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비밀, 그리스도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기독교 신앙과 경건(딤전3:14-16) 2008.8.10 온가족수련회 1
2. 경건과 그리스도(딤전3:16) 2008.8.11 온가족수련회 18
3. 교회의 경륜과 경건(딤전3:15-16) 2008.8.12 온가족수련회 36
1.기독교 신앙과 경건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4-16).
I. 본문의 배경
사실 우리가 읽은 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가 없도다”라는 말은 앞 뒤 문맥하고 전혀 상관이 없이 갑자기 껴들어간 삽입구 같습니다. 그러나 디모데 전서 전체를 우리들이 숙독해보면은 이 의문이 풀립니다. 사도가 이 서신을 기록하는 목적은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로 하여금 어떻게 자기를 신앙 안에서 지키고 목회자로서 교회를 섬겨야 할 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 디모데가 어떻게 신앙을 지키며 교회 안에서 대적자들과 변절자들로부터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격려하는 것이 1장과 2장의 내용이고 3장에서는 이러한 교회에서 세워지는 일꾼들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상세한 편지를 쓴 것은 바울이 지금 옥에 갇혀 있어서 당장 달려가서 교회의 여러 현황들을 직접 확정해 줄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본문이 기록이 된것이죠.
II. 기독교 신앙과 경건
하나님의 교회의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격이 요구되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공통된 바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 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러한 경건이야말로 모든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원동력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곧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오늘 고백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에서 말하는 이 경건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III. 경건이란 무엇인가?
A. 경건의 어의
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유세베이야라는 단어인데 유는 좋다는 뜻이고 세베이야는 두려움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좋은 두려움, 좋으면서도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마음이 바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물론 이 경건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영혼과 정신에 국한되지 않고 그의 마음과 삶 전체 그가 행하는 삶과 생활의 모든 체계를 함께 아우르는 그런 종류의 삶의 전체의 체계로 연결이 되요. 오늘날 우리들이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영성과 지성 그래서 지성과 대비되는 그런 어떤 영적인 성격을 가리키는데 사실 이런 단어는 성경에도 잘 안 나오고 종교 개혁자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던 단어였어요. 그래서 오늘 이런 영성이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들이 무분별하게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영성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신령하고 어떤 신비하고 그러면서 어떤 행동이라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느낌과 감정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영적인 것에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신성 이 모든 것을 통틀어서 얼버무려서 영성이라고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데 지난번에 산상세미나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 영성이란 말의 배경에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대비시키고 그리고 세계 이 자체가 어떤 커다란 정신과 영적인 실체에 의해서 하나로 전체가 이어진 그러한 영적인 힘이나 세력에 의해서 이 물질의 세계가 움직인다고 하는 이러한 범신론적인 세계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인간이 그 모든 인간들이 각각 영성을 가지고 있고 그 영성은 세계 전체를 감싸고 있는 그 하나인 영의 세계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부여받아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고 그 신들의 세계와 함께 통할 수 있다고 보는 이런 사상을 가진 배경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인격적이고 거룩하시고 아주 분명한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계신 신이신 완전하신 신이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보다는 인간뿐만 아니라 무생물에게까지 모두 깃들어 있는 샤머니즘적인 그 모든 영적인 세계전체를 총칭해서 영성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모든 종교에는 영적인 특성들이 있고 기독교라고 해서 그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영적인 것 화되어가는 방법이 종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경건이라고 하면 웨그런지 누구로부터 강요를 받는 무거운 의무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고 억제를 해야하는 그런 어떤 규범적인 것이 생각이 나지만 영성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인간 자신이 영화되어서 그 영적인 세계에 접속할 수 있고 또 인간이 그 영적인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신화된 존재라는 생각이 많이 그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애매모호한 단어인 이 영성을 경건이라느 말보다 훨씬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단어 하나도 아주 주의깊게 사용함으로써 우리들이 신앙의 본질이 애매모호함 속에서 이 현대사상에 의해서 침범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보호하는 역할들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영성 하면은 신비한 모든 것 진리라고하는 개념보다는 뚜렷한 기준이라는 것보다는 무언가 영적으로 예민하고 민감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처럼 생각이 되어지고 그리고 경건하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경의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붙들린 신자, 순종하는 생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는 그런 극기의 삶,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은혜, 이 모든 것이 뚜렷하게 한 줄기로 우리의 마음 속에 확 들어오는 거에요. 이런 것을 세상사람들은 싫어 하는 거에요. 그리고 사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붙들어야지만 종교 개혁자들이 그토록 올바로 세우고자 했던 그 참된 신앙으로 우리들이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냐 이거죠. 이것은 잘 들어보세요. 내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이상하게 하나님께로 아주 좋게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을 의미하며 외적으로는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흘러나온 모든 총체적인 삶의 행동거지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비심으로 나타나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체계라 이거에요. 다시 한 번 할께요. 내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러면서도 싫지 않아서 하나님께로 계속 이끌려 들어가는 사랑의 감정을 가리키고 외적으로는 이 두렵지만 충만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흘러나오는 마음과 삶의 모든 행동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데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비심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이것은 영혼과 정신의 관계들 뿐만 아니라 마음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삶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체계로서의 경건이다 이런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기독교신앙에서 이 경건을 빼 버리면 아무것도 안남는 거죠. 삶도 거룩한 삶도 무너지는 것이고 구별된 마음도 무너지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영향도 무너져버리는 거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 경건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는거에요. 그런데 이런 경건을 가능하게 하는 그 핵심이 뭐냐하면 두려움을 동반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에요. 이 그 신앙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잘들으세요. 신앙이라고 하는 마차가 거기에 우리의 삶이라는 짐을 싣고 달리기 위해서는 두 개의 확실한 바퀴가 필요해요. 하나는 종교이고
B. 경건과 지식의 관계
또 하나는 지식이에요. 이 종교의 바퀴와 지식의 바퀴가 두 개가 함께 붙어있어야지만 우리의 삶을 거기에 얻었을 때 그것을 끌면 잘 달려가는 것이에요 .만약에 그 위에 짐을 잔뜩 실었는데 말은 힘이 아주 강한 말을 묶었는데 하나의 바퀴가 달려 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아마 그 모습을 머리 속에 상상하면 매우 답답한 그림이 나올 꺼에요. 차라리 바퀴가 없느니 만도 못하게 되겠죠. 철학은 지식이라는 바퀴 하나만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잡아 끌려는 것이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라고 이름하는 것들 중에 상당수는 종교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우리의 삶의 바퀴를 끌려고 하는 거에요. 기독교 신앙은 이 두 개를 모두 가지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배우며 꾸준하게 그 진리를 습득하고 말씀으로 그렇게 지식으로 무장이되어야 해요. 그게 한 쪽의 바퀴에요. 문제는 이것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가지고 이 종교라는 것 없이 지식만을 가지고 하려고 하니까 여기에 매달려서 우리가 끌려갈 때 아주 고통스러운 결과가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또 하나의 바퀴가 필요한데 그것은 뭐냐 하면 종교라고 하는 것이죠. 이 경건은 바로 그러한 종교의 산물이야 이 종교는 이유를 많이 대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 뜻은 이렇다 하고 보이신 것이 성경이에요. 지식 생활을 잘 하는 것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되지만은 이 종교 생활을 잘 하는 것은 끊임없이 믿어야 돼요. 이 성경진리의 말씀의 내가 다 하나하나 그게 왜 그런지 몰라도 일단 좋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절대 나쁜 것을 명령하실 수 없다고 마음을 푹 놓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느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 아멘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렇게 한 번 아멘하고 맏아들이는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통해 획득되는 지식은 전부다 사소한 지식이 아니라 모르면 절대 안되는 아주 뛰어난 지식이에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이천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나의 죄 때문이였다라고 하는 이런 것들은 이 세상에 인간 중에 뛰어난 학식을 가진 인간에게 아주 달콤한 말로 가르쳐서 설득시킬 수 없는 지식이에요. 이거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굳게 믿는 믿음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거죠.
오늘 올 때 그 초상이 나서 입관 예배를 드려주고 왔어요. 그 할머니가 88살 때 돌아가셨어요. 올해가 88인데 근데 이 분이 사년전에 우리교회에 오셨어요 .그래서 학습을 받고 세례를 나한테 받았어요. 그래서 집사를 시켜줘야 되겠는데 잡사 되자마자 명예 은퇴 집사가 되버렸어요. 그래도 집사로써 돌아가셨어요. 근데 이 분이 나이가 그렇게 많으신데 아주 인테리여서 옛날에 공부도 많이 하셨데요. 그런데 이분이 불교 조계종의 아주 골수였어요. 열심히 절에 다니는데 우리로 말하자면 절에 오래 다니는데 부처님을 못 만났어요.(폭소) 그런데 온가족 교회오는 날 4년전에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서 왔는데 오는 첫날 말씀을 들었는데 무릎을 치면서 인간의 사는 모든 이치가 바로 여기 있구나. 그러고는 믿기로 결심한 거야. 그렇게 믿기로 결심을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귀가 열려서 그 연세인데도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이성으로 설명 안되는 많은 진리들이 아멘 아멘 하고 받아들여지는거에요. 그래서 절에가서 신사적으로 내 인생사는 이치를 여기서는 못 만났는데 내 교회에 가서 발견했습니다. 그동안에 여기 오래 다녔지만 이제 오늘로 여기 작별 인사를 난 교회로 돌아가니 그렇게 아시오. 굉장히 신사적이죠. 교인들은 그저 슬그머니 떠나는데 그래서 신사적으로 최후 작별인사를 하고 그러고 돌아온 거에요. 근데 그렇게 돌아오고 나니까 하나님의 말슴이 확 믿어지는거에요. 믿어지니까 오래 교회 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 들었지만 별로 안 믿어지던 사람들이 십년을 다녀도 생길 수 없는 신앙이 이 할머니 속에 확실하게 생겨나요. 아멘 하게 된거죠. 그러고나니까 인제 연세가 많으니까 그 연세에 무슨 새가족반 뭐 그런걸 하겠어요. 그죠. 세례문답 외운 것만해도 대단하지 않아요. 근데 내가 이 나이에 예수 믿었는데 똑바로 믿어야지 하고 새가족반, 성장반 공부 다 했어요. 모범생으로 수료했어요. 그 할머니 일년만 더 사셨으면 교리반 오겠다고 그러셨을 꺼야. 그러니까 신앙이 쭉쭉 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항상 우리에게 사랑을 불러 일으켜요. 그래서 잘 믿으면 사랑이 많이 생겨요. 그 선하신 하나님을 아멘하고 믿게되니까 이 아멘하고 믿는 이것이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영혼의 참다운 작용이기 때문에 믿음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동반하는 거야. 사랑이 생겨나는 거죠. 지식은 이런 것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지 못해요. 근데 이런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하고 믿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속에 생겨서 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사람보다 더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연결이 되는게 뭔지를 모르고 평생을 이 바퀴 빠지면 이 바퀴로 굴러가다가 다시 이 바퀴 껴지면 이 바퀴가 빠지고 이러면서 한 번도 똑같이 굴러가는 적이 별로 없이 빠졌다 껴졌다 하면서 세월 가요.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마차 위에 짐을 가득 싣고 경주를 하는데 한 마차는 그냥 길도 알고 그 다음에 이 바퀴 두 개가 있어서 힘차게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와요. 한 마차는 말도 똑같이 힘이 쎈데 그 가는데 한쪽 바퀴 빠져서 끌려가다가 그 다음 다시 두 바퀴가 껴졌나 하니까 이 쪽 바퀴가 빠지는 거에요. 그 가다가 또 너무 힘들면 두 바퀴 다 빠져버리고. 그렇잖아요. 아니 은혜 떨어지면 성경공부라도 열심히 해야되는데 그건 잠깐이지 결국 은혜 떨어지면 그마저 집어 치우거든. 그러면 은혜 떨어졌어도 성경공부라도 열심히 할 때는 한 쪽 바퀴라도 있었는데 그것도 집어 치우니까 두 바퀴 다 빠진거고 또 공부는 안해도 기도라도 열심히 하면 한 쪽 바퀴라도 굴러가는데 그게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깨달음 없이 기도가 도대체 몇 달이나 가겠어요? 그래서 결국은 두 바퀴가 껴졌다 빠졌다 하면서 그 짐을 끌고 질질 끌면서 가는데 그게 가는게 가는 것이 겠습니까? 지금은 오늘날 우리 과거를 돌아보면 그래도 옛날에는 이 한 쪽 바퀴는 그래도 열심히 했어요. 기도도 열심히 하고 그래도 주님 사랑에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건다 그러고 그러던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핍박도 이기면서 그런데 지금은 이제 아주 현저하게 약해졌어요. 그런데다가 이 지식도 열심히 체계적으로 배울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하는 태도 자체가 배 내밀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 보는 것 같은 또 우리 교회에는 텔레비전이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복도에서 애들이 만나면 나만 만나고 나서 뛰어다니면서 나 김남준 목사님 만났다. 내가 텔런트인 줄 아는 거야 항상 텔레비전에서 봐서 그래서 집에가서 텔레비전 키고 왜 목사님 안 만나냐고? 열린 방송에서만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TV보는 것처럼 들으려고 교회와서 신앙생활 하니까 거기서 경건이라는 것이 생길 일이 있는냐? 어쩌다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이 경건이 불이라면 체계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과 사상은 거기에 던져지는 장작이거든요.. 장작이 없이 타오르는 그 불길이 여러분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지금은 다 전기로 하지만 옛날에는 불로 땟거든요. 그러니까 시체가 잘 안탈때가 있으면은 볏집을 몇 트럭을 갖다가 땟거든요. 그게 불이 엄청나게 올라와요. 볏집에 불을 부쳐 봐야 올라오는 거야 어마어마한 불길이 올라와 삼킬듯하잖아요. 옛날에 겨울에 쥐불놀이 할 때 짚 갖다 놓고 불부쳐 놓아봐요. 무서운 기세로 타올라가잖아요. 3분도 안타. 한 트럭 갖다 놓아봐야 5분도 안타는 이야기 에요. 그러면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이 들어가고 체계적인 지식이 쌓여야 돼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려고 하지 않아요. 우리 교회도 정말 걱정되요. 새가족 공부하는 률이 한 78년 전만 해도 거의 90퍼센트 정도 였는데 이제 60퍼센트 정도 밖에 안돼. 나머지 40퍼센트 되는 사람 교회 와서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체계적인 하나님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다가 보니까 경건이라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거에요. 그렇게 경건이 없이 그러니까 아까 내린 경건의 설명에 관해서 맗하자면 하나님에대한 두려움 가운데서 웬지 그 사랑으로 깊이 이끌리는 그 따뜻한 마음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이 동기가 되지 않는 가운데 이 신앙의 형식을 유지하며 살아가려니까 이 생각과 마음 이 교회생활 자기가 해야할 의무 이것들이 모두 힘들게 뒤범벅이 되어서 정리가 안돼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이것을 왜 해야하는지 이게 왜 나의 의문인지 그리고 지금 내가 하나님앞에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돼는지.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그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되는지 그리고 왜 내가 왜 손에 이 거룩한 책들을 놓치 말고 성경과 그 다음에 경건서적들을 끊임없이 읽으면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안 된 속에서 무슨 사고가 나고 집안에 복잡한 일이 생기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 생기면 짐승처럼 괴로워하면서 뛰어나와서 하나님 한 번만 도와 달라고 막 그러고 한 번만 도와주면 이것도 하겠습니다. 저것도 하겠습니다. 뻥을 치고 말이지. 그리고 실제로 되고 나면 사람 마음이 딱 변해가지고 그 때 떠들었던 것 기억도 안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요. 그리고 교회와서 봉사하는 것이 도대체 내 신앙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도 몰라. 할만 할 때는 열심히 하고 할 만 할때는 일 안시켜 준다고 상처를 받고 삐지고 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며 엤다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휙 집어 던져 버리는거야. 내동댕이 쳐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하면서 아주 막되먹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개념도 없이 마구 사는 거야. 그걸 한 번 이 모든 지혜와 사랑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그런 우리들의 삶을 위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내려다 보신 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거 어떻게 보면 좀 발광하는 삶이에요. 도대체 무슨 삶의 연결이 없잖아요.
제가 청년부 할 때 이상한 형제가 하나 있었는데 하여튼 하나님은 자기 혼자 만난 것처럼 그렇게 폼을 잡고 그러던 형제인데 개가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보면 신학적으로 혼돈이 와. 하여튼 찬양 인도 할 때는 눈물을 펑펑흘려요. 그리고 기도할 때는 그렇게 뜨겁고 교회를 너무 사랑해. 예배 시간에 자. 집에 갈 때는 술먹어. 그러니까 이 삶과 이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거죠. 그거는 한 마디로 애기 하면 신앙생활 아니야. 이게 그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서 예수 믿는 사람 흉내를 막 내는 거에요. 그게 절대 신앙 생활 아니야. 그래서 내가 항상 하는 말이 넌 정리가 안됬다. 정리가 뭡니까? 내가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확 이러는데 정리가 뭡니까? 있어보면 안다. 옛날에 우리 교회 있었던 어떤 사람도 그래. 도대체 목사님 매번 정리 정리 그러시는데 저만큼 목사님 테잎 많이 들은 사람이 어디있고 저 만큼 이렇게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도 없는데 왜 매일 나만보면 정리가 안 되었다고 하십니까? 정리가 안된거에요. 정리가
정리가 안 된 그속에서는 경건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거에요. 일시적으로 충동,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 욕구, 어떤 종교적인 느낌, 감정 불끈불끈 생기지 않아요. 나는 어저께도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대한 민국 선수가 남에 나라 선수와 씨름을 하다가 번쩍 집어던져서 거꾸로 집어 던져 버리데. 금메달 그러는데 눈물이 왈칵나드라고 (폭소) 아니 진짜 더라고. 개도 그렇게 보니까 매트에 엎드려 기도하는 거 보니까 예수 믿는 청년인 모양이야 그런데 별로 금메달도 못 따봤는데 어쨌든 한 번에 번쩍 들어서 시원하게 메다 꼿았는데 꼭대기 까지 올라가서 금메달을 따는 거에요. 눈물이 확 나는 거에요. 정말 대한민국 만세다. (폭소) 이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애국심이라고는 생각안해. 그 몇 년전에 그런거 있잖아요. 아 이 녀석이 물건을 훔치려 들어왔다가 월드컵을 하니까 거기에 흥분해서 막 응원을 하는 가운데. 같이 TV 보는 사람이 너 누구냐 하다가 잡혔다고. 그것이 애국심이 아니듯이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과 함게 어울려서 섞여서 무엇인가 느끼는 그것이 그건 경건과 틀리다. 이거에요. 그리고 경건이라고 이야기 하면 이것이 너무 엄격해지니까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것이 싫고 영성이라는 말을 두루뭉수리 처럼 이렇게 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 수련회를 통해서 영성이라는 말을 버리고 버립시다. 그리고 경건이라는 말을 굳게 붙들고 이 경건은 내적으로는 하나님이 두려우면서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달콤함에 마음이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그런 거룩한 삶의 체계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경건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지녀야 할 것이 그것이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중에 대부분은 그래도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고 여러분 중 대다수는 그래도 열린교회에 와서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 이기 때문에 이제껏 까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어요 훌륭해요.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 들에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의 이 경건에 진보가 있습니까? 처음 믿을 때는 그 뜨겁게 주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만나서 눈물과 감격이 있었지만 경건은 겨우 시작이었는데 해가 거듭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내가 이끌려 사랑의 감정이 풍부해지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거기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감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따라서 매일매일 그 마음에 합당하게 살고자 하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거룩한 삶의 영향력이 여러분들 안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경건에 진보가 있어왔느냐. 이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사람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아무렇게나 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데 하나님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앞에서 신앙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신비한 힘이 하나님에게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에요.
최근에 존 맥아더 목사라는 분이 오늘 이 혼란스러운 은사주의에 대해서 글을 한 편 썼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가 아는 오순절 교회 어느 목사님이 자기와 이야기를 하면서 맥아더 목사님 저는 우리 주님을 늘 만납니다. 어떻게요? 그러니까 아 글세 주님이 오늘 아침에도 제가 면도를 하는데 화장실에 들어오셔서 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언지시면서 지극히 쳐다보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저는 면도를 계속하면서 우리 주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래 맥아더 목사님이 목사님은 제 이야기를 못 믿으시나 보죠? 그러니까 목사님이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안타까운 것은 목사님은 그것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이 당신에게 찾아 왔는데 파자마 바람으로 계속 면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찾아 왔을 때, 엎드려져서 주여 어찌 하오리까 물었는데 어떤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길래 거룩하신 주님이 찾아 왔는데 파자마 바람으로 면도를 하면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겠습니까? 다 거짓말이거든요. 그거는 경건이 아니에요. 그거는 영성일 수 있어요. 정신적이고 신비한 것에 대해 계속 착각하는 것도 하나의 영적인 현상에 속하니까 거기에 뭐가 빠져있어요. 아까 경건에서 애기 했던 두려우면서도 두렵고 떨리면서도 그러면서도 피하고 싶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이상 야릇한 사랑의 이끌림 두렵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사랑의 감정이 어울어진 것이 경건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두려움 속에 떨면서 주여 뉘시니이까 주여 내가 어쩌 하오리까 그랬지 나 이 상황 지긋지긋하고 괴로우니 멀리가십시오. 그랬습니까?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했지만 자기는 그 시간에 예수님과 함게 있는 것을 싫어해서 도망치지 않았잖아요. 그게 그거에요. 핵심이 그거에요. 오늘날 이런 신비주의 속에는 그런게 없는거야. 자기들 나름대로는 끌리는 사랑의 감정 체험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 빠진게 뭐냐면 떨리는 두려움 떨리는 두려움이 없는거에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뵈었을 때 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엎드려 졌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 가운데 있으면서 거룩하신 주님을 뵈었도다. 그랬어요. 근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며 내가 누구를 보낼까? 분명히 두렵고 떨리고 아주 무서웠지만 이상 야릇하게 그 자리를 피할 수 없는 강하고 달콤한 사랑의 끌림이 있었던 거에요. 그 두려움과 사랑이 함께 어울어져야지만 이것이 기독교적인 경건이 되는거에요. 그걸 보게되는거에요. 그래서 이 두가지가 함께 바퀴가 성립되어서 굴러가는 거에요. 그럼 여러분 들은 묻고 싶겠지요. 목사님 그런 긴 이야기 말고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겁니까? 그렇게 묻고 싶겠지요. 여러분 워낙 간단할 걸 좋아하니까 나도 여러분들에게 간단하게 이야기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첫 번째는 이해를 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교회에 들어왔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하고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하고 그걸로 부족하니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해야 된다라고 하는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여기서 아직까지도 새가족반 공부 안한 사람들 있죠. 성장반 공부 안한 사람들 있죠. 성장반 공부 안하면 집사 안시켜준다고 해도 조금도 겁 안돼. 그러니까 오년 씩 교회다녀도 집사가 안돼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안되. 이거는 내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신차려서 배우고 깨닫고 잘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로 여러분들이 경건을 소유할 수강 없어요. 그러면 이 경건을 소유하고 소유하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건 잠시 후에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내내 해야될 것들이에요. 경건이 생겨나지 않느다 이거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아주 거부할 수 없는 달콘한 이끌림 이게 무엇인지를 오래 교회다녀도 절대 깨닫지 못해요. 그린까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노력해야 되는데 이렇게 체계적으로 열심히 가르쳐주는 교회는 많지 않아요. 손만 뻗으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잇는 내용들이 가득해 그리고 또 하나 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머리 굴리지 말고 매 순간 진리의 말씀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아멘 아멘 이렇게 믿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를 써야돼 이 둘 없이는 절대로 어느 하나가지고는 경건이 생겨날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종교 생활을 통해서 아멘하고 믿으면서 하나님이 나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거기에서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것이 있는거에요. 네가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내가 아직 지식이 짧아서 다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순간이 그렇게 달콘하고 아름답고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달콘하고 행복 할 뿐만 아니라 항상 그 분 앞에 섰을 때 나의 살아온 모든 삶,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삶이 그분의 눈 앞에 다 드러나요. 그래서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들어줘요. 내가 유혹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줘요. 주님을 만날 때 마다 하나님이 엄격하시고 두려우신 분이시고 떨리지만 그러나 왜 그런지 도망치고 싶지 않고 그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랑에 이끌리는 마음이 생겨나요. 그것이 한 번 있어서는 안돼고 계속 되어야 거에요. 이것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생활이에요. 기도생활 종교생활의 대표는 기도생활이에요. 영성에 대해서 이렇게 많이 강조하는데 기도는 이십년 전에 비해 현저히 교회가 기도 안하는 거 여러분이 아시죠. 삽십년 전에는 교회 철야기도는 열한 시에 모여서 새벽 네시까지 했어요. 에누리 없어요. 중간에 오줌누러 가는 시간 십오분 제외하고 내가 다니던 교회는 그것도 없었어요. 자기가 알아서 가는거에요. 그러고 밤새도록 기도했어요. 그것이 철야 였어요. 새벽기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은 새벽기도를 지키는 사명감이 있어요. 왜 나이 들면 어차피 무릎에 바람나고 새벽에 잠이 않오잖아요. 그래 새벽에 교회가야 한다는 신앙이 있었어요. 이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미 서울 시내에는 새벽기도가 문 닫은 교회들이 많아요. 그러면서도 영성은 더 많이 강죠해요. 그러니까 이것이 성경적인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거에요
C. 경건의 핵심 : 그리스도를 앎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아주 진실하고 절실한 사랑이에요.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깔보거나 사랑하기 때문에 막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뜨거운 사랑이에요. 그런 것이 그 경건의 핵심이 결국은 이 종교 쪽에서 공급이 되고 지식 쪽에서 공급이 되면서 어울어 지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이게 기독교의 신아이라는 이야기 에요. 그러니까 교회를 오래 다니고 별별 신비한 경험을 다하고 교회를 섬기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이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함은 찾아보기 어려운 거에요. 예수 믿으면서 사람의 삶이나 사고방식이 아주 세속적이에요. 그리고 도덕적으로 부패해. 윤리적인 수준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에서 양식이 있는 사람들 수준에도 미치지 못해요. 그걸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한 편으로는 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거하는게 마음 안에 거하잖아요. 지식을 통해 사랑이 들어오지만 머리에 머무르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계속 부어지는 그 은혜에 의해서 계속 공급될 때 사랑의 특성 자체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부어지는게 사랑이라고 제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영웅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그거 아니라 이야기에요. 사랑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가 계속되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가치를 알고 그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지속적으로 그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이런 성향이 이게 사랑이란 말이에요. 그런 사랑은 많이 종교에 속하는 거죠. 그러니까 기도생활 절대 안하고 그냥 성경공부 교재 1권 2권 3권 교리반 성화반 모시깽이 막 고 책이 이렇게 쌓여가는 사람보다는 그런거 잘 몰라도 예배시간에 은혜 받고 열렬히 기도하며 눈물로 사는 사람이 훨씬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사랑하는 거에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세요.
그 두가지가 다 함게 지식과 경험이 어울어지면서 그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건이 되는 거에요.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에게 우리의 도덕적인 삶이 이 경건과 따로 떨어진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아요. 세상의 목표는 도덕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경건이에요.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그 속에서 지식과 사랑이 어울어지면서 거긱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삶이 구현이 되어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하지 맗라 하시는가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될 것이에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모든 순종하는 삶이 흘러나오게 되는 거죠. 오늘 여러분 여기와서 집회에 참석하면서도 교회 생활 하기는 하는데 이상하게 무엇인가 아주 숲이 우거진 수풀속에 들어가서 앞 뒤 안보이는 곳에서 길이 어딘지도 모르고 지팡이 하나들고 막 몸부림을 치는데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 있을 거에요. 그렇다고 예배시간에 와서 뭔가 은혜를 못 받는 것은 아니고 가끔가다가 번쩍 모가 들어오기는 하는데 그래서 가끔 눈물도 흘리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다짐도 해보지만 불과 몇 주 지나고 나면 다시 뒤엉켜서 이상하게 뭐가 뭔지 모를 것 같은 혼돈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분 있을꺼야 더 실감나는 묘사를 하자면은 무엇인가 자기길을 가야되겠는데 수렁에 빠진 것 같이 아무리 몸부림 쳐도 부지런하게 몸부림 치고 피곤하고 힘들기는 한데 어디로 가는지 도대체 진전이 없는 것 같은 혼란속에 있는 분들이 있을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고 기독교 신앙을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삶 따로 예배생활 따로 교회생활 따로 섬기는 거 따로 모든게 다 상관 없이 돌아가서 내 마음이 도대체 내 자신도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혼돈 속에 있는 분들이 있을 거에요. 하나 생각하면 되요. 아 나에게 경건이 없구나 그 생각을 하면 되요. 경건이 없구나 경건은 선명한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동반한 뜨거운 사랑의 융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한족에서는 열렬하게 기도해야 되요. 기도해서 우리 마음이 기경되고 변화되면 전혀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말슴이 쏙쏙 들어오기 시작해요 .또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잘 깨달아진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마음 속에서 예전에 없던 기도의 제목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그 기도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런 혼란들이 싹 가시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아주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게 정돈되어서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교회를 섬기는 것 일하는 것 그리고 주님께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 물질을 드리는 것 가정생활 나의 사업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난의 질서속에서 연결되는지가 들어오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경건은 개인의 힘이고 교회의 힘이야. 그래서 사단은 우리가 뭘 못믿게 하는게 아니고 우리가 몰 믿든지 배우든지 내버려 두는데 그 배우고 먼가 경험하는 많은 것들이 깨끗이 정리되어서 선명하고 분명한 경건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보석처럼 소유되는 것을 방해하는 거야 흐드려 놓는 거야. 그래서 정신을 혼미케 만들어서 번쩍번쩍하는 진리를 보지만 이런 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못 깨닫게 하는 거야 . 그리고 혈기를 부리게 하고 유혹에 빠지게 하고 하면서 삶과 지식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다 따로따로 움직이도록 그렇게 뒤범벅을 만들어 놓는 거야. 이런 속에서 자기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죄의 유혹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그리고 자기가 놓여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내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과 불행하고 기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를 올바로 깨닫는 것이 불가능해져요. 깨어잇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깨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둘러 싸고 있는 이 상황이 또 상황 속에서 자기를 숨기고 다가오는 죄의 유혹을 헤아리고 그 죄에대해서 대비하고 잇는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에요. 상황과 자신과 죄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고 잇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올바르게 판단해야지 깨어 있는 것인데 아까 말할 것같은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혼돈된 상황 속에서는 이런 것들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는 것이죠. 결국 뭐냐하면 경건 그 자체가 이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그 경건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거룩한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신비한지 오늘 사도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치 않다 하는 이가 없도다 희랍어 성경에는 고백하건데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 에요. 그렇게 되있어요. 그러니까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아 맛다 경건의 비밀은 아주 큰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여기에 쓰여진 뮤스테리온이라고 하는 신비라고 하는 단어는 인간이 이성이나 자연인의 생각을 가지고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이해 저편에 있는 그러나 확실히 있기는 있는 그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에요.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거에요. 그 때 우리에게 신비한 감정이 들잖아요. 그죠?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을 봤잖아요. 불이 훨훨 타는데 이상하게 거기에 있는 관목 숲은 타지가 않는 거에요. 불이라면 그 모든 것들을 태우면서 시간이 지나면 불길이 번져가면서 나무들이 재가 되어서 자꾸 떨어져야 되는데 불만 활활 타고 나무는 소멸되지 않는 거죠. 그걸 볼 때 신비하고 두려운 느낌을 받았죠. 그런게 신비에요. 그런데 경건이 그런 신비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결국 무슨 뜻이냐고 하면은 이 경건이라고 하는 이것은 결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사고를 통해서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거는 경험의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잘 묘사해주면 사람들에게 실감은 나게 해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을 그대로 느끼게 만들어줄 수 없어요. 이것은 영혼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주 신비한 작용이에요. 그러니까 이 경건도 역시 똑같이 핵심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경건을 주고 나면 이 경건을 우리의 주머니에 넣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 경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과 잇대인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끊임없는 성령의 역사로 그 경건한 영향을 우리에게 계속 은혜로써 끼치실 때 그 때 우리들이 그 경건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지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보면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기반 자체가 이 경건인데 경건이 우리의 삶 속에서 거의 성경이 이야기 하는 바와 같이 모양만 남고 내용 자체는 거의 사라진 거죠. 여러분들이 가장 최근에 한 번 생각해보시죠. 가장 최근에 두 바퀴를 놓고 볼 때 여러분들이 열심히 성경이나 교리를 공부하면서 아 그거 였구나 아 신앙의 묘리가 그런거 였구나 아 정말 놀랍다. 이런 깨달음이 여러분 들에게 최근 언제가 잇었습니까? 그래서 이게 너무나 혼자 묻어두기가 너무나 아까와서 사람들에게 야 나 깨달았어 정말 하나님의 진리가 그런거 였더라고 이 기독교 신앙이 참 그런거 였단 말이야 이렇게 깨달아 본 적이 언제 입니까? 또 이쪽 바퀴로 넘어가서 여러분들이 마음을 바쳐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오면서 여태까지 교회를 더난 적 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지만은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찬양)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렇게 펑펑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마음이 막 녹아나면서 그렇게 정말 내가 그렇게 못살지라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품에서 죽고 싶다. 그런 기도의 경험이 언제였죠. 가끔 저녁 때에 예배당에 들어가보면 밤 늦게 혼자들와서 이 구석 저구석에서 기도해요. 그런데 그 때 기도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가 새벽기도 때보다 훨씬 더 간절해요. 사람도 별로 없겠다. 우리 교회처럼 기도하기 좋은 환경이 없거든요. 방해하는 사람도 없이 한 쪽 구속에서 그렇게 큰 소리도 안네.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해달라고 빌면서 그렇게 휴지를 이렇게 막 쌓아놓고 회개하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한 두시간 기도를 마치고 나오 때 눈물을 씻으면서 예배당을 나올 때 그 성도의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있겠어요?
(찬양)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런 고백이 있지 않겠어요? 그가 만약 죄를 지었다면 이렇게 찬송하겠죠..
(찬양)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 속에 잇었던 더러운 찌꺼기들이 확 소재가 되는 거에요. 뭐 갖다놓고 디립다 공부한다고 해서 청소 안돼요. 청소 안돼는 거에요. 망가진 집에 페인트 칠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두가지에 의해서 이 경건이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걸 누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겟어요. 하나님 만난 사람은 하나님 만난 사람하고 이야기 할 때 아주 놀라운 교통이 있어요. 서로가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의 이성과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안하요. 아주 신비한 세계에요. 그래서 오늘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럼 감추어진 그 비밀을 여시는 분은 누굴 까요? 주님이 여시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가 집을 달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응답해주시고 안 응답해주실 수도 있고요. 돈을 달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응답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응답이 안되기도 해요. 우리 생각에는 나이가 차면 다 시집장가 가야되니가 그 기도 모두 들어주셔야 될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기도해도 기도 응답이 잘 안돼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소원하고 안 맞을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거절하지 않는 기도가 있었요. 그것이 뭐냐하며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내 생명을 다 걸고 예수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절대로 거절하지 안으셔요. 정말 놀라워요. 우리가 하나님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진리를 깨닫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따로따로 일어나는게 아니에요. 오늘은 지식에 좀 치중을 해야 되겠다. 지식을 많이 먹었으니가 이 번에는 불을 좀 때어야 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이 두가지가 하나로 온전히 합쳐지는 거죠. 이것이 신앙생활이야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터득하고 그 진리 안에서 이 진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그 분을 두려워하고 두려움 속에서도 웬지 그분 앞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아주 사랑스러운 이끌림이 우리 안에 있어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이게 은혜의 정상적인 경험이라는 것이에요. 안돼 그렇게 해가지고.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도 모르면서 불 때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만나는게 아니라는 이야기 에요. 내가 애기했죠? 성령 체험 깊이 할 때 빈 예배당에서 그 추운 겨울에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서 혼자서 묵상기도하다가 저는 하나님 만났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어떤 외형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다가가려 하지 말고 모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참된 것은 하나님의 자기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는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의 집중이에요. 그거를 통해서만 경건 안에 있는 그 신비하고 비밀스로운 세계로 들어가게요 되는 거죠. 그것은 우리들이 설명할 수 없는거죠. 어떤 사람은 저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아니 어떻게 설교가 한 없이 계속 할 애기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내가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말이죠. 다른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쏟아놓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잇겠어요. 여러분은 안 믿으실 수도 있지만은 저도 뭘 설교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가 드물기는 하지만 있었어요. 그러면 그 때는 어떤 때 일까요? 어디를 펴면 못 하겠어요? 그런데 하는게 다 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건 뭐에요. 하나님께서 내 안에 똑같이 그러니까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 두려움을 동반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경건이 생겨난다면 설교자도 똑같이 설교하려고 성경을 필 때에는 설교해야될 것을 찾을 수가 없지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경을 펼 때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매순간은 아니지만 어느 한 순간에 아주 새롭게 다가오게 되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늘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잖아요. 그리고 대부분 설교 속에서 설교하려고 읽은 성경은 대부분 우리들이 다 한 두 번이나 심한 것은 몇 십번씩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 성경구절들이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의 본문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런데도 그 진리의 말씀을 어느 순간에 깊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면서 그 진리를 깨달아 나아갈 때 그 때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그렇게 진리의 세계를 알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시는 때가 있어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 때에는 아주 신비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만난 애기 돼지도 않는 간증같은 거 들으면서 신비한 경험에 들어 갔다 나오면 아무것도 남는 거 없는데. 남는 거라고는 그 사람 정말 잘 났다. 난 못낫고 그것뿐인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열어주시면 비유를 하면 이렇게 되는 거죠. 산에 가보면 어느 길이든지 가보면 사람이 다닌 길이 있잖아요. 다닌 길만 계속 다녀 그래서 반질반질하게 까졌죠.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거에요. 터벅터벅 성경을 읽는데 뭐 가슴에 별로 다가오는 내용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거에요. 어떤 마음의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느냐가 무슨 내용으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느냐 보다 더 중요한 거에요. 그래서 주님 앞에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경건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마치 사진을 찍을 때 초점이 안 맞는 사진을 수없이 찍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 다는 말이에요. 마음을 모아야 해요.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 내가 무슨 목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내가 기도회에 나왔으면 무엇을 위해 기도하러 나왔는지 봉사 할 때는 이 일을 하나님이 난에게 왜 맡기셨고 내가 여기서 봉사하는 이유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햇서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생각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없이 떠밀리듯이 생각이 없이 사는 거죠. 결코 기도를 통해서나 예배를 통해서나 일을 통해서나 무엇을 통해서도 주님을 만날 수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비록 지금 죄 가운데 있더라 할 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집중된 마음이 필요한 거에요. 그래서 마음을 깊이 모으고 그리고 정말 주님을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을 가져요.
(찬양)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에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에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작년에 어린이 회심집회를 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애가 주님을 깊이 만났어요. 그런데 개 애기를 들어보니까 일주일 전무터 예수님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대요. 기도할 때 개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나 알고 했겠어요. 근데 성령께서 그 마음을 어루 만지셔서 어쨌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좋다니까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리고 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엄마가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했는 데 하루 이틀 기도하면서 이 기도가 이 아이의 기도가 된거요. 성령께서 역사하시니까 이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는 거죠. 뭔진 모르지만 성령의 역사 잖아요. 주님 만났어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외모나 교회생활 경력 지식 신학지식 나부랭이 그런거 가진거 이런 거 보고 주님이 우리 만나주시지 않으셔요. 사도가 이것을 비밀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진리를 대하려고 할 때 매일 걸어가는거에요. 여러분 저는 한 때 설교학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참 신기해요. 보면은 어느 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은 삼주를 예배드렸는데 세 번 헌신 예배강사가 삽주를 나란히 왔는데 모두 똑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똑같이 설교를 해 그래서 교인들이 저건 사기다 누구꺼 보고 배낀거다. 그랫는데 사실 알고 보니까 각자가 와서 그 말씀을 전했는데 똑같이 전한거야. 서론 본론 결론 까지 같은거야. 내가 오늘 상식적으로 읽어서 깨닫는 것은 다른 사람도 대부분 깨닫는 거에요. 그런데 그냥 성경을 읽는게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내가 정말 만나고 싶은 것은 이 시커먼 활자가 아니라 이 활자를 통해서 나에게 전달되는 그 진리의 주인이신 주님을 이 진리를 통해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면 매일 듣는 설교인데 매일 읽는 설교인데 어느 한순간에 쭉 남이 길어간 길을 걸어가다가 숲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그리고 그 소리에 그야말로 두려움과 싫지 않은 사랑의 이끌림에 들어가게 되는거에요. 이 성경의 말씀을 잘 깨달으면서 거기에서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눈을 막 열어주시면서 그 진리의 빛을 비쳐 주시는 거에요., 이길은 늘 사람들이 다니는 길인데 그 숲에 이끌려서 들어가니까 전혀 가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느 것이에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보였던 그 숲속에서 넓은 잔디밭과 예쁜 오솔길 그리고 앞에 환하게 바다처럼 나타나는 그 커다란 호수, 아침에 햇살을 받으면서 그 햇살이 그 나뭇가지로 쫙 비치면서 잔디위에 떨어진 수많은 이슬방울들을 보석 처럼 만들어요. 거기서 예전에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 은혜의 깊은 세계들을 거기서 보게 되는거에요. 흠~ 하~(숨 들이쉼)
(찬양)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막 쏟아지는 거에요. 그만큼 이 진리가 신비하게 다가오는거야 어떻게 그 한구절을 한시간에 설교할 수 있겠어요. 그 아름다운 진리의 드 넓은 세계가 막 펼쳐지는데 그런 것이 없다면 삽십절을 왜 한시간에 설교를 못하겠어요. 대충의 뜻이 있는데 그 속에서 막 빛들이 들어오는거에요. 그 속에서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그러면서도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 죄에 대해서 엄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예수그리스도께 대신 지어 심판하시고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갈 때 가슴 아파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함께 확 전해지는 거에요. 그 때에 불 순종과 죄를 버리지 말라고해도 이 사람이 자기의 죄와 불 순종 때문에 예수의 아픔을 내가 느끼기 때문에 그것도 버리게 되는 거에요. 거기에서 주님의 향한 사랑이 생겨나요. 이런 것들이 말로 설명하지만 지금 누구에게 이것이 전달될 수 잇겠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경험 닫혔던 진리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빛줄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진리의 향연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뻐하는 영혼의 감미로운 찬양 이것이 어찌 비밀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진리와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신자는 탄탄한 경건을 소유하게 되는 거에요. 이 경건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야 어느 한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주어지지만 지속적인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두렵고 떨리면서도 이끌리고 싶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 그런 사랑을 토대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리고자 하는 온전한 순종의 삶 이것들이 모두 함께 어울어지는 가운데 이 경건이 마치 나무가 심겨져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나무가 튼튼한 나무가 되어 가듯이 이 경건도 그렇게 자라가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 없으면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은 분재처럼 되어버려요. 그런 거목들이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100m 씩 쭉 뻗어있고 뻗어있는 그 나무들은 그 속에서 그 뿌리가 나무와 나무끼리 함게 뒤엉키면서 온 산을 휘감고 있는 거에요. 이런게 바로 교회여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한 시대에서 참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법들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어떻게 하면 불신앙으로 가득찬 이 세상과 충돌하지 않고 사이 좋게 타협하면서 살 수 있는가 인간의 지혜나 가르쳐주고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교회는 산을 휘감은 나무들처럼 그렇게 든든한 산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에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떻게 자라가고 잇는지에대해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이제야 내 신앙의 문제가 무엇인지 만족하지 말고 한 번 이런 생각해보십시오. 오년 전에도 이렇게 비슷하게 사셨지요. 사경회 때 와서 일시적으로 은혜받기도 하고 마음에 감동이 되면 헌금하기도 하고 교회에서 직분 맡겨주면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하다가 내키지 않아서 집어치울 적도 있지만 어쨌든 남들 하는 것처럼 흉내 내려고 하면서 삼년이고 오년 따라왔죠. 그런데 이상하게 별로 오년 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고 내가 더군다나 아
(찬양)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죠. 5년 후에는 형편이 나아질까요? 허무하게 세월만 흘러 갈꺼에요.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모습이 뭘까요? 안 믿는 사람처럼 맘 놓고 한 번 죄를 지으면서 행복해져 보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정말 미워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가끔 세상에서 타락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마음을 한 편으로 가지면서도 또 무서워하는 마음도 있고 그러면서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예배 드릴 때는 신자의 모습으로 집에가서 가정 생활 할 때는 불신자의 모습으로 이렇게 정체불명의 박쥐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서 마지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뭔지 아세요? 두려움 속에서 죽는 것이에요. 오늘 그 할머니 떠나보내면서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오늘 하루종일 생각했어요. 그렇게 늦게 예수를 믿어서 자손들으 다 하나씩 불러서 야 하나님이 나 부르실 꺼 같다. 마지막으로 오너라 내가 기도해주마 그래서 자녀들 위해 하나씩 하나씩 축복하면서 기도하는 거에요. 마지막에 자기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그리고 쓰러져서 누우셨어요. 어머니 이제 좀 쉬세요. 그랬더니 돌아가셨어요. 지극한 평안가운데 주님 내가 이제껏 달려왔던 이 믿음의 길을 다 마치고 당신의 품으로 갑니다.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못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이 신앙생활이라는 건 뭐하는데다 쓸려고 우리들이 하는거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번기회에 다 허물어 버려요. 토대가 아닌 것들을 와르르 허물고 다시싸 그게 훨씬 나요. 되지도 않는 그 위에다가 뭐 하나 쪼끔만 뭐가 있으면 될 꺼라는 생각 버리고 확 허물어 버리고 아닌 것은 처음부터 다 허물고 다시싸요. 그렇게 해서라도 참된 신앙의 기쁨, 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야되지 않겠어요? 단 일주일을 살다가 죽어도 내가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거하고 그리고 나에게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내 마음과 모든 삶이 주님이 나를 위해서 당신을 다 주신 것처럼 나도 때로는 넘어지고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내 마음의 진정한 소원은 나를 당신 앞에 다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은 굉장히 나쁜 시대에 태어났어요. 왜냐면 많은 성도들이 나를 너무 가혹한 목사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나를 가지고 논문을 써서 발표했는데 결벽증 걸린 목사라고 했어요. 청교도적 결벽주의 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나를 디립다 욕해서 논문을 썻지만 내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 이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사님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그렇게 믿으면 나도 할 이야기가 없어요. 나도 누구를 봐라 누구를 봐라 라고 이야기 하고 싶은데 없어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속에서 주님을 믿어가는 상대주의 신앙이 아니에요. 모든 신앙의 사람들은 이 오래된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영광과 사랑과 존경을 드릴대 그 안에서 우리도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하셨잖아요. 인자가 올텐데 내가 마지막 날에 믿는 자를 몇이나 보겠느냐?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기준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요. 누가 어떻게 믿느냐 그 생각하지 말고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라고 부르셨구나 할머니가 그렇게 죽으니까 그 가족들이 모두 예수를 안 믿을 수 가 없는거야. 너무나 분명하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할머니는 기적을 일으킨 적도 없었고 신비한 경험을 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경건해지는 것 자체가 신비였어요. 그 초롱초롱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똑바로 믿어가고 마지막에 죽는 순간에 자녀를 위해 눈물로 간절히 축복하니까 자녀들이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끔 나타났다가 사라져가셨다면 의심할 수 있겠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의심할 수 없는 거야.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야 그게 경건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에요.
IV.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라
나는 이 시점에서 이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시는 아주 애절한 음성이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너희는 경건해지거라. 이제껏까지 너의 교회가 나를 섬기기위해서 이모양 저모양으로 많이 달려왔는데 너희의 경건을 돌아보라 정말 너희에게 나 하나님께 두려움 가운데서도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 그리고 그 사랑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삶의 체계 이거를 아우르는 그 경건이 너희들에게 있느냐? 매일 예배드리고 매일 기도하지만 그 속에 정말 나를 찾는 경건한 교회 경건한 신자가 되기 위한 그런 절실한 마음의 집중 정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헐떠거리면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주님의 진리의 세계를 알고 싶어하고 그 그리스도 예수의 경건의 비밀을 누리고 싶은 그런 절실한 사모함과 목마름을 내가 너희에게 보고싶다. 이런 주님의 마음,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일주일을 예수님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서너번 눈물로 기도햇더니 만난 하나님을 여러분들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구역장이 되고 교회나온지 삼년 오년이 되도 못 만나고 있어요. 그렇게 애매모호한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한번 부산했던 우리의 마음을 다 정리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믿든지 그거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사람이 어떻게 믿든지 나는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정말 만나고 싶고 참된 신앙을 찾고 싶다는 구도자의 마음을 가지고 그 주일학교 학생처럼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법이 없어요. 집을 사주십시오. 돈을 주심시오하는 기도는 이 사람에게 응답해주시지만 저 사람에게는 응답 안하셔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는 주님이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세요.. 왜냐하면 주님도 우리가 주님 만나는 것이 좋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당신의 경건을 우리들이 소유할 때에 우리들이 거목처럼 자라서 이 교회 안에서 이 시대라는 산을 휘감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서 요령은 배우고 본격적으로 주님 만나는 것은 다음에 하자 이러지 말고 정말 오늘밤 부터라도 절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아주 분명하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주님을 만나서 잃어버린 그 경건을 되찾고 그 경건 안에서 아주 아름답게 자라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 1
2.경건과 그리스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I. 경건과 십자가 경험
지난 시간에는 기독교 신앙과 경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경건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를 집중해서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좀 깨우치시기를 바라고 너무 많이 필기하지 말고, 다 나눠드리니까 쳐다보세요. 여기에서 결국은 기독교 신앙에서 경건은 시작이고 거의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 경건은 결국은 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창조목적을 향하여 살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선을 행해도 경건이 있으면서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선일 경우에는 경건한 삶이 되지만 그것이 없이 선을 행하면 위선이 되는 거죠. 그런 경건이 없으니까 없는 대로 산다 하고 아예 악하게 살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경건이 없는 삶은 성공하면 위선이고, 실패하면 타락이란 말 이예요. 오늘 우리들의 삶을 보면 이러한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실다운 경건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육신의 혈기로 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면서도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 섬기게 되는 것이죠.. 경건 그 자체가 없으면 이 기둥과 지붕이 없는 집처럼 그 자체가 건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나머지 그 위에 쌓아 올리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을 흉내 내는 삶 전체가 주저앉아버려서 그래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한 경건이 없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런 일 저런 일 을 때로는 자기 자랑을 위해서 때로는 위선을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억지로 행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그 삶의 번잡하고 피곤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오래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끔찍한 악행과 불순종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어떤 열렬한 신앙심이 없이 지리멸렬하게 누군가의 의해서 끌려가는 것 같이 계속되는 타율적이고 피동적인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원인은 단 한가지 경건이 사라졌다는 것 이예요.
그러면 이 경건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생겨나고 그리고 이 경건이 우리에게서 어떻게 유지되고 또 이 경건이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차례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시간 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경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리고 경견이 어떻게 부패한 인간 안에서 시작되는지를 살펴봅시다. 저는 첫 시간에 경건이 무엇이냐는 정의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그러면서도 왠지 싫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끌림 이것이 내적인 요소이고 그러한 마음과 정신과 영혼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삶이 흘러나와서 그 삶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삶이 될 때 그 마음과 정신 삶 전체를 하나로 아울러서 우리들이 경건이라고 말한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책에 있다든지 의지에 있다든지 감정에 있다든지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모두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것들이다. 그 기독교 신앙은 경건이고, 그 경건의 핵심부에 영혼과 정신에 일어나는 작용과 거기에서 흘러나가 펼쳐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삼을 경외하는 삶의 연결 점이 마음이라는 것 이예요.
그러니까 내적인 경건이 작용하는 공장과 같은 것이 사람의 마음 이예요.. 그 마음을 통해 영혼과 정신 안에 있는 거룩한 영향력이. 삶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삶 속에서 저질러진 불순종과 마음의 악이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마음이 실제적으로 우리들이 지각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장소다 하는 것이예요. 그러면 그렇게 내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떨림 두려움으로 떨면서도 왜 그런지 싫지 않게 하나님 속으로 깊이 이끌리고 마는 사랑의 끌림.. 이것이 경건한 마음의 특징이다. 그러면 그것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 인가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이 자연의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인간이 순전 하고 명료한 지성이 있어서 그것을 보면서 탁월한 이해력을 가질 수 있었어요. 누가 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보여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모두 소리치며 하나님이 두렵고 떨릴만한 분이시며 그리고 우리가 온전히 이끌리어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두려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지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를 보여주셨어요.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할 수 있어요" 타락한 거예요.. 그러니까 타락하면서 둘 다 에 대해서 어두워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주 두려움 속에서 떨릴 만큼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시며 전능하시고 무한하시고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거예요. 다만 하나 무엇인가 이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아주 큰 능력을 가진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막연하게나마 인간이 알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서 수많은 종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또 하나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은 조금 남아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가지신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좋아서 막 이끌리는 이것은 하나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 그렇게 사랑하려고 맘을 먹어도 사랑할 능력도 없는 그런 인간이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경건의 두 요소가 주저앉아서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타락과 함께 인간은 본래 가지고 있던 그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 속에 이끌려 들어가고자 하는 달콤한 사랑의 끌림 이것을 인간이 잃어버린 것 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이 두 가지 면을 하나님 자신이 온 땅과 모든 만물은 물론 그 모든 인간 위에 뛰어나고 지극히 높으셔서 우리 같은 인간이 그 하나님 앞에 감히 설수 없는 두렵고 떨리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당신이 우리에게 아주 탁월한 사랑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이것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어서 그것에 감동을 받을 때 이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옳게 두려워 하지 않고 그르게 두려워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올바르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올바르게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공상 속에서 하나님을 그릇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남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경배하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더 반역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 되는 거예요. 자식을 기르는데 자식이 아버지를 올바르게 두려워하면 행실을 올바르게 하고 부모의 뜻에 순종하게 되지만 그릇된 방법으로 두려워하게 되면 가출을 하거나 반항을 하거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인간이 되는 거예요.. 태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적대감이 뼈 속 깊이 배인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가 나타나요. 그 지혜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타락했는데 그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시는데 이게 얼마나 탁월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는지 심하게 얘기하면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이 놀라운 사랑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에게도 있었을까 할 정도로 그렇게 탁월하게 하나님을 떠난 희망이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사랑이 나타나는 거예요.. 구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자기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드라마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 빛이 한번에 환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쒸익 올라가는 한줄기 작은 빛을 그리고 올라가는 작은 폭죽처럼 아주 실낱같이 작은 빛이 공중 향해 올라가는 거예요.. 그 빛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이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행동을 보면서 자기 인간 하나하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을 떨림 속에서 두려워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사랑에 이끌려서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생겨났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래도 그 것을 하나님이 맨 처음엔 한 인간을 통해서 한 가족을 통해서 한 나라를 통해서 알려주셨지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비참한 인간들을 찾아오시는 가슴이 저미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두려움과 떨림을 함께 지녀야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순종하는 사람을 살 수 있는데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그 두렵고 떨림의 올바른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것부터 시작하신 거예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고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영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시고 그 분의 지상의 생애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성육신은 구약의 어둠 속에서 깜깜한 하늘을 향해 어둠을 향해 실낱같은 빛줄기를 그리며 공중으로 올라갔던 폭죽이 딱 하고 터지는 그 광경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찬란하게 하늘에 파문을 그리며 팍 하고 터지는 그 장엄한 폭발의 광경이 모든 사람에게 한 번에 알려진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가 누구이든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지금도 실낱 같이 비치던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그 사람에게 폭죽처럼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터지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두렵고 떨리면서도 싫지 않게 깊이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이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그러면서도 싫지 않게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이 두 개가 어떻게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이냐 이거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분은 피조물이 아니에요. 그 분은 사람이 아이를 낳아서 출생했을 때에 없던 사람이 생겨나는 것처럼 그렇게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분이지만 하나님 자신이셨어요. 다만 그 예수님이 입고 오신 그 육체는 피조물이었죠. 그래서 기적적으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그렇게 구름을 타고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배 안에서 잉태되어 그래서 평범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영혼도 육체도 모두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는 사람의 육체를 빌어 입으셔서 늙고 병들고 그럴 수 있는 육체였지만 영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내려 오셨어요.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요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 되셨으니 이는 예수 오신 목적 자체가 인간의 죄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멀어지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을 화목시키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셔야 했고 한편으로는 참사람이셔야 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그리고 영혼들에게도 전도 하셨지만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일이었어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빛 아래에서 이쪽으로는 예수님의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머리 둘 곳 없이 섬기신 모든 생애를 살펴보고 저쪽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 당하고 죽으신 그 빛 아래에서 부활과 마지막에 하늘에 오르신 승천까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마지막에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그 영광까지를 모두 바라보는 기축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가, 그 십자가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이 경건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 경건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티끌 만큼도 없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비뚤어진 두려움 밖에는 없던 존재였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다시 재창조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의 핵심이 성육신과 지상 생애, 마지막의 부활과 승천까지 연결되어 있지만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라 그 얘기에요. 그럼 이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그 내면에, 경건의 내면적 질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심오한 두려움과 떨림, 그것과 상반된 감정인 두려움 속에서도 싫지 않게 이끌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시에 그런 것이 없었던 인간의 마음속에 생길 수 있냐 이 얘기에요. 우선 그것이 십자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거에요. 우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보여 준다기 보다는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부들부들 떠시는 그 하나님의 아주 엄격하심과 두려움을 보여 주는 거죠.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알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예화) 어느 목사님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런 수련회에 와서 이틀을 설교를 했대요. 첫날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두려운 공의에 대해서 설교를 했어요. 근데 사람들이 시큰둥하고 반응을 안 보이는 거예요. 그 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참한 고난은 죄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엄격하심, 그리고 죄 지은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간에 죄에 대한 무한한 진로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시큰둥하고 아무도 제대로 듣는 사람이 없어요. 그랬는데 둘째 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했는데 사람들이 막 우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어요. 어저께 울지 않은 사람은 오늘 울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떨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형벌에서 자기를 구원해 주셨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알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보거나 혹은 설교하거나 설명할 때 항상 반쪽짜리를 설교하는 거예요. 반쪽짜리를 설교하면 십자가가 아니라 막대기가 되는 거예요. 막대기가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느냐, 하나님의 그 사랑은 정말 놀랍다, 아멘, 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그건 반쪽짜리 십자가다 이 얘기에요. 엄밀한 의미에서 그 감정이 전부라면 그것은 성경적인 경건이 될 수가 없는 거죠. 한 가지 요소를 빠뜨리고 있는 것이에요.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인간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모두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대들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 죽는게 마땅해요. 그런데 그런 인간들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는 그 인간들이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셔야 했어요. 그것도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육신을 가진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끝까지 고통을 당하는 그 끔찍한 십자가라는 사형 방법을 통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죽이셔야 했어요.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이 아니라 창조주인 당신을 반역한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총체성과 개별성을 함께 갖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그 고통이 100이라면 사람들의, 나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은 수십 억 분의 일이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거죠.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만약에 이 세상에 인간이 단 한 명 밖에 없었더라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도 그 한 사람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 오셔야 됐다 이거에요. 물론 누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인가에 대한 이런 숙제는 남지만, 그러나 그래도 어쨌든 오셔야 됐다 이거에요. 그거에요. 그게 그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큰 고난을 당하시고 육체를 다 찢으시고 처참하게 죽으신, 그 잔인한 죽음의 과정은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이었다는 거죠.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 아니라..나 한 사람의 죄 때문이었다는 거예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죄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수억 분의 일만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 죽으셨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죄가 완벽하게 용서받는 거예요. 단체로 용서 받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는 이런 면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십자가는 그걸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나무 위에 매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진 어린 양이니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짓이기시는 광경을 보여주는 거죠. 아직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지은 죄,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래서 사실은 죄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지은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구나. 그리고 사실 그 십자가 위에 누워야 될 사람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었거든요.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이 없었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십자가에 눕혀서 그렇게 짓이겨 그렇게 살 찢고 피 흘리면서 죽어도 하나님에게 입힌 이 손해는 보상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속에서 우리는 커다란 두려움과 떨림을 보게 되는 거죠. 오늘 순교 역사, 저도 다 들었거든요. 제 방에서..근데 여러분 굉장히 인상적인 라 교수님 설명이 그거였잖아요. 모여서 새벽마다 기도하는 내용이 우상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간음하지 않겠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겠습니다, 도적질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왜 그런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게 있는 성도들에게서 그런 고백이 생겨났겠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자기의 죄, 인간의 이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스러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고난의 광경을 통해서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무서운 것을, 잘 들으세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무서우신 것을 깨닫는 것은 모두 그릇된 두려움을 가져다 줘요. 한 번 더 할께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두려운 것을 깨닫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이거에요.
(예화) 지금도 우리 교회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건네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교회 나오는 형제가 있었대요. 아버지가 교회의 장로님이셨는데, 늘 목사님하고 부딪히셨대요. 나도 전해 들은 이야기에요. 늘 부딪히셨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신 거예요. 돌아가신 분이야 뭐 어쨌든 하늘 나라 가셨겠죠. 그런데 문제는 자식에게 있는 거예요. 혹시 저렇게 아버지가 죽으신 것이 교회를 올바로 못 섬겨서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데려 가신 것이면 어떻하나.. 두려움 속에서 제 방에서 사는 거예요. 그러다 열린 교회 와서 복음을 배우고 장시간 동안 터득하면서 자유를 얻게 된 거죠.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잘 했다 잘못 했다 그 문제가 아니라 아까 얘기했잖아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진노하시는 분이신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가진 두려움과 떨림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데, 다른 곳에서 아무렇게나 자기가 경험하고 아무렇게나 해석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가져다 주는 거예요. 공포는 경외의 감정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이 아니요 라고 했던 것이에요. 빗나간 두려움이라는 거죠. 아빠가 무서워서 가출하는 거..뭐 이런 거라 이거에요. 그걸 보게 되는 거죠.
(찬양)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마음이 생각나는 거예요. 큰 찔림 받아서..그래서 존 오웬이 유혹받는 신자에게 이렇게 타일렀어요. “ 네가 어떤 죄를 짓고 싶을 때 가슴에 손을 얹고 이것을 생각하라 내가 지으려고 하는 이 죄, 이 죄 때문에 예수님 당신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형벌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내 영혼아 네가 이 죄를 지으려느냐.”.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이 특별히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아주 올바른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 말고 십자가에 나타난이 아주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할수록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탁월한 사랑이 우리에게 아주 뜨겁게 다가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경건의 두 요소가 십자가에서 경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잘 들으세요. 그래서 이 경건의 핵심적인 경험이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동기가 뭐냐 이거에요. 왜 죄 있는 나는 피 없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내 피 없이 용서해 주시고, 하나도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애매하게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그 분에게 지워서, 그래서 십자가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하여야 할 그 끔찍한 고난과 그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두려움에 떨면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하리만치그 무서운 단절과 육신을 부수어뜨리는 하나님의 파멸을 내리신 동기가 하나 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뭐겠어요?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게 뭐였어요? 두 가지도 아니고 하나에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죄 때문에 멸망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동기였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신 못 박으셨던 거죠. 그 다음엔 울어도 돼 이젠..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가, 가장 가보치 있고 탁월하신 그 분이 아무 쓸모도 없고 뼛속까지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적대감 속에서 철저히 썩어 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 분이 죽으신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설명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 하나 만을 놓고는 이게 어떤 존재인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우리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예화 )우리들이 공장에서 땅에 떨어져 있는 어느 부속품을 주웠다 할 때 이것 하나만 갖다 놓고 책상 위에 비로드를 깔아 놓고 현미경으로 망원경으로 들여다 봐도 이것 하나만을 봐서는 이걸 어디다 쓰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주위에 이것이 떨어진 곳이 어디 부분인가를 찾아보고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를 알아보면 이 부속품 하나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나를 살려주신 그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무슨 의미를 가진 존재이고 누구이며 누구이어야 하는 것이 거기서 규정이 되는 거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아주 감명적인 고백을 남겼어요. “ 하나님, 우리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우리가 사랑하지 아니하는 것이 마치 당신에게 손해라고 되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파멸시킬 것처럼 우리를 위협하시면서까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나이까?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을 한없이 위대한 존재로 만드는 우주적인 사건이에요. 오늘날의 이 후기 근대 사상으로 물든, 포스트 모더니즘에 물든 현대인이 볼 때는” 너 나를 사랑하거라,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진노하리라“ 이렇게 말할 때 ”어이 씨,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이렇게 말하지만 공정한 시각에서 보면 ” 너는 나를 사랑하거라,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그것은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뛰어난, 모든 만물과 피조물들 위에 뛰어나서 마치 하나님이 그 인간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아주 소중한 것처럼.. 근데 사실은 그렇지 않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사랑을 받으셔야지만 뭐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우리 인간은 그래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의존적이에요.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에, 자식은 부모에, 부모는 자식에, 사랑을 받아야지만 겨우 사람답게 살아가는 거예요. 예?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잖아요. 그냥 너 나 사랑해라.. 하고 부르시는 거예요. 만약에 너 사랑하지 않으면 너 혼난다. 이것은 인간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을 이제 인간이 단순히 이 땅에서 살다가 짐승처럼 사라져 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부르시니 그 명령 자체가 인간이 불멸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왜? 사랑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인간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이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결코 규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안 사람이에요. 그것을 안 사람이에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성에 의해서만 내가 누구이고,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그리고 어떻게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들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는 인간이 누구인지는 결코 인간이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랑 앞에 거꾸러지는 거예요. 무엇 때문입니까? 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순결하신 그 분이 나의 죄를 없는 죄를 뒤집어쓰시고 그렇게 처참하게 주님 앞에 짓이겨 죽임을 당하시고 그 희생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은 살게 하셨습니까? 주님이 내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하나님 자신이 삼위 일체 안에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도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은 필연이에요. 그 필연은 강요된 필연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선하심의 결과로서의 필연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제한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거예요.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할 때 반 죽여 버릴 수도 있었는데 사랑한 사람이 더 칭찬받을 만해요? 아니면 아무리 잘못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하는 사람의 사랑이 더 뛰어나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아이, 대답을 해야지. 전자에요 후자에요? 후자죠. 그게 더 뛰어난 사랑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필연성의 사랑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 앞에서 뭘 배우냐 하면 어디서 이런 사랑을 만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성찰할 때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한없는 두려움과 떨림을 느껴요. 두려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 같은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두려우면서도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끌려서 두려움 속에서도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이끌림을 갖게 되는 거라 이거에요. 그것이 십자가에서 경험이 되는 거라 이거에요. 십자가에서.. 십자가의 경험 안에서 이 경험이, 이 두 가지 요소가 연결이 되는 거예요. 모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면서 보여주시고 싶어했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말 할 수 없이 이끌리는 그 사랑의 감정, 이 두 개가 하나로 치달려 오다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라 이 얘기죠. 그러니까 뭐 산에 올라가서 자기 뭐 뭐 무슨 뭐? 자아 찾기 30일? 그거 다 썩은 자아를 찾으면 뭘 해? 예? 만나봐야 주님이 결별하라고 그러시는 자아야. 아니 그거 믿고 살았더니 인생이 개판 돼서 주님께 손 들고 왔는데 그걸 또 찾아서 뭘 해? 자아는 혼자 발견이 안 되고 발견해도 이놈의 물건을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몰라. 누구를 만나야 된다구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핵심적인 만남의 포인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요. 십자가. 그래서 사도가 막 교회, 교회에서 대적자들, 변절하는 자들, 그 인간들이 막 디모데를 괴롭히고 막 괴롭게 그랬는데도 그래도 목회는 해야 돼. 그러니까 집사도 세워야 되고 감독도 세워야 되고, 막 목사도 세워야 돼. 그리고 막 누구를 세워야 될지 모르는데 이런 사람, 이런 사람 세워라. 그런데 그게 뭐냐하면 결국은 경건한 사람들을 세우라는 거죠. 근데 이 경건을 어떻게 생각하냐. 사도가 그냥 하다가 너무 할 얘기가 많으니까 그냥 끊어버리고 찬송하는 거예요. 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영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시고.. 하면서 쫙 설명을 하면서 찬송으로 그냥 그것을 대신해 버리는 거죠. 그러면 오늘날 잘 들어봐요.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교회에 모이고 수없이 많은 얘기를 듣고 또 이 책 저 책 많이 읽어요. 안 읽는 사람은 죽어도 안 읽지만.. 그런데 경건의 모양은 좀 있지만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이유가 이제 뭐 때문인지 알겠죠?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게 십자가가 아니야.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드리고 나면 막 땅에만몰두하면서 살다가..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러면서 이 땅에 코 박고 사는 것이 정말 하찮게 느껴지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그 하나님이 나 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신 그 하나님의 나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뜨거운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면서 돌아가야지만 경건이라는 것이 생겨나는 거죠. 은혜는 받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야. 당신도 할 수 있다.
(예화)우리 교회에 지금은 시골로 내려가서 열심히 신앙 생활 하는 자매가 젊은 시절에 유혹에 이끌려서 다단계 판매 조직에 들어가서 젊음을 바쳤던 자매가 하나 있었어요,. 한 6년 정도 빚데 허덕이면서 거기서 살았는데 나중에 와서 뭐라고 하냐면..목사님, 저 그렇게 고생하고 나서 마음의 평안을 찾아보려고 교회에 나왔는데요. 너무 충격적인게 다단계 판매 회사하고 너무 비슷하다는 거예요 교회가.. 나 다단계 판매에서 수련회 한 번 갔었거든요. 간 게 아니라 같은 숙소에 묵어서 구경했거든요. 오.. 무서워요 무서워. 영적이에요. 영적. 아니 그런데 뭐 사례 발표를 하고 막 이러는데 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몇 억을 벌었다고 발표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막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치면서 막 이러니까 간증이 끝난 거야. 그러더니 어떤 사람이 나오더니 우리도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이야 아멘 그러지만 저 사람들은 할 수 있다 그러고 대답을 하는 거예요. 할 수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소리가 점점 커지는 거예요. 막 박수치면서. 사람이 한 사람씩 책상 위로 올라가는 거야. 막 수백명이 책상에 올라가서 책상을 구르면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막 그러는데 근데 그게 문을 살짝 열고 보는데 막 영적으로 느껴져요 막. 확..그러다 그 자매가 그걸 딱 본거에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은혜가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듯이 자기가 은혜라고 느끼는 그것이 은혜가 아닌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험은 그렇게 십자가의 경건과 연결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 아주 간단한 거 좋아하잖아.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면, 아주 간단하게, 여태까지 하나도 기억 안 나도 이것만 딱 기억하면 돼요. 그냥 딱 이거만.
A. 두려운 엄위
뭐냐면 그냥 매일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그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짓이김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 앞에서 죄의 심각성,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떨고,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사랑에 펑펑 울면 그는 경건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경건하게 경건한 마음이 생기고 경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설교를 딱 절반 했어요. 그러면 이 중간에서 한 번 결산을 해 봐요.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대한 느낌은 지금 무엇이에요? 15년 동안 설교 한 것을 다 보니까 가장 많이 설교한 게 십자가 원, 투, 쓰리, 풔, 퐈이브, 식스, 세븐.. 시리즈 제목이에요. 그게.. 십자가에요. 근데 지금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그 십자가가 현재적으로 어떻게 느껴지고 있어요? 집에서 곤고한 일 때문에, 사역에서 너무 괴로워서 그런 거 말고.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런 거 아무것도 말고. 언젠가 어린이 집회를 하는데 막 울어요. 여자 애야. 한 3학쯤 됐을 거야. 막 울어. 선생님이 얘를 달래다가 안 되니까, 야 왜 그러냐.. 선생님,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못 박히셨어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못 박히셨어요. 그 얘긴 무슨 얘기냐 하면, 선생님은 아프지 않으세요? 그 뜻이에요. 그게 경건의 핵심이에요. 그게 경건을 만들어내는 공장이에요. 그것을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를 경건하게, 경건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거..경건의 능력은 의사의 힘이나 무슨 영적인 권세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경건의 능력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말 할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 그러면서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 않은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이끌림, 그것을 함께 느끼는 거죠. 그래요. 그게 있을 때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 하는 영혼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과 영적인 왕국의 증진이에요. 번영이에요.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이에요. 그것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환희할 수 있는 감정의 체계가 바로 그 말 할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
B. 이끌리는 사랑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 속에 이끌리는 이 내면의 경건 속에서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막.. 그러니까 이런 것이 없을 때 영혼에 대한 사랑 없이 전도하러 나오고 주님을 찾는 마음이 없이 기도하러 나오고 주님께 엎드러지는 심령 없이 예배하고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갈망 없이 봉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과연 마지막 날에 우리의 살던 모든 삶을 헤아릴 때 하나님이 그것을 경건 없이 섬겼던 그것을 당신을 향한 헌신이라고 생각 하실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우리가 언제 주님을 섬기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아 나는 너희를 모른다 ” “ 아 우리는 굶주린 자를 먹이고 갇힌 자를 찾아가고 다 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너희를 모르노라 했다고 해도 그건 너희 좋아서 한 일이지 나 하곤 관계없다” 그러니까 이 경건이 그것이 없으면 나머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래서 크도다 이 경건의 비밀이여..사도가 이렇게 감격적으로 외칠 때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메시지가 지금 저의 설교라 이 얘기예요.
그러면 이 경건이 어떻게 해서 인간의 마음에 생겨나게 되는가..이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집중해서 들어 보세요. 우선 우리들이 맨 처음 타락하지 않았던 아담의 상태는 일단 제외해 놓고 너무 시간이 많이 가니까 그건 제외해 놓고 지금 우리, 우리, 그 아담에게로부터 선천적인 죄를 물려받고 태어나자마자 결국은 죄를 행할 수밖에 없는 내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 말 모든 것 속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잖아요. 그래서 인간을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된다기보다는 죄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 거예요.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이 뼛속 깊이 죄의 본성이 샅샅이 베어서 따로 죄를 지으라고 가르쳐 주지 않아도 놀랍게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도록 그런 상태에서 인간을 태어나는 거죠. 뭐 이것을 논증하는 방법은 많이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생각해 보죠.
II. 경건과 중생
A. 전적타락 상태의 인간
(예화)아이들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하는 것은 장시간이 걸려요, 단시간에 돼요? 장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그 좋은 습관이 허물어지는 것은 그 세워진 것만큼 장시간이 걸려요, 아니면 짧은 시간이 걸려요? 짧은 시간이 걸려요.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도 애들이 담배 많이 피웠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담배 많이 피웠어요. 저는 그래도 중학교 때는 안 피웠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피웠는데.. 담배 많이 피웠어요. 근데 딱 보면요 담배 피워서 인백이는게(?) 몇 년 걸리는 것 같아도 애들이 3달만 담배 물고 다니면 담배 못 끊어요. 벌써 우리 고등학교 때도 임박인(?) 아이들이 있었어요,. 제가 담배를 한 6년, 7년 피다가 끊었는데 4번을 시도해서 결국은 3번을 시도해서 실패하고 마지막에 4번째 시도에서 성공했어요. 세례 받고도 4년 동안 담배를 피웠어요. 끊을 수가 없어요. 근데 4년째 끊었는데 그러니까 처음 끊었을 땐 막 미칠 것 같은 거지. 사탕을 막 여기다 넣어 갖고 다니고 불안증에 걸려 가지고. 막 식사하고 나거나 이럴 때는 막 견디지를 못 하는 거죠. 그런데 끊었어요. 그러고 나서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어느 날 아침인데, 앞에서 누가 좌석 버스를 타고 가는데 담배를 푸~피워요. 전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쑥 내밀고 훅~~그게 담배 끊은 지 3년 후의 일이었어요. 3년이 되어서, 3년 동안 한 개피도 안 피웠거든요. 근데 이 안에 담배 냄새를 좋아하는 성향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죠. 그 때 제가 안 피웠으니까 그렇지 다시 시도했으면 한 한 달만 피웠으면 다시 인 박혔을(?) 거에요. 근데 그 때부터 이 때까지 안 피웠어요. 요즘도 안 피워요. 진짜예요. 근데 피우는데 5년이 지나고 나니까 담배 연기를 맡으면 막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즘도 식당에 들어갔다가 담배 피우는 사람 있으면 그냥 나와요. 다른 식당에 가. 왜냐하면 너무 머리가 아파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에 베이는 건(? )3달, 그게 완전히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5년이 걸리는 거예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경건이 생겨나고 그래서 옛 삶이 고쳐져서, 잘 들으세요. 옛 삶이 고쳐져서 하나님 안에 바르게 되는 것은 단 번에 돼요? 아니죠. 부지런히 싸우면서 한두 번 깨뜨려져선 안 돼. 그래서 또 하다가 아, 아니지 하고 회개하고 또 하다가 하고 그렇게 막 짓이기고 깨지면서 아우, 이제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그러고 이렇게 세워져요. 그런데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은혜 못 받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유혹 받고 그러면 한 번에 툭 치면 우르르르 무너져요. 그건 순식간이에요. 이미 벌써 죄의 맛을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지금은 술을 끊었지만 술을 좋아하는 이것은 이 안에 인자를 여전히 가지고 있어요. 바람피우는 것 끊었지만 그 인자를 여기 또 가지고 있어요. 담배 끊었지만 또 가지고 있어요. 아내를 쥐어 패고 자식들을 발로 차던 폭력, 정말 회개하고 끊었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인자는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배나 열렬하게 신앙생활 해야 돼요. 다른 길은 없어요. 다른 길은 없어. 다른 길은 없어. 여러분 그 저기 막 장관집도 털고 그러던 왜 조세영 이라고 왜 대도 있었잖아요. 그래가지고 참 도망도 흥미진진하게 다니고 그러다가 서른 몇 살에 붙잡혀서 오십 살까지 살았잖아요. 나오자마자 막 온 교회에서 불러서 막 간증 집회하고 그랬거든. 근데 일본 가서 다시 털다가 잡혀서 지금 감옥에 있단 말야. 왜 그랬냐 그랬더니 문 단속 제대로 했는지 한 번 점검하러 들어갔었다고..그게 그렇게 쉽게 가려지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간증 뭐 하고 불러가고 그랬을 때 아우, 저거 저러면 안 되는데..아니나 달라. 그 다음에 뻥~~하고 터지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뼛속 깊이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미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가지고 인간이 태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이러한 인간, 잘 들으세요.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런 식의 우울한 인간관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넌 할 수 있다. 너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어. 그리고 너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 네가 최고야. 그리고 세상은 너의 성공을 빌어....이런 얘기만 좋아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막 쌓아 올리는데 이 밑에서 기초 자체는 사실이 아냐. 속속들이 철저하게 썩은 인간이에요. 근데 그런 인간의 견해를 안 받아들여. 그리고 그 위에 인생을 설계해. 그러니깐 안 되는 거죠. 근데 이러한 인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필수적이에요. 인간의 전적인 타락, 완전한 부패, 그래서 인간을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창조의 목적을 찾아갈 수 없는 인간이다라고 하는 것, 이 철저한 부패와 무능으로 집약되는 전적인 타락을 받아들이는 거죠. 그렇게 되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그러니까 경건이 그러한 인간에게 있을 수가 없는 거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커녕 적대감을 가지고 태어나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어느 정도 남았는데 비뚤어진 두려움이에요.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가만 내버려두면 절대로 경건을 소유한 인간이 될 수 없는 거죠. 자 한 번 보세요. 인간은 자기 밖에 있는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절대로 중립적일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기 밖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들, 하나님을 포함해서. 이 사물이나 사람, 혹은 하나님을 접하면서 그것들을 판단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두 가지 기능을 주신 거예요. 첫째가 뭐냐하면, 인식하는 기능이에요. 딱 보고, 어..사람이네. 꽃이네, 돼지네, 코끼리네, 그리고 천사네,,그리고 모든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그런 것을, 그걸 보고 알 수 있는 인식의 기능을 주신 거에요. 근데 그것만 주신 것이 아니라 보는 순간에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이 함께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거예요. 근데 잘 들으세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기 전에 맨 처음의 인간에게는 이미 이 속에서 잘 들으세요.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야 할 것들을, 것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더 많이 사랑하고 좋아해야 될 것들과 덜한 것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 것과 똑같은 성향을 인간 속에 넣어서 창조해 주신 거죠. 그러니까 뭐냐면 이 안에 하나님을 제일 좋아하는 성향이 이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딱 볼 때 이 속에 있는 성향과 딱 맞는 것을 봤을 때 확 끌리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린지 이해 안 가요? 예? 확 끌릴 것 아니에요?
(예화)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에 자전거가 있는데 그 자전거가 우리 딸은 뭐 5만원이라고 그러는데, 그게 2000만 원짜리가 있다네? 그런데 그걸 또 사서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대. 근데 우리는 그거 봐도 타고 싶지 않거든? 내 안에 자전거 타고 싶어하는 성향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끌리는 거예요. 나는 욕심이 나는 건 책이에요. 특히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들을 보면 막 사고 싶어. 끌려요. 그러니까 이 속에 있는 성향과 그 성향에 맞는 것이 있으면 확 끌릴 것 아냐.
맨 처음 타락하기 전의 인간이 하나님이 좋아해야 할 만물들의 질서와 똑같은 성향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넣어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면 확 사랑이 끌리게 되는 거예요. 아내를 보면 확 끌리고, 남편을 보면 확 끌리고, 이렇게 똑같았던 거예요. 근데 죄가 들어오면서 이것들이 확 뭉개져 버린 거야. 확 반대로 완전히 뭉개져 버린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냐 하면 하나님은 꼴도 보기 싫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예요. 하나님 뿐 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뭘 들어도 아주 분노하고 싫어하는 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미워했던 이유이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을 미워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거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잘 들어보세요. 밖에서 하나님이 아무리 하나님이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걸 수없이 보여주고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찬란한 사랑의 빛줄기를 막 불꽃놀이처럼 보여준다고 해도 이 안에 그것을 싫어하는 성향이 있으면 그런 게 많이 비치면 비칠수록 짜증이 날 거 아니에요. 그렇죠?
B. 중생과 새 감각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강권적으로 중생을 통해서 이 성향을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하나님이 확 바꿔 버리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놀랍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일이 노래방에서 술 먹고 춤추다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거에요. 이해해? 이해하지? 정신없이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이러면서 그런 게 생겨나는 게 아니다 이 얘기에요. 놀랍게 그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닌데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놀라운 일을 아까 말씀 드린 경건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것이 선포되고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극히 두려운, 떨리는 두려움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이끌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사랑의 성품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그 순간, 하나님이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성향을 확 바꿔 놓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게 생기냐 하면 예전에는 이 육신의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이거에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고 그 다음에 이게 오감을 통해서 들어올 수가 없으면 그건 없는 거예요. 우리들이 없다고 그러는 건 진짜 없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예화)지금도 우리가 막 음성을 가지고 얘기하는데, 엄청난 파장인데 그게 워낙 긴 파장과 워낙 짧은 파장을 가지고 있는 소리는 안 들리는 거죠. 없다고 하는 거예요. 없는 게 아니라 있거든. 안 들리거든요. 우리 눈도 마찬가지에요. 빛도 하나의 파장이거든요. 입자이면서 파장이잖아요. 그러니까 전파의 속도하고 빛의 속도하고 똑같애. 30만 킬로미터, 세크..초당 30만 킬로미터 똑같단 말이에요. 그것만 해도 벌써 빛이 파장이라는 증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 빛들의 파장 중에서 일부분 밖에 못 보는 거예요. 나머진 안 보이는 거죠. 근데 그 보이는 한계 안에서 우리들은 있다, 없다 이렇게 판단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오감을 가지고 보니까 이것은 모두 물질적인 것밖에는 못 본다 이거에요. 근데 하나님은 영이시잖아요. 그럼 당연히 하나님의 아름다움도 물리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적인 아름다움이죠. 물리적인 아름다움은 봤지만 그 위 있는 연결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못 보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그 순간에 확 바꿔 놓으시면서 두 가지, 아까 똑같이 인식하는 기능을 바꿔 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우리의 영혼 안에 하나님이 확 주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에 있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거듭나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면서 반대로 묻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안 계신 곳이 있는가?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고 했잖아요. 근데 여기서 확 바꿔 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하라고 하신 것들을 좋아하는 성향, 하나님이 싫어하라고 하는 걸 싫어하는 성향으로 바꿔 놓은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경향이 이 안에서 확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기만 하면 확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감격하는 거예요. 이 안에 그것에 기울어지는 마음을 하나님이 넣어 줏니 거예요. 새로운 감각을.. 그러니까 예전에는 이런 아름다움을 모르니까 먹고 마시고 입고 예쁜 옷 입고 뭐 막 그냥 이렇게 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하나님 없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근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의 성향이 이렇기 때문에 변화가 오는 거죠.
제가요. 아주 팝송을 무지하게 좋아했어요. 그래가지고 밤새도록 듣고 그 가사 번역하는 게 취미였어요. 고등학교 때..그런데 놀라운 게 딱 거듭나고 나니까 하루아침에 그 가락 자체가 싹 싫어지는 거예요. 하루아침에..거짓말 같아요. 싫어져요. 그게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듣지 말라, 나쁘다 이런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해 주는데 한 순간에 싫어지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다른 성향이 이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찬송가의 가락이 좋아져요.
(찬양)손과 발 날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C. 경건과 정동
눈물이 막 흘러요. 그렇게 해서, 잘 들으세요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인식의 감각과 새로운 이끌림의 감정이, 호 불호의 감정이 하나님의 두렵고 떨리는 엄위하심을 보게 하고 말 할 수없이 신비하게 이끌려 그 사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것도 경험하게 되죠. 이 두 개를.. 그러면서 이 안에서 이 경건이 자라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거듭난 인간 안에 있는 이 경건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냐 하면 이렇게 중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감각, 그러니까 인식하는 기능과, 그것의 좋고 싫음을 느끼는 마음의 감각, 이 두 가지가 이 성향을 따라서 외부 상황과 접촉하면서 일어나는데 이게 항구적인 게 아냐. 항구적인 게 아니라 이게 완전히 사라지진 않지만 이게 우리가 기도 생활 속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진실하게 회개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움을 느끼고 그리고 용서의 경험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용서하시고 다가오셔서 나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그 십자가의 경험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 반복될 때 하나님이 세워주신 이 성향은 탄탄하게 유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장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조금만이라도 보여주면 그걸 훅~ 하고 빨아들이는 거예요. 그게 들어오니까 가슴에 확 다가오면서,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은혜 많이 받을 때 들었던 설교나 말씀 보면 요즘 보면 그렇게 건조한데, 그 땐 왜 이 말씀을 깨달으면서 참 많이 감격했을까.. 그런 생각 들잖아요? 그 때 감각과 지금 감각이 예민했기 때문이에요. 성향 자체가.. 확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먹으면서 그래서 이런 것들을 인식하게 하는 마음 안에 있는 많은 욕망들이 이 틀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예요. 마음이 더럽고 사악한 욕망 같은 것들에 붙잡히게 되면 이 틀들이 붕괴되는 거죠. 그러니까 기도를 통해서 이런 것들을 털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이런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경건의 성향들이 강화되는 거예요. 탄탄하게.. 그러면 계속 그 쪽으로 빠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것이 성장해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경건이 그 경건 자체가 단계가 있고 정도가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시작과 발전, 후퇴, 진보, 성장, 어림, 그 다음에 성장함.. 이런 모든 단계들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탄탄한 성향을 마음속에 갖는 거예요. 그것의 핵심을 얘기하라고 하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깊이 끌리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이에요. 반쪽짜리 두려움은 절대로 완전한 두려움일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경건을 이루지 못 해요. 이 두 가지가 융합이 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이 안에서 탄탄한 틀을 형성하면서 그것들이 내적으로 그런 두려움과 사랑에 이끌리는 감정을 갖게 만들고 외적으로는 마음이 그러한 두려움과 사랑에 의해서 지배 되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되는 거죠. 삶 구석구석에서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다 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서 그것이 삶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경건한 그 체계가 되는 거죠. 체계를 형성해요. 그래서 마음과 삶, 영혼, 성향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딱 덩어리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의 틀로 움직이는 거죠. 어느 부분을 떼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게 경건이에요. 그렇게 해서 경건은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우리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모두 이런 일을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영혼 안에서 행하신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만약에 진지하게 생각해서 나는 결코 십자가 앞에서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그 십자가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속으로 이끌리는 그 신비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하면 거듭난 게 아니에요. 중생한 신자가 아니에요. 점검을 필요로 하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경건이 거의 없는 삶을, 내가 아주 분명하게 거듭났지만 그저 기도 좀 안 하고 말씀을 안 봤기 때문에 내가 지금 침체에 빠져서 그렇다 라고 해석을 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 해석이 맞지만 어떤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그런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두려움과 떨림, 그러면서도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감격적인 사랑의 이끌림, 이러한 변화를 아예 처음부터 경험하지 못 했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사람도 있다 이거에요.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죄와 더불어 싸우고 경건하게 살려는 모든 노력이 모두 실패해요. 그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처음부터..자신의 구원과 중생에 관한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될 사람들이에요.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될 우리들을 천당 보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죠. 그것은 하나의 결과이고, 믿음의 결국이고, 결과이고, 주님이 우리를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주신 그 절절한 사랑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어둠 가운데 빛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내일 교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각 사람의 경건의 능력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능력의 총화에요. 그 경건 속에 주님이 살아 계시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교회를 구속의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러한 놀라운 계획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자기의 힘으로는 하나님과 원수 맺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그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 때에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당신을 의로우시지만 불의한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아주 잔인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이것은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그리고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하신 거룩함과 엄위를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엄위롭게 우리의 죄에 대해서 당신의 아들에게 진노를 퍼부으신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이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하는 자각 속에서만 내가 어디서 왔고,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죽어야 되는지 명료한 이해가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하신 사랑 앞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들에게 주님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처럼 보라..그러면서 우리처럼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보내신 거예요. 오늘 순교 역사 시간에 그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서운 속도로 전파됐던 것이 수없이 돌아다니면서 메가폰 들고 외쳤기 때문이 아니라 뭐라구요? 분명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음의 삶, 그것을 보면서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사람들이 죽임 당하는 그 사람 보다 더 두려워했던 거예요.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종교적인 깡다구가 아니었단 말이에요. 10년의 소산이 아니었다 말이에요. 그런 경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한 깊고 진실한 사랑이, 그게 마음과 영혼 뿐 만 아니라 삶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는 체계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라고 부인하는 것은 삶 전체를 뭉개 버리는 거예요. 그럴 수가 없는 거죠. 말로만 예수를 믿은 사람은 말로만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게 따로 도는 신앙이니까.. 그리고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묶여있는데 그걸 입으로 부인하게 되면 자신의 삶 전체를 부인하게 되는 거잖아요. 예? 그거에요. 그거에요.
III. 결론 : 다시 십자가로
(예화) 런던에 가면 아까 라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동상이 서 있어요. 옥스퍼드 학생들이 돈을 걷어서 세운 거예요. 거기에 휴래티머, 그 다음에 리들리, 그 다음에 크렘머 라는 사람이 순교 당하는 광경이 거기 있어요. 메리 여왕이 막 핍박을 하면서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라 그러는 거예요. 그 때에 크렘머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이 개혁자가 있었는데 너무 핍박을 하니까 잠시 생각을 바꿔요, 그래서 카톨릭을 믿겠다고 그래요. 그러다가 나중에 이게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즉시 회개해요. 그리고 못 박혀서 거기에 매달려서 죽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내 이 손을 먼저 불태우시오. 왜냐하면 잠시 나의 이 손이 주님 앞에 변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손을 그 불속에다가 먼저 태우는 거예요. 그리고 장렬하게 화형에 처해지게 되는 거예요.
허물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바람개비처럼 예수님 부인하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유는 경건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 체계가 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면서 막 불이나 때는 감정적인 신앙으로서는 죽어도 생겨날 수 없는 신앙의 경지야. 경건과 두려움이 이 안에서 끊임없는 십자가의 경험과 진리의 빛 안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자 하는 이러한 진지한 삶 속에서 이 마음과 삶 전체의 체계로서 한 덩어리가 되는 경건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이게 교회의 능력이에요. 이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어요? 다시 그 십자가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 분이 엎드렸던 그 곳, 그 분이 지셨던 그 길, 그리고 그 분이 죽으셨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세요. 십자가에서 듣고, 이야기하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찬양)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할 수 있을 때 까지 그 십자가로..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와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사랑 이외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는, 여기로 돌아와야 해요. 그래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관심사들을 버리고 그리고 오직 그 십자가로 돌아가서 이 소중한 경건을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 1
3.교회의 경륜과 경건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 의 기둥과 터이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5-16).
I. 경건의 “비밀스러움”
그러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두렵고 떨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사랑 속으로 이끌리는 이 내적인 경건히 삶 전체로 흘러나와 생활의 체계 전체를 아우르는 경건히 된다는 사실이 그러면 실제의 우리의 삶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경건의 비밀로 삼으신 데에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경륜과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그 탁월한 경륜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더 큰 구속의 경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II. 교회의 경륜과 경건
사도는 오늘 이 경건에 대해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건의 비밀스러운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경건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비밀스러운가 하는 것이죠. 우선 인간 본성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타락한 후에 인간은 전혀 믿음이라고 하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아는 것은 모두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연적인 사물들의 이치를 알 뿐이에요. 그리고 그것들을 자기의 경험의 한계 안에서 이성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파악함으로써 모든 것들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원인과 결과가 파악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것을 그렇다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지성의 구조예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한쪽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한쪽은 지식이 함께 굴러감으로써 참다운 기독교 신앙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쳐 드렸습니다. 똑같이 인간의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똑같이 두 개의 바퀴에 의해서 굴러가게 되어 있는데 하나는 믿음이고 하나는 이성이에요. 만약에 이성을 포기하고 믿음 하나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마치 사랑의 감정적 체험 하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힘겨워지고 믿음이 없이 이성만을 가지고 하려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알 수가 없으니 그것은 마치 사랑을 포기하고 지식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처럼 똑같이 그런 꼴이 된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거듭나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본성의 판단에 따라서 생각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거죠. 그렇게 볼 때에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이 현상계 안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그 이해를 초월하여 영적인 세계를 알고,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서, 그 하나님을 보이는 사물보다 더 사랑하는 게 되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거죠.
자연의 본성을 가지고는 이러한 경건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 사도가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낯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경건 그 자체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선 그 본질 자체가 매우 신비롭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이해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경건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그 크신 어미 앞에서 두려워 떨고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에 의해 포기할 수 없게끔 그분의 사랑 속으로 이끌리는 애정이에요. 그런 본질을, 그런 본질 자체를 경험해 본적이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회심하고 나서 어떤 사람은 회심하고 나서 며칠 혹은 몇 달 동안 지성적인 혼란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 거죠.
저도 어느 정도 그랬어요. 주일 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에서 제대로 된 성경교육을 받지를 못했어요. 그때 21살에 회심을 하게 됐어요. 주님의 그 두려우심과 그 다음에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어느 날 회심하면서 뜨겁게 경험을 하게 된 거죠. 근데 그 다음날 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혼란스러운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나에게 어제 일어난 걸까, 그리고 그것은 혹시 단순한 감정의 체험은 아닐까, 분위기의 소산은 아닐까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의심에 찬 생각으로 다시 교회에 가서, 그리고 풍금에 맞춰서 다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찬양)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뉘우친 눈물로 주여 옵니다
다시 어제와 똑같이 내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 살아온 수많은 날들의 죄와 그리고 이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사랑이 확 밀려들어요. 쏟아지는 거예요. 그게 며칠 동안 계속 되는 거예요. 그게 믿어지는데, 믿어지는데 그런 감정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니까 이게 말씀으로 쫙 지식이 정리되고 믿음으로 엮어지면서 사이사이에 이성적으로 잘 깨달아 알았으면 그렇지 않을 텐데 이게 믿어지는 그 순간만 가슴 벅차지 이게 그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지식이 워낙 없으니까 이게 혼란이 막 생기는 거죠. 그게 본인 안에서 일어나는 건데도 이상하게 이해가 잘 안되는 거죠. 그게 경건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있는 본성의 추측의 범위 안에 있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는 그게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거냐는 것이죠. 그러므로 비밀스러운 것이라는 것이죠. 비밀스러운 것이죠.
어떤 그리스도인이 공무원인데 꽤 신실하게 신앙생활 하던 사람인데 뇌물을 받았어요. 근데 사실은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그 시절에는 다 웬만큼 뇌물 받던 사람들이었거든요. 이 사람이 이걸 받아서 아이 참 신앙적으로 좀 켕기지만 써야지 하고 봉투를 넣고 집에 가는데 견디기 힘들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막 회개를 시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도로 그것을 가지고 와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작용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본질에서 뿐만이 아니라 경건 그 자체가 우리 안에 있어서 수시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그 경건히 작용을 하는 거야, 작용하지 않으면 경건한 삶이라는 게 나올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작용한다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그 마음에서 그 경건에 어울리는 거룩한 삶들을 빚어내는 거거든요. 그렇게 일어나는 작용이 어떤 때는 우리에게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신비스럽다는 거죠. 나쁜 마음을 품었는데 기도 한번 하니까 한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바꿔놓으실 때가 있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내가 언제 한번 얘기 했잖아요. 회심하고 몇 달 안됐을 때인데 내가 다니던 교회가 30평쯤 되는 진짜 손바닥 만한 교회였는데 새벽기도 그때 5시에 나왔는데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으면 그 추운 겨울에 그 새벽 5시에 4시 반에 종치면 거기 그 뚝방길 그 추운 데를 걸어서 코트도 변변히 없이 왔겠어요. 그런데 찬송가를 계속 부르는데 집사님 한 사람이 방석을 들고 계속 앞으로 가는 거야. 나중에 찬송을, 기도하고 그 다음에 또 찬송을 부르는데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하필이면 그 찬송이었어요. 그냥 막 뒤집어져서 통곡을 하면서 우는 거야, 뭔가 그러고 봤더니 방석 밑에서 5000원짜리가 나오는 거야. 새벽기도를 갔는데 저기 5000원짜리가 떨어져 있었던 거예요. 그때 5000원이면 4인 가족이 일주일을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큰 돈이었죠. 만 원짜리는 별로 구경도 못했고, 그러니까 그렇게 믿음으로 살려고 아침에 새벽에 그 추운 새벽에 나왔는데 그걸 보는 순간에 애들 생각, 집의 생각 막 다 떠오르면서 하루 종일 풀빵을 구워 팔아야 천원도 못 버는데 5000원이 떨어져 있는 거예요. 슬금슬금 방석을 가지고 가서 그걸 딱 덮어버린 거야. 하필이면 찬송을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왁 뒤집어져서 우는 거예요. 굉장히 열심히 믿는 집사님이었어요. 조집사님이라고.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우리도 때로는 당혹하게 느껴지는 우리 안에 이 살아있는 경건의 힘, 이게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고, 그게 은혜의 힘이야 그게. 그러니까 잘 들어요. 경건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번 주시면 우리 게 되어서 막 경건하게 살다가 떨어지면 얻어오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성령이 우리에게 똑같이 사랑에 대해 설명한 것처럼 이미 주셨지만 매 순간 주시는 그 본성위에 새로운 은혜를 계속 부어주시지 않으면 경건 껍데기만 남는 거예요. 껍데기를 지탱하는 데는 성령의 능력이 없어도 괜찮아요. 그래서 경건의 모양은 성령에 의해 지탱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얼마든지 지탱될 수 있어요. 근데 그 속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주님께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은 성령의 끊임없는 은혜 아니면 없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경건해도 우리가 그 경건을 자랑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은혜로다. 그런 점에서 이 경건은 어떤 때는 우리에게 조차도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사도가 경건의 비밀스러움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전혀 안되는 적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우리 맘대로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경건은 그런 두 가지 점에서 비밀스러운 것이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그런데 이 경건히 교회의 경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사도도 보면 무얼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면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자신 속에 무엇인가 벅차오르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찬송하는 이유가 무얼 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1장과 2장에서는 어린 디모데 목회자 디모데가 교회의 반역자들과 변절자들에 의해서 한없는 고생을 하고 고통을 받을 때에 어떻게 그 괴로움과 고난을 이기고, 자신을 지키며 교회를 지켜야 되는지를 1~2장에서 설명한 다음에 3장에 들어와서 교회에 일꾼을 세우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리고 다시 또 신앙에 관해서 4장에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건 뭘 보여주냐하면 이 경건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A. 경건과 구속의 경륜
그러니까 우리가 둘째 날 그러니 어저께 경건은 핵심이 그리스도 예수를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그 큰 사랑을 깨달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이끌리는 이 마음이 내적으로 생겨나게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이 흘러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어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 태어나서,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면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장사지내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위에 앉으신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어요? 이게 바로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도 알 수 없고 세계의 존재 목적은 물론 자기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인간을 구원 하셔서 창조와 구속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야 했던 이유는 구속의 경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교회는 그런 구속의 경륜 안에서 그 구속의 핵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큰 사랑을 발견한 인간들을 인간들로 그것을 발견하게 하셔서 도저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바꾸어 놓으신 것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그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신자의 모습이에요. 그런 인간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영적으로 접붙여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령 안에서 충만하게 누리며 연합을 이룬 가운데 살게 하신 것이 교회예요, 교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 대한 생각을 아주 올바르게 갖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계속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도 아주 허접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이 되는 거예요.
나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 열린교회 안에서도 그런 성도들을 꽤 여럿 봐요. 어느 교회에 있다가 왔냐고 물어보면 어쩌면 그렇게 말씀 좋은 교회만 줄로 긋듯이 돌아다니다가 온 거예요. 여기가 최종적인 정착지가 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 이후의 신앙생활을 두고 봐야 되요. 그러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진리에 대한 사모함도 있어요. 주님도 사랑해.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교회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이 성숙해지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들어요. 경건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절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이에요.
나는 오늘 이 시간에 왜 경건히 공동체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설명할 시간은 없어요. 그런데 부분적으로는 설명할게요.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건 공동체적 이예요. 왜냐하면 자기만의 그리스도가 아니니까,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는 거죠. 그러니까 한 사람의 경건은 교회의 것이야, 교회의 것이야, 교회의 것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난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데 바깥에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저렇게 돌아다니면서 아무데서나 성경공부하고, 그 다음에 아무데서나 다니면서 훈려 받고 하는 것들, 그것이 뭔 상관있겠냐 하는데 그것이 죄냐? 그러면 왜 바깥에서도 아까 그분은 굉장히 안 좋은 것만 예를 드셨지만 건전하게 성경을 가르치는 데도 우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렇죠?
근데 결국은 긴 관점에서 보면 결국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인 이해와 기반을 약화 시켜요. 그래서 결국은 시들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죠. 무얼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 안에서 한 지체된 안에서 자신의 경건, 이것도 나의 개인의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모두 연합을 이룬 공동체 안에서의 경건이고, 그리고 내가 경건하다는 사실이 먼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입증되어야 하고, 그리고 나의 경건히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경건의 공동체적 성격 이예요.
자 조금만 더 설명할 게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한 그 큰 두려움과 떨림, 그러면서도 싫지 않게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이끌리는 하나님에 대한 애정을 하나님께서 주신 거죠.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사랑하는 가운데 그 의무를 충만한 애정으로 채워서 그 의무가 조금도 짐스럽거나 괴롭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었다는 거예요. 그게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시려는 죄 때문에 이런 것들이 다 박살나고 끊어졌어요.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남아 있는데 삐뚤어진 두려움 이예요.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리 도망치거나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을 섬기게 하는 그런 쪽으로 발전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두려움과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함께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던 것이에요 그런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구약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그것이 쭉 내려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확연하게 보여주셔서 그들이 구원을 받을 때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는데 그 믿는 내용이 뭐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걸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거예요. 그 죽으셨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당신이 고난을 받으시면 서도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한꺼번에 믿는 것을 통해서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거죠. 그래서 구약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경외라는 개념이 먼저 들어와요. 근데 신약은 그리스도와 함께 뚜렷하게 믿음이라는 개념이 훨씬 중요하게 들어오는 거죠. 구약에서보다 믿음이 신약에서 훨씬 강조되는 거죠.
근데 그 믿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 죽으심의 내용이 뭐냐 하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위와 그를, 인간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예요. 그러니까 이 내용도 들어가 보면 두려움과 사랑 이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구약의 이 경외의 개념과 신약의 개념이 만나는 거예요. 다만 이쪽(구약)에서는 경외가 먼저 나오고, 여기(신약)에서는 믿음이 먼저 나오는 거예요.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께 대한 말할 수 없는 마음이 녹는 사랑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게 된 사랑을 그렇게 죽으신,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그 분을, 그 분을 머리로 하는 교회에 그거를 깨닫고 마음속에 깊이 자각한 사람을 접붙이시는 거예요. 그리고 한 지체, 한 지체들을 각자각자 그렇게 해서 주님께 오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난 계기나 장소, 사건은 모두 틀리지만 모두에게 공통된 경험이 있었어요.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죄 때문에 그 끔찍한 형벌을 받으셨구나, 내 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구나, 하나님은 그렇게 거룩하시기에 엄격한 분이시구나 하는 것과 그 예수님이 당신은 죽으시고 나는 살리셨구나 하는 사랑이 함께 확 다가오는 거예요. 두개가 반쪼가리씩 이렇게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두려움을 통해서 사랑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랑은 두려움을 삼켜버린, 두려움이 들어오고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서 이 사랑이 찬란한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서 결과적으로는 우리에게 사랑이 남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은 방종할 수가 없는 사랑 이예요. 사랑의 시작, 사랑의 나타남의 시작을 생각해보면 그건 반드시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거듭난 신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 그 분께 죄를 짓거나 불순종 하면 이 안에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삼켜지질 않는 거예요. 항상 그것이 남아 있는 거예요.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이 없으면 그것은 참다운 기독교적인 경건히 아녜요. 근데 오늘날은 그렇게 공정하게 경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대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정확하게 균형 있게 설명을 안 하고 일반적으로 사랑으로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것이 경건의 핵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이 동반되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각자 만난, 주님 만난 곳은 틀리고, 상황은 틀려도, 똑같은 경험을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계획이 얼마나 정교한지 보라고, 그렇게 해 가지고 그들이 모여서 그렇게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사랑을 다른 성도들보다 매우 특별하게 경험한 사람을 목자로 삼으셔서 그를 통해서 평범한 자신의 신앙과 이성으로는 갖기 어려운 그러한 전문적인 진리의 세계에 대한 탐구와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듣게 하셔서 자신들의 경건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엮어져서 자라게 하시는 거예요. 그 안에서 별래별 사연이 다 일어나잖아요. 맘에 안 드는 인간도 만나고 은혜 떨어져서 교회 괴롭히는 인간도 만나고 아니면 신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이상한 인간도 만나고 별 인간 다 만나잖아요. 그것이 그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속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용서하고 용서를 받으며, 그러면서 이것이 점점 점점 더 주님을 향한 경건 속에서 일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구속의 경륜 이예요. 그리고 교회는 그 전 세계적으로 펼쳐져 그러한 구속의 경륜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구원이 완성되고 결국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서 이 세계를 완성하시는 것이 구속의 계획 이예요. 교회는 바로 그런 구속의 계획의 경륜 안에 있다 이 얘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교회의 신자가 되는 것, 그 자체가, 표가 경건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교회에서 한 지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모든 삶은 그 경건을 끊임없이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에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경건의 능력은 이것이 총화를 이루고 공동체적인 경건히 되어서 그래서 그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양육하고 직행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속에 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표본을 그리스도인이 보여주어서 참 사람 사는 이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몸으로서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이 세상에서, 주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의 뒤를 이으며,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그리고 그들을 위하며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속의 경륜 안에 있는 신자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구속 그 자체가 경건한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고, 그 구속의 경륜 안에서 이후에 완성될 세계의 예표로서의 교회의 성립이 그런 경건을 소유한 사람들이 경건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이고, 그리고 교회는 그런 많은 신자들이 그런 처음 경건을 유지하고 그 경건의 능력 안에서 성장해 가도록 돕는 것이 이것이 구속의 경륜이고 교회의 경륜 이예요. 그러니까 이 경건과 구속의 경륜은 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럼 여러분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은 교회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 아니에요. 교회는 하나의 없어지기 위한 한 알의 밀알이에요. 썩어지기 위한 밀알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는 이 세상에 있는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이 도래하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그날을 가리켜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하는 여호와를 아는 그 지식 자체가 여호와를 향한 두려움과 사랑 이예요. 그 하나님을 지극히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아는 것이에요.
그런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경외의 마음이 꽉 차서 이 마음 안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자비를 한없이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자기 인간들 사이에는 가까이 할 수 없는 탁월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엄위 앞에 엎드려지고 그러면서도 그분에게 말할 수 없이 끌리고 그분에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는 것 같은 사랑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거예요. 그것으로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 전체가 그런 거룩함으로 가득 차고 그가 행하는 모든 삶, 그때에도 우리들이 먹고, 그때에도 우리들이 생활할 거 아녜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졌을 때에도 그것이 오늘날 하는 것과 좀 틀릴지 몰라도 어쨌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의 모든 삶 자체가 그런 완전한 거룩함에 경건으로부터 흘러나온 삶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리켜서 성경에서 ‘그 날에는 너희가 말방울 위에도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쓸 것이다. 원래 여호와께 성결은 제사장한테만 써 붙여놓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날에는 성소의 구별이 없어져서 그 모든 말방울과 같이 아주 하찮은 것에까지도 그것을 만드는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도 주님의 영광을, 그래서 말방울에도 여호와께 성결이라 쓸 것이다. 그래서 세상 전체가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없는 그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찬송과 주님을 향한 헌신의 들림이 되는 거죠. 그게 뭐예요? 그게 인류 전체가 경건으로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 도래할 세상의 모판, 본보기가 교회예요.
우리는 자꾸 이 세상 사람들을 전도할 때 너네가 찾는 게 교회에도 있다 이렇게 해서 전도하려고 하고 너나 나나 별 차이가 없다 그렇게 해서 전도하려고 그러는데 이거는 신학적으로 잘못되고 심리적으로도 틀린 거예요. 내가 회심하기 전에 성당에 매력을 많이 느꼈어요. 왜그랬냐하면 교회는 너무 나하고 비슷한 거 같애, 건물부터 벌써 틀리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내가 이 세상에서 늘 맛보고 얻고 하는데도 그게 내게 만족을 못 주기 때문에 종교의 문을 두드리는 거거든요. 거기는 틀리기를 원하는 거예요. 다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왔을 때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면 친밀감이 생겨서 그 교회를 더 잘 다니게 되요? 아니면 와 봤는데 나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너무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너무 경건하고 진리에 대해 목마르고 자비의 눈물이 있고 내가오니까 완전히 나는 이방사람인거 같아 오히려 이런 경우에 소외감을 느껴 교회를 떠나는 게 아니라 더 그 교회에 다니고 싶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실지로 우리 개척교회 초기 때 설교에 은혜를 받아서 등록했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설교 듣는 성도들을 보면서 은혜를 받고 등록한 사람도 있어요.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자기가 본 사람들하고 너무 틀리다는 거예요. 틀려야지만 그 사람들은 붙잡고 싶은 거예요. 이 세상에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것을 보여줄 때에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겉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두려움과 떨림을 함께 느끼는 거예요. 저 요동하지 않는 편안함,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무엇을 믿는지는 모르지만 저 말할 수 없는 평안, 그걸 보면서 주님을 믿게 되는 거예요. 그게 경건히 구속의 경륜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B. 경건과 교회 섬김
근데 더 큰 신비는 뭐냐 하면 이 경건히, 그래서 이 경건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경건만이 교회를 섬기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비밀이에요. 이 경건만이 교회를 참답게 섬기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여기에서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질서정연해요. 하나님의 계획이 처음 인간 안에 그런 경건히 있었죠. 타락과 함께 사라졌어요. 구원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이것들을 주셔요. 그런 경건히 있는 백성들을 함께 모아 교회를 이루셔요. 교회 그 자체가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진 또 다른 집단으로서 아주 뚜렷한 경건을 갖게 하심으로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백성들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구별된 백성이 되게 하세요. 구별된 백성.
그리고 그 백성들이 복음을 전하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으로써 많은 인류들에게 자기들이 만난 그 많은 인류들에게 자기들이 가진 것 같은 똑같은 경건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는 거예요. 방법이 뭐예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전함으로써 이것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아주 분명하게 전하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인간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자비하심을 경험하고, 경건히 심겨지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될 때 이러한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이러한 교회의 성장이 없이는 이러한 교회의 성장을 빼놓고는 교회의 영광을 이야기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교회의 영광스러운 번영이 없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다시 한번 할까요? 그렇게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발견하고, 그 성향을 받은 사람이 참다운 경건을 소유한 사람들이 교회에 접붙여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성장이라면 이런 성장이 없이는 교회의 번영이라고 하는 것이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속한 이 번영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번영이고 교회의 영광은 이 물질과 그리고 사물의 영광이 아니고 영적인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 스윈녹이라는 청교도는 소수의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단언했어요. 그러나 거기서 그 사람이 이야기할 때는 수만만이 모이면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된다. 그 뜻이 아니에요. 두 세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 십만 명이 예배를 드리는 중에 누가 영광을 받으시겠느냐 이렇게 질문을 하면 그거는 바보 같은 질문이죠. 당연히 그 십만 명 가운데는 안계시고 두 주님의 이름을 진실하게 찾는 두 세 사람 가운데 주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러나 똑같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경건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열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십만 명이 모여서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 거예요. 그거예요.
그런 교회의 번영을 통해서 그런 교회의 번영을 통해서 번영이 이루어질 때만이 그 교회의 성장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이바지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나를 포함해서 너무 가슴 아픈 얘기는 뭐냐 하면 이제는 이 신앙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해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그것을 보여줘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진노의 자녀이고 하나님과 원수된 네가 지은 그 모든 죄 때문에 순결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니 하나님은 그렇게 두려우신 분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기의 순결한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피로 죄 많은 너를 구하신 것은 너를 향한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이 시킨 것이다. 그 앞에서 확~
(찬양)“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그거를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매 순간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것을 끊임없이 회상하고 회고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분명히 하나님이 ‘너는 이방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할 나의 종이다’ 그러셨는데 그는 오히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 옛날에 주님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폭행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강포하던 인간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반성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며 두려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게 그게 경건이에요. 그게 경건히.
그런데 문제는 교회는 이 한편으로는 이 죄 많은 세상에 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상과 교회를 들락날락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세상에 속해 있고 한편으로는 교회에 속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일치한 마음으로 철저히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며 매순간 참회와 은혜 충만한 삶을 살면서 진리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좋을 텐데 모두 그러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교회는 교회 안에서 그렇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섬겨야 되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교회를 섬길 때 이 경건히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도 그렇게 오래 교회를 섬긴 거는 아니지만 보면 목회하려는 사람하고 평신도하고 만나서 악수하면서 ‘우리 교회 한번 잘해봅시다’ 이렇게 해서 끝까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난 본적이 거의 없어요. 그건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최근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을 읽으면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노센트 교회에서 첫 번째 부흥이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놀랍게 회심할 때 굉장히 많이 신뢰한 거예요, 사람들을. 근데 이게 한 1년 두고 보니까 이게 뭐 그렇게 놀랍게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 설교 들으면서 완전히 뒤집어진, 뭐 역사에 남는 부흥이었는데 얼마나 뒤집어졌겠어요? 그죠? 뭐 뒤집어져도 수없이 재주를 넘었겠지 그지, 엎었다 뒤집었다 뭐 수없이 빈대떡처럼 몇 번씩 뒤집어졌겠지. 그런데 변절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에드워즈가 그때 인간이 정말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을 쉽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거죠.
저도 교회를 하면서 뭐 초창기에 젊고 그랬으니까 뭐 실제로 은혜가 더 많아서라기보다도 젊고 그랬으니까 더 열렬하게 보였겠죠. 소리소리 지르고 잡아먹을 듯이 막 그랬으니까 싫다는 사람이야 발길로 차고 가지만 좋다는 사람이야 막 뒤집어지고 그러지 않겠어요? 얼마나 심각하게 뒤집어지는지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저 사람 정말 분명히 주님을 만났다, 뭐 아주 현저하게 틀려지니까 근데 그러면서 세월을 많이 두고 보니까 그런 사람들이 모두 회심해서 보여준 그 외형적인 나타남과 그의 신앙의 견고함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한쪽에서는 격렬하게 회개하는 게 다 가짜다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거기에는 많은 오해의 요소가 있고 과장된 요소가 또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말할 수 없이 진실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애에 한번 뒤집어지면 계속 뒤집어 있는 게 아니거든. 다시 또 똑바로 돌아오거든. 그래 또 뒤집어 놔야해요. 뒤집힌 채로 계속 있을래면 하나님께로 공급되는 끊임없는 은혜가 필요한 거예요. 자녀 회심한 사람들 보면 말이죠. 자기 자녀 회심했다고 ‘목사님 작년 회심 집회때 우리 딸이 주님을 만나고’ 이제부터 눈물의 기도가 시작이에요. 그거 회심 안했을 때는 회심하는 것만 놓고 기도하면 됐지만 이제는 은혜 안에 살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해요. 근데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은 기도만 해 줘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면서 기도를 해야지 응답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어려운 거죠.
거기에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 근데 거기에 필요한 게 뭐냐 하면 경건이라는 말이죠. 교회를 섬길 때에는 절대로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사랑, 하나님을 향한 방종한 애정의 감정, 이런 것들이 교회를 섬기는 동기가 되어서는 결국은 교회도 망가지고 자기도 망가지는 거죠. 그래서 교회를 섬길 때에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있어야 되요. 그래서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일군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 뭐냐 하면 진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경건한 사람이에요. 그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가 충돌을 일으킬 때 서슴지 않고 그 둘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어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고는 이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할 수 없다 생각될 경우에는 인간을 버리고 하나님을 붙드는 게 신앙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 왜 동의가 안 돼요? 그거거든요. 그렇죠? 그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항상 이 속에 있고, 그리고 자기 같은 인간을 그 십자가에서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는 아무리 많이 손해를 보고 고난을 받고 희생을 해도 I'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교회의 한 모퉁이를 섬기는 동안에 나는 덤으로 사는 인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고백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럼 그렇게 될 때 교회를 섬기면서 수많은 어려움들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수많은 어려움들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냥 육체적으로 못 먹고 못 입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쉬운 것이에요. 그런데 교회를 깊이 섬기면서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되요. 아마 여러분들이 구역장이라도 제대로 한번 해 보신 분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마 다 알거예요. 어느 구역장이 그래요.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면 핸드폰 보는 게 겁이 난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구역장님 오늘 저 못가거든요’. 이거 올까봐. 그게 그런 그리고 섬기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아주나, 알아주긴 뭘 알아줘요. 그렇게 진실하게 온 맘을 다해서 섬기는데 경건한 사람들은 그걸 알아요.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고 대적하는 감정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거기에서 끊임없는 고난이 있는 거예요. 그때에 그걸 무슨 힘으로 이길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슨 힘으로 이길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가만히 보면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섬기고 기둥처럼 일하는 사람들이 아주 거칠고 포악한 경우를 많이 봐요. 왜냐하면 일을 하면서 너무 힘드니까 짜증도 많이 나고 그러면서 사람 하나, 하나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들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마음속에서 경건히 식으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럼 만약에 참지 못하면 그 속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결국은 혈기로 죄를 짓게 되죠. 자기 힘으로 못하면 편들을 만들고 그리고 대적하고 맞서고 그리고 서로 웬수맺은 감정을 절대로 풀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지 않겠어요? 그렇게 살아가요.
그리고 만약에 견딘다고 하면 이게 경건으로 견디는 게 아니니까 이 속에서 한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는 거예요. 그런 괴로움들을 겪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런 해결을 어디에서 보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가 교회를 목회자로 섬기면서는 물론이고 성도로 섬기면서도 어떤 오해를 받고 괴로움을 당하고 물질적인 고통을 받고 어쨌든 괴로움과 고통을 당할 때 그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건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 괴로움과 고통이 들어올 때 이 사람이 그 십자가에 대한 끊임없는 경험 속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지 못하면 자기에게 오는 모든 고통 원인이 있거든요. 사람들을 통해서 오거든요. 그 사람이 그 모든 고통의 최종적인 원인인 것처럼 그를 미워하고 죄를 짓게 되어서 그 영향으로 인해서 자신의 경건히 또다시 파괴되어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고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많이 당하는 데도 여전히 그 십자가의 주님과 교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너무 괴롭고 견디기 힘든 모욕 혹은 수치, 고난, 박해, 핍박, 그리고 손해 이런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는데 오늘도 주님 앞에 매달리고 말씀을 탁 피는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보면서 확 무너지는 거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고난당하신 것을 보면서 내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교회를 섬기면서 마음으로, 삶으로 짓는 동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런 죄를 지으려고 하는 자신을 경계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의 큰 사랑을 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이 쓸모없는 인간을 향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내가 깊이 회개하며’
(찬양)“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내 평생 살리라”
그리고 깊이 깨뜨려지면서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 큰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복음 들고 사랑안고 찾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때에 그 고난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죽음이 나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죄짓고 싶은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용서하기 싫었던 인간들을 향해 품었던 악한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설움과 괴로움의 감정들, 억눌린 원한의 감정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러면서 자기가 다 용해되어서 십자가를 통해 쏟아지는 하나님의 큰 사랑 그 속으로 자기가 하나가 되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 은혜의 물에 떠밀려, 그 사랑의 흐름 속에 작은 파도의 입자 같은 존재가 되어서 그래서 주님이 나를 통해 부족하고 불완전한 이 지체들을 사랑하시고 교회를 온전케 하시는데 나의 희생을 사용하시도록 그렇게 자기를 철저하게 죽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속에 흘러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경건해지는 길이기도 하지만 경건히 그 속에 없으면 그게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죠. 저 인간이 나를 괴롭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하고 무슨 상관이냐, 저 새끼 죽여 버려야지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워요?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인간이 저마다 이 경건에서 떠나서 까불고 돌아가다가 마지막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 다시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게 되요. 그래서 다시 하나로 다시 묶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 쓸모 있었던 사람이 경건을 잃어버리고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슬픈 일도 있지만, 또 한쪽에서는 예전에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었는데 다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서 거기에서 자기 같은 인간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큰 은혜, 잊고 살았던 삼위 하나님의 그 눈물겨운 사랑, 죄 없는 그 분은 십자가에 못 박고 죄 있는 나는 오히려 살려주신 하나님의 그 뜨거운 핏빛 사랑을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다시한번 이 안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이끌림이 충만해져서 잠시 이 경건히 식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였던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찬양)“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그러면서 경건을 잃어버렸을 때는 내 슬픔, 내 고통, 나의 괴로움, 내가 입은 손해, 나의 갈등, 나의 이 깊은 시련 이런 것들만 눈에 들어왔었는데 눈을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그러면서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이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한 죽음이었고, 그래서 내가 사는 것도 주님의 은혜고 내가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라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고 그리고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저 지체도 이렇게 나를 위해서 죽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셔서 죽어주신 그 피로 사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 내가 확 무너지면서 무너진 나를 타고 흐르는 사랑의 물이 내가 원수처럼 생각했던 지체들에게까지 확 스며드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 그 인간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바쳐요. 그리고 그가 얼마나 내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지 그가 얼마나 신앙이 없는지를 이야기해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도 누구에게 그런 만족을 준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나를 깨뜨려지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참다운 경건은 이렇게 많은 비난과 오해, 원망 이런 것들이 자기에게 왔을 때 경건히 있으면 자기가 온 화살을 맞으면서도 여기에서 끝나는 거예요. 근데 이 경건히 없으면 이쪽에서 칼 맞으면 저 쪽에다가 활 쏘는 거예요. 맞은 사람 또 다른 사람에게 서로 활질을 하고, 칼질을 하면서 공동체가 막 상처를 받는데 그렇게 될 때마다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향한 현재적인 경험이 개개인 속에 살아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 안하죠. 여러분 상당히 자만하시는 거 아세요. 왜냐하면 공부도 교리도 교리도 배울 만큼 배우고 물론 여러분 가운데 소수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예요. 소수만을 두고. 죄와 은혜의 지배를 공부하는데 교수님들이 와서 그걸 갖고 우리가 공과공부를 한다고 그러니까 몇 사람이 안 믿어요. 신학교 학생들도 이걸 어렵다고 해서 못 읽는데 이걸 어떻게 공부 하냐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우리 교회에게는 이 책 덮어놓고 자기 구역원들에게 충분히 이 420페이지짜리 책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200명쯤 된다고 그랬어요. 진짜 200명 정도. 그러니까 대게 교리적으로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되는 거죠. 자부심도 있고. 그러고 뭐냐 하면 한번 주님을 만나서 확 뒤집어지는 경험도 했어요. 그게 단순한 신비주의의 경험이 아니라 복음의 맛을 봤다는 거예요. 자부심도 있어요. 자부심도 있어요. 심지어는 책 읽은 은혜를 못 받아도 옆에 있는 지체들이 은혜 받는 것도 자기 자부심이 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 교회에 있는 어떤 형제는 덜렁덜렁 그냥 다녔어요. 그래서 그냥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세례 문답에서 떨어뜨렸어요. 온 동네 다니면서 자기 세례 문답 떨어져서 세례 못 받았다고 친구들한테 자랑을 하는 거예요. 너네 교회 떨어뜨리는 거 있냐고 그것도 자부심이예요. 아니 실화야. 그렇게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더래요, 자기 떨어졌다고. 근데 그것도 경건에 도움이 안 돼요.
나는 전도사님이 오늘 이단에 대해서 특강하는 거 다 들었거든요. 제 방에서 TV를 통해서 들었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우리는 교리교육을 시켜야 된다 그거는 반만 맞는 거예요. 교리 많이 배웠어도 넘어가요. 그래서 이단과 교회의 관계의 역사를 펼쳐봐도 아주 재미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에서 이상하게 신비주의에 빠져 가지고 불 때러 다니는 무리들이 생겨나요. 정말 이상해요. 반대로 막 불 때는 교회에서 깊이 있는 설교를 그리워하면서 다니는 사람들이 또 나와요. 상대적이예요. 결국 내가 그 강의를 다 들으면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오늘 이번 수련회의 이 설교가 그 모든 이단 문제에 대한 답이에요. 진리를 통해서 확실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두려우심과 말할 수 없이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뭐라고 떠들어도 안가요.
요새 뭐 어디가면 금이빨 되는 데가 있다며, 그러면서 그게 진짜냐 그러는데 진짜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어 내가 금방에 물어보니까, 그 금은 돈도 안 나간대 이빨에 붙은 금은 돈도 안 쳐준대. 설령 그것이 진짜 금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뭐가 신기하냐 이거야. 구약에 보면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피 개구리, 이, 파리 막 이런 기적을 베풀었을 때 앞의 것들은 애굽의 술사들도 다 따라서 했어요. 근데 근원 자체가 틀린 거라는 거죠. 오히려 금이 되는 것을 보며 더 분노하고 가증스럽게 느껴야지, 그냥 막 했는데 뒤집어 보니까 맨 이빨이더라 에구 그냥 장난이구나 하면 되지만 진짜 금이 됐구나 하면 더 분노하고 더 가짜라고 하는 것을 더 확신할 수 있어야 되요. 그런 것에 미혹돼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바보예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경험이 내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결코 요동할 수가 없어요. 그게 요한복음 10장의 내용이 그거 아니에요.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고 그래서 그것 안에서 교회가 하나의 통을 이루는 거예요. 이러한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로 구속의 물줄기를 타서 이 경건히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백성들의 열매요 특징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들을 모두 해서 교회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게 하고 그 참다운 사랑 안에서 통일이 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교회를 섬기면서 겪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만남이 있으면 이것이 나를 끊임없이 경건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들어서 이 고통을 통하여 주께로 더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게 하시는 거예요.
근데 만약에 그런 주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그것은 끊임없는 고통과 상처로 남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를 믿었던 그가 목사든, 장로든, 평신도든, 남자든, 여자든, 부모든, 자식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엄위와 사랑을 발견하고 신자가 되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렇게 해서 교회 전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하나로 묶으셔서 그 진리와 사랑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그 교회를 하나로 묶는 거예요. 그래서 그 경건히 나 하나 사람의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그것을 공유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공동체적인 경건을 이루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적인 영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공동체적인 경건이라고 그래도 아무 문제 없어요. 경건 그 자체가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가는 것이에요. 아멘. 하나님을 섬겨가는 거예요. 나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눈이 열리는 것 같은 그런 신비한 경험을 했어요. 아 그렇구나,
(찬양)“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면 오늘 수련회의 모든 결론을 내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III. 결론 : 그리스도를 힘써 알자
결론은 뭐냐, 그리스도를 알자, 그리스도를 알되 힘써서 그리스도를 알자. 이미 그리스도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분의 이름은 비밀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이 지혜는 무한하고 그 사랑은 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일평생 그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찾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배우지만, 그러나 우리는 아침마다 일평생 몰랐던 새로운 진리의 빛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비취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의 모든 부요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교회에 필요한 모든 자원, 개인의 경건을 위해 필요한 모든 영적 자원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자원까지도 모든 것을 가지신 유일한 보고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예요. 그래서 그 분 안에 모든 부요한 것이 있는 거예요.
근데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을,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신비롭긴 하지만 그러나 가장 기본이 되는 이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무지하고 교회는 이것을 선포할 수 있는 절절한 십자가의 체험을 상실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조국의 교회의 모든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꿈꾸는 부흥은 이빨이 금으로 변하고 병자들이 일어나고 무슨 그런 종류의 부흥이 아니에요. 우리가 꿈꾸고 그리워하는 부흥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 모든 사람들 속에 폭풍처럼 다가가는 십자가의 부흥이에요.
사도 바울이 일평생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찾고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마지막 말년에 고백한 고백이 뭐였어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 싶다 그랬어요. 옥 속에 갇혀서 그걸 원했어요. 나는 목자로서 최근의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그것이 나의 모습의 그림자이겠지만 거울이겠지만, 이제 말씀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더 이상 핑계 댈 수도 없고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 처음의 뜨거움과 열심, 진지한 열정,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아주 추한 모습들을 발견해요. 그 그림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능력은 상실한 거예요. 모양은 워낙 주님을 확실하게 만났고 지식이 워낙 분명하기 때문에 이 껍질을 포기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미 이 마음속에는 실증과, 정신의 실증과 육체의 게으름 그리고 나태, 그리고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달콤한 미각의 상실, 그리고 의무에 대한 나태함, 분발하지 않는 침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으름,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아주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는 모습을 솔직히 느껴요.
나는 최근에 여러분들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탁월하게 좋다고 느끼지 않아요. 사람의 개인차는 물론 있지만 내 눈엔 전체적으로 들어오잖아요. 특히 오래전에 믿은 사람들 속에서 이런 것들을 발견해요. 원인이 뭔지 아세요? 오래 믿고 오래 말씀을 깨달은 사람 속에 살아남은 죄는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사람 속에 있는 죄보다 더 강력해서 그 수많은 눈물의 기도를 헤치고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그 많은 성경의 교리의 탐구 속에서 죽지 않고 견뎠어요. 펑펑 우는 십자가의 체험과 그리고 의무에 대한 명료한 인식 이런 속에서도 살아남았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내성을 가지고 있겠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결국은 경건의 모양은 남아있는데 능력은 사라지는 거예요. 경건의 능력이 사라지면 뭐가 없어지냐면 의무를 행하긴 행하는데 뜨거운 열정이 살아지는 거예요. 간절한 열정,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예전같이 영혼에 대한 타는 마음은 없는 거예요. 누구든지 올려놓으면 설교할 수 있고, 누구든지 구역식구를 데려다 놓으면 가르칠 수 있어요. 당구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그래도 몇 년을 다녔고 교리반을 하고 뭐 다 했는데 뭐 입을 열면 하다못해 허튼 소리를 해도 그거 몇 시간을 못 때우겠어요.
근데 뭐냐 하면 이 속에 있는 영혼을 향한 절절한 사랑,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쏟아지는 눈물과 마음에 녹아내림, 그리고 나는 죽고 사라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쓰러져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갈망, 내가 여기에 있는 것과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 사이에서 확인되는 나의 소명, 어떠한 사랑을 나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부인할 수 없는 선명한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 그리고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결단, 그리고 이 무한히 흐르는 이 끊없는 시간의 연속 속에서 나 같은 인간이 왜 태어나서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아름답게 보일지 이런 선명한 생각들이 사라져 가요. 그래서 모든 것들이 다 뒤범벅되어서 혼란스럽게 되요.
그 모든 희미해진 영적인 상태의 핵심, 그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 가지가 아니에요. 여러분들 속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 영적인 혼란과 혼동, 어두움과 그리고 번잡함 속에 있으면서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가슴 속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말해 보세요. 누구도 이 사실에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세상을 향하여 환난과 시련, 고난과 핍박, 그리고 많은 환경적인 괴로움 속에서도 꿋꿋이 강건하게 살아왔어요.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그 사랑을 생각하면서 교회 한 구석에서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길을 걸어가다가도 주님의 그 큰 사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생각할 때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죽으신 그 큰 사랑, 그런 착한 그 마음의 눈물이 사라지는 거예요. 은혜도 멀어진 거죠. 마음에 있는 자만 ‘아 복음 이제 내 손에 들어왔지, 그리스도 많이 알고 있지, 십자가 나처럼 많이 들은 사람이 있을려고, 아니’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일부인 부분이고 무한한 십자가의 찬란한 진리의 빛 중에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에요. 그 신자의 의무는, 아니 인간의 의무는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 앞에서 경건해지는 것이에요. 그게 인간의 의무의 다예요, 모든 것이. 그것이 없으면 참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닌 것이에요. 그 경건 안에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을 향해 친절하고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끊임없이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버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고난과 괴로움 속에서 그분의 고난을 생각하지만 그렇게 당신을 찾는 모든 신자들 안에는 그들 이외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경건의 비밀이 있어서 당신을 위하여 아파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큰 위로,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신비한 그 친절하심,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이 자기의 죄 때문인 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 십자가의 감사해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현재적인 기쁨이 있는 거예요. 아주 신령한 기쁨이에요. 그래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고 생각해요. 구원의 은혜를 주셨죠.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주셨죠. 붙잡고 살 수 있는 진리를 주셨죠. 은혜를 주셨죠. 섬길 수 있는 지체들을 주셨죠. 이제는 무엇만 하면 되요? 매일 매일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 그 은혜를 향한 감격이 우리의 마음에서 식지 않도록 그 십자가 아래서 날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나의 나된 것이 오직 그분의 희생이요, 그 분의 은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도록 내 눈을 열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더 많은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래서 주님을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알아가며 매일 매일의 삶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래서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매일 매일 살아가요. 꽃처럼 향기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잖아요. 꼭 붙들고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