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세우는 말, 허무는 말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별식과 같은 뒷담화(잠18:8) 2007.10.7 주일오후 1
2. 입술을 다스리라(잠18:6) 2007.10.14 주일오후 8
3. 입술 벌린 자(잠20:19) 2007.10.21 주일오후 14
4. 영혼을 보존하라(잠21:23) 2007.10.28 주일오후 20
5. 입술은 마음입니다(잠15:7) 2007.11.4 주일오후 25
6. 정결케 하는 말(잠15:26) 2007.11.11 주일오후 30
7. 감사의 말로 드리는 찬송(시147:7) 2007.11.18 주일오후 35
8. 지식과 입술(잠10:21) 2007.11.25 주일오후 40
9. 이익없는 수고(잠14:23) 2007.12.2 주일오후 44
1.별식 같은 뒷담화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 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18:18)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많이 흘러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먹는 것입니다. 아마 다른 모든 욕구보다도 가장 뛰어난 욕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체가 살아 움직이려면 에너지가 필요 합니다. 그래서 식물들은 광합성을 통해서 거기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데 우리 인간과 같은 동물은 무엇을 먹어서 그것을 위속에서 잘게 부수어서 소화를 해서 여기에서 ATP라는 화학 에너지를 얻어 냅니다. 그것을 가지고 몸 안에 있는 기능들이 움직이는데 필요한 연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먹는 문제는 생명의 문제하고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것을 제대로 못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먹고 살기만 하면 만족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가난하던 시대에는 하루에 밥 세끼만 먹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원이 없다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만 채워지고 나면 인간의 욕구는 계속 상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말에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미르하마'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하고 어근이 같은 것이 '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이라고 할 때 그 '레헴'입니다. 떡입니다. 떡하고 전쟁하고 무엇인가 상관이 있다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렇게 치열한 생존경쟁 그리고 정상적인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아주 야비하게 경쟁해서라도 무엇인가를 뺏어야 되겠다라고 하는 치열한 경쟁 이것들은 결국 떡을 차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양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식이 문제는 생존을 위한 양식이면 그렇게 많이 소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점점 더 욕구가 높아져서 좋은 음식,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가만히 어느 날 생각해 보니까 참으로 허무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음식을 먹는데 그것을 맛있다라고 느끼는 것이 몇 초나 될까요? 일단 목구멍을 넘어가면 맛을 못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맛을 느끼는 것이 혀에 있는데 혀가 길다랐게 있는데 맨 뒤에서부터 쓴맛, 양쪽의 신맛, 짠맛, 단맛을 맨 앞쪽에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단것을 속에 집어넣으면 단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혀를 스쳐지나 가면서 이동 중에 조금씩 맛을 보여주고 목구멍으로 넘어 가면 그 맛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화) 얼마 전에 우리교회 부목사님 한사람하고 주례를 설 일이 있어 예식장에 갔습니다. 저는 가면 당연히 밥을 주는지 알고 갔는데 예식이 다 끝나야 밥을 준다고 해서 "그럼 나 오늘 점심 굶는다. 그냥 이 호텔에서 간단한 것 아무거나 먹자" 해서 들어갔는데 가서 눈을 한참 비볐습니다. 메뉴를 가져 왔는데 45만원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45만원 인가 했더니 조그마한 쇳덩어리에다가 전복하고 고기 조금 넣고 자글자글 끓인 것이 45만원인데 1인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이 먹으려면 90만원입니다. 그래서 이것 하나 먹고 한 달 동안 물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제일 싼 것을 찾았습니다. 순두부찌개가 제일 쌉니다. 그런데 먹고 나오는데 순두부찌개 두개 시켜 먹었는데 76,000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맛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맛이 있어도 그렇지 그것이 그 집에서 제일 싼 것인데 냉면이 두 그릇에 76,000원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호텔 다녀 봤지만 이런 데는 정말 처음이다. 그리고 둘이서 투덜대면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뉴판을 한참 보았습니다. 45만원부터 시작을 해서 제일 싼 것이 세금 빼고 3만 몇 천원까지 있습니다. 5천원이면 나가서 먹을 수 있는 순두부찌개인데 두부에 금가루를 넣은 것도 아니고 왜 이리 비싸냐? 먹으면서 계속 투덜대면서 먹었습니다. 조개 건지면서 이 조개 한 개에 얼마일까?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하여튼 목구멍으로 색다른 것이 들어오면 빨리 땡기는 것입니다. 뱃속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저희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그러셨습니다. 만두를 참 잘 빗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그 만두 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 손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맛이었습니다. 만두를 먹으면서 할아버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양반이 그렇게 밥 먹기 싫다고 하다가도 이렇게 김치를 두들겨서 두부를 으깨 만두를 빚어 주면 그렇게 잘 드셨다고 하시면서 거기에 고기라도 있어 끓여서 국물을 내면 할아버지가 드시면서 "오늘은 이 고기가 밥을 채찍질 하는구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여기서 이야기 하는 별식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영적인 거목이 백 몇 개의 결심문을 썼는데, 결심문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되겠다라고 마음먹은 것을 위해서 때로는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결심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것을 평생에 백 몇 개를 썼습니다. 그중에 여덟 개가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그것이 극복하기 어려웠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과식입니다. 그래서 반성문을 쓰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그래도 나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잔칫집을 가면 잘 안 된다. 잔칫집은 분위기가 먹는 분위기이고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고 그것은 두 번째 요인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1,800년대이니 가난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에 보면 잔칫집에 가서 음식물을 주인 몰래 싸가지고 가는 것은 도둑질이라는 설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그 당시에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잔칫집은 틀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영적인 거장이 과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고백록에서 정말 너무너무 괴롭다 자기가 방탕하게 살았지만 주님께 회심을 하는 순간 잠자리를 끊었는데 이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면 몸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럼 먹어야지 하는데 공정하게 건강을 생각하는 것과 식도락으로 바뀌는 것 사이를 자기는 구분 할 수 없어서 매일매일 괴로운 심령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별식은 음식을 우리의 위에서 음식을 확 잡아 당기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별식입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별식 같은가 하면 남의 말 하는 것이 그렇게 별식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나는 안 그런데... 남의 말 별로 관심 없어." 이러면 여러분들은 인생의 풍파를 덜 만날 사람들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자의 말'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을 하는데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혹은 그 말을 하는 당사자에게서나 별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맛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좀 이해가 안가는 편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모이면 막 열을 내고 큰소리를 내고 싸워서 가만히 들어 보면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 가지고 서로 의견 충돌을 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 인간에게는 소위 이야기하는 대리만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잘 되었다 라고 할 때 그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자신도 잘 된 기분을 느껴 보는 것입니다. 안된 이야기를 막 하면서 자신이 마치 그 사람 위에 서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오늘부터 주일마다 차근차근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뱃속으로 내려 가느니라 했으니까 남의 말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강한 매력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 안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그런 성향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사람은 긍정적이고 좋은 이야기는, 이것을 뒷담화라고 하는데 남이 안보는 뒤에서 이런 이야기 뒷담화를 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매우 즐거운데 그 즐거운 것들이 긍정적인 대화 속에서는 즐거움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대화 속에서 즐거움이 가속화 되는 것입니다. 호기심과 즐거움이 가속화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얼마나 시시한지 제가 시범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무개 집사 있지 너무 너무 훌륭해" "그래 뭐가?" "기도도 그렇게 열심히 하고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고 예절도 아주 깍듯하고.." 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맞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옆에 사람들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시무룩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렇게 조신하지도 않고 신앙도 별로 없고... 그런데 누가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에이 안 그래 얼마나 못 되먹었는데."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뭐가 못됐는데?"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집안에 가니 개꼴이야! 살림에 관심이 없어" 옆에서 "어쩐지 그 남편 최집사가 별로 안색이 안 좋더라." "이혼을 생각한다는 소리가 들려" 그러면서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안양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골목을 지나간다고 하더라 했을 때 그것을 보겠습니까? 멧돼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수락산에서 뛰어 내려 왔다가 교회 앞에서 트럭에 치어 죽었습니다. 둘 중에 무엇을 사람들이 많이 볼 것 같습니까? 전자 입니까? 후자 입니까? 후자입니다. 쳐다 볼 때 어느 것을 보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얼굴이 예뻐서 안양에서 미스 코리아 나가려 했다가 말았다는 여자, 그 여자를 보는 것이 기분이 좋겠습니까? 트럭에 갈려 머리가 터진 멧돼지의 시체를 보는 것이 기분이 좋겠습니까? 전자 입니까? 후자 입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후자를 보려고 더 모일까요? 호기심입니다. 타락한 다음부터는 이 호기심이 긍정적인 쪽으로 발동을 안 하고 부정적인 쪽으로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실제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어느 음식점이 음식을 맛있게 하면 아홉 명까지 전파가 되고 끝난다고 합니다. 6개월 동안에... 그런데 음식이 맛이 없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떠들면 6개월 동안에 24명이 전파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음식점을 해서 입소문이 나서 성공을 하는 것은 시간이 한참 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 잘못되어서 문을 닫는 것은 아주 신속히 문을 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내려 간 것은 다시 올라 오려면 간판을 바꾸어 달고 주인이 바뀌거나 아니면 다른데 가서 하지 않는 한 거의 회복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면 인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 타락한 다음부터는 긍정적이고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것들을, 남의 고통을 이야기 하는 것들을 아주 즐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이 펼쳐 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제일 먼저 손해를 보게 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 뒷담화를 당하고 있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렇게 험담하며 말을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커다란 영혼의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손해를 보게 되냐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게 되는데 그 일이 처음에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한번 하고 나면 그 일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담하게 커다란 범행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마음이 경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람 속에 계속 남아서 어떤 필연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꾸 하다 보면 성향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서 거품을 물고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자신의 영혼과 마음이 제일 먼저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우리가 도둑질을 했다든지 누구에게 폭행을 했다든지 하는 것은 회개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잘못이고 그 피해를 본 것이 현실적으로 남아 있으니까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이 됩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이 말의 실수가 많은 것 때문에 뼈저리게 회개 기도해 본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여러분들이 말의 실수를 해서 굉장히 커다란 손해를 입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회개까지는 안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심각성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하면서 그것을 별식처럼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기만 먹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 갈 때에는 항상 해석을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구르고 굴러서 처음에는 전혀 없었던 말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은 법적으로 말하자면 경합법입니다. 그래서 공동정범 그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이 사람이 말을 하고 옮기고 옮기면서 마지막에 큰 어떤 말이 되어서 어떤 사람에게 큰 해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굴러가는 이것은 마지막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처음에 시작해서 거기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화) 지금은 죽었는데 제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군대를 가서 전방 산꼭대기에서 면회를 오면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3시간이나 걸리는 1,300미터 꼭대기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 생활을 잘 하고 제대가 두 달 밖에 안 남았는데 한 달 있으면 제대할 선배한테 얻어맞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군대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줄방망이를 친 것입니다. 그래서 때리는데 어느 순간에 내가 제대 두 달을 남겨 놓고 이것이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때리다가 몽둥이를 내려놓으면서 너희들끼리 해라. 난 들어가서 쉬겠다. 그리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기수가 나와서, 줄방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데 여성도님들은 안 맞아 보았겠지만 제일 선배가 한번 때리고 지나가면 그 다음 선배가 때리고 지나가고 그 다음 선배, 그 다음 선배 계속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한번 얻어맞고 때리다가 그냥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줄방망이를 친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자R;가 때리고 내가 뭐하는 짓인가 하고 몽둥이를 던진 그 앞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법적으로 그 사람에게 손을 댄 것은 모두 공범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맞아서 죽었다는 것이 입증이 안 되니까 마지막 사람이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서 앞의 사람이 안 때렸으면 안 죽었을 것 아닙니까? 또 앞의 사람이 좀 세게 때렸어도 뒷사람이 안 때렸으면 안 죽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이것이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김병장님은 이 앞에 사람들만 때리고 몽둥이를 내려놓았습니다 하고 증언을 해 준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른 나쁜 말을 할 때 커다란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재미있으니까 거기에 보태고 보태서 말을 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굴러가서 마지막에는 어떤 사람에게 쾅하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한번 해본 이야기이고 나도 모르지만 그냥 전해보는 거야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것이 굴러가서 마지막에 사람에게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 혹은 평판을 상실 시키거나 나아가서는 그 사람의 재산을 상실 시키는 망가뜨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크게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한 벌을 자신이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자기의 영혼에 주는 남의 말 좋아 하는 사람이 받는 가장 커다란 손해입니다. 그리고 보면 입을 헤벌리면서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가운데 깊은 영성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귀로 받는 은혜의 이 금싸라기 같은 은혜를 입으로 확 토하듯이 쏟아 버리는 것입니다. 또 귀로 좋은 것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과 섞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삶이 거룩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지도자는 절대 입이 큰 사람을 옆에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말을 많이 하고 남의 말 옮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 가든지 다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모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좋아해서 모인다기 보다는 그냥 쓰레기통에 파리들이 잠깐 모이는 것입니다. 파리가 쓰레기통을 사랑합니까? 그래서 결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는 것 같지만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외톨이가 되는 법입니다. 아무도 진심에 있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야기하면 결국은 그 이야기가 흘러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 두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그렇게 남의 말을 하고 다니면서 분란을 일으키고 마음의 상처를 주는 사람은 성화가 되지 않습니다. 성화될 겨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화라고 하는 것은 귀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머릿속에서 소화가 되어서 가슴으로 내려와서 가슴속에서 체질을 변화 시켜야 하는데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 입으로 쏟아져서 밖으로 토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무리 진귀한 음식을 아이의 입에 떠 넣어 준다고 하더라도 먹자마자 그것을 토해 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좋은 음식이 아이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마치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남의 험담을 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다음 주부터 차례대로 나가겠지만 우선 영혼이 그에게 해를 끼칩니다. 영혼의 해를 끼치고 피해를 당하는 그 사람의 악한 상황에 대해서 공동정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쁜 결과를 가져 오는데도 그렇게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데 는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그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뭐냐면 그 사람 속에 있는 타락하고 더러운 정신을 말을 통해서 배설하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입을 열고 그 사람의 입에서 향기로운 말이나 아름다운 찬양이 아니라 변이 쏟아져 나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쾌하고 더러운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지각이 없는 험담이나 말들은 바로 입을 열면 거기에서 말하자면 변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결국은 자신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더럽히고 그런 아내를 데리고 사는 남편의 명예가 먹칠이 되고 그런 남편하고 사는 사람은 아내가 정말 수치스러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 입을 가지고 잠시 후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찬양을 올릴텐데...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집안이 갈등이 생겨서 미움과 갈등 속에서 찢어지고 상처받은 그 마음이 되었을 때에 그렇게 찢어지고 상처받은 마음이 되었을 때에 교회가 시험이 들어서 막 찢어지고 고통을 당할 때 보면 마지막에 들어 있는 것은 말입니다. 그것들이 꼬리를 물고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사단의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어서 얼마든지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일단 말에 의해서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싫은 것입니다.
(예화) 제가 한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와서 이렇게 어깨를 다독여 주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사랑의 행동 입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름철에 수영복이라도 입었는데 등이 뜨거운 태양 빛에 타서 피부가 염증이 생겨서 곪기 시작했다거나 어디 긁혀서 껍질이 다 벗겨진 상태에서 간신히 있는데 거기에 누가 와서 사랑한다고 두들기면 아마 기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게 되면 와서 평상적으로 사랑하는 손짓으로 두들겨 주어도 거기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속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계가 나왔습니다. 대부분 여자들이 이혼을 결심할 때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 수 있는데 저도 어디서 건네 들은 이야기 인데 제가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를 설교를 했는데 집에 가서 남편이 그러더랍니다. "여보 우리 목사님은 정말 이상해? 아니 뭐 해당되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그런 설교를 하는지 몰라!" 하니까 부인이 있다가 "여보 나 생각 많이 했거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가도 마지막에 이혼을 결행하는 것은 남편의 한마디의 말입니다. 남편의 한마디의 말에 어느 한 순간에 이성적인 판단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무모한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사실 이 주제가 열린 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인간 세상이 그렇게 험한지 몰랐습니다. 개척 초기에 하나님 정말 영혼들을 보내 달라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한 양을 보내 주시면 내가 품겠다고 했더니 정말 목자 잃은 염소들이 가득 모였습니다. 그렇게 험하게 살았기 때문에 주님을 전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은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그 거칠기 짝이 없는 상처 받은 심령이 그대로 부패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그런 공동체를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정말 절제가 없는 말 앞에 은혜고 뭐고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때부터 제가 말이 장난이 아니구나하고 말 시리즈를 13년 동안 두어 번 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의 말과 영적생활’ 이것은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여러분들은 이제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온 몸이 은혜의 물에 잠길 때, 물속에만 들어가면 소금에 절여 지듯이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는데 우리의 온몸의 지체 중 끝까지 안 들어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소금물 위에 그것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의 입술을 제어 할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해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손은 금방 복종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화투치던 손으로 교회에 와서 단무지 담근다는 것입니다. 발도 잘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대포집 다니고 까불던 발이 순종해서 교회에 와서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입이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지체가 은혜의 물에 들어가자고 하는데 입은 물위에 뜨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몸부림을 치면서... 그래서 안 잠기는 것입니다. 깊이 반성을 해 보십시오.
(예화) 제가 5-6학년 되었을 때 죽을 뻔 했습니다. 그때 아직까지 수유리에 포장이 안 되었을 때인데 무슨 일로 그곳에 갔습니다. 그때 여러분 가게문 닫을 때, 지금이야 스위치를 누르면 셔터가 내려오지만 옛날에는 나무로 짜서 함석으로 만들어서 퇴근할 때쯤 되면 문에 끼우고 열쇠로 잠갔던 것 기억나십니까?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도로가 아직 포장을 하지 않고 울퉁불퉁한데 비가 조금 왔습니다. 그리고 날이 게이니까 땅의 돌멩이들이 다 올라 온 것입니다. 좀 천천히 차를 몰면 어떻습니까? 어떤 트럭 운전수가 막 털털 거리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맥없이 지나가는데 푱하고 얼굴 앞으로 무엇인가가 지나 가는 것입니다. 진짜 간발의 차이였습니다. "으악"하고 피했는데 날아가서 그 함석 문 닫는 데에 광하고 부딪히는데 진짜 주먹하나 들어갈 정도로 구멍은 안 뚫렸는데 푹 찌그러진 것입니다. 하도 신기해서 내가 가서 보았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주먹 반 만한 아주 날카로운 돌멩이입니다. 그것을 트럭이 지나 가니까 밟고 지나가니까 옛날 타이어는 요즘 타이어와 다르게 좋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끼었다가 팡하고 날아간 것입니다. 그것이 뭐 운전수가 정교하게 그 돌멩이 밟아서 지나가는 초등학생 뒤통수를 맞혀야겠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맞았으면 오늘 여기서 여러분들 못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몇cm 차이로 나를 살려 주셔서 이렇게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만약에 뒤통수를 맞아서 정신 이상이 되었다든지 하면 어떻게 할뻔 했습니까? 아마 운전수 찾아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하는 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책임지지도 않습니다. 돌고 도는 말에 대해서 누구의 책임이냐고 결국은 규명해 내지 못하겠지만 규명 한들 그 인간보다 수십 배 악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를 죽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의 절제가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자기반성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쏟아 놓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직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막 재미있게 이야기 하는데 누가 옵니다. 그러면 직원들이 "야 빅마우스 온다" 빅마우스가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입 큰사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반성이 없는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술을 잘 지키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말에 의해서 영혼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를 구하며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옵소서 하면서 잠언에 보면 그 앞에도 나오는데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흐르는 냇물과 같다 휘둘려 흐르면서 그 계곡들의 아름다운 꽃과 풀과 나무들을 자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주 쓴물을 내는 샘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화의 삶속에서 잘 훈련하여 여러분의 지체가 온몸이 기뻐하는 하나님을 입술로 버리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성화의 생활에 힘써서 여러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고 지혜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입술을 다스리라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18:6)
말이 모두 나쁜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방배동에서 처음으로 노회에 가입할 때 일 이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가고 싶은 노회가 있는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관계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냥 법이 정해주는대로 가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노회라고 하는것은 교회가 세워질때부터 노회의 허락을 받아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지만 사실 요즘 보면 노회에서 작고 힘없는 교회들이 들어오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단에 가입을 안하고 그냥 열심히 교회를 하다가 이사도 하고 예배당도 생기고 했으니까 이제는 명실공히 교단에 가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500여명 모일때에 노회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특별한 노회에 가입하겠다는 정치적인 의도나 계산이 없었기 때문에 부교역자를 시켜서 우리 주소를 알려주고 총회에 어느 노회로 들어가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동서울 노회로 들어가라 해서 동서울 노회에 들어가겠다고 절차를 밟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교회와 충분히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추천서를 받고 노회의 서기나 시찰자나 목사님들을 일일이 찿아 다니면서 교회가 들어오려고 하니까 어떻게 수속을 밟으면 되겠습니까 하고 한주간 동안 따라 다녔습니다. 그렇게 결국은 서류를 꾸며서 우리 교회를 받아 주느냐 마느냐 하는 노회의 날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갔으니까 저는 당연히 교회가 그렇게 작지도 않고, 강남의 서초구에 있고 또 총회에서 시키는 대로 갔으니까 당연히 받아 주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우리교회가 들어가는 것을 놓고 된다 안된다 옥신각신 하면서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논쟁이 무엇인가 보았더니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이쪽으로 들어 올 수도 있고 저쪽으로 갈수도 있는 애매모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제가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여기에 들어오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나는 아무대나 보내주면 거기에서 열심히 하겠는데 이렇게 안될것 같으면 총회에서 처음부터 가지 말라고 했어야지 총회에서 시키는대로 원서를 집어 넣었더니 담임목사 앞에 놓고, 물론 그때는 담임목사도 아니었지만 목회자를 앞에 두고 목사님들이 서로 큰 소리를 하면서 되니 안되니, 원칙이 무너지니 그것은 원칙이 아니지 하면서 계속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좌불안석입니다. 그때 어른 목사님이 나오시더니 한마디로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게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저 교회가 여기에 들어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으며 만약에 이것을 문제 삼으면 총회 전체에 문제가 너무나 많다. 그러니까 그냥 해주자 이렇게 하니까 그 논리에 의해서 모든 회원들이 동의를 해주어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경우의 그 말은 듣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건져주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굉장히 서먹하고 어려운 관계속에 있을때에 그때 던지는 한마디의 친절한 말은 끊어질 관계를 다시 이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 디베리아 바닷가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날도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못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고기를 잡았더니 많은 고기를 낚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다 하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였는데 사실 가만히 생각하고 보니까 굉장히 어색한 순간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첫 번째 나타날때는 거기에 없었고 두 번째 나타날때도 개인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세 번째 나타나셨는데 얼마나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긴장이라 할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시 고기를 잡겠다고 뛰어 나가서 결국은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엮기어진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쑥스러웠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마 교회 떠났다가 다시 온 교인이 담임목사 만나는 그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속 침묵하고 계셨으면 그 분위기가 얼마나 어색했겠습니까? 예수님이 너희들 가운데 고기를 조금 잡은것이 있느냐 하고 물어 보셨습니다. 기다렸다는듯이 고기를 대령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의 서먹한 분위가 깨지고 다시 화해속에서 서로 감정이 오갈수 있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한마디의 말 입니까?
(예화) 직장 다닐때 일이었습니다. 저는 직장다닐때도 예수님 믿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커다란 사무실에 앉아서 저하고 후배하고 앉아서 일을 하는데 우리 둘다 노래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조그맣게 노래를 부른다 하는 것이 노래 소리가 점점 커져서 커다란 사무실을 울리면서 그때 퇴근할 사람은 퇴근하고, 야근할 사람들은 야근하면서 남아있는 밤 8시에서 9시는 거의 된 시간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직원이 저쪽에서 투벅투벅 걸어 왔습니다. 그러더니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서 제 마음속으로 우리가 실수 했구나, 우리가 남들 일하는데 너무 큰소리로 노래했구나 하면서 우리는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걱정이야 하고 있는데 뜻밖에 이 아가씨가 하는 말이 “저 죄송한데요 조금 크게 불러 주시면 안돼요?” 그래서 “왜요?” 하니까 “두분이 노래하는 것이 건물에 전체적으로 울리면서 우리가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조금 더 크게 불러달라고 직원들이 부탁을 해서 제가 대표로 왔습니다.” 이런 한마디의 말은 얼마나 기분이 좋은 이야기 입니까?
엊그제 텔레비전 인터뷰를 갔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통치로 인터뷰를 하는데 인터뷰 하시는 분이 대게 책도 안읽고 덜렁덜렁 오는데 그래서 어떨때는 인터뷰하다가 짜증이 납니다. 왜냐하면 바보같은 질문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저자로서 인터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빨리 끝내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책을 아주 꼼꼼하게 탐독하고 더군다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는데 어쩜 그렇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면서 20분 녹화하기로 했는데 40분 녹화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정말 제 생애에서 이 책을 만난것은 감격입니다. 제가 가르친 성경공부 모임이 한 300명쯤 되는데 이것을 모두 레포트로 내줄 것입니다.” 기분이 얼마나 좋습니까? 왜냐하면 그 책을 피를 말리듯이 쓰고 제가 이 체력으로 삼일밤을 세웠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밤을 못세우는데 그렇게 썻는데 어렵다고 타박만하지 자기들 머리가 나쁜것은 생각을 안합니다. 노력을 하면 되는데... 더 쉽게 쓰지 그랬냐하는데 그것이 말은 쉽지만 굉장히 어렵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만약에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 일어난 재미난 시트콤 같은 이야기를 논문으로 쓰라고 하면 여러분들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똑 같습니다. 논문으로 쓸 수 밖에 없는 사상적인 깊은 이야기를 시트콤처럼 게으름처럼 쓰면 그것은 생명을 상당부분 죽이지 않고는 그렇게 안되는 것입니다. 설렁탕은 뚝배기 그릇에 담아 먹고, 냉면은 도기 그릇에 담아 먹고, 고추장은 항아리에 그리고 커피는 예쁜 커피잔에 그렇게 담아서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생을 해서 책을 쓰고도 사람들이 별로 읽지를 않으니까 사실은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책 많이 읽었습니다 해서 도덕적 통치 읽었느냐 하면 “그것만 빼 놓구요” 이러니까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렇게 열심히 읽고 온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데 그냥 입술로 하는 소리이겠지만 귀에 대고 “목사님 이번 책을 읽으면서 느꼈는데 목사님은 천재에요” 얼마나 듣기가 좋은 이야기 입니까? 사실은 그것이 천치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어렵게 썼냐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우리에게 있어서 적합할 때에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윤활유와 같습니다. 이것을 잘 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많이 얻습니다. 그래서 늘 주위에 덕을 쌓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늘 말이 많으면서 문제를 안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거의 목석입니다. 말이 없습니다. 과묵합니다. 그런데 몇년만에 한번 입을 열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것이 미련해서 그런 것입니다. 미련하다고 하는 말은 지혜롭다의 반대말입니다. 그럼 지혜로운것은 무엇일까요? 지혜로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신 때문에 사물들의 모든 질서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가르켜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도 지혜는 공부하고 틀립니다. 그래서 제가 늘 쓰기 좋아하는 비유로 지식은 구슬이라면 지혜는 꿰임입니다. 그래서 그 구슬을 꿰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는데도 지식이 별로 없으면 꿰일게 별로 없고 지식이 많은데 지혜가 없으면 그 소중한 구슬들이 여기저기 방바닥에 굴러 다녀서 값어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것은 지혜도 있고 지식도 많을때 아름다운 꿰임에 예쁜 구슬이 가득 꿰여졌으니 그보다 더 좋은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혜는 지식을 결합하고 구성하는 원리인데 거기에서 사람사는 도리, 인생사는 이치, 사람들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이 거기에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에서 지혜가 나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됩니다. 경외하는 정신이 꽉 차게 되면 그것은 사랑의 정신이 꽉 찬 것입니다. 사랑은 잘 몰라도 시키는데로 하는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절대로 이해가 안되면 순종 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똑한것 같지만 사실은 반만 똑똑한 것입니다. 어떤때에는 사람이 말하는 내용의 주장이 헛점이 있어서 순종하면 잘못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것은 사귀는 사람이 불신실한 사람일때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니까 우리가 이해를 못해도 하나님이 왜 이런 계명을 주셨는지 설명을 못해도 계명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모두 연결이 되어서 그것 하나하나를 준행하고 복종하면 결국은 지혜로운 삶이 되게끔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예화) 우리들이 새로운 가전제품이나 기계를 가져오면 설명서를 펼칩니다. 그리고 제일먼저 전원을 꽂으십시오 그럴때 우리들이 꽂기전에 왜 이것을 꽂으면 전기가 작동하는 거지, 이것을 다 알 때 까지는 절대로 못 꽂지 이렇게 마음을 먹는다면 일평생 기계라고는 아무것도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꽂은 다음에는 동작 버튼을 누르십시오. 그럴때 우리는 아무 의심하지 않고 동작 버튼을 누릅니다. 그래서 VTR, DVD 플레이어를 어떻게 제작하는지, 기계의 구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몰라도 매뉴얼에 나온대로 단추를 누르면 우리는 충분히 쓸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삼성전자에서 나온 매뉴얼만도 못합니까?
이렇게 살아라 하면 아멘하고 살면 영혼이란 기계가 작동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하나 순종해 나가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이것이 전체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지식도 훌륭해지게 된다면 그 스위치를 누를때 기계를 알고 누르는 사람의 느낌은 모르고 누르는 사람의 느낌과 틀립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 가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식이 조금 모자라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만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들일줄 몰라 이렇게 되면 미련한 자의 입은 무엇을 말하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언제 어떤말이 합당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는지 이런것들을 분간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미련한 사람들의 말은 끊임없는 다툼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말로 넘어가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대로 넘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렸을때 학교에서 의사전달 실험을 합니다. 한 반의 학생을 세워놓고 뒷집에 있는 아줌마의 강아지가 세끼를 세 마리 낳았데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이상하게 저 끝에 가서는 엉뚱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줌마가 강아지를 낳았데... 그것은 왜 그러냐하면 말을 들을때 사람이 들을때에도 자기의 얼개를 가지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듣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덧붙이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여러번 밟게 되면 말이 다르게 자꾸 변해서 충돌을 일으키고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을 도대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험담하듯이 함부로 옮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화제중에서도 보태어도 문제가 덜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무개 집사가 집을 샀데 그런데 그렇게 좋은 주인을 만나서 좋은 가격에 샀데, 이런 이야기가 보태어져 봐야 그 아무개 집사는 너무 좋은 주인을 만나서 돈을 천만원이나 깍아 주었데 이런식으로 밖에 말이 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경우 어떤 사람이 살다가 너무 힘이 드니까 자기 친구를 만나서 "요즘 어때?" 하니까 "요즘 우리 남편 신앙생활을 따르니 힘들어 죽겠어 내가 혼자 살았다면 얼마나 편할까?" 친구 만나서 푸념을 했는데 옆의 사람에게 옮길때 아무개 집사는 이혼하고 싶데 그러니까 그 다음사람은 이혼한데 또 옆 사람은 이혼했데 위자료도 받았데 이러면서 이야기가 도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다 쓸데없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사람은 자신이 말을 하면 이것이 굴러가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또 그 사람에게 폭탄이 되어서 터지게 될지를 헤아리면서 말하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들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을 한다. 지혜를 발휘하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머리가 나쁘니까 그냥 자기가 아는 방법만 고집하면서 일을 하려니까 일이 계속 꼬이면서 어려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화) 벌써 여러해 전입니다. 한 4년 되었는데 행정 직원들이 수련회를 가는데 그중 근무하던 자매가 안색이 매우 안좋았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회의가 다 끝나고 나서 애로사항 있으면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에 한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사실은 말씀 안 드릴려고 했는데 복사기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왜 그러냐 했더니 옛날에는 복사기가 교회의 큰 재산 이었는데 어느 교회나 복사기는 항상 사무실에 들여 놓습니다. 그래서 나도 170만원짜리를 거기에 들여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람 저사람이 복사기를 만지니까 복사기가 망가집니다. 그래서 한사람만 복사기를 만지도록 했습니다.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하니까... 그래서 했더니 이제 어려움이 생긴 것이 "이것 좀 복사해줘 자매" 하고 교역자들이 서류를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해 드릴까요?" 한 장, 두장 이런것은 문제가 안되는데 800매, "언제까지 해드릴까요?" "지금" 그래서 한두번은 해주는데 이 사람은 내가 복사나 하려고 여기에 취직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따로 있는데 시도때도 없이 와서 복사를 해 달라고 하니까 이제 마음이 너무 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800매 당장 해달라고 해서 해 줬더니 나중에 복도에 나가 보니까 500매는 쓰고 300매는 탁자에서 굴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퇴근할 때 교회에 들러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아무개 목사님 미워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미워한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회개를 하고 그 다음날을 맞이 했는데 똑같은 일은 몇일 있다가 또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담임목사가 수련회를 가서 마음껏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니까 그 이야기를 살며시 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으냐?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는 줄 알았더니 마음까지 고생을 하는 구나? 지금 전화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편리하고 좋은 복사기가 얼마인지 물어봐라” 1,300만원 이랍니다. “사지 말고 빌려 달라고 해라 그리고 복도에 가져다 놓아라” “그것 손타서 망가지면 어떻게 합니까?” “망가지면 어차피 우리껏 아닌데 어떻냐? 그리고 누가 망가뜨린 사람 있으면 물어 놓으라고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직원들 복사 시키지 말고 각자 자기가 하라고 해라.” “한 없이 할텐데?” “카드기를 달아라” 카드기를 60만원 주고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복사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냐 하면 사무실에 와서 카드를 사 가면 됩니다. 그래서 에누리 없이 한 장 복사하는데 30원씩 빠져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원래 20원인데 내가 30원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깝게...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 났나하면 교회 사무실에서 복사 해 줄때는 복사하고 남은 것이 온 복도에 다 돌아 다녔습니다. 지금은 한두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피 같은 돈으로 카드를 샀는데 찰칵찰칵하고 30원씩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27장 필요하면 27만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자매가 오랜 시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잘 안되던 시험에서 벗어 났습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고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머리가 나쁘면 손발만 고생하는데 입술이 나쁘면 존재 자체가 날라가 버립니다. 여러해 전입니다. 검찰계에 잘 나가던 검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일 모레면 승진을 앞두고 승승장구하던 사람인데 기자들하고 만나 폭탄주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짧게 한마디를 했는데 그것이 뭐냐면 어디어디에서 노조운동이 일어나고 난리를 쳤는데 그 뒤에는 내가 있지 이렇게 한마디를 한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 하나 때문에 그 사람 인생이 땡하고 종 쳤습니다. 결국 승진은 커녕 곧바로 목이 날라가고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우리의 입술은 누구도 우리의 입술은 충분히 다스렸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한두번쯤은 다 범죄 하였고 그리고 교회에 상처를 주었고 여러분들은 생각도 나지 않는 지체가 여러분이 무심코 던진 그 말, 남에게 듣고 무심코 퍼뜨린 그 말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고통을 받고 연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회개하여야 합니다. 롱펠로우라는 시인이 그런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대로 외울수는 없지만 비슷하게 하자면 오래전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내가 하늘을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아 올렸지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나는 그 화살이 나무에 박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네 오래전 옛날 내가 하늘을 향해 노래 한곡조를 불렀지 세월이 많이 지난후에 내가 부른 그 노래가 내 친구의 가슴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나는 알았다네. 이렇게 화살을 쏜 것도 노래를 하늘을 향해 부른것도 우리는 기억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가슴속에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부부가 살고 타투고 하는데 그러다가 늘 저 인간하고 헤어져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살고 그리고 끝까지 살아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헤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의 통계에 의하면 이혼을 결심할 때 아주 논리적으로 추론을 하고 상담을 받고 최종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가슴 팍 찌르면서 들어오는 한마디의 말에 이제는 저 인간하고 끝내야 되겠다라고 결단을 내린다고 통계에 나왔습니다. 그 순간에 가슴에 탁하고 꽂히면서 나머지 모든 필름들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모한 결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지혜없는 사람의 차이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어느 한순간에 팍하고 꽂히는 것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나 신령한 세계의 가치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그런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감각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미련한 자의 벌린 입술은 마지막에는 패망을 부릅니다. 그리고 매를 자초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팔자가 험합니다. 험한 꼴을 많이 당합니다. 증인으로 가끔 불려 나가지만 험한 꼴을 많이 당합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없어도 사람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고 특별히 다른사람에게 해꼬지 하는 것이 없는데도 그에게 원한 맺힌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입술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 속에서 말이 떠올라 오면 한번 씹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 전체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칙은 삼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좋고 당연한 일도 다시 생각해 보며 하나님 앞에 사는 것처럼 옷깃을 여미는 것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중함과 덕이 있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3.입술 벌린 자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를 누설하니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잠20:19)
직장에서도 보면 자기의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거기에 전심, 전력하면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에 별로 휘말리지 않습니다. 대게 직장에서 말을 함부로 하고, 남의 말을 옮기고 해서 어려움을 끼치고 본인도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루 다니면서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세상이라는 것이 이것이 쓰여진 것이 3,000년 가까이 된 옛날인데 그래도 보면 인간 사회라고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돌아가는 것은 비슷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다른사람에게 말을 옮기고 또 그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깨뜨리고 하는 일들이 일어 났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두루 다니면서 한담하는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라고 하는 자체가 무엇인가 자기가 뚜렷한 사상을 가지고 있고 인격의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절대 말 때문에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상속에 있는 말, 그것을 소화하기도 벅차니까 다른 사람에게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화)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저한테 번역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오는 경우도 있고 번역을 제가 할 시간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번역을 하고 목사님이 감수해 주시면 안되냐고 하는데 저는 안 합니다. 예전에는 저도 20여권 번역을 했습니다. 지금도 하면 못하겠습니까? 젊은 사람들만 못하겠지만 하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 합니다. 심지어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이나 에드워즈 목사님이나 이런 책들에 대한 번역 요청이 들어와도 정중하게 사절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할 일이 더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책을 이미 다 써 놓으셨는데 그러면 영어가 통하면 읽을 것이고 못 읽으면 할수 없는 것이지 내가 그것까지 봉사를 해야 하나하고 생각이 됩니다. 나는 내가 할일도 많이 있는데 언제 내가 설교 준비 안하고 그것 붙들고 앉아서 번역을 할까 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나름대로 사상을 가지고 있고 인격의 깊이가 있는 사람은 늘 자신과 대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돌아 다니면서 한담을 늘어 놓지 않아도 외롭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사람들은 대게 뭐냐면 냄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사람은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 없기 때문에 마치 기름 바른 후라이팬에 물방울이 돌아 다니듯이 그렇게 남의 말이 마음 속에서 튀기면서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만나는 사람마다 어차피 자기 것이 없으니까 그런 것을 쏟아 놓아야지만 재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러것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오래간만에 친밀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오가는 대화가 너무 건조하고 재미도 없고 그리고 경건한 심령을 고갈 시켜서 대화의 자리에서 빨리 떠나고 싶은 것을 느껴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거기에서 진리의 말씀이 오고갑니까? 아니면 눈물 어린 자기 고백이 오고갑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커다란 전망과 비젼들이 나누어 집니까? 대게 동네에서 일어난 일, 성도들에게서 일어 난 일... 그런데 누가 은혜 받았고, 누가 회심했고, 놀랍게 성경을 깨닫고 성숙해 졌다더라 이런 이야기는 재미가 없습니다. 대게 누구 집에 누가 바람을 피었데 아니면 이혼을 한다더라, 교회에서 싸움을 해서 뛰어 왔다더라 그 사람은 왜 그랬데, 누구 집 딸은 약혼을 했는데 파혼을 했데, 그 집 부부가 손 잡고 교회에 나오는데 사실은 이혼하기 일보 직전이래, 싸우는 것을 보았데, 왼쪽눈에 바른 짙은 보라색 화장품은 사실 멍든 것이래, 뭐 이런 이야기들... 그래서 기름 부은 철판의 물방울이 마구 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것에서 소외되어서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빨리 이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럴때가 있지 않습니까?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때 정말 신나서 그곳이 이상하다든지 지루하다든지 한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이 여기에 나오는 입술 벌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생을 사는데 무슨 향기가 거기에 있겠습니까? 향기라고 하는 것은 뭔가 좀 깊은 이야기 그것이 꼭 고상하고 심오한 말씀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에 대해서 반성하게 해주는 그 어떤 무엇이 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쓸데도 없는 담화 이런것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안 그럴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니까...
(예화) 그런데 제가 전에 있던 교회들을 보면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구역에서는 구역예배가 너무 은혜롭습니다. 그래서 저도 구역을 꽤 많이 인도했는데 교인이 150명 밖에 안되는데도 목사님이 저에게 네구역을 맡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떨때는 점심을 세 번 먹은 적이 있습니다. 10시에 구역 예배에 갔는데 11시 조금 넘어서 끝났습니다. 점심을 잘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음 구역에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고 거기에서 매정하게 일어 서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서 조금 먹고 그 다음 구역에 가니까 구역 예배가 12시 30분경 끝났는데 점심때이니까 먹었습니다. 그리고 먹자마자 다음 구역에 뛰어 가서 구역예배가 끝나고 나니 1시 30분 이었습니다. 점심 못 드셨죠 하고 차려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을 모두 처음 먹는 사람인것처럼 그렇게 먹으면서 구역을 인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 있는 것이 어떤 구역은 교육수준이 낮고, 사람들이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가진 돈도 별로 없고, 교육도 많이 못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전도사 였으니까 설교를 뭐 대단한것을 했겠습니까? 신학교 다니는 전도사이니 앉아서 잠깐 찬송 두어장 부르고 성경을 펴서 잠깐 20분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격을 하면서 구역을 가지고 같이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과를 나누든지 하면 오가는 이야기가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가정에 일어난 어려운일, 그것을 극복한 일, 최근에 응답 받은 일, 구역 식구들의 변화 그 다음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받은 말씀, 자기의 부족함에 대한 자기 반성등 어쩜 교육 수준도 별로 안되는 말하자면 촌동네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고구마나 배를 깍아 먹으면서도 어쩜 그렇게 세상에 그렇게 교양있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떨때는 구역예배에 가는데 마음이 상할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부도 해야하고 내 부서 일도 해야 하고 일복은 많아 가지고 주일학교, 청년부, 고등부까지 그렇게 나에게만 일을 맡기는지 심지어는 교회 청소까지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학교 공부 까지 해야 하는데 구역은 또 네구역이나 맡겨 주어서 말입니다. 이것 두구역만 줄여 주면 좋을텐데 하면서 투덜대면서 가는데 구역 예배 가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 마음이 정말 따뜻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역자인 내가 구역예배를 인도하면서 너무나 힘을 얻습니다. 정말 감사하구나... 이것이 성도의 교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라는 인간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는데 그 옆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가고 싶은,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교통이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성도의 교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말이 많습니다. 말이 없는 사람이 누구냐면 천성적으로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이 없는 사람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해도 목표점과 추구점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이 없습니다. 자기반성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이야 수양관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어디 가든지 이제 직접 밥 해먹는 수양관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 식당 설비가 되어 있어서 식당에서 밥을 해 주면 돈을 주고 사먹습니다. 그런데 20년전만 하더라도 그런 수양관은 별로 없었고 있어도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300명이 가서 3,500원짜리 사 먹으려면 한끼에 70만원입니다. 그러니까 10끼 먹으면 700만원입니다. 그 정도 돈을 내고 수련회 할 수 있는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대게 허름한 기도원에 가서 솥 걸어 놓고 쌀이고 뭐고 싸가지고 가서 밥을 해 먹고 오는 것인데 예전에 보니까 선임자들이 중고등부 수련회 갈 때 항상 권사님, 집사님들을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역자 회의 할 때 아무개 권사님하고 집사님이 중고등부 수련회 때문에 따라 가셨습니다 하고 교역자가 보고를 하니까 목사님이 심히 근심어린 표정입니다. "아이고 전도사님 그렇게 사람이 없습니까?" 무슨 소리인가 봉사 하겠다는데 왜 그러시나 했는데 "그 사람은 말통입니다. 다른 사람을 데려가 보십시요. 그분이 한번 수련회에 따라 갔다 오면 항상 분란이 일어 납니다." 저는 그런데에 눈치가 빠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서를 맡은 다음에 수련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번 수련회에 가서 밥은 누가 해 줍니까? 우리는 집사님, 권사님 사절합니다. 누가 해 주겠습니까? 우리는 대학생들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대학부에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가 100명이 수련회에 가는데 이번 수련회 끝나고 석달 있으면 대학부로 다 올라 가니까 너희들이 와서 밥해라. 그리고 간증도 하고 아이들하고 교제하고 데리고 올라가면 좋지 않냐?" 그러니까 대학부에서는 환상적인 초청입니다. 그러니까 청년들이 시간이 좀 많습니까? 방학때라 많이 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고등부 선생님들중에 영양사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꼭 있는데 총 지휘는 이 선생님이 하고 너희들은 보조만 하면 된다하고 시장을 봐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매끼니에 선생님이 나타나서 이것은 볶고, 이것은 삶고, 이것은 찌고, 이것은 튀겨라 하고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열심히 합니까? 한번만 그렇게 하면 이제 부대가 형성이 되어서 그때 했던 사람들 몇사람만 내려와라 하고 신입대웓들 데리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떠나올때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아무 이야기 안 나옵니다. 그리고 또 나와 봤자 자기들끼리 도는 이야기이니까, 교회에는 청년들끼리 도는 이야기 이니까 별 이야기가 없습니다. 장년들이 이야기가 돌아야지만 권사님, 집사님, 장로님, 안수집사님 하면서 이야기가 돌면서 폭풍이 일어나는데 어차피 정보가 차단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부탁합니다. "여기 수련회에 와서 너희들이 밥도하고 후배들하고 교제하는데 여기서 4박5일 있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그렇게 우리는 매년 두 번씩 수련회를 가도 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것이 사실 자랑꺼리 입니까? 얼마나 믿지 못하면 그런 이야기가 나왔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목표와 자기자신에 대한 그리고 조직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가 있고 하나님 앞에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두루 다닐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두루 다닙니까? 집중해야 무엇이든지 되지 그렇게 두루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요즘도 가끔 편지가 옵니다. 우리 교회 집회에 와 주십시요. 비서실에 있는 간사 시켜서 목사님 못 가십니다 하고 한번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그 다음에 계속해서 또 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이 책상에 앉아서 친필로 장문의 편지를 씁니다. 내가 사실 상황이 이렇고 이런데 결국은 당신이나 나나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는데 내가 하나님께 맡은 사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합니다. 빽빽이 편지를 써서 매번 답장을 보냅니다. 거기에 책까지 한권 해서... 그렇게 안하면 저는 아마 매일 교회를 비울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연구도 못합니다.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한가지 목표를 위해서는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두루 다니며 한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역으로 이야기해서 그렇게 두루 다니면서 남의 말을 하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삶이 허한것입니다. 말과 음식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끼를 천오백원에 해결할 수도 있고 5만원에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무엇입니까? 어차피 식도까지만 넘어가면 얼마짜리이든지 이속에서는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뱃속에 5만원짜리가 들어간다고 해서 위장이 춤을 추고 1,500원짜리가 들어 간다고 해서 위장이 탈이 나서 배탈이 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싼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날 수 있습니다. 식도로 넘어가면 끝입니다. 그러면 음식을 차려 놓았을때 눈에 보이는 것 몇초, 찍어서 입에 넣었을 때 입속에서 도는 것 몇초,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 그 다음에 식도로 넘어가서 위로 떨어지면 다 똑같은 것입니다. 일단 식도로 넘어가면 아무런 쾌락이 없는 것입니다. 혀는 목구멍에서부터 쓴맛, 신맛, 짠맛, 단맛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설탕을 먹을때는 혀끝으로 맛을 보지만 소금 먹을 때 혀 끝으로 맛을 보는 것은 바보입니다. 짠맛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혀에서 쓴맛, 신맛, 짠맛, 단맛이 어울어 지면서 인간이 도락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국산과 중국산을 가려내는 감별력, 미제와 국산을 가려내는 감별력, 돼지고기 소고기를 가려내고 비싼것 싼것 가려내는 감별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초입니다. 그리고 꿀꺽하고 넘어가면 끝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 안에서 느낄수가 없고 혹시 삼켰는데 욱하고 다시 올라와서 씹는다고 하더라도 예전의 그 맛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산에 음식이 절었기 때문에 그 맛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뭐냐면 말을 해서 공중에 공기를 때리면서 흩어 집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쾌감을 줍니까? 그러면 생각과 발화사이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막을 자신의 말이 생각과 발화 사이에 있는 하나의 막을 통과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남을 헐뜯거나 욕하거나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는 그런 험담이나 등등의 이야기를 할 때 생각과 입술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막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탁 건드리면서 통과할 때 짜릿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이것 내가 말하면 안되는데,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면서 결국은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말을 하고나서 당하게 될 위협보다는 머릿속에 있는 그것이 머리의 생각과 발화 사이에 있는 작은 막 하나를 통과하는 기쁨이 너무 신비로운 것입니다. 한순간에...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쏟아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왜 그렇게 쓸데없이 남의 말을 많이해 이해를 못하겠어 하는데 인간은 언어의 동물입니다. 말하는 그 쾌감은 엄청난 쾌감입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했더니 어떤 지체가 자기가 대학 다닐 때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굉장히 떠들기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그 친구가 오더니 "야! 나 지금 말 마려 죽겠어! 빨리 말좀 하게 해줘!" 배설작용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말을 안하면 정신에 매우 해로운 일들이 일어 납니다. 우울증 같은 것이 오는 것입니다. 보면 말의 실수도 있고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지혜롭게 잘 표현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사람들이 꼭 다물고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지금 말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히려 때에 맞는 말, 상황에 부합하는 언어 이런것들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상황에 맞는 말은 마치 은으로 만든 쟁반의 구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두루 한담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뭐냐면 비밀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면 어떤 일을 하거나 행동을 하거나 대화를 할 때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이것 때문에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없을까 라고 생각을 하면서 행동을 해야합니다.
(예화) 박사과정에서 수업을 받을 때 였습니다. 외국인 학생하고 네명이서 수업을 받았는데 한 친구가 감기에 걸린것은 사실인데 감기에 걸렸으면 너무 아프면 나오지 말던지 나올수 밖에 없었으면 좀 참고 조용히 콧물이나 닦던지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교수님 죄송합니다 하고 화장실 가서 해결하고 와야지 교재를 쌓아 놓고 5분에 한번씩 큰 소리로 코를 푸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토할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용케 그것을 참고 계셨습니다. 수업이 수업이 아닙니다. 어떻게 목사라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을까? 덕이라고 하는 것은 심오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사람이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스스로 자신을 추스르는 절제심입니다. 이것이 덕의 첫걸음입니다. 여러분 아주 작은 다방에서는 전화가 오면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면서 "김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 합니다. 조금 큰 곳에서는 마이크에 대고 방송을 합니다. 정말 고급스런 호텔에 가면 벨걸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김 갑동씨에기 전화가 왔다고 하면 보드에 김 갑동이라고 쓰고 위에 벨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쁜 드레스를 입은 자매들이 그것을 들고 딸랑딸랑 하면서 사람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 사이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칠판을 보고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가서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 생각을 안하고 그렇게 행동하냐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행동했을 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있었는데 굉장히 성품이 고결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함부로 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얼마나 흥분 하셨는지 심지어는 그 자식이 목사냐고. 하시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셨냐고 했더니 호텔에 가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한쪽 다리에 구두를 올려 놓더니 거기에 프림을 들이 붓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티슈를 꺼내 막 문지르면서 이렇게 해주면 가죽에 최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굉장히 점쟎으신 분인데 거기서 얼마나 화를 내셨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목사냐고... 여기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품위있게 대화를 하는데 어떻게 당신 구두위에다 프림을 쏟아 부으면서 그것을 카페트에 다 떨어뜨리면서 이것을 문지르면 가죽에 좋다고 하냐고 말입니다. 거기에서 얼마나 야단을 치셨는지... 당신이 그렇게 하고도 노회장이냐고 하면서... 드물기는 해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개야 하고 큰소리로 부르면 두 사람 사이의 일인데 그 고함 소리를 옆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들어야 합니까? 제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식당에서 떠드는 사람입니다. 자기 혼자 밥 먹는것 아니지 않습니까? 목소리의 크기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 도달할 정도이면 충분합니다. 설교시간에 마음에 뜨거운 감화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무슨 식당에서 설교할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행동을 그렇게 할때는 우리들이 분노하고 정말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말을 할때는 우리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조용조용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옮기는 그 말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쭉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자신이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마음이 후련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어떤 한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조화와 균형과 절제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꼭 말하고 싶은데 말 안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마음속에는 그런 언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여기 남아 있는 혹은 떠난 사람들, 어떤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를 선대해 주고 떠난 사람들, 나에게 악을 행하고 떠난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상담했던 내용들, 나에게만 공개했던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와 비밀들이 가슴에만 있습니다. 집에 가서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뚜껑을 열면 어마어마한 사연들이 많지만 열면 안됩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아주 야비한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묻어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그런 일들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추잡한 행동이고 더군다나 그것이 교회일 경우에는 그렇게 행동하는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중대한 범죄입니다. 여기에서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걸린 비밀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명예를 위해서 보전해 주어야 하는 가치가 없는 내용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하고 말입니다. 덮어주는 것입니다. 어떤분이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목사님 성격이 불 같습니다."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저 앞에서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시다가 전화 통화가 안되니까 핸드폰을 집어 던져 버리시더라구요" 그래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다른 교회 목사님에게 뭐하러 할까? 정말 사람들은 개념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이 세상에 보호 받을 가치가 없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명예와 그 신실함을 보전하면서 공동체 속에서 사랑하며 사랑을 받으면서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우리 안수 집사님한테 방 하나만 주십시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아주 명언을 하더랍니다. "교회에서 집사님들에게 방을 주면 뭘 하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할말이 없으니까 모이기도 하고 교제도 하고... "됐습니다. 안수 집사님들은 지갑만 두둑하면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까? 모여 앉아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겠습니까?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문제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벌린 사람들하고는 사귀지를 마라 했습니다. 정죄하고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깊은 인격적인 교통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끊임없는 시험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미성숙으로 인해서 끊임없는 시험이 생겨 나니까 마음을 터놓고 그 사람하고 무엇을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입을 벌린 사람 왜냐하면 하도 이야기를 하느라고 입이 단 몇초 만이라도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만나서 함께 포개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서지는 그의 황폐한 영적인 삶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솟아나는 내밀한 기쁨, 그분과의 교제에서 오는 행복, 그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감각, 들려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음성 그리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과 이런 것들이 별로 없다 라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함을 이루어 가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이웃에게 행복이 되는 나는 좀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4.영혼을 보존하는 자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잠21:23)
우리의 영혼과 육체라고 하는 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분리되면 우리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영혼과 육체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사람이지만 영혼의 움직임이 육체에 의해서 반영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몸을 시체라고 부르고 영혼만 덩그러니 남은 것을 가리켜서 영혼이라고 부르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영혼과 육체는 두 개가 마음에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결국 우리들이 밑도 끝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영혼의 무한한 기억의 세계들이 마음으로 떠올라서 마음을 드리고 그 마음의 움직이는 바에 의해서 육체가 행동을 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마음은 육체로부터 오는 것에 대해서 수동적이고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해서 수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면 눈으로 보면 “아! 저것 꽃이네! 저것 얼마나 줬을까?” 하고 마음속에서 생각이 도는 것입니다. 저것 얼마나 줬을까, 요즘 가을이라서 비싸게 줬을 텐데, 꽃은 정말 예쁘다 등등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수동적이지만 않고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조용히 혼자 어둠속에서 눈을 감아도 인간의 마음은 능동적으로 스스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활동을 하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 안에는 언어들로 꽉 차게 됩니다. 이 언어는 아직 구체적으로 한국말이나 미국말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말로 옮길 수 있는 어떤 재료들이 우리 안에서 잔뜩 형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못가 본 남의 나라에 가서 여러 가지 아주 신기하고 특이한 문명, 문화, 습관 그 다음에 새로운 경치들을 많이 보았을 때 누구를 만나면 그 본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안에 벌써 언어들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내적 언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꽉 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 내적 언어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말들을 선택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많은 내적인 언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가벼운 일상에서부터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는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 밖으로 쏟아져 나올 때 아무렇게나 막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취사선택에 의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세속적인 마음이 되면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언어들 가운데 세속적인 것들을 골라내어 말로 표현을 하면서 쏟아져 내는 것입니다. 특히 마음에 미움이나 원망들이 가득 차 있으면 무엇을 하든지 욕이 나옵니다. 괜히 부부가 둘이 싸운 다음에 나가면서 강아지를 발로 걷어차면서 “이 자식은 왜 여기 있는 거야!” 하면서 ‘뻥’ 차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마음속에서 미움과 반항의 감정들로 가득 차게 되니까 이런 생각들이 그런 언어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은 마음에 어떤 언어가 있기 때문에 쏟아져 나오기도 하고 그 다음에 또 반대로 자기가 선택을 하기 때문에 말들이 마음에 또 다른 현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기능도 하지만 없는 것을 밖에서 안으로 불러들여 재창조하는 기능들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오후 예배 설교 시간에 말에 대해서 듣고 있는 시간이지’ 하고 말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꿔서 그 말이 경마장에서 뛰어 다니는 말로 설명을 한다면 그렇게 몇 주만 지나면 생각이 돌아서서 오후예배 시간되면 말고기, 달리는 말, 기수, 경마, 마차, 마차경주, 말고기, 말고기 스테이크, 조랑말 대회 뭐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이 내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말에 의해서 새로운 생각들이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 만큼 영혼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라는 기능을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안 주시고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로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을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 찬양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면서 찬양을 하면 찬양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타락하고 나서부터는 인간이 이 말을, 그렇게 말을 주신 목적에 합당하도록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는 하나의 배설작용으로서 이 말을 토해놓는 타락한 경향성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해 줄 수 있도록 솟아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 같은 것, 요즘은 시를 읽을 시간이 없지만 옛날에 시집을 좋아 했는데 시 같은 것을 읽으면 소설 읽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설은 스토리가 생각이 나지만 시는 영상이 생각이 납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이런 것 입니다. 소설이 드라마라면 시는 뮤직비디오 같이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활짝활짝 우리에게 색깔과 영상을 열어 보여 주어서 표현과 은유 사이에 담긴 놀라운 이미지들을 우리 속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상상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언어 속에 커다란 이미지들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가 아주 짧은데도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은 소설이지만 같은 글씨고 쓰여 진 시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확하고 가슴에 와 닿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면서 그런 아름다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올바르게 말을 한다면 그 말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관한 아름다운 그림을 그 마음속에 끊임없이 그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을 통해서 받으실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예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별로 가지도 않지만 불쑥 예술의 전당 같은데 가서 미술 작품이라고 해서 들여다보는데 히끄므리한 그림 하나를 놓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는데 “내가 발로 그려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 하고 나오는데 누군가가 그 미술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그 그림을 볼 때 느낌이 틀려질 것입니다. “이런 비밀이 숨어 있구나! 정말 놀랍다!” 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누군가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해서 “뭐 좋은데” 이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그 창조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노래하고 말로써 그것을 가르쳐 준다면 창조의 세계를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얻어 지는지 보십시오. 심지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언어를 통해서 얻어 집니다. 또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도 언어를 통해 얻어 집니다. 말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데 이 말이 바로 그렇게 창조 세계를 더 아름답게 하고 창조세계에 있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상호교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말인데 이것을 가지고 거기에다가 자기의 악하고 더러운 마음을 담아서 배설하듯이 자기 자신의 구정물 같은 감정을 쏟아 놓은 도구로 사용을 해서 덕을 끼치는 대신 그 말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게 만들고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을 주고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남의 명예를 보존해 주는 대신 깍아내리고 시기와 갈등들이 생기게 만들어 주고 이렇게 만약에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을 매우 잘못 사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고 말을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마음에서 나왔는데 그 말이 되돌아 와서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되돌아와서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영혼을 환난에서 보존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들이 돌아와서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주어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대부분 밖에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의 말, 우리의 욕망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로 휘돌아 와서 다시 우리를 휘감고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과 말의 절제가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에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에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런 책임들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영혼의 해를 입히고 그 다음에 자신의 영혼에 해를 입힙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 사람들과의 관계를 세우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 들어가게 하는 통로로 사용되어야 할 이 말이 죽음과 황폐함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올바르게 할 때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인생이 끝장이다. 인생이 막장까지 갔기 때문에 내 인생은 이제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거의 죽음의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새로워지는 가운데 심령 속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상담을 받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새 생명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거기에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나는 것이 말의 역사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전달해 주는 도구로서 우리에게 말을 주셨는데 이것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무조건 말 안하고 입을 닫고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있는 것이 훌륭한 성화의 삶이 아니라 말을 해서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말을 주신 것입니다. 타락해서 사물들 간에, 인간들 간에 하나님과 인간간의 상호교통이 다 깨진 속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들이 다 깨진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들을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명과 사랑이 그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입을 꽉 닫고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지난주가 입술을 벌린 자였는데 입술을 다물고 있는 사람이 최고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말,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말, 하나님의 은혜와 그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통로로서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말을 안 하는 사람은 덕이 있는 삶이 아닙니다.
(예화) 조지 휘필드라고 하는 18세기의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부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분이 항상 자기 자신의 삶을 체크하는 것 가운데 16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 눈에 띄는 것이 뭐냐면 "나는 오늘 모든 사람들에게 붙임성 있고 친절하게 대했는가?" 이것이 매일매일 반성하는 제목입니다. 그 탁월한 설교자가 모든 사람에게 붙임성 있고 친절한 태도로 남들을 대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꼭 필요한 대목입니다.
사람들을 다독거릴 줄 알고 위로할 그 자리에서 따뜻하게 위로할 줄 알고 그리고 격려할 때 그 자리에서 격려할 줄 아는 사람, 그것이 훌륭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말을 안 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말을 함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예화) 나도 영혼의 침체에 빠져 있는데 누가 와서 하필이면 나 같은 인간에게 상담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내가 어떻게 하면 이런 인생에서 벗어 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잘 생각해봐!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 주셔서 구원해주셨잖아!” 자기도 감사하지 않으면서 “기도해야해!” 자기는 기도 안 하면서... 그런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내 마음속에서 자기 쇄신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맞아! 하나님이 정말 놀라운 세상을 베풀어 주셨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셨잖아! 감사한 마음을 잊고 살았는데...” 이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설명하면서 ‘그렇구나, 그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구나!’ 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저 사람의 영혼만 살리는 게 아니라 내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면 그 사람의 영혼만 파괴할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죄의 쓴물로 튀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을 고르게 하고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로서 아주 놀라운 격려를 얻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교회에 아주 똑똑한 형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서울대를 나와서 고시 공부를 했는데 계속 떨어 졌습니다. 세 번인가 떨어지고 나니까 친구들은 모두 취직을 했는데 대학을 졸업을 하고도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쓰는 신세가 되니까 너무 처량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찿아 왔습니다. “전도사님! 제가 아무래도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습니다. 취직해야 될 것 같습니다. 친구들은 다 직장 다니고 부모님께 용돈 타서 쓰는 것도 괴롭고 계속 떨어지고 나니까 전 안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그만두고 자네가 취직을 하면 잘 나갈 때는 이 지점을 생각 안하는데 잘 못나가고 어려움이 올 때는 이때에 그만 둔 것을 너는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내가 인생을 좀 더 살아봐서 아는데 너는 그러면 안 된다. 이유 없이 될 때까지 해라”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 붙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제일 먼저 자매를 데려와서 저에게 소개를 시켰습니다. 이 전도사님이 2년 전에 너무 힘들어서 고시를 포기하려고 할 때 ‘안 된다. 너 여기서 그만두면 반드시 후회한다, 너는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자기가 이제 나는 더 이상 다른 선택은 없다 하고 매달렸더니 그 해에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작은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큰 힘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말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영혼도 살고 그렇게 말로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이롭게할 때 내 영혼도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은혜를 달라고 하지만 사실은 대바구니 가지고 가서 은혜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습관도 제대로 형성이 안 되고 언어도 제 마음대로 미끄러집니다. 그냥 은혜를 달라고 해서 막 부어주시는데 대바구니에 확 쏟아져서 그 다음날 와 보면 또 없어서 맨 날 달라고 하는데 간수도 못하면서 맨 날 달라고 하면 뭐합니까? 그냥 바구니만 은혜의 맛을 보는 것이지 자신은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나쁜 경우가 무엇이냐면 말을 할 때 계속 꼬투리를 잡고 깔짝깔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꽤 있는데 고쳐야 합니다. 결국은 뭐냐면 마음이 꼬부려져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말은 마음의 반영입니다. 말을 시원시원하게 하는 사람은 성격도 시원시원합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사기꾼은 예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말을 만들어 내니까... 보통 사람들의 경우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는 사람은 일도 그렇게 합니다. 말할 때 하나하나 따지면서 정확하게 하는 사람은 일도 그렇게 꼼꼼하게 합니다. 말의 조리가 없고 덤벙대는 사람은 일처리도 그렇게 덤벙대서 신뢰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일 처리도 논리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야기할 때 끊임없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것을 긁어내리려고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에게 격려를 못합니다. 깍아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굉장히 꼬부라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을 함으로서 자신의 마음이 꼬부려져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런 것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보다 더 나쁜 상처를 그렇게 행한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서 한번 대화를 하면 또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밥을 사주겠다고 나오라 해도 그 사람하고 밥 먹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밥맛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생활은 그래서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그리스도와 친근히 하면서 늘 그 은혜에 살아간 사람들은 자신의 그 언어를 십자가의 보혈 아래에 담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속에서 끊임없는 은혜의 언어들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실천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활짝 웃고 따뜻하게 격려하고 그리고 힘을 주고 그리고 따뜻한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어 주고 주님 안에 있는 축복을 그리워하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그들의 영혼도 보존하고 자신의 영혼도 보존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입술을 마음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잠15:7)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말이 많은데 그런데도 그 말 때문에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거나 위기를 불러오지 않는데 또 어떤 사람은 말이 별로 없는데 입만 열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말에 대한 교훈은 말은 안하면 최고다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과 만났을때에 제일 불편한 것이 뭐냐면 말을 안하는 사람입니다.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많이 안 다니지만 집회를 가면 저도 사람들에게 말을 막하면서 재롱을 떨고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가만히 있는데 상대방도 그러면 식사기도 끝나고 계속 밥만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붙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서 묵묵히 시간이 흘러 가는데 제잘제잘 이야기를 붙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이야기에 불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분위기가 따뜻해 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이 없는데 한번 입을 열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말을 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성경의 견해에 의하면 입술은 입에 달린것이 아니라, 위치는 입에 달렸지만 입술은 마음과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술은 마음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읽는 그것이 입술을 통해서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음의 무엇에 꽉 차게 되면 그것을 밖으로 내놓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영혼의 특성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사물을 보거나 어떤 사건을 경험하거나 혹은 진리를 깨닫거나 어떻든지 우리의 마음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되면 그것들이 우리안에 커다란 느낌들을 형성합니다. 그 덩어리를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적인 언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경험하거나 해서 충동을 느끼게 되면 이것들이 부피가 커지면서 덩어리가 되는데, 뭔지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되는데 이것이 뭐냐면 내적인 언어입니다. 이 내적인 언어가 많으면 마치 도자기 빚는 사람 앞에 진흙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진흙이 많으면 이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만들어 내서 항아리도 만들고, 접시도 만들고, 커피잔도 만들고, 오강도 만들고 할 것 아닙니까?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그렇듯이 내적으로 느낀것이 아주 많고 언어로 꽉 차게 되면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창조적 욕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느낀것이 많이 있어도 말하기 싫을때가 있습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습니다. 불행하고 고통스런 일을 당할 때 그때 이 안에는 내적인 언어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진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들기가 싫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들어 봐야 모두 자신의 아픈것을 생각나게 하는 기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런것들을 표현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것을 쏟아 놓았을 때 누군가가 그것을 잘 받아주고 그래서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 그 사람은 거침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막 쏟아놓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적인 언어는 꽉 차면 넘처 흐르는 샘물과 같은 것입니다.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입술을 통해 나오는 언어라는 것은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이냐면 우리 안에 좋은 내적인 언어로 꽉 차야 합니다. 그러면 말을 많이 해도 문제가 덜 됩니다. 하나님을 너무 많이 자랑해서 문제가 된 것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났는데 하나님을 너무 자랑해서 문제를 일으킨것 본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너무 자랑해서 문제가 된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너무 자랑해서 문제가 된적은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싶으면 늘 자기 자랑을 하십시요. 순식간에 바뀝니다. 그래서 내적인 언어가 좋은 것으로 꽉 차 있으면 말의 실수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내적인 언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냐면 닭이 알을 낳듯이 알 밴 닭을 잡아 보면 알집이 위에서부터 새겨져 있습니다. 수십개의 알이 배겨 있습니다. 안 믿어지죠? 그런데 많은 구슬 같은 것들이 졸졸졸 달려 있습니다. 맨 밑에는 하얀 것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내일이면 나올 것입니다. 눌러 보면 말랑말랑 합니다. 하루만 더 있으면 이것이 딱딱해 져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오면 그 다음 것이 대기하고 있다가 커지는 것입니다. 내려 보내면 내려 보낼수록 위에서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창조의 섭리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닭은 계속해서 달걀을 낳은 것입니다. 오리알을 낳은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닭속에서는 계속 달걀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닭이니까... 그러니까 우리 속에도 똑같이 생각이 있는데 많지 않습니까? 내적인 언어가 많은데 놀랍도록 우선 순위가 매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랫것부터 차례대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위의 것을 순서를 바꿔 내려 보내려면 헛소리를 막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기도를 시켰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이 배추 장사 인데 예배시간 내내 배추값이 떨어져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무개 장로님이 성경 봉독 하시겠습니다 했는데 그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원 16전입니다." 그러니까 이속에 있는 것이 차례대로 나와야지 자연스런 것입니다. 근심이 그렇게 꽉 찰 때 시장의 배추 상황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원고가 필요 할까요? 필요 없습니다. 줄줄 나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언어가 하나님과 신령한 것, 선한것들로 꽉 차 있고 그것이 1순위를 차지하면 그러면 말이 조금 많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여자가 누구였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여자가 사실은 남편을 5번이나 갈아 치웠기 때문에 낮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낮에는 물 길는 시간이 아니랍니다. 사람을 피해서 온 것입니다. 그 여자가 후에 예수님을 만나고 하는 행동을 보면 본바탕이 어떤 여자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 만나고 회심하기 전에 남편을 5번이 갈아 치기 전에는 아주 수다 스럽고 말이 많은 여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물동이를 내려 놓고 달려 와서 사람들에게 한마디로 나발을 분 것입니다. 그때는 자기가 사람들 보기에 챙피해서 아침을 피해 낮에 물 길러 왔다는 사실도 잊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막 떠든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를 불러 일으켰습니까? 물동이까지 내려 놓고 입에 거품을 물고 예수님 자랑을 했으니까 교양은 좀 모잘랐을지 모르지만 얌전하게 가서 "저 혹시 예수님을 아시나요? 제가 당신에게 잠깐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실수 있을까요? 안 되신다면 다음에 오고요" 이랬을까요? "야 와봐 내가 누구 만났거든" 입에 침을 튀기면서 "그 예수님이 우리가 말하던 선지자 였거든 내가 이전에 행한 일을 다 알고 있는 거야" 그것이 뭡니까? 남편 5번 갈아 치운것입니다. 약간 조절이 안된 상태입니다. 오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설교는 여러분중에 어떤 사람들은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천성이 말이 많습니다. 그것을 고치려고 해도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개별적인 장점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자기의 마음속을 은혜로운 내적인 언어로 꽉차도록 그렇게 영적인 상태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우물가에 물길러 나온 여자 중에서 제대로 찍으신 것입니다. 천성 자체가 두사람만 모이면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언제 한번 심방을 갔는데 심방 받는 사람이 달달 떨었습니다. 왜 떠냐고 했더니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만약 예수님 만나 주셨으면 가서 그렇게 "야 내가 있지 이분을 만났는데 이분 진짜 선지자야!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야 내가 남편 5번 갈아 치운것도 다 아는것 있지? 지금 남편도 내 남편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 있지? 야! 놀랍지 않아 나 말고 예수님 놀랍지 않아?"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어렵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여자를 고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좀 말이 많다 해도 절제해야 하지만 말을 안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내적인 언어를 그 하나님과 은혜의 세계 이런것들로 꽉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을 전도 데려가면 최고입니다. 도저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모르는데 이 사람은 기가 막히게 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결국은 마음의 변화 없이 말만 잘하려고 하는 것은 성공하면 위선입니다. 그렇죠? 마음이 아름다운 것으로 꽉 차면 아주 놀라운 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만 가꾸지 말고 마음을 가꾸십시요. 그러면 입이 그 마음의 수원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입의 수원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예화) 어떤 사람이 잡지에 글을 썻는데 시외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예쁜 자매가 탄 것입니다. 화장을 깨끗하게 하고 입술까지 곱게 바르고 얼굴도 너무 예쁘고 특히 입술이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서서 가는데 한참을 가는데 인상을 막 쓰더랍니다. 멀미가 나고 어지러운것 같았습니다. 대게 그러면 사람들이 자리를 조금 옮긴다든지 못 참겠으면 차를 좀 세워달라고 하든지 아니면 옛날에 시외버스에 보면 비닐봉지 검은것 매달고 다니지 않습니까? 앉아서 그것을 하든지 하는데 이 여자는 참지 참지 하는데 서서 가다가 우웩하고 오바이트를 하는데 그것이 쏟아지면서 자기에게 쏟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입술이 어쩜 그렇게 예쁠까? 거기서 어쩜 그것이 쏟아 질까? 결국은 속이 흔들리면 입술이 예쁜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쏟아 지는데...
결국 좌우하는 것은 입술의 모양이 아니라 속에 있는 언어입니다.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음을 아주 아름답게 가꾸면 학교 교육을 못 받았는데도 어디 가서도 교양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흘러 나오는 이야기가 거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교양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아름다운 내적 언어로 꽉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뭐냐고 하면 입술로 아름다운 지식을 말하는 사람과 입술로 아름다운 지식을 전하는 사람의 입술과 미련한 자의 마음을 대칭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지혜로운자는 입술을 열어서 아주 아름답고 유익한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미련한 자는 입술을 열어서 쓸데없는 이야기만 쏟아 놓는다고 해야 하는데 지혜로운 자의 입술과 미련한 자의 입술을 대조하지 않고 미련한 자의 마음을 대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개가 다 한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어에 나오는 문학적인 기법입니다. 그래서 입술과 입술이 있는데 입술의 근원이 마음이기 때문에 입술과 입술을 비교하지 않고 입술과 마음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지식을 쏟아 놓아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은 마음이 지혜롭고 아름다우며 마음이 미련한 사람은 입술이라는 이야기는 안 했지만 여기서 결론을 이끌어 내면 입술로서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소리들을 쏟아 내어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이것이 무슨 주방에 있는 반찬통도 아닙니다. 반찬통의 깨소금통에는 깨소금만 담겨 있고 고춧가루통에는 고춧가루만 담겨 있습니다. 혹시 섞어서 담아 놓는 사람 있습니까? 제가 알기에는 그렇게 지혜가 없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기름하고 간장하고 병에 섞어서 쓰시는 분 있습니까? 참기름은 참기름병에 들기름은 들기름병에 올리브유는 올리브유병에 간장은 간장병에 그것도 조선 간장이냐 왜간장이냐 따로 분리해 놓고 씁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의 은혜 아닌 다른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또 반대로 여러분들이 아무리 은혜에서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쓰레기 말고 다른것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도 조금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면 아무리 성화된 사람의 마음에도 부끄러운 것이 있고 아무리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사람 속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식으로든지 이것들이 섞여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옛날에 떡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떡이 재미 있는 것이 뭐냐면 쌀을 찜통에 찌는데 갈래떡을 하려면 위에 집어 넣고 그 다음에 절편 같으면 넙적한 것을 집어 넣으면 되고 떡국 떡 그러면 굵은 것 집어 넣으면 되고 학교 앞에서 파는 떡볶이면 네구멍짜리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커다란 공이로 꾹꾹 누르면서 집어 넣으면 쫙하고 나옵니다. 물에 떨어지면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데 툭툭 잘라서 쌓으면 그것이 떡국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재미 있는 것이 뭐냐면 집에서 하실 때 한번 해 보십시요. 쌀가루를 집어 넣고 떡을 빼는데 뺀 떡을 자르지 말고 또 집어 넣어 보십시요. 그렇게 해서 세 번만 하면 세상에 없는 맛있는 떡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이 계속 줄어 듭니다. 찰져 지니까 줄어 듭니다. 이것이 쫄깃쫄깃 하면서 그렇게 맛있는 떡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떤일이 있었냐 하면 분명히 쌀을 집어 넣고 했는데 나오는 데에서 노란 떡이 나오는 것입니다. 떡을 다 버리게 생겼습니다. 이것이 뭐냐고 했더니 주인이 그제서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앞에 옥수수 떡을 했는데 조금만 나오고 안나올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말을 할때까지 계속 노란 것이 묻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떡 나오는 구멍에 노란 옥수수 떡이 잔뜩 끼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씩 묻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지혜롭게 어떻게 했냐면 나온 것을 가져다 안 자르고 다시 집어 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넓적한 절편을 집어 넣어서 끊어서 팥에 묻히니까 콩가루에 묻히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쨎든 맛있게 먹고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내적인 언어가 많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잔뜩 쌀가루를 집어 넣어서 쏟아져 나와도 거기에 붙어 있는 노란 떡이 있어 섞여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떠오르는대로 무엇을 말해도 문제가 안 되는 사람은 이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누구도 그런 말을 실수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사님이 빌리 그레엄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부시 대통령이 뭐라고 까지 이야기 했냐면 빌리 그레엄 목사님은 우리 미국의 양심이라고 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할 정도로 극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분은 세계적인 부흥사이면서도 정말 아름답게 사신것 같습니다. 엊그제 부산에 내려 가니까 그의 아들 프랭크린 그레엄이라고 하는 분이 와서 오십만명이 모이는 집회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끼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쨎든 그렇게 훌륭하셔서 부시 대통령이 목사님은 미국의 양심이십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 할 정도로 존경 받는 분인데 한번 언론에 혼이 나셨습니다. 그것이 어느정도까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유대인에 대한 비하 발언 때문입니다. 사실 복음을 사랑하는 그 목사님이 유대인이라 해서 비하 했을리가 있겠습니까? 무언가 말을 실수 하셨겠죠? 그것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확대가 되어서 그렇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해 전에도 어떤 후보가 한참 열 받아서 이야기 하다가 60이상 나이 먹은 사람은 투표에 안나와도 된다고 해서 발칵 뒤집히지 않았습니까? 노인들이 데모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오버하면 항상 이 속에서 말을 만들어 낼 때 하얀떡이 아무리 많아도 노란떡이 묻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그것을 조절하는 말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속에서 생겨난 많은 기억들이 뭉글뭉글 떠오르면서 위에 있는 마음의 수면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지가 무슨 말을 해야겠다 하고 지정을 하면 전파를 보내서 선택된 생각들이 집중을 받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뭉글뭉글 수면에서 끓듯이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뭘 좀 집중적으로 생각해야겠다 하고 신호를 던지면 그 중에 몇 개가 선택되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수면으로... 그리고 마음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방울이 일어 나면서 마음의 내적인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후르륵하는 것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냐면 내적인 언어화된 그것을 조합하고 가려내면서 마음으로 말을 해보고 말한 이것이 어떠한 파장을 일으킬지를 생각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내적인 언어로 떠오른 것들을 이것은 잘라서 묻어 버리고 이것은 말을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너무 말하기 싫은때도 말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 너무 말하고 싶은데 그 물방울을 끄면서 내적인 언어를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말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혜가 어디서 생기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생겨납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죄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거늘' 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가장 참기 힘든것이 나 때문에 하나님이 손해 보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언어 선택의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말을 하고 싶지만 이 말을 한 다음에 많은 파장들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손해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내적인 언어를 아름다운 것으로 꽉 채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들을 섞고 떠오르게 하는 조작의 지혜를 소유할것 그러면 여러분들이 말이 좀 많아도 그것 때문에 너무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용하셔서 온 동리에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6.정결케 하는 말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잠15:26)
잔잔한 강가에, 호수에 돌맹이를 휙 던지면 퐁하고 떨어지는 것은 한번인데 파문은 아주 여러개가 생기지 않습니까? 파문을 그리면서 계속 뻗어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말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의 입에서 나온것이 끝났다고 해서 그 말이 끝난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계속 번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말한것을 이미 잊었고 마음에도 그 말이 남아있지 않은데 그 말은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말이 만약에 악한 말이었다면 그 말을 할때에는 부분적으로는 기회가 없어서 그 말을 쏟아 놓았고 또 부분적으로는 마음이 악해서 그 말을 쏟아 놓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마음에는 다시 지혜도 생기고 그 악한 말에 어울리는 마음도 사라졌는데 자기가 이미 내밷은 말은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예화) 아기를 가지면 힘들다고 합니다. 저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자매들이 그랬습니다. 배가 이만해서 다니는 자매들을 보면 참 안쓰럽습니다. 무게중심 때문에 앞으로 넘어질 것 같기도 하고... 더군다나 아기가 나오기 직전이어서 배가 남산만해지면 불편하겠지요? 우선 피곤하면 엎어져서 잘 잤는데 그것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래도 뱃속에 넣고 있는 것이 낳은 것 보다 낳지 않습니까? 우선 뱃속에 들어 있을때는 내가 자면 아기도 자는 것입니다. 뱃속에 있는 아기가 깨우는 것 보았습니까? 그리고 내가 먹으면 아기도 먹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아기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낳아 놓으면 이제 별개의 문제입니다. 잠 자는데 먹겠다고 울고, 먹는 시간인데 쌋다고 울고 이렇게 해서 이제 뱃속에 있을때에는 내 마음대로 였는데 나오고 나면 이것은 나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를 휘두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도 마음에 있을때까지는 하나님 앞에서만 문제가 되었는데 낳아놓고 나면 이놈이 돌아 다니면서 계속 역사 하면서 내가 일하지 않을때에도 이 말은 일하는 것입니다. 계속 파문을 일으키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을 쏟아 놓기 시작하면 그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면 다른 사람은 잔잔한 마음이었을때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거나 좋은 이야기를 할 것이 있었는데 파문이 일어나면 할 이야기가 많아지고 그 파문이 안 좋은 파문이면 안 좋은 이야기가 이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적언어라고 합니다. 내적인 언어가 많이 있으면 말하기가 굉장히 쉬어지고 빨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쏟아 내어야 하니까...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똑같은 음식인데도 배가 고프면 음식이 빨려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안에 내적인 언어가 많으면 정해진 시간에 많이 쏟아 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게 열 받았을때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침 닦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 내적인 언어를 빨리 쏟아 놓아야 합니다.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말들을 절제 없이 쏟아 놓을때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자극을 일으켜서 또 다른 절제없는 말들을 쏟아 놓게 하고 또 다른 절제없는 말이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극해서 또 다른 언어를 쏟아 놓게 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게 될 때 그것을 마치 비유를 하자면 조그마한 웅덩이에 흙탕물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가라 앉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대화나 덕이 안되는 언어들이 판치는 그곳에 있다가 나오면 심령이 더러워지고 불결해지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선한 말은 자기를 정결하니라 했습니다. 선한말은 자기 자신이 깨끗할 뿐 아니라 다른 것들을 깨끗하게 하는 아주 놀라운 힘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뿐 아니라 불결하고 절제없는 대화 속에서 순결함을 잃어 버린 지체들의 영혼과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흘려 보내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데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야! 저사람 소경 된 것이 누구 때문이겠냐?” 하고 수군수군 되면서 “지 애비가 얼마나 못됐으면 아이가 소경으로 태어났을까?” “혹시 저놈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닐까?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을 미워하면 3, 4대까지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아이 아버지가 아니면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증조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사람들이 이렇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내적인 언어가 많이 생겨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나면서부터 소경된 아이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소경이 되어서 태어난 이 아이의 대한 연민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일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태도 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도로 만드셔서 파송하시기 전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완전한 피해자 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패역하게 살고 제멋대로 살면서 뭐라 하냐면 상처가 많아서... 그런 말 들어 보았지요?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바람에 깍이고 비에 씻겨가는 바위같은 존재로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처럼 자존하고 자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그런 하나님 닮은 존재로 창조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상처라고 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입은 손해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결정적인 반응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자기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렇게 된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된 것입니다. 그런것은 빼버리고 상황에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만 자기를 묘사하는 것은 자기를 아주 하챦은 존재로 깍아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 하는 인간관이 아니고 심리학이 바라보는 인간관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의지를 가지고 태어나서 순간순간 그렇게 반응하므로 망가진 사람들이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성경이 보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상처의 문제와는 틀린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결정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라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럼 똑같이 목자 잃은 양같이 영적으로 유리하고 방황하는데 물론 돌보는 목자가 없어서 그랬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리하고 방황하는 원인이 자신안에도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정말 순진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 생각하면 인간관이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너무 낙관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 보면서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는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반성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살아 왔는지를 이야기 하면서 지금 하나님 만난 것을 감격해 합니다. 그때 나는 진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피해를 당하며 고생을 했구나 누군가가 저 사람을 잘 이끌어 주었으면 인생이 저렇게 안 되었을텐데... 그런데 사실은 그리고 몇 달 길면 몇 년 지나고 나면 은혜가 빠져나가고 강팍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그때의 그 모습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와서 은혜 받을때는 원래의 모습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서 은혜가 고갈되고 나면 아 저 사람이 옛날에 주님 만나기 전에 이 교회에 와서 변화되기 전에 저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둘러싸고 이 아이의 소경된 상태에는 애정이 없고 왜 이 아이가 소경이 되었는지가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는 호기심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한 것이 그들의 책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눈에는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안되는 불쌍한 모습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면서 심히 민망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들을 쏟아내고 분란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었을때 예수님이 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이 아이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이 아이의 소경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란다” 하고 예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한마디의 슬기로운 말로 사람들속에 일어나던 분란어린 내적인 언어들은 사라지고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한 상태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또 하나 기가막힌 경우가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율법으로는 돌로 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기가막힌 순간이라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여자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혔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돌로 쳐 죽여라 하면 율법을 지키신 분이라고 이해가 되는데 평소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또 용서해 주어라 하면 모세를 무시하는 이단자라고 해서 예수님을 넘어뜨릴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두 곤경속에 한 곤경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 안에서 내적인 언어들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간음한 여자에 대한 증오, 두려움,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 죄에 대한 생각 이런것들이 내적인 언어가 꽉 차서 소란 스러웠을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려 쳐라” 흙탕물처럼 일어나던 죄를 둘러싼 불결한 상황이 가라 앉으면서 한사람씩 한사람씩 손에 들었던 돌맹이를 땅에 놓고 흩어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돌맹이를 내려 놓았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확 치밀어 오르던 무서운 정죄하고자 하는 마음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어느 한 순간에 잠자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말의 위력입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날 때 말은 그 분란을 더 부채질하는 말은 한순간에 쏟아 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렇게 분란이 일어나면 아주 커다란 상황을 오히려 선한말로 한번에 잠재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목마른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을 주는 것도 하나님께 받은 상을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수 많은 행동들을 쏟아 낼 인간의 마음 이것이 분탕질을 하며 분노와 좌절 그리고 시기, 욕심 이런 것으로 꽉 차 있을때 선한 말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만들어 줄때 그가 받을 상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말을 잘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정결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불 붙는데에 기름을 끼얹는 것처럼 그렇게 절제가 없는 말로서 화난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욕심을 가진 사람에게 탐욕을 불러 일으키고 교만한 사람들에게 완고함을 더하고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하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 말을 접었는데 말은 돌아 다니면서 수 많은 사람들 마음을 헤집으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모두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어 있고 그때 증인은 허공을 돌아 다니는 그 말이 자기 자신에게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성숙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말에 있어서 하늘의 교양이 좀 깊이 베어서 분유한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탐욕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마음에 안정을, 교만한 사람들의 마음에 겸손을, 더러운 사람들의 마음에 정결함을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경우에 맞는 그때에 바로 다른 사람의 불결하고 더러운 말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선한 말로 자기를 정결케하고 다른 사람들도 정결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넘쳐야 합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다 하나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예화) 저는 하나님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프리즘 생각이 잘 납니다. 우리 초등학교 다닐때 프리즘은 자연 시간에 가끔 썻는데 프리즘을 햇빛에 비추면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개의 색깔로 분광이 됩니다. 그러면 일곱개의 무지개 빛은 프리즘을 통과한 빛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인데 프리즘을 통과하기 전에 햇빛 안에는 빨주노초파남보중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없다고 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거기에서 나왔는데 없다고 하면 됩니까?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할때는 없는 것이고 진짜로 눈에 보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할때는 있는 것입니다.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이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빛을 보는데 인간이 볼 수 있는 빛의 폭은 아주 작습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도 대역이 아주 작습니다. 예를 들자면 초음파 해충 퇴치기 같은 것 있습니다. 그런것은 전기를 꽂아 놓으면 불만 들어오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귀뚜라미가 들을때는 그것이 기차 지나가는 소리처럼 어마어마한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음파를 인간은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색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를 관측할 때에 관측 장비중에 전파 망원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파로 그것을 받아서 전파로 영상을 만들게 하는 망원경입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도 그런것을 많이 발전 시켜야 하는데 큰 산의 골짜기에 망원경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직경이 몇백 미터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파 망원경을 어마어마하게 설치 하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오는 전파를 받아 그 전파는 파장인데 우리의 눈에는 그것이 빛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받아서 그래프로 환원을 하면 그림이 되어서 영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보이는 모든 것이 프리즘을 통과한 빨주노초파남보라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안에 있는 것은 프리즘을 통과하기 전의 빛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막을 통과하면서 말, 행동, 사상 그리고 태도, 몸짓, 습관 이런것들로 분광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경건하지 않고 악한 내적 언어로 꽉 차있게 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그렇게 아주 경우에 맞는 선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를, 오류에 빠진 사람들에게 빛을 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진리의 빛으로 가득차 있을때 옳은 판단 속에서 그런 언어를 하나님앞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앞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의 교양도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저는 교역자들에게 늘 이야기 하는 것이 신령한 목사가 되기 전에 교양 있는 신사 숙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영성이 있는 기독교인이 되기전에 먼저 구원받은 신자로서 덕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예의가 반듯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사는 일에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훌륭하고 아름다우면 그 사람의 아름다운 태도 때문에 예수가 전파되는 것은 거북이 처럼 전파되고 사람이 예의가 없고 교양이 없고 처신이 불량하면 제비처럼 전파됩니다. 막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의 태도도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꽉차고 밖으로는 교양을 잘 갖추어서 언제든지 사람의 마음이 거짓된 내적인 언어로 가득차서 경건치 못하게 휘둘릴때에 마음속으로 경우에 맞는 선한 말을 해서 악한 사람들이 더럽힌, 지혜가 없어서 말을 절제하지 못해 더럽힌 사람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7.감사의 말로 드리는 찬송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시 147:7)
I. 본문해설
우리가 주일 오후마다 말 가지고 살펴보는데, 이 말에다가 곡조를 붙인게 노래입니다. 이게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서 유행이 사라져도 결코 사라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한 가지가 있으니 이게 바로 노래입니다, 노래. 사람들은 다 우리 민족은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그러는데 노래 좋아하지 않은 민족이 별로 없습니다. 다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이 노래가 그렇게 인간의 그 마음을 자극하고 사랑을 이끌어내는 이유가 뭔가 궁금하지 않아요? 그렇죠. 이 음악은 아무렇게나 한다고 해서 음악이 되는게 아니예요. 이 음악이 근원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끄는 놀라운 힘이 있어요. 이 힘을 알았던 사람들은 이 음악을 정치와 심지어는 전쟁에 활용을 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랬어요. 새벽종이 울렸네, 뭐 이런 것도 웬지 그 음악 들으면 빗자루를 들고 뛰쳐 나가고 싶은 충동이 있어요. 또 군대에선 아직도 하죠.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다만 웬지 전쟁나면 웃통벗고 선두에 서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무솔리니, 히틀러 이런 사람들은 모두 이 음악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특히 히틀러, 이 사람은 바그너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중국의 역사에 보면 도저히 전쟁에서 이길 것 같지 않은 때에 적군들이 쭉 있는 고요한 밤중에 아주 애처로운 피리를 불어요. 그러며는 군인들이 처음에는 하찮게 듣다가 밤이니까 정신을 집중하게 되잖아요. 그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이 단장의 애가야, 그리고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아주 애처로운 그런 곡조란 말이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름에 잠기게 되는 것이죠. 군인은 시름에 잠기면 끊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음악의 놀라운 힘이예요. 근데 왜 그렇게 음악이 우리를 잡아끄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을까 이거를음악하는 사람들 보고도 여러사람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 잘 모른데요. 그건 음악의 소관이 아니래요. 그게 참 신기해요. 그쵸?
그래 내가 좀 가르쳐 드릴께요. 왜 이렇게 음악이 사람을 끄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냐면 이 음악이 우주 전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농축한 거예요. 그래서 음악이 사람을 끄는 강한 힘이 있는 거예요. 우주는 조화와 균형과 절제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분량과 수량과 무게로 형성되어서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뭐 쌀이나 밀가루의 분량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정확한 위치라고 생각하면 되요. 제 주제 넘게 뭘 행하는 사람을 가르켜서 우리들은, ‘야 그건 니 분량 밖이야’ 이런 말하죠. ‘그건 니 분량이 아니다’ 그러죠. 그 분량은 넘치는 크기를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이 분량은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주는 각각 별이 있어야 될 자리에 별이, 해가 있어야 될 자리에 해가, 지구가 있어야 될 자리에 지구가 이렇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구가 조금만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면 큰일나요. 그래서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이렇게 돈다는 것은 여러분이 다 알잖아요. 그래서 겨울은 거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겨울은 지구가 이렇게 (동그랗게) 도는데 똑같이 도는데, 겨울과 여름은 이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에 의해서 여름과 겨울이 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적도쪽에 있는 사람은 늘 가까우니까 그 거리가 사실은 얼마나 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더위와 추위가 현저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러한 것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또 수량이 있어요. 이 수량은 수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수는 모든 비율을 뜻하는 거죠. 비율. 그래서 음악을 남이 한 음악을 부르는데는 그런게 필요가 없지만 작곡을 하는 사람들은 이 수학을 탁월하게 잘해야 해요. 수학에 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절대로 작곡가로 대성할 수 없어요.
우리의 몸 전체도 이 숫자가 가져다 주는 비율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쁘게 보이는 사람과 뭐 그런 사람도 별로 없지만, 예쁘게 보이는 사람과 별로 못생기게 보이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몇 mm의 차이로 눈과 코와 입이 균형을 이탈하는 거예요.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그 균형을 이탈하게 됐을때 그때에 예뻐보이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오면 예뻐보이기도 하고, 멀어지면 미워보이기도 하고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몸도 전체 마찬가지예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여기여기여기여기, 이 마디마디마디 사이, 그 다음에 상체와 하체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아주 엄격한 비율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비율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것도(팔꿈치) 비율로 이렇게 이루어져 있죠. 그래서 어떻게 여기를 가운데 중심축으로 해서 이렇게 지렛대모양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렇게 해 가지고 똑바로 된것이 굽혀지면서 원으로 운동을 해서 사람을 쥐어박기도 하고, 그 다음에 또 섬기기도 하고 이렇게 되는 것이죠. 온 몸이 그런 균형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목사 골탕먹이는 질문이거든요. 저 목사님? 왜? 그러니까 그 아담과 하와도 배꼽이 있었을까요? (웃음) 그거 어떻게 생각해요 여러분들. 엄마 탯줄을 끊는 게 배꼽인데 대체 아담과 하와의 엄마는 누구야? 그건 조금 그래도 들해. 더 짖꿋은 질문은, 목사님 그 하나님이 아담의 젖꼭지는 왜 만드셨을까요? 근데 여성의 젖꼭지는 엄마가 되어서 애들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 필요하죠. 양식을 먹이기 위해서 필요하잖아요. 남자의 그것은 왜 만드셨을까?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어요. 그것은 그냥 디자인 상으로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이게 정확한 대답이예요. 디자인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디자인 때문에 아니, 웃으면서 하는게 하는 얘기가 아니예요. 진짜 미학적인 디자인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거예요.
또 의학으로 케들어가보면 더 심오한 비밀이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 발견 못했지만 앞으로도 발견할 지도 몰라요. 그러나 확실한 거 하나는 디자인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양쪽에다 남자에게도 젖꼭지를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배꼽도 따라서 그때 이미 있었고, 그 디자인이 이 탯줄에 의해서 계속 유지가 된 것이죠. 그러고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비율로 이루어진 것이죠. 그러니까 남자들 아까 얘기가 나왔지만 이 가슴 중간에서부터 이쪽 젖꼭지까지의 거리와 여기, 이것도 비율이죠. 하나는 여기 붙고 하나는 이 배꼽 아래에 붙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아이를 먹일 엄마의 입장에서는 불편하다고 하겠지만, 뭐 불편할 것도 없지, 하나는 눕혀서 먹고 하나는 서서 먹으면 되니까. 근데 그렇게 되면 예쁘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놀랍잖아요. 존재하는 모든 동물이나 식물들이 반을 쪼개면 대칭을 이루어요. 개도 중간을 딱 쪼개보세요. 딱 펼쳐지고. 닭 쪼개보세요 쫙 둘이 만나죠. 사과 쪼개도 똑같이, 개구리를 쪼개도 똑같이, 심지어 뱀을 쪼개도 똑같이, 장어 봤잖아요, 장어 쪼개면 똑같잖아요. 둘이 마주보잖아요. 그죠? 그렇게 되는거죠. 그것이 바로 수량이예요.
이러한 요소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아름답게 보이는 거죠. 그것들이 뭐냐면 질서를 만드는 요소예요. 그런데 요소가 2개 밖에 없으면 질서가 참 간단해지지 않겠어요? 그렇죠? 두개. 그런데 요소가 여러 개가 되면 이제 관계가 복잡해지니까 질서가 아주 많아지고, 관계가 아주 많아질 것 아니에요 그 많은 관계 속에서 질서를 이루면 이룰수록 그것은 아주 탁월하게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예요
그래서 인간이 다른 모든 사물들에 비해서 아름다운 이유는 뭐냐면 인간 안에는 관계하고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보다도 훨씬 더 많은 거예요. 과학자들은 생각하기에 인간의 유전자는 개나 돼지보다는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고등한 동물이니까. 근데 실지로 나중에 결과가 나와서 조사를 해 보니까 비슷비슷한 거예요. 인간이 굉장히 실망했죠. 근데 우리는 그런 생화학은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예측했던 바죠. 왜냐하면 그거는 인간의 몸을 놓고 해부를 하고 분석을 하는 거니까 인간의 몸은 자연적인 질서에 속해 있기 때문에 동물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거죠. 다만 인간은 또 하나 이 복잡한 인체 말고 정신과 영혼이 있어서 관계하는 질서를 만드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이 정신과 육체사이의 질서가 잘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거예요.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진짜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정신과 영혼을 가진 사람의 그 탁월한 아름다움은 황금이나 뭐 커다란 집이나 무슨 파란 쪽빛 바다, 이런 거에 비교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 질서가 깨뜨려지면 인간은 정말 똥보다 더러운 존재가 되요. 그게 추함이예요.
그런데 그런 질서들이 잘 되어있을 때 좋은 것이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되거든요. 그래서 질서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을 보면 다시 만나고 싶고, 그 다음에 뭐라도 주고 싶고, 관계를 계속 갖고 싶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음악이 우주 안에 있는 그런 탁월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질서들을 농축해서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게 뭐냐면 딴 따 딴따 딴따다 길이에 의한 박자를 가지고 있죠. 아아아아아아 이런 음의 높낮이를 가지고 또 질서를 이루는 거죠. 그 속에 언어가 들어가요 말이 들어가서 질서를 이뤄요. 또 그 속에 부르는 사람의 이 속에 있는 질서가 있어요 사랑으로 확 차오른다든지 기쁨으로 확 차오른다든지 이런 질서가 그 속에 반영을 해요. 그러니까 어때요? 작곡가는 하나의 곡을 작곡해 놓고 오케스트라에 연주를 시켜서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한번도 똑같은 노래가 나오는 적은 없는거죠. 그건 불가능하죠. 그래서 음악을 아주 탁월하게 잘하는 사람은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음악이 틀려진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죠. 그게 음악적 해석 능력이라고 하는 거죠. 뭐 얘기하면 아주 굉장히 복잡해요. 그런데 우선 보면 이렇게 많은 악기 연주자들이 있잖아요. 여기서부터 소프라노부터 시작해서 저기 베이스까지 쭉 이렇게 오케스트라가 펼쳐져 있잖아요. 수백명이 연주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잘 보세요. 들어봐요. 밖에 그려서 있는 이 작곡의 음표는 몇 세기를 내려와도 똑같은 것이 내려 올거 아니예요. 원래의 작곡가가 작곡을 해 놓은 거니까 근데 이것을 딱 갖다놨을 때 이것을 연주한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니예요. 또 오늘 연주한 이 사람이 어저께 그 사람이 아니예요. 왜 이 속에서 마음의 움직임이 다르니까요.
참 감사하드라구요. 엊그게 우리 한태순 집사 딸래미 한수진 왔다가 인사하고 갔는데 그 영국에서 그렇게 잘해요. 요번에도 여기 정명훈씨 하고 도쿄에서 다시 연주회를 하고 가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이번 주일 지킨다고 그러면 내가 한번 해 보라고 할려고 했는데 가버렸어요. 그런데 그 중학교때 가서 그렇게 재능이 있으니까 열심히 뻗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아이가 그 연주하는 이제 뭐 아이가 아니고 자매네 대학교 다니니까 그 자매가 연주하는 그 바이얼린이 말이죠. 조금 비쌉니다. 얼마 하나 함 불러볼라고요. 스트라디발디라는 18세기의 작품인데 그 악기인데 전 세계에 몇 대 안됩니다. 놀라는 표정하세요. 44억입니다. 그거는 개인이 아무나 살수가 없죠. 그래서 그걸 어느 협회에서 보관하고 아주 음악을 잘해서 상을 받거나 탁월한 사람에게 1년씩 이렇게 대여를 해 주는, 상으로 대여를 해주는 그거를 가지고 일본에 가지고 가서 연주했다고 하더라구요. 야 떨려서 그걸 어떻게 들고 올라가냐? 떨어뜨리면 어떡하냐 보험 다 들었죠. 악기도 또 틀려요 그러니까 여기에 몇 개의 요소가 들어가요 쫙 연주를 하면 이것들이 다른 것들과 어울리면서 음을 쫙 내요. 이게 뭐냐면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때 노래를 좋아하게 만드세요. 그런데 노래인데 인간의 타락한 감정을 표현하는 그런 쪽으로 좋아하게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사랑, 하나님을 노래하는 그런 가락에 깊이 심취하게 만드세요. 그 아이에게 엄청난 정서적인 영향을 주는 거예요 요즘처럼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텔레비전이나 보고 거기서 CM송이나 따라하고 이러면 애들 망가뜨려요. 그렇게 하면서 정신과 영혼에 큰 영향을 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가락을 가지고 지어서 찬송을 하는데 이게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질서만 하겠어요. 그것을 정말 유치하게 흉내낸 것이 인간의 음악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또 아주 탁월하게 흉내를 냈다고 하는 것이 명곡이 되는것이 아니겠어요? 아무리 큰 명곡이라도 아무리 뛰어난 명곡이라도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질서를 다 담고 노래하기에는 너무 그릇이 작아요.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다 곡을 붙여서 하나님을 노래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가사 내용 중에 하나님이 모르시는게 있겠어요? 주 하나님은 광대하시도다, 주 이름은 높도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도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셨도다, 뭐 하나님이 새롭게 아신 사실이 있느냐고요 거기에.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을 말로서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에,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이거는 아주 놀라운 거죠.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둘다 음악을 하는 부부인데 자주 다퉜대요. 그랬더니 이제 남편이 제안하기를 그랬대요. 우리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 다투니까 우리 말로 하지 말고 노래로 하자. 그래서 서로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에다 담아서 하기로 가락을 붙여서 하기로 뭐,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즉석에서 우리도 흥얼거릴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은 더 잘할거 아니예요. 싸움을 계속 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그 아름다운 노래 가락에다가 “나가 죽어, 너하고 만난게 불행이야, 헤어지고 싶어, 그대가 날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최고의 일은 죽는거 이런 식으로 그 험한 가사를 아름다운 가락에 담을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찬송이 필요한 거예요.
오늘 여기에 보면 감사로 노래를 부른다고 되어 있어요. 특별히 이 노래도 우리의 마음안에 우주의 질서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있는데 그 가락에 붙여진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일 경우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감사의 찬송, 우리의 마음 안에 확 울려 퍼지면서, 그러면서 온 사람의 마음에 온 심령에 가득 울려 퍼지면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신앙이예요. 그런데 보십시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인간의 말에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아프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자신의 마음에 칼질을 해서 마음을 찢어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님이 주신 그 언어로 의사를 소통해서 먹고 사는 일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서 주님께 감사하며 노래를 불러 자신의 침체된 영혼을 고양하고 그리고 시름에 잠겨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리고 지체들의 미끄러진 영혼들을 다시 살리는 일에 이바지를 해요 그러니 우리가 말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까? 늘 부를 노래가 마음에 있는 사람, 참 아름다운 사람이예요. 여러분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에 부를 노래가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의 부를 노래가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같이 한번 간절히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 위해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어지이다. 아멘.
8.지식과 입술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잠10:21)
동물들도 제한된 의사표현의 언어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언어라기 보다는 소리입니다. 소리를 통해서 생존기능을 위해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병아리를 길러 보았는데 어미 닭이 병아리를 돌보는 것을 보면 먹을것을 찿고 병아리를 부르는 소리와 시골에서 솔개가 떠서 위급상황에서 병아리를 부르는 소리가 다 틀립니다. 그리고 궁금해서 어디 갔는지 찿는 소리는 우리 인간이 들어도 그 소리를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소리입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통해서 서로의 의사를 전달해서 생존기능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언어라고 하는 것을 주신 것입니다. 이 언어는 자신의 생각과 지식, 사상 이런것들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말은 대부분 동물과 같은 수준에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까? 즉 뭐 먹었니?, 맛있다, 자자, 어디가자, 뭐 하자, 옷 입었니등등... 그렇게 대부분의 언어들을 쓰는 목적들이 우리의 생존기능과 관련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의 목적중에서 10%정도만 사용하는 것이고 90%는 사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주신 이유는 언어의 소통을 통해서 온세계를 하나님의 솜씨로 창조하신 세계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 돌보고 그렇게 고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어라고 하는 수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활발한 언어의 소통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언어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먹고, 입고, 마시고, 쓰고 하는 육체를 위한 단순한 삶을 위해서도 우리의 언어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언어의 전부라고 하면 좀더 복잡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동물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 너무 지나친것일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통해서 유익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첫째가 말을 사람들에게 잘 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말재주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 인데도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하면 정말 재미있고 감동이 되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하면 재미가 하나도 없고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기술이 필요하고 또 하나는 이제 내면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면 내적인 언어가 필요합니다. 아는 것이 많이 있어도 가슴에 와 닿은것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말할것이 별로 없습니다. 가슴에 와 닿은것이 많은 사람은 아는것이 좀 없어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적인 언어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식 자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있고 그 지식중에서 어떤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똑같은 정도로 살아서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도 보면 어떤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실제적인 삶, 정직이라든지 순종이라든지 이런것들이 가슴에 와 닿고 어떤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 어떤때는 성경 말씀의 깊은 은혜, 또 어떤때는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이 그 시기마다 우리의 가슴속에 다가오면서 우리의 삶을 비옥하게 하고 우리의 삶과 인격을 균형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적인 언어는 이 지식의 큰 덩어리중에서 어떤것들의 떠올라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과 감화와 은혜와 이런것들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유형이고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의로운자의 입술은 많은 사람을 교육한다고 했습니다. 교육한다고 해서 선생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데도 한참 대화를 나누고 나면 무엇인가 그 사람으로부터 얻는것이 있습니다. 한참 대화를 나누고 나면 무엇인가 그 사람으로부터 얻는것이 있고 그리고 대화를 한참 나누고 나면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교육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화를 나누어도 무엇인가 지식적으로 얻는것이 있으면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다 끝나도 마음에 무엇인가 따뜻하게 차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얻는것이 없으면 대화를 나누고 일어 난 다음에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운 정서들이 오히려 깍여 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이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의로운 입술은 사람을 교육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 있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어야 되는데 성경에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행해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의로운자와 반대되는 사람으로서 나오는 것이 미련한 자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사람의 반대말이 미련한자이고 그리고 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얻는것이 있게 만들어 주는데 미련한 사람은 그렇게 못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죽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사람을 괴롭게한다는것 보다는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도 아주 세속적이고 쓸데없는 사람들과 만나서 여러시간 떠들고 나서 그런식으로 몇일 살고 나면 은혜는 다 소멸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일날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불씨입니다. 그것을 가슴속에 잘 간직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세속적인 사람들과 만나서 웃고 떠들고 세속스런 담화를 나누고 나면 은혜가 고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것들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한참 대화를 나누고 일어나는데 마음이 건조해지고 마음이 메말라지는 것을 여러분들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은혜를 죽이는 말의 작용들입니다. 미련한 자는 처음부터 지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면 그 사람의 경건한 심령을 상하게 하고 은혜받은 심령이 아주 메말라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한적도 없고 열심히 모여서 찬양을 한것도 아니고 설교를 들은것도 아닙니다. 이상하게 대화를 나누다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아! 그래 맞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시는 구나 내가 하나님앞에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주님의 뜻대로 그렇게 살아야 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깊은 변화가 찿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에 담긴 아주 놀라운 능력입니다. 정말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하면 은혜를 받지만 목사는 설교를 할 기회가 많지 설교를 듣을 기회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때 비록 그 사람이 성도일뿐인데도 함께 대화를 하다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눈물이 나는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심방을 하고 돌아오면 아주 새롭게 힘이 날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머리가 터질것 같은 집만 심방을 하는 날도 있습니다. "왜 저렇게 사나?" 그렇지만 안 그런집도 있습니다. 보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구나,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는구나 그래서 마음이 아주 따뜻해질때가 있습니다. 돌아와서도 그렇게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생겨 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마전에는 서울시내에 주례를 서러 갔습니다. 그날 왜 그랬는지 주최측에서 기도를 많이 하셨는지 저는 기도를 그렇게 많이 못했는데 주례를 하는 시간에 그렇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례가 끝났는데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뛰어 나와서 손을 잡고 감격을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일가친척인줄 알았습니다. 손을 잡고 감격을 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서 결혼식에 왔으면 부조금 내고 가면 되지 주례선생 손을 붙들고...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가난한 마음으로 결혼식에 참석했겠습니까? "주님 이 결혼예식에서 저를 만나주시옵소서"라고 했겠습니까? 그냥 부조금 내고 갈비탕이라도 먹고 가려고 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 속에서 마음에 와 닿으니까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식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무슨 지식이냐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에서 지식이라고 나오면 대부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은 수학지식이나 생물학 지식이나 공학지식이나 하는 것과 관련이 없습니다. 지식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또 하나는 하나님을 빼놓은 지식,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나니 하면 하나님을 빼놓은 지식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이야기를 해도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그 무엇이 그 말속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의 말속에는 바로 그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가 깊이 들어간 사람은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못했어도 교양이 몸에 베어 있습니다. 저는 그런분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학벌로 이야기하면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는데도 교양이 베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앞에서 겸손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앞에서 자신의 분수를 알고 주님앞에서 꺽이고 하니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몸에 베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속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식들이 계속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앞에 그들로 하여금 나오도록 만들어 주고 지혜없는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대화속에서 깨우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로만 도와주는 것은 육체를 위할 뿐이지만 이렇게 지혜로운 말로서 사람들을 돕는 것은 그의 영혼에까지 이르는 그러한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르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생각할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니... 주님이 우리에게 정말로 편지 한통을 써서 보내신다면 그 주님의 편지에 얼마나 많은 진리의 빛과 사랑의 언어가 담겨있겠습니까? 그렇죠?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우리의 말 속에서 주님의 향기가 흘러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연스러움입니다. 우리교회의 부목사님들도 보면 설교를 잘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면 벌써 앞으로 설교를 해서 목회를 잘 할것 같은 사람들은 뭐가 있냐면 자연 스러움이 있습니다. 뭐냐면 남의 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설교를 하는데도 자기옷에 딱맞게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베끼기의 천재이기 때문에 이런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 들어가서 자기가 다 소화해서 나오는 것이니까 소화된 진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친밀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 때 전하는 말과 그 사람이 동떨어지지 않고 딱 붙어 있는 그런 느낌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때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것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알지도 못하는 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입술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마지막에 계속 내려가다 보면 마음으로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꽉 찼을 때 그 지식이 성령의 은혜로 화할 때 그때 그것이 내적인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온 몸에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서해안쪽에 가면 서해만 아니라 다른데에도 있겠지만 LNG선이 들어 옵니다. 우리가 쓰는 LPG가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는 마이너스 173도의 액체로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차갑습니다. 거기에 손을 집어 넣으면 동상 걸립니다. 그것을 들여다가 LNG선에 가져오는데 액체인데 가스를 액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운반을 할 수 없으니까... 액화시켜 그것을 차갑게해서 물로 만듭니다. 그래서 LPG차도 가스를 가득넣고 시동을 켜면 출렁출렁 합니다. 휘발유처럼... 그러면 커다란 둥그런 통이 있는데 무지하게 큰데 거기에 가득 채우면 그것이 전국에서 하루를 쓰는 것이랍니다. 둥그런 통 아마 여러분들이 텔레비전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마치 사발 엎어 놓은것 같은것 있습니다. 그것의 양이 어느정도 인가하면 시내에 가다보면 커다란 탱크차가 있는데, 가스 넣고 다니는 커다란 트럭 일만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양입니다. 그것이 하루정도 쓴다고 하는데 그 가스가 액체로 들어 옵니다. 그러면 그 가스가 있는 곳은 항상 화력발전소가 있습니다. 화력발전소가 왜 필요한가하면 액체로 된 것을 그냥 쓰면 안됩니다. 그래서 액체로 된 것을 가스로 다시 만들어서 통에 집어 넣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달을 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액체를 가스로 만들려면 그때는 뜨거운 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발전소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 속에 관을 통과시키면 거기에서 액체로 보낸 가스가 부풀면서 액화 가스가 기체가 되어서 관을 타고 도시가스로 배달도 되고 차가 와서 싣고 가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 액체 상태의 가스가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라면 그 발전소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은 성령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은혜를 주시면 우리에게 있는 혹은 새롭게 부어지는 말씀 가운데 어떤 것들이 끌어 오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꽉 채우는 내적 언어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지식으로 꽉 찬 마음이 되면 사람들에게 무슨 대화를 나누든지간에 결국은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하나님을 알게하는것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뜻을 정하고 최선을 다해서 섬겨야하는 섬김도 있고 그냥 살아가면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의 인생을 살고보면 전자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후자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이니 그래서 각오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지 하지 않아도 그냥 매일매일 살아가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꽉 채워서 의로운자의 입술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게하는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되면 말이 많아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입만 열면 보배입니다. 거기에서 은혜로운 말씀의 생수가 쏟아져 나오니까 말입니다.
9.이익 없는 수고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잠14:23)
어느 목사님이 지금은 다 은퇴하신분인데 굉장히 말씀도 잘 전하시고, 열정도 있으시고, 인품도 좋으신데 교인이 합심을 해서 목사님을 쫒아 냈습니다. 그것이 왜냐하면 성경 절수을 잘못 이야기해서 쫒겨나셨습니다. 교인들이 생일을 만나거나 아이들 백일이 되면 그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카드를 하나씩 써서, 카드가 인쇄되어 있으면 거기에 아이 백일을 축하합니다 하고 몇장 몇절 이렇게 적어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 있다 보니 아이 돌인데 카드가 온것입니다. 아기의 돌을 축하한다 하고 거기에 성경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이 뭘까하고 펴 보니까 '이에 나가서 목메어 죽으니라'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실화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런것이 이해가 안 갔었는데 요즘 제가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겨야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모든 수고는 이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모든 수고라고 하는 것은 목적이 선할 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보면 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선한것을 위해서 애를 쓰면 그 수고에는 이익이 있습니다. 어떤점에서 그러하냐면 선한 일을 위해서 애를 쓰면 하나님은 그 선한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것이 선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1부와 2부에는 이야기를 안한것 같은데 4부에서 설교가 조금 확대되어서 설교시간이 길어 졌읍니다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세계를 아름답고 완전하게 창조하셨는데 하루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완전하고 아름답다면 인간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가꾸고 돌보면서 살아야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것을 풀수 있는 성경의 비결이 뭐냐면 하나님이 이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현실적인 아름다움과 잠재적인 아름다움을 같이 넣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아름다움은 시간속에서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아 예쁘다 정말 아름답다" 이것은 현실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잠재적인 아름다움은 이미 그 안에 있지만 시간이 덜 흘러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가게에서 꽃을 살 때 집에서 두고 볼 사람은 잠재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꽃을 사고 개업 축하에 보내는 꽃은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꽃을 보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업 축하한다고 해서 꽃다발이 왔는데 보리밖에 없으면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그때는 활짝 피어서 아름다움이 현실화 되었을 때 축화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두고 볼때는 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몽우리가 떠지면서 꽃이 피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활짝 핀 것은 오히려 싸고 그 다음에 약간 피려고 하는 것, 꽃봉우리도 없는 것은 싸죠? 약간 피려고 하는것이 비쌉니다. 그것이 벌어지는 과정을 보고 활짝 핀것까지 보는 것입니다. 봉우리가 있을 때 꽃은 잠재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확 피었을때는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이 세계속에 확 드러내서 현실화 시킨것도 주셨고 아직 시간이 조금 흘러야지만 누군가 돌보아야지 활짝 핀 아름다움을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넣어주신대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잘 가꾸느냐에 따라서 활짝 피어날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향하여 수고를 할 때에는 우리가 무엇인가 잘 안되는것 같아도 선하게 사는 사람들속에는 잠재적인 행복을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선을 행하면 즉시 행복해 질때도 있지만 때로는 올바른 길을 계속 걸어가는데 고난이 계속 올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낙심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시간이 흘러서 때가 되면 반드시 활짝 그 잠재적인 행복이 활짝 펼쳐져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설명을 하면 불의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재적인 불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불행하지 않은것 같지만 이미 삶이 시간속에서 전개되면서 이 안에서 언젠가는 그것이 꽃피게 되어 있습니다. 불행의 꽃이 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불행이 현실화 될 때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지혜로운 농부는 바짝 마른 볏씨같은 종자를 만지면서 수확이 어떻게 될지를 알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재 되어 있는 불행과 행복을 인간의 마음속에서 찿아 낼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모든 수고의 이익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선을 향해서 올바르게 수고를 하면 거기에 반드시 이익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선을 향하면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제외하고라도 우리들이 수고하면 이익이 있지 않습니까? 저녁이 되어 밥을 해도 대충 한끼 때우자 하고 주부가 준비할 때는 식구들이 그 날 저녁은 별로 먹을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을 고민하면서 오늘 온가족이 모이는 날인데 어떻게 하면 맛있게 저녁을 즐겁게 해줄까 그리고 생각을 하면서 수고를 많이 하면 그날 저녁이 맛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의 문제를 떠나서도 수고는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그런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수고는 선을 지향하는 것이지만 악은 목적이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의 생각과 말을 목적 없이 배설하고자 하는 언어적 배설욕구에 의해서 그냥 쏟아져 나오는 배설작용과 같은 그런 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목적이 없이 행동하는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언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말의 방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배설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꽉 차니까 그냥 쏟아져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인간도 마찬가지로 마음의 말이 꽉차도 그것을 마음속에서 가려하면서 이 말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이룰까 그리고 이 말을 통해서 사람을 세우고 관계를 좋게하고 이 말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풀어주고 함께 더 좋은 길로 가기위해 말하는 그것은 그야말로 말입니다. 그런 말은 항상 궁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부요함을 이룹니다. 그래서 낙심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없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만들고 깨어졌던 관계를 치료하는 힘이 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배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꽉차면 배가 아프면서 변이 나오듯이 이 속에서 꽉차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변이든지 말이든지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능이 사라지게 되면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항문에는 괄약근이라고 하는 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경하고 연결이 되어서 이 괄약근을 움직이면서 변을 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해서 괄약근이 무력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동성애자들 같은 것입니다. 괄약근이 무력화 되면 음식이 소화가 되면서 장에 차곡차곡 쌓여도 괄약근에서 통제가 되어서 이것을 잡고 상황이 되어서 괄약근을 풀어서 배설을 하게 되는데 이 통제할 수 있는 괄약근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냥 호수, 무엇인가가 차면 흘러 내리듯이 자기 의식과는 상관이 없이 변이 흘러 내리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사실은 그 더러움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괄약근을 하나님이 우리안에 있는 판단력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욕구가 있어도 마음안에서 이것을 통제를 해서 어느 말을 내보내고 어느말을 삼켜야 할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조절해서 그 말을 드러내고 나올때는 반드시 그 말이 배설처럼 나와서는 안되고 반드시 목적을 가지고 선한뜻을 가지고 말이 흘러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목적이 없이 말하는 많은 사람들을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을 보니까 모든 선한일을 위한 수고는 반드시 이익을 가져와도 그렇게 배설하듯이 마음을 쏟아낸 사람들은 궁핍함 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말이 가져다 주는 폐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궁핍이라고 하는 것은 이익과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이 궁핍이 아니라 있는 것을 빼앗기고 없어도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는 박탈된 상태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그 말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 말로 인해서 그 사람 전체가 자신이 전체적인 신뢰를 잃어 버리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사람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배려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게 될 때에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쏟아 놓을 때 이 말 때문에 피해를 받을 사람, 고통을 받을 사람, 상처를 받을 사람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욕구를 절제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적인 삶을 보면 말하고자 하는 그 욕구는 듣고자 하는 욕구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듣고자 하는 하는 욕구 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잘못하고 범죄할 때에는 왕같이 죄를 짓지만 왕같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말도 말을하고 자기가 선을 이루지 못하는 말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자기를 집중할 때는 왕 같이 느껴지지만 그 언어가 쏟아져 나와서 그것들이 삶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자신을 압박하게 될때에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자신은 노예같이 비참한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자신의 모든 구체적인 삶속에 도입해서 그 질서에 자기의 질서를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경건한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것이며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지혜자는 인생을 살아 오면서 수고하는 거기에는 반드시 이익이 있지만 말을 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를 씀으로 말미암아 허물을 갖게되는 이 언어에 있어서는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빼앗기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상실하고 그래서 결국은 궁핍하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궁핍은 두가지 차원에서 다가 옵니다. 첫째 차원은 우리의 육체와 환경으로 다가 옵니다. 그래서 말의 절제가 없고 비밀을 지킬줄 모르는 사람은 가까이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그가 참여자가 되지 못합니다. 늘 제외합니다. 그점에 있어서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 했는데 그 이야기를 무절제하게 옮겨서 나에게 어려움을 준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진심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혜로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미워해서라기 보다는 지혜로운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있는 진실한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는 사람들의 사이가 윤택한 사이겠습니까? 아니면 마음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저 사람의 언어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돌아서 결국은 어떻게 칼이 되어서 날라올지 모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가슴에 묻어두는 사이가 그것이 정말 진실한 교제의 사이일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요.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보면 직원들도 있고 교역자들도 있고 하는데 누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향입니다. 성향이 무엇을 듣고 보든지 간에 자갈밭처럼 쑥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이야기 할때는 편합니다. 왜냐하면 흘러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털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긴장감이 없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속에서 그 사람들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깊은 마음을 더 많이 전수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타락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격적인 교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면 3일이 되지 않아서 내귀에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번이나 두 번은 우연이겠지만 반복이 되면 그 다음에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들어도 괜챦은 것 이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 놓을 수가 없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안 합니다. 더군다나 그로 인해서 큰 피해를 내가 한번 보게 되었다하면 절대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것 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해도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절제한 말 속에서 결국 상대방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정과 사랑, 존경 교제 이런것들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궁핍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속에 처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죄인이고 악을 행하기 때문에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끊임없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질서에 너무 어긋나서 경우없이 행동하거나 말하는 사람들하고 가까이 하게 될 때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나를 낳아 주신 엄마라든지 아빠라든지 갖다 버릴수 없는 내자식이라든지 이럴 경우에는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관계가 아니어서 피할수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경우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해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이익도 별로 없는데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이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안하느냐 말할 수 없는 것이 여러분 자신도 하기 싫어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초면에 처음 만났는데 아주 무례하게 말하고 경우가 없게 구는 사람을 여러분 의도적으로 다시 한번 만나고 싶겠습니까? 이익과 관련이 되지 않았을 때...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절제 없는 말에는 궁핍이 뒤따를 뿐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환경과 육체에만 이런 결핍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무절제한 말은 영혼과 마음에 깊은 공허함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인데도 언어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하면 끊임없이 내 안에서 생수의 강과 같은 은혜의 물이 계속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남의 험담 그리고 사람에 대한 비난, 교회의 질서를 해치는 난잡한 말 이런것들은 곧바로 그의 영혼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고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울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말 조차도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저사람안에 내안에, 우리안에 너희안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말, 허무는 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