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아끼는 길 (2) : 끝나지 않은 경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끝나지 않은 경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내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루디아라는 자주 장사를 통해서 개척하게 된 곳입니다. 많은 교회들을 세웠지만 이 빌립보 교회가 사도의 마음에 큰 기쁨을 준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너무 은혜롭고, 착하고, 사랑이 많고, 그리고 사도의 목양적 가르침에 잘 순종하는 아름다운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이 빌립보 지방은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지점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빌립보는 로마에서 굉장히 중요시했던 도시입니다. 보스포로스라는 해협이 있는데 마르마르 바다와 러시아의 흑해 사이를 지나는데 유럽과 아시아 대륙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유럽, 다리를 건너가면 아시아가 됩니다. 거기에서 좀 더 내려가면 빌립보 지방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아시아에서 온 수많은 사람이 무역을 하기 위해서 그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 유럽에 들어오는 위치에 있었거든요. 로마가 어떤 나라인지를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데 거기서 로마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빌립보라는 지방에 로마와 똑같은 도시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빌립보 지방에 와서 로마의 장엄한 문명을 보면서 “야, 로마는 굉장하구나!” 라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빌립보 교회는 그런 도시에 있는 성도들의 영적인 연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할 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가르친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너희 도시에 와서 그곳을 보며 “야, 우린 아직 로마에 못 갔지만 로마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빌립보가 이렇게 아름다우니 로마는 얼마나 아름다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처럼 “야, 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모임이 하늘나라의 모형이라는데 이 교인들이 이렇게 아름다우니 이들의 모형이 아닌 진짜 실체인 성도들이 모이는 하늘나라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거기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실까?”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개인적인 고백을 합니다. “내가 예전에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육체에 속한 것들을 많이 자랑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내가 이제껏 육체로 자랑하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내가 어떻게 하든지 꼭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얻고 싶은 간절한 목표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으시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대신 마지막으로 얻고 싶은 것이 아는 것이었단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마지막에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세계 선교라든지, 인류 평화라든지, 아니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가 된다든지, 권력자가 된다든지... 그런 장엄한 포부가 아니라 기껏 아는 것이란 말인가?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려하여” 그랬으니까! “아는 것이 고작 원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 말이 그림처럼 잘 이해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일평생을 고난을 받고 많은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으며 심히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여자가 드디어 인생의 방황 끝에 좋은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어느 순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당신은 많은 풍랑과 인생의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와서 당신을 사랑하는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는데 이제 어떻습니까?” 그럴 때 그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내 남편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 “그 까짓 거 아는 것!”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안다’라는 말의 용법이 우리나라의 용법과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사람들의 용법이 아주 흡사합니다. 그 여자가 “내가 이제야 당신을 만나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다, 나와 그리스도가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있는 합일의 상태이고, 또 하나는 그 능력이 내 안에서 놀랍게 살아 역사하고 있어서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난의 의미를 알면서 살아가는, 그것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아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안다’는 말은 그렇게 아주 심층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이 ‘안다’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랍니다. 도움이 될까봐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안다’라는 것은 ‘사랑한다’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가 나를 아시나니”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오직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라는 것은, 하나님이 욥이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애정을 가지고 그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길, 가야할 인생의 길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해 열심히 공부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이 신자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의 상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알게 되고, 그의 부활의 권능,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능력으로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알게 되므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적인 지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에 대한 앎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고난을 알게 되므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삼중적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아는 것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그저 공부하고, 설교를 듣고, 교리를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하고, 설교를 듣고, 교리를 배우고, 책을 읽는 것은 진정한 앎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만이 수단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으면 그 마음을 잘 지키면서 힘써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많이 쓰는 것입니다. 바로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상태만이 우리들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상태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 속에 있는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분명히 아까 목사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와 인간에 관한 지식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이번에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하나가 됩니까? 성부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예수님 자신이든 모두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과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게 되면 거기에서 찬란한 무지개 빛깔처럼 성부와 세계와 인간과 자기 자신과 심지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예전에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을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혈통도 필요 없고, 이 세상에 가문도 필요 없고, 다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라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 히브리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히브리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베냐민지파 사람이었다는 것, 그 다음에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이런 것들을 왜 배설물처럼, 똥과 같이 여기게 되었냐하면 그런 것들 때문에 더 귀하신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했던 그것들을 오늘 똥과 같이 여기노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자랑과 집착 때문에 존귀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절망 가운데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더러웠던 것들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사도 바울에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목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모든 것,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알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분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속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그 비천하고 더러운 인간이었을 죄인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서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다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예수님께서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셨구나! 이제는 자유다.” 하면서 죄악된 인생에서 아름다운 세계로 뛰쳐나오는 하나의 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죄악된 세상에 갇혀 있다가 문이 열리고 뛰쳐나와서 아름다운 세계 속으로 달음박질한다면 그 문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생생하게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수용소에 갇혀서 죽도록 매를 맞으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강제 노역에 종사를 합니다. 그러다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막 튀어 나가니까 자유세상이 열려졌습니다. 막 도망을 갔습니다. 문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망친 사람은 다시 그 문을 회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그 문으로 돌아가면 다시 옛 세계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문처럼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도의 초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예수 믿고 구원 얻기 위해 필요한 일회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 문을 통해 뛰쳐나왔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신데, 근데 다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목표가 생겨났는데 그 목표도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푯대는 뒤에 있는 푯대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데 분명한 인생의 목표가 있는 사람, 그래서 매일 그 목표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고,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슬퍼하며 분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앞에 있는 푯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뒤에 푯대가 이미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주님을 만나고 깊은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이중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영혼이 다시 태어나게 되고, 자신의 사명에 대해 눈뜨는 또 다른 태어남이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흐느적거리며 갈짓자로 살아온 허무한 인생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자신이 일생을 살아가야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무슨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까? 그것을 이 세상에서 그것들을 좇아 살아가게 될 이유가 생겨나게 됩니다. 시간과 자원의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은 시간과 자원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에게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시간 속에 살아있습니다.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자신에게서 박탈되어져 버리면 누구도 그 사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헌신하는 것 보셨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충성하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이미 숨을 거둔 사람이 성화되어가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또 하나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숨만 붙어 있어도 성화되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화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합니다. 육신은 후패하여 날마다 죽음으로 가지만 삼켜오는 죽음의 아가리 앞에서도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게 되어 갑니다. 살아만 있다면 그렇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어서 어떤 일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된다고 할 때 자원 없이 그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이번에도 교육관 공사를 했는데, 교수님들 몇 분이 오셔서 이곳을 보시고 여기서 학회 같은 것을 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가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습니까? 자원이 흘러가니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시간과 자원이 있어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갔던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야 별로 없었지만 건강했잖아요! 하다못해 쓰레질이라도 할 수 있는 자원이 남아있었는데 시간이 박탈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원이 남아봐야 시간의 박탈과 함께 자원도 함께 소실되고 그는 주님을 만났지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 자원 중에서 시간이라는 것이 너무너무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간은 남아있는데 자원이 없기 때문에 죽음으로 가고, 자원의 부족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굶어죽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것도 이런 것이죠. 그러나 대부분 더 큰 문제는 자원이 있어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사명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것을 정말 아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제한된 시간을 가지고 제한된 시간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목표를 따라 사는 비결 세 가지가 여기 나옵니다.
세월을 아끼는 길의 첫 번째는, 미완의 아파함. 미완이라는 것은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내가 이미 붙잡았다함도 아니라” 이 고백 속에는 이미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견디지 못할 아픔이 사도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헛된 것들을 사랑하고 가치 없는 것들에 목숨을 바치고 살다가 이제 참 가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알고, 그분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그리고 그가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셔야했던 그 비밀과 인간의 죄에 대해 알고자 하는데... 목표는 이미 분명히 세워졌는데... 그것을 온전히 알고, 그것을 알므로 말미암아 도달하게 되는 행복을 아직 누리지 못하고, 온전히는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자와 죽어있는 신자와의 차이는 미완성에 대한 아픔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 빠지게 되는 것은 자기만족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말씀에 의하여 깨어있을 때에는 항상 그가 미완성된 것에 대한 아픔과 많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은혜가 떨어진 구역장은 자기에게 맡겨진 구역이 일 년 만에 아무 성장이 없고, 구역 식구들이 변한 것도 없고 심지어는 구역의 식구들이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 그 구역이 없어져서 다른 구역과 합치게 되어도 마음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에 의하여 살아있는 구역장의 경우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구역의 양무리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혼들이 전도되지 못했고, 더 많이 사랑해주었더라면 더 많은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올 수 있었을 거라고 안타까워합니다. 이런 미완에 대한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이 있을 때 세월이 아껴지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일어난 일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난 일이잖아요. 서양에서 배를 몰고 와서 문 열고 통상하자고 요구를 합니다. 왜 그렇죠? 물건에 자신이 있으니까 자기들 물건을 팔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싫다고 해서 싸움이 붙었죠. 대원군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전하, 서양 오랑캐들이 와서 대포를 쏘고 난리입니다.” “ 그 놈이 누구란 말이냐? 당장 잡아서 대령하렸다.” 그런데 어떻게 데려와요? 이쪽에서 쏘는 포는 그쪽까지 안가고 거기서 쏘는 대포는 육지까지 날아와서 펑펑 터지는데! 뒤떨어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곧바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분발하고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은혜 받았다고 말하더라도 자신 속의 더러운 욕심과, 불쑥불쑥 솟아나는 비열한 혈기, 주님을 위해 많은 물질을 드렸지만 순간순간 솟아나는 더러운 자만심 등을 보면서 좌절을 느끼고 아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기에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도 보면 울어야 할 사람은 안 울고, 이제 그만 울어도 될 사람은 눈에 눈물이 가득합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이 미완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죠? “성화? 그래도 내가 이 교회 와서 얼마나 변화되었는지는 세상이 다 아는데!”하는 사람이 매 순간 “나는 갈 길을 모르니 주여 나의 손을 잡고 인도하소서. 주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 년 동안 주님을 참 잘 섬겼지. 이 정도면 충분해!”하는 사람이 분초마다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필요하다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겠냐하는 것입니다. 자만은 세월의 낭비를 가져옵니다. 이런 미완성의 아픔을 느끼는 성도가 살아있는 양심을 가진 성도이고,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분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미래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생각이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입니다. 불이 났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은 엄청난 기세로 타들어 가는데 누가 불을 냈냐고 토론을 한다면 집이 다 타버려도 토론이 끝이 안 납니다. 사랑의 마음은 과거를 잊고 미래를 지향하게 만들고 미움과 분쟁의 마음은 자꾸 과거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꾸 상처와 시비를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은 미래를 향해서 관심을 갖고 그것을 대비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했을 때, 이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예전에 하나님 앞에 잘했던 것,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신앙과 사명에 있어서 진보를 이룬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한 것, 훌륭하게 섬긴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잊어버린다는 이유는 그런 것들에 대한 회상이 미래에 대한 지취적인 기상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자랑하고 있는 사람 중에 금년에 신통한 사람은 없다고 제가 십삼 년 동안 외쳤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진취적인 기상으로 날마다 발견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비밀에 대해 깨달으면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왕년을 회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그 왕년을 능가하는 새로운 간증들이 계속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기쁜 일이 지금 매일매일 있는 사람은 오늘 아침 이야기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삼십 년 전을 회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희미한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예전에 잘한 일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극적으로는 예전에 행했던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합리화시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진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것이 그를 사로잡아서 양심과 모든 것들을 사로잡아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복음과 성령님의 역사는 그것을 끊어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제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후회가 되는 것,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잘못과 오류를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기억은 언제나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끊어 버리십시오. 그럴 때 미래에 대한 진취적인 기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하고 이야기해야 뭐하겠습니까? 이미 그랬는데! 모두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이제 사라져 간 일로 보고 지금 이 자리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앞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계속 방황하고 곤고한 한 해를 보냈더라도 금년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지난날들이었고, 이제는 그것을 굴려버리고, 새로운 비전으로 과거보다 미래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과거로부터 현재를 배우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과거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고, 미래는 우리 앞에 미개척지로 남아있습니다. 거기를 향하여 전심으로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주님이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꾀부리고 잘 감당 안 해서 심경이 괴로운 분들도 있죠?! 그러니까 금년에도 섬겨야 합니다. 왜요? 이 시점에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으면 결국은 불충성하고 악하고 게을렀던 삶으로 끝나잖아요!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을 정말로 잘 섬겼던 사람들은 그랬으니까 또 섬겨야죠. 왜냐하면 그만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해나가서 보람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것을 그만두어야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또 하나님 앞에 깊이 헌신하고 충성해야합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구역장이나 교사들이 그만두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겠죠. 그러나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에 여기에서 지난 한 해의 실패와 게으름을 딛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며 전심으로 부르짖으며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면 지난해의 실패는 금년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취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거울이 되고 교훈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태만했을 때 내 영혼이 이렇게 곤고했는데, 올해는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의 목표를 따라가니까 이렇게 행복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니까 내 영혼이 깃털처럼 가벼운 영혼이 되었구나!’라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잘 섬기기 위해 미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한 해에 가정의 복음화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사람들도 그렇기 때문에 올해는 더 절실한 마음으로 비전을 갖고, 그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지난 한 해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으로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목표도 없고, 가야할 목적지도 없는 인생을 살았을 때 행복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죠! 날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시는 일이 많아서 때로는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고 어려워하고, 때로는 분투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면서, 때로는 아파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생각했던, 그렇게 목표가 있었던 때가 행복했죠!
저도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그래야 되겠다. 지난 몇 해 동안 힘든 일도 많고 어려운 사연도 많았지만 이젠 세월과 함께 강물 속에 떠내려 보내고 미래에 살자. 아, 금년에 우리 안에 펼쳐진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향하여 항해하자.’ 금년 안에 주님을 더 깊이 만나서 예전에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성화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찬란한 주님의 은혜의 빛을 발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리고 주일날은 교회에 자리가 없어서 성도들이 밖으로 도로 나와요. 이렇게 자리 많을 때 오면 얼마나 좋아요! 하필 왜 자리 없을 때만 와서 그럽니까? 이것이 낭비입니다. 여러분, 전도해야 합니다. 10월이 되기 전에 이곳이 꽉 차야 합니다. 여기서 가정과 교회 조국 교회를 위해 간절히 부르짖는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꿈을 우리들이 꿔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부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노라” 하나님의 부름! 사도 바울이 자신을 부른 부름을 위해 좇아간다고 했을 때의 그 부름이 무엇입니까?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까? 아니죠. 우리 모두 각자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백 살을 살아도 인생의 의미는 그 길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창조하셔서 여기 보내셨을 때 여러분들에게 고유하게 주신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따라 사는 날만 여러분들의 인생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여러분을 위해 부르셨는데 죽을 때까지 그 부르심에 대해 한 번도 눈뜨지 못하고 죽어요. 그럼 그 의미는 짐승이 죽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왜?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길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름에 따라 산 의미 있는 시간에 의해 인생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온갖 관심이 아파트 평수 늘려가는 것이고, 아파트가 얼마나 오른 것에 대해 집중되고, 그리고 돈 모으고... 그렇게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의 인생 전체가 그 부름을 따라 향하고 있을 때 그렇게 얻어진 물질들이 그 부름을 잘 완수하기 위해서 부어질 때, 사용될 때에 비로소 겨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 살다가 죽어도 그 부름을 따라 살다간 사람의 짧은 인생은 그 부름을 따라 살지 못하며 휘청거리며 백 년을 산 사람의 긴 인생보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자는 가슴에 손을 얹을 때 자기의 심장을 뛰게 하는 부름, 그것이 있는 사람이 살아있는 신자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듣기만 해도 가슴을 뛰게 하는 부름이 무엇입니까? ‘전도, 생각만하여도 가슴이 뛰는 일입니다. 나같이 미천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불행한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이런 사람. ‘주님의 교회,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더러운 인간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하셔서 나와 비교될 수 없이 거룩한 성도들의 무리에 나를 접붙이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접붙여졌습니다.’
(찬양)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아, 예수님이 바로 이 일을 위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아멘.’ 가슴이 뛰는 사람...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신자입니다.
오늘 저녁 먹으러 집에 들어오는데 집사람이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제 얼굴이 훤하다고 하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오늘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가슴이 막 뜁니다. 내가 이것들을 캐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부름을 받았는데 그것을 못하는 나는 우울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는 날은 가슴이 뜁니다. 그것들을 담고 있는 책을 본다든지 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 가슴이 뜁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흔적이잖아요! 이런 것이 없이는 우리들이 살아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쓰러져서 시체가 되어 누워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예쁜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자랑을 해도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까? 맛있는 음식을 코앞에서 아무리 먹어도 침 흘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름, 인간으로 부르신 부름이 있고, 성도이기 때문에 부르신 부름이 있고, 인간과 성도, 거기서 더 좁혀져서 열린교회의 한 가족으로 나를 부르신 부름이 있고, 심지어는 마지막에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부름이 있습니다. 그 부름을 느낄 때 가슴이 막 뜁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들어서 이 부름을 나에게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도록 망가진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으로 데려가는 그 일을 위해서 나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부르시고 나를 사용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슴이 막 뜁니다. 그때 그 하나의 부르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부르심, 이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에 내게 맡겨주신 부르심, 이 교회의 한 지체이기 때문에 내게 맡겨주신 부르심, 그리고 이 조국 교회의 일원으로 사랑하는 내 나라, 내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고유한 부름을 발견하면서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비밀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면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은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가슴이 막 뜁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유혹하고 즐거운 곳이 있다고 내게 손짓하여도 다 떨쳐버리고 그리고 나를 부른 그 부름을 위해서 나의 모든 정신과 나의 모든 의지와 나의 모든 지성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쏟아 부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일에 가장 훌륭한 모범을 보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생애는 실질적으로 삼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분의 생애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완악한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시며 아파하며 우시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해달라고,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미완의 아픔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미완의 아픔은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만 예수님의 미완의 아픔은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죄인들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당신 자신의 아픔으로 소화시키면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장차 나타날 아름다운 구원의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때문에 잠시 강도들과 함께 못 박혀 치욕스런 고난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많은 열매를 향한 기대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많은 열매들이 나타날 것을 메시야께서 기대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시를 보게 될 것을 기대하시면서 미래에 대한 영광스런 비전으로 깊이 관심을 가지며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오직 그 하나의 일을 위하여 자기를 집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주 습관처럼 하신 말씀이 “너희가 그렇게 하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겠느냐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간다”였습니다. “너희들의 죄를 위해 대속 제물로 죽기 위해 이 인자는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부르심에 온전히 집중하며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의 경제 발전이나 정치 발전을 위해 애쓰신 것이 아니라 구속에 대한 것을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모든 자원을 거기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인생을 살아야지만 세월을 아낄 수가 있습니다. 2007년에는 갈짓자로 흔들리지 마시고 곧바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소명을 따라 살아 주님 앞에 큰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