신앙의 유산이 더 깊다. 라고 생각할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뭐냐하면은 요즘이야 많이 나아졌지만은 옛날에는 성경이 없어요. 라핀어 성경밖에는 없다고요.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라틴어 성경밖에 없어요. 로마의 글자에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설교하고 라틴어로 성경을 읽는거에요. 그러니까는 무지목매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결국은 종교 개혁도 어떻게 해서 일어냐하면은 성경을 성도들이 집적 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한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캐톨릭이 고상해보이는 부분이 많아도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말씀을 대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들을 깨달으면서 나아간다. 라고하는 이 유산을 능가할 수는 없는거에요. 물론 그러다가 보니까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렇게 성경을 읽다가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리고 깃발들고 교주가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수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인도하시고 자기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라고하는 것은 굉장한 것이라이거죠. 그러니까 아침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내게 다가오셔서 내 영혼을 텃치하고 지나가시는 것 이것이 오늘 하루 내가 기대해야하는 최고의 기적이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된다고요. 그래서 개인적인 지속적으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거기에서 공급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자신의 삶 속에서 아예 깊이 배여있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 이거에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고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거죠. 하루 이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자극을 받는 삶이 없이 살아가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갈급하다 라는 느낌을 받지만은 시간이 지나가면은 그 갈급하다라고 하는 마음까지 완전히 사라져요. 그렇게 되면은 영혼은 말라깽이처럼 핍절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거에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받는 공적인 예배의 은혜는 간직될수 없어요. 그러니까 아주 견고하고 강력한 개인적인 경건 생활이 없이는 그 거룩한 삶이 불가능하다고요. 그것과 공적인 은혜의 생활이 함께 결부가 될 때에 그 때에 비로소 신실한 성도의 삶이 되는거에요.
매일매일 성경을 읽지않는 것을 그렇게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었서는 심각한 문제라 이거죠. 그것은 기본적인 성도의 의무에요. 이게 교회 역사로 볼때에 기도와 개인적인 성경읽기 이 두가지는 개인의 경건의 삶에 있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두 날개였다고요. 여러분들이 무엇이 특별하길래 매일매일 성경을 안 읽으면서도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수 있다고 그렇게 자부하느냐 이 얘기에요. 그것은 안되는것이에요. 그리고 허영에 들뜬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되요. 허영에 들뜬 사람들이 되지말아야되요. 어느 집회에 까면 깨진다더라. 어디가면 성령받는다 그러더라. 누가한데 가서 그 사람이 눌러주기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러라. 그렇게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냐이거에요. 우선 해야될 것은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실 것을 하나님 앞에 기대해야되요. 아침마다 성경읽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짧막한 설교를 듣든지 하여튼 무엇을 하든지간에 말씀으로 내가 젓을수 있는 그런 상황을 경험해야된다 이거죠. 그리고 그것이 매일매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만지시는 일들이 있어야한다. 라고 하는 강한 성취욕을 성취욕이라 그러면 이상하지만 강한 은혜에대한 욕구를 가지고 매일매일 하루를 시작해야된다 이거죠.
일어나자 마자 잠결에 손을 뻗어서 신문을 들고 경제난을 휙 넘기면서 주가동향을 보는 사람들은 아침서부터 밤까지 돈 얘기만 하는 사람이에요. 돈 얘기만 하는 사람이라고요. 일어나자 마자 텔레비젼 켜는 사람 똑 같은 사람이에요. 정시만 되면은 일어나자 마자 라듸오 틀고 6시 아침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는 사람은 매일 돌아다니면서 뉴스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뭐 뻔히알잖아아요.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그렇게 동 서기도 못해본 양반들이 그렇게 정치 돌아가는 것은 박사보다 더 잘알아요. 입을 멀리고 가만히 듣고만있어요. 밀실에서 오간얘기까지 훤하게 알아요. 왜 정치난을 매일 보니까 뉴스도 매일 그거에요. 이 속에 무엇이 들어갔던지 들어간데로 나온거에요. 콩기름 들어가면 콩기름 나오고 구정물 들어가면 구정물 나오는거에요. 눈뜨자마자 집어넣는게 손을뻗어서 집어넣는게 맨 그런 것만 집어넣는거에요. 신령한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간밤의 꿈이 산란했습니다. 제 영혼에 어두운 그늘이 있습니다. 하나님 꿈속에서라고 범죄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하루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가면 다시 오지않는 이 하루를 주님을 위해 살게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오늘을 무엇을 말씀하시려나 그리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이게 성도로서의 최상의 삶이 아니라 기본이에요. 기본, 기초라 이얘기에요. 연속극은 어디까지 봤는지 최진실 해어지는 장면이 생생한데 성경은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이 안나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에 담으면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오늘 이 만나가 아침에 내렸던 사건에 대해서 깊이 주목하세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먹이시는 이 만나의 사건을 새벽의 시간에 배푸신거에요. 물론 우리는 새벽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볼수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하루를 시작하는 처음시간,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간이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시간보다 훨씬 중요하다라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것이죠. 하나님의 은혜에 푹젖어서 시작하는 하루는 반쯤은 승리가 확보된 삶이에요. 내 마음이 완전히 건조해지고 척박해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하루는 이미 실패를 반쯤은 담보하고 시작하는 삶이에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주 명료하고 간단해요. 아침시간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요. 그리고 구름 잡는 기적을 기대하지 말고 제일 먼저 경건의 기적을 기대하라 이거에요.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새벽시간에 얼마나 좋아요. 6시 15분이에요. 서울 시내에 6시 15분에 기도회하는 이런 좋은데가 없어요. 6시 15분에 보따리 싸가지고 나와서 1시간 일찍 나오면 되잖아요. 한 7시까지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열린 공간에 가서 성경을 쭉 읽으면서 조용하잖아요. 누가 방해하는 사람 없어요. 하나님 말씀하시고 그래서 어떤 때는 지체들이 와서 간절히 성경을 묵상한 후에 손을 모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보면 살금살금 지나가죠. 그리고 거기다가 묵상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이 촉촉히 젖어요. 그리고 이제 커피로 위장을 적시고 커피도 마시고 빵 하나 먹고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직장을 향해 가는거에요. 하나님이 이러한 성도의 삶이 이게 정상적인 하루의 출발이라고요. 새벽에 일어나서 새수도 씻는둥 마는둥 하면서 허겁지겁 직장에 뛰어나가서 신경질을 뻣치고 요즈음 뭔 그리스도인이 인격, 거룩한 삶, 그것은 다 은혜가 깃들때의 이야기지 어떻게 하겠어요. 이런 삶이 한두번이 아니라. 몸에 딱 베인 그런 삶이 되어야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아주 간단해요. 아침 시간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아침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라 이거죠. 그러면 아침에 기대하는게 뭐에요.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니면 뭘 기대하느냐고요. 뭘 기대하죠. 아침에 화려한 식탁을 기대하세요. 아니면 뭘 기대하세요. 합승하는 택시를 기대하세요. 전철에 빈 자리를 기대하세요. 뭘 기대하시냐고요. 하나님의 백성이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안믿는 사람들은 여기가 홈 그라운드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여기자 홈 그라운드가 아니에요.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분명히 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수 있는 그 어떤 제3의 자원이 필요하다고요. 그것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을 공급받는 길이 무엇이냐 이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내려서 그 말씀으로 우리의 원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촉촉히 젖은 그런 상태에서 사람도 보고 자신의 일도 보고 세상도 볼수 있을 때에 우리들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 아니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아침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생각해보세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거에요. 몸이 약하고 10시간 이상 안자면은 정신을 못차리고 밤에는 강하지만은 밤에 강하다는 이야기는 잠이 안온단 얘기지 강하긴 뭐가 강해 밤에는 강하지만 아침에는 약해서 중천에 해가 떠야지만 일어나는 체질도 있을수 있어요. 그럴수 있어요.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지내는 하루에 어떤 과거적인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형편이고 그러니까 그 아침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해요. 한30분 일찍자고 1시간 일찔 일어나면 안되요. 안되긴 뭐가 안되겠어요. 밥벌어 먹을려고 사람들이 이른 새벽에 자기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 한번 보세요. 그 사람들의 하루의 희망은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급료를 받는거에요. 그 사람들이 거기에 적응하면서 살잖아요. 그렇죠. 출근 시간이 너무 빨라서 사표내겠다는 사람 아직 본적이 없어요. 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새벽의 시간에 이른 아침의 시간에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만나를 내리시는 이 사건들 그죠. 나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 내 이웃 모두 경험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적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어요. 주님이 이렇게 베풀어 주시지 않으셨으면 죽음밖에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신 거에요.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이 오래 예수 믿었으면 뭐해요. 여러분들이 신앙의 온갖 경험을 다 했으면 뭐해요. 여러분들이 교회생활에 이골이나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에 우골탑을 아무리 많이 세웠으면 뭐하냐고요. 하나님이 몇 달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양식을 공급해주시지 않으시면 여러분 아주 질이 아쁜 흉악한 옛사람으로 돌아가는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주님이 붙잡고 계실 때에만 주님의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만날때에만 하나님을 닮아가고 싶어하는 착한 사람이에요. 주님의 신령한 세계를 맛보게 하실 때에만 죄악된 세상 버리고 신령한 세계를 향해서 살수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죠. 하나님의 텃치가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매일매일 반복되어야할 텃치다이거죠. 아침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만나를 거두러 나아가는 그런 시간을 가지세요. 그래서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들의 마음이 젖은 가운데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주시는 하루의 밭을 하루라고 하는 이 삶의 밭을 경작하고 씨를 뿌릴수 있는 그런 즐거운 농부와 같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새벽에 무너진 성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수6:1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나의 사건과 버금 갈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바로 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건은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만나의 사건은 홍해를 건넌지 얼마되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이었고 이 여리고 성이 무너진 사건은 요단강을 건넌지 얼마되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이었죠. 만나의 사건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본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험한 사건이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사건은 요단강이 마르는 기적을 보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더욱이 두 사건 모두 인간이 무엇을 보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하셨다는 점에서 아주 특이한 유사점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고 하지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소리가 성을 무너뜨렸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소리는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반응이었고 성을 무너뜨린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건은 차이가 납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느냐하면은 후자인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사건에서는 믿음의 역활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을 했고 만나가 내리는 사건에서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적이 많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만나가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일방적으로 아침에 너희 진 주위에 서리와 같이 이슬과 같이 내리턴데 그것이 만나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만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는데 그들이 반신반의 하던, 믿던, 믿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밖에 나가보니까 만나가 내렸더라. 믿는 집 앞에는 만나가 쫙 내리고 안 믿는 집 앞은 비껴가면서 맨땅만 남았던 것이 아니라. 모두 거둘수 있도록 내린거죠. 그런 점에서 만나의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기적의 능력이 강조되었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당신 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지만은 그러나 믿음의 역활의 중요성을 많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 아는 얘기지만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요단강을 말리면서 건너갔을 때 제일 먼저 마주쳐야했던 큰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성은 요단강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자리잡은 큰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이 이렇게 있으면은 성을 호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성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대항을 하는 것은 최후 항쟁입니다. 그렇죠. 성이 있으면 그 성을 지키기 전에 먼저 군사를 보내어서 저쪽에서 오는 군사들을 앞서 나아가서 막아서 그렇게 함으로서 적군이 성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전쟁의 상례인데 이 사람들은 아예 다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여리고 성을 방어하는 작전을 세우는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굉장히 무서운 민족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여리고를 비롯해서 모든 가나안 땅에 소문으로 알려지게 하셔서 그들의 마음이 녹아내리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말리면서 기적으로 건널때에 그 소문이 입에 입을 통해서 가나안에 퍼졌고 가나안데 퍼진 그 놀라운 소문은 광야의 시절에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보았던 수많은 풍문과 함께 보태어져서 싸움도 해보기 전에 가나안 백성들의 마음을 물같이 녹여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떨림과 두려움 속에서 성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그들은 성을 단단하게 막고 그 성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루에 한번씩 돌아라 이거에요. 떠들지도 말고 소리치지도 말고 하루에 한번씩 돌고 그리고는 그들이 한 일은 그들이 한일은 하루에 한번씩 돌고는 들어가서 잤습니다. 성의 크기가 정확하게 얼마였는지는 알수 없지만은 이 성은 여리고라고 하는 한 도시를 포괄하고 있는 성이니까 굉장히 큰 성이었을거에요. 성벽의 높이가 30미터 가까이 되었다고하고 발굴팀들에 의하면은 그 성벽이 어마엄하게 높고 이 라합의 경우에는 성벽 위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성 벽이 이중으로 되어있어서 그 위에 도로가 나있고 도로 위에 집들이 지어져 있는 그런 형태였단 말이죠. 그러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성이었고 그런 큰 성을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이외에는 본적이 없었을 그런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속에 들어가서 문 닫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달한 병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막고 있으면 그들이 아무일도 할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돌고 왔습니다. 돌고 들어와서 잤습니다. 엿세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칠일째 되는날 일곱번을 돈 후에 나팔소리에 맞춰서 백성들이 소리를 지렀고 그러자 그 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이것을 읽으면서 이게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이 우리와 같이 쌓인 성과 같다면은 그 성이 무너져 내리면은 돌던 사람들이 다 깔렸을 것같은데 고고학 적인 발굴에 의하면은 이 성이 말이죠. 앞에는 앞부분은 이렇게 세우고 뒷부분을 각지게 세운걸로 발굴물들이 나타나요. 결론이 뭐냐하면은 흔들리면서 무너져내린 돌이 밖이 아니라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구죠였다이거죠. 그러니까 성을 무너뜨린 것은 그 성을 무너뜨려서 벽을 허물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가기 좋게한 효과만은 가져온 것이 아니라. 기적적으로 무너져내리면서 그 돌들에 깔려서 성벽 주위에 진을치고 있었던 수 많은 군사들을 몰살시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참 하나님이 그렇게 무너뜨리 실려고 이미 오래전에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안쪽으로 무너지는 성을 쌓도록 예비하신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인제 성을 일곱 번 돌때에 무너지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거죠. 그것이 이 스토리의 전부다이고 그리고 그렇게 무너졌을 때 인제 그 성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거기에 있는 남녀 노유를 막론하고 모두 죽였다 그거거든요.
이것은 하나의 하나님을 대신한 신판이죠. 그러니까 이런 것을 가지고 사랑 이런 것을 논하면 안되요.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뭐냐하면은 여리고 성, 가나안 그 가체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제 더 이상 그 성을 눈뜨고 보실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가 꽉 찬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자들을 특별히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나라들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역사 속에서 어느 한 나라의 죄악이 어떤 무엇을 믿던 상관없이 죄악이 쫙차고 도저히 이제는 이들을 이땅에 남겨놓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행동하신거에요. 그 에스비오스 화산의 폭발로 묻힌 봄페이 도시 같은 것들 그런 경우잖아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제 심판하시는거죠. 그런 하나님을 대신해서 진멸하는거죠. 그리고 거기에는 그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의미 말고도 또 하나가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의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는데 그런 것들을 방해할 여지를 모두 없애버리신거에요. 싹을 잘라버리신 거에요.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멸망 당하는게 우상숭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결국은 뭐 궁극적으로는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부패이지만은 그러나 이제 사회적으로 본다면은 결국은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모든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진멸하도록 하신 그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나중에는 원인이된다고요. 그래 나중에는 산위로 쫓겨서 올라가거든요. 보면은 선지서 같으데 보면은 산꼭대기 산당들이 있잖아요. 그런 인간들이 쫓겨 올라가서 거기서 자신들이 이제껏 가나안에서 섬기던 그런 우상들을 섬기게된거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그 인종들이 적대감이 사라지면서 문화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게되는요. 그러면서 그 위에 도망갔던 잔재 세력들이 내려와서 이 문화적인 활동을 통해서 영향을 미치면서 신앙이 부패해지자 그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우상들이 들어오게 되는거에요.
그러니까는 역사 속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많잖아요. 정치적으로보면 한 나라를 먹었는데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망한 나라에 의해서 정신적으로 정복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로마와 히랍이에요. 그리스,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부스고 로마가 섰는데 사실은 정치적으로 로마가 지배했지만은 그러나 결국은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그 문화에 모두 삼킨바 되게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는 지배를 했는데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망한 나라의 지배를 받는 그런 사회가 되는거잖아요. 그러니까는 로마에 나오는 로마신화 있잖아요. 그게 전부다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것이에요. 그리스의 신화가 있는데 그것을 비슷한 것을 껴맞추어가지고 자기네도 그것을 뭐라 그러나 각색을 해가지고 자기네 판을 만드는 것이죠. 자기네 판의 신화를 만드는거죠. 비슷하게 그렇게 해서 다 모방 되는거죠. 그런 식으로 인제 먹혀버리는거죠. 그런데 여기서도 그런 일들이 결국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거에요. 완전히 그렇다고 볼수는 없지만 그런 영향이 주어지게되죠. 그러니가 진짜 세상적인 문화의 입장에서 본다면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문명이라고 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없거든요. 사실 그것도 꼭 성경적인 싱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은 옛날에 아주 골수 보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이 사회 속에 어울려서 살아가는 문화활동 이런 것 자체를 굉장히 죄악시 했거든요. 이원론적인 사고에 빠지는거죠. 죄악시 하니까 무슨 문화라고 하는 것이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처럼 재미없는 사람이 없고 예수 믿는 사람은 그거뭐 아주 단순하게 그렇게 교회 집을 왔다갔다 하면서 돈벌어도 그냥 꾀제재하게 살고 그 따지기 좋아하고 도수 높은 안경쓰고 그리고 말 잘하고 꼬장꼬장하고 그러면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표징이었잖아요. 그런 것들도 다들 잘못된거죠. 그런데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이렇게 진멸하라고 하신거에요. 그런데 문화적으로 보면 사실 그 가나안의 사람들이 훨씬 더 풍부했거든요. 농경사회니까 농경사회가 아니면은 사실 문화라는 것이 있을수가 없어요. 농경사회는 왜 문화가 되는지 보세요. 수입이 일정하다고요 수입이 물론 풍년 흉년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 말이죠. 가을에 곡식을 많이 해서 거두어 들이면은 그러면은 가을 겨울은 논단말이죠. 이 사람의 문화라는 것은 여유가 있어야지만 발달하는거 아니에요. 여유가 있어야지만, 그렇게 하면서 발달되는거죠. 그 종교적인 것도 마찬가지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서 아주 컴풀렉스를 가지고 있어요. 뭐냐하면은 뭐 보이는 것이 없다이거죠. 보이는 것이 그들은 보이는 우상이 있고말이지 진짜 가지고 다니면서 이게 나를 지켜준다 그러고 뭐가 있냐 이거죠. 제사는 한 곳에서 드리고 드리고 나오면 아무것도 없는거에요. 뭐 성경이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뭐가 있냐이거죠. 아무 것도 아니죠 이런데서 오는 자신들의 종교가 하등한 종교일지도 모른다는 열등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죠. 결국은 신앙이 떨어지고 나니까 그런 세력들이 내려오면서 인제 소위 얘기하면 종교적인 동화현상들이 일어나는거에요. 결국은 그것 때문에 우상 숭배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잖아요.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싹쓸어버리게끔 그렇게 명령하신거에요.
오늘의 관심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이 성이 무너졌다고 하는 사실이죠. 이 성이 무너진데에는 크게 세 가지의 요인이 있었어요. 세가지의 요인이 첫째는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고요. 그런데 그 약속이 뭐냐하면은 그 성을 내가 무너뜨려 주리라. 하는 그런 약속이 있었다고요. 우리들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심리적인 확신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씀이 뭐냐하면은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스물 몇살 때인데 예수 처음 믿고 삼각산 꼭대기의 기도원을 올라갔는데 어느 전도사가 그 때는 저는 그게 믿음인지 알았죠. 복권을 사가지고 와가지고 그 산꼭대기에 올라와서 목이 터지게 기도를하는거에요. 나는 만나도 꼭 그런 사람들만 만나는지 모르겠어요. 뭐 그냥 열심히 기도 하는거에요. 계속 무지무지하게 추웠거든요. 겨울에는 추우니까 밖에 나가서 산에 올라가서 산기도를 하면은 입술에 침만 바르면은 적극적극 얼어붙을 정도로 그렇게 추워요. 그러니까 3-40분 기도하고 꼭 들어와서 방에 들어와서 잠깐 녹이고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그 녹이는 시간에 우연히 만났는데 계속 그 얘기라 믿음은 만사를 해결한다는거에요. 믿음은 그래 나는 처음 믿는 처음신앙에 옆에서 그냥 순수하게 아멘. 아멘 아 진짜 나는 왜 저런 믿음이 없을까 나는 이렇게 사면서도 이게 맞아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거 하나 사서 될줄 믿습니다. 그러고 아 이 산에 올라와서 기도하면서 이게 되면은 뭐 교회를 산데나 세를 낸데나 그러면서 야 참 그러는구나 그래 나도 그런 믿음을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못받았어요. 아직 그런데 그런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의 심리적인 확신이죠
또 어떤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믿음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살수 있겠느냐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은 당신 어떻게 이발하러 가서 시퍼런 칼을 든 사람에게 당신의 목을 맡길수있녜요 여자분들은 무슨 얘기인지 모를텐데 이발소에 가면 이렇게 드러눕거든요 면도칼을 이렇게 싹싹 갈아가지고 목에다 댄다고요 여기다 그리고 목서부터 인제 털을 깍지 시작하거든요. 돼지 털 벗기듯이 이렇게 벗기기 시작하는데 그거 어떻게 그렇게 맡길수 있냐 그 한번만 그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라 이거죠.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 많이 듣죠 일상사에서 끌어내서 그런데 사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확률의 문제에요. 왜냐하면은 확률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웃통벋고 거기에 벌렁 드러누워서 시퍼렇게 간 칼 이발소에서 목에 댓어도 한번도 목잘린 사람 없어요. 그들이 그 털만 깍고 살려주지 무슨 문제를 별로 일으키지를 않는다고요. (누가 교회에서 전도를 열심히 하라고 목사님이 그랬더니 이발소 하는 그 양반이 밤중이 되었는데 막 문을 닫고 들어 갈려고 하는데 아저씨 이발해 줄수 있어요. 그러고 어떤 남자가 오더래요. 그래서 들어오라고 앉으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이발소 하는 사람인데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말주변 머리가 없어요. 뭘좀 해야되는데 그러니 이제 다 문을닫고 종업원도 가고 자기 혼자 남으니까 불을 다 끄고 그 사람 앞에만 이만한 불하나만 켜 놨어요. 그리고 나서 뭔가를 이야기해야 되겠는대 그래서 이제 혁대를 이렇게 해가지고 칼을 쏵쏵쏵 갈면서 그랬데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적 있냐고 어쨋든 그렇게 해서 아무리 그렇게 컴컴한 불빛 아래서 칼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면서 느닷없이 손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럴 때 얼마나 섬짓했겠어요. 그래도 그 사람도 살아서 돌아갔어요. 그래서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확률의 문제라 이거죠. 비행기를 타서 얼마전에도 콩코드가 떨어져 가지고 박살이 나서 수 백명이 죽었잖아요. 그런데도 비행기를 타잖아요. 그것은 믿음으로 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떨어졌다고 이것도 떨어지랴 그리고 타는거에요. 사실은 그래서 타보니까 안떨어질 때가 더 많고 그래서 아직 살았거든요. 그래서 탄거지 그런데 어느날 그 믿음이 실행이 안되고 떨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그 다음날 신문에 나는거죠.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작용이 죽요한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거라이거에요. 무얼 하나님이 약속하셨는지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그러니까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않는 사람들이 갖는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일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요. 그것을 기억을 해야되요. 믿음일 가능성이 별로 없더라 이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약속이에요. 그런데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약속이 먼저 주어지는거에요. 하나님이 오셔서 약속을 하시는거에요. 내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주겠다. 이것이 이제 이큰 역사가 일어나는 첫 번째 중요한 조건이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어떤 삶의 상황에 놓여있을 때 여러분과 유사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나 혹은 여러분과 유사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붙들 수 있는 약속들을 성경에서 찾는 것이 기도하는 것보다 사실 더 급한거에요. 그것이 더 중요한 거에요. 그래서 그것이 분명하게 약속이다고 한것들이 발견이되면 그것을 만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신뢰합니다. 라는 반응이 필요한거에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단순한 사람들은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단순한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게 말이되요. 애들 장난도 아니고 돌고 가서 자고. 돌고 가서 자고. 여섯 번을 그렇게하고 그리고 일곱 번째에 가서 소리를 지르면은 성이무너진다. 그 역사 속에서 그런 예가 있었느냔말이죠. 없죠.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좀 멋있는 방법으로 아니 이 후에 역사를 보면은 하나님이 전쟁을 하실 때에 그 때에 아주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잖아요. 그죠. 뭐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군사들을 모두 죽이신다든지, 또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다든지, 지진이 난다든지, 소돔과 고모라 성처럼 깨져버린다든지, 아니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지 왜 이렇게 말도 되지않는 계속 돌면은 무너진다. 그 얘기를 맨처음에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때의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과 연애하던 기간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순전하고 온전하게 아멘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때에요. 비교적 그랬기 때문에 이들이 곱게 받아들일수 있었지 사실 예레미야 그 시대쯤 같았으면 그런 얘기하면 사실 말도 되지 않는다고 얘기하며 어디가서 그 딴 소리를 하고 앉았느냐고 그렇게 얘기를하죠.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까 이거죠. 그게 결국은 뭐냐하면은 믿음을 테스트파이 하는거에요. 그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를 입증하시고 싶어하시는거에요. 믿음을 보고 싶어 하시는거에요. 그러니까 믿음을 보시기 위해서는 가장 믿을수 없는 방법으로 조건을 제시하면 그들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잖아요.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물 위를 걸어와라 그러셨을 때 수상스키를 주시면서 와라. 그러면 사실 믿음을 보고 말고 할필요도 없잖아요. 그거 타고 그냥 잡아당기면 오면은 자자작하고 오는데 걸어오라 그러니까 불가능하잖아요. 되지않는 것을 가지고 명령을 하시는 것을 보이면서 진짜 그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시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행하시는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것을 시키는데로 했어요. 그게 진짜 믿음이라고요. 이것은 하나의 시키는데로 순종했다 라고 하는 그런 것도 있지만은 그러한 준종 그 이면에는 뭐가 있었느냐면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대한 어떻게 보면은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에대한 완전한 신뢰, 그 말의 내용은 자신들이 이해할수 없었지만 그것을 말씀하시는 분에대한 신앙적인 신뢰감이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던거죠. 이게 믿음이에요. 그 어떤 약속들을 찾아내고 기적이 일어나기전에 어떤 커다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약속들이 있고 그 다음에 그것들을 자신의 상황에 적용할 때 불가능한거 아니에요. 불가능해 보일 때 많잖아요. 그런데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재면은 답이 안나오는거죠. 논리적인 답이 안나오는거죠. 그렇게 되서 믿게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아니죠 논리적인 믿음이죠. 그런데 이게 안나오는데 상황도 사실이지만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사실이라 이거에요. 그런데 상황도 사실이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인데 사실 그 사실이 왜 사실인지는 논리적으로 확실히 알수 없지만 그것을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래서 그 내용을 믿는 것, 이루어 지리라고 확신하는 것, 이것이 신앙이라이거죠. 그러니까 무슨 신앙따로 삶따로 이것은 말이 안되요. 그러면 처음서부터 존재하지 않는것이죠. 보십시오. 이들이 이렇게 그 말도 되지 않죠. 돌맹이라도 하나 던지든지 땅이라도 파야지 그 돈다고 뭐가 해결이되냐 이거죠. 그런데 그렇게 그냥 돌았어요. 그런데 그 돈 것이 아무것도 가져다 준 것이 없지만은 그것게 도는 것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내용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몰랐지만 그러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에대한 신앙적인 신뢰감 때문에 그것을 믿은거에요. 이게 믿음이라고요.
그러니까 마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사람들은 믿음이라 그러면은 반 논리적인 것 처럼 생각하잖아요. 반 논리적인 것 그래서 하는말이 뭐냐하면은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 그래요. 사실 저의 경험에 의하면은 그렇지가 않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신앙이 참 잘들어가요.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논리적이니까 그러니까 논리를 깨버리면은 신앙이 되는 것 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은 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초 논리적인 것이에요.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지 그것이 반논리적인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런 사고는 가지면 안되요.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이었어요. 뭐냐하면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소리치는 것과 성이 무너지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이거죠. 아무 연관이 없는데 연관은 없지만은 그러나 이것은 어차피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설명이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렇게 그 설명이 옳다. 그르다. 그렇게 판단할 입장은 안되는데 어떤 음악을 전공하신분이 저한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게 뭐냐면은 소리로 사람을 죽일수 있다는군요. 소리로 그리고 무슨 음파가 한참 설명을 해요. 그러면서 그것이 딱 맞으면은 그 소리로 사기 그릇 같은 것들을 깰수가 있대요. 뭔소리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데 하여튼 그러면서 자기는 이 여리고 성의 이적도 하나님의 기적이지만 그러나 캐고 들어가보면은 아마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될거다 그런 생각을해요.) 그러나 우리는 과학적인 설명을 여기서 입증해야지만이 하나님의 기적이 입증된다. 라는 그런 식의 논리는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분명한 사실 하나는 뭐냐하면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 기적이지 논리의 반대되는 것이 기적은 아니다 이거죠.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거에요. 기적의 있어서 첫 번째 요건은 약속이었고 두 번째 약속은 이들의 믿음이었어요. 그런데 그 믿음의 성질이 뭐냐하면은 아주 단순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참 재미있어요. 아니 가만히 있다가 칠일째날 가서 돌다가 소리를 지르라고 했으면 이해가 되는데 하루 돌고 왔는데 아무일도 안일어 나는거에요. 이틀 돌고 왔는데도 아무일도 안일어나고 왜 이렇게 여섯 번이나 하게하신 다음에 마지막 칠일째에 일을 만드셨을까 사실 이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입증받으시는 과정이었다고 말할수 있는거죠. 한번 돌고 왔을 때에 그게 사실은 그 큰 성을 그 많은 사람이 한번 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뭐 동네 무슨 구멍가게 도는게 아니고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었을거에요. 그죠. 그러니까 돌고와서 잤다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돌아서 한바퀴 돌면 저녁때가 되었던 모양이에요. 가서 그 일하고 와서 진에 들어와서 피곤해서 이제 자는거였죠. 그런데 첫날 돌았는데 첫날 금이 슬슬가기 시작했다든지 둘째날은 금이 세 개 네 개 가기 시작하다가 일곱째날 되니까 거의 흐물흐물 해졌는데 이놈 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면은 그것은 표징이 날마다 보이니까 야 이것은 진짜 공짜가 아니구나 한번 돌면 금이 한개씩 간다. 그렇게 생각했을거에요. 그런데 사실 그런 일이 전혀없었어요. 육일동안 여리고 성은 그대로 있었다. 이거죠. (그 누가 그런 얘기 하더라고요. 새벽 기도를 잘 나오다가 안나와요. 아니 뭐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에요. 그래서 왜 안나오냐 그랬더니 나와도 되는일이 뭐 특별히 없더래요. 그런데 사실 직장 다닌 사람들이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참 쉬운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나와도 뭐 특별히 되는것도 없고 그래요. 그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보세요. 끝까지 해봐야 알아.) 믿음으로 육일이 지났는데 아무일도 없었을 때에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간적인 입장에서 얼마나 허무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겠어요. 그죠. 첫날 돌때에는 야 저놈들이 뭔가를 할려나보다 그리고 아마 긴장을 해서 성벽에 새까맣게 달라붙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하나 보았을거에요. 그런데 그것도 뭐 설렁설렁 하루종일 하더니 가서 자더라이거죠. 이튿날 또와요. 야 첫째날은 망보고 이튿날은 뭘 꾸밀려나보다. 그랬더니 터덜터덜 한바퀴 돌고 또 자는거에요. 셋째날쯤에는 사실 쳐다보지도 않았을거에요. 또 도는구나 돌아라 그래라. 그랬을거에요. 이러면서 봐도 성벽하나 갈라지지 않았어요. 그것은 물리적인 성격이었고 신앙의 세계에서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여리고 성이 하루 하루의 순종을 통해서 서서히 금이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잘 보세요. 육일까지 하고 끝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너졌을 리가 없죠. 그러니까 육일동안이 없는 칠일의 순종은 의미가 없었다고요. 육일 동안은 탱탱히 놀다가 우리는 대게 그러잖아요. 꾸준히 기도하고 하나님 의지하고 그러다가 뭔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거보다는 육일이 싫은거에요. 일곱 번 도는것도 싫고 칠일째 마지막 바퀴 돌 때 동참해서 으악 하는그것 한번만해서 기적을 보고 싶은거에요. 기가 막히게 여러분들의 마음을 파악했죠. 그러니까 뭐가 안 일어나는거에요. 얼마나 재미있어요. 그렇잖아요. 우리 심리에요. 그러니까 일일에도 참여하고싶지 않고 이일 삼일 사일 오일 육일에도 참여하지 않고 칠일째 여섯바퀴 돌때도 참여하고 싶지 않아요. 일곱바퀴 돌때도 참여하고 싶지 않고 양각 나팔 소리가 들릴 때 그 때 참여하고 싶은거에요. 으악 하고 그리고 무너지는 거기에 동참하고 싶은거에요.
그러니까는 이것도 하나의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눈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은 진짜 기적이죠. 그렇지만은 이 기적적인 역사는 오랜동안에 믿음이 쌓여가면서 어느 때가 차매 어느 순간에 그것들이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이거에요. 그것을 보여주는거에요. 그것을 보라고요. 그러니까 눈으로는 갈라지지 않았지만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영적인 면에서는 이 여리고 성이 금이가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고 마지막 육일째 칠일째 여섯바퀴째 돌 때 쯤에는 완전히 허물어진 상태가 되어있어요. 그리고 훅 하고 부니까 그냥 와르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죠.
그러니까 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도 기도해서 짧은 순간에 기도해가지고 단방에 한방으로 해결보는 사람들은 짧은기도로 해결을 보는 사람들은 오랜 동안 깊은 기도와 긴 기도의 헌신 속에서 산 사람들이나 그렇게 되는 것이지 평소에는 기도 하나도 안하고 말이지 탱탱히 놀다가 어느날 되더니 귀신아 나가라 계가 왜 나가겠어요. 너나 나가라 그러지 그러니까 어때요. 오랬동안 기도 속에 헌신하며 살아온 그런 사람들의 정신과 그런 믿음의 삶은 거의 습득하지 않고 그 어느 순간에 뭐해라. 될지니라. 그거 다 겉멋 아니에요. 겉멋 먼저 진실이 쌓이고 하나님 앞에 믿음이 쌓인 후에 그런 어떤 권위와 능력이 갖추어 졌을 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그게 되겠어요. (옛날에 신학교에 뭐 이름만 대면 저명하게 아는 유명한 교수님이였죠. 그런데 뭐 하여튼 무슨 일인지 하여튼 밤마다 그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거에요. 귀신이 나타난데나 뭐란다나 그러니까 이 교수가 하도 불안하고 그 집안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조금 돌았어요. 그러니 얼마나 무섭겠어요. 신학교 선생이라도 거 뭐 말가지고 하는것이면 신학교 선생님이 야단 칠탠데 귀신이 그 말가지고 되겠어요. 능력이지 그것을 학교에다 이야기를 했더니 기도꽤나 한다는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와가지고 거기에서 마루에서 밤새도록 기도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큰 소리를 뻥뻥 치더래요. 이놈의 자식 나오기만 해봐라 혼내줄태니까 그날 저녁에 귀신이 나와서 턱을 치고 갔데나 그래 이 턱이 이렇게 돌아가가지고 나 왔다. 그리고 한데 치고 간모양이에요. 턱이 돌아가가지고 말이지)
그러니까 크고 위대한 능력은 육일이 있기 때문에 칠일의 그것이 있는거에요. 진실과 정직 단순한 신앙 속에서 차근차근히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따르듯이 그렇게 따라가는 그러한 믿음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그런데 우리들이 그것이 싫은거에요. 어떤 마지막 결정체로 남은 그 큰 이적의 역사, 그리고 큰 권능, 그것만 보고싶어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활짝 핀 아름다운 국화, 그래서 화분 하나에 수백만원 가는 그런 국화는 원하지만 그 국화꽃이 피기까지 봄부터 우는 소쩍새의 사연을 삶으로 써가기는 싫은거에요. 아니 그 심각한 이야기에 왜 웃으세요. 싫은거에요. 여기서 그것을 딱 보여주는 거에요. 어린아이 처럼 단순하게 순종하면서 그것을 도는 그게 사실은 사실 솔직히 말해서 몇 백만의 사람을 하루만 동원한다는 것도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닌데 그것을 하루에 한번씩 돌렸다는게 보통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일을 다하고 나니까 마지막 순간에 역사가 일어나는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런 일이 없었지만은 그 얘를 들면은 그 칠일째 여섯바퀴 돌때까지 참여했다가 뭐야 이거 아무것도 안 일어나네 그러면서 보따리 싸고 간 사람은 무너진 것을 못보았죠. 그렇지 않아요. 당연하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는데 그 전까지 기도하다 간 사람들은 성령 받는거 하고 상관이 없었겠죠. 바로 그거에요. 그러한 믿음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일어난 두 번째 조건이었다 이거죠.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의 완전한 순종이었어요. 그러니까 믿음에 포함되기도 하겠지만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순종하게 되는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허물어 뜨릴 수 있으시다. 그렇게 믿기만하고 그 일을 위해서 주시는 명령을 실천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라고 말하는것이에요. (아이 띵 솝 오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동의지요. 믿음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이 믿음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하면은 온전한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수있다. 라고 하는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정을 받는것이에요. 그것에 대한 아주 대표적인 예가 로마서에서 말하는 그 믿음이잖아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재물로 드리잖아요. 그러니까는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확증하시잖아요. 그죠. 하나님이 아들이라도 바쳐라. 그러면 바쳐야한다. 이렇게 믿고 실지로 그 아들을 바치지 않았다면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바치라 그러면 바쳐야된다고 생각을 했다 이거에요.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생각이죠. 믿음은 그렇게 바깥으로 표출이 된다. 이거에요. 표출이 된다 이거에요. 확실히 신뢰하고 믿었기 때문에 아들을 바친거죠.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순종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것이에요.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진실한 믿음이었고 어린 아이와 같은 정직한 믿음이었다는 것이 순종을 통해서 입증이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이 무너뜨리실 수 있다. 라고 굳게 믿었어도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행동하지 않았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동의한 것이지 믿은 것은 아니었다 이거죠. 그리고는 그들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이 하시라는대로 순종하는 거에요. 그랬더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거에요. 그런데 이 사건도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있어서 회고하는 사건이에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사건이 그 여리고 성은 아주 뭐 어마어마한 성이었어요. 그 엄청난 성, 아이성 같은 것은 작은 성이었는데 제일 먼저 하나님이 덩치가 가장 커다란 주된 성과 딱 대면하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이게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미래의 싸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고 그렇잖아요. 그 큰 것도 먹었는데 그 작은 것은 장난이다 그런 생각을 넣어주신 것이고 거기에 가나안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여리고가 무너졌데 이제 끝이구나 그런 절망감을 하나님께서 넣어주시기 위해서 그 성을 선택하신 거에요.
마지막으로 언제있었던 일이죠. 그 결정적인 대목에 있어서는 아무도 대답을 안해요. 언제있었어요. 새벽에 있었어요. 새벽에 그래서 히브리어에는 야스킨 이라고 하는 동사가 있어요. 동사자체가 아침 일찍 일어나다. 라는 동사에요. 그런데 이 새벽이에요. 일이 일어난거죠. 우연치고는 참 재미 있잖아요. 그죠. 홍해가 갈라지는 것, 만나가 내리는 것, 그리고 그 큰 성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 새벽에 일어난거에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늦잠잔 사람이 있었더라면은 그 절묘한 광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눈을 뜨고나니까 모두 무너진 것만 보였겠죠. 새벽에 일들을 하나님께서 행하신거죠. 그러니까 우리도 말이죠.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 거기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이어지는 온전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 이런 것들이 필요한데 이 일들이 새벽에 일어났다고요. 하나님이 새벽에 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거에요.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문제는 어떤거에요. 어떤 거에요. 그것이 어떤 거에요.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성격일수도 있고 가정의 관계일수도 있고 자신의 죄의 문제일수도 있고 사업의 성공의 문제일수도 있고 또 어느 학생은 그러대요. 목사님 저의 난공불락의 성은 영어입니다 그러더라고요. 영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때요. 새벽에 무너지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새벽에. 새벽에. 새벽에. 기도하겠습니다.
5. 새벽에 이기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 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19:35)
시편 46편은 150편의 시편가운데 자주 애송되는 사랑을 많이 받는 시입니다. 시편 46편의 배경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 심심치 않은 논란거리였는데 대부분의 많은 구약 학자들은 시편 46편에 나오는 이 시대적인 배경은 앗수르가 유대를 공격했을 때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히스기야 왕을 공격하던 그 때에 거둔 승리를 기념하면서 지은 시일 것이다. 이렇게 추정하는데 추정이 아니라. 그런 확신을 얻게하는 몇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은 오늘 이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성중에 거하시니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사실 그 발달한 병기가 전쟁을 주도하던 그 시기 이전에는 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전쟁 방어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나라일수록 성을 도저히 도달할수 없을 정도로 높이 쌓고 성벽을 매우 두텁게하고 성문을 매우 튼튼하게 해서 정상적으로 웬만한 군대가 공격할수 없는 성을 만들고 거기에서 적군들을 방비하는 것이 훌륭한 방비책이었습니다. 유다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튼튼하게 쌓고 그리고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했죠.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은 그 성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단지 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신앙이 가르쳐주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리고 성 같은 것들도 무너진 것은 성이 약하거나 성이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고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성 같은 경우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성이 무너졌죠. 이 글을 쓴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적군의 수 많은 성들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적군 앞에 성이 무너져 무릎을 꿇기도 하는 역사를 보면서 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성이 요동치 않고 서 있기 위해서는 그 성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한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또 다른 곳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파수꾼이 아무리 성을 지킬려고 애를쓰고 원수의 침입으로부터 자기를 지킬려고 애를 써도 여호와께서 그 성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 성은 안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깊이 느끼고 또 터득해오던 터였습니다. 앗수르는 여러분들이 역사 시간에 배우는 앗시리아입니다. 이 앗수르는 북방에 있는 민족인데 이스라엘을 자주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물론 북왕국 이스라엘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굉장히 커다란 민족이었고 그리고 그들이 끊임없이 팔레스타인을 거쳐서 애굽 쪽으로 남아하려고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애굽을 향해서 내려가는 전진 기지로서 이스라엘과 유대 그리고 뒤에는 불레셋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자주 공격을 받았습니다 주전 722년 오늘 이 문맥이 710년쯤 된걸로 보는데 주전 722년에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패망하고 수도 사마리아가 점령당합니다. 그처럼 이 민족은 굉장히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대국이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신흥 맹주국가가 주변에 있는 나라 하나를 쳐서 멸망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불순종과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많은 죄악들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고 거듭되는 경고 끝에도 돌이킬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 치시는 한 방법으로 앗수르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비참하게 멸망되고 그리고 이들이 견지했던 정책중에 하나는 국제화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주민들을 불러다가 사마리아에 살게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외주로 이주시키고 해서 막 혼혈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도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적인 피가 흐르지를 않고 혼혈아들의 피가 흘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하게 여긴 땅이 되었습니다. 어쨋든 그렇게 북왕국 이스라엘을 공격한 앗수르 군대는 파족지세로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여 여러 성들을 격하하고 결국은 수도라고 할수 있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게된 지경에 이르렇습니다. 말이 전쟁이지 이미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나서 의기가 매우 소침해 있었고 그리고 반대로 앗수르 군대들은 아주 강력한 사기를 지닌 군대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와서 여러 성을 격파당하면서 인제 남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수무책이 되었고 결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그랬던 것 처럼 수도를 공격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해서 거기에 있는 값진 보물들을 탈취해 가고자 하는 그러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이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제 남왕국 이스라엘의 패배는 불보듯 분명했고 그들은 더 이상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앗수르의 군대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나라에는 청사에 길이 빛나는 신앙의 사람이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히스기야 라고 하는 임금이었습닌다. 그가 비록 신앙의 인물이었고 신앙 인격이 출중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전쟁은 단지 믿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전선에서 수세에 몰렸고 이제는 백성과 자기를 이간질 시키는 앗수르 군대의 장군의 이야기를 모두 모욕을 받으며 들어야했습니다. 랍사게라고 하는 자가 내려와서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충동질하며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히스기야 왕을 아직도 의지하느냐 우리 앗수르 대왕이 한번 치면은 이 나라는 간곳이 없을 탠데 그러면 너희들이 누구의 백성이 되겠느냐 너희들이 이제는 히스기야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없고 더욱이 그가 중얼거리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관데 너희를 돕겠느냐 다 쓸데없는 이야기다 너희들은 이제 히스기야를 왕으로 여기지 말고 우리에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너희들이 잘먹고 살수 있도록 호의를 배풀어 주겠노라. 하면서 백성들을 충동질 했으니까 이미 그 나라는 더 이상 자신의 무력 앞에 항거할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막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스기야 임금이 이끄는 남왕국 유다의 백성들은 정말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하면은 이튿날 아침 일찍 여기에는 새벽이라고 나오는데 아침일찍 혹은 새벽에 나아가서 성 주위를 바라보니까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던 185000명의 군사들이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모두 죽어서 시체로 변해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기억하면서 시인이 감격적으로 쓴거죠. ”여호와 하나님이 성중에 계시니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리라.“ 그렇게 강력한 군대가 졸지에 죽어서 시체로 발견되고 그 성이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되는 이 놀라운 일, 이 놀라운 도움을 하나님께서 새벽에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은 밤중에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 그 모습은 그들이 아침 일찍 혹은 새벽에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눈뜨고 전쟁의 두려움과 위협 속에서 밤새워 잠도 자지 못하고 떨며 이른 아침 일찍이 나와서 성주위를 두려움과 함께 쳐다볼때에 죽어있는 앗수르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혹은 여러분들의 인생가운데도 이렇게 도저히 항거하고 몸부림 치기는 하지만 더 이상 내 힘으로 저항할수 없고 내 힘으로 그 상황을 뒤집을수 없는 그런 위기의 상황이 올때가 여러분에게 없습니까? 힘쓰고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내 힘으로는 안될것이 뻔한 것, 성실하게 노력을 하고 애를쓰고 주위의 많은 사람의 도움을 구해도 도저히 내힘, 내능력 그리고 내 힘으로는 극복할수 없는 커다란 어려움이 밀려닥치는 이런 때. 여러분들에게는 없을까요? 우리에게는 모두 유다 백성들이 두려움 속에서 온 밤을 떨며 기도할 힘조차 잃어버리는 그런 위기의 때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일수도 있고 우리 밖에서 시작된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시작된 것일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이 누군가 다른 사람 때문에 우리에게 섭리속에서 찾아온 커다란 위기와 시련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어두운때 만난적 없을까요. 저녁이 되어서 잠이들면 아침에 눈을 뜨기 싫은 그런 때는 없습니까?
참 짧은 인생을 사는데 인생에는 왜그렇게 시련이 많고 아픔이 많은지 몰라요. 저는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은 고생스럽게 인생을 살아온 것을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왔는데 여러분들의 눈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제가 내리는 하나의 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절망의 공포속에서 두려워해보지 않은 사람은 희망의 한 빗줄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못해요. 아무도 도울길이 없는 캄캄한 인생의 밤 바다에서 항로를 잃고 그리고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누려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완전한 절망 속에 휩싸이는 것이 그 절망을 견디는 것이 사실은 죽는 용기보다도 훨씬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라고 하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희망의 한 빗줄기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모른다이거죠. 시시때때로 우리는 유다백성들이 만나서 고통했던 강력한 앗수르 군대에 에워쌓여서 성문을 열수도 없고 나갈수도 없는 그러한 견디기 힘든 절망적인 상황, 한번 여러분들도 경험해보신적 있을것입니다. 묵상해보십시오.
밤이 지나고 나면 이튿날 아침에는 이제 앗수르 군데들이 성을 넘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여러 가지 병기를 동원해서 성을 무너뜨릴지도 모르고 그리고 성문을 불태워 버릴지도 몰라요. 발달한 병기와 강력한 군데를 몰고 들어와서 우리를 모두 칼로 능지처참하고 그리고 정들었던 예루살렘 성을 핏빛으로 물들일지 몰라요. 살아있는 사람들은 노예로 개처럼 끌려갈 것이고 남아있는 부녀자들은 치욕스러운 놀이게 감이 될지도 몰라요. 가족들은 이제 헤어질지도 모르고 이제 더 이상 오늘밤이 마지막 평안을 누리는 밤일지도 모를거에요. 그러한 철저한 절망과 공포, 어디를 돌아보아도 인간의 머리로는 이 위기 상황을 타계하고 해쳐나갈수 있는 그 어떠한 가능성도 보이지를 않아요. 그런 철저한 위기 상황에서 지내던 그 밤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밤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 가운데는 어떤 분들은 목사님 제가 지금 제 인생의 그러한 어두운 밤을 지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분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절망의 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하고 뛰어넘을수 없는 그 깊은 절망의 늪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면 우리는 아마 꿈꾸는 것 같겠죠. 유다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공포와 위기 속에서 밤을 하얗게 지새고 이른 아침 일어나서 사면을 살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앗수르 군대 18만5천명 이것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18만5천명의 사람들이 즐비하게 시체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의 환호성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들려오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모든 사람이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정확하게 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셨도다. 우리의 조상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때에 경험했던 꿈꾸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들을 우리 주님이 행하셨고 우리가 지금 그 악한 원수들이 우리를 위해 엎드러진 것을 보는도다. 간밤에 성을 무겁게 짓눌렀던 절망과 공포의 두려움은 변하여 주님를 찬양하는 함성소리로 메아리졌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이게 신앙의 묘미에요. (어떤 예수 믿는 사람이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봐서 팔자를 봐달라 그랬더니 아무리 두두려도 점꾀가 안나오니까. 야 너 혹시 예수쟁이 아니냐? 그러니까 깜짝 놀래가지고 야 이사람은 진짜 그런 것도 일아 맞추는구나 그래서 그렇다. 그랬더니 그 점쟁이가 참 명언이에요. 가 집에가. 좀 봐 주세요. 가 그러면서 하는말이 진리야 야 어차피 예수쟁이들은 팔자데로 안살아 가. 그런데 그 뒤에 괄호가 있었는데 생략된게 뭐에요. 팔자데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신앙대로 산단다. 이 사람은 신앙을 몰랐었나보죠. 그 얼마나 명언이에요. 무당집에서 진리가 난거에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팔자대로 살지않는다 이거에요. 신앙대로 산다이거에요. 야 정말 얼마나 멋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 군대에 저항할 힘은 없고 18만5천명의 대군이 웨워쌓을 때 팔자는 뭐에요. 그 다음날 점령되고 노예가 되어서 속국이 되는거에요. 그게 팔자에요. 그런데 그것 대로 안 살잖아요. 무엇 때문에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에 새벽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리로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이거에요. 도데체 하나님이 왜 도와주셨나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주셨나 우선 뒤에 것부터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주셨나? 어떻게 도와주셨던가요.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를 치시는데 모두 감기에 걸리게 만드셨다면 아마 쌍화탕 먹고 다시 일어나서 전쟁을 할려고 덤벼들었겠죠. 하나님이 그들을 간밤에 절도시키셨다면 차가운 이슬을 맞으면서 정신이 들었을거에요. 반쯤만 진멸시키셨더라면 반이 남아있었겠죠. 어떻게요. 깃발을 든 기수부터 시작을해서 전쟁을 진두 지휘하는 장군부터 시작을해서 마지막에 물통들도 쫓아 다니는 보급병까지 하나님께서 모두 치셔서 진멸하신거에요. 하나님의 도움이 이렇게 나타난거에요. 그런데 어떤 도움 완벽한 도움, 쉽게 얘기하면은 완전히 끝장내시는 도움. (퍽패트릭던) 완벽하게 되었구나 그렇게 하나님께서 싹쓸어버리신거에요. 그 시체들을 통해서 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통해서 혹은 그 죽음의 광경을 본 그 누구에 의해서 다시 똑같은 종류의 침공이 되풀이 될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완전히 문제의 씨를 말리시면서 그 전쟁을 종식시켜 버리신거에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인간의 몸부림도 그 문제를 상당히 해결을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러나 하나님 아니면은 해결이 안되죠.
그 지금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 산불이에요. 산불인데 이렇게 문명이 발달해도 아무 대책이 없어요. 그러니까 인도네시아 같은데는 6개월을 탓다고 그러죠. 미국에서도 두달을 석달을 타고 아마존 같은데서 불이나서 남한 전역의 무슨 세배가 넘는 밀림들을 태우면서 아무대책이 없어요. 이렇게 발달해도 뭐 미국이 돈이 없겠어요. 기술이 없겠어요. 소용이 없다이거에요. 자연의 힘 앞에서 불이야 자연적으로 늘 나는 것인데 그러니까 도저히 대책이 없다이거에요. 그러니까 언젠가 한번 다큐멘타리에서 산불나는 광경을 보여주는데 그 핼기가 물을퍼가지고 공중으로 올라는데 바다 같은데서 물을퍼서 그 한번 물을푸면 3톤 4톤된데요. 3톤 4톤 5톤 그렇게 되는데 그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거든요. 그거야 코끼리 비스캣이지 그 수많은 넓이의 산불이 막 번져가는데 그까짓거 물뿌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요. 수십대의 핼기가 날아가서 그렇게 물을 뿌려도 해결이 안되요. 그냥 계속 불길이 번져가요. 더군다나 바람이 불면은 막 타들어가는거에요. 번져가면서 해결이 있어요. 뭐면 해결이 될까요?. 그렇지 하늘을 열고 쏟아져 내리는 소낙비, 그 비가 핸드폰 소리에 맞춰서 막 쏟아지면 그러니까 몇주 동안을 속수무책으로 수십대의 핼기가 떠서 막 날리를 쳐도 해결이 안되던 것이 서너시간 비가 그냥 폭포수 같이 쏟아져내리니까 그걸로 딱 끝나는거에요. 얼마나 놀라워요. 문제에 무딪혔을 때 인간의 몸부림치는 노력도 도움이되죠. 그러나 하나님의 해결은 완전해요. 완전하다고 우리는 좀 이러한 역사를 보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의 삶, 신앙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대적들이 어느날 소리없이 완벽하게 잠재워지는 아니 잠재워지는 것으로 충분하지않고 완벽하게 진멸된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어떤 보복도 할수 없을정도로 완벽하게 진멸된 그러한 위대한 광경을 보고싶어요. 그런 위대한 광경을 보고싶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거에요.
그런데 어떤 때 그런일을 하셨느냐 마지막에 그것은 히스기야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없어요. 하나님이 그 새벽에 거져 도우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히스기야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우신거에요. 성경을 보면서 19장을 다시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14절입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서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데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 그렇게 이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아마 히스기야 왕은 왕으로 즉위한 이후로 가장 중요한 위기를 만났을 것이며 그는 이제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왕국의 존망이 달린 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왕들처럼 다른 나라의 왕을 끌어들여서 도움을 받으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기네 나라를 다스리시는 궁극적인 왕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야말로 마음을 다 바쳐서 그 마음이 녹듯이 하나님 앞에 매달렸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열방중에 빛내시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저는 종종 인생의 위기를 만날때마다 이 히스기야의 기도를 상상합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앗수르의 군대들을 물리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그는 한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틀림없이 울며 매달리며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시도록 간구하였을 때 그는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왕의 위엄이나 한 왕국을 다스리는 제왕의 존귀함은 찾아볼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흐느끼는 한 자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내가 쌓아온 인생의 경력, 신앙의 경험,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 나를 도울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대, 이런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야 그것을 어떻게 신앙이라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보십시오. 히스기야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신망과 사랑을 비교적 많이 받던 훌륭한 성군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성전에서 치욕스러운 외교문서를 펼쳐놓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매달리는 이 히스기야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제왕의 위엄을 읽을수 있습니까? 한 나라의 임금의 어떤 권세나 거들먹거림을 읽을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 앞에 흐느끼며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한 철없는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도울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며 그 하나님 말고는 자신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실수 있는분이 없고 이 절망적인 전쟁의 상황에서 자신들을 건져주실 분이 아무도 없다라고 하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면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의 시선은 이제껏 자기를 존경하고 사랑하던 사랑하는 많은 만조백관들이나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아니었고 자신들을 깊이 존경하는 신하들이나 혹은 많은 그 땅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왕국이 강성했을 때에 조공을 가지고 들어오던 주위의 수많은 작은 나라의 임금들의 시선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를 주목해주시는 것이었어요. 살아계신 하나님, 기도 속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자기가 붙잡는 그 일, 그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어찌할수 없는 위기상황이 담긴 절망적인 외교문서를 놓고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절망하는 것 만큼 그 상황을 뛰어넘는 권능으로 자신을 도우실수 있는 하나님 한분을 깊이 신뢰하면서 그 하나님께 생명을 걸고 매달렸어요. 그 사람이 히스기야였습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살면서 누구누구는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을 배풀어 주셨데. 어느 교회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어떤어떤 큰일을 했데.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은 흔히 기적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서 무용담처럼 듣고 말하지만은 그러나 소쩍새 우는 사연없이 국화꽃이 필리가 없습니다. 그 배경에는 웃어넘길수 없고 입을 벌리면서 기적이로구나. 와! 그거 놀랍다 와 그런 기적이 일어났구나. 하나님 앞에 매달린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필연이었어요. 필연이었어요. 기적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의 어두운 밤을 믿음의 기도로 지낸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기적의 새벽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생각합시다. 절망적인 인생의 밤을 어떻게 지내시렵니까? 기도하지 않고 흐느끼면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내고 나면 아침도 오지 아니하거니와 설령 흐린 아침이 온다고 할지라도 절망의 밤을 그렇게 지내고 나면 가슴에는 육체의 아침보다도 더 처참한 절망의 어두움이 드리웁니다. 고난의 때를 적절하게 지내지 못하면 가슴에는 수많은 상처와 패역이 무성하게 자라게 마련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절망의 어두운 밤을에 기적과 같은 새벽을 맛보고 싶지 않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것을 원한다면 그 인생의 어두움의 절망의 밤을 히스기야와 같은 기도의 불빛으로 밝히는 여러분들이 되셔야합니다. 언젠가는 그 절망의 아침이 변하여 희망의 찬란한 아침, 그 여명을 볼수 있을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새벽을 깨우는 정한 마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108:1-2)
신앙생활이 백미터 달리기만 같으면은 한번 있는 힘을 다 발휘해서 단거리 경주를 하듯이 스퍼트를 내고 정말 장렬하게 불꽃 같이 살다가 죽겠는데 미안하지만은 이 신앙은 장거리 마라톤과 같아요. 어제 집에 들어가서 아주 잠깐동안 올림픽 경주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불과 한5분정도 보는데 마침 뭘하고 있느냐면은 릴레이 결승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미국이 아주 확 휩쓸더군요. 그런데 그 릴레이를 할 때에 중간에 아주 탁월하게 잘뛰는 선수 하나를 시든카드로 딱 거기에다가 이제 세우는거죠. 그래서 그 사람한테 인제 만약게 지고 있으면 만회를 이기고 있으면은 쫓아올수 없을 정도로 격차를 벌이도록 인제 그렇게 아마 작전을 하는 모양이에요. 그런거 같아요. 그런데 그 중에 미국 선수 하나가 있는데 백미터 달리기에서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가진 선수인데 그 선수가 뛰어야하는 거리는 400미터에요. 그러니까 인제 해설하는 사람이 금방 염려하는 것이 뭔냐하면은 저 선수는 100미터에 있어서는 탁월한데 400미터까지 그 스퍼트를 유지해 줄 수 있을지 걱정이됩니다. 그런데 하여튼 예상을 깨고 그 선수가 탁월하게 잘뛰어서 이위 하고의 거리를 현격하게 벌이면서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인제 금매달을 땋는데 그처럼 백미터를 잘 뛰는 선수를 백미터를 잘 뛴다고해서 그 선수를 400미터에 내 보냈을 때에 벌써 해설하는 사람이 불안해지는거에요. 그 백미터를 탁월하게 뛰는 선수가 400미터까지 견디어 주겠는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은혜를 받고 불꽃처럼 확 산화하듯이 한번쯤 살아보는 것은 가능한일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의 인생을 살펴보면은 그것은 백미터 경주와 같은 것이 아니라 아주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 하듯이 아무렇게나 막 살려고 하다가 보면 인생이 참 짧은 것 같아요. 그렇지만은 잘 살아볼려고 공을 들이면 끝까지 잘살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길어요. 한2-3개월이면은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가 죽겠는데 너무 길어요. 그러다보니까 결국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간절히 사모함이 없는것이 뭐냐하면은 견고함이에요. 흔들리지 않는 것.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담대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들이되어라. 성경에 있어서 그 순서도 참 우리에게 멧세지가되요. 주님의 일에 힘쓰는 자가되라. 헌신을 말하기전에 먼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사도가 자기의 교인들에게 권면한거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되라. 사실 그것을 보면은 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은 신앙생활의 어떤 높은 영적인 수준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표지라고 볼수 있지 않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이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데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되요. 사시 말하면 그냥 흔들리지 않는 모든 것이 다 견고함은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모든 것이 견고함은 아니다. 지금은 말이에요. 나무 구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전봇대를 전부다 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서 세우잖아요. 옛날에는 전봇대를 모두 나무로 세웠어요. 그나무도 타마고라 그러죠. 콜타르를 새카맣게 먹인 것을 그것을 새웁니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면은 애들이 전신주 세워논 곳에 새카맣게 달려들어서 구경을하죠. 그 때에 구경할것이 그런 것 밖에 더 있겠어요. 그것을 어떻게 새우나 보면은 말이죠. 제일먼저 구덩이를 아주 깊이파요. 깊이파고 그리고 나무를 거기다가 박고 그리고 주변에다가 시멘을 해서 집어넣어요. 그리고 그 위에 흙을 덮죠. 그리고 그 나무가 높이 서고 나무 위에다가 인제 변압기를 매달기도하고 애자를 걸어서 선을 연결하기도해요. 그 전봇대는 정말 애들의 친구죠. 심심하면 거기에 올라가고 올라가지 말라고 거기에 써붙여놨거든요. 그거 밟고 올라가고 그리고 술래잡기 할 때도 항상 거기에다 손을대고 눈을감고 야도할때도 와서 거기다 찍고 그러면서 아이들의 친구인데 그렇게 애들이 발로차고 거기서 등을대고 말타기를 하고 애들이 올라가고 심통이나면 막대기로 와서 두둘기고 이래도 그 전봇대 정말 견고해요. 흔들리지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 나무가 견고하다 라고 말할 때 죽은 나무를 구멍파고 콘크리트 집어넣어서 굳혀가지고 막대기 꼽아 놓아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견고하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거든요.
우리가 신앙적으로 볼로때에 견고하다라고 할려면은 그렇게 막대기가 꼿혀있는 그것은 견고한 것이 아니고 그만한 나무가 거기에 서서 땅속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아니 뭐 시절을 쫓아서 잎이나고 열매가 맺고 그래야지 그것을 견고하다. 라고 말하지 그 전봇대를 보고 우리는 견고한 나무다. 그렇게 말하지 않거든요. 그렇잖아요. 인제 그러면 눈치 대개챘겠죠. 그죠. 그래서 타고난 성실성과 인내와 끈기. 이 나이에 내가 교회를 옮겨서 뭘하랴 아니면은 여태까지 생활 기록부에 기독교라고 썼는데 이제야 그냥 한길가지 뭘 그것을 또 제삼 제사 생각하면 뭔하랴. 그런 동기에서 소잡아 먹은 귀신 주저앉듯이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그것을 가르켜서 우리는 견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이거죠. 그것은 견고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달라붙어서 나태해서 그런 것 아니에요. 털석 주저앉아서 그냥 아무 다른 생각 하지않고 가만히 생명도 없이 거기 있는사람.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견고하다고 말하지않는거죠. 견고하다라고 할 때에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와 삶은 끊임없이 변천하는거에요. 그게 견고한 거라고 끊임없이 변천하는 것이 견고한거에요. 그죠. 겨울에 산에 올라가서 큰 나무를 보면은 정말 썰렁하죠. 그죠. 아름드리 나무인데 후 바람따라 휘파람만 불고있죠. 그런데 봄이되면은 작은 이파리들이 쫙 돋아나기 시작해요. 여름이면은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막 울창하게 나뭇잎이 뒤덮인거에요. 그래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줘요. 가을이면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대신 열매가 막 주렁주렁 맺히기 시작하는거에요. 그래서 가을이 깊어지고 나면은 잎은 다 떨어졌는데 열매들이 빨간 감이나 그런 것들이 잔뜩 달려있어요. 우리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거죠.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나뭇잎을 다 떨어뜨리는가 하면 새잎을 내고 새잎을 내는가 하면 꽃이피어나게 만들고 꽃이 피어나는가 하면 열매를 맺고 열매를 맺는가 하면은 잎이 떨어지고 잎이 떨어지는가 하면은 다시 또 새봄이 와서 새순이 튼다고요. 그러면서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는 그 나무, 비가와도 눈이와도 얼어죽지 않고 비가와도 그 빗물을 머금고 가물어도 뿌리에 저장한 물을 마시면서 계속해서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쉬지않고 열매를 맺는 그러한 나무, 그런 나무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견고하다. 이렇게 말하는거죠. 고정 출석자 말고 고정해서 한 교회에 누러 붙어있는 누룽지 같은 사람 말고 그런 사람들은 얼굴도 꼭 누룽지같아 은혜를 못받아서 누룽지 같아요. 그것도 누룽지도 그냥 이렇게 맛있게 누른 가마솥 누룽지가 아니라. 다탄 누룽지 같이 말이죠. 그렇게 누러붙어 있는 사람말고 정말 끊임없는 생명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 이것은 견고한 거거든요.
그래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이거에요. 무엇이 우리를 견고하게 하는가 이것은 참 여러시간의 설교를 요하는 문제일거에요. 그죠. 우선 뭐 하나님의 체계적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가는 것. 이게 빼놓을수 없는 견고함의 조건이에요. 그죠 사상이 적립되어서 기독교적인 사상이 우리 속에 가득담기는 것 이것은 절대적이죠. 그리고 또 매일매일 게으르지 않는 성실한 경건생활, 이것 없이는 우리들이 결코 우리들이 견고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그런 열매를 얻을수가 없죠. 그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그런 것도 있고 또 뭐가 있을까요. 그렇죠. 주위에 신앙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에 의한 돌돔이 없이는 견고할 수가 없죠. 그죠. 견고할 수가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견고한 나무도 처음서부터 견고한 것이 아니라 맨처음에 옮겨 심을 때는 가상자리에다 나무를 받혀줘가지고 몇 달씩 매달아놔요. 그죠. 그래서 흔들리지 않게해주고 그러다보니까 이제 뿌리를 내리고 든든해지는거죠. 그러니까 그런 주위의 도움없이는 안되요. 주위의 도움없이는 안되고 하여튼 여러 가지 요인이 많죠. 나무 하나가 모두 다른 나무들은 말라죽고 쓰러져 죽었는데 한 나무는 아름드리 나무로 수 천년동안 죽지않고 거대한 나무의 숲을 이루는 말하자면은 종주목이됐다. 라고 할 때에 그 때에 그 요인은 뭐 한두가지가 아니잖아요. 그래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오늘 그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는 없고 오늘 궁금한 것은 뭐냐하면은 그러면 그 시작이 뭐냐이거죠. 그 시작이뭐냐 그게 뭐냐하면은 마음을 정하는거에요. 마음을 정하는 것. 그것이 모든 견고함의 시작이에요. 물론 정한 마음이 다시 흔들릴수도 있어요. 다시 흔들릴수도 있고 또 한번 정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그래서 정말 견고함에 이르게 되는 계기가 될수도 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흔들릴 것을 미리 예상하고 마음을 정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니죠. 견고함을 누리고 신앙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항상 마음을 정한 과거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을 정한 것이 한번에 마음을 정해서 견고함에 이른 사람도있지만 마음을 정하고 씨름하다가 넘어졌지만 다시 그렇게 마음을 정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하고 마음을 먹고 마음을 먹고 하면서 그러면서 견고함에 이르게된 사람들을 우리들이 얼마든지 만나게되는것이에요. 그러니까 결단이라고 하는것도 결국 다른말로 표현하면은 마음을 정하는것이에요 그죠. 결단과 마음을 정하는 것의 차이는 결단은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 따르는 희생을 기꺼이 감내하기를 각오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정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마음을 정하는 것은 문자그대로 흔들리지 않기로 다짐하고 어떤 한가지 목표에 자신의 정신을 고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이거죠. 그리고 그 정신에 의해서 자신의 모든 생각과 정서 그리고 의지 이런 모든 것들이 지배될수 있도록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허락하는 것 그런 것들이 결국은 말하자면은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이거죠.
그러기 때문에 뜻을 정한 신앙생활과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벌써 일을 하더라도 뜻을 정한 사람의 마음과 마음의 정함이 없는 사람의 일하는 모습은 엄청나게 달라요. 뭐 비할데 없이 다르죠. 학교에 선생으로 있을 때도 학생들이 레포트를 이렇게 내면은 이게 학점을 받을려고 학점을 받는다는 의미는 좋은 점수를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낙제를 안할려고 낸 레포트인지 아니면은 장학금을 받을려고 낸 레포트인지 아니면은 스스로를 레포트를 쓰다가 자기가 탐구하는 내용에 심취해서 열열한 탐구의 정신으로 쓴 레포트인지 받아보면은 금방 안단말이죠. 그 차이는 천차만별이에요. 엄청난 차이가 있는것이죠. 그 일을 하면서 스스로 거기에서 성취욕을 느끼고 지적인 탐구의 과정에 재미를 느끼면서 참된 것을 알아가는 성취감으로 쓴 그 레포트는 말이죠. 교수라도 읽어볼만한 가치가있어요. 그래 이제 그런 것이 없이 낙제나 면하기 위해서 쓴 레포트는 항상 그 사람이 얼마나 불성실한지를 보여줄 뿐이에요. 이 선생이라고 하는 이것은 참 나빠요. 지금도 길거리에서 인제 제자들을 만나면은 그 사람의 이름하고 얼굴은 기억이 안나는데 이름하고 몇점쯤 맞았는지는 꼭 기억이나요. 다 기억이나요. 뭐 자기는 지금 뭐 근엄하게 목사라 그러고 나타났지만 이름 누구 하면은 아 출석번호가 되게 몇번쯤이었는데 낙제 시킬까 말까 말까 그러다가 간신히 한해 이렇게 했다 이렇게 입력이되어있어요.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삶은 항상이래요. 그런데 그 학생들에게는 그래도 낙제를 면해야되겠다는 목표가 있는데 여러분에게 무슨 목표가 있습니까. 무슨 목표가 교회에서 낙제를 시킬 그럴 권세를 가진 그런 교회는 없거든요. 물론 새가족 반에서 낙제를 받을수는 있겠지만 새가족반을 마치고 헌가족이 되면은 이제 누구도 등을 밀어서 교회를 나가라거나 뭐 그럴 사람 없어요.
목표가 뭡니까? 마음을 정하지 않고 신앙생활하는데 그 신앙생활의 목표가 뭐에요. 누구 보라는 신앙생활이죠. 어느 기준을 통과하기 위한 신앙생활이냐이거죠. 그 카트라인이 없는 것 같죠.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은 양심달래기 선상이에요.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선상에서 합의를 보는거에요. 이런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정말 신앙생활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신앙생활이 아무리 오랫동안 이어져도 그게 정말 견고할수 있겠는가 정말 견고할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거죠. 철을따라서 살아있는 나무들이 옷을 갈아 입고 자기의 살아있음을 마음껏 뽐내도 그 나무는 자신의 살아있음을 어떻게 드러내 보여주지를 못해요. 죽었다고는 말할수 없는데 살았다고 말하기에는 죽은 것 같은 부분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 나무에는 결실도 별로없어요. 땅을 버릴뿐이죠. 그런 신앙생활은 결국은 견고함이 없는 신앙생활인데 그 견고함에 이르는 가장 첫 번째 비결은 뭐냐하면은 마음을 정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마음에 불붙는 목표가 없는 사람은 인생의 초점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마음에 불붙는 사람은 인생에 초점없는 사람이에요. (정주영씨 자서전에 읽어보니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구멍가게를 할 때에 매일 아침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대요. 오늘은 무슨일이 일어날까? 무슨일이 일어나겠어요. 사람 많이 와서 물건 많이 팔든지 이상한 고객을 만나서 대판 싸우던지 둘중에 하나지 그런데도 가게 문을 열면서 가슴이 설랬다이거죠. 그건은 뭐에요. 그목표가 뭐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이상적인 모든 인간들이 바라볼수 있는 고매한 목표는 아닐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가슴을 설레게하는 목표가 매일 아침마다 있었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나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가슴뛰게하는 어떤 목표가있어요. 아 오늘은 주일인데 정말 많은 성도들이 만나서 주님을 만나야할텐데 그런 목표가 있느냐이거죠. 무슨 목표가 있어요. 신앙적인 어떤 목표가 있는지 가슴설레이는 목표가 그 목표를 따라서 우리의 삶이 가는것이에요. 그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결코 견고한 삶이 아니에요. 세상에서 손짓하면 그 쪽으로 가고 또 신앙에서 손짓하면 이쪽으로 가고 저기에서 오라하면 가고 인생을 다 산 다음에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우리의 발걸음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도데체 걸어온 것인지 해맨것인지 소갈 때 말갈 때 다 다니면서 뒤처거리면서 갈지자로 오다가 어느날 발걸음이 뚝 끊어진거죠. 죽었으니까 더 이상 걸을수가 없죠.
무엇이 있느냐 이거죠.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불타는 어떤 목표가 있느냐이거죠. 이것이 있느냐이거죠. 무엇을 위한 견고함이냐 어디에다 마음을 정해야하겠느냐 하는거죠. 잡다하게 이생각 저생각 이사상 저사상 돌아다니는 것을 젊은 사람들은 무슨 삶의 다양성의 체험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동안에 낭비되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요. 된장인지 뭔지 그것을 꼭 찍어서 먹어봐야 알아요. 그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깊이 이해하고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걸어가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경험해보지 못한 길도 우리에게 경험한 것처럼 알게 하시려고 성경도 주셨고 책도 주시고 또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셔서 행할길이 무엇인지를 미리보고 걸어가게 하신 것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지 마음에 풍만한 정함이 있어야되요. 물론 여러 가지 세계를 경험하고 볼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게 다 정함이 있어야되요. 저는 글을 쓰면서 그런 것을 느끼거든요. 이 글을 인제 쓰는 사람들마다 자기 생각이 다르겠지만 책을 이제 부지런히 저도사요. 보는 것 보다는 좀 더 많이사요. 사는데 뭐 워낙 책이 많이 쏟아져 나와가지고 그거 사는것도 감당하기가 쉽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 책을 쭉 이렇게 읽어보면 국내 저자도 마찬가지고 외국저자도 마찬가지인데 그 변천하는 많은 사상들을 섭렵하면서도 아주 선명하게 하늘을 가르는 것 같은 아주 선명한 빗줄기 같이 성경적인 자기 중심 사상을 잃지않고 글을 써내려 가는 저자가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 잡탕이야 그 사람의 글을 쭉 읽어보면 뭘 읽으면서 요세 살아가고 있는지 훤히 알아요. 훤히 알수있어요. 수없이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데 뭐냐하면은 다 각자각자 흩어서 돌아가는 것이지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어떤 불변하는 성경의 진리가 자신의 글속에 중심이 되지 않는다이거죠. 저는 이런 문제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하냐면은 이 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글과 신앙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땅과 같아요. 땅을 보면은 땅에 뭐 아주 기름진 부협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쓰레기도 들어가고 개가먹다 토한 것도 들어가고 뭐 똥도 들어가고 별거다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인간이 그냥 먹으면 죽는것들이에요. 아주 안 좋은 것들이에요. 중금속을 빼놓고는 그런 것들이 많이 들어갔는데 그런데 신기하게 세월이 지나면 이 땅이 말이지 이것을 다 썩혀서 분해해서 용해를해요. 그리고 그 양분을 나무가 쭉빨아 먹어요. 그래서 그 사과 나무를 심으면 사과를 자라게하고 귤 나무를 심으면 귤을 영글게 만들어요. 배를 심으면은 아주 맛있는 배가 영글도록 만든다 이거죠. 이런 것이 필요하다이거죠.
많은 것들을 경험하지만은 그것들이 다 자신 안에서 소화가 되어서 그 소화된 것을 가지고 성경의 가르침을 꽃피우는 인격과 삶의 열매가 맺어져야되요. 여기가서 이 얘기들으면은 혹 해가지가 보따리 싸가지고 거기 쫓아가서 뭐하고 저기서 또 야 그거 아니래 그러면 야 어디래 그래가지고 보따리 싸가지고 가고말이지 이렇게 하면서 일생을 살다가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너무 비참한거에요. 마음에 정함, 마음에 확정함이 없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일생을 살아도 단 한번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지를 못해요. 그리고 마지막에 그 인생에대한 판단과 책임은 자신이 담당하는거죠. 이렇게 마음을 확정하는 것이 필요해요. 설교를 들으면서도 마찬가지죠.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결단은 우리에게 마음을 확정하기를 요구한다이거죠. 그런 반응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진리를 엔조이 하는것에 지나지 않는것이에요.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진리를 섭취한 방식은 결코 엔조이가 아니었어요. 대리 만족이 아니라고요.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 불러다놓고 간증을 들으면서 마치 람보 영화보듯이 말이죠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이거죠. 문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살고 스스로 실천하고 스스로 결단하고 스스로 자신의 몫을 짊어져야한다. 이거에요. 그것이 중요한거에요. 마음에 확정함이 있어야된다 이거죠. 그렇지 않으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그것은 진리에 대한 엔조이에 지나지 않는것이에요.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할 때 계시록에도 보면 나오잖아요. 5장인가요. 보면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요한이 사도 요한이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열어보게 해달라고 막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요한의 경험 가운데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천사가 두루마리를 주면서 먹어라. 그러죠. 그래서 그것을 먹으니까 입에서는 너무 달아요. 이게 엔조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정도 우리들이 신앙적인 눈이 열리게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즐거움이에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속에 들어가서 우리 속에 있는 강팍함 죄악 이런 것들과 더불어서 싸우려고 할 때는 우리는 굉장히 힘겨운 싸움을 싸우는거에요. 그래서 배 속에서는 쑥같이 쓴 그런 고통을 맛보게 되는거죠. 그런 와중에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서 우리 속에 깊이 우리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런 아픔과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깊이 경험하게되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것 같은 그러한 삶으로서는 충분하지가 않다. 이거에요. 그러면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다음에 말씀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바대로 우리의 마음을 확정하는 것이 필요하다이거죠.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보니까 마음이 확정되고 나니까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그러니까 마음을 확정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감격이 터져나오는거에요. 그러니까는 어때요. 이 확정, 마음의 정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있겠지요. 그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견고하게 살기를 마음에 확정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찬송할 감격이 가슴 속에서 용솟음 치는거에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뜬물에다가 물탄 것처럼 말이죠. 흐리멍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감격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영성도 깨끗할 수가 없어요. 선명하지를 않아요. 그것은 죄문제 이전에 그것은 성격의 문제에요.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요. 예면 예. 아니면 아닙니다. 아멘이면 아멘. 생각해보겠습니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태도가 아주 클리어하고 깨끗해야죠. 유리를 보듯이 좀 투명해야지 태도가 그게뭐 흐리멍텅한 그런속에 무슨 영성이 깃들겠느냐 이거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딱 확정하고나니까 그 다음에 자신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할 감격이 확 솟아 나오는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사야서에서도 보면 나오잖아요. 심지가 견고한 사람들을 평강의 평강으로 인도하신다는거에요. 그 말을 뒤집으면 무슨뜻이냐하면은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많이 경험할수 있게 해주신다는거에요.
아니 이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뭐 그렇게 눈을 껌벅이면서 심히 어렵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아주 내가 쉽게 예를 들어볼께요. 잘 들어보세요. (내가 새벽에 기도를 잘 못했어요. 구조적으로 내가 새벽기도하는 것은 쉽지가 않아요. 그런데 이제 사경회가 다가왔다든지 아니면은 그런게 다가오지 않아도 내가 개인적으로 볼 때 지금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될 어떤 결심들이 생기게되었어요. 이게 뭐 꼭 새벽기도가 아니어도 괜찮고 저녁때도 마찬가지고 뭐 무엇이든지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잘 보세요. 말씀을 듣고나서 이제는 안되겠다. 그리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내일서부터 새벽기도 하겠습니다 아니면은 내일서부터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마음에 깊이 승복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마음을 확정하고 하나님께 토해놓으면은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아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냐구요.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자신에게 느껴지잖아요. 그죠.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그런 기본적인 경험이에요.) 하나님은 다 마음이 확정된대로 다 실천하는 삶을 물론 기뻐하시지만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인생을 다 주를 위해서 힘에 지나도록 살고 하나님 이제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습니다 주님 이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할 때로 주님이 기뻐하시지요. 그런데 그것도 기뻐하시지만 아직 살지않은 나의 인생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바칠 때. 아직 다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이제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을 바꾸어서 이제는 내가 마음을 이렇게 정하고 이렇게 살겠습니다.
오늘 이번에 열린교회 식구들은 말이죠. 다 문필가에요. 작가로서의 위치가 매우 흔들려요. 이사람들이 책낼까봐 나는 겁나요. 김호경 장로님이 딱 이렇게 글을 쓰셨잖아요. 그게뭐냐하면은 열린 교회에 와서 큰 기쁨중에 하나는 매일매일 성경을 읽는 기쁨입니다. 왜 어느날 예배시간에 그때 아마 말씀의 미각을 회복한 때가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오후시간에 성경 안 읽는것에 대해서 제가 아주 심하게 설교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죠. 여러번 설교했는데 장로님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 하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매일매일 성경을 읽겠습니다. 목사님 하면될것 않겠습니까 마음으로 그렇게 결심을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니까 하나님께서 성경 읽는 가운데 은혜를 주시는거에요. 그런 것들이 마음을 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흔들리지 않고 성경을 읽어가는거에요. 그러니까 뭐 이렇게 무슨 순교의 결단이 있는 어떤 거창한것만이 마음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하는 것들이 쌓여서 그런 삶이 우리에게 허락이 되는거에요. 기도생활에도 정함이 없고 그저 은근과 끈기로 버티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 밖에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왜 순교할 목숨을 내놓으라고 그러겠어요. 그런 사람 목숨을 하나님이 받아서 어디에다 쓰겠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사는거에요. 그렇게 정하고 나니까 감격이 솟아나고 찬양할 이유가 생겨나는거에요. 아 하나님이 내 삶을 버러두지 않고 간섭하고 계시는구나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이게 밀려오는 거에요. 그러니까는 감격과 찬양이 확 솟아오는거에요.
그러니까 이 시인이 이것을 고백하는거에요. 그러면서 하는말이 뭐냐하면은 “비파야 깰찌어다.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이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게 무슨 소리에요. 새벽이 자기를 깨우지 자기가 어떻게 새벽을 깨워요. 새벽이 언제 잠잤나 새벽을 깨운다 이거에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게 뭐냐하면은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이 고백이에요.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 내가 마음에 확정할 때 그분을 경험하고 그분에 대한 감격이 내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기쁨, 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솟아나오는데 나 내 안에있는 모든 것들도 다 그 하나님을 찬양해야하고 이것 가지고는 만족이 안되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과 그리고 내 눈앞에 비치는 모든 사물들. 이 모든 것들이 찬란한 빛 앞에 들어나서 자기들을 창조하신 이 좋으신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하면서 모든 피조물들을 깨우고 있는 장면이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마음을 하나님 앞에 확정하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거에요. 마음에 정함이 없이 흔들리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이에요. 그의 마음에 오가는 생각은 공상이고 망상일 뿐이지 비젼일수 없어요.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이 무슨놈의 비젼이 있느냔말이죠 했으면 좋을탠데하는 요행수에대한 소망으로 끝나는거지 그게 무슨 비젼이에요. 그렇잖아요. 시인이 그것을 보여주는거에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여러모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정하여야할 그런 시기를 닥치고있어요.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해야해요. 뭔가 하나님 앞에 해야되지 않겠어요. 정말 자신의 삶을 꼼꼼히 살피면서 어떤 부분들이 자신의 삶의 결단을 요하는지를 보고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되요. 그리고 그 뜻을 견고하게 붙들고 그 뜻에 매여서 살아갈 때에 그 때에 그가 견고한 사람이 될수 있었던거에요. 우리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갖거든요. 이방의 땅에 포로로 끌려가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살면서 사실은 노예처럼 학대를 받으면서 사는 상황보다 훨씬더 흔들릴 위험이 많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을거에요. 특히 다니엘이 그렇지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견고하게 서서 마지막에 장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한 나라의 제상이 되었지만 그는 관직과 부귀 영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비쳐오는 해방의 여명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생각할수 있었던 놀라운 비젼은 그 출발이 1장8절이에요. 그게 뭐냐하면은 뜻을 정한거에요.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결심하고” 그랬죠. 그 1장에 어린아이의 뜻을 정하는 그 마음이 그 마음이 수십년 세월을 두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견고함으로 살아가게하는 단초가 되었던거에요. 여러분들에게 이런 삶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새벽에 만나는 하나님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시119:147)
시편에는 다윗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 있습니다. 특별히 다윗의 시를 잘 살펴보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수 있었던 원동력 들을 어떻게 공급 받았는지에 대한 개인의 고백들을 쉽게 접할수 있습니다. 이 시인은 특별히 이 119편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리우는 서사시와 같은 이 장편의 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붙드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들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편 119편은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전 생애의 농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으로서 입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를 말씀에 전심으로 착념하며 사는 삶을 통해서 입증 받았고 그 말씀을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도구로 삼으면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의 사람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다윗의 시편들을 보면은 아침에 대한 이야기 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아침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시편 5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유명한 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 그러면서 “부르짖는 나의 소원 들으소서 내가 아침에 주께 기도하리이다”라고 하는 결심을 보여즈는거죠. 그리고 오늘 이 119편에서도 이른 새벽에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 시인의 익숙한 두가지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이 역사가 많이 흘러가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두 개의 날개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과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에요. 이 두가지가 특별히 개인의 경건한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깊은 깨달음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묶이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계속 날아오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가지 방편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거에요. (제가 어느 책에서 글을 읽으니까 화란에서 있었던 일을 누가 실지로 적었대요. 어느 그리스도인들이 철새가 날아왔는데 한 마리가 다리가 부러져서 그만 친구들을 좆아서 떠나지를 못했어요. 그것을 본 어느 그리스도인이 너무 불쌍해서 잘 치료해주고 그리고 일년동안 보살펴 주었어요. 그래서 먹이도 주고 이렇게 하면서 가족처럼 잘 돌보았어요. 그래서 이 주인의 생각에는 일년 후에 친구들이 왔으니까 그 때까지 보호하고 있다가 인제 그 철새들이 돌아간 때가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문을 열어주면서 이제 일년동안 얼마나 기다리느라고 애를 많이 섰느냐 이제 우리는 너를 놓아주고 싶지 않지만 여기서 살면 무슨 재미가 있겠니 너희 친구들 좇아서 가라. 그리고 날려 보냈는데 날았을까요? 못 날았을까요? 그동안 너무 살이쪄서 날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옛날에는 날지 않으면 도저히 먹을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하여튼 날아다니면서 어떡하든지 벌래를 잡든지 주리든지 먹으면서 살았는데 주인이 주는 기름진 음식을 계속 먹으니까 다리통은 점점 굵어지고 몸에는 살이 붙어서 날개는 약화되고해서 일년 지나고 나니까 공중으로 날려보내도 도저히 날아갈수가 없는 그런 새가되고 마는거죠. 철이 되었는데 친구들을 따라서 함께 날아갈수 없는 새가 되었다라는 것은 그 새에 있어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게 뭐냐하면은 동물원에 있는 그 짐승들이에요. 정 보고 싶으면은 밀림에 가서 보지 그것을 거기다 그렇게 가두어 놓고 그거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 호랑이는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살도록 되어있는거지 거기서 애들이 던져주는 비스켓을 먹도록 그렇게 되어있는 짐승이 아니잖아요. 자연적인 상태에 있을 그 때에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거에요. 그런데 보세요. 이 새가 어느 하루에 살이찐거는 아니에요. 서서히 서서히 시간이 흐르면서 날개는 퇴화하고 다리는 굵어지고 살이찌면서 새의 본분인 날아오를수 있는 이 일들을 더 이상 계속할수 없는 처지가 된거에요.)
이게 역사를 막론하고 이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경건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에요. (어느 바이얼리니스트가 여기도 바이얼리니스트가 있는데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하루를 연습을 안하면 바이얼린이 나를 알고, 내가 연습을 안한 것을 그래서 바이얼린이 그런다는거에요. 너 어제 연습안했지 이틀을 안하면 내가 알고, 삼일을 안하면 청중들이 안데요. 청중들이 안다는거에요. 그러한 일평생을 바이얼린을 연주하며 사는 사람도 로마가 어차피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은건데 그 어디 하루 이틀 안했는데 그러느냐. 그런데 그거는 바이얼린을 전혀 켤줄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하는 얘기고 그 사람은 그것을 안다 이거에요.) 아무리 신앙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무슨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생각들과 색깔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더라도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합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동의하지 않되는 한가지 사실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은 말씀과 기도로 다져지는 개인적인 경건의 삶이 토대가 되지 않은 모든 신앙과 모든 활동, 모든 섬김, 모든 것들은 다 모래위에 쌓여진 것과 같은 쓸데없는 것들이라이거죠. 쓸모없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감히 말하는 것은 그거에요. 뭐냐하면은 교회는 제일 중요하게 봐야하는 것이 뭐냐하면은 일군들을 세울때에 개인적인 경건이에요. 기도 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지 않는 사람들을 여기서 도장찍어서 여러분들이 집사나 장로나 권사나 그렇게 세우면 안되요. 나중에 다 벌받는다고요. 자기가 이렇게 찍은 것에 대해서 영원히 자기가 만든 제품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되요. 그러잖아요. 왜 찍었어요. 그러면 사람이 워낙 좋아서, 좋은 사람은 시장에 많아요. 사람이 경건해야지 기본적인 신앙의 토양이 안되있는거에요. 누구 하고 떠 올리면은 생각나는 것은 그냥 뭐들고 맨날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일이나하는 장면이나 떠오르고 말이지. 사람들을 규합해가지고 놀러가는 것이나 떠오르고 말이지. 그런 식의 무슨 친목회 회장같은 분위기 떠오르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권을 잡으면 교회가 어디로 가겠는지 너무나 뻔하잖아요.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을 해야되요. 그래서 한 교회에서 세워진 일군들을 보면은 그 교회의 수준을 알아요. 그러니까는 그것이 가장 기초고 그것이 기본이에요. 오늘 그 동안에 계속해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그것만 가지고 울어먹었는데 오늘 아침에 새로운 용어가 하나 나왔잖아요. 출석짐승, 출석짐승이 그게 성도가 아니라고요. 그거를 잘 생각을해야지요. 그래서 이 두가지는 불변이에요. 아주 기본적으로 되어있어야되요. 기본적으로 되어있어야 된다기 보다는 이것이 끊임없이 신앙생활에 기초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굉장히 어려워요. 쉽지가 않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주일날 들은 설교를 묵상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성경 읽는사람, 늘 성경을 읽고 그 다음에 읽고 깨달은대로 그리고 그 다음에 그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이런 삶이 전체적인 삶의 기초가 되어서 상황에 흔들리지 않게끔 토대가 놓이기 위해서는 한두주의 실천 가지고는 안되고 우리가 어떤 나쁜일을 계속하면 그 패역이 되어서 쌓이듯이 선하고 경건한 일들을 계속함으로서 그것이 우리의 몸에 깊이 배여야되요. (사실 교회 개척하기 전에 학교 교수로 있을 때에 교회 개척하면 제일 염려되는 것이 새벽기도였거든요. 원래 야간 강의하고 그러니까 반에 늦게 자는 편이에요. 보통 1시되서 자고 그랬는데 학교에서 끝나고 오는 시간이 11기다 넘었으니까 와서 씻고 밥먹고 뭐하고 그러면 1시는 보통이죠. 그런데 대게 새벽에 잘 못일어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밤에는 강하다고 말하죠. 강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밤잠을 안자고 그냥 딴 짖하는거죠. 제가 그런 형이었거든요. 아 그런데 그 5시 새벽예배는 너무 잔인해요. 너무 잔인해요. 그래 처음에 인제 전도사도 없었던 시절에 어떻게해요. 그리고 참 기가막힌 것은 교회 개척을 했는데 어저께 개척 예배를 드렸잖아요. 오늘은 월요일인데 그런데 우리 집 사람하고 둘이 않아서 이야기하면서 아 새벽예배 가야되는데 여보 새벽에 누가 왔겠소, 그저 가서 누가 왔겠소 그냥 가서 개인 기도나하고 오면되지 그런데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어저께 개척하고 오늘 학교 강의 에다가 개척예배에다가 아침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서 토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어떻해요. 아 내가 전도사 한 사람만 있어도 내가 안 갔을텐데 그러면서 이제 코꽸다 그러면서 툴툴대면서 그리고 왔는데 아니 철문을 열을려고 열쇠를 집어넣고 돌리는데 이미 돌아간거에요. 문을 열고 가보니까 글쎄 5시 3분 전인데 8명이 그림같이 앉아서 새벽기도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는거에요. 진짜 주여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니 집에서 개기고 안갔어봐요. 그거 어떻게 할뻔했어요. 개척 예배를 호후3시에 들였는데 그날도 오전예배 끝나고 나서 오후에 개척예배를 드렸는데 집에가서 자다가 10분 늦었거든요. 개척 예배 드리는데 담임 목회자가 낮잠 자다가 10분 늦었으니 무슨 망신이에요. 그래도 어떻게해요. 또 정직하게 내가 사실 자다가 10분 늦었다고 내 생애에 그렇게 수치스러운 날은 처음이었어요. 참 그거보면 내가 믿음이 참 많아 그런데 사랑하셨으니까 잠을주셨죠. 그런데 그렇게 있는거라. 그러니 인제 진짜 코꽨거죠. 꼼짝못하죠. 밤11시30분이나되서 학교 강의 끝나고 나와가지고 씻고 드러누우면 1시인데 4시30분이 일어나야되는데 그 때가 아주 가장 단잠 잘 시간이에요. 그때 인제 깨고 일어나고 새벽기도 갖다오면 학교 출근해야되요. 막 신발신다가 주저 앉아가지고 졸고 토할 것 같고 그러면서 인제 그 때에 조금만 더 참자 전도사 하나만 구하면 내가 면재해줄깨 그런데 전도사 한 사람을 구했어요. 그런데 그게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 사람마다 그 생긴데로 쓰시는데 하나님 저는 체질이 새벽체질이 아닌데 저좀 어떻게 편의좀 봐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러는데 한번도 응답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는 체질이 딱 되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집회를 가든, 지방을 내려가든, 기도원을 가든, 어디를 가든지간에 자명종 없어도 눈을 딱 떠요. 그러면 정확하게 5시 45분이에요. 그래 이제 어떤 사람은 5시에 새벽디도인데 5시45분에 눈뜨면 어떻하냐 그러는데 6시 15분 기도가 있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맞춰서 완전히 체질화가 되어서 미국에를 가든 중국에를 가든 그 시간이 되면 눈이 딱 떠져요. 정확하게 거 이상하죠. 시계가 바뀌었는데 그런데도 그 바뀐거에 맞춰서 이 안에서 작동을 해서 딱 깬거에요. 이게 뭐에요. 이게 몸에 베는거에요.)
그런데 다윗의 경험이 무엇을 얘기해 주냐하면은 이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에 마음에 함당한 삶을 살았으니까 사실 우리들이 구체적으로는 잘 알수없지만은 이 사람이 개인적인 경건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이 씨름했을거라고요. 그것은 확실하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본성이 굳이 그것을 살펴보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거 아네요. 그렇잖아요. 그래요. 안그래요. 그래 모두 동의하는거거든 그러니까 어떡하든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은 그 다음에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굉장히 사모하게되요. 우리가 누군가를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게되면은 둘이만 있어야지 그게 같이 있는거지 여러 사람하고 함께 있는 것은 그것은 같이 있는거라고 안치는거에요. 그렇잖아요. 고개를 끄덕끄덕 그래요. 처녀 총각이나 그래야지. 그런데 어쨋든지 간에 그렇대요. 그렇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깊이 젖고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충분한 이 친교를 나누고 싶은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제공해 주는 것이 물론 공적인 예배와 제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장엄한 은혜를 맛보지만은 매일매일 그런 하나님을 친근히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가 뭐냐하면은 만남의 터전이 뭐냐하면은 매일매일의 경건 생활이에요.
그러니까는 이 다윗이 개인적으로 그런 경건의 시간들을 중시한 증거가 많이 나와요. 그것은 성경에도 나올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굳이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거에요. 왜냐하면은 그렇게 될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충만한 만남과 교제속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갈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하기위해서 다윗도 우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깊이 고뇌했을 것이라는거죠. 그런데 다윗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은 찾은것이 아침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아침에 대한 얘가 많이 나오는거에요. 그리고 밤이에요. 밤, 아침과 밤 그런데 이제 특별히 인제 여기에서도 아침에 얘기하는데 그러니까 새벽 미명에 일어나는거죠. 아직까지도 새벽이 오지않은 새벽이 되기 그 전에 일어나서 그래서 두가지 일을 해내는데 첫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하루 이틀동안 계속되는 일이 아니라. 다윗의 삶속에서 하루의 일과속에서 흐르는 그런 아주 자리잡힌 시간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어하는 것은 그거에요. 뭐냐하면은 여러분들이 잘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이 새벽의 시간은 나에게는 도저히 상황이나 모든 여건상 불리하다. 생각되시는 분들은 굳이 새벽에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러면 어느 시간에 확정되어 있느냐 이것을 대답을 해야되요. 밤입니다. 혹은 낮입니다. 아니면은 근무시간이 특수하기 때문에 나는 오후입니다. 이렇게는 말할수 있어요. 그런데 새벽 시간은 나는 도저히 피곤하고 일도 많고 그래서 새벽 시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딴데는 어디입니까. 적절하게 그 경건의 시간을 가질 시간을 찾을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안된다이거죠. 그것은 뭐냐하면은 그러면은 이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수 있잖아요. 직업 활동이 너무나 바쁘고 또 벌려놓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어쩔수가 없고 그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수 있잖아요. 그래요. 좋아요. 그런데 그러면 어떡하겠어요. 새벽기도 나오는데 직장에서 비상걸렸으면 가야되고 민방위 교육 나왔으면 목사라도 새벽기도 못하고 민방위 교육가야지 뭐 어떻게해요. 그런데 그것이 그런 상황이 장구한 세월동안 계속되어서 나로 하여금 어떻게 영적인 생활의 날개를 펼수 없도록 만드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되면은 그거 직업을 바꿔요. 그리고 사업을 좀 말하자면은 시간을 적게쓰고 돈을 투자한다든지 아니면은 시간을 적게쓰고 농축된 노동력을 공급을해서 끝장을 보는 그런 사업으로 바꾸든지, 뭔가를 하라 이거에요. 누구를 위한 삶이냐 이거에요.
(제자 아는 어떤 분은 호텔에 근무를 했는데 돈을 꽤 많이 월급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는 모르지만은 젊은 사람인데 굉장히 돈을 많이 받았데요. 그런데 어느날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3분의 1밖에 급료를 주지 않는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게 상식적으로 사실은 말이안되잖아요. 예를 들면은 450만원을 받는 사람은 벌써 450만원을 가지고 살도록 생활이나 모든 것들이 틀이짜여져 있는데 어느날 150만원 밖에 안주는데 그거 살수 있겠어요. 50만원 밖에 못받던 사람이 150만원 받는다 그러면 살아요. 괜찮아요. 그런데 450만원씩 수입이 되다가 어느날 갑자기 상황이 바뀌면서 150만원 밖에 수입이 안되는데 그거 가지고 살수 있겠어요. 그거 힘들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선택한거에요. 그래서 왜 그랬느냐 그러니까 어느날 말이죠. 누구를 위한 삶인가?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생활은 넉넉하게 해주는데 그런데 뭐에요. 가족들 얼굴을 볼 시간도 없는거에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 바쳐서 주 너희 회사를 사랑하고 이렇게 인생을 살아서 내 인생이 정말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잘했다 그랬죠. 잘했다. 그리고 나니까 주일도 지킬수도 있고 그리고 나니까 아침의 시간에 기도할수도 있고 그러고 나니까 일주일에 이틀 내지는 삼일 정도는 일찍 들어와서 가족들과 함께 식탁을 마주 앉아서 지낼수도있고 그런데 그 사람의 고백이 재미있죠. 그렇게 해서 맛보는 기쁨이 300만원을 잃어버린 불편보다 훨씬큼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에요. 가치를 어디에다 두고 사느냐이거죠.) 모두 이렇게 극단적인 결단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실제로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은요. 우리가 우유 부단하기 때문에 낭비하고 허비해버리는 시간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그 경건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중의 하나는 뭐냐하면은 경건을 위해서 사용하는 시간말고 다 른시간들을 밀도있게 사용하지 못하는거에요. 그리고 그 시간들을 보내는거죠. (나는 직장생활도 해보고 그랬는데 이해할수 없는데 말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낮에는 말이죠. 안그런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도 많아요. 그것은 뭘보면 아냐면은 저는 목사니까 뭐 낮에 어떤 때는 낮에 너무 피곤해서 오래간만에 목욕을하러 가잖아요. 그러면 특히 남탕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요. 대낮에 그 사람들은 왜그러냐 그리고 나서 벌거벚고 뛰어다니면서 헨드폰 받는거보면은 전부다 회사에서 오는 전화에요. 그거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회사에 나왔으면 말이죠. 회사를 위해서 근무를 해야지 출근을 해놓고 낮에와서 싸우나에서 누워있고 이발소에 가서 누워있고 그리고 전부다 6시쯤 되면은 전부다 회사로 들어가요. 그리고 나서 인제 책상 펴놓고 그리고 일하기 시작하는거에요. 상사가 볼때에는 하루종일 출장다니다 와가지고 몸을 돌보지않고 일하는 것 같지만은 사실은 목욕탕 주인은 다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죠.)
그러니까 하루의 삶을 밀도있게 사용을해야되요. 그래서 아주 농축된 가운데 열심히 일하고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제가 세웠던 제가 직장인으로서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요셉이었어요. 요셉. 그 사람은 진짜 성실하게 인한사람이에요. 직장에서 일하면은 이거 딱 벋으면은 바쁠때에는 등골에 땀이 쫙 배야되요. 거기있는 회사를 위해서 바쳐진 시간이니까 그렇게 온전히 쏟아서 딱하고 그리고 퇴근시간 딱되면 가고 그리고 시간을 쎄이브하면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할 경건의 시간을 지켜야지요. 그리고 그것도 도저히 생활상으로 그것도 안한다 그러면은 잠을 줄여서 잠을 30분 내지 1시간줄여서 거기에 익숙해진 체질을 만들어야지 어떡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된다이거죠.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뭐냐하면은 그런 경건의 시간이 필수적인데 그 경건의 시간을 새벽에는 못하지만은 어디엔가 삶의 하루에서 확고하게 흔들리지 앉도록 집어넣을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더 이상 이야기 할필요가 없지만 그렇게 살면되지만 흔들려서 정착하는 시간이 없다면 새벽을 자기 시간으로 만들어 놓고 사용해야된다. 이얘기에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왜 못하겠어요. (옛날에 내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은 나이 70이 되었는데도 말이죠. 새벽기도 끝나고나서 가방들고 학원으로 뭘 배우러 다니셨는지는 미스테리에요. 어쨌든 학원을 다녔어요. 제 생각에는 독일어가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학원다녔어요. 젊은이들도 보세요. 이른 새벽에 엄마 한데 도시락 두 개 싸 달라 그래서 학원을 다녀요. 심지어는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회사출근하기 전에 새벽반 들어가서 강의를 들어요. 그 왜 안되겠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자라니까 안하는거지. 환경이 도저히 나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이어가지 못하게한다. 그것은 없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그 환경을 나는 버려야된다고 생각을해요. 누구를 위한 삶이에요. 그렇게 핍절한 상태에서 그렇게 살아서 마지막에 신앙까지 다 반납하고나서 그런 식으로 마지막에 얻을수 있는 댓가가 무엇이냐이거죠. 하나님과의 교통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하고 살아서 쌓아올린 삶의 업적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겠느냐는 것이죠. 가치의 문제에요. 이런것들은 결국은 가치의 문제라 이거죠.
그러니까 새벽 시간에 하나님 앞에 경건의 시간을 이 시인처럼 가져야된다. 이거죠. 다른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은 그것은 괜찮지만 다른 시간이 도저히 안정해져 있다. 그러면은 가져야된다 이거죠. 하루에 한 시간도 경건의 시간의 갖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꿈꾸는 것은 그것은 만용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과 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의 체험들을 수없이 얘기하면 뭐해요. 현재의 삶에 거룩한 능력이 없고 현재의 삶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친교가 없는데 그런 삶을 자랑해서 뭐하냐이거죠. 한시간이 과하면 단 40분이라도 20분 기도하고 20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더라도 하여튼 그것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시간이라그거죠. 기본적인 시간이라고요. (제가 알고 있는 외국의 어느 목사님은 유명하신 분인데 그분은 거의 40년 이상 아침을 안드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몸에 굳어졌죠. 그 이유가 뭐에요. 아주 간단해요. 아침을 식사해야 되는 그 시간이 하나님과 교제해야할 시간데에 걸쳐있다는거에요. 그래 식사를 하면 부레이크되는 깨져버린다이거죠. 그래 처음에는 자신의 영적인 편의를 위해서 아침을 건너뛰었는데 시간이 지나고나서 보니까 그게 몸에 배었다 그래요.) 보세요. 그렇다고 해서 아침을 굶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다 주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안되요. 그리고 어떻게 주일날 예배에 와 가지고 뒤집어져 볼려고 그러는데 돌맹이가 점점 자라는 돌맹이가 있다고요. 돌맹이가 조그마했을 때는 요런 말씀의 은혜로도 뒤집어지는데 이게 계속해서 돌맹이가 점점점점 자라서 큰 바위가 되면은 이게 웬만큼 쑤셔도 말이죠. 들석거리지도 않는다고요. 무슨 얘기하는지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다 알아요. 그건 하나의 종교적인 사행심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다윗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만난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아니에요. 하나님의 권능에 감화를 받은 사람아니에요.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고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궁창에 가득한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본사람 아니에요. 그런 위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에요. 전쟁터에서 그 얼마나 다이나믹한 체험을 많이 했어요. 그렇죠. 신앙의 간증에 대해서 쓰라고 그러면 말이죠. 다윗은 뭐 진짜 무궁무진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 하나님에대한 생생하고 살아있는 수 많은 간증을 가진사람 아니에요. 그런데요도 새벽의 시간에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할려고 몸부림 쳤던거에요. 무슨 얘기인지 알죠. 그런 개인적인 경건의 삶을 위한 헌신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에대한 그런 풍부한 체험들을 하나님이 말년에까지 거두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그에게 부어주신거에요.
이게 문제라이거죠. 새벽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잖아요. 이건 열린교회 6시15분새벽기도 이거는 모두 새벽기도 나오라는 하나님의 응답이에요. 6시15분 기도회 이것은 환상적인 시간이에요. 5시에 나와요. 5시에, 정말 얼마나 여러분들 놀라운지 몰라요. 그리고 이 새벽의 시간에 여러분 모든게 말이죠. 이 모든 것을 젊음이들이 더 잘해요. 그렇죠. 모든것을 뭐 달리기를해도 젊은이들이 빠르고 밥을 먹어도 젊은이들이 잘 먹고 머리도 젊은이들이 잘돌아가요. 그런데 나이든 사람이 잘할수 있는 것이 하나있어요. 그것이 새벽기도에요. 나이 많이 들면 무릎에 바람나오고 아침이면은 새벽에 일찍 깨잖아요. 그죠. 새벽에 나와서 뭐해요. 멀뚱멀뚱 있으면 새벽에 일찍 나와서 기도하고 그리고 교회에서 먼저 믿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이러한 경건한 삶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되요. 여러분 이렇게 성경을 펴놓고 매일 묵상하면서 뭔가 아침마다 큐티를한다. 그러면 그 그림이 머리가 하얀 노인네에요. 아니면은 눈알 반짝반짝한 대학교 1.2학년 학생들이에요. 대게 후자잖아요. 이런 것들은 잘못된거에요. 이런 하나님과의 경건한 만남 속에서 풍부한 개인의 경건생활이 토대가되어서 구축된 신앙생활은 그런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 성경을 딱 펼치고 볼때에는 이제 방금 은혜받은 사람이 볼수 없는 성경의 깊은 맛들을 보게 만들어주는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런 본보기를 보기가 굉장히 힘든거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가면 안되요. 난 여러분들에게 정말 다시 촉구하는데 여러분 그렇게 개인경건의 생활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그렇게 하면은 절대 여러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불꽃들이 여러분 안에서 지속될 수가 없어요. 그것을 여러분이 계속 기억을 해야된다고요. 그것을 기억해야되요. 정말 그것을 기억을해야되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을 해야되냐면은 아침의 시간에 불신자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시간을 하나님 앞에 구별해 드려야된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내가 숨을 쉬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리스도인이된 이 후로는 이것 자체가 나의 삶에 고정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을 해야되요.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편의의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 진짜 대단해요. 보세요. 직장에 9시에 출근이니까 8시까지 가면은 매우 성실한 사람이고 9시30분에만 딱딱 출근을해도 착한 사람이라고 그래요. 다들 그런데 그러다가 비상한번 걸리면은 투덜투덜 대면서 이놈의 직장은 매일 비상만 건다고, 뭐 매일이에요. 6개월 전에걸고 지금 처음걸었는데 그런데도 투덜투덜 대면서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6시에 매일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뭐하냐 그랬더니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인데 매일 새벽6시에 와가지고 뭐하냐 하면은 헬스클럽에 가가지고 이거이거 땀 뻘뻘 흘리면서 그거 막 하는거에요. 그것도 그냥해요. 돈 내고 말이지. 그거 안 믿는 사람들이 아침 시간에 얼마나 성실하게 사는지보라고요. 새벽에는 일찍이 강아지 데리고 뒷산에 올라가서 개 오줌 누이고 그거 돈을줘 밥을줘 떡을줘 그런데 그 새벽 시간에 말이지 전부다 유니폼 갈아입고 나와가지고 운동장에 나와가지고 조기 축구한다고 말이지 그렇게 하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뭐에요. 건강을 위해서 우리의 영혼의 건강이 육체의 건만도 못지않아요. 굉장히 우리는 이런 점에 있어서 오히려 불신자들을 보면서 깊이 자극을 받아야되요. 사실 신자들 가운데 이 교회 생활을 불신자들의 취미생활 만큼도 성실하게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불신자들이 그 취미생활을 얼마나 성실하게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개인적인 경건의 삶, 이것을 새벽의 시간에 갖는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게 정말 너무너무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죠.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경험이 뭐냐하면은 새벽의 시간에 하나님과 대면할 기회를 놓치면은 하루종일 그런 기회를 갖기가 힘들다는 것이 공통된 경험이에요.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새벽의 성경을 읽잖아요. 그런데 이제 (어떤 때는 기도가 길어져서 성경을 못 읽는다든지 새벽에 아니면은 어디 지방에 내려가야 할 일이 있어서 새벽에 일찍이 새벽기도를 못하고 가면은 아주 정직한 고백은 30-40%는 다른 시간으로 대치를 해서 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60-70%는 목회자인 나도 그날 기도는 굶는거에요. 어떡해요. 여기에서 새벽에 비행기타고 지방에 내려갔더니 지방에서 계속 스케줄이 있고 뭐 밥먹으러 가자고 해서 데리고가고 그리고 오후 집회까지 하고 들어오면 녹초가 되어있는데 갔다가 숙소에다 집어넣으면 엎드렸다가도 잠이들어서 살며시 잠이들지 그 뭐 그렇게 새벽에 여기서 기도하는 것 처럼 그렇게 기도가되느냐 이거죠. 그래서 제가 안 나갈려고 애를쓰는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절대 안되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기도를 안하고 성경을 안 읽어도 금방 그 영향이 우리 자신에게 오는데 하물며 무슨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를 안 한것도 아니고 뭐 교회 봉사하기 위해서 성경을 안 읽었던 것도 아니고 그 시간 전부다 다 잃어버리고 나서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섞여서 이렇게 교제하면서 살아가면서 경건의 시간을 놓치는데 그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는지 보세요. 시간이 점점점 쌓이면서 처음에는 자기가 기도하기 싫어서 기도시간을 놓쳤는데 나중에는 기도 시간이 자기를 버리는거에요. 와 그렇게 경건의 생활 안하고 막 그냥 다 제쳐놓고 살다가 몇 달만에 너무 곤고해서 기도할려고 교회에 가보면 기도가 안되는거죠.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거에요.
그래서 이것 자체가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지워버릴수 없는 삶의 한 패턴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되요. 그래서 아침마다 나와야죠.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는 그 할아버지 목사님은 새벽기도를 끝나고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지팡이를 짚고 그 할아버지 목사님도 참 대단하죠. 그 남의 교회 장로님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더래요. 그러면 그냥 인사하고 가서 주무시면되지 어디 갔다 오시오. 그러니까 목사님 아침마다 제가 저 앞산을 올라갑니다. 그래서 아니 그때 새벽기도 시간인데 거기가면 새벽기도는 어떻게 하느냐 그러니까 아 여기부터 먼저 올라가고 나중에 기도합니다. 에이 여보시오 산은 무슨놈의 산, 시온산이나 올라가시오 장로가 되어가지고. 말이지. 그거에요.) 무엇이 중요한지 한번 생각을해버세요.
그렇게해서 새벽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을 시간을 다른 일에 써써 그거 얼마나 많은 수확을 거둘려고 생각을하세요. 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죠. 진짜 하나님의 오병이어에 손드시는 축복이 필요한게 이게 시간이에요. 얼마나 놀라운지아세요. 이 하나님께서 손드셔서 이 시간에 축복해주시면 요만한 시간 가지고도 남들이 이만한 시간 가지고 사는거보다도 더많은 열매를 맺을수가 있어요. 이 시간이 한 밭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시간에 복을 안주시면은 가끔 그런거 느끼잖아요. (막 글을쓸 때 그런 것을 느껴요. 막 죽어라하고 쓰는거에요. 기도고 뭐고 다 제껴놓고 막 넘겨줘야하니까. 막써요. 한 삼일 썻는데 컴퓨터가 삐비빅하면서 휙 날아간거에요. 마음 속에서 소리가 들려오는거에요. 야 기도에 대해서 쓰면서 자기는 기도 안하고 이거 쓰느라고 정신 다 팔았는데 삐비비빅 하는거에요. 회개해도 그것은 복구안되요.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어떤 날은 어때요.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탁 앉아서 타이프를 치기 시작하면은 나 타이프를 잘 못치거든요. 이렇게 이렇게 밖에 못치는데 그런데 어쩜 그렇게 오타도 안나오고 잘나와요. 다다다닥 누구 옆에서 누가 쳐주면은 더 좋죠. 잘르르르르 어떤 날은 말이죠. 하루종일 머리를 쥐어짜면서 씩씩거리고 책을 찾아다니고 난리를 치는데 책이 나올만하면은 전화오고 전화끊고 나서 나올만하면은 또 누가 찾아오고 나중에는 막 돌아버리겠어요. 결국은 하루종일 지나고나면은 한 삼십매도 쓸까말까에요. 그런데 그냥 마음에 기쁨과 은혜가 확 솟아오르는 날은 말이죠. 타르르를 치는거에요. 저녁이 딱 되어서 세어보면은 어떤 때는 250매를 썻어요. 250매가 이게 말이되요. 책 4분의1인데 하루에) 그게 뭐에요. 하나님이 그 시간에 복주시는거죠. 하나님이 시간에 복주시는거죠. 목사님 그것은 목사님 처럼 건강한 사람이나 그렇지 나는 체질적으로 이9시간을 안자면 일이 안되요. 그런데 그것도 또 달라요. 뭐냐하면은 다 누워있는다고 해서 다 쉬는게 아니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시기 전에 아담을 깊은 잠에 떨어지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오늘 이 잠자는 시간에 축복해 주셔서 아주 깊이 골아떨어져서 누가 엎어가도 모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은 피로가 비록 1시간 덜 잤지만은 완벽하게 풀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편안한 잠을 자게 해주죠. 그러면 그렇게 해서 충만하게 이 기력을 회복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과 함께 눈뜨는 새벽, 그거 얼마나 복된 새벽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지, 그래야지 그런 시간 다 반납하고 말이죠. 그래서 벌써 어디가면 표가 나냐하면은요. 교수들이진지 누구든지 같이 가서 한 방에서 자보면은 이 사람들이 아침을 어떻게 지내는 사람들인지 알아요. 어떤 사람은 눈뜨자마자 슬리퍼를 찍찍끌고 4층서부터 1층까지 돌아다니는거에요. 어 여기 동아일보 없어요. 동아일보 펴놓고 ‘얘야 다 용서했으니 돌아오라’. 그런 것 까지 다읽는거에요. 막 읽어요. 오전내내 진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읽는거에요.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눈비비고 일어나자 마다 수첩꺼내 가지고 스케줄을 하는거에요. 또뭐 일어나자 마자 먹을 것을 찾는사람, 일어나자 마자 하여튼 싸우나로 직행하는 사람, 그런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어나자 마자 벼개 끓어안고 기도하는 사람, 일어나자 마자 아무튼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사람, 아주 그 아침 시간이 다 나타나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설교단에 올라가면 그대로에요. 동아일보 동아일보 동아일보 그러고 다니던 사람들은 딱 성경 어디를 읽던지 간에 시작이 난 다 알아요.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까 그게 시작이에요. 자기 깐에는 신선한 설교죠. 오늘 아침에 신문에 보니까 해외 토픽에 이르기를 김 아무게 기자 가라사대 그러고 이제 나오는거에요. 그러니까 정말 그게 중요한 거에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당부를 하는데 각오를해요. 결단을 하고 이 새벽의 시간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교제의 시간을 삼도록 여러분들이 가져야되요. 그리고 이것은 일평생 계속되요. 일평생 계속되야되요. 여기 꼭 구조적으로 볼때에 여기가 오기 어려우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도되요. 그리고 교회 오는 것이 구조적으로 너무 힘들면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에 거실에서 기도해도되고 아니면은 건넌방에 가서 기도해도되고 뭐 그것은 장소는 둘째문제에요. 그러데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다니는 이 교회에 오면 가장 좋겠죠. 그렇지 않아요. 제일 좋겠지 그렇지만 그것이 힘들 경우에는 어떻게든지 하여튼 정해진 장소와 시간이 있어서 매일 성경을 읽어야되요.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한20분 길면은 1시간정도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맥체인의 성경읽기표에 의해서 아침것 2장 읽고 그리고 그 말씀따라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간단하게 아침먹고 그리고 직장에 가서 근무하고 저녁때 집에돌아 와서 마지막 세수하고 두장 읽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도로 하루의 문을 열고 기도의 문으로 잠그고 이렇게 하면서 신앙생활 해야되요.
이 기본적인 경건의 생활이 여러분 속에 적립되어야된다. 이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은 결국 우리들이 받은 많은 은혜들을 우리 자신들이 유지해 나갈수가 없는 것이에요. 개인적인 경건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수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에요. 그 그릇이 견고하고 탄탄하게 마련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으실 때 그 은혜를 담고 담겨진 그 은혜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 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이거죠. 시인을 비롯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침의 시간을 그토록 중시했던 이유는 그들이 경험으로 볼때에도 성경으로 볼대에도 이 아침의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면서 개인의 경건의 토대를 놓기에 가장 구별된 시간일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도 이렇게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새벽에 행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