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맺는 신앙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3)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17-20)
녹취자: 박재홍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하고 고생한 농부의 보람은 추수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추수의 기쁨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쌀 나무 세대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추수의 즐거움을 저도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교 다니면서 그런 추수의 즐거움을 종종 경함하게 되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교회에서 주는 사례금은 한 푼 안 쓰고 모아도 등록금에서 3만원이 모자랍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1년에 한 번씩, 한 학기에 한 번씩 감격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강예배 드릴 때였습니다. 한학기동안도 고달픈 교회생활, 혹은 직장생활 속에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공부하는 가운데도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결석안하고 잘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시고 이른 새벽기도서부터 시작해서 밤 깊은 시간까지 쉴 새 없이 땀 흘리며 뛰어다녀도 건강을 주셔서 한 학기를 마치게 하시고, 나아가서 한 학기 동안 공부를 잘했다고 또 학교에서 손에 용돈까지 지어줄때는 그 종강예배가 더 감격스럽게 마련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종종 “하나님, 하나님 보시기에는 한 학기 동안 살아온 나의 삶이 맘에 안 드실지 몰라도, 주님, 최선을 다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셔도 이렇게밖에는 못 살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한학기가 끝나면 하나님 앞에 하며 종강 예배 때 펑펑 울고 은혜를 받으며 방안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저는 그 속에서 농부의 기쁨까지는 비교되지는 않지만 열매를 맺는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서 여러 차례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격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복음사역에로 부른 것은 6개월이나 혹은 1년으로 끝나는 사역이 아니라, 일평생 계속되는 사역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영혼의 추수의 때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마음에 주님을 섬기고 싶은 열심히 남아 있어도 이제는 섬기던 모든 일들을 그치고, ‘너는 내게로 속히 올라오라’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인생의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우리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얼마나 오르내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한다고 말하든지, 그러한 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인생이 주를 위해 얼마나 열매 맺는 인생이었는가 하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추구하는 열매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열매가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때에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풍성한 열매로 주 앞에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러워해야할 사람들이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사역으로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인생을 사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가 부러워해야할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바로 예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맺고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세상 사람들이 그 열매를 보고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사역의 열매를 맺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로마 교회를 향한 간절한 소원도 많은 이방인들 속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어진 것처럼 너희들 속에서도 또한 동일하게 열매가 맺혀지기를 원한다는 것이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열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누가 풍성한 열매를 맺혔다 할 때 사람들은 그 열매를 맺힌 방법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열매 맺힌 사역을 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열매 맺지 못한 사역을 할 때 인간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엊그제도 어느 한 예수 믿는 형제를 만났는데 교회 형편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10년 되었는데, 지금 교인이 10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근데 목사님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안수기도를 해주는데도 10명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때에 느낌은 심리적인 좌절은 물론이거니와 그 삶의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신학교 문턱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6년 혹은 5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열매 맺히고 있습니까? 여러분,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이 안에 들어와서 5년 혹은 6년, 2년 혹은 1년 공부했지만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까 여기 오지 않고는 결코 안 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촉구해 보는 것입니다.
(예화) 팔불출 같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신학대학원 2학년 때 일입니다.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우리 형제 3학년이 우리 집에 같이 학교 끝나고 놀러왔습니다. 앉아서 같이 담화하던 시절이니까 삼양라면에다 계란을 집어넣어서 끓여서 한 국자씩 퍼주면서 국물을 마시면서, ‘아, 정말 맛있다.’ 하면서 교제를 했습니다. 한 형제가 내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책장 캐비넷을 뒤지니까 무더기로 뭔가 서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것을 봐도 되냐고 그러니까 보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6년 동안 신학을 하면서 써놓은 페이퍼, 레포트들이 과목별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간간히 제가 쓴 글들도 거기 있었습니다. 형제가 다른 사람들은 함께 농담하고 이야기하고 떠드는데, 형제가 한 시간 동안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이만큼 쌓인 깨끗하게 타자되거나 정서된 수많은 레포트와 그들을 다 읽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돌아가는데, 계속 한숨을 쉬면서 골목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전도사님, 왜 그래요? 뭐 근심 있는 일 있어요?” 그러니까 이 친구가 돌아가면서 쓸쓸하게, “왜 말을 안했어요? 전도사님, 나는 오늘 전도사님 집에 와서 당신이 공부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그 모든 페이퍼들을 보면서 나는 신학교 시절도 없었고, 대학원 시절도 없다. 그런 절망을 느끼며 돌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말해주었습니다. “전도사님,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6년의 신학교 생활이 너무도 부끄러운 것이 많죠. 그러나 성도들의 헌금에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을철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가 맺기 전에 거기에는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농부의 피눈물 나는 사연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많은 열매를 맺힌 것을 바울은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 로마 교회를 위해서 “너희들 가운데 이런 놀라운 열매가 다른 이방인 교회에서 맺힌 것 같이 너희교회에서도 맺히기를 사모하노라”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에서의 사역에 놀라운 열매를 맺혔습니다. 수많은 목회의 간증을 교회 개척할 때마다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놀라운 열매를 여러분들의 사역 속에서 맺고 싶으면 아멘 해 보십시오. ‘아멘’ 맞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사도행전의 고백이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서 수많은 목회자와 목회 후보생들의 가슴을 들뜨게 하는 사역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기까지 사도가 보이지 않는 피나는 사연으로 어떻게 그 열매를 위하여 자신을 바쳤는가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입니다. 모두가 기쁘고 즐거워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 긴 여름과 그리고 오랜 가뭄, 그리고 긴 봄, 그리고 추위 때부터 열매 맺기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 수고해온 사람들만 춤추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추수의 때도 동일한 것입니다. 이 긴 시절을 세상 풍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그렇게 장난하는 것처럼 실험정신으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결코 영혼 추수할 마지막 때에 천사들과 함께 찬송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성령이 증거 하기를, 환난과 핍박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러한 곳에 사도바울로 하여금 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이 마지막하는 말이 “이제 나는 심령의 메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이 은혜의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기는 부르심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다가 꿈에도 기리던 순교의 길을 가거니와, 마음에 밀려오는 긴긴 고통은 두고가야 하는 사랑하는 양떼들이었습니다. 밀레도에서 그는 정들었던 목회지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오게 하였습니다. 장로들이 순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이미 결심을 굳힌 존경하는 목회자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 유언과 같이 바울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들도 아는 바이니” 하며 말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 그 구속의 십자가 앞에서는 목회사역의 성공도 떠오르지 않고, 그리고 이방인 가운데 전도를 통해 맺었던 수많은 선교의 열매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찬송)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자기가 비록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그리고 수많은 날을 어둠과 깊음 속에 풍랑 속에서 보내고 유라굴라라는 폭풍의 암흑을 헤어나고 죽을 자리와 성 밖에 내치는 일과 모함을 당하는 일과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이 비참한 고난의 길을 걸어온 눈물로 얼룩지고 가시밭길을 걸어온 자신의 사역의 이력서도 하나님 앞에만 서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30여년 가까이 사역을 했지만 예수님처럼 살았고 세례 요한처럼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것도 취하신 것이 없이 오직 목자 잃은 것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양떼들을 섬겼던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렇게 살았고 또 그 뒤를 쫓아서 바울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했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바울을 위해 목숨도 기꺼이 버릴만한 열렬한 추종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자신을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금반지하나 양복 한 벌 얻어오지 않았습니다. 동행에 쓸 것과 차비에 쓸 것을 스스로 천막을 키우며 조달했습니다. 다메섹에서 빛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그의 인생도 예수께 미쳤습니다. 그것 말고는 그의 인생의 족적에 생각날 것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버렸고, 장래가 보장된 탄탄한 종교지도자의 장래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동족의 박해와 조롱을 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기만 하면 이거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생각나는 것은 오직 주님은 죄 없이 피를 흘리시고 나는 그 피로 구속받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만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할 말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온 장로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그 첫날부터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온 것을 너희들이 알지 않느냐?” 우리가 우리의 이 인생을 끝내고 우리가 섬기던 교회를 떠날 때 우리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30여 년 전 이 허허 벌판에 십자가를 세우고 일곱 명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개척예배를 드리던 그 때로부터 지금 이 큰 교회가 되는 30여년의 세월이 흐르기까지 내가 어떻게 목회해온 것을 너희들이 알지 않느냐?”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목회지에서 뿐만 아니라 이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6년의 세월동안을 내가 이렇게 교회와 학교 사이에서 주님을 섬기며 최선을 다하며 이 방배동을 오르내리던 것을 너희들은 알지 않느냐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의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가장 타파해야할 부패한 죄가 있다면 그것은 열심히 살지 않는 편안한 죄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합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곧 “너희들이 아는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는 먼저 겸손과 눈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같이 능력이 없는 사람이 겸손해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올 시오다. 그러나 여러분 바울은 겸손해질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손들고 기도하면 병든 사람이 낳았고,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말씀을 증거하면 부흥이 일어났고, 십자가를 선포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겸손해질만한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이 겸손은 하나님께 대한 겸손이 아니라, 이 이방 땅에 들어온 에베소 그리고 아시아에서 목회하며 모든 이방인들 앞에 머리를 숙인 겸손이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한번 말씀을 증거할 때에 회개하지 않는 사악한자들의 생명을 뺏을 수 있는 권능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넘친 것만큼 바울은 겸손과 눈물이 넘치는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원에서 무슨 능력을 받았다고 반말 짓거리나 하면서 교인을 주장하고 타고 다니는 이런 목회자들은 심히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산자를 죽게 할 수 있고, 죽은 자를 살아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개척한 교회 중에 실패한 교회가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교인이 모이지 않아서 십자가를 뗀 교회가 있으면 한번 말해보십시오. 바울의 사전에는 그런 목회의 실패는 없었습니다. 어디서든지 그는 성공했고 복음의 성공은 가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울을 이방인 선교의 아버지처럼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는 사역이 성공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겸손해야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한데서 강하게 하시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는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손안에 쥐고 있었으나 자신을 높이는데 그 권세를 쓰지 아니하고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높이는 일에 자기의 모든 은사와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가 되었습니다. 발을 닦으시던 그리스도와 같이 낮은 자리에 엎드려서 성도를 섬기고 죄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노예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노예로 택정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제나 새기며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겸손해졌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대접은 교인들이 받고 그리고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괴로운 사역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위대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겸손과 뜨거운 눈물이 바울의 목회지의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 들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위대한 능력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이 깊은 겸손과 그리고 깊은 눈물,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서고 짐승과 같이 살다가 떼로 몰려 지옥의 불길로 달려가는 이 이방인의 무매한 영혼들과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우매한 동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그는 눈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교 때 채플실에 떨어지던 그 눈물은 30년 동안 가슴에서 눈물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때, 기도하고 있는 그 자리가 메마른 자리가 되고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인가 매우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교적 어려운 여건이 많고, 교회에서 겪는 갈등도 많이 있고, 그리고 말씀으로 가장 많은 도전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는 이때에 여러분의 마음은 눈물이 없는 신앙이 되고, 깊이 낮아지는 겸손한 즐거움들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언가 결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이 없이는 땀이 없습니다. 땀이 없이는 피도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지만, 그 보배로운 피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제 받으셨는지 아십니까? 심한 통곡과 눈물로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그 눈물의 기도가 다 받쳐진 이후에야 비로소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보혈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겸손의 눈물은 우리의 마음의 죄를 씻어버리고, 그리고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더러운 때를 닦아냅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사역이 부흥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심령도 성숙해갔습니다. 우리가 이런 길을 걸어가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겸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종류의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는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겸손이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사람들에게 낮아지기 위해서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내어주는 빌라도의 법정에 서서 고요히 침묵하시고, 그런 종류의 예수그리스도의 겸손도 배웠을 것입니다. 겸비하고 한없이 낮아지셨습니다.
저는 자꾸 제 이야기가 나와서 죄송합니다만,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강의 시간마다 고통을 주시던 교수님들을 기억합니다. 대학원 다닐 때나, 대학 다닐 때나 언제나 이것이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근데, 기도해도 교수님들이 학교를 안 그만 두었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세월은 흘러서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는 선생으로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너무나 그 수업시간에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을 때, 언젠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 선생이 다 있을 줄 알면서 나는 너를 이 학교에 보냈다. 그 다음부터 그 수업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서 깨끗한 노트를 펴놓고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내용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낫낫이 써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과정을 통해서 정말 겸손해지는 것을 배웠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오늘 여러분에게 눈물과 겸손을 이야기할 때, 미래에 흘릴 눈물과 미래에 여러분이 이행하게 될 겸손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말입니다.
바울은, 오늘 이 밀레도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오는 이 순간도 이러한 겸손과 눈물을 자기가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과 눈물을 실천하며 이렇게 자신의 모든 땀을 들여서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긴 것이 이방인들 가운데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를 인해서 수많은 시험을 참아야 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에 의해서 박해를 받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예수그리스도처럼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을 인하게 간계를 당하고 그를 통하여 시험을 받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외롭게 이 고난의 길을 걸으며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이런 눈물의 씨가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오늘 이렇게 유대인의 간계를 인한 시험을 당할 때 그는 참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제가 총각 집사 시절에 다니던 교회에 전도사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사건인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름다운 사건이 아니니까. 제직회를 하는데 교회 문을 열고 와장창 뛰어들어 오기에 무슨 난리가 쳐들어왔나. ‘너희들 내가 전부다 명예 훼손죄로 고소해 버릴 거야.’ 내막은 말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했던 모양입니다. 뛰어 들어와서 ‘내가 너희들 다 명예훼손죄로 감옥에 집어넣어 버릴 거야.’ 그런 사람이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를 갈구고 고통스럽게 하는 시험이 일어날 때가 있죠? 그때 한 가지만 가슴에 새기시면 오늘 예배드린 것을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뭔지 아십니까?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모한테도 말하지 마십시오. 막 떠들면 가만히 있으십시오. 입을 꼭 다물고 그리고 하고 싶은 수많은 말이 있거들랑 하나님께 직접 하십시오. 맘에 안 들면 하나님 손 좀 봐달라고 직접 하나님께 여쭈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하면서 그렇게 시험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목회사역의 열매를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목회사역에 훌륭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보니까 참는데 있어서 도가 튼 사람들입디다. 여러분, 제가 존경하는 박희천 목사님께 한번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목회를 하시다가 너무나 너무나 속상하고, 있지도 않은 모함을 받으면서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목사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똑같은 질문을 하면서 옆에 있는 교역자가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니까 아마 뭔가 심령이 괴로운 일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저는 그때 하나님 앞에 말합니다. 나는 벙어리가 되었고, 귀머거리가 되었사오니, 하나님 시편 31편을 고요히 외웁니다.’ 하면서 외우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싸우듯이 이는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시는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의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니이다.’ 아멘. 입을 다물고 꼭 참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할 때가 있고, 참을 때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해서 시험을 당할 때에 바울은, 굳게 참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시험에서 이렇게 굳게 참는 것이 가을철에 맺힐 사역의 열매에 뿌리를 보전하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한참 참고나면 속에서는 심령이 녹는 것 같아도, 참고 쓴물이 올라오는 것을 그때 참고 세월이 흘러가면 진실은 밝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낮았던 자리에서 높이시고, 높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울로 하여금 놀라운 사역의 열매를 맺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이번에 신학원에 하나 입학을 하는데, 신학교 출신인데 이력서를 가지고 왔는데, 교회를 1년 동안에 세 번을 옮겼습니다. 전도사인데 세 번을 옮겼습니다. 그어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역을 하다가 보면 이렇게 입에서 쓴물이 날 정도로 참아야하는 이 시련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사도되었다. 너희들이 나를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도다. 내가 사도인 증거를 대 볼까?’ 말할 때 그는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사도된 표는 오래 참음과 이적과 기사라.’ 얼마나 멋이 없습니까? 몇 년 전에 내가 그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녹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사도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증거한다. 너희는 나를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도다. 증거가 있다. 그것은 이적과 기사를 행했기 때문에 사도라는 것. 이것은 두 번째고 나는 얼마나 참았는지 봐라. 내 소명이 참된 소명이 아니라면 이렇게 참을 수가 있겠느냐.’ 바울은 이렇게 인내하며 가을에 맺힐 열매를 바라보고 겸손해지고 낮아지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다시 들어서 존귀하게 하실 열매의 때를 바라보았습니다. 쓴물이 넘어오는 고난을 참으며, 그 모든 간계를 굳게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참았던 것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맺게 될 이방인 가운데서 역사하는 복음의 성공의 열매를 바라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사역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지 두려움 없이 외쳐야하는 그것을 외치는 생애를 살았던 것입니다. 한 번의 증거와 하나의 목숨을 바꾼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기가 왜 이방인 가운데 사도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았는지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것은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고 증거하고 그 진리를 들을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환난의 핍박과 그리고 모든 시련의 피바람도 그의 설교 사역을 중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는 외칠 곳을 찾았고, 그가 외칠 곳을 찾을 때 들을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셨습니다. 핍박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도 그는 담대히 예수의 복음을 굴하지 않고 외치고 전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을 때, 그는 복음을 외치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해 살아있다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증거하기를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증거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야겠사옵나이다.’
이렇게 결심하게 만들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에서 팡파레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단을 깔고 이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이 바울을 맞이할 환영의 준비를 할 인파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하는 인파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겉옷을 벗어 깐 그 인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나귀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의 목을 자를 칼과 그의 옆구리를 찌를 예리한 창칼들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직 대치할 수 없는 소명. 그것이 그를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셔서 위탁하신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설교하기 위해 살아있기에 그는 한 번의 설교와 목숨을 바꾸고 싶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방인 가운데 유래가 없는 열매를 맺혔던 바울은 이런 삶을 씨로 뿌렸습니다. 그리고 심겨진 복음의 나무를 위해 눈물을 흘려 물을 주고, 피를 흘려 거름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오직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를 위해 그 소식을 듣지 못하는 어둠가운데 있는 수많은 이방인들을 기억하며 한 번의 설교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 사도의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말씀선포의 사역을 축복해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가면 그곳은 언제나 주님이 두 손을 들고 축복하셨습니다. 수많은 열매는 맺혔고, 열매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깃들여 생명과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찬송하였습니다. 주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그리고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번 살고 지나가면 끝입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비문에 새겨진 이름 석 자와 뒤에 붙은 목사라고 하는 이 숙명적인 직분하나밖에는 세상에 남기고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영원히 주님 오실 날까지, 아니, 주님 오신 후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도 하늘 높은 곳에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어깨를 마주하며 땅 아래를 내려보고, 자신이 열매 맺었던 그 복음의 역사가 어떻게 꽃피고 있는지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깊이 가슴이 시려오는 하나님의 교훈을 우리의 마음에 담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추수의 때, 우리의 영혼이 추수되는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그 보좌에 천군 천사들과 함께 둘러 앉아 우리가 사역하던 그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는 떠났으나 여전히 열매 맺고 있는 수많은 열매를 바라보며 진정한 의미의 추수감사를 드릴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과 그리고 진리를 외치고자하는 열망으로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 주는 도전인 것입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