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되어야 할 화목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제사보다 먼저 화목(마5:21-24) 2007.1.15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형제와 화해하라(창33:1-4) 2007.1.16 새해말씀사경회(새벽) 9
3. 원망이 교회부흥에 미치는 영향(행6:1-7) 2007.1.17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6
4. 부부간의 화목(벧전3:7) 2007.1.18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6
5. 목회자와의 화목(민12:1) 2007.1.19 새해말씀사경회(새벽) 32
1.제사보다 먼저 화목(마5:21-24)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속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게 천국 시민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훈을 보면 정말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표준과는 너무나 높은 그런 표준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들이 도달하기를 포기하고 우리의 길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준이 아니라, 우리가 그 표준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그런 표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엔 그렇게 되어있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현실적으로’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그 표준에 도달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자기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정신의 작용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도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산상수훈을 읽을 때 성경엔 그렇게 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부끄러울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읽은 이 토막에서는 예수님께서 살인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지켜야할 도덕률들을 최소한을 모아놓은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 중에서 바로 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사람을 죽이면,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율법은 사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 율법은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에게 당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그 첫 번째 교훈이 율법의 교훈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지만 난 너희에게 말 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삶의 표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복음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에 의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복음에 의해서 율법의 원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림자였고 그리고 복음은 그 그림자를 끝까지 찾아가보니까 실체가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그 실체가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그림자였다면 사실 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데 이르게 하는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그 작용까지 하나님께서 금하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먼저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표준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세 가지로 반복을 하십니다. 그 반복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공회에 잡히게 되고, 여기서 라가는 히브리 말의 욕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향해서 욕설을 퍼부으면 그러면 그것을 곧 공회에 잡히게 되고 죄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마지막으로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이렇게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사람을 죽이면 심판을 받게 된다고 되어 있지만 그러나 진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데 있다, 그 본질적인 것이 뭐냐면 미워하면, 형제를 향해서 미워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 이 미워하는 감정은 아직 살인을 수행하진 않았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렇게 바라보실 때에는 이 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이 있으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살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여건이 형성이 안됐기 때문에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그 사람이 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움의 감정이 바로 그런 감정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뭐냐 하면 그러면 사실은 천국 갈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우리는 가끔 우리 애들보고도 ‘저런 미련한 녀석’,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나도 가끔 교역자 회의 하거나 직원 회의할 때, ‘어떻게 그렇게 넌 미련하니’,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러면 나도 지옥을 가야되는가? 아마 여러 번 갔다가 왔을 것이다. 올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렇게 될 거다 이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해석적으로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형제를 미워하거나 라가라고 욕을 하거나 혹은 미련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 지옥을 가게 된다 그 뜻이 아니라, 이렇게 형제를 미워하고 아주 얕잡아 보면서 욕설을 퍼붓고 그리고 또 그에게 거침없이 미련한 놈이라고 그를 나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 백성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표다 그런 뜻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이해를 하십시오. 누군가가 형제에게 ‘넌 미련한 놈이다’ 이렇게 한 번 말한다고 해서 지옥을 간다거나 ‘미련한 놈, 꺼져버려!’ 이렇게 욕을 한다고 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그렇게 형제들을 미워하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교만하게 꾸짖고 하는 이것이 구원받지 못한 백성의 표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인가 여러분들은 좋은 표를 가지고 살기를 원하지, 좋지 않은 표를 갖고 살기 바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 우리나라에는 이제 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 명품들을 베끼는 짝퉁들 말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한국뿐 아니라 홍콩, 중국, 이런 쪽에서 굉장히 기승을 부리면서 아주 많이들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상표보다도 훨씬 못한 제품을 모방하는 것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방할 때는 자기보다 훨씬 좋은 것을 모방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빛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욕을 하거나 미워한다고 해서 지옥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한 번 미움을 품으면 죽어도 그것을 못 풀고 그리고 용서 안하고 뭐 조금만 섭섭하게 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는 물에 새기고 사람에게 상처는 돌멩이에 새깁니다. 옛 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미움은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 물에다가 새겨보십시오. 아~ 진짜, 나는 누구의 은혜 참 고맙다 새겨보십시오. 물이 휘 흘러가는데, 돌멩이에다 새겨 놓으면 수천 년이 지나도 이게 글자 하나 안변하고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인간이 그렇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비록 자기가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그건 옳지 않은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살면서 그것은 하나도 기억 안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많은 은혜는 물에다가 기록을 해서 쉽게 잊어버리고 누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좀 잘 못해서 상처를 주거나 미움을 주면 그 뭔가 원망스러운 일을 하고 나면 그거를 가슴에 깊이깊이 새깁니다. 우리가 그렇게 새길 것은 하나님 사랑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그렇게 새기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그것을 풀지 않고 화해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그것을 긴 세월을 그러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한 번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면 지옥을 간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집요하게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혈기를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막 욕설을 퍼붓고 거친 말을 함부로 하고 하는 이 모든 것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표라 이겁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아도 내가 성화가 덜 됐으면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런 일을 행하면서는 너무 수치스럽고 나는 다시금 그것을 취하고 싶지 않은 표라는 생각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모든 것이 잘 됐고 우리나라도 이제는 점점 사람들 좀 사형을 안시키는 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구십 몇 년 도에 사형을 시키고 아직까지도 사형을 안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이렇게 저한테도 가끔 사형수들한테 편지오고 이러는 것을 보면 좀 사형시키지 말고 그들이 변화될 수 있도록 좀 기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도 사실은 많이 합니다. 그런데 뭐 지금서부터 한 30년 전에 읽은 책인데, 그 책에 한 번 보니까 그 오래전에 교도소에 있다가 은퇴한 교도관이 쓴 책입니다. 그 책 속에서 이 사람이 담장 밖에서는 잘 모르는 일들을 수기처럼 적어서 출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뭐 지금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겠지만 그 사람이 적은 그 기록에 의하면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사형을 시키는데, 교수형을 처한답니다. 사람을 이렇게 데리고 가서 마지막으로 소원이 뭐냐 그러면 대부분 담배를 한 대 피고 싶다 그런답니다. 뭐 마지막 소원이 뭐냐 하는데 살려주는 거요 그러면 그것은 소용이 없지만 담배를 피자 그러면 담배를 한 대 주면 담배가 다 타들어가도록 그 담배를 달달달달 떨면서 못놓는 답니다. 그리고는 결국은 끌려가서 머리에 두건을 쓰고 위에서 밧줄이 내려오면 스위치를 올리면, 레버를 돌리면 그러면 마룻바닥이 탕! 하고 떨어지면서 거기 매달리면 삼십 분 만에 이제 관에 실려서 바깥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사형을 시키는 날 아침에는 항상 돼지 비계를 넣고 끓인 국이 나온답니다. 사실 그게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국이 딱 나오면 사람들이 고깃국이니까 일단 좋아할 것 같지만, 그 국을 딱 받는 순간에 정적이 감돈다는 겁니다. ‘아! 오늘 누가 죽는구나.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에 이거라도 먹으라고 주는구나.’ 하는 의미입니다. 거기에서 그렇게 살다가 나온 사람이 그 다음에는 그런 국을 절대 안먹는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분들은 서울, 우리는 뭐 서울도 아니고 서울 근처지만, 서울 근처 가까운 시골에 살다보니까 그런 국이 어디 있나 그러지만 저기 경상도 쪽으로 내려가면 돼지 국밥이 있습니다. 돼지를, 저도 한 번 먹어봤는데, 돼지를 썰어 넣고 그리고 국을 끓였습니다. 저는 별로 그렇게 입에 안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 절대 입에 안댄다는 겁니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속에 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성도, 하늘에 속한 성도들의 표다, 이것을 실천하면서 살아도 다 못살텐데,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의 표야!’ 그러는데도 그것을 ‘뭐 어때!’ 그리고 계속 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든지 요즘 상태가 매우 안좋아서 그래서 은혜가 완전히 고갈되어서 그래서 마음 속에 똥만 남았든지 둘 중에 하나지, 그게 진짜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성도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가끔 희귀병 중에 보면 우리 몸 속에서 우리의 몸에 어떤 부분들이 어떤 부분을 잡아먹는 것 같은 그런 질병이 있습니다. 그러면 몸 안에,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불치의 병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누가 외부에서 건드리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면서 몸이 죽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은 바로 하나의 몸으로 세워놓으셨습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그렇게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을 그렇게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을 그렇게 미워해서 안되지만 미워하는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영혼에 파괴를 가져오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이 미움을 이제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신약시대에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 속으로 이 문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가족, 그리고 영적인 유대관계를 갖고 있는 부부에게까지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나 부부가 서로를 심히 미워하고 마음에 한을 품는다든지 가족에 대해서 그런 뼈저린 미움을 갖고 있다든지 이런 사람들은 그 자신이 인성이 파괴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가족들을 용서하고 화해해야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좀 부족하고 아내가 좀 모자라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히 기대에 어긋나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그를 용서하고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휘돌아서 자기 자신에게 그 사랑이 돌아오는 겁니다.
똑같은 원리가 교회에는 더 놀랍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다투고 지체들을 미워하는 그런 일들을 누가 옳으냐를 가지고 그렇게 싸우는데 사실은 주님이 보시기에는 누가 옳으냐 보다도 누구의 몸이 상처를 받느냐 이것이 주님에게 더 큰 관심사가 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사랑이 정의를 완성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정의를 헤치고 있다든지 아니면 정의가 사랑을 헤치고 있다면 그러면 그러한 사랑과 정의는 잘못된 사랑이요, 잘못된 정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올바르게 가면 반드시 정의를 완성하게 되어있고 정의가 올바르면 그것은 반드시 사랑을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이 사랑이 정의를 완성하는지를 여러분들에게 설명해드릴 테니까 가슴에 새기시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겁니다. 여기에서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결코 정의를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허물을 잘 못보게 되듯이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과 잘못은 공정하게 보지 못합니다. 그런 약점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이 정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정의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완성이 되냐 하면 우리가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것, 다른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끊임없이 다가가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려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모든 움직임입니다.
여러분, 사랑하게 되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이제 결혼을 약속하고 그러면 서로 끌어안게 되지 않습니까? 그 왜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끌어안습니까? 집에 가면 우리 딸을 끌어안는 게 나는 취미인데 말입니다. 요즘 또 다이어트까지 해서 얼마나 날씬해졌는지, 끌어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습니다. 저도 나처럼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지만, 그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중간에 빈 공간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과 일체가 되려는 자기가 그 사랑하는 대상 속에 녹아들어가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사랑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는 이것이 더 크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그냥 이렇게 내가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그런 열망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너는 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다. 내가 너와 함께 하마’ 그래도 우리에게 만족이 없습니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계시다. 이렇게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다. 그런 일체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끊임없이 일체를 이루고 싶을 것 아닙니까? 주님처럼 생각하고 싶습니다. 주님처럼 눈물 흘리고 싶습니다. 주님이 아파하시는 곳에 내가 아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끊임없이 하나 되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주님이 바로 사랑이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내가 끊임없이 그렇게 합치되려고 하는 그 분이 본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정의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랑의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질서대로 사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과 합치려고 많이 애쓰면서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면서 나아갈 때 그것은 곧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단기적으로 보면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미련해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불의를 용납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은 사랑이 마지막에는 승리하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그 사랑이 승리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죄인들과 함께 먹고, 그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을 때에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막 욕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예수님도 정의로운 분이 아니시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사랑으로 그 흉악한 죄인들을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그럼으로써 사랑을 통해서 정의를 완성한 겁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정의를 완성하신 것이지만 자기를 그렇게 바치신 그것은 사랑을 완성하신 겁니다. 사랑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여러분 모두는 자녀입니다, 자녀. 진실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녀입니다.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그리고 결점을, 그 사람의 결점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있지, 당신의 아들 예수의 피를 주고 구원한 백성들이 한 번 마음에 맺히면 죽어도 풀지 않고 가슴에 한을 품고 물고 뜯고 거침없이 욕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평판을 깎아 내리고 명예를 헐뜯고 무엇인가 마음에 섭섭한 게 있으면 그것을 가슴에 품고 죽어도 놓지 않는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 마음속에는 이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런 큰,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큰 감격 이런 게 없단 말입니다. 그냥 교회에 나오고 남 보기에 반듯한 생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를 받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 ‘나는 정말 가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 거룩한 교회에 한 지체인 것 자체가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러한 자리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용히 스며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흐르는 겁니다. 좀 더 하고 싶은데 출근도 해야 되니까 그러면 마지막 적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친히 그것을 친절하게 적용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치자, 사실 이것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였습니다. 이 예배, 제사, 이것은 뭐 말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최고의 종교행위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뒤집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최고의 제사행위 그것을 뒤집으시는 겁니다. 어떻게 뒤집는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내가 형제를 좀 미워하고 탐심이 있고 죄를 좀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그 때에 내가 최고의 예물을 가지고 가서 정성껏 하나님 앞에 드리면 이런 것들이 지워진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뒤집으시는 겁니다. ‘그게 아니다’ 그러고 뒤집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뒤집으신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물을 드리러 하나님 앞에 갔다가 형제와 불화하다면 예물을 거기에 놔두고 가서 화해하고 오너라. 이게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지만 이미 구약 속에 이러한 사상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선지자들의 외침입니다. 미가나 아모스나 호세아나 모든 걸출한 선지자의 외침이 뭐냐 하면 제사가 하나님 앞에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의 마음이 제물의 분신이 되어야 된다. 그러니까 제물이 헌제자의 마음의 분신이 되어야 된다 이겁니다. 제물을 드릴 때에 짐승을 잡아서 죽여서 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려서 그 제물이 하나님 앞에 열납 되려면 제사를 드리는 네 마음이 그렇게 죽임을 당한 것 같은 마음이어야 된다. 그 때에 헌제자의 마음과 제물 사이에 일치가 있게 되고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제사가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움직이는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연약한 몸으로 한 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했더니 하나님이 친히 영광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에게 지혜와 그리고 부귀와 모든 명성을 주시고 그와 함께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까? 제사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응답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제사 속에 충만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제사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다가 형제와 불화하면 네가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고 오너라. 그래야지만 내가 이 예물을 받을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향한 미움과 원망, 한 번 상처받으면, 뭐 상처받는 게 큰 자랑이 아닙니다, 그것이.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것은 자기 사랑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에 상처가 자꾸 나고 덧나는 것은 체질이 안좋다는 뜻입니다. 상처를 받는 게, 그것이 자기가 순수해서 상처를 받는다 그러는데 그게 아니고 반대입니다. 자기 사랑에 빠져서 상처를 자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받으면 그것을 풀지 않고 가슴에 깊이 품고 끝까지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예배의 감격에 빠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사람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 예배의 감격에 빠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늘 그걸 한 번 깊이 돌아보십시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니가 잘 못했거든’ 그게 아니라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이 나거든’ 그럼 그 형제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제가 마음이 삐뚤어져서 괜히 자기를 시비하면서 자기를 오해해서 자기에게 이렇게 그 원망을 퍼붓고 있는 그런 상황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에 상관이 없이 불화하다 라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이 예배 중에 감격을 주시지를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화해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희생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대개 어떤 마음이냐 하면 ‘와서 빌어봐! 내가 용서해 줄 텐데’ 그건 뭐냐 하면 마치 왕이 신하에게 은전을 베풀듯이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신 방법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어느 인간이 예수님 제발 오셔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달라고 그렇게 빈 적이 있습니까? ‘우리 인류의 지은 모든 죄를 우리가 고백하오니, 예수님 제발 오시옵소서’ 그런 적이 있습니까? 진정한 용서는 용서를 빌지 않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를 용서하기 위해서 내려오신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오셔서 그 미움을 받으시면서 그 용서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 예배 시간에 은혜를 못받고 하나님을 못만나는, 기도해도 하나님을 못만나는 사람들의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이 미움의 문제, 특별히 과거에 그랬든 지금 그랬든 그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열린 교회에 오기 전에 있는 교회에서라도 누군가를 그렇게 미워했던 일이 있으면 회개하고 가서 용서를 비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맺힌 것들을 마음속에서 풀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 자체를 기뻐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한 번 그런 경험을 해보십시오. 그렇게 화해하고 돌아오는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십자가의 사랑이 막 이렇게 밀려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안합니다, 인간들이. 왜냐하면 그것은 미워하는 것은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걸 화해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자발적으로 찾아가서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내가 잘 못했노라고 깊이 용서를 빌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이 있습니까? 일생에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소외된 가운데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자기를 죽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미워하므로 형제를 찌르고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기를 죽입니다. 이게 자기 깨어짐입니다. 이게 자기 죽음이라 이겁니다.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고난이 실제화 되어서 그렇게 내 가슴 속에 스며들어서 그 구속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갖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 열심히 하고 집회에 아홉 번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녁집회 오기 전에 화해를 하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빌고 그리고 찾아갈 수 없으면 편지라도 보내십시오. 요새 세계 방방곡곡도 이메일 한 통이면 다 날아가는데, 진심으로 기도하고 ‘내가 당신을 마음속으로 정말 미워했었습니다. 제가 많이 잘못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해 주십시오. 나도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그러고 저녁집회에 나와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확 밀려옵니다. 또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설마 저 얘기가 내 얘기일까? 당신 얘기입니다. 남이 아니라 자기 얘기라 이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더 많이 설교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것을 가지고 두 시간쯤 설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또 밥 먹고 출근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면 내 마음이 전해질 것이고, 내 마음이 전해지면서 주님의 마음이 더 전해질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정말 뉘우치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제사보다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2.형제와 화해하라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창33:1-4)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야곱의 이야기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그리고 그 형 에서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에서가 형으로 태어나고 야곱이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두 사람 성격이 매우 달랐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하고 들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하고 야곱은 집 안에 있으면서 엄마 품에서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에서를, 그리고 엄마 리브가는 이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사실 이 편애는 자녀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을 편애하는 아버지를 경험하면서 엄마 품으로 더 파고들고 에서는 엄마로부터 멀어지고 이 믿음의 가정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 이삭이 마음의 총기가 흐려져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야곱을 축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총기가 흐려져서 에서를 축복하고자 할 때에 이제 야곱은 형에게 받을 그 축복을 어머니와 모의하여 대신 가로채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 대신 이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는 형의 큰 원망과 그 슬픔 속에서 이제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이삭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이 사람은 돈을 많이 번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 바로 그 때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그 때 그 때 하나님께 지혜를 얻고 또 하나님의 도와주심으로 인생의 고난과 난국을 통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 사람이 하나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그런 벽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형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자가 되었지만 사실 무력을 거느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형은 오랫동안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군사를 거느릴 수 있었습니다. 사백 명을 데리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이게 사실은 정상적으로 자기를 맞이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미 깨닫지 않았겠습니까? 틀림없이 자기에게 보복을 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치려는 것이다 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야곱의 마음 속에는 지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형이 쳐서 잃어버리면 잃어버리지 생각하는 그 식솔들을 앞에 세웠습니다. 그래서 종들과 그 다음에 세우고, 그리고 뒤에 자기가 별로로 생각하는 아내, 레아와 자식들을 세우고 맨 뒤에는 자기가 끔찍이 사랑하는 라헬과 그리고 요셉을 뒤에 세우고 이렇게 해서 앞에를 치면 그 뒤가 도망가고 또 뒤에를 치면 그 뒤가 도망가서 최소한 라헬과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살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모든 무리들 맨 앞에 나아가서 그래서 형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일곱 번을 땅에 엎드려서 절했습니다. 이것은 종과 상전 사이에나 오가는 인사의 예법입니다. 그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 때까지도 형이 자기를 어떻게 할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좋은 기대를 가질 수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기적이 뭐냐면 그 동생이 자기에게 절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긴 세월동안 가슴에 품었던 이 형 에서의 마음 속에 있는 원한이 눈 녹듯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달려가서 목을 어긋맞기며 그 동생을 끌어안고 슬피 울면서 그 동생과 화해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번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그 동생이 자기를 속여서 하나님께 받을 축복을 대신 빼앗아 가지고 도망을 가고 아버지께 축복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더니 아버지 하는 말이 “네 동생에게 다 축복해주었기 때문에 난 너에게 축복해줄 게 없다.” 그래도 슬피 울면서 나를 축복해달라고 울부짖었더니 아버지가 기껏 축복해준 게 뭐냐면 “너는 들사람이 되겠다.” 그러니까 칼과 활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 되신다고 하는 축복이 빠진, 사실상 어떻게 보면 저주와 같은 그 껍데기 밖에 없는 것을 받게 되었을 때에 이 형의 마음에 맺힌 원한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것을 20년이 넘는 세월동안을 가슴에 한처럼 품고 그리고 이 동생에게 복수할 날을 기다리면서 산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보면 대개 형제들이 서로 반목하고 불화한 것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부모의 유산 때문이 아닙니까?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에도 아마 유산 때문에 형제와 반목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욕심 많은 동생이 혹은 욕심 많은 형이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아서, 욕심 많은 오빠들이 그 재산을 빼앗아서 나누어갖고 자신은 아주 하찮게 대우해주는 것을 인해서 형제들과 원수 맺고 미워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그 까짓 것, 돈 때문에 그러느냐’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 보다도 더 중요한 자존감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가족에서 정당한 아버지의 한 자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는 이러한 심리적인 일그러짐이 훨씬 더 큰 충격 아닙니까?
어쨌든 이 형은 견디기 힘든 복수의 마음을 품고 20여 년의 긴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렇게 자기 가슴에 일생 못을 박은 그 사기꾼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에서의 마음이 얼마나 복수심에 불탔겠습니까? 그런데 그 동생을 맞으러 나아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복수심이 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기서 강을 건너오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까, 자기를 속여서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 빼앗아간 그 사람답지가 않습니다. 얼굴은 두려움에 가득차고 세월이 흘러서 이미 벌써 늙었고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장애인이 되어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강을 건너오는 그 모습을 보는 그 순간, 형의 마음이 확 녹아내리면서 그러면서 그 동생을 향한 그 마음의 그 끌어 오르는 연민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서 동생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대성통곡하면서 거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울었습니다. 이게 결국은 이십여 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의 불화와 그리고 가슴에 품은 원한이 마음에서 녹아내리는 화해의 현장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미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집요하게 미워하고 가정에서의 형제들, 화목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사실은 부모의 마음에 얼마나 많이 못을 박았습니까? 작년에도 가정의 달 설교를 하면서 형제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 설교했을 때 나이 드신 성도님 한 분이 내 손을 붙들고 복도에서 한 없이 울었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바로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살아가는데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노인네 눈에서 눈물이 한 없이 흘러내리는 겁니다. 결국 형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고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그 부모의 가슴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형제를 미워할 뿐 아니라 부모에게 불효하여서 그 가슴에 상처를 주는 행동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집요하게 미워합니다. 그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끼리 그렇게 집요하게 미워할 수 있는지 우리는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일에는 누가 잘하고 잘 못한 일의시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시비도 어느 편에서 누가 보느냐에 의해서 각기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해당사자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둘다 정직하질 않고 조금씩들 말을 바꿉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끓어오르는 감정으로 그 형제를 그렇게 집요하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미워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영혼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이 혀끝에서 쓴 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너무 미워하는데 그 사람을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는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죽고 싶은 겁니다. 그게 바로 미워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심리입니다.
어떤 식물학자가 실험을 했답니다. 꽃을 화분을 여러 개를 놓고 그리고 아침마다 일어나서 그 꽃을 어루만지면서 식물을 어루만지면서, “사랑해, 너 참 보고 싶었어. 오늘 아침엔 네 모습이 훨씬 더 이쁘구나.” 이렇게 하고 저 쪽 화분에 가선 “죽어버려. 병신, 넌 보기도 싫어. 어째 이 모양이냐.” 이렇게 각각 마음을 담아서 한 꽃은 저주하고 한 꽃나무는 축복했습니다. 똑같은 물과 비료를 주면서 기르는데, 똑같이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서 기르는데 한 나무는 아주 아름답게 자라고, 한 나무는 아주 점점점점 볼품이 없어지고 시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꽃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이렇게 해놓은 것도 좋아하지만, 나무로 심겨진 것을 좋아합니다. 한 번 시장에 가서, 꽃시장에 가서 보기도 좋아 보이는 나무 하나를 사서 방에다 놨습니다. 그런데 방이 문을 열어놓으면 공장에서 소리가 어떻게 시끄럽고 별로 안좋은 공기가 들어오는지 대부분 문을 닫고 삽니다. 그러니까 식물이 잘 안자랍니다. 그런데 참 기품이 있어서 좋아보였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나오면 항상 물뿌리개로 물을 주고, ‘야~ 참 예쁘다.’ 그러고 기분이 좋았는데, 이게 방안에서 기르니까 조금씩 잎이 빨갛게 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햇빛을 좀 쐬게 할 요량으로 그걸 들어다가 옥상에 햇빛 잘 드는데다가 갖다놨습니다. 그러고 너무 바빠서 잊어버렸습니다. 그 꽃을 거기에다 갖다놨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 두어 달 지났는데, ‘아참! 그 꽃 거기다 내다놓은 거 어떻게 됐지?’ 그러고 올라가 보았더니 도저히 다시 갖다놓을 마음이 안생길 정도로 못생기게 변했습니다. 아무렇게나 막 자란 겁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거참, 이상하다. 가까이 놓고 기를 때나 밖에 놨을 때나 똑같은 나무인데 그런데 가까이 놓고 물을 뿌리면서 이렇게 기를 때에는 자태도 곱고 그렇게 그 아름답게 자라더니, 거기다 갖다놓으니까 아주 상스럽기 짝이 없는 잡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버렸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면 곱게 이렇게 자라는 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물에서 문제를 풉니다. 그래서 물을 잘 축복하고 물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이 영하 2도에서 물이 살짝 얼면서 녹는 가운데 잠깐 동안 물의 결정이 나타나는데 그 결정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가슴에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한을 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병에 걸립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체의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런데 가슴 속에서, 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 사람에 대한 안좋은 생각을 하고 가슴 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을 품습니다. 이게 파장을 일으키는 겁니다. 물로 되어있는 온 몸에 번지면서 그러면서 이 몸의 구조를 바꿔놓는 겁니다. 그리고 그 미움이 그런 미움, 그걸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그걸 계속해서 바라는 겁니다. 말을 한마디를 해도 훨씬 따뜻하게 할 수 있는데 항상 그 속에 가시가 돋쳐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무엇에 깊이 억눌린 사람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시비적입니다. 그래서 뭔가 사람에게 도전하고 싸움을 걸려는 사람처럼 언성을 높이고 태도가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가 들릴 때에 그 속에 묻어나오는 그 사람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고 경멸하고 미워하는 그런 감정의 진폭들이 그 사람의 말과 언어와 마음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겁니다. 그것이 때려서 또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결국은 마지막에는 자기를 불행하고 상대방을 불행하게 하고 그리고 자기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을 함께 불행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이 미워하는 삶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 가정생활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부모에 대한 미움, 특별히 시어머니에 대한 그 원망과 미움, 그리고 시누이 그리고 자기 형제 동기간에 대한 미움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 이기적인 이해관계와 얽혀서 얼마나 많이 이 속에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화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매이면 땅에서 매이고. 이게 하나님의 신앙의 원리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지독하게 미워하고 한 번 미워하면 풀지 못하는 그 옹졸한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또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식구들에게 널리 공포하고 드러내니 거기서 모욕 받으시는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인생을 보면, 우리가 착하게 살면 사람들이 감동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착하게 살면 이용합니다. 어디로 흘러가도 자기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니까 착한 사람에게로 흘러가서 개기면서 손해를 입힙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분의 생애는 어떻게 보면 이용당하신 생애였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이용당하시고, 완악하고 하나님 대적하는 죄인들에게 이용당하시고, 그리고 병들고 곤고한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하시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그 떡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주셨습니까? 떼어서 주셨습니다, 떼어서. 그러면서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이 떡은 너희를 위하는 바 나의 몸이니, 이 떡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거라.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희생이 없이는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용서 그 자체는 자기가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마음으로 사람들을 그렇게 깊이 미워하는 이 미움을 버리고 뜨겁게 화해한다면, 이 미움을 버리고 아주 뜨겁게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에 먼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변화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쉽게 원수 맺는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한 번 미워하기 시작하면 잔인할 정도로 화해하지 않는 그 집요한 원망의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을 말은 하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를 못합니다. 왜 그런지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경험이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어떻게 경험하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병이 들어서 너무 힘든데 우리의 병을 낫게 해주실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려서 견디기 힘든 가운데 있을 때 그런 길을 열어 주셔도 우리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험됩니다. 또 나이가 많아서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는 지체들에게 좋은 짝을 주실 때에도 그 사람들이 한 동안 그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 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어두워서 그렇지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사랑에 신세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하나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아주 깊은 사랑,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무엇을 통해서 전해지냐 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전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그 모든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을 능가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용서하는 사람,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사랑의 경험이 용서를 통해 오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할 때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으로 누군가를 용서할 때는 항상 용서 받는 사람이 우는 게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왜?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면 내가 이 사람을 용서해야해. 그런데 그 사람이 내게 행한 것을 보면 죽어도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 이 둘 사이에서 나를 용서한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이기게 될 때 그 때에 내가 가슴에 품었던 이 피 묻은 칼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제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우리 가운데 웬만하면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 둘이 있습니다. 그게 말하자면 하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자하는 정욕과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이 집요한 마음의 욕망입니다. 이 두 가지는 포기하기가 너무 어려운 겁니다. 사람이 살자고 태어난 사람인데,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에게 복수하지 못할 때 자살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 쉬운 것을 두 번째라고 생각하고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한을 품고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 아니면 이 마음 속에서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가져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용서하게 될 때, 그 때에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화해의 강물, 그 은혜가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 이 야곱을 보면, 이 야곱이 그 형 앞에 나아가서 일곱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형에게 용서를 빌 때 하나님이 형의 마음을 녹이셔서 수십 년 된 원한을 털어버리고 절뚝거리며 자기에게 와서 절을 하고 있는 그 철천지원수인 야곱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며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 일이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 전날 밤에 유명한 얍복강가에서의 씨름 아니었습니까? 모든 식구들은 보내고 혼자 생각하는데 도저히 인생의 이 시련의 고비를 넘을 수 있는 지략이 보이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새벽쯤 됐는데 천사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이 천사를 붙들고 나를 축복해달라고 하면서 천사를 붙들고 씨름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야곱의 믿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 혈기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 보려고 하는 아주 인간적인 고집이었습니다. 천사가 이 사람의 환도를 내리칩니다. 환도는 이 복숭아뼈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허리 아래에 있는 골반 아래쪽에 있는 뼈를 가리키는 컵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지면 아녀자들이 환도가 시리다 그러지 않습니까? 거기를 내려쳤으니 남자의 모든 힘이 바로 그 뼈에서 나오는데 그걸 후려쳤으니 결국은 하체를 쓰지 못하고 질질 끌고 가야되는 이 절름발이가 된 겁니다. 그 때에 야곱이 호세아 12장에 보면, 그 때에 깨뜨려져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매달렸습니다. 내 인간의 고집과 그리고 인간의 아집으로 살아오려고 했던 것, 형의 축복을 가로채 빼앗고 그 인생의 위기를 나의 고집과 재주로 넘어보려고 했던 것, 이 모든 것을 회개하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펑펑 울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니까 형의 마음이 동생 앞에서 꺾어지기 전에 동생의 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깨트려지는 일이 먼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자기 인간의 교만과 거짓, 그리고 속임수와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인생을 살려고 했던 모든 죄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는 이 마음 속에서 이 형, 이 어리석은 녀석을 어떻게 내가 피하고 인생의 위기를 극복할까 그것이 아니라 형이 나 때문에 얼마나 가슴 아픈 세월을 보냈을까 하며 진심으로 그 형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절뚝거리며 형 앞에 와서 일곱 번 머리를 조아리며 형에게 용서를 구할 때에 그 진심이 이 에서에게 느껴진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형제를 혹은 가족을 깊이 용서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이루지 못하는 그것은 여러분의 육이 여러분 속에 혈기로서 펄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불행합니다. 우선 뭐냐면 친구가 없습니다. 그래도 “전 친구가 있는데요.” 친구가 아니라 아첨꾼입니다. 저만 좋다 그러는 사람, 그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싫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 분과 미움을 가슴에 품으면 아무도 그를 소외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사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많은 사람들 속에 흘러가야할 삶입니다. 사람이 나 때문에 이익을 얻고 사람이 나 때문에 용서받고 사람들이나 때문에 사랑을 알게 되고 필요한 사람들은 나를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우리를 빼앗기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바로 그렇게 자기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주신 생애였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밑에서 자기를 향해서 침 뱉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용서의 축복을 빌었던 분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자기의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저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온 살과 몸이 찢어서 죽으시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마음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원수들이 당할 미래의 형벌을 보며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깨어짐이 있습니까?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다른 이유 말고, ‘아~ 내가 어쩌면 이렇게 포악하고 사랑이 없는 완악한 인간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울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완악하기 짝이 없는 광포한 죄인입니다. 내 맘에 품은 이 많은 원한, 그리고 내 육신의 형제들을 향한 미움, 그리고 마음에 깊이 서려있는 그 복수심 같은 것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셔서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깊이 고백하고 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한 인간의 존재의 가치는 선한 의지에 달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족하지만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고, 내가 누구보다도 상처가 많은 집안에 태어났지만 그래서 내 마음 속에서 미움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말씀대로 선한 의지를 갖는 겁니다. ‘아~ 내가 이러면 안돼.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그 크기와 그 놀라운 높이, 이걸 생각하면 내가 사랑해야해, 내가 용서해야해. 아프더라도 내가 아프고, 깨어지더라도 내가 깨어지고, 희생하더라도 내가 희생해야지.’하는 이 선한 의지가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입니다. 그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주님을 믿으면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뿐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해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육신의 형제를 용서해야합니다. 육신의 형제를 깊이 용서해야합니다. 아주 깊이 용서해야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하나님의 큰 사랑, 우리가 먼저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용서해야합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가슴에 묻고 두려움과 그리고 미움 속에서 살았던 이 두 사람이 화해하던 그날이 하늘의 축복의 문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큰 사랑이 없다면 먼저 자기를 잘 돌아보고,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주었다 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비십시오. 용서를 비십시오. 정말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닫혔던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단비가 내리기 시작할 겁니다. 육신의 형제를 이렇게 깊이 용서하십시오. 정말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깊이 용서하고 그리고 육신의 형제뿐 아니라 영혼의 형제도 깊이 용서하고 그리고 한 번 안아줘 보십시오. 마음의 모든 미움을 풀고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과 미움, 죄악이 많은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집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활이 여러분들을 속이거나 슬프게 할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려니 하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이 많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나는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일 뿐이라 생각하며 베풀고 나누어 주고 용서하며 그렇게 살아가기 바랍니다.
오늘 낮에 오늘 새벽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지체들에게 용서를 비십시오. 화해하고 그리고 저녁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늘의 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3.원망이 교회부흥에 미치는 영향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1-7)
우리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 모두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즉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구원은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한 몸으로 되는 구원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영원히 잊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건강을 해쳐서 아주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나쁜 생활의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축척이 되어서 몸의 건강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의 잘못된 생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고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위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이유는 우리들이 모른다고 할지라도 똑같이 우리의 영혼이 건강을 잃어버려서 우리의 삶 전체가 자기 보기에는 옳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매우 삐뚤어진 삶을 살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되는 것과 함께 신앙생활이 시작이 됩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영원히 이 교회라고 하는 주제와 자기의 개인의 행복이라고 하는 주제가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교회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혹은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쓰임을 받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니까 당연히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인생을 살았냐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판단하실 때에 복된 인생이 되려면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의 이 확장에 기여하는 인생을 살 때에 그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높은 벼슬이나 많은 재산, 그리고 많은 자녀들을 두며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고유한 목적을 위해서 살도록 주신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높은 벼슬을 가졌는데 자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대접 받으면서 많은 월급 받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살다가 죽었더라. 재산이 많은데 수전노처럼 그것을 끌어안고 그리고 저 먹고 쓰고 살다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죽었다더라. 자식을 일곱을 낳았는데 모두 불화하고 그리고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저 좋은 데로 살다가 죽은 자식들이었더라.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육신의 눈 말고 영혼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가치가 없는 것인지를 헤아려 알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을 가져야지만 우리의 인생을 삐뚜로 살지 않고 올바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고 힘드냐고 투덜거립니다. 그리고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애를 써보다가 안되면 그 다음에 자기가 원망하고 가슴에 못 박았던 하나님께 돌아와서 제발 날 좀 잘 좀 대우 좀 해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하나님 좀 도와달라고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해서 건져주시면 다시 또 삐뚤어진 인생을 살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어떤 지위나 재물이나 아니면 자식들의 번성이나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정말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기여 했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혼자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인간이 태어나서 어떻게 그렇게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이바지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도 사실은 교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겁니다. 교회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깊이 받고 변화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해서 눈을 뜨고 변화 받게 됩니다. 그러면 이 복음을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내 마음에 눈물이 흐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이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인가 베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라고 하는 열망을 마음속에 갖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갈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기여하고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이바지 한다 그럴 때 이것도 사실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바로 이 일을 함께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이바지한 바는 정확하게 그 교회에서 주님을 섬긴 성도들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이바지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이 거기에 기여한 모든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희생하고 물질을 드리고 이바지하고 매어달리고 헌신하고 재능을 바치고 시간을 드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교회에 봉헌이 되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봉헌이 되어서 그래서 결국 각자가 행한 그것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께 행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바쳐져서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계속하셨을 그 일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만약에 하나님의 일을 잘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방에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가득하게 전파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세상이 되면 그는 자기가 직접 그 복음을 전하지 않았어도 그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참여한 겁니다. 누군가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그 복음이 성공적으로 전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누군가가 물질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았더라면 그 복음이 성공적으로 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전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자기 자신을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는 전혀 기억도 없는 그 일을 하셨다고 나에게 큰 칭찬을 해주실 겁니다. 왜냐하면 나와함께 한 많은 성도들이 한 일이 곧 내가 한 일이고, 그리고 내가 섬기던 그 교회가 행한 그 많은 일들이 그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한 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받아들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그런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요즘은 잠시 쉬고 있지만 멀리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 거기서 난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함께 간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잘 전하고 많은 교회에 은혜로운 역사가 오면 그러면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상급 받을 겁니다. 그래서 잘 절제하고 또 균형을 잘 찾아야 되겠지만 일단 말씀을 전하러 가면 그, 나 만나서 나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거 왜 쓸데없이 그렇게 힘들게 멀리 돌아다니냐”고, “열린 교회에서 힘 빼지 딴 데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어디든지, “거 왜 쓸데없이 그렇게 멀리 돌아다니냐고 말이지, 힘들텐데 왜 그러냐”고 그러지 말고 기왕 가기로 돼있으면 우리가 “힘드실텐데 가서 그래도 열심히 전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커다란 은혜가 있고 영혼들이 변화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름답게 확장이 되겠습니까.” 아멘, 그러고 기도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열린 교회 빼 놓고 다른 교회, 닫힌 교회에 가서 힘빼느냐”고 그러면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는 항상 꼭 같지가 않습니다. 이게 이제 6장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여러분들이 잘 들어야지만 여러분들이 정말 복 받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를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읽은 본문이 사도행전 6장입니다. 이 1장에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3장에서 그 유명한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큰 능력과 복음의 은혜가 충만해서 막 뻗어나가는 겁니다. 사단이 이렇게 보니까 교회가 그렇게 뻗어나가는 것이 보통 위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4장에서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래가지고 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가서 죽도록 맞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랬는데도 결국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핍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온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니까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불붙는데 기름 끼얹은 것처럼 교회가 더 활활 타오르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5장에서 사단이 전략을 바꾸는 겁니다. 그래서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집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갖다놓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공동생활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그렇게 헌신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사람이 재물을 보자 돈에 눈이 어두워지면서 그 재물 중의 일부를 떼어서 감추는 겁니다. 이 사건은 교회의 순결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클 때에는 심판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교회가 순결을 잃어버리고 속이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전체가 그랬던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그 못된 교인 둘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교인 둘이 그러는데, 이 영향이 얼마나 큰 지 강력하게 복음이 전파되다가 교회의 능력 있는 복음 전파의 역사가 정지하는 겁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냥두지 아니하시고 두 사람을 하나님이 목숨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거 보면서 여러분들이 “야, 저 죄가 무지하게 큰 죄였구나.” 만약에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다루신다면 교회 안에 시체가 즐비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야 그런 개념 없이 그냥 주님 앞에 바치려고 했다가 마음 속으로 바치려고 했다가 반쯤 바치고 반쯤 안바친 건데 마음 속으로 한 게 아니라 요즘 말입니다. 손들고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 만큼 헌금하겠습니다.” 그러고 뚝뚝 떼어먹고 도망가는데 별로 안좋습니다, 끝이. 인생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정말 어리석은 바보들입니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멀쩡하게 교회에 직분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십일조 생활도 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갖다가 뭐하는지 나는 정말 궁금합니다. 대를 물려서 연구해봐야 될 일입니다. 그거 어떻게 그렇게 담대한 생각을 가집니까? 그러고도 복을 받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어떻게 사는지 나는 이해가 안갑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행동을 합니다. 예? 그런 사람들은 두 번 죽어야 합니다. 이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다면 그런 사람은 두 번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건 내버려두고 더 큰 죄와 악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면 여러분들은 보면서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일 인간이다 라고 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게 뭐냐면 교회에 파고 들어오는 이 순결을 위협하는 것, 그 불결로부터 교회를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걸 그렇게 다루시지 않고 내버려두셨다고 하면 아마 하나님과의 약속, 거룩한 교회에 대한 이 그 두려움 같은 것들이 없이 마구잡이로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초대 교회에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으로 뜨겁게 복음이 전파되는 이제 이 교회의 초기의 이 위대한 역사의 불이 꺼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심각하게보시고 다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뭐 가끔 목회자가 뭐 “이렇게 이렇게 하십시오.” 충고를 해도, 뭐 저한테는 그런 사람 없지만 “그건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러는데 그런 것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개인이라는 거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은. 뭔가 아주 중대하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싫어도 좋아도 영적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어떻게 살아가는 삶의 형편과 바르지 못한 마음이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그것은 그리스도께 올바로 하지 못하는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을 속였습니까? 뭐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그랬다가 뭐 그 사람이 무슨 약속 헌금을 했겠습니까, 아니면 온 교회 앞에 공포를 했겠습니까, 라디오 방송을 탔겠습니까? 그냥 마음 속으로 ‘이거 주님께 바치자.’ 그랬다가 집을 다 팔고 정리하고 나고 돈을 보니까, 노후도 걱정되고 또 뭐 주님 앞에 바쳤는데, 나중에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돈을 어디서 구하나 등등 생각하면서 반쯤 떼어서 딴 데 감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와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속인 죄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사단이 그런 식으로 교회를 위협하는데 하나님께서 쐬기를 쾅! 하고 박으신 것입니다. 두 사람을 즉시 불러 가신 것입니다.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온 교인들이 이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인가 하는 그런 떨림을 가지면서 더 순결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그리고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다시 복음이 막 전파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 사단이 보다가 그 다음에 또, 교회가 넘어지도록 한 번 시도를 하는 아주 중요한 시도가 6장에 나타납니다. 이게 뭐냐하면 과부들을 구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핏줄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 당시에는 히브리말은 우리로 말하자면 일제 시대 때에 한국말이고 헬라말은 일본말이었습니다, 말을 하자면. 그래서 헬라말은 어느 나라를 가든지 다 통용되는 만국 공용어였습니다. 왜냐하면 헬라말을 알렉산더가 자기의 제국에 널리 보급해서 쉽게 말이 통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바로 이제 로마 제국에 그 땅덩어리로 그냥 그대로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바뀌었어도 말은 옛날 말이 그대로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교회에서 구제하는 그 일이 교회의 중요한 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따라서 성도들이 갖다 준 많은 돈으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받고 복음의 정신에 충만한 교회가, 말을 히브리말을 한다고 과부들에게 먹을 것을 더 주고, 헬라말을 한다고 야박하게 구제에서 그 사람들을 빠뜨리고 그랬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니까 어떻게 일을 하다가 보니까 그 구제에 빠지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들이 헬라말을 하는 헬라파 과부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과부들이 원망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뭐 여기에는 안나오지만 그렇지 않겠습니까? “야, 우리가 헬라파 과부라고 히브리파 이 사람들이 우리를 우습게 여기는구나.”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헬라파, 히브리파 라는 이야기가 안나옵니다.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파당이라고 하는 것이 교회가 화평을 누리는 때에는 그런 파당이라는 것이 존재를 안합니다. 무엇인가 파당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익이 대립되었을 때, 이익이 대립되었을 때에 그 이익을 따라서 교회의 편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을 원망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누가인데, 누가가 이렇게 보기에 이것이 어떤 한 사람 개인의 일이었다면 ‘헬라파 과부들이’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몇 사람이 빠졌는데 그 이야기를 그 자기 같은 헬라파 과부들에게 하소연을 다 한 겁니다. 그걸 들쑤시니까 자기가 구제에 빠지지 않고 받을 걸 다 받은 사람들의 마음도 막 상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헬라파 과부 전체가 뭉쳐서 그래서 이 헬라파 과부들의 마음 속에 있는 원망과 불평을, 이제 대상이 히브리파 과부들에게 대상인 히브리파 과부들에게 쏟아놓는 겁니다. 히브리파 과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 원망이 생길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무슨 그 과부들을 구제하는 것을, 나눠주는 것을 히브리파 과부들이 주도를 한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돈을 히브리파 과부들에게 주어가지고 너희들이 나눠주어라 그런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이게 균형 있게 돌아가지 못해서 히브리파 과부들에게 더 돌아가고 헬라파 과부들 중에 빠진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무슨 교회하고 결탁을 이루어가지고 정략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비난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망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예루살렘 교회의 두 번째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위기는 아주 훌륭하게 먹혀들어간 것입니다. 이러면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무슨 변화가 일어나냐면, 그렇게 지순의 사랑으로 충만하던 사람, 이 히브리파 과부들, 헬라파 과부들도 결국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놓았던 사람 아닙니까? 나는 이제 이 세상, 나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립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왔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늘 다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그 얼마 안되는 먹고 마시는 음식, 얼마쯤 안왔다고 해서 이 속에서 말입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그러면서 지체들에게 대한 원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원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어떤 교인이 어느 날 성질을 팍 부리면서 목사님에게 “나 이제 교회 떠난다”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 그랬더니 야유회 갔다 와서 수건을 하나씩 나눠주는데 그게 차례가 안돌아왔답니다. 그 사람이 내가 그 수건이 얼마나 필요한데 그걸 안주냐고 그래서 그랬겠습니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가지고 옛날에 쌓였던 일이 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무시당하고 이 교회 다닐 줄 아냐고. 이 교회도 아니고 이 노무 교회 다닐 줄 아냐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팽개치고 교회를 떠나는 겁니다. 전부다 미친 짓입니다, 미친 짓.
오늘 여기에 보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그 원망하는 일들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냐면, 그렇게 힘 있게 복음이 전파되고 잡혀가서 제자들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아도 꺼지지 않던 복음의 불이 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탁 멈추는 것입니다, 복음의 전파가.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논리를 가지고 합니다. 내가 비록 열방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헌금해서 선교사 파송하고 그 헌금한 것으로 전도지 찍어서 온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고 내가 혹시 건강이 안좋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러 다니지는 못하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지체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 사람이 그 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각자에게 구체적으로는 한 가지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걸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려면 기도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위해서는 헌금을 해서 그렇게 전도지를 찍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도 누군가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회에서 점심밥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당 쓰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고 열방에 나아가 전하지만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씻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교도소에 찾아가서 그렇게 희망을 잃고 담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며 그렇게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가 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자기를 바치면서 살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의 바퀴들이 모아져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원망하는 이것이 교회가 그렇게 힘차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이바지하던 어느 순간에 그걸 탁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핍박에 의해서 불길이 꺼지거나 고난에 의해서 불길이 꺼지는 적은 없습니다. 대부분 이 교회의 복음의 불길이 꺼지는 것은 교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이제 교회 안에서 누가 옳으냐를 가지고 집요하게 따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 그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보면 어쨌든지 간에 결과론적으로 보면 교회가 잘못했습니다. 나누어 주려면 헬라파 과부든 히브리파 과부든 똑같이 나누어 줘서 원망과 불평이 없이 해야 합니다. 원인 제공을 누가한 것입니까? 교회가 한 것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똑같이 그렇게 나누어주었더라면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를 원망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은 누군가는 잘못한 사람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최종적으로는 사도들이 잘못했겠지만 사도들이 직접 무슨 그 떡을 들고 다니면서 나누어주었겠습니까? 그 일에 깊이 관여했지만, 나누어주는 장본인은 누군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뭐 그 사람이 일부러 그랬겠습니까? 어쨌든 일부러 그랬든 일부러 그러지 않았든 누군가가 책임질만한 일을 한 사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일을 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 만을 가지고 따지다가 결국은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뭐냐하면 히브리파 과부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고 원망을 한 것입니다. 아마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불공평하게 구제가 행해진 것도, 히브리파 과부들이 자기 동족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영향력을 행사해서 부당하게 자기들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인간으로서 정말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혼에 올바른 힘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어거스틴같은 사람은 이 영혼의 올바른 힘을 4개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지혜와 용기와 그리고 정의와 절제입니다. 다시, 지혜와 용기, 정의와 절제입니다. 그것을 잘 가지고 있을 때에 이 덕스러운 삶을 살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면 안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면 지혜가 있다고 칩시다. 거꾸로부터 합시다. 용기가 있다고 칩시다. 용기가 있는데, 용기가 있어서 불의에 굴하지 않는 목숨까지 버리는 담대한 용기는 있는데, 그런데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용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정의가 있습니다. 올바르게 하고 싶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런데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정의심은 불쌍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있습니다. 절제가 있는데 모든 면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먹고 싶은 것도 절제하고 높아지고 싶어하는 것, 부하고 싶어하는 욕망, 절제가 뛰어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처럼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사람취급을 안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기가 막히게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수없이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 헬라파 과부들처럼. 그리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혜와 용기, 절제, 정의 그 속에 공통적으로 깊이 스며들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그것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와져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 속에 까라따스의 사랑이 깊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을 하면서도 사랑이 그 속에 깊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옳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지혜를 가지고 옳지 않은 악과 옳은 선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미워하고, 그러니까 악과 선을 올바로 판단해서 악은 미워하고 선은 사랑하나, 그러나 선한 사람과 악인 사람 모두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그 지혜와 함께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혜 속에 그것이 깊이 스며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용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용기 속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스며들지 아니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용기를 행사하면 반드시 어디에 가서는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까리따스의 사랑이 용기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면 불의와 타협함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절제를 행하고 나면 자기처럼 절제를 못하는 인간에 대해서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들을 향해서 돌을 치켜들었던 유대인들의 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랑이 스며들게 되면 그 다음에 자신은 엄격하게 절제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서 덕을 찾아가지만 그러나 그렇게 자기처럼 절제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고 관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지점에서는 내가 저 사람보다 절제를 잘하지만 어느 한 지점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절제를 잘 할 수 있잖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또 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만을 추구하고 사랑이 그 속에 스며들지 못한다면 항상 그 사람 앞엔 친구와 적 둘밖에는 존재를 안합니다. 그러나 그 정의심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까리따스가 깊이 스며들게 되면 그러면 그 정의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사랑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큰 칼을 들고 사람들의 목을 침으로써 정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으로 그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그 사람들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너희는 어디 갈 때 돈이나 칼이나 그런 걸 들고 복음을 전하러 갈 생각하지 말아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가서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돼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맥락도 바로 그런 맥락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덕으로 안들어 갑니다. 이것은 덕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와 이 모든 것들 속에 공통적으로 사랑이 계속 스며들어감으로 말미암아서 이 네 가지가 하나로 모아져서 천지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이 아름다운 인간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사람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와 모든 것들을 추구하는데 그 속에 스며들어가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네 가지가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 속에 수 많은 모순을 일으키고 제 깐에는 굉장한 삶을 산다고 그렇게 법석을 떨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 지혜도 저를 위한 것이고 용기와 절제와 정의도 저 좋은 맛에 행하는 것이 되지 사랑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여기서도 누군가는 잘못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잘못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어쨌든 일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헬라파 과부들이 피해를 입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러면 누군가가 잘못한 것입니다. 잘못 안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이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옳고 그름을 지혜를 가지고 생각하고 그다음에 정의를 가지고 그것을 판단하고 용기로써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교회 앞에 항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사랑이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헬라파 과부들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렇게 능력있게 전파되던 복음의 역사가 멈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헬라파 과부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도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고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재산을 하나님 앞에다 내놓은 사람인데, “아, 그렇지 우리가 이렇게 원망하면 교회가 복음 전파 못할거야. 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도 그칠거야. 야!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그랬을 리는 없습니다. 절대 그 의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은 그 책임이 이들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헬라파 과부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그 피해자라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고 교회의 그 힘있는 복음의 역사, 사도들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아도 끊어지지 않던 그 복음의 역사, 그것들을 스스로 그 복음의 기관차를 딱 멈추는 역할을 이 사람들이 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용기, 정의 모든 것들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 모든 것들 속에 처음에 있었던, 처음에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나 세상 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그런 마음으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놓던 그 까리따스의 사랑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지혜가 있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의협심도 있고 용기도 있어서 이렇게 교회의 문제점들을 교회 앞에 밝히 말한다 라고 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 헬라파 과부들의 마음에는 교회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원망은 누구에 대한 원망입니까? 그렇습니다.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원망입니다. 그것도 그들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술 먹는 사람이 간암에 걸려서 죽으려고 목표 세워서 술 먹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좋으니까 그냥 하는 겁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폐암에 걸려서 죽으려고 목표를 세워놓고 매일 엑스레이 찍어 가면서 왜 아직도 안걸리지 안걸리지 그러고 담배 핍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음식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뚱뚱이 되려고 밥 먹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매일 자로 재보면서 이게 도대체 왜 이거 38인치밖에 안나가는 거야? 그러면서 밥 퍼먹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그건 맛있으니까 그냥 먹는 것이고 담배가 좋으니까 피는 것이고, 술이 땡기니까 그냥 먹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원망을 하는 것도 무슨 교회가 복음전파 되는 것을 멈추게 하고 싶고, 무슨, 그런 무슨 오히려 반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항의 하고 그렇게 투쟁을 해서라도 올바로 바로잡아야지만 이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왜 똑같이 주지, 그 왜 하필이면 헬라파 과부들 그렇게 홀대해서 홀대받았다는 인상을 받게 그렇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공정무사하게 일을 처리해야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공정무사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공정하게 해야지만 됩니다. 정말로 공정하게. 그것이 중요합니다. 많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옳고 그름을 가지고 따지는 동안에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더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교회의 복음 전파되는 그것이 그친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생각이 나서 말씀드리는데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비행기는 항상 조종사와 부조종사 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중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라도 일어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비행기는 아무리 적어도 왠만하면 둘이 탑니다. 저도 한 번 헬리콥터를 탔는데, 헬리콥터를 탈 때도 보니까 손님은 나 혼자인데, 조종사하고 부조종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한 사람이 심장에 쇼크를 일으켰다, 그러면 그냥 같이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옆에 부조종사가 있습니다. 지금은 다 그런 헬기가 없어졌습니다만, 옛날에 꼭 한 번 타봤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비행기 타고 가다가 둘이서 싸웠다고 칩시다. 조종간을 놓고 둘이서 이 자식 저 자식하고 멱살을 잡고 머리를 박고 뺨을 때리고 싸웠다고 칩시다. 비행기가 떨어져서 다 죽었습니다. 뒤에 승객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조종사가 그렇게 그것을 목표로 하던 바는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얼마나 더 큰 일입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던 그 큰 능력 있는 역사가 일어날 때 어떻게 됐겠습니까?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의 빛 아래 들어와서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막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멈췄습니다. 그러니까 뭐 떡 몇 개 나눠주다가 헬라파 과부들이 빠진 것이 잘 못된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된 크기가 복음이 그 교회를 통해 그렇게 힘 있게 전파되다가 멈춘 것만큼 그 정도가 되느냐 그겁니다. 그게 비율이 그 정도가 되느냐 그겁니다. 누군가가 그 돈을 떼어먹은 것도 아닌데 그런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이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저기 뭐야, 벼룩 몇 개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그 꼴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이렇게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 지혜는 지혜만 있어서는 참으로 지혜로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 지혜 속에 함께 역사해야지만 참으로 지혜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오랜 세월 주님을 믿으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교회가 정말 힘 있게 복음이 전파될 때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까? 그러면 우리가 잠드는 시간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가 병들어 누웠을 때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심지어는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해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들려서 영혼을 변화시키는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역사가 계속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바로 그 고유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일들이 이렇게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지혜를 가지고 올바르게 잘 해야 되겠습니다. 그것과 함께 그 원리가 사랑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에 무엇인가 아픈 것이 있으면 자기 몸에 박힌 가시를 빼듯이 그렇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 손끝에 가시 박혔을 때 부엌칼 가지고 와서 손가락 자르고 일단 가시를 빼는 사람 있습니까? 뭐 핀셋부터 시작해서 별 도구를 다 갖고 와서 다치지 않고 그 가시만 뽑으려고 돋보기까지 쓰고 안간힘을 쓰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보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보기에는 우리의 소견이 다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정말 사랑으로 가득 찬 가운데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혜, 용기 그리고 정의, 절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도록 그렇게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많이 복 주실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교회를 열심히 섬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런 악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바지 하게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의 표리부동하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이 여기면서 그러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4.부부간의 화목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오늘 성경에 보니까 기도가 막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도가. 이 기도가 막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기도가 그 막히면 그러면 아주 매우 중요한 은혜의 통로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잘 깨달아져서 은혜가 막 쏟아지는데 기도는 막히는 그런 경우가 있는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 경우는 잠시이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깊이 임하면 기도의 문도 함께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총체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밀려오면 기도도 잘 되고, 기도가 막히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막히게 되면 서서히 말씀의 미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심령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이러한 은혜의 경험들이 살아있어야지만 잘 못 걸어가던 길은 말씀에 의해 깨닫고 돌이키게 되고, 그리고 의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미숙하게 살았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성숙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 말씀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의 변화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래서 내 마음에 이 놀라운 변화의 은혜들이 있게 될 때에 그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가 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잘 하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애를 쓰면 어느 순간에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고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기도가 잘 되고 나면 그 다음에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시 열렸던 이 말씀의 문이 또 닫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쉼 없이 계속 흘러 들어와서 이 변화되고 깨뜨려지고 하는 작용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 때쯤 되면 사람들이 가끔 그럽니다. 예배를 아무리 드려도 말씀이 귀에 안들어온다 그러는데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고 깨달아지다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안들리기 시작할 때 시험에 든 많은 사람들은 그 설교하는 사람을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는데 그거 두 번 죄 짓는 것입니다. 정말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데 두 번 죄 짓는 것입니다. 한 번은 말씀을 들을 수 없도록 자신의 영혼을 잘 못 관리해서 미끄러진 데서 한 번 죄를 지은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영혼이 깨끗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을 무슨 설교하는 사람에게 중대한 결함이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니까 그건 두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마지막까지 자기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철저히 자아의 편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어오면 철저히 하나님 편이 됩니다. 주님의 은혜의 작용이 아니면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봐야지만 자신이 잘 못 됐다는 것을 알게되고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것도 깨닫게 되어서 자기를 고칠텐데 자기를 그렇게 못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기도의 문이 닫힌다 라고 하는 이것은 기도만 막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좋아하실 때에는 기도가 잘 되고, 하나님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성령의 마음이 상하신다든지 하게 되면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막히는 것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기도가 잘 되던 사람이 잠깐 막히는 경우가 있고, 그 다음에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기도가 장시간 동안 안되고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가운데에도 후자에 속하는 경우에 있는 사람들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점점 굳어지고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러면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은혜의 작용들이 그치고 힘겨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이 기도의 문을 막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공통점은 뭐냐하면 죄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기도를 막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그 자체는 그 하나님을 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죄입니다. 하나님을 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왜 적으로 생각하겠습니까? 나 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이 못하게 하시니까 하나님을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가 뭐라고 그랬냐면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생각과 원수 되고 성령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원수가, 육신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과, 육신이 원하는 욕망은 성령이 원하는 욕망과 원수가 되고, 성령이 원하는 욕망은 육신이 원하는 욕망과 원수가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돈이 떨어지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원수 찾아가서 날 좀 도와달라 그러면 싸대기 맞지,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친구를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해야지. 그래서 자신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가운데 한편으로는 도와달라 그러니 그게 응답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와서 자신의 죄를 버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그리고 은혜의 문이 쏟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공통점은 죄지만 인간이 그 죄를 방법과 모든 것들은 얼마나 다양한 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많은 것들은 죄를 짓고 죄를 행하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가지고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은 성적인 문제로 죄를 짓고, 또 어떤 사람은 명예의 문제를 가지고 죄를 짓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의 사랑의 문제로 죄를 짓고, 편견의 문제로 죄를 짓고, 수 없이 죄를 짓지 않습니까? 그 중에 오늘 많은 통로 중에서 아주 죄가 잘 들어오는 예민한 통로하나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하면 가정생활입니다, 가정생활.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이와 같이 남편도 지식을 따라, 남편도 지식을 따라 이와 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라고 나옵니다. ‘이와 같이’라는 게 뭐냐하면 그 앞에 보면 이제 아내가 남편을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둘 다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지 못할 때에 이제 기도의 문이 막히게 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지 못할 때 또 기도의 문이 막히고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이 이야기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러면 그 기도가 막힌다, 그 어떻게 막힙니까? 몇 번쯤 부부싸움을 하면 기도의 문이 서서히 막히기 시작합니까? 한 번 할 때마다 10%! 그래서 아홉 번 할 때까지는 쬐끔 열려있는데 열 번에 완전힌 닫힌다. 이런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순간에도 기도의 문이 딱 닫히고 더 이상 기도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있다 이겁니다.
경험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늘 많으시리라고 저는 그렇게 확신을 하는데, 그냥 오랫동안 남편 예수 믿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그걸 또 이용해서 남편이 이상하게 교회는 안가주면서 뭘 이렇게 바가지를 긁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 번 오랫동안 참고 눈물로 기도했지만 이번에도 내가 더 이상 참을 수는 없다 그러고 혈기가 확 솟아서 남편하고 한 대거리 합니다. 남편이 바가지 집어 던지니까 나는 양동이를 집어던지면서 한 번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하필이면 수요예배 드리는 날입니다. “싸우다가 말고 어디 가는 거야?” “예배는 드리고 와서 싸워야지!” 그리고 이제 수요예배 털래털래 옵니다. 그리고 앉아서 준비 기도를 합니다. “주님!” 그럴 때 주님이 하늘의 문을 확 열어주시면서 “그래 양동이 집어던지면서 싸우느라고 고생 많았다. 정말 수고했다. 니 남편이 다 못돼서 그렇지, 니가 무슨 죄가 있겠냐? 나는 너를 사랑한다. 우리 한 번 손잡고, 니 남편을 혼내주자.” 하나님이 그러신 적이 있습니까? 예? 그러니 회개를 하려고 그래도 자존심이 작용을 합니다. 10분전에 대판거리 “내가 잘 못한 게 뭐 있냐?”그러고 대판거리 소리소리 지르고 싸우고, 10분 후에 여기 와서 “내가 잘 못했습니다.”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 다음날쯤 돼야지. 그리고 수요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는 그 발걸음이 얼마나 성령 충만 하겠습니까?
어느 여자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온 동네에서 그 사람 별명이 뭐냐하면 ‘당신이 뭘 알아’. 그게 그 여자의 별명이었습니다. 남편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온 동네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습니다. 남편은 착해 터지고 물러 터져가지고 맨 날 그 가사나 열심히 돌보고 말입니다. 아내가 모든 것을 휘어잡고 흔들면서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무시를 하는지 동네 사람들이 그 여자의 이름을 ‘당신이 뭘 알아’로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신이 뭘 알아’씨가 어느 날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는데, “아무개씨네 집이죠?”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남편이 아무개씨 맞냐?”고 그러니까 “예, 맞다.”고 그러니까, “빨리 병원으로 오시라.”고 “교통사고가 났는데, 즉사 하셨다.”고. 그러니까 이제 ‘당신이 뭘 알아’ 이 여사가 차를 몰고 막 곡예 운전을 하다시피 하면서 정신없이 간 것입니다. 가니까 진짜 남편이 죽어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하얀 보자기를 탁 씌워놨습니다. 그래서 막 꺼이꺼이 울면서 “있을 때 잘 해 줄 걸. 여보, 내가 당신한테 잘 못했어.” 그러고 막 우는데, 남편이 하얀 보자기를 이렇게 열고, 고개를 이렇게 내밀고 마누라를 쳐다보는 겁니다. 그래 이제 죽었는 줄 알고 갖다놨는데, 의식이 다시 들었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내리고 “여보, 나 안죽었어.” 그런데 그 ‘당신이 뭘 알아’여사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남편이 “여보, 나 아직 안죽었어.” 그랬더니 이 여자가 다시 보자기를 탁 덮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뭘 알아, 의사가 죽었다는데.” (하하하) 이렇게 해서 기도의 문이 안막히면 신기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그 앞에서 사라의 예를 들면서 사라가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다고 가르치면서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라’ 그러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종관계나 그런 복종과 의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집안의 머리로 남편을 세우셨으니까 그 질서를 따라서 남편을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먼저 가고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랑이 가라 그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편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것이 그 남편을 깊이 존중하고 존경하는 그런 관계로 가야지만 기도의 문이 막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흘러들어 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많은 관계를 주셨지만 영적으로 연합을 이루며 하나 되게 하신 관계가 둘 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지체됨과 그리고 가정에서의 부부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잘 못하는 그것은 결국은 남편과 자신이 하나이니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찌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둘이 미워하고 다투어도 그것은 몸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처럼 가정에서의 원리가 그렇다 이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은혜 받는 비결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깊이 회개하고 남편이 무능하다고 남편이 돈을 좀 덜 번다고 혹은 남편이 신앙이 없다고 혹은 남편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나에게 잘 해주지 못한다고 남편을 멸시하고 대들고 심하면 욕하고 싸우고 이랬던 것들을 회개하십시오. 회개하고, 가서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고 마음으로 화해하고 그리고 좀 마음을 정성을 담아서 그 남편을 따뜻한 아침밥으로라도 섬겨보십시오. 그 기도의 문이 다시 열릴 것입니다. 다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가정의 소중함도 일깨우고 말입니다. 왜 아멘을 안하십니까? (아멘) 쬐끔한 소리로 ‘아멘’?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 기도의 문이 열려서 은혜가 들어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그렇습니다. 잘 아시네요.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남편한테 한 번 죽고, 하늘의 문이 열려서 은혜의 단비가 내린다면 할 만 하지 않습니까? 원래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사랑에 빠져서 살게 되어 있는 인생인데,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뜨려서 주님 앞에 드리면 그러면 정말 주님이 기뻐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해보십시오. 그러면 오늘 저녁에 말씀을 들을 때에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면 자매들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하하하) 나는 여기서 그치고 싶은데, 균형을 맞춰야지 않겠습니까? 그 뒤에 보니까 뭐라고 나오냐 하면 지식을 따라 이와 같이 아내와 동거하고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무슨 얘기가 나오냐 하면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다, 그런데 이것이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뭐냐하면 그릇이 연약한데 그 그릇에 담긴 것이 없다든지 아니면 그저 쓰든 말든 다 버릴 때가 됐다든지 그러면 살살 다뤄야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침에 해장국 같은 것 먹으러 가면, 요즘은 그렇게 주는 집이 많지 않지만 그 예전에는 질그릇에다 원래 이 해장국은 먹어야지 이게 제 맛이 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토기 그릇에다가. 거기에다가 이제 옹기그릇에다가 거기에다가 이렇게 잔뜩 해장국을 담아주면 그걸 먹으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아침에 시원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한 참 설거지를 하고 뭐 쓰다가 보면 이빨이 빠지지 않습니까? 이빨이 빠져도 그냥 썼는데 어느 날 보니까 금이 쭉 간 겁니다. 그래서 국을 담으면 국이 줄줄줄 새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이 그걸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손으로 받들어서 쓰레기통에 갖다가 모십니까? 그냥 휙 집어던집니다. 연약한 그릇이라도 담긴 게 없거나 담긴 내용물이 더러운 것이면 그렇게 휙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워낙 귀한 게 담겨있습니다. 아주 소중한 게 담겨있다 이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그 그릇을 살살 조심해서 다루게 됩니다. 기름병 같은 것, 향유병 같은 것, 향수병 같은 것,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살살 다루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리도록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진 사람입니다. 아내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신자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 성령님의 이 생명을 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아내가 특별히 그런 점에서 더 소중하게 취급받아야 되는 것은 그 생명의 유업이 자신과 함께 나누게 될 생명의 유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그 그릇에 담겨진 사람이니까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제 아내와 함께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폭력까지는 감히 못하겠지만, 아주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그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될 리가 없습니다. 그 아내와 그렇게 심하게 다투고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렸던 사람이어야지만 닫힌 게 고통스러운 줄 알지, 원래 닫혀있었던 사람들은 이 기도의 문이 닫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거기서 오는 고통 이런 게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그 화목이 깨질 때에 마음에 깊이 고통이 밀려오고 죽을 것 같은 그 아픔을 경험하지 원래 하나님과 불화하게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았던 사람들은 그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도 그것 때문에 자신 속에 일어나는 고통이나 아픔 이런 게 뭔지 잘 모른다 이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냥 아무렇게나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물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목사님, 우리 남편은 나하고 대판거리 싸우고도, 기도의 문이 막혀도 그렇게 한 달 동안도 말 안하고 제대로 잘 살고, 나만 괴로워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 남편은 원래 막혔던 사람이라서 막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모르고, 그 여성은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래도 열려있기 때문에 그 막히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먼저 회개하고 뉘우치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엉망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부부가 서로 화해하고 화목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생활의 이 기틀들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부부가 하도 싸우니까 심방을 가서 ‘싸우지 말고 잘 살라’고 그러면서 선물을 주고 왔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가신 다음에 그 선물을 펴보니까 오이 한 개 하고 칼 하고 들었더랍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심오한 뜻이 있나’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제발 남편인 당신이 아내를 먼저 섬겨라’ 그러더랍니다. 그러면서 거기에다가 목사님이 편지를 친절히 써서 ‘이 칼로 오이를 깎아서 그래서 아내를 무릎팍에 눕혀놓고 얼굴에다 그거를 쳐덕쳐덕 붙여라. 최소한 당신들이 30분은 이야기를 해야 될 것이다.’ 뭐 사실 그 나이 먹도록 인생 살았으니까 거기에다 오이 붙인다고 해서 얼굴에 무슨 큰 변화가 오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오이를 길게 죽죽 잘라서 그래서 이제 생전 처음으로 아내를 무릎팍에다 눕히고 거기에다 오이를 그야말로 쳐덕쳐덕 발라줬습니다. 호박 위에 오이를 붙였으니까 뭐 그게 뭐 그림이 그렇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식물이니까, 그래서 어쨌든지 간에 그 오이 때문에 이 여성은 깊이 감격해서 자기 남편을 존경하지 못한 것을 용서를 구하고 남편은 그 오이를 붙여주면서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을 회개하여 다시 화목하게 됐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기도의 문이 열리고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깨달아지고 하는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우리가 남편에게 불순종하고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대들고 이랬던, 남편의 자존감을 빼앗아가고 이랬던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고 기도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연약한 그릇이 아니라 아무리 집어던져도 깨지지 않는 그 만년 플라스틱 그릇처럼 생각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에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주십시오. 내가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사랑하고 아끼고 이렇게 하면서 가정의 화목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나의 이 기도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5.목회자와의 화목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 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 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 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 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그로 살이 반이나 썩고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같이 되게 마옵소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찌라도 그가 칠 일간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 밖에 칠 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찌니라 하시니 이에 미리암이 진 밖에 칠 일 동안 갇혔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진행치 아니하다가 그 후에 백성이 하세롯에서 진행하여 바란 광야에 진을 치니라’(민12:1)
자, 우리가 새벽마다 그 화목에 대해서 이제 살펴보고 있습니다. 화목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첫째 날은 우리가 제사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목해야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고, 둘째 날은 육신의 형제와도 그렇게 화해해야지만 하나님의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교회에서 지체들을 인해서 원망하는 것이 얼마나 이 교회 전체의 부흥을 가로막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교회에서만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화목해야지만 기도의 문이 막히지 않는다 이 말씀을 우리들이 네 번 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아마 그 모든 네 개의 대상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주제가 오늘 여기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목자와의 화목입니다. 오늘 저녁에도 우리들이 교회에 관한 말씀을 통해서 이제 시편 23편이 끝이 날텐데, 그런데 이제 그 이 문제가 아주 굉장히 현실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우리들이 필연적으로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목회자인데 목회자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제 사회가 많이 변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깊이도 많이 얕아졌기 때문에 이제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이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그 변질이 됐습니다. 그래서 인본주의적인 생각들이 사실은 이 사이에 많이 들어오게 되어서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근간이 많이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에 한 번 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깊이 정리를 하는 것이 우리가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할거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그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문맥으로 볼 때에 이 미리암과 아론만이 한 것이 아니라 아마 미리암과 아론이 백성들도 어느 정도 선동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를 대적하는 일이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어려운 일들을 이 장에서 한 장 전체를 향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광야 생활을 다 끝내고 이제 가나안의 정복을 막 시작하려고 하는 이 때에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아주 굉장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들이 모세 다음에는 여호수아가 뒤를 잇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여호수아는 모세 같은 불세출의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그 권위가 거의 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수아는 오랫동안 그 모세 밑에서 지도자로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냥 이렇게 좋은 믿음을 가지고 성장한 그런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제 이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수아를 가나안의 정복의 지도자로 삼으실 작정이었는데 사실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모세가 나중에 죽고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될 때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생각을 보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 하는 것을 온 회중들에게 가르쳐주셔서 세대교체의 충격을 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호수아 1장을 보면, 이 패역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얼마나 놀랍게 뭉쳐서 강한 민족이 되어서 가나안을 정복해 가는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모세가 들어갔어도 불안했을 텐데 그 연약한 지도자 이 여호수아가 들어갔을 때 온 백성이 하나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건의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입니다.
발단이 뭐냐 하면 모세가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일부다처제가 하나님에 의해서 묵인 됐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자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구스 여자입니다. 이 구스 여자는, 구스 지방이 오늘날 우리에게 에디오피아 지방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겁니다. 틀림없이 이 여자는 얼굴이 새까만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미리암과 아론이 펄펄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펄펄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거기를 가서 그 흑인과 결혼하는 모세를 볼 때 여러분들은 쉽게 “아멘!”하고 용납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 여러분의 목사가 있는데 그 사람이 만약에 상처를 하고 재혼을 하는데 그 입술이 주먹만큼 튀어나온 토종 흑인과 결혼을 했고, 그 여자는 여기에 머리를 꼬고 나왔다고 생각할 때 어느 날 여러분들이 그 자매 손을 딱 붙들고 “사랑하는 사모님!” 이렇게 부를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대답을 안하는 것 보니까...
그리고 그걸 이야기했을 때 이스라엘 많은 백성들이 “모세는 잘 못하는 거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신기한 건 여기에 모세가 자기를 변명하는 이야기가 안나옵니다. 그러면 왜 모세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하필 모세는 그 새까만 사람한테 또 장가를 들었을까? 뭐 또 장가를 들겠다고 지도자가 그랬을까?’ 그런데 그 당시에 율법을 기준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스에 가서 이 여자와 결혼을 하고 온 게 아니라 이 구스 여자를 어디서 주워왔다, 주워왔다 그러면 미안하지만, 이 구스 여자를 어디서 데려왔겠습니까? 예? 대답을 해보십시오. 어디서 데려왔겠습니까? 애굽에서 데려 왔다구요? 어떻게 그렇게 기괴한 발상을 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이스라엘 속에는 그 애굽에서 데려왔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만 애굽에서 떠날 때에 같이 묻어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출애굽기 12장 3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중다한 잡족들이 따라 나왔다’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애굽에서의 그 재앙을 보면서 신앙이 생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따라 나온 겁니다. 그들이 따라 나오게 되어서 주님을 믿고 신앙을 갖게 되면 그들도 똑같이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는 폐쇄된 공동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스라엘 혈통이 아니더라도 신앙에 의해서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고, 들어간 후에는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 그런 것이었단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갈렙 같은 사람, 가나안 정복의 영웅입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갈렙 같은 사람은 가나안 원주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네 땅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또 그 다윗의 시대에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아, 그 사람이 군인으로서 꽤 높은 지위에 올라서 활동하고 있던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그 사람도 헷족속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섞여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었으니까 율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고 신앙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고, 하나님이 그 당시에 일부다처제를 묵인하고 계셨으니까 그 여자와 결혼한 것이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미리암과 아론이 펄펄 뛰면서 반대를 했겠는가. 편견, 편견. 여기에서 참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편견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그들의 사상입니다. 느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스라엘 민족과만 결혼을 해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 편견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를 받아도 이 편견은 못 고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있을 때에는 은혜에 의해서 그 편견들이 묻히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편견들을 어느 정도 극복을 하는데 이제 은혜가 좀 떨어지고 나면 이 신앙은 뒤로 물러나고 편견이 뚜렷하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 고통을 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의 한 방식이지 하나님의 진리 이외에는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깊이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그런 것 많지 않습니까? 뭐, 이 세상에서 시간을 잘 지키는 것, 굉장히 훌륭한 것입니다. 그리고 잘 지키지 못하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잘 지키고 그래야 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예배를 한다, 그러면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됩니다. 예배를 드린다, 정확히 지켜야 됩니다. 그렇지만 구역에 보내주니까 구역장이 시간 안지킨다고 구역장하고 대판거리 싸우고 구역을 뛰쳐나오고 그러면 그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 옳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진리는 아닙니다. 그 외에도 다른 것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편견인데, 이 편견이 도화선이 되어서 미리암과 아론이 이제 모세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미리암이 누구입니까? 모세의 생명의 은인 아닙니까? 이 모세를 낳아서 이제 감추어서 기르다가 도저히 기를 수가 없을 때 갈대 상자에 넣어서 물에 띄우고 그것을 공주의 집에 들어가게 해주고 또 그 모세가 양육을 왕궁에서 받을 수 있게 해준 생명의 은인이었고 아론은 소명을 받았을 때에 말을 잘 못하는 모세를 위해서 대변인의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정 해준 사람들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평생 사역에 절실한 동지들이었고 인간적으로는 혈육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미리암과 아론이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미리암이 먼저 나온 것을 보니까 이 여자가 주동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론은 뒤에 서고, 이제 이렇게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님이 ‘너희 세 사람 다 좀 나오라.’ 나오니까 다시 또 두 사람,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 세워서 그래서 ‘넌 잘 못됐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내세운 것은 뭐였습니까? 모세가 뭐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해주셔서 우리에게 그 말씀을 전달해주니까 중요한 인물인데, ‘모세 저 한테만 말씀하셨냐? 우리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 우리도 하나님 만난 사람이고 우리도 영성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저 인간 모세는 틀렸다.’ 그러고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 나오라.’ 셋이 나오니까 그 중에 둘을 따로 세우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말씀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 종 모세와는 너희들은 다르다. 너희들은 말로만 했지만 내 종 모세에게는 그 직접 내가 대면하여 말하였고 친구처럼 내가 대면해서 말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모세가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이라.” 그러고 모세의 편을 들어주시고, 미리암은 하나님이 본 때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확~! 하고 한 순간에 하얗게 꽃이 핀 문둥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병이 있었지만 이 문둥병은 천주의 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저주가 내린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문둥병을 내리신 이유는 하나님도 이 사람을 싫어한다 라고 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얗게 문둥병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 번 이렇게 가만히 상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 문둥병자 보신 적 별로 없죠? 저희는 몇 번 봤습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그 온 신체가 뭉개져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문둥병이 걸렸던 하나운(?)이라는 시인이 지은 보리피리라는 그 시에 보면 ‘오늘도 고개를 넘는다 / 발가락이 하나 또 떨어진다...’ 뭐 이런 시가 나옵니다. 그렇게 그 온몸이 망가져 가는 겁니다. 그걸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얗게 문둥병이 들고., 모든 사람들은 일시에 물러갔을 겁니다. 접촉하면 문둥병이 전염되니까.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그 하나님께서 뭐라 그러시냐 하면 너희에게는 꿈과 이상으로 말하였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나는 그에게, 그는 나와 대면하여 말하는 자라. 그런데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이라 그럽니다. 그럼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아니, 뭐 그럼 모세만 충성했나? 미리암과 아론도 그 광야에서 그 긴 세월을 고생하면서 모세를 수종하며 그러면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 같이 고생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똑같지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충성했지만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 여호와의 집인 이 광야의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가을 사경회 때인가 말씀을 전할 때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이 목회는, 교회의 이 모든 일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목회자에게 위임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목회자의 일들을 도와서 함께 일을 해나가도록 하나님께서 노래잘하는 사람도 보내시고, 건축을 잘하는 사람도 보내시고, 교육을 잘하는 사람도 보내시고, 돈 있는 사람도 보내시고, 재능 있는 사람 보내시고, 또 건강한 사람을 보내시고 이렇게 해가지고 그 일들을 나누어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내 어린양을 먹이라’ 그리고 세우시고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어린 양들을 베드로 혼자서 먹였습니까? 거기에 수 많은 같은 사도들이 있었고 그 다음에 또 따르던 집사들이 있었고, 제자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영혼을 돌봤고 바나바 같은 사람은 그 이름의 뜻 자체가 위로자입니다. 그래서 다니면서 그 시험에 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잘 권면하고 위로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영혼을 돌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다니면서 설교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일도 베드로에게 맡겨진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가 이 광야 교회를 세워서 가나안 정복을 앞두기 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이 교회를 인도해왔는데 그런데 사실은 이 교회가 이 나의 사랑하는 종 모세에게 맡긴 교회이고 그리고 너희는 모세를 도와서 이 교회를 함께 이끌어 가도록 내가 모세를 돕기 위해서 보낸 사람들이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세와의 불화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편견에 의해서 모세와 깊은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교회에서의 화목을 깨뜨립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도 보면 모세가 오히려 그렇게 비난 받을 때에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 그랬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세가 그렇게 원래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에서 그 3장에서 주님을 만나서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노자로 소명을 받을 때도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못 간다고 버텼던 사람이고 그 이전에는 혈기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혈기로 애굽의 병사를 때려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보통 과격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 그랬던 것은 뭐냐 하면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이 사람이 그 40년 동안에 얼마나 성화됐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렇게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지만 이 사람의 이 마음은, 이 마음이 이러한 일들로 인해서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범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 자신의 평생 동지이고 혈육인 미리암이 선동을 해서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아론이 또 거기에, 아론은 좀 판단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또 뒷북을 치고 줄을 서서 그래서 백성들을 선동하면서 ‘언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뭐냐 하면 ‘모세가 잘난 게 뭐가 있냐? 저만 하나님의 종이냐, 우리도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도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사람인데, 저 독선과 오만을 보라.’ 그러면서 사실은 선동을 한 것입니다. 그 때에 지도자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교인하나가 교회 다니다가 시험이 들어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저녁 내내 마음이 편치 않고 괴로운데 이렇게 자기의 친 혈육이 반기를 들고 이렇게 도전을 하는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그 마음이 상하고 괴로웠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이 목회자와는 이렇게 불화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사람의 보기에는 다 옳은 것 같아도, 그러나 그것이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한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여러분들의 목회자가 여러분보다 신앙은 몰론 좋고 학문에 있어서 여러분보다 뛰어나고, 경영이나 세상의 것을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도 여러분과는 비교되지 않게 뛰어나고 그리고 건강에 있어서도 뛰어나서 그래서 모든 일들을 감당하면서도 체력의 손상이 없고 인간성도 좋아서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리고 공부도 잘해서 말씀의 깊이도 탁월하고 거기에 더 뛰어나서 정말 집에 재산도 있어가지고 교회가 필요하면 집의 유산이라도 팔아서 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 있고, 기왕이면 나처럼 얼굴이 못생기지 않고 탤런트처럼 멋있고 이쁘게 생기고, 기왕이면 이렇게 늙지 않고 훨씬 젊고 튼튼하고 보기도 좋은 그래서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면 사람들이 배우인가, 목사인가 혼동할 정도가 되고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뭐 이렇게 밤새도록 해도 끝이 없지만 그런 사람을 원하겠지요. 내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런 사람이 왜 여러분들 목사가 되겠습니까? 더 좋은 데 가지. 나야 뭐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그냥 이렇게 시골에서 목회를 하지만, 시골이지 않습니까? 서울 아니면 시골이지 않습니까? 목사들 만나면 항상 그럽니다. 시골 목회 한다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디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천사들 중에 찾아봐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수시로 부딪히고 힘들어 합니다. 그건 한 마디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건 뭐냐면 자기가 깨뜨려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혈기가 충천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에 있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5년 전에 교회를 여기로 옮기고 아이들이 막 늘어나서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밤에 잠이 안오는 겁니다.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야 되는데 아이들이 교육 받을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지금 장로님 되신 분 몇 분하고 그 때 막 고민을 하면서 여기저기 아이들을 어디서 그 교육을 시켜야 되나 고민 하고, 건너편에 빌딩을 알아볼까 뭘 할까 그러면서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몇 일을 그렇게 고민을 하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지 않습니까? 하여튼 그렇게 마음이 불안할 수가 없고, 빨리 얘들을 위해서 공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일 난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이 교회 옮긴 지 한 2년 쯤 넘어서 교육관을 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것도 어떻게 보면 참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교인들이 100% 헌금한 것도 아니고, 굉장히 어렵게 돈 천오백만 원 밖에 없는 상태에서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고 이년 밖에 안됐는데 다시 또 80억짜리 교육관을 산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쁨으로 눈물로 기도하면서 헌신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원망을 하고 그런다는 이야기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참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났으니까 이야기합니다만, 우리 사택에서 창문을 이렇게 열면 정확하게 그 교육관이 딱 눈앞에 들어옵니다. 매일 그 창가에서 앉아서 밤마다 그 교육관을 바라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가는데 이제 얘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는데 그래도 다음 세대의 얘들을 교육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뼈아프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여튼 한 일 년 동안을 살기가 싫을 정도로 제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었을 때에는 ‘내가 왜 이 일을 해서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여튼 정말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돈 때문에 고통을 받아본 적이 없고, 나는 목사가 되면 그런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나는 생각을 안했습니다. 하여튼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집들을, 이제 뭐 교인들이 있으니까 심방을 가지 않습니까? 어디를 심방을 갔는데 무지무지하게 커다랗고 좋은 집입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이 새로 지어서 이사 온 집이 얼마나 좋은 지를 쭉 설명을 하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아, 이 아파트를 팔면 도움이 될텐데.’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참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그랬습니다.
그래도 하여튼 불에 튀기는 것 같은 그 맹렬한 시련을 거치면서 결국 세월이 흘러가고 지금은 모든 것들이 다 잘 됐습니다. 그 때 그렇게 그 원망하던 사람들이, 뭐 어떤 사람은 교회를 떠났고, 어떤 사람은 남았지만, 남아있는 사람 가운데 또 어떤 사람들은, 요즘은 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 목사님은 탁월한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이 또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때의 그 판단과 불과 한 3년 지난 다음에 그 바뀌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본인들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지금 만약에 그걸 안샀어 보십시오. 거기서 천 명이 넘게 예배를 드립니다. 천 명이 뭡니까? 천이백 명 가까운 사람이 저 교육관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받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아무 대책 없습니다. 건널목에서 수시로 여러분, 사고 나는 것 보지 않습니까? 저 건너편에다가 얻어가지고 아이들 천 명씩 보냈으면 그 동안에 아이들 몇 명은 하늘나라 갔습니다. 틀림없이. 아무리 조심해도.
그러지를 마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교회는 목회자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생명을 다해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지협적인 면에서는 여러분들의 생각이 더 옳을 수도 있고 또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이 이런 식으로 모세와만 말씀하시더냐 우리와는 말씀하시지 않더냐 하고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이렇게 해서 무리를 규합하고 이러는 방식으로 교회에서 자기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너무나 달라서, 살을 찢는 것 같이 고통스러워서 도저히 합의를 이룰 수 없거들랑 기도를 많이 하면서 자기를 깨뜨리십시오. 그것이 안되면 조용히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교회의 화평과 질서를 유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강물처럼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흘러가면 어떤 곳에서는 수로가 있어서 그 강물이 수로로 흘러 들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시냇물이 강물로 흘러 들어오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강은 강대로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누가 모든 사람이 한 교회를 영원히 끝까지 좋다고 하겠습니까?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와 이렇게 부딪혀서 불화하게 되면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 하면 자신의 영혼의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목회자와 싸우기도 하는데 그것은 둘 다 바보짓입니다. 목회자와 교인은 서로 싸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부모와 자식이 싸우는 것을 봤습니까? 가끔 부모와 자식이 싸워서 자식이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내고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소송을 내고 하는 그런 일들이 있는데, 그것 다 미친 짓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이 결국은 망합니다.
옛날에 전두환 대통령이 있을 때 어느 큰 그룹에서 자식과 부모사이에 소송이 벌어졌습니다. 그 양반이니까 그 일을 하지,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청와대에서 호통을 쳤습니다. 결국은 소송이 끝났습니다. 민주국가에서 그래도 되느냐 그러겠지만 나는 참 통쾌했습니다. ‘야, 그럴 수도 있겠다.’ 그걸 소송하는 걸 보지 않고 불러서 말입니다, 호통을 쳤습니다.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라고 말입니다. “당장 집어치우지 않으면 가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민주사회에서 그러면 되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미친 짓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교회에서 당신의 종들을 세워서 일하시는데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 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투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잘 못해도 그 종편이냐, 그렇습니다. 잘 못해도 그 종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잘 보십시오. 모세가 항상 옳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혼 난 적이 있었습니다. 몇 번 있는데, 그 중에 한 번이 뭐냐 하면 맨 처음에 소명 받을 때, 계속해서 안간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이 모세를 심하게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뿐 아닙니다. 한 번 하나님이 모세를 향해서 다시 한 번 진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뭡니까?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 그럴 때 이 모세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이 반석을 혈기로 내려치는 겁니다. 그러면서 물을 내게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른 섭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니가 그렇게 혈기로써 이 반석을 쳐서 백성들에게 물을 내었기 때문에 너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이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죽게끔 하나님께서 그를 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잘 못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심하게 책망하시면서 그러면서 그 복된 가나안 땅 앞까지 인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입성을 불허하십니다. 이런 일들이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내종 모세는 알고 보니까 혈기 충천한 인간이다. 나는 이 인간이 너무 싫다. 너희들 중에 새로 태어난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만 모세 저 녀석은 내가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공포하셔서 모세에 대한 반감과 그리고 모세의 명예나 모세의 모든 것을 먹칠을 해서 그래서 백성들에게 짓밟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가정이지만, 당시에서는 이 다시 여자를 취하는 것이 묵인이 되었지만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하나님께서도 별로 안기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해결할 문제였습니다. 백성들에 의해서 이렇게 책망을 받음으로서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이런 책망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세의 지도력이 흔들리게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영혼 속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자기의 영혼을 인도하는 목자와 구겨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서 충만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결국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리암과 아론의 경우처럼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틀림없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영혼의 시험에 빠지고 곤고한 것은 이 목자가 본을 못 보이고 제대로 못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결론이 나오느냐 하면 우리가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는 그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런 침체를 가져온 경제적인 어려움, 거래처의 사장, 경제 정책을 잘 못한 대통령, 경제 장관, 이런 식으로 전가가 될 것 아닙니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 논리가. 그런 건 모두 내 주위에 있는 상황이고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떤 사람은 그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낙심해서 침체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거 누가 결정하는 겁니까? 자기가 결정하는 겁니다. 각자 자기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책임이다 이겁니다.
저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적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저는 정말 병들고 잠들어 있는 교회 속에서도 인생 최고의 영적인 호황을 누리면서 산 적도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경험했습니다. 뭐 그거 좋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은혜를 못받으니까 자기 자신이 어떻게 은혜 생활을 하며서 살아가느냐 하는 그런 것입니다. 자기 책임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이제 분명하게 각자가 심판을 받을 때에 그 차이가 드러나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침체는 자기의 책임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그런 깊은 침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목회자에게 깊은 상처를 줍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실 때에 이 하나님의 마음을 목회자에게 부어주셔서 목회자의 마음은 사실은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공동체의 마음입니다.
최근에도 어느 목회자를 만났는데 교회도 꽤 큰데 끊임없이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나 그랬더니 얘기를 쭉 들어보니까 뭐냐 하면 교회에 부임한 지가 꽤 여러 해 지났는데도 이 교회가 내 교회처럼 느껴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늘 남의 교회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인생을 끝마칠 수 없다. 떠나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러나 하고 보면 교인들이 대부분 다 좋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몇 사람이 그렇게 괴롭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이제 참으라고 늘 내가 얘기해줬습니다. 극복을 하라고 이렇게 얘기를 해줬는데 인간이니까 쉽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심성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생활비가 좀 적고 일이 많고 너무 힘들고 그래도 어차피 목회의 길에 들어설 때 생각한 그 자체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가 죽겠노라 그러고 길에 들어섰으니까 일이 많고 힘들다는 것 때문에 사실은 마음이 틀어지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거기에서 사람들에게 격려 받고 사랑받고 그러면서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일에 순종하고 따르는 착한 교인들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 말씀을 깊이 청종하는 교인들을 만나고 할 때에는 그 교회에, 섬기고 그 교회에서 목회하는 보람이 있지만,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택을 주고 월급을 많이 주고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를 향해서도 이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혼하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게 어느 한 순간에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십 수 년을 두고 이혼을 결심하면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 이불 덮고 오래 살다가 생각이 많이 오갑니다. 그 때까지는 아이들 때문에 이혼을 못하지, 내가 가정을 버리고 어떻게 할까 그러지만 어느 한 계기가 있어서 마음을 딱 뜻을 정하게 되면 그 다음에 십 년 이십 년 산 집인데 자기 집에 딱 들어가면 남의 집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남처럼 느껴지고 애들도 자기 새끼처럼 안느껴진다는 겁니다. 시집올 때 해 온 양복장이 자기 것처럼 안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낯선 집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교인들이 끊임없이 거역하고 그 다음에 부딪히고 그렇게 되면 교회 내려와서 교회 뜰을 이렇게 걸을 때 이게 내 교회처럼 느껴지지 않고 손님으로 온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이 돌아서면 사람이 이혼하듯이 목회자도 그렇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사람에 따라서 목회자도 자기의 잘 못을 깨닫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깨뜨려지고 또 깨뜨려지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자기 성숙을 위한 십자가로 삼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극복해가면 훌륭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혈기 방자하던 사람이 이렇게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작용이 어느 순간에 잘 안된다든지, 그치고, 그러고 결단을 내리게 되면 파국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해보면 결국은 목회자와의 불화한 관계가 결국은 교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다행이 이 모세의 경우는 이 마지막 때에 은혜 충만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니까 그것을 끊임없이 소화를 시키면서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면서 극복하는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염소 같은 교인들이 수없이 뿔로 들이받아서 목회자가 배에 구멍이 나고 만신창이가 되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 있고 그리고 충만한 은혜로 끊임없이 부어지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모두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면 그러면 목회자의 마음도 교회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은 굉장히 단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먹이는 목자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권고했듯이 두 가지 일에 근심이 없이 전념하도록,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고 자신이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일에 헌신하도록,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도록 그 두 가지 일에 전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런 목회자와의 갈등과 이런 것들은 결국은 자신에게 올 많은 하나님의 축복들을 앗아갑니다. 이 미리암과 아론이 오랫동안 놀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던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그 미리암과 아론만큼 모세 가까이에서 충성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릇된 선택을 하니까 미리암의 이전에 행했던 많은 좋은 것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어 버리고 그는 오히려 문둥병으로 하얗게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리암의 이 공격이 모세의 집안에서 일어난 집안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공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 여기에서 진짜 이 교회에서의 목자와 양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게 사실 그렇게 괴로움을 끼치고 문둥병자가 됐으면 그냥 제거해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버려두면 죽어버릴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당시에 문둥병이 걸리면 격리 수용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못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고쳐달라고.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셔서 그를 하나님이 치료해주십니다. 그리고 미리암과 아론이 자신이 잘 못했다고 고백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속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얼마를 신앙 생활을 하든지 간에, 어디에 가든지 간에, 정말 목회자와는 불화하지 않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와는 절대 불화하지 말고 그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그 목사가 담임목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사라도. 그 가장 어린 사람들이라도 그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그에게 도움을 주고 그를 아끼고 그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 화합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에 복이 될 것입니다.
저는 무슨 좋은 사람들 만나서 13년 살아오는 동안에 그렇게 뼈에 맺힌 상처 같은 것은 없습니다마는 어느 선배 목사님이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여튼 저희 아버지가 교회에서 만나는 목사마다 그렇게 싸우더니 자식들이 잘 되는 것을 못봤다고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이 있는 사람들이 되려면 교회와 목회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생활을 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회복되어야할 화목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