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없음에 관하여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미안합니다(잠15:1上) 2007.4.4 교직원예배 1
2. 다툼을 일삼는 사람들(잠20:3) 2007.4.10 교직원예배 5
3. 역린을 건드리지 말아라(잠17:9) 2007.4.17 교직원예배 15
4. 용서는 메아리다(잠17:9) 2007.4.24 교직원예배 19
5. 다시 보게 된 사람(잠17:17) 2007.5.1 교직원예배 23
6. 가입니까, 부입니까(막2:4) 2007.5.22 교직원예배 28
7. 사랑받는 비결(잠3:1-4) 2007.5.29 교직원예배 33
8. 책임을 다함, 지도자의 능력(창40:14-15) 2007.6.5 교직원예배 39
9. 섬기는 자의 열망(잠12:15) 2007.6.13 교직원예배 43
1.미안합니다
잠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 비가 온 뒤에는 땅이 어떻게 되죠?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 그건은 땅이 평지일때 이야기입니다 땅이 비탈이 지면 어떻게 되죠? 비가 오면 골이 패인다 그래서 나무가 안 심겨진 데 비가 막 쏟아지면은 골 막 패이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요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났을때 우리의 마음이나 삶의 태도가 평지와 같은면 땅이 굳어져 근데 이게 마음과 태도가 휘어져 있어요 그러면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골이 파이게 되는거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만찬가지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똑같거든요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있는 일이고 그런 갈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멀리 지냈을 사람들이 더 가까워지게 되는거죠 제가 교수 생활을 하고 있을때 여교수님이 한분 있었습니다 연세드신 분인데 아주 성격이 불같으신 분이셨어요 근데 왜 그랬는지 라디에이타를 하나를 놓고 이렇게 구멍을 뚫어서 이쪽도 덮히고 저쪽도 덮혀지게 해 놔서 여기서 뭐라고 하면은 말소리가 다 들리는 거죠 이 교수님이 하루종일 라디오를 틀어 놓으세요 어떤 때는 켜 놓고 그냥 강의를 들어가 버려요 그럼 하루종일 거기서 나는 그지겨운 뽕짝 소리를 들어야 돼요 그래서 하루는 그것도 제가 잘못했지만, “얘야 옆에 교수님한테 조금만 소리좀 줄여달라고 말씀드릴래” 가서 우리 조교는 그렇게 잘못 한게 없어요 “교수님 죄송한데요 라디오 조금만 줄여주실래요” 그랬더니 이제 옆에서 소리가 들리는거에요 “야 너는 나보고 라디오 줄이라 그러는데 너는 왜 교수실에 니 친구들 데리고 와서 웃고 떠느냐?” 그러면서 역정을 내시는거에요 그리고 끝났어요 그 다음에 전화 소리가 들려요 “신학과장이요” 나 아무게 교순데 나 옆에 있는 신학과 교수하고 불편해서 못 살겠소 좀 좋은 이웃이 되어 볼려고 그러는데 아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한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려요 저도 성격이 유순한 사람이 아닌데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자기가 이때까지 그렇게 라디오 틀어놓고 들어가는거 다 참고 그랬는데 그 한 번 줄여달라 그랬다고 그렇게 다 들리게 소리를 지르고 조교를 면박을 주고 그럴수 있어 그래서 문을 발길로 차고 들어가서 한 대거리 했겠습니까? 그러고 가만히 있다가 그 날은 지나가고 그 다음에 찾아가서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지혜롭게 못해서 우리 조교가 제 말을 전할 때 교수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나이도 제가 어린데 저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공손하게 사과를 했어요 그랬더니 아우 아니라고 그러면서 자기 얘기를 해요 사실은 교수님 제가 하루종일 유행가를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수님이 정색을 하면서 난 그런줄 몰랐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 우리들이 얼마나 좋은 관계가 되었는지 그 외국갔다오시면 차 같은거 사가지고 와서 내 방에 갔다주시고 난 먹을 것도 갔다드리고 하면서 그렇게 2년 동안을 재밌게 지내다가 왔습니다 내가 책 하나라도 건네주면 꼭 잃고 소감 얘기해 주고 극 교수님들에게 저를 일반학과 교수님이었는데 좋게 소개 해 주어서 그렇게 좋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건 뭐죠 비가 온뒤에 땅이 굳어진거죠
그러나 이런 태도를 못가지면 이런 일이 있고나면 인간관계는 파괴되는 거에요 흙더미가 내려 앉으면서 골이 패여버리는 거죠 그게 뭐냐하면은 사과하는거에요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건은 모든 사람의 분노를 쉬게하는 바로 그거에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사과드립니다 제 불찰입니다 이렇게 뭔가 일이 생겼을때 분노한 사람에게 사과하는 이것은 이것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에게 책임이 많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나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우리가 관계가 어려움이 생겼지만 저는 여전히 당신을 존중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관계가 매우 소중한 겁니다 이런 표시란 말이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근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사람이 막 분노하고 있는데 1% 자기가 잘못이 없고 전적으로 이 사람이 오해하게 된는 경우도 있을수 있습니다 근데 그런 경우는 희귀합니다 대부분 나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화를 내게 됐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잘못한건 5밖에 안되는데 이 사람이 화가 50이 났을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는 화가 나는거죠 내가 그정도까지 잘못했나 근데 화난 사람한테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뭐 그런정도까지 잘못했습니까? 근데 거기서부터 불난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관계는 깨뜨려지게 된는거죠 그리고 씻을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는거죠 그렇지만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한겁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 불찰이었습니다 제가 사과드립니다 제가 정중히 사과를 드립니다 이러면 이게 가라앉아요 그 다음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실은 저 사실은 조금밖에 잘못을 안했는데 내가 너무 과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거죠 그겁니다
근데 이 사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하면은 첫째는 자기 반성 능력의 결핍이야 원래 반성능력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뭐냐하면 자라면서 부모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과 이런 훈련을 받으면서 자라면 그 교육자체가 끊임없는 반성을 요구하게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 교육을 못받아 항상 니가 옳다고 가르치는 거죠 하나를 놓고 으 하면서 기르는거야 반성할 필요가 없는거야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반성능력이 완전히 퇴하가 돼 그게 뭐냐 하면은 똘아이 같은 사람이 되는거에요 도저히 말이 안통할 때 똘아이구나 똘아이 같이 돼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한 번만 상대해 주고 그 다음부터는 상대를 안해요 친구가 없어요 아무도 그 사람을 받아주지 않아요 그게 뭐냐하면 반성 능력이야 인간은 원래 잘못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잘못을 안한다고 하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근데 그때에 반성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주 빨리 그런것들을 깨달아 그래서 이런 자기 반성능력이 없는 사람은 신앙새활하는데 굉장히 고달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설교자가 저렇게 방방뛰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거에요 그러면서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신앙 생활을 하는거에요 자기 반성 능력이 회복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옛 성인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일일삼선이면 그 마음이 병경지수와 같다 하루에 세 번씩 반성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자기 반성능력이 결핍되어 있을때 사과를 못하는거죠
그 다음에 뭐냐하면은 열등감이 사과를 못하게 하는거죠 자기가 저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저 사람보다 자신있는 사람이면 아 이건은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근데 열등감에 치여서 뭐도 못하고 뭐도 못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에 제가 당신앞에 잘못했습니다 열등감이죠 그래서 대게 사과를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은 어려서부터 열등감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 서로 잘못을 일깨워 주어도 치열하게 변명과논쟁을 벌이는 사람, 아주 변명을 벌이는 사람, 우리 교회 교역자 가운데서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한 번 심하게 야단을 쳤어요 뭐를 지적을 하면 항상 그건 목사님이 뭘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인데요 내가 또 이야기를 하면은 그건 목사님이 한쪽 면만 보신건데요 뭘 얘기를 하면은 그건 목사님이 다른 사람 얘기 듣고 하시는 말씀이구요 그 다음에 또 얘기를 하면 목사님 그건 다른쪽을 보면 목사님 생각하고 전혀 틀립니다 한 자리에서 계속 담임 목사를 밟는 거에요 계속 참다가 내갈 화를 벌컥 냈어요 내가 너보다 인생을 살아도 두 배나 더 살았는데 그 따위 태도가 어디있냐고...반성은 인간만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에요 열등감이 이 반성을 가로막아요 열등감이 아주 심한 지체였어요 그러니까 그걸 못하는거에요 흔히 우리는 사과를 하면 이런 염려를 하게되요 이렇게 사과를 자꾸하면 벨도 없는 인간, 자존감도 없는 인간이라고 사람들이 그러면 어떻게 하나 절대 안 그럽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하면 내가 사과하는데 저 사람이 안받아 주면 어떻게 하나 사과는 받아 줄거라는 기대 때문에 하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에 비춰서 하는거에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은 아주 자기 자신의 잘못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인정하기를 좋아한단 말이죠 대부분 사과를 못하는 사람이 그 대신 잘하는게 있어요 변명! 사과를 안하는 사람들이 잘하는 공통적인게 있어요 끊임없는 변명과 핑계에요 근데 이런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 사람들이 없어요 항상 외롭게 살아요 그 정체를 모르는 사람만 정체가 드러날 때 까지 가까이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절대로 인간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어요 2003년도간에 미쓰비씨 자동차에서 희귀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뭐냐하면은 회사가 그 핵심간부 7명에게 십사억엔짜리 소송을 걸었어요 이유가 뭐냐하면은 자동차를 출시했는데 하자가 있는거였어요 그걸 계속 쉬쉬하며 숨겼어요 그랬더니 그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신문에 대서특필이 돼가지고 2004년 매출이 전년도에 비해서 40%가 떨어진거에요 회사가 주저앉는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회사가 소송을 걸어버린 거에요 이렇게 끊임없이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은면은 당장을 모면할 수 있지만 이게 부메랑이 되어서 결국에는 자기에게 돌아 와 그래서 항상 그 사람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과오는 그 사람의 꼬리표가 되어서 그 사라을 끝까지 따라다녀요 마치 회개하지 않은 죄가 따라 다니듯이 계속 따라 다니는거에요 정 반대의 일이 있었어요 1989년도에 토요타가 미국에다가 렉서스를 출시했어요 렉서스 자동차는 참 좋은 차입니다 그리고 8500대나 팔았는데 불과 그 짧은 기간동안에 많이 팔렸는데 그 자동차 딜러가 자동차를 사러 온 사람하고 같이 시승식을 했는데 달렸죠. 근데 자동 항속장치라는게 있어요 100km로 눌러놓으면 100km로 계속 가는거에요 악세레이터를 계속 밟던지 브레이크를 밟던지 하기전에는 100km로 자기가 그냥 쭉 가는거에요 근데 그게 망가져가지고는 그게 충돌사고를 일으킨거에요 그러니까 깜짝 놀란거지요 1대가 그랬으니까 그냥 덮으면 되잖아요 그렇지않고 즉시 발표를 했어요 우리가 출시한 항속자동장치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24시간 만에 일본에서 항속장치 부품을 실어가지고 왔어요 그 다음날부터 모두 전화를 해가지고 8500대를 다 들어오게 하고 그거 가는 동안에 렌터카를 다 빌려줬어요 그 8500명에게.. 렌터카 빌려쓰고 영수증 가져오면 우리가 돈을 드립니다 해 가지고 다 했어요 그리고 그걸 다 바꾸어줬어요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다 끝난 다음에 그 회사 경영진들이 정중하게 사과편지를 써서 선물과함께 그 차를 돌려 줬어요 이게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오히려 그 렉서스의 결함이 도요타 자동차에 대한 신뢰를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된거죠 그래서 3,4년만에 미국 판매 1위의 자동차가 된거에요 군자는 자기가 잘못 했을때 잘못 했다는 말을 할 줄을 알고 소인배는 끊임없이 핑계를 대는거에요 그리고 이유와 구실을 대는거죠
어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섬유회사에서 거래처 사장에게 여태까지 당신이 우리회사 물건을 자져갔는데 5달러를 지불을 덜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장이 열을 받아가지고 찾아 온 거에요 내가 이 큰 회사를 하는데 5달러 정도 띠어 먹을 사람으로 보이냐고 내가 언제 5달러를 덜 갚았냐고 말이죠 그러면서 막 방방 뛰는거에요 그때 발칵 뒤집히니까 직원들을 통해서 알아보니까 진짜로 이 사람이 5달러 덜 낸 거에요 방방 뛰고 화 내는 사람한테 봐 보라고 당신 5달러 틀렸잖아 이렇게 했으면 거래는 끝나는거죠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쩔쩔매고 내가 잘못 알았구나 미안합니다 그러고 돌아갔지만 다시 그 회사랑 거래를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때려 죽여도 안하죠 자기가 수치스러워서 안하지요 사장이 딱 보니까 5달러 덜 냈어 근데 덮어놓고 아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수 한것 같습니다 알아보겠습니만은 저희가 실수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마음이 풀어지고 갔어요 집에 가가지고 며칠 있다보니까 자기가 정말 5달러 덜 낸거에요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이 편지를 보낸거에요 제가 실수 했습니다 제가 알지도 못하면서 가서 당신네 회사에서 큰 소리 치고 소리 지른거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평생 그 회사의 고객이 된거에요 그리고 30년이 넘게 그 일로 인해서 그 사장하고 둘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데요 그러니까 말 한마디의 사과가 그렇게 갈라 놓는거에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을때 제가 잘못 했습니다 언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니야 얘 내가 팀장이지만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하다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다음부터 그런 일이 없도록 내가 주의할테니깐 나를 이번에 용서해다오 아주 깨끗해 보여요 그리고 꼬리표가 거기서 딱 떨어지는 거에요 그리고 그걸 통해서 인간관계가 더 깊어지게 되는거에요 한번 가만히 여러분 주위를 돌아서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결국은 한마디만 진심으로 사과하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될텐데 그거 한마디 하지 않아서 결국은 그 사람하고 인간관계까지 깨지고 좋은 동료를 잃어버리고 급기야는 마음에 미움까지 품게 되어서 하나님앞에 죄를 짓게 되는 그런 상황이 되는거 잖아요 이건 잘못 된 거라는거죠 그래서 항상 마음깊이 준비하고 살아야 해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살 때 여러분들은 잘못해도 어디가서든지 사람들한테 그 잘못 때문에 미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잘못한거를 통해서 여러분들 안에 있는 인격의 깊이를 드러낼 수 있는거에요
기도합시다
2.다툼을 일삼는 사람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잠20:3)
Ⅰ.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요.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여러분들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을 것 아니에요? 그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그중에는 여러분들에게 좋은 점에서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 있고, 아니면 나쁜 의미에서 큰 의미를 지닌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의미가 별로 없는 사람들일수도 있을 것이에요. 그렇죠? 그러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의미를 가진 사람이에요? 아니면 의미가 별로 없는 사람이에요?
오늘 여기에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의 영광이거늘’ 이 영광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카보드’인데 원래 ‘카베드’라는 상태 동사에서 나왔어요. 무겁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뭐가 무거우냐? 의미의 무게지요. 의미의 무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과 악수를 했는데 그 악수한 사람이 굉장히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악수의 의미가 틀려지겠지요. 만약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람이 모든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저명인사라면 함께 사진을 찍은 자기 자신이 영광스럽겠지요. 그렇게 그 사람의 영광이 그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게 되면 그 영광이 분유되는 것이에요. 나누어 갖게 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투지 말아야 해요. 그러니까 다투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의미를 가진 사람으로 기억될 수 없어요.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의미를 가진 무게감이 있는 중요한 사람에서 아주 가볍고 하잘 것 없는 사람으로 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에요. 그래서 인생을 살아갈 때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야지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사람들과 원만한 교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늘 이렇게 다투는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렇게 다투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런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투는 것을 좋아할까? 그런데 사실 다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둥근 물체가 기울기가 있는 면을 만나기만 하면 굴러가듯이 사람의 기질이 그렇게 되어서 여건만 조성되면 사람들과 다투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도 좋은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요. 그게 문제입니다.
Ⅱ. 다투게 되는 이유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러면 도대체 왜 이렇게 다투게 되는 일반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기질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러나 왜 그렇게 사람들이 다투게 될까? 라는 것이죠.
A. 이익의 문제 때문에
그게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이익의 문제 때문이에요. 이익의 문제. 그래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이익에 대해서 아주 밝고 집착이 강한 사람이에요. 회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사람이에요. 첫째는 뭐냐 하면 잘난척하는 사람들이에요. 앙케트를 해보면 그게 일위입니다. 저 사람이 틀림없이 나보다 모든 면에서 낫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과시하면 내 속에서는 그 인간을 깔아뭉개려고 하는 파괴적인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죠. 그 다음으로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자기의 이익에 집착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에요. 이기적인 사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개인주의적인 사람을 싫어해요.
(예화) ➀어떤 기업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프리카에 가서 상사주재원으로 일하던 때에 경험담을 썼어요. 그게 뭐냐 하면 상대방과 함께 상사를 설립하고 물건을 파는데 그쪽하고 합작계약을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오직 생각이 뭐냐 하면 이 트레이드에서 우리 회사에 이익이 남아야 된다는 생각이에요. 어떻게 하면 최대한의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온갖 지혜를 다 동원했어요.(똑똑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계약서를 딱 쓴 것이에요. 그래서 저쪽하고 거의 합의가 다 되었어요. 그것을 상사에게 보여주었어요. 자기 깐에는 이정도면 거래를 할 때에 우리가 저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우리들이 유리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만들어 보낸 것이에요. 그랬더니 상사가 그 계약서를 보더니 이 계약서를 저쪽에서 동의했느냐고 물었어요. 사인을 하겠다고 했다면서 자기는 굉장히 유리하게 작성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상사가 이렇게 보더니 하는 이야기가 ‘너 이 나라에서 장사 한번만 하고 안 할 거냐?’ 그러면서 그 계약서를 다시 반려하면서 주는 충고가 ‘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이익이 돌아가게끔 계약서를 다시 써라.’ 이 사람은 아직 처음 합작회사를 하는 미개한 나라니까 아직 잘 몰라서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계약서대로 상황이 벌어질 때 육 개월, 일 년이 지나고 나면 이 사람들은 이게 별로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고 상대방만 배부르게 한다는 것을 알겠어요? 모르게 되겠어요? 알게 되겠지요. 그러면 자기네가 사인한 것과는 상관없이 ‘아, 이 사람들하고는 계속 관계를 맺으면 이득이 별로 없겠구나.’ 하면서 이 한건의 사업에서는 돈을 남길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에요. 더군다나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경쟁자가 나타나면 이 사람들의 파트너십은 깨지는 것이에요.
➁제가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인데 우리로 말하자면 팀장회의처럼 이렇게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그런데 아주 작은 일이에요. 그런데 돈이 안 되고 힘이 드는 일은 서로 남의 것이라고 미룰 것 아니에요. 이권이 얽히고 남에게 대접받는 것은 서로 자기네 일이라고 가져갈 것 아니에요. 그리고 언쟁이 벌어지면서 서로 자기네 일이 아니라고 미루는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내가 보기에는 그게 큰 일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이에요.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다음에 그 작업을 하면서 나오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갖다가 쓰레기장까지 갖다 버리는 게 이 사무실의 책임이냐 문밖에 내다놓으면 그 다음에 관리실에서 그것을 갖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관리실 책임이냐를 놓고 분쟁이 벌어진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네가 썼으면, 작업을 하고 거기서 쓰레기가 나왔으면 갖다가(내가 보기에는 10미터, 20미터도 안 돼요.) 쓰레기 소각장에 넣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팀장 하나가 바득바득 우기는 것이에요. 뭐냐 하면 요기 문 앞에까지만 갖다놓으면 그것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이지만 청사 안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관리하는 것은 관리실에서 해야 될 일이니까 우리는 거기까지만 갖다놓으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관리실에서 그렇게 하면 여기 청사가 11층이나 되는데 다 갖다놓으면 그러면 우리의 인원이 얼마 안 되는데 어떻게 그것을 나르느냐고 하니까 굉장히 설득력 있게 논리를 제기하면서 결국은 제압해버렸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 회의에서는 승리를 해서 그 사무실 직원들은 자기 쓰레기를 문밖에만 갖다놓으면 되게끔 이익을 챙겼어요. 그런데 거기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속으로 ‘저 개새끼’ 하면서 욕을 하는 것이에요. ‘인간성 한번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말을 안 해도 가슴속에 담고 가는데 그 인간만 모르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어요? 소탐대실이에요. 여기 이권에서는 이익을 챙겼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그 부서에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결국은 자기 자신이 작은 것을 탐하면서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한번 보세요. 이 자연세계의 모든 이치도 서로 주고받는 공생의 관계에요. 그래서 동물들이 이산화탄소를 토해 놓으면 식물들이 그것을 먹고 산소를 토해 놓으면 동물들이 또 그것을 마셔요. 그러면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활용해요. 인간이 식물에서 난 것들을 먹고 그것들을 소화시켜서 배설하면 그것들은 또 식물에게 도움을 주고 하면서 이렇게 모든 것들이 기대면서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물론 살다가보면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받을 때도 있고 내가 먼저 줄 때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준 사람은 모두 받을 것을 기대하고 또 여러분들은 받았으면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인생을 살지 않으면 단기간에 있어서는 항상 이익을 챙겨요. 그런데 그 사람의 별명이 빈대가 되는 것이에요. 어디가든지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항상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뭔가 내가 필요해서 도움을 요청하면 사람들이 기쁘게 와서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 중에는 인색한 사람은 없어요. 인색하면서 친구를 얻는 방법은 권력으로 복종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친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니 하다못해 조직폭력배들도 그 부하나 동료들에게 후하게 해주어야지만 충성을 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득바득하게 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고 상대방을 꺾으려고 하는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친구가 있겠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사람은 사람들을 사귈 때에 진통제 같은 관계가 있고 보약과 같은 관계가 있는 것이죠. 진통제 같은 관계는 뭐냐 하면 내가 필요할 때 찾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좋은 말로 사탕발림을 하고 그 다음에 그 끝에는 항상 도움을 청하는 것이죠. 한 두 번은 그렇게 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은 항상 나와 저 사람과의 관계는 저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인간관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바보에요. 그런 것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화) ➀제가 아는 한 교수님은 이름을 대면 여러분들도 다 아는 학교인데 꽤 실력 있는 교수님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학교에서 강사로 모셔갔어요. 물론 교수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학교에서 강사로 모셔갔어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다닐 때는 강사 비는 한 시간 50분 수업에 12,000원 주었어요. 그러니 뭐 그것 가서 3시간씩 하면 36,000원에다가 4주를 하면 기껏해야 200,000원도 안되잖아요. 거기에다가 교통비를 좀 얹어준다고 해봐야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500,000원을 주더래요. 그래서 ‘아 내가 좀 유명한 교수니까 대접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학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통장엔 가보니까 강의를 안 하는 방학 때인데 강사료가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수님이 학교에다가 전화를 했대요. ‘아니 뭐 사무에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니냐. 내가 강의를 안했는데 어떻게 강사료를 보냈느냐? 뭐 착오가 아니냐?’ 그랬더니 ‘아닙니다. 교수님이 지난학기에 워낙 강의를 잘해주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조건 없이 방학 중이지만 교수님께 강사료를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7월, 8월 돈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러니 9월의 강의를 해달라고 8월쯤에 전화가 오는데 어떻게 안 간다고 하겠느냐고요. 먹은 것이 있는데……. 겨울에는 12, 1월 이렇게 통장엔 돈을 넣어주고 그 다음에 1월 중순이나 하순쯤 3월에 강의를 해주실 수 있느냐고 묻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느냐는 것이에요.
➁내가 한때는 두란 노 바이블 칼리지에 강의를 나갔어요. 매주 나간 것은 아니고 일 년에 몇 번 나갔는데 사람도 그렇게 모이지 않고 강의하는 게 좋았으면 학교에서 오라고 할 때 벌써 갔겠지요. 그런데 꼭 1월쯤 되면 거기에 있는 여전도사님이 그렇게 내가 바쁘다고 해도 비서실에 연락해서 목사님 좀 꼭 뵙게 해달라고 와요. 그러면 무엇을 부탁하려고 오나? (부탁안할 사람이 왜 오겠어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와이셔츠 하나 사들고 때로는 케이크하나 사들고 그러고 와요. 자기도 바쁠 텐데 그랬어요. ‘어떻게 왔어요?’ 그냥 뵈러 왔습니다. 그리고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라고 그러면서 그것을 놓고 가요. 그러면 나한텐 뭐 부탁할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런 것은 없다고 해요. 그러면 왜들고 왔느냐고 했더니 ‘작년에 강의를 해주셨는데 우리 학생들이 너무 감동을 받아서 그래서 목사님이 작년에 우리 칼리지에 와서 강의해주신 강사들 가운데 학생들에게 참 많은 도움을 주신 강사님이셔서 감사해서 연초에 인사드리려 왔습니다.’ 그러는 것이에요. ‘고맙다’ 그리고 이제 가요. 그리고 뜯어보면 거기에 정성스럽게 카드를 써서 거기에 넣어놓았어요. 그리고는 1월 달에 그러고 가서 3월쯤에 전화를 하는 것이에요. 뭐냐 하면 5월쯤에 강의가 있는데 한번 와주시겠느냐고 물어요. 어떻게 안가느냐고요. 만약에 그 와이셔츠를 들고 와서 3월 달에 와서 강의를 해주십시오. 그러면 와이셔츠를 받고 안 갈수 있어요. 왜냐하면 와이셔츠는 강의에 와달라고 하기 위해서 가지고 오는 홍보용 선물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받고 내가 안가도 시간이 없어서 못 간다고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래서 보면 사람들과 거래를 할 때 이익을 얻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평소에 많이 양보했던 사람들이에요. 결정적인 시점에 가서 이익을 얻는 것이에요. 이게 말하자면 삶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에요.
➂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나 더 할게요. 옛날에는 이 제주가 도가 아니라 목이었어요. 제주도가 아니라 제주목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나가는 사람을 목사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 제주도로 발령이 나면 중앙의 관리들이 다 ‘삼가 명복을 비나이다.’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가난한 동네니까 뭐 받아먹을 것도 없고 제주도를 가보면 알지만 농사도 제대로 못 짓던 시절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중앙에서 잘나가던 관리였는데 제주도로 발령이 난 것이에요. 그래서 다들 삼가 명복을 빈다며 보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근본이 그렇게 깨끗하고 성실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야 이제 이 좋은 시절에 제주 목사로 내려가는데…….’ 임기는 이년이란 말이에요. 금방 금방 갈아치웠지요. 그래서 내려가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서 내려갔는데 내려가자마자 이 사람이 중앙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제주도를 다스리는 것이에요. 그런데 딱 내려가니까 그래도 제주에서 한다하는 부호들이 뇌물을 싸들고 새로 부임하는 목사의 관아에 모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신임목사가 이제 조촐하게 주연을 베풀고 내가 여기서 이년동안 목사 일을 할 텐데 나를 잘 도와달라고 사람들에게 당부를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면서 우리가 잘 돕겠다고 하면서 뇌물을 바쳤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 돌려보냈어요. 나는 이런 것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 돌려보냈어요. 그 소문이 온 제주도에 퍼진 것이에요. 새로 온 그 목사가 부호들이 가지고 온 모든 상납하려고 가지고 온 좋은 물건과 돈들을 다 거절하고 하는 말이 이렇게 나한테 가지고 올 돈이 있으면 인근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절대로 화려한 파티를 없애고 그리고 늘 수수한 차림으로 그리고 온 제주도를 돌면서 그러면서 민정을 직접 챙기는 것이에요. 백성들의 삶을 챙기는 것이에요. 그래서 헐벗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아프고 병든 사람에게 의사들을 보내주어서 치료받게 해주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그렇게 소탈하게 백성들 속에 들어가서 지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래간만에 제주도 도민들이 정말 좋은 목자를 만났다고 그렇게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이에요. 드디어 이제 이년의 임기가 거의 마쳐가요. 그런데 갑자기 늘 그렇게 나타나던 그 목사가 안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들리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목사가 큰 병이 들어서 누웠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온 몸에 종기가 나는 이상한 병에 걸려서 누웠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러니 이제 백성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좋은 목사께서 그런 병에 걸렸으니 어떻게 하느냐? 왜 그랬을까?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가 점점 더 병이 위중해진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백성들이 한둘씩 모여서 목사가 있는 관아에 모여서 울고 가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저렇게 아파서 기동도 못하시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말이죠. 그 다음에 소문이 도는 게 그 병은 모든 약으로도 듣지를 않고 오직 한 가지만 되는데 우황을 발라야한다더라. 이 제주도가 우황의 특산지였어요. 우황이라는 것은 소가 삼을 먹고 인삼이나 산삼을 먹고 그리고 말하자면 이 속에 종기가 생기는 것이에요. 그것이 뭉친 것이 우황이란 말이에요. 우황이 금값보다 비싸요. 훨씬 비쌉니다. 그런데 거기가 그 우도도 있고 해서 소들도 많아서 그 우황의 주산지였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우황이 문제냐 우리 목사께서 저렇게 병들어 누웠는데 그러면서 우황이 있을만한 소는 눈꺼풀을 까서 자기네 소를 다 때려잡아서 우황을 다 꺼낸 것이에요. 그러니까 각 처에서 우황을 상납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황이 원래 노르스름하고 말랑말랑하거든요. 그것을 상납하는 것이에요. 그러더니 드디어 며칠 있다가 이제 꼭 원하는 사람은 목사께서 누워계시는 방에 와서 눈인사를 해도 좋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보니까 온 몸에 우황을 붙이고 그리고 누워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와서 눈인사를 하고 손을 한번 잡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 꼭 일어나시라고 그러면서 온 사람들이 다 보고 갔어요. 그것은 계란 노른자였어요.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계란 노른자를 바르고 누워있었다는 얘기에요. 그래도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그 사람이 제주도를 다스린 사람 가운데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으면서도 거부가 된 유일한 사람이에요. 우황가지고 온 것은 다 챙기고 자기는 계란 노른자를 바르고 누워있었단 말이에요. 전임자들은 수탈과 약탈로 부자가 되었지만 이 사람은 제주도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에요. 문제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래에서 항상 이기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거래에서 항상 양보를 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에요.
한강다리가 정부에서 입찰했을 때 일원에 낙찰되었던 것을 아세요? 어느 기업에서 일원에 낙찰을 받았어요. 이 팀장 다리를 놓으려면 그 당시만 해도 몇 십억이 들었을 텐데 왜 일원에 해주겠다고 하고 공개입찰에 일원을 써넣었을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일원을 써내서 그 공사를 받아서 우리 건설회사가 이 정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실화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이후에 이루어지는 공사에서 선점을 차지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죽어도 양보하지 말아야 되는 때가 있을 것이에요. 그런 때가 아니면 여러분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양보해서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 때문에 도움을 받고 섬김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B. 교만 때문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교만 때문이에요.
(예화) ➀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몇 년 되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잘나가는 젊은 목사 한사람을 익명의 네티즌 하나가 나와서 악랄할 정도로 씹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신문에까지 문제가 되어서 그 목사가 굉장히 곤경에 처했어요. 나중에 자기도 실력이 있으니까 이제 지체들을 동원해서 이 익명으로 나를 이렇게 곤경에 빠뜨린 자가 누군가하고 찾았더니 결국은 찾았어요. 같은 목사에요. 같은 목사가 그렇게 지독하게 씹은 것이에요. 내가 직접 본인들을 만나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누가 얘기해줘서 들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씹었을까? 신학적으로 그 사람의 설교가 문제가 있고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집요하게 퍼뜨린 것이에요. 최근의 세미나에서도 박살을 냈습니다. 책까지 냈습니다. 왜 그럴까?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초면에 처음 만났는데 이 목사가 반말을 했대요. 그 때부터 마음에 품은 것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겸손한 사람들은 사람들과 다투지 않아요. 겸손한 사람이 잘못했을 수도 있는데 그 때는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분쟁의 불을 꺼요. 그런데 교만한 사람들은 그런 말 한마디 하는 것이 가문이 무너지는 것처럼 인색해요. 결국은 거기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요.
➁실화인데 국군병원에 입원해있는 어떤 사람이 살해당했어요. 그래서 왜 그랬나 했더니 그 국군병원에 근무하는 군인인데 어떤 군인하나가 입원했는데 잘 보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던 악랄한 친구가 입원한 것이에요. 그래서 걔를 보니까 그 때의 분노가 확 치밀어 오르는 것이에요. 그래서 찾아가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하니 너무 분하니까 ‘너 그 때 나한테 이렇게 했지? 네가 진짜 잘못한 것 아니냐? 너 나한테 잘못했다고 해라.’ 이것을 일곱 번을 찾아가서 요구를 했대요. 그런데 끝까지 잘못했다는 이야기하기를 거부하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 욕을 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침대에 붕대감고 누워있는 놈을 칼을 갖고 찔러 죽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목이 쉽게 꺾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적이 굉장히 많아요. 자기 깐에는 나는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 책임감이 있다. 그리고 누구도 나를 못 꺾는다. 그리고 나는 내 일을 잘 지켜낼 수 있는 그런 몇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바보에요.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교만일 경우에는 자기 혼자 남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와 어떤 이해관계에 말리기를 싫어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자신만 고립되는 것이에요.
C. 혈기 때문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혈기에요. 이런 일이 많잖아요. 어떤 문제를 가지고 막 싸우는데 원래에 다투게 되었던 근본적인 것은 제쳐두고 ‘너 말버릇이 그게 뭐냐?’고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지요. ‘너는 잘했느냐? 너 기분 나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전에도 그랬어!’ 그러면서 다투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혈기를 부리게 되면 다툼이 계속 일어나게 되요. 이런 요인들로 인해서 다툼이 생겨나게 되요
그런데 마음이 온유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공정한 거래를 하고 그리고 자기를 낮추고 그리고 혈기를 죽여요. 그래서 다툴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 다툼을 피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 못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느냐하면 관계가 계속 파괴되는 것이죠. 그래서 관계가 계속 파괴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관계를 중심으로 우리들이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건물을 쌓아올리는 것과 똑같아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가 전 재산을 투자할 테니까 당신 사업한번 해보라는 사람은 없어요. 절대로 그런 사람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신뢰라는 것은 관계에서 계속 쌓여가는 것이에요.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한번 만나서 마음을 다 주는 사람이라는 것은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래서 돌다리를 두드리듯이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주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도 괜찮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과 신뢰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에요. 다툼이 일어나게 되면 그런 관계가 더 이상 진전이 안 되고 이미 조금씩 신뢰가 쌓였던 관계 자체가 허물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계를 계속 쌓아가면서 어떤 일을 해야 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에요. 그게 되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이 관계를 자꾸 깨뜨리기 때문에 깨진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은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니까 어디 가서 대접을 못 받는 것이에요.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다투는 사람들은 단기적으로는 자기 일들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우군이 없어요. 여러분들은 아직 CEO들의 마음을 잘 모르지요? 직장 상사의 마음은 어떠냐하면 이런 것이에요. 어떤 직원을 데리고 왔는데 능력이 매우 탁월해요. 그럼 그 사람을 써요. 썼어요. 일을 참 잘해요. 그런데 주위에는 그보다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저 사람이 훨씬 귀하지요. 그래서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 둘을 줘도 저 사람과는 안 바꿔요. 여기서 두 사람이 사표를 낸다고 하면 그러냐고 말하지만 저 사람이 사표 낸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어보는 것이에요. 월급이 적나? 올려줄게. 몸이 아프냐? 휴가를 줄게. 그리고 추가적인 제의를 자꾸 하게 되요. 그러면 이 사람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아! 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구나!’ 그런데 이 사람이 계속 다투어요. 그러면 이제 사람들에게서도 불평이 들어와요. 한번 들어왔을 때에는 ‘그래도 너보다는 쟤가 훨씬 낫지.’ 그러면서 두둔을 해요. 두 번, 세 번, 네 번 들어오게 되면 이 직장 상사는 이제는 무엇을 느끼느냐하면 저 사람이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을 하는데 조직을 전체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럴 때 이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저 사람을 계속 놔두면 개인적인 일은 잘해내겠지만 조직 전체를 이끌어가지 못하도록 자꾸 나에게 부담을 주는구나! 그러면 어느 날 능력을 버리고 조직의 안정을 찾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조직이라는 것은 한사람이 잘한다고 해서 아무리 잘해도 그 일은 조직 전체가 해야 하는 일들 중의 아주 일부일 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어느 사회에서든지 보면 개인적인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밖에서는 열렬하게 환영하는데 내부에서는 계속 거절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의 능력을 인정 안 해주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전체 조직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조직의 안정성이 개인 업무의 뛰어남 보다도 더 중요하고 최고 책임자는 항상 저 사람의 튀는 성격과 뛰어난 업무능력 이것과 조직의 안정성을 조화시키려고 애를 많이 써요. 그런데 이것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될 때에는 조직을 버리고 그 한 사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아깝지만 버리고 조직의 안정성을 취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보면 직장에서 일을 못하기 때문에 왕따를 당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누구냐 하면 그 사람이 일을 못해내기 때문에 계속 자기들이 피해를 받게 될 때 왕따를 시켜요. 그런데 때로는 보면 아주 뛰어나게 일을 잘하는데 아무 동료도 없는 경우가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렇게 조직의 안정성을 끊임없이 해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능력을 꺾어버리지 않으면서도 같이 조직의 안정성을 기하면서 살아가는 비결들을 터득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중용이에요. 자기가 백을 가지고 있으면 팔십 정도만 발휘를 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에요. 바로 그것입니다.
최근에 책이 한권 나왔는데 ‘회사가 당신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50가지’라는 책인데 거기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회사가 어려워서 구조조정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항상 불러서 얘기한다는 것이에요. ‘자네는 정말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재이고 우리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많이 기여했는데 정말 자네만은 붙들고 싶었는데 회사가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되겠네.’ 그 말 중에 마지막 ‘헤어져야 되겠네.’ 그것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래요. 왜냐하면 회사는 어느 순간에 사람을 정리해야 될 때에 무능한 사람, 그 다음에 월급 많은 사람부터 제하는 게 아니라 조직의 안정성을 자꾸 헤치는 사람을 먼저 일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뭐냐 하면 자꾸 부딪혀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제일먼저 일순위에 놓고 제거하는 것이에요. 바로 그것이에요. 그리고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그 회사의 책임자가 혹은 사장이 꼭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망하기 직전까지 데리고 있는 것이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게 데리고 있어요.
그 사람이 직장이나 사회 속에서 늘 다투는 사람들은 언제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발령 날 때보면 알아요. 발령 날 때보면 이렇게 덕을 많이 베풀던 사람들은 발령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람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해요. ‘헤어지게 되어서 섭섭합니다.’ 혹은 ‘정들었었는데 어디로 가세요?’ 그러면서 떠나가기 몇 주 전부터 밥 먹자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요. 그리고 직원들이 와서 서랍정리도 해주고 캐비닛의 짐도 싸주고 그러면서 챙겨줘요. 그런데 늘 다투던 사람은 그 회사를 떠날 때가 되어도 섭섭하니까 밥 먹자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 혼자 자기의 짐을 쓸쓸히 꾸려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그게 그 사람이 그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다투면서 살았던 마지막이에요.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서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너희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하셨어요. 그게 바로 진짜 그 마음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진 사람들의 삶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항상 살아갈 때에 진통제와 같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돼요. 그것은 너무나 얍삽한 것이에요. 그렇게 살면 안 돼요. 그리고 보약과 같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이에요. 그래서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할 수 없다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해도 괜찮을 때 내가 조금 희생하면 충분히 될 수 있을 때, 그 때에 양보하고 나와 거래를 맺었을 때에 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되요. 겸손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배려하고 혈기를 죽여서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늘 존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요즘은 그럴 기회가 별로 없는데 나는 음식점에 가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많이는 아닙니다만 꼭 팁을 줍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사람들이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손님이 많이 오는 것도 싫고 안 오는 것도 싫어요. 많이 오면 힘들고 안 오면 잘리니까. 월급 나올 정도로만 오면 제일 좋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가서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을 존중해보세요. ‘에이 이리와.’ 이렇게 말고 ‘물 한잔 좀 주시겠습니까? 수저하나 부탁드립니다. 오늘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탁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고 예의를 차리면 몇 번만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그 음식점에서 vip가 되는 것이에요. 사장이 아무리 vip취급을 해도 소용없어요. 중요한 것은 종업원이 vip취급을 해야 돼요. 그러면 종업원들에게 깍듯이 대접을 받는 것이에요. 인간의 모든 세상사가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투지 마세요. 나도 똑같은 갈등을 느껴요. 여러분들이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다투면 그래서 여러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꾸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그러면 이 마음속에서 자꾸 갈등과 괴로움이 생겨요. 항상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그래서 다툼이 없이 생활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언제든지 그 사람이 도움이 필요할 때 돕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인간생활의 기본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렇게 작은 이익에 집착해서 그래서 우리들이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고 우리의 사역의 현장이 늘 다툼의 현장이 된다면 결국 어느 날 우리도 쓸쓸히 보따리를 싸게 될 날이 올지도 몰라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온유함과 넉넉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면서 그렇게 살 때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3.역린을 건드리지 말라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것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17:9)
첫째 시간에는 사과에 대해서, 둘째 시간에는 다툼에 대해서, 오늘 셋째 시간에는 허물을 덮어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비자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용에게는 역린이 있는데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왕의 결점을 말해서 왕을 고치는 것이 어렵다고 토로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용이라면 껌벅 죽거든요. 그런 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전설에 의하면 이 용의 목에 비늘이 하나 있답니다. 그 비늘이 한 치쯤 되는 비늘인데 그렇게 크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그 비늘이 거꾸로 나있답니다. 모든 비늘이 다 똑바로 나있는데 유독 이 비늘만 거꾸로 나있어서 그것을 건드리면 용이 자극을 받고 그것을 건드린 자는 용이 반드시 죽인다는 것이죠. 이 역린이 사람마다 다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콤플렉스에요. 그런데 그 콤플렉스는 사람들마다 눈에 잘 띄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그 사람이 아무리 성화되고 그리고 어쨌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건드리면 그 사람은 반드시 관계가 깨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남의 역린을 자꾸 건드려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러는 사이에 자기는 생각 없이 그 얘기를 계속하는데 상대방은 역린을 계속 건드리는 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이 속에서 생겨나요.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일을 당하고 나면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다 밖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저 사람이 왜 나를 저렇게 대할까? 그런데 본인은 농담 삼아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이 사람의 역린을 계속 건드린 것이에요. 그게 쌓인 것이에요. 어느 한순간에 폭발할 때 친구로 알았던 사람이 원수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를 다 해도 그 사람의 콤플렉스는 건드리면 안돼요.
가끔 여러분 회사를 다녀본 사람들이 있지요? 종종 그런 일이 있지요. 회사 상사가 ‘내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얘기해봐. 나는 진짜 문제가 많지? 내가 어떤 것이 잘못되었는지 얘기 좀 해봐.’ 그럴 때에 얘기하는 사람은 바보에요. 하라고 그러는 것이 모두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하지 말라는 것이 모두 하면 안 되는 것은 아니에요. 이렇게 역린을 건드리는 것은 부부사이에도 금기사항이에요. 신앙적으로 보면 이런 역린들은 하나님도 한 번에 박살을 안내시고 서서히 사랑으로 다루시면서 그 사람을 고쳐 가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나타나서 그 비늘을 확 뽑아버리려고 해요. 그러면 깨뜨려지는 것이죠. 나이가 많이 들어도 시집을 아직 안간 자매들이 명절이 되면 괴로운 이유가 뭐에요? 고향에 내려가면 만날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에요. ‘너는 어떻게 하느냐? 여태 시집을 못가서…….’ 말하는 사람은 애정을 가지고 걱정이 되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듣는 사람은 그것이 지긋지긋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도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시집을 못 갔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그것을 존중해줘야지 그것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에요. 아직 스물 셋, 스물넷밖에 안된 애들보고 장난으로 ‘야, 너 친구는 스물셋에 다 갔는데 너는 스물넷이나 되었는데 시집을 아직도 안 갔느냐?’ 이것은 콤플렉스가 아니에요. 얼굴이 예쁘게 생긴 자매한테 ‘아이고 얼굴도 못생겨가지고 잘난 척은…….’ 이것은 상처가 안 된다는 것이에요. 반어법으로 듣는다는 것이에요. 늘 얼굴을 보면서 ‘못생겼는데…….’ 이러는 사람한테 ‘아이고 얼굴도 못생긴 게…….’ 그러면 반응이 무엇인지 아세요? 얼굴이 못생긴 것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는 못생겼다. 네가 나에게 보태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래 나는 못생겼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사람한테 ‘아이고 무식한 사람같이…….’ 그러면 상처 안 받아요. 그런데 늘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된 사람한테 ‘아이고 무식하기는…….’ 그러면 ‘그래 나는 못 배웠다.’ 그러면서 관계가 파괴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금기사항이에요. 관계를 지속하고 싶으면 부부간에도 그 다음에도 아이들 사이에도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금기사항이에요. 그 사람도 힘들어하는 콤플렉스에요. 다 알아요. 그것을 사랑도 별로 없고 권위도 없는 자기가 나타나서 역린을 확 뽑아버리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커다란 인간관계의 실패로 나타나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오늘 성경에도 보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어떤 사람의 허물이 있어요. 이런 허물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진실이잖아요? 진실은 진실인데 그 진실도 자주 말하면 안 돼요. 자주 말하면 그러면 인간관계가 깨진다고요. 그 사람하고 안 보려면 몰라요. 그러나 그 사람하고 관계를 가지고 계속 살려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오늘 얘기가 그것이에요. 그래서 허물을 거듭해서 말하는 사람은 이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저도 이렇게 인생을 살면서 가만히 보면 사람은 한결 같이 똑같아요. 자기한테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좋지요. 쓰고 고통스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좋지 않아요. 예외는 있을 수 있지요. 사람이 워낙 그 사람을 사랑해요. 그런데 너무 안타까워요. 너무나 안타까워서 이렇게 저렇게 고민을 하다가 그 사람에게 옳은 충고를 해주는 것이죠. 여기서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대개 남의 콤플렉스를 건드리고 말하는 사람이 그런 애정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부모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많으면 자식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사랑이 없으니까 그것을 거듭, 거듭 말하는 것이죠. 사랑이 있으면 아파하는 것을 보니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뭐 부정직하고 잘못된 것이냐? 아니거든요. 다 알거든요.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죠.
우리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그 때는 잘 먹으니까 몸이 통통했어요. 할아버지가 오시면 매주일 용돈을 꼭 주셔요. 그런데 한번은 할아버지가 나타나자마자 손녀딸을 보면서 ‘이슬이 잘 있었니?’ 그러시면 되는데 기술이 좀 부족하시니까 아이에게 친절한 표현을 하신다고 하신 것이에요. ‘아이고 너는 무엇을 먹고 얼굴이 그렇게 좋아졌느냐?’ 애가 방에 들어가서 대성통곡을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 싫대요. 왜냐하면 항상 자기가 너무 그렇다고 느끼는데 할아버지가 ‘너는 무엇을 먹고 이렇게 좋아졌니?’ 그랬으니……. 이경호집사가 아이한테 와서 애가 얼굴이 훤하게 생겼으니까 ‘아이고 너는 우리 딸처럼 떡판 같구나!’ 애가 집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러면서 이경호집사 딸이 누구죠? 예지아빠는 굉장히 나쁜 사람이라고 그래서 나중에 이경호집사가 선물사가지고 와서 진짜 정중하게 사과했어요. 만원까지 주고 갔어요. 그래도 아마 그 나쁜 인상을 회복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 애가 사실은 요즘 보면 그 애를 가지고 떡판이라고 그러는 사람은 없거든요. 나는 요새 항상 ‘아 이슬아 너는 어쩜 그렇게 예쁘니 너는 솔직히 말해서 요즘은 안 그렇지만 옛날에 몸매가 있긴 하지만 요렇게만 하면 너는 너무 예뻐서 문근영하고 비슷하게 생겼다.’ 그 다음부터는 거울을 보면서 ‘아 나는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사람에게 자기가 계속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것을 건드리면 그 사람에 대한 파괴적인 적대감이 확하고 생겨나요. 더군다나 그 이야기가 자기에게 직접 들어오지 않고 딴 사람을 통해서 들어올 때 그것은 배가 되는 것이에요. 수치심이 배가 되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우리는 항상 이야기할 때 떠올리는 것들이 그런 외모, 배나온 것……. 요즘은 좀 덜한데 언제나 저는 밥을 먹으면 가스가 꽉 차요. 문제가 좀 있어요. 가스제거제도 먹고 그러는데 너무 먹으면 안 좋다고 해서 힘들어요. 어떤 때는 바지가 안 잠길 정도로 그래요. 저녁을 절식하고 변을 보고 아침에 몸을 잘 조절하고 일어나면 바지가 다 헐렁헐렁해요. 한 1.5인치 이상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이게 왔다 갔다 해요. 꼭 그렇게 가스가 찼을 때 내 배를 보고 우리 집사람이 배가 나왔다고 해요. 한번 이야기는 괜찮은데 두 번, 세 번 얘기하면 부부인데도 싫어요. 그래서 ‘아, 나 배 나왔어. 그래 배 나왔다. 어쩔래?’ 그러죠. 그러한 자기가 늘 콤플렉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배려를 받을 때 말하자면 그 사람이 자기를 건드리지 않을 때 인간관계가 원만하게 움직여지는 것이죠. 그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사람들이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에 항상 재미있어하는 것들은 대개 무엇이냐 하면 누군가의 결점이나 실수를 이야기할 때에 그 때에 우리는 행복해하는 것이에요. ‘아, 임성우 실장 있지? 사람이 참 괜찮더라고! 이런 식으로 나에게 감동을 주었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썰렁해 해요. 다른 사람들은 이익을 받은 것이 아니니까. ‘임성우 실장 있지? 굉장히 아집이야! 진짜 바보더라고 남의 자동차 키를 가지고 자기 자동차를 쑤시면서 안 맞는다고 난리를 치는 거 있지?’ 다들 깔깔대고 웃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으면 단점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뒤집어지며 포복절도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사람의 콤플렉스를 건드려서 죽여야 해요.
제가 건망증이 심합니다. 머리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건망증이 정말 심해요. 요즘도 건망증이 있는데 그 건망증이 좀 염려가 되요. 혹시 이것이 치매가 아닌가? 치매하고 건망증의 차이가 뭐냐 하면 열쇠를 손에 들고 ‘열쇠가 어디 있지?’ 그러면 그것은 건망증이고 이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것을 무엇에다가 쓰는 물건이지?’ 그러면 그것은 치매에요. 내가 기독교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인데 이제나 저제나 좀 바빠요? 그 때는 프린스를 타고 다녔는데 막 끝나고 밤11시가 넘었어요. 그러고 나서 빨리 집에 가려고 아이들은 다 가고 조용해요. 차에 딱 탔는데 누가 운전대를 빼간 거예요. 아니 누가 운전대를 빼갔느냐고요? 미친놈들이구나? 알고 보니까 뒷좌석에 탔어요.(웃음) 거봐요. 이렇게 즐거워하잖아요! 왜 이렇게 즐거워요? 다른 얘기를 한번 해볼게요. 신대원 졸업식 때가 다 되었는데 공부를 별로 못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졸업식에 가보니까 김남준! 신학대학원장상! 그러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서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내가 대학원장 상을 받아가지고 왔어요. 거봐요. 아무도 안 웃잖아요. 그런 거예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그런 것이에요. 인간이 뒤집어지는 것은 언제 뒤집어지느냐하면 남이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을 이야기할 때 뒤집어져요. 그렇게 사람들을 웃기고 싶으면 자기를 사용해요. 자기의 결점과 문제를 사용하라고요. 그러면 그 사람을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에 ‘아이고 저 목사님은 정말 바보네! 아니 뒤에 타서 운전대를 어느 놈이 빼갔다고 그렇게 투덜거렸다며? 저 사람이 목회할 수 있을까?’ 그렇게는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죠. 그런 인격적인 XX을 안 한다는 것이에요.
죄도 마찬가지에요. 죄도 그것을 발견하고, 그래서 성경을 보면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발견하거든 혼자 조용히 찾아가서 타이르라고 했잖아요. 확 까발리지 말고 그래도 안 들으면 두세 증인,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 앞에 알리고 정리하라고 하잖아요. 그러한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님의 배려를 여러분들은 느낄 수 있잖아요? 하물며 그게 무슨 죄가 아니고 단지 결함이고 다른 사람과 약간 다른 것을 가졌는데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에 사용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허물을 계속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노력을 자꾸 하다보면 몸에 쭉 배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gentle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성경은 베드로 서에서도 얘기를 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사랑하면 그러면 그런 허물들을 덮어주게 되요. 그래서 배려하는 것이죠. 자기도 그런 배려를 받으면서 살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도 그렇게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해요.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사랑이 많으면 그것이 허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 도와주고 싶고 기도해주고 싶은 제목으로 다가오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런 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용서는 메아리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17:9)
사람이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사회니까 우리가 항상 잘할 수는 없거든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결함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은 남들이 못할 때에 잘하고 있지만 살다보면 남들이 잘할 때 자기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죠. 똑같이 잘하는 일이었는데 어느 시점에 가서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에 공부는 잘하지만 운동시간에는 놀림거리가 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공부는 못하지만 운동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이죠.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지만 오락회 시간에는 장기가 좋아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지만 둘 다 잘해도 오락회가 되면 음정도 박자도 못 맞춰서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단 말이죠. 이처럼 완전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살다가 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가 있어요. 이것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죠. 나를 곤경에 빠뜨릴 때 얼마나 그 사람이 밉고 고통스러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토마스 칼라일 이라는 영국의 사상가가 있지요. 그 사람이 자유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그래요.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그 원고를 썼는데 어느 날 서고에 가서 찾아보니까 그것을 몇 년에 걸쳐서 썼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온 힘을 다해서 썼는데 원고뭉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녀를 불러서 ‘여기에 있는 원고뭉치가 어디에 갔느냐?’ 하니까 ‘못 쓰는 휴지인줄 알고 벽난로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은 글을 써본 사람들만 압니다.
제가 몇 달 전에 휴대폰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휴대폰을 잃어버렸는데 왜 초죽음이 되었겠어요? 상상력이 뛰어난 우리 임성우 실장이 이야기 해봐요. 메모를 했습니다. 육 개월 동안을 사색을 했는데 그 속에 200자가 들어가는 메모지 안에 60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에 옮기지 않았습니다. 옮길 줄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이죠. 캄캄해요.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생각 못해냅니다. 죽어도 생각 못해냅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쭉쭉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욕망과 시간, 아니면 욕망과 마음의 움직임 1, 1 밑에 A, A 밑에 ➀ 이렇게 해서 써내려간 것이 60건 이상이었거든요. 막막해요. 그 때 생각했어요. 600만원을 주고 그 휴대폰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이었어요. 다행히 며칠 동안 잃어버렸다가 고민했는데 찾았어요. 그 다음에 너무 놀라서 그 다음날 속히 타이프를 치게 해서 옮겼습니다. A4용지 40매 정도가 나왔어요. 그런데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무엇을 하려고 질서를 세우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고의적으로나 혹은 고의는 아니더라도 실수에 의해서 허물었을 때 그 때에 그 마음과 기분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막막하지요. 그런데 그 때가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사람을 얻을 수 있는 때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정말 필요할 때 도움을 주면 별로 필요하지 않을 때에 도움을 주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도록 기억을 해요. 여러해 전에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저에게 세미나를 해달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거기를 가는데 전에 있던 교회를 가보는 것을 되게 싫어하거든요. 한번 떠나왔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지 자꾸 가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제가 거기서 햇수로 8년을 지냈던 신성교회가 마친 지나가는 길옆이에요. 거기는 공릉동이고 서울여대는 거기서 버스를 타고 5정거를 가면 되요. 그래서 그날은 한 시간 반 이상을 남겨놓고 예정시간보다 훨씬 빨리 혼자 출발했어요. 출발해서 가면서 그 교회에 전화를 해서 그 교회 아무개집사가 아직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아직도 있다고 교회 사무원이 이야기를 해요. 제가 거기에 전도사로 있던 누구인데 그 집사님 좀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이제 거기를 갔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그 교회 집사님인데 사람이 손이 크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우리 교회의 김의현 목사님 비슷한 성격이에요. 그런데 왜 그 집사님을 만나고 싶어 했느냐하면 86년도에 저희가 영래를 낳았어요. 영래를 낳았는데 정말 가난했습니다. 진짜 우리 집사람이 먹을 것을 안 먹고 그렇게 해서 900,000만원을 모아놓았어요. 그때 우리는 의료보험도 안 될 때니까 이제 아기를 낳으면 혹시 만일을 위해서……. 자연분만을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가 애가 머리가 너무 커서 안 된다고 해서 고생만 실컷 하다가 제왕절개를 했어요. 그렇게 하고 아파서 눈도 못 뜨고 입원해있는데 병원비는 어떻게 낼 수 있겠는데 정말 궁핍해요. 나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교회가 그래도 많지도 않고 전도사가 두 사람 있는데 그렇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그러는데 그나마 수술을 받을 정도까지 되었으면 돈 십만 원을 보태주는 게 교회로는 큰일이 아닐 텐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매정할 정도로 차가와요.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서 우리 집사람을 간호하고 있는데 그 집사님이 찾아왔어요. 반찬하고 몇 가지를 다 해가지고 왔어요. 참 감사했어요. 그런데 봉투를 하나 놓고 가요. 그래도 좀 보태서 쓰시라면서 놓고 갔어요. 간 다음에 봉투를 열어보니까 사만원이 들어있어요. 그 때 저에게 사만원은 눈물을 왈칵 쏟아지게 할 정도로 큰돈이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생활비 십만 원, 십이만 원 받을 때니까 정말 큰돈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오천 원도 놓고 가고 만원도 놓고 가고 그랬어요. 몇 사람 오지도 않았어요. 그게 정말 잊히지 않아요. 그 후에 별사람 다 있거든요. 엊그제도 보니까 불우이웃도 아닌데 목사님 앞으로 지정헌금을 해서 깨끗한 만 원짜리 돈을 삼십 장을 넣어서 보냈어요. 더 큰 것으로도 많이 받았어도 기억이 별로 안나요. 그런데 그 사만원은 오래도록 기억이 나요. 왜냐하면 내가 너무 필요하던 때에 준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그날 가면서 과일가게에 들렀어요. 오렌지를 사만 원어치를 샀어요. 돈을 줘봐야 안 받을 테니까 사만이천 원 하는 오렌지 큰 거 한 박스를 사서 그 집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니까 자기는 기억도 안 난대요. 물론 기억도 안 나겠지요. 기억도 안 나는데 그렇게 베푼 것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 하면 그 때가 내가 꼭 필요하던 때였기 때문이지요.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해서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그 때에는 용서가 가장 필요한 때에요. 그 때 베풀어주면 개념이 아주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틀리겠지만 기본적인 개념만 있으면 오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얻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군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큰 손해를 입히거나 잘못했을 때를 그 사람을 얻는 기회로 활용하지만 반대로 소인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럴 때 좋은 친구였던 사람을 잃어버리는 기회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때는 이미 일어난 손해잖아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러면 그 때에 분노해서 그 사람과 관계를 깨뜨리고 징벌을 해버리면 일도 망가지고 사람도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일은 이미 망가졌으니까, 망가졌으니까 어쩔 수 없고 그 때에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주면 그러면 사람을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아버님이 6.25때 총상을 입으셨어요. 뒤에서 중공군이 총을 쐈는데 그 총탄이 정확하게 다리를 관통하며 지나갔어요. 뼈가 부러진 것이죠. 그래서 제가 하루는 물었어요. 아버지 이거 한번 부러졌던 다리인데 불편하거나 또 나중에 부러지지 않을까요? 그랬더니 ‘너 내 다리 좀 만져봐라.’ 다리가 이렇게 내려오다가 부러진 부분이 이만큼 튀어 나왔어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했더니 젊었을 때에 다리가 완전히 부러졌는데 접합을 하니까 오히려 그 속에서 뼈 물질이 더 나와서 거기가 더 튼튼해지는 것이에요. 똑같이 그런 일이 있었을 때에 용서하면 그러면 그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더 돈독해져서 이후에 자기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우군이 되는 것이에요.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중국의 주나라에 한 임금이 살았대요. 그 날을 장군들을 모두 모아놓고 왕이 주연을 베풀었어요. 술이 한잔, 두잔 돌아가니까 거나하게 취했대요. 그러니까 장군들이 술을 먹으니까 왕이 기분이 좋아서 자기의 궁녀가운데 자기가 아주 아끼는 궁녀인지 무슨 우리로 말하자면 왕비는 아니고 왕이 아끼는 애희라고 그랬으니까 그저 궁녀 중에서 왕이 특별히 친근하게 여기거나 아니면 빈이거나 그런 정도 되었겠지요. 그래서 이제 ‘자 이 장군들이 나를 위해서 수고들을 많이 했으니까 네가 술 한 잔씩 따라 올려라.’ 그래서 한잔씩 올리니까 왕의 특별한 대접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확 불더니 주연 장소를 밝히고 있던 불들이 일제히 꺼져버린 것이에요. 컴컴한 방이 되었지요. 조금 있더니 그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이에요. 그러고 나서 다시 정돈을 하고 불을 다시 켰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우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폐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그러느냐?’ ‘제가 왕이 아끼는 여자인데 어떻게 왕의 수하에 있는 장군이 저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습니까? 제가 어두워서 보지는 못했으나 그 사람이 지금 쓰고 있는 모자에 끈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손에 있습니다. 그를 벌하여 저의 치욕을 풀어주소서.’ 그러면서 우는 것이에요. 왕이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우리 모두 모자를 벗고 계속 술을 마십시다.’ 그러더래요. 그리고 모자를 다 벗었어요. ‘너는 물러가 있어라.’ 그리고 술을 마시고 주연이 끝났어요.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왕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친정을 하게 되었어요. 친정이라는 것은 왕이 직접 금가마를 타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의미한단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전쟁이 밀리면서 왕이 위기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런데 끝까지 왕을 호위하면서 적군과 더불어 분투하는 군인이 하나 있었어요. 결국 그 사람 덕분에 왕이 목숨을 건졌는데 사태가 수습되고 적군이 물러간 다음에 보니까 온 몸에 적군의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와서 고슴도치처럼 왕을 대신해서 활을 맞은 사람이 있었어요. 왕이 너무 측은해서 죽어가는 그 장군을 보면서 위로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장군이 폐하의 손을 잡으면서 ‘왕이시여 저는 그날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죽기로 작정했습니다.’ 왕의 권력이라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권력이거든요. 그 순간에 이미 그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침묵하고 있었을 때에 무서운 공포 분위기가 온 연회자리에 가득했겠지요. 그런데 누구의 끈이 떨어졌는데 알아 볼 수 없도록 모자를 다 벗고 다시 계속 술을 먹었을 때에 그 때에 그 사람이 맹세를 했대요. ‘내가 저 주군을 위하여 죽어야 되겠구나!’ 그것이 내가 이 폐하에 대해서 진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리고 전쟁터에서 그렇게 임금을 위해서 죽어간 것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내게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에 그것도 아주 크게 잘못했을 때일수록 그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용서하면서 살면 그것이 메아리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작은 이익에 밝아서 그것을 탐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보다 더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도 항상 그렇게 베풀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사람들에게 용서로 베풀어서 관계를 오히려 더 보존하고 돈독하게 하는 이러한 삶의 기술을 갖는다면 아마 여러분들이 인생을 지내면서 많은 동료를 얻게 될 것이에요. 여러분들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많이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볼 때에 사랑스럽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다시 보게 된 사람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잠17:17)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게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가거든요. 우리들이 경험하는 불행과 고통의 대부분이 현상적으로 볼 때에는 관계를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상적으로 볼 때 우리들의 이러한 불행과 고통들 혹은 기쁨이나 즐거움들이 관계를 통해서 오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어떻게 잘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본질적이지만 모든 고통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중에 오늘 다루어 보고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비결 혹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을 때 다시 그 사람을 자신의 관계 속에 묶어두는 비결,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돈이 많은 사람은 부자라고 그럽니다. 부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물질적인 부자와 정신적인 부자입니다.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곡간에서 인심 난다.’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마음만 부자인 것 가지고는 안 되고 물질도 있어야지만 마음의 부자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이 마음의 부요함과 그 다음에 물질의 부요함이 모두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살면서 더 필요한 것은 마음의 부요함이에요. 왜냐하면 물질의 부요함이 있어도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면 그 물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지만 물질이 없더라도 마음이 넉넉하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주었을 때 그 사람들이 정말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도움이 도움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하찮을 때도 있는 것이죠. 요즘은 제가 잘 안합니다만 요즘은 사실 내 돈을 내고 밥 먹으러 갈 경우도 별로 많지 않은데 예전에는 제가 식당에 가면 일하는 종업원들에게 꼭 팁을 주었습니다.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저 사람들에게 무슨 기쁨이 있을까? 한 달에 백만 원 월급을 받기로 하고 지금 음식점에서 일하는 것이거든요. 그 종업원들의 심정은 내가 너무 잘 알아요. 너무 사람이 안와도 짜증이 나고 너무 많이 와도 신경질이 나는 것이에요. 너무 안 와서 음식점이 문 닫으면 그만두어야 되잖아요. 너무 많이 오면 힘드니까 지겨운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아무리 손님이 많이 와도 기쁘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음식점 경영을 잘 못하는 것이죠. 오히려 우리나라 같이 팁을 안주는 나라에서는 얘기를 하는 것이에요. ‘야, 인마 하루에 백만 원어치 팔면 너 월급 백만 원이다. 백이십만 원어치 팔면 너 월급은 백이십만원이다. 하루에 이백만 원어치 팔면 너 월급 이 백만 원 줄게.’ 그러면 종업원이 얼마나 친절해지겠어요.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 오면 더 잘해주지 않겠어요. 미국을 갈 때마다 감동을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것이에요. 음식점에 가면 우리 종업원들은 골난 사람 같아요. ‘저, 우리 이층으로 올라가면 안돼요?’ ‘안돼요! 여기서 먹어요.’ ‘저기 방에 들어가면 안돼요?’ ‘그냥 홀에서 드시라니까요.’ 거기는 안 그럽니다. 자매들도 보면 땀이 송알송알 맺혀있어요. 얼마나 빨리 뛰어다니는지 유니폼을 입었는데 뒤가 땀에 젖었어요. 내가 세어보았어요. 한번 식사할 때 몇 번 오나 보았더니 여섯 번을 와요. ‘괜찮으세요? 커피 더 드릴까요? 맛있으세요? 부족한 것 없으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말 대단해요. 그것을 그렇게 윤기 나게 만드는 게 뭐냐 하면 팁이에요. 팁. 그래서 밥을 실컷 먹고 동전은 주는 것이 아니에요. 동전을 주면 그것은 멸시하는 거예요. 1달러짜리를 놓고 가면 이것은 우리말로 야, 이것도 서비스라고 하느냐 엿 먹으라는 것이래요. 모욕이래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하면서 움직이는 것이에요. 얼핏 얘기를 들으니까 월급은 천오백 불밖에 안되는데 팁으로 들어오는 게 천오백불이래요. 그러니까 음식점에서 죽어라하고 일하면 우리나라 같으면 삼백만원의 월급을 받는 것이에요.
그런데 한번 있었던 일인데 교수들하고 연수를 갔어요. 거기에 그런 것을 잘하는 교수님이 한 분 있었어요. 음식을 무엇을 드시겠어요? 역시 불친절해 보이는 아줌마 한사람이 입이 이만큼 나와 가지고 물 컵을 내려놓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교수님이 ‘아줌마! 아이고 이렇게 바쁜 식당에서 얼마나 고생해?’ 오천 원짜리를 꺼내더니 아줌마의 손에다가 쥐어주었어요. 그때가 1989년도였으니까 꽤 큰돈이었어요. 그것이 자기 돈이 아니고 공금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주었지. 이 아줌마가 한참 반찬을 가지고 오는데 주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요. ‘아, 손님이 와서 반찬을 달라면 줘야 될 거 아냐?’ 그러면서 그 아줌마가 주방하고 한판 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또 한 번 갔는데 일 년 후에 갔는데 정확히 우리를 기억해요. 대단하잖아요. 반대의 경우에는 한번 무슨 일이 있어서 식사를 했는데 그저 후줄근하게 차려입은 사연 많아 그래요. 그런데 궁기가 끼었어요. 아휴, 당신도 여기에 와서 시중을 들면서 고생이 많구나! 그러면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아줌마 고생했어요.’ 그러면서 이천 원을 주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 같으면 ‘감사합니다.’ 그럴 텐데 아무 인사도 안 해요. 그러더니 띵하고 열더니 돈 통에다가 집어넣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아줌마가 이집 주인이에요?’ ‘네.’ 아, 내가 왜 주었을까 그 아까운 이천 원을…….
우리 영래가 민주화 운동 때 피해자거든요. 총신에 그냥 최루탄을 쏘아대서 이 애가 그 가스를 마시고 폐렴에 걸렸어요. 그래서 소화아동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때 내가 시간강사로 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히브리어를 나한테 배우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내 동기였어요. 동기들이 어떻게 돌다, 돌다 나한데 히브리어를 배우는 상황이 되었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해서 우리 아들이 이렇게 병원에 입원했다고 그랬더니 우리가 가서 기도해주겠대요. 아니 뭐 바쁜데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그랬는데도 굳이 그 병원까지 따라오더니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었어요. 그리고 세월이 이십년이 지났는데도 잊히지가 않아요. 그 두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왜 그랬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와서 돈 한 푼 보태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심정적으로 외로울 때 그렇게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에요.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 때가 항상 똑같은 게 아니에요.
옛날에 내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노동 운동을 하면서 그렇게 자유당 시절에 정치도 하고 그러던 사람이었는데 그 때에 김현옥씨가 서울시장을 할 때 자기가 그 집을 찾아갔대요. 청소하는 권한을 따내기 위해서 시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찾아갔대요. 그래서 없는 돈에 갈비를 한 짝을 산거에요. 지금은 그런 것을 선물하는 사람이 없지요. 갈비 한 짝, 두 개가 이렇게 붙은 것이요. 그게 엄청난 선물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돈을 들여서 사가지고 갔더니 그것을 시장 앞에다가 보기 좋게 내놓으려고 했더니 들어오자마자 그 집의 식모 같은 사람이 ‘그게 뭐에요?’ ‘시장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이리 가져오세요.’ 들고 갔더니 창고를 딱 여는데 옷걸이 같은 게 쭉 있고 거기에 갈비 들어온 게 턱턱 걸려있는데 거기다가 걸더니 쭉 밀어버리더래요. 그런데 그것이 남이 가져온 갈비의 2/3밖에 안되더래요. 그러면서 들어가는데 시장은 그것을 가져왔는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아휴, 저것을 집에 가서 끊여먹으면 애들이 얼마나 좋아할 텐데 생색도 못 내고…….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결국은 세 가지 중의 하나 아니겠어요. 아주 좋은 인상을 주었던지 ‘아, 조남구!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 막 사귀어봤지만 사람이 서글서글하고 유머도 있고 친절하고 사람 괜찮은 것 같아.’ 이런 생각을 갖던가 아니면 ‘아무개 아유 난 그 사람에게 보태준 것은 없지만 뭐라고 형언할 수 없지만 나는 싫어. 인상도 좀 험악하고, 말투도 좀 불친절한 것 같고, 잘 모르겠어.’ 또 세 번째의 경우에는 전혀 중립적인 경우, 객관적인 경우가 아니겠어요. 그러면 이제 인상이 나쁘게 가슴에 비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 인간하고 결별하지 않으려면 이미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이 팀장,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지요! 또 반대로 이미지가 참 좋다면 그러면 그 정도로는 안 되고 좀 더 발전을 시켜야 되잖아요. 그렇지요. 자기한테 좋은 것을 얘기할 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도 개념이 없는 것이에요. 역린을 건드렸나? 중립적이면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잖아요. 그 때가 언제냐 하면 그 사람이 위기를 만났을 때 혹은 큰 슬픔을 당했을 때에요. 그래서 사람을 보면 지혜로운 사람을 보면 잔칫집 보다 초상집을 찾아가는 거예요. 잔칫집에 찾아가서 ‘아, 나도 축하합니다.’ 그러고 악수하고 와도 사람들 머릿속에 기억이 안나요. 그런데 아버지를 여위었어요.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잠겼어요. 어떤 인간 하나가 걸어와요. 그러더니 부조를 넉넉히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두 손을 꼭 붙들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러면서 ‘얼마나 슬프세요? 저도 지난해에 아버님을 여위었는데 그때의 슬픈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아버님을 일찍 여윈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손을 따뜻하게 붙잡으면 부정적이었던 인상이 거기서 만회가 되는 것이에요. 이 사람이 기분 좋을 때 와서(부정적이잖아요.) 밥이라도 한 끼 사겠다고 제안을 해요. 그러면 돌아서면서 그래요. ‘누가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냐?’ 그런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기회에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런 기회를 자꾸 놓쳐요. 한번 잘못 박힌 인상이 호전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그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직장 상사가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뭐냐 하면 맘에 안 드는 직원이 같이 밥을 먹자고 할 때 제일 힘들대요. 왜냐하면 얘는 내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자꾸 밥을 먹겠다고 하면서 선물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봐달라는 뜻이거든요. 가슴에는 다가오는 게 아닌데 제스처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은 이제 자꾸 허위가 되는 것이에요. 그게 싫은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봐요. 정말 잘 생각해봐요. 누군가에 대해서 굉장히 안 좋은 인상을 가졌거든요. 그런데 확 뒤집혀서 ‘아니야 그 사람 굉장히 좋은 사람이야 나는 이제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럴 정도로 바뀐 경험이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처음에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나중에 그것을 극복하기위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이에요.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라 아주 가끔 와요. 그게 뭐냐 하면 상을 당했다든지 그 사람이 큰 사고를 당해서 입원했든지 아니면 어떤 일로 해서 위기에 몰렸다든지 그런 게 자주 오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절호의 기회에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자꾸 놓쳐요.
내가 안양대학에 있을 때 거기 교수님이 계셨어요. 지금은 학장이 되셨는데 지난번에도 가서 만났어요. 어느 교수님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 이후부터 내 마음의 철칙이 생겼어요. 그래서 내가 아는 목사들이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찾아왔다면 그러면 나는 찾아가고 꽃다발도 보내요.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와서 십만 원을 부주했다. 나는 삼십만 원을 부주해요. 그러니까 그 교수가 하는 이야기가 그 얘기에요. 한번은 자기가 대학생이었을 때인데……. 그러니까 깨달음의 빛이 그런 식으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라도 가끔 받는 사람들은 인생을 그래도 개념 있게 사는 것이에요. 뭐가 왔느냐 하면 같은 과에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다 그 교수를 따라다니고 하는 애들이 있잖아요. 같은 과의 동아리 애들이 다 간 것이에요. 자기는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어서 거기를 못 갔대요. 그 다음날 학교를 가니까 담당교수가 자기를 부르더래요. 그러더니 ‘너 왜 그 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안 왔느냐?’ 그러더래요. ‘아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 ‘야, 이 자식아 무슨 일이 생겼는데? 무슨 일이야? 너희 아버지가 죽었느냐? 무슨 일인지 말해봐. 네가 사랑하는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네 친구가 슬픔에 잠겼는데 그보다 더 큰일이 있느냐?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봐라.’ 그 때 이 교수가 학생이던 시절이었는데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에요. 할 말이 없는 것이에요 물론 자기는 중요한 일이 생겼어요. 그런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에 비춰보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안 해도 되고 못 간다고 얘기해도 되고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이에요. 그 다음부터 자기의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연하게 깨달았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는 어디든지 간에 어쨌든 자기가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상을 당했을 때 자기는 아무리 어려워도 찾아간다는 것이에요. 내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웬만하면 도저히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웬만하면 찾아가자! 특별히 주변에 있는 목사나 동료들의 경우에 찾아가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도로 최대한 잘해주자!
최근에 목사님 한분이 돌아가셔서 제가 빈소에 찾아갔어요. 저도 그것도 주일날 갔을 것이에요. 주일날 얼마나 피곤해요. 그리고 멀어요. 그런데 찾아갔습니다. 화환도 보내고 부조금도 넉넉히 가지고 찾아갔어요. 상주가 누군지 압니까? 상주가……. 그 목사님은 나는 몰라요. 그런데 상주가 누군지 압니까? 우리 총신 신 대원 후배에요. 같은 교회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목사가 먼저 되었어요. 나는 자기보다 훨씬 연장자에요. 아무리 교회라고 하지만 후배잖아요. 나는 그때 대학 교수였고 저는 새파란 부목사가 되었는데 자기들 부목사들이 나보다 네다섯 살씩 어렸어요. 학교의 새카만 후배지요. 얘기하다가 우연히 반말이 나왔다고 얼마나 나를 혼내는지 그리고 헤어져서 생전 안 만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찾아갔어요. 사모님이 현관까지 뛰어나와서 인사를 했어요. 인생은 그렇게 사는 거예요. 아마 그런 생각을 할 거예요. 틀림없이 그 젊은 목사가 자기 아버지가 일 년 후에 돌아가셨을 때에 이렇게 바쁜 내가 찾아와서 화환도 보내고 위로하고 부조도 이렇게 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작년에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에 왔었을 거예요. 그게 인생을 지혜 있게 사는 비결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평소에 같은 노회에 있고 별로 자기도 지난날에 대해서 기분이 좋을 것도 없을 거예요. 그 때 한번 찾아오면 얼마나 서로 관계가 회복이 되요.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자꾸 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바보지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한번 꼬인 관계는 풀리지 않고 계속 줄달음질 쳐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만 싫어해.’ 이유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큰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지 않았을 때에는 감사해요. 작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때 즉시 감사하는 버릇이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아주 역겨운 것이에요. 그래서 작은 섬김을 사람들에게 받았어도 고맙다고 그것도 며칠 있다가 하지 말고 즉시 ‘정말 고맙다.’ 그것을 표현을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중심은 안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취하지만 사람들은 외모를 봐요. 그것을 표현해야 되요. ‘사실은 내 중심은 안 그런데…….’ 그것은 한 오년쯤 같이 살아본 사람이면 그게 통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심오한 통찰력으로 자기의 마음을 뚫어보고 외모에 모든 것들을 다 벗겨버리고 그 내면의 속을 봐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에요. 그것은 자기도 그렇게 못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해야 되요. ‘아! 목사님 고맙습니다.’ ‘전도사님 이렇게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바쁘신데 저를 위해서 시간을 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작은 선물을 받았는데 제게 정말 과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해요. 그러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메아리와 같이 것이에요. 그런 것이에요.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바로 그렇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힘에 넘치도록 도와주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잘못 박혔던 인상들이 깨끗이 씻겨 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항상 사랑의 빚을 지워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외톨이가 되었을 때에 그 때 찾아가서 너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평생 동안 잊히지 않는 적선이에요. 그런 것을 잘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 눈을 가지고 주변을 이렇게 보면 정말 그렇게 필요한 때가 있어요. 그래서 참 사람의 인상이라는 게 그래요. 그게 뭐냐 하면 평소에 이렇게 잘 하다가도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안 나타나면 과거에 자기를 향한 모든 호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요. 이 사람이 이렇게 평소에 잘해주었었는데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까 나도 잘나갔기 때문에 지가 그랬나보다 하고 다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반대일 경우에는 또 다른 생각을 하는 거예요. 평소에 그랬지만 아, 이 사람의 진심이 그런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그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또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삶이거든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빛이 되어서 그래서 주님께 갚으려고 했더니 주님이 그것을 내게 갚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갚으라고 말씀하셔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랑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베풀고 나누어주고 그럴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황금률이에요.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 그러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눈을 들어서 작은 일에 고맙다는 말을 늘 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깊은 위기에 있을 때, 슬픔에 있을 때 그 때에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지만 이것은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나타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고 또 삶이에요. 향기로운 생활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6.가입니까, 부입니까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2:4)
사람들이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데 누가 일부러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것은 아닌데 살아가다보면 그 사람의 사귀는 친구는 그 사람의 됨됨이와 품격을 못 넘어서요. 인격이 조잡하고 야비하면 그런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아주 고결하고 품위 있는 그런 사람들하고는 못 어울립니다. 사람이 졸렬하고 쩨쩨하면 그런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아주 호방하고 대범하고 큰 뜻을 품은 이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서 어울릴 수 없습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가운데 ‘마지막 잎새’ 라는 단편소설이 있지요. 소녀 하나가 병에 걸려 죽어 가는데 창문을 열면 거기에 넝쿨이 있어요.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이파리가 하나씩 둘씩 떨어지는데 그러면서 이제 소녀는 생각하기를 ‘저 이파리가 하나만 남았는데 저게 떨어지면 나도 죽을 거야.’ 바람도 많이 부니까 그 마른 잎에 금방 떨어지지 않겠어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소녀가 잠들어 있던 밤중에 정성껏 그 벽에다가 사실화를 그리죠. 바람이 불고 막 그런 날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아직까지도 이파리가 달려있어요. 그래서 희망을 갖고 살아났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사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의 선택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만나는 사람들의 부류까지도 좌우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이 세상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환영하는 세상이에요. 여러분들이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기질이 있기 때문에 아주 소극적이고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하나님이 쓰시겠지요. 그래서 이제 같이 어울리고 살아요. 그런데 너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에요. ‘나는 정말 능력도 없어.’ ‘나는 몸이 너무 아파.’ ‘나는 여기저기가 안 좋아서 내 직무를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정말 이런 직분을 맡지 말았어야하는데 괜히 일도 못하는 사람이 맡아가지고 이래.’ 한번 두 번 이야기하면 돋보여요. 그 사람이 뭐냐 하면 겸손하고 자기의 부족을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한번, 두 번 그럴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겸손해서 하시는 말씀이고 당신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럽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러면 아니라고 그러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떠받들어주는데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한사람, 두 사람 떠나요. 그리고 만날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은 나만 싫어해.’ 자기가 그렇게 사는 거죠. 떠나가요. 이렇게 모든 것들을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항상 그 삶의 태도 자체가 거부적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합시다. 그러면 항상 이 생각이나 사고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려면 힘이 드는데…….’ ‘돈이 많이 드는데…….’ ‘그것을 하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야 되는데…….’ 이러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죠.
언젠가 한번 우리 교회에 장로님들이 여러 사람 왔다가 갔어요. 그리고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는데 내가 친절하게 그 개 같은 글에다가 내가 진짜 사람같이 친절하게 답을 많이 달아서 보냈어요.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식당을 왜 이런 식으로 만들었느냐는 것이에요. 그것도 익명으로.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식당을 매주 이런 식으로 펼쳤다 집어넣었다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와서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그러는데 그 장로라는 사람은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렇게 조립식으로 만들면 주일이면 밥 먹기 위해서 다 식탁을 피고 의자를 날라야 되는데 평신도가 불쌍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미친놈이라고 그랬어요. ‘저런 것들이 장로를 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글에다가는 그렇게 표현을 안했어요. 그게 바로 부정적인 사람의 대표적인 본보기에요.
여러분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장로들 등쌀에 못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 등쌀이 뭐냐 하면 긍정의 등쌀이 아니라 부정의 등쌀이에요. 목사는 힘이 없는데 자꾸 장로들이 무엇을 하자고 그래서 열 받아서 사표를 낸 교회가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요. 모두 무엇을 하자고 그러면 발목을 잡고 안하겠다는 거예요. 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중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뭐냐 하면 ‘돈 쓰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었어요? 죄인인 여자가 향유 옥합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뭐라고 그랬어요? ‘저 푼수도 없이 저 비싼 것을 왜 붓느냐?’ 굉장히 경제적이고 돈을 아끼는 사람 같지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그들 속에 깔려있는 생각이 뭐냐 하면 거부에요. 거부. 부정적인 사람은 항상 거부의 몸짓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끝까지 그 일들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저항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두 번째는 비판이에요. 비판. 그래서 사물을 항상 볼 때에 공정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두운 면을 보면서 계속 비판하는 것이에요. 그래요? 그것이 하나의 성향이 되요. 자기 속에 성향이 되요. 그런 것들은 결국 뭐냐 하면 그런 것들을 안 하고 거부하고 비판함으로 말미암아 어디로 가고자하는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죠. 두려워하는 것이죠. 그렇게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하게 되면 진취적인 사람들은 그 사람하고 같이 있을 수가 없어요. 숨이 막혀서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 떠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직장에서 어떤 사람은 계속 고속으로 승진을 해요. 어떤 사람은 만년 대리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이 주제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것은 상사에 대한 수용성이에요. 그것이 승진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에요. 질문을 한번 해볼게요. 어떤 직원이 똑똑해요. 업무를 잘 알고 똑똑해요. 그런데 자신의 지시에 대해서 수용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능력은 좀 떨어져요. 그런데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지시를 수용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 남겨야 될 때에 여러분은 전자의 사람을 남기겠어요? 후자의 사람을 남기겠어요? 후자의 사람을 남기겠지요. 전자의 사람은 일을 잘 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이에요. 일을 잘 아는 것이 독이 되요. 그게 뭐냐 하면 일을 잘 알면서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상사의 지시에 대해서 수용적이지 않아요. 그러면 이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내보내는 것이에요. 업무를 잘 모르면 ‘내가 가르쳐서 쓰면 되지!’ 이런 마음을 딱 갖는 것이에요. 충격 받지 마세요. 그러니까 업무 능력은 그 사람을 쓰는 고용주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안중요해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저 사람은 능력이 있으니까 그러는데 아니에요. 그 객관적인 능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무엇이죠?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에 대해서 수용적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과 조직을 이끌어가려는 계획, 비전, 그리고 자기가 지시하는 작은 지시사항에 대해서 수용적인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고분고분하다는 뜻이 아니라), 거부하려고 하는가?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에요. 업무능력은 그 다음이에요. 그런데 능력이 있다면 고분고분하기 때문에 승진했다고 얘기하지는 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능력도 있는데 그것도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뜨는 것이죠.
이것은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이것 좀 할 수 있겠어?’ 물어보는데 사람의 태도가 둘이 틀려요. 한 사람은 딱 지시를 받았을 때, 무엇을 하자고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쪽에서는 후루룩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스쳐가는 것이에요. 시간도 내야지요. 골머리를 썩어야지요. 또 사람도 규합해야지요. 잘못하면 나중에 야단도 맞지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지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되지 못하게 하는 요인과 되게 하는 요인이 함께 있어요. 하다못해 내가 가서 이 컵에 얼음이 들었잖아요. 얼음 안들은 따뜻한 보리차를 가지고 오라고 해도 거기에는 그게 될 수 있는 요인과 될 수 없는 요인이 함께 있어요. ‘히터가 안 들어옵니다.’ 아니면 ‘뜨거운 물을 담을 컵이 없습니다.’ ‘옥수수차는 있는데 보리차는 없습니다.’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잖아요. 그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긍정적인 사람은 항상 가야되겠다는 목표를 붙들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이것 좀 할 수 있겠느냐고 하니까 대답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 할 수 있는데 시간을 좀 더 주셔야합니다.’ ‘그래?’ 한편에서는 이렇게 얘기해요. ‘시간이 없어서 접으셔야 되겠습니다.’ 이건 벌써 느낌이 틀린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 두 얘기가 똑같은 얘기에요. ‘시간을 더 주십시오.’ 그런 얘기니까 시간을 안준다면 어떻게 된다는 얘기에요? 못한다는 얘기죠. 여기는 시간이 없으니까 그만두지요. 그러는데 시간을 주면 이것은 긍정인의 표현법이고 저것은 부정인의 표현법이에요. 그런 것이죠. 그 때에 사람들은 자기 의지를 자꾸 꺾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들어갑니다.’ 그 얘기나 ‘돈도 없는데 그만두지요.’ 그 이야기는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런데 하나는 긍정인의 표현법이고 후자는 부정인의 표현법이에요. 그것을 부탁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긍정인의 표현법으로는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껴지고 부정인의 표현법으로는 자기가 배척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에요. 그런데 업무가 많이 있는데 긍정인이에요. 그런데 무엇을 시키면 고분고분하기만 해요. 항상 잘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뭐냐 하면 ‘꼭 저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기간을 더 주십시오.’ ‘꼭 해야 됩니다. 그러나 돈은 더 들어갈 각오를 하셔야합니다.’ 이게 부족해요. 한쪽에 얘기하니까. 자꾸 안 된다고 얘기해요. 그러면 나중에 이 사람 일을 이쪽으로 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물이 흐르듯이 분명히 저사람 일인데 한쪽으로 다 휘돌아서 한번, 두 번 배척당하는 것은 하지만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해서 배척을 당하면 그러면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그리고 강제하거나 더 많은 논리로 저 사람을 설득하면 이길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 이겨도 저 사람 속에는 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다고 가슴에 새겨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가슴속에 부정인이라고 새겨지면 절대 승진 못합니다. 끝입니다. 상사는 나갈 때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조조정의 때가 오면 회사에서 그런 사람들을 제일 먼저 불러서 ‘자네는 너무 좋은데 사실은 우리 회사 형편이 어려워서 나가주어야겠네.’ 다 거짓말이고 나가달라는 것만 진실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조직 생활 속에서 계속 배척당해요. 친구들도 그런 사람들만 만나게 되요. 그래서 뭐냐 하면 회사에서도 사장을 씹고 회사를 비판하는 반골들은 모여요? 독자적으로 행동해요? 모여요. 교회에서도 교회에 대해서 엔타이하고 반대 감정을 갖는 사람들이 각자 혼자 합니까? 연대를 이룹니까? 연대를 이루어요. 선하게 교회의 뜻을 함께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연대를 잘 안 해요. 그렇게 연대하려고 애써서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이 부정적인 사람들은 아주 끈끈하게 연대가 이루어져요. 그게 성경에서 당 짓는 사람들로 표현 되요. 그런데 그 에너지가 파괴력이 굉장해요.
그래서 교회에서 보면 교회에 어떤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격렬하고 그것에 대해서 긍정하고 찬성하는 사람들은 온건해요. 한사람들은 긍정적이기 때문에 열려있는데 반대사람들은 스스로 파괴적이에요.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인생자체가 그렇게 뭐가 이렇게 말라서 쭈그러들듯이 아주 쓸모없고 볼품없는 것으로 말려드는 것이에요. 자기 뜻을 펴보지도 못하는 것이죠. 그게 인상을 형성하는 것이에요.
미안한 얘기지만 여러분 모두에 대해서 나는 인상을 가지고 있어요. 사랑으로 그런 인상들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데 자꾸 새겨져 있어요. 누구는 부정인, 저 사람은 얘기를 해도 항상 안 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하면 또 안 된다고 하겠지? 그러면 내가 뭐라고 그것을 변명해야하나? 에너지가 막 들어가요. 어떤 사람은 긍정인으로 새겨졌어요. 무엇을 얘기해도 저 사람은 일단 수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항상 잘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들어가야 됩니다.’ ‘시간을 더 주십시오.’ ‘사람이 더 있어야합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수용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러면 그 사람일이 아닌데도 그 사람을 불러서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게 되요. ‘사실 자네 분야의 일은 아닌데 내게 이런 일이 있는데 자네가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서 많은 정보들을 공유하게 되요. 그러니까 일이 한쪽으로 들어가게 되요. 그러다보니까 이 사람은 행정을 맡고 있는 사람인데 회계담당자는 부정적이에요. 그런데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수용적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한테 가서 거절당하고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관리한테 물어보니까 부정적인데 행정 보는 사람한테 가서 이야기하니까 수용적이에요. 그러면 자꾸 일이 그리고 가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는 격이 안 맞아요. 그 다음에 승진시킬 때 그 사람이 일 순위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야, 저 부정적인 사람들 다 네 밑에 넣고 일을 해라.’ 그러면서 그 자리에 올려놓고 승진을 시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이에요. 안 올라가는 사람은 계속해서 배척을 당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사표를 내면 쫒아가서 팔을 잡고 말리면서 번복하라고 사정을 하고 어떤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저녁에 사표를 냈는데 오늘 밤에 수리해 버리는 것이에요. 그게 조직사회에요. 아주 냉혹한 곳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니까 친구 넷이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 계신 곳에 온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빼곡해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할 말이 있잖아요. ‘가보니까 사람이 물결치듯이 많아서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도 없더라.’ 누가 그것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얘기를 하겠어요. 그런데 해야 되겠다는 열망은, 긍정적인 생각은 창조적인 생각의 원동력이에요.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내리는 것이에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에요. 예수님이 그것을 보고 믿음이라고 그랬어요. 내 얘기는 창조적인 모든 발상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거기에서 태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보고를 하거나 사람들과 만났을 때 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도 찾아내지도 못하면서 부정인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십 가지를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인생을 바라보는 모든 시야가 항상 그래요. 그러니까 결국은 스스로 파괴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사람 주위에 남는 사람들은 누구만 남느냐하면 부정인들만 남아요. 긍정인은 그 속에 들어가서 숨이 막혀서 살수가 없어요. 너무나 갑갑해서. 그래서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고 난후에 보면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것이에요. 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만 모이는 것이에요. 다 써금써금한 사람들만 모이는 것이에요. 다 썩은 사람들끼리 모여요. 그리고 진취적인 사람들은 만나면 에너지가 막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에요.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그래서 그런 에너지가 막 들어오는 것이에요.
나는 청교도를 좋아하지만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는 싫어요. 내가 만난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인이에요. 청교도를 잘못 배운 것이에요. 청교도 안에 있는 낙관주의와 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못 배운 것이에요. 그래서 모여 앉으면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씹는 게 대교회에요. ‘사랑의 교회는 제자훈련을 하니까 틀려먹었다.’ ‘온누리 교회는 찬양집회를 하니까 그것은 꽝이다.’ ‘풍성한 교회는 두 날개를 하기 때문에 그것은 틀려먹은 것이다.’ ‘주안장로교회는 전도드라이브니까 틀려먹은 것이다.’ ‘무슨 사람의 거듭남이라는 것이 영접하십시오. 한다고 해서 영접이 되는 것이냐? 다 꽝이다.’ 그러는 것이에요. 그러면 ‘너의 답은 뭐냐?’ 답은 없어요. 계속해서 파괴적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도 무슨 설교 단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쪼개는 것과 같은 능력이 나오느냐하면 나오긴 뭐 개 코가 나와요. 다 그런 사람이고 도토리 키 재기지요. 뭐 그렇게 대단하게 나오겠어요? 그러니까 뭐에요? 사람이 모두 부정적이 되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요. 그러니까 교회가 성장을 안 한 것이에요. 개인적으로 무슨 심오한 영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냥 평균적이지 청교도를 좋아한다고 해서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늘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한번 새겨 봐요. 주위에 있는 친구들을 돌아봐요. 여러분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람이 진취적이고 긍정적이고 선한 목표를 품고 가슴에 불붙은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이렇게 칙칙하고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인 사람들인가? 생각해보세요.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여러분들의 인생은 아무 발전이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계속 불평하고 불만을 가진 사람들로서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으로 끝내게 되는 것이죠. 오늘 여기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는 것을 보시고, 그것도 이상한 것이 중풍병자를 보고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달아 내린 사람들을 보고 믿음을 칭찬을 하셨어요. 그 사람들이 긍정적이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그들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이 아닌 중풍병자의 인생을 바꾸어놓는 힘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부정인은 마주대하는 것 자체가 깊은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 그런 부정인들은 정말 자신의 장래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좋은 사람들, 훌륭한 조력자들과 동역 자들,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스스로 계속해서 처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삶의 태도를 바꿔야 되는 것이에요. 부정인이면서도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기도에서 받은 많은 은혜와 비전들이 이 부정인으로서의 기질 속에서 다 녹아서 계속해서 낭비되어 버리는 것이죠. 경향성이 그러니까 계속해서 에너지의 고갈이 오는 것이죠.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7.사랑받는 비결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3:4)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늘의 가치를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땅의 가치를 포기해야 될 때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이 지나쳐서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냐?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냐? 양자택일을 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랴? 사람께 순종하랴?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우리가 본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의 정신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이 모든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워낙 중요하게 선택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이렇게, 이렇게 해라. 그러면 하나님에게는 은총을 입고 사람에게는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람은 외모로 취하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 성경을 읽으면서 ‘아 그러니까 이 외모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중심이 올바르면 되는구나!’ 이렇게 적용을 하면 반만 맞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외모를 가꾸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중심을 희생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적용해야지만 백점입니다. 할 수 있으면 중심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고 외모도 사람들에게 받으실만할 때에 그 사람이 존 귀히 여김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이죠.
이런 사실은 다윗의 생애에서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기름은 부어주셨지만 자기가 무엇입니까? 아버지도 안중에 없어하던 그런 한미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이름이 나라를 구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하더라도 소년에 불과했고요. 또 그렇게 유명하게 알려졌다고 하더라도 인품이 뒤따르지 아니하였더라면 다윗이 왕국을 세우려고 할 때에 그렇게 많은 백성들이 따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시글락에서 왕이 된 것을 선포하고 일어섰을 때에 다윗의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병든 자, 빚진 자, 원한이 많은 사람, 사회에서 학대받고 버림받던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외모부터 귀족적이고 나라를 그렇게 다스리던 사울에게서 못 느끼는 목자와 같은 심정을 다윗에게서 느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귀중히 여김을 받아서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나라를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면 다윗이 사람들이 그렇게 추종하고 따르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 한분 앞에 살아가는 자신이 신앙의 중심을 포기하거나 변경했다면 다윗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보다는 외모를 취하는 인간에게 더 호소한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아야 되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목회자들을 만나보면 나도 그런 성품이 있을 것입니다. 남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에 호소한 세속적인 성장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자기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거나 혹은 자신의 유능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반면에 자기 교회가 잘 안 될 때에는 워낙 말씀대로 하려고 하니까 이 세대에 어필을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고 다른 교회가 잘되는 것은 세속적인 방법에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똑같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분명히 사람을 향한 태도를 고치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데 안 고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 의해 따돌림을 당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사람은 그냥 사람일 뿐이지 오래 기다리면서 그 중심의 보화와 같은 것을 찾아낼 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참아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더군다나 사회에서 부딪히며 만나는 사람들은 첫인상이 거의 인간관계를 결정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태도가 불비하면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버림을 받아요. 왠지 사람들이 나만 싫어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에요. 그렇게 될 때에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헤아려보는 것이죠. 그래서 남의 눈에 비친 나를 발견하면서 거울로 삼아서 나를 고치고 개선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해요.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 안으로 오그라들어버려요. ‘그래 나는 주님밖에 없어.’ 바보에요. 누가 주님 말고 또 있대요? 아니 태도를 고치면 되는데 자기 태도가 잘못돼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못 받는데 안으로 오그라들어서 ‘그래 나는 주님밖에 없어.’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그러시느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셔요. ‘나도 너밖에 없거든. 그런데 태도는 고쳐라.’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태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고립시켜서 외로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관계 속에 침투해서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생의 좋은 자원과 복음을 그 관계를 통해서 흘려보내는 것이에요.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샘처럼 된 우리에게서 터뜨려져서 그 물이 흘러가지 아니하면 어떻게 우리가 근원이 될 수가 있겠어요? 복이 흘러가는 것은 관계를 통해서 흘러가는 것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다니면서 하는 얘기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 사람들은 외모를 취하지만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 그러니까 그런 태도로 사니까 원서를 집어넣어도 계속 떨어지는 것이에요. 그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을 그렇게 깊이 보지 않아요.
실제로 각 회사에 있는 인사담당 간부들에게 여론조사 회사에서 앙케트를 냈어요. 당신네 직장에 새로운 사람이 와서 면접을 볼 때에 어떤 옷차림을 하느냐가 면접에 영향을 주느냐? 안주느냐? 할 때 40%가 되는 사람들이 영향을 준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자기의 사람들을 향한 태도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제가 지난주에도 얘기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인류회사들은 직원들의 유니폼을 정말 정성껏 디자인해서 좋은 것으로 맞춰줍니다. 우리교회도 좋은 것으로 했는데 호텔에서 근무하는 팀장들의 까만 슈트는 한 벌에 보통 300만원씩 한답니다. 호텔에서 겨울에 털 코트같이 생긴 기다란 금색단추가 달린 옷과 모자를 쓴 bellman들을 볼 수 있어요. 그런 옷을 한 벌에 400만원씩 한답니다. 그렇게 비싼 옷이에요. 그렇게 입혀놓고 규정대로 입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렇게 입지 않을 때 이 직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룰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이까짓 직장’ 이라는 태도로 비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누구도 그것을 매 순간 지적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데 사람의 인상이 사람들 속에 계속해서 박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후에 그 사람이 우연히 자기네 회사에 대해서 불평을 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 사람의 인상 속에는 ‘아, 원래 그 사람은 우리 회사를 같잖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지.’ 한 번도 그것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그 인상과 그 정보가 만나는 것이죠. 그럼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확 떨어지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관계들이 끊임없이 깨뜨려지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그런 얘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번져나간다고 할 때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에 대한 악평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죠. 그 사람들을 모두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져서 선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그것은 교회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러니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오죽하겠느냐는 것이죠. 그런 태도들이 고쳐져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앙의 가치를 양보하면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배신행위에요. 기로에 서서 마지막에 도저히 이 신앙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과의 평화, 사람들로부터의 좋은 평판과 귀중히 여김, 이것과 신앙의 가치를 좇는 것 사이에 추호의 타협점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사람을 버려야지요. 그 직장을 사표내고 나가는 한이 있고 사람들이 자신을 모욕하는 한이 있더라도 버려야지요. 그러나 자신이 삶의 태도를 고치고 지혜롭게 하면, 사랑이 가지면,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게으름과 패역함 그리고 자신의 그릇되고 구부러진 본성을 고치기 싫어하는 안일함이 아주 쉽게 사람들로부터 평판을 잃어버리게 하고 망가지게 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나오죠. 예수님이 지혜와 키가 점점 자라 가셨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가는 성숙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평가가 어땠어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랬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사람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속에서 성장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여러분, 어른들 중에 강포한 사람이 있지요? 뭐만 조금만 말을 하면 막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주먹을 휘두르거나 그러는 사람들, 주먹을 휘두른다고 해서 막 팬다는 것이 아니라 막 주먹을 휘두르는 것 말입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신경질을 잘 내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것이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아이들이 많이 있는데 ‘목사님 지나가신다. 인사해야지!’ 그럴 때 ‘싫어’ 그리고 버팅 겨요. 그리고 인사를 하라고 머리를 누르니까 애가 막 씩씩대면서 엄마를 주먹으로 막 때려요. 그 광경을 두 번, 세 번 보면 그 아이가 철이 없어도 나는 이렇게 가다가 피해가게 되요. 아이를 미워하거나 그 부모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피해가게 되요. 그런 광경을 재연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애가 막 울어요. ‘왜 우니? 이리와. 아저씨가 너한테 사탕 줄게.’ 그럴 때에 눈물을 훔치면서 자기의 손을 잡는 아이에게 사랑이 가겠어요? 아니면 신경질을 부리면서 골을 내는 아이에게 사랑이 가겠어요? 아이에게서부터 벌써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에도 보면 아이들이 이렇게 쟁쟁거리면서 우는 애들이 있어요. 교인들이 별로 사랑하지 않아요.
옛날에 교회에 다닐 때 얘는 누가 오라고 그래도 잘 가요. 구역예배 때에 징징거리다가도 ‘이리 오너라.’ 그러면 딱 와서 무르팍에 올려놓으면 점잖게 자기 시작해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것이에요. 어렸을 때의 태도에도 그런데 하물며 성인이 된 상태에서 사람들과 하나님에게 동시에 사랑스러워져가는 것이 할 수만 있다면 매우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거의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들은 흔히 주관이 뚜렷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개념이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모든 인생의 일들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니까요.
사실 선교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이 너희는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고 그러셨는데 그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들이 전하는 그 복음은 사랑의 복음이에요. 그래서 그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관계의 갱신이 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어요. 미움과 멸시, 분쟁이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평화로운 관계로 바뀌어요. 그런 관계의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지금 인도나 아니면 이슬람 국가 같은데서 복음이 급속하게 전해지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요? 자신들이 오랫동안 설정해놓은 이런 신분제도,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형성된 관계, 그리고 또 나아가서 자기 종교에 의해서 형성된 관계, 이런 것들이 복음이 들어가면 다 무너져서 새로 수립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이 봉건제도가 타파되고 양반과 상민의 차별이 없어지게 된 중요한 역할을 기독교가 한 것이지요. 성경에서 보더라도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 속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으나 사실은 그 관계 자체가 사랑의 관계로 변질되어서 노예제도 자체가 그 사람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그런 노예제도가 아닌 그 사랑하는 가족으로서의 관계로 탈바꿈하는 것이죠. 본질이 바뀌는 것이에요. 관계가 이렇게 바뀌는 것이죠.
그런데 자기가 좀 성화되고 고쳐지면 되는데 그것을 철저하게 노력하기 싫어서 사람은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나는 상관없다고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붙들고 살아가면 된다고 그러는데 대개 그렇게 우악스럽게 주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영성이 건강하고 맑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죠. 그러면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다고 말하잖아요? 그렇지요? 뭐 깨뜨려지는 경험을 우리 모두가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깨뜨려져도 결국 그 적용은 사람을 향해서 이루어지는 적용이에요. 그렇잖아요?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회개하고 깊이 깨뜨려졌다. 그리고 내가 주님만을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했어요. 그 다음에는 무엇인데요? 그 다음에는 섬기면서 살아도 사람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의 빛을 나타내며 살아도 사람에게 나타내는 것이고, 말씀을 가르쳐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고, 봉사를 해도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것이에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 두 관계는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에요. 자신의 마음속에 거울이 있어서 자기를 비추어보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인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사람들이 달리 보이죠?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로 조금 사랑이 없이 우리를 볼 필요가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으면서 제가 일생에 잊히지 않는 깊은 교훈을 받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비난받는 것에 대한 설교였어요. 그분의 요지는 이것이에요. ‘당신이 누군가에 의해서 혹독하게 비난을 받을 때 그 사람은 당신을 향한 사랑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비난을 받은 그 내용 속에는 물론 당신을 향한 악의와 험담, 있지도 않은 일에 대한 모함, 이런 것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당신의 진실한 모습의 그림이 그 비난하는 사람들의 언어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비난할 때에 그 속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그 모습을 아주 풍성하게 애정이 없는 사람은 볼 수 없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지만 애정이 없이 보면 애정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안 들어오는 그 사람의 단점이 보인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있는 동안에는 자기도 발견할 수 없는 단점이에요. 이것을 사람들에게서 보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대개 누가 나를 비난하면 우리 모두 그 비난하는 사람에 의해서 나에 관해 전달되어 오는 정보를 존중합니까? 무시합니까? 무시하지요.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극단은 피해야 되요. 그런 정보에 의해서 ‘아이 말이지 아무 아무개는 말이지 요새 너무 설쳐. 그리고 말이지 열심히는 한다고 하는데 사장한테 잘 보이려고 꼬리치는 거 아니야?’ 이런 비난이 들어와요. 확 무시해버리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말 그런 마음이 없는데 내가 무엇을 좀 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구나 하면서 기가 확 꺾이는 거예요. 둘 다 잘못된 것이죠.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에요.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에 대해서 나는 관심 없다는 것을 믿음을 가진 증거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너무 개념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모두는 각 사람에 대한 인상을 나를 포함해서 가지고 있어요. 아무개!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아, 게으른 사람’ 그러면 이후의 정보들은 우선적인 인상에 의해서 압도당하는 것이죠. 그래서 실제로 두 집단에게 누군가를 소개했대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하면 ‘이분은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말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요. 그리고 또 공부에도 재능이 있어서 아주 훌륭한 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아주 재능도 많아서 음악, 미술, 체육 등 못하는 것이 없고요. 회사에 와서는 영업도 아주 잘해요. 그런데 사람이 조금 속이 좁은 면은 있어요.’ 그렇게 얘기를 한 집단에서 했고. 그리고는 순서를 뒤바꾸었어요. ‘이 사람은 속이 되게 좁아요. 그렇지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거든요…….’ 그러면서 쭉 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의 인상에 대해서 적어내라고 하니까 똑같은 이야기를 순서만 바꾸었는데 전자의 집단은 우호도가 확 나타났고 후자의 집단에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하고 딱 했을 때 딱 떠오른 그 인상이 나머지의 모든 정보들을 압도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도 누구! 그랬을 때에 딱 떠오르는 생각이 ‘아, 되게 게으른 사람, 무엇을 시켜도 안하는 사람.’ 그런 인상이 딱 떠오르면 재능이 있고 똑똑하고 그런 것들이 다 무시 되요. 그런데 게으르고 그 뭔가 시켜도 일을 잘 안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박혔을 때에 그 사람이 모처럼 오래간만에 일찍 출근했어요. 그러면 ‘자기 할 일이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주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일찍 출근하면 ‘오늘도 일찍 나왔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에게 여러분들 자신이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저 수전노 일 년 365일을 가도 얻어만 먹고 쓴 커피 한잔을 안사는 저 구두쇠.’ 이런 인상이 박히면 그가 좋은 뜻에서 회사의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애를 써는 행동조차도 노랑이로 보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아마 그 정보는 쉽지 않을 것이에요. 대놓고 ‘목사님, 저는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내가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 말 잘나왔다. 다 얘기해줄게.’ 그러겠느냐고요. 내 인상에 박힌 너는 더럽게 게으르고 그리고 아주 구두쇠고 그리고 너는 뒤에서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돌아다닌다며? 증인이 세 명이나 있다. 예를 들어볼까? 내가 그렇게 얘기를 하겠느냐고요. 그 관계를 박살낼 일이 있습니까? 그 얘기를 왜 해요? ‘저 인상 괜찮아요?’ 물어보세요. ‘좋지.’ 그리고 말겠지요. 속으로는 ‘네 자신을 알라.’
오늘 성경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께 은총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비결에 대해서 두 가지가 나와요. 첫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 이 명령은 뭐냐 하면 법은 율법이고 명령은 그 율법에서 파생된 삶의 규칙들이에요. 삶의 교훈들이에요. 그 삶의 교훈들은 수없이 많아요. 그 삶의 교훈들을 잘 지키면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지혜롭게 만들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면서 그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비결에 대해서 두 번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런 명령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내면의 질이에요. 사랑과 진리에요. 사랑과 진리. 그래서 오늘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뭐라고 나오느냐하면 ‘인자와 진리’라고 나와요. 인자는 사랑이에요.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사랑이에요. 그런 자비와 그 다음에 진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꺾이지 않고 살려고 하는 단호한 진리에 대한 충성심과 함께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 이것이 유지될 때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자기의 태도가 끊임없이 고쳐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 사람들이라는 것은 자기 부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좋은 평판을 입으며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게 가장 성공하고 아름다운 신앙이에요.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는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살았는데 어디가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죠. 집사들을 세울 때 특이한 조건이 있지요. 착한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착한 사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착한사람, 이것이 사도들의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공궤하는 일군이 되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깊이 자기를 돌아보며 성찰해서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거나 부딪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때에 ‘저따위 인간이 왜 내 옆에 있어서 나를 힘들게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 살면 살수록 그 사람이 망가지는 것이에요. 그러한 기회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모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단점이 많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고치려고 노력할 때 1년, 2년, 3년 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나타내 보이면서 살게 하시는 부르심에 부응하는 삶인 것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8.책임을 다함, 지도자의 능력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견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창 40:14-15)
요셉에게 있는 특별함
직장인들이 직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잘난 척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가 지위가 높으면 권력으로 사람을 잡으나,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고작 아첨꾼일 뿐입니다. 만일 그에게 권력조차 없으면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난 척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싫어서 피하는 류라면, 책임을 전가하거나 고자질하는 사람의 곁에는 공격적인 사람이 생겨납니다.
제가 7년가량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앞의 절반의 시간동안은 직장생활이 불행했습니다. 사직서를 써서 품에 넣고 다니며 하루하루 견뎌내었습니다. 그러나 뒤의 절반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요셉과 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요셉과 같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그에게 마음이 그렇게 끌렸던 큰 이유는 요셉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변명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 때 나라의 중직의 맡고 있던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꿈을 꾸었고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몽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처지를 간략하게 말하며, 자신이 감옥을 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에 대해 아무런 하소연도,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을까요?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15절 下) 그 뒤에 이렇게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진실은 이러저러해서 누명을 받았고 정말 억울하지만 이렇게 갇혀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자질도 아니고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도 아닙니다.
은혜 갚기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보디발 때문입니다. 요셉이 처음 노예로서 애굽에 끌려왔던 그 막막한 때에 보디발은 그를 사서 자신의 집에서 거두었고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자기 집의 집사의 자리까지 내어주며 신임하였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후의를 입었고 그에 대해 보답코자 그의 억울함을 풀어내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처벌을 받는다면 보디발의 집은 풍비박살이 났을 것입니다. 집안의 명예는 먹칠당할 것이고, 보디발을 포함한 그의 가족들과 집안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질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행복을 지키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이와 같은 일을 종종 봅니다. 진실을 규명한다 하여 큰 분란을 만들어 교회가 들썩이는 형국은 마치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실이 밝혀진다면 당사자의 억울함은 풀리겠으나, 그로 인해 야기된 시끄러움을 잠재울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요셉은 그곳에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의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그의 능력을 발휘하였고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의 도량이 크고 활달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나라를 경영할만한 마음의 크기를 지닌 자의 모습입니다.
지도자의 마음의 크기
유능한 사람과 지도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유능한 사람은 어디서나 실무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영을 하고 사람을 부리는 지도자가 되려면, 유능함 위에 정신의 크기가 커야 합니다. 전제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나는 곳이 전쟁터입니다. 각 군의 참모총장은 국방부장관의 휘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전쟁이 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합동참모본부가 모든 권력을 위임받습니다. 모든 지령이 이곳에서부터 내려집니다. 육해공군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며 자기의 일밖에 볼 수 없지만, 본부에서는 전쟁의 입체적인 그림을 그리며 하나 하나의 임무를 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략가가 중요합니다. 전쟁의 승패가 이들에 의해 갈라집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매 분기마다 감사가 들어오는데, 이것이 참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일입니다. 감사를 앞두면 행여나 실수하여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까 더욱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감사를 하면서 보았던 광경이 있습니다. 타부서의 사원이 감사위원에게 이렇게 항변하였습니다. “이 일은 저번에 저희 과장님이 시키셔서 한 일입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들은 그 과장이 펄쩍 뛰면서 외쳤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언제 이 일을 시켰나,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하고 그의 변명이 죽 이어졌습니다. 지적받은 그 일이 잘 마무리가 되었다 해도 이 일은 두고두고 회상될 것이고 그 과장에게는 불명예를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떤 부서의 과장은 평소에 사원들에게 무례하거나 무관심하게 굴어 사원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 받기로 한 날 일찍 그 과장이 사원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곧 감사받게 되면 어떤 잘못이 발견되거나 밝혀지거나 해서 징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이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거든 즉각 과장인 내가 시킨 일이라고 해명하세요.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실제로 감사를 받는 도중에 어떤 잘못이 발견되면 그 진상을 철저히 규명할 터이니 과장이 책임을 떠맡고 사표를 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원 모두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겠다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은 얼마나 감동을 받았을까요. 암탉의 날개 아래 숨겨진 병아리들처럼 그 안에서 안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 부서는 타부서에 비해 더 단결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그의 형제들과 다시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7-8). 이처럼 요셉은 마음의 크기가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신임을 못 받는 자
중국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중국의 황제들 가운데 평화롭게 정권을 이어받은 경우가 참 드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궁과 나라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였습니다. 황제들은 신하들과 만날 때에도 마주하는 거리에 차등을 두었고 이것은 자신이 암살당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습니다. 신하들 중에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는지 서로 감시하게 했고, 따라서 남모르게 고자질하는 일들이 빈번하였습니다. 그러면 고자질 당한 자는 제거되었고, 고자질한 자 역시 황제의 견제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고자질하는 자는 그 순간에는 황제의 신임을 얻는 것 같으나, 경계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처럼 책임을 전가하는 자 역시 누구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그가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깨뜨려진 관계일 뿐입니다.
애매한 고난도 견딜 수 있는 힘
요셉이 꿈 해몽을 해주었던 술 맡은 관원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그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으나, 그는 복직되자마자 요셉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에야 요셉을 다시 떠올립니다. 보디발의 아내나 술 맡은 관원장은 얼마나 야속한 사람들입니까. 요셉은 그야말로 아무 잘못없이 애매히 고난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만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청을 기억하고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었다면 그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몇 년이 더 지나 요셉이 바로 왕의 앞에 나아간 때는 그의 나이 30세로서 관직에 등용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이었습니다.
요셉이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억울함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진실을 그대로 털어놓았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하였을 것이고 그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홀로 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낙천적인 사람이었고 신앙의 힘 때문에 그러할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어도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니 간수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만을 바라자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었고, 단 한 사람도 불행하게 하거나 잃지 않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복의 근원이 되자 모두가 그의 신세를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복의 근원이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9.섬기는 자의 열망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사랑스러워지고 싶은’ 욕구
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훌륭히 준비되어 쓰임 받는다면 그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도 복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면서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이 일을 맡기면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로 사람은 대개 자신의 능력을 좀 더 낫게 평가하여 좀 더 어려운 일에 도전하려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발전의 기회를 주시면서 그를 쓰십니다. 일에 적합하도록 사람이 만들어져 갑니다. 그런데 능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두드러지게 발전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발전 속도가 느린 것은 왜일까요? 후자의 사람은 자신이 상사에게 사랑받고 칭찬 받는 것은 ‘유능해서’이고, 다른 사람이 사랑받는 것은 그가 ‘아부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상사의 핍박과 무시를 당하는 것은 자신이 ‘올곧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이 핍박받는 이유는 그가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삶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학습이론 원리 중에 학습이 효과적이기 위한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학습 효과가 높아지려면 피학습자의 학습에 대한 욕구가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픈 욕구가 높을수록 부딪히는 사건들과 어려움이 학습의 기회가 되고, 그는 끊임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잘 배우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여기고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학습하고 배워서 자신을 고치려는 욕구가 전혀 없다면 발전할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사랑하는 학생은 어떤 학생일까요? 그 과목의 톱을 달리는 학생일까요? 꼭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그 이상으로 선생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학생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고 3이던 시절에 학교에 악명 높은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학생들을 얼마나 몽둥이로 다스렸던지 그분의 별명이 ‘똥물’이었습니다. 한 번 걸리면 똥물이 튀기도록 매 맞는다고 붙여진 것이지요. 그 당시 저는 영어 공부에 재미 붙어서 New York Times나 Washington Post를 사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신문을 보다가 해석이 잘 안 되는 곳이 있으면 밤늦은 시간까지 선생님을 교문에서 기다려서 여쭙곤 했습니다. 어둡고 추운 겨울 밤, 길거리의 가로등불 아래서 선생님과 영어 해석을 하기도 하고 그 글을 가지고 토론을 하다 보니 선생님과 제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이후로 선생님은 저를 유독 아끼고 사랑해주셨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저는 지금도 선생님께 연락하며 안부를 여쭙고 인사드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직장에서 사랑받는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잘 배우려는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다. ‘나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고쳐야 할 점이 너무 많아.’ 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면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선생이며 삶이 학습의 장이 됩니다. 마주치는 사람이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나를 능가하는 ‘한 가지의 장점’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나의 스승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시기하고 자신을 비하하여 좌절하면서도 자기 삶의 스타일과 고정관념을 고수하려는 마음은 더욱 굳게 다집니다. ‘내가 좋은 대로 한다, 내 뜻을 굽히지 않으리라’ 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그의 곁에는 친구라 부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됨을 보면서 그의 장점을 배우려고 합니다.
직장에서 누군가 부서를 옮기거나 해서 송별회를 하면 그의 사람됨이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가 떠나는 것을 서운해 하고 아쉬워하는 반면 혼자 쓸쓸히 짐을 꾸리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가 어떤 ‘덕’을 쌓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 좋을 대로’하는 사람이 만일 권력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지만, 마음으로부터는 소외된 관계를 맺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배우려 해보십시오. 자신이 변하고 발전합니다. 그렇게 배우려는 마음과 태도가 그를 돋보이게 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매력적인 사람 되기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윗사람과 동료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말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매력적인 사람인가’ 자문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숙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자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7,8개월에 걸쳐 제게 심리학을 가르쳐주었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제법 오랜 시간을 만나 공부했는데도 제가 눈이 몹시 나빠 얼굴의 생김새를 잘 기억하지 못해서 다른 장소에서 마주쳤을 때 알아보지 못하여 미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그 자매의 결혼 소식을 접하고 미안한 마음에 화환을 선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잊고 지냈는데, 몇 달 후 부산에서 있었던 집회에서 자매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가 제게 건네준 것은 자매가 정성스레 쓴 편지였습니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결혼이라는 기쁜 출발점에서 목사님의 화환을 받으니 기쁨이 더욱 컸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꾸지람을 받았을 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을 바꾸려는 의지를 가진다면 그와 상사의 관계는 돈독해집니다. 그러나 말로만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할 뿐,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그가 내뱉은 마음에 없는 그 말이 상사에게도 전달되어 그들의 관계는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부산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저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지나온 많은 세월을 허송했구나!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구나.’ 한 신자의 태도가 온전하면 다른 사람의 잘함을 보고 닮으려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경계를 삼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을 구하면서 더욱 잘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출간된 저의 새 책을 접한 교인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지성적인 헌신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절감했습니다.’ 지성적 헌신도 자신을 고치려는 노력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찬송가 349장을 모두 아실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 찬송을 부르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고치며 온전해지려는 노력이 없으면 자기연민에 빠질 뿐입니다. 그러나 노력하고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자신이 미웠던 사람,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슬펐던 사람이라면 이 찬송은 영혼을 울리는 노래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위로가 그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예전에 오랫동안 섬겼던 교회를 떠날 때였습니다. 담임 목사님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는데 저의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잘 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섬기던 교회를 떠나서 송구합니다.’ 그 때 담임 목사님의 위로가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아닙니다, 전도사님. 좀 열심히 하셨습니까….’
자신의 지혜 없음을 통감하여야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오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는 찬송은 그의 마음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겠습니다. ‘좋으신 주님, 지혜와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싶은 열망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사역에 누가 되지 않게 하소서.’
개념없음에 관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