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7)_2010_05_01 (4-2)
<본문>
Ⅲ.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
여기서 우리가 숙고할 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먼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 간의 일치는 원리적인 일치와 실제적인 일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원리적인 일치나 실제적인 일치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원리적인 일치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진 신자들로서, 함께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지체들과 공동체로 존재합니다. 이는 지상에 있을 때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천상에 이른 후에도 계속될 영적인 연합입니다. 이러한 원리적인 일치는 어떠한 때에도 손상되지 않는 일치이니 이는 이 일치의 본질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불변하는 영적 연합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실제적인 일치는 성도들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이는 신자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성화의 진전은 곧 교회의 일치를 촉진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실제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치입니다. 이러한 일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일치를 말할 때, 원리적인 일치, 실재적인 일치라고 나눌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구원얻는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죠? 그래서 이제 큰 그림을 가지고 보면 이러한 것 아니겠어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속에서 신적 작정이 이루어져요. 이 작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미 이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죠. 그러면 창조하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하나의 몸으로 묶고자 이렇게 의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레카플라치오 교리에서 가르쳐 드렸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이 사람들중에 어떠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이미 이렇게 예정되어 있는 것 아니에요.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이후에, 타락한 이후에 결국은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 결국은 인간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타락의, 타락한 후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이후에 사람들이 이렇게 계속 타락한 모든 인류들이 이후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속에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죄를 간과하셔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는 구원 계획도 이렇게 펼쳐 지는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이렇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구원받을 자들이잖아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이게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러면 결국은 인간이 태어나는 것도 이 신적 작정의 실현이요, 그죠?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구원을 받아 가는 것.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도 결국은 신적 작정을 성취하는 것 아니야. 그렇잖아. 그러면 결국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몸이 잠재태적으로 주어진 이 몸이, 가능태적으로 주어진 이 몸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들을 이렇게 이렇게 연합시키시는 이 것이 바로 교회라 이거야. 그렇게 보면, 잘들어봐요. 자 사람이 시간속에서 보기에는 여기에 있는 어떠한 사람이 회개해서 이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회개를 하고 이 사람이 들어간다라고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 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이렇게 형성하시려고 영원전부터 계획하셨던 교회의 몸속으로 부름을 받는 거야. 그래서 뭐냐 하면 이러한 중생이 자체가 공동체적인 말하자면 성취하에 있는 거야. 중생 자체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 되죠? 이해 되잖아요. 관점을 그렇게 보면 이해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해서 가게 된다 이거야. 그러면 그렇게 해서 공동체의 몸으로써 부름을 받게 된다. 이렇게. 가게 된다 이거야. 그러면 한번 이렇게 공동체 속으로 이렇게 해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을 이루는 거야. 내가 이것을 5월5일에 발표하는 논문을 아주 힘들게 완성을 했어요. 영어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내가 이야기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오시잖아요. 이 분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은 레카프탈레치오 교리에서 보면 이 필연이에요. 필연. 그래서 이제 아우구스티누스가 너무나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약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오셔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몸 전체를 치료하시는 거예요. 이 치료의 범위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거잖아요. 이것은 이미 가능태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이 시간속에서 실현되어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실현되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다면, 이 몸 전체가 결국은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시간을 고려해서도 볼 수 있고 시간을 뛰어 넘어서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칭의를 이야기 할 때 교리에서 영원에서의 칭의를 개념을 알고 있잖아요. 똑같이 영원 신적 작정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기로 한 자가 있으니까 시간속에서 실현이 되는 거잖아. 그것을 영원에서 칭의라고 이야기 하거든요. 그러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일치를 이러한 점에서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실재로 교회를 형성하면서 이렇게 교회를 형성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이 지상에 존재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원리적인 일치 말고 원리적 일치 말고 실재적 일치가 필요해요. 이 실재적 일치에 의해서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는 거예요. 그러한 일치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랑이다. 사랑의 일치다. 그러면 이것은 꼭 무엇과 유사하냐 하면,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 할 때, 원리적인 연합과 실재적인 연합으로 나뉘어서 이야기 하잖아요. 실재적인 연합은 무엇을 통해서 와요? 원리적인 연합은 칭의를 통해서 오지만은, 실재적인 일치는 무엇을 통해서 와요? 그렇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실재적인 일치를 이루는 거죠. 그래서 지금은 이름을 잊어 버렸는데, 그 청교도, 청교도가 아니지. 이름을 잃어버렸어요.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하면, 누가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냐. 가장 넓게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이다. 그런데 더 좁히면 실재로 영적인 부패에 빠져서 그리스도의 몸 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제외해야 한다. 실재적으로 그 생명을 누리면서 침체에 빠지지 않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자신의 삶을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은 이것이 A고, 이것이 B라면, B의 파일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 것인가. 이게 진정으로 교회의 모습을 교회되게 하는 그러한 의미들이다 하는 거예요. 이러한 케파에 대한 담론들을 결국은 어떤 생각을 우리에게 하는가 하면 양적인 교회 성장의 생각들에서 이러한 것들이 좋은 것인가 반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것이, 이 범위가 확장되어지도록 해야 한다. 거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까 이야기 한 이야기들을 염두해 놓은 것이에요.
<본문>
A. 사랑의 질서가 재편됨
교회의 일치는 성도의 사랑의 일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삼위 하나님과 교회와 자신, 그리고 지체들인 다른 성도들 간에 존재하는 존재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데서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존재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데서 이루는 일치이니, 곧 성도의 개개인이 사랑과 순종으로써 그리스도께 합치된 생각과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개인적인 사랑의 일치는 반드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이를 통하여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되어 가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이 논의될 수 있습니다.
1. 개인적으로 : 참회와 믿음을 통하여
첫째로, 개인적으로는 참회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교회가 참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그 구성원인 신자 개개인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원리적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한 몸이 되었으나 실제적으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표에 자신의 존재목표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참회를 통해 이기적인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여야 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선호하는 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악, Evil이라고 하는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받아 들이는 거예요. 악문제도 이제 이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 악을 똑같이 죄와 똑같이 악을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그 선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악이지만,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한 주관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악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을 기준으로 볼 때, 절대적으로 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자, 어떠한 사람이 밤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죽여서 시체를 암매장하고 그의 현금을 강탈했다고 치자 이거야. 그러면 이것은 악한 거야, 아니면 선한거야? 악한거죠. 그런데 그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은 그것을 선하다고 생각을 한 거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된 선에서 보다 좁은 의미의 선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그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이해되죠? 그러니까 아주 극단적인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동의할 수 있는 악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어떠한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하죠. ‘이 놈의 세상 다 폭발해서 없어져야 해’ 그 사람은 진짜 폭발해서 지구가 반쪽이 나서 그냥 부서져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 선이라고 느껴지는 거예요. 어떠한 식으로든 자기사랑의 질서를 받아 들이는 것은 다 악이라 이거예요. 결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인간의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 오랫동안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기독교적인 접근은 아니지만,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장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는한 인간은 어느 가르침을 따르더라도 결국은 행복할 수 없는 거예요.
어느날 포스터모더니즘의 말로는 그러한 것을 보여져요. 나는 이번 논문을 쓰면서 가슴이 많이 찢어졌어요. 사실 이게 우리에게는 기회다. 여러분들이 오늘날의 시대 정신을 따라서 목회를 하려고 하면 피튀기는 전쟁심이 필요해요. 찬양 기자재는 더 좋은 것을 들여야 해요. 훈련도 더 빡세게 해야 되고, 뭐, 그래요. 그런데 미국에서 말이지. 이 놀랍게 젊은이들 속에서 개혁주의의 부흥이 있는 거야. 개혁주의의 부흥이 일어나는 거야.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바지 하는 거야.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산산히 찢어 놨기 때문에 어떠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산히 찢어지고 절대적인 가치를 다 부인해 버리면, 신나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같은 젊은이들도 있거든. 옛날에 나 젊었을 때처럼 나는 무슨 사상, 누구에게든지 종이될 용이가 있는데 Master가 없어. 그리고 뿌리가 뭐냐는게 나의 궁금증이었어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중학교 1학년 말에 사춘기가 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기질속에 뿌리를 찾고자 하는 집요한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 고등학교 애들 한참 시험 공부하는데 나는 왜 살아야 되나, 아침에 눈을 뜨면 학교의 시험공부, 이러한 것들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야, 오늘 하루를 인간으로 살아야 되는가. 그러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겠어. 맨, 그 당시에는 쓸데없는 책이 보면서 고민을 하는데 말할 상대도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그러한 사람들이 나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꽤 있어. 그러니까 그 열정 컨퍼런스나 존파이퍼,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조나단에드워즈 연구. 조나단에드워즈의 부흥은 정말 대단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이러한 곳 까지도 에드워즈 학회가 대 부흥을 이루고 있어요. 그게 아주 기이한 현상이에요. 19세기에 페리밀러 나온 이후로 조나단에드워즈 연구에 부흥이 일어났어요. 그것 말고도 몇 사람이서 개혁주의의 부흥을 미국에서 맞았어요. 그것은 예를 들어 존 맥아더 목사님 교회 같은 경우 뭐, 만명이 넘게 모이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자유로운 미국 사람들이 그 유장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거잖아. 그렇게 목회를 하면 불러 와지는 거야. 내가 목회할 때에 옆에 새로운 교회 들어온다고 내가 신경쓰는 것 본적 있습니까? 그러한 것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러한게 부흥이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제대로 가르치면 뿌리를 알려주기 때문이에요. 내가 이야기 하는게 뭐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의,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대로 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텐데 왜 부흥이 안되나. 뭐지? 그쪽 교단하나 있지? 독립교단인가 하나 있잖아. 개혁주의해서 철저히 하는 교단들 있잖아. 5개 교회인가 몇 개 교회 모여서 하는 교회 있잖아.
나는 이제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나눠 주려고 가져왔는데 여러분들은 아직 내 생각을 잘 몰라. 그게 뭐냐 하면 역사상 개혁주의를 재현해서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사람들의 오류가 있어. 오류가. 아주 공통적인 오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시대와 소통하는 다변성과 본질을 고집하는 것 사이에 판단의 혼란이 오는 거야. 그래서 이 글에도 이야기 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이 세상의 문화 그 자체를 인본주의라고 다 보고 그 다음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현상들 그 자체에 대해서 앙심과 반감이라고 품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러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 그게 그러한 잘못을 크게 저질렀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올드 프린스턴이야. 역사속에서 내가 개혁주의 흐름속에서 이야기 했잖아. 그때부터 무슨 정신이 생겨났는가 하면,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것이 negative한 진술이야. ‘우리는 찬양집회 안한다’ ‘제자훈련 안한다’ 뭐 안한다, 뭐 안한다 그런데 그러한 negative한 것으로서 개혁주의의 하나의 특징으로 자기 자신들이 주장을 하는 거야. 물론 그러한 것도 있겠죠. 그렇지만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하는 거죠. CS루이스가 그렇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이 사람은 그러한 파도를 굉장히 잘 탄거야. 그 사람이 유일한 사람이야. 시도한 사람으로 내가 보기에는. 예를 들면 지금 우리는 굉장히 과학의 시간이야. 조금 다른 곳으로 나갔는데, 언제 나에게 시간을 줘. 내가 한번 교역자들에게 가르쳐 줄게. 우리들이 굉장히 정치한 과학의 시대잖아. SF같은 것 보면, 확하고 파도가 치는데 옛날에는 물을 붓고 그래가지고 막 찍은 거거든, 1950년대 1960대에는. 그런데 지금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잖아. 그런데 영화같은 것 보면 2012 영화의 물이라든지 빙산들이 무너지는 것 같은 거라든지 굉장히 어마어마한 실감이 나잖아. 그게 뭐냐 하면 유체역학이 이용이 되는 거야. 그래서 물이 이렇게 쏟아지지 않냐. 막 이렇게 치잖아. 물방울 하나하나가 하나하나에 유체역학을 이용해서 이것이 어디로 얼마만한 힘으로 튀는지에 대한 방정식이 있어요. 그 방정식의 값을 물방울 하나하나에 대입을 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요? 그렇게 해서 컴퓨터 그래픽을 때리는 거야. 그러면 그게 실제하고 똑같이 움직이는 거야. 어마어마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거야. 이러한 치열한 과학 시대인데 이상하게 판타지가 유행하는 거야. 반지를 가지고 막 이랬더니 무슨 뭐가 생겼다더라. 그러잖아. 판타지라고 하잖아. 그 판타지가 유행을 하는 거야. 그 판타지에 가공할만한 힘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아주 선명하게 자라나는 세대에게, 어린아이들에게 선과 악의 대조를 아주 훌륭하게 보여주는 거야.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깨끗하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파트가 기독교거든. 그러한 것을 이러한 문화를 왜 저러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이야기 같은 것들이 저렇게 엄청난 인기를 끄는지를 모르고 그까짓 마법 이야기하면서 애들 읽는 것 빼앗아서 던지고 안사주고 그리고 욕을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지. 드라마 같은 것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도 쭉 보면 뜨고 있는 드라마에는 공통적인 문화적인 특징이 있는 거야. 그러한 것들을 목회자가 안목을 가지고 현대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거야. 이 충고는 여러분들이 20년쯤 흐르고 나면 지금 느끼고 있는 것보다 훨씬더 심각하게 느끼게 될 꺼야. 여러분들이 이러한 코드까지 정확하게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구석에 갇혀서 개혁신학을 설교하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추종하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담장을 쌓고 마치 자신들의 교회가 성장하고 소통하지 않는 것은 워낙 옳음을 추구하는 것 때문이라는 그러한 착각,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그러한 문제들을 조심해야 하는 거예요.
시대와 소통하는 다변성과 본질을 양보하는 것을 혼돈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비본질적인 것에는 목숨을 걸고, 그 다음에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주 너그럽게 양보를 하면서 결국에는 교회를 망치는 거야.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해요. 그리고 문화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거야. 문화자체가 소통하는 수단인 것이기 때문에 깊이 이해를 해야 하는 거야.
음. 97쪽. 그런데 이제 그릇된 질서를 받아 들이는 것인데, 그게 악인데 그러한 그릇된 질서는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 수시로 받아들이라고 유혹이 다가오는 것이거든. 누가 그것에서부터 자유롭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어?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이 세상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거야. 그것이 사실은 보면 교회의 순수성을 헤치고 신앙의 순수성을 헤치는 것이 되지만, 더 넓은 견지에서 그가 구원의 목적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자체가 아주 놀라운 은혜의 수단이 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자기가 홀로 주앞에 살 수 없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끊임없이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죄를 자기 안에 있는 악을 정확하게 보게 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이 되고 주님을 의지할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거지. 그래서 끊임없이 개개인이 참회하고 믿고 이게 결국은 반복되는 회심이겠죠. 회심의 반복이죠. 그 다음사람.
<본문>
a. 참회: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림
첫째로는, 참회를 통하여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사랑은 구체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물의 질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사랑의 질서의 동심원 한가운데는 자신에 대한 부당한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진실한 참회는 항상 자기 깨어짐을 동반하여야 합니다.
신자는 그 자기 깨어짐의 경험 안에서 부당한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려는 옛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죽음의 경험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영혼과 본성 안으로 들어오는 실재화의 경험히며, 이 자기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기죽음은 곧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성취되는 과정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신자의 그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와 자신 사이에 있는 실제적인 연합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기 자신에 대한 부당한 사랑에 관하여 깨어질 때, 비로소 자신이 설정한 사물들의 질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참회 안에서 경험되는 자기 깨어짐은 곧 죄에 대한 사랑이 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이 이처럼 진실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교회의 일치는 촉진됩니다.
따라서 신자 개개인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증진이야말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이처럼 진실한 참회가 늘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이기심을 버릴 수 없고, 교회는 분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b. 믿음: 신적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임
둘째로는, 믿음을 통해서 신적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회개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리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은 곧 사랑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질서를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믿음으로써 자기사랑의 질서를 버리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회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항상 신자들에게 이성적으로 납득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때 신자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비록 자신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 깨달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토대로, 자신의 부패한 이성의 추론보다 명백한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주어진 계명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많은 사랑의 질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따라 각각 사람과 사물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지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개개인의 자기 깨어짐은 공동체적으로 봉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의 깨어짐이 되는 거야. 예수 그리스도는 깨어질 수 없는 분이시지만, 왜, 완전한 머리이시니까. 그 몸들은 완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깨어지는 거죠. 그러한 것들이 집단적으로 깨어지는 것들이 교회에 나오는 각성과 부흥의 역사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깨뜨려지잖아. 참회하잖아. 이러한 것들이 우리 목회에 있어서 굉장히 약해진 거죠. 옛날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것들을 통합할 수 있는 영적인 권위와 통찰이 있었어요. 그래서 1852년에 미국의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뉴욕에서 일어났던 기도운동들, 열렬한 기도운동들 이러한 것. 그러한 것들이 이제 아주 기회를 적절하게 활용했고, 청교도 역사에서 보면 전염병 같은 것 발생해서 사람들이 죽어가잖아. 이러한 것들을 목회자들이 굉장히 훌륭한 교회전체가 깨뜨려지는 영적인 기회로 활용하였던 거야. 그러한 것들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 앞에 공동체적을 회개를 하면서 깨뜨려지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야. 한 개개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깨뜨려지면서 그렇게 하게 되는 것들. 부흥을 보면 부흥이 참 항상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영적 각성이에요. 영적 각성이 없는 부흥은 참된 부흥일 가능성이 적어요. 반드시 참된 부흥은 영적인 각성과 함께 다가오는 거죠. 나중에 그 뭐지. 거룩한 부흥을 읽으면서 정리를 해봐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경우는 순종을 지성의 명료성과 깊이 연관을 시켜요.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일단 은혜에서 미끌어져서 이제 잘못살고 있는 사람이 돌아오는 방법이 뭐냐 하면 제일 먼저 순종이라고 봐요. 의지의 순종은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고 이어서 지성을 명료하게 한다는 거야. 그 다음에 말씀을 깨닫고 그 다음에 정서가 정돈되고 의지가 다시 강화되는 이러한 순서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미끌어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순서예요. 그 다음
<분문>
2. 공동체적으로: 교회의 목적을 받아들임으로
둘째로, 공동체적으로 교회의 존재목적을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공동체적으로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것은 이처럼 개개인의 참회와 믿음을 통하여 가능해집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길입니다. 개인적으로 철저한 자기 깨어짐과 신앙을 통하여 신자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그 목적을 구현하는 데로 정위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 목표를 따라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며 믿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신자들 안에는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있으니, 그 일치 안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은 공동체적으로도 적용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공동체 적으로는 교회의 존재의 목적과 같아지는 거야. 의견이 각각 다를 수가 있잖아. 그런데 교회가 존재하는 존재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규정을 놓고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교회의 지체들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더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 하면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현재에 재현하기 위하여 그래서 힘쓰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정하신 아주 중요한 신앙의 모토다 보는 거죠. 그 목적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면 참으로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내가 참으로 어떠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항상 같이 가는 거야. 기차 레일처럼. 그래서 참된 교회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없어요. 그리고 만약에 전자가 없이 후자에 대해서만 고민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결론을 내릴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을 그것을 결국 공동체적으로 보자면 온전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질문이 항상 같이 가고 두 개가 항상 묶어져 있는 것이지, 그러한 교회론적인 질문을 제외한 채 내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한 식으로 되는게 아니에요. 오늘 그런 면에서 사고가 너무 교회론이 고려되지 않은 신학적인 사고들이 난무를 해서 오늘날 문제가 되는 거죠.
그 다음에. 넘어가겠어요. 그렇게 해서 공동체적으로 교회 존재의 목적을 받아 들이는데, 100페이지로 넘어가면, 생명의 질서와 사역의 질서를 사모함 그랬잖아요. 이것은 결국 크게 세 가지를 내가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에서 이야기 하면서 세 가지 질서를 이야기 했지. 세 가지 질서가 뭐였어? 유기체적 생명, 그 다음에 섬김 그리고 통치잖아. 여기에서 통치를 제외한 이유는 결국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은혜에 의한 생명의 역사 그 다음에 사역의 질서 이 모든 것들이 이제 통치의 질서는 이 두 지평과는 성질이 다르다고 여겨지는 거죠. 이것은 이제 그릇되게 행동했을 때 제제하고 하는 것이니까, positive한 것들만 예로 든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러한 질서들을 따라서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질서와 교회의 이러한 하나님이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통치의 질서들을 따라서 사역들이 이루어지잖아.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나 이후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속에서 좀 소외된 개념이 바로 사역의 질서야. 질서없이 사역을 했다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서 강력하게 사역해야 할 개념보다는 기독교 세계의 천지에서 비진리와 싸우고 교회를 옹오하고 변증하는 것에 치중하면 되었던 그러한 환경이잖아요. 그래서 놀라운게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선교의 흔적이 안나타는 거야. 예외적인 것이 칼빈이 선교를 하죠. 멕시코인가요? 멕시코죠? 아주 획기적인 거야. 칼빈이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을 당시의 세계관을 뛰어넘어주는 것인가 보여주는 거야. 그래서 그러한 생각들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어떠한 생각을 우리들이 해야 되냐 하면, 어쨌든 칼빈이 그러한 선교 공동체를 만들어요. 최근에도 논문이 하나 나왔어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거예요. 그러한 것들을 생각을 하면서 개혁신학 교회론 들을 받아 들여야지, 그렇지 않고 단지 교조주의로 가면 그러면 적실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거야. 내가 몇몇 그 개혁신학적으로, 개혁신학까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개혁교회 특징을 고집하면서 목회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걱정스러운게 뭐냐 하면 뭔가 깊이 사상속에서 해석하면서 이것을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추종이에요. 추종. 그래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그것을 왜 만들어졌는지 아는데,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몰라. 그래서 카피는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다른 상황속에서 해석을 못하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요? 그런데 목회자는 그렇게 하면 안돼요. 나는 그러한 점에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지금 내가 체계적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가끔 한국에서 고지 곶대로 청교도 목회를 하려고 하는 교회가 잘 안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하죠. 청교도 목회를 한다고 하면서 교회가 잘되는 교회들은 타협을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자신들은 워낙 알 보수이기 때문에 안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 참 어지럽죠.
그 다음에 이제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함 그랬죠. 그 다음 사람 두 번째 단락부터 읽어봐. 교회의 일치는 101페이지부터.
<본문>
b. 질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함
이러한 두 질서를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사모함으로써 지상 교회의 존재목적을 구현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마음으로 그 질서를 사모하는 것은 참으로 교회가 존재목적에 이바지하는 데에 자신들의 모든 섬김과 헌신이 쓸모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성도들은 자기를 구원하신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실천하고, 이로써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공동체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게 됩니다. 홀로 믿었더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었던 섬김들을 공동체적으로 구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교회는 존재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교회의 일치는 성도들이 바로 이에 필요한 질서를 한 마음으로 사모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이 너무나 자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실 때에 남아있는 연약한 제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그에 필요한 질서를 사모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고하신바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에 힘쓰며 그 질서를 갈구하였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4)
뿐만 아닙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공동체적으로 세상을 섬기기에 어려운 질서 속으로 들어갈 위협이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이러한 핍박과 고난 속에서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따라 섬기기에 적합한 질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또 그런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과 자원을 공급해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면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일어나는데, 왜 일어나느냐. 왜 그러한 다툼이 일어나게 하느냐. 두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나라의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애쓴다고 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지 가능한 거예요. 그러한 영원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없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도덕주의에 떨어지게 되거나 아니면 이 세상 인간의 행복에 이바지 하는 환경을 조정하는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번 논문에도 이야기 했는데, 맨 처음 18세기에 경건주의가 일어날 때에는 그래도 굉장히 영적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전부다 복음 운동이 복지사업으로 다 대치되었어요. 그래서 독일에 가면 프랑케 제단이라고 있는데 어마어마하게 커요. 커다란 블록 전체가 프랑케 제단이에요. 어마어마해요. 그러한 복지국가로 가는 모델을 제시했다라고 하는 것에는 굉장히 가치가 있지만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복음의 능력, 복음의 사역들은 사회주의화 되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이제 우리의 눈에는 안타깝죠. 그러면 결국 뭐냐 하면 교만과 이기심 때문이다. 자, 그 다음 사람 읽어봐.
<본문>
b. 적극적: 교만과 이기심
둘째로, 적극적인 측면에서입니다. 교회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투는 적극적인 원인으 교만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교만이 마음에서 나잖아. 교만이 다른게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더 높이고 그러한 것은 유아들에게 하는 설명이고. 사물의 질서에 대한 자기 판단의 고집 이것이 결국은 교만이에요. 교만. 모든 죄의 뿌리를 지적으로는 모든 죄의 뿌리를 지적으로는 교만, 의지적으로는 자기사랑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사랑과 교만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하나는 지성적 측면을 다른 하나는 의지적 측면을 보여주는 거야. 그래서 죄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자기 사랑이라 말하잖아요. 교만 없이는 자기 사랑에 빠질 수가 없어요. 이해되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잘 모르는 것이고, 내가 가장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자기사랑은 반드시 지적인 교만을 내포한다 이거야. 그 다음
이것이 바로 교만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판단은 그리스도께서 내리는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이며, 그것 이외에 어떤 판단도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할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그것이 교회 안에서 이데올로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판단에 더 이상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104페이지로 넘어가며, 두 번째 단락 그 다음 사람
<본문>
이러한 교만에 의하여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분쟁과 다툼에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상대화하고, 그러한 자신의 판단이 그리스도와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진리의 판단을 따라 자신을 개혁하여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사랑의 질서를 재편하는데 있어 일치된 방향을 갖게 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인간은 누구든지 부패성이 있으니까 자기사랑에 끌리게 되는 것이거든. 이렇게 강하게.
<본문>
둘째로는 이기심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의 이익을 사랑하게 될 때 그 교회 안에는 끊임없이 다툼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자의 이기심은 잠시 있을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향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한 자기 자신이 부패성에 흘러서 언제든지 자기사랑에 빠지게 되고 교만하고 같이 가는 거거든. 그러한 것들에 철퇴를 가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 뭐냐 하면 선명한 진리를 확 보여주어서 아, 내 판단이 틀렸구나. 이것이 바로 지성의 각성이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속에서 아, 나는 추루한 인간이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다라고 하는 감동을 가져다 주는 것이 은혜야. 그래서 이제 내가 항상 이야기 하지만,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무슨 시간이라고 그랬어? 성경 읽기라는 거야.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토론할 필요가 없는 명제들을 제공을 받는 거야. 나는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명제들이 주어지는 거야. 그것을 지식이라고 하잖아. 믿음의 규칙과 뭐야? 생활의 교훈. 그것을 제공을 받아요. 그것이 명제야. 그것을 딱 받을 때에 아, 그냥 바케스로 물을 받아 머리에 뿌리는 것처럼 확하면 잡다한 생각 공부하다가 고3때, 연예하는 생각도 나고 놀라갔던 생각도 나다가 바케스에 물을 담아 확 끼얹으면 정신이 퍼뜩 나듯이 그렇게 정신이 퍼뜩 나는 일이 이제 계속 될 때에 그때에 잘 믿고자 하는 성향이 생겨나고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성향이 생겨나는 가운데 그러한 가운데 논리의 틀들이 생겨나는 거야. 그게 바로 신학이 정말 신앙의 신학이 되는 거지. 그런데 이상하게 신학을 할수록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지. 그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이나 개혁파 정통주의 사람들에게 많이 배워야 하는 거야. 기본적으로 그들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Greek과 히브리어 텍스트들을 거의 암기하고 있었어요. 성경전권을 거의. 그러니까 자유 자제로 술술술술 나오는 거야. 그런데다가 70인 번역과 시리아역본까지 막 쏟아져 나오는 거야. 조나단에드워즈를 보면서 기이했던 것이 뭐냐 하면 야, 어떻게 이렇게 신학을 전개할 때, 그 많은 성경 구절 속에서 기가막히게 찾아서 연결을 시킬까. 그것은 성경 전체를 아주 다독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거든. 그러한 거죠. 성경을. 칼빈도 자기의 설교속에서 성경과의 친숙성을 굉장히 강조하죠. 그러한 기준들을 가리켜서 베리따스, 진리라고 하는 거죠.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허위에 흐르기 싫은 삶을 제시받은 진리의 기준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생겨나는 특징이 되는 거죠. 베룸과 베리따스의 관계에요. 자, 거기 계속 읽어봐봐.
<본문>
삶의 질은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데 있습니다. 생각으로 진리를 찾는 데는 희생이 따르지 않지만,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진실은 자기죽음을 필요로 합니다. 진리를 구하며, 진실에 이르지 아니함이
<김남준 목사님>
그게 굉장히 중요하잖아. 진리를 구하며, 겉으로 라고 해야 하지. 겉으로 구하는 거지. 진실을 겉으로 구하며...계속 읽어봐
<본문>
신자의 허위이자 탐욕이 신자들이 영원한 것을 사모하고 그 영원한 것들이 주는 의미에 관심을 가져야 할 본분은 버리고, 한시적이고 잠세적인 것들에 대한 추루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진실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그 다음에 이제 다음 페이지 넘어가서 다음 사람 맨 마지막 단락, 105페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본문>
지금 이 순간도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은 박해하는 세상에 의해 고통 받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지체들에 의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들을 세상에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보여주며
<김남준 목사님>
이번에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느 유족이 그랬죠. 차라리 싸우다 죽었으면 원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잖아요. 목회하면서 당하는 대부분의 많은 고난이 복음을 열렬하게 전파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불신 세력과 싸우다가 당하는 고난이라고 하면 참 좋겠어. 대부분의 많은 고난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없는 일들 때문에, 혹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이야. 그러면서 이제 피가 마르고 살이 썩고 그러면서 고통 받는 거지. 주님 보실 때 얼마나 어리석겠어요?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지식의 빛이에요. 그래서 지식의 빛이에요. 그렇게 될 때에 목회자의 길, 목회자 아내의 길, 뭐 교회의 본분 이러한 것들에 대한 명료한 지식을 갖을 때, 다투는 많은 부분들을 해소할 수 있다 이거죠. 자, 그 다음.
<본문>
스스로 그 영원한 것들로 인하여 즐거워해야 할 교회가 신자들의 추루한 욕망 때문에, 잠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충돌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아름다움은 훼손되고 영혼들은 추루해지며 공동체는 일치를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이제 그렇게 되면 이제 삼위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그래서 결국은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전체적으로 요약을 하면, 대부분 신자의 개개인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 다음에 지체들이 서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교회가 진정한 일치를 이룬다 이야기야. 109페이지로 넘어와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까리따스적 사랑의 일치의 본질이 어떠한 거냐 하는 것을. 그 다음 사람. 109페이지 a번 읽어봐. 아르모니아.
<본문>
첫째의 까리따스적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가 이루어야 할 까리따스적 일치를 가리켜서 사랑의 하모니라고 불렀습니다. 음악에서 하모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악기가 같은 소리를 냄으로써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악기가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작곡가의 의도를 따라 모든 음들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냅니다. 단지 악기가 다르고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조화의 원리 없이 다른 악기를 흉내내려고 하거나 혹은 자기 만의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모니가 아니라 소음이 될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잘 생각해봐. 우리들이 합창을 한다고 할 때, 유니슨이라고 하잖아. 같이 파트에 상관없이 일치해서 부르잖아. 그것은 하모니 속에 잠깐 나올 때 아름다운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부른다면 그것은 군가지 음악이 아니란 말이야. 굉장히 어떻게 보면 오래 들으면 굉장히 불쾌하고 무섭죠. 그런데 도, 미, 솔.. 각자 각자 자기 부호를 따라 가는 거야. 그런데 그것들이 쫙 어울리는 거야. 그 어울림이 정교하고 많을수록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거야. 그래서 복잡함의 질서가 정도를 더할수록 피조세계에서는 더 아름다운 거야.
예를 들어보면, 책상 하나를 예쁜 것을 사다놔. 예뻐 안예뻐? 예쁘지. 그러면 어떠한 생각이 들어? 아, 바닥을 바꿔야지. 그래서 바닥을 바꾸면 벽이 안되겠다해서 벽지를 갈았어. 그러면 천장을 보면서 안되겠다 천장도 손대야지. 천장 손대면, 여기에 문이 안어울려. 그래서 문을 바꾸면 그러면 의자는 후지잖아 그러면서 바꾸는 거야. 그렇게 되면서 전체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그러한 것이 뭐냐 하면 전체의 하모니다.
우리 교회에서 만드는 각양 도안물이나 책을 보면 네모 디자인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낄 거예요. 왜냐하면 건물이 네모낳고. 뭐 인쇄물이라도 만들 때에 네모낳게 만듦으로써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거예요. 어떠한 사람이 나보고 네모를 좋아하시냐 그러는데 그럴수도 있겠지만, 만약 교회가 아기자기하게 원형으로 지어졌으면 나는 인쇄물이나 다른 것들 모두 형태를 바꿨을 거야. 그게 달라야 하는 거지. 그 전체적인 질서를 다같이 이룰 때 그 안에서 사람들이 굉장히 즐겁고 편안해 지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항상 옷 잘 입는 법에 대해서도 강의 한 번 해줬잖아. 김찬제 전도사님 같은 경우는 조폭차림이나 다름 없어. 까만 것에 하얀 것 팍 메고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이제 저기 김지태 전도사 같은 경우가 저게 이제 성격 불안을.... 패션 심리학에서 빨간 넥타이는 남자의 성기를 나타내는 거야. 그래서 눈에 별로 안 좋은 거야. 그래서 교회에 올때에는 교회의 색깔과 맞추어서 잘 어울리게 입고 나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거야. 원판이야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그것을 바로 하모니라고 하는 거야. 하모니가 굉장히 멋있죠. 아주 굉장히 멋있잖아요. 어거스트 러쉬 봤잖아요. 어거스트 러쉬. 한참 상호교통 할 때 그 영화가 나왔는데, 그게 재밌는게 뭐냐 하면 남자가 치는 것은 완전히 팝이잖아. 하류 문화의 팝이야. 여자가 첼로를 연주하는 것은 상위 클래스의 클래식이잖아. 두 개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게 기가막히게 조화를 이루잖아. 난 뭐 한번 밖에 안 봤지만, 그게 굉장히 기이하더라고. 어떻게 그렇게 화음을 맞출 수 있었을까. 그래서 결국은 두 개가 하류문화와, 그게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큰거야. 말하자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고급문화가 따로 있고, 하급문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통을 이루면서 어쩌면 그렇게 두드리면서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는데, 그게 공연장에서 치는데, 그게 하이클래식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아주 아름답게 들리잖아. 그러한 것들이 바로 하모니라는 거야. 그래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다를까. 나와는 다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사람 자체가 다름을 인정하는 거야.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그것이 나에게는 기회가 되고 나에게는 나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서로로 인하여 서로가 더욱 온전하게 되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의 질서라는 거야.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거야. 그래서 나는 같은 사람들끼리 교회에서 모이는 것에 대해서 자꾸 복음적이라는 생각이 안들고, 선교적으로도 그렇게 정죄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지만, 연예인 교회, 법조인 교회, 자기들끼리 모이는 거잖아. 무섭겠어. 변호사 교회. 다시 모여서 변호사 교회, 판사 교회, 검사 교회 모이면 부장판사.. 어지럽죠. 자 그러면 이해되죠. 그러한 하모니를 아름답게 이루게 만드는 그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합창단 연습을 해보면 이러한 것을 많이 깨달아요. 누가 기가막히게 잘해도 소용이 없어요. 자기는 오히려 소리를 죽여주고, 저 사람 소리를 높여주고 막 이러면서 결국은 한 부분으로 이바지해서 전체가 잘 되게 할 때, 그때에 그들 중에 개별적으로 영광받는 사람이 없으면 모두 함께 영광을 받는다 이거야. 그게 사랑의 하모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잘 생각해봐요. 축구나 단체 경기 같은 곳에서 감독들이 제일 신경쓰는 것이 개인선수의 기량보다도 팀 전체의 화합이에요. 이제 그러한 사랑이 있을 때, 그때에 막 굉장히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반주해보고 찬양인도해본 사람들이 느낄 텐데, 막 여러 악기들을 동원하여 찬양인도를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막 밀려오면 신들린 것처럼 반주가 잘 되고, 찬양 인도가 잘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모니에요. 그 다음에 이제. 또 뭐지. 그 다음에 111페이지로 넘어가서 110페이지 쪽으로 가죠. 110페이지 맨 아래 단락부터 읽어봐.
<본문>
그러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들이 각기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그들과 함께 이루는 보편적인 질서 안에서 비로소 자신이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다른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로부터 떨어진 거리도 다르고 별의 크기와 밝기, 그리고 빛깔도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광명을 가지고 밤하늘에 빛나니, 달은 달의 광명으로 수많은 별들은 각기 별로서 자신의 광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로서 밤하늘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자신들의 차이점들을 토대로 지체들의 우열을 겨루거나 다툼을 일으킨다면,
<김남준 목사님>
한번 생각해봐요. 밤하늘에 별은 없고 달이 그냥 후라이팬에 호떡 얹어 놓은 것처럼 수천개가 달이 떠있다고 생각해봐. 무섭지 않겠어요? 그 다음에.
<본문>
그것은 교통하는 사랑에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프게 하고 교회에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신자가 이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에 고통을 줄 때, 그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없으며 주신 마음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까리따스적인 일치를 통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될 때, 교회는 더 큰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교회의 존재 목적은 보다 더 성숙하게 부연되게 됩니다.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빛 안에 있는 잠재적인 아름다움을 가시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빛을 더욱 신비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의 까리따스적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조화이니 이 조화의 성숙이 곧 교회의 성숙이며 교회의 완전함의 성립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이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는 거야. 그때에 그 다름은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런 것이야.
<본문>
교회의 최고의 섬김
둘째로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참으로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세 가지 목적인데,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예배로 나타나죠. 그리고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선교로 나타나요. 교회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데, 이게 교회 자신의 돌봄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뒷 페이지로 넘어가요. 둘째줄.
<본문>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과 자신을 향한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신자의 최고의 섬김이 곧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랑과 교제와 일치하면서 세상 사람들이나 집단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삼위일체와의 사랑의 교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참된 행복을 알게 되고, 그러한 교제 안에서 터득하는 지식을 통해 이 세상을 위한 지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혜의 빛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통치를 받으며 행복해하는 신자들의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치가 이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선교는 바로 이러한 삼위와의 사랑과 일치를 이 세상에 부여하기 위한 교회의 첫 번째 시도입니다. 선교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통하여 진리를 가르치며 참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그들이 들어가게 하여 지식과 사랑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곧 교회의 일치를 이루게 하는 길이니 이 일치가 세상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 사랑의 질서로 이루어진 나라이니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일치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비롯된 일치여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