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7.토요일교역자특강다섯번째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랑과 교제인가요. 성령과 교제인가요? 사랑과 교제죠. 사랑과 교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랑과 교제는요. 무엇을 가르키는 거냐 하면, 이것은 caritas이고, 이것은 societas인데 둘다 그 교회안에서의 지평에서의 사랑과 교제를 가리켜요.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앞에서 이야기한 게 이러한 이야기 하니야.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삼위간의 위간간의 사랑이 있고 그 다음에 위간 사랑이 있고 그 다음에 이 사랑 자체가 관계를 맺는 교통으로 이루어진다고 봤거든요. 이렇게. 그 다음에 이들간의 모상이 교회안에 이루어지게 되는데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루어지겠어요? 여기에서 사랑은 그 자체가 아가페의 사랑이 될거잖아. 그렇죠? 그러면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 다음에 여기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지체적 사랑이 있을 것 아니야. 그렇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여기에서의 사랑 caritas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지순애의 반영이잖아. 아가페의 사랑으로서의 반응으로서의 caritas의 사랑이잖아. 이렇게.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의 반응으로서의 이러한 caritas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caritas의 사랑. 그 사랑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그 다음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 두 지평으로 펼쳐지잖아.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지체들간의 사랑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caritas의 사랑이 이게 지평 융합이라는 말을 사용했잖아. 지평 융합. 그게 뭐냐 하면 신에의 지평이야, 첫째 지평은. 인간을 향한 사랑이야.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인데 이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라면 이 사랑에 대한 이렇게,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펼쳐져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같이 펼쳐 지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caritas의 사랑안에서 caritas의 사랑안에서 지평이 융합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신에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장 결정적으로 만나는 이 지점이 교회란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게 될 때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사실은 인간안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하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의 이 경륜지이기도 하고, 이웃으로 향하여 뻗어나가는 사랑의 중심지이기도 한 거야. 그러한 점에서. 그런데 사실은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의 집은 참답게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보여주기도 하고 이 공동체가 어떻게 올바르게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랑할 수 있을지 잠재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거야. 여기 이것을 A라고 한다면 이 A는 B와 C를 반대로 이야기 해야 겠죠. 이것을 B라고 한다면 이 B는 결코 그 A,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거야. 그러한 점에서. 그러한 점에서 이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이 caritas의 사랑이 이 교제의 말하자면 본질이란 말이야. 그러면 잘 생각을 해봐요. caritas의 사랑이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하여 부어주는 사랑이 아니라 이 사랑에대한 반응이란 말이야. 반응으로서의 사랑. 반응애적인 반응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단 말야. 그러면 한사람 한사람이 이렇게 어떻게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grace란 말야. 은혜의 문제인거야.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이 회심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사랑에 감화를 받는 끊임없는 caritas의 작용속에서만 이 교회가 올바른 사랑안에서 societas, 교제를 이루는 거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간에와 교통을 모상하는 거야. 본뜨는 거란 말이야. 이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러한 성경적으로 보면, 이러한 사랑과 교제를 하나님의 하나님이 예를 들면 여기에 이제 사랑, caritas가 있고 어쨌든 그 다음에 societas가 있어서 교제를 나눈다고 할 때 이러한 것들을 이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속에 심으시고 강화하고 유지하고 하는 이러한 것들을 만약에 삼위일체의 간섭으로 본다면 관여하시는 이 위격을 어디로 돌려야 되겠느냐 하는 것이죠. 어디로 돌려야 할까? 여기에 지금 나와 있는 대답이 성령이야.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되게 작용하시는 위격을 성령으로 봐야 한단 말이지. 여기는 성부가 되고. 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이제 내가 책에서 창조와 함께 아우르면서 이 모든 것을 한번 전체적으로 정리를 신학적으로 본 거예요.
우선 첫째 어떻게 봤냐 하면 이렇게 보는 거죠. 맨 처음에 잘 들어요. 잘들어야 돼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의 창조가 이루어진게 성령안에서 이루어진거야. 성령 안에서. 그래서 세 가지 전체사를 바빙크의 방법에 따라서 세 가지가 나오죠, 어떻게? by Father, 성부에 의해서, 그 다음에 성자를 통해서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성령 안에서, 자 이렇게 되죠. 이것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더라 그랬잖아. 메가 해패트에요. 이게 라하프에서 옵니다. 라하프는 뭐냐 하면 창세기 32장에 나오는데 이렇게 새 둥지가 있잖아. 이 새들이 주둥이를 내놓고 엄마새에게 모이 달라고 그럴 때 엄마 독수리 날개가 이렇게 하면서 펄러기는 거예요. 이것을 라하프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펄럭거리는 이 주체가 펄럭거림을 당하는 개체보다 훨씬 더 큰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이 창조된 세계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모든 피조물의 창조가 성령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말하자면 창조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결국은 영혼을 가진 인간부터 시작을 해서 그 다음에 동물들과 그 다음에 식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성령안에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너무 확대해석을 해서 잘못하면 애니미즘이 되겠죠.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보지 않고 이렇게 모든 것이 성령안에서 창조되어서 각각 연관은 다르지만 이것들이 어떤 전체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이것과 관여하시는 정도와 방식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자기의 본체를 나누어주시는 방법이 아닌 그러한 통치와 사무들간의 질서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현존에 영향을 미치고 계신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잘들어봐요. 전에 설명을 했듯이 레카프레타치오 교리에서 설명했듯이 하나님이 인간 하나를 창조하실 때 그게 이 인간이 하나님이 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개별적인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 전체를 하나의 하나의 그 말하자면 몸으로 창조하시려고 한 것이었다 이미 설명했었죠. 레카프레타치오 교리에서.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그러한 고백을 하기 원하셨다는 거라 이거야.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한사람 한사람 창조하실 때에도 성령안에서 창조하신 것이 되지만 처음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사실은 성령안에서 하나된 것을 구체적으로 시간 속에서 실현해나가는 것이란 말이야. 그래서 결국은 사람의 창조는 성령안에서 이루어 졌는데 두 번째는 교회 창조야. 그럼 알다시피 교회 창조는 이러한 인간이 죄가 들어와 그 몸 자체가 상해 버린 거거든. 상해 버린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필히 몸 중의 하나로 오셔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필연이었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안에서 교회를 이루시는데 이 교회가 망가진 몸을 재창조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거야. 당연히 이것이 in the Sprit, 성령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교회의 창조도. 그렇잖아요. 그러면서 이 교회의 창조가 여기 이루어짐으로써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인간이 신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올바르게 caritas의 사랑으로 반응하고 그 자신들은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공통분모처럼 만나면서 이 안에서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시려고 했던 인류이고, 교회는 이것을 먼저 선취적으로 모본을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교회 창조가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야. 그 이 두 커다란 가닥을 가지고 3과를 만들어 가는 거야. 그러면 보세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성령으로 창조하시잖아요. 그래서 사람을 성령으로 창조하시는데, 잘 봐요. 이렇게. 맨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시잖아요. 데페시 하이아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산 사람이 되는 거죠. 생기를 불어 넣으시는 것, 그래서 이것이 결국은 성령안에서 사람을 창조하셔서 두 가지로 효과가 나타나는데 첫 번째는 사람이 영적인 존재가 되는 거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 사람의 교통 가능성이에요. 교통 가능성. 그게 첫째로 뭘까요? 우선 인간의 영혼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 가능성이 열리는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인간이 각자 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 각자 영혼을 가지신 영혼이 있는 영이 있는 인간들끼리의 교통. 이게 가능해 지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놀랍잖아요. 성령안에서 이것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해지고 그 다음에 같은 영혼을 가진 인간들끼리의 교통도 가능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작용이에요. 동물들이 자기의 자식을 위해서 개체의 보호를 위해서 희생을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몰라요. 그러한 점에서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종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연적인 섭리로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하는 거죠. 자, 그러면 해결이 됐죠. 그 다음에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이것이 어떻게 되죠? 중생을 통해서 중생을 통해서, 중생. 그러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societas의 측면에서 본다면 중생 그 자체는 어떤 의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끊겨진 하나님과의 관계, 교제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회복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안에 행하시는 작용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중생 이 자체가 societas를 위한 것이 된다 이거죠. 그래서 중생과 회심함으로써 인간은 끊어졌던 삼위 일체 하나님과의 societas를 다시 똑같이 아버지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다시 societas를 이루는데, 이 societas는 사실은 영생의 본질이란 말이에요. 본질.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끊임없이 우리 인간에게 영혼속에 부여되면서 그러면서 인간의 존재의 고유한 목적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이게 생명이라고 하는 게 결국은 하나님의 뭐라 그럴까. 하나님의 자존성. 스스로 존재하심. 이것의 가장 훌륭한 모상이에요, 생명 그 자체가.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신비한게 생명이에요. 그래서 일반적 차원에서도 이 생명은 경이로운 거예요. 하나님의 자존성을 가장 훌륭하게 모상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살아있는 것이 아름답다. 생의 외경이나 이러한 이야기를 썼던 슈바이처나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죠. 생명이 그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보여주는 것이 되는 거죠. 살아있는 작은 벌레 그죠. 어마어마하게 큰 보석보다도 더 아름답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생명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존성 때문에 아름다운 거죠. 볼 수 있는 사람들만 보는 거죠. 그래서 중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아주 정교하죠. 그 다음에 이제 이쪽으로 넘어가면 새사람이 되는데 그 자체가 공동체적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편교회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거예요. 사랑해야 되고. 그래서 이렇게 중생 그 자체가 공동체적인 사건이에요. 그리스도의 처음에 인간 전체로 보더라도 공동체적인 몸이 없고,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졌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다고 하는 점에서 접붙여질 수 있게 하는 모든 그러한 접붙이기 하는 능력 자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오기 때문에 복음적인 가르침이나 성령의 모든 역사까지도 그렇기 때문에 시작도 공동체 적이고 그 다음에 결론도 공동체 적이다. 그 이야기에요. 이것을 깊이 우리들이 이해해야 되는 것이죠.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이 문제가.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레카플레타치오 교리가 아주 그 아주 그 순조롭게 풀리죠. 너무 잘 이해가 되죠. 너무 잘 이해가 됩니다.
그 다음에 이제 교회를 창조하셨는데, 잘 보세요. 교회가 어떻게 창조되어요? 넓은 의미에서는 교회는 광야에서부터 존재해왔고, 예수 그리스도 때에도 존재해 왔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 교회의 출현은 성령을 부으심을 통해서 신약 교회가 형성 되는 거예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고유한 의미의 신약 교회의 시대가 열리는 거예요. 참 놀랍잖아요. 성령 보다 뛰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었는데도 성령이 부어주신 후에야 교회가 이루어지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말하자면 장작임으로 성령이 오셔서 불을 붙이심으로 이게 드디어 말하자면 모닥불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신약의 교회의 시대가 열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 될 수 있죠? 그렇죠. 이전에 잘 봐요.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생애를 목격했고 또 십자가의 죽음도 알았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 그러한 부활도 보았어요.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그런데 이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이 착한 삶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도 있었어요. 이것이 다 쪼가리 쪼가리 떨어져 있었던 거야.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서 그래서 이제 이 분이 누구인가를 증거한 거예요. 이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속에 증거한 것.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이렇게 증거받은 각 사람들을 각 사람들을 모두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의 몸체로 만드시고 그 다음에 이 사람들 속에서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서 반응으로서의 caritas를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래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신 거죠. 그러면 결국 잘봐요. 이것은 이것은 맨 처음에 사랑을 창조하셨을 때 가지셨던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늘 하는 이야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뭐라고 했죠? 대충기도하면 안되고 왜 그렇게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어요? 그렇지. 참 사랑이 되기 위해서. 참 사랑이 되기 위해서. 그러면 여기에 이야기하는 참 신자, 참 신자가 되는 것이 핵이라면 그 다음에 참 사랑이 되는 것은 밖으로 뻗어가는 외연이잖아. 이것이 외연이 되잖아.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 이 내포라면 이것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인류라고 하는 공통된 집단을 이루어가시기 위한 참 인류가 되기 위한 방법이라는 거란 말이에요. 참 교회 그 다음에 참 인류 공동체. 그렇게 해서 이것이 기가막히게 연결을 이루는 거야.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75페이지에.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성령을 부으심으로써 크게 세 가지 일들을 이루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첫째가 공동체에 성령을 부으셔요. 공동체에 성령을 부으셔서 그래서 은혜를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실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시는 거죠. 두 번째는 복음을 믿게 하시고, 성령을 부으심 그 다음에 믿게 하심, 복음을 믿게 하시는 거죠.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말하자면 신자 안에 내주하심. 이것이 전부다다 하나의 societas를 이루게 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는 분명히 첫째는 진리의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뭐죠, 영의 교통이 있는 거예요. 이것이 두 개의 기둥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 그 다음에 진리와 성령 그 다음에 지식과 은혜, 등등으로 대비가 되면서 교회 전체를 하나님이 이끌어 가고 구속 역사를 전개해 나가시는 두 개의 기둥이 되는 거예요. 하나는 객관적이고 하나는 주관적이고 두 개의 기둥이 되어서 쭉 가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예배에서도 목양에서도 구원에서도 계속 강조되었던 두 개의 기둥이라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제 77페이지로 넘어가면 그러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societas를 이루어가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두 가지가 나오는데, 이제 첫째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용서에요. 용서. 그 다음에 두 번째 사랑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sharing, 나눔이에요. 이것은 사실 소극적인 것이 되잖아요. 이것은 적극적인 것이 되어요. 그러면 소극적인 용서가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 여기 보세요. 자 이렇게 해서 아까 그림이 없어져버렸지만 이렇게 있고, 이것이 모상이 되어서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몸 안에서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의 개교회라고도 보여주는 전체적으로, 원리적으로 본다면 전체적인 보편교회의 연합이 되는 거잖아요. 이렇게 이루어지잖아요. 이것을 가리켜서 caritas라고 이해했어요. 그러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caritas 자체가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 신자들끼리 스스로 불러 일으켜지는 종류의 사랑도 아니에요. 뿌리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신적인 사랑, 신에 기초하지 않으면, 결국은 이게 아가페이죠. 아가페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러면 이렇게 caritas가 존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선 그것을 염두해 두고 그러니까 결국은 이 caritas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 원천이 되어서 그것이 사람들 속에 적용이 되어 보이는 모든 인간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관계들에 대해서 나타나는 빛깔이 caritas의 사랑이거든. 그러면 결국은 정체 그 자체는 원천 그 자체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란 말이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관계를 맺어서 그래서 우리 안에 접수되고 흐르게 될 때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아무것도 끊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경험적으로 끊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죠? 죄에요. 죄. 죄에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안에 있는 caritas의 사랑은 원천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것처럼 이 죄역시 죄역시 이중적인 국면을 함께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사람들 속에 있는 이 죄는 반드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죄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거죠. 그것을 내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그것이 죄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그러면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이 사람들 사이사이에 있는 이 죄가 실질적으로 이러한 societas를 가로막게 되는 거죠. societas를 가로 막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똑같이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지평이 하나님과 그 다음에 이웃을 향하여 펼쳐지듯이 이 죄는 다시 이중적인 지평과 관련이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 관련이 되고, 이웃과 또 관련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다음에 지체들끼리 서로 그 회개한 결과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이러한 죄의 문제들을 자기 속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거지. 그래서 결국은 대신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차원에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그리고 대인적인 차원에서는 이 열매가 필요한 거예요. 이것이 관계로서 나타나는 거예요. 이 두 개가 일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속에서 societas가 계속 흐르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계속 부어줘서 증대되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지은 죄들을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회개의 열매를 맺어서 그 관계가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해 지도록 각자가 노력을 해야 하는 그러한 지평을 갖게 되는 거죠. 아주 놀라운 일치를 보여주는 거죠. 수학의 공식처럼 탁 들어맞는 일치를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 공동체의 지평속에서 입증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 미래에 이루어질 이웃과의 관계를 모두 공통분모처럼 집약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명제가 성립하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이렇게 이러한 societas속에서 자기의 신앙과 태도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reality를 여기에서 정말 알 수 있어야 해요.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 중심적인 신앙이 되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 이제 용서가 그래서 중요한 거고요, 그 다음에 넘어가면 그래서 용서하시는 사랑을 배운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이렇게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악을 행했을 때, 그 사람을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용서가 고통스럽고 아플수록 결국 뭐가 그 아픔과 고통의 크기만큼 자신 속에 뭐가 있는 거예요. 자기 사랑이 있는 거예요. 자기 사랑을 자기 사랑의 크기 만큼 아픈 거예요. 자기 사랑의 크기 만큼 고통 스러운 거예요. 그것을 비워 버리면 아프지 않아요. 비워 버리면 아프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아직까지도 교회 지체속에 있지만 자기 사랑의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은혜의 계기가 되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제 용서하시는, 그래서 자기가 받은 용서가 얼마나 가치있고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아울러서 또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용서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항상 이중의 화목의 경험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이고,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주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은 caritas의 사랑으로 하는 거라 이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입으면 입을수록 지체들을 더 잘 용서하게 되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보면 한번 미워하고 가슴에 품고 떼려 죽여도 안 꺽여지는 사람 있잖아요. 복음적인 생활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게 사실은 사랑의 부족이에요. 결론적으로. 그래서 가장 악한 관계였다고 할지라도 그게 감정이 지나가고 나서는 그것을 마음속에서 깊이 용서하고 그리고 그도 사랑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기억하고 가슴에 품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니에요. 잘하는 것이 아닌게 아니라, 자기의 안에있는 은혜를 반영하는 많은 것들이 참된 은혜가 아니라는 것들을 보여주는 거예요. 끝없이 용서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을 이제 80페이지에서 다루고 있는 거예요.
80페이지 맨 밑의 단락을 보면, 오늘날 교회에 가득 찬 다툼과 분쟁들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지지 않기 때문에 한번 일어난 분쟁들은 끝없이 불길처럼 번져 가고 지체들의 아픔은 온 몸에 전염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참된 신자들은 자신이 고난을 받더라도 교회와 다른 지체들은 더 이상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자기 깨어짐의 용서를 통하여 교회는 미완성의 추루함을 점점 더 벗어버리고 순전한 공동체가 되어 갑니다.
용서의 복됨이 뭐냐 하면 소극적으로는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선물이에요. 그렇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기 전에는 우리가 속박되잖아. 그때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을 때 우리는 자유케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못느낀다 할지라도 지체들속에서라도 이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속박이 되는 거잖아. 속박이 된 만큼 이 속에 흘러야 할 그 성령안에서의 교통, societas는 방해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면 성령이 슬퍼 하신다 등등의 표현, 근심케 하신다는 표현 등등이 이 societas가 방해받는다는 표현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일뿐 아니라 공동체적 문제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넘어가면 교제를 세롭고 올바르게 하시는 기초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되죠. 뭐냐 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는 이게 목표가 아니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우리들이 있는데, 죄지은 우리들이 있는데 우리들을 이렇게 지나가면서 용서해주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을 다시 사랑하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늘 이야기 하듯이 더 이상 나한테 말하지 마라. 이 문제에 대해서 너한테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그대신 너와 나는 관계를 더 이상 갖고 싶지 않다. 이것은 용서하겠다는 표현이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에요. 왜냐 하면 용서, 그 자체가 사랑으로 가능한 과정이기 때문에, 용서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이 용서의 참됨을 확증하는 열매가 사랑이에요. 사랑은 관계의 계속이에요,. 관계의 지속이에요. 관계의 지속이죠. 그게 사랑이에요. 그래서 끊임없는 용서는 하나님과 잘못되었던 관계를 새롭게 시작이 되게 하시는 출발이 되듯이 또한 사람들속에서의 서로를 용서하게 하는 이 용서는 또한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의 중요한 말하자면 계기가 되는 거죠. 그러한 계기가 계속해서 주어지게 될 때에 관계는 새롭게 주어지게 되고 발전하게 되는 거란 이야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게 하시는데 여기에서 사랑하시는 교제를 배움, 교회의 참된 기초는 사랑, 그 다음에 교회와 사랑의 완성. 이렇게 이제 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는 조금만 꼼꼼히 읽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래서 뒤에 이제 교회 일치 문제는 약간은 어려워요. 그래도 이 교제를 공부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이 부분들을 깊이 목상하면서 여러분들이 가르침을 풍부하게 하기 바랍니다.
또 하나 교훈을 해야겠죠? 가르침의 풍부함은 어디에서 나온다고요? 가르침의 풍부함은 어디에서 나와요? 삶의 무엇?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여러분들이 먼저 이것을 실천하게 될 때에 그때에 이 진짜로 용서해보고 경험이 있어야지 강물처럼 가르침이 확 밀려오게 되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신앙이란 말이에요. 어떻게 경건과 학문이,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이 분리될 수 있겠어요?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질문할 것있으면 다음주에 질문해 주십시오. 기도하겠어요.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배운 이 말씀을 잘 소화해서 양떼들에게 아름다운 꼴로 먹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