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5-2
김남준 목사님 : 135 페이지. 양목사부터 읽어 보세요.
양연식 목사 : 가견적 교회의 경험.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신자들에 의하여 가시적으로 나타났지만 그리스도는 보이시는 분이 아니시니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계실 때에는 사도들에게는 정반대였습니다. 사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관하여 눈에 보이는 경험은 다음과 같이.
김남준 목사님 : 사도들 시대에는 예수님 살아계셨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가시적으로 보이고 교회는 아직 안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헤드 신 바디 빌리브드(Head seen body believed) 그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보이고 반면에 그의 몸인 교회는 믿어져야 했던 반면에 우리들의 시대에 와서는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안보이시잖아요. 그래서 정반대가 되어서 헤드 빌리브드. 머리는 믿어지고 바디 신(Head believed body seen) 몸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아름다움의 극치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제도 에베소서를 묵상하면서 굉장히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데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제가 읽어볼게요. 3절 그다음에 5절. 5절을 한번 보죠.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게 뭐냐 하면 4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비밀’ 이거든요.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제 나오잖아요. 9절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였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지난번에 레까피텔라치오의 교리를 하면서 지상 세계에서의 구속사의 펼침이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지식을 더한다는 이야기했죠. 그러니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도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 그런데 그 펼쳐짐이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을 아는 영광스런 지식이 증진되는 것도 위에서 아래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역사의 전개를 따라서 그게 이루어진다 이거에요.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의 발전이 이루어져요. 그게. 그러니까 구속사가 종결된 다음에도 이거는 우리가 유추해보는 건데 구속사가 종결된 다음에도 천상세계에서 그 지식의 증진이 지상세계에서의 그 가시적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의 펼쳐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보는 거예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관계가 되는 거죠. 그래서 지상에 있는 놀라운 구속 사역의 전개야 말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사랑과 지혜가 시간 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거예요. 그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천상에 있는 천사들 그리고 성도들도 이 땅에 있을 때에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지식들이 증진되고 그래서 거기에서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의 존재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엑기스가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첫째 자연세계 속에 담겨있쟎아요. 그 다음에 이게 뭐냐 하면 성경계시 속에 담겨 있어요. 그래서 자연세계 속에 남아있는 것들은 포괄적이고 보편적이지만 성경계시는 말하자면 이것의 에센스에요. 엑기스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게. 그러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핵심을 이루는 거거든. 이게 심미라면 이 심미를 보여주는 말하자면 중요한 통로 이 렌즈 같은 것들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탁월성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사경회때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에 대해 공부했잖아요. 그러한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이르게 된 거에요.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에서 읽은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특별히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혜 이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셔요. 이 세계는 천상 그 다음에 지상세계를 창조하셔요. 그러면 창조하신 두 세계가 이렇게 천상과 지상 두 세계가 있다 이거에요. 그러면 여기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도 결국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를 통해서 투영되어서 하나님 사랑이 드러나는 거 아니에요? 이건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이시니까 사실 인간에 의해 파악이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투영하셔서 그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세계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세계는 피조물인 인간이 이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자신이 또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당신 자신을 감상하시는 거예요. 이게 세계의 존재의 이유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에서 여기에 이렇게 자연의 세계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결국은 이 지상세계 안에서는 자연을 통해서 그리고 그다음에 인간과 이 모든 창조를 통해서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창조와 계시는 아주 밀접하게 관련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창조의 세계 자연세계와 성경계시가 있는데 타락한 다음에는 이 자연계시도 부패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도 부패하는 거예요. 계시를 전달해주는 자연이 부패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도 부패하는 거예요. 그러한 인간들에게 치유책으로 주신 것이 성경계시라는 말이에요. 요걸 성경계시라고 그러죠. 성경계시의 핵심 코아가 뭐냐 하면 구속이란 말이에요. 구속. 그래서 여기에서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구속의 역사가 전개가 되잖아요. 구속전개. 그러면 구속을 전개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를 이렇게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그 고백 이런 고백 속에서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으시려고 했던 거죠. 하나의 몸으로 창조하신 거예요. 이렇게 창조하시려고 했는데 타락하잖아요. 타락해서 결국은 이렇게. 이것은 말하자면 구원받은 백성들의 무리가 되는 거죠. 이거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무리가 되는 거죠. 그죠. 그러면 구속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멸망할 인간들 중에서 구원하기로 작정된 영원한 하나님의 지혜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속해 나가시는 전개과정이 구원사쟎아. 이것을 확정지어서 구별해서 영원한 멸망에 처할 사람들과 그 다음에 영원한 말하자면 구속에 이를 사람들을 구별해내는 과정들이 시간과 공간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말이에요. 그게 구속사란 말이에요. 구속의 역사. 그러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지혜가 탁월하게 나타나는 거예요. 이 전개과정이 보여지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여기 이렇게 오시는 거예요. 이러한 전개가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구속 전개가. 여기에서 전개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아주 찬란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게 펼쳐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속성과 그 다음에 속성의 시행방식이 전개가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는 거예요. 이렇게. 그것이 결국은 자기들이 뵈옵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돼요? 미(美)에 대한 깊은 인식이 결과가 뭐죠. 사랑이라고 그랬잖아. 사랑. 사랑은 계속 증진되는 거죠. 그 전개과정을 보는 거죠. 주욱. 그 전개과정을.
그러니까 인간의 죄라고 하는 그것이 에드워즈가 이 문제를 아주 잘 설명을 했어요. 죄가 들어온 것이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커다란 작정 속에서 보면 인간이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 이 창조하신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지시면서 당신 자신의 속성 사랑뿐만이 아니야. 사랑이 우선 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랑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와 자비와 신실하심과 이런 모든 것들 있잖아. 신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은 약속에 대해 충실하신 건데 약속이란 것이 결국은 우리들이 그 약속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결국은 우리들이 타락된 후에 약속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거잖아. 그런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이 찬란하게 들어올 준비를 인간이 죄가 마련해 준거야. 그래서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사단은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기 위하여 인간을 유혹했지만 그것들이 성공하였을 때 오히려 역으로 하나님은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없었을 탁월한 계시를 누리게 하신 거죠. 그래서 이제 이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받는 유익이 뭐냐 하면 첫째는 뭐냐 하면 우선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이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 이 속성의 전개 방식이 아주 탁월하게 전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렇게 탁월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을 탁월하게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에요. 그래서 이제 대부분의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어야 된다 이렇게 보거든요. 아마 내가 레까피텔라치오 교리에서 설명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인간이 타락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시어서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이 창조하셔서 구원하시는 이 모든 인간들을 위한 하나의 가장 아름다운, 인간들이 이렇게 있다면 말하자면 여기 원뿔과 같은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인간의 모본을 보여 주는 거죠. 타락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탁월성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비교할 수가 없잖아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이것이 더 탁월한 목적을 가지고 보여지는 거에요. 더 탁월한 목적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구속이에요. 구속.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이러한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죄인의 심령 가운데 있는 초자연적 특성 이게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건데 초자연적 특성. 자 어떤 걸까요? 예를 들자면 리차드 십스도 얘기했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것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마음이 확 녹아내리는 이러한 경험들은 항상 죄와 타락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신자가 경험하는 초자연적인 특성, 마음 안에서,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경험 그런 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상상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인간에게도 죄에 시달리고 많은 구원의 전개 과정에서 인간이 고난을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 때문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게 한다는 면에서 결국은 전체적으로 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목적을 더욱 찬란하게 성취하시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에드워즈가 자신의 전집에서 보면 베너 오브 트루쓰 1번이야.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라는 그런 종류의 설교가 있어요. 거기에서 이 문제를 아주 상세하게 다뤄요. 그런데 아주 굉장히 탁월해요. 특히 초자연적 특성에 대해서는 리차드 십스가 상세하게 다뤘는데. 그런 경험은 아주 굉장히 복된 것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자기 깨어짐 속에서 누리는 깊은 녹아내리는 마음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 속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랑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죄의 덕분이에요. 죄의 덕분에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들이 이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맨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셨을 때에는 사도들이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데 이후에 이루어질 교회의 모습은 아직까지 불확실한거에요.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존재하거든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아담은 선택자와 불택자의 공통 분모이긴 하지만 그러나 칼빈도 아담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쟎아요.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구속과 관련해 주어진 때부터 결국은 교회는 있었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이것들이 전개가 되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거에요. 그렇지만 이게 불분명한 형태로 있어서 결국은 고유한 의미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로 나타나는 거거든요. 그것이 성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에요. 성령이 오셔서 다스리시는 시대가 되면서 교회는 실질적으로 나타나서 이 두 개가 교체가 되는 거에요. 교회가 이렇게 되고 그 다음에 여기는 이렇게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는 신(seen) 되고 이것은 빌리브드(believed) 됐는데 이제는 반대로 이것은 신(seen)되고 이것은 빌리브드(believed) 되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바라보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거꾸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통로가 되었고 이제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통로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워져야 할 이유, 더 순전하고 올바르게 되어져야 할 이유 그 다음에 교회로서의 목적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그 기준 이것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보여주느냐 그거에 달린 거죠. 그래서 선포 그 다음에 선포와 어울리는 삶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래서 그리스도를 올바로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그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이거죠. 그리고 이걸 통해서 결국은 더 멀리 나가면 신지(神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내려보내시는 거죠. 여기에 구원이 있는 거에요.
낭독자 :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관하여 눈에 보이는 교회의 경험은 다음과 같이 시기에 따라 구분됩니다. 즉 사도들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눈으로 뵈올 수 있었으나 그의 몸인 교회는 아직 세워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믿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통하여 미래에 세워질 교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지상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나누신 교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시되 당신을 위해 일할 도구들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세우셨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는 명백히 열두 사도들을 세우신 것이 당신과의 특별한 교제에로의 선택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는 교회 설립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지상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머리되실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일루 교회와 삼위가 함께 누릴 사랑의 교통, 그리고 지체들 안에서 누리게 될 사랑의 교통의 실재를 몸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이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나 곧 세워질 교회를 믿음으로 바라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 그 다음
낭독자2 “ 2. 우리들 :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봄.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비로소 그리스도를 봅니다. 즉, 교회는 우리의 눈에 보이며, 또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나 이 교회를 통하여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경험은 사도들의 경험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교회를 통하여서만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이는 몸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머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속한 지체이나 동시에 그 자신도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교회의 한 몸의 지체인 동시에 또한 그 몸을 봄으로써 그리스도를 더욱 잘 믿게 됩니다. 신자가 교회의 일부이면서도 스스로 그 몸을 바라보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아닌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요, 머리는 보이지 아니하고 믿어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볼 줄 몰라도 교회는 볼 줄 압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지체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름답고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 그러나 이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왜냐하면, 자, 생각해보세요. 아름답다, 그 다음에 선하다 그 다음에 참되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이렇게 볼 때에 그러면 이렇게 본다 이거야. 그러면 이건 뭐와 관련이 있냐하면 이 사람 속에 있는 판단의 기준과 관련이 되잖아.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의 진에 대한 선에 대한 미에 대한 각각의 판단의 기준이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무슨 얘기냐 하면 이게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신적인 기원을 가진 것으로서 분명하게 기준에 의해서 이것이 A, B, C라고 하면 이 사람 속에도 A. B. C와 어울릴 만한 것이 있어야지만 이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일 때 ‘아 이것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판단을 하쟎아.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것이 다른 거예요. 이것이. 무슨 얘긴지 알죠? 다른 거라 이거야. 판단의 기준이 다르다 이거야. 이렇게. 그럴 경우에는 참된 것을 보여주어도 그것을 참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잖아. 만약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이 깊이 동의하면서 만약에 그것이 아름답다고 여겨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복음을 전할 때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야 되잖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는 성경계시이고 성경계시의 엑기스는 복음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잖아. 그런 차이가 존재하는 거야.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말했듯이 교회가 이렇게 판단할 때에 이 사람들이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쓰는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이거야. 아주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께서 ‘너희의 착한 행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할 때에 그것은 하나의 결과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이거야. 그러니까 교회의 아름다움은 충실히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여기에 진과 미와 선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살려고 하면 그것이 이 사람들에게 효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거지. 그게 결국은 거룩함이야. 거룩함. 거룩함의 효과란 말이야. 효과. 그런 거룩함의 효과가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거야.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격하고 기뻐하고 그럼 되는 거야. 그런데 사상과 생각이 틀려서 그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은 할 수 없는 거지. 그것은 그 사람들의 처지고. 그래서 목적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사람들에게 그 영광이 인정되는 것 이게(전자) 원인이라면 이것은(후자) 결과라 이거죠. 그러니까 이 자체가(후자)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이거죠. 그래서 이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교회에는 미담을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아름다운 일화들을 만들어 내고 감동을 주고 그런 목적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얘기가 이거죠. 그래서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 그 다음.
낭독자3 : 3.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자신. 이러한 교리적 사실로부터 우리는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합당한 존재로 나타나기를 힘써야 할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자기 자신의 지체들과 또한 이 세상에 대하여 보여주어야 할 자신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담을 조성하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회개혁을 위한 도덕적 매개체가 아닙니다. 혹시 교회를 통하여 그런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회가 참으로 교회된 결과이지, 그것이 목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 개개인이 그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거룩해지고자 할 때, 그의 삶이 도덕적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삶은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열매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는 그 열매를 위하여 애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하여 힘쓴 것이니,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분께 일치되는 존재의양식과 삶을 추구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복음적인 거룩함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거룩해져 가는 본성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므로 그 거룩함을 이루었다 하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 그러니까 만약에 복음적 거룩함으로서의 열매가 도덕적인 삶인데 그걸 통하지 않고 바로 도덕적인 삶을 겨냥하게 될 때 수많은 자기의가 생겨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거꾸로 오히려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이유라 이거에요. 자, 그 다음. 그 다음 사람.
낭독자4. :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줌 . 첫째로, 교회는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까리따스는 교통하는 사랑으로서.
김남준 목사님 : 그래서 이제 내가 소위.. 아모르 소끼아쓰라고 하쟎아요. 카톨릭에서 사회적 사랑이라고 번역하는데 나는 그걸 교통애라고 보는 거죠. 왜냐면 까리따스의 특성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서 오는 사랑이거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가게 되는 거야.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사랑하게 될 때 이런 사랑의 아가페 적인 사랑의 특성을 본받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들을 교통애라고 부르는 거죠. 이에 비해서 아모르 쁘라비뚜스. 사적 사랑이라고 그러죠. 그런 사랑은 뭐냐면 나는 단절애라고 부르는 거죠. 단절애. 쁘라비뚜스. 사적인 사랑. 사애라고 많이 번역을 해. 이건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이렇게 자기 자신이 이렇게 속해서 그래서 자기 자신이 이렇게 잊혀지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의 순환 속에 자기 자신을 두는 거야. 그래서 자기 자신도 이 사랑을 흘러가게 하는 한 통로가 되게 하는 거야. 이게 사실은 교통애의 특성이야. 하나님의 자기회귀적인 위대한 사랑 속에 자기 자신을 한 통로가 되게끔 그냥.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없는 거지. 그래서 이런 사랑이 흘러가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거야. 내가 만약에 죽은 다음에라도 누군가가 나를 연구한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을 반드시 연구하게 될 거라고 난 생각해. 난 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리는 가장 기본적인 그림이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서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느니라 그러지. 이것을 사랑으로 풀이를 하는 거지.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그 사랑이 결국은 만물을 모두 휘돌아서 당신 자신에게도 돌아가는 거야. 이것이 바로 복이란 말이야. 이것이. 모든 복의 효과인 평안과 이 모든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는 거거든. 그러면 이런 피조물인 인간 존재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실재적인 방식이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그분 안에 있는 거야. 피조물인 물질에 속한 이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교통에 의해서 하나가 되는 거지. 전적인 타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겠어요? 그건 관계의 합일이에요. 관계가 사랑의 합일이라 이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를 버리고 이 사랑으로 회귀해서 거대하게 흐르는 이 사랑의 자기 순환 속에 당신 자신이 여기 서서 그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통로가 되게끔 자기 자신을 이바지해서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화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해지는 인간의 비결이라구. 그래서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같은 거 공부하면서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쟎아. 그래서 이제 조직신학에 보면 인간의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된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되었다(?34:58초) 그러는데 사실 이것은 나누어지는 게 아니야. 어느 관점에서 우리들이 이것들을 먼저 풀어내느냐 하는 거지만 그래서 이 두 개는 거대한 하나의 사랑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시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 사랑에로 돌아가게 하시는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런 얘기에요. 자 그 다음에.
낭독자4 :(계속 이어서) 이 사랑 안에서 신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교통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게까지 미치고자 하는 속성이 있으니, 이는 삼위 하나님 자신뿐 아니라 교회와 지체들, 그리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이 사랑은 신자 개개인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소유하게 된 지순의 사랑이며, 이 사랑은 신자의 존재 그리고 모든 삶에 있어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신자의 이러한 까리따스로 충만한 사랑 때문에 공동체적으로 삼위 하나님과 교회의 지체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이지 아니하나 그 사랑에 감화를 받은 신자들 안에 있는 까리따스를 통해 지체들과 모든 이웃은 그리스도 자신의 사랑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훌륭한 유기중 하나는 그를 뵈옵는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 안에 있는 까리따스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 그 자체가 바로 성부를 향한 성자의 지순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그분이 지상 생애 동안에 죄인들을 향해 보여주신 그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자비에 넘치는 섬김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안에 잇는 아가페의 사랑을 보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아가페의 사랑이 있었고 동시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 아들로서 아버지를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까리따스의 사랑을 소유하게 만드는 아가페 사랑의 근원이기도 하였고, 당신 자신이 우리들과 한 형제로서 어떻게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는지 보여주기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주시는 일은 승천하신 이후 성령 강림과 함께 세워진 교회에게 마땅히 승계되어야 할 주님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주시는 일은 승천하신 이후 성령 강림과 함께 세워진 교회에게 마땅히 승계되어야 할 주님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하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교회에 계승하셨고, 그것이 바로 신자들을 통해 당신의 몸을 이루게 하신 중요한 의도입니다. 실로 교회가 하여야 할 일 중 이보다도 더 본직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 각자가 신적인 지순의 사랑으로 가득차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완성하는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의 체험이 공동체적 지평으로 나타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 자신이 이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몸의 일부인 지체들이 그 사랑의 몸을 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한 이 세상을 향하여도 그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진리이시니 교회가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사랑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갖게 하시고 싶은 그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사적인 사랑이 참된 까리따스의 사랑을 대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면서도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투고 분쟁하는 것입니다. 이 사적인 사랑은 언제나 자기사랑을 중심축으로 하여 외연이 확대된 사랑이니, 이것은 본질적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지순의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적인 사랑을 통해서는 교회가 결코 자신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 이제 보라구. 여기서 이렇게 설명을 했잖아. 그러면 결국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으로 회귀하게 될 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회귀하시는 사랑이 사실은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이렇게.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요한 사도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참 사랑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했을 때 그 형제가 사실은 이 교회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자기가 여기 이런 식으로 있으면서 자기 외연을 이런 식으로 확대하는 거야. 이것을 이렇게 많이 확대할 때 이렇게 중첩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그렇게 감격할 필요가 없다 이거죠. 그래서 이걸 뿌리를 추적해가서 그 사람의 사랑의 근원에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봐야죠. 그래서 교회에서도 보면 맡겨준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해. 굉장히 헌신적이야. 그런데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니야. 그런 사람들은 여기에서 있을 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여기에서는 벌릴 수 없는 격차가 나기 때문에 결국은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이 없는 사람들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교회에. 가장 커다란. 적이 되는 거예요. 복음에 대한 반감이 항상 이 속에 있는 거죠. 이 속에. 그럼 여기서 일치 꽁꼬르디아 라고 하는 것은 뭐겠어요.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각각 이 사람들이 다른 거야. A, B, C, D 이렇게 각각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이렇게 사랑에 있어 일치를 이루는 거야. 그래서 이것들이 음표로 그린다면 말하자면 도 미 솔 이렇게 되는 거잖아. 도 미 솔 화음이 이루어지잖아. 도 미 솔 도 화음이 이루어지잖아. 이렇게 해서 각각의 다름. 사랑은 말이지. 사랑은 다름을 인정하는 힘이야.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힘이야. 그래서 부부도 서로 사랑하면 이 사람이 나와 다른 것이 참 감사하고 사랑이 식으면 다른 것이 짜증이 나고 힘들게 느껴지는 거야. 이런 속에서 교회의 아름다움 말하자면 꽁꼬르디아 일치를 이루어가는 거에요. 그게 이제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138 페이지 꼼꼼히 읽어보세요. 140페이지. 그 다음 사람. 마지막 단락만 읽어봐요.
낭독자5 : 이러한 일치는 단지 제도나 규율에 의한 타율적인 일치 혹은 외형적인 일치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참된 일치는 진리와 사랑을 통한 일치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의 유일한 초점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교회가 이러한 일치의 지속을 자신의 지체들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합치를 이루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진리 안에서 성숙해 가야 합니다. 이로써 세상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보게 되고, 그 몸을 통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를 통한 하나님 영광의 나타남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 그러면 자 여기 보라구.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의 순환이, 잘 들어봐요.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의 순환이 있잖아. 순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멀어져서 각각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각각 자기 생각과 자기 사랑과 자기 의지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꺾고 돌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바로 무엇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그걸 하게 하쟎아. 그런데 그걸 위해 필요한 것이 이렇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지식과 사랑이야. 이것이 성령이고 은혜라면 이것이 진리이고 복음인거에요. 그래서 커다란 두 개의 화두 진리와 은혜 지식과 은혜 그 다음에 성령과 진리 이런 두 개의 화두에서 이렇게 된 사람들을 다시 돌아가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목회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다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다시 비끌어 매고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선교죠. 이렇게 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더 많은 성도들이 소외되지 않고 이런 자기 사랑의 순환 속에서 있게 되는 것이 목회의 영광이란 말이죠. 그런데 자꾸 그러질 않고. 여기 있다가도 자꾸 이탈을 하쟎아. 다시 이제 목양적인 돌봄을 통해서 돌아오게 하는 거쟎아. 다시 이탈을 하쟎아. 그럼 다시 돌아오게 하고. 관계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을 여기 참여하게 하고. 이렇게 해 나가는 이것이 목회라는 말이지. 목회는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거야. 그래서 세 가지. 어떻게?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거. 이게 결국은 목회의 목적이란 말이지. 이 두 개 이외에는 다른 것들은 본질적인 무기가 아니에요. 지식과 사랑.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하든지 목양을 하든지 무얼 하든지 간에 이 지식과 사랑 이 두 가지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통하는 거야.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