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은 기회입니다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염려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마6:30) 2003.10.2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
2. 환란은 영광의 기회입니다(시50:15) 2003.10.2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7
3. 환란 가운데 취할 세가지 태도(시77:2) 2003.10.22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2
4. 사유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시86:5) 2003.10.23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7
1. 염려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0)
사실 견고하던 믿음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참 좋겠는데 야속하게도 우리의 믿음은 늘 흔들립니다. 우리는 우리 바깥에서 들어오는 많은 유혹들, 그리고 커다란 죄악들을 대치하면서 싸우지만, 그러나 사실 정작 우리의 신앙을 허무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당연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이런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허무는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염려는, 보이지 않으면서 서서히 우리의 영적인 삶을 고갈시키는 무서운 질병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바는, 염려하는것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쓸모없는, 낭비하는 삶을 사는지를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먹고 입고 마시고,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는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화) 대통령이 취임을 하기전에 “남북의 전쟁이 나는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고, 경제는 생활의 문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그런 취지의 발언을 했을때 저는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경제의 문제는 물론 전쟁보다는 덜 하겠지만 이것은 단순한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IMF가 났을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살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요새도 카드빚에 쫒겨서 수많은 사람이 툿신자살 하는것이, 80년대 분신자살 하면서 빌딩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문에 나고 알려진것만 해도 이러니 그 속에서 죽은자와 다름없이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속에서 오는 가정과 인간관계의 파괴와 이런것들은 가히 단순히 생활의 문제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절대절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럴때 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경제생활에 지혜를 발휘할려고 애를 쓰고, 무엇이든지 벌어벌려고 애를 쓰고, 경제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럴때 일수록 우리는 정말 지혜롭게 경제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돈도 없는데 펑펑 낭비하고, 빚을 얻어 쓰고, 이렇게 덤벙대면서 살면,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된 많은 사람들에게 형언할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려운 때에는 자신에게 여유가 있어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제하고, 이렇게 살수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모든 것을 깊이 인정하면서,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면, 그렇게 지혜롭게 경제활동을 하고 물질을 여축하고, 그래서 미래에 다가올 고통과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비하고, 이런것을 비난하는것이 아닙니다. 비난하고 있는것은 무엇인가 하면, ‘염려하는것’이다 라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염려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 법을위한 인격적인 모든 신뢰, 이것이 부족한데서 모든 염려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으면, 내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것이라고 하는 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뇌를 뺴버리고, 믿음이 있으면 뇌를 빼버리고 생각이 없이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뇌도있고 모든 것이 있어서 생각도하고, 고민도 하고, 어떻게 하면 잘할까 생각도 하지만, 그러나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잘할까 고민하고 탐구하는것과 염려하는것은 다른것입니다. 그렇게 탐구하고 생각하는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이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서 앞에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충성스런 사람들이 본분입니다. 그래서 충성이라고 이야기할 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동을 하는것만이 충성이 아닙니다. 생각을 하는것도 충성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육체적인 게으름도 있지만, 정신적인 게으름도 있습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것, 부주의한것,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게으름입니다. 그래서 많이 연구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염려가 아닙니다.
(예화) 저는 교회일을 하면서 8월에 접어들면 배운 구상을 하기 시작해서, 10월쯤 될 때에는 모든 구상을 끝냅니다. 그 다음에 2월이 지나가면 3월부터 서서히 하반기 구상을 시작해서, 5월쯤 모든 구상을 끝냅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상을 하고 고민을 할때는 밤에 잠이 안 올 정도고, 어떤때는 생각이 복잡해서 종이 두장을 놓고 설교 준비를 합니다. 설교 준비하는 종이 한 장, 교회 행정하는 종이 한 장. 설교 준비하다 떠오르면 이쪽에 쓰고, 기억력을 믿을수 없고 잘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설교 준비하다 떠오르고, 길거리 가다가 생각이 나면 핸드폰에 메모를 해놓고, 와서 열어보고 다시 적어놓고, 이거 하다가 또 말씀이 생각나면 이리로 가고, 간심해서 어떻하냐? 그러나 저는 저대로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살아 왔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기 시작 합니다. 그렇게 8월달, 9월달이 돼서 고민이 절정에 달합니다. 그러다 10월쯤 접어들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10월 말쯤 대충 신년도의 모든 것들이 그림이 나옵니다. 신년 사경회가 끝나고 나서, 3월부터 한달내지 두달, 고민을 하면서 하반기 계획을 짭니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어떨때는 잠이 안와서 밤을 하얗게 밝힙니다. 잠을 잘수 없는것이 고통스러워서 잠이 안오는게 아니라, 생각이 나니까 머리가 빤짝빤짝하고 쇠락하게 빛납니다. 주일라고 하고 생각해서 설교했는데도 밤에 쇠락하게 빛납니다. 그래서 항상 못 잘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충성스런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것이, 그렇게 생각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쓸때에, 그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뇌를 빼논 사람처럼 생각없이 덜렁덜렁 다니다가 기도하려고 무릎 꿇으면, 그때 비로소 생각이 나서 도와달라고 하고, 그것을 새카맣게 잊어먹고 되는대로 살고,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 문제는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곧바로 우리의 영성에 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할때에는 항상 염려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하고, 정보도 많이 얻고, 사람들과 상의를 많이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염려는 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두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맡아서 다 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될때,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다하고, 하나님도 다하시고, 그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항상 하나님께서 선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직원 하나를 뽑아도 그렇게 고민하고 뽑으면 거의 좋은사람이 와서 봉사를 하게되고, 교역자 하나를 써도 그렇게 고민하면서 하면 좋은 교역자가 오고, 어려운 문제가 생겨서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쓰고, 숫자를 헤아리고, 계산기로 두드리면서 고민하고 나면, 뜻밖에 기회를 주셔서 기가막히게 해결방안을 마련하게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항상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사는것은 아무 문제가 안되고, 나는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고민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염려가 금방 우리의 형혼의 커다란 무기력을 가져오고, 머리는 살아서 막 움직이고 열이 나는데, 과부하가 걸려서 열이나는데, 가슴이 식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염려라고 하는 그 정체의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신뢰가 부족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잘 돌보아 주실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온전한 신뢰와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다음으로 우리를 잘 돌볼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나 자신이 내 문제를 끌어 안고 살으려고 할때 믿음을 따라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온전한 위탁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해야 하냐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맑고 투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투명하지가 않습니다. 우선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기울여서,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쏟아놓으면, 하나님과 화목을 계속 증진 시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야될때가 되는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생겨나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렇게하고 살아가니까 순전히 염려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 해보십시오. 우리들이 경제가 이처럼 어렵고 많이 고통스러울때, 지혜를 짜고, 모든 것을 궁리하고, 시장을 연구하고, 다른사람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 훌륭한 것이며 꼭 해야할 것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더 많이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잘 될것이라 생각하는 하나님을 배제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제일 싫어하는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하나가, 혼자서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온전히 의지할때에 당신의 백성들을 가장 사랑스럽게 보십니다. 혼자 잘했다고, 혼자 인간 승리를 엮어보겠다고, 하나님 없이 날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할수 있게 되기에는 어떻게 해야 하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투명해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하고, 용서의 은혜를 구하고, 그리고 내가 무엇인가 게으른 삶이 있다면 그것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부지런한 삶을 살고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양심의 자유함을 가져다 주지 않는, 성령께 불순종하는 그런 삶이 있다면, 그것을 진심으로 돌이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떠한 걸림돌도 없이 말고 명지한 관계가 되도록, 혼탁해지지 않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온전히 의지할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 때문에 영혼이 손해를 보고 심령이 고통을 받는것은, 모두 우리자신의 염려와 근심이 하나님께 맡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밖에서 얻을수 있는 것이 어떤것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것이면 그것이 가시와 같은 고통이라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면 제왕의 면류관 이라도 그것은 우리를 지옥과 같은 삶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기준점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나면, 내가 이세상에서 잘되면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잘 되는 것이고, 내가 이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굶으면 내가 굶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굶고 고통을 받는 것이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면 사실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상기 시키고 싶으셨던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너희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화) 산에 가면 꽃들이 있는데 전혀 꺽을 마음이 안듭니다. 별로 꺽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놓았을 때가 제일 이쁘고, 그것을 꺽어 가지고 집에 오면 시들어 보기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백합화를 볼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합니까? 그러한 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모든사람에 주신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입니다. 꽃 받을때 신경질 내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남편이 꽃을 사다 주니까 부인이 신경질을 내면서 “먹지도 못하는데 왜 이렇게 돈을 쓰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그러는 것이지 속으로는 다 좋아합니다. 여러분 오늘 꽃을 사가지고 남편에게 한송이 갖다 줘 보십시오. 아내에게 조금 닭살 돋긴 하지만, 꽃 한다발 해서 “여보 내 마음이요 이거 받고 오늘 사경회 갑시다.” 하고 줘 보세요. 그러면 싫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몇일 피고나면 황혼의 십일홍 입니다. 열흘이 지나고 나면 꽃이 없습니다. 몇일 피고나면 다 시들어지고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 그러는데, 누가 그렇게 기르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러시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너희들은 이 모든 것들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일먼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직접 흙으로 우리를 빚어서 이 세상에 창조하셨고, 그리고 온 창조 세계의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당신이 형상을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깊은곳에 심어 준 그런 피조물입니다. 그런점에서 하나님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상관없이, 이세상에 모든 인간들에 대한 한 없는 애정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그 형상에서 하나님과 사귈수가 없는 우리들을 당신의 구원의 세계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하시면서 까지, 값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슴 벅찬 감격으로 외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들도 우리에게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무엇이 우리를 위해서 아까운 것이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의 영광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그 사실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화) 염려를 많이 하는데 마지막에 남는것은 마치 장작이 타고나면 마지막에 재 밖에 남지 않는데, 그 재는 아무짝에도 쓸데없어서 털어 버려야 합니다. 제 방에 나무를 때는데, 겨울이 되면 일 입니다. 그 장작을 때는건 좋은데, 그 재 치우다가 항상 불에 디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손에 지문이 안 남을 정도로 그렇게 불꽃에 디었습니다.
염려를 많이 하고나면 같은 생각인데 가슴이 숯처럼 까맣게 타서 생기를 잃어 버리고, 같은 생각인데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묵상하고 나면, 활활 타오르는 열정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생겨 남니다. 그 염려를 통해서 얻을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말입니까?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것이 무엇이냐하면, “그렇게 염려를 해봐야 너희의 키가 한자는 더 자라겠느냐?” 너희들 자신의 인생을 개선하는데에는 그 염려가 아무 필요없고, 근심이 아무 도움이 안되고 마지막에 남은것은 재처럼 까맣게 타버린 가슴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차가움과 사람을 향한 원망과 절망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냐면, 항상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주시고,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온 우리의 인생의 많은 날들이, 회상하고 보면 굽이굽이 힘들고 어려운 많은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걸어온 길 이었습니다. 염려도 하고 근심도 했지만 마지막으로 인생의 고비를 넘게 하신 분은 역시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폭풍우 속을 헤매일때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고난의 고비를 넘어 허덕일 떄에도, 우리를 붙잡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 이셨습니다.
(찬송)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야 염려 필요없네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왜 버리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는 때로 신앙까지 팔고 우리의 영혼까지 죽여가면서 까지 세상에 있는 것 들까지 염려하고 가슴을 태우고, 그래서 영적으로 깊은 손해에 빠지지만,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강팍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니까, 떄로는 이세상에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허락하셔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사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주님이 꼭 보여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만이 아니라 남이 알지 못하는 마음의 많은 근심이, 사실은 근심하라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상황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만들어 주시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더많이 의지하고 사랑하게 될 때, 놀랍게 우리 인생의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이 됩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 앞에 건조한 삶을 살다가, 도저히 내힘으로 극복할 수가 없어서 어떤 어려운 문제의 제목을 가지고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도 설교하는 가운데, 돈이 필요해서 돈 달라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체험을 한 것에 대해서 잠깐 간증을 했습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당신 앞으로 인도하시고 당신을 의지하면서 살게하시는 방법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방법만큼이나 무궁무진 합니다. 많은 방법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셔서, 이 세상에 정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며 당신 품에서 사는 그것이 너무나 사랑 스럽고 그것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이 두 눈을 질끈 감으신채 우리를 고난 가운데 두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회초리에 맞으면서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하고 시련을 당하면서, 거기에서 자기가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 혼자의 힘으로 살수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까지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들을 염려하고 근심하게 하는 그 끈을 어느 순간에 놓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시는 분이 나보다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내인생에 무엇이 좋은가 하는 것도 나보다는 하나님이 더 잘 아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더하시고 우리의 영혼도 살리시고, 우리의 육신의 피로들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시간도 여러분들에게 문제도 주셨지만, 염려하며 가슴을 제처럼 태우라고 염려를 주신것이 아니라, 염려 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떠났던 하나님, 염려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러분들이 버렸던 그 하나님, 밀쳐 주었던 그 신앙의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그런 기회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문제를 주신 그 옆에는 언제나 먼 곳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바로 옆에 답안지가 함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깊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보지 못했던 답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서, 염려로 인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상하고 여러분들의 영혼이 병들어 가는 일이 없도록, 오늘 이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염려 했던 것을 깊이 회개하고, “내가 정말 주님을 신뢰합니다. 이제까지 내 인생을 주관하고 움직여 오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던 하나님, 이제 저를 붙들어 주시고 제 인생을 온전히 책임져 주시옵소서. 제가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오신 문제들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 내 염려 때문에 살아 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신앙은 병 들었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용서해 주시고, 정말 하나님 앞에, 정말 주님께 맡기면서 살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시고, 이번 사경회에 우리를 만나 주시도록, 우리 같이 한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2. 환란은 영광의 기회입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인생을 살다보면 환란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환란이라고 하는것은 우리의 삶의 상황이 평소와는 달리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고, 우리에게 많은 인내를 필요로하는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안해 지는 시기를 우리가 환란의 때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환란은 크게 둘로 나누어서 밖으로부터 오는 환란이 있고, 안으로부터 오는 환란이 있습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환란이라는 것은 우리가 많이 흔들리고 마음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나 이런것들이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의 환경들이 막 흔들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견고하게 서서 살려고는 하는데 사업의 위기를 맞는다든지, 아니면 가정에서 자녀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든지, 건강에 위협이 온다든지, 혹은 나와 관계가 있는 가족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닦쳐서 나의 삶의 환경들이 흔들리든지 하는 그런 환란이 있습니다. 또하나는 그런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오는 환란입니다. 그 내면에서 오는 환란이 대게 밖으로부터 오는 환란과 함께 일어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떄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외부적으로는 커다란 변동이 없지만 내면적으로 말 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신음하게 되는, 그런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깊음에 떨어진 모든 사람이 다 육신적으로 큰 환란을 겪으면서 요동치는 환경속에서 내동댕이 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가만히 있으면서 어느 순간에 자신의 마음속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일어나고, 환란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마음의 진통이 시작되는 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떄를 우리가 환란이라고 하고, 이 두가지가 함께 결합이 되어서, 밖에서 우리의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큰 심정적인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마음 둘곳이 없이 고통스러운 환란의 때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많이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런 환란의 때를 허락하십니다. 그떄 신자들의 반응은 두가지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그런 환란이 올떄 , 그런 커다란 환란이 올떄, 그냥 그런 환란을 겪으면서 괴로워하고 고통하기만 할뿐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보다 나쁜 경우는 환란이 오는데도, 환란이 닦쳐오는데도, 그 환란을 환란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세상것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환란들이 오게 되면 괴로워하게 됩니다. 또하나의 반응은 이런 환란이 닥칠때에, 재빨리 이렇게 환란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환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꺠닫게 하시는 것으로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에 있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전자에 해당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환란이 닥치면 두려움이 생기면서 “하나님이 이제 나를 치시나보다”, “하나님이 나를 이제 징벌하시나 보다”라고하는 두려운 의식이 밀려오는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이 확 밀려오게 되면 그 마음속에 단순한 환란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자기가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평안들이 뒤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견딜수 없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환란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복수하시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딱딱한 막대기로 떄리면서 인도를 하시고 어떤 사람은 부드러운 막대기로 인도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왜 그렇게 하시는지 우리는 다 설명 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의 인생의 떄에서도 어떨떄는 딱딱한 막대기로 몇 번 떄리셔서 우리를 정신차리게 해서 인도하시는 때가 있는가 하면, 떄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드러운 막대기로 툭툭 건디려서 정신을 차리게 만드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맞게, 우리의 때에 합당하게, 인도하시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화) 저는 대학에서 9년을 선생 노릇 했습니다. 학생들을 9년 다루다 보면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깁니다. 이 학생은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쳐서 다루어야지만 말을 들을 학생인가, 아니면 앉혀놓고 천천히 인격에 호소해야지 들을 학생인가하는 그런 구분이 생겨 납니다. 아니면 저 학생은 절대 직접 상대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다루어야 할 사람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판단이 생겨나게 되고 그런 경우에 학생들은 저를 보면서 불공평하다고 생각 합니다. 잘못 했는데 누구는 데려다가 차까지 먹여주고 밥까지 사주면서 잘 하라고 하고, 누구는 데려다 방문열고 들어오자마자 레포트를 집어 던지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너 같은 놈 신학교 오라고 도장 찍어준 목사님은 누구냐고 교회에 전화 건다고 엄포나 놓고 말이지... 불공평하다고 말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내 편에서는 가장 그 학생들을 잘 아는 지도방법을 선택 한 것입니다. 딱딱한 막대기로 다루어야 할 학생을 부드러운 막대기로 툭툭치면 꿈쩍도 하지않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때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 질것만 같은 떄가 있는가 하면, 어떨때는 막대기로 후려쳐도 그 막대기를 붙들고 대들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같은 선생들도 그런것을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그렇게 인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이 딱딱한 막대기로 우리를 인도하시든, 부드러운 막대기로 인도하시든지간에 확실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것은 환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의미를 꺠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의미를 꺠닫는 다는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성경입니다. 이것에 다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어디든지 펼치면 이럴땐 이렇게 살아야 하고 저럴때는 하나님이 싫어 하신다 하는 내용들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섭리는 살아봐야 압니다. 왜 하나님이 사랑하고 선택하신 요셉이 형들의 관교한 꾀에 팔려서 애굽까지 끌려가서 죽도록 고생하는지는 그때는 누구도 알수가 없었습니다, 다 살고 나 보니까 요셉도 하나님이 만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애굽에 보내셔서 여러 환란을 겪으며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본인도 나중에야 꺠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게 하시는 환란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데 하나님이 허락을 안 하시는데 어떻게 환란이 일어 남니까? 그런 환란이 일어날떄 의미를 생각할 줄 아는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그 환란의 의미를 생각 할 줄 압니다. 더더욱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 환란의 의미를 생각 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이 있습니다. 그 감추어진 뜻의 섭리가 가는 방향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예수님이 구원하신 계획에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하신 계획은 결국 우리를 창조하신 계획과 일치하기 때문에 결국은 환란과 시련이라는 섭리를 통해서 우리를 데려가고 싶으신 곳은 어디냐하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진실된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해 놓으셨을뗴에 두셨던 그 자리, 거기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게 생각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정말 들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기만 하면 하나님은 아까운것이 없는 분 이십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문제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정해 놓으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 나라에서 무엇인가 창고에서 꺼내서, 자기만 누리고 살려 하니까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시면 그 사람은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데, 하나님이 주신 그것들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허락을 안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형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두며 사는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죄를 꺠닫고, 그렇게 그 죄속에서 환란을 만나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서 환란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우리안에 있는 창조의 본래의 목적을 떠난 바르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화) 저도 인생을 살면서 환란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누구한테 호락호락 무릎은 꿇는 사람이 아닌데 오죽했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겠습니까? 환란을 많이 만났는데,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기까지 많은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데, 신기한게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동물은 버틸수 있는데 까지 버틸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환란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애들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겁을주면, 무조건 빌고 보는 애들이 확실히 덜 맞습니다. 아버지가 떄리려해도 일단은 잘못했다고 비는 애들이 제일 빨리, 덜 얻어 맞습니다. 그런데 소 심줄 같은 애들은 맞아도 몇 대 훨씬 더 맞습니다. 옛날에 제가 고등학교 다닐때 그렇게 애들을 잘 떄리는 학교 이었습니다. 선생님도 잘 때리고, 애들끼리도 잘 때리는 학교 이었습니다. 그런데 막 이렇게 비는 애들은 선생님이 한 대를 때리다가 마는데, 엎드려서 꿈쩍 안하는 애들은 시계풀고 안경 벋고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버티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큼 어려움을 만나면, 그것을 하나님앞에서 “내가 왜 이런일을 당할까” 생각하면서 고민을 하면서 해결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란을 주신 계획이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보내실때에 그 계획이 성취 되기만 하면 더 이상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생하는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예화) 제가 아는 목사님 아드님 한분이 있는데 얌전합니다. 이 친구가 군대를 간다드니, UDT를 지원 한다고 했습니다. 수중폭파대입니다. 거기는 정말 지옥훈련 시키는 곳입니다. 죽어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부모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냥 가서 논산 훈련소 훈련받고 총 한자루 매고 청소하고 오는것도 가슴이 아픈데, 수중폭파대 들어가서 지옥훈련을 받고, 훈련 받다가 죽을수도 있는데, 너무 괴로워서 가지마라고 해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목사님! 어떻게 됐습니까?” 물었더니 웃으시면서 “못 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왜 부모가 자식 고생하는것을 보고 있겠습니까? 말로는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는 가야된다 그러지만 가서 얻어 맞았다, 큰 위험을 만났다, 밥을 굶었다, 눈 위에서 텐트치고 잔다더라, 그러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생각 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돌아 옵니다. 그리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만약에 환란을 만났는데 버티고 그 의미를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돌아 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강도를 높이셔서 더 큰 환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답답하셔서 성경에 보면, 왜 그렇게 매를 맞느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성한곳이 없을 정도로 터졌는데, 그런데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냐?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란을 만날 때에 인간의 마음은 결국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많은 정욕, 우리 마음속에 있는 많은 욕심떄문에, 사실 사물이 올바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의 눈이 어두워져서 옳게 못보게 되는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환란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나면, 죄와 우리의 욕심떄문에 보이지 않던 우리의 영혼의 현실이 보입니다. 내가 굉장히 부자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 영혼은 가난하다 라고 하는 사실을 꺠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까 내가 버림 받은자처럼 이 세상에 버려져 있는 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모습을 보여 주셨을때 그때 우리가 비로소 이게 바로 오늘 이뤄진 일이 아니라 오래된 일이라는 사실을 꺠닫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사실을 꺠닫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런 상태를 개선 할 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성경에서 옷이라고 하는것은 성도의 올바른 행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주님 앞에 서는 사람들이 하얀 새마포 옷을 입고 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화) 그런데 언제 한번 꿈을 꿧는데, 나는 뭐 문제가 없다 하고 살았는데, 예배당 앞에 서있는지 어디 서있는지, 내가 양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주 근사한 넥타이까지 매고, 양복 카라까지 최신형으로 뺴입고, 그런데 기분이 이상해 내려다 보니, 양복은 기가막힌 양복인데 신문지로 만든 양복 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새벽에 일어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았으면 주님이 꿈을 통해 내게 보여 주셨는데, 모직 양복을 입고 있었어도 겨울에 추울텐데, 동아일보하고 조선일보로 만든 옷을 입고 이러고 있나”하고 회개한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의 영적인 상황을 환란을 통해서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환란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나면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도저히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하는 문제 같으면 은행에 가서 찿아오고, 친구에게 빌려 오기라도 하겠는데, 이 영혼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된 문제가 아닙니다. 하늘의 자원으로 해결될 문제지 이세상 자원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지상에 있는 자원은 우리가 얻어 올수도 있지만 하늘에 있는 자원은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우리에게 주실 분이 없고, 더욱이 나를 향해 하늘 문이 열리지 아니하면 하늘 자원이 부어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자신은 그런 하늘의 자원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환란을 당한 위치에 있고, 자신은 그것을 스스로 공급 할 때가 없을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부르짓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르짓는다 하는 것은 단순한 통성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고통과 꺽일수 없는 열심 가운데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탄원을 하나님 앞에 꺽이지 않는 열렬함을 가지고 토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우리안에 계시고 우리 가까이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시기 떄문에 온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지만 응답 하실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환란을 주시는 분, 혹은 넓은 의미에서 환란을 허락하시는 분도 하나님 이시고, 그리고 어떻게 환란을 당해야 했는지도 하나님이 아시고, 그런 환란을 통해서 우리안에 있는 것을 무엇을 제거하려 하는지 하는 계획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처한 상황도 알고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도 알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지도 다 아시는데, 왜 하나님이 환란을 허락은 하시고 우리가 부르짖을떄까지 기다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떄문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짖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잘못된 것들을 고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환란은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도 그치게 하실수도 있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없겠습니까? 하늘을 보십시오.
(예화) 한번은 내가 어떤 사람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회에 가기 위해 비가 막 쏟아지는데, 내가 목사님 “저 비가 쏟아지는데, 저기 언덕에 저기는 비가 올꺼 같습니까? 안 올꺼 같습니까? 나는 안올꺼 같은데” 목사님은 올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차를 몰고 그길로 쭉 가보니까 기가 막히게, 언덕에서 자로 긋듯이 비가 딱 끝났습니다. 여기는 물에 젖고, 저쪽은 바짝마른 땅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쏟아져도 자고나면 맑은 하늘이 빛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한번에 우리의 인생의 폭풍우를 걷을수도 있고, 환란을 가져 가실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바꿔 놓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환란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천식이나 기관지염으로 고생을 하면서 기도에 막 가래같은 것들이 달라 붙었을때, 애처로울 정도로 기침을 하면 그것을 통해서 그것이 빠져 나오고 기도가 청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하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동안에 죄가 가져다 주는 고통, 죄로 인해 형성된 우리의 마음의 틀들이 변화되면서, 우리가 정말 새로워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고치시는 기회로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것을 통해 우리가 정말 새로워지고 변화되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이 그런 환란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셔야 했던 우리안에 있는 내면의 모든 이유들이 정리되고, 환란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 그러면 “환란 아래 나를 부르라 내가 네게 응답 하겠고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환란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수 있는 기회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환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매달리기만 하면,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응답을 만나고 그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라고 하는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도 우리 기도할 때 여러분들이 안밖으로 환란을 당하고 있다면 어제 새벽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염려로 그것을 극복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런 환란을 주실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것을 꺠닫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여러분들을 그 환란의 계곡속에서 만나주시고, 오히려 오늘 만나고 있는 환란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는 기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응답을 받는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3. 환란 가운데 취할 세가지 태도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77:2)
우리들이 아무리 급해도 큰 건물에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문을 찾게 됩니다. 그렇죠. 그래서 그 문을 찾고 그 문으로 들어가야지만 건물에 접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환란을 당하게되면 많은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환란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우리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보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정말 환란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날 때, 그때 자신의 믿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 한번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이, 정말 이 신앙의 경험을 통해 자기화되고, 그 속에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사실은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정말 도움을 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을 보면 이 시인도 우리와 꼭같은 환란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환란을 만났을때에, 그가 하나님을 앞에 어떻게 그 환란을 통과하게 되었고, 그 환란속에서 어떻게 승리하게 되었는가하는 비결을 세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첫번째가 결단입니다.
환란말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환란이라고 하는 커다란 상황을 만나서, 그는 인생의 요동치는 큰 변화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주어지는 외적인 환경이 변화를 통해오는 환란이든지, 또 그것이 내적인 깊은 정신적인 고통을 통해오는 환란이든지, 그것이 어떤것이든지 간에, 그 사람에게는 말할수 없이 커다란 어려움 이였을 것이고, 그 어려움 속에서 그는 여러길을 택하는 대신에, 오직 한가지를 결단했으니, 그것은 주를 찾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를 찾는다는 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주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찾는다고 하는것은 그냥 뭔가를 잃어 버렸는데 어디 있을까? 궁금하다. 왜 그러지? 그리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참말로 그것이 없는 것에 대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것을 정말로 찾기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하는 그런 종류의 참는것을 가르키는 것 입니다. 제가 잠깐 뭐 안식년이라기 보다도 그저 7년, 7년이 넘어 10년이 거의 됐지만 어쨌든 잠깐 쉬었습니다. 그냥 이제 유럽을 갔는데 로마에서 설교을 하고 올라가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긴 머리로 버스로 여행하는 가운데 저에게 그렇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머리에 이렇게 연구를 하고 책을 읽고 이러다가 이제 그 말씀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이 뭔가 이렇게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경우도 있지 않겠어요? 막 떠올라요. 그게 뭔지는 제가 나중에 개봉하겠지만, 하여튼 떠올라요. 그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라요. 그래서 흔들거리는 버스안에서 제가 가지고 갔던 새 성경이 얇은게 있었는데 뭐 메모할데도 없어요. 그래서 뒤집어보니깐 성경뒤에 하얀 종이가 두바닥이 나와요 그래서 거기다 꺠알같이 쓰고, 또 기도하다가 가다, 또 쓰고, 또 쓰다가 또 기도하고, 또 그걸 며칠을 흘렀습니다. 그래서 그 두바닥이 그냥 새까맣게 빽빽하게 쓰여졌어요. 그래서 이정도면 한 6개월 정도는 설교를 할수있겠다. 6개월정도는 족히 설교할수있겠다. 그리고 가슴 뿌듯해서 야 이거 정말 내가 청교도들의 책을 읽어도 이렇게 이 주제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못 만드는데 진짜 하나님께서 나에게 열어 주셨구나, 그리고 한국에 도착했는데, 아 글쎄 밤에 와가지고 그걸 찾았더니 그 성경이 없어진거에요.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래서 오스트리아로 전화를 하고, 호텔에다 알아보고, 그 몇번을 알아보았는데, 그냥 다 필요없고, 그냥 밤에 비행기를 타고 가고 싶은 거에요. 솔직히 말해서 홍콩 정도만 되도 갔어요. 가서 다시 찻았을 거에요. 근데 어떻게 갈수가 있어야지요. 그래 가지고 그렇게 가슴 아파했는데 결국은 못 찾았어요.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만약에 그 호텔에 있다는 연락만 오고, 당신이 직접 오기 전에는 도저히 줄수 없다 하면은, 저 한주일 주일 설교를 쉬고서라도, 가서 그것만 딱 찾아올 용의가 있습니다. 구경 안하고 그냥 가서 그것만 딱 찾아올거에요. 어젯밤에도 그것이 생각이 많이 나는 거에요.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이 저를 위로를 해주는 거에요. 그걸 잃어 버린건 하나님의 섭리다 왜? 더 좋은 말씀을 주시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잃어버리게 하신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라. 그것은 당사자가 아니니깐 그렇게 이야기 하는거죠. 그거 보면 참 못난 사람이다. 그래서 할수 없이 몇일 지나고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서 다시 그것을 회상하면서 적어놨습니다. 그게 바로 참음이라는 것입니다. 벌써 두달이 다 되가쟎아요. 그런데 지금도 생각이 간절히 나요. 정말 간절히 나요. 정말 이백만원을 줘야지만 찾을수 있다고 하면, 저는 진짜 한달 밀가루 먹는 한이 있더라도, 돈 주고 그걸 사오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게 바로 참는다 라고 하는 결단이라 이거죠. 하나님 앞에서 환란을 당했을때, 제일 먼저 시인이 내린 결단은 나의 환란은 내가 그냥 풀고 해결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야할 문제다. 그리고 결단을 하고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참 올바른 방법을 택한 것이죠. 그렇게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신이 인생의 환란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빨리 그 참다운 해결의 방향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있는 그 옆에다, 그 문제를 풀수있는 열쇠도 함께 주시는 것 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을 찾게 하기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환란속에서 하나님을 찾는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지하고 인간을 찾으니까,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인이 한것은 인내입니다. 밤에 두손을 들고 그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도다. 이 손을 드는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기도하는 기도의 모습중에 하나 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을 찾기로 결단을 한 다음에 쉽게 꺽이지 않는 이 문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찾기로 결단을 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오늘밤에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의 문제에서 나를 건져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죠. 그것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욕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환란을 만나게되기까지 그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변했겠습니까? 예전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넘쳤던 마음이, 그렇게 환란을 만나지 않으면 안될정도로 변화된 삶을 경험하면서, 마음의 틀도 무너지고 마음속에 있는 은혜도 많이 사라지고, 그리고 순결했던 마음에는 때가 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환란을 통해서 깨끗이 씻어 내고, 주님앞에 순결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삶에만 관심이 있지만, 당장의 고통에만 관심이 있지만, 당장의 성공에만 마음을 쓰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를 그 모든 불의와 환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더러움으로부터 우리를 씻어서, 다시 순결한 주의 자녀로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금방 응답 해주실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장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결단을 하고, 손을 들고 밤에도 그 손을 거두지 아니 하였다고 하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그 환란에서 구출을 받고 도움을 입어야 되겠다고 하는 갈망 때문에, 잠도 이루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즉각적으로 구원의 은혜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뒤편에 가보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불안하여 근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총이 다했는가, 이제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돌아보지 않으신가, 그런 많은 회유와 의심의 유혹속에서도, 이 시인은 한번 그 환란속에서 하나님을 찾기로 한 결단을 꺽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한 그 인내를 버리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자신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진실한 사랑과 변함이 없는 충성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내를 통해서 보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도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련과 환란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인내를 이루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인내 속에서 이 시인이 한 것은, 하나님 앞에 두손을 들고 거두지 않는 지속적인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환란 가운데에 있을때에 결단을 하는 일은 쉽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어느 한 순간에 단발마적으로 외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다시 용서하시기까지, 주께서 나를 향해서 얼굴 빛을 다시 비추시기까지, 주께서 나를 환란과 이 시련에서 다시 건져 주시기까지, 주께서 나를 다시 순결한 주님의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시기까지, 내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것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환란가운데에 쳐했을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그 환란에서 환란을 이길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환란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우 약해지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우리가 주님 손에 붙들려 있을때만 비로소 주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 이런것들을 깊이 깨달으면서 꺠달을수록, 주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오래 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 환란에 이겼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수 없는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시편 103편에 기록된 바와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체질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까지 견딜수 있고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고통하는지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오래 참으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때, 반드시 다시 찾아오셔서, 그들의 그 환란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을 보면은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것은 집중입니다. 환란을 당했을때에, 누구나 그 환란 속에서 고통하고 고통했을때에,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는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환란속에서 회복하고 싶은 주님과의 관계, 환란속에서 회복하고 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말 집중하고 끝까지 매달리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하면 영혼이 쉽게 싫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에 자신이 잘못 되었다는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를 건져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금이 어느 한순간에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다시 깨어났고, 그래서 그 영금이 헐떡거리면서 예전에 받았던 주님의 사랑을 다시 받고 싶어하고, 예전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열렬함과 간절함이 이 사람의 마음속에 생겨나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 지나고 나면, 영혼의 싫증이 생기고 이제까지도 환란속에서 그냥 살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봐야 한두번 기도해도 주님의 응답도 없고, 그러면서 영혼의 구원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실망하고 낙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옛생활로 돌아가게 되니, 그 영혼의 비참함 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영혼의 싫증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반 맞도록 손을들고 거두지 아니하고 하는, 부질없는 기도의 모습으로 만은 결코 밀려오는 이 영혼의 피곤함과 영혼의 싫증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그 영혼의 싫증을 이기는 중요한 비결이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하나님 앞에 수시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는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 놓기 위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을때, 쏟아지는 그 마음속에 싫증들이 묻어서 같이 쏟아져 내리고나면은 하나님을 향해 처음에 품었던 열렬함이 계속해서 간직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모하는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내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 환란 가운데에서 왜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자녀가 매맞고 시련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피 끓는 그 아픔을 경험하는 그것이 정말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일수가 있겠습니까? 이세상에 있는 어느 부모가 자기의 자녀의 우는것을 보고 달려가지 않겠으며, 자기의 자녀가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고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건져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이세상에 인간의 아버지와는 비교도 될수 없을 정도로 자비하시고 또 우리를 그렇게 당신의 자녀로 온전히 삼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 이십니다. 과거의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것을 보면, 앞으로 우리를 향해 행하실 일들을 알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가 환란속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이 태도가 정말 올바른 태도인가 하는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시인은 위로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환란 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그 면전에서 추방된체 고통하고 아파하는 이 시인의 무엇을 위로해 줄수 있겠습니까? 좋은 음식이나 갚진 의복이 그를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자신의 기뻐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의 이륙 영혼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에게 이 시인이 바라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나 큰 물질의 축복이나 그런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마음에 소박한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라진 그 얼굴의 빛을 자기에게 다시 비춰 주시는 것 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무슨 힘으로 이를 살았겠습니까? 골로세서 1장에 보면은 우리의 영광의 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 영광의 힘으로 승리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 빛을 비추셨을 때에, 그 하나님을 붙들고 환란도 이기고 위복도 이기고, 시련도 극복하고, 그리고 우리의 본성적인 태만함과 게으름도 이기고 극복하면서, 오늘날까지 희망적인 순례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집중된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참된 위로라고 믿고,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환란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이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는 정말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환란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은혜를 구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 같이 기도하다가 편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4. 사유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5)
이 시도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는 알수 없지만 이 시인이 매우 곤궁해진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을때,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확신이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는 사실 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 이신지를 보여주신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해줌에 있어서, 당신이 ‘선하시다’라고 하시는 사실을 가장 분부하게 많이 계시해 주셨고, 다윗도 또한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라고 하시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 하나님께서 무조건 인간에게 인간이 좋은데로 모든것을 해 주신다라고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그런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도 사실이 아닙니다.
(예화) 예를 들면 의사가 있고 환자가 있는데, 환자가 의사의 치료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행복 할 수 만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는 아마 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가 항상 자기에게 좋은것만 해주고, 좋은것만 베풀어 주는 그런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빗나간 삶을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올바로 가르치려하는 부모의 교육방침에 어긋나게 되면, 부모는 선한길로 인도하는데도 아이들에게는 고통이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은 무조건 우리 좋은데로, 우리의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부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버릇없는 자녀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이 만약에 집을 짓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무엇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목적없이 만들어 놓은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당을 짓고나서 사람들이 와서 목수님 이건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면 사람들은 오면서 저건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저건 이렇게 만들면 더 좋을텐데... 그렇게 생각을 해도 사실 자기가 생각한 것은, 우리도 다 한번씩 생각한 것이고, 그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설프게 와서 누가 뭐라고 하면, 당신이 생각하는것 가운데 아마 우리가 생각 안 해 본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을 하고 그리고 도달한 결론입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도 무엇을 만들어 놓으면, 다 그것을 각각 쓰고자하는, 어디에다 써야 되겠다 라고하는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 우리의 원하는 바이며 뜻하는 바입니다.
(예화) 여러분이 밖에 나가면 천막이 쳐집니다. 자동으로 천막이 쳐집니다. 저는 그것을 설치할 때, 통로가 길기 때문에 바람이 많이 불테니, 그곳에 감지장치를 달아서 바람이 많이 펄럭거리면 밑에서 치고 올라가는 공기의 바람이 똑바로 부는 바람의 세배가 넘습니다. 그래서 밑에서 치고 올라가는 바람이 통로에서 불게 되면, 알루미늄 휠이 휘어져 망가지니까 거기에 센서를 달아서 바람이 어느정도 치면 접히도록 하는 그런 장치가 있습니다. 처음 들으시겠지만 그런 장치가 있습니다. 가히 비싸지 않고 프랑스제인데, 그것을 달면 바람이 일정량 이상으로 펄럭거려서, 이것이 휠것같은 위험이 생기면 자기가 감지를 해서 감깁니다. 그런데 하여튼 무슨 이유인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제가 하자는 대로 안 했습니다. 이번 여름에 바람이 엄청나게 몰아칠때, 펴놓고 어디 가기만 하면,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저것이 휘면은 저것을 다 새로 고쳐야 하는데, 그런것입니다. 이것이 생각하는대로, 집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아래에서 따라서 해줘서 그렇게 하면 염려가 되지 않는데, 결국은 다시 설치를 좀 하는 방향으로 다시한번 시공을 했으면 좋겠다 해서, 제가 설치 인부를 불러서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에 다시 설치가 되리라 봅니다. 그러면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길게 쳐놓고 갔는데 아침에 바람이 안 불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길게 쳐 놓고 갔는데, 어딜 외출했는데 점심때 바람이 막 불어서, 누가 그것을 챙기지 않으면 뿌러지는 소리 나기 전에는 안 됩니다, 그래서 2층 도서관에 있는것이 이렇게 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바로 잡았는데 그런 것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거기에 완전히 미치지 못한것은 ‘선한것’이 아닙니다. ‘선한것’이 선한 상태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선하신’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뭔가 자꾸 나를 다른 방향으로 나만 미워하고, 나는 안 가려고 하는데 나를 꼭 그리로 데려 갈려고 하고, 그렇게 느껴 집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렇게 선하고 행복하게 하시는 분으로 느껴지지 않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어린아이 곤하게 자는 녀석을 일어나라고 일으켜 세워서, 세수하고 빨리 공부하라고 할때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엄마가 선한 엄마라고 느껴질수가 있습니다. 공부는 했는데 성적은 안좋고, 용돈은 낭비하고, 책가방에 이상한 사진이나 가지고 다니고 해서, 아빠가 방망이로 엉덩이가 피가 나도록 때리는데, 어떻게 그 아이가 우리 아빠가 내 행복을 위해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선하시다’라고 하는것은 자기의 죄 가운데 있어도, 환란 가운데 있어도, 자신의 의지, 자신의 인생의 계획,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완고한 고집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결국은 좋은 날이 오냐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하자는 대로 안하면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이야기가 나와서 이야긴데 센서를 꼭 달아야 한다고 우겼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것이 안 달렸습니다. 그래서 하도 신경 쓸것이 많고 머리가 고갈되어서 결국은 내가 뒤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바람이 막 불때 그랬습니다. 그거 내가 물러나지 말고 끝까지 내 주장을 관철하는 것인데... 저렇게 바람이 불어서 펄럭대니 불안해서 어떻게 보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것은 자기 고집을 가지고 완고한대로 자기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자꾸 ‘선하심’으로 느껴지는것이 아니라, 가시나무와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맨날 나만 미워해. 내 기도도 안들어 주시고 말이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맨날 나만 잘못했다고 그래”하고 심통스런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 마음대로 인생을 살고나서 행복한 적이 있었다면 한번 말해 보십시요?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처음에는 대로와 같고, 처음에는 친구도 많고, 처음에는 잘 가는것 같고, 처음에는 순풍에 돛 단것 같지만, 그러나 자기 뜻대로 살고나서 시간이 흘러가 보면은, 즐겁고 그것은 행복했던것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쓰디쓰고, 고통스러운 열매로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돌아서면 그 길은 어떨때는 가시에 찌르는 길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힘들게 느껴지고, 그 길은 친구도 없는 길처럼 느껴지고, 그길은 너무 외로운 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잠시 지나고 나면은, 가시밭길이 지나고 나면은, 환한 대로가 열리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놀라운 축복, 주어를 따라 갈수 있을때 맛볼수 없고, 유혹에 굴복했을때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간명한 축복이, 정말 자주 함께 하는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커다란 환란 가운데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완고함을 꺽어 내니깐 하나님의 ‘선하심’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고 자기의 완고한 고집을 꺽고나면,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이, 그 하나님의 ‘선하심’이 보이기 시작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가고자 하시는 길로 내가 순종하며 가면,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좋은길로 이끄실 것이고, 그 좋은길로 이끄신 그곳에서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살것이고, 그렇게 살게 되면 내가 창조의 목적에 가장 기여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는 이세상에 태어나서 최고의 행복을 맛보는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는것이, 환란 가운데서 깨달은 시인의 믿음 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할때마다, 언제나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화) 옛날에 시골에 가면, 제가 어렸을때 살던 동네에 가보면 징검다리가 있었습니다. 개울은 깊지 않은데 개울이 꽤 넓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놓을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커다란 바위를 가져다가 개울을 가로질러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비가 많이 오면 당연이 두절되고 못 건너는 것이고, 비가 조금 덜 올때에는 돌다리를 건너서 아이들이 가서 형들하고 연도 날리고 그렇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제일 애매한 때가 언제인가 하면, 겨울에 눈이 살짝 왔을때, 징검다리를 30개정도 건넜어야 하는데, 그때 하나하나 건널때, 다른 생각은 없고, 이 징검다리를 건너면, 우리가 가려고 하는 저 건너편 개울건너 동네의 논에, 얼음 언 논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징검다리를 건넘니다. 그때 아이들은 멀리 볼까요? 가깝게 볼까요? 멀리 보면은 넘어집니다. 그러니까 돌맹이 하나하나 내가 여기서 발을 떼어 놓으면 어디를 밟을까를 생각 하면서 하나하나 건너다 보면은, 그 건너편에 우리가 가려고 하는 넓은 논에 물이 있어서 얼음이 있어서 스케이트를 잘 타고, 썰매를 지칠수 있는 그곳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어둡고, 우리의 길이 어디인지 안보이고 해도,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완고한 고집, 자기의 욕망과 죄의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이 불신앙적인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찬송)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렇게 하고 보면, 하나님의 목적이 자신에게 행복하게 느껴지면, 자신을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따라 가는것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수 없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기쁠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욕심 때문에 잠시 눈이 가리워져서, 우리의 앞길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살려고 하면, 지금은 아파 보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슴 시리도록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향해서 인도하시는 주님의 그 인도하심이, 결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시인이 발견한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사유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이라고 표현 했냐하면 ‘사유하시기를 즐기시며’, 이 사유한다 라고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사유란 말이 쓰이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면죄해주고,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무엇인가 갚을 것이 있는데 그것을 탕감해 주는것, 그런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마치 부채(負債)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가 있으면, 반드시 그 죄는 같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게 되면 우리자신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분명하게 꺠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죄가 있다는 사실과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 부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안에 양심도 증거하고, 우리안에 율법도 증거하고, 또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에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너의 죄는 부채와 같다. 그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그래서 빗을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마음 입니까? 정말 할수만 있으면 빗을 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뇌리껴, 교회를 짓느라 나도 빗을 졌지만 할수만 있으면 빚지지 마십시요.
(예화) 옛날에 우리 부모님들이 사업하다 어려움을 당해서 빗을 졌는데, 문소리가 나면 깜짝깜짝 식구들이 놀라는 겁니다. 빗장이가 와서 돈 내놓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어린 마음에 내가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다른것은 몰라도 절대 빗지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데 빗을 진 사람은 항상 채권자에게 굽신거려야하고, 빗을 진 사람은 항상 저자세입니다. 빗 준 사람이 나타나면 고양이 앞에 쥐 같이, 그렇게 꼼짝도 못하고, 업드려 있어야 하는, 그런 신세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빗을 진 사람의 슬픈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 죄는 빗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세상에서 진 빗은 지금은 돈이 없어도, 돈을 많이 벌어서 갚으면 되고, 돈이 없어도 열심히 일해서 조금씩 모아서 갚아 나가면, 언젠가는 자유함이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의 빗은, 빗은 냈지만 갚을수가 없습니다.
(예화) 우리 젊은이들이 카드 빗 떄문에 고생한다고 합니다. 카드는 19살이 넘었으니까 은행에서 만들어 주고, 만들어 주니까 이것도 사보고 저것도 사보고, 그저 막 긁고 썻는데, 그다음에 갚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자기에게 그것을 해줍니까? 그래서 신문에 보면 연체대납하여 줍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납해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새카맣게 연체대납해 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면은 그렇게 대납해 주는 회사가, 그렇게 많이 늘어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빗을 졌는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럴 경우 어떻합니까? 부모가 갚아 주든지 누가 갚아 주든지간에 해결해 줘야지만 그사람이 자유해 질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자신도 죄를 짓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경우도 있고, 부채와 같은 죄를 지었을 때마다, 자신의 육체는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 부채를지고 빗을 졌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빗진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사유하시는데 시인이 보기에는 그렇게 용서해 주시고 빗을 갚아 주시는 것이, 인색한 것이 아니라 정말 즐거워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진 죄의 빗을 갚아주시는, 즉 사유해 주시는 것을 이 시인이 많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쁨으로 당신의 자녀들의 죄를 사유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우리가 그렇게 죄를 짓고, 빗진자처럼 고통할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유해주시는 이유는, 다시 또 죄를 짓고 죄의 종이 되어 불순종하는 삶을 살으라고 죄를 사유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용서를 받으면서 죄의 즐거움에 비해서 그 결과가 얼마나 쓰고 고통스러운지를 꺠닫고, 그 속에서 마치 불에 치듯이 괴로워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면서, 그가 눈물로 용서를 빌때에 사죄의 은혜를 허락해 주심으로써, 죄가 얼마나 큰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고, 좋으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사는것이 잠시는 행복해 보이지만 나중에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쫒아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불순종 가운데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사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어렸을때 밖에가서 비오는날 좋다고 친구들하고 뛰어 놀다가, 온통 흙탕물을 해서 들어오면 엄마한테 실컷 야단을 맞습니다. 그때는 빨래하기가 좀 힘들었습니까? 실컷 야단맞고 화장실의 뜨거운 물에 씻기고, 따뜻한 내복을 입혀 줍니다. 내복 바람에 야단은 좀 맞았지만, 아랫목에 앉아서 이불 속에 들어가 않아 있으면, 가을 같을때에 그렇게 기분이 좋을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모가 깨끗이 해 줬는데, 그 내복입고 또 뛰어나가서 더럽게 하고 오면 엄청 맞습니다.
그래서 용서,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책임이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아! 이제 용서 받았구나, 다시한번 이옷을 입고나가서 다시한번 또 죄 져봐” 그러면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빨리 안 건져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면, 이제 우리는 그렇게 말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보지 않겠네”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자하심이 후하신다는 사실을 시인이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유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빗을 면제해 준다라고 한다면, 인자하심은 그것을 기초로해서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애정을 보여주시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예화) 그런데 사실 우리 어렸을때 보면 그렇게 비오는날, 개울에 가서, 온통 개꼴을 해가지고 오면, 항상 우리 할머니가 개꼴을 하고 온다고 말씀하셨는데, 개도 성품이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도 개를 여럿 키웠는데 어떤 개는 비만 오면 밖으로 나갑니다. 털이 긴 스피치가 진짜 개판을 치고 다니다가 온통 흙탕물 투성이를 해가지고 와서 부엌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 할머니가 작대기로 막 두들겨 팻습니다. 밖으로 나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르는 또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그 개는 정말 비가오면 미친듯이 뛰어 다닙니다. 그러나 마른땅만 밟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개는 정말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하고 개꼴을 하고 들어 온것을 실컨 야단 맞고, 그리고 나서 깨끗이 씻겨서 내 놉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 합니다. 왜냐하면 계속 밖에서 엄마가 투덜거립니다. “바보같은 녀석, 비오는날 나가가지고 개꼴을 하고, 도대체 이 빨래를 누구보고 하라는 거야! 정말 지겨워 죽겠네, 애들은 한둘도 아니고, 다섯씩이나 되고 말이지”하고 좀 있다 동생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석은 학교갔다 왜 아직 안 오는거야! 어디서 뭘하고 있는거야!” 이렇게 다 엄마가 혼자하는 이야기 인데, 저러다가 엄마다 문을 열고 “도대체 넌 왜 그러니” 그럴까봐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경험한 것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사유를 경험한 것입니다. 내게 그럴때, 어쩔줄 모르고 그러고 있을때 엄마가 들어와서 “야! 아까는 미안하다. 그렇지만 넌 어떻게 그렇게 개꼴을 하고 다니냐?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하고 꼭 안아주고, 만약에 장독대에 감춰놨던 엿이라도 이렇게 갔다주면 얼마나 기가살고 기분이 좋겠습니까? 여기서 인자하심을 여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면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오셔서 “내가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네가 어떻게 비가내리는 흙탕물에서 더러워 졌다해서, 내가 너를 버릴수 있겠는냐? 잠시 내가 너의 죄를 고치고, 선한길로 돌아오게 하기위해서 야단을 쳤지만, 그러나 너는 여전히 나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면서 하나님이 끌어안고 많은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앞에 돌아왔을때, 제일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 첫 번째로 느끼는것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무거운 죄의 짐에서 벗겨 주시는 것이 첫 번째 느낌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복되어 갈수록,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가 하는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꼭 끌어안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왜 그 긴 세월동안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못하고, 의심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하나님께 대들고, 그렇게 강팍하게 주님을 멀리하는 삶을 살았을까?” 그러면서 “옛날 내가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그리고 “내가 이사랑, 주님께 받은 이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제는 이 선한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 나도 주님을 사랑해야지”하고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지, 내가 아프더라도 이제는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더 이상 아프게 해드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는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이 이세상에 살아있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영광을 많이 받으시겠습니까?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환란은 기회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