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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준비하라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 37:5)
녹취자: 박은경
은혜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할 설교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6번 한 것으로 일단 만족하시고 거기서 여러분 각자의 삶에 신앙의 지침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늘 주의해야 될 것은 말씀을 맛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sermon taster라고 합니다. 설교를 맛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듣고 깊이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설교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지 여러분들이 알고 경험하는 하나님은 설교자의 하나님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동받고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불굴의 정신과 격렬한 투지를 가지고 받은바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야지만 영적인 삶에 진보가 있습니다. 야고보선생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도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거울을 보고 ‘세상에 내 얼굴에 이렇게 더러운 검댕이 묻었구나. 이럴 수가!’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고는 검댕을 지우지 않고 다시 좋다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비유한 사람이 바로 말씀을 듣고 안 사람 그런데 자신의 삶이 고쳐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깊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원래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고로 내가 쉽게 변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입니까?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회개하라”라고 간단하게 명령하셨지 “회개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내가 너희에게 회개할 능력을 주거든 너희가 회개를 해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성결 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지 복잡하게 “성결이라는 것이 원래는 잘 안되지만 그러나 자꾸 하면 될 줄 누가 아냐 노력을 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는 성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존 오웬도 자신의 책 속에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대단히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천진난만한 것이 대단해 보이고 순수해 보이지만 영적인 생활에서 천진난만한 것은 마귀에 의해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합니다. 마귀는 온갖 궤계들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천진난만 그 자체라면 이건 마귀의 밥입니다. 그러면서 존 오웬이 이야기하는 골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듣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듣는 것 없이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말씀을 따라서 우리들이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될지언정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물론 말씀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 없이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그러나 잘 듣기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변화를 저절로 불러일으키는 것을 아닙니다. 태만하고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교만하고 악랄한 자아와 철저하게 싸우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면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능력을 힘입기를 사모하는 마음, 깨달은 바 그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불굴의 투지, 주님의 뜻대로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살점도 배어내겠다는 그 불굴의 투지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그렇게 칼빈주의적인 교리를 선호하고 하나님의 주권사상에 대해서 탁월한 견해와 그런 청교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찰스 스펄전 목사의 설교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설교 속에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피 중에 단한방울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흘리기를 싫어하는 피가 있다면 그것을 뽑아내버려 주시고 내 몸의 살 중 단 한 점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찢어지기 싫어하는 살이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 버려 주시옵소서.’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훌륭한 성경지식을 갖고 설교를 들으며 많은 감화를 받았는가는 마지막 날에 아무런 상급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람보 영화를 보면서 한명이 수백 명을 죽이고 정글을 누비는 장면을 보면서 아하라고 감탄하는 사람이 총 한방 못 쏘는 사람이 있듯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때때로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점을 주의하고 책을 읽으면서도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어차피 내가 못할 일 누가 하는 것을 보면서 감명을 받으면서 감명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그 사람과 같은 위치에 서있다는 착각에 만족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을 혐오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지식을 가졌는가, 어떤 설교를 들었는가,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깨닫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정제된 삶을 살고 깨끗한 삶을 살아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길러보면 아버지 사랑을 압니다. 전 아이들을 낳기 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란 말이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못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 자랄 때까지 아버지는 강원도에 있고 나는 서울에 있는데 무슨 정이 붙겠습니까? 몇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잠깐 보고 헤어지는 데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할 때 아버지란 단어자체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보니 느껴집니다. 부모가 무엇을 이야기를 할 때 무릎을 꿇고 조신하게 들으면 얼마나 착하고 귀여 웁니까? 근데 듣기만 하고 안하면 배신감이 느껴집니다. 장난치고 안 들었으면 배신감이 안 듭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깨달은 말씀그대로 행할 때에만 여러분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차피 여러분들이 행하지 않고 살 것 같으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에 대한 시리즈도 6번이나 했는데 이것을 늘 기억하시면서 무엇을 들었는가를 생각하고 다시 또 듣고, 가슴에 세기고 하면서 기어코 그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시리즈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그 길을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구체적으로 그 중심자리에 무엇이 와 있는가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서와 많이 관계된 문제이고 그것이 우리의 인격전체와 삶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삶의 태도와 관련해서 신앙이 무엇이냐고 만약에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절대의존의 마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무엇이냐고 할 때 신학자들은 절대의존의 사색이라고 말합니다. 생각과 이 모든 상념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 있는 것. 그래서 그러한 생각과 마음이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기대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러분 진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도덕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자녀들보다 더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내에 대한 설교를 들었지만 여러분은 안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믿는 사람들이 인내하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제생활에 있어서 믿지 않는 자들을 반드시 능가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특성만을 가지고는 현실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결정적인 표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무엇이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는 한 요인이 되느냐? 그것이 바로 절대의존의 감정입니다.
옛날에는 동네에서 가난한 아이들, 학교도 못다는 아이들을 꼬여다가 지하실에 가둬놓고 일을 시키다가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와서 돈벌이를 해서 일당을 받아가지고 가는 아이들은 주인이 야단을 치면 집어치고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자기의 친아들은 종아리를 회초리로 치면 용서해달라고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이것이 바로 친 자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야단을 치고 매를 때려도 그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절대의존적인 마음 이게 바로 신앙의 중심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이 바로 내가 주를 떠나 어디를 가겠는가? 시인도 말합니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 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의 목전에서 내가 쫓겨날 지라도 내가 주의 성전만을 바라보겠나이다. 이런 고백들은 모두 절대의존적인 신앙입니다. 주께서 책망하시고 야단치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계획대로 인도하지 않으실지라도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바로 절대의존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저는 찬송가 중에 그 찬송을 참 좋아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여기에서 ‘길’이라는 것은 히브리어의 ‘데레크’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특히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더 우세하게는 이것이 인생길 같은 것,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야 할 길. 하나님 앞이 아니라도 자기가 지내온 인생의 여정을 가리킬 때에 ‘데레크’라는 말이 써졌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할 때 길은 다분히 물리적인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이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를 하나님께서는 보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자기의 인생을 온전히 위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모두 맡겨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위탁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싸움이 있습니다. 그 싸움은 인생은 두 가지 시야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한 가지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선입니다. 무엇이 좋은 것이냐? 그것을 한쪽에서는 자기가 걸어간 자기가 바라본 시야를 가지고 선을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그 시각에 있어서 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쪽 방면에서 볼 것이냐 저쪽방면에서 볼 것이냐를 가지고 계속 갈등하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고통을 받게 되고 불순종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우리인생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확신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수하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라라는 것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인생길을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굉장히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위해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일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대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셔서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 없고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살겠다는 독선적인 오만으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삶이 그렇게 되어있는데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이 있는 관계가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는 자신의 삶의 문제를 여호와의 손에 전적으로 위탁하는 절대의존적인 신앙 속에서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것을 깊이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기의 삶의 문제를 전적으로 의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갈 때 가장 좋은 것은 우리는 서슴없이 입술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고난이라도 좋은 것이요, 주님이 주시지 않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라도 그것은 불행한 것이고 나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이 계셔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든 고난이든지, 형통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면 결국은 가장 종은 것이라는 확신, 그것을 우리들이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굳게 확신할 때에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는 아픔이나, 고난이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 이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손상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기르면서 가장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때가 언제냐면 약을 안 먹겠다고 하는 어린애를 큰 애 같으면 야단쳐서 먹이는데 안 먹겠다는 애를 어른이 맛을 봐도 그렇게 쓴 약을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먹여야 되는데 입에 손을 쑤셔 넣고 목구멍으로 넘기려고 하니 이게 눈물을 펑펑 쏟고 얼굴이 시뻘게져가지고 난리를 칩니다. 여러분 그 때 그 아이의 눈에 부모가 얼마나 밉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유치원 다닐 때니까 대여섯 살 되었을 것입니다. 벌레를 먹어서 어금니가 하나 아픈 것입니다. 그때는 시골이 참 무지했습니다. 아주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병원에 갔는데 강원도 산골의사가 펜치같이 생긴 것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마취도 없고 넷이서 팔을 잡는데 두 사람은 간호사였고 두 사람은 우리 엄마, 아빠였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배신감이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지금 38년이 지났는데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강릉을 가다가 들러봤는데 그 병원이 아직도 있었습니다. 아주 끔찍했습니다. 결국은 의사가 빼다가 안 빠지니까 잡아당겼는데 부러져서 나왔습니다. 서울에 와서 치과를 갔는데 웬걸 입을 벌리더니 주사 같은 걸로 빼더니 세상에 어느 무식한 인간이 애 이빨을 이렇게 뺐냐며 생 이빨 반 토막이 나왔습니다. 그 때는 부모뿐만 아니라 그 의사가 인간같이도 안 보였습니다. 너무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부모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떤 결과가 올지 아니까 그랬습니다. 사랑이 그런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모든 우리의 인생길이 저절로 가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이 교회 세울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어려움이 하나도 없었습니까? 그것은 별개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으면서 우리의 인생길을 여호와께 맡겼는데 피할 수 없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길이 주님께 맡기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길을 걸어갈 때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아무런 유익이 없이 애매히 고난을 당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요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있어서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의뢰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데 내가 그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그런 모습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보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이루시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맡기지 않으니까 이루어지는 일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인생 살아오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데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일이 있으면 한번 얘기해 보십시오. 그런 간증이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그런 간증을 쌓으면서 살아가야합니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실 때에 우리는 너무나 힘이 솟고 능력을 얻게 되고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깊이 의뢰하고 신뢰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기대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가장 기쁠 때는 지체들이 하나님을 의뢰하려고 할 때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살고 싶어 하는 지체는 목사를 바라보는 눈빛이 틀립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이 간절하고 마음속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사모함,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일어나게 될 때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아닙니까?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삶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영적인 상태, 마음의 상태는 곧 절대의존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지도하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너무나 자주 그렇게 씩씩하게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우리를 사용해서 당신의 뜻을 잘 이루시시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공하면 그 잘난 자기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범사에 깊이 신뢰하고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 주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고 나는 나를 도우시고 붙드시는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모든 일들이 형통하고 내 마음대로 풀릴 때는 얼마나 자기가 하나님을 잘 의뢰하면서 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형제 가운데 연배는 저보다 아래인데,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교회가 있는데 한인교회 중에서는 제법 큰 교회랍니다. 그런 교회에서 자기를 목회자로 불렀는데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기도를 해주십시오.”라고 해서 기도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한국에 나올 건데 꼭 담임목사로 가야겠느냐고 했더니 와서 나중에 고백을 하는데 자기는 정말 죽어도 가기 싫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믿음대로 안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판단 대로 살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자기대로 인생의 계획이 있습니다. 언제쯤 공부를 마치고 언제쯤 한국에 들어와서 언제쯤 교회 들어가서 언제쯤 사역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절대의존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기아집을 가지고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자기계획을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했는가를 깨닫게 됐다는 고백을 하면서 깊이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밀진단을 해야 합니다. 이 잡듯이 샅샅이 우리의 마음속을 누벼서 우리 삶 구석구석을 살펴서 여호와만을 의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나쁜 자아와 악한 생각들을 철저하게 복종시키고 파괴시킬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맡길 때 그 일들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참 하나님은 섬세하신 분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면 일이 이루어졌을 때 의심할 여지없이 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건이 있었습니다. 홍해 갈라진 사건이라든지, 만나사건이라든지, 여리고성 무너진 사건이라든지. 아무리 신앙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홍해는 우리가 힘을 합쳐서 바람을 불었더니 갈라졌더라고 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이 고백하기를 여호와 홀로 그 일을 행하셨다고 합니다. 그 때 자기의 조상들이 온전히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손 놓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너희는 잠잠히 오늘날 내가 행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 홀로 그 일을 하셨다는 고백을 합니다.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엄청나게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구나.’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구나.’라는 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강인한 신앙으로 범사에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앞에 모두 맡기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절대순종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