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를 굴려 버리고 (2006.01.01 신년주일)
수치를 굴려버리고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5:8-9)
2006.01.01 신년주일
가끔 학교에서 부르면 내가 강의를 하거나 강연을 하러 갑니다. 다른 학교에 가서 제가 그렇게 깊은 감회에 잠긴 일은 별로 없는데 특별히 제가 졸업한 학교에서 저를 부르면 거기에 갔을 때 항상 감회가 있습니다. 저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에게는 너무 죄송하지만 제가 강의할 때까지 20분 남았는데 혼자 있고 싶으니까 들어가서 기다리십시오. 하고 혼자 가방을 차에 놔두고 뒷짐을 지고 제가 강의를 듣던 강의실, 건물 옆 도시락을 먹던 숲 이렇게 한 번씩 거닐어봅니다.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밀려옵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I. 본문의 배경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사연이 있는 땅에 종종 이름을 붙이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땅에 갈 때마다 그 땅에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떤 사연들을 생각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다루시기도 했는데 오늘 우리 앞에 있는 길갈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본문에 배경을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넜을 때 일어난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고 처음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도달한 곳이 바로 이 길갈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는 길갈이라는 이름이 붙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진치고 그들은 가나안 정복의 꿈을 불태우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 길갈이라고 하는 말은 똥을 굴려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비유이니 수치를 굴려버렸다는 뜻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이름을 지어주셨으니 애굽의 모든 수치를 굴려버린 여기가 바로 길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 갈 때마다 하나님이 여기에서 우리의 모든 수치를 굴려버리신 일을 회상하게 되었고 길갈의 지명을 들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도와서 수치를 굴려버린 그 특별한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굴려버린 그 수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수치를 굴려버렸을까요?
II. 이스라엘의 수치
A. 애굽의 수치: 노예살이
이스라엘의 수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애굽에서의 수치였으니 이는 바로 노예 살이의 수치였습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영광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그 총리가 가족들을 초청해서 애굽 땅에 왔으니 바로의 큰 환영을 받았고 애굽 백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애굽을 건져준 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들이 나오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그 애굽 땅에 노예살이를 하는 비천한 종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어서 수백만의 인구를 이루게 되었지만 권력은 애굽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으니 그들은 거기서 애굽 사람들이 하지 않는 위험하고 힘들고 더러운 일에 종사하며 짓밟히는 노예 살이로 일생을 살다가 죽고 또 다시 태어나 죽고 이렇게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을 비롯한 온 중동 땅에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 하면 그 애굽의 비천한 노예자식들, 이런 이름 이상의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여기에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애굽에서 겪었던 모든 수치를 다 굴려버리셨습니다.
애굽에서의 그 수치는 똥 같은 부끄러움이었는데 하나님이 이제 그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후에 그 아름다운 땅을 유업으로 주시기로 하고 그 수치를 모두 굴려버렸던 것입니다. 가나안에 있는 백성들이 예전에는 히브리 민족 그러면 쓰레기 그리고 더러운 종의 자식들 했는데 이제는 그들이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물같이 녹아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이 되었으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럽고 수치스러운 종의 민족이 아니라 이제 강대한 군사를 거느린 나라가 되어서 그들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우리를 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지금 불평과 불만만 많이 느끼지 예전에 우리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바로 이 세상에서 살던 죄에 매여 노예살이 하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참된 신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여러분들은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지겨운 노예 살이 인지를 모두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창살이 있어서 감옥이 아니요, 감시하는 사람이 있어서 징역살이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죄에 매여 살아가는 이 속절없는 이 세상살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구속을 느끼며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을 하나님이 거기에서 살게 하시는 날 동안에는 우리가 늘 죄를 좋아하고 그 죄에 매어 살았기 때문에 우리의 이름은 이 세상에 더러운 죄의 노예였고 죄인들이었으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더러운 영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옛날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요단강을 건너게 하여 그 수치를 굴려버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생각지도 못했던 때에 우리같이 더러운 죄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셔서 그 지겨운 노예 살이로부터 모두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갖고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의 놀라운 구주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굴려버려 다시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신 것처럼 이런 우리를 이 세상 죄에 매여 살던 노예와 같은 신분에서 해방시켜 우리를 주의 자녀로 삼으셨으니 지금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이전에는 죄의 노예요, 세상의 포로였던 것을 잊지 말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B. 광야의 수치: 불순종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또 다른 수치는 광야의 수치였으니 이는 바로 불순종의 부끄러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온 이후 광야생활 속에서 말할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고 그들의 광야생활은 부끄러운 생활들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나 그들이 얼마나 많은 징계를 받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몇 번이나 그들을 책망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민족들에게 베풀어야 할 재앙과 징계를 스스로 당한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애굽의 바로의 속박에서 먼저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내어놓았을 때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채찍을 들고 벽돌을 찍도록 후려치는 군인도 없었고 무서운 위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는 임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눈에 보이는 왕좌에 앉은 바로에 의해서 종살이에 치욕스러운 날들을 보냈지만 광야의 해방을 맞이하니까 이번에는 이들은 자기들 마음속에 있는 죄의 노예가 되어서 비천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면서 두 달이면 충분히 갈수 있는 그 길을 40년 동안 그 광야에서 방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온 모든 옛 세대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시고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나 조상들의 더러운 불결과 불순종에 물들지 않은 세대들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는 경륜을 펼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 길갈에서 광야의 조상들의 그 불순종과 예전에 그 모든 더러운 수치를 굴려버린 것을 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큰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자유 하는 광야의 생활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거울이 되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생애 전체를 기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으나 그 구름 기둥 아래서 뜨거운 태양빛을 피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불기둥 앞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한 번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애굽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먹을 것이 모두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방법으로 그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으니 그것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아침이면 진 가득히 그 만나를 모아서 그들이 먹고 살았습니다. 아침이면 아침의 기적을 보고 이제 아침이 지나고 나면 구름기둥의 기적을 보고 해가 떨어지면 불기둥의 기적을 보면서 굶주릴 때 먹이시고 목마를 때 마른 땅에서 샘을 내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 속에서 광야의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자비하심으로 신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어떻게 불순종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침마다 내리는 누구도 먹어본 적이 없는 그 고귀한 만나를 그들에게 내리셨을 때 얼마가지 못해서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고기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순례의 길이라고 하는 광야의 인생길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을 똑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옛날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이 세상에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포로 되어 살던 여러분들을 주님이 건져내셔서 다시 한 번 세상을 고치면서 살라고 파송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 만나를 먹으며 살다가도 늘 애굽을 그리워하고 그 고깃국, 정욕에 좋은 마늘, 그리고 부추, 외 이런 것들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불평했을 때 우리들이 예전에 있었던 세상을 그리워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 거기서 고난을 받으며 괴로워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동안에 겪었던 노예 된 설음을 잊어버리고 다만 이 세상의 달콤한 만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신앙의 길에는 말씀밖에 없느냐고 반문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너무 많은 시간들을 광야에서 방황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원받은 이후에 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건져서 날마다 말씀으로 인도했지만 그 말씀이 언제나 여러분들에게 감격으로 다가온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이 꿀보다 단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정말 얻고 싶은 것이 이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주님만나기 위해 세상에 버려두고 온 것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따라다니던 수치가 바로 이 불순종의 수치였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속속들이 부패한 백성들이었고 그래서 광야의 길을 가는 동안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모질게도 배반했습니다. 때로는 어머니 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시고, 아버지 같은 인자하심으로 그들을 인도해오시며 앞서 행하신 그 하나님이 그들에게 잘못하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싫어했고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 앞에 많이 불평하며 원망하고 죽어갔습니다. 이스라엘, 하면 따라다니던 광야의 불순종의 자식들이었는데 이제 그 조상들은 다 죽고 옛 세대는 죽고 새 세대가 기적으로 요단 땅을 건너며 거기에서 예전에 그 모든 수치스러움을 굴려버렸던 것입니다. 옛 세대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 죄를 짊어지고 그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민족이 아니라 죄와 부패를 전파하는 민족이 될까봐 하나님이 옛 세대들은 광야에 묻으시고 새 세대들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밟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이후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사랑으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영혼에 원기를 더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결 같이 그 말씀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주님의 마음에 못 박고, 어떤 때는 못 박은 자신의 그 죄 때문에 주님이 아파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 우리의 옛 사랑은 옛 세대를 광야에 죽이신 것처럼 우리의 옛 사람은 모두 2005년과 함께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죽여 버리고 그리고 주님께서 예수의 피로 거듭나게 하신 새 본성의 사람이 약속의 땅과 같이 펼쳐진 2006년을 밟을 수 있도록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더러운 탐욕을 좋아하던 옛 세대들은 광야에서 죽었듯이 더러운 욕망이 사로잡히던 우리의 옛 사람은 2005년의 광야에 묻어야 합니다. 혈기부리기를 잘하고 쉽게 미워하던 그 모든 부정적인 옛 사람은 2005년 광야에 모두 죽여 버리고 그리고 2006년 이 약속의 땅에 우리가 거듭난 새 성품의 사람, 인내하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는 그 새 성품의 사람이 2006년의 약속의 땅을 밟게 해야 합니다. 이런 두 가지 수치를 바로 이 길갈에서 다 굴려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치욕스러운 노예생활에 백성이 아니오, 불순종의 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고 부끄러움을 모두 떨쳐버린 영예로운 백성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2006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수치를 굴려버린 날 그때가 어떤 때였을까요? 어떤 때에 하나님이 이 애굽에서의 수치와 광야에서의 부끄러움을 모두 굴려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 백성들이 되게 하셨을까요? 우선 첫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도 물을 한번 건너고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도 물을 한번 지난 사실은 의미심장한 사실입니다. 애굽에 종살이할 때 그들은 홍해를 건넜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물리적으로 치면 바다가 갈라진 사건이 작은 강이 마른 사건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두 가지는 매우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의미의 크기는 사건의 크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홍해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는 애굽의 병사들이 마차를 타고 추격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불기둥을 옮겨 그들을 요란하게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해치기 위해서 접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눈앞에 망망한 바다가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가 밤새도록 하나님을 의지했고 새벽이 되어서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에 죽을 때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로 끌고 왔는가 하고 모세에게 말할 수 없는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인간들이었는데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홍해가 확 갈라지면서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거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으니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기적을 보여주시니까 그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믿고 그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너무 어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이 별로 없었는데도 역설적으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적을 보여주셔서 하나님을 믿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기적을 먼저 보여주셔서 하나님을 믿게 만드시지만 그렇게 주님을 알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다루십니다. 그런 과정이 광야의 생활 속에서 모두 나타났고 그 절정을 이룬 사건이 요단이 마르는 사건이었습니다. 요단을 건널 때 어떻게 건넌지 아십니까? 기도를 많이 하니까 요단강 물이 말랐기 때문에 건너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요단에 들어가라. 명령하셨기 때문에 물이 있는데도 그들은 요단을 밟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여기를 밟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눈앞에는 파란 강물이 흐르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발을 들여놓습니다. 할 때 요단이 마르는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하나님이 믿음이 있는 곳에 기적을 행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기적을 보여주시면 제가 믿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아무리 하나님 앞에 기도해봐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여러분들은 이미 그런 시절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2005년도까지 도저히 나의 이 수치는 떨쳐버릴 수 없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썼지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서 ‘거기가 내 한계야. 도저히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내 멍에야,’ 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생각을 바꾸고 기적을 먼저 구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십시오. 약속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나는 능력이 없으나 주님이 나를 붙들어주실 것이야. 나는 능력이 없으나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나를 이 어려움에서, 이 숙명적인 실패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야. 이것을 믿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큰 기적을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고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잘 믿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III. 수치를 굴려버린 날
A. 하나님이 함께 하신 날
그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린 그 날이 첫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날이었는데 또 그 날이 어떤 날이었는가 하면 할례를 받은 때였습니다. 할례는 분명히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광야에서 할례를 안 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이 할례는 몸에 새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팔일 만에 고추에 앞부분을 까서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표를 새기는데 이것은 자손 대대로 건강한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위생학적인 배려인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서 그 표를 지울 수 없도록 몸에 새김으로 그들이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시는 방법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광야에서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시점이 이 시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큰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넜고 그리고 눈앞에서는 가나안의 문명사회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이미 정신적으로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았고 두려워 떨고 그 백성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내 백성을 떠나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면 살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조차 있을 정도로 이미 그렇게 승리가 눈앞에 펼쳐진 그때에 하나님이 할례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구별되어서 주님께 속했다고 하는 구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만 바쳐졌다는 헌신입니다. 세례의 의미와 거의 동일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구별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첫 번째 의미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그렇게 구별되어서 이제는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 헌신의 의미가 바로 이 세례의 의미이니 할례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B. 할례를 받은 때
그러면 하나님은 이 놀라운 축복의 때에, 정복을 눈앞에 둔 때에 그때까지 할례를 연기시키시고 그때에 할례를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잠시 후에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을 모두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심지 않은 포도원에 열매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끔 이미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의 마음에 얼마나 감사했던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형통한 날이 그들에게 주어지면 교만하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릴까봐 하나님이 연기하신 할례를 바로 가나안 정복에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직전에 행하게 하셔서 그들이 모두 할례를 받고 어른으로서 할례를 받았으니 온 몸에 신열이 나서 며칠을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 아픈 기간 동안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우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하다가 애굽의 노예라는 수치를 그대로 짊어진 채 죽었지만 우리는 광야에 새로 태어난 세대들로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이 요단을 기적으로 건너게 하셨고 이제는 하나님이 이 가나안을 우리에게 붙이셨는데 아! 이 할례를 받으면서 우리는 생각하는데 그렇다.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오직 우리는 하나님께만 바쳐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닌가. 이것을 가나안 정복 직전에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만나서 덕담들을 합니다. 옛날에 제가 담임목사님으로 모시고 있던 할아버지는 하여튼 새해만 되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셨습니다. 목사님,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러면 복을 네가 주냐. 그 다음부터는 복 받으시라는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사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맞습니다. 복을 제가 줍니까? 여러분들이 복 받으십시오. 그러면서 다 이야기를 하는데 진짜 복이 뭔지 압니까? 로버트 멕체인이 라고 하는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예수를 많이 닮은 것입니다.
그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여러분 자신이 많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또 그럴 것입니다. 또 새해 벽두부터 또 나만 갖고 자꾸 뭐라고 그러네. 이제 제가 이성적으로 증명을 해보이겠으니 여러분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내 말이 맞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자, 여러분들이 변화되지를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못된 성품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해에 여러분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2005년을 돌아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서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한 때 참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게도 개인적으로 2005년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례로 내가 가장 싫었던 나 자신이 아닌 것을 가장 싫었던 고통스럽고 두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잊어버릴 수 없는 한해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만의 소위이겠습니까. 생각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2005년을 돌아보면서 아쉬운 날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2005년 곤고하게 산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거나,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건강이 나빴기 때문이거나, 둘 다 있었지만 가족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해서 등등의 말로 우리들이 2005년의 곤고함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신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또 반대로 형통했기 때문에 부패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새해에 복을 우리에게 서로 많이 빌어준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별로 변화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2006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곤고하고 어려운 시련이 많이 찾아온다고 쳐봅시다. 변화되지 않은 그 사람은 곤고하고 괴롭기 때문에 주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물질의 형통도 주어지고 근심은 모두 물러가서 평안이 찾아왔다고 칩시다. 곤고하던 때도 주님을 안 불렀는데 평안하게 되었는데 그가 가슴을 부여잡고 주께로 가까이 갈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님이 보태어주셔도 그에게는 고통이 찾아오고 빼앗아 가셔도 그에게는 아픔이 찾아오니 진정한 인생의 행복이 자신의 영혼의 변화에 있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기분 좋은 비유를 한번 해봅시다. 한 사람이 있는데 정말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성이 정말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음으로 자기같이 더러운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싶은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에게 시련이 그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시련이 많이 왔습니다. 그러면 그는 시련 속에서 더 주님을 붙들지 않겠습니까? 시련 때문에 더 정결해지고 시련 때문에 더 깨끗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 그에게 하나님이 많은 형통을 주었다고 칩시다. 물질을 주시면 그 물질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고 시간을 주시면 재능과 몸으로 하나님께 봉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바람이 불면 그 풍랑 인연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잔잔한 날이 오면 항해해서 항구에 도달하는 어떻게 그 사람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진정한 축복은 우리 자신의 환경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 환경 가운데 있는 보다 본질적인 행복의 요소인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하나님이 그 큰 축복을 주시려는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살에 할례의 표를 새기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을 따라서 이제 이 큰 일을 행하고 이 애굽과 광야의 수치를 모두 굴려버리고 이 복된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인데 너희는 가슴에 깊이 기억하여라. 너희는 내 백성이며 너희는 나에게 헌신된 백성이니라. 그 정체성을 가슴에 깊이 새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하기를 애들아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의 마음을 찢어라. 마음에 할례를 받고 그리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부패한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저는 이 2006년을 맞이하면서 말할 수 없이 감회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회심한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방황하고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에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수없이 죽음을 넘나들었던 젊은이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의 축복을 받은 지 30년이 지나는 해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새벽에 눈 내린 교회마당 한가운데 서서 많이 울었습니다. 30년을 돌아보니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던 때는 진리에 대해서 조금 밖에 아는 것이 없어서 그렇게 못 살았고 진리를 깨닫게 하신 후에는 이제는 그렇게 살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잘 살지를 못하면서 30년이라는 세월이 속절없이 지나갔구나. 특별히 영광 돌린 날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정말 하나님이 다시 한 번 태어나게 해주신다면 하나님 앞에 보상받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원하십니다. 그래야지만 축복을 받아도 그 축복이 주어지는 자원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기 밖의 사물의 질서를 자기를 위해 바꾸기 위해서 도전하고 원망하고 심지어는 신앙을 역행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어놓으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질서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물의 질서를 우리도 갈망하면서 살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시골에 가면 장날이 있습니다. 그러면 대장간이 있습니다. 대장간에서 뚝뚝 잘라진 무쇠덩이를 대장장이 아저씨가 웃통까지 벗어던진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것을 불속에 집어넣고 조수는 풍구를 돌리면서 그 풀무에 그 쇠 덩어리를 시뻘겋게 달구어서 망치로 쾅쾅 내려치면서 칼을 만들고 낫을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일생동안 따라온 결점이었는데 작년 한 해 동안에 영원히 결별한 결점이 있으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뒷부분이라 잘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은 눈에 참 잘 보이는데 자신의 결점은 그렇게 쉽게 발견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고 자기는 사랑하니까 자기사랑에 눈이 멀어서 자신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남이 보면 징계를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는 그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대장장이 같으신 하나님의 장인의 혼이 불어넣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빚으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 때문에 이 고난이 말할 수 없이 감사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쾅쾅쾅 내려치는 망치에 의해서 아무 쓸모없던 무쇠덩어리가 아주 요긴한 칼이 되고 낫이 되고 호미가 됩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람이 빚어지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시뻘겋게 달구어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냥 무쇠를 달구지 않고 망치로 후려치면 분질러버려서 차라리 내버려두면 그냥 무쇠덩어린데 그냥 두들기면 쇠 조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마음에 은혜를 받고 마음에 깊이 할례를 받아서 주님의 은혜로 주님이 빚으시면 그 손에 의해서 빚어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발갛게 그 마음이 달구어진 사람, 하나님 저도 제가 싫거든요. 그러니 제가 아프더라도 주님의 손으로 나를 빚으셔서 내가 원하는 나 말고 주님이 원하는 나로 만드셔서 어떻게 하면 내가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무 것도 아니니 주님의 도움만 기다립니다. 나는 쓸모없는 죄인입니다. 주님 저를 빚어주시옵소서, 그러면서 깨트려지는 마음, 할례 받은 마음이 될 때 우리의 마음이 쇳덩어리라면 그것을 발갛게 달구어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하나님이 쾅쾅쾅 치면서 고난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렇게 빚어질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연장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바로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이렇게 빚으시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기에서 할례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해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우리도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가식과 허위, 위선과 거짓, 속임과 불화, 미움과 원망, 모든 탐욕들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한번 자신을 깊이 돌아보며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표준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있고 자기 사랑에 눈멀어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못 봤는지 정직하게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할례를 받아 발갛게 달구어진 마음이 되십시오. 주님이 환경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두드리실 때 여러분들은 정말 훌륭한 주님의 사람, 정말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이 있는 그곳을 길갈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이 계신 그곳이 길갈이 될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가끔 강연을 하거나 설교를 하도록 부를 때 제가 거절하지 않는 학교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졸업한 학교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갑니다. 가면 항상 가슴에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밀려옵니다. 신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에 하나님이 베푸셨던 그 은혜가 너무나 컸고 매일 하나님 앞에 애써서 살았던 그 기간들이 제 마음에 드는 감회가 밀려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좀 일찍 도착하면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정중하게 부탁을 합니다. 20분 남았는데 제가 혼자 있고 싶습니다. 들어가서 기다리면 제가 시간이 될 때 들어가겠습니다. 가방을 차에 넣고 내가 강의를 듣던 강의실, 아침마다 나의 갈 길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하던 채플실, 곤고한 날이 이르렀을 때 하나님 앞에 사생결단하던 그 예배실, 도시락을 먹던 그 숲 속을 걸어가면 매순간 한 번도 마음이 녹으며 기도하지 않던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거기가 저의 길갈이었기 때문입니다.
IV. 그대 있는 곳, 길갈이게 하라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우연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여기에 두실 수밖에 없으시고 더 이상 실패에 매여 사는 것을 보실 수 없어서 여기에 서있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여기가 여러분들의 길갈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하지 마시고 자신의 불결함과 자기를 사랑하셔서 온전하게 하시려는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서있는 여기가 길갈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늘 2005년까지 실패로 얼룩진 가정이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던 그 가정에 여러분들이 그 가정을 길갈로 이름을 바꾸는 그런 할례 받은 주인공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껏 까지 늘 분쟁이 많은 구역, 그리고 도무지 열심이 없는 시험 든 구역이었는데 여러분들이 그 구역을 할례 받은 마음으로 섬겨서 이제는 그 수치스러운 구역의 불명예가 다 사라지고 바로 아무개 집사가 한해를 눈물로 섬겼더니 곤고한 영혼들이 모두 살아나게 된 구역, 예전에는 술꾼들이 돌아다니며 오줌이나 싸고 구역질이나 하던 골목이었는데 아무개 형제가 눈물로 이 동리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더니 지금은 신자들이 모여 사는 믿음의 골목이 된 이 장소, 이런 이름이 붙을 수 있도록 사시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생애 가장 큰 보람입니다.
주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나의 마음에 가득 찬 사랑을 전합니다. 그리고 아마 제가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여러분 모두를 주님이 더 많이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이 어떠하든 곤고하든, 형통 중에 있든 주님이 여러분들 사랑하시고 여러분들 앞에 믿음을 보고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그곳이 길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을 의지하면서 2006년 한해를 꼭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