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계2:4~5上) 2003.1.13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잃어버린 기도를 찾아서(벧전4:7) 2003.1.14 새해말씀사경회(새벽) 9
3. 잃어버린 말씀을 찾아서(시119:38) 2003.1.15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3
4. 잃어버린 사명을 찾아서(욘3:1~3上) 2003.1.16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6
5. 잃어버린 거룩을 찾아서(레11:45) 2003.1.17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0
1.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上)
에베소 교회는 지상에 있는 교회로서 그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아마 오늘날 이 땅에 이런 에베소 교회 같은 곳이 있다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주님을 믿으면서 말로만 믿는데 이 교회는 행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위에 수고가 있는 교회였고, 그 위에 핍박과 고난을 잘 견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결해서 악한 자 들을 용납지 아니하고 영적인 분별력이 뛰어나서 자칭 사도라 하는 사람들을 시험해서 그들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교회는 주님을 위해 게으르지 않고 많이 수고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정도의 순결과 열심, 정직, 영적분별력, 단호한 용기를 갖추고 있는 교회가 오늘날 지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훌륭한 점들이 탁월하게 있는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한마디 말씀이 앞의 모든 좋은 것 들을 무효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 지적된 것은 굉장히 많은데 뒤에 나오는 것은 오직 한가지였으니 그 한가지 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앞에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많은 덕과 신앙의 행위들이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효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하나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 하나 때문에 앞에 나와 있는 모든 에베소 교회의 아름다운 장점들은 훌륭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 교회에서 사라지고 나니까 이런 것 들은 모두 과거가 되어버렸고 현재에는 이런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를 가질 수 없는 그런 교회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이런 발자취를 남긴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랑을 잃어버리자 예수님께서는 만약 그것을 되찾지 않으면 그 촛대를 옮겨버리겠다 즉, 주님께서 그 교회를 거두어 버리시겠다. 라는 극단적인 심판이 선고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들은 늘 잃어버리고 사는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 한 한가지진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심이 되는 요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이 없는 모든 신앙생활은 허위요 거짓이요 가식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행위가 있고 수고가 있고 인내가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행위, 수고, 인내, 일수가 없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섬김이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그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신자의 내면의 세계를 가득 채웠을 때의 그 섬김과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신앙의 중심은 항상 동일합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척박한 계시 속에 살았고 구약 속에 산 인물들 이었지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했고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삶의 방식을 움직이는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시편을 넘겨보십시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한 시인들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주님의 사랑을 찾아 헤매었고 주님을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삶으로서 고백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는 견디기 힘든 영혼의 통증을 느끼면서 자신 속에 있는 그 사랑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삶의 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에 있는 성도들에게 와서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넘쳐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 속에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말로만 들려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장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잘 나타나있는 것입니다.
이 에베소교회가 이런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그런 아름다운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에베소교회의 교인들 마음속에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사랑 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행전19장에서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나타납니다. 큰 능력과 기적으로 영적인세계의 실체를 드러내고 대도적인 영적인각성과 부흥을 통해서 온도시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점치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수많은 헛된 책들이 영적인 각성과 함께 불태워졌고 에베소도시 한복판에서 그 더러운 책들이 불길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는데 그 책값만 당시에 은 5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어 생긴 교회가 바로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분명한 복음이 있고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셨고 그리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범죄 한 인간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시는지를 극명하게 깨닫는 부흥과 함께 이들은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바로 이런 부흥과 함께 가슴에 깊이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심겨지자 이들은 그 사랑을 가지고 말뿐 아닌 행위가 있는 신앙생활을 했고 그 사랑 때문에 견딜 수 없는 핍박들을 인내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자기보다 남을 섬기며 수고했고 그 사랑 때문에 진리를 파수하기위해서 사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성과 모든 영적인 분별력을 동원해서 거짓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분별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추호도 악한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순결을 지탱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무엇이 진리인지 공리공담에 그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분투하고 일체의 게으름을 미워하며 주를 위해 뼈 빠지게 수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마음속에 있는 진실한 사랑이 사라지자 마치 전원이 차단된 집이 한순간에 흑암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처럼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사랑이 그들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신앙생활에서 가장중심이 되는 요체가 무엇입니까 형식적인 교회생활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생각도 없이 익숙해진 기독교적인 문화가 가져온 삶의 양시도 벗겨내고 생각 없이 남 따라하는 신앙생활의 모습도 벗겨내고 모든 것들을 벗겨내고 나면 마지막에 무엇이 남을까요? 정말 그 속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남아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죽을 때 까지 하나님 앞에 물어야할 신앙에 있어서의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사랑은 모두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형식, 그리고 중심이 실리지 않은 예배생활, 형식에 흐르는 기도생활, 심지어는 자신이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하는 봉사나 섬김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진실한 사랑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한사람이 어떤 사상만 받아들여도 그 사람은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과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신자가 어떻게 똑같은 사람으로 나타날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 과거의 아름다운 장점들을 많이 칭찬하신 후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하셨습니다. 다른 사랑도 아니고 처음사랑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처음 사랑이 있습니까? 제게는 이런 처음 사랑이 있습니다. 처음사랑의 때로 모두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무지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미숙했고 인격적으로도 지금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때만큼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때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인생의 길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무게로 다가올 때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내가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못 받는 사람에게는 자존감이 없습니다. 때문에 많이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거듭나고 회심을 통해 나같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심지어는 내가 그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그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셨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셨을까 그런 사랑이 가슴속에 가득 차니까 너무 순수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순수해 진다라는 말은 미련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의 내면의 세계가 꽉 차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수이고 순결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으로 꽉 차고 나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오래 살지 말고 빨리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을 죽어서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능숙하지는 않지만 무엇을 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하는 정신이 깃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라는 책에도 앞에 내가 썼듯이 한겨울 매서운 바람을 뚫고 허허벌판에 있는 그 작은 교회를 가기위해 집에서 20~30분이 걸려도 하나도 춥지 않고 그 길이 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새벽에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데 마치 솜구름을 밟고 돌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정말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런 사랑을 받고나니까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가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 하시는데 나를 이 거친 세상에 혼자 팽개쳐두시지는 않을 것이다 가야할 길을 나는 알 수 없고 지금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도 파악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내 인생의 계획은 주님의 수중에 있고 내 가장 커다란 의무는 주님이 날 이렇게 많이 사랑하시니까 나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것처럼 나도 그분께 다 드리면서 살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가장 좋은 길로 나를 인도 하실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죽음으로 말미암는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쫒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두 팔을 벌리면서 자기를 향해 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오는 죽음을 향해서 죽음이여 내게 오라 네가 나를 삼키면 나는 너를 지나 주님을 만나리라 하는 그 죽음의 공포를 소망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사랑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과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중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을 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말씀하신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 처음 사랑의 때를 생각할 때에 정말 뼈져리게 그리워지는 것은 그런 순수, 아무 욕심도 없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때 만약에 주님이 내게 오셔서 소원이 뭐냐고 물으시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내 사랑이 더 온전하고 완전해 질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 있으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형식주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드리지 않은 예배, 기도, 섬김, 이런 것 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것 아무리 많이 드려도 마치 말하기를 그 사랑을 처음사랑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사랑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생각나는 처음사랑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신자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해서 주님이 내 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고 그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일생에 모두인 것처럼 느껴지는 신앙의 때가 없는 사람이 신자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서 성경이 처음사랑을 버렸노라 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다른 모든 어떤 것을 주고도 그 잃어버린 사랑을 보상 할 수 없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는 이것이 우리를 향한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나는 오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주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사랑을 깊이 느낄 때 신자는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 이라는 확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잃어버렸다가 부모가 아이를 다시 만났을 때 그 부모가 펑펑 울면서 어디 갔었니? 엄마가 너를 찾느라고 눈이 빠지게 고생했다면서 뜨겁게 품에 안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데 이 아이가 엄마! 집에 가면 밥은 주는지 묻진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뜨거운 사랑 속에서 엄마가 모든 것을 줄 것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기도의 제목들을 잃어버리는 때가 나타납니다. 기도 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 그리고 자신의 모든 삶을 헤아리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 해 본적 있습니까? 기도와 제목이 잃어버려질 정도로 그럴 정도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감동을 받아 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사랑이라 하는 것은 마치 심장의 박동을 통해서 온 몸으로 퍼져가는 피와 같습니다. 그런데 심장의 박동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혈관 구석구석까지 피가 돌지 않을 때 중대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마비증세가 오거나 썩게 되면서 결국은 어느 한 부분의 지체를 잘라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왜 성경에서 신앙생활 하느라고 애쓰고, 섬기느라고 애를 썼는데도 하나님이 그런 모든 제사와 헛된 경배와 절기를 지키는 것과 교회의 행사와 대외로 모이는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시면서 탄핵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속에 마땅히 깃들여야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한 가지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겠지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 해 본적이 있습니까? 제가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1906년도에 인도 카시지방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 어른들은 모두 예배드리러 교회가고 아이들은 골목에 모여 앉아서 둘러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길래 선교사가 왜 우느냐고 했더니 이제 10살밖에 안된 아이가 아저씨 예수님은 우리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그 예수님을 조금 밖에 사랑하지 않으니 그것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그 눈물겨운 사랑을 깊이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그 분의 사랑을 못 받는데서 오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불순종은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우리 속에 가득하지 않은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불평과 불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 그리고 하나님 앞에 중심을 드리지 않는 불신실함, 이런 모든 것들이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영적으로 깊이 변화를 받고 사랑을 회복하게 되면 환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회개하기 전에는 지옥 같은 자기의 삶의 환경이었는데, 한 순간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물질을 잃어버리는 것은 작은 것인데도 큰 것처럼 생각하고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도 작은 것 인데 큰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나니까 교회는 다니는데 그 속에 진실함이 없습니다. 거짓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식과 단단한 껍질에 에워싸여서 조금도 변화가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삶과 신앙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고통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했습니까? 형식적인 사랑 이었습니까? 아니죠. 애가 꿇는 사랑이었고 자기를 다 쪼개서 우리를 위해 희생과 고난으로 주신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온갖 형식주의와 위선과 거짓과 기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정직과 속임수와 온갖 탐욕들이 돋아나는 것입니다.
조금 어리석고 부족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은 목양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안 들어도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렇게 사는 것 싫어하신다는 그 한마디로 마음이 물같이 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정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자기의 신앙생활의 문제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인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상황과 이유와 사람과 모든 것으로 돌려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직결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사랑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강퍅해지기 시작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먼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 한다. 라는 말이 희랍어로 메탄노이아 인데 메타는 다시 한번 더 혹은 뒤에 라는 뜻으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격렬한 뉘우침이 있기 전에 먼저 생각이 없으면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깊이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고는 잘 정돈이 되어있습니다. 절대로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이 지성에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잘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이 들어오면 그 빛이 정확하게 내 삶이 어떤 상태에 있고 내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다. 라는 것을 명확하게 판단을 내려줍니다.
그런데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지적인 혼란이 오면서 자기 자신도 속기 때문에 회개하기 전에 먼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형식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데 넌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떨어졌다는 것은 곧 타락 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서 타락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곰곰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타락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지점이 어딘지를 찾아내고 나면 비로소 모든 실패가 환경이나 상황에 핑계를 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지점에서부터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이어갔다는 것이 뼈져리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타락한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섬기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1년 내내 열심히 한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느 한 지점에서 타락해버려서 어느 한순간부터는 섬기는 모든 섬김이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일꾼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그리고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 주님이 나의 섬김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아무 보상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헌신의 정신이 사라져버린 분명한지점이 있는데 그곳이 타락한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이라는 것 자체가 신앙을 팽개쳐 버리고 세상 돌아가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건 타락이 아니라 배교입니다. 타락은 제일 먼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사라져버리는 것 이 타락입니다. 형식을 유지 하든 안 하든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벌써 잠재적으로 주님을 버릴 수 있는 준비가 완전히 갖추어진 사람입니다. 다만 어떤 다른 세상적인 이유에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타락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뼈져린 회개입니다. 회개를 하고나면 두 가지가 분명하게 생기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잃어버린 사랑이 우리 안에 다시 가득하게 차게 되고, 또 하나는 우리 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두려운 건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오고 환난이 오고 심지어는 죽음의 칼이 우리 목에 드리워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고 하나님이 내편인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깜짝 놀라고 뒤집어질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놀라울 일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항상 진실하게 대하시고 한번도 빈말로 사랑하신 적이 없고 언제나 진실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고 자기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때에 우리가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현저히 욕보이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우리주님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있어서 금년 한해도 많은 문제와 기도 제목이 있겠지만, 그 어떠한 절박한 기도 제목도 이 기도 제목 보다 시급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가식과 거짓을 몰아내고 우리가 영적으로 좀 미숙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덜 깨닫고, 모자라고, 다른 방면에서 아직까지 미숙하다고 할지라도 완전해야 될 것은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예수 밖에는 없네.
그런 고백,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왜 이 쓸데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시는가 이러한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이 되면 주님의 마음에 제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것을 깊이 고민하고 살아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 라고 하는 철학자는 크리스찬 이었습니다. 유명한 유신론적 실존 철학자였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와서 당신의 생애 최고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그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아주 단순한 대답이 나왔는데 내 최고의 철학적 고민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참된 신자가 되는지..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귀하게 쓰실 수 도 있고 천하게 쓰실 수 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쓰임 받을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던지 간에 중요한 것은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은 학식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의 지위의 문제도 아니고 환경의 행복과 불행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살았던 자신의 헛된 삶을 뉘우치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속에 들어오게 된 세상 사랑과 강퍅한 죄와 견디기 힘든 고통과 많은 어려움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진실하게 살고 싶어 하는 참된 회개를 통해서 언제든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으면서 한번 주님을 깊고 진실하게 사랑했던 첫사랑의 때를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그런 순수한 사랑이 없는 것을 깊이 회개하고 그런 사랑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되찾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많은 것처럼 헛되게 관심을 가지며 살아가는 우리의 향방이 없는 신앙생활을 깊이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그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가는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2. 잃어버린 기도를 찾아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예수님이 오실 때로부터 이미 마지막 때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200년이 흘러서 지금도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날을 가르쳐서 말세의 마지막 때라고 말합니다. 이 마지막 때가 되면 신자가 신앙생활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우선 첫째로 영적으로는 마귀가 마지막 때가 다가올 줄 알고 더 많이 역사하고, 믿는 자들에 대한 유혹이강해지고, 그들을 대적하는 악한 영들의 역사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영적인 환경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이례적인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성령의 은혜를 받고 자기를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때의 신앙생활이 오히려 축복일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이 마지막 때는 사단의역사가 강하기 때문에 그 만큼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투쟁이 심할 때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지막 때가 되면 주님이 예고하신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사는 것이 너무 번잡하고 복잡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농경사회 같으면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분명했는데 오늘날 산업사회는 깊은 밤이 되어도 사람들이 대낮처럼 일하고 살아갑니다. 10시만 되도 대낮이고 11시만 되도 아직까지 사람들이 활동을 하고 살아가는데 그렇게 세상이 복잡하니까 그 세상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살아가다 보면 그만큼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밤에 늦게 자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 할 시간이 없습니다. 24시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많은 나라가 없습니다. 목욕탕도24시 해장국도24시 편의점도24시 그렇게 밤과 낮이 구분 없이 살아가는 사회가 신앙생활을 참 힘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세상을 너무나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가 신자들에게도 밀려오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많이 어려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원 같은데 들어가서 조용히 한 주간 지내면 그 만큼 죄를 적게 지게 되고 마음과 눈에 들어오는 생각들이 단순하니까 그만큼 죄짓지 않게 됩니다. 저는 금요일마다 기도원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가는 곳이 있는데 조용합니다. 그러면 우선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부터 멀어져 숲속에 조용히 앉아있으면 엿새 동안 마음에서 떠올랐던 잡다한 생각들이 가라앉고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시간들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생활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 권면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정신을 차리는 것, 두 번째는 근신하는 것, 세 번째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이야기는 사고의 기능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깊이 침체되고 은혜를 잃어버리고 나면 사고의 기능이 막 엉클어져 머리가 많이 나쁜 사람처럼 됩니다. 그렇지만 머리가 나쁘다. 라고 하는 부분은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부분에 있어서 머리가 나빠진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 시대의 어둠의 자식들이 빛의 자녀들 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사고의 기능 헝클어져서 사람이 멍하게 되는데, 그래서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눈에 총기가 사라져서 영적인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사고의 기능이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있지 않고 흐트러져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치는 곳이 지성입니다. 생각에 제일 먼저 영향을 미치고 그 다음에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도 은혜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시험에 들면 사고의 기능이 헝클어져서 IQ가 두 자리도 안 되는 사람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반드시 패망하는데 그러니까 사고의 기능이 엉클어지고 나면 생각이 혼미해지고 복잡해지고, 영적인 사고의 기능은 엉클어져있으니까 그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지 못하니까 점점 더 깨닫지 못하는 삶이 가중되고 어둠속에서 이 사고의 기능은 점점 헝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이나 사고의 기능이 올바르게 되어있는가 영적으로 바른 생각을 하는지 늘 점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근신하라는 권면입니다. 근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들 때 생각은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고 그 다음 정서는 우리의 의지를 자극하니까 마음속에서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이 정서를 자극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입니다. 생각도 떠올랐지만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또 어쩌다가 마음까지는 지배했는데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통제력을 유지하는 상태가 근신하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힘도 없는 노인네들이 이쪽에 소한마리 저쪽에 소한마리 끌고 가는데 더러 한손으로 두 고삐를 끌고 가는 것은 소의 코를 뚫었기 때문에 소는 할아버지에 비해 백배나 힘이 세지만 잡아당기면 코가 아파서 못가는 것처럼 딱 붙들면 통제력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는 그것이 근신하는 삶입니다. 이것을 놓고 나면 우리의 마음이 길길이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코 안 뚫은 송아지 삼부자가 감당을 못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소도 아니고 조그만 송아지인데 코를 아직 안 뚫고 목에 줄을 매었으나 소용없습니다. 사람을 끌고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삼부자가 감당을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런 마음이 수없이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통제를 유지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막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통제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니까 짐승과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물고 싶으면 달려가서 물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는 방탕하게 사는 삶이 그런 것 이라는 것입니다 방탕에 대해 무슨 술집 출입하면서 흐트러지게 사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원하는 대로 통제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마음이 원하는 데로 미끄러져서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이 방탕한 삶입니다.
이렇게 살게 되면 반드시 인생을 망치게 되고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파멸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되면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마지막에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을 하지 않는 삶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생활을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 후에 인생을 살 때 기도하기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막살다가 오면 기도가 안 되지만 정성을 들여서 잘살려고 애를 쓰면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동안에는 살기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가 끝나면 기도하기위해서 진실 되고 간절하게 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사도가 그런 순환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지막 때가되면 정말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영적인 사고의 기능이 가지런히 정리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신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져도 그것은 항상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속에 새롭게 은혜를 불러 일으키셔도 우리가 그 은혜를 기도 속에서 잘 지키면서 믿음생활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영위해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에 신앙생활을 실패했던 것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 미끄러지고 실패하기위해서 마귀가 제일먼저 노리는 것은 여러분들의 기도 생활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끄러지기 전에 공식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아직 기도할 수 있는 은혜가 남아있는데 그때 기도의 의무를 하나님이 주시는데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적절히 기도의 의무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기도하려고해도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식만남은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너무 사랑하면 신앙생활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를 쳐서 복종 시킨다 에서 그 희랍어가 로마시대 때 노예를 다루는데 사용되었던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나쁜, 혹독한, 자비심이적은, 이런 노예주인들로부터 매로 다스리듯이 맞고 혹독하게 다루지 않으면 그런 노예근성으로 인해 일하지 않는 그런 것들을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면서 쳐서 복종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욕을 육체대로 살고자하는 안일한 소욕 같은 것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자기를 휘몰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최대의적은 마귀도 아니고 세상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을 해도 자기가 싫어하면 마귀가 힘을 쓸 수 없지만 세상이 아무리 유혹해도 우리자신이 호응하지 않으면 그 세상의 유혹이 우리의 신앙에 지장을 줄 수 없습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그렇게 유혹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슨 효용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일평생 최고의 적은 하늘에 있는 것도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닌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혹독하게 달구려고 하는 엄한 주인의 정신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기가 아닌 다른 노예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를 길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만나고도 너무나 약합니다. 주님이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약합니다. 그 약함이라는 것이 결국은 과도한 자기사랑입니다 그렇게 자기사랑의 기회를 타서 마음의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사고의 기능을 헝클어져 대처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은혜를 심어 넣으셔도 죄의 반란군들이 일어나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분명히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인데도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사람처럼 우리를 바꿔놓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은혜를 지키는데 있어서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최대의방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의지식이 잘 갖추어지고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말씀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삶을 살지만 조금 부족한 것 같아도 자기를 쏟아 붓는 비지땀을 흘리는 열렬한기도속에 있는 사람은 조금 부족한 지식 속에서도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려고 하는 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그런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세상 끝날 까지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미워하고 혹독히 다루면서 자신에게 야단을 쳐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자기를 엄격하게 감시를 하고 다루면서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에게 정말 이 아름다운 신앙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잃어버린 말씀을 찾아서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시 119:38)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말씀을 세우소서. 하는 것은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부분이 레아부데카 라고 되어있는데 주님의 종을 위하여 주의 말씀을 세우소서. 일으켜주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으로 믿어지는 이시인은 참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말씀을 통해서 경험하고 그 율법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시로 노래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르게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경험했고 시련의 때에는 그 고난의 아픔을 통해서 주의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즐거움을 터득하였습니다. 우리가 믿기로는 이 시인이 비록 완벽한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가까이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진실한 신자였습니다. 그 시인이 오늘 주의 말씀을 주의 종을 위해 일으켜 세워달라고 하는 이 대목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은혜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적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다시 한번 강하게 일으켜 세워주셔서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장악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받지 못하는 신자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여러분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난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매일성경을 읽거나 혹은 하루한번씩 이렇게 새벽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일이면 늘 공부하고 또 하루에 한번, 혹은 삼일에 한번 ,일주일에 몇 번씩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주님의 뜻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순전하게 경외하면서 살기위해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적으로 우리의 세상적인 관심사와 함께 영향을 미치는 그런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그 말씀에 붙들려서 사는 그런 신앙생활이 아니면 우리가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주님을 깊이 경외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거나 완전히 떠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여러분들 가운데 득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벌떡 일어서서 강한 군대와 같이 일어나서 여러분의 삶의 구석구석을 다스리고 여러분의 삶 구석구석을 진리의 말씀의 빛으로 비추고 그 말씀에 감화와 은혜를 여러분들의 삶 구석구석에 끼쳐서 그 말씀으로 여러분들이 지배받고 있는 사람들인지 오늘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정도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 배교와 불신이 보편화 되어있는 세상에서 그런 정도의 영향을 가지고는 도저히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주의말씀을 세워주소서 라고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한 시대를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살았습니다만 부패와 배교 불신앙이 가득한 시대에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특별한 기쁨을 드렸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패성과 의 경향성을 마음에 모든 죄인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유혹받고 쓰러질 수 있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들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사로잡힐 때 다시 말하면 그의 영혼과 마음, 그의 온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벌떡 일어나서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그의 전 삶을 다스리고 통치할 때 죄악 된 세상에서도 노아와 같이 완전한 삶을 살수 있었고 불순함이 가득한 시대에 여호수아와 같이 신령한 하늘의 세계와 교통하며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불꽃같은 말씀에 사로 잡혔던 사람들이고 그 말씀에 장악되어 벌떡 일어난 그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 아래 사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어느 날 설교 에서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누가 나더러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한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 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사소한일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살고 이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종처럼 살기에 바쁘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일에는 마음을 쓸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수시로 잊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자기의 본분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기억한다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불순종하면서 막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석양아래서도 주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입증이라도 하듯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라고 했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레아브데카 라고 되어 있는데 문자 그대로 직역을 하자면 당신의 한 노예를 위하여 당신의 말씀을 세우소서. 그런 뜻 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자기 인식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주의사랑을 받는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족속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 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노예처럼 살아야지만 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에 희년의 때가 되어 땅도 다시 찾고 노예들이 해방되어 풀려 날 때가 되어 풀려났을 때에도 불고하고 노예가 노예생활을 자청하기를 계속 원하는 상황을 원해서 그 노예의 귀를 뚫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는데 스스로 그 집안의 종이 되었다는 것으로 표는 하였지만 주인은 그를 노예로서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노예는 노예의 신분으로 살았지만 가족관계와 같은 관계로 살아 왔기 때문에 주인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노예로서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보람이요, 기쁨이요,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개척교회 시절 사람들이 예배시간이면 은혜를 많이 받아 눈물바다가 되고 때로는 설교시간에 종을 치면서 우는 것을 절제 시켜야지만 설교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등록은 절대 안합니다. 어쩌다가 한번 와서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매주일 자기네 교회는 가지 않고 와서는 펑펑 울면서 은혜를 받고 점심까지 먹으면서 6개월 다니면서도 등록은 안 합니다. 그러다가 은혜가 식으면 다시 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깨닫게 된 것도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두 주님의 종처럼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어나서 그의 전 마음과 영혼과 삶을 강력하게 장악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종처럼 노예처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그 말씀에 붙들려서 사는 것만이 우리들의 죄악 된 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희망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한해에도 주님께 받을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께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면 우리의 많은 기도 제목들은 필요 없는 제목들이 됩니다. 쌀이 떨어지고 가전제품도 다 낡고, 집이 망가져도, 남편이 돈 벌어오면 모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면 많은 기도 제목들이 저절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사랑스러우면 존재 자체가 기쁜데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래서 금년에 우리의 가장 커다란 기도제목 중 하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삶에 말씀으로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 이제까지도 말씀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말씀이 우리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왕권을 일으켜 세워 혼란스러운 나라에 통치자를 세우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가운데 벌떡 일으켜 세우셔서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정부 상태에 있었던 우리의 온 마음과 삶을 철저하게 다스려서 우리가 하나님 섬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말씀이 그렇게 우리위에 역사해주실 그 때에 우리가 우리 마음에 있는 죄의 지배를 받는 악한 죄를 모두 타파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들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을 드려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4. 잃어버린 사명을 찾아서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욘 3:3上)
요나는 잘 아는 대로 저 큰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라고 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나가 성을 멸망시키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전할 말씀을 받았을 때에는 정말 자기도 원하는 바였습니다. 너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이기에 그 나라를 하나님이 심판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방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전해라 하는 것을 보니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나라를 쓸어버리실 때에는 경고 없이 쓸어버리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듯이 너희를 심판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까 그 속에는 이미 회개하면 용서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생각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와 그 심판을 들은 백성들이 진실하게 회개하면 심판에서 건져주시는 그런 양상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요나는 그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요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내가 가서 저 사람들 에게 선포하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내가 전파 하지 않으면 그들이 멸망 할 것이니까 오히려 애국의 길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방법으로 자신의 사명을 회피하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불순종하는 요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순종은 정말 갈 데까지 가는 그런 불순종 이었습니다.
배 밑창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풍랑이 일어나서 배에 있는 사람들이 화물을 다 버리고 그렇게 고통을 받는데도 니느웨 선지자는 배 밑바닥에서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제비를 뽑아 그 제비가 요나에게 당했는데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바닷물에 던져졌습니다. 아마 요나 선지자의 마음은 그냥 그대로 눈을 감고 죽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명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죽는 것도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한번에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사명을 잘 감당 하지 않으면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마찬가지지만 신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죽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 다 헛된 생각뿐이며 생명 있는 날 동안 열심히 살아야지 죽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안 좋아하신다. 는 말입니다.
그러더니 물고기가 그를 삼켰는데 학자들에 의하면 만약에 물고기가 진짜 삼켰더라면 위속에 들어가서 다 녹아 버렸을 테니 그곳으로 들어 간 것이 아니고 여러분 밥 먹다보면 밥풀 걸리지 않습니까? 코도 아니고 입천장도 아닌 그걸 후실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커다란 상어나 그런 것들 속에는 후실이 작은방만한 정도로 크답니다. 그러면 그곳이 공기가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인데 거기에서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어쨌든 코에 꼈든 배속에 들어갔든 사람이 들어갔으니 고기인들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심지어는 물고기까지 괴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도 사업을 하거나 무엇을 할 때 예수 믿는 사람들하고 손잡는 것은 좋은데 그 사람이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 아니면 손잡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면 물고기처럼 고통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면 같이 동업을 해도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은 것처럼 복을 받는데 그렇지 않으면 고통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물고기까지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죽었으면 끝나는데 3일 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3일이 지나니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죄도 우리에게 들어 올 때는 계획이 있는데 왜 계획이 없겠습니까? 그 계획 이라는 것이 사명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이 사명을 주셨는데 요나가 이 사명을 외면하다가 환란을 당하고, 또 물고기 뱃속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간절히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물고기속에서 요나를 토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참 있다 요나가 깨어나서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데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첫 번째 사명 주실 때와 거의 글자도 틀리지 않고 두 번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명은 냉정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토해내서 3일 동안에 먹지도 못하고 그 속에서 고생하다 나왔음에도 하나님은 오셔서 너는 저 큰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하셨으니 아직 사명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죄의 지배아래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가 은혜를 받으면 다시 떠오릅니다. 그것은 하기 싫어도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고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그런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는 왜 그렇게 숙제를 많이 내주는지 요즘은 숙제를 그리 많이 내주지 않지만 그 때는 방학이면 매일매일 해야 할 숙제를 프린트 하나 가득 내줍니다. 그러면서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방학은 노는 것이 아니라 날씨가 너무 추워서 집에서 공부 하는 것이 방학이다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방학’ 하면은 배우는데서 놓임을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다시 묶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하나씩 꼭 숙제를 합니까? 얼음지치고 공차고 놀다가 이제 개학하기 3일전에 나 하지.. 그런데 아침에 펴놓고 숙제하다 말고 몰래 빠져나가 학교 뒷 담장 쓰레기장에 모여서 불을 때고 놀다가 저녁때 들어와서는 혼나고 책상 앞에 가면 놀랍게 아무도 내 숙제를 대신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쓰다 나간 자리 거기에 그대로 연필이 놓여있는 겁니다.
우리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명은 우리가 감당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 떨어지고 불순종하면서 살면 숙제하다가 중간에 도망 간 것 같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다가 은혜 받고 나면 그 사명이 떠오르는 겁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요나가 살 고비 죽을 고비 다 넘기고 역경과 시련을 다 거쳐서 왔는데 하나님이 살려주신 겁니다. 그러면 상황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저 큰 성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하시는 겁니다. 이게 사명의 비밀 입니다.
죄도 계획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그 좋은 은혜를 주실 때 왜 계획이 없겠습니까? 사명이 다 끝나면 하나님이 데려 가십니다 그래서 사명이 끝나지 않은 사람은 죽을 고비를 넘겨도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사명을 감당해 가는지 하나님이 보시는 겁니다. 사명을 감당해 나가도록 은혜를 주실 때는 반드시 사명이 있는 겁니다. 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까? 성령 충만, 기도의 은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심령의 부흥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데 만나면 무엇 할 겁니까? 대부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가만히 보면 자기가 힘들어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달픕니까? 그러니까 아이들도 실컷 놀다가 싫증나면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듯이 불순종하고 살아가다가 죄도 먹고 마시고 하다 지치고 피곤해지면 생각나니까 하나님께 와서 은혜를 주십시오. 하나님 내게 뭘 주십시오. 그러는데 동기 자체가 사는 게 너무 불편하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모든 게 편안해지니까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사는게 불편하고 힘들어서 은혜를 구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전에 받은 은혜라고 할지라도 그때 받았을 때 하나님이 은혜와 함께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으로 돌아가서 사명과 함께 사는 것이 항상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은혜를 유지하며 사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고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는 사명도 같이 주셨는데 그 사명은 팽개치고 불순종하고 막 죄 가운데서 살다가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우니까 다시 하나님 은혜를 달라고 기도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한번 은혜를 줘 보시는 겁니다. 그런데 도무지 은혜는 달라고 하는데 그 은혜를 주어도 그 은혜로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 그 자체가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경향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안 기뻐하시는 겁니다.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않는 사람치고 주신 은혜를 유지하는 사람이 없고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애쓰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자신의 사명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장에서 내가 주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생명까지 바치겠다는데 사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헌신적인 고백도 주님자신이나 받으실만한 고백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명은 곧 주님자신이라고 생각을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명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명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바로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가장 커다란 명령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만약 사명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 사명을 모르던지 아니면 하나님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다음에는 우리가 사명을 놓고 그것을 감당해 나가려고 분투하고 애를 쓰고 많이 헌신할 때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깨닫고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게 은혜를 달라고 매달릴 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고 사명을 감당해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팽개친 사람들은 주님을 배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혼이 절대로 건강할 수 없고 그 사람들의 심령은 항상 곤고하고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사람들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란트 맡은 종들의 비유에서 주인이 한달란트 맡겼는데 땅에 묻어두었던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시면서 그 한달란트 마저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사명을 받았으면 그 사명으로 돌아가서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잠들지 않고 깨어있어서 신앙생활 하는 비결을 터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 사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제가 오늘 목사님 한분을 만났는데 젊은 시절 하나님이 목회자로 부르셨음에도 불순종하고 30대, 40대를 보내고 50대를 지나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는데 그분 하는 말씀이 자기가 50이 넘어 감당하려니까 코피가날 정도로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순종하고 돌아오면 지나온 것은 다 무효로 치고 이제 지금부터나 주시려니 그랬더니 못살았던 삶들을 다 살게 하시더라.. 그러면서 한탄하시는 광경을 제가 본 적 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도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언젠가 은혜 받았을 때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야 되는데 얼마나 고달플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받은 사명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거기로 속히 돌아가서 충성하는 그런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은 곧 자신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5. 잃어버린 거룩을 찾아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이 성경구절은 구약에서 몇 개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에서 거의 설교되지 않고 있는 몇 구절중 하나가 이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소개하시고 자기의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레위기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고 시내 산에 있는 동안에 상당부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가 그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레위기는 신약의 히브리서라고 불리 울 정도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죄 된 인간이 가까이 갈 수 있는 수많은 제사와 방법들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히브리서에서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어떻게 통과 할 수 있는지를 기록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레위기 에서는 제사를 통해서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러 갔는데 히브리서 에서는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통과해야 했으니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하게 하는 모든 규례와 제사들은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라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들이 주님을 통해 얻게 되는 최고의 특권은 사실은 구원이 아니라 거룩 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소개 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 해낸 나 여호와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사실 처음 하시는 말씀부터 말이 잘 안 되는 것 같은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되실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인데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으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의 하나님이신데, 정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삶이 이루어져야지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첫째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모든 온 우주의 하나님 되시는 것으로만 만족하셨다면 왜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인간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이유는 하나님이 인간들 속에 오셔서 함께 거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오 순결한 영이시니 인간과 함께 거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거하는 것과는 같지 않지만 하나님은 영으로써 인간들안에 오셔서 영을 가진 인간과 함께 교제하심으로써 바람을 만질 수는 없어도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누구도 바람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 속에 오셔서 당신자신이 계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피조된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진실 되게 경배하며 높이는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안 되십니다.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지 않지만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납니다.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불신자들은 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신자들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되십니다.
그러나 신자가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죄의 지배아래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충만하게 오셔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로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신자요 사람이지만 그 삶을 살도록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삶은 자신들이 살아도 드러나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고 또 우리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해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갈망을 가지시고 두 번째로 하나님이 하신일이 있는데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다. 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노예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해방 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애굽의 권세와 권위는 오늘날의 미국, 소련, 일본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권세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나라의 강력한 군사력 아래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서 구원을 받아 해방된 백성들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 일을 계획 하신 분부터 실행하고 성취하신 유일한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립군이 있었습니까? 해방전선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손잡고 공동으로 합작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혼자 힘으로 그 큰 능력을 베푸셔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애굽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불바다로 만드시고 바로의 처음 난 자식부터 시작해서 짐승의 모든 초 태생에 이르기까지 심판하시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했습니다. 나일강을 피바다로 만들고 개구리가 온 지면을 덮고 이가 온 땅을 가득히 채우고 파리가 가득 차고 악질과독종이 모든 짐승들에게 달라붙고 우박과 불비가 내리는 그 엄청난 심판 어둠과 장자가 죽는 것 이런 모든 열개의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서 무엇을 더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그들은 잠잠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 바로의 손에서 풀려나와 홍해를 건넌 사건은 더더욱 하나님혼자 그 일을 하신 사건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바가지로 물을 펐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혼자 그 물을 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넜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애굽 에서의 이스라엘백성을 건져내신 해방의 역사가 바로 후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게 될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를 때는 이 세상에서 애굽과 같은 죄악 된 세상에서 바로 보다도 악랄한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어떠한 해방의 소망도 없이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던 비참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와 버금가는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있는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죄의 지배에 철퇴를 가하시고 은혜와 생명의 원리를 심으셔서 우리를 거듭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죄와 사망의 법이 끊어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감격으로 차서 선언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잊지 않고 암송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출애굽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절망적인 어두운 죄 가운데 건져내신 그것이 영원토록 우리에게 소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이후에 매일매일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보혈로 구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가 된 상태와 그 피로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행복한 상태를 비교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도 감사할 수 없고 만입이 있어도 감사할 수 없고 우리의 머리카락으로 신발을 만들어서 주님의 발에 신겨드리고 우리 살의 가죽을 벗겨서 예수님의 옷을 만들어 드려도 우리들이 도저히 갚을 수 없고 우리의 살점을 떼어서 예수님의 구멍 난 옆구리와 손바닥을 메꿔 드려도 우리들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결코 죄와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우리의 오감을 사로잡는 이 세상의 사랑과 유혹이 잠시 있다 지나가는 헛된 것들이고 우리에게는 보다 영원한 집이 있어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우리인생의 전부이다. 그렇게 고백하며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믿음 때문에 보이는 이 세상을 하찮게 여기며 살수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그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인 우리에게 간절히 명령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성경에 최고의 아름다운 요절도 사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한 방법의 구절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오신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기위해 오셨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리입장에서 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피 흘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게 하신이유는 불결해서 도저히 당신이 함께 살 수 없는 우리인간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그리스도예수의 피를 발라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든 다음에 그렇게 거룩하게 되어진 사람들을 믿음으로 당신과 연합하게 하셔서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가족으로 사셔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죄 없이 인간과 함께 그렇게 살고 싶으셨던 소망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거룩이 무엇이냐 하면 거룩은 크게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물들을 지으신 궁극적인 창조주로서 어떤 식으로든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는 비교 되실 수 없는 지위에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이것을 거룩에 있어서 초월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계를 가지고 로봇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지금만 해도 로봇이 상당히 발달해있는데 그 로봇이 수많은 센서를 가지고 느끼고, 생각하고, 앉고 ,일어서고, 말하는 로봇을 만드는데 과학자들 얘기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과 거의 유사한 로봇을 만들 수 있답니다. 그래서 어느 영화에서 보니까 사람끼리 서로 말을 안 듣고 자기만 위해달라니까 로봇하고 결혼하는 세상을 영화로 만들어서 식모로봇, 비서로봇, 안마로봇에 이르기 까지 로봇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겁니다. 로봇은 거역이라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시키는 대로 프로그램을 입력해서 18세기의 절대 순종 프로그램을 입력하고 또 발랄하고 경쾌한 20세기 서구스타일을 원하면 그렇게 프로그램을 집어넣으면 되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정교하게 로봇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거의 완벽하게 인간과 의사소통을 한다 하더라도 그 정교한 로봇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적이고 질적인 차이는 극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 속에 오셔서 인간과 대화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과 교제하신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월성입니다. 그 초월성을 깨닫고 나면 인간은 그 하나님 앞에 깊이 엎드려서 철저하게 부복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나 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존재적인 격차가 있으니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시요 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무리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대화하셔도 하나님은 나의 위대한 창조주시요 나는 지푸라기와 같이 당신의 손으로 지은 존재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깊이 엎드려서 나는 티끌과 같사오니 하는 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아는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는 이야기의 첫 번째 개념도 하나님 앞에 깊이 엎드려져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창조주 하나님에 비하면 자기는 티끌과 다름없는 존재이고 굴러다니는 돌멩이, 들에 핀 풀 한포기와 같은 동창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분 앞에 전적으로 그 엄위 앞에 엎드려지는 것, 그래서 자기를 전적으로 낮추며 사는 이것이 거룩하게 되라는 첫 번째 명령입니다. 그래서 속되고 불경건한 사람 중에 교만한사람이 있지 거룩한 사람들 중에는 교만한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나는 하찮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과 의가 있고 신실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자비로울 때가 잇고 긍휼을 베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향을 받아서 흘러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렇게 가지고 계신 모든 사랑과 의와 신실과 자비와 긍휼 이런 것 들은 하나님 것은 완전하고 우리 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많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랑을 하면서도 우리가 불결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완전하고 변함이 없는데 우리의사랑은 늘 죄가 섞여있고 불완전 합니다. 그렇게 완전한 것을 가르쳐서 거룩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할 때에 인간이 보여야 될 반응은 결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하나님처럼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해도 하나님이 될 염려는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 거룩을 계속 닮아가는 것, 그래서 사랑을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온전히 사랑하려고 애를 쓰면서 온전케 되어지는 것이 곧 거룩하게 되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도 더 온전하게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어도 더 온전하게, 오래 참아도 더 온전하게 오래 참으려고 애를 쓰면서 온전해져 가는 그것이 바로 거룩해져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닮아서 거룩해지려고 애를 써야 되느니라.. 그런 뜻입니다. 동적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거룩의 영역으로 구별되어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거룩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는 동적인 개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듭나는 것은 순간에 이루어지지만 성화를 통해서 거룩해져가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일생을 거쳐서 계속 이루어져 가야할 신자의 가장 커다란 사명입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행복해지는 것 보다 거룩해짐으로써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는데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교회는 어리석게도 그렇게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얻고 싶어 하는 행복을 예수님과 복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화해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자신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깊이 변화되고 나면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얻음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서 거룩해져감으로써 행복해지게 되고 그렇게 거룩해짐으로써 하나님이 거룩한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충만히 계시고 그렇게 계실 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인간이 참으로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떤 삶을 살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 마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들고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이것이 우리를 구속하셔서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요 원대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잃어버린 것 들을 찾아야 됩니다. 그중에서 우리들이 정말 가슴이 저미도록 사모하면서 그렇게 찾아야할 소중한 것 우리의 가진 소유를 모두 주고 우리의 지위와 심지어는 우리의 생명을 주고서라도 하나님께 찾아야 될 것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날마다 뵈옵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또 하나님은 당신으로 인해 행복해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즐거워하시는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거룩을 되찾고 이 시대에 하나님을 알리는 훌륭한 나침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