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같게 하시는 하나님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고난의 유익(시 119:71) 2000.10.3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
2. 정금같게 하시는 하나님(욥 23:10) 2000.10.3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4
3. 인생에서 하나님께로 피하라(시 31:19) 2000.11.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8
4. 고난 중의 위로(시 119:50) 2000.11.2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0
5. 악한 자가 괴롭힐 때(시 119:95) 2000.11.3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3
1.고난의 유익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정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고난의 학교를 반드시 통과해야지만 답이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이 고난의 학교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고난을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어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좀 야비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그 사람이 거룩한 성도답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누구보다도 모진 고난의 학교를 통과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바로 앞에 섰을 때에 그가 술회하기를 “내 나그네 길이 130년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생에 길이 정처없는 설음을 받으면서 걸어온 나그네 길이였다는 것입니다. “나의 연수가 조상들의 연수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렇지만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요셉은 어땠습니까?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한 요셉이었지만 고난을 빼놓고는 요셉의 생애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라고 믿어지는 다윗 역시 한 나라의 제왕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지만 고난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돈만 있으면 고난을 좀 면할텐데’ 생각합니다. 또 너무 사람들에게 짓밟힐 때는 ‘지위가 높으면 고난을 면하겠지’ 생각합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하도 아파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건강하기만 하면 고난을 좀 면할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합니다. 돈도 있고 권세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 왕궁의 화려한 영광이 다윗의 고난을 덜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에 모든 증인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학교에 동창생들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들이 중대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러면 고난을 당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거룩한 신앙의 사람이 되는가.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 가까히 모실 수 있는 훌륭한 인물들이 되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제가 형제 자매들을 결혼시켜주기도 하고 또 결혼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요새 부지런히들 찾아오는데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너무 험난한 인생을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사람하고는 왠만하면 결혼하지 말아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이상한 환경, 물론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다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하여튼 아주 심하게 고난과 역경,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망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하고 결혼하면 자기도 어느 정도 망가졌으니까 망가진 사람끼리 결합을 해서 합력하여 악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고통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예외가 무엇인가 하면 그런 이상한 환경 속에서 고난 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은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쳐진 사람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고난의 학교를 통과했는데 그 사람들이 망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야비한 사람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도 거룩한 성자들로 새롭게 빚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그 차이가 무엇인가. 답이 이렇습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밀려올 때에 고난 그 자체에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신자의 반응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고난이 우리를 거룩의 사람으로 빚어서 새사람 되기도 하고 우리를 망가트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칠 때 경건한 믿음으로 반응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인간성이나 신앙, 인간관계 이런 것들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이 더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 빚어지는 것입니다.
(예화: 20세 때 친구들과 함께 양수리에 놀러갔는데 친구가 심장마비로 죽어서 그 친구 를 위해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비석을 세우는데 좋은 돌은 비싸서 질이 낮은 돌 을 친구와 함께 종일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며 숫돌로 갈아 반질반질하게 만들 었다는 이야기)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이 신자를 잘 깍아서 하나님 사람 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게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경건한 믿음으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왜 고난 속에서 경건한 믿음으로 반응하기만 하면 이 시인처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이를 통해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백하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고난이 올 때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게 되면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 마음에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 처음 온 교인들이 이 교회는 설교 소리가 너무 조용해서 자꾸 졸리운 유혹에 빠져든다고 하는데, 소리를 지르면 뭐합니까?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간절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그 진리를 필요로 하여 말씀이 주어질 때 그것이 가슴에 아로새겨주는 그런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을 때 신자가 경건한 신앙으로 고난에 대해서 반응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그리움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고난을 당할 때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든지 고난은 싫은 것입니다. 고난이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고난이 좋은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맛보는 하나님의 은혜가 좋은 것이지 솔직히 말하면 누가 고난이 좋습니까?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십시오. 내가 막 줄테니까. 누가 고난이 좋습니까?
그런데 그 고난을 받을 때에 다 고난이 싫고 고난을 피하고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간절히 고난에서 벗어나는 길, 고난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에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나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화: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 회관에서 공부를 하는데 지하 보일러실에서 연기가 조금 났는데 어느 자매가 천천히 불이 났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미처 알아듣지 못한 상 태인데 다른 학생들은 그 말을 알아듣고 당황하며 피하느라고 법석이었는데 자신 의 생명을 좌우하는 말이니까 천천히 이야기를 해도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다 알아듣고 피했다는 이야기)
보십시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필요하고 정말 이 고난 받는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의 갈길이 어디입니까? 나의 문제가 많은 이 상황에서 해답의 열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고난에 반응할 때에 하나님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놀랍게 증폭시키십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없이 일상적으로 다닐 때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던 진리들을 한순간에 확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러고 나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니까 고난 당한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진리,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주는 유익을 대조해보니까 고난의 아픔은 작은 것이었고 그 고난 속에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훨씬 컸다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는 유익이라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훅크’라고 하는 것인데 율례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도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고난에 처한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잘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고난이 오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의 죄로 말미암아 온 고난이든지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든지 관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고난을 당할 때 신자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난 속에서 마음을 낮추고 그 속에서 그 고난을 자기를 하나님 앞에 고치는 학교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에 그때는 상황을 붙들고 허둥대기보다는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주께서 이 고난의 상황 속에서 나를 가르치시옵소서’라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정금같게 하시는 하나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고금을 막론하고 이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악인은 고통을 받고 선한 사람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의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런 구조 속에서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칙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시대 사람들에게 공상진학의(?)도리를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축복과 고통이 대두되는 개념을 가지고 선을 권하고 악한 삶을 미워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성경도 사실 그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의뢰하고 믿는 사람들은 복을 받고 산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끝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도 성경이 인정합니다. 그 큰 틀을 성경도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는 좀 다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고통과 축복의 문제가 인간의 모든 고통의 문제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생각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왔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질문의 구도로서는 설명될 수 없는 답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도 끝까지 고통을 받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교자의 삶이 그런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고통을 받을 때에 모두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죄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매우 특별하게 당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일단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면 일단은 우리에게 어떤 죄와 허물이 있는가 돌아보고 그리고 그런 단계를 거친 다음에 만약에 이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내가 이 속에서 순전한 믿음을 잃지 않겠노라는 그런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욥의 고난은 말하자면 우스운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사실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너 욥이라는 사람을 보았느냐. 이렇게 순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가 못 보았다. 그러니까 사단이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하나님이 복주시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걷어가보십시오. 그럼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에 사단이 욥을 치므로서 고난을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의 입장에서는 욥 자신도 그런 구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대게 고난이 닥쳤을 때에 그때에 분명히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겠지만 이렇게 위증의 고난을 당할 정도로 그렇게 커다란 괄목할 만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혼란 속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이 욥기 속에서 당하고 있는 큰 고통이 사실 고난 자체를 통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기본적인 그 구도 자체가 적용이 안 되는 것으로는 말하자면 점진적인 고통인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의인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고난을 당하는가. 네가 당하는 이 고난은 하나님이 너를 버리신 증거인데 일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안 된다. 빨리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라. 그런데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는 깨트려졌고 그리고 그것은 죄 때문일 것이고 그러니까 고난을 받는다 그 불의를 버려라. 죄악을 빨리 버리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라.
사실 욥의 친구들을 비난을 많이 하지만 사실 그 모든 충고가 욥을 향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는 분명합니다. 누가 거기에 와서 같이 재를 무릎쓰고 굶으면서 그렇게 욥의 고난을 동참하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동기는 그렇게 순수했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욥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동의될 수 있는 처지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한 것도 문제지만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인식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워낙 수준이 낮고 가난하면 진실하고 성실한 것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헌신하고 진실됩니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욥을 위해 너희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견해나 생각을 가지고 진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워낙 수준이 낮으면 그 진실한 삶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반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도 답답하니까 욥이 하는 이야기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할 때 자기를 안다는 것입니까,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까? 누가 나를 그렇게 비난하지만 나도 사실 내가 가는 길을 모르겠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이제 심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상황입니다.
결국은 고난 중에 성도들이 보여야 할 과제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탁입니다. 이것은 비록 의롭게 고난을 받을 때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죄가운데서 징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 외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있어서 필요한 자세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난 속에서 마음이 강퍅해지고 하나님 앞에 더 많이 범죄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자기에게 섭리 가운데 다가오는 고난을 피해보려고 요령을 피울 때 더 많이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 있어서 비겁한 것은 많은 타락의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그 경우입니다. 그 단초를 들여다보면 결국은 비겁입니다. 용기없는 것입니다.
새벽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불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주님 부활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모두 변화된 것이 무엇입니까? 용기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욥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이제는 자신의 모든 고난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하는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생기고 거기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은혜를 붙드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소망을 두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 당할 때에 그 고난이 어떤 동기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든지 간에 이런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뀝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주관자가 주님이시라는 것과 나는 나의 가는 길을 모르지만 오직 하나님이 가는 길을 아실 것이다라는 그 신앙, 사람이 나를 몰라주고 이웃이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시는 것으로서 만족할 수 있는 신앙, 그것이 고난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두 번째 마지막으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기서 “단련한다”라고 하는 것은 제련하는 것입니다. 불같은 것으로 쇠를 녹여서 금 같은 것을 녹여서 찌끼를 걸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련하신 후에는 나를 정금같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욥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고백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이경 까지는 자신의 모든 죄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 자신 밖에 있는 문제들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무슨 도적질을 한 것인가,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고난을 쭉 당하면서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단련하여 정결하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백을 통해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를 시작을 해서 이제 욥의 신앙이 말하자면 중보자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는 놀라운 신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겨냥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잘못을 징벌하시기 위해 보복하시기 위한 개념으로서의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런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일 따름이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나니” 성경이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인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보복하시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각양 많은 찌끼와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시련과 그리고 고난의 풀무불을 통해서 그 찌끼들이 걸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각이 순전해지도록 주 오실 때에 흠도 티도 없는 사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련하고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앞에 마음이 녹아지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싶은 간절한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주 앞에 우리의 마음이 녹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 마음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더 정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이 모든 고난이 우리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그 자체가 우리들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에 대한 경건한 믿음의 반응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고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녹아지면서 맷돌에 의해서 굵은 곡식들이 갈아져 나가듯이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더러운 찌꺼기들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말 그런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 속에 있는 이 부패한 본성 때문에 우리들이 정결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정결하게 되는 일들을 정결하게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상황 속에 있다고 하면 이 시간부터 우리들이 다른 태도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부르시는 것이고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도록 그래서 우리의 영혼과 내면의 세계의 더러운 찌끼들을 씻어내어서 정금과 같은 존재가 될 때에 우리의 지난 날의 많은 실패와 우리의 더러운 것들을 오히려 더 씻어내고 주님 앞에 갚진 존재가 될 것입니다. 14금이나 18금은 쌀 때도 싸지만 팔 때에 제 값을 거의 못받습니다. 그러나 순금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지고 있으면 변함없는 불변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사람 만드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인생에서 하나님께로 피하라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9)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고통을 많이 받은 고난의 학교를 통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난이 어떻게 우리에게 찾아오는지 그 통로는 참 수도 없습니다. 어리석게도 어떤 사람들은 ‘이제는 내게 고난이 미칠 통로를 내가 다 막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고통 받을 때에는 물질이 부요하면 고난을 이길 수가 있을 것처럼 생각이 되고 억눌리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는 힘이 있으면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특별히 시인은 신자의 독특한 고난 하나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구설의 다툼이라고 그랬으니까 아마 이것은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그 말로서 시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준 기억들을 회상하고 있는 장면들 같습니다. 어째든 시인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많은 말의 고통을 인해서 아파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허망한 풍설로서 시인의 마음을 고통을 주고 또 많은 사람들이 고통 없이 이 시인에 관한 삶을 이야기꺼리로 구설수에 올려서 경건한 시인의 마음에 고통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때로는 시인의 생애에 있어서는 자기가 가장 가까히 사랑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시인 자신을 비난하고 나서므로서 견디기 힘든 아픔과 배신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통이 어떻게 시인에게만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더욱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세상과 야합해서 적당히 살려고 마음 먹는 것은 경건하고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이런 구설의 다툼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 사람들로부터 받는 말로 말미암은 상처나 아픔 이런 것들을 쉽게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시인에게서 이런 상황에 처해있을 때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 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라는 말씀은 공포 속에서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인간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경외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주님을 경외한다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았을 때에 하나님께 도망치는 사람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시인은 생애에서 그런 일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시인의 것으로 여겨지는 시편 한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저희를 사랑하나 저희는 나를 미워하는도다” 자신은 그들을 향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은 이 시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잊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어서 죄를 뒤집어 씌우고 모함하고 자객을 푸는, 특별히 사울의 그 고통스러운 추격을 피해나가면서 이 시인은 이런 경험들을 깊이 쌓아갔습니다. 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당하였을 때 근거없는 구설수에 올라서 마음이 상할 때, 그때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은 많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받는 그 말의 고통과 아픔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쉽게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향은 칼이고 그리고 사람의 (?)비난을 받고 구설수에 올라서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로 피한 것은 무슨 좋은 것을 위해서 피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위기에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나님께로 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사람들의 구설에 다툼 때문에 고통을 받아 하나님의 품으로 피했더니 사람들로부터 받는 비난과 말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실 뿐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고통을 받아서 하나님께 피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은신처만 제공해주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기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쌓아두신 놀라운 은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무슨 은혜를 경험했는지 우리들이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시인이 “주를 경외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위해서 쌓아두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라고 할 때 그 은혜는 이전에 사람들로 말미암아 고통받던 그 마음이 완전한 보상을 받고 그리고 넘치도록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 도와주시는 은혜 이런 것들이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적합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저는 아침에 그런 비유를 생각했습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막 총알이 비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단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서 바위 뒤에 숨었는데 그만 그 바위 뒤에는 바위 뒤에 있을 때는 한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총알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하나 때문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바위 뒤에 숨었는데 놀랍게도 그 바위 뒤에 누군가 놓고간 도시락도 있고 아름다운 꽃도 있고 그리고 좋은 책도 있고 전쟁 중에 위로가 될만한 좋은 음악이 들어있는 라디오도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이 있는 것과 그 장소로 도망간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경외한다라고 하는 말은 실제적으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고통을 당할 때에 말로 인해서 구설수에 올라서 경건하고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될 때 사람들을 붙들고 함께 다투고 싸우고 원망하고 미움의 칼을 품는 사람들이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께 도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서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의 진실을 언젠가는 입증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주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고난 중의 위로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고난을 받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후유증이 옵니다. 우리가 몸이 약하고 병들면 치료를 받습니다. 치료를 받는데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완치가 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주 심각한 후유증이 옵니다.
제가 아는 분 한분은 암에 걸려서 방사선 치료를 받는데 방사선 치료를 받으니까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욕이 떨어지는데 고기를 씹어도 꼭 나무토막을 씹는 것 같이 그렇게 후유증이 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 갈 수가 있습니다.
고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아프고 고통스러운 때가 지나고 나면 곧 평화가 찾아와야 되는 데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지가 않습니다. 고난을 많이 당하고 나면 반드시 그 후유증이 따라옵니다. 고통스러운 시절은 지나갔고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이해요인도 없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받던 시기에 마음에 남은 많은 상처와 아픔에 대한 기억들이 고난이 사라져간 그 이후에 삶에 아주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많이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일상적인 삶이 아니라 특별히 이제 고난을 많이 당하게 되면 식물이든지 동물이든지 인간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그 작용들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없던 과민한 반응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래 고난이 지속되면 그것이 움추려들지 않고 그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작용들이 오래 계속되는 것입니다. 오래 계속되다가 보면 그 자체가 병적인 후유증으로 자신의 내면의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그저 경제적으로 고통받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갈 때는 누구를 의지할 리도 없고 누구 기대게 할 일도 없이 자기가 벌어 자기가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특별히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스러운 상황이 되면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주위에 사람들에게 대한 간절한 도움의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돈이 많은데 나를 좀 안 도와주나. 우리 누나가 떵떵 거리고 잘 산다는데 동생인 내가 이렇게 고통받는데 도와주겠지. 우리 동생, 우리 사촌이 높은 자리에 있는데 이렇게 어려울 때에 날 좀 도와주지 않을까?. 도와줘야 될텐데. 도와줄거야. 도와주었으면’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강렬하게 생겨나면 그 다음에는 아버지가 계속 도와주지 않으면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형제간이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그 형제가 자기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거나 고통을 가한 적은 없는데 자신의 고난이 워낙 크니까 그것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본능이 작동하다가 보니까 자기를 돕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한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처가 되고 한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자기도 넉넉했더라면 그런 기대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기를 딱 포기하고 나면 상처도 없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상처로 뭉개진 사람들이겠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보면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고 상처를 잘 안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타고난 천성이기도 하지만 살아온 삶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보호본능이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더 내면의 세계 속에서 이상현상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망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제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지나고 이제는 더 이상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고 동기간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끝났는 데도 마음 속에서 ‘그때 내가 필요할 때 아버지가 나를 의붓자식 보듯이, 저 동기간이라고 하면서 나를 쳐다도 안 봤지 내가 평생 살면서 너희들 얼굴 보나 보라’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의 상황은 사라졌는 데도 여전히 그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망가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하나님이 새롭게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주셔서 그 크신 사랑을 알게 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기 전까지는 대부분 망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 죄많은 세상에서 이기심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누가 그렇게 우리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면서 살아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을 향해 그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망가진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인간의 저항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다만 이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은 망가집니다. 고난을 지나가고 나도 그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서 그래서 그 사람의 고난 이후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 자기 자신의 자녀나 동기간이나 배우자나 또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받았던 그런 고통스러운 상처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망가진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야 할 창조 세계에서의 인간과의 관계가 끝없이 이런 파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날의 미움과 시기와 분쟁으로 가득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숙명적인 비극에 대한 대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안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예화: 9월달에 카나다 에드먼트 집회에 가셨을 때 어느 유명한 음악 대학의 교수와 식 사를 하면서 나눈 이야기는 그 학교는 유명한 학교여서 1년 학비가 1억이 드는데 그곳은 최소한 5년을 다녀야 인정을 받는데 그곳에 입학하는 것도 쉽지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의 어느 학생이 그곳으로 유학을 왔는데 그 부모는 그리 넉넉하게 학비를 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집을 줄여서 전세를 살면서 자녀를 가르켰 는데 집을 줄여 어렵게 살아도 그들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았는데 그 아이가 능력 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바로 그런 것입니다.
고난 중에 위로가 넘치면 그러면 새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 신자의 위로는 무엇인가. 고난 중에 가끔 이런저런 취미나 즐거움에 빠져보는 것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고난을 이기는 위로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은 고난 중에 나의 위로라” 하나님의 말씀, 자기의 고난 중에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왜 그러는가. 어떻게 그 말씀이 고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제대로 그 말씀을 깨닫기만 하면 그 말씀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다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나면 그 고난 속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인격적인 관계를 우리와 맺으시면서 고난을 왜 주셨는지를 가르켜 주시고 또 그것을 아직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고난을 받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위로를 주십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소망을 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고난을 걷어가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지나고 나면 그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고난의 후유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지나고 나면 추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고난의 한복판에서 만난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추억, 그 고난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고 그 크신 사랑과 위로를 한몸에 받아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는 고난이 다가와도 오히려 그 고난이 닥칠 때에 두려움과 고통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고난이 다가오면 ‘아! 또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나보다.’ 이런 기대가 생겨서 소망 가운데 그 고난을 인내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인생이 얼마나 다른 인생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를 거절하겠습니까? 고난 중에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 속에서 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악한 자가 괴롭힐 때
“악인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를 생각하겠나이다”(시119:95)
시편 119편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시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표제에는 안 나오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저 역시 구약에서도 이 시편 119편과 같이 이렇게 영성이 깊은 시편을 체계적으로 써내려갈 만한 사람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 아마 다윗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119편이 가지고 있는 그 강한 매력은 무엇인가 하면 평범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녹아드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성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강한 어필을 합니다.
어떤 청교도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진리를 따라 일평생 살아온 신자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뜻을 세우지를 않고 한량처럼 노닐면서 살아가면 고난이 없습니다. 뭐 그렇게 사는 게 하나님께서 안타까우셔서 징계를 내리셔서 고난을 받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고난은 없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고난이 있고 우리의 대적이 있고 장애물이 있고 이런 삶이 되려면 뭔가 신령한 목표가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신령한 목표가 있는가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아주 명징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었으면 너희는 위엣 것을 찾으라” 그런데 그 위엣 것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땅에 있으면서도 위엣 것, 신령한 나라의 것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라, 핍박을 받을 것이라” 그 다음에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봉사하며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오직 각성에서 증거하여 환난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하나....” 이게 주를 위해서 살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는 힘입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사람들은 진짜 자신이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느니라” 그러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반드시 신령한 삶의 목표를 갖지 않을 수가 없고 그런 신령한 삶의 목표를 갖기만 하면 우리는 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입니다. 영적인 대적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사주를 받거나 혹은 직접적인 사주를 받지 않더라도 우리가 걸어가는 이 믿음의 길을 방해하기 위해서 준비된 많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특별히 시편에서 악인과 의인의 날카로운 대조를 우리들이 많이 보게 되는데 악인과 의인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도덕적인 차원에서 악한 사람, 의로운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악인은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 데서 오는 악한 삶을 사는 것이 특징인 사람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거룩의 은혜 속에서 살기 때문에 신령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서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되는 사람, 이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제외해 놓고는 악인과 의인의 대조를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악인’이라고 할 때에 악인은 아주 굉장히 광범위한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또 자신이 파멸하기를 손뼉을 치며 기다리고 있는 모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악인입니다. 그 중에서도 여기는 치려고 한다라고 했으니까 아주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고 시인에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의 동질성이 싫어서 그를 박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악인이 나를 치려하나 나는 주의 증거를 생각하느니라” 이것이 말하자면 고난에 대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람을 통해서 내려오는 고난에 대응하는 삶의 경건한 반응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악인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은 이 세상의 자녀들과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자기를 치려고 하고 공격을 해서 고통을 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때리려고 하면 맞고 더 세게 때리려고 하면 피하든지 공격을 하든지 하는 것이 본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정도는다르고 방향은 다르지만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나를 박해하거나 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을 붙들고 해결하려고 덤벼들다가 보면 사실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많은 상처와 고통투성이 되고 자신도 경건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그 사람의 더러움에 자신이 오염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우리가 아무리 선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악한 것과 더불어서 싸울 때는 항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악한 것에 오염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렇게 악인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면서 배운 지혜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면 그 어떤 악인이라도 나를 해할 수 없다. 그 신념과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시인이 23편에서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는 것처럼 커다란 식탁을 차려놓고 주님이 우리에게 먹여주시면서 우리와 주님이 특별한 가족 관계에 있다라고 하는 것들을 악한 무리들을 향해 과시할 때 그들이 우리 때문에는 우리를 건드릴 수 있지만 우리를 가족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신의 덕분에 누구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원리를 터득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이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악인이 나를 치려하나 그들을 대응해서 대꾸해서 싸울 수도 있지만 시인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그럴 때는 말도 되지 않는 자기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악인과 칼을 겨누면서 싸우는 것 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하는 기대와 확신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악인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상황 속에서 정말 보호를 받으며 살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위해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는데 신경을 쓰시지만 나는 그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주의 진리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점점 더 빚어져 가는 이 경건이 연마되는 이런 은혜로운 작용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향해서 신자들을 향해서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오면서 ‘야! 저 인간 하나만 변하면 내 인생이 필텐데’ 그런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 인간 하나만 바뀌면 내 인생이 정말 변화될텐데’ 이런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변하기 전까지는 상황을 변화시키시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상황 때문에 고민하며 하나님을 찾게 되었지만 때로는 상황이 마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주님 밖에 없는 것처럼 그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면서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악인의 박해 주를 모르는 자들로 인해 나의 설음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거기에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갈 길을 보이시고 보다 분명한 길들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거울 삼아서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일들을 그만두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깊이 생각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를 깨달아서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주께서 우리를 위해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해주시도록 그렇게 호소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정금같게 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