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9.교역자 특강
질문 : 사랑이라는 용어가 세 개가 나오는데, 희랍어에는 5개 정도 나오는데, 아가페(agape), 까리따스(caritas), 딜리게레(diligere). 전체 아모르(amor)라는 단어를 쓰셨고, 그것에 대한 반응이 까리따스(caritas) 인데, 딜리게르와 까리따스(caritas), 까리따스(caritas)는 분명히 대상들 인간들 사이에서 까리따스(caritas)를 분명히 적용하는데, 용어들의 정확한 용매가 무엇인지 궁금하더라고요.
답
아모르(amor), 아가페(agape), 딜리게레(diligere) 이렇게 있었죠. 좋은 질문이에요. 아모르는 가장 넓은 형태의 사랑을 총체적으로 가리켜요. 그 다음에 딜리게레(diligere)는 인간이 인격체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요. 그 다음에 아가페(agape)는 하나님의 사랑이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agape)이고,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agape)의 사랑은 이렇게 삼위일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도록 이렇게 엑스트라라고 하죠. 외부 지향적이라고 번역하면 좋은데, 외부 지향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외부 지향적으로 흘러나와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 때에는 조건이 있는데 이게 뭐냐하면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에요. 인간이죠. 그 다음에 까리따스(caritas)는 여기에 있는 인간이 아가페(agape)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과 그 다음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까리따스(caritas)에요. 까리따스(caritas)는 이제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랑하는 것인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후행적 사랑이야. 후행적 사랑. 그래서 이것은 아가페(agape)는 하나님 안에서 자아 생산적 사랑인데, 자아 생산적 사랑인데 비해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은 후행적 사랑이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나오는 거야. 여기서 희랍어 성경에 보면 사실은 아가파오라고 하잖아요. 아가파오라는 말이 까리따스(caritas)라는 이런 것들이 없어.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형성해오는가 하면 까리따스(caritas)라는 이것이 결국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가 하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서도 나오지만, 중세에 형성된 사랑의 개념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작품속에서도 아가페(agape)도 까리따스(caritas)라 쓰고, 그 다음에 까리따스(caritas)도 까리따스(caritas)라 쓰고 이렇게 섞여서 사용이 돼요. 그래서 도덕적 통치인가 맨 앞에 보면, 그 하나님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영원한 사랑이여 할 때, ‘까리따스(caritas) 아르떼르 나이’ 라고 나오거든, 하나님의 사랑이 ‘아르데르 나’ 라고 나오거든,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까르따스라 묘사한다 이거죠. 그런데 후에 이러한 것들을 구분을 짓게 돼요. 이러한 것들을 왜 차용을 했는가 하면 굉장히 설명하기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 안에서 이 사랑이 결국은 인간이 선행하는,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데, 이 선행하는 하나님의 아가페(agape)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게 선행이에요. 선행했기 때문에 인간이 이제 이 사람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랑을 가지고, 그 다음에 이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랑을 하는데, 이게 하나님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여기에 있는 또 다른 타인들이에요. 타인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후행적인 사랑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 까리따스(caritas)의 대상이 인간뿐이냐. 인간뿐이냐 아니면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들 까지도 포함하는것이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그냥 보편적인 주장은 오늘 새벽에 설교했듯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그 다음에 자연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각각 디맨션 이 다르듯이 이 이러한 까르따스의 사랑을 갖게 될 때에 이모든 자연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영혼을 가진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률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그런 자비를 입는다 보는 거죠. 그런 정도로 봐요. 결국 후행하는 사랑이 돼요. 그게 무엇인가 하면 만약에 인간이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나름대로의 에로스의 사랑이 있잖아요. 이게 에로틱, 에로영화 그런거 할 때 에로가 아니라, 원래 여기에는 그러한 뜻이 없어요. 인간대 인간의 사랑이에요. 인 대 인의 사랑. 그러면 이게 결국은 타락한 인간이라도 이러한 에로스가 있는데 이 까르따스는 이러한 에로스와 아가페(agape)를 이렇게 지평통합을 이루는 개념이에요. 그러면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잘 들어봐요. 이렇게 되는 거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을 장소적으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잘 봐요.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하나님 홀로 이렇게 계셨을 때에는 그러면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잖아요. 영원속이잖아. 영원속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창조하시는 세계, 창조하시는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이것 자체가 결국은 무슨 세계인가 하면 감각 세계잖아. 감각 세계. 감각적인 세계잖아. 그러면 이러한 감각적인 세계가 지상 세계이고, 또 창조하셨는데 또 하나의 세계가 영적 세계잖아. 영적 세계. 그러면 잘봐요. 여기에 하나님의 존재가 있다고 할 때, 그러면 이 하나님이 계시는 이 영원과 이러한 차원과 그 다음에 영적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있는 세계의 디맨션 차원이 똑같을 수가 없잖아. 만약에 똑같지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여기에 천상의 세계에 만들어진 영적인 존재, 천사와 같은 존재들 사이에 구별이 없어지잖아.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 존재론적인 문제인데, 여기에 여기에 무엇 무엇이 있다. 이러한 것들까지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지마. 머리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이해만 하면 되고, 무엇 무엇이 있다고 하잖아. 그때 여기에 칼, 그 다음에 공기, 그 다음에 사랑, 이러한 주어가 들어간다고 치자 이거야. 그럴 때에 칼이 있다할 때에 공간과, 공기가 있다고 할 때에 생각하는 공간과 사랑이 있다고 생각할 때의 그 사랑이 있는 장소성, 이 모든 것들은 각각 다른 개념으로 다가오잖아. 이해 안돼? 이해 되죠?
그 다음에 그러면 여기를 C라고 본다 이거야. 그러면 결국은 이 세계도 창조할 때 이러한 감각적인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금 크기, 부피,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 하지만, 여기에 영적 존재가 있다고 하고 그 영적 존재는 피조물로서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면 결국은 무엇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있는 장소성, 장소성을 생각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있다고 할 때 하는 장소성과 다른 장소성이죠. 그러면 이제 이것은 너무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은 빼놓을게. A와 B는 빼놓고 C만 가지고 이야기할게. 우리 세계만 가지고. 그러면 결국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안한 담론 공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나오는 거야. 공간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흔히 공간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간이 이렇게 비어 있는 것이고 그 속에다가 하나님께서 공간을 만들어 놓고, 만물들을 창조한 것으로 생각되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고, 공간 그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데, 공간 그 자체가 하나님이 피조하신 것들로 꽉 차있기 때문에 그것이 감각적 특성을 지니기 위해서 공간속에 존재하는 거야.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하신 것들로 꽉 차여져 있는 것이 공간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달도 매달고, 별도 매달고, 그 다음에 칼도 만드시고 인간도 만드시고 이렇게 만드신 거지. 이렇게 A와 B사이에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도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이 각각 다른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준으로 볼 때 여기가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거야. 이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물로 꽉 찼고, 이 꽉 찬 창조물을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감각, 이것을 대상일반이라 하는데 크기, 색깔, 길이 등등 그러한 감각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인간의 감각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요소를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것을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하신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들 그 자체를 공간이라 부른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이렇게 공간을 만드시고 공간 안에 있는 이러한 것들이 존재할 때, 이것은 B의 존재방식과도 다르고, A의 존재방식과도 다른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돼잖아요. 좋은 얘기 생각이 났어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봅시다. 이렇게. 여기에서 이렇게 한 줄이 빛이 들어오잖아. 이게 프리즘이야. 이렇게 빛이 들어오면 여기서는 빛 자체가 보이지 않잖아. 색깔도 없고 빛깔도 없고 크기, 모양, 길이가 없으니까. 그런데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빛이 분광되잖아요. 이렇게. 이렇게 빛이 분광되면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이렇게 빛이 분광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해도 좋고,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좋겠지. 하나님의 속성이 이 피조세계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이 다른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가시적인 것은 관찰자가 둘인데, 뭐냐하면 피조물들 자신이 관찰자이고, 그 보다 더 우등하게는 하나님 자신이 관찰자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세계를 통해서, 이 두 피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 당신 자신을 보시며 즐거워 하는 거라 이거야.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공간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이 전달되는데 그 전달되는 방식이 뭐냐하면 관계에요. 관계 맺으심. 이것에 의해서 전달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언약관계 속으로 사람을 부르신 것은 당신 자신을 프리즘처럼 싹 통과해서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의 성품을 아주 찬란하게 보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 이거야. 물론 언약관계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인간들이나 모든 사물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인간을 통해서 그러한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시는 거지. 그런데 특별히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구속의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실 때에 그 타락한 인간의 구원계획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신적 작정이라고 하는 Divine Decree. 이것은 더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프리즘 역할을 하는 거야. 그 찬란한 빛이 아까 이야기 했듯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여준다 이거야. 그러면 더 연장해요. 이렇게 해서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좀더 확장할게. 여기에 있는 이러한 인간들이 이러한 구원하는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돼. 이렇게 알게 돼. 이렇게 이 사람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인간도 알게 되고, 저 인간도 알게 되고, 그 다음에 이 사람도 알게 되요. 이렇게 알게 될 때에 이 알게 되는 아가페(agape) 사랑에, 아가페(agape) 사랑을 받는 거 아니야, 그지. 이 사랑을 받으면 이 아가페(agape) 사랑은 반드시 후행하는 사랑을 뒤따르게 만들어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없는 거야. 이것이 첫 번째 회심이라 보는 거지. 왜냐하면 중생 그 자체가 두 가지 강력한 변화를 동반한다고 했죠. 시험좀 봅시다. 중생이 무엇을 동반한다고 했지? 두 개를, 두 가지 변화가 뭐야, 중생이 도입하는 두 가지 변화가 첫째 무슨 변화?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 하면 암기 안돼있는 지식은 끈 떨어진 가방이야.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항상 시간을 내서 암기를 해야 해. 뭐야 이게. 중생의 커다란 변화가 뭐야. 무슨론적 변화, 무슨론적 변화. 그렇게 두 개가 도입된다고 수없이 이야기 했잖아. 뭐야? 목사님 뭐야? 내가 아주 그냥 지루할 정도로 반복했어. 존재론적 변화, 어 이제 나오네. 그 다음이 뭐야, 이신론적 변화.. 강윤석 목사가 대답했는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대답해봐. 여기. 답을 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시 답을 안할꺼 아니야.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존재론적 변화가 뭐야. 중생과 함께 도입되는 존재론적 변화가 뭐야.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주도면밀하게 하나를 배우면 그렇게 의식없이 배운 9개보다 주도면밀하게 배운 한가지가 훨씬 더 나은 거야. 그러니까 돌이킴에서도 다 나오고, 수없이 설교한 것인데 존재론적 변화는 성향의 변화야. 왜냐하면 존재의 본질이 성향이기 때문에, 그러면 성향은 어떤 성향의 변화라는 거야? 순종은 사랑의 결과니까, 사랑이라는 성향이 생겨나니까 새롭게 생겨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방향을 바꾸는 거야.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사랑하던 인간이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 심겨지는 거야. 이것을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피직컬 오퍼레이션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물리적 작용이 아니라 힘적 작용이야. 힘적 작용. 영혼에 하나님이,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던 인간을 막 설득해 가지고 스스로 ‘야, 이래서 안되겠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돌이킨다고 보는 것은 펠라기우스나, 소키누스나 아니면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생각이에요. 인간에게는 자기를 돌이킬 수 있다는 능력이 없다고 보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던 인간을 하나님이 힘으로 이렇게 붙들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심어버리는 거야. 그게 중생의 가장 변화, 존재론적인 변화야. 그 다음에 이신론적 변화는 뭐냐 하면, 이것은 신미와 관계 있는 것인데, 이신론적 변화가 뭐라고 했어? 뭐라고?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되고 외워야돼. 그래서 임목사는 교역자 전체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방안을 살펴봐. 성도들은 물어보면 탁탁 대답하던데, 어떻게 할려고 해. 이게 뭐냐하면 아름다움과 관계되는 거야. 그래서 뭔가 하면 얘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중생과 함께 도입된 영혼의 기능의 변화로 말미암아서 보게 되는거야. 이 아름다움을 신미라고 이야기 하잖아.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만 꼼꼼히 들으면서 메모를 해도 좋단말야. 그래서 해서 노트를 하나 해서 쭉 정리를 해놔. 그러면 언제든지 그것을 가르칠 수 있잖아. 그래서 이 중요한 개념들을 머릿속에 암기해가지고 있을 때, 저쪽 설교할 때도 왔다갔다 하면서 왔다갔다 하면서 설교가 펼쳐지고, 가르침이 펼쳐지는 거야. 그래서 인식론적 변화가 일어나. 그래서 신미를 보게 되는 거야.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면, 관상한다는 말을 쓰기도 하고 잘 안 쓰는데, 하나님의 신미를 말하자면 알 수 있는 그러한 인식론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피조 모든 만물속에 묻어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신미를 반영하고 있겠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을 것 아니야, 왜냐하면 여기서도 교회가 이미타치오,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이라며. 그렇잖아. 진짜 용갈이는 못 가져도 용갈이 만든 인형을 가졌을 때 아이들이 그것을 보면서 판타치에서 본 용갈이를 생각을 하면서 기뻐하고 좋아하듯이 아바타를 보고 좋아하듯이 그러한 닮음이 있을거 아니야. 닮음. 그지? 그러면 그것들을 얘전에는 그것을 못 보던 사람들이 이렇게 됨으로써 이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단 말이야. 물론 얘전에도 희미하게는 있지. 그런데 이렇게 잘 봐요. 이렇게 자연 세계 속에 나와있는 이떠한 아름다움은 본거야.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산에 올라가서 “야, 진짜 좋다” 심지어 술 한잔 먹으면 “조물주가 참 허다하시구나” 이러한 생각을 하잖아. 그런데 문제는 궁극적인 원천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거야. 알 수가 없는 거야. 이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지. 있다고 보잖아. 원천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보는 거야. 그런데 이것을 귀납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역해 나오는 거야. 그래서 이 하나님을 만나고 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니까 그것들이 이렇게 흘러나와서 이렇게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런데 이 미의 본질이 질서란 말이야. 질서. 그래서 이것을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야. 자 그러면 어떻게 돼? 이렇게 되면 아가페(agape)의 사랑을 받았을 때, 그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피조물 가운데 가장 이 신미를 가장 아주 탁월하게 본뜨고 있는게 있어.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란 말이야. 인간 중에서도 인간 영혼안에 있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야.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닮아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에요. 감각적인 모든 것들보다도 천상과 지상을 통틀어서 하나님을 가장 닮은 이미타치오(Imitatio), 모상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거야. 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이유로 발견하게 될 때에 결국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이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선행하는 아가페(agape)의 사랑에 대해서 후행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까르따스(caritas)의 사랑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게 결국은 자기를 사랑해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온안에 있는 이마고 데이를 보면서 사랑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있는데 율법이 결국은 요체가 뭡니까 그랬더니 하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다 이거야. 이 자체가 뭐냐 하면 아가페(agape)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까르따스가 포괄해야 할 대상들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 거야. 이 안에 원수들도 들어있고, 친구들도 있고,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들어 있는 거야. 그러면 이렇게 사랑하게 될 때, 잘 들어봐요. 이렇게 사랑하게 되죠.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온전히 사랑을 받을 때에 이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게 되는 거야. 쉽게 이야기 하면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포기하는 거야. 그것은 결국 행복해 질 수 없어.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아가페(agape)의 사랑이 반응으로서의 까르따스의 사랑을 통해서 바깥으로 분출해 나가는데 최대의 방해가 되는 것이 결국은 자기애 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야. 물론 이것은 부당한 자기애. 부당한 자기애 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야. 결국 참다운 자기애는 휴머니즘과 기독교의 관계와 똑같이 참다운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때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며, 자기를 진정으로 미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러한 연결들이 이루어지게 되잖아. 그럴 때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그려 놓으면, 사람이 공간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와서 그래서 사람들 속에 회귀하여서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거야. 이것이 이 개념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회귀적 사랑이다라는 의미에요. 전 우주를 휘돌아서 하나님 당신자신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때에 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살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자원들을 이 사람에게 주시잖아. 영적인 차원에서도 자원을 주시고, 육적인 차원에서도 자원을 주시잖아. 그러면 이러한 자원들이 사랑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 받은 바 자원 그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죄와 결국은 인간의 불행과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라고 하는 그것 자체가 자원의 부족 때문에 오는 거잖아. 그것들을 펼쳐 나가는 역할을 하는데, 그게 이 두 자원 모두가 같이 그러한 일들을 한다 이거야. 우리는 이제 한쪽으로만 치우치기 쉽잖아. 그래서 흘러나가면서 자기를 최종적 소비의 터미널로 삼지 않는거야.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그렇게 됨으로써 레카프탈레치오 교리에서 이야기 했던 인류 전체를 하나님이 맨 처음에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라고 하는 고백을 가능하게 했던 그러한 사랑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일체된 한 몸으로서의 인류를 창조하셨던 계획이 이러한 식으로 구속사 안에서 성취되는 거라는 말이야. 그래서 큰 얼개를 가지고 보면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얼개가 안들어오면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거죠.
자, 질문있어요?
질문: 결국에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창조했는데, 창조한 인간이 타락해서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셔서 모든 것들이 더 확장되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이제 전체적인 것은 다 이해가 되었는데, 거기에서의 그 구속을 이루는데, 구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어떻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분출하는데, 회복된 인간으로 분출하는데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답
지난번에도 다 다뤘지. 그 문제는 잘 체계적으로 잘 다룬 것이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라고 하는 사경회때 한 거예요.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이것이 사실은 지금 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인간에게 베풀어 줘도, 인간이 그것에 대해서 반응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에 이렇게 서 계신데, 십자가라고 보면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 그 다음에 죄에 대하여 차마 보지 못하는 공의, 이것을 합하여 우리는 거룩함이라 이야기 할 수 있잖아. 하나님의 이 거룩함이 인간에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렇게 제시된 것이 바로 'incanation'이야.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핵심적인 것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대게 몇 가지로 이야기하지? 그리스도의 성육신한 이유를 이야기 해봐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죠? 수 없이 이야기 했는데, 첫째,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거야.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면 죽으실 수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첫 번째야. 두 번째가 뭐지? 모본을 위해서 오신 거지. 수없이 이야기 나온 거잖아. 모본을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내려오신 거잖아.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목적으로까지 이야기하기엔 희미하긴 하지만, 그 성육신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인성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 대해서 누리게 된 중요한 지식적인 유익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다고 했지? 순종을 배웠단 말이야. 이것을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이 어려웠다고 이야기하는데, 지난번에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있잖아. 그것을 꼼꼼히 공부를 해야 돼. 그래서 진짜 열심히 공부해야 해. 다 만들어서 줬는데, 여러분들 하기 싫어도 여러분들 양떼들 위해서 해야지. 어떻게 할려고 그래?
순종을 이야기 했는데, 순종을 배웠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지난번에도 이야기 했는데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나오고, 배웠다고 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결함이 있었다거나 순종안하려 했는데 점점 순종하게 됐다고 하는 그런 뜻이라기 보다, 실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셨기 때문에 그렇게보면 예수님도 모르는 것이 있으셨잖아. 도성인신한 기간동안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렇게 될 때에 결국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도 새로운 사실로 체득해 나아가셨던 거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체율이 훨씬 더 깊어졌다고 보는 거야. 긍휼이 깊어졌다고 보는 거야. 대게의 경우 두 가지를 보는 거죠. 그래서 가장 중심이 십자가 사건이야. 인간에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두 가지 요소가 나온다 했잖아.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는 두 가지 요소, 그래서 여기서 경건이 생긴다고 했잖아. ‘삐에따스’가. 그 경건이 생겨나게 하는 그 요소가 뭐라는 거야. 이것을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에서 다뤘잖아.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이거야. 그래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이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삐에따스(pietas)의 시초라 이거야. 경건. 이 경건이 심겨진다는 말과, 신애가 심겨진다는 말과, 아까 이야기한 존재론적인 변화와 다 같은 이야기란 말이야. 이게 경건이 바로 이거야.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그것을 이렇게 보여주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죽으셔서 결국은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영생의 관계로 우리를 도입하시고, 모본을 보이시는데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찬란하게 보이도록 인간에게 현시되었다 보는 거죠. 그래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구약은 음성만 나오는 거였는데, 신약에서 칼라 영화가 나오면서 그 밑에 자막까지 달리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도성인신이다 말했잖아. 그래서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뛰어 넘어서 다른 사물들을 일반 섭리하시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봐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서 봐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핑계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죄인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다. 이렇게 설명했잖아. 그래서 하나 하나의 시리즈들이 벽돌처럼 다 연결이 되니까 공부를 해. 아무래도 안되겠다. 대책을 세워야지.
그 다음에 이야기 할게. 그러면 이 설명은 끝났고, 여기에서 이제 영생의 개념이 나와요. 이것도 사실은 설명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것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하겠습니다.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디를 보냐 하면, 제일 먼저 인간으로서의 신자의 삶 제목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신자의 삶, 그 다음에 인간의 의무를 기억함, 알아감, 사랑함, 그 다음에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이제 26페이지로 넘어가게 되면, 우리가 분열된 복음주의가 아니라 26페이지로 가보면 이 목사 읽어봐.
26페이지
인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과 그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대상을 나뉘는 것이지, 인간이 참으로 즐거워해야 할 대상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사물들이 아니라, 영원히 있으며 불변하며 완전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 이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원래는 없었으나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죽고 소멸하여 걸국 무無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것을 즐거워하고자 하는 인간은 항상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상실하게 되므로 끊임없는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용해야 할 대상이어야 합니다. 혹시 사랑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즐거워하는 데 기여하는 한도 안에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의 질서가 전복된 것은 악입니다.
즐거원하다 그러잖아요. 이것을 향유라는 말로 써요. 그런데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진정으로 최종적으로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는데, 향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쓰는 향유와 다른 거예요. 향유의 개념을 누가 이야기 해볼 수 있는 사람, 사람이 어떤 것을 사랑할 때, 이것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을 얻기 위한 또 다른 목적일 때, 요 B는 프로이의 대상이 되죠. 이 위기는 더 이상 없어. 그럴 때 프로이 한다고 이야기 하고, 사랑하는 것, 누리는 것, 요거는 프로이. 그리고 이거는 뭐냐 하면 모텐디라고 이야기 해. 사용한다. 내가 늘 쓰던 말이 그거잖아. 형제가 자매에게, 야 나 너 너무 사랑해, 정말? , 너무 사랑해, 죽을 때까지 사랑할꺼야,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니네 아버지가 부자잖아. 라고 하면 안된다고 몇 번 설명했잖아. 그러면 이 자매가 여기에 있는 거고, 얘네 아버지의 돈이 여기에 있는 거야. 엄격하게 따지면 돈도 여기에 있는 거지, 궁극적으로. 이렇게 계속 올라가면 마지막에는 결국 자기 Sefl 의 문제로 가는 거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자기의 모든 죄가 결국은 아모르수이 자기 사랑으로 보는 거야. 그렇게 보게 되는 거잖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즐거워한다, 누린다, 향유한다 같은 말인데, 이것은 뭐냐하면 그것을 사랑하는 더 이상의 이유가 없는 최종적인 사랑. 그것을 누림(frui)이라 이야기하고, 그것이 잘들어요.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가치의 질서와 그 다음에 사랑 질서가 인간에게 있어서 일치를 이루게 될 때에 그때 인간이 행복해 지게 되는거라 이거야. 그런데 대부분 어떻게 돼? 가치가 점복되잖아. 그래서 어떻게 돼? 여기에 인간이 있어. 여기에서 어떠한 이런 물질을 사랑한다고 치자 이거야. 그래서 굉장히 강력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 사랑이라는 특성 자체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거야. 그지? 그런데 이것을 T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없다가 존재하게 된 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변해. 결국은 다시 없는 것으로 사라지는 거야. 결국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러면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거란 말이야. 이때 인간은 결국 사랑하는 이것이 진정으로 유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현재 있다고 하더라도 이 개념에서 있는데, 계속해서 이것이 변전하게 되는 거야. 변전하게 돼서 이것이 무로 돌아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거지. 시작이 무였고, 마지막 돌아가는 것도 무인 것, 결국은 지금 있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돌아가는 것이 무인 것은 성경의 판단으로 보면 무라 이거야.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허무요, 악이 되는 거란 말이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그런 말을 하죠.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것이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닌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마지막 그때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뭐야? 하나님이잖아. 하나님은 영원히 계속 계셨고, 언제든지 유가 아니신적이 없는 거야. 항상 유이신 분이에요. 그런데 사랑 자체가 이렇게 영원의 특성이에요. 영원 그 자체가 사랑이에요. 그 문제를 어디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는가 보면, <도덕적 통치>에서 보면, 영원과 사랑이라는 문제를 시간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다루었잖아.
공부해야지. 공부해서 남줘? 여러분 나중에 목회 할텐데,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야. 그래서 강단에 올라가서 어떠한 설명을 했을 때, 설교할 내용만 아는 것은 아는게 아니야. 항상 이렇게 되어야 해. 이게 설교해야 될 내용이에요. 그때에 이것이 확신이 있고, 힘찰 수 있는거예요. 그렇게 해야지.
이렇게 영원속에 있는 것이 사랑인데, 결국 이러한 사랑이 어울리는 것은 신, 하나님 밖에 없는 거지. 이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지복이시잖아.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들만이 이 복에 참여하고 복의 효과를 누리게 되는 거지. 이 복은 세상의 복과는 달라서 많이 누릴 때 후유증이 생긴다든지, 문제가 생겨나는 그런게 아니라 이거야. 그래서 인간을 너무 사랑하는 것도 안 좋은 거지. 사랑하는 여자하고 다 죽어가는데 결혼해서, 영화배우와 결혼했잖아. 그것이 아름다워 보이긴 하지만, 그것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허무한거야. 인간에게 그렇게 메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자기 엄마가 죽었을 때 통탄하면서 ‘인간의 일이 이가지도 나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심히 못마땅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통탄하는 장면이 나오잖아.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된다 이거지.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된단 말이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를 ‘사랑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고, 사실은 이게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해해야 할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느 거예요.
그러면 이제 영생이란, 그래서 결국은 사랑해야 할 사물, 사물이라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까지 다 들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생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존재에 대한 대치어로 보면 돼.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하나님 의존적으로 만들어 졌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인간이 육체는 땅으로부터 자원을 공급 받고, 그것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인데, 그것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내려주시는 거야. 그런데 이제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자원에 의해, 하늘 자원에 의해서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건데, 이것은 간적접인 방식으로 주워지고, 섭리 속에서. 이것들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워지는 거예요. 하늘에서 식탁이 메달려서 내려오는 것은 아니잖아. 가서 벌어서 사먹어야 하고, 구제해서 먹어야 되고 그러는 것이니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게 육적인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방법인데, 이것은 직접 하나님이 주시는 거란 말이야. 사람을 통해 주신다고 할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거라 이거야. Spiritual Blessing 이라고 이야기 하잖아.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하늘 자원이 끊어졌던 인간이 이것을 다시 회복하는 사건이 이게 결국은 말하자면, 구원을 얻는 사건이라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영생의 개념을 여기에서 몇 가지로 설명하는데, 고유한 의미에서는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키는 거고, 그렇게 보는데, 사실은 그렇게 보면 버림받은 사람도 영원히 사는 거잖아. 존재 자체가 소멸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보는 거고. 그런데 이것이 이제 3가지로 내가 이야기 했는데, 둘이네. 적용한 의미는 결국은 삼위와의 교통을 통한 거지.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 영적 교통을 통해서 이제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 영원을 하나님이 심어주신 거죠. 이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거죠. 진리를 통해서, 진리를 사용해서 은혜로 나타나는 거죠.
여기에서 계속해서 솟아나는 것이 뭐냐하면 사랑이야. 사랑. 이 사랑이 결국은 까르따스(caritas)의 사랑이야. 까르따스(caritas)의 사랑이 바로 은혜의 결과야. 이 사랑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은혜의 정의가 뭐야. 은혜라 그럴 때 신학적으로 몇 카테고리가 있다고 했어? 카테고리가 뭐야? 첫째는 뭐냐하면, 값없이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를 가리켜서 은혜라 이야기했잖아. 객관적인 개념이지.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구원의 방도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 자체를 은혜라고 부르는 거야.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하면, 주관적인 의미에서 부르는 게 있는데, 그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를 실행하도록 하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란 말이야. 하나님 사랑의 감화가 지향하는 바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지향하는 점을 놓쳐 버리면 이게 자기 만족적 신앙이 되어 버리는 거야.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장 31절에서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결국 뭐야? 의무로 돌아가게 하는 거야. 의무. 하나님의 사랑을 의무와 항상 밀접하게 연관시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인간안에 경험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경험은 인간을 의무로 돌아가게 해서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자체를 이루어가는 것에 이바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야. 여기서 공급을 받는 거지.
그래서 이제 이 영생은 원래 하나님 안에 있는 거잖아. 그죠? 하나님 안에.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이시니까,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인데,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없는 거야. 만약에 이러한 영원한 생명이 구원받은 인간에게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덕 입은, 하나님이 주신 그 자체가 영원적 성질이라기 보다는 인간과 계속 관계를 맺으심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덕 입힘으로 그 사람이 이러한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게 되는 거야. 그래서 이러한 영원한 생명이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데, 이 영원한 사랑이 사람 누구에게나 있지만, 이것이 번성하게 된 상태, 쇄약하게 된 상태, 이러한 많은 등급들이 나타나게 되는 거야. 이것을 청교도 신학자들이 ‘Degree of Grace'라고 설명했던 거야. ’은혜의 등급‘을 이야기 한 거야. 목회의 목표는 이 은혜의 등급을 최상으로 끌어 올리게 하는 거야. 그래서 이 은혜의 등급이 최상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데, 이것은 은혜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함께 성장하는 거야. 은혜와 지식, 두 가지가 알레데이아(aletheia), 카리스(charis) 두 가지의 성장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 실질적인 성장이라 이거야. 그렇게 하면서 이렇게 성장하며 나아가는 거야. 그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거야. 그래서 이름을 잊어 버렸는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인데, 그 사람이 이렇게 봤어요. 그리스도의 지체가 누구냐 볼 때에, 첫째는 뭐냐하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진실하게 중생한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적이다. 그러면 상태가 나쁜 사람들은 제외된단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이 은혜가 떨어져서, 은혜의 세계가 허물어 졌을 때, 사랑의 질서가 허물어 졌을 때 실제로 그 사람이 교회에 달라붙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이바지 하느냐, 이바지를 못한다 이거야. 그래서 상태가 나쁜 사람은 실제로 도움이 안된다는 거지.
군인이 군대를 갔는데, 치질에 걸리고 류마티스가 걸리고 못움직인다 이거야. 군대 숫자에는 인원이 들어갔는데 전쟁에 내보낼 수가 없는 거야. 침대에 누워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것은 전투병의 숫자에서 빼버려야 하는 거야.
그러면 목회는 결국은 이러한 원리적으로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이렇게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계획을 사랑의 확장을 통해서 이렇게 뻗어 나갈 수 있는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전달자들을, 진리와 사랑의 전달자들을 만들어 내어서 결국은 궁극적으로 교회가 확장되어가는 데에 이바지하는 이러한 전투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이게 목회의 판도를 보여주는 거야. 그것을 위해서 온전함에 이루도록 더 많이 희생하고 수고하여야 할 그러한 인간의 본분을 보여주는 거란 말이야.
자, 10페이지를 보면, 앞에 나오는 내용들은 다 읽으면 되는 내용들이고요, 그 다음에 10페이지에 보면, 첫째로는 둘째로 다 이해되는 것이고, 까리따스(caritas)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 말로 지순애至純礙 이렇게 옮깁니다. 그 다음에 사랑의 교통, 이것도 이해되고, 그 다음에 ‘totus Christus’의 개념이 나오죠. 이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정립한 교리인데, 영어로는 Whole Christ라고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아니 교회는 참되게 회심해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잖아. 그것을 성찬을 베푼다든지 그리스도의 참된 몸을 규정할 때에는 그러한 것들을 칼같이 나눠야 하지만, 실제의 영혼을 돌보고 섬기는데 있어서는 유형 교회안에 들어와 있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잠정적으로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보고 그리고 섬겨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totus Christus’의 교리에요. 이러한 것들이 바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으로 가능하게 되죠. 그래서 이것을 삼중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교회와 신자의 연합, 신자와 신자의 연합 차원에서 살펴본다는 이야기이고, 그 다음에 쭉 내려가서 6번에 가면, 신자의 성화에 대한 이해, 이게 그 칼빈의 사상에서 많이 언급되는 것인데,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아까 강윤석 목사도 이야기 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10페이지 위에서 셋째 줄 보면, [그때까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교회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들로서 살아갑니다. 그들의 중생도, 성화도, 섬김도, 영광도 모두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의 것으로서 삼위 하나님께 봉헌됩니다.] 라고 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서 하나님께 봉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자의 개인적인 성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성화다 이렇게 봐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온전히 성화되면 공동체적 지평 속에서 성례전적으로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것이 된다는 것이에요. 이해되죠?
그 다음에 이제 삼위 안에 있는 사랑으로 들어가면, 사실 여기에서 나오는 12, 13, 14, 15, 16, 17페이지부터 시작해서 그 18페이지 C번의 바로 위까지는 사실은 개혁주의자들은 사실 이러한 논의들을 잘 안합니다. 그리고 이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가운데도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논의들을 하는데, 왜냐하면 이 논의 자체가 이제 형의 상학적이고, 그래서 관심사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계속 관심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여기에 그 이제 하나님이 계시잖아, 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설명한대로 이제 당신 자신의 존재와 당신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데, 그게 하나는 천상의 세계를 통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드러 내시고, 이제 지상 세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데, 각각 다른 차원으로 드러내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나타나는 아름다움도 종류가 다르겠죠.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얼굴 이쁜 사람을 봤을 때에 기분이 좋잖아. 그러한 사람을 봤을 때에 기분이 좋은 느낌이 드는 것과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을 봤을 때에 기분 좋음이 느끼는 것은 똑같은 좋음인데 다른 차원의 행복감을 우리에게 주잖아. 이해 돼죠? 그러한 것처럼 만약 그 사람이 얼굴도 예쁜데, 성질이 거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쁜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강하게 끌림을 갖게 되잖아. 그렇듯이 각각 다른 것들이 이렇게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매개적 수단이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지금 인간은 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이렇게 있잖아.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러한 영원에 속한 하나님이 영원에 속한 이 하나님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도록 들어오는 것은, 가시적인 세계에 들어왔을 때에 인간에게 이해가 된다 이거죠. 그래서 여기는 이렇게 모르는 거예요. 건너뛰고 여기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나 또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이 하나님의 어떠하신 성품을 관계 맺으심 속에서 그 관계 맺은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대하시는 방식과 태도를 보면서 추측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라 이거죠.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서 논의를 막하면서 번쇄적으로 가던 중세철학에서는 여기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거든. 이 부분을. 왜냐하면 B라고 하는 부분은 A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까 프리즘의 예를 들었지만, 이렇게 프리즘의 예를 들었지만 이것들은 사실은 본질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사실 말은 맞잖아요. 빨, 주, 노, 초, 파, 남, 보 현란하게 춤을 추지만, 사실 이것은 여기에 있는 빛의 요소는 아니잖아. 프리즘을 통과했기 때문에 파장이 생겨난거죠. 그렇죠? 사실은 이것은 본질이 아니야, 이것이 본질이잖아. 이것을 여기에서 훨씬 더 관심을 갖는 거야. 담론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될 때에 이것은 굉장히 철학으로 기울여질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것이 너무 번쇄적으로 치우쳤다고 보고, 여기는 거의 거론을 안합니다. 기독교 강령에 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담론이 안 나와요. 삼위일체에 대한 담론이 안나와요. 그래서 멀러 교수와 같은 분이 이야기 하기로는 자기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체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들이 나올 때에는 이단들을 이야기 할 때에 그것은 틀렸다고 이야기할 때에 삼위일체가 나오지, 조직적으로 삼위일체를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세워서 나오는 교리는 없다. 그렇게 이제 그러한 것은 없다고 보는 거죠. 이유는 중세의 카톨릭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과 대동소이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 가면서 조정이 되면서 여기를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잃어나기는 해요. 보완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그렇지만 나는 이제 이렇게 생각합니다. 뭐냐하면 믿음으로써 이렇게 보는 거예요. 중세에서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면, 잘들어요. 하나님을 만나면 믿음의 빛 아래서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날로기아 피데(analogia fide)야.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지?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 존재의 유비지, 존재의 유비가 뭐야 임 목사,
우리의 존재를 근거로 해서 그 이전에 제 일의 원인자를 찾는다든지, 조물주를 찾는다든지...
내가 잊혀지지 않는 예를 들어줄게. 이렇게 생각하면 돼. 우리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나?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잖아.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는 안 보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 아버지가 있잖아.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야. 여기에 이렇게 수염이 나있는 아버지가 이렇게 있어. 아버지의 모습이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을 거잖아. 여기는 삶의 태도라든지, 성품이라든지 다 있잖아. 이렇게 해서 어떻게 보는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보고, 사람 아버지야. 그지? 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는 몰라, 이게 만난 적이 없으니까 모르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여기에서 사람 아버지가 있는데 잘 들어요. 사람 아버지가 있는데, 아버지가 술을 먹고 가끔 애들을 패, 그러면 그것은 참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잖아. 그지? 그럼 떼어내. 아버지면 돈 좀 벌어서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는데, 능력이 없어. 무능해. 그것은 아니잖아. 어쨌든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못 채워주신다고 한다면 아니잖아. 그래서 또 떼어내. 아버지가 늘 실수를 해, 그렇다면 이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떼어내. 방탕해, 이것도 떼어내 이렇게해서 계속 떼어나가면 어떠한 아버지로서는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참된 아버지 상이 나올 것 아냐. 그렇게 상정할 수 있잖아. 유한하지만 상정할 수 있잖아. 이렇게 해내면 이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거야. 이게 바로 존재의 유비야. 무조건 여기서 뭐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아닌 것을, 부정의 방식이야. 부정의 방식으로 아닌 것들을 다 사상해 내면 이렇게 아버지를 유추해 나갈 수 있다는 거야. 그게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야. 그러한 점에서 이런 것들은 이렇게 이것들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면, 결국 뭐냐하면 자연 신학의 존재를 폭 넓게 인정하게 된다 이거지. 인간의 이성이 충분히 발휘되면 여기에서 점프에서 알게 되는 것은 뭐를 통해서 알게되는거야? 계시와 신앙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인데, 이게 뭐야, 이성과 추론을 통해서 알게 되는거야. 이것이 이것을 충분히 대치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머리 나쁜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필요하고, 머리 좋은 사람들에게는 이성이 충분하면 된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것들은 이러한 이론들은 뭐를 간과한거냐 하면, 어떤 영적인 특성들, 믿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특성들을 무시 한거예요. 그러한 것을 존오웬 같은 사람,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신앙론에서 아주 유능하게 공격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러한 사상은 루터 사상을 본받은 거예요. 루터가 뭐냐하면 선행은 우리의 영혼을 바꿔 놓지 못하지만,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본질적으로 변화 시킵니다. 그게 이신칭의이니까. 우리의 영혼안에 아까 이야기한 그러한 성향을 이러한 성향을 도입하는 거야. 본질적인 변화를 도입하는 거야.
<질문> 아날로기아(analogia)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면, 그 쪽에 대한 어떤 우려가 생기는데요. 신의 속성도 기쁨이나 슬픔이나 즐거움이나 분노나 이러한 것은 원래 없는데, 인간의 편에서 유비로 표현하다 보니까 웨스트민스터 신학문서 신의 속성에서 무정을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원래 없는 것인데 하나님에게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표현하다 보니까 유비로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고,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도 유비로써 상정을 하고 살펴가야 한다고 한다면, 객관적인 계시 자체가 하나의 유비로써 남을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커다란 우려가 생겨나거든요. 역사 위에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받지 않고 인간의 유한한 인식이 있다라고 하는 근거 하에 유비로써 모든 것을 다 해석을 해낸다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시자체가 굉장히 커다란 위협을 받지 않을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수도 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어커머데이션(acomodation)에 대한 문제인데, 이게 결국 뭐냐하면 그렇게 따지면,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안되는게 뭐냐하면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은 완전하고 불변하고 그 다음에 영원하시잖아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 했듯이 아파데(afade)한 분이라 이거야, 그래서 결국 파데(fade)되지 않아. 그래서 스스로 분노하시지도 않고, 뭐 그 도덕적 통치에서 이야기, 정동되는 분이 아니다 이거야. 정동되는 분이 아니라고 봐야 되는 거야. 그래서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에 있는 이 인간이 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결국은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이 안에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야.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든, 창조든, 뭐든지 간에 전부다 다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거니까,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시간과 공간을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이거야. 그리고 이것은 아파데(afade)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할 때, 시간과 공간안에 존재할 때 하나님은 여기에서 당신 자신이 진노하시는 분으로도 나타나고, 기뻐하시는 분으로도 나타나고, 그 다음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정동된 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야. 인간에 느껴지게 되는 거죠. 정동이 있으신 분으로서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야. 이 범위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뿐이야. 그러니까 이러한 범위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 뿐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이 영원하고 불변하고 완전하신 분이시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속에 계시되어 나타나실 때에는 진노하고, 기뻐하고, 정동이 있으신 분으로 나타나느냐, 이것을 어커머데이션(acomodation)이라고 보는 거야. 이것을 인간에게 맞추어 주시는 거야. 맞춤이라는 뜻인데 인간에 맞추어 주시는 거야.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맞추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거지. 우리가 그러한 속에서 각종 계시들을 주어지게 되는거지. 진노만 하더라도 진노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잖아. 질투같은 것도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잖아.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이시다 이러한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도 논쟁들이 많이 일어나요. 결국은 에오노미아와 같은 사람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이었는데, 이게 하나님은 ~이다 하면 안된다 이거지. 이것 자체는 오이코노미아(Oikonia)의 언어이지, 데올로기아(theologia)의 언어가 아니다 이거야.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속의 섭리의 이야기이지 이렇게 하면 안된다 이거야. 이제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사랑안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보는 거죠. 그래서 존재 자체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렇게 보고, 다만 그러한 사랑이 시공간 안에서 나타났을 때, 그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서 이 사랑은 질투라는 국면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기쁨이라는 국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거죠.
<질문> 저것은 연역적인 방법인데, 계시 자체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간다는 측면에서 볼 때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제한적이지 않을까요? 제한적이고 왜곡될 수 있고, 그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요?
그러니까 아까 설명하다 만게 이거잖아.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찾아갈수 있다라고 보는 것이 존재의 유비인데, 개혁파 신학에서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이거야. 이렇게 못 쫓아가게 된다는 거야. 이렇게 가게 되지, 이렇게 못 쫓아 간다 이거야. 왜냐하면 이것들을 유추해내는 과정 자체를 우리가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해서 도달하게 되는 것을 못본다 이거야. 결국 아날로기아 피데(analogia fide)에다가 나오는데,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고, 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받아들이게 될 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속에서 하나님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아까 이야기 한게 뭐냐하면, 계시 얘기가 나왔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만 만나고 나면 모든 것들은 인간이 각자 해석할 때, 사물들을 해석해서 올바르게 하나님과 질서속에 정의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것도 믿지 않는거야. 왜냐하면 이 사람 자신이 순수 객관의 상태가 아니라 이 안에 있는 수많은 월드뷰(world view)라든지, 세계관이라든지 왜곡된 인간의 지성이라든지 아집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수 없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올바른 질서를 지을 수 없다라고 보는 거야.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이렇게 계시의 도움을 받는 거지. 그래서 움직일 수 없도록 이 계시는 명제로 작용을 하고, 나머지 부분들이 이성적인 추론에 의해 채워져 갈 때, 이것이 하나의 사상의 얼개를 형성하게 된다고 보는 거예요.
<질문> 목사님, 저게 지금 한 명이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거잖아요. 그러한 점에서 거듭난 사람과 비거듭나는 사람의 차이점들과,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이것은 올라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실 때에 믿는 사람이 아니면 못가는거야. 그러니까 신앙의 유비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신앙이 아니면 이렇게 못되는 거지.
<질문> 저희가 이제 부교역자들과 논의한 것이었는데요, 구조와 방향에 있어서 죄가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창조하신 창조물들, 도덕적 피조물들 통상 개념 안에서 구조 자체가 철학 안에서는 무너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기독교 철학 안에서는. 신학안에서는 구조 자체까지도.
<김남준 목사님> 무슨 구조? 무슨 구조?
<질문> 하나님의 형상, 창조 세계의 질서와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죄가 들어왔을 때...
<김남준 목사님> 이렇은 그렇게 생각하면 되요. 핑계할 수 없을 만큼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을 만큼은 명백하게, 계시를 믿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하지는 않게, 이렇게 주어지는 거야.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이거야, 머리에 담아둬. 하나님이 안계시다, 이렇게는 절대로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그러나 계시와 신앙이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는 분명하지 않도록 불명하게 주어지는 거야. 한계를 정확하게 쭉 거야 되요.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그 다음에 계시와 신앙이 필요없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불분명하게 그렇게 주어지는 거야.
<질문> 거듭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는데,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신자가 신앙의 유비를 유추해 나가면서도 갈 수 있다라는 것인지,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김남준 목사님> 신앙과 계시의 도움 없이는 안된다 이거야. 신앙과 계시의 도움 없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핑계 못하는 것. 그것이 한계야. 그 대신 여기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정당성이 확보가 되는 거야.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주어지는 거야.
<질문> 계시 자체는 천상 세계에 대하여 매우 극소수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데, 대부분의 계시의 내용이 지상 세계와 관련된 용어들로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그 천상세계는 아무래도 계시가 드문 드문 있다 보니까 이성의 추론들이 많이 작용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거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되는 것인가 의문점이 드는 거거든요.
<김남준 목사님> 그렇죠. 결론은 뭐냐 하면 이 아랫것을 설명하기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골격만, 그것만은 가지고 있어야 해요. 지금 오늘날의 신앙이 잘 못하고 있는 것이 그 부분을 다 허물어 버리는 거야. 그래서 어제 멀러 같이 공부하던 친구 하나가 이야기 한게 뭐냐하면, 신학을 하는데 철학이 필요없다라고 이야기하는게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대신 철학이 신학을 대치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지. 그래서 멀러 교수의 책이 안읽히는 이유가, 중세 철학을 먼저 해야해, 중세 철학을. 중세 철학을 안하고 역사신학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별로 안나겠지만 불가능한 거야. 그래서 중세 철학을 어느 정도라도 윤곽을 뜨고 그 다음에 사유의 폭을 넓혀야 되고, 그 사유의 폭을 넓히려면 결국은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최소한의 논의를 여기서 해본거야. 그래서 설명을 한번 해보는거라 이거지.
그러면 사실은 이 질문은 아우구스티누스도 진지하게 던진 진문이야.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것을 계사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다라고 이야기 하려면 이것은 계속해서 밤에는 하나님이 사랑이시지만, 낮에는 아니시다라고 한다면 이 명제 자체가 성립을 안하는 거야. 이 자체가 뭐냐하면 어떠한 상황에도 통용될 수 있는 영원적인 특성을 가져야지만 이 명제가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결국은 뭐냐 하면 관계성을 토대로 해야지만 성립되는 거야.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셔서 더 넓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해와 달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인간들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인간들과 관계를 가리셨는데, 하나님이 인간과 이렇게 관계를 가지셨다 이거야. 그러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였다 이거지.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이렇게 성립이 된다면 그러면 지금 이것을 이렇게 그으면, 결국 시간과 공간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고, 이것은 영원이잖아. 그러면 만약에 영원 속에서는 이 명제가 성립이 안되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물들이 생겨날 때만 하나님이 사랑이실 수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이 명제가 성립을 안한다 이거야.
예를 들면 강윤석 목사가 진실하다고 하면, 여기서도 학교에서도 집에가서도 진실해야지. 교회와서는 진실한데, 집에 가서는 안 진실하고 학교가서 사기치고 그러면 그게 is 라는 말로 연결 될 수 없잖아. 강윤석 is truthful. 이렇게 되려면 여건과 공간, 시간 상관없이 연속성을 이루어야 된다 이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본질적으로 오히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안에 계신 분이고 시간 안에는 당신이 계신 존재의 효과를 나타내니는 것 아니야. 그러니까 더더욱 is라는 계사로 이어지는 명제가 성립되려면 이 자체가 계속해서 하나님이 사랑할 대상을 갖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이셔야 된다 이러한 이야가 되는 거지.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성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만물 이전에도 사랑이실 수 있느냐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거야.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는 신앙이 적고 한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던져질 수 있는 질문이거든, 그러니까 이러한 논의를 한번쯤 해주는게 믿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일들을 한다, 나 나름대로 잠재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나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의 영향이 끼쳐 졌겠지만, 에드워즈는 이 문제를 이야기 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이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 본거야.
이렇게 해서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보는 거야. 그래서 이제 기본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이제 하나라고 놓고 보고 설명하는 것과 그 다음에 셋이라 놓고 설명하는 것 이러한 방법이 있거든요. 학자들마다 각각 자기가 선택하는바가 다르긴 한데, 이제 너무 먼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바르트 같은 사람을 예를 들자면, 칼 바르트 같은 사람을 예를 들자면 하나라는 것을 중요하게 중심점으로 놓고 설명이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서 셋이라는 것을 잘 설명을 못해 그래서 어떻게 말하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반복이라고 이야기해, repetition이라고 이야기하는거야. 성자는 이것의 반복, 성령은 또 이것의 반복이라고 보는 거야. 그래서 칼 바르트의 이것은 양태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러한 것들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 몰트만인데, 몰트만은 이렇게 안보고, 하나님을 먼저 하나라고 보고 그래서 하나의 신성으로 보고 그리고 이 신성이 각각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이렇게 부여되어 일체를 이룸으로써 한 하나님이 되셨다 이렇게 설명해. 하나의 신적 본질이 삼위에게 부여되었다고 이렇게 보는 거야. 이러한 문장도 보면 잘못하면 사신론으로 떨어지는 거야. 왜냐하면 이 본질은 따로 있고 그 다음에 본질이 주어지는데 주어지기 전에 공통 본질인 이 본질은 뭐냐,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사신론으로 떨어져요. 그래서 이것에 대한 대안이 헤르반 바빙크 같은 것인데 이러한 방법은 상당히 건전하게 생각을 해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일단 셋으로 출발을 하는 거예요. 셋으로부터 이렇게 셋의 인격이 있고 그 다음에 셋의 인격이 그 다음에 하나의 신적 본질로 연결된다고 보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의 신적 본질로 이것은 상당히 동방 교회적인 설명을 모티프로 하는 것인데, 바빙크는 이제 동방교회 설명과 서방교회의 난점들을 조화를 이루어요. 어떻게 했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가 위격이다 보는 거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위격과 상관없이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하나님은 위격 안에서 존재하신다. 그런데 어떻게 되는가 하면 파란거 설명했듯이 단일한 신적 본질로 존재하는거야. 단일한 신적 본질로. 일체라는 것을 물리적으로 일체라 생각하면 안되고 본질에 있어서 일체가 생각하는 거야. 삼위 일체라 그러잖아. 여기 신적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이게 위격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거야. 다르게 존재하시는게 아니라. 이해 되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놓고 봐야 한다는 거야. 이렇게 하나의 본질을 이루는 거야. 이것을 페리쿼레시스, 침투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유통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신적 본질을 깨닫게 되는 거야. 이 사람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위격을 하나님의 존재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다, 위격의 개념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이제 가장 개혁적인 입장이라 보는 거예요.
사실은 바빙크가 마지막 신학자에요. 마지막 신학자.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야. 그러면 이제, 됐죠? 이것을 여기에 그대로 가지로 들어와봐요.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이잖아. 그러면 이렇게 이해를 처음부터 해야 된다는 거야. 하나의 신적 본질속에서 이렇게 된다 말이지. 이러한 신적 본질이 하나인 속에서, 아예 하나님 자신이 위격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으시고, 위격 안에서만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할 때 이러한 존재는 결국은 하나님의 인격이 몇이야? 인격이 몇이냐고?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신거야. 세 인격이 바로 위격이야. 위격이 인격이라 이거야. 페르소나. 이 위격이 다르면 인격도 다른 거야. 만약 이것을 인정을 해야지만 무엇이 가능하냐 하면 성 삼위의 교통이 가능해지는 거야. 인격이기 때문에 교통이 서로 가능해지는 거야. 삼위일체의 신비야. 세 인격인데 그것이 삼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야. 만약에 세 인격을 할 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는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격은 다른 것들의 유비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야. 물론 우리는 인간이지만 본질은 각각 다르다고 봐야지. 그래서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인격을 구성하는 거잖아. 여기에서는 아니다 이거지. 결국 삼위가 교통을 하게 되는 거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관계가 이게 결국 사랑의 결과라 보는 거는 거죠. 에드워즈는 생명이라 보는 거죠. 사랑과 생명은 결국 같은 것인데 어떤 면에서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을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세계 창조가 하나님 자신이 속박받았다는 면에서 필연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특성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 세계 창조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보는 거예요. 이러한 생명과 사랑은 끊임없는 산출을 지향하기 때문에 사랑 자체가 관계를 맺고자 하는 특성으로 나타는 거지. 사람이 사랑이 많으면, 사랑이 식으면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 들어서 자폐증 같이 되고, 사랑이 많으면 오지랖이 넓어지면서 온갖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돌아봐야 할 사람이 많아 지는 거야. 이게 사랑의 확장이란 말이야.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어떤 일과 관계를 맺을 때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어떻게 맺는가 하면 성부가 혹은 성자가, 성령이 주도적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어떤 성부가 관계를 갖으신다고 할 때, 나머지 두 위는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설명 여러번 했잖아, 이러한 식으로 되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는데 왜 서로 사랑하실까. 이것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수 있지만, 명제로 받아들이면 되지만, 굳이 이것을 설명한다고 한다면 나는 둘로 보는데 그게 뭐냐 하면 각 위의 아름다우심 때문이다. 미는 결국 완전성이에요. 이 완전성 자체가 결국 거룩함이에요. 거룩함의 두 요소가 뭐라고 가르쳐 주었죠? 존재적 초월성 그리고 뭐지? 도덕적.... 미학적 견지에서 보면 이것은 아름다움이란 말이야. 그런데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첫째 뭐라고 했지? 개별적 사물의 아름다움과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미 이렇게 정리를 했잖아. 결국은 여기에 하나님을 대입시키면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개별적인 위로서 성자가 보시기에 성자는 더 이상 아름다우실 수 없는 최고의 무한한 아름다움으로써 완전하신 거야. 그래서 이 성부는 성자,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최고의 조화를 이루시는 분이지. 그래서 결국은 개별적 위의 완전성과 상위 안에서 완전성 이것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사랑하시는 거야. 이러한 사랑이 결국은 시공간 안에서 스며 들어서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게 하는 거야. 그래서 인간이 바로 이렇게 서로의 완전성과 질서의 아름다움 안에서 서로 아름다움을 보면서 사랑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신 거야.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하면 굉장히 길지만, <도덕적통치>의 자발적 박애적 사랑, 목적적 사랑, 그러한 부분들을 읽어봐. 그러면 설명을 덧붙일 수 있어. 그러면 넘어가요. 넘어가.
각주 1번은 이해할 수 있겠지? 그 다음에 14번으로 넘어가면 14페이지 15페이지 다 설명했어요. 17페이지로 넘어가면 자, 읽어봐요. 읽어봐.
<책 본문>
B. 사랑의 방식 : 서로에게 수단이 되지 않으심
둘째로 삼위 하나님 안에서 교통하시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교통의 본질인 사랑은 각 위가 서로에게 수단이 되지 않는 방식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각 위는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더 높은 목표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위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오나전하시며 충족하신 하나님이시라는데 기인합니다.
사랑은 “어떤 대상을 궁극적으로 목적으로 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곧 ’누림‘fruid 인데, 이 누림은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더 높은 목표가 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김남준 목사님-거기 줄치세요. 그게 누림에 대한 형이 상학적인 정의에요. 그 다음, 이 누림의 대상은, 사랑의 대상은 많아도 되는데, 이 누림의 대상은 하나여야만 되는 거에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할 이유가 없는 것을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란 말이야. 그 다음..>
<책 본문>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궁극적 누림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거나 자기 자신 뿐입니다. 후자를 우리는 ‘자기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지성적 피조물에게 있어서 사랑은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존재의 질서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의 질서는 곧 그가 생각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판단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의 판단에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김남준 목사님-이렇게 때문에 사실은 칼빈이나 마스트리히트나 개혁파 사람들이 중생을 자꾸 지성하고 연결시키려고 시도했던 거예요. 그것을 무조건 중세적으로 비판하면 안되는 거예요. 논리적인 근거가 탄탄하게 있는 거야. 왜냐하면 지성이 깨어나지 않으면 가치의 질서를 제대로 볼수가 없는 거야. 지난번 논문 줬지? 마스트리히트 논문 줬죠? 안읽었지? 자, 그 다음. >
하나님 자신이 모든 존재의 질서에 있어서 최고이시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심에 있어 도구가 되지 않으시니, 삼위 간의 사랑이 바로 서로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각 위는 결코 서로에게 보다 더 높은 대상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삼위간의 사랑도 결국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하나님은 존재와 가치에 있어서 최고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능가하는 또 다른 존재의 목표를 가지고 셰시지 않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이 피조물에게 있어서 최고의 사랑이 되는 거야. 자기 사랑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사랑은 인간에게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나타나는 거야. 이해해? 자, 그 다음에
<책 본문>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에게서 시작되어, 당신 자신 때문에 계속되며, 당신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를 합치시키시는 자충족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사랑은 최종적인 목표에 대한 궁극적인 누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들을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고 즐거워 하시는 수단으로 삼으시지만, 당신 자신은 그들 누구에게도 수단이 되실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위탁하신 인간 안에 부여하신 사랑도 바로 이런 사랑이었습니다. 곧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모든 사랑을 이 궁극적 사랑의 목표이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도록 사용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러한 사랑 안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방식만이 존재의 올바른 질서를 따르는 것이며, 그 안에서 인간의 사랑은 참으로 그 사랑이 유래한 원천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교통애(交通愛, amor socialis)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부터 이탈한 모든 방식의 사랑은 인간을 참된 행복으로 데려가지 못하는데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랑은 단절애(斷絶愛, amor pravitus, 혹은 ‘사적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참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사랑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자, 이 개념이 뭐냐하면 이러한 개념이거든. 여기에서 그림은 지웠는데, 여기다 여기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인간들에게 이렇게 아가페 사랑이 주어질 때 이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써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나온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나오면, 이렇게 될 때 자기는 무화 되는 거야. 자기가 무화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아가페(agape)의 사랑에 대해 까리따스(caritas)로 반응했는데, 이 까리따스(caritas)를 통해서 사람들은 아가페(agape)를 알게 되는 거야. 그렇게 아가페(agape)를 알게 되면 그 아가페(agape)에 대한 반응은 또 다시 까리따스(caritas)가 되는 거지. 그러면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아가페(agape)의 사랑이 까리따스(caritas)를 통해서 누군가로 흘러가게 되잖아. 그러면 자기가 베푼 것은 까리따스(caritas)인데, 이 사람이 받은 것은 아가페(agape)의 사랑이 되는 거야. 이해되죠? 그러면 아가페(agape)의 사랑은 다시 까리따스(caritas)로 반응하게 되지?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그러면 이렇게 계속해서 흘러가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지순애라고 할 때, 지순애는 교통애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거야. 흘러까니까. 그래서 이것을 아모르 소키아리스(amore socialis)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야. 소키아리스(socialis)가 이제 society가 거기서 온거거든. 사회적 사랑이라고 카톨릭에서 번역을 하는데, 사회적 사랑은 아니고 교통애라고 봐야 하는 거야. 교통애. 이렇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거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교통애를 이야기 하는 거야. 그래서 끊임없이 흐르는 거야. 끊임없이 흐르는 이 과정 전체가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과정이라 이거야. 자기 사랑의 과정.
자 그 다음에 조금더 설명할게. 그 다음에 뭐가 나오냐 하면, 그 다음에 설명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단절애 인데, 잘봐요. 자 이렇게 될 때 이 사람 하나를 확대해 보자. 이 인간 하나를 확대해 보면, 어떤 존재가 될까? 이 사람을 확대해 보면 어떤 존재가 될까? 이렇게 되지 않겠어?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있잖아.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일단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접붙여 졌다라고 본다면 일단 자기 사랑에 대해서는 깨뜨려진 사람이야, 이렇게.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주인삼으며 살아가게 되는 거야. 왜냐하면 사랑하는 그 대상이 자기 주인이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살아가게 되는 거지. 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냐, 묻지마. 복잡하니까. 왜냐하면 그 삼위 하나님이 그 사랑이 보이도록 하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니까, 그래서 그렇게 됐다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이 사람이 미완의 사람이야. 그래서 여기에 뭐냐하면 여전히 두 개의 본성이 싸우는 거야. 이게 말하자면,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제가 되는 사항이야. 하나는 자기 사랑, 자기애의 본성이 남아있는 거야. 여기에. 그리고 그 다음에 뭐가 있는가 하면 신의 본성이 동시에 있는거야 두 개가. 이것이 결국은 계속해서 왕좌를 다투는 거야. 이게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다룬 내용이잖아. 그러니까 상태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잖아, 그치? 그러면 만약에 이것이 상태가 나쁠 때는 어떻게 되는가. 이 자기 사랑을 중심에 자기애를 딱 놓고 그 다음에 자기애에서 범주를 펼쳐나가는 거야. 이게 결국은 여기 서있는 기준점이 되는 거야. 왕국의 기준점이 되는 거야. 그런데 이제 거듭난 사람안의 자기애는 한계가 있는데 항구적이지 않아.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신의 경향이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아. 그래서 심지어 악을 행할 때도 무슨 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무슨 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신자가 죄를 지을 때와 불신자가 죄를 지을 때의 의지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는거야?
대답 - 불신자는 완전한 자신의 전인적 의지로 하지만, 신자는 갈등이 있는 채로..
<김남준 목사님>
조금 더 정돈된 말로, 단일 의지와 복합 의지라 하는 거야. 말로 설명하면 길잖아, 용어로 설명하면 되는 거야. 단일 의지와 복합 의지. 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온 내용이야. 공부를 좀 해. 저자도 26번을 읽었는데. 이렇게 해서 단일 의지와 복합 의지라는 문제가 나오는데, 이것은 언젠가는 꺾어져. 꺾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에 이것들이 펼쳐져 나가잖아. 자기 중심축으로 이렇게 사랑이 펼쳐질 때 여기에 혜택받는 많은 사람들이 나올 것 아니야, 그것도 사랑이니까. 펼쳐져 남잖아. 마지막에 결국은 이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회귀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야.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 해서, 조폭 두목도 조직원 관리하잖아. 자기가 쓰고 싶은 돈을 똘마니에게 주잖아. 그것은 뭐냐 하면, 똘마니의 행복을 빌어서가 아니라 이것 먹고 조직에 충성해서 나를 세워달라 그거 아니야.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사애라고 부르는 거야. 사애. 사적 사랑이라 부르는 거야. 나는 이것을 사애 보다는 단절애라고 부른다 했죠.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이러한 것을 통해서 많은 자원들을 주실 때에 그것이 여기에서 멈추는 거야. 자기 자신을 이 자원들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즐거워하는 최종적인 종착역으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거야. 지지난주 설교 시간에 이야기 했잖아. 그래서 여기에서 소진해서 없애 버리는 거야. 흘러들어가지 못하는 거지. 그러면 결국은 소진해서 없어지는 것들을 이것들은 어떻게 되냐 하면 이 하나님이 하셔야 될 것들을 자기가 중간에서 가로챈다는 거야.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악이라 부르는 거야. 이러한 것들이 힘차게 흐를 때, 힘차게 흐를 때 교회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 되고 교회 자체에 일그러진 모습들이 피어나게 되고 인간 자신의 일그러졌던 형상들이 펼쳐지게 되고 더욱 강력한 힘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장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말하는 선교라 이거야. 전도이고.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라 이거야. 그래서 여기 단절애와 교통애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 다음에 이제, 사랑의 목적이라 나오는데 거기에 읽어봐. 더 읽어봐.
<책 본문>
셋째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자신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무엇과 무엇으로 창조하시죠? 말씀과 능력으로 창조하셨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당연하지. 무엇으로 창조하시지? 지혜가 먼저 나오는 거야.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신거지. 그러면 뭔가 하면, 지혜와 사랑의 본질이 뭔지 잘 생각해 보라 이거지. 지혜의 가장 본질은 자기 지식이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란 말야. 사랑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이것이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당신 자신을 아는 이러한 지식들이 있잖아요. 하나님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들이 이 세계 속에 펼쳐지는 거야. 펼쳐진 이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거야. 이것을 과정 신학자들은 창조의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보는 거야. 당신도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배워가야 될 필요성이 있는 존재라 보는 거지. 진화론적 신관이야. 그러한 것들이 이제 우리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매혹적이지. 그래서 설명이 잘 되는 거야. 구약에서 왜 하나님이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냐, 아직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 자체가 성숙해지셔서, 그 성숙은 하나님 자신의 부족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될지에 대하여 관계 속에서 그렇게 성장하는 거라고 보는 거야. 이렇게. 이러한 것들을 이렇게 하는데, 이러한 피조물들이나 모든 것들을 시공간 속에서 펼치시는데, 이 동기 자체가 한없는 사랑이라고 보는 거야. 그래서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의 많은 속성들이 있는데, 속성들이 하나님 자신이 정동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아파데(afade)한 존재이라고 다 이야기 하지만, 사랑에 관하여서는 상당히 논란이 많아.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어거스틴의 생각이 훨씬 승리로 끝나요. 왜냐하면 에오노미아의 입장 같이 이것을 사랑이다 어떤 것들이 전부 관계로 설명하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오이코노미아(Oikonia)의 언어이고, 데올로기아(theologia)의 언어가 아니다라고 다 쳐버리면 마지막에 스토아 철학에서 그리는 신과 성경에서 그리는 신이 일치를 이루는 거야. 그렇게 되면 안되는 거야. 그러면 또 너무 철학으로 기울어지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사랑을 설명하는 거야. 하나님 자신은 당신 자신을 앎에 있어서 모자람이 있겠어, 없겠어? 그게 바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의 근거가 되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 자신을 사랑함에 있어서 불완전하실 수 있겠어, 없겠어?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무한히 사랑 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보는 거야. 그래서 시공간 속에서 펼쳐나가는 것이야.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 있는 거야.
그러면 이제 19페이지로 넘어갑시다. 넘어가고, 읽어봐. 첫째로는 거기.
<책 본문>
첫째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들이 도덕적 목적을 이루도록 그들을 통치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한 도덕적 피조물들을 도덕적 의지를 가지고 통치하지 아니하신다면,
<김남준 목사님>
도덕적 피조물은 지성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에요. 이성적 피조물이라고도 하는데, 지성적 피조물이에요. 천사들까지 포함하는 거예요. 그 다음.
<책 본문>
이 세계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도덕적 목적을 따라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덕적 목표를 따라 세상을 통치하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의도를 따라 만물을 다스리도록 작정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도덕적 목적을 계시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 주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른 것이며, 이 지혜를 이루어 나가시는 모든 방식들이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모든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이 바로 이러한 사랑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num이시기에 당신 이외의 모든 만물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분의 ‘선함’ bonitas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자신은 무한히 완전하시기에 누구에게도 덕을 입으실 필요가 없으시지만, 당신을 제외한 모든 만물들은 완전하지 않기에 무한히 완전하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끔 존재하고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선함을 덕 입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만물이 하나님을 의존한다라고 할 때, 그분께 덕을 입는 거예요. 그분 덕분에. 그 다음에.
<책 본문>
그 선함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따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 통치 안에서 자신의 존재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물들에게 복주시고, 쉼과 행복을 얻게 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지혜를 따라 존재 할 때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가장 선한 존재의 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자신도 아름답고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사랑으로써 이 지혜를 이루어 가십니다.
2. 지혜를 이루시는 방법
둘째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도덕적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당신의 지혜를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만물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지혜를 사용하시지만, 이 지혜는 사랑 안에서 행사됩니다. 또한 그렇게 그 지혜를 이루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도덕적 통치를 실현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성취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삼위안에 있는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삼위가 사랑으로 교통하시는 것처럼 인간과 만물이 당신 자신과 교통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을 우리는 두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a. 목표의 합치 :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심
<김남준 목사님>
이것은 뭐냐하면, 아까 설명한 건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지금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데 내일은 당신 자신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거나 그렇게 될 수 없다 이거죠. 그것을 목표의 합치라 이야기하는 거야. 그 다음에.
<책 본문>
첫째로, 목표의 합치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하나님 자신에게 사랑의 근거가 된다면, 이러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목표의 합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우심으로 말미암아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당신 자신의 사랑의 근거가 되지만 그 근거가 당신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자발적 사랑이 되고 박애적 사랑이 되는 거야. 이해돼죠? 그 다음.
<책 본문>
삼위 안에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우심으로 말미암아 각 위가 함께 사랑으로 교통하시고 이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천지창조의 경륜이 일치하게 수행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인간과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순결하신 영이신 하나님은 아무 구성요소도 없이 존재하는 분이시며 이것을 하나님의 단순성 simplicatas Dei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섞임과 혼합이 없는 단순하신 분이기에, 그런 청결한 마음으로 찾아오는 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으로 하난미을 뵈오며, 불변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으로부터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 안에서 이루어진 목표의 합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이 순결해 질 때, 하나님의 단순성을 가장 본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그 때에 텅빈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꽉 찬 상태가 되는데, 그 사랑으로 꽉 찼을 때, 불의를 보면 분노하게 되고 비참한 사람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비진리를 보면 그것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 다음에 진리를 발견하면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것과 같은 다양한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거야.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 거야. 하나님이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incomprehensible, 파악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에요. 이게 뭐냐 하면 단순성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때 이야기 했죠. 우리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할 때, 이러한 그림은 조직신학에서 신학교 다닐 때에 가끔 봤잖아요. 그리고 이 가운데는 동그랗게 파가지고, 영원한 속성, 불유통적 속성과 유통적 속성을 집어 놓잖아. 이렇게 하나님이 된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것은 틀린 묘사라 이거죠. 이렇게 되어서 이렇게 됐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각각 A로부터 B로부터 C로부터 각각 다른 속성, 사랑, 자비, 긍휼 뭐 이러한 것들이 내려와서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 것은 넌센스다 이거야. 생각나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에서 생각나지? 자 이렇게 여기에서 이러한 분이신데 다양한 인간들과 관계를 갖으시잖아. 이렇게 무릎꿇고 기도하는 자도 있고, 춤추고 까부는 사람도 있다 이거야. 이러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 사랑으로 진노로 이렇게 해서 여기는 저 뭐야 선으로 이러한 사람의 경우에는 공의로 이러한 식으로 나타난다 이거야. 이것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봤다고 해서 이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있나 찾아봐서는 안된다는 거야. 이러한 상태인데, 잘 들어봐요. 이러한 하나님의 삼위 일체 사랑을 경험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어떤 인간이 깊이 변화를 얻게 되었어요. 이 내면의 상태가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 할 때,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게 될 때에 이 사람이 사랑으로 꽉 차있는데, 설명할 수 없는 단순한, 단순성의 상태로 되는 거야. 단순성의 상태. 똑같이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이 자체는 설명할 수 없는 단순성이기는 하지만, 여기도 막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볼 때 여기서 정의로운 분노가 확 솟구치는 거지. 이러한 사랑이 없을 땐, 분노가 안생겨나는 거야. 그럴수도 있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러고 싶은 마음인데 분노가 막 생겨나는 거야. 여기는 또 이러한 사람이 있어. 여기서 또 사랑이 생겨나고 진노가 생겨나고 등등의 것들이 계속 생겨나는 이 꼴하고 상당히 담지 않았냐. 그치?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수는 없지만, 상당히 많이 닮잖아. 그래서 이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순전한 마음이라는 거야. 이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단순성들이 이러한 것들을 여러 가지로 표현했지만, 율법과 관련해서 표현을 하게 되는 거야. 율법과 관련될 때 이러한 것들이 온전한 삶으로 나타나는 거야. 온전한 삶으로. 그래서 칼빈이 뭐라 했냐면, “ ”(33:48부분) 온전함, whole 그러한 뜻이거든. intergaral 전일적이고 순전하고, 순수하고, 온전한 전체적인 상태가 된다는 거야. 여기에서 holiness라는 말이 온거야. holiness은 wholeness야. 두 개가 일치를 이루는 거야.
자 그 다음.
<책 본문>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사랑으로써 자신의 존재목적을 하나님의 뜻과 합치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받는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목표의 차이로 희생과 자기 포기가 필요하지만, 삼위 하나님은 서로에 대하여 상충되는 존재목적을 갖고 계시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b. 인간의 행복 : 삼위 하나님의 지혜에 합치함
둘째로, 인간의 행복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사랑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합치된 존재가 되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ㅇ비니다. 하나님은 당신 밖의 만물들을 지혜와 사랑으로 다루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지혜이시니, 그 안에서 천지창조가 계획되고 이루어졌으며, 타락한 인류의 구원도 그 안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습니다. 또한 이로써 인간의 구속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이 회복되고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당신의 영원한 지혜를 시간세계 안에서 펼치시되, 당신은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으로써 이 일을 행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안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써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각자에게 합당한 존재와 작용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창조되어 그 의도된 대로 존재하고, 또한 그 지혜를 따라 자기에게 합당한 작용을 함으로써 쉼과 평안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맞는 존재가 되고 그에게 의도된 바대로 행함으로써 만물의 보편적 존재질서와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서 쉼과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지혜로써 이 모든 일을 정하셨으며, 또한 사랑으로써 그 지혜를 이루신다는 사실이고, 참으로 인간은 그 사랑과 지혜로써 거기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19세기에 미국에서 기독교 신앙안에서 인간이 행복을 찾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냐에 대한 큰 논쟁이 벌여져요.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뭐냐하면 두 가지 자체는 분리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자기 회귀적 사랑 안에 있을 때에, 인간은 결국 참답게 행복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현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 그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그 아가페(agape) 사랑의 충실한 통로가 되도록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으로 자기를 유통할 때,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 안에서 가장 적합한 자리를 갖고, 그리고 가장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믿어야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포기하게 될 때에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한 목표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이제 어거스틴이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그려내자면, 이렇게 되는 거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참답게 자기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자기를 사랑함으로써 결국은 인간이 자기를 참답게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놔요. 적어놨다가 가르쳐줘요. 그렇게 해서 이것을 가르침이 풍부해지려면 뭐냐하면 내가 뭘 쓰려고 하게? “ ”-(38:48부분)살아야 할 양태, 가르쳐야 할 풍부함. 이게 뭐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살고, 그렇게 가르치면 무지해도 각주 못써도 막 가르침이 풍부해진다 이거야. 그래서 한주간 동안에 기도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회귀적 사랑 속에서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렇게 잘못했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다시 자기 자신이 희생하고 흘러가려고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으면 제목 몇 개 적어가지고 쫙 눈감고 설명을 해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의미의,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 ”(40:13부분)-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안에서 쉼을 누리면서 쉼을 주면서 그렇게 살다가 우리의 육신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우리의 영혼은 최고의 아름다운 상태로 그러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그 사랑의 연합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그것이 신자의 일생이고, 목회자의 일생도 그와 다르지 않다 얘기에요. 자, 은혜가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