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과 정직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그리스도인, 정직의 마지막 등불(잠15:8) 2003. 6. 8주일오후 1
2. 정직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커다란 성공(잠2:7) 2003. 6. 22주일오후 8
3. 정직함 없이 경외함 없다(잠14:2) 2003. 6. 29주일오후 13
4. 정직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잠3:32) 2003. 7. 6주일오후 19
5. 정직한 자가 누리는 자유(잠23:16) 2003. 7. 13(주일오후 26
6. 정직한 자는 하나님이 인도하신다(잠11:3) 2003. 7. 20주일오후 31
7. 정직한 길을 떠나면 어두움입니다(잠2:13) 2003. 7. 27주일오후 38
8. 정직한 자에게 은혜가 있음(잠14:9) 2003. 8. 3 주일오후 49
9. 영혼을 지키는 정직(잠16:17) 2003. 8. 31주일오후 60
10. 정직하지 않고 온전할 수 없습니다⑴(잠2:21) 2003. 9. 7주일오후 72
11. 정직하지 않고 온전할 수 없습니다⑵(잠2:21) 2003. 9. 14 주일오후 85
12. 정직한 자는 미움 받으나(잠29:27) 2003. 9. 21주일오후 98
1.그리스도인 정직의 마지막 등불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고 정직한 자의 기도는 저가 기뻐하느리라’(잠 15:8)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마직만 막 등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아닌 누구에게도 인간의 참된 도리를 가르쳐 준적이 없고 아무리 수양을 많이 하고 학문을 탐구하고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인간의 참된 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주실 때 그들이 특별한 백성이라는 것,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이라는 것, 하나님이 당신이 누구신지 알리기 위한 선교적인 존재로 이 세상에 두셨다는 것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인 삶이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으로서 마지막 등불의 역할을 하게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기억하고 또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오늘날은 정직이 위기를 느끼는 시대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도 그 자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고 사람이 한 그 말은 듣는 이의 해석을 거쳐서 자기 나름대로 파악을 한 후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어떤 점에서 정직이 의사소통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 속에 정직의 정신이 너무 퇴폐하고 현실 야합이 되어서 이제는 정직을 찾아보기가 너무 힘든 시대입니다. 정말 심각하게 부정직한 사회를 살고 있고 더 가슴 아픈 것은 이런 것을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하는 부정직이 만연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정직은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 보다는 동양 사람들이 더 심합니다. 그 이유는 문화가 그것을 널널하게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미국의 동부 신학교를 가서 설교 후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한국 학생들의 부정직 때문에 미국 신학교수 들이 많은 애를 먹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리포트를 베껴 쓰지만 그곳에서는 어름도 없는 일입니다. 한국 학생들이 유학을 와서 리포트를 쓰면 교수들이 도서관을 뒤져서 그 원처를 밝히는 일이 많기 때문에 교수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한번은 캐나다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서는 한국학생들이 전화, 전기를 쓴 후 항상 마지막 달은 요금을 내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유학생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한국학생들은 이제 보증금을 먼저 내고 전기, 전화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서양보다는 동양에 많은데 이것은 문화자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양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동양의 사상입니다. 자기가 100을 가지고 있어도 80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은 생각과 사고가 헬레니즘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분석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 단순한 문화의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결부되어서 그 부정직이 부도덕을 양산해 낼 때는 이것은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시간 10분정도 늦는 것은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100만원 세금을 내야 하는데 10만원을 내는 것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A라고 진술해야 하는데 B라고 진술하는 것, 자기가 죄를 짓고도 그렇지 않다고 진술하는 것은 단순한 문화의 차이가 아니라 타락과 부패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은 올곧은 인간입니다. 이 정직을 영어로는 upright입니다. 처음 인간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확하게 느끼고 분석하고 그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할 때 불균형이 없이 정확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짐승을 이끌어서 아담 앞에 데려오면 아담이 이름을 짓는 광경을 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를 선택하고 그 용어를 말할 때 그 이름이 지시하고 있는 원래의 물체를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통찰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담이 이름을 붙이니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 되니라’ 라고 하였으니 그 아담의 통찰력이 얼마나 올곧고 정확하였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죄가 들어와서 타락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이 올곧은 것이 흩어지게 됩니다. 뱀이 유혹을 할 때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정녕 죽으리라’고 타협 없이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그 뒤에 나타나는 아담의 변명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의 진술이 참된 것을 포함하고 있어도 참된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참되지 않고 왜곡되어서 사실이 아닌 것을 사람들에게 생각나게 유도하는 것은 부정직에 가깝습니다. 타락이 깊어지면서 인간의 부패성은 철저하게 부정직과 거짓과 야합을 하는 것을 봅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심 때문에 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가인이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말할 정도로 인각이 악해집니다.
은폐, 모함, 술수, 거짓이 모두 부정직이라는 천막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실제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서 사람들 속에서 서로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고 심지어는 성도들 간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 서로 얽혀서 악을 은폐하고 부패 속에서 살아가는 구조는 이 사회의 썩은 구조가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의 대상이 되는 세상의 고통 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거짓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책망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 간음, 거짓, 무자비함은 함께 따라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열거 중에 거짓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마음과 생각이 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신자 속에서도 거짓이 신출귀몰하고 안개 속에 가려있는 것 같기 때문에 신자 안에 거짓의 죄를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것이 거짓, 부정직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부정직의 가능성을 기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정직의 회복은 당연히 성화의 한 과정에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정직하지 않은 순결한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정직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거짓을 늘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 늘 거짓 속에 살지만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는 사람은 존재한 수 없습니다. 그런 거짓들이 타고나고 또 죄의 성장과 함께 거짓은 무성하게 살 자란 숲 속에서 죄는 마음껏 생육하고 번성하고 우리의 온 인격과 성품을 뛰어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냥꾼에 의해서 포획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부정직이 커다란 죄라는 것을 정직하게 인식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정직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정직하지 않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 본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하나님과 여러분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풍부한 증거를 보여주는데 수없이 많은 성경 구절 속에서 ‘정직’이라는 한글 단어만 120여 번 나옵니다. 그리고 ‘정직한’ 이라는 용례는 58번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직이라고 할 때는 이것을 성경 전체에서 얼마나 많이 말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고 다시 살수 없다 라는 선지자의 선고를 받았을 때 면벽을 하고 기도하는 말을 기억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평생 정직히 행한 것을 기억하오소서’ 입니다. 인생의 위기 속에서 정직히 살아온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 은혜와 긍휼을 구할 수 있는 훌륭한 소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정직해 지는 것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입니다. 정직에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부정직함으로 내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세상에 불러일으키고 누구에게 손해를 입히게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구약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재판할 때 거짓으로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두세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정직한 증언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신뢰를 쌓아가고 이것이 곧 정직하신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사람에게 대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을 대하여야 사람과의 관계화 하나님과의 관계가 수직 수평적 관계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을 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너무 소수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해야 하는 것은 아는데 사람들과 섞여 살 때 불신실함과 부정직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느 종교적이고 부분적인 시간에만 정직하려고 해도 그 실천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만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교훈을 우리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공격할 때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항복을 하는 장면을 봅니다. 멀리서 왔다던 그들은 옷의 남루함과 곰팡이가 난 떡을 보여주면서 여호수아에게 이 땅을 정복할 때 우리 민족을 살려달라고 요구하고 이제 그들은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일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종을 듭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말을 믿고 화친을 약속을 하고 잠시 후 기브온을 공격할 때 그 사람들은 모두 진멸하여야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인 줄을 알고 난 뒤에도 여호수아는 그들과 맺은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실성을 보여줍니다.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인 여러분은 사회가 아무리 부정직해도 사회의 핑계를 대고 부정직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마음속에는 나는 내가 서있는 이 자리의 마지막 등불이다 라는 고백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 빛을 잃어버리면 내 주위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참된 도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니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어렵다고 하더라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이 부정직한 사회에서 정직한 자로 사는 것은 작은 희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내가 부정직함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죄이고, 심지어는 내가 거짓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자신의 영혼은 파괴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영혼은 정직한 마음에 가장 오랫동안 깃듭니다. 차가운 물에 얼음을 담으면 얼음이 한참동안 안 녹지만 미지근한 물에 담으면 굉장히 빨리 녹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잘 타오르는 불씨이면 우리의 마음은 따뜻한 재와 같습니다. 거기에 묻어 두면 추운 겨울에도 오랫동안 그 불씨가 유지됩니다. 만약에 이글거리는 불씨라도 한 겨울에 차가운 모래에 보존하면 금방 숯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는 정직한 마음에 잘 보존되고 그 정직한 마음은 정직한 삶이 계속될 때 그 정직한 상태를 가장 잘 보존합니다. 그래서 정직이 있더라도 말과 행동, 생각이 거짓과 친밀히 지내면 마음의 틀이 부정직으로 흐트러지고 그리고 마음의 틀이 흐트러지면 하나님의 은혜는 급격히 소멸됩니다. 그러니까 정직해지는 것은 사회적으로, 사람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전기불이이라고 하더라도 차를 타고 갈 때 신호등의 불이 한꺼번에 모두 들어온다면 매우 조심스럽게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건너 방에 불이 나간 것은 작은 문제이지만 폭풍주의보가 내린 깜깜한 바다위의 등대의 불빛이 꺼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뒤뜰에 켜진 쓸모없는 불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폭풍을 만나서 피난할 항구에 빛나는 그 외로운 등대의 불빛입니다. 그런 등대의 불빛은 일반전기가 아니라 축전기를 이용해서 독립적으로 불을 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곳의 모든 불이 정전이 되더라도 여러분들은 정전과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직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다른 은혜라는 발전기로 불빛을 충분히 내면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대통령 후보들이 선거공약을 잘 내세우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들은 늘 정직한 사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대우받는 시대를 만들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 말 추가하여 ‘나는 목사로서 대우를 못 받아도 정적한 사람이 되고, 법대로 살 때 손해를 보더라도 법대로 사는 그리스인을 길러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사람이 대우받는다는 것은 대우를 못 받으면 부정직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들은 모두 일반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전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직하지 않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에 기여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현금을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고 카드 사용을 합니다. 왜냐하면 업소에서 세금을 포탈할 수 없게끔 하기 위합니다. 사람들이 사회 시스템이 정직한 시스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를 어수룩하게 만들어 부정직하게 살아가고 술수를 쓰며 살아가게 하는 것은 정치가와 시민의 책임입니다. 제가 신학대학교에 교수를 있을 때 가끔 신학교 안에서 도덕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 시스템을 만들 때 여기에 은혜 받은 교수가 들어오고 사명 받은 학생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경영자가 들어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순도둑놈들이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처음 시스템을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 은혜 받은 교수나, 사명 받은 학생들이 들어오면 그 시스템에 걸리지 않고 그 안에서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제가 교수로 있을 때 거의신앙이 없는 직원 한 사람이 들어와서 소송을 낸 적이 잇습니다. 퇴직금과 임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소송을 낸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책임 있지만 영수증도 없이 그냥 현금으로 만나서 준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사회 시스템이 정직한 시스템이 되도록 하여야 하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사회가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전에 70년대에 어떤 사람이 미국 영주권 받으면서 그 미국 사람이 하는 말이 다음에는 호텔에서 호텔 물건 가지고 오지 마십시오. 라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의 어느 학생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 강도사 고시를 보는데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가 몇 년 전에 전도사 시절 때 어느 교회 설교를 하러 가는 데 5분 늦게 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 곳은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이야기이고 일반전기 이야기입니다. 일반 전기가 정전이 안 되게 하려면 많은 전력시설을 가추고 어느 때이든지 정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특별전기입니다. 세상이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는 길입니다.
6.25시절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남으로 3.8선을 넘어오신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밤을 새워 넘어오려고 한 것이 날이 밝고 보니 북한 군 처소였는데 그곳의 북한군에 잡혔습니다. 그분은 순교의 각오로 자신이 지금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남으로 가고 있었노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무사히 남으로 내려온 후에는 피난을 가지 못해서 집 마루 밑에 숨었는데 마을 주민의 신고로 북한군에 다시 잡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은 이교회의 전도사이고 마침 피난을 가지 못하여 이곳에 숨었노라고 순교의 각오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북한군에 많은 그리스도인을 만났지만 이 젊은이 같이 정직한 사람을 은 처음이다 라고 말하면서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항상 정직해지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때 성경은 두려움을 갖는 것에 대해 많은 경고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이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대담함과 항상 담대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에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제나 공산군이 칼을 들이대고 고문하는 것이 힘들어 변절하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다더라 라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변절을 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실망스러웠겠습니까? 핍박을 받아서가 아니라 핍박이 온다더라는 소문만을 듣고 미리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담대해야 합니다. 정직히 사는 사람이 아니면 담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편이시다. 지금 나는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고 지금 내 말과 행동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칼날 같은 신앙의 용기를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대학교에 교수로 있을 때 졸업 시험 때 컨닝을 한 학생을 0점 처리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다음주 매일 교수실로 찾아와서 매일 용서를 빌었지만 5일 쯤 지나도 용서해준다는 말이 없으니 그 중 한 학생이 ‘교수님은 학생시절 때 컨닝한 적이 없습니까?’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의롭지도 않고 올바르지는 않지는 그렇게 속이면서까지 점수를 받는 적이 없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도 정직한 마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그 은혜가 금방 부패하고 그 정직한 마음의 틀을 유지하려면 정직이 몸에 배어서 그런 정직한, 올곧은 삶을 매일 매일 살아야 합니다. 교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투명하여 사람들이 신뢰하고 의심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을 하면 그것이 정직이라고 믿고 판단의 기초가 되어서 또다란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라고 말합니다. 제사는 제물을 잡고 복잡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 제사를 기초로 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한 방식입니다. 원성경은 제사라는 단어를 복수로 쓰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제사를 많이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토해바’라는 히브리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혐오’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술을 먹느냐 담배를 피우느냐 안 피우느냐가 교회 일꾼을 세우는 기준으로 세우는 때는 지나가고 이런 시대에는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복제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장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담배 피우는 사람을 장로로 세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담배는 문화의 차이입니다. 그렇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의 저작권을 침해해서 복사해 불법으로 판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의 장로나 집사가 되었다는 사람의 회사가 탈세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면 저는 그 직위를 모두 박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술을 먹고 담배를 먹느냐는 것으로써 예수 믿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던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기준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업계에서 인정하는 관행처럼 되었다고 하더라도 거의 모든 학생들이 컨닝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는 공무원 사회에서 용납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켜져도 되고 안 켜져도 되는 그런 일반전기입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경시청의 과장 한 사람이 뇌물을 먹었다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격렬하게 시위를 하던 장면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찰청장이 그랬다면 신문에 날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신문에도 안 납니다. 저는 그 격렬한 시위를 보면서 일본이란 나라가 참 부러웠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 앞에 칭찬을 받았던 이유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지 않더라도 기업을 해도 정직하게 하고, 공직생활을 해도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 꺼진 등불을 항구에 높이 세워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삶이 없는데 은혜를 어디에 씁니까? 왜 은혜를 받습니까? 왜 성령으로 충만해지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사로잡히려고 합니까?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삶으로 진실과 정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이 시대에 마지막 등불이 될 수 있겠는가를 보여주는 그 삶을 위해서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적당히 섞여서 이 세대에 삶으로 많은 은혜를 부패시키고 잊어버리고 같은 삶으로 돌아가고 돌아가는 삶을 계속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에서도 정직히 살아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마지막 등불입니다. 부정직한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자신의 부정직한 삶 이전에 정직하게 사는 삶이 고향처럼 느껴져서 생각에 잠기는 삶을 살라고 여러분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2. 정직한 자를 위해 예비된 커다란 성공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어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니 (잠 2:7)
오늘은 정직이 중요하고 올바른 것인데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직해지지 못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우선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고 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본문을 ‘그리고 정직한 자들을 위하여 커다란 성공을 쌓아 두셨고, 순전함을 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방패가 되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의 하나님께서 정직한 사람들을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의 히브리 단어는 ‘차판’ 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쌓아두신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지혜의 ‘투시아’는 다른 성경 구절에서 지혜라고 쓰인 때도 있지만 이 본문 앞에 나오는 지혜라고 나오는 단어와는 다릅니다. 또한 이 ‘투시아’는 구약 성경에서 이사야, 시편에 많이 나오는데 커다란 성공, 성공하게 하는 은밀한 계획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편 119편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완전한 지혜를 주신다’ 에 나오는 단어와도 다릅니다. 그래서 이 완전한 지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 지식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성공을 위해 하나님이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셨다 혹은 커다란 성공을 예비하셨다는 뜻이고 저는 후자 쪽의 해석을 더욱 좋아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라고 말합니다. 행실이 온전한 자라는 단어의 ‘툼’은 완전한, 순전한 이라는 말과 인생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결합한 것입니다. 정밀하게 말하면 순전하게 인생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방패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정직한 자가 행실이 온전한 자라는 말로 설명되고 커다란 성공이 방패가 라는 말로 설명되는 대구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선 정직한 자를 행실이 온전한 자, 순전하게 인생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즉각 정직하지 않는 사람들이 걷는 삶이 하나님 앞에 순전 할 수 없다는 것을 봅니다. 정직하지 않는 사람이 헌신적일 수 있고 정직하지 않는 사람이 큰일을 할 수 있고 그리고 정직하지 않는 사람이 놀라운 수환과 지혜로 일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직하지 않아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큰 것, 높은 지위, 많은 사람들의 지도자,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정직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에게 주목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 있고 부러워하는 지위에 오를 수는 있어도 순전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살을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사람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수시로 상기시키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에게 기름을 부으러 이새의 집에 갔을 때 큰 아들로부터 외모와 신장을 보고 이 사람인가 할 때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본다는 것을 일러주셨습니다.
만약에 정직한 길을 걷지 않는 자가 모두 실패하고 모두 낮은 지위에 있을 수밖에 없고 한 번만 정직해지면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고 높은 지위와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정직해지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부정직해져도 갑자기 사업이 망하고 놓은 높은 지위에서 떨어지고 지도자로써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번 정직해 짐으로 하던 일이 잘 안될 수 있고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번 정직해짐으로 많은 희생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부정직한 것에 대한 벌을 나중에 하나님께 적게 받더라도, 사람들은 항상 그 벌이 죄에 대한 것보다 적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여튼 하나님께 벌을 적게 받더라도 지금은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아주 미묘하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과 온전하고 순전하게 인생의 길을 걷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선택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하고 순전하게 사는 삶이 없어도 나는 순간의 이익을 위해 정직을 포기하고 부정직과 야합하면서 살겠다고 선택하면 잠시는 번성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막 벤 논둑의 풀이 잠시는 번성하는 것 같지만 후에는 곧 잎이 마르는 것과 같습니다. 잠시는 번성 하는 것 같지만 그 성공도 꽃이 떨어지고 잎이 마르는 것 같이 곧 떨어집니다. 의인의 번성은 끝이 없지만 악인의 번성은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선택하고 수시로 정직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유혹과 위기와 도전이 찾아올 때 부정직해지는 대가로 잠시 번성하는 삶을 선택하는 대신 정직해지고 순전하게 살려는 사람에게 잠시는 고난을 당하는 것 같고 손해를 당하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손해를 보고 고통을 보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결코 고아와 같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영혼의 구원, 즉 죄로부터의 구원 뿐 아니라 죄의 결과인 비참으로부터의 구원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 전 포괄적인 성격이 구원 안에 있으므로 우리의 물질적인 문제나 사업의 어려움 여러 가지 어려움 앞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야 하고 또 하나님만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사업일이나 직장 일들은 자기가 자기의 지혜로 스스로 알아서 하고 은혜 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 때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런 양분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합니다. 그래서 돈이 없고 직장이 없고 사업이 잘 안될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지키기 위해서, 정직을 지키기 위해서 부정직해지는 유혹을 거절하면 잠시는 고난을 받고 박탈당하는 것 같지만 그에는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라는 미래가 있습니다. 정직해졌다는 이유 때문에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다른 사업으로 하나님이 성공을 주셔서 선을 이룰 것이고 정직해졌다는 이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면 하나님이 더 좋은 직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실제로 사회생활과 직장생활을 해보니까 정직해 질까 말까를 갈등하는 사람에게는 정직해지는 것이 어렵지만 정직해지자라고 뜻을 세운 사람에게는 그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왕궁에서 먹고 마시면서 잘 양육해서 바벨론을 받드는 고급인력으로 왕은 삼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제는 왕궁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그것들 중에는 율법이 금하는 음식이 들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의미상으로 왕이 상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먹고 마시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왕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큰 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직했을 뿐 아니라 지혜로워서 물과 채소만 먹겠노라고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 이전에 뜻을 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그 이전에 그들은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신앙의 순전함을 지켜야겠다는 뜻들 세우니 하나님께서 피할 놀라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완전한 지혜라고 번역된 ‘투시야’입니다.
보십시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출세 , 입신양명, 재물,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고 살다가 사라질 것이지만 순전한 삶을 살아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를 누리며 사는 것은 저 나라에서도 계속될 우리의 최종적인 유산입니다. 그리고 매 순간의 삶에서 용기와 믿음으로 정직해지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10년을 넘게 신학을 하고 학교를 다녔지만 늘 바빠서 친구와 어울려서 지낼 여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미안하여 4년 동안 공부를 하고 졸업을 앞두고 1박 2일로 친구들과 어울려 엠티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학우들이 모여서 간증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학우의 간증이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가 중학교를 나오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후에 목회자가 될 생각으로 성경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고등학교는 나라에서 인정해주는 정식 고등학교가 아니었습니다. 정식고등학교가 아니었다는 것은 졸업을 하고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을 나와 목사가 되기에는 문제가 있는 학교였다는 말입니다. 후에 그사실을 알고 중간에 다니다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1살 정도 경에 다시 고등학교를 갈 결심을 하고 공부를 하는데 자기 실력으로는 정상적으로 고등학교 갈 실력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수학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동안 늘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날이 되었고 수학 시험을 보는데 문제지와 정답이 달린 답안지가 함께 자기에게 왔다고 합니다. 순간 이 젊은이의 마음에 ‘정말 놀랍구나’ 6개월 동안 간절히 수학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는데 기도 응답으로 이 답안지가 왔다고 생각하고 답을 빈 시험지에 그대로 옮겨 쓰고 그 학교에서 입학 장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3년을 등록금 없이 다녔다고 그 자리에서 간증을 하였습니다. 시험 당시 많은 선생님들이 사라진 답안지를 찾으러 이 교실 저 교실로 다녔지만 그 학생은 모르는 척하고 나중에 혼자 그 답안지를 소각하였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학생들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기는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 네가 기도를 많이 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다.라고 그 학생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은혜를 구했을 때 그런 방법으로 응답이 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그 당시에 그 모범답안지가 여기에 같이 왔습니다. 하고 정직하게 선생님에게 주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당신은 이 답안지가 여기에 잘못 왔다고 선생님에게 말했다고 해도 당신은 그 학교에 붙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번양보해서 만약 수학이 0점 나와서 떨어졌다고 해도 하나님은 지금보다 더 좋은 길로 인도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길로 인도하지 않아서 혹시 신학대학을 못 갔어도 하나님이 새롭고 선한 길로 인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이 선한 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삶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시오. 나의 인생을 맡아 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걸어오다가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나와 함께 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 되었고 주의 진리를 행하다가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친밀함을 많이 보여주십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친밀함이 그를 경외하는 사람에게 있으며’ 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순전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은 정말 살아계시고 그분을 믿으며 사는 것은 행복하고 그분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간증을 남기기 위해서는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많은 날들을 눈물과 희생으로 살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빛이 되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의 존재가 tot별처럼 되기 위해서, 어둠을 비추는 단 하나의 등불로 남기 위해서 그는 너무 긴 시간을 끊임없는 희생과 자기 부인 속에서 쉽게 걸어갈 수 있는 부정직한 길을 포기하고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 친구도 없는 외로운 길을 선택함으로써 이 등불로서의 존재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그 불빛을 잃지 않고 소금의 짠맛을 잃지 않는데 있지, 결코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물질을 소유한다거나 엄청난 일을 많이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간 적이 있었는데 저녁예배를 드리려했지만 1시간을 돌아다녀도 교회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도시에 다닥다닥 교회가 붙어있는 현실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생활이 해결되고 자녀들의 교육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으면 이런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역지를 찾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시골에 교역자를 파송할 때 교역자의 생활과 자녀의 교육을 보장해주면 사역할 교역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시골은 비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목회자가 커다란 성공을 지닌 세속적인 비전을 바라보는 것 보다는 시골이든지 서울이든지 가서 목자 잃은 양같이 곤고하고 유리하는 영혼과 같이 울다가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물론 서울에서 큰 교회를 하면 신문에도 나고 잡지에 나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가 얼마나 커다란 성공을 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순전한 삶을 살다가 죽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정직함을 일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영혼과 정신이 순결하지 않고 혼탁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흉내는 내는데 가슴을 찢는 순결한 외침, 생사를 건 신앙의 정조,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너희 열조가 애굽에서 섬긴 우상이나 이 가나안 족속이 섬긴 우상이나 섬길 자를 택하라, 그러나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순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순간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직히 행하면 망하고 나는 세상에서 외톨이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외톨이가 되었습니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정말 순결한 사람 요셉이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짓밟혔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쓰시려는 사람은 귀하게 쓰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투시아’를 쌓아두신다고 했습니다. 커다란 성공을 쌓아두신다고 했습니다. 정직하면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고 외톨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커다란 성공을 쌓아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되려고 할 때 많은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막아주십니다. 그런 이유로 고난을 당할 때는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고통 가운데 다가오십니다.
마지막으로 짧은 동화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어느 나라에 임금이 외동딸과 사는데 사위에게 왕위로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그 나라에는 없는 이상한 꽃씨를 수입을 해서 그 꽃을 가장 잘 키워오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공고를 하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꽃씨를 받아 가서 커다란 화분에 정성껏 비료를 주고 가꾸었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그 화분들을 싣은 마차가 왕궁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 나라에는 보지도 못한 아름다운 꽃들이 왕궁으로 들어왔지만 모두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꽃은 없는 화분을 가지고 온 젊은이가 와서 하는 말이 “폐하, 폐하께서 주신 꽃씨를 가지고 예쁜 꽃을 피워보려고 정성껏 물을 주고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고 정성을 기울였지만 결국은 싹도 띄워보지도 못하고 썩히고 말았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였습니다. 그랬더니 임금이 저 사람에게 공주를 주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임금이 준 꽃씨는 삶아진 꽃씨였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의 정직함에 이 임금이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든 분입니다. 이 세상의 일로는 그분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땅위에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리 여러분이 높은 지위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최선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순전하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을 팔아서 살 수 있는 것은 내 목을 겨누는 칼이 됩니다. 그 신앙의 정절을 팔아서 살수 있는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키다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대화, 상거래, 윤리적인 삶, 나라와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순전한 삶의 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예기치 않은 커다란 성공을 예비하시고 위기 시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서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정직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3. 정직함 없이 경외함 없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히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느니라” (잠 14:2)
지난 시간에는 정직한 자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지혜로 그들을 위해 커다란 성공을 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정직한 것과 하나님을 경외함의 관계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곧 정직한 자와 패역한 자,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는 자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직한 삶이라는 것은 정직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정직한 영혼, 혹은 정직한 정신을 새롭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 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정직한 것을 오늘날은 과소평가하는데 한 사람이 말에 있어서 정직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정직의 질서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사람의 사고는 질서로 정돈되어있고 그리고 그런 사고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직한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 말에 있어서 정직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고 믿어줍니다. 그렇게 믿어주다가 어느 순간에 그가 정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그 후부터는 재해석해야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정직하지 못하면 그의 마음도 정직하지 습니다. 정직한 틀이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틀이 정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가 부정직하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자주하고 부정직하게 살아가는 삶을 때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때로는 사소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선의의 부정직이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이렇게 변명하면서 부정직해 한 삶을 계속 사는 것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마음의 틀이 부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것이 고통스럽고 부정직한 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한번 정직해짐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사람은 계속 부정직하게 살아가고 그가 사귀는 사람들도 대부분 부정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의 틀과 맞는 부정직한 말, 부정직한 생활, 이런 것들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정직에 관해 생각할 때 사실은 부정직하면서도 부정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융통성 있다라고 자신을 평가하고 어느 선을 넘어서는 자신은 매우 투명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부패함은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것이고 인간의 마음의 틀은 삶의 전체적으로 부정직한 마음이 영향을 미침으로 자신은 머릿속으로 위험하지 않는 수위까지는 융통성있게 살지만 어느 한도가 넘으면 자신은 매우 정직해지고 투명하게 살 것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틀림없이 정확한 삶, 작은 일에 정확한 사람이 매사에 정확하게 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일에도 불의합니다. 그리고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일에도 충성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실 때 단번에 어마어마한 것을 맡기시진 않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을 주고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에 불합격하면 더 이상의 큰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합격하면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십니다. 흔히 작은 돈을 꾸어가고 갚지 않는 사람들은 큰돈을 구어주어도 정직하고 신용 있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행에서도 작은 돈을 먼저 빌려주고 잘 갚으면 그 점차 한도를 늘리는 것입니다. 작은 재물에 불의하고 정직하지 않는 사람들이 큰 재물에도 불의하고 부정직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오늘 날 신문지상에 오르는 대북사업에서 돈이 오가는 것을 보고는 처음에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위 떡고물이라는 150억 혹은 얼마의 돈을 보고는 많이 실망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므로 남북관계를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들이 도덕성을 잃고 그렇게 행한 커다란 일들도 무엇인가 자신의 영달과 이익이 개입되었을 것이라는 인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진국일수록 모든 일이 투명합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무엇인가 공개하지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은 발달한 나라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공개하고 사람들이 확인할 수 없도록 자꾸 덮어씌우는 것은 정부에서도 사라져야 하고 교회에서도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들 이 공정하고 공평해야 합니다.
작은 돈을 남에게 꾸고 갚지 않거나 작은 돈에 계산이 부정확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정확하게 하지 않는다든지 물질의 문제에 부정확함이 있다든지 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있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 앞에 큰일에도 정직하고 분명한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은 뭐라고 변명을 하든지 정직하지 못한 이유가 하나님이고 이웃의 행복인 경우는 없습니다. 모두 자신에게 부정직한 것이 이익인 이유이기 때문에 욕심, 탐욕, 자기사랑, 자기 정욕이 부정직하게 만듭니다.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받았으면 보는 사람이 없어도 메모지에 연락처를 남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후에 배상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정직한 이세상의 마지막 등불입니다. 이런 일이 어렵더라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정직함으로 얻는 모든 재물과 기회, 이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집을 5000만원주고 샀는데 이사 갈 때 보니 1억으로 올랐으면 5000만원은 하나님이 주신 소득입니다. 양도소득세를 내고 10일조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는 정직해지지만 큰 것에는 정직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변명을 하든지 기반이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 은혜다라고 생각하면 하나님 것이라는 생각이 분명한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정직해지면 복잡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면 목사님은 그렇게 삽니까? 라고 물으면 저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명백할 때는 회개를 합니다. 그렇게 대가를 많이 치르고 살아야 합니다. 그 대신 여러분은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시고 하늘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해주시고 세상을 이기며 살게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몸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닌 믿음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이생명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구속받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정직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도자의 작은 부정직은 지도자가 아닌 사람의 커다란 부정직보다 훨씬 더 커다란 죄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의 위치를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지도자라면 좋은 차 타고 큰 집에서 살고 월급도 많이 받고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도자의 길은 피를 흘리는 길이고 살을 깎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 걸어가는 길을 걸어가면서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이 지도자의 길입니다. 기업을 잘 경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잘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많은 고생을 하고 종업원들을 가족처럼 끌어안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분투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삶을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정직한 나라에서는 공통적으로 부자를 모두 존경합니다. 그러나 부정직한 나라에서는 부자를 도둑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탁월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의 길을 가려면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마음속에서의 욕심이외에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은 스스로 지도자가 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사회적 정직성을 보고 교회의 지도자도 뽑아야 합니다. 교회는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과 중직자가 되려는 사람의 사회적 정직성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평가하고 선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작은 일에 정직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정직한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닌데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뇌물을 받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주지 않는다든지 공정하게 처리하면서도 뇌물을 받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영적 상태는 혼탁합니다. 기도를 안하는 것은 아닌데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닌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애매모호한 혼탁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외식하는 생활입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많이 헌금을 해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보고 헌금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헌금을 하는 사람을 바랍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꼭 저를 만나고자 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났더니 그 자리에서 봉투를 주면서 감사헌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옆의 전도사님을 주고 그 거액을 헌금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시험에 들어서 나중에 헌금을 다시 돌려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부정직한 사람들이 대체로 외식에 빠지고 그가 정직한 행동을 했는데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끼고 박탈감을 느낍니다. 결국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행복해지는 영혼의 참된 기쁨이 업는 사람이 사람의 시선을 의지하고 사람에게서 만족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이 부정직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얽혀서 살아갑니다. 소득이 적으면 십일조하고 많으면 하지 않고 정직해 지는 것이 이익이 되면 정직해 지고 정직해 지는 것이 불이익이 되면 부정직해지는 이렇게 일관성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는 정직해지고 관공서가서는 부정직해지는 사람, 권력가진 기관에서는 정직해지고 다른 곳에서는 부정직해지는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은 부정직한 것입니다. 그가 삶 속에서 우발적으로 정직해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정직과 부정직을 오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세인들이 사람을 보고 구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부정직한 가운데서 대충 살아가는 삶 속에서 순결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순결은 어떤 열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순결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것인데 그 사랑은 죄악을 용납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이 보시는데 어떻게 거짓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런 정직의 문제와 순결을 문제가 떼에 놓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의 감동으로 땅을 하나님 앞에 바치기로 하였는데 후에 돈을 보고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부를 떼어놓고 일부를 바치면서 이것일 전부라고 말한 뒤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돈을 모두 바치지 않으면 죽는구나를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기가 특별히 비상한 부흥의 시기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악을 다루실 때 다른 방법으로 다루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렇게 심판해서 지금까지 모두 죽이셨다면 교회는 시체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시기에 교회가 태동이 되어서 세워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계시다는 엄중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어내지 않으면 교인들이 스스로 교회를 밟아버릴 사태를 우려한 하나님의 처벌이십니다. 그러니까 순결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교회 전체적으로 들어오는 더러움의 원흉을 처벌하시고 다스리시면서 교회의 전체의 순결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직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달려가는 교회의 매달린 무거운 돌덩이라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들의 죄악이 순결을 헤치고 여러분들의 부정직이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도록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정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지 않고 순결할 수 있습니까? 순결하지 않는 사람속의 사랑이 정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사이가 좋고 서로 사랑하고 신뢰할 때는 감출 것이 없습니다. 뭔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게 되면 자꾸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직의 근원은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정직에서는 순결을 이야기 할 수 없고 신앙의 정절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부정직해는 이유를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패역함입니다. 부정직해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사람, 정직한 사람과 부정직한 사람을 모두 똑같이 여기신다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너무 억울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많은 손해를 보고 때로는 회복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고 사는 사람과 부정직한 사람을 같이 취급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부정직한 사람은 수시로 변해서 자기를 보호합니다. 핍박받을 때 피하고 손해를 볼 때 이익을 보고 두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탈을 바꾸어 쓰면서 실리를 챙기면서 살아갑니다. 한사람은 세상과 짝하며 사는 삶이고 한 사람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예수님을 붙들면서 사는 생애입니다. 그러데 하나님이 이 두 사람을 같이 대우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합니다. 하나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자녀들에게 그 정직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정직을 배워가지 않으면 노력이 없어도 그 아이는 저절로 부정직한 아이로 자라납닙니다.
우리는 이사회를 부정직한 사람이 살기가 굉장히 불편하고 힘든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실현을 하고 훈련을 함으로써 이 교회에 지체들을 모였을 때 정직한 사회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정직한 것으로 얻은 것은 남의 자원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고 정직하게 얻을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그렇게 자신을 훈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이 세상에서 어울리며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걱정이 밀려오는데 모두 기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부정직해짐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마음이 아픈 것은 이것이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정직해 지도록 해야 합니다. 부정직을 옹호하거나 용인하는 것에서 어떠한 이득을 얻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근시안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환란 날에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 내게 온 고난입니다. 고난의 파도는 높고 내 살을 덮지만 나는 하나님편이고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환란 날에 예전의 잘못이 생각나서 하나님 용서해 주셔요라고 말하는 것은 애매히 당하는 고난입니다. 당연히 자기에게 올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놀라운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럼으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러면서 평생 나는 하나님 편입니다. 세상의 부정직을 통해 오는 모든 것은 주님이 제게 주시는 것 이 아닙니다. 주님은 저의 영원한 기업입니다. 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전에 은행에서 돈을 찾았는데 돈이 더 많이 온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행에 갖다 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은행에서 더 들어왔다고 해서 이것을 내가 가질 수 있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정직하게 얻은 것이 아님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일단 내가 소유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유혹이 생기고 돈을 갖다 준다고 해도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순간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마음의 정결함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시다, 어떤 환란과 시련이 오더라도 하나님이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라는 이런 담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는 정직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축복을 해주심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축복, 깨끗하게 부자가 되고 깨끗하게 높은 지위에 오르고 깨끗하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게 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한 투시아입니다. 커다란 성공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정직한 사람들에게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정직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잠 3: 32)
몇 시간에 걸쳐서 설교를 들었습니다만은 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정직하게 사는 이 일은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쉽지만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겨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한 번 정직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해야 하고, 단 한 번 정직해지는 대가로 많은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이 세상에서 문제없이 살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정직해진 것 때문에 고난의 가시 밭 길을 걸을 수도 있고, 한 번 정직해지는 것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직해지는 것이 쉬울 것 같으면 정직하게 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정직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밝은 태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 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정직하게 살지 않은 사람들의 앞길에는 양심의 번민과 그리고 두려움 같은 것들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정직하지 못하고 불의한 사람이 의롭고 의로운 사람을 박해할 때, 그 의롭고 정직한 사람이 박해를 받는다는 것 때문에 불의한 사람들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사람들이 오히려 정직한 자의 피흘리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정직해지는게 힘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직해지는 것이 힘든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 드물고, 부정직이 일반화 되어 가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저는 정치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늘날 일어나는 노사의 갈등도 제가 보기에는 노동자들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서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죠,. 그렇지만 좀 더 면밀하게 보면 이렇게 노사간의 갈등이 있어서 공장이 멈추고 철도가 파업을 하는 이런 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모든 상황이 지속되는 궁극적인 이유가 사회가 부정직하기 때문에 치루는 대가라고 보는 것입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양심적이고 투명하게 기업을 해서 그것을 공개할 수 있는 법적인 정직성과 투명성들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근로자들에게 큰소리를 칠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이 만큼되는 상황에서 의식이 생긴 노동자들에게 파업하지 말아라, 데모하지 말아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발씩 양보해서 어떻게든지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투명하게 해 나가고, 근로하는 사람들은 산업의 터전을 이루면 데모할 일도 없다라고 하면서 사회적인 합의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못하게 하는 것이 부정직입니다. 저는 한 번 음식점을 경영하는 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는데, ... 80년대 90년대까지 강남에 있는 음식점들이 엄청나게 성행습니다. 어마어마한 음식점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IMF때 다 문 닫았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회사의 비자금이 끊어지니까 그 고급 음식점에 와서 밥먹는 이들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금이라고 하면 눈먼 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다 부정직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이 우리 나라가 한 때 유실수를 심자고 해서 심었습니다. 그런데 또 나무가 다 바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실수는 관리를 잘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볼상 사나운 것은 ... 길거리에 사과, 은행..이런게 달려있으면 그것을 따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걸 왜 땁니까? 그게 자기 것입니까? 얼마 전에 시에틀에 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과나무가 도로변에 가득해서 열매가 떨어지는데 학교 가던 아이들이 다 주워서 나무 아래 갖다 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물어봤다고 합니다. ‘너희들 왜 그거 안가져가니?’ ‘아저씨 그거 우리거 아니예요’ 그러더라는 것이죠. 다 부모들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그거 하나 먹고 싶으면 과일 가게에 가서 사먹고, 능력이 없으면 꾹 참지.. 그걸 올라가서 따먹겠다고...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나 직장에 다닐 때 보면 말이죠. 눈먼 돈은 아무도 주인이 없으니까 마구 쓰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그런 풍조들을 가끔 교회에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부정직한 것이죠. 그러니까 그 큰 음식점들이 전부다 도산하는 것입니다. 부정직하게 번 돈으로 먹고사는 산업들이었다는 것이죠. 그게 다 무너졌던 것입니다. 기업을 하다보면 접대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회사의 기업카드를 만들어서 회사의 높은 사람들이 허랑방탕하게 마구 사용하고 ... 옳지 않습니다. 부끄럽고 기가막힌 이야기이지만 신학교에서도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있는 총무과장이 말하는데 학교가 망하고 넘어가고 하는 와중에서 카드빚 갚으라고 독촉이 오는데 하루에 400만원씩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학교 이사장 부인이 가서 롯데 백화점에 가서 옷 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미쳤다, 미쳤다’ 했습니다. 학교 이사장 부인이 왜 그 카드를 가지고 자기 옷을 삽니까? 한주간 동안에 440만원.. 10년전의 일입니다. 미친 사람들입니다. 이런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도둑질입니다. 이런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앴습니다.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신학대학에 다닐 때 감사를 했는데 총학생회에서 1억인가 2억을 썼는데... 59퍼센트가 식당영수증으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물론 그런 비용이 안들어갈 수 없죠. 그런데 59%가 밥값으로 썼다는 것은 얼마나 굶주렸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공금이라는 돈을 엉터리같은 방법으로 썼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교직원들에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수전노처럼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 하지만 쓸 때는 항상 내 일이라도 .. 내 재산이라도 투자할 가치가 있겠는가를 물어보고 사용하라.. 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개념들을 가지고 있냐 하면.. 임자가 없는 것은 나도 소유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것 이외의 것은 다 남의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목사님은 저렇게 심각하게 하는가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당연한 이야기로 여기지 않는 겁니다. 주인이 불분명한 것은 나도 한 번 손을 내밀수 있다는 게 아니라 내건 내거고, 남의 것은 남의 것입니다. 내게 아닌 것은 다 남의 것입니다. 내 소유가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부정직한지 보세요.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건이 모두가 독직사건입니다. 언제나 청렴한 정치가를 만나봅니까? 뜻이 좀 있나 해서 찍어주면 뒤에서 호박씨 까고, 살아있는거 같아서 찍어주면 주변의 사람들이 해먹고 말이죠. 주변에 까마귀처럼 덤벼들어서 고기 뜯어먹듯 하고, 개떼처럼 사라지고... 언제까지 슬픈 표정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까?
정치를 하면.. 기업을 하면 다 잘먹고 잘살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걸 지탱해 주는 것이 자기 자신의 지도자적인 사상이고 청렴한 사고라고 하는 것이죠.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 가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기업을 해서 억수로 돈을 벌었는데도 가난하더라.. 이런것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는데도 가난하더라.. 왜?.. 다 벌어서 남줬기 때문에... 설교시간에 이야기한대로 벌어서 남줬다더라는 이야기를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라도 볼 수 있어야 하잖아요. 사회가 너무 부정직합ㅈ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별명은 ‘정신나게 하는 존재들’이에요. 정신 못차린 이세상에게 정신 나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아닌 지점에서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직원수련회를 갔는데.. 미디어 사역국에서 이런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교회의 프로그램들을 불법으로 복제해서 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죠. 나는 말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컴퓨터를 사면 거기에 프로그램이 따라오고, 또 필요하면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이지. .. 그거를 그 사람들이 죽어라고 힘들여서 만들었는데 다 베껴서 쓰면.. 그거 경찰에서 수사 나오면 줄줄이 구속입니다. 교회에 급습할 일이 없겠지만은 회사 같은 경우에는 다 급습해서 구속되고 그래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밤 잠을 안자고 코피를 흘리고 연구를 해가지고 책을 만들었는데 그걸 베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냐 하면 말이죠. ‘생애 한가운데’라는 소설을 쓴 작가에 의해서 해적판이라는 말이 처음 생겼는데 말이죠. 한국에 와보니까 자기는 사인 한 적도 없는데 자기 책이 억수로 찍혀서 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해적들이 하는 짓이다 해서 해적판이라는 말이 생긴겁니다. 근데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한 죄의식이 없이 복제를 해서 썼어요. 그러데 우리의 행한 이것이 얼마나 악했는지 한 번 보세요. 미국에서 지적소유권을 들고 80년대에 나왔을 때, 우리는 잘 사는 나라에서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을 했죠. 몇푼이나 된다고... 그런데 그 사람들은 머리가 돌 정도죠. 우리 기독교 서적같은 경우에는 그들에게는 안중에도 없는데 의학서적들은 거기에서 박사급되는 사람들이 여러명이서 몇십년간을 노력해서 내놨는데.. 돈십만원씩 해도 팔리는 거예요. 그런데 한 권을 한국에 가지고 들어와서 그거를 복사를 해.. 그러면 만원도 안되요.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끼리 돌려서 보면 이해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복사를 해서 컨테이너에 실어서 미국으로 수출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책이 두권 나왔는데 한 권은 10만원이고 하나는 만원이예요. 그러니까 저자들이 책이 팔릴 때가 됬는데 안팔리는 거예요. 불법복제된 것들이 팔려나가는 거예요. 특히 이 구라파 사람들은 이런 부정직에 치를 떨거든요. 이조시대라고 해서 정조관념이 철저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 사지를 찢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람 폈다거나 그러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세금을 떼먹었다고 하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사해서 팔았다는 것은 사람으로 생각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영국에서 살 던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왕실의 다이에나가 이혼하기 전에 소령하고 스캔들이있었죠. 그게 다 베일에 가려진 것인데.. 그 사람이 나쁜 남자가 그것을 터뜨려 버린 것이죠. 그 대가로 받은 돈이 우리 나라 돈으로 40억이라고 해요. 그리고는 그 사람은 영국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되어 버렸죠. 영국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말이죠. 어디에 사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인간으로 생각지도 않아요. 그런거예요. 그런데 그걸 컨테이너에 실어서 수출을 하는거예요.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생도둑놈이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말이죠 전기도 쓰면 요금도 다 내고 와야 하는데... 캐나다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은 선불을 받고 예치해 둔다고 합니다. 왜냐면 마지막달은 항상 떼먹고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갈 때마다 얼굴에 똥물을 뒤집어 쓰는 기분입니다. 정말요. 정말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캐나다의 전력공사, 전화공사에 찾아가서 한국학생들이 얼마나 떼먹었길래 그런 말을 하냐고 하면서 한꺼번에 물어주고 오고 싶은 심정이예요. 대신해 다라고 하면 돈만주면 내가 대신해 주고 오겠어요. 챙피해요. 이런 부정직들이 우리들이 자녀교육을 잘못시켜서 그 녀석들이 가서 그딴짓 하면서 나라 망신 다 시키는 거예요. 캐나다 토론토에 가서 한국에 대한 반응을 알아보니까.. 한국사람은.. 가재비 눈을 뜨고 이리저리 눈치를 본다는 시늉을 합니다.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비춰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정직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장에는 이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고난이 오면 거짓말고 피하고, 시련이 오면 사기로 피하고, 그러면서 고비고비를 넘겨요. 그걸 처세술이 뛰어나다고 말할지는 몰라도 ... 순발력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모두가 벤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을 정신차리게 해 주는 존재들입니다.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먼저 정직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옛날에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인데, 419때 이승만 정권이 부패하면서 교회마다 정부 타도해야 한다고 목소리가 높았던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패한 정권 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던 교회가 나중에 한전에 걸렸어요. 교회가 도둑전기를 썼어요. 지금은 웃지만 예전에는 그런게 많았어요. 그래서 한전에서 나와서 한 번씩 해보는 것이 있는데 두꺼비집을 내리고 온집을 다니면서 불켜진 전기가 있는가를 보는것이죠. 불켜진 전기가 있으면 그것은 두꺼비집 통하지 않고 막바로 오는 전기.. 도둑전기였죠. 그러면 집 지은지가 언제인가부터해서 전기쓴 비용을 몇백만원씩 부과하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강단에 켜놓은 불도 메다 안돌아가는 전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세상이 바뀔수 있겠어요. 물론 정직해지기 힘들어요. 정직해지면 인생이 고달파집니다. 회사에 왜 늦었냐고 물으면 장모님이 갑가지 위급하셔서.. 하면 그냥 넘어가지만... 늦잠을 자서.. 하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시말서 써라, 왜 인간이 그러냐.. 저거 언제나 인간되나.. 다음 인사때 보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복잡합니까? 그런데도 늦잠 자다 늦었으면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다른 이야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해지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불법으로 남의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엄중하게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정직하게 사는 것을 부모들을 통해서 그걸 배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외골수로 그렇게 살아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에 이런 염려가 되겠죠. ...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정직하게 살다가 친구도 없고, 왕따가 되면 어떻하나... 그래요. 그렇게 안살고 가재비 눈을 뜨고 삶으로 해서 된게 뭐가 있습니까? 한 번 말해보세요. 하나님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들에게는 투씨아를 예비하셨어요. 커다란 성공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누구예요? 요셉이예요. 정말 얼마나 훌륭해요. 정직하게 살았어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국무총리를 예비하셨어요.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은 막을 사람이 없어요. 근데 이 정직을 작은 것부터 해야 해요. 제가 이해가 안가는 것은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써달라고 하면 백지를 찢어줘요. 영수증 아무것도 안쓴거.. 어쩌라는 겁니까? 써서줘야 상인은 그것으로 세금을 내고, 구매자는 그것으로 지출을 증명할 거 아닙니까? 백지를 주는 이 영수증.. 우리나라.. 이거 순 엉터리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직원들이 마음대로 쓰는 겁니다. 그게 죄라고 생각을 안합니다. 공금을 가짜 영수증으로 타가지고 오른쪽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것들을 천벌 받을 죄라고 생각안합니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뭡니까? 그런 사회에 반응할 수 없고, 부정직에 반항할 수 업이 살아간다면 한 무리가 되어 살아가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관공서 뿐 아니라 이웃간에..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에 있어서 정직하게 법도를 따라서 행해야 해요. 그것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옛날에 ... 그당시로 비싼 31만원짜리 카메라였는데 교회에서 사례금 7만원이었으니까 직장에 있는 카메라.. 굉장히 비싼 것이었죠. 일 때문에 그것을 신학교 채플실에 잠깐 두고 왔는데 사라졌어요. 어느 놈이 가져간 거죠. 신학교에서... 신학교에도 회심 안한 사람이 가끔 들어오거든요. 대학교 떨어지다.. 떨어지다 안되니까 그 엄마가 여기라도 넣으면 사람될까 해서 보냈는데... 사람은 안되고 물을 버리고 있죠. 신학대학이 많이 생겨나서 다행이에요. 그래서 미달사태가 속출하잖아요. 옛날에는 그것라도 들어갈려고 별 사람이 다 모였어요. ........이런 일들 속에서 크리스챤이 누구냐 이겁니다. 정직의 마지막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기 위해서 용기가 있어야 해요. 정직해지다가 이 사회에서 도태되어지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정직해지다가 어떤 불이익을 받으면 내게 영광이라고 하는 자부심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편이고 .. 하나님이 내 편에 서계신 한..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그런 고백 속에서 정직하고 담대하게 그 길을 걸어가면서 살아야 해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닌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날마다 우리를 위해 역사해 주시고 붙들어 주신 것입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정직해지는 일이 어렵거든요. 때론 박해를 받아요. 그렇게 정직해지면 고통과 손해를 보게 되는데.. 그 정직해지는 사람의 보상은 무엇이냐... 죽어서 하늘나라 가서 상을 많이 주시겠지.. 물론 상을 주십니다.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살살이 처럼 살살.. 피해서 야비하게 순간순간 부정직해지면서 세상과 신앙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서 세상에는 달콤한 설탕이 되어서 동시에 소금도 되고 싶어하면서.. 결국은 둘 다 못되었지만.. 일평생 이렇게 믿음없이 살던 사람이 정직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며 사는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을 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이죠. 물론 그 나라에서 받는 상급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라고 계시록에서 이야기를 해요. 우상숭배와 간음한 자와 동류로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그러면 안됩니다. 근데 이런 상급은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있습니다.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있느니라... 신자가 이세상에 살면서 누릴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하나님과 교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예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신자가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동행하는 삶의 핵심부분 중에 하나가 하나님과의 교통이예요.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영향력이 흘러들어오고, 은혜가 사랑이 흘러들어와요. 이런 교통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어요. 근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이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예요. 정확히 말해 수단이 된다기 보다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예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예요.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예요. 그것을 매이매일 행하고.. 인생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예요. 그래서 한 번 부정직해짐으로 세상으로부터 받는 이익은 커요. 고난이 올 때 한 번 부정직해지면 피할 수 있고, 정직해지면 모욕이 기다리고, 부정직해지면 영화가 기다리는 때가 있어요. 그래도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수 있는 이유는 뭐냐 하면... 부정직해지면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고, 정직해지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어요. 하나님 이외에 이세상에 존재하느 s 보든 것들은 분토와 같은 것이고, 뜬 구름과 같은 것이예요. 누가 높은 지위에 올라갔다, 많은 재물을 소유했다, ... 뜬 구름과 같은 것이여요. 영원한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통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우리가 놓칠 수 없는 완전한 자랑이고 행복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살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생생한 교통을 누리면서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쏟아부어지고 완전한 교통의 연합이 있다면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환란이 무섭겠습니까? 우리는 지옥의 불 한가운데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과 천국의 교통을 누리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왜?... 그와의 교통이 있는 곳에 자유와 행복, 기쁨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보세요.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향해 열린문을 가지고 생생한 은혜 가운데서 온전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는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공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하고, 그 깨달은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고 그 순종한 말씀대로 섬기면서 살려고 하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 의지 모든 삶의 방향.. 전체를 걸고 그것을 쏟아부어서 그것을 초점으로 삼는 삶이 그런식으로 재편되는 일 없이 그가 결코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아도 여러분들이 삶에 대해 부주의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한주간 동안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속에서 사라지기에는 충분해요. 성령을 슬프게 하기에 충분해요. 그래서 분명히 해야할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충만하 교통을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대충 살아서는안되요. 정확하게 말씀의 빛 아래서 무엇이 그르고 옳은지를 따져서 그르다고 생각되면 목숨을 걸고 따라가지 말아야 하고, 옳다고 생각되면 그 옳은 것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되어도 순종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부단한 자기 부인, 자기 헌신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의 은혜의 교통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것이예요. 바로 정직을 이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마음이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인데 그 속에서 끊임없는 거짓이 쏫아나는 것이예요. 집안에 매우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똥뭍은 방석을 내와서.. 여기 앉으시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우리 주님이 좌정하고 계셔도 거짓이 우러나오는 부정직한마음을 여러분들이 버리지 않으면 주님이 떠나십니다. 성령이 슬퍼하십니다. 성령은 생각보다 굉장히 예민하십니다. 어느때는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찾아오셔서 영원히 떠나시지 않을 것처럼 역사하시지만 여러분들이 그 성령을 근심시켜드리면.. 그러면 성령님이 내마음을 완전히 떠나신 것 같은 공허함이 우리 속에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리적으로 성령님이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마음의 불결이나 죄악, 특히 고의적인 죄와는 성령님이 함께 하기 힘드셔요. 그래서 마음에서 거짓되고 악한 것이 나오는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영적인 생명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 입술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정직한 도를 가감없이 정확하게 전파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선전하도록 선택받은 입이에요. 그 입에서 거짓이 함께 나오는 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 있어서도 부정직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짓가운데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매일 살아가는 사람들.. 부정직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정직해지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하나님 기쁘시게 하면서 살려고 매일 노력하면서 살아요. 이런 성화의 연장선상에서 정직을 생각해야 해요. 그리고 정직해지기 위해 치루는 희생은 두말할 필요없이 훌륭한 십자가예요. 고난이에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모두 부정직해지다 해도 .. 스스로 부정직해지는 일에 담대해지는 것은 악이 시킨 것이지 성령이 시킨 것이 아니예요. 왜냐면 신학적으로 죄는 절대적 성질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함ㄴ 안된요. 모든 사람이 악을 행한다고 해서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이 거짓의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나..를 살피는 것 자체가 시험이예요,. 그 정직의 요구 앞에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신앙이 시키는 내 길을 간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거짓없이 양심적으로 기업을 해서 성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꿔야 해요. 그리고 성공한 흔적을 남겨요. 그리고 널리 알려요. 정직하게 기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요. 그렇게 세속적으로 직장생활 하지 않고도 능력으로 당당하게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줘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등불이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해요. 우리의 인생에 자랑스러운 영광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느냐..그런데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았느냐에요. 돈없고 명예없어도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산 사람들이에요. 돈이 많고, 권력이 많아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에요. 혹시 지금 여러분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막힘, 기도생활의 끊어짐,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상실,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의 소진...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사회적인 부정직이나 여러분의 개인적인 부정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지 한 번 깊이 돌아보세요.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의 마지막 등불로 보내심을 받았는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꺼이 부정직한 길을 걸어간 것을 회개하고 부지런함으로 정직한 길을 걸어가야 해요. 무엇이 부족합니까.. 우리 주님만 있으면 되잖아요. 충분하잖아요. 기도하겠습니다.
5.정직한 자가 누리는 자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잠23:16)
오늘은 정직의 대물림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지혜자는 특별히 정직의 문제를 가지고 자기 자녀에게까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15절과 16절은 한짝으로 되어 있는 동의적 평행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우면.. 정직을 말하면.. 이것이 한짝이고.... 즐겁겠고, 유쾌하리라가 한 짝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만약 지혜롭다면 나는 즐겁겠다. 그리고 네가 정직을 말하면 내가 정말 유쾌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16절을 해설하기 전에 우리가 자녀에게 바랄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자녀들이 얼굴도 예쁘고, 성품도 좋고, 공부도 잘하면 참 좋겠죠. 엊그제도 신문에 보니까 자매 둘이서 공부를 잘해요. 하나는 MIT에서 24살에 박사를 받았는데 그 기록이 지금까지 안깨졌데요. 둘째는 하버드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 둘째가 말하길 언니가 너무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에게 인정을 못받았다고... 중학교때 전교 10등을 한 성적표를 보시더니.. 짐승을 보듯하면서... 너는 뭐가 잘못된 애가 아니니.. 하더라는 거죠. 그렇게 공부를 잘하면 좋겠죠.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면에서 갖추어진 자녀들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이교, 또 그것을 위해서 부모들은 신앙이 허락하는 한에서 많이 노력을 해야 되요.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날 자녀교육을 보면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사람으로 기르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기르는데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저는 자주 느낍니다. 못생기면.. 어릴 때부터 성형을 하고, 많은 돈을 들여서 공부를 시켜서 좋은 학교를 보내고, 어릴 때부터 어학, 운동 예능 이런것들을 익혀서 갖추게 하는거.. 심지어는 초등학생을 데리고 주식투자를 가르치는 것.. 이런것들이 필요하지만,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하죠, 그런데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 성형수술도 필요해요. 선천적으로 기형으로 나서 음식을 씹어도 잘 안씹혀서 소화가 안되서 턱을 교정한다든지... 치아를 교정한다는 것... 여러 가지.. 필요해요. 허락된 범위 안에서 같은 사람이라도 이쁘게 보이고 싶은거.. 정죄할 의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들은 경쟁사회를 사는데 필요한 것이고 개인적 유익을 위한 것이죠. 이런것들을 위해서 거의 모든 신경을 쓰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 아이가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외모가 반듯해지거 경제의 원리를 알고, 예능, 공부, 운동을 잘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가치를 높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은 그런 모든 것들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 두가지를 함께 가르쳐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라는 것입니다. 이 경쟁사회에서 결코 뒤졌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상하게 삶의 질이 고상하지 않아요. 이것은 후자는 가르치고 전자는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은 자녀들과 함께 신앙에 대해 얼마나 대화를 나누세요.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고, 그 아이가 신앙,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부모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 우리 엄마 , 아빠는 학교 성적을 잘 받았을 때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바르게 살려고 할 때 더 좋아하신다.... 느낌을 얼마나 아이에게 주고 있습니까? 정말 그 아이에게 그 입술로 고백하는 가치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보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모든 것들이 더 소중하다고 느낄 수 있게 행동하는지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반성을 촉구하고 싶어요. 그 중에 하나가 지혜입니다. 지혜는 어떻게 생겨날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면 살수록 사람답게 사는 지혜를 계속 공급받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좀 더 경외하고 더 섬기면서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탐구하면서 살 때에는 이런 신앙적인 지혜가 급속하게 자라납니다. 그러니까 짐승처럼 교회나 왔다갔다 하면서 막되먹은 신앙생활하면.. 개꼬리 삼년이면 절대로 황모가 되지 않습니다. 이번에 저희 교회에서 5월에 앙케이트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목회자로서 여러분을 목양하는 것과 실제 여러분의 삶 사이에 얼마든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런면에 있어서 두려운 맘이 많았ㅅ브니다. 조사를 했는데... 통계를 냈는데.. 분석을 했어요. 그거 보면서 그래도 통계를 100%로 믿을 수 는 없지만..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제법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통계에 보면 예배 생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냐는 물음에 13%정도는 매우 은혜를 받는다. .. 60%정도가 은혜를 받는다... 9%정도가 그저그렇다. 은혜를 못받는다 ..... 등드이 나왔습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은혜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은혜를 받는다는 사람들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안 받는다는 사람에게 머물러요. 무슨 이유일까... 다른 사람 대다수가 은혜를 받는데 이 사람들은 이유가 뭘까? 비록 7-8%의 사람들이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 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 그 연장선상에서 살다가 와야지 ... 설교하라고 해 나는 나대로 살꺼야.. 라고 사니까 설교가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설교하는 것과 같은 초점을 가지고 살아야지만 설교가 들어요는 거예요. 옛날에 주부들이 춤바람이 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된 적이 있었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색출해 내냐 하면.. 다 모아놓고 음악을 틀어놓는 거예요. 그러면 경쾌하게 흔드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가락이 있는거죠. 들어간게 없으면 나올게 없는 법입니다. 가려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일주일 동안을 말씀의 정신대로 살았으면.. 그 울려퍼지던 가락이 예배 시간에 나오는거예요. 그러면 마치 니나노 가락에 춤이 나오듯이 자기가 고민하던 것이 설교시간에 나오니까.. 거기에 대해 반응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거예요. 그러면서 지혜가 생겨나게 되요. 그런데 이제 오늘 이 지혜자는 그 지혜를 정직으로 구체화시켜서 이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있어요. 만약에 네 입으로 정직을 말하면 내 마음이 유쾌할 것이다. .. 이 속이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신장’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은밀한 내면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로 성경에 씌였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정직을 말하면(복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쏫아나리라.... 입니다. 정말 여러분이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해요? .. 우리 아버지는 A학점 보다 정직한 것을 좋아하신다.. 빵점맞은 이모습 이대로... 그럽니까? 어쨌든 정직을 강조한 것입니다. 일본 사람인데.. 앤드꼬 마사로라는 사람이 의미있는 책을 냈는데 물에 대해 책을 냈어요. 그 두권 중에 한 권을 읽었는데 깜짝 놀랐어요.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크리스챤 같애요. .. 물을 떠서 얼리는 거예요. 그 얼음 얼린 상태에서 서서히 녹이는 거예요. 그 상태에서 현미경으로 관찰하는데 그 투명한 유리병에 낱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사랑애’ ‘죽어’ ‘희망’ ..각각 다르게요. 그런데 물이 녹으면서 결정이 나타났다가 서서히 나타났다가 뚜렷이 나타났다가 물이 녹으면서 서서히 사라져요. 2분 동안 결정이 나타나는데.. 그 결정이 낱말에 따라 다 달라요. ‘망할 놈’이라고 하면.. 결정체가 일그러지게 나타나요. 심지어는 911테러 사태 뉴욕‘이라고 써놨더니 해괴망측한 결정이 나타나요. ’사랑‘이라고 하면... 육각형을 중심으로 해서 다 다르게 나타나는 거예요. ’경쟁‘하면 또렷하게 칼날같이 서는 거예요. ’화합‘이라고 하면 둥글둥글하게 결정이 나타나요. 그게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미경으로 사진을 찍은 거예요. 그래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어요.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세계적인 평화의 메신저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 그 분 이야기가.. 상당히 수긍이 가요. .. 인간의 몸의 70%가 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물이 모든 것에 반응을 한다는 겁니다. 근데 망할 놈.. 이라고 하면 이 물의 구조들이 결정체가 그렇게 변한다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분석해 낼수 없겠지만 어쨌든 안좋은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요새 물을 먹는데 그 물에 성경구절을 하나씩 써넣어볼까? ㅋㅋ 어쨋든 그것을 과학적으로 쭉 풀어갔어요. 이 물질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죠 글자도 마찬가지고 딱딱한 물건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장으로 존재해요. 이게 양자역학에서 다 나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이죠 신들린 사람이 아닌데.. 색깔을 눈을 감고 만지면서 구분을 합니다. 따뜻한 계통.. 하얀 계통.. 심지어는 글자를 덮어놓고 읽는 사람도 있데요. 그게 어떤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그것들이 파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지하는 예민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가능하다는 거예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해.. 이미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인식하고 있는 것은 A라고 하는 것은 A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말을 할 때는 B라고 틀리게 말하는 거예요. 거짓말이잖아요... 정치하는 사람들요즘 먹었다 안먹었다.. 하잖아요. 처음에는 알지도 못한다고 하죠.. 그리고는 만난적은 있다.. 그다음은 받았지만 대가는 없었다.. 그리고 감옥소에서 사진 찰영한 모습이 나오잖아요. .. 거짓말이죠. 근데 우리 속에 있는 양심과 몸이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근데 이것이 그릇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면 영혼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하니까.. 영혼이 고통하죠. 두 번째는 양심이 자기를 찌르니까 마음이 고통을 느껴요.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 육체적으로 반응을 보인다는 거예요. 몸이 다 알고 있고 이 속의 물이 알고 있는데 B라고 반응하는 거예요. 우리가 나쁜 의미의 스트레스라고 하는 게 어떻게 와요... 여러분들이 열받을 일이 있어서 분노하면 피의 점도가 높아져요. 찐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심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열을 받다가.. 물.. 물.. 물.. 그러잖아요.빨리 물을 먹어야 해요. 물이 순식간이 스며들어서 혈액을 묽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래야지 사고가 안나요. 열받을 때는 항상 물을 먼저 먹어야 해요. 그렇게 반응을 해요. 그러니까 저는 가끔 숨소리 빼고 거의 거짓말인 사람들을 가끔 만나거든요. 그런사람들 보면 얼굴이 정상이 아니예요. 균형을 잃고..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이예요. 어린아이들 얼굴 보면 해맑잖아요. 어린 아이들이 자면 세 살 때까지는 세근세근 평화가 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평화가 없어요. 해맑지 않아요. 그리고 세파에 시달려서 코까지 골고, 이까지 갈면은 .. 잠꼬대까지 하면 흉악해 추해요. 차라리 깨어있는 것이 나아요. 그게 인간의 자연적인 늙어감도 있겠지만은 제가 보기에는 자라면서 자꾸 거짓말은 자연스럽게 배워요. 그 속에서 이 자기의 양심과 몸이 원하지 않는 잘못된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원래 가지고 있던 좋은 성품들이 깊이 내재되어 있던 악한 성품에 유혹과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거예요. 이것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조금씩 파괴되어져 가는 과정이예요. 안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욕심을 버리고 정직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예요.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계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얼굴이 말이죠 정말 해맑다고 느껴지는 몇분이 계셔요. 70살 넘어서 뵈었는데.. 정말 해맑아요. 그래서 요즘은 내가 70살이 넘어서 그 목사님같은 얼굴이 될 수 있을까.. 교회가 아무리 잘되고 성도들이 많이 모이고.. 내가 유명해져도.. 마지막에 궁극적인 승리는 저분처럼 저렇게 해맑은 얼굴이 되어야 될테데.. 근데 뭐.. 지금같아선 거의 가망성이 없어요. 얼마나 사람이 악하고 거칠게 변하는지 몰라요. 근데 그런 분들이 있어요. 공통된 생활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정직한 생활이에요. 그래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기 보다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이 습관화 되었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부정직과 거짓들을 말 할 수 없는 거죠. 심지어 그 중에 한 분은 과장 자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혐오했어요. 그래서 자기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가난에 대해서 말하면서 ,... 말도 마 나도 신학교 다니지만 사실은 여름옷이 2벌밖에 없어.. 하고 갔더니.. 몇 일 있는데 등기 속달로 편지가 왔더래요. ... 정말 미안하다. 집에 와서 장롱 뒤져보니까 여름옷이 3벌이다.. 이러더래요. 용서해달라고.. ㅎㅎ
친구들이 그런 분들이었으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오래 웃는다는 것은 그렇게 악하다는 거에요. 그게 얼마나 양심에 괴로웠으면 등기 속달로 편지를 썼겠어요. 그런 정직해요. 해맑아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세 살 네 살때 표정을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쳐다봐도 지루하지 않아요 그런 아이들은 못생긴애 잘생긴 애가 따로 없어요. 있지... 있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잘 때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어요. 오늘 거울을 한 번 보세요. 해맑은가.. 아니면 누리 퉁퉁한가.. 만약 해맑음을 원하다면 정직해지세요. 여러분의 마음도 영혼도.. 물도 알아요.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정직의 문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구약에서 끔찍한 삼대 죄악이 있는데 간음과 우상숭배와 그리고 거의 어깨를 같이 하며 등장하는 것이 거짓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 지난 시간에 정직한 자에게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근데 정직한 자에게는 자유함이 있어요.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투명하게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거에요. 감출 것이 없어요. 그게 정말 아름다운 거에요. 투명하고 자신 있다는 말은 양심이 꺼리김이 없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강조했던게 꺼리김이 없는거.. 무엇에 대해서든. 우리가 완벽한 삶을 살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심지어는 죄의 유혹을 받고나 질때도 있죠. 그래도 그것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거에요. 그것을 숨기거나 혹은 그것을 호도하거나 합리화 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은 멸시하지 않으세요. 그 중심에 통회하는 일도 정직의 과정을 통해서에요.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도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 정직한 인정을 통해서 마음이 상하게 되고 그 상한 마음이 하나님ㅇ 앞에 열납되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정직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이에요. 그래서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대신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아요. 자기의 잘못된 것은 하나님이 아신다. 심지어는 부정직했던 때도 있다.. 그것도 정직하게 고백하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유함이 있어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모두 노출하고 사니까 사람들이 지적할 수 있는 모든 죄는 이미 하나님 앞에 토설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노출이 되어서 문제가 안되는 것은 사람 앞에 노출이 되도 문제가 안되는 거에요. 그죠? 그런 삶을 살아야 해요.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양심에 자유가 있어요 어두운 그늘이 있을 수 없어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가 온전해지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완전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그러면 마음에 자유함이 있어요. 그래서 허물많은 것은 많은대로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사는 거에요. 오늘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에 대입해 보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아들아 나는 네가 뛰어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돈 많이 벌고 그거보다 나는 네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원한다. 나는 네 입으로 정직을 말하면 아버지인 나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기쁨이 샘 쏫듯 쏫아날 것 같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이 시대에 정직의 등불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자녀들에게 ..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정말 정직하다. 우리 어머니는 성적이 떨어지거나 성공하지 못할 때 보다 정직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잃어 버렸을 때 더 많이 마음 아파하신다... 이런 것을 가졌을 때, 자신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가지 못했을 때 인생의 표본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길로 걸어가려고 노력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부모가 아니면 누가 어디에서 배울 것을 기대하겠어요. 여러분이 먼저 실천하고 말하고,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을 버리고 정직해지는 성화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배워가야 한다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6.정직한 자를 인도하심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하느니라” (잠11:3)
오늘 이시간에는 정직한 자는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제목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몇 주에 걸쳐서 정직에 관해서 많이 들었는데 사실 우리들이 홀로 살아가는 그런 생활이라면 자기가 맘만 먹으면 정직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직을 사회생활로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저도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전혀 부정직해질 의도가 없는데 구조적으로 부정직해지도록 강요를 받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찌 직장생활 뿐이겠습니까? 사업을 하면서도 법대로 행하는 사람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들이 항상 덕을 보고, 이익을 본다면 정직해지지 않은 사람이 없겠죠. 그러나 그렇게 정직해질 때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정직해질 때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는 일이 뒤따를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렇게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데 조금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고, 그것이 마땅하다라고 우리도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정직해지기 위해서 치뤄야 하는 희생이 그렇게 많다면 나중에 가서는 어떤 회의가 생기냐 하면.. 과연 정직해짐으로서 하나님 앞에 획득되는 의롭고 칭찬받을 만한 삶이 한 번 정직해짐으로 많은 고통과 손해를 보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하는 고통의 상황을 주고도 바꿀수 있을 만큼 값진 것인가.. 다시 말해서 한 번 정직해짐으로 획득되는 의는 작은 것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치루는 대가는 너무 큰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정직해지다보면 사회성을 잃어버리고 너무 맑은 물에는 아무 물고기도 살지 않는 것처럼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스스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고 나는 도퇴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갈등들이 순종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씩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것들을 어떻게 해결을 할 수 있는가.. 사실 이문제에 대해 특별히 해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믿음으로 사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냐 그것에 관해서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거죠. 정직한 자의 성실은 그 사람을 인도하지만 사특한 자의 패역은 그를 망하게 한다. 여기에서 사특하다는 말은 요즘은 쓰지 않는 옛날 말이죠. 우리말로 하면 이런 뜻입니다. 신실하지 않다. 믿음성이 없다. 영어로 말하면 faithfulless입니다. 믿을만 하지 못하다.. 거짓이 있고 진실하지 않은. 안팎이 다른.. 이런 사람의 패역인데.. 패역은 구부러지고 휜 것을 말하죠. 고집, 도덕적인 불결, 그러니까 옳은 일을 위해 곧게 가는 사람에게 패역하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항상 패역이라고 할 때는 옳지 않은 것은 것을 고집하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의 속성을 이야기 할 때 그때에 우리는 패역이라고 해요. 앞에 나오는 정직한 자의 히브리 성경에는 정직한 자들의 성실은 그를 인도하거니와 믿음성이 없는..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 패역 ,, 굳은 고집들은 그를 망케하느니라.. 로 되어있습니다. 이 두 개가 잠언에 나오는 전형적인 대구법, 평행법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정직한 자와 사특한 자를 비교하고 또 성실하고 패역을 비교하고.. 그다음에 인도하느니라와 망하게 하느니라를 비교합니다. 그래서 결국 정직하지 않은 사람의 정체는 믿음성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거짓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아요. 그래서 진실함은 내적 속성에 관한 것이고 신실함은 그 사람이 약속에 관련된 진실성을 말하는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약속에 대해서 진실하게 그것을 위반하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뭐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약속을 가진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요.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다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찬송할 때에 그것이 매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여호와이시며 약속을 지키심에 있어서 신실하시다는 것을 찬양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이죠. 찬송은 전도나 설교와는 달리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진실하고 신실하다는 것을 알려드리려는게 아니라 그렇게 진실하고 신실한 성품을 찬송하는 동안에 그 하나님의 성품의 영향을 받아서 찬송하는 사람 자신이 그 성품에 영향을 받아 닮아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당신의 성품을 상기시키고 찬양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정직한 사람의 정체는 신실함이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의 정체는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정직이라고 하면 이미 일어난 일.. 알고 있는 일, 행해지고 있는 일에 투명하고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고, 속에 있는 것을 솔직히 말하고 사실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을 우리들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것에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이죠. 우리 초등학교 바른생활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바른생활.. 처음에는 도덕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바른생활로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른생활이라는 것이 타고 들어가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올바른 생활이라는 것이죠. 이 올바르다는 것은 정직하다는 것 없이는 도덕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거에요.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많은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많이 헌금하고 자선을 베풀어서 굶주린 사람을 먹인다고 해서 그 돈이 아주 부도덕한 방법으로 강탈한 돈이라고 한다면 여러분 그 선한 사없을 인정해 줄 수 있어요?없어요? 없지요~ 허긴 그렇게 빼앗아서 자기 혼자 먹고사는 것보다 남주는게 낫겠죠? 그러나 우리는 기왕이면은 그렇게 쓰여지기 보다는 올바른 방법으로 돈이 획득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희생으로 되는 것을 원하는거 거든요. 지금 우리나라에 그 강원도 탄광촌 같은데 카지노가 생기고 또, 경마, 경륜, 경정.. 들이 생기면서 많은 도박들을 국가가 공공단체들이 앞다투어 유치를 해서 돈벌이를 하는데 .. 서로 혈안이 되었죠. 그런거 하나 유치를 하면 벌어들이는 세금이 장난이 아니라고 합니다. 몇 백억에서 몇 천억까지 됩니다. 그래서 이런 복권같은 거 하게 합니다. 그런데 선진국에서도 이렇게 해서 나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 선진국에서 그거 해서 나라를 일으켰겠어요? 그렇게 해서 선한 일을 했겠죠! 그건 당연하죠. 그렇게 해서 국가가 돈을 벌고 공공단체가 세수를 올렸는데 공무원들이 그걸 나눠가졌겠어요. 아니면 나쁜 일에 썼겠어요? 좋은 일에 쓰는건 당연하죠. 그러나 우리가 이런 건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도움을 주면 안됩니다. 경마도 해보고 어그제도 음식점에 가서 하는 얘기를 들으니까... 아들이 경마를 하더래요. 그래서 아버지가 화가 나서 셋째를 보내면서 막내를 말리라고 했데요. .. 너 아버지가 준 돈으로 이거나 하고 있니.. 하면서 뒷통수를 치더니 자기가 한 번 해보더니 뒷통수를 또 한 번 때리면서 하는 말이.. 이렇게 재미있는거 왜 이제서야 가르쳐주냐고 하더래요. 아버지가 하도 안오니까 둘째를 보냈어요. 그래서 둘째가 막내와 셋째의 뒷통수를 때리면서 빨리 가지가 했더니.. 형, 이거 한 번 해봐... 한 번 하더니만 뒷통수를 또 때리면서 ...이렇게 재미있는걸 이제서야 가르쳐주냐.. 하더라는 것이죠. 이제 이 아버지가 갔어. .. 이놈의 자식들... 그런데 .. 아버지 한 번만 해보세요..했더니.. 이렇게 재미있는 걸 너희끼리만 했냐면서 뒷통수를 때리더라는 거죠. 그래서 부인이 쫓아갔어요. 이 영감도 안온다고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가지고.. 갔는데..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거 혼자 하냐고.. 그래서 모두 함께 망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경마라는 것입니다. 그걸 왜 하냐고요. 어느 목사님이 미국엘 갔데요. 라스베가스에 가서 심심풀이로 땡겼는데 500만원인가 1000만원이 됬데요. 그래서 우리 한테는 그거 맞았다고 자랑을 하더니만 교회에 가서는 그런 광고를 안했데요.. ㅎㅎ 그런데 가지마요. 하지마세요. 절대 아멘을 안하는거 보니까.. 갈려고 하는구만.. 교회가 건축하는 한이 있더래도 거기가서 그거 하지 마세요. 돈 없는 사람만 아멘해요? .. 돈있으면 저금통에 저금하세요. 그게 바로 정직한 자의 성실이에요. 누가 로또 복권 맞으면 목사님이 십일조 안받는다고 했으니까 그 십일조까지 내꺼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각성하시오~!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 내면 한 번 생각해 보겠어요. 그거는 또 얘기가 달라지죠. 회개하고 .. 손들고 오는데.. 도저히 돈이 불결해서 쓸 수 업다는데.. 생각해 봐야겠어요. 어쨌든 하지마요. 그거 하는거 왜 나쁘냐 하면 그렇게 해가지고 1000억을 남겨서 선한 사업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혜택을 보는 사람들보다는 그런 도박에 빠져서 인생을 방치고 파타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몇 주 전에 주간지에서 강워도에 잠입해가지고 어떻게 사람들이 도박에 빠져서 파멸하는지를 상세하게 썼는데 정말 끔찍해요. 나라가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너무 수치스러워요. 한 번 우리나라는 말이죠. 그런거 하나도 없어도 양심적인 복지가들의 기부에 의해서 그런 좋은 사업들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한다면 얼마나 빛이 나겠어요. 다른 외국처럼 이런거 해서 오페라 하우스 짓고 그런거 없어도 처지는거 아니에요. 중요한 건 내실이예요. 수많은 사람들을 도탄으로 몰아놓고 그까짓 다리 놓고, 건물 짓고, 그런다고 해서 좋은 나라가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못하게 해야 해요. 그래서 정직한 사람들은 요행수를 바라지 않아요. 여기에 보면 정직한 사람과 신실하지 않은 사람을 대비했어요. 그래서 정직한 사람은 과거에 일어난 일,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올바르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 약속하는 것들도 자기가 책임을 지고 약속한 바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정직한 자의 특성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신실함과 성실함이 이 평행선처럼 함께 간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들이란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약속을 완벽할 수는 없지만 잘 이행하고 지키고, 그러는 것이 필요해요. 그것이 바로 정직한 사람의 특성이에요. 신실함과 관련되기 때문에 ... 그런데 그 정직한 사람은 오늘 정직한 자의 성실함을 이야기해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굉장히 게으르고 나태한데 정잭해.. 이게 잘 연결이 되요? 안돼요. .. 정직한 사람 하며.. 부자는 아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 그리고 잔꾀를 부리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 아니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열심히 일하고 하는 사람.. 이렇게 룰을 따라 사는 사람을 정직하다고 하는 것과 연결이 되는 것이지.. 몇 시에 일어나는지 시간도 없고, 밤늦게까지 고스톱이나 치고 술을 마시다가 코가 삐뚤어지게 자고, 직장은 수시로 결근하고 사업을 하면 이리로 뒤집었다, 저리로 뒤집었다 해서 여러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세금은 수시로 탈세하고, 어떻게 하면 편법을 써서라도 눈앞의 이익을 찾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는 그림과 매치가 안되요. 정직한 사람은 눈동자를 빨리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가고자 하는 의지와 길이 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아요 자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도 자기가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정당성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부정직한 사람하고는 매치가 잘되요. 부정직한데 게을러.. 아침에 몇시에 일어났는지는 태양만 알고, 그리고 생활이 불규칙하고 밤 늦게까지 도박과 유흥에 빠지고 그리고 돈벌이도 힘든건 안하고.. 돈 많이 벌면서 쉬운거 해서 한 번에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거.. 일을 안해서 손이 하얗고.. 그런 사람.. 뭐든지 편한거 하는사람.. 이런 사람과 게으른 사람과 잘 어울려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절제하는 치열한 노력이나 게을름과 싸우는 치열한 싸움, 목표를 향해서 이글거리는 열정.. 이런것들을 볼 수가 없어요. 찾아볼 수 없어요. 학교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나는 대학생 10명을 세워놓고 얘가 학교에서 학교생활을 어느정도 할까..를 80%는 알아맞출 수 있어요. 눈빛에 나타나 있어요. 그래서 학생들은 어물전에 드러누운 생선과 같애요. 막대기로 툭툭 치면서 눈동자를 보면 알아요. 벌써 아침에 들어온 생선은 또렷해~! 자기를 가져다가 동태국을 끌이려는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본다고요. 근데 몇일 전에 들어온 동태는 눈이 벌게~ 벌써 여러사람을 봤어. 그래서 나를 끓이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어. 그다음에 3-4일이 되서 냄새가 나는 것은 이미 눈 자체가 빨간것도 지나서 거무티티해서 이미 먹물이 흩어지기 시작해요. 대학생들도 똑같애.
혁띠없는 바지 걸치고 슬리퍼 끌고, .. 가방은 멨는데 책을 없고, 맨 무슨 카세트, 영어회화책.. 덜렁덜렁.. 와요. 그러면 공부안하는 겁니다. 여학생들도 짧은 치마 입고, 예쁘게 하고 나타나는데 손에 책은 없어요. 그리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것도 게을러서 화장도 안하고 원판 그대로에 폭탄 맞은 머리에 찢어진 바지.. 책도 없어. 앞의 여학생은 세속적인 부지런함이라도 있는데 이건 아무것도 없는거에요. 그러니 세상에 급한게 없어. 기말고사에 교수가 5줄에 문제 내면.. 2줄로 답쓰고 나가고 말이죠. 그러니까 정말 마른뼈같이 살아요.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노는거.. 유흥엔 굉장히 밝아요. 영화~ 어디서? 이런게 사람의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되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일낙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것이라’고 한 겁니다. 일낙이라고 해서 향락 이런걸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거룩한 즐거움이 아니라 다른 즐거움이 깊이 몰두해 있는 것.. 이것에 모두 말하자면 일낙이에요. 일낙에 빠지면 영혼이 쇠퇴하게 됩니다. 그런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 게으름입니다. 물론 육신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모두 영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부지런히 일하고 짐승같은 신자들도 있어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게 게으른 삶을 살면서도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회 속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할 때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우리의 정직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죠? 예를 들어서 내가 어느 업종에 종사를 하는데 나는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데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부정직하게 세금을 내서 세무서에서 탄로가 나는거에요. 그때 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리가 없죠. 그래서 나는 법대로 희생한 것이 많아도 돌아오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집사님은 정직하게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는데 유능하니까 많은 물자를 구입하는 부서로 가게 되었어요. 가서 보니까 너무 비싸게 물건이 들어오는 거에요. 이미 초등학교에 문방용품이 들어가는데도 임원들에게 10%의 리베이트를 줘야 하는 것은 다 알고 있는 거죠. 중고등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그런 관행이 옳지 않다.. 해서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물건 값을 싸게 해라고 했데요. 그래서 물건이 안좋거나 값이 비싸면 다른 회사제품과 경쟁을 시켜서 공정하게 하게했데요. 그래서 많은 때는 30%나 싸게 물건을 구입하게 되고 그랬데요. 그러면 원가가 그만큼 떨어지니까 다른 제품과 비교해서 경쟁력을 갖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얼마나 회사에 기여를 많이 한 사람입니까? 근데 그사람이 짤렸어요. 그 자리를 거쳐서 지나간 사람들이 위협을 느낀거죠. 그래서 모함을 해서 직장에서 퇴출시켰어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회사를 위해서 일했는데 쫓겨나는 거에요. 이런것들이 없을 수 는 없어요. 왜냐면 이 세상이 악하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선한 일을 하셨지만 항상 선한 대접을 받아셨어요?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그 진리의 빛 때문에 환대를 받으셨서요. 부정직하고 불의한 사람들 책망하셨지만 그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정받았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함했고 대적자들이 생겨났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거에요. 근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정직하지 못하게 하는 두요인 가운데 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거에요. 두요인이 뭐냐 하면 하나는 자기 자신이 정직해 질 때 하나님 앞에 받게 되는 칭찬보다는 부정직한 삶을 살면서 편리하고 또 무엇인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빼앗기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게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정직해짐으로 주님앞에 받는 칭찬보다는 정직해짐으로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더 깊은 거에요. 그러니까 정직해해지지 못하게 되는거에요. 또 하나는 정직해지고는 싶은데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나의 앞날이 무엇인가 비관적으로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우리로 하여금 정직해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거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아가게 만드는거에요.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금방 데려가시지 않고 죄과 많고 어두운 이 세상 가운데 아직까지도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에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가운데 우리를 빛들로 나타나게 하시기 위해서에요. 이 이야기는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다른 존재로서 독특성을 드러내며 살게 하심으로 빛이신, 우리를 그렇게 빛나게 만드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그 빛을 어둠 가운데 내려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심으로 아직까지 어두운 이 세상에 우리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우리들이 정직해지고 올바르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따돌림을 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독특성을 잃어버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어그러지고 부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보람이 없는거에요. 통탄할 일이죠. 여러분들이 만약에 애써서 자식을 길러서 좋은 학교에 보냈는데 그 아이가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올바르게 살지 않고 불량배들하고 어울려서 산다면 여러분이 그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한 부모인 여러분의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청소년들을 선도하기 위해서 선도자로 보냈는데 불량청소년들하고 어울려 노는 선도위원 선생님들이 된 꼴과 같애요. 생각을 해보세요. 학교에 있는 불량배들을 선도해달라고 교사를 돈을 주고 파송을 했는데 교사가 불량배 학생들과 어울려서 술이나 먹고, 성희롱이나 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주님이 우리를 보는 마음이 그런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다. 누구를 보며 이세상이 살겠어요. 하나님을 봐야 하는데 하나님은 모르니까.. 어느 등불을 보면서 이 거친 세상을 항해해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두려움은 남아요. 우리가 정직해 질 때 우리의 앞길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근데 오늘 성경에서 말하기를 정직한 자의 성실은 그를 인도하느니라.. 인도하느니라.. 그래서 그렇게 생각해요. 직장을 다니다가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려고 애쓰고 평소에 자기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나가다가 이렇게 정직과 부정직, 신앙과 불신앙의 기로에 서서 담대하게 신앙을 택해!! 부정직해서 잠시 이익을 보는 것보다 정직하게 아닌 것은 그르다고 말하고... 그러면은 그렇게 말을 할 때,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해나 비난을 너무 두려워하면 너무 비겁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께도 사랑을 받고, 이 세상에게도 사랑을 받겠어요?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지 설탕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어떻게 양쪽에서 다 사랑을 받겠어요. 어떻게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데, 세상이 하나니을 싫어하는데 물론, 하나님을 좋아하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기도 하고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환영을 받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따돌림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고 너무나 당연한 거에요.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해요. 그런데 실제로 자신이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박해를 받는다고 할 때, 그것만이 아니에요. 직장에서도 가만히 보면 따돌림을 받는 사람을 보면.. 자기는 오직 신앙 때문에 따돌림을 받는다고 하는데 직장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요? 물론 따돌림을 받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무제한의 신앙의 자유를 가진 나라에서는 안그래요. 그런데 평소에 일도 제대로 못해, 유능하지도 않아 성실하지도 않아, 그런데 요령은 부려.. 근데, 그 요령이 성공은 못해! 이런 짜증나는 생활을 하다가 어쩌다가 도덕적인 문제가 나왔을 때, 다른 것은 다 부도덕하게 살다가 난 못해 하고 대드는 것이죠. 순간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하는거죠. 그때 사람들이 ... 너 싫어!.. 하는 거죠. 그때 그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저 사람이 너무나 순전한 그리스도인이라서 싫은게 아니라 저런 못난 사람이 이 특별한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신앙을 내세우면서 일을 그르치는 것이 짜증나기 때문에 싫다고 말해요. 그래서 어느 순간에 우리들이 담대하게 신앙의결단을 따르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양보하고, 더 많이 섬기고, 희생하고 그러는 재미로 살아야 해요. 그리고 유능하고 꼭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이 정직한 사람이 성실한 삶은 그가 당장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아주 강직하고 주님을 사랑해요. 회사를 꾀 다녔는데 회사가 잘못하는 거에요. 다니는 동안에 주님을 만나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거죠. 직장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이 부도덕한 일이 너무 싫은거에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싫은거에요. 자기 의견의 개진했어요. 그리고는 회사에서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결국에는 회사를 그만 두었어요. 근데 자신만만해.. 나는 믿음을 따라 살았다. 그런데 이 회사가 내가 싫다는거다. 나는 하나님이 인도할 것이다... 그래서 자기 개인 사업해서 세상적으로 더 성공했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 하나님이 나를 그곳에서 쫓겨나게 하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싸움이나 하고 살았을 텐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큰 일이 있으셔서 인도하셨다.... 그러니까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사회 속에서 정직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면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고, 친구를 잃어버릴 수 있어요. 그런데 살아남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거에요. 나는 믿음을 따라 살려고 애를 썼는데..
결과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의 인생을 주님께 맡깁니다. 라고 담대함이 있는거에요. 그런데 이쪽에 가서 조금 눈치를 보고 변절자가되고, 하나님한테가서 가끔 변절을 하고 부정직하고 살고 하면, 그 다음에 이 세상에 나를 버릴 때 하나님 앞에 가서 어떻게 해달라고 말을 못하는 거에요. 내가 잘못해서 망친건데... 그래서 십자가를 경험하라에서 요한 크리소스돔이 나와요. 그 사람이 정직하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자기를 교묘하게 미워하고 핍박을 하니까..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린다.. 라고 말한거죠. 세상이 자기를 버려도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스도가 계시다는거죠. 그 하나님과 더불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온 세상이 주님의 것이고 나는 주님의 자녀이므로 이 온세사을 유업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악한 자들이 강탈 한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요령을 피우면서 이 세상의 눈치를 보았을 때는 얼마든지 세상이 나를 배반할 수 있지만 정직과 성실로 섬긴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실수도 없고, 배반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거에요.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변함이 없는 좋으신 나의 주
그래서 항상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 것이다. 이게 바로 악하고 거스르고 어두운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진실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할 바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도 거짓하지 말고, 정직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아무리 많은 이익을 걸렸어도, 아무리 기둥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정직한 삶을 매일매일 살아야 해요. 그리고 주님이 보시기에 모든일에 분명하고 정직한 태도를 보여야 해요. 주신 권세에 대해서 정직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권세를 더 주시고, 물질에 있어서 정직한 사람들은 물질을 더 주세요. 왜.. 하나님이 안심하시고 맡기시는 거죠. 작은 걸 맡겨보시고 불의하면 하나님이 신뢰할 수 없는거에요. 그래서 걷어가시죠. 재능도 하나님이 주시면 훌륭하게 잘 감당해요. 그리고 재능을 사용함에 있어서 올바르고 정직해.. 그러면 하나님이 그 재능을 더 계발시켜 주시죠. 그래서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실험용이에요. 주님이 주신 재능이 많아요? 앞으로 주실 것에 비하면 시험용이에요. 여러분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나요? 그건 요셉이 보디발의 집의 총무가 된 겁니다. 말하자면.. 나중에 갈 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질을 주셨어요? 앞으로 여러분들이 받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닙니다. 여러분들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직하게 행하는가... 보시는거죠. 거기에 합격하면 안심하시고 더 많이 맡기시고, 다음에 또 합격하면 더 맡기시고.. 맡기시면서 여러분들이 이 역사속에서 살면서 여러분의 자리에서 살면서 다른사람들의 삶에 더 많은 영향을 비치면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어떤 굽음도 없는 정직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난 시간에 설교한 바와 같이 유쾌함이 있고, 마음과 영혼의 참된 자유가 있어요. 억수로 돈 벌었지만 나 위해 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아시죠.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나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아시죠. 많은 재능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것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한 것을 주님이 아신다는 담대함이 그 사람속에 있어서 영혼에 유쾌함이 있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7.정직한 길을 떠나면 어두움입니다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잠2:13)”
여기에서 ‘이 무리’는 바로 앞 절에 나온 악을 행하고 패역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에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이 잠언에서는 아주 선명하게 악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 정직한 사람과 패역한 사람이 뚜렷하게 선 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속한 부류의 사람들이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냐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냐,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사람이냐, 이런 식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정말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내가 정말 사랑하는 분이 하나님이냐 세상이냐’하는 식으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 같은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챨스 스펄전도 그의 설교 속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중간지대라는 것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야지 만 스스로 겸비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 무리들은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는 사람들이다’고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정직한 길’이라고 하는 것은 말에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정직-야사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우리의 말이나 마음, 행동,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왕이 정직한 길로 일생을 행했다면 그것은 허물이 없다거나 완전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이라는 개념 자체가 마음의 정직부터 시작해서 그 마음이 언어로 나오는 말의 정직, 나오기 전 마음속에서 나오는 작용의 정직부터 시작해서 언어적인 정직, 그리고 그 정직이 다시 삶으로 실천되어서 올곧게 마음에 있는 어떠한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생각이나 마음이 굽어짐이 없이 똑바로 삶까지 연결되어서 펼쳐지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정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정직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면과 외면의 모든 삶을 포괄하는 전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맑은 물이나 사이다를 컵에 담아 빨대를 꼽으면 빨대가 꺾어진 것처럼 보인다- 물 속에 잠긴 부분의 상이 굴절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조차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지만 마음으로는 올바른 것을 생각한다고 해도 삶으로 그 올바르게 사는데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고 희생이 수반되기 때문에 마음만 올바르고 그것이 삶으로까지는 표출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마음은 올바른데 삶까지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자기가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에 ‘어린아이라도 어린아이의 작은 행동이 그 마음이 어떠함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말씀하고,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다음에 ‘사람이 어려서부터 마음에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악하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경적으로 보면 어떤 사람이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게되면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 마음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정직한데 차마 그 정직한 대로 살 여건이 안돼서 부정직하게 된 것이지 원래 마음은 그것이 아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고,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마음에서 맺힌 열매이기 때문에 그 열매를 가지고 그 나무가 어떠함을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를 맺었지만 알고 보면 뿌리는 배입니다’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배를 맺고자 하는 속성이 뿌리에 있었는데 날씨도 덥고 배 값이 떨어져서 할 수 없이 사과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 농부가 있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혼내줄 것입니다. 주님 입장에서 볼 때도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잠언에 보면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다 올바르게 보여도 여호와는 중심을 감찰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정확하지 않은 인식 속에서 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부정직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되지 않았는데도 부정직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자기 자신이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굉장히 정직하지 않고 뿌리가 잘못되어있는 사람인데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인데도- 자신은 ‘그 점에 있어서는 많이 변화되었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계기가 되어서 행위로서 악한 열매를 맺으면 정직하게 그 열매를 보고 ‘이렇게 부정직한 일을 행했으니까 저는 하나님 앞에 거짓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정직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이런 열매를 맺은 것은 내가 정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요즘 세상을 봐라. 그렇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실 배나무인데 배 값도 떨어지고 사람들이 왜 배만 맺느냐고 해서 금년에는 사과를 한번 매달아 봤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나무는 그 나무대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사실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합니다. 여러 종류의 나무를 모두 뽑아 눕혀 놓고 그 뿌리를 보고 나무의 종류를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과가 달렸으면 사과나무입니다. 잎이 사과나무 잎과는 조금 달라도 사과나무입니다. 뿌리 모양이 배나무와 흡사해도 사과나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밖으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삶-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 말고-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배우면서 거룩한 삶에 있어서 정사(꼼꼼하게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를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깊은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화: 깊은 바다 속이 제일 궁금하다-최근에 13톤 짜리 오징어가 잡혔다고 한다)
인간의 마음이 바로 그렇게 깊은 바다 속과 같습니다. 30㎝짜리 오징어만 먹던 사람들이 17미터 오징어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으며 2-300g짜리 오징어를 구워먹던 사람들이 13톤 짜리 오징어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다에는 그런 것들이 무수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 밑바닥에도 뭐가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내 속에 한 법을 깨달았나니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다음날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사도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을 때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속에 있는 모든 법을 다 터득한 것이 아니라 겨우 한 법을 깨달았는데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의 속에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깊은 속은 심해바다보다 더 깊어서 그 속에 뭐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삶은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정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잠잠히 자신이 어떻게 행하고 있고 생활하고 있는지를 꼼꼼히 정직하게 살피게 되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 자체에 정직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사람은 절대 정사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못 박힐 정, 죽을 사) 정사라고 합니다. 그 정사 말고 꼼꼼하게 살핀다는 의미의 정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하나님 앞에서 반성하는 것을 정사라고 말합니다. 건들거리고 잘난척하고 외식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정사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사는 정직이 기본입니다. 정직해야지 만 정사가 가능합니다. 또 정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사의 결과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정사가 안됩니다.
정사하며 꼼꼼하게 자신을 살피는데 ‘결론부터 내리고 나를 살필 꺼야. 나는 좋은 사람이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MRI 촬영을 할 때 그 기사에게 ‘나는 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찍으시오’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기계의 역할은 정확하게 찍어서 속에 뭐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사가 어려운 것입니다.
진실하고 정직해지려는 모든 사람들은 이 정사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미끄러져 가는 자기 자신을 다시 새롭게 세울 수 있고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병들었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부분에서 못살고 있는 지를 정사가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삶이 그럴듯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속에는 없는데 겉으로 그럴듯한 삶을 구축하면 첫째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흉내를 며칠이나 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얼마 안갑니다.
시집 갓 온 새댁이 3일 동안은 잘합니다. 그러나 두어 달 지나면 시어머니가 일찍 일어나 일하셔도 그냥 잡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하는 지체들에게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을 지어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어먹은 마음은 오래가면 3일 갑니다. 그 다음에는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달라고 하고, 또 그분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드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가족관계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본색은 금방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또 한가지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속에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오래도록 유지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계속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향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조화를 똑같이 만들어냅니다. 더구나 양란 같은 것은 향기도 없어서 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는 꽃잎을 하나 따서 눌러보면 됩니다. 조화는 구겨지지만 살아있는 것은 화즙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먼저 인정해야 될 것은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 무리들은 정직한 길을 떠나서 어두운 길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악을 행하고 패역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정직한 길을 떠나서 어두운 길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고 굽은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직이라는 덕목 자체를 값을 치르고 사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화: 20대 중반쯤 변화 받기 전에 어두운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컴컴한 양식집을 좋아했다. 그런데 나중에 변화 받고 나니까 음식 맛이 좀 없어도 햇빛이 잘 들고 탁자와 그릇이 깨끗한 것이 좋았다)
마찬가지로 악한 사람들은 정직이라는 것 자체가 빛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정직과 공의를 빛으로 많이 묘사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되면 이렇게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이 악을 행하며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짜증나는 일입니다.
(예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9시에 잠들면 범죄의 50%가 줄어든다는 통계)
그래서 농촌의 한적한 삶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많이 맑아집니다. 보는 것이 적으니 자극을 적게 받고 마음을 빼앗는 것이 적어집니다. 저는 전기를 많이 생산해서 밤에 온 나라를 환히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범죄도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가지고는 있어도 죄를 산출해내지 못하도록 굉장히 많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하면 ‘대낮에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는데 그러면 밤에는 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낮에 안 되는 것이면 밤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빛은 태초로부터 생명과 관계가 되고 죄악을 억제하는 기능을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이것이 올바른 인생을 사는 길이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많이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러면 빛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행하는 일이 어두움 속에서나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이렇게 부정직해진 이 세대에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정직 시리즈에 은혜 받으면서도, 마음속으로 항상 한풀 접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살수는 없을 거야’하며 세상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온 몸을 던져서 그렇게 살겠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다 던지셨던 것처럼 나도 이 말씀대로 살다가 죽겠습니다’하며 순교의 각오를 하고 가도 세상이 바뀔지 말지 인데 다 듣고 나서 은혜를 받고 ‘그러나 그것은 목사님 말씀이고-성경 말씀이고-현실적으로는 아마 저렇게 할 수가 없을 거야’하며 가니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삶을 가르칩니다.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도 삶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과 똑같이 살면 괜찮겠습니까? 우리가 자녀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가르치는 교육의 덕목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우상 수준으로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예화: 자신은 은혜 못 받았어도 아이들이 은혜를 받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
자녀를 위해서 많이 투자하지만 아이들에게 정직을 얼마나 가르칩니까? 부모인 우리 속에 잠재 의식적으로 있는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정직을 너무 가르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 도둑놈 같은데 우리 아이에게만 정직을 가르치면 내 자식이 바보 될 것이다. 늘 손해를 볼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부모인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인생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움직이고 자기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이 신앙적인 덕목,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는 정신적인 덕목들은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목사가 말씀에 은혜를 받았는데 설교 안 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설교할 것이 없는데 설교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설교 할 것이 끓고 있는데 설교를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죽을 맛입니다. 즉 우리가 자녀에게 정직의 덕목을 중요하게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부정직에 친근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정직은 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면 불법하게 행동하거나 거짓되게 행동할 수 있는 폭이 아주 줄어드는 것입니다.
청소년 때 나쁜 짓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화: 담배 값을 올리려고 하는 것에 대해 한쪽에서는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청소년 범죄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는 아이들이 많고 보편적입니다. 우리도 그 시절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게 합니까? 유혹에 의해서, 혹은 그 시대의 분위기에 의해서 담배도 피우고 이상한 사진도 가지고 다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양심을 그들에게 심어주면 그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죄의식이 계속 따라다녀서 철이 들면 안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악의 판단이 없고 정직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다보면 그냥 그렇게 인생을 살면 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리고 나이가 먹어도 그 행동을 그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대로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가서 사악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무조건 부모가 정직에 대해서 가르쳐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못 지켜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 정직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네가 A학점을 맞고 서울대를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나는 네가 부정직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그냥 정직하면서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기쁘다’하고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실제로 그런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부정직한 삶을 살면서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생 자체의 관점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자녀들에게 가르쳐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부모가 이 세상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인간이 무엇이며, 참된 신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참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기 부인의 과정과 극기의 과정이 필요한지를, 어떻게 정직하게 말씀 앞에 서야 되는지를, 자녀들에게 보여 줘야하는 것입니다.
(예화: 열심 있는 신앙을 갖게된 한 형제가 아이들이 전에 나쁜 짓을 했던 것을 다 보 면서 자란 것 때문에 고민했다- 아이들에게 다 인정하고 용서를 빌라고 충고 했 다)
그래서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있고 그분의 눈빛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거짓 가운데 온 세상 사람들 앞에 영광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이런 정직 자체를 싫어합니다. 이 자체가 빛이기 때문에 자신도 정직해지는 것이 싫을 뿐만 아니라 정직해지는 사람을 제일 미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주위에 있는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정직해질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자에게는 여호와의 교통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직한 자는 지금은 물러서는 것 같고 망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투씨아’를 가지고 계십니다. 커다란 성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부정직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닙니다. 부정직해지면 지금 핍박을 면할 수 있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부당하게 얻은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직의 길을 떠나고 나면 급속하게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첫 번째로 마음의 어두움을 포함해서 특별히 지적인 어두움이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늘 받고 그 은혜 속에서 살면서 은혜가 만성이 되어서 그 은혜가 감사한 것을 잊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을 고비 넘기고 은혜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펑펑 울면서 남은 여생을 주께 드리겠다고 하지만 몇 달만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은혜는 새카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적을 체험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매일매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느냐가 더 문제가 됩니다. 고속도로에서 굴러서 옆 사람은 다 죽고 자기 혼자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큰 사람이 못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체험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얼마나 그것을 붙들고 주님 앞에 살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은혜 속에서 살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 듯이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죄다’라고 우리의 마음에 찌르듯이 가르쳐주면 ‘이것이 죄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죄를 안 행하게 되고 혹 행하면서도 ‘이러면 안돼’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정직한 깨달음의 작용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어두운 길로 들어서게 되면- 그 다음에는 부정직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이 없이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명확한 인식이 흐려지는 지식적인 혼란이 오게 됩니다.
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정직이 불빛을 비춰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말씀이 말하는 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때 그것이 자기 속에 빛이 되어서 자기의 마음과 삶을 비취면서 ‘이것이 죄다’라는 것을 찾아내는데,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두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또 하나는 정서적인 어두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감정적 성향도 바뀝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팝송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음악을 틀어야만 밤에 잠이 올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도 그 음악을 틀어야만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고 나니까 제일 먼저 그런 노래가 싫어졌습니다. 지금도 싫습니다. 그렇게 성향이 바뀝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정직의 빛 앞에서 살 때의 마음의 작용과 이것이 꺼져버리고 어둠 속에 들어갔을 때의 마음의 작용이 정서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직의 불빛 앞에서 살고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친화적인 성격으로 마음의 지배력이 바뀝니다. 그런데 이런 정직의 불빛이 사라지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죄에 대해서 친화적인 성격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우리 속에서 무성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 속에 죄가 들어왔을 때 그것을 죄라고 탐지해 낼 수 있는 정확한 영적 레이더와 그 영적 레이더를 정확하게 죄라고 판독하고 인정할 수 있는 승복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그 두 가지가 다 정직입니다. 그것을 다 거둬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고 건강한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 정확하게 따지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왜 기도가 안 되는가, 왜 내가 이런 잘못에 빠지게 되었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이것이 원인인데 그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따집니다. 자신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 필요하니까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항상 두루뭉실 합니다. 그렇게 두루뭉실하게 어둠의 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두 시간 세 시간씩 말씀을 들으면서 그것을 깨알같이 적으면서 자기에게 적용하고 살피는 짓을 왜하겠습니까? 죄짓기만 점점 불편해지는데. 퇴폐적인 주점이 있는데 그 옆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교회당이 들어오면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정직을 잃어버리게 되면 정서적으로도 벌써 부정직에 적합한 마음의 틀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직하게 살 때에는 의를 행하기가 쉽고 정직을 거슬려서 부정직하게 행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학교 다닐 때도 아이들이 컨닝을 합니다. 두근두근하면서 컨닝을 하는 새가슴형이 있고 철판형이 있습니다.
(예화: 중학교 때 답을 다 쓰고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 앉은 아이가 시험지를 가져가고 백지인 자기 시험지를 내밀었다)
(예화: 컨닝하다가 걸린 어떤 아이가 오히려 선생님에게 대든 이야기)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면 결국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싫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에 있는 것이 좋고 그들의 행실이 악하기 때문에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에서 목회나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니까 저러는 것이지 나가서 한번 우리처럼 직장생활 해보라고 해. 저렇게 했다가는 당장 쫒겨날거야. 우리처럼 한번 사업 해보라고 해. 저렇게 했다가는 쫄딱 망할 거야’합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 받고 해보니까 그렇지도 않더라구요. 그렇게 부정직하게 산다고 해서 모두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하더라도 그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뒤쳐지고 바보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방면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백 번 양보해서 그렇게 정직하게 살았더니 이 세상에서 배척 당할 수밖에 없고 고난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우리는 왕 앞에 절할 수 없나이다’하는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이 세상이 부정직하라고 우리를 꼬일 때에 어쩔 수 없어서 현실 적응한다는 미명하에 아부하고 부정직하게 살았다고 합시다. 그러다 교회에 와서 ‘그렇게 살면 되겠느냐’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눈물 흘리면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려고 하고 고쳐보려고 왔다갔다하다가 정말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세상도 자기편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가 떳떳하게 ‘하나님 제가 당한 이 모든 어려움은 제가 주님의 뜻을 따라서 의의 길을 걸어가다가 정당하게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내 인생 책임져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택할 수 있는 길이 또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정직한 길을 갈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 중 하나를 택하십시오. 세상에 가서 아부를 해서 세상 사람처럼 그렇게 간교한 꾀를 가지고 살아서 성공을 하든지, 그렇지 않고 정직하게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 이 세상에서는 따돌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는 ‘저는 세워주신 이 자리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바를 따라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인생이 주님의 수중에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아부하고 세상에 잔꾀를 부리면서 살아서 세상에서 성공합니까? 그 삶은 하나님 버린 삶인데. 선택하라고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울어져 가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역사 벼랑 끝에 서서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네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아모리 족속들의 더러운 우상들을 택하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하는 것이 진짜 택하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택하겠습니까? 하나님 여호와에 의해서 구속받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포도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있는 그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강 건너편에서 조상들이 섬기던 아모리 족속들의 우상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두 가지 선택 사항이 있지만 한가지 선택 사항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는 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와 우리 집처럼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자’는 이야깁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올바른 일을 감당하려고 하면 무섭습니다. 정치인이 되려면 선교사적인 의식을 가져야 된다고 말하는데 저는 순교자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 정치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국회의원 월급을 배로 올려주는 대신 순교자적인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까마귀 떼들처럼 새카맣게 몰려들어서 돈 뜯어먹고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그 중에서 상당수가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예배에 참석하는 사진이나 내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 욕 먹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전부 우리가 교회에서 가정에서 올바르게 안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아가려고 할 때 희생과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고 성경이 어디에서 가르칩니까?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천국에서 그렇게 천군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주를 위해서 살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손해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그 손해보는 세상의 것들이 귀하면 예수 버리고 부정직을 택하십시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가 귀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고귀하고 그 사랑이 소중하다면 그것을 택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지지하게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가지고 거짓말을 밥먹듯 해서 부정직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예화:시골에서 쉬면서 한 교회 목사님을 만났는데 교인들이 헌금을 제대로 안 하는 것으로 인해 속상해하셨다-농사지은 수입에서 비료값, 종자값 등을 다 계산하고 순이익에서 10분의 1을 낸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웃 교회는 수확하면 무조건 10분의 1을 하나님 것으로 떼어놓는 것이 그 교회 교인들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 다)
어느 계산법이 옳은가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은혜로 살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 계산 속에는 잔머리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내가 인생을 살 때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산다’고 하는 고백이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부정직은 항상 정직과 정확을 가장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희생이 뒤따릅니다. 정직만 아니라 신앙을 지키려고 하면 희생이 뒤따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면 희생이 뒤따릅니다. 내 일도 바쁜데 주님의 일을 하려고 사명을 감당할 때 희생이 뒤따릅니다. 도저히 시간도 없고 건강도 허락을 안 하는데 기도하면서 살려고 할 때 희생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뻐하시는 모든 삶의 아름다운 덕목 중에 십자가 없고 희생이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희생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귀한 것이 아닙니다. 정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직해지려고 할 때 따돌림을 당하고 당장 눈앞에서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화:어느 정치인이 자신은 법정 선거비보다 더 썼다고 양심선언하고 6개월 구형 받 았는데 ‘아직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바보처럼 보이게 만드는 야만이 이 사회 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그 사람을 왕따 시키고 병신 만들려고 하는 야만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두움입니다. 그 어두움을 밝히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희생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았다고 하는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난관이 오면 세상적으로 비껴 갑니다. 또 다시 난관을 만나면 이번에는 신앙으로 한번 돌아가 봅니다. 또 난관을 만나면 세상으로 갑니다. 이렇게 ‘갈 지(之)자’로 계속 가면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며 살았는데 무슨 고난이 있겠습니까? 구한말에 변절해서 일제에 빌붙어 먹고살고 다시 변절해서 1공화국 시절에 출세하고 또 변절해서 3공화국 시대에 고위 관직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언제 박해를 받아보았겠습니까? 세상이 OK 할 때까지 언제든지 변심해주는데, 죄가 OK 할 때까지, 정욕이 만족할 때까지 봉사해주는데 핍박을 왜 받겠습니까? 자기 동료인데 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사람을 핍박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합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것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내 자리에 서 계셨더라면 이 시대 타령하면서 정직을 버리고 세상과 야합한 구세주가 되셨겠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바로 그분의 뒤를 따라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며 살 때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화되는 것입니다. actualization(?)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이 무엇이고 나를 통해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온 삶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진리를 따라 산 사람들의 면상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박해를 받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환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짊어질 때 그 때에 하나님이 그 고난과 시련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놀라운 성령의 위로를 주시는데 이것은 경험해본 사람만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핍박받는 순교의 형장에서도 그렇게 담대히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김대건신부의 죽음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묘사해놓은 내용-칼을 들고 춤을 추는 망나니에게 ‘쳐라 네가 어느 쪽으로 칼을 대려느냐. 이렇게 하면 네가 편하게 내 목을 치겠느냐?’고 하자 망나니가 덜덜 떨면서 목을 못 쳤다고 한다)
그의 양심이 저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라고 증언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요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든 삶에서 부정직하게 살던 삶을 회개하고 정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의지해야 합니다.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내가 서 있는 이 세상에서는 내가 이 어두움을 비추는 마지막 존재의 등불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직의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 때에만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8.정직한 자에게 은혜가 있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14:9)”
먼저 단어를 설명하겠습니다. ‘심상히 여긴다’는 뜻은 히브리 원어로 ‘루츠’ 혹은 ‘리츠’에서 온 말인데 산문이냐 운문이냐에 따라서 각기 달리 쓰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가지고 놀다’ ‘조롱하다’ ‘우습게 여기다’ ‘비웃다’ 정도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놀이 삼아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는 ‘앗샴’이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죄책’이나 민수기 민법에 다른 사람의 재물에 손해를 입혔을 때 그런 손해나는 행동을 하는 그릇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어겨서 이웃에게 손해를 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랬겠지만 탐욕과 부정직 등을 통해서 민법상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주는 그릇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자는 죄책과 범법행위를 우습게 알지만'입니다.
정직한 자나 미련한 자는 모두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벤’이라는 전치사가 나오는데 ‘사이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자들 사이에는’ ‘정직한 자들 모임 가운데에는’이 되고 ‘은혜’는 ‘라쬰’이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원래 쓰인 것은 왕이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왕이 큰 상급을 내린다든지 죄를 용서해준다든지 하여 왕의 특별한 은혜를 입는 것부터 시작되어서, 하나님이 지존하신 왕으로서 우리 인간들에게 특별히 우리에게 이득이 될만한 예기치 못한 혜택을 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우리 안에 은혜가 살아있다느니 떨어졌다느니 하는 의미보다도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큰 은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또 우리 안에 주관적인 은혜를 불러일으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대구법이 아닙니다. 앞에는 앞대로 이야기하고 뒤는 뒤대로 이야기하는데 모든 것이 딱 들어맞는 평행법은 아니지만 두 개가 상당한 대조를 보입니다. 그래서 맨 먼저 우리들이 풀어볼 것은 여기서 정직한 자를 부정직한 자와 대비를 시키면 좋았을 텐데 왜 미련한 자와 대비를 시켰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언 전체에 나오는 시문학적인 기법입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를 한쪽에서만 보면 재미가 없습니다. 각 방향으로 돌릴 때마다 영롱한 빛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정직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계속 상대를 바꾸어서 설명함으로서 이 정직한 사람의 특성을 다이아몬드를 돌려서 찬란한 광채를 보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태껏 우리가 본 것만 해도 정직한 자를 패역한 자와 비교했는데 패역한 자를 들춰내면 정직한 자의 영광이 무엇인지 나타납니다. 오늘 여기에서는 미련한 자와 정직한 자를 비교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정직한 자를 게으른 자와 비교합니다. 따라서 정직한 자는 굉장히 성실하고 자기 일에 철저한 사람이구나 하며 반대되는 것들을 서로 대비시킴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미련한 자와 정직한 자를 대비시켰습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적어도 이런 정도는 우리들이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계속 부정직하게 살면 미련해지겠구나’ 그러나 사실 우리 사람 눈에 미련해 보이는 것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부정직한 사람은 아주 지혜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롭게 계속 살면 역설적으로 미련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정직의 근본적 동기는 믿음 없음과 삐뚤어진 자기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통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승부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하고 세상적인 지혜를 발동해서 그릇된 방법으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무리를 해서 별로 좋지도 않은 머리를 너무 많이 돌리니까 과부화가 걸려서 병이 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합이라는 사람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이 탐스러운 포도를 맺고 너무 좋아 보여서 갖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정해주신 기업은 서로 침범하지 못하는 기업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너무 가지고 싶어 병이 나니 부인 이세벨이 때려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주었습니다. 이세벨은 바알 종교의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데 갖고 싶은 탐욕 때문에 온갖 구실들을 붙여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 보기에는 얼마나 지혜로워 보입니까? 그런데 그것은 인간적인 안목을 가지고 보니까 정직한 사람이 미련해 보이고 약삭빠르게 부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실 적응력이 뛰어나고 똘똘한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는 누구도 지혜로울 수 없다고 가르쳐줍니다.
솔로몬을 생각해보십시오. 뛰어나게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버지 다윗 못지 않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기에게 지혜를 달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부귀와 영화를 구할 수 도 있었을 텐데 지혜를 달라고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니 굉장히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지혜의 은사를 받으면서 찬란하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 재판하는 사건은 안 믿는 사람들도 다 아는 사건입니다. 그런 번뜩이는 놀라운 지혜는 공부를 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입니다. 그런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고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귀하게 하나님을 섬길 기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지혜를 많이 얻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그 지혜는 일평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계속 솔로몬을 따라다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년에 행한 일들은 세속적으로 보면 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많은 나라들과의 외교를 위해서 연혼 관계를 맺었는데 그 여자들이 모두 자기의 신들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꽉 잡고 있을 때에는 그 지혜가 정말 아름다운 효과를 발휘하는 지혜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는데 은혜가 떠나고 나니까 자기 딴에는 그 은사를 지혜롭게 활용한다고 한 것이 미련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하면서 역사와 민족에게 고통을 남겨준 것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활용하고 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래서 영리하고 똑똑한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거둬가 버리시기도 하시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안 거둬 가시고 솔로몬처럼 놔두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재능과 지식을 가지고 아주 나쁜 일에 사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돈 받고 사람들 치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어떤 지혜의 은사도 매우 중요하지만 항상 은혜 안에 살면서 그 지혜의 은사가 은혜에 깊이 잠겨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시는 방향으로 사용되도록 살아가는 것도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승복되지 않은 지혜를 뭐에 쓰겠습니까? 칼 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직이 미련과 통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솔로몬이 그렇게 지혜롭게 행한 것 같았지만 신앙적 측면에서 보니까 미련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현명해 보이고 대단해 보였는데 마지막에 나타난 결과,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그 일을 끌고 가실 때 나타난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점에서 내려다보면 순식간에 솔로몬이 돌 머리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진짜 그 사람이 미련해져서가 아니라 그 지혜가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참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혜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서 그분의 은혜의 통제를 받으면서 사용될 때 우리들이 정말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내릴 수 있는 첫 번째 결론은 ‘요령부리고 잔머리 굴리면서 살면 당장은 지혜로운 것 같고 잘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안목으로 내려다볼 때 결국은 미련한 자가 되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집은 그냥 살다가 죽으면 되지 집을 사서 돈벌려고 하면 안됩니다. 식구가 많으면 좀 큰집에 살고 식구가 적으면 작은 집에 살고, 식구는 적지만 조금 안락하게 살고 싶다면 좀 더 큰집 사는 것이지 집을 돈으로 계산하고 환산하면 안됩니다. 집 팔아서 장난하고 증권 잘된다고 집 팔아서 증권에 집어넣고 하다가 망한 사람 많습니다.
요즘 ‘정도 경영’을 내세우는 기업들이 있는데 저는 정말 좋게 생각합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정말 정도를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조업에 종사해서 물건 팔아서 생산에 기여해서 기업을 키워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물건을 싸고도 좋은 품질로 만들어서 많이 팔아서 돈을 벌까 생각해야지 은행에서 돈 빌려다가 땅 사놓고 공장도 안 돌리고 있다가 땅값 오르면 벌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비정상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업을 맡겨주셨으면 그 기업을 잘 경영해야 합니다. 물론 기업 하는 사람들이 땅 사서 돈 버는 사람을 보면 기업 할 마음이 알 들 것입니다. 그러니 정부에서는 그런 것을 못하게 해야합니다. 땅 값이 올라서 돈을 벌었다면 정부에서 세금으로 다 가져가 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땅 값 올라봐야 소용없게 해야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땅을 사려고 하겠습니까?
이사야서에 보면 그렇게 부동산에 관심을 갖고 땅에 땅을 연하고 하는 탐욕들이 나옵니다. 성경적인 정신에 의하면 땅은 그렇게 누구에게 예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땅을 모두 국가가 소유하고 개인에게 20년 정도씩 사용권을 주어서 계약기간이 끝나면 언제든지 나라가 그 땅을 환수할 수 있게 해서 땅값이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력을 안하고 떼돈을 버는 사람이 없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혹시 떼돈을 벌었으면 조금만 남겨주고 세금으로 다 거둬가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지혜롭게 사는 것 같아도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미련과 통합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정말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직이 아무 생각도 안하고 시계바늘 돌아가듯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자기를 더 많이 실현할 수 있고 더 많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고 자신의 신앙을 더 잘 지킬 수 있고 자신의 경쟁 가치를 높일 수 있다면 점프해서 다른 회사로 가야합니다. 사업도 하다가 면밀하게 기도하면서 계산해보고 아니라고 생각되면 손떼야 합니다. 음식점을 해도 5년 10년씩 계속 잘 되는 집은 수만 개 중 하나 정도입니다. 대부분은 바글거리다가도 짧으면 6개월 길면 3년만에 파리 날리게 됩니다. 그래서 영리한 사람들은 2년 정도 되어 손님이 많을 때 최정점에서 팔고 다른 곳에서 다시 가게를 냅니다. 그렇게 해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계속 높이면서 삽니다. 연봉만 많이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치 있게 봉사할 수 있는 기업을 찾아다닙니다. 생각을 하면서 한 우물을 파야지 무조건 한 우물을 파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삽으로 파다가 돌이 나오면 곡괭이로 파고 암반이 나오면 포크레인으로 파고 그래도 안되면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 폭파해서 암반을 깨트려야 합니다. 암반이 나왔는데도 계속 삽질을 하다가 삽이 다 닳았는데도 계속 하는데, 한 우물을 파라고 했지 누가 한 연장 쓰라고 했습니까? 정말 한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도태 되야 마땅합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직하게 행한다고 해서 생각 없이 바보같이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올바른 안에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아이디어 있고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 곧 부정직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이 가라는 범위를 넘어서서 창의적이 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창의적입니다. 보통사람들은 그렇게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의적이지만 범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영재들은 다 감옥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자기네들끼리 연구해서 더 지혜로워집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갔다 나올수록 상상할 수 없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그 모두 창의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창의적인 것이 다 정직의 범위를 넘어서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의 틀 안에서도 얼마든지 창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고 생기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정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화:어떤 사람이 식당을 하는데 설거지할 그릇이 수없이 나오고 설거지할 사람을 구 하기가 힘들기에 ‘먹은 사람이 설거지하고 가게 하면 어떨까’하는 발상을 해서 수 도 꼭지를 여러 개 달아놓고 설거지하고 가는 사람은 밥값에서 1000원을 깎아 주 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발상입니까? 오히려 일꾼을 사는 것보다 경제적이고 위생적이었습니다. 정직하게 발상 하는 이런 발상 때문에 인류 역사가 발전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정직한 사람이 고지식하고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정직은 도덕적 판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올곧은 삶을 사는 것을 가치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저항과 더불어서 나는 싸울 것이다. 내가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못살지 모르지만 기꺼이 싸울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이 정직을 지키면서 사는 이것이 부정직함으로써 현실과 야합하면서 얻는 눈앞의 이익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이 바로 정직한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 정직한 삶을 살면 첫 번째로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 정직하게 살면 살수록 지혜가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서 영적인 면에 적용시켜보겠습니다
앞의 내용이 정직한 자의 삶이라면 이번에는 정직한 자의 영적 유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게으름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부주의한 것도 게으름의 결과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알았더라면 제가 그랬겠어요?’하는데 다 쓸데없는 변명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 쉽습니까, 대충 아는 것이 쉽습니까? 대충 아는 것이 쉽습니다.
(예화; 기계 제품을 샀을 때 설명서를 꼼꼼히 읽지 않고 기본작동만 할 수 있으면 신 경을 쓰지 않는 나쁜 습관이 있다)
아무리 하나님을 충격적으로 크게 만나서 격렬한 회심을 경험했다고 해도 빈틈이 없는 논리적인 지식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견고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빛이 들어오면 비논리, 혹은 무논리가 무너집니다. 그것이 말씀이 하는 첫 번째 역할입니다. 열린 신문에 실린 간증의 공통적인 것은 어두움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깨닫기 시작하면 ‘여태껏 내가 너무 논리 없이 무지하게 살았구나. 그리고 틀린 것을 확신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것들, 비논리적인 것들이 다 사라지고 정리되면서 ‘아 이것이구나’하며 쌓아져 가는 것이 말씀의 빛이 들어올 때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소수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씀의 빛이 비치든 말든 자기 생각은 꾸준합니다. 그래서 가끔가다가 자기 생각과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면 ‘아멘. 주님도 그것을 알고 계셨군요’합니다. ‘봐라.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느냐’하고 자기 생각과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만 지나면 내 답안지와 맞는 게 나온다’하며 눈을 지긋이 감고 참는 것입니다.
(예화: 정답을 가지고 설교를 듣기 시작하는데 계속 자기의 정답이 틀리기에 몇 개까 지 용서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설교를 들으면 화가 나기 시작했다는 어느 지체의 간증)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영적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리한 칼에 의해서 빚어지는 것이지 두부를 썰다가 급하면 나무도 패는 무식한 부엌칼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이 조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격적으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하는 사람들이 은혜 많이 받았을 때는 괜찮은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주님인들 어떠하리 세상인들 어떠하리’하며 다시 가버립니다. 그리고 항상 선생의 입장에서 애써서 이것과 저것이 이런 차이가 난다고 설명해주면 ‘다 마찬가지 이야기지요?’하며 묶어버립니다. 본인들은 상당히 찔릴 것입니다. 그럴 때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좌절을 느낍니다. 틀린데 같다고 합니다. 결국 미련한 것입니다. 분석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교육수준과 어떤 의미에서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학문적으로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굉장히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겠습니다’를 연발하는 사람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다른 책은 많이 읽었는데 성경책은 별로 안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초보가 아름다운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삶에 어떤 변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모든 것들이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나 은혜의 원리에 대해서 가르듯이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것들을 두루뭉실 묶어버리는 것들이 결국은 삶의 면에서 본다면 게으름 때문이고 또 하나는 정직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잘못들을 분명히 지적해서 가르쳐주고 그것들을 통해서 그 문제가 어떻게 발전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그것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가르쳐보면 가르치는 담임목사와 생각이 같다는 얘기는 안 하더라도 자기의 생각이 무엇인지 말해야 하는데, 매사가 정확하지 않고 혼탁합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사람과 혼탁은 좋은 짝을 이룹니다. 정직한 사람은 명징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 부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나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지나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이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영적인 삶에 있어서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이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인가’하며 캐 들어가야 합니다. 그 때 거기에서 굉장히 파괴적인 힘이 나옵니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뭐든지 이 신앙에 관한 것들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것도 우리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을 때 그런 사고력과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자세히, 더 정확하게, 더 분명하게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 속에서 사라지면 그 정확한 것이 싫습니다. ‘뭐가 그렇게 어렵냐’ ‘좀 간단하게 믿을 방법이 없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세세하게 하나하나 정리해서 그 진리들을 드러내줄 때 사람들이 비로소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그 말씀 하나 하나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하나 하나의 말씀들이 나의 어떤 삶을 드러내는지 생각하면서 믿을 때 작품이 되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기나 생선은 어떤 결로 써느냐가 중요합니다.
(예화: 일식 집에서 생선을 써는 사람에게 얼마나 배워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주방에서 3년 반 걸려야 칼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김치찌개 끓이기 위해 돼지고기 썰 때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 없이 설교시간에 와서 웃기는 얘기하면 웃고 슬픈 얘기하면 눈물 찔끔 흘리고 이해 안가면 자고 이해는 가도 감동이 없으면 눈 지긋이 감고 하며 산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안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데서 나온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시퍼런 도장 찍히고 털도 숭숭 박힌 막 돼지고기 썰어 넣고 끌인 김치찌개 수준밖에 안됩니다. 한사람에게 고기 구워 팔고 몇 만원씩 받을 수 있는 양질의 음식은 될 수 없습니다.
대개 부정직한 사람들은 부정확합니다. 42300을을 꿔가고 나서 40000원만 꿔갔다고 생각합니다. 2300원에 대해서는 ‘그까지것 가지고 뭘 그러느냐’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38000원 빌렸는데 40000원 갚으라고 하면 펄펄 뛸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한 사람들은 정확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정직한 사람들이 인간미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원리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의 갈피 갈피에 죄악들이 숨어있는데 그것들을 하나 하나씩 들춰내어서 그 죄들을 끌어내려고 할 때 두루뭉실한 사고를 가지고 있고 사람이 부정확하고 정직하지 않으면 많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새사람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항상 ‘왜 성경은 한말 또 하느냐’고 합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한말 또 하지 않는 것 같은 것은 텔레비전 드라마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얘기하면 계속 반복되는 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 모든 기초가 사람이 부정직한 것에 놓여집니다. 부정확한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렇게 미련한 사람들은 죄를 심상히 여깁니다. 그 이유는 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없고 그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성경이 수없이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인식이 없어졌습니까? 정직하지 않으니까 부정확하고 부정확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앙까지 없으니까 담대하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직 말을 못해도 부모가 아이에게 제일 먼저 해주어야 할 것은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대해서 부모가 호 불호를 분명하게 표시해 주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하면 웃으면서 좋아하고 옳지 않은 것을 하면 굉장히 슬퍼하고 분노하는 표정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뚜렷하게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이 명징하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가 돈을 주웠다고 하면 제자리에 갖다놓으라고 해야 한다-법적으로 ‘점유이 탈물횡령죄’라고 할 수 있다)
(예화: 미국에서 가을에 가로수에서 열매가 떨어지니까 두 아이가 그것을 모아서 나무 밑에 놓고 갔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안 가르치는 것은 부모가 부정확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게 부정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정직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부정확하게 사니까, 지금은 부정직함으로 얻는 이익이 별로 없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이익이 충돌하면서 부정직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는 언제든지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안됩니다. 우리 자라나는 아이들이 부정직한 것은 거의 90%가 부모책임입니다. 부모가 정직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마음놓고 부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분명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왜 하나님께서 새나 물고기처럼 알만 까놓고 내버려두고 가고 새끼는 각기 자라는 체제로 안 하시고 부부가 아이를 낳아서 그 부모의 그늘 아래서 아이가 자라서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남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가정 속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제일 가는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참 사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님이 기대하셨던 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모들이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정은 하나님이 특별히 그 가정을 징계하시려고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셔도 계속 나쁜 씨앗들이 나옵니다. 주님을 경외하면서 주님 앞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그렇게 부모들이 살아가면 그 밑에서 그런 정신을 머금은 자식들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얼마나 충실하게 했느냐를 보고 우리의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해야 됩니다. 돈을 얼마나 벌고 사회적으로 무슨 지위에 올랐고 권력을 쥐었고 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사람들은 미련할 뿐만 아니라 죄를 하찮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가르치면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는 ‘라찌온’인데 ‘왕이 베풀어주는 특별 호의’입니다. 그런 왕의 혹의가 정직한 사람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떨어지는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고 그래서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갚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또 안 갚아 주신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풀무 불에 집어넣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슨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아니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사람이 이 세상에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들 이외에는 없습니다. 누가 그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에다 쓰리요”하셨는데 신약성경에서 난해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해석가들의 문제가 소금이 어떻게 맛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결론은 그 때 당시의 소금이 우리가 쓰는 천일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암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광물질이 섞여 있기 때문에 습기가 있는 상태에 두면 소금 성분이 녹으면서 찌꺼기 같은 광물 성분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이 액체로 흘러버리고 소금기를 약간 머금은 광물질이 붙어있는 것만 남는데 그것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그래도 소금이 많이 있을 때에는 음식에도 넣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썼지만 소금기를 잃어버리고 나니까 소금의 형체는 남았는데 순수한 소금은 조금밖에 없고 나머지는 광물질인 것입니다. 그러면 밖에 버립니다. 밖에 나가면 흙만도 못하게 됩니다. 소금을 머금은 흙은 농사도 못 짓고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계속 유지되어야 할 사상입니다. 세상에도 족해 보이고 예수님에게도 족해 보이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정직의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양자를 다 조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이 안될 때 그때는 서슴없이 세상에서의 유익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몇 년 전 까지 계속 했던 제직 세미나에서 첫 번째로 강조했던 것이 ‘우리 교회는 현실과 하나님 말씀 사이에 괴리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조화점을 찾아보려고 애를 쓴다-거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 상황을 개선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양보하지 않고는 조화점을 찾을 수 없을 경우에 우리는 말씀을 버리는 대신에 상황을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한 방법으로 간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들이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 처음부터 노력하지 않고 ‘신앙? 웃기네. 필요 없다. 나는 세상적으로 잔머리를 굴리면서 의지하면서 산다’하고 살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제 아닌 것이 없으니까. 구원받았다면 배교에 가까운 삶이고 구원받지 않았다면 불신자의 삶이니까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세상에서 잘됐는가 안됐는가 하는 것은 세상의 비유를 맞추면서 살았기 때문에 인간적인 지혜로 잘 나갈 수 있었겠지요.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잘 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자극을 받거나 부러워하거나 하면 안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는데 너무나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부정직해지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자기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자체가 나쁜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삶을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고 어느 상황에서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정직에 있어서 일관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세상에서 미련한 자처럼 됐을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정직하게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면서 왔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이라고는 돈도 없고 명예도 잃어버리고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주님, 저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할 때 하나님이 ‘그래’하고 베풀어주시는 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은혜-라찌온’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하나님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신앙으로 살려고 애를 썼고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는데 혼자 힘으로는 너무 견딜 수 없을 때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낫도다’ ‘천만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나는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는 고백이 담대히 나오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 시며 나의 구원이라’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곤란 중에 내가 주께 부르짖나이다’하는 시인의 고백이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것입니다. 샛눈 뜨고 산 적이 없고 올곧게 살았기 때문에 주님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놀라운 교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치 못했던 성공-투씨아-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라찌온’이 바로 그런 선물, 호의입니다. 특별 호의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믿음으로 안 사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런 기적을 상식처럼 경험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했더니 주님이 도와주셨네’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정말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았는데도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하나님이 안도와 주시더라’ 하는 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기도 응답 받은 것이 무슨 간증거리입니까?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이는 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바라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신앙이 있으면 담대해지고 정직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부정직한 사람은 모두 신앙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하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길거리에 돈 보따리를 떨어트리고 가도 며칠만에 오면 거기 그냥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정말 정직하게 살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부정직해지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주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참된 신자로 지속적으로 빚어 가시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 앞에서 정직해지지 않고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가 없고 진리를 깊이 아는 지식에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만큼 죄와 가깝고 유혹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속에 있는 부정직한 습관들이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만날 때에는 더 가공할 만한 범죄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육체적인 게으름이 게으름으로만 존재하면 문제를 크게 일으키지 않는데, 영혼의 실증과 만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등돌리는 무수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영혼의 실증과 우리 육체의 게으름이 랑데부 할 때 그 게으름은 커다란 연자맷돌이 되어서 우리 목을 달아서 깊은 바다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정직이 일상적으로 살아갈 때는 문제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탐욕과 만날 때에는 역시 우리 목에 연자맷돌을 매어서 깊은 바다 속으로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두 개의 연자맷돌이 짝을 이루면서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정직과 탐욕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를 깊은 수렁으로 끌어갑니다.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마지막에 생각할 것은 ‘그렇습니다. 하나님. 내가 서있는 이 삶의 자리에서, 이 삶의 엄중한 현실 속에서, 저는 이 시대의 마지막 정직의 등불입니다. 저까지 그렇게 살면 우리 이웃은 희망이 없습니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말 정직해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9.영혼을 지키는 정직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16:17)”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자의 대로다 그리고 그 길은 지키는 것은 영혼을 보존하는 길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문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정직한 자의 특징은 악을 멀리 떠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절대로 ‘악의 길에 계속 행하는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정직한 자는 본성적으로 악을 미워하고 그 악한 길에 가지도 않거니와 설혹 환경으로 인해서 잘못하여 그 악한 길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에는 즉시 그 길에서 떠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정직의 문제가 이처럼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정직 자체도 문제가 되겠지만 정직하지 못할 때 나타나게 될 그 후의 결과가 심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이 정직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직에 대해서 ‘그렇게 너무 칼날같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분도 아마 없지 않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칼날처럼 정직을 적용한다면 아마도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굉장히 힘들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직하게 살아가면 그 길은 굉장히 힘듭니다.
저는 그래서 요즘 교회를 전체적으로 돌아보면서 설교만 할 것이 아니라 정직에 위반되는 그 어떤 것들이 교회 안에 있는가, 제 삶은 말할 필요도 없고 저를 알로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 정직에 위반되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을 면밀하게 살피고 또 직원들에게 그렇게 살피도록 지시하고 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해야될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는 교회라고 하는 이 인격체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에 완전한 성도들만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성도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모임은 온전함을 지향해야 합니다. 완전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온전해지기를 지향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교회라고 하는 몸 전체가 또 다른 몸인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모본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이끌어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설교만 되어지고 정직이 이 교회의 구석구석에 적용되어지지 않는다면 아마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성도들이 교회의 운영되어지는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설교와 자신의 삶 사이의 괴리를 정당화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아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닌데 그것을 가치로 세우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것을 내 삶에 적용하면서 살아야된다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피 흘리는 노력이 필요하고 희생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길이고 때로는 정말 신앙을 조금 양보하는 것이 정직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흘리는 희생을 덜어줄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신앙을 대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고통받을 일도 없고 핍박받을 일도 없고 신앙 때문에 십자가를 질 일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정직의 원칙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 길이 정말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걸어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타협이라고 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들어오는 죄와 타락은 없습니다. 타협을 타고 타락이 들어오다가 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타락하고 불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소중한 물건은 좋은 껍질에 쌉니다. 귀한 물건일수록 우선 단단한 포장을 하고 예쁘게 장식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물건값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검은 봉지에 넣어서 파는 멜론은 한 개에 4천 원인데 오동나무 박스에 들어있는 것은 만원입니다. 어물전에서 썩어 가는 나무 판자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누워있는 조기는 불과 2천 원 밖에 안 하는데 그것을 등나무 박스에 얼음 넣어서 풀잎 몇 개 얹어놓으면 5-6만원 짜리 조기로 변합니다. 그만큼 껍질과 포장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수시로 죄와 악에 의해서 공격을 당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영혼을 잘 보호하게 만들어주는 껍질이 정직한 삶입니다. 정직한 삶이 몸에 배면 정직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은혜가 떨어진다고 해서 이 정직이 갑자기 부정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충만 할 때는 더 정직한 삶을 살게 되고 고갈되어서 은혜가 많이 떨어지면 칼날 같은 정직을 가졌던 사람들의 정직의 칼날이 무뎌지기도 하지만, 오늘 은혜가 떨어졌다고 해서 갑자기 사기 치고, 내일 은혜 받아서 정직해졌다고 갑자기 칼날 같아지고, 그 칼날이 갑자기 두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많이 변화되어서 성격이 온유해진 사람은 은혜가 떨어져도 그 온유함이 조금 지속됩니다. 물론 오래 은혜가 떨어지면 결국은 바닥이 다 드러나게 되지만 은혜가 떨어졌다 올라갔다 하는 상태 못지 않게 인격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꾼들을 뽑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인가만 보면 안됩니다. 그 은혜가 떨어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집사 세워놓고 3주밖에 안됐는데 은혜가 떨어진 것 같으니 집사 그만두라고 했는데 1주일 후에 다시 은혜를 받았다면 다시 오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도 집사를 뽑을 때 성령이 충만한 것과 함께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인격의 사람을 뽑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은혜를 많이 받고 펄펄 끓는 정도에 있어서는 좀 떨어져도 성격과 인격이 원만한 사람이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신앙을 제쳐놓고 인품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인격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대체적으로 정직한 삶을 살아갑니다. 은혜가 떨어졌을 때나 은혜가 충만할 때나 정직한 삶이 몸에 배면 부당한 뇌물을 받는다거나 불법한 방법으로 굽은 길을 택한다거나 하는 것이 생리적으로 안 맞은 것입니다. 성품 자체가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 중에도 정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화:뇌물을 많이 받은 자리에 있는 공무원에게 돈 봉투를 내밀며 점심이나 사드시라 고 했더니 ‘왜 당신이 주는 돈으로 내가 점심을 사먹느냐’고 크게 소리쳤는데 그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평생 가도 그런 것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또 성품 자체가 부정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정직이 몸에 배이게 되면 은혜가 좀 충만할 때나 떨어질 때나 굽은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혼을 보호합니다. 어떻게 영혼을 보호하게 되는지는 설명 안 드려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하고 부정직한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마치 은혜 받은 영혼의 좋은 상태가 포장지 없이 노출되어있는 것 같아서 부정직한 삶을 통해서 침투하는 무수한 죄의 병원균에 오염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이 몸에 배이게 해야합니다.
(예화: 어느 단체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강의안을 줬는데 강의를 하고 나서 얼마 있 다가 허락도 받지 않고 그 내용을 가지고 책이 나왔다-저작권을 유린당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몇 년 동안 몇 백억 심지어 몇 천억을 들여 개발한 프로그램들을 디스켓과 CD에 복사해서 수천 명이 돌려쓰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개발한 회사들이 다 문을 닫고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뭐라고 말해도 이런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금 컴퓨터 시대에 사셨다면 그런 방식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복제해서 우리들에게 설교를 나눠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은 지워버리고 쓰지 말고 꼭 필요하면 사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렇게 도용된 프로그램으로 교회의 인쇄물을 만들고 하는 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정직의 문제에 있어서 희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항상 죄라고 하는 것,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못된 것을 선택하려고 할 때 내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양심은 올바르게 판단할 때가 많기 때문에 양심은 나에게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 하고 싶습니다. 양심을 따라서 정직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쉬운 길을 택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택하고 싶어서 그 길을 택하려고 할 때 양심이 계속 옳지 않다고 우리에게 제재를 하는데 그 때에 그 양심을 꺾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것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부정직하게 행하고 있을 때 우리의 양심은 급속히 꺾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잘못된 길을 선택해야겠다고 하는 우리의 의지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됩니다. 응원군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어디를 살펴봐도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시대가 어두우니까 너희도 티내지 말고 컴컴하게 살아라’ ‘물이 아래로 흐르니까 튀지 말고 같이 흘러라. 그 대신 천천히 흘러라. 그래도 믿는 사람이니까’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둡단다. 너희라도 찬란하게 빛나라’ ‘세상이 죄로 흐른다. 그러니까 거기를 거슬러라’ ‘시대가 어그러지고 거스르니까 너희는 그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에서 빛들로 나타나야 된다’하는 모든 여망이 로마서 12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본받다’는 말은 희랍어로 ‘수쓰케마티죠’로 붕어빵을 굽듯이 찍어낸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정직하기 때문에 나도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다이케스트(diecast)에 들어가서 똑같이 찍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이 세상을 향해서 인간이 참으로 살아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보여주는 그 기능을 실제적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이케스트(diecast)에서 찍어내어 지듯이 획일적으로 ‘쑤쓰케마티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생산된 인간제품과 세상에서 생산된 인간제품이 다 똑같이 찍혀졌는데 색깔만 다르게 찍혀져 나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들고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 이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또 다른 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후예이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닌 것입니다.
또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 '퍼팩트(perfect)한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적당히 찍히고, 이 세대를 적당히 본받고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대하셨던 가장 간절한 부탁 중 하나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또한 온전하라” 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부탁하신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막 살게 내버려두십시오. 그들은 원래 그렇게 살도록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까지 그렇게 살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해야 되는 것입니다. 투명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특히 여러분들의 이익이 그 문제에 관련되어있다면 ‘목사님이 세상을 너무 몰라서 그렇지’라고 반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매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만 알고 세상은 전혀 모르는 동떨어진 지도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사람과 똑같이 룸싸롱에 가서 술 먹고 PC방에 들어가서 채팅하고 하지는 못하지만 여러분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저는 매일 살핍니다. 세상을 모른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잘 연구해서 신자가 어떻게 타락하는지 경로들도 부지런히 연구하는 것이 목회자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윤리의 기준은 하나님이 죄라고 생각만 안 하시면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할 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프로그램을 베껴서 돌려쓰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확증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기업을 하면서 너무 과다한 이윤을 남기는 것까지도 다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직한 사람들은 삶이 정직해지면 그만큼 죄의 유혹을 덜 받게 됩니다. ‘나 눈먼 돈 있으면 뭐든지 먹지’하는 사람들은 은혜가 속에 있어도 누가 뇌물을 주겠다고 하면 은혜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은혜를 무마시키면서 되는 길을 모색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성품이 굳어져 있으면 은혜가 좀 떨어져도 감정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많이 일하고 헌신적으로 살아도 어느 부분에서 부정직해서 더러움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던 많은 부분들의 영광이 가리워 지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 6천억을 줬다고 할 때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전쟁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매일 마음속으로 염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변명을 들으면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잡혀온 사람들이 모두 구국의 일념으로, 조국을 건지겠다는 결단으로, 역사 앞에 심판 받겠다는 양심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하고 끝났으면 얼마나 역사 앞에 떳떳하겠습니까? 그것이 싫다고 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권을 가지고 신명대로 살았기 때문에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면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는 그것이 구국적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판단 착오였는지 심판을 해줄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정책 판단 착오라고 해도 그것이 가문의 불명예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떡고물을 묻혀서 그것을 뜯어먹고 합니까? 그런 것이 너무 더럽습니다. 그런 큰일을 할 때 아무리 구국적 결단을 가지고 했다 하더라도 작은 일에 있어서 정직하지 못했으니까 행했던 모든 좋은 일까지 더럽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신앙생활 하면서 일평생을 은혜 받아서 하나님 섬기며 살아간다고 할 때 그가 어떤 사회적 활동을 하면서 부정직해서 추문이 생겨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알려지게 되었다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부가 그렇게 추문을 불러일으킬 때 물질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탐욕으로 일관된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항상 성도들의 삶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섞여 있지 작은 악이 하나 있다고 해서 선한 모든 것이 다 악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실제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옳으냐 그르냐, 또는 실제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중량이 큰 죄냐 작은 죄냐를 가지고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하나님의 심판은 죄 자체의 경중뿐만 아니라 그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기 위해서 나타낸 파괴적 효과를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이 커다란 심판을 선고하시는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의 경우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구 조사를 하게 됩니다. 그 죄는 사실 그렇게 큰 죄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행정적으로 보면 그것은 왕국에서 늘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인구 조사를 한 것이 큰 죄입니까, 아니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한 사람을 간음한 것이 큰 죄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입니다. 그런데 후자 때문에는 다윗의 영혼이 괴로워했을 뿐이고 인구 조사를 했을 때에는 온역이 일어나서 수만 명의 사람이 일주일 안에 죽어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판단은 ‘네가 행한 그 일이 사단의 훼방거리가 되었으니까 벌을 받아야 된다’하는 취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죄 자체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이 죄가 나타낸 효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고려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하자면 성경적으로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똑같은 죄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지도자가 짓는 죄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효과가 다르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죄를 각각 다르게 다루십니다. 지도자가 잘못에 빠지게 되었을 때는 보다 가혹한 방법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더 많은 속죄를 요구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지성소로 들어갈 때 먼저 자기의 죄를 속해야지 만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해서 빌 수 있으니까-대제사장이어도 예수님 같은 대제사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제사장 한사람의 죄를 위해서 바치는 제물과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바치는 제물과 똑같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보다 많은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속에 통용되는 부정직의 죄는 추문을 덜 불러일으키지만 믿는 사람들이 짓는 부정직의 죄는 더 많은 추문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러 일으켜서 그들의 마음이 굳어지게 하고 복음을 거절하게 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절대 우리 믿는 자들의 부정직의 문제를 믿지 않는 자들의 부정직의 문제와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는 부정직해도 잘 넘어갔는데 예수 믿고 나서는 오래 동안 정직하다가 세상맛에 취해서 딱 한번 실수를 해서 부정직했는데, 옛날에는 부정직해도 안 걸렸는데 예수 믿고 나서 부정직해지면 족집게같이 하나님이 집어내셔서 개망신을 시키십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서양속담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 저명 인사들에게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살아가는 이 모든 세상에서 볼 때, 신령한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 세상의 ‘노블리스’들입니다. ‘명사(名士)’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의무와 책임을 느껴서는 안되고 보다 더 큰 의무와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다 불법으로 빼앗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저 사람들은 타인들이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의 노불리스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블리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책임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계획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영적인 신령한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이 그렇게 부당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 담력을 얻어서 ‘나도 한 번 그렇게 살아가 볼까’하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그래 너는 그렇게 살아라. 너하고 내가 똑같으냐. 너희들은 하층 천민들이고 우리는 노블리스다. 그리고 노불리스에게는 오불리제가 있다. 우리는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너희처럼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도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하며 영적인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항상 마음을 세우고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성경의 음성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단단한 갑옷으로 두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영적인 전투지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오지 않을 리가 없고 칼끝이 우리의 몸을 스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면 날아오는 화살이 우리의 몸을 꿰뚫지 못합니다. 칼날이 스쳐서 우리가 입은 갑옷을 상하게 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살을 찌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안전한 싸움입니까? 전쟁을 할 때 깃발이 나부끼고 칼날이 허공을 그으면서 휘돌고 여기 저기서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불꽃이 튀는 전쟁터에서, 맨몸으로 팬티 하나 입고 칼 들고 싸우는 사람이 유리하겠습니까, 갑옷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싸우는 사람이 유리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정직하게 사는 삶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면서 고민하고 찾아와서 호소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세금을 잘 냈더니 세무서에 찍혀서 불시 감찰을 받습니다. 똑같은 업종 사람들이 500만원씩 세금 내는데 혼자만 1000만원을 내겠다고 하니 세무서에서도 황당할 것입니다. 표창장은 안 줄망정 오히려 감사 나와서 다 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당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살고 있는데 인간들의 불법한 강탈이 너무 심하구나’ ‘하나님의 의와 신과 진리를 사람들이 이렇게 왜곡하면서 사는구나’하며 사명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 현상입니까? 돈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만큼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에 있어서 판단이 정확하고 사리분별이 명쾌하고 선악에 대한 판단이 명쾌하고 그 명쾌한 판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데 있어서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죄와 싸우는데 있어서도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만큼 자신의 영혼이 죄로부터 부당하게 공격당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서히 말려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자의 대로요 그것을 지키는 자는 영혼을 보존하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들이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의 판단의 기준은 세상의 판단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교회가 좀 작았을 때는 1년에 한번씩 제직들을 모아놓고 제직 세미나를 했었습니다. 그 때 첫 번째 가르치는 것은 ‘우리교회는 성경의 진리와 현실이 모순될 때 어떻게든지 성경의 진리를 가지고 현실을 끌어안으려고 고민한다. 그래서 조화를 이루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하고 애를 써도 도저히 성경의 진리를 양보하지 않고는 현실을 끌어안을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진리를 버리는 대신 우리는 현실을 버린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적용하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교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가정 파탄의 문제들, 도덕적인 문제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할 지 목회자로서 고민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교회이기 때문에 지금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버리는 것보다는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앞으로 변화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사랑과 공의의 양쪽 측면 속에서 정말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모든 것 속에서 그래도 정직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삶과 아무 의식이 없이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밀면 물결이 미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가져다 줄 그 마지막의 차이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정직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없이 아무리 교회에서 은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성도들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따라서 희생하며 이 세상에서 피 흘리며 가시밭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소금이 되기보다는 너무나 쉽게 예수의 구원도 몸소 체험하고 예수의 사랑도 받고 동시에 이 세상에서도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들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중히 여기든가 저를 경히 여기든가 둘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은혜와 죄가 공존하고 하나님과 세상이 공존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것도 동시에 보좌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보좌를 차지하는 것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정직, 제 자신의 정직,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정직이 무너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셔서 원하시는 것은 그 은혜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타협하지 말고 어두운 세상에 마지막 정직의 등불이 되기를 원하시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선배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가정인데도 부모에게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신 있게 ‘나는 너 혼자 쓴 답안지 C학점을 원하지 남의 것을 보고 쓴 답안지 A학점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컨닝 안하고 재수하기를 원하지 컨닝해서 내신 잘 받아서 일류대학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부모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 ‘똑바로 살아라 이놈. 그 따위로 살아서 되느냐’고 야단을 치면 ‘아빠는 구세대야. 엄마는 시대가 낡았어. 우리를 너무 이해 못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 들지 않았을 때의 이야깁니다. 철 들고 사리판단이 서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부모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삶과 말이 일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옳았는데 자기가 싫고 능력이 없어서 그것을 못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판단력이 서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우리의 종교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직에 대해서 희미한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 다 하는데’ ‘그것이 일반적인데’ ‘누가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있어’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 부정직을 타고 죄들이 들어옵니다. 악을 행하게 되고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정직하게 살면 영혼이 영향을 받고 마음이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올곧게 살면 그 올곧은 삶에 여러분들의 영혼도 마음도 영향을 받습니다.
어느 한순간 덜컥하고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뚜렷하게 자기가 넘어진 지점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삶의 방식이 워낙 부정직하기 때문에 많은 죄와 접촉하면서 타협을 통해서 끊임없이 작은 죄의 병원체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금야금 그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를 타락한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내가 무슨 죄가 있냐?’라고 반응합니다. 죄가 없다면 영혼의 살아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죄 없이는 영혼이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법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영혼은 수면하지 않습니다.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보거나 교회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이 그토록 영혼의 변화를 받아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뭔지를 아십니까? 한 사람 속에 이루어진 나라와 그 사람 밖에 있는 나라가 평준화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의 신령한 통치가 있는 성결한 나라가 형성되면 신자는 둘 중의 하나를 해야됩니다. 그 신령한 나라를 변질시켜서 세상과 똑같이 되든지 이 신령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 변화되지 않은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땅을 고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하며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백성들-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속에 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이루어져서,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와 전혀 다름이 없는 교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해서, 그러한 신자가 어떤 마음을 갖기를 원하실까요? 성경으로 살펴볼 때 끊임없는 증언은, 정말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들은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말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던 장본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었는데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 땅에서는 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시며 가시밭길을 걸어가시면서 일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안타까움과 눈물,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세상에 도래하기를 원하시는 지를 외칠 때에 자신 속에 예수님과 같은 나라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 나라와 함께 짝하며 살고 있던 죄들을 회개하고 자신 속에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을 경험한 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이고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이스탐블에 갔었는데 동로마제국이 이슬람들에게 멸망당하게 되기 전 전쟁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성벽을 두 겹으로 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슬람들이 로마를 공격할 때의 마지막 광경을 묘사해주는데 제가 군인이라면 그 성벽을 넘어서 그 성을 공격할 엄두를 못 낼 것 같았습니다. 2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 성벽을 넘는 동안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뜨거운 물을 붓고 불을 붙이고 활을 쏘고 했을 것입니다. 올라가면 죽는데도 그 죽은 시체를 밟고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가는 것입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사다리 없이 시체를 밟고 거기를 넘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었답니다. 그리고 한 벽을 넘어서 일부 군인이 내려오면서 벽과 벽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광경을 기록한 역사책에 의하면 평소에 말라있는 상당한 커다란 개울이 완전히 피로 도랑을 이루었답니다. 그렇게 성을 공격했고 막기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이번에 로마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가슴 아팠습니다. 이 세상의 왕국은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왕도 치열하게 살아왔고 왕을 섬기기 위한 신하들도 치열하게 살아왔고 그 신하들과 함께 왕을 섬기기 위해서 노력했던 군인들도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피 흘리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 무너진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저렇게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며 피를 쏟고 죽어간 저 어리석은 군인들처럼 저렇게 치열한 정신으로 산 하나님의 백성들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며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생각했습니다.
정직에 관한 다양한 변명들은 대부분 쉬운 삶을 택하고 싶은 데서 비롯되는 변명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참된 신자가 되어서 우리 안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 안에 이루어진 그 나라와 같이 거룩한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항상 정직에 있어서 위협을 받을 때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내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누굴 믿고 사나’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누구를 바라보며 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우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만 알지 절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구원받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우리가 정직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욕심 때문입니다. 쉽게 살려는 욕심, 손해보지 않으려는 욕심,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깊이 회개하면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가장 감격스러운 장면 중 하나는 중세 시대 마지막 설교자인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의 화형장소를 가본 것입니다. 거기에 동판이 새겨져있고 몇 년도에 처형당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한 관광 가이드가 자신의 여행객들에게 설명하기를 사보나롤라라는 수도승이 살았는데 피렌체가 너무 부패하니까 사회 정화해보려고 하다가 왕따 당해서 불 태워 죽인 자리라고 설명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거기에서 잠시 묵상을 했습니다. 그 불타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은 ‘우리 주님은 큰 고난을 당하셨도다’였습니다. 정말 청빈한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산 결과가 거칠고 부정직한 세상과 맞선 결과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볼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예수님이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서 지불했던 그런 종류의 동질의 것을 요구합니다. 희생과 순종, 복종과 헌신, 이런 것들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정직한 길을 가다가 아무리 많은 고난을 당해도 언제나 우리는 밑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정직하게 살 수 있도록 남이 모르는 많은 사랑을 주셨고 또 물질적으로 좀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다 날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중에서 일부를 정직을 위한 대가로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한들 우리가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물질로 해결이 안되고 순교를 한다면 주님이 팔을 벌리시고 믿음을 따라서 의의 길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하고 당신께 날아오는 성도를 받으시기 위해서 보좌우편에서 일어서서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완벽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서 주저하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예화: ‘난 외과의사다’라는 책이 나왔는데 외과의사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자질이 사자 같은 심장, 독수리 같은 눈, 여인의 손길이라고 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사자 같은 담대함을 가지면 ‘세상아 네가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주님을 위해서 손해를 본다면 보리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직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독수리 같은 눈입니다. 세상과 야합하려는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보면서 ‘무엇 때문에 나는 주님이 주신 명백한 길을 애매하게 피하면서 살려고 하는가’하며 ‘이 핏줄을 타고 들어오는 이 죄의 병원체들은 내 영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그러나 확 뜯어내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회식하면 늘 술 먹으라고 하는 것 지겨워서 직장을 그만뒀다고 하는데, 정말 답답합니다. 직장 그만두고 기독교인이 하는 회사에 모이는데 거기에는 부정이 더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신학교가 무슨 도피처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 부정응해서 거기로부터 도망치는 영성이면 그것을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경건한 고넬료같은 사람만 찾아다니면서 심방하셨습니까? 될 수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멀리 떠나서 검문을 거치고 거쳐서 정말 변화 받을 사람만 산 위로 올라 오라 해서 면담하셨습니까? 창녀들이 있는 소굴로 들어갔습니다. 사기 치고 나쁜 짓 하는 세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도시 한복판을 거니시며 그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시면서 욕지거리하는 소리는 안 들으셨겠습니까, 아니면 술 한잔 팔려고 호객하는 이들의 외치는 고함소리는 안 들으셨겠습니까? 별 소리를 다 들으시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써버시브(?) spirituality’ 말하자면 뒤집어엎는 영성이었습니다.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회사 가도 은혜가 없고’하는데 회사가면 은혜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그런 이유 때문에 직장 다니면서 회식자리 피한 적 없습니다. 술 한 모금 안 마셔도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교제하는 이 자리가 좋습니다’하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화제로 끌고 가면 오히려 반대로 끌고 가면 됩니다. 그렇게 의연하게 살아야 합니다. 술도 두세 번 만 아니라고 칼같이 그으면 다시 권하지 않습니다. 동료가 뇌물 받아도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어’하고 정색을 하고 얘기하면 됩니다. 물론 핍박은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이미 예고 된 것입니다. 사회가 더럽고 타락해 보이지만 똥파리만 모인 직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올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회식에서 자꾸 술 먹으라고 하는 것이 박해라고 그만둬버리고 빙빙 돌면서 ‘이것이 목사의 소명이 아닌가’하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간신히 적응하고 살아가는 영성이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런 엄청난 이익을 부정직하다는 이익 때문에 던져버릴 수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구나. 누가 그렇게 다른 가치관을 주었는가. 내가 여태껏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사이비였구나. 저 사람 속에 진짜 신앙이 있구나’하는 것을 일깨워줘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한 건축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늘 뇌물을 줘야했습니다. 돈을 갖다주면 받는 정도가 아니라 가져오라고 할 정도니까 당연하게 생각하고 뇌물을 가지고 갔는데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런 것을 안 준다고 해서 당신에게 불리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거기에서 그 건축업을 하는 사람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돈 싫어하는 놈 어딨어’했는데 정말 돈 싫어하는 인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강하게 충격을 받게 됩니다. ‘돈 그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가치관의 기준이 아니구나 다른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있구나’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이 세상에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추상명사로서의 인류는 사랑할 수 있는데 사람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의(義), 이 땅 고쳐주소서, 부흥,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나라, 통치, 그리스도의 왕국, 이런 것을 사모하는 데는 별로 비용이 안 듭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안 이루어질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나라로 부름을 받은 사람처럼 제자도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데는 당장 손해를 봐야 합니다. 상상 속에서의 순교가 힘듭니까, 실제 상황에서 10만원 손해보는 것이 힘듭니까? 상상 속의 순교야 100번을 못하겠습니까? 피가 나는 것도 아니고 머리만 잠깐 쓰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순간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부정직하게 살려고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하는 조언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사님, 그렇게 살면 안될 것 같습니다. 부정직한 것 같습니다. 사업의 원리가 하나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점에 있어서는 부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기의 상처를 아파하는 것처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것들을 거론하고 고민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정직하게 고쳐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고 은혜 받은 사람들의 삶의 표준이고 하나님이 그런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10.정직하지 않고 온전할 수 없다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잠2:21)”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이 굉장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그 구속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까지도 이기적인 구도를 가지고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우리를 그 보혈로 구원받는 이 놀라운 은혜를 주셨을까?’ 하고 질문하면 우리는 흔히 그 이유를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으니까’라고 합니다. 그 대답이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구속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이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끔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기에서 끝낸다고 하면 그것을 가지고 얼마든지 우리 원하는 대로 써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냐?’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존재지.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를 주셨는데 죄 가운데 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지’합니다. ‘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니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이지’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그치면 안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도 우리를 형벌 받을 죄에서 건져주시기 위함인데,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동기가 되었지만 보다 더 최상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의 육체가 방종으로 흐르고 우리의 욕심대로 살아가는데 사용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하는 것은 허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무리 많이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아들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궁극적인 계획에 대해서 알고 그 계획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기뻐하면서 살지 않으면 그런 은혜와 사랑을 아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사용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큰사랑과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거저 주어졌는데,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입었는데, 그러면 앞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뭘 원하시고 궁극적으로 나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을까’ 거기까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죠나단 에드워드는 ‘천지 창조의 목적’이라는 논문 속에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는 계획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고 최상의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목이 말라서 주스를 사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슈퍼에 가서 그것을 사 가지고 오면 은행에 간 것은 돈을 찾기 위한 것이고 돈을 찾은 것은 슈퍼에 가기 위한 것이고 슈퍼에 간 것은 주스를 사 가지고 오기 위함이었는데, 그래서 결국은 목마른 내가 그 주스를 먹고 만족을 느꼈습니다. 그러면 은행에 간 것, 슈퍼에 간 것, 사 가지고 들고 온 것, 이 모든 행동의 궁극적 목적은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입니다. ‘왜 목말랐냐?’하는 질문은 할 수 없습니다. ‘주스를 먹으면 왜 목마름이 해갈되느냐?’라고 얘기할 수도 없습니다. 주스가 들어가니까 해갈이 됐는데 그것까지 다 대답하고 먹어야 합니까? 그런 것이 궁극적 목적 대 종속적 목적입니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이 최상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마르면 주스를 먹는다’에 더 이상 이유를 댈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이유를 대면 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이유로 올라갑니다. 그 이상은 대답이 없는 것이 궁극적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맨 마지막에 창조하셨는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많은 짐승과 들의 식물들을 만드신 것이 누구를 위함이었습니까? 인간을 위함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을 두셔서 그 빛 아래 살게 하신 것도 인간을 위함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대답은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일 뿐 최상의 목적은 아닙니다. 최상의 목적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인간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최상의 목적과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 있어서는 하나로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주신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지만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함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최상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 때에 비로소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곳에서 참된 신자는 가장 행복해지는 것이고 그렇게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한없이 행복해하는 인간의 기쁨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궁극적 목적과 최상의 목적이 인간 창조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에드워드가 그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창조 세계와 모든 사고에 있어서 철저하게 중심이 되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천지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요즘 묵상하고 있는데 너무 은혜가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 남들이 말하니까 예수 믿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라도 붙들고 있어야지 어려움을 만날 때 하소연을 할 데가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니 궁극적 관심은 자신의 인생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에서 떠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는 영광을 안 받으십니다. 그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불순물이 낀 인생을 사는 중입니다. 그래서 안됩니다.
공업용수로 반죽한 빵을 여러분들이 먹겠습니까? 모르면 먹지만 알면 안 먹을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이유는 컬컬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싶은 것도 냉랭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죄를 받고 싶은 것도 괴롭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자신의 행복이 관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 서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전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아닙니다. 인간이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 살아가는 것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의미 없는 것입니다. 기반이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약간 빗나간 듯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발광체처럼 우리 온 삶과 존재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창조의 목적이 좌절되자 구속하시고, 구속한 것 가지고도 충분하지 않도록 우리 안에 죄와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거룩하고 진실하게 되도록 오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으로서 변화되어가고 새롭게 되어가도록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들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땅에서입니다. 천국가면 타력으로 완전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온전한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에 가면 게으른 사람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지옥에 모여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직한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정직한 사람은 모두 지옥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예화: 천사와 마귀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서 하늘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마귀가 하는 말이 ‘변호사를 세워서 네가 나와 한번 해보자는 것이냐? 유능한 변호사는 우리 지옥에 다 모였다’라고 했다)
천국에 가면 이미 완전해져서 더 이상 게으르거나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 가면 정직 시리즈는 선포될 리가 없습니다. 부정직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화에 대한 설교도 들을 필요 없고 성경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그런 가이드들이 필요 없이 완전하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필요합니다. 이 땅에서는 여러분 자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붙드시고, 똑바로 살 때는 ‘그래 그렇게 잘 살면 된다. 미끄러지지 말고 살아라’하시고 못살면 ‘이놈’하고 야단을 치셔서 종아리가 퉁퉁 부르트도록 하나님이 때려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잘 모르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배워야 합니다. 똑바로 살려고 하는데 잘 안 살아지면 바르게 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의로운 길이 무엇인지 교육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그렇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훈련받으면서 인생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그는 정말 고도의 영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정신없이 따귀 맞아본 적 있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의 이런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사람을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사람들로 자기의 양떼들을 인도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늘 나라에 가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테니까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그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설교 듣고 아무리 감동 받아봐야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맞다고 하면서 마지막 대답은 ‘좋은 것 어떡해’합니다. 그것은 논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논리를 세우기 위해서 22개의 테이프를 들었지만 한마디로 다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난 세상이 좋아. 좋은 걸 어떡해’하면 끝납니다. 그 2000매의 원고지가 한 줄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게 뭔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얻고 가끔씩 곤고해지면 하나님을 찾아와서 거래를 트고 뭔가 협상하면서 살아가려는 인생의 태도들은 여러분들이 어느 교회에 다니든지 간에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좋은 평판을 얻고 신앙생활을 하든지 간에, 물론 여러분은 자신이 대견하겠지만-옛날에는 술 먹고 개망나니처럼 다녔는데 그래도 지금은 남들이 집사라고 하고 교회의 일꾼이라고 하고 목사님도 가끔 오셔서 충성스럽다고 하니까-그 사람 속에는 정말 가슴을 열고 들려오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하늘을 두루말이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넓은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다 말로 하지?’ ‘나의 묘사를 능가하는구나(beyond my description)’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세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으면서 그냥 도덕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에 만성이 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가 너무 진리에 감동을 받으면 저는 온몸이 비늘이 되어서 살갗이 거꾸로 일어서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한번 겪고 나면 몇 달 동안 주일예배가 길어집니다.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가끔은 그래야 합니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온몸의 껍질이 들고일어나는 것 같은, 진리로 말미암는 경련들을 경험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약점들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 우리 교회 방문해서 이제 막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말씀으로 서비스를 할까 에 대해서 고민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제 제일 큰 숙제는 오래 예수 믿어서 황태포처럼 굳어져 버린 사람들의 껍질을 벗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살아있는 신앙의 세계를 보여주면 처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들이 겸손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짜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파헤쳐 가야 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왜 우리가 그렇게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해부되어야 하고 살갗이 일어서고 비늘이 궐기대회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완전한 진리에 대한 충격 속에서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되느냐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입니다. 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연합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다 맞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하신 말씀 속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대명제입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구절 몇 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가장 중요합니다. 거기로부터 선언되면서 드라마가 모두 펼쳐져 지나갑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굉장히 중요한 말씀은 “너희가 순종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도 그것에 대한 해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불순종한 백성을 다시 돌이켜서 저희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백성들은 자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냐면 그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심으로서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경구절이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이제는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한없이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실현이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온전하라’는 이 명령 자체가 정적 명령이 아니라 동적 명령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너희가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 온전함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온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에 쓰인 온전함이라는 것이 히브리 말로 ‘타밈’이라는 것인데 이 단어는 창세기 6장 9절에 나옵니다. “노아는 당세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할 때 나옵니다. 그래서 이 ‘타밈’은 구약성경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인데 여호수아서에 보면 ‘온종일 싸웠다’의 ‘온’이 ‘타밈’입니다. 영어로는 ‘entire’ ‘whole’의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이 ‘타밈’이라는 단어가 쓰일 때에는 ‘책망할 것이 없는’ ‘blameless’정도의 의미입니다. 절대적인 완전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완전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절대적인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그 절대적인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할 것이 없는’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가리킬 때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라’고 하지 않고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 시대를 놓고 볼 때에 탁월할 정도로 하나님께 부종 하던 책망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렇게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 그것이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있어서나 인격에 있어서나 삶의 실천에 있어서나 부단히 온전해지기를 힘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의욕이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러 모양의 사람을 쓰십니다. 그래서 성경과 역사에 보면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쓰시고 칼빈과 같이 샌님과 같은 사람도 쓰시고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천재-세살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하고 여섯 살 때에 자연과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여덟 살 때에 유물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열세 살 때 히브리어와 희랍어와 라틴어를 모두 마스터하고 예일대학에 들어가고 열 일곱 살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을 공부하고 교수가 되었을 때 약관 나이 열 아홉 살, 스무 살 스물 한 살 때 쓴 논문 몇 편을 놓고 미국에서는 교수들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연구를 하다 죽으면서 마지막에 ‘에드워드는 그렇게 평생을 연구했는데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천재-도 사용하십니다. 그런가하면 저 같은 둔재도 사용하십니다. 헤라클레스 같은 체력을 가진 사람을 쓰시는가하면 브레이너드 같이 한번 설교하고 주저앉아서 한 사발씩 피를 토하는 사람을 쓰시기도 합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을 쓰시는가 하면 무디처럼 공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이 쓰십니다. 물론 약하다는 것 때문에 쓰신 것도 아니고 튼튼하다는 이유 때문에만 쓰시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쓰시는 것도 아니고 공부 잘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얘기하는 것이 여러분도 어찌할 수 없이 자라온 성장의 배경이나 타고난 기질을 가지고 너무 고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죄만 빼면 됩니다. 그러면 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합니다. 얼굴이 못생긴 사람이 목회를 하면 얼마나 좋은지 교인들이 시험에 안 듭니다.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모두 온전해 지고 싶어서 몸부림치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늘 쓰는 태도를 가지고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경계에 대한 구분이 분명하지 않고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차별이 희미하고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판단의 선들이 흐릿할 때 여러분들의 삶은 이방원의 시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편이면 어떠하리 하늘편이면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세상과 얽혀서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고 지고’하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과 확신이 없고 언제나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온화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타협을 잘 이끌어내고 모든 사람들과 화해하면서 평화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야합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지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려고 몸부림쳤는지 모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성찬 문제를 가지고 몸부림치다가 오랫동안 정들었던 교회에서 떠났습니다. 그 교회에서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아이는 9명이고 생계는 막막했습니다. 로셈턴에 있는 그 교회에서는 미 동부에서 최고의 대우를 그 목사님에게 해줬습니다. 그러나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해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회개의 표증이 없고 거듭나지 않은 신자에게 성찬을 주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세례 받았다는 이유로 성찬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지옥에 대해서 6개월씩 설교를 하고 하나님께 회개를 외쳤지만 젊은이가 지옥의 심판에 관한 설교를 듣고 뛰어나가서 목매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는 교인들과 그렇게 가슴 아프게 대립했던 이유는 온전해지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 천재만 온전해지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무디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가 비록 부랑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온 생애동안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고난을 많이 받고 눈앞에 수많은 편안한 길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좋은 이익들을 아낌없이 버려야 했는지, 그분의 전기를 읽어보면 거인과 같은 한 위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 그 사람을 보고 구두나 닦던 구두 수선공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모두 그렇게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어떤 보상이나 대가나 행복 같은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온전한 삶을 삶으로서만 자신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창조와 구원에 부합한 삶을 살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 하나 때문에 생명을 걸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목숨을 버리도록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기를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타협하고 야합하면서 적당주의로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안겨드리는 기다란 생애를 이 땅에서 번영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온전한 삶을 택하다가 더 이상 그 삶을 계속 할 수 없도록 환경에 의해서 압박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품에 가는 것이 그분의 구속함을 입은 자녀로서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목표, 하나님 앞에 정말 모든 면에 있어서 온전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온전해지기까지 나는 무엇인가 이 땅에 살아남아서 이 세상이 그렇게 온전해지도록, 나 자신이 온전해지도록, 교회가 온전해 지도록,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투자하며 살다가 죽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절박함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유로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벗겨서 벌판에서 굶어죽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 역사상 몇몇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탁월한 신학을 만들어놓고 거인같이 살다가 죽은 조나단 에드워드도 미국 동부에서 최고로 많은 사례금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의 대우와 학자적인 명성을 따라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그래서 그의 결심문을 읽어본 사람들은 다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렇게 부유한 삶을 살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매일 십자가 앞에서 죽으면서 온전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진정한 의미에서 고난이 넘치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세상이 핍박하면 ‘우리 사이에 뭘 그래’하며 그 품에 가서 안기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슨 고난이 있겠습니까? 그런 온전한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고 온전한 자는 땅에 남으리라”했는데 히브리어의 전형적인 동의적 대구법입니다. ‘거하리라’와 ‘남으리라’가 B, B'로 일치하고 ‘정직한 자’와 ‘온전한 자’가 A, A'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해서 하면서 개념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지혜자의 생각에는 정직한 자는 곧 온전한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직해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결코 온전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우선 이것은 내적인 영혼의 상태와 외적인 삶,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는데 오늘은 영혼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직해지지 않으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온전해질 수 없고, 또 하나는 자신의 인격, 그리고 인격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신의 삶도 외적으로 볼 때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왜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온전해질 수 없느냐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합니까? 살다가보면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성과 죄에 대한 친화적 성격 때문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처음 은혜 상태에 있었던 마음이 아니고 영혼도 또한 더러운 것들에 의해서 오염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영혼에 고통과 괴로움이 미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내면의 질서들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다 떨어지고 나면 옛날에 엎드려 있던 기질들이 전부 들고일어나서 마음속에서 거리를 행진합니다. 영혼의 상태들이 더럽혀지면 영혼의 각종 질병적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온 인격과 육체에까지 영향을 주고 나아가서는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죄의 궁극적 계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주 교묘합니다.
행동에는 침투가 안되니까 마음으로 들어오고 영혼으로 들어와서 그것을 병들게 함으로써 마음과 영혼에 관련된 모든 기관에까지 악한 영향을 끼쳐서 그를 전체적으로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하고자 하는 것이 죄의 원대한 계획입니다.
그러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 고치는 방법도 죄가 들어가서 우리를 망가트린 방법과 똑같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강퍅해져서 펄펄 뛰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데 그 사람 붙들고 ‘너 술 먹으면 죽어’ ‘너 또다시 술집에 가면 교회 지하실에 가둘 거야’하고 아무리 협박해봐야 그 사람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죄가 들어갔던 똑같은 경로에 치료제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집어넣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수술대에 눕는 것입니다. 자기도 고달픈 영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날들은 건강했을 때지만 질병적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괴로운 것입니다. 죄를 범한 영혼에게는 곤고한 괴로움이 지속적이고 즐거움이 순간입니다. 곤고하고 괴로워지니까 나중에 너무나 핍절해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경제학에 의하면 은혜를 까먹으면서 죄를 범하는데 그것을 계속 먹을 때 한계효용이 점점 체감되는 것입니다. 죄를 먹기 위해서 은혜를 까먹는데 은혜를 까먹는 고통이 가져다준 그 고통이 죄를 통해서 얻는 즐거움보다 작다고 느낄 때는 계속 죄를 먹는데 어느 한순간에 너무 영혼이 곤고해져서 죄 하나를 먹음으로서 맛보는 즐거움보다 은혜가 사라지는 고통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할 때 스스로 죄에 대해서 일시적인 싫증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죄에 대해서도 싫증을 내기 때문입니다.
주의해야 될 것은 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싫증은 항구적인 성격을 가졌는데 죄에 대한 싫증은 항상 일시적인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예화: 건강하고 입맛이 좋을 때에 담배도 맛이 있지 몸살나면 담배 맛이 없다)
니코틴에 푹 절어서 니코틴에 대해서 친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일시적으로 몸에 이상이 오면 그 좋은 담배가 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항구적이 아닙니다. 다시 밥 몇 끼 잘먹고 주사 맞고 회복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밥보다는 담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싫증을 느낄 때 자기 속에서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죄의 지배 아래서도 죄인이 죄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는 일은 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치료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무엇으로 고치십니까? 물리적으로 고치는 것 같으면 톱으로 갈비뼈 자르고 확 뜯어서 죄라고 쓰여진 시커먼 세포를 끄집어내면 되겠지만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해부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안나옵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깃들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의 빛으로 그것을 고치십니다. 고치는 방식이 결코 외부의 힘만 의존해서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나의 죄가 너무나 악하니 기도 좀 해달라’고 하는데 해주기는 하는데 그것은 바깥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의 원리에 따라 회복되어가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인격적으로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그를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하시고 확인하게 하시고 확인이 되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느껴지게 됩니다.
‘담배 피우지마. 몸에도 안 좋은데’해도 ‘더러운 세상, 담배 좀 피우고 한 10년 먼저 죽으면 되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하다가 기침이 계속 나와서 찍어보니까 암 말기니까 죽을 준비하라고 하면, ‘가져와라 며칠 안 남았다고 하니 빨리 피우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술을 받기도 하고 직장 사표 내고 요양원에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직함이 있어야 그것도 가능합니다. 사진 찍어오니까 ‘이거 뻥이야. 기계를 어떻게 믿어. 다 쓸데없는 거야’하며 사진을 갖다 놓고 다 지우고 ‘괜찮데’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우리 교회 최집사 들으라는 진단서인데. 그 집사가 진짜 죄의 지배 아래 있네. 틀림없어’하며 항상 객관적으로 여기고 자기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합니다. 항상 비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습관들이 자신의 삶의 부정직과 많이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해서 정직하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정직한 것은 아니지만 성화의 과정을 거쳐가면서 정직이 몸에 밴 사람들은 두 개가 일치합니다. 그래서 삶에 있어서 부정직하고 삶에 있어서 정직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판단해서 정말 그것이 옳다고 생각될 때, 그 말씀의 빛 앞에 드러나는 자신의 영혼의 증상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직이라고 하는 이 부패성 자체도 영혼 속에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죄인들의 본성 속에 깃들여 있는 부패함이기 때문에- 그것이 모든 방향에 골고루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비춰주어도 가끔 충격을 받는 정도일 뿐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한 사람들은 큰 죄에 빠져도 반드시 돌아옵니다. 말씀을 차례대로 갈라서 먹일 때 정직한 사람들은 하나하나 자기에게 적용시키면서 고쳐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비빕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이야기하면 대충 ‘그냥 은혜 받고 충성하라는 거야. 기도하면 된다 이거지’하며 간단합니다. 테이프 22개를 설교했는데 이 사람에게는 딱 원고지 1매입니다.
게으름 시리즈를 듣고 나서 게으름의 원천은 무엇이고, 경향은 무엇이고, 게으름이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게으름이 영혼의 싫증과 결탁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고, 게으름의 정체가 무엇이고를 다 갈라서 형형색색의 양장피처럼 만들어서 하나하나 복용하라고 줬는데 대충 비비는 것입니다. 15시간 설교한 것 같은데 ‘교회 하루 이틀 다녀. 부지런히 살아라. 게으르면 나쁜 사람이다 하는 이야기야’합니다. 그 사람은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압니다. 다 간단합니다. 그렇게 뭐든지 비벼버리는 것입니다.
정직에 대해서 설교해도 말씀의 감각이 있는 분들은 세세하게 부정직은 어디서 오는가, 부정직의 원천, 근원, 대책은 무엇이고, 부정직이 영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부정직이 성화에 어떤 영향을 결정적으로 미치고, 부정직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과 어떻게 관계되며, 그 사유는 무엇 때문이고 증상은 어떤 것들이고 대책은 무엇이고 거기에서 일어난 반작용은 무엇이고 거기에 대한 예방책은 무엇인지 가지를 치면서 나옵니다. 엄청난 정보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하나씩만 꺼내어 써도 무한히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 말한 사람들은 ‘공갈치지 마라 하는 얘기다. 공갈치지 말고 세금 잘 내라 하는 것이다’하며 비벼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정직한 사람들입니다. 말씀 앞에 부정직이 몸에 밴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 날 선 검과 같다. 오늘 나를 찔렀다. 그리고 나는 그 칼 앞에 살해되었다’ 이런 고백을 못합니다.
(예화: 10년 전에 집회를 갔는데 첫날 한 형제가 많이 은혜를 받았는데 둘째 날은 안 에 안 들어오고 바깥에서 빙빙 돌았다. 간신히 끌고 데려다 놨더니 또 은혜를 받 고 도망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또 은혜를 받았다. 마지막 날에 그 교회 교역자가 하나님 말씀에 은혜 받 은 소감을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저를 말씀으로 확인 사살하셨습니다’ 했다)
그런 고백은 부정직한 사람들에게서는 안 나타납니다. 부정직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 만난 경험을 얘기해도 감탄은 많이 하는데 두루뭉실합니다. ‘오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큰 은혜’하며 은혜 받았다고 계속 말하는데 무엇 때문에 은혜를 받았는지 미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치료할 때에 이 부정직한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치료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안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삶도 부정직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 드릴 최고의 선물은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선교사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제물이 먼저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찌르고 선명한 진리의 칼날 앞에서 나의 양심이 파헤쳐지고 나의 죄와 불결들이 파헤쳐지고 하는 놀라운 역사들은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정직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영혼의 변화는 반드시 정직을 필요로 합니다. 우선 설교자 자신도 정직해야 합니다. 인간들이 죄라는 질병에 걸렸으면, 그래서 그것을 해결해야 되겠으면, 흰 가운을 입고 고무 장갑을 끼고 칼을 들고 수술실로 들어가야지, 의사로서의 역할을 해야지, 그들이 뭐가 먹고 싶은지 요리사가 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설교자가 완전한 말씀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지성의 한계가 있고 경험의 한계가 있으니까, 없는 것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일단 있는 것을 가지고라도 최대한 정직해져서 그 정직의 통로를 타고 하나님의 말씀이 최대한 안 굽고 맑은 원천으로서 흘러 내려오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밤을 세워가면서 원어를 공부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설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청교도가 이야기한 것처럼 원어 자체가 원수(原水,샘)이니까 원천에서 떠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제일 맑고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그것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직하게 해서 떠내면 뭐합니까?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의도 자체가 굽고 부정직하면 굽게 됩니다. 맑은 것을 떠내서 맑은 것을 그대로 흘려주고 -설령 자기가 목회 하는 교회에서 그 설교 때문에 벽돌을 맞고 쫓겨난다고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대접을 받는 것보다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진리를 진리대로 외치는 정직함이 더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벽돌 던지고 나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양이 아니다. 하나님의 양은 진리의 편에 서있는 사람일 것이다’고 생각하고 목회 하다 죽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정직하게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은혜 받건 말건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예화: 새가족 환영회에서 설교자는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 씀을 먹고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감동 받았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죠셉 얼라인이 ‘죄인의 유일한 희망은 정직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있는 것이다’했는데 있기만 하면 안되고 들어야 합니다. 들은 다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를 생각하면서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가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모든 사랑과 지식에 뛰어난 총명을 너희에게 주사”했듯이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되 머리가 빈 채로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지성인으로서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람, 세상에서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많이 한 세속적 지성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지성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 지성이 정말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이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그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그런 종류의 영적 지성인을 보는 것이 꿈입니다.
그렇게 비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에 있어서 진전이 없습니다. 늘 같은 얘기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부정직할 때 자신의 영혼이 살 수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정직해져서 그 말씀 앞에 어린아이처럼 정직하게 반응하고, 잘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옳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더 옳게 살아가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정직함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정직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무한하신 완전하신 성품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을 아는 지식에서 더 자라가고, 그 거룩을 알아감으로서 남들이 맛보지 못했던 더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서 비치는 그 지식의 빛을 소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지식의 빛을 소유하고 그 찬란하고 더 많은 진리의 지식 속에서 생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님을 모를 때 우리의 욕심대로 살면서 부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서 죄의 종이 되어서 살았던 날들도 충분합니다.
이젠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그의 사랑 안에서 하나되며
내 맘에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제 마음을 말씀드리자면 지금도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제 마음을 무겁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정직한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회피하고 비벼버려서 옆에 있는 많은 지체들은 예리한 말씀의 칼날 앞에 갈피갈피 숨겨져 있는 자신의 죄악들이 수술되고 고쳐지는데 그 사람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한편의 설교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가슴을 도려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흐릿한 인상 하나만 남는 것입니다. 한 시리즈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서 역사 하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과 진리의 말씀의 칼날로 자신을 세세하게 다스리시고 고치시는 그 세밀한 하나님의 그 수술하시는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리즈 전체의 개괄적인 인상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인상 받은 것으로 충분하고 자신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의 싸움은 어두운 세상에서 악한 영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안팎으로 죄의 유혹과 더불어 싸우고 부패성과 더불어 싸우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흐릿한 인상으로서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칼을 버리고 칼집으로 싸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정확하게, 그리고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행할 수 있는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11.정직하지 않고 온전할 수 없다(2)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잠2:21)”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해지도록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려고 우리를 온전한 데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요구는 이미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말씀 속에 잘 나타나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결코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표준으로 우리를 부르심으로서 우리를 끊임없이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들로 살아서 구속 이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주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온 땅을 구속으로 새롭게 하셔서 창조의 원래 상태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이 그때에만 있다면 지금 모두 심판하셔서 정리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면 되지만, 지금 아직 살아있는 날 동안에는 그렇게 완벽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왜 참으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야 하는가, 구속받은 후에 인간이 어떻게 진실하고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함으로서 비록 아직까지도 죄가 남아있는 인간이지만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에 가깝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우리 인생에게 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 이 창조 세계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온전한 표준으로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온전해질 수 있냐’고 하면서 처음부터 아예 온전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온전에 약간 못 미치는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마 형편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가운데 종종 공포의 자녀들-공부하기를 포기한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도달해야할 표준이라든지 목표가 없습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어떻게 하면 성적표를 숨겨서 엄마에게 혼나지 않을까’ ‘턱걸이라도 해서 2학년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되지 대학은 내 팔자에’하는 학생들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학교를 다녀도 공부하는 재미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딴 데 가있습니다.
대학에서 모든 과목에서 100점을 맞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100점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100점을 목표로 놓고 공부합니다. 하나님이 온전해지라고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것은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나같이 될 수 있다’하며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그렇게 온전해지도록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이야기는 하나의 방향 제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시니까 결코 인간은 그 표준에 도달할 수 없지만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계산하고, 따라서 기준과 목표를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꾸준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또한 그런 존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직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정직하고 공평하신 것처럼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면서도 말만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제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살펴보았습니다. 매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점검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그렇게 살면 뭐하냐.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직하지 못하지 않냐’하고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완벽하게 정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직해질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정직하고 의로우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도달하지 못한 것과 아예 그렇게 되기를 포기하고 ‘말이 그렇지 어떻게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온전해질 수가 있겠어. 그것은 주님이 시간이 남으시니까 괜히 해보신 말씀이고 우리 인생은 그런 게 아니지’하며 살아가면 그 사람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이겠습니까? 공포의 자녀, 신포의 자녀-신앙을 포기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포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화로 들어가서 성화는 대개 두 가지 요소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자기가 인격과 성품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고 삶이 하나님을 공격하고 섬기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의 참된 변화가 필요한데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의 변화를 받을 길이 요원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직해 지는 것은 결코 학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코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느냐 하는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지 않으면 그 지식을 가지고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수많은 논리들을 냅니다. 그리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적 학문의 지식이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가르쳐서 이치를 따지면서 이것은 잘못되고 이것은 옳은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상세하게 설명해주면 정직한 사람들은 그 말씀의 하나 하나의 작은 차이점들이 지시하는 자신에 관한 지적들을 깨달으면서 도전을 받고 신앙이 깊어지는데 부정직한 사람들은 한번에 다 비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은혜의 지배’를 22번에 걸쳐서 세세하게 나눠서 설교했는데 다 뭉쳐서 ‘잘 살아라. 신앙 생활 열심히 해라’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절대로 영적으로 변화되고 깊어지지 않습니다. 또 변화를 이미 조금 받았다면 더 이상의 깊이 있는 신앙의 변화 속으로 절대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흐르고 교회는 오래도록 출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마치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처럼 하나님에 관해서는 수없이 말씀을 듣고 기독교적인 용어와 신앙의 성화에 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은 많이 들었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감동으로 남기도 했는데 한번도 정면으로 하나님과 맞닥뜨려서 ‘여기가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구나. 내가 오늘 하나님을 만났구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 입술이 부정한 자 가운데 있으면서 거룩한 하나님을 뵈었도다. 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 주시옵소서’하는 고백을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교회 생활에 좀 적극적이고 어떤 때는 소극적이고 어떤 때는 교회 안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다닐만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앙 집어치우고 싶기도 하는 변화와 굴곡은 있겠지만 그것은 날씨가 인간의 감정에 주는 영향만큼이나 미미한 것이지 진정으로 그 모든 변화는 영혼의 변화로부터 우러나오는 증상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신앙생활 안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나 그래도 교회에 출석하는 유익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계속 나오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완전히 떠난 것보다는 변화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세월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하면서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난을 만나면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처럼 말씀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지 않고 어떤 말씀을 주셔도 전부 비벼버리니까 하나님이 때로는 고난도 주시고 역경도 주십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정말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자신은 다만 인간일 뿐이고 하나님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고난과 시련이라는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주시는 음성을 듣게 하시고자 함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파하는 것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면 서도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고난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정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일 뿐이지 실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뭔가 깨달으라고 커다란 어려움과 고난을 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것을 통해서 ‘내가 정말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나님,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교만하게 살았고 죄에 지는 상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덮으면서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고 보니까 정말 내가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났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가난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부정직하던 태도들을 회복하고 고난 속에서 야곱이 ‘내가 벧엘로 올라가리라’했던 것처럼 그렇게 ‘내가 하나님을 뵈어야 하리라’ ‘내가 전능자를 직접 뵈옵기를 원하노라’할 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회복되어야 할 것은 정직입니다. 만나서 뭐하겠다는 것입니까?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만나야되겠다는 결단, 그리고 ‘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 도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내가 그분을 독대하리라’고 하는 결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되라고 고난을 주셨는데 아주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생 살다보면 다 그럴 수 있지 뭐’ ‘그래도 이렇게 많이 시련을 당했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반응을 보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당한 시련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시려는 것입니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안 바꾸면서 살아가는 그 마음을 감사라는 형식으로 뒤바꿔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한 진단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감동은 잠깐의 일이고 영혼이 변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변화된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온 작용이 아닌데, 순간 마음을 돌려먹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의 도도한 항로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커다란 행복이나 기쁜 일, 혹은 위기에서 건져주심으로서 당신의 말씀 앞에 정직하기를 원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커다란 시련을 만났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이었는데, 하나님이 거기에서 놀랍게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를 삼킬 듯 일어날 수 있는 이 엄청난 시련과 해일과 같은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서 당신을 의지하게 하고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회복시키시고자 하나님이 잠시 위기를 주시고 거기에서 건져주시는데 그런 것들을 모든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다스리시는 결과로서 해석하지 않고 우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사업의 위기 속에 있었는데 김씨 아저씨 정말 좋은 사람이야. 돈 빌려주다니. 그 사람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뻔 했지. 인생 살다보니 귀인을 만나는 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해질 수 있는 기회들을 수없이 잃어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정직한 그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정직한 사람들을 만나서 신앙 생활하면 갈등이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로는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한번도 변화를 경험해보지 못하신 분들은 한번 더 마음을 돌이켜 보십시오. ‘내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해본 적이 있었는가. 주님이 내 죄를 지적하실 때 그것은 주님의 판단이고 그 판단이 옳습니다. 나도 어찌할 수 없지만 나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영혼의 변화가 없는 그 지루한 터널과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갑니다. 죄인들에게 어떠한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신이 없고 일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주님이 내 인생의 전부이고 오늘에서야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 같은 인간을 만드시고 내 힘으로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면서 까지 나를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지를 깨달았습니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런데 때로는 아주 도덕적이고 반듯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심하게 부정직할 수 있고 때로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하고 죄에 자주 빠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느 순간에 벌거벗은 듯이 정직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후자의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표적으로 부정직하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을 제일 먼저 받아들였던 창녀와 세리와 병든 자와 같은 죄인들, 그들은 부정직할 것이 없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이 아닌 것처럼 살았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일 때 죄인처럼 살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예수의 인격 안에서 발견했을 때 그것이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도 일생을 살면서 목사님이 늘 설교하시는 그런 회심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회심할 수 있을까요?’하는데 할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정직해지십시오. 그러면 회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해지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비비지 말고 그 말씀이 여러분들을 지적하고 고치려고 할 때에 그 말씀에 대해서 정직한 반응을 보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속일 수도 없고 그릇 행하실 수도 없는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도 정직할 것이다’를 생각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회심에 이를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직해지지 않으면 그의 영혼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그는 교회 생활에 익숙해질 뿐이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사라져버린 평화,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죄를 가운데 둔 갈등, 그리고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골 깊은 거리감, 그리고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진 적이 없는, 언제나 하나님의 집에서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온 친자식이 아니라 의붓자식처럼 느껴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낯섬을 계속 간직한 채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생활로 자신의 이런 모든 거짓된 본질들을 덮어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화: 한 잡지에 난 기사로 여기자가 성인전화 아르바이트로 잠입했던 내용-30대 가 정을 가진 여성도 교회 막 갔다왔다며 전화했다)
이것이 사실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죄가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영혼을 타고 들어오는 병원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병원체를 비추는 빛이고 정직은 그 병원체를 봤을 때 이것은 병균이라고 인식하는 의사의 확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고 소독해냄으로서 그 사람이 치료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작업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서 무엇은 못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교회 안에서도 모두 일어납니다. 담장 하나 쳐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 땅을 엄청나게 도덕적인 땅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다만 세상은 세상에게 엮여서 죄악들이 일어나고 교회 안에서는 교회 일로 얽혀서 죄악 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깊이 인식하고 비추는 빛이 있어도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나오는 믿음의 반응이 없으면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영혼을 치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해지지 않으면 성화에 있어서 참다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을 우리 모두가 갖기를 소원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 앞에 드리는 황소나 염소의 제물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고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는 우리가 온전해지고자 하는 데에 있어서 온전한 정직 속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 안에 없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삶도 온전해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제물을 받으실 때에 순결한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렇게 순결한 제물을 요구할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셨고 그렇게 순결한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러한 제물을 바치지 아니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그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러한 온전한 제물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받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으셨다면 굳이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내려보내시지 않아도 되셨을 것입니다. 죄인 중 아무나 죽어도 하나님이 죄를 속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실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흠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죄 없으신 예수의 몸에 사람의 몸을 입히시고 일생을 순결하게 사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피가 깨끗케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영원한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그 피의 속죄함을 얻도록 항구적인 효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온전해지기를 원하시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은 바로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온전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깨트려지거나 찢어지지 않은 하나된 마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동그란 빵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반은 하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찌되지 않은 하나의 것이 바로 온전한 마음입니다. 그 온전한 마음이 바로 거룩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holy heart는 whole heart입니다. 거룩한 마음은 전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holiness는 곧 wholeness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똑같은 공식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해서 온전하게 행하신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을 우리의 부하직원에게 시켜도 우리의 부하직원이 나처럼 못해내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가 온전하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모본을 본받는다고 하지만 그것처럼 얼토당도 안 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흉내를 낸다고 해서 예수님의 모본을 우리들이 본받을 수 있습니까? 그가 완전하신 분이었는데 그분이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섬길 수 있을까요?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가졌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기를 우리들이 그대로 소유할 수 있을까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티끌만큼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쓰시지 아니하고, 자신의 모든 생애, 자신의 모든 재물, 마지막에는 자신의 물과 피까지 아버지에게 다 쏟으신 그 온전한 헌신을 우리 중에 누가 본받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아야될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도록 끊임없이 구하며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과 나의 게으름과 나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봉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봉사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든 삶 전체가 하나님 섬기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그런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정직한 길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열매는 마치 벌레 먹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저녁에 슈퍼에 가면 꽤 큰 과일을 싸게 팔 때가 있는데 벌레 먹은 것이다. 먹을 수는 있겠지만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일을 하느냐, 많은 일을 하느냐,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그렇게 모두 위대해 질 수 있겠고 하나님의 큰일을 하다가 죽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큰일을 꿈꾸고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두 그렇게 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산들이 모두 에베레스트산같이 그렇게 거창한 산이고 그런 산들만 서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상막하겠습니까? 어디 가든지 눈 덮인 산들뿐이고 그 산 틈에서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산이 별로 없고 히말라야 가야지만 겨우 볼 수 있으니까 열 몇 시간씩 비행기 타고 가서 거기 한번 서서 소리를 지르면서 ‘정말 여기는 아름다운 곳이다’ ‘정말 엄청난 곳이다’고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레이시아에 450미터가 넘는 쌍둥이 빌딩, 앞을 다투면서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빌딩을 짓기 위해서 여기저기에서 빌딩을 올리지만 그렇게 몇백 층 되는 엄청난 빌딩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빌딩이 제일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7-8층밖에 안되면서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몇 번씩 바라보게 하는 빌딩이 서울에도 몇 개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에베레스트산 같겠습니까? 메킨리봉 같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마테오른봉 같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가 케이투봉일 필요가 있습니까? 창조된 이래로 한두 사람밖에 못 올라가 본 그런 봉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 얕으면서도 아름다운 동산들이 우리 나라에는 많습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멋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의 범위 안에서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우리의 무지 때문에,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면서 하나님을 많이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조금밖에 못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할 수 있었는데도 이런 우리의 부족 때문에 작은 일밖에 못 하고 죽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 쓰기를 원하고 정말로 썩어서 죽느니 닳아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과 교역자들에게 예배드릴 때 가끔 하는 얘기가 ‘그 일이 올바른 일이고 그대들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고 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효율적으로 더 많이 할 때 하나님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신다’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이 주신 지혜를 힘입어서 어떻게 하면 그 일을 빨리 완벽하게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지혜를 구하면 연구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세우는 길이고 그 교회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비결입니다.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운동으로 다져지고 날렵한 청년의 몸같이 되어서 마치 골리앗을 향해서 물메를 들고 가볍게 달려가던 다윗과 같은 날렵한 몸매를 가진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앉아있는 사람인지 서있는 사람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로 비대해져서 머리에 생각이 팔다리로 전해지는데 10초쯤 걸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은 있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지방을 빼야합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다윗 같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런 순발력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탐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남는 문제는 우리가 모두 똑같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똑같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각기 부르신 은사가 있고 각기 세우신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큰 일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맡겨준 작은 일이라도 그가 자신의 마음을 전체적으로 바쳐진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되어가기를 애쓰는 사람이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오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섬김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우리들이 이 정직이라는 덕목을 포기하고는 결국은 부정직과 불결이 우리의 온 삶에 골고루 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부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화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려지지 않는 우리의 삶의 별다른 부분들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안 계신 곳 없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으로 우리의 인생을 지켜보시고 교회에서 행한 것이나 골방에서 행한 것이나 직장에서 행한 것이나 사업장에서 행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는 그 모든 삶이 평행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예배드리는 것만큼 살기를 원하시고 사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직이라는 덕목을 포기하고 살아갈 때 그가 무슨 수로 온전해질 수 있는 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정직이라는 덕목을 포기하고 살아간다면 ‘온전해지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해야될 지 한번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밝혀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정직해지기만 하면 고통 없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을 정직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을 치르고 값비싼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어떤 때는 잠깐 정직함으로 받는 이익보다는 부정직함으로부터 받는 이익이 훨씬 크고 정직해짐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유익보다는 그 정직을 고수하기 위해서 지불해야하는 희생이 때로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정직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정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정직해질 수 있는 유혹의 순간을 통해서 그 사람이 진정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통해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유익에 집착하면서 살고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며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자기의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한번의 정직을 실천하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할 위기의 순간에 그는 정직해지기를 위해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 속에서 말할 때는 쉽니다. ‘주님이 제일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자’ ‘주를 위해서 우리가 아까울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들은 모두 생각입니다.
(예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 문제로 목회자들이 모였을 때 한 목사님이 ‘우리 주님을 위해서 순교합시다. 나는 오늘 예배당에 오기 전에 가족들에게 유언했습니다’고 말할 때 앉아있는 목회자들은 자신 속에는 그런 용기가 없기에 너무 괴로웠다. 그 때 눈물을 흘리며 그 간증을 듣고 있던 집사 한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사는 순 교했고 간증한 목사님은 변절했다)
결심도 있고 하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는 희생이 없으나 상황이 벌어질 대는 진짜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 때는 큰 소리 친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예수님이 전부인 사람,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서 생명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이 있는 사람들은 그 희생이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희생입니다. 그것은 작게 잃어버리는 것이고 정직과 부정직을 미끼로 해서 믿는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의 그 박해는 영혼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박해는 아닙니다.
(예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끌려갔을 때 한번만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 고 했더니 ‘내가 86년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분을 만났고 그분과 함께 살아왔는데 그분은 단 한번도 나를 부인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이 늙은 구차한 목숨을 보존하고자 살아가고자 살아 계신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하며 순교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깐 부정직해지기보다는 잠깐 정직해지고 오랫동안 고난을 받는 길을 택함으로서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삶인지 모릅니다. 특히 이 세상이 부정직이 일반화되고 죄가 보편화될 때에는 더더욱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의절해야 하는 견디기 힘든 고통들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신 생애였고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아들을 통해서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아들이 내려오셨을 때 사실은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이었고 죄인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인하여 흐느끼실 때 사실은 하나님이 거기에서 울고 계신 것이었으며 권세자들과 당대의 유명한 자들을 찾아가지 아니하시고 병들고 주린 자들과 곤고한 영혼을 안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나오는 자들을 가슴에 품으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그렇게 사랑하셨지만 한번도 이 세상과 타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을 구하겠다는 미명하에 부정직해지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사랑했지만 죄는 사랑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정말 도덕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을 알고 그 거룩한 주의 부르심대로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데서 오는 정직,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도덕적인 삶,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주님이 주신 지성을 최대한 사용하고 정직해지기를 두려워하는 나의 악한 본성과 끊임없이 싸우고, 그러면서도 이 정직이 부정직한 사람들을 정죄 하는 포학이 되지 아니하고 죄를 미워할 뿐 죄인들을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정직의 실천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이 세상을 죄악 되다고 꾸짖을 수 있고 그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오라고 외칠 수 있으며, 여기에 참된 사람의 길이 있다고 그들을 향해서 선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그러지고 거스러지는 세대 가운데에서 그러한 빛 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발광체처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정직이라는 덕목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다고 하는 그 죄에서 용기를 얻는 것은 죽은 양심의 특징입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양심은 아무리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죄일 경우에는 보편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도 부정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국부적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많이 괴로워하고 더 많이 아파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의 불순종과 부정직과 죄를 인해서 마땅히 돌려져야할 하나님의 영광이 돌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일에 대해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 그 깊이 만큼 그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닙니다. 세금 내는 것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방면,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정말 정직해져야 합니다.
(예화: 집회를 갔을 때 점심을 대접하는 분이 변호사였는데 자신이 얼마나 힘없는 사 람과 가난한 자를 위해서 변호하는 지를 자랑했다. 그에게 세금은 정확하게 내는 지 물었더니 ‘그 것은 정말 안 된다고’ 대답했다-‘그러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앞에 행한 좋은 일들의 빛이 바랩니 다’라고 말해주었다)
어느 한 부분에 있어서만 뛰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 정직을 다 실천하려고 힘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방면에 있어서 정직을 다 실천하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고치고, 또 지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정직해지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그 부정직 속에서 사실은 그 부정직이 문제가 아니라 그 부정직을 통해서 저 깊은 밑바닥에 있는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이 어두운 세상에 파송 된 자신의 소명보다는 눈앞의 이익에 더 집착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깊이 반성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그런 삶을 살면서 지금은 온전하지 않지만 온전해져 가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내게 손해가 나고 지금은 마치 살가죽을 벗겨내고 소금을 바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워도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불러주신 그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 고맙습니다’하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가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누구 보여주기 위한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싫다고 했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나를 좋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합니까? 여러분 중에도 하나님이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정직하고 말씀 앞에 회개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지 않는 것 아닙니까? 물론 좋을 때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게 하실 때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들판을 가로지르고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겸비하게 자기를 돌아봅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반성합니다. 그런 나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너무너무 어렵고,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자기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정직하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출혈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정직하게 바뀌어가도록 해야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이 정직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좋은 세상으로 끊임없이 바꿔가기 위해서 또한 노력하고 기도하고 우리의 할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묻어버리는 여러분들의 태도는 아주 위험한 태도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부정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정직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은 두 가지 놀라운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동행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참다운 가치가 자신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참다운 가치가 자신의 유익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올바른 동기를 가지며 살기 위해서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작은 가슴을 안고 세상의 시련과 파도 앞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들을 어디서든지 동행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심령의 담대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식할 수 없는 죄와 잘못이라고 명백하게 생각하면서 짓게 되는 죄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죄를 우리들이 죽여야되겠지만 가장 먼저 멀리해야 될 것이 우리가 죄라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라는 변명 하에 스스로 선택하는 죄,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에 가져다 주는 폐해는 엄청난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이유로 인해서 정직하게 살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여러분들의 자녀를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칼같이 교육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자녀도 여러분처럼 될 것이고 그 자녀들도 그 자녀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는 또 그 자녀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으며 그 상황은 마치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을 한 상황과 방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거룩한 자존심을 길러줘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정직을 통해서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정직한 삶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르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는 것보다는 가까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축복이 훨씬 더 크다’라고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상기시켜서 거룩한 자존감을 가지고 세상과 자기가 다른 것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 교육에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정직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담대함을 얻게됩니다. 그 담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오만한 용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을 의존하는 일에 있어서의 담대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사실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오래 전 생각이 납니다. 전도사 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제깐에는 해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안되었습니다. 제가 담임목사였다면 무능하다고 짤라버렸을 텐데 목사님의 인격이 좋은 것이 내 영혼에 덜미가 되어서 목숨은 붙어있는데 너무 안되고 힘들었습니다. 새벽이면 좌석 버스를 타고 교회에 가면서 창가에 기대서 오늘도 무엇인가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고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되겠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안팎으로 싸인 시련과 어려움들이 너무 컸습니다. 그때 창문에 기대서 눈을 감고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여 두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날 인도 하소서
그 노래를 부르며 가면 그렇게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는 괄목할만한 성과가 없어도 언제든지 하나님께 기대고자 할 때에는 기대어집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담대함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하며 언제든지 하나님께 기대려고 하면 기대어집니다. 그런데 우리 양심에 거스르는 악을 행하면 우리 양심에서 외침이 들리는데 ’주제에 물 의지까지 하셔. 혼자 열심히 잘 사시더니. 계속 살든 대로 한번 살아봐‘하는 반항과 비웃음이 우리 양심 속에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될 수 있는 것, 성도가 성도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님처럼 완전해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님처럼 완벽한 생애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이유는 언제든지 양심에 거스르는 악이 없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 그래서 주님께 기대질 때 담대하게 ‘나는 주게 피하리이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내가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나는 오히려 하나님 때문에 평안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품으로 피합니다. 새가 날개 짓을 하고 나무 그늘 아래로 피하듯이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이러한 의존하는 마음에 있어서 담대함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정직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없으면 그런 자유함을 가지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않는 것을 그런 의존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증하실 때, 우리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슨 큰일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최악의 큰일을 만나야 죽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일이니 정말 이 세상이 실수한 것입니다. 우리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이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얼마나 우리가 행복하겠습니까?
정말 얼마 안 되는 이 짧은 인생의 시기 동안에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다가 아버지 앞에 가기 위해서라도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데, 나만 정직하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정직하게 살기를 권면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 그런 진실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2.정직한 자는 미움을 받으나
“불의한 자에게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는 미움을 받느니라(잠29:27)”
우리가 정직해지기 위해서 지불해야 되는 대가는 때로는 너무나 큽니다. 그리고 사회의 구조가 불의하고 부정직할수록 작은 정직을 지키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희생은 훨씬 더 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리스도인이고 신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정직해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희생을 차마 감당하지 못해서 정직해지기를 포기하고 더 이상 정직을 유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치의 기준을 어디에 뒀느냐에 따라서 그 희생이 크고 정직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의 가치 기준을 올바른 데다가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 희생과 정직의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도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격이 바로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악인은 의인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정직한 사람은 악인들에게서 미움을 받는다고 되어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조금 다르게 나와있습니다. ‘토바트 짜비킨 이슈이 아벨’ ‘악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의 미움이다’ 또 ‘토바트 라쉬아 이슈알 데레크’ ‘이슈알’은 정직한 혹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데레크’은 길입니다. 또는 처신, 행동, 컨버세이션에 해당됩니다. 그래서‘길이 정직함은 악한 사람의 미움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사람으로 번역해서 ‘처신이 정직한 사람은 악한 자에게 미움이 된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토에바’ ‘토에바트’는 구약 성경의 출애굽기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러 애굽으로 갔을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압박하고 핍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너희가(아론과 모세) 우리로 하여금 바로의 눈앞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였도다”에서도 ‘토에바’가 나오고, 더 많이 나오는 것은 제사를 이야기할 때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가증한 제물들을 가리킬 때 ‘토에바’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보통의 ‘싫다’ 정도가 아니라 ‘극단의 혐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치우지 않으면 분노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극단의 혐오가 악인에 대해서는 의인들 속에 있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정직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악인들 가운데 그런 극도의 혐오와 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하는 것들을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정체성이 분명한 신자들에게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정체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드러나게 만드는 존재 자체로서 시금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금석은 줄칼처럼 생긴 것으로 돌멩이를 그어보면 가루가 묻는데 그 돌멩이가 파랑 색이어도 가루는 검은 색이 나오게 되는 시험하는 돌멩이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들에게 악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들처럼 부정직하고 불의 하게 살아가지 않고 올바로 살아간다는 존재 자체가 주는 영향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정직하다는 이유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롭고 진실한 사람이든지 -그래서 다윗이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이 명징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정직한 삶을 살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에 항상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복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나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인해 행복하지만 채찍에 맞는 핍박을 당할 때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높은 궁극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채찍에 맞고 핍박을 받아도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 때에 우리를 창조하신 신성의 영광의 광채를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시려고 할 때 그것이 항상 우리가 행복한 방법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자녀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 자녀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높은 사람이 되어서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 그 높은 자리에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 많은 세월들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정직하게 드러내 왔던 그 파란만장한 생애의 발자취, 그런 방식으로 영광을 드러내기를 우리는 원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신앙으로 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것을 뿌리쳤더니, 올곧게 행동했더니 그에게 돌아온 대가는 보디발의 집의 총무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비참하고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서 투옥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랍니다. 그것이 이해가 가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리라고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싶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악하고 더러우니까 자기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시면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처럼 치열한 반대자에 에워싸이신 분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파계하기 위해서 온 세상의 철학자들이 무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예수님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뭘 비난하셨기에 공산주의자들이 예수 죽이기 운동을 벌리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나치즘에 대해서 뭐라고 방해하셨기에 그 사람들이 예수님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부르는 유대인들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이고 일제시대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과민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 세상에 존재해야할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본으로서 참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사람답게 살다가 가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미워한 것입니까?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이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빛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이질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게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달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악하고 부정직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들이 정직하고 올곧게 하나님 앞에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박해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심지어 ‘토바’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주 미운 물건이 되고 그들을 해코지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진실하게 살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 때문에 나쁜 자식 소리를 들으면서 온갖 불이익을 당하고 때로는 폭행도 당하고 때로는 교제권에 있어서 따돌림을 당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너무나 크니까 그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다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모든 명령 속에 그것은 우연한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은 ‘이렇게 살아라’ ‘저런 사람이 되어라’ ‘이 일을 해라’ ‘이 일은 하면 나는 정말 싫어한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을 생각해 봐라. 얼마나 잘했느냐’ 이렇게 특정한 행동이나 행위에 대해서 마음가짐이나 존재에 대해서 우리에게 선장 하시고, 금지하실 때에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순종하는 순종 하나 하나를 전체적으로 부속품처럼 사용하셔서 원래 이 세상에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목적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하나 하나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 마음에 드는 몇 가지는 훌륭하게 순종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자기가 지킬 수 없거나 지키기 싫거나 혹은 자기와 생각이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순종하지 않고 살겠다’ 혹은 ‘느슨하게 순종을 하겠다’-이 얘기는 불순종하겠다는 이야기이다-식의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결코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만든다고 하면 2만 가지 이상의 부속을 다 끼워야 만드는데 어느 부분은 좋은 제품으로 철저하게 조립하고 어떤 부분은 아예 조립을 안 해버리면 차가 완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대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교리들이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와 은혜의 지배’ 교리를 배우면서 죄 죽임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총체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는 죄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이 너무 크고 희생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섞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구속을 통해 의도하셨던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정직해짐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누리게 되는 이익, 부정직해짐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피하게 되는 고통과 고난,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피하게 하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의적으로 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해지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속해 있었을 그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는 것입니다. 정직해지지 않아서 여러분들이 부정직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다든지 세금을 포탈한다든지 부정직한 방법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든지 남의 소유를 탈취한다든지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뭐라고 설명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그 외도 행위를 통해서 얻은 이익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가롯 유다의 손에 들려있던 은 삼십과 같은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그것을 써보지도 못하고 던져버리고 죽었습니다. 쓰고 죽었든지 안 쓰고 죽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어떻든 그것은 가롯 유다의 손에 들려져 있었고 그것 때문에 가롯 유다가 잠시 괴로워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누리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또 정직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의 것은 자기의 것으로 취하고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은 가지지 않습니다.
(예화: 미국에서 아이들이 땅에 떨어진 과일을 나무 아래 모아 두는 것을 보고 왜 가 져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떨어졌어도 우리 것이 아니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내 것이 아니면 ‘내 것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임자 없는 것은 다 내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입니까? IMF 이전에 강남에서는 점심 한끼에 10만 원씩 하던 거대한 음식점들이 IMF로 인해 다 문을 닫았습니다. 그 이유는 전부 다 눈 먼 돈 가지고 가서 먹는 것입니다.
(예화: 대학원 다닐 때 감사를 해보니 전체 학생회 예산의 50%가 음식값으로 나갔다- 자기 돈이면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정직한 방법으로 내게 들어온 것만 내 것이고 그렇게 들어오지 않은 것은 다 내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주인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제대로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들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거기에서 정직의 문제가 또 나옵니다. 정직한 사람은 정직한 방법을 좋아합니다. 부정직한 사람은 정직한 방법을 싫어하고 부정직한 방법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것이 아니더라도 주인만 없으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욕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한 짐승 같은 삶입니다.
인간을 하나님께서 왜 만드셨고 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자리가 어디이고 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서 이 구원받는 그 구원의 의미 자체가 이 창조의 세계에서 목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이탈한 피조물들을 그 원래의 질서로 돌아가게 해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 속에 깃들여 있는 창조주의 신성의 영광의 풍성함을 드러나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건설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은 그 회복을 위한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그 원 질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서진 것이 너무나 심각하니까 원 질서로 돌아가는 그것이 새롭게 건설되는 것처럼 느낄 뿐이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문제는 왜 사람들이 핍박이나 따돌림, 경제적인 이익 같은 아주 하찮은 것들 때문에 신앙을 접고 아주 자유롭게 부정직한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해외에 나갔다고 올 때 400불 넘게 사 가지고 들어옵니다. 세관에서 일일이 검사하지 않으니까 신고 안하고 들어오는데 전부 도둑질입니다.
(예화: 필리핀에서 가족들이 생각나 망고를 사서 가방에 넣다가 신고서에 ‘과일을 사가 지고 오셨습니까?’ 묻는 난이 생각나서 다 호텔에 꺼내놓고 왔다)
그것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금 조금 더 내고 금지된 것 안 가져오고 먹고 싶으면 와서 백화점에서 사서 먹든지 형편이 안되면 참든지 하면 됩니다. 그래서 살 때는 ‘싸다’만 생각하지 말고 ‘세금을 매겼을 때 한국에서 보다 쌀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몰래 가지고 들어오면 얼마를 벌까’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계는 여러 개 차고 팔아야 하니까 상자는 접어서 가방 밑에 깔아서 들어옵니다. 그런 작은 것들 때문에 기꺼이 정직의 의무를 쉽게 버리는 사람들이 박해가 오거나 핍박이 올 때 정직해 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실제로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두려움만 생겨도 쉽게 부정직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겠습니까?
내면에는 하나님이 거듭난 본성을 주셨는데 밖으로 드러나는 삶은 어두움의 삶입니다. 부정직한 삶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하찮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무엇 때문입니다. 판단 자체가 잘못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자신의 행복이라고 쉽게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정직해지는데 치뤄야할 희생은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그런 표현 자체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가있다는 사실입니다.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그 부인에 대해서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시는 이요 여호와시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일정한 부분을 어느 시기에 하나님을 위해서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희생입니까?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주신 것, 그것은 희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인데 당신이 안 주셨으면 잃어버리시지 않았을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희생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여러분 것이 뭐가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 것이 있다고 고백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생명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질도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벌어서 남 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조금 타서 쓰십시오. 그것이 삶의 원리입니다. 지식은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입니다. 배움의 기회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셨고 지혜를 주셔서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셔서 남보다 좋은 지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나님 섬기는 데 써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식의 빛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전도라고 하는 그 자체가 교인 늘리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빛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직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이 너무 악하다. 그래서 너는 정직하게 살아야지? 그런데 너 이만큼 손해 봐야 겠다. 다 내놔라. 이것이 한번 정직해지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다’하실 때 몸서리치면서 ‘왜 다 빼앗아 가십니까? 내가 언제 하나님 앞에 조금씩 늘 바치면서 산다고 했지, 다 바치면서 산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제게서 가져가시는 것도 한계가 있지 십일조는 벌써 가져가셨으면서 그 경계선까지 침범하시고, 정직해지기 위해서 더 희생하라고 하십니까?’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가 진정으로 무엇을 진정한 가치로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정직한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 가치 기준 자체를 자신의 행복에 둡니다. 그리고 가족이나 자기와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영역들 속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직하게 살아가고 탐욕을 갖는 것이 모든 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노욕이 심해집니다. 특히 물질에 대해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곧 죽을 텐데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그러다 결국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다 취해 가는데, 욕심으로 가득 찬 가운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영혼을 팔아먹으면서 부정직한 삶을 살다가 가는 인생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정직을 포기하고 되는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 속에 청렴하고 진실한 신앙, 하나님 앞에 맑은 영성, 그리고 깨끗한 영혼, 주님을 닮아 가는 거룩한 삶의 지속적인 발전,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흐트러진 삶 속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흉내를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원이 뭐냐고 물어보면 여러 사람들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을 주는 대답을 합니다. ‘참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습니까? 그것이 정말 여러분들의 가치의 판단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고백입니까, 아니면 제 고백이 여러분의 귀에 닳아서 여러분 속에 들어간 것입니까? 60년대 무조건 어떤 나라는 좋은 나라고 어떤 나라는 나쁘다고 교육을 시키니까 판단도 없이 세뇌되어서 흘러나왔던 반공 구호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라면 참된 신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요소와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버려서 이 세상에서 벌거벗은 사람처럼 버려진 바 되어도 참 신자로 사는 길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그런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고백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 12번째 설교를 하는데 아직까지도 퇴치되지 않고 있는 여러분 삶의 부정직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그 말씀의 예리한 지적들을 정직하고 올곧게 받아들이려고 했습니까? 아니면 그 예리한 날들을 모두 섞어서 구부러트리고 비빔밥처럼 만들어서 적당히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넘어가는 적당주의의 삶을 살았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도저히 하기 어려운 그런 것들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여러분들이 이 세계의 정직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주신 은혜 안에서 할 수 있는 것, 여러분들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들을 활용하고 주님이 주신 그 은혜를 가지고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능히 정직해 질 수 있는 그런 영역과 부분들에 있어서 부정직한 모든 것들을 미워하고 정직에 속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반응하면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여전히 버젓한 남의 창작물들을 복사해 다가 책으로 만들어서 쓰고 불법으로 복제된 프로그램으로 교리반, 새신자반, 리포트를 써서 내고, 분명하게 소득이 있는데도 정확하게 하나님 앞에 십일조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정직의 규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누르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렇게 부정직하게 살아가는 삶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정리하고 돌이켜 서야지 만 그 때 비로소 여러분들이 삶으로서 ‘정말 나는 참된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게는 나를 진실한 신자로 만드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하는 고백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고백이 정직하고 아름다운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위해서 정직해지려고 하는 자신의 양심을 거절하고 세상에서 많은 사람 속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는 부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나의 부정직이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주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그런 삶을 살지 않게 하시려고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렇게 부정직하고 불의 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적인 목적으로부터 멀어진 이 세상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세상에서 구원해내시고, 그 죄악에서 건지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를 못 박은 사람들이 그런 불의한 사람들이고 부정직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우리들이 그 악을 행하면서 주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내 일생 소원이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진실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젊은 아이들이 주간지나 보고 나타나는 연예인들을 보고 일시적으로 느끼는 연예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의 사랑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창조주로서의 그 영광은, 창조의 위대한 권능으로 당신의 신성의 영광을 모든 피조물 속에 나타내시는 그 조물주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 그 질서 속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찬양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부정직이 일상화된 삶이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이야기했던 비영적인 틀 속에 그 사람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좀처럼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었습니다. 비영적인 틀 속에 있을 때는 회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정직으로 얻은 기회, 정직해지고자 하는 양심을 누르고 얻은 물질의 얼마간의 이익, 부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남이 얻지 못하는 특별한 기회, 부정직한 방법으로 도달한 남보다 좀더 높은 지위, 그런 것들이 영혼보다 소중합니까? 하나님보다 귀합니까?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번도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창조의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도 좋을 만큼 그렇게 값진 것입니까? 이런 사람을 향해서 사도는 ‘은과 함께 망할지니라’고 사도행전에서 말했습니다. 모두 바람같이 지나가는 것들이고 모두 몸부림쳐도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재배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리스도 예수가 구속하신 주님의 피조물이고, 이 부정직과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정직의 마지막 등불이다. 내 등불까지 꺼지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도록 그 가슴에 항상 새겨야 합니다.
또 하나는 정직한 방법으로 얻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을 사취하고 강탈하고 빼앗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빼앗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어두움 속에 있으니까 양심의 외치는 함성을 누르고 ‘세상 사람 중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요즘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라고 말하면서 살지만 어느 날 하나님을 정말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어떠한지를 그 창조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떤 것인지를 하나님이 경험하게 해주시면 그때 모두 뼈저리게 뉘우칠 죄악들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를 잘못된 데다 두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직해지기는 너무 쉽고 정직해지기에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부정직해진 대가는 현찰로 즉시 지급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정직한 대가는 언제 받을 지 기약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안주실지도 모르고 저 세상 가서야 주실 지도 모릅니다. 부정직해지는 것은 즉시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익을 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올곧은 길을 걸어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은 악인의 미워하는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악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심판에 이를 사람을 심판에 이르게 하고 구원에 이를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 시대 때 적과 싸우고 오면 개선문을 통과해서 군인들이 들어옵니다. 황제를 비롯한 수많은 문무백관들이 좌정해 있고 환영하는 백성들이 가득 있고 향로에서 향을 확 피웁니다. 그것이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승리와 상급의 향연이고 전범자로 끌려온 적장들은 죽임을 당하는 냄새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과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과 파멸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보통 소중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창조의 영광을 모두 잃어버린 이 세상에서 내면의 세계를 재창조 해주신 사람들로서 그가 죄를 누르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드러나는 또 다른 피조물인 그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긷든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이 냄새가 되게 하셔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심판을 당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어찌하여야 내가 그 하나님께로 돌아갈꼬’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정도로 장엄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인데 손톱 만한 이 세상의 기회들을 얻기 위해서 신앙의 양심을 팔면서 수시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어떤 때는 신앙 있는 사람처럼 어떤 때는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그렇게 변신하면서 부정직하게 살아가는 그런 삶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스러운 사람들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삶 자체가 비영적인 틀 속에 그 사람을 가두어서 영혼의 참된 축복과 자유를 누릴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부정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남들을 밀치고 남의 기회를 여러분의 것으로 빼앗는 식의 삶을 살아도 하나님이 당장은 여러분을 벌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내하고 참으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셔도 영혼의 아름다운 유익을 거두어 가시고 그를 비영적인 틀에 스스로 갇히게 하심으로서 이미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고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했을 때에 그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지를 하소연했습니다. 그 때에 세계 요한 이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군인들이라면 포학을 행하지 말고 너희가 세리라면 정한 세 이외에는 더 거두지 마라’하는 아주 실제적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불의들이 다 부정직과 하나님이외의 것들을 자신의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잘못된 인생관과 신앙관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성적으로 변화를 받아서 그런 삶의 뿌리를 죽이고 진짜 변화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것이- 너희들에게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에게는 심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앙망했던 많은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라고 선고한 것입니다.
이런 비영적인 것들의 틀 속에서 양심을 억압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정직하게 살아가면서 이익을 취하고 그 이익 위에 자신의 인생을 쌓아올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 사랑에서 오는 아름다운 영적인 연합, 그 연합 속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친밀함,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창조의 원래의 목적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 뜨겁고 간절한 소망,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어찌하든 지간에 그렇게 자신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바지하여야되겠다고 하는 진실한 고백 같은 것이 흘러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예수 믿는 사람의 껍질을 입고 살아가면서 비록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데서 오는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양심의 가책과 고통 같은 것들을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보 한 장 받아가면서 위로를 받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으로 위로를 받고 몇 푼 헌금하고 나도 하나님께 바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모두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 더러운 양심의 고민을 달래기 위한 진통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그 사람이 결코 온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이 의미하는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항상 그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 속에 포괄되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거기로부터 이탈된 비정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신앙으로 말미암는 참된 기쁨을 누리자니 세상이 울고 세상에서 마음대로 타락하고 살자니 신앙이 갈등을 일으켜서 세상에서도 행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더더욱 외인처럼 느껴지는 그런 삶을 살다가 불만족스럽게 인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두 개가 있어서 한번쯤 시험해 본다면 해보겠는데 딱 한번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도저히 내 힘으로 지금 복구할 수 없는 것 말고, 내 힘으로 정직해지고자 하고 하나님이 부정직하다고 지적하신 것에 대해서 내가 정직으로 회귀하여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우선 정직해 지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혼의 유익은 그렇게 정직해짐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려야 되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도록 굳게 하나님 앞에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래서 ‘내가 참된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이 고백 속에는 이런 아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들이 분명하게 뒤따라 와야 합니다. 그것들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쓸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따랐습니다’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거지가 됩니까?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높은 지위에서 떨어져서 비참하게 지위가 낮아집니까? 아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얼마를 살든 지간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 내 인생의 목적은 내가 온전히 주님을 닮아서 이 온 우주의 세계도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피조 세계 속에 긷든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나를 통해서 마음껏 주님이 발산하셔서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마다 우리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존재로서 일생을 사는, 그래서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면서 정말 ‘저 자녀를 통해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한 그 창조의 놀라운 신성의 충만한 영광이, 모든 피조물들조차도 드러내지 못한 그것을 저 자녀가 성화를 통해서 저렇게 잘 드러내고 사는구나’하실 때 그 인생이 하나님 앞에 정말 큰 인생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든지 낮은 지위에 있든지 하나님이 크게 쓰시든지 작게 쓰시든지, 역사 속에서 내 존재가 에베레스트산같이 높지 않아도 사람들 속에 기억도 자니 않는 작은 동산과 같이 되어도 거기서 그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그것이 성도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비범한 부정직의 척결과 비범한 정직으로서의 회귀를 정말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뜻 없이 이 세상에 무릎꿇지 않고 운명에 매여 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삶 자체가 피 어린 통곡이 되어서 ‘주 뜻이 이루어 지이다’ 외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밤바다의 등대처럼 삼아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알리는 향도의 역할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정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