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성도의 마음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아 5:2).
Ⅰ. 본문해설
이 아가서는 솔로몬의 작품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나눈 사랑의 경험을 시의 형태로 엮은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남녀상열지사만을 다룬 노래가 아닙니다. 성경 모든 책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사랑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은 그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관계, 그리고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가서는 신랑의 노래가 나오고, 신부의 노래가 나오고, 또 신랑의 노래가 나오는 이런 교창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바로 그 앞에서는 신랑의 노래가 나왔고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다시 신부의 노래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부분에서 신부는 왜 그런지 신랑이 멀리 떠나간 상태에서 홀로 잠들어 있습니다.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이 신부는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거울이기도 하고 보다 더 공동체적으로는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예표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교회는 잠자기 좋아하는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잠들어있는 신부의 모습은 잠자는 성도 그리고 교회 역사 속에서 쉽게 잠드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Ⅱ. 잠자는 성도
엔드류 보나라는 청교도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는 잠자는 큰 거인과 같다. 교회는 마치 잠들기 위해 태어난 거인과 같으니 혹은 종종 큰 소리에 잠을 깨는 적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깊은 잠에 빠져 든다.”라고 말이죠. 어느 시대든 교회는 이처럼 깊은 잠에 빠지기를 좋아했습니다. 잠시 깨어난 때가 있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자극은 사라지고 마치 잠자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잠드는 것이 교회의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도 그 교회가 완전히 잠들도록 내버려 두신 적은 없습니다. 어떤 때는 많이 잠들고 어떤 때는 조금 살짝 잠이 들지만 어느 때도 하나님이 모든 교회가 완전히 잠들도록 버려두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든지 깨어있는 소수의 성도들이 있어서 그 깨어있는 성도들에 의해 신앙의 본질들이 경험되고 또 그것들이 글로써 말로써 잘 정리되어 당대에 선포되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겨져서 오류가 가득한 세상에서 신앙의 참된 본질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날마다 그것들을 사용하셨던 것이죠. 이러한 사실은 우리 성도 개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언제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셨습니까?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1년 2년도 안 된 분들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회심하고 30년 40년 혹은 50년의 세월이 흐른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긴 세월동안 예수를 믿었을 때 여러분 항상 깨어있었는지 한 번 여러분들의 믿음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많은 날들 안에서 여러분들은 잠들어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영혼은 잠들어 있어서 진짜 생생하게 깨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활발하게 뛰어놀며 주님을 섬겼던 때는 회심하고 살아온 날들 중에서 아주 적은 날들이었다는 사실들을 실감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신부가 왜 그런지 신랑이 없어져 버렸는데도 잠들어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자는 성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우리 주님의 섭리를 봅니다.
Ⅲ. 잠자는 성도의 마음
영혼의 침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영혼이 잠들어 잇는 것을 가리킵니다.
A. 영혼의 침체: “내가 잘지라도”
영혼의 침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혼의 침체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영적인 생생한 생명력과 활기를 잃어버리고 영적인 활동이 무기력해져서 하나님의 사랑, 용서, 영광에 대한 생생한 감각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영혼의 침체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께 싫증을 내게 되고 육체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기에 게으른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부는 한 때 신랑없이 살 수 없는 그 마음이 신랑과 완전히 합치되어 있는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신랑은 신부에게서 멀어졌고 그랬는데도 이 신부는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생활에 있어서 죽음과 가장 유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입니다. 수면이야말로 우리의 육체의 죽음과 아주 유사한 것이죠. 우리의 육체의 죽음은 목숨이 끊어져서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작용이 멈추고 바깥 사물들에 대한 반응이 종료되는 것을 뜻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우리의 몸이 한 편으로는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활발하게 이 안에서 신진대사 작용을 하고 또 밖으로는 우리의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우리의 살갗을 통해서 외부의 세계와 접촉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접촉한 외부의 많은 사물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오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고 그 때 사랑과 미움 분노와 슬픔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 우리가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게 되는 것이 육체가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이 모든 기능이 일시에 멈춥니다. 그러나 수면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최소한의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생명의 조절작용만 이루어지고 나머지 활동은 모두 멈추게 됩니다. 10시간 동안을 열렬하게 일하는 사람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는 일할 수 없겠죠. 그러나 10시간 동안 등뼈가 아프도록 잠을 자는 일은 안 먹고 안 마셔도 가능합니다. 이게 영혼의 죽음과 영혼의 잠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여서 하나님을 찾고 은혜에 참여하고 열심히 선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노라면 양식을 끊임없이 공급받지 않고는 영혼도 그 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도 넉넉히 살 수 있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을 변화시키는 기쁨이 없어도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활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아무리 기름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영혼이 움직여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행동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섭취하고 싶은 이 영적인 욕구가 감퇴되거나 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단 하루라도 말씀의 은혜를 안 받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던 사람이 몇 년 동안 거의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산 것이 아니죠. 육체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모든 활동이 멈추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죽음은 개념이 틀립니다. 신자의 영혼이나 불신자의 영혼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멸절되지 않습니다. 늘 살아있다는 말씀이죠. 그러나 영혼에게 있어서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작용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진리와 성령 안에서 영적 생명을 공급받고 영적 생명을 공급받을 때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주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이런 영적인 생명력이 사라지게 되고 아주 결핍되게 되면 그 다음에 영혼은 죽어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이 죽어있는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죽어있어도 자기의 육체를 향해서는 놀랍도록 살아있고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죄는 은혜가 사라진 것이 곧 죄입니다. 죄에 빠지기 위해 별도로 노력할 필요는 없고 은혜를 못 받고 성령과 진리로부터 멀어지면 그는 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이죠. 이 때 그는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수많은 욕망을 따라서 잘못된 행실들을 낳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죽은 행실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영혼의 침체는 바로 이러한 커다란 문제들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묻지 마십시오. 성경은 여러분들이 짓는 죄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그 진리와 은혜 안에서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을 성경은 기대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의도대로 생활할 수 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이 신부는 한 때는 신랑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신랑이 어디에 갔는데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도 잠들 수 있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한 번도 마음이 바뀌시거나 우리를 버리시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부인 우리는 순간순간 그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그 신랑을 배반하고 버리고 그리고 잘못된 길로 갑니다. 바로 이 술람미 여인이 오늘 잠들고 있는 모습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여자가 노래하기를 “내가 잘 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잠들기는 하였지만 완전히 편안하게 마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지는 못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이렇게 새 창조에 버금가리만치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만드시면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우리에게 세 가지 감각에 눈뜨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셨다는 사죄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새롭게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감각은 영혼이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의 공급을 받으면서 생생하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때에는 이 세 가지 감각이 극도에 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지에 대해서 충분하게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혹은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거나 심지어는 찬양을 부를 때조차도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으시며 아주 아름다우신 분이시고 자신은 아주 미천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 그분은 지극히 뛰어나고 아주 위대하시며 자기는 그 분 앞에 복종하고 사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럴 때 신자는 불순종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신자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갖게 됩니다. 이천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오늘 현재적으로 내가 느끼게 되는 것이죠.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고 생생하게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의 마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모든 환경과 삶의 질서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닙니다. 자기와 같은 죄인인 용서 받았다고 하는 생생한 감각이 성령 충만한 은혜 생활가운데 생생하게 유지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신 은혜 때문에 자기는 아주 무가치한 존재이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신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영혼에 아주 분명하게 영향을 끼치는 이 영적 생활이 사라지게 되면 신자의 마음은 굳어지고 신자의 정신은 아주 혼란스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의 침체에 빠졌을 때 우리의 머리는 꼭 쓰레기통과 같아집니다.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 영적인 것과 육체의 것, 버려야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들이 뒤엉켜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 모르게 비빔밥이 되어서 우리 속에서 쓰레기통과 같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영혼의 침체에 빠지면 머리가 아파요. 골치가 아프다고. 그래서 영혼의 침체에 빠진 사람에게 뭘 물어보면 항상 하는 말이 몰라예요. 몰라 당신의 신앙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실까요? 잘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왜 열렬히 기도를 못하고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지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을 까요?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시면서 당신 같은 사람을 구원하셨을까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나 은혜에 충만하게 되면 이런 것들이 아주 질서 있게 정렬이 됩니다. 이것은 가치가 없는 생각, 이것은 비본질적인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 이것은 목숨 버려도 붙들어야 될 것, 그리고 이것은 내가 행하지 않아도 될 일, 그러나 이것은 내가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헌신해야 할 일 이런 것들이 질서가 1번, 2번, 3번, 4번 쫙 정해지는 거예요. 시루떡처럼 분명하게 딱 정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것들이 들어오면 그 질서 속에서 딱 대보면 아는 거예요. 아 이건 중요하지 않은 것, 그러면 버릴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 그러면 자리를 비켜서라도 그것을 집어넣고 그대로 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면 이러한 생생한 감각들이 사라져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버림받고 내팽개쳐졌다고 하는 느낌이 드는 거죠. 말씀을 들어도 옆에 있는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만나는데 나의 마음에는 찬바람이 불어요.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없이 감격하고 기뻐하는데 나는 짜증이 나는 거죠.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하면 어떤 지체는 마음을 쏟아 부으며 기도를 하고 나는 마음이 건조하고 그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밖에는 들지 않아요. 그 때에 저는 사랑하시고 나는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에요. 그러나 어떤 상황이라도 그리스도는 교회도 성도도 버리시는 법이 없어요. 언제나 버리고 떠나가는 것은 교회요, 신자이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버리거나 신자를 떠나가지 않으셔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 그리고 우리의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에요. 은혜가 사라지고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에 신자의 마음은 신랑을 향한 아주 애달픈 그러한 간절한 사랑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여자처럼 신랑이 없는데도 찾으러 갈 생각도 안하고 그리고 무릎을 꿇고 신랑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퍼질러 잠을 잘 수 있는 마음이 된다는 애기에요.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신자의 마음은 완전히 잠들 수는 없어요. 그래서 오늘 이 신부가 신랑은 없어졌고 자기는 잠들었지만 마음까지 완전히 잠들지는 못했기 때문에 내 마음 깨어있고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빈 잔과 같이 그 마음의 공허한 그 무엇을 주셨어요. 그리고 이것은 술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하고 극도의 향락에 빠져보아도 채워질 수 없는 것들이에요. 이것을 모든 인간에게 주셨어요. 그것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이기도 해요. 인간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그 영혼이 후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주 하나님 후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으로 영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혼은 끊임없이 육체에 갇혀서 자기가 본래 왔던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복음의 빛이 비추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이런 목마름이 있지만 이것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는 몰라요. 먹고 마시고 교육을 받고 이래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죠. 그게 쾌락인줄 알고 재밌게 놀고 취하고 때로는 죄를 지으면서 까지 극단의 향락으로 달음질 치지만 그 순간이 끝나고나면 더 깊은 공허함이 영혼을 휩싸 그는 우주 공간에 홀로 내동냉이 쳐진 것 같은 무서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에요.
실제로 뭐 한 15년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제가 직접 그 기록을 보았습니다. 서울 북쪽으로 가면 수유동이라고 있어요. 우이동 있는데 어느 병원에서 생긴 일이에요. 새벽에 의사가 당직을 서는데 어떤 환자가 이 사람들에게 그 떠메어져서 병원에 도착했어요. 선생님 이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심장마비로 방금 쓰러졌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이렇게 진찰해보니까 완전히 죽었어요. 소용없습니다.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리고 보자기로 덮어 넣고 시체실에 넣어놨는데 아침이 됐더니 여기저기서 새벽에 가족들이 올라와서 울고불고 진짜 초상집이 됐어요. 유족들은 막 울고 슬퍼하는데 이 의사는 환자가 죽은 폼을 가만히 봤어요. 사람이 태어날 때는 두 손을 움켜쥐고 태어나도 죽을 때는 펴고 죽는 것이 이게 일반적인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한 손은 펴고 한 손은 꽉 움켜주고 죽었어요. 그래서 의사 생활 20년에 이렇게 기묘한 폼으로 죽은 거는 처음이에요. 이 가족들은 울고 있는데 이 의사는 도대체 저 주먹 속에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손가락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펴봤더니 화투 두장이 떨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뒤집어보니까 삼팔 광땡이에요. 도대체 이 사연이 뭔가 그러고 알아봤더니 장례가 난 집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첬는데 끝발이 안 땡겨서 다 돈을 잃은 거야. 새벽에 끝빨이 붙었는데 돈이 잔뜩 쌓였어요. 그런데 펴보니까 삼팔 광땡이 들어 온거에요. 옆에 있는 사람이 펴봐 너 뭐야? 그랬더니 딱 피면서 삼팔 삼팔 하다가 심장마비로 으악하고 죽은 거에요. 그러니 그 후손들은 후일 너희 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느냐 누가 물으면 나라를 지키다가 죽었다든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가 죽으셨다든지 모 그래야 되는데 삼팔 광땡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어떻게 보면 그게 무슨 심장마비로 죽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에요. 그런데 화투 두 장을 들고 삼팔 삼팔 그러다 죽는 사람이나 그것보다 조금 더 큰 땅문서 집문서 붙들고 내 땅 내집 그러다가 죽는 인간이나 그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려다 볼 때는 그게 그거지 뭐가 틀리겠어요?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영혼의 빈 잔은 그렇게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에요.
B. 마음의 감각
영혼의 침체에 빠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단번에 그에게 벼락을 내리시거나 죽여 버리시거나 사업이 도산하게 하거나 은혜가 떨어졌다고 해서 가족들을 불치의 병으로 몰아넣으시거나 아니면 부도가 나게끔 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영혼이 깊은 잠에 빠졌는데도 그 사람의 삶에는 계속해서 번영이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평화로울 수 있어요. 마치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간 배를 탄 요나가 한동안 순풍에 돛 단 듯이 항해하는 뱃전에서 즐거워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신자의 영혼은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리고 외적으로 번영이 있고 평화가 있어도 마음에 진정한 안식은 찾지 못합니다. 오늘 이 신부가 신랑이 사라지고 잠들었지만 그러나 마음까지는 잠들지 못해서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 잠들어 있는 것처럼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사람이다. 그게 신자의 정체에요.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내가 지금 곤고한 것은 불경기 때문이다. 장사만 잘 되면 행복할 텐데“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우리 아내만 건강하다면 우리 집에 무슨 근심이 있을까라고 말할지도 모르죠. 내게 돈이 좀 없어서 고통을 받고 이것이 괴로움을 주는데 돈만 많다면 사업만 잘된다면 나는 걱정이 없을텐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 영혼의 쉼과 완전한 만족의 궁극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의 신앙생활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붙어있고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과의 생생한 은혜의 교제 속에서 생활할 때 그 때 우리가 항상 돈 많고 건강하고 주위에 속상한 일 없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핍박을 받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견딜수 없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깨어 있고 생생한 하나님과의 은혜의 교제 안에 살 때에는 이 모든 인생의 풍랑과 괴로움들이 예수님의 품으로 이끌어 가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풍랑을 인하여 주님 안에 있는 안식을 더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제가 그릇 살았지만 고난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제가 주님의 율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은 저를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친절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가슴이 찟어지는 것 같은 그런 견디기 힘든 시련 때로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참아야 했더 그 많은 고통의 순간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잊기 쉬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이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이 절대로 일상적인 일이 아니고 평범한 일이 아니고 그리고 만입이 있어도 내 모든 피와 살들이 소리쳐도 다 찬송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은혜라고 하는 것을 살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리스도를 버리고 믿음의 생활에 손해를 입히고 얻을 수 있는 것들 중에 진정으로 값어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버리고 붙잡았던 많은 것들은 그 순간에는 아주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더 큰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에요. 그래서 신자는 어떤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남아 있는 것이에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요. 여성을 많이 상대하는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돈이 아무리 많고 그리고 큰 집에 살고 외제차를 굴리고 공부를 많이 해서 교양을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남편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속일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돈없는 것은 명예로 대치되고 또 학식이 없는 것은 다른 기술로 대신 채울 수 있을지 몰라도 교양이 없는 것은 그 사람의 권력의 지위를 가지고 덮을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랑을 받을 사람이 참답게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영혼의 어두운 그림자야. 잠시 손잡고 살다가 죽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성에게도 그 그림자를 감출 수 없다면 영원히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신자의 영혼의 상태가 감출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자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하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헌 신발 팽개치듯이 사명이고 나발이고 자기 좋은 대로 도망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그렇게 자기 새끼들보다 사랑하던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 사랑하는 구역식구들, 사랑하는 어린 영혼들 어느 한순간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내팽개치고 제 멋대로 갈 길을 가는 이유는 무엇이죠?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던 자신의 목회자들에게 어느 한 순간 표독하게 마음을 칼날 같이 세우고 그리고 다툼과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기쁘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면서 꺾어지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개떡같이 여기는 그 담대한 불신앙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돼요? 질문은 많지만 대답은 마치 수많은 가지들이 있지만 하나의 뿌리에 있는 것처럼 결국은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죽은 행실들이 나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었을 때는 그렇게 겸손하던 사람이 교만으로 충만해지고 그리고 마음속에서 하나님도 잘라 버릴 수 있는 이 무지막지한 무모함,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드리면서도 추호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 그 뻔뻔스러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에요. 주님이 신랑이 멀리 떠났는데도 이 여자는 잠들었어요. 그러나 그 잠은 예전에 신랑의 품에서 얼굴을 기대고 그 심장의 박동소리를 느끼며 신랑의 오른 손에 의해서 머리부터 온 몸에 이르기까지 어루만짐을 받으며 잠들었던 그 잠과는 다른 종류의 잠이에요. 인생을 오래 산다고 해서 길게 사는 것이 아니야. 오십년을 예수를 믿어도 거의 대부분을 이렇게 잠자면서 신앙생활을 하며 그는 1년도 하나님 앞에 산 것이 아닙니다. 18살에 예수를 믿고 뜨거운 은혜 속에서 살다가 20살에 요절을 했다면 차라리 80살까지 예수를 믿은 그 사람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스무 살에 요절한 젊은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중에 우리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살아온 세월들은 얼마나 될까요? 몇 해 동안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나요? 몇 해 동안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왔나요?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억지로 사는 것처럼 살아온 날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니었습니까? 결국 이 신부는 계속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마음까지 잠들지는 못했습니다.
Ⅳ. 찾아오시는 그리스도
결국은 이 여자가 떨치고 일어나서 신랑을 찾으러 어두운 밤길을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빛 먼 길 어디엔가 자기를 버리고 홀연히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아주 멀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신랑이 바로 그 밤에 바로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랑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제발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히 맺혔노라 사랑이 식은 신부가 신랑 없어도 넉넉히 잠들어 있는 그 밤에 신랑은 신부가 그 문을 열어줄 때를 기다리며 온 밤이 지나도록 그 이슬을 머리와 온 몸에 흠뻑 맞으며 그 바깥에서 신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급기야 그는 이슬에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문을 향하여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영혼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하나님의 그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찬양)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들어 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온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가 정작 계시고 싶은 곳은 황제의 보좌나 이 세상 임금들이 앉는 의자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진정으로 계시고 싶은 곳은 우리의 마음 그 속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가 가장 거하고 싶으신 곳이에요. 주님이 우리의 마음의 높은 보좌에 계셔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통치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계셔서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쓰레기들을 걷어내시고 우리의 마음을 질서롭게 아름답게 가다듬으심으로써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당신의 질서를 펼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그렇게 오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주님은 점령군처럼 우리의 마음의 문을 비인격적으로 부수고 군화발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신랑이 얼마나 힘세고 튼튼한 사람이었을텐데 그까짓 작은 문 하나 부수고 그리고 신부가 있는 방 속으로 급히 들어갈 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신랑은 마음에 없는 신부를 가슴에 품고 잠들기 보다는 자기를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신부를 가슴에 품고 싶어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마음을 우리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나머지는 모두 다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짜 꽃이 아니고 종이로 만든 가화 조각들입니다. 신랑 신부가 둘이 너무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이 보는 앞에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맞아들이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백년을 해로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신부는 신랑과 함께 여행하고 웃고 떠들고 밥 먹고 같이 놀고 관광도 하고 했습니다. 그러나 첫날밤에 자기의 정절을 주지 않겠노라고 문을 굳게 걸어 잠갔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이죠. 그러면 그 모든 결혼식 그 여행 그 수많은 꽃다발 헤알릴 수 없이 수많은 지인들로부터 받은 박수와 갈채, 여기저기 터지는 후레쉬와 결혼을 축하하는 종소리 그 화려한 예배당에서의 예식 그까짓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부는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자기의 마음의 문을 모두 열고 자기의 깊은 속으로 들어와 부부가 한 몸을 이루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고의 기쁨을 서로 때문에 맛보며 이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참된 기쁨의 근원이 되는 그런 완전한 연합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면 감동과 설렘으로 남편을 기다리는 그것이 결혼한 신부의 진정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주님과 결혼했는데 누구를 마음에 품고 계시나요? 여러분들은 주님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또 사랑을 받고 있고, 그 신랑이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께 버림받기 까지 여러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는데 여러분들은 예수 대신 매일 가슴에 누구를 품고 잠드셨나요? 영혼의 깊은 잠 속에서 사실 그대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의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자기 자신의 행복입니까? 자아입니까? 과연 그것이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밤이슬을 맞으며 밖에 세워두면서 까지 부둥켜않고 온 밤을 지내야할만큼 그렇게 가치 있는 것들일까요? 번잡하고 아주 소란스러운 마음에서 멀어지십시오. 굳이 기도원을 올라가지 않아도 조용히 침참하며 쓸데없이 나뒹굴어져 소리내며 흐르는 깡통같은 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한 번 벗어버리세요. 하루 쯤 휴가를 내서 교회와서 생활해보세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며 금식하며, 찬송하며, 말씀을 읽으면 그래도 시간을 남으면 교회 마당이라도 쓸으면서 흩어진 영혼의 시선을 한 곳에 모아 우리의 참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한 번 바라보십시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주 송축하리.
그러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신랑이 없어서 울고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흐느낌이 들릴 거예요. 그때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내 인생의 모든 곤고함이 우리 주님을 내가 버렸기 때문이구나. 나의 행복과 즐거움과 보람을 찾아서 내가 너무나 멀리 주님을 떠나왔구나. 그때 신자의 영혼은 탄식하며 주님 앞에 울부짖게 됩니다. 하나님 나는 신랑을 잃은 신부입니다. 내 신랑이 어디를 갔습니까? 내가 방종하니 신랑이 내가 지겨워 멀리 떠났습니까? 그 때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군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생명적인 교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둘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분게 사랑을 받고 그 분을 사랑하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부부애로써 사는 것입니다.
(찬양)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Ⅴ. 결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모든 것은 잠시 지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날 때 예수 없이 살 수 없는 유전자를 우리의 영혼 속에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헛된 것들이고 우리의 영혼에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여러분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대신 죄를 택하고 순종대신 불순종을 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없이 사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섭리 속에서 여러분들의 선택을 지켜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 신랑이 밤이슬 흠뻑 맞으며 온밤이 지나도록 사랑하는 신부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문을 여는 것은 그대들의 몫입니다. 그래서 문 밖에 홀로계신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문 밖에 홀로 세워둘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의 생명도 그분의 것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중에 그분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신랑 되신 그 분을 그렇게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모르던 시대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의 가슴에 못 박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을 알고 그와 혼인하였으니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품을 그리워하고 그 품으로 돌아가는 신부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